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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무엇을 위해 희생을 해야 하는가? (0) 2020/09/21 AM 12:55

무엇을 위해 희생을 해야 하는가?

 

 

 

왕정국가는 왕을 위해 희생하고 종교국가는 신을 위해 희생한다. 그렇다면 민주국가는 누구를 위해, 무엇을 위해 희생을 해야 하는가? 민주국가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 중 하나가 바로 이것이다. 하지만 이 문제는 공공연하게 논의하기가 어렵다. 누가, , 무엇을 위해 희생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 논의를 한다고 가정해보자. 어떤 반응이 일어나겠는가? 왜 국민을 희생시킬 생각을 하느냐는 반발이 일어날 것이다. 누군가의 희생이 필요하다는 것, 그리고 이미 일상적으로 희생을 하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말이다. 잠시 희생의 사전적 정의에 대해 알아보겠다. 「다른 사람이나 어떤 목적을 위하여 자신의 목숨, 재산, 명예, 이익 따위를 바치거나 버리거나 빼앗기를 것을 뜻한다.」 희생은 크게 세 가지로 나뉜다. 첫째, 하고 싶어서 자발적으로 한다. 둘째, 하기 싫지만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한다. 셋째, 하기도 싫고 필요도 없다고 생각하지만 강제로 하게 된다. 지금까지는 보통 셋째로 강제로 희생을 당했다. 피지배자들은 언제나 지배자들에게 자신의 것을 빼앗겼다. 전쟁이 나면 끌려 나와 왕의 검이나 방패가 되어 싸우다 죽었다. 천재지변이 일어나면 제물로 바쳐져 신의 분노나 민중의 분노를 달랬다. 왕과 신을 위해 생명과 재산을 빼앗기는 것은 일상적인 일이었다. 신분사회는 이런 희생이 강요되었다. 정복자의 논리로 노예가 된 이들은 하루 종일 일을 하고도 제대로 된 대가를 받지 못했다. 평민들의 처지도 좋은 것이 아니었다. 남성은 평생 일만 하다가 죽었고 여성은 평생 집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죽었다. 먹고 사는데 급급했던 그들에게 꾸밈은 사치였다. 힘이 약한 여성에겐 보다 더 가혹했다. 여성은 종종 씨받이란 이름의 아이를 낳는 도구로 활용되기도 했다. 공녀로 팔려나갔다. 과부는 재가도 하지 못했다. 그들은 당시 인간으로 대접을 받지 못했다. 이런 천대는 최근까지 이어졌었다. 얼마나 천대받았으면 남아선호사상이 판을 쳐서 수많은 여자아이들이 낙태를 당했겠는가? 지금이야 그런 문화가 대부분 사라졌다. 오히려 여자아이가 태어나면 기뻐하는 사람들도 많다. 하지만 그 잔재는 여전하다. 유교문화가 남아있지 않는가? 여성주의로 인한 사회적 갈등은 사실상 남성사회의 질서를 유지하던 유교문화가 만든 셈이다. 여성은 남편을 섬겨야 한다고 가르쳤던 것이 유교였다. 섬김의 뜻은 다음과 같다. 「윗사람을 잘 모시어 받들다.」여성은 남성의 아랫사람이라 전제하고 가르쳤던 것이다. 유교는 백성을 지배하고 연하를 지배하고 여성을 지배하는데 사용된 교리이며 학문이며 도덕이었다. 이 질서에 여성은 천대받고 차별 받았다. 여성차별의 본질은 남성보다 힘이 약하다는 것에 있다. 여성의 힘이 약했기 때문에 남성사회가 되었다. 그 남성사회의 질서를 유교가 유지했던 것이다. 그랬던 과거와 달리 지금은 과학의 힘으로 무력()과 생산성(기계)이 거의 비등해졌다. 역할에 따라 여성이 더 우수한 분야도 많은 상황이 되었다. 여성이 차별 받았던 근거가 사라진 것이다. 여성은 과학 덕분에 인권이 올라간 셈이다. 그렇게 올라간 인권으로 평등사회가 만들어지고 있다. 되려 역차별 논란까지 나올 정도다. 그런 평등사회를 이룩하는 과정 속에서 유교는 걸림돌이 되었다. 과거 불평등했던 국가의 도덕이 관습으로 남아 사회적 불평등을 초래했던 것이다. 집안일, 명절, 혼수, 징병 등의 불평등은 과거 문화가 만든 잔재들이다. 여성주의자들이 가장 먼저 했어야 하는 것은 여성의 권익이나 남성혐오가 아니라 유교문화 철폐였음을 분명히 하고 싶다. 유교문화가 만든 폐해로 나타나는 차별 몇 가지를 바꾼다고 해서 평등사회가 오는 것이 아니다. 평등사회를 바란다면 유교 자체에 문제가 있음을 인식하길 바란다. 일제의 침략에 대한 반발로 조선이 미화되다 보니 이런 문제들에 대한 해결이 이루어지지 못하는 것 같아 안타깝다. 당시 조선왕조나 일본제국이나 피지배자들에게는 역겨운 지배자들이었다. 알아볼수록 조선말기를 옹호할 수가 없더라. 민주국가에서 굳이 누가 낫네 다투지 말고 미래로 갔으면 좋겠다. 과거에 얽매여서 조선미화를 하다가는 한국의 발전도 하지 못하게 되니까 말이다. 일본과의 갈등은 철저하게 현재의 시각으로 봐야 한다. 연좌제가 허용되지 않는 이상, 그들의 잘못은 과거에 있는 것이 아니라 현재 과거의 잘못을 외면하려는 것에 있기 때문이다. . 조선왕족들이 일본의 귀족이 된 것을 보면 참 할말이 없다. 언제나 그랬다. 지배국가에서는 약자를 희생시키고 강자가 호의호식을 했다. 내가 분노하고 내가 동정하는 것은 조선의 기득권이 아니라 그 시대 피지배자들이다. (일부 현명한 기득권도 있긴 하다.) 이처럼 과거의 피지배자들은 이외에도 말도 못할 정도로 많은 것들을 희생당해왔다. 인간의 사회는 누군가의 희생 위에 성립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어느 체제, 어느 제도도 누군가의 희생은 필연적이다. 당장 한국도 과거 한국인의 희생을 발판 삼아 성장하지 않았던가? 세계의 지원, 미국의 지원이 있었다고 해서 그들의 희생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경제의 성장도 학문의 성장도 민주주의의 성장도 전부 희생을 발판 삼아 성장했다. 사건사고들이 발생해도 국민들이 희생해서 극복했다. IMF가 터지자 국민들이 손수 금을 모아 국난을 극복하는데 큰 도움을 줬다. (대기업의 배를 불려줬다는 비판이 있다. 누군 희생을 하고 누군 이익을 얻고.) 태안에서 삼성1호와 허베이 스피릿호의 충돌로 인한 원유 유출 사고로 태안 앞바다가 기름으로 뒤덮이자 연 100만명에 가까운 자원봉사자가 찾아가 수작업으로 기름때를 제거해 생태환경을 복원하기에 이르렀다. 이외 다양한 사건사고들을 보라. 국민들이 희생해서 극복한 사례가 많다. 그러니 한국만큼 희생의 중요성을 모르는 국가는 없을 것이다. 사회질서를 준수하는 것, 세금을 내는 것 등 공동체에 속하게 되면 공동체를 위해 자연스럽게 희생하게 된다. 의료보험도 마찬가지다. 세금으로 운영되는 의료보험은 개인보다는 공동체를 위해 존재한다고 본다. 자신을 위해 내는 보험비가 결과적으로 건강한 사람이 희귀병이나 중병을 앓고 있는 사람의 의료비로 사용된다. 공동체를 위한 희생이다. 지금까지의 이런 희생은 지금까지는 어느 정도 관습적인 측면이 있었다고 본다. 지배국가였던 시대의 관습으로 희생을 강요당했던 사람들이 많았을 거란 얘기다. 사고 치는 사람 따로 있고 책임 지는 사람 따로 있고. 이거 어디서 많이 본 그림 아닌가? 지배국가에서 늘 일어나던 일이다. 그러나 이제는 그런 것도 점차 사라지도 있다. 그 어떤 것도 희생하지 않겠다며 나선 여성주의자들의 주장을 보라. 꾸밈, 결혼, 임신 등 조금이라도 손해를 볼 것 같으면 전부 거부하고 있다. 그것에 반발한 남성들 또한 희생할 수 없다며 군 징병과 징용을 비판하고 있는 상황이다. 결혼을 거부하고 징병을 거부한다. 출산율이 줄어들고 이민이 증가한다. 온갖 단체들이 제 이익만 요구하는 집단 이기주의를 보이고 있다. 국민들이 희생을 거부하자 희생 위에 서 있던 공동체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지배국가처럼 강제로 희생할 수 없게 된 이상, 자유국가처럼 모두가 조금씩 자유롭게 자발적으로 희생을 해야 하는데, 그걸 하지 않으니까 지금 국가가 흔들리고 있는 것이다. 한국은 지금 애국심을 고취시킬 수 있는 소식으로 아슬아슬하게 버티고 있는 중이다. 사상누각. 사회의 수많은 문제는 지배국가의 문화를 관습적으로 무분별하게 수용했기 때문이다. 도덕, 가치관, 자발적 희생의 이유. 이 세 가지를 민주국가에 맞게 재정립해야만 기초가 튼튼한 민주국가로 거듭나게 될 것이다. 지금 어떤 정권이든 개혁을 하면 반발이 나오고 있다. 왜 그런 걸까? 그건 일괄적으로 손해를 전부 거부하고 있기 때문이다. 올바른 정책을 시도하면 부당한 이익을 취해왔던 이들이 손해를 본다. 그릇된 정책을 시도하면 정당한 이익을 취해왔던 이들이 손해를 본다. 뭘 하든 누군가는 손해를 보게 되어 있다. 손해 자체에 초점을 맞추면 어떤 개혁이든 반발이 일어나 지지율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그 반발 때문에 개혁이 늦춰져 국가발전에 해가 되고 있다. 일부 집단의 이익 때문에 모든 공동체의 구성원이 손해보고 있는 것이다. 이제는 상황에 따라 손해도 받아드릴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어야 한다. 그걸 못하면 민주국가는 발전하기 어렵다. 예컨대 일부 집단의 이익 때문에 인공지능과 로봇을 거부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냥 뒤쳐지는 거다. 독재국가야 밀어붙여서라도 발전할 수 있겠지. 근데 민주국가는 그게 안되지 않나. 국가가 쇠퇴하는 거 특별한 이유로 발생하는 게 아니다. 국가의 변화가 멈추면 그 나라는 쇠퇴하게 되어 있다. 진작 조선이 중국이 세계의 중심이라는 생각에서 벗어나 세계를 떠돌며 문물을 접하고 성장했었다면 식민지배라는 치욕을 겪지는 않았을 것이다. 역사를 아는 한국인이라면 결코 변화를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그것이 설령 손해를 준다고 해도 말이다. 한국은 희생으로 성장했고 희생을 거부해서 흔들리고 있다. 이제는 더 이상 국가를 위해 희생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누군가의 희생은 반드시 필요하다. 그 누군가는 모든 국민에 해당되는 일이다. 연령, 성별, 학력, 지위 등 관계없이 모든 국민은 민주국가에 살고 있는 이상 자발적인 희생을 각오해야 한다. 그게 국가의 주인이 할 일이다. 그러지 않으면 공동체는 무너질 수밖에 없다. 제 이익만 챙기는 공동체가 어찌 유지될 수 있겠나. 그런 공동체는 사분오열로 무너지고 말 것이다. 희생은 국가존립과 발전이 걸려 있을 정도로 중요한 문제다. 그렇다면 어떻게, 누가, 무엇을 위해 희생을 해야 하는가? 이번에는 이 주제로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그럼 시작하겠다.

 

 

답을 먼저 말하겠다. 민주국가에서 희생은 나를 위해서 희생을 해야 한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위해서 희생을 해야 한다. 왕조국가가 왕을 위해서 희생하고 종교국가가 신을 위해서 희생한다면 민주국가는 나를 위해서 희생해야 한다는 것이다. 일견 이해가 되지 않을 수가 있다. 다음 두 가지 물음을 가정하고 진행해보자. 첫째, 그게 무슨 희생이라 할 수 있나? 둘째, 자신을 위한 희생이 공동체에 도움이 되겠는가? 먼저 첫째의 물음에 대한 답을 적어보겠다. 희생은 다른 사람이나 어떤 목적을 위하여 자신의 것을 바치거나 버리거나 빼앗기는 걸 뜻한다. 요는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위해 자신의 것을 바치는 것 또한 희생의 하나라는 것이다. 한국을 좋아하는 유학생이 있다고 가정하자. 그 사람이 한국을 사랑하여 해외의 좋은 일자리를 마다하고 한국으로 와서 일을 하는 것을 희생이라고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애국심이라. 많은 사람들이 애국심을 비판하는 것은 그걸 빌미로 희생을 강요했기 때문이다. 국가를 위해 희생하라고 강요하니 애국심에 진절머리가 난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희생기피는 주로 이것 때문이었다. 그것과 별개로 스스로 국가를 사랑하여 희생하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세뇌하지 않는 이상 말이다. 국가를 위해 민족을 위해서라는 명분으로 자폭테러 하는 사람들을 보면 과연 그 희생이 자발적이었는가 의문이 든다. 아이에게 폭탄을 건네줘서 자폭하라는 건 아마 자발적이지는 않을 것이다. 인류애가 충만한 사람이 있다고 가정하자. 그 사람이 기아에 허덕이는 아이들을 가엾게 여겨 아프리카에 가서 먹이고 재워주는 것을 희생이라고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동물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고 가정하자. 그 사람이 길거리에 돌아다니는 동물들을 어여쁘게 여겨 자신의 시간과 돈을 사용해 그 동물들을 돌봐주는 것을 희생이라고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개인적으로 해외보다 한국을, 동물보다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더 중요한 것이 아닐까 싶긴 하지만 강요할 수는 없다. 그들의 의지로 그들이 희생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래도 이해가 안 된다면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위해 쏟는 시간과 열정과 자본을 떠올려보자. 아이돌을 좋아해서, 취미를 좋아해서 정신적 이득과 물질적 손해를 보는 것도 자신을 위한 희생이다. 다음은 둘째의 물음에 대한 답을 적어보겠다. 공동체 성립을 위한 희생은 공동체를 위한 희생이 되어야 하는데, 자신을 위한 희생이 과연 얼만큼 공동체에게 이익이 되겠는가? 그런 의문이 들 수 있다. 이기적인 사람과 이기적인 집단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희생을 한다. 사실 그런 희생은 공동체에 큰 도움이 안 된다. 오히려 해가 되는 경우가 많다. 하청업체나 비정규직을 외면하고 자신들의 이익만 챙기는 노조가 있다고 가정하자. 이성을 혐오하고 증오하는 평등주의자가 있다고 가정하자. 그들의 희생이 사회에 얼마나 도움이 되겠는가?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게 별로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어떤 개인이나 집단도 이기적인 주장을 할 수 있다. 노조나 여성주의자가 비판을 받는 것은 그들의 이기적인 주장 때문이 아니다. 그들의 주장을 용인한 사람들과 허용한 정치가들 때문이다. 그런 이기적인 주장이 정책으로 이어지고 법률로 제정되니까 사회논란이 발생했던 것이다. 특히 젊은 남성이 분노하는 것은 여성에 대한 편애로 소외 받은 것이 크다고 본다. 사실 모든 인간은 소외 받으면 상처받고 슬퍼한다. 유치원생이 간식거리 못 받아서 우는 거나, 노인이 간식 못 받아서 삐치는 건 비슷하다는 거다. 너그러움이나 이해심은 사람마다 편차가 있는 거지, 연령이나 성별은 관계가 없다. 어떤 행동도 이걸 전제해야 한다. 여성정책을 내놓으면 아, 남성들이 소외 받고 상처받을 수도 있겠구나, 청년정책을 내놓으면 아, 장년들이 소외 받고 상처받을 수도 있겠구나. 반대의 경우도 동일하다. 이는 다수의 공동체 구성원이 주관에서 벗어나 객관적 시각을 갖춰 이해를 통한 납득이 가능해질 때까지 언제나 염두 해둬야 할 것이다. 잠시 이기적과 이타적에 대해 이야기를 해보겠다. 이는 크게 세 가지로 나뉜다. 하나, 이타적인 이유로 이타적인 행위를 하는 것. , 이기적인 이유로 이타적인 행위를 하는 것. , 이기적인 이유로 이기적인 행위를 하는 것. 여기서 하나는 주로 희생을 강요당할 때 발생한다. 이타적이란 자기의 이익보다 다른 이의 이익을 더 꾀하는 걸 뜻한다. 그런데 자유의지를 가지고 남을 위할 때에는 자신의 이익보다 다른 이의 이익이 더 커질 수가 없다. 이익이란 물질과 정신의 보탬이 되는 것을 뜻한다. 내 의지로 남을 위하는데 어찌 남의 이익보다 더 커질 수가 있겠는가? 자유의지로 남을 위해서 하는 행동은 내가 겪는 손해보다 내 정신적 만족도가 더 크니까 하는 거다. 국가를 위해 자발적으로 희생하는 거나, 아프리카 아이를 위해 자발적으로 희생하는 거나, 길거리 동물을 위해 자발적으로 희생하는 거나, 정신적 만족도가 크기 때문에 하는 거란 말이다. 그게 아니라면 누가 강요했거나 세뇌 당한 것뿐이다. 누가 강요하거나 세뇌했으니까 자신의 의지가 아니므로 남을 위해서 행동하게 된다. 그게 바로 이타적인 이유로 이타적인 행위를 한다는 것을 뜻한다. 여기서 둘과 셋은 자유의지로 희생할 때 발생한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희생한 것이므로 자유의지를 갖고 있다고 봐야 한다. 단지 그 결과의 차이가 있다.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위해서 행동한 것이 다른 이의 이익에 보탬이 된다면 이기적인 이유로 이타적인 행위를 한 것이 된다. 반면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위해서 행동한 것이 다른 이의 이익에 보탬이 되지 않는다면 이기적인 이유로 이기적인 행위를 한 것이 된다. 일반적으로 둘을 이타주의자라고 하고 셋을 이기주의자라고 인식해도 무방하지만 하나의 예가 있으므로 굳이 따지면 구분 지어야 할 것이다. 여기서 둘은 보통 자유주의 국가가 하는 희생이다. 분명 자유국가가 한국전쟁에서 피를 흘리며 희생한 것은 온전히 한국의 이익만을 위해서는 아니었다. 미국이 한국을 위해 물적 인적 지원을 했던 것은 온전히 한국의 이익만을 위해서는 아니었다. 한국에서 필사적으로 도움을 요청했고, 그 요청을 받아드린 것도 그들에게 이익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이념전쟁, 이념경쟁. 하지만 그것이 바로 이기적인 이유로 이타적인 행위를 한다는 것이다. 한국을 도왔던 것은 그들의 이익에 해당되었지만 그들의 이익이 한국에겐 매우 큰 이익이 되었다. 하고 싶어서 한 것이 이타적인 행위가 되는 것. 그게 바로 자유주의자의 희생방식이다. 다시 돌아와 자신을 위한 희생이 공동체에 도움이 되기 위한 방안에 대해 이야기를 해보자. 그 자발적인 희생이 공동체에 도움이 되기 위해서는 그 희생이 이기적인 이유로 이타적인 행위를 하는 것인지, 아니면 이기적인 이유로 이기적인 행위를 하는 것인지를 분명하게 구별해서 용인유무를 결정해야 한다. 그러니까 하청업체나 비정규직도 대변하고 사회와 기업까지 고려하는 노조가 되어야지 귀담아 들을 가치가 있다는 것이고, 이성을 증오하고 혐오하는 평등주의자가 아니라 사랑하고 포용하는 평등주의자가 되어야 귀담아 들을 가치가 있다는 것이다. 무언가 이익과 정의를 주장할 거면 그것을 위한 희생과 더불어 공동체에 이익이 전제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무작정 혐오하고 증오하는데 어찌 공동체에 이익이 될 수 있겠나? 기업을 혐오하고 기업의 편을 드는 노동자를 혐오하는 이들이 있다. 이들의 주장이 공동체에 이익이 되겠는가? 남성을 혐오하고 남성과 가까이 지내는 여성을 혐오하는 이들이 있다. 이들의 주장이 공동체에 이익이 되겠는가? 혐오로 가득 찬 이들의 이기적인 의견은 굳이 귀담아 들을 가치가 없다. 그들은 증오와 혐오를 정의의 도구로 만들어 서로를 할퀴고 상하게 만들었다. 공동체 외부에 대한 혐오와 증오도 바람직하지 않지만 공동체 내부에 대한 혐오와 증오는 보다 더 끔찍하다. 그렇다고 그들의 행동이 아예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다. 지금까지 과거 기업과 남성의 횡포가 어마어마하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언제까지 과거에 얽매일 셈인가? 여성이 차별 받는 것은 성별 관계 없이 모두가 협력해야 할 문제라고 말하니 왜 남성들과 협력해야 하냐며 거부하는 댓글을 봤다. 그리고 그 댓글을 지적하는 여성은 없더라. 정말 끔찍하다. 과거에 속박될수록- 과거의 불행에 집착할수록 현재와 미래는 불행해진다. 불행했던 과거를 들춰내며 감성을 자극해 서로를 공격하여 불행에 빠지지 말고 이성적으로 가능한 모두가 행복할 수 있는 길을 찾았으면 좋겠다. 제발 미래로 갈 수 있으면 좋겠다. 그래. 사실 나도 모른다. 난 한국기업이 국민들을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최근엔 모르겠는데 IMF 때만 해도 제 이익만 챙기다 끝나지 않았나. 누구 말마따나 국민들을 개돼지로 여기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제 이익만 챙기던 조선 기득권들의 전철을 밟지 않기를 바란다. 자유주의의 목적은 모든 인간의 자유다. 모든 인간이 정부, 자본, 의식주 등에서 자유롭게 자신의 능력을 갈고 닦아 인류의 발전에 공헌하는 것이 바로 자유주의가 추구하는 성장이다. 모든 인간이 자유롭게 능력을 발휘하여 사회를 행복하게 만드는 것이 바로 자유주의가 추구하는 행복이다. 자유주의는 말 그대로 인간의 자유의지에 최대한 맡기는 걸 의미한다. 알아서 잘 할게요. 라고 말하는 아이와 비슷하다. 반면 사회주의는 인간의 자유의지로 스스로를 통제하는 게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는 정부에게 그 통제를 맡기는 걸 의미한다. 알아서 못하겠으니 시키는 데로 할게요. 라고 말하는 아이와 비슷하다. 스스로 빈부격차도 사회의 갈등도 혼란도 불행도 통제 불가능한 사람들의 도피처가 바로 사회주의다. 간단히 말해 미숙하다. 신분에 지배로 통제 당하던 사람들이 주어진 자유를 감당하지 못하고 다시 한번 정부에게 통제해달라 바라는 것이 과연 제대로 된 진보인지 묻고 싶다. 사회민주주의는 민주적인 절차로 통제해달라 요구하는 것이고 공산주의는 폭력적이고 독재적인 방식으로 강제로 통제해 버리는 것이다. 이건 자유롭게 날던 새가 다시 새장으로 들어가는 모양새. 자신의 의지로 새장에 들어가는 것은 자유지만 그것은 미숙한 자유다. 자유방임주의는 제멋대로 구는 아이 같은 미숙한 자유고 사회민주주의는 자발적으로 시키는 데로만 하겠다는 아이 같은 미숙한 자유다. 흔히 공산주의가 이상이라고 하는데, 그보다 더 이상적이고 추구해야 하는 것이 바로 자유주의다. 공산주의 같은 독재체제는 독재자만 잘하면 되지만 자유주의 같은 민주체제는 모든 국민이 잘해야 되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자유주의가 사회주의보다 낫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서는 스스로 통제할 수 있다는 걸 보여줘야 한다. 지배는 결코 자유주의가 될 수 없다. 지배자의 자유는 이미 독재자가 잘 보여주고 있으니까. 누굴 지배하고 싶으면 합의하에 플레이로 즐겨라. 혈통의 지배로부터 자유롭기 위해 자유를 외치던 자본주의자들이 혈통지배자들과 마찬가지로 자본지배를 할 것이 아니라 다른 자유주의자들과 같이 자유를 외치고 자유를 위해 살았으면 좋겠다. 이것이 나의 희망이다. 나는 남성들이 여성들을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여성들을 사랑한다면 최소한 여성혐오로 얼룩진 사람들을 비판하고 그들의 주장에 선동되지 말아야 하는 것 아닌가? 가만 보면 이기적인 여성주의자를 공격한다는 명분으로 모든 여성을 싸잡아 공격하는 것에 휘말려 같이 욕하고 있다. 일부 여성의 감성을 비난하는 이들이야말로 감성적인 대응을 할 때가 있었다. 일부 여성의 남성혐오를 비판하고 싶다면 여성혐오를 하는 사람들도 비판해야 한다고 본다. 남자와 여자, 젊은이와 늙은이, 부자와 빈자 등 모두가 사랑할만한 가치가 있는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다. 이것이 나의 희망이다. 자신을 위한 희생이 공동체에 도움이 되기 위해서는 공동체의 도움이 되는 희생을 하는 사람과 집단을 존중하고 아끼고 그들의 주장에 귀를 기울이면 된다. 간단한 예로 자발적으로 군복무를 하고 자발적으로 아이를 낳는 그런 사람들을 존중하면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어떤 이익이나 정의를 요구하면서 그걸 위해 어떤 희생을 하고 그 희생으로 공동체에 이익이 된다는 걸 주장하는 이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면 된다는 것이다. 어떻게 된 게 정의를 주장하면서 어떤 손해도 감수하지 않겠다는 이야기를 할 수 있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권리를 달라, 그러면 어떤 책임을 지겠다. 또는 그건 잘못된 거다, 나도 잘못된 걸 하지 않겠다. 그런 식의 주장이 나와야 하는 것 아닌가? 가령 여성이 입사와 진급에 차별을 하지 말라달라고 주장한다면, 힘들고 고된 일도 같이 한다고 해야 하는 거다. 오지 파견도 당직도 평등하게 말이다. 가령 갑질에 불만을 느낀다면 꼰대질도 하지 말아야 하는 거다. 회사에서 갑질당해서 술 마시고 집에 들어와서 아이들에게 꼰대질을 하는 걸 보면 답답하다. 어른에게 꼰대질 당해서 욕하고 서비스직종에게 갑질하는 것도 답답하다. 기업이 규제가 강해 성장에 해가 된다고 주장할거면 규제를 풀어줬을 때 상응하는 희생을 통한 공동체 이익을 제시했어야 했다. 노동자가 CCTV감시가 인권에 침해된다고 주장할거면 알아서 일을 잘해서 생산성을 높였어야 했다. 이익이든 정의든 어떤 주장을 할거면 그걸 위한 희생을 각오해라. 그리고 그런 각오가 되어있는 이들의 주장에 귀를 기울이면 되는 거다. 이런 사회적 인식변화와 그걸 토대로 한 제도적 변화가 이루어지면 자연스럽게 공동체를 위한 자발적인 희생이 이어질 것이다.

 

 

 

그런데 이런 자발적인 희생은 사실 바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미워하는 상대를 위해 희생하고 싶어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아무리 공동체를 위해 희생하는 이들을 존중한다고 해도 서로를 미워하는 한 매우 어려운 일이라는 것이다. 노사가 서로를 혐오하는데 손해라는 희생을 감수하고 서로를 위한 타협이 가능할까? 이성을 혐오하는데 이성의 권리증진에 찬성하는 사람이 있을까? 군대에 가서 비리와 부조리를 보며 애국심이 사라졌다는 사람들이 많다. 나라를 사랑한다는 마음가짐으로 징병이란 희생을 감내하고 있었는데 그게 사라지고 말았단 얘기다. 자발적인 희생을 하게 하기 위해서는 사랑할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해야 한다. 물론 사랑하지 않아도 필요에 의해 희생할 수 있다. 그러나 거짓으로 한 행동의 끝은 그리 좋지 못한 법이다. 반드시 탈이 나게 되어있다. 이런 것처럼 자발적 희생의 기피는 사실 애정결핍이 낳은 현상이다. 지배국가에서 하던 강제로 하던 희생에서 자유국가에서 하는 자발적인 희생으로 바뀌었으니 하고 싶어야만 희생을 하게 되는데, 하고 싶지 않으니까 하지 않게 되는 거다. 그리고 그 애정결핍은 지배국가의 도덕과 가치관에 영향을 받았음을 강조하고 싶다. 연령으로 위아래를 정해 복종하는 질서를 만들고(장유유서), 직종에 따라 신분을 나눠 차별하는(사농공상) 그런 조선의 문화를 물려받았으니까 나이로 차별하고 직업으로 차별하는 거다. 한국은 지배국가의 차별하는 문화를 물려받고 자유국가의 자유롭고 평등한 이념을 전수받았다. 그게 얼마나 재미있는 현상들을 초래했는지에 대해 잠시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어떤 집단을 분석할 때, 그 집단이 어떤 행동원리를 가지고 있는지 알게 되면 이해가 가능해진다. 첫째, 경쟁. 둘째, 발전. 셋째, 민주주의. 넷째, 문화. 다섯째, 적폐. 첫째인 경쟁은 상명하복의 유교문화에 평등한 민주주의 체제가 도입되었기 때문에 발생하였다. 평등한 체제기 때문에 대부분 능력만 있으면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문화는 상명하복이라 상대적으로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이 낮은 위치에 있는 사람을 지배할 수 있었다. 표면은 민주적이기 때문에 대놓고 하지는 못해도 은밀하게 상하를 나눠 차별하게 되었다. 그 현상이 바로 갑질과 꼰대질이다. 경쟁에서 패배한 사람은 피지배자로 전락할 우려가 있기 때문에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하게 되었다. 왜 과열경쟁이 발생하게 되었는지 알겠는가? 지배 받고 싶은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그러니까 노력한 것이다. 지배 받기 싫으니까. 뭐 개중에는 지배하고 싶어서 노력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어떤 학생이 행복하기 위해 노력을 왜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며 고민을 토로했다고 한다. 행복을 위해 좋은 대학을 가고 좋은 직장에 취업하라고 하는데 그런 노력을 해야 할 이유를 모르겠다고 토로한 것이다. 이에 대한 답은 각자 다를 것이나 나는 두 가지를 지적해보겠다. 하나는 보상의 한계가 있다는 것. 아무리 노력해도 급여만으로 집을 사기도 벅찬 세상 속에서 노력의 의미를 찾지 못하겠다는 것이다. 둘은 애초에 노력하는 까닭이 행복하기 위해서 노력하는 게 아니었다는 것. 행복을 위해서 노력한 것이 아니라 불행하지 않기 위해서 노력했던 것이다. 하나는 굳이 자세히 설명하지 않아도 알 것이다. 자산가가 얻는 잉여가치가 늘어날수록 빈부격차는 커지게 되어있고 후발주자는 노력대비 얻는 보상이 점점 줄어들게 되어있다. 이는 게임에서 올드비(고인물)과 뉴비(청정수) 문제를 대입해보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뉴비가 아무리 노력해도 올드비 서브 캐릭터 하나 이기지 못한다. 쌓아 올린 재화의 차이가 극심하기 때문이다. 그런 상황에서 올드비가 뉴비를 지원하는 걸 반대하면 뉴비는 얼마 있지 않아 그만둬버린다. 현실에서는 출산율이 줄어들고 청년들이 노력하지 않거나 사는 걸 그만둬버린다. 둘도 앞서 이야기한 걸로 알고 있을 것이다. 지금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하는 것은 행복하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다. 불행하지 않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이다. 사회구조상 남들보다 위에 서야 지배 받지 않기 때문에 경쟁에서 패배하면 지배 받는 걸 좋아하는 일부를 제외하면 불행해질 수밖에 없다. 본질을 잘못 보고 행복을 위해서라는 명분으로 노력을 강요 받자 그 의미를 알 수 없어 헤매게 된 탓에 노력을 해야 할 이유를 찾게 된 것이다. 남들보다 위에 서야 불행해지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은 달리 말해 그 나머지는 전부 일반적으로 불행한 상황이란 얘기가 된다. 우리 사회가 불행으로 가득 찬 까닭은 거기에 있다. 과열경쟁은 유교의 불평등한 사상 때문이었고 그 덕택에 인재들을 쥐어짜서 우수한 결과를 냈지만 그만큼 불행한 사람들로 가득 찬 사회가 되었던 것이다. 둘째인 발전 또한 유교의 영향이 크다고 본다. 유교는 장유유서라는 상명하복의 질서를 올바른 도리로 만들었다. 그러다 보니 국가 전체가 군대인 것처럼 체계적으로 움직이게 되었다. 맨 위에 있는 사람이 방향만 제대로 가리키면 군말 없이 따랐기 때문에 지금까지 끊임없이 발전했었다고 본다. 군대에 가면 철이 든다는 소리는 군대에 가야 유교가 만든 상명하복의 질서에 적응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한강의 기적은 국가가 군대처럼 움직였기 때문에 가능했다. 하지만 그건 자유롭지도 않고 평등하지도 않고 행복하지도 않다. 그리고 잘못 가리키면 중국의 제사해 운동이나 문화대혁명과 같은 일이 벌어질 수도 있다. 시키는 데로 군말 없이 다하니까 그런 현상이 일어날 수 있는 것이다. 유교를 적폐로 몰아 문화대혁명으로 지웠다는 얘기도 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형식상에 불과하다고 본다. 공산당에 복종하는 그 행태를 보면 본질은 바뀌지 않았다. 유교를 대체할 새로운 도덕이 있지 않는 이상 본질은 바뀌지 않는다. 한국도 유교를 버렸지만 유교가 만든 문화는 남아있지 않는가? 미국의 커티스 르메이가 일본을 공격할 때 한 말이 있다. 무고한 민간인은 없다. 일본은 모든 국민이 전쟁물자를 만들기 위해 동원되고 있었다고 한다. 스즈키는 볼트, 하루보노는 너트, 키타가와는 공장에서 조립한다. 상명하복이 일상화된 국가에서는 모든 민간인이 전쟁의 도구로 활용된다는 얘기였다. 한국, 중국, 일본 모두 상명하복의 유교문화가 자리잡은 국가답게 전체주의적으로 움직인 경험이 있다. 지금은 조금씩 개선되고 있지만 그 잔재가 남아 국가와 세계를 혼란케 하고 있다고 본다. 유교문화권은 분명 군대 같은 체계적인 움직임으로 빠른 발전을 했지만 그 만큼 불행이 겹겹이 쌓여있는 국가들인 것이다. 셋째인 민주주의는 적이 있기 때문에 가능했다. 중국은 공산당에 복종하고 일본은 자민당에 복종한다. 상명하복의 유교문화권은 기본적으로 윗사람에게 복종하는 게 올바르기 때문에 민주주의가 발전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서 한국은 민주주의가 발전할 수 있었는가? 사실 한국도 보면 민주주의가 발전할 수가 없었다. 상명하복. 윗사람에게 복종하게 되어있는데 어떻게 발전할 수 있나? 그런데 발전했다. 어떻게? 그건 적의 존재가 있기 때문이었다. 프랑스 시민혁명을 부르주아 혁명이라 일컫는 사람들이 있다. 부를 축적한 부르주아가 사회 주도층이 되기 위해 프롤레타리아를 선동하는 것으로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한 반박이 있다. 프롤레타리아는 사상가 장 자크 루소의 영향을 받아 자신의 의지로 혁명에 가담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질문이 하나 있다. 그 장 자크 루소의 사상을 전파할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한 것은 누구겠는가? 현대와 같이 인터넷도 있는 상황이 아니니 쉽게 정보 전달이 되는 것도 아니다. 자유와 평등의 가치를 시민들이 배우게 된 그 배경에는 부르주아의 지원이 있었다고 본다. 물론 그들의 이익을 위해서였겠지만. 만약 부르주아가 왕족과 귀족과 사이가 좋았더라면 시민혁명이 일어나기 어려웠으리라 생각한다. 한국도 마찬가지다. 3.15 혁명은 학생운동으로 시작했다. 그렇다면 그 학생들에게 민주주의의 가치를 알려준 사람들은 누구였겠는가? 이승만은 반공 반일 친미(미국을 경계했으나 기본적으로)로 외교적이나 이념적 문제가 발생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그는 정적을 공산주의자로 몰아 공격하며 독립운동가와 지식인들의 반발을 사게 되었다. 정치권력을 위해 친일파를 비호하는 일도 서슴지 않았다. 한국정부 단독수립이라는 같은 뜻은 지녔던 이들(윤보선)마저 등을 돌릴 정도였다. 사소한 것 하나하나 자신이 결정해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에다가 그의 측근(윤치영) 또한 나폴레옹과도 같은 독재적 지도자가 되길 권했던 것을 보면 권력을 위한 부정선거는 필연이었을지도 모른다. 이런 상황에서 부정선거가 발각되자 학생들이 앞장서는 시민혁명이 발발했다. 그 학생들의 배경에는 분명 이승만을 반대하는 독립운동가와 지식인들의 가르침이 있었을 거라 본다. 만약 이승만과 다른 독립운동가와 지식인들과 사이가 좋았더라면 시민혁명이 일어나기 어려웠을지도 모른다. 부정선거가 되었다는 사실 자체가 전파되지 않았을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그랬다면 다른 유교문화국가와 마찬가지로 오랫동안 독재를 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건 이후 박정희의 등장으로 현실이 되었다. 당시 한국식 민주주의라는 표현으로 3선 개헌을 정당화하며 유신독재를 시작했다. 한국 또한 유교국가의 때를 벗지 못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그렇게 쉽게 독재를 받아드릴 수 있었던 것이다. 민족개조론을 주장했던 안창호나 가족주의를 경멸하며 대를 잇는 걸 거부했던 서재필 같은 경우를 보면 이미 당시에도 유교문화의 한계를 깨닫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싶다. 한국과 북한은 같은 민족이다. 한국과 다른 유교문화 국가들은 같은 유교영향권 아래에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한국에서 유독 민주주의가 발달했던 것은 오로지 적의 존재 말고는 없다. 만약 중국과 일본과 북한도 적의 존재가 있어 그 적이 민주주의 혁명을 외치며 일어날 수 있었다면 유교문화의 영향을 적게 받으면서 제대로 된 민주주의가 활성화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원래 자유당과 민주당은 독립운동가와 친일파가 혼재되어 구성되었다고 한다. 이승만도 윤보선도 반일주의자였으니까 말이다. 그러다 이후 박정희의 한일기본조약 체결부터 친일 여당과 반일 야당이 갈라져 투쟁한 것으로 보인다. 한국은 투쟁의 역사를 통해 민주주의가 발전했고 그 투쟁은 적이 존재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적이 없었다면, 대다수의 국민들이 복종하는 지배자가 있었다면 한국의 민주주의는 유교로 인해 발전할 수 없었을 것이다. 뭐 지금도 독재자와 그 딸에 복종하는 사람이나 대통령을 이름으로 불렀다고 화를 내는 사람들이 있으니 아직 완전한 민주주의라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적의 존재로 인해 같은 유교문화권인 중국이나 일본보다는 민주적으로 되었다는 것이다. 정치적으로 평등해졌기 때문에 한국은 중국과 일본보다 더 심한 과열경쟁이 생기게 되었다. 중국과 일본은 공산당과 지역구세습으로 정치가 신분제화가 되고 있지만 한국은 아니니까 더 올라 갈려고 기를 쓰게 된 것이다. 중국이나 일본이 보다 민주적으로 변하기 위해서는 기존 질서와 맞서 싸울 민주적인 악당들이 등장하거나 유교문화를 버려야 할 것이다. 적은 윗사람이 아니니까 말이다. 넷째인 문화도 유교의 영향을 받았다. 남녀유별이라면서 어려서부터 이성교제를 하는 걸 부도덕하게 여기는 탓에 유사연애산업이 발전하기 시작했다. 한국은 주로 3차원 이성(아이돌)에 빠져 유사연애를 즐기고 일본은 주로 2차원 이성(창작물)에 빠져 유사연애를 즐기고 중국은 둘 다 즐기고 있다. 유사연애를 즐기는 거야 전세계가 다 하는 거지만 유독 유교문화권만 심하다. 문화는 문화를 즐기는 이들이 많을수록 성장한다. 유사연애산업이 성장한 것은 유사연애를 즐기는 사람이 그만큼 많다는 걸 의미한다. 흔히 한국노래에서 사랑이 빠지질 않고 한국 드라마 영화는 어떤 장르든 사랑으로 빠지게 되어있다는 얘기가 있다. 그것은 연애가 산업으로 이어질 만큼 연애물을 즐기는 이들이 많다는 걸 의미한다. 현실에서 충족되지 못한 사랑에 대한 욕구가 가상으로 이어진 것이다. 일반적인 국가에서는 어려서부터 주위 이성을 사랑하며 살아가니 노래도 드라마도 사랑으로부터 보다 자유로울 수 있었다고 본다. 사랑하는 상대가 주변에 있으니 굳이 문화에서 사랑을 강조하지 않아도 되니까 말이다. 요즘 유명한 BTS의 결과는 다음과 같은 과정을 거쳤다고 본다. 남녀유별로 유사연애산업이 발전했다. 적의 존재로 민주주의가 발전해 성차별이 줄어들어 여성의 입맛에 맞는 아이돌이 등장했다. 상명하복으로 인한 과열경쟁이 우수한 아이돌을 배출했다. 그 결과 기본적으로 남성사회가 많은 전세계 여성들은 자신의 입맛에 맞는 수준 높은 한국 아이돌을 좋아하게 되었다. 이성을 사랑해야 결혼하는 사람이 늘고 결혼하는 사람이 늘어야 출산율도 증가한다. 유사연애산업의 발전은 저출산과 맞바꾼 결과일지도 모른다. 다섯째인 적폐는 지금까지 말한 것들로 인해 발생한 것이다. 꼰대질, 갑질, 비리, 부정, 차별, 저출산, 허례허식 등. 유교문화와 자유롭고 평등한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의 충돌이 만든 폐해들이다. 오래된 유교문화의 폐단이 한국을 불행으로 이끌었다. 많은 사람들은 인간을 적폐로 인식하는데 그건 오래된 폐단이 만든 결과물에 불과하다. 환경이 인간을 만드는 거다. 개개인들은 다를 수 있으니까 오차가 있다는 걸 인정한다. 하지만 집단으로 가면 환경의 영향력이 엄청나게 커진다. 특정 개인이 적폐가 되는 건 그 개인의 유전적 특성일 수 있지만 집단 내에서 적폐가 발생하는 것은 환경이 원인일 확률이 높다는 것이다. 생계형 비리가 무슨 말이겠는가? 생계를 위해 비리를 저지르던 것이 일상화되어 있었다는 걸 의미한다. 급여가 적었던 시절 생계를 위해 일상적으로 저지르던 사소한 비리에 익숙해지다 보니 죄의식 없이 비리를 저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환경에 의한 관습적인 잘못은 개개인의 특성과 관계가 없다. 모두가 잘못을 저지르니 잘못인 것처럼 느껴지지 않고, 그러다 보니 선을 추구하던 사람도 아무렇지도 않게 잘못을 저지르게 되어있다. 우리 사회에 존재하는 대부분의 적폐는 다들 이런 과정을 거쳤다. 그냥 그래왔으니까 그랬던 거다. 예컨대 이런 것이다. 그 동안 화재를 몰고 오던 부도덕한 입시과정이나 불투명한 기부단체는 개개인의 특성보다는 악습이 만든 잘못이다. 다들 그렇게 하니까 그랬던 것뿐이다. 누군가의 잘못을 지적하거나 누군가를 옹호하고자 하는 게 아니다. 우리사회, 아니 인간의 잘못은 대부분 관습에 근거한다고 주장하는 것뿐이다. 관습, 관행, 우리가 익숙해서 잘못된 것을 느끼지 못했던 그 모든 것들이 적폐를 만들어 사회를 불행하게 만드는데 일조했다. 진정 적폐를 몰아내고자 한다면 사람보다는 그런 사람을 만드는 환경을 바꿀 필요가 있음을 강조하겠다. 차별금지법에 찬성하는 사람조차 연하가 연상에게 반말하는 걸 불편해할 것이다. 우리는 얼마나 관습에 취약한가? 어떤 올바른 일을 행하고자 하면 자신이 가지고 있는 고정관념을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이외에도 다양한 영향을 끼쳤지만 여기까지만 하겠다. 이렇게 지배국가의 차별하는 문화와 자유국가의 자유롭고 평등한 이념의 충돌은 이와 같은 빠른 발전과 깊은 불행을 안겨주었다고 본다. 여기서 하나의 질문이 있을 수 있다. 이 상황이 장단점이 있는 거라면 발전을 위해 불행을 감수할 수 있는 게 아니냐고 말이다. 하지만 상명하복의 질서가 만드는 발전에는 한계가 있다. 윗사람이 시켜서 하는 일에는 창의력이 발휘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가발을 수출하고 파병이나 파견을 보내어 발전하는 건 분명 상명하복의 질서에서 보다 빠르게 가능하다. 하지만 창작물을 만들고 새로운 아이디어를 내고 고부가가치를 만드는 산업에서 상명하복은 오히려 발전을 저해한다. 윗사람의 창작물이나 아이디어만 인정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보겠다. 어떤 창작물을 만드는데 시시하고 재미없는 결과가 나오는 건 전문가도 아닌 사람들이 위에 있다는 이유 하나로 간섭하고 바꾸기 때문이라고 한다. 광고를 만들어도 광고주가 간섭해서 재미없게 나오고, 게임을 만들어도 투자자가 간섭해서 재미없게 나온다. 비전문가들이 위에 있다는 이유 하나로 자신의 의견을 밀어붙인 결과가 바로 재미없는 창작물이라는 것이다. 발전도 막는데 불행하기까지 한다면 더 이상 유교문화를 방치할 까닭은 어디에도 없다. 사회적 불행은 서로를 미워하게 되는 촉매재가 되었고, 그 미움은 사회적 애정결핍이 되어 희생을 꺼려하게 되었다. 애정결핍이 일어나자 문화로 애정을 충족하게 되는 기현상이 발생하여 모든 문화에 사랑이 섞이게 되었다. 사랑에 대한 애절한 갈구는 사랑이 결핍되어있음을 반증한다. 유교문화가 낳은 애정결핍으로 인한 희생기피현상을 해결하려면 무엇이 우선되어야 하겠는가? 당연히 사랑이다. 취미나 물건이나 우상에 쏟는 애정을 사람에게 쏟을 수 있는 환경조성이 가능해져야 자발적인 희생이 나타나 공동체를 지탱할 것이다. 그게 안되면 인구소멸로 우리는 자연스럽게 사라지게 될 것이다.

 

 

 

도덕, 무엇이 옳고 그른가? 가치관, 무엇이 가치 있는가? 희생의 이유, 무엇을 위해 희생을 해야 하는가? 지배국가에서 벗어난 자유국가에서 해결할 우선과제라고 생각한다. 지금까지 그런 고찰이 얼마나 있었는가? 우리가 생각하는 옳고 그름이 과연 자유국가의 것이라고 할 수 있었는가? 한국의 초대 대통령인 이승만부터가 그런 모순을 안고 있었던 사람이었다. 미국에서 배워온 자유와 민주의 가치를 설파하던 사람이 유교의 영향을 받아 모든 것을 자기 영향권 아래에 놓아 사사건건 간섭하여 지배적인 영역을 구축했다. 자유를 강조하던 장면은 총리가 되고서도 어머니에게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비는 등 전형적인 유교적 복종이 몸에 밴 인물이었다고 한다. 이미 새겨진 도덕은 스스로 인지하고 있지 않는 이상 바꿀 수가 없는 그 사람 특유의 행동원리라는 형태로 자리잡고 있다. 다들 안다. 꼰대질이 나쁘다는 걸. 그런데 연하가 자신과 맞먹으려고 하는 걸 보면 속상하고 답답해진다. ? 이미 도덕이 새겨졌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에게 새겨진 지배국가의 도덕을 지우고 자유국가의 도덕을 스스로 갖춰 나가야 할 때가 왔다고 말하고 싶다. 모든 어른을 공경해야 하는가? 아니다. 제 역할을 다하는 어른을 공경해야 한다. 잘못을 저지른 어른도 공경하라고 말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모든 걸 윗사람 의견으로 결정해야 하는가? 아니다. 사람 사이에서 위아래가 존재하지 않다. 단지 역할이 다를 뿐이다. 연령성별 상관없이 모두가 능력에 맞는 역할을 맡고 그 역할의 수행여부로 존중을 결정하고 기여도의 차이로 대우를 달리해주면 된다. 네 주인은 누구냐며 경비원을 폭행했던 사실이 뉴스에 나온 적이 있었다. 나는 담담하게 충격을 받았다. 알면서도 놀랄 수밖에 없었다. 한국은 아직도 지배국가의 도덕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그런 사람이 실존한다는 것을 알게 되니 굉장히 우울해졌다. 대놓고 그렇지 않더라도 사회 곳곳에서 그런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아이들을 위해서라면서 아이들을 통제하는 사람들이 많다. 언제까지 자기 손 안에서 키우려고 할 것인가? 이미 정보의 통제는 불가능하다는 걸 모르는 건가? 아이들이 즐기는 문화의 검열 좀 적당히 했으면 좋겠다. 사춘기 아이에게 포르노를 가르치지 않는 것은 구시대의 도덕이 만든 잘못된 관념에 불과하다. 식욕이 있는 아이에게 식사방법을 알려주고 수면욕이 있는 아이에게 자는 방법을 알려주는 것은 당연한데 어째서 성욕이 있는 아이에게 성욕을 해소할 방법을 알려주지 않는 건가? 이치에 맞지 않는 것은 대체로 과거의 도덕으로 형성된 관습이 큰 영향을 끼친다고 볼 수 있다. 식사예절이라. 어른이 수저를 들어야 밥을 먹게 하는 것 자체도 참 우습기 짝이 없다. 조상의 묘를 돌보는 벌초도 의미 없는 행위라는 걸 이제는 알았으면 좋겠다. 그건 그냥 조상을 신으로 모시던 유교국가의 도덕이 만든 잔재일 뿐이다. 유교는 신이 없는 게 아니다. 조상을 신으로 모시던 종교다. 우리 사회 곳곳에서 불합리함을 형성하던 수많은 도덕들에 대해 다시 한번 점검해볼 필요가 있음을 강조하고 싶다. 모든 걸 제거하자는 건 아니다. 예컨대 반말과 존댓말은 연령차별이다. 연상은 연하에게 반말하고 연하는 연상에게 존댓말을 한다. 그 때문에 초면에 반말을 들으면 연하취급 받는 것 같아 불쾌해하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이건 다른 용도로 사용할 수 있다. 친하면 연령차이 관계없이 반말을 하고 친하지 않으면 존댓말을 하면 된다. 친분으로 반말과 존댓말을 구분 짓는다면 자유국가에 맞는 언어사용이 가능해질 것이다. 가치관도 지배국가에 물려받은 것 같은 걸 가지고 있다. 연령, 학력, 지위, 재산이 높은 것을 가치 있게 여긴다. 높으면 가치가 있고 낮으면 가치가 없다. 실제 용도와 관계없이 그런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다. 모닥불을 피울 때엔 불에 안 타는 지폐보다 잘 타는 나뭇가지가 더 쓸모 있다. 어떤 용도나 역할로 가치를 판단하는 것이 자유국가에 맞는 가치관이라 생각한다. 나는 이런 역할로 가치를 판단하는 역할주의가 유교의 도덕과 가치관을 대신할 수 있다고 주장하겠다. 역할로 가치를 판단하기에 평등하고, 역할을 수행하기만 하면 그 외엔 자유가 보장되기 때문에 자유롭다. 이런 식으로 도덕과 가치관을 자유국가에 맞게끔 재정립하고 서로를 사랑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어야 자유국가에 맞는 나를 위한 희생이 공동체에 이익을 가져와 결과적으로 공동체를 위한 희생이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나를 위한 희생. 자유국가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은 자유롭게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면 된다. 마음껏 이기적으로 살아라. 그 이기적인 욕심이 공동체에 이익을 가져오면 된다. 마음껏 이기적인 주장을 펼쳐라. 공동체가 그 주장을 판단해서 공동체에 이익이 되는 걸 수용하면 된다. 우리가 자유를 경계하고 부정하는 것은 그것이 미숙한 자유였기 때문이다. 아무 책임도 지지 않고 하고 싶은 대로 다 했던 그 어린아이와도 같은 자유는 노동자를 착취하고 제국주의가 되어 침략을 하고 전쟁을 발발하게 했다. 그런 미숙한 자유 때문에 또 다른 미숙한 자유인 사회민주주의나 자유를 빼앗는 지배인 공산주의가 유행하게 된 것이다. 성숙한 자유라는 건 해야 할 일을 자신의 자유의지로 결정한다는 걸 의미한다. , 공동체를 위해서는 부를 분배해 빈부격차를 줄여야 하는구나. 알아서 분배하면 사회주의는 필요가 없다. , 공동체를 위해서는 어떤 주장을 펼칠 때 그에 대한 책임과 희생이 필요 하는구나. 알아서 책임지고 희생하면 분쟁은 거의 없다. 전염성이 강한 바이러스의 유행으로 마스크를 착용하는 것은 시켜서 하는 건가? 아니면 자유의지를 가지고 그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여 자발적으로 하는 건가? 전자라면 사회주의에 어울리는 사람이고 후자라면 자유주의에 어울리는 사람이다. 모두가 다 하는데 제멋대로 굴겠다며 하지 않는 사람은 자유방임주의가 어울리는 사람이다. 자유주의 공동체를 위해 어떤 사람이 필요하겠는가? 지금도 그렇지만 앞으로는 더더욱 자발적인 희생이 없이 공동체는 유지될 수 없을 전망이다.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일자리를 위해 인공지능과 로봇을 거부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스포츠 심판이 인공지능으로 대체된다는 소식이 있었다. 그걸 반대하면 스포츠의 발전이 있을 수 있겠는가? 법조계, 의료계, 언론계 전부 인공지능이 도입될 수 있는 분야다. 그들이 그걸 무조건 거부하면 발전할 수 있겠는가? 다 수용해서 발전했다고 가정해보자. 그런 상황이면 인공지능과 로봇을 만드는 기업과 재벌들이 얻은 수익을 공동체를 위해 희생을 해야 한다. 그걸 안 하겠다고 하면 공동체는 유지될 수가 없다. 우리는 기술발전을 거부하고 정체되는 것과 기술발전을 받아드리고 희생하는 것,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공동체가 유지될 수 있다는 걸 이제는 알아야 한다. 시대 변화를 받아드려야 한다. 미래로 가자.

 

무엇을 위해 희생을 해야 하는가? 그 답이 자신을 위해서라면 희생의 이유는 각자 다 다를 것이다. 자신이 하고 싶은 게 다 다르니까. 그렇다면 스스로 물어봐야 한다. 나는 무엇을 위해 희생을 해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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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족하네요. 좀 더 공부해서 더 정리해야겠습니다.

분명한 것은 도덕, 가치관, 희생의 이유를 자유국가에 맞게 정립해야 한다는 겁니다. 기초가 튼튼해야 곧고 바르게 성장이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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