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gyptian Blue MYP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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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킹스맨 : 시크릿 에이전트(Kingsman: The Secret Service, 2015) (1) 2015/02/12 PM 11:55

메인 포스터부터 007 유어 아이즈 온리를 패러디 한 킹스맨 : 시크릿 에이전트는 젠틀맨 스파이를 지향하면서도 노골적으로 007을 비틀어냅니다.
제이슨 본 시리즈나, 다니엘 크레이그 이후의 007 시리즈에서 볼 수 있는 현대적인 느낌의 액션, 그 강력함을 유지하면서도 올드 007 시리즈의 스타일을 추구하고, 거기에 시리즈 특유의 클리셰를 제거해내는 점이 인상적이네요.

이만하면 망작이 나올 만한데 영화의 거의 모든 장면에서 스파이물을 비틀어 내면서도 큰 줄거리는 옳은 방향으로 이끌어가는 매튜 본의 연출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특히 이런 장르 물에서 음악을 어떻게 사용할 것 인가는 어려운 문제일텐데,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같은 방법으로 훌륭하게 돌파, 긴장과 속도감을 유지해내는 것도요. 일부러 로버트 로드리게즈 스타일을 보여주려고 한 것 같기도 하고, 그의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약 빤 액션과 후반부 큐브릭의 영화들 샤이닝. 특히 닥터 스트레인지러브를 패러디한 폭파 장면은 압권이었습니다.

에이지 오브 울트론이 나오기 전까지는 일단 올해 최고의 오락물이 아닐까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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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노    친구신청

공주 로맨틱 성공적
[영화] 테스 (Tess, 1979) (0) 2014/11/24 PM 06:06

아름다운 처녀 테스는 존 더버필드의 장녀이다. 어느 날 자신의 가문이 명문가인 더버빌 가의 후손임을 알게 된 아버지에 의해 더버빌 가로 보내진다. 부유한 더버빌 가에 금전적 도움을 청해보려 하지만, 더버빌 가는 알렉 더버빌의 아버지 시대에 족보를 산 것에 불과하고, 바람둥이인 사촌오빠 알렉 더버빌은 테스에게 첫 눈에 반하게 되어 테스를 하녀로 일하게 한다. 어느 날, 체이즈 숲에서 알렉 더버빌은 테스를 겁탈하고, 그녀에게 정부가 될 것을 제안한다. 테스는 그 날 알렉 더버빌의 아이를 임신하고, 그녀는 더버빌 가를 떠나 집으로 돌아온다. 태어난 아이는 병으로 일찍 죽고 만다.
이 일을 계기로 테스는 먼 지역의 목장으로 떠나 소젖 짜는 일을 하게 된다. 그리고 농장을 차리기 위해 견학차 와 있던 청년 엔젤을 만나서 사랑에 빠진다. 그 역시 테스에게 반해 그녀에게 청혼을 하게 되고, 결혼 첫날 밤 엔젤이 젊은 날의 치기를 고백하자, 그녀 역시 자신의 비밀을 털어놓는다. 하지만 엔젤은 그녀에게 실망하여 떠나고 둘은 별거한다.

테스가 엔젤에게 마음을 주는 것은 필연적인 일일 것이다.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농부로의 길을 택하겠다는 것, 오래된 가문은 싫다며 사회적 관습에서의 탈피를 꿈꾸는 청년에게서 그 시절 없었으나, 여성으로 그렸을 이상향의 모습을 보았을테니 말이다. 그러나 그 역시 사회가 빚어낸 통념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못했기에, 테스는 더 큰 고통에 빠지게 된다.

그 후, 경제사정에 의해 다시 알렉 더버빌과 함께 할 수 밖에 없었던 테스에게 엔젤이 지난 날의 잘못을 후회하며 돌아온다. 이미 알렉의 아내가 되어버린 테스는 절망하여 알렉을 살해해 버리고, 엔젤과 함께 도망치지만 스톤헨지에서 경찰에게 잡혀 교수형 당하고 만다.

영화는 길 저편 멀리서 한 무리의 사람들이 음악과 함께 걸어오는 것으로 시작한다. 대부분은 흰 옷을 입고 있는 이 무리는 길을 따라 화면의 가장 먼 쪽에서 스크린을 향해 다가온다. 카메라는 한 지점에 멈춰 서서 그녀가 속한 행렬이 도착하기를 기다리고 그녀가 도착하자 자연스럽게 그녀를 따라간다. 한 사람의 인생을 표현하는 데에 있어서 길은 가장 좋은 은유일 것이다. 우리는 한 지점에 서 있다가 영상으로 표현된 그녀의 삶을 따라가 보는 것이다. 길의 이미지는 영화 처음부터 끝까지 계속해서 반복된다. 그리고 카메라는 마지막 스톤헨지에서 테스가 잡혀갈 때 다시 자리에 멈춰 서서 그녀가 안개 낀 길 저 편으로 사라지는 것을 바라보며 대구를 이룬다.

의도적으로 드라마를 배제하여 만들어진 이 영화는 사건을 표현하는 데에 있어 감정을 격렬하게 표현하는 것을 최대한 지양한다. 격렬한 감정이 드러날 수 밖에 없는 체이즈 숲에서의 겁탈 장면은 안개를 사용한 후 빠르게 장면을 전환하며, 엔젤이 그녀가 비밀을 고백한 편지를 읽지 않았음을 알게 되는 장면, 그 비통한 감정이 드러났어야 할 장면에서는 빛으로 테스의 얼굴을 가려버린다. 또한 알렉 더버빌을 살해하는 장면은 아예 보여주지 않고 흘러내린 피로 대신할 뿐이다. 이렇게 의도적으로 드라마를 배제함으로써 로만 폴란스키는 관객을 거대한 화랑(畵廊)의 입구로 인도한다. 거기에 더해 종종 화면의 주변으로 등장인물을 밀어내고, 최대한 정적으로 인물의 행동을 제한함으로써, 풍경에 더 많은 포커스를 향하게 하여 한 폭의 그림과 같은 이미지를 강화해낸다. 놀라운 것은 이렇게 만들어낸 이미지, 각각의 풍경이 테스의 상황과 감정을 암시한다는 것이다. 화면의 배경을 이루는 안개와 빛, 구름은 그녀의 감정과 완전히 조응한다.

(최대한 자연광을 이용한 것처럼 보이는 이 조명과 구도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을 명화를 떠올리게 한다. 대부분의 이미지는 만종이나, 이삭 줍는 사람들과 같은 장 프랑소와 밀레의 그림에서 가져온 것이다.)

의상 역시 마찬가지다. 영화 초반 흰색 계통으로 그녀의 순수함을 강조해냈던 의상은 아이가 죽고, 엔젤에게 버림 받는 등 슬픈 일이 생길 때마다 어두운 계통으로 변한다. 그녀가 순수를 상징하는 흰 옷을 입고 있는 것은 영화 초반 아무 것도 모르던 순수한 여인이었을 때와, 사생아를 낳은 것을 알고 있는 마을을 떠나 아무도 자신의 비밀을 알지 못하는 목장으로 떠나 사회의 폭력에서 자유로워진 시간이다. 그리고 끝내 알렉 더버빌을 살해한 후에는 피에 물든 듯 붉게 변하고 만다. (장 자크 아노가 감독한 양가휘, 제인 마치 주연의 영화 연인에서 이런 감정과 상태의 변화를 잘 활용한다. 특히 제인 마치가 운동장에서 다른 학생들과 다르게 혼자 붉은 색의 옷을 입고 있는 것은 아주 극적인 장면이기도 하다)

실제로 그런 의도가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영화는 로만 폴란스키의 삶과 묘하게 교차한다. 사회와 종교적 관습, 그 지독한 폭력의 희생양이 되어 버린 테스는 물리적인 형태로 드러나 버린 사회의 폭력성을 보여주는 사건에 의해 희생된 샤론 테이트를 떠올리게 한다. 그래서 이 영화를 샤론 테이트에게 헌정했는지도 모른다.

이 영화는 사회가 보여주는 보수성과 폭력에 대한 알레고리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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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사냥꾼의 밤 (The Night Of The Hunter, 1955) (1) 2014/11/10 PM 11:23




찰스 로튼의 감독 데뷔작이자 마지막 연출작이기도 한 이 작품은 뭐라 정의하기가 어려운 영화다. 어느 부분의 연출에선 제임스 스튜어트가 주연한 영화 멋진 인생을 떠올리게 할 정도로 가족적이고, 칼리가리 박사의 밀실 같은 표현주의 작품을 보는듯한 기괴한 배경 구성에, 서스펜스를 불러 일으키는 잘 계산된 장면 구성을 보고 있노라면 히치콕의 영화들이 생각나기도 한다. 게다가 필름 느와르적이기도 하고, 후반부의 장면들은 특히 한 편의 오컬트 영화를 보는 듯한 느낌을 받을 때도 있다.

존과 펄의 아버지인 벤은 두 사람을 죽이고 만 달러를 훔쳐온다. 경찰에 잡혀 가기 전에 펄의 인형에 돈을 숨기고 존에게 그가 클 때까지 돈을 잘 간수할 것, 펄을 돌봐줄 것을 약속시키는데 이 만 달러의 돈이 영화에서 갈등을 일으키는 원인이 된다. 교수형을 앞두고 형무소에서 잠을 자던 벤은 실수로 만 달러를 숨겨두었다는 이야기를 흘리고 만다. 때마침 감옥에 들어와 있던 해리는 이야기를 그 돈을 빼앗으려는 계획을 세운다. 이 영화를 대표하는 이미지인 해리는 양 주먹에 LOVE와 HATE를 새긴 전도사로 미망인들을 만나 죽이고 돈을 훔쳐가는 사이코패스적 인물이다.

전도사 행세를 하는 해리를 마을 사람들은 호의적으로 대하고, 미망인이 된 존과 펄의 어머니 윌라와의 결혼을 부추긴다. 결국 해리는 윌라와 결혼하게 되고, 아이들을 꾀어 돈을 빼앗으려는 잔인한 해리와 돈과 펄을 지켜내려는 존 사이의 갈등이 계속된다. 해리의 진면목을 알고 판단하여 대항 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존 뿐이다. 결국 해리는 윌라를 죽이고, 존과 펄은 배를 타고 강의 하류로 도망친다.
정처 없이 강으로 떠내려 가다가 존과 펄은 쿠퍼 부인을 만난다. 그녀는 이미 자신을 떠난 자식들을 대신해서 가족 없이 떠돌아 다니는 아이들을 돌보며 살아가는 인물이다. 마치 선과 악의 대결인 것처럼 보이는 쿠퍼 부인과 대결 끝에 영화는 결말에 이르게 된다.

이 영화는 내가 본 모든 영화를 통틀어 가장 기묘한 작품이다. 스스로 전도사임을 자처하는 해리는 악의 극단에 있는 인물이다. 아버지인 벤은 존과 펄에게는 상냥했을지 몰라도 돈을 위해서 살인을 저지른 인물이고, 존과 펄의 어머니인 윌라는 벤의 설명으로부터 이미 믿을 수 없는 인물이며, 해리의 꾀임에 넘어가고 첫날 밤 장면에 이르러서는 기독교적 분위기가 가득한 영화 안에서 홀로 음란한 역할을 맡은 듯한 분위기를 풍기기도 한다. 또 그녀를 부추기는 마을 인물들은 어떠한가. 그들은 호의로 윌라를 대하지만, 결과적으로 그 행동은 참혹한 결과로 돌아온다. 결국 존의 시선 아래에서는 모든 인물들이 해리의 범행을 돕는 인물로 여겨진다. 마을에서 유일하게 믿을 수 있었던 인물인 버디 역시도 중요한 순간엔 방관자가 되고 만다. 갑자기 등장한 쿠퍼 부인은, 영화에서 어떤 설명도 없이 등장하는 낯선 인물이지만 선 역으로 해리의 정반대에 위치하여 존과 펄을 돕는다. 가까운 인물들은 모두 적이고, 낯선 인물들은 모두 조력자가 된다.

이 영화의 정말 무서운 점은 동화적인 분위기와 공포가 함께 맞물려 있다는 것이다. 마치 오른손에 LOVE를, 카인의 왼손에 HATE를 새겨 놓은 해리의 손이 깍지를 끼고 있는 것처럼 두 가지는 완전히 맞물려 있다. 영화는 계속해서 이 것이 동화임을 주지시킨다. 오프닝에서 다섯 아이들의 얼굴과 함께 등장한 쿠퍼 부인은 관객을 바라보고 이야기를 들려주다가 책을 펴는데, 그 다섯 아이들의 얼굴이 영화에서 쿠퍼 부인이 키우는 다섯 명의 얼굴과 다르다. 존과 루비 대신 다른 아이들의 얼굴이 등장한다. 존과 루비는 성장하여 떠나갔을 수도 있지만, 책을 읽는 장면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 영화는 물론 영화지만, 동화와 실제일 가능성이 혼재하고 있기도 하다. 존이 펄의 침대에서 이야기를 해주는 장면, 쿠퍼 부인이 잠자리에서 아이들에게 모세의 이야기를 읽어주는 장면, 펄이 배 위에서 노래를 부르는 장면 들은 영화 전체적인 내러티브와도 맞물리고, 빛과 어둠을 잘 사용한 배경과 발랄하고 아름다운 선율이 흐르는 음악 역시도 동화적 분위기를 강화한다. 그래서 이 영화는 더욱 무섭다. 이렇게 무서운 동화가 어디 있단 말인가. 오프닝에서 존과 루비의 얼굴이 없는 것도 그렇다. 존과 루비는 해리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은 인물들이다. 이런 기묘한 연출은 공포를 불러 일으키는 상상을 더욱 자극한다.

해리라는 악마 그 자체를 상징한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악마적이다. 기막힌 설교를 통해 윌리 부인을 교회에서 간증하게 하는 장면도 그렇거니와, 그녀를 살해할 때의 장면은 빛과 어둠을 사용해서 제단과 같은 분위기를 내는데, 그 자체로 상당히 반기독교적이다. 그녀는 죽음 앞에서도 전혀 저항하지 않을 정도로 그의 광신적인 신앙 앞에 세뇌되어 있다. 그는 항상 주의 팔에 안기세라는 찬송가를 부르는데, 영화의 후반부 해리가 쿠퍼 부인의 집 앞에서 찬송가를 부르며 자신의 존재감을 과시할 때, 쿠퍼 부인이 정확한 가사로 그 찬송가를 따라 부르는 장면은, 마치 영화 엑소시스트처럼 악마에 대항해 성경을 영창하는 듯한 분위기로 여겨질 정도다.

이런 영화의 공포를 아름다운 장면들이 희석시킨다. 특히 배를 타고 두 아이가 하류로 떠내려가는 장면은 음악과 더불어서 환상적인 이미지를 만들어낸다. 두 아이가 헛간에 숨어 하루 밤을 보낼 때 어두운 건물의 바깥 쪽으로 어스름히 보이는 빛, 창 밖의 초승달. 물 속에 가라앉은 윌라 부인의 시체가 드러나는 장면 역시도, 무서운 장면이지만 존 에버렛 밀레이의 오필리아를 떠올리게 할 정도로 아름다운 이미지다.

결말에 이르러 해리가 경찰에 잡혀갈 때 안된다고 소리치며 아버지라고 부른다. 벤이 잡혀갈 때를 떠올리며 해리와 벤을 동일시하는 이 충격적인 장면은 전율이다. 펄도 그렇고 루비도 그렇고 존도 마찬가지로 아이들은 무엇보다도 부모의 사랑을 갈구한다. 또 윌라의 시체가 드러난 후의 이어지는 장면에서 해리의 뒷모습을 따라 카메라의 시선이 조금씩 작아지고 아이들을 클로즈업 하는 장면, 펄이 인형에서 돈을 꺼내 자를 때, 해리의 발치로 존과 펄을 상징하는 두 장의 종이 인형이 날리는 장면의 연출은 잊을 수 없을 것이다.

몇 번이고 다시 보아야 할 위대한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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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틴    친구신청

러브 & 헤이트가 여기서 나온 거였군요....
[영화] 선셋 대로(Sunset Blvd., 1950) (0) 2014/10/28 PM 09:35


빌리 와일더 감독의 1950년작 선셋 대로를 보았습니다.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건 이런 영화를 볼 수 있다는 것은 행복한 일입니다. 고전 영화들에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면 이런 작품을 보지 못했을 거라고 생각하니 아찔할 정도입니다. 이 영화가 많은 감독과 비평가들의 역대 최고의 영화 리스트에 빠지지 않고 등장했던 이유를 잘 알 것 같습니다.

벌이가 시원찮아 방세도 내지 못하고 있는 작가 조에게 낯선 남자들이 방문합니다. 그들은 할부금을 내지 못한 조의 차를 압류하러 온 사람들입니다. 조는 여기저기 돈을 구해보려 움직이지만 실패하고, 차를 압류하러 온 자들에게 쫓겨 선셋 대로 10086번지의 저택에 숨게 됩니다. 버려진 낡은 저택인 줄 알았던 곳은 무성 영화 시절의 여배우인 노마 데스몬드의 집이었고, 영화계로 복귀할 꿈을 꾸고 있는 그녀는 자신이 쓴 시나리오 살로메의 수정을 조에게 맡깁니다. 조는 자신의 젊음과 꿈을 버려둔 채 노마에게 종속되어 살아가게 됩니다. 노마가 자신에게 애정을 품고 있음을 알게 된 연말 파티 때, 그녀를 떠나려고 결심하지만 노마가 자살을 시도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저택으로 돌아와 오히려 이전보다 더 깊은 관계가 되고 맙니다. 조에 대한 그녀의 광기와 집착은 심해지고, 결국 끔찍한 결말에 이르게 됩니다.

간단한 줄거리로는 설명할 수 없는 대단한 작품입니다. 노마가 복귀작으로 썼던 시나리오인 살로메는 영화의 비참한 말로를 예견하는 복선으로 사용되고, 무성 영화에 출연했던 배우로서의 글로리아 스완슨, 그리고 감독이기도 했던 에리히 폰 스트로하임, 조가 밀납 인형이라고 부르던 버스터 키튼 외 다른 무성 영화의 배우들이 스스로의 어떤 일부분을 연기하고 있다는 점도 놀랍기만 합니다.
헐리우드에서 시나리오 작가로 꿈을 이루기 위해 찾아왔다가, 자본을 상징하는 노마에게 종속되어 버리고 하인과 다름없이 부려지는 조의 모습도 마찬가지로 여러가지 생각을 하게 합니다. 꿈을 가지고 살아가는 젊은 베티는 아름다운 빛, 연인으로 다가오지만 이미 타락해 버린 조는 노마에게서 달아나기는 하여도 그 것을 움켜쥐지는 못합니다.

드밀 감독을 찾아간 자리에서 다가오는 마이크를 밀어버리고, 핀 조명과 예전 자신들의 팬 사이에서 눈물을 흘리는 노마의 모습은 누구에게나 황금기가 있다던 '미드나잇 인 파리'의 대사를 떠오르게 합니다. 빌리 와일더 감독에게 자신이 꿈꾸고 보아왔던 황금기는 무성 영화가 제작되던 그 때인지 모릅니다. 빌리 와일더 감독 스스로가 그 시기를 추억하고 간직하는 한 방법인지도 모르지요. 영화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그녀를 기억하고 사랑을 보내는 것은 말입니다. 아주 짧은 시간의 꿈에 불과할지 몰라도요.

광기와 집착에 사로잡혀있는 노마의 모습은 때로는 가련하고 우스꽝스러워 보이기도 합니다. 눈을 크게 뜨고 턱을 들어 올린 상태로 마치 실에 걸린 인형인 것처럼 움직이는 모습은 소리를 제거하면 무성 영화의 스타일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노마의 연기와 광기가 최고조에 이른 영화 후반부에 조와 노마가 함께 한 장면에 공존하는 것은 아이러니한 화면 구성처럼 보입니다.
마지막 장면에 이르러서 노마는 자신이 체포되는 과정을 영화의 한 장면으로 착각하는데, 준비를 마치고 천천히 계단을 내려오는 그녀의 모습은 정지된 것처럼 보이는 다른 사람들과 겹쳐져서 공포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냅니다. 특히 화면으로 천천히 다가오는 마지막 장면은 그녀가 스크린을 찢고 뛰어나올 것만 같은 느낌까지 받게 하는 전율의 명장면입니다.

두서 없이 이런 저런 이야기를 적었는데, 정말 이런 영화를 볼 수 있다는 것은 행복입니다.

이중 배상이나 뜨거운 것이 좋아를 볼 때도 생각한거지만 빌리 와일더 감독은 정말 대사를 잘 쓰는 것 같습니다.
언제고 계속해서 다시 보아야 할 영화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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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검은 신, 하얀 악마(Deus e o diablo na terra do sol, 1964) (0) 2014/10/27 PM 03:22




브라질 영화인 검은 신, 하얀 악마를 보았습니다. 누벨 바그와 동시대에 브라질과 제 3세계의 영화계에 새로운 물결을 이끌었던 시네마 누보 운동의 대표적인 작품입니다.

소작농인 마누엘은 지주의 횡포와 학대를 견디지 못하고 그를 죽이고 아내인 로사와 도망쳐 세바스챤이라는 선지자에게 몸을 의탁합니다. 세바스챤은 곧 새로운 세상이 열릴 것이라며 민중들에게 큰 지지를 받고 있는 종교 지도자인데 마누엘은 그를 맹목적으로 추종하게 됩니다. 교회와 정부는 세바스챤의 영향력이 커지는 것을 두려워 하여 죽음의 안토니오라는 남자를 고용하고 마누엘은 종교 의식의 하나로 그의 아들까지 제물로 바치게 됩니다. 로사는 아들을 죽인 세바스챤을 살해하고 때마침 등장한 안토니오가 나머지 추종자들을 모두 죽여, 로사와 마누엘은 다시 무기력한 떠돌이가 되어 황무지를 떠돌다가 이번엔 코리스코라는 산적을 추종하기 시작합니다. 코리스코는 자신 이전 폭력으로 민중에게 권력을 찾아오려 했던 람피앙의 이름을 빌려 자신의 폭력을 정당화하고 마누엘은 코리스코와 행동을 함께 합니다. 결국 다시 안토니오가 등장하여 코리스코를 죽이고, 마누엘은 그를 피해 달아나며 영화를 끝맺습니다.

마누엘은 정당한 노동의 대가를 받지 못하고, 부당한 힘에 짓눌려 있는 나약한 민중을 상징합니다. 노력에 대한 대가가 따르지 않고 권력자들은 합심하여 그 지배구조가 탄탄해져 있으므로 민중은 기적에 기대어 현실을 극복해 나가려고 합니다. 신앙과(선지자) 폭력(전설적 의적)이죠. 하지만 둘 모두 민중에게 제대로 된 길을 제시하지 못합니다. 세바스챤은 아이를 희생 제물로 바치는 거짓 선지자로 변질될 뿐이고, 민중에게 권력을 달라고 울부짖던 도적은 폭력에 중독되어 총잡이에게 목숨을 잃고 마니까요. 영화는 마누엘의 행동을 통해 이런 민중의 고통에 대해 정답을 제시하는 방법을 택하진 않습니다. 다만 맹인을 통해 앞이 잘 보이느냐고 관객들에게 묻습니다. 나약하게 다른 이에 기대는 것이 아니라 민중 스스로 무엇이 옳은지 눈을 뜨는 것이 중요하다는 이야기겠지요.


실험적이다 싶은 장면이 많은 영화입니다. 군중들 사이에서 한명 한명의 얼굴을 클로즈업해서 보여주다가 어느 순간엔 브라질 전통 음악을 깔고 노래를 집어 넣어 배경과 현재 상태를 설명해주기도 하고, 아무 소리 없이 황무지를 비추며 철학적으로 사색하다가도 갑자기 서부극으로 돌변하기도 합니다. 마지막 전투 총을 쏘며 지그재그로 달려나가는 안토니오와 코리스코의 모습을 멀리서 잡은 장면은 심각한 그 전의 장면들과 대비되서 아주 우습게 보이기도 하죠. 이런 극적인 변화들은 그들이 품은 정의, 철학의 부재와 황무지 땅에 정착하지 못하고 부유할 수 밖에 없는 민중의 고통을 더 자극적으로 다가오게 만듭니다. 특히 마누엘의 아내인 로사의 무기력한 표정을 클로즈업한 장면들은 아주 슬퍼보입니다. 다만 후반의 이십분 가량은 지나치게 지루하다는 느낌이 들어서 보기가 힘들더군요.


보면서 같은 브라질 영화인 엘 토포 생각이 많이 났는데, 브라질에선 가톨릭이 토착 종교와 융합하여 퍼져있는 모양입니다. 그래서 종교적인 부분을 많이 다루는 두 영화가 비슷하게 보이는 것인가 봅니다. 서부극의 스타일을 추구하는 것도 마찬가지겠고요.

두 영화 모두 민중이 신앙과 권력에 의해 학살 당하기도 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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