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언어 기원
말과 글, 어쩌면 그렇게 사랑스러운가? 이런 의사전달의 매개체가 있기 때문에 우리는 좀
더 고상하게 사람들과 웃고 울을 수가 있다. 생각해보라, 언어와 문자가 없었다면 우리는 다른 동물들처럼 야옹야옹 거리거나 멍멍! 꿀꿀! 거리며 대화를 나눴을지도 모른다. 기쁜 일에 어깨를 들썩이며 꿀! 거리거나 슬픈 일에 축 처져서 꿀, 꾸울… 거리는 것은 특수한 성벽이 있는 사람을 제외하곤 그리 유쾌하진 않을 것이다.
우리를 사람답게 해준 언어와 문자는 우리 주변에
당연하게 있었기 때문에 언제부터 말하고 썼는지에 대해서는 별다른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못한다는 표현이 더 어울릴 것이다. 당연하면 그 소중함을 잊어버리니까 말이다. 하지만 이런 시작에 대한 탐구는 사물의 본질을 보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라고 본다. 사람을 사람답게 해준 언어와 문자가 언제 시작되었는지를
알게 된다면, 사람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 분명하다.
인류가 처음으로 발견한 문자는 기원전 4천년전 경에 발견한 수메르 비문이라고 한다. 물론 이 이전에도 문자가 있었을 확률은 높다. 아직 발견되지 않았을 뿐이다. 이렇게 문자는 유적으로 남아있어 그 시기를 추측할
수 있지만, 언어는 그런 것이 있을 수가 없다. 언어를 남기려면 녹음기 같은 기술이 있어야 하니까
말이다. 그래서 언어가 언제 처음 시작되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오로지 상상만이 가능할 것이다. 답이 없다는 이야기는 어떤 이의 의견도 답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앞다투어 자신의 상상을 세상에 널리 알렸다. 참고한 서적의 옮긴이에 따르면 대표적으로 신수설, 의성설, 유추설, 감정표출설, 가창설, 몸짓설, 노동설, 의지설, 진화설이 있다고 한다. 여러분들도 한번쯤 상상해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그것이 답이 될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이런 유행의 흐름에 따라 장 자크 루소(1712~1778) 또한 자신의 상상을
글로 써서 발표했다. 그 상상이 꽤나 흥미롭고 재미있어 현재까지 많은 사람들이 읽는 글이 되었다. 다음은 루소의 글을 나름대로 정리하였다.
‘욕구는 첫 몸짓들을 유발했고, 정념은 첫 목소리들을 토해내게 했다.’
루소는 몸짓 언어와 목소리 언어를 구분하는 것으로
시작했다. 인간의 원초적 욕구인 육체적 욕구는 몸짓으로 시작되었을
거라고 한다. 몸짓은 쉽고 강력한 시각적인 이미지를 준다. 무엇보다 육체적 욕구는 몸짓만으로도 충분히 의사소통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먹는 시늉, 자는 시늉, 싸는 시늉 어렵지 않게 가능하다. 그러니 굳이 목으로 소리를 내서 말할 필요도 없지만, 무엇보다 당시엔 목으로 소리를 낼 줄 몰랐을지도 모르고 그 기능조차 불안정했을지도 모른다. 사람이 쉬운 것에 먼저 기대는 건 자연스러운 현상이
아닐까? 그렇기 때문에 루소는 우리 언어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는 목소리를 토해내게 한 것은 정신적 욕구인 정념이라고 주장했다. 정념에서 일어나는 감정들인 사랑, 증오, 동정심, 분노 같은 것들은 몸짓으로만 전달하기에는 어려움이 따른다. 그 감정들을 표현하지 못할 것까진 아니지만, 그 세세한 구분이 어려운 것은 이해할 것이다. 더 뜨겁고 강하게 자신의 감정을 전달하기 위한 방법이
필요했고, 그런 필요로 의해 목에서 소리를 냈던 것이 최초의
언어라고 한다.
인간이 말을 하게 된 동기가 정념이었다면, 최초의 표현들은 비유였다고 한다. 간단히 정리하자면, 모르기 때문에 대명사로 지칭하던 것을 알고 나서
제대로 된 명사를 붙여줬다는 이야기다. 동물들을 따로 구분하지 않고 그냥 동물로 지칭하던 것을, 제대로 알고 나서 하나하나 이름을 붙여주었다고 이해하는 것도 좋다.
인간은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 감정을 담아 소리를
내기 시작했고, 그 소리는 매우 음악적이었을 것이라고 한다. 생각해보면 그럴 듯 하다. 기쁨이나 슬픔을 표현할 때 단조롭게 말하는 이는
별로 없다. 기쁠 때는 활기차고 톡톡 튀는 목소리가 나오고 슬플
때는 축 처지고 음울한 목소리가 나온다. 언어가 정념으로 시작되었다면 감정을 담은 음악적인 목소리로 의사소통을 했을 것이다. (일상생활에서 오페라처럼 대화를 주고받는 것을 생각하고 왠지 재미있다. 흔히 원시인들의 생활을 떠올릴 때 ‘우가 우가’ 같은 짐승적인 느낌으로 떠올리는데, 이제는 조금 달라져야 할 것이다. ‘우가아! 우가아~’ 같이 음악적이며 감각적인 느낌으로 대화했을 것이다.)
음악적이었던 언어는 문자의 등장으로 퇴화되었다고
한다. 사실 이 이야기는 상당히 놀라웠고 언어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만들었다. 그래 그렇지, 자유로운 언어가 문자라는 틀에 종속되니 필요 없어지는 부분은 퇴화되는 게 맞았다. 문자는 이성적 필요로 나타난 것으로 절제되고 효율적인 언어만 남게 되었다. 이는 문명이 발달할수록 점점 정교한 문법과 논리를
통해 다듬어져 과거 언어의 상당수는 사라지게 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현상을 가리켜 ‘한 언어를 이내 단조롭고 생기 없게 만들려면 그 말을 하는 나라에 아카데미를 설립하기만 하면 된다는
것이다.’ 라며 비꼬기도 했다.
이런 현상에 대한 근거는 로마의 아우구스투스 시대(기원전27년~서기14년)의 사학자 드니 달리칼리나스(Denis d’halycarnasse)가 고대 그리스(기원전1100년경~기원전146년)에서 사용되었던 악센트에 대해 말한 것을 정리한 글을 가지고 설명했다.
‘드니 달리카르나스에 따르면, 악상 테귀(accent aigu)에서 성조의 높임과 악상 그라브(accent grave)에서 성조의 낮춤은 일종의 5도 음정에 속하는 것이었다. 그처럼 음조 악센트 역시 음악적이었으며, 특히 악상 시르콩플렉스(accent circonflexe)가 그런데, 그것은 같은 음절에도 5도 음정 올라갔다가 새로 5도 음정 내려오는 목소리다.’
이 문장에서 알 수 있는 사실은 우리의 언어에서
음악적인 악센트가 아닌, 음조 악센트와 음성적인 악센트만을 인정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고 한다. 이해를 돕기 위해 설명을 보충하자.
분명 ‘음의 높낮이가 있는 악센트가 있다면 음악적인 언어가
아닌가?’ 라고 의문을 품을
수도 있다. (우리 시대에도 있는
중국어의 성조와 같이 말이다.) 그러나 그 악센트는 로마시대 사람이 고대그리스 언어의 발음을 문자로 표시하기 위해서 발명한 것으로 추측한다고 한다. 고대그리스에서 사용했던 수많은 음악적 발음 중에서
몇 가지를 골라 표시한 것에 불과하다는 사실이다. 다음은 그에 대한 루소의 설득을 정리해보았다. 어떤 악기의 음을 목소리로 정확하게 소리 내어 본다고 가정하자. 그럴 때엔 이렇게 발명된 악센트 부호와 관계없이 소리를 낼 것이다. 그렇게 낸 소리를 발명된 악센트 부호에 맞춰 문자로
표시해보자. 아마 불가능할 것이다. 이렇듯, 악센트가 없던 시대의 발음을 문자로 표시하기 위해
악센트를 발명했기 때문에 음악적인 언어는 효율적인 언어로 점차 바뀌게 되었다고 한다. 언어가 그렇듯, 음악 또한 선율에 대한 새로운 규칙들이 강요되면서 퇴화되었다고 주장한다. 일리 있는 말이다. 모든 소리를 글자로 표시할 수 있다면 모든 음악가는
같은 곡을 같은 소리로 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렇지 않기에 같은 곡이라도 음악가마다의 개성이 드러나게 된다.
음악적인 부분을 상당히 잃어버린 언어는 통치 형태에
따라 달라지기도 했다고 한다. 그 옛날 고대그리스에서는 설득이 공권력의 구실을 했기 때문에 힘이 있는 웅변으로 사람들을 설득해야 했다. 그 웅변에는 선율이 담겨있었다고 한다. 그러한 음악적인 웅변은 사람들을 설득하는데 강력한
효과를 발휘했다고 한다. 음악은 감정을 자극하니까 말이다. (그래서 설득으로 정치가 가능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계층이 고착되면서 통치자의 권력이 강해지는 바람에 그런 웅변술이 필요 없어졌다고 한다. “이것이 짐이 기뻐하는 것이니라.” 이 말 하나면 끝인 시대에 무슨 웅변이 필요하겠느냐고
그는 역설한다. 그런 사회가 형태를 갖추게 되어버린 그의 시대엔
대포와 돈이 아니고는 사회의 어떤 것도 변화시키지 못한다며 한탄한다. (이러한 이야기를 안다면 오늘날 민주주의가 자리잡은 국가에서는 이 점을 심도 있게 받아드려야 할 것이다. 공권력은 명령이 아닌 설득으로 행사해야 한다. 물론 받아드리는 사람 또한 그에 걸맞은 지성이
필요할 것이다.)
여기까지가 루소가 설명한 보편적인 최초 언어들과
그 언어들의 지속으로 비롯된 진보다. 루소는 기후에 따라서도 언어가 달랐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그 부분에 대해 간단히 정리하고 루소의 주장에 대한 정리를 마치도록 하겠다. 루소는 크게 남방(더운) 언어와 북방(추운) 언어로 구분하였는데 그런 차이점을 관찰해야 고유성을 발견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요점은 간단하다. 따뜻한 남방에서는 자연의 축복을 받아 모든 것이 풍부해 생존에 전력을 다하지 않아도 되었다. 여유 있는 삶 속에서 그들은 정신적 욕구의 충족에
집중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남방의 최초 언어는 ‘나를 사랑해줘요’ 였을 거라고 한다. 그렇게 남방 언어는 사랑과 부드러움이 담겨있는 따스하고 여유로웠을 거라고 추측한다고 한다. 반면 추운 북방에서는 먹고 살기 위해 전력을 기울여야 했다. 척박한 환경 속에서 그들은 정신적 욕구보다 육체적
욕구를 충족하는데 급급했다. 그러므로 북방의 최초 언어는 ‘나를 도와줘요’ 였을 거라고 한다. 그렇게 북방 언어는 척박한 환경 속에서 불안과 초조함이 담겨있는 날카롭고 위협적이었을 거라고 추측한다고 한다. 현대에는 북방과 남방언어가 섞여 알아보기는 어렵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요즘도 약간 남아있다고 한다.
루소의 글은 여기가 끝이다. 나름 간략하게 요약했기 때문에 부족한 부분이
많이 있다. 그러니 자세한 것은 그의 글을 직접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 당시 글이라고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로 참신하고
재미있는 발상들로 여러분들의 사고 영역을 넓혀 줄 기회가 되리라 생각한다. 그것은 또 다른 삶의 즐거움이며, 사람마다 다른 개성을 만들어낼 수 있는 수단이기도 하다. 아! 혹시 몰라 말하는데, 그의 이야기를 그대로 받아드리지는 말길 바란다. 어느 것이나 마찬가지로 그의 주장도 되도록 한번은
생각하고 받아드리기를 권하겠다.
지금부터는 나의 생각이다. 사실 나는 지금까지 언어 기원에 대해 본격적으로
생각해 본적은 없었다. 언젠가 한번은 생각해봤지만 ‘아마 언어는 … 그랬을 것이다.’ 정도로만 끝냈었다. 그러나 루소의 다양한 생각이 담긴 상상을 접하고 나니 나 또한 언어 기원에 대해 생각하고 싶어졌다. 그러므로 나의 상상을 적어보도록 하겠다.
기본적으로 나는 ‘사람은 동물이다.’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래서 언어 기원 또한 그런 관점으로부터 시작하게
된다. 그렇다면 우리 인류의 최초 언어 또한 다른 동물들과
별로 다를 바 없으리란 예상도 그리 어렵지 않다. 그에 대한 근거는 인간사회에 격리된 채 자라난 야생아나 고립아들을 보면 알 수 있다. 참고한 서적의 옮긴이에 따르면, 1724년 독일 하노버에서 발견되어 페터라고 이름 붙여진 어린이는 아무런 말을 할 줄 몰랐다고
한다. 그리고 인간 사회에 적응하는 과정에서도 많은 어려움을
겪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고 한다. 특히 1920년 인도의 늑대소굴에서
발견된 어린 자매들의 이야기가 인상적이다. 그 아이들은 발견 당시 모두 일어서지 못하고 두 손 두 발로 기어 다녔으며, 음식도 손으로 사용해 먹지 못하고 혀로 핥아 먹었다고 한다. 그리고 발견된 뒤에도 한동안은 하룻밤에 세 번씩
늑대처럼 짖었다고 한다. 놀라운 이야기다. 그 외 다양한 이야기를 예시로 들었지만 여기까지 하겠다. 이렇듯, 사람 또한 사회에 격리된 채 살아가면 동물과 다를 바 없이 생활하게 된다. 그러니 우리들은 동물처럼 대화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동물의 의사소통 수단을 먼저 알아봐야 한다. 그들은 어떻게 대화를 할까? 구글에서 ‘동물 울음 의사소통’으로 검색을 해봤다. 심심하면 검색해보길 권하겠다. 그들은 다양한 방법으로 의사소통을 했다. 꼬리를 흔들거나 귀를 씰룩 거리거나 날개를 퍼덕이는
등 몸짓 언어로 대화를 하거나 짖는 것, 포효하는 것, 으르렁거리는 것, 새의 지저귀는 소리 등 목소리 언어로도 대화하였다. 이렇게 보면 이상하다. 동물들도 몸짓 언어와 목소리 언어를 가지고 있다. 인간과 동물, 무슨 차이일까? 어떤 이는 동물은 인간처럼 말을 할 수 없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의 관점에서 바라본 시각이다. 우리가 모르는 언어를 쓰는 외국인의 말을 들으면 웅얼거리듯 들리며 못 알아듣는 것처럼, 우리가 동물의 언어를 알아듣지 못하는 것은 해석할
수 있는 능력이 없을 뿐이다. 그러니 그것은 동물과 인간의 차이가 아닌, 동물과 동물의 차이라고 할 수 있겠다. 또한 인간의 말을 흉내 낼 수 있는 앵무새가 있는 한 인간처럼 말하는 것은 인간만의 특징이 아니다. 그렇다면 무슨 차이가 있을까? 루소는 인간과 동물의 차이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동물들의 언어는 선천적으로 습득한 것으로, 그들은 후천적으로 언어를 습득할 수 없다고 한다. 그러니 그들은 진보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것은 옳은 말이 아니다. 수화를 배운 침팬지에 대해 알고 있는가? 동물들도 언어를 후천적으로 배울 수 있다. 단지 지능에 따라 달라지는 것뿐이다. 동물들 사이에서도 선천적 언어와 후천적 언어습득이
다른 것처럼, 인간과 동물의 차이는 오로지 지능 말고는 없다. 구강구조나 발음방법, 직립보행 등의 인간적 특징은 다른 종보다 우월하다는
증거가 되지 못한다. 직립보행이 지능을 높게 해주었다는 추측은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직립보행 자체가 우월한 것이라고는 할 수 없다. 날거나 물속에서 숨쉴 수 없는 인간이 다른 종보다 육체적으로 우월하다고 할 수 있겠는가? 지능 말고는 없다. 그러니 우리의 최초 언어도 지능이 낮은 동물들과
별로 다를 바 없었을 것이다. 동물은 육체적 특징에 따라 의사소통 방식이 다르므로, 아마 원숭이나 침팬지처럼 대화했던 것이 우리 언어의 기원이었을 것이다.
선천적 언어습득과 후천적 언어습득의 차이가 지능뿐이라면, 우리 언어의 진보 또한 지능의 발달에 영향을 받았을
것이라는 추측도 어렵지 않다. 지능의 발달은 진화에 직접적인 연관이 있다. 그러므로 언어의 진보에 대해 설명하려면 우리 인류가 진화해온 과정을 이야기 해야 할 것이다. 인류는 어떻게 진화하였을까? 진화를 하면 떠오르는 것은 다윈이 주장한 적자생존이다. 생존경쟁의 결과, 환경에 적응할 수 있는 생물만이 살아남고, 그렇지 못한 것은 도태되어 멸망하는 현상이라고 한다. 최근 상아 없는 코끼리가 대표적인 예다. 하지만 이런 설은 인류의 지능 발달에 대한 정확한
해답이 될 수는 없다. 우리 인류가 처음부터 지능이 뛰어났던 것도 아니었고, 어떤 특정한 개체의 지능 발달이 유전되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직립보행이 뇌의 용량을 늘려주어 지능이 높아졌다는
이야기도 있는데, 특정 개체가 갑자기 직립보행 한다고 해서 그 개체로부터 유전된 개체 또한 직립보행을 했을 리는 없다. 물론 교육을 통해서 가능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능이 낮고 언어와 문자가 없던 시절에 그런 교육이 어디까지 가능하고 얼마나 효과가 있었을지 의문이 든다. 원숭이나 침팬지에게 직립보행을 가르쳐봐라, 배울 수 있겠는가? 있긴 있었다. 침팬지 올리버다. 직립 보행하는 침팬지가 있어 사람들에게 놀라움을
선사했지만 그것이 이어지진 않았다. 그처럼 직립보행 하는 개체가 있다 해도 그들이 자기새끼들에게 가르칠 수 있겠는가? 나는 부정적으로 생각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여 인류는 현재의 지능을 지니게 되었는가? 유인원들의 유골이 아프리카 대륙과 이어진 곳에서 발견되는 것을 보고 사람들은 그곳에서 인류가 시작되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그곳에 어떤 공통된 조상(무엇인지는 모른다.)이 오스트랄로피테쿠스 같은 유인원으로 진화하였고, 그 오스트랄로피테쿠스에서 수많은 진화를 거쳐 사람으로 진화한 것이 현 인류라고 한다. 다음은 이런 진화과정에 대해 설명해보도록 하겠다. 우리는 우리의 학습이 유전되지 않음을 알고 있다. 그렇다면 유전적인 변화는 유전자의 변형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현대에 들어 유전자 변형을 통해 강제적으로 동물과 식물을 진화시키고 있다. 또한 현대의 고구마가 자연 속에서 유전자 변형을 통해 나타난 것이 밝혀지면서 자연적인 유전자 변형이 가능하다는 근거가 마련되었다. 여기까지 쓰면 무슨 이야기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유전자 변형으로 진화하였다. 공통조상 중 특정 개체가 어떤 특별한 일을 겪어 유전자에 변형이 일어났다. 그 특별한 일이 뭔지는 모른다. 고구마의 경우 수세기전 토양 속 박테리아의 일부가 야생 고구마에 들어가 변이를 일으켜 다른 고구마보다 더 크고 튼튼하게 자랐다고 한다. 당시의 농부는 당연히 크고 좋은 고구마만 골라 다시 심기 시작했고, 자연스럽게 현대의 고구마만 살아남게 되었다고 한다. 그와 마찬가지로 그 공통조상 중 특정 개체의 변형된 유전자가 짝짓기를 통해 유전되었다. 그렇게 변형된 유전자가 유전되면서 그들은 하나의 종으로 진화한 것이다. 그런 유전자 변형이 일어난 특정 개체는 하나가 아니었기 때문에 다양한 종의 유인원들이 나타났고, 그런 유인원들끼리도 짝짓기를 하여 살아남는 유전자를 가지고 있는 종이 살아남게 되었다. 하나의 예로 현생 인류에는 4만년전 멸종된 네안데르탈인의 유전자가 1~9% 가량 발견된다고 한다. 그렇게 유전자 변형으로 진화를 시작하여, 변형된 유전자끼리의 싸움을 통해 살아남은 유전자를 보유하고 있는 종이 살아남았고, 살아남지 못한 유전자는 자연스럽게 사라졌다. 그 유전자의 생존경쟁에서 살아남는 마지막이 바로 우리 인간이다. 인류가 아닌 다른 유인원들의 멸종 이유에 대해 다양한 의견이 있지만, 나는 이런 유전자의 생존경쟁으로 결정되었다고 생각한다. A유인원(또는 유전자 변형이 일어난 B와 같은 종)이 B유인원과 짝짓기를 할 때 A유인원의 특징을 가진 유전자가 많이 유전되면 B유인원은 자연스럽게 멸종할 수 밖에 없다. 원숭이나 침팬지가 멸종하지 않은 까닭은 그들과의 짝짓기로 아이를 낳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가능하더라도 호랑이와 사자의 잡종인 라이거 같이 다음 세대로 유전되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멸종한 이유에는 적자생존 등 여러 가지 복합적인 이유도 있었으리라.
유전자 변형을 통한 수많은 진화로 조금씩 지능이
높아져갔고, (때로는 낮아질 때도
있었을 것이다.) 그 지능이 높아짐에
따라 우리의 언어는 조금씩 달라졌을 것이다. 처음에는 동물들과 다를 바 없었으리라. 아마 이 때가 그 공통조상이었을 때 일 것이다. 그것에서 자연적인 유전자 변형을 통해 진화하여 불을
쓸 수 있게 될 때쯤엔 다른 동물들과 다른 언어를 사용했을 것이다. 유전자 변형이 일어나서 지능이 조금 높아진 개체는 다른 이들과 달리 우수했기 때문에 리더적 역할을
했을 거란 예상은 어렵지 않다. 그 리더적 역할을 했을 개체는 지능이 높아진 덕분에 의사를 남들과 다르게 표현하고 싶다는 의지를 갖게 되었다. 이 때 그 의지를 갖게 된 동기에 대해 상상해보자. 유전적 변형으로 지능이 높아진 개체(또는 그 유전자를 이어받은 개체)는 왜 남들과 다르게 언어를 표현하고 싶어졌을까? 선천적으로 알고 있던 목소리 언어는 다른 동물들과
마찬가지로 울음소리였을 것이다. 왜 그 울음소리를 넘어서 후천적인 언어를 표현하고 싶어졌을까? 육체적 욕구는 선천적인 몸짓과 목소리 언어면 충분하다. 동물들을 보면 충분히 가능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동물에게 감정이 없다고 이야기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니 감정표현도 할 수 있다. 그렇게 육체적 욕구와 정신적 욕구인 정념을 다 표현할
수 있는 그런 상황 속에서 후천적 언어를 표현하고 싶어진 까닭은 바로 나와 다른 존재를 지칭하고 싶어질 때다. 세상 만물에 있는 다양한 것들에는 소리가 있었고, 그 소리를 통해 그것을 지칭할 수 있는 단어를 떠올릴
수 있게 되었다. 지능이 높아진 뇌는 그 방법을 알려주게 된다. 세상의 소리를 학습하여 따라 하는 것. 그것이 인간이 세상에 내뱉은 새로운 말일 것이다. 고양이가 야옹하는 것을 보고 야옹이라 부르거나 강아지가
멍멍 하는 것을 보고 멍멍이라고 부르는 것처럼, 당시의 동물이 내뱉는 소리를 듣고 그 소리를 단어화하여 불렀을 것이다. 그것은 뇌가 동물의 울음소리를 저장하여 패턴화하였을 때, 유인원이 의지를 가지게 되자, 그 의지가 반영되어 머릿속에 하나의 발상으로
떠오르게 된다. ‘아 저것은 꿀꿀거리니까
꿀꿀이라고 불러보자’ 또는 ‘이유는 모르겠는데 꿀꿀이라고 불러보자’가 떠올랐을 것이다. 그렇게 리더가 꿀꿀이라고 부르자, 어느 정도 지능이 있던 개체도 같이 꿀꿀이라고 부르게
된다. 그것이 단어의 탄생과정이라고 생각한다. 번개를 보고 꽈꽝하니까 꽈꽝이라고 불렀을지도 모르고, 물소리를 듣고 슈루루 라고 불렀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자연을 보고 학습하여 언어를 터득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렇게 조금씩 단어 하나씩은 배우게 되었지만 지능의
한계로 그 이상은 배울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도 단어 하나씩 말했던 것이 본격적인 언어의 시작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단어를 터득한 유인원들 중 또다시 유전자 변형이 일어나 새로운 개체가 나타났고, 그 개체가 다른 개체와 짝짓기를 할 때 그 개체의 유전자가 살아남아 다시 한번 진화하게 된다. 그렇게 진화한 또 하나의 새로운 개체는 높아진 지능으로 문장을 형성할 수 있었을 것이다. 아마 이때쯤부터 대화에 논리적인 색체가 조금씩 드러나기 시작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현 인류에 비교하면 부족하다. 그래도 이때쯤부터 루소가 말한 음악적인 언어가 나타났을 거라 생각한다. 자신의 감정을 몸짓이나 울음소리가 아닌 언어에 실어 대화할 수 있는 수준까지 도달했다. 또다시 유전자 변형을 통해 진화하였고, 또다시, 또다시, 또다시 등 반복하여 현 인류까지 도달했다. 이렇듯, 언어의 기원과 진보는 인류의 진화와 직접적인 연관이 있을 수밖에 없다. 후천적 언어는 지능이 높아야 가능하기 때문이다. 우리들이 좀 더 고상하게 웃고 울을 수가 있는 것은 후천적 언어 습득을 가능하게 한 지능을 얻을 수 있었던 진화과정과, 언어가 시작되었을 때부터 내려온 언어 관습(사회와 격리된 아이들이 언어를 몰랐던 점을 생각해보자.)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오늘의 상상은 여기까지. 나중에 좀 더 보충하거나 정리할 수도 있고, 또 나중에 이 소재를 가지고 언어 교육에 관한 글을
쓸 예정이다. 그에 관해 약간만 쓰도록 한다. 언어가 문자의 등장으로 퇴화되었다면 지금의 외국어
교육방식도 달라져야 하지 않겠는가? 우리는 외국어를 문자로 배우기 시작한다. 그것이 효율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언어가 본디 문자에 종속된 것이 아니라면 그런 식의 교육은 언어적 사고 영역을 문자라는 작은 틀 안에 가두는 결과이며, 퇴화된 방식으로 언어를 배우는 것과 같다. 언어란, 모국어처럼 언어로 시작해야 한다. 외국문자를 모국어로 번역하여 배우기 시작하면 뇌
속에서 모국어에 대한 연상이 되기 때문에 혼동될 수밖에 없다. 우리는 학교에서 12년 넘게 영어를 배우며 문자로는 해석이 가능하지만 회화는 어려워하는 사람들을 많이 봐왔을 것이다. 또한 그렇게 배웠음에도 콩글리쉬 같이 잘못된 발음으로
회화를 하게 되는 경우도 많이 봐왔을 것이다. 이것은 전부 문자를 통해 외국어를 시작했기 때문이다. 나는 다른 이들이 우수하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그들이 이런 것을 모를 리가 없다고 가정하자. 그러면 왜 문자로 외국어를 교육했을까? 그것은 어느 입장을 기준으로 삼느냐의 차이다. 가르치는 입장에서 평가하기 편리하느냐, 학습하는 입장에서 배우기 편리하느냐, 물론 단어와 문법의 암기능력을 평가하는 것이 훨씬
편하다. 그것의 차이로 인해 우리는 문자로 외국어를 배우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학습의 기준으로는 정말로 비효율적이며, 잘못된 버릇(콩글리쉬)이 생기는 교육이다. 그러니 외국어를 배울 때엔 모국어를 가지고 번역하여
배우게 하기 보다는 그 나라 어린아이들이 언어를 배우는 과정을 그대로 따라 하는 것이 가장 효율적이며 이상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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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소의 글은 이번에 처음 읽었는데 막 나가는 게
마음에 드네요. 그의 의견은 사고의 자유가 느껴져요. 세상에 남방 언어가 필요가 아닌 즐거움 때문에 생겨났다니, 그걸 주장하기 위해 우물가에서 이성을 꼬시는 것을
진지하게 설명하는 걸 보면 재미있어요. 그의 ‘자연으로 돌아가라’ 에는 동의할 수 없지만요. 아무튼 이런 글을 보니까 한번 써보고 싶어서 씁니다. 제 생각을 정리하는 건 즐거운 일이네요. 그 생각, 읽어줘서 고마워요. 나중에 지식이 늘어나면 한번 더 정리해야겠어요. 그리고 이 소재를 중심으로 언어 교육에 관해 나중에
써볼 생각이에요. ///
제 이야기를 쓰고 나서 우울했어요. 이런 식으로 자신을 드러내는 것은 분명 손해겠지요. 그래도 하는 수밖에 없었어요. 가상과 현실의 괴리를 없애 스스로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자기자신과 마주볼 수밖에 없었어요. 아무래도 빠진 부분은 많지만 최대한 솔직하게 스스로에 대해 작성했다고 생각하는데, 혹시라도 환멸이나 경멸하셨다면 미안해요. 제게 슬픈 것 중 하나는 호의를 표하던 사람의 변모더군요. 손바닥 뒤집듯 태도를 바꾸는 건 너무 슬픈 일이었어요. 만약 그런다고 해도 과거의 저를 넘어서기 위해서는
받아드려야 하겠지요.
거짓을 진실로 생각해왔었다면 그것은 진실일까요, 거짓일까요? 사람이 몰리면 무언가를 만들어내죠. 인격을 만드는 이들도 있지만, 저는 흉내 낸 가짜를 만들어 그것에 맞추려고 했고, 그것이 옳다고 생각했어요. 모든 것이 진심이자 거짓이었죠. 그렇다면 그것은 진실일까요, 거짓일까요? 흉내를 낼 필요가 없어질 때쯤에 생각해보니 그것이
거짓으로 느껴져 자기자신이 몹시 싫었어요. 그리고 거짓도 싫어지게 되었죠. 이 외에도 빠진 부분은 많지만, 여기까지만 할게요. 앞으로는 달라지려 노력해 볼 거에요. 공부도 해보고, 세상과도 마주보겠어요. 자기관리도 하고 집안정리도 하겠어요. 실패할 확률은 높지만, 그래도 할 수 있는 데까지 해보려고 해요. 조금 과한 욕심으로는 철학가 사상가 소설가.. 아니면 어떤 종류라도 나의 생각과 이야기를 세상에 알리는 것으로 먹고 살고 싶어요. 가능할까요? 하하…
기운이 빠져 우울한 상태였는데, 최근 읽은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론’에서 힘을 조금이나마 얻었네요. 제 생각이랑 닮은 부분이 많았어요. 물론 읽어주시는 분들이 있다는 것이 가장 힘이 나지만, 그건 별개의 영역인 것으로 느껴져요. 글이 인정받는 것과 방식이 인정받는 것의 차이일까요? 아무튼 그래서 일부 발췌해봤어요.
'사상가라면 모름지기 결론이 어떻게 나든 자신의 논리를 끝까지 따라가야 한다. 단지 생각하는 것이 귀찮아서 기존의 올바른 의견을 그대로 받아드리고 그 덕분에 실수를
피할 수 있는 사람보다는, 적절한 공부와 준비 끝에 자기 혼자 생각하다가 실수를 저지르는 사람이 진리의 발견에 더 크게 기여한다.'
‘흔히 자제심을 잃은 토론이라고 할 때 독설, 빈정댐, 인신공격 등을 꼽는데, 논쟁의 당사자 모두에게 이런 것을 금지시킬 수만
있다면 그 같은 조치에 공감하는 사람이 늘어날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그저 통설에 대해 무차별 공격을 가하지 못하게 가로막는 것이 주목적일 뿐이다. 이에 반해 소수 이설에 대해서는 아무런 제약도 받지 않은 채 거침없이 공격을 퍼부을 수
있다. 심지어 그런 식의 공격을 가하는 사람에게 뜨거운
양심이니 정의의 분노니 하는 따위의 찬사를 보내기까지 한다. 그러나 가장 심각한 문제는 이런 일이 상대적으로 힘이 없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벌어진다는 점이다.’
‘일반적으로 볼 때, 다수가 받아드리는 의견과 일치하지 않는 소수 의견은,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표현을 순화하고, 상대방에게 불필요한 자극을 주지 않도록 극도로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깜짝 놀랄 정도로 현대에 벌어지는 현상과 비슷하죠. ‘자유론’이 작성된 시기가 1859년인데도 말이죠. 저와 생각이 비슷한 건 ‘자유론’에 영향을 받는 작품을 보고 영향을 받았거나, 그 때나 지금이나 별반 차이가 없다는 것을 증명하는
사례가 아닐까 생각이 돼요. 일종의 광기 속에서 글을 작성할 때, 스스로의 이상함을 자각하며 ‘세상에 나 하나쯤은 있어도 괜찮겠지’라고 생각하며 썼었는데 그걸 응원해주는 것 같은 문장을 보니까 힘이 났어요. 그는 개인의 개별성을 매우 중요시했거든요. 이 외에도 몇 가지 고전 저서들을 읽고 있는데, 고전을 접할수록 저자신의 부족한 부분과 배울 점을
많이 느낄 수 있어서 뭔가 충족되는 기분이 들기도 하네요. 세상 지식이 얼마나 많은데 그 많은 것을 접하고 나면 저는 그 때 어떻게 변해있을지 걱정도 되고 기대도 돼요. 자신의 무지함에 절망하며 무너질지, 새로운 지식에 전율하며 앞으로 나아갈지, 역시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의 문제에 대해 깨달은
게 너무 늦긴 늦은 것 같아요. 그래도 별 수 없지요. 어떻게 살든 제 자유니까, 엉망진창으로 제멋대로 살아보려고 합니다. 폐를 끼칠지도 모르고 기댈지도 모르고, 거부당할지도 모르고 상처받을지도 모르지만 어떻게든 나아가봐야겠지요. 간신히 소생한 상태라 언제 마음이 꺾일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예전보다는 나을 것 같아요. 이제는 미래를 보고 있으니까.
2018년 4월 15일 작성
참고
언어 기원에 관한 시론, 루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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