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식화의 죄악, 조선의 도덕
불평등한 사회의 질서를 유지하던 도덕이 평등한 사회의
질서를 유지하는데 적합한가? 그 의문에 대한 답은 쉬울 것이다. 적합하지 않다. 그렇다면 달리 물어보겠다. 불평등한 신분사회였던 조선의 도덕이 평등한 민주사회인 한국에 적합한가? 이에 대한 답도 쉬울 것인가? 아마 꺼림칙할 것이다. 조선에 대한 비판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조선의 결점을 지적하면 식민지배를 옹호하는 반민족주의자로 몰려 공격 당할 우려가 있기
때문에 애초에 언급 자체를 꺼려한다. 하지만 처음 의문처럼 객관적으로 보면 분명 적합하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보다 나은 방향으로 가기 위해서는 객관적으로 사물을 봐야 한다. 조선의 도덕은 한국의 사회에 적합하지 않다.
조선은 불평등한 신분제국가였다. 그런 조선의 도덕은 왕과 양반에 반항하지 않는 순종적인
백성을 길러내는데 적합했다. 무지한 백성들을 다루기 쉽게 도덕의 족쇄를 채워 반항할 수 없게 만들었다. 분명 그 당시 사회에는 적합했을 것이다. 당시 도덕의 상징인 삼강오륜 중 삼강을 살펴보자. 군위신강「신하는 임금을 섬기는 것이 근본」, 부위자강「아들은 아버지를 섬기는 것이 근본」, 부위부강「아내는 남편을 섬기는 것이 근본.」 삼강의 경우 정치적 목적으로 새로 추가된 것이라고
한다. 뭐 그건 별로 중요한 사실은 아니다. 유교에 초점을 맞춘 것이 아니라 조선의 도덕에 초점을
맞춘 것이니까. 어쨌든 이것이 평등한 사회에 적합하다고 주장하지는
않을 것이다. 삼강은 불평등하다. 좋은 뜻이 담긴 오륜 중에서도 한심한 것은 장유유서다. 「어른과 어린이 사이의 도리는 엄격한 차례가 있고
복종해야 할 질서가 있음을 이른다.」 아이는 어른에게 복종하라. 이것이 정상적인 민주사회에 있을 수 있는 규범인가? 그런데 한국은 그런 식으로 교육했고 그랬기 때문에 불평등한 사회가 되었다. 한국아이는 처음부터 어른에게 복종하라는 불평등한 교육을 받고 성장했다. 그렇게 질서를 유지하는 도덕 자체가 불평등하니 갑질, 꼰대 따위가 존재하는 것이었다.
왜 갑질과 꼰대가 끊이질 않는 걸까? 그건 평등이 부자연스럽기 때문이다. 그 동안 그렇게 교육받아왔기 때문에 평등해지면 자신이
존중 받지 못하다는 느낌을 받는다. 예전에 어떤 아이의 고민상담 글을 본 적이 있다. 본인 스스로는 부모에게 마음을 열고 평등하게 대했는데 부모는 그걸 받아드리지 못한다고 하소연했다. 아마 그 아이는 부모를 친구 대하듯 애정을 담아
평등하게 대했겠지. 하지만 그건 불평등한 교육을 받아온 사람에겐 모욕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감히 아이가 어른과 맞먹으려고 하는가? 아이시절부터 서열주의로 교육을 받은 인간은 서열로 차별하는 걸 당연하게 생각한다. 갑질, 꼰대, 왕따 따위는 아주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한국에서 서열 때문에 나타나는 폐단은 도덕이 근간이다. 물론 그 도덕의 근간은 인간의 본성이므로 한국의
문제는 인간 본성의 문제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그러니까 민주사회에 적합한 도덕이 되지 못한다. 그건 불평등한 사회의 질서를 유지할 때나 도움이 되는 것이다. 야생이나 신분제사회 같이 말이다. 이런 당연한 것을 왜 모르고 있었을까? 올바른 도리라고 생각했던 것이 사회문제를 일으켰던 원인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올바르다고 생각해왔는데 어찌 의심할 수 있겠나? 관습이 된 정의는 시간이 흘러 변화의 시기에 적응하지
못하고 악습이 되어버린다. 오래된 악습은 오래된 폐단이 되어 적폐라고 불린다. 현재 한국에 뿌리 깊게 내린 조선의 도덕은 한국사회에 있어 적폐다. 진정 평등한 사회를 바라는 이가 상대할 대상은 특정한 인간이 아니라 올바른 도리라 생각했던
조선의 도덕이다. 그 도덕이 그런 불평등한 인간을 길러내는 것이니까.
과거 모든 인류가 불평등했음에도 어떤 기준을 나눠
차이를 구분한다면, 육식국가는 힘으로 인간을 지배했고 초식국가는 도덕으로 인간을 지배했다. 동학농민혁명이나 갑신정변의 실패는 도덕이 원인이었다. 많은 백성들이 호응하지 못했을 것이다. 서열에 복종하라 교육받은 인간이 투쟁하기가 쉽겠는가? 힘으로 억눌렀으면 터져 나왔을 것이다. 그러면 자연스러운 혁명으로 이어져 민주화가 되었을
수도 있다. 그런데 조선은 도덕으로 억눌렀다. 백성은 왕과 양반을 섬기는 것이 당연하고 아이는
어른을 섬기는 것이 당연하다. 높은 서열과 싸우는 것이 죄가 되는데 어찌 싸울 수 있겠는가? 죄인이 되는 각오가 된 자들만이 싸울 수 있었다. 이런 불평등한 서열주의가 도덕이 된 순간, 조선의 백성은 도덕의 노예가 되었다. 저항할 수 없고 투쟁할 수 없다. 그런 현상이 두드러지자 조선은 싸울 줄 모르는 국가가 되었다. 이른바 초식화다. 조선은 초식국가였다. 입으로만 도덕적인 양반들은 선비라 불리며 귀함을
받고 야만적인 도축업자들은 백정이라 불리며 천대를 받았다. 이 얼마나 슬픈 일인가. 각자 사회를 구성하는데 필요한 역할임이 분명함에도 서열을 나눴다. 복종을 올바른 도리로 만들다니, 그건 정말 잔인한 일이다. 그리고 그런 잔인한 일은 현대 다른 국가에서도 벌어지고 있다. 현대의 대표적인 초식국가가 바로 일본이다. 제국주의, 군국주의로 파멸을 맞이했던 일본의 정치가들은 민중을
지배하는 방법을 힘에서 도덕으로 바꿨다. 착한 일본, 세계에 사랑 받은 일본, 겉으로만 드러나는 도덕적인 행위에 집착하며 싸움과 투쟁을 죄로 만들었다. 분쟁요소가 있는 시위를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것은 초식화 교육의 산물이다. 무능하고 부패한 정치가들과 싸울 줄 모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투쟁이 죄가 된 사회에서 불의와 맞서 싸우려면 죄인이란
낙인을 받을 수가 있다. 그러므로 일본이 바뀌려면 죄인이 되는 각오가 된 자들이 많아야 할 것이다. 그렇게 초식화된 그들은 아주 자연스럽게 조선의 뒤를 따르고 있다. 조선을 지배했던 일본이 조선의 말로를 그대로 따라간다는
사실은 보고 있으면 참 헛웃음이 나온다. 일본사회에서 전쟁범죄를 받아드리지 못한 까닭도 어쩌면 이것이 원인일지도 모른다. 초식화되어 착하다고 생각하는 자신들의 선조가 그런 악독한 죄를 지었으리라 생각을 하지
못하는 거겠지. 일본에서 교육받다가 서양으로 건너간 일본의 어린
아이가 서양의 관점에서 일본역사를 교육받고 충격 받아 엉엉 울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기억이 난다. 인터넷 글이므로 근거가 확실한 것은 아니나, 초식화된 일본에서 있을 법한 일이라 보고 있다.
지금까지 한국사회의 질서를 유지하던 도덕이 없으면
어찌 사회가 유지될까 불안해할 수가 있다. 어쩌면 서양의 것을 그대로 따르자는 사대주의적인 주장을 하는 것이냐고 물어볼 수도 있다. 아니다. 한국사회에 맞는 새로운 도덕을 만들어보자는 것이다. 어째서 불평등했던 조선의 도덕을 그대로 교육하고 받아야 하는가? 단순히 관습으로 여기기엔 그 도덕이 만드는 사회문제가
한두 가지가 아니지 않나. 한국국민은 불평등했던 조선의 도덕이 없어도 평등한 사회질서를 유지할 수 있는 지적 수준과 정보교환수단이 발달했다. 진정 평등한 민주사회는 그 질서를 유지하는 도덕이
평등해야 달성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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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여기서 역할주의를 주장합니다. 역할의 수행여부로 가치를 판단하는 사상입니다. 연령, 성별, 인종, 지위, 인맥, 학력 등과 관계 없이 역할을 다하면 존중을 주는 사상. 그게 진짜 평등한 사상이라 생각합니다.
일단 초식화의 죄악은 좀 더 정리해봐야겠습니다. 초식화의 죄악 중에서 과거 조선의 도덕만 짧게 요약했는데도
이정도 길이. 참 쉽지 않네요. 다시 한번 초식화되고 있는 한국사회가 건전한 투쟁이
살아있는 자유국가가 되어 자유와 평등을 누리는 이성적인 민주시민이 많아졌으면 좋겠네요. 지금은 여나 야나 다 감성적입니다. 객관적으로 보세요.
우박이 많이 내리네요. 참. 흥미롭죠.
아, 보람이 있는 일을 하고 싶네요. 부디.
한국사회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에 대해 간단히 다루는
글을 써보려고 합니다. 지금까지는 선입견이 들어가는 것이 정보전달에 있어 방해가 된다고 판단하여 인명이나 단체명을 언급하는 걸 자제했는데, 직접적인 언급이 정보전달에 좀 더 도움이 되는 것
같아 그냥 써보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