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국가의 소년범죄
시대가 변했다. 하지만 도덕은 변하지 않았다. 자유국가임에도 어째서 도덕은 자유롭지 못했는가? 사회에 적응하여 철이 들었다는 말은 인간에게 복종하는
법을 배웠다는 의미와 같다. 어른 말을 잘 듣는 아이. 선배 말을 잘 듣는 후배. 상사 말을 잘 듣는 사원. 착하다고 한다. 사회에 적응하여 철이 들었다고 한다. 이는 인간을 지배하기 위해 인간에게 복종하는 걸 올바른 도리로 만든 탓에 생긴 역겨운 현상이다. 짓지 않는 개를 가리켜 착한 개라고 하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음에도 잘못되었음을 자각하지 못한다. 인간들을 개돼지 취급하면서도 그 취급을 받아드리지 못하면 되려 네가 잘못된 것이라며 타박해왔다. 정말 웃기는 일이다. 어떤 사람은 이런 현상을 그저 문화의 특성으로 치부할지도
모른다. 이런 연령차별이 연하에게 복종을 바라는 꼰대를 만들고
그렇게 학습된 차별로 갑질을 행하게 만듦에도 말이다. 다른 국가에도 갑질이 있지 않냐고 물어볼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그건 당연한 거다. 대부분 국가는 지배국가였다. 그러니까 그런 잔재가 남아있는 거다. 한국은 그런 잔재가 유교였을 뿐이다. 그런 유교가 원인이 된 꼰대질과 갑질이 얼마나 많은 불행을 불러왔던가? 꼰대질과 갑질로 싸우고 증오하고 혐오하고 살해하고
자살한다. 의식적으로 뉴스를 시청하길 권해보겠다. 정말 많은 불행을 부르고 있다. 그것들로 불행했던 이들은 그들의 책임이 아닐 것이다. 피해자에게 책임을 전가할 수는 없다. 그렇다고 해서 불행하게 만든 이들의 책임조차 아니다. 그들은 그저 배운 대로 행동했을 뿐이다. 유교에는 장유유서라는 나이로 차별하는 질서를 올바른
도리로 만든 가르침이 있다. 이 가르침에 따라 한국인들은 한 살만 차이 나도 존대말과 반말이라는 언어의 차이가 발생할 정도로 차별하게 했다. 「연하는 연상에게 복종하라. 그것이 올바른 도리다.」 보아라. 가르침대로 행동한 것이 꼰대질이다. 꼰대가 정확히 모르는 사람들이 많아서 한번 정의해본다. 꼰대는 인간을 도덕을 명분으로 지배하려는 인간이다. 생각해보자. 이래라 저래라 하면서 명령하는 것이 꼰대 아니던가? 「나 때는 이랬으니까 너도 이래야 해. 내가 시키는 대로만 해. 내 말을 따라. 내 말에 복종해.」 간단하지 않나? 지배하려는 인간은 지배자고 도덕을 명분으로 연하를
지배하려는 자는 꼰대다. 꼰대질이나 갑질로 불행을 겪게 되면 이런 식으로 생각하게 될 것이다. 「그들이 그런 행동을 했던 것은 나쁜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나는 착하게 행동해야겠다.」 그리고 나서 의식적으로 보다 더 도덕적으로 행동하려
한다. 그런데 꼰대를 만든 것이 도덕이었다. 그러면 어떻게 되겠는가? 착하게 행동하기 위해 도덕의 가르침인 장유유서를
지키며 연하에게 복종을 요구하게 될 것이다. 나쁜 꼰대가 싫어서 착하게 행동하려 한 결과가 바로 이거다. 그리고 연하에게 꼰대질을 해서 이제는 자신이 불행을 전파한다. 본인인 그게 잘못된 것인지도 모르고 똑같이 행동해버린다. 불행이 불행을 낳는다. 올바른 일을 행함의 결과가 불행이라면 도대체 누굴
탓해야 하겠는가? 한국사회의 많은 불행은 여기에서 왔다. 한국은 애정이 결핍된 나라다. 남녀유별이나 남녀칠세부동석 같은 걸로 미성년일 때
이성교제가 부도덕하다 배운다. 그런 탓에 커서도 이성을 사랑하는 사람이 줄어들었다. 여성을 섹스파트너로만 여기고 남성을 ATM기기로만 여기는 사람이 늘어났다. 어떤 사람은 연애보다 성매매가 효율적이라고까지 하더라. 이성을 성욕 해소 도구로만 생각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사랑을 배우지 못해서 그런 거다. 심각성을 느껴야 한다. 이성애가 결핍되자 이성의 권리에 화를 내고 자신의
손해에 발작하며 거부한다. 결혼과 출산과 육아는 인간의 희생을 필연적으로 필요로 한다. 왜 출산율이 낮을까? 이성애가 결핍되어있으니까 그런 걸로 희생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애국심이 결핍되면 국가를 위해 희생하는 걸 거부하고
싶어지는 것처럼 말이다. 왜 여학생들은 남성끼리 동성 연애하는 작품들을 즐기게 되었을까? 단순 취향으로 치부하기엔 즐기는 사람들이 생각이상으로 많다. 남성끼리 성관계를 맺는 것까지 즐긴다. 모 예능프로그램에서는 어떤 사람이 출연자들을 소재로
동성애 작품을 만들고 그걸 출연자들에게 보여주어 논란이 일어난 적이 있다. 여기서 재미있는 점은 동성애 작품을 만든 사람이 그 행위를 긍정적으로 생각했다는 점이다. 도덕적으로 결함이 없다고 인식하기 때문에 그런 무례한
짓을 저지르면서도 잘못되었음을 모르고 있었다. 이성애가 부도덕하다고 교육받으니까 그런 거다. 여학생들이 본능적으로 남성에게 관심이 많다. 그런데 도덕으로는 나쁘다고 한다. 그 두 가지 사이에서 타협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도덕적으로 행동하려는 착한 여학생들은 남성의 동성애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최근까지도 학교에서 이성교제를 하면 처벌받았다고
하지. 이성애가 잘못되었다고 교육받는 것. 얼마나 가엾은 일일까? 여성의 정조를 명분으로 미성년자의 성관계가 부도덕하게
되었다. 성관계가 부도덕하다고 배우니까 성욕이 많은 이성을
혐오하는 사람이 늘어났다. 성욕이란 자연스러운 본능이 부도덕하다고 느껴지니 성욕을 해소하려는 행동 자체도 역겨워진 것이다. 왜 성 상품화에 예민할까? 생각해보자. 부도덕한 쾌락을 얻기 위해 상품을 구매하는 것.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바로 마약이다. 성욕이란 부도덕한 쾌락을 위해 상품을 구매하는 남성들을
보고 어떤 기분이 들었을 것 같나? 정말 슬프다. 왜 성별이 평등해지고 있음에도 남성혐오가 사라지지 않는지 알겠는가? 성관계가 부도덕하다고 교육받는 한 남성들이 전부 거세당하지 않는 이상 남성혐오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성욕이 부도덕하다는 게 얼마나 심각한 문제인지 인지하길
바란다. 한국은 여성주의로 남성혐오가 생긴 게 아니다. 애초에 도덕으로 성욕이 많은 남성을 혐오하는 사람들이
많았던 것이다. 남성이 여성의 몸을 쳐다보면 화를 낸다. 매력을 느껴 본능적으로 쳐다보는 것도 잘못되었다고
한다. 지금도 학교에서 성교육을 한다고 하면 학부모가 항의를
한다고 한다. 한국은 성인들도 포르노로 성교육을 받아 제대로 된
성교육을 받지 못해 성 지식이 부족하다는 얘기가 있다. 정말 웃기는 얘기다. 왜 그렇겠는가? 성욕이 부도덕하니까 그런 거다. 「세상에 학교에서 부도덕을 가르치다니요!」 성교육에 대한 항의는 그들에게 도덕적으로 당연히 해야 할 일이었을 뿐이다. 이런 현상을 여성주의는 더욱 심화시켰을 뿐이다. 예전에 어떤 여학생이 고민상담을 부탁하며 올린 글을
읽은 적이 있다. 학교에서 걸레라고 불려 화가나 그렇게 부른 상대와
싸우다가 강제전학조치를 당해 많은 부분 자유를 억압받아서 고민이라고 하더라. 걸레라. 왜 여성이 성의 자유를 누리는 걸 모욕으로 취급하는가? 그건 여성을 도구 취급했던 지배국가의 도덕 말고는 이유가 없다. 남성은 그러지 않으니까 말이다. 만약 걸레라고 부르는 부자유스러운 인간이 있다면
유교인이라고 반격하길 권하겠다. 여성들은 여성주의에 휘둘리지 말고 자유주의적으로 생각하길 바란다. 무엇이 더 자유로운가? 사랑하는 사람과 자유롭게 성관계를 맺는 것이 자유로운가? 아니면 억압을 받는 것이 자유로운가? 마음대로 꾸밀 수 있는 게 자유로운가? 아니면 꾸미면 잘못되었다며 공격받는 게 자유로운가? 무엇이 진정 여성인권인지 생각해줬으면 좋겠다. 한국은 지금 유교에 여성주의가 결합되어 성을 억압하는
게 여성인권이 되어버렸다. 그것은 자유롭지 못한 일이다. 나는 여성계가 사랑을 주장하는 걸 본 적이 없다. 아무리 기억을 뒤져봐도 남성을 사랑하자고 주장하는 사람이 없다. 그들에겐 사랑이 없었다. 사랑은 커녕 증오나 혐오를 퍼트린다. 일방적인 여성특혜나 성 문화 검열이라는 성욕이 많은 남성박해로 서로를 증오하고 혐오하게
만들었다. 이런 사람들이 교사와 여학생들에게 영향을 끼치고
있는데 정상적인 이성애가 자리잡을 수 있겠는가? 중동국가보다 더한 성 억압을 강요하며 자연스러운 욕구를 가진 이들을 나쁘다고 공격했을 뿐이다. 한국의 출산율에 그들의 증오와 혐오가 얼마나 큰 영향을 끼쳤을까? 한국의 불행에 얼마나 큰 영향을 끼쳤을까? 정말 무시무시한 일이다. 좋다. 그들도 이기적인 주장을 할 수도 있다. 그런데 그들은 그걸 모든 인간이 따라야 할 정의마냥 내세웠던 점이 잘못되었다. 그 때문에 이타적인 착한 사람들이 휘둘려서 잘못된
정책을 추진했던 것이다. 이래서 이타주의는 자유국가에서 쓸모가 없다. 모든 주장은 이기적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래야 교만해지지 않을 수 있다. 사랑이 줄고 혐오가 는다. 결혼이 줄고 출산도 준다. 이성애가 결핍되었다. 이성을 향해야 할 애정이 문화로 가자 급속도로 성장했다. 왜 한국문화는 노래 자체를 즐기기는 것보다 우상에게 애정을 품는 아이돌문화가 유명할까? 많은 사람들이 한국에도 다양한 장르의 가수가 필요하다고
한다. 그럼에도 왜 아이돌만 성장했는가? 그들의 성장에는 이성애가 결핍된 사람들의 애정이
있었기 때문이다. 왜 한국문화에는 음악이나 드라마나 영화를 가리지
않고 사랑이 빠지지 않는 걸까? 어떤 창작물도 끝내는 사랑으로 흘러가서 지겹다는 사람이 있을 정도였다. 그럼에도 왜 사랑이 빠지지 않았는가? 문화로 애정결핍을 해소하려는 움직임이 있었기 때문이다. 문화의 성장은 그 문화를 즐기는 사람에 영향을 받는
거다. 이런 성장은 그 원인이 반드시 긍정적일 거란 보장은
없다. 게임문화 성장 또한 애정결핍이 큰 영향을 끼쳤다. 가족애나 이성애가 많은 곳에서는 게임보다 실외놀이를
더 즐겁게 즐길 것이다. 그런데 한국은 어떠했는가? 이성애는 애초에 부도덕하다 배우고 성장한다. 가족애는 부모의 꼰대질에 질린 아이들이 어느 순간부터 가족끼리 놀러 가는 걸 거부하게 된다. 꼰대질을 하지 않는 가정이야 사이가 좋겠지만 대부분 그러지 않다. 한국이 그렇게 행복한 국가였으면 출산율과 자살률이
이렇지 않다. 보편적으로 불행하니까 그런 거다. 가족애가 결핍되어 버렸다. 더구나 실외에 놀 거리도 적다. 애정결핍에 놀 거리도 없는 한국의 학생들은 자연스럽게
게임에 몰두하게 되었다. 어떤 국가는 게임을 하는 것 자체로 너드 취급 받는다고 한다. 한국이 그러지 않는 것은 대다수 학생들이 게임을 즐길 수밖에 없었던 환경이었기 때문이다. 게임플레이강국의 이면에는 그런 슬픔이 자리잡고 있다. 이렇듯 한국문화는 애정결핍이 만든 결과물이다. 참 복잡한 심경이다. 사회에 뿌리내린 근본을 알게 되면 거기서부터 다양한
현상이 해석된다. 뿌리부터 자라난 나무의 곁가지를 쳐낸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게 아니다. 뿌리부터 바꿔야 해결된다. 카스트로 불행을 겪은 사람은 카스트의 책임인 것처럼 도덕으로 불행을 겪은 사람은 도덕의 책임이다. 도덕을 바꾸지 않음 도덕으로 발생한 문제들을 해결해봐야
별다른 의미는 없다. 계속 반복될 뿐이다. 나는 내가 이상한 아이인지 알았다. 나는 세뱃돈을 받는 걸 싫어하는 이상한 아이였다. 친척 어른에게 무릎 꿇고 절하는 것도 싫고 그걸로 돈을 받는 것도 싫었다. 내 의지와 감정이 헐값에 팔리는 기분이었다. 그래서 세뱃돈을 받고 나면 부모에게 세뱃돈을 건네주고 모른 척을 했던 기억이 난다. 단순하게 돈을 받고 기뻐하는 어린이였다면 불쾌하지
않았을 텐데. 그래도 최대한 이해 보려고 노력했다. 나중에는 절을 하고 돈을 받는 것이 그들에게 기쁨을
줄 수 있다며 자기합리화를 했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내가 이상한 게 아니었다. 이상한 건 연하에게 복종을 요구하는 한국의 도덕이었다. 죽은 자는 산 자에게 복종을 요구하며 제사를 지내라 하고 산 자는 연하에게 복종을 요구하며 명령을
따를 것을 강요한다. 정말 숨막힐 정도로 답답하다. 이제 내겐 어른과 조상에게 절하는 한국 국민과 태국 왕족에게 절하는 태국 국민과 별반 차이를 느끼지 못하겠다. 어떤 정신 나간 태국 왕족은 한국에 와서 한국인에게도
절을 받았다고 한다. 정말 역겹다. 지금 생각해보면 어른들은 가급적 아이들을 위하려고 노력은 한 것 같다. 그러면 뭐하나. 그 노력의 근간이 지배국가의 도덕이었는데. 친구의 어린 동생과 친구처럼 지낸 적이 있다. 초등학생 때였을 것이다. 그때엔 한두 살 차이도 큰 시기다. 그런데 한참 어린 동생이랑 친구처럼 지냈었다. 그걸 보고 어떤 어른이 불같이 화를 내며 혼을 냈다. 아마 연하와 대등하게 지내는 내가 못마땅했던 모양이다. 도대체 왜 그랬는지는 정확히 모른다. 그 이후 나는 그 친구와 멀어졌다. 당분간 연하와도 어떻게 지내야 하는지 몰랐던 시기가
있었다. 대중가수의 춤과 노래를 TV를 통해 즐긴 적이 있다. 그걸 보고 TV채널을 바꾸고는 화를 내며 혼을 냈다. 아마 그런 문화를 즐기는 내가 못마땅했던 모양이다. 그 이후 도덕에 지배당하고 있다는 내적 결함을 알아차릴
때까지 제대로 즐길 수가 없었다. 밖에서 놀다가 늦게 집에 들어가니 다 식은 음식이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그걸 강제로 먹었다. 왜 늦게 왔냐며 혼이 나고서는 다 불어터진 걸 억지로 먹으며 눈물 흘렸던 기억이 난다. 평소 요리를 하지 않던 사람이 모처럼 준비한 음식이
식을 때까지 늦게 들어온 것이 못마땅했던 모양이다. 나는 김치가 싫었다. 그 신맛이 무척 불쾌했다. 볶음김치는 먹을 만했는데 생김치는 도저히 먹을 수가 없었다. 그런 아이는 한국에서 이상한 아이였다. 김치를 먹게 해야만 했다. 그게 정상이었다. 그런 비정상을 고치기 위해 어떤 어른이 다른 어른에게 김치를 먹을 수 있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나는 초등학교에서 아이들이 다 보는 데서 강제로
김치를 입 안에 쑤셔 넣어지게 되었다. 나는 그걸 받아드릴 수 없었다. 맛이 없는 것도 없는 것이었지만 강제로 그걸 당한 다는 것이 굉장히 수치스러웠다. 나는 그걸 내뱉고 아이들에게마저 이상한 아이로 낙인을 찍히게 되었다. 한국의 자랑식품인 김치를 먹지 않는 게 그렇게나
못마땅했던 걸까? 내가 먹는 음식은 편식하면서 자신들이 먹는 음식은
편식하면 화를 낸다. 유치원생일 때 미형이 아닌 이성과 사이 좋게 지내는 걸 보고 답답했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기억에는 없지만 아마 그때 나는 외모와 관계없이
사람을 대했던 것 같다. 지금 보면 그건 교정된 듯하다. 이외에 자잘한 것 하나하나 어른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강제로 교정을 당했다. 이 세상 모든 것이 내가 이상하고 사회가 올바른 것이라며 꾸짖었다. 어떤 것은 아무리 봐도 내가 아니라 네가 이상한
것 같은데 내가 이상하다고 한다. 내가 이상하지 않다고 말해줄 사람은 없었다. 내 주변에 자유주의자는 없었다. 「어른에게 절하기 싫어하는 내가 나쁜 거야? 연하와 친구 먹는 내가 나쁜 거야? 대중문화를 즐기는 내가 나쁜 거야? 멋대로 준비한 배려를 받지 못한 내가 나쁜 거야? 김치를 먹지 않는 내가 나쁜 거야? 미형이 아닌 이성과 친하게 지내는 게 나쁜 거였어? 나는 나쁜 아이구나?」결국 어린 학생이 스스로를 별볼일 없는 인간이라고 말할 정도로 자신감을 상실해버렸다. 나쁜 자신을 할퀴고 상처를 입혔다. 그 흉터는 아직도 남아있다. 이런 것은 도대체 누구 책임이라 할 수 있는가? 어른들이 과연 악한 의도로 행한 것 같은가? 선한 의도로 행한 것이다. 착한 아이로 만들기 위해 자신이 배운 대로 가르쳤다. 어떻게 그게 그들의 책임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가르침대로 교정되려다 망가진 아이의 잘못인가? 아마 대다수의 아이들은 사회가 뭔가 이상하다고 느꼈을
것이다. 그게 바로 사춘기다. 어린 시절부터 시키는 대로만 하면서 살다가 사춘기쯤
되면 뭔가 이상하다고 느낀다. 「왜 인간을 지배하려고 하지? 내가 왜 복종을 해야 하는 거지?」 뭔가 이상함을 느끼고 자유를 위해 반항을 하는데 정확히 어떤 뭐 때문에 그런 건지를 모른다. 마냥 어른이 잘못되었다고만 한다. 그러다 보니까 반항기로 끝나버리고 마는 것이다. 반항하다가 자유롭지 못한 원인조차 찾지 못하자 결국은
도덕의 지배에 복종하는 결말을 맞이하는 것이 대다수 사춘기의 끝이다. 얌전해졌다. 착해졌다. 그런 말은 더 이상 지배에 반항하지 못하는 노예를
보고 하는 말과 다르지 않다. 많은 아이들이 자유국가에서 자유를 바라다가 망가졌다. 어떻게 그게 그들의 책임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모든 것은 도덕의 책임이다. 자유롭길 바랬던 모양인지 인터넷 아이디마저 대부분 Free가 붙게 되었다. 아무래도 당시엔 Freedom과 Liberal의 차이를 몰랐던 것 같다. 그토록 자유를 바랬지만 나 또한 도대체 무엇이 원인으로
내가 부자유를 느꼈는지 정확하게 알 수 없었다. 자유롭지 못한 세상 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을 때 어떤 사건으로 신체의 부자유를 느낀 순간 모든 걸 자포자기하고 운명이란 이름의 도피를 통해
무기력하게 살아남기만 했을 뿐이다. 이제는 안다. 모든 부자유는 지배국가의 도덕으로부터 비롯되었다. 나의 트라우마와 나의 적인 인간을 지배하고 복종 당하는 걸 올바른 도리로 만든 지배국가의 도덕이다. 인간을 지배하려는 모든 것은 자유의 적이고 자유의
적은 나의 적이다. 나는 그걸 단언하겠다. 이외 도덕이 만든 현상 몇 가지를 살펴보자. 왜 귀농을 꺼려하겠는가? 시골의 연상들에게 지배 받기 싫기 때문이다. 도시는 핵가족화가 진행되어 연상의 꼰대질을 당할 우려가 상대적으로 적은 편이다. 이웃사촌이란 말도 이제 과거의 말일 뿐이다. 도시의 연상들도 직접적인 원인은 몰라도 꼰대질이나 갑질이 문제라는 것은 인식하고 있어
자제하려고 한다. 무의식적으로는 꼰대질을 해도 의식적으로는 하지 않으려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시골은 아직 그런 게 부족하다. 연하가 시골에 가면 모든 연상들에게 꼰대질을 당할
것이다. 꼰대질이 곧 인간을 지배하려는 행동이므로 꼰대질을
당하러 간다는 것은 자발적으로 노예가 되겠다는 것과 다르지 않다. 누가 그러고 싶겠는가? 시골에 젊은 사람이 가기 위해서는 도덕이 자유롭게 바뀌거나 시간이 흘러 지배할 인간이 사라져야 할
것이다. 왜 연하를 아기 취급할 때가 있을까? 다 큰 성인도 자신에게 비하면 어리니까 아기라고
한다. 성인을 아기라고 하다니 황당하다. 왜 그렇겠는가? 나이로 차별하기 때문이다. 어리게 여겨야 자신의 위치가 올라간다는 걸 무의식적으로
알고 있기 때문에 그런 행동이 나타나는 것이다. 현실 커뮤니티나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연상임을 강조하는 사람이 있다. 형이라 강조하며 말을 한다. 이것은 「내가 위니까 알아서 기어라.」라는 의도가 담겨있다. 어린 놈이 건방지게. 어린 주제에 벌써부터 까져가지고. 어린 녀석이 죄를 저질러? 이런 류의 발언도 연령차별에서 비롯된다. 굳이 나이를 붙이는 것은 차별의식이 있기 때문이다. 유교인이 아니라면 연하를 아기 취급하거나 어리다고
하는 것이 무례하다는 걸 인식하고 나이와 관계없이 대등한 인간 대접을 해야 할 것이다. 왜 한국에서 천재는 범재가 되어버리는가? 그건 범재인 어른의 입맛에 맞게끔 천재인 아이가 교정 당하기 때문이다. 왜 한국에서는 창의력이 없는 게임들이 많은 것인가? 창의력이 없는 윗사람 입맛에 맞게끔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창의력이 있는 것은 윗사람이 창의력이 있거나 아랫사람의
창의력을 중용했기 때문이다. 사람에는 위아래가 없고 평등하며 역할에 따라 달라질 뿐이라는 걸 강조하고 넘어가겠다. 왜 명절에 친척과 만나기가 싫은가? 꼰대질 당하고 싶지 않아서다. 위에서 내려다보며 명령하듯 잔소리하는 걸 듣고 싶어하는 자유인이 어디에 있겠는가? 흔히 한국의 핵가족화를 개인주의가 원인이라고 하던데
나는 다르다고 본다. 연상들의 지배가 싫은 자유로운 이들의 자유주의가 원인이라고 본다. 연상의 명령이 싫은 사람들이 가정을 꾸려 나갔다는 얘기다. 재미있는 건 자유가 필요할 때는 자유 찾고 지배가
필요할 때는 도덕을 찾았다는 점이다. 핵가족화가 되었어도 꼰대질 하는 사람들은 수두룩했다. 왜 음주운전은 줄어들지 않는 걸까? 윤창호법이 시행되어 처벌이 강화되었음에도 여전하다. 그걸 보고 많은 사람들이 처벌을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아마 처벌을 강화해도 별반 차이가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음주운전에는 술에 강한 인간이 우대받는
음주문화가 영향을 끼치고 있기 때문이다. 술을 많이 마셔도 멀쩡한 사람이 대단한 사람 취급 받는다. 한국 음주문화에서는 술 마시고 멀쩡한 것이 올바르게 되어버린 것이다. 그런 배경이 음주운전을 하게 만드는 원인으로 작용한다. 술 잔뜩 마시고 「나 안 취했어!」 라며 운전을 한다. 술 마시고 멀쩡하게 운전하는 나는 대단해! 이런 사고의 흐름이 이어지는데 처벌 강화한다고 달라지겠는가? 무엇보다 음주는 이성을 마비시킨다. 술 마시기 전에는 음주운전 하지 말아야지 해놓고
술 마시고 나서 이성을 잃고 「나 멀쩡해!」 라면서 음주운전을 하게 된다. 올바름이 원인이 된 문제는 법을 아무리 바꿔도 해결할 수 없다. 술에 강한 것이 자랑거리가 되는 한 음주운전은 사라지기 어려울 것이다. 도덕적이고 올바르다는 것이 악영향을 끼치는 사례는
무수히 많다. 이것들이 수많은 불행을 불러왔다. 상식적으로 생각하자. 인간을 지배하고 복종하게 만드는 걸 올바르다고 가르치면서
자유국가의 국민이 정상적으로 행복할 수 있겠는가? 이런 다양한 문제들을 성장해서 스스로 바꿀 수만 있다면 좋겠지만 쉽지가 않다. 쉬웠다면 세 살 버릇 여든 간다라는 속담이 없었을 것이고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는
말도 없었을 것이다. 성장기에 배운 교육은 자아성찰이 없다면 대부분 평생 간다. 미성년자의 이성교제와 성관계 금지가 왜 그런 영향을 끼치는지 알겠는가? 한국인들은 학창시절 배운 대로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성애가 결핍되고 성욕이 많은 인간을 혐오하고
있는 것이다. 도덕적으로, 연하가 복종하길 바라고 이성과 교제하는 걸 금하고
야한 걸 검열할수록 사회는 불행해져 갔다. 지배당해서 불행하고 이성애가 결핍되어 불행하고 욕구충족이 어려워서 불행하다. 너무 자연스러운 인과관계가 아닌가? 이런 불행을 부르는 도덕을 한국 문화의 특성이라며 존속하길 바란다면 카스트를 인도 문화의
특성이라며 존속하길 바라는 것과 같다는 걸 지적하고 싶다. 인도의 카스트는 신분으로 인간을 나눠 차별하는 것이고 한국의 장유유서는 나이로 인간을 나눠 차별하는 것이다. 하위카스트가 상위카스트에게 평등하게 대해달라는 걸
보고 철이 들지 않았다며 비난한다면 어떤 기분이 드는가? 황당하거나 화가 나는가? 그렇다면 하위카스트에 연하를 넣고 상위카스트에 연상을 넣어보라. 어떤 기분이 드는가? 이처럼 둘 다 복종을 올바른 도리로 만든 도덕들이다. 부디 잘못되었음을 깨닫길 바란다. 장유유서만의 특이한 점이 있다면 아이일 때는 주로 차별 받고 어른일 때는 주로 차별한다는
점이다. 과거 수공업 도제시절에는 장인에게 부림을 당하더라도
시간이 흘러 장인이 되면 도제를 부릴 수 있었기 때문에 스스로 노동자라 자각하지 못하고 있었다고 한다. 사용자가 될 수 있기 때문에 노동자 시절의 불평등함을
호소하지 않는다. 이는 한국의 의료체계와 비슷하다 수련의나 전공의
시절에 부림을 당하더라도 이후 부릴 수 있기 때문에 악습을 바꾸려 하지 않는다. 장유유서도 마찬가지일지도 모른다. 신분제와 달리 어릴 때는 지배당하더라도 어른이 되고 나서는 지배할 수 있으니까 문제제기를
하지 않는 것이다. 언젠가 젊은 정치가가 늙은 정치가에게 나이로 차별 받았다며 억울하다고 호소한 기사가 공개된 적이 있다. 과연 그 젊은 정치가는 단지 늦게 태어났다는 이유
하나로 차별당하는 한국 도덕의 문제점을 인지하고 연하와 대등한 관계를 맺었을까 궁금하다. 자유. 자유. 자유! 지배국가의 도덕으로부터 자유롭고 싶다. 왜 한국엔 진정한 자유주의자가 보이지 않는 건가? 자유와 평등을 외치며 민주화 운동을 했던 이들은
어디에 있는가? 자유민주주의를 외치며 자유의 가치를 중시하던 이들은
어디에 있는가? 도대체 자유주의자는 어디에 있느냔 말이다! 도덕을 명분으로 인간들을 지배하고 있음에도 그것을
지배라고 인식하지 못하여 왜 자유를 갈구하고 있는지조차 모를지도 모른다. 차라리 알기 쉽게 독재자라도 있으면 싸울 수라도 있으련만 나는 도대체 무엇과 싸웠어야
했는가? 자유국가에서 자유를 외치는 사람들과 자유를 위해
싸워야 했나? 선한 의지로 행동하는 사람들과 싸워야 하냔 말이다! 아아. 자유를 희망했던 민주화 운동가와 자유민주주의자가 진정 자유를 갈구하고 그것에 맞춰 사회의
도덕을 변혁했다면 이토록 높은 자살률과 낮은 출산율을 부를 정도로 불행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도덕이 원인이 된 사회의 불행. 그걸 누군가에게 책임을 물을 수가 없다. 도대체 어떻게 책임을 묻나? 그렇다면 앞으로가 문제다. 앞으로 지배국가의 도덕이란 잘못된 것을 바꾸는 걸 부정하는 이에게 도덕으로 발생한 불행에
대한 책임을 물어야 한다. 부디 문화 특성이라면서 불행을 부르는 도덕을 수호하려 하지 말아 주길 바란다. 자유롭지 못한 도덕을 가지고 있는 자유국가. 그것이 한국이다. 이제는 바뀌어야 한다. 최소한 올바른 일을 행하면 행복할 수 있는 세상으로 바꾸어야 한다.
본론으로 들어가자. 도덕이 시대의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는 것처럼 소년범죄의
대책 또한 시대의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촉법소년 문제다. 최근 촉법소년은 별다른 죄책감 없이 죄를 저질러 사회질서를 어지럽히고 있다. 촉법소년이 무면허 운전차량으로 대학생을 쳐서 사망에 이르게 하고는 SNS에 죄책감을 느끼지 못한 것 같은 메시지를 올려
사회적 공분을 산 적이 있다. 이외에도 다양한 촉법소년 범죄들이 일어나 많은 사람들이 불안에 떨거나 불만을 가지거나 분통을 터트리고 있다. 소년범죄는 언제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소년범죄는 범죄를 저지르지 않아도
될 환경에 놓은 아이들도 저지르고 있다. 이런 현상은 정보검열이 어려운 자유국가의 현대사회에서 일어나는 정보과잉공급이 만드는 결과물이다. 길거리에 총기가 널려 있다고 가정해보자. 어떤 어린이는 그 총을 주어서 쏘고 싶다는 충동만으로도
아무런 죄책감을 느끼지 못한 채 쏘아버릴 것이다. 총기에 정보를 대입하면 그게 바로 촉법소년 범죄다. 자유국가에서는 인터넷을 통해 누구나 다 성인이 접하는 정보를 얻을 수 있다. 미성년자 차단을 한 사이트도 VPN을 통해 어렵지 않게 접속이 가능하다. 굳이 VPN도 필요 없다. 유튜브를 이용하는 어린이들은 뉴스를 통해 어른들이 접하는 정보를 얻을 수 있다. 촉법소년에 관한 정보를 어디서 얻을 수 있겠는가? 과거엔 한자가 많은 불친절한 뉴스나 주변 연상들에게
정보를 얻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양질의 정보를 유튜브만 봐도 얻을 수 있다. 더구나 과거 뉴스와는 다르게 매우 쉽고 친절하게 정보를 전달해주고 있다. 그 정보가 옳다는 확증은 없지만 과거에 비해서 확실히
친절해졌다. 모르는 내용이 있으면 댓글로 물어보면 된다. 자신의 나이를 말하고 도움을 청하는 아이들이 종종
눈에 띈다. 옛날과는 차원이 다른 정보수집이다. 아이들에게 공급되는 정보의 양은 과거와 달리 어른과
비등해지고 있다. 그렇게 얻은 정보를 마치 길거리에 널린 총기를 주인
어린이들처럼 충동적으로 사용하여 범죄를 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현대사회에서는 과거 지배국가처럼 정보검열만으로는 아이들을 올곧게 성장할 수 있도록 도울
수가 없다. 일부 아이들은 정보검열 같은 통제만으로도 망가질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어떤 부모가 자신의 아이를 착하게 키우기 위해 억지로 정보검열을 했다고 가정해보자. 스마트폰을 빼앗고 TV를 못 보게 한다. 그런데 그 외의 아이들은 정보를 얻고 있다.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되겠는가? 간단히 말해 따돌림을 당한다. 정보라는 힘을 쥐지 못한 아이들을 아이들의 사회에서 도태되어 버린다는 것이다. 정보라는 총기를 쥐지 않은 아이가 따돌림이라는 총상으로
온몸이 너덜너덜해져서 집으로 돌아오면 어떤 기분이 들겠는가? 정보검열은 자기보호도 못하게 하는 어리석은 행위다. 아는 게 힘이라고 하면서 왜 정보검열은 그렇게 좋아하는가?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아는 것으로 힘이 강해진다. 아이들을 볼모로 내세워 정보를 검열하는 것은 아이들을
다루기 쉬운 가축처럼 취급하기 위해서와 별반 다르지 않다. 그것은 우민화 정책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정보를 검열할 것이 아니라 그 정보를 다룰 수 있는 방법을 알려줘야 할 것이다. 이제는 정보라는 총기를 쥐어줄 밖에 없는 환경이라는 것이다. 어린이에게 총기를 쥐어 줄 밖에 없는 환경이라면
총기 사용법과 쏴야 할 목적과 대상과 시기 등을 알려줘야 하는 것이다. 이처럼 자유국가에서는 정보과잉공급으로 나타나는 소년범죄에 대한 대책을 그에 맞게 마련할 필요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촉법소년이 저지르는 범죄에 대한
대책이 제대로 마련되지 못하고 있다. 사실 못하고 있는 건지 안하고 있는 건지 모른다. 내부에서 어떤 식으로 진행되는지를 모르니까 말이다. 외부에서 공표되는 소년범죄 전문가와 관련자의 의견에 따르면 크게 두 가지 측면에서 촉법소년의 형사처벌이 어렵다고 한다. 첫째, 촉법소년은 강력범죄 비율이 낮고 생계형 범죄 비율이 높다고 한다. 둘째, 지나치게 어릴 때 형사처벌을 하는 것은 낙인을 찍는 효과가 나타날 수 있다고 한다. 대강 이런 의견이었을 것이다. 생계형과 낙인효과. 어떤 이는 강력범죄만 형사처벌하자고 하던데 그런
의견이 받아 드려지지 않는 걸 보면 강력범죄와 생계형 범죄의 구분이 모호한 것으로 보인다. 생계형이라고 하더라도 강력범죄로 이어질 수 있지 않겠는가? 여기에 하나를 더하겠다. 셋째, 촉법소년의 범죄는 사회의 책임이 있기 때문이다. 이들의 행동은 대부분 환경에 의할 확률이 높다. 환경에 관계없이 독특한 특성을 지니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기 때문이다. 쌍둥이를 예로 들며 유전자가 인간의 행동원리를 결정하는데 큰 영향을 준다고 주장하는 이가 있다. 그렇다면 묻겠다. 쌍둥이 중 한 명은 미국에서 자유주의를 접하며 성장하고
한 명은 중국에서 중화사상을 접하고 성장했다면 그 둘은 같은 사상을 공유할 수 있겠는가? 맛의 호불호나 취미 같은 건 유전적 특성에 의할 확률이 높다. 하지만 사상적인 부분은 환경에 큰 영향을 받는다. 한국 내에서 발생하는 좋은 것은 한국 환경 덕분이고
한국 내에서 발생하는 나쁜 것은 한국 환경 때문이다. 이를 부정하는 것은 좋은 것만 취하고 나쁜 것은 외면하는 편향적인 책임회피에 불과하다. 모든 인간이 환경에 영향을 받는다. 아직 미숙한 어린이들은 더 크게 영향을 받는다. 그런 그들의 범죄는 잘못 가르친 사회의 책임도 크기
때문에 형사처벌을 하기 어렵다. 이런 저런 이유로 소년범죄 전문가와 관계자가 촉법소년 범죄에 대한 대책마련이 쉽지 않다는 걸 알겠다. 실제 현장에서 직접 경험하고 있는 이들의 의견을
귀담아야 할 필요가 있다는 건 누구나 다 알 것이다. 그들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고 있을 것이다. 제 역할을 못하는 이들을 제외하면 그런 점은 어느 전문가나 신뢰하고 있다. 그렇다고 이대로 방치할 수도 없다. 자유국가에서는 지배국가의 도덕을 자유국가에 맞게 바로잡아야 하는 것처럼 정보확산사회에서는 정보통제사회의
범죄대책을 정보확산사회에 맞게 바로잡아야 하는 것이다. 이것은 특별히 소년범죄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모든 범죄는 이제 정보확산사회에 맞게 바로 잡아야 한다. 그 중 촉법소년 범죄에 대한 의견을 내보겠다. 자유국가에서 정보는 총기자유국가의 총기와도 같다. 주자니 위험하고 뺏자니 도태된다. 다 총을 들고 있는데 너만 안 들고 있다고 생각해봐라. 얼마나 위태로운가? 어린이들도 마찬가지다. 잘못 주면 범죄가 발생하고 아예 뺏으면 따돌림을
당한다. 애 망칠 생각이 없다면 결코 정보검열은 하지 말아야
한다. 그런 걸 어느 정도 알기 때문에 대부분은 그냥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그렇게 총기와도 같은 정보를 쥐게 된 어떤 촉법소년들은
충동적으로 범죄를 일으켰다. 이런 상황에서 아이들이 앞으로 범죄를 일으키지 않게 하기 위해서 어떤 방법을 동원해야 하는가? 촉법소년이 저지른 소년범죄는 소년원에 들어간다고 한다. 촉법소년이 아닌 소년범죄는 소년교도소에 수감된다고 한다. 지금 많은 사람들은 촉법소년의 처벌이 약하다며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렇다면 촉법소년들도 소년교소도에 수감되어야 하는가? 그렇게 된다면 앞서 말한 생계형과 낙인효과와 사회책임의
문제가 발생할 것이다. 그렇다고 이대로 방치할 수는 없다. 소년원에 가고 있는 현 상황에서도 소년범죄는 더 뻔뻔해지고 교활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많이 생각해봤다. 사실 예전부터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자유를 억압하고 질서를 강요할수록 자유가 소중해지지 질서가 소중해지겠나? 지금의 교정방식은 질서를 소중하게 여기게 만들지는
못한다고 생각한다. 청소년들이 무면허로 운전을 하고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는 것은 어른 수준의 자유를 누리고 싶기 때문에 그러는 것이 아니었던가? 어른들이 강요하는 질서가 답답하니까 질서가 하찮아진
것이다. 그런 아이들에게 더 억압된 질서를 강요한다는 것은
자유국가에 맞는 방식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질서가 소중해지기 위해서는 더 큰 자유를 주는 것이 타당하다. 더 큰 자유. 그것은 질서 밖의 자유다. 사회질서가 답답하다면 사회 밖으로 나가 사회가 없는 자유를 겪어봐야 사회질서의 소중함을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죄를 지은 자가 사회에 적응하는 방식은 크게 두
가지가 있다. 첫째, 죄를 지은 자에게 더 많은 통제와 억압을 줘서 질서에 복종하게 만드는 것이다. 둘째, 죄를 지은 자에게 더 많은 자유를 줘서 질서의 필요성을 깨닫고 자발적으로 질서를 따르게
하는 것이다. 위의 방식이 교도소고 아래의 방식이 추방이다. 옛 영국에서는 죄를 지은 자를 식민지에 추방하여
거기서 형기를 살도록 했다. 그리고 형기를 마친 이들이 식민지에 남아 정치에 참여하고 사법역할도 맡아 현대국가의 초석을 다지게 되었다. 영국 관리들이 식민지에 파견 나오길 거부하는 바람에
사람이 없어서 죄수 중에서 그런 역할을 맡았다고 한다. 범죄자들이 자유로운 땅에서 자기들끼리 질서의 필요성을 배우고 질서를 만들고 지켜나갔다는 것이다. 그게 지금의 미국과 호주다. 영국의 의도는 그런 것이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렇게 되어 자유주의적 질서가
자리잡고 말았다. 그렇게 촉법소년들이 질서의 필요성을 깨닫고 스스로
질서를 만들고 지켜나가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주장하겠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미국과 호주가 경험한 방식이 적절하다고 본다. 범죄를 저지른 촉법소년들을 나이와 관계없이 보내 어떤 무인도에 보내 생존교육을 받게 한다. 그곳에서 자연과 싸우며 질서의 소중함을 깨닫고 스스로 질서를 만들고 지켜나가게 하는 것이다. 이러면 생계형 문제가 해결된다. 생계형으로 강력범죄를 저지른 아이에게 살아남는 법을
배우는 생존교육은 그들에게 필요한 교육일 것이다. 이 생존교육은 정규교육과정으로 모두에게 열려있으나 범죄학생은 의무고 나머지 학생은 권리다. 이러면 낙인효과 문제도 해결된다. 모든 학생이 자발적으로 지원할 수 있는 정규교육과정이기 때문에 그걸 이수했다고 하여 낙인이
찍혀 차별 받는 일은 개인정보가 유출되지 않는 한 드물 것이다. 그리고 나는 교육계가 나서서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주장하겠다. 촉법소년의 범죄가 환경의 책임이 크다면 부모와 교육의
책임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면 사회책임 문제가 해결된다. 지금은 다른 곳에서 하고 있다고 알고 있는데 촉법소년은 교육계가 책임지는 것이 적절하다고 본다. 사회의 질서가 없는 무인도에서 살아남기 위해 질서를
만들고 지켜나가는 과정을 교육하는 것이야 말로 사회질서 적응을 위한 교육과정이다. 무인도에서 자유를 주고 살아남기 위한 정보를 통제하지 않는다. 그런 방식이 자유국가에서 자유를 다루는 법을 배우는
것이고 정보확산사회에서 정보를 다루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구체적인 방식은 앞으로 설명할 예정이나 그건 아무래도 좋다. 중요한 것은 일반 학생들도 참여할 수 있는 정규교육과정 내에서 죄를 지은 촉법소년들이 질서의 필요성을
배울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교육계가 이런 일을 떠맡는 것이 못마땅할 수도 있다. 하지만 생각해보자. 사회적 영향력이 강할수록 그 집단의 목소리는 커지는 법이다. 예컨대 이런 것이다. 가정폭력피해를 입은 아이들이 편의점에 도움을 청하는
사례들이 늘어났다. 그렇게 하여 편의점이 파출소의 역할을 겸임하게 되었다. 편의점 관계자들은 사회에 더 큰 목소리를 낼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찰리 채플린은 영화 위대한 독재자를 통해 단순한
예능인을 넘어서게 되었다. 예능계가 사회비판을 하는 걸 주저하지 않길 권하겠다. 역할은 고정되는 것이 아니다. 자기역할만 해도 존중은 받을 수 있다. 하지만 그건 최소단위다. 수행하는 역할이 늘어날수록 그에 맞는 대우를 받을 수 있는 것이다. 만약 그러지 못한다면 그런 사회가 잘못되었다. 촉법소년 문제는 부모와 교육의 책임이기도 하니 정규교육과정이
하나 늘어났다고 불평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럼 구체적인 방식을 설명하겠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방식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촉법소년들은 자유롭길 바라기에 자유롭게 무면허 운전을
하고 상점을 약탈했다. 그런 아이들에게 더 큰 자유를 주자. 사회의 질서가 없는 자유가 어떤 것인지 몸소 체험하게 만들자. 왜 사람들이 사회를 이루고 질서를 만들어 준수했는지를 알게 해주자. 그래야 질서의 소중함을 깨닫고 자발적으로 질서를
지키려고 하게 될 것이다. 그것이 자유의지를 가지고 질서를 준수하는 자유주의자로 만드는 교육이다. 자 생존교육을 하기 위한 준비를 해보자. 장소는 한국 내에 있는 무인도다. 한국은 섬이 많으므로 인위적인 생존교육에 적합한 섬을 찾기가 쉬울 것이다. 대상은 초면인 촉법소년이다. 새로운 질서를 배우는 것이므로 서로 초면인 것이
적합할 것이다. 범죄자는 의무고 나머지는 권리다. 범죄를 저지른 촉법소년은 교육을 의무로 무조건 생존교육을
받아야 한다. 그걸 거부하는 방법은 징병을 거부하는 방법과 같이
해외로 이민을 가는 것이다. 의무냐 해외냐 선택해야 할 것이다. 해외로 가는 건 관대한 처사라며 화를 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생각해보자. 평생 교도소에 갇혀 지내는 것과 평생 고국으로 귀국하지 못하는 것은 한국에 사는 한국인이 범죄자를
만날 일이 없다는 점에서 같다. 형사처벌을 받지 않는 촉법소년이라면 적절한 대가라고 생각한다. 나머지 학생들은 교육받고 싶으면 자원해서 교육받을 수 있도록 하면 된다. 생존교육은 따돌림을 당한다거나 자유롭지 못해 답답하거나
변화의 필요성을 느낀 학생들에게 매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초기에는 시범적으로 강력범죄를 저지른 학생들부터 행해보면 좋을 것이다. 기간은 1년 정도가 적당해 보인다. 교육이행 정도에 따라 기간이 조정되어도 괜찮다. 정규교육과정으로 편성되기 때문에 학년이수가 가능하다. 촉법소년의 나이가 다 다를 확률이 높기 때문에 생존교육이
끝나기 전 해당학년의 지식을 담은 시험을 쳐서 유급 여부를 결정한다. 생존교육은 말 그대로 살아남는 방법을 배우는 것이기에 남는 시간이 많다. 그 시간 동안 스스로 공부한 학생들만이 진급할 권리를
취득하게 되는 것이다. 인원은 열 명 정도가 적당하다고 본다. 상황에 따라 수는 달리할 수 있을 것이다. 나이에 관계없이 반말을 하게 하여 차별이 없도록 한다. 교관은 생존전문가가 좋을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교관이 군대처럼 명령을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다른 사람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 한 철저하게 방치한다. 생존하는 방법만 알려주고 알아서 생존할 수 있도록
한다. 정말 위급할 때를 제외하면 그들의 자유에 개입하지
않는다. 방치하던 도중 만약 어떤 학생이 다른 학생의 자유를
침범하는 것과 같은 행위를 저지르면 그에게 더 큰 자유를 주면 된다. 예컨대 어떤 학생이 다른 학생을 폭력을 통해 의식주를 마련하라고 명령을 한다고 가정해보자. 그러면 그 작은 집단의 질서도 적응 못할 정도로
자유가 필요하다는 것으로 판단하여 혼자서 살아남는 공간을 마련해주면 된다. 그러다 만약 혼자 고립된 학생이 무단으로 집단에 돌아오려고 한다면 집단은 그를 질서를
어지럽혔던 적으로 간주하고 공격하게 하면 된다. 실제 인류가 살아온 생존경쟁을 몸소 깨닫게 만드는 것이다. 왜 자유를 준다면서 무인도에 갇히게 하는지 알겠는가? 사회 밖에 속한 외부인은 사회에게 공격 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회의 공격을 피하면서 자유를 누리려면 인간이 없는
곳밖에 없다. 한국에서는 그게 무인도다. 한 일주일에서 한달 가량 혼자서 살아남게 만들자. 밥도 혼자서 만들어 먹고 잠자리도 혼자서 준비하고
노는 것도 혼자서 한다. 그 자유가 힘들다는 걸 깨닫고 집단의 질서에 합류하길 원할 무렵 다시 돌아와서 사고화하고 화해하게 하면 된다. 살아남기 위해 서로가 필요하다는 걸 깨닫게 해야
한다. 환경은 인위적인 생존교육에 적합하게 먹기 좋은 풀과
낚시하기 좋은 장소와 사냥하기 좋은 동물들을 풀어놓는 것이 좋을 것이다. 비용은 소년원보다 더 적을지도 모른다. 원재료와 교육전용 무인도와 생존전문가 인건비만 들어가기 때문이다. 이에 따른 교육은 말 그대로 생존교육이다. 마실 물을 만드는 방법. 먹을 수 있는 풀을 채집하는 방법. 물고기를 낚시하는 방법. 동물을 사냥하는 방법. 사냥한 걸 도축하는 방법. 고기로 요리하는 방법. 농사를 짓는 방법. 집을 만드는 방법. 옷을 만드는 방법. 놀이를 즐기는 방법. 등 이런 기본적인 생존교육으로 시작한다. 그리고 질서를 만들고 유지하는 방법도 배운다. 규칙을 만드는 방법. 역할을 정하는 방법. 토론을 하는 방법. 등 자유로운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해 어떤 것이 가장
필요한 것인지를 배운다. 규칙을 지키지 않으면 생존에 어떤 피해가 가는지를 배운다. 제 역할을 다하지 않으면 생존에 어떤 피해가 가는지를 배운다. 제대로 된 토론이 없으면 불만이 생겨 생존에 어떤
피해가 가는지를 배운다. 생존에 필요한 모든 역할이 중요하다는 걸 깨닫고 직업차별을 하지 않게 된다. 생존에는 나이가 중요하지 않다는 걸 배우고 연령차별을 하지 않게 된다. 이런 것들을 배우고 스스로 생각해서 어떻게 해야
잘살아남을 수 있는지를 고민하고 또 고민한다. 밤 중에 별을 보며 산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생각한다. 직접 질서의 중요성을 깨닫고 질서를 어지럽히는 행위가 얼마나 큰 잘못인지를 인지하게 만든다. 더 나아가 어떤 질서가 옳고 그른지를 판단한다. 어떻게 해야 질서 아래서 더 행복할 수 있는지를
생각한다. 고찰이 아이를 성숙하게 만든다. 그 성숙함이 자유주의 질서 아래서 자유를 감당하는
것과 총기와도 같은 정보를 다루는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물론 이것은 이상적이다. 의도대로 되지 않을 확률이 높다. 그래도 좋다. 살아남는 방법과 질서의 필요함만 깨우쳐도 충분하다. 살아남는 방법을 충분히 터득한 후에는 자발적으로 공부하는 방법을 배운다. 유급하지 않기 위해 학년에서 배우는 지식을 쌓는 도구를 줘서 스스로 배우게 한다. 시기는 생존교육을 받은 지 약 6개월부터가 적절하다고 본다. 학업적인 부분은 완전 방치해야 한다. 문제집과 필기구만 주고 알아서 공부하나 지켜보자. 스스로 공부하지 않아 유급한다고 해도 별 상관없다. 유급하는 동안 스스로 공부하지 않았던 자신을 자책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과정이 어린 학생들에게 다소 가혹할 수도 있다. 하지만 범죄를 저질렀다면 안전이 보장된 곳에서 생존교육을
받는 것이 죄에 대한 큰 대가는 아닐 것이다. 부모도 그건 납득해야 한다. 이런 생존교육이 정규교육과정으로 편입되기 위해서 어떤 절차가 필요한지는 잘 모른다. 그러나 이런 과정이 없다면 촉법소년 문제는 해결되지 못할 것이다. 어른의 입맛에 맞춰서 아이들을 교정시켜 강제로 질서를
준수하게 만드는 것은 자유주의에 적합한 방식이 아니다. 그것은 지배당하는 인간에게 적합한 방식이다. 자유국가에서는 아이들이 스스로 질서를 지키고 그 질서가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하면 자유로운 의견개진으로 바꿀 수 있는 인간이 되어야 한다. 자신의 이기적인 의견이 적절한지 사회에 평가 받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어떤 의견이 이기적이라고 무조건 하지 못하게 하는 것보단 그 어떤 의견이라도 표현하게 하고 그걸 냉정하고 공정하게 평가하는 것이 자유국가에
맞는 방식이라 생각한다. 집단 이기주의는 집단을 위하는 이타주의에서 시작된 것이다. 현명한 인간이 이기적이어야 집단 이기주의가 만드는 폐해에서 벗어나 사회를 행복하게 할 수 있다. 자유의지를 가진 현명한 자유주의자가 되는 것. 자유국가에서는 그것이 진정 철든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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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상부터 바라보고 본질을 찾아가는 방식으로 해석하다
보니 오류가 있었네요. 다른 방식으로 교정 중에 있었군요. 현상부터 사물을 바라보고 본질을 찾아올라 가다 보니 종종 이런 경우를 겪어요. 그래서 대게 오류가 있는지 확인했는데 이번엔 소홀했네요. 다음엔 조심해야겠습니다. 일단 정정해서 다시 올립니다.
사랑하는 여성들이 여성주의라는 또 다른 지배로부터
자유롭길 바랍니다. 꾸며도 안돼. 성욕도 안돼. 사귀어도 안돼. 이런 부자유스러운 걸 어째서 여성인권이라 생각합니까? 보다 자유로운 것이 여성의 인권인 것입니다. 착한 여성들이 이타주의에서 벗어나 현명한 이기심으로 자유롭게 살길 바라겠습니다. 머리 긴 것이 남성이 정한 여성성이므로 잘못되었다. 라는 의견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런 과거 기준으로 잘잘못을 따지면 어떻게 합니까? 길게 기르고 싶으면 기르면 되는 거고 짧게 자르고
싶으면 짧으면 되는 겁니다. 길게 기르면 나쁘다고 주장하는 쪽이 더 이상한 게 아닙니까? 철저하게 자유를 관점으로 사물을 보십시오. 그래야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여성들이 자신들을 억압하는 여성주의를 인권이라 생각하는 걸 보면 참 가슴이 아픕니다.
모든 인간이 부디 자유롭길 바랍니다.
다음 주제는 아마 새로운 도덕입니다만…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