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 코로나 교육정책
한국 교육계에 코로나란 불똥이 떨어졌다. 급변하는 사회에 발맞춰 교육정책도 매번 바뀌어 수험생들을
혼란에 빠뜨렸었다. 그럼에도 입시와 취업의 기준이 크게 달라지지 않아 본질적으로는 바뀐 것이 없었다. 그랬던 교육계가 이제는 변해야만 한다. 진보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과학이 예상보다 빠르게 진보할 전망이기 때문이다. 왜 과학이 예상보다 빠르게 진보하는가? 그리고 과학이 진보하는데 어째서 교육도 진보해야
하는가? 그것이 대해 이야기를 하며 시작하겠다. 코로나 사태가 반년을 넘어서고 있다. 공기전염의 가능성도 지닌 전염병이기 때문에 인간이
밀집하는 공간은 언제나 감염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다. 그 감염의 위험으로 인간이 일하기 어렵게 되었다. 일자리와 수출량이 줄어들고 실업자가 늘어났다. 기업들은 예정보다 빠르게 인력감축을 시작하기 시작했다. 항공업계가 인간 대신 물자를 나른다. 유통업계가 코로나 감염으로 마비되어 멈춘다. 유동인구가 줄어 자영업이 힘들어진다. 군부대가 감염이 되기 시작했다. 수십만 명이 사망하고 있는 해외는 더 심각하다. 해외에서 일하는 한국 노동자가 코로나로 사망한 사건들이
뉴스를 통해 속속 전해져 오고 있다. 이라크에서 일하는 한국 노동자를 전세기로 불러올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이 사태가 쉬이 끝날 것 같지도 않다. 전문가의 의견에 따르면 수 년 이상 지속될지도 모른다고 한다. 앞으로도 인간은 일하기 어려울 확률이 높다는 것이다. 인간이 일하기 어렵다는 것은 기업에 충분한 노동력을
제공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기에 필연적으로 인간을 대신할 노동력이 필요하게 된다. 그 노동력이라는 게 소나 원숭이 같은 다른 동물을 말하는 게 아니다. 바로 인공지능과 로봇이다. 알다시피 머지 않은 미래에는 인간 대신 로봇이 대신
일하게 될 것이다. 인공지능이 빠르게 발전하여 단순 노동뿐만 아니라 법조계, 의료계, 언론계 가리지 않고 거의 모든 분야에서 인간을 대신해 일하게 될 거란 전망이 있다. 그래서 기초소득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자본주의 체제를 유지하면서 자원을 분배하기 위해서는
기초소득 말고는 답이 없기 때문이다. 모든 사상은 인간을 위해 존재한다. 자본주의가 인간의 생존을 위협한다면 자본주의는 사라져야 할 사상이 된다. 자본가야말로 자본주의 내에서 자신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기초소득에 동의하는 수밖에
없다. 세계가 통합되면서 대다수의 국가가 시장을 개방함에
따라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는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와의 싸움이 아닌 자본가와 정치가의 권력다툼으로 변질되었다. 큰 시장에선 자본을 지닌 자본가의 힘이 크고, 큰 정부에선 분배할 권리가 있는 정치가의 힘이 크다. 이 싸움에서 자본가가 민중의 지지를 받기 위해서는
정치가가 기초소득을 시도하지 않더라도 할 수밖에 없다. 그러지 않으면 민중은 자본주의를 버리게 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경제이념엔 민중이 없다. 민중에겐 자유주의와 민주주의가 필요할 뿐이다. 그리고 역할 외의 시간을 자유롭게 보낼 권리와 가치판단을 역할로 삼아 평등하게 바라볼
수 있는 역할주의가 필요하다고 역설하겠다. 어쨌든 기초소득을 부르게 될 인공지능과 로봇, 그리고 그걸 토대로 한 완전자동화. 이것이 코로나로 인해 빠르게 발전할 과학기술이고, 이것이 인간을 대신하게 될 노동력이다. 본래라면 이 과학기술은 많은 저항에 부딪쳤을 것이다. 모든 진보의 걸림돌은 시대의 변화를 거부하는 저항의 총체다. 노동과 자본은 둘 다 과학의 진보를 꺼려한다. 노동은 일자리를 빼앗기기 때문에 꺼려하고 자본은
위험부담이 싫기 때문에 꺼려한다. 물론 상대적으로 자본가가 더 여유롭긴 하다. 이미 자동화 공정이 발달한 기업은 정리해고를 하거나 추가 인력을 고용하고 있지 않다. 이 사태를 계기로 더 많은 인력을 정리하고 있다. 그럼에도 보수적인 기업이 많다. 대부분은 다른 곳에서 완전자동화가 상용화되어 이익을
얻는 것을 확인해야만 시도할 것이다. 이런 저항이 코로나로 인해 인간이 일을 할 수 없게 되면 대신할 노동력의 필요로 과학이 진보하게 될 것이란 이야기다. 이는 전쟁 중에 무기개발에 힘을 쏟는 것과 비슷할
것이다. 평시라면 자본, 노동, 도덕, 윤리, 관습, 이해관계 등의 이유로 무기개발이 상대적으로 느려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전시가 되면 그런 저항들이 의미를 잃고 무기개발에
총력을 기울일 수 있게 된다. 전쟁이 과학의 발전을 부른다는 것은 이런 이유가 크다. 저항이 줄어드니까. 코로나 사태도 이와 비슷한 이유로 과학이 진보할 것이다. 과학의 진보는 자연스럽게 교육의 진보도 부른다. 과학의 진보는 출산, 교육, 생산, 분배, 사망의 순환구조에서 생산의 변화를 부르게 된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그 생산에 공급되는 노동력에 대한 교육도 변화할 것이다. 가령 지금 인간이 기계가 하는 일을 배우고 있나? 아니지 않나. 과거의 인간은 지금 기계가 하는 일도 배워서 직접
생산했다. 지금은 어떠한가? 기계가 하는 일은 배우지 않고 기계를 다루는 일을
배운다. 좋은 예가 바로 글씨일 것이다. 직접 쓰는 것이 아니라 컴퓨터로 작성한다. 그렇게 컴퓨터로 서류를 작성하는 일이 많아지자 다들
글씨가 엉망이다. 안 쓰면 퇴화한다. 자연법칙은 사회법칙으로도 이어지기 마련이다. 이처럼 생산의 변화는 교육의 변화로 이어진다. 그와 마찬가지로 인공지능 덕분에 앞으로 하지 않게
될 노동에 관련된 교육을 배우는 것은 적절한 교육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 필요 없는 지식은 배울 필요가 없다. 인간이 사회를 구축한 이상, 지식은 개인의 것이 아닌 사회의 것이기 때문이다. 개개인이 기계가 하는 일, 로봇이 하는 일, 인공지능이 하는 일을 몰라도 괜찮다. 하드웨어를 만드는 사람도 소프트웨어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모르고, 소프트웨어 만드는 사람도 하드웨어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모른다. 모든 사회의 지식은 이와 같이 인간 개인의 것이
아니다. 사회의 지식이 개인의 것이 아닌 사회의 것이라는
인식이 있다면, 모든 전문가는 자신이 가진 지식을 다른 전문가도
알아듣기 쉽게 전달할 의무가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사회의 지식을 키워야 개인의 지식도 키울 수 있으니까 말이다. 그것이 지식의 상향평준화다. 어떤 이는 사회가 붕괴될 때를 대비해 전부 교육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건 지나치게 인간의 자유를 속박한다. 언제 있을지 모를 사회붕괴에 대비해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할 수 없게 되는 것은 자신의 삶을 사회보험에 바치는 것에 불과하다고 말하고 싶다. 이와 같은 이유로 과학이 진보하면 본질적으로는 별로 달라지지 않았던 교육계가 이제는 진보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 진보는 인간이 일을 하기 어려워져 질수록
빨라질 것이다. 인간을 대신할 노동력이 필요하니까.
그렇다면 교육은 어떻게 진보해야 하는가? 그것에 대해 이야기를 해보자. 많은 학생들은 이번 교육부가 결정한 대면학습을 부정적으로
생각한다. 등교하다가 코로나 걸리면 책임질 수 있느냐는 것이다. 학생들이 주로 이용하는 유튜브의 댓글들을 살펴보면
등교를 결정한 교육부장관에 대한 불만으로 넘치고 있었다. 심지어 사리사욕을 위해 등교를 결정했다고 믿는 학생들도 있었다. 그 여파인지 몰라도 제주도의 초등학교에서는 집단등교거부 사태까지 벌어지고 있었다. 교육부에 대한 불신이 극에 달했다. 그럼에도 한가지 변호하자면, 그 자리에 누가 앉더라도 등교를 결정했을 확률이
높다는 것이다. 교육은 인간의 자아실현이나 사회화뿐만이 아니라 생산을
위한 노동력 제공에 있다. 최근 대학은 앞의 것보다 뒤의 것에 무게가 실리는 형편이다. 괜히 대학교를 취업기관이라 폄하하는 것이 아니다. 어쨌든 사회에 노동력 공급을 담당하는 교육이 정체되면 사회 전체가 정체될 우려가 있다. 출산, 교육, 생산, 분배, 사망의 순환이 멈추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출산율이 저하되어 사회구조가 흔들리고
있는 상황 속에서 교육도 멈춰버리면 걷잡을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 교육과정이나 출석이나 시험 따위의 기존 교육체계를 유지하면서 사회가 굴러가게 하려면 위험부담을 감수하더라도
등교를 해야 한다. 이는 사회유지를 위해 위험부담을 감수하고 일하고 있는 것과 같다. 만약 현행 교육과정을 무시한다면 많은 학생과 학부모와 교육관계자의 반발이 있을 것이다. 미리 예고한 교육과정대로 교육을 하지 않으면 그들의
계획에 혼란이 생기기 때문이다. 그리고 공정. 체계화된 교육과정이 있어야 공정을 유지할 수 있다. 그 공정 때문이라도 쉽게 교육과정을 바꾸기 어렵다. 그런데 왜 사람들이 공정을 그렇게 갈구할까? 공정이 손해를 받아드리게 만드는 결정요소기 때문이다. 누군가 내 위에 있는데 그게 공정하지 않는다면 받아드릴 수가 없다는 얘기다. 한국은 연상에게 복종하는 것이 올바른 도리였던 장유유서가
도덕이었다. 그래서 사회관계는 복종과 지배로 나뉘게 되었다. 누군가 내 위에 있다는 것은 그 윗사람에게 복종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걸 반길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복종하기 싫어서 중소기업도 가기 싫어하고 회식도
싫어하고 명절에 친척집 가기도 싫어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한국이 겸손한 까닭도 여기에 있다. 대중이란 연령 미상의 집단은 특정 개인이 대중과 맞먹으려고 하는 것을 용납할 수가 없었다. 특정 개인의 연령이 대중보다 높을 확률은 극히 드물기 때문이었다. 이러니 한국인은 겸손할 수밖에 없다. 한국의 과도한 경쟁과 공정에 대한 집착도 그런 불평등한
도덕으로 형성된 사회관계 때문이라 본다. 경쟁으로 지배하느냐 복종하느냐 결정되니까 말이다. 이런 이유들 때문에 교육부는 등교를 결정할 수밖에 없던 것이다. 그럼에도 한가지 비판하자면, 지나치게 보수적이다. 이런 사태가 되었음에도 교육과정을 준수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설령 사람들의 반발이 있더라고 하더라도 말이다. 지금은 긴급한 상황이지 않나. 코로나로 노동력이 저하되고, 그 노동력을 대신할 것을 위해 과학이 진보하고, 그 진보한 과학으로 기업이 진보하고, 그 진보한 기업 때문에 교육이 진보할 수 밖에 없다. 굳이 현행을 유지하는 것은 현실을 보지 않은 무사안일주의에
불과하다. 이 사태가 언제 끝날지도 모른다. 이 기회에 학부모의 반발, 교사의 저항, 입시와 취업, 공정을 위한 체계 등으로 정체되어왔던 교육이 진보해야만
한다. 국민들에게 새롭게 각인을 시켜야 한다. 교육도 변화해야 한다고. 사실 진작에 했어야 했다. 포스트 인터넷과 포스트 인공지능에 맞는 교육을 진작에
했어야 했다는 것이다. 인터넷은 정보의 과잉공급으로 연령과 관계없이 사회의 문제에 접할 수 있게 만들었다. 인공지능은 인간 노동력의 필요성을 감소시켜 생산자가 아닌 사용자를 필요하게 만들었다. 이제는 이 두 가지 변화에 맞는 교육과정이 필요하다.
우선 포스트 인터넷에 대해 이야기를 해보자. 인터넷은 판타지에 나오는 어떤 마법보다 마법 같은
도구다. 전세계 어느 곳도 네트워크만 연결되어 있으면 컴퓨터나
모바일의 사용자는 누구나 다 정보교류와 축적이 가능하다. 그것은 정보가 특정 계층이나 연령의 제한을 받지 않고 전달된다는 이야기다. 아이들도 어른들의 정보를 접할 수 있고 어른들도 아이들의 정보를 접할 수 있다. 그걸 통해 원래는 있을 수 없었던 연령을 넘어선
소통이 가능해진다. 이러한 사실은 그 동안 우리가 아이들을 위해서라는 명목으로 통제된 연령대별 정보차단이 무의미해짐을 알게 된다. 최근 아이들 사이에는 민식이법이라는 놀이가 유행한다고
한다. 민식이법이란 어린이 보호구역에서 교통사고 시 운전자에게
가중처벌을 가하는 법을 말한다. 이런 민식이법에 대한 정보가 아이들에게 흘러가자 아이들은 이걸 가지고 어른들에게 위험한 장난을 시도하기 시작했다. 어린이보호구역에 있는 차량에게 접근해서 의도적으로
부딪친 후 신고 당하고 싶지 않으면 돈을 달라고 협박한 것이다. 그 이유를 물어보니 어른들이 벌벌 떠는 모습이 재미있어서 장난쳤다고 한다. 장유유서로 어른들에게 복종해야만 하는 아이들 입장에서
어른들의 그런 태도는 매우 유쾌했겠지. 예전이라면 이런 법 관련 정보가 아이들에게까지 전달이 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민식이법 놀이도 유행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아이들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악용이 가능해졌다. 요즘 늘어나는 촉법소년의 자동차 운전사고는 그런
정보가 전달되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큰 처벌을 받지 않는다는 이미 알게 된 것이다. 특히 최근엔 어린 아이들도 스마트폰을 들고 다니기 때문에 유튜브를 통해 그런 정보를 아주 쉽게 접할 수 있다. 최근 틱톡의 정보유출에 관한 뉴스가 유튜브에 올라온
것이 있었다. 보통 그런 뉴스는 아이들이 잘 안본다는 인식이 있다. 지금까지 사회현안은 어른들을 위한 정보였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어린 학생들도 자신과 관련된 뉴스는 살펴보게 되었다. 틱톡의 이용자는 주로 초등학생과 중학생이라고 한다. 그래서 틱톡 관련 뉴스가 학생들의 추천목록에 뜬
모양이다. 그 뉴스에는 학생들의 댓글이 많았다. 학생A: 정보유출이 무섭다. 학생B: 엄마가 지우라고 해서 지웠는데 다행이다. 학생C: 구글 계정도 지워야 하나요? 등등 다양한 의견들이 많았다. 이처럼 이제 정보는 연령대별로 통제한다고 해서 통제가 되는 것이 아니다. 다 퍼져나간다. 원하면 쉽게 알아볼 수도 있다. 차단 자체가 무의미하다. 오히려 차단을 하면 차단된 일부 학생들만 정보고립으로
외톨이가 될 뿐이다. 이제 모든 학생들은 연령과 관계없이 사회현안에 대한 판단능력이 필요하게 된 것이다. 그 능력이 없으면 앞으로 법을 이용해 어른들을 협박하거나 범죄를 저지르는 일들이 더 많아질
것이다. 정보과잉공급으로 연령에 관계없이 모든 인간이 정보를
접할 수 있는 시대. 이 시대야 말로 지식만 가르치는 것이 아닌 지혜와 지성도 동시에 가르쳐야 한다. 이것이 바로 포스트 인터넷에 맞는 교육방식이다. 그 동안 한국교육은 주입식 교육을 주로 사용했다. 이 교육방식은 많은 비판을 받았지만 다수의 인원에게
지식을 심는 데는 가장 효율적인 방식임을 부정할 수는 없다. 수천 년간 쌓아 올린 인류의 지식은 지나치게 많았다. 간추리고 간추려서 요약만 한 것을 기억하는 것만으로도 시간이 부족했다. 세월이 흘러갈수록 학생들의 고달픔이 늘어나는 것은
인류가 쌓은 지식들이 늘어나기 때문이다. 지금의 교육방식은 이런 지식을 기억하고 이해하고 평가 받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것이 가난하고 무력했던 한국을 키워냈던 매우 효율적인 교육방식이었다. 주입식이 아무리 부작용이 많아도 그 효율자체는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지식을 쌓는데 급급하다 보니 지혜나 지성을
가르치는데 소홀하게 되었다. 남들이 만든 지식을 기억하고 이해하는 것에 치중하다 보니 새롭게 무언가를 만드는데 익숙하지 않은 것이다. 한국의 아이들은 스스로 어떤 현상을 보고 고찰하고
의견을 내는 그런 자유의지를 가질만한 시기가 없었다. 예전에 학생들의 모의재판영상을 시청한 적이 있다. 어떻게 하는지는 잘 모르겠는데 느낀 바가 하나 있었다. 학생 개인의 의견을 내는 것이 아니라 대본대로 하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재판의 형식을 익히는 것이 목적인 듯싶었다. 그런데 그건 결국 남이 만든 지식을 기억하고 이해하고
평가 받는 것이 아닐까? 지저분하고 엉망이어도 좋으니 사건에 대해 자신의 의견을 내는 것을 보고 싶었다. 학생의 자유의지가 담긴 주장을 듣고 싶었다. 학생의 지혜와 지성을 키우는 걸 보고 싶었다. 한국은 이제 선진국의 반열로 올라서고 있다. 선진국이 만든 문명을 그대로 기억하고 이해하는 것은
이제 불필요한 단계가 아닐까 싶다. 그렇지 않아도 인터넷을 통해 정보가 과잉공급 되고 있는 시점에서 지식과 함께 지혜와 지성을 배우게 만드는 교육과정이 필요하다고 본다. 그렇다고 주입식 자체를 아예 없애자는 건 아니다. 지식을 쌓는 최고의 효율은 주입식이다. 태어나서 무언가를 반복학습으로 기억하는 것 하나하나가
주입식 아니던가. 반복해서 빠르게 기억하고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것은
지극히 효율적이다. 그러니 지식을 평가하는 것은 현행을 유지해도 괜찮다고 본다. 단 지식을 쌓는 방식은 바뀌어야 한다고 본다. 웬만한 곳에서 인터넷을 통해 정보를 쉽게 찾을 수 있는 상황에서 그 정보를 일일이 다
기억하는 것은 정말 불필요한 일이다. 모든 교육은 현장에서 사용할 수 있는 도구가 있다는 전제하에 행해져야 한다. 농사를 가르칠 때 트랙터가 있다는 전제하에 가르쳐야지, 손으로 한다거나 소를 끌고 다니는 걸 가르쳐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지식은 정보를 검색할 때 필요한 키워드를 기억하고 그 기억만 평가하면 된다. 굳이 세세하게 년도를 기억한다거나 같은 교훈이 담긴 이야기를 중복해서 배운다거나 하는
일은 지혜를 배우는 시간을 날려먹는 비효율적인 방법이다. 인터넷을 언제 어디서든 사용할 수 있다는 전제하에 쌓는 지식이야말로 포스트 인터넷에 어울리는 지식습득이라 할 수 있겠다. 어떤 상황에서 지식이 필요할 때 인터넷을 사용해
그 지식을 이용할 수 있는 정도만 기억하면 된단 얘기다. 평가 또한 마찬가지다. 암기를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이해를 평가하면 된다. 세세한 부분은 요점만 알고 있으면 인터넷 검색으로 보충할 수 있다. 이렇게 필요한 지식만 쌓다 보면 생각 외로 시간이 많이 남게 된다. 그 남는 시간에 지혜나 지성을 성장시킬 교육을 하면
된다. 지혜는 사물의 이치를 빨리 깨닫고 정확하게 처리하는
능력이라 한다. 지성은 지각된 것을 정리하고 통일하여 새로운 인식을
낳는 능력이라 한다. 지식을 쌓는 데는 단순 암기가 효율적이지만 지혜나 지성을 키우는 데는 암기로는 어렵다. 사물의 본질을 보고 판단하고 새로운 의견을 제시하는 그런 교육이 필요하다. 이는 정보의 공급이 연령과 무관하게 이루어지므로
모든 학생을 대상으로 실시해야 될 것이다. 가령 민식이법 놀이는 초등학생들이 일으키는 사회 논란이다. 그렇다면 당사자인 초등학생들이 직접 관찰과 실험으로 사건을 판단한 후 토론이나 논쟁을 통해 결론을
내리는 교육과정이 필요할 것이다. 이 과정 속에서 교사의 역할은 교사가 어떤 결론에 도달하도록 유도하는 것이 아니라 지식의 오류를 정정하는 것에 머물러야 한다. 누군가 결론을 내리는 것에 의존하다 보면 스스로
의견을 내는 것을 어려워하게 되어있다. 여론이 쉽게 흔들리는 까닭은 의존성과 무책임 때문이다. 자신의 의견에 책임감을 갖게 한다면 이런 현상은 분명 완화될 거라 생각한다. 여기서 사건의 판단이나 토론의 방식은 굳이 대면으로
하지 않아도 된다. 비대면 온라인으로도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다. 만약 글로 자신의 의견을 표현하는 것이 부적절하다면 논술은 도대체 왜 배우는 것인가? 그리고 논술로는 한계가 있다. 논술은 평가자가 원하는 답을 예상하고 그 답에 맞는 의견을 가르치고 있지 않나? 그건 지식을 쌓는 과정과 별반 다르지 않는 방식이다. 지혜나 지성을 키우기 위해서는 어떤 즉흥적인 사건을
과학적인 관찰과 실험으로 판단한 걸 논술로 풀어내고 그걸 바탕으로 다른 이들과 논쟁하여 의견의 장단점을 개선하거나 아예 새로운 결론을 내리는 과정이
필요하다. 이런 교육과정은 비대면 학습으로 가능하기 때문에
지금 같은 상황에 적절한 교육방법이 될 것이라 본다. 예컨대 어떤 사안에 대한 정보를 학교 홈페이지나 유튜브에 올리고 댓글로 익명 토론을 하게 만들면 된다. 이 경우 다른 이의 의견을 가져다 붙이거나 다른
사람이 대신 작성하는 위험이 있으나, 그런 우려는 결과를 평가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다. 토론 참여도만을 평가한다면 웬만해서는 스스로의 의견으로 토론할 것이라 본다. 애초에 인터넷에서 댓글 논쟁은 누구나 다 해본 매우
익숙한 것이므로 참여 자체는 그렇게 어렵지 않은 일이다. 교사는 그 토론 과정 속에서 질서를 유지하고 지식의 오류만 정정해주면 된다. 설령 그릇된 결론이 나온다고 하더라도 괜찮다. 사물이나 사건을 관찰하고 실험하여 판단한 것을 다른
이들과 토론하는 과정 자체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애초에 그릇된 결론이 나오기도 어렵고 나오더라도 외부의 인원과 다시 토론하다가 답을 찾을 수 있기 때문에 큰 문제는 없을 것이다. 정리하겠다. 인터넷은 정보과잉공급이 발생해 예전과는 다르게 초등학생도
사회의 정보를 접할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법을 악용해 어른을 골려 주거나 범죄를 일으키기도 했다. 이런 현상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기존 지식을 위주로 쌓는 교육을 효율화하고 남는 시간에 연령과 관계없이
모든 학생은 사회현안에 대한 판단능력과 토론능력을 길러 지혜와 지성을 갖춰는 교육으로 진보해야 한다. 그 동안은 여러 이해관계로 진보하기 어려웠으리라 본다. 그렇지만 지금은 아니다. 코로나로 혼란스러운 이때, 가장 진보하기 좋은 시기라 본다.
그 다음 포스트 인공지능에 대해 이야기를 해보자. 인공지능은 세상을 바꾸고 있다. 이제는 단순노동뿐만 아니라 언론기사나 사법판단 또는
의료판단까지 인공지능의 사고회로로 충분히 가능하게 되었다. 실제 인공지능이 쓴 기사의 중립성이 기자보다 높다는 결과가 있다. 그 결과를 보고 많은 사람들이 희망했다. 하루 빨리 인공지능이 대신 일했으면 좋겠다고. 사리사욕에 휘둘려 제 역할을 못하는 사람들을 보고
분노한 것이다. 이 현상은 분노라는 감정으로 형성되어 여론만으로
결정할 수는 없다. 성실한 사람들도 많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인공지능이 특정 분야에 인간보다 더 쓸모가 있다면 굳이 인간이 그 분야를 담당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기계가 하는 일을 인간이 할 필요는 없지 않나. 세탁기가 있는데 굳이 손 빨래를 하는 것은 시간낭비다. 인간은 보다 더 많은 자유를 누리야 한다. 인공지능이 할 수 있는 일을 인간이 하는 것을 시간낭비다. 인간은 인공지능이 할 수 없는 분야에서 보다 더
자유롭게 능력을 키워야 한다. 그것이 바로 창의다. 인공지능이 인간 수준의 창의력을 발휘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왜냐하면 인공지능에는 자아가 없기 때문이다. 인간의 자아는 세가지가 있어야 갖춰진다. 인간이 지닌 세포, 그 세포와 상호작용하는 세계, 그리고 세포의 의지를 여론화하여 의식적으로 판단하게 만드는 뇌다. 여기서 뇌가 없으면 해파리 같은 생물이 되고, 지능이 낮으면 인간 외의 동물이 되고, 지능이 높으면 인간이 된다. 인공지능은 이 세가지 다 제대로 갖추지 못했다. 인공지능은 단지 특정한 작은 틀에 입력된 데이터
내에서만 새로운 것을 만들어낼 수 있다. 인공지능이 바둑을 제패한 것은 바둑이란 틀 내에서 무한정 사고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바둑의 규칙을 입력하고 시행착오를 수없이 반복시켜 학습시킨 것이다. 하지만 이런 방식으로는 인간 수준의 창의력을 발휘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인간은 세상이란 틀 내에서 무한정 사고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바둑의 변수와 세상의 변수, 얼마나 큰 차이가 있겠는가? 그래서 인공지능의 방식으로는 아무리 발전해도 인간 수준의 창의력을 따라잡을 수가 없다. 진정 인공지능이 인간을 따라잡기 위해서는 유전자부터 시작해 생명을 만드는 수밖에 없다. 완성된 인간과 세계를 만드는 것보다는 유전자를 설계하는
것이 훨씬 편하다는 것이다. 그렇게 인간과 세계를 만들고 나면 비로소 인간 수준의 자아, 인공자아가 탄생할 것이다. 인공자아가 탄생하면 그제서야 인간 수준의 창의력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이다. 그전까지 인간은 인공지능이 할 수 없는 인간 수준의
창의력을 발휘하면 된다. 창의, 그것이 포스트 인공지능 시대에 걸맞은 교육이다. 그렇다면 창의력을 어떻게 키워야 하는가? 우선 교육의 방향성부터 바꿔야 한다. 이제 교육은 생산에 동원될 노동력을 키우는 것이
아니라 창작에 동원될 창의력을 키워야 한다. 지금 교육은 미래에 하게 될 생산활동을 위한 지식을 쌓게 만드는 것에 머무르고 있다. 하지만 앞으로 인간은 대부분의 생산활동을 하지 않게 된다. 그렇다면 미래에 생산을 하게 될 때를 대비해 교육을
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 학생들이 하고 싶은 일에 맞춰서 교육을 하고 동시에 학생들이 창작을 해야 한다. 지식 쌓기와 취미활동의 중요성이 뒤바뀌게 된 것이다. 인간은 인간이 하고 싶은 일을 해야 창의력이 발휘되기가
좋다.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하는 것은 남이 시켜서 생산활동을
할 때나 도움이 되는 것이다. 남이 시켜서 하는 생산활동은 이제 인공지능이 대신할 것이니 이제 인간은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창의적인 결과물을 만들면 된다. 그래야 창의력이 키워질 것이다. 포스트 인터넷은 지식 암기의 양을 줄여주었다고 본다. 맥락만 잡고 있으면 세세한 지식은 인터넷으로 통해
보충할 수 있다. 쓸 수 있는 도구를 쓰지 않는 교육은 단순히 시대에
뒤쳐진 것일 뿐이다. 평가 또한 암기가 아닌 이해를 중점으로 해야 한다. 그렇게 지식을 암기하는 시간을 줄이고 나머지를 취미활동에 열을 올리게 만들어야 한다. 가령 게임개발을 하고 싶은 사람이 게임제작동아리를 만들었다면, 학교는 그 제작을 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도와야
한다. 취미에 필요한 지식을 쌓도록 교육과정을 만들어야
한다. 그 취미가 진로가 되어 대학과 장래를 선택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흔하지는 않았던 취미의 직업화가 이제는 일상이 되어야 한다. 기자가 되고 싶은 학생은 기사를 쓰게 하고 작가가 되고 싶은 사람은 글을 쓰게 하고 장사를 하고 싶은
학생은 직접 장사를 할 수 있게 해야 한다. 포스트 인터넷과 인공지능은 학생들의 경제활동에 대한 접근을 매우 좋게 만들었다. 오픈마켓을 통해 누구나 다 장사를 할 수 있지 있다. 그 외 인터넷을 통해 누구든 방송경험을 할 수 있다. 어플리케이션을 통해 누구든 자신의 능력을 뽐낼 수가
있다. 연령과 관계 없이 사회활동을 하는데 제약이 매우
많이 줄어든 상황이다. 유튜브를 보다 보면 초등학생이 프로그램을 만들었는데 그게 놀랍다며 이야기하는 개인방송들이 있었다. 이제 교육은 미래에 있을 직업을 위해 지식을 단순암기
할 것이 아니라 직접 사회에 뛰어들어 창작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줘야 한다. 그것이 창의력을 키우는 교육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이상하다. 창작하지 않고 어떻게 창의력이 키워지나. 그런데 이 또한 쉽게 진보하기 어려울 것이다. 애들은 공부나 하라는 식의 고지식한 부모들이 많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지금은 아니다. 코로나로 혼란스러운 이때, 가장 진보하기 좋은 시기라 본다.
마지막으로 포스트 코로나에 대해 정리해보자. 인간이 일하기 어려운 지금, 인공지능과 로봇을 이용한 완전자동화 시대가 예정보다
빠르게 올 전망이다. 그 시대를 대비하기 위해 포스트 인터넷과 포스트 인공지능 시대에 맞는 교육정책을 추진해야 한다. 교육이 진보할 때다. 이것이 지금까지의 주장이었다. 그렇다면 교육이 진보하기 전, 지금 당장 포스트 코로나에 대응하여 할 수 있는
건 뭘까? 그것에 대해 이야기해보겠다. 우선 교육부의 관점을 살펴보자. 최근 교육부의 뒤로 가는 사고방식을 접할 수가 있었다. 코로나 시대야 말로 공동체 의식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그건 학교를 갈 수 없으니까 공동체 속에서 어른들이
아이들을 돌봐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으로 보였다. 나는 이 이야기를 접하고 놀랐다. 아, 어째서 더 과거로 가는 건가. 어째서 공동체 시절로 돌아간단 말인가! 이제 아이들도 자립심을 길러야 한다. 스스로 일어설 필요가 있다. 얼마 전 6살 러시아 여자아이가 총기분해를 하고 가지고 노는
영상이 유튜브에 올라온 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런 아이들이 모임을 가지기도 했었다. 그걸 보고 어떤 한국인은 댓글로 비아냥을 하더라. 한국 아이였으면 엄마 찾고 난리였을 거라고. 부끄러웠다. 언제까지 아이들을 어른들에게 의존하게 만들려고 하나. 이제 아이들도 어른들 손에서 벗어나 자립심을 길러야 하지 않겠나? 지금은 충분히 그럴 수 있는 환경이다. 인터넷으로 어른의 도움 없어도 정보를 수집할 수
있다. 사회도 많이 성숙해져서 과거에 비해서 치안이 매우
좋은 상태다. 오히려 어린이가 어린이 보호구역에서 민식이법으로
어른을 협박할 정도지. 아, 왜인지 갑자기 눈물이 흘러 나왔다. 잠깐 그 이유에 대해 생각을 해봤다. 아마 도덕에 지배 받는 어른과 그들에게 영향을 받는
아이들에 대한 연민이 것이다. 어째서 조선의 도덕에서 벗어나질 못하는가? 어째서! 조선의 공동체 의식에서 벗어나질 못하는가! 정말 글을 쓰다가 눈물이 나온 것은 오랜만이다. 이제 아이들도 스스로 자신이 원하는 길을 찾게 만들어야
한다. 인터넷이 있지 않는가! 아이들이 직접 자신이 원하는 길을 찾고 그 정보에
대한 사실확인과 외출 시 안전보장만 어른에게 도움을 받으면 된다. 이제는 아이들에게 자유의지를 가르치는 교육이 되었으면 좋겠다. 공동체를 형성하더라도 연령과 관계없이 평등해야 한다. 장유유서의 질서가 자리잡은 공동체는 연상이 지배하는
공간에 불과하다. 그런 곳에서 어떻게 자유의지를 가질 수 있겠는가? 연상이 지배하던 사회였던 한국은 아이들이 자립심을
기르기 어려운 환경이었다. 그런 만큼 코로나 시대야말로 자립심을 기르기 가장 좋은 시기다. 왜냐하면 홀로 있어야 감염이 안 되는 시대기 때문이다. 홀로 책이나 영상으로 정보를 접하고 그 정보를 관찰하고 실험하고 고찰하여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과정이 필요하다. 자유의지로 스스로 생각할 줄 아는 인간이 되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더 이상 한국 아이들이 힘들면 엄마를 찾으며 울 거라는 부끄러운 이야기를 접하고
싶지 않다. 이제는 한국 아이들도 자립할 때다. 그러고 보니 생각나는 것이 하나 있다. 옛날 어른들은 아이들을 강하게 키우고 싶어했다. 그러나 그건 말이 안 되는 얘기였다. 순종적인 인간을 만드는 조선을 도덕으로 연약하게
만들어놓고 강하게 성장하길 바라다니. 그건 자가당착이다. 자유를 보장해주고 그에 대한 책임을 짊어지게 만들어야 강하게 성장할 수가 있다. 그리고 강하게 성장해야만 한다. 코로나는 자립심을 길러 강한 아이로 키우기 좋은 시기라는 것. 그것을 알면 당장 할 수 있는 교육방식도 자연스럽게
나온다. 시험 범위를 공개하고 알아서 공부하라고 해라. 학교는 평가만 하면 된다. 단 포스트 인터넷 시대에 맞게 암기가 아닌 이해로
평가해야 할 것이다. 인터넷이 있다는 전제하게 교육을 하게 되면 암기는 그리 크게 중요한 요소가 아니다. 이해로 평가하게 만들면 시간소요가 줄어들어 시험의 난이도가 적절하게 내려간다. 비대면 학습으로도 충분히 대응할 수 있는 난이도가
될 것이다. 남은 시간에는 취미로 창작을 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어떤 것이든 좋으니까 결과를 만들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육상이 취미면 시간 감축을, 글쓰기가 취미면 글쓰기를, 별보기가 취미면 별 관찰일기를. 어떤 것에 몰두해서 창의적인 창작품을 만들어내는
그런 시간을 줄 필요가 있다. 공부도 스스로, 하고 싶은 일도 스스로 할 수 있는 자유의지를 가진 인간을 길러내야 한다고 생각한다. 교육부가 비대면 학습을 진행하지 않은 것은 기존 교육과정인 출석방식을 유지하기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 학생이 수업에 집중을 할거란 보장이 없기
때문으로 보인다. 아이들을 믿지 못하니까 비대면 학습이 어려운 것이다. 그런데 그건 결국 공동체 속에서 아이들을 어른들
손으로 키우려는 것과 다르지 않다. 실제로 집중하지 않고 딴짓하는 아이들이 있을 것이다. 암기가 아닌 이해로 난이도를 줄여도 그런 아이들은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스스로 공부하게 해야 한다. 사실 이건 인과가 잘못되었다. 시켜서 하는 공부로 학습하다 보니 시키지 않는 공부가
어려운 것이다. 처음부터 스스로 공부하게 했어야 했다. 원하는 길을 위해 스스로 공부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했어야 했다. 그걸 지금이라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또한 쉽게 진보하기 어려울 것이다. 공부를 시켜서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고지식한 부모들이
많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지금은 아니다. 코로나로 혼란스러운 이때, 가장 진보하기 좋은 시기라 본다.
한국 교육 자체가 어른에 의존하는 경향이 크다 보니
국가 자체도 의존적인 경향이 있다. 국방을 미국에 의존한다거나 말이다. 나는 주한미군 주둔을 찬성하는 입장이다. 주한미군이 주둔해서 얻는 이익이 크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립심은 그것과 별개다. 국방비리를 보면 나는 이런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좀 비리 해쳐먹어도 미군이 지켜주겠지. 어차피 미군이 다 할 텐데 뭐. 비리가 나도 제대로 처벌도 안하고 제 식구라고 감싸기만 하고 있고. 이게 정녕 휴전국가인지 의심스러울 정도다. 이런 현상은 미군에 대한 의존 말고는 해석이 되지 않는다. 이 얼마나 의존적인가. 이것 외에도 잘 살펴보면 의존적인 성향이 눈에 띈다. 세세한 것을 다루기엔 부끄러운 것이 많으니 두루뭉실하게
넘어가겠다. 애초에 교육이 문제니까 교육이 진보하면 그런 의존적인
성향은 바뀌게 될 것이니 굳이 안 써도 될 거라 본다. 교육이 자립해야 국가도 자립한다. 그걸 강조하며 마친다.
---
섹스를 싫어하는 매우 도덕적인 팬더양반들은 멸종위기고
섹스를 좋아하는 매우 부도덕적인 토끼천민들은 호주를 정복했습니다. 조선의 성 관념은 생존에 적합하지 않습니다. 그건 지배에 적합한 겁니다. 여성을 도구로 삼기 위해 주입한 정조관념 따위 버리기 바랍니다. 지조 절조 따윈 남성이 만든 족쇄일 뿐입니다. 여성들의 자유와 평등은 남성에게까지 정조관념을 주입하는
것이 아니라, 여성 또한 자유로운 성생활을 즐기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여성들이 그 족쇄에서 벗어나서 자유로운 성생활이
가능해져야 성적 농담을 수치스럽게 느낀다거나 하는 일들이 없어질 겁니다. 지금 남성들은 성적 농담이나 알몸에 수치심을 별로 느끼지 않거나 아예 느끼질 못합니다. 주입된 정조관념이 없으니까요. 요즘은 여성에게 주입된 정조관념을 남성에게도 주입하려
애쓰는 모양새가 있지만, 없는 것이 자유로운 인간의 모습입니다. 여성들은 남성들이 주입한 도덕에서 해방되어 그 자유를 쟁취해야 해요. 그게 진정한 여성의 자유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래야 남성들도 덜 피곤해질 겁니다. 최소한 구급대원이 구조할 때 성추행으로 신고 받는 일은 없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여성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여성들이 성추행을 당했을 때 수치심으로 벌벌 떠는
것이 아니라 맞서 싸울 수 있게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만들어진 수치심 때문에 이성을 유지할 수 없어 성추행인지 아닌지 분별할 수 없으니까 구급대원의 구조도 성추행으로 느끼는 겁니다. 고지식한 보수주의자들이여, 나중에 팬더처럼 강제로 포르노 시청해서 애 만들
거 아니면 미리미리 준비해두십시오. 참 왕에게 지배 받던 시대의 도덕 때문에 이게 뭐 하는 건지.
안전과 보호라는 명목으로 많은 통제를 하고 있죠. 그렇지 않아도 도덕적인 국가라 자유롭지 못한 상황이에요. 한국은 자유주의 국가라고 알고 있습니다. 혹시 자유주의자라면 인간을 지배하려 들지 말길 바랍니다. 딱 필요한 만큼만 통제해야 해요. 정당으로 지배하려 들지 말고 자본으로 지배하려 들지
말고 도덕으로 지배하려 들지 말고 종교로 지배하려 들지 마세요. 정당으로 지배하는 공산당이나 의식주 투기로 지배하려는 자산가나 장유유서로 지배하려는 연상이나 조선시대
성 관념으로 인간의 성욕을 지배하려는 정조관념이 투철한 자나 맹신이나 불살로 인간의 생각과 행동을 지배하려는 종교인이나 전부 마찬가지입니다. 정치가든 자본가든 도덕이든 종교든 그 어떤 것이든
인간을 지배하려는 것은 자유의 적입니다. 그리고 자유의 적은 나의 적입니다.
시원한 여름 따뜻한 겨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