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와 관광
인류의 문명은 개인주의로 진보했다. 문명은 인류가 이룩한 비교적 높은 수준의 물질적과
기술적과 사회 조직적인 발전을 뜻한다. 개인주의는 개인의 의의와 가치를 중시하여, 개인의 권리와 자유를 존중하는 사고방식을 뜻한다. 인류는 생존을 위해 집단을 이루면서 집단주의가 나타났고, 그런 집단의 문명이 발전하면서 객관적이고 효율적인 체제가 갖춰짐에 따라 개인주의가 나타났다. 집단주의에는 가족주의, 혈통주의, 연고주의, 신앙주의, 전체주의, 사회주의, 공산주의 등이 있고 개인주의에는 자유주의, 민주주의, 자본주의 등이 있다. 집단주의는 집단의 규율과 집단의 권리와 집단의 소유를
중시하고 개인주의는 개인의 자유와 개인의 권리와 개인의 소유를 중시한다. 내가 주장하는 역할주의는 개인의 역할을 중시하는 개인주의에 해당한다.
집단주의는 집단을 중시하여 집단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집단 이기주의가 되곤 한다. 잠깐 이기주의에 대해 정리하겠다. 이기주의는 본인의 이익만을 위하는 것으로 본인의 의지인 것은 타인의 이익이 되더라도 본인의 이익만을 위하는 것과 같으므로 본인의 의지인
모든 것이 이기주의다. 고찰 없는 자유의지가 없다는 명제아래 이기주의는 고찰이 끝난 본인의 의지인 모든 것을 말한다 할 수 있다. 집단 이기주의와 구별하기 위해 개인 이기주의라 하겠다. 이타주의는 본인의 이익보다 타인의 이익이 더 높을
때를 말하는 것으로 타인의 의지인 것은 본인의 이익이 되더라도 타인의 이익이 더 높으므로 타인의 의지인 모든 것이 이타주의다. 간단히 정리해 본인의 의지는 모두 이기주의고 타인의
의지는 모두 이타주의다. 자유의지를 기준을 이기주의와 이타주의를 구분한 것은 이래야 책임소재가 명료해지기 때문이다. 본인의 의지라면 남을 돕는 것도 이기적이야 본인이 책임을 지는 법이고 타인의 의지라면
나를 위한 것도 이타적이어야 타인이 책임을 지게 된다. 본인의 의지인 것은 본인이 책임지고 타인의 의지인 것은 타인이 책임진다. 일반적으로 악이란 정당한 기준이나 절차 없이 과한 이익이다. 책임소재가 분명하지 않으면 일방적 이익이나 손해가
발생해 부당한 기준으로 과한 이익이 나타나 악을 유발할 수 있다. 책임소재의 명료화는 분명 악을 줄일 수 있을 것이다. 본론으로 돌아가자. 집단 이기주의는 집단의 이익만을 추구하여 개인의 의지와 관계 없이 집단이란 타인들의 이익을
우선시하게 되므로 이타주의가 된다. 집단에 속한 모든 인간이 집단의 이익만을 바란다면 집단 이기주의도 개인 이기주의가 될 수 있으나, 그건 모든 집단 구성원이 영원히 같은 생각을 할
거란 망상과도 같다. 인간이 인간인 이상 전체주의 국가에서조차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이 나온다. 설령 일순간은 같은 생각을 하더라도 시간이 흐르면 생각이 달라진다. 어떤 경우에도 집단 이기주의는 이타주의가 된다. 전통적인 도덕관념에 의해 이타주의가 옳다는 인식이
있는데 이는 집단주의의 영향이 크다. 집단주의 관념에 의해 본인의 의지가 아닌 타인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것이 옳다고 인식했던 것이다. 이타주의가 옳다는 관념은 단순히 체제의 영향으로
진리가 아니다.
집단 이기주의는 개인의 이익보다 집단의 이익을 우선시하여
집단 구성원의 이익만을 위해 부당한 입시와 취업을 지원하고, 횡령이나 배임을 모른 척 하기도 한다. 만약 비리나 횡령 같은 집단 밖인 사회에 피해를 주는 것에 대해 내부고발자가 나오면 그것이
사회에 이롭더라도 집단 내에 피해를 끼친 배신자가 되어 괴롭힘을 당한다. 이런 걸 정당화하는 집단주의의 논리는 두 가지 있는데 하나는 전통적인 도덕관념이고 둘은
집단의 이익이 개인의 이익으로 돌아온다는 인식이다. 도덕과 이익으로 집단주의에 의한 범죄는 정당화된다. 이런 집단주의는 발전이 느린 시골일수록 깊게 남아있다. 예를 들어 외지인이 시골에 가면 마을발전기금과 선물을 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시골 주민에게 배척되거나 괴롭힘을
당한다. 미개하다. 이런 집단주의 폐해를 보고 부도덕하다 오해할 수
있는데, 집단주의에서는 지극히 도덕적이다. 그들은 그들이 알고 있는 도덕 내에서 올바른 일을
했을 뿐이다. 이제는 도덕에 대해 제대로 알아야 한다. 도덕은 단지 특정 시대의 옳고 그름에 불과하다. 진리가 아니다. 그럼에도 잘못된 모든 것을 부도덕하다 여기는 것은
관념의 특성 때문이다. 인간이 가진 감각과 감정과 욕구와 같은 성질은 환경이나 교육으로 학습된 관념으로 구체화된다. 구체화된 후천적 성질을 직접 느낀 인간은 본인이 느낀 감각이나 감정이나 욕구기 때문에
그걸 본인의 선천적 성질인 본성으로 착각하게 된다. 본인의 본성으로 착각한 성질과 그 성질을 만든 관념을 담은 사상은 몹시 비슷할 것이므로 진리인 유전자에서 비롯된 본성과 비슷한 사상을 진리로
착각하게 된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본인의 사상을 부정할 수가
없는 것이다. 특정 사상에 세뇌 당해 구체화된 감정을 가진 사람은
특정 사상이 본인의 감정을 완전 긍정해주는 것과 같은 기준을 느껴 자아와 사상을 일체화하여 바라보기도 한다. 성을 죄악시하는 관념에 학습되어 성을 죄악시하는
인간이 성을 죄악시하는 사상을 보고 어떤 기분을 느끼겠는가? 아, 나를 긍정해주는 이 사상은 좋고 옳은 거구나. 진리와 무관하게 올바름이 결정되어버린다. 한국에서 저출산이란 국가소멸 위기가 닥친 것은 성을 죄악시하여 이성관계를 파탄 내게 한 전통적인 도덕관념에 담긴 유교 사상이 주 원인이다. 종교인 또한 같은 원리로 종교를 진리로 여기고 있다. 이처럼 관념의 특성으로 도덕관념을 진리로 여기기
때문에 도덕이 잘못된 결과를 낳을 거라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잘못된 것을 모두 부도덕하다 여긴다. 이런 오해는 온전히 인문학의 책임이며 사상가의 책임이다. 분명히 말하겠다. 도덕은 진리가 아니다.
한국은 지금 유교라는 집단주의 관념과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라는 개인주의 체제인 상태다. 한국은 집단주의 관념에 의해 다양한 현상이 나타난다. 혼자서 식사하는 걸 꺼려하고 지단에 속하려는 강박증을 가지고 있고 허니버터칩이나 포켓몬 스티커 같은
유행에 지나치게 빠져든다. 한국은 개인주의 체제에 의해 다양한 현상이 나타난다. 개인의 자유를 위해 감시와 검열 따위에 분노하며 반대하고 개인의 주권을 위해 선거 조작에 열렬히 투쟁하고
개인의 소유를 위해 절도나 강도 등을 죄로 여긴다. 집단주의 관념을 가진 사람은 개인주의 체제로 나타나는 현상과 무관할 수 있고, 개인주의 관념을 가진 사람은 집단주의 체제로 나타나는 현상과 무관할 수 있다. 개개인마다 다르나 사상가의 부재로 이런 관념과 체제를
정립하지 못해 집단주의 관념과 개인주의 체제의 공존으로 한국은 몹시 혼란스러운 상황이다. 집단주의와 개인주의는 서로 옳고 그름이 다르기 때문이다. 집단주의 관념에서 바른 것도 개인주의 체제에서는
그른 것이 된다. 집단주의 관념에 의하면 집단의 이익을 위해 입시와
취업 비리, 횡령과 배임, 담합 등을 행하는 것은 바른 것이 되나, 개인주의 체제에 의해 그런 것이 그른 것이 되어
범죄로 취급된다. 한국은 집단주의 관념을 가진 탓에 가족이나 지인을
위해 이런 범죄행위를 도덕적으로 여겼고, 그런 탓에 이런 종류의 범죄가 굉장히 많은 상황이다. 예컨대 자녀 입시 비리는 대표적인 집단주의 관념에 의한 도덕적 범죄다. 집단주의 관념에 의한 잘못이 개인주의 체제에서 정당화되는
일이 있다. 그건 바로 법을 제정하는 정치가가 잘못을 저지를
때다. 과거와 현재의 정치가는 간첩과 성범죄자를 잡겠다는
명목으로 국민을 감시하고 검열하고 통제하고 강압했다. 집단의 이익을 위해 개인의 자유권을 침해했다. 그럼에도 정치가가 저지르고 있기 때문에 국민의 자유권을 침해하는 범죄가 정당화되고 있다. 이 죄는 간첩을 잡겠다고 국민의 자유권을 침해했던 과거의 정치가가 현재 잘못했다는 평가를
받듯이, 성범죄자를 잡겠다고 국민의 자유권을 침해하는 현재의
정치가는 미래에 잘못했다는 평가를 받을 것이다. 한국은 집단주의 관념을 가지고 있으나 집단주의에서 허용되던 감시와 검열과 비리와 횡령과 담합 등과 같은 도덕적 범죄에 대해 잘못된 것이라는
인식이 늘어나고 있는 것을 고려하면 집단주의 관념에서 개인주의 관념으로 진보 중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정리하면 한국은 지금 개인주의로 진보하고 있다. 흔히 자유주의를 보수로 여기고 사회주의를 진보로
여기고 있다. 그러나 문명이 집단주의에서 개인주의로 진보하고 있으므로
실제로는 개인주의인 자유주의가 진보고 집단주의인 사회주의가 보수나 퇴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명료한 기준이 없이 시간의 선후관계로 보수와 진보를 나눈 지금의 정치는 진정 잘못된 길로
가고 있다 할 수 있다. 도덕을 진리로 여긴 이들이 종교의 도덕성을 갖췄다는 이유 하나로 사회주의를 진보로 규정한 순간부터 인류의 정치는 혼돈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확실히 말해 인류의 보수는 집단주의고 진보는 개인주의다. 이것이 진실이다.
개인주의 체제는 개인의 자유와 권리와 소유를 인정하기
때문에 집단에 속하지 않더라도 생존할 수 있고 개인의 이익만을 위하더라도 올바른 결과가 나온다. 민주주의를 생각해보자. 개인에게 주권이 있는 민주주의는 개인의 이익만을 고려하여 투표해도 된다. 개인이 개인의 이익만을 위해 투표하더라도 다수결로
선출되는 선거 특성상 선동정치가 아니라면 다수의 이익을 대변하는 정치가가 선출된다. 일반적으로 공공의 이익을 가리켜 선이라 부르는 것을 고려하면 올바른 결과가 나왔다고 볼
수 있다. 잠시 선과 악에 대해 정리하자. 선의 반대가 악이 될 수 있고 악의 반대도 선이
될 수 있으나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기준이나 절차나 입장이나 관점에 따라 선과 악이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도 마찬가지다. 개인의 소유를 인정하는 자본주의는 수요와 공급이 기본인 시장경제의 구조상 논리적으로 소비자의
행복이 이념이 되는 사상이다. 소비자의 수요에 공급 경쟁을 하는 것으로 상품과 서비스의 가격이 내리고 품질이 오르는 현상이 나타나 저렴한 가격에 높은 품질의 상품과 서비스를
소비하는 소비자가 행복하게 된다. 이처럼 시장경제는 논리적으로 소비자가 행복해진다. 그뿐만이 아니다. 높은 품질과 서비스는 세계 시장 경쟁에서 승리하게 하는 원동력이 된다. 품질이 높아야 외국인이 소비한다. 기업은 높은 품질과 서비스를 유지하기 위해 노동자의 노동력 상품에 타당한 가치를 평가하고
그에 대한 마땅한 부를 분배한다. 마땅한 부의 분배가 이루어지지 못하면 상품과 서비스의 품질이 낮아짐에 따라 그런 기업은 도태된다. 마땅한 부의 분배도 못하는 무능한 기업은 도태될
때 국가에서 지원하지 않는 것이 국가와 국민에게 이롭다. 개인이 개인의 이익만을 위해 상거래를 하더라도 시장경제 특성상 규칙만 준수해도 소비자가 행복하고 세계 시장 경쟁에서 승리하여 경제가 성장하고
품질을 위해 노동자에게 마땅한 부의 분배를 하게 된다. 이런 순리를 위해 담합을 처벌하고 독과점을 경계하고 공정경쟁을 하면 된다. 그러면 개인이 개인의 이익만 추구해도 올바른 결과가 나온다. 부정부패도 마찬가지다. 집단주의는 집단의 이익을 위해 집단 구성원의 부정부패를
감싸게 되지만, 개인주의는 개인의 이익을 위해 집단 구성원의 부정부패를
고발하게 된다. 가령 어떤 기업이 부정을 저지르면 기업에 속한 개인주의자는
개인의 이익을 위해 부정을 고발하고, 고발한 대가로 국가기관에 포상금을 받는다. 집단주의자는 그런 개인주의자를 배신자라며 멸시하지만 사회에서는 그런 개인주의자가 이롭다. 적폐청산을 주장하는 이들이 있는 걸로 안다. 적폐는 집단이 집단의 이익을 위해 폐단을 감싸는 것으로 나타났다는 걸 고려하면 집단 이기주의가
적폐를 만든 원인이었다. 그러므로 적폐를 청산하기 위해서 가장 좋은 방법이 바로 개인주의다. 개인주의로 진보하면 적폐는 사라진다. 개인주의야말로 현재 가장 진보적인 체제다. 개인주의가 개인의 이익만을 우선시하기에 타인을 사랑하지 않게 될 거란 우려를 할 수 있다. 그러나 아니다. 집단주의가 집단의 강요로 타인을 사랑하게 한다면
개인주의는 개인의 의지로 타인을 사랑한다. 서로가 서로에게 사랑 받기 위해 노력하면 된다. 이렇듯 개인주의라는 것은 개인이 집단에 속하지 않아도 생존할 수 있고 개인이 개인의 이익만 추구해도 올바른 결과가 나온다.
집단주의 체제는 집단의 규율과 권리와 소유를 인정하기
때문에 집단에 속해야 생존할 수 있고 집단의 이익만을 위해야 올바른 결과가 나온다고 여기고 있다. 담합에 대해 생각해보자. 자본가가 모여 경쟁 입찰이나 상품의 가격이나 노동자의 임금을 미리 협의하여 정한다. 담합이다. 노동자가 모여 소비자와 자본가에게 받는 비용과 임금을
미리 협의하여 정한다. 담합이다. 자본가는 소비자에게 서비스와 상품을 파는 상인이고
노동자는 자본가에게 노동 상품을 파는 상인이라는 전제하에 자본가와 노동자가 가진 힘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본질은 같다. 그럼에도 자본가가 시장경제에서 담합을 하는 것은
죄가 되지만, 노동자가 노동조합에서 담합을 하여 결정한 임금을
요구하며 파업을 하는 것은 권리가 된다. 이는 단순히 체제의 차이 때문이다. 자본가가 상품을 파는 시장경제는 개인주의 체제인 반면 노동자가 속한 노동조합은 집단주의 체제기 때문에 자본가의 담합은 죄가 되나 노동자의
담합은 권리가 된다. 어떤 사람은 체제가 아닌 힘의 차이로 담합이 정당화되고 있는 거라 반론할 수 있다. 그렇다면 묻겠다. 힘의 차이로 담합이 정당화된다면 가난한 자영업자의 담합은 정당하고 부유한 노동자의 담합은
부당하다 할 수 있는가? 관광지나 위수지의 가난한 자영업자가 수익을 얻기 위해 다른 자영업자와 담합하여 내국인과 내지인에게는 정가로 팔고 외국인과 군인에게는 비싸게
하는 것이 정당한가? 대기업의 부유한 노동자가 수익을 얻기 위해 다른 노동자와 담합하여 임금 상승을 주장하고 파업하여 생산하는 상품과 제공하는 서비스의 가격상승과
품질저하는 일으키는 것이 정당한가? 가진 부의 차이를 보면 관광지의 자영업자가 더 가난하고 대기업의 노동자가 더 부유하다 할 수 있다. 그럼에도 전자는 부당하다 말하고 후자는 정당하다
말할 것이다. 담합은 힘과 관련이 없다. 아파트 문제로 접근해보자. 집단주의 관념을 가진 사람이 많아 아파트 주민이
아파트 가격을 유지하기 위해 아파트 거래가를 담합하여 정하는 일이 있다. 이 때 싼 아파트의 담합은 정당하고 비싼 아파트의 담합은 부당하다 할 수 있는가? 담합은 힘이 아닌 체제로 정당화된다. 만약 경제 또한 집단주의 체제였다면 담합이 정당화되었을
것이다. 공산주의가 그렇다. 세습에 대해 생각해보자. 어떤 노동조합이 직업의 세습을 시도하는 것이 발각되어
사회의 비판을 받은 적이 있다. 세습은 집단주의 체제에서 왕정처럼 바른 것이 되지만 개인주의 체제에서는 민주정처럼 그른 것이 되기 때문에 법적으로 허용된 노동조합의 담합은
권리가 되지만 노동조합의 세습은 비판을 받는다.
집단주의 체제인 노동조합의 담합은 노동자가 이익을
얻기 때문에 올바른 것이라 착각할 수 있다. 그러나 노동자의 집단주의 체제는 그저 노동자가 개인으로 생존하기 어렵고 개인이 개인의 이익만 추구해도 올바른 결과가 나오지 않는 낡은 체제기
때문에 그런 것일 뿐이다. 민주주의에서 개인이 집단에 속해 있지 않다고 해서 주권이 훼손되는 일이 있던가? 되려 집단주의 체제라면 주권이 훼손될 수 있다. 가령 집단에서 개인의 의사와 무관하게 특정 후보를
지지하도록 강요하면 그것이 주권 훼손이 된다. 과거 독재 정권 때 실제 있던 일이다. 민주주의가 정상적으로 작동하려면 반드시 개인주의 체제여야만 한다. 자본주의에서 개인이 집단에 있지 않는다고 소유권이 훼손되는 일이 있던가? 되려 집단주의 체제라면 소유권이 훼손될 수 있다. 가령 집단에서 개인의 의사와 무관하게 집단의 이익을
위해 개인의 소유물을 강탈하면 그것이 소유권 훼손이 된다. 전체주의나 공산주의 국가에서는 집단의 이익을 위해 개인의 소유물을 강탈한다. 자본주의가 정상적으로 작동하려면 반드시 개인주의 체제여야만 한다. 그러나 노동은 노동조합에 가입하지 않으면 노동권이
훼손될 수 있다. 노동삼권은 단결권과 단체교섭권과 단체행동권을 일컫는다. 단결권은 노동조합을 만들 권리를 말하고 단체교섭권은
노동조합이 사용자와 노동조건에 대해 교섭하는 권리를 말하고 단체행동권은 파업과도 같은 행동을 할 권리를 말한다. 노동은 처음부터 집단주의 체제였다.
노동 또한 이제는 개인주의 체제가 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차별이 나타나게 된다. 특정 노동조합이 담합을 하여 결정한 임금을 주장하며
파업을 하면 담합한 임금이 통과되든 통과되지 않든 나머지 국민은 손해를 보게 된다. 파업을 하면서 상품과 서비스 공급이 지연되고, 수학적 계산을 근거로 한 논리적인 설득이 아닌 파업으로
강행하여 임금이 상승하게 되면, 자본가의 부를 노동자가 더 많이 가져가는 게 아니라, 상승한 임금만큼 상품과 서비스의 가격을 올리거나 품질을 저하시켜 상품을 구매하고 서비스를 이용하는
국민의 소비비용이 오르거나 소비만족도가 낮아지게 된다. 노동자와 자본가의 계급투쟁이 아닌 분야와 분야의 이익경쟁이 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럼에 따라 파업을 한 노동자와 파업을 하지 않은 노동자 사이에서 차별이 나타난다. 다른 노동자는 손해를 본 만큼 이익을 얻기 위해
또 다시 파업을 강행한다. 파업의 연쇄작용이다. 이 과정에 논리가 없기 때문에 보다 더 감정적으로 행동한 집단이 큰 이익을 얻게 된다. 사회가 이성을 잃고 질서가 무너진다. 파업의 연쇄로 집단 이기주의가 강해짐에 따라 개개인의 의견이 무시되어 파업에 동의하지
않는 이도 파업을 강요하게 된다. 개인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으로 자유주의 이념이 무너진다. 이윽고 모든 노동조합이 파업을 하는 것으로 이익을 얻으면 노동조합에 가입하지 않는 노동자는 부당한
손해를 입게 된다. 그럼에 따라 노동조합에 가입하는 노동자의 수는 늘어나고, 가입할 수 없는 노동자는 더 큰 부당한 손해를 입게 된다. 단순히 손익문제만이 아니다. 노동조합이란 집단주의 체제가 견고하게 될수록 국가의
집단주의 관념은 강해져 개인주의 체제를 갖춘 국가에 악영향을 끼치게 된다. 집단주의의 폐해인 정치의 진영논리나 경제의 담합 따위 같은 도덕적 범죄가 집단주의 체제를
갖춘 노동조합의 담합에 의해 정당하단 착각을 하게 된다. 집단주의 관념을 정당화하게 하는 집단주의 체제인 노동조합은 언제까지고 한국이 개인주의 관념으로 진보하는 것을 방해하고 있다. 국가 문명 발전에 해가 된다. 지금 노동조합은 개인주의 체제를 갖춘 국가에서 집단주의
체제를 유지하는 비정상적인 집단이라는 것을 확실히 인식해야 한다.
본래 노동자의 임금은 개개인마다 달라야 한다 시장경제에
속하는 민영 분야의 노동력 상품은 수요와 공급에 따라 가격이 달라지는 것이 마땅하다. 예를 들어 IT 개발자 같은 직종이 그러하다. 최근 IT 개발자의 노동력 상품은 수요가 높아짐에 따라 가격이 폭등하고 있다. IT 개발자도 개발자 개인마다 임금을 다르게 받는다. 이런 것이 바로 노동의 개인주의 체제다. 일반적으로 노동자는 자본가에 비해 힘이 작기 때문에
노동자가 취급하는 노동력이란 상품이 부당거래 될 확률이 높다. 예컨대 노동착취나 부당한 해고는 자본가의 계약위반이 된다. 그렇다고 해서 노동자 쪽에서 계약위반을 하는 것이
없는 것은 아니다. 노동방기나 부당한 결석은 노동자의 계약위반이 된다. 힘의 차이로 자본가의 계약위반이 보다 위험할 뿐이다. 이런 부당거래는 보통 자본가는 해고를 하고 노동자는 노동조합에 도움을 받는데, 노동자가 노동조합 없이 개인이 대처할 수 있도록
노동자와 자본가가 공정거래 할 수 있는 체계가 마련되어야 할 것이다. 집단주의 체제인 노동조합이 아닌 개인주의 체제인 공정거래위원회 같은 곳에서 대처 해야 한다. 현존하는 고용노동부가 아닌 공정거래부 통합하여 노동자
또한 노동력이란 상품을 취급하는 상인으로 대하는 것으로 노동자와 자본가가 대등한 관계임을 명시해야 할 것이다. 내가 주장하는 역할주의가 이런 기관의 논리구조를
갖추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임금에 대해 좀 더 알아보자. 계획경제에 속하는 국영 분야의 노동력 상품은 세금으로 구매되고 있는 만큼 노동력 상품의 가격변동은 국민의 의견을 수렴하는 것이 마땅하다. 수도요금이나 대중교통요금 등이 그렇다. 세금을 더 내는 걸 찬성할 국민이 많지는 않을 것이므로
논리적인 주장으로 국민을 설득해야 할 것이다. 이때 시장경제에 속하는 민영의 노동자가 얻는 임금을 근거로 계획경제에 속하는 국영의 노동자가 얻는 임금의 상승을 주장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경쟁하는 민영과 안정적인 국영이 같은 이익을 얻는
것은 국영의 과한 이익이 된다. 보통 국영은 민영보다 안정적인 대신 임금은 낮다. 대표적으로 공무원 임금이 그렇다. 경쟁을 하는 민영이 보다 높은 임금을 받는 것이 마땅하다. 이는 경영자도 마찬가지다. 시장경제에 속하는 민영과 계획경제에 속하는 국영의 경영자는 얻는 이익이 달라야 한다. 경쟁하는 민영과 안정적인 국영의 경영자가 같은 이익을
얻으려 하는 것은 국영의 과한 이익이 된다. 따라서 국영은 경영자와 노동자의 임금 차이가 커서는 안 된다고 본다. 국영 또한 수요와 공급의 영향을 받는데, 국민에게 필요가 없는 공공 서비스는 자연스럽게 사라질 것이다.
노동조합이 집단주의 체제인 까닭은 지금까지 노동운동의
본질이 노동자 개인의 인권운동이 아닌 노동자 집단의 이권운동이었기 때문이다. 노동자 집단에 대해 알아보자. 노동자는 산업혁명 시기 나타났다. 산업혁명 시기 산업의 변화로 공장 노동자의 수요가 급증함에 따라 수공업과 농업 등 다양한
분야에서 일하던 이들이 시골에서 도시로 진출하면서 평생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 계층이 나타났다. 농노해방이 이루어지면서 농노 또한 노동자 계층에 합류했고, 다수의 공장 노동자는 고용한 자본가에게 착취당했다. 당대 종교의 도덕성을 가지고 있던 사상가들이 노동자를
가엾게 여기며 자본주의를 비판했다.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주장하며 노동자의 단결과 연대를 강조했다. 노동자가 단결과 연대를 하면서 노동자가 집단화가 되었다. 그런데 자본가가 노동자를 착취한 것은 자본주의 때문이 아니었다. 신분제 관념 때문이었다. 신분제는 인간을 차별하는 제도로 왕과 귀족과 평민과
노예 등과 같은 서열이 존재했다. 그런 신분제 사회에 살던 자본가가 노동자를 대등한 인간이 아닌 서열이 낮은 인간으로 여겼기 때문에 착취했던 것이다. 쉽게 이해하면 영주와 농노를 착취하는 것과 자본가가
노동자를 착취하는 것은 같다. 노동자 착취는 자본주의 체제가 아닌 신분제 관념이 만든 잘못이라 보면 된다. 자본주의 자체는 산업혁명 당시에도 소비자의 행복이 이념인 사상으로 인간으로 대접받던 이들은
행복한 소비를 할 수 있었다. 당시 노동자 혁명의 본질은 노동자의 투쟁이 아닌 노예의 투쟁과 같은 것이었다. 이런 관념은 자본가뿐만이 아니라 사상가와 노동자조차 갖고 있었기 때문에 자본가와 노동자가
대등한 관계가 될 거란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래서 노동자와 자본가의 대등한 관계를 요구한 것이 아닌 대등하지 않는 관계에서 노동자의 이익만을 주장하게 되었다. 인권운동이 아닌 이권운동이 된 것이다. 어떤 사람은 사회주의와 공산주의가 잘못된 결과를
낳았더라도 노동환경 개선의 공이 있다 말하며 칭송하기도 하는데, 그건 눈 앞의 아픈 사람에게 죽을 먹이고 그 후 아무런 대책이 없는 걸 칭송하는 것과 같다. 진정 노동자를 위해서라면 노동자와 자본가가 대등할
수 있도록 근본적인 구조를 바꿨어야 했다. 그저 노동자가 불쌍하다고 눈 앞의 노동자에게 배려와 혜택을 주는 것에만 급급하며 주먹구구식 변화만 해왔으니 지금까지도 노동자가 천대 받는
것이다. 지금 정치와 경제는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라는 개인주의
체제로 진보하였지만, 노동은 아직까지도 집단주의 체제에서 머물러 있는 것을 볼 때,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야말로 노동의 진보를 막았다. 분명 그 사상을 주장한 사상가는 선의였겠지만 잘못된 결과를 낳았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인권운동과 이권운동은 큰 차이가 있다. 인권운동은 인간의 권리를 주장한 운동이고, 이권운동은 운동자가 이익을 얻을 수 있는 권리를
주장한 운동이다. 노동운동이 인권운동이었다면 노동자와 자본가가 같은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주장하며 대등한 관계를 요구했을 것이다. 그랬다면 노동자가 노동유연화에 반대하거나 노동자 담합에 찬성할 이유가 없다. 노동자는 노동력 상품을 취급하는 상인으로 대해달라
요구하고, 자본가 또한 기업유연화를 찬성하고 자본가 담합에
반대해달라 요구했을 것이다. 그러나 노동운동은 그러지 않았다. 천대받는 노동자를 자본가와 대등한 관계로 하는 게 아니라 천대받는 것은 방치하고 노동자가 이익을 얻을 수 있는 배려와 혜택만을 주장했다. 눈 앞의 배려와 혜택보다 대등한 관계야말로 진정한
인권운동이거늘 안타깝기 그지없다. 이는 민주주의와 비교하면 이해가 쉽다. 지금의 노동운동은 왕과 귀족과 평민과 노예를 대등한 관계로 만드는 민주주의 국가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신분제를 유지한 상태에서 평민과 노예에게
배려와 혜택을 늘려달라 요구하는 것과 같다. 평민과 노예인 상태에서 책임은 지지 않고 왕과 귀족과 같은 권리를 요구한다. 끔찍하다. 이는 다른 인권운동도 비슷하다. 여성인권과 아동인권 또한 천대받는 여성과 아동을 남성과 성인과 대등한 관계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천대받는 것을 방치한 상태에서 이익을 얻을 수 있는 배려와 혜택만을 주장했다. 천대 받는 것을 방치하는 걸 알아보자. 성인지감수성을 말하며 천대 받던 가부장제 세계관의 여성상을 신세대 여성에게 세뇌하고, 그 여성상에 맞는 배려와 혜택을 사회에 강요하고
있다. 여성은 의지가 약하고 수치심이 강하다. 그런 여성상에 어디에서 왔겠는가? 가부장제다. 천대 받는 걸 권리라 외치며 강요하고 세뇌하고 있다. 이익을 얻을 수 있는 배려와 혜택만을 주장하는 걸
알아보자. 여성의 평등한 고용은 주장하면서 여성의 징병에는
반대한다. 여성과 남성이 대등한 관계에서 같은 권리와 의무를
행하자고 주장했어야 했는데 그러지 않았다. 그러니까 인권운동이 아닌 이권운동이다. 아동인권도 마찬가지다. 천대 받는 것을 방치하는 걸 알아보자. 장유유서를 말하며 천대 받던 가부장제 세계관의 아동상을 아동에게 세뇌하고, 그 아동상에 맞는 배려와 혜택을 사회에 강요하고 있다. 아동은 의지가 약하고 수치심이 강하다. 그런 아동상이 어디에서 왔겠는가? 가부장제다. 천대 받는 걸 권리라 외치며 강요하고 세뇌하고 있다. 이익을 얻을 수 있는 배려와 혜택만을 주장하는 걸
알아보자. 학생인권조례를 통해 미성년이 두발 등의 자유권은
주장하면서 선거권과 성적 자기결정권과 촉법소년 폐지에 반대한다. 아동과 성인이 대등한 관계라면 미성년에게 권리를 주는 동시에 권리에 대한 책임을 지게 하는 촉법소년
폐지에는 찬성했어야 했다. 촉법소년은 미성년이 사리분별을 하지 못하는 심신미약자와 동등한 상황이기 때문에 처벌하지 않는 것을 기본 논리로 정했는데, 선거권과 성적 자기결정권 또한 같은 논리로 권리를
주지 않고 있다. 만약 촉법소년 폐지에 찬성한다면 선거권과 성적 자기결정권과
같은 권리도 줘야 한다. 그러나 주장하는 걸 보면 논리가 전혀 없다. 노동자든 여성이든 아동이든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주장한 인권운동이 아닌 운동자 또는 특정 대상의 이익을 주장한 이권운동이기 때문에, 이익에 눈이 멀어 논리적인 판단을 못하니까 이런
모순적인 태도가 나타난다. PC주의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단 한번도 인권운동을 한 적이 없다. 흑인운동을 생각해보자. 인종차별에는 반대하면서 동양인차별에는 무관심하다. 흑인인권은 주장하면서 외국흑인에겐 무관심하다. 흑인운동은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주장한 인권운동이 아닌 운동자의 이권을 주장한 이권운동이다. 다른 것도 모두 이권운동이다. 대등한 관계를 바란 것이 아니라 대등하지 않은 관계에서 이익만을 바랐다. 그러니까 권리는 외치지만 책임은 외면한다. 주관적 이익에 눈이 멀어 객관적 기준이 없이 감정적으로
행동하고, 감정적이게 되자 질서가 무너져 혼란이 생긴다. PC주의가 사회혼란을 일으킨 것은 너무나도 당연했다.
개인주의 체제에 속하는 자본주의와 집단주의 체제에
속하는 공산주의는 둘 다 규칙을 준수한다는 가정하에 자본주의가 올바른 사상이다. 서바이벌 게임을 비유로 그에 대해 알아보자. 공정한 규칙에서 개개인이 자유롭게 생존경쟁을 한다. 이걸 자본주의 규칙이라 하자. 그런데 참가자 일부가 규칙을 무시하고 외부 인원에게
무기와 물자와 탄약을 공급받거나(기회의 차별) 개개인이 모여 팀을 짜거나(담합) 심판과 유착하는 행위를(정경유착) 저지르게 된다. 그런 탓에 나머지 참가자가 손해를 본다. 부당하다 외친다. 평등하게 생존경쟁을 해야 한다고 외친다. 이걸 공산주의 규칙이라 하자. 같은 자원이어야 평등하다 외친다.(기회의 평등) 신체조건이 달라 결과가 달라지자, 같은 신체여야 평등하다 외친다. 신체는 평등할 수 없으므로 신체적 불리함을 안고
있는 이들이 혜택을 받아야 한다고 외친다.(결과의 평등) 인간의 능력은 다양하여 기준이 지나치게 많이 하나의 객관적 기준을 정할 수 없어 특정 기준을 주장한 집단만이 이익을 보게 된다.(이권운동) 달리기 속도가 느린 사람에게 혜택을 주자, 체력이 낮은 사람에게 혜택을 주자, 각자 다른 주관적 기준을 주장하자 혼란에 빠지면서
자본주의 규칙을 준수하며 기회의 평등을 주장하고 담합과 유착을 하지 않았던 사람들이 큰 손해를 보게 된다.(역차별) 악이란 정당한 기준이나 절차 없이 과한 이익을 얻을
때 나타난다. 객관적 기준이 아닌 주관적 기준의 난립으로 일방적
이익과 일방적 손해가 나타나면서 악이 유발된다.(사회갈등) 규칙을 이용해 참가자를 지배하는 독재자가 등장하게
된다.(공산주의 독재정권) 이 상황에서 자본주의 규칙이 문제라 할 수 있는가? 결코 아니다. 참가자의 잘못이지 규칙의 잘못이 아니다. 자본주의는 규칙은 바른데 참가자가 잘못했고 공산주의는
규칙은 그른데 참가자가 일부(기회의 평등) 바른 걸 주장했다. 이런 상황에서 진정 올바른 길은 참가자가 자본주의 규칙을 준수하는 것이다. 어떤 문제를 파악할 때 규칙이 문제인지 사람이 문제인지 명확하게 판단할 수 있어야 한다. 한국에서 바른 길은 노동자에게 배려와 혜택을 주는
것이 아닌 자본가가 규칙을 준수하는 것이다. 자본주의는 규칙만 준수하면 개인이 개인의 이익만을 좇더라도 올바른 결과가 나오는 체제다. 규칙을 어기지 않는 사람을 보고 규칙 자체를 바꾸자고 주장하면 되려 다른 사람이 손해를
볼 수 있다. 공정함이 최선이다. 자본주의 체제는 특정 분야의 상품과 서비스의 가격이나
임금이 오르면 나머지 분야가 손해를 보게끔 되어 있다. 예컨대 농작물의 가격이 오르면 농업 분야는 이익을 얻지만 나머지 분야는 손해를 본다. 그러므로 정상적인 부의 분배가 이루어진다는 가정하에 이제 대립구도는 노동자와 자본가가
아닌 분야와 분야가 되어야 할 것이다. 그것이 바로 개인의 역할을 중시하는 역할주의다.
인류 문명의 보수인 집단주의 체제와 진보인 개인주의
체제에 대해 알아보았다. 알아본 까닭은 관광 특성상 국가의 체제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럼 관광에 대해 알아보자.
관광은 국가의 접대다. 관광은 다른 지방이나 나라의 명승고적과 풍속 등을
돌아다니며 구경하는 것을 뜻한다. 접대는 손을 맞아 대접하는 걸 뜻한다. 대접은 마땅한 예로써 대하는 것 또는 음식을 차려 손님을 모시는 것을 뜻한다. 정리하면 관광은 국가에 방문한 관광객을 마땅한 예로써 대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한국 관광은 무엇으로 접대를 해야 할 것인가? 한국의 전통적인 문화는 다른 나라보다 모자라다 할
수는 없어도 특별하게 우수하다 하기도 어렵다. 한국 문화가 전세계에 유행하는 것을 보고 전통적인 문화의 힘이라 착각할 수 있는데, 유행한 것은 과거의 문화가 아닌 현대의 문화다. 만약 한국의 과거 문화가 유행한 것이라면 같은 과거
문화를 공유하는 북한의 문화도 유행했어야 했다. 이치에 맞지 않다. 한국의 과거 문화가 조명되는 것은 한국의 현대 문화가 유행하니까 그런 것일 뿐이다. 한국의 현대 문화를 만든 것이 무엇이겠는가? 바로 현대 문명인 개인주의 체제다. 개인이 개인으로 생존할 수 있고 개인이 개인의 이익만을 추구해도 올바른 결과가 나오는
체제를 갖추고 있다. 한국 현대 문화가 성공할 수 있었던 것도 개인주의 체제에 영향을 받아 개인의 자유와 권리와 소유를 중시하는 것으로 개개인이 성장했기 때문이다. 아직까지 집단주의 체제인 북한의 현대 문화를 생각해보자. 성장하지 못했다. 한국은 지금 집단주의 관념을 가진 국민이 있고 집단주의
체제인 노동조합이 있지만, 집단주의 관념에 의한 도덕적 범죄와 노동조합의 담합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흐름이 나타나는 것을 볼 때, 개인주의 관념으로 진보하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은 개인주의 체제가 확립되고 개인주의 관념을
가지는 것으로 진보 중에 있다. 그런 한국은 관광객 또한 개인이 개인으로 생존할 수 있는 체계가 갖춰져 편리한 공공서비스와 웬만하면 생명과 재산을 위협받지 않을 정도의
치안을 보장받을 수 있다. 한국은 상대적으로 가장 발전한 문명 중에 하나라는 측면에서 관광지로써 가치가 있다. 보통 관광지는 오래된 문화재를 가지고 홍보하는데, 한국은 정반대로 새로운 체제를 가지고 홍보하면 된다. 과거가 아닌 미래로 홍보한다. 진보한 문명을 체험하게 한다. 이것이 한국 관광의 장점이다. 관광이 개인주의 체제를 활용하는 것이야말로 관광이
가야 할 길일 것이다.
접대에 대해 정리하겠다. 관광은 모험이나 여행과 본질적으로 다르다. 모험과 여행은 인간 중심이고 관광은 산업 중심이다. 모험과 여행은 인간이 세상을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것이지만 관광은 인간을 관광지에 초대하여 접대하는 것이다. 모험과 여행은 상품화되지 않은 자연과 지역을 즐기며 지역경제에 소비하지만 관광은 상품화된 자연과 지역을 즐기며 관광산업에 소비한다. 모험가와 여행자와 관광객은 모두 타지와 타국을 방문하는
것으로 같지만, 관광객은 꾸며진 접대실에 잠시 방문한 객이라 볼
수 있다. 모험가나 여행자라 하더라도 관광지에 방문하면 관광객이
된다. 가정이나 회사의 접대실에서 손님을 맞이하기 위해
방을 깨끗이 청소하고 보기 좋은 예술품으로 장식하고 맛있는 음식을 준비하는 것과 같이 국가의 관광지에서 손님을 맞이하기 위해 길을 깨끗이 청소하고
보기 가치 있는 문화재를 정비하고 맛있는 음식이 준비된 음식점을 운영한다. 관광이 가정과 회사와의 차이는 금전거래뿐이다. 관광은 손님을 접대하는 것으로 이윤을 얻는 산업이다. 그렇기에 관광은 국가의 접대라 할 수 있다. 실제 관광자원의 가치보다 접대가 더 중요하다. 관광객이 관광자원에 만족을 못해도 접대에 만족하면
좋은 관광지가 된다. 정리하면 관광이 사회에서 맡은 역할은 국가에 방문한 손님을 접대하는 것이다.
접대를 부정적 시각으로 바라보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생각해보자. 접대는 단순히 손님을 마땅한 예로써 대하는 것일
뿐이다. 이사간 가정에 집들이하는 손님을 마땅한 예로써 대하는
것이 접대다. 사적인 것을 대접이라 하고 공적인 것을 접대라 하기도
하는 모양인데 본질적으로는 같다. 이게 잘못된 것일 수가 없다. 그렇다면 어째서 접대에 대한 부정적 시각이 나타났을까? 그것은 회사에서 영업에 성공하기 위해 영업 대상에게 접대를 하는 일이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두 가지 측면에서 부정적으로 보게 되는데, 하나는 접대 방법이고 둘은 접대 목적이다. 하나는 접대 방법으로 회사에서 접대를 할 때 성적인
접대도 하기 때문에 성을 죄악시하는 국가에서는 보통 그런 접대를 부정적으로 볼 수밖에 없다. 나는 성을 죄악시하지 않고 개인의 자유를 중시하는 자유주의자이기 때문에, 인간은 본인의 성을 자유롭게 매매할 권리를 얻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렇기에 성적인 접대에는 반대할 이유가 없다. 사회 일부는 반대하나 나는 반대하지 않는다. 둘은 접대의 목적으로 거래처 계약을 접대로 결정하게 되면 접대 경쟁이 붙으면서 계약에 과잉비용이 소모되게 된다. 계약을 접대로 결정하게 되면 계약 근거가 상품과
서비스의 품질이 아닌 접대가 되어버리게 되므로, 낮은 품질의 상품과 서비스를 고가로 생산하고 제공할 가능성이 높게 된다. 상품과 서비스의 비용이 오르고 품질이 낮아지면서 상품과 서비스를 소비하는 국민이 불행해진다. 낮은 품질의 상품과 서비스는 세계 시장 경쟁에서도
패배하여 도태돼 경제성장에도 악영향을 끼치게 된다. 상품과 서비스의 품질이 아닌 접대로 계약을 결정하면 이런 일이 나타나기 때문에 이런 목적으로 하는 회사의 접대는 부정적으로 본다. 그렇기에 이런 접대에는 반대할 이유가 있다. 사회 일부는 반대하고 나도 반대한다. 성적인 접대든 일반 접대든 접대 목적이 부당계약이라면
잘못되었다. 반대로 부당계약이 아니라면 어떤 접대든 단순한 놀이다. 물론 계약상대와 단순한 놀이를 할 확률이 낮으므로
그런 일은 드물 것이다. 부당계약을 목적으로 한 영업 접대로 접대에 대해 부정적 시각을 가질 수 있으나, 가정에 방문한 손님을 마땅한 예로 대하는 것도 접대인 것을 고려하면 접대 자체가 잘못된
것이라 할 수는 없다. 오히려 손님을 접대하지 않는 것이 예의도 모르는 자가 된다.
일반적인 접대의 종류는 다음과 같다. 가정 접대는 손님 접대로 가정에 방문한 손님을 접대하는
것이다. 금전 거래가 없다. 회사 접대는 손님 접대와 영업 접대와 고객 접대가
있을 수 있다. 손님 접대는 순수하게 회사를 방문한 손님을 접대하는
것이고, 영업 접대는 영업 성공을 위해 계약상대를 접대하는
것이고, 고객 접대는 상품을 구매한 고객을 접대하는 것이다. VIP고객을 떠올리면 된다. 보통 회사의 접대는 손님을 접대하는 순간보다 접대
이후에 이익을 얻는다. 접대했다고 바로 계약이나 상품을 구매한다는 보장은 없다. 관광 접대는 관광객 접대로 관광지에 방문한 손님을 접대하는 것이다. 관광 접대는 관광지에 방문한 모든 관광객을 대상으로
하고 있으므로 굉장히 광범위하다. 보통 손님을 접대하는 순간 이익을 얻는다. 깨끗이 청소한 거리는 입장료를 받는 것으로 접대하는 순간 이익을 얻고, 아름답게 정돈한 문화재는 관람료를 받는 것으로 접대하는 순간 이익을 얻고, 맛있는 음식을 준비한 음식점은 식사비를 받는 것으로
접대하는 순간 이익을 얻는다. 관광지 내에서 접대 후 바로 이익을 얻는다. 부가이익으로 국가 이미지 상승 등이 있겠지만 관광산업에 종사하는 이들은 보통 접대 후 즉각 이익을 얻기 때문에 접대가 보다 더 중요해진다.
관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관광객의 만족이다. 역사가 짧은 곳이라도 깨끗하면 된다. 재건축한 문화재도 보기 좋게 정돈되면 된다. 유명하지 않은 음식점도 맛있으면 된다. 관광객을 유치하기 위해 관광지가 고가의 비용을 예산으로
써도 관광객이 만족하지 못하면 나쁜 관광지가 되고, 저가의 비용을 예산으로 써도 관광객이 만족하면 좋은 관광지가 된다. 설령 관광객이 바가지 따위의 부당한 과소비를 하더라도 지불한 본인이 만족하면 아무런 문제가
없다. 이런 특성으로 관광산업은 투자비용 대비 높은 이익을
얻을 수 있는 구조긴 하다. 별 것 없어도 유행하는 것으로 방문 자체에 만족도를 느끼고 거금을 쓰는 관광객이 있다 해보자. 얼마나 높은 순익을 얻을 수 있겠는가? 다른 분야는 대부분 접대가 단순 손님 맞이 외엔 꼭 필요한 것이 아니나, 관광 분야는 접대가 반드시 필요하다. 지금까지 개인주의 체제와 접대의 필요성에 대해 알아보았다. 이 두 가지를 조합하면 적절한 길이 나온다.
첫째, 관광지 상품화. 국가의 지역은 보통 주거지와 상업지와 생산지와 관광지 등으로 분류할 수 있다. 주거지와 상업지와 생산지는 지역 자체를 상품화할
필요는 없으나 관광지는 특별하게 관광지 자체를 상품화할 필요가 있다. 단순히 관광명소 몇 군데를 상품화하는 것이 아니라 관광지 자체를 상품화한다. 자세히 알아보자. 우선 주거지와 관광지를 철저하게 분리한다. 이런 구별은 지역의 역할분담으로 관광지 밖은 관광객의
민폐에서 벗어날 수 잇고, 관광지 안은 보다 관광에 전문화된다. 보통 국민이 관광객을 꺼려할 이유가 없다. 그러나 본인 주거지가 아니라고 무책임하게 행동하는 관광객은 꺼려한다. 거주지를 대상으로 한 범죄인 쓰레기 무단 투기나 거주민을 상대로 한 범죄인 절도나 폭행
따위로 관광객의 방문을 꺼려하기도 한다. 이런 역할분담으로 그걸 방지한다. 반면 관광지는 관광객이 방문한다는 걸 전제한 체계를 갖춘다. 그럼으로써 거주지보다 관광에 전문화된다. 간단히 말해 국가의 접대실을 만드는 것과 같다. 가정에 손님이 방문하는데 접대실이 아닌 방에 가버리면
다른 방에 있던 사람이 불편하고 접대도 불충분해지게 된다. 바람직하지 못하다. 그에 따라 관광특화도시를 만드는 것이 좋다 본다. 몇 가지 예시를 들어보자. 하나는 로봇도시. 로봇도시는 두 가지 역할을 맡는다. 실제 주거지에 로봇을 공급하기 전에 인간의 삶에 로봇이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실험해보는 도시. 최첨단 로봇이 활성화되어 미래를 체험하고 싶은 관광객이 방문하는 도시. 이런 도시는 과학실험을 하고 관광수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둘은 동물도시. 동물도시는 두 가지 역할을 맡는다. 동물을 좋아하는 주민이 거주하는 도시. 동물을 좋아하는 관광객이 방문하는 도시. 최근 길고양이를 과도하게 아끼는 이들로 인해 길고양이
개체수가 급증하여 도심지 생태계를 파괴하는 일이 일어나고 있다. 그 때문에 고양이가 높은 등급의 유해조수가 되어버렸다. 이런 현상은 한국 도덕인 유교의 가르침 중 장유유서로 연령관계 애정을 온전히 충족하지
못하고, 남녀유별로 이성관계 애정을 온전히 충족하지 못하는
것으로 애정이 결핍되었고, 그 애정결핍을 해소하기 위해 고양이에게 과한 애정을 줘버린 바람에 나타난 것이다. 애정결핍을 해소하기 위한 행동을 정당화하기 위해 동물보호라는 도덕성이 있는 명분을 사용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건 개인의 책임이 아닌 사회의 책임이자
인문학의 책임이자 사상가의 책임이다. 길고양이를 과도하게 아끼는 이들에게만 책임을 전가할 수는 없다. 그렇다고 거주지에 유해조수가 되어버린 길고양이를 방치할 수는 없다. 따라서 고양이와 같은 동물이 모여 사는 도시를 만들고, 길고양이를 아끼는 이들이 거주하도록 유도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동시에 특정 동물을 좋아하는 관광객이 방문할 수
있는 체계를 갖춰 관광수익을 얻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타협해야 한다. 길고양이를 좋아하는 사람은 특정 관광지에서만 길고양이가 허용되는 것을 받아드리고, 길고양이를 싫어하는 사람은 특정 관광지 내에서만큼은
허용해야 한다. 셋은 문화재도시. 문화재도시는 두 가지 역할을 맡는다. 문화재를 보관하고 문화재를 아끼는 사람이 모이는
도시. 문화재를 좋아하는 관광객이 방문하는 도시. 부동산인 문화재는 이동하기 어려워도 동산인 문화재는
이동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문화재를 문화재도시에 전부 모아 관리한다. 한국에서 문화재 관리가 허술하다는 점은 빈번하게 보고되고 있다고 알고 있다. 문화재를 기부하면 보관상태가 허술하여 가치가 훼손되고 있다고 한다. 심지어 이순신 장군의 유물조차도 허술하게 보관되어
헐값에 장물로 팔릴 뻔한 사건이 있었다고 한다. 따라서 문화재를 모아 보관할 도시를 만들고, 문화재를 아끼는 이들이 거주할 수 있도록 유도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동시에 문화재를 좋아하는 관광객이 방문할 수 있는 체계를 갖춰 관광수익을 얻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관광특화도시는 분명 개인주의 체제에 맞는 개인주의 체계다. 개인이 개인으로 있을 수 있고, 개인이 개인의 이익만을 추구해도 올바른 결과가 나온다. 누구나 로봇이나 동물이나 문화재에 관심이 있다면
개인으로 방문하여 거주 또는 관광을 하면 된다. 개인이 관심 있는 분야만 있기 때문에 개인의 이익만을 추구해도 도시의 이익으로 이어지는 올바른 결과가 나온다 할 수 있다. 이외 게임도시나 영화도시나 미술도시나 음악도시도
괜찮을 것이다. 관광의 본질이 접대이므로 관광지인 이상 로봇이든
동물이든 문화재든 관광할 가치가 있게끔 상품화를 해야 할 것이다. 이렇게 특화된 도시는 해당 분야에 종사하는 이들이 모여 지방활성화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둘째, 관광지 학교와 회사의 상품화. 관광은 타지나 타국을 방문하는 것으로 낯선 곳의 새로움을 즐기는 것이 목적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단순히 새로움만이 목적이 아니다. 관광의 본질은 접대다. 관광객은 관광지에 접대 받고 싶어 방문한다. 자주 방문하여 새로움이 사라지더라도 접대에 만족하면
재방문을 한다. 아무런 포장이 되지 않은 도로, 아무런 청소가 되지 않은 거리, 아무런 꾸밈이 없는 환경에 어떤 관광객이 방문하겠는가? 관광으로써는 방문한 가치가 없다. 그런 곳에 방문하는 것은 관광객이 아니 모험가나
여행자다. 그러므로 관광은 접대 받을 수 있는 안전하고 편안하고
여유로운 새로움이 목적이라 할 수 있다. 관광은 접대 받을 수 있는 안전한 새로움이다. 여기서 관광이 아닌 다른 걸로 대체해보자. 학교나 직장 체험은 접대 받을 수 있는 안전한 새로움이다. 같다. 관광과 본질적으로 같은 것을 연결한다. 보통 학교나 회사에서 공부하거나 일하는 것은 접대 받지 못하는 새롭지 못한 일상이다. 그러나 외부인이 잠시 학교나 회사에서 공부하거나 일하는 것은 접대 받을 수 있는 안전한
새로움이 된다. 관광지 내에 있는 학교와 회사를 관광상품으로 개발한다. 학교와 회사 입장부터 살펴보자. 관광지는 학교와 회사에서도 관광객을 접대하는 것으로
학교의 학생은 손님을 접대하는 법을 배우고 회사는 회사를 홍보한다. 학습과 홍보효과다. 잦은 외부인의 출입은 학교와 회사를 보다 개방적으로 만든다. 개방적인 학교와 회사는 외부인의 눈치 때문에 부정한
일을 하기가 어렵다. 학교와 회사에서 따돌림이나 갑질을 하는 것을 외부인에게 보여주기는 어려울 것이다. 자연스럽게 방지하게 된다. 폐쇄적인 곳에서 폐단이 늘어나는 걸 고려하면 개방은 대체로 바른 결과를 낼 수 있다. 부정부패방지다. 모든 학생이나 직원이 관광객을 상대하라는 것은 아니다. 하고 싶은 사람만 하면 된다. 현재도 있는 교환학생이나 직장체험 등과 같이 일부분만
관광할 수 있도록 하면 된다. 학교와 회사는 관광객 전용 교육과정과 직업체험을 준비하면 된다. 이를 통해 일정의 수익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수익강화다. 관광객 입장에서 보자. 관광은 타지와 타국의 명승고적이나 풍속 등을 돌아다니며 구경하는 것을 뜻한다. 여기서 풍속은 단순히 관광지에 방문했다고 직접적으로
알기가 어렵다. 관광지 주민이 일상에서 생활하고 있는 것을 주변에서
목격하는 것이야말로 제대로 된 풍속 구경이라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풍속을 보고자 하는 관광객은 학교와 직장 체험이 가치가 있을 것이다. 올바른 풍속 구경이다. 관광은 여가기도 하다. 여가는 웃고 즐기는 것만 있는 게 아니다. 등산을 생각해보자. 고행을 자처하는 것으로 즐거움을 누린다. 접대를 받는 관광이 반드시 힘들어서는 안 된다는 것은 없다. 학교에서 공부하는 것은 잠시 힘들지 몰라도 경쟁의
부담 따위는 없어 보다 편안하게 수업을 들을 수 있다. 직장에서 일하는 것은 잠시 힘들지 몰라도 성과의 부담 따위는 없어 보다 편안하게 업무를 볼 수 있다. 편안한 체험이다. 학교와 회사의 체험은 분명 안전하게 접대 받으며
타지나 타국의 풍속을 구경하는 가치 있는 관광이 될 것이다. 이런 체험 또한 개인이 개인으로 방문해도 되고, 개인이 개인의 이익만을 추구하며 체험해도 올바른 결과가 나올 것이다. 개인주의 체제에 맞는 개인주의 체계다.
셋째, 관광지 주민 태도의 상품화. 간단히 말해 접대의 마음가짐을 갖도록 한다. 관광지는 국가의 접대실과 같은 곳. 모든 주민이 손님을 접대하는 역할을 맡은 것과 같다. 관광지의 주민은 모두 접대하는 마음을 가지고 접대하는
방법을 배워 국가의 손님을 접대하는 역할을 수행할 수 있어야 한다. 어른이 아이를 접대한다. 아이가 어른을 접대한다. 남성이 여성을 접대한다. 여성이 남성을 접대한다. 인간이 인간에게 마땅한 예로써 대하는 법을 배운다. 그렇다고 해서 손님에게 복종하라는 것은 아니다. 손님 또한 접대하는 이를 마땅한 예로써 대해야 할
것이다. 그러지 않은 손님은 정당한 절차에 의해 처리하면
된다. 한국은 동방예의지국이라 불렸던 나라다. 그 근거가 장유유서의 연하가 연상에게 복종하는 것과
같이 복종의 예이기 때문에 평등하지 않으므로 사실 바람직하지는 않지만, 현대식에 맞게끔 평등한 관계에서 모든 인간에게 마땅한 예를 다하는 것으로 예의지국이라 불리는 것은
바람직할 것이다. 그렇다고 모든 국민에게 예를 배우라 하는 것은 어려우므로
국가의 접대실이라 할 수 있는 관광지를 중심으로 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역할분담이다. 관광지 주민은 단순히 한국의 예만 배울 것이 아니라 전세계 언어와 예를 조금이라도 배워 응대한다면
좋을 것이다. 그러면 분명 관광객은 만족할 거라 본다. 관광지 주민은 거리에서 관광객을 접하는 것으로 삶
자체가 접대하는 삶이 될 것이므로 관광지에 거주하는 주민에게는 특별한 거주 지원비나 세금감면이 있어야 할 것이다. 삶 자체가 접대하는 삶이라는 것이 굉장히 고되 보일
수 있는데, 길거리의 자영업자는 일하는 내내 접대하고 있다. 단지 자영업자는 가게에 방문하는 손님을 대상으로
한다면, 관광지 주민은 관광지에 방문하는 손님을 대상으로
한다. 그래서 인간관계가 어려운 사람에게는 좀 더 고되긴
할 것이다. 한국에서 가출 청소년이 많다고 들었다. 어떻게 대처할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방치되고 있다고
들었다. 대부분 가정불화로 가출했기 때문에 가출 청소년을
가정으로 돌려보내도 다시 가출할 수 있다. 만약 학대 당하는 가정이라면 피해자를 가해자 손에 되돌리는 것이 된다. 정말 잔혹한 짓이다. 이러한 사회문제 또한 단순히 개인의 책임으로 돌릴 수가 없으므로 그에 대한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 가출 청소년의 의향에 따라 관광지에서 거주하여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방법이 좋을 거라 생각한다. 관광지에 머물면서 관광 관련 일을 배우고 하면 된다. 접대는 기본적으로 학력보다는 마음가짐이나 기술이 중요하므로 일을 배우고 하는데 어려움을 없을 것이다. 관광지가 특정특화도시라면 그 도시에서 다루는 학문을
배우는 것으로 그에 관련된 성장도 가능할 수 있을 것이다. 젊은이가 시골에 귀농하기 싫은 가장 큰 이유가 집단주의 관념일 것이다. 특히 장유유서는 연하가 연상에게 복종하는 걸 올바른 도리로 만들어, 젊은이가 시골에 간다는 것은 시골의 연상에게 복종하러
간다는 것과 같다. 그렇기에 젊은이가 시골을 꺼려하는 것으로 시골은 점점 더 빠르게 소멸하고 있다. 이에 따라 지방인 관광지에 젊은이들이 모여 활성화되기 위해서는 모든 주민이 그런 낡은
관념에서 벗어나야 할 것이다. 극단적으로 새로운 관광지에는 그런 관념만 가진 사람만 모이게 하는 방법도 있을 것이다. 그렇게 해서라도 개인주의 관념으로 진보해야 한다. 관광지 모든 주민이 접대하는 마음을 가지고 접대하는
방법을 배운다면 모든 주민이 관광 가이드 자격을 취득한 것과 같다. 그에 따라 관광지 주민은 누구나 관광 가이드를 하는 것으로 수익을 얻을 수 있도록 하면 된다. 이는 국가기관에 신청하는 것으로 일을 배당 받을
수도 있지만, 현대식에 맞게 배달 앱처럼 어플리케이션을 이용하여
가이드와 관광객이 매칭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관광 가이드를 하는 사람이 관광객이 마음에 들면 집에 초대해서 손님으로 접대하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이런 것이 개인주의 체제에 적합한 체계다.
관광은 국가 경쟁이다. 관광은 내국 관광객과 외국 관광객으로 나눌 수 있는데, 내국 관광객 또한 외국에 방문할 수 있으므로 모든
관광은 국가 경쟁이 된다. 예를 들어 한국인이 한국 관광지와 해외 관광지 중 하나를 고를 수 있다. 관광은 국가의 접대로 접대실 역할을 맡고 있기 때문에 국가가 관광특화도시와 같이 계획경제
비슷하게 기초설계는 할 수 있으나, 그 이후는 전부 시장경제에 속한 경쟁이다. 관광은 삶에 필수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경쟁이므로 안정보다 더 큰 수익을 얻는 것도 타당하며, 관광객이 행복할 수 있도록 노력한 만큼 개개인이 부를 쌓아 올릴 수 있는 체계가 마련되어야 할 것이다. 관광이 국가경쟁인걸 고려하면 수출이나 국가 경기와
비슷할 것이다. 세계 시장 경쟁과 국가 경기 경쟁에서 승리해야 하는
것처럼 관광도 승리해야 한다. 경쟁을 좋아하는 한국인 특성상 경쟁할 수 있는 토양만 제대로 만들어두면 분명 국가 경쟁에서 승리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한국을 방문하는 관광객이 한국인이 마땅한 예로써
대하는 것에 만족하고 재방문 하기를 바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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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복지 아니면 외교 아니면 게임 밸런스입니다.
보수와 진보의 기준을 정립하여 역할주의를 개인주의
체제 중 하나로 설정했네요. 비슷한 내용을 연거푸 다시 쓰면서 점진적으로 발전하는 걸 느낍니다. 역할주의를 쓰게 되면 개인 블로그를 하나 더 개설해서 거기에도 올릴 것 같네요.
시간이라는 건 지구 속도를 수로 객관화한 것이었을
뿐이었군요. 인간의 시간이 아닌 지구의 시간이었어요.
조용하고 포근한 곳에서 살고 싶네요.
국민을 감시와 검열 하겠다는 건 독재를 하겠다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런 짓을 한다면 모든 논리를 동원해서 그 행동을 부정하겠습니다. 어떤 경우에도 독재자를 지지하는 일은 없습니다. 그런 걸 정당화하는 정치가는 권력을 포기하는 거라고
인식하겠습니다. 일반적으로 악이란 정당한 기준이나 절차 없이 과한
이익을 얻을 때 발생합니다. 자유주의 국가에서 자유를 침해하는 감시와 검열은 분명 부당한 것으로 그걸 통해 어떤 이익을 얻는 것은 과한 이익, 즉 악입니다. 독재자의 감시와 검열을 비판하던 이들이 감시와 검열을
자행하는 건 정말 비극적인 코미디입니다. 집단주의 관념을 가진 이들이 집단주의 관념의 폐해를 적폐라 규정하며 공격했던 것도 정말 비극적인 코미디입니다. 이 모든 것이 인문학과 사상가의 책임입니다. 끔찍하군요.
본인의 의지가 아닌 타인의 의지로 생각을 바꾸는 사람은 사상가로서 가치가 없죠. 어떤 경우에서 생각을 바꾸지 않는 것은 독선이나 아집이 될 수 있지만, 타당한 기준 없이 그저 눈치 보느라 생각을 바꾸는 건 인형에 불과하겠죠. 그러니까 마음대로 생각하고 쓸 겁니다. 쓸모 있으면 살아있을 수 있겠죠. 쓸모를 증명하기 위해 노력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