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와 도덕
인간에게 부과된 도덕적 의무는 없다. 현존하는 도덕적 의무는 어느 시대에 누군가 어떤
목적을 위해 도덕을 의무화하여 대중에게 전파한 것이 현재까지 남아있는 것일 뿐이다. 간단히 정리해보자. 도덕이란 인간 상호 관계 속에서 옳고 그름을 판단하여 올바르게 행동하기 위한 규범의 총체다. 여기서 규범은 언제나 시대와 장소에 따라 달라진다. 의무[철학]란 도덕적으로 필연성을 가지는 요구로서 인간의 의지 및 행위에 부과되는 강제 및 구속이다. 올바르다는 이유로 강요한다. 즉 도덕적 의무란 어떤 특정한 규범이 인간에게 강요되는
걸 뜻한다. 규범이 교리로 바뀌면 종교적 의무가 된다. 도덕적 의무는 종교적 의무와 마찬가지로 의심하지
않고 당연히 해야 한다. 도덕적 의무는 법적 의무와 달리 영속하다. 법적 의무는 법이 바뀌면 없어지지만 도덕적 의무는 나라가 바뀌어도 남아있다. 도덕적 의무는 미래로 향하는 배가 과거에 영원히 머무르게 하는 보이지 않는 무거운 닻이다. 닻에 걸린 줄 모르고 미래로 향하다 다시 과거로
돌아온다. 과중한 도덕적 의무를 짊어졌던 조선을 이은 한국이
강요로 운영되었던 것은 필연이었다.
도덕적 의무에 대해 알아보자. 지금 전염병으로 마스크를 착용하는 것이 일상화되어
있다. 지금 마스크 착용은 올바른 일이다. 이 올바름을 의무화한다고 가정해보자. 사람들은 이 도덕적 의무를 지키기 위해 전염병이
없음에도 마스크를 착용한다. 착용하지 않는 이는 부도덕하다며 공격한다. 마스크 착용여부로 옳고 그름이 결정된다. 마스크를 착용하지 않는 인간은 각종 모욕과 비난을 받게 된다. 이것이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하나 이건 실존한다. 과거 만들어진 도덕적 의무 때문에 불필요한 의무를 행하는 것이 많다. 세 가지를 언급해보겠다. 하나, 연령차별. 조선의 질서를 유지했던 이것은 자유롭고 평등해진 한국에는 더 이상 필요가 없다. 그럼에도 규범으로 강요되고 있다. 이것으로 발생하는 꼰대는 비판하면서 상하관계는 철저히
따지는 모순이 종종 목격된다. 이 의무를 따르지 않는 이를 예의범절을 모른다며 공격한다. 둘, 민족의 통일. 이것은 분단되었던 시기 발생한 민족주의자의 염원이다. 이것은 민족주의자에게 도덕적 의무가 되었다. 민족주의자는 본인이 본인에게 통일이라는 무거운 의무를 부과하며 타인도 당연히 해야 할
의무로 인식한다. 이것이 의무기 때문에 민족주의자들은 북한에게 굽히고
들어간다. 선택인 사람들은 그걸 이해하지 못한다. 남북에 관련된 국내갈등은 대체로 통일이 의무인 사람과
선택인 사람 사이에서 발생하는 몰이해 때문이다. 이 의무를 따르지 않는 이를 반민족주의자라며 공격한다. 셋, 정조관념. 이것은 남성이 여성에게 주입한 그릇된 관념이다. 이 그릇된 관념을 소중하게 여기는 이들이 성을 터부시하고
있다. 외적인 코르셋은 탈피하려 애를 쓰면서 내적인 코르셋은
소중하게 여기고 있다. 정녕 남성이 주입한 코르셋을 벗고자 한다면 성에 대한 관념도 남성과 비슷해야 할 것이다. 성에 대한 터부는 해외도 마찬가지라고 할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정조관념의 주입은 해외도 마찬가지다. 그러니까 비슷하다. 이 의무를 따르지 않는 이를 성인지감수성이 부족하다며
공격한다. 이것들이 위의 예와 구조가 비슷하다. 어쩌면 이해하기 어려울지도 모르겠다. 그러니 이해하기 쉬운 예를 들어보겠다. 도덕적 의무는 종교적 의무와 비슷하다. 맹목적으로 따르게 되기 때문이다. 종교적 의무로 접근해보겠다. 이슬람에서는 돼지고기 섭취가 금지되어 있다. 이는 꾸란에서 금지했기 때문이라 한다. 간단히 말해 종교적 의무다. 꾸란에서 금지했던 까닭에 대해서는 다양한 의견이
있으나 대체로 당시 유목민족이었던 이들에게 돼지고기가 적합하지 않았기 때문이라 추측한다고 한다. 과거에는 돼지고기를 금지할 필요가 있었다. 그 필요가 교리를 통해 의무가 되자 필요가 없어진 지금도 금지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의무는 플라시보 효과처럼 굳게 믿을 때 단순
심리뿐만이 아니라 생리적인 영향까지 끼치게 된다. 연령차별을 도덕적 의무로 여기는 이들이 반말을 들을 때 느끼는 심리적인 불쾌감은 이에 비롯된다. 채식주의자가 느끼는 고기 섭취에 대한 생리적인 불쾌감은
유전적 요인이 아닐 경우 채식이 도덕적 의무 때문이다. 비폭력주의자가 폭력에 간접적이라도 관련되면 모욕적인 불쾌감을 느끼는 것도 비폭력이 도덕적 의무이기 때문이다. 어떤 여성이 남성 경찰관이나 소방관에게 구조받을
때 느끼는 성적인 불쾌감도 정조를 지키는 것이 도덕적 의무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도덕적 의무는 인간의 생리까지 간섭하는 너무나도 무겁고 위험한 강요를 받는 저울대다. 강요된 의무를 어기면 저울이 불행으로 기울게 된다. 이런 도덕적 의무를 단편적인 생각으로 사람들에게
강요하듯 주입하는 교육은 굉장히 위험하다는 것을 강조하겠다. 결벽증 환자가 있다고 가정하자. 결벽증 환자는 더러운 것에 지나치게 예민하여 삶이 불행할 정도로 취약하다. 그런 교육은 결벽증 환자를 양산하는 것과 같다. 교육대상을 교육을 통해 의무를 짊어지게 하는 것으로
특정한 것에 약하게 만들어 교육하는 자를 따를 수 밖에 없게끔 한다. 이는 정신적 장애까지 일으킬 수 있는 최악의 수단이다. 자유와 완전 배치되는 일이다.
민족에게 부과된 도덕적 의무가 특유의 민족성으로
나타나곤 한다. 각각의 민족이 독특한 특성을 지는 까닭은 이 때문이다. 비슷한 도덕적 의무를 지닌 가까운 국가가 비슷한
특성을 지닌 것도 이 때문이다. 민족주의자는 도덕적 의무로 나타나는 민족성을 지키는 것이 올바르다 여길지도 모른다. 하나 그것은 개인의 개성을 말살하는 결과를 낳게 된다. 자유와 배치된다. 현대 국가는 도덕적 의무로 나타나는 민족성을 국가의
정체성으로 삼을 것이 아니라 이념을 정체성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한국은 자유를 정체성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하겠다. 자유국가에서 자유를 정체성으로 삼자고 주장하고 있다. 이게 얼마나 당연한 걸 주장하고 있는지 알아주었으면
한다.
도덕적 의무는 종교적 의무와 마찬가지로 한번 의무가
되면 시공간을 초월해 지켜야 하는 것이 된다. 의무가 생겨나면 이후 세대는 불필요한 의무를 짊어지게 된다. 조선 후기 수많은 허례허식이 바로 그러하다. 전대가 만든 예절이나 법식을 의무화하여 전부 지키다 보니 쓸데 없는 허례허식이 늘어난
것이다. 도덕적 의무는 결국 이런 식으로 특정 세대가 이후
세대에 부과한 의무에 불과하다. 원시인까지 거슬러 올라가면 애초에 인간에게 도덕적 의무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인간에게 부과된 도덕적 의무는 없다는 것이다. 이 시대는 이 시대의 것이다.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지금 살아있는 사람의 것이다. 산 자가 죽은 자로부터 해방되어야 한다. 현재의 도덕은 이제 생물이다. 지금까지 도덕이 만들어졌을 때 인터넷과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 있었던가? 언제 어느 때건 사건의 옳고 그름을 토론할 수 있는 수단이 있었는가? 과거의 도덕은 박제된 생물이었다면 현재의 도덕은 살아있다. 과거엔 죽은 자가 산 자의 옳고 그름을 판단했다. 현재는 산 자가 산 자의 옳고 그름을 판단한다. 이제 옳고 그름을 산 자가 판단해도 될 정도의 성숙한
지성과 시스템을 갖추었다. 인간이 자유롭기 위해서는 더 이상 도덕적 의무라는 이름으로 과거에 속박되어서는 안 된다. 도덕은 맹목적으로 의무를 짊어질 것이 아니라 지성적으로 필요한 것을 지켜야 한다. 이것이 자유의 시작이다.
인간은 필요로 도덕을 지켜야 한다. 그렇게 해야 과거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 도덕적 의무가 없더라도 반드시 필요한 것은 지켜지게
되어 있다. 인류는 인간의 생존권을 보장하기 위해 인간 보호를
미덕으로 만들고 인간 살해를 악덕으로 만들었다. 이 구조에서 도덕적 의무의 필요성은 존재하는가? 존재하지 않다. 오히려 그릇된 도덕적 의무는 인간 살해마저 미덕으로 만들 수 있다. 명예살인이라는 것이 있다. 명예를 지킨다는 도덕적 의무로 인간을 살해한다. 그 사람에게 있어 그것은 미덕이다. 종교적 의무에 의해 인간 살해를 선행으로 여기는
일도 있다. 이교도 살해다. 현재까지도 세계 각지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이쯤 되면 차라리 이들이 부과된 의무를 저버리는
것이 인류의 생존에 도움이 된다.
이런걸 보면 사이코패스의 악마화나 성선설과 성악설이
얼마나 구시대적인지 알 수 있다. 인간은 사이코패스가 아니더라도 정당화할 수 있는 수단이 있으면 얼마든지 흉악한 짓을 저지를 수 있다. 사이코패스는 그냥 감정결핍 장애를 가진 사람이다. 그들이 바르게 살고자 하는 의지가 있다면 그들을
선입견으로 바라봐서는 안 될 것이다. 성선설과 성악설로 가보자. 도덕적 의무로 인해 인간을 살해하는 인간은 성선인가? 성악인가? 그 도덕적 의무는 특정 집단에게 있어 선일 것이다. 반면 그 집단 외는 악일 것이다. 이와 같이 선과 악은 도덕적 기준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진다. 이런 상황에서 성선설이나 성악설이 의미를 가질 거라 보는가? 이것은 그냥 낡은 관점이다. 흉악한 사건이 발생하면 피해자는 거들떠도 보지 않고
가해자만 보고 인간은 원래부터 악하다 말하는 일이 있다. 이건 그냥 단지 인간의 잘못을 인간 태생의 문제로 만들어 책임을 회피하려는 태도에 불과하다. 인간은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다. 인간의 본성을 멋대로 규정하는 일은 위험하다 말하고 싶다.
도덕은 생존권과 같이 인간을 위해서 만들어진다. 생존권 이외에도 다양한 것이 있을 것이다. 이번 주제가 자유이므로 자유권을 기준으로 생각해보겠다. 인간의 자유권을 보장하기 위해 무엇을 미덕으로 삼고
무엇을 악덕으로 삼아야 하는가? 미덕은 의지와 지성이고 악덕은 강요와 세뇌다. 인간의 자유를 억압하는 강요와 강제 세뇌가 악덕이고
이 악덕에 저항할 수 있는 의지와 지성이 미덕이다.
한국에서 강요는 크게 네 가지가 있다. 연령으로 강요하는 것을 가리켜 꼰대라고 한다. 권력으로 강요하는 걸 가리켜 독재라고 한다. 재력으로 강요하는 걸 가리켜 갑질이라고 한다. 약함으로 강요하는 걸 가리켜 정치적 올바름이라고
한다. 강요란 억지로 요구하는 것을 뜻한다. 연령으로 강요하는 것은 유교의 장유유서에서 비롯되었다. 장유유서는 어른과 어린이 사이의 도리는 엄격한 차례가
있고 복종해야 할 질서가 있음을 이른다. 이걸로 연상이 연하를 지배하여 강요했다. 꼰대는 유교를 기준으로 도덕적 의무를 행하는 지극히 도덕적인 인간이다. 유교가 끼친 영향에는 연령차별 외에도 여성차별도 있을 것이다. 부위부강은 아내는 남편을 섬기는 것이 근본이라 하였다. 이걸로 남성이 여성을 지배하며 강요했다. 정조관념이 대표적이다. 유교의 도덕적 의무에서 해방되어 무엇이 진정한 자유와
평등인지, 그리고 무엇이 인간을 행복하게 하는지에 대한 고찰이
필요할 것이다. 이런 연하나 여성의 차별은 자유권을 기준으로 보면
악덕이 된다.
권력으로 강요하는 것은 군부독재나 공산독재가 있다. 정당의 손익으로 가치를 판단하는 정당주의자에 의해
독재가 정당화되는 일이 있다. 진영논리로 반공주의자나 민족주의자가 군부독재나 공산독재를 옹호하기도 한다. 자유주의를 추구해야 할 반공주의자가 군부독재를 옹호하고 민주주의를 추구한다는 민족주의자가
공산독재를 옹호하는 것은 한국 정치의 희극이자 비극이다. 이는 국민들이 유교의 도덕적 의무에 강하게 영향 받아 현대 이념을 가지지 못했던 것과 함께 선동에 취약한 지역별 대표가 입법권을 쥐었기
때문에 발생하는 현상이다. 유교의 도덕적 의무에서 해방된 뒤 현대 이념을 공부하여 새로운 도덕을 만들어가고, 입법이 공약이 되게 될 분야별 대표가 입법권을 쥐게 된다면 이 현상은 긍정적으로 변화할
것이라 본다. 이런 독재 옹호는 자유권을 기준으로 보면 악덕이
된다.
재력으로 강요하는 것은 구매자 갑질이나 하청 갑질이
있다. 자본논리로 이런 갑질을 합리화하기도 한다. 구매자 갑질을 보자. 손님은 왕이 아니다. 지불한 대가만큼 서비스를 받는 것이 타당하다. 역할로 가치를 평가하는 역할주의적 관점에서 보자. 판매자는 일정한 대가를 받고 판매자가 소유한 능력을
가지고 잠시 서비스해주는 것일 뿐이다. 구매자는 판매자가 제공하는 서비스라는 역할까지만 요구할 수 있다. 이는 연예인도 마찬가지다. 연예인은 자신의 예능이란 역할까지만 판매하고 있을 뿐이다. 팬이란 이름의 소비자가 연예인의 예능 외의 사생활에
간섭하는 것은 갑질이다. 하청 갑질을 보자. 하청 갑질도 같다. 원청은 대가를 지불한 것만큼만 하청에게 요구할 수 있다. 계약 외의 요구사항은 갑질이 된다. 역할주의적 관점을 가진다면 이 현상은 감소할 것이라 생각한다. 이런 갑질의 합리화는 자유권을 기준으로 보면 악덕이
된다.
약함으로 강요하는 것에는 정치적 올바름이나 여성주의가
있다. 약자나 소수자에 대한 이해와 관용과 배려를 하게끔
훈계한다. 다른 것은 강함으로 강요하나 이것은 약함으로 강요한다. 이것은 시대의 변화가 만든 진통이다. 사회적 참여도가 낮았던 약자가 처음으로 타인에게
강요할 수 있는 위치에 서자, 사회에 대한 어떤 사상적 고찰도 없이 특정 이들의 이익만을 강요하게 되었다. 사회 전체가 아닌 특정한 이들의 입장만 고려하는 것에서 이들의 미숙함이 드러난다. 이것은 올바르니까 네가 도덕적 의무를 짊어져야 해. 그걸 하지 않으면 네가 잘못된 거야. 약자만을 위한 논리를 만들고 그 논리를 타인에게
강요한다. 여성주의는 보다 더 심각하다. 노예로 살았던 흑인들조차 흑인주의를 대놓고 내세우지는
않는다. 지나치게 편협하다. 여성의 입장만 고려하는 이들이 국가정책에 깊게 관여하는
것은 국가에 있어 중대한 실책이 된다. 여성도 이제는 사회 전체를 바라보는 성숙한 시각을 가져야 할 것이다. 나는 한국 여성들이 현명하다 생각한다. 충분히 가능하다. 이런 훈계는 자유권을 기준으로 보면 악덕이 된다.
한국에서 강제 세뇌는 크게 세 가지가 있다. 도덕적 의무를 부과하는 것. 정치적 선동을 전파하는 것. 종교적 맹신을 설파하는 것. 세뇌란 본디 가지고 있던 생각을 다른 생각으로 개조하거나, 특정한 사상과 주의를 주입하는 일을 뜻한다. 이것이 강제되면 악덕이 된다. 한국에서 도덕적 의무를 부과하는 것에는 유교를 비롯해
채식주의나 비폭력주의나 여성주의 등이 있다. 도덕적 의무에 강제로 세뇌된 이들은 도덕에 대해 의심치 못하고 맹목적으로 행한다. 그 행함에 있어 심리를 넘어 생리적인 영향까지 받게 된다. 한국에서 정치적 선동을 전파하는 것에는 반공주의나
반미주의 같이 이념과 국가를 반대하는 것에 있다. 정치적 선동에 강제로 세뇌된 이들은 선동 목적을 생각지 못하고 맹목적으로 행한다. 본인의 이익보다 선동한 타인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이타주의자가 되어버린다. 이타주의가 올바르다라는 풍조가 있기 때문에 그것이
잘못된 것임을 의심치 못한다. 정치적 선동에 도덕적 의무가 겹쳐 파괴적인 효과가 나타난다. 한국에서 종교적 맹신을 설파하는 것에는 다양한 종교들의 선교나 포교가 있다. 일반적으로 사이비 종교다. 종교적 맹신에 강제로 세뇌된 이들은 인생 자체가
종교에 속박된다. 본인의 이익보다 설파한 타인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것을 넘어서 본인이 종교가 되고 종교가 본인이 된다. 종교가 아니면 살아가는 것 자체가 어려워진다. 맹신을 가리켜 종교적이다라고 말할 정도로 종교의 세뇌가 가장 강도 높다. 이런 강제 세뇌는 자유권을 기준으로 보면 악덕이 된다.
이와 같이 자유를 기준으로 하면 강요와 강제 세뇌가
악덕이 된다. 이에 저항하기 위해서는 강요에 맞설 수 있는 굳건한
의지와 강제 세뇌에 속지 않을 지성이 필요하다. 강한 의지가 미덕이다. 현명한 지성이 미덕이다. 둘 다 강함을 요구한다. 약함이나 무지는 악덕에 휘말릴 수 있으므로 온전한 자유를 누리기 어렵다. 최근 약함으로 타인에게 강요하는 사상이 유행하여 약함을 내세우는 일이 종종 있다. 체력이 약하니까 배려해라. 배려하지 않는 네가 잘못이다. 지식이 부족하니 이해해라. 이해하지 못하는 네가 잘못이다. 그 뻔뻔함을 악덕이라 부르기까지는 어려워도 미덕이라
부를 수는 없을 것이다. 힘이 약한 사람도 강한 의지와 현명한 지성을 갖출 수 있다. 어떤 장애를 가진 이를 제외하고는 강함을 얻을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그래야 온전한 자유를 얻을 수 있다. 약함으로 배려를 얻고자 하는 이는 온전한 자유를
누리기 어렵다는 걸 강조하고 싶다. 여성이든 아동이든 노동자든 소수자든 자유롭고 싶으면 의지와 지성이란 강함을 갖춰야 한다.
의지란 어떠한 일을 이루고자 하는 마음이다. 이런 의지를 가지고 있어야 강요에 맞설 수 있다. 어떤 교사가 학생을 폭행한 사건이 있다. 그 때 학생은 교사의 강요로 체벌이 없었다고 증언했다. 경찰은 그 증언을 믿었다. 이때 유교적 관점으로 보면 경찰이 미숙한 학생의
의지박약을 의심하여 좀 더 조사했어야 했다. 자유적 관점으로 보면 학생이 강한 의지를 갖고 부당한 행위에 맞서 싸울 수 있어야 했다. 되려 경찰이 학생의 의지박약을 의심하는 것이 무례한 일이 된다. 학생이 어떤 장애를 가지지 않는 이상, 학생의 자유의지에 따른 증언을 믿는 것이 자유의
미덕이다. 의지의 강함을 전제하는 것. 그리고 그 강함을 갖출 수 있는 교육이 필요하다. 배려로 끝나는 이타적인 사상은 결코 자유에 적합하지
않다.
의지를 가지고 자유롭게 어떤 일을 할 때, 그 의지에 맞는 책임을 지는 것도 동반된다. 어떤 노인이 산불감시원 직무에 지원하여 면접시험을
보다 사망한 사건이 발생했다. 직무를 수행하기 위한 능력을 검증 받기 위해 등산하다 사망한 것이다. 유교적 관점으로 보면 노인의 지원 자체를 막았어야 했다고 할 수 있다. 하나 자유적 관점으로 보면 노인의 지원은 자유롭다. 대신 그 만큼 자유에 대한 책임은 본인이 진다. 사망할지도 모른다는 리스크를 본인이 지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자유에 책임이 따른다고 말을 하면서
위험감수라는 책임은 지려하지 않는다. 그것은 자유를 기준으로 부도덕하다. 인터넷 실명제 논의가 있었다. 어떤 사람은 어차피 악플을 달지 않을 거라면 실명제 해도 괜찮을 것이 아니냐며 실명제를 옹호했다. 실명제를 비판하는 사람을 가리켜 잠재적 악플러로
간주했다. 그렇다면 묻겠다. 어차피 죄를 짓지 않을 것이니 외출 시 가슴에 이름표를
부착해도 괜찮은가? 이름표 부착을 비판한다면 잠재적 범죄자로 간주해도 괜찮은가? 인터넷과 현실을 동일시 할 수는 없다. 하나 논리는 같다. 어떤 도덕적 명분으로 사생활의 자유를 억압한 것이다. 이런 태도는 자유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기 때문에
나타난다. 모든 자유는 위험을 동반한다. 세상 어딜 가든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위험국가로 선교하러 간 선교자들은 그 위험을 감수했어야
했다. 그와 같은 것이다. 인터넷 세상도 악플이란 위험이 가득하다. 자유롭고 싶으면 그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그걸 방치하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불쾌하면 커뮤니티에 신고하고 차단하면 된다. 악플 때문에 모든 의견 자체를 막거나 실명제를 도입하는
것은 자유를 기준으로 부도덕하다.
지성이란 지각된 것을 정리하고 통일하여, 이것을 바탕으로 새로운 인식을 낳게 하는 정신 작용. 넓은 뜻으로는 지각이나 직관, 오성 따위의 지적 능력을 통틀어 이른다. 이런 지성이 있어야 강제 세뇌에 속지 않을 수가
있다. 지각된 것을 정리하고 통일한다. 알고 깨달은 것을 정리하고 통일한다. 무엇을 안다는 것인가? 자신을 아는 것에서 시작해야 한다. 내가 밥을 먹고자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허기졌기 때문이다. 이런 단순한 행동원리부터 시작해 대부분의 행동원리를
파악한다면, 어떤 세뇌가 강제되어도 그 세뇌가 끼치는 영향을
파악하여 원래의 행동원리와 세뇌 후의 행동원리를 구분 지을 수 있다. 이미 세뇌가 되어 있어도 냉정하게 판단할 수 있다. 나도 연하의 반말이 불편했던 적이 있다. 그런데 그 불편함이 유교에 영향을 받았음을 깨닫고 없애려고 노력했다. 그 도덕적 의무는 자유에 있어 불필요한 것이었다. 그렇게 나는 연령차별이란 도덕적 의무에서 해방되었다. 정치적 선동이나 종교적 맹신도 방법은 같다. 자신을 알고 있다면 선동과 맹신에 속지 않을 수
있다. 객관적으로 보는 방법을 말하겠다. 정치적 선동을 당하지 않으려면 정당 이름을 지우고
바라보면 된다. 가령 어떤 사람이 어떤 정당을 지지한다고 해보자. 그 사람이 정당에 선동되지 않으려면 정당의 하는
일을 바라볼 때, 정당의 이름을 지우고 행동 자체만 바라보면 된다. 반공주의자가 선동 당하지 않으려면 정당 이름을 지우고
친공산주의 행위를 저질렀는지에 대해서만 초점을 맞추면 된다. 민주주의자가 선동 당하지 않으려면 정당 이름을 지우고 반민주주의 행위를 저질렀는지에 대해서만 초점을
맞추면 된다. 행위에 초점을 맞추면 선동에서 다소 안전하다. 이는 종교도 마찬가지다. 종교 이름을 지우고 종교의 행동을 바라보면 옳고
그름이 분명해진다. 종교인이 죄를 지었음에도 종교인이라는 이유로 옹호하는 일이 있다. 그 때 종교를 지우고 죄만 바라본다면 옹호할 수 있겠는가? 이렇게 자신을 아는 것으로 자유를 얻은 이가 다양한
것을 아는 것을 바탕으로 새로운 인식을 낳게 하는 것을 가리켜 지성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자유롭기 위해서는 의지와 지성을 가지고 강요에 맞서고
세뇌에 속지 않아야 한다. 이러면 분명 불필요한 도덕적 의무에서 해방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만큼 필요한 것을 명확히 구분 짓고 필요한 만큼은 자발적으로 지켜야 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간단히 말하자. 본인의 생존권을 보장받고 싶으면 타인의 생존권을
보장해야 한다. 본인의 자유권을 보장받고 싶으면 타인의 자유권을
보장해야 한다. 슬픈 일이 있으면 유명인이나 지인이 슬픔이란 도덕적
의무에 동참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공격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그것은 잘못된 것이다. 낡은 도덕적 의무로 타인의 자유권을 침해하는, 자유의 관점에서 악덕이다. 성적 억압을 받는 이가 성적 자유를 누리는 이에게 성 상품화를 빌미로 공격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그것을 잘못된 것이다. 이것은 애초에 성적 매력의 상품은 잘못된 것이 아니기에
어처구니 없는 일이다. 모든 개인은 자신의 능력을 상품화하여 소유한 뒤 대여의 형태로 거래해야 한다. 거기에 성적 매력이 없어야 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성 상품화가 되었다고 가정해보자. 그 상품의 주인은 누구겠는가? 바로 상품화한 본인이다. 그 상품을 구매하는 이들은 성적 매력 외의 것에
간섭할 수 없다. 성적 매력을 판매하는 이와 성적 매력은 별개로 구분된다. 그렇게 함으로써 성적 매력을 판매하는 이는 자유로울
수 있다. 이런 것을 공격하는 것은 유교적 정조관념이나 여성주의적
탈코르셋(외면에만 집중하는)에 영향을 받았을 뿐이다. 성 상품화를 이유로 포뮬러1그리드 걸 폐지는 자유의 관점에서 분명한 악덕이다. 그 외 도덕적 의무를 명분으로 창작의 자유나 발언의
자유 등을 억압하는 행위는 지극히 부당하다 할 수 있겠다. 창작물을 즐기는 입장에서 창작의 자유를 부디 넓은 의미에서 받아드렸으면 좋겠다.
연령, 성별, 자산, 학력, 역할 등은 관계 없다. 자유국가에 속한 모두가 자유로워야 한다. 우리는 진리를 모른다. 거대한 우주 속에서 지구는 데굴데굴 어디론가 굴러가고 있다. 그런데 왜 존재하는지, 왜 굴러가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모르기 때문에 자유롭다. 육체를 알기에 자유로웠다면 세상은 모르기에 자유롭다. 이 모순은 ‘나’를 기준으로 하면 설명이 된다. 나의 육체는 알기에 자유롭지만 나 외의 것은 모르기에 자유롭다. 세상은 뭐든지 해도 된다. 설령 죄를 짓더라도 사후에 처벌받는 일은 없다. 그것은 높은 수준의 현대과학의 편린도 찾기 어려운
과거의 공상이 만들어낸 산물이다. 인간이 저지르는 행위에 제한이 없으면 사회가 혼란스러울 거라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니까 우리가 만들어야 한다. 한국이 자유롭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내가 자유롭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도덕적 의무에서 벗어난다면 그 의무로 질서를 유지하던
시대는 끝나게 된다. 새로운 시대를 만들어가야 한다. 인터넷이라는 희대의 소통 도구를 통해 자유를 기준으로 한 옳고 그름이 무엇인지 모두가 끊임없이 대화를 하며 만들어가야 한다. 이제 도덕은 살아있는 생물이라 했다. 이 생물을 어떻게 키울지는 이제 현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 손에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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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에게 부과된 도덕적 의무는 없다. 이 한 줄을 위해 3주를 썼네요. 이게 일반적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처음 쓰겠다고 했을 때는 단순 책임 여부만 고려했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끝날 게 아니더군요. 자유란 무엇인가 도덕이란 무엇인가 자유에 맞는 도덕은
무엇인가 도덕적 의무는 무엇인가 등 3주간 생각하면서 메모하고 하루 동안 글을 썼습니다. 다음 글은 글쎄요 필요한 걸 쓰겠습니다.
미국의 브랜다이스 판사가 정치적 의사 표현의 자유를
제한하는 법에 대한 판례에서 한 말입니다. 독립을 쟁취해낸 선조들은 국가의 궁극적 목적이 인류가 능력을 기르도록 자유롭게 하는 것이고 정부의 심의 권력이 전횡적 권력을 압도하는 것임을
믿었다. 그들은 자유를 목적이자 동시에 수단으로 평가했다. 그들은 자유가 행복의 비결이며 용기가 자유의 비결임을
믿었다. 그들은 원하는 대로 생각하고 생각하는 대로 말할
수 있는 자유가 정치적 진실을 발견하고 확산하는 데 필수 불가결한 방법이라고 믿었다. 언론과 집회의 자유가 없다면 토론이 무익함을 믿었으며, 그러한 자유가 있음으로 해서 토론이 불건전한 교의의
확산을 충분히 방어할 것이라고 믿었다. 자유에 대한 가장 큰 위협은 힘없는 사람들을 괴롭히는 것이라고 믿었다. 공적 논의는 정치적 의무이며, 이 의무가 미국 정부의 기본 원칙임을 믿었다. 이것이 투쟁하는 자유주의의 신조라고 주장한 존 듀이의
자유주의와 사회적 실천에서 발췌했습니다.
프랑스 자유주의 루소 자연으로 돌아가라
독일 사회민주주의 칸트 정언명령 감성은 지성이 준
명령(인간성이란 이름의 특정한 도덕)을 의무로 따르라
대강 이런 느낌을 받았습니다. 뭐라고 해야 하나, 어떤 사상이 국가 이념에 영향을 끼쳤다고 해야 할까요? 자세한 것은 좀 더 알아봐야겠지만요.
만약 분야별 의석이 도입되어 분야의 대표가 입법권을
쥐게 된다면 분명 역할주의가 실질적인 의미를 갖게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입법권 후보자의 공약이 입법이 아니라는 점이 이상했지요. 분야의 대표가 입법권을 쥐게 된다면 분명 후보자의
공약은 입법이 될 것입니다. 우선 이것을 실제 달성해야 할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역할수행으로 집단의 질서가 유지되고, 역할 외는 자유로움으로 개인의 개성은 유지된다. 개인과 개인의 능력을 분리하여 능력이 쓰이는 집단
내 역할과 개인은 분리된다. 개인은 능력을 상품화하여 그 상품의 주인이 된다. 그렇게 하여 개인은 고유성을 가진다. 역할주의는 질서와 자유의 공존을 통해 모든 개인이 자유로워지는 것을 목적으로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