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의 사회정착실패
게임의 사회정착실패는 국정의 타성과 태만을 상징한다. 게임은 사회정착에 실패했다. 2020년 하반기 모바일 게임 사용자 수만 해도 2600만명을 돌파했다고 한다. 국민 절반 이상이 게임을 즐기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게임을 즐기는 만큼 어떤 분쟁이 일어나는
것도 자명했다. 실제 게임회사와 고객 사이에서 심각한 분쟁이 발생했다. 그 분쟁으로 고객들이 돈을 모아 회사 앞으로 트럭을
보내는 일명 트럭시위를 할 정도였다. 그런데 이 시위가 일반적이지는 않다. 다른 분야를 생각해보자. 보통 분쟁이 발생하면 정해진 절차에 따라 분쟁을 해결했다. 소비자분쟁해결기준이다. 이 기준으로 분쟁을 중재했다. 그런데 왜 게임은 그러지 못했을까? 그건 분쟁사유에 해당하는 기준이 없었기 때문이다. 기준에 온라인게임서비스업이 없는 것은 아니다. 현존하는 기준의 항목을 살펴보자. 미성년자계약, 서비스 중지와 장애, 청약철회, 계속적 이용관계와 이용관계 거부, 허위 및 과장 광고. 이것 외에는 없다. 이 기준은 요즘 유행하는 온라인 게임의 특수성을
고려하지 않았다. 실제 분쟁은 고유의 특수성에서 일어난다. 특수성에 해당하는 기준이 없으니까 소비자분쟁해결기준으로
분쟁을 중재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럼 그 특수성이 무엇인지 알아보도록 하자.
본래 게임은 이야기 자체에 금전적 가치를 매겨 통째로
판매했다. 폴란드에서 외교 관례 선물로 선택한 위쳐나 발매
당시 커다란 센세이션을 일으킨 와우가 바로 그러하다. 오프라인 게임인 위쳐는 게임 자체를 팔았고 온라인 게임인 와우는 매월 일정 금액을 지불하고 이용하는 월정액 방식으로 서비스했다. 이 둘은 보통의 소설이나 만화나 영화와 같은 방식으로
게임 자체만 팔았다. 게임회사는 고객에게 가상의 세상을 체험하게 해주는 이야기꾼이었다. 지금의 소비자분쟁해결기준은 이것을 기초로 했다. 만약 모든 게임이 이런 형태였다면 지금의 기준은
아무런 문제가 없었을 것이다. 하나 누군가 굉장한 생각을 해냈다. 여기서부터 요즘 유행하는 온라인 게임의 특수성이 시작된다. 어떤 게임회사들이 이야기 내에 있는 요소에 금전적 가치를 매기기 시작했다. 가상의 세상에 있는 모든 걸 상품화하였다. 가상의 세상의 재화로만 얻을 수 있었던 장비나 치료제를
뿐만이 아니라 등장하는 인물에게조차 금전적 가치를 매겨 현금으로 팔기 시작했다. 게임회사가 직접 이야기 속의 상인이 되었던 것이다. 신대륙을 발견한 심정이었을까? 자본주의는 누군가 지역이든 분야든 선점하여 장악하면
후발주자가 추월하기 어렵다. 세계화가 된 지금 대부분의 영역이 선점되어 있다. 대다수 신생 기업은 후발주자에 머물렀으나 어떤 게임기업은 가상의 대륙을 만들어 그 대륙을 선점하여 가상의 상품으로 장사했다. 기가 막힌 상품화였다. 보다 적극적으로 상품을 팔기 위해 가상의 대륙에
가상의 전쟁터를 마련했다. 고객은 그 전쟁터에서 싸워 승리하는 것에 큰 만족감을 느꼈다. 이기기 위해 게임 내 상품을 마구잡이로 사들였다. 이쯤 되어 고객은 가상의 세상에 방문한 이세계인이 되었다. 현금만 지불하면 치트 능력을 보유한 주인공이 될
수 있었다. 요즘 유행하는 이세계물이 게임으로 구현된 것이다. 이세계물을 좋아한다면 사람들이 이런 종류의 게임에
빠지는 이유를 유추할 수 있을 거라 본다. 가상의 전쟁터에 무기를 공급하는 게임회사는 어느 순간 이야기꾼에서 무기를 파는 죽음의 상인이 되었다. 전쟁터 내의 경쟁 속에서 상품은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거기에서 발생하는 가치는 상상을 초월했다. 죽음의 상인이 된 게임회사는 실적이 나날이 올라갔다. 이야기꾼이었던 게임회사들도 그 흐름에 동참하여 이야기
속의 요소들을 팔기 시작했다. 그 결과 현재 모바일 게임 매출 10위권은 전부 이것과 비슷한 형태의 BM(비즈니스 모델)을 가지게 되었다. 게임 내 요소를 상품화하여 판매하는 것. 이것이 요즘 유행하는 온라인 게임의 특수성이다.
이런 특수성이 있음에도 소비자분쟁해결기준은 과거와
달라지지 않았다. 게임회사는 그 어떤 제약도 받지 않은 상태에서 원
단위부터 억 단위의 상품을 팔아버렸다. 게임 내 시스템 미비로 거래에 문제가 발생해도 거래에 대한 보증이 없었다. 현금으로 판 게임 내 상품의 품질에 대한 보증이 없었다. 새로운 상품의 가치를 하루 아침에 폭락시켜도 될
정도로 가치에 대한 보증이 없었다. 이에 대해 아무도 책임지지 않았다. 심지어 상품에 대한 상세내역을 거짓으로 고지해도 책임지지 않았다. 오로지 자본논리에 따른 시장경제의 흐름에만 맡겼을 뿐이다. 이런 건 요즘 시대 일반 기업에서는 보통 있기 어려운
일이다. 이래도 된다면 대부분의 기업은 과거 질서가 없었을
시대의 기업처럼 성장할 수 있다. 게임회사는 지금 무질서 속에서 말도 안 되는 수익을 올리고 있는 셈이다. 일상적으로 해왔기 때문에 게임회사는 죄책감이 없었다. 잘못된 것 자체를 몰랐기 때문에 죄책감이 있을 수가
없었다. 죄책감이 없는 폭거에 많은 고객이 분노했다. 시장경제에만 맡겼기 대문에 고객은 불만이 생기면
신규 고객 유입을 방해하는 별점테러로 대응하게 되었다. 별점테러란 모바일 게임의 평점을 의도적으로 낮추는 걸 의미한다. 그 테러가 부당하다 여긴 게임회사도 분노했다. 명확한 잘잘못의 기준이 없었기 때문에 사소한 불만으로도 평점을 낮추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서로 간의 갈등이 고조된다. 트럭시위는 온라인 게임 내의 상품 확률을 거짓고지
했기 때문에 발생했다고 한다. 이건 지금까지 쌓인 분노가 거짓고지로 터진 것으로 보는 것이 맞다. 트럭시위는 이런 흐름의 끝에서 발생한 것이다. 고객과 회사 사이에서 발생하는 분쟁을 중재하는 기준은
소비자보호에 있어 기초 중에 기초다. 이런 기초적인 기준이 없는 것을 보았을 때, 한국에서 게임은 사회정착에 실패했다.
이런 상황임에도 이에 대한 공적 논의가 거의 없다. 일부 국회의원이 트럭시위를 보고 이 사건을 해결해보려는
태도를 보이긴 했다. 그러나 게임의 영향력을 고려하면 이런 일부의 움직임은 너무 미흡한 처사다. 누군가는 게임의 중요도가 낮기 때문에 그런 것이라 말할지도 모른다. 한국에서 게임은 천대받았기 때문에 그런 선입견은
자연스럽다. 그러나 중요도는 그런 일방적인 선입견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얼마나 많은 시간을 써서 얼마나
많은 영향을 받았느냐에 따라 중요도가 달라진다. 생각해보자. 한국은 국민 절반이 게임으로 여가를 보낸다. 중요도가 낮을 수가 없다. 한국인에게 있어 게임은 이제 없어서는 안 되는 문화로 자리매김했다. 게임업계는 이제 인간의 여가를 책임지고 있다. 매우 중요한 역할이다. 게임이란 편견에서 벗어나 인구수와 시간과 영향력만
생각하면 게임이 사회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상당히 높은 편이다. 그럼에도 이런 현상에 대한 공적 논의가 별로 없는 걸 보면 정치권은 게임의 중요도가 낮다 생각했을
거라 본다. 그게 바로 새로움을 거부하는 타성에 해당한다. 시간이 흘러도 타성에서 벗어나려는 시도가 없다. 그게 바로 낡은 관념을 유지하려는 태만에 해당한다. 그러므로 게임의 사회정착실패는 국정의 타성과 태만을
상징한다. 이것에 대해 정치권만 타박하고 싶지 않다. 사회전반적으로 타성에 젖어 자유적응에 실패했기 때문이다. 한국은 자유적응에 실패했다. 사상과 구조는 강요로 둔 채, 개인에게 자유를 주니 사회가 제대로 돌아갈 수가
없었다. 대표적으로 출산율이 그렇다. 결혼과 출산을 강요하다가 자유롭게 놔두니까 출산율이
폭락한 것이다. 그렇다고 다시 강요할 수는 없다. 그러니 자유롭게 놔둬도 결혼과 출산을 자연스럽게
할 수 있도록 사상과 구조를 자유로 바꿔야 한다. 남녀유별이나 정조관념을 버리고 이른 시기에 빠르게 연애하고 성관계하고 결혼하는 풍조와 그에 맞는 사회구조가 형성되어야 저출산이라는 국가의
죽음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사회 전체가 그러하였으니 이런 타성은 모두의 책임이자 누구의 책임도 아니다. 새로운 길을 안내하지 않은 사상가의 책임이다.
이 타성이 일으킨 현상 세 가지를 지적해보겠다.
첫째, 거래 기준 부재에 따른 사회갈등
둘째, 효율적인 쾌락의 위험성에 대한 경계 미비
셋째, 미래산업의 성장동력 저하
첫째, 거래 기준 부재에 따른 사회갈등
우선 요즘 유행하는 모바일 게임의 형태가 어떠한지
게임을 즐기지 않는 사람도 이해할 수 있도록 현실에 비유해보겠다.
어떤 명당 낚시터가 있다고 가정하자. 고객은 그 낚시터에서 높은 만족감을 느낀다. 그 낚시터는 출입 자체는 무료지만 낚시터 주인이
제공하는 낚시물품만 빌릴 수 있다. (부분유료화) 고객은 만족감을 위해 낚시터 주인에게 낚시물품을 빌린다. (이야기 내 요소를 대여의 형태로 판매) 그러다 낚시터 주인이 특정 낚시터에서 좋은 물고기를 낚으면 좋은 낚시물품을 준다는 명목으로
고객들을 경쟁시킨다.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보다 좋은 낚시물품을 빌리게 된다. (경쟁을 부추겨 고가의 물품을 판매) 그때 낚시터 주인은 판매하는 낚시물품에 뽑기에 변동확률을 집어넣어서 좋은 낚시물품을 도박의
형태로 대여한다. (도박과 거짓고지) 낚시터 주인이 고객들을 출입시키기 위해 매일 일정한
낚시물품을 무료로 제공한다. (출석) 매달 일정 금액을 내면 고가의 낚시물품을 매일 저렴한
가격에 제공한다. (구독경제) 고객들은 좋은 낚시물품을 대여하여 고객들과 경쟁하는
걸 즐기는 것으로 만족감을 느낀다. 낚은 물고기는 기록으로 남아 우수한 낚시꾼의 증표가 된다. 이 증표는 실제 물건이 공급되는 것으로 표창이나 트로피 또는 낚시협회의 공인된 낚시꾼으로 명예의 전당에
오를 수 있게 된다. 낚시터에서의 기억과 기록이 애정이 된다. (매몰비용) 그러다가 낚시터 주인이 갑작스럽게 낚시물품의 가격을
올린다. 한창 낚시터에 비용을 지불하던 고객들은 혼란에 빠진다. 갑작스런 가격변동에 불만을 가지고 낚시터를 떠나려고
해도 매몰비용이 아까워 갈등하게 된다. 그렇다고 남자니 낚시물품의 대여비가 부담된다. 더군다나 이번 변동이 계속될 수 있는 확률이 높다. (안정성 부재) 갈등 속에 결국 남게 된다. 낚은 물고기와 낚시물품은 낚시터 주인의 높은 수수료를 받는 중개로만 거래가 가능하다. 수수료 부담으로 다른 방식을 통해 거래를 하다 손해를 보더라도 보상은 일절 없다. (거래보증 부재) 고객이 낚은 물고기나 낚시물품의 품질이 손상되어도
보상은 없다. (품질보증 부재) 고객이 낚시물품을 대여한 다음 날 그보다 품질이
높은 낚시물품을 판매한다. (가치보증 부재) 고객이 이런 것에 불만을 품고 항의하려고 해도 그 어떤 기준도 없다. (소비자분쟁해결기준 부재) 기준이 없기 때문에 고객은 다른 낚시꾼이 이 낚시터에 오지 못하도록 나쁜 소문을 퍼트린다. (별점테러) 끝내 낚시터 앞에서 트럭을 가져와 시위한다. (트럭시위) 어느 날 고객이 낚시터에 가보니 낚시터 시설과 주인이
없다. (게임종료) 그 동안 고객이 대여한 낚시물품이나 낚시기록이 사라졌다. (게임 내 아이템이 대여인 이유) 최근 고객이 대여한 낚시물품 비용은 통장으로 환불되었다. (일반적인 소비자분쟁해결기준) 고객은 허망한 표정을 지으며 주저앉는다. (슬퍼하는 고객)
지금 모바일 게임은 대강 이것과 같다. 구매와 환불까지만 기준이 있고 나머지는 아예 없다. 갈등이 일어날 수 밖에 없는 구조다. 이걸 어떻게 해야 하나. 이런 게임업계에 대한 정당한 비판을 부당하다 말하는
것은 전자업계가 전자제품의 보증기간을 무시하는 것에 대한 비판을 부당하다 말하는 것과 같을 정도다. 우선 최소한 세 가지 보증을 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본다. 하나, 거래보증. 둘, 품질보증. 셋, 가치보증.
하나, 거래보증. 게임 내 자유롭고 안전한 거래를 보증한다. 모바일 게임A에서 거래보증이 되지 않아 고객a가 현금 1억 9천만원의 손실을 보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에 대해 잠시 설명하겠다. 모바일 게임A는 개인 간 거래를 금지하고 5%의 수수료를 받는 경매장 거래만 가능했다. 고객a는 현금 2억 원의 가치를 지닌 아이템을 거래하고자 했다. 경매장을 거쳐서 거래하면 수수료는 1천만 원이 필요했다. 상당히 비쌌다. 이 수수료를 절약하기 위해 2억 원의 가치를 지닌 아이템을 1천만 원으로 경매장에 올렸다. 이러면 수수료가 50만 원으로 낮아져 9천 500만 원이나 절약할 수 있었다. 이런 방식의 판매는 구매자가 아이템을 1천만 원에 구매하고 나머지 잔금은 다른 방식으로 지불하면 된다. 그런데 경매장에 아이템을 올리자마자 예약한 구매자가
아닌 다른 사람이 사 가버리고 말았다. 경매장에 고가의 아이템이 저렴한 가격에 올라오면 자동으로 구매하도록 설정된 매크로(컴퓨터 프로그램)로 구매한 것으로 추측한다고 한다. 이러면 단순히 2억 원의 아이템을 1천만 원에 팔아버린 것이 된다. 고객a는 현금 1억 9천만 원의 손해를 입었다. 게임회사는 이것이 정상거래라며 어떤 보상도 지급하지
않았다. 물론 이것은 편법을 이용하다 손해를 본 것이 맞다. 그냥 경매장에 2억에 올리고 팔았다면 수수료는 비싸도 정상적인 거래가
가능했을 것이다. 하나 애초에 개인 간 거래를 금지한 것이 잘못되었다. 게임회사가 게임 내 상인이 되어 고객에게 게임 아이템을
현금으로 팔았다. 일종의 디지털 자산을 판매한 격이다. 게임이 종료되면 아이템이 사라지기에 임시 대여의
형태긴 하지만 게임이 존재하는 이상, 그 자산을 소유한 사람은 게임회사에 정당한 소유권을 주장하여 소유물에 대한 정상적인 사용과 수익과 처분을 할 수 있어야 했다. 아예 거래 자체가 안 되는 것이라면 몰라도 경매장을
통한 거래가 가능한 이상 개인 간 거래도 가능했어야 했다. 이용약관을 변명으로 내세울 수도 있다. 그렇다면 묻겠다. 전자기업이 판매한 전자물품의 중고거래를 회사 내 경매장에서만 가능하다 정해두는 것이 타당하다 여겨지는가? 말도 안 되는 폭거다. 물론 보호구역 부동산이나 천연기념물이나 운석 같이
소유권 해석이 달라지는 예가 없는 것은 아니다. 하나 게임 내 상품을 그런 식으로 특별히 대해줄 필요는 없다. 이건 그냥 게임회사만 유리한 불공정한 규칙을 약관으로 만들어버린 것에 불과하다. 가상의 세상이니 현실과 다르다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묻겠다. 인간 사이에서 발생하는 분쟁이 있는데 가상이니 예외라
한다면 그걸 법치가 할 수 있겠는가? 이 세상 법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어야 법치라 할 수 있다. 사사로운 인간관계에 일일이 법치가 적용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건 적용되지 않는 게 아니라 암묵적인 합의하에
그냥 넘어가는 것일 뿐이다. 세세한 것까지 전부 법으로 해결하자는 것이 아니라, 법의 테두리 내에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가상의 세상에서도 법치는 적용되어야 한다. 게임회사가 판매한 디지털 자산에 대한 거래보증을 하지 않는 것은 게임회사의 귀책사유가 된다고 본다.
둘, 품질보증. 판매한 상품의 품질을 보증한다. 게임회사가 판매한 상품의 품질을 보증하는 일은 극히 드물다. 본래 게임은 이야기 자체에 가치를 매겨 판매했다
하였다. 그때에 게임 내의 상품은 게임 내의 재화로만 거래할
수 있었다. 그 아이템에 금전적 가치가 없었기 때문에 품질을
보증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것이 관행이 되었다. 게임 내 상품에 금전적 가치를 매겨 판매하게 되었음에도 품질을 보증하지 않았다. 금전적 가치가 매겨진 것에 대한 품질을 보증하지 않자 수백, 수천만의 돈을 지불해도 그에 따른 정당한 대우를
받지 못한 게임 이용 고객들이 분노했다. 게임회사는 관행상 하지 않는 것이었기에 이들의 분노를 이해하지 못했다. 게임 운영에 있어 게임 내 상품의 가치 변동은 언제나 게임사의 권한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다시 말하지만 게임 내 상품에 금전적
가치가 없을 때 해당되는 얘기다. 이를 용인하는 지금의 게임이용약관은 명백하게 잘못되었다. 이 변화를 명확하게 인지해야 갈등의 본질을 알 수 있다. 게임에서 아이템의 품질이 훼손되는 일은 보통 다음과 같다. 밸런스 패치, 버그, 에러 등. 밸런스 패치에 대해 잠시 얘기해보자. 게임은 밸런스가 맞아야 한다. 서바이벌 게임을 한다고 가정해보자. 서바이벌 게임은 제공되는 무기의 성능의 균형이 맞아야 공정한 게임이 가능하다. 완전히 같은 성능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일정한 선을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예컨대 서바이벌 게임의 무기 종류에 검, 창, 활, 총이 있다고 해보자. 이 중 총이 다른 무기에 비해 지나치게 강하다. 총을 든 사람이 너무 유리하여 게임이 재미가 없어진다. 이 총을 빼거나 약하게끔 만들어야 밸런스가 맞게
되어 재미있는 게임이 된다. 이렇게 무기 성능의 균형을 맞추는 것 같은 걸 밸런스 패치라고 한다. 게임회사에서 검, 창, 활, 총에 해당하는 무기를 팔았다고 해보자. 그 중 총의 성능이 지나치게 강하여 약하게 만드는 밸런스 패치를 했다고 해보자. 그러면 게임회사가 판매한 총의 성능이 낮아지게 된다. 밸런스 패치로 아이템 품질이 훼손된 것이다. 그럼에도 게임회사는 관행에 따라 아이템의 품질을
보증하지 않는다. 어떤 보상을 할 의무가 없다. 불만을 잠재우기 위한 게임회사 자체적으로 작은 보상을
하는 경우는 종종 있지만, 품질 보증에 따른 보상이 적용되지는 않는다. 버그나 에러도 마찬가지다. 아이템 품질이 훼손되더라도 그에 대한 보상을 하는 일은 그리 많지 않다. 이것이 잘못되었다. 모든 상품의 품질을 보증하라 하지는 않겠다. 그건 게임운영을 지나치게 어렵게 한다. 그래도 최소한 일정 금액 이상의 상품은 품질을 보증해야 한다. 어떤 캐릭터나 아이템의 뽑기에 쓰인 비용이 일정금액
이상이 되면 그 상품은 품질보증서가 붙어야 한다. 기간은 약 1년 정도는 보증하고, 그 기간 내에 품질이 훼손될 경우 그에 해당하는 게임 내 상품으로 보상해야 한다는 소비자분쟁해결기준이 있어야 한다. 게임 내 요소들을 현금으로 팔아버리다 보니 세부적인
것이 너무나도 많다. 그러니 보증 기준은 상품이 아닌 금액이 되어야 한다. 어떤 상품의 품질이 훼손되면 그 상품을 구매하는데 쓰인 비용을 기준으로 보상해야 한다. 금액보증기간제도다. 금액보증기간제도라면 뽑기 상품을 실제 뽑지 못하더라도
그 뽑기에 지불한 금액을 보증해야 한다. 이런 최소한의 품질보증이 없다면 소비자는 안심하고 구매할 수 없다. 게임회사가 현금으로 판매하는 상품에는 게임회사가 보증하는 보증서가 붙어야 한다. 과금(유료이용고객)과 무과금(무료이용고객)은 앞으로 보증서의 차이로 구분되어야 한다고 본다. 이런 건 어떨까? 과금 상품에는 기본적으로 보증서가 붙고 그 보증서를 누르면 상품에 쓰인 비용이 기록되어 있다. 이후 상품의 품질이 훼손되면 그 금액만큼 보상한다.
셋, 가치보증. 판매한 상품의 가치를 보증한다. 요즘 유행하는 모바일 게임은 경쟁이 기본이다. 그러다 보니 상품의 가치를 보증하지 않으면 아예
쓸모 없게 되는 일도 허다하다. 검, 창, 활로 경쟁하고 있는 곳에서 총이 발매된다고 가정해보자. 어떻게 되겠는가? 총이 없으면 경쟁 자체가 어려워져 검과 창과 활은
쓸모가 없게 되어버린다. 최근 검과 창과 활을 구매한 고객은 큰 손해를 보게 되는 것이다. 예컨대 전자제품은 개인의 주관적인 절대평가로 상품의 가치가 판단되어 고성능의 새로운 상품이
발매되어도 어느 정도 가치는 유지된다. 반면 게임의 상품은 객관적인 상대평가로 상품의 가치가 판단되어 고성능의 새로운 상품이 발매되면 가치가 폭락한다. 그 차이로 게인 내 상품은 가치가 보증되어야 한다. 그렇다고 계속 성능이 같기는 어렵다. 그러면 게임업계가 돈을 벌기 어려워진다. 이는 마치 전자업계가 고성능의 신상품을 발매하지
않는 것과 같다. 그러니 최소한의 가치를 보증할 수 있는 기간을 정해야
한다. 시즌제의 도입이다. 일정기간 지날 때마다 게임 내 상품의 성능이 고르게
성장한다. 예컨대 1990년대 무기와 2000년대 무기와 같이 연도별로 나눈 것과 같다고 보면
된다. 6개월 정도 시즌을
나눈다면 그 6개월 안에 발매하는 상품의 성능은 균형이 맞아야
한다. 이렇게 시즌이 있어야 고객이 상품 가치가 언제까지
보증되는지 인지할 수 있다. BM 또한 시즌제로 나눠 일정기간이 지나지 않으면 새로운 BM을 추가할 수 없도록 해야 한다. 게임 초기에는 시행착오를 겪을 수 있으니 예외로 둔다 쳐도 이후에는 지켜야 하는 규정이
되어야 한다고 본다. 이런 시즌제로 게임 내 상품의 가치가 안정적이게 되어야 고객은 안심하고 구매할 수 있게 된다. 만약 지키지 못하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자동차나 스마트폰에 결함이 생기면 전량 리콜하는 걸 보았을 것이다. 시즌이 지켜지지 않아 가치보증이 되지 않았을 경우
게임회사가 그에 대한 모든 책임을 지는 것은 그다지 부당하지 않다고 본다.
이런 보증이 게임회사 입장에서 달갑지만은 않게 느껴질
것이다. 하나 소비자가 안심하고 구매할 수 있는 명확한 기준이
있어야 비로소 게임이 사회에 정착했다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외에도 가상의 세상에서 거래하는 이들에 맞는 다양한 소비자분쟁해결기준이 있어야 고객과 회사 사이에서
갈등이 중재되어 감정적인 별점테러도 줄어들거라 본다. 기준이 없기에 고객 또한 게임 자체의 상품화와 게임 내 요소의 상품화를 명확하게 구분 짓지 못했다. 게임 자체의 상품화는 게임 내 요소가 무료다. 무료라는 인식이 모든 게임에서 BM에 대한 이해 없이 게임재화를 요구할 수 있는 근거가
되었다. 그런 고객의 태도에 게임회사 또한 진절머리 치게
되었다. 이는 서로의 몰이해가 만든 갈등이다. 만약 분명한 기준이 정립되면 이런 몰이해는 줄어들거라
본다. 무질서는 고객과 회사 간의 불필요한 분쟁의 야기했다. 이런 현상은 게임회사 혼자 질서를 만드는 것이 아니기에
게임회사에게만 책임을 물을 수는 없다. 지금까지는 시행착오로 여기고 앞으로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가야 한다. 새로운 질서가 험악한 관계를 화합으로 이끌 것이다.
둘째, 효율적인 쾌락의 위험성에 대한 경계 미비
게임은 효율적인 쾌락의 마지노선이다. 이보다 덜한 효율에는 소설과 만화와 영화가 있고, 더한 효율에는 도박과 마약이 있다. 현실을 기준으로 쾌락을 얻는데 필요한 노력이 줄어들수록
효율적이다. 정리해보자. 현실을 경험하기 보다 소설을 읽는 것이 효율적이다. 소설을 읽으면서 작중 세상을 상상하기 보다 형상화된
만화나 영화를 보는 것이 효율적이다. 만화나 영화를 보면서 형상화된 가상의 세상에 참여하고 싶은 욕구를 현실에 풀기보다 게임 내에서 바로 체험하여 욕구를 충족해버리는 것이 효율적이다. 게임이 인기가 많은 것은 굉장히 효율적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런데 여기서 더 효율적이게 되면 반사회적이게 된다. 도박과 마약이다. 도박은 단순한 놀이로 큰 돈이 오가는 것으로 큰
쾌락을 얻고 마약은 체내 물질 주입으로 큰 쾌락을 얻는다. 노력 대비 얻는 쾌락의 수치가 굉장히 높다. 그러다 보니 인간의 삶이 피폐해진다. 도박은 인간의 가치관을 망가트린다. 지금까지 소중하게 여긴 것보다 도박의 승리를 더 가치 있게 여긴다. 마약은 인간의 삶을 망가트린다. 마약에 대한 과도한 의존성은 사이비종교와 같이 초법적인 집단을 탄생시킬 우려가 있다. 멕시코 마약 카르텔이 대표적이다. 그런데 사실 마약은 중독성이나 의존성보다 효율이
더 위험하다. 생각해보자. 예를 들어 뇌에 컴퓨터를 연결하여 굉장한 쾌락을
경험한 기억을 주입한다고 해보자. 기억이 주입된 순간부터 그 기억이 재생되면서 실제 경험하는 것과 같게 된다. 그 기억을 주입 받은 사람은 아무런 노력 없이 그 쾌락을 경험할 수 있게 된다. 그러면 마약과 쾌락 기억 중에 무엇이 더 인기 있겠는가? 별다른 부작용이 없고 복잡하고 재미있는 쾌락 기억이
더 인기 있을 것이다. 아마 어떤 경험도 하지 않고 기억 주입만 받으며 살아가는 사람이 생길지도 모른다. 지극히 반사회적이다. 기억 주입이 부작용은 없더라도 인간의 자아에 큰 영향을 줄 확률이 높다. 인간의 자아는 세포의 여론이 형성한 기억을 기초로
한다. 그 기억을 주입 받는다는 것은 기억의 주인의 자아의
일부를 이식 받는 것과 같다. 자아의 복제다. 기억의 추출과 주입이 가능해지면 기억의 상품화가 시작될 것이다. 그러면 인기 있는 기억이 몇 종류 나뉘게 될 것이다. 다수의 사람이 같은 기억을 공유한다. 다수의 사람이 고유성을 잃고 같은 자아가 되어 간다. 썩 좋은 결말은 아니다. 소설과 만화와 영화와 게임을 생각해보면 인간이 즐기는
문화는 점점 더 효율적이게 되었다. 그렇다면 이런 기억 주입도 기술이 발달하면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인류는 효율을 좇다 자아의 자유를 잃어버리게 될지도 모른다. 효율의 끝은 파멸밖에 없다. 따라서 인류는 효율적인 쾌락의 위험성에 대한 경계를
늦춰서는 안 된다.
게임은 스펙트럼이 넓다. 정신연령이 낮은 사람도 즐길 수 있는 게임이 있는가
하면 정신연령이 높은 사람도 위험한 게임이 있다. 이는 다른 문화와 다를 바 없지만 직접 체험한다는 점에서 위험도의 정도가 다르다. 위험도는 다양한 기준으로 판단할 수 있는데, 쾌락을 기준으로 한다면 어렵고 복잡할수록 건전하고 쉽고 간단할수록 불건전하다. 이런 노력이 불필요한 불건전한 게임이 효율적인 쾌락의
마지노선이 된다. 게임 내에서 지나치게 낮은 확률로 높은 재화(현금교환이 가능한)를 얻을 수 있다면 그것은 효율에 있어 도박과 다를
바 없게 된다. 마지노선을 넘게 된다. 게임 내에서 노력이 필요한 모든 걸 현금으로 구매해
그 노력으로 얻을 수 있는 쾌락을 단숨에 느끼게 된다면 그것은 효율에 있어 마약과 다를 바 없게 된다. 마지노선을 넘게 된다. 게임이 마지노선을 넘지 않기 위해서는 지나치게 낮은
확률과 높은 대가를 지양하고 목적(예컨대 경쟁에서 승리)을 일정 부분 이상의 노력이 필요하게끔 게임을 설계해야 한다. 앞서 게임 내 요소를 상품화하여 파는 걸 구매하는 이들을 가리켜 치트 능력을 현금으로 사는 이세계인이라
비유하였다. 이세계물은 현실의 주인공이 이세계로 넘어갈 때 쉽게
능력을 얻어 타인보다 우월하게 되는 걸 감정이입하며 즐긴다. 마찬가지로 이런 종류의 게임 또한 쉽게 능력을 사서 타인보다 우월한 것을 체험하는 걸 즐긴다. 이 자체를 나쁘다 말하지 않겠다. 자칫하다가는 마지노선을 넘을 우려는 있으나 그 선을
지킨다면 충분히 즐겨도 된다. 하나 그런 게임이 깊이 있다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치트 능력으로 우월감을 뽐내는 이세계물이 그리 수준 높다 말하기 어려운 것처럼 말이다. 그래픽 수준이 높고 오가는 돈이 많아도 쉽게 산
능력으로 쉽게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면 그 게임은 치트 능력을 보유한 주인공이 등장하는 이세계물과 다르지 않다. 게임은 쉬우면 재미없다는 말이 있다. 거기에 하나 더해 게임은 쉬우면 위험하다라는 말을
붙이겠다. 게임이 반사회적이게 되지 않기 위해서 게임회사는
효율적인 쾌락의 위험성에 대한 경계를 늦춰서는 안 된다.
셋째, 미래산업의 성장동력 저하
분명 한국에 기회는 있었다. 충분한 시간이 있었다. 누군가 별다른 고찰 없이 단편적인 생각으로 게임을
악으로 몰지만 않았다면 게임 자체를 상품화하여 팔던 시기에 게임의 사회정착이 가능했을지도 모른다. 그랬다면 효율적인 쾌락에 대한 위험성을 인지하고 그에 대한 충분한 대응책을 마련했을 것이다. 소비자분쟁해결기준도 게임 내 요소의 상품화를 포함했을
것이다. 게임이 사회정착에 성공했더라면 지금 같이 게임개발의
주도권을 빼앗기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제 한국게임보다 나은 외국게임이 수두룩한 상황이다. 그래서 한국은 게임강국이 아니라 게임플레이강국이라는 미묘한 별칭을 얻게 되었다. 안타까운 일이다. 무언가 새로운 것이 나오면 모른다고 무조건 악으로
몰지 말고 충분한 고찰로 현명한 대응책을 마련해야 할 것이다. 일방적인 선입견으로 게임을 홀대하며 악으로 몰아가던 이들이 셧다운제를 만들고 각종 제약과 억압을 주도하여
한국의 게임산업을 쇠퇴시킨 것은 물론이고 게임이 반사회적이게 될지도 모르는 위험에 처해지게 되었다. 셧다운제는 한국 자유의 수치다. 만화의 성장동력은 만화를 악으로 몰던 이들이 저하시켰다면 게임의 성장동력은 게임을 악으로
몰던 이들이 저하시켰다. 너무나도 명백하다. 지금까지는 그렇다 치다. 지금부터라도 게임을 진지하게 바라봐야 한다.
생각해보자. 소설과 만화와 영화의 흐름을 생각해보면 필시 게임의
시대가 올 수밖에 없다. 한국에서 이런 게임이란 문화를 단편적으로 생각한다면 한국문화의 미래는 어두울 수밖에 없다. 이미 치트 능력의 구매가 가능한 이세계물 게임의 범람으로 한국 게임의 미래는 밝다고 하기
어렵다. 이런 종류의 게임은 오래가는 것이 드물어 게임 브랜드가
성장하질 못한다. 브랜드가치가 전무한 게임이 줄줄이 나와서 한철 장사하듯
서비스해봐야 한국게임은 성장하지 못한다. 이런 종류의 게임은 내부 구조가 지나치게 단순하여 그래픽 같은 외적인 요소만 발전할 수밖에 없다. 내적인 발전을 할 수가 없다. 창의력이 전무한 게임에 어떤 새로운 가치가 있고
어떤 예술적 가치고 있고 어떤 미래가 있는가? 이런 종류의 게임을 양분 삼아 나오는 다음 게임은 도대체 무슨 가치가 있는가? 똑같은 게임만 계속 양산될 뿐이다. 이런 게임의 범람은 가상의 세상에 질서가 없었기 때문이다. 가상의 세상에서 장사하는 게임업계는 상품에 대한
아무 보증 없이 장사하는 전자업계와 같이 비정상적인 수익을 얻게 된다. 그러니까 능력을 고가에 팔아 높은 수익을 챙기는 이세계물이 유행했던 것이다. 이 유행을 끝내려면 하루빨리 게임 내 요소의 상품화에
대한 소비자분쟁해결기준이 바로서야 한다. 옛날 한국 게임은 분명 어렵고 복잡하여 노력이 필요했다. 어렵고 복잡하여 몰입도도 강했지만 쾌락의 위험성에서는 다소 안전했다. 인간이 어떤 쾌락을 얻기 위해서 이 정도의 노력은
필요하다라는 인식을 주기 충분했기 때문이다. 이런 종류의 게임은 충분히 문화예술이 될 수 있다. 하나 이런 게임은 이세계물에 비해 수익이 좋지 못하다. 이세계물의 비정상적인 수익이 끝이 나야 문화예술이 될 수 있는 게임과 수익이 어느 정도는 비슷해질
수 있다. 그래야 이세계물에 편중되지 않고 모든 게임이 고르게
발전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발전이 미래산업이 될 게임산업 전체의 발전으로 이어질 것이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깨닫는 것이 있다. 지금 정치체제로는 급변하는 시대흐름을 쫓아가기 어렵다는
것이다. 분야의 대표가 입법권을 쥐고 있다면 분야의 성장에
도움이 되는 법안을 즉각적으로 제안했을 것이다. 그랬다면 게임업계가 이런 일그러진 성장을 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법치국가라면 일일이 시위할 것이 아니라 입법으로 싸우는 것이 정상이라 생각된다. 게임 이용 고객이 트럭을 보내는 시위를 하는 것이
유행하고 있다. 그런데 사실 정상적인 절차라면 입법권 대표인 지역구
국회의원에게 이런 분쟁에 대한 공적 논의를 요구했을 것이다. 게임 이용 고객은 전국에 있다. 각 지역의 게임 이용 고객이 각 지역의 국회의원에게 이런 사항을 전달했다면 어쩌면 진작에
소비자분쟁해결기준이 바로 섰을지도 모른다. 이런 게 안 되는 까닭은 국민과 정치가 너무나도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정치가 국민과 관련이 없다 생각하니까 트럭 시위는 하면서 이런 건 할 수 없는 것이다. 애초에 선거 자체도 아예 관련이 없는 사람을 뽑을
수밖에 없게 되어 있다. 나는 지금까지 선거 투표를 하면서 그 후보가 공약으로 내세운 정책이 나와 관련이 있던 적이 많지 않다. 그건 나뿐만이 아닐 것이다. 이게 비정상적이다.
자유국가의 국민은 이기적이어야 한다. 자기자신의 의사를 명확하게 표출할 수 있어야 한다. 이기주의가 나쁘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이기심이 잘못을 만드는 것이 아니다. 시야의 좁음이나 지성의 부족이 잘못을 만드는 것이다. 충분한 현명함을 갖추고 있으면 이기적이어도 좋은
결과를 만들 수 있다. 각자의 역할수행이 각자의 이익이 된다고 가정해보자. 그러면 모두가 이기적일 경우 모두가 제 역할을 다하게 될 것이다. 정치가 경제가 사회가 문화가 모두가 각자 자기 역할에 충실하기만 해도 기본적인 행복요건은
달성할 수 있다. 그것이 무엇이 나쁘겠는가? 모든 국민이 자기자신의 의사를 명확하게 표출할 수
있도록 직접적인 이해관계가 있는 사람이 국민의 대표가 되어야 한다. 이해관계가 있는 집단의 대표가 입법권을 쥐어야 한다. 이해관계가 있는 분야의 대표가 입법권을 쥐어야 한다. 분야의 대표가 입법을 공약으로 내세워야 한다. 분야에 속한 국민은 그 공약을 보고 후보를 선택해야
한다. 그렇게 해서 모든 국민이 자신의 의사를 입법에 반영하는
걸 경험해야 한다. 그렇게 하면 선거에 대한 책임의식이 싹트게 될 것이다. 의사반영과 책임의식은 분명 국민의 정치의식의 성장을 도울 것이다. 그 성장이 한국 정치의 성장으로 이어질 것이다. 한국 정치의 성장이 한국의 성장으로 이어질 것이다. 한국의 성장이 한국인을 행복하게 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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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엔 쉬어가는 글이었는데 생각보다 생각할 게 많았네요. 다음 글은 인간교육입니다. 그 다음은 어쩌면 역할주의입니다. 역할주의를 정리하는 건 생각보다 어렵군요. 다양한 주제를 정리하면서 필요한 생각과 지식을 쌓아야
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성추행과 구조도 분간 못할 정도로 성에 취약한 여성이
정상적인 구조를 성추행으로 신고, 그 신고를 믿고 구조하려던 남성을 처벌, 그 처벌로 위험한 여성을 구조하려는 남성 수의 격감, 남녀갈등의 고조화, 분열, 붕괴, 이것을 초래한 사람은? 여성이 성에 취약하도록 세뇌한 정조관념이 투철한
여성주의자. 간단합니다. 성상품화가 불편한 까닭도 그걸 불편하게끔 성에 취약하도록
세뇌했기 때문에 불편한 겁니다. 인간이 성을 보고 불편한 게 정상일 수가 없습니다. 과거 남성이 여성에게 주입한 정조관념을 어떤 여성들이 그걸 여성의 본성인 마냥 취급해서 성에 취약한 걸 여성인권이라 주장하고 있는 것일
뿐입니다. 일부 여성이 그런 자신의 이익을 위해 다른 여성을
약자로 만드는 꼴을 두고 보기 어렵네요. 여성이기 때문이라기보다 인간을 약자로 만드는 꼴을 보고 있을 수가 없습니다. 선천적으로 약한 사람은 어쩔 수 없을지 모릅니다. 하나 강해질 수 있는 사람은 강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예컨대 의지가 그렇습니다. 인간의 의지는 타고납니다. 대부분의 아기가 의사표현 할 것이 있으면 울고 봅니다. 거의 모두가 강한 의지는 타고나는 겁니다. 의지가 약한 사람은 환경에 의해 의지가 꺾였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는 그렇다 칩시다. 지금부터라도 인간을 약하게 만들지 마십시오.
A당이 잘못하면 B당이 권력을 쥐고 B당이 잘못하면 A당이 권력을 쥐는, 실상 양당이 정치를 독점하는 구조. 잘못되었다고 봅니다. 정치가 개개인이 아니라 이런 구조가 잘못되었다고 봅니다.
저출산 문제는 나한테 대책 비용의 절반만 줬어도
해결했을 겁니다.
생활능력은 꽝이라 사는 게 힘드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