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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식] 2019년 10월 6일 일요일 (0) 2019/10/06 PM 07:44

내일부터 다시 씁니다

 

늙은 세상을 살고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닫는 순간

주변이 다 낡게 느껴지는 건 

자신의 우울함이 빚어낸 착각일까요

영상 속으로나 보던 70년대 80년대의 탁한 색의

어딘가 고풍스러우면서도 어두침침한 그런 역사 속에

존재하는 것 같은 기분

거리를 걸어도 백화점을 가도 영화관을 가도 

거리 시설 사람 면면이 전부 과거 영상속에 있을 법한 모습들로 보여요

아,

 

지금까지 인류의 문제는 과장 보태서 전부,

정치도 노화로

경제도 노화로

사회도 노화로

문화도 노화로

 

전부 늙어서 그런 것이었다는 건 끔찍하군요.

내 절망과 우울과 슬픔과 고통과 비참함은 그런 것이 원인이었다는 건

정말이지 우울하지 않을 수가 없는 일이네요.

 

단순히 실제 연령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종 자체가 늙었어요.


아,

대를 잇고 역사를 잇고 마음을 잇는다는 건

그런 문제가 있음을 알았어야 했는데

육체는 백년 정도지만 사상은 영원히 늙을 수도 있다는 걸 알았어야 했는데

 

인간이 천년 만년 그 이상 살았다면 종이 늙지 않았을 수도 있었을까요

백년 정도 사는 인간의 문명이 수천년 간 이어지는 것 자체가 아.

 

다음 편은 늙어버린 세상에 태어난 자들의 슬픔에 대해서 써볼게요

 

우린, 늙어버린 세상 속에서 과거가 만든 제약 속에서 발버둥 치는

아무리 나이가 많아도 역사와 비하면 결국 어릴 뿐인

그런 사람들이었어요. 

 

무엇이 옳았던 것이었을까요

갑작스럽게 내동댕이 쳐져서 세상에 나오게 된 인간들은

과거의 인간들이 구성해놓은 질서 속에서 

자신의 사상을 과거의 인물들에게 교정당한 채

마음 껏 뜻을 펼치지도 못하고 

 

어쩐지 슬프네요 지금까지 써온 글들을 새삼 한번 씩 생각해봤는데

이것도 노화와, 저것도 노화와 연관되어 있었군요.

 

어린 시절 괴로웠던 주변 환경의 근본적인 문제는,

종교도 늙었고 관습도 늙었고 교육도 늙었기 때문에

그랬었다는 사실이 

몹시 저를 괴롭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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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담] 감정제어, 인격 (1) 2019/09/23 AM 06:29

감정제어, 인격

 

 

 

시작하기 전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 누군가를 미워해본 적이 있습니까? 그 미운 상대의 불행을 보며 만족을 느낀 적이 있습니까? 그리고 그러한 감정에 의문을 품어본 적이 있습니까? 왜 미워하고, 왜 만족하는지. 그러한 감정에 의문을 한 번 품어볼 기회가 있길 바랍니다.

 

 

사람에게 있어 감정은 물과 같은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분명하게 구별할 수 없고, 미세하게 구분할 수도 없지요. 우러나오는 감정을 관찰하여 깨닫는 것일 뿐입니다. ‘, 내가 지금 기뻐하고 있구나.’ 그렇기에 사람들은 자신의 감정을 제어하는데 어려움을 느낍니다. 갑작스럽게 기쁠 때도 있고, 갑작스럽게 슬플 때도 있습니다. 치밀어 오르는 분노 속에 실수를 저지를 때도 있지요. 이렇게 감정은 의식적으로 표출하기 보단 무의식적으로 나타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의식적으로 행하는 감정을 가리켜 위선이나 위악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하지만 인간의 자아는 세포의 여론일 뿐입니다. 인간의 모든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의식적으로 행하더라도 효과가 나타나곤 합니다. 의식적인 행동이 세포에 영향을 끼쳐 다시금 결과로 나타나는 거지요. 그런 효과를 기대하고 학교나 군대에서 억지로 칭찬하거나 억지로 웃게 만들곤 합니다. 그걸 보고 의문을 품을 수 있습니다만 효과는 있을 겁니다. 사람마다 미세한 차이는 있더라고요. 단지 위선 같음을 느껴 불만을 느낄 뿐입니다.

 

 

이러한 행태를 보며 현행교육에 다소 아쉬움을 느끼곤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감정제어를 강요하거나, 감정제어를 위선으로 느끼는 걸 보면, 자기감정제어의 필요성을 잘 모르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감정제어는 강요할 필요도 없고, 위선으로 느낄 필요도 없습니다. 인간 스스로를 제어하는 건, 인간이 자신의 모든 세포를 통제할 수 없는 한, 꼭 필요합니다. 특히 인간관계에 해를 끼칠 수 있는 악의라고 불리는 감정들의 경우가 그러합니다. 선의도 제어가 필요할 때가 있지만, 악의는 대체로 필요할 때가 많습니다. 미움 분노 증오 공포 질투 괴롭힘(사디스트) 지배욕 따위의 감정들은 제어되지 않으면 사회의 죄로 이어지곤 합니다. 흔히 사람들이 분노하는 청소년 범죄들은 거의 다 이러한 악의로 일어났다고 봅니다.

 

많은 사람들은 청소년의 흉악범죄가 일어날 때마다 분노합니다. 그리고 그런 청소년들을 보호해주는 소년법의 개정이나 폐지를 주장합니다. 그런데 판사의 말을 들어보면 청소년 범죄의 1%정도만 흉악범죄라고 합니다. 대부분 빈곤범죄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판사들은 개정이나 폐지보다는 유지를 바라는 것 같습니다. 청소년의 빈곤범죄는 사회체계의 허술함으로 나타나는 것이니 사회의 책임이지요. 그러나 1%라도, 그러한 청소년을 보호해주는 것을 악용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한 악용 때문에 희생당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판사의 말도, 소년법 개정이나 폐지를 바라는 사람의 말도 수긍이 간다는 겁니다. 따라서 그 둘이 만족할 수 있는 결론을 도출해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자기감정제어라고 생각합니다.

 

 

소년법의 개정이나 폐지를 바라는 사람들은 보통 일벌백계를 바란다고 봅니다. 강력한 징벌로 청소년들에게 범죄에 대한 경각심을 느끼게 만들겠다는 거지요. 그런데 바라는 만큼 효과가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흉악범죄 비율이 낮은 것 때문에 빈곤범죄라는 사회의 책임을 아이들에게 지우는 결과로 나타날지도 모르니까요. 작은 비율의 흉악범죄도 비슷합니다. 한가지 예시를 들어보지요. 작은 범죄도 가혹한 형벌을 행하는 나라에서 일어나는 범죄는 줄어드는 걸까요? 다소 영향은 있을지 몰라도, 그리 큰 영향은 없다고 합니다. 오히려 더 혼란해진다고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범죄와 형벌의 균형이 깨지게 되면 작은 범죄로 끝날 것이 큰 범죄로 이어지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작은 범죄나 큰 범죄나, 가할 수 있는 형벌이 가혹해질수록 비슷해지므로 큰 범죄로 이어지는 경향이 나타났다고 합니다. 법조인들이 이러한 형태를 알고 있기 때문에 사람들의 불만이 있더라도 유지를 하는 거지요. 법조인은 정의를 위한 집단이 아닙니다. 질서를 유지하는 집단이지요. 감정적으로 가혹한 형벌을 내리고 싶더라도, 사회질서유지가 더 중요하므로, 형법에 맞게 형벌을 내리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한낱 범죄자의 처벌보다 사회질서유지가 더 중요하다는 겁니다.

 

그런 까닭에 다른 방법으로 소년범죄를 줄일 방안을 떠올려야 합니다. 그게 바로 앞서 말한 감정제어입니다. 일벌백계를 하기 전에 애초에 범죄를 저지르지 않도록 감정을 제어하는 방법을 알려주자는 겁니다. 지금까지의 교육은 단순히 선의를 강제로 권하고 악의를 강제로 막습니다. 성의 있는 교육자는 그 이유에 대해 성심껏 알려주기도 합니다만, 그 감정 자체를 제어하는 방법을 알려주는 이는 드뭅니다. 애초에 그런 교육과정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지식을 쌓게 하고 지식을 활용하게 하는 것에 치중된 나머지 인간을 고찰하고 제어하는 것에 대한 교육이 미흡한 것 같습니다. 적어도 제가 겪고 관찰한 바에 의하면 그렇습니다.

 

인간의 범죄는 악의로부터 비롯된다.’ 보통은 그렇습니다. 그래서 악의만 제어하면 되는 것이 아니냐고 물어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한가지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정의구현을 통해 악당이 불행을 맞이할 때 느끼는 만족감은 선의일까요? 악의일까요? 얼핏 보면 정의가 구현되었기 때문에 선의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아닙니다. 이럴 때 느끼는 만족감은 악의입니다. 인간의 불행을 보며 만족감을 느끼는 것이므로 세포가 받아드리는 감정의 만족감은 악의라는 겁니다. 단지 사회적 측면에서 정의가 구현되었을 뿐입니다. 따라서 정당한 악의충족이라고 불러야겠습니다. 다른 예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소중한 이의 행복을 위해 죄를 지었을 때 느끼는 만족감은 선의일까요? 악의일까요? 얼핏 보면 죄를 지었기 때문에 악의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아닙니다. 이럴 때 느끼는 만족감은 선의입니다. 소중한 이의 행복을 보며 만족감을 느끼는 것이므로 세포가 받아드리는 감정의 만족감은 선의라는 겁니다. 단지 사회적 측면에서 죄가 되었을 뿐입니다. 따라서 부당한 선의충족이라고 불러야겠습니다.

 

이렇듯 인간의 세포가 받아드리는 감정의 만족감은 사회적 올바름과 비례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감정은 주관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자신의 모든 감정을 제어할 줄 알아야 합니다. 보통은 인간의 악의가 죄를 부르기 때문에 악의를 중심으로 해도 무관합니다만, 선의가 부르는 죄를 경계하기 위해 되도록 모든 감정을 제어할 수 있는 것이 타당하다고 봅니다.

 

 

보통 공교육에서는 감정제어를 알려주지 않는 것 같습니다. 요즘은 잘 모르지만, 아마 별다를 바 없겠지요. 더구나 청소년 범죄가 그대로인 걸 보면 과거와 크게 다르지는 않지 않을까 예상해봅니다. 그러나 감정제어는 누구나 다 필요로 하기 때문에 알려주지 않아도 스스로 하려고 애를 씁니다. 선의가 부르는 오해를 막기 위해 친절을 베풀고 싶은 충동을 참거나 악의가 부르는 죄를 막기 위해 화내고 싶은 충동을 참습니다. 화를 삭인다고 하지요. 그걸로 나타나는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다양한 방법을 동원하기도 합니다. 좋은 방법으로 취미를 통해 해소하거나, 나쁜 방법으로 만만한 상대에게 해소하거나 하지요. 때리거나 괴롭히거나 욕설을 퍼붓거나. 여기서 잘못된 방법으로 감정을 제어하는 건, 공교육으로 체계적인 감정제어방법을 일러주지 않았기 때문에 생기는 폐해라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잘못된 방법으로 감정을 제어하는 건, 성장해도 변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렇게 학습되어버렸기 때문입니다. 단지 좀 더 교묘하거나 그런 행동을 자기합리화 할 뿐입니다. 그렇기에 인간은 변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인간이 스스로를 제어할 수 있게 되면 변할 수 있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행태로 인해 감정제어방법에 대한 교육의 중요성은 커지지만, 이러한 상황의 본질을 모르는 사람들은 그냥 그 행동을 하지 말라고만 합니다. 결과가 나쁘니까 결과만 하지 말라는 겁니다. 원인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귀찮아서 일까요? 아니면 그저 관성에 의해 학습된 대로만 행동하기 때문일까요? 더 큰 문제는 감정을 해소하기 위해 이용되는 취미를 악으로 여기며 무조건 막으려고만 하기도 한다는 겁니다. 사실 인간이 취미를 즐기는 건, 단순히 스트레스만 해소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되려 스트레스를 쌓아가며 즐기는 취미도 있지요. 인내를 필요로 하는 취미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즐기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단순히 더 큰 보상을 얻기 위해 즐기는 걸까요? 그렇다면 웃기 위해 즐기는 취미. 울기 위해 즐기는 취미. 화내기 위해 즐기는 취미. 무서워하기 위해 즐기는 취미들은 무엇일까요?

 

모든 취미는 인간의 감정이나 욕구 등을 해소하기 위해 존재하는 겁니다. 감정이나 욕구가 충족되지 않아 쌓이는 스트레스를 다른 방식으로 해소하는 것이 취미지요. 감정과 욕구의 충족이 만족감을 느끼게 만들어 기분이 좋아짐에 따라 취미를 즐기게 되는 겁니다. 이러한 것을 알고 있었다면 인간이 취미를 즐기는 것을 무조건 막을 것이 아니라 취미를 통해 자신의 감정이나 욕구를 제어한다는 것을 인식하게 만들어, 그걸로 자신을 제어하게끔 이끄는 것이 올바를 겁니다.

 

이러한 감정제어방법이 교육을 통한 체계적인 방법이 아니기 때문에 다양한 부작용이 나타납니다. 감정을 해소하는 것이 지나쳐, 다른 이들에게 피해를 끼치기도 합니다. 예를 들자면, 게임 중 욕설이나 비아냥 따위가 있겠습니다. 취미는 분명 인간의 감정과 욕구를 해소하기 위해 존재하는 겁니다. 하지만 그것을 위해 다른 이에게 피해를 주면 본말전도가 되어버리게 되겠지요. 이러한 본말전도가 바로 감정제어방법을 체계적으로 교육하지 않는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자신의 악의를 제어할 줄 모르기 때문에 나타난다는 겁니다. 또한 선의도 마찬가지입니다. 선의를 위해 기부나 봉사를 하지만, 제어할 줄 모르기 때문에 그 선의는 종종 악용되기도 합니다. 사기꾼이 기부를 받아 사리사욕을 채우는가 하면, 기부금을 다른 용도로 사용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현상들이 바로 감정제어를 못하기 때문에 나타납니다. 따라서 좀 더 체계적인 감정제어방법을 알려줄 필요성이 있다고 봅니다.

 

 

 

왕따와 괴롭힘은 아직도 사라지지 않은 채 여전히 학생들을 괴롭히고 있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아시아권만이 아닌 전세계에서 벌어지는 것으로 볼 때, 단순히 문화적 측면에서 발생하기 보다는, 인간 본성에 의해 발생한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입니다. 아마 보통 악의에서 비롯될 겁니다. 타인을 괴롭히는 것에 만족감을 느낀다는 이야기에 자신은 아니라며 손사래 칠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약간 형태만 다를 뿐, 모든 인간(결핍되지 않는 한)은 악의를 통해 만족감을 느낍니다. 단지 그것이 정당한 악의충족이냐, 아니냐 일뿐 입니다. 앞서 설명한 것처럼 정의구현에 만족감을 느끼는 것 또한 악의를 통해 만족감을 느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학교 내 사건들도 체계적인 감정제어를 통해 방지할 수 있습니다. 누군가를 괴롭히거나 폭력을 행하고 싶은 충동도 교육을 통해 다른 방식으로 해소하게끔 하면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교육은 어떠했습니까? 그냥 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 이유를 설명하기만 합니다. ? 다른 아이의 상처를 입으니까. 그렇게 그냥 막기만 하고 끝이 납니다. 그런다고 아이의 감정은 사라지는 것이 아닐 것인데, 그냥 막기만 하고 있지요. 그러니까, 감정 욕구가 해소되질 않으니까 충동에 이기지 못하고 사건을 일으키는 겁니다. 왜 그런 걸까요? 이런 걸 생각할 때마다 깊은 슬픔을 느낍니다. 인간에 대한 고찰이 부족한 걸까요? 아니면 교육과정을 그대로 답습하는 고지식함 때문일까요?

 

누군가를 괴롭히고 싶은 충동, 누군가를 욕하고 싶은 충동 자체가 나쁘다고 교육하면 안됩니다. 그 충동을 제어하지 못하고 다른 이들에게 피해를 주는 것이 나쁘다고 교육을 해야지요. 인간의 악의 자체를 나쁘다고 교육하는 건, 인간을 악인으로 만드는 것밖에 되질 않는 겁니다. 모든 인간이 그러한 충동을 가지고 있는데 그걸 악으로 낙인 찍어버리면 어떻게 하나요. 그러면 모든 인간이 악인이 되어버릴 테죠. 그러면 어차피 악인이니까 선행을 할 필요가 없어지겠죠.

 

 

그렇다면 어떻게 악의를, 자신의 감정을 제어해야 하는 걸까요? 이건 어렵지 않습니다. 단지 이미 하고 있으니까 잘 모르고 있던 것뿐입니다. 앞서 말한 것처럼 우리는 취미를 통해 자신의 감정과 욕구를 제어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것처럼 어떤 의식적인 방식으로 자신의 감정을 해소할 수 있도록 유도해야 합니다. 웃음 박수처럼 강제로 권하지는 말고 자연스러운 방식으로 유도하게끔 해야 합니다. 웃음 박수나 칭찬 노트를 생각해보면 인간의 감정을 제어해야 할 필요성을 어렴풋이 느끼는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런데 악의를 제어할 필요성은 모르는 것 같습니다. 그러한 필요성은 인간을 고찰했다기 보다, 억지로 웃더라도 기분이 좋아지는 현상을 보고 본받은 것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악의의 경우엔 개그의 교육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학생들이 개그를 통해 비웃음을 당하고 비웃음을 하도록 유도하는 겁니다. 진지하게 개그 과목을 하나 개설해서 악의를 제어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될 정도입니다. 개그라는 일종의 문화를 통해 누군가에게 비웃음을 당하는 것으로 정신력을 강화하고, 누군가를 비웃는 것으로 악의를 제어하는 수업이 필요하다는 겁니다.

 

이런 교육을 통해 자신의 악의를 제어할 수 있다면, 어떠한 도덕교육보다 훌륭한 결과를 만들어낼 것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주입식으로 학습하여 지식으로만 알고 있는 도덕보다, 자신이 실제 경험하면서 악의를 제어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더 나은 결과를 만들 수 있다는 겁니다. 수행평가나 시험도 그러하지요. 사람을 웃기는 것. 그걸 해낼 수 있으면 좋은 평가를 받으면 됩니다. 단지 선을 넘지 않도록 유도해야겠지요. 저는 모든 아이들이 개그의 기본소양을 익히게 되면, 악의를 제어할 수 있게 되어 학교범죄가 상당히 줄어 들을 거라 확신합니다. 인간이 죄를 짓는 것은 악한 것이 아니라 약한 것입니다. 감정과 욕구를 제어하지 못한 약함. 그걸 강하게 만드는 것이 인간교육이라 생각합니다.

 

그 외에도 인간 스스로 자신의 감정과 욕구를 제어할 수 있는 방법을 교육하는 것은 단순히 지식을 외우는 것 이상의 효과를 발휘할 거라 생각합니다. 인간은 언제까지나 자신의 감정과 욕구를 제어하기 어려워하기 때문에, 그걸 미리 교육받아놓으면, 평생 덕을 받아 보다 편하게 살아갈 수 있을 겁니다.

 

 

사전적 정의로 사람의 인격은 사람으로서의 품격이고, 사람의 품격은 사람 된 바탕과 타고난 성품이라 합니다. 저는 복잡할 것 없이 자기제어능력의 정도에 따라 인격을 평가합니다. 자기제어능력을 통해 감정과 욕구를 제어하여 올바른 행동을 할 수 있다면, 타고난 성품이 어떠한들 우수한 인격이라 여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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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들을 마음대로 선동했었다는 교만함은 사물의 본질을 보지 못한 오만함일 뿐입니다. 지금까지는 그저 인간의 상처를 이용해왔을 뿐입니다. 가여운 사람들.

 

그럼 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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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극권지니    친구신청

감정제어가 가능한 사람은 손에 꼽지요.
부처님정도 되어야 가능하죠.
감정은 사고 체계의 무의식에 가까운 습관입니다.
어릴때 뇌가 발달하면서 그때 각인된 사고 체계입니다.
그걸 콘트롤 하려면 자신의 호흡을 콘트롤 하는 것만큼 힘든
영역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무리 하려해도 무의식중에
하는 호흡을 인식하며 호흡하기도 힘들듯이 감정을 자신의 사고체계를 스스로 알기조차도 힘들기 때문에
타인의 감정을 이해하고 콘트롤 하도록 한다는건 너무나도
어려운 일입니다.
[잡담] 한국정치, 사상의 노화 (0) 2019/09/16 AM 01:38

한국정치, 사상의 노화

 

 

 

세상의 불합리는 어쩌면 노화에서 온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분야를 가리지 않고 노화가 진행되면 불합리가 나타났습니다. 여기서의 노화는 실제 나이의 많음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상의 노화를 뜻하는 것입니다. 대체로 실제 나이가 많을수록 사상도 같이 노화되기 때문에 그런 편견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상은 과거로부터 이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자칫 하단 어리더라도 늙어버릴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어떤 어린이가 옛날부터 이어진 특정 사상을 스스로의 생각 없이 그대로 수용했다고 가정해보겠습니다. 그렇다면 그 아이의 사상은 수백 년 또는 수천 년 이상이 되는 겁니다. 대표적으로 종교가 있을 수 있겠습니다. 보통, 종교 위인의 언행을 그대로 수용하고 믿는 것이 선이고 의심하는 것이 악이기 때문에 맹목적으로 종교를 믿는 어린이는 사상이 늙어버리는 겁니다.

 

물론 어린이가 사상이 어릴 확률이 높습니다. 왜냐하면 교육만이 어린이가 수집하는 정보는 아니기 때문입니다. 실제 경험하면서 얻은 정보를 토대로 스스로의 생각을 갖춰나가게 되면서 새로운 사상이 탄생하게 되는 겁니다. 하지만 주입식교육이나 세뇌를 받게 되면 그 어린이는 새로운 사상을 가질 수 없게 되어 늙어버린 상태로 살아가게 됩니다. 반면, 어떤 어른이 옛날부터 이어진 특정 사상을 토대로 자신만의 사상을 만들었다고 가정해보겠습니다. 그렇다면 그 어른의 사상은 많아 봐야 백 년 안팎일 겁니다. 일반적인 인간의 수명이 그 정도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사상의 노화는 실제 나이의 많고 적음보다는 개인의 고유성을 얼마만큼 유지할 수 있느냐에 따라 결정될 것입니다. 어느 누구라도 남의 말을 그대로 수용하는 사람은 그 사람이 가진 사상의 나이를 그대로 이어받는 겁니다. 어떤 경우에도 그러하므로, 어떤 좋은 말이라도 그대로 수용하기보다는 자신만의 해석으로 판별하고 수용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나이의 많고 적음과 관계없이 사상이 늙어버릴 것입니다. 그렇게 늙으면 자연스럽게 부패하거나 변질됩니다.

 

알기 쉬운 예가 바로 기득권의 노화일 겁니다. 기득권은 보통 선대가 쌓아 올린 지식과 부를 물려받는데, 그 지식과 부를 부정하기 어렵기 때문에 그대로 수용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의 선조인 조선은 치욕을 겪었을까요? 단순히 생각하면 우수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랬을 거라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다릅니다. 우수했기 때문에 그랬습니다. 조선의 기득권의 선대가 쌓아 올린 지식과 체계의 완성도가 높았기 때문에 후대는 그것을 그대로 수용했습니다. 그 결과, 사상의 노화가 찾아와 변화를 바라지 않는 바람에 늙고 부패하여 망했던 겁니다. 쇄국정책. 그것이 바로 사상의 노화가 부른 것이라 봅니다. 만약 우수하지 않았더라면, 늙어버리기 전에 망하고 다른 왕조가 세워졌을 겁니다. 만약 늙어버리지 않았더라면 개화하여 혼란의 시기를 극복해낼 수도 있었을 겁니다. 따라서 조선의 가장 큰 실수는 사상의 노화를 견제하지 않은 것에 있다고 봅니다.

 

보통 오랜 왕조가 없다고들 합니다. 조선이 특이한 예였지요. 그건 당연합니다. 수백 년간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대대로 늙어갔는데 어찌 부패하지 않을 수가 있고, 어찌 망하지 않을 수가 있을까요? 지금까지 인류는 연령기득권의 권위가 만든 과거 미화와 전통을 가치 있게 여기는 것에 속고 있었던 겁니다. 인간은 과거에 종속될수록 늙어가고, 과거를 부정할수록 어려집니다. 늙으면 부패하고 어리면 미숙합니다. 늙은 국가가 저지른 이기적인 갈등조장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기득권의 유지를 위해 표리부동한 태도로 사과도 제대로 하지 않고 부당한 이익을 취하고 있는 것을 알고 있을 겁니다. 어린 국가가 저지른 예의 없는 미숙함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문화대혁명으로 문화가 어려져 예의와 예절을 잊은 사람들의 행패를 알고 있을 겁니다. 따라서 과거에 종속되지도, 과거를 부정하지도 말고 젊음을 유지해야 할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유교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사회의 불평등의 많은 부분은 유교 때문이라고 비판하지요. 그런데 유교가 최초 탄생했을 때엔 신선하고 좋은 사상이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렇지 않으면 융성해질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름에 따라 사상의 노화가 찾아왔습니다. 늙고 부패하게 됩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사실 유교에는 충효가 없다고 합니다. 자세히는 모르지만 그렇다고 하니 그렇다고 합시다. 그런데 지금은 어떻습니까? 일반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충효를 중시하는 풍조가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어떤 사상이라도 늙으면 부패하거나 변질됩니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연령기득권을 소중히 여겼기 때문에 그러한 늙고 부패한 것을 인식할 수가 없었습니다. 감히 따질 수도 없었습니다. 전통은 올바른 것. 그것이 사상의 노화를 눈치채지 못하게 만든 정의입니다.

 

다른 종교들도 그렇습니다. 이웃을 사랑하라고 설파했던 종교는 불신지옥이라는 공포로 마음이 약한 사람을 이용하고 있습니다. 수행을 통해 도를 닦는 종교는 세속에 물들어 물질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사상의 노화 찾아오자 부패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특별히 종교만 그런 것은 아닙니다. 모든 사상은 노화되면 부패하거나 변질됩니다. 정치를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공산주의의 사상은 분명 자본주의의 자유가 만든 불평등을 해결하기 위해 나타난 사상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어떠합니까? 독재자의 독재수단으로 전락해버렸습니다. 지금의 공산주의 국가는 이미 공산주의 국가라 불릴 수도 없다고들 하지요. 자본주의도 예외는 아닙니다. 한번 늙어 제국주의라는 온갖 추태를 보여주다가 수정자본주의로 변질되었습니다. 기득권에 대한 분노가 원동력이었던 정치이념은 이렇게 부패하거나 변질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러므로 좌파니 우파니 진영논리로 구분 짓고 사물을 바라보는 건, 이러한 현상을 인식하지 못하고 과거의 사상을 그대로 이어받은 사상의 노화, 늙어버린 사상을 유지하고 있는 것에 불과합니다.

 

 

 

저는 지금까지 한국정치를 바라보며 많은 괴리감을 느껴왔습니다. 처음에는 독재를 비판하는 사람들이 독재자를 지지하거나 가까이하려는 태도를 이해하기 어려웠습니다. 그리고 정치에 대해 조금 알게 되자 세상에 널리 알려진 정치이념과 실제 정치와 많이 다르다는 걸 느끼게 되었습니다. 좌파 민족주의와 우파 사대주의는 저에게 잠시간 몰이해를 가져다 주었습니다. 이후 좌우 구분이 의미가 없다는 걸 깨닫고 이해하게 되었지요. 애초에 해외에서 배워온 정치이념이 한국 사정에 맞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더불어 그 정치이념도 정치인의 입장에서 정리된 것이었습니다. 국민의 입장에서 정리된 것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러한 오류들이 한국정치에 대한 괴리감을 만든 것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기본 정치이념은 본래 기득권에 대한 분노가 원동력이었습니다. 왕조에 대한 분노. 자본가에 대한 분노. 그것이 간단하게 정리하면 자본주의와 공산주의가 되겠지요. 그런데 한국은 어떻습니까? 왕조에 대한 분노가 형성될 무렵, 외세의 침략을 받아 외세에 저항을 했어야 했습니다. 기득권에 대한 분노로 정치세력이 형성되기 전에, 자본주의의 침략에 대한 분노로 정치세력이 형성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항일운동이 대표적일 겁니다. 우리는 이렇게 일반적인 정치이념과 다르게 시작한 것입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광복을 하게 되고 남북이 갈라져 버립니다. 그러다가 공산주의의 침략이 시작됩니다. 한국전쟁의 발발입니다. 이 끔찍한 전쟁은 한 독재자의 야욕으로 발생한 것입니다. 이 전쟁은 휴전 이후, 최악의 상황을 만들게 됩니다. 자본주의의 침략에 기대어 부당한 이익을 취하던 기회주의자들이 사람들을 공포로 이용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공산주의 침략을 빌미로 자신들에게 반발하던 자들을 탄압합니다. 독립운동가들 말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탄압에 민중은 공산주의 침략에 대한 트라우마로 순응하게 됩니다. 그들의 정의는 공포 앞에서 무력했습니다. 그렇지만 올바른 행동을 한다고 굳게 믿었던 지식인들은 민중의 트라우마를 이해하지 못하고 민족을 위해서 북한과의 화합을 시도하다가 정치적 패배를 겪게 됩니다. 그리고 민중에 대해 실망을 하게 됩니다. 슬픈 일입니다.

 

어쨌든 이렇게 자본주의 침략의 피해자들이 정치세력화가 되고, 공산주의 침략의 피해자들이 정치세력화가 된 것이 지금까지의 한국정치였습니다. 이를 공산주의의 독재자가 민족을 미끼로 자본주의 침략의 피해자들을 이용했고, 군사정부의 독재자가 북풍을 미끼로 공산주의 침략의 피해자들을 이용해왔던 겁니다. 그 상황에서 정치인이 지역을 이용한 것이 지역갈등을 유발했습니다. 지역갈등의 본질은 여기에 있던 겁니다. 이처럼 일반적인 정치이념과 전혀 다른 방식으로 형성되었기 때문에 한국정치는 정치이념과 괴리감이 있었던 겁니다. 기득권의 피해자와 침략의 피해자. 그 차이가 바로 한국정치를 혼란케 해왔던 겁니다. 더불어 정치이념이 국민의 입장에서 정리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이러한 차이를 깨닫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지금까지 한국정치의 정체를, 그리고 노화를 불러왔던 겁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또 다른 정치세력이 등장하기 시작합니다. 바로 군사독재의 피해자들입니다. 이들이야말로 정체되어있었던 한국정치의 변화를 불러와 정치적 젊음을 되찾게 만든 정치세력입니다. 그것이 주관적인 입장에서 옳건 그르건, 정치에 변화를 불러와 국가가 정치적 젊음을 되찾게 만들었다는 겁니다. 상대적으로 정치세력이 적었던 군사독재정부에 맞서 싸운 민주주의자들을 중심으로 형성된 정당이 어째서 저번에는 패배하고 이번에는 승리하였는가? 그것은 간단합니다. 공산주의 침략의 피해자에서 군사독재 횡포의 피해자들로 세대교체가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득권으로 그간 쌓아 올린 다양한 힘을 통해 사람들의 생각을 유도해도 통하지 않는 겁니다. 공산주의 침략의 피해자들이 뭘 해도 지지했던 것처럼, 군사독재 횡포의 피해자들이 뭘 해도 지지하고 있는 겁니다. 그것이 옳건 그르건 말이지요.

 

이러한 정의의 충돌은 주관적으로 우위를 가리기 어렵습니다. 공산주의 침략의 피해자들은 무엇보다 반공, 반북이 가장 중요하기 때문에 정부의 부패의 우선순위는 상대적으로 낮게 됩니다. 반면 군사독재 횡포의 피해자들은 반독재, 반부패가 가장 중요하기 때문에 반공, 반북의 우선순위는 상대적으로 낮게 됩니다. 이처럼 가치관이 다르기 때문에 주관적으로는 어렵습니다.

 

하지만 객관적으로 차이는 말할 수 있습니다. 어느 쪽이 더 젊은가? 그것은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그간 쌓아 올린 정치적 기득권을 파괴하고 변화를 불러일으켰다는 것에는 어떠한 사상을 가지고 있던 이견은 없을 거라 봅니다. 변화 자체에 이견이 있을 수는 없습니다. 단지 그 변화가 옳은가 옳지 않은가에 대한 시각차이겠지요. 변화에 따른 젊음은 분명합니다. 모든 사상이 노화되면 변질되거나 부패했던 것처럼, 지금의 한국정치도 시간이 흐르면 변질되고 부패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지금 당장은 생생하고 젊은 상태라고 생각합니다. 개개인의 사상은 노화될 수 있으니 각각은 사상의 노화를 겪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한국정치 자체는 지금, 생생하게 젊은 상태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정치의 본질을 깨닫고 앞으로도 젊음을 유지하길 바랍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어쩌면 사상의 젊음이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이건 나중에 사상으로 한번 더 정리해보겠습니다. 사상의 흥망성쇠 노화. 등 생각할 거리가 많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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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평등하다면, 명문대생들에게 무언가 더 특별한 것을 요구할 권리는 없습니다. 일반 시민들같이 행동해도 무관합니다. 그럼에도 이들에게 과거를 회상하며 무언가 더 특별한 것을 요구하는 것은 오히려 이들에게 특권을 부여하는 꼴이 되는 겁니다. 이제는 달라져야 합니다. 차라리 이들의 특권을 없애는 것이 좀 더 합리적입니다.

 

좀 고민해봤는데 시간 좀 지나도 신경 쓰지 않으렵니다.

 

제 가치 제 위치 알 것 같습니다. 저는 사상의 어린이 같네요. 처음부터 다시 다 생각하고 있으니까요. 약간 미숙하더라도 성장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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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담] 감춰진 과제, 인류의 노화 (0) 2019/09/09 AM 12:00

감춰진 과제, 인류의 노화

 

 

 

세계에서 벌어지는 많은 현상들의 근원은 노화에 있는 것 같습니다. 많은 것을 고찰할수록 인류가 늙어가고 있음을 절실히 깨닫게 됩니다. 단순히 고령화 사회로 진입하고 있어서가 아닙니다. 인류의 역사가 길어짐에 따라 종 자체가 늙어가고 있다는 겁니다. 선진국의 자국주의화. 이는 얻을 것보다 잃을 것을 걱정하는, 그런 늙은 시대임을 방증하는 현상이라고 봅니다.

 

지금까지 인간의 기록은 불완전했습니다. 불타거나 잃어버리거나 왜곡되었어요. 그래서 역사가 온전하게 기록되는 일이 적었습니다. 심지어 불완전한 기록조차 기득권의 전유물이었습니다. 교육의 기회를 얻기 어려웠던 사람들은 성숙해질 기회조차 없었습니다. 그래서 늙을 수도 없었어요. 늙은 건 언제나 기득권이었습니다. 교육받은 기득권은 대대로 물려받은 가문의 역사 속에서 꾸준히 늙어갔습니다. 과거에 종속되고 과거에 휘둘렸어요. 자신의 삶을 사는 것이 아닌, 선조가 만들어둔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살았습니다. 그러니 늙을 수밖에 없지요. 그리고 그러니까 부패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젊은 나이서부터 가질 것보다 잃을 것을 걱정하게 되는 늙은 상태로 시작되는데 어찌 부패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기득권의 대물림은 부와 함께 늙음도 물려주고 있는 겁니다. , 참고로 부패의 순화어는 썩다입니다.

 

그런 기득권의 노화도 전쟁과 자연재해로 인해 매번 커다란 변혁을 겪어왔습니다. 죽었기 때문에 새로 시작할 필요가 있었어요. 전쟁이나 자연재해는 끔찍합니다. 있어선 안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랬기 때문에 인류는 젊음을 유지해왔던 겁니다. 매번 새롭게 시작해야 했기 때문에 과거의 늙음을 물려받지 않고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떻습니까? 무기의 발전이 부른 평화는 온전하게 유지 중에 있습니다. 치열한 다툼조차 온건하게 무역전쟁이란 이름으로 펼쳐지고 있어요. 인터넷을 통해 서로의 사상이 연결되는 시점에서 민의에 어긋나는 전쟁은 있기 어렵게 되었습니다. 무엇보다 이제는 기득권만 늙는 것이 아닙니다. 인터넷을 통해 대다수의 사람들이 자유롭게 정보를 공유하고 역사를 물려받아 동시에 늙어가고 있어요.

 

평화와 자유와 평등은 올바릅니다. 하지만 그것이 지금 인류의 노화를 부르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인류에게 커다란 과제를 알려주게 됩니다. 평화와 자유와 평등은 필요합니다. 따라서 전쟁 없이 젊음을 유지할 수 있는 방법을 떠올려야 하는 과제가 있는 겁니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젊음을 유지할 수 있을까요? 간단히 과거에 종속되지 않으면 됩니다. 스스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사람들이 많아질수록 젊음을 유지하는 국가가 될 것입니다. 그렇다고 과거를 부정하라는 것은 아닙니다. 과거는 소중합니다. 과거가 있기에 우리는 성장하고 성숙할 수 있었습니다. 과거를 부정하는 것은 그러한 장점도 버려지는 것이기 때문에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따라서 과거를 부정하지 않고 과거에 종속되지 않으면 됩니다.

 

예컨대 이런 겁니다. 지금 한국과 일본의 갈등을 어떻게 접해야 하는 걸까요? 과거사로 촉발되었기 때문에 과거로 접해야 하는 걸까요? 아닙니다. 과거는 과거로 끝이 났습니다. 지금 일본의 잘못은 과거에 있는 것이 아니라 현재에 있습니다. ‘현재과거의 죄를 인정하고 반성하지 않는 것. 정확히 말해, 표리부동한 사과로 한쪽은 진정성을 의심하게 만들고, 한쪽은 사죄피로를 불러일으켜 갈등을 부추긴 것. 이것이 지금 현재 일본의 잘못입니다.

 

어쩌면 이러한 일본의 태도도 단순히 그들이 늙었기 때문에 그런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일본은 지금 늙었습니다. 이건 비하용이 아니라 냉정한 평가입니다. 인간은 늙어갈수록 성숙해지고 체계적이게 되죠. 모든 사람이 그런 건 아닌데 대체로는 그렇습니다. 대신에 변화를 두려워하거나 수동적이게 됩니다. 그러한 현상을 그대로 닮은 것이 일본입니다.

 

정치는 경쟁이 죽었고 경제는 도전이 죽었고 사회는 변화가 죽었고 문화는 흐름이 죽었습니다. 예컨대 사회의 경우, 매뉴얼을 통해 체계적이게 되었지만, 그 때문에 변화를 두려워하고 수동적이게 되었습니다. 이런 것이 바로 늙었다는 겁니다. 문화를 봐도 자국의 과거문화의 우수성만 설파하고 있는 시점이죠. 닌자나 사무라이나 기모노나 자기들 문화를 아주 소중히 여깁니다. 그러니까 문화도 늙었습니다. ‘현재문화를 새롭게 만들 생각이 없게 됩니다. 새로운 흐름이 죽었습니다.

 

이렇게 늙었기 때문에 과거의 죄에서 벗어날 수가 없고, 그렇기 때문에 진정한 사과를 할 수가 없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우리는 이러한 현상을 반면교사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노화는 이런 행동을 야기합니다.

 

물론 이번 갈등이 무조건 좋지 못한 것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우리나라는 지금 늙어가고 있었습니다. 변화를 두려워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최근 정치와 법조계가 국정농단 사건으로 인해 젊어지고 있었습니다. 그런 상황 속에서 경제가 이번에 변화를 통해 일부 젊어지고 있어요. 이러한 현상은 다소 손해를 보더라도 추후 이익으로 돌아올 거라 확신합니다.

 

, 시간이 없네요. 사실 좀 더 잘 써보려고 했는데 너무 늦은 밤에 시작해버렸군요. 나중에 좀 더 정리해보겠습니다. 다른 나라의 예시도 나중에 정리해보죠. 그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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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은 쓸지 안쓸지 모르겠네요. 가능하면 써보겠습니다.

 

적자생존, 전범기, 인재와 자연재해, 가상화폐, 한국정치, 호불호, 악의, 만족

 

쓰고 싶은 거 아무거나 씁니다.

 

그럼 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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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감] [영화감상] 우리집 (1) 2019/09/01 AM 12:00

[영화감상] 우리집

 

 

 

내용누설 있을 수 있습니다.

 

특별히 볼 것이 없어서 보게 되었습니다. 다른 영화들의 평이 그다지 만족스럽지가 않더군요. 어떤 영화는 과거 명작의 후속편이고, 어떤 영화는 과거 유명배우 2세가 주연이고, 어떤 영화는 과거가 주젠데 상업적이었어요. 이 세 가지의 공통점은 평가가 그다지 좋지 못하다는 거였어요. 그래서 남은 영화는 재난영화와 가족영화뿐이었습니다. 그 중에 사회문제에 좀 더 관심이 있어 이 영화를 보게 되었어요. 그런데 이 영화가 저예산영화라 상영관 자체가 얼마 없더군요. 그래서 정말 우연찮게 봤습니다.

 

이 영화를 보기 전에 알고 있던 정보는 세가지. 저예산영화, 가족, 아이. 구체적인 내용은 직접 보고 나서 알았습니다. 그리고 나름대로 볼 만 했던 것 같아요. 적어도 상업성에 치중하여 영화품질에 소홀했던 고예산영화보다 나았습니다. 그러니 우선 만족스럽게 봤다라는 감상평으로 시작하도록 할게요. 그럼 몇 가지 느낌 점을 적어보도록 하겠습니다.

 

 

 

내용

 

등장인물 부부싸움 가족(남매, 부부) 불안정가족 (자매)

 

내용은 간단합니다. 착한 아이의 반항. 학교에서 선행상을 받을 정도로 착한 아이였던 주인공()은 부부싸움으로 인해 가족이 깨지기 시작하는 걸 목격합니다. 그러자 어린 시절을 떠올리며 가족여행을 가자고 제안을 합니다. 주인공의 어린 시절에도 부부싸움이 있었는데, 가족여행 후에 화합을 하게 되었거든요. 그래서 가족여행을 가자고 합니다. 그런데 반응이 영 시큰둥합니다. 오빠는 사춘기가 와서 부부싸움에 질려 이혼을 바라고 있을 정도고, 부부는 서로의 탓을 하며 바쁘다는 이유로 가지 못하겠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우연찮게 생활이 불안정해 자주 이사를 다니는 자매와 만나 사이가 좋아집니다. 그리고 집에서는 독일 주재원으로 떠날 예정이 잡힌 어머니와 불륜을 저지르는 아버지를 우연찮게 알게 됩니다. 대강 배경은 이렇습니다.

 

 

그 후 주인공()은 두 가지 결심을 합니다. 부부싸움을 멈추고 가족의 화목을 부를 가족여행을 기획하고, 어른들의 사정으로 이사를 가는 것이 결정된 자매들을 돕기로 합니다. 이것저것 시도하면서 소소한 재미들을 줍니다. 아버지와 불륜을 저지르는 불륜녀에게 공중전화로 욕을 하거나, 학원 빼먹고 여자친구와 놀고 있는걸 추적해 사진을 찍고 협조하라고 협박하는 등의 유치한 악의를 충족시켜 웃음을 하게끔 유도합니다. 실제로 사람들에게서 웃음이 나왔습니다.

 

이것저것 많은 노력을 하던 끝에 자매의 실수로 가족여행을 가기로 결정이 됩니다. 그래서 주인공은 기뻐했어요. 그런데 그 여행의 시기 때문에 자매와 불화가 생겨버립니다. 그리고 그 여행조차 이혼을 하기 전, 아이를 위한 추억여행임을 알게 되자, 가출을 합니다. 착한 아이가 삐뚤어져 버린 것이었죠. 부모와 소통이 되지 않는 자매들을 설득하여 자매의 부모가 있는 지방의 해변까지 여행을 가게 됩니다. 아이의 입장에서는 모험이라고 표현하는 게 낫겠네요. 그리고 아이다운 실수, 실패. 잦은 미숙함으로 목적지에 도달하지도 못하고 엉뚱한 해변에서 이들의 모험이 끝이 납니다. 이 때 착했던 아이들의 스트레스가 폭발해요. 화목한 가정을 바라며 만들었던 상징물을 부수면서 스트레스를 풀죠. 그런 건 소용이 없었다고 외치면서요. 우연찮게 주인이 떠난 해변가의 텐트에서 잠을 자게 된 아이들은 아이들끼리의 생활이란 덧없는 희망을 꿈꾸며 잠을 청합니다. 그리고 어찌어찌(과정 모름) 집에 돌아가게 된 주인공은 주인공의 실종으로 걱정하는 가족들에게 밥을 먹고 여행을 가자고 요청을 합니다. 그리고 영화는 끝이 납니다.

 

 

 

간단하게 요약하다 보니 빼먹은 것도 있을 거예요. 그래도 줄기는 맞을 겁니다. 아아 시간이 없어서 빨리 쓸게요. 감상은

 

첫째, 단조로운 이벤트,

 

독일주재원과 불륜사건을 좀 단조롭게 알게 된 것 같았습니다. 결과에 맞춘 과정이라는 느낌.

 

둘째, 아이의 고뇌

 

아이의 고뇌가 다소 성숙하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가족의 화합을 바라기 때문인지, 가족 앞에서 불평을 하질 않아요. 너무 착해. 그래서인지 착한 아이의 고질적인 문제에 대한 의식이 조금 부족했던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셋째, 결말 누락

 

앞에서 관람하던 가족 중 아이의 말이 인상 깊었습니다. 영화를 많이 봐왔는데 이렇게 조용한 결말은 처음 봤다고. 저도, 그리고 다른 관람객도 동의할 정도로 당황스러운 시점에서 끝이 났습니다. 일부러 누락시켜 각자 결말을 스스로 생각하는 시간을 준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시간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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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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