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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담] 빅데이터와 독창성 (0) 2019/08/26 PM 11:35

빅데이터와 독창성

 

 

 

습관

 

인간은 늙어갈수록 무의식에 기대게 됩니다. 의식적 행동보단 무의식적 행동을 한다는 겁니다. 이는 교육과 경험으로 다양한 기억을 가지게 된 인간의 뇌가 무의식적으로 가장 편한 행동을 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습관대로. 이것이 이 현상의 이름입니다. 늙어갈수록 하던 일을 하고 하던 휴식을 취합니다. 뇌가 새로운 기억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있는 기억으로 사람을 움직이게 하기 때문에 자원소모가 적어 편함을 느끼는 겁니다.

 

늙어갈수록 이런 말이 있습니다. “시간이 빨리 지나간다.” 이는 당연합니다. 습관대로 행동하다 보니 새로운 기억이 적으니까 회상할 기억도 얼마 없으므로 시간이 빠르게 느껴지는 겁니다. 이런 말도 있습니다. “변화나 도전을 저어하게 한다.” 이도 당연합니다. 습관대로 하는 것이 편하니까 새로운 변화나 도전을 저어하는 겁니다. 굳이 새롭게 하다가 그 편함을 읽어버릴 수 있으니까요. 익숙함의 중독. 그것이 습관대로입니다.

 

편함이 아니더라도 습관대로에 거역하기도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그 무의식적 행동은, 켜켜이 쌓인 자신의 과거의 기억들이 만든 행동들이기 때문입니다. 그 무의식적 행동을 거역하는 것은, 자신의 과거를 거역하는 것과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늙어갈수록 무의식에 기대게 된다는 겁니다.

 

 

 

관습

 

이러한 현상은 사회에도 나타납니다. 인간들이 모인 곳이 사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회도 역사가 쌓이면서 과거에 기대는 현상이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사회의 관습. 정치를 생각해보세요. 관습대로 이분법으로 나뉜 이념들을 가지고 있죠. 경제를 생각해보세요. 관습대로 새로운 것을 보고 성공사례를 가져오라고 하고 있죠. 사회를 생각해보세요. 관습대로 연령계급화가 이어지고 있죠. 문화를 생각해보세요. 관습대로 과거문화만을 한국적으로 여기고 있죠. 스스로 독창적인 한국적 문화를 만들 생각이 없다는 거예요. 과거의 한국음식. 과거의 한국의복. 과거의 한국예절. 그런 것들을 주로 한국적이라 말하죠. 다른 문화에 영향을 받은 현대의 한국인의 창작물들을 한국적이라고 말하지를 않아요. 그게 바로 과거에만 기대고 있는 겁니다.

 

특히 창작물들은 더해요. 봤던 캐릭터, 봤던 배경, 봤던 시나리오. 독창성이 없어요. 단순히 자본의 논리로 투자자들이 성공사례만 요구해서 그렇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새로운 것이 보이질 않아요. 인간이 늙어감에 따라 많은 기억을 토대로 습관대로 움직이는 것처럼, 사회가 늙어감에 따라 많은 역사를 토대로 관습대로 움직이게 되고 있어요. 변화를 바라지 않는 이상, 우리는 지금 늙은 사회 속에 살아가고 있는 거예요.

 

 

 

빅데이터

 

본론으로 들어가죠. 우선 빅데이터가 뭔지 간단히 설명할게요. 빅데이터란, 말 그대로 커다란 데이터를 활용하는 것을 뜻합니다. 주로 이런 것을 말합니다. 인간의 모든 행동을 데이터화하여 빅데이터가 되면, 그 데이터를 분석하여 인간에게 편리함을 제공하는 겁니다. 예를 들어 유튜브의 맞춤동영상 같은 것이 있겠습니다. 이용자들의 검색어, 시청한 영상, 구독한 유튜버 등을 분석하여 이용자들이 원할법한 영상을 맞춤동영상으로 제공하는 것이 빅데이터 활용 중 하나입니다.

 

이렇게 개인의 행동을 데이터화하기 때문에 개인정보논란이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대다수는 자유를 일부 희생해서 안락을 영위하기 때문에 논란이 심하지는 않습니다. 애초에 국가에 속한 이상, 완전한 자유는 있을 수가 없지요. 국가에 자유를 일부 헌납하고 국가의 보호를 받으며 안락을 영위하고 있으니까요. 단지 범위에 따라 달라질 뿐입니다. 남용하면 독재가 되는 것이겠지요. 그러므로 빅데이터의 개인정보논란이 심하지 않는 겁니다.

 

하지만 빅데이터의 문제는 개인정보논란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다시 한번 빅데이터를 살펴보지요. 수많은 자료를 기반으로 편리함을 제공하는 것. 여기서 수많은 자료는 과거를 뜻합니다. 새로운 것이 아니란 겁니다. 과거의 기억, 과거의 성향, 과거의 취향, 과거의 행동 등. 인간의 과거를 종합해서 인간에게 편리함을 제공한다. 이것이 바로 인간의 무의식인 습관과 사회의 무의식인 관습과 같은 겁니다. 아니 오히려 더 심각한 거죠. 습관과 관습은 어느 정도 허술함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변화의 가능성이라도 있지만, 기계적인 완벽함이 제공하는 편안함은 변화의 가능성도 줄어들게 됩니다.

 

그렇지 않아도 했던 것만 또 하고 했던 것만 또 하는 사람들이 빅데이터의 편리함에 물들게 되면 새로운 것이 얼마나 등장할 수 있을지 저는 걱정이 됩니다. 데이터를 분석해서 인간이 과거에 가장 원했던 것을 위주로만 제작하려 들겠죠. 빅데이터를 주로 활용하게 되면 과거 성공사례가 없는 새로운 것은 등장할 차례가 없을지도 모른다는 겁니다! 최근에 국산 애니메이션을 보고 더욱 더 걱정되었어요. 아니 도대체 과거 동화 따윌 왜 패러디 하는 겁니까! 알게 뭐야! 새로운 보여줘요! 독창성을 발휘해야 합니다!

 

빅데이터는 분명 편리한 도구입니다. 사람들에게 편리함을 제공할 것에는 이견이 없어요. 하지만 이건 창작에 독이 되는 도구입니다. 과거의 것들로만 분석하기 때문에 독창성이 죽어버릴 위험이 있는 도구라는 겁니다. 비단 창작뿐만이 아닙니다. 빅데이터 활용이 가속화될수록 우리 사회는 과거에 머물게 될 겁니다. 과거의 자료로만 행동하게 만드니까요.

 

그렇지 않아도 늙어버린 사회, 이보다 더 늙어버릴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편리함에 이면에 노화가 있음을 잊으면 안됩니다.

 

 

 

사실 주제는 끝났는데, 간단하게 빅데이터가 끼칠 영향 몇 가지를 이야기를 해볼게요.

 

첫째, 인간의 규격화

 

빅데이터로 인간을 분류하기 시작하면, 인간의 규격화가 진행될 것입니다. 성향에 따라 규격을 맞춰서 비슷한 사람들끼리 교류를 하겠죠. 이걸 어떻게 말해야 할까요? 복잡하네요. 단지, 변화가 줄어들 것은 자명한 사실이라 봅니다.

 

둘째, 감시사회

 

빅데이터를 위해 인간의 행동을 모두 수집하고 있죠. 우리는 모두 감시 당하고 있는 겁니다. 뭐 다들 알고 있을 거라 생각해요. 알면서도 그냥 편하니까 모른 척 하는 거죠.

 

셋째, 문화경쟁

 

세상은 넓고 인간이 문화를 향유할 수 있는 시간은 한정적이죠. 빅데이터로 인간의 규격화가 진행되면 국경과 관계 없이 비슷한 사람들끼리 교류하기 시작할 것이기 때문에 문화경쟁을 통해 최상위권 문화의 문화독점이 시작할 겁니다. 뭐 지금도 그런 경향이 있는데, 개방되지 못한 나라들이 아직 많이 있으니까요. 살아남은 문화들이 인류의 문화로 남게 될 것입니다.

 

 

 

---

 

정치가의 정치수단은 이성적이되,

유권자의 정치지지는 감정적이다.

 

정치수단은 정론으로,

정치지지는 감정으로.

 

대강 이런 것 같네요.

 

중국은 아편전쟁의 피해자로서 결집하고 있는게 아닐까 생각해보기도 하네요. 같은 나라는 아닌데, 거기 사는 사람은 별로 달라지지 않았으니까요. 마약에 대한 반응을 보면 그 시절에 대한 트라우마가 남아있다는 걸 알 수 있지요. 그러니까 홍콩이 해야할 것은, 중국 본토 사람들의 트라우마를 벗겨내는 일이 아닐까, 생각해 보게 되네요. 근데 그게 쉽지만은 않을 것 같아요. 어쨌든 응원합니다. 중국에 민주화의 바람이 불길!

 

그럼 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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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담] 정치의 본질, 감정 (0) 2019/08/25 PM 11:42

정치의 본질, 감정

 

 

 

이번 주제는 사실 쓰려던 것이 아닙니다. 다른 걸 쓰려고 했어요. 그런데 홍콩에서 학생들이 부당한 권력에 대항하는 의미에서 수업거부 의지를 표명한 것을 보고 뭔가 마음에 와 닿는 것이 있어 정치에 관해 좀 더 정리해보려고 합니다. 요즘 정치서적을 몇 권 읽고 있어요. 막스 베버가 정치를 가리켜 이렇게 말하더군요. 정치는 투쟁이다. 싸워서 원하는 걸 쟁취하는 것이 정치라는 거죠. 그런데 그 투쟁을 부르는 것은 무엇일까요? 저는 바로 감정이라고 생각합니다. 투쟁해야 한다는 감정을 느꼈기 때문이 투쟁을 하는 거죠. 그러니까 정치의 본질은 감정에 있다고 봅니다.

 

이를 오해하는 사람들이 주로 경제인들입니다. 경제는 주로 이성적이에요. 합리적이고 효율적이고 논리적이죠. 때론 비정하기까지 합니다. 보통 사람의 감정을 배제하고 자본의 논리로 사물을 바라보니까요. 경제인들은 그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정치도 이성적으로 접근합니다. 구체적인 경제성장을 공약으로 내세우거나, 경제지식을 통해 설득해보려고 한다거나, 이해관계에 얽힌 사람들에게만 지지를 받으려고 합니다. 그리고 그래서 실패합니다. 왜냐하면 정치는 이성이 아니라 감성이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구체적인 경제이론이나 정책보다는 감정적으로 지지를 하기 때문에, 얼굴을 보고 뽑는다거나, 진영논리에 입각한 맹목적 지지가 존재할 수 있는 겁니다. 때때론 흡사 종교와도 비슷해질 때가 있습니다. 오래된 독재자들이 종교와 비슷해지는 경향을 띠는 까닭도 정치와 종교가 감정이란 공통분모를 가지기 때문입니다.

 

이를 가리켜 어떤 사람들은 우매한 대중들이라며 비판하곤 합니다. 그러나 그건 정치의 본질을 모르기 때문에 하는 말입니다. 애초에 정치는 대다수가 직접적인 이해관계가 아닙니다. 이익을 보는 것은 소수기 때문에 대부분의 간접적인 이해관계자들을 결집하게 만드는 데 어려움이 따르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해관계를 넘는 어떤 결집요소가 필요합니다. 그것이 감정입니다. 애정, 증오, 공포, 분노 등의 감정으로 어떤 일정한 공통점을 통해 결집하여 투쟁하는 것이 바로 정치라고 봅니다. 애초에 정치가 그러한 것이기 때문에 우매하다고 비아냥 하는 것은 정치를 할 줄 모른다는 고백과 다르지 않습니다. 아니면 인간을 모른다거나.

 

 

 

가해자, 피해자, 이용자

 

자본가와 노동자의 혁명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이 부분의 지식은 부족하므로 나중에 좀 더 정리하겠습니다.) 현대정치는 시작부터 감정적이었습니다. 왕가에 대한 분노. 그것이 자본가의 세상을 만드는데 사용되었던 감정입니다. 분노가 혁명의 원동력이 되어 성공할 수 있었던 겁니다.

 

최초 정치는 세가지로 구분됩니다. 가해자(왕가)와 피해자(노동자, 자본가)와 이용자(자본가)

 

왕가에 대한 분노로 결집했던 노동자는 자본가의 횡포에 따라 괴로운 나날이 시작되었습니다. 어린아이를 장시간 노동하게 해도 별 문제가 없던 시대. 그 시대가 바로 자본가의 세상이었습니다. 자본의 논리에 따라 식민지배도 허용되어 제국주의를 발호하게 만들기도 했습니다. 이건 결국 왕가의 피해자를 자본가가 이용했던 겁니다.

 

노동자에게 끔찍한 세상이 지속되자 공산주의라는 노동자를 위한 사상이 등장합니다. 자본가를 배제하며 평등한 세상을 주장하며 사람들을 이끌었습니다. 이번에도 감정은 사용됩니다. 자본가에 대한 분노. 그것이 공산주의국가를 만드는데 사용되었던 감정입니다. 분노가 혁명의 원동력이 되어 성공할 수 있었던 겁니다.

 

자본가에 대한 분노로 결집했던 노동자는 공산주의자의 횡포에 따라 괴로운 나날이 시작되었습니다. 개인의 자유를 탄압해도 별 문제가 없는 나라. 그 나라가 바로 공산주의자의 세상이었습니다. 평등이란 미명아래 사유재산을 몰수하고 독재를 시작하게 됩니다. 이건 결국 자본가의 피해자를 공산주의자가 이용했던 겁니다.

 

 

세계를 양분하고 있던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는 이렇게 분노라는 감정으로 시작되어 퍼져나갔던 겁니다. 하지만 그러한 것도 점차 동력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분노했던 피해자들이 역사 속에 잠들었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공산주의국가인 중국이 일부 시장경제를 개방한 이상, 사상으로써의 경쟁은 끝이 난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지금의 공산주의는 이미 독재의 수단으로 전락했습니다. 그래서 지금의 정치가 좌파와 우파로 분명하게 구분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구시대의 정치세력이 잠들기 시작하자 새로운 정치세력이 등장하게 됩니다. 그것이 독재의 피해자들입니다. 독재의 피해자들이 분노를 통해 정치세력화가 되어 세상에 등장하게 되었습니다. 한국의 군사독재, 중국의 공산독재 등이 그렇습니다. 앞으로 세상은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의 대립이 아닌, 독재와 반독재의 대립이 될 것입니다. 이후엔 성별대립과 종교와 무교의 대립이 있겠습니다. 공산주의가 유물론을 채택하고 있어 오해할 수 있는데, 종교의 자유가 보장되는 곳에서 나타날 대립을 뜻합니다. 뭐 애초에 공산주의는 끝이 난 것이나 다름이 없지만요. 지금의 대립은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의 대립이 아닌, 독재와 반독재의 대립이니까요.

 

 

 

피해자들

 

간단하게 현대정치의 흐름을 보았습니다. 지금까지의 정치세력은 전부 감정을 근원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로므로 앞으로도 나타날 정치세력도 예측할 수가 있습니다. 감정이 나타날 수 있는 집단. 그 집단이 앞으로 탄생할 정치세력과 이념이 되겠습니다.

 

가령 지금 유럽에서는 이민자들과의 문화충돌로 인한 갈등으로 이들을 배격하는 우파가 지지를 받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이는 이민자들의 피해자가 정치세력화가 된 것입니다. 또한 유럽에서는 환경중심 정당이 지지를 받기 시작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이는 환경파괴의 피해자가 정치세력화가 된 것입니다. 이렇게 어떤 피해자가 등장하면, 그 피해를 통한 감정분출로 형성된 정치세력이 탄생할 수 있다는 겁니다. 이는 구시대의 정치와 결별할 순간이기도 할 것입니다. 그 때가 되면 좌파와 우파는 명목상으로만 남게 될 것입니다. 뭐 이미, 중도라거나 애매한 위치에 있는 정치인들도 많기 때문에 별 의미는 없는 상황입니다.

 

이처럼 어떤 정치인이 세상을 좋게 만든다는 숭고한 사상이 있을지 몰라도, 일반 국민들은 대부분 감정에 의해 지지하는 겁니다. 일반 국민들은 지지를 통해 자신이 실질적인 이익을 보지 않더라도 감정이 그것을 옳다고 여기게 만드니까 지지를 하는 겁니다. 부의 분배 방식, 다양한 정책 등,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도대체. 노동자에게 지지를 받지 못하는 노동정당과, 자본가에게 지지를 받지 못하는 자본정당이란 아이러니는, 애초에 지지이유가 이성이 아닌 감성이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특히 우리나라는 특별합니다. 한국은 좌파와 우파가 일반적인 사전적 정의와 다르지요.

 

그 까닭은, 한국의 정치세력은, 지배층에 의한 피해자가 아닌, 침략의 피해자이기 때문입니다. 자본주의의 피해자가 좌파를 담당하고 공산주의의 피해자가 우파를 담당했습니다. 그래서 공산독재자가 민족이란 이름으로 좌파를 이용했고, 군사독재자가 북풍이란 공포로 우파를 이용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좌파가 민족주의를, 우파가 사대주의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한국에서 좌파와 우파의 구분은 의미가 없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그건 이미 구색 맞추기에 불과합니다.

 

한국 또한 각 피해자들이 역사 속에 잠들 시기가 오기 때문에, 가장 최근의 피해자인 군사독재의 피해자들의 정치세력이 가장 강성한 상황입니다. 그래서 10년 전, 갖은 비난 속에 정권이 바뀌었던 때와 지지율이 다른 겁니다. 공산주의의 피해자가 무엇을 해도 지지했던 것처럼, 군사독재의 피해자들은 무엇을 해도 지지할 것으로 보입니다. 같은 피해자이니까요.

 

따라서 군사독재의 피해자들로 형성된 정치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또 다른 정치세력화를 주장한 바가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무교의 정치세력화입니다. 이들 또한 종교의 피해자들로서 감정을 통해 결집할 수 있는 세력입니다. 관습과 오해에서 벗어난다면 가장 적절한 정치세력이 될 겁니다. 지금 종교와 대립하는 유명인은 아마 추후 정치인으로 데뷔할 가능성도 있어 보입니다.

 

 

 

가치관

 

이렇게 피해자들의 감정을 통해 정치세력화가 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그런데 피해자임에도 정치세력화가 되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중국이나 일본이 바로 그러합니다. 이들이 독재에 항거하지 않는 까닭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순종이 미덕인 사회기 때문입니다. 간혹 이들이 투쟁을 해본 적이 없기 때문에 민주주의가 바로 서지 않는 것이다, 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근본적인 이유는 그곳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들의 가치관에 있는 겁니다. 독재자를 순종하며 따르는 것을 올바른 것이라고 여기기 때문에 정치세력화가 되지 않고 있는 겁니다. 그러므로 이들이 독재의 피해자로서 정치세력화가 되기 위해서는, 그러한 가치관에서 벗어나 불의에 맞서 싸우는 것을 올바르다고 여겨야 할 것입니다.

 

남성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현재 남성중심사회의 피해자인 여성이 여성주의를 통해 여성의 인권을 신장시키는 과정 속에서 역차별을 하기도 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하여 남성이 피해를 받고 있음에도, 이들이 정치세력화가 되지 않는 까닭은, 그러한 것에 항의하는 것이 올바르다고 여기지 않기 때문입니다. 흔히 말해 남성의 체면, 남성의 미덕이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이러한 것은 주로 남성중심사회 속에 살던 이들이 가지고 있으므로, 이후 성장한 남성들이 사회 주력이 되기 시작하면, 남성의 정치세력화도 가능해질 것입니다.

 

 

 

애정과 증오

 

피해자가 아니더라도 감정적 지지는 있습니다. 가령 이런 거죠. 영국의 브렉시트(유럽연합 탈퇴)는 주로 청년이 반대하고 노인이 찬성했다고 하더군요. 과거 제국시대에 대한 향수로 인한 감정적인 태도가 브렉시트 찬성을 불렀다고 봅니다. 그러므로 영국 정치인이 미래의 권력을 쥐고 싶다면, 브렉시트 반대를 하고 있는 것이 나을지도 모르겠네요. 그에 대한 피해를 입은 청년들의 정치세력화가 될 수도 있으니까요.

 

 

 

시대의 변화

 

정치인은 국민의 대표이며 대변자며 대행자지, 과거 정치이론의 전문가가 아닙니다. 우리나라는 지배층에 의한 피해자가 아닙니다. 그럼에도 지배층에 의한 피해자들로 만들어진 정치이념을 가져다가 한국 정치에 사용한다는 것은, 국민을 보는 것이 아니라, 정치이론을 보는 것입니다. 정치인은 관료가 아닙니다. 구체적인 정책이나 국가 전력이나 비전은 관료에게 맡기고, 정치인은 국민을 보길 바랍니다. 국민의 감정을 보길 바랍니다. 국민이 원하는 걸 하길 바랍니다. 국민을 이용하는 것이 아닌 국민의 대행하길 바랍니다.

 

앞서 말한 것처럼 앞으로는 지배층에 의한 피해자들로 발생한 좌파와 우파의 구분 또한 그 의미를 잃어갈 것입니다. 그 피해자들이 역사 속에 잠들었기 때문입니다. 이는 침략에 의한 피해자들로 발생한 정치세력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이러한 것이 바로 시대의 변화겠지요. 정치는 살아있는 생물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변화는 필수불가결입니다. 정치인들은 그 변화에 대비해야 합니다.

 

솔직히 저도 앞으로 어떻게 될지 궁금합니다. 그런데 확신하고 있는 것은 있어요. 정치는 감정이라는 것. 정당의 목적은 정권이라고 하더군요. 앞으로 국민의 감정적 지지를 받을 정당이 정권을 잡을 것입니다.  

 

 

 

---

 

공정경쟁은 국가발전의 원동력이라 생각합니다. 앞으로는 공정경쟁이 가능하길 바랍니다. 저는 게임의 경쟁체계를 참고했으면 좋겠어요. 게임에서는 자발적으로 공정하게 경쟁에 참여하고 즐기고 있습니다. 그와 같이 다른 부분에서도 공정하게 자발적으로 경쟁에 참여하고 즐길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면, 굉장한 성장을 할거라 확신합니다.

 

일반 국민들이 분노해야 해야 하는 것은 사건이 아니라, 부당판결입니다. 예전부터 일부 사건에만 몰두하는 현상을 보고 객관성이 필요하다고 느낀 바가 있습니다. 감정적이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필요한 부분에서 감정적이라는 것이지요.

 

외교가 이슈가 되고 있죠. 대외적인 관계도 중요하지만 대내적인 관계도 중요하다는 점을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외국을 설득할 수단과 더불어 불안감을 가진 국민들을 설득할 수단을 준비했으면 좋겠습니다.

 

홍콩의 민주주의가 승리하길 바랍니다. 

 

다음 글은 글쎄요, 가능하면 매일 써보도록 해보겠습니다. 변화의 시기인가요.

 

미국 정치

 

소수의 피해자(흑인 여성 이민 등)의 정치세력화로 흑인 대통령이 탄생했고, 그에 역차별 받은 또 다른 피해자들의 정치세력화로 백인 대통령이 탄생했죠. 감정이 지지의 근원입니다.

 

그럼 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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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담] 개그의 초식화 (1) 2019/08/18 PM 10:50

개그의 초식화

 

 

 

일요일 저녁, 그런대로 선선한 날이네요. 조만간 가을이 오겠지요. , 이번 글은 예전 개그프로그램들이 하락세에 접어들기 시작했을 무렵 생각했던 주제예요. 좀 오래되었죠. 그래서 요즘에는 어떤지 모르겠어요. 그래도 써볼게요.

 

 

 

개그란

 

우선 개그가 뭔지 알아보고 시작할게요. 개그는 뭘까요? 사전용어로는 연극, 영화, 텔레비전 프로그램 따위에서 관객을 웃게 하기 위하여 하는 대사나 몸짓이라고 해요. 사람을 웃게 만드는 것이 개그라는 거죠. 그런데 사람들은 왜 웃는 걸까요? 왜 개그맨들의 대사나 몸짓에 웃는 걸까요? 개그의 본질은 거기서부터 시작해야 된다고 생각해요.

 

많은 개그맨들은 사람들을 어떻게웃게 만들지는 안다고 생각해요. 그러니까 개그맨을 할 수 있는 거겠죠. 그런데 사람들이 웃게 되는지는 모르는 것 같아요. 만약 왜 웃게 되는지를 알고 있었다면 개그프로그램들의 하락세는 없었을 거라 생각하니까요. 그렇다면 사람들은 왜 웃게 되는 걸까요?

 

 

 

웃는 이유

 

결론부터 내릴게요. 개그는 인간의 악의(나쁜 마음)가 부르는 웃음입니다.

 

조소, 조롱, 경멸, 천시, 멸시, 놀림, 깔봄, 증오, 혐오, 분노, 미움 등.

 

인간에게 내제된 악의가 충족되면서 기분이 좋아짐을 느끼는 것이 보통 개그에서의 웃음입니다. 조금 과격하다 생각할지도 몰라요. 그리고 선의가 부르는 웃음도 있으니까 헷갈릴 수도 있어요. 더구나 인간의 감정이 분명하게 경계가 그어져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구분하게 어려울지도 모르겠어요. 그러나 엄연히 악의도 인간이 가지고 있는 감정들입니다. 보통 개그는 악의의 충족으로 웃게 되는 거예요. 한번 가벼운 악의로 접근해보죠.

 

하하, 바보 같아.’

 

보통 웃긴 장면을 보면 이런 감상을 느끼지 않나요? 재미있는 홈비디오를 보면 실수를 보고 웃게 되죠. 개 뺨 때리다가 개한테 뺨 맞는 영상 같은 걸 보면 웃게 돼요. 바보 같으니까요. 이런 것이 보통 인간의 악의가 부르는 웃음이라는 겁니다. 멍청해 보이고 바보 같이 보이는 걸 즐기는 거죠. 실제로 멍청한지, 바보인지는 중요한 것이 아니에요. 개그맨들의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보며 바보 같다며 웃지만, 그들이 실제로 바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드물겠지요. 인간의 악의만 충족시켜 웃게 만들기만 하면 됩니다.

 

이런 것들 중에 널리 알려진 것이 바로 슬랩스틱 코미디라고 생각해요. 우스꽝스러운 행동을 보며 웃는 거죠. 근데 이건 잘 몰라서 톰과 제리를 예시로 들어볼게요.

 

 

 

톰과 제리

 

톰과 제리는 멍청하고 불쌍한 고양이톰이 영리하고 교활한 쥐제리를 잡으려다가 골탕 먹는 것이 주 내용이에요. 톰의 바보 같은 모습을 보며 깔깔 웃으면 되는 거죠. 이 바보 멍청이! 가끔은 제리가 골탕 먹기도 하고, 그 개(이름 모름)가 골탕 먹기도 하더군요. 아무튼 등장하는 동물들의 바보 같은 모습을 보며 즐기면 돼요. 워낙 불쌍하게 골탕 먹으니까, 톰을 가엾게 여기는 사람들도 있었지요. 그래서 제리가 골탕 먹거나 둘이 힘을 합칠 때가 보기 좋았다는 사람들도 있었어요. (인터넷 댓글 반응 참고)

 

이렇게 개그는 인간의 악의를 충족시켜 웃게 만드는 거죠. 반면 감동은 인간의 선의를 충족시켜 웃게 만드는 거고요. 용어를 새로 정립할 필요가 있어 보이긴 하는데, 어쨌든 일단 이런 구분이라고 생각해요. 개그가 인간의 악의를 충족시켜 웃게 만들다 보니 이런 문제들도 있었어요. 인종차별. 톰과 제리에 인종차별 요소가 있었다고 하더군요. 흑인이나 아메리카 원주민을 조롱하거나 했죠. 예전에는 이런 게 잘못되었다는 인식이 없었으니까, 다른 인종을 비웃으며 악의를 충족시켰던 것 같아요. 이제는 문제의식이 발달하여 수정하거나 삭제했다고 해요. 아무래도 악의의 충족이다 보니 이런 것은 주의할 필요가 있지요. 그런데 그게 과해졌어요.

 

 

 

초식화

 

본론으로 들어가죠. 지금 개그프로그램들의 하향세는, 개그의 초식화가 부른 거라 생각합니다. 이것도 누군가 상처 입을 수 있으니까 안돼, 저것도 누군가 상처 입을 수 있으니까 안돼, 상처 입지 않는 웃음만을 추구하기 시작했어요. 인간의 선의를 충족시켜 웃게 만드는 감동에만 집중하게 된 거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망하죠. 사람들은 악의를 충족시켜 웃고 싶어했는데!

 

알기 쉬운 비유를 해볼게요. 지금의 개그프로그램들은, 육식 전문점에서, 요리사 개인 신념 때문에, 육식을 바라는 손님들에게 채식을 제공한 것과 다름이 없어요. 그리고 사람들이 왜 고기가 없느냐고 따지면, ‘그게 올바른 거니까요.’ ‘여러분들도 채식을 하세요. 몸에 좋아요.’ 이러는데, 고기 찾는 사람들이 그 음식점을 가겠습니까? 절대 안 가죠. 망하는 건 당연한 거예요. 채식주의자들은 다소 갈지도 모르겠지만, 채식전문점은 또 따로 있으니까요.

 

지금의 개그프로그램들은 그냥 이런 거 하고 있는 거예요. 선의의 웃음(감동)만 추구하다 보니까, 악의의 웃음(개그)를 바라는 사람들이 외면했던 거죠. 이걸 몰랐던 것은 아마 선의의 웃음과 악의의 웃음을 구분하지 않았으니까 그런 게 아닐까 생각해보네요.

 

 

 

인간고찰

 

선의의 웃음만 옳다고 여기는 건, 인간고찰이 조금 부족한 것이 아닐까 생각하게 되네요. 사람은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아요. 그냥 동물일 뿐이죠. 인간이 구분 지은 감정들도 사실, 분명하게 알 수 있는 것이 아니에요. 뭔가를 느끼고 분석해서 판단해서 결론을 내리는 거죠. ‘, 이건 이런 감정 같아.’ 라고요. 이러니까 공포와 사랑도 구분 못하는 거죠. 자아의 근원은 세포니까, 매번 달라지는 세포들의 여론으로 나타나는 감정들이 매번 같을 수가 없어요. 그리고 그걸 분명하게 알 수도 없고요. 양면적이고 이중적이고 모순적인 것은 다, 각기 세포들의 자기주장 때문인 겁니다. 이건 여기까지 할게요. 나중에 자아를 정리할 때 더 작성해보죠.

 

어쨌든 인간은 선의도 있고, 악의도 있기 때문에, 악의의 웃음도 충족할 필요가 있어요. 비웃고 조롱하고 깔보면서 기분이 좋아지는 걸 충족시킬 필요가 있다는 거예요. 그런데 그걸 일반적인 인간관계에서 충족시키려고 하면 파탄이 나겠죠. 그러니까 대신해서 비웃음 당하고 조롱 당하고 깔보일 대상이 필요해요. 그게 바로 개그맨, 아니 사람들을 웃게 만들 수 있는 수많은 직업들이 전부 포함되겠죠. 예능프로그램이나, 개인방송이나 뭐 그런 거요.

 

 

 

개그의 역할

 

결론을 내리죠.

 

육식을 바라는 사람에게 육식을 제공하세요. 개그가 육식을 되찾게 되면, 개그프로그램들이 다시 상향세가 될 거라 생각합니다. ‘어떻게를 모르지는 않을 거라 생각해요. 우리나라 개그맨들이 사람들 웃기는 방법을 모르는 건 아니라 생각합니다. 단지 그 방법이 옳다고 여기지 않으니까 안 했던 거겠죠. 그런데 그 방법이 옳은 게 맞아요. 인간의 악의를 충족시켜 인간관계에 불화를 만들지 않도록 하는 것이 바로 개그의 역할이겠죠. 그러니 개그는 위대해요. 평화를 부르니까요.

 

단지, 선을 지킬 필요는 있겠죠. 지나치게 조롱하는 것은 문제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지나치게 주의하는 것도 문제라고 생각해요. 개그가 인간의 악의를 충족시키지 않으면 도대체 어디서 충족해야 하죠? 개그가 인간의 악의를 충족시켜주지 않으면 사회에서 그걸 충족할지도 모릅니다. 일정 선을 지켜 악의가 부르는 웃음을 제어할 수 있도록 해줘야 해요. 그래야 사회에 불화가 적어질 겁니다. 악의가 충족되었으니까요.

 

그러니 분명하게 역할을 인식해야 해요. , 이건 사람들의 악의를 충족시키기 위해 바보처럼 군다거나, 부끄러운 행동을 하는 거구나. 라고 인식을 해야겠죠. 그걸 보고 실제로 깔보거나 비웃으면 안 된다는 거예요. 그러는 사람이 많은 건 아닌데, 개인방송에서는 종종 있는 것 같아요. 아무래도 일반 방송보단 거리감이 가까우니까요. 바보 취급 당하고 놀림 받더라도, 그건 어디까지나 방송의 캐릭터지, 실제가 아님을 인식해야 될 것입니다.

 

또한 개그를 하는 사람들도 역할을 인식해야 해요. 부끄럽고 수치스럽다고 느껴 바보 같은 짓을 하지 않을 거라면, 개그를 할 자격이 없는 거죠. 사람들을 웃게 만들고 싶은 사람들이라면, 자신의 역할에 충실하세요. 유쾌와 불쾌에서 줄타기를 하는 것이 바로 개그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저를 웃게 만드는 사람들을 몹시 좋아해요. 또 보게 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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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와 민족주의의 갈등. 홍콩과 중국은 과연 어떻게 될까요? 참 복잡한 문제죠.

 

배운 체제인 홍콩의 민주주의냐

같은 민족인 중국의 공산독재냐

 

중국의 민주화냐, 중국의 분열이냐, 선택할 때가 온 것 같네요. 전세계에 민주주의가 찾아오기를!

 

지난날 광복절이었죠. 기쁜 한편 반성해야 될 날이기도 합니다. 두 가지 무력함. 국민에게 힘이 없어 매국노의 매국행위를 저지하지 못했던 것, 우리 힘만으로 광복하지 못한 것. 힘이 필요한 것 같네요. 그러니 불필요한 정치분쟁으로 국력을 낭비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필요한 것만 했으면 좋겠어요.

 

덧없는 인생. 무력함을 허망하게 느낍니다. 내일도 쓸까 말까 모르겠네요. 비나 더 왔으면 좋겠는데

 

그럼 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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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편한 사람들이 워낙 많으니.. 뭐 해보기도 겁날겁니다.
예전같으면 하하호호 넘어갈 일도, 지금은 사람 놀린다면서 욕먹고 매장당하는 분위기죠
[잡담] 정치, 세 번째 (0) 2019/08/11 PM 11:43

정치, 세 번째

 

 

 

일요일 저녁. 쓰고 싶은 걸 씁니다. 기본적으로 민주주의자들을 지지하고 있음을 밝히고 시작합니다.

 

어떻게 정리해야 할지 고민이 되네요. , 그냥 편하게 쓰겠습니다.

 

 

양당체제

 

[자본주의 침략의 피해자][공산주의 침략의 피해자]가 대립하는 한국은 이들을 대표하거나 이용하는 거대양당이 주축이 되어 운영되어왔습니다. 그러던 와중에 시간의 흐름에 따라 [군사독재의 피해자]가 성장하여 반독재, 반부패 세력의 증가로 거대양당체제에 균열이 가기 시작했습니다. 여기서 큰 변화가 없다면 양당체제의 붕괴는 필연적입니다. 침략의 피해자들이 역사에 잠들 시기가 오기 때문입니다. 현재 정치인들의 행동에 따라 그 시기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요. 그러한 붕괴에 대비하기 위해 세 번째 정치세력의 탄생이 필요한 시기가 올 겁니다. 오늘은 그것에 대해 간단하게 다뤄보도록 하겠습니다.

 

지금까지 한국 정치는 세 번째가 없었습니다. 이번에 각 정당에서 분리하여 탄생된 세 번째 정당은 교섭단체를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분열 중에 있습니다. 왜 그런 걸까요? 그냥 간단하게 말하자면, 세 번째 정당의 고유성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들 또한 결국 과거 정치이념을 각자의 정체성으로 삼고 있었기 때문에 결집되지 못하고 분열했던 것이지요. 물론 이들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한국의 정당은 과거 정치이념을 중심으로 탄생했기 때문에 두 거대 이념과 차별화된 비전이나 전략, 그리고 결집요소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나머지 정당들은 양당의 하위 정당이라는 모욕적인 취급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에 반박도 하기 어렵습니다. 웬만한 이념이나 비전은 다 거대정당들도 가지고 있으니까요. 독자적인 무언가가 없는 한 비슷한 부류로 엮길 수밖에 없었습니다.

 

무엇보다 거대양당은 피해자들이(자본주의, 공산주의 독재자) 정치세력화 된 것이기 때문에 감정적인 지지를 받고 있습니다. 그래서 진영논리에 의해 뭘 해도 지지하거나 뭘 해도 반대하는 정치성향이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각자 진영의 승리를 위해 거대양당을 주로 지지하게 되어 나머지 군소정당은 힘을 발휘하기 어렵게 되었습니다. 양당체제는 정치체계나 선거체계에 영향을 받은 것은 사실이나, 이러한 극단성은 감정이기 때문이라 보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감정이 나쁘다는 건 아닙니다. 인간의 행동의 원동력이 되어주는 감정이야말로 정당의 정체성을 유지하게 만드는 요소입니다. 감정이 없는 정당은 오래 유지될 수 없습니다. 애정이든 증오든 공포든 말이죠.

 

따라서 세 번째가 탄생하기 위해서는 차별화된 비전, 전략, 결집요소, 감정 등이 필요합니다.

 

 

 

정치세력

 

정치세력을 정리해보려고 합니다만, 너무 길어질 것 같으니 요약하도록 하겠습니다.

 

 

피해자

 

자본주의 침략의 피해자, 공산주의 침략의 피해자, 군사독재정부의 피해자, 남성중심사회의 피해자

 

여기서 직접 피해자와 간접 피해자가 있겠습니다. OO의 피해자 또는 피해를 물려받은 사람.

 

직접 피해자나 간접 피해자가 아니더라도 피해를 받은 사람에게 영향을 받으면 같은 영향권에 속하게 됩니다. 요즘 세상에 자본주의(일제강점기)나 공산주의(한국전쟁) 침략의 피해를 직접적으로 받은 사람이 얼마나 있겠습니까? 대부분은 피해자들의 영향을 받아서 정치세력화 된 것이지요. 이는 남성중심사회의 피해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직접 피해를 받지 않았어도 영향을 받아서 정치세력화가 된 것이죠. 여성주의의 정치세력화는 여성우대정책을 증가시켰고 때로는 역차별까지 낳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지금 현재 젊은 남성들이라는 또 다른 피해자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러한 현상이 지속되면 어쩌면 여성우대정책의 피해자들이 정치세력화가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마 당분간은 체면 때문에 어려울 확률이 높지만요.

 

이러한 상황 속에서 정치인들은 피해자들을 대변, 대행하거나 이용하거나 하고 있습니다. 그 중 이용하는 자들은 이념과 관계없이 경계해야 합니다. 그 이념 또한 그저 이용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할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군사독재자는 공산주의 침략의 피해자들을 공포(북풍)로 이용했고, 공산독재자는 자본주의 침략의 피해자들을 애정(민족)으로 이용했습니다. 이러한 자들은 주의해야 될 것입니다.

 

 

이념 또는 이권

 

자본가, 노동자, 부동산, 자영업

 

오래된 정치이념이나 이권으로 굳이 구체적인 설명을 할 필요는 없어 보입니다. 정당에 따라 기업의 편을 들거나 노동자의 편을 들었죠. 그러나 국가발전을 위해서는 자본가와 노동자가 둘 다 필요하므로, 이제는 생산성을 높이는 경쟁과 생존력을 높이는 안정을 둘 다 추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자본가에게는 경쟁체계 유지를 위한 복지필요의 시대가, 노동자에게는 안정적인 환경을 위한 대화필요의 시대가 왔다고 봅니다. 폭력투쟁이 아닌 대화투쟁, 규제가 아닌 능동적인 사회책임. 이것이 순행될 때 국가는 발전될 것입니다.

 

부동산이나 자영업 등 각종 이권에 의해 정치세력화가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한국은 피해자들이 정치세력의 주류를 이루고 있기 때문에 이들의 목소리가 현재 크지는 않습니다. 그러니까 노동자가 정경유착으로 손해를 봐도 부패한 정권을 지지했던 겁니다. 가령 이권을 위해 자금으로 영향을 준다고 하더라도, 명분은 정치이념으로 흘러가게 됩니다. 정치세력의 주류가 피해자들이니까요. 앞으로 피해자들에 의한 양당체제가 붕괴되면 달라질지도 모르겠습니다.

 

 

인맥

 

인물, 지역, 학교, 종교

 

특정 정치인을 중심으로 한 정당, 특정 지역을 중심으로 한 정당. 굳이 더 설명할 필요가 있을지 모르겠네요. 단지 정교분리는 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옳고 그르건 관계없이 말이죠. 종교는 종교 본연의 역할을 다하길 바랍니다.

 

 

 

과학과 무교

 

간단하게 정치세력들을 살펴봤습니다. 이러한 정치세력구도를 살펴보면 세 번째가 등장하기 몹시 어렵다는 걸 느끼게 될 것입니다. 거대정당들이 촘촘하게 나뉜 정치세력들까지 포용했기 때문에 세 번째는 등장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세 번째가 등장하기 위해서는 기본 정치이념을 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저는 과학과 무교라고 생각합니다.

 

2년전 설문조사에 따르면 종교인구 비율이 46%, 20대는 30%로 적은 편이라고 합니다. 만약 무교를 정치세력화 하여 등에 업을 수만 있다면 세 번째가 되기에 어려움이 없을 거라 봅니다. 그렇다면 왜 지금까지 이런 걸 하지 않았던 걸까요? 그 이유는 주류 정치이념이 무신론이 악덕으로 여겨지던 시절부터 내려왔기 때문이라 봅니다. 그렇기 때문에 관습적인 시각으로 새로운 정치세력화를 주장하기가 어려웠을 거라 봅니다. 더구나 공산당이 유물론을 주장하고 있기 때문에 오해 받을 수도 있으니 섣불리 무교를 정치세력화 할 수 없었다고 봅니다.

 

간단히 무신론이 악덕으로 여겨지던 시절부터 내려온 정치이념, 유물론을 채택한 공산당

 

이 두 가지가 무교인의 정치세력화를 막고 있었다고 봅니다.

 

그러니 관습적인 편견과 이분화된 정치이념에 따른 오해에서 벗어난다면 무교야말로 세 번째가 되기 가장 적절한 정치세력이라 볼 수 있겠습니다.

 

 

첫째, 많은 인구수

 

무교인 비율이 전체 54%, 20대는 70%까지. 미래로 가면 갈수록 늘어날 예정입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이들을 포용할 수 있는 첫 번째 정당은 선점효과에 의해 가장 큰 정당이 될 확률이 높겠지요. 과학과 무교를 등에 업는 정당이 등장할 경우, 기존 종교의 반발을 살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과학과 무교는 종교의 탄압으로 이어지는 게 아닙니다. 종교가 종교 본연의 역할에 충실하면 되는 겁니다. 옳건 그르건 정치에 관여하지 않고, 길거리 강요적 포교활동을 금하고, 종교의 기업화를 막는 것이면 충분합니다. 이를 어찌 탄압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믿는 건 상관없어요. 단지 정치 간섭 말고, 종교 강요 말고, 종교 기업화 막고. , 종교 세습보세요. 문화재관람료를 보세요. 이게 종교야 기업이야. 그럼에도 반발할지도 모르겠습니다만, 탄압하지 않는 이상, 종교는 다수가 될 무교인들의 지지를 받기는 어려울 겁니다.

 

어쨌든 수가 제일 많으니까, 정말 정치세력화가 되면 가장 큰 세력이 될지도 모릅니다. 적어도 기존 이념정치에 환멸을 하여 중립에 선 사람들 중 무교인들은 포용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반부패를 지향하는 정당은 환영할지도 모르지요. 종교의 반발을 저어하여 종교의 부패를 막기 어려웠는데, 그걸 대신할 정당이 탄생하는 거니까요.

 

 

둘째, 확실한 비전

 

과학이 미래를 만든다. 한마디로 모든 국가 경영발전을 과학에 초점을 맞추는 겁니다. 과학국가로 세계를 선도하는 나라가 되겠다, 정도면 되겠네요. 과학국가라, 모 게임에선 한국의 정체성을 과학국가로 선정한 적이 있었어요. 그런 만큼 과학국가라는 건 괜찮은 비전이라 생각합니다.

 

지금 다른 정당들이 과학을 소홀히 하는 것은 아닙니다. 단지 과학과 노동자, 과학과 자본가를 저울질하면 과학보단 기존 이념에 따라 노동자나 자본가에 기울어져 있었다는 겁니다. 노동자의 직업안정이나 자본가의 사업환경을 위해 최신기술도입을 늦추기도 했었으니까요. 아마 그에 따른 불만들이 있었을 거라 보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에 대비되어 과학을 최우선으로 삼아 최신기술도입에 앞장서서 과학국가로 거듭나겠다고 주장하면 됩니다. 그에 따른 피해를 입는 노동자나 자본가는 다른 방식으로 구제해주면 되는 겁니다. 이 다른 방식을 생각하고, 그 방식을 받아드리게 만드는 걸 바로 정치라고 할 수 있겠지요.

 

이스라엘의 출산정책 중 하나가 생식보조의료라고 해요. 자녀평균 3명으로 출산율이 높은데, 저출산의 해결도 과학적인 접근 방식이 존재한다는 거죠. 뭐 부작용이 있다고는 합니다만, 과학이 발전하면 해결할 수 있는 문제라고 봅니다. 무엇보다 그 동안 저출산 해결대책도 마땅히 없었던 상황에서 명확한 대책을 내놓을 있는 접근 방식이라 생각합니다.

 

명확하고 현실적인 비전이 바로 과학국가라고 생각합니다. 이는 과학이 종교와 대립되는 경향이 있는 만큼 무교세력을 등에 업은 정당이 가장 진정성이 있을 거라 봅니다.

 

 

셋째, 구체적인 전략

 

지금까지 나머지 정당들은 기존 정치이념에 따라 전략을 설계하고 수행해왔습니다. 양당체계를 붕괴할 수 있는 구체적인 전략 같은 건 없었다는 얘기예요. 그냥 예전과 같이 양당과 비슷한 선거전략을 짜거나 소수의 정치세력을 공략하는데 그치고 말았죠. 그러니 양당의 하위 정당으로 전락해버렸던 것이지요.

 

따라서 그에 대비되어 과학을 최우선으로 삼아 구체적인 전략을 세우면 됩니다. 이걸 써도 되는지 모르겠네요. 뭐 간단하게 정당 얼굴은 자연과학자나 의사면 괜찮을 것 같네요. 구성원들도 과학에 소양이 있거나 과학에 초점을 맞추면 좋겠네요.

 

그리고 서민 위한다고 서민들 만나가며 손잡거나 고생하거나 하는 거보다, 강한 의지로 모든 국민들을 책임져주겠다는 의사표명이 더 효과적 일거라 봅니다. 보통 사람들은 책임지길 싫어해요. 진짜로. 그래서 대신 책임져주는 사람을 좋아해요. 그리고 그리워해요. 때론 부채감을 느끼기도 하지요. 그러니 강하게 나서서 과학으로 모든 국민을 책임지겠다고 하면 괜찮을 거라 봅니다. 과학적 카리스마.

 

노동자들에게는 과학의 혜택을, 자본가들에겐 기초과학지원의 혜택을, 보장하면 될 것 같습니다. 일반 시민들이 가장 친숙하게 느끼는 과학적 혜택은 의학이니 이를 강조하면 괜찮을 거라 봅니다. 과학발전으로 건강 보장해주겠다, 이거예요! 안보도 과학발전으로 튼튼하게! 경제도 과학발전으로 성장하고! 이하 나머지도 과학적으로 접근하면 괜찮을 거라 봅니다.

 

이하 다양한 정책(개인의 자유와 평등, 자원분배, 사회갈등 등)은 합리, 논리, 효율, 실용, 미래, 기초, 기술 등 과학적인 이미지를 활용하면 괜찮을 것 같습니다.

 

 

넷째, 안정적인 결집요소

 

한국에서 종교에 거부감을 느끼는 정서는 상상 이상입니다. 부패종교 기사 댓글 반응보세요. 장난 아니에요. 그냥 종교의 부패가 부각되면 자연스럽게 결집되는 정당이 될 겁니다. 종교가 부패하지 않을 수가 없고, 종교탄압을 주장하지 않기 때문에, 종교가 사라지진 않습니다. 따라서 사라지지 않는 결집요소가 탄생하는 겁니다. 사이비종교의 잔혹한 사건이나 종교의 부도덕이 기사에 나올 때마다 지지자들이 몰려올 겁니다.

 

지금 양당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대외내적으로 적대적 공생관계를 통해 결집되고 있는데, 이와 비슷하게 결집될 수 있는 요소가 존재한다는 겁니다.

 

 

다섯째, 감정적인 호소

 

부패한 종교의 직접적인 피해자나 그에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 정치세력화가 된다면, 감정적인 지지를 받을 수 있을 거라 봅니다. 사이비종교의 다단계 전도에 피해를 입거나, 어린 나이에 타의로 인해 강제적으로 종교를 믿다가 환멸 했거나, 가족의 맹신으로 집안을 거덜 낸 사건으로 피해를 입거나, 안아키 같은 미신에 피해를 입거나 등 부패한 종교나 미신의 피해자들은 감정정인 지지를 보내줘 끈끈한 지지자가 되어줄 겁니다.

 

 

많은 지지층, 확실한 비전, 구체적인 전략, 안정적인 결집요소, 감정적인 호소까지. 망하기가 어려운 요소들인데. .

 

어쨌든 앞으로 반독재, 반부패 정치세력의 증가로 인한 거대양당체계의 균열로 인한 붕괴에 대비하여 정치의 세 번째에 대해 다뤄봤습니다. 과연 어떻게 될까요? 저는 이거면 세 번째가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제게 힘이 있었다면 도전해봤을지도 모르겠네요. 도전해보고 싶기도 하고요. , 미래로 가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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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인과 국민을 분리해서 바라보자는 주장을 이해하지 못하는 걸 보면, 정말 정치를 할 필요성을 모르는 것 같습니다. 두 가지 예시를 들어보죠.

 

첫째, ‘모든 국민은 지지하는 정치인의 모든 정책에 동의한다라는 명제가 참입니까? 물론 아니죠. 그렇다고 할 사람은 아마 맹목적인 추앙이나 진영논리에 매몰된 사람일 겁니다. 지지자들이 각기 다른 성향을 가지고 있으므로 정치적인 승리를 위해서는 정치인을 상대할 것이 아니라 국민을 상대함이 바람직하겠죠.

 

둘째, ‘모든 국민은 똑같은 정의를 추구한다.’라는 명제가 참입니까? 물론 아니죠. 그렇다고 할 사람은 아마 독선적인 사람일 겁니다. 국민들이 각자 다른 정의를 가지고 있으므로 정치적인 승리를 위해서는 다양한 정의를 포용할 수 있어야겠죠.

 

 

예컨대 불매운동이 정치적인 승리를 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정의를 가진 사람들이 불매운동을 자발적으로 참여하게 만들어야 돼요. 극단적인 사람들은 일본의 모든 것을 반대하며 불매운동을 하자고 주장하는데, 참으로 정치적이지 못합니다. 애초에 불매운동이 효과를 발휘하는 까닭 자체가, 대다수의 국민들이 반일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반일이 아니니까 일본물품을 많이 써왔고, 그러니까 불매운동이 효과를 발휘하는 거죠. 한마디로 극단적인 반일이 불매운동의 주축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극단적인 반일을 주장하며, 그러지 아니한 사람들을 매국노로 몰아가면, 불매운동이 지속될 수 있겠습니까? 순수 반일주의만 정의로 인정하는 상황이 오게 된다면, 불매운동은 그들만의 잔치로 전락할 것입니다. 정치적인 승리를 원하면 정치를 해야 합니다. 정말 정치적인 승리를 원한다면, 일본의 진정한 사과를 받아 갈등을 끝내고 사이 좋게 지내고 싶어하는 사람도 불매운동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해야죠. 뭐 제가 일본 정치인과 일본 국민을 분리하자고 주장한 것은, 제가 국경과 관계없이 전세계에 진정한 민주주의가 퍼지길 바라서이기도 하지만, 다양한 정의를 포용하여 정치적인 승리를 하기 위해서이기도 합니다.

 

어쨌든 일본에 진정한 민주주의가 도래해야, 인권이 보장되어 방사능 식품에서 안전해질 수 있고, 환경이 보호되어 무분별한 방사능배출을 막을 수 있고, 시장이 신뢰받아 안정적인 시장경제가 유지되겠죠. 이는 다른 독재국가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세계에 진정한 민주주의가 찾아오기를! 민주주의가 승리하기를!

 

스스로 생각해도 저 자신은 정치적인 사람 같네요. 현실에선 별로 그러지 않지만요. 어쩌면 평등한 세상에선 정치를 잘할지도 모르겠어요.

 

 

 

다음 주제는 감시사회, 개그, 말의 족쇄, 빅데이터, 공유경제, 삶의 의미, 객관성 등 중에서 아무거나 씁니다.

 

더럽게 덥네요. 매일매일. 비라도 와야지. (쓰던 도중 비가 오네요 반가워라!)

 

그럼 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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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감] [영화감상] 레드슈즈 (4) 2019/08/04 PM 11:57

[영화감상] 레드슈즈

 

 

 

내용누설 있습니다.

 

보게 된 계기는 단순해요. 디즈니와 한국제작과 홍보동영상. 그거 보고 관람평 보니까 괜찮다고 하길래 보기로 결심했죠. 그래서 솔직히 무슨 내용인지는 모르고 봤어요. ‘적어도 평작은 하겠지.’ 생각하고 봤지요. 그리고 정말 그 정도였네요. 높게 쳐줘서 평작과 수작 사이. 많은 발전이 필요해 보인다고 느꼈습니다. 그에 관해 몇 가지 감상을 남겨보도록 할게요.

 

 

 

첫째, 관람객

 

우선 다른 관람객을 관찰한 내용을 작성해보죠. 관람객은 주로 부모, 아이, 여성이 주를 이뤘습니다. 커플들도 종종 보였고요. 관람객 전원을 본 건 아니어서 정확한 것은 아니지만, 아이가 많았던 것은 분명하게 기억합니다. 이후 내용을 보고 나서 그럴만하다고 느꼈습니다. 동화책을 옮겨놓은 듯한 영화더군요. 짧고 단순한 내용, 외모지상주의 비판 영화, 주연은 과체중에 강하고 편견 없는 여성. 정말 타겟층에 맞는 관람객들이었습니다.

 

관람 도중 인상 깊었던 것을 써볼게요. 아이가 많았는데 매우 조용한 분위기에서 관람했습니다. 상영 중에 반응하는 소리가 한 두 차례 정도? 정확히는 기억 안 납니다. 그리고 생각 이상으로 많은 사람들이 상영 도중 상영관을 들락날락하고 있었어요. 사람들을 집중시킬만한 힘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관람이 끝나고 나서 인상 깊었던 것을 써볼게요. 관람을 마치고 상영관 밖으로 나가는데 어떤 아이의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이거 한국인이 만든 거지?”

 

저는 이 소리 듣고 씁쓸했어요. 영화 내용이나 결말 또는 등장인물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제작자들의 국적을 말하고 있다니. 영화에 대해 별다른 인상을 받지 못하니까 국적이야기나 나오는 겁니다. 이거 정말 느끼는 바가 있어야 합니다. 그냥 이 영화감상은 간단히 이 아이 질문 하나로 요약될 수 있어요. “이거 한국인이 만든 거지?”

 

 

 

둘째, 상업성

 

디즈니 출신, 한국인 제작자, 배경은 유럽 동화, 남자 주인공의 중국화. 정말 성공하고 싶었나 봐요. 다른 건 다 그렇다 치고, 마법을 쓰는 남자주인공이 중국전통의상을 입고 부적 던질 때 깜짝 놀랐습니다. 서양풍 동화에 중국전통의상과 부적이라. 어차피 분위기 깰 거면 한국 느낌 나는 캐릭터 등장시켜도 괜찮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였네요. , 그건 한국 제작으로 퉁 칠 생각이었나요? 디즈니로 미국을, 제작자로 한국을, 배경으로 유럽을, 남자 주인공으로 중국을? 다음 작은 상업성보다 작품성에 치중했으면 좋겠습니다. 상업성이 나쁘다는 건 아닌데, 너무 노골적이라 좀 그러네요.

 

 

 

셋째, 고유성

 

무슨 이유인진 알겠어요. 이것저것 패러디 넣은 거요. 그런데 그거 좀 그러네요. 자기만의 세계관으로 만든 작품에 자신이 없었나요? 특별히 한국문화를 가지고 만들라는 건 아니에요. 그냥 자기작품을 만들라고 하는 거죠. 친근하고 익숙한 동화를 바탕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보다 편하게 전달하기 위해서란 명분 아래, 위대한 고전 작품에 기대지 않으면 흥행할 자신이 없는 제작자의 모습이 비춰졌어요. 과거에 의존하는 버릇은 창작자에게 독이라고 생각합니다. 패러디 넣지 마세요. 제작자의 고유성을 잃게 될지도 모릅니다. 정녕 창작자라면 과거 작품에 엿 먹이고 자기만의 작품을 만들어보려고 했으면 좋겠습니다. 경쟁은 현시대 작품하고만 하는 게 아닙니다. 과거하고도 경쟁하세요.

 

 

 

넷째, 내용

 

주제도 내용도 단순해서 특별히 할말은 없어요. 단지 좀 무미건조한 느낌. 제가 예전에 미성년이란 영화를 본 적이 있어요. 그 영화도 특별히 내용을 알고 본 건 아니에요. 그냥 한국영화라 봤죠. 이 영화도 감상문을 남길까 고민했는데, 그냥 넘겼었네요. 좀 평가가 안 좋게 나올 것 같아서요. 이 영화 감상 중 하나가 모범생이 만든 첫 작품이란 것이었어요. 느낌이 딱 학교에서 가르치는 내용을 순진하게 다 적용한 것 같았어요. 시작부터 끝까지. 막판에 가서 조금 과감한 결론을 내린 것 같은데, 그것조차 모범생의 일탈로 느껴질 정도. 그리고 첫 작품답게 이것저것 사회문제를 다 넣다 보니까 주제가 흔들린 것도 있었죠. 뭐 이건 여기까지 할게요.

 

어쨌든 그 영화는 모범생이 만든 첫 작품이었는데, 이 영화는 모범생도 아닌 것 같았어요. 좀 더 안 좋은 평가죠. 주제와 내용이 단순하니까 연출로 승부를 봐야 하는데, 그게 잘 안된 것 같아요. 분명 여기서 터질 거라 생각하고 넣은 장면 같은데 별 다른 감정이 들질 않았어요. 게다가 가장 인상 깊었던 남주역과 악역의 대결은 참 어떤 만화에서 연출을 따온 것 같았고요. 심지어 여주역이 아버질 찾아 헤맸는데, 그 아버지가 토끼였다는 게 밝혀졌을 때도 아무런 감정이 느껴지지 않았어요. ‘아 그랬구나거기서 끝.

 

분명 배운 대로 한 것 같은데 모범생은 아닌 느낌. 아쉬웠습니다.

 

 

 

다섯째, 주제

 

주제의식은 뚜렷해요. 외모지상주의 비판. 너무 직설적이라 다른 요소들이 묻힌 것이 아닐까 생각될 정도로. 그냥 간단히 요약하면, 외모에 편견이 없는 여성이 남성을 있는 그대로 사랑해주자, 외모에 편견이 있던 남성이 자신의 외모지상주의를 반성하고 여성의 있는 그대로를 사랑하게 된다는 내용이에요. 주제의식에 관해서는 특별히 할말이 없네요. 단지 성별을 바꾸면 어떤 반응이 나왔을지는 궁금하지만요. 뭐 설득은 상대방 입장에서 하는 거니까 그렇게 하는 게 맞을지도 모르겠네요.

 

굳이 더하자면, 인간의 취향을 강요할 순 없는 것 같네요. 단지 과한 것은 좋지 않다. 정도.

 

 

 

굳이 여기서 기술이야긴 안 했어요. 기술은 뛰어난 편에 속하니까요. 캐릭터도 예쁘고 배경도 예뻤어요. 뭐 그래도 욕심을 내자면 그 기술도 디즈니를 뛰어넘었으면 좋겠네요. 여러모로 발전이 필요한 작품이었지만 그만큼이나 미래가 기대되는 작품이었습니다. 다음 영화에선 발전된 모습으로 보길 희망합니다.

 

제가 좀 안 좋은 평을 남기긴 했지만, 평작에서 수작 아니 최소한 평작은 될 거예요. 끝까지 봤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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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할 인생 이사 언제가 어떻게가

 

자발적불매운동의 가치를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대외적이나 대내적이나 자발적이라는 것이 매우 중요해요. 그리고, 부디 정치적으로 행동했으면 좋겠습니다. 국민과 정치인은 분리해서 바라보길 바랍니다. 그게 공략 포인트라고 생각해요. 어느 쪽이든 말이죠.

 

우리나라의 경쟁의식은 최고수준이라 생각해요. 그러므로 공정경쟁이 가능한 환경만 조성해주면 굉장한 성장을 이룰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게임은 그렇게 해서 최고수준이 됐으니까요.

 

오늘도 비가 오네요. 매일 매일.

 

 

그럼 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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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게여사장    친구신청

내년추석을 기약할까 합니다.
이거 아니라도 지금 볼영화가 많아서요..

LEILIS    친구신청

잘 읽었습니다~^^

Hawaiian    친구신청

저도 연말이나 내년에 투니버스에서 하지 않을까 기대 중입니다. 극장판 애니 좋아하는 저도 극장서 보기엔 아까워 보이더라고요.

간G나게    친구신청

드림웍스의 슈렉1편이 생각나던데요.
노골적으로 풍자위주로 갔다면 좋았을텐데.
틈이 너무 많이 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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