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약함에 대해서
불평등한 가치관이나 불균형한 힘과 책임 같은 우리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어떤 방식이 되었든 사람들에게 정보를 전달해야 해요. 교육이든 언론이든 인터넷이든 말이죠. 그런데 불합리한 교육을 해결하지 않고는 조금 어려울지도 모르겠어요. 사람들을 설득할 때 합리성이 없으면 어려우니까요. 그래서 오늘은 불합리한 교육이 무엇인지를 알기 위해
그것이 낳은 약함을 주제로 선정했습니다.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약함이란
사람의 약함은 크게 ‘타고난 약함’과 ‘만들어진 약함’으로 구분하고 있습니다.
첫째, 타고난 약함은 보통 신체적 또는 정신적 결함을 의미합니다. 눈이 잘 안보이거나 공감능력이 떨어진다거나 말이죠. 여기서 죄의 약함이나 감정의 약함도 포함됩니다. 욕구나 욕망이나 감정은 기본적은 다들 가지고 태어나니까요. 이렇게 원래부터 가지고 태어난 약함을 타고난 약함이라
정의하겠습니다.
둘째, 만들어진 약함은 불합리한 교육으로 주입된 어떤 제약을 의미합니다. ‘무조건 반찬은 다 먹어야 해’, ‘무조건 학교는 가야 돼’, ‘무조건 공경을 받아야 해’ 같이 말이죠. 이 만들어진 약함은 내제된 제약에 어긋나는 것을
보게 되면 약해진 사람은 괴로움을 느끼게 됩니다. 그 괴로움에서 벗어나고자 불합리한 행동도 불사하게 되는데, 그때 문제가 발생하면 그걸 합리화하기 위해 자기합리화를 하게 됩니다. 이러한 일련의 흐름을 만드는 약함을 가리켜 만들어진
약함이라 정의하겠습니다.
편견과 트라우마
편견과 트라우마와 헷갈릴 수도 있으므로 정리하겠습니다.
첫째, 편견은 치우친 생각으로 만들어진 약함으로도 생성됩니다. 인종차별이나 성별차별이나 지역차별 따위는 이런 만들어진
약함이 낳은 편견이겠죠. 교육으로 만들어지든, 경험으로 일반화하여 만들어지든 말이죠. 하지만 모든 편견이 만들어진 약함으로 생기는 건 아닙니다. 그저 몰라서 생긴 편견도 있거든요. 이 몰라서 생긴 편견은 생각보다 쉽게 바꿀 수 있어요. ‘아, 내가 몰랐었네’하고 바꿀 수 있지요. 반면 만들어진 약함으로 생긴 편견은 괴롭기 때문에 바꾸기가 어려워요. ‘내가 이상한 게 아니야! 네가 이상한 거야!’ 라며 남 탓을 하거나 ‘어쨌든 내 잘못은 아니야.’ 라면서 합리화를 합니다.
둘째, 트라우마는 만들어진 약함과 비슷하게 괴로움을 느낍니다. 어떤 안 좋은 사건을 겪은 후 그 사건을 연상시키는
것을 보게 되면 괴로움을 느끼게 되는 거죠. 하지만 이건 대체로 괴로운 원인을 알 수 있어서 대처는 할 수 있게 돼요. 어렵지만요. 반면 만들어진 약함은 타고난 약함으로 여기거나 그 약함을 올바르다고 여기기 때문에 바꿀 필요성조차도
몰라요. 그래서 이 만들어진 약함이란 짐을 평생을 걸쳐 짊어지고
가게 되죠.
약하게 만든 이유
약하게 만든 이유를 설명하고 넘어갈게요.
왜 사람들을 약하게 만들어왔던 걸까요? 그건 간단해요. 약한 사람이 다루기 쉽거든요. 어떤 형태로든 제약을 걸어서 약하게 만들어야 다루기
쉽기 때문에 그 옛날부터 지배계층이나 어른들이 백성들이나 아이들을 약하게 만들어왔어요. 도덕이란 이름으로 사람들을 약하게 만들어 왕과 양반들에게 충성하게 만들고 어른들을 공경하게
만든 겁니다. 특별한 논리는 없어요. 백성들이 지배계층에 충성해야 될 이유 따윈 없습니다. 그러니까 도덕으로 약하게 만들거나 힘으로 찍어 눌러왔던
거죠. 논리가 없으니까요. 어른을 공경해야 될 이유가 없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분명 어른들은 사회를 보호하고 이끌어가기 때문에
공경하는 건 어쩌면 타당할지도 몰라요. 하지만 모든 어른이 그런 건 아니잖아요. 지독한 범죄자도 어른이라고 공경하라고 말할 건가요? 그러니 마냥 어른이면 다 공경하라고 하기 보다는 훌륭한 어른, 제 기준에서 바라보면 사회적 역할에 충실한 어른들을 공경하라고 말할 거예요. 역할존중이죠.
이렇게 불합리한 교육으로 약해진 아이들은 어른이
되어서 다시 한번 그 약함을 물려주게 됩니다. 이렇게 약함의 굴레는 이어져왔어요. 뭐 입장을 바꿔보면 효율적이고 편리한 방법이라는 건 부정하지 않겠어요. 일일이 설명하지 않아도 되니 효율적이고, 윽박지르면서 ‘내가 무조건 옳으니까 너는 따라야 돼’ 라고 말하니 편하지요. 죄에 강해지게 만드는 것도 마찬가지예요. 죄를 짓지 말아야 될 이유를 설명하기보다 도덕에 약하게 만들어 죄를 짓는 것만 생각해도
괴로움을 느끼게 만드는 게 관리하는 입장에선 편하고 좋죠.
하지만 이건 앞서 설명한 것처럼 그냥 약하게 만든
것에 불과해요. 옳고 그름을 떠나서 약한 인간을 양성하게 된단 이야기입니다. 옛날이라면 괜찮았을지도 몰라요. 지배계층이 권력을 잡고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지금은 아니에요. 모든 국민들에게 권력이 주어졌잖아요? 한 명이라도 더 약해지지 않고 올바른 판단을 내려야
되겠죠. 무엇보다 지금은 고립된 세상이 아니에요. 우리끼리 서로를 약하게 만드는 건 세계와 경쟁할
때 불리한 요소로 작용할 수 밖에 없단 말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인구수가 많은 것도 아닌 나라에서 약한 사람들이 늘어나면 세계와 경쟁할 때 어떻게 되겠어요. 어떤 이유, 어떤 목적이든 이제 그만해야겠지요. 편하자고 우리나라 사람을 약하게 만들면 결국 손해
보는 건 우리나라 사람이니까요.
뭐 이외에도 다양하죠. 믿지 않으면 지옥, 종교가 왜 사람들을 약하게 만들었을까요? 그야 다루기 쉬우니까 그랬겠죠. 벌벌 떨면서 신을 모시게 만드는 게 논리적으로 설명하는
것보다 훨씬 효율적이고 편하죠. 뭐 애초에 논리가 없으니까 어쩔 수 없는 것이기도 하지만요. 지역차별, 지역사람들을 약하게 만든 것도 마찬가지죠. 정치인들 입장에서 다루기 쉬워지니까. 논리적으로 생각하기 전에 모든 걸 다른 지역 탓으로 돌리며 차별하게 만들면 서로 싸우느라 옳고 그름을 판단하지 못하게 되죠. 포탈사이트 뉴스 댓글 보다가 슬퍼서 눈물이 났어요. 거기엔 증오, 맹목적인 증오밖에 없었어요. 누군가를 지지하거나 비판할 때엔 그에 맞는 타당한
이유가 있어야 되는데 그게 없어요. 무조건 좋고 무조건 싫다고 해요. 예전이라면 그냥 무시했을 테지만 모든 현상을 받아드린 지금 그 댓글 하나하나가 우리나라 사람들의 생각으로 여겨지는 바람에 슬퍼졌네요.
누군가는 어리석다고 할 그 모습, 어리석은 게 아니에요. 약해졌으니까 그런 거예요.
물려받은 감정
잠시 부끄러운 이야기를 할게요. 이건 제가 아직 무엇이 옳고 그른지 분간하기 어려웠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사람들이 많은 거리에는 종종 종교를 권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특히 불신지옥이라고 말하며 믿음을 강요하는 사람들이 있을 때가 있어요. 당시부터 이야기를 나눠봐야 피곤한 건 나뿐이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굳이 관련되려고 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볼 때마다 그냥 지나치곤 했지요. 그런데 어느 날 초등학교 저학년 정도 되는 아이가 붙잡혀 지옥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있는 것을 보고 열이 뻗쳐서 그 주변을 맴돌았습니다. 순진무구한 얼굴 사이에 얼핏 드러나 보이는 난처함. 말하는 사람이 나이든 사람이다 보니 싫다고도 말
못하고 묵묵히 들어주고 있는 것 같았죠. 이때 정말 많이 갈등했어요. 마음 같아서는 아이에게 공포를 심어주지 말라고 쏴 붙이면서 아이 손을 잡고 자리를 떠나고 싶었어요. 그런데 나이든 사람이란 말이죠. 그냥 갈까 말까를 몇 번이고 고민하다가 주제 넘는
참견이라고 자기합리화 하면서 떠난, 매우 후회하는 기억이 있어요. 젠장
약해져서 공포에 덜덜 떠는 건 알겠어요. 그런데 최소한 물려주지는 말아야 할 거 아니겠어요? 그 어떤 것도 그 사람의 것이 되어야 해요. 누군가의 감정을 물려주는 건 그만둬야 합니다. 사랑도 증오도 마찬가지에요. 아이들을 가르칠 때 조국을 사랑하라 말하죠. 그런데 그렇게 가르치는 건 그냥 사랑을 물려주는
것에 불과해요.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해서 자신의 나라를 사랑해야죠. 국민에게 권력이 주어진 지금, 나라는 모든 국민을 의미합니다. 나라를 사랑하라는 건 결국 스스로를 사랑하는 것과 다를 바 없어요. 이런 식으로 논리적으로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해서
사랑하게끔 해야 하는데 그냥 자기나라니까 사랑하라고 해요. 그건 잘못된 교육이에요. 사랑해야 될 이유를 논리적으로 교육받은 게 아니니까 맹목적인 애국이나 이유를 몰라서 저지르는 매국이 존재할 수 있는 거죠.
증오도 마찬가지에요. 미리 말해둘게요. 저는 나라 팔아먹은 사람들이 싫어요. 그리고 그들이 처벌받아야 된다고 생각해요. 그들이 처벌받지 않으면 너나 할 것 없이 나라를
팔아먹을 테니 사회질서가 흔들리겠죠. 하지만 그런 증오를 물려주는 건 별개예요. ‘공산당이 싫어요’ 라고 말하는 아이나 ‘친일파가 싫어요’ 라고 말하는 아이나 슬퍼 보이긴 마찬가지예요. 그리고 더 슬픈 건 그런 걸 보고 잘했다며 칭찬하는 어른들이에요. 증오를 물려받고 칭찬받은 아이들은 그 증오를 평생 떠안고 살아가겠죠. 그리고 맹목적으로 증오할거에요. 공산당과 비슷한 것만 봐도 진저리 치며 괴로워하거나
일본과 친하게 지내는 사람만 봐도 혐오하겠죠. 약해진단 말이에요.
나는 아이들이 커서 스스로 판단해서 무언가를 증오한다면
그래도 이해하겠어요. 성장한 다음 나라 팔아먹은 매국노들을 처벌한다고 말한다면 박수를 치면서 응원할 거예요. 하지만 물려받는 건 아니잖아요. 아이들이 증오를 물려받아야 할 논리적인 이유가 있나요? 그냥 어른들이 했어야 할 일을 떠넘긴 것뿐 아닌가요? 아이들의 감정은 아이들의 것이에요. 사랑이나 증오나 공포 같은 감정들을 그만 좀 물려줬으면
좋겠어요. 그만 좀 약하게 만들었으면 좋겠어요. 감정을 물려주는 것도 아이를 자신의 2회차로 생각하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여성
여성들에 대한 진정한 억압이 무엇이었는지를 설명해볼게요.
요즘 여성들은 성별평등을 주장하며 탈코르셋이나 여성들의
수치심 교육을 많이 하고 있지요. 어떻게 해야 남성위주의 사회에서 벗어날 수 있는가, 어떤 것이 성희롱이고 성폭행인가 같이 말이죠. 그런데 사실 정말 여성들을 억압하는 건 그런 게 아니에요. 좀 더 끔찍한 거죠. 그래서 이 이야기는 어쩌면 여성분들이 받아드리기 어려울지도 모르겠어요. 그러니 미리 말해둘게요. 저는 여성을 사랑합니다. 그럼 시작해볼게요.
요즘 여성들은 수치심을 많이 느끼고 있죠. 사소한 것 하나하나에 수치심을 느껴요. 자신의 알몸을 보이는 것뿐만 아니라 남성의 알몸만
봐도 수치심을 느끼며 괴로워하죠. 남성이 몸에 스치기만 해도 수치심을 느껴서 괴로움을 느끼는 여성들도 있어요. 그래서 남성들은 지하철에 타면 손을 올리고 있지요. 배려하기 위해서든, 오해를 받지 않기 위해서든요. 그런데 이런 수치심은 타고난 것이 아니에요. 만들어진 수치심이에요.
언젠가 봇물이란 단어를 보고 수치심을 느껴 항의한
여성들을 비웃는 글을 본 적이 있어요. 그런 것도 모르고 화를 내냐며 비웃은 거죠. 하지만 이건 단순히 몰라서 그런 게 아니에요. 그냥 단순히 몰랐다면 수치심을 느낄 필요가 없지요. 궁금하면 검색부터 먼저 해보면 되는 문젭니다. 그런데 검색조차 하지 않고 수치심부터 느끼며 분노했던 건 만들어진 수치심에 약해져 있어서 그런 거예요. 이외에도 다양한 곳에서 사소한 것에 수치심을 느끼고
분노하는 여성들이 있지요. 그런 것은 전부 약해져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별일 아닌 것에 괴로움부터 느끼는 건 트라우마를 연상시켜요. 좋지 못한 사건으로 생긴 트라우마는 그 사건과 비슷한 것만 봐도 괴로워하죠. 마찬가지에요. 무언가에 약해진 사람은 비슷한 것만 봐도 괴로워하는
거예요.
수치심이 만들어진 것이라는 이야기를 받아드리기 어려울지도
모르겠어요. 그래서 객관적인 사실만 나열해볼게요.
첫째, 성별을 바꿔봅시다. 남성들은 자신의 알몸을 보이는데 그렇게 큰 수치심을 느끼진 않아요. 그냥 좀 부끄러워하고 말뿐이죠. 더구나 여성들의 알몸을 본다고 수치심을 느끼진 않습니다. 수치심을 느낄까 걱정돼서 눈을 피할 뿐이죠. 그리고 스친다고 수치심도 느끼진 않아요. 뭐 대놓고 만지작거리면 느끼겠지만 수치심보다는 분노와
짜증이 먼저 일어나겠죠.
둘째, 과거로 가봅시다. 그 옛날 사소한 수치심은 없었겠죠. 정말인지는 모르겠는데 스키타이였나, 그런 민족은 보호자와 함께 남성을 사냥해서 사냥한 남성과 결혼했다던 이야기도 있다고 들었어요. 뭐 모계사회였던 시절도 있었던 걸 보면 현대와 같은
수치심은 없었겠죠. 현대에도 비슷한 건 볼 수 있어요. 요즘도 그런지는 모르겠는데, 고립된 지역의 원주민들은 가슴을 내놓고 다녀도 별다른 수치심을 느끼지 않지요. 당당하게 아기 젖을 먹여요.
이하의 사실로 하여금 수치심은 만들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현대의 수치심은 대부분 만들어진 겁니다. 남성 알몸 본다고 수치심 느끼는 것 자체가 이상한 거예요. 그런 이상함이 바바리맨 같은 이상한 변태를 만든 거죠. 때론 수치심을 느끼지 않은 여성이 역으로 놀리기도 하지만, 바바리맨의 존재자체가 남성의 알몸만 봐도 수치심을
느끼는 것이 보통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게 됩니다. 그렇다면 수치심은 왜 만들어진 걸까요? 거기서부터 여성들의 진정한 억압을 알 수 있게 됩니다.
수치심이 만들어진 이유, 제 생각을 말해볼게요. 끔찍할지도 몰라요. 그건 남성이 여성을 관리하기 위해서 만든 약함입니다. 원래부터 여성이 타고난 수치심이 아니에요. 다른 남자에게 한눈 팔지 말고 조신하고 얌전하게
만들기 위해 약하게 만든 겁니다. 지배계층이 백성들을 약하게 만들어 충성하게 만든 것이나 어른들이 아이들을 약하게 만들어 공경하게 만든 것과 같은 거예요.
자 보세요, 왜 다른 남성의 알몸만 봐도 수치심을 느끼게 했는가, 그러면 결혼한 남성 외의 남성에겐 접근하기 어려울
거 아니에요? 그러니까 그런 거죠. 왜 스치기만 해도 수치심을 느끼게 했는가, 정절을 지키게 만들기 위해서죠. 왜 정절 높은 여인은 두 지아비를 섬길 수 없다고
하잖아요? 이거 되게 끔찍한 거예요. 그러니 은장도를 들고 자결했던 거죠. 약해졌으니까요.
이제 알거라 생각해요. 우리 사회에서 우리 여성들이 가지고 있는 수치심들은
대부분 남성들이 여성들의 정절을 지키게 만들기 위해 만들어진 약함입니다. 남성들이 만든 약함을 여성들의 타고난 약함인 것 마냥 취급해왔던 거지요. 슬픈 건 그 만들어진 약함을 성별평등이란 이유로
더 약하게 만들고 있다는 거예요. 21세기에 새로운 정절교육이라니-
그렇다고 수치심을 완전 버리라고 할 수는 없어요. 사회전체가 만들어진 수치심에 길들여져 있기 때문에
어느 특정 여성이 수치심을 버린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에요. 어떤 여성이 만들어진 수치심을 버리고 남성처럼 행동했다고 가정해보죠. 남성이 터치를 해도 웃고 넘기다 보면 만만하게 보여질지도
몰라요. ‘아 이 여자는 만져도
되는 여자구나’ 라고 생각 될 수도 있지요. 그래서 함부로 수치심을 버리라고 할 수는 없어요.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어느 정도는 필요해요.
하지만 괴로움을 느끼는 건 별개의 문제예요. 왜 괴로움을 느껴야 하나요. 남성 알몸 본다고 괴로움 따윈 느낄 필요가 없습니다. 사고는 웃고 넘어가고 혹시 그런 변태가 있으면 오히려
비웃어주세요. 그리고 스친다고 괴로움을 느낄 필요는 없어요. 냉정하게 관찰해서 성희롱인지 판단한 다음 행동해야겠지요. 도움을 청하는 손수 격퇴를 하든 간에요.
이게 진짜 여성들을 억압해왔던 거예요. 이것이 진짜 코르셋이라고요. 외면 같은 게 아니라 여성의 내면을 억압하던 게
바로 이런 거예요. 도대체 무엇이 진짜 억압인가요? 외간남자에게 함부로 접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 남성들이 만든 수치심이 억압인가요, 아니면 여성 스스로 자존감을 키우고 이성의 관심을 받기 위해 외모를 꾸몄던 것이 억압인가요? 도대체 왜 외모를 꾸미는 게 코르셋인지 모르겠어요. 외모를 꾸미는 게 코르셋이면 남성은 왜 꾸미고 있나요? 이성에게 좀 더 매력적으로 보이고 싶은 것은 억압이
아니라 타고난 본능이에요. 여성의 미모에 남성의 취향이 반영되고 있다는 건은 부정하지 않겠어요. 그거 때문에 탈코르셋을 이야기하는 거겠죠. 하지만 그건 남성도 마찬가지 아닌가요? 남성의 미모에 여성의 취향이 없다고 확답할 수 있나요? 특히나 성별평등이 도래한 지금, 남성의 미모는 여성의 취향에 맞게 변하고 있어요. 지금 인기 있는 남성 연예인을 참고하여 여성들의
취향에 맞는 외모를 가꾸려고 하고 있죠. 물론 여성이 좀 더 많이 노력한다는 건 맞습니다. 하지만 노력의 크기는 달라도 목적은 같아요. 좋아하는 사람에게 관심을 끌기 위해 가꾸는 거지, 남성들이 주입한 코르셋이 아니라고요. 진짜 여성의 코르셋은 외면이 아니라 내면이에요.
약해진 수치심을 타고난 것으로 생각하여 억압으로
받아드린 게 아니라 평등의 일부로 받아드리니 ‘여성은 수치심을 느껴도 되고, 남성은 수치심을 느끼지 말아야 한다’ 같은 모순이 발생하죠. 불합리한 교육은 그 어떤 것도 불합리한 행동을 낳게 만듭니다. 이외 다양한 것들을 관찰해보세요. 불합리한 건 전부 약해져 있기 때문에 발생했던 겁니다. 남성을 위한 게임에서 왜 여성주인공은 없느냐고 불평하는
걸 봤어요. 도대체 왜, 모든 것에 여성이 포함되지 않으면 불평등하다고 느끼게
만든 건가요? 남성들은 그러지 않잖아요. 여성을 위한 게임에서 남성주인공이 없느냐고 불평하진
않는다고요. 평등이란 도덕으로 여성들을 약하게 만드는 건 그만해주세요. 사소한 것 하나하나에 전부 불평등하다고 느끼게 되는
건 너무 가엾잖아요. 그거 되게 괴롭거든요. 정말 우리 시대의 여성은 남성이 만든 수치심과 여성이 만든 평등에 너무 괴로워하고 있어 보여서 안타까워요.
그러니 남성들은 봇물 같은 걸 보고 비웃지만 말고
어느 정도는 배려를 할 생각을 해야 해요. 트라우마로 약해진 사람을 비웃지는 않잖아요? 가여워할 뿐이죠.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는 성별관계 없이 모두 약해져 있어요. 여성의 배려를 받기 위해서는 남성도 배려를 해야겠지요. 그리고 여성들은 자신의 약함을 직시하고 더 이상 약함을 나누거나 물려주지는 말아야겠지요. 약해지면 괴로우니까요.
무슨 년생이란 책이 여성들 사이에서 유행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그리고 남성들은 그걸 보고 비웃지요. 내용 자체가 극단적이고 요즘 시대의 여성이 겪기
힘든데도 공감하고 있는 게 말이 되지 않는다고 말이죠. 하지만 그건 비웃고 끝날 게 아니에요. 여성들이 공감한다는 현상 자체가 있잖아요. 왜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지 알아봐야죠. 물론 이건 앞서 설명한 것처럼 약해졌기 때문에 공감하는 겁니다. 우리는 약함을 물려받았어요. 여성들은 어른들에게 여성들의 부당함을 계속 듣고 자라났겠죠. 부당함에 대해 특별히 논리적으로 교육받은 게 아니라
부당함을 당한 여성들의 한탄을 듣고 자라났어요. 불합리한 교육을 받았다는 거예요. 그러니 약해졌지요. 사랑이나 증오나 공포를 물려받은 것처럼 부당함을 물려받았기 때문에 직접 겪지 않은 이야기도 공감할 수 있는 거예요. 그리고 그 책은 그러한 물려받은 부당함을 긍정해줬어요. 불합리 했기 때문에 여성 스스로도 올바른지 아닌지
헷갈리고 있을 때에 ‘너는 잘못된 게 아니야’, 라고 말해주는 책이 어찌 인기를 끌지 않을 수가 있겠어요? 자기합리화 할 필요도 없이 대신 합리화해주고 있는 책이라는 겁니다.
여성의 약함과 약하게 만든 이유와 물려받은 감정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앞서 설명한 것과 비슷하지요? 불합리한 교육으로 주입된 만들어진 수치심이란 약함과 평등이란 강박관념, 그걸 만든 이유는 여성을 편하게 다루기 위해서, 물려받은 부당함. 제가 써놓고도 슬프네요. ….
다른 사람들도 비슷해요. 약함을 가지게 된 것도, 약하게 만든 이유도 물려받은 감정도, 결국 불합리한 교육의 희생자들이죠. 그리고 그걸 알지 못하고 마치 올바른 것을 전수해주는
거 마냥 똑같이 아이들에게 물려주고 있어요. 수치심도 허세도 사랑도 증오도 공포도 전부 물려주고 있지요. 그 굴레, 이제는 끊을 때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시작은 교육이든 언론이든 인터넷이든 정보전달매체가 변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우리나라의 문화를 사랑해요. 하지만 악습마저 사랑하는 건 아니에요. 바꿀 때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불필요한 것은 없애고 우리의 손으로 새로운 문화를 만들면 되지 않을까 생각해요. 우리가 물려받은 약함은 우리 시대에, 우리 손으로 끝냅시다.
사실 다른 예시도 작성해볼까 했는데 많이 길어졌네요. 다른 건 다음에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이것만 추가로 작성하고 끝내죠.
욕구나 욕망이나 감정을 제어하지 못하여 죄를 저지르는
악인은 악한 게 아니라 약한 것입니다만, 스스로 원해서 저지르는 사람도 있어요. 절제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고 자유를 위해 제멋대로 하는 거죠. 그리고 그걸 강하다고 여기고 있어요. 그런데 그건 강한 게 아니에요. 개체는 강할지도 몰라요. 하지만 종으로선 약해요. 악은 죄를 저질러 질서를 파괴하는 힘, 한마디로 종의 자멸을 이끌어내는 존재들이라는 거예요. 그러니 종으로선 약한 거라는 거예요. 제어하지 못해도 약하고 제어할 필요가 없어서 저지른
것도 결국 약한 거예요. 단지 개체로 약한지, 종으로 약한지의 차이일 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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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이면 4월 1일이니 새로운 결심을 한지 1년이 되겠네요. 아, 그간 개인적인 괴로움을 위해 많은 시간을 사용하다 보니 생각보다 발전이 더뎠네요. 그래서 조금 슬퍼요. 그래도 지금까지 해온 생각은 어느 정도 정리되었으니
별일 없으면 올해 안에 최소한 불평등한 가치관, 불균형한 힘과 책임, 불합리한 교육, 그리고 자아는 완성해볼 예정입니다. 중간중간 내키는 대로 쓰는 주제들로 더 늘어날 거 같지만요.
일단 다음 편은 인간교육을 쓸 예정입니다.
저는 삼권을 이렇게 생각해요. 질서를 만들고 질서를 유지하고 만들어지고 유지된
질서로 나라를 운영하고 있지요. 이들이야 말로 질서를 지켜야 함은 당연한데, 때때로 질서를 지키지 않고 파괴하는 분들을 보게 되면 슬프네요.
그 동안 개인적인 괴로움 때문에 못해온 것들을 해보려고
하는데, 좀처럼 용기가 나질 않아요.
그럼 살아있으면 또 만납시다.
레토릭에 단어와 술어를 끼워 맞추면 재미있죠.
대구도 반복도 매번 재미있고 새로운 반짝임이 보이는 거 같지만
전부 내 머릿속에서의 화학 작용일 뿐이고 타인이 읽을 때의 목 넘김은 전혀 달라요..
단어를 제대로 이해하고 사용하는 게 아니니까 전혀 와닿게도 못하거니와 질질 길어지기만 하졍.
그래서 댓글이 안달리는거구여.
[불평등한 가치관이나 불균형한 힘과 책임 같은 우리의 문제]
는 시작하는 말인데도 이미 술어가 어떻게 풀어주지 못할 정도로 지저분하죠.
[사람의 약함은 ~구분하고 있습니다]
같은 아무 꾸밈없는 문장부터 주술 호응이 틀려있으면 제 경우 더 읽어볼 생각도 안들구여.
어휘는 문맥에 관계없이 그 자체로 정확해야 합니다.
해결과 규명 방식이 엉망인걸 지적하기 이전에 제시부터가 제대로 안되어있어요.
혼자 중얼거리는 꼴 이죠.
글 쓰는 거 되게 좋아하시는거같은데
가끔 메인에서 볼 때마다 너무 발전이 없으셔서 감상 조금 남기고 가요
땡기는대로 이것저것 써 보는 것도 좋지만
이래서야 완전히 마른땅 밟는 꼴이구 독서력을 더 높이는걸 추천드려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