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한 나라의 올바름
사람은 행복하길 바란다. 그런데 행복하길 바라면서도 불행을 선택하는 사람들이
있다. 참으로 이상하지. 도대체 왜 그런 걸까? 왜 그런 모순된 행동을 하는 걸까? 이유가 있을 것 아닌가. 물론 이유가 있다. 그 불행이 사회의 올바름이기 때문이다. 올바르기 때문에 불행을 감수한다. 그것뿐만이 아니다. 그게 불행을 부른다는 것조차 모르는 걸로 보인다. 예를 들어보겠다. 많은 사람들은 꼰대를 싫어한다. 꼰대란 높은 연령이나 지위를 수단으로 상대에게 비논리적이고
불합리한 언행을 하는 사람을 뜻한다. 자신이 말이 무조건 맞는다고 생각한다. 독선적이고 지배적이다. 복종을 강요한다. 이하 다양한 특성을 지닌 꼰대는 사회적 문제를 일으켜 논란을 부르고 있다. 어떤 설문조사에 따르면 75%가 사내에 꼰대가 있다고 대답했다. 많은 한국인들이 꼰대에게 괴롭힘을 당한 적이 있다는 얘기다. 도대체 얼마나 많은 사람을 불행하게 했을까? 꼰대는 불행을 부른다. 그렇다면 이런 꼰대가 왜 생기는 걸까? 사회의 악인 것마냥 비난을 받고 있음에도 사라지지
않는 이유가 뭘까? 그 이유는 간단하다. 꼰대야말로 지극히 도덕적인 인간이기 때문이다. 그 행동이 올바른 도리기 때문에 사라지지 않는 것이었다. 조선에는 장유유서라는 도리가 있다. 「어른과 어린이 사이의 도리는 엄격한 차례가 있고 복종해야 할 질서가 있음을 이른다.」이런 도리를 물려받은 한국은 연령에 따라 엄격한
질서가 있다. 어린이는 어른에게 공손하게 존댓말을 해야 되고, 공경을 표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싸움이 일어난다. “어린 것이 반말이야!” “어디서 건방지게!” “주제 넘는 짓을 하고 있군!” 장유유서는 인간이 인간에게 복종하는 것을 올바른
도리로 만들었다. 불평등을 올바른 도리로 교육하고 있는 것이다. 오히려 평등하면 불쾌감을 느낀다. 연령평등을 주장해봐라, 받아드릴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불쾌하니까. 어떤 이는 어린이는 어리석기 때문에 어른에게 복종해야
한다고 주장할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그 논리가 바로 신분제의 논리다. 백성은 어리석기 때문에 복종해야 한다. 이 둘이 무슨 차이가 있는가? 차이가 없다. 장유유서는 어른과 어린이의 관계에서 성립되는 질서가 아니냐고 물어볼 수 있다. 그렇지만 어린 시절 교육받은 질서는 평생가게 되어있다. 세 살 버릇 여든 간다고 하지 않나? 어른이 되도 연령으로 차별하는 모습을 쉽게 접할
수 있다. 한국에선 그것이 올바른 도리가 된 것이다. 이제 알겠는가? 연하에게 복종을 요구하는 꼰대는 무척이나 도덕적인
인간인 것이다. 반대로 복종하지 않는 연하가 부도덕하다. 도덕이란 대체. 사회적 문제 중 갑질이라는 것이 있다. 갑질이란 높은 지위로 불합리한 요구나 명령을 내리는
것을 뜻한다. 꼰대랑 본질적으로 별 차이는 없다. 요는 갑질도 결국 장유유서의 질서에서 비롯되었다는
거다. 인간을 차별하는 게 올바른 도리가 되어버리니, 다른 관계에서도 영향을 미친 것이다.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 꼰대나 갑질에 불만이 있는
사람들도 장유유서의 질서를 따른다는 것이다. 당장 자신에게 물어보라. 연하가 반말을 한다고 가정하면 어떠한가? 단순 연하뿐만 아니라 어린이와 노인이 반말을 하며 평등하게 지낸다고 생각해보라. 이상한가? 불편한가? 그렇다면 장유유서의 질서를 따르고 있다는 말이 될 것이다. 불행을 부르는 꼰대와 갑질은 싫어하면서 꼰대와 갑질의 원인이 된 장유유서는 올바른 도리로 여긴다. 이것이 바로 행복하길 바라면서 불행을 선택한다는
말이다. 헛웃음이 나온다. 어려서부터 배워온 장유유서라는 연령차별주의를 올바른
도리로 교육받아 그게 불행을 부르고 있다는 걸 의심조차 하지 못해 스스로 불행을 선택하고 있는 것이었다. 자리가 바뀌면 사람이 바뀐다는 말이 있다. 갑질에 당하던 인간도 자리가 높아지면 갑질을 한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그 말은 틀렸다! 그건 사람이 바뀌는 게 아니다. 그저 올바른 도리를 행하고 있을 뿐이다. 높은 자리로 가면 복종을 요구하는 게 올바른 도리지
않나! 어쩌면 이렇게 당연한 것이었을까! 참 신기할 정도로 원인이 명백하다. 명절에 친척집 가기 싫은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집안 어른에게 복종하기 싫어서 그런 게 아닌가! 자유와 평등이 자리잡은 현대한국사회에서 이보다 더
이상한 것이 또 어디 있을까? 그야말로 이상한 나라의 올바름이다.
올바름이라. 도대체 우리가 알고 있는 올바름은 정말 올바른 것이었을까? 생각해보면 이상한 것이 하나 둘이 아니다. 예부터 남녀유별이 올바른 도리로 여겨졌다. 남녀유별인데 어찌 함께 앉으리요? 어려서부터 남녀가 유별나다는 것을 교육받았기 때문에
어릴 때 하는 이성교제를 부도덕으로 받아드리게 되었다. 그런 영향으로 아직도 많은 학교에서는 이성교제를 교칙으로 금하고 있을 것이다. 뭐 그것이 아니더라도 사회의 시선 자체가 학생교제를 바람직하게 바라보지는 않는다. 애들은 공부나 해. 이성교제는 학업에 도움이 안 된다는 거겠지. 이성교제금지는 본질적으로 남녀유별이 부른 것이지만
명분도 그럴 듯 하기에 연애와 학업을 저울질 해보겠다. 과연 연애가 중요한가, 학업이 중요한가? 이는 얼핏 봤을 때엔 학업이 중요해 보인다. 지금까지 그래왔으니까. 하지만 잘 생각해보면 연애가 더 중요하다는 걸 알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국가생존에 달린 문제기 때문이다. 연애와 생존이 무슨 관계가 있냐고? 관계가 있다. 저출산 문제다. 출산율이 낮아지면 한국은 도태된다. 저출산은 국가생존에 매우 치명적이다. 그렇다면 저출산의 원인은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자본? 환경? 다양한 원인이 있지만 근본적으로 결혼 자체를 하지 않아서 그렇다. 사실 결혼한 부부의 출산율은 높다고 한다. 만약 결혼을 하는 사람이 늘어난다면 출산율을 걱정하지
않아도 될 정도라고 한다. 그러니 저출산은 단지 결혼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결혼을 하지 않는 이유가 뭘까? 이성을 사랑하는 사람이 적기 때문이다. 왜? 그건 꼰대와 인과관계가 같다. 어려서부터 사람이 사람을 평등하게 대하는 걸 부도덕하다고
교육을 받으니 성장해서도 평등하게 대할 수가 없다. 그래서 꼰대가 생기고 갑질이 생긴다. 마찬가지다. 어려서부터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는 것을 부도덕하다고 교육을 받으니 성장해서도 사랑할 수가 없다. 그래서 결혼이 줄고 이혼이 늘었다. 인과관계가 명확하지 않나? 그렇다면 과거에 결혼과 출산율은 왜 높았는가? 그야 간단하다. 과거에는 결혼이 의무였기 때문이다. 집안과 집안의 연결이라고 할 정도였지. 그래서 학생의 이성교제를 금지해도 사회가 돌아갔다. 사랑하지 않아도 결혼을 하게 했으니까 출산율이 높았던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지 않나. 결혼은 의무가 아니다. 그래서 결혼하는 사람이 줄어들었다. 분명 결혼은 개인에게 많은 희생을 요구한다. 서로에 대한 간섭과 책임. 가족을 형성한다는 것은 개인의 희생을 동반한다는
것이다. 그 희생은 의무가 아니면 사랑이 있어야 감내할 수
있다. 그런데 어려서 사랑하는 방법을 배우지 못했네? 그러니까 우리 사회가 이 지경이 된 것이다. 남녀유별에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 교육을 명분으로
별생각 없이 내세운 학생의 이성교제금지 때문에 사랑하는 법이 배우지 못한 사람들이 많아져서 결혼을 하지 않는 바람에 국가존립을 흔드는 저출산 현상이
나타난 것이다. 이제 알겠나. 국가생존을 위해서라면 지금이라도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는
걸 부도덕하다고 교육하지 말아야 한다. 이제라도 연애하게 만들어야 한다. 어려서부터 서로를 아끼고 사랑하게끔 해야 커서도 서로를 사랑할 수가 있는 거다. 그래야 결혼도 늘어나는 거다. 애초에 사랑하지 않는데 어찌 결혼을 하고 출산율이 높아질 수 있을 거라 생각했던 건가? 모든 현상에는 원인이 있다. 사랑을 교육하지 않았으니까 사랑을 할 줄 모르기에
결혼을 하지 못하는 거다. 흔히 연애는 커서 하면 된다고들 한다. 그런 논리로 학생의 이성교제를 반대하겠지. 똑같이 돌려주겠다. 커서 공부하면 된다. 그러면 공부에는 때가 있다고 말할 것이다. 똑같이 돌려주겠다. 사랑에도 때가 있다. 어릴 때 사랑하는 법을 배우지 못한 인간은 평생 사랑할 줄 모르게 된다. 어린 시절 교육은 평생 가는 법이다! 그리고 학업과 병행이 불가능한 것도 아니다. 오히려 누군가에 대한 사랑이 삶의 원동력이 되어 공부에 집중하게 할 수 있다. 강압으로 공부에 매달려왔던 아이들이 능동적으로 노력할
근거가 생긴다는 거다. 사랑하는 사람과 행복한 미래를 위해 공부한다. 그것이 이상한가? 한국은 사랑을 부도덕하다고 교육한 결과 국가 애정결핍이 되어버렸다. 결혼비율감소. 그것이 명확한 근거가 된다. 이런 애정결핍현상은 저출산에만 영향을 끼치는 것이 아니다. 사람이 사람을 사랑할 줄 알아야 사회도 사랑하고
국가도 사랑하는 것이다. 이제는 애국심을 강요할 수 있는 시대가 아니지 않나. 국가를 위해서, 민족을 위해서, 희생하는 시대가 아니다. 이제는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희생하는 시대다. 가족을 위해 연인을 위해.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손해를 감수한다. 그러나 한국은 애정결핍사회다. 사랑할 대상이 없거나 사랑할 줄 모르는 사람이 많이 늘어났다. 그래서 희생을 하겠다는 사람들도 줄어들고 있다. 군대를 왜 가나? 출산을 왜 하나? 과거엔 강제로 가고 했다. 지금은 사랑하는 사람이 있어야 그 희생을 감수할
것이다. 현재 우리 사회에는 혐오와 증오가 만연하다. 그것은 사람을 사랑하는 걸 부도덕이라 교육한 결과라고
본다. 애정이 결핍되었으니 증오와 혐오가 넘치는 거다. 성별관계 없이 왜 혐오사상에 휘둘리겠는가? 왜 이성을 혐오하는 사람이 많을까? 배움의 시기에 이성을 사랑하는 방법을 배우지 못했기
때문이다. 사랑이 없는 사회, 이 얼마나 불행한 사회인가? 지금까지 우리가 아무 생각 없이 지켜왔던 올바름이야말로
우리를 불행하게 만들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는 그걸 알아야 한다. 도대체 올바르다고 생각해왔던 것 중에 진정 올바른 것이 얼마나 있는 건가?
유교의 올바름만 이상한 건 아니다. 다른 것들도 살펴보면 이상했다. 불교는 살생을 죄로 만들었다. 모든 생명체를 죽이면 죄라는 것이다. 즉 불살이 올바른 도리다. 얼핏 보면 맞는 말 것처럼 느껴진다. 살생이 올바르게 느껴지진 않겠지. 그런데 생각해보면 이상하다. 인간은 생명체를 죽여서 생명을 유지하는 생물이다. 잡아먹고 살아남았다. 수백 만년간 그래왔다. 그것이 잡식동물인 인간 본연의 성질, 인간의 본질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불살이 올바른 도리가 되면 잡식이란 인간의
본질이 잘못되었다는 얘기가 된다. 그건 달리 말해 잡식의 성질을 버리는, 인간이 인간에서 벗어나는 게 올바른 도리라고 주장했던 것이다. 도대체 이게 뭔가. 그 어떤 올바름이건 인간의 올바름이면 인간을 위해 존재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어찌 인간이 아니게 되는 걸 올바른 도리라고 하는가? 인간이 인간이 아니게 되는 것이 올바르다면 무엇을
위해 올바름은 존재하는 것인가? 증명되지 않은 신을 위해서? 염라대왕께서 진노하기 때문에? 파리는 잡아죽이면서 반딧불은 예쁘다고 아끼는 게 인간이다. 소와 돼지는 잡아먹으면서 고양이와 개는 예뻐하는 게 인간이다. 원래부터 인간은 동물 상대로 제멋대로 해왔고 그것이
그릇된다고는 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다른 종도 인간 상대로 제멋대로 하기 때문이다. 지금은 힘에 눌려서 제멋대로 하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호랑이를 산에 풀어놔보라. 매일 호환에 시달릴 거다. 그러니 인간이 무슨 만물의 지배자마냥 다른 종까지 보살피려 들지 말라. 잡아먹지 않아도 살 수 있으면 모르되, 다른 종을 잡아먹을 거면서 그들의 사정까지 살피는
건 지나치게 오만한 행위다. 인간은 지적 능력 외에 생명의 가치 측면에서 다른 동물과 아무런 차이가 없다. 그러니 다른 동물처럼 똑같이 생존경쟁에 나선다고 해도 별다른 죄가 되지 않는다고 본다. 살생의 죄라. 어쩌면 도축업자가 천대받은 것은 살생이 죄였기 때문이
아닐까 싶을 정도다. 동물을 도축하는 도축업자는 매일 살생하고 있으니 살생이 죄인 사회에선 존중 받기 어렵겠지. 반면 그런 게 없는 서양에선 도축업자가 존중을 받고 있다. 올바른 도리가 끼치는 영향이란 바로 그런 거다. 여기서 끝난 게 아니다. 생각이 계속 이어진다. 올바름이 사회의 질서를 형성한다. 그렇다면 어쩌면 그 올바름 때문에 동양이 서양보다
뒤쳐졌던 것이 아닐까 싶다. 사회를 형성하는 질서가 다르니까 격차가 생긴 거란 얘기다. 정리해보자. 동양에 영향을 끼치던 불교의 올바름은 인간뿐만 아니라 다른 생명체를 죽이는 것도 덜덜 떨며 죄악감을 가졌다. 그야말로 초식이다. 반면 서양에 영향을 끼치던 기독교의 올바름은 명분만
있으면 그 대상이 인간이라도 죽여도 되었다. 이교도를 학살하는 건 지극히 올바른 도리였다. 그야말로 육식이다. 이 차이가 동양과 서양의 격차를 만드는데 큰 기여를 한 것이 아닐까? 불교는 내면수행을 중요시했고 기독교는 종교전파를 중요시 했다. 불교의 죄는 죽어서 저승에서 갚게 되고 기독교의
죄는 회개하면 천국으로 갈 수 있었다. 과연 어느 쪽이 인간에게 있어 더 자유로운 활동이 가능했는가? 어느 쪽이 더 넓은 세계로 뻗어나갈 수 있겠는가? 인간의 발전은 생각과 행동의 자유에서 비롯된다. 동양은 내면수행을 하고 있을 때, 서양은 종교전파를 목적으로 세계를 떠돌며 새로운
문물을 접했다. 동양은 되도록 얌전히 질서를 유지하고 있었지만 서양은
종교전파의 과정 속에서 침략의 죄도 지었다. 옳고 그름을 제외하고 보자. 어느 쪽이 더 자유로운가? 어느 쪽이 더 나아갔는가? 그것만 따지면 서양 쪽이 더 자유롭게 나아갔다. 자유로운 환경, 새로운 변화. 그러니까 서양이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동양과 서양은 각자가 추구하는 올바름의 차이로 격차가 벌어졌다고 본다. 씁쓸한 일이다. 불살이 진정 인간을 위해 올바른 것이었다면 그래도 이해한다. 그런데 그건 단지 잡식인간이 아니게 되는 걸 올바르다고
주장했던 것뿐이다. 그 때문에 동양이 굴욕을 겪는데 영향을 끼쳤다면 불살을 지켜야 하는 게 올바른 도리라 할 수 있을까? 약자는 죄가 아니다. 하지만 약하게 만드는 것은 죄가 된다. 왜 벌레 하나 죽이지 못하는 약자로 만드는 걸 올바른
도리라고 교육했는가? 참 이상하다. 내가 생각하는 최고선은 종의 생존과 번영이다. 그 최고선을 이루는데 방해되는 올바름은 내게 있어 더 이상 올바름이 되지 못한다.
기독교는 의심을 죄로 만들었다. 즉 맹신이 올바른 도리다. 상식적으로 어떻게 이걸 올바른 도리로 여기는지 이해할
수가 없을 것이다. 그런데 그게 올바른 도리로 여겨진다. 그냥 그렇게 교육받아왔기 때문이다. 복종을 올바른 도리로 여기거나 불살을 올바른 도리로 여기거나 하는 것과 똑같은 거다. 그저 그렇게 배웠을 뿐이다. 이런 도리는 지배를 할 때 아주 효율적이고 적절했다. 의심이 죄가 되자 종교의 가르침뿐만 아니라 종교지도자의
말 또한 의심할 수 없게 되었다. 종교지도자의 말은 뭐든지 믿는다. 기독교계열에서 사이비종교가 많은 까닭은 여기에 있다. 뭔가 이상한 게 있어도 의심이 죄다라고 말하며 의심할 수 없게 만들면 되니까. 의심이 죄다 보니까 과학의 효과도 미미하다. 과학이 발달하면서 기독교의 가르침이 비과학적이라는
것이 밝혀지고 있음에도 의심할 수가 없으니까 그냥 종교를 그대로 믿고 있다. 맹신이 올바른 도리라고 교육받은 사람들이 늘어날수록 사회엔 비과학적, 비이성적, 비논리적인 사람들이 늘어났다. 이는 피해의식과 정으로 이미 감성적인 한국을 보다
더 감성적으로 만들었다. 의심이 죄다 보니까 사기꾼도 엄청 많다. 아니 사기꾼 입장에선 매우 손쉬운 먹이였을 것이다. 의심 자체를 할 수 없는 인간들이니까. 아, 맹신이 올바른 도리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 자체가
괴롭다. 이런 당연한 걸 주장해야 한다니. 그래도 하겠다 맹신은 올바른 도리가 아니다! 의심은 죄가 아니다! 무엇이든 의심하고, 자신이 의심받는 것을 불쾌해 하지 말라. 맹목적인 의심은 잘못되었으나 합리적인 의심은 사회를
건전하게 만드는 훌륭한 수단이다. 의심이야말로 발전의 양분이다. 배운 것을 의심하지 않으면 어떻게 앞으로 나아갈 수가 있나! 기독교의 질서 내에서 현대사회의 사상들이 등장했음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기독교의 맹신이 올바르다고는
할 수는 없다. 의심하고 또 의심해라. 그래야 발전한다. 종교를 가진 사상가와 철학가는 불완전하다. 가르침을 부정하지 못하고 가르침 내에서만 사상과
철학을 할 수 있으니까 말이다. 의심할 수 없는 사상가와 철학가는 그 한계가 명확하다. 그런데 서양이 의심이 죄라는 한계가 있음에도 동양보다 발전할 수 있었다. 그 말은 의심이 죄인 것이 행동에 제약이 많은 초식보다는
발전에 도움이 된다는 이야기가 된다. 인간을 위한 올바름이라, 도대체 뭐라고 해야 할까?
왜 싸움이 죄가 되었던 걸까? 나는 싸움이 싫었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니까 싸움 또한 일종의 의사표현이었다. 나의 의사를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는 수단이었다! 그걸 죄로 만들다니! 죄는 폭력으로 인간을 상하게 만들었을 때 죄가 된다고
가르쳤어야 했다. 논쟁! 무도! 그런 것은 올바르다고 가르쳤어야 했다! 최근 미국에서 흑인 사망으로 흑인인권시위가 벌어지고 있다. 그런데 일부 폭력을 사용하는 이들이 있어 논란이
일어나고 있다. 그 때문에 시위 자체를 잘못되었다고 보는 사람이
있다. 하지만 시위 자체는 잘못이 아니다. 설령 폭력이 있다고 하더라도 시위 자체는 그야말로
자유의 상징이다. 불만 있으면 싸워라! 나는 흑인인권시위에 관심이 없다. 그 시위는 모든 인간의 인권도 아니고 흑인인권도
아닌 미국 내에 있는 흑인의 권리를 위한 시위이기 때문에 별로 관심이 없다. 하지만 시위 자체가 잘못되었다고 하지는 않는다. 그것이 자유주의에서는 올바른 도리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자유국가인 미국다운 모습이다. 싸움이 죄를 부를 수 있다고 싸움 자체를 막는 것보다
훨씬 자유롭고 바람직하다. 만약 폭력이 있을 수 있다고 하여 시위 자체를 못하게 했다고 가정해보자. 그것이 정녕 올바른 일일까? 나는 그릇된다고 본다. 지금까지 아이들을 손쉽게 다루기 위해 싸움자체를 죄로 만들었다. 조용히 순종적으로 지내라고 요구했지. 하지만 그것은 잘못되었다. 오히려 싸움할 수 있는 인간으로 길러냈어야 했다. 건전한 싸움, 올바른 싸움을 할 수 있도록 싸우는 방법을 알려줬어야
했다. 논쟁하는 법을 알려주고 무도를 알려준다. 그것이 바로 싸울 줄 아는 인간으로 육성한다는 것이다. 논쟁을 가르쳐서 저열한 욕설보다는 품위 있는 논리적인
공격을 할 수 있도록 했어야 했다. 무도를 가르쳐서 정당한 약자를 보호하고 부당한 강자와 맞서 싸울 수 있도록 했어야 했다. 단순하게 싸움이 죄를 부를 수 있다고 해서 싸움 자체를 죄로 만들면 안됐다는 이야기다! 많은 사람들이 제대로 싸울 줄 모르니까 우리 사회에서
싸움이 불건전하게 진행되고 있지 않나! 인터넷 상에 악플을 단다거나, 약자를 공격하고 강자에게 복종한다거나 하는 것들은 그야말로 인간의 싸움을 배우지 못한 동물들이 저지르는 죄악이다. 따라서 싸움자체를 금하는 것이 아닌 인간의 싸움을
배우도록 하게 했어야 했다. 아,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까지 올바르다고 생각했던 것들
대부분이 이상하다.
왜 성 상품화가 죄가 되었던 걸까? 얼핏 들으면 올바른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어린 시절 이성교제를 부도덕하다고 교육받아 자연스럽게
섹스도 부도덕하다고 교육받아왔으니까. 자연스러운 욕구 중 하나를 언급하는 것도 조심스럽게 만든 것은 그러한 영향이 크다고 본다. 그 영향으로 포르노를 죄악으로 여기는 건 한국 제외하곤 거의 없다고 하지. 한숨만 나온다. 성 상품화? 그건 결코 죄가 아니다. 인간의 필수적인 욕구를 충족하게 할 상품을 죄로
만들면 어쩌자는 건가. 식욕을 충족하기 위해 만든 상품은 죄가 되는 건가? 성의 상품화나 식의 상품화나 인간 본성을 기준으로 하면 차이가 없다. 그럼에도 조선의 도덕관념과 서양의 여성주의가 합쳐서 성 상품화를 죄로 만드는 사태가 벌어지고
말았다. 이는 인간이 인간임을 부정하는 불교의 불살과도 같은
상황이다. 고기를 먹는 것을 죄로 여긴 이들이나 성 상품으로
성욕을 해소하는 걸 죄로 여긴 이들이나 똑같이 인간을 위한 것이 아닌 것을 올바름으로 추구하고 있다는 거다.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일이다. 어떻게 인간에게 인간이 아니게 되는 걸 올바른 걸로
인정하길 바라고, 따르길 바라고, 인정하길 바라는 걸까. 이런 것 다 집어치우고 물어보겠다. 왜 그렇게 그릇이 좁은 건가? 성 상품으로 행복을 얻는 것이 그렇게나 아니꼬운가? 자신이나 사회에 피해가 많지 않으면 웬만하면 그
자유를 인정해라. 성 상품이 대한 부정적 인식을 줄 수 있어서 반대한다는
의견이 있다. 그건 틀렸다. 성 상품화로 부정적 인식을 주는 것이 아니라, 애초에 그 부정적 인식이라는 게 정상적인 인식이다. 가슴 좋아하고 팬티 좋아하고 근육 좋아하는 것들이
성 상품화 때문인 걸로 보이나? 원래 그런 거다. 원래 인간이 그런 거 좋아하는 거란 말이다! 더럽다고 느끼는 것은 그걸 더럽다고 느끼게 만든 도덕 탓이다. 왜! 인간의 성애를 더러운 것으로 만들었나! 꼰대가 도덕적인 인간인 것처럼, 애초에 잘못된 올바름을 주입 받아서 그런 거다. 정말 우리가 생각하는 올바름이 진짜 올바른지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성욕은 본능이 원인이지만 성 상품화가 불편한 건 주입된 도덕이 원인이다. 성욕은 생존에 필수적이지만 도덕은 생존에 필수적이지
않다. 무엇이 더 우선되어야겠는가? 본능을 죄로 만들지 좀 마라. 가엾은 한국인들. 의미 없는 올바름 때문에 다른 나라 사람들은 당연하게
얻는 성적 만족감을 우리는 죄악감을 가지며 얻고 있다. 이 또한 사회를 불행케 하는 요소다. 이는 올바름이 불행에 일조하고 있다는 명백한 근거다. 결국 우리는 이 또한 스스로 불행을 선택하고 있는 셈이다. 아, 도대체 올바름이란. 모든 올바름은 그 근간에 인간애가 있어야 한다고 본다. 인간을 위해서, 인간을 사랑하기 위해서. 존재해야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성 상품화를 죄로 만든 올바름은 과연 인간을
위해서 존재한다고 볼 수 있는가? 성애, 즉 이성을 성적으로 사랑하는 것은, 인간을 사랑하는 것으로 지극히 올바른 도리가 아니겠는가? 성을 사랑하여 상품화가 되는 걸 좀 죄라고 여기지
말라. 그건 조선의 정조관념이 부른 잘못된 도덕관념이다. 조선의 정조관념에서 좀 헤어나왔으면 좋겠다. 정말 지겹다. 여성주의자들은 조선의 여성차별은 싫어하면서 조선의
정조관념은 왜 그렇게 좋아하는가? 단지 입맛에 맞아서인가? 흔히 여성주의가 사회를 바꾸는 개혁이라고 말하는데, 결코 아니다. 지금 여성주의자들이 주장하는 바는 남성이 만든 질서에서 남성의 권리와 여성의 혜택을 바라고 있을 뿐이다. 새로운 질서를 만드는 것이 아니란 얘기다. 남녀의 권리와 혜택이 조금 달라질 뿐, 근본적으로는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다. 연령차별이 사라지나? 정조관념이 사라지나? 그들은 조선의 정조관념을 유지하는 지극히 도덕적인
인간들이다. 그들은 진보가 아니라 보수다. 조선의 정조관념이라, 고리타분하긴. 애초에 수치심도 정조관념에서 온 게 아닌가? 여성을 약하게 만드는 수치심을 왜 그렇게 소중히
여기는지. 정말 보수적인 사람들이다.
그 외 자본의 지배를 올바른 도리로 여긴다거나 정당의
지배를 올바른 도리로 여긴다거나 하는 일들이 있다. 흔히 앞에 것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뒤에 것은 공산주의 사회에서 벌어지는 일이다. 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한 자본주의의 명분은 자유고 공산주의의 명분은 평등이다. 자유와 평등, 명분은 그럴 듯 하다. 하지만 그건 명분에 불과하다. 자본을 가진 자는 자유롭게 뭐든지 할 수 있다. 법치 위에도 설 수 있다. 이것이 자본의 지배를 정당화한다는 것이다. 정당에 속한 자는 평등한 분배를 위해 지배할 수
있다. 법치 위에도 설 수 있다. 이것이 정당의 지배를 정당화한다는 것이다. 각 사회에 속한 사람들은 헷갈릴 것이다. 어째서 자본 지배가 이상하다는 거지? 어째서 정당 지배가 이상하다는 거지? 하지만 생각해보라, 「인간이 인간을 지배하는 것은 올바른 도리가 될
수가 없다.」그런 명확한 기준이 있다면 그들이 말하는 궤변에서
벗어날 수 있다. 세상의 올바름은 대부분 인간을 이용하기 위한 부분이
있으니 주의하지 않으면 올바름에 이용당할 수 있다. 그 점을 잊으면 안 된다. 특정 시대의 올바름은 절대선이 아니다.
기본적으로 보수는 선이고 진보는 악이다. 기존 질서유지를 바라는 보수는 질서 내에서 선이
될 수밖에 없고 질서파괴를 바라는 진보는 질서 내에서 악이 될 수 밖에 없다. 제정시대에 자유와 평등의 외침은 분명 악이라 할 수 있다. 독재체제에 민주화 운동은 분명 악이라 할 수 있다. 그런 식으로 질서를 파괴하는 진보는 악이 될 수밖에
없다. 그 의미는 악이 없는 집단은 진보할 수가 없다는
얘기가 된다. 조선은 수백 년간 질서가 유지되었다. 수백 년간 질서를 파괴할 악이 등장하지 못했다. 올바른 것이건 올바르지 않은 것이건 그다지 변하지
않았다. 그야말로 불변의 질서가 자리잡은 도덕적인 국가. 그것이 조선의 본질이다. 그리고 그랬기 때문에 진보하지 못하고 결국 몰락하고
말았다. 변화 없는 질서의 끝은 바로 그런 것이다. 참 재미있게도 조선은 질서를 파괴할 악이 없었으니까
망했단 얘기다. 불변의 질서라. 한국사회의 질서에서 장유유서의 도리를 부정하는 것은
분명 악이 될 것이다. 꼰대나 갑질 싫어하는 사람들도 애들이랑 맞먹으라고 하면 불편하겠지. 실제로 그런 방송이 나간 적이 있다. 아이와 노인이 서로 반말을 하며 대등한 관계를 구축했다. 흥미로운 기획이었다. 그러나 장유유서의 도리를 거역한 이 방송은 반발이
많았다. 그 방송을 시청한 시청자의 의견 중 기억나는 것은, 어린 애가 네 부모에게 반말을 해도 괜찮겠냐는 것이었다. 당연히 괜찮다. 장유유서를 올바른 도리로 배운 사람들은 쉽게 받아드리지
못하겠지만 잘 생각해보면 문제가 없다. 반말이 상대를 업신여기는 것이 아니지 않나. 그러면 반말을 사용하는 평등한 관계는 서로 업신여기고 있단 건가? 말이 안 된다. 연하가 연상에게 복종하지 않아도 충분히 서로 사이 좋게 지낼 수 있다. 충분히 서로를 존중하고 아낄 수가 있다. 충분히 서로를 사랑할 수 있다. 그럼에도 연하가 연상에게 복종하는 것을 올바른 도리로
배운 사람들은 연령평등을 악으로 여기게 된다. 끔찍하다. 토할 것 같다. 연령평등을 주장하는 나는 악이 될 수밖에 없다. 그래도 감수하겠다. 사회의 폐단의 원인이 논리적으로 명확함에도 그걸
받아드리지 못해 악으로 취급한다면, 나는 악으로서 기존 질서를 파괴하고 새로운 질서를 만들자고 주장하겠다. 꼰대나 갑질이 싫으면 좀 새로운 질서를 받아드려라! 모든 개혁자와 혁명가는 악이 되는 걸 두려워하지
말라. 그리고 다른 이들도 악을 두려워하지 말라. 꺼려하지 말라. 그 악이 있어야 우리 사회가 변화할 수 있다. 앞으로든 뒤로든 나아갈 수 있다. 그래야 우리가 불필요한 족쇄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 자유, 자유, 자유! 이 나라 사람들이 이상한 올바름에서 해방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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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주의를 올바르다고 교육받은 사람들은 한국을 적대시하는
북한을 형제로 여기고 그걸 부정하는 이들을 반민족주의라며 공격하겠죠.
그런데 그 올바름이 정말 한국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지
묻고 싶어요. 민족과 국가 사이에서 저울질하지 말고 국가를 위해
일했으면 좋겠습니다. 올바르다고 교육받은 것이 전부 올바른 건 아니니까요. 좀 더 고찰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저는 역할에 초점을 맞추고 싶어요. 개인 사상이 어떠하건 한국을 위해 일하는 역할이라면 그 역할을 다하길 바랍니다. 친미니 친일이니 친중이니 친북이니 관계없이. 한국을 위해서 일했으면 좋겠습니다. 외세에 휘둘리는 게 더 부끄러워.
북한은 분명 서양의 제국주의에 저항하여 민족주의자들의
귀감이 되었을 겁니다. 지금까지도 저항하고 있죠. 어쩌면 한국의 민족주의자 입장에선 부채감을 느낄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못했는데 그들은 했으니까. 그런데 그게 정말 올바른 겁니까? 모든 독재자는 권력유지가 최우선이다. 이건 어떤 곳에도 들어맞는 이치일 겁니다. 착각하지 마세요. 북한의 독재자는 독재를 위해서 행동하지 민족을 위해서 행동하지 않습니다.
서양의 것을 수용한 것이 민족주의자 입장에서 악이
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악이야 말로 사회를 진보시킵니다. 민족자결주의를 주장하며 민족주의자의 선을 지향했던 북한인들이 어떤 삶을 사는지 잊지 마십시오. 민족주의에서 벗어나 서양의 문물을 받아드려 친미파 친일파 소리를 들었던 자들의 악행 때문에
한국이 성장했음을 잊지 마십시오. 독재정권에 대항하여 질서를 파괴하는 악인 취급을 받다가 드디어 질서의 중심이 된 사람들은 잊지 마십시오. 악이 사회를 진보하게 만듭니다. (가끔 퇴보하게 만들기도 하지만.) 현재 질서를 거역하는 악이 사회를 혼란케 할 겁니다. 그래도 그 악이 있어야 한국은 진보할 수 있습니다. 질서를 거역하는 악의 존재를 인정하고 당당하게 맞서
싸우십시오.
진보라고 이야기하는 사람들 중에 진짜 진보가 얼마나
있는지 모르겠네요. 그냥 서양정치이념에서 진보라 설정된 걸 따르는 것뿐이잖습니까? 조선의 정조관념을 소중히 하는 사람들이 진보라 주장하는 걸 보면 정말 헛웃음이 나옵니다.
앞으로 꼰대나 갑질이 나오면 음, 장유유서의 도리를 따르는 도덕적인 인간이군! 이라고 감탄하면 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