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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 7. 자아 (0)
2019/01/20 PM 11:24 |
7. 자아
실험 및 관찰 대상 - 나와 세상
참고자료 – 과학자들
다방면에 지식이 부족하므로 오류가 있을 수 있음을
미리 말한다. 추후 세세한 부분은 수정할 예정이나 자아의 근원이
세포라는 점은 바뀌지 않을 거라 생각한다. 그럼 시작하겠다.
자아는 세포를 근원으로 하고 지성은 언어를 근원으로
한다. 이것이 다른 생물과 인간의 차이다. 자아는 세포를 가진 모든 생물이 가지고 있지만 지성은
오직 인간만 가지고 있다. 이 전제가 기준이 되어 자아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럼 자아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해보자. 자아의 근원인 세포들은 각각의 의지를 가지고 움직인다. 이 때, 뇌의 유무에 따라 성격이 달라진다. 뇌가 없는 생물은 유전자에 의해 움직이며 세포 자체가
자아라고 할 수 있다. 반면 뇌가 있는 생물은 유전자나 경험을 기억하는 뇌를 통해 일정한 몇 가지의 의지로 통합되어 움직인다. 이를 가리켜 세포의 여론화라 하겠다. 이 세포의 여론은 중요도에 따라 처리 영역이 결정된다. 아무것도 모르는 새끼도 살기 위해 배가 고프다고
운다. 유전자의 기억을 통해 기초적인 욕구의 중요도가 결정되어
가장 먼저 의식 위로 떠오르게 된 것이다. 감각기관도 마찬가지다. 유전자 또는 경험을 통해 중요한 감각기관의 정보부터 의식 위로 떠오르게 된다. 이처럼 중요한 여론부터 의식 위로 떠오르는데, 이를 가리켜 의식적 자아라고 하겠다. 보통 이 의식적 자아만을 통상적인 자아라 인식할
수 있지만 자아의 근원이 세포인 만큼 무의식적 자아 또한 자아의 일부라고 인식해야 할 것이다.
그럼 지성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해보자. 지성의 근원인 후천적 언어는 현재 인간만이 습득하고
있다. 이 점이 다른 생물과 인간의 차이다. 보통 뇌가 있는 생물은 최초 유전자에 의해 여론이
형성되어 의식 위로 올라와 움직이다가 경험을 통해 차츰차츰 달라지게 된다. 아무데나 대소변을 보던 애완동물도 훈련을 통해 가릴 수 있게 된다. 이러한 중요도 변경은 후천적 언어가 있든 없든 학습으로
어느 정도는 가능하다. 하지만 그 뿐. 인간 수준의 체계적인 사고는 후천적 언어와 그것을 이해할 수 있는 지능이 있어야만 가능해진다. 어떤 사람이 배변욕구를 느꼈다고 가정해보자. 최초, 배변욕구를 담당하는 세포들이 모여 여론을 형성한다. 그 세포의 여론은 뇌에 있는 과거 기억을 통해 우선순위가 결정되어 의식 위로 떠오른다. 이때 배변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할 수 있는 것은
언어를 습득하여 그것에 이름을 붙였기 때문이다. 언어를 통해 어떤 상황인지 인지하게 되면 다양한 대처 수단들이 언어화하여 떠오르게 된다. 현재 상황, 배변의 인내시간, 화장실 위치 등이 떠올라 스스로 판단을 할 수 있게 된다. 이러한 체계적인 사고는 언어가 없으면 불가능하다.
세포를 가진 생물, 후천적 언어와 그를 이해할 수 있는 뇌. 이것들을 가지고 있는 우리 인간은 단순한 자아가
아닌 지성을 갖춘 자아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한 증명은 지금 당장 내가 할 수는 없다. 아마도 자아를 가진 인공적인 존재가 탄생해야 가능할 것이다. 그렇다 인공생명이다. 인공생명이 탄생해야 증명이 가능할 것이므로, 나는 현재 인공지능과 내가 생각하는 자아를 비교해가며 자아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을 해나가도록
하겠다.
인공지능은 우수하다. 연산처리, 저장매체, 수집능력 등 인간이 넘을 수 없는 벽이 되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들에겐 자아가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살아있는 생명이 아니기 때문이다. 생물은 수도 없이 많은 세포들이 각각의 의지를 가지고
움직인다. 그 의지들이 모여 여론을 형성하기 때문에 아주 복잡하고
다양한 의지, 자유의지를 가질 수 있었다. 인간이 인공지능에 명령을 내릴 때 아무리 복잡하다고
하더라도 생물의 세포에 비하면 하잘것없다. 아무리 복잡하게 설계한다고 하더라도 생물의 세포를 넘는 명령을 내릴 수 있을까? 인간의 세포수만 해도 조 단위가 넘어간다고 한다. 이걸 어떻게 따라잡을 수 있겠는가? 그러니 자아를 만들기 위해 일일이 의지를 가진 명령을
내리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본다. 물론 조 단위의 프로그래밍이 가능하다면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러니 애초에 설계를 다르게 해야 한다고 본다. 예컨대 인공지능에 기쁨을 학습시킨다고 가정해보자. 그럴 때 기쁨이란 형태를 갖춘 감정을 학습시키려고
한다. 그러나 그건 거꾸로 된 것이다. 인간은 본래 기쁨을 알지 못한다. 세포의 여론으로 일어나는 어떤 것을 가리켜 기쁨이라고
명명했을 뿐이다. 식사를 할 때 느끼는 기쁨, 칭찬을 받을 때 느끼는 기쁨, 사랑을 할 때 느끼는 기쁨, 전부 다 다르다. 그걸 일일이 전부 학습시킬 것인가? 가령 전부 학습시킨다고 하더라도 정해진 기쁨만을
느끼는 존재가 될 것이다. 그것을 자아라고 할 수 있는가?
세포부터 만들어야 한다. 기쁨은 어디까지나 세포의 여론이 의식 위로 올라온
것에 불과하다. 국민이 없는 국가의 여론이 존재할 수 있는가? 지금의 인공지능은 그러한 것을 만들려고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고정될 수밖에 없다. 그러니 변화가 없다. 그러니 의지가 없다. 그러니 자아가 아니다. 그렇다고 조 단위의 세포를 일일이 설계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러니 그 중심이 될 유전자를 설계 해야 한다. 유전자에 의해 알아서 세포가 분열하여 의지를 가질
수 있도록 정밀하게 설계한다면 자연스럽게 자아를 가질 수 있는 존재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유전자를 설계하고, 그 설계된 유전자에 의해 세포가 분열하고, 분열한 세포들의 의지가 여론화하여 의식 위로 올라와
의지를 가지고 행동을 하고, 언어의 학습을 통해 말을 하는 것을 지켜보는 것은 정말이지 아기를 기르는 감정과도 같을 것이다. 아아 설레게 된다. 인공생명을 만드는 사람은 인공생명에 어떠한 감정을
느낄 것인가! 정말 설레게 된다.
물론 이때에도 주의점은 있다. 인위적인 손길로 문장을 입력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어떤 아기에게 밥을 먹고 싶다는 말을
가르친다고 하자. 이 때 뇌 내에 직접 ‘밥을 주세요’ 라는 문장을 입력해봐야 의미가 없다. 사람은 세포의 의지들이 모인 여론이 뇌의 기억을
자극하여 행동하게 된다. 식욕이 생길 때 보호자가 아기에게 ‘맘마’, 맘마’, 하며 말했던 기억들이 연결점이 되어 말을 내뱉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좀 더 자세히 설명하겠다. 이때 그냥 단순하게 ‘맘마’ 라는 단어만 기억하는 게 아니다. 그 상황에 따른 시각정보, 후각정보, 청각정보, 미각정보, 촉각정보 전부를 기억하고, 그 기억과 세포의 여론이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아기가 ‘맘마’라고 말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갑작스럽게 ‘밥을 주세요’ 라는 문장을 입력해봐야 큰 의미는 없다. 애초에 인간은 매시간 매초 수많은 정보를 접하고 있다. 그러한 인위적인 입력은 스쳐 지나가는 간판만도 못하다. 설령 언어를 습득하여 지성을 갖춘 자아가 형성되더라도
그 입력이 의식 위로 떠오를 수 있을지 의문이 든다. 의식 위로 떠오르는 것은 중요도에 의해 결정되는데, 그 중요도는 모든 기억과 복합적으로 연결되어 결정되므로 단순한 인위적인 입력이 중요도를 갖출 수 있을지 의문이 든다. 만약 그러한 입력을 중요하게 여기게 된다면 제대로
된 자아를 갖출 수 있게 될까? 단순 입력에 대한 단순 반응만을 보이는 인공지능과 다를 바 없어지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그런 입력은 별 의미가 없다고 본다. 입력이 중요하게 여겨지면 자아가 없고, 입력이 중요하지 않으면 의식위로 떠오르지 못하게
될 테니까 말이다.
이렇게 자아를 가진 인공생명은 학습을 통해 지성을
갖추게 된다. 그때가 되어야 인간 수준의 자아를 가진 인공생명이
탄생한다고 봐야겠다. 아마 그런 존재가 탄생하면 인간과 거의 비슷한 대화를 나눌 수 있을 것이다.
일단 이건 여기까지 쓰겠다.
이외 자아에 관련된 다양한 현상들에 대한 생각을
적어보겠다.
생물
생물은 개체가 아니라 집단이다. 자아의 근원인 세포가 생물 내에서 생과 사를 반복하기
때문에 생물은 매시간 매초 다른 존재로 있을 수 있다. 어제의 나는 오늘의 나와 다르고, 오늘의 나는 내일의 나와 다르다. 그러한 다른 존재를 하나의 자아로 묶어주는 건 기억이다. 우리와 조상이 다른 사람임에도 같은 언어, 역사, 문화 등을 공유하면서 같은 나라 사람임을 인식하는 것처럼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내가 같은 사람임을 인식하는
것은 기억 내에 있는 습관, 편견, 취향 등을 공유하기 때문이다.
언어
인간의 언어의 역사는 최소 4천년으로 오랫동안 함께 해왔다. 그러한 후천적 언어가 인간의 지성을 갖추게 해주었다는
것은 인간의 지성이 단순히 개체로서 성립된 것이 아니라 인류 역사와 함께 성립되었음을 말해두고 싶다. 인간의 지성이 언어임을 고려해본다면 어린아이가 다양한 언어를 습득하는 것도 좋지만 하나의
언어를 통해 사고영역을 깊고 넓게 만드는 것이 우수한 인간을 만들 수 있는 길이 아닐까 생각도 해본다.
스스로 생각
우리가 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 것도 언어의 힘이
크다. 물론 스스로 생각하는 것은 뇌를 가진 생물이라면
어느 정도 다 가능하다. 하지만 인간 수준의 체계적인 생각은 후천적 언어를 익혀야만 가능하다. 스스로 생각할 수 있다는 점 때문에 자아가 세포의 여론이라는 것을 이해하기 어려울지도
모르겠다. 감정이나 욕구의 충동으로 일어나는 생각과 그것에
대해 스스로 판단하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이 분리되어 여기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감정이나 욕구의 충동을 본능이라 여기고 스스로 생각하는 것을 이성으로 여겨 다른 것으로
생각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둘 다 세포의 여론이 맞다. 단지 스스로 생각하는 것은 현재뿐만이 아니라 과거의 여론 또한 기억 속에 자리잡아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둘을 같이 보기 어려울 뿐이다. 가령 배가 고프다는 욕구를 느꼈다고 가정해보자. 그 욕구는 현재 세포의 여론이다. 그리고 그 욕구에 따라 스스로 생각하게 된다. 무슨 밥을 먹을지, 어떤 장소에서 먹을지, 누구하고 먹을지 등등을 생각하여 판단하게 된다. 이러한 판단은 최초 인간이 자아를 가지게 될 무렵부터
이어져 온 생각의 흐름 속에서 나타나는 것이다. 우리는 살아오면서 시시때때로 계속하여 자극을 받는다. 감각기관을 제외하더라도 심장의 박동, 피의 흐름, 관절의 움직임 등의 자극을 받는다. 그러한 자극들이 최초부터 이어져 큰 물줄기가 되어 ‘나’를 형성하는 것이다. 다시 식욕으로 돌아가면, 본능으로 여기는 식욕의 경우엔 물을 공급하는 것, 이성으로 여기는 자아의 경우엔 큰 물줄기에 해당된다고
해야겠다.
자유의지
자아가 세포의 여론이라면 자유의지는 없다고 생각될지도
모른다. 특별한 형태가 없이 세포의 의지에 따라 이리저리
움직이는 것이므로 진정한 의미에서 자유의지는 없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하지만 말이다, 세포 자체가 우리가 아니던가? 모든 세포는 우리 자체다. 가령 사회의 여론에 실체가 없으므로 사회에는 자유의지가 없다고 이야기해보자. 말이 안되지 않는가? 시민들이 사회를 형성하는 존재이므로 사회의 자유의지는 시민 자체라고 볼 수 있겠다. 마찬가지로 자아의 자유의지는 세포의 자유의지, 세포는 나의 일부이므로 나의 자유의지다.
자유의지2
보통 자유의지는 신체적 정신적 속박이 없는 상태를
의미한다. 하지만 자아의 경우에는 조금 다르다고 본다. 인간은 외부에서 수집한 정보로 나타나는 감각기관의
의지와 내부에서 발산하는 욕구나 감정들의 의지를 가진 세포들의 여론을 형성하여 중요도에 따라 의식위로 올라와 생각하고 행동하게 되는데, 둘 다 세포의 여론이라는 점에서 같은 측면이 있다. 자아입장에서는 신체적 정신적 속박이 있든 없든 세포의
의지임은 별로 차이가 없다는 것이다. 자아의 입장에서 자유의지가 아닌 것은 어떠한 의지도 형성되지 않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가령 사람을 아무것도 없는 공간에 오랫동안 넣어두면
자아가 붕괴되어 이지를 상실한다. 감각기관이 의지를 발하지 못하자 자아도 의지를 잃어버린 것이 아닐까 싶다.
실수
인간의 의식은 가장 중요한 세포의 여론 순서대로
떠오르게 되어있는데, 현실에서 중요한 것과 자아에서 중요한 것이 서로 다를 때 나타나는 현상 중 하나라고 본다. 잊는다는 것은 당시 상황에서 자아에겐 별로 중요하지 않았던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세포의 손상이 이유일 수도 있다.
의식 무의식
정확히는 모른다. 그냥 써본다.
잠을 자고 있지 않을 때 의식과 무의식은 세포의
여론의 중요도에 따라 결정된다고 본다.
잠을 자고 있을 때 의식과 무의식은 세포의 휴식
수에 따라 결정된다고 본다. 세포가 하나하나 휴식에서 깨어나기 시작하면 사람도 잠에서 천천히 깨어난다… 아마도;
수면
뇌가 없는 해파리가 잠을 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이점을 보았을 때 수면은 뇌의 명령이 아니라 세포의
휴식욕구라고 생각한다.
꿈
꿈은 뇌를 가진 생물이 수면에 들었을 때 나타나는
현상이 아닐까 싶다. 의식이 있었을 때엔 유전자나 경험의 기억을 통해 세포가 일정한 형태를 갖춰 여론을 형성하여 중요도에 따라 의식에 떠오르게 되지만, 의식의 통제를 받지 않는 무의식적 상태인 수면상태에선
중요도와 관련 없이 제멋대로 뇌를 자극하여 무작위의 기억들을 머릿속에 떠오르게 만드는 게 아닐까 싶다. 무작위의 기억들인 꿈은 잠을 자는 순간부터 꾸게
되지만 인식의 경우엔 수면에서 깨어날 무렵, 얕은 잠을 잘 때에 의식이 깨어날 때 인식할 수 있는 게 아닐까 싶다.
다중인격
인간은 누구나 다중인격이 가능하다. 단지 다중인격자는 기억의 연결점이 없을 뿐이다. 가령 오늘부터 습관을 바꾼다고 해보자. 과거의 기억과 오늘의 기억이 연결되기 때문에 둘을
같다고 생각할 뿐이지, 만약 연결되지 않은 상태에서 습관을 바꾼 사람과 아닌 사람이 나뉘어졌다고 가정해보자. 그 둘은 다른 인격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보통 치명적인 트라우마의 경우 다른 인격이 생성되는데, 보통 사람이라면 기억이 연결되기 때문에 트라우마를
겪기 전과 겪은 후가 자연스럽게 연결되어 하나의 인격으로 나타나지만, 다중인격자는 그 둘의 연결점이 이어지지 않아 새로운 인격이 탄생하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기억이란 단순히 모든 기억만은 이야기하지
않는다. 실제로 기억상실의 경우에도 다양한 기억상실증이 있다고
보고되었다. 아마 습관에 관련된 기억이 아닐까 생각된다.
편견
처음 나는 편견이 나쁘다고 생각했으나 편견 또한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를 이어주는 자아의 이면, 편견이 없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그러므로 나는 편견을 없애라고는 못하겠다. 하지만 사물을 볼 때 편견 없이 보는 것이 좋으므로 그 때엔 잠시 자기자신을 지우고 사물을 바라보길 권해본다. 습관, 편견, 취향 등 사람의 형성하는 모든 것은 그 사람의 자아의 일부다.
심장이식
심장을 이식하면 사람이 바뀐다고 들은 적이 있다. 그건 당연한 게 아닐까 싶다. 심장 박동수만 달라져도 기분이 달라지는데, 심장 자체가 바뀌면 어떻게 변하겠는가? 입력기관이 달라지면 출력기관도 달라지기 마련이다.
마음
사람의 마음은 심장에 있는가, 뇌에 있는가, 아니다 세포에 있다. 세포의 생과 사의 굴레를 만드는 생명에 있다.
인공생명이 탄생한 후 벌어질 일들에 대한 생각을
적어보겠다.
자아를 가진 인공생명의 탄생은 인류의 새로운 서막을
예고한다. 세포가 자아의 근원임이 확실해지면 우리 자신들이
하나의 의지가 아닌 집단의 의지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하면 영혼의 의미는 없어진다. 세포 하나하나에 영혼이 있다고 할 수는 없지 않는가? 생명의 속에서 존재하는 생과 사의 굴레 속에서 영혼이 있을 공간이 어디 있겠는가? 세포가 자아의 근원이라면 영혼은 없다. 그리고 영혼이 없으면 사후세계도, 신고, 윤회도, 아무것도 없다. 물질공간만이 진리가 되는 세상이 도래한다. 그건 지금까지 인류가 기대어왔던 종교의 종말을 가져다 주는 사건이 될 것임이 틀림없다. 자아의 증명은 이러한 현상을 초래하여 지금까지 본
적이 없는 세상으로 우리를 초대할 것이다.
어쩌면 좋을까, 우리는 아무런 대비가 되어있지 않다. 어쩌면 좋을까, 죄의 책임마저 신에게 떠넘기던 우리는 홀로 세상과
맞서게 될 것이다. 어쩌면 좋을까, 자아를 탄생시킨 집단은 아마 지금까지 가지지 못한 힘을 얻게 될 것이다. 그걸 어쩌면 좋을까?
그렇지 않아도 급변하는 세상인데, 자아의 근원이 세포라는 것이 증명된다면, 인류 역사와 함께해왔던 수많은 것들이 의미를 상실한다. 그것에 기대어 살아가는 사람들은 도대체 무엇을 기대야
할 것인가? 사후세계를 생각하며 선을 행하던 사람들은 선을 행할
것인가? 다음 생을 기약하며 살아가던 사람들은 무엇에 기대어
살아가야 한단 말인가? 아무것도 없다. 지금 당장, 우리가 가진 것은 몸 밖에 없단 말이다. 기억을 옮겨서 넷의 공간에서 살아가려던 사람들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 기억에는 의지가 없는데 무슨 의미가 있을까? 설령 인공생명을 만들어 그 생명에 기억만 옮긴다고
하더라도, 무슨 의미가 있을까? 사람은 오래 전의 나를 생경하게 바라보게 된다. 기억을 공유하되 나머지는 상당히 다르기 때문이다. 그런데, 모든 몸이 다른 인공생명에 기억을 옮긴들, 그걸 나라고 할 수 있을까? 그 개체는 자신을 ‘나’라고 인식할지도 모르지만 진짜 나는 별개의 존재라고 생각한다. 하하… 엉망이 된 몸뚱이 하나밖에 남지 않았구나.
……
세상에는 우수한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사실 뭐 자연스럽게
적응할 확률은 높다. 그걸 기대하며 글을 마친다.
지금 현재 내가 생각하는 자아는 이러하다. 지식이 부족하므로 추후 좀 더 정리하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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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아와 인공생명에 관련된 세 번째 글이네요. 다른 글에도 어쩌면 실마리가 있을지도 모르니 궁금하면
찾아보시길… 개인적으로 하루빨리 인공생명이 탄생했으면 좋겠습니다. 궁금하거든요. 제 인생이 좀 망해서… 아니 상당히 망해서 호기심을 충족하는 걸 기쁨으로
삼고 있네요. 눈물
우리사회의 문제점
불평등한 가치관 -> 서열존중
불균형한 힘과 책임 -> 무책임한 힘
해결법
역할수행여부로 존중을 주고 기여도에 따라 대우를
달리하자.
힘이 책임을 지는 것이 아니라, 책임을 지는 자에게 힘을 주자.
언젠가는… 완성할 수 있기를 바라며.
다음은 오컬트 아니면 인간교육 아니면 민족에 대해
쓸지도 모릅니다.
그럼 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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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 6. 예술 (1)
2018/06/24 PM 07:56 |
6. 예술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것, 그것을 가리켜 예술이라 부른다고 한다. 사실 나는 예술을 잘 모른다. 몇 가지 예술들의 일부를 접하고 감상하며 즐길 뿐이다. 게임이나 만화 소설, 약간의 음악, 영화, 미술 정도. 광대한 예술의 세계 속에서 그 일부를 즐기는 정도에 불과한 내가 예술에 대해 논한다는 것은 어찌 보면
터무니 없는 일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예술이 사람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라면, 나 또한 사람이기에, 어쩌면 내가 바라보는 예술도 의미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해본다. 그래서 작성해본다.
그럼 내가 생각하는 예술에 대한 몇 가지를 이야기해보도록
하겠다. 일단 생각나는 것까지만 작성하고 나중에 더 정리할
예정이다.
첫째, 예술은 사랑
노동을 천시하는 자는 먹고 살 자격이 없고, 정치와 치안과 국방을 천시하는 자는 보호받을 자격이
없고, 문과를 천시하는 자는 생각할 자격이 없고, 이공과 상공을 천시하는 자는 문명의 혜택을 받을
자격이 없고, 예체능을 천시하는 자는 사랑을 하거나 받을 자격이
없다. (이것은 대략적인 구분이다.)
그렇다. 사랑이다. 예술은 사랑이다.
예술의 사전적 정의로는 [특별한 재료, 기교, 양식 따위로 감상의 대상이 되는 아름다움을 표현하려는 인간의 활동 및 그 작품.] 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무엇을 위해 아름다움을 표현하는가? 사람에게 사랑 받기 위해서다. 어떤 예술이든 동일하다. 대중을 위한 예술은 대중에게 사랑 받기 위해서 아름다움을
표현하고, 스스로를 위한 예술은 스스로에게 사랑 받기 위해
아름다움을 표현한다. 그러므로 예술의 본질은 사랑에 있다.
예술과 교훈에 대해 이야기를 함으로서 예술의 본질을
좀 더 살펴보도록 하겠다. 예술에 교훈은 필요한가? 이야기를 만드는 많은 사람들은 그 속에 교훈을 담는 것을 두려워한다. 진지하거나 어려운 예술은 곧잘 외면 당하기 때문이다. 교훈, 즉 가르침을 담은 예술은, 예술이 아닌 학문이 되어버리기도 하여 사람들이 즐기는 것이 아닌 공부를 하게 되기도 한다. 그래서 즐기기 위해 예술을 접한 사람은 그 예술을
외면하게 된다.
하나의 예시를 들어보겠다. 루이스 캐럴의 동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는 [동시대 다른 동화나 동시가 주로 아이들에게 교훈을 주려는 목적을 띠었던 데 반해 앨리스
이야기는 아이들에게 순수한 즐거움을 선사했다.] 고 한다. 환상, 신비, 말장난, 오해, 착각, 실수 등의 순수한 즐거움으로 그 시대 아이들에게 사랑 받는 것은 물론,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 받아 재창작 되기도
한다. 이 동화가 교훈이 없었기에 사랑 받았다면, 예술에
교훈은 필요 없는 것일까?
다른 예시를 통해 교훈의 필요성을 살펴보겠다. ‘피그말리온’의 작가 조지 버나드 쇼는 서문을 통해 예술에 대한
시각을 드러냈다. [이 작품은 고의적으로
교훈적이며, 주제 또한 매우 무미건조한 것으로 평가 받고 있기
때문에, 나는 예술은 결코 교훈적이어서는 안 된다는 소리를
앵무새처럼 반복하는 현명한 척하는 자들의 머리 위에 기쁘게 이 극을 던지겠다. 이 극은 위대한 예술은 교훈적인 것이라는 나의 주장을 증명할 것이다.]
실제로 ‘피그말리온’은 지극히 교훈적이다. (이후 약간의 내용 누설이 있다.) 길거리에서 꽃을 파는 소녀인 일라이자는 9년간 학교에서 교육을 받았음에도 영어발음이 엉망이다. (여기서 공교육과 음성학에 대한 비판이 있다.) 그 소녀를 음성학 교수인 히긴스 교수가 6개월간 영어발음을 가르쳐 한 파티에서 공주로 인정받게
한다. 길거리에서 꽃을 파는 소녀를 6개월만에 공주로 만든 것이다. (여기서 신분제도에 대한 비판이 있다.) 정작 일라이자가 공주로 보일 만큼의 숙녀가 될 수
있었던 것은 히긴스 교수의 영어발음 교정보다는 피커링 대령의 신사적인 태도 덕분이었다고 한다. (여기서 예의범절이나 품위는 모범을 보여야 본받을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외에 도덕, 존중, 경제 등 수많은 교훈들이 있음에도 ‘피그말리온’은 대성공하게 된다. 연극뿐만 아니라 뮤지컬이나 영화로도 제작되어 수많은 사랑을 받았다. 영화에 관심이 있다면 ‘마이 페어 레이디’를 한번쯤 들어봤을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 받아 재창작
되기도 한다.
이로서 알 수 있듯이 예술에 교훈의 유무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 사람을 매료할 수 있다면, 그것은 예술이 된다. 교훈을 담은 예술들이 인정받지 못했던 까닭은 교훈이
있어서가 아니다. 사람들을 매료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피그말리온’이 그랬듯이, 교훈을 담았더라도, 즐거운 재미를 주어 사람들을 매료할 수 있다면 위대한
예술이 될 수 있다. 달리 말해 예술로 포장하면 어떤 학문도 사랑 받을 수도 있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래서 많은 철학, 사상가들은 자신의 철학이나 사상을 사랑 받게 하기 위해 예술의 틀을 가져다 쓰기도 하였다. 볼테르의 철학적 콩트인 ‘캉디드 혹은 낙관주의’ 같이 말이다.
사랑, 그래 사랑이다. 예술의 본질은 사랑에 있다. 누구를 대상으로 하였는지에 따라 달라질 뿐이다. 대중을 매료할 수 없어 인정받지 못했던 예술이더라도, 만약 그 예술이 자기자신 또는 특정 대상에게 사랑
받기 위했다면, 그리고 사랑 받았다면, 그것은 예술이다. 단지 대중 예술이 아닐 뿐이다. 문학은 연애편지며 무용은 구애의 춤이다. 예술가들이야말로 (특히 대중예술) 이세상에서 가장 합법적인 하렘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다. 도대체 몇 명에게 사랑 받는 건가?
학문으로 지식을 배운다면 예술로는 감정을 배운다. 사람을 매료할 준비가 되어있는 예술은 사람의 감정을
뒤흔들어 감정을 학습하게 만든다. 이것도 기쁘다가 될 수 있구나, 이것도 슬프다가 될 수 있구나. 단순한 경험뿐만이 아닌, 예술을 통해 다양한 감정들을 느끼면서 풍부한 감성을 얻게 한다.
단순히 지식으로만 알고 있던 감정들도 예술을 통해
깨어나 정말로 알게 된다. 아름다운 그림을 보고 느끼는 감정, 아름다운 노래를 듣고 느끼는 감정, 아름다운 이야기를 읽고 느끼는 감정 등 수많은 감정을 느끼게 되면서 마음의 영역이 보다 더 넓어지게 된다. 넓어진 마음은 공감능력을 증대시켜 타인의 감정을
아는데 큰 도움을 주게 된다. 그리고 그렇게 자신과 타인의 감정을 알게 됨으로써 다양한 방법으로 사랑을 하거나 받을 수 있게 된다. 그러므로 예술을 천시하는 자는 사랑을 하거나 받을
자격이 없다. (뭐 사실 특정 예술을
천시할 수는 있어도, 예술 자체를 천시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예술은 먹고 사는 것 이상의 풍요로움을 누릴 수
있게 만드는, 우리가 좀 더 고상한 사람이 될 수 있게 만드는, 마음의 재료 중 하나다.
둘째, 예술은 정체
예술은 정체되어있다. 무궁무진한 발전가능성을 지닌 다른 학문들과는 다르게
예술은 발전이 매우 더디거나 멈춰있다. 왜? 예술은 사람의 마음을 다루기 때문이다. 세상은 변해도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 사람이 변하지 않기 때문에 지금까지 인류가 쌓아온
수많은 예술들이, 사람의 마음을 자극할 수 있는 영역을 거의 모두
차지해버렸다. 남은 영역이 거의 없단 이야기다. 그래서 새로운 예술이 등장하기가 어렵다. 아직도 극에서는 셰익스피어가 공연되고, 아직도 클래식에서는 베토벤이나 모차르트가 연주되고, 아직도 미술에서는 피카소가 언급되고 있다. 마음의 근본이 변하지 않기 때문에 그 시대에 정점을
찍은 예술들을 현대에서도 뛰어넘기 힘들다.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예술가에게는 괴로운 일일 것이다.
예술의 본질로는 이미 선조의 작품을 뛰어넘기 어려워졌다. 기술의 발달로 형태는 바뀌어가고 있지만, 종합 예술인 게임을 보라, 형태조차도 정체되어가고 있다. PC방 점유율이 몇 년째 비슷비슷하다는 것이 그걸 증명한다. 가끔 뛰어난 게임이 등장하여 판도를 바뀌기도 하지만
그 바뀐 판도가 계속 유지되고 있다. 급격한 기술의 발달로 사람 수준의 자아를 지닌 NPC가 등장하는 게임이나 VR게임이 등장할 정도가 되어야 비로소 이 판도가 크게 뒤집히게 될 것이다. 물론 그조차도 시간이 지나면 또다시 정체될 전망이다.
왜 피카소가 기묘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걸까? 그 시대의 예술조차 새로운 영역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어렸을 때 이미 훌륭한 그림을 그렸던 그에게 새로운
영역은 차원을 넘는 그림 외엔 발견되지 않았던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런 피카소의 고민은 현대 미술가들의 고민이기도 하다. 새로운 영역이 거의 없다. 그래서 좀더 기묘한 작품들을 도전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결과 대중이 현대미술을 외면하게 되었다. 피카소의 그림을 보고 “와 대단해”라고는 해도 그걸 진정 즐기는 사람은 그리 많지는
않을 것이다. 기묘하니까. (많은 사람이 즐기면 기묘하다는 표현을 쓰지 않는다.)
종종 돈세탁으로 쓰이는 것처럼 보이는, 붓으로 한 줄 그어둔 것(그림이라고는 못하겠다.)이 비싼 가격에 거래되는 것을 보며 현대미술을 비판하는데, 그것은 애초에 예술이 아니다. 어떤 감정도 일으킬 수 없는 그것에는 어떠한 예술적
가치가 없다. (어쩌면 외적인 요인으로
분노나 슬픔은 일으킬 수도 있겠다.) 그저 금전적 가치만 있을 뿐이다. 아무 가치가 없는 가상화폐에 금전적 가치를 부여하여 거래하는 것처럼, 아무 예술적 가치가 없는 것에 금전적 가치를 부여하여 거래하는 것뿐이다. 그걸 예술로 바라본다면 모든 예술에 대한 모독이다. 그러니 그걸 빌미로 현대미술을 비판하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현대미술이 비판 받아야 될 점은 그 점이 아니다. 미술의 새로운 영역에 도전하려고 하다 보니 예술의
본질을 잊어버린 것을 비판해야 한다. 예술의 본질은 어디까지나 사랑을 받는 것이다. 새로운 영역에 도전하기 위해 괴상한 작품을 그리고, 그걸로 사람들에게 사랑 받을 수 있다고 진정으로 생각하는가? 대중의 사랑에 관심이 없다고 하더라도, 스스로가 사랑할 수 있는 작품을 만들었다고 자신할 수 있는가? 만약 새로운 것을 위해 스스로가 사랑할 수도 없는
작품을 만들었다면, 그것을 예술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학문을 하고 있다고 봐야 한다. 그런 사람은 예술가가 아닌 학자가 된다.
또한 수단과 목적을 착각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붓 터치가 어떻고, 색감이 어떻고, 그린 사람의 철학이 어떻고 하는 것은 수단에 불과하다. 예술의 목적은 사람을 매료하여 사랑 받는 것이다. 위대한 작가의 작품A와 평범한 작가의 작품B를 예술에 문외한인 사람들에게 공개하여 어느 쪽이
더 마음에 드는지 선택하게 했다고 가정해보자. 그때 작품B가 더 많은 선택을 받았다면 그 작품이 사람의 마음을 매료시키는 능력은 더 뛰어나다고 봐야 한다. 그걸 보고 미술전문가가 식견이 없어서 그런 것뿐이라며
조롱한다면 나는 웃을 수밖에 없다. 그 미술전문가는 예술의 본질을 잃은, 수단에 예술적 가치를 부여하거나 금전적 가치에 예술적 가치를 부여하는 사람일 뿐이다.
이런 현상들은 대체로 예술의 발전이 정체되어있기
때문이 발생한다. 새로운 것을 도전하기 위해, 또는 비슷비슷한 것 중에 좀 더 우수한 것을 고르기
위해, 이런 현상이 발생하는 것이다.
셋째, 예술은 과학
그럼에도 예술에 대한 새로운 시도는 지향되어야 한다. 설령 아무에게도 사랑 받지 못하는, 그래서 예술이 아닌 학문이 되어버린 작품이라고 하더라도
그런 시도는 필요하다. 그런 수많은 시행착오가 있어야만 간신히 새로운 예술이 발견되기 때문이다. 패션쇼를 보면 일반 사람들은 이해 못할 괴상한 패션들이 나오곤 한다. 왜 그런 괴상한 패션이 필요할까? 그런 새로운 시도들이 있어야 일반 사람들도 이해할
수 있는 새로운 패션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좀 더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자면, 그런 새로운 시도는 과학에서 신기술을 발견하기 위해
시도하는 수많은 실험과도 같다. 과학의 발전이 수많은 실험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라면, 예술의 발전 또한 수많은 시도 끝에 이루어지게 되어있다. 그러니 사람들에게 사랑 받지 못하는 괴상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은 아무짝에 쓸모 없는
것이 아니다. 그것이 언젠가 새로운 예술로 대접받을 수도 있고, 설령 대접받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새로운 예술의 토대가
될 수는 있기 때문이다.
이제 예술은 과학으로 접근해야 한다. (이미 하고 있겠지만…) 어떤 색이 어떤 감정을 일으키고, 어떤 선이 어떤 감정을 일으키는지에 대한 연구를
하여 체계적인 지식을 쌓아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단순한 경험뿐만이 아닌 실험을 통해 결과를 만들어내기도 하고 의학 같은 다른 학문과 연계하여 사람의 감정을 체계적으로 정리해 예술을 과학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마 이런 생각은 에밀 졸라의 ‘실험소설’에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요즘 현대미술은 다양한 볼거리 속에서 관심을 잃어가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지원도 제대로 받지 못한다고 들었다. 냉정하게 말하겠다. 현대미술이 예술 그 자체로 사랑 받는 것으로 수입을 얻을
수 없어 말라 죽을 처지에 놓여있다면, 국가적 지원을 요구할 때 예술에 대한 지원이 아닌 미학이란 기초 학문에 대한 지원을 요구하는 것이 사람들에게 이해를 구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예술 또한 과학과 마찬가지로 토대가 마련되어야 더
수준 높은 예술이 가능하니까 말이다.
예술의 영역이 워낙 광범위하다 보니 요점만 잡아
나의 생각을 정리했다. 요점에 대해 설명할 때 특정 예술을 예로 들어 설명하였으나, 다른 예술에도 충분이 적용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어떤 것이라도 예술이라면 사랑 받는 것이 목적이고, 어떤 예술도 변하지 않는 사람을 위한 것이라 정체되어있으며, 어떤 예술이라도 과학적으로 접근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일단 여기까지 쓰겠다. 나중에 예술에 대한 생각이 늘어나면 추가로 정리하거나
작성해보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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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대체로 오래된 작품을 예시로 들려고 해요. 현대의 작품보다는 편견에서 좀 더 자유로운 측면이
있거든요. 그리고 직접적인 연관이 없어야 다양한 요소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있어서 되도록 해외의 것을 사용해요. 우리나라에서 예민한 주제도 다른 나라의 것을 가지고 설명하면 조금 더 편하게 전달할 수 있게 되지요. 그래서 보통은 특별한 예시 없이 전개하거나 해외
고전을 예시로 들고 있고 앞으로도 그럴 예정이에요. 뭐 생각이 달라질 수도 있지만요. ///
저는 저를 기준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드물어요. 대화를 할 때 종종 그걸 느껴요. 저는 저를 배제하고 이야기를 하는데, 상대방은 저를 포함시키고 이야기한다고 생각하고 있더군요. 본질을 보기 위해서는 객관이 필요하고, 객관을 위해서는 주관을 분리시켜놔야 해요. 본질을 보고 싶어하는 제가 저만을 포함시켜 생각할
리가 없지요. 역할존중에 대해 쓸 때도 그걸 고심했어요. 예민한 주제들이 많이 있기 때문에 그 생각들이 “너만을 위한 생각이지 않느냐” 라고 생각될 수도 있으니까요. 어떻게 받아드릴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분명한 의도는 우리 모두를 생각하여
작성했음을 말해두고 싶어요. 부족한 부분이 많은 생각이지만, 저는 괜찮다고 생각해요. 정리하면 더 나아지겠지요. 저 스스로가 부족한 부분이 많아 글에 부족한 부분이 있는 것이 부끄럽네요. 빨리 발전하여 좀 더 잘 쓸 수 있는 날이 왔으면 좋겠어요.
저는 B사의 W게임에서 유저가 만든 ‘캐슬파이트’라는 게임을 몹시 좋아했어요. W게임이 생산과 전투를 동시에 한다면, ‘캐슬파이트’는 생산에만 집중할 수 있게 만들었지요. 굉장히 재미있게 했었는데 생각 이상으로 마이너한지 수많은 장르의 모바일게임이 등장하고 있음에도 이 게임의 형식을 본 따 만든 작품은 보이지
않네요. 그저 제가 모르고 있을지도 모르지만요. 유저는 적절한 생산만 하면 되기 때문에 모바일에서
상대와 대전할 때 드는 문제점 (Ping이라던가) 이 적어 의외로 괜찮을 거 같은데 만드는 곳이 없어요. 재미가 없거나 수익이 안돼서 그런 걸까요? 언젠가는 개발되어 해봤으면 좋겠네요.
몇 분이나 읽어주실지는 모르겠지만, 읽어줘서 고마워요.
2018년 6월 24일 작성
참고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인물소개
피그말리온 서장
캉디드 혹은 낙관주의 소개
실험소설 초반부
인터넷 검색 (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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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 5. 역할존중 (0)
2018/06/10 PM 09:32 |
5. 역할존중
보다 더 행복한 세상이 되길 바라며-
사실 이 소재는 예전에 한번 쓴 글을 다시 정리하는 것뿐이다. 당시에는 꽤 괜찮다고
생각했고, 지금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물론 이것은 그저 나의 생각일 뿐이다. 어쩌면 형편없을지도
모른다. 그걸 각오하겠다.
우리는 왜 불행한가? 출생률이 최저를 찍는 이시대, 우리의 불행은 어디에서
오는가? 나는 처음에 신분제 시절의 경험에서 온다고 생각했다. 우리의 불행은 높은 것을 귀하게 여기고
낮은 것을 천하게 여기는 상하존중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것이 강제되던 시절부터 시작되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그보다 더 오래 전부터
시작되었다고 생각한다. 바로 진화다.
어떤 유인원이 돌연변이로 유전자 변이가 일어나 인간이 되었을 때, 모든 유인원이 동시에
인간이 된 것은 아닐 것이다. 인간이 된 개체를 개체A라고 하고 나머지 유인원들을 개체B라고 가정해보자. 개체A와 개체B가 교잡했을 때, 개체A의 유전자가 더 많이
유전된다면 그들의 아이는 인간이 된다. 인간이 된 그들이 다른 유인원들과 교잡하는 것을 반복하여 인간의 유전자를 퍼트려 갔을 거라 생각한다. 그렇게 인간은 교잡을
통한 유전자의 생존경쟁에서 살아남아 종으로 확립되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우수한 지능을 지닌 인간과 그렇지 않은 유인원의 차이가 있었을 거라 생각한다. 다른 무리를 이루는
동물들에게 우두머리가 있는 것을 보았을 때, 우리가 지성을 갖기 전에도 분명 우두머리가 있었을 것이다. 그런 우두머리를 우수한
지능을 가지게 된 인간이 차지했을 거란 예상을 해본다. 힘이나 체력으로 우두머리가 정해지던 때와 다르게 유전자부터 다른 존재가 위에서 군림하게 된 것이다. 그들이 왕처럼 행세하며
그것이 자연스럽게 신분이 되었으리란 예상은 그다지 어렵지 않다. 언어관습이 후천적 언어를 사용했을
때, 그리고 문자를 사용했을 때 같이 단계별로 심화된 것처럼, 상하존중 또한 우리가 무리를 이루었을
때, 그리고 진화하였을 때 같이 단계별로 심화된 것이 아닐까 싶다.
이런 상하존중은 대를 거치며 피가 섞여 모두가 인간이 되었음에도 남게 되었다. 이것이 왕을 만들고, 이것이 귀족을 만들고, 이것이 노예를 만들었다. 이런 과정 속에서 인간은
적자생존을 경험하게 된다. 세가지를 언급하겠다. 첫째, 지능과 체력이 높은
개체가 살아남는다. 둘째, 사회성이 있는 개체가 살아남는다. 셋째, 상하존중을 받아드리는
개체가 살아남는다. 사회성이 없어 고립된 개체는 자연 속에서 죽어나가고, 상하존중을 받아드리지
못하는 개체는 사회 속에서 죽어나갔다. “왕이 명하니, 저 건방진 자를 처단하라!” 물론 예외는 있다. 반대의 경우도 있었으니까. 이렇게 우리는 오랜
세월에 걸쳐 개량되어 현대에 이르렀다. 그런 과정 속에서 사회성과 우열을 매기는 본성을 가진 개체가 상하존중에 적응하여 주로 살아남았다. 물론 이것은 인간만의
특성은 아니다.
문자의 등장으로 학습이 쉬워지면서 인간의 문명은 기하급수적으로 발전하였다. 현대에 이르러 평등을
지향하는 제도가 등장했음에도 이런 상하존중은 관습마냥 남아 영향을 끼치고 있다. 그에 관해 이야기를
해보겠다.
우선 상하존중에 대해 정리하도록 하겠다. 상하존중이란 높은 것을
귀하게 여기고 낮은 것을 천하게 여기는 것을 의미한다. 대표적으로 나이, 지위 따위가 있을 것이다. 이러한 상하존중은 오랜
세월 사회 질서로 자리잡아 관습화되어 당연하게 여기게 되었다. 특히 우리나라는 높은 사람을 귀하게
여기라는 사상으로도 존재해왔기 때문에 도덕으로서 좀 더 극명하게 자리잡게 되었다. 충효같이 말이다. 이러한 사상은 충성과
효도가 같이 엮기면서 현대에 이르러도 감히 지적하기 어려워졌다. “낳아준 이를 공경하는 것이 무엇이
나쁘냐?” 식으로 말이다. 더구나 “내가 겪었으니 너도 겪어야 한다” 식의 굴레에 갇혀 지금까지도
그 잔재가 남아있게 되었다.
그렇다고 어른을 공경하는 것이 나쁘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어른이면 무조건 공경하라는
것이 나쁘다는 이야기다. 모든 어른을 공경하는 것이 아니라, 올바른 사람을 존중해야
된다. 어른이면 무조건 공경하라는 것은 높은 신분이면 무조건 공경하라는 신분제 시절과 별반 다르지 않다. 경험이나 지식이 높기
때문에 어른을 공경해야 된다면, 우수한 교육을 받기 쉬운 높은 신분 또한 동일하게 적용이 가능하다. 한마디로 헛소리란 이야기다. 어떤 계층, 집단이건 무조건 존중
받는 것은 불공정하다. 정의를 의미하는 Justice가 공평, 공정이니 그것을 가리켜
‘정의롭지 못하다’라고 할 수 있겠다.
이런 상하존중이 평등한 사회와 맞물리면서 다양한 문제와 갈등을 빚어내게 되었다. 금전만능주의, 우월주의, 갑질, 꼰대질, 왕따, 과도한 경쟁, 불신, 불안, 경계, 공포 등. 높아야만 존중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 수많은 사람들이 상대적으로 높아지기 위해 다른 사람들을 공격하면서 수많은 문제가 발생했다. 갑질이나 꼰대질이 우리나라만
있다고 생각할 수 있어 말해두겠다. 이것은 전세계적인 문제다.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사회는 평등해졌는데 사상은 평등하지
않으니 이런 문제들이 발생하고 있다.
몇 가지를 집어보겠다.
첫째, 갑질과 꼰대질
갑질과 꼰대질, 이 두 가지의 요점은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불합리한 말을 강요한다는 점이다. 말도 안 되는 헛소리라도 상대적으로 높다는 이유로 강요할 수 있다. 그걸 상대적으로 낮은
사람이 받아드릴 수 없다며 하소연하면 건방지다며 윽박지른다. “네까짓 게 뭔데 그러느냐!” “감히!” “버릇없이!” 이것에 대해서는 하나씩
사례를 들어가면 길게 쓸 수도 있으나, 여기까지만 하겠다. 다 알고 있을 테니까. 재미있는 점은 이것이
비단 우리나라만의 문제는 아니라는 점이다.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불합리한 강요를 하는 것은 어디에나 있다. 좀 더 건전한 곳이
인식이나 대처가 나을 뿐이다.
왜 우리나라는 공무원에 인재들이 몰리는가? 우리나라보다 하급공무원
수준이 높은 곳은 별로 없을 것이다. 한참을 공부해서 하급공무원이 된다. 왜? 중소기업에 가서 천대받느니, 정해진 시간에 퇴근할
수 있고 월급도 꼬박꼬박 밀리지 않고 나오는 하급공무원이 낫다는 이야기다. 어느 정도 수준이 되어야
대기업에 들어갈 수 있는데, 그런 사람은 드문 편이니 대부분 공무원이 되길 희망한다. 급여는 중소기업보다
낮더라도 사람대접 받고 싶은 사람들의 열망이 그런 결과를 빚어내게 되었다. 이건 명백한 인재낭비다. 물론 시간이 지나 자동화
체계가 완성될 무렵엔 공무원 숫자를 늘리거나 무상으로 돈을 줘야 국민들이 살아갈 수 있기 때문에 큰 그림으로 보았을 때엔 그다지 틀리지는 않다. 그러므로 인재낭비란
현재를 의미한다.
둘째, 금전만능주의
미리 말해두겠다. 나는 돈이 나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돈이 왜 나쁘겠는가, 돈 자체가 나쁜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돈을 나쁘게 다루는 것뿐이다. 돈은 수단으로서 우리사회에 꼭 필요한 요소 중 하나다. 단지 사람이 돈 위에
있어야 된다고 말하고 싶은 것뿐이다. 그러나 자본주의라는 변명아래 금전만능주의에 빠져 자신의 것을 나누기 꺼려하고 사람보다 돈을 우선시한다. 자신들의 이익만을 챙기려는
몰지각한 부류들을 생각해보라. 비정규직을 챙기지 않는 노조, 비싼 하숙비를 받기
위해 대학교 기숙사 건설을 반대하는 건물주, 불이 난 아파트에서 구해준 소방관에게 피해보상을 받으려는 아파트 주민들. 맙소사. 이건 빙산의 일각이다. 자기자신조차 돈 아래로
둔다. 큰 돈을 벌기 위해 빚을 져서라도 투자하고, 투자에 실패하면 자살한다. 또는 돈을 위해 자신의 몸을 헐값에
팔아버리기도 한다. 돈을 벌기 위해 어떤 노동도 정당화될 수 있다면 성희롱이 성립될 수 있겠는가? 몸을 파는 행위는 부끄러운
일이다. 이런 행위는 극빈 또는 자신을 돈 아래로 생각할 때나 가능하다. 극빈으로 몸을 파는 것은 그 나라의
체계가 문제고, 자신을 돈 아래로 생각하여 몸을 파는 것은 그 나라의 사상이 문제다. ‘파는’을 ‘(한강에 몸을)던지는’으로 바꿔도 된다. 더욱이 안타까운 것은
사람 위에 돈이 있다는 사상이 팽배하여 이런 행위를 부끄러워하지도 않고 인터넷에 글을 올리며 깔깔거린다. 슬픈 일이다.
우습게도 자기일 아니라면 욕을 하고 자기 일이라면 적당한 합리화로 진실을 외면한다. 노조가 건물주를 욕하지
않았을까? 건물주가 아파트 주민을 욕하지 않았을까? 아파트 주민이 노조를 욕하지 않았을까? 하하. 쓰게 웃게 된다. 도덕이란, 사회 구성원들의 양심, 사회적 여론, 관습 따위에 비추어
스스로 마땅히 지켜야 할 행동 준칙이나 규범의 총체라고 한다. 우리 사회에서 금전만능주의는 이미
도덕이나 마찬가지다. 슬프게도.
또한 모든 행위가 돈으로 직결되기 때문에 돈이 되지 않으면 하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돈이 안
되는 취미에 열정적인 사람을 좋아하는 편이다. 그런 사람은 보통 돈으로부터 자유롭다.) 모든 일이 돈과 연관되어있다. 언젠가 뉴스를 보고
놀란 적이 있다. 저렴한 인건비로 사람을 굴리는 것이 효율적이란다. 효율적이란다! 맙소사. 나는 처음에 어째서 효율적인지 이해를 못했다. 그런데 관점을 달리하니
이해가 되었다. 돈을 사람 위로 두니까 그것은 몹시 효율적인 일이었다.
그렇다면 왜 사람 위에 돈을 두는가? 돈도 결국은 먹고 살기
위한 수단에 불과할 텐데 왜 자신의 목숨보다 가치 있게 여기는가? 그건 돈이 있어야 윗사람이 될 수
있고, 윗사람이 되어야 존중 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즉 상하존중이다. 존중 받지 못하는 삶을
사느니 죽어버리겠다는 것이다. 경멸 받으며, 천대받으며 살고 싶은 사람이 얼마나 있겠는가?
그렇다면 이렇게 물어볼 수도 있다. 과거엔 천대받아도 잘만
살지 않았느냐? 그건 그 시대엔 계급이 고착화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떤 사회가 평등에 대한 열망을 가지려면
우선 평등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민주주의 국가로부터 평등에 대한 제도를 배웠고, 우리는 인터넷에서 상대를
모르기 때문에 가능한 진정한 평등을 배우게 되었다. 평등을 알게 되니 사회의 불평등한 부분을 도저히 견딜 수 없게 되어버렸다. 상하존중으로 인한 사회적
갈등의 표면화되는 까닭도 대게 이런 이유 때문이다. 평등한 사회 속에서 불평등이란 어쩔 수 없을 정도로 이상하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그렇다고 돈을 가볍게 취급하라는 이야기는
아니다. 내가 생각하는 선은 생존과 번영이다. 생존과 번영에 도움이 되는 돈이 나쁠 리가 없지 않는가? 단지 돈을 사람 위로
두지 말라는 이야기다. 부디 그랬으면 좋겠다. 그리고 가능할 것이라 생각한다. 우리사회는 생각 이상으로
건전하다. 교육 수준이 높고, 치안이 다른 나라에 비해 우수한 편이며, 변화에 익숙하다. 관점만 바꾼다면 보다
더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셋째, 저출산
우리나라의 저출산도 이런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다. 상하존중이 만연한 세상
속에서 돈이 없으면 행복하지 못하다고 생각하니, 돈이 없는 사람들이 불행을 물려주지 않기 위해 아이를 낳지 않는 것이다. 이는 어떤 제도로도
분명하게 해결할 수 없다. 상하존중은 어디까지나 상대비교기 때문에 돈을 공정하게 뿌려도 상대적으로는 돈이 부족하다 여기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사상의 변화가 없으면 궁극적으로 이런 저출산을 해결할 수 없다. 회사에서 출산휴가를 요구하는 사원을
꺼려하는 까닭도 결국 회사에 금전적인 이익이 안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넓게 보면 출산율이
늘어나 나라에 이익이 되고, 그 나라에 속한 회사 또한 이익이 될 터인데, 상하존중으로 나타난
금전만능주의를 추구하니 당장의 이익이 안 되는 출산휴가사원을 꺼려하게 된다. 휴가를 보내준다고 하더라도
사상이 그대로면 그들이 눈칫밥을 얼마나 먹겠는가? 그러니 본질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면 사상의 변화로 스스로 생각하여 필요성을 느끼고 행동하게끔 해야
한다.
과거에 잘만 낳다가 낳지 않는 까닭 또한 마찬가지로 우리가 평등을 알아버렸기 때문에 평등하지 못한
세상을 불행하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왜 가난하고 불평등한 나라가 출산율이 높은 것인가? 그건 그들의 계급이
고착화되어 불평등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래서 제도적으로는 평등한데, 사상적으로는 불평등한
나라가 대체로 출생률이 낮다. 출생률을 높이기 위해서 제도적으로 불평등하게 만들 수는 없으니, 사상적으로 평등하게
만들어야 우리나라의 출생률이 근본적으로 높아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넷째, 우월주의
우열을 가리는 본성을 가진 인간이 이런 우월주의를 갖는 것은 그렇게 특이하진 않다. 그러나 우리는 문명을
이룩한 사람으로서 이런 본성을 제어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감정이나 욕구, 욕망을 제어할 수 있다. 그렇다면 어째서 우열을
가리는 본성은 제어할 수 없는가? 그건 다른 방법을 달리 모르기 때문이다. 대체로 우월주의는 상대방보다
높아야 우월하고, 우월해야 존중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높아지려고 한다. 이성에게 존중 받기 위해 상대보다
높아지려 하고, 윗사람은 아랫사람에게 존중 받기 위해 높아지려 한다. 뭐 결국 상하존중이다.
다섯째, 왕따
어째서 왕따는 해결될 수 없는가? 그건 우리가 우열을
가리는 본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사람을 사람답게 해주는 사회성을 제대로 익히기 전인 학교에선 동물과 다를 바 없는 약육강식이
되어 얕보이게 되면 따돌림이나 괴롭힘을 당한다. 학교에선 사회성을 제대로 가르쳐주지 않기 때문에(요즘은 모른다) 사회에 나가서 사회성을
강제로 체득하게 되더라도 왕따는 남게 된다. 바로 사내왕따다. 스스로 필요하다고 느껴서 익힌 것이
아니기 때문에 다른 이들의 시선이 없는 곳에서는 아무렇지도 않게 상대방을 따돌리거나 괴롭힌다. 슬픈 일이다.
물론 이런 왕따에도 예외는 있다. 너무 이상한 사람과도
친하게 지내라 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괴롭히는 것은 이야기가 다르다. 괴롭힘을 통해 상대를
깎아 내리면서 자신을 높이는 것은 약육강식에서 벗어나지 못한 짐승수준의 행동이다. 문명을 이룩해 지성을
가지게 된 지성인으로서 자존심을 가졌으면 좋겠다. 종류가 많아 일일이 언급하긴 어려우니 여기까지만 하겠다. 이런 특수한 예외도
있지만, 이 예외를 모든 것에 적용하여 합리화 하지는 말기 바란다.
왕따를 없애기 위해서는 이런 우열을 가리는 본성을 제어할 수 있는 다른 방법을 제시해야 한다. 그것이 앞으로 이야기할
역할존중이다. 이건 이후 자세히 다루겠다.
한번 지금 소개한 것 외에 우리 사회에서 문제되는 현상을 곰곰이 생각해보라, 대부분 상하존중이다. 취미가 존중 받지 못하는
까닭이 무엇인가? 나의 취미가 존중 받기 위해서는 다른 취미보다 상대적으로 높아야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다른 취미를 존중하지 못한다. 다양한 생각이 존중
받지 못하는 까닭이 무엇인가? 마찬가지다. 대부분 사람들의 생각인 통설이 존중 받기 위해서는 소수 이설보다 상대적으로 높아야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소수 이설을 존중하지 못한다. 이런 세상 속에서 우리는 스스로의 생각도 쉽게 표출하기 어려워지고 있다. 애써 스스로 생각해서
의견을 내면, 각종 멸칭 또는 비난으로 그 의견을 꺾어 버린다. 통설을 위협할 이설의 등장 자체를 막아버리는 것이다. 끔찍한 일이다. 정말. 그래도 익명인 인터넷은
그나마 낫다. 이외에도 상하존중이 끼치는 영향은 막대하지만 일단 여기까지만 하겠다.
이런 상하존중으로 나타나는 문제에 대한 해결방법으로 내세우는 것 또한 결국 상하존중이다. 상대보다 낮기 때문에
천대받는 것으로 생각하여 상대보다 높아지길 바라는 것이다.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무섭게 하여 존중을 받아내면, 아랫사람은 그걸 배워
다시 윗사람을 무섭게 하여 존중을 받아내려고 한다. 그러면 다시 윗사람은 아랫사람을 무섭게 하여 존중을 받아낸다. 끝이 없는 굴레, 이 어찌 슬프지 아니할
수 있겠는가.
갑질이나 꼰대질을 당하면 욕을 하면서도 똑같이 갑질이나 꼰대질을 한다. 존중 받는 방법을 그거
말고 배운 것이 없기 때문이다. 오랜 세월 교사에게 억압받아온 학생들은 다시 교사를 억압하려고 한다. 마찬가지로 오랜 세월
남성에게 억압받아온 여성들은 다시 남성을 억압하려고 한다. 그래야 존중 받는다고 생각하고 있다. 나는 성별을 나누는
일을 그다지 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러나 지금만은 몇 가지 이야기를 하겠다. 아니 이성애자로서 다른
성별을 본심으로 싫어할 사람이 얼마나 있겠는가? 그럼에도 우월주의를 내세우며 서로를 싫어하는 것처럼 행동한다. 존중을 받기 위해서
말이다. 남성이나 여성이나 우월주의를 내세우는 사람들은 똑같다. 억압에 지친 여성이 평등을 바라며
우월주의를 내세우면, 다시 한번 남성은 평등을 바라며 우월주의를 내세운다. 정말 끝이 없는 굴레다. 평등한 세상을 바란다면서
과거 남성처럼 행동하는 여성들이 간혹 있다. 그들은 도대체 무엇을 위하여 그런 행동을 하는 것인가? 과거 남성은 여성을
억압했다. 그걸 따라 한다는 것은 결국 여성이 남성을 억압하겠다는 이야기나 마찬가지다. 진정한 평등을 바란다면, 여성 그 자체로 존중
받는 길을 모색해야 하지 않나 싶다. 존중 받기 위해 사회적 진출을 하며, 특정직업(좋은 인식)에만 여성할당을 요구하는
것은 결국 다른 특정직업(나쁜 인식)이나 가사노동을 천대하는 상하존중의 관점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진정 존중 받고 싶다면, 어떤 역할(사회에 긍정적인)도 수행여부에 따라
존중을 받을 수 있는 역할존중적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봐야 하지 않을까 싶다.
그렇다. 역할존중이다. 그럼 본 주제인 역할존중에 대해 시작해보자.
아, 그전에 능력존중과 역할존중의 차이를 집고 넘어가겠다. 능력존중은 기준이 애매하기
때문에 결국 상하존중과 별다를 바 없게 된다. 무엇을 기준으로 능력이 있다고 평가하는가? 돈이 많다고? 나이가 많다고? 학력이 높다고? 지위가 높다고? 어떤 특정한 기준이
없으니 해당 언어를 쓰지 않는 직업에서조차, 그 언어의 숙달여부를 판단기준으로 내세운다. 그것이 정상인가? 또한 동일한 일을 하는데도
비정규직과 정규직의 급여가 천지차이로 벌어진다. 실제 하는 일과 무관한 기준이 능력의 잣대가 되기 때문이다. 고용의 기준이 제멋대로고, 대우의 기준도 제멋대로니
노동할 맛이 날 리가 없다. 그러니 더욱더 상대적으로 공정한 공무원에 구직자들이 몰리게 되었다. 이것이 정상인가? 능력이 높다는 기준이
제멋대로니 직업간의 차이도 격심해진다. 인문계와 이공계가 급여가 다른 이유가 무엇일까? 일에 대한 기여도가
높은 곳 역할을 맡은 쪽이 더 급여가 높아야 되는데, 그게 아니다. 그냥 직위만 높으면 급여가 높다. 그러니까 최선을 다해
개발한 개발자가 대우를 받지 못하니 다른 나라에 기술을 팔아먹지 않는가? 물론 이는 금전만능주의에
빠져 기술을 팔아먹은 기술자의 잘못도 있다. 그러나 애초에 정당한 대우를 해주었다면 이런 일이 적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능력존중은 상하존중과 별다를 바 없는 사상이다. 그러니 능력위주로 뽑겠다고
이야기를 하더라도 사회는 바뀌지 않는 것이다. 그러니 그런 기준을 확실하게 제시해줄 역할존중이 필요하다. 역할존중은 간단하다. 역할의 수행여부에 따라
존중여부를 결정하고, 역할의 수행수준에 따라 능력을 평가한다. 아무리 높은 지위라고
하더라도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면 존중을 줄 필요 없다. 마찬가지로 아무리 낮은 지위라고 하더라도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면 존중을 줘야 한다. 그리고 역할수행수준에 따라 대우를 해주면 된다.
정리하자면, 역할존중은 역할수행여부에 따라 존중여부를 결정하는 사상이다. 상하존중이 수직이라면, 역할존중은 수평이라
할 수 있다. 위아래 관계없이 역할수행여부에 따라서 우열을 가려 존중을 준다. 이것이야말로 우열을 가리는 본성을
가지고 있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평등이라 생각한다.
자 본격적으로 역할존중에 대해 말해보겠다. 우선 역할이란 단순히
직업으로의 역할만 존재하는 것이 아님을 말해둔다. 국민으로서의 역할, 직업으로서의 역할, 가족으로서의 역할 등
다양한 역할들이 많이 존재한다. 우선 국민과 직업 두 가지만 다뤄보겠다.
첫째, 국민
국민의 역할은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국민의 의무를 다하고, 법을 지키는 것. 일반적으로 그렇게 생각한다. 맞다. 그것이 기본이다. 그걸 지키면 어떤 국민이라도
존중해야 한다. 설령 외국인이라도 우리나라 국민으로서의 역할을 다하면 존중해야 한다. 또한 외국인이더라도
우리나라 국민으로서의 역할을 다하지 못하면 굳이 ‘우리나라 국민’으로 존중할 필요는 없다. 그냥 외국인일 뿐이다. 프랑스 최초 아시아
장관이 우리나라 핏줄이란 이유 하나로 과장되게 난리 피운 적이 있었다. 그 행태를 보고 장관은 “나는 프랑스인이다.”라고 대답한 적이 있다. 그게 올바른 행동이다. 반대로 우리나라에 외국인
출신 장관이 있다고 가정해보자. 그 사람이 “나는 한국인이다.”라고 대답하지 않는다면 우리나라 사람들은
어떤 기분이 들겠는가? 핏줄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좀 더 자세히 설명하기 위해 국가는 기계가 아닌 생명이라는 점을 집어보겠다. 물론 이것은 비유이니
너무 직접적으로 받아드리지는 말길 바란다. 기계는 고장 나면 부품을 바꾸면 된다. 그러나 사람은 그렇게
쉽게 바꿀 수가 없다. 끝까지 끌고 가야 하는 것이 사람이다. 그와 같이 국가 또한
약해진 부위를 바꿀 수가 없다. 끝까지 끌고 가야 한다. 그러니 국가는 기계라기보다 사람이라고
하는 편이 옳다. 그런 기준에서 국민의 역할은 보다 더 정밀하게 파악될 수 있다. 어떤 국민이 아파 제 역할을 하기
어렵다고 가정해보자. 그 국민의 역할은 무엇일까? 빨리 건강해지는 것뿐이다. 사람이 아프면 아픈
부위를 빨리 낫게 하도록 하는 것처럼, 국민이 아프면 빨리 낫기만 하면 된다.
사람의 피가 온몸에 제대로 순환되어야 건강한 것처럼, 국가의 돈 또한 전국민에게
제대로 분배되어야 건강해질 수 있다. 그러니 국민의 역할에는 부의 분배를 제대로 해야 하는 것 또한 포함되어있을 것이다. 즉, 국민의 역할은 모든
국민이 행복해질 수 있는 공공의 이익을 추구하는 것도 포함되어있다. 물론 공공의 이익에는 사익도 포함되어있다. 스스로를 버리면서까지
공익을 추구하는 것은 선의 허들을 높여 선행의 참여율을 낮추게 되기 때문에 오히려 좋지 못하다.
(음, 좀 더 정리해봐야 할 것 같다)
둘째, 직업
역할존중이 좀 더 직접적으로 와 닿을 수 있는 직업에 대해 설명하도록 하겠다. 직업에 설명하기 전에
우선 계급에 대해 설명하도록 하겠다. 보통 계급이 만들어내는 문제점 때문에 계급 자체를 문제시하는 경향이 있을 수 있는데, 그건 계급이 문제라기
보다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높은 계급을 받던 옛날 신분제도나, 계급이 높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무조건
존중을 받던 사상의 문제다. 계급은 어디까지나 필요하기 때문에 존재한다. 어떤 집단이든 사람들이
모이는 이상 사람들의 의견을 모아줄 리더가 필요한데, 그렇기 때문에 어떻게 하든 간에 결국 리더와 나머지로 계급이 나뉘게 되어있다. 이해가 어렵다면 보호자와
피보호자를 생각해보자. 보호자와 피보호자는 역할로서 계급이 나뉜다. 보호자는 피보호자를
보호할 의무가 있고, 피보호자는 보호해주는 보호자를 따를 의무가 있다. 이 관계에서 위아래가
없을 거라 생각하는가? 문제는 보호자의 의무를 팽개치면서 보호자의 권리만 휘두르면서도 높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존중을 받으려는
태도지, 계급이 문제가 아니다. 종종 정치인도 이런 것을 착각하고 평등하다는 식으로, 또는 자신들이 낮다는
식으로 이야기를 하기도 하는데, 그것은 정치인의 의무와 책임을 지지 않겠다는 표명이나 마찬가지로 보여 당황스럽다. 정치인은 그 역할로서
우리 사회의 리더들이지 않나? 사람이 아닌 정치인의 역할로서 계급이 높은 것은 맞다. 맞으니까 그 계급에
맞는 의무와 책임을 다하길 바라겠다. 그걸 통한 권리(급여, 명예, 존중)는 제 역할만 다한다면
충분히 정당한 보상이다.
역할존중의 관점에서 계급을 바라보면 보다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계급은 어디까지나 사람이
아닌 역할에 속해있다. 회사에 있을 때엔 사장이라고 하더라도 역할을 벗어난 밖에서는 더 이상 사장의 계급으로 사원들에게 지시를
내리면 안 된다. (물론 개인적인 부탁은 가능하지만, 이것 또한 사장의 권위를 이용한 부탁, 즉 부탁을 받지 않으면
후환이 두려울 것이다라는 암중의 의사전달이 있어서는 안될 것이다.) 종종 계급이 사람에 속해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사원들을 개인용무로도 부려먹어 사회적으로 논란이 일어나기도 한다. 그건 부당한 행위다. 회사의 사유화 또는
대물림 또한 이렇게 계급이 사람에 속해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걸 당연하게 여기는 것이다.
그럼 본격적으로 직업에 대해 이야기를 해보겠다. 역할존중이란 역할수행여부에
따라 존중을 주기 때문에 어떤 직업이든 상관없이 제 역할만 다하면 존중을 받을 수 있다. 물론 사회에 긍정적인
직업만을 이야기한다. 범죄자의 역할을 다한다고 존중을 주자는 이야기는 아니니까. 사기꾼이 사기 잘 친다고
존중해줄 수는 없지 않겠는가? 애초에 범죄자는 국민의 역할을 다하지 않았기 때문에 존중 받을 수 없기도 하다.
구인, 대우, 존중 이 모든 것이 역할수행여부로 판단할 수 있다. 사람을 모집할 때에도
능력이라는 애매한 기준이 아닌, 모집하는 역할에 걸 맞는 능력이 있기만 하면 된다. 나이, 성별, 학력 아무것도 필요
없다. 기본적인 인성과 상식 그리고 역할에 대한 능력이 있으면 된다. 종종 우리사회에서 할당제 이야기가
나오고는 하는데, 할당제가 무슨 필요인가? 그 역할에 맞는 능력만 있으면 누구나 다 그 일을 할 자격이 있어야 한다. 그 역할에 맞는 능력도
없는데 할당제로 인해 그 역할을 맡는 것이 오히려 이상하다. 물론 이것은 역할에 맞는 능력을 공정하게
평가해줄 사람들이 있어야 되긴 하다. 그리고 학력을 쌓는 시간과 비용 때문이라도 학력에 보상을 해줘야 한다는 소리가 있는데, 아니 학교를 간판 따러
갔나? 학교를 가서 배웠으면 당연히 다른 사람보다 능력이 높아야 한다. 그런 애매한 기준 따윈 필요 없다. 누구나 공정하게 그
역할에 대한 능력만을 평가 받아야 한다. 그것이 역할존중이다. 어떻게 평가하냐고? 회사에서 자체 테스트를
보거나 하면 되는 거 아닌가? 물론 알고 있겠지만 많은 회사가 이미 그러고 있다.
대우 또한 역할수행여부, 그리고 역할수행수준정도로 판단이 가능하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동일한 일을 하고 동일한 결과를 낸다면 동일한 대우를 받아야 한다. 우리사회는 아직도 이 당연한 것이
지켜지지 않고 있다. 슬프게도. 또한 해당 역할에 대한 급여만 줄 것이면, 그 역할에 대한 일만
줘야 한다. 그 이상의 일을 줘놓고 급여는 그대로라면 그것은 공정하지 못하다. 그리고 계열이나 직위도
관계없이 어떤 일에 대한 역할의 기여도에 따라 대우를 받아야 할 것이다. 우리사회는 이제 역할에
따라 대우를 받는 것에 익숙해져야 한다. 그래야 제대로 대우받지 못하는 기술자가 산업스파이질을 하지 않을 것 아닌가? 또한 그래야 급여를
감당하기 어려워진 나이든 노동자를 해고하는 분위기가 사라질 것 아닌가? 물론 이런 것은 이권 때문에 쉽게
받아드리기 어렵다. 그러니 더욱더 사상적으로 역할존중을 받아드려야 이런 것을 받아드리기 쉽게 될 것이다.
존중 또한 역할수행여부로 받아야 한다. 어느 집단이든 동일하게
적용이 가능하다. 작은 집단인 회사 내를 살펴보자. 어떤 역할이든 그 사람이 제 역할 다하면 충분히 존중 받을 수 있다. 직업이 워낙 많아 제
역할이라는 것이 조금 애매하긴 한데, 평균만 해도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꼬박꼬박 출근하고 일
적당히 잘하고 그 정도면 충분히 존중 받을 자격이 있다. 그 이상은 대우의 차이로 구분하면 된다. 뭐 당연하게도 좀 더
열심히 하여 좋은 결과를 낸 쪽이 더 나은 대우를 받아야 한다.
큰 집단인 국가를 살펴보자. 국가에 이로운 직업이면
어떤 직업이든 제 역할만 다하면 존중 받을 자격이 있다. 나이고 성별이고 상관없다. 사장이라고 하더라도 제 역할을 못하면
비판 받아 마땅하고, 아르바이트 생이라고 하더라도 제 역할을 다하면 존중 받아 마땅하다. 교사가 교사의 역할을
다하면 존중을 주고 학생이 학생의 역할을 다하면 존중을 준다. 선생은 학생의 의견이라고 흘려 듣지
말고, 학생은 선생의 의견이라고 흘려 듣지 말아야 한다. 상호존중! 이런 것이 당연한 세상이 오길 바란다. 여기서 잠시 학생의
역할이 애매할 것 같아서 말해두지만, 학생의 역할은 공부를 하는 것이 아니다. 공부를 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수단으로 그 수단을 통해 사회에 적응할 수 있는 사회성을 배우는 것이 학생의 역할이다. 모든 직업을 열거할
수는 없는 일이니 여기까지만 하겠다. 그래도 충분히 이해했으리라 생각한다.
더 큰 집단인 인류를 떠올려도 그다지 다를 바 없다. 인류를 위한 국가의
역할을 다하는 국가는 충분히 존중 받을 자격이 있다.
실현가능성에 대해 이야기를 해보겠다. 내가 처음 역할존중을
떠올리게 된 것은 아마 인터넷과 온라인 게임의 영향이 컸을 것이다. 온라인 게임에서는 상대가 누군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상대가 해당 역할을 다하느냐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제목을 당시
‘역할존중, 나는 너를 모른다’라고 썼었다. 네가 누군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네가 하는 역할의 수행여부가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였다. 이러한 생각은 우리가 인터넷이나 온라인 게임을 통해 점점 익숙해짐에 따라 자연스럽게 받아드려 질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사람들의 근본적인 가치관을 뒤흔들지도 모르는 이 역할존중이 자연스럽게 퍼져나갈 거라 생각했던 것이다. 지금도 크게 다르지는
않다. 아마 수십 년 후에는 대부분이 역할존중을 받아드리게 될 것이다. 현실과 가상은 상호영향을 받기 때문에
가상의 평등함이 현실에 영향을 끼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너무 오래 걸린다. 우리나라는 앞으로도
매년 매년 격변의 시간을 보낼 확률이 높다. 국내외 정세를 살펴보면 그럴 수 밖에 없다. 그러니 하루 빨리라도
정비를 하지 않으면 곤란한 상황에 처해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퍼져나갈 것이라 생각되는 역할존중을 보다 빠르게 받아드려 제도뿐만 아니라 사상적으로
평등한 사회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 우리 사회의 문제점들을 본질적으로 해결하여 보다 더 행복한 나라가 되어 격변하는 이 세상에
맞설 수 있다고 생각한다. 또한 가능성의 이야기지만, 우리나라의 긍정적인 모습이 다른 나라에
영향을 끼쳐 인류가 행복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해본다.
이하 손익, 관점, 예외, 모순 등은 나중에 다시 정리해보겠다.
체계적으로 정리하는 것은 생각이상으로 어렵고 시간이 오래 걸리는 일임을 깨닫고 있다. (어떻게 정리해야 읽기가
쉬운 거지? 더 공부를 해야 한다. 하고 싶다.) 예전에 이 소재에 대한 글을 쓸 때, 농담으로 책도 쓸 수
있을 거라 이야기한 적이 있는데, 이 소재를 제대로 정리하면 정말로 책 한 권이 나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언제 가능할지, 애초에 가능할지, 애초에 괜찮은 건지
의문이 들긴 하지만 언젠가 이 소재를 가지고 책 한 권 분량의 글을 쓰는 날이 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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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가 건전할수록 국제적 신용도가 높아지고, 신용도가 높아질수록
국가적 이익이 높아집니다. 높은 투표율은 사회의 건전성을 입증하는 것 중 하나이므로 여러분, 어떤 후보를 선택하든
상관없습니다. 투표 자체가 대부분의 국민들에게 이익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다음 소재는 예술입니다.
저 자신을 최대한 드러내지 않으려고 하는 까닭은 대체로 무언가 특정되면 그것을 기반으로 선입견이 자리잡기
마련이라 생각하기 때문이에요. 선입견은 글의 의도를 왜곡할 때도 있지요. 뭐 일단은 그래서 그랬고
지금도 그러고 있긴 한데, 앞으로는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되네요.
읽어줘서 고마웠고, 그럼 또 봐요.
2018년 6월 10일 작성
참고
인터넷 검색 (사전 검색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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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 4. 선과 악 (0)
2018/05/06 PM 06:44 |
4. 선과 악
모든 선악의 근간은 손익이다. 간단히 이익이 되면 선, 손해가 되면 악이다. 이익에는 금전적 이익도 포함되어 오해할 수 있으니
미리 말해두겠다. 여기서 말하는 이익은 모든 방면으로 이로운 것을
뜻한다. 이런 선악을 기준으로 가치의 우선순위인 가치관이
정해지기도 한다. 크게 외적(물질) 이익과 내적(마음) 이익으로 구분해도 좋을 것이다. 이 둘은 종종 충돌하는데, 외적인 손해가 있더라도 내적인 이익이 있다면 개체에 따라 그걸 선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러한 선악은 크게 문명의 유무로 구분할 수 있다.
첫째, 문명이 없는 동물의 영역은 개체와 무리까지가 한계다.
문명이 없어 그 이상의 영역을 생각해볼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의 선악 기준은 대체로 생존과 번영이다. 후천적 언어가 없어 언어로 학습할 수 없는 그들의
사고방식은 대부분 본능에 기대기 때문에 본능적인 선악 외엔 있기 어렵다. 문명이 없는 동물들 중 상대적으로 지능이 우수한 돌고래나 침팬지, 오랑우탄, 고릴라 등은 조금 다를지도 모른다. 가르칠 줄을 모를 뿐이지 학습은 가능하니까 말이다. 그렇게 학습으로 후천적 언어인 수화를 배운 동물이라면
다른 동물과는 조금 다르게 세상을 보고 있을지도 모른다.
둘째, 문명이 있는 동물인 사람의 영역은 개인, 집단, 나라, 인류, 생물 등이다.
문명이 있어 다양한 영역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언젠가 우주의 다른 행성에서 살기 시작한다면 지구, 태양계 등과 같이 우주적인 관점의 영역으로 구분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사람의 선악 기준은 매우 다양하다. 사람은 후천적 언어로 학습할 수 있기 때문에 각자
다르게 세상을 바라볼 수 있다. 선악에 대한 부모의 가르침, 학교의 가르침, 종교의 가르침 등 다양한 기준 때문에 번민해본 적이 있다면 보다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도대체 누구 말을 따라야 할 것인가?
여기서 잠깐! 어쩌면 의문을 표할지도 모르겠다. 사전에는 선악의 기준을 도덕으로 한정 지었으니까. 그러나 그것은 낡은 시대에서나 통용되는 말이라고
단언하겠다. 세계가 하나가 되기 이전에 사람들이 바라보는 ‘영역’은 나라가 한계였다. 자국이나 주변 국가까지. 그 시대에선 분명 도덕은 선악의 기준이 될 수 있었다. 대부분 자국 내에서, 아니 대부분 지역조차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에 그
사회의(나라, 지역 등) 오랜 관습이나 여론으로 정한 도덕을 기준으로 선악을 구분해도 충분했다. 그러나 이제는 아니다. 세계가 하나가 되었기 때문에 어느 사회의 주관적인
도덕은 이제 선악의 기준이 될 수 없다.
흔히 말하는 ‘컬쳐쇼크’는 모든 방면에서 다르기 때문에 충격 받을 수 있다. 나는 다른 나라의 도덕에 충격 받은 적이 있다. 아니, 이걸 선이라고 부른다고? 명예를 위해 무고한 사람을 죽이는 것을 정당하게 여기는 나라가 있다는 것에 충격 받지
않을 수가 있을까? 그렇다고 그들이 ‘원래’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그냥 그렇게 배워왔을 뿐이다. 시대가 바뀜에 따라 이런 낡은 관습은 악습으로 평가
받기도 하는데, 그것을 도덕으로 여겨 바꾸지 않는다. 도덕은 종종 진리와 비견될 정도여서 무비판수용을
하기 때문에 바꿔야 한다는 생각조차 하기 어렵다. 당연한 것에 의문을 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으니까. 보라, 이처럼 주관적인 도덕만으로 선악의 기준이 될 수 있겠는가? 그야말로 낡은 사고방식이다. 그렇다고 도덕을 지키지 말라는 이야기는 아니다. 세계가 하나가 되어 다양한 도덕이 충돌하는 이 시대, 객관적인 선악의 기준이 필요하다고 역설하는 것이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 보자. 사람의 선악 기준은 매우 다양하다. 낡은 시대의 선악 기준인 도덕만 해도 많이 있을
수 밖에 없다. 도덕의 사전적 정의는 ‘어느 사회(공통생활을 영위하는 모든 형태의 인간 집단)구성원의 양심, 여론, 관습 따위에 비추어 스스로 마땅히 지켜야 할 행동 규칙이나 규범의 총체’ 라고 한다. 영역으로 구분하자면, 집단과 나라다. 이외에도 법, 사상, 종교, 인류, 생물 등이 있을 수 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의 근간에는 손익이 있다. 우선 도덕을 살펴보자. 도덕을 기준으로 도덕에 이로운 행위는 선이고 해로운 행위는 악이다. 뭔가 이상함을 느끼지 않았나? 여기서 기준은 사람이 아닌 도덕이다. 대체로 세상의 선악은 사람이 기준이 아니라 사람이 만든 선악이 기준이다. 사람이 중심이 아니란 이야기다. 이해가 조금 안 된다면 도덕을 관습으로 바꿔보도록
하자. 관습이 선악의 기준이 될 경우 관습에 이로운, 그러니까 관습을 지켜나가는 것이 선이고, 관습을 없애는 것이 악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악습을 선으로 여겨 지켜나가는
사람에게 “그것은 악습이니 그만두세요.” 라고 말해봐야 통하지 않는 것이다. 되려 그런 그만두라는 말을 악의 길로 인도하는 것으로
느낄지도 모른다. 이외에도 다양한 선악에 대해 생각해보면 도덕과 별로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음은 법을 살펴보자. 법을 지키면 선 어기면 악이다. 거기에는 사람이 없다. 이런 문제 때문에 융통성 있는 판결이 필요하여 사람이
재판을 주도해야 한다는 의견이 있다. 물론 사람 수준의 자아를 갖춘 어떤 것을 만들어낸다면 이야기는 달라지게 되어있다. 다음은 물질만능주의 사상을 살펴보자. 물질을 얻으면 선, 잃으면 악이다. 여기에도 사람은 없다. 이런 사상은 사람보다 물질을 우선시하기 때문이다. 다음은 종교를 살펴보자. 종교에 이로우면 선, 해로우면 악이다. 이곳에도 사람은 없다. 이교도나 무신론자를 배척하는 것을 보라. 나는 어떤 고전을 읽으면서 깜짝 놀란 적이 있다. 그 고전이 작성될 당시, 법정에서는 무신론자의 증언을 인정하지 않았다고 한다. 언제적 일이라고 생각하는가? 19세기다. 해당 고전인 ‘자유론’에 작성된 문장을 하나 가져오겠다.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은, 신(어떤 신이든 상관없다.)이나 내세의 존재에 대한 믿음을 공표하지 않은 사람은 법정에서 증언할 수 없다는 법규
때문이었다.’ 저자는 당시 이런
사회적인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종교인의 입장에서 차근차근 자신의 주장을 설명하며 설득하고 있었다. 이설은 외로운 법이니, 그 또한 외로웠을 것이다. 아무튼 이렇게 종교를 선악의 기준으로 삼고 있다면 사람이 아닌 종교를 기준으로 생각하게
된다.
이렇게 다양한 선악은 사람이 아닌 사람이 만든 기준을
중심으로 생각한다는 점에서는 별반 차이가 없다. 그리고 이런 선악을 중심으로 가치관이 정해지기도 한다. 대체로 도덕을 최고선으로 여기는 사람들은 외적인 이익보다 내적인 이익을 추구할 것이다. 반면 물질만능주의 사상을 최고선으로 여기는 사람들은
내적인 이익보다 외적인 이익을 추구할 것이다. 물론 하나의 기준만으로 판단하는 사람은 얼마 없으니까 상황에 따라서 우선순위가 달라질 수는 있다. 이외에도 다양한 것을 살펴보면 기준이건, 그 기준에 따른 가치관이건, 그 근간에 손익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도덕을 최고선으로 삼는다면 내적인 이익을 우선시하기
때문에 상대적으로는 물질에 집착하지 않아 ‘물질’로 다른 사람들을 괴롭히는 일은 적다. 그러나 자신의 내적 이익의 기준인 도덕에 반하는
행동을 보면 불같이 화를 내면서 이렇게 말할 것이다. “너는 못됐구나! 그러니 혼이 나봐야 돼!” 그것이 진정 옳고 그른지에 대해선 고찰하지 않는다. 설령 현대에 들어 악습이 되어버린 도덕이라고 하더라도 그에 반대하면 불같이 화내게 되어있다. 슬프게도.
물질만능주의를 최고선으로 삼는다면 외적인 이익을
우선시하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물질에 집착한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을 괴롭게 만드는 일들이 많이 있다. 물질을 최우선 하기 때문에 사람을 물질 아래로 둔다. 심지어 자신조차 물질보다 아래로 둔다. 물질적인 이익을 크게 보기 위해 도박적인 투자를 감행하고 그것이 실패하면 한강 가서 자살하자는
말이 유행어로 나타날 정도다. 슬프게도.
요는 어떤 선악의 기준이건 거기에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단 하나, 사람 자체를 기준으로 삼는 것을 제외하곤 말이다. 그것이 바로 문명이 없는 동물들의 선악이며, 인류의 최초 선악인 종의 생존과 번영이다. 인류의 생존과 번영, 그것 외엔 사람 자체를 기준으로 삼는 선악은 없다.
나는 오늘 여기서 주장한다. 세계가 하나가 된 이 시대, 모든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는 객관적인 최고선은
사람 자체를 기준으로 삼는 인류의 생존과 번영이라고 주장한다. 음, 예전에 한번 썼던 것이기 때문에 조금 겸연쩍긴 하지만, 오늘 정식으로 주장한다고 하자.
그럼 본격적으로 사람 자체를 선악의 기준으로 삼는
인류의 생존과 번영에 대해 이야기를 해보도록 하겠다. 이런 인류의 생존과 번영 또한 그 근간에는 손익이 있다. 간단히 인류의 생존과 번영에 이익이 되면 선, 손해가 되면 악이다. 그리고 이런 선악을 기준으로 이익의 우선순위인 가치관이 정해져야 하는데, 사람 자체를 기준으로 삼았기 때문에 이 또한 간단하다. 그 사람의 생존과 번영에 이익이 되면 선, 손해가 되면 악이다. 외적인 손익이든, 내적인 손익이든, 생존과 번영을 중심으로 생각한다. 그러면 매우 간단해진다. 종종 외적인 손익과 내적인 손익이 충돌할 때가 있는데, 그 때엔 그 둘을 저울질하여 무엇이 더 그 사람의
생존과 번영에 이로운지를 생각해보면 판단이 가능해진다.
그럼 이렇게 물어볼 수도 있다. “개인A와 개인B의 손익이 충돌할 수 있다. 또한 개인A와 집단A의 손익이 충돌할 수 있다. 그러면 무엇을 기준으로 우선순위를 정해야 하는가?” 간단하다. 앞서 말한 것처럼 선악의 기준은 인류의 생존과 번영이다. 만약 개인A와 개인B 또는 개인A와 집단A의 손익이 충돌할 때, 그 손익이 인류의 생존과 번영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고려해보면 된다.
첫째, 개인
기본적으로 개인과 개인의 충돌은 인류의 생존과 번영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고려한다. 그러나 그것이 분간하기 어려울 때엔 개인의 생존을 도와주는 국가에서 정한 법을 기준으로 삼아서 판단하면 된다. 법은 어디까지나 나라에 속한 인류를 사이 좋게 만들기
위해 만들어진 규칙이다. 때론 특정 계층의 인간들끼리만 사이 좋게 만들어 그들의 이익만 대변한다고 혹평을 사곤 하지만 기본은 그렇다. 만약 그렇게 특정 계층의 이익만 대변하는 법이 있다면
바뀌어야 할 것이다.
둘째, 집단
작은 집단(개인포함)과 큰 집단의 충돌 또한 인류의 생존과 번영을 기준으로
보면 된다. 작은 집단의 이익이 큰 집단의 손해가 되면 악이다. 두 가지 CASE로 예를 들어보겠다.
CASE1 어떤 개인이 자신의 생존과 번영을 위해 기업의 돈을 횡령했다고 가정해보자. 분명 개인에게는 선이지만, 기업에게는 악이다.
CASE2어떤 개인이 자신의 생존과 번영을 위해 기업의 비리를 고발하여 포상금을 챙겼다고 가정해보자. 분명 개인에게는 선이지만, 기업에게는 악이다.
이 두 CASE의 결과는 같다. 개인에게는 선이지만 기업에게는 악이다. 그러나 더 큰 집단인 나라에 대한 결과는 다르다. CASE1은 나라에게 손해가 되고, CASE2는 나라에게 이익이 된다. 이렇게 작은 집단과 상대적으로 큰 집단의 충돌은
그보다 더 큰 집단의 생존과 번영을 고려해보면 무엇이 선이고 악인지 분명해진다. 기업의 생존과 번영을 위해 개인의 이익을 침범하는 사례도 동일한 기준으로 판단할 수 있다. 더 큰 집단인 나라에 속한 인류의 생존과 번영에
대한 손익을 고려해보면 답은 나오게 되어있다.
대체로 개인과 집단까지는 나라 내 법을 통해 해결되는
일이 많지만, 도덕이나 사상 같이 법으로 판단하기 어려운 생각들의
충돌은 이렇듯, 나라에 속한 인류의 생존과 번영에 도움이 되는가
아닌가를 따져보면 판단이 가능하다. 여기서 중요한 점 두 가지. 첫 번째는 나라라는 무형의 대상이 아닌, 나라에 속한 인류의 생존과 번영이라는 점이다. 두 번째는 특정 계층이나 집단이 아닌 ‘모든 사람’들의 생존과 번영을 고려해야 한다는 점이다. 특정 집단의 이기적인 관점은 결코 선이 될 수 없다.
셋째, 나라
나라 내 집단과 나라의 충돌 또한 더 큰 집단인
인류의 생존과 번영을 기준으로 보면 된다. 예를 들어 한 기업이 이익을 위해 환경보호를 무시하고 유해물질을 정화하지 않고 배출했다고 가정해보자. 그걸 나라의 이익으로 받아드리는 사람도 있지만, 일반적으로는 막심한 손해다. 아니, 유해물질로 인해 그 나라에 속한 인류의 수명이 줄어드는데 어떻게 이익이 될 수 있는가? 그건 지극히 물질만능주의적 관점일 뿐이다. 더구나 이런 유해물질은 그 나라 내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전세계로 퍼져나가 인류 전체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아주 심각한 문제라고 볼 수 있다.
넷째, 인류
나라와 나라의 충돌 또한 더 큰 집단인 인류의 생존과
번영을 기준으로 보면 된다. 예를 들어 침략국은 침략하여 큰 이익을 얻었기 때문에 그들에겐 선이 될 수도 있지만, (물론 대체로 이익을 얻는 것은 침략을 주도한 지배계층뿐이다. 때때로 멍청하게 이용당하면서 이익이 되었다며 좋아하는
부류도 있지만 현명한 사람이라면 그것이 얼마나 큰 손해인지를 알고 있다.) 인류의 생존과 번영에는 해가 되기 때문에 악이 된다. 반면 평화를 수호하고 인류의 생존과 번영에 앞장서서
도움을 주는 나라는 인류의 생존과 번영에 이익이 되기 때문에 선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개인에서 인류까지의 기준은 영역이 커질수록 선과
악의 농도도 짙어진다. 개인의 선악은 칭찬 또는 비난을 받는다. 농도가 짙어지면 포상 또는 벌금, 아니면 사회적 격리 조치를 당한다. 집단의 선악은 그 집단의 흐름을 바꿀 수 있을 정도가 되고, 나라의 선악은 나라의 흐름을 바꿀 수 있을 정도가 되며, 인류의 선악은 인류의 흐름을 바꿀 수 있을 정도가 된다. 인류 전체의 생존과 번영에 이익이 되면 평화상을
받을 정도로 칭송 받게 되고, 인류 전체의 생존과 번영에 해가 되면 인류의 적이 되어 전세계적인 비난을 받게 된다. 세계가 하나가 된 현 시대, 만약 침략국이 나타난다면 인류 전체의 적이 되어 정의의 이름으로 처단 당할 것이다. 심지어 그 나라 국민들마저 외면할 것이다. 그것이 세계가 하나가 된 현 시대의 흐름이다.
다섯째, 생물
예외적으로 작은 집단이 우선되는 경우가 있는데, 그것은 인류와 다른 생물과의 충돌이 일어날 때다. 어디까지나 인류의 선악은 인류의 생존과 번영이기
때문에 인류를 기준으로 생각해야 한다. 자연보호나 동물보호도 인류를 위해서 보호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본말이 전도 되어버린다. 자연이나 동물을 보호하겠다는 사람 또한 이를 심도 있게 받아드려야 할 것이다. 인류를 위해서 보호하자고 주장해야 다른 사람들을
설득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인류의 중심은 언제나 인류가 되어야 한다.
그 외에 외계인이라도 나타나면 이제 또 새로운 영역이
나타나겠지만, 일단 큰 줄기는 이 정도까지만 다뤄도 될 것이다. 어떤 영역이든 인류의 생존과 번영을 고려해보면 무엇이
선이고 악인지 구분이 가능해진다. 설령 이런 기준을 선악으로 삼지 않는다 하더라도, 자신이 생각하는 선악들이 충돌하여 번민하고 있다면 어떤 선악을 기준으로 삼아야 할지에 대한 참고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이런 기준들은 강제가 아니다. 강제성을 띤 법조차 바르지 않다고 판단하면 지키지
않는 사람도 있다. 모든 것이 그러하듯, 선과 악도 스스로 생각하여 판단해야 할 것이다.
어디에도 흔들리지 않고 객관적으로 선악을 구분 지을
수 있는, 사람 자체를 기준으로 삼은 인류의 생존과 번영. 나는 이것이 인류의 최초이자 최고선이라고 주장한다.
일단 선악에 대한 이야기는 여기까지. 앞으로 지식이 늘면 정리하거나 보충하겠다. 또 나중에 이 소재를 가지고 글을 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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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소재는 역할존중입니다. 다음 글은 일단 인공생명을 먼저 쓰도록 하겠습니다. 바둑의 미래는 슬퍼서 쓰기 힘드네요. 어쩌면 글을 위해 소재를 한 주 쉴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 일이 생기면 소식에서 찾아 뵙도록 할게요. 읽어줘서 고마워요. ///
제가 추구하는 문제해결방식은 대체로 이렇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취미(게임, 만화, 소설 등)가 천대받으면 천대하는 사람을 공격하기보다 그 취미가 존중 받는 길을 모색합니다. 우리 사회가 불평등하면 불평등하게 만드는 누군가를 공격하기보다 모두가 평등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합니다. 본질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것, 저는 보통 이런 방식을 선호합니다.
2018년 5월 6일 작성
참고 인터넷 (사전, 포탈 검색 ‘침팬지 수화’)
인용 자유론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은, 신(어떤 신이든 상관없다.)이나 내세의 존재에 대한 믿음을 공표하지 않은 사람은 법정에서 증언할 수 없다는 법규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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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 3. 정보 (1)
2018/04/22 PM 12:37 |
3. 정보
세상은 변해도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 후천적 언어와 문자를 통해 문명을 이룩한 동물인
인류에게 어울리는 말이다. 가르침으로서 우리의 문명은 발전해왔지만 우리의 유전자는 변하지 않았다. 어쩌면 이렇게 물어볼지도 모른다. 현대에 들어서면서 인간의 평균 수명이 늘어났다고 말이다. 그러나 그것은 생활환경 개선 등을 통해 유전적으로
가능한 수명에 도달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네이처’에 실린 논문에 의하면 인간의 수명은 보통 115세가 한계라고 한다. 그러한 주장에 맞서 150세가 한계라고 하거나, 애초에 수명의 한계가 없다는 주장도 있지만, 이제껏 인류가 살아온 흔적을 보면 보통은 115세가 맞긴 했다. 모든 본질은 세상에 나타나는 현상을 제쳐두고 볼
수 없는 법이다. 그런 관점에서 수명이 아무리 늘어난다 하더라도 120세에서 150세가 한계일 것이다. 만약 수명에 한계가 없다면 장수하는 인간의 수명이
비슷할 리가 없다. 우리가 수명의 한계를 넘기 위해서는 변하지 않는 유전자를 변하게 만드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즉, 유전자 변형을 통한 진화다.
이렇게 기술이 발전해도 유전자는 바뀌지 않아 수명은 달라지지 않는 것처럼, 발전하는 문명과 변하지 않는 유전자의 괴리는 우리
사회 속에서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우리의 문명은 달에 갈 수 있을 정도로 발전했지만, 사람의 마음은 달에 토끼가 살고 있다고 생각하던 시절과 별반 다르지 않다. 세상에, 믿을 수 있는가? 우리는 수천 년 전에 있었던 이야기에 매료될 수 있다. 만약 과거의 인물이 현대에 온다면 그들 또한 우리의 이야기에 어렵지 않게 매료될 것이다. (학습을 통해 자아가 발달된 현생 인류는 어떤 언어라도
배울 수 있고, 어느 시대에도 적응할 수 있다.)
이러한 가변과 불변의 괴리는 정보에도 동일하게 나타난다. 기술의 발달로 인해 정보의 형태는 바뀌었지만 사람은
변하지 않았기 때문에 정보의 활용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인터넷이 등장하기 전까지 정보는 보통 수직적으로 전달되었다.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가르치는 형태였다. 때로 현명한 사람은 아랫사람에게도 가르침을 청하곤 했지만 일반적으로 그 구조가 바뀌는
일은 없었다.
세상의 수많은 물줄기(자료)들이 바다로 모여 구름(정보)을 형성하면 태풍이 되어 육지에 빗물(가르침)을 퍼부었다. 그 빗물들은 다시금 물줄기로 변해 바다로 모여 구름을 형성하게 된다. 그런 과정 속에서 땅(아랫사람)은 빗물을 내려주는 하늘을 우러러 볼 수 밖에 없었다. 그 구조는 오랫동안 변하지 않은 채 이어져 내려왔다가 익명의 상호작용이 가능한 인터넷의
등장으로 급격하게 바뀌게 되었다. 일방적으로 빗물을 받던 땅에서 물이 솟아올라 하늘에 닿는 세상이 되었다. 익명인 가상세계에선 어린이가 어른을 가르치고(곤충을 관찰한 어린이는 그것에 관심 없는 어른보다
곤충에 대해 더 잘 알 수 있다.), 교사가 학생들에게 배우기도 한다. 익명이라 상대가 누군지 모르니까 그게 가능하다. 그것을 가리켜 천지가 바뀌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이렇게 정보의 형태는 천지가 바뀌었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바뀌었지만, 정보의 활용은 과거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정보를 활용하는 사람은 달라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것에 대해 이야기를 하기 전에 이해를 돕기 위해 인간의 본성과 행동원리에 대해 잠시 이야기해보겠다.
첫째, 인간의 본성은 우열을 가리고 싶어하는 동물과 큰 차이가 없다.
인간은 동물이니까 말이다. 분명한 사실조차 받아드리기 괴로워 본질을 보지 못하면
문제를 제대로 해결할 수 없다. 우리 사회의 가장 본질적인 문제는 이러한 우열을 가리고 싶어하는 본성으로 나타난 ‘윗사람을 존중하고 아랫사람을 천대하는 상하존중’이었다. 이것이 왕을 만들고, 이것이 귀족을 만들고, 이것이 노예를(아테네 민주주의에서조차) 만들었던 것이다. 이런 상하존중이 현대의 평등한 사회와 부딪치며 다양한
문제를 야기했다. 이것 또한 발전하는 문명과 변하지 않는 인간 본성의
괴리로 일어난 문제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우열을 가리고 싶어하는 본성을 바꿀 수는 없다. 그러니 우리는 위아래가 아닌 다른 방식으로 우열을 가려야 한다. 그것이 위아래 관계없이 ‘역할수행여부로 존중을 주는 역할존중’이다. 그래야 평등한 사회와 인간의 본성이 어우러질 수 있다고 본다. 그에 관해서는 차후 자세히 다뤄보도록 하겠다. 이렇듯 우리는 우열을 가리고 싶어하는 본성을 가지고
있어서 정보 또한 우열을 가리고 있다.
둘째, 인간의 행동원리 또한 뇌를 가진 동물의 그것과 큰
차이가 없다.
(많은 과학자들이 지적하는
인간과 동물의 차이는 기능이 차이가 아닌 지능의 차이다. 물론 지능에 따라 그 기능도 약간씩 차이 날 수는 있지만 본질적으로는 같다. 파블로프의 개를 생각해보자.) 뇌가 있는 동물은 뇌가 자동적으로 기억(본능과 학습), 욕구, 오감을 계산하여 동물의 행동을 예측하는데, 그러한 예측을 보통 자신의 마음으로 생각하여 그걸 그대로 받아드린다. 그 바람에 사람들은 선입견이나 편견에 저항할 수가 없었다. 한 철학자가 말하길, 학력이 있을 때나 없을 때나 동일한 말을 하는데
청중은 다르게 받아드린다며 한탄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우열을 가리는 본성과 그런 본성을 바탕으로 뇌가 자동적으로 계산하여 나타난 선입견이나 편견 때문에 그랬던 것이니 온전하게
그들의 의지라고는 할 수 없다. 그들을 탓하기보다는 우열을 가리는 기준을 바꾸거나 인간의 행동원리를 알려주어 자유의지를 통해 그것에 저항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이렇듯 우리는 정보를 온전하게 받아드릴 수가 없었다. 이렇게 인간의 본성과 행동원리로 인해 정보의 형태가
천지가 바뀌었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바뀌어도 그 정보의 활용은 그전과 비슷했던 것이다.
우리시대는 기술의 발달로 정보의 형태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뉘게 되었다. 현실세계와 가상세계다. 이런 형태에 따라 정보의 활용도 약간씩 달라지는데 우선 현실에 대해 이야기해보도록 한다. 다들 알다시피 현실에서는 예전과 크게 다르지 않다. 가상에 영향을 받다 보니 조금씩 달라지고 있긴 하지만
본질은 같다. 정보의 우열을 나누고, 그 기준이 선입견이나 편견이 되어 정보를 온전하게
받아드리지 않고 있다. 과거와 동일하게 높은 것을 먼저 존중하고 받아드리고 낮은 것을 천대하고 거부한다. 권위나, 지위, 학력, 나이 등을 기준으로 우열을 나누는 것이다.
어쩌면 이렇게 반박할 수도 있다. 요즘 아이들은 어른들의 의견(정보)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고 말이다. 그러나 그것은 아이의 입장에서 봤을 때 그 어른의 권위가 실추되어 낮아졌기 때문이지, 위아래로 정보를 취사선택하는 것은 그다지 달라지지
않았다.
어쩌면 그렇게 위아래로 정보를 취사선택하여 활용하는
것이 무엇이 나쁘냐고 물어볼지도 모른다. 대답하겠다. 중요하니까 또 얘기한다. 그런 기준으로 나누어 보게 되면 정보를 온전하게 받아드릴 수 없다. 어떤 사건을 주사위로 바꿔 바라보는 것으로 비유하자면, 모든 면을 보는 것이 아니라 몇몇의 면만 보게 된다. 또한 그렇게 높은 것에만 기대게 되면 스스로 생각할
줄 모르게 된다. 아무 생각 없이 그것이 기대게 되고 만다. 사람이 맹목적이게 된단 말이다! 어떤 높은 자의 말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진리라는
보장은 없다. 그러니 되도록(가능하면 반드시) 한번은, 그 어떤 것이라도 한번은 생각해야 한다.
그렇다면 가상에선 어떻게 정보가 활용되고 있는 걸까? 놀랍게도 크게 다르지 않다. 그 방식이 약간 달라졌을 뿐이다. 기본적으로 실명이나 현실세계를 기준으로 한 정보
출처의 경우엔 현실과 거의 다를 바 없이 활용된다. 같은 말이라도 권위나 지위 등이 높은 정보를 받아드리기 마련이다. 정보 자체를 스스로 생각해 판단하지 않고 그냥 주어 삼킨다. ‘높은 사람이 한 말이니 맞겠지’ 하고 말이다. 익명에서는 조금 다르게 전개되는데, 위아래로 우열을 가리는 것은 동일하다. 익명일 경우엔 특정한 사람의 권위를 알 수 없기
때문에 다수의 의견에 휩쓸린다. ‘많은 사람이 맞는다고 하니 맞겠지’ 하고 말이다. 이 경우엔 다수가 높고 소수가 낮다고 평가하고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친목이 권장되는 커뮤니티는 그런 것이 더 심할 때가 있는데, 친목의 중심이 되는 사람의 주장은 아무런 생각 없이
그대로 받아 드려진다. 이 경우엔 중심이 되는 사람이 높고 외부인이 낮다고 평가하고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 외 다양한 문제들로 인해 많은 커뮤니티는 친목을 권장하지 않게 되었다.
이런 저런 문제가 있음에도 사실 현실보다는 가상이
낫다. 왜냐하면 가상에선 익명일 수가 있어 자신만의 의견을
개진하거나 소수의 의견에 찬성하기가 쉽기 때문이다. 소수의 의견이 다수에게 몰려 핍박당해도 현실에서 당하는 그것보다는 훨씬 낫다. 정말 사회적 물의를 일으킬 정도의 의견이나 욕설 따위가 아니라면 한 번쯤은 소수의 의견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이 나타나게 된다. 누구 의견인지 모르니까 말이다. 이렇게 낫긴 하지만 가상과 현실의 차이는 이것 정도뿐이다. 상대를 모르기 때문에 의견을 개진하거나 소수의 의견에 찬성하기가 현실보다 ‘쉬울’ 뿐이지, 일반적인 정보의 활용은 별반 차이가 없다.
정보의 출처에 따라 우열을 가리는 현상을 보면 보다 더 쉽게 이해가 가능하다. ‘똑같은’ 정보라고 하더라도 익명이 작성한 위키와 전문가의
의견은 다르게 받아드린다. 심지어 전문가의 출처를 달아도 그렇게 받아드린다. 그게 뭐가 문제라고 묻는다면 다시 말해주겠다. 그것은 정보를 정보자체로 받아드리는 것이 아니라, 위아래로 우열을 가려 선입견이나 편견을 통해 정보를 받아드리는 것이다. 그 때문에 생기는 문제도 다시 말해주겠다. 그렇게 정보를 받아드리게 되면 정보를 온전하게 받아드릴 수 없을뿐더러, 높은 것에만 기대게 되어 스스로 생각할 수 없게
된다. 맹목적이게 된다.
현실의 세계에 있는 맹목적인 집단들은 이미 알고
있을 테니 굳이 이야기는 하지 않겠다. 가상의 세계에서도 맹목적인 집단들이 있는데 쉽게 접할 수 있는 부류들이 흔히 말하는 성별우월주의자들이다. 커뮤니티 중심인물의 의견이라고, 다수의 의견이라고, 아무 생각 없이 맹목적으로 그 의견을 받아드려 그것과
동화되었다. 그리고는 옳고 그름도 생각하지 않고 똑같이 행동하게
된다. 그런 사람들이 커뮤니티 내 지위상승을 위해 보다
더 과격한 행동을 취하기 시작했는데, 그것이 사회적 물의를 일으켜 수면 위로 올라와 많은 사람들이 알게 되었다.
만약 그들이 스스로 생각하여 옳고 그름을 판단했었더라면 그런 선택은 하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한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기본 교육을 충실하게 받아왔기
때문에 일반적으로는 우수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보다 문맹자가 적은 나라도 그리 많지 않다. 뭐 우스개 소리로 언어가 같다고 말이 통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들 하지만, 현실적으로 똑똑한 사람이 많은 나라일수록 잘 굴러가는 것은 확실하다. 베네수엘라의 몰락을 보면 더 쉽게 받아드릴 수 있을
것이다. 풍부한 자원으로 교육을 방치한 나라는 자원의 가치가
낮아지면 그렇게 되게 되어있다.
맹목적으로 받아드리는 사람 중에서 어쩌면 자신이
스스로 생각하고 있다고 여길지도 모르기 때문에 ‘스스로 생각한다.’에 대해 잠시 이야기를 하겠다. 스스로 생각한다라는 것은 어떤 정보를 접했을 때, 그 정보를 다양한 방법으로 고찰하는 것을 의미한다. 신뢰도를 고려하고, 옳고 그름을 따져보고, 공익과 사익을 따져보고, 누구의 이익을 대변하는지 생각해보고, 그것이 목적인지 수단인지 생각해보고, 논리적인지 생각해보고, 필요와 불필요를 생각해보고, 가능과 불가능을 생각해보고, 감성과 이성을 생각해보고, 형평성에 대해 생각해보고, 당연하게 여기고 있는지 생각해보고, 특별하게 여기고 있는지 생각해보고, 시점을 달리 하여 다양한 각도에서 관찰해보고, 다른 이들의 시각에서 관찰해보고, 다른 이들의 다양한 생각들을 차별 없이 관찰해보고, 그 정보가 실제 현상이 나타나는지 알아보고, 과거의 비슷한 정보를 관찰하여 그 흐름을 파악하여
미래를 예측해보고, 교차검증을 해보고, 자신의 자연스러운 선입견이나 편견에 순응하는지 스스로를 성찰해보는 것 등을 가리켜 스스로 생각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런 방식으로 스스로 생각하는 것이 본질을
보는 것과 일맥상통하다 할 수 있다. 이렇게 스스로 생각하여 자신의 가치관이나 손익 등을 고려해 그 정보를 어떻게 활용할 것인지를 정하면 된다. 너무 많은 것이 아니냐고 물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우리가 의사소통을 할 때 생각해보면 그건
가능한 일이다. 우리가 의사소통을 할 때, 거기에 쓰이는 모든 단어와 문법을 의식적으로 기억하여
말하지 않는다. 어떤 의사를 전달하겠다는 의지를 가지게 되면 뇌가
알아서 계산하여 그에 해당되는 단어나 문장을 알려주는데, 그게 적절하다고 생각하면 그대로 말하면 되는 것이고, 아니면 한번 더 생각해 다른 것을 떠올려보면 된다.
그렇게 의사소통을 할 때처럼 스스로 생각하는 방법을 알고 난 뒤엔 스스로 생각하겠다는
의지만 갖고 있으면 뇌가 알아서 계산하여 그 정보가 어떤지에 대해 알려준다. 예컨대, ‘오늘 대기오염이 심각하다.’라는 정보를 받아드리면 자동적으로 떠오르는 생각들이 있을 것이다. ‘미세먼지가 많겠군’, ‘오늘 갈 때 마스크를 써야겠군’, ‘뭐 때문에 심각한 걸까?’ 등등 떠오르게 된다. 이렇게 뇌가 자동적으로 계산하여 알려주는 것처럼, 스스로 생각하는 방법에 습관을 들이면 받아드린 정보를
다양한 방법으로 고찰하고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나의 경우를 예로 들자면, 모든 것이 다 떠오르는 것은 아니다. 정보를 받아드리는 순간에 다양한 것이 떠오르면서 여러 가지가 판단된다. 그러나 그걸로는 부족할 때가 많고, 그렇게 떠오른 것이 선입견이나 편견일 가능성도 있다. 그래서 판단이 될 때까지 하나하나 다시 생각할 때도
많다.
이렇게 정보는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여 활용해야
한다. 그렇다면 정보의 우열은 어떻게 정해야 하는지 물어볼
수도 있다. 대답하겠다. 기본적으로 정보의 우열은 스스로 생각하지 않을 때엔
위아래로 나누고 있지만, 스스로 생각할 때엔 다양한 기준으로 나누게 된다. 옳고 그름, 가치, 영향력, 정합성 등 아주 다양한 기준으로 나눌 수 있는데, 사람마다 정보의 우열이 다를 수 있으므로 객관적인
지표는 없는 것이나 다름없다. 심지어 ‘틀린’ 정보 조차도 가치 있게 활용하는 사람도 있으니까 말이다. 그러니 정보의 우열은 스스로 판단하여 나눌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정보 자체가 아닌 정보 출처의 우열은 가릴
수 있다. 우열이라고 하기엔 좀 이상한 표현인데, 적합도에 따른 구분이라고 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예컨대 익명이 작성한 위키는 쉽게 정보를 접할 수
있다. 그런 위키를 가지고 논문 수준의 신뢰도와 정확성을
기대하는 것은 인스턴트 식품을 먹으면서 건강을 챙기겠단 말과 비슷하다. 이렇듯, 익명이 작성하는 위키의 역할은 ‘쉽고 빠른 정보’다. 그 역할에 따라 적합도를 따지면 된다. 쉽고 빠르게 접근할 수 있는 위키에 논문 수준의
어려운 정보는 적합하지 않다. 앞서 말한 것처럼 정보 자체의 우열은 스스로 정해야 하는 것이지만, 정보 출처에 적합한 정보인지 아닌지는 이렇게 역할에 따라 객관적으로 판단이 가능하다. 그걸 기준으로 하여 각 정보들의 편의성, 신뢰도, 정확성 등의 점수를 매겨 그걸 감안하여 해당 출처의
정보를 받아드리면 된다. 무작정 위아래 우열을 가려 취사선택을 하다 보면 위에서 수 차례 설명한 부작용이 나타나게 될 것이다.
정보의 출처는 매우 다양한데, 부모, 교사, 종교, 언론, 어른, 친구, 책, 잡지 등등 그 출처에 적합한 정보인지 판단한다. 그리고 그 출처에 대한 편의성, 신뢰도 정확성 등의 점수를 매기고, 그걸 감안하여 정보를 받아드리면 될 것이다. 예컨대 ‘여기 언론사 정보는 신뢰도가 이 정도니까 이만큼은
감안하고 받아드리자.’ 같이 말이다. 심지어 거짓정보를 유포하는 정보 출처조차 한번 생각해볼 여지가 있다. ‘왜 그런 거짓정보를 유포하는가? 그리고 그런 거짓정보를 유포하여 그들이 얻는 이익은 무엇인가?’ 등을 생각하다 보면 그에 맞는 정보를 수집할 수
있게 된다. 이렇게 정보 출처에 따라 감안해야 할 부분을 감안한
뒤,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해야 올바른 정보수집이 가능하고, 그 올바른 정보수집에서 올바른 결론이 도출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런 정보활용이야말로 변화하는 문명과 변화하지
않는 유전자를 지낸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이라고 생각한다.
일단 정보에 대한 이야기는 여기까지. 앞으로 지식이 늘면 정리하거나 보충하겠다. 그리고 언젠가 이 소재를 가지고 정보 공유에
관한 글을 쓸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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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발상법 중 하나를 공개하자면, 뇌가 알아서 계산해 주는 모양인지 놀고 자다 보면
뭔가가 떠오릅니다. 예를 들어 하나를 생각하고자 결정하면 그에 대해 좀 생각하다가 놀기 시작하죠. 게임도 하고 만화도 보고 독서도 보고 최근에 시작한 운동도 하다가 피곤하면 잡니다. 자던 도중에 갑자기 눈을 떠지더니 발상이 떠오릅니다. 그 떠오른 것을 적어둡니다. 그게 제 발상법 중 하나에요. 믿을지 안 믿을지는 모르겠습니다. 보통은 그냥 생각해서 떠오르지만 이렇게 떠오를 때도
있습니다. 사실 이 글을 쓸 때도 그렇게 시작했어요. 정보에 대해 쓰고 싶은데 어떻게 시작해야 할까? 그걸 고민하다가 잤어요. 그리고 자던 도중이었지, 자기 직전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데, 갑자기 눈이 떠지더니 발상이 떠올랐어요. 처음엔 ‘세계는 변했다, 사람은 변하지 않았다.’ 이렇게 떠올랐다가 조금 바꾸고 시작했지요. 명확한 기준이 잡히니 술술 써지더군요. 뭐 아무튼, 읽어줘서 고마워요. ///
저는 eBook을 좋아하는 편이에요. 읽기 편하고 관리하기 편하고 종이를 쓰지 않아도
되니 환경보호도 되나요? 아무튼 그래서 좋아해요. 그런데 걱정되는 건 회사가 망하면 남는 게 없을지도 모른다는 점이에요. 예전에 온라인 인증방식의 게임을 구매해서 즐겼었는데 회사가 망하니까 그 권한도 사라져서
끝나더군요. 아무런 보상도 받지 못했었답니다. eBook은 안 망했으면 좋겠지만 만약 망하더라도 그대로
사라지지 말고 부디 다른 회사에 인계했으면 좋겠어요. 그런 보장이 있다면 좀 더 마음 편하게 대여하거나 구매할 것 같네요. 회사가 사라져도 구매한 것은 남는다고 할지도 몰라 말해둘게요. 구매한 책을 보관한 것을 분실하면 다시 다운로드
받을 수가 없어요. 어쨌든, 지식을 공유하는 매체는 발전했으면 좋겠습니다. 똑똑한 사람들이 많아져야 대화가 통하고 즐겁거든요.
저는 글을 쓸 때 꼬박꼬박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라고 썼어요. 그런데 왜 ‘고맙습니다.’라고 써왔을까요? 그 이유에 대해 몇 가지 이야기 해볼게요. 첫째는 그 쓰임새가 특이한 것이 재미있어서 그랬어요. ‘고맙다.’나 ‘고마워.’는 보통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하거나 대등한 사람 또는 친한 사람에게 쓰이더군요. ‘감사합니다.’는 보통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하거나 거리감이 있는
사무적인 관계에 사람에게 쓰이더군요. 그런데 ‘고맙습니다.’는 그 어디에도 명확하게 쓰이는 곳이 없다고 생각했어요.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또는 대등하거나 친한 사람에게
쓰이는 ‘고맙다.’나 ‘고마워.’와 높임말인 ‘습니다’가 합쳐지니 어쩐지 대등한 관계에서만 쓰이는 말 같지 않나요? 그게 재미있다고 느껴져서 그렇게 쓰기 시작했어요. 더구나 예전에 저는 대등한 관계 아니면 상대하기 어려웠었거든요. 둘째는 초성이 어렵기 때문이었어요. ‘감사’와 달리 ‘고맙’은 초성으로 알아보기 힘들죠. 마찬가지로 ‘수고’와 달리 ‘고생’도 알아보기 힘들고요. 그 뜻을 전달하기 위해서는 온전하게 다 쓸 수밖에 없어요. 저는 나름 제 글을 읽어주시는 분들에게 정성스럽게
인사하고 싶었어요. 셋째는 보던 만화나 소설에서 쓰였기 때문이었어요. 넷째는 사람들이 잘 안 써서 쓰면 재미있을 거라 생각했어요. 다섯째는 평등한 사회, 대등한 관계를 추구하는 제게 어울리는 인사라고 생각했어요. 그저 재미있어서 쓰기 시작했던 것이 그런 이유로
그 인사말이 정착하게 되었죠. 뭐 사실은 이러니 저러니 해도 재미있는 부분이 큰 것 같아요.
2018년 4월 22일 작성
참고 인터넷 검색 (수명 한계에 관한 지식이 맞는지 확인, 사용한 단어가 맞는지 사전에서 확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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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으로 오드리 헵번의 연기를 본 작품이기도 하고..
개인적으로 피카소의 예술은 여전히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 너무 많아요
그래서 현대에 와서 누군가의 주관적인 에세이 그리고 재해석으로 들어서 알게 된 그 사람의 생애나 연애관 가치관 등에 대해 알게 되니
그제야 조금 그림이 이해되더군요 개인적으론 그림에 마음을 담다 라는 책이 참 좋았더랬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