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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 섬이의 문학산책 - 2014 제5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0) 2014/05/21 PM 02:43

2014 제5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2014 제5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을 읽으며, 저는 우리나라의 젊은 작가들이 아직 어떤 경향을 따라가고 있다는 것을 느낍니다. 좋게 말하면 주변의 흐름을 읽어내는 능력들이 출중하다는 것이고, 나쁘게 말하면 새로운 시선이 부족하다는 뜻이지요.

저번에 읽은 『2011 제2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에 실린 작품들보단 좋다고 여겨지는 작품들이 많았습니다. 제 사적인 생각을 좀 적어보자면, 지금 출발하는 젊은 작가들이 그때 출발했던 아주 조금 더 늙은 작가들보단 앞선 출발점에 서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세상을 더 예리하게 바라보고 다시 재구성하는데 탁월한 역량을 드러내고 있지요. 물론 그것이 작가와 작품의 역량을 판단하는 전부가 될 순 없겠지만 한국 문학의 미래를 읽는 데는 주요한 관점이라고 봅니다.

이번 작품집에는 황정은 작가의 「상류엔 맹금류」, 조해진 작가의 「빛의 호위」, 윤이형 작가의 「쿤의 여행」, 최은미 작가의 「창 너머 겨울」, 기준영 작가의 「이상한 정열」, 손보미 작가의 「산책」, 최은영 작가의 「쇼코의 미소」가 실려 있습니다. 전체적으로 충격보다는 내실, 이미지보다는 서사, 해체보다는 구성에 중점을 둔 작품들입니다. 이를 보면 넓게는 예술계, 좁게는 문학계의 흐름이 다시 한 번 변화하려는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예전에 해외의 문학계에서 키치와 해체에 천착하는 자신들을 스스로 비판하며 서사를 복구하자는 의견이 늘고 있다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이번 작품집을 읽으며 그런 경향이 우리나라에 상륙했다는 느낌을 받기도 하는군요. 물론 속단할 일은 아닙니다. 이 또한 단순한 유행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이런 주목할 만한 경향에도 아쉬운 부분은 분명 존재합니다. 이들에게선 변화의 시도는 보이지만 그것이 진정한 의미에서의 변화라기보다는 과거로의 회귀의 느낌이 강합니다. 마치 삶에 염증이 난 사람이 그보다 더 과거의 자신을 그리워하는 모습을 떠올리게 하지요. 그것이 어떤 해결책으로 제시되기보다는 도피처라는 느낌이 강합니다. 이들은 2014년의 젊은 작가들이지만 2011년의 젊은 작가들보다 젊은 작품을 쓰지는 않았습니다. 분명 탄탄하게 완성된 소설임에도 어쩐지 매력이 덜 한 이유는 거기에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들에게서 젊음을 읽을 수 있는 단서는 소재와 표현, 세련된 문장입니다. 무모한 도전이나 새로운 시각의 제시는 찾기 힘든 것 같습니다. 분명 젊은 작가라는 이유만으로 완성도보다는 새로움을 추구하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모든 작가에게는 창작의 자유가 있고 자신의 작품은 스스로 결정하는 거니까요. 하지만 새롭다고 해도 완성도가 떨어질 이유도 없고, 완성도가 높다고 해서 새롭지 않을 이유도 없지요. 그 둘은 수직적인 반비례가 관계가 아니니까요.

정리해보면, 『2014 제5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에 실린 작품들은 이전보다 더 완성돼있었습니다. 하지만 앞으로 우리 문학계가 나아갈 지표가 될 만한 작품은 없었습니다. 사실 이들의 잘못은 아닙니다. 문학을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기대를 걸어볼 뿐이죠. 오히려 이들의 탄탄한 기본 위에 앞으로 새로운 도전이 함께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미래로 향하는 밑거름이 될 것입니다.

ps. 저는 개인적으로 조해진 작가의 「빛의 호위」가 인상 깊더군요. 이 작가, 언젠가 큰일 낼 듯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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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 김준희의 즐거운 살인사건 (0) 2014/05/21 PM 02:41

린지 데이비스 <베누스의 구리반지>(1991)

2000년 전 서기 1세기의 로마 사람들은 어떻게 살고 있었을까. 제정 로마의 9대 황제인 베스파시아누스가 제위에 오른 것은 서기 69년이다. 당시 로마제국은 광활한 영토를 보유하고 있었다.

동쪽의 시리아부터 서쪽의 히스파니아(스페인)까지가 로마제국의 속국이었다. 베스파시아누스의 아들인 티투스가 유대전쟁을 승리로 이끌었기 때문에 제국의 동방도 안정된 듯이 보였고, 브리타니아(영국)를 공략하는 과정도 꾸준히 이루어지고 있었다.

반면에 이즈음 로마의 국내정세는 그다지 안정적이지 못했다. 서기 69년 한 해에만 황제가 세 차례 바뀌었다. 내전이 일어났고 신전은 파괴되고 불타올랐다. 그 다음에 황제가 된 인물이 베스파시아누스다. 이 한 해 동안 수도 로마의 시민들은 무척 혼란스러운 나날을 보냈을 것이다.

이런 시기였던 만큼 황제의 자리를 둘러싼 음모도 있었을 테고, 불안한 치안을 틈타 시장이나 광장에서 다른 사람의 재물을 노리는 사람도 많았을 것이다. 서기 69년은 로마시민들에게 돌이키기 싫은 악몽의 해였을지 몰라도, 상상력 풍부한 작가에게는 좋은 이야기 소재를 제공해주는 시기였을 수도 있다.

서기 1세기 혼란스러운 로마

영국 작가 린지 데이비스의 역사 추리 소설 <베누스의 구리반지>의 무대도 바로 이 시기다. 서기 71년 여름, 베스파시아누스 황제가 제위에 오른지 2년 후다. 베스파시아누스는 혼란기를 거쳐서 황제가 되었지만, 모든 로마인들이 그를 믿고 따르는 것은 아니다. 뒷전에서 반란을 꿈꾸는 귀족도 있고, 이때를 틈타서 부정한 방법으로 한 밑천 챙기려는 사람들도 있다. 로마의 밤거리는 여전히 위험하고, 낮에도 혼자 안심하고 돌아다니기 힘든 구역이 있다.

주인공 디디우스 팔코는 이런 로마 시내에서 탐정으로 활동하는 인물이다. 30대 초반의 나이에 가족과 떨어져서 허름한 아파트에서 혼자 산다. 가진 재산도 없고 벌이도 시원치 않아서 그런지 아직까지 미혼이다. 하는 일은 주로 가정문제와 관련된 정보수집이다. 이혼문제나 유산상속문제 같은 일을 주로 다룬다. 간단하게 말해서 크게 돈 되는 일을 하고 있지 않다는 이야기다.

그런 팔코에게 어느 날 한 갑부로부터 의뢰가 들어온다. 의뢰자는 자신과 함께 사업을 하는 동료인 노부스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노부스가 세베리나라는 이름의 여자와 약혼을 했는데 이 여자의 정체가 수상하다는 것이다. 세베리나는 이전에도 세 차례나 결혼한 경력이 있다. 당시 로마사회에서 그건 특별히 이상할 것도 없는 일이다.

문제는 세 차례 모두 세베리나의 남편이 결혼 후 얼마 지나지 않아서 의문스러운 죽음을 맞았다는 점이다. 세 남편 모두 부자였기 때문에 결혼을 거듭할수록 세베리나의 재산도 늘어갔다. 남편의 재산을 노리고 세베리나가 교묘한 방법으로 살인을 한 것은 아닌지 의심이 드는 것이다. 세베리나가 세 명의 남편과 함께 살았던 기간은 다 합해봐야 채 3년이 되지 않는다. 치안관이 이 세 명의 죽음을 조사했지만 특별히 세베리나에게 혐의를 둘만한 증거를 발견할 수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세베리나는 죽은 세 명의 남편의 유산을 물려받아서 호화로운 생활을 하고 있다. 그러던 그녀가 뭐가 아쉬운지 다시 부동산 갑부인 노부스에게 접근해서 결혼을 약속 받아낸 것이다. 팔코를 찾아온 의뢰인은 세베리나가 노부스를 죽이려 한다면서 그녀를 조사해달라고 한다. 돈은 얼마가 들어도 상관없다는 이야기를 곁들이면서.

팔코가 이 문제를 제대로 해결한다면 꽤 두둑한 돈을 챙길 수 있는 것이다. 그러면 시끄럽고 악취가 풍기는 낡은 아파트를 벗어날 수도 있을지 모른다. 팔코는 의뢰를 수락하고 혼자서 본격적인 조사에 들어간다. 죽은 전 남편들의 주위 사람을 만나보고 세베리나와 단독으로 대치하기도 한다. 그러던 도중 또 다른 살인사건이 터지고 만다.

로마에서 활동하는 가난한 탐정 팔코

서기 1세기 로마 사람들이 사는 모습도 같은 시기 동양의 사람들과 크게 다를게 없다. 겉모습이야 차이가 있겠지만 본질은 마찬가지다. 당시 로마는 계급사회였다. 귀족, 중산계급, 자유시민, 노예 등의 계급으로 나뉘어진 사회다. 자유시민 신분의 남자가 중산계급의 여자를 넘본다는 것은 상상하기도 힘든 일이다. 팔코는 이런 자유시민의 신분이다. 노예의 신세는 아니지만 돈벌이가 시원찮기 때문에 그보다 특별히 더 좋을 것도 없다.

자유시민이 중산계급으로 오르기 위해서는 40만 세스테르티우스(로마의 화폐단위)의 돈이 있어야 한다. 팔코의 1년 생활비는 약 1천 세스테르티우스다. 이 정도면 팔코의 신분과 중산계급의 신분차이가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다.

하지만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가진 자들의 욕심은 끝이 없는 법. 당시 로마에서도 중산계급의 사람들은 자신의 위치에 만족하지 못한다. 중산계급의 사람들은 어떻게든 서민들에게 돈을 뜯어내서 한 단계 더 신분상승을 하려한다.

서민들을 상대로 고리대금업을 하고 부동산을 임대한다. 대출금이 연체되면 가혹한 방법으로 돈을 징수한다. 팔코는 이런 중산계급의 사람들을 증오한다. 임대업을 가리켜서 더러운 전염병 같은 것이라고 하고, 시내에는 사회 기생충들이 득실거린다고 말한다. 제정로마에 반감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로마는 공화정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당당하게 주장하기도 한다.

그렇다고 팔코가 세상에 대한 분노로 뭉친 인간은 아니다. 젊은 나이인 만큼 그도 사람들을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유머감각을 잃지 않는다. 친구와 함께 포도주를 마시면서 기분 좋게 취하고, 술집에서 괜찮은 여종업원에게 농담을 건네기도 한다. 조카들을 자상하게 돌봐주는 좋은 삼촌이기도 하다.

소설로 복원한 2000년 전의 로마

<베누스의 구리반지>는 '디디우스 팔코 시리즈'의 세 번째 편이다. 전편인 <실버 피그>와 <청동 조각상의 그림자>에서 팔코는 베스파시아누스 황제의 특명을 받고 로마제국을 둘러싼 음모를 파헤지기 위해서 제국의 변방을 누비며 활약했다. 그러던 그가 정치판에 환멸을 느끼고 다시 자신의 아파트와 로마의 뒷골목으로 돌아온 것이다.

그렇지만 사정은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기득권층이 장악하고 있는 로마시내의 풍경도 팔코가 환멸을 느끼기에는 충분하다. 팔코는 돈과 권력을 가진 사람에게 정면으로 쳐들어갔다가 반죽음이 되도록 얻어맞고 거리에 버려지기도 하고, 사람들이 살고 있는 아파트가 폭삭 무너져 내리는 모습을 눈 앞에서 목격한다.

사건도 사건이지만 작가가 묘사하는 1세기 로마의 생생한 풍경 또한 흥미롭다. 팔코는 파리가 득실득실한 술집에서 포도주를 마시며 빵 사이에 오이 피클을 끼워서 먹고, 친숙한 오줌냄새와 썩은 양배추 냄새가 진동하는 골목을 지나서 자신의 집으로 향한다. <베누스의 구리반지>를 펼치면 후덥지근한 열기가 느껴지는 2000년 전 로마의 뒷골목이 눈앞에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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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 문너머의 세계 - 강산무진 (0) 2014/05/21 PM 02:35

김훈, 『강산무진』, 문학동네, 2006.

 

  서평쓰기가 즐겁지만은 않다. 작가들의 옥고(玉稿)를 평하는 일 자체가 만만치 않기도 하거니와, 그것의 흠결을 지적하려면 상당히 치밀한 안목을 유지해야 하기 때문이다. (나 같은 사람은 안목 없음을 감추기 위해 어설프기까지 한 수식어들로 원고를 뒤덮으려 안간힘을 다하기도 한다.)

 

  이렇게 안목을 유지한 채, 서평 쓰는 사람은 독자에게 설득시키기 위한 높은 수준의 논조를 공고하게 가다듬어야 한다.

 

  서평이 작품을 투영(投影)하긴 하지만, 서평을 통해 작품의 진가를 온전히 느낄 순 없다. 서평은 작품이 없으면 생길 수 없는 그림자이다. 또한 서평은 작품을 드러내는 거울 같은 수단이자, 그것에 담긴 의미들을 찾아내게끔 돕는 필터이다. 손에 든 필터를 내려놓거나, 그것을 다른 것으로 바꿀 수 없다는 점에서 서평자(者)는 한계를 지닌다. 나는 아무리 좋은 서평이라 할지라도 작품 자체가 지닌 격(格)과 위(位)를 뛰어넘을 순 없다고 믿는다. 작품을 보조하는 부가물인 서평은 작품의 질에 따라 격과 위가 결정되는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나는 왜 이런 말들로 김훈의『강산무진』이라는 책의 서평을 시작했는가. 김훈의 글에 대해, 그의 글이 지닌 격과 위에 걸맞은 서평을 쓸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나는 김훈이 독자의 뇌리에 감흥과 감동을 어떻게 자아내는지에 대한 약간의 실마리를 지녔을 뿐, 그것이 무엇인지를 매끈하게 설명할 실력은 없다. 그런 까닭에 나는 이 책의 일독을 권하는 바이다. 김훈이 꾸려놓은 서사의 숲으로, 그 우거진 가지 아래 깊이 낀 어둑함으로 나는 모두를 기꺼이 청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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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산무진도. 이 그림을 깊이 들여다보고 소설을 읽어보세요. 소설의 맛이 달라집니다.

 

  김훈의 글은 강고하다. 서사의 숲에 깊은 뿌리를 박은 채 침침한 그늘을 드리우는 그의 세계는 창조자의 눈매를 닮아 몹시 서늘하다. 숲이 만든 그늘은 짙고 무겁다. 기름기 없는 짧은 문장은 뻑뻑하기 이를 데 없었기에 행간을 따라가던 나는 좀처럼 느긋할 수 없었다. 늘 그랬듯이, 김훈이 조성한 서사의 숲은 나를 긴장으로 옥죄게 하였다.

 

  작가 김훈이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들을 따라가노라면, 이 빈틈없는 유물론적인 관점에 이내 숨이 막히고 만다. 아내의 임종을 지키는 사내의 부푼 방광과 암 선고를 받은 사내가〈강산무진도〉를 보고 깨닫는 숨 막힘 속에서 삶의 밀도는 너무도 빡빡하다. 너의 고통은 너의 것일 뿐, 나의 것은 아니라는 명제 속에서 김훈의 인물들은 나눌 수 없는 고통 때문에 슬퍼하고, 끓어오른 슬픔을 지그시 눌러 아래로 퍼져나가게 만든다. 기쁨도 슬픔도, 사실은 나눠지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나눠지지 않기에 커질 리도, 줄어들 리도 없다.

 

  슬픔이라는 감정은 공감되는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공감은 절대로 온전히 이뤄질 수 없다. 누군가가 넘어져 피를 흘릴 때, 사람은 다친 이의 고통에 공감함으로써 교감한다. 하지만 그 고통은 내게 새겨진 기억의 복원에서 기인한 정신적 반응이며, 다친 이가 겪은 고통은 다친 이 자신에게 고유하게 속한 것이다. 아픔을 나누었다고 해서 아픔이 줄어드는 게 아니라, 위로라는 감화를 받음으로써 슬픔의 반대 심리를 보상받는 것이다. 결론은 이러하다, 너의 고통은 너의 고통이요, 나의 고통은 나의 고통이다.

 

  나눌 수 없는 슬픔 속에서 각각의 인간이 속한 육신이라는 철폐가 너무도 공고하다는 사실이 인간이 지닌 한계를 명징하게 드러내기 때문에, 김훈의 소설은 아름답다. 군더더기 없이 담박하기에 그의 문장들은 삶 자체를 겨누는데 어려움이 없다. 맑은 문장은 가벼이 뜨는 듯하다가 날카로이 내리 찔러 깊이 스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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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이 오기 전에 읽어보세요.

만물에 생동감이 드는 계절에 이 책을 읽는 건 너무 맥 빠지는 일일 겁니다.

 

  사건을 조성하고, 이를 가다듬는 소설가 김훈의 시선은 냉정하다. 그 냉엄함은 차라리 뜨겁다. 높이 솟은 파도 아래의 그늘진 어두컴컴함, 밑이 빠진다고 표현된 강물의 소리, 오줌으로 팽팽해진 아랫배에서 느껴지는 몸의 조바심, 늙음과 질병을 통해 마침내 드러나 버린 인간의 화장기 없는 초라하고도 숭고한 맨얼굴을 김훈은 들여다보았고, 문장을 통해 독자에게 드러내어 보인다. 그가 맹렬하게 바라본 광경들을 바라보며 독자는 가장 뜨거운 얼음을, 가장 차가운 불꽃을 품는다.

 

  내가『강산무진』을 통해 느낀 가장 큰 미덕은 인간에 대한 김훈의 시선이다. 간암과의 기나긴 투병을 눈앞에 둔 아들은 육탈한 어머니의 유골을 마른 시선으로 바라본다. 그 시선은 그저 메말라버리기만 한 것이 아니다. 그 서술 너머엔 서술되지 않은 복잡한 감정들이 출렁이고 있다. 뇌종양으로 빠개질 듯한 머리통을 부여잡은 아내를 바라보는 남편의 시선 또한 마찬가지다. 사랑의 부재 때문이 아니라, 어찌 할 수 없는 무력함 때문에 그는 고통을 겪는 아내를 무참한 시선으로 바라본다. 메말라 버린 눈물, 단독자일 수밖에 없는 인간은 초라함 속에서, 고독 속에서, 침묵 속에서, 질병 속에서, 외로움 속에서, 인생이 가한 철저한 패배와 패퇴 속에서 오히려 인간이 된다. 인간이 지닌 무력함은 마침내 역설 속에서 아름다워진다. 단독자인 인간의 고독이 온전히 그만의 것이라는, 인간이 진 짐은 절대로 나눠지지 않는다는 준엄한 명제야말로 누추한 생을 오히려 활짝 피어나게 만드는 역설인 셈이다.

 

  ‘너의 고통은 너의 고통이요, 나의 고통은 나의 고통이다’라는 명제 속에서, 그것의 바닥엔 ‘어찌 할 수 없는 안타까움’이 자리한다. 강과 산은 다함이 없다(江山無盡). 그렇다. 그것은 역설적으로 인생의 삶이 다해감에 대해 ‘노래’하고 있다. 삶은 다 하여 어디로 가는가? 그것들은 화장 후 한 줌의 유골이 되어 어디 메로 가는가. 혹여 머나먼 속세로, 경혈이 끊어지는 인생의 후반부로, 약간의 돈을 쥐고 이국의 땅으로, 해독할 수 없는 시그널로 뻑뻑거리는 항로표지판 앞으로 가는가?

 

  아, 실로 강산은 다함이 없어라.

 

  삶의 자취는 간 곳이 없어라.

 

  글이 남기는 향취의 머물 곳이 없어라. (*)

원문 보러가기 : http://www.fountainwz.com/index.php?mid=board_UkHR07&document_srl=46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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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 [서평] 조선의 탐식가들 - 김정호 (0) 2014/05/08 PM 03:53

이 세상이 흑백이었던 적은 단 한번도 없었지만, 한국전쟁 이전 서울의 모습을 컬러사진으로 보게 되면 과거의 사진이 아닌것 같은 묘한 느낌을 받곤 합니다. 1950년대의 한반도가 컬러인 것마저 어색한 마당에 조선시대가 컬러였다는 것은 상상하기 힘듭니다. 테크놀로지는 인간이 세상을 경험하고 지각하는 방식 자체를 변화시키고, 공진화합니다. 인간을 둘러싼 기술생태계 자체가 근본적으로 변화하면, 사회와 개인의 존재 양식 자체를 다르게 규정짓게 됩니다. 우리는 사진을 통해 과거를 생각하면, 흑백사진의 모습을 과거의 모습으로 인식합니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조선시대의 음식문화 역시 자료의 부족 때문에 많은 오해를 받고 있습니다. 저자 김정호는《조선의 탐식가들》을 통해 독자들에게 진짜 조선시대의 음식문화라는 대동여지도를 보여줍니다.

불교를 기반으로 한 고려가 멸망하면서 육식 금지는 해제되었지만 성리학을 기반으로 하는 조선 역시 이념적으로 음식을 즐기는 것에 대해 엄격했습니다. 3첩, 5첩 밥상과 같은 규제를 통해 백성들의 밥상을 통제했고, 사대부들도 성리학의 예를 식사예절로 시작했습니다. 청백리처럼 간소한 식사를 하는 것은 이념적으로 장려된 부분이기도 하지만, 더 중요한 이유는 경제적 이유였습니다. 너도나도 풍족하게 먹을 수 있는 시대가 아니었고, 주로 먹던 고기가 소고기였기 때문에 농촌의 농사역량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문제였습니다. 정부에서 소고기 금령을 내리자 율곡이이 같은 사람은 평생 소고기를 먹지 않았습니다.

정부의 규제로 대중의 기호를 억제하고자 하는 시도는 역사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미국의 금주령처럼 조선시대의 소고기 금지령 또한 그런 정부의 시도 중 하나였습니다. 소고기 금령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역사를 조금만 알고 있다면 누구나 예상할 수 있습니다. 소고기 금령으로 인해 유통, 판매가 음성화되었고 가격이 상승했습니다. 사대부는 금령을 지킬 생각도 없었고 정부도 단속할 능력이 없었습니다. 사대부들 뿐만 아니라 양민들도 소고기를 즐기다 보니 농사를 짓는 주요 동력인 소가 줄어들었고, 이는 개인적인 차원이나 국가적인 차원에서 모두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하지만 조선사람들은 소고기를 먹는것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동국세시기》(1849)에 따르면, "서울 풍속에 음력 10월 초하룻날, 화로 안에 숯을 시뻘겋게 피워 석쇠를 올려놓고 소고기를 기름장, 달걀, 파, 마늘, 산초가루로 양념한 후 구우면서 둘러앉아 먹는 것을 '난로회'라고 한다."라고 하였다. - p.73

조선사람들은 소고기 뿐만 아니라 개고기, 양고기 등 다양한 고기를 즐겨먹었습니다. 개고기의 경우 당시에도 애완용 개와 식용 개의 구별을 해서 전문적으로 키워먹었을 정도였습니다. 기술을 가진 절의 스님들을 착취해서 다양한 두부요리를 해먹었고, 순챗국과 농어회, 대게 등 현대인도 별미라고 인정할만한 음식들을 먹었습니다. 양세욱이 모든 음식은 퓨전이라고 지적한 것처럼 조선시대에도 중국과 일본의 음식들이 들어오면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고, 일정 부분 변화해서 조선화되기도 했습니다. 특히 일본요리는 큰 인기를 끌었는데, 일본음식은 설탕을 사용했기 때문에 그 단맛은 조선 사람들의 입맛을 사로잡았습니다.

역사학자 하비 레벤슈타인은 음식문화의 발달, 전파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상층민의 음식문화라고 지적합니다. 중세 유럽인들의 고혈을 짜서 만든 호화로운 교회들이 그 당시에는 민중들에게 고통을 안겨줬지만 현대에 문화재산으로 남은 것처럼, 조선의 음식문화 역시 사대부를 중심으로 꽃피웠고 계속 이어져 현대의 한국 음식문화의 기원이 됩니다. 저자는 조선시대의 문헌을 바탕으로 당시에도 기름진 음식문화와 현대의 음식 칼럼니스트와 같은 사람도, 대식가도 존재했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결국 조선시대나 현대나 사람 사는것은 공통점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저자는 당시의 사대부들이 '탐식가'였다는 사실을 지적합니다. 조선시대에도 현대인들처럼 고기와 별미를 즐기는 사람들이 존재했지만, 그것은 일부 사대부의 특권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중세 기독교의 7대 죄악론에서 언급하듯 사대부들의 음식문화는 '탐식'이었습니다. 조선시대의 음식문화를 조명하면서 저자는 현대인의 음식문화를 말합니다. 음식이 많다못해 절반이 버려지는 현대사회에서 우리는 음식을 여전히 '탐식'으로 즐기고 있지는 않은지 저자는 묻습니다. 저자는 '탐식'에서 '미식'으로 나아갈 것을 주장합니다. 그것은 음식에 담긴 삶을 맛보는 것입니다.

원문 보러가기 :

http://www.fountainwz.com/index.php?document_srl=44128&mid=board_oCbL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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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 연쇄살인을 하는 살인범의 내면 - (1973) - 2 (0) 2014/05/08 PM 03:51

<제 2의 대죄>, <제 3의 대죄>. 예전에 한길사에서 각각 <화가와 소녀>, <사랑의 종말>이라는 제목으로 출간한 적이 있었다.

로렌스 샌더스 <제 1의 대죄>(1973) 2 - 연쇄살인범의 내면

<제 1의 대죄>는 도서추리소설의 기법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독자들은 작품의 도입부에서 범인의 정체를 알 수 있다. 범인이 누구인지 고민할 필요 없이 작가가 보여주는 범인의 모습을 따라가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동시에 살인범의 시선에서도 작품이 진행되기 때문에 독자들은 살인범의 심리와 입장(?)도 추측할 수 있을 것이다. 그가 왜 살인을 저지르고 다니는지, 살인을 하면서 어떤 만족과 위안을 얻는지 등. <제 1의 대죄>의 연쇄살인범은 다니엘 블랭크 라는 이름의 백인 남성이다. 통계에 의하면 대부분의 연쇄살인은 20-30대의 백인 남성에 의해서 벌어진다.

36살인 다니엘 블랭크는 대형 출판사에 임원으로 근무 중이다. 젊은 나이지만 재능을 인정받아서 고속으로 승진할 수 있었고 그의 연봉은 5만 5천 달러에 이른다. 180cm가 넘는 장신의 다니엘은 학창시절 수영과 육상, 테니스 등 개인종목 스포츠에 뛰어난 능력을 보여 주었다. 때문에 30이 넘은 나이에도 단단한 근육과 균형 잡힌 체형을 가지고 있다.

다니엘은 취미로 등산을 한다. 그의 등반 경험은 초급수준을 넘어섰기에 그는 다양한 등산 장비를 집에 구입해두고 계절에 관계없이 산을 탄다. 다니엘에게 등반은 도전이다. 살인도 도전이다. 그에게 살인하는 것은 등반 기술을 배우는 것과 별 차이가 없다. 책을 통해서 암벽등반 기술을 배울 수 없듯이, 사람을 죽이는 것도 독서를 통해서 익힐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런 것을 배우려면 기술을 습득한 후에 자신의 능력과 용기, 무엇보다도 필요한 행운을 시험해봐야 하는 것이다.

등산을 거듭하다 보면 요령이 생기고 경험이 쌓이듯이 살인도 마찬가지다. 등산에 재미를 붙이면 자주 산에 가고 싶어지는 것처럼 살인도 그렇다. 험한 산에 오를 때 자신에게 꼭 맞는 장비를 챙겨가듯이 살인을 할 때도 자기에게 익숙한 도구를 택해야 한다. 등반도 살인도 모두 위험하다. 위험하다고 등반을 포기할 수 없듯이 어렵다고해서 살인을 그만둘 수도 없는 노릇이다.

성공한 엘리트처럼 보이는 연쇄살인범

다니엘은 그래서 거리로 나선다. 그는 특이하게도 성인 남성을 살해의 대상으로 찾는다. 많은 연쇄살인범들이 여성이나 어린 아이를 노리는 것과는 반대인 것이다. 그것은 그가 가지고 있는 일종의 뒤틀린 성취욕과 관계있다. 건장한 성인 남성에게 반격당할 위험을 무릅쓰고 살인을 행할 때, 그래서 그 시도가 성공했을 때, 그는 ‘해냈다’라는 자부심을 느끼는 것이다. 험한 산의 정상에 올랐을 때 성취감을 느끼는 것처럼.

무엇이 그를 연쇄살인으로 이끌었는지는 알 수 없다. 대부분의 연쇄살인범은 어린 시절 부모에게 학대받았던 경험이 있다. 다니엘은 돈 많은 부모 밑에서 경제적으로 풍족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어린 시절에 학대받은 적은 없지만 대신에 사랑을 받아보지도 못했다. 그의 부모는 그의 입술에 키스를 해주지 않고 언제나 볼에만 키스를 해주었다. 어머니는 그를 부를 때 '다니엘' 또는 '우리 아들'이라고 하지 않고 항상 성과 이름을 합쳐서 '다니엘 블랭크'라고 불렀다.

간단히 말해서 외로운 어린 시절을 보냈다는 얘기다. 외로운 어린 시절은 다니엘의 정신세계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다니엘은 취직해서 승진가도를 달리고 일반인들의 눈에도 성공한 사람으로 보이지만, 아무도 그의 뒤틀린 내면을 알지 못한다. 그는 고전적인 세련미로 장식된 비싼 정장을 입고 고급 승용차를 몰고 다니며 쾌적한 아파트에서 혼자 산다. 부유한 몇몇 친구들과 함께 고급스러운 파티를 벌이기도 한다.

다니엘은 자신의 모든 물건을 깔끔하게 정리해 둔다. 옷장 속의 속옷은 똑같은 각도로 접혀서 차곡차곡 포개어져 있고, 주방에는 식기와 그릇이 항상 깨끗하게 설거지 된 상태다. 거실, 욕실, 침실 전부 방금 체크인해 들어간 고급호텔처럼 완벽한 정돈상태를 보여준다.

일반인들이 보기에 다니엘의 아파트는 수수께끼 그 자체다. 그의 집은 알아내기 힘든 인격의 분열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깔끔함과 질서정연함이 있지만 인간미와 개성은 없다. 오직 황량하게 느껴지기까지 하는 청결함이 있을 뿐이다.

이런 아파트 안에서 다니엘은 혼자 있을 때면 종종 나체가 된다. 자신의 몸에 사슬을 휘감고 거울 앞에 서서 자신의 몸을 감상하며 감탄한다. 그도 가끔씩은 자신이 미쳤다고 생각한다. 그렇더라도 그게 무슨 상관인가. 어차피 세상이 미쳐 돌아가는데.

연쇄살인범의 황량한 내면

다니엘은 동물 애호가이기도 하다. 애완견을 학대하는 사람들에게 폭력을 휘두를 정도다. 범죄소설 속에서 묘사하는 살인범들의 특징 중 하나는 그들의 상당수가 동물 애호가라는 사실이다. <양들의 침묵>의 버팔로 빌은 자신의 애완견이 다칠까봐 눈물을 흘리며 소리를 지른다. 살인범들은 동물들을 사랑스러운 손길로 쓰다듬고 보듬어주면서, 태연하게 사람을 찔러죽이고 내장을 끄집어 내고 눈꺼풀과 귀를 도려낸다. 살인범의 분열된 인격을 보여주는 또 다른 단면이다.

그리고서도 아무런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다. <제1의 대죄>에서 정신분석학자는 연쇄살인을 수사하는 형사 델러니에게 살인범들의 내면을 알려준다. 공통점 몇 가지는 이들이 사람을 사귀지 못하며, 혼란에 질서를 부여하는 것을 좋아한다는 점이다. 깨끗하게 정리된 다니엘의 아파트처럼. 다니엘도 주변 사람에게 이런 이야기를 한다.

"길거리나 직장에서 수많은 사람들과 마주치지만 도저히 내가 그들과 한 부류라고 생각되지가 않아. 그들이 인간이라면 나는 아냐, 내가 인간이라면 그들은 인간이 아니야."

다니엘은 그래서 사람을 죽이기로 마음 먹었는지도 모른다. 역설적이게도 다니엘은 죽이려는 사람에게 가까이 다가가면서 상대에게 애정을 느낀다. 그에게 살인행위는 궁극적인 사랑의 행위다. 상대에게 다가가며 "너를 사랑해"라고 중얼거리고, 상대의 육체에 흉기를 힘껏 꽂아 넣으면서 그와 한 몸이 되었다고 느낀다. 성적인 충동이 없더라도 살인을 통해서 상대방의 몸 속 깊숙이 들어갈 수 있는 것이다.

형사 델러니는 연쇄살인범들의 이런 심리를 정신이상자들의 슬픈 연대기라고 생각한다. 그러면서 델러니는 자기 자신의 내면도 공허하다고 느낀다. 자신에게 최소한의 동정과 인간미가 남아있었다면 사건은 다른 방식으로 해결되었을 테고 그럼 범인들도 살아서 재판을 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럴 때면 델러니는 범인들처럼 자신의 인생도 뭔가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한다. 다니엘이 길을 벗어난 것처럼 델러니도 어디선가 궤도를 이탈했기에 연민은 고갈되고 따뜻한 인간미마저 메말라 버렸다. 오랜 세월동안 범인을 뒤쫓다가 그들을 닮아버린 것인지도 모른다. 극과 극이 서로 통하는 것처럼, <제 1의 대죄>에서 묘사하는 연쇄살인범과 형사의 내면도 크게 다르지 않다.

원문 보러가기 : http://www.fountainwz.com/index.php?document_srl=43938&mid=board_hbWf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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