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8년 중화민국 국방부 2청이 외교부에 보낸 문서의 부록 지도
일본의 패망 이후 간도는 국공내전으로 국민당 및 중공군과 그를 후원하는 소련군의 각축장이 되었으며 간도는 중공군이 점령하였다. 하지만 간도를 자국이 관리하려는 중국의 의도와는 정반대로 소련은 다른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간도를 북한에게 편입시키는 것으로서, 소련은 비록 일면으로는 공산주의 맹방인 중국 공산당을 지원하였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이후 자국의 패권을 위협할 수도 있는 중국의 영향력을 주의하고 있었으며, 음양으로 중국을 약화시킬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소련은 중국과는 별개의 민족이며 북한과는 동일한 민족이 다수 분포되어 있었던 간도를 중국에서 분할하여 북한에 편입시켜 중국을 약화시키고 북한을 강화하여 중국을 견제하게 함으로써 다소나마 중국과 북한의 균형을 맞추고 자국의 유일 패권 확립을 도모하였던 것이다. 국공내전으로 인하여 만주에 소련군이 주둔하고 있었던 시국을 이용하여 소련은 중국을 배제시킬 수 있었으며, 그로 인하여 북한과 소련이 참여한 이 제1차 평양협정(1947.5)에서 북한에게 랴오닝성(遼寧省), 안둥성{安東省, 현 단둥(丹東) 부근} 등 요동반도와 남만주 전체를 편입시키기로 협정하였다.
그리고 제2차 평양협정(1948.2)에서는 요동반도를 제외한 안둥성, 지린(구 만주국 행정구역), 간도(구 만주국 행정구역, 현 옌지 부근)의 3개의 자치구를 북한에 귀속시키기로 협의하였다. 사실상 전 간도를 북한의 영토로 귀속시키기로 하였던 것이다. 그에 따라 북한의 정규군이 옌지(延吉), 무단강(牧丹江), 무링(穆陵) 지역에 주둔(1948.7)하기까지 한다.
이러한 소련의 옹호와 지지에 힘입어 북한은 고구려 이래의 고토이자 한민족 구성원의 다수까지 포함한 간도 영유는 물론이고, 남북 간의 관계에서 강력한 우세를 점할 수 있는 위치까지 가지게 되었다. 아마도 이같은 낙관적인 상황은 북한의 김일성으로 하여금 강렬한 공산통일의 야심을 품게 되는 이유 중의 하나로 작용하였을 것이라고 추측된다. 그러한 이유들을 원인으로 하여 결국 2년 만에 6.25 전쟁이 발발하게 된다.
잘 아시다시피 전쟁 초반은 북한이 우세하였다. 그러나 연합군의 참전으로 전세가 역전되었으며 북한은 중국의 구원에 의존하여 간신히 북진통일을 면하고 휴전을 체결하고 마는 패전이나 다름없는 상황에서 종전을 하게 되었다. 이 때문에 북한의 국력과 국가적 위신은 크게 추락하였으며, 뿐만 아니라 중국의 참전으로 인해 북한에서의 중국의 영향력이 매우 커져서 중국에게 상당 부분의 지분을 양보할 수 밖에 없게 되었다. 당연하게도 간도의 북한편입은 말 그대로 계획으로써만 종결되었다. 간도는 명실공히 중국의 영토가 되어 옌볜조선민족자치구가 설치(1952)되었다가 옌볜조선족자치주로 변경(1955)되었으며 그 땅의 한민족은 중국의 소수민족인 재중교포(조선족)로써 현존하게 된다.
조중변계조약(1962)으로 북한과 중국은 간도의 중국 소유를 인정하였으며 백두산을 천지를 경계로 하여 북한이 2/3, 중국은 1/3로 분할하기로 협약하였다. 이리하여 대한제국 이래로 간도를 한반도 국가쪽에서 먹으려고 했던 시도는 다시 한번 무위로 돌아가게 된다.
요약
1. 중국 국공내전 당시 소련은 향후 중공 견제를 목적으로 간도를 북한에 넘기려 했음.
2. 소련이 북한을 지원한다는 사실에 들뜬 김돼지가 한국전쟁을 일으킴.
3. 6.25 전쟁 패배후 중공군 입김이 세져 간도 주기로 한게 무효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