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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미는 글쓰기] 길음역 1-1번 문 (0)
2013/11/27 PM 03:15 |
나는 1-1.
지하철의 맨 앞 칸에 앉아있었다. 지하철이 진행하는 방향 앞에서부터 좌석에 번호를 붙인다면 마주보는 한 자리를 제외하고는 가장 이른 번호일 오른편 좌석의 가장 끝 자리였다. 다들 그렇게 생각하겠지만 팔을 걸 수 있는 이 자리는 정말 좋다. 양쪽의 끝자리를 제외하면 이제 지하철 좌석은 너무 불편하다. 서구화된 체형에 맞지 않는 좌석의 넓이에 더해 내 오른쪽과 왼쪽으로 덩치 큰 남자 둘이 앉았을 때의 답답함을 생각하면 끔찍하다. 그럴때는 두 가지 선택지가 주어진다.
피하느냐 대항하느냐.
나는 성격대로 내가 앉은 그 자리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려고 팔짱을 끼고 어깨를 비비고 들어가 좌석의 등받이에 딱 등을 대고 눈을 감기 보다는 앞으로 상체를 내미는 쪽을 택한다. 가끔 그러다가 내 앞에 미니스커트를 입은 여성분이 앉아있거나 했을 때는 오해할만한 자세가 되기도 하지만 어쨌든 이런 상황들과 상관없이 그 날의 나는 맨 끝자리에 앉았다. 그래서 느긋하게 팔을 걸어놓고 생각도 하고 주위를 둘러볼 수도 있었다.
미아역에서 출발한 지하철이 두 정거장을 지나 길음역에 도착함을 알리고 있었다. 길음역은 섬식 승강장으로 되어 있어서 나는 고개를 들기만 해도 타고 내리는 승객들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내 앞의 1-1, 1번 차량의 첫번째 문이 열렸다. 1번 차량의 다른 문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타고 내렸지만 그 문제의 1-1번 문에 서있던 것은 단 한 커플이었다. 여자가 올라탔고, 그녀는 타자마자 뒤로 돌아 승강장에 서서 인사를 하고 있는 그녀의 남자친구를 바라보았다. 내 고개가 하필 거기 있었던 탓에 나는 그 남자가 말없이, 촐싹맞아 보이는 줄도 모르고 귀엽게 손을 흔들거나 하지 않고 아주 자연스러운 자세와 입꼬리를 살짝 올린 미소로 그녀를 향해 눈으로 수많은 사랑한단 말을 전하는 것을 모두 보았다. 표정은 볼 수 없었지만 아무말도 하지 않은 것으로 보아 그녀도 아마 같은 눈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던 것 같다. 다른 문에서 탄 다른 사람들이 하나둘씩 자리를 차지하고 앉는데도 그 두 사람은 그렇게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고 있다. 1-3번 문에서 탄 한 아주머니가 내 앞쪽의 좌석까지 걸어와 자리를 차지할 때까지도 계속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문이 닫히고, 전차가 어둠속으로 사라지고 나서야 그 여자는 뒤로 돌아서 한쪽에 손잡이를 잡고 선다. 늦은 저녁인데도 피곤한 기색없이 눈가에 웃음이 가득해서, 그 기분이 나에게까지 전해지는 것 같았다.
며칠쯤 지나서 오늘에서야 생각해보니 지하철에 타고 내리는 수많은 사람들 중에서도 그 두 사람만이 기억에 남은 것은 1-1번 문 때문이 아닌가 싶다. 1-1번 문에서 1 한 사람과 1 한 사람이 애정의 신호를 - 주고받는 모습이 왠지 묘하게 어울렸던 것이 아닐까.
겨울이라서 그런지 요즘은 가끔 나도 곧게 서서 한 사람으로. 멀리 등대에서 불빛을 보내듯이 눈으로 깜빡깜빡 애정의 신호를 보내고 싶다.
나 여기 있어요. 거기 듣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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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미는 글쓰기] 내 손이 그녀의 얼굴만큼 컸더라면 (4)
2013/11/27 AM 03:00 |
저기 그녀가 걸어오고 있다. 앞머리 없이 왼쪽으로 쓸어넘긴 검은 머리카락이 어깨에서 흔들리고 있다. 검은 머리와 흰 피부, 붉은 입술의 원초적 아름다움에 나는 왠지 더 그녀를 사랑하게 되는 것 같다고 생각한다.
그녀를 맞이하기 위해 손을 들다가, 잠깐 내 손을 바라본다.
내 손이 그녀의 얼굴만큼 컸더라면.
내 손은 수면의 과학처럼 커져서 그녀의 일해보지 않은듯한 나른한 어깨선과 나를 추종하게 만드는 도도한 얼굴 사이의 갸녀린 목 그리고 어깨에 걸쳐있는 찰랑대는 머리카락의 가장 바깥 쪽, 그 사이 공간에 쑤욱하고 들어간다. 뜨거운 손바닥으로 그녀의 체온을 공유하면서 민감한 손등에 머리카락 한 올 한 올이 닿는 그 간지러운 느낌을 즐긴다. 서로의 체온과 함께 분위기도 뜨거워질 무렵에 내 손은 부드럽게 돌아 그녀의 목 그 뒷부분으로 간다. 그러면 이내 그녀의 긴장이 풀리고 내 오른손에도 무게가 실린다. 가볍게 뉘여진 고개를 따라 턱이 당겨지고, 그 빨간 입술에 내가 닿는 것이다. 내 손이 그녀의 얼굴만큼 컸더라면.
작은 손은 인사밖에 할 줄 모른다.
오늘도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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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미는 글쓰기] 책 (0)
2013/11/25 PM 06:30 |
어제 도서관에 갔을 때의 일이다.
책을 빌릴 때면 나는 기왕이면 '균형있게' 책을 빌리고 싶은 마음이 든다. 내가 말하는 '균형있게 책을 빌린다'는 의미는 예를 들면 소설책을 세 권 빌렸을 때, 역사나 철학 같은 인문학에서 한 권, 사회과학이나 자연과학에서 한 권을 빌려서 다섯 권을 만드는 식이다. 이렇게 책을 읽다보면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과학 분야의 책을 마지막에 읽게 되는데 그러다 보면 전에 읽었던 소설이나 역사, 철학들이 새로운 의미로 다가온다. 마치 온 세상이 과학적으로 설계되어 있다는 것이 소설에도 역사에도 철학에도 스며있었음을 깨닫는 것과 같은 느낌을 받는다. 후에 그 책을 다 읽는동안 찾아오는 건 내가 너무 무지하구나 하는 생각과 활자포비아, 두통이긴 하지만서도.
요새는 이 '균형있게 책 빌리기'를 할 일이 별로 없었다. 한 번에 여러권 책을 빌릴 일이 없었던데다가, 요새 나오는 소설책은 왠일인지 권수가 계속 늘어나서 다섯 권의 대출제한으로는 완결까지 한 흐름에 읽고 싶은 소설책을 빌리는 것만으로도 부족했기 때문이다.(그렇다면 소설책을 다 읽고, 다른 분야의 책들을 새로 빌려오면 되지 않느냐고 누구든 묻고 싶을텐데, 나는 그렇게는 책을 못 읽는다. 어떤 미묘한 느낌의 차이다.)
어쨌든 관악구의 도서관에 새로 회원으로 가입해서 오랜만에 한번에 다섯권의 책을 빌릴 일이 생겼다. 나는 이번에 '균형있게 책 빌리기'를 하겠다고 마음먹고 책을 고르기 시작했다. 작년에 알라딘 중고서점에서 살까 했다가 내려놓았던 '존은 끝에 가서 죽는다' 1, 2권을 골라 놓았고, 볼테르의 캉디드를 집었다. 이 세 권은 정말 너무 맘에 들었다. 일단 책이 내가 처음 읽는 것처럼 깨끗해서 좋았다. 읽고 싶던 책이라도 손때가 많이 묻어있으면 나는 갑자기 내려놓고 다른 책을 찾고 싶다. 손때는 사랑을 많이 받은 책만이 누릴 수 있는 영광스러운 훈장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또 그 손때가 책 속에 담긴 위대한 지성을 전혀 더럽히지는 못한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나는 그 책은 읽고 싶지가 않다. 이 것도 나만의 미묘한 느낌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그 다음으로는 전부터 읽고 싶던 리처드 도킨스의 '눈 먼 시계공'을 골랐다.(도서검색을 하고 이 책을 나는 생각 없이 800번 대 서가에서 한참을 찾아 다녔는데, 동명의 한국소설이 있었다. 어쩐지 이상하긴 했는데) 마지막으로 900번대 서가에 와서 책을 찾아다니기 시작했는데, 역사책은 생각해둔 것이 없어서 마음에 드는 책을 눈으로 찾았다. 기왕이면 깨끗하고 표지가 예쁜 책을 찾았을거다. 그러다가 '바다의 제국들'이라는 지중해 역사를 다룬 책이 눈에 띄었다. 표지는 내가 사랑하는 파란색이었고 돛대가 펴진 배 같은 것들이 그려져 있었다. 즐거운 마음으로 내용을 살펴보기 위해 책을 폈고.
그리고 모든 것이 변했다.
내가 우연하게 편 페이지에는 커다란 코딱지가 있었다. 생각해보니 그건 우연이 아니었을거다. 코딱지의 두께만큼 유격이 생겼고 내가 그 부위를 잡고 책을 편 것이지. 그 책을 집은 그 때에 나는 그 것을 볼 수 밖에 없는 운명이었던 것이다. 나는 이 것을 여러번 보았다. 중학교 때 동네 책방에서 무협소설이나 판타지 소설을 빌려볼 때도 그랬다. 드래곤 라자의 몇 페이지 쯤에 있었고, 또 천사지인이나 영웅문 같은 소설의 몇 페이지 쯤에 있었다. 고등학교 때 도서관에서 책을 빌릴 때도 기억나지 않는 어떤 책의 한 부분에 있었고 대학에 와서도 분명히 보았다. 대학에 와서 본 건 토익 책인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리고 마침내 공공도서관에서도 이 것을 보게 된 것이다. 중 고등학교 때 그 것을 보았을 때는 얼굴이 찌푸려지고,(물론 지금 보아도 얼굴이 찌푸려진다) 아, 더러운 XX들 정도로 생각했다. 대학에 와서 보았을 때는 책에 그것을 묻히는 사람에게는 일종의 변태적인 욕구가 있다고 생각했다. 공공 도서관에서까지 보게 되자, 이제는 둘 사이에 뭔가 상관관계가 있는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예를 들면 샤워기에서 물이 나오는 소리 때문에 샤워를 할 때 요의를 느끼는 뭐 그런 종류의 것 말이다. 책을 한 장 넘길 때마다 미세 먼지가 일어나서 코 속에 분비물을 더 많이 생성한다거나, 가로로 쓰여진 활자를 읽는 행위가 우리의 뇌주름을 자극해서 코를 팔 수 밖에 없게 만든다든지 아니면 방금 든 생각인데 !!!! 느낌표! 느낌표가 그렇게 만들 수도 있다. 느낌표는 어딘가 검지손가락을 닮았다. 그렇게 생각해보니 그런 것도 같다.
그 것도 아니면 우리의 어딘가에 새하얗고 순수한 것들은 그저 더럽히고 싶은 마음이 있는지도 모른다. 더럽혀진 페이지에는 삽화가 있었다. 보이지 않게 하려면 삽화에 묻히는 방법도 있었다. 근데 왜 삽화 외에는 그저 백색의 하얀 종이 뿐인 것을 누군지 모르는 그 사람은 왜 더럽힌걸까. 나이도 성별도 학력수준도 또는 그 무엇이 더 다를지 알 수 없는 일련의 사람들은 왜 책에 그런 짓을 한 걸까.
코딱지 하나를 보고 와서는 나도 언젠가 그런 행동들을 했던 것을 떠올렸다. 책이 아닌 사람의 마음에, 얼굴이 찌푸려지는 상처를. 나도 단지 깨끗했기 때문에, 순수했기 때문에 그랬는지도 모른다.
그 책은 제자리에 내려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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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미는 글쓰기] 고양이 (0)
2013/11/25 PM 06:28 |
고양이 한 마리가 있다. 집 앞 계단에 앉아 있으면 어느새 다가와 내 다리에 머리를 부벼대거나, 울음소리와 함께 애교를 부리거나, 우아한 자세로 누워서 나를 바라보곤 한다. 길을 지나는 사람들이 음식을 주곤 했었는지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아 내 옆에도 곧잘 오는 모양이다.
덕분에 나도 괜히 정이 간다.
누워있다가 가끔 고개를 들어 냐옹하고 울면서 그 큰 눈으로 내 얼굴을 바라보기라도하면 나는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다. 뭔가 해줘야 할 일이 있는가 싶어 일전에 고양이어를 배워두지 않은 것이 안타깝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곧 추억으로 되돌아가서 슈렉에 나오는 장화 신은 고양이 생각이 난다. 그런 표정을 짓던 사람을 한 명 알고 있었다. 같은 언어를 쓰면서도 나는 그 사람과 소통을 잘 해내지 못했다. 소통에 언어가 중요한것은 아니다만, 실패를 거울삼아 내가 고양이어를 배운다면 그대와 원없이 대화를 할텐데!
집 앞 계단에 앉은지 10분이 넘었는데도 고양이는 소리나는 방향으로 고개만 움직이며 우아한 자세로 내 옆에 그대로 누워있다.
그대는 부산스럽지 않아서 좋다.
내가 꿈꾸는 조용한 우아함이 등줄기를 따라 꼭 머물러 있는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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