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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담] 홍콩 고찰, 우리가 할 수 있는 일 (1) 2019/10/13 PM 10:30

 

홍콩 고찰, 우리가 할 수 있는 일

 

 

 

홍콩시위는 나날이 격화되고 있습니다. 어린 학생의 죽음들은 쉽게 여길만한 사안이 아니지요. ‘자유 아니면 죽음을 달라’라는 것이 현실화되었다는 사실에 스산한 슬픔을 느낍니다. 그래서 간단한 고찰을 통해 어떻게 알고 대처할 것인가에 대해 논해보고자 합니다.

 

사실 홍콩 문제가 단순하진 않습니다. 인류가 지금까지 국가형성과 유지에 사용했던 민족주의와 수많은 투쟁으로 탄생했던 새로운 개념인 민주주의와의 갈등이기 때문입니다. ‘민족의 지배를 받으니 이민족의 민주주의를 따르겠다.’ 공산당의 지배에서 벗어나 독립하겠다는 그들의 의지를 보며 한국은 복잡한 심정을 가지게 됩니다. 우리나라만 해도 민족이란 개념에 근거하여 마련된 체계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대표적으로 널리 알려진 체계가 바로 북한에 대한 유화정책과 재외동포에 대한 우대정책이 되겠습니다. 이렇게 민족이란 개념이 사회 곳곳에 영향을 끼치는 나라기 때문에 민족주의와 민주주의의 갈등이 한국에게 있어 단순한 문제가 될 수 없는 겁니다.

 

그럼에도 한국은 대다수 국민들이 홍콩을 응원합니다. 왜 그런 걸까요? 그건 한국의 정치를 알면 보다 쉽게 접근할 수 있습니다. 민족주의와 민주주의의 갈등 이외의 요소가 한국 양대 정치세력에 영향을 끼쳤기 때문입니다. 한국은 공산주의 침략의 피해자로 이루어진 정치세력(흔히 보수라 자칭하는)과 자본주의, 그리고 군사독재 횡포의 피해자로 이루어진 정치세력(흔히 진보로 타칭되는)이 양분하고 있습니다. 앞의 세력은 공산주의자에 대한 분노와 그들의 압제에 벗어나고자 하는 자본주의자들에 대한 동정심이 주를 이룹니다. 뒤의 세력은 공산독재에 대한 분노와 그들의 압제에 벗어나고자 하는 민주주의자들에 대한 동정심이 주를 이룹니다. 재미있는 일입니다. 그렇게 싸워왔던 한국 양대 정치세력은 ‘공산독재’라는 말 아래 하나가 될 수 있었습니다.

 

물론 해묵은 갈등은 쉽게 해결되는 건 아닙니다. 이러한 사안조차 서로에 대한 비방거리로 이용되고 있으니 말입니다. 쓴웃음이 나옵니다. 그런 탓에 어쩌면 그저 비방거리로 이용하기 위해 홍콩을 응원하는 이들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럼에도 이들이 홍콩과 중국 사이에서 고르라고 하면 단연코 홍콩을 선택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중국의 횡포는 홍콩에게만 가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쉽게 체감할 수 있는 중국의 횡포는 미세먼지가 되겠습니다. 이미 이런 미세먼지에 피해를 입는 국민이 존재할 정도니 분노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 먼지를 흡입할 때마다 중국이 증오스럽습니다. 어떤 지식인은 중국의 영향이 크지 않다며 한국인을 다독이기도 합니다. 기간의 평균을 따지면 그렇게 많지 않다고 하면서 말입니다. 그런데 그건 평균값일 뿐입니다. 중국에 영향을 받는 날은 미세먼지 수치가 2~3배 이상 치솟는데 어찌 중국의 영향이 적다 할 수 있겠습니까? 알면서도 그들에게 저항하지 않고 평균값이라는 통계의 오류를 통해 국민들을 우롱하려는 태도가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더구나 그들의 중화사상을 보고 있으면 불안감을 느끼게 됩니다. 한국에 들어와 있는 조선족들은 한국에 융화되지 않고 중국인으로 남은 상태에서 영향력을 넓혀가고 있습니다. 한번 중화사상에 빠지게 되면 그들에게 흡수되어 독자적인 영역을 구축한다는 것이 현실 속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런 현상은 어쩌면 미래의 한국이 중화사상에 영향을 받아 중국의 소수민족화가 될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런 끔찍한 가능성 속에 한국인이 중국인에 대해 거부감을 느끼는 것은 그리 이상할 것이 없습니다. 더구나 많은 자본을 보유한 중국인들이 한국 땅을 마구잡이로 사들이고 있습니다. 자본으로 정복당할 염려까지 존재하는 상황 속에 불안감을 느끼지 말라고 하는 건 지나친 낙관주의입니다. 쉽게 말해 홍콩의 일이 남일이 아니게 될지도 모른다는 겁니다. 중국으로부터 독립을 외치게 될 미래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면, 미리 그들에게서 벗어나야 합니다.

 

이런 저런 이유들 때문에 한국인이면 중립이라고 하더라도 홍콩을 응원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홍콩을 실질적으로 돕는 건 현실적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고루한 개념이긴 해도 같은 국가, 같은 민족이란 개념은 다른 국가, 다른 민족이 간섭하기 어렵습니다. 흔히 내정간섭이라고 하지요. 안타까운 현실이지만 국가 차원에서 지원하는 건 중국과 전면대결을 각오하지 않는 한 어려운 일입니다. 그래서 국가 운영에 연관이 있는 자들이 목소리를 내기 어려운 것입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전면대결로 치닫더라도 중국의 폭주를 제지할 필요가 있음을 주장하는 바입니다. 전 세계와 연대하여 홍콩에 대한 다방면의 지원과 함께 모든 형태의 교류를 점진적으로 축소하고 중국의 침략에 대비해야 함이 마땅할 것입니다. 사상의 침략이든, 자본의 침략이든 말입니다. 왜냐하면 하나의 중국은 다른 국가조차 잡아먹을 거대한 지배야욕을 내포한 사상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티벳이나 위구르가 현실 속에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들이 가여우면서도 무섭습니다. 나는 민주주의자로서 하나의 중국을 부정하겠습니다. 독립을 바라는 자에게 독립을! 자유를 바라는 자에게 자유를!

 

이런 현실이지만 사실 한국에는 중국과 관련 있는 이들이 많이 있기 때문에 그러한 결단을 내리는 것은 쉽지가 않습니다. 그러니 미리 국민 개개인이 할 수 있는 일을 함이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은 국민의 힘이 강한 나라입니다. 예부터 그래왔습니다. 왕이 수도를 버리고 도망가더라도, 국가를 지키는 것은 민중이었지요. 지금도 보면 의사표현을 위한 시위에도 많은 사람들이 참여하고 있습니다. 지금 한국은 상당히 민주적인 국가인 상황이라 봅니다. 잠깐 시위에 대해 써보자면, 낡고 부패하여 종교와 자본의 도움이 없으면 인력을 끌어들이기도 어려운 공산주의 침략의 피해자로 형성된 정치세력은 황혼기를 맞이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단지 성별 역차별 문제가 어떻게 작용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을 거라 봅니다. 정치의 본질을 알면 이런 사안이 가볍다고 볼 수는 없을 것입니다. 이는 나중에 정치의 노화에 대해 작성해보겠습니다. 어쨌든 지금 한국은 국민의 목소리가 크기 때문에 여론을 잘 살펴보면 대세를 타는 것은 어렵지 않을 거라 봅니다.

 

이렇게 국민의 목소리가 큰 국가기 때문에 개개인이 홍콩에 대한 지지의식을 결집할 수 있다면, 미래에 있을 중국과의 투쟁에 앞서 국가를 단결하게 만들 공동의식이 나타날 수 있을 거라 봅니다. 그러니까 지금 저와 여러분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작더라도 그것이 한국의 미래를 결정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홍콩 문제에 대해 국민이 할 수 있는 일에 대해 이야기 해보겠습니다.

 

 

 

지금 중국은 공산주의임에도 불구하고 자본을 아주 잘 활용하는 국가입니다. 가장 자본주의를 사랑하는 국가가 공산주의라니 참으로 아이러니한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본질을 알게 되면 그리 이상할 것은 없습니다. 자본은 수단입니다. 기존 자본주의자들이 자유를 위해 자본을 사용했다면, 지금 공산주의자들은 지배를 위해 자본을 사용하는 것일 뿐입니다. 그러한 사실은 웃기는 상황을 만들어냅니다. 자본주의자들이 사랑하는 자본이 중국공산당의 지배를 위한 수단으로 이용되고 있다는 겁니다. 지금 유명 거대 게임사인 블리자드의 경악할만한 행동을 보십시오. 공산당의 자본에 지배 받아 자유를 외치는 민주주의자를 배격하고, 그를 응원하는 두 명의 교양인을 배제했습니다. 우스운 일입니다. 정말로.

 

공산주의로 국가를 지배하는 중국의 공산당은 자본주의의 효율성을 깨닫고 자본을 통해 세계를 지배하겠다는 야욕을 보여주고 있는 셈입니다. 각기각층에 자본을 살포하여 손아귀로 넣고 좌지우지하는 것을 보십시오. 그들은 이미 자본으로 세계를 흔들고 있습니다. 이는 자본주의자건 민주주의자건 어떤 형태의 사상가건 지배 받기를 싫어한다면 반드시 알아두어야 할 사실입니다. 그 무엇보다, 자본주의자가 가장 상처받아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의 사상은 공산당이 아주 잘 사용하고 있습니다.

 

내부적으로는 공산주의를 변명 삼아 시장개방을 하지 않고 부당한 이익을 취하는 한편, 외부적으로는 자본주의를 변명 삼아 자본살포를 통한 지배력을 강화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지금의 중국입니다. 그런 자들에게 대항하는 홍콩인들은 지금 무력하고 외로운 상황일 것이 분명합니다. 그들을 돕는 방법은 국민 한 명 한 명으로선 제약이 많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할 수 있는 일은 있습니다.

 

중국 공산당이 자본을 통해 세계를 지배하겠다면, 자본을 통해 대항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중국의 물건을 되도록 사지 않고, 중국의 사상에 동조하는 기업의 물건을 되도록 사지 않습니다. 그러한 소소한 행동 하나하나가 중국의 지배력을 낮추어 미래의 한국이 중국으로부터의 압제에서 시달릴 확률을 줄여줄 수 있는 방안이라 생각합니다. 그거 말고는 현재 일반 국민이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지금 블리자드 게임을 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지금 중국의 물건을 되도록 구매하지 않으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하여 중국의 지배력을 악화시키는 것이, 저와 여러분들이 현재 홍콩을 돕고 미래 한국을 지키는 일이라 생각합니다.

 

 

 

한국은 지금 문과가 어려움을 겪고 있지요. 이에 대해 나중에 글로 작성해보겠습니다만, 간단히 그 이유를 써보도록 하지요. 그건 그냥 사상이 늙었기 때문입니다. 본디 사상이나 철학은 시대의 현상에 맞물려야 하는 법입니다. 그리고 시대의 현상은 시대의 기술과 맞물려야 하는 법입니다. 따라서 기술이 진화하면 사상도 진화해야 하는 법이지요. 그런데 지금의 사상은 어떠합니까? 옛 사상을 그대로 이어가고 있습니다. 그러한 사상의 정체가 문과를 쇠퇴하게 만든 것입니다. 기술은 계속 진화하며 할 일이 생기는 반면, 문과는 마땅히 할 일이 없으므로 쇠퇴할 수 밖에 없지요. 새 사상과 철학이 나타나지 않는, 또는 나타나는 것을 거부하고 부정하는 시점에서 문과의 쇠퇴는 결정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문과의 필요성, 사상과 철학의 필요성을 모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잠깐 작성해보겠습니다. 사상과 철학은 사람들의 행동의 방향성을 알려주는 지표입니다.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할 것인가? 그것에 대한 해법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종교적 사상이라면 종교에 의존하거나 귀의하지요. 경제적 사상이라면 자원의 분배방식을 정할 것이고, 평등 사상이라면 평등방식을 정할 것입니다. 이런 인간의 생각과 행동에 영향을 끼치는 사상은 대체로 필요한 법입니다. 올바른 사상은 부도덕한 사상을 견제할 수 있는 훌륭한 수단이 될 거라 생각합니다.

 

어째서 이러한 이야기를 하느냐면, 여러분들의 행동을 결정하는 건 단순히 자본만이 아니라는 겁니다. 자본에 얽매여 시야를 좁히지 말고 세상을 넓게 바라보고 올바른 결정을 내리길 바랍니다. 세상에서 가장 돈만 밝히는 금전만능주의자는 중국인입니다. 자본에 지배 받지 마십시오. 그 지배는 곧 중국의 지배가 될지도 모릅니다. 자본에서 벗어나 자본을 수단으로 이용해 올바른 사상을 관철하길 바랍니다. 홍콩의 민주주의를 지지하며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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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합니다. 도움을 청할 상대도 없네요. 외롭네요. 눈물이 나요. 후후 글로 평가 받는 곳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럼 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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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좋은 글이네요 잘 읽었습니다 ~
[소식] 2019년 10월 6일 일요일 (0) 2019/10/06 PM 07:44

내일부터 다시 씁니다

 

늙은 세상을 살고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닫는 순간

주변이 다 낡게 느껴지는 건 

자신의 우울함이 빚어낸 착각일까요

영상 속으로나 보던 70년대 80년대의 탁한 색의

어딘가 고풍스러우면서도 어두침침한 그런 역사 속에

존재하는 것 같은 기분

거리를 걸어도 백화점을 가도 영화관을 가도 

거리 시설 사람 면면이 전부 과거 영상속에 있을 법한 모습들로 보여요

아,

 

지금까지 인류의 문제는 과장 보태서 전부,

정치도 노화로

경제도 노화로

사회도 노화로

문화도 노화로

 

전부 늙어서 그런 것이었다는 건 끔찍하군요.

내 절망과 우울과 슬픔과 고통과 비참함은 그런 것이 원인이었다는 건

정말이지 우울하지 않을 수가 없는 일이네요.

 

단순히 실제 연령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종 자체가 늙었어요.


아,

대를 잇고 역사를 잇고 마음을 잇는다는 건

그런 문제가 있음을 알았어야 했는데

육체는 백년 정도지만 사상은 영원히 늙을 수도 있다는 걸 알았어야 했는데

 

인간이 천년 만년 그 이상 살았다면 종이 늙지 않았을 수도 있었을까요

백년 정도 사는 인간의 문명이 수천년 간 이어지는 것 자체가 아.

 

다음 편은 늙어버린 세상에 태어난 자들의 슬픔에 대해서 써볼게요

 

우린, 늙어버린 세상 속에서 과거가 만든 제약 속에서 발버둥 치는

아무리 나이가 많아도 역사와 비하면 결국 어릴 뿐인

그런 사람들이었어요. 

 

무엇이 옳았던 것이었을까요

갑작스럽게 내동댕이 쳐져서 세상에 나오게 된 인간들은

과거의 인간들이 구성해놓은 질서 속에서 

자신의 사상을 과거의 인물들에게 교정당한 채

마음 껏 뜻을 펼치지도 못하고 

 

어쩐지 슬프네요 지금까지 써온 글들을 새삼 한번 씩 생각해봤는데

이것도 노화와, 저것도 노화와 연관되어 있었군요.

 

어린 시절 괴로웠던 주변 환경의 근본적인 문제는,

종교도 늙었고 관습도 늙었고 교육도 늙었기 때문에

그랬었다는 사실이 

몹시 저를 괴롭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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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담] 감정제어, 인격 (1) 2019/09/23 AM 06:29

감정제어, 인격

 

 

 

시작하기 전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 누군가를 미워해본 적이 있습니까? 그 미운 상대의 불행을 보며 만족을 느낀 적이 있습니까? 그리고 그러한 감정에 의문을 품어본 적이 있습니까? 왜 미워하고, 왜 만족하는지. 그러한 감정에 의문을 한 번 품어볼 기회가 있길 바랍니다.

 

 

사람에게 있어 감정은 물과 같은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분명하게 구별할 수 없고, 미세하게 구분할 수도 없지요. 우러나오는 감정을 관찰하여 깨닫는 것일 뿐입니다. ‘, 내가 지금 기뻐하고 있구나.’ 그렇기에 사람들은 자신의 감정을 제어하는데 어려움을 느낍니다. 갑작스럽게 기쁠 때도 있고, 갑작스럽게 슬플 때도 있습니다. 치밀어 오르는 분노 속에 실수를 저지를 때도 있지요. 이렇게 감정은 의식적으로 표출하기 보단 무의식적으로 나타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의식적으로 행하는 감정을 가리켜 위선이나 위악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하지만 인간의 자아는 세포의 여론일 뿐입니다. 인간의 모든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의식적으로 행하더라도 효과가 나타나곤 합니다. 의식적인 행동이 세포에 영향을 끼쳐 다시금 결과로 나타나는 거지요. 그런 효과를 기대하고 학교나 군대에서 억지로 칭찬하거나 억지로 웃게 만들곤 합니다. 그걸 보고 의문을 품을 수 있습니다만 효과는 있을 겁니다. 사람마다 미세한 차이는 있더라고요. 단지 위선 같음을 느껴 불만을 느낄 뿐입니다.

 

 

이러한 행태를 보며 현행교육에 다소 아쉬움을 느끼곤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감정제어를 강요하거나, 감정제어를 위선으로 느끼는 걸 보면, 자기감정제어의 필요성을 잘 모르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감정제어는 강요할 필요도 없고, 위선으로 느낄 필요도 없습니다. 인간 스스로를 제어하는 건, 인간이 자신의 모든 세포를 통제할 수 없는 한, 꼭 필요합니다. 특히 인간관계에 해를 끼칠 수 있는 악의라고 불리는 감정들의 경우가 그러합니다. 선의도 제어가 필요할 때가 있지만, 악의는 대체로 필요할 때가 많습니다. 미움 분노 증오 공포 질투 괴롭힘(사디스트) 지배욕 따위의 감정들은 제어되지 않으면 사회의 죄로 이어지곤 합니다. 흔히 사람들이 분노하는 청소년 범죄들은 거의 다 이러한 악의로 일어났다고 봅니다.

 

많은 사람들은 청소년의 흉악범죄가 일어날 때마다 분노합니다. 그리고 그런 청소년들을 보호해주는 소년법의 개정이나 폐지를 주장합니다. 그런데 판사의 말을 들어보면 청소년 범죄의 1%정도만 흉악범죄라고 합니다. 대부분 빈곤범죄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판사들은 개정이나 폐지보다는 유지를 바라는 것 같습니다. 청소년의 빈곤범죄는 사회체계의 허술함으로 나타나는 것이니 사회의 책임이지요. 그러나 1%라도, 그러한 청소년을 보호해주는 것을 악용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한 악용 때문에 희생당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판사의 말도, 소년법 개정이나 폐지를 바라는 사람의 말도 수긍이 간다는 겁니다. 따라서 그 둘이 만족할 수 있는 결론을 도출해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자기감정제어라고 생각합니다.

 

 

소년법의 개정이나 폐지를 바라는 사람들은 보통 일벌백계를 바란다고 봅니다. 강력한 징벌로 청소년들에게 범죄에 대한 경각심을 느끼게 만들겠다는 거지요. 그런데 바라는 만큼 효과가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흉악범죄 비율이 낮은 것 때문에 빈곤범죄라는 사회의 책임을 아이들에게 지우는 결과로 나타날지도 모르니까요. 작은 비율의 흉악범죄도 비슷합니다. 한가지 예시를 들어보지요. 작은 범죄도 가혹한 형벌을 행하는 나라에서 일어나는 범죄는 줄어드는 걸까요? 다소 영향은 있을지 몰라도, 그리 큰 영향은 없다고 합니다. 오히려 더 혼란해진다고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범죄와 형벌의 균형이 깨지게 되면 작은 범죄로 끝날 것이 큰 범죄로 이어지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작은 범죄나 큰 범죄나, 가할 수 있는 형벌이 가혹해질수록 비슷해지므로 큰 범죄로 이어지는 경향이 나타났다고 합니다. 법조인들이 이러한 형태를 알고 있기 때문에 사람들의 불만이 있더라도 유지를 하는 거지요. 법조인은 정의를 위한 집단이 아닙니다. 질서를 유지하는 집단이지요. 감정적으로 가혹한 형벌을 내리고 싶더라도, 사회질서유지가 더 중요하므로, 형법에 맞게 형벌을 내리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한낱 범죄자의 처벌보다 사회질서유지가 더 중요하다는 겁니다.

 

그런 까닭에 다른 방법으로 소년범죄를 줄일 방안을 떠올려야 합니다. 그게 바로 앞서 말한 감정제어입니다. 일벌백계를 하기 전에 애초에 범죄를 저지르지 않도록 감정을 제어하는 방법을 알려주자는 겁니다. 지금까지의 교육은 단순히 선의를 강제로 권하고 악의를 강제로 막습니다. 성의 있는 교육자는 그 이유에 대해 성심껏 알려주기도 합니다만, 그 감정 자체를 제어하는 방법을 알려주는 이는 드뭅니다. 애초에 그런 교육과정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지식을 쌓게 하고 지식을 활용하게 하는 것에 치중된 나머지 인간을 고찰하고 제어하는 것에 대한 교육이 미흡한 것 같습니다. 적어도 제가 겪고 관찰한 바에 의하면 그렇습니다.

 

인간의 범죄는 악의로부터 비롯된다.’ 보통은 그렇습니다. 그래서 악의만 제어하면 되는 것이 아니냐고 물어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한가지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정의구현을 통해 악당이 불행을 맞이할 때 느끼는 만족감은 선의일까요? 악의일까요? 얼핏 보면 정의가 구현되었기 때문에 선의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아닙니다. 이럴 때 느끼는 만족감은 악의입니다. 인간의 불행을 보며 만족감을 느끼는 것이므로 세포가 받아드리는 감정의 만족감은 악의라는 겁니다. 단지 사회적 측면에서 정의가 구현되었을 뿐입니다. 따라서 정당한 악의충족이라고 불러야겠습니다. 다른 예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소중한 이의 행복을 위해 죄를 지었을 때 느끼는 만족감은 선의일까요? 악의일까요? 얼핏 보면 죄를 지었기 때문에 악의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아닙니다. 이럴 때 느끼는 만족감은 선의입니다. 소중한 이의 행복을 보며 만족감을 느끼는 것이므로 세포가 받아드리는 감정의 만족감은 선의라는 겁니다. 단지 사회적 측면에서 죄가 되었을 뿐입니다. 따라서 부당한 선의충족이라고 불러야겠습니다.

 

이렇듯 인간의 세포가 받아드리는 감정의 만족감은 사회적 올바름과 비례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감정은 주관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자신의 모든 감정을 제어할 줄 알아야 합니다. 보통은 인간의 악의가 죄를 부르기 때문에 악의를 중심으로 해도 무관합니다만, 선의가 부르는 죄를 경계하기 위해 되도록 모든 감정을 제어할 수 있는 것이 타당하다고 봅니다.

 

 

보통 공교육에서는 감정제어를 알려주지 않는 것 같습니다. 요즘은 잘 모르지만, 아마 별다를 바 없겠지요. 더구나 청소년 범죄가 그대로인 걸 보면 과거와 크게 다르지는 않지 않을까 예상해봅니다. 그러나 감정제어는 누구나 다 필요로 하기 때문에 알려주지 않아도 스스로 하려고 애를 씁니다. 선의가 부르는 오해를 막기 위해 친절을 베풀고 싶은 충동을 참거나 악의가 부르는 죄를 막기 위해 화내고 싶은 충동을 참습니다. 화를 삭인다고 하지요. 그걸로 나타나는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다양한 방법을 동원하기도 합니다. 좋은 방법으로 취미를 통해 해소하거나, 나쁜 방법으로 만만한 상대에게 해소하거나 하지요. 때리거나 괴롭히거나 욕설을 퍼붓거나. 여기서 잘못된 방법으로 감정을 제어하는 건, 공교육으로 체계적인 감정제어방법을 일러주지 않았기 때문에 생기는 폐해라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잘못된 방법으로 감정을 제어하는 건, 성장해도 변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렇게 학습되어버렸기 때문입니다. 단지 좀 더 교묘하거나 그런 행동을 자기합리화 할 뿐입니다. 그렇기에 인간은 변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인간이 스스로를 제어할 수 있게 되면 변할 수 있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행태로 인해 감정제어방법에 대한 교육의 중요성은 커지지만, 이러한 상황의 본질을 모르는 사람들은 그냥 그 행동을 하지 말라고만 합니다. 결과가 나쁘니까 결과만 하지 말라는 겁니다. 원인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귀찮아서 일까요? 아니면 그저 관성에 의해 학습된 대로만 행동하기 때문일까요? 더 큰 문제는 감정을 해소하기 위해 이용되는 취미를 악으로 여기며 무조건 막으려고만 하기도 한다는 겁니다. 사실 인간이 취미를 즐기는 건, 단순히 스트레스만 해소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되려 스트레스를 쌓아가며 즐기는 취미도 있지요. 인내를 필요로 하는 취미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즐기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단순히 더 큰 보상을 얻기 위해 즐기는 걸까요? 그렇다면 웃기 위해 즐기는 취미. 울기 위해 즐기는 취미. 화내기 위해 즐기는 취미. 무서워하기 위해 즐기는 취미들은 무엇일까요?

 

모든 취미는 인간의 감정이나 욕구 등을 해소하기 위해 존재하는 겁니다. 감정이나 욕구가 충족되지 않아 쌓이는 스트레스를 다른 방식으로 해소하는 것이 취미지요. 감정과 욕구의 충족이 만족감을 느끼게 만들어 기분이 좋아짐에 따라 취미를 즐기게 되는 겁니다. 이러한 것을 알고 있었다면 인간이 취미를 즐기는 것을 무조건 막을 것이 아니라 취미를 통해 자신의 감정이나 욕구를 제어한다는 것을 인식하게 만들어, 그걸로 자신을 제어하게끔 이끄는 것이 올바를 겁니다.

 

이러한 감정제어방법이 교육을 통한 체계적인 방법이 아니기 때문에 다양한 부작용이 나타납니다. 감정을 해소하는 것이 지나쳐, 다른 이들에게 피해를 끼치기도 합니다. 예를 들자면, 게임 중 욕설이나 비아냥 따위가 있겠습니다. 취미는 분명 인간의 감정과 욕구를 해소하기 위해 존재하는 겁니다. 하지만 그것을 위해 다른 이에게 피해를 주면 본말전도가 되어버리게 되겠지요. 이러한 본말전도가 바로 감정제어방법을 체계적으로 교육하지 않는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자신의 악의를 제어할 줄 모르기 때문에 나타난다는 겁니다. 또한 선의도 마찬가지입니다. 선의를 위해 기부나 봉사를 하지만, 제어할 줄 모르기 때문에 그 선의는 종종 악용되기도 합니다. 사기꾼이 기부를 받아 사리사욕을 채우는가 하면, 기부금을 다른 용도로 사용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현상들이 바로 감정제어를 못하기 때문에 나타납니다. 따라서 좀 더 체계적인 감정제어방법을 알려줄 필요성이 있다고 봅니다.

 

 

 

왕따와 괴롭힘은 아직도 사라지지 않은 채 여전히 학생들을 괴롭히고 있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아시아권만이 아닌 전세계에서 벌어지는 것으로 볼 때, 단순히 문화적 측면에서 발생하기 보다는, 인간 본성에 의해 발생한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입니다. 아마 보통 악의에서 비롯될 겁니다. 타인을 괴롭히는 것에 만족감을 느낀다는 이야기에 자신은 아니라며 손사래 칠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약간 형태만 다를 뿐, 모든 인간(결핍되지 않는 한)은 악의를 통해 만족감을 느낍니다. 단지 그것이 정당한 악의충족이냐, 아니냐 일뿐 입니다. 앞서 설명한 것처럼 정의구현에 만족감을 느끼는 것 또한 악의를 통해 만족감을 느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학교 내 사건들도 체계적인 감정제어를 통해 방지할 수 있습니다. 누군가를 괴롭히거나 폭력을 행하고 싶은 충동도 교육을 통해 다른 방식으로 해소하게끔 하면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교육은 어떠했습니까? 그냥 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 이유를 설명하기만 합니다. ? 다른 아이의 상처를 입으니까. 그렇게 그냥 막기만 하고 끝이 납니다. 그런다고 아이의 감정은 사라지는 것이 아닐 것인데, 그냥 막기만 하고 있지요. 그러니까, 감정 욕구가 해소되질 않으니까 충동에 이기지 못하고 사건을 일으키는 겁니다. 왜 그런 걸까요? 이런 걸 생각할 때마다 깊은 슬픔을 느낍니다. 인간에 대한 고찰이 부족한 걸까요? 아니면 교육과정을 그대로 답습하는 고지식함 때문일까요?

 

누군가를 괴롭히고 싶은 충동, 누군가를 욕하고 싶은 충동 자체가 나쁘다고 교육하면 안됩니다. 그 충동을 제어하지 못하고 다른 이들에게 피해를 주는 것이 나쁘다고 교육을 해야지요. 인간의 악의 자체를 나쁘다고 교육하는 건, 인간을 악인으로 만드는 것밖에 되질 않는 겁니다. 모든 인간이 그러한 충동을 가지고 있는데 그걸 악으로 낙인 찍어버리면 어떻게 하나요. 그러면 모든 인간이 악인이 되어버릴 테죠. 그러면 어차피 악인이니까 선행을 할 필요가 없어지겠죠.

 

 

그렇다면 어떻게 악의를, 자신의 감정을 제어해야 하는 걸까요? 이건 어렵지 않습니다. 단지 이미 하고 있으니까 잘 모르고 있던 것뿐입니다. 앞서 말한 것처럼 우리는 취미를 통해 자신의 감정과 욕구를 제어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것처럼 어떤 의식적인 방식으로 자신의 감정을 해소할 수 있도록 유도해야 합니다. 웃음 박수처럼 강제로 권하지는 말고 자연스러운 방식으로 유도하게끔 해야 합니다. 웃음 박수나 칭찬 노트를 생각해보면 인간의 감정을 제어해야 할 필요성을 어렴풋이 느끼는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런데 악의를 제어할 필요성은 모르는 것 같습니다. 그러한 필요성은 인간을 고찰했다기 보다, 억지로 웃더라도 기분이 좋아지는 현상을 보고 본받은 것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악의의 경우엔 개그의 교육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학생들이 개그를 통해 비웃음을 당하고 비웃음을 하도록 유도하는 겁니다. 진지하게 개그 과목을 하나 개설해서 악의를 제어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될 정도입니다. 개그라는 일종의 문화를 통해 누군가에게 비웃음을 당하는 것으로 정신력을 강화하고, 누군가를 비웃는 것으로 악의를 제어하는 수업이 필요하다는 겁니다.

 

이런 교육을 통해 자신의 악의를 제어할 수 있다면, 어떠한 도덕교육보다 훌륭한 결과를 만들어낼 것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주입식으로 학습하여 지식으로만 알고 있는 도덕보다, 자신이 실제 경험하면서 악의를 제어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더 나은 결과를 만들 수 있다는 겁니다. 수행평가나 시험도 그러하지요. 사람을 웃기는 것. 그걸 해낼 수 있으면 좋은 평가를 받으면 됩니다. 단지 선을 넘지 않도록 유도해야겠지요. 저는 모든 아이들이 개그의 기본소양을 익히게 되면, 악의를 제어할 수 있게 되어 학교범죄가 상당히 줄어 들을 거라 확신합니다. 인간이 죄를 짓는 것은 악한 것이 아니라 약한 것입니다. 감정과 욕구를 제어하지 못한 약함. 그걸 강하게 만드는 것이 인간교육이라 생각합니다.

 

그 외에도 인간 스스로 자신의 감정과 욕구를 제어할 수 있는 방법을 교육하는 것은 단순히 지식을 외우는 것 이상의 효과를 발휘할 거라 생각합니다. 인간은 언제까지나 자신의 감정과 욕구를 제어하기 어려워하기 때문에, 그걸 미리 교육받아놓으면, 평생 덕을 받아 보다 편하게 살아갈 수 있을 겁니다.

 

 

사전적 정의로 사람의 인격은 사람으로서의 품격이고, 사람의 품격은 사람 된 바탕과 타고난 성품이라 합니다. 저는 복잡할 것 없이 자기제어능력의 정도에 따라 인격을 평가합니다. 자기제어능력을 통해 감정과 욕구를 제어하여 올바른 행동을 할 수 있다면, 타고난 성품이 어떠한들 우수한 인격이라 여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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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들을 마음대로 선동했었다는 교만함은 사물의 본질을 보지 못한 오만함일 뿐입니다. 지금까지는 그저 인간의 상처를 이용해왔을 뿐입니다. 가여운 사람들.

 

그럼 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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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극권지니    친구신청

감정제어가 가능한 사람은 손에 꼽지요.
부처님정도 되어야 가능하죠.
감정은 사고 체계의 무의식에 가까운 습관입니다.
어릴때 뇌가 발달하면서 그때 각인된 사고 체계입니다.
그걸 콘트롤 하려면 자신의 호흡을 콘트롤 하는 것만큼 힘든
영역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무리 하려해도 무의식중에
하는 호흡을 인식하며 호흡하기도 힘들듯이 감정을 자신의 사고체계를 스스로 알기조차도 힘들기 때문에
타인의 감정을 이해하고 콘트롤 하도록 한다는건 너무나도
어려운 일입니다.
[잡담] 한국정치, 사상의 노화 (0) 2019/09/16 AM 01:38

한국정치, 사상의 노화

 

 

 

세상의 불합리는 어쩌면 노화에서 온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분야를 가리지 않고 노화가 진행되면 불합리가 나타났습니다. 여기서의 노화는 실제 나이의 많음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상의 노화를 뜻하는 것입니다. 대체로 실제 나이가 많을수록 사상도 같이 노화되기 때문에 그런 편견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상은 과거로부터 이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자칫 하단 어리더라도 늙어버릴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어떤 어린이가 옛날부터 이어진 특정 사상을 스스로의 생각 없이 그대로 수용했다고 가정해보겠습니다. 그렇다면 그 아이의 사상은 수백 년 또는 수천 년 이상이 되는 겁니다. 대표적으로 종교가 있을 수 있겠습니다. 보통, 종교 위인의 언행을 그대로 수용하고 믿는 것이 선이고 의심하는 것이 악이기 때문에 맹목적으로 종교를 믿는 어린이는 사상이 늙어버리는 겁니다.

 

물론 어린이가 사상이 어릴 확률이 높습니다. 왜냐하면 교육만이 어린이가 수집하는 정보는 아니기 때문입니다. 실제 경험하면서 얻은 정보를 토대로 스스로의 생각을 갖춰나가게 되면서 새로운 사상이 탄생하게 되는 겁니다. 하지만 주입식교육이나 세뇌를 받게 되면 그 어린이는 새로운 사상을 가질 수 없게 되어 늙어버린 상태로 살아가게 됩니다. 반면, 어떤 어른이 옛날부터 이어진 특정 사상을 토대로 자신만의 사상을 만들었다고 가정해보겠습니다. 그렇다면 그 어른의 사상은 많아 봐야 백 년 안팎일 겁니다. 일반적인 인간의 수명이 그 정도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사상의 노화는 실제 나이의 많고 적음보다는 개인의 고유성을 얼마만큼 유지할 수 있느냐에 따라 결정될 것입니다. 어느 누구라도 남의 말을 그대로 수용하는 사람은 그 사람이 가진 사상의 나이를 그대로 이어받는 겁니다. 어떤 경우에도 그러하므로, 어떤 좋은 말이라도 그대로 수용하기보다는 자신만의 해석으로 판별하고 수용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나이의 많고 적음과 관계없이 사상이 늙어버릴 것입니다. 그렇게 늙으면 자연스럽게 부패하거나 변질됩니다.

 

알기 쉬운 예가 바로 기득권의 노화일 겁니다. 기득권은 보통 선대가 쌓아 올린 지식과 부를 물려받는데, 그 지식과 부를 부정하기 어렵기 때문에 그대로 수용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의 선조인 조선은 치욕을 겪었을까요? 단순히 생각하면 우수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랬을 거라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다릅니다. 우수했기 때문에 그랬습니다. 조선의 기득권의 선대가 쌓아 올린 지식과 체계의 완성도가 높았기 때문에 후대는 그것을 그대로 수용했습니다. 그 결과, 사상의 노화가 찾아와 변화를 바라지 않는 바람에 늙고 부패하여 망했던 겁니다. 쇄국정책. 그것이 바로 사상의 노화가 부른 것이라 봅니다. 만약 우수하지 않았더라면, 늙어버리기 전에 망하고 다른 왕조가 세워졌을 겁니다. 만약 늙어버리지 않았더라면 개화하여 혼란의 시기를 극복해낼 수도 있었을 겁니다. 따라서 조선의 가장 큰 실수는 사상의 노화를 견제하지 않은 것에 있다고 봅니다.

 

보통 오랜 왕조가 없다고들 합니다. 조선이 특이한 예였지요. 그건 당연합니다. 수백 년간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대대로 늙어갔는데 어찌 부패하지 않을 수가 있고, 어찌 망하지 않을 수가 있을까요? 지금까지 인류는 연령기득권의 권위가 만든 과거 미화와 전통을 가치 있게 여기는 것에 속고 있었던 겁니다. 인간은 과거에 종속될수록 늙어가고, 과거를 부정할수록 어려집니다. 늙으면 부패하고 어리면 미숙합니다. 늙은 국가가 저지른 이기적인 갈등조장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기득권의 유지를 위해 표리부동한 태도로 사과도 제대로 하지 않고 부당한 이익을 취하고 있는 것을 알고 있을 겁니다. 어린 국가가 저지른 예의 없는 미숙함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문화대혁명으로 문화가 어려져 예의와 예절을 잊은 사람들의 행패를 알고 있을 겁니다. 따라서 과거에 종속되지도, 과거를 부정하지도 말고 젊음을 유지해야 할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유교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사회의 불평등의 많은 부분은 유교 때문이라고 비판하지요. 그런데 유교가 최초 탄생했을 때엔 신선하고 좋은 사상이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렇지 않으면 융성해질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름에 따라 사상의 노화가 찾아왔습니다. 늙고 부패하게 됩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사실 유교에는 충효가 없다고 합니다. 자세히는 모르지만 그렇다고 하니 그렇다고 합시다. 그런데 지금은 어떻습니까? 일반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충효를 중시하는 풍조가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어떤 사상이라도 늙으면 부패하거나 변질됩니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연령기득권을 소중히 여겼기 때문에 그러한 늙고 부패한 것을 인식할 수가 없었습니다. 감히 따질 수도 없었습니다. 전통은 올바른 것. 그것이 사상의 노화를 눈치채지 못하게 만든 정의입니다.

 

다른 종교들도 그렇습니다. 이웃을 사랑하라고 설파했던 종교는 불신지옥이라는 공포로 마음이 약한 사람을 이용하고 있습니다. 수행을 통해 도를 닦는 종교는 세속에 물들어 물질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사상의 노화 찾아오자 부패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특별히 종교만 그런 것은 아닙니다. 모든 사상은 노화되면 부패하거나 변질됩니다. 정치를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공산주의의 사상은 분명 자본주의의 자유가 만든 불평등을 해결하기 위해 나타난 사상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어떠합니까? 독재자의 독재수단으로 전락해버렸습니다. 지금의 공산주의 국가는 이미 공산주의 국가라 불릴 수도 없다고들 하지요. 자본주의도 예외는 아닙니다. 한번 늙어 제국주의라는 온갖 추태를 보여주다가 수정자본주의로 변질되었습니다. 기득권에 대한 분노가 원동력이었던 정치이념은 이렇게 부패하거나 변질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러므로 좌파니 우파니 진영논리로 구분 짓고 사물을 바라보는 건, 이러한 현상을 인식하지 못하고 과거의 사상을 그대로 이어받은 사상의 노화, 늙어버린 사상을 유지하고 있는 것에 불과합니다.

 

 

 

저는 지금까지 한국정치를 바라보며 많은 괴리감을 느껴왔습니다. 처음에는 독재를 비판하는 사람들이 독재자를 지지하거나 가까이하려는 태도를 이해하기 어려웠습니다. 그리고 정치에 대해 조금 알게 되자 세상에 널리 알려진 정치이념과 실제 정치와 많이 다르다는 걸 느끼게 되었습니다. 좌파 민족주의와 우파 사대주의는 저에게 잠시간 몰이해를 가져다 주었습니다. 이후 좌우 구분이 의미가 없다는 걸 깨닫고 이해하게 되었지요. 애초에 해외에서 배워온 정치이념이 한국 사정에 맞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더불어 그 정치이념도 정치인의 입장에서 정리된 것이었습니다. 국민의 입장에서 정리된 것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러한 오류들이 한국정치에 대한 괴리감을 만든 것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기본 정치이념은 본래 기득권에 대한 분노가 원동력이었습니다. 왕조에 대한 분노. 자본가에 대한 분노. 그것이 간단하게 정리하면 자본주의와 공산주의가 되겠지요. 그런데 한국은 어떻습니까? 왕조에 대한 분노가 형성될 무렵, 외세의 침략을 받아 외세에 저항을 했어야 했습니다. 기득권에 대한 분노로 정치세력이 형성되기 전에, 자본주의의 침략에 대한 분노로 정치세력이 형성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항일운동이 대표적일 겁니다. 우리는 이렇게 일반적인 정치이념과 다르게 시작한 것입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광복을 하게 되고 남북이 갈라져 버립니다. 그러다가 공산주의의 침략이 시작됩니다. 한국전쟁의 발발입니다. 이 끔찍한 전쟁은 한 독재자의 야욕으로 발생한 것입니다. 이 전쟁은 휴전 이후, 최악의 상황을 만들게 됩니다. 자본주의의 침략에 기대어 부당한 이익을 취하던 기회주의자들이 사람들을 공포로 이용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공산주의 침략을 빌미로 자신들에게 반발하던 자들을 탄압합니다. 독립운동가들 말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탄압에 민중은 공산주의 침략에 대한 트라우마로 순응하게 됩니다. 그들의 정의는 공포 앞에서 무력했습니다. 그렇지만 올바른 행동을 한다고 굳게 믿었던 지식인들은 민중의 트라우마를 이해하지 못하고 민족을 위해서 북한과의 화합을 시도하다가 정치적 패배를 겪게 됩니다. 그리고 민중에 대해 실망을 하게 됩니다. 슬픈 일입니다.

 

어쨌든 이렇게 자본주의 침략의 피해자들이 정치세력화가 되고, 공산주의 침략의 피해자들이 정치세력화가 된 것이 지금까지의 한국정치였습니다. 이를 공산주의의 독재자가 민족을 미끼로 자본주의 침략의 피해자들을 이용했고, 군사정부의 독재자가 북풍을 미끼로 공산주의 침략의 피해자들을 이용해왔던 겁니다. 그 상황에서 정치인이 지역을 이용한 것이 지역갈등을 유발했습니다. 지역갈등의 본질은 여기에 있던 겁니다. 이처럼 일반적인 정치이념과 전혀 다른 방식으로 형성되었기 때문에 한국정치는 정치이념과 괴리감이 있었던 겁니다. 기득권의 피해자와 침략의 피해자. 그 차이가 바로 한국정치를 혼란케 해왔던 겁니다. 더불어 정치이념이 국민의 입장에서 정리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이러한 차이를 깨닫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지금까지 한국정치의 정체를, 그리고 노화를 불러왔던 겁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또 다른 정치세력이 등장하기 시작합니다. 바로 군사독재의 피해자들입니다. 이들이야말로 정체되어있었던 한국정치의 변화를 불러와 정치적 젊음을 되찾게 만든 정치세력입니다. 그것이 주관적인 입장에서 옳건 그르건, 정치에 변화를 불러와 국가가 정치적 젊음을 되찾게 만들었다는 겁니다. 상대적으로 정치세력이 적었던 군사독재정부에 맞서 싸운 민주주의자들을 중심으로 형성된 정당이 어째서 저번에는 패배하고 이번에는 승리하였는가? 그것은 간단합니다. 공산주의 침략의 피해자에서 군사독재 횡포의 피해자들로 세대교체가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득권으로 그간 쌓아 올린 다양한 힘을 통해 사람들의 생각을 유도해도 통하지 않는 겁니다. 공산주의 침략의 피해자들이 뭘 해도 지지했던 것처럼, 군사독재 횡포의 피해자들이 뭘 해도 지지하고 있는 겁니다. 그것이 옳건 그르건 말이지요.

 

이러한 정의의 충돌은 주관적으로 우위를 가리기 어렵습니다. 공산주의 침략의 피해자들은 무엇보다 반공, 반북이 가장 중요하기 때문에 정부의 부패의 우선순위는 상대적으로 낮게 됩니다. 반면 군사독재 횡포의 피해자들은 반독재, 반부패가 가장 중요하기 때문에 반공, 반북의 우선순위는 상대적으로 낮게 됩니다. 이처럼 가치관이 다르기 때문에 주관적으로는 어렵습니다.

 

하지만 객관적으로 차이는 말할 수 있습니다. 어느 쪽이 더 젊은가? 그것은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그간 쌓아 올린 정치적 기득권을 파괴하고 변화를 불러일으켰다는 것에는 어떠한 사상을 가지고 있던 이견은 없을 거라 봅니다. 변화 자체에 이견이 있을 수는 없습니다. 단지 그 변화가 옳은가 옳지 않은가에 대한 시각차이겠지요. 변화에 따른 젊음은 분명합니다. 모든 사상이 노화되면 변질되거나 부패했던 것처럼, 지금의 한국정치도 시간이 흐르면 변질되고 부패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지금 당장은 생생하고 젊은 상태라고 생각합니다. 개개인의 사상은 노화될 수 있으니 각각은 사상의 노화를 겪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한국정치 자체는 지금, 생생하게 젊은 상태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정치의 본질을 깨닫고 앞으로도 젊음을 유지하길 바랍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어쩌면 사상의 젊음이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이건 나중에 사상으로 한번 더 정리해보겠습니다. 사상의 흥망성쇠 노화. 등 생각할 거리가 많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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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평등하다면, 명문대생들에게 무언가 더 특별한 것을 요구할 권리는 없습니다. 일반 시민들같이 행동해도 무관합니다. 그럼에도 이들에게 과거를 회상하며 무언가 더 특별한 것을 요구하는 것은 오히려 이들에게 특권을 부여하는 꼴이 되는 겁니다. 이제는 달라져야 합니다. 차라리 이들의 특권을 없애는 것이 좀 더 합리적입니다.

 

좀 고민해봤는데 시간 좀 지나도 신경 쓰지 않으렵니다.

 

제 가치 제 위치 알 것 같습니다. 저는 사상의 어린이 같네요. 처음부터 다시 다 생각하고 있으니까요. 약간 미숙하더라도 성장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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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담] 감춰진 과제, 인류의 노화 (0) 2019/09/09 AM 12:00

감춰진 과제, 인류의 노화

 

 

 

세계에서 벌어지는 많은 현상들의 근원은 노화에 있는 것 같습니다. 많은 것을 고찰할수록 인류가 늙어가고 있음을 절실히 깨닫게 됩니다. 단순히 고령화 사회로 진입하고 있어서가 아닙니다. 인류의 역사가 길어짐에 따라 종 자체가 늙어가고 있다는 겁니다. 선진국의 자국주의화. 이는 얻을 것보다 잃을 것을 걱정하는, 그런 늙은 시대임을 방증하는 현상이라고 봅니다.

 

지금까지 인간의 기록은 불완전했습니다. 불타거나 잃어버리거나 왜곡되었어요. 그래서 역사가 온전하게 기록되는 일이 적었습니다. 심지어 불완전한 기록조차 기득권의 전유물이었습니다. 교육의 기회를 얻기 어려웠던 사람들은 성숙해질 기회조차 없었습니다. 그래서 늙을 수도 없었어요. 늙은 건 언제나 기득권이었습니다. 교육받은 기득권은 대대로 물려받은 가문의 역사 속에서 꾸준히 늙어갔습니다. 과거에 종속되고 과거에 휘둘렸어요. 자신의 삶을 사는 것이 아닌, 선조가 만들어둔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살았습니다. 그러니 늙을 수밖에 없지요. 그리고 그러니까 부패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젊은 나이서부터 가질 것보다 잃을 것을 걱정하게 되는 늙은 상태로 시작되는데 어찌 부패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기득권의 대물림은 부와 함께 늙음도 물려주고 있는 겁니다. , 참고로 부패의 순화어는 썩다입니다.

 

그런 기득권의 노화도 전쟁과 자연재해로 인해 매번 커다란 변혁을 겪어왔습니다. 죽었기 때문에 새로 시작할 필요가 있었어요. 전쟁이나 자연재해는 끔찍합니다. 있어선 안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랬기 때문에 인류는 젊음을 유지해왔던 겁니다. 매번 새롭게 시작해야 했기 때문에 과거의 늙음을 물려받지 않고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떻습니까? 무기의 발전이 부른 평화는 온전하게 유지 중에 있습니다. 치열한 다툼조차 온건하게 무역전쟁이란 이름으로 펼쳐지고 있어요. 인터넷을 통해 서로의 사상이 연결되는 시점에서 민의에 어긋나는 전쟁은 있기 어렵게 되었습니다. 무엇보다 이제는 기득권만 늙는 것이 아닙니다. 인터넷을 통해 대다수의 사람들이 자유롭게 정보를 공유하고 역사를 물려받아 동시에 늙어가고 있어요.

 

평화와 자유와 평등은 올바릅니다. 하지만 그것이 지금 인류의 노화를 부르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인류에게 커다란 과제를 알려주게 됩니다. 평화와 자유와 평등은 필요합니다. 따라서 전쟁 없이 젊음을 유지할 수 있는 방법을 떠올려야 하는 과제가 있는 겁니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젊음을 유지할 수 있을까요? 간단히 과거에 종속되지 않으면 됩니다. 스스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사람들이 많아질수록 젊음을 유지하는 국가가 될 것입니다. 그렇다고 과거를 부정하라는 것은 아닙니다. 과거는 소중합니다. 과거가 있기에 우리는 성장하고 성숙할 수 있었습니다. 과거를 부정하는 것은 그러한 장점도 버려지는 것이기 때문에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따라서 과거를 부정하지 않고 과거에 종속되지 않으면 됩니다.

 

예컨대 이런 겁니다. 지금 한국과 일본의 갈등을 어떻게 접해야 하는 걸까요? 과거사로 촉발되었기 때문에 과거로 접해야 하는 걸까요? 아닙니다. 과거는 과거로 끝이 났습니다. 지금 일본의 잘못은 과거에 있는 것이 아니라 현재에 있습니다. ‘현재과거의 죄를 인정하고 반성하지 않는 것. 정확히 말해, 표리부동한 사과로 한쪽은 진정성을 의심하게 만들고, 한쪽은 사죄피로를 불러일으켜 갈등을 부추긴 것. 이것이 지금 현재 일본의 잘못입니다.

 

어쩌면 이러한 일본의 태도도 단순히 그들이 늙었기 때문에 그런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일본은 지금 늙었습니다. 이건 비하용이 아니라 냉정한 평가입니다. 인간은 늙어갈수록 성숙해지고 체계적이게 되죠. 모든 사람이 그런 건 아닌데 대체로는 그렇습니다. 대신에 변화를 두려워하거나 수동적이게 됩니다. 그러한 현상을 그대로 닮은 것이 일본입니다.

 

정치는 경쟁이 죽었고 경제는 도전이 죽었고 사회는 변화가 죽었고 문화는 흐름이 죽었습니다. 예컨대 사회의 경우, 매뉴얼을 통해 체계적이게 되었지만, 그 때문에 변화를 두려워하고 수동적이게 되었습니다. 이런 것이 바로 늙었다는 겁니다. 문화를 봐도 자국의 과거문화의 우수성만 설파하고 있는 시점이죠. 닌자나 사무라이나 기모노나 자기들 문화를 아주 소중히 여깁니다. 그러니까 문화도 늙었습니다. ‘현재문화를 새롭게 만들 생각이 없게 됩니다. 새로운 흐름이 죽었습니다.

 

이렇게 늙었기 때문에 과거의 죄에서 벗어날 수가 없고, 그렇기 때문에 진정한 사과를 할 수가 없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우리는 이러한 현상을 반면교사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노화는 이런 행동을 야기합니다.

 

물론 이번 갈등이 무조건 좋지 못한 것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우리나라는 지금 늙어가고 있었습니다. 변화를 두려워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최근 정치와 법조계가 국정농단 사건으로 인해 젊어지고 있었습니다. 그런 상황 속에서 경제가 이번에 변화를 통해 일부 젊어지고 있어요. 이러한 현상은 다소 손해를 보더라도 추후 이익으로 돌아올 거라 확신합니다.

 

, 시간이 없네요. 사실 좀 더 잘 써보려고 했는데 너무 늦은 밤에 시작해버렸군요. 나중에 좀 더 정리해보겠습니다. 다른 나라의 예시도 나중에 정리해보죠. 그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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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은 쓸지 안쓸지 모르겠네요. 가능하면 써보겠습니다.

 

적자생존, 전범기, 인재와 자연재해, 가상화폐, 한국정치, 호불호, 악의, 만족

 

쓰고 싶은 거 아무거나 씁니다.

 

그럼 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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