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페미니즘 현상 해석
한국 페미니즘은 여성열등주의다. 일반적인 관점이 아니므로 여성주의(페미니즘) 찬반과 별개로 선입견 없이 바라보길 바라겠다. 페미니즘을 성평등주의로 착각하는 사람이 있어 알기
쉽게 여성주의로 부르도록 하겠다. 한국 여성주의는 조선의 종교였던 유교와 서양에서 시작된 여성주의의 결합으로 여성열등주의가 되었다. 유교부터 알아보자. 유교는 여성을 열등하게 만들었다. 여성을 남성의 아랫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여성의 의지를
약화하여 사회진출을 방해하고, 여성에게 정조관념을 주입하여 정조를 지키게 했다. 유교는 여성열등주의다. 여성주의를 알아보자. 여성주의는 여성의 주관적인 이익을 여성인권이라 부르고 주관적인 손해를 여성차별이나 혐오라 불렀다. 이 주관적이라는 게 상당히 황당하다. 여성주의 자체에 객관적인 기준이 없다. 자유주의적 여성주의나 사회주의적 여성주의 같이 다른
사상에서 여성이 이익을 보면 여성인권이라 말하고 손해를 보면 여성차별이라 말했다. 이러니 여성주의자마다 군복무에 대한 시각 차이가 발생하는 것이다. 어떤 여성이 주관적으로 남성을 혐오하는 것이 이익이면
남성혐오가 여성인권이 되고 그걸 막는 것이 여성차별이나 혐오가 된다. 어째서 여성주의자가 남성혐오를 옹호하는지 알겠는가? 주관적이기 때문이다. 여성주의는 주관적인 손익으로 인권이 결정된다. 자, 유교의 여성열등주의와 여성주의의 여성인권을 합쳐보자. 유교에 세뇌된 여성은 여성이 열등하다라는 주관적인
인식을 만족시키는 걸 이익으로 여기기에 그걸 여성인권이라 말하여 여성을 열등하게 세뇌한 뒤에, 여성의 주관적인 이익을 위해 열등함에 대한 배려를 사회에 강요하게 된다. 이 강요를 사회는 수용하였다. 왜냐하면 이 여성주의가 주장하는 여성의 의지 약화와
성적 수치심 강화는 기성세대의 입맛에 딱 맞았기 때문이다. 남성이 여성을 이용하기 위해 여성을 약화한 걸 여성이 여성인권이라 주장하는 걸 본다고 생각해보자. 얼마나 흐뭇하겠는가? 세뇌된 노예가 자발적으로 주인의 가르침을 인권이라
주장하는 꼴을 본 거나 다름이 없다. 끔찍하다. 이런 이유로 여성주의는 사회에 쉽게 흡수되었다. 여성주의자와 기성세대가 여성은 열등하다라는 시각을
공유한 상태에서, 여성주의자는 여성이 열등하니 배려해달라 강요했다. 여성은 열등하다라는 시각을 갖고 있는 이들은 배려하는
것에 동의했고, 여성은 열등하지 않다는 시각을 갖고 있는 이들은
그 배려에 동의하지 못했다. 한국은 세대별로 유교의 세뇌 농도가 조금씩 차이가 나는데, 그 차이가 여성에 대한 시각 차이를 나타낸다. 성별 평등으로 자라난 세대의 남성과 일부 여성은 여성을 열등하다 여기지 않기 때문에 그
열등함에 대한 배려를 받아드릴 수 없었다. 일부 여성이 장애인 혜택과 같은 열등함에 대한 배려로 받는 혜택을 여성의 이익으로 여겨 그 배려를 여성인권이라 말하게 되었다. 여성을 열등하게 여기지 않았던 남성은 그 배려를
이해하지 못해 여성우월주의로 이익을 얻는 것이라 착각하였다. 그에 따라 그 남성은 여성우월주의 반대라며 반발하였다. 그 반발을 보고 일부 여성은 이런 장애인 혜택과도 같은 배려야말로 여성을 우월하게 하는
것으로 인식하게 되어 더욱 더 여성을 열등하게 만든 다음 혜택 받길 바라게 되었다. 여성에 대한 과잉혜택은 이런 과정에서 나타났다. 한국인의 성적 억압은 여성의 정조관념으로 나타났다. 정조관념을 주입 받아 성적 수치심이 강해진 여성은
성관계를 터부시하고 성적 문화나 창작물도 검열하게 되었다. 창작물에 등장하는 여성의 정조조차 지켜야 한다고 굳게 믿고 있었기 때문에 이런 몰상식한 짓을 저질렀던 것이다. 마호메트를 신성시하라는 세뇌를 당한 이슬람이 창작물에서
등장하는 마호메트 묘사에 몹시 불편해 하는 것과 같다. 남성 성 상품화는 무시하고 여성 성 상품화에만 예민했던 것은 여성의 정조를 지키게끔 세뇌되었기 때문이다. 여성은 여성대로 여성의 정조를 지키게끔 세뇌되어
강하게 세뇌된 여성은 남성과 관계를 맺기를 꺼려하며 남성의 동성애를 즐기며 이성애의 욕구를 해소했다. 남성의 동성애를 즐기는 여성 수가 늘어나며 그에 따라 남성과 관계를 맺는 여성 수가 줄어들었다. 국가의 이성애가 결핍되었다. 1인 가구 증가가 이를 증명한다. 이런 건 본인이나 타인의 경험으로 볼 게 아니라
통계적으로 접근해야 한다. 많은 여성이 정조를 굳게 지키며 살다가 정말 잘생긴 남성과만 관계를 맺자, 그 여성과 관계를 맺어야 할 다수의 남성이 성적 욕구를 충족할 수 없었다. 여성과 성적 관계를 통한 욕구를 충족 못한 남성은
포르노나 성매매도 금지 당해 이걸 막는 이들에 대한 불만이 고조되고 있다. 여성은 여성대로 열등하게 세뇌 당해 장애인이 겪는 불편함을 겪으며 살아가고 있다. 매일 같이 여성이 불행하다라고 세뇌 당하면 어떤
여성은 실제와 관계 없이 주관적으로 불행하다 여기게 된다. 그 불행함을 남성에게 쏟아내며 더욱더 성별 갈등이 심화되고 있다. 일단 여기까지가 간단히 알아본 현재 한국 여성주의가 만든 사회현상이다.
여성이 주장하는 여성인권이 유교의 여성열등주의라면
지금까지 주장하던 여성인권은 대부분 헛것이 된다. 그에 따라 반론을 하고 싶어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묻겠다. 여성주의자는 유교의 세뇌에서 완전하게 벗어났다 말할 수 있는가? 대표적인 유교의 세뇌가 바로 연령차별이다. 장유유서를 통해 연상과 연하는 차별 되었다. 장유유서에 세뇌된 인간은 연하의 반말을 들으면 몹시 불편해진다. 건방지고 예의가 없어 보인다. 심지어 창작물에서 연하가 연상에게 반말하는 걸 보는
것도 불편해진다. (이는 여성주의자가
성적 창작물을 불편해 하는 것과 동일하다.) 이 세뇌에서 벗어났다 할 수 있는가? 특정 개인이 벗어났다 해도 다른 이들이 벗어났다 단언할 수 있는가? 아마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연하의 반말에 불편해하는 게 인간의 선천적인 성질인가? 결코 아니다. 오로지 유교의 세뇌로 만들어진 감각이다. 해외의 사례를 보면 안다. 이와 마찬가지로 여성은 의지가 약하고(여자는 이렇게 한단 말입니다!) 성적 수치심(성 과민이나 창작물에 대한 과도한 불편함)이 강하다는 감각이 있는 것과 함께 여성에게 강한
의지나 수치심이 적길 바라는 것을 불편해하는 것은 오로지 유교의 세뇌 때문이다. 원시 부족 여성이 의지가 약하거나 성적 수치심이 강한 걸 본 적이 있는가? 이런 건 철저하게 남성의 의도로 만들어진 감각이다. 대다수 한국인이 연하의 반말에 불편해하는 시점에서
그들이 유교에 세뇌되어있다는 것과, 여성주의자가 유교에 세뇌되어 여성열등주의를 여성인권이라 주장했다는 논리에 대한 반론은 불가능하다. 연령차별에서 벗어나지도 못한 인간이 여성열등주의에서
벗어날 수 있을 리가 없지 않나. 그럼 한국 여성주의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알아보도록 하자.
한국 여성주의로 발생하는 성별 갈등 현상에 대해
알아보자. 한국 여성주의로 발생하는 성별 갈등은 크게 두 가지가
있는데 첫째는 여성특혜고 둘째는 여성 성 과민이다.
첫째, 여성특혜
여성가족부, 여성할당제, 여성가산점, 여성창업지원, 여성대학존재, 여성징병의무 없음, 여성폭력방지법, 성매매여성 지원, 여성전용주거, 여성주차장 등 여성 전용 서비스는 전부 여성열등주의를
근거로 한다. 보자, 장애인가족부, 장애인할당제, 장애인가산점, 장애인창업지원, 장애인대학, 장애인징병의무 없음, 장애인폭력방지법, 성매매장애인여성 지원, 장애인전용주거, 장애인주차장 등 여성에 장애인을 넣으면 일부를 제외하고 대부분 합리적으로 보이게 된다. 지금 일부 여성은 장애인 혜택 받으면서 좋다고 하고 있는 것이다. 국가에 있는 인간 절반을 장애인으로 만들어버렸으니
사회가 제대로 돌아갈 리가 없다. 이걸 많은 사람들이 파악하지 못했던 것은 여성을 열등하게 여긴 이들은 당연하니까 굳이 반론하지 않았기 때문이고 여성을 열등하게 여기지 않았던
이들은 열등하지 않은데도 혜택을 받으니 장애인을 떠올리지 못했던 것 때문으로 보인다.
자발적으로 성매매한 여성에 대한 지원금 지급은 보통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여성을 장애인으로 바꿔서 해보자. 자발적으로 성매매한 지적 장애인 여성에게 지원금을 지급했다. 이건 상대적으로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그들에게 있어 여성은 장애인 수준으로 열등하기 때문에 이런 지원은 당연한 것이다.
성인지감수성은 간단히 말해 약자인 여성의 진술이나
증언 또는 증거를 더 중요시해야 한다는 황당한 논리를 일컫는다. 대놓고 말하고 있다. 여성은 열등하니까 거기에 맞춰야 한다고. 가령 장애인 같은 경우에는 진술이나 증언 또는 증거에 보다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걸 여성에도 해야 한다는 게 성인지감수성이다. 여성주의는 여성의 주관적인 이익을 여성인권이라 말하고
주관적인 손해를 여성차별이나 혐오라 말하는 사상이다. 설령 법치주의를 훼손하더라도 여성의 이익이 되면 여성인권이라 주장하기 때문에 이런 황당한 일을 옳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이 용어는 해외에서 시작했는데 그 때에는 법과 큰
관련이 없었다고 한다. 한국 여성주의는 그걸 억지로 법과 연결 지어 여성의 열등함에 맞춰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여성징병의무가 없는 것은 간단한 논지로 여성은 남성에
비해 약하기 때문에 징병하지 않는다고 한다. 기본적으로 여성을 열등하게 여기기 때문이 이런 논리가 나온다. 최근 여성징병에 대한 찬반조사 결과 40대 이상의 남성만 여성징병에 반대하는 비율이 높았다고 한다. 유교에 세뇌된 농도가 높을수록 이에 대한 반대가
심해진다. 여성주의가 주관적인 여성의 이익을 여성인권이라 주장하는
사상이기 때문에 여성을 열등하게 여기는 곳일수록 여성징병에 회의적이다. 여성주의자라고 하더라도 여성을 열등하게 여기지 않으면 여성징병에 찬성하게 되어 있다. 최근 선진국에서 여성징병에 대한 논의를 한 것을
보면 대부분 여성징병에 찬성하는 입장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여성을 열등하게 여기지 않기 때문이다.
남녀의 가족폭력 비율을 보고 여성이 여성이기 때문에
폭력피해를 입는다는 착각을 할 수 있다. 하나 그렇지 않다. 성인 남성과 성인 여성 사이에서 발생하는 폭력은 남성이 비율이 높지만 성인 남녀와 아동 사이에서 발생하는 폭력은 남녀 비율이 비슷하다. 남성이 폭력적이고 여성이 비폭력적인 것이 아니라, 그냥 단순히 힘의 차이로 인해 비율이 달라지는 것뿐이다. 만약 여성이 힘이 더 쌨다면 남성이 폭력피해를 받는
비율이 높았을 거라 확신할 수 있다. 이걸 무시하고 여성폭력방지법을 추진한 것은 정말 어리석기 짝이 없는 행동이다. 가족폭력방지법이 차라리 낫다.
둘째, 여성 성 과민
여성 성 과민은 크게 두 종류가 있다. 유교의 정조관념에 세뇌 당한 여성과 그 여성에게
정조관념은 여성인권이라 세뇌 당한 여성이다. 정조관념은 남성이 여성을 성적 소유물화하기 위해 만든 악의적인 관념이다. 의도적으로 여성에게 성적 수치심을 강하게 주입하여 다른 남성에게 쉽게 몸을 허락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결혼 전에는 관계조차 못하게 만들었으며 결혼 후에
과부가 되더라도 재가를 못하게 만들었다. 여성에게 성적 주도권을 앗아간 무거운 족쇄다. 그런데 이걸 유교적 여성주의자들은 옳다고 여겼다. 결혼 전 미성년 여성은 정조를 지켜야 하므로 최대한 야한 것을 접하지 못하게 하고, 성년 여성조차 야한 옷을 입는 것을 막았다. 유교적 여성주의자에게 세뇌된 새로운 여성주의자들도 그걸 잘못되었다고 말하며 치마를 입는
여성에게 득달적으로 다가가 잘못되었다고 비난공세를 펼쳤던 것이다. 자유의지에 따라 성적 매력을 발산하는 이들에게 여성 성적 대상화라던가 성적 착취라는 말은 말도 안
되는 헛소리다. 왜 인간이 인간에게 성적 매력을 느끼는 걸 잘못되었다
말하고 있나! 남성 성적 대상화나 여성 성적 대상화는 인간으로서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성적 대상화를 하지 않으면 되려 이상하다. 이성이 서로의 성적 매력에 이끌려야 사랑하고 출산하고 그럴 거 아닌가. 남성이나 여성의 신체 일부를 성적 대상화하였다고 해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과거와 달리 평등해진 지금은 그저 서로의 매력을
사랑하는 다른 행태일 뿐이다. 이제 여성은 남성의 성적 노리개라는 낡은 시각에서 벗어날 때가 됐다. 대등하다면 성적 대상화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리고 어째서 여성의 인권을 운운하는 이들이 여성이
성적 주도권을 잡는 것을 부정하는가? 여성도 성적 주도권을 쥐고 자유롭게 야한 옷을 입을 수 있다. 이걸 잘못되었다 말하는 건 그냥 세뇌되었기 때문에 그렇다. 세뇌되어 불편한 감각이 발생하여 그 불편함을 해소하기
위해 성적 매력을 발산하는 이들을 공격했던 것이다. 애초에 인간은 자신의 감각을 명확하게 알지 못한다. 흔들다리 효과가 대표적이다. 흔들리는 다리에서 느끼는 감정이 공포인지 사랑인지도 분간 못해서 이성에 대한 호감도가 더 높아진다고 한다. 정조관념에 세뇌되어 불편해진 감각을 성적 대상화니
뭐니 말하며 가져다 붙인 것이 여성 성 과민의 본질이다. 이런 세뇌를 당한 여성은 성에 몹시 취약해져 남성 구조원이나 경찰관의 접촉에도 과민반응을 보이게 된다. 아니 구조하는 것에도 과민반응을 보일 정도로 취약하게
만들면 어떻게 하나. 그게 정상인의 삶이라 할 수 있는가? 멀쩡한 여성을 장애인으로 만든 다음 배려하라고 강요하면 어떻게 하나. 그 사람은 평생 그 짐을 짊어지고 살아가야 하겠지. 어쩌자고 이런 짓을 했나. 남성은 여성 알몸 본다고 불편해 하지 않는다. 여성이 불편해할까 봐 걱정하는 거지 직접 보는 것
자체는 보통 불편해하지 않는다. 그러나 여성은 남성 알몸을 보면 불편해하는 사람이 많다. 이 차이가 잘못되었음을 모르는가? 본다는 행위에 육체적인 체력의 차이가 발생하는가? 아니지 않나. 이건 오로지 의지와 지성의 영역이다. 세뇌 당하지 않았다면 남녀 모두 인간의 알몸을 본다고
불편해할 이유가 없다.
성 과민이 이성적이었다면 남성 성 상품화와 여성
성 상품화에 대한 시각 차이가 발생할 수가 없다. 여성 성 상품화만 불편해하는 것은 남성의 정조가 아닌 여성의 정조를 지키게끔 세뇌되었기 때문이다. 여성 성 상품화만 불편해한다는 점에서 정조관념이
불편함의 근원이라는 점은 명확해진다. 서양에서도 여성 성 상품화를 불편해한다고 반론할 수 있다. 그야 당연하다. 서양에서도 여성은 성적으로 억압받아 정조관념을 강요당했기 때문이다. 기독교가 얼마나 여성의 혼전순결을 강조했던가? 이성으로 만든 주장이 아니라 감성으로 불편해진 감각에
이유를 갖다 붙였던 것에 불과하다. 여기서 코미디가 발생한다. 실제 여성의 정조뿐만이 아니라 창작물에 등장하는 가상 여성의 정조까지 지키려는 움직임이 나타난 것이다. 창작물에 나오는 여성이 야한 옷을 입고 있거나 노출이
되면 검열을 통해 가린다. 이것이 보통 2D인권부여라고 하는데, 2D남성에 대한 인권은 부여하지 않았으므로 2D여성인권부여라고 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어째서 창작물에 등장하는 남성의 노출은 괜찮은데 여성의 노출은 안 되는가? 그야 앞서 말했던 것처럼 여성의 정조를 지키게끔 세뇌 당했기 때문이다. 이런 창작물에 대한 불편함의 노출은 연하의 반말을
불편해하는 것이나 마호메트 세부묘사에 불편해하는 것이나 같은 원리다. 공통점은 세뇌되어 창작물에서조차 불편한 감각을 느낀다는 것이다. 어떤 이는 조선의 춘화를 보고 조선시대보다 한국이
더 성적으로 억압받고 있다고 말하며 유교의 탓이 아니라고 할 때가 있다. 이건 여성의 인권에 초점을 맞추면 해석이 된다. 과거 조선은 여성의 인권이 낮았다. 발언권도 별로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여성의 나체를 묘사한 춘화가 있더라도
과연 불편하다 말할 수 있었겠는가? 반면 한국은 여성의 인권이 높다. 발언권이 많다. 그런 상황이니까 정조관념에 세뇌되어 나타나는 불편함을 대놓고 호소하며 마구잡이로 야한 것을 검열했던 것이다. 거기에 여성주의의 본질이 더해진다. 여성주의는 주관적인 손해를 여성차별이나 혐오라 말하는
사상이다. 주관적으로 불편한 것이 그들에게 차별과 혐오였기에
여성차별과 혐오를 막기 위해 창작물 검열에 힘을 쓴 것이다. 여성을 억압하던 정조관념에 세뇌되어 창작물까지 간섭하며 검열하는 모습. 이 얼마나 웃기는 꼴인가. 자유주의 국가에서는 표현의 자유가 최대한 허용되어야
한다. 되도 않는 검열은 자유와 여성의 가치를 훼손하는
중대한 실수다.
이제는 남녀 상관없이 인간이라면 자기 몸의 기능을
명확하게 알고 그 기능을 사용할 줄 알아야 한다. 얼마나 여성의 정조를 중시했으면 지금 성인들도 성교육 지식이 낮다 하나? 아직도 청소년들 대상으로 성교육을 하면 학부모가 반발하는 일이 빈번하다고 한다. 이게 도대체. 얼마나 많은 사람이 유교의 정조관념에 세뇌되어 있는
건가. 이러니까 터무니 없는 창작물 검열을 사회가 받아드리고
있는 것이다. 한국에서만 야한 그림을 까맣게 검열하는 걸 보면
속이 터진다. 이외 실제 여성인권과 거리가 먼 용어나 형태 따위에
집착하는 것도 세뇌의 결과물이다. 그게 여성인권이라 세뇌 당했기 때문에 용어나 형태에 이성적으로 접근하는 게 아니라 감성적으로 불편하다고 접근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지성이 부족해 보이는 결과가 나오게 된다.
사법부는 입법부가 제정한 법률 내에서 판결을 내리기
때문에 잘못된 법에 대한 판결에 대한 책임을 입법부에 전가할 수 있다고 본다. 그런데 그러면 사법부의 존재가치를 잃게 되어버리는 게 아닐까 싶다. 삼권분립이라는 말이 있듯이 입법부가 잘못된 법률을
제정하면 그에 대한 견제작용이 필요하다 주장하겠다. 성별에 차등을 둬서 판결하는 것은 부당하다 주장하겠다. 그것은 여성을 열등하게 보는 시각 때문에 나타난 것이다. 피해자가 없는 창작물에 대한 처벌은 부당하다 주장하겠다. 그것은 자유주의적 시각에서 악법이다. 자유주의 국가에서는 같은 인간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한 최대한의 자유를 보장해야 한다. 그 누가 되었건 강요가 없는 자유의지를 최대한 존중해야 한다. 한국이 자유주의 국가인지, 유교 국가인지, 여성주의 국가인지 분명하게 기준을 정해 판결을 내려주길 간곡히 바란다.
유교의 여성열등주의에 대해 알아보자.
종교의 본질은 인류열등주의다. 유교는 상명하복 사상으로 윗사람은 우월하고 아랫사람은
열등하다 가르쳤다. 윗사람은 조상과 연상이 있고 아랫사람은 연하와 여성과 아동이 있다. 신분으로는 양반과 중인과 상민과 천민으로 나뉜다. 조선은 유교를 통해 상명하복을 도덕으로 만들어 열등한
아랫사람은 우월한 윗사람에 복종해야 한다는 것으로 지배체계를 유지했다. 이 사상이야말로 동북아에 민주주의를 정착하기 어렵게 만드는 주 원인이다. 상명하복과 민주주의는 수직과 수평으로 전혀 다른
사상이기 때문이다. 기독교나 불교도 마찬가지다. 열등한 인간은 우월한 신에게 복종해야 한다고 가르치며 지배체계를 유지했다. 차이점은 기독교는 외향적이나 불교는 내향적이라는 점이다. 기독교는 해외를 떠돌며 선교하러 다니고 불교는 산에
들어가 수행을 쌓는다. 뭐 그거 말고는 본질적으로는 인간이 열등하단 시각에는 차이가 없다. 있지도 않은 원죄를 주장하며 인간이 열등하다 말하는 거나, 인간의 선천적인 육식성이나 폭력성을 죄로 말하는
거나 인간을 열등하게 여기는 것은 똑같다. 가스라이팅이라는 용어가 유행하고 있는 것 같은데, 본래 종교가 그 원조다. 괜히 새로운 용어 써가며 새로운 것마냥 대하지 말고 그냥 종교식 세뇌라 말하면 된다. 자유주의 국가에서 종교에 세뇌되지 않도록 온전한 자아를 갖추게 도와야 할 것이다. 그러면 세뇌 따위에 휘둘리지 않을 수 있고, 그걸 당할 우려로 과민반응 하지 않아도 된다.
이와 같이 인간은 열등하게 만들면 이용하기가 쉽다. 여성도 같다. 남성이 여성을 이용하기 위해 여성을 열등하게 만들었다. 의지를 약하게 하여 사회진출을 막고 성적 수치심을
강화하여 정조를 지키게 했다. 독재자가 국민을 어리석게 만들어 쉽게 이용하는 것처럼, 부모나 교사가 아동을 어리석게 만들어 쉽게 세뇌하는 것처럼, 남성이 여성을 어리석게 만들어 쉽게 다뤘던 것이다. 그거에 세뇌되어 열등한 걸 여성의 선천적인 성질로
착각한 여성주의자들이 있다는 게 참 한국의 비극이 아닐 수가 없다.
체력이나 근력은 남성이 여성보다 보편적으로 강한
편이다. 그러나 인간의 우열은 체력이나 근력에 있는 게 아니다. 의지와 지성에 있다. 힘만 따지면 동물보다 연약한 인간이 우열의 기준을
힘으로 하는 게 정상일 리가 없지 않나. 의지와 지성은 성별로 우열이 나눠지지 않는다. 남녀가 모두 동등한 의지와 지성을 가지고 있다는 가정하에 여성에 대한 과잉혜택은 여성을 열등하게 여기는 처사가 된다. 여성은 열등하지 않다.
여성주의의 본질에 대해 알아보자.
여성주의는 여성의 주관적인 이익을 여성인권이라 말하고
주관적인 손해를 여성차별이나 혐오라 말하는 사상이다. 명확하게 제시하는 이상 따위가 없다. 그냥 주관적으로 이익이면 옳고 손해면 그르다고 주장한다. 이러니까 자유주의적 여성주의나 사회주의적 여성주의 따위가 있는 것이다. 이게 얼마나 황당한 것인가 하면 여성주의를 남성주의로
바꿔보면 안다. 남성주의를 남성의 주관적인 이익을 남성인권이라 말하고
주관적인 손해를 남성차별이나 혐오라 말하는 사상이라 가정해보자. 미국 남성의 손익과 이슬람 남성의 손익은 다를 것이다. 미국 남성은 보통 여성에게 옷차림이나 성적 억압을 하는 것이 주관적인 이익이 아닐 것이다. 하나 이슬람 남성은 여성에게 옷차림이나 성적 억압을
하는 것이 이익이다. 이때 남성의 주관적인 손익으로 남성인권이 결정되기 때문에, 이슬람 남성이 여성에게 정해진 옷차림이나 성적 억압을 하는 것이 이슬람에서는 남성인권이 되고, 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차별이나 혐오가 된다. 이게 얼마나 황당한 사상인지 알겠는가? 이슬람적 남성주의자는 여성에게 정해진 옷차림과 성적
억압을 하는 것이 남성인권이라 주장한다. 그게 잘못되었다고 지적하면 남성차별이나 혐오라고 말하며 화를 낸다. 이것이 바로 유교적 또는 기독교적 여성주의자가 여성에게 정해진 옷차림과 성적 억압을 하는
것이 여성인권이라 주장하는 것과 동일하다. 그게 잘못되었다고 지적하면 여성차별이나 혐오라 말하며 화를 내는 것도 같다. 정말 천박한 사상이 아닐 수가 없다. 만약 이슬람에 여성인권이 올라 여성주의가 퍼지면 나중에 이런 말이 나올 수도 있다. 히잡은 여성인권이라고요! 실제 한국이 그러고 있지 않나. 꾸미지 않는 게 여성 인권이라고요! 그러면서 아나운서한테 치마 입지 말라고 강요하고
있다. 코미디가 따로 없다. 여성주의자가 맨스플레인이나 유리천장이나 기울어진
운동장 따위를 주장하고 있다는 걸 안다. 그걸 바꾸고 싶다면 여성이 노력을 해서 바꿔야 하는데, 여성주의가 여성의 주관적인 이익을 여성인권이라 말하고 주관적인 손해를 여성차별이나 혐오라 말하는 사상이기
때문에, 노력을 하라고 말을 하면 차별이나 혐오라 되받아
치게 된다. 노력하지 않고 그냥 할당제나 가산점을 요구하는 게
여성주의다. 이는 비만이어서 사람에게 사랑 받기 어렵다고 말하는
이에게 다이어트를 하라 말하면 차별이나 혐오로 되받아 치는 것과 유사하다. 노력하지 않고 그저 사랑해달라 말한다.
이와 비슷한 사상으로는 자유방임주의나 금전만능주의가
있다. 자유방임주의는 사람의 주관적인 자유로움을 옳다 말하고
그렇지 못한 걸 그르다 말하는 사상이다. 그냥 지 감각으로 자유로우면 옳고 아니면 그르다며 화를 내는 사람이 방종한 행동을 정당화할 때 쓰는 사상이다. 정말 조잡하다. 금전만능주의는 돈으로 뭐든지 가능하면 옳다 말하고
그렇지 못한 걸 그르다 말하는 사상이다. 세상에는 다양한 힘이 있고, 패권을 무력으로 쥐고 있음에도, 독재자가 권력으로 뭐든지 하고 있음에도, 돈으로 뭐든지 할 수 있다고 말하며 돈으로 뭐든지 하는 걸 합리화할 때 쓰는 사상이다. 정말 지성이 없다. 여성주의는 여성의 주관적인 이익을 옳다 말하고 그렇지 못한 걸 그르다 말하는 사상이다. 여성 마음에 불편하면 차별과 혐오라 인식한다. 이러니 지하철에서 어떤 여성이 지 심기가 불편하다고
신고하는 사태가 발생하는 것이다. 정말 천박하다. 천박하다의 뜻은 뒤섞여서 바르지 못하다. 또는, 순수하지 못하다. 아니면 얕고 얇다. 라는 뜻이다. 이 세 사상은 지극히 조잡하고 지성이 없으며 천박하다. 이 세 사상이야말로 자유와 자본과 여성을 천박하게
만든다. 자유방임주의는 자유주의를 천박하게 만들고 금전만능주의는
자본주의를 천박하게 만들고 여성주의는 여성인권을 천박하게 만든다. 이런 사상은 자유와 자본과 여성에 하등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을 넘어 해만 되므로 부디 가지지 않길
바라겠다. 그 외에는 중우정치가 있다. 중우정치가 민주주의를 천박하게 만든다. 민주주의가 나와서 하는 말인데 개인적으로 자유민주주의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민주주의는 당연히 자유를 전제해야 하기 때문이다. 자유 없는 민주주의는 있을 수 없다.
남성이 여성을 이용하기 위해 여성을 열등하게 만든
것은 서양도 마찬가지였던 것 같다. 이 글을 위해 페미니즘적 첫 저서라 불리는 메리 울스턴크래프트의 여성의 권리 옹호를 읽었다. 메리는 당시 사회가 여성을 의도적으로 열등하게 만든다는 사실에 주목하며 여성도 남성과
같은 교육을 할 것을 주장했다. 당대 여성이 실수를 저지르는 까닭에 대해 여성의 본성 탓이 아니라 교육의 탓이므로 이성을 계발해야 한다 주장했다. 여성을 위해 여성이 충분한 지성과 의지를 갖춰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걸 위해 여성 또한 남성과 같이 교육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매우 합리적인 주장이다. 이 사람도 기독교의 한계를 넘지는 못했지만 당대
환경이나 교육으로 의해 여성이 열등해지고 있음을 주장한 바가 있다. 이 사람은 무의식적인 사고의 흐름이나 자아의 본질에 대해서는 알지 못해도 어렴풋이 환경이나 교육에
의해 여성이 열등해지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당황했다. 이미 비슷하게 알고 있었는데 왜 그런 천박한 여성주의를
추구하게 된 것인가? 당대 유럽이 환경이나 교육으로 인해 여성이 열등해지고 있음을 알고 있다면 한국도 마찬가지라는 걸 알아야지, 그걸 왜 놔두고 멋대로 한국적 여성주의를 추구했던
건가? 아니 그보다 왜 이 사람을 여성주의자라 불렀는가? 여성주의는 단순히 주관적인 손익으로 인권이 결정되는
사상이지 않나. 이 사람은 그냥 자유주의자다. 인간의 권리 옹호를 먼저 작성한 자유주의자다. 당대 자유주의자들이 여성에 대한 부자유스러운 인식을
가지고 있어서 그에 대한 지적을 하며 여성의 자유를 주장한 것일 뿐이지, 실제 스스로를 여성주의자라 부른 적도 없다. 여성주의의 시작은 1837년 사회주의자 샤를 푸리에가 도입했다고 한다. 이 전에는 애초에 여성주의 자체가 없었다. 이런 고상한 자유주의자에게 천박한 여성주의를 붙이지
않았으면 좋겠다. 진정한 여성의 인권을 위한다면 부디 자유주의자가
되길 바라겠다.
한국 여성의 불행에 대해 알아보자.
여성은 여성주의자에게 열등하게 세뇌되어 불행하다. 생각해보자. 네 주관적인 이익은 전부 옳고 주관적인 손해는 전부
그르다. 이런 식으로 교육받은 인간은 앞으로 얼마나 불행한
삶을 살겠는가? 정당한 손해에 차별이나 혐오라 느끼고 부당한 이익을
당연하게 여기게 된다. 거기에 의지약화와 성적수치심 강화까지 더해지면 세상 대부분의 것을 차별과 혐오로 느끼게 된다. 이러면 불행해질 수밖에 없지 않나. 도대체 어쩌자고 이런 짓을 저질렀나. 여성주의자는 한국 여성에게 큰 죄를 진 것이다. 남성이라던가 국가라던가 출산율이라던가 그런 거 다
집어치우고 말하겠다. 이건 여성에게 지독하게 잔인한 짓을 저지른 것이다.
사람이라는 건 말이다. 온전하게 자신의 의지를 드러낼 수 있어야 하고, 별 쓸데 없는 것에 불편함을 느끼지 않아도 되고, 사람의 호의나 사랑을 마음 편하게 받아드릴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이게 뭔가. 차별하지 않는다고 해도 닿지 않는다. 혐오하지 않는다고 해도 닿지 않는다. 사랑한다 말을 해도 닿지 않는다. 이미 많은 여성들이 세상이 차별과 혐오로 가득하고
사랑 받을 수 없다고 세뇌되어 그런 식으로 살아갈 수 밖에 없게 되었다. 아아, 돌아버리겠구나. 하루 종일 너는 불행하다고 세뇌 당한 사람이 행복을 느낄 리가 없지 않나. 뭐든지 감사하라나 힘든 형편을 지닌 사람보다 낫다거나
맹목적으로 사랑하라 말하는 게 아니다. 온전한 자유의지! 현명한 지성! 객관적인 시각! 통찰력! 사고력! 따위를 길러줘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래야 스스로 행복하기 위한 길을 걸을 수 있단
말이다. 그런데 지금 여성은 어떠한가? 보호를 명목으로 여성의 의지를 꺾는 일이 얼마나
많았던가? 옷차림의 자유를 막는다. 외모 꾸밈의 자유를 막는다. 인간관계의 자유를 막는다. 성관계의 자유를 막는다. 이동의 자유를 막는다. 사생활의 자유를 막는다. 여성 자유 억압이 일상이다. 본래 인간의 자유의지란 어떤 것을 하겠다는 의지를
정하고 행하면서 나온 결과에 따라 책임을 지는 것으로 성장하게 된다. 그걸 싹 다 막았으니 자유의지가 제대로 성장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아, 창작물 따위 여성인권이랑 아무 관련 없지 않나, 여성 아나운서가 치마를 입거나 여성 아이돌이 야한
옷을 입었다고 여성인권이 낮아지는 게 아니지 않나, 왜 그거에 불편하도록 세뇌한 건가. 사이비종교에 세뇌된 인간이 종교에 의존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을 정도로 약해져서 불행한 것처럼 유교적 여성주의에 세뇌된 인간은 열등함에
대한 배려가 없으면 살아갈 수 없을 정도로 열등해져서 불행하다.
한국 남성은 한국 여성이 불행하기에 불행하다. 원래 남녀는 그런 관계다. 남성이 불행하면 여성도 불행하고 여성이 불행하면
남성도 불행하다. 남성이 여성에 비해 적은 혜택을 받는 것은 여성이
장애인 정도로 열등하게 취급 받고 있기 때문이다. 남성이 성적 욕구를 해소할 수 없는 것은 여성이 성적 억압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성별을 바꿔도 결과는 같다. 만약 남성이 성적 억압을 받았다면 여성이 성욕 해소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만약 남성이 장애인 정도로 열등하게 취급 받고 있었다면
여성이 남성보다 적은 혜택을 받았을 것이다. 한국 남성이 여성주의로 불행한 것은 철저하게 여성이 열등하게 세뇌되었기 때문이다. 남성이 행복하길 바란다면 여성이 열등함에서 벗어나길 바라야 할 것이다.
출산율 추락에 대해 알아보자.
출산율 추락은 이성애 결핍 따위로 인해 연애와 출산에
대한 욕구의 순위가 낮아져서 발생하는 현상이다. 본래 유교사상은 미성년 때부터 성을 터부시하여 이성애 결핍이 발생해 출산율이 낮을 수 밖에 없다. 그런데 그걸 강요로 출산율을 올려 유지했다. 집안 어른의 강요로 결혼을 하고 출산을 한다. 강요로 한 결혼은 자발적이지 못하기에 순탄한 결혼생활로
이어지지 못해 아이가 크고 나서 이혼하는 황혼이혼을 하곤 한다. 자유로운 사회가 되어 황혼이혼을 하는 비율이 점점 늘고 있다고 한다. 황혼 이혼의 사유로는 성격 차이가 1위로 압도적이었다고 한다. 당연하다. 원해서 결혼한 것도 아닌데 성격이 맞는지 아닌지
어떻게 아나. 그러다 자유로운 사회가 되었다. 결혼과 출산을 강요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럼에도 미성년에 대한 성에 대한 터부는 여전하여
다수의 미성년이 제대로 된 이성애를 배우지 못하며 자라나 결혼과 출산에 대한 욕구 순위가 낮아 결혼과 출산율이 낮아지게 되었다. 자, 여기서 여성주의의 본질로 돌아가보자. 여성주의는 주관적인 여성의 이익을 여성인권이라 말하는 사상이다. 그렇다면 여성주의자의 주관적인 이익이 무엇이겠는가? 성을 터부시하는 것이다. 그것이 여성인권이 되었다. 보다 더 미성년에게 성적 억압을 강요한다. 보다 더 성적 문화를 검열하고 억압한다. 유교의 성 터부시나 성적 억압에 여성주의가 더해져
심각한 수준으로 악화된 것이다. 정리해보자. 처음부터 한국은 유교로 인해 자유로울수록 출산율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그러다 최근에 급격하게 떨어진 원인은 그 유교를 올바르다 여긴 여성주의자가 중용되어 사회적
영향력을 늘려 유교의 가르침을 더욱더 강요했기 때문이다.
이럼에도 많은 사람들은 돈이나 부동산 따위가 원인으로
알고 있다. 어느 정도는 그것도 맞다. 그러나 결코 본질적인 원인은 아니다. 한국보다 가난한 나라, 한국보다 빈부격차가 큰 나라도 한국보다 출산율이
높다. 그거 하나면 이에 대해 반론할 수가 없다. 다수가 애정결핍된 상태라서 이해하기 어려울 수도
있는데, 보통 정말 사랑하고자 하면 환경 가리지 않고 사랑하고, 정말 아이를 낳고자 하면 환경 가리지 않고 낳는다. 생각해보자. 사랑하는 취미를 위해 무언가를 포기한 적이 있지
않는가? 취미의 욕구 순위가 높으면 다른 걸 후순위로 두는
것은 당연하지 않나. 마찬가지다. 출산율이 낮은 것은 단지 연애를 하고자 하는 욕구의 순위, 아이를 낳고자 하는 욕구의 순위가 낮기 때문이다. 어떤 욕구의 순위가 높으면 다른 걸 포기하더라도 하게 된다. 연애와 결혼과 출산의 욕구 순위를 높게 해야 출산율이
오를 수 있을 것이다. 과거와 현재, 한국과 외국, 인간의 선천적인 성질과 후천적인 성질 등 이런 것을 하나하나 다 고려해보면 인간의 저출산의 원인이 파악된다. 북한보다 출산율이 낮다는 시점에서 물질적인 원인이
아니라는 걸 깨달아야 된다. 2018년 한국이 0.98이고 북한이 1.90다.
여기에 꾸밈노동을 죄악시하는 탈코르셋 따위가 원인의
일부로 더해진다. 꾸밈이라는 것은 다른 사람에게 사랑 받기 위해 노력하는
걸 의미한다. 그걸 죄악시하면 사람에게 사랑 받고자 노력하는 사람의
수가 줄어든다. 그러면 사랑 받을 수 있는 매력을 갖춘 사람이 줄어
서로를 사랑할 확률도 줄어든다. 강요가 없는 이상 사랑이 줄면 연애도 줄고, 연애가 줄면 결혼도 줄고, 결혼이 줄면 출산도 준다. 당연히 출산율이 떨어진다. 이 천박한 사상은 인류에 하등 도움이 되지 않는다.
꾸밈노동거부에 대해 알아보자.
남성이 여성에게 꾸밀 것을 강요했다는 이유로 꾸밈노동을
거부하는 이들이 있다. 좋다. 그럴 수 있다. 그런데 그러면 다른 사람에게 사랑 받지 못할 것도
각오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꾸밈이란 타인에게 사랑 받기 위한 노력을 의미한다. 사랑 받기 위해 노력하지도 않으면서 어찌 사랑 받기를 바라는가? 과거 남성이 여성에게 꾸밈을 강요했다 하여 현재 꾸밈이 불필요한 것이 아니다. 남성이 여성에게 사랑 받기 위해 노력하는 것처럼
여성도 남성에게 사랑 받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당연하다. 이런 타인이 아닌 본인을 먼저 생각하는 것은 지극히 공산주의적이다. 생산자를 먼저 생각하다 소비자에게 선택 받지 못한 공산주의처럼 본인을 먼저 생각하며 꾸미지
않다가 타인에게 선택 받지 못하고 있다. 할당제나 가산점도 이런 같은 맥락으로 접근이 된다. 경찰이 할당제를 도입하여 능력이 떨어지는 인간이 경찰 역할을 맡으면 치안 서비스가 악화되어 국민에게 외면 받는 것은 당연하다. 할당제로 들어가는 경찰을 먼저 생각했기에 치안 서비스를
받는 국민에게 외면 받는 것이다. 노력하지 않거나 능력이 떨어져서 외면 받는 것이 당연함에도 외면하지 말라 요구하고 있다. 이게 정상으로 보이는가? 할당제로 들어가는 사람 생각하다 치안 서비스를 받는 국민이 불행해지는 걸 생각지 못한다. 이러면 안 된다. 시장원리를 통한 공정한 경쟁으로 타인을 행복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경쟁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의 평등을 보장해야 한다. 그러지 않고 결과의 평등을 보장해버리면 타인이 불행해진다.
성 상품화에 대해 알아보자
성은 상품화되어야 한다. 그래야 그걸 소비하는 사람이 행복할 수 있다. 이건 남성 성 상품화와 여성 성 상품화 둘 다 해당된다. 특정 성이 상품화 되었다고 그 성의 인권이 낮아지는
일은 없다! 남성 성 상품화가 된다고 남성인권이 낮아진다는 생각을
가진 남성이 얼마나 있을 것 같나? 아마 거의 없을 것이다. 여성 성 상품화에 불편해하는 건 오로지 여성은 정조를 지켜야 한다는 것에 세뇌되었기 때문이다. 성욕은 가능한 자유롭게 발산할 수 있어야 한다. 그 성욕을 강요하는 것이 잘못된 것이지, 각자 자유의지로 행하는 것은 어느 때에도 올바르다. 그런 관점에서 인간의 행복을 위해 포르노와 성매매는
허용되어야 한다. 고백하겠다. 과거 유교의 세뇌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때에는 성매매에
부정적이었다. 그러나 벗어난 뒤에는 그것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기
어려웠다. 인간의 자유의지가 훨씬 중요하고 가치 있다 여겨졌기
때문이다.
뉴트리아 항문 봉합에 대해 아는가? 뉴트리아의 항문을 봉합한 후 풀어주면 배변이 불가능하게
되어 정신적 공황과 극심한 스트레스로 어린 새끼들을 없애 뉴트리아 멸종을 유도할 수 있다는 연구가 있다고 한다. 이와 같이 동물에게 자연스러운 욕구를 금하면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는다. 성욕이 그 정도까지는 아니어도 분명 해소불가는 스트레스를 유발하게 된다. 성 터부로 관계가 어렵고 성 상품화를 금지시켜 욕구해소를 막으면 그게 범죄로 이어지지
않을 거란 보장이 있다고 보는가? 매우 당연한 얘기를 하는 것이다. 동물이면 원래 욕구가 막히면 스트레스로 이상행동을 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이다. 인간이라고 다를 것 같은가? 성욕은 의지로 참을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의지로 뭐든지 가능하면 전국민이 채식주의를 받아드릴
수 있겠는가? 다이어트를 해야 한다고 하면 받아드릴 수 있겠는가? 그렇게 인간의 의지가 강하면 금주령을 내렸을 때
술을 마시지 않았겠지. 일시적으로 욕구를 참을 수는 있어도 그게 쌓이고 쌓이면 강한 스트레스가 된다. 그 스트레스로 이상행동을 할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그러니 가능한 인간의 욕구를 충족하여 행복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정상이다. 욕구를 인정하고 좋은 방향성으로 안내하는 것이 올바르다. 성범죄보다 성 창작물이나 성매매가 낫다. 왜 이걸 모르는가? 한국이 자유주의 국가라면 본격적으로 포르노와 성매매의 합법화에 대해 논의를 해야 할 것이다. 우리 모두 이제 유교의 세뇌에서 벗어나야 한다.
열등주의 전파에 대해 알아보자.
여성주의가 여성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치면서 여성의
비율이 높은 교육계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여성주의는 주관적인 여성의 이익을 여성인권이라 말하는 사상이다. 여성이 이익이라 생각하는 열등함인 약한 의지나 강한 수치심을 남성에게까지 세뇌하기 시작했다. 본래 미성년 남성은 성년 여성과 관계를 맺어도 큰
문제가 없었다. 미성년 남성에게는 성적 자기결정권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성년 여성이 성적 자기결정권이 없는 것처럼
미성년 남성에게도 성적 자기결정권이 없는 것처럼 교육하고 있다. 미성년 여성에게 주입하던 열등함을 미성년 남성에게까지 주입하고 있다는 것이다. 최근 충격 받은 일이 있다. 본래 남성은 성추행을 당하면 곧바로 반격을 하거나
신고를 하는 것으로 대응해왔다. 그런 것에 대한 자유의지가 충분했다. 그런데 최근 어떤 남성이 기숙사에서 모르는 남성에게 성추행을 당하자 반격하거나 신고하는 것이 아니라 깜짝 놀라 가까운 카페로 도망쳐 울면서
인터넷에 성추행을 당했다며 호소하였다는 글을 본 적이 있다. 이게 뭔가. 의지가 약한 남성이 잘못되었다는 게 아니다. 의지를 약하게 만든 게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여성을 열등하게 하던 여성열등주의가 여성을 열등하게 하는 것을 넘어서 남성마저도 열등하게 만들고 있었다. 돌아버리겠다. 여성이 열등하게 되었다고 남성도 열등하게 만들 것이
아니라, 여성을 열등하지 않게 해야 한다. 여성이 성추행을 당하면 바로 맞대응하고 신고할 수
있는 의지를 키워줘야지, 그러지 않고 남성의 의지를 약화하면 어떻게 하나. 억압받고 있던 여성과 억압받지 않는 남성이 있으면 여성이 남성처럼 억압 받지 않도록 하는 게 정상 아닌가. 아예 그냥 전국민 장애인화를 목적으로 하고 있는
건가? 이러면 안 된다. 강해질 수 있는 인간은 강해져야 한다. 강하지 않은 사람이 어떻게 선천적인 약자를 돌보나. 정상인을 장애인으로 만들면 정작 도움이 필요한 장애인이
도움을 받지 못한다. 약자는 자신을 돌보는 것에 벅차기 때문에 강자가 되지 않고서는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는 약자를 돌볼 수 없다. 정녕 약자를 위한다면 강해질 수 있는 인간은 강해질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자유주의나 자본주의에 맞서 사회주의나 공산주의가
옳다고 주장했던 근거에는 도덕성이 있다. 그렇다면 그 도덕성은 어디에서 온 것이겠는가? 당대 사람들이 느끼는 옳고 그름은 무엇을 근거로 하고 있었겠는가? 그야 당연히 그 당시 과거 종교의 도덕이다. 유교나 기독교나 불교 같이 말이다. 이런 과거 종교는 인류열등주의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인간은 열등하므로 우월한 종교의 가르침을 따르거나
우월한 신에게 복종해야 한다. 이 교리를 인간에게 강요하는 것으로 사회를 유지했다. 그런 식으로 본인의 자유의지보다 타인의 의지를 우선시하는 이타적인 인간이 양성되었다. 모든 자유의지는 개인에게 있어 가장 큰 이익이고, 자유의지가 아닌 행동은 개인에게 있어 이익이 아니기에, 자유의지여부에 따라 이기주의와 이타주의가 달라진다. 이런 관점에서 종교의 이익을 위해 행동하는 것은
이타적이다. 과거 종교의 도덕성에서 나타난 사회주의도 같은 형태를
띤다. 사회주의가 주장하는 올바름을 인간에게 강요하는 것으로
사회를 유지한다. 질서강요가 사회주의의 본질이다. 선천적인 인간의 자유를 중시하는 자유주의는 선천적인
인간의 성질에 맞추고, 후천적인 인간의 질서를 중시하는 사회주의는 후천적인 인간의 성질에 맞춘다. 여성주의의 경우 후자다. 주관적인 여성의 손익으로 여성인권여부를 결정하는 이 사상은 지극히 사회주의적이다. 이와 비슷하게 후천적인 인간의 성질에 맞추는 사상이
보통 채식주의나 비폭력주의나 동물보호주의 따위다. 이런 것들은 과거 종교의 사상과 다를 바가 없다. 불교가 보통 육식금지와 폭력금지와 살생금지 차원에서 원조 격에 해당할 것이다. 동물보호주의에 대해 잠시 말해보자. 인간 개인이 특정 종을 좋아하는 것은 좋다. 어떤 인간이 고양이나 개를 다른 동물보다 더 좋아할 수 있다. 원래 인간은 동물을 차별하기 때문에 그건 당연하다. 익충은 살리고 해충은 죽여왔다. 인간에게 이로운 건 우대하고 해로운 건 천대했다. 그러니 귀여운 동물만 좋아하며 보호하자 주장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그 귀여운 동물 보호를 다른 사람도 당연히 해야 할 도덕적인 것으로 만드는 것은 잘못되었다. 인간이 특정 종을 좋아하는 것은 취미의 영역이지
도덕의 영역이 아니다. 한국에서 개고기를 먹는 것은 자유의 영역이지 전통의 영역이 아니다. 개인적으로 굳이 개를 먹을 필요는 없다 보지만 자유주의 국가에서 그걸 강요하는 것은 부당하다
본다. 이와 같이 사회주의 계열의 도덕성을 주장하는 사상은
전부 과거 도덕을 근거로 하고 있다. 그러니까 극단적인 것도 도덕적이라 포장하며 활개칠 수 있는 것이다. 육식이 잘못되었다며 고기 집에서 행패를 일삼는다거나 폭력이 잘못되었다며 병역회피를 한다거나
특정 동물을 보호해야 한다며 사유지에 침범하여 음식을 놓고 도망간다거나 하는 등의 행동을 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이 도덕적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뭔가 올바른 걸 하는 것 같음에도 결과가 좋지 못하게
나오는 것은 과거 종교의 도덕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과거 종교의 도덕이기 때문에 올바른 것 같으면서 과거 종교의 도덕이기 때문에 좋지 못한 낡은 결과가 나온다. 이럼에도, 과거 종교와 그 종교에서 파생된 사상들이 도덕성을
갖춰 횡포를 부리고 있음에도, 현대 사상인 자유주의와 자본주의는 자유방임주의나 금전만능주의 같은 천박한 사상에 영향을 받아 제대로 된 도덕성을 갖추지 못해 이런 낡은
사상들에 아무런 대응도 못하고 부도덕하다며 공격받고 있었다. 말하고 싶은 것이 있다. 도대체 좌파와 우파가 왜 나오는 건가? 현대 세계 정치는 좌파와 우파의 대결이 아니라, 과거 종교의 도덕과 거기서 파생된 사회주의나 공산주의와
현대 사상인 자유주의와 자본주의의 대결이다. 여성주의는 이 대결에서 과거 종교의 도덕에 속한 일부일 뿐이다. 이제 여성은 이런 작고 천박한 사상에 묶여 있을 것이 아니라 보다 큰 사상에서 자유롭게 생각하고 행동해야
한다고 주장하겠다.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는 과거 질서강요로 회귀하겠다는 사상이므로 자유주의와 자본주의 같은 자유로운 사상이 도덕성을 갖추는 진보를 해야 비로소
사회가 진보할 수 있을 것이다. 역할주의가 그걸 도울 수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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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문제를 해결하는데 있어 자유를 억압하는 것부터
떠오르는 사람은 자유주의자가 아닙니다. 어느 정당이든 그건 달라지지 않아요. 셧다운제가 여야 가리지 않고 찬성을 통해 통과된 법이라는 걸 잊으면 안 됩니다. 대다수 한국인은 유교사상에 세뇌되었음을 잊으면 안 됩니다. 한국은 좌파나 우파로 구분할 것이 아니라 어떤 사상과
이념을 가지고 있느냐고 구분해야 합니다. 자유주의 진보, 자본주의 진보와 역할주의를 추구하는 사람이 정치를 하길 희망합니다.
중국은 자유의 적입니다. 그들의 사상으론 자유를 억압할 수 밖에 없어요. 중국은 한국의 적입니다. 그들의 사상으론 한국을 지배하려고 할 수밖에 없어요. 눈 앞의 이익 때문에 더 큰걸 놓쳐서는 안 됩니다. 중국과 과도하게 가까이 하는 것은 자유와 국가를
포기하는 것과 같습니다. 중국의 눈치를 보며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는 것은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겠지요.
유교는 중국에서 온 사상이고 내가 만든 건 한국에서
시작한 사상이 되겠죠. 뭐가 더 한국적인가요
변호사가 많다고 하는데 그게 정상. 시장원리에 따라 사람에게 필요로 되는 우수한 변호사는
높은 수익을 얻고 그러지 않은 변호사는 적은 수익을 얻는 게 당연한 게 아닐까 싶어요.
한국 교육이 노력하고 있다는 건 압니다. 교육계도 열심히 하고 있어요. 그럼에도 수준이 낮습니다. 인공지능에 비유하면 지금 교육은 알고리즘 설계가
아니라 데이터 입력 단계에 머물러 있는 수준이에요. 알아서 데이터를 수집하게 하는 게 아니라 직접 일일이 수작업으로 데이터를 입력하고 있는 거예요. 이걸 어떻게 포장해도 수준이 높다 할 수는 없어요. 참 안타깝죠. 노력한다고 좋은 결과가 나오는 건 아니니까요. 열심히 문제풀이능력 키워놨더니 상품화 능력이 떨어져서
자본으로 상품을 생산하고 판매하는 것으로 이익을 얻는 자본가가 감소하고 문제풀이능력으로 일할 수 있는 공무원에 사람이 몰리고 말았죠. 자본가 수 감소로 인한 취업자 수 감소나 공무원
쏠림 따위는 당연한 현상이었습니다. 기업의 경력자 선호도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학생은 문제풀이능력을 갖춘 반면 경력자는 기업에서 문제해결능력을 배웠기 때문에 문제해결능력을 갖췄을 확률이 높기 때문입니다. 경력자를 신입대우로 써먹기 위해서 그런 걸 희망한
기업도 있었겠지만요. 이런 현상은 그냥 그렇게 교육했으니까 그런 결과가 나온 것뿐이었습니다. 자동화 시대가 오면 올수록 자본가의 필요성은 늘어난다 봅니다. 이제 교육도 학생을 노동자가 아닌 자본가로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합니다. 노동자 착취를 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유능한 자본가가 나타나면 무능한 기업도 세대교체 될 겁니다. 그러면 중소기업에 가더라도 노동자 착취를 당하지
않게 되기 때문에 중소기업 기피도 줄어들 거라 봅니다.
다음 글은 구글 경쟁상대 또는 문제해결능력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