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감상] 기생충
내용 누설이 있습니다.
현실직시, 그 외엔 아무것도 없다.
우선 영화에 큰 관심이 없는 사람의 감상임을 미리
이야기해둡니다. 잘 몰라요. 영화. 그래도 뭐, 이야기는 다 비슷하겠죠. 시작해보겠습니다.
최초 감상은 그냥 ‘재미있었다’ 입니다. 양극화 현상을 어떻게 풀어나갈지 기대했습니다. 라고 말하면 거짓말입니다. 사실 어떤 영환지 자세히 모르고 봤어요. 그냥 지금까지 결과를 냈던 감독의 작품이니 재미있을
거라 생각하고 봤죠. 그리고 실제로 재미있게 보았습니다.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전개기는 하지만 어딘가 인위적인 진행. 그러던 와중에 깜짝 놀라게 만들었던 지하실. 그리고 약간 황당한 결론까지. 많은 인위적 감각 속에 가장 황당했던 건 역시 살해. 자기 딸을 죽인 인간에게 감정이입 하여 살해하는
걸 보고 어처구니가 없었습니다. 사고와 행동의 우선순위가 바로잡힌 인간이라면 있을 수가 없는 행동입니다. 물론 무계획한 인간의 행동이니 그럴 수도 있을 거라 생각하지만, 딸과 아버지의 관계가 나빴던 것은 아니란 말이죠. 몰이해를 부르는 결론이었습니다. 부자의 순진함, 멍청함, 단순함, 친절함, 냉정함, 거리감. 빈자의 영악함, 교활함, 잔인함, 음흉함, 무계획, 무력함이 기억이 나네요.
두 번째 감상은 ‘감독의 의도가 무엇인가’ 입니다. 제가 요즘 기사 댓글을 보고 있는데, 기생충을 예시로 들어가며 노동자들을 자본가의 기생충에
빗대는 댓글들을 보았습니다. 음. 무엇이 감독의 의도였을까요? 사실 양극화 문제를 지적하는 영화치고는 부자에 굉장히
관대했습니다. 부자의 부도덕이 드러나는 장면이 없어요. 냄새로 양극화를 표현했다고 하지만, 사실 그건 빈부만 벗겨내면 자연스러운 모습입니다. 둘이 빈부격차가 없다는 가정하에 한 쪽이 불쾌한
모습을 하고 있으면 불쾌감을 느끼는 건 당연하겠죠. 그러므로 그건 부자의 부도덕이라 하기 어렵습니다. 그저 양극화를 표현하는 장치에 불과해요.
뭐가 목적이었을까…? 많은 사람들의 감상을 읽어보았습니다. 어느 사람은 이념에 치우쳐 평가절하하는 사람. 어느 사람은 도덕에 치우쳐 평가절하하는 사람. 어느 사람은 빈자를 탓하기 위한 용도로 쓰는 사람. 어느 사람은 부자가 불쌍하다는 사람. 어느 사람은 빈자가 불쌍하다는 사람. 어느 사람은 복선과 장치에 감탄하는 사람(주로 긍정적인 평가에 많았음). 어느 사람은 철학적 요소로 심도 있게 분석해보는
사람까지. 다양한 사람들의 감상을 읽으며 생각해봤습니다. 의도가 무엇이었을까?
이런 감상들을 보다가 어느 순간, 이 모든 것이 감독의 의도를 위한 껍데기에 불과했던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인물, 배경, 사건, 주제, 복선, 장치, 결론 등. 전부 감독의 의도를 포장한 껍데기였다는 거예요. 뭐 다른 영화들도 결과적으로 보면 감독의 의도를 위한 껍데기일 수도 있습니다만, 이 영화는 보다 더 순수하게, 오로지 하나의 의도만을 위한 영화가 아니었나 싶었습니다.
그 의도는 바로 ‘현실직시’ 그 외엔 아무것도 없습니다. 만약 부자의 부도덕을 조명했다면, 부자에 대한 성토가 주를 이루었을 겁니다. 그러니까 의도적으로 부자의 부도덕을 조명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양극화에 대한 특별한 대안도 제시하지 않았습니다. 빈자의 무력함을 극복하는 장면도 없었습니다. 불편하고 또 불편한 현실을 그대로 그냥 조명했을
뿐이었습니다. 현실직시만을 위해 다소 인위적인 진행과 결론조차
감내했다고 봅니다. 부자연스러움조차 의도되었다고 파악됩니다. 감독은 영화를 보고 다양한 생각이 나왔으면 좋겠다는 의미심장한 말을 했습니다. 그야 그렇겠죠. 현실직시만 하고 끝났으니까요. 대안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래서 다양한 생각이 나올 수 있었다고 봅니다. 만약 대안을 주장했더라면, 다양한 생각이 나오기 전에 그 대안의 옳고 그름, 적합성 따위들로 생각들이 소모되었을 겁니다. 그러니까 멀리서 조망하며 현실직시만 했다고 봅니다. 그러므로 이 영화는 감독의 의도가 적중한 재미있고
훌륭한 작품이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거기서 끝났다고 생각합니다. 한계점에 도달했다는 거예요. 현실직시만으로는 현실을 바꾸기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양극화를 모르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요? 아마 대부분은 알 것입니다. 체감하고 있으니까요. 물론 그걸 조명하여 다양한 사람들이 현실직시 하게
된 것은 좋았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끝입니다. 아 그래, 그렇구나 그래서?
특별한 대안 없이 멀리서 조망하기만 하는 것은 분명
여러모로 이익입니다. 사회를 바꿀 수 있는 대안을 제시하면 그 대안에 손해를 보게 되는 사람들에게 경계 받을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위계질서를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나이만 또는 권위만 높아도
존중 받았던 사람들이 위계질서 붕괴를 쉽게 받아드릴 수 있을까요? 반발이 일어날 수 밖에 없습니다. 어른과 아이와 언어의 평등이 찾아와야 한다고 주장해보세요. 아이가 네 부모에게 반말해도 받아드릴 수 있느냐는
반발만 돌아오게 됩니다. 도대체, 평등을 사랑하긴 한 건지 모르겠어요. 학생 교육문제도 그래요. 학생과의 평등만 생각하지, 교사와 학생의 평등은 대부분 생각지 못합니다. 당연하니까. 그 둘은 불평등한 것이 당연하니까 생각을 하지 못해요.
양비론도 마찬가지입니다. 둘 다 비판하며, 거리를 두면 둘 다에게 첫 번째 타겟이 되지 않기
때문에 다소 안전한 위치에 있을 수 있지요. 그런데 그건 결국 진흙탕에 발을 딛지 않겠다는 말과 다름이 없습니다. 자기 손을 더럽히기 싫다는 거예요. 복잡하고 다양한 사안에서 둘 다 똑같이 나쁘기는 어렵습니다. 어느 쪽은 이쪽이 낫고 어느 쪽은 이쪽이 낫다. 그런 것을 종합해서 어느 쪽이 상대 우위를 점하고
있는지 파악이 가능해지죠. 그것이 불가능 할 리가 없습니다. 특히 머리 좋은 사람들이 그게 불가능 할 수가 없어요. 그럼에도 그게 불가능 했던 건 단지 미움 받고 싶지 않을 것뿐이죠.
분명, 어설픈 대안보단 현실직시만 하는 것이 나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현실직시로는 한계가 있어요. 냉정하게 말해서 현실직시 한 기사와 이 작품은 큰
차이가 없습니다. 포장지만 다를 뿐이에요. 예쁘고 아름답고 추하고 더러운 다양하고 화려한 색으로
포장된 영화이지만 내용은 객관적인 기사와 별반 차이가 없죠.
이 작품의 한계에 저는 두 가지를 집겠습니다. 감독 의도에 맞춘 결과론적인 진행과 대안 없는 현실직시. 한계라고 표현했지만 위대하지 않다는 것은 아닙니다. 절제된 표현으로 자기 의도를 확실하게 전달했어요. 단지 그 이상을 넘기 위해선 대안도 필요하다는 이야기입니다. 대안을 제시한 작품은 아마 현실직시보다 흥행이 안될
수도 있습니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그 대안으로 손해 보는 사람들의
반발이 나타날 수 있거든요. 그래도 한계점은 분명 대안이 있는 쪽이 더 높습니다. 현실직시만으로 위대한 상을 수상했으니 대안이 있는 작품으로 위대한 상을 수상하게 되어 현실을 바꾸는데
초석을 다지게 된다면, 영화 역사뿐만이 아니라 일반 역사에 남는 감독이 될지도 모르겠네요.
그리고, 인물 설정, 배경 설정, 사건 설정만으로 감독의 의도에 맞게 이야기를 진행할
수 있는 걸까요? 자유 속에서 의도가 온전하게 포장될 수 있을지 궁금합니다. 저는 이 감독의 다음 작품을 기대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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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정도 글이라면 매일매일 써도 어렵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만, 아, 모르겠다.
역할평등론 – 다름이 없는 기준(역할)로 가치를 판단해야 다름이 존중 받을 수 있다. 아무리 달라도 역할만 수행할 수 있으면 존중 받을
수 있기 때문에, 다름이 없어야 다름이 존중 받을 수 있다는 이야기다.
교사경쟁 – 학생과 학생 사이의 평등뿐만이 아닌, 학생과 교사 사이의 평등도 필요하다. 학생을 경쟁시킬 것이라면, 교사도 경쟁해야 한다. 그리고, 경쟁이 곧 서열화라고 말할 수는 없다. 공교육의 몰락은 무경쟁이 만들어낸 참상이다. 공교육의 품질 하락이 사교육을 불렀다. 사교육 활성화는 빈부에 따른 교육 품질 차이를 불렀다. 아, 그리고 단어가 마땅히 생각이 안 나서 사람에게 품질이란 단어를 썼는데, 기사를 보니까 자질이란 좋은 단어가 있었다. 다음에는 교사 자질, 학생 자질이란 표현을 쓰도록 하겠다.
다음에는 교사경쟁에 관한 글을 써보려고 합니다. 역할평등론을 주장하는 사람다운 결론이 나올 거예요. 역할평등론답게, 입시제도를 이렇게 주장할 겁니다. 정시에서 수능점수는 강의에 따라갈 수 있는 최저
등급(또는 점수) 달성하면 모두 만점으로 처리되고, 나머지는 전공에 맞춘 전공 전용 시험의 점수로 평가할
수 있도록 해야 된다고 주장합니다. 수능 점수에 맞춰 전공을 결정하는, 대학 간판만 노리는 어리석은 관행을 끝내기 위해서는 전공 전용 시험이 도입되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공공기관 또는 공기업에서(정확히는 모름) 사용하는 블라인드 테스트가 도입되어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만약 두 시험을 전부 만점으로 통과한 사람이 많아
동률이 많아지면, 나머지는 면접점수로 계산해야겠지요.
저는 정치를 대행(마땅한 용어가 떠오르지 않음)이라고 봅니다. 가치 분배는 대행의 일부에 불과해요. 국민의 대행자, 정치인. 피보호자의 대행자, 보호자. 집단의 대행자, 리더. 모든 것은 대행으로. 집단의 대행자로서 민주적이면 자율로, 독재적이면 강제로 대행하는 것을 정치라고 생각합니다. 요컨대 대신 행동해주는 사람이라는 거죠. 권력으로 찍어 누른 힘으로 대신 행동하여 가치 분배하거나, 국민들의 지지로 대신 행동하여 가치를 분배하거나. 설령 타협의 결과로 각자 조금씩 의견을 섞게 된다고
하더라도, 일부는 다른 이를 대행하게 됩니다.
내 생각을 대신 행동하고 대신 책임져달라. 참여에 소극적인 태도, 책임지지 않아도 되는 곳에서의 정치질, 따위를 고려해보면 정치의 본질이 보입니다. 정치는 책임지는 대행자, 정치질은 책임지지 않는 대행자.
음, 잘은 모르겠는데, 페이스북의 리브라는 위험한 것 같네요. 저는 다국적 기업의 미래의 청사진 중 하나를 기업독재로 생각하고 있었어요. 다국적 기업의 힘이 국가를 넘어설 미래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거죠. 기업독재의 가능성 첫 순위에 구글을 점 찍고 있었는데… 미안해요. 페이스북이 첫 순위였던 것 같아요. 저는 세계가 점차 하나가 되어가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 역할은 정치가 맡아야 한다고 봅니다. 경제가 맡으면… 경제논리로 접근하게 되어 경제력이 없는 사람들은
위험하게 됩니다. 뭐 유능한 사람들이 많으니까 알아서 잘 하겠죠.
이게 경제 보니까, 작년 것과 비교하더라고요. 생산성도 그렇고 그냥 년 단위 같아요. 올해 –를 찍어 놓으면 내년엔 보통만 해도 +가 되겠네요. 음.
선거가 내년이었죠?
그럼 또 만나요.
특히나 맨마지막장면은 더더욱 현실직시를 강하게 대비시켜서...
굳이 이런 주제였다면 뭔가 말하고 싶었던거같은데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