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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당] 한국정치, 우민화와 무책임 (1) 2020/01/27 AM 04:58

한국정치, 우민화와 무책임

 

 

 

「대중은 개돼지다.」어떤 영화에서 대중을 개돼지로 비유하여 유명해진 말입니다. 개돼지마냥 사료만 잘 챙겨주면 부당한 일에도 짖지 않고 금방 잊는다는 의미에서 비유한 것이지요. 그런데 정말로 어리석은 걸까요? 분명 대중을 보면 어리석어 보이는 일들이 한둘이 아닙니다. 감정적이고 충동적이죠. 익명이 보장된 인터넷에서는 대중의 어리석은 발언들을 쉽게 접할 수 있습니다. 앞뒤 고려하지 않고 자기 욕구와 감정이 부르는 충동이 이루어지기만을 바라고 있지요. 감성정치, 감성법치가 문제시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이러한 충동적인 대중정치를 가리켜 중우정치라 말하며 경계한 바가 있습니다. 어리석은 이들의 의견도 수용해야 하는 정치체제의 결점이라 할 수 있겠지요. 이러한 이유로 민주주의는 완전무결한 정치체계는 아닙니다. 대다수가 현명해야 잘 작동할 수가 있지요. 그렇다면 한국은 우민화가 되었기 때문에 이런 중우정치가 나타나게 되는 걸까요?

 

흔히 한국을 가리켜 고학력사회라고 합니다. 무한경쟁체제 속에서 우수한 인재가 쏟아져 나오기 때문에 능력에 맞는 직업을 구하기가 어려운 학력과잉사회가 되었지요. 그런데 이는 앞으로 있을 완전자동화를 생각해보면 그리 나쁘지만은 않은 상황입니다. 어차피 단순노동의 일은 로봇이 하게 될 전망이므로 고학력 직업에 많은 인력이 경쟁하여 더 나은 인재가 선별되는 것이 국가 발전에 도움이 되는 것이겠죠. 국가가 할 일은 고학력사회를 막는 것이 아니라, 경쟁에 탈락해도 다시 한번 경쟁에 도전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들어야 할 것입니다. 안정적으로 경쟁을 즐기는 구조가 만들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경쟁과 안정이 공존할 수 있는 방법일 것입니다.

 

이렇게 학력과잉사회가 된 이상 개개인이 어리석다고 보기는 어려울 겁니다. 우민화 때문에 중우정치가 나타난다고 보기는 어렵다는 겁니다. 「개개인은 우수한데 대중이 되면 어리석어진다.」 그렇지만 명백하게 현상으로 나타나서 부정할 수 없는 이 모순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걸까요? 왜 개인의 우수함이 대중으로 연결되지 않는 걸까요? 그건 인간의 본질을 알면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지성을 갖춘 동물이다.」단순하게 생각하면 됩니다. 취한 지성인은 똑똑한 걸까요? 만취한 인간이 지성을 갖춰서 행동할 수 있는 경우는 극히 드물 겁니다. 아무리 뛰어난들 취해서 자신의 몸을 제어할 수 없는 상황이 되면 어리석은 행동도 할 수 있게 됩니다. 사회에서 나타나는 고위직의 음주운전은 그러한 취기가 부른 실수이지요. 술에 취해 충동적으로 나타나는 욕구와 감정을 이성으로 제어할 수 없었던 겁니다.

 

인간은 본디 동물이므로 욕구와 감정이 먼저 나타나고, 그걸 제어하는 이성이 나중에 나타납니다. 보통은 욕구와 감정이 먼저 나타나도 이성이 제어를 하기 때문에 어리석은 행동을 하지 않게 되지요. 하지만 이때 이성이 제어를 하지 못하게 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욕구와 감정의 충동을 이루기 위해 어리석은 행동을 하게 될 것입니다. 아무리 뛰어난다 한들 말이지요. 술에 취한 인간이 어리석은 행동을 하는 것처럼, 익명의 인터넷에서 어리석은 행동을 하는 것처럼. 지성인의 중우정치는 감성을 제어하지 않는 무책임함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중우정치를 간단히 말하면 우민화 또는 무책임한 지성인들이 만드는 현상입니다. 애초에 우민화가 된 시점에서는 이성 또한 어리석은 행동을 하게 만들기 때문에 제어유무와 관계없이 중우정치가 되기 마련입니다. 우민화가 되지 않음에도 중우정치가 나타나는 것은 지성인들의 무책임함 때문인 것입니다. 그런 관점에서「대중은 개돼지다.」라기보다는「대중은 무책임하다.」라고 말하는 것이 좀 더 타당할 것입니다. 직접적인 연관이 없어 해당 사안을 책임지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감성정치, 감성법치를 요구할 수 있게 되는 것이지요. 책임져야 하는 정치인이나 관료입장에서는 골치 아플 것입니다. 중우정치에 실망하여 엘리트정치로 회귀하는 이유도 이런 책임문제가 가장 클 것입니다.

 

그렇다면 중우정치의 책임은 대중에게 있는 걸까요? 무책임하게 떠드는 대중들이 중우정치가 부르는 폐해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하는 걸까요? 저는 아니라고 봅니다. 분명 중우정치의 원인은 대중의 무책임한 충동에 있습니다. 하지만 정치의 역할은 그런 충동을 건전하고 올바르게 이끌어야 하는 것입니다. 정치는 국민의 감성을 보고 정책을 짜고, 관료는 그 정책을 이성적으로 판단하여 가장 효율적이고 타당하게 실행해야 하는 것이겠죠. 설계와 실행은 분명 다른 역할입니다. 정치는 본디 인간이 동물인 만큼 모든 국민들에게 이성을 요구할 것이 아니라, 국민들의 감성이 만족할 수 있는 대안, 정책을 짜서 설득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 충동이 어리석어 보일지라도 외면하지 말고 설득해야 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감정을 언어화하는데 익숙한 사람은 드뭅니다. 애초에 감정은 교육으로 만들어지는 것이지요. 즐겁다, 슬프다, 같은 일차원적인 감정이 교육을 통해 구체적으로 진화합니다. 소설이나 영화를 보며「아, 이런 때엔 기뻐하는 거구나. , 이런 때엔 슬퍼하는 거구나.」라는 식으로 교육을 받습니다. 권선징악 같은 도덕적 교훈이 담긴 이야기를 접하면서 바른 일을 행할 때 기쁨을 느끼고, 바르지 않는 일을 행할 때 슬픔을 느끼도록 만듭니다. 이런 기초적인 윤리가 자리잡지 못한 국가에서는 약자를 멸시하며 쾌감을 느끼는 것이 당연하게 이루어지곤 합니다. 도덕을 절대선인 마냥 가르친 곳에서는 초식화로 인한 폐해가 드러나지만, 도덕 자체를 가르치지 않는 곳에서는 육식화로 인한 폐해가 드러나지 마련이지요.

 

이처럼 사람은 자신의 욕구와 감정을 이미 알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걸 누가 정리를 해줘야 해요. 「이유는 정확히 모르겠는데, 재미있다. 재미없다.」 이런 의견이 나오는 것 또한 자신의 욕구와 감정을 잘 모르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소설이나 영화를 봐도 정확히 모를 때가 있어요. 「왜 내가 재미있지?」 그걸 평론가들이 평론으로 정리해줍니다. 「아 이래서 재미있구나.」정치도 마찬가지입니다. 대중은 자신의 욕구와 감정을 정확하게 알고서 행동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선동을 당하고, 그러니까 중우정치가 되는 겁니다. 따라서 올바른 정치는 대중의 감성의 본질을 파악하여 그것을 만족시키면서 올바른 방향을 지향할 수 있도록 사상과 정책을 짜야 하는 것입니다.

 

「중우정치로 향하고 있다.」그 의미는 정치가들이 국민의 감성을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하는 뜻이기도 합니다. 예컨대 민족주의자에게 반민족행위를 했던 친일행적을 긍정하는 것, 예컨대 반공주의자에게 반체제주의자들이 했던 종북행위를 긍정하는 것, 예컨대 민주주의자에게 독재자들이 했던 독재를 긍정하는 것. 그들의 역린을 건들지 말고 설득할 수 있는 정책을 짰더라면, 민주주의가 중우정치화가 되는 일은 아마 적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정치가라면 국민의 무책임한 감성을 비난하지 마십시오. 정치의 역할이 그 감성을 이성적으로 듣고 올바른 길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아마 그건 몹시 어려운 일이 될 것입니다. 술 취한 인간을 말로 설득하는 것과 비견될 것입니다. 악플다는 인간을 말로 설득하는 것과 비견될 것입니다. 그래도 국가에서 정치가 하는 일이 바로 그겁니다. 특히 민주주의 국가에서라면 더더욱.

 

한국정치 갈등의 본질은 간단합니다.「피해자들로 형성된 진영논리가 만든 몰이해.」민족주의자는 반민족주의자를 비난합니다. 그런데 그 비난이 같은 진영으로 여겨지는 반공주의자에게도 향하게 됩니다. 반공주의자는 반체제주의자를 비난합니다. 그런데 그 비난이 같은 진영으로 여겨지는 민족주의자에게도 향하게 됩니다. 서로가 잘못된 대상을 상대로 공격하고 자신이 공격받았다고 생각하여 갈등이 일어나는 겁니다. 거기서 민주주의자는 독재자를 비난합니다. 그런데 그 비난이 같은 진영으로 여겨지는 반공주의자에게도 향하게 됩니다. 반공주의를 내세웠던 정치가가 독재를 했으니까요. 민족주의자, 반공주의자, 민주주의자는 모두 피해자들로 형성된 집단들로 그들에겐 모두 정의가 있습니다. 그 독선적인 정의가 이성을 마비시켜 감정으로 표출되게 만들어 한국정치를 중우정치로 향하게 만들었지요. 민족을 위해서 공산독재와 손을 잡은 민족주의자. 반공을 위해서 독재자를 지지했던 반공주의자. 그리고 그들을 이해하지 못했던 사람들. 각각의 콘크리트 같은 지지자들의 근본은 피해자의 정의에 있습니다.

 

부디 앞으로의 정책은 그들의 무책임한 감성을 설득할 수 있는 방향이 나오길 바랍니다. 제발 역린은 건드리지 마세요. 감성이 폭발합니다. 북한 얘기가 나오면 이성이 온데간데 없어지잖아요! 어느 쪽이든.

 

진영논리 때문에 뭘 하든 찬성하고 뭘 하던 반대하는 상황 속에서 대외적으로 골치 아픈 사건들이 터지고 있네요. 무언가를 행할 때엔 올바른 일도 좋지만, 그 올바른 일을 행할 때엔 국민들을 설득할 수 있는 방안을 반드시 마련하길 바랍니다. 어떤 정책이든 정론이 없으면 반대진영으로 인해 국론이 분열될 것입니다. 중우정치가 지속되는 한, 그리고 그 후에도 가능하면 어떤 정책이든 설득논리가 갖춰줘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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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가로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반공주의자들은 공산주의에 맞서 자신들을 보수라고 주장하지요. 그런데 만약 반공주의자들과 갈등을 빚은 자들은 민족주의자들이라면, 반공주의자들은 보수가 아니라 진보라고 생각됩니다. 민족주의가 먼저 나왔잖아요. 보수와 진보는 시대별 사상에 따라 결정되는 것으로 생각되므로 한국의 반공주의는 진보였다고 말하는 것이 타당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과거의 진보죠. 그리고 현시대에서는 민족주의건 반공주의건 전부 보수적인 사상입니다. 바뀌는 것이 없으니까요. 새 사상이 필요할 때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건 생각하는 사람의 몫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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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는 세상이 새장이 세장이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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