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순전히 파판 8을 여러번 클리어하고 각종 정보를 모은 뒤 제 나름대로 레벨 연동제에 대해 생각한 지극히 개인적인 의견입니다.
설명충 기질이 좀 있어서 글이 길어졌으니 마지막 요약만 보셔도 큰 상관은 없을 겁니다.
플레이 스테이션 1 당시 스퀘어는 영화같은 연출을 중시해 만드는 게임 대부분에 CG 동영상을 때려박으며 보여주는 게임을 만들고 있었습니다. 특히 파이널 판타지 8은 그 절정에 달했던 작품으로 온갖 영화에 나올 법한 상황을 모두 끌어다 CG 영상으로 만들어 보여주는데 주력했습니다(해안 상륙 작전, 무도회, 열차 탈취, 거대 로봇과의 추격전, 대규모 퍼레이드, 저격 이벤트, 탈옥, 미사일 발사, 날아다니는 건물, 대규모 집단 전투, 미래 도시, 우주 여행, 시간 여행 등).
이렇게 보여주기를 중시하는 과정에서 파이널 판타지 8은 전투가 스토리 진행(보여주기)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조정이 들어갔습니다. 게임 초기부터 적과 전투를 하지 않게 해주는 인카운트 반감/없음 어빌리티를 얻을 수 있게 했으며 전투에서 도망치는 것도 굉장히 쉬워졌습니다. 또한 전투를 하지 않으면 레벨이 낮은 상태가 되므로 전투를 하지 않아도 게임을 깰 수 있도록 적의 레벨이 아군의 레벨과 연동하는 레벨 연동제 시스템을 만들었습니다. 정션 시스템을 이용하면 레벨을 올리지 않아도 스테이터스를 올릴 수 있습니다. 덕분에 파판 8은 일반 전투 없이 보스 전투만 하면서 게임이 보여주는 동영상만 감상하면서도 클리어할 수 있는 궁극의 보여주기 게임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만
이렇게 게임을 만들면 CG 동영상 감상보다 전투를 중시하는 유저 입장에서는 당연히 반발이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보여주기와 전투 중시의 양쪽 입장을 저울질하던 파판 8이 도달한 결론은 바로 기존의 레벨업에 의한 성장이 아니라 수집에 의한 성장입니다.
기존 파판 시리즈, 아니 대부분의 JRPG의 성장은 간단합니다. 레벨업하면 됩니다. 물론 파판 6라면 마석 장착하고 레벨업, 7이라면 마테리아 장착하고 마테리아 레벨업 등 단순 레벨업은 아닙니다만 마석이나 마테리아나 거의 장비에 가까운 개념이니 별 문제없습니다.
하지만 파판 8은 다릅니다. 레벨업 해봤자 캐릭터의 스테이터스는 이전 작품들에 비하면 별로 오르지 않습니다. 레벨 100 찍어봤자 HP 5,000을 넘기는 캐릭터는 아무도 없고 힘 수치도 주인공인 스콜은 꼴랑 47까지 밖에 올라가지 않아서 초기 레벨에 비하면 30정도 밖에 오르지 않습니다(최대 255 - 다만 레벨업 시 능력치 +1을 해주는 어빌리티가 따로 있기는 합니다).
반면 파판 8의 성장 시스템인 정션을 이용하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디스크 1장에서부터 마법 케알가를 정션하면 HP + 2,200 이라는 어마어마한 수치가 가산되서 죽고 싶어도 죽을 수 없는 수준이 됩니다. 힘 수치는 ~가 계열 마법을 정션하는 것 만으로 +30 이 되어서 레벨 100 까지의 키우는 것의 수치를 한 방에 올려버립니다.
이러한 정션을 하기 위해서는 마법을 수집 해야 합니다.
마법을 수집하기 위해서는 드로우로 상대 마법을 빼앗던가 적 몬스터한테서 아이템을 수집 해야 합니다.
무기를 강화하기 위해서는 역시 적 몬스터한테서 아이템을 수집 해야 합니다.
카드를 수집 해도 아군을 강화할 수 있습니다.
레벨이라는 요소는 거의 필요 없으면서 적한테서 소재를 얻어서 아군을 강화하는 시스템...우리는 이와 비슷한 유명한 게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정말 뜬금없이 들릴 수도 있지만
저는 파이널 판타지 8의 성장 시스템이 몬스터 헌터와 닮아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수집에 의한 성장을 위해 파이널 판타지 8이 선택한 것이 바로 마법의 개념 변화와 레벨 연동제입니다.
파판 8 의 마법은 일반적인 이미지와 달리 공격용이 아닙니다. 파판 8 에는 무기는 있어도 방어구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마법이 다른 시리즈의 방어구, 액세서리에 해당하는 개념이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이런 시스템을 정당화하기 위해 '마녀'라는 개념을 스토리의 중심축에 놓습니다. 왜 갑자기 마녀 이야기가 나오는가 하면
파이널 판타지 8의 세계관에서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존재는 마녀뿐입니다.
그럼 스콜이나 갈바디아 병사들이 사용하는 마법은 무엇인가? 그 해답은 게임 시작하자마자 튀어나옵니다.
일반인이 배틀 등에서 사용하는 마법은 정확하게는 유사마법(원문은 疑似-의사 이지만 유사라는 단어가 더 익숙하니 유사라고 적습니다)이라고 부른다. 마법 연구의 제1인자 오다인 박사가 마법의 메카니즘을 연구해 만들어낸 에너지(에네르기) 콘트롤의 기술이다. 훈련 여부에 따라 누구라도 (마법을) 사용할 수 있게 되지만 일반인 레벨에서는 훈련을 한 사람들(즉, 군인)이라도 통상 병기의 위력을 넘기는 것은 힘들다.
스콜이 G.F 케차크아톨과 시바를 얻는 개인 PC에서 볼 수 있는 정보입니다. 마녀를 제외한 인물들이 사용하는 마법은 오다인 박사가 마녀의 힘을 연구해 이론을 정립한 유사 마법 입니다. 하지만 일반인(군인 포함)이 아무리 수련을 해도 일반 병기를 뛰어넘는 화력은 내기 힘들다고 게임 텍스트에서 못박고 있습니다.
...문제는 이 문장이 단순 설정이 아니라 게임 시스템에 진짜로 반영되었다는 점입니다. 실제로 직접 마법을 사용해보면 다른 시리즈(멀리 갈 것 없이 파판 7이나 파판 9과 비교해봐도)에 비해 위력이 정말 약합니다. 게임하면서 갈바디아 병이 사용하는 마법에 맞아도 웃음밖에 안나오는 위력인 이유는 다 이 설정 때문입니다.
그럼 이 약한 마법을 왜 다른 사람들은 정션을 하지 않고 공격용으로 사용하고 있을까요? 그것 역시 게임 시작하자마자 정보를 알려줍니다.
G.F
자율 에너지 체.
유사 마법과 조합하는 것에 의해 막대한 에너지를 콘트롤 가능하게 해준다.
기억의 손실 등의 부작용이 알려져 있지만 인과관계의 증명이 행해지지 않았다.
시드의 전투 방법의 장점은 고도로 훈련된 '유사 마법'의 사용에 있다.
바람 가든에서는 유사 마법과 G.F의 조합에 관한 연구가 진척되어 있어서 다른 국가의 병사나 학생들이 익힌 '유사 마법'을 이용한 전투보다 훨씬 높은 레벨을 자랑한다.
G.F에 의한 정션은 기억 장해라는 부작용의 우려가 있지만 바람 가든에서는 그러한 소문을 근거없는 헛소문으로 치부하며(게임 진행 중 바람 가든 교사가 하는 말입니다) G.F에 의한 정션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셀피가 있던 트라비아 가든, 어바인이 있던 갈바디아 가든에서는 G.F에 의한 정션은 사용하고 있지 않아서 어바인은 과거 고아원 시절의 추억을 온전히 가지고 있었던 것이죠(셀피는 어린 시절 야생에서 잡았던 G.F를 정션했던 경험이 있었던지라 역시 기억장해).
이런 설정을 통해 파판 8은 마법의 위력이 낮은 것, 마법을 장비하는 이유, 적이 정션을 하지 않는 이유, 스콜 일행이 게임 주인공 답게 특별한 존재(전세계에서 유일하게 마법 정션을 이용하는 집단)라는 부분을 모두 해결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반면 마법과 다르게 물리 공격은 위력이 장난이 아닙니다. 파판 8 의 대미지 계산식에서 물리 공격은 힘 수치의 제곱으로 처리가 되기 때문에 힘 수치가 오르면 오를 수록 대미지가 팍팍 증가합니다. 유사 마법이란 설정을 충실히 반영한 시스템 상 마법을 공격용으로 직접 사용하는 것보다 정션으로 마법을 장비해서 물리 공격을 때리는게 훨씬 대미지 효율이 좋기 때문에 파판 8의 마법은 공격용이 아닌 우리편의 스테이터스를 증가시켜 주는 장비 - 즉 캐릭터의 성장과 관련되게 되었습니다.
마법이 공격이 아닌 장비의 개념이 되었으므로 남은 문제는 이것의 수집 방법입니다. 파판 8 발매 전 대대적으로 홍보했던 드로우 시스템이 바로 대표적인 마법 수집 방법 중 하나죠. 하지만 문제는
드로우는 게임 시작하자마자 있는 가장 기초 어빌리티입니다.
어느 게임이건 초기 어빌리티를 끝까지 사용하면 당연히 효용이 떨어집니다. 드로우도 마찬가지로 초반에 필요한 마법을 얻기 위해서 쓸모가 있을지 몰라도 이제 정션을 위한 마법을 모으기 위해 사용하기에는 역부족입니다. 정션을 위한 마법을 대량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G.F를 통해 익힐 수 있는 마법 정제 어빌리티가 필요합니다.
마법 정제 어빌리티는 상점에서 구입할 수 있는 물건, 또는 적에게서 얻을 수 있는 아이템을 이용해 마법을 대량으로 생산 가능한 어빌리티입니다. 그리고 상점과 적이라는 이 두 가지 입수 루트의 차이가 일반 유저와 전투 중시 유저를 구분하기 위한 기준이 됩니다.
파판 8 의 돈은 전투로 얻는 것이 아니라 좀 걷다 보면 알아서 시드 급료가 들어와서 차곡차곡 모입니다. 즉, 전투를 하지 않고도 상점에서 물건을 구입해서 캐릭터를 강화할 수 있다는 뜻이지요. 하지만 상점에서 살 수 있는 물건은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성장폭이 적습니다(HP + 2,200, 힘 + 30, 마력 + 34 정도).
반면 적에게서 소재를 얻으면 이보다 훨씬 큰 수치로 스테이터스를 강화할 수 있게 됩니다. 하지만 적에게서 쉽게 소재를 얻어서 강화할 수 있다면 일반 플레이어도 잠깐 전투해서 소재를 모으면 되므로 전투 중시 유저들에게 득이 되는 부분이 없습니다.
여기서 레벨 연동제가 등장합니다.
파판 8 의 적들은 레벨이 높아질 수록 하위 레벨에서는 내놓지 않던 아이템을 내놓기 시작하고 여기서 레벨이 더 올라가면 아이템을 6 ~ 8개씩 뭉터기로 뱉어내기 시작합니다. 레벨이 올라갈 수록 마법을 수집하는 속도 역시 빨라진다는 뜻이지요. 적의 아이템 테이블은 레벨 10 단위로 변화하기 때문에 몬스터 헌터와 비교해보면 평균 레벨 10대 → 하위, 평균 레벨 20대 → 상위, 평균 레벨 30대 → G급 의 개념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즉,
전투를 최대한 적게 하며 스토리를 진행해 동영상을 감상하는 유저 → 레벨이 낮아서 상점에서 얻는 마법 수준밖에 성장할 수 없지만 적도 약하므로 진행에 문제 없음 - 몬스터 헌터에서 하위 몬스터와 스토리 보스만 잡아 엔딩 스탭롤 보고 끝내는 유저(근데 이런 유저가 있을까...)
전투를 많이 하는 유저 → 강해진 적들에게서 고급 마법, 무기 강화의 소재를 긁어낼 수 있으므로 큰 폭으로 성장 가능 - 몬스터 헌터에서 상위, G급에 도전해 더욱 강력해진 몬스터들을 잡아 자신의 장비를 더욱 강화시키는 유저
로 나뉘게 됩니다. 다만 여기서 문제는 우리 레벨이 오르면 적도 강해지니 큰 폭으로 성장해봤자 성장이 체감이 안되지 않느냐 라는 부분입니다.
하지만 위에서 언급했듯이 이 게임의 대미지 공식에는 힘의 제곱이 들어갑니다. 덕분에 적이 강해지는 수치보다 좋은 마법을 정션해서 우리가 강해지는 속도가 훨씬 빠릅니다. 특히 특수기라는 희대의 공격 기술 덕택에 힘 수치가 올라가면 올라갈 수록 아군이 뽑는 최대 대미지는 기하급수적으로 올라갑니다.
게다가 스토리 보스들은 레벨 제한이 걸려 있기 때문에 일정 이상 레벨이 올라가지 않아서 강화된 아군의 평타 1~2방에 작살나는 경우도 흔합니다. 강해진 능력을 체감하기에 충분하죠.
일반 적들의 경우는 레벨 제한이 없으므로 레벨 100 까지 올라가 무시무시하게 강해지는 경우가 생기지만 정말로 위협이 되는 몬스터들(몰볼, 루블름 드래곤, 일부러 찾아가서 싸워야 하는 보스 G.F들, 알테마/오메가 웨폰 등)은 스토리 동선 상에서는 만날 일이 없습니다. 스토리 진행을 포기하고 옆길로 새야 만날 수 있는 놈들이지요. 스토리 라인 따라가는 일반 유저는 이런 위협적인 몬스터들과 만날 일이 거의 없고 전투 중시하는 유저들은 바로 이런 몬스터들을 찾아 헤매는 유저들이므로 레벨을 너무 올려서 스토리 진행이 불가능해지는 일은 정션을 전혀 하지 않고 플레이하면서 옆길로 새지 않는 이상은 일어나기 힘든 일입니다.
길게 줄줄 썼지만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레벨 연동제는
파판 8의 성장 시스템은 수집에 의한 성장이다 → 일반 유저와 전투 중시 유저의 차이를 내기 위해 레벨 연동제로 적군의 레벨이 아군에 맞춰 변해 수집할 수 있는 소재의 질이 달라져서 플레이 스타일에 따라 성장의 폭이 달라진다.
- 전투는 안하고 동영상을 주로 감상하는 유저들이 클리어하기 쉽도록 적의 레벨이 아군에 맞춰 낮아지지만 좋은 소재를 내놓지 않아서 우리편의 성장폭은 적음
- 전투를 열심히 하는 유저들이 더욱 빠르게 강해질 수 있도록 아군 레벨에 맞춰 강해진 적들이 좋은 소재를 대량으로 내놓게 되서 더욱 강해짐
라는 식으로 양쪽 유저층을 다 잡기 위한 스퀘어의 노림수가 아니었나 하는게 제 생각입니다.
실제 게임 플레이라면 굳이 저레벨 맞춰서 플레이하는 것 보다는 아이템 테이블이 바뀌는 평균 레벨 30대까지는 올리는게 저레벨로 진행하는 것보다 훨씬 쾌적합니다. 실제로 레벨 30 이상 노가다를 하면 디스크 1장에서 캐릭터 최강 무기를 얻을 수 있고 디스크 2장에서 자폭을 얻어서 보스를 한 방에 날려버릴 수 있으며 디스크 3장쯤 들어가면 적들이 중요 마법과 어빌리티의 재료가 되는 아이템을 마구 뱉어내게 되지요. 디스크 1장에서 레벨 30 이상 올리는거나 디스크 2장에서 자폭 얻는 것은 좀 특이한 케이스이긴 합니다만 달의 눈물 이벤트 일어날 때까지 레벨 30을 이루지 못하면 강력한 후반 마법들을 얻기 힘들어지게 됩니다.
또한 적들의 레벨 연동은 아군 전체의 평균 레벨이 아니라 현재 전투를 하고 있는 파티의 평균 레벨을 따라갑니다. 즉, 게임을 가장 쉽게 플레이하는 방법은 재료를 모으기 위해 노가다하는 채집 멤버 둘 + 스콜이 평균 레벨 30 이상을 유지해서 소재를 모으고 전투를 해야할 때에는 초기 레벨을 유지한 나머지 멤버들 중 둘 + 스콜로 싸워서 소재 수집에 의한 강화 + 적들의 평균 레벨 낮추기를 동시에 달성해 진행하는 것입니다. 레벨 연동제는 이렇게 아군의 강화와 적군의 약화를 동시에 이루는 식으로도 사용이 가능합니다.
개인적으로 이 시스템에 불편을 느낀 적이 없고 레벨 노가다를 하면 그에 따른 보상이 워낙 확실하게 주어지는 시스템이기에 옹호하는 말만 쭉 늘여놨습니다만 세간의 평가는 굉장히 나쁜 편입니다. 왜 이렇게까지 평가가 나빠졌나 생각해보면 아마도
소재를 긁어 모아 마법 정제로 마법을 대량으로 만드는 파판 8 특유의 성장 방법
...이 당시 기준으로는 상당히 생소한데다가 시스템이 제대로 알려지지 않아서 그런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왜 일반 유저들이 마법 정제를 잘 사용하지 않게 되었나...에 대한 생각은 다음 기회에 적도록 하겠습니다. 한 마디로 요약하면 1주차 플레이에서는 이런 성장 메카니즘을 눈치채기 매우 어려울 정도로 스퀘어가 게임 속 설명을 이상하게 했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