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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담] SK와 바이오 (0) 2022/02/25 AM 11:06

SK와 바이오

 

 

 

영원진리

 

인류는 영원진리에 도달한 적이 없다. 영원진리를 모르는 인류의 지성과 문명은 모래와도 같은 견고하지 못한 가설 위에 쌓아 올린 불안전한 건축물이다. 인류가 이 세상에 바로서기 위해서는 영원진리에 도달해야 할 것이다. 토대가 영원진리가 아니라면 언제든지 무너질 위험 속에서 불안하게 살아가야만 한다. 인류의 행복을 위해서 견고한 영원진리를 찾아야 한다. 진리란 언제 어디서나 누구든지 승인할 수 있는 보편적인 법칙이나 사실이다. 그게 시간을 초월하면 영원진리라 한다. 보통 수학이나 물리학 법칙을 이른다. 하나에 하나를 더하면 두 개가 된다는 법칙이 미래에 바뀐다고 생각하기 어렵다. 그렇기에 영원진리라 부른다. 그러나 그것조차도 세상의 존재이유를 규명하지 못한다면 영원진리라 할 수가 없다.

 

모든 학문의 끝과 시작은 세상의 존재이유다. 존재를 사유하는 형이상학만 그런 것이 아니다. 어떤 학문도 의문에 의문을 더하다 보면 세상의 존재이유에 대한 의문을 갖게 된다. 의류학을 예로 들어보자. 옷은 무엇인가? 옷의 재료는 무엇인가? 옷의 목적은 무엇인가? 인간이 옷을 입는 이유는 무엇인가? 인간은 무엇인가? 인간이 존재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인간이 속한 세상이 존재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음식학이나 건축학뿐만이 아니라 모든 학문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그 의문에는 답할 수가 없다. 어떻게 인간과 세상이 만들어져 있는지는 알아도 왜 만들어져 있는지는 모른다. 왜 만들어져 있는지 명확하게 답할 수 있는 것은 인간이 만든 것뿐이다. 의식주의 존재이유는 알지만 인간과 세상의 존재이유는 모른다. 인간이 만든 것은 존재이유를 규명할 수 있지만 인간이 만들지 않은 것은 존재이유를 규명할 수 없다.

 

세상의 존재이유를 규명할 수 없게 되면 모든 진리는 영원할 수 없게 된다. 존재이유에 따라 모든 진리가 뒤집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세상의 존재이유라고 주장하는 것에 대해 알아보자. 하나는 신과 시뮬레이션이다. 세상이 존재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신이 만들었기 때문이다. 시뮬레이션 제작자가 만들었기 때문이다. 어떤 존재가 세상을 만든 것이 이 세상의 존재이유라는 것이다. 이 경우 수학이나 물리학 법칙 등이 신이나 제작자 손에 의해 멋대로 조작될 수 있다. 그 조작으로 중력이 사라진 세상이 성립될 수 있다. 이해가 되지 않는다면 시뮬레이션 게임을 떠올려보자. 게임 내에서 중력을 제거하더라도 세상은 존재할 수 있다. 물론 중력이 사라지면 우주질서가 붕괴하여 엉망진창이 될 것이다. 그런 가정을 다룬 영상도 많다. 그러나 그건 다른 방식을 통해 충분히 해결할 수 있다. 온갖 방법으로 시뮬레이션에서 해결이 될 때까지 실험하면 되는 문제다. 신이나 시뮬레이션이나 어떤 존재가 세상을 만든 것이라면 그 세상의 법칙은 언제든지 바뀔 수 있다. 관점을 바꿔보자. 이 세상이 시뮬레이션이고 세상에 존재하는 수학과 물리학 법칙은 진짜 세상에 없는 실험용 법칙일 수 있다. 지금 인류도 그러고 있다. 시뮬레이션 게임에는 세상에 없는 마법이 존재한다. 그것과 마찬가지로 이 세상이 시뮬레이션이라면 현재 수학과 물리학 법칙은 진짜 세상에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실험용 법칙이라면 언제든지 법칙이 달라질 수 있다. 이렇게 어떤 존재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라면 그 존재를 넘지 못하는 이상 모든 법칙은 영원진리가 될 수 없다.

 

둘은 우연이다. 세상의 존재이유가 어떤 존재의 개입이 없는 우연이라면 웬만해서는 현재 수학과 물리학 법칙은 지구 내에서만큼은 영원진리가 될 것이다. 알고 있는 이치만 따지면 아마 우주의 법칙이 같지 않을까 싶긴 한데 우주의 크기가 광속으로 백억 년이 넘으므로 확신할 수는 없다. 어쩌면 지구의 법칙은 우리은하의 중력에 영향을 받은 고유한 법칙일지도 모른다. 천문학으로 우주를 관측하고 있으므로 같을 거란 예측은 가능하지만 그 현상이 지구와 같은 법칙으로 만들어졌는지는 확신하지 못할 거라 생각한다. 그런데 우연이 세상의 존재이유에 대한 답은 될 수 있어도 그런 우연이 발생하게 된 이유에 대해서는 모른다. 우주의 탄생배경에 대해 다양한 의견이 있다. 우주가 빅뱅으로 만들어졌다면 빅뱅 전의 세상이 어떤지 모른다. 우주가 수축과 빅뱅과 팽창을 반복하는 구조라면 전 세상이 수축되는 우주일 것이지만 그 때에도 우연의 이유는 모른다. 이에 대해서는 우주에 대한 정보가 극히 적으므로 추측조차 어렵다. 우주의 진리에 다다를 수 있는 편린이라도 쌓아야 추측이라도 할 수 있다.

 

솔직히 어떤 존재에 의함이란 가정은 지나치게 인간편의 위주의 해석이다. 수천 년 전의 지식으로 세상의 진리일 수 있다고 말한 것이 신이고 현재의 지식으로 세상의 진리일 수 있다고 말한 것이 시뮬레이션이다. 지금 시뮬레이션이 그럴 듯 해 보이는 것은 실제 인류가 시뮬레이션을 만들 수 있기 때문일 뿐이다. 어느 때나 인간이 아는 지식 내에서만 진리라 주장했을 뿐이다. 그렇다고 어떤 존재에 의함 자체의 가능성이 우연에 비해 낮다는 것은 아니다. 지금 아는 지식으로 결론지은 존재의 가능성이 낮다는 것이다. 존재에 의함이든 우연이든 세상의 존재이유를 규명하는 순간부터 모든 학문은 다시 시작할 수 있다. 그렇기에 세상의 존재이유가 모든 학문의 끝과 시작이 된다. 세상의 존재이유를 규명한 순간부터 인류는 비로소 세상에 바로 서서 살아갈 수 있게 되며 그 순간부터 학문은 다시 시작하게 될 것이다.  

 

 

 

사상

 

인류가 바로 서기 위해 필요한 영원진리. 진리. 내가 바랐던 것은 언제나 진리였다. 최초 의문을 가질 때나 관념에 의해 신체부자유를 겪을 때나 지금이나 바라는 것은 진리다. 만약 종교에 모순이 없었다면 종교인이 되었을 것이고 사회에 모순이 없었다면 과학자가 되었을 것이다. 종교에 기대기엔 역사와 논리와 이치와 객관과 법칙과 모순되는 것이 지나치게 많았다. 과학에 기대기엔 자유를 외치며 억압을 하거나 평등을 외치며 차별을 하는 사회의 모순을 견디지 못하고 과학을 배우기 전에 망가져버렸다. 당시에는 알 수 없었던 관념에 의한 신체부자유로 인해 연상에게 제대로 된 의사표현을 하지 못했던 나에 대한 불신과 조소. 이후 운명에 기대며 될 대로 되란 듯이 자포자기하며 살았다. 종교에는 기대지 않았으면서 운명에는 기댔다는 것이 아이러니하지만 망가졌던 나에게는 어쩔 수 없었다. 이후 망가졌던 원인에 대한 답을 찾다가 과학의 도움이 받아 자아와 몸이 하나가 아님을 깨닫고 낡은 도덕관념에 세뇌된 탓에 신체부자유로 인한 자기의사표현을 하지 못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면서 지금은 다양한 현상과 사실과 과학과 사상과 철학 등의 도움을 받아 사상가가 되기를 희망하고 있다.

 

바나나우유 부정취득 사건 몰이해, 연하와의 인간관계 타박, 대중문화 차단, 세배 암묵적 강요, 김치 섭취 강요거부, 전단지 아르바이트 배포 중 구박, 성 문화 접촉금지, 연상에게 의사표현 실패 등 별 것 아닌 것도 많지만 꾸준하고 집요한 낡은 도덕관념의 세뇌와 주관적인 손익에 의한 강요와 편의주의적인 억압으로 자기의사표현도 제대로 하지 못할 정도로 망가져 자포자기 하는 순간 자아의 시간이 멈춰서 고정되어버렸다. 한창 자아를 형성하던 중학생 때 자아의 시간이 고정된 것이다. 고등학생과 대학생 때 괴리감과 위화감을 느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또래가 가질법한 욕구나 생각에서 벗어났다. 다르다는 것에 괴로움을 느끼며 타인을 흉내 내려 애썼다. 자기암시를 통해 감정조차 모방했던 것을 조소했던 기억이 난다. 이제는 그 이유를 안다. 망가지면서 자아의 시간이 멈췄었기 때문에 타인과 달랐던 것이었다. 나중에 사는 것조차 포기했다 다시 사는 것에만 집중했을 때엔 그런 흉내도 지쳐서 공적인 때에만 하게 되었다. 일반적인 사람을 관찰하고 관념이 고정된 사람을 흉내 내었다. 그럼에도 흉내에는 한계가 있다. 흉내 내는 것에 실패하여 나보고 어쩌라고! 했던 기억이 난다. 아마 다른 사람들도 그런 내게 위화감이나 괴리감을 느꼈을 것이다. 이런 망가짐으로 자아형성 시기에 자아의 시간이 고정된 것이 사상을 하는데 도움이 되었던 것 같다. 자아형성에 대해 잠시 정리하자.

 

자아는 환경과 교육으로 수동적으로 관념이 학습되어 기초적인 관념이 고정되면서 감각과 감정과 욕구와 가치관 등이 설정되어 사리분별이 가능하게 되면 형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통상 세상에 눈을 뜨는 어린 아이 때부터 관념이 학습되면서 자아형성이 시작되고 점차 자아가 형성되다 성에 눈을 뜨는 중학생 때 자아형성이 끝이 난다. 빠르면 초등학교 고학년 때도 형성된다. 최근 인터넷의 발달로 수용하는 정보양이 폭증하여 관념 학습이 빨라지는 것으로 자아형성 시기도 빨라지고 있다. 그에 대응하여 정보를 차단하는 것은 정보편중화를 부추겨 정보가 막힌 아이만 도태되게 만들 뿐이므로 모든 아이에 대한 이른 교육이 필요할 것이다. 정보는 힘이다. 정보양에 차이가 발생하면 또래 사이에서 뒤쳐지는 것은 필연이다. 단순히 학업에 필요한 지식만 쑤셔 박는 것은 인간에 대해 잘 모르기에 하는 끔찍한 실수다. 또래 사이에서 뒤쳐지는 순간부터 자존감이 부서지며 전체적인 능력이 하락한다. 정보를 차단할 거면 극단적으로 말해 차라리 학교에 보내지 않는 것이 아이에게 도움이 될 것이다. 부디 어리석은 짓으로 아이를 괴롭게 만들지 말길 바란다. 사리분별을 할 수 있다면 지식을 활용해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대응을 할 수 있다.

 

사리분별을 할 수 있게 된 자아형성 시기에 능동적으로 관념을 학습하면서 사춘기가 시작된다. 능동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면서 자기의사표현이 확실해짐에 따라 보호자의 말을 수용하는 것이 줄어들고, 학습된 관념과 학습한 관념의 차이와 모순으로 세상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으로 반항하기 시작한다. 이때 보호자는 이런 실수를 한다. 피호보자가 자아형성이 되어 사리분별이 가능하면 대등한 인간으로 대함이 마땅함에도 성년에 자아형성이 된다고 착각하여 대등하지 않은 인간으로 여기며 관념을 세뇌하고 주관을 강요하고 편의로 억압하는 짓을 저지른다. 장유유서에 의해 연하를 아랫사람으로 여기는 관념에 의해 성인조차도 사리분별 못하는 인간으로 여기며 통금이나 성적 자기결정권을 침해하는 경우까지 있다. 심각한 연하차별이다. 어떤 동물이 성기능이 작동하는 시기에 성관계를 금하고 있나? 보통 있기 어려운 일이다. 성기능이 작동한다는 것은 성관계를 맺어도 된다는 걸 의미한다. 남녀 모두 애를 낳을 수 있는 몸이 되면 누구와도 해도 된다. 인간의 자유의지로 결정할 문제다. 고리타분한 관념으로 연하를 열등하게 여기고 성을 죄악시하는 것에 영향을 받아 성적 자기결정권을 빼앗고 있었을 뿐이다. 의사표현만 제대로 할 수 있으면 성적 자기결정권을 주더라도 문제가 없다. 의사표현을 제대로 못하니까 연상에게 이용당하는 거지 그렇지 않으면 괜찮단 말이다. 의사표현을 못했던 것으로 망가진 나로서는 의사표현을 할 수 있게 만든 다음 성적 자기결정권을 주는 게 아니라 의사표현을 못하게 만들면서 성적 자기결정권을 빼앗는 걸 보는 것이 너무나도 괴롭고 슬프고 비참하다. 도대체, 유전자와 낡은 도덕관념 중 무엇이 더 진리에 가까운가? 성적 자기결정권은 유전자에 근거해서 줘야 한다. 그것이 진리다. 그럼에도 낡은 관념에 의해 성년이 되어도 성적인 것을 금한다니 정신 나간 짓이다. 이따위로 하니까 출산율이 폭락한 것이다. 범죄에 관련된 인간관계가 범죄를 죄악시하는 관념에 의해 줄어들었다면 성에 관련된 인간관계도 성을 죄악시하는 관념에 의해 줄어든다는 것은 이치에 맞는다. 이성관계가 줄어드니까 결혼도 줄고 출산율도 줄어들었다. 국가가 죽어가게 되었다. 관념에 대해 알았다면 이제는 어릴 때부터 성에 친숙해져야 함을 이해했으리라 생각한다. 낡은 관념을 근거로 미성년을 위해서라는 명목을 가지고 어릴 때 접하는 성 문화를 탄압하는 것이 국가를 죽음으로 내몰고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성을 검열하는 것은 인간에 대한 이해도 없고 예술에 대한 이해도 없는 진정 야만스러운 짓이다. 이성관계가 줄어드니까 이성애 결핍이 되었다. 유사연애산업의 비정상적 성장이나 이성의 동성애 문화 발달이나 고양이나 개에 대한 과도한 집착은 애정결핍으로 나타난 것이다. 괴롭다. 도대체 언제까지 연하의 자유의지를 뭉개고 성적 자기결정권을 빼앗는 폭거를 저지를 것인가? 인간은 낡은 도덕의 장난감이 아니다. 인간은 국가의 장난감이 아니다. 인간은 연상의 장난감이 아니다. 멋대로 주물럭대며 원하는 모양으로 구겨대지 말길 바란다. 자아형성 전에도 관념이 학습되면서 학습된 관념 내에서는 사리분별이 가능하므로 연하가 논리적인 의견을 표하기 시작한다면 대등한 인간으로 대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자아가 형성된 이후 관념 학습을 마무리하면서 구체적인 관념이 고정되기 시작한다. 그러다 모든 관념이 고정되어 변하지 않는 시기가 오면 자아가 완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자아가 완성되면 그 순간부터 그 사람의 지성은 죽었다고 보면 된다. 모든 관념이 고정되어 관념대로만 생각하고 행동하여 새로움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새로운 인식을 낳는 것이 지성이라면 새로운 걸 생각하거나 받아드리지 못하는 순간이 그야말로 지성의 죽음이라 할 수 있다. 자아의 완성은 곧 지성의 죽음이다. 자아완성 시기는 천차만별이다. 빠르면 어릴 때조차 완성될 수 있고 늦어도 완성되지 않는 사람도 있다.

 

무엇이 인간을 행복하게 하는가? 한국은 도덕적일수록 불행하고 부도덕적일수록 행복한 나라다. 장유유서에 휘둘리지 않고 자유롭게 자기의사표현이 가능할수록 행복하고 정조관념에 휘둘리지 않고 마음에 맞는 상대와 자유롭게 성관계를 맺을수록 행복하다. 이게 도대체 뭔가. 한국이 불행 지수가 높았던 것은 단순하다. 그저 대다수가 도덕적이었기 때문이었다. 이 사실에 지독한 슬픔을 느낀다. 인간을 불행케 하는 도덕은 더 이상 필요 없다. 새로운 도덕으로 인간을 행복하게 할 것이다.

 

 

나는 자아형성시기에 자아의 시간이 고정되면서 다양한 특성이 나타나게 되었다. 크게 세 가지다. 하나는 관념이 제대로 고정되지 않은 채 망가졌다. 관념이 제대로 고정되지 않은 채 스스로의 관념을 의심했다. 겉으로는 살아가기 위해 운명에 기대어 자포자기한 상태에서 관념이 고정된 타인의 흉내를 냈고 속으로는 조소하며 관념을 의심하는 것으로 언제든지 관념을 바꿀 준비가 되어 있었다. 성장할수록 선천적인 성질인 본능과 후천적인 성질인 관념이 섞이는 바람에 구분 짓기 어려워한다. 그 두 가지를 전부 본성으로 착각하는 일이 잦다. 그런데 나는 관념을 의심하고 있었던 터라 생각보다는 쉽게 본능과 관념을 구분 지어 본성이 무엇인지 판단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사상가의 역할 중 하나가 바로 관념을 만드는 것이다. 관념에 의해 망가져 관념을 의심하여 관념을 파악하기 수월한 상태가 된 지금 사상가에 적합해졌다 본다. 둘은 자아의 시간이 멈춰 순수한 욕망이 변하지 않았다. 중학생 때 시간이 멈췄었기 때문에 당시 느꼈던 진리와 자유에 대한 갈망을 유지하고 연상에게 의사표현을 하지 못하는 것으로 망가졌던 이유를 오랫동안 추적하며 답을 찾을 수 있었다. 아마 일반적으로 성장했다면 갈망이나 망가짐을 단순한 사춘기의 방황 정도로 마무리 짓고 적당히 살았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러지 못했다. 그렇기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 순수한 욕망은 변하지 않았다. 앞으로도 변하지 않을 것이다. 영원히 진리를 추구하는 욕망을 가진 지금 사상가에 적합해졌다 본다. 셋은 자아의 시간이 멈춰 형성에 필요한 관념을 계속 고찰하게 되었다. 원래 생각이 많은 인간이 생각을 많이 하게 되는 자아형성 시기에 자아의 시간이 멈추자 끊임없이 생각하게 되었다. 사상가의 역할은 생각하는 것이다. 다양한 것을 생각하여 인간에게 새로운 길을 안내하는 것이 사상가다. 지나칠 정도로 생각이 많은 지금 사상가에게 적합해졌다 본다.

 

관념에서 자유로울 것, 순수한 욕망을 가질 것, 생각이 많을 것. 각각의 특성은 자아형성 시기에 자아의 시간이 멈춰 고정되었기 때문에 얻을 수 있었던 것 같다. 망가졌기 때문에 사상가에 적합하게 되었다는 것이 참 황당하다. 사실 이런 특성은 보통 쉽게 얻어지지 못한다. 관념에서 자유로워야 자아의 구조를 파악하고 관념을 만들 수 있다. 그런데 인간은 관념이 고정되는 것으로 자아가 형성되고 유지된다. 그런 인간이 관념을 고정시키지 않으면 자아가 붕괴될 수도 있다. 느끼는 모든 감각과 감정과 욕망을 전부 의심하며 살아간다고 생각해보자. 그 느꼈던 것을 바탕으로 행동해온 모든 걸 의심한다고 생각해보자. 자아의 시간이 흐르는 사람이 관념에서 자유로운 것은 정말 굉장한 것이다. 일반적으로는 아마 몹시 어려울 것이다. 순수한 욕망을 가져야 다른 것에 휘둘리지 않고 끝까지 그 욕망을 추구할 수 있게 된다. 욕망을 위해 끊임없이 사유할 수 있게 된다. 그런데 어린 시절 충동적인 욕망을 평생 가지고 가는 사람은 그리 많지가 않다. 자아의 시간이 흐르면서 욕망이 변화하기 때문이다. 자아의 시간이 흐르는 사람이 순수한 욕망을 가진 것은 어떤 충동이나 욕망에서 휘둘리지 않은 강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기에 굉장한 것이다. 일반적으로는 아마 어려울 것이다. 생각이 많아야 끊임없이 사유하며 사상을 할 수 있다. 그런데 보통 사람이 생각이 그렇게까지 많지는 않다. 지나치게 많으면 일상에서 불편하기 때문이다. 보통 어린 시절 생각이 많다 하더라도 시간이 흐르면서 필요한 생각만 하게 되게 되어 있다. 자아의 시간이 흐르는 사람이 생각이 많은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일반적이지는 않다. 사상가는 관념을 만들면서 감각과 감정과 욕망에 혼란을 겪으며 자아가 흔들릴 수 있고 고정되지 않은 관념에 의해 또래와의 위화감과 괴리감을 느낄 수 있고 지나치게 많은 생각으로 일상 중 실수를 할 수 있다. 사상가는 관념을 만들기 위해 관념을 고정시키지 않고 영원히 자아형성을 해야 한다. 영원히 자아형성 시기에서 벗어날 수 없다. 만약 벗어났다면 가진 자아를 붕괴시키고 자아형성 시기로 돌아가야 한다. 그 과정이 그리 쉽지는 않을 것이다. 사상가가 되고 싶다면 일반적인 삶을 살 거란 생각은 하지 않는 것이 좋다.

 

 

관념에 대해 이해해야 한다. 자아형성 이전의 기초적인 관념이 한국은 유교의 가르침으로 만들어졌고 서양은 기독교의 가르침으로 만들어졌다. 서양은 기독교와 그리스의 사상과 철학이 자리잡은 곳인데 자아형성 이전의 기초적인 관념을 기독교가 담당한 것은 가르침이 단순하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나 플라톤의 사상과 철학을 자아형성 이전에 배우기는 어렵다. 거의 대부분 기초적인 관념은 단순한 가르침에서 시작된다. 십계명 같이 누구라도 알기 쉬운 가르침으로 기초적인 관념이 학습되면서 자아가 형성된다. 이 시기의 기초적인 관념으로 인간의 감각과 감정과 욕구가 개발된다. 성을 죄악시하면 이성과의 접촉으로 느끼는 촉각만으로도 굉장한 죄악감과 불편함을 느끼게 된다. 과도한 성적 수치심이 이걸 근거로 한다. 언어로 연령차별하면 연하의 반말에 심각한 불편함을 느낀다. 반말에 부정적 감정을 느끼는 것이 이걸 근거로 한다. 채식주의에 영향을 받으면 육식에 끔찍한 불쾌감과 불편함을 느끼게 된다. 육식에 대한 강한 혐오가 이걸 근거로 한다. 관념에 의한 것이라면 몸이 먹을 수 없는 게 아니라 자아가 먹을 수 없다고 보는 것이 맞다. 이렇듯 인간의 감각과 감정과 욕구는 사상에 담긴 관념에 매우 큰 영향을 받는다. 이 정도로 중요한 관념을 인간이 제어하지 못한다는 것이 정상이 아니었다.

 

자아형성 이전의 관념은 본능과 결합되어 인간의 본성으로 착각하게 된다. 인지하지 못한 상태에서 학습된 것에 영향을 받아 감각과 감정과 욕구를 느끼면 그게 본성인 거라 착각한다는 것이다. 각국이 즐기는 맛이 다르다는 걸 알고 있을 것이다. 기초적인 미각조차도 관념에 영향을 받는다. 그럼에도 대부분 그걸 본성이라 착각하고 있다. 유전자에 의한 미각과 관념에 의한 미각이 있다는 것을 인지해야 한다. 이런 기초적인 관념은 대체로 변하지 않으나 충격적인 경험이나 구체적인 관념 학습을 강하게 받으면서 변형된다. 물론 그런다고 하더라도 본질이라 할 수 있는 관념 자체가 변했다기 보다는 단지 변형되었을 확률이 높다. 기독교 사상으로 관념이 만들어진 인간은 새로운 사상을 만든다 하더라도 기독교의 도덕성에 뿌리를 두게 된다.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의 도덕성이 기독교의 도덕성과 유사한 까닭은 뿌리가 같기 때문이다. 사회주의가 옳다고 느끼는 사람은 그저 종교의 도덕성에 익숙했기에 그랬던 것이다. 공산주의를 독재자가 이용하기 쉬운 이유도 이런 까닭이 원인이었다. 왕정의 오랜 친구가 기독교였음을 잊으면 안 된다. 유교 사상으로 관념이 만들어진 인간은 여성인권을 주장한다 하더라도 유교 사상으로 나타난 가부장제 세계관의 여성상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된다. 여성주의는 주관적 손익으로 인권이 결정되어 보다 더 심각하게 가부장제 세계관의 여성상을 세뇌하고 강요하게 된다. 약한 의지나 과도한 성적 수치심이나 단절된 이성관계는 전부 여성을 도구로 생각하고 차별했기에 나타난 모습들이다. 그걸 올바른 여성상으로 착각하고 세뇌하고 강요하면 어떻게 하나. 여성들이 여성을 차별하던 관념에서 나타난 여성상을 근거로 여성인권을 주장하며 다시 한번 여성을 차별하는 걸 보니 끔찍한 비명을 지르고 싶을 정도다. 관념이란 정말 무섭구나. 이처럼 사상과 철학을 새롭게 만들거나 주장할 때엔 기초적인 관념부터 다시 만들어야 할 것이다. 인간의 행동원리는 기초적인 관념에 의할 확률이 높으므로 인간의 본질을 알려면 우선 기초적인 관념이 무엇인지 파악해두는 것이 좋다. 대부분은 오래된 종교의 가르침이 보통 기초적인 관념이 될 것이다. 새로 접한 사상도 관념에 영향을 받는다. 루소, , 데카르트, 칸트, 헤겔, 니체 등등의 사상가와 철학자의 사상과 철학 또한 자아 형성 이전에 학습된 기초적인 관념을 바탕으로 학습하게 된다. 그들의 사상과 철학을 온전히 받아드리는 것이 아니라 왜곡된 형태로 받아드리게 된다. 기초적인 관념에 의해 감각과 감정과 욕구가 이미 설정된 상황에서는 그걸 자각해야 새로 접한 사상을 통해 관념을 바꿀 수 있다. 많은 사상가와 철학자들이 이걸 놓치고 있었다.

 

사상가의 길을 걷고자 하는 나는 기초적인 관념부터 만들고 있다. 자유주의의 이념과 미덕과 악덕은 무엇인가? 자유주의의 이념은 모두가 자유로운 것이며 자유롭기 위한 미덕은 의지와 지성이고 악덕은 강요와 강제 세뇌가 된다. 자본주의의 이념과 미덕과 악덕은 무엇인가? 자본주의의 이념은 소비자의 행복이며 소비자가 행복하기 위한 미덕은 공정과 경쟁이고 악덕은 불공정과 독점과 담합이 된다. 역할주의의 이념과 미덕과 악덕은 무엇인가? 역할주의의 이념은 역할수행 외의 자유와 역할수행 유무로 가치판단 하는 걸로 얻을 수 있는 평등이며 그러기 위한 미덕은 역할로 가치를 판단하는 것이고 악덕은 역할과 무관한 것으로 가치를 판단하여 억압하고 차별하는 것이다. 이런 기준은 몹시 간단하여 어린 아이도 알기 쉽기 때문에 기초적인 관념이 될 수 있다. 역할주의를 예로 들어보자. 부모는 자녀에게 아이의 역할을 인식하게 하는 것으로 맡은 역할을 수행하도록 유도하여 올바른 행동을 할 수 있도록 할 수 있다. 무엇을 위한 역할인가에 따라 옳고 그름이 달라질 수 있는데 자아형성 이전에는 자유주의를 참고하면 된다고 본다. 자아형성 이후에는 직접 무엇을 위한 역할인지 고찰하면 된다. 역할로 가치를 판단하는 것으로 용도에 맞는 소비를 할 수 있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떤 목적이 있을 때에 무슨 역할이 필요하고 그 역할에 필요한 능력이 무엇인지 고찰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것이 바로 역할주의의 기초적인 관념 학습이 되겠다. 자아형성 이후에도 기초적인 관념에 대해 인식하고 있다면 그걸 바꿀 수 있다. 이제 자아는 직접 설계해야 한다.

 

이런 걸 생각해보면 정상적인 사상가가 나타나지 않았던 이유에 대해 알 것도 같다. 물론 인문학이 쇠퇴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에 대해 잠시 알아보자.

 

 

 

인문학

 

인문학의 쇠퇴는 학문 특성의 차이에서 비롯되었다고 본다. 수학과 과학은 대부분 영원진리에 가깝기에 암기하고 이해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학문의 수준을 높일 수 있으나 사상과 철학은 대부분 진리도 아니기에 암기하고 이해하는 것만으로는 학문의 수준을 높일 수가 없다. 수사학이나 논리학 같은 언어기술에 해당하는 것은 과거의 것을 그대로 쓸 수 있지만 사상과 철학은 그럴 수가 없다. 매번 새로 시작해야 한다. 1576년 국가론을 작성한 장 보댕은 마녀 사냥을 주장한 마법학의 전문가였다고 한다. 그가 쓴 마법사의 빙의망상에서 이런 글귀가 있다고 한다. 한 명의 마법사는 천 명의 범죄자보다 더 큰 범죄다. 14개 판본이 만들어지고 지금까지 읽히는 글을 쓴 자가 이 따위 주장이나 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런 걸 암기하고 이해한다고 인문학 수준이 올라갈 수 있겠는가? 결코 그럴 수가 없다. 애초에 사상은 진리가 아니라는 걸 알아야 한다. 장유유서도 남녀유별도 정조관념도 진리가 아니다. 그걸 지킬수록 불행해지는 도덕 따위가 진리일 수가 없다. 그런 건 사상가가 만든 관념을 당시 필요에 의해 쓴 것에 불과하다.

 

수학과 과학은 실험하고 연구하고 탐구하면서 영원진리에 가까운 것들을 토대로 체계적으로 발전해나갔지만 사상과 철학은 대부분 진리가 아닌 것에서 고찰하고 사유하고 토론하면서 지나치게 복잡하게만 발전했다. 형이상학을 떠올려보자. 증명되지 않은 진리가 아닌 명제를 전제 삼아 진리를 찾으려 하니 답이 나오지 않는다. 수학으로 비유하면 이런 것이다. 1+1=2 . 같이 간단히 답이 나올 수 있는 것도 1+1+X는 무엇인가? 라고 의문을 던진 다음 그 답을 찾기 위해 끊임 없이 사유했다. 이러니 제대로 된 답은 나오지 않고 그에 대한 추측만 엄청나게 복잡하게 되는 것이다. 특히 특수 형이상학에 속하는 신과 영혼은 도대체 의미가 없는 사유만 늘어나고 있다. 관념에 의해 신의 존재를 당연시하면서 어떤 사실을 논하고 있으니 쓸데 없이 복잡해졌다. 현상에 대한 답을 도출하는데 있어 그런 전제는 필요가 없다. 더군다나 철학의 역사가 길어짐에 따라 과거 철학자가 만든 고유명사들까지 끼어드니 더더욱 복잡하고 어려워졌다. 본질만 정리하면 간단함에도 말이다. 괜히 인문학이 쇠퇴한 것이 아니다.

 

한국이 수직사회인 까닭은 무엇인가? 수직사회인 조선의 도덕관념을 이어받았기 때문이다. 이렇게 간단하게 답이 나옴에도 자아성찰도 제대로 하지 않고 관념에 의해 유교의 가르침을 당연시하면서 수직사회에 대한 원인을 찾으려 하니 다른 나라의 사상을 참고하며 애꿎은 자본주의나 비판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수직사회로 나타나는 사회문제도 제대로 해결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꼰대질이나 갑질 따위를 말이다. 수직사회는 유교의 가르침이 학습되어 나타난 관념이 만든 것이니 수직사회로 나타나는 폐해는 자본주의를 비판할 것이 아니라 유교를 비판했어야 했다. 수직적 인간관계, 교육의 줄세우기, 부의 분배의 실패, 재벌 등등은 자본주의가 원인이 아니라 유교가 원인이었다. 자본주의는 낡은 관념에 지배당해 유교의 가르침을 실현하기 위한 도구에 불과했다. 그 점을 명확히 인식하길 간곡히 바란다. 모두 낡은 관념에서 해방되어 자유로워질 때가 왔다. 민족의 자유, 국가의 자유, 국민의 자유 그리고 사상의 자유다.

 

한국의 교육은 주입식으로 암기하고 암기한 걸 이해하는 것이 주류였다. 이 방식으로 학문을 접하자 영원진리에 가까운 수학과 과학의 수준은 높아졌으나 진리가 아닌 사상과 철학의 수준은 낮아졌던 것이다. 극단적으로 말해 기초적인 사상과 철학은 과거의 것을 아무것도 모른다고 해도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수학과 과학이 있기 때문이다. 이 영원진리에 가까운 것들을 가지고 사상과 철학을 하면 된다. 나는 과학이 없었다면 자아에 대해 고찰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렇다고 수학과 과학을 전공할 필요는 없다. 학문의 시작과 과정과 끝에 있어 수학자와 과학자는 대부분 알아야 하지만 일반인은 답만 알면 된다. 사상가와 철학자도 마찬가지다. 과정에 속하는 복잡한 것은 그들의 역할로 그 역할을 신용하고 그들이 내놓은 답을 가지고 사유하면 된다. 이러면 낡은 관념에 방해 없이 자유롭게 사고하는데 도움이 된다. 기초적일 때에는 오히려 과거의 것을 안보는 것이 더 좋을 수도 있다. 오랫동안 체계적으로 발전한 사상과 철학의 거대함에 잡아 먹여 관념이 고정되어 새로운 생각을 하지 못하게 될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자아형성 이전의 관념에 대한 이해가 있어 본능과 관념을 분리할 수 있다면 그렇게 크게 위험하지는 않다. 자아구조를 파악한 뒤에는 본인 판단으로 다른 사상을 접하면 된다. 보다 전문적으로 사상과 철학을 하고자 한다면 당연히 과거의 사상과 철학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 하나는 과거의 사상과 철학에 영향을 받아 사회가 형성된 측면이 있기 때문이고 둘은 방법론 측면에서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사상과 철학은 역사가 아니다. 암기하고 이해할 것이 아니라 생각을 해야 한다. 시대의 진리를 모아 사유한 다음 사람들에게 가야 할 길을 안내해야 한다. 과학의 도움을 받아 자아에 대한 구조를 어느 정도 파악하게 되었다. 그에 대해 간단히 알아보자.

 

 

무의식에 대한 어떤 과학 실험이 의식과 무의식을 파악하여 자아의 본질에 도달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인간의 무의식은 인간의 의식적 의지와 무관하게 동작한다. 자아에 대해 간단히 알기 쉽게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자아는 의식이 몸의 세포의 신호가 전달되면 유전자에 의해 그 신호를 감각과 감정과 욕구로 변화하고 경험이나 교육이란 학습을 통해 체계화되며 라는 관념이 학습된 뒤 생각과 행동을 할 수 있는 범위를 라고 지각한 것을 이른다고 본다. 이는 짐승도 그리 다르지 않다. 지능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자아는 몸과 하나가 아니다. 자아는 몸과 별개다. 컴퓨터로 비유하면 자아는 소프트웨어고 몸은 하드웨어라 보면 된다. 그 동안 의식과 무의식과 잠든 상황에 대해 구분하기 어려웠는데 컴퓨터로 비유하니 알기가 쉬웠다. 자아의 의식과 무의식은 소프트웨어적으로 분리가 가능하다. 의식은 현재 몸의 세포의 신호로 나타나는 생각이라 보면 된다. 어떤 신호를 통해 생각을 하고 생각하면서 과거의 기억이 떠올리는 것으로 과거의 기억을 통해 그 기억 모두가 나라는 것을 자각하고 움직일 수 있게 된다. 무의식은 과거의 기억들이라 보면 된다. 의식이 깨어난 후에 자극 받은 세포의 신호에서 기억으로 이어진 뒤에는 자유롭게 생각하면서 움직이며 의식 외의 동작은 무의식적 기억에 의해 움직이게 된다. 잠들거나 기절한 상황은 소프트웨어적 무의식과 동일한 상황이 아니다. 하드웨어적으로 꺼진 것이라 보면 된다. 프로그램의 동작과 무관하게 컴퓨터가 꺼진 상황이라는 것이다. 아예 꺼진 건 아니라 대기모드라고 보면 된다. 잠들거나 기절한 대기모드에서는 의식이 없으므로 무의식적 움직임만 나타나게 된다. 무의식적으로 외부에 반응하기 때문에 외부의 자극이 있으면 대기모드가 풀리고 깨어나게 된다. 기절 또는 술이나 약에 취했다면 쉽게 깨어나지 못할 수도 있다. 대기모드에도 단계가 있는 것이다. 생각해보자. 만약 인간의 자아가 하드웨어였다면 어째서 인간은 육체의 모든 기관을 정확하게 제어할 수 없는가? 그건 간단했다. 인간의 자아는 몸이란 하드웨어에 장착된 소프트웨어일 뿐이었다. 일반적으로 컴퓨터에 있는 프로그램이 컴퓨터의 모든 걸 장악하지는 않는다. 관리자 권한이 있는 프로그램도 컴퓨터를 소프트웨어적으로 파악이 가능하지 하드웨어의 손상여부를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지는 않다. 그것과 같다. 유전자에 의한 몸의 신호와 문명에 의한 관념의 학습으로 만들어진 자아는 몸의 일부만 권한이 있는 상태다. 이 정도면 자아에 대해 어느 정도 파악했을 거라 생각한다.

 

인공지능이 자아를 얻어 인공자아가 되려면 몸이란 하드웨어를 설계를 했어야 했다. 그러나 지금까지는 그냥 인공지능이란 이름으로 소프트웨어적 판단만 설계하니 자아가 깨어나질 못했던 것이다. 인공지능에 자아를 깃들게 하기 위해서는 인공자아란 소프트웨어와 인공생명이란 하드웨어를 둘 다 설계하고 인공생명에 외부 신호를 넣을 세계를 설계해야 일반적인 인공자아가 나타날 수 있을 것이다. 아니면 인간처럼 인공생명 내에서 자아가 깨어나도록 설계하는 것도 좋다. 확실히 말해 어렵더라도 이것이 순리일 것이다. 가상세계에 인간의 몸을 만든 다음 관념의 학습을 통해 자아가 깨어나도록 한다. 이것이 진정한 인공생명, 인공인간이다.

 

 

이처럼 정보가 있어야 고찰이 가능하다. 재료 없이 사유는 언어 없는 사유만큼 무의미하다. 자아성찰을 할 수 있었던 것도 과학 정보로 자아 구조를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었던 덕분이다. 세상의 존재이유 규명 또한 마찬가지다. 이 세상의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우주에 대한 정보가 절실히 필요하다. 우주 정보를 최대한 많이 끌어 모아야 한다. 우주에 대해 최소한 절반은 알아야 세상의 존재이유란 물음의 답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 있는 정보만으로는 너무나도 어렵다.

 

우주의 정보를 최대한 많이 모으려면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이 있다. 정보를 수집하여 진리를 추구할 인간이 젊음을 유지하고 수명의 한계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간단히 말해 불로불사다. 우주의 크기가 광속으로 백억 년이 넘는다고 한다. 지금 인류 수명으로는 우리은하에서도 벗어날 수 없다. 우주와 비교한 인류의 크기와 수명은 인류와 비교한 하루살이만도 못하다. 지금 이대로라면 인류는 우주에 아주 작은 흔적만 남기고 덧없이 사라질 수 있다. 정말 초라하다. 나는 이것을 받아드리고 싶지 않다. 인류를 사랑하는 인본주의자가 이런 걸 어떻게 받아드릴 수 있겠나. 지금 인류는 불필요한 낭비를 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지금 인류는 인류끼리 싸우고 있을 때가 아니다. 지금 인류는 낡은 관념에 지배될 때가 아니다. 태양계에서도 벗어나지 못한 문명으로 남을 수는 없다. 적어도 최소한 만 년 이상은 살 수 있어야 우리은하라도 돌아볼 수 있을 것이다.

 

불로불사의 방법은 크게 두 가지가 있다. 컴퓨터와 진화다. 컴퓨터는 컴퓨터 안에 인간의 자아를 넣는 것을 의미한다. 컴퓨터 속에서 영원히 사는 것이다. 인간의 자아는 소프트웨어고 인간의 몸은 하드웨어다. 자아와 몸과 가상세상을 프로그래밍하면 인류는 가상세계에서 영원히 살 수 있다. 현실의 자아와 가상의 자아가 같은 존재인지 의문이 들 수 있다. 생각해보자. 자아가 소프트웨어라면 하드웨어가 바뀐다고 하더라도 달라질 것이 없다. 현실의 몸에서 가상의 몸으로 자아를 넣는 것뿐이다. 컴퓨터를 바꿨다고 일반 소프트웨어의 내용물이 달라지지는 않지 않겠나. 둘 다 같은 프로그램이다. 둘 다 같은 자아다. 자아를 넣을 때 방법이 두 가지가 있다. 복제와 이식이다. 현실에서 가상으로 자아가 이동하는 것이므로 현실의 자아가 남을 수 있다. 그럴 때엔 복제가 된다. 이러면 어느 한쪽이 가짜가 될 거란 인식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아니다. 소프트웨어를 떠올려보자. 소프트웨어의 복제는 같은 게 두 개가 될 뿐이다. 둘 다 진짜다. 만약 고유한 느낌을 얻고 싶다면 이식을 하면 된다. 가상의 몸에 자아를 넣는 도중에 현실의 몸이 죽으면 된다. 그러면 무엇이 진짜냐는 고민에서 해방될 수 있다.

 

그런데 컴퓨터로는 한계가 있다. 불로불사는 인류의 두 가지 사명을 이룰 수 있다. 하나는 동물로서의 사명이다. 동물의 본능 중 하나가 종을 퍼트리는 것이다. 이 본능은 적자생존에 의해 나타났는데 그런 본능이 없는 동물은 멸종했기 때문이다. 팬더가 성적 욕구가 약해 교미를 꺼려하고 있어 팬더용 포르노를 보여주고 있을 정도라고 들었다. 인간이 없었다면 아마 멸종했을 것이다. 한국도 성적 욕구는 약하지 않지만 성을 죄악시하여 성관계가 줄어드는 것으로 팬더와 비슷한 길을 걷고 있다는 점에서 참으로 우습고 슬프다. 동물만 봐도 알 수 있는 이치를 관념에 의해 이해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관념의 무서움이 나타난다. 어쨌든 적자생존에 의해 깨어난 동물의 본능인 종을 퍼트리는 것이야 말로 인류의 동물로서의 사명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사명을 불로불사가 되어야 이루기가 쉽다. 광속으로 백억 년이 넘는 이 우주에 인류를 퍼트리기 위해서는 불로불사가 되어야 가능하다. 이건 컴퓨터로 불로불사를 이뤘을 때에는 어려운 일이다. 컴퓨터 안에서 불로불사한 뒤 백 년 정도 사는 인간들을 대리고 전 우주를 돌아다니며 퍼트리는 것은 상당히 이상하고 어려운 일이 될 것이다. 우주에 종을 퍼트리는 것은 본인의 의지에 따라 해야 한다. 컴퓨터 안의 불로불사자의 명령으로 그럴 수는 없는 일이다. 둘은 지적 생명체로서의 사명이다. 영원진리에 도달하는 것. 그걸 위해 세상의 존재이유를 규명하는 것. 그것이 지적 생명체로서의 사명이라 생각한다. 우주에 다른 지적 생명체가 존재하는지 모른다. 만약 있다면 세상의 존재이유를 그들이 이미 알고 있을 수도 있고 그들과 경쟁할 수도 있다. 지적 생명체 중 하나인 인류가 세상의 존재이유를 규명하는 영광을 누릴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겠다. 그것이야말로 지적 생명체로서의 사명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사명을 위한 불로불사는 컴퓨터와 진화 두 가지 방법이 가능하다. 컴퓨터로 불로불사하여 사명을 달성하는 것이 과연 인류의 영광인지 묻고 싶다. 진정 인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현실의 몸을 가진 상태에서 목적을 달성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따라서 현실에서 불로불사하는 것이 이상적이다. 그게 가능한 분야가 바로 바이오, 생명공학이다.

 

현실에서 불로불사를 하기 위한 방법은 크게 두 가지 있다. 새로운 육체와 유전자 조작이다. 새로운 육체를 만든 다음 뇌나 자아를 복제 또는 이식하는 것으로 영원히 사는 걸 시도해볼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불완전한 불로불사다. 진정한 의미에서 불로불사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유전자 조작이 가장 이상적이다. 얼핏 듣기로 짐승에 어떤 유전자를 넣자 지능이 높아졌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본래 종의 진화 중 바로 그런 방식이다. 고구마에 미생물의 유전자가 섞여 들어간 것으로 진화했다고 한다. 그것과 마찬가지로 어떤 특정한 유전자를 인류의 유전자에 넣으면 불로불사가 가능할 수 있다고 본다. 가령 체내 시간을 반복하는 유전자를 찾거나 만든 다음 동물에 넣는 것으로 실험한 후 인간에게 삽입하면 어쩌면 불로불사가 가능할 것이다. 생명공학에 대해 잘 모른다. 그런데 이치만 따져 봤을 때엔 불가능할 이유가 없다. 인간의 시작을 생각해보자. 정자와 난자의 결합으로 그 작은 크기에서 만 배 이상 커졌다. 유전자의 설계에 따라 이렇게까지 변할 수 있다. 그런 걸 보면 유전자의 설계에서 체내 시간 부분만 간섭할 수 있다면 불로불사가 가능할 거라 생각한다. 늙었어도 어려지고 어려진 상태에서 시간을 반복할 수 있다고 본다. 피부가 벗겨지고 새살과 새 이가 돋아나고 머리카락이 자라난다. 불가능하다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처음부터 생각하자.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이치만 따져보자. 만약 시뮬레이션이었다면 불가능하다 말했을 거라 생각하는가? 가능하다 말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시뮬레이션에서는 실제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 세상이 시뮬레이션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다양한 법칙들이 정교하게 짜여 있다. 유전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유전자의 법칙에 의해 인간이 태어나고 성장한다. 세상의 법칙을 이용해서 하늘을 날고 우주로 날아가는 것처럼 유전자의 법칙을 이용해서 불로불사를 달성하는 것이 가능할 것이다.

 

 

 

인류진화

 

바이오에 대해 써보겠다고 생각한 것은 그저 충동이었다. 내가 이런 분야도 생각하면 뭔가 나올 수 있을까 싶어서 그냥 생각해봤다. 그러다 친숙한 기업이 없어 검색해보니 SK가 오랫동안 바이오에 투자하고 있었다는 걸 보고 SK로 정하기로 했다. 그거 말고 별다른 이유는 없다. 바이오가 뭔지 생각해봤다. 생명공학이다. 생명공학이 뭔지 생각해보았다. 생명을 다루는 연금술사다. 연금술은 비금속을 귀금속으로 변화시키거나 늙지 않는 영약을 만들려고 했던 원시 화학 기술이라 한다. 연금술은 비록 결과를 내지는 못했지만 연금술을 뜻하는 Alchemy가 화학을 뜻하는 Chemistry의 어원이 되었을 정도 과학에 영향을 끼치긴 했다고 한다. 그 연금술로 불로불사가 떠올랐다. 바이오에 종사하는 이들은 불로불사를 연구하는 현대의 연금술사와 무엇이 다르다 할 수 있나 싶었다. 지금도 바이오가 가장 많이 활약하는 곳이 제약이다. 장생을 위한 연구를 하는 연금술사들이다. 생각의 흐름은 다음과 같다. 불로불사가 뭐지? 영원히 젊게 사는 것. 영원히 젊게 살면 뭐가 좋지? 우주를 떠돌아다닐 수 있는 것. 우주를 떠돌아다니면 뭐가 좋지? 세상의 존재이유를 규명하기 위한 정보를 수집하는 것. 그리고 인류를 전 우주에 퍼트리는 것. 사명감을 느꼈다. 인류가 동물이자 지적 생명체로서 가야 할 방향을 위해 필요한 최초의 준비가 바로 불로불사가 되기 위한 인류진화였다.

 

 

바이오가 불로불사, 인류진화를 위한 연구에 장벽은 크게 두 가지 있다. 윤리와 인식이다. 윤리는 원래부터 사상가나 철학자가 담당해야 한다. 만약 낡은 윤리로 과학의 발전이 더디게 되었다면 그건 인문학의 책임이다. 낡은 윤리로 유전자 조작이 부도덕하다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생각해보자. 현재 인류는 진화의 결과다. 오랫동안 진화하여 인류가 되었다. 그런 인류가 자연에서 진화하면 좋고 인류가 진화시키면 나쁘다 할 수 있는가? 만약 그게 나쁘다면 진화 가능한 유전자를 자연에 뿌려 미생물의 유전자를 받아드려 진화한 고구마처럼 자연스럽게 진화할 수 있게 유도하면 좋다고 말할 것인가? 이런 건 무의미한 짓이다. 약을 먹이지 않고 아이를 키우는 것이 옳다 생각하는 것과 비슷한 자연 맹신이다.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자. 인류가 인류를 진화시키는 것만으로 비윤리적인 것이 아니다. 인간의 특성을 유지한 상태에서 체내 시간만 반복하는 것으로 불로불사를 얻은 것이 어떻게 비윤리적일 수 있겠는가. 나는 불변가치를 주장해왔다. 인류가 진화하지 않는 이상 변하지 않는 가치다. 그걸 지키는 것이 인간의 행복이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건 진화를 하지 않았다는 전제에서 나타나는 불변가치다. 만약 채식만으로 살 수 있는 개체가 되면 채식주의도 불변가치가 될 것이다. 인간의 불변가치는 인간의 유전자에 근거한 것이기에 유전자가 바뀌면 불변가치도 그것에 맞춰 바뀌게 된다. 인간을 사랑하는 인본주의자이기에 인간의 특성을 유지한 상태에서 체내 시간을 반복하는 진화가 바람직하다 주장할 뿐이다. 종교계가 인류의 진화에 반대할 수 있다고 본다. 하지만 생각해보자. 기독교의 성서에 따르면 900년도 살았다 하는 자도 있다고 들었다. 다른 종교는 어떤지 모르겠지만 성서의 해석에 따라 젊음이나 수명 정도는 수용할 수 있는 게 아닐까 싶다. 무엇보다 종교도 이 세상의 존재이유가 궁금할 거라 생각한다. 신이 있는 종교는 대부분 세상의 존재이유가 신의 의지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렇다면 우주 또한 신의 의지로 만들어졌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우주를 떠돌며 세상의 존재이유를 찾아 다니는 것이 신의 의지를 부정하는 것이 되지는 않는다고 본다. 그걸 위해서 젊음을 유지하고 수명을 늘리는 것은 우주에 진출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개인적으로 현존하는 종교는 모순이 많으므로 믿기가 어렵다. 하지만 신의 존재는 있는지 없는지 확신할 수가 없다. 그래서 세상의 존재이유 중 신에 의함을 부정할 수 없다. 그저 모르겠다. 모르니까 알고 싶다. 이외 수많은 사람들이 고정관념에 의해 유전자 조작을 통한 인류 진화를 부정적으로 바라볼 수 있다. 단호하게 말하겠다. 태양계에서도 벗어나지 못한 문명의 윤리로 옳고 그름을 따지면 언제까지고 우주로 진출할 수가 없다. 윤리도 진화해야 한다.

 

다음은 인식의 문제가 있다. 종의 번영과 영원진리를 위해 인류진화라는 인류의 공통된 과제를 실현할 수 있는 분야가 바이오임에도 바이오에 대한 인식이 그리 좋지 못하다. 다른 분야에 비해 얻는 부와 명성이 적다고 들었다. 부는 지극히 자본주의적인 결과다. 시장경제의 논리에 의해 보통 수요와 공급으로 가치가 판단되어 현재 수요가 높은 산업이 부를 얻기가 좋다. 대표적으로 IT가 그렇다. 지금 IT의 현재 수요가 높기 때문에 부를 얻기가 좋은 것이다. 그런데 바이오는 그렇지 못하다. 바이오가 하는 것 중 하나인 제약의 결과가 나오려면 보통 십 년은 걸린다고 한다. 자본주의 원칙에 따르면 원래 이런 분야는 부를 얻기가 쉽지 않다. 더군다나 바이오는 새로운 것으로 인식되는 경향이 높다. 새롭기에 친숙하지가 않아 관심도 적고 투자도 적다. 최근 들어 바이오에 대한 투자가 늘었다고 하는데 아직도 많이 부족하다. 바이오의 역할을 생각해보면 인류의 잉여자원 대부분이 바이오에 투자되더라도 이상할 것이 없다. 그 정도로 진화는 중요하다. 인류를 위해 화성으로 가는 것은 훌륭하다 보나 그 전에 인류가 우주에 적합한 몸으로 진화하는 것이 선결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겠다. 둘 다 중요하면 우선순위가 있기 마련이다. 둘 다 같이 진행하되, 투자되는 자원은 인류진화에 보다 더 투자해야 한다. 원래 새로운 과학이나 사상은 친숙하지 않아 여러모로 힘들다. 천 년 전 양자역학이나 자유주의를 들고 가면 어떻게 되겠는가? 마녀 사냥이나 당하지 않으면 다행이다. 바이오가 부를 얻기 위해서는 인식을 개선해야 한다. 바이오야말로 인류가 전력으로 투자해야 할 분야라는 걸 인류 모두 인식해야 한다.

 

바이오에는 투자뿐만이 아니라 인재도 많이 필요하다. 그런데 이토록 중요한 역할임에도 바이오는 학생들의 관심밖에 있다. 최근 초중고 장래희망 5개를 중복을 제외하고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운동선수, 의사, 교사, 창작자, 경찰, 군인, 간호사, 컴퓨터공학자 정도다. 순수과학이 없다. 컴퓨터 공학을 제외하면 응용과학도 없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나. 부를 목적으로 한 자본가도 없다. 유명하거나 안정적인 것뿐이다. 유명한 것은 매체의 영향이고 안정적인 것은 보호자의 영향일 것이다. 대부분 외부의 영향으로 장래희망이 나타났다. 아이의 생각 속에서 나타난 고유한 순수한 꿈이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바람직한 현상이 아니다. 자유의지가 제대로 성장하지 못하다는 게 나타난 것이기 때문이다. 고찰 없는 자유의지는 없다. 외부의 영향으로 나오는 결과가 나오는 것은 외부의 의지가 반영된 것일 뿐이다. 자유의지로 유명하거나 안정적인 것을 고를 확률도 있겠지만 거창한 꿈을 꾸게 되는 초등학생 때부터 이런 경향이 나타난다는 것은 외부의 영향이 크다고 본다. 만약 보호자가 안정적인 것이 좋다는 인식이 없었다면 다른 장래희망을 가졌을 거라 생각한다. 이런 장래희망은 정상적인 자유의지가 없단 해석이 될 수밖에 없다. 이걸 바꿔야 한다. 자유의지를 얻을 수 있는 교육이 필요하다. 암기하는 교육이 아닌 사유하는 교육으로 나아가야 한다. 학생들이 자유의지를 얻은 다음에는 바이오가 친숙하도록 해야 한다. 바이오가 과거의 연금술사와 비슷한 일을 하고 있음을 알리고 연금술사가 되는 것에 대한 흥미를 느끼게끔 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바이오와 연금술을 연결하는 것만으로도 큰 홍보효과가 있을 것 같다. 연금술 관련 게임이나 만화는 상당히 유명하기 때문이다. 새롭게 관련 창작물을 만드는 것도 좋을 것이다. 과학의 발전으로 대부분의 단순 직업이 사라지므로 연구자는 늘어날수록 바람직하다. 특히 자연과학은 늘어날수록 좋다. 지금 당장 자본주의에 의해 수요가 높은 응용과학의 수익이 높지만 자동화가 될수록 자연과학의 수익이 높아질 것이다. 일정이상 자동화가 되면 기술초격차가 보다 높은 수익을 얻게 만들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응용과학으로 당장의 수익을 얻고 자연과학에 투자를 하는 것이 미래지향적일 것이다.

 

지금 한국은 줄세우기 때문에 인식이 좋지 못한 분야에도 인재가 들어가고 있다. 간판 따러 들어갔다가 그 분야에서 일하게 되는 것이다. 예컨대 교수의 유혹으로 대학원에 가면 본인의 의지와 무관하게 계속 그 분야에서 일하게 되기도 한다. 황당하게도 부정적으로 여겨지는 줄세우기가 다양한 분야에 인재를 넣는 일을 하게 만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개인의 의지와 무관할 확률이 높으므로 직업만족도가 높기 어려워 성취도나 행복 지수도 상대적으로 높기가 어렵다. 성취도나 행복을 볼 때 줄세우기보다는 본인의 적성에 맞는 걸 하도록 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만약 인류가 불로불사로 진화하면 문제점이 하나 있다. 지구 포화문제다. 지금도 인류가 지나치게 많다고 한다. 그런 상황에서 불로불사 개체가 늘어서는 안 된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은 간단하게 해결할 수 있다. 모든 진화한 인류는 우주개척에 나선다는 전제가 있으면 된다. 첫 번째 인생을 지구에서 살다가 진화한 후에 두 번째 인생을 우주에서 사는 것이다. 오히려 이래야 지구 포화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불로불사 정도의 이익이 아니면 지구를 떠날 사람이 얼마나 있겠나. 이것이 말처럼 쉽지 않다는 걸 안다. 그래도 방향이 정해져야 나아갈 수 있다.

 

윤리 문제를 해결하고 인식을 개선하는 것으로 불로불사 연구의 장벽을 허물어 인류의 관심과 투자를 늘리고 우수한 인재를 받아드린다. 그것으로 인류진화를 위한 준비를 마치게 된다. 인류가 진화하여 우주로 진출해서 종을 퍼트리고 정보를 모아 세상의 존재이유를 규명하여 동물과 지적 생명체의 사명을 다하길 바란다. 영원진리에 도달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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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이 쇠퇴하니 혈액형이나 MBTI 같은 걸로 사람을 판단하죠. 다음은 정부와 인사입니다.

 

정세가 복잡하게 돌아가고 있는 시대, 낡은 관념을 가지고 있으면 살아남을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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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담] LG와 가전 (0) 2022/02/01 AM 02:59

LG와 가전

 

 

 

인간은 본능과 사상으로 자아가 형성된다. 본능은 선천적이고 변하지 않기에 불변가치고 사상은 후천적이고 변하기에 만변가치다. 본능은 유전자에 보관된 동물의 행동양식이나 능력을 뜻한다. 식욕이나 성욕 같은 욕구나 기쁨이나 슬픔 같은 감정과 그와 관련된 능력을 가리킨다. 사상은 인간 주위의 체계화된 관념을 교육 또는 경험으로 학습한 것을 뜻한다. 예의와 범절 같이 인간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관념을 가리킨다. 본능이 힘이라면 사상은 방향이다. 본능적으로 욕구나 감정을 느끼면 사상이 그걸 충족하기 위한 방법을 안내한다. 식욕을 느낄 때 절도에 관한 관념을 교육받지 못한다면, 절도를 해서라도 욕구를 충족한다. 기쁨을 원할 때 폭력에 관한 관념을 교육받지 못한다면, 폭력을 써서라도 감정을 충족한다. 본능에 따른 욕구와 감정은 솟아나오는 힘이고 사상이 그 방향을 결정하여 올바른 길로 안내하고 있다. 이렇기에 보통 사상이 사회에 속한 인간의 사고방식과 행동원리를 결정한다. 사상이 인간이 가야 할 길을 안내하고 있다.

 

사상은 자아형성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 자아형성 시기는 사람마다 다르다. 관념이 수동적으로 학습되면 이전이고 능동적으로 학습되면 이후다. 보통 예의범절에 속하는 전통적인 도덕관념이 이전사상이고 학교나 사회서 배우는 사상이 이후사상이다. 통상 이르면 초등학생 고학년에서 중학생 정도에 자아가 형성된다. 자아가 형성되고 성에 눈을 뜨면서 사춘기가 시작하는 것이다. 정보의 과잉공급으로 자아형성 시기가 빨라지고 있다. 그에 대응해 빠르게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할 것이다. 이후 다양한 지식과 고찰을 통해 자아를 완성하는 이들도 있다. 이에 대해서는 생략하겠다. 한국에서 보통 유교와 기독교와 불교가 이전사상이고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와 PC주의 등등이 이후사상이다. 이후사상이 이전사상에 영향을 끼치고는 있으나 본질적인 부분은 변하지 않은 채 지속되고 있다. 왜냐하면 이전사상은 사람이 인지하기가 몹시 어렵기 때문이다. 수동적 학습됨이란 강제 세뇌와 크게 다르지 않다. 세뇌란 다른 생각으로 개조하거나 특정 사상을 주입하는 것을 뜻한다. 수동적으로 학습되는 것은 의지와 무관하게 세뇌된다는 것과 같다. 강제 세뇌된 인간이 세뇌된 것을 인지하기 어렵듯이 관념을 수동적 학습된 인간이 이전사상을 인지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이와 같은 문제로 자아형성 이전에 종교를 갖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 종교 강제 세뇌와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이 이전사상이 굉장히 중요하므로 반드시 기억하길 바란다. 확실히 말하겠다. 그 누구든 이걸 이해하면 최소한 사상 수준이 보통을 넘게 된다. 현재 해결하지 못한 많은 사회문제가 이전사상이 원인일 정도다. 이후사상은 인식할 수 있기 때문에 원인파악이 가능하여 해결할 수 있지만 이전사상은 인지조차 하기 어렵기 때문에 원인조차 파악하기 어려워 해결 자체가 불가능하다. 이것에 대해 잠시 알아보자.

 

 

한국에서 이전사상은 대부분 유교다. 일부를 제외하면 다른 종교를 가지고 있더라도 유교에 영향을 받았다. 가르침의 종류는 다음과 같다. 수신제가, 삼강오륜, 정조관념, 남녀유별 등이 있다. 수직사회는 오륜의 장유유서와 변질된 삼강 등이 영향을 끼치고 교육열은 수직사회와 수신제가 등이 영향을 끼치고 성별갈등은 수직사회와 정조관념과 남녀유별 등이 영향을 끼친다. 각각의 설명은 너무 길어지므로 생략하겠다. 수직사회 중 연령차별만 잠시 정리하자. 종종 오성과 한음을 말하며 조선은 나이 차이가 나도 우정을 나누었다는 말을 하곤 한다. 그런데 나이를 말하며 그런 관계를 특별하게 미담이라 말하는 것 자체가 그런 일이 흔치 않다는 걸 방증하는 것이다. 일제와 독재를 거치며 조선보다 한국에서 연령차별이 더 심해졌다 할 수는 있는데 변질되는 것 또한 사상이 짊어져야 할 책임이라 말하겠다. 나도 예외는 아니다. 나의 사상으로 나타나는 현상 또한 내가 책임져야 할 것이다. 몇 가지 주요 사회현상에 대해 간단히 알아보자.

 

꼰대와 갑질 또는 독재와 재벌 같은 수직사회의 가치관과 구조가 바로 유교의 가르침으로 만들어졌다. 노동자와 아동과 여성 등이 괴로움을 겪은 것은 자본주의가 원인이 아니었다. 조선의 탐관오리를 자본주의 탓으로 할 수는 없지 않는가? 학력과 학벌을 중시하고 학생을 줄세우기 하게 만드는 과도한 교육열도 유교의 가르침으로 만들어졌다. 수직사회가 수신제가보다 더 큰 영향을 끼친다. 수평사회였다면 수신제가가 있더라도 과도한 교육열까지 발생하지는 않는다. 학생의 불행은 교육열 자체보다 수직사회가 만든 것이다. 조선의 과거시험과 한국의 수능이나 고시와 본질적으로 얼마나 달라졌다 할 수 있는가? 성차별과 과도한 성적 수치심과 성 문화 탄압과 이성관계 단절도 유교의 가르침으로 만들어졌다. 수직사회가 성차별을 만들고 정조관념이 과도한 성적 수치심과 성 문화 탄압을 만들고 남녀유별이나 남녀칠세부동석이 이성관계 단절을 만들었다. 여성을 열등하게 여기고 힘든 일을 할 기회를 주지 않아 의지가 약화되어 사회참여를 하지 못하는 것으로 성차별이 나타나고, 여성을 도구로 여기고 성적 자기결정권을 주지 않고 과도한 성적 수치심을 느끼게 하여 스스로 정조를 지키게 만들고 그 수치심을 근거로 성 문화 탄압을 하고 있고, 연하를 도구로 여기고 남녀의 관계조차 연상의 입맛대로 하기 위해 이성관계를 단절시켰다. 그럼에도 조선이 출산율이 유지되었던 까닭은 가부장제의 가장의 강요로 결혼과 출산을 하였기 때문이다. 조선이 성 문화가 생각보다 자유로웠던 까닭은 여성이 과도한 성적 수치심을 갖고 있더라도 여성의 발언권이 낮았기 때문에 그 수치심을 근거로 성 문화를 탄압하지 못했던 것이다. 조선의 가부장제 세계관의 여성상(의지가 약하고 성적 수치심이 강하며 이성관계가 단절된)이 한국에서 여성주의자가 주장하는 여성상과 무엇이 다르다 할 수 있는가?

 

이전사상에 대한 이해가 없기에 이런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 묻겠다. 연하의 반말에 불편함을 느끼는 까닭은 무엇인가? 영어권은 그런 게 없어 그걸 불편해하지 않지 않나. 그렇다면 그런 불편함은 사상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닌가? 왜 과도한 성적 수치심을 느끼는가? 원시 부족을 보면 그렇지 않지 않나. 그렇다면 그 수치심은 사상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닌가? 주관과 객관을 분리하는 것이 바로 이런 것이다. 주관적 감각과 객관적 현상을 비교해보면 본인의 감각이 무엇인지 유추할 수 있다. 그럼에도 다수는 이런 불편한 감각을 본능으로 착각하고 있다. 그래서 그런 감각을 바꾸려 하지 않고 그 감각에 맞춰 사회를 바꾸려 하고 있다. 이런 것이 바로 이전사상에 대해 이해하지 못한다는 증거 중 하나다. 사이비종교에 세뇌되어 동그라미가 불편해진 사람이 생기면 세상의 동그라미를 전부 각지게 만들 것인가? 말도 안 되는 일이다. 낡은 성 관념에 세뇌되어 과도한 성적 수치심을 근거로 성을 죄악시하고 성 문화를 탄압하고 성에 관련된 것은 사소한 것이라 막으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런 말도 안 되는 일을 저지르면 국가가 죽어가게 된다.

 

(2021.12.08) 1인가구 664만 가구

(2021.12.14) 혼인율 88년생 37%, 83년생 67%

(2016.06.29) 부부 섹스리스 36.1% 세계 2

(2021.12.09) 출산율 0.6

 

혼자 사는 사람이 늘고 결혼하는 사람이 줄고 결혼한 사람마저 3쌍 중 1쌍은 성관계를 잘 안하며 출산율은 0.6명까지 떨어졌다. 이게 정상이라 보이는가? 83년생과 88년생의 차이는 강요와 자유의 차이다. 사회가 점차 자유롭게 되어가면서 본인 의지로 결혼한 사람이 저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는 걸 의미한다. 이걸 그냥 결혼시기가 늦어졌다고만 해석해왔기 때문에 아무런 대책 없이 여기까지 와버린 것이다. 이것이 경제나 본능이 원인으로 보이는가? 경제가 원인이면 선진국 중 왜 한국만 이런 현상이 나타나는지 생각해본 적이 없나? 미성년 때부터 성을 죄악시하며 자위조차 금하니까 그게 학습되어서 연애하여 동거하는 사람이 줄고 결혼하는 사람이 줄고 결혼하고 나서도 성관계 하는 사람이 줄어든 것이다. 장유유서로 인해 미성년은 연상에게 아무런 반항도 하지 못하고 잘못된 성 관념을 주입 당해버렸다. 가부장제 세계관의 남성이 여성을 도구로 여기며 주입한 정조관념과 여성이 스스로 정조를 지키게 하기 위해 주입한 과도한 성적 수치심과 과도한 성적 수치심을 근거로 한 성 죄악시를 장유유서를 명목으로 미성년에게 올바른 도리라며 주입하자 이성관계가 망가지고 국가가 죽음으로 향하고 있는 것이다. 이게 이해가 되지 않는다면 짐승으로 이해해보자. 만약 짐승이 교미를 할 때마다 막고 못하게 하고 그걸 나쁜 것이라 인식하게 한다고 해보자. 그게 학습되어서 파블로프의 개처럼 성욕을 느낄 때마다 그 교육이 떠올라 교미를 부정적으로 여긴다고 생각해보자. 그러면 어떻게 되겠는가? 당연히 교미를 하지 않게 될 것이다. 사람도 동물이다. 어려서부터 성을 죄악시하는 풍조에서 자라나면 결혼한 부부조차 성을 부정적으로 여기고 성관계를 하지 않게 된단 말이다. 울렁거린다. 성욕은 본능이니까 죄악시해도 알아서 잘 할 거라 착각할 수 있다. 하나 본능은 힘이고 사상은 방향이다. 사상이 잘못된 방향으로 안내하면 본능조차 제 힘을 발휘할 수 없다. 본능이 전부면 모두가 절도와 폭행을 하지 않겠나? 사상에 의해 절도와 폭행이 죄악시되면서 하지 않았던 것처럼 사상에 의해 성이 죄악시되자 성관계를 하지 않음으로써 성에 관련된 인간관계 자체가 붕괴해버린 것이다. 물론 절도와 폭행과 성관계가 없다는 것은 아니다. 비율이 줄어든다는 것이다. 절도와 폭력의 비율이 줄어들면서 범죄율이 감소한 것처럼 성관계가 줄어들면서 출산율이 감소한 것일 뿐이다. 낙태가 많은 까닭은 애정으로 성관계를 한 것이 아니라 어떤 수단이나 쾌락을 위해서만 성관계를 했기 때문이다. 그런 수단과 쾌락은 상품으로 소비하고 연인과는 애정을 갖고 관계를 맺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그래야 그 애정이 아이에게 이어진다. 이제는 성 자체를 죄악시할 것이 아니라 강요를 죄악시해야 한다. 그것은 자유주의적으로 접근해도 충분히 해결할 수 있다. 성 자체는 결코 죄악시해서는 안 된다.

 

이럼에도 다수 국민과 정부는 집값을 운운하고 있다. 정말 돌아버리겠다. 이전사상에 대해 아무런 이해도 없고 인간의 학습효과를 알면서도 미성년 때 성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어떤 학습효과를 나타내는지를 모르고 있다. 조금만 야해도 선정적이라며 미성년에게 접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바로 잘못된 성 관념을 심어주는 것이다. 경국대전에 따르면 조선시대에 결혼은 15세가 일반적이고 11~13세도 적지 않았다고 한다. 당시 평균수명이 낮았기 때문이라는 추측이 있는데, 그때나 지금이나 유전적으로는 거의 달라지지 않았다. 그때나 지금이나 인간은 본질적으로 달라진 것이 없다. 그 말은 미성년이 선정적인 걸 보더라도 실제로는 괜찮다는 것이다. 낡은 도덕관념이 잘못된 형태로 전해져 성에 눈을 뜨는 사춘기시기조차 성에 접하는 걸 막고 있는 것뿐이다. 성은 불결하지도 불건전하지도 않다. 마치 이런 것 같다. 과거 위생으로 돼지를 꺼려했던 것을 현재까지도 그 때문에 돼지를 불결하다며 죄악시하는 것과 같이 과거 남성이 여성을 도구로 여겼던 것 때문에 나타난 정조관념과 과도한 성적 수치심을 가졌던 것을 현재까지도 그 때문에 성이 불결하다며 죄악시하는 것과 같다. 아아, 국가가 죽어가고 있는데 이걸 이해하는 사람이 적다. 죽음의 원인을 알고 있는데 할 수 있는 게 적은 게 너무나도 괴롭다. 할 수 있는 거라도 할 것이다. 이제 성을 죄악시하는 이들을 국가를 죽음으로 몰고 가는 악당이라고 말할 것이다. 내게 있어 그러지 않는 것이 불의다. 명백하게 원인을 알면서도 하지 않는 것은 사상가의 길을 걷고자 하는 자에게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한국이 살아남고자 한다면 여성은 가부장제가 세뇌한 과도한 성적 수치심을 벗어날 수 있어야 하고, 미성년은 성을 친숙하게 여겨 자연스럽게 이성과 성관계를 맺을 수 있어야 하고, 성년은 이른 동거와 결혼을 통해 다인가구를 늘릴 수 있어야 한다.

 

삼권은 이제 가부장제 세계관의 아동상이나 여성상에서 벗어나 그것에 맞춘 입법과 사법과 행정을 그만해야 할 것이다. 누구든 자유의지로 성관계를 맺었으면 연령 따지지 좀 말고, 과도한 성적 수치심을 근거로 한 디지털성범죄는 운운조차 하지 말아야 한다. 도대체 왜! 성적 자기결정권을 국가가 가져가려 하는가? 도대체 왜! 디지털은 물리적인 힘과 관계가 없어 오로지 의지와 지성으로 결정되는데 여성의 과도한 성적 수치심을 근거로 규율을 만들고 강요하려 하는가? 죽어가고 있단 말이다! 낡은 도덕관념으로 국가가 죽어가고 있단 말이다! 인간의 행동원리가 무엇인지 자아성찰은 해본 적이 있는가? 앞으로 아무리 돈을 쏟아 부어도 잘못된 성 관념으로 나타나는 저출산은 막을 수 없단 말이다! 이미 수십 년 수백 조를 쏟아 부은 상태다. 그럼에도 돈으로 해결하려 하는가? 학습능력이 아예 없나? 내가 이토록 화를 내는 게 부당하다 생각하는가? 이것이 잘못되었다 생각하는가? 국가에 있어 국가의 죽음 말고 더 심각한 문제가 도대체 어디 있냔 말이다! 세금 쏟아 부은 지방은 돈만 받고 이사 가거나 지급이 끝나자 바로 출산율이 낮아졌다. 애정 없이 결혼한 부부는 보상금만 타고 아이를 버리고 있다. 돈이 많이 조건보고 중매결혼한 많은 부부들이 부부간 애정이 결핍되어 설거지를 한다거나 트로피 취급을 받는다고 대중에 조리돌림 당하고 있다. 미치겠구나. 길을 안내하는 건 사상가의 역할이다. 그 길을 이해하는 건 사람의 역할이다. 나는 한국인이 이걸 이해하지 못할 거라 생각하지 않는다. 낡은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이전사상을 이해하고 잘못된 성 관념이 국가를 죽음으로 몰고 있다는 걸 깨달아야 한다. 정권은 대체로 못해도 자유와 생존을 지키면 무난한 것이고 대체로 잘해도 자유와 생존을 지키지 못하면 무능한 것이다. 이번 정권이 잘한 것도 있다는 걸 알지만 어쩔 수 없다. 검열과 출산율은 이번 정권의 변명할 수 없는 최악의 실패다.

 

 

한국은 유교가 보수다. 한국은 자유와 자본이 진보다. 한국은 사회와 공산이 퇴보다. 사회와 공산은 유교와 같이 규율을 중시하므로 실상 퇴보가 된다. 이전사상을 이해했다면 사회주의와 공산주의가 당대의 이전사상인 기독교의 도덕성에서 나타났다는 걸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이 아무리 새로운 사상을 주장한들 이전사상에 대한 이해 없이 본인의 주관적인 도덕성을 근거로 사상을 만들었다면 그 뿌리는 종교가 된다. 북한이 조선과 크게 다르지 않음을 상기하자. 공산주의를 만든 인간의 이전사상이 종교이기 때문에 그 구조 자체를 왕정이 이용하기가 너무 쉽다. 공산주의를 변질시켜 이용할 수 있는 까닭은 규율 강요라는 측면에서 과거 종교와 같기 때문이다. 이상도 마찬가지다. 빈민구제하며 인류구원을 주장하는 기독교나 노동자구제하며 낙원을 주장하는 공산주의나 차이가 없다. 이전사상을 기준으로 한다면 종교와 사회주의와 PC주의가 보수고 자유와 자본과 개인이 진보다. 인류는 아직까지도 규율을 강요하던 종교의 그림자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마녀사냥과 홍위병이 같은 원리로 작동했었음을 알아야 한다. 현재 강대강으로 치닫는 미국과 중국의 갈등은 첫째로 진보적인 자유와 보수적인 규율의 이념다툼이며 둘째로 서양의 현재 패권과 동양의 과거 패권과의 최초 인류 패권다툼이다. 자유주의자로서 자유가 승리하길 바란다.

 

한국에서 정당의 이념 구분의 의미가 퇴색되는 까닭이 대부분 정당의 이전사상이 유교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군부독재 비판하면서 공산독재를 옹호하거나, 공산독재를 비판하면서 군부독재를 옹호하는 비정상적인 상황이 나타날 수 있는 것이다. 자본주의를 주장해도 그 바탕에는 유교가 있고, 민주주의를 주장해도 그 바탕에는 유교가 있다. 각각 인사들이 이후사상을 가지더라도 인간의 행동원리에 이전사상이 강하게 영향을 끼치기에 그런 결과가 나올 수 있다. 민족에 대한 관념이 자아형성 이전에 수동적으로 교육되면 자유를 외치던 민주를 외치던 민족주의가 올바르다 여기며 북한과의 관계에 신경 쓰게 되는 것이다. 내로남불. 흔히 말해 모순되는 일을 하는 이들을 가리켜 비꼬는 단어다. 이것도 이전사상과 이후사상이 충돌하여 모순이 발생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예컨대 가족을 아끼라는 이전사상과 공정해야 한다는 이후사상이 충돌하면 앞에서는 공정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뒤에서는 가족을 위해 불공정도 해버리게 된다.

 

 

의지가 약하고 성적 수치심이 강하고 이성관계가 단절된 가부장제 세계관의 여성상은 여성을 도구로 여긴 남성이 만든 악의적이고 잘못된 여성상이다. 그럼에도 여성인권을 주장하는 이들은 그런 잘못된 여성상을 바꾸려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여성상을 기준으로 신세대를 세뇌하고 사회에 배려만 강요하고 있다. 법 앞의 차별을 만든 성인지감수성은 의지가 약하고 성적 수치심이 강한 가부장제 세계관의 여성상을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는 감수성을 말하며, 거기에 맞춰 양형을 결정해야 주장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남성차별을 만든 여성특혜는 여성은 의지가 약하므로 장애인보다 더 많은 가산점과 할당제가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검열을 만든 성 문화 탄압은 여성은 성적 수치심이 강하므로 수치심을 느낄만한 것은 전부 죄악시해야 한다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전사상을 이해했다면 이게 얼마나 어처구니 없는 것인지 이제는 알 것이다. 여성을 차별하던 도덕관념을 근거로 여성인권을 주장하며 다시 한번 여성을 차별하고 있다. 여성차별의 결과로 남성도 차별 받고 있을 뿐이다.

 

여성을 도구로 여기고 여성의 성적 자기결정권을 보호자와 남편과 사회가 가지고 있었던 것과 같이 여성 성 상품화와 여성 성 대상화를 비판하는 것으로 여성의 성적 자기결정권을 여성주의가 가지려고 하고 있다. 여성을 도구화하는 것은 노동자를 도구화 하는 것이 노동자의 자유의지를 무시할 때 나타나는 것처럼 여성의 자유의지를 무시할 때 나타난다. 여성주의는 여성을 더 이상 도구취급 하지 말길 바란다. 여성 성 상품화가 문제가 없다면 다른 형태의 성 상품화도 문제가 없다. 남녀 모두 성의 아름다움을 즐길 권리가 있다. 그걸 낡은 도덕관념으로 막으려 하지 말길 바란다. 고리타분한 도덕관념을 강요한 것으로 지금 한국을 죽어가게 하고 있는 것이다. 여성을 열등하게 여기고 힘든 일을 할 기회를 주지 않음으로써 사회진출을 하지 못하게 한 것과 같이 여성을 열등하게 여기고 병역이나 오지파견 등의 힘든 일을 여성혐오라 외치며 성장할 기회를 주지 않고 있다. 인간은 인간을 열등하게 여기지 않고 힘든 일을 할 수 있어야 성장한다. 과거 메리가 여성의 실수를 가리켜 교육의 문제라고 지적한 적이 있다. 나도 그것에 동의한다. 지금 교육은 여성을 지나치게 열등하게 보고 힘든 일 자체를 주지 않고 있다. 그게 올바른 도리라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 그것이야 말로 진정한 여성차별이다. 여성주의는 여성을 더 이상 차별하지 말길 바란다. 고리타분한 도덕관념을 강요한 것으로 지금 한국 여성의 성장을 막고 있는 것이다. 여성을 무능하게 여기고 여학교나 여성할당을 도입했던 것과 같이 여학교를 유지하고 여성할당을 더 요구하고 있다. 여성은 무능하지 않다. 여학교나 여성할당은 여성을 무능하게 여긴 가부장제의 산물일 뿐이다. 여성주의는 더 이상 여성을 무능한 인간으로 여기지 말길 바란다. 고리타분한 도덕관념을 강요한 것으로 지금 한국은 여성이 무능하단 편견에서 벗어나지 못하여 유능한 여성이 손해를 보고 있는 것이다.

 

한국 여성주의자는 실질적으로 유교적 가치관을 중시하는 보수적인 인물이었다. 한국 여성주의를 지지하는 남성도 실질적으로 유교적 가치관을 중시하는 보수적인 인물이었다. 흔히 이런 사람을 스윗 남성이라 하는데 틀렸다. 그냥 보수적인 가부장제 세계관의 남성이다. 여성주의가 PC주의와 마찬가지로 주관적 손익으로 인권을 결정하는 사상이기 때문에 이전사상인 유교적 가치관에 의한 주관을 여성의 인권으로 착각하여 이런 어처구니 없는 상황이 나타나게 된 것이다. 한국 여성주의자가 이전사상에 대해 이해하지 못하는 이상 그 주관의 여성상은 어디까지나 유교의 가르침에 따른 가부장제 세계관의 여성상에 불과하다.

 

 

어떤 것을 기뻐하는 것이나 슬퍼하는 것조차 사상에 의해 만들어진 것일 확률이 높다. 고찰 없는 자유의지는 없다. 누군가 그걸 불편해하라 말한 것으로 불편해진다면 그것은 본인의 의지가 아니다. 불편하다 말하는 사람 대다수가 그냥 사상에 의해 만들어진 것을 불편해하는 것일 뿐이다. 인간은 스스로의 감정을 확신하지 못하여 흔들다리 효과 같은 것으로 착각하기까지 한다. 그래서 나는 가능한 내 모든 욕구나 감정이나 감각을 본능에 의함인지 사상에 의함인지 구분하고 있다. 예술을 보고 웃음을 터트리거나 눈물을 흘릴 때조차 그것의 근원을 헤아리고 있다. 이게 상당히 미친 짓임이 틀림없지만 사상가가 되고자 하는 자라면 누구나 반드시 거쳐야 할 길 중 하나다. 자아성찰은 확실히 해야 사상을 논할 수가 있다. 내가 만약 사상가의 교육과정을 담당한다면 이 과정을 꼭 넣을 것이다.

 

 

 

유전자 코드

 

인간은 이전사상을 본능으로 착각하는 경향이 심하다. 만변가치인 사상조차 자아형성 이전에 수동적으로 주입되면 불변가치인 본능으로 착각하여 절대적으로 지키려는 경향이 나타나게 된다. 유전자는 본능이자 이전사상이자 이후사상이다. 본능으로 유전자를 남기고 싶어하고 이전사상으로 대를 이어가라 들었고 이후사상으로 아이를 낳아야 한다는 걸 안다. 성을 죄악시하는 풍습이 없었다면 자연스럽게 본능과 사상에 의해 결혼과 출산을 했을 것이다. 이걸 산업으로 연결해보자.  만약 전자제품에 유전자 코드를 삽입한다면 제품을 소유한 사람은 유전자를 지켜야 한다는 본능과 사상에 무의식적으로 영향을 받아 제품의 대를 이어가기 위해 같은 회사의 제품을 구매하려 할 수 있다. 예컨대 모니터를 사용하다 새로운 모니터를 구매할 때, 유전자 코드가 같은 회사의 제품을 구매하려는 행태가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이다. 발상단계부터 세 관점으로 분류해보자.

 

최초 가전이 무엇인지 생각해보았다. 가전이란 집안의 전자제품을 말한다. 가사에 필요한 역할을 수행하는 전자제품을 말한다. 각각의 전자제품을 생각해보자. 텔레비전, 청소기, 세탁기, 전기밥솥, 전기난로, 전기렌지, 에어컨, 드라이기 등등. 여기서 하나의 공통점을 발견했다. 모든 가전제품이 인간을 위한 고유한 역할이 부여되어 있다. 각각의 역할이 겹치지가 않는다. 그리고 그 역할은 기술이 발달해도 본질은 변하지 않았다. 고유한 형질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종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각각의 차이로 사회학적으로 인종을 구분 짓는 일이 있더라도 실제로 인종은 하나다. 그것과 같다는 얘기다. 디자인이나 성능이 좀 달라져도 드라이기는 뜨겁거나 차가운 바람을 내뿜을 것이고 세탁기는 물을 헹굴 것이며 청소기는 먼지를 빨아드릴 것이다. 그것을 하나의 종으로 설정한다.

 

 

생산자

 

지금 전자제품은 제품이나 대상이나 시기마다 고유번호가 다르다. 그걸 역할로 일원화한다. 역할이 같은 제품은 가격과 관계 없이 같은 유전자 코드를 사용하도록 한다. 생물 분류 단계와 비슷한 분류체계처럼 사용한다. 이렇게 하여 생산체계에 줄기가 잡힌다. 기획에 따라 생산이 휘둘리지 않게 된다. 유행에 맞춰 디자인이나 기술추가 등이 이루어져도 역할로 구분 지은 제품의 고유한 유전자 코드는 흔들리지 않는다.

 

연상기법을 활용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LG ThinQ라는 브랜드가 있다고 안다. 내가 LG 스마트폰을 써서 그건 알고 있다. 그런데 그거 보고 생각하는 게 있었다. 너무 직설적이다. 무엇을 뜻하는지는 명확하지만 너무 직설적이기에 심심하다. 가령 만약 로댕이란 브랜드로 시작 했다고 가정해보자. 로댕이 무엇인가? 생각하는 동상을 만든 사람이다. 그래서 로댕의 생각하는 동상으로 유명하다. 만약 로댕이란 브랜드였다면 연상을 거쳐 고객에게 재미를 주었을 것이다. 그 재미가 브랜드에 대한 호감으로 이어졌을 것이다. 이것과 같이 연상기업을 사용해 전자제품의 역할과 비슷한 이미지를 가진 동물을 넣어보자. 세탁기 같은 경우 라쿤이 재미있을 것이다. 라쿤이 물속에서 솜사탕을 씻다가 사라지는 걸 보고 어리둥절해 하는 걸 찍은 장면이 사람들에게 웃음을 준 적이 있다. 청소기는 너구리가 좋을 것 같다. 청소 동물이기 때문이다. 굳이 연상기법을 쓰지 않아도 된다. 이건 그냥 방법 중 하나다.

 

 

소비자

 

스마트폰은 그야말로 인간과 가장 오랫동안 가까이 있는 전자제품이다. 인간과 거의 24시간 붙어 있다. 그럼에도 이 스마트폰은 단순한 물건처럼 여겨지고 있다. 몇 차례 스마트폰을 바꿔왔지만 바꾼 다음에 쓰던 폰은 아예 신경 쓰지 않고 있다. 버려졌다. 수 년간 하루 종일 같이 있던 것과의 추억이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과거의 폰과 현재의 폰이 연결되지도 않는다. 같은 기업의 제품을 구매해도 그냥 모델만 비슷할 뿐이지 연결점은 거의 없다. 만약 유전자 코드가 있었다면 어땠을까? 마치 동물을 분양 받듯이 말이다. A제품의 유전적 형질이 이어진 B제품을 구매하게 되면 A제품에 남아있는 고유한 특징이 남아있어 마치 대를 이어 A제품의 자손을 받았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다. 개인적으로 노크온 기능이 마음에 들었다. 그 노크온 기능이 대를 이어가며 남아있게 되면 같은 유전자를 공유하는 자손을 받았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외형도 비슷하게 할 수 있다. 어떤 고유한 색상이나 포인트 칼라를 넣어 비슷한 외모를 이어간다는 느낌으로 가면 된다.

 

사용자가 전자제품을 관리하는 것 또한 유전자로 할 수 있다. 각각의 전자제품에 암호화된 고유한 정보를 담기게 한다. 드라이기를 예로 들자면 작동시기나 고장시기나 수리시기 등등이 기록에 남는다. 그것이 드라이기의 일생이며 고유한 유전자 코드가 된다. 기업에서 입력한 기초 정보는 본능이고 사용자의 기록은 사상이라 생각하면 된다. 그 두 개가 합쳐서 전자제품의 고유성이 나타난다. 그런 고유한 전자제품을 앱을 통해 정리하여 보관할 수 있다. 전자제품은 새상품을 구매하더라도 같은 유전자를 공유하는 걸 구매했을 때에는 유전자 코드의 연결로 앱 내에서도 연결성이 보이도록 한다. 또한 사용 기록도 이어져 어떤 일부의 유전형질도 이어지게 한다. 용불용설이 최초 틀렸다고 했으나 후성유전학에 의하면 완전히 틀린 것은 아니라고 한다. 어느 정도는 획득한 형질이 유전된다고 한다. 유전자 자체에 영향을 끼치지는 않으나 어떤 형질 정도는 이어진다는 말이다. 이와 같이 전자제품 또한 고유한 역할은 달라지지 않으나 사용자 기록은 특정 형질 같이 이어질 수 있을 것이다. 사용기록과 함께 세부설정도 이어지게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다가 특정 역할 자체가 바뀌는 일이 발생하면 그게 바로 종의 진화와 같이 전자제품의 진화가 될 것이다. MP3와 전화기와 컴퓨터가 합쳐져 스마트폰이 된 것 같이 말이다.

 

 

공급자

 

지금까지 이용자 관리를 할 때 사람을 기준으로 관리를 해왔다. AS를 받을 때 사람을 기준으로 서비스를 해왔다는 것이다. 그걸 바꾼다. 철저하게 전자제품을 기준으로 관리를 한다. 가령 어떤 제품의 AS를 하러 오면 그 제품을 중심으로 관리를 하게 된다. A사람의 B제품으로 접근하는 게 아니라 B제품의 A사람으로 접근한다. 전자제품을 단순한 부속품이 아닌 고유한 존재로 인지시킨다. 병원에 보호자와 환자가 가면 보호자의 이름이 아닌 환자 이름을 부르는 것과 같이 AS센터에 가면 소유자의 이름이 아니라 제품의 이름과 고유 유전자 코드명을 부른다. 길면 끝 네 자리 정도 부르면 된다. 내부관리 프로그램도 사람으로 관리되는 게 아니라 제품으로 관리가 된다. 사람이름이 쭉 뜨는 게 아니라 제품이름 옆에 소유자가 뜬다. 물론 필터에 따라 다르게 볼 수는 있을 것이다.

 

이러한 전자제품 중심의 관리는 이후 로봇시대를 대비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로봇이 일정이상의 자아를 얻게 되면 단순 전자제품이 아니게 될 것이다. 애완동물을 반려동물과 같이 대하며 깊은 애정을 품는 것과 같이 로봇에도 그런 애정을 품을 수도 있다. 그런 로봇에 유전자 코드가 존재하고 이어질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된다면 분명 보다 더 깊은 애정을 가지고 기업의 제품을 대대로 구매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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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나의 길을 걸을 것입니다. 정상적인 사상가는 분명 국격을 높이는 존재일 것입니다. 그렇게 되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지금 민주주의는 토주주의(땅의 주인이 국가의 주인)에 불과하죠. 지역대표가 입법과 행정을 둘 다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토지기준 상위 10%가 대부분의 부동산을 소유하고 있다고 하죠. 부동산 관련 공약을 하게 되는 지역대표는 결국 부동산 소유자인 10%의 국민을 대표하고 있다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이게 어떻게 정상적인 민주주의인가요? 반면 분야는 대부분 속하게 되죠. 한푼 없어도 특정 분야에는 속하게 되기 마련입니다. 설령 창업이나 취업을 못해도 그런 교육과정을 거친 것만으로도 분야에 속하고 있다고 말할 수가 있어요. 그런 분야의 대표는 분야와 관련된 공약을 하게 되어 실질적으로 국민의 대표가 됩니다. 각각 국민의 이상이나 정의를 중시하는 입법은 분야대표가 맡고 국가의 질서를 유지하는 사법은 객관적 판단이 가능한 능력자가 맡고 국가를 운영하는 행정은 지역대표와 행정의 능력자가 맡는 것이 보다 나은 민주주의가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입법을 지역대표와 나누는 것도 타협은 가능합니다. 어떻게든 분야의 대표가 입법권을 쥐는 것이 민주주의적일 거라 생각합니다. 최근 소방관 처우가 좋지 못해 소방관들이 시위에 나섰다고 하지요. 택배는 일부 아직까지도 투쟁 중에 있는 사람들도 있고요. 정상적인 민주주의라면 이들의 대표 또한 국회에 나와 공적 논의를 통해 긍정적인 방향으로 문제를 해결해야 함이 마땅하다 봅니다.

 

출산율을 어떻게 해야 합니다. 명백하게 원인이 있고 해결할 수도 있는데 낡은 도덕관념으로 죽을 수는 없습니다. 기아도 아니고 외침도 아니고 낡은 도덕관념 때문에 죽어가고 있다는 게 참. . 가부장제에서 벗어나야 성을 죄악시하는 풍습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장유유서에 의해 연상에게 무릎 꿇고 머리 박고 나서 돈을 받는 풍습인 세배는 하지 않는 것이 좋다 정도로 머문다면 정조관념에 의해 성을 죄악시하는 풍습은 우리가 살아남기 위해서 절대로 하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제는 성을 죄악시하지 말아주세요.

 

비동의간음죄 운운하던데 정신 나갔습니까? 여성을 바보로 압니까? 여성은 의지박약입니까? 얼마나 여성을 열등하게 보면 이 발상이 나옵니까? 적극 반대하지 않았으나 내심 싫었다는 이유로 강간으로 처리하면 어쩌자는 겁니까? 여성이 적극 반대하지 않았으면 그 행동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하는 겁니다. 도대체 자유와 책임에 대해 이해가 조금도 없습니까? 이따위로 하면 성관계는 더 줄어들 것이고 국가는 더 빠르게 죽을 겁니다. 정신 나간 짓 좀 하지 마십시오.

 

지금 사민주의 국가인 독일이 백신 의무화를 추진하고 있다고 하지요. 역시 규율 중시인 사회주의 국가다운 방향입니다. 필요가 도덕이 되면 의무가 되어 불필요하게 되었어도 지키려 들게 됩니다. 지나치게 백신을 강조하면 이후 백신이 불필요하게 될 시점에도 그걸 지키려 들고 알레르기 등으로 맞지 않는 사람을 비난하게 될 것입니다. 의무는 위험한 결정이에요.

 

저출산 책임이 여성인 것으로 여기게 된다고 출산을 출생이라 부르고 있다고 하죠. 여성 책임이 아닙니다. 이전사상 책임이죠. 단지 여성주의가 가부장제 세계관의 여성상을 세뇌하고 강요하는 바람에 더욱 더 성을 죄악시하여 여성주의의 책임이기도 합니다. 여성주의는 여성이 아닙니다. 남성주의가 남성이 아니듯 말이죠. 여성 책임이 아니니까 굳이 바꿀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나중에 인공자궁에 태어나게 되면 그때는 출생이 어울릴지도 모르겠지만요.

 

시험만능주의에 반대하는 입장입니다.

 

LG스마트폰을 썼었는데 이제 삼성이나 애플 중 하나 고르겠죠 음. 다음은 바이오입니다. 특별히 친숙한 회사가 없어서 검색을 하던 해서 적당히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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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담] 롯데와 제과 (0) 2022/01/23 AM 08:02

롯데와 제과

 

 

 

오늘날 인권운동이란 인간상 강요를 말한다. 본인이 생각하는 주관적인 인간상(전통적인 도덕관념 등)을 각 대상(인종, 노동, 아동, 여성 등)에게 세뇌하고, 사회에 그 인간상에 맞춰 배려하도록 강요하고 있다. 인종은 언제까지나 제국주의 시기의 인종이어야 하고, 노동자는 언제까지나 산업혁명 시기의 노동자여야 하고, 아동은 언제까지나 유교적 가치관의 아동이어야 하고, 여성은 언제까지나 가부장제 세계관의 여성이어야 한다. 그들은 이 인간상 내에서만 인간의 권리를 주장하고 있다. 이 인간상에서 벗어나는 건 부도덕하다 여기고 있다. 보호대상이 부도덕하지 않다 말하는 행위조차 부도덕하다 말한다. 왜냐하면 보호대상의 자유의지보다 주관적인 인간상이 더 중요하다 여기기 때문이다. 독선. 이것은 본인의 도덕성이 어디에 뿌리를 두고 있는지에 대해 제대로 자아성찰조차 하지 않은 인문학적 고찰이 부족한 이들이 할법한 실수다. 사상가의 길을 걷고자 하는 자로서 이런 어리석은 작태를 더 이상 용납하지 않겠다. 이제 그들이 차별 받던 시기에 머물러 있게 하지 않겠다. 그들에게 새로운 길을 안내하겠다. 그들뿐만 아니라 모든 인간을 위한 길을 안내하겠다.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도록 하겠다. 인간의 행복을 위하도록 하겠다. 인간을 행복하게 만드는 방법 중 하나가 바로 예술이다. 그 예술에 대해 알아보며 시작하겠다.

 

 

예술이란 무엇인가? 아름다움을 표현하려는 인간의 활동을 뜻한다. 그렇다면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 인간이 보거나 느끼기에 즐겁거나 상쾌하거나 기쁨을 주는 상태에 있는 것을 뜻한다. 정리하면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예술은 인간을 즐겁거나 상쾌하거나 기쁘게 만들기 위해 존재한다. 그것이 예술의 목적이다. 그런데 예술에는 괴롭거나 불쾌하거나 슬픔을 주는 상태에 있는 것도 있다. 비극을 예술이라 말하지 않은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어떤 경우에는 더러운 것조차 예술이라 말한다. 이렇듯 아름답지 못한 것 또한 예술이라 부른다. 왜 그게 예술이 되는 걸까? 예술작품의 관점에서 벗어나 인간의 관점인 인본주의적으로 바라보자. 인간의 본위로 바라보면 비극 또한 인간의 세계를 넓히는 일을 하고 있다. 세계의 확장이라는 점으로 접근하자. 인간은 희극과 비극, 아름다움과 더러움, 기쁨과 슬픔 등 다양한 상태에 있는 것을 간접 체험하면서 인간이 알고 있는 세계가 넓어진다. 예술에서 접한 다양한 것들에 영향을 받아 단순한 단어나 식상하고 지루한 일상의 풍경조차 신선하고 재미있는 것이 된다. 밤하늘을 바라보며 어떤 동화를 떠올리고 저녁놀을 바라보며 어떤 영화를 떠올린다. 예술은 단색의 평면적인 세계를 살아오던 사람에게 다양한 색을 알려주어 복색의 입체적인 세계를 살 수 있도록 한다. 예술은 인간의 세계를 다채롭게 만든다. 다채로움 속에서 즐겁거나 상쾌하거나 기쁨을 느낀다. 세계의 확장 그 자체가 아름다운 것이다. 그러니까 아름답지 못한 상태에 있는 것 또한 예술로 분류되게 된다. 하나의 인간상을 강요 받는 시대에 인간의 세계를 넓히는 예술은 인간을 보다 행복하게 하고 있다.

 

세계의 확장은 두 가지 방식으로 분류할 수 있다. 하나는 언론이고 둘이 예술이다. 둘 다 인간에게 다양한 세계를 보여줌으로써 인간의 세계를 넓히고 다른 인간과 연결하는 역할을 한다. 차이는 이성과 감성이다. 정보를 전달해 세계를 넓힌다는 점은 같지만 이성이냐 감성이냐에 따라 언론과 예술이 달라진다. 통상 언론은 객관적이고 이성적으로 인간의 세계를 넓히고 예술은 주관적이고 감성적으로 인간의 세계를 넓힌다. 이런 역할의 차이가 발생한 이유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현실과 가상의 차이고 둘째는 독자의 수용태도 차이다. 언론은 현실이기에 객관적이고 이성적이어야 한다. 현실에서 발생하는 사건을 주관적이고 감성적으로 접근하게 되면 관점이 한정되어 인간 사이에 과도한 괴리가 발생해 불필요한 다툼을 일으킬 수 있다. 대표적으로 법이 그러하다. 법에 관련된 것을 감성적으로 접근하면 그 감성에 호소된 대중에 의해 법치가 파괴되는 일이 발생할 수도 있다. 특히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중우정치를 유발할 수도 있는 위험한 일이다. 언론이 사건을 감성적으로 바라보면 이성을 놓치고 이성을 놓치면 전체를 놓치며 전체를 놓치면 질서를 놓친다. 정치는 정의를 추구해야 하고 사법은 질서를 추구해야 한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대중이 올바른 정의를 추구해야 입법이 올바른 정의를 추구하고, 올바른 정의가 있어야 사법이 올바른 질서를 유지할 수 있다. 보통 사법이 정의를 추구한다 생각할 수 있는데 정의보단 질서다. 국민정서법과 사법의 판단이 다른 까닭이 여기에 있다. 아무리 보편적인 도덕관념을 바탕으로 법이 제정된다 하더라도, 사법 자체는 정의보다는 질서를 우선시하기 때문이다. 정의 위주로 판단하면 질서가 흔들려 국가가 무너진다. 양형에는 형평성과 사회적 비용도 고려된다. 살인과 강간을 동일시 할 수 없고 교도소의 수용 인구수와 재원도 고려하지 않을 수가 없다. 개개인의 정의보단 사회의 질서가 우선시되고 있다. 가부장제 세계관의 여성상을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는 감수성을 말하는 성인지감수성이 법치를 파괴하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사법을 객관적 질서가 아닌 주관적 정의로 바꾸려 했기 때문이다. 국민 각각은 다양한 정의를 추구하더라도 사법은 질서를 추구한다는 것을 알아야 국민과 사법의 괴리가 줄어들 수 있다. 모든 인간이 자유롭게 의사표현을 할 수 있어야 한다는 자유주의의 이념에 따라 언론도 주관적 의견을 낼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객관과 주관을 분리할 수 있는 사람만 그래야 한다고 본다. 객관과 주관을 분리할 수 있으면 객관적 서술과 주관적 의견을 둘 다 쓰면 되기 때문이다. 그게 안되면 일반적으로 그냥 객관적 서술만 해야 한다. 물론 우수한 언론인이라면 누구나 객관과 주관의 분리가 가능할 거라 생각한다. 언론이 어떤 사건에 있어 여론에 호소하기 위해 감성적으로만 접근하는 일이 있다. 그건 바람직하지 못하다. 언론은 언론의 위치와 가치를 좀 더 자각하길 바란다.

 

예술은 가상이기에 주관적이고 감성적이어야 한다. 가상에서 발생하는 사건을 객관적이고 이성적으로 접근하게 되면 감정이입이 어려워 재미가 없어지기 때문에 관심을 사기가 어렵다. 현실의 정보를 전달하는 언론과 달리 가상의 정보를 전달하는 예술은 재미를 추구해야 한다. 그래야 사람들이 보고 그래야 의미를 갖게 된다. 논픽션도 예외는 아니다. 현실에 있던 사건이라 할지라도 결국 그건 감독의 눈으로 바라본 재창작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세계를 넓히고 다른 인간과 연결하는데 감성이 작용하게 되면 그 인간은 풍부한 감성을 얻게 된다. 빈자는 부자의 세계를 모르고 부자는 빈자의 세계를 모른다. 그걸 언론이 알리면 이성적으로 바라보기에 이성적인 이해는 되도 감성적인 공감은 하기 어렵지만, 그걸 예술이 알리면 감성적으로 바라보기에 이해가 어려워도 공감은 할 수 있게 된다. 그런 감성적인 자극이 보는 이로 하여금 진심을 갖게 만든다. 진심으로 어떤 변화가 바라게 되게 된다. 변화를 바라는 마음에 감정이 실리게 된다. 같은 주제, 같은 주장을 하더라도 여기서 언론과 예술에 차이가 발생하게 된다. 예술이 사건을 이성적으로 바라보면 재미를 놓치고, 재미를 놓치면 관심을 놓치고, 관심을 놓치면 의미를 놓친다. 대중을 위한 예술을 위해 최소한의 독자는 필요하다. 모든 예술작품이 모든 사람에게 인기를 끌 수는 없다. 주관적이고 감성적인 예술이 그럴 수가 없다. 대중을 위한 예술이라는 것은 수많은 각각의 여러 사람이 각각의 예술을 즐길 수 있으면 된다는 것이다. 다양한 예술이 있어야 인간의 세계도 넓어지게 된다. 어떤 예술은 예술성을 명목으로 독자를 아예 외면하는 일이 있다. 예술은 예술의 위치와 가치를 좀 더 자각하길 바란다. 독자의 수용태도에도 차이가 발생한다. 언론이 주관적이고 감성적으로 접근해도 독자가 언론 역할 자체가 객관적이고 이성적일 거라 받아드리게 된다. 예술이 객관적이고 이성적으로 접근해도 독자가 예술 역할 자체가 주관적이고 감성적일 거라 받아드리게 된다. 언론은 감성적으로 접근하는 걸 예술에 맡기고 예술은 이성적으로 접근하는 걸 언론에 맡기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예술은 대중을 위해 존재해야 한다. 모든 예술이 그러해야 하고 그러했었다. 지금 현대미술이나 클래식 같은 순수예술을 가리켜 대중적이라 말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건 시대가 달라졌기 때문이다. 지금 현대미술과 클래식은 과거의 대중예술이었다. 과거 예술은 종류와 대상이 한정적이었다. 종류는 그림, 소설, 음악, 연극 등과 대상은 부유한 자에 한정되어 있었다. 과거 예술을 즐길 수 있는 사람 자체가 한정적이었기 때문에 즐기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현대미술과 같은 그림과 클래식과 같은 음악이 대중예술이었던 것이다. 지금의 현대미술과 클래식과 같은 순수예술은 과거의 대중예술이었다. 그렇다면 현재의 대중예술이란 무엇인가? 대중이 즐기는 예술인 게임과 영화와 만화와 소설 등등이다. 간단히 말해 상업예술을 말한다. 순수와 상업, 어느 것이 더 예술적인가? 미술로 바라보자. 지금의 현대미술은 대부분 예술이 아닌 단순한 자산으로 전락했다. 코인에 그림을 입히면 그게 현대미술이다. 현대미술과 코인에 투자하는 이유가 비슷한 시점에서 둘은 차이가 없어졌다. 대부분 현재 현대미술은 금전적 가치를 보고 예술적 가치를 평가하고 상업미술은 예술적 가치를 보고 금전적 가치를 평가하고 있다. 다수의 사람이 현대미술은 비싸니까 예술적일 거라 생각하고 상업미술은 예술적이니까 비쌀 거라 생각한다. 이러니 상업미술이 더 예술적이라 하게 된다. 현대미술을 예술로 즐기는 사람도 있다는 걸 안다. 그러나 그들조차 그게 다수가 아님을 알고 있을 것이다. 음악으로 바라보자. 클래식은 투자자산이 되기가 어렵기 때문에 아직도 예술적 가치를 보고 금전적 가치를 평가 받고 있다. 그래서 순수와 상업 둘 다 예술적이다. 그러나 순수는 낡았기 때문에 하향세에 있다. 클래식이 살아남고자 한다면 상업예술과의 연계를 꺼리지 말아야 할 것이다. 생존의 관점으로 바라보면 현대미술이 클래식보다는 나은 상황이지만 예술의 관점으로 바라보면 클래식이 현대미술보다 나은 상황이다. 정리하면 순수예술은 과거의 대중예술이고 상업예술은 현재의 대중예술이다.

 

이런 관점에서 상업예술인 게임과 영화와 만화를 검열하는 것은 순수예술을 검열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상업예술 중 하나인 게임에서 등장하는 인간의 나체에 검열을 하는 것은 순수예술 중 하나인 동상으로 표현한 인간의 나체에 검열을 하는 것과 같다. 주관적인 도덕관념으로 야한 걸 가리는 검열은 나체상에 페인트칠을 하는 것과 같단 말이다. 가부장제 세계관의 여성상에 세뇌되어 여성의 성을 다룬 예술을 천박하게 바라보는 이들이 상업예술의 검열을 주도하고 있다는 사실에 깊은 슬픔을 느낀다. 가부장제는 여성을 도구로 여기고 여성에게 성적 자기결정권을 주지 않았다. 여성의 성을 결정하는 권리는 보호자와 남편과 국가가 가지고 있었다. 여성에게 보호자가 순결을 지킬 것을 강요하고 여성에게 남편이 정절을 지킬 것을 강요하고 여성에게 도덕이 정조를 지킬 것을 강요했다. 그 가부장제 세계관의 여성상에 세뇌된 한국 여성주의는 똑같이 여성 성 상품화가 잘못되었다고 말하며 한국 여성들에게서 성적 자기결정권을 빼앗고 있다. 정말 어처구니 없다. 아름다운 여성의 성을 다룬 예술을 낡은 도덕관념으로 폄하하며 파괴하려는 수작을 당장이라도 그만둬야 한다. 남성이 여성의 성을 다룬 예술을 보고 성욕을 느끼는 것은 당연하다. 여성이 남성의 성을 다룬 예술을 보고 성욕을 느끼는 것이 당연하듯 말이다. 예술은 인간의 세계를 넓히는 것으로 세상을 아름답게 느끼게 만드는 것. 새로운 세계에서 욕구를 해소하여 행복감을 느끼게 만드는 것. 인간의 성은 예술이다. 거기에 검열을 하는 것은 예술에 대한 모독이다.

 

나는 인간의 아름다움을 사랑한다. 어떤 이는 가벼운 성형조차 비판하고 있다. 그런 이는 인간의 아름다움을 즐길 자격이 없다. 과도한 성형은 건강에 해가 될뿐더러 본연의 미조차 해치지만, 적절한 성형은 인간을 아름답게 만들어 인간 스스로 자존감을 얻기가 좋다. 나는 인본주의자로서 자잘한 도덕관념보다 인간의 행복을 우선시한다. 나는 인간의 성의 아름다움을 사랑한다. 어떤 이는 성 상품화를 비판을 하고 있다. 그런 이는 인간의 성의 아름다움을 즐길 자격이 없다. 현실 인간의 성 상품화가 잘못되는 경우는 노동 상품화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자유의지를 무시했을 때에 발생하고, 가상에서는 애초에 성이나 노동 상품화가 잘못될 일이 없다. 무엇이 인간을 도구화하고 있는지 인지해야 한다. 나는 자유주의자로서 자잘한 도덕관념보다 인간의 자유의지를 우선시한다. 솔직히 머리가 아프다.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 한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나? 어쩌자고 낡은 성 관념을 바꾸지 않고 있는 건가. 인간을 성적인 대상으로 본다 하더라도 아무 문제가 없다. 오히려 안보는 게 이상하다. 도대체 인간이 인간을 성적 대상으로 안보면 어떻게 하나. 강요할 수 없는 이상 인간이 인간에게 성욕을 느끼는 것이 당연해야 서로 자연스럽게 성관계를 맺고 출산을 하는 것이다. 이제 한국이 자유국가라는 걸 깨닫고 변화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 그러지 않으면 도태될 것이다.

 

모든 인간은 각자 예술가를 가지고 있다. 본인이 즐기고 있는 예술이 곧 본인의 예술가다. 내가 즐기는 게임과 영화와 만화와 소설은 나의 예술이고 그걸 만든 사람이 나의 예술가다. 내가 즐기는 예술에 검열이 들어가는 것은 고가의 예술에 페인트칠 당한 것과 같을 정도로, 아니 그보다 훨씬 화가 나는 일이다. 나의 예술과 나의 예술가를 모독하지 않길 바란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도 화를 내야 하는 일이다. 본인의 예술가를 모독하는 일에 참지 않길 바란다. 특히 예술가들이 더욱 분노해야 한다. 같은 예술인데 누구는 예술이라고 검열되지 않고 누구는 예술 대우도 못 받고 검열되어야 하는가? 대량생산되면서 예술의 영역은 넓어지게 되었다. 스마트폰의 디자인이 예술이 아니라 할 수 있는가? 자동차의 디자인이 예술이 아니라 할 수 있는가? 예술가의 작품을 대량생산했을 뿐이지 거기에 예술적 가치가 없다는 것은 아니다. 양산품 또한 예술이다. 주변에 있는 모든 상품에 예술적 가치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 과자 또한 마찬가지다. 양산과자도 예술이 될 수 있다.

 

 

 

처방전

 

과자는 무엇인가? 단맛 위주로 만드는 간식을 뜻한다. 간식은 무엇인가? 끼니 외에 먹는 음식을 뜻한다. 끼니는 무엇인가? 아침, 점심, 저녁 같이 일정한 시간에 먹는 밥을 뜻한다. 정리하면 일정 시간 외에 단맛 위주의 간식을 과자라 부른다. 이 과자는 앞으로 어떤 길을 가야 하는가? 어떤 길이 바람직할 것인가? 우선 과자의 역할에 대해 알아보자. 하나, 심심풀이. 둘, 배 채우기. 셋, 맛 즐기기. 심심할 때 먹거나 끼니 전에 간단히 배 채울 때 먹거나 오로지 맛을 즐기기 위해 먹는다. 음식에 있어 과자는 어디까지나 조연이다. 하지만 조연이기 때문에 시간과 건강으로부터 제약이 적다. 시간과 건강은 주연인 끼니가 책임지고 있다. 조연인 과자는 미식에 집중할 수 있다. 건강보다 맛에 초점을 맞출 수 있다. 조연인 과자는 주연인 끼니를 돋보이게 할 수 있다. 전채처럼 끼니 전에 과자를 먹는 것으로 끼니를 보다 맛있게 만들 수 있다. 조연인 과자는 음식의 양을 조절하기가 쉽다. 포만감이 높은 과자를 먹으면 폭식을 멈출 수 있고 소화가 빠른 과자를 먹으면 소식하지 않을 수 있다. 체중 조절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간단히 정리하면 미식과 미용이다. 둘 다 아름다움을 다룬다. 즉 예술이다.

 

어떻게 해야 할까? 여기서 의학을 가져왔다. 보통 의학은 인간의 건강을 목적으로 한다. 그래서 고정관념에 빠져 있었다. 의학이 굳이 건강을 목적으로 하지 않아도 된다. 의학의 목적이 미식과 미용이라 할지라도 달성할 수 있다. 왜냐하면 수단이 인간의 몸을 아는 것이기 때문이다. 의학이 인간의 건강을 위하는 것과 같이 인간의 미식과 미용을 위할 수 있다. 인간이 어떤 맛에 가장 만족감을 느낄 수 있는가? 인간이 끼니 전에 어떤 과자를 먹어야 끼니에 만족감을 느낄 수 있는가? 인간이 체중을 조절하기 위해 어떤 과자를 먹어야 하는가? 이 모두 의학적으로 분석해서 결과를 내놓을 수 있다. 보편적 인간의 특징을 진단하고 그 진단에 맞춰 처방을 하면 된다. 어떤 과자 브랜드는 과자와 의학의 건강을 더해 새로운 개념을 만들었다면 나는 과자와 예술과 의학을 더해 새로운 개념을 만들었다. 의학의 진단과 처방을 통해 예술의 미식과 미용을 도입한 과자로 인간을 보다 행복하게 만든다.

 

 

미식. 음식의 맛이 좋은 걸 뜻한다. 아름다움으로 접근하면 즐겁거나 상쾌하거나 기쁨을 주는 상태에 있는 음식을 뜻한다. 미식 자체가 예술이다. 예술이 세계의 확장으로 인간의 세계 자체를 아름답게 만들어주는 것이라면, 다양한 맛을 통해 세계를 확장시키는 것으로 인간 세계 자체를 아름답게 만들어줄 수 있다. 특정 맛만이 미식이 아니라 다양한 맛이 고유한 색채를 띠게 되면 그게 미식이 된다. 과자가 다양한 맛에 도전하는 것 자체가 미식이며 예술이다. 그 맛을 의학적으로 알아낼 수 있다. 최근 노벨상을 수상한 연구가 바로 매운 맛의 감각이 무엇인가라고 한다. 매운 맛은 통각이 아니라 온도 감각이었다고 한다. 매운 맛이 아픈 게 아니라 뜨거운 것이었다고 한다. 그와 같이 인간이 느끼는 맛의 감각을 의학으로 연구하고 그 맛을 과자에 적용할 수 있다. 어떤 맛이 가장 인간에게 만족을 줄 수 있을 것인가? 보편적인 인간을 진단하고 처방하는 것으로 과자를 미식으로 만든다. 이 처방을 맹신할 수는 없어도 보편적인 가이드라인이 있다면 다수의 사람이 과자의 맛에 만족할 수 있을 것이다.

 

전채. 식사 전에 식욕을 돋우기 위해 나오는 요리다. 그런데 이런 전채요리는 번거롭고 비싸다. 대중적이지 못하다. 예술은 대중을 위해 존재해야 한다. 미식도 대중을 위해 존재해야 한다. 모든 인간의 끼니가 아름다워야 한다. 그렇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양산되는 과자가 전채의 역할을 맡으면 된다. 어떤 과자를 먹으면 식사가 더 맛있다. 그런 개념이 도입되면 된다. 이러면 대중이 전채를 즐길 수 있게 된다. 대중을 위한 미식이 가능해진다. 이게 바로 대중을 위한 예술이다. 가령 식욕을 돋우는 식욕증진 성분을 과자에 넣으면 어떻게 되겠는가? 과자를 먹으면서도 맛있게 식사를 할 수 있다. 보통 아이들이 과자 먹고 끼니를 거르는 일이 많다. 그걸 방지할 수 있다. 밥 먹기 전에 먹기 좋은 과자가 나올 수 있다. 단순히 전채만이 아니라 식사 후에 먹어야 더 맛있는 과자가 나올 수도 있을 것이다. 식전과 식후로 나눌 수 있다는 것이다. 거기에 끼니의 성질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끼니가 달거나 맵거나 쓰거나 짜거나 한다면 그것과 조화를 이룰 수 있는 과자가 나올 수 있다. 개인적으로 매운 것을 먹고 속이 뜨거울 때에 퍽퍽한 과자를 먹으면 다소 속이 편해졌다. 그런 것에 전문적인 과자가 나오길 바란다. 매운 거 먹고 먹게 좀 사두려고 한다. 그런 것과 같이 식사에 맞춰 진단을 하고 처방하는 것으로 식사를 보다 더 맛있게 할 수 있다.

 

미용. 용모를 아름답게 매만지는 일을 뜻한다. 최근에는 몸도 포함되었다. 이 몸을 관리하는데 과자가 도움이 될 수 있다. 주관으로 인권을 결정하는 사상이 유행하자 자기평가를 주관에 맡겨버려 노력할 이유를 잃고 자기관리에 실패하여 과체중이 되거나 저체중이 되는 일이 늘어나고 있다. 객관적 기준이 없으니까 뚱뚱하거나 말라도 그냥 그대로 발전 없이 살게 되는 것이다. 이런 건 외모뿐만이 아니라 건강에도 도움이 안 된다. 정말 인간의 발전을 막는 최악의 사상이다. 그대로 만족하고 살라는 것은 인간의 능력 자체가 낮아지는 것뿐이다. 멍청해도 멍청한 대로 살라고 말하는 것과 다르지가 않다. 인간은 본인과 타인을 위해 똑똑해져야 하는 것과 같이 아름답고 건강해져야 한다. 우리 스스로를 사랑하며 변하지 말자고? 그러면 무엇 하러 교육을 받나? 그렇게 생각한다면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사랑하며 자연으로 돌아가 동물처럼 살면 된다. 인간이라면 인간답게 살기 위해 발전해야 한다. 인간이라면 인간답게 살기 위해 정상체중을 유지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과자가 그걸 도울 수 있다. 인간을 보다 아름답게 만들 수 있다. 과자가 높은 포만감을 줄 수 있다면 식사량이 줄어들 수 있을 것이다. 과자가 소화가 빠르고 식욕을 높인다면 식사량이 늘어날 수 있을 것이다. 그걸로 자연스럽게 어느 정도는 체중조절도 가능할 것이다. 의학으로 체중에 맞춰 진단을 하고 처방을 하는 것으로 보다 전문적으로 다수의 사람을 정상체중으로 유도하는 것이 가능할 것이다.

 

 

건강용품과의 차이는 맛이다. 과자는 맛이 있기 때문에 먹고 평소에 자주 먹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미식과 미용이란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 그냥 홍보 자체를 이런 식으로 하면 된다. 식전이나 식후에 먹기 좋은 과자, 매운 음식이나 짠 음식에 어울리는 과자, 과체중이나 저체중에 효과적인 과자 등등이 같이 말이다. 의학적 처방을 통해 단순한 심심풀이였던 과자를 예술로 끌어올려 인간을 행복하게 만들 수 있다.

 

다양성을 명목으로 특정한 인간상을 강요하는 것으로 다양성을 해치고 인간을 위한다는 말로 인간의 발전을 막아 인간을 불행케 하는 이 시대. 과자는 다양한 맛을 통해 다양한 세계로 안내하여 다양성을 만들고 인간을 위해 자연스럽게 미식과 미용을 할 수 있게 하여 인간을 행복하게 만들 수 있다. 과자가 세상을 보다 아름답게 만들길 바라며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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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담이 아니에요. 한국 인간관계 붕괴는 유교와 여성주의가 만든 결과물입니다. 유교의 장유유서가 가족관계와 사회관계를 수직적으로 만들었죠. 가부장제와 중앙집권체제를 견고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다 자유롭게 되자 관계가 수평적으로 변하면서 붕괴하게 되었습니다. 높은 자살률은 인간관계 붕괴가 만든 현상입니다. 유교의 남녀유별이나 남녀칠세부동석이 이성관계를 멀리하게 만들었죠. 그럼에도 연상의 강요로 관계를 유지했습니다. 이성관계가 멀었음에도 출산율이 높았던 것은 연상의 강요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자유롭게 되자 관계에 강요가 사라지면서 붕괴하게 되었습니다. 낮은 출산율은 인간관계 붕괴가 만든 현상입니다. 그러던 중 관계를 붕괴시킨 가부장제 세계관에서의 의지가 약하고 성적 수치심이 강한 여성상을 여성의 본성이라 착각한 기성 여성주의자가 그 여성상을 신세대 여성에게 세뇌하고 사회에 강요하는 바람에 이성관계가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붕괴하여 출산율을 0.6까지 떨어트리게 만들었죠. 이는 PC주의와 마찬가지로 여성주의 사상이 주관적 손익으로 인권이 결정되는 사상이기 때문에 발생한 현상입니다. 주관에 의해 인권이 결정되니까 가부장제 세계관에 살고 있던 여성은 그 세계관에서 인권이 결정되었던 겁니다. 이러니 지금 한국 여성주의가 가부장제의 마지막 발악이라 말하고 있는 거죠. 대놓고 말하죠. 유교와 여성주의는 지금 자유롭고 평등한 한국에 있어 인간관계를 붕괴시켜 국가를 죽음으로 내몰고 있는 최악의 사상입니다. 지금 당장은 연구가 부족하니까 실감이 안 날 수 있는데 미래에는 반드시 한 국가를 위기로 내몬 또는 국가를 소멸시킨 사상으로 기록될 겁니다. 실감이 나지 않는다면 과거 국가를 망친 이들이 현재 어떤 평가를 받고 있는지 상기하십시오. 사리사욕이나 정치적 손익계산으로 국가를 멸망시키지 말길 바랍니다.

 

여성이 가진 성적 수치심이나 정조관념은 가부장제 세계관의 남성이 여성에게 주입한 악의적인 감각과 관념입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걸 소중히 하는 것 자체가 남성의 노예를 자청하고 있는 겁니다. 요즘 유행하는 용어를 쓰면 가스라이팅이죠. 네 몸을 노출하는 건 수치스러운 거야. 야한 건 나쁜 거야. 가부장제는 여성에게 성적 수치심을 강하게 느끼게 만들어 죄책감을 유도해 정조를 지키게 만들었습니다. 그 감각과 관념에 세뇌된 여성주의자는 그걸 정당화하기 위해 남성의 자연스러운 성욕 탓으로 해버린 것일 뿐입니다. 여성주의의 성 문화 탄압이 서양에서 왔다고 하는데, 기독교도 똑같이 여성의 정조를 중시하지 않았습니까. 기독교 사회에서 성장한 여성주의자는 당연히 같은 감각과 관념에 세뇌되어 있었겠지요. 그러니까 서양과 한국이 같은 관념을 공유하고 있는 겁니다. 이런 관점에서 한국 여성이 성 상품화를 비판하는 건 그야말로 여성을 모독하는 행위입니다. 가부장제 세계관의 여성상으로 바라보니까 여성의 성적 자기결정권을 무시하고 억압하고, 여성 성 상품화를 탄압하고 있는 겁니다. 여성은 여성의 자유를 위해 이제 가부장제 세계관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여자는 성적 자기결정권이 없다고 생각하니까 성 억압을 하고 성의 결정권을 부모와 남편과 또는 국가가 가지고 있는 겁니다. 여성의 자유의지를 존중해야 합니다. 가부장제 세계관의 여성상에 세뇌 당한 이들의 주장에 현혹되지 마십시오. 여성이 자유주의적 관점으로 자유권을 쟁취하길 바랍니다. 성을 상품화하더라도 그것이 여성의 의지라면 괜찮습니다. 성 상품화가 괜찮다면 다른 형태도 괜찮습니다. 성 문화 탄압이 여성이 가진 자유권을 침해하는 것에서 왔다는 걸 알아야 합니다.

 

너무 수준이 낮은 사상이니까 지성인이라면 부디 다시 생각해주세요. 가부장제 세계관의 여성상과 별개로 주관적 손익으로 인권을 결정하게 되는 것 자체로도 정말 엉망진창입니다. 기분 나쁘다고 신고하거나, 피해자를 가해자로 가해자를 피해자로 만들거나, 죄를 지어도 옹호하거나, 이성적인 의견을 혐오로 받아드리거나 등등 제멋대로에요. 이런 사상에 세뇌 당하면 누구든 바보가 됩니다. 본인의 주관이 뭐든 옳다고 말하자 폭군이 되어버린 이들이 많죠. 본인의 정의가 무조건 옳은 게 되자 이성을 잃은 군중이 되어 마녀사냥이나 홍위병이 되어버린 적이 있죠. 기본 능력과 별개로 어떤 사상에 영향을 받았느냐에 따라 결과가 천지차이로 달라집니다. 아무리 똑똑해도 바보 같은 사상에 영향을 받으면 바보가 돼요. 인간이 가진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여 인류를 이롭게 해야 한다는 이념을 가진 자유주의자로서 이런 사상은 한 톨만큼도 옹호할 수 없습니다. 정말 눈물이 날 정도로 수준이 낮아요.

 

세배에 대해서는 참. 한국 전통의 풍습이지만 그게 돈에 대한 잘못된 관념을 주입하고 있다는 건 말해두겠습니다. 연상에게 무릎을 꿇고 머리를 바닥에 박은 뒤에 돈을 받는 풍습이 돈을 위해서라면 무릎 꿇고 머리 박는 것도 할 수 있다는 관념을 주입한다고 주장하는 게 이상하게 보입니까? 돈을 위해서라면 감옥도 갈 수 있다, 돈을 위해서라면 맞는 것도 할 수 있다. 라는 의견이 나오는 게 학습효과에 의한 결과물이라 생각되지 않으십니까? 만약 이게 한국 풍습이 아니었다면 어땠을까요? 객관적으로 보길 권합니다. 차라리 그냥 선물을 주고 받아야 합니다. 각자 경제사정에 맞게 선물을 준비해서 주고 받는 것이 보다 긍정적이겠지요. 한국이나 서양이 자본주의를 받아드렸던 때의 사회문제는 당대 종교가 만든 겁니다. 한국은 유교겠지요. 유교로 인한 수직사회가 노동자와 아동과 여성 등등을 괴롭게 만든 겁니다. 이제는 우리를 위해 전통적인 도덕관념이 반드시 옳다는 생각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마이크로소프트가 블리자드를 인수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블리자드라. 중국의 잘못된 행위를 옹호 또는 방관하는 것 보고 정떨어져서 그 회사 게임 안 한지 오래되었지요. 인수되면 어떻게 될까요? 어쩌면 다시 하게 될지도 모르겠네요. 월드오브워크래프트는 내게 있어 꽤 의미 있는 게임이죠. 역할주의가 와우나 롤 같은 역할수행게임에서 떠올린 거니까요. 메타버스. 근본적으로 스타나 와우의 유즈맵이 메타버스와 다를 바가 없죠. 거기에 금전거래가 도입되면 메타버스입니다. 메타버스가 새로운 것 같지만 그냥 유즈맵의 연장이라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겁니다. 뭐 그런 의미에서 마소는 메타버스 전문기업을 인수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겠지요. 수십 년간 유즈맵을 운영해왔을 테니까요. 히오스 부활 가능?

 

롯데인 이유는 별 이유 없습니다. 광고가 눈에 띄었어요. 그래서 써볼까 생각해봤습니다. 다음은 LG와 전자입니다. 그 다음은 눈에 띄는 걸 골라 씁니다. 수백 년간 기술은 꾸준히 발달했는데 사상들은 제자리 걸음을 걸었죠. 새로운 사상이라곤 불변가치를 훼손하거나 객관적 기준도 없는 천박한 사상들밖에 없었습니다. 해체주의는 반대를 위한 반대에 불과하고 PC주의와 여성주의는 객관적 기준도 없고 채식주의나 비폭력주의는 인본주의적 불변가치마저 훼손했습니다. 반대를 위한 반대. 본래 사상이란 기존 질서와 다른 길을 제시하기 위해 나타납니다. 자유주의는 사회의 규율 강요를 반대하기 위해 나타났고, 사회주의는 인간의 방종을 반대하기 위해 나타났죠. 정상적인 사상은 새로운 질서를 안내하고, 반대를 위한 반대인 사상은 과거의 질서에서 반대만 합니다. 해체주의나 PC주의나 여성주의 등등이 같은 세계관에서 반대만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자유주의는 다르죠. 인간에게 규율을 강요하던 질서에서 벗어나 인간의 자유의지를 존중하는 새로운 질서로 나아갔습니다. 무언가 반대를 위한 반대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처음부터 다시 다 생각해야 합니다. 내가 주장하는 역할주의는 존중 척도가 수직인 것을 수평으로 만들고자 주장했던 것이지만 지금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며 새로운 질서로 안내하려고 하고 있어요. 정치적으로 보면 분야의 대표에게 정치권력을 주는 제도를 구상하고 있고, 경제적으로 보면 역할중심으로 체계를 유기적으로 만들려고 하고 있죠. 자본가와 노동자의 대결구도가 아닌 각 역할끼리 뭉쳐야 합니다. 사회적으로 보면 역할로 가치를 판단하기 때문에 다양성을 존중할 수 있게 되죠. 네가 누구든 역할만 수행하면 존중하겠다가 가능하거든요. 이외 다양한 관점을 제시합니다. 도구의 가치판단도 용도에 따라 달라지게 만듭니다. 물질적 가치가 높더라도 필요한 용도가 아니면 그 순간에는 가치가 낮게 되죠. 모닥불을 피울 때엔 지폐보단 잘 타는 나뭇가지가 더 가치 있을 겁니다. 역할주의를 떠올린 게 약 6년전이었죠. 6살 정도 먹은 사상입니다. 아마 가장 어린 사상이 아닐까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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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담] 국민과 은행 (0) 2022/01/10 PM 06:09

국민과 은행

 

 

 

오프라인 은행은 온라인 은행에 밀려 점차 사라지고 있다. 왜냐하면 온라인이 편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보통 오프라인에서만 가능한 일이 있을 때만 오프라인 은행에 직접 방문한다. 그런데 그마저도 온라인에서 모든 은행업무가 가능한 인터넷전문은행의 등장으로 오프라인 은행에 직접 방문하는 사람의 수가 더욱 줄어들고 있다. 시간이 흘러 대다수가 온라인 은행에 익숙해지면 오프라인 은행은 일부 지점과 ATM 기기를 제외하면 없어지게 될 것이다. 그런 까닭에 많은 기성은행이 은행원의 수를 줄이고 있다. 신규채용을 줄이고 희망퇴직을 유도한다. 이런 상황에서 오프라인 은행이 꼭 사라져야 하는가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만약 사라지지 않아도 된다면 오프라인 은행은 이제 어떤 역할을 맡아야 하는가?

 

 

감시사회

 

인류는 기술발달로 과거보다 편의를 누리고 있지만 그만큼 개인의 자유가 침해되는 일이 늘어나게 되었다. 보통 사생활 자유 침해, 통신의 자유 침해가 있다. 사생활 자유 침해는 크게 세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째, 국가와 부모와 같은 보호자의 역할을 맡은 이가 안전이나 보호를 명목으로 과도하게 피보호자의 사생활을 파악 및 간섭하는 것. 둘째, 기업이나 개인이 영리목적을 위해 개인의 사생활을 익명으로 정보수집을 하여 빅데이터로 활용하거나 해킹을 통해 부당한 정보수집을 하는 것. 셋째, 개인의 사적인 용무로 SNS등을 통해 이용하는 걸 알려지고 싶지 않은 대상에게 알려지는 것.

 

첫째에서 국가는 보통 국가이념에 따라 방침이 달라진다. 자유주의 국가에서는 개인의 자유를 우선시하고 사회주의 국가에서는 개인의 안전을 우선시하는 경향이 있다. 최근 학원 등의 방역패스에 제동을 건 법원의 판단 또한 이런 이념을 근거로 했다고 본다. 타당한 공익이 없는 이상 개인의 자유권을 우선시한다는 원칙아래 내린 판단이라는 것이다. 의료붕괴는 코로나 백신 접종률이 99%가 되도 나타날 수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어째서 방역패스를 추진하면서까지 개인의 자유를 침해해야 하는가? 방역당국의 고충은 알겠다. 방역당국이 방역패스를 추진하는 까닭은 국민의 최대한 자유를 보장하면서 의료체계를 유지하기 위한 방법을 찾다 나온 결론일 것이다. 모든 국민의 자유를 억압하기 보다는 백신을 맞은 국민에 한에서는 자유를 보장하기 위해서 그랬을 것이다. 접종률을 늘리기 위한 수단일 것이기도 하고 말이다. 그러나 미성년에게 바이러스는 큰 위험이 되지 않고 백신의 부작용이 더 큰 위험이 되는 시점에서 그들에게 백신의 선택을 강요하게끔 유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할 수 있겠는가? 모든 연령을 대상으로 백신을 접종케 한 것은 최초 백신을 통한 집단면역을 시도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그러나 돌파감염이 일상화된 시점에서 그 논리는 파괴된 지 오래다. 돌파감염 비율이 낮다고 하는데, 모든 접종 완료자 중 돌파감염 사례를 찾으면 어떻게 하나. 이게 정상적인 통계인가? (2021.12.27) 4,115 5,260명 중 147,918 명이 돌파감염으로 추정된다고 돌파감염 비율이 0.359%라고 말하면 어떻게 하나. 당장 감염자 중 돌파감염 비율을 찾아야 정상 아닌가? (2021.12.8.) 일일 신규 확진자 2901명 가운데 1355명이 돌파감염으로 64%가 돌파감염 되고 있다고 한다. 이런 상황에서 모든 연령을 대상으로 백신을 맞추게 하는 것은 논리적이지 않다. (2021.7.11.) 18세 이하 코로나 생존율이 99.995%라고 하는데, 미성년은 보통 그냥 감염되고 치료하는 것이 더욱 안전하다. 이런 상황에서 모든 연령을 대상으로 백신접종 하는 것은 논리적이지 못하다. 집단면역이 불가능해진 시점에서 백신은 전염을 막는 역할이 아닌 병세의 악화를 막는 역할로 바뀌었다. 방역패스는 집단면역이 가능한 백신이 나오고 나서야 논리적이게 된다고 말하고 싶다. 나올 수가 없다면 방역패스는 아무래도 찬성하기가 어렵다.

 

보호자는 보통 개인사상에 따라 방침이 달라진다. 한국은 유교사상에 영향을 받아 보통 피보호자의 자유보다 안전을 우선시하는 경향이 있다. 유교적 가치관의 아동상을 지금까지 강요하는 세태가 보인다. 그러다 보니 한국 미성년은 성장할 기회를 빼앗겼다. 위험을 부담할 감수를 하지 않는 이상 자유가 없고 자유가 없는 이상 성장도 없다. 위험, 자유, 성장은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 국가와 국민의 자유와 성장을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위험은 부담할 감수를 해야 할 것이다.

 

이런 배경에서 기술발달은 사생활의 자유를 침해하는데 최적화 되었다. 누구나 가지고 있는 스마트폰을 통해 사생활을 침해하기가 쉽다. 국가는 스마트폰을 통해 이동경로를 감시할 수 있고 보호자는 스마트폰 감시프로그램을 통해 모든 걸 감시할 수 있다. 보호자의 감시에 대해 잠시 말해보자. 많은 이들이 스마트폰이 없던 미성년 시절에도 부모의 감시와 억압을 경험한 적이 있을 것이다. 요즘 미성년은 그보다 훨씬 심한 감시와 억압으로 자유권을 침해 당하고 있음을 알았으면 좋겠다. 그건 정말 괴로운 일이다.

 

둘째에서 기업은 보통 익명으로 개인정보를 수집한 걸 빅데이터로 만들어 고객을 만족시키고 있다. 흔히 말해 알고리즘이라고도 한다. 개인방송 플랫폼은 알고리즘에 의해 원하는 영상이 목록에 뜨고 있다. 이와 같은 걸 거의 모든 온라인 서비스가 이용하고 있다. 그럼에도 대다수 이런 사생활 자유 침해에는 이해하고 넘어가고 있다. 고객이 이용하고 남은 기록을 고객만족을 목적으로 재활용하고 있는 것과 같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는 인터넷 사전검열과 전혀 다르다. 어떤 상품 구매로 비유하면 빅데이터는 영수증을 익명으로 재활용하는 것이고, 개인간 중고거래를 할 때 일일이 거래목록을 검열하고 나서 허용된 것만 거래하게끔 하는 것과 같다. 페미니즘 광풍으로 모든 국민을 범죄자로 상정하고 사전검열한 것은 매카시즘 광풍으로 모든 국민을 간첩으로 상정하고 사상검증한 것과 같은 논리로 인간의 자유권을 침해하고 있다. 끔찍하다. 이 검열은 국내 기업을 죽이고 국가 이념을 죽이고 국민 성장을 죽인 악이다. N번방은 사건과 방지법 둘 다 악이다. 둘 다 인간의 자유권을 침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개인은 보통 개인정보를 범죄에 활용하기 위해 해킹을 통해 수집하는 일이 많다. 보이스피싱이나 대포통장이나 주민등록이나 여권 위조로 활용한다.

 

셋째의 사생활 자유 침해는 보통 공개된 SNS를 개인공간으로 착각하여 나타난다. 미국 CIA의 인사가 다수의 사람이 SNS에 개인정보를 올려 정보수집이 편하다는 말을 했다. SNS에 개인정보를 올린 사람은 그 정보를 CIA가 활용하길 바라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사생활 자유 침해로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공개 SNS는 개인공간이 아니다. 누구나 출입할 수가 있다. 원치 않는 상대가 개인정보를 보게 될 거란 위험부담은 감수해야 SNS를 자유롭게 즐길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비공개 SNS는 기업이 보호해야 할 것이다.

 

 

통신의 자유 침해는 사생활 자유 침해와 겹치는 부분이 많으므로 경험담 하나만 작성해보도록 하자. 언젠가 사설 메신저 서버를 운영한 적이 있다. 그 때 개인과 개인의 대화 내용이 기록되는 걸 보고 깜짝 놀란 적이 있다. 기본설정으로 대화 내용이 기록되게 되어 있었다. 원치 않게 대화 내용을 잠깐 본 적이 있는데 공개하기 어려운 예민한 인간관계가 담겨있어 외부에 공개하지 않았다. 이후 바로 설정에서 로그가 기록되지 않도록 설정했다. 부당정보취득으로 이익을 얻을 수 있을지 몰라도 그게 올바른 일이라 생각했었기 때문이다. 국내 메신저도 어떤 안전이나 보호를 목적으로 감시하는 일이 있다. 대놓고 통신의 자유를 침해하고 있다. 황당하다. 도대체 이해할 수 없다. 전화나 메신저나 대화라는 관점에서 크게 다를 바 없음에도 전화 감청은 안되고 메신저 감시는 된단 말인가? 정말 예외적으로 간첩이나 산업스파이를 조사할 때에는 감청이나 감시가 있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개개인의 부도덕은 다른 방식으로 해결해야 개인의 자유가 보장된다고 말해두겠다.

 

 

사생활 자유 침해에 둔감한 탓인지 자유개념이 없는 건지 모르겠으나 인권위와 이화여대 소속의 어떤 여성주의자는 대놓고 국민을 온라인 감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의견을 내겠다. 나는 자유주의자다. 나는 반페미도 반공도 아니다. 자유주의자이기 때문에 여성주의와 공산주의에 반대하고 있을 뿐이다. 그런 관점에서 자유침해를 주장하는 여성주의는 자유의 적이고 나의 적이다. 여성주의는 객관적 기준이 없는 주관적 손익으로 인권을 결정하는 사상이기에 자유주의를 옹호하는 여성주의도 있는 걸로 안다. 취향은 주관적을 편향되어도 되지만 도덕은 객관적으로 기준이 있어야 한다. 그렇기에 어떤 여성주의든 기본적으로 반대하는 입장이지만 자유를 억압하지 않는 이상 적극적으로 반대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자유에 대한 최소한의 경의도 표하지 않는 여성주의는 적극적으로 반대할 것이다. 지금 한국 여성주의에 적극적으로 반대하는 것은 대부분 자유 억압을 주장하기 때문이다. 한국 여성주의는 가부장제 세계관의 여성상(의지가 약하고 성적 수치심이 강한 여성)을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는 감수성인 성인지감수성을 주장하며 여성인권을 명목으로 신세대 여성과 사회에 강요하는 것으로 여성의 성적 자기결정권을 침해하고, 여성이 힘든 일을 할 자유를 혐오로 둔갑시켜 하지 못하게끔 유도하고 있다. 그 여파로 남성이 즐기는 성 문화를 탄압하고, 여성특혜로 인한 남성차별이 일어나고 있기 때문에 겉으로는 한국 여성주의가 남성차별을 한 것으로 보이지만 실상은 명백하게 여성차별이다. 한국 여성주의의 주장은 결과는 남성차별이되 원인은 여성차별이었다. 그런 차별주의자들이 국민의 자유권을 침해한다면 자유주의자로서 결코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지금 하고 있는 인터넷 검열과 문화 검열 또한 적극적으로 반대한다. 앞으로 한국이 그런 검열에서 해방될 날이 오길 바라겠다. 홍콩은 이제 영화검열까지 하겠다고 한다. 정말 검열은 보기만 해도 불쾌하다.

 

자유주의의 이름으로 그 누구의 발언권도 빼앗을 생각은 없다. 하지만 그건 발언권이지 절대권이 아님을 강조하겠다.

 

 

 

개인정보

 

감시사회이기 때문에 개인정보는 보다 중요시되고 있다. 개인이 공개한 개인정보는 쉽게 얻을 수 있지만 공개하지 않은 개인정보는 되려 얻기 어려워졌다. 기술발달로 개인의 정보를 얻기가 쉬워졌기 때문에 다수의 사람들이 예민할 정도로 개인정보 노출을 꺼려하기 때문이다. 정보를 얻기 어려워짐에 따라 개인의 정보를 신용하기 어려운 사례들이 나타나고 있다. 누군가 말하기를 자기소개서는 대부분 거짓일 거라 생각하는 이들이 많다고 한다. 신용할 수 없다는 얘기다. 정보와 신용. 여기에 초점을 맞추자. 기술이 발달하면서 정보가 포화되어 정보양은 많아졌지만 신용할 수 있는 정보의 수는 줄어들었다. 기술이 발달하면서 감시사회가 되면서 개인정보의 중요성이 높아짐에 따라 개인정보를 신용할 수 있지 않게 되었다. 사회 전체에 특정 정보에 대한 신용이 낮아졌다는 것이다.

 

현상 A. 유명인의 학력을 불신하여 진실을 요구하는 집단이 나타난 적이 있다.

현상 B. 유명인의 논문을 불신하여 표절유무 검증을 요구한 이들이 나타난 적이 있다.

현상 C. 유명인의 경험(학교폭력 등)을 불신하여 직접 조사한 이들이 나타난 적이 있다.

 

이외에 수많은 사건들이 개인정보 불신으로 이어지고 있다. 커뮤니티에 올라오는 글을 신용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매번 근거를 요구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에 따라 사회에 떠도는 정보의 신용을 올리기 위한 역할이 필요하다. 그걸 누가 해야 하겠는가? 은행이다.

 

은행은 은행에 들어온 통화에 은행의 신용을 새기고, 새긴 통화를 시장에 내보내 순환시키는 것으로 시장의 신용도를 높이고 있다. 가령 위조화폐가 있다 하더라도 시장을 떠돌다 은행에 도달하게 되면 위조여부를 분간하고 은행의 신용을 새긴 뒤에 다시 시장에 유통하고 있다. 그런 식으로 지금까지 은행은 시장의 신용도를 높여왔다. 그렇다면 정보는 어떻게 되겠는가? 은행에 들어온 정보에 은행의 신용을 새기고, 새긴 정보를 사회에 내보내어 순환시키는 것으로 사회의 신용도를 높인다. 같은 논리가 적용된다. 다른 점은 유형 자산과 무형 자산의 차이다. 그런데 이제 정보라는 무형자산은 이미 금과 은의 가치를 넘은 것이 많다. 은행이 정보라는 무형자산을 취급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자산은 다양하지만 은행이 보증하는 자산은 한정되어 있다. 정보는 다양하지만 은행이 보증하는 정보는 한정되어 있다. 기술발달과 정보의 가치변화와 은행의 신용을 결합하여 새로운 개념이 탄생했다. 정보 보관 및 대여다.

 

정보를 보관하는 역할은 보통 대학과 도서관이 맡고 있다. 그러나 그들이 다루는 정보는 지식에 한정되어 있다. 개인정보는 거의 없다. 정보의 수집과 확산과 연결의 역할을 맡고 있는 언론은 보통 공적인 정보를 다룬다. 개인정보를 다루는 일이 적다. 정보의 바다인 인터넷은 정보는 많지만 신용도는 낮다. 탐정은 타인의 정보를 수집하여 그 정보의 신용을 높이지 본인의 정보를 수집하여 그 정보의 신용을 높이지 않는다. 신용평가는 보통 금융에 관련되어 있다. 지금까지 개인정보의 신용을 높이기 위한 역할을 맡고 있는 곳이 없었다. 정보양이 적었기 때문에 그럴 필요도 없었고, 감시사회가 아니었기 때문에 개인정보노출을 그렇게 꺼려하지 않아 진실여부를 가리는데 어려움이 적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는 아니다. 개인정보의 신용을 높일 수 있는 방법이 필요하다.

 

언론이나 인터넷에서 떠도는 가짜뉴스로 사회의 신용이 낮아지는 일이 발생하고 있다. 그런데 언론이 신용에 초점을 맞추면 언론의 자유가 침해될 우려가 있다. 높은 신용도를 우선시하면 지나치게 깐깐하게 기사를 검증해야 하기 때문에 정보공급에 차질이 발생한다. 그러면서 신용도가 조금이라도 낮은 정보는 뉴스로 싣기가 어렵게 된다. 그러면서 자유가 침해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은행은 다르다. 은행은 처음부터 신용이 최우선이다. 은행은 신용을 위해 직원의 경제권에 간섭까지 하고 있다고 한다. 도박, 보증, 사업, 대차 등 은행의 신용에 해가 될 것은 철저하게 금지하고 있다고 한다. 그 정도로 신용최우선인 집단이 정보에 신용을 새겨 사회에 떠도는 정보의 신용을 높이는 역할을 맡는 것이 적절하다고 본다.

 

앞서 오프라인 은행의 새로운 역할에 대해 말하겠다고 했다. 그렇다면 정보 보관은 어째서 오프라인 은행에 방문할 필요가 있는가? 그건 돈과 정보의 차이에 있다. 돈은 돈 자체로 객관적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걸 디지털화하여 온라인으로 거래한다고 해도 큰 문제는 없다. 그러나 개인정보는 주관적인 경우가 많다. 직접 만나서 진위여부를 가리는 것이 효과적이다. 직접 대면하여 눈을 마주보고 거짓을 판단한다. 거짓말탐지기를 이용해도 괜찮을 것이다. 정보의 신용을 높일 수 있는 근거를 조사하여 제공하거나 은행과 연결된 탐정에 맡겨 진위여부를 판단하게끔 하는 것도 좋을 것이다. 정리하면 온라인 은행은 돈을 보관하고 오프라인 은행은 정보를 보관하는 것을 담당하면 된다.

 

 

은행이 정보를 보관하면서 얻을 수 있는 수익에 대해 알아보자. 일단 수요다. 앞서 말한 것처럼 사람들은 사회에 떠도는 정보나 개인정보를 신용하지 못하고 있다. 거기에 누군가 신용을 새긴 적이 없기 때문이다. 사업투자나 기업취업에 필요한 개인정보에 신용을 새길 필요가 있을 때가 있다. 자기소개서를 써도, 경력기술서를 써도, 믿지 않는다는 게 정상인지 묻고 싶다. 개인정보보호 때문에 투자자나 기업이 진위여부를 가리기도 어려울 것이다. 오로지 면접만으로 개인정보의 진위여부를 판단할 때가 많다. 이런 상황에서 개인정보에 신용을 새길 수 있게 되면 내세우고 싶은 정보가 있는 이는 그 정보를 효과적으로 사용할 수 있게 된다. 신용을 중시하는 집단의 신용을 새기게 된다면 그 정보의 신용도는 높게 될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수요는 적을 수가 없다고 본다. 단지 익숙하지 않기 때문에 적응시간은 필요할 것이다.

 

은행은 개인정보에 신용을 새기고자 하는 이들이 내는 정보등록료와 보관료를 통해 수익을 얻으면 된다. 은행이 돈을 대출하여 수익을 얻은 것으로 돈을 보관하는 이에게 이자를 지불하는 것과 같이, 은행이 정보를 대여하여 수익을 얻는 것으로 정보를 보관하는 이에게 돈을 지불하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경험이나 추억에 신용이 새겨지면 그걸 필요로 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사업이나 프로젝트를 시작한 사람이라면 비슷한 사업이나 프로젝트의 경험이 담긴 정보를 필요로 할 것이다. 지도가 있는 길을 걷는 것과 없는 길을 걷는 것은 천지차이다. 이야기를 쓰는 사람이라면 신선하고 재미있는 추억이 담긴 정보를 필요로 할 것이다. 예전 어떤 소설가가 어떤 사건의 기록을 보고 거기에서 착안하여 소설을 썼다고 한다. 경험이나 추억에 은행의 신용이 새겨지면 그 정보를 필요로 하는 사람은 믿고 대여할 것이다.

 

기타 인간관계에 있어 개인정보의 신용이 필요할 때가 많다. 가족, 연인, 친척, 친구, 이웃 등의 사적인 인간관계를 비롯해 학교, 직장, 동아리 등의 공적인 인간관계에서도 개인정보에는 신용이 필요하다. 보통 인간의 신용을 빌려 개인정보의 신용도를 평가한다. 그러나 중요할 때에는 주관적으로 본 인간의 신용만으로 개인정보를 평가하기가 어렵다. 그걸 이용하는 사기꾼도 많기 때문이다. 신뢰를 쌓고 나서 결정적일 때 속인다. 그게 사기꾼이다. 그래서 중요한 개인정보에는 신용이 필요하다.

 

단순히 개인정보에만 신용을 새길 것은 아니다. 만약 사회에 떠도는 정보의 진위여부를 알고 싶다면 은행에 의뢰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언론에 팩트체크를 맡기는 것도 한 방편이기도 하지만, 그들은 돈을 받고 정보를 팩트체크 하지 않는 걸로 알고 있다. 의뢰를 통해 진위여부가 확실해지면 보관기간과 대여기관을 정한 뒤 사회에 퍼트릴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하여 사회의 신용을 높인다. 위조화폐 박멸을 위해 은행이 나선 것과 같이 위조정보의 박멸을 위해 은행이 나서야 한다.

 

정보는 돈과 달리 주관적 요소가 개입될 수 있어 신용도의 차이가 나타나게 된다. 그 차이는 크게 세가지로 나뉜다. 온라인 서류로 정보를 접수했을 때엔 보통 신용도 낮음으로 평가한 뒤 보관하고, 오프라인 서류로 정보를 접수했을 때엔 보통 신용도 중간으로 보관하고, 오프라인 서류로 정보를 접수한 뒤 직접 조사에 나서서 진위여부를 가리면 신용도 높음으로 보관한다. 물론 서류에 따라 차이가 나타날 수 있다. 명백할 때에는 온라인 접수도 신용도를 높게 평가할 수도 있을 것이다. 가령 신뢰도가 높은 기관의 보증이 있다면 그걸 근거로 신용도를 높게 책정할 수 있다. 은행의 신용이 걸린 문제기 때문에 쉽게 책정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것은 지금까지 없던 개념이기 때문에 어색할 수 있다. 하지만 인류는 대부분 필요가 발생하여 새로운 것을 시도했다. 지금까지 한국은 슬픈 역사가 있어 후발주자였다. 선진국의 많은 문물을 그대로 수용했다. 이제 한국도 선발주자가 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제 새로움에 익숙해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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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로자보다 노동자가 자유주의에 적합하다 봅니다. 근로는 이미 노동자의 행동을 결정지어버려요. 기업 입장에서 노동자가 부지런히 일하지 않아도 생산성만 높으면 됩니다. 1시간 일하고 생산성 10인 사람과 10시간 일하고 생산성 10인 사람이 있으면 누가 더 기업에 이익이 되는 사람입니까? 그런데 근로로 해버리면 생산성과 별개로 그냥 열심히 한 사람이 잘한 거라 착각하게 됩니다. 이러니 아무 생산성 없이 야근하고 있는 거죠. 자유주의의 관점으로 보면 부지런함은 노동자의 자유에 맞기는 것이 맞다 봅니다. 그에 대한 평가도 노동자가 직접 감수해야 하는 거고요. 역할주의의 관점으로 봐도 역할수행이 중요한 거지 부지런함 같은 주관적 해석이 깃든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나는 노동자란 단어를 씁니다.

 

공산주의는 기술적응에 실패한 수준 낮은 사상입니다. 어떻게 상품가치와 소비자의 권리에 대한 서술이 보이질 않나요. 산업혁명으로 시대가 변하면서 저렴하고 품질이 높은 상품을 양산할 수 있는 수단이 나타나고, 그 수단을 소유한 이가 많은 사람들에게 가치 있는 상품을 공급하면서 얻는 부를 단순한 계급투쟁으로만 해석하다니. 관점이 노동자와 자본가의 계급투쟁 말곤 거의 없습니다. 사회와 기술의 변화로 나타나는 각가지 현상을 맞아 인간 본위의 행복을 위해 어떤 식으로 대처해야 하는지도 모르고, 상품가치와 소비자의 권리에 대한 이해도 없고, 세계화가 되면서 나타나는 다양성에 대한 예측도 없고, 종교를 비판하면서 종교의 도덕성을 이어받았다는 것에 대한 인식도 없고, 국민과 국가의 성장과 행복을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고찰도 없고, 오직 주관의 도덕성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사유재산을 해체하고 가족을 해체하고 집단을 해체하고 다 해체하고 나서 종교 교리의 지배 아래 살아가자는 주장과 마찬가지로 공산주의 사상의 지배 아래 살아가자는 주장 따위에 세계가 현혹되었다는 사실에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깊은 슬픔을 느낍니다. 종교의 도덕성의 DNA를 물려받았기 때문에 아무래도 종교에 익숙한 사람들은 현혹되기가 쉬웠겠지요.

 

인간의 도덕성은 당대의 도덕관념에 의해 형성됩니다. 자본주의가 막 들어섰을 당시 자본주의의 폐해는 실질적으로 자본주의의 문제기보다는 인간의 도덕성을 결정하던 당대의 도덕관념이 문제인 겁니다. 종교를 믿던 인간이 자본주의를 받아드리면 그 인간의 도덕성이 완전히 바뀌는 일이 얼마나 있습니까? 종교국가에 자본주의가 들어서니 도덕성이 바뀌었습니까? 중국에 시장경제를 도입하니 사상이 바뀌었습니까? 인간의 사상은 일반적으로 쉽게 바뀌지 않으니까 사람이 변하기 어렵다고 하는 겁니다. 한국도 마찬가지입니다. 자본주의의 폐해가 아닌 유교의 폐해입니다. 유교의 가르침 중 상명하복을 정당화하는 것이 있었기 때문에 전체주의적인 자본주의 국가였던 것이지요. 그래서 독재국가의 시장경제에도 쉽게 적응했던 것이고요. 본래 사상이란, 그 사상으로 야기되는 모든 현상에 대한 책임을 질 줄 알아야 합니다. 유교가 국가 사상이었고, 그 사상으로 연령차별이나 성차별 현상이 나타났다면 유교가 책임져야 하는 거죠. 그래야 사상의 변화가 있을 거 아닙니까. 공산주의 사상은 처음부터 수준 낮긴 했지만 도덕성을 명분으로 시작했습니다. 그러다 변질되었는데, 그러면 공산주의는 그 변질에 대한 책임이 없는 겁니까? 말도 안 되는 소립니다. 유교가 중앙집권체제를 유지하는데 굉장한 공헌을 했다는 것에는 의문사항이 없습니다. 왕을 중심으로, 가장을 중심으로 한 상명하복이 중앙집권체제를 확고히 했습니다. 그걸로 국가가 성장하고 사회의 질서가 확립되어 오랫동안 유지되었지요. 그런데 그게 현대의 국민의 행복으로 이어진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상명하복의 수직사회에서 국민이 얻는 행복과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의 수평사회에서 국민이 얻는 행복은 비견할 수 없습니다. 후자가 국민의 행복을 위한 사회입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의 행복을 위해 사상을 바꾸어야 합니다.

 

아직도 출산율을 경제적 관점으로만 보려는 사람이 있다는 것에 비참함을 느낍니다. 금전만능주의 따위 같이 하나의 관점인 사상은 인간을 너무 멍청하게 만듭니다. 특정 종교가 다산을 강조하고 피임을 부정해서 출산율이 높은 곳이 있죠. 특정 종교의 사상이 출산율을 올린 겁니다. 유교와 기독교는 여성의 정조를 지키게끔 만들었죠. 그럼에도 조선과 과거 한국은 강요를 통해 강제 결혼과 출산을 시켜 출산율을 유지했었습니다. 그러다 강요가 사라지자 출산율이 낮아졌습니다. 그러면 무엇이 문제겠습니까? 사상 때문에 출산율이 낮아진 겁니다. 사상이 원인으로 출산율이 높아지는 건 이해되고 사상이 원인으로 출산율이 낮아지는 건 이해가 안됩니까? 객관적으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경제적 문제는 전세계가 공유하는 문젭니다. 그럼에도 어째서 한국만 출산율이 이토록 낮은 것인가? 거기에 초점을 맞춰보십시오. 한국이 유독 출산율이 낮은 것은 결혼 전 성관계를 부정하고 결혼 후 과부가 되어도 새로운 만남을 갖지 못하게끔 한 정조관념으로 기본적으로 출산율이 낮은 상황에서 그런 여성상을 도덕적이라 여긴 여성주의자로 인해 더욱 더 성을 터부시하게 되어 출산율이 폭락한 겁니다. 거기에 유교와 기독교의 차이는 장유유서가 있습니다. 기독교가 정조관념을 강요해도 연하는 무시할 수 있지만 유교는 정조관념을 강요하면 장유유서 때문에 무시하기가 어렵습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의 생존을 위해 사상을 바꾸어야 합니다.

 

 

국민은행인 이유는 별 이유가 없습니다. 그냥 내가 이용하기 때문입니다. 다음은 아마 롯데와 제과입니다. 그 다음은 글쎄 아무거나 씁니다. 지금 뭐든 다 쓸 수 있을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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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담] 현대와 자동차 (0) 2021/12/31 PM 11:24

현대와 자동차

 

 

 

현시대를 관통하는 가치 중 하나가 바로 다양성이다. 다양성은 명분과 실리를 둘 다 잡았다. 명분을 보자. 다양성은 지극히 인본주의적이다. 다양한 인류를 위하기 위해서는 다양성을 중시할 필요가 있다. 실리를 보자. 다양성은 지극히 민주주의적이며 자본주의적이다. 민주주의는 국민에게 주권이 있기에 국민이 가진 다양성을 수용할수록 권력을 얻기가 수월하다. 자본주의는 상품을 소비할 소비자가 있어야 되기에 인류가 가진 다양성을 수용할수록 재력을 얻기 수월하다. 다양성은 도덕적이고 실용적이다. 다양성은 사회가 개방되고 발달될수록 가치가 높아진다. 개방되고 발달된 미국에서는 다양성을 존중한다는 취지로PC(Political correctness)주의를 주장하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다. 세련된 도덕성을 얻길 바라는 일부 신세대와 권력을 얻길 바라는 일부 정치가와 재력을 얻길 바라는 일부 자본가가 PC주의를 지지하고 있는 중이다. 그 지지로 미국 전체가 들썩이고 있다. 미국을 넘어 세계의 문화에까지 침투 중이다. 세계에 영향을 끼치는 만큼 PC주의를 지지하는 이들도 많지만, 올바름을 근거로 타인에게 PC주의를 강요하는 일로 인해 염증과 피로감을 느끼는 이들도 많아지고 있다. 이런 현상에 대해 확실히 말하겠다. 다양성은 올바르나 PC주의는 올바르지 않다. 목적은 찬성하나 수단은 찬성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PC주의는 객관적 기준이 없는 사상이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간단히 정리하고 다양성과 자동차의 새로운 길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다.

 

 

PC주의는 사회주의적이며 종교적이며 무질서하다. 종교적이며 무질서하다는 말은 굉장히 모순되는 말이지만 차근차근 알아보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우선 자유주의와 사회주의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자유주의는 자연으로 돌아가자는 주장을 할 정도로 사회의 규율보다는 개인의 의지를 우선시한다. 사회주의는 사회가 도덕성을 갖춰야 한다고 주장을 할 정도로 개인의 의지보다는 사회의 규율을 우선시한다. 이런 차이에 의해 자유주의는 개인의 의지에 따라 사회의 규율이 바뀌는 일이 잦지만, 사회주의는 사회의 규율에 따라 개인의 의지가 바뀌는 일이 잦다. 사회주의가 사회의 규율을 우선시하기 때문에 도덕을 명분으로 곧잘 자유주의를 비판하고는 한다. 그런데 여기서 생각해볼 것이 있다. 사회주의의 도덕성은 어디에서 온 것인가? 곰곰이 생각해보자. 대부분 인간은 전통적인 도덕관념에 의해 도덕성이 길러진다. 유교의 세계관에서 살고 있는 이들은 유교의 도덕성을 가지고 있고 기독교의 세계관에서 살고 있는 이들은 기독교의 도덕성을 가지고 있다. 사회주의자도 예외는 아니었다. 당대 종교의 도덕성을 가지고 있었고 그 도덕성을 기반으로 사회주의가 나타나게 되었다. 그런 탓에 대부분 종교가 교인의 의지보다 종교의 교리를 우선시했던 것처럼 사회주의 또한 개인의 의지보다 사회의 규율을 우선시하게 되었던 것이다. 민중이 사회주의를 상대적으로 쉽게 받아드릴 수 있었던 것은 민중을 위한다는 명분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종교에 길들여진 민중에게 있어 그 방식 자체가 너무나도 익숙했기 때문이다. 과거 한국에서도 사회주의에 크게 영향을 받았던 것은 한국 또한 국민의 의지보다 유교의 가르침을 우선시하던 국가였기 때문이다. 자유주의는 도덕성이 부족하고 사회주의는 도덕성이 낡았다. 이에 따라 인류가 진보하기 위해서는 자유주의가 고유한 도덕성을 갖추는 진보를 해야 할 것이다.

 

PC주의 또한 개인의 의지보다 PC주의의 규율을 우선시한다. 가령 PC주의의 규율과 어긋나는 걸 보게 되면 잘못되었다고 화를 내며 PC주의를 따를 것을 강요한다. 지극히 사회주의적이고 종교적이다. 이런 특성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피로감을 느끼고 있다. 여기에 무질서가 추가되었다. PC주의가 주장하는 도덕성이 다양성이었기 때문이다. 다양한 인종과 민족, 종교, 성별 등을 차별이나 편견 없이 바라보자 주장했고, 그걸 실현하기 위해 다양한 이들이 주장하는 가지각색의 규율을 올바르다 해버렸다. 공통된 기준이 없이 각자의 집단의 주관에 옳고 그름을 맡겨버린 것이다. 각자 주관에 맡겨버린 탓에 질서가 사라졌고, 질서가 사라진 탓에 목소리가 큰 이들의 주장이 주로 수용되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세력이 많거나 감성적인 이들의 주장이 주로 수용되고 세력이 적거나 이성적인 이들의 주장은 배척되게 되었다. 미국에서 흑인과 아시아인의 차이를 떠올려보면 된다. 흑인이 당하는 인종차별에는 PC주의가 크게 반응하는 반면, 아시아인이 당하는 인종차별에는 PC주의가 적게 반응하고 있다. 약자에 피해를 입었다는 사실에만 주목하지, 그 피해를 입었다는 이유로 난폭한 행동을 하며 강도질하는 것에는 주목하지 않는다. 이처럼 PC주의는 공통된 기준이 없어 세력이 크고 감성적인 이들의 무질서를 용인하게 되었다. PC주의는 객관적인 기준이 없는 이상 무질서하고 비이성적인 평등을 추구할 수밖에 없다.

 

가령 자유주의의 관점에서 다양성을 존중하면 타인의 자유를 침해하는 일이 벌어지지 않는다. 자유주의의 이름으로 인종과 민족, 종교, 성별 등의 자유를 보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PC주의의 이름으로 다양성을 존중하게 되면 타인의 자유를 침해하는 일이 발생한다. 미국에서는 12 25일을 크리스마스라 부를 것인지 아니면 홀리데이라 부를 것인지에 대해 치열한 논쟁 중에 있다고 한다. 자유주의자라면 그 날을 크리스마스라 부르던 홀리데이라 부르던 본인과 타인의 자유에 맡긴다. 하나 PC주의자는 모든 인간에게 그 날을 홀리데이라 부를 것을 강요하며 타인의 자유를 침해하고 있다.

 

주관으로 인권을 결정하다 보니 질서가 사라져 이런 황당한 일이 생기기도 한다. 성적 지향을 존중하기 위해 남성의 몸을 가진 사람이 여성 화장실에 출입할 수 있게 했다고 한다. 출입한 남성은 화장실에서 여성을 성추행 했다고 한다. 신체적 특성이라는 객관적 기준이 아닌 정신적 성적 지향이라는 주관적 기준에 특정 성별의 공간 출입여부를 결정해버리니 이런 일이 발생하는 것이다.

 

자유주의자 입장에서 자유라는 기준으로 질서 있는 다양성을 존중하는 게 아닌 각자 주관에 맡긴 질서 없는 다양성을 존중하는 걸 추구하는 PC주의는 용납할 수가 없다. 진정 다양성을 원한다면 객관적 기준을 가지고 추구하길 바라겠다.

 

 

한국은 세력이 크고 감성적인 여성주의의 목소리가 크다. 여성주의 또한 PC주의와 같이 인간의 의지보다 여성주의의 규율을 우선시하고 주관적 손익으로 인권을 결정하고 있다. 가부장제 세계관에 있는 여성주의자는 다른 여성들에게 가부장제 세계관의 여성상을 여성인권을 명분으로 강요하고 있다. 가부장제 세계관은 유교와 기독교에 영향을 받아 여성에게 혼전순결과 정절을 지킬 것을 강요하고 있다. 대부분 인간의 도덕성은 당대의 전통적인 도덕관념에 의해 형성되는 만큼 많은 여성주의자가 이런 걸 도덕적이라 받아드리고 있었다. 여성의 순결을 지키기 위해 여성 성 상품화를 죄악시했던 것이다. 그 결과 여성이 성적 억압을 받게 되었는데, 그 억압을 정당화하기 위해 남성의 성욕 탓을 하게 되었다. 그런 탓에 정상적인 이성에 대한 성욕조차도 잘못되었다고 지적하고, 한국사회는 전통적인 도덕관념에 의해 그걸 수용해버렸던 것이다. 이성애의 결핍은 정조관념에서 시작되었고, 그 정조관념을 인권으로 여긴 여성주의에 의해 더욱 결핍되게 되어버렸다. 한국의 저출산은 이성애 결핍으로 인한 이성관계 붕괴로 인한 것이다. 이해가 어렵다면 여성과 남성의 차이를 떠올려보자. 여성 성 상품화가 자유롭지 못한 까닭은 여성이 성적 억압을 받고 있기 때문이고, 남성 성 상품화가 자유로운 까닭은 남성이 성적 자유를 누리고 있기 때문이다. 여성이 성 문화를 자유롭게 즐긴 것은 남성이 성적 자유를 누리고 있기 때문이고, 남성이 성 문화를 자유롭게 즐기지 못하는 것은 여성이 성적 억압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여성주의의 성 상품화 비판은 그야말로 여성의 성적 자기결정권을 무시하는 여성 자유권 침해이며, 정상적인 이성애의 발달을 막아 출산율을 낮춰 사회를 죽음으로 몰고 간 인문학적 고찰이 부족한 실수다.

 

성인지감수성은 가부장제 세계관의 여성상(의지가 약하고 성적 수치심이 강한)을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는 감수성을 말하며, 그런 여성상을 지금 여성인권을 명분으로 신세대 여성에게 강요 및 세뇌하고, 사회에 그런 여성상을 수용하도록 강요하고 있다. 여성주의자는 그 누구보다 가부장제를 비판하면서 그 누구보다 가부장제의 여성상을 여성과 사회에 강요하고 있는 것이다. 자발적으로 성매매를 하는 여성에게 지원금을 주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그것 또한 가부장제 세계관의 여성상을 떠올려보면 된다. 가부장제 세계관의 여성은 남성의 말을 거역할 수 없는 자유의지가 없는 존재기 때문에 모든 성매매는 남성의 강요로 이루어지고 있다고 인식하여 그런 짓을 저질렀던 것이다. 성 상품화나 성매매가 여성의 자유의지로 이루어진다면 자유국가는 그 자유권을 존중해야 한다. 성 상품화가 잘못된 것이 아니라면, 다른 형태의 성 상품화도 문제가 없게 된다. 성적 문화의 탄압이 가부장제 여성상에서 왔다는 걸 인식하길 바란다.

 

어떤 여성이 학교나 직장에서 힘든 일이 있으면 나서지 않는 것은 첫째로 가부장제 세계관의 여성은 의지가 약하고 성적 수치심이 강하기 때문에 힘든 일을 할 수 없기 때문이며 둘째로 여성주의는 주관적 손익을 인권으로 결정하기 때문에 손해에 해당하는 힘든 걸 인권침해라 받아드리고 있기 때문이다. 첫 번째 이유로 여성주의자가 아님에도 힘든 일에 나서는 여성이 드물고 두 번째 이유로 여성주의자들은 더욱 더 힘든 일을 외면하고 있다. 진정한 여성인권을 말한다면 평등한 관점에서 힘든 것도 같이하고 특혜를 거부했어야 했다. 학교나 직장에서 힘든 일이 발생하면 성별 관계 없이 할 수 있는 만큼은 같이 하고, 파견 또한 오지라고 해도 평등하게 받아드리고, 징병의 의무 또한 같이 했어야 했다. 평등한 관점에서 여성전용 특혜 거부나 여학교 폐지를 주장했어야 했다. 그러나 그들은 그러지 않았다.  

 

가부장제는 여성을 도구로 여기고 여성에게 성적 자기결정권을 주지 않았다. 그걸 알고 있음에도 여성주의는 여성의 성적 자기결정권을 존중하지 않고 여성 성 상품화를 죄악시하고 있다. 이것은 명백한 여성의 자유권 침해다. 가부장제는 여성을 열등하게 보고 힘든 일을 할 기회를 주지 않았다. 그걸 알고 있음에도 여성주의는 여성이 힘든 일을 하는 것 자체를 여성혐오라 말하고 있다. 이것은 명백한 여성에 대한 멸시다. 한국 여성주의는 가부장제 세계관에서 벗어나지 못해 여성의 자유권을 침해하고 여성의 능력을 무시하는 여성차별적인 행보를 보이고 있다.

 

 

내가 주장하는 역할주의적으로 보자. 가령 역할주의의 관점에서 다양성을 존중하면 모두가 평등하게 역할수행유무로만 존중이 결정되게 된다. 역할주의의 이름으로 인종과 민족과 종교와 성별 등의 평등을 보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여성주의로 접근하면 여성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비판을 여성혐오라 주장하게 된다. 여성의 주관적 손익으로 인권이 결정되다 보니까 제 역할을 못한 것에 대한 비판조차도 혐오로 받아드리고 있는 것이다. 자유주의자이며 역할주의를 주장하는 입장에서 이런 수준 낮은 사상을 어떻게 반대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사실 여성주의라 자칭하는 자체가 이상하다. 대놓고 나는 한쪽 입장만을 대변하는 편향적인 인간입니다라고 말하고 있음에도 그게 올바르다 말하고 있다. 같은 잣대로 남성주의를 주장하는 남성을 비판하는 것처럼 여성주의를 주장하는 여성을 비판하겠다.

 

최근 단어의 정의도 주관에 맡기는 일이 많은 바람에 연상의 언행에 심적 불편함을 느끼면 근거 없이 꼰대라며 공격하는 일이 발생하고 있다. 꼰대의 어원과 별개로 그 단어가 지칭하는 대상은 연상이란 이유로 타인에게 무언가를 강요하는 인간을 말한다. 이런 강요는 사회적으로 보면 꼰대가 있고 경제적으로 보면 갑질이 있다. 반대로 강요하지 않는 이상 꼰대가 아니라 그냥 자기의사표현이다. 무지 또한 예외가 아니다. 주관에 맡겨버리다 보니 무지한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이들까지 생겨버렸다. 모르는 걸 알려주면 되려 화를 낸다. 정상이 아니다. 이런 비이성은 기준이 없는 사상이 세상을 혼란스럽게 하고 있기 때문이다. 정리하겠다. 어떤 규율보다 인간의 의지를 우선해야 자유가 보장되고, 객관적 기준이 있어야 질서가 생기고 질서가 있어야 이성이 생긴다. 이런 형편없는 사상에 선동되거나 세뇌되지 않기를 바라고, 만약 그렇게 되었다면 하루라도 빨리 개인의 의지를 우선시하고 질서 있는 다양성을 추구하길 간곡히 바라겠다.

 

 

 

다양성

 

현대 광고가 눈에 띄어서 상대적으로 유명한 현대자동차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현대자동차가 노조나 차내 결함 따위로 논란이 있다는 건 알고 있지만 그에 대해선 주제와 관련이 적으므로 논점이탈을 막기 위해 언급하지 않겠다. 현대가 로봇회사를 운영하는 걸 보았을 때 미래지향적인 것 같다. 그건 확실히 의미 있는 일이다.

 

자동차가 무엇인지 생각해보았다. 자동차. 이동수단. 인간을 태우고 이동하는 수단. 인간이 어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이동하는데 쓰이는 수단. 자동차는 인간에 맞춰 환경, 지형, 날씨, 온도 등을 고려하며 만든다. 자동차는 인간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각각의 용도에 맞춰 소형, 대형, 산악용, 사막용, 운반용, 공사용 등으로 만든다. 자동차는 인간의 사정에 따라 가격을 다르게 만든다. 자동차는 인간의 취향에 따라 디자인이 다르게 만든다. 생각하다가 하나의 공통점을 발견했다. 바로 대상이다. 모든 자동차는 인간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 인간이 탑승할 것을 전제하고 있다. 너무나도 당연한 말하는 게 이해되지 않을 수가 있다. 그러나 자동차는 인간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이동하는데 쓰이는 수단이다. 만약 인간이 탑승하지 않더라도 인간의 목적이 달성될 수 있으면 된다. 가령 출장이 필요할 때가 있다. 요즘은 컴퓨터관련은 원격으로 가능하기 때문에 출장이 필요하지 않지만, 인간이 직접 작업을 해야 할 때에는 출장이 필요할 수가 있다. 그럴 때 만약 인간형 로봇이 있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인공지능 차량에 인간형 로봇을 탑승시킨 후 출장시키면 된다. 그러면 인간의 목적은 달성된다. 간단한 얘기다. 많은 인간의 기술이 인간의 시간을 줄이기 위해 발전되었다. 걸어서 출장이 가능하다. 그러나 이동하는 시간을 줄이기 위해 자동차나 지하철 따위의 이동수단을 이용한다. 식사하는 시간을 줄이기 위해 인스턴트 식품을 먹는다. 욕구해소 시간을 줄이기 위해 성상품을 소비한다. 필기입력 시간을 줄이기 위해 녹화나 녹음을 한다. 가사노동 시간을 줄이기 위해 가전제품을 이용한다. 이런 기술발달의 흐름이라면 분명 나중에는 인간의 시간을 줄이기 위해 인간이 출장 가는 게 아닌 인간형 로봇이 출장 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인간만이 차량에 탑승한다는 고정관념을 깨고 인간 외의 대상을 고려하여 자동차를 만드는 것. 이게 바로 대상의 다양성이 된다.

 

인류가 멸망하지 않는다면 몇 가지 확정사항이 있다. 인간형 로봇이 등장하는 것은 확정사항이다. 완전운전자동화 자동차가 등장하는 것은 확정사항이다. 부의 편중화에 따른 일부의 과잉자산은 현재진행형이다. 이 세가지를 고려하면서 새로운 길을 알아봐야 한다.

 

 

첫째, 대상의 다양성. 인간형 로봇이 등장한다면, 자동차에 인간이 아닌 로봇이 탑승할 수 있다. 기술이 부족한 지금은 로봇이 아니더라도 좋다. 애완동물을 반려동물이라 부르며 인간에게 쏟을 애정을 동물에게 쏟는 이들이 많다. 그들에게 동물은 인간과 동격에 가까운 존재이므로 그런 동물에 맞춘 차량을 개발하면 충분히 관심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분명히 말해두는데 특정 동물이나 반려동물에 대한 애호는 도덕이 아니라 취미다. 도덕이라면 그런 애호 자체를 타인에게 요구할 수 있지만 취미라면 타인에게 애호가 아닌 존중을 요구할 수 있다. 그 차이를 명확하게 인지하길 바란다.

 

인간형 로봇은 등장 시기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 인류가 멸망하지 않는 한 반드시 등장할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지금 당장은 없으므로 그걸 대상으로 하여 자동차를 만들기가 어렵다. 하지만 인간형 로봇이 없더라도 지금 당장 로봇은 존재한다. 그런 로봇들과 결합한 자동차를 만들어 로봇자동차라는 이미지를 선점하는 것이 좋을 거라 생각한다. 가령 드론을 자동차 어딘가에 부속할 수 있다고 해보자. 그걸 이동을 멈추고 정찰하는데 이용하거나 조수석에 있는 이가 가지고 놀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런 개념은 과거 매를 날려 정찰하던 것과 같은 것이다. 지금 당장 드론의 속도가 빠른 것이 아니므로 적절하게 쓸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로봇과 자동차의 결합이라는 개념을 선도할 수 있을 것이다. 로봇 개를 활용할 수도 있다. 미래에 인간형 로봇이 만들어지면 인간을 수행하는 비서와 같은 일을 할 수도 있다. 자동차를 운전하고 짐을 운반하고 위협으로부터 주인을 보호하는 일을 로봇이 할 수 있다. 지금 당장 기술이 부족하여 그걸 할 수는 없지만 로봇 개가 짐을 운반하는 것은 가능할 거라 생각한다. 그 로봇 개를 장착할 수 있는 차량이 등장한다면 짐을 운반하는 로봇과 자동차의 결합이라는 개념을 선도할 수 있을 것이다.

 

파워태권도라는 것이 있다. 게임의 철권과 같이 체력 게이지의 감소를 관객이 명확하게 볼 수 있게끔 해둬 엔터테인먼트 요소를 도입한 태권도다. 그런데 지금 당장은 아무래도 인기가 적은 편이다. 다른 격투기에 비해 폭력성이 적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기술과의 연계는 분명 이미지를 선점하는데 충분히 효과가 있다. 미래에는 어쩌면 안전보호구의 발달과 중력을 낮추는 기술의 등장으로 종래의 격투기보다 훨씬 화려한 싸움을 하는 태권도도 될 수 있을 것이다. 중력을 낮추면 일시적으로 강해지고 이후 적응한다는데, 격투하는 동안에만 강해지면 되기 때문에 그건 괜찮을 것이다. 어쨌든 중요한 것은 이미지 선점이다. 태권도가 전세계 보육원이 되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적이 있다. 훌륭하다.

 

다양성을 명목으로 로봇과 결합한 자동차 개발. 반려동물에 최적화한 자동차 개발. 동물은 소수에 속하므로 채산성이 맞을지 걱정할 수 있다. 하지만 전세계를 대상으로 만든다면 충분한 수요가 있을 거라 생각한다. 미국 반려동물 수가 고양이는 9500만 마리, 개는 9000만 마리로 추정된다고 하니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한다. 고양이나 개가 인간에 맞춘 좌석에 앉아 불안정하게 창 밖을 바라보는 일을 본 적이 있다. 이제 동물에 맞춘 좌석을 만들어도 그에 따른 충분한 수요가 있을 것이다.

 

자동차는 혁명을 상징하는 산업이다. 산업혁명의 변화를 마차에서 자동차로 바뀌는 걸로 설명할 때가 많다. 지금 기술혁명 또한 인간이 운전하는 자동차에서 인공지능이 운전하는 자동차로 바뀌는 걸로 설명할 때가 많다. 언젠가 미래에는 인공지능이 운전하는 자동차에서 인간형 로봇이 운전하는 자동차로 바뀌는 걸로 설명할지도 모른다. 그런 시대를 대비해야 한다고 본다.

 

 

둘째, 차내의 다양성. 완전운전자동화 자동차가 등장한다면, 자동차 내에서 운전 외의 것을 할 수 있다. 이동하는 동안 식사를 할 수 있고 수면을 취할 수도 있다. 가령 미래에는 캡슐호텔에 동력기구를 달아 출발할 때 누어서 자다 도착하고 나서 깰 수 있는 캡슐차량이 등장할 수도 있다고 본다. 완전운전자동화가 대중화가 되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그게 아니더라도 지금 당장 차내를 다양하게 만들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자동차가 인간의 목적을 위해 이동하는 수단인 만큼 이동하는 동안 다른 걸 하더라도 아무 문제가 없다. 캠핑카 등이 있지만 그건 일상적인 자동차의 목적과 거리가 있다고 본다. 일상 속에서 차내의 다양성을 추구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대상의 다양성이 인간 외의 존재에 맞춘 차량이라면 차내의 다양성은 인간에 맞춘 다양한 차량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건 아무래도 인간을 대상으로 한 자동차가 많았기 때문에 그렇게 새로운 개념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완전운전자동화에 최적화한 차량은 아직 등장하지 않았다고 본다. 그야 완전운전자동화가 등장하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완전운전자동화에 따른 차내의 다양성은 새로운 개념에 가까우므로 거기에 최적화한 차량을 계획하고 비슷한 걸 개발하여 이미지를 선점할 수는 있을 것이다.

 

지금 인공지능 자율주행은 인공지능 기술발달이 더뎌 언제 개발될지 확정되지는 않았다고 한다. 개인적으로 인공지능의 발달은 지금과 같이 단순 계산으로 끝날 것이 아니라, 인간과 같이 알고리즘 자체 생성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본다. 정해진 알고리즘을 통해 계산하여 결론을 도출하여 학습하는 것으로 알고리즘을 성장시키는 게 아니라 최초 만들어진 알고리즘을 통해 계산하여 결론을 도출하는 학습하는 것으로 아예 또 다른 알고리즘을 생성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인간, 유전자, 행동, 학습, 생각, 다른 행동으로 나아가는 것과 같이 말이다. 요컨대 알고리즘 겹치기다. 알고리즘을 하나 만들고 거기에 또 다른 알고리즘을 겹친다. 겹치고 겹치고 겹치면서 인공지능이 어떤 알고리즘을 이용해 계산할 것인지 판단하게 하면 된다. 하나의 알고리즘 내에서 수많은 계산의 결과를 인공지능이 선택하는 게 아니라 셀 수도 없이 많은 계산하는 알고리즘들을 선택하게 하면 된다. 그 선택과정 속에서 알고리즘을 조합하여 또 다른 알고리즘을 만든 것으로 행동한다. 그런 식으로 반복하며 자아가 형성된다. 인공자아다. 인간은 매일 세포를 바꾼다. 세포의 신호를 통해 인간의 자아가 형성되는 걸 고려하면, 매일 매시간 매초 다른 인간으로 살아가고 있다고 보면 된다. 다른 인간임에도 하나의 자아로 유지될 수 있는 것은 수많은 알고리즘이 담긴 기억 자체가 인간의 자아이기 때문이다. 인간과 같이 알고리즘과 알고리즘에 전달되는 신호가 계속 바뀌며 알고리즘 자체도 계속 바뀌는 기능을 도입하면 인간과 비슷한 자아를 갖게 될지도 모른다. 어쨌든 이 차내의 다양성은 인공지능의 성장이 필수적일 것이다. 일단 개념적으로 정리해두겠다.

 

 

셋째, 차량의 다양성. 일부의 과잉자산이 현재진행형이므로, 그들을 위한 차량개발이 가능할 수 있다. 차량 또한 컬렉터들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자본주의의 특성상 돈이 계속 늘어나기 때문에 일부는 상상이상의 돈을 소유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현대미술이나 코인이나 NFT에 돈이 몰리고 있는 실정이다. 그런 이들의 니즈를 만족시키기 위해 컬렉션화를 할 수 있는 컨셉카를 만드는 것이 좋다고 본다. 스마트폰 같은 기기와 다르게 자동차는 외형을 바꾸기가 매우 수월한 편이다. 이동만 가능하면 되기 때문이다. 자동설비에 적합하지는 않지만 애초에 고가의 컨셉카를 지향하는 만큼 수작업을 늘리면 되기 때문에 괜찮을 것 같다고 본다. 자동화 설비의 증가로 노동자 고용이 줄어들어 정계와 노동계의 불편한 시선을 감당해야 하는 시대에, 수작업의 컨셉카로 노동자의 일거리를 만드는 것은 시대변화의 흐름에 적응하는데 도움이 될 거라 생각한다. 컨셉카의 노동자와 자동화 설비의 노동자가 같은 일은 하는 건 아니지만 보통 사회는 인원 수와 급여의 수와 같이 숫자에 주로 초점을 맞추지 어떤 일을 하는지에 초점을 맞추지는 않기 때문에 괜찮다. 이렇게 수작업이 필요한 일거리를 늘린다면 완전자동화를 대비한 연착륙이 가능할 거라 생각한다. 개인적으로 궁금한 것이 있다. 토토로의 고양이 버스 같은 걸 만들 수 있는 게 아닌가? 외형적인 디자인만 바뀌는 것이기 때문에 기술적으로 불가능한 것 같지는 않다. 실제 고양이처럼 안과 겉에 부들부들한 털과 지하철 의자처럼 내부에 열이 흐르도록 만든다면 만질 때 기분이 좋아질 것 같다. 이런 식으로 다른 산업과 연계하여 컨셉카를 만든다면 다른 산업을 좋아하던 이들을 끌어들일 수가 있을 것이다. 흔히 말하는 콜라보다. 같은 산업과 연계하면 산업에 관심이 있는 인간의 수가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크게 효과를 보기 어렵지만, 다른 산업과 연계하면 상대적으로 크게 효과를 볼 수 있다고 본다.

 

수집을 목적으로 한 컨셉카는 매년 또는 매월 한정적으로 제작하고 상대적으로 고가에 팔면 될 것 같다. 에르메스라는 명품은 단순히 비싼 걸 넘어서 구매자격이 필요하다고 한다. 어떤 매장의 제품을 많이 사야 구매할 자격이 부여된다고 한다. 과잉자산이 명품에 대한 욕구를 크게 늘려 공급자가 우선되는 상황까지 다다르게 되었다. 수집욕을 만족시킬 수 있는 명품 컨셉카의 등장은 분명 채산성을 물론이고 브랜드 가치를 올리는데 도움이 될 거라 생각한다. 개인적인 바람이기도 하다. 길거리에 비슷한 차량만 보이는 건 다소 심심하기 때문이다. 게임이나 영화 또는 만화나 소설에서 보던 것과 같은 차량이 현실에 등장하는 걸 본다면 보는 것만으로도 꽤나 자극적이고 재미있을 것이다. 대중에 친숙한 브랜드를 만드는데 도움이 될 거라 생각한다.

 

 

자동차의 새로운 길에 대해 간단히 알아보았다. 다양성은 분명 시대를 관통하는 가치다. 그것의 수단이 잘못되었기는 했지만 그 방향은 옳다. 지금 당장 자동차만 다루기는 했지만 다양성은 다른 산업에도 적용될 수 있는 가치일 것이다. 개념적으로만 접근했기 때문에 이 다양성이 어떤 식으로 나아가게 될지는 모른다. 규제나 저작권 등이 어떤 식으로 있는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새로운 개념은 충분히 가치 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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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국민과 은행입니다. 원스토어와 앱 플랫폼, LG전자, 롯데제과 등 아무거나 씁니다. 사실 은행은 답이 없을 것 같았는데 나오긴 하네요. 인문학은 사실 취업은 물론이고 창업을 목적으로도 배워야 하는 게 아니었나 싶습니다. 지금 당장 사회에 필요한 수많은 산업들은 인간에게 필요한 것이 무언인가에 대한 고찰로 나타난 게 아니었나 싶어요. 거기에 필요한 게 바로 인간을 배우는 학문이라 생각합니다. 지금 한국이 인문학을 발달시켜 인간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잘 파악할 수 있다면 한국의 상품이 전세계에 사랑 받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인문주의 인본주의 인간주의 다양하더군요. 굳이 인본주의라 한 것은 그것이 본래 뜻에 가장 적절하다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본위(판단이나 행동에서 중심이 되는 기준)

 

민족의 자유, 국가의 자유, 국민의 자유, 모두의 자유를 위해. 한국은 물론이고 동맹국이나 자유진영이 보다 인간의 보편적인 자유를 위했으면 좋겠습니다. 모든 인류가 자유롭기를 바라지만 그건 지금 당장은 어렵겠지요. 한국이 자유국가라면 인류의 자유를 위했으면 좋겠습니다. 당장 경제나 안보로 자유를 위하지 않는 국가와 협력하는 일이 있더라도 한국 자체는 자유를 위한 길을 걷길 바랍니다. 부디 자유를 위하는 국가와 협력했으면 좋겠습니다.

 

한국은 인간의 본질적인 가치인 자유와 생존을 지키기 위해 자유적응과 기술적응을 해야 합니다. 자유 없는 생존은 무가치하고, 생존 없는 자유는 무의미합니다. 둘 다 갖출 수 있는 수준 높은 자유국가가 되길 바랍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대선 후보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한국 국민의 눈높이가 높아졌다는 걸 의미합니다. 국민의 눈높이에 맞춰 정계가 성장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걸 위해 정치개혁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 개혁은 분야의 대표에 입법권을 주는 일이 필요하다 주장하겠습니다. 양당정치가 고착되다 보니 경쟁이 줄어들어 아무래도 한국 정치의 발전이 더디는 일이 발생하는 것 같습니다. 정당에 갇혀 정당의 당리당략에 따라 국정을 운영하는 것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정당에서 벗어나 분야의 이익을 위해 움직이는 이들 또한 필요하다 주장하겠습니다. 정당의 대표와 분야의 대표가 둘 다 입법권을 쥐고 정당은 국가의 방향을 결정하고 분야는 분야의 방향을 결정하는 역할분담이 있으면 좋을 것 같습니다.

 

내년에는 역할주의를 작성할 겁니다. 다양한 역할을 담당하는 산업의 새로운 길을 떠올리는 것이 역할주의를 작성하는데 도움이 될 거라 생각합니다. 본질과 가치를 통해 개념을 만들고 그런 과정을 통해 새로운 사상을 작성하는데 필요한 생각을 키워나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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