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차백만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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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충 소설] [엽편소설] 이불데드 (ibul dead) (0) 2022/12/30 AM 02:17

다른 엽편들 (노벨피아)

최신화까지 포함된 다른 엽편들 (브릿G)


2년 동안 장편 2개 끝내고 요즘엔 그럭저럭 한가해서 전에 썼던 엽편집 컨셉 다시 부활시켜 놀고 있습니다.

날이 추워서 이불 아나에서 떨고 있으려니까 별 해괴한 아이디어가 다 나오네요.

그럼, 아래서부터 본편.

출근을 위해 이불과 싸우는 모든 분들과 유게의 옛 할아버지들께 이 글을 바칩니다.


====================

이불데드

====================



20XX년!
그 별의 인류는 핵의 불길에 휩싸이지 않았지만, 멸망의 위기를 맞이하고 있었다!

"꺄아아악! 살려주세요!"

원인 불명의 전염병인가?

"온다. 놈들이다!"

아니면 좀비인가?
아니다! 이건 '그런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이것은 그 무엇보다도 주민들의 생활에 밀접하게 관련된 재난이었다!

"모두 버텨라! 방어선을 사수해!"

추위가 뼛속 깊이 스며드는 아침, 동대장은 횃불을 든 채 비장한 얼굴로 지시를 내렸다.

"주민들의 출근길을 사수하라!"

총알이 빗발치고, 횃불이 던져지고, 불길이 일었다.
좀비도 전염병도 버섯도 괴물도 아닌, 모서리 끝을 다리처럼 말아 걸어 다니는 이불들에게.
그렇다. 이 별의 섬유는 이불로 가공된 뒤에도 살아있었고, 이불의 목적을 이해했다.
본디 이불이란 인간을 덮기 위해 만들어진 것.
좀비가 사람의 뇌수를 원하듯, 이불들은 사람을 덮어 따끈하고 폭신하게 만들겠다는 목적에 따라 맹목적으로 움직였다.

"동대장! 기름이 떨어졌습니다!"
"이 이상 불을 피우면 건물에도 피해가!"
"안 돼! 물로 축축하고 기분 나쁘게 만드는 데는 한계가 있다!"
"적이 방어선을 돌파!"
"으아아악! 잠들고 싶지 않아! 나는 출근하고 싶어!"
"그녀에게 고백하려고 반지도 샀는데!"

불로 만든 방어선이 뚫리자 참상이 급속도로 확산되었다.
방어선을 맡은 방위대도, 딸에게 퇴근길에 케이크를 사 오겠다 약속한 대머리 회사원도.

"이 결재서류를 부장님께! 이것은… 좋은 것이다!"
"총은 의미가 없어! 다른 이불이 구멍을 덮어준다!"
"아아아아! 너무 푹신해애애애! 너무 따뜻해애애애!"
"사실은 출근 따위 하고 싶지 않아! 하지만 생계가, 급료가!"
"나는 틀렸어! 너만이라도 출근해!"
"체커를…! 출근 카드를…!"

다들 잠들기 시작했다.
하나씩. 하나씩. 착실하게.
통근 전철이 오기까지 남은 시간은 앞으로 15분.
남은 시간이 너무 길었다. 불길을 피해 꾸물꾸물 다가오는 이불들은 너무나 매력적이고, 따뜻하고, 폭신해 보였다.
그러나 그게 함정이다.
이불들에게 포근하게 감싸인 이들은 저녁이 되어서야 빠져나올 터.
누군가의 멋진 하루가 사라진다.
누군가의 인생을 바꿔줄 하루가 헛되이 사라진다.
모두의 앞에 펼쳐진 가능성을 비웃듯, 이불들은 행군 속도를 늦춘 채 확실한 포진을 구성하며 다가왔다.
이불들이 역 안으로 들어가면 모든 게 끝난다. 퇴로마저 빼앗긴 직장인들은 플랫폼에서 잠들어, 직장마저 잃게 되리라.
머리는 시원하고 몸은 따뜻한, 한여름에 에어컨을 켠 듯한 환상에 빠진 채로.

"그런 형편 좋은 환상, 쳐부숴 주마!"

각오를 다진 동대장은 오리털 파카를 벗어 던지며 고함쳤다.

"내가 휴무를 내겠다! 모두 출근해!"
"저희도 남겠습니다!"
"대장 혼자…! 자게 둘 수는 없습니다!"
"크읏!"

모두가 한가해서 예비군에 나가는 게 아니다.
가야 할 직장이 있고, 사랑하는 가족이 있고, 지켜야 할 것이 있다.
사고 싶은 책이 있다. 보고 싶은 영화가 있다. 예구하고 싶은 프라모델이 있을 것이다!
사람의 욕망은 사람의 숫자만큼 있는 법.
그걸 위해 일하는 하루다. 잠들어서는 안 되는 아침이다!
혼자 막을 수 없을 것 같다 해서, 모두를 이불에 뛰어들게 하는 건 동대장으로서 내릴 수 있는 지시가 아니었다!

"안 된다. 그럴 수는 없다! 여기선 나 혼자서 가겠다!"
"이렇게 갈 수 없습니다… 같이 가게 해주십쇼!"
"맞습니다! 동대장 혼자 가시게 할 수 없습니다!"

그때였다.

"아주 스토리를 쓰는구만. 킥킥킥킥."
"뭐야?"

잠자코 상황을 지켜보던 금발과 오렌지 머리카락의 예비군이 실소를 흘렸다.

"그렇게 쫑알댈 필요 없잖아? 대장이 뭐라 하건 간에 우린 따라갈 건데."
"훗, 맞는 말이야. 대장 혼자 보낼 수는 없지."

두 예비군의 말에 흔들렸는지 다른 예비군들도 출근을 포기하며 동대장에게 다가갔다.

"대장… 전우를 버리는 짓, 우리는 할 수 없다고."
"대장 혼자만 멋있는 척하게 놔둘 것 같아?"

물론, 이 와중에도 냉정하게 판단하는 사람이 없지는 않았다.

"그만해 미친놈들아. 너희 그냥 출근하기 싫은 거잖아."

무울론, 이 와중에 냉장한 상식이 통할 리가 없었다.

"가려면 너 혼자 가!"

정상적인 의견을 낸 예비군이 저지당한 사이, 자칭 밀리터리 애호가가 전투모를 어루만지며 눈을 빛냈다.

"대장을 보면 지뢰밭에서 병사를 구해낸 장교가 생각난단 말이지.

무우우우울론, 그는 전장 경험은커녕 지뢰 실물도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기묘한 고양감에 휩싸인 사람들 사이에서는 그런 허언도 통하는 법이다. 여론은 이미 출근 포기 파에게 기운지 오래였다.

"우훗. 대장. 좋은 남자야."
"대장은 정말 대박이야!"
"애송이 녀석들이 감동시키긴…!"
"너희들……."

동대장은 진심을 담아 모두에게 말했다.

"후회하지 말라고! 멍청이들아!"

사심이나 곡해 없는, 정확한 지적이었다.

"그럼 모두들! 같이 가자!"
"우오오오오오!"

그렇게 예비군들은 이불을 향해 돌격했다.
아침 해가 떠오르는 잠자리로, 이불이 걸어오는 빌딩 숲의 저편으로.
누구도 눈을 뜬 채 돌아오지 못했다. 이불에 휘감긴 예비군들은 상냥함마저 느껴지는 이불의 보드라움과 따뜻함에 감싸인 채, 천천히 눈을 감았다.

"등신들이."

홀로 남은 예비군은 군복 위에 외투를 걸친 채 역 안으로 들어갔다.
노사 간 협상이 적절하게 처리된 전철은 연착 없이 5분 뒤에 무사히 도착했다.


<끄-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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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충 소설] 자작단편소설 - 위대한 진화 (1) 2022/04/05 PM 11:19

<-meta>/


img/22/04/05/17ffa150ad91090cd.png

트위터 친구인 분필갈매기님의 습작게임(관련 트윗) 기반으로 만들어본 단편입니다.

장면 제시가 거의 없어서 너무 추상적인 글이 되어버렸네요.

썩 잘 만든 글은 아니었다고 생각했는데 원작자분이 만족하신 김에 마이피에도 들고와봤습니다.


https://britg.kr/novel-group/novel-post/?np_id=401101&novel_post_id=159857
(요건 브릿G버전 링크)


=============== 위대한 진화 ===============


<-meta>/

, 어서 오렴 얘야.

옛이야기를 하나 해주마.

그래, 내가 학교에 다닐 적의 일이란다.

 

***

 

너도 알듯이 모든 짐승은 학교에 다녀야 했지.

그게 그 시대의 진화였어.

아무도 의문을 가지지 않았단다.

돼지도, 여우도, 다람쥐도.

심지어 사자도.

짐승들은 의문을 가지는 일에 관심이 없었단다.

더 훌륭하게 진화해, 더 좋은 먹이를 먹고, 더 좋은 짝을 만나 섹스를 하는 것.

그렇게 해서 더 좋은 자손을 남기는 것

, 얘야. 얘야.

발정기도 지났으면서 섹스라는 두 글자에 참 잘도 반응하는구나. 귀엽기도 해라.

어쨌든, 그날은 작은 문제가 있었단다.

점심시간이 끝날 무렵이었지.

밥 먹을 시간은 이미 끝난 거나 다름없었고, 꼬르륵거리는 소리가 들렸지.

불행히도 밥을 먹지 못했거든.

특히나……. 얘야, 너도 알겠지만, 돼지는 허기를 참지 않는단다.

게다가 누구보다 미식가이기도 하지.

학교가 세워지기 전의 돼지는 땅을 파헤치고 코를 박으면서 온갖 먹거리를 찾아냈단다. 돼지에겐 그러기 위한 진화한 코가 있었으니까.

슬픈 일이지만 돼지의 코는 학교에선 의미가 없었어. 그 코는 맛있는 걸 찾는 코지, 위험을 감지하는 코가 아니었으니까.

그게 돼지의 두 번째 불행이었단다.

, 첫 번째에 대해 얘기하지 않았던가?

첫 번째는 MP3를 잃어버린 거였단다. 밥을 굶을 수밖에 없게 된 돼지는 음악이라도 들으면서 버티려 했지만, 아뿔싸. MP3가 사라진 거였지.

배고픈 돼지는 이곳저곳을 뒤지기 시작했지.

그렇단다 얘야.

네가 좋아하는 RPG 게임의 주인공이 숨겨진 아이템을 찾듯이, 돼지는 책상이며 사물함이며, TV 뒤편까지 샅샅이 확인하고 싶었단다.

하지만 뒤지지는 못했지.

왜냐면 우리는 학교 안의 짐승이지, 담장 너머의 짐승이 아니었으니까.

그러다 돼지는 반에서 힘을 상징하는 곳까지 들여다보려고 했단다.

그게 뭐냐고? 교탁이란다.

사자가 가장 신경 썼던 곳이지. 사자는 힘과 상징을 좋아했거든.

 

.”

 

가장 앞자리에 앉은 사자가 말했단다.

사자는 교실에서 선생님 다음으로 가장 강했어.

게다가 아주 강력한 대화 수단을 가지고 있었지.

날카로운 발톱과 이빨,

무엇보다도 중요한 건 누구보다 우월한 갈기였단다. 사자의 적은 손톱에 찢기고 이빨에 물리기 전에 그 갈기를 보고 기가 죽어서 물러나는 경우가 더 많았지.

이렇게 대단한 능력을 두루 갖춘 사자는 돼지에게 복잡하게 말할 필요가 없었어.

 

꺼져.”

 

그 한마디로 충분했단다.

그런데 돼지는 물러나지 않았어.

위험하다고 생각하지 못했던 거지. 돼지에겐 먹을 걸 찾는 코가 있던 거지, 위험한 냄새를 맡을 코가 있던 게 아니었으니까.

돼지는 낌새가 나쁘다는 걸 전혀 모른 채로 물었어. MP3를 못 봤냐고.

그러자 사자가 답했지.

 

또 말해줄까?”

 

그제야 돼지는 자기가 말을 잘못 걸었다는 걸 깨닫고 서둘러 물러났지.

이젠 MP3가 있을 만한 곳도 떠오르지 않았어.

얘야, 돼지가 다음에 했을 건 뭐였다고 생각하니?

포기하고 자리로 돌아간다고?

, 얘야. 너라면 그러겠니?

돼지는 MP3가 필요했단다. 먹는 걸 무엇보다 좋아하는 돼지가 배고픔을 참으려면 돼지에겐 MP3가 필요했어.

이젠 구석구석을 뒤지는 게 아니라, 교실에 있던 짐승들에게 말을 걸 때가 되었어.

돼지는 마침 옆자리에 앉아있던 다람쥐의 손을 봤지. 그 작달막한 손에는 MP3가 있었단다. 하지만 돼지의 MP3는 아니었어. 돼지는 물어볼 필요도 없다는 걸 알았단다.

그러면 누구에게 말을 걸어야 할까.

교실 안에는 다람쥐와 사자, 여우가 있었어.

일단 사자는 아니었지. 사자라면 돼지가 자는 동안에 돼지의 물건을 빼앗는 비겁한 짓을 할 이유가 없으니까.

다람쥐도 아니었지. 다람쥐는 자기 MP3가 있었으니까.

예상했겠지만 돼지의 시선이 교실 가장 끝자리의 여우에게로 향하는 건 시간문제였단다.

그리고 앞자리에서 일어난 일을 지켜보고 있던 여우도 이걸 알고 있었지.

여우는 돼지가 말을 걸러 오기도 전에 이를 드러냈어. 내가 멍청한 돼지 새끼의 MP3를 왜 뺐겠냐. 잘 다듬어진 송곳니는 마치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우왕좌왕하던 돼지는, 다람쥐에게 말을 걸었단다.

실제로 할 줄 아는 건 위협밖에 없던 어린 사자와 여우를 피해 다람쥐에게 시비를 거는 것. 실로 학교 안에 있는 돼지다운 발상이었지.

여기서 다람쥐는 생각했단다.

 

그래. 작은놈한테 지랄하는 건 사자가 아니라 돼지 새끼가 할 일이지. 늘 그랬어.’

 

그런데 그때, 돼지의 친구인 다른 돼지가 교실에 돌아왔어.

친구 돼지는 돼지를 보자마자 꿀꿀 웃으며 말했지.

 

, MP3 빌려줘서 고마워.”

? 내가 언제 빌려줬어?”

네가 자는 동안에 빌려줬지.”

 

친구의 말에 돼지는 어처구니가 없었어. 배도 고팠고, 화가 치밀어오른 게 눈에 보였지.

 

그건 빌린 게 아니라 훔친 거잖아!”

훔쳤다는 그렇게 쓰는 게 아니야. 빌렸다는 건, 훔쳤다는 게 아니잖아?”

 

꿀꿀 꽥꽥 꿀꿀.

돼지 멱 따는 것 같은 소리가 점점 커졌어. 여우는 신경 쓰기 싫었는지 자기 이어폰을 귀에 꼈고, 사자는 조금만 더 시끄러워지면 닥치라며 고함을 지를 기세였지.

, 아마 사자가 고함을 질렀다 해도 그게 끝이었을 거란다. 사자는 창밖에 있는 코끼리 선생을 무서워했으니까.

일에 끼어들고 싶지 않은 여우와 소리 지를 줄만 아는 사자.

교실에서 두 돼지의 다툼을 통제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어.

가까이 있던 다람쥐는 더 있다가는 큰일이 나겠구나 싶어 교실 밖으로 달아났지.

결과적으로, 다람쥐의 판단은 정확했어.

돼지 멱 따는 것 같은 소리는 돼지 멱 따는 것 같은 소리로 끝나지 않았단다.

돼지는 친구의 멱을 진짜로 따버렸거든. 사자도, 여우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 벌어진 거야.

그리고 더 놀라운 건 그다음이었지.

얘야. 네가 하는 게임은 적을 쓰러트리면 레벨이 오르지?

그거하고 똑같은 일이 일어났단다. 친구를 죽인 돼지의 목이 갑자기 떨어졌어.

그리고 추잡하고 주름투성이였던 돼지머리를 대신해 우아한 뿔을 가진 사슴의 머리가 솟아올랐지!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그래 얘야. 지금이야 그렇게 말할 수 있지.

하지만 그 시절의 짐승은 철저하게 경쟁하는 사회였단다.

누군가를 먹고 강해지는 건, 사실 어디서나 있을 수 있는 일이었어.

중요한 건, 누가 학교가 정한 규칙을 깨고 남을 먹을 생각을 했냐는 거지.

우리 학교의 경우엔, 그게 배고픈 돼지였을 뿐이란다.

그렇게 학교에는 새로운 질서가 세워졌지.

짐승은 짐승을 먹고, 더 훌륭한 짐승으로 진화했어.

그러자 처음엔 미친 소리라고 반발하던 짐승들도 동족을 잡아먹기 시작했지.

왜 그런 미친 짓을 하면서까지 경쟁을 하느냐고?

단순하단다, 얘야.

그 시절의 짐승은 진화가 끝나지 않았어.

남을 속이고, 괴롭히고, 때리고, 죽여서 끝내 잡아먹어 버리는 행위가 미친 짓이라고 생각할 수준까지 진화하지 못했었단다.

동물이 동물을 먹는 행위를 멈춘 건 우리처럼 약해빠졌지만 살아남은 다람쥐들의 말을 들을 만큼 진화하고, 자기들이 해온 짓이 미친 짓이라는 걸 이해한 뒤에야 멈췄지.

하지만 얘야, 너도 알듯이 때는 이미 너무 늦었단다.

짐승은 짐승을 먹는 방법을 알아버렸어.

그 맛을 기억했어.

너무 많은 짐승이 죽고, 그래서 너무 많은 짐승이 섞였지.

사자도, 여우도, 돼지도 아닌 그 괴물을 뭐라고 불러야 할까.

최근, 그들은 자신을 사람이라고 부르나 보더구나.

나는 아직 사람이 뭔지는 모르겠다만…….

모를 일이지.

여전히 사람은 사람을 먹을 수 있어.

늘 그랬단다.

그들은 진화를 쉬고 있을 뿐이야.

쉬는 시간이 끝나면, 또 진화를 시작하겠지.

마지막 하나가 남을 때까지.

가장 고독한 짐승으로 남을 때까지.

그야 사람은 다람쥐가 내는 작은 소리는 듣지만, 진심으로 이해해주지는 않거든.

자기들끼리도 이해를 못 하는데, 다람쥐의 말은 어떻게 이해하겠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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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의 편향이 호모 사피엔스를 각자 다른 종으로 진화시키는게 아닐까?
...같은 생각을 하는 요즘에 흥미로운 글이었습니다.
[대충 소설] 자작단편소설 - 4월 2일의 거짓말 (1) 2022/04/04 AM 02:29


https://britg.kr/novel-group/novel-post/?np_id=400927&novel_post_id=159797

(조금 더 읽기 편하실지 모를 브릿G버전)



https://www.likenovel.net/novels/531/4223

(요건 라이크노벨)



https://novelpia.com/viewer/1129856

(그리고 이거슨 노벨피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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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일에 썼어야 했던

42일의 이야기.

 

===================================

 

장난을 좋아하는 그녀에게 만우절은 일종의 축제였다.

예를 들자면 십몇 년 전.

난데없이 전화한 그녀는 놀러 왔다면서 잠깐 나와보라고 말했다.

특별히 바쁜 일도 없었기에 요청대로 현관문을 열기는 했지만, 그녀는 거기에 없었다.

대신 문 앞에는 핼러윈의 잭 오 랜턴 스타일로 깎아놓은 호박이 놓여있었다.

 

이건 시즌이 다르잖아.”

만우절이니까요.”

 

그녀는 평소처럼 밝고, 너무 들뜬 나머지 약간 불안정한 목소리로 물어왔다.

 

히히. 그보다 안에 손은 넣어봤어요?”

 

그 말을 듣고 무심코 넣어보자, 안에는 초콜릿이 들어있었다.

발렌타인이냐.

 

지금 4월이거든?”

“4월에는 2월이 포함된 법이니까요.”

궤변이구만.”

수학적이지 않아요? 지적이죠?”

지적할 곳투성이긴 해.”

 

대충 이런 식이었다.

시시한 장난이기는 해도 꽤 재밌었던 애.

분명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생각하겠지.

그리고 이젠 기억으로만 남겠지.

 

41.

나는 그녀의 장례식장에 와 있다.

그녀의 부모님과 인사하고 조문을 했다.

갑작스러운 일이었을까. 그녀의 부모님들은 안색이 안쓰러울 정도로 창백했었다.

물론 굳이 묻지는 않았다.

굳이 물어서 딸을 잃은 부모의 마음에 못을 박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

 

그녀가 죽은 걸 들은 건 어제다.

한창 일하던 중에 전화를 건 인물은 대학교 후배인 A.

대학 시절에 알고 지내던 녀석들은 내가 결혼을 하고 일이 바빠지면서 대부분 끊어졌었지만, 어쩌다 보니 아직도 연락하고 지내는 몇 안 되는 녀석 중 하나였다.

인맥이 협소하다 해도 할 말은 반박은 못 하겠는데사는 데가 다르고, 하는 일이 다르면 어쩔 수 없이 멀어지긴 하더라. 단톡방 같은 곳도 들어가 있어봤자 거의 얘기 안 하고.

 

. 소식 들었어? ▲▲죽은 거.”

? 죽었다고? ?”

 

알 리가 있나.

친했던 애들하고조차 연락을 안 하고 지냈는데 여자애 하나만 알고 지냈다고 해보자.

그게 아내와 아이한테 어떻게 보이겠냐고. 우리 애도 벌써 6살이다. 괜히 집에서 다른 여자 얘기를 가볍게 꺼내서 아이에게 트라우마가 남을 수도 있는 사건을 일으키고 싶지 않았다.

 

걔 장례식 갈 거야? 내일인데.”

얘기는 들었으니 가긴 해야겠는데……. 너는?”

내가 왜?”

?”

 

뭐냐 얘. 나한테는 갈 거냐고 물어놓고 자기는 안 간다고?

영문을 몰라 고개가 저절로 기우는 사이, 녀석은 허둥대며 말을 바꿨다.

 

, 그게 아니라. 하하. 내가 내일 바쁘거든. 하필이면 중요한 상담이 내일 잡혀있어서.”

그래어쩔 수 없겠네. 알았다. 나 혼자 다녀오지 뭐.”

 

그 뒤로 녀석은 미안하다는 말을 몇 번 반복하고, 같이 못 가서 정말 미안하다고 말했다.

참 별일이다 싶었다.

예의를 깍듯이 차리는 녀석은 아니었는데 말이지.

 

***

 

반차를 내고 온 장례식장에서 좋은 일이라고 하면 장소에 어울리는 말은 아니겠지.

그래도 장례식장 온 옛 친구들을 몇 명 보니 반갑기는 하더라.

다만.

 

?”

, 너 온 거냐?”

 

오지 말았으면 했던 사람을 보는 시선에 들떴던 마음이 조금 식었다.

그래. 장례식장에서 들뜨는 것도 이상한 일이긴 해.

게다가 나는 연락이 완전히 끊겼었으니까 녀석들 처지에선 갑자기 불쑥 나타난 느낌이었겠지.

그러면 당황하는 것도 이상하지 않았다.

녀석들이 껄끄러워하는 것처럼 보였던 건 그냥 기분 탓이었겠지.

그렇게 생각을 바꾸고 친구들과 자리에 앉아 술잔을 기울였다.

 

그나저나 몇 년 만에 주변 신경 안 쓰고 마시는지 모르겠네.”

꽤 바빴나 보네.”

바빴지, 바빴어. 그게 아니면 왜 너희하고 연락을 안 하고 살았겠냐.”

다른 이유라고 생각했는데.”

다른 이유? 그런 게 있을 리가 없잖아.”

 

말도 안 되는 소리 말라며 손사래를 친 나는 멀리 떨어진 그녀의 어머니와 눈이 마주쳤다.

딱히 이상한 일은 아니다. 상주(喪主)는 장례식장 안의 상황을 계속 지켜보고 있어야 하고, 그러다 몇몇 사람하고 눈이 마주치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니까.

그랬을 텐데…….

그녀의 어머니는 흠칫 놀라서는 급히 고개를 돌렸다.

잘못 본 게 아니다. 입이 벌려지고, 어깨가 크게 올라간 게 정확히 보였다.

이상할 정도의 과민반응이, 어째선지 전날 얘기를 나눈 후배와 겹쳐 보였다.

 

.”

 

나는 친구들에게 물었다.

 

그런데 ▲▲는 왜 죽은 거야?”

, 자살이었어.”

사고였지?”

?”

?”

 

간단한 질문이라고 생각했는데 얘기가 매끄럽지 않았다.

어째서?

소리 없이 내리는 눈처럼 의문이 부풀고, 나는 답을 재촉하려 했다.

다른 목소리가 끼어든 건 그때였다.

 

뭔가 부족하신 건 없나요?”

 

목에 맞지 않는지 어딘가 불안정한 하이톤의 목소리.

 

누구신지…….”

△△라고 해요. ▲▲의 쌍둥이 언니죠.”

어쩐지. 들어본 목소리라고 생각했어요.”

어머나. 그런가요?”

.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감사합니다. 동생에게서 이야기는 많이 들었었어요.”

하하. 그럴리가요. ”

…▲▲는 저한테 아주 특별한 사람이었다 말했었죠. 괜찮으시면 잠시 밖에서 동생에 대해 얘기를 나눠주시지 않겠어요?”

 

바쁜 일도 없으니 괜찮을 것 같았다. 고인도 고인의 가족과 대화를 나누는 걸 더 좋아하겠지.

나는 친구들에게 다음에 또 보자고 형식적인 인사를 하면서 자리에서 일어나, 한 걸음 먼저 간 그녀를 따라갔다.

 

***

 

나는 그녀와의 대화를 통해 ▲▲에 대한 새로운 사실을 꽤 많이 알게 되었다.

▲▲는 대단히 내향적이었다.

▲▲는 초등학교부터 대학에 이르기까지 남들과 교우가 거의 없었다.

▲▲는 짜증을 자주 내는 편이었다.

▲▲는 집에서도 별로 웃지 않았다.

▲▲는 기념일 같은 걸 거의 신경쓰지 않았다. 내향적인 만큼, 같이 보낼 사람도 없었으니까.

 

그건……. 제가 기억하던 ▲▲와 정말 다르네요.”

아마도 그럴 거예요.”

 

그녀는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

 

당신은 그 아이한테 있어서 정말로 특별한 사람이었으니까요. 집에 오면 당신 얘기를 멈추지 않았답니다.”

……. 그랬나요?”

만우절 거짓말 같은 이야기인가요?”

그럴리가요.”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답했다.

 

오늘은 42일인 걸요. 게다가 가족이 하는 말이 거짓말일 리가 없죠.”

만약에.”

 

그녀는 조금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만약 그 시절에. 그 아이가 당신을 좋아했다는 걸 알았다면. 지금이 바뀌었을 까요?”

글쎄요. 어쩌면 바뀌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지만…….”

 

눈썹이 저절로 찌푸려졌다. 저물어 가는 노을을 정면에서 마주하고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녀에게는 미안하지만, 이런 부분은 립서비스가 아니라 진심을 담아 얘기하는 게 옳겠지.

 

그렇다 해도 지금이 변하는 일은 없을 겁니다. 전 지금의 아내를 정말로 사랑하니까요.”

 

진심이 통한 걸까. 이미 죽은 사람의 고백을 거절한 꼴이었지만, 고백 대리인이 된 그녀는 이를 드러내며 밝게 웃어줬다.

 

정말로 애처가이시네요. ▲▲가 좋아한 이유를 알겠어요.”

 

대화다운 대화는 그걸로 끝이었다.

우리는 형식적인 인사를 끝으로 헤어졌고, 나는 느긋하게 거리를 가로지르며 역으로 향했다.

후배에게서 전화가 온 건 그 무렵이었다.

 

, A. 고맙다. 너 덕분에 옛날 애들도 만나고 꽤 재밌었어. 너도 왔으면 좋았을 텐데.”

하아. 형이 좋았다면야 다행이네……. 다른 일은 없었어 형?”

다른 일……. 뭐 그건 딱히 없었고, . ▲▲한테 누나 있던 거 알았냐? 아니다.”

……?”

쌍둥이라더라고. 목소리가 어찌나 닮았던지. , 외형은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누나 쪽이 훨씬 미인이더만.”

아니. 아니 아니 아니.”

몰랐었는데, ▲▲ 우리 학과에서 꽤 소외되어 있었다면서? 하아, 이제와서 말해 뭣하냐 싶지만. 그럼 안 되지 이놈들아.”

아냐!”

 

A는 내 귀가 아파질 정도로 크게 고함쳤다.

 

?”

아냐! 이런 얘기는 사전에 없었다고!”

. . 왜 그래? ?”

걔는 혼자야! 끝까지 외톨이어야 해! 걔를 누가 좋아하겠어! 그런 년 누가 좋아하겠냐고!”

! 말이 심하잖아?”

. 정말 미안해. 처음부터 말했어야 했어! 똑바로 들어. 그 새끼는…….”

 

. 나는 혀를 차며 전화를 끊어버렸다.

 

새끼. 깐죽대기는 해도 선은 지키는 놈이라고 생각했는데……. 대체 뭐야?”

 

***

 

그 뒤로 A와 연락하는 일은 없었다.

장례식장에서 만났던 친구들도 마찬가지다.

, 어디있는지는 아니까…….

물론 △△의 가족과 다시 만나는 일도 없었다.

그 가족에게는 그 가족의 삶이 있고, 우리 가족에게는 우리 가족의 삶이 있는 거니까.

거리가 멀고 하는 일이 다르고 사는 세계가 다르다면, 결국 마음도 멀어지는 거겠지.

퇴근길에는 누군지도 모를 사람들의 행복한 얼굴이 넘쳐났다.

저마다 집에 돌아가 애인이나 가족, 친구와 행복한 시간을 보낼 생각에 젖어있겟지.

혼자서 보내는 사람도, 최소한 일할 때보다는 여유로운 시간을 보낼 테고.

그런 시답잖은 생각을 하는 사이, 전화가 울렸다.

 

히익!”

 

갑작스런 벨소리에 비명을 지르자 주변의 시선이 나에게로 모였다.

두렵고 창피한 나머지 어깨를 잔뜩 움추린 채로 전화를 받았다.

아내였다.

어디에 있냐는 질문을 받은 나는 어조를 너무 높인 나머지 조금 불안정한 목소리로 답했다.

특별한 내용은 없다.

당연한 일이다. 퇴근한 직장인이 조금 천천히 집으로 돌아가고 있을 뿐인데 덧붙이거나 거짓말할 게 뭐가 있을까.

 

어느덧 우리 부부가 함께한 지 1.

나는 행복하다.

나는 행복하다.

 

오늘은 42.

만우절이 끝난 다음 날.

거짓말이 허락되지 않는 날.

 

나는 케이크를 사들고, 피곤과 삶의 무게 때문에 느려진 발을 억지로 움직였다. 너무 무거운 나머지, 발이 땅에 닿을 때마다 쿵쿵 울리는 것 같았다.

물론 내 걸음에 지축이 흔들리는 일은 없다. 실제로 쿵쿵거리는 건 내 심장뿐이었다.

 

! 케이크를 전하러 가자!

어제 태어난. 우리의 첫째 아이를 위한 케이크를.

누구에게도 전해지지 않을 이야기를 위해.

전할 사람조차 남지 않은 세계에서.

우리들의 행복한 이야기를 위한 케이크를.

집으로!

 

나는 행복하다.

우리는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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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우절의 블랙홀에 갈려나가는 유일하고도 무수한 나, 우리! 같은 느낌이네용.
[대충 소설] 웹소설) 10,000회차 연재 후 끝장나는 세계 - 20 (0) 2021/10/17 PM 0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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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나구리와 서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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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광고회사 파랑새의 직원인 나구리는 심심했다.


늘어져 있는 게 너무 노골적으로 보이자, 동기였던 서 씨가 슬쩍 고개를 빼서 물었다.


 


구리 씨. 벌써 오늘 일 끝낸 거야?”


아니.”


 


그녀의 질문에 돌아온 건 시원할 정도로 깔끔하면서도 무책임한 답변이었다.


 


해야 할 일이 의욕보다 많으면 뭔가 거꾸로 일이 안 되진 않아?”


등신같은 소리지만 이상하게 공감이 되는 소리네.”


그러니까 마감 직전까지 버티다 일을 시작하는 거야.”


대체 왜?”


스릴이 있으니까. 제시간에 일을 끝낼지. 아니면 시간을 넘겨서 부장한테 머리를 붙들릴지! 그정도의 긴장감이 있어야 직장 생활이 즐겁지 않겠어?”


오호라. 이제야 좀 이해가 가는군.”


이해 해준다니 기쁘네. 그런데 서 씨. 복화술 익혔어? 어쩐지 목소리도 뒤에서 들리고…….”


 


거기까지 말하고 나서야 자기 입에서 나온 말이 무엇을 암시하는지 이해한 나구리는 이마 위로 식은땀을 흘렸다.


 


저기 서 씨. 솔직하게 답해주면 좋겠는데.”


질문도 답변도 예상은 되지만, 한번 말해봐.”


최근에 복화술을 익히신 적은?”


없지요.”


엄청 허스키한 느낌의 남자 성대모사에 자신있으신가요?”


장기자랑 대회에서 굳이 해야 한다면, 그딴 장기는 떼를 써서라도 거절할 거야. 요즘 시대가 어느때인데.”


혹시 제3의 팔이나 초능력을 익힌 적이 있나요?”


그런 능력이 있으면 광고회사에 취직하는 게 아니라 영화사에 취직했겠지. , 친구가 그런 능력자긴 해.”


있긴 했구나. 그런 사람.”


운석이 떨어지다가 멈춘 동네인데 뭔들 없을가.”


. 지금 내 머리 위에 있는 손은 서 씨의 손이 아니란 거지?”


덧붙이자면 뭔가 장난감 같은 것도 아니야.”


그야 그렇겠지. 털이 북슬북슬하고 열기까지 있는데, 세상의 어떤 애들이 이런 손을 좋아하겠어.”


헐크 팬이라든가?”


영화를 너무 많이 보셨구만. . . 그리고…….”


 


나구리는 함박웃음을 입에 억지로 걸어놓은 채 그녀와의 대화를 이어가려고 애를 썼다.


 


서 씨. 오늘 날씨 좋지?”


점심 지나서 써먹을 화제는 아닌 거 같은데.”


화제 좀 맞춰주면 안 돼? 이왕이면 세 시간 정도. 그래. 퇴근 직전까지 말이야.”


그냥 지금이라도 모르는 척 하는 거 그만두고 뒤를 돌아보는 게 어때?”


굳이 답변을 하자면 싫어가 내 답이야. , 나구리는 담을 타고 소리 없이 넘어가는 능구렁이처럼 아무말 듣지 않고 하루를 넘기면서 월급일까지 버티고 싶다, 이 말을 당당하게 할 수 있는 인생을 살고 싶다고.”


 


나구리는 속마음을 털어놓으면서 현실을 외면하려 했지만, 결국은 임기응변에 불과했다.


그의 머리에 손을 올린 장본인은 사회인 답게 분노를 절제한 차가운 어조로 말했다.


 


슬슬 그 잘난 언변이 떨어질 때도 됐군.”


히끅.”


어쩐지 보고서가 요즘 퇴근 5분 전에 칼같이 맞춰서 올라온다 싶었는데. 그런 마음이었다 그거지?”


, 늦지는 않았잖아요?”


그래. 너는 안 늦었지. 확실히 너는 안 늦었어.”


 


나구리의 머리뼈에서 나서는 안 될 소리가 울려퍼지기 시작했다.


 


아얏. . 아야얏. 아이에에에. 아얏. ///.”


그런데 나구리. 왜 니 보고서 보느라 내 퇴근 시간이 늦어져야 하는지 설명해 볼까?”


, 시간과 예산을 아주 많이 주신다면야…….”


두 가지 선택지를 제안하지.”


 


나구리가 눈살 위에서 안구 위로 가해지는 압력을 느끼고 신음을 흘리든 말든. 부장은 담담하게 거절해선 안 되는 제안을 입으로 읊었다.


 


하나. 경찰이 빠를지 네 두개골이 박살나는 게 빠른지 실험한다. . 이번 주 화장실 청소 당번을 전담하고, 일은 빠릿하게 끝낸다. 어느쪽이 현명할까?”


세번째. 싸게 협상할 수 있는 청소업체를 찾아온다……. 같은 선택지는 어떠세요?”


사장은 설득할 수 있겠나? 그 짠돌이 이기는 게 쉽지는 않을 텐데?”


최적의 예산안과 프리젠테이션을 약속드리죠.”


“4시간 준다. 다녀와.”


 


***


 


나구리가 가방과 명함만 챙겨서 총알처럼 튀어나가고 나서 열흘 뒤.


청소업체에 아르바이트생으로 채용돼 나흘 정도 파랑새에 왔던 나라는 다른 동료들과 같은 생각을 하고는 그걸 무심코 입에 올렸다.


 


저 아저씨. 상사한테 저렇게 구박받으면서 용케 안짤리네…….”


그렇지?”


히익?”


, 미안. 놀래킬 생각은 아니었는데.”


 


나라가 까치발까지 들며 놀라는 모습에 거꾸로 당황한 서 씨는 그녀의 어깨를 잡은 채 사과했다. 나라가 이렇게 반응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미르와 관련된 일만 아니면 그녀는 뭐든 낯을 가리고 소극적으로 대하는 아웃사이더였으니까. 친한 친구가 조금이라도 있는 학교가 아니라면 누군가가 말을 걸어온다는 경우 자체가 적었던 것이다.


 


, 아녜요. 제가 과, 과하게 반응한 건데데데요.”


. 일단 진정 좀 할까? 여기, 물 좀 마셔.”


죄송해요……. , 원래 이런 성격이어서…….”


 


서 씨는 숨을 돌리는 나라의 모습이 겁 많은 고양이와 겹쳐보인다는 것을 깨닿고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용케 그런 성격으로 아르바이트를 하는구나.”


돈 없는 척 하면서 남자친구 한테 얻어먹으면서 사귀고 싶지는 않아서요.”


어머나. 그런 부분은 묘하게 똑부러지네.”


그보다 저 아저씨……. 정말로 괜찮은 거죠?”


 


잠깐 사이 나구리가 또 부장의 심기를 건드린 건지, 이번엔 목을 붙들린 채 허공에서 버둥대고 있었다. 동료 직원들은 부장을 말리기는커녕 초크슬램이다! 이번엔 분명 초크슬램이야!’라며 열광하고 있었다.


 


괜찮겠지. 죽지는 않을 거야. 늘 그랬으니까. 저 사람은 자기가 급할 때는 어떻게든 해내니까. 정말 웃기다니까.”


 


그 말은 대책 없는 동료 직원을 한심하게 여기는 것 같았다.


하지만 사람의 마음이라는 것은 말만으로는 전부 알 수 없는 법.


 


어라라.”


 


나라는 서 씨의 눈에 깃들어 있는 것이 냉랭한 말과 속성이 다르다는 것을 눈치 챘지만, 그걸 굳이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그 감정의 무게를 아는 사람으로서 서 씨의 비밀을 지켜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한편, 초크슬램 자세로 붙들려 있던 나구리는 기어코 회의용 테이블 위에 내동댕이 쳐졌다.


나구리는 일어나지 못했고, 심판은 링 대신 컵을 두들기며 그가 완전히 뻗었다고 선언했다. 그러자 동료들은 환호성을 내질렀고, 몇몇은 , 돈만 날렸네. 피니시는 파워밤이라고 생각했는데라며 투덜거렸다.


 


***


 


이곳은 K국의 S.


거대 운석이 낙하하다 허공에서 멈춘 기묘한 도시.


이것은 S시에 사는 사람들의 혼돈과, 혼돈의 이야기다.


 


세계가 끝나기까지.


앞으로 9,9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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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충 소설] 웹소설) 10,000회차 연재 후 끝장나는 세계 - 13 (2) 2021/10/02 PM 0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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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평범한 흡혈귀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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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아무 일 없이 평온한 날이었다.

장 선생은 오늘도 어김없이 죽었다혼세중학교 과학실이 폭발하는 곳에서 화학동아리 학생들을 구출하려 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화학동아리도 아주 바보는 아니어서 정식으로 인가된 실험을 안전장비까지 갖춰서 하고 있었고폭발에 휘말려도 죽지는 않았을 것이다장 선생의 죽음은 오늘도 무의미했다.

학교가 일찍 끝난 덕에 미르는 담벼락에서 고양이들과 낮잠을 즐겼고나라는 그 옆에서 고양와 미르의 투샷을 찍느라 여념이 없었다.

묘란은 논밭에서 거대 식인지렁이를 한 자루의 괭이로 토벌했다예전이라면 그저 귀찮은 지렁이었지만 요즘엔 이야기가 달랐다. S시로 이사온 메를렌이 이 지렁이 시체를 마법재료로 매입했기 때문이다.

그 무렵 나스카 슈퍼마켓의 점장 알 파카는 저녁세일을 노리고 몰려들 무투파 아줌마들을 대비해 만년한철로 만든 매대에 공력을 불어넣고 있었다.

학교 수위인 케이젤은 학생들의 등굣길을 습격하는 그리폰을 쫓아내는 대신 아예 길들일 방법을 찾기 위해 학교도서관 아래의 저주받은 지하던전을 탐색하는데 열을 올렸다자정 전에는 찾고있는 책이 있는 지점까지 진행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청진연구소의 로봇소년 디엠은 옥청진 박사의 부탁을 받고 공중에 멈춘 운석의 시료를 채취하러 가다가하필이면 공중에서 모히칸 대학생들을 만나 급히 도망치고 있었다.

언제나처럼 평범한 오후.

 

어라라라라리요?”

 

평범한 회사원이자 흡혈귀인 카밀라 체페쉬는 문제의 거대 운석 위에서 정신을 차리고는 어리둥절하고 있었다.

 

이상한데요오오오…….”

 

카밀라는 눈을 찡그리고는 조금 전까지 사무실에서 있던 일을 떠올리려고 애를 썼다.

 

분명 사무실에 갑자기 흡혈귀 사냥꾼이 들이닥쳐서 저를 17등분하네 어쩌네…….”

 

차디찬 고지대의 바람을 마시고 머리가 맑아진 카밀라는 생각하는 것을 그만뒀다.

이유는 세 가지였다.

우선대낮에 흡혈귀 사냥꾼이 사무실을 습격한다는 게 법적으로 말이 안 됐다애초에 흡혈귀 사냥꾼은 동화로나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 아니던가.

그리고 두 번째로복장이다그녀가 입고있는 건 정장이자 정장이 아니었다옷은 정장이 맞았지만브래지어를 와이셔츠 겉에 걸치고 자켓을 허리에 묶어 스커트처럼 하고 있었다.

마지막으로입에서 고기와 마늘양파소주냄새가 감돌았다.

이 세 가지 정황을 통틀어 볼 때그녀가 내릴 수 있는 결론은 하나였다.

 

이런 젠장꿈이었네요오술해 취해서 맛이 갔던거예요오오.”

 

정확했다카밀라는 전날 회식 술자리에서 상사가 권하는 술을 제어하지 못하고 폭주해버렸다.

그리고는 달까지 날아가 주게써!’라고 외친 후 날개를 펼쳐 날아온 곳이바로 이 거대 운석 위였던 것이다.

현실을 인식하자이번엔 두통과 함께 진실이 밀려들어왔다신선한 공기가 카밀라의 뇌를 활성화 시켜별로 기억하고 싶지 않았던 어제의 이를 강제로 떠오르게 만들었다.

 

전부터 생각했는데요오사장님하고 부장님하고 나란히 서 있으면 성희롱 아닌가요둘다 반질반질 대머리라 합쳐놓으면 가슴이라고요? M컵이잖아요?’

 

두둥탁드럼을 다루듯 리드미컬하게 사장과 경영지원부 부장의 머리를 두들긴 카밀라의 손이오늘은 자신의 머리를 드럼처럼 두들겼다.

 

두둥탁은 얼어 뒈질미쳐버린 건가요나느으으은!”

 

눈물이 앞을 가렸다회사생활이 끝났다는 절망감도 있었으나그 눈물에는 뇌리에서 떠나지 않는 반들반들한 대머리도 만만치 않은 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카밀라가 사장과 부장에게 미안한 마음이 없던 것은 아니었으나모든 사회적 리미터를 소주로 해제한 그녀의 웃음 코드는 대머리들하고 최악의 상성이었다.

그리고 회사에서 문자가 왔다는 걸 안 것은 바로 이 무렵이었다.

 

어쩐지 안 봐도 내용을 알 거 같은데요오오…….”

 

불행히도 카밀라의 예상은 정확히 맞아 떨어졌다술자리에서의 폭주와 무단결근을 이유로 해고조치를 하겠다는 내용이었다.

대기업이라면 중간 과정이 조금 더 까다로울 수도 있겠지만 그녀가 다니는 회사는 중소기업사장과 왕이 같은 의미라고 착각하는 작자가 꼭대기에 있는 곳이었고그의 심기가 뒤틀린 시점에서 카밀라가 해고당하는 건 예정된 일이나 다름 없었다.

 

자고 일어나니 하늘 위에서 백수가 되어버렸네요오오오…….”

 

상실과 허무온갖 감정이 피어올랐지만 그마저도 잠깐이었다창공에 휘몰아치는 바람은 카밀라에게서 걱정근심을 가져가버렸다.

 

따져보면 말이죠딱히 좋은 직장도 아니었다고요세금내고 이거 내고 저거내고 하니 남는 게 토마토 주스 하나 살 정도의 돈이라니솔직히 말이 안 되는 거잖아요?”

 

문제는걱정근심만이 아니라 상식까지 가져가 버렸다는 사실이다.

 

그래요저는 자유인 거예요이런 정장 따윈이제 필요 없어요!”

 

카밀라는 경쾌한 웃음소리와 함게 상의를 전부 벗어버렸다자켓과 브래지어와이셔츠는 상공에 휘몰아치는 광풍을 타고 순식간에 점이 되어 사라졌다.

 

자유에요카밀라는 그 어느대보다 자유라고요오오오오!”

 

항공역학에 최적화 되었으며오렌지빛 머리카락과 강하게 대조되는 흡혈귀의 하얀 나신이 상공에 노출된그때였다.

여객기 한 대가 카밀라의 앞을 지나갔다.

그리고 여객기 안에 있던 한 소년과 카밀라의 시선이 맞닿았다.

 

.”

 

***

 

우연이라고만 말할 수는 없다.

거대 운석은 혼세중학교의 위, S시 상공에서 멈춰있지만 충돌 직전이 아니라 상당히 위에서 멈췄다게다가 크기도 커서 윗부분은 성층권에 아슬아슬하게 걸려있었다.

거대 운석을 비행 중의 관광요소로 꼽은 여행사도 있었던 만큼이곳을 지나가는 여객기를 탄 사람이라면 한두명 쯤은 운석 위에 관심을 갖고 있다.

이날 카밀라와 눈이 맞은 소년도 마찬가지였다게다가 이 아이는 준비성도 철저한 타입이라 쌍안경도 소지하고 있었다.

 

엄마아빠바지만 입은 이상한 누나가 운석 위에 있어.”

얘는 무슨그런 일이 있을 리가 없잖니.”

 

아이의 말도부모의 말도 모두 맞았다아이가 관측한 순간의 카밀라는 분명 운석 위에 있었다.

하지만 아이의 부모들이 아이에게서 쌍안경을 넘겨 받아 관측한 순간그곳에는 희끄무레한 안개밖에 없었다.

물론 카밀라는 이때도 운석 위에 존재했다인간으로서도흡혈귀로서도 수치심의 한계를 돌파한 그녀는 고위급 흡혈귀만 할 수 있는 안개 변신을 터득한 것이다.

 

집에 가자.’

 

생각하는 것도옷을 찾는 것도 포기한 카밀라는 안개가 된 채 S시로 돌아갔다고전 장르소설의 흡혈귀들이 자신만의 고성에서 나오지 않듯카밀라가 밖으로 나오는 일은 한동안 없으리라.

어느 평범한 여름날에 일어난 일이었다.

 

***

 

이곳은 K국의 S.

거대 운석이 낙하하다 허공에서 멈춘 기묘한 도시.

이것은 S시에 사는 사람들의 혼돈과혼돈의 이야기다.

 

세계가 끝나기까지.

 

 

 

앞으로 9,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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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

녹차백만잔    친구신청

사고쳐서 직장에서 쫓겨나는 일은 생각보다 평범한 법이지요.

이것은 그런 이야기의 카오스 버전일 뿐입니다. 아무튼 그러합니다.(끄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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