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와 바이오
영원진리
인류는 영원진리에 도달한 적이 없다. 영원진리를 모르는 인류의 지성과 문명은 모래와도
같은 견고하지 못한 가설 위에 쌓아 올린 불안전한 건축물이다. 인류가 이 세상에 바로서기 위해서는 영원진리에 도달해야 할 것이다. 토대가 영원진리가 아니라면 언제든지 무너질 위험
속에서 불안하게 살아가야만 한다. 인류의 행복을 위해서 견고한 영원진리를 찾아야 한다. 진리란 언제 어디서나 누구든지 승인할 수 있는 보편적인 법칙이나 사실이다. 그게 시간을 초월하면 영원진리라 한다. 보통 수학이나 물리학 법칙을 이른다. 하나에 하나를 더하면 두 개가 된다는 법칙이 미래에
바뀐다고 생각하기 어렵다. 그렇기에 영원진리라 부른다. 그러나 그것조차도 세상의 존재이유를 규명하지 못한다면 영원진리라 할 수가 없다.
모든 학문의 끝과 시작은 세상의 존재이유다. 존재를 사유하는 형이상학만 그런 것이 아니다. 어떤 학문도 의문에 의문을 더하다 보면 세상의 존재이유에
대한 의문을 갖게 된다. 의류학을 예로 들어보자. 옷은 무엇인가? 옷의 재료는 무엇인가? 옷의 목적은 무엇인가? 인간이 옷을 입는 이유는 무엇인가? 인간은 무엇인가? 인간이 존재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인간이 속한 세상이 존재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음식학이나 건축학뿐만이 아니라 모든 학문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그 의문에는 답할 수가 없다. 어떻게 인간과 세상이 만들어져 있는지는 알아도 왜 만들어져 있는지는 모른다. 왜 만들어져 있는지 명확하게 답할 수 있는 것은
인간이 만든 것뿐이다. 의식주의 존재이유는 알지만 인간과 세상의 존재이유는 모른다. 인간이 만든 것은 존재이유를 규명할 수 있지만 인간이 만들지 않은 것은 존재이유를 규명할 수 없다.
세상의 존재이유를 규명할 수 없게 되면 모든 진리는
영원할 수 없게 된다. 존재이유에 따라 모든 진리가 뒤집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세상의 존재이유라고 주장하는 것에 대해 알아보자. 하나는 신과 시뮬레이션이다. 세상이 존재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신이 만들었기 때문이다. 시뮬레이션 제작자가 만들었기 때문이다. 어떤 존재가 세상을 만든 것이 이 세상의 존재이유라는 것이다. 이 경우 수학이나 물리학 법칙 등이 신이나 제작자
손에 의해 멋대로 조작될 수 있다. 그 조작으로 중력이 사라진 세상이 성립될 수 있다. 이해가 되지 않는다면 시뮬레이션 게임을 떠올려보자. 게임 내에서 중력을 제거하더라도 세상은 존재할 수 있다. 물론 중력이 사라지면 우주질서가 붕괴하여 엉망진창이 될 것이다. 그런 가정을 다룬 영상도 많다. 그러나 그건 다른 방식을 통해 충분히 해결할 수
있다. 온갖 방법으로 시뮬레이션에서 해결이 될 때까지 실험하면
되는 문제다. 신이나 시뮬레이션이나 어떤 존재가 세상을 만든 것이라면
그 세상의 법칙은 언제든지 바뀔 수 있다. 관점을 바꿔보자. 이 세상이 시뮬레이션이고 세상에 존재하는 수학과 물리학 법칙은 진짜 세상에 없는 실험용 법칙일 수 있다. 지금 인류도 그러고 있다. 시뮬레이션 게임에는 세상에 없는 마법이 존재한다. 그것과 마찬가지로 이 세상이 시뮬레이션이라면 현재
수학과 물리학 법칙은 진짜 세상에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실험용 법칙이라면 언제든지 법칙이 달라질 수 있다. 이렇게 어떤 존재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라면 그 존재를 넘지 못하는 이상 모든 법칙은 영원진리가 될 수 없다.
둘은 우연이다. 세상의 존재이유가 어떤 존재의 개입이 없는 우연이라면
웬만해서는 현재 수학과 물리학 법칙은 지구 내에서만큼은 영원진리가 될 것이다. 알고 있는 이치만 따지면 아마 우주의 법칙이 같지 않을까 싶긴 한데 우주의 크기가 광속으로
백억 년이 넘으므로 확신할 수는 없다. 어쩌면 지구의 법칙은 우리은하의 중력에 영향을 받은 고유한 법칙일지도 모른다. 천문학으로 우주를 관측하고 있으므로 같을 거란 예측은 가능하지만 그 현상이 지구와 같은
법칙으로 만들어졌는지는 확신하지 못할 거라 생각한다. 그런데 우연이 세상의 존재이유에 대한 답은 될 수 있어도 그런 우연이 발생하게 된 이유에 대해서는 모른다. 우주의 탄생배경에 대해 다양한 의견이 있다. 우주가 빅뱅으로 만들어졌다면 빅뱅 전의 세상이 어떤지
모른다. 우주가 수축과 빅뱅과 팽창을 반복하는 구조라면 전
세상이 수축되는 우주일 것이지만 그 때에도 우연의 이유는 모른다. 이에 대해서는 우주에 대한 정보가 극히 적으므로 추측조차 어렵다. 우주의 진리에 다다를 수 있는 편린이라도 쌓아야
추측이라도 할 수 있다.
솔직히 어떤 존재에 의함이란 가정은 지나치게 인간편의
위주의 해석이다. 수천 년 전의 지식으로 세상의 진리일 수 있다고
말한 것이 신이고 현재의 지식으로 세상의 진리일 수 있다고 말한 것이 시뮬레이션이다. 지금 시뮬레이션이 그럴 듯 해 보이는 것은 실제 인류가 시뮬레이션을 만들 수 있기 때문일
뿐이다. 어느 때나 인간이 아는 지식 내에서만 진리라 주장했을
뿐이다. 그렇다고 어떤 존재에 의함 자체의 가능성이 우연에
비해 낮다는 것은 아니다. 지금 아는 지식으로 결론지은 존재의 가능성이 낮다는 것이다. 존재에 의함이든 우연이든 세상의 존재이유를 규명하는 순간부터 모든 학문은 다시 시작할 수 있다. 그렇기에 세상의 존재이유가 모든 학문의 끝과 시작이
된다. 세상의 존재이유를 규명한 순간부터 인류는 비로소
세상에 바로 서서 살아갈 수 있게 되며 그 순간부터 학문은 다시 시작하게 될 것이다.
사상
인류가 바로 서기 위해 필요한 영원진리. 진리. 내가 바랐던 것은 언제나 진리였다. 최초 의문을 가질 때나 관념에 의해 신체부자유를 겪을 때나 지금이나 바라는 것은 진리다. 만약 종교에 모순이 없었다면 종교인이 되었을 것이고
사회에 모순이 없었다면 과학자가 되었을 것이다. 종교에 기대기엔 역사와 논리와 이치와 객관과 법칙과 모순되는 것이 지나치게 많았다. 과학에 기대기엔 자유를 외치며 억압을 하거나 평등을 외치며 차별을 하는 사회의 모순을
견디지 못하고 과학을 배우기 전에 망가져버렸다. 당시에는 알 수 없었던 관념에 의한 신체부자유로 인해 연상에게 제대로 된 의사표현을 하지 못했던 나에 대한 불신과 조소. 이후 운명에 기대며 될 대로 되란 듯이 자포자기하며
살았다. 종교에는 기대지 않았으면서 운명에는 기댔다는 것이
아이러니하지만 망가졌던 나에게는 어쩔 수 없었다. 이후 망가졌던 원인에 대한 답을 찾다가 과학의 도움이 받아 자아와 몸이 하나가 아님을 깨닫고 낡은 도덕관념에 세뇌된 탓에 신체부자유로 인한
자기의사표현을 하지 못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면서 지금은 다양한 현상과 사실과 과학과 사상과 철학 등의 도움을 받아 사상가가 되기를 희망하고 있다.
바나나우유 부정취득 사건 몰이해, 연하와의 인간관계 타박, 대중문화 차단, 세배 암묵적 강요, 김치 섭취 강요거부, 전단지 아르바이트 배포 중 구박, 성 문화 접촉금지, 연상에게 의사표현 실패 등 별 것 아닌 것도 많지만
꾸준하고 집요한 낡은 도덕관념의 세뇌와 주관적인 손익에 의한 강요와 편의주의적인 억압으로 자기의사표현도 제대로 하지 못할 정도로 망가져 자포자기
하는 순간 자아의 시간이 멈춰서 고정되어버렸다. 한창 자아를 형성하던 중학생 때 자아의 시간이 고정된 것이다. 고등학생과 대학생 때 괴리감과 위화감을 느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또래가 가질법한 욕구나 생각에서 벗어났다. 다르다는 것에 괴로움을 느끼며 타인을 흉내 내려
애썼다. 자기암시를 통해 감정조차 모방했던 것을 조소했던
기억이 난다. 이제는 그 이유를 안다. 망가지면서 자아의 시간이 멈췄었기 때문에 타인과
달랐던 것이었다. 나중에 사는 것조차 포기했다 다시 사는 것에만 집중했을
때엔 그런 흉내도 지쳐서 공적인 때에만 하게 되었다. 일반적인 사람을 관찰하고 관념이 고정된 사람을 흉내 내었다. 그럼에도 흉내에는 한계가 있다. 흉내 내는 것에 실패하여 나보고 어쩌라고! 했던 기억이 난다. 아마 다른 사람들도 그런 내게 위화감이나 괴리감을 느꼈을 것이다. 이런 망가짐으로 자아형성 시기에 자아의 시간이 고정된
것이 사상을 하는데 도움이 되었던 것 같다. 자아형성에 대해 잠시 정리하자.
자아는 환경과 교육으로 수동적으로 관념이 학습되어
기초적인 관념이 고정되면서 감각과 감정과 욕구와 가치관 등이 설정되어 사리분별이 가능하게 되면 형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통상 세상에 눈을 뜨는 어린 아이 때부터 관념이
학습되면서 자아형성이 시작되고 점차 자아가 형성되다 성에 눈을 뜨는 중학생 때 자아형성이 끝이 난다. 빠르면 초등학교 고학년 때도 형성된다. 최근 인터넷의 발달로 수용하는 정보양이 폭증하여 관념 학습이 빨라지는 것으로 자아형성
시기도 빨라지고 있다. 그에 대응하여 정보를 차단하는 것은 정보편중화를 부추겨 정보가 막힌 아이만 도태되게 만들 뿐이므로 모든 아이에 대한 이른 교육이 필요할
것이다. 정보는 힘이다. 정보양에 차이가 발생하면 또래 사이에서 뒤쳐지는
것은 필연이다. 단순히 학업에 필요한 지식만 쑤셔 박는 것은 인간에
대해 잘 모르기에 하는 끔찍한 실수다. 또래 사이에서 뒤쳐지는 순간부터 자존감이 부서지며 전체적인 능력이 하락한다. 정보를 차단할 거면 극단적으로 말해 차라리 학교에 보내지 않는 것이 아이에게 도움이 될
것이다. 부디 어리석은 짓으로 아이를 괴롭게 만들지 말길
바란다. 사리분별을 할 수 있다면 지식을 활용해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대응을 할 수 있다.
사리분별을 할 수 있게 된 자아형성 시기에 능동적으로
관념을 학습하면서 사춘기가 시작된다. 능동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면서 자기의사표현이 확실해짐에 따라 보호자의 말을 수용하는 것이 줄어들고, 학습된 관념과 학습한 관념의 차이와 모순으로 세상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으로 반항하기 시작한다. 이때 보호자는 이런 실수를 한다. 피호보자가 자아형성이 되어 사리분별이 가능하면 대등한 인간으로 대함이 마땅함에도 성년에 자아형성이 된다고 착각하여 대등하지 않은 인간으로
여기며 관념을 세뇌하고 주관을 강요하고 편의로 억압하는 짓을 저지른다. 장유유서에 의해 연하를 아랫사람으로 여기는 관념에 의해 성인조차도 사리분별 못하는 인간으로 여기며
통금이나 성적 자기결정권을 침해하는 경우까지 있다. 심각한 연하차별이다. 어떤 동물이 성기능이 작동하는 시기에 성관계를 금하고 있나? 보통 있기 어려운 일이다. 성기능이 작동한다는 것은 성관계를 맺어도 된다는 걸 의미한다. 남녀 모두 애를 낳을 수 있는 몸이 되면 누구와도
해도 된다. 인간의 자유의지로 결정할 문제다. 고리타분한 관념으로 연하를 열등하게 여기고 성을
죄악시하는 것에 영향을 받아 성적 자기결정권을 빼앗고 있었을 뿐이다. 의사표현만 제대로 할 수 있으면 성적 자기결정권을 주더라도 문제가 없다. 의사표현을 제대로 못하니까 연상에게 이용당하는 거지
그렇지 않으면 괜찮단 말이다. 의사표현을 못했던 것으로 망가진 나로서는 의사표현을 할 수 있게 만든 다음 성적 자기결정권을 주는 게 아니라 의사표현을 못하게 만들면서
성적 자기결정권을 빼앗는 걸 보는 것이 너무나도 괴롭고 슬프고 비참하다. 도대체, 유전자와 낡은 도덕관념 중 무엇이 더 진리에 가까운가? 성적 자기결정권은 유전자에 근거해서 줘야 한다. 그것이 진리다. 그럼에도 낡은 관념에 의해 성년이 되어도 성적인
것을 금한다니 정신 나간 짓이다. 이따위로 하니까 출산율이 폭락한 것이다. 범죄에 관련된 인간관계가 범죄를 죄악시하는 관념에 의해 줄어들었다면 성에 관련된 인간관계도 성을 죄악시하는 관념에 의해 줄어든다는 것은
이치에 맞는다. 이성관계가 줄어드니까 결혼도 줄고 출산율도 줄어들었다. 국가가 죽어가게 되었다. 관념에 대해 알았다면 이제는 어릴 때부터 성에 친숙해져야
함을 이해했으리라 생각한다. 낡은 관념을 근거로 미성년을 위해서라는 명목을 가지고 어릴 때 접하는 성 문화를 탄압하는 것이 국가를 죽음으로 내몰고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성을 검열하는 것은 인간에 대한 이해도 없고 예술에
대한 이해도 없는 진정 야만스러운 짓이다. 이성관계가 줄어드니까 이성애 결핍이 되었다. 유사연애산업의 비정상적 성장이나 이성의 동성애 문화 발달이나 고양이나 개에 대한 과도한 집착은 애정결핍으로 나타난 것이다. 괴롭다. 도대체 언제까지 연하의 자유의지를 뭉개고 성적 자기결정권을
빼앗는 폭거를 저지를 것인가? 인간은 낡은 도덕의 장난감이 아니다. 인간은 국가의 장난감이 아니다. 인간은 연상의 장난감이 아니다. 멋대로 주물럭대며 원하는 모양으로 구겨대지 말길 바란다. 자아형성 전에도 관념이 학습되면서 학습된 관념 내에서는 사리분별이 가능하므로 연하가 논리적인 의견을
표하기 시작한다면 대등한 인간으로 대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자아가 형성된 이후 관념 학습을 마무리하면서 구체적인
관념이 고정되기 시작한다. 그러다 모든 관념이 고정되어 변하지 않는 시기가 오면 자아가 완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자아가 완성되면 그 순간부터 그 사람의 지성은 죽었다고 보면 된다. 모든 관념이 고정되어 관념대로만 생각하고 행동하여
새로움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새로운 인식을 낳는 것이 지성이라면 새로운 걸 생각하거나 받아드리지 못하는 순간이 그야말로 지성의 죽음이라 할 수 있다. 자아의 완성은 곧 지성의 죽음이다. 자아완성 시기는 천차만별이다. 빠르면 어릴 때조차 완성될 수 있고 늦어도 완성되지
않는 사람도 있다.
무엇이 인간을 행복하게 하는가? 한국은 도덕적일수록 불행하고 부도덕적일수록 행복한
나라다. 장유유서에 휘둘리지 않고 자유롭게 자기의사표현이
가능할수록 행복하고 정조관념에 휘둘리지 않고 마음에 맞는 상대와 자유롭게 성관계를 맺을수록 행복하다. 이게 도대체 뭔가. 한국이 불행 지수가 높았던 것은 단순하다. 그저 대다수가 도덕적이었기 때문이었다. 이 사실에 지독한 슬픔을 느낀다. 인간을 불행케 하는 도덕은 더 이상 필요 없다. 새로운 도덕으로 인간을 행복하게 할 것이다.
나는 자아형성시기에 자아의 시간이 고정되면서 다양한
특성이 나타나게 되었다. 크게 세 가지다. 하나는 관념이 제대로 고정되지 않은 채 망가졌다. 관념이 제대로 고정되지 않은 채 스스로의 관념을 의심했다. 겉으로는 살아가기 위해 운명에 기대어 자포자기한 상태에서 관념이 고정된 타인의 흉내를 냈고 속으로는
조소하며 관념을 의심하는 것으로 언제든지 관념을 바꿀 준비가 되어 있었다. 성장할수록 선천적인 성질인 본능과 후천적인 성질인 관념이 섞이는 바람에 구분 짓기 어려워한다. 그 두 가지를 전부 본성으로 착각하는 일이 잦다. 그런데 나는 관념을 의심하고 있었던 터라 생각보다는
쉽게 본능과 관념을 구분 지어 본성이 무엇인지 판단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사상가의 역할 중 하나가 바로 관념을 만드는 것이다. 관념에 의해 망가져 관념을 의심하여 관념을 파악하기
수월한 상태가 된 지금 사상가에 적합해졌다 본다. 둘은 자아의 시간이 멈춰 순수한 욕망이 변하지 않았다. 중학생 때 시간이 멈췄었기 때문에 당시 느꼈던 진리와 자유에 대한 갈망을 유지하고 연상에게 의사표현을
하지 못하는 것으로 망가졌던 이유를 오랫동안 추적하며 답을 찾을 수 있었다. 아마 일반적으로 성장했다면 갈망이나 망가짐을 단순한 사춘기의 방황 정도로 마무리 짓고
적당히 살았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러지 못했다. 그렇기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 순수한 욕망은 변하지 않았다. 앞으로도 변하지 않을 것이다. 영원히 진리를 추구하는 욕망을 가진 지금 사상가에 적합해졌다 본다. 셋은 자아의 시간이 멈춰 형성에 필요한 관념을 계속 고찰하게 되었다. 원래 생각이 많은 인간이 생각을 많이 하게 되는
자아형성 시기에 자아의 시간이 멈추자 끊임없이 생각하게 되었다. 사상가의 역할은 생각하는 것이다. 다양한 것을 생각하여 인간에게 새로운 길을 안내하는 것이 사상가다. 지나칠 정도로 생각이 많은 지금 사상가에게 적합해졌다
본다.
관념에서 자유로울 것, 순수한 욕망을 가질 것, 생각이 많을 것. 각각의 특성은 자아형성 시기에 자아의 시간이 멈춰
고정되었기 때문에 얻을 수 있었던 것 같다. 망가졌기 때문에 사상가에 적합하게 되었다는 것이 참 황당하다. 사실 이런 특성은 보통 쉽게 얻어지지 못한다. 관념에서 자유로워야 자아의 구조를 파악하고 관념을 만들 수 있다. 그런데 인간은 관념이 고정되는 것으로 자아가 형성되고
유지된다. 그런 인간이 관념을 고정시키지 않으면 자아가 붕괴될
수도 있다. 느끼는 모든 감각과 감정과 욕망을 전부 의심하며
살아간다고 생각해보자. 그 느꼈던 것을 바탕으로 행동해온 모든 걸 의심한다고 생각해보자. 자아의 시간이 흐르는 사람이 관념에서 자유로운 것은 정말 굉장한 것이다. 일반적으로는 아마 몹시 어려울 것이다. 순수한 욕망을 가져야 다른 것에 휘둘리지 않고 끝까지
그 욕망을 추구할 수 있게 된다. 욕망을 위해 끊임없이 사유할 수 있게 된다. 그런데 어린 시절 충동적인 욕망을 평생 가지고 가는 사람은 그리 많지가 않다. 자아의 시간이 흐르면서 욕망이 변화하기 때문이다. 자아의 시간이 흐르는 사람이 순수한 욕망을 가진
것은 어떤 충동이나 욕망에서 휘둘리지 않은 강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기에 굉장한 것이다. 일반적으로는 아마 어려울 것이다. 생각이 많아야 끊임없이 사유하며 사상을 할 수 있다. 그런데 보통 사람이 생각이 그렇게까지 많지는 않다. 지나치게 많으면 일상에서 불편하기 때문이다. 보통 어린 시절 생각이 많다 하더라도 시간이 흐르면서
필요한 생각만 하게 되게 되어 있다. 자아의 시간이 흐르는 사람이 생각이 많은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일반적이지는 않다. 사상가는 관념을 만들면서 감각과 감정과 욕망에 혼란을 겪으며 자아가 흔들릴 수 있고 고정되지
않은 관념에 의해 또래와의 위화감과 괴리감을 느낄 수 있고 지나치게 많은 생각으로 일상 중 실수를 할 수 있다. 사상가는 관념을 만들기 위해 관념을 고정시키지 않고
영원히 자아형성을 해야 한다. 영원히 자아형성 시기에서 벗어날 수 없다. 만약 벗어났다면 가진 자아를 붕괴시키고 자아형성 시기로 돌아가야 한다. 그 과정이 그리 쉽지는 않을 것이다. 사상가가 되고 싶다면 일반적인 삶을 살 거란 생각은 하지 않는 것이 좋다.
관념에 대해 이해해야 한다. 자아형성 이전의 기초적인 관념이 한국은 유교의 가르침으로
만들어졌고 서양은 기독교의 가르침으로 만들어졌다. 서양은 기독교와 그리스의 사상과 철학이 자리잡은 곳인데 자아형성 이전의 기초적인 관념을 기독교가 담당한 것은 가르침이 단순하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나 플라톤의 사상과 철학을 자아형성
이전에 배우기는 어렵다. 거의 대부분 기초적인 관념은 단순한 가르침에서 시작된다. 십계명 같이 누구라도 알기 쉬운 가르침으로 기초적인 관념이 학습되면서 자아가 형성된다. 이 시기의 기초적인 관념으로 인간의 감각과 감정과
욕구가 개발된다. 성을 죄악시하면 이성과의 접촉으로 느끼는 촉각만으로도
굉장한 죄악감과 불편함을 느끼게 된다. 과도한 성적 수치심이 이걸 근거로 한다. 언어로 연령차별하면 연하의 반말에 심각한 불편함을 느낀다. 반말에 부정적 감정을 느끼는 것이 이걸 근거로 한다. 채식주의에 영향을 받으면 육식에 끔찍한 불쾌감과 불편함을 느끼게 된다. 육식에 대한 강한 혐오가 이걸 근거로 한다. 관념에 의한 것이라면 몸이 먹을 수 없는 게 아니라
자아가 먹을 수 없다고 보는 것이 맞다. 이렇듯 인간의 감각과 감정과 욕구는 사상에 담긴 관념에 매우 큰 영향을 받는다. 이 정도로 중요한 관념을 인간이 제어하지 못한다는 것이 정상이 아니었다.
자아형성 이전의 관념은 본능과 결합되어 인간의 본성으로
착각하게 된다. 인지하지 못한 상태에서 학습된 것에 영향을 받아
감각과 감정과 욕구를 느끼면 그게 본성인 거라 착각한다는 것이다. 각국이 즐기는 맛이 다르다는 걸 알고 있을 것이다. 기초적인 미각조차도 관념에 영향을 받는다. 그럼에도 대부분 그걸 본성이라 착각하고 있다. 유전자에 의한 미각과 관념에 의한 미각이 있다는
것을 인지해야 한다. 이런 기초적인 관념은 대체로 변하지 않으나 충격적인 경험이나 구체적인 관념 학습을 강하게 받으면서 변형된다. 물론 그런다고 하더라도 본질이라 할 수 있는 관념
자체가 변했다기 보다는 단지 변형되었을 확률이 높다. 기독교 사상으로 관념이 만들어진 인간은 새로운 사상을 만든다 하더라도 기독교의 도덕성에 뿌리를 두게 된다.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의 도덕성이 기독교의 도덕성과
유사한 까닭은 뿌리가 같기 때문이다. 사회주의가 옳다고 느끼는 사람은 그저 종교의 도덕성에 익숙했기에 그랬던 것이다. 공산주의를 독재자가 이용하기 쉬운 이유도 이런 까닭이 원인이었다. 왕정의 오랜 친구가 기독교였음을 잊으면 안 된다. 유교 사상으로 관념이 만들어진 인간은 여성인권을
주장한다 하더라도 유교 사상으로 나타난 가부장제 세계관의 여성상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된다. 여성주의는 주관적 손익으로 인권이 결정되어 보다 더 심각하게 가부장제 세계관의 여성상을
세뇌하고 강요하게 된다. 약한 의지나 과도한 성적 수치심이나 단절된 이성관계는 전부 여성을 도구로 생각하고 차별했기에 나타난 모습들이다. 그걸 올바른 여성상으로 착각하고 세뇌하고 강요하면
어떻게 하나. 여성들이 여성을 차별하던 관념에서 나타난 여성상을
근거로 여성인권을 주장하며 다시 한번 여성을 차별하는 걸 보니 끔찍한 비명을 지르고 싶을 정도다. 관념이란 정말 무섭구나. 이처럼 사상과 철학을 새롭게 만들거나 주장할 때엔 기초적인 관념부터 다시 만들어야 할
것이다. 인간의 행동원리는 기초적인 관념에 의할 확률이 높으므로
인간의 본질을 알려면 우선 기초적인 관념이 무엇인지 파악해두는 것이 좋다. 대부분은 오래된 종교의 가르침이 보통 기초적인 관념이 될 것이다. 새로 접한 사상도 관념에 영향을 받는다. 루소, 존, 데카르트, 칸트, 헤겔, 니체 등등의 사상가와 철학자의 사상과 철학 또한 자아 형성 이전에 학습된 기초적인 관념을
바탕으로 학습하게 된다. 그들의 사상과 철학을 온전히 받아드리는 것이 아니라 왜곡된 형태로 받아드리게 된다. 기초적인 관념에 의해 감각과 감정과 욕구가 이미 설정된 상황에서는 그걸 자각해야 새로
접한 사상을 통해 관념을 바꿀 수 있다. 많은 사상가와 철학자들이 이걸 놓치고 있었다.
사상가의 길을 걷고자 하는 나는 기초적인 관념부터
만들고 있다. 자유주의의 이념과 미덕과 악덕은 무엇인가? 자유주의의 이념은 모두가 자유로운 것이며 자유롭기
위한 미덕은 의지와 지성이고 악덕은 강요와 강제 세뇌가 된다. 자본주의의 이념과 미덕과 악덕은 무엇인가? 자본주의의 이념은 소비자의 행복이며 소비자가 행복하기 위한 미덕은 공정과 경쟁이고 악덕은
불공정과 독점과 담합이 된다. 역할주의의 이념과 미덕과 악덕은 무엇인가? 역할주의의 이념은 역할수행 외의 자유와 역할수행 유무로 가치판단 하는 걸로 얻을 수 있는 평등이며 그러기 위한 미덕은 역할로 가치를 판단하는
것이고 악덕은 역할과 무관한 것으로 가치를 판단하여 억압하고 차별하는 것이다. 이런 기준은 몹시 간단하여 어린 아이도 알기 쉽기 때문에 기초적인 관념이 될 수 있다. 역할주의를 예로 들어보자. 부모는 자녀에게 아이의 역할을 인식하게 하는 것으로
맡은 역할을 수행하도록 유도하여 올바른 행동을 할 수 있도록 할 수 있다. 무엇을 위한 역할인가에 따라 옳고 그름이 달라질 수 있는데 자아형성 이전에는 자유주의를
참고하면 된다고 본다. 자아형성 이후에는 직접 무엇을 위한 역할인지 고찰하면 된다. 역할로 가치를 판단하는 것으로 용도에 맞는 소비를 할 수 있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떤 목적이 있을 때에 무슨 역할이 필요하고 그
역할에 필요한 능력이 무엇인지 고찰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것이 바로 역할주의의 기초적인 관념 학습이 되겠다. 자아형성 이후에도 기초적인 관념에 대해 인식하고 있다면 그걸 바꿀 수 있다. 이제 자아는 직접 설계해야 한다.
이런 걸 생각해보면 정상적인 사상가가 나타나지 않았던
이유에 대해 알 것도 같다. 물론 인문학이 쇠퇴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에 대해 잠시 알아보자.
인문학
인문학의 쇠퇴는 학문 특성의 차이에서 비롯되었다고
본다. 수학과 과학은 대부분 영원진리에 가깝기에 암기하고
이해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학문의 수준을 높일 수 있으나 사상과 철학은 대부분 진리도 아니기에 암기하고 이해하는 것만으로는 학문의 수준을 높일
수가 없다. 수사학이나 논리학 같은 언어기술에 해당하는 것은
과거의 것을 그대로 쓸 수 있지만 사상과 철학은 그럴 수가 없다. 매번 새로 시작해야 한다. 1576년 국가론을 작성한 장 보댕은 마녀 사냥을 주장한 마법학의 전문가였다고 한다. 그가 쓴 마법사의 빙의망상에서 이런 글귀가 있다고
한다. 한 명의 마법사는 천 명의 범죄자보다 더 큰 범죄다. 14개 판본이 만들어지고 지금까지 읽히는 글을 쓴 자가
이 따위 주장이나 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런 걸 암기하고 이해한다고 인문학 수준이 올라갈 수 있겠는가? 결코 그럴 수가 없다. 애초에 사상은 진리가 아니라는 걸 알아야 한다. 장유유서도 남녀유별도 정조관념도 진리가 아니다. 그걸 지킬수록 불행해지는 도덕 따위가 진리일 수가
없다. 그런 건 사상가가 만든 관념을 당시 필요에 의해
쓴 것에 불과하다.
수학과 과학은 실험하고 연구하고 탐구하면서 영원진리에
가까운 것들을 토대로 체계적으로 발전해나갔지만 사상과 철학은 대부분 진리가 아닌 것에서 고찰하고 사유하고 토론하면서 지나치게 복잡하게만 발전했다. 형이상학을 떠올려보자. 증명되지 않은 진리가 아닌 명제를 전제 삼아 진리를
찾으려 하니 답이 나오지 않는다. 수학으로 비유하면 이런 것이다. 1+1=2 다. 같이 간단히 답이 나올 수 있는 것도 1+1+X는 무엇인가? 라고 의문을 던진 다음 그 답을 찾기 위해 끊임 없이 사유했다. 이러니 제대로 된 답은 나오지 않고 그에 대한 추측만 엄청나게 복잡하게 되는 것이다. 특히 특수 형이상학에 속하는 신과 영혼은 도대체
의미가 없는 사유만 늘어나고 있다. 관념에 의해 신의 존재를 당연시하면서 어떤 사실을 논하고 있으니 쓸데 없이 복잡해졌다. 현상에 대한 답을 도출하는데 있어 그런 전제는 필요가 없다. 더군다나 철학의 역사가 길어짐에 따라 과거 철학자가
만든 고유명사들까지 끼어드니 더더욱 복잡하고 어려워졌다. 본질만 정리하면 간단함에도 말이다. 괜히 인문학이 쇠퇴한 것이 아니다.
한국이 수직사회인 까닭은 무엇인가? 수직사회인 조선의 도덕관념을 이어받았기 때문이다. 이렇게 간단하게 답이 나옴에도 자아성찰도 제대로
하지 않고 관념에 의해 유교의 가르침을 당연시하면서 수직사회에 대한 원인을 찾으려 하니 다른 나라의 사상을 참고하며 애꿎은 자본주의나 비판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수직사회로 나타나는 사회문제도 제대로 해결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꼰대질이나 갑질 따위를 말이다. 수직사회는 유교의 가르침이 학습되어 나타난 관념이 만든 것이니 수직사회로 나타나는 폐해는 자본주의를 비판할 것이 아니라 유교를 비판했어야
했다. 수직적 인간관계, 교육의 줄세우기, 부의 분배의 실패, 재벌 등등은 자본주의가 원인이 아니라 유교가 원인이었다. 자본주의는 낡은 관념에 지배당해 유교의 가르침을
실현하기 위한 도구에 불과했다. 그 점을 명확히 인식하길 간곡히 바란다. 모두 낡은 관념에서 해방되어 자유로워질 때가 왔다. 민족의 자유, 국가의 자유, 국민의 자유 그리고 사상의 자유다.
한국의 교육은 주입식으로 암기하고 암기한 걸 이해하는
것이 주류였다. 이 방식으로 학문을 접하자 영원진리에 가까운 수학과
과학의 수준은 높아졌으나 진리가 아닌 사상과 철학의 수준은 낮아졌던 것이다. 극단적으로 말해 기초적인 사상과 철학은 과거의 것을 아무것도 모른다고 해도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수학과 과학이 있기 때문이다. 이 영원진리에 가까운 것들을 가지고 사상과 철학을
하면 된다. 나는 과학이 없었다면 자아에 대해 고찰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렇다고 수학과 과학을 전공할 필요는 없다. 학문의 시작과 과정과 끝에 있어 수학자와 과학자는
대부분 알아야 하지만 일반인은 답만 알면 된다. 사상가와 철학자도 마찬가지다. 과정에 속하는 복잡한 것은 그들의 역할로 그 역할을 신용하고 그들이 내놓은 답을 가지고 사유하면 된다. 이러면 낡은 관념에 방해 없이 자유롭게 사고하는데
도움이 된다. 기초적일 때에는 오히려 과거의 것을 안보는 것이
더 좋을 수도 있다. 오랫동안 체계적으로 발전한 사상과 철학의 거대함에 잡아 먹여 관념이 고정되어 새로운 생각을 하지 못하게 될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자아형성 이전의 관념에 대한 이해가 있어 본능과
관념을 분리할 수 있다면 그렇게 크게 위험하지는 않다. 자아구조를 파악한 뒤에는 본인 판단으로 다른 사상을 접하면 된다. 보다 전문적으로 사상과 철학을 하고자 한다면 당연히 과거의 사상과 철학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 하나는 과거의 사상과 철학에 영향을 받아 사회가
형성된 측면이 있기 때문이고 둘은 방법론 측면에서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사상과 철학은 역사가 아니다. 암기하고 이해할 것이 아니라 생각을 해야 한다. 시대의 진리를 모아 사유한 다음 사람들에게 가야
할 길을 안내해야 한다. 과학의 도움을 받아 자아에 대한 구조를 어느 정도 파악하게 되었다. 그에 대해 간단히 알아보자.
무의식에 대한 어떤 과학 실험이 의식과 무의식을
파악하여 자아의 본질에 도달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인간의 무의식은 인간의 의식적 의지와 무관하게 동작한다. 자아에 대해 간단히 알기 쉽게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자아는 의식이 몸의 세포의 신호가 전달되면 유전자에
의해 그 신호를 감각과 감정과 욕구로 변화하고 경험이나 교육이란 학습을 통해 체계화되며 ‘나’라는 관념이 학습된 뒤 생각과 행동을 할 수 있는 범위를 ‘나’라고 지각한 것을 이른다고 본다. 이는 짐승도 그리 다르지 않다. 지능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자아는 몸과 하나가 아니다. 자아는 몸과 별개다. 컴퓨터로 비유하면 자아는 소프트웨어고 몸은 하드웨어라
보면 된다. 그 동안 의식과 무의식과 잠든 상황에 대해 구분하기
어려웠는데 컴퓨터로 비유하니 알기가 쉬웠다. 자아의 의식과 무의식은 소프트웨어적으로 분리가 가능하다. 의식은 현재 몸의 세포의 신호로 나타나는 생각이라 보면 된다. 어떤 신호를 통해 생각을 하고 생각하면서 과거의
기억이 떠올리는 것으로 과거의 기억을 통해 그 기억 모두가 나라는 것을 자각하고 움직일 수 있게 된다. 무의식은 과거의 기억들이라 보면 된다. 의식이 깨어난 후에 자극 받은 세포의 신호에서 기억으로
이어진 뒤에는 자유롭게 생각하면서 움직이며 의식 외의 동작은 무의식적 기억에 의해 움직이게 된다. 잠들거나 기절한 상황은 소프트웨어적 무의식과 동일한 상황이 아니다. 하드웨어적으로 꺼진 것이라 보면 된다. 프로그램의 동작과 무관하게 컴퓨터가 꺼진 상황이라는
것이다. 아예 꺼진 건 아니라 대기모드라고 보면 된다. 잠들거나 기절한 대기모드에서는 의식이 없으므로 무의식적
움직임만 나타나게 된다. 무의식적으로 외부에 반응하기 때문에 외부의 자극이 있으면 대기모드가 풀리고 깨어나게 된다. 기절 또는 술이나 약에 취했다면 쉽게 깨어나지 못할 수도 있다. 대기모드에도 단계가 있는 것이다. 생각해보자. 만약 인간의 자아가 하드웨어였다면 어째서 인간은
육체의 모든 기관을 정확하게 제어할 수 없는가? 그건 간단했다. 인간의 자아는 몸이란 하드웨어에 장착된 소프트웨어일 뿐이었다. 일반적으로 컴퓨터에 있는 프로그램이 컴퓨터의 모든 걸 장악하지는 않는다. 관리자 권한이 있는 프로그램도 컴퓨터를 소프트웨어적으로
파악이 가능하지 하드웨어의 손상여부를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지는 않다. 그것과 같다. 유전자에 의한 몸의 신호와 문명에 의한 관념의 학습으로 만들어진 자아는 몸의 일부만 권한이 있는 상태다. 이 정도면 자아에 대해 어느 정도 파악했을 거라
생각한다.
인공지능이 자아를 얻어 인공자아가 되려면 몸이란
하드웨어를 설계를 했어야 했다. 그러나 지금까지는 그냥 인공지능이란 이름으로 소프트웨어적 판단만 설계하니 자아가 깨어나질 못했던 것이다. 인공지능에 자아를 깃들게 하기 위해서는 인공자아란
소프트웨어와 인공생명이란 하드웨어를 둘 다 설계하고 인공생명에 외부 신호를 넣을 세계를 설계해야 일반적인 인공자아가 나타날 수 있을 것이다. 아니면 인간처럼 인공생명 내에서 자아가 깨어나도록
설계하는 것도 좋다. 확실히 말해 어렵더라도 이것이 순리일 것이다. 가상세계에 인간의 몸을 만든 다음 관념의 학습을 통해 자아가 깨어나도록 한다. 이것이 진정한 인공생명, 인공인간이다.
이처럼 정보가 있어야 고찰이 가능하다. 재료 없이 사유는 언어 없는 사유만큼 무의미하다. 자아성찰을 할 수 있었던 것도 과학 정보로 자아
구조를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었던 덕분이다. 세상의 존재이유 규명 또한 마찬가지다. 이 세상의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우주에 대한 정보가 절실히 필요하다. 우주 정보를 최대한 많이 끌어 모아야 한다. 우주에 대해 최소한 절반은 알아야 세상의 존재이유란 물음의 답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 있는 정보만으로는 너무나도 어렵다.
우주의 정보를 최대한 많이 모으려면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이 있다. 정보를 수집하여 진리를 추구할 인간이 젊음을 유지하고
수명의 한계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간단히 말해 불로불사다. 우주의 크기가 광속으로 백억 년이 넘는다고 한다. 지금 인류 수명으로는 우리은하에서도 벗어날 수 없다. 우주와 비교한 인류의 크기와 수명은 인류와 비교한 하루살이만도 못하다. 지금 이대로라면 인류는 우주에 아주 작은 흔적만
남기고 덧없이 사라질 수 있다. 정말 초라하다. 나는 이것을 받아드리고 싶지 않다. 인류를 사랑하는 인본주의자가 이런 걸 어떻게 받아드릴 수 있겠나. 지금 인류는 불필요한 낭비를 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지금 인류는 인류끼리 싸우고 있을 때가 아니다. 지금 인류는 낡은 관념에 지배될 때가 아니다. 태양계에서도 벗어나지 못한 문명으로 남을 수는 없다. 적어도 최소한 만 년 이상은 살 수 있어야 우리은하라도
돌아볼 수 있을 것이다.
불로불사의 방법은 크게 두 가지가 있다. 컴퓨터와 진화다. 컴퓨터는 컴퓨터 안에 인간의 자아를 넣는 것을 의미한다. 컴퓨터 속에서 영원히 사는 것이다. 인간의 자아는 소프트웨어고 인간의 몸은 하드웨어다. 자아와 몸과 가상세상을 프로그래밍하면 인류는 가상세계에서
영원히 살 수 있다. 현실의 자아와 가상의 자아가 같은 존재인지 의문이 들 수 있다. 생각해보자. 자아가 소프트웨어라면 하드웨어가 바뀐다고 하더라도 달라질 것이 없다. 현실의 몸에서 가상의 몸으로 자아를 넣는 것뿐이다. 컴퓨터를 바꿨다고 일반 소프트웨어의 내용물이 달라지지는
않지 않겠나. 둘 다 같은 프로그램이다. 둘 다 같은 자아다. 자아를 넣을 때 방법이 두 가지가 있다. 복제와 이식이다. 현실에서 가상으로 자아가 이동하는 것이므로 현실의
자아가 남을 수 있다. 그럴 때엔 복제가 된다. 이러면 어느 한쪽이 가짜가 될 거란 인식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아니다. 소프트웨어를 떠올려보자. 소프트웨어의 복제는 같은 게 두 개가 될 뿐이다. 둘 다 진짜다. 만약 고유한 느낌을 얻고 싶다면 이식을 하면 된다. 가상의 몸에 자아를 넣는 도중에 현실의 몸이 죽으면
된다. 그러면 무엇이 진짜냐는 고민에서 해방될 수 있다.
그런데 컴퓨터로는 한계가 있다. 불로불사는 인류의 두 가지 사명을 이룰 수 있다. 하나는 동물로서의 사명이다. 동물의 본능 중 하나가 종을 퍼트리는 것이다. 이 본능은 적자생존에 의해 나타났는데 그런 본능이
없는 동물은 멸종했기 때문이다. 팬더가 성적 욕구가 약해 교미를 꺼려하고 있어 팬더용 포르노를 보여주고 있을 정도라고 들었다. 인간이 없었다면 아마 멸종했을 것이다. 한국도 성적 욕구는 약하지 않지만 성을 죄악시하여 성관계가 줄어드는 것으로 팬더와 비슷한
길을 걷고 있다는 점에서 참으로 우습고 슬프다. 동물만 봐도 알 수 있는 이치를 관념에 의해 이해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관념의 무서움이 나타난다. 어쨌든 적자생존에 의해 깨어난 동물의 본능인 종을
퍼트리는 것이야 말로 인류의 동물로서의 사명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사명을 불로불사가 되어야 이루기가 쉽다. 광속으로 백억 년이 넘는 이 우주에 인류를 퍼트리기 위해서는 불로불사가 되어야 가능하다. 이건 컴퓨터로 불로불사를 이뤘을 때에는 어려운 일이다. 컴퓨터 안에서 불로불사한 뒤 백 년 정도 사는 인간들을
대리고 전 우주를 돌아다니며 퍼트리는 것은 상당히 이상하고 어려운 일이 될 것이다. 우주에 종을 퍼트리는 것은 본인의 의지에 따라 해야 한다. 컴퓨터 안의 불로불사자의 명령으로 그럴 수는 없는
일이다. 둘은 지적 생명체로서의 사명이다. 영원진리에 도달하는 것. 그걸 위해 세상의 존재이유를 규명하는 것. 그것이 지적 생명체로서의 사명이라 생각한다. 우주에 다른 지적 생명체가 존재하는지 모른다. 만약 있다면 세상의 존재이유를 그들이 이미 알고
있을 수도 있고 그들과 경쟁할 수도 있다. 지적 생명체 중 하나인 인류가 세상의 존재이유를 규명하는 영광을 누릴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겠다. 그것이야말로 지적 생명체로서의 사명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사명을 위한 불로불사는 컴퓨터와 진화 두 가지
방법이 가능하다. 컴퓨터로 불로불사하여 사명을 달성하는 것이 과연
인류의 영광인지 묻고 싶다. 진정 인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현실의 몸을 가진 상태에서 목적을 달성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따라서 현실에서 불로불사하는 것이 이상적이다. 그게 가능한 분야가 바로 바이오, 생명공학이다.
현실에서 불로불사를 하기 위한 방법은 크게 두 가지
있다. 새로운 육체와 유전자 조작이다. 새로운 육체를 만든 다음 뇌나 자아를 복제 또는
이식하는 것으로 영원히 사는 걸 시도해볼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불완전한 불로불사다. 진정한 의미에서 불로불사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유전자 조작이 가장 이상적이다. 얼핏 듣기로 짐승에 어떤 유전자를 넣자 지능이 높아졌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본래 종의 진화 중 바로 그런 방식이다. 고구마에 미생물의 유전자가 섞여 들어간 것으로 진화했다고
한다. 그것과 마찬가지로 어떤 특정한 유전자를 인류의 유전자에
넣으면 불로불사가 가능할 수 있다고 본다. 가령 체내 시간을 반복하는 유전자를 찾거나 만든 다음 동물에 넣는 것으로 실험한 후 인간에게 삽입하면 어쩌면 불로불사가 가능할 것이다. 생명공학에 대해 잘 모른다. 그런데 이치만 따져 봤을 때엔 불가능할 이유가 없다. 인간의 시작을 생각해보자. 정자와 난자의 결합으로 그 작은 크기에서 만 배
이상 커졌다. 유전자의 설계에 따라 이렇게까지 변할 수 있다. 그런 걸 보면 유전자의 설계에서 체내 시간 부분만
간섭할 수 있다면 불로불사가 가능할 거라 생각한다. 늙었어도 어려지고 어려진 상태에서 시간을 반복할 수 있다고 본다. 피부가 벗겨지고 새살과 새 이가 돋아나고 머리카락이 자라난다. 불가능하다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처음부터 생각하자.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이치만 따져보자. 만약 시뮬레이션이었다면 불가능하다 말했을 거라 생각하는가? 가능하다 말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시뮬레이션에서는 실제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 세상이 시뮬레이션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다양한
법칙들이 정교하게 짜여 있다. 유전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유전자의 법칙에 의해 인간이 태어나고 성장한다. 세상의 법칙을 이용해서 하늘을 날고 우주로 날아가는 것처럼 유전자의 법칙을 이용해서 불로불사를 달성하는 것이 가능할 것이다.
인류진화
바이오에 대해 써보겠다고 생각한 것은 그저 충동이었다. 내가 이런 분야도 생각하면 뭔가 나올 수 있을까
싶어서 그냥 생각해봤다. 그러다 친숙한 기업이 없어 검색해보니 SK가 오랫동안 바이오에 투자하고 있었다는 걸 보고 SK로 정하기로 했다. 그거 말고 별다른 이유는 없다. 바이오가 뭔지 생각해봤다. 생명공학이다. 생명공학이 뭔지 생각해보았다. 생명을 다루는 연금술사다. 연금술은 비금속을 귀금속으로 변화시키거나 늙지 않는 영약을 만들려고 했던 원시 화학 기술이라 한다. 연금술은 비록 결과를 내지는 못했지만 연금술을 뜻하는 Alchemy가 화학을 뜻하는 Chemistry의 어원이 되었을 정도 과학에 영향을 끼치긴 했다고
한다. 그 연금술로 불로불사가 떠올랐다. 바이오에 종사하는 이들은 불로불사를 연구하는 현대의
연금술사와 무엇이 다르다 할 수 있나 싶었다. 지금도 바이오가 가장 많이 활약하는 곳이 제약이다. 장생을 위한 연구를 하는 연금술사들이다. 생각의 흐름은 다음과 같다. 불로불사가 뭐지? 영원히 젊게 사는 것. 영원히 젊게 살면 뭐가 좋지? 우주를 떠돌아다닐 수 있는 것. 우주를 떠돌아다니면 뭐가 좋지? 세상의 존재이유를 규명하기 위한 정보를 수집하는 것. 그리고 인류를 전 우주에 퍼트리는 것. 사명감을 느꼈다. 인류가 동물이자 지적 생명체로서 가야 할 방향을 위해 필요한 최초의 준비가 바로 불로불사가
되기 위한 인류진화였다.
바이오가 불로불사, 인류진화를 위한 연구에 장벽은 크게 두 가지 있다. 윤리와 인식이다. 윤리는 원래부터 사상가나 철학자가 담당해야 한다. 만약 낡은 윤리로 과학의 발전이 더디게 되었다면
그건 인문학의 책임이다. 낡은 윤리로 유전자 조작이 부도덕하다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생각해보자. 현재 인류는 진화의 결과다. 오랫동안 진화하여 인류가 되었다. 그런 인류가 자연에서 진화하면 좋고 인류가 진화시키면 나쁘다 할 수 있는가? 만약 그게 나쁘다면 진화 가능한 유전자를 자연에
뿌려 미생물의 유전자를 받아드려 진화한 고구마처럼 자연스럽게 진화할 수 있게 유도하면 좋다고 말할 것인가? 이런 건 무의미한 짓이다. 약을 먹이지 않고 아이를 키우는 것이 옳다 생각하는
것과 비슷한 자연 맹신이다.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자. 인류가 인류를 진화시키는 것만으로 비윤리적인 것이 아니다. 인간의 특성을 유지한 상태에서 체내 시간만 반복하는 것으로 불로불사를 얻은 것이 어떻게 비윤리적일
수 있겠는가. 나는 불변가치를 주장해왔다. 인류가 진화하지 않는 이상 변하지 않는 가치다. 그걸 지키는 것이 인간의 행복이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건 진화를 하지 않았다는 전제에서 나타나는
불변가치다. 만약 채식만으로 살 수 있는 개체가 되면 채식주의도
불변가치가 될 것이다. 인간의 불변가치는 인간의 유전자에 근거한 것이기에 유전자가 바뀌면 불변가치도 그것에 맞춰 바뀌게 된다. 인간을 사랑하는 인본주의자이기에 인간의 특성을 유지한
상태에서 체내 시간을 반복하는 진화가 바람직하다 주장할 뿐이다. 종교계가 인류의 진화에 반대할 수 있다고 본다. 하지만 생각해보자. 기독교의 성서에 따르면 900년도 살았다 하는 자도 있다고 들었다. 다른 종교는 어떤지 모르겠지만 성서의 해석에 따라 젊음이나 수명 정도는 수용할 수 있는
게 아닐까 싶다. 무엇보다 종교도 이 세상의 존재이유가 궁금할 거라
생각한다. 신이 있는 종교는 대부분 세상의 존재이유가 신의
의지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렇다면 우주 또한 신의 의지로 만들어졌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우주를 떠돌며 세상의 존재이유를 찾아 다니는 것이 신의 의지를 부정하는 것이 되지는 않는다고
본다. 그걸 위해서 젊음을 유지하고 수명을 늘리는 것은
우주에 진출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개인적으로 현존하는 종교는 모순이 많으므로 믿기가 어렵다. 하지만 신의 존재는 있는지 없는지 확신할 수가 없다. 그래서 세상의 존재이유 중 신에 의함을 부정할 수 없다. 그저 모르겠다. 모르니까 알고 싶다. 이외 수많은 사람들이 고정관념에 의해 유전자 조작을
통한 인류 진화를 부정적으로 바라볼 수 있다. 단호하게 말하겠다. 태양계에서도 벗어나지 못한 문명의 윤리로 옳고 그름을 따지면 언제까지고 우주로 진출할 수가 없다. 윤리도 진화해야 한다.
다음은 인식의 문제가 있다. 종의 번영과 영원진리를 위해 인류진화라는 인류의
공통된 과제를 실현할 수 있는 분야가 바이오임에도 바이오에 대한 인식이 그리 좋지 못하다. 다른 분야에 비해 얻는 부와 명성이 적다고 들었다. 부는 지극히 자본주의적인 결과다. 시장경제의 논리에 의해 보통 수요와 공급으로 가치가
판단되어 현재 수요가 높은 산업이 부를 얻기가 좋다. 대표적으로 IT가 그렇다. 지금 IT의 현재 수요가 높기
때문에 부를 얻기가 좋은 것이다. 그런데 바이오는 그렇지 못하다. 바이오가 하는 것 중 하나인 제약의 결과가 나오려면 보통 십 년은 걸린다고 한다. 자본주의 원칙에 따르면 원래 이런 분야는 부를 얻기가 쉽지 않다. 더군다나 바이오는 새로운 것으로 인식되는 경향이
높다. 새롭기에 친숙하지가 않아 관심도 적고 투자도 적다. 최근 들어 바이오에 대한 투자가 늘었다고 하는데
아직도 많이 부족하다. 바이오의 역할을 생각해보면 인류의 잉여자원 대부분이 바이오에 투자되더라도 이상할 것이 없다. 그 정도로 진화는 중요하다. 인류를 위해 화성으로 가는 것은 훌륭하다 보나 그 전에 인류가 우주에 적합한 몸으로 진화하는
것이 선결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겠다. 둘 다 중요하면 우선순위가 있기 마련이다. 둘 다 같이 진행하되, 투자되는 자원은 인류진화에 보다 더 투자해야 한다. 원래 새로운 과학이나 사상은 친숙하지 않아 여러모로 힘들다. 천 년 전 양자역학이나 자유주의를 들고 가면 어떻게 되겠는가? 마녀 사냥이나 당하지 않으면 다행이다. 바이오가 부를 얻기 위해서는 인식을 개선해야 한다. 바이오야말로 인류가 전력으로 투자해야 할 분야라는
걸 인류 모두 인식해야 한다.
바이오에는 투자뿐만이 아니라 인재도 많이 필요하다. 그런데 이토록 중요한 역할임에도 바이오는 학생들의
관심밖에 있다. 최근 초중고 장래희망 5개를 중복을 제외하고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운동선수, 의사, 교사, 창작자, 경찰, 군인, 간호사, 컴퓨터공학자 정도다. 순수과학이 없다. 컴퓨터 공학을 제외하면 응용과학도 없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나. 부를 목적으로 한 자본가도 없다. 유명하거나 안정적인 것뿐이다. 유명한 것은 매체의 영향이고 안정적인 것은 보호자의 영향일 것이다. 대부분 외부의 영향으로 장래희망이 나타났다. 아이의 생각 속에서 나타난 고유한 순수한 꿈이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바람직한 현상이 아니다. 자유의지가 제대로 성장하지 못하다는 게 나타난 것이기
때문이다. 고찰 없는 자유의지는 없다. 외부의 영향으로 나오는 결과가 나오는 것은 외부의
의지가 반영된 것일 뿐이다. 자유의지로 유명하거나 안정적인 것을 고를 확률도 있겠지만 거창한 꿈을 꾸게 되는 초등학생 때부터 이런 경향이 나타난다는 것은 외부의 영향이
크다고 본다. 만약 보호자가 안정적인 것이 좋다는 인식이 없었다면
다른 장래희망을 가졌을 거라 생각한다. 이런 장래희망은 정상적인 자유의지가 없단 해석이 될 수밖에 없다. 이걸 바꿔야 한다. 자유의지를 얻을 수 있는 교육이 필요하다. 암기하는 교육이 아닌 사유하는 교육으로 나아가야 한다. 학생들이 자유의지를 얻은 다음에는 바이오가 친숙하도록
해야 한다. 바이오가 과거의 연금술사와 비슷한 일을 하고 있음을
알리고 연금술사가 되는 것에 대한 흥미를 느끼게끔 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바이오와 연금술을 연결하는 것만으로도 큰 홍보효과가 있을 것 같다. 연금술 관련 게임이나 만화는 상당히 유명하기 때문이다. 새롭게 관련 창작물을 만드는 것도 좋을 것이다. 과학의 발전으로 대부분의 단순 직업이 사라지므로
연구자는 늘어날수록 바람직하다. 특히 자연과학은 늘어날수록 좋다. 지금 당장 자본주의에 의해 수요가 높은 응용과학의 수익이 높지만 자동화가 될수록 자연과학의 수익이 높아질 것이다. 일정이상 자동화가 되면 기술초격차가 보다 높은 수익을
얻게 만들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응용과학으로 당장의 수익을 얻고 자연과학에 투자를 하는 것이 미래지향적일 것이다.
지금 한국은 줄세우기 때문에 인식이 좋지 못한 분야에도
인재가 들어가고 있다. 간판 따러 들어갔다가 그 분야에서 일하게 되는 것이다. 예컨대 교수의 유혹으로 대학원에 가면 본인의 의지와 무관하게 계속 그 분야에서 일하게 되기도 한다. 황당하게도 부정적으로 여겨지는 줄세우기가 다양한
분야에 인재를 넣는 일을 하게 만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개인의 의지와 무관할 확률이 높으므로 직업만족도가 높기 어려워 성취도나 행복 지수도 상대적으로 높기가 어렵다. 성취도나 행복을 볼 때 줄세우기보다는 본인의 적성에
맞는 걸 하도록 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만약 인류가 불로불사로 진화하면 문제점이 하나 있다. 지구 포화문제다. 지금도 인류가 지나치게 많다고 한다. 그런 상황에서 불로불사 개체가 늘어서는 안 된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은 간단하게 해결할 수 있다. 모든 진화한 인류는 우주개척에 나선다는 전제가 있으면
된다. 첫 번째 인생을 지구에서 살다가 진화한 후에 두
번째 인생을 우주에서 사는 것이다. 오히려 이래야 지구 포화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불로불사 정도의 이익이 아니면 지구를 떠날 사람이 얼마나 있겠나. 이것이 말처럼 쉽지 않다는 걸 안다. 그래도 방향이 정해져야 나아갈 수 있다.
윤리 문제를 해결하고 인식을 개선하는 것으로 불로불사
연구의 장벽을 허물어 인류의 관심과 투자를 늘리고 우수한 인재를 받아드린다. 그것으로 인류진화를 위한 준비를 마치게 된다. 인류가 진화하여 우주로 진출해서 종을 퍼트리고 정보를
모아 세상의 존재이유를 규명하여 동물과 지적 생명체의 사명을 다하길 바란다. 영원진리에 도달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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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이 쇠퇴하니 혈액형이나 MBTI 같은 걸로 사람을 판단하죠. 다음은 정부와 인사입니다.
정세가 복잡하게 돌아가고 있는 시대, 낡은 관념을 가지고 있으면 살아남을 수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