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출산과 애정결핍
저출산 원인은 간단하다. 자유 억압으로 인한 애정결핍. 그로 인한 연애감소와 결혼감소. 이외의 원인들은 직접적이지 않다. 간접적으로 영향을 주거나 명분이 되었을 뿐이다. 정말 간단한 문제다. 사랑하지 않으면 연애하지 않고 연애하지 않으면 결혼하지
않고 결혼하지 않으면 출산하지 않는다. 자유결혼이 많기 때문에 연애가 곧 결혼이고, 결혼 외의 출산이 적기 때문에 결혼이 곧 출산이다. 따라서 저출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이성애를 교육하고 강조하고 권장하는 것이 타당하다. 그런데 이 간단한 걸 몰라서 수십 년의 시간과 수백 조의 예산을 낭비하고도 저출산 문제를
해결하기는커녕 더 악화시키고 있다. 답답하다. 본론으로 들어가기 앞서 기성세대라면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을 통계를 통해 확인해보자.
* 중앙일보 1991.10.21「20년통계로 본 부부생활 실태」 검색해서 나온 기사다. 이 기사에서 나온 통계를 살펴보자. 한국은 80년대 후반에 들어서야 자유결혼 비중이 중매결혼 비율을
넘어섰다고 한다. 자유결혼은 81년 36.3%에서 89년 54.7%로 늘었고, 중매결혼은 같은 기간 58.4%에서 39.4%로 줄었다고 한다. 혼인 연령은 모두 높아지는 추세로 초혼은 72년 남성은 26.7세에서 89년 28.6세로 늘었고, 여성은 22.6세에서 24.8세로 늘었다고 한다. 이 통계를 통해 과거 한국에서는 중매결혼이 많았다는
것과 자유결혼이 늘어날수록 혼인 연령은 높아졌다는 걸 알 수 있다. 이 간단한 통계로 애정결핍이 저출산의 원인이라는 걸 알 수 있다. 그것에 대해 설명해보겠다.
중매결혼이 높았을 때로 가보자. 81년만 해도 중매결혼이 높았던 때다. 중매결혼은 혼인 당사자가 아닌 집안 어른의 의사에
따라 배우자가 결정되어 결혼을 하는 걸 말한다. 출산도 집안 어른의 의사에 따랐다. 집안의 대를 잇기 위해 며느리에게 임신을 강요했다. 며느리가 여성을 임신하면 낙태를 시키기도 했다. 가부장제 속에서 출가외인이 되어 대를 잇지 못하는 여성보다는 남성을 선호했기 때문이다. 남아선호사상이다. 이처럼 집안 어른의 의사로 본인의 결혼과 출산이 결정되었다. 사랑을 해서 결혼을 한 게 아니라 누군가 결혼을
시켜서 사랑을 했다. 아이를 낳고 싶어서 낳은 게 아니라 누군가 낳으라고 해서 낳았다. 애정이 없는 상태에서 결혼을 하고 출산을 했기 때문에 부부싸움과 아동학대는 예견된 일이었다. 이런 중매결혼은 자유 억압의 명확한 근거가 된다. 미성년일 때 연애와 성관계를 터부시하게 만들어서
중매결혼을 할 수밖에 없었다. 성에 관해서는 철저하게 억압했다. 소설, 만화, 영화 같은 문화도 검열했다. 유교적 가치관에 따라 여성의 지위가 낮았기 때문에 여성은 보다 더 성에 보수적이었다. 순결을 반드시 지키게 했다. 순결을 지키지 못하면 결혼도 하기 어려웠다. 그러다가 남성에게 팔려나갔다. 이처럼 기성세대는 연상에게 자유를 억압받았다. 그로 인해 애정결핍도 되어 있다. 그러니 자유 억압과 애정결핍으로 사회적 문제가 발생해도
이들에게 모든 책임을 물을 수가 없다. 이들 또한 피해자이기 때문이다. 자유억압과 애정결핍. 이걸 기억해둬야 한다. 이것이 현대의 저출산을 부른 것이기 때문이다. 현대와 과거가 자유억압으로 인한 애정결핍으로 동일함에도 출산율이 달랐던 것은 중매결혼과 출산강요 때문이었다. 그 두 개만 빠지면 현대의 출산율이 된다.
시간이 흐른다. 89년부터 자유결혼이 높아지기 시작했다. 성년이 되면 자유를 찾아 독립하여 집안 어른의 억압에서
벗어난다. 핵가족화가 된다. 그런데 집안 어른의 억압에서 벗어나지 못한 미성년은
계속 억압을 받는다. 미성년은 억압을 받으면서 이성애와 성교육을 받지 못한다. 성년은 억압에서 해방되어 자유롭게 행동한다. 성년은 이성애와 성교육을 받지 못한 채 자유를 얻어버렸다. 그걸 제대로 배우지 못하여 연애와 결혼에 소극적이게
된다. 성년이 되고 나서 이성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되니
시행착오를 겪느라 혼인 시기가 늦어진다. 자유결혼이 늘어날수록 혼인 연령이 높아졌던 것은 이런 까닭 때문이다. 미성년 때 연애를 마치고 성년이 되자마자 결혼했다면 이러지 않았을 것이다. 자유롭게 지내다 때를 놓친 사람들이 결혼을 하지
못했다. 여기서 멈추면 현대의 출산율이 될 것이다. 그러나 당시만 해도 성년은 아직 완전히 자유롭지는
못했다. 집안 어른의 발언권이 강해 늦게까지 자유결혼을 하지
못하면 중매결혼을 강요 받았다. 그렇게 자유든 중매든 결혼을 하면 대를 잇기 위해서라는 명분으로 출산을 강요 받았다. 그래서 이 때까지도 그나마 출산율이 유지되었던 것이다.
시간이 흐른다. 점점 더 자유로워졌다. 중매가 거의 사라졌다. 성년에게 결혼과 출산을 강요할 수 없게 되었다. 자 그러면 어떻게 되겠는가? 이성애와 성관계를 터부시하여 애정결핍이 되었음에도
출산율을 유지시켜주던 중매결혼과 출산강요가 사라지니 애정결핍으로 인한 출산율 저하가 시작되었다. 결혼과 출산을 강요하던 구조에서 강요가 사라지니 출산율이 곤두박질 치게 된 것이다. 그러면 여기서 그 구조를 바꿔야 한다는 걸 이해했을
것이다. 애정결핍을 해소하여 강요가 없어도 출산율을 유지시켜주는
구조를 만들었어야 했다. 그런데 그러지 않았다. 강요를 통해 출산율을 유지시켜주던 그 구조는 그대로 둔 채, 출산과 관계된 곳에 대한 배려만 늘렸다. 과거 자유를 억압받던 기성세대는 자신이 경험한대로 미성년을 억압했다. 미성년의 연애와 성관계를 막는다. 성 문화를 검열한다. 이때 여성의 해방을 말하는 여성주의자가 성을 검열하는
것은 정말 웃기고 슬프다. 그 검열은 과거 남성이 강요한 성적 억압에 영향을 받은 것이므로 그 행동 자체가 여전히 남성에게 종속되어있음을 증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억압들을 받지 않는 소수의 미성년만 연애에
적극적이게 된다. 나머지 미성년은 유사연애산업을 통해 욕구를 충족한다. 한국에서 유사연애산업의 성장은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과도한 수요가 산업을 급속도로 성장시킨 것이다. 성년이 되고 나서도 소수만 연애에 적극적이게 된다. 그 소수 중에서 일부만 자유결혼을 한다. 유사연애산업으로 연애욕구를 충족하던 사람들은 혼자
사는 것에 익숙해져 간다. 1인가구와 비혼이 늘어난다. 그 중에서 여유가 되는 사람은 이성과 만남을 통해 결혼한다. 정상적인 이성애를 배운 적이 없기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하는 것이 아니라 조건이 되는 사람과
결혼을 한다. 조건이 중매를 해준다. 조건중매다. 이성애가 결핍되어 있기 때문에 종종 사람들은 이성을
성욕 해소용이나 ATM 기기로 인식하게 된다. 때로는 트로피처럼 우수한 이성을 곁에 두는 걸로
외부에 자랑하며 만족감을 느낀다. 이처럼 애정결핍이 되는 구조는 그대로 두었다. 그 대신 배려를 늘렸다.
* 한국일보 2018.11.20「저출산 예산 13년간 143조원 다 어디에 썼나…」 검색해서 나온 기사다. 기사를 살펴보자. 기사는 다음과 같은 부분을 지적했다. 저출산 예산이 13년간 143조원 정도 되지만 목적과 다른 곳에 쓰이는 예산도
많다고 했다. 여기서 일반적인 저출산 대책은 보통 이런 것이라고
한다. 신혼부부 주거지원, 난임부부 지원, 무상보육 및 교육확대, 아동수당 지급, 공공 어린이집 확대, 돌봄교실 등 다양한 정책을 시행해왔다고 한다. 여기서 다른 곳에 쓰인 예산은 이런 것이라고 한다. 가족여가 프로그램 개발, 산업연계 교육활성화 선도대학, 고성장기업 수출역량 강화 등. 좀 엉뚱한 곳에 쓰이기는 했다. 어떻게 가져가 붙이면 되기는 할지도 모르겠지만 직접적이지는
않다. 기사는 이런 것이 문제라고 지적했다. 그런데 사실 본래 하던 저출산 대책도 실제 효과는
그리 크지 않았을 것이다. 애정이 결핍되게 되는 구조는 그대로 두고 이런 혜택만 늘리지 않았나. 애정이 결핍되어있으니까 연애와 결혼과 출산을 하지 않는데 그런 혜택 늘린다고 출산율에
변화가 있겠는가? 애정이 결핍된 채로 혜택만 늘리니까 가정폭력이나
학대들이 나타나는 것이다. 가정폭력은 4명 중 3명이 남성으로 많다고 한다. 이것은 다들 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자녀살해 비율은 절반으로 비슷하다고 한다. 최근 이런 사건들이 있었다. 3살 친딸 죽은 거 알면서도 새살림 차린 뒤에 양육수당과
아동수당 챙겨먹은 인간이 나오는 사건. 22개월 아들을 남편 닮았다고 굶겨 죽인 인간이 나오는 사건. 8살 딸을 사실혼 남편 충격 받으라고 목 졸라 죽인 인간이 나오는 사건. 약한 자녀를 살해하는 비율은 비슷한 걸 보았을 때
범죄는 성별이 아닌 힘의 논리로 나타난다고 보여진다. 따라서 이런 문제는 성별로 접근할 것이 아니라 애정결핍이나 아동의 지위 문제로 접근해야 한다. 사랑하지 않으니까, 대등하지 않으니까 쉽게 살해하는 것이다. 이 두 가지 문제를 모두 해결할 수 있음에도 방치하고 있다. 머리가 아파온다. 인간에게 사랑하는 걸 배우게 하지 않으면 이렇게
된다. 과거엔 집안의 어른에게 지배 받았으니까 눈치 보면서
사랑하는 척이라도 했지. 이제는 자유롭지 않나. 자유로운 상황에서는 애정이 필수적이다. 애정을 가르쳐야 한다. 이성애를 강조하고 성교육을 적극적으로 하여 빠른 시기에 상대를 찾아 연애를 해서 애정을 배워야 한다. 같이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한 그런 상대를 만나서
애정을 통한 행복을 배워야 한다. 이성을 사랑하고 이성에게 관심을 끌 수 있도록 매력을 가꾸고 이성을 이해하려고 한다. 이성애가 충만해져야 한다. 그렇게 해야 자발적으로 자유결혼을 하고 애정이 담긴 출산을 할 수 있는 거다. 그런데 그렇게 하기는커녕 이성애와 성교육을 보다
더 부정적으로 만들고 보다 더 비혼을 강조하는 사람들이 저출산 대책을 맡고 있다고 한다. 어쩌면 좋나.
한국에서는「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에서(이하 위원회) 저출산 대책을 맡고 있다고 한다. 저출산에 대해서 전부 여기서 하는 건 아니다. 영향력이 엄청 큰 것 같지도 않다. 2006년부터 2017년까지 12년동안 회의를 22회하는 걸로 그쳤다고 한다. 그래도 그 역할을 맡고 있는 건 분명하다. 그런데 위원회의 인선과 발언과 행동이 부적절한 경우가
있었다. 인선을 살펴보자. 이성애에 부정적이며 비혼을 주장하는 여성주의자가
속해있다. 아무래도 출산을 여성이 하다 보니까 여성 중에서
발언권이 강한 이들을 뽑은 모양이다. 이런 이들이 저출산 대책을 마련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처구니 없는지 다음을 보면 안다. 발언을 살펴보자. 위원 중 하나는 이런 말을 했다. 「출산할 권리보다 낙태할 권리를 주장한다.」 이게 어떻게 위원에게 나올 수 있는 발언인가? 나는 낙태를 부정적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여성의 자유권을 존중하기 때문에 법적인 제재가
아닌 윤리적인 문제로 접근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낙태는 법적으로 여성만 책임질 것이 아니라 윤리적으로 남녀 모두 책임져야 할 사안이다. 그럼에도 이건 역할을 생각하면 있을 수 없는 발언이다. 설령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어도 저출산 대책을 담당하고
있으면 그런 말을 하면 안 되는 거 아닌가? 상식적으로 저출산을 담당하면 출산율을 올릴 생각을 먼저 하는 게 맞지 않나? 그러지 않으면 거면 왜 그 자리에 있는가? 답답하다. 정말 여성주의자의 문제 중 하나는 자신의 역할보다 여성주의를 우선시하는 점에 있다. 그들은 역할주의와 다른 길을 걷고 있다. 행동을 살펴보자. 2020년 10월 7일 보건복지위원회가 진행한 국정감사에서 황당한 것이 지적되었다. 이 위원회에서 만든 홍보 영상 중에서 이런 것이
있었다고 한다. 「비혼」「아이 없이 살기로 결심했습니다.」 이 영상들은 지적 받은 후 삭제되었다고 한다. 어떻게 이럴 수 있나. 이러니까 수십 년의 시간과 수백 조의 예산을 쓰고도
저출산 문제를 해결하기는커녕 악화시켰던 거다. 2016년에서 2020년 저출산 대책에 투입한 예산이 150조. 2021년에서 2025년 저출산과 고령화 대책에 투입되는 예산이 196조. 연간 40조 가까이 사용할 예정이라고 한다. 그러면서도 2020년 출산율은 0.84명이다. 이러면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해야 하지 않나? 뭔가 열심해 해도 개선되기는커녕 악화된다면 다른
방법을 찾아보는 게 정상 아니냔 말이다. 진작에 저 애정결핍이 되는 구조를 바꿨다면 큰 돈을 들이지 않아도 출산율이 유지되었을 것이다. 정말 상식적으로 생각해보자. 지금 1인가구나 비혼 말하는 사람들이 상대가 있는데도 그러는 것 같나 아니면 상대가 없으니까 그렇게 된 것
같나? 인간은 동물이다. 알지 않나. 그냥 서로 자연스럽게 사랑할 수 있는 환경만 마련해주면
알아서 연애하고 결혼하고 출산한다. 그게 안 되는 건 애정이 결핍되도록 미성년의 이성애나 성관계를 막았기 때문이다. 제발 좀 막지 말라고. 꾸밈 막지 말고 연애 막지 말고 성관계 막지 말고 성 상품화 막지 말고 성 문화 검열
좀 그만 해야 한다. 이성애에 관련된 모든 걸 억압하지 말아야 인간이 정상적인 이성애를 배운단 말이다. 그게 안되니까 여학생들이 BL에 빠지고 알페스를 즐기고 있는 거지 않나. 한국이나 일본의 여학생들 특히 이런 걸 즐긴다는 것이 뭘 의미하는지 알았으면 좋겠다. 여학생들이 하도 억압 받다 보니까 그런 쪽으로 새게
된 거다. 이성에 관심은 있다. 이성과 관계를 맺으면 안 된다. 그러면 이성끼리 관계 맺는 걸 즐긴다. 자연스러운 흐름 아닌가? 이성애가 부족하니까 이성과 갈등을 빚는 거고 이성애를
배우지 못했으니까 비혼을 주장하고 있는 거지 않나. 서로 사랑했으면 이해하고 양보하고 그랬겠지. 어쩌면 좋나. 이성의 매력을 칭찬하는 것조차 이제는 잘못되었다고 비난한다. 그게 폭력이라고 하더라. 어쩌자는 건가. 이러는데 어떻게 출산율이 높아지나. 멸종직전인 팬더를 보고 느끼는 게 없나? 성에 보수적일수록 개체수가 줄어드는 건 당연한 거다. 호주 정복한 토끼를 보고 느끼는 게 없나? 성에 개방적일수록 개체수가 늘어나는 건 당연한 거다. 성에 보수적이기를 바라면서 어떻게 출산율을 올릴
생각을 하는가? 위원회는 아직도 헛다리를 집고 있다. 위원회의 주장은 다음과 같다. 「프랑스와 스웨덴 등 최근 출산율을 회복한 나라들의
사례를 보면 GDP 대비 아동과 가족
지출 비중은 출산율과 정의 관계를 가지고 있다.」 아직도 돈이 원인인지 안다. 당혹스럽다. 프랑스와 스웨덴이 같은 문화를 가지고 있나? 적어도 비교할거면 같은 동양 문화권을 참고해야 하는 게 정상 아닌가? 최소한 프랑스와 스웨덴만큼 성에 개방적이고 나서 그것을 참고해야 한다. 그 나라가 얼마나 성에 개방적인지는 알고 참고한
건가? 상대가 있으니까 결혼하고 그런 결혼한 사람에게 지원했으니까
그만큼 지출이 된 것이다. 무엇보다 프랑스와 스웨덴은 이민자들이 출산율에 영향을 끼쳤다고 한다. 애초에 이민자가 적은 한국은 비교할 수도 없다.
자유 억압으로 인한 애정결핍이 저출산의 원인이다. 그렇다면 해결 방법도 간단하다. 애정을 충족시키면 된다. 단도직입적으로 미성년 연애비율이 90%이상이 되면 된다. 성년은 간섭하기 어려우니까 주기적인 홍보와 성적
자유를 통해 천천히 개선해나갈 수 밖에 없다. 미성년은 교육기관에서 교육을 통해 연애비율을 올리는 게 충분히 가능하다. 대다수 미성년이 이성애와 성을 교육받고 연애를 하면 출산율은 자연스럽게 올라가게 되어있다. 이성애에 대한 모든 걸 개방해서 서로가 자연스럽게
사랑할 수 있는 구조가 마련되면 이성혐오도 자연스럽게 사라진다. 사랑하지 않으니까 쉽게 혐오하는 거 아닌가? 저출산, 이성혐오, 세대갈등 따위의 인간의 애정과 밀접한 관계를 지닌 문제들의 본질적인 원인은 대부분 애정결핍에서 오는 것이다. 애정결핍이 되어있으니까 누군가의 강요가 아니면 출산율도
유지 못하고 있는 거다. 이 멍청한 구조를 바꿔야 한다. 그럼에도 어려운 까닭은 올바름을 바꾸는 일이기 때문이다. 사회전반적으로 깔린 유교적 가치관과 그에 영향을 받은 여성주의에서 벗어나야지 가능해진다. 적어도 그런 것에 영향을 받은 사람이 저출산이나
성별 문제에 관한 역할을 맡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 그런 사람들이 힘을 가지고 영향을 행사한지 꽤 되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는가? 출산율은? 이성갈등은? 더욱 더 악화되지 않았나? 사랑이 넘치는 사회가 되도록 해야지 어떻게 갈등을 조장하고 비혼을 주장할 수 있나. 그러니까 상황이 더 악화되는 거다. 이처럼 현상의 본질을 모르면 상황이 악화될 수도 있다. 그런 것이 우리 사회에 생각 이상으로 많다. 그에 관해서는 꾸준히 지적해보겠다.
그러고 나서 저출산이나 성별갈등 따위의 문제 원인이
애정결핍에서 온다는 사실을 널리 알려 사회적 공감대를 형성해야 한다. 그 뒤에 미성년들에게 연애를 권장하고 세부적인 성교육을 하여 자연스러운 이성애를 배울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래야 그 미성년들이 그런 상대들과 성년이 되자마자
결혼을 하거나, 지금보다 훨씬 쉽게 상대를 만나 연애를 하며 결혼상대를
찾을 것이다. 그렇게 사랑이 넘쳐야 연애와 결혼이 늘면서 자연스럽게
출산율이 늘어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에게 직접적으로 재정지원을 하면 된다. 연애를 권장한다는 것은 이성에게 매력적이게 보일 수 있는 방법을 알려준다는 것이다. 외모를 가꾸고 운동을 하고 옷을 잘 입고 호감 가는
언행을 연습한다. 어떤 사람은 과거 여성이 주로 꾸몄다고 꾸미는 게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그러면 당연히 남성도 꾸며야 한다고 주장해야 하는 게 타당한 게 아닌가? 그런데 어떻게 된 게 다 같이 꾸미지 말자고 주장을 한다. 비정상적이다. 매력을 가꾸는 게 자연스럽게 되면 외모지상주의가
될 수 있다고 지적할 수 있다. 큰 문제 없다. 외모지상주의는 매력이 없는 사람을 천대하는 게 잘못된 것이다. 그걸 하지 않고 매력이 있는 사람에게 호감을 표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매력을 가꾸는 교육이 이성애 교육의 기초가 될 것이다. 이성애 교육의 방해는 이성애에 대한 억압들이다. 꾸밈 막지 말고 연애 막지 말고 성관계 막지 말고
성 상품화 막지 말고 성 문화 검열을 그만하면 된다. 이성애를 권장하고 이성애를 억압하지 않으면 자연스럽게 출산율은 오른다.
성범죄가 문제가 될 수도 있다고 할 수 있다. 미성년이 이성애에 관한 것이 개방되면 성에 눈을
뜨고 범죄를 저지를 수 있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런데 그런 범죄는 이성애 교육과 무관하다. 정보습득 유무와 범죄 유무는 반드시 정비례하지는 않다. 오히려 음지에서 이성애 교육을 받으면 이성을 성욕해소 도구로만 생각하게 될 우려를 발생시킨다. 양지에서 실제 여성과 교류하면서 애정을 쌓아가야
이성을 성욕해소 도구가 아닌 하나의 인격체로 존중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성애를 억압하는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이성을 성욕해소 도구나 ATM 기기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이처럼 좋지 못할 까봐 감추면 더 나빠진다. 개방하고 다 가르치는 것이 더 올바른 길로 인도할
수 있다. 너무 단편적으로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루밍 따위의 문제가 있을 수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그건 그루밍 당하지 않도록 교육하는 게 정상
아닌가? 당혹스럽다. 왜 그 따위 말장난이나 협박에 넘어가게끔 나둔 상태에서
배려만 해주나. 싸울 수 있도록 해야지 않나. 인권개념이 너무 이상하다. 최근 아이스하키 지도자가 학생들을 수시로 폭행한
사실이 드러난 적이 있다. 최초 학생과 학부모가 경찰서에서 자발적으로 체벌을 받았다고 진술했다. 그래서 경찰은 불기소 의견으로 송치했다. 그 뒤에 사실은 체벌이란 이름으로 폭행을 당한 게 맞는다고 고백했다. 그래서 재수사를 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걸 보고 어떤 언론은 경찰에 책임을 물었다. 학생과 학부모가 거짓진술을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에
대한 분석과 그 해결 대책을 촉구한 게 아니라, 그 현상은 그대로 두고 경찰에게 책임을 물었다는 것이다. 학생들에게 어른 말 무조건 들으라고 교육하니까 학생들이 반항할 수가 없었던 거고, 아이스하키 감독의 권한이 너무 강해 견제할 수 없었기
때문에 자녀 미래를 위해서 학부모들이 반항할 수 없었던 것이다. 학생들에게 부당한 것에 항의할 수 있도록 가르치고, 아이스하키 감독이 학생 장래를 결정할 정도의 과도한 힘을 가지게 되는 구조를 바꿔야 한다. 이런 게 바람직한 지적 아닌가? 부디 배려로 끝나지 말고 본질적인 원인 해결을 강구하길
바란다.
저출산이 지속되다 보니 지구 내 인구포화로 인구감소의
필요성이 대두되고 완전 자동화 사회로 인력의 필요성이 줄어들기 때문에 출산율이 낮아도 괜찮지 않냐는 의견이 있다. 그건 시야가 좁은 의견이다. 첫째, 지구 내 인구포화는 한국 인구수만 줄어든다고 바뀌는 게 아니다. 2021년 기준 지구 내 인구수가 약 77억 명 정도 되는데 약 5천만 명 정도 되는 한국에서 인구수 줄어든다고 영향 주는 거 거의 없다. 둘째, 인구의 필요성은 단순 노동력에만 있는 게 아니다. 지금 중국에서 한국을 잡아 삼키려는 움직임이 활발하다. 한국 역사부터 시작해 한국 문화까지도 중국의 것이라며
거짓말을 하고 있다. 그런 상황에서 토종 한국인의 수가 줄어들고 중국인 유입이 늘어나면 어떻게 되겠는가? 자연스럽게 정복되는 것이다. 인구수로. 저출산은 한국이란 국가의 존립을 흔드는 중대한 사안이라는 걸 알았으면 좋겠다. 그 외에도 출산율을 올려야 하는 이유가 있다. 바로 생물의 의무다. 우리가 환경을 지키는 이유는 무엇인가? 우리가 미래를 생각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우리들의 후손을 위해서인 게 아닌가? 인간은 각기 다양한 가치를 추구한다. 그런 인간이 공통된 가치를 추구할 것이 있다면 그것이
바로 인류라는 종을 이어나가는 것이라 본다. 어떤 사람은 지구가 포화되었으니까 인구수가 더 줄어들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나는 다르게 말하겠다. 지구가 포화되었으면 인구를 줄일 것이 아니라, 다른 행성을 개척하여 그 행성에 인구를 늘려나가야
한다. 그것이 순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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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알고 있던 올바르다라는 건 반드시 올바른
결과를 낳지는 못합니다. 어떤 걸 좋게 만들고 싶으면 구조 자체를 바꿔야 하는 겁니다. 좋지 못한 구조는 그대로 두고 배려만 해주는 것은 상황은 더 악화시킬 뿐입니다. 지금 하는 건 상처를 치료하는 게 아니라 진통제만
먹고 있는 겁니다. 상처를 치료해야 합니다. 본질적인 원인을 찾아 문제를 해결합시다.
여성은 지금 배려를 받을 때 정당한 권리를 누릴
수 있도록 의무를 다하게 해달라고 해야 하는 겁니다. 배려가 끝나면 지금 받는 혜택들은 물거품처럼 사라집니다. 예전처럼 돌아가게 됩니다. 아니, 예전보다 더 나쁜 환경이 될 수도 있습니다. 과거보다 배려가 더 사라질 테니까요. 여성의 인권을 주장하고 싶으면 자잘한 것들을 바꾸는 게 아니라 여성의 지위를 남성과 대등하게 만드는 걸 해야 합니다. 과도한 혜택은 낮은 위치에 대한 과잉배려일 뿐이라는
걸 인지하고 남성과 의무를 같이하고 혜택을 동등하게 누리는 걸로 남성과 대등해지길 바랍니다. 그런 진정한 여성인권을 추구했으면 좋겠습니다.
경력 있는 신입, 낮은 자수성가 비율, 기업에 대한 과한 의존, 자기개발이 아닌 회사발전에 치중, 다른 분야에서 일하기 어려운 환경, 노동자가 을이 되는 구조 따위는 노동자가 자본가에게
종속되어 있기 때문에 나타납니다. 그 구조를 바꿔 노동자 개인이 개인으로 있을 수 있는 노동의 개인화가 필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