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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 문너머의 세계 - 강산무진 (0) 2014/05/21 PM 02:35

김훈, 『강산무진』, 문학동네, 2006.

 

  서평쓰기가 즐겁지만은 않다. 작가들의 옥고(玉稿)를 평하는 일 자체가 만만치 않기도 하거니와, 그것의 흠결을 지적하려면 상당히 치밀한 안목을 유지해야 하기 때문이다. (나 같은 사람은 안목 없음을 감추기 위해 어설프기까지 한 수식어들로 원고를 뒤덮으려 안간힘을 다하기도 한다.)

 

  이렇게 안목을 유지한 채, 서평 쓰는 사람은 독자에게 설득시키기 위한 높은 수준의 논조를 공고하게 가다듬어야 한다.

 

  서평이 작품을 투영(投影)하긴 하지만, 서평을 통해 작품의 진가를 온전히 느낄 순 없다. 서평은 작품이 없으면 생길 수 없는 그림자이다. 또한 서평은 작품을 드러내는 거울 같은 수단이자, 그것에 담긴 의미들을 찾아내게끔 돕는 필터이다. 손에 든 필터를 내려놓거나, 그것을 다른 것으로 바꿀 수 없다는 점에서 서평자(者)는 한계를 지닌다. 나는 아무리 좋은 서평이라 할지라도 작품 자체가 지닌 격(格)과 위(位)를 뛰어넘을 순 없다고 믿는다. 작품을 보조하는 부가물인 서평은 작품의 질에 따라 격과 위가 결정되는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나는 왜 이런 말들로 김훈의『강산무진』이라는 책의 서평을 시작했는가. 김훈의 글에 대해, 그의 글이 지닌 격과 위에 걸맞은 서평을 쓸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나는 김훈이 독자의 뇌리에 감흥과 감동을 어떻게 자아내는지에 대한 약간의 실마리를 지녔을 뿐, 그것이 무엇인지를 매끈하게 설명할 실력은 없다. 그런 까닭에 나는 이 책의 일독을 권하는 바이다. 김훈이 꾸려놓은 서사의 숲으로, 그 우거진 가지 아래 깊이 낀 어둑함으로 나는 모두를 기꺼이 청하고 싶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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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산무진도. 이 그림을 깊이 들여다보고 소설을 읽어보세요. 소설의 맛이 달라집니다.

 

  김훈의 글은 강고하다. 서사의 숲에 깊은 뿌리를 박은 채 침침한 그늘을 드리우는 그의 세계는 창조자의 눈매를 닮아 몹시 서늘하다. 숲이 만든 그늘은 짙고 무겁다. 기름기 없는 짧은 문장은 뻑뻑하기 이를 데 없었기에 행간을 따라가던 나는 좀처럼 느긋할 수 없었다. 늘 그랬듯이, 김훈이 조성한 서사의 숲은 나를 긴장으로 옥죄게 하였다.

 

  작가 김훈이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들을 따라가노라면, 이 빈틈없는 유물론적인 관점에 이내 숨이 막히고 만다. 아내의 임종을 지키는 사내의 부푼 방광과 암 선고를 받은 사내가〈강산무진도〉를 보고 깨닫는 숨 막힘 속에서 삶의 밀도는 너무도 빡빡하다. 너의 고통은 너의 것일 뿐, 나의 것은 아니라는 명제 속에서 김훈의 인물들은 나눌 수 없는 고통 때문에 슬퍼하고, 끓어오른 슬픔을 지그시 눌러 아래로 퍼져나가게 만든다. 기쁨도 슬픔도, 사실은 나눠지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나눠지지 않기에 커질 리도, 줄어들 리도 없다.

 

  슬픔이라는 감정은 공감되는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공감은 절대로 온전히 이뤄질 수 없다. 누군가가 넘어져 피를 흘릴 때, 사람은 다친 이의 고통에 공감함으로써 교감한다. 하지만 그 고통은 내게 새겨진 기억의 복원에서 기인한 정신적 반응이며, 다친 이가 겪은 고통은 다친 이 자신에게 고유하게 속한 것이다. 아픔을 나누었다고 해서 아픔이 줄어드는 게 아니라, 위로라는 감화를 받음으로써 슬픔의 반대 심리를 보상받는 것이다. 결론은 이러하다, 너의 고통은 너의 고통이요, 나의 고통은 나의 고통이다.

 

  나눌 수 없는 슬픔 속에서 각각의 인간이 속한 육신이라는 철폐가 너무도 공고하다는 사실이 인간이 지닌 한계를 명징하게 드러내기 때문에, 김훈의 소설은 아름답다. 군더더기 없이 담박하기에 그의 문장들은 삶 자체를 겨누는데 어려움이 없다. 맑은 문장은 가벼이 뜨는 듯하다가 날카로이 내리 찔러 깊이 스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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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이 오기 전에 읽어보세요.

만물에 생동감이 드는 계절에 이 책을 읽는 건 너무 맥 빠지는 일일 겁니다.

 

  사건을 조성하고, 이를 가다듬는 소설가 김훈의 시선은 냉정하다. 그 냉엄함은 차라리 뜨겁다. 높이 솟은 파도 아래의 그늘진 어두컴컴함, 밑이 빠진다고 표현된 강물의 소리, 오줌으로 팽팽해진 아랫배에서 느껴지는 몸의 조바심, 늙음과 질병을 통해 마침내 드러나 버린 인간의 화장기 없는 초라하고도 숭고한 맨얼굴을 김훈은 들여다보았고, 문장을 통해 독자에게 드러내어 보인다. 그가 맹렬하게 바라본 광경들을 바라보며 독자는 가장 뜨거운 얼음을, 가장 차가운 불꽃을 품는다.

 

  내가『강산무진』을 통해 느낀 가장 큰 미덕은 인간에 대한 김훈의 시선이다. 간암과의 기나긴 투병을 눈앞에 둔 아들은 육탈한 어머니의 유골을 마른 시선으로 바라본다. 그 시선은 그저 메말라버리기만 한 것이 아니다. 그 서술 너머엔 서술되지 않은 복잡한 감정들이 출렁이고 있다. 뇌종양으로 빠개질 듯한 머리통을 부여잡은 아내를 바라보는 남편의 시선 또한 마찬가지다. 사랑의 부재 때문이 아니라, 어찌 할 수 없는 무력함 때문에 그는 고통을 겪는 아내를 무참한 시선으로 바라본다. 메말라 버린 눈물, 단독자일 수밖에 없는 인간은 초라함 속에서, 고독 속에서, 침묵 속에서, 질병 속에서, 외로움 속에서, 인생이 가한 철저한 패배와 패퇴 속에서 오히려 인간이 된다. 인간이 지닌 무력함은 마침내 역설 속에서 아름다워진다. 단독자인 인간의 고독이 온전히 그만의 것이라는, 인간이 진 짐은 절대로 나눠지지 않는다는 준엄한 명제야말로 누추한 생을 오히려 활짝 피어나게 만드는 역설인 셈이다.

 

  ‘너의 고통은 너의 고통이요, 나의 고통은 나의 고통이다’라는 명제 속에서, 그것의 바닥엔 ‘어찌 할 수 없는 안타까움’이 자리한다. 강과 산은 다함이 없다(江山無盡). 그렇다. 그것은 역설적으로 인생의 삶이 다해감에 대해 ‘노래’하고 있다. 삶은 다 하여 어디로 가는가? 그것들은 화장 후 한 줌의 유골이 되어 어디 메로 가는가. 혹여 머나먼 속세로, 경혈이 끊어지는 인생의 후반부로, 약간의 돈을 쥐고 이국의 땅으로, 해독할 수 없는 시그널로 뻑뻑거리는 항로표지판 앞으로 가는가?

 

  아, 실로 강산은 다함이 없어라.

 

  삶의 자취는 간 곳이 없어라.

 

  글이 남기는 향취의 머물 곳이 없어라. (*)

원문 보러가기 : http://www.fountainwz.com/index.php?mid=board_UkHR07&document_srl=46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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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만화] BlueLuancy의 애니 동시방영관 [노게임 노라이프] 6화 (0) 2014/05/19 PM 09:27

?Blue Lunacy의 적당주의 애니 동시방영관

??

[노게임 노라이프 No game No life]

 

 

 크흠... 저번에도 말했다시피 소라와 시로는 어디까지나 게임을 즐겁게 즐긴다라는 기준으로 하고 있습니다. 재미있게 게임을 즐긴다가 그들의 기본적인 사항이죠. 왜냐하면 게임은 즐거우라고 하는 거니까요. 이 말을 먼저 드리는 것은 가히 상상을 초월하는 게임 폐인인 소라의 정신세계가 전혀 이상한 것은 아니라고 선 주의를 드리기 위해서 입니다.  그래도 저는 일단 ?17금?을 선고하겠습니다.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전혀 외설스럽지는 않으나 개념적으로 외설스럽다는 점을 주의하셔야됩니다.(이런 걸 생각 좀 하고 리뷰작을 잡을 걸 그랬네요..)

 

 자 그럼 리뷰를 시작하죠.

 

노겜노라6-1.png 하늘에서 내려온 그녀...

 

노겜노라6-2.png 플뤼겔, 지브릴. 소라와 시로를 압니다.

 

노겜노라6-3.png 그리고 소라와 시로는

 

노겜노라6-4.png 도서관쟁탈의 시작

 

노겜노라6-5.png 하지만 지브릴은 느닷없는 상황에 영어를 섞어가며 말하는데..

 

노겜노라6-6.png 일본에 그런 말이 있다는 사실에 당황

 

노겜노라6-7.png 어쨋든 본론으로 돌아가서 게임 도전하는 그들을 비웃는 지브릴

 

노겜노라6-8.png 전쟁 이후 지식을 찾아다니는 플뤼겔이라는 종족

 

노겜노라6-9.png 그 지식을 얻기 위해서 뭘 바칠 것인지?

 

노겜노라6-10.png 그것은 바로 태블릿 PC에 있는 4만권의 도서들

 

노겜노라6-11.png 이세계라니! 눈이 말똥

 

노겜노라6-12.png 올드데우스도 차원을 넘어서 소환하는 것은 힘들다고 하는데(테토는 유일신이니 가능)

 

노겜노라6-13.png 그리고 지브릴이 모르는게 있을까봐서...

 

노겜노라6-14.png 신세계를 발견하였습니다.

 

노겜노라6-15.png 그래서 이세계인 체크 2번째, 바디(성감대)체크

 

노겜노라6-16.png 소라는 바로 확답... 변태시키

 

노겜노라6-17.png 그리고 ... 변태시키

 

노겜노라6-18.png 이 애니는 절대 야애니가 아닙니다.

 

노겜노라6-19.png 날개가 성감대여라

 

노겜노라6-20.png 이 디스보드의 생명체는 전부 정령회랑이라는 것이 있는데

 

노겜노라6-21.png 그것이 모인 곳이 성감대가 되므로 플뤼겔은 날개가 성감대입니다.

 

노겜노라6-22.png 어쨋든 체크 결과 정령이 없는 소라와 시로. 디스보드에서는 생명체조차 아니지만

 

노겜노라6-23.png 이것이야말로 미지!

 

노겜노라6-24.png 기뻐하는 지브릴은 내두고 어쨋든 증명 완료

 

노겜노라6-25.png 그리고 이세계의 도서 4만권에 대한 판돈으로 자기자신을 거는 지브릴

 

노겜노라6-26.png 그 게임은 구상화 끝말잇기

 

노겜노라6-27.png 룰은 위와 같습니다.

 

노겜노라6-28.png 말한 것이 자리에 있다면 사라지고

 

노겜노라6-29.png 없다면 나타나는 방식

 

노겜노라6-30.png 이 위험한 끝말잇기를 시작합니다.

 

노겜노라6-31.png 애완견으로 참전하는 스테프

 

노겜노라6-32.png 시작하자마자 수소폭탄을 날리시는 소라

 

노겜노라6-33.png 펑!

 

노겜노라6-34.png 지브릴이 지켜줍니다.

 

노겜노라6-35.png 그 속내는 1턴만에 끝나는 것을 방지하는것!

 

노겜노라6-36.png 다음은 정령회랑을 없애고 시작하는 소라

 

노겜노라6-37.png 이어지는 게임

 

노겜노라6-38.png 그리고... 그 뭐시다냐 여성의 중요부위를 외치는 소라

 

노겜노라6-39.png 스테프가 당황당황

 

노겜노라6-40.png 그리고 해변가로 변하자 폐인모드가 되고

 

노겜노라6-41.png 소라는 연이어서... 씁

 

노겜노라6-42.png 그리고 최후의 필살기처럼... 여성복을 없애버립니다.

 

노겜노라6-43.png 그 중요부위들은 사라진 관계로

 

노겜노라6-44.png 수위는 낮은가?....

 

노겜노라6-45.png 어쨋든 게임이 계속되어 스테프는 에일리언에게 쫒기는 중

 

노겜노라6-46.png 멘틀을 없애고

 

노겜노라6-47.png 외핵 없애고

 

노겜노라6-48.png 스테프는 자신만만한 소라와 시로의 태도를 비웃습니다.

 

노겜노라6-49.png 소라 역시 지지는 않습니다.

 

노겜노라6-50.png 하지만 자신감 충만 100%

 

노겜노라6-51.png 그리고 그 부분을 꼬집는 소라

 

노겜노라6-52.png 그리고 끝마치려는 듯

 

노겜노라6-53.png 암석권 삭제

 

노겜노라6-54.png 내핵만 남은 이 상황에서

 

노겜노라6-55.png 아래로 발려들어가기만 하는 것... 지브릴의 암약에 소라는 비웃다시피 합니다.

 

노겜노라6-56.png 그리고 산소를 없애버립니다.

 

노겜노라6-57.png 지브릴은 공기를 다시 부르지만

 

노겜노라6-58.png 산소는 돌아오고 공기를 구성하는 다른 것들은 사라짐

 

노겜노라6-59.png 키스가 아닙니다. 몸 안의 기체를 서로 순환시켜서 최대한 기압을 원상태로 바꾸는 행위입니다.

 

노겜노라6-60.png 그리고 대기권도 없애버리는 소라

 

노겜노라6-61.png 대기권이 사라지면서 기압이 사라지고 몸 안의 기체가 팽창하며

 

노겜노라6-62.png 진공이 되어서 소리가 안 납니다.

 

노겜노라6-63.png 하지만 지브릴은 아직 지지 않았습니다.

 

노겜노라6-64.png 마법으로 잇는 끝말잇기

 

노겜노라6-65.png 그리고 승리를 확신했는데...

 

노겜노라6-66.png 이미 적혀있는 다음 단어

 

노겜노라6-67.png 쿨롱힘이 없어지고 핵력만으로 생겨나는 그것... 초신성

 

노겜노라6-68.png 핵에 가까운 지브릴이 먼저 죽습니다.

 

노겜노라6-69.png 이미 뛰어오르는 순간부터 정해진 패배.

 

노겜노라6-70.png 스테프는 죽었지만서도

 

노겜노라6-71.png 스테프가 에일리언을 대신 끌고다닌 덕에 이긴 소라

 

노겜노라6-72.png 한편 소라의 선견지명에 놀라워하는 지브릴

 

노겜노라6-73.png 신한테 도전하는데 이정도는 필요하겠죠?

 

노겜노라6-74.png 그 말에 지브릴은

 

노겜노라6-75.png 주종계약을 맺습니다. 자신을 이끌어줄 새로운 주군으로서 그들을 맞이하는 지브릴

 

노겜노라6-76.png

 그들이 이제 향할 곳은....

 

 

 

 

 

 

6화

 지브릴에게 도전하는 소라와 시로. 플뤼겔의 원칙대로 구상화 끝말잇기가 시작되고 사라지고 나타나는 수많은 물체들과 개념과 개체들. 그리고 소라는 디스보드의 세계에서는 발달하지 않은 과학의 개념을 이용하여 지브릴을 하나하나 궁지에 몰아넣지만 마법생명체라는 것은 가히 초월적인 생명력을 가져 죽지 않는데... 지브릴을 향한 최후의 발언, 목숨이 사라질 것까지 각오한 소라와 시로의 최후의 단어란?!

 

 

 

 이것도 이제 2권 내용이 끝나가는군요. 하지만 아직입니다. 아직 2권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솔직하게 말해서 중간 반환점인 이번 화, 그리고 3권까지 나갈 예정인 노게임 노라이프는 꽤 적절한 양을 취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권을 더해가면 갈수록 게임의 규모도 방식도 창의적인 것들이 나오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4,5권 내용을 다루지는 않아서 소라라는 인물에 대해서 더 파고들거나 하지는 못한다는 점이 아쉽군요. 그것도 3권 내용에서 중요한 복선을 던지면서도 말이죠...

 

 

 예! 이번에야말로 이공계인 저의 전문분야가 나왔죠. 솔직히 말하면 제 전공은 천체물리가 아니지만 천체물리를 좋아하는지라 저런 부분하고 더 많은 내용들을 배워둔 상태죠. 작 중에서 소라와 시로가 시도하려고 하는 것은 초신성폭발입니다. 그것도 보통의 초신성이 아닌 극초신성(Hyper Nova)이죠. 하지만 이정도의 설명으로는 잘 이해가 안될테니 아는 한도 내에서 차근차근 밟아봅시다. 

 

 소라와 시로는 하나하나 준비하기 시작하죠.

 그리고 마지막 지브릴이 마법으로 글씨를 쓰고 그 글씨를 받아서 소라가 미리 적어둔 쿨롱이라는 것을 꺼냅니다. 쿨롱이라는 것은 전자의 힘. 가장 기초적인 힘 중에 하나입니다. 현재까지 밝혀진 가장 기초적인 힘에는 약 4가지, 중력, 약력, 강력(약력, 강력을 합쳐서 핵력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전자력이 있습니다. 다른 것들은 다 제쳐두고 전자력이라는 것을 보죠. 전자력은 입자가 가지고 있는 전하의 힘입니다. 이 전하의 힘은 우리가 잘 아는 N극과 S극과 마찬가지로 +극과 -극이 서로 끌어당기거나 같은 극이 밀어내는 힘입니다. (사실 자기력도 전자력의 일종입니다.) 이 전자력은 거리에 비례하는데 그 거리라는게 매우 미미한 단위 약 1/10^20단위에서 생겨납니다. 하지만 그 미세한 거리가 점차 좁아질수록 밀어내는 힘은 기하급수적으로 커지게 됩니다.

 별의 탄생과정중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것이 있는데 바로 그것이 블랙홀입니다. 매우 큰 질량을 가진 별은 결국 스스로의 중력에 잡아먹혀서 빛조차 빨아들이게 되는 것인데 여기에서는 그 전 단계에서 멈추는 초신성에 대해서 보는 것입니다. 별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수소를 핵융합시키면서 소비하게 되고 마침내 수소가 다 떨어지면 죽음의 과정에 이르게 됩니다. 핵융합을 통해서 중력을 이겨내는 힘을 가지고 있던 별은 핵융합을 통한 열이 사라지면서 스스로의 중력에 지게 되는데 이 때 모든 별이 다 블랙홀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중력에 의해서 압축되는 별은 몇 번의 과정을 통해서 블랙홀이 되거나 초신성, 또는 백색왜성이 되는데 적색거성이라는 단계를 지나고 중력을 이겨낼 힘이 부족해진 별은 점차 압축이 되다가 더더더더 줄어들다가 쿨롱, 즉 전자력의 반발력에 의해서 밀려납니다. 이 때 밀려나면 별은 백색왜성이라는 죽은 행성이 됩니다.(실상 별의 질량에 있어서 전자력의 반발에 의해서 밀려나지 않습니다만) 하지만 중력이 너무 세서 쿨롱의 힘을 이겼다. 그러면 더더더 작아지다가 전자 자체가 차지하는 공간에 의해서 밀려나는 힘, 축퇴압력에 의해서 밀려나가서 초신성이 일어나게 됩니다. 이보다 더 작아지면 중성자에 의한 축퇴압력에 의해서 더 큰 초신성이 일어나게 되죠. 그런데 여기에서 쿨롱힘이 없어졌다. 그러면 기본적으로 행성을 이루고 있던 것들과 대기를 이루는 공기 분자들이 사라지고 오로지 중력만이 작용하는 세계에서 내핵을 이루는 고밀도의 원자들이 서로 밀어내어 강력과 중력에 의해서 서로 끌던 힘들과 평형을 이루던게 무너지고 압축이 되기 시작하죠. 그 속도는 상상초월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전자의 축퇴압력이나 중성자의 축퇴압력에 의해서 밀려나는 내핵은 초신성을 이루게 됩니다.

 

 실제로는 과연 이론상으로는 쿨롱의 힘이 없어졌다고 하이퍼노바가 일어날지는 모르겠습니다. (저는 좀 부정적인 생각입니다만)

 

 내용이 많이 어려우리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필요하신다면 자세히 설명해드립니다. 양이 많으니 메일주소를 가르쳐주시면 친절하게 적어드리죠.... 찾으실 분이 있을런지는 몰라도

 

 

 사실 좀 따져보고 생각하면 이상한 점이 한 둘이 아닙니다. 말은 이마니티와 같은 말을 쓴다는 억지. 그리고 거기에 더해서 영어인 에어(Air)라는 말을 지브릴이 쓰죠. 물론 애당초 지브릴이 등장하면서 영어를 난무하니 그런 것도 넘어갈 수 있겠지만 순수하게 따지자면 여러모로 말이 안되는 장면이기는 합니다. 그리고 위에서 언급했다시피 이론상으로 과연 하이퍼노바가 일어날지에 관해서는 미지수입니다. 애당초 항성(별)이 아니라 행성에 있어서 중력이 그렇게 셀 리가 없거든요.. 행성의 핵을 유지하는 힘 또한 쿨롱힘이 아니라 고열에 의한 팽창으로 알고 있는뎁... 초신성을 발생시키는 기본 원리인 축퇴압력 역시 쿨롱의 힘에 의한 것도 아니고요.(더 자세히 아시는 분 가능한지 가르쳐주세요~) 하지만 뭐 그저 모르고 본다면 그렇고 그런 것이겠거니 하고 넘어가는 분들이 많으실 것입니다. 하지만 사실은 내용이 책략과 적에게 치는 사기가 중심이 되는 지능적인 이야기가 되다보니 그런 면에서 현실적인 부분이 반영이 안된다는 점이 꽤 아쉽기만 하군요. SF라는 장르를 다룰 때, 실제로는 불가능한 것을 가능케하는 것과는 다른 문제니까요.

 

 

 

 

 뭐, 저건 이정도로 넘어가도록하고 지브릴에 대해서 이야기 해봅시다.

 

 지브릴은 천익종, 플뤼겔이라는 종족입니다. 플뤼겔은 전권대리인 대신에 16익회라는 것을 만들어서 전권대리를 그 16익회에서 토의를 걸쳐서 합니다. 그리고 플뤼겔의 전권대리인은 전익대리인이라고 합니다. 있기는 합니다.

그런데 이 플뤼겔은 사실 인간이나 수인종과는 다른 종족입니다. 아르토스라는 전쟁신이 만든 종족으로서 신을 죽이기 위한 첨병으로서 만들었죠. 하지만 사실 신, 즉 올드데우스를 죽이기에는 모자란 힘입니다. 서열 6위라는 것이 말해주듯 그 위로는 1:1을 하기에는 무리가 많은 종족입니다. 본래 그들은 자신들이 죽인 자들의 머리통을 수집하는 것이 취미였으나 과거 전쟁시기에 자신들의 신인 아르토스가 죽어버리고나서 자신들의 존재의의를 찾기 위해서 지식을 수집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고있죠. 특히 지브릴은 아르토스가 만든 마지막 플뤼겔로 지식 탐구에 있어서 매우 탐욕스러운 존재입니다.

 

 그런 그녀는 이세계인인 소라와 시로에 대해서 흥미를 느끼지만 그 밑바탕에는 어디까지나 흥미일 뿐, 하나의 동등한 존재로 보아주지는 않습니다. 이제 수인종을 잡으러가서의 그녀의 태도를 보면 알겠지만 매우 신랄합니다. 자신이 서열 6위라는 것에 자신감이 있죠.(실제로 서열 6위부터는 힘의 클래스가 다릅니다.) 그래서 자기 아래 종족을 깔보는 그녀입니다만 이세계인에 대한, 한 종족의 전권대리자에 대한 예의를 이번화에서 보여주었을 뿐이죠.

 

 그래서 결국 지고 만 지브릴, 그녀는 신인 테토에게 대항한다는 목표를 가지고 있는 소라와 시로를 자신의 주군으로 모십니다. 이유는 아르토스가 남긴 유언과 소라와 시로에게서 본 미래 때문인데, 이에 대해서는 이번에는 절대로 나올 일이 없을 듯 하군요. 4권 내용이다보니... 언젠가 기회가 되면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전반적으로 지브릴이 암약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사실은 이 노게임 노라이프는 우연에 의지해서 이기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우연에 의해서 생긴다고 찝찝한 기분이 되지 않는 것은 소라는 게임을 즐기면서 도박사처럼 그 우연에 승부를 걸기 때문입니다. 우연을 이용하고 있다는 느낌을 주는 것이죠. 사실 우연을 유도하는 모습들도 보이니 더욱 신빙성이 있게 만들어주기까지 하죠.

 사실 그런 것들이 비현실적이기도 하고 가끔씩 조금 조리에 어긋나는 부분도 있음에도 불구하고 재미있는 이유도 바로 그런 분위기와 우연을 조종하는 그런 장면들의 조합에 의한 것이라고 저는 봅니다. 실제로 제가 원작을 보고 있을 때에도 쿨롱이 없어졌다고 초신성이 나타나는 부분을 굳이 짚고 넘어가고 싶지는 않았던 것처럼 하나의 재미를 위해서 만들어진 작품이기에 웃어 넘길 수 있는 것이죠. 그리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고요.

 

 

 그나저나 스테프는 언제까지 소라와 시로의 장난감일런지... (아직도 소라의 나에게 반해라!의 명령은 유효합니다.) 멍멍이인채로 막을 내린 이번 화, 다음 화는 이제 동물귀소녀들과 만남이 기다리고 있을테죠.

 

원문바로가기 :

http://www.fountainwz.com/index.php?mid=board_WmlV68&document_srl=46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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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문달콤의 영화소개 두번째 (0) 2014/05/19 PM 08:54

 Poker Face:

속마음을 나타내지 아니하고 무표정하게 있는 얼굴.

포커를 할 때에, 가진 카드의 좋고 나쁨을 상대편이 눈치 채지 못하도록 표정을 바꾸지 않는 데서 유래한다.

 

포커에 대해 잘 모르지만 카드의 숫자 5개가 연달아 붙는 스트레이트를 갖고도 판돈을 억지로 올리지 않고 체크를 외치며 상대가 따라붙기를 끈질기게 기다리는 포커페이스.

 

그 포커를 주제로 한 도박영화 <라운더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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겜블러들 사이에서 긴장감이 팽팽하게 지속되는 도박을 소재로 하여 스릴러로 풀어나갈 수 있을만한 스토리를 가지고 있지만 드라마의 장르를 선택하여 담담히 전개 해 나가는 영화 <라운더스>는 제가 좋아하는 또 다른 도박영화인 <타짜>와는 다른 매력을 느낄 수 있습니다.


1999년 1월 30일에 개봉했던 영화 <라운더스>의 감독은 존 달 감독이 제작한 영화입니다. 존 달 감독에 대해 좀 살펴보자면 여러분들도 잘 아시는 미국 드라마죠 <덱스터>의 시즌1과 시즌4에서부터 7시즌까지의 연출을 담당했네요. <덱스터>... 한때 열심히 볼 때가 있었는데.. 

존 달 감독의 영화중에서 제가 봤던 영화는 <캔디 케인>이 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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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보신분 계신가요? 여주인공 엄청 답답해서 죽을 뻔 했는데... 마지막이 너무 허무하게 끝납니다. 스릴 있고 무서운 영화를 좋아하시는 분들께는 추천해 드릴만한 작품입니다. 너무 기대하진 마세요.

 

영화의 <라운더스>의 주인공은 맷 데이먼(마이크 역)과 에드워드 노튼(웜 역)이 맡았습니다. 이밖에 엑스멘 시리즈에서 ‘진 그레이’로 출연한 팜케 얀센(페트라 역)과 트랜스포머 시리즈에서 시몬스 요원으로 나온 존 터투로(조이 크니쉬 역)가 출연합니다. 그리고 러시아 발음과 주인공인 마이크를 꿰뚫어보는 듯한 눈빛이 카리스마 넘쳤던 존 말코비치 가 놀음판의 주인겪인 ‘테디 KGB’를 연기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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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말코비치(테디 KGB 역)의 첫 등장..!!


상대방의 표정만 보고 패를 읽을 줄 아는 비상한 머리를 가진 법대생을 연기하는 맷 데이먼은 실제로도 굉장히 똑똑하다고 하네요. 하버드대학교 영문학과를 중퇴했다고 합니다. 실제로 맷 데이먼은 출연한 많은 영화에서 굉장히 비상하고 두뇌 회전이 빠른 인물을 연기할 때가 많은 것 같네요. 도박도 좋아하는지 실제로 포커대회에도 나가고 카지노에서 맷 데이먼을 본 사람들도 많은가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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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들은 ‘맷 데이먼’ 하면 떠오르는 영화가 어떤 것 들이 있나요?

우리나라 사람들을 대상으로 해서 조사 한 결과입니다. 역시 액션영화의 바이블? 이라고 할 수 있는 본 시리즈가 1위네요. 그 다음으로는 자신을 찾아가는 수학천재 이야기 <굳 윌 헌팅>이 2위입니다. 오션스 시리즈도 그렇고 <디파티드>도 그렇고 참 괜찮게 봤던 영화이지만 한 가지만 꼽으라면 저도 본 시리즈에 표를 던졌을 겁니다.

 

이밖에도 <우리는 동물원을 샀다>에서 무겁게 다룬 것 은 아니지만, 가족과의 갈등을 해결하려는 아버지의 모습을 연기했었고 저희 아버지께서 좋아하시는 <스피릿>이라는 애니메이션에서 목소리로 출연하기도 했습니다.

 

맷 데이먼은 필모그래피가 굉장히 탄탄하고 연기 이외에 각본과 제작 등 영화인으로서의 길을 걷고 있는 배우라는 생각이 듭니다. 영화 <굳 윌 헌팅>은 맷 데이먼이 하버드 대학교 재학시절에 과제로 작성한 소설을 원작으로 벤 애플랙과 공동 집필하여 영화를 만들었다고 합니다. 아무도 자신들을 써 주지 않아 영화를 직접 만들었다고.. 이 영화로 1998년 아카데미에서 각본상을 공동 수상하죠.

 

<라운더스>로 돌아와서.

 

“포커테이블에 앉아 30분안에 호구를 찾지 못하면 바로 네가 호구다.” 라는 마이크의 회고로 영화는 시작합니다. 그리곤 그동안 모아놓은 비상금과 등록금 3천달러를 테디 KGB(존 말코비치 분)에게 전부 잃죠.

 

결국 ‘조이 크니쉬’(존 터투로 분)라는 자신을 아끼는 전문 도박사에게 트럭을 빌려 운전을 하며 처음부터 다시 돈을 모으기 시작합니다. 포커에 손을 때게 된거죠. 하지만 죽마고우인 웜 (에드워드 노튼 분)의 출소로 다시 포커에 손을 대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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웜 의 출소


이 사실을 알게 된 마이크(맷 데이먼 분) 의 동거녀 조(그레첸 몰 분)는 결국 마이크를 떠나게 되고 감옥에 가기 전부터 망나니였던 웜 은 마이크의 이름을 빌려 돈을 빌리고 사기포커를 치면서 돈을 따고 다닙니다.

 

하지만 웜은 빚을 진채 구속되었던 것 이었고 얼떨결에 마이크는 웜의 빚을 짊어지게 됩니다. 자그마치 2만 5천 달러죠..

 

빚을 갚기 위해 남은 시간은 부족하고 액수는 산더미 같습니다.

 

조이 크니쉬를 찾아가 도움을 구해보지만 도움을 주지 못하는 상황. 마이크는 이 장면에서 뭔갈 깨닫게 됩니다. 조이 크니쉬에게 포커는 여가나 놀음이 아니라 살아가기 위한 생계였다는 것 이죠. 자식들을 부양하고 위자료를 지불하는 등 살아가기 위한 수단으로써 조이 크니쉬는 포커를 선택했던 것 이고 돈을 딸 수 있었습니다.



처음 장면으로 돌아가 봅시다.


 

마이크는 테디 KGB에게 많은 돈을 잃었죠. 그것도 한 번에..

돈을 모아서 포커를 “즐기는” 것과 먹고 "살기 위해" 포커를 치는 것. 어떤 상황에서 좀 더 냉정한 포커페이스가 유지될 수 있을까요?

 

조이 크니쉬 에게 도움을 받지 못한 마이크는 자신을 아끼는 또 다른 사람. 페트로보스키 교수(마틴 랜도 분)를 찾아갑니다.

 

랍비집안에서 태어나 신동으로 불릴 만큼 영특한 두뇌를 갖고 있었지만 자신을 기대하는 사람들을 절망시키며 랍비가 아닌 법대 교수로서의 길을 선택한 페트포보스키 교수는 마이크의 마음을 이해합니다.

 

“우린 운명에서 도망칠 수 없어. 왜냐면 운명이 우릴 선택하니까.”

 

라는 말을 하죠.

 

교수님은, 괴로워 하셨지만 랍비가 아닌 자신을 길을 걷도록 보내주신 어머니의 마음을 다른 사람에게 베풀고자 마이크에게 만 달러를 선뜻 내어줍니다.

 

마이크는 이 돈을 가지고 KGB를 찾아갑니다. 포커를 하기 위해. 포커로 빚을 갚아 죽지 않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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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GB와 포커를 시작하는 마이크


빚을 갚지 못하면, 돈을 따지 못하면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


하지만 냉철한 판단을 내리며 좋은 패를 쥐고도 판돈을 올리지 않고 체크를 외치며 KGB가 이성을 잃고 자신에게 따라 붙도록 테디 KGB를 요리합니다. 결국 빚을 갚고도 교수님의 돈을 반 정도 되돌려 줄 만큼 돈을 딴 마이크는 자리에서 일어서려 하지만 그동안 자신에게 잃어 왔던 돈을 들먹이며 마이크를 자극하는 KGB.

 

고민 하는 마이크. 그리곤 다시 포커 테이블에 앉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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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카드로 펼쳐지는 스페이드 A 


그리고 웜의 팔에 문신으로 새겨진 스페이드 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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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디 KGB와 마이크의 대결은 어떻게 될까요? 마이크는 빚을 갚을 만큼 돈을 따서 테디 KGB로 부터 벗어날 수 있을까요?

 


“돈을 걸지 않으면 잃지도 않는다. 하지만 따지도 못한다.”

 

영화중에 등장하는 멋진 대사중 하나입니다.


수 없이 많은 기회비용을 지불하고 확률과 운에 매달리는 우리 인생은 어쩌면 도박판 같을지 모르겠습니다. 각박하게 말하고 싶진 않지만, 이곳에서 살아남는 사람은 좀더 치열하고 남들보다 간절한 사람이 아닐까요?

 

인생의 교훈으로 삼을만한 영화는 아니지만 한번 볼만한 영화가 아닌가 싶어 여러분께 소개해 드립니다. 영화 <라운더스>였습니다.

원문보러가기 : http://www.fountainwz.com/index.php?document_srl=45001&mid=board_LMme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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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문달콤의 영화소개 첫번째 (1) 2014/05/19 PM 08:51

※ 모바일 이용자분들은 네이버 블로그에서 가져온 동영상 시청이 안된다고 하던데 죄송합니다.. 유투브를 아무리 뒤져도 마음에 드는 동영상이 없어서요 네이버 동영상으로 올렸습니다. 가급적 컴퓨터로 봐 주시길 바랍니다.









안녕하세요~ 영화는 달콤달콤 문달콤입니다. 






첫 번째 집필 이네요.. 이런 건 처음이라 어떻게 해야 하는지.... 어쨌든 시작해 보겠습니다.









이번에 소개해 드릴 영화는 바즈 루어 만 감독의 <물랑루즈>(Moulin Rouge)입니다.






movie_image.jpg▶ 영화 <물랑루즈>의 포스터 입니다.






물랑루즈는 1889년 파리 몽마르트의 번화가에서 개장한 댄스 홀 이라고 하네요. 프랑스어로 ‘붉은 풍차’라는 말이고 건물 옥상의 붉은 네온사인 풍차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합니다. 포스터에서도 붉은 풍차를 볼 수 있고 스크린 에서 역시 붉은 풍차의 모습이 자주 보여 집니다.






이 물랑루즈를 소재로 영화를 재작한 것이 바즈 루어만 감독이 처음은 아닌데요, 1952년 존 휴스턴 감독이 <물랑루즈>라는 이름으로 프랑스의 후기 인상파 화가 ‘로트렉’의 생애를 영화화 했다는군요. 로트렉은 물랑루즈의 포스터와 무희들을 그렸답니다. 이밖에 10편 이상의 물랑루즈를 소재로 한 영화가 존재한다고 알고 있습니다.






영화 얘기를 좀 해봅시다.



 





<물랑루즈>는 정말 대단한 영 화 입 니 다. 



명작이기도 하고 배우들의 연기도 뛰어났죠. 하지만 정작 영화제에서 인정받은 부분은 미술상, 의상상, 작품상...무대배경이 이쁘긴 했거든요..






영화를 보는 내내 하나의 뮤지컬을 보는 듯한 감동과 전율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만큼 영화로의 <물랑루즈>가 뮤지컬의 성격을 잘 살렸다고 말 할 수 있는데요. 배우들의 동선이 짧고 관객들의 포커스가 배우들의 연기와 노래에 자연스럽게 집중됩니다. 물론 화려한 무대의 배경과 의상, 배우들의 분장들 역시 뮤지컬의 그 맛을 잘 살려주고 있지만 카메라 앵글 안에 확실한 포커스를 두고 촬영했다는 느낌을 항상 받았습니다.






날씨와 시간이 갑작스럽게 변한다던지 혹은 굳이 ‘몇 년 전, 몇 달 후’ 같은 시간 흐름에 대한 자막을 넣지 않아도 배우들의 연기와 대사로 그 심리상태를 표현하여 관객들이 이해할 수 있게 한 것 역시 뮤지컬의 특성을 잘 살린 것 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뮤지컬에서 연출할 수 없었던 효과들을 영화에서 가능케 하여 어쩌면 뮤지컬 보다 더 깊은 효과를 낼 수 있지 않았나 하고 생각해 봅니다.






영화의 주인공은 이완 맥그리거(크리스챤 역)와 니콜 키드먼(새틴 역)입니다.



니콜 키드먼은 <물랑루즈>이후 <오스트레일리아>라는 영화로 다시 한 번 바즈 루어만감독과 호흡을 맞췄습니다. 아무래도 니콜 키드먼이 호주 국적을 갖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이완 맥그리거는 새틴을 보고 첫눈에 사랑에 빠져 첫사랑과 함께 겪는 행복함과 사랑하는 사람을 향한 질투, 또 그녀를 떠나보내고도 잊지 못하고 괴로워하는 크리스챤의 모습을 잘 연기 했죠. 하지만 제가 <물랑루즈>하면 떠올리는 것은 니콜 키드먼의 새틴입니다.






니콜 키드먼은 영화 <물랑루즈>에서 외모만큼이나 아름다운 다양한 연기의 스펙트럼을 보여줍니다. 여배우가 보여줄 수 있는 모든 연기를  



<물랑루즈>에서 보여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거에요.






니콜 키드먼은



제가 좋아하는 여배우입니다. 정말 아름답습니다.



Moulin.Rouge.2001.1080p.BrRip.x264.BOKUTOX.YIFY.mp4_20140506_163731.615.jpg▶<물랑루즈> 새틴 역 의 니콜 키드먼






제가 니콜 키드먼의 연기에 처음 반했던 영화는 <디 아더스>라는 영화입니다. 귀신들린 집에서 전쟁을 통해 남편을 잃고 아이들과 함께 지내는 



‘그레이스’의 연기를 정말 소름 돋게 잘 해 냅니다. "우린 안죽었어!! 우린 안죽었어!!" 아직도 기억에 남아요..ㅎㄷ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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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밖에 니콜 키드먼 하면 생각나는 영화들이 뭐가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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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작으론 박찬욱 감독의 <스토커>가 있네요. 스릴러였지만 스릴 있게 보진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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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르네 젤위거의 연기가 너무나도 좋았던 <콜드마운틴>. 주드 로 멋있게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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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대 훈련소에서 보여줬던 <휴먼 스테인> 너무 오래돼서 내용은 기억이 안나네요..









이밖에 <도그빌> 과 <인베이젼>이 있습니다. <황금나침반>도 있네요. 이건 후속작 언제 나오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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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계인이 지구에 침공하여 인간의 신체를 강탈하는 내용의 <인베이젼>은 수년전에 봤지만 그 소재만 놓고 봤을 땐 그 당시에도 굉장히 유치하게 느껴졌습니다. 하지만 그 연기는 유치하지 않았죠. 감정을 드러내거나 잠에 들면 외계인들이 막 쫓아와서 육체를 빼앗습니다.



정말 막 쫓아와요.



잠들지 않고 감정을 드러내지 않기 위한 니콜 키드먼의 연기가 인상 깊었습니다. 



상대 역 으론 신세대 제임스 본드 역할을 맡은 다니엘 크레이그가 나왔었군요.









<도그빌>의 얘기를 좀 더 하고 싶은데요. 영화<도그빌>은 좁은 세트장 안에서 모든 영화가 촬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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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진이 실제로 영화를 촬영한 세트장의 평면도 입니다. 하얀 선으로 나누어진 구획이나 텍스트 들이 그대로 스크린에 올라가게 됩니다. 같은 공간에서 일어나는 사건이 아닌 이상 배우들은 세트장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소리’ 라는 매개로 사건을 추리하죠.



 





영화 내용은 인간의 본성을 다뤘던 좀 어려운 영화이기도 했지만 굉장히 신기한 영화였습니다. 많은 영화를 봐 왔지만 이런 영화는 정말 처음 봤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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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콜 키드먼 이라는 배우를 좋아하다보니 배우에 대한 얘기가 너무 길어졌네요. 이완 맥그리거에 대해선 나중에 알아보도록 합시다.






ugc (1).jpg ▶"여러분 그러면 다음에 만나요~ 사랑해요~헤헤" 라고 하며 아쉬워 하는 맥그리거






다시 영화<물랑루즈>로 돌아와서..






1900년 프랑스를 배경으로한 <물랑루즈>는



물랑루즈 최고의 인기를 누르고 있는 창부 새틴과 보헤미안 정신(?)을 찾아 몽마르트 로 찾아온 크리스챤이라는 청년 작가의 사랑이야기입니다. 하지만 단순히 사랑이야기 라고 하기엔 둘 사이엔 많은 것 들이 얽혀있습니다.



 





돈을 밝히고 진정한 배우가 되는 것을 꿈꾸는 새틴은 다이아몬드를 사랑합니다.



첫 등장부터 심상치 않았는데 그녀가 다이아몬드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보시죠.










제목부터 심상치 않아요.. 다이아가 아주 절친이다 이거죠 네..






한편 물랑루즈의 사장 지들러(짐 브로드벤트 분)는 이런 팜프파탈의 새틴을 돈 많은 공작(리차드 록스버그 분)과 엮이게 하여 공작의 돈으로 물랑루즈를 개조하고 나이트클럽과 창부촌이 아닌 극장으로 바꾸고 싶어 합니다. 좋게 말하면 새틴의 꿈을 이루게 하는 것 이겠지만 나쁘게 말한다면 새틴을 공작에게 팔고 자신의 사업영역을 넓히고자 하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창부가 아닌 진정한 배우로서의 삶을 꿈꾸는 새틴



그녀는 당연히 공작을 만나려고 하지만 그곳에 나타난 것은 공작이 아닌 가난하고 사랑 해 본적 없는 크리스챤이었죠.






모든 남자들이 그러듯이 크리스챤은 처음만난 새틴을 사랑하게 됩니다. 새틴이 자신을 공작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크리스챤은 사랑의 노래를 부릅니다.










이때 크리스챤과 새틴은 서로 사랑에 빠지게 됩니다. 






크리스챤에게 이 사랑은 물,불을 두려워 할 줄 모르는 첫사랑입니다. 다들 첫사랑은 그렇게 하잖아요..?






하지만 새틴은 사랑을 두려워하죠. 그녀의 신분, 이뤄야 할 꿈, 공작과 의 관계, 지들러와의 약속 등이 그녀를 가로막았으며 창부로서 살아가면서 진정한 사랑을 경험해 보지 못해서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이렇게 크리스챤과 자신의 사랑에 확신을 갖지 못하는 새틴에게 첫사랑을 품은 젊은 작가는 다시 한 번 노래합니다.













우연한 만남을 갖게 된 둘은 서로 사랑에 빠지지만 모든 남자들이 새틴을 사랑하는 것처럼 공작역시 새틴에게 한눈에 반하게 됩니다. 새 건물을 지어주고 새틴에게 보석을 선물하는 공작이지만 물질적인 '수단'이 잘못 되었다고 말할 수 있어도 공작의 순정이 잘못 되었다고 할 순 없겠죠. 크리스챤이 새틴에게 느끼는 사랑 만큼 공작역시 새틴을 사랑할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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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크리스챤은 이렇게 신났습니다. 저 립스틱이 어디서 묻은 립스틱인지는 말하고 싶지 않네요...ㄸㄹㄹ






크리스챤과 사랑에 빠져 공작과의 관계에 소홀해진 새틴. 리허설이라는 핑계로 공작과의 만남을 멀리하고 크리스챤과의 만남을 이어가던 중 결국 공작은 이 둘의 관계를 눈치 채게 됩니다. 저는 이 부분에서 어쩌면 니니(캐롤라인 오코너 분)의 새틴을 향한 질투때문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니니가 흘린 말로 공작이 어느 정도 눈치를 채게 되기 때문이죠.. 이 장면의 군무 '록센의 탱고'는 정말 멋있습니다. 동영상은 생략!






ugc (2).jpg▶공작에게 언질을 주는 니니






모든 것 을 접어둔 채 크리스챤만을 사랑하는 새틴은 자신이 죽어간다는 것을 알게 되고 둘의 사랑을 질투하는 공작의 욕망은 극에 달하게 됩니다. 자신의 돈을 들여 제작하는 연극이 공작 자신과 새틴, 그리고 가진 것 없는 크리스챤의 이야기라는 것 을 깨닫고 연극의 결말을 바꾸려고 들죠. 그리고 크리스챤을 내보내지 않으면 그를 죽이겠다고 지들러를 협박합니다.



    





자신의 죽음과 공작의 음모를 알게 된 새틴은 결국 크리스챤과의 사랑이 연기였다는 듯이 이별을 연기 합니다.






Moulin.Rouge.2001.1080p.BrRip.x264.BOKUTOX.YIFY.mp4_20140507_145743.625.jpg▶모든것을 알게된 새틴



 





사랑을 위한 선택을 하지만 더 이상 사랑할 수 없게 되는 선택이죠...



 





새틴의 연기에 속아 깊은 배신감을 느낀 크리스챤은 작가의 생명줄과 같은 타자기를 팔아 “창부” 새틴에게 화대(花代)를 지불하러 찾아 갑니다. 마지막엔 새틴이 공작의 돈과 자신의 이상 때문에 크리스챤 자신을 버린 것 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죠.



 





하지만 그렇게 돈을 뿌리고 떠나는 크리스챤에게 새틴은 자신의 진심을 담은 용서와 사랑을 바라는 노래를 부릅니다.












이 만남을 통해 새틴과 크리스챤은 다시 한 번 둘의 사랑을 확인 하게 되지만 그 둘을 향해 권총을 뽑아 든 공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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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틴과 크리스챤의 사랑은 과연 어떻게 될까요?












막을 내린줄 알았던 물랑루즈가 아직도 상영중이라고 하네요.. 가서 다시 한 번 보고 싶지만.. 너무 멀어서.. 



물랑루즈를 보다보면 친근한 노래들이 자주 등장하는 것 을 느끼실텐데요 이미 많이 알려진 노래들을 편곡해서 사용했다고 합니다.



이 영화에 많은 수식어들을 붙이고 싶지만 정말 최고의 로맨스 영화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여러분들도 시간을 내셔서 꼭 한번 보시면 반드시 그 감동을 느끼실 수 있을거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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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완 맥그리거는 <물랑루즈>의 후속편을 만들었으면 하나봐요.. 워낙 예전 뉴스이기도 하지만 기다려 볼만한 작품이 아닌가 싶습니다..






지금 까지 영화<물랑루즈>를 소개한 영화는 달콤달콤 문달콤 이었습니다. 이거 하지 말까요 너무 오글거리네요...



엄청 많이 쓴것 같았는데 내용이 별로 맘에 안드네요.. 처음이기도 하고 쓰다가 몇번 날려서 그런가..



다음주엔 어떤 영화를 소개해 드릴지 고민이 많이 됩니다. 하지만 제가 알아서 할게요. 여러분은 이번주 주말에 물랑루즈 한편 어떠세요?



원문보러가기 : http://www.fountainwz.com/index.php?document_srl=44373&mid=board_LMme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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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효성♡    친구신청

사진이 다 짤려서 안나오네요 ㅠㅠ
[영화] 블라인드(Blind), 2007 (0) 2014/05/12 PM 1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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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라인드 Blind, 2007


 



세상이 그토록 아름답다면, 다시 말해 세상이 아름답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온전한 의미에서 진실이 아닐 것이다. , 반대로 온전한 거짓말도 아닐 수 있다. 우리의 감관으로 인식되는 세상은 항상 자기모순을 내포할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완벽한것이란 없다. 만약 진정한 아름다움, 사랑이 가능하다면 그곳의 위치는 어디쯤일까?


그곳을 정확히 집어내기란 어려운 일이지만 조심스레 말 할 수 있겠다. 세상이 아름답게 보일 수도, 누군가를 사랑하게 만드는 그 장소. 한계를 넘어 불가능한 곳에 위치한 그것을 우리는 찾는다. ‘진정한(완벽한)’ 아름다움 그리고 사랑. 이 모든 것들의 이름은 환상그 속에서 새어져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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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Blind>는 날카로운 인상이 강하다. ‘날카롭다라는 단어에서 우리가 느낄 수 있는 것은 시각적, 청각적, 촉각적인 감각일 것이다. 물론, 영화라는 매체가 기본적으로 시각적이기 때문에 우리는 끝이 예리한 무언가를 생각하기 십상이다. 하지만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 작품을 구성하고 총체화 시키는 한 부분은 바로 눈 멂이다. 그렇기에 영화는 청각적(오디오) 부분이 극대화 되어 있다. 영화 시작부터 우리는 알 수 있다. 귀를 파고드는 날카로운 소리, 머릿속에 유리조각이 부유하는 듯한 소리가 들린다. 이 글에서 청각적인 부분을 표현할 수는 없어 아쉬울 따름이다.


앞으로 살펴볼 <블라인드> 영화 분석은 영화 시간적 흐름에 맞춰 진행될 것이다. 글의 분량이 길어져 지루할 수도 있을 거란 염려도 들었지만, 너무나 인상 깊게 본 나머지 독자들에게 하나도 빠짐없이 영화를 꼭 소개하고 싶었다. 어떤 식으로 소개하는 게 좋을지 가장 효과적일지 고민한 끝에 내린 결정이다. 부족한 글쓰기지만 최선을 다해 영화를 검토할 것이다. 조금은 긴 여정, 너그러이 봐주시길 바란다.


 


 



      



<시작은 시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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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이 들리듯, 아니 작은 유리파편이 신경을 건드리는 같은 오디오. 그리고 거울이 등장한다. 거울에 비친 누군가의 얼굴이 보인다. 하지만 우리는 알지 못한다. 지금 이 시점에서 알 수 있는 것은 거울에 비친 이가 여자아이란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 짐작하자면 이 깨진거울은 필경 이 아이에게 무슨 문제(도덕적 의미가 아닌)있다는 것이다.


보통 영화에서 거울이 가진 상징성은 크게 두 가지이다. 하나는 상상계를 포함한 라캉의 거울단계. 다른 하나는 반영성이다. 하지만 영화의 흐름으로 보아 상상계를 나타내는 이상적 자아와는 관련성이 적은 것으로 판단했다. 그렇기에 조금은 다른 관점에서 보았다. 그것은 타자의 시선이다.


흔히 우리가 라캉이론에서 상상계를 논의할 때는 이상적-자아를 얘기한다. 이것은 어린아이가 거울에 비친 자신의 신체를 보고 환호하듯 자신이 되고 싶은 이미지를 구성하는 시기이다. 보통 거울에 비친 상은 자신이 되고 싶은 이미지를 구현하는 법이다. 그리고 오이디푸스콤플렉스를 거쳐 상징계로 진입하게 되면 자아-이상이란 것이 나타난다. 이 자아-이상은 시선으로 이뤄진 것이다. , 자신을 타자화 시켜, 타자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이것을 쉽게 표현하자면 타자의 시선에 비쳤으면 하는 자신이다. 이상적 자아와 다르게 여기에는 타자의 시선이 개입되는 것이다. 흔히 우리가 알고 있는 인간의 욕망은 타자의 욕망이다라는 유명한 명제 또한 이것과 같은 궤를 그린다.


깨진 거울에 나타난 자아를 타자의 시선에 기인한 자아-이상으로 분석한 이유는 조금씩 설명해 나갈 것이다. 다만, 지금은 이 글의 시작이 시선에서 출발한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다.


 



영화의 첫 장면인 깨진 거울 씬은 페이드-아웃된다. 그리고 책장 넘기는 소리와 함께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잘 들어보세요. 이 이야기를 다 읽고 나면 훨씬 더 많은 것을 알게 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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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이 섞이지 않은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전해진다. 흔히 알고 있는 옛날 옛적에라고 시작되는 동화들처럼, 영화 <Blind>는 누군가의 안내로 시작된다. 그리고 우리는 영화() 속으로 들어간다. 이 여정의 끝은 무언가를 알 수 있다는 달콤한 선물을 약속받고 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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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배경인 그곳은 고전적 동화에 나오는 저주받은 성의 모습처럼 얼어붙고 사람의 온기가 느껴지지 않는다. 그곳에는 앞을 못 보는 청년 루벤과 옆에서 그를 지키는 어머니 캐서린이 있을 뿐이다. 물론 일을 도와주는 다른 이들도 있지만 존재감이 없다. 그들은 두려움에 떨고 공포에 얼어붙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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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을 못 보는 루벤은 나날이 폭력적이게 변해가고 있었다. 하지만 으레 그렇듯이 폭력을 일삼는 사람에게는 만성적인 두려움이 있다. 그에게 두려움이란 어둠이다. 그에게 어둠이란 선천적인 것이 아니다. 어릴 적에는 분명 시력이 있었다. 그는 빨강이 무슨 색인지 알 수 있으며 기린의 모습도 알고 있다. , 이 말은 그에게 있어 어둠은 내재적인 요소가 아니란 것이다. 외부에서 다가온 피할 수 없었던 외적 요소인 것이다.


그에게 있어 어둠은 두려움 자체이기도 하지만 무기력함이기도 하다. 옷을 갈아입을 때도 씻을 때도 누군가의 손길이 필요했다. 그것은 그에게 있어 참기 어려운 수치심으로 다가왔다. 그렇기 때문에 누군가가 자신을 보는 것, 자신에게 다가오는 것은 어둠 속에서 들려오는 묵직하고 소름끼치는 것이다. 그에게 있어 시선(시력)은 선망의 대상이기도 하지만, 두려움의 대상이기도 하다. 이 선망의 대상이란 부분은 여자주인공 마리를 만나면서 비로소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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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가 등장하는 장면 또한 인상적이다. 이 장면에서는 마리의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 이슬람권 국가의 차도르를 연상케 하는 이 모습을 보아 마리는 철저하게 자신을 가리고자 하는 것 같다. 그리고 거울에 비친 모습 조차 그녀의 얼굴은 보이지 않는다. 마리의 첫 등장이라고 말할 수 있겠지만 사실상의 첫 등장은 이미 있었다. 아마 몇몇 눈치 빠른 분들께서는 짐작하셨겠지만 처음에 보았던 깨진 거울에 비친 어린아이의 모습은 바로 마리(마리아)의 어릴 적 모습이다. 그녀의 트라우마를 구성하고 있는 거울, 그리고 어릴 적 모습이 영화의 포문을 여는 데 사용된다.


이미 잠깐 논의했듯이 거울의 의미를 타자의 시선으로 위치시켰다. 타자의 시선을 염두에 두고 본다면 전신을 가리고 있는 마리의 옷에서는 단순히 자신의 얼굴(영화에서 마리는 상당히 못생긴, 어떠한 의미에서 혐오스러운 얼굴을 가졌다고 설정되어 있다)을 가리기 위한 용도가 아니다. 그것은 타자의 시선으로부터 스스로를 지키기 위한 방법인 것이다.


 



서로 다른 이유에서 타자의 시선과 싸우고 있다. 루벤은 눈 멂이라는 상처와, 마리는 외상적 기억인 트라우마와 싸운다. 정확히 말하자면 초기의 그들은 싸움을 회피하고 자신을 숨기기 급급했다. 자신을 드러내고 투쟁하는 것이 아닌, 꼭꼭 숨기는 행위로 말이다.


그렇기에 이 영화의 첫 시작이자 중요한 상징적 단어가 시선인 것이다.


 


 



 



<블라인드, 보이지 않는 곳에서 침입하기>


마리의 역할은 루벤에게 책을 읽어주는 것이다. 심리적으로 불안한 루벤을 위해 그의 어머니가 마리를 부른 것이다. 물론, 처음부터 루벤과 마리의 사이가 좋았던 것은 아니다. 뒤틀린 성격은 루벤 뿐만 아니라 마리도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평생 타자의 시선에서 도망친, 모멸감 섞인 시선을 받으며 살아온 그녀 또한 루벤에게 배타적일 수밖에 없다. 그를 제압해 눕히는 상황이나 책을 집어 던졌다고 뺨따귀를 때리는 장면에서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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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 둘 사이에 변화가 일기 시작한다. 그것은 그녀가 읽어주는 때문인데, 우연찮게도(인과 관계는 항상 소급적으로 적용되기에 우연은 반드시 필연이다) 마리가 낭독하는 안데르센 동화는 루벤이 알고 있는 내용이었다. 단순히 알고 있는 게 아니라, 소리 내어 내용을 읊을 수 있을 정도로 외우고 있었다. 이 장면으로 보아 루벤은 시력이 있었을 때(어린 시절) 그 동화를 즐겨보았다는 것을 예상해 볼 수 있다. 루벤은 동화의 결말, 심지어 모든 내용을 외우고 있지만 마리의 낭독을 멈추게 하지 않는다. 오히려 다른 책을 읽으려는 마리를 제지하기까지 한다. 이것으로 봤을 때 루벤은 그 동화로 인해 어떠한 영향을 받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영향은 마리(타자)의 목소리에서 흘러 들어오는 세계, 또 다른 세계에서 시작된다. 시력을 잃으면서 루벤은 타자에 대한 두려움과 배타성이 생겨났다. 이런 상황에서 타자의 촉각과 목소리는 두려움 자체이다. 누군가가 옷을 갈아입히며 자신(루벤)의 음밀한 부분을 보고 있는 게 아닐까하는 걱정과 수치심, 다른 누군가는 자신을 제압해 차가운 주삿바늘로 진정제를 투여하는 그 감촉, 모든 것이 두려울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마리의 차분한 목소리로 전해지는 친근한 이야기. 어릴 적 자신의 눈으로 직접 읽었던 그 책. 하지만 지금은 타자의 목소리를 매개로 전해지고 있다. 그것은 익숙한 낯섦(역설적이지만), 기존의 세계를 흔들 수 있는 자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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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에 대한 불신의 벽이 조금씩 무너져 내리는 순간, 그것은 현실을 초월한 또 다른 세계에 다다름이다. 마리의 목소리로 전해지는 세계, 너무나도 익숙하지만 낯선 그 세계가 루벤에게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마치 살아있는 현실과 같이 생생한, 어둠에서 자신을 구원할 세계인 것이다.


루벤의 변화는 이렇게 시작 되었다. 그녀가 읽어주는 동화세계와 상상력이 결합하여 만들어진 환상의 공간은 루벤에게 생기를 불어 넣는다. 그리고 이 어둠 너머에서, 자신에게 또 하나의 세계를 전달하고 있는 그녀를 상상하게 된다. 이 보이지 않는 혹은 어렴풋 보이는 불가능한 지점에서 그는 세계를 깨트릴 역동성()을 가지게 된다.


 



그렇다면 마리에겐 어떤 변화가 시작 됐을까. 마리는 루벤과 다른 세계와 조우한다. 그것은 너무나 실재적인, 감추고 싶었던 진실이다. 그리고 자신의 얼굴, 타자의 시선에 대한 기억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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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가 낭독하는 동화는 또 하나의 이야기 전개이다. 루벤과 마리를 매개하는 이 동화는 영화와 교묘하게 같은 포물선을 그린다. 동화 속 인물인 카이는 거울 조각에 눈과 심장이 찔려 세상 모든 것들이 흉측해보이고 따뜻했던 마음은 차가워진다. 그리고 게르다에게 정말 못생겼군, 게르다라고 말한다. 루벤에게 동화를 읽어주는 순간, 즉 발화되는 순간 동화세계와 마리의 기억은 뒤섞인다. 마리는 계속해서 책을 읊어 내려가고 있고, 트라우마적 기억 또한 진행된다. 이중의 세계가 동시에 진행되는 것이다. 우리는 이 장면이 매우 혼란스럽다. 특히 어린 마리가 나오는 부분에서는 다시 귀를 찌르는 듯한 소리, 날선 소리가 들려온다. 그리고 이 시점부터 첫 장면의 거울에 비친 얼굴이 마리라는 것을 예상해 볼 수 있다.


마리에게 그 동화는 자신의 기억을 되짚어보는 계기인 것이다. 마주하기 싫었던 잊고 싶었던 기억인 것이다. 하지만 침입해오는 것은 그것뿐만이 아니다. 빠른 속도로 그녀의 깊은 곳으로 침입해 오는 것은 루벤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루벤의 환상이다. 마리가 안내하는 환상적 세계에 감화 받은 루벤은 마리에게 흥미를 느끼고 사랑에 빠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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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벤 스스로가 그려낸 이미지. 시각을 제외하고 그녀의 순전히 목소리를 통해 만들어진 마리의 이미지인 것이다. 하지만 마리는 부정하지 않는다. 루벤이 만들어낸 이미지 즉, 그의 시선에 대해 긍정한다. 머리는 빨간색, 눈동자는 초록색이라고 한다. 앞서 얘기한 자아-이상에 대한 주장을 뒷받침해주는 부분이다. 그녀는 스스로가 만들어내는 거울단계의 이상적-자아라는 이미지가 아닌, 타자의 시선에서 재단된 이미지를 스스로에게 부여한다. 트라우마적 상처, 그 근본에는 자신의 얼굴이 흉측하다고 멸시의 시선을 던지는 타자의 시선이 자리 잡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유년기 시절 얼굴을 비추고 있는 거울은 무참히 깨져있는 것이다(물론, 깨진 거울과 관련된 사건이 그녀에게 존재한다). 그녀에게 부재된, 분열을 일으키고 있던 자아-이상은 루벤으로 하여금 회귀한다. 그가 만들어낸 아름다운 이미지, 타자인 루벤의 이미지가 그녀에게 주입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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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가 책을 읽는 사이에 그는 상상한다. 눈으로 뒤덮인 이곳과는 너무나도 이질적인 장소에서 빨간 머리한 그녀를 생각한다. 그녀의 얼굴은 알 수 없지만, 아름다울 것이라는 루벤의 생각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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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벤은 확신을 가지기 위해 어머니에게 물어본다. “어떻게 생겼어요?” “빨강머리랬어요” “눈은 초록색이죠?” “굉장히 예쁘고요?” 아들의 변화를 지켜보고 있는 어머니의 입장에선 그의 환상을 깨트릴 수는 없었다. 그녀는 처음에는 모호한 말투지만 결국 단정 짓는 말을 하였다. “그래, 굉장히 예뻐


이제 루벤이 만들어낸 이미지는 실체성을 가진다. 물론 루벤에게만 한정되어 있다. 빨간 머리와 초록색 눈을 가진 아름다운 마리, 그것은 어머니의 긍정으로부터 확실성을 가지게 된다.


확신이 선 순간, 루벤에게 변화는 빠르게 찾아온다. 마리에게 다가가기 위해 냄새는 카펫을 바꾸기도 한다. 그리고 마리에게 더욱 다가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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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아름다워요 그녀가 들어볼 수가 없었던 그 말. ‘아름다움그것은 그녀에게 두려움을 주는 단어이다. 그녀의 트라우마의 중심에는 자신이 못생겼기 때문이라는, 죄책감이 자리 잡고 있다. 못생긴 죄, 흉측한 죄로 인해 스스로를 감추고 살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루벤의 그 말은 깊숙이 숨겨져 있던 마리의 트라우마를 마주하게 한다.


하지만 그녀를 바라보는 그의 시선은 특별하다. 그것은 그가 앞을 보지 못 한다는 사실이다. ‘블라인드’, 이 눈-멂은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이 글의 논의가 시선에서 시작했다면, 조금 더 깊숙이 확장하여 시선은 역설적으로 해석해야한다. 영화의 모든 이야기에 의미를 부여하는, 모든 것을 얼어붙게 만드는 총체성이 있다. 그것은 주인-기표(S1)블라인드(시선의 부재)’인 것이다.


 


 





<누빈점, 블라인드(시선의 부재)-1 : 의미의 고정점>


루벤과 마리의 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바로 시선의 부재이다. 이 시선의 부재로 이들의 사랑은 성립된다. 루벤은 자신만의 이미지로 마리를 그리고 그녀는 태어나 처음으로 타자의 사랑을 받게 된다. 그 중심에는 루벤이 앞을 보지 못한다는 것, 시선의 부재로 루벤이 마리를 사랑할 수 있다고 여긴다(이것은 영화를 극단으로 몰고 가는 오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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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해서 영화를 지켜보자. 마리에게 마음을 연 루벤은 그녀를 위해(그녀와 더욱 가까이 하기 위해) 몸을 씻는다. 영화 초반, 이 문제로 소동이 있었다는 것을 기억한다면 이 장면은 상당한 의미를 가진다. 자신의 음밀한 부분, 타자의 시선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했다고 할 수 있다. 사실, 마리보다 먼저 마음의 문을 연 루벤의 행동에 마리 또한 영향을 받는다. 이런 부분에서 플라시보 효과’ ‘피그말리온 효과에 대해서 바라보는 것도 가능하다.


이들의 사랑이야기에 있어 의미를 부여하고 고정시키는 누빈점은 바로 블라인드(시선의 부재)’이다. 이들의 사랑 혹은 만남까지도 블라인드라는 주제가 없었다면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루벤과 마리의 관계는 더욱 깊어져 간다. 루벤은 마리에게 자신의 집에서 함께 살자고 제안한다. 그리고 그들의 사랑은 블라인드를 중심으로 성립된다.


이들의 관계는 영화가 반쯤 진행되었을 때 절정에 다다른다. 자신에게 아름답다고 말해주는 루벤으로 인해 마리 또한 뚜렷한 변화가 생긴다. 그것은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는 행동이다. 조심스럽게 거울을 보는 그녀의 행동에는 트라우마를 극복하는 마리의 능동성이 엿보이는 부분이다.


거울에 비친 루벤과 마리의 얼굴 또한 인상적이다. 자신의 외상적 실재와 조우하기 시작한 그녀는 루벤과 함께 거울을 바라본다. 그녀에게 있어서 루벤이 어떠한 위치에 있는지 볼 수 있게 한다. 결국 이들은 서로를 사랑하며 성관계를 맺게 된다. 그리고 어느 때보다 그들의 사이는 가까워졌다.


하지만 영화는 중반으로 흘러갈수록 새로운 요소가 개입된다. 그것은 시선의 개입이다. 기표의 환유적-미끄러짐을 방지하는 누빈점으로서의 블라인드는 영화의 중심에서 그들의 이야기에 성립된다. 하지만 영화()의 특성, 그리고 누빈점의 역설적 본질로 인해 영화는 전혀 다른 국면에 치닫는다.


누빈점은 기의 없는 기표순수한 형식의 텅 빈 기표인 것이다. 이 텅 빈 기표란 결여를 가지고 있는 즉 팔루스를 상징하고 있다. 이 말은 상징계를 구성하는 주인-기표(S1)은 필연적으로 붕괴될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마르크스의 이론에서 이런 증후적 독해는 자본의 한계는 자본 자체이다. 즉 영화에 총체성을 구현하는 누빈점으로서 블라인드는 필연적으로 상징화에 실패한다.


 


 



 



<누빈점, 블라인드(시선의 부재)-2 : 누빈점의 역설>


그 시작은 조금씩 그리고 아주 천천히 다가온다. 영화 중간 중간에 볼 수 있는 루벤의 어머니의 시선이 누빈점의 실패를 예견한다. 처음에는 조금씩, 관계가 깊어진 이후에는 노골적으로 루벤과 마리 사이에 자신의 시선을 던진다. 노골적인 시선은 목욕 씬으로부터 시작된다(위에 장면 참고). 문 너머로 몰래 엿듣다 넘어지는 장면 그리고 성관계를 맺던 그 날 밤, 루벤의 어머니는 잠 못 이루며 이들이 내는 소리를 말없이 듣는다. 결국, 그녀는 마리에게 접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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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울을 보고 있는 그녀의 프레임 안으로 루벤의 어머니는 들어온다. 이 모습은 아주 은밀히 그리고 섬뜩하게 침입해오는 유령과 같은 모습이다. 물론, 영화에서는 마리의 눈썹을 그려주겠다며 자연스럽게 접근한다. 하지만 거울에 비친 그녀의 얼굴은 무섭기까지 하다.


루벤의 어머니는 마리에게 그녀의 역할에 대해 확실하게 말한다. 역할을 한정지으며 마리의 존재를 경계한다. 이 부분에 있어서 마리에 대한 단순한 질투라고 본다면 조금은 어폐가 있을 수 있다.


루벤의 어머니는 끝내 죽음을 맞이하는데, 영화가 진행됨에 따라 그녀의 건강상의 문제가 뚜렷이 보인다. 그녀의 불편한 다리를 도와주던 지팡이가 하나에서 둘로 늘어난다던지, 휠체어를 타는 모습 등에서 그녀의 병세가 영화의 흐름과 함께 즉, 결말에 다다름과 함께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루벤의 어머니 또한 그 사실을 알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앞을 못 보는 루벤을 지극정성으로 아꼈고 그리고 지켰던 것이다. 하지만 루벤의 시력이 회복될 기미가 보이자 그녀 또한 두렵기 시작한다. 그것은 진실이라는 것이다. 의학의 발달로 인해 루벤의 시력이 돌아올 수 있다는 사실은 곧, 마리의 얼굴을 볼 수 있다는 얘기이다. 그녀의 어머니 또한 마리에 대한 루벤의 상상에 일조한 책임이 있다. 그렇기에 어머니는 빨간 머리색, 초록빛의 눈동자, 그리고 아름다운 마리의 이미지를 반드시 지킬 필요가 있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루벤이 눈을 뜨기 전에 마리를 보내야 했다. 그렇기 때문에 어머니는 마리에게 접근했던 것이다. 그리고 역할을 제한하며 그녀스스로가 떠나길 원했다.


 



루벤 어머니의 침입. 정확히 말하자면 타자의 시선이 다시금 개입된다. 이것은 아름답게 굳어져 가는 영화의 총체성에 금이 가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리고 금이 가기 시작한 성채는 빠른 속도로, 그리고 처참히 무너져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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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체성을 상징하는 블라인드는 무너지기 시작한다. 누빈점의 역설, 그것은 결여의 기표로 반드시 상징화에 실패한다고 앞서 말했다. 저지할 수 없는 불가항력적인 시선이 다시금 침입해 오고 있다. 마리는 그것을 목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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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실재의 침입이 두렵기만 하다. 빨강이 어떤 색인지 정확히 알고 있으며 아름다운 마리를 확신하는 루벤의 모습에 그녀는 절망한다. 지금까지 한 번도 찾지 못했던 행복, 자신을 사랑해주는 루벤과 함께 머물고 있던 그들만의 성은 마치 모래성처럼 흩어져간다. 결국 그 모래성은 아무리 견고해도 파도에 휩쓸려, 바람에 날려 무너져 내릴 운명이다.


 



그녀는 루벤과 함께 도망치고자 한다. 하지만 모든 선택은 항상 빠르거나 늦다. 루벤과 함께 도망치고자 했던 그녀의 선택 또한 너무 늦은 선택이었다. 결국 루벤은 수술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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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일, 반가운 소식은 루벤이 수술을 통해 시력을 회복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한때 시력은 자신에게 좌절과 두려움을 가져다주는 단어였지만, 마리를 통해 그리고 발전된 의학을 통해 희망의 대상이 된 것이다. 어둡기만 하고 길고 길었던 고독의 시간을 마리로 인해 버텼고 아름다운 마리의 얼굴을 두 눈으로 볼 수 있다는 사실에 그는 기뻐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녀에게 있어 시력은 다른 의미이다. 루벤이 시력을 회복한다면 자신이 그에게 거짓말을 했다는 사실, 그리고 아름다운 얼굴이 아닌 볼품없고 나이 든 여자라는 사실이 밝혀진다.


누빈점으로서 블라인드는 정확히 영화를 구성하고 있다. 이 시점에서 루벤은 블라인드라는 주인-기표가 해제됨으로써 어떤 반향을 일으킬 것인지 전혀 모른다. 그에게 있어도 아름다운 세상, 완벽한 사랑은 블라인드를 전제로 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누빈점, 블라인드(시선의 부재)-3 : 붕괴>


글의 진행을 조금 빠르게 하기 위해 이 장면에 있어서는 요약정도만 하고 넘어가겠다.


 



끝내 마리는 편지 한 통을 남긴 채 사라진다. 그녀의 편지는 어머니에게 전달되었고 루벤은 수술실로 향한다. 수술이 끝난 뒤, 루벤은 끊임없이 마리를 찾는다. 곁에 어머니가 함께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리의 이름를 애타게 부른다. 불안을 머금은 자신의 곁에, 그리고 세상과 조우할 때 그녀가 함께 하길 원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미 떠나버린 마리는 그의 곁에 없다. 그러는 사이 계속해서 쇠약해져가던 어머니 또한 병세가 악화되어 세상을 떠나고 만다. 이제 그의 곁에 남은 이는 없다. 그를 평생토록 지켜주었던 어머니 캐서린’, 자신을 어둠에서 구원했던 아름다운 그녀 마리’, 블라인드라는 눈-멂에서 벗어남과 동시에 모든 것들을 상실하게 된다.


 



루벤이 병원에서 회복하는 동안 마리는 그를 찾아온다. 그녀는 용기를 내어 그를 만나고자 했다. 하지만 빅터 박사가 그녀를 가로 막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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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루벤을 만나기 위해 당당히 모습을 드러낸다. 그녀에게 있어 마지막 용기였던 것이다. 시선으로부터 투쟁하기 위한 마지막 용기, 하지만 결국 루벤을 만나지 못 한다. 빅터 박사는 그녀에게 친절을 빙자한 말을 건넨다. 하지만 그의 말에는 확실한 오만이 자리 잡고 있다. 루벤과 마리와의 관계에 있어서 어떠한 판단도 오로지 그들의 몫이다. 이들은 자신들의 관점에서 마음대로 재단하고 판단한다. 물론, 빅터 박사의 행동은 전이된 캐서린의 입장이다. 루벤의 어머니인 캐서린은 죽기 전 빅터에게 자신의 아들을 지켜달라고 부탁했다. 그렇기에 빅터의 행동은 전이된 캐서린의 행동에 가깝다.


결국 타자의 시선에 다시금 재단 된 마리는 루벤을 만나지 못한다. 그리고 어설픈 빅터의 위안은 잔인하다. 그가 말한, 결코 지울 수 없는 상처. 빅터의 의도에 따르면 그 상처를 안고 살아갈 사람은 루벤이다. 빅터는 전이된 캐서린의 입장으로 보아야 한다. 캐서린이 걱정했던 것처럼 빅터 또한 마리의 얼굴을 보고 난 후 루벤이 크게 상심할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렇기 때문에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루벤에게 전해줄 수 없다는 말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 뒤에 이어지는 말에 주목하고 다음 장면을 보아야 한다.


그녀 얼굴에 난 흉터는 지워질 수 있는, 의학이 발달됨으로써 치유할 수 있는 상처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것을 위안삼아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녀에게 있어 얼굴에 난 상처는 결코 치유할 수 없는 상처이다. 곧이어 어릴 적 캐서린이 등장한다. 이야기는 다시 영화의 처음 장면인 깨진 거울과 연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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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벤과의 만남이 좌절되는 순간, 얼굴에 난 상처가 치유될 수 있다고 말하는 빅터의 말이 끝나는 순간 트라우마는 다시 돌아온다. 마리의 어머니는 무슨 문제였는지 그녀를 지독히 싫어했다. 그녀가 겨울을 보는 것을 극히 싫어했던 그녀의 어머니는 거울로 향해 마리의 얼굴을 밀어 붙인다. 영상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녀의 어릴 적 모습은 흉측이란 단어와 거리가 멀다. 하지만 거울파편이 그녀의 살을 찢고 상처를 남기면서 그녀의 얼굴 또한 망가져 버렸다. 영화에 나오는 안데르센의 동화의 카인은 거울조각이 심장에 박히면서 차갑게 변했다. 그녀는 거울조각이 얼굴에 박히면서, 그리고 그 상흔인 흉터가 남음으로써 세상과 등을 진다.


그것은 빅터의 말처럼 지울 수 있는 상처가 아니다. 심장에 박힌 얼음조각은 발달된 의학으로 치유할 수가 없다. 루벤의 입장에서 마리를 재단하며 그가 받을 상처를 걱정한 빅터는 그와 동시에 마리의 상처는 보지 못했다. 그리고 영상에서는 깨진 유리소리와 여자아이의 울음소리가 울려 퍼진다.


 



영상은 페이드-아웃되고 루벤의 목소리가 들린다. 이야기는 새로운 국면에 진입한 것이다. 처음에는 마리의 목소리가 우리를 안내했다. 이제는 무너진 총체성 앞을 직면할, 잔인할 정도로 현실적인 세계를 목도할 루벤의 목소리가 우리를 안내한다. 그리고 전해지는 말은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영원이란 단어이다. 이것은 영화의 마지막과 연결되는 고리이다. 마지막 논의에서 다시금 설명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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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뜨다, 현실적인 너무나 현실적인>


루벤이 고대했던 시간이 찾아온다. 그것은 세상의 빛을 보는 것이다. 하지만 그 놓아진 것들은 너무나 현실적인 이야기들, 인간적이라면 너무도 인간적인 이야기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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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앞에 놓아진 것들은 형체가 일그러진 혹은 너무나 밝은 세상이다. 그가 그토록 보고 싶었던 이 세상은 어쩐지 괴기스럽다. 그가 도수에 맞는 렌즈를 쓰고 주위를 바로 보는 순간, 자신의 두 눈으로 사물을 알아보는 순간 찾아온 것은 어머니 캐서린의 죽음이다. 그는 눈을 뜸과 동시에 어머니의 죽음을 확인한다. 잔인하지만 이것이 바로 현실적인 세상이 아니겠는가.


홀로 집에 돌아가 느낄 수 있는 것은 부재이다. 어머니는 세상을 떠났고 마리는 사라졌다. 그는 눈만 뜨면 모든 것이 행복해질 것이라 믿었지만, 현실은 달랐다. ‘블라인드에서 벗어나 세상을 직시 할 때 아름다운 것들은 모두 사라졌다.


루벤은 마리를 찾기 위해 노력하지만 그 시도는 매번 실패로 돌아간다. 자신을 마리라고 말하는 많은 여자들 사이에서 그가 의지할 수 있는 것은 시력이 아닌 촉각과 청각, 후각이다. 그가 사랑한 마리는 코끝의 향, 귀를 간질이던 그녀의 목소리 그리고 손에 머문 촉감에 머물고 있는 것이다.


 



 


 



<“난 동화 같은 거 믿지 않아”>


이 글의 첫 물음은 완벽한이란 것은 어디에 있냐는 질문이었다. 우리는 이것을 영화 마지막 부분에 적용한다면 아름다운 그녀, 나의 사랑 마리는 어디에 있는가라고 물어볼 수 있을 것이다.


시간은 흘러 루벤은 여행을 다녔다. 그곳을 벗어나 이스탄불(마리와 함께 가고자 했던)에 갔으며 사위가 푸르른 초원, 키보다 높게 자란 갈대가 무성한 들판을 보았다. 그리고 다시 돌아온다.


돌아온 그는 자신이 그토록 사랑했던, 아니 아직까지 사랑하고 있는 그녀의 자취가 스며든 책을 찾아 나선다. 그것은 그와 그녀의 첫 매개인 안데르센 동화이다. 그는 도서관에서 책을 찾는다.


항상 사건은 우연찮게 발생한다(이 우연은 영화의 귀결에 필연적인 요소로 자리 잡는다). 그가 찾아간 도서관에 마리가 근무하고 있었다. 물론 먼저 발견한 사람은 마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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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고민한다. 시력이 회복된 그가 자신의 눈앞에 있는 것이다. 그녀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그 앞에 서성인다. 루벤이 그녀를 알아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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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드르센 동화집이 어느 쪽에 있죠?”라고 물어온다. 이는 분명 마리와의 기억을 더듬고 있다는 것이다. 그녀는 루벤을 안내하고 안데르센 동화를 집어준다. 그리고 루벤을 향해 뒤돌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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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자신을 알아봐 주었으면 하는 기대와는 달리 루벤은 마리를 알아보지 못한다. 그것보다 더욱 충격적인 것은 그가 그녀의 얼굴을 보고 놀랐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두 사람 사이에는 적막이 흐리고 루벤의 형식적인 인사만 있을 뿐이다.


대화는 종결되고 마리가 루벤 옆으로 스쳐지나가는 순간, 그는 무엇인가 느꼈다. 시각적 감각으로는 잡을 수 없었던, 오직 시력을 제외한 다른 곳에 머물고 있던 그녀를 느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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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눈을 감은 채 그녀의 음성을 듣고 그녀의 얼굴을 어루만진다. 이 행동들은 그가 알고 있는 유일한 방법, 그녀를 찾기 확인할 수 있는 가장 정확한 수단이다. 결국 그녀가 자신이 사랑한, 그렇게 찾을래야 찾을 수 없었던 마리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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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과 함께 돌아가자는 루벤의 말에 마리는 다시금 물어본다. “내가 아직도 예뻐?” “예쁘요라는 루벤의 대답에도 마리의 마음은 움직이질 않는다. 그 이유로 마리는 더 이상 동화 같은 것을 믿지 않는다고 말한다. 루벤이 수술하고 회복하는 사이에 마리가 겪었던, 그리고 마리를 처음으로 보자 놀랐던 그의 모습에서 그녀는 자신이 동화 속 주인공이 될 수 없다고 확신한다. 분명 동화 속 이야기 전개(참고 장면)는 해피엔딩이다. 거울조각으로 얼어붙은 카이의 심장을 게르다의 입맞춤으로 따스하게 녹인다. 그리고 게르다로 인해 심장에 박혀있던 거울조각이 흘러나온다. 하지만 루벤과 마리와의 관계는 다르다. 현실은 동화가 아니라는 것이다. 얼어붙은 마리의 마음은 루벤의 포옹에도 녹지 않는다. 그녀를 조심히 어루만지는 그의 온기로도 그녀의 마음을 녹이지는 못한다. 결국 현실인 것이다.


마리는 난 동화 같은 거 믿지 않아라는 말만 남기고 사라진다. 그리고 다시는 돌아오지도 보이지도 않는다.


 



우리는 앞서 ‘<누빈점, 블라인드(시선의 부재)-3 : 붕괴>’에서 보았던 두 장면을 기억해야 한다.그림1_46.jpg


카이가 찾을 수 없었던 영원이란 단어는 마리는 물론 루벤도 찾지 못한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바로 마리가 말한 그대로인 것이다. 현실은 동화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영원한 것은 루벤이 사랑하는 마리는 어디에서 찾아야 하는 것일까.














<“성관계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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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캉의 유명한 명제인 성관계는 없다는 영화 <Blind>를 정확히 관통한다. 지금까지 보았던 시선, 누빈점(블라인드), 동화와 같은 모든 것들은 저 날카로운 것으로 인해 꿰뚫린다.


라캉이 말한 성관계는 없다란 불가능한 진리 혹은 영화에서 보았던 영원’ ‘완벽이라는 것들의 불가능성이다. 남자와 여자의 합이라고 생각되는 성관계는 환상을 바탕으로 만들어지는 것이다. 논리적으로 보았을 때 여성과 남성의 완벽한 동일성은 불가능하다. 만약 가질 수 있는 것이라면 완벽하다라는 동일성을 가질 수 있다는 환상뿐이다. 이것으로 인해 우리는 누군가를 사랑하고, (그녀)와 완벽한 합(사랑)을 이룰 수 있다고 상상한다. 기만적이라고 볼 수 있지만 이 불가능성으로 인해서 인간은 역동을 얻는다. 인간 자체가 기표-주체 즉, 기의 없는 기표로 표상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영화 <Blind>에서 말하는 영원, 사랑하는 마리의 위치란 어디인가. 그것은 바로 환상이다.


 



마리가 떠난 뒤 루벤이 깨닫게 되는 사실은 바로 그 불가능성이다. 우리는 이 대목에서 떠오르는 것이 있다. 그것은 영화 초반, 마리가 우리에게 했던 말이다.


 



잘 들어보세요. 이 이야기를 다 읽고 나면 훨씬 더 많은 것을 알게 될 겁니다.”


 



영원이라는 것은 불가능하다, 정확히 말하면 실현불가능하다. 오직 환상에서만 가능하다라는 진실. 그것이 이 영화의 끝에 준비된 (치명적인)보물인 것이다. 우리가 보통 에로스라고 불리는 동일성의 원리는 유년기의 아이의 환상에서 기인한다. 자신의 어머니와 동일화된 그 완벽한 동일성의 기억을 끊임없이 추구한다. 하지만 이미 상실해버린 팔루스는 결여의 기표로 그리고 인간이란 존재를 역동적으로 만드는 것으로 남는다.


 



편지를 통해 알려진 그녀의 아픔, 그것은 바로 시선이다. 마침내 그녀가 자신을 떠난 이유, 그녀와의 사랑이 불가능한 이유는 루벤은 찾은 것이다. 그토록 원했던, 아름다운 것들을 보기 위해서 노력한 루벤에게 있어 이처럼 역설적인 부분은 또 있을까. 마리의 편지에 적힌 것처럼 세상에는 아름다운 것들이 많다. 하지만 그것은 미완의 아름다운, 불가능을 내포한 아름다운 것들이다. 완벽한 사랑은 그가 보지 못한 채 더듬은 손끝으로 본 세상에 마리는 존재한다.


여기서 새로운 질문이 필요하다. 루벤의 사랑은 무엇인가? 진정한 사랑을 좇는 결국 비극으로 치달을 수밖에 없는 사랑을 맹렬히 좇는 그의 순수함은 어디에서 오는 것인가.


루벤은 마리가 지닌 고통에 대해서 윤리적 책임을 진다. 마리가 떠나기 전까지 괴롭혔던 그 타자의 시선에는 자신 또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만다. 그녀가 떠나기 직전, 그는 그녀를 만났지만 결국 그녀를 놓치고 말았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자신의 시선(시력)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결국 그는 극단적인 선택을 한다. 이유는 두 가지로 생각될 수 있다. 하나는 완벽하고 충만한 세계에서 마리와 영원한 사랑을 나누고 싶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마리의 아픔에 대한 (현실세계에서의)윤리적 책임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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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현실세계(상상계)와 작별을 고한다. 그 행동은 고드름으로 자신의 눈을 찌르는 행위다. 이것으로 마리를 괴롭혔던 시선을 단죄하고 모든 것을 망친, 그리고 마리를 만나게 했던 시선의 부재(블라인드)로 다시금 돌아가려 한다.


 



이제 영화 마지막 시퀀스이다. 이 장면은 루벤이 마리에 대해 상상하는 장면으로 이 전 장면과 비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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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전에 상상했던(그림1)과 다르다. 그것은 마리의 머리색이다. 분명 이전에는 빨간색 여자가 그의 상상 속에서 머무르고 있었다. 하지만 고드름으로 눈을 찌른 뒤, 마지막 장면에 와서는 진짜 마리의 모습과 가까운 여자가 등장한다. 그렇다. 이제 빨강 머리와 초록색 눈동자를 가진 허상의 마리가 아닌, 탈색된 금발에 가까운 마리가 등장한다. 그리고 어느 때보다 따뜻하고 평화로운(오디오가 주목할 만하다) 곳에서 루벤은 미소 짓고 있다. 비로소 그의 환상은 완성된 것이다.


 



성관계는 없다라는 라캉의 명제처럼 현실세계에서는 완벽한 사랑이란, 영원한 사랑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곳이 존재하는 곳은 자신이 상상한 허상의 세계에서만 가능하다. 루벤이라는 청년이 그토록 순수하게 여겨지는 부분은 바로 이 비극성 뒤에 놓인 역설적인 부분인 것이다. 루벤은 순수하게 사랑했다. 루벤은 마리를 위해 자신의 두 눈을 포기 할 수 있었다. 그곳이 현실성이 없는 허상의 세계라도 말이다.



원문 바로가기 : http://www.fountainwz.com/index.php?document_srl=45182&mid=board_mBXb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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