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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6 오늘의 영화 : (0) 2014/09/24 AM 1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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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기세포 스캔들' 벌써 10년 전, 2004년 황우석 박사의 인간 배아줄기세포의 복제가 세계
최초로 성공되어 세상을 들썩이게 했던 발표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는 거짓으로 드러났
고 대국민 사기극으로 남아있습니다. (결국은 2013년에 인간 배아줄기세포 복제를 미국에
서 세계 최초로 성공했다고 합니다.) 이 사건을 픽션으로 재구성하여 만들어 낸 영화 <제보
자> 입니다. <우리 생에 최고의 순간>의 임순례 감독이 연출했고 주연 배우들 외에도 내로
라하는 조연 배우들 박원상, 권해효 등이 출연하여 좀 더 몰입도 높은 영화가 기대 되었습
니다. 영화는 세계 최초로 인간 배아줄기세포를 추출한 이장환 박사(이경영)는 국민적인 영
웅이 된 것 처럼 관심과 존경을 받습니다. 그러던 중 이 모든 게 거짓이라는 한 제보자 심민
호(유연석)는 증거도 없지만 PD추적의 윤민철 PD(박해일)에게 방송을 의뢰하고 진실을 밝
히기 위한 내용을 다룹니다. 

이 영화는 실화를 바탕으로 했지만 미처 밝혀내지 못한 의혹을 풀어내자는 부류도 아니고
과거 사건을 다시 상기시킴으로써 "잊지말자. 대한민국" 하는 으쌰으쌰 영화도 아닙니다.
황우석 박사는 사실 인간 배아줄기세포 복제에 성공했었고 우리가 모르는 무언가에 의해
조작되었다. 라는 모티브로 시작했다면 이야기가 달랐겠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알고있는
내용과 동일하고 영화의 분위기도 실제와 비슷합니다. 비슷한 이유는 영화가 관람객들에게
알려주고자 하는 방향이 우리가 방송과 신문에서 접한 언론의 입장이기 때문이기도 합니
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윤민철 PD의 시점에서 풀어낸 이 영화는 흥미로웠습니다.  방송정신
투철한 윤민철, 확고한 이장환. 이 둘의 진실공방전으로 영화는 시종일관 흘러갑니다. 

유명한 실화라는 강점을 살려 배역의 구질구질한 설명 없이 바로 본론을 향해 달려가고 그
렇다고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적정한 속도감으로 연출 되어졌습니다. 그렇지만 관람객들
에게 긴장을 유도하고 몰입감을 주는 요소는 양파를 까듯이 하나하나 진실을 파헤쳐 가는
부분인데 추리극 처럼 사소한 증거들을 발견하면서 점진적으로 커다란 진실을 밝혀내고 있
습니다. 하지만 밝혀냈거나 공표하고자 하는 진실들은 이장환 박사와 그를 감싸는 여러 세
력에 의해 무너지거나 좌절됩니다. 이러한 열고 덮는 식의 교차 연출을 통해 영화 후반부로
갈수록 그리고 진실이 점차 분명해질수록 관객들이 얻는 카타르시스는 점차 커지게 됩니다.
추리극이라 해서 쫄깃한 서스펜스를 다루는 영화는 아니고 그저 드라마 장르를 고수하고
있는 영화입니다. 무기나 폭력이 전혀 없는 말과 글로 이루어지는 정치적 드라마 이기도 합
니다. 
 
정치적 드라마라고 하니 상당히 진지할 것만 같은 영화인데 실제로도 영화의 분위기는 한껏
낮게 깔려있습니다. 하지만 영화내내 이어지는 소소한 웃음 코드들이 있습니다. 상황에서
발생하는 웃음이나, 캐릭터나 대사에 의해 발생되는 웃음들이 상당히 많은데 영화의 분위기
를 깨지 않는 선에서 있고 각자 입맛에 맞게 웃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 영화는 언론인들에게 사명감을 던져 주는 것 같기도 하고 언론의 무서움도 알려주려는
듯 하지만 진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영화 초반부에 나오고 있습니다. 언젠가부터 사람들
확인되지 않은 사실을 맹목적으로 믿기 시작했습니다. 그게 언론의 영향인지 존경하고 싶
사람의 사회적 지위의 영향인지는 알 수 없지만 영화속에서는 거짓을 거짓이라 얘기해도
"에이~ 설마" 라고 말하며 인정하지 않습니다. 결국, 이 영화는 맹목적인 믿음의 무서움을 알
려주면서 주관을 가지라는 메세지도 전달하고 있는 작품이 아닐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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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1 오늘의 영화 : (0) 2014/09/11 AM 1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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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처음 인사 드립니다.

이번 주 부터 영화 관련 소식을 전해드릴 예정입니다.

최신 개봉작을 미리 전해드리거나 개봉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따끈따끈한 영화를 소개해 드리려고 합니다.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평이니 참고만 부탁드립니다.^^


허영만 화백의 4부작 만화 '타짜'의 2부 신의 손이 8년만에 영화로 세상에 나왔습니다. 전작의 연출을 맡았던 최동훈 감독에서 <과석스캔들>, <써니>의 강형철 감독으로 바뀌었고 주연진들도 많이 바뀐 2부입니다. 1부의 대성공으로 인해 제작사든 연출진이든 후속편을 만들기에 부담도 많이 됐을 것이고 만들고자 결정을 했어도 전작을 어떻게 뛰어넘어야 할 지에 대해 많은 고민이 되었을겁니다. 강형철 감독은 타짜의 4부작 중 한 편은 연출하고 싶었다고 하는데 이번 2부의 제안을 받게 되었고 원작을 각색하는 데만 3년이 걸렸다고 합니다. 너무 오랜만에 등장이라 그런지 생각보다 기대감이 덜 한 분위기인데 주연 배우들의 영향도 없지 않아 있을 거라고 생각됩니다. 영화는 고니의 조카인 대길(최승현)이 서울에서 '타짜'로 데뷔를 하게 되고 우사장(이하늬), 장동식(곽도원), 꼬장(이경영) 등 다양한 인물들과의 얽히고 설킨 도박판의 이야기를 다룹니다.


"가벼워졌다." 도입부에서도 영화가 마친 후에도 드는 생각이었습니다. 가볍다고 해서 나쁘지 않았습니다. 물 흐르듯 이어지는 강형철 감독의 코믹한 연출들과 그 속의 유치한 대사들이 소소하게 터지나 했더니 웃음의 빈도수도 그 크기도 커졌습니다. 전작은 전작으로 남겨두고 <타짜-신의 손>은 새로운 영화로 보려고 상당히 노력했는데 그래서 그런지 좋은 점들이 많이 보였습니다. 원작 만화를 접하지 않은 터라 우려가 되었던 캐스팅 부분들은 캐릭터에 잘 맞아 떨어진다는 생각도 들었고 특히, 최승현, 이하늬씨는 생각 외로 영화에 잘 녹아들어있었고 신세경씨는 그간 보여주었던 연기를 그대로 가져온 듯 한 모습이었는데 영화 속에 잘 스며들었습니다. 도박을 접하지 않은 대길의 입문 과정이나 성공 그리고 타락하는 과정이 속도감 있게 연출 되어졌고 이미 익숙한 장면들임에도 불구하고 재미를 안겨줍니다. 개인적으로 고광렬의 등장부터 영화가 빛을 발한다고 생각하는데 또 한 번 유해진씨의 영향력을 확인하는 순간이었습니다. 대길의 재기를 위해 고광렬의 도움으로 카센터 직원들과 판을 벌이는 장면이 있는데 이 부속 이야기가 재밌고 흥미로웠습니다. 그래도 가장 눈에 띄는 배우는 장동식을 연기한 곽도원씨였습니다.

이번 편에서는 상당히 많은 캐릭터들이 등장하는 만큼 이야기에 이야기가 물려 들어가고 이야기 속의 이야기가 있는 영화입니다. 그래서 속도감 있는 연출을 보일 수 밖에 없었는 지도 모르겠지만 최동훈 감독이 전작에서 보여주었던 속도감 있고 긴장감 넘치는 연출과는 유사하지만 또 다른 모습이었습니다. 하지만 영화가 중,후반부로 접어들면서는 전개가 늘어지는 느낌입니다. 늘어지는 이유는 앞서 많은 내용을 보여주기 위해 속도를 냈더니 오히려 정상적으로 돌아온 속도에 익숙치 않아서 이기도 하겠습니다. 자칫 지루하다는 느낌을 받을 시점에 하이라이트인 엔딩신이 시작되는데 잠시 등장했음에도 불구하고 김윤석씨는 역시 존재감이 탁월했습니다. 전체적으로는 오락 영화로는 괜찮게 탄생했다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전작의 묵직함을 과감히 버리고 다이어트에 성공했습니다.

추석 연휴 3파전이라고 볼 수 있는 <타짜-신의 손>, <두근두근 내 인생>, <루시> 중에서 <타짜-신의 손>이 청소년관람불가 등급임에도 불구하고 가장 우세할 것으로 보이고 9월 라인업에 특출난 영화가 없기에 어느정도 장기 흥행의 가능성을 열어둘 것 같습니다. 기 개봉작인 <해적>, <명량>, <비긴어게인>에 추석 연휴 개봉작 중 또 하나 <스텝업: 올 인> 까지 다양한 장르의 영화를 즐길 수 있는 연휴가 될 것으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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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2 오늘의 영화 : (0) 2014/09/11 AM 1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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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명이 필요없는 뤽 베송 감독의 신작이며 제작, 각본, 연출이 이뤄진 작품입니다. 금일 진행된 언론/배급 시사가 끝나고 기자 간담회에서는 내한한 뤽 베송 감독이 직접 참석하여 영화의 질의응답도 진행되었습니다. <루시>는 제작을 결심한 지, 10년만에 나온 영화라고 합니다. 인체의 신비스러움을 느끼고 뇌와 세포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대부분 이런 부분의 지식들이 별로 없기 때문에 이런 소재를 꼭 보여주고 싶었다고 합니다. 이미 개봉한 북미에서는 참신한 영화긴 하지만 다양하게 혹평을 받고 있는데 작품성과 대중성 사이에서 묘한 위치에 있는 영화인 것 같습니다. 4천만불의 제작비로 벌써 5배 이상의 수익을 달성한 <루시>는 국내 배우 최민식의 첫 헐리웃 진출작이기도 하고 <명량>의 역대 최대 스코어의 기록도 함께 하고 있기에 국내의 흥행 실적이 주목됩니다. 영화는 평범한 삶을 살고 있던 루시(스칼렛 요한슨)가 미스터 장(최민식)에게 납치됩니다. 새로 개발된 약품을 몸 속에 숨겨 옮기는 운반책이었으나 폭력으로 인해 루시의 몸 속에 퍼지게 되고 이 약품은 루시의 두뇌의 세포들을 깨우며 발생하는 사건들을 그립니다.


뤽 베송 감독은 <루시>는 실험적인 영화였다고 했고 상영 30분 뒤부터는 지루해 질 것이라고 얘기했습니다. 지루함은 그 때 즈음이면 이미 아군과 적군이 누군지 알기 때문이라고 통역으로 들었는데 통역을 잘못한 것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영화를 보면 시작부터 아군, 적군이 누가봐도 뻔하기 때문인데 오히려 영화가 진행되면서 그 경계선이 허물어진다거나 모호해집니다. 영화의 초반부는 루시의 납치 이야기와 노먼(모건 프리먼)의 뇌 사용량 세미나 이야기 두 파트로 진행되는데 루시의 뇌 사용량의 변화에 대해 노먼이 친절하게 설명해주는 교차 상영 구조로 연출되었고 이후엔 영상이나 루시의 대사들에게 개연성을 만들어가는 방식입니다. 이 구조가 깨지기 전 까지는 호기심 어린 눈으로 보게하는 시간이었습니다. 개연성이란 단어를 쓰는 것이 우스울만큼 허무맹랑한 상상력을 보여주는 영화입니다. 그 상상력이 엄청나게 참신하고 신기할 정도는 아니지만 외계인을 만나보지 못한 것처럼 뇌 사용량을 늘렸던 과학적 근거가 없기에 저럴 수도 있을까 하면서 보게됩니다. 


SF, 액션 영화인 줄로만 알았던 이 영화의 실상은 철학적인 부분이 더 강했습니다. 전체적으로는 <리미트리스>를 떠올릴 수 밖에 없는 소재라 비교하면서 보게되고 타 영화에서 좋은 것은 다 차용한 듯한 모습을 보이는데 첫 신의 유인원의 등장은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 중,후반 부에는 <ET>와 <그래비티>마저 떠오르게 합니다. 뉴에이지, 진화론, 우주론 등 이것저것 너무 많은 걸 담아내려고 하니 90분으로는 턱 없이 부족했고 너무 과하다고 느껴집니다. 그렇다고 영화가 영 재미없는 것은 아닌데 스칼렛 요한슨만으로도 볼만하고 영화내내 한국어만 구사하는 최민식의 되돌아온 악역 연기도 한 몫 톡톡히 합니다. 액션에서는 기대를 버리고 관람해야 할 영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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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해무: 한정된 공간속 괴물들의 전쟁(잿빛안개). (0) 2014/09/04 PM 1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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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무: 한정된 공간속 괴물들의 전쟁(잿빛안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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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인 포스터)




 원톱 주연의 김윤석은 필자를 실망시킨 적이 없었기에 해무 역시도 엄청난 기대감에 영화를 감상하려갔습니다. 또한 배라는 한정된 공간속에 그려질 치밀한 감정싸움을 영화로 어떻게 그려내었을지 정말 궁금하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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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본에 대해 상의중인 심성보 감독과 김윤석)




 영화의 감독은 살인의 추억의 각본을 만들고 기타 영화 3개 정도의 감독을 한 후 해무로 도달한 심성보 감독입니다. 오늘 뭐해? 라는 옴니버스 영화로 인감감성을 잘 다루는 감독을 입증하였으며, 살인의 추억 속 스릴러와 감정 묘사를 해무에도 각기 다른 분야에 미쳐버린 괴물들의 광기로 극에 달한 상황을 잘 그려주었습니다. 심성보 감독은 인감 감정의 표현을 극대화하는데 특화된 감독인 것 같다는 생각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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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뇌중인 문성근)




 이 영화의 장점은 우선 스토리입니다. 해무의 스토리는 호불호가 갈립니다. 하지만 필자는 호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장점으로 꼽았습니다. 극적상황을 맞는 사람들이 한정된 공간 속에서 어떻게 괴물로 변하는지의 과정과 변한 후의 결과 그리고 이를 묘사하는 치밀한 감정으로 만들어진 긴장감이 영화를 내내 지배합니다. 또한 한정된 공간이라는 설정은 좁은 공간 속에서 광인들이 끝나지 않는 숨바꼭질을 하면서 공포와 광기가 관객들에게 전해지는데 매우 좋은 소재였습니다. 두 번째로는 배우들입니다. 배우들은 정말 미친 괴물 그 자체 이었습니다. 배에 대한 집착이 강한 선장, 사랑하는 여자에 대한 집착, 성에 대한 갈망, 자신이 저지른 행위에 대한 죄악들은 서로 얽히고설키며 극의 상황을 만듭니다. 그리고 이를 표현하는 김윤석, 박유천, 이희준문성근의 모습은 연기쟁이들 답게 완전히 몰두할 수 있는 연기력을 보여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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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항전쟁)




 다음으로는 화면이 있습니다. 광기와 비밀을 보여주는 어두운 화면들과 자욱한 안개는 긴장을 가미시키는 사운드와 치밀한 구성에 잘 어울려 영화를 극대화해주었습니다. 또 다른 장점은 안타까움이 있습니다. 영화는 팩션이지만 현실의 이야기입니다. 사람을 짐짝 취급하고 불법으로 입출국을 자행하는 사람들은 모두 사회 속 소외된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서로의 무엇인가를 지키기 위해 미쳐야했고, 광기는 악행을 만들었습니다. 악인이 처음부터 악인이 아니라 모두 평범하고 소외된 주변 사람들일 수 있다는 경각심을 영화를 보면서 느낄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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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진호 선원들)




이런 영화에도 아쉬운 점들은 있습니다. 첫째로는 억지적 설정입니다. 박유천은 처음 본 한눈에 반한 여자를 지키기 위해 몇 년간 동거 동락한 선원을 죽입니다. 김윤석은 배 때문에 가족 같은 선원들을 죽입니다. 그리고 여자를 강간하기 위해 사람을 죽인다는 모습 역시도 미쳐가는 과정이라는 점에서는 이해하지만 변함이 진행되는 요소와 내면을 조금 더 자세하게 설명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다음으로는 보기 힘든 부분들이 있습니다. 많이 잔인한 장면은 아니나 숨이 막힐 정도로 답답함이 생기게 하는 장면들이 조금 많다는 생각을 합니다, 이런 빈도를 조금만 줄이고 적당히 영화 사이사이에 긴장을 풀어주면 더 좋지 않았을까? 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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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정된 공간 '전진호')




 결론적으로 해무는 어둡고 답답한 스릴러입니다. 필자가 평론을 쓰기 위해 조사하던 도중 이 영화의 총제 작이 봉준호감독이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영화를 보는 내내 괴물과 설국열차의 그림체와, 컬러가 생각난 이유가 있었습니다. 사람도 상황과 집착에 따라 괴물이 되고 괴물은 주변 누구나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괴물들이 불쌍하고 절박한 사람입니다. 무너지는 배 속에서 주인공들의 모습은 정말 괴물 그 자체였습니다. 영화의 구성, 연기 모두 훌륭했으며 영화 종료 후 먹먹함과 답답함은 영화가 추구함을 느꼈기에 생긴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필요한 부분에 조금 더 설명을 해주고, 긴장을 완화하는 부분이 있었으면 하는 아쉬움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무의 괴물들과 잿빛 안개는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습니다. 평점은 8.0을 주면서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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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영화비평 : 하이힐(Highheel, 2013) (1) 2014/08/26 PM 1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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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힐 (Highheel)

 

2013년에 개봉한 영화 <하이힐>에 대한 비평에 앞서 올해 인터넷을 뜨겁게 달군 한 가지 장면을 참고하고자 한다. (영화에 대한 비평은 포스터이미지부터입니다.^^)

지난 6월 신촌 연세로에서 퀴어문화축제가 열렸다. 일부 보수시민단체와 종교단체의 반대시위로 인해 작은 충돌이 있었다고 한다. 사회적 분위기는 세월호 참사로 인해 차가운 바닷속으로 가라앉았고 그들의 행렬은 시기적으로 적절하지 않다는 이유로 비난받았다. 또한 여론을 의식한 듯 서대문구청은 애도 분위기를 이유로 행사를 불허했다. 그렇게 강행한 일련의 퍼포먼스는 사람들의 주목을 끌기에 충분했다. 팬티바람의 사람들은 옷가지를 벗어 던진 채 거리행렬에 나선다. 진보적 매체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는 인터넷 담론에서도 팬티바람으로 거리를 활보하는 그들에게 비난의 화살을 날린다. 하지만 그들에 대한 비난에 앞서 한 가지 질문을 했어야만 했다.

 

왜 옷을 벗을 수밖에 없었나?

 

사회적 그물망에 속해있는 우리는 다양한 형식들과 만난다. 학교에 등교하기 앞서 우리는 교복으로 갈아입고, 회사에 출근하기 전에 사무복으로 갈아입는다. 장례식과 결혼식은 그 자리에 맞는 복장(암묵적 합의)이 따로 있으며, 형식이 그 사람의 사회성(예의범절)을 대변한다. 오늘도 우리는 밖을 나서기 전에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점검한다. 지금 내가 입고 있는 옷이 를 대변하고 있는가를 끊임없이 질문한다.

 

주체가 어떤 상황에 적절하게, 그때그때 올바른 형식을 자신에게 새겨 넣는 것은 옷장 앞에서 옷을 선택하는 우리의 모습과 비슷하다. 하지만 이런 선택을 가능하게 하는 자율적인 주체는 어떠한 가정이 전제 되어야 한다. 자율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주체가 있다는 것은, 고정된 정체성을 가진 주체가 있단 말 아닌가? 우리 행위에 선행하고, 그것을 선택하는 고정된 정체성이 필연적으로 가정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다시 질문이다.

 

선행되는 고정된 정체성이란 게 존재할 수 있는가?”

 

그 고정된 정체성으로 인해 어떤 특수적인 내용 또한 고정된다. 남성은 남자다움의 내용을 가지고 여성은 여자다움을 가진다. 정확하게 표현하면 가진다라기 보다는 부된다라는 표현이 더 적합한 듯하다. 이렇게 이성애적 매트릭스는 우리의 모든 패러다임을 정의하고 있다. 단어의 의미를 구성하는 건 본질적으로 기표간의 차이뿐이다. 이분법적 사고는 현재 우리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성애적 매트릭스 범주에서 존재할 수 없는 이 퀴어는 무엇이라 정의해야 하는가? 사실 이 질문 자체가 잘못된 질문이다. 퀴어는 고정적인 정박점을 가질 수 없는 것이다. 이성애적 매트릭스 사이에 부유하고 있는, 어떤 곳에서 닻을 내릴 수 없는 것이 퀴어다. 그렇기에 퀴어 이론의 저항성은 다분히 포스트모던적인 것이다.

이상의 것을 고려했을 때 최초의 질문에 대한 답변이 나올 수 있을 것 같다. 선택에 앞서 고정된 정체성이 없다고 한다면, 퀴어의 본질이 정의될 수 없는 것이라는 주장을 이해한다면, 그들이 옷을 벗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옷이 가지고 있는 격식, 그 상징성에 자신의 닻을 내릴 수는 없는 것이다. 그들은 여하한의 선행되고 고정된 정체성을 거부한다. 이것이 그들의 팬티바람행렬의 핵심인 것이다(여성해방 운동과 비슷한 맥락이다-피맨-).

 

 

조금 길게 퀴어문화축제에 대한 인상을 늘어놓았다. 비평에 앞서 무리하게 이 글을 첨가한 것은 퀴어의 저항적 제스처가 이번 비평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필자는 퀴어가 단순히 성해방 운동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고정점이 없는 정체성, 본질을 거부하는 제스처는 현대사회 속에서 부유하는 개인에게 큰 메시지를 던져준다. 그리고 영화 <하이힐>이 단순히 성소수자를 소재로 한 영화가 아니라는 것을 밝히고자 한다. 거칠지만 <하이힐>은 조금 더 넓은 범위를 표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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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내안의 그녀가 죽었다

 

감성 느와르라고 했던가? 마초적인 느낌을 물씬 풍기는 포스터에 떡하니 있는 저 글귀는 하이힐의 표면적인 내용을 지칭한다. 하지만 종종 선물 포장지와 그 내용물은 다른 경우가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영화에서 그녀는 죽은 것이 아니라 원래 그녀는 없었다라는 것이다. 이 의미는 두 가지를 담고 있다. 하나는 앞서 얘기한 선행하고 고정된 정체성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하나이다. ‘여자가 되는은 있어도 여자는 없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앞으로 세부적인 영화를 분석하며 주장하겠지만, 윤지욱(차승원)의 여성성은 강박증에 가깝다는 것이다. 영화에서는 선천적인 것으로 묘사되지만 영화 흐름을 꼼꼼히 짚어 본다면 윤지욱의 여성성은 상징적 부채감으로 인한 강박증에 가까운 것으로 판명된다.

만약 이 주장이 적절하다면 <하이힐>이야말로 전형적인 느와르에 가까운 것이다. 그렇다면 윤지욱의 여성성, 즉 강박적으로 주입된 그것은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이미 영화를 본 독자라면 지금부터 우리가 주목할 장면을 유심히 보았을 것이다.

 

영화 도입부는 윤지욱에 대한 신화로 시작된다. 허불(송용창)진술로 윤지욱의 이미지는 그려진다. ‘600만 불의 사나이라고 일컫는 윤지욱은 그 별명에 걸맞은 화려한 액션과 잔인한 폭력성을 보여준다. 물론 이 장면에서 윤지욱의 여성성은 전혀 엿볼 수 없다. 주목할 장면은 다음 시퀀스이다.

장미(이솜)을 바래다주고 자동차 백미러를 통해 멀어져가는 그녀를 바라본다. 점점 멀어지는 순간, 잔잔한 음악은 페이드-인 되고 영상에는 슬로우-모션 효과가 걸린다. 플래시백 장면의 전형적인 도입문법이다. 우리가 윤지욱을 따라 빠져든 공간은 바로 소년시절의 그의 기억이다. 과도하게 노출된 조리개, 일부러 빗 맞춘 포커스는 마치 환상의 공간을 보고 있는 듯하다. 그리고 우리는 첫 장면에서부터 이 꿈의 내용이 윤지욱의 트라우마를 토대 짓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주연(이언정) 대사

잠을 그렇게 못자서 어떡하니? 때맞춰 잘 수 있는 직업도 아닌데.”

집까지 태워다 줄게. 약기운 때문에 너 운전 못해

처방전이야. 다른 건 몰라도 잠은 자야지. 약 떨어지면 연락하고.”

 

이 대화를 통해서 윤지욱이 불면증에 시달리고 있다는 사실을 유추해 낼 수 있다. 그리고 약을 통해 수면을 보충한다는 사실도 충분히 짐작 가능하다. 무엇이 그를 불면증으로 몰아넣었을까? 우리는 그 원인이 사춘기 시절의 기억에 있다는 것을 예상해야한다. 윤지욱은 잠을 청하는 동시에 억눌러 왔던 기억들이 조금씩 분출되어 외상적 트라우마와 조우한다. 이 섬뜩한 고통으로 인해 윤지욱은 잠을 거부하는 것이다. 그것이 만성적인 불면증의 원인인 것이다. 하지만 억압된 기억은 봉합할 수 없는 벌어진 틈새에서 계속해서 새어져 나온다.

 

영화 초반 그는 관객에게 고백함으로써 여성성을 표면화시킨다. 주연과의 대화와 사직서를 제출하는 장면은 수술을 결심하고 경찰로서의 삶을 마감하려는 그의 결심을 엿볼 수 있게 한다. 그렇게 영화의 주제를 명확히 관객에게 제시하는 듯하다.

하지만 영화는 의문투성이이다. 선천적으로 여성성을 가졌다고 가정되는 윤지욱에게서 뚜렷할만한 특징이 보이지 않는다. 기껏해야 볼 수 있는 것으론 여장을 하는 모습이나 차를 마실 때 새끼손가락을 살며시 드는 습관이다. 겨우 이정도 여성성을 볼 수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오히려 그가 여자로서 진우(고경표)에게 호감을 느끼고 있다는 설정이 필요하지 않을까? 영화에서 보여준 윤지욱의 행동들은 마치 여자가 되어야한다는 강박증에 걸린 것 마냥 자신에게 여성성을 입히는 것 같다. 만약 우리가 주장한대로 이 여성성이 강박적으로 주입된 것이라면 그 해석의 실마리를 분명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위치한 곳이라면 환상과도 같았던 윤지욱의 꿈일 것이 분명하다.

 

억압된 윤지욱의 꿈에는 또 하나의 소년이 등장한다. 중성적인 외모를 가진 그 소년은 윤지욱의 ()정체성에 큰 영향을 미친다(우리는 이 소년을 ‘X’라고 칭하자). 그들은 흔히 동성 간에 있을법한 애정관계를 넘어선 관계까지 발전한다. 사실 이와 같은 장면에서 윤지욱의 트랜스젠더적 성향을 볼 수 있기보다는 동성애적 성향이 더 짙게 보인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사춘기시절 소년/소녀들은 정체성은 모호하다. 그렇기에 그들은 성인들이 가지고 있는 동성 간의 애정보다 더 깊고 모호한 관계가 유지 가능한 것이다. 지난해 9월 독일 가정법이 개정되었는데 우리의 흥미를 돋을만한 내용이 있다. 개정된 내용을 살펴보자면, 자녀 출생 시 출생신고서의 성별 칸을 비워놓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성 구분을 단순히 섹스(생물학적 성)로 구분 짓지 않겠다는 얘기다. 선천적인 성차인 섹스와 본인이 아닌, 부모의 결정으로 신생아의 성별을 고정시키지 않겠다는 것이다. 이 신생아는 성인이 된 후 자신의 성별을 결정할 수 있다는 내용이다. 물론 이 혁신적인 개정안에도 한계는 존재한다. 퀴어 이론으로 보았을 때 여전히 이성애적 매트릭스에 갇혀있기 때문이다(최근 호주의 사례로 그 한계를 넘어서려는 움직임을 볼 수 있다). 다시 영화로 돌아가자면, 사춘기 소년인 그들에게 하나의 성 정체성으로 호명하기가 애매하다. 사실 동성애적 기질이 보인다고 하지만 이들을 단순히 동성애자라고 말하기에는 너무 비약적이다. 하지만 일단 동성애적 성향은 재처 놓더라도 윤지욱의 여성성의 원인을 확인할 길이 요원하다.

그의 여성성이 우리가 가정한 강박증적 징후라고 주장한다면 그것을 뒷받침해줄만한 근거를 영화에서 찾을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윤지욱의 강박적 여성성이 내면화 되는 과정을 몇 단계로 나눠 살펴볼 것이다. 모두 그의 꿈에서 찾을 수 있는 흔적이다. 그리고 장면분석 말미에 그의 기억이 트라우마로 남은 이유, 그리고 그곳에 외상으로 인한 상징적 부채가 무엇인지 우리는 알 수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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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시절 윤지욱에게 여성성이 찾을 수 있는 장면이 있던가? 사실 소년 윤지욱의 행동에서 어떠한 여성성을 찾아보기 힘들다. 만약 찾을 수 있다면 다음의 장면부터이다. 거울에 투영된 그의 이미지 위에 빨간색 입술이 그려진다. 하지만 주목해야할 점은 바로 그 입술을 그린 것은 윤지욱 본인이 아니라 X라는 사실이다. 장면순서는 위에서 보는 것과 동일하다. 빨간색 입술이 보이며 그것을 그리는 손이 보인다. 입술을 그리는 그 손의 주인공은 윤지욱이 아닌 X이다. 그리고 X가 그린 입술은 거울에 투영된 윤지욱의 입술과 겹쳐진다. 바로 이 순간부터 윤지욱의 여성성이 노골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한다.스크_1.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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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투적인 드라마의 한 장면 같은, 비에 젖은 원피스와 마스카라 위에 내려앉은 물방울. 비련의 여주인공을 연상케 하는 소년 윤지욱의 모습이야말로 명백하게 여성성을 지칭한다고 말 할 수 있다. 우리는 거울 씬 이전에 그 어떤 여성성을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을 확인했다. 하지만 X가 소년 윤지욱에게 여성성(입술)을 부여함으로써 비로소 관객에게 전달된다. 우리는 이 연속적인 장면에서 윤지욱은 여성성을 자율적으로 선택된 것이 아니라 타자에게서 역할을 부여받았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단순히 타자의 부름으로 강박증이 성립되는 것은 아니다.

 

소년 윤지욱(이동길) 대사

징그러, 그만해

우린 병에 걸린 거야. 병에 걸린 거라고.”

 

비를 맞던 그날. 소년 윤지욱이 X에게 단언한 말. 자신은 물론 X의 정체성을 부정하는 저 언술이 상황을 급변하게 만드는 기제인 것이다. 이때부터 관객은 앞으로 전개될 장면들이 순탄치 않을 것이라고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다.

우리는 자신의 정체성(성소수자)을 부정하는 윤지욱의 행동이야 말로 지극히 평범하다는 걸 알 수 있다. 이성애적 매트릭스라는 절대적인 범주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사람은 소수에 불과하다. 사회에 존속하는 모든 금기(질서, 습관, 체제 등)는 주체를 구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자신의 여성성을 부정하는 저 제스처가 윤리적(“네 욕망을 포기하지 말라”)으로 옳은가, 그른가를 떠나 사회적 범주 내에서 위치하고자 하는 주체의 히스테리적 반응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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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관객이 트마우마적 꿈(환상)에 접근할 수 있었던 길은 하나뿐이었다. 우리는 윤지욱()을 통해서만 그것이 가능했다. 하지만 영화 전개 이후 조금 다른 방식으로 환상에 접근할 수 있게 된다.

다시금 관객 앞에 제시되는 환상의 공간은 꿈을 매개로 하지 않는다. 관객조차 윤지욱의 발화를 통해 알 수 있었던 그 이름. 본인(장미)은 알려주지도 않은 이름을 미리 알고 있는 그 남자. 자신에게 이상하리만치 호의적이고, 어느 순간 불현 듯 찾아온 그 중년의 남자란 누구인가. 고민이 장미의 머릿속을 헤치는 순간 다시 사춘기 시절 윤지욱의 기억이 드러난다. 이 꿈이 누구에게서 비롯됐는가는 분명치 않다. 하지만 이 장면에서 분명하게 알 수 있는 것은 이 세계를 구성하고 있는 구성원이 한 명 더 있다는 사실이다. 이 컷으로부터 꿈은 근본적인 성격 변화를 겪는다. 3자가 등장한 순간, 그리고 비극의 시작을 알리는 윤지욱의 대사(“나 이사가 서울로”), 중심은 윤지욱의 성정체성 담론에서 상징적 부채로 이동한다.

분석의 편의상 소년 시절 윤지욱의 기억만을 나열하고 있습니다. 실제 영화에서 윤지욱의 꿈은 네러티브 중간에 플래시백 형식으로 편집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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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동생. 너랑 눈이 되게 닮았어.”

클로즈-업으로 교차된 그들의 얼굴, 조금씩 흔들리는 화면. 이미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장미를 포착하는 순간 화면은 평안함을 잃는다. 핸드헨들 기법은 동요되고 있는 윤지욱의 심리를 적절하게 묘사하고 있다. 지금까지 윤지욱은 트라우마적 기억을 직접적으로 조우한 적이 없다. 그는 약을 통한 강제 수면. 기억의 단편들을 간접적으로만 접근할 뿐이었다. 자아는 그 외상적 기억들을 틀어막고 있었던 것이다(불면증의 이유). 하지만 예상치 못한 전개. 철저하게 숨겼던 사실(장미의 이름이 밝혀지는 과정 참고). 예고 없이 찾아온 장미의 침입은 마치 실재의 침입마냥 낯선 것이었다. 그녀의 눈을 바라보는 순간, 억압된 기억들은 새어져 나오고 그는 주체할 수 없는 슬픔에 잠긴다. 자아가 필사적으로 틀어막았던 기억. 불면증을 유발한 트라우마의 핵심, 그 중핵은 바로 X의 자살이다. 서울로 떠나는 윤지욱. 어쩌면 우린 병에 걸린거야라고 말했던 그날, X가 보여준 의미심장한 제스처(자살을 암시하는 듯한)에서부터 이미 예견되어 있었는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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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눈앞에서 자살한 X. 그가 속삭이듯이 남긴 말은 무엇인지 정확히 알 수 없다. 어렴풋이 사랑해라고 말하는 것 같기도 하다. 마지막 한마디만을 남기고 그는 편안하게 뒤로 몸을 허공에 맡긴다. 아름다운 묘사. 너무나도 아름다운, 바람에 몸을 맡긴 가련한 꽃송이가 떨어지는 것만 같다.

꽃송이가 되어버린 그 대신 책상 위에 놓아진 국화꽃. 소년 윤지욱은 서랍 속에 있는 그의 물건들을 하나하나 올려놓는다. 모두가 떠나버린 텅 빈 교실에서, 아무도 없는 그곳에서. 이미 떠나간 그의 빈 자리에서. 윤지욱은 받아들인다. 외롭지 않게. 항상 그에 곁에 있기를 다짐한다. 왼손 약지에 새겨 넣은 그 자국이 다짐의 상징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받아들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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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그러, 그만해. 우린 병에 걸린 거야. 병에 걸린 거라고.”

 

비에 젖은 원피스를 입고 X 앞에서 서던 그날. 그날 이전으로 돌아가고자 한다. X가 직접 그린 입술을 간직했던 그 순간으로, 입술이 서로 포개져 하나가 됐던 그 시절로 말이다.

 

우리는 이것으로 윤지욱의 여성성이 처리하지도 해소하지도 못한, 오히려 해소를 거부한 강박증자의 욕망으로 남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윤지욱은 X가 부여한 여성성을 떠맡음으로서 여자가 된 것이다. 이는 윤지욱이 선천적으로 여성성을 가진 젠더가 아닌, 상징계의 담론적 맥락으로 후천적으로 구성된 성정체성이라 할 수 있겠다. 우리는 앞서 얘기한 선천적으로 고정된 성정체성(정체성)은 존재하지 않다는 퀴어 이론을 통하여 결국, 내안의 그녀가 죽었다라는 <하이힐> 포스터의 글귀를 뒤집는다. 하지만 우리의 분석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지금까지 논의한 것을 종합하면 선천적으로 고정된 성차는 없다는 것. 즉 행위에 앞서 행위자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주장이다. 그리고 윤지욱에게 부과된 성정체성은 타자로 인한, 담론의 효과라는 사실을 밝혔다. 그렇다면 다음 질문으로 이렇게 던져볼 수 있겠다.

 

주체를 규정하고, 호명하는 타자(대타자)란 무엇인가?”

 

우리는 영화 디제시스에 어떻게 접근하였는가? 허불의 진술로, ‘600만 불의 사나이라고 불리는 신화로서 호명된 윤지욱을 통해 영화에 빠져든다. 그렇기에 허불의 진술이 상징하는 의미는 크다.

윤지욱의 꿈을 분석하면서 도달한 결론은 선행하는 주체란 존재하지 않으며, 주체는 담론의 효과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담론을 어떻게 형성되는가? 사회적 담론, 역사적 담론은 누구의 기록하는가? 역사가 승리자의 기록이라는 벤야민의 글을 인용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충분히 알고 있다. 그 승리자란 바로 권력집단을 지칭한다. 그리고 영화를 실질적으로 이끄는 힘은 윤지욱, 개인으로서의 힘이 아닌 담론의 차원에서 이뤄진다.

실제로 영화의 도입은 허불의 진술로써 시작되고 영화의 기승전결은 권력주체가 주재한다. 또한 영화 클라이맥스를 종결하는 존재가 누구인가? 윤지욱이 마침표를 찍었던가? 아니다. 피투성이가 된 윤지욱을 살리는 것도, 그 상황을 종결하는 것도. 마침표를 찍는 것은 개인인 윤지욱이 아니다. 오직 영화 디제시스를 이끄는 힘은 권력주체에게 기인다. 이것이 이번 비평의 핵심이다. <하이힐>은 단순히 성소수자, 성해방 운동만이 아니라 했다. 조금 먼 길을 돌아왔지만, 영화에서 어떻게 권력집단이 개인을 주체화시켰는지 분석해보자.

 

<하이힐>에서 담론을 주도하는 집단이 있다. 별다른 추론 없이 제시할 수 있는 대립되는 두 집단. 보통 선으로 파악되는 법, 질서, 체계의 상징하고 있는 검찰’. 이에 각을 세우는 집단으로 당연히 그와 반대 속성인 범죄, , 무질서를 상징하는 조폭이 있다. 사실 윤지욱을 위험으로 몰아넣는 것도 이 두 집단의 알력다툼이지 않은가. 이분법적인 규분은 이제 무용해졌다. 선과 악은 명확한 구조라 생각하지만 실제로 어떤가? ‘헤드라인을 요구하며 조폭과 거래하는 <하이힐>의 검사와 실제 우리나라 검사들은 무엇 하나 다를 게 없다. 이 두 집단은 단순히 권력을 나눠같은 같은 목적의 집단이라 볼 수 있다. 이들에게 목표는 단 하나다. 상대보다 보다 많은 권력을 갖는 것. 이것이 전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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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둑에서 승자는 누구인가? 흑을 쥔 사람? 백을 쥔 사람? 판위에 많은 돌을 올려 넣은 사람인가? 아니다. 바둑이야 말로 일자의 스포츠이다. 돌은 상관없다. 오로지 집(공간)이 승리의 조건이다. 상대보다 많은 집을 획득한 주체가 승리를 한다. ()이 죽든, ()이 죽든 그것은 플레이어(권력주체)에게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는다. 하나의 돌이 죽든 셋이 죽든 상관없이 상대의 집을 뺏을 수 있다면 얼마든지 소모할 수 있는 소모품이다. 결국 흑을 쥔 권력주체와 백을 쥔 권력주체 간의 다툼인 것이다.

<하이힐> 전개의 급작스런 변화. 검찰과 조폭 간의 거래, 그리고 허불·허곤 형제의 권력다툼이 영화의 흐름을 주도하지 않았던가? 이 권력주체 혹은 권력집단의 바둑판 위에 개인은 놓아져 있다. 윤지욱은 물론 허불, 허곤 그리고 헤드라인검사까지 말이다.

영화의 도입은 허불의 진술로 시작 됐고, 절정으로 치닫는 문은 바둑돌을 쥔 권력주체들에 의해 활짝 열어젖혀진다. 그렇다면 영화 절정 부분은 어떤가? 이미 언급했지만 그 또한 그들에 의해 좌지우지된다.

 

 

출국을 앞둔 윤지욱은 떠나지 못 한다. 공황에서 대기하는 사이 자신이 아끼던 후배 형사 진우가 살해당했다는 보도를 접한다. 그리고 허곤이 장미를 납치했다는 사실 또한 알게 된다. 그는 발걸음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윤지욱이 돌아 올 수밖에 없는 단 하나의 이유가 있다. 그것은 상징적 부채이다. 이미 논의한 상징적 부채는 자살한 X와의 약속, 여성성에 관한 것이다. 하지만 이때 윤지욱은 또다른 장면을 기억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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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 윤지욱(이동길) 대사

오빠한테 약속했었어. 어디에 있든지 내가 지켜줄게

 

깊이 새겨진 다짐. X와의 약속. 여성성과 함께 약지에 새겨진 것은 동생을 지켜주겠다는 약속. 마치 커플링 같이 약지를 두르고 있는 거즈. 그리고 그 손을 붙잡는 어린 장미. 이 장면에 도달해서야 우리는 비로소 알 수 있다. 우연찮게 자신(장미)에게 찾아온 한 남자. 자신에게는 늘 친절했던 그 아저씨. 내 이름은 어떻게 알고 있단 말인가.

 

장미(이솜) 대사

날 왜 찾아 왔어요? 날 알죠?”

 

장미에게 자신의 존재를 알릴 수 없었던 이유 부채감 때문이다. X의 죽음을 강박적으로 떠맡은 이유. 윤지욱은 그 이유를 자신에게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X, 장미도 약지에 새겨놓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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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사범(안길강), 윤지욱(차승원) 대사

박사범: “여자랑 어떻게 싸우겠나?”

윤지욱: “이렇게 생긴 여자본적 있냐?”

 

윤지욱은 유령이다. 정체성을 상실하고 떠다니는 유령 같은 존재이다. 그가 여자가 되기 위해 출국을 결심한 그날. 결국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이뤄놓은 모든 것을 버려놓고 떠나기로 결정했지만, 그는 돌아온다. 죽은 진우, 납치당한 장미. 결국 그는 문턱을 바로 눈앞에 두고 돌아선다. 이미 자신은 신화적 존재로서의 윤지욱이 아니다. 이미 그가 진정한 남자가 아니라는 사실이 드러났다. 그렇다면 그는 누구인가? 문턱을 넘지 못하고 되돌아오는 그/그녀는 누구란 말인가. 이 기괴한 혼합물, 마치 유령처럼 흔들흔들 걸어오는 저 존재는 무엇이란 말인가. 붉은 모조 손톱과 짙은 눈 화장. 하지만 피에 얼룩진 얼굴과 미끄러지듯이 걸어오는 윤지욱. 그의 모습은 섬뜩하기만 하다.

허곤의 대사(“진짜 사랑을 했나보네. 시발, 더 미안해지네)는 장미가 죽었음을 암시한다(물론, 사실과 다르다). 이미 디제시스에 빠져든 관객은 윤지욱의 슬픔을 공유한다. 동생을 지켜주겠다는 X와의 약속. X, 장미도 못 지켰다는 사실에 그는 이성을 잃는다. 이 장면은 <하이힐>의 절정이며 관객의 집중도 또한 최고조에 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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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신창이가 된 윤지욱은 끝내 죽는 것일까? 장미 또한 어떻게 되었을까? 모든 고민이 관객을 사로잡고 있을 때 상당히 어색하게 연출된 장면이 개입한다. 조폭들은 윤지욱을 내버려둔 채 떠났고 허곤을 보좌하던 조폭의 대사가 들려온다.

 

거기도 철수 하시지. 아직 살아있으면 뽀뽀라도 한 번 해주고 보내주라 하시네.”

 

이게 무슨 말인가. 윤지욱을 죽이지도 않고 하물며 장미는 살아있다. 우리는 여기서 이 두 주인공을 못 죽여서 안달난 사람들이 아니다. 관객을 태운 롤러코스터는 절정에 위치했고 윤지욱이 죽는지, 장미는 어떻게 된 것인지 관객은 숨죽이며 있었다. 이렇게 팽팽하게 당겨진 실을 한 번의 가위질로 잘라버린, 당겨진 실이 바닥에 축 처져 늘어진 것이다. 자연스럽지 않은 이 조폭의 개입은 윤지욱의 분노도, 좌절도 모두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 모든 긴장은 해소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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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막 끝나고 나왔습니다. 힘쓸 일 없이 쉽게 끝났네요. 제가 있으니깐 회사걱정 마시고 회장님 건강 챙기십쇼.”

 

구역질이 난다. 입을 틀어막을 정도로 역겹다. 결국 허불과 허곤의 알력다툼이었던 것이다. 윤지욱의 분노, 관객의 긴장. 우리의 감정은 이 권력집단의 판 위에 놀아난 것으로서 생긴 파생물이다. 영화는 끝까지 개인을 놓아주지 않는다. 이 모든 것을 일거에 일소하는, 윤지욱과 관객을 비웃는 연출인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상당히 어색하게 개입한 이 연출에 대해 의구심을 가질 수밖에 없다. 급조한 듯한 연출. 윤지욱과 장미를 살리기 위한 짜 맞추기식 연출이라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종류의 장면에서 단순히 감독의 미숙함이라고 판단하는 순간 비평은 중단된다. 우리는 앞으로 더 나아가기 위해 이 장면이은 감독이 의도적으로 연출한 것이라 가정하고 분석해야 한다(필자는 감독 혹은 작가의 의도 자체는 비평에서 중요하다고 생각지 않는다).

관객의 모든 긴장을 제거하는 연출. 디제시스에 함몰된 주체를 잠에서 깨우듯이 관객을 영화에서 건져낸다. 마치 브레히트의 소격효과가 생각나는 대목이다. 어색한 개입은 관객이 몰입한 슬픔에 잠긴 윤지욱의 모습은 허구적이라 대놓고 말하며 의도적으로 영화과 감정적 교류를 방지하는 듯하다. 그렇다면 이 낯선 연출. 그것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는 뒤에 이어지는 권력집단의 알력다툼이 영화의 결말을 이끌어 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결국 윤지욱의 감정은 바둑돌 하나의 감정일 뿐이다. 영화가 소격효과로 얻고 싶은 사실은 바로 주체화를 부르는 권력의 존재이다. 영화는 철저하게 권력집단의 호명으로 전개된다. 이는 성소수자 혹은 개인이 담론을 이끌어 나가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영화에 녹아든 주인공을 통해서 영화는 흘러가지 않는다. 주인공은 전방에 세워 놓은 바둑돌일 뿐이다. 이 권력주체의 어색한 개입. 모든 상황을 종결짓는 조폭의 몇 마디 대사가 전부라는 것을 관객에게 사실로서 전달한다.

 

영화 마지막 씬. 윤지욱도 장미도 살아있었다. 덥수룩한 수염. 여성성은 고사하고 깔끔한 중년남자의 모습도 찾아볼 수 없다. 우리는 또 다르게 호명된 윤지욱을 보고 있는 것인가? 옆에서 장미를 기다리던 윤지욱에게 어떤 시선이 느껴진다. 대화를 나누던 장미의 보이스가 오프되고 배경음악이 흘러들어온다. 이제 남은 오디오는 현장음과 흘러들어오는 피아노 소리다. 그를 응시하고 있는 것은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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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누구인가? 스쳐가는 행인들 사이에 우두커니 서서 윤지욱을 바라보는 그 주체는 누구란 말인가? 담론에 의해 뭐라 호명되는 주체인가? 트랜스젠더라 불리는가? 성별 기호는 여자가 된 남자인가? 남자가 된 여자인가? 그들은 이 담론에 귀속되기 위해 남자가 되어야 하고 여자가 되어야 했다. 만약 선택치 않는다면 유령처럼 배회하며 정박점 없이 떠 다닐 수밖에 없다.

 

윤지욱과 그/그녀. 서로를 응시하는 순간, 장미의 호명이 개입한다. 수행적인 발화. 그것은 윤지욱을 주체화시키기에 충분하였다.

 

장미(이솜) 대사

오빠, 가자.”

 

오빠라고 호명하는 순간 윤지욱은 깨어난다. 사람들 속으로 사라지는 윤지욱의 뒷모습을 보여주는 컷은 담론으로 귀속되는 주체의 운명을 보여준다. 이제 그는 X를 대신한 장미의 보호자이며 후견인이다. 그가 공황에서 돌아서는 그 순간부터, 그의 여성성은 X에 대한 상징적 부채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리고 두 번 다시는 장미(X)를 잃지 않기 위해 그녀의 곁에 머무른다. 그것이 윤지욱에게 (영화에서) 마지막으로 주어진 역할인 것이다. 그 역할은 오빠라는 장미의 호명에서 찾을 수 있다.

 

만약 주체가 호명에 의해 주체화된다고 한다면, 담론에 필연적으로 종속될 수밖에 없다고 한다면 퀴어 이론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무엇일까?

 

사실 호명으로 인한 주체화, 행위에 이전에 주체가 존재하지 않다는 이론은 매우 논쟁적인 이론이다. 우리가 차용한 퀴어는 이 논쟁 속으로 들어가기 위해 사용된 것이다. 필자는 이들 이론 중 어떤 것이 옳다고 단언하지 못 한다. 만약 퀴어 이론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퀴어자체가 아닐까하고 생각한다. 명명되기를 거부하는 그 저항성 자체를 말이다.

 

인권운동, 해방운동의 씨앗은 불법에서 싹 틔우는 것과 같다. 그렇다고 해서 불법행위를 종용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다만, 우리의 관습과 질서를 흔드는 그 행위에서 전복가능성이 나올 수 있다는 말이다. 우리는 영화비평에 앞서 퀴어문화축제를 잠깐 보았다. 우리가 그들의 포르노그래피적 퍼포먼스에 유독 냉담한 이유가 무엇인가. 또 다른 성해방 운동 집단인 피맨(Femen)의 나체 시위는 용감한 여성들의 시위인가? 그렇다면 여성도 남성도 아닌, /그녀의 포르노그래피는 무엇인가? 음란죄이자 꼴불견인가?

 

모더니티적 기획에서 이데올로기 비판은 은폐되고 허구화된 권력을 폭로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것으로는 부족하다. 이데올로기는 단순히 허구가 아닌 실체였고 더 이상 이데올로기는 무엇을 은폐하는 것이 아니다. 이데올로기는 지극히 평범한, 우리가 사회를 보는 상징계 그 자체인 것이다. 현실이 바로 이데올로기(환상이).

우리가 피맨의 저항운동과 퀴어의 저항운동에서 동일하게 보지 않는다. 이미 이성애적 매트릭스에 갇힌 우리는 그것에서 벗어나려는 퀴어의 움직임 자체가 불편할 뿐이다. 현실이란 관점은 지극히 이데올로기적이다.

 

행위에 앞선 행위자라는 존재는 허구라고 주장하며 주체는 담론의 효과라 말한다. 우리의 정체성이 담론에서 귀결된 것이다. 즉 이데올로기의 파생물이다. 우리는 이것을 인정해야한다. 우리는 그 자체로 순수한 자율적 주체가 될 수 없다. 그렇기에 불편하고 낯설지만 벌려진 상징계의 틈에서 실재의 조각들을 마주할 수 있어야 한다. 그 실재의 조각, 환상을 걷어내고 남은 그 낯설고 섬뜩한 것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야 우리는 부자유 속에서 자유로 한 발짝 내딛을 수 있을 것이다.

 

일련의 어떤 퍼포먼스가 낯설고 불편한가? 그렇다면 그곳에 가능성이 숨어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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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    친구신청

소수자에 대한 표현력이 생각보다 좋았고 딱히 트랜스젠더만이 아니라 장애인이나 동성애자들도 공감할 수 있는 내용이었다고 봄.

액션씬도 구성에서 좀 뻔한 부분이 있었지만 프레임을 빠르게 줄이는 연출이 좋았음.

다만 퀴어 문화에 대한 거부감이 있는 사람이라면 대부분 싫어하는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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