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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담] 초식화의 죄악 (3)
2020/05/17 PM 11:58 |
초식화의 죄악
모든 본질은 간결하다. 인간의 유형을 두 부류로 나눈다면 육식과 초식이다. 사냥을 하거나 농사를 짓는다. 침략을 하거나 평화를 누린다. 자유를 만끽하거나 통제를 수용한다. 경쟁에 뛰어들거나 안정을 취한다. 투쟁에 나서거나 복종을 받아드린다. 이를 이념으로 구분한다면 자유주의나 사회주의가 될
것이다. 서양에선 자유주의가 보수로 불리고 사회주의가 진보로
불리고 있다. 그래서 우파와 좌파라고도 부른다. 과거에는 극단으로 치우쳐 이념갈등이 극심했다. 그 극단이 냉전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시대가 달라져 우파와 좌파의 가치가
많이 섞였다. 우파도 복지를 하고 좌파도 시장경쟁을 활성화시킨다. 그래도 어느 쪽에 비중을 두느냐에 따라 구별은 가능하다. 이런 서양정치를 기준으로 한다면 현 야당인 한국당은
보수고 여당인 민주당은 진보에 속할 것이다. 그런데 사전적 정의에 따르면 보수는 변화를 거부하고 진보는 변화를 받아드린다. 이제껏 한국의 것을 지키자며 중국과 북한과 화합하려던 쪽은 민주당이고 서양의 것을 따르자며
미국과 일본과 화합하려던 쪽은 한국당이다. 사전적 정의만 따진다면 보수가 민주당이고 진보가 한국당이다. 쇄국과 개화, 동양과 서양. 한국정치는 관점에 따라 보수와 진보가 달라진다. 그래서 헷갈린다.
한국은 최근 민주당의 선거승리로 사회주의 쪽으로
추가 기울게 되었다. 그렇다고 사회주의 국가가 된다는 것은 아니다. 한국은 자유주의 국가다. 민주당도 자유주의 정당으로 서양이념으로 따져도 중도 보수에 가깝다. 그래서 큰 틀의 변화는 없다. 단지 상대적으로 사회주의 쪽으로 기운다는 것이다. 복지정책이 보다 더 많이 추진되고 평등사상이 보다
더 많이 용인된다. 여성주의자, 채식주의자, 비폭력주의자와 같은 소수나 약자의 주장이 받아 드려져 그에 따른 정책이 추진되거나 법률이 제정된다. 평화를 위한 정책을 추진하고 안전을 위한 통제를
강화하고 노동자를 위해 안정적인 일자리를 만든다. 간결하게 말해 초식화가 진행된다.
한국은 자유주의 국가로 육식국가에 가깝다. 육식국가였던 제국주의 국가들의 문명을 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육식화의 죄악을 경험했다. 동맹국의 요구에 민주주의를 위한 침략을 강행하고
노동자를 착취할 자유를 만끽하고 경쟁으로 상대방을 찍어 누르고 의견이 다르면 투쟁했다. 죽이고 착취하고 찍어 누르고 투쟁한다. 지금 한국이 누리는 풍요는 강자의 뼈를 깎는 노력과 약자의 피와 눈물로 쌓아 올린 첨탑이다. 그 첨탑에는 행복이 부족했다. 그래서 불완전하다. 자살률 최고수준, 출산율 최저수준. 이는 불행의 수치화다. 한국은 성장과 행복이 비례하지 못했다. 그렇다고 완전 육식국가는 아니었다. 초식국가였던 조선의 피와 문화를 이었기 때문이다. 조선은 평화를 누리며 통제를 수용하고 안정적인 삶을
살았다. 조선은 늙은 초식국가였다. 그들의 문화를 이은 한국은 예와 효를 중시하고 선하게
살려고 노력했다. 한국만큼 치안이 좋은 국가가 어디 있던가? 그런데 초식국가의 결점도 고스란히 물려받았다. 낮은 서열은 높은 서열에게 복종하게 만들었다. (육식의 복종과 초식의 복종은 다르다. 힘으로 복종하게 하느냐, 도덕으로 복종하게 하느냐) 그들과 경쟁할 수 없게, 투쟁할 수 없게 만들었다. 무한경쟁사회임에도 관습으로 서열이 나뉘어 불평등하게
경쟁했다. 어른과 아이가 경쟁하기 어렵고 선배와 후배가 경쟁하기
어렵고 스승과 제자가 경쟁하기 어렵다. 아이가 어른 말을 거역할 수 있었는가? 경쟁이라 함은 상대방을 꺾고 넘어야 하는데 그걸 관습으로 불가능하게 만들었었다는 거다. 능력과 관계없이 경쟁상대가 결정되어 그들끼리만 경쟁하게 되었다. 이는 정치적 이유로 왜곡된 유교를 숭상하던 과거
조선의 관습이 부른 폐해다. 삼강오륜에서 삼강은 원래 없던 것이라 하더라. 이런 이유로 한국은 문명은 육식인데 문화는 초식인 기묘한 사회가 되었다. 그런 상황에서 이제 문명도 초식화가 시작되었다.
과거 한국이 경험한 육식화의 죄악이 강렬했기 때문에
그와 대비되는 초식화는 완전무결한 정의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평화, 평등, 안정. 무엇이 나쁘냐고 되물을 수도 있다. 하지만 생각해보라. 이미 역사로 우리는 초식화의 죄악을 알고 있다. 조선은 타국을 침략하지 않은 선한 국가였다. 평화로운 국가였다. 하지만 약했다. 초식화의 죄악 중 하나는 사람을 약자로 만드는 것에
있다. A는 도덕을 지키고 B는 도덕을 지키지 않는다. 그런 상황에서 B가 A를 공격하면 일방적으로 당할 수 밖에 없다. 그게 과거 조선이 제국주의 국가에게 당한 일이다. 살생을 하는 야만적인 사람들의 지위는 낮아지고 입으로만
도덕적인 선비들의 지위가 높아졌다. 도축업자를 백정이라 부르며 천대했던 것은 우리 선조의 부끄러운 과오다. (참고로 서양은 도축업자의 지위가 낮지 않다고 하더라. 어떤 나라는 되려 천민이 도축업자를 하는 것이 금지되었다고
한다.) 조선은 평화롭게 안정적으로
살며 국가의 야성을 지워버렸다. 힘과 기술을 녹슬게 만들었다. 국가 자체가 초식화가 되어버렸다. 그런 조선은 국가 자체가 육식이었던 제국주의 국가들의 맛 좋은 먹이로 전락해버렸다. 초식화된 기득권은 제대로 싸우지도 않고 나라를 팔아버렸다. 국가몰락의 죄. 이것의 얼마나 큰 죄악인가? 우리는 이미 역사를 통해 초식화의 죄악을 알고 있었다.
이런 초식화의 죄악은 문화가 초식이었던 현대의 한국
아이들도 경험하고 있는 일이다. 괴롭힘이 왜 생기겠는가? 학교 내에 강자와 약자가 왜 생기겠는가? 왜 누구는 괴롭히고 누구는 괴롭힘 당하는가? 단순히 힘과 체력의 차이인가? 아니다. 도구를 사용할 수 있는 인간이 오로지 힘과 체력만으로
그런 환경이 조성되지 않는다. 도덕으로 인해 저항하고 투쟁하는 마음가짐이 지워졌기 때문이다. 싸울 줄 모르는 인간이 되었기 때문이다. 누구는 도덕을 지키고 누구는 도덕을 지키지 않는다. 그러면 지키는 아이만 일방적으로 당하는 거다. 청소년의 흉포화는 아이러니하게도 청소년을 착하게
만들기 위한 행동이 만든 것이다. 강요된 도덕이 아이들을 약자로 만들어 다른 아이들에게 잡아 먹히게 만들었다. 별다른 고찰 없이 죄를 짓지 말라고 강요하는 도덕교육은 머리회전이 빨리 그 교육에 강하게
구애 받는 아이들을 약자로 만들어 그들의 삶을 고통스럽게 했다. 이 얼마나 가여운 일인가. 정녕 아이들을 선하고 바르게 자라게 하고 싶다면, 아이들이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게 했어야 했다. 바르지 않는 일을 바로잡고 나설 수 있는 강인한
아이들로 자라게 했어야 했다. 과거 한국인들이 불의에 맞서 싸웠던 것처럼 미래 아이들도 불의에 맞서 싸울 수 있는 사람으로 길러내야 했다. 그렇다고 도덕교육을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다. 어른들이 편하기 위해 아이들을 도덕의 노예로 만들지
말라는 것이다! 가축화시키지 말라는 것이다! 하라는 대로만 하는 인간으로 만들지 말라는 것이다! 그것이 설령 편하더라도 어려울 길로 걸어달라. 스스로 생각할 줄 아는 인간으로 교육하길 바란다. 스스로 생각해서 선을 행할 줄 아는 인간으로 교육하길
바란다.
가끔 인터넷 고민상담 글을 읽는다. 그 중 정말 별 것도 아닌 일에 스트레스를 받는
사람이 있었다. 사소한 도덕적 실수가 큰 잘못을 한 것마냥 초조하고
불안하고 괴롭다고 하소연 하더라. 가여웠다. 이미 이건 세뇌의 영역이다. 이런 도덕적 강박증이 한국 사회를 불편한 사회로
만들었다. 별 것도 아닌 일로 불편해하며 힘들어한다. 알고 있지 않나. 이건 누가 상처 입을 지 몰라요! 저건 도덕적이지 못해요! 이 따위 불편하단 의견으로 한국의 개그는 죽었지
않았나. 무엇으로 사람이 웃을 수 있고, 개그가 어떤 역할을 하는지 일말의 고찰도 하지 않는
이들이 세뇌된 도덕으로 불편하다 호소하여 사람들의 작은 낙마저 없애버리지 않았나. 모든 것이 불편한 그들이 가엾다. 세상이 얼마나 힘들게 느껴질까? 다른 이들의 시선으로도 고통 받은 이들은 누가 구원해줄 것인가? 인간을 약하게 만들어 선을 행하게 만든다. 사소한 것 하나하나 괴롭고 고통스럽게 만들어 선을
행하게 만든다. 그것은 결코 바르지 않는 일이다. 한국은 치안이 우수하다. 그 우수한 치안은 약자의 눈치에서 비롯된 것인가? 아니면 강자의 여유에서 비롯된 것인가? 할 수 없으니까 못하는 건가, 할 수 있음에도 하지 않는 건가? 사람을 약자로 만드는 것. 이것이 초식화의 죄악이다.
죄는 짓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모든 인간은 죄를 짊어질 각오를 해야 한다. 누군가 공격해오면 반격할 준비를 해야 할 것이 아닌가? 반격하다 보면 살해할 수도 있는 것이 아닌가? 도덕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줄 생각인가? 도덕을 이유로 아무 방비 없이 희생당하라 요구할
수 있는가? 자기자신뿐만이 아니다. 공동체를 위해서 죄를 짊어질 각오를 해야 한다. 공동체가 침략을 당하면 공동체를 위해 침략자를 공격할
수 밖에 없다. 그러다 살해도 할 수 있다. 그것이 부당한 일인가? 그것이 잘못된 일인가? 많은 사람들은 징병제에 대해 가볍게 생각한다. 단순하게 훈련을 받고, 경계를 서고, 휴가를 기다리는, 그런 단순한 일상을 생각한다. 심지어 숨막히던 경쟁에서 벗어나 잠시 여유를 가지는
시기라고 인식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징병제는 결코 가볍지 않다. 군인이 된다는 것은 나라를 지키기 위해 인간을 살해할 각오를 다진다는 것이다. 이것이 얼마나 무거운 책임이고 무거운 각오인지 알겠는가? 징병된 군인 본인도 의식적으로 인식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래도 공동체를 위해 적을 쏴 죽일 훈련을 하고
있다. 미사일이나 총알이 날라오면 긴장을 한다. 민간인과는 마음가짐부터 다르다. 초식화를 주장하는 이들은 이런 죄를 짊어질 각오가
되어있는지 묻고 싶다. 폭력과 살인에 반대하는 비폭력주의자들이 있다. 이들은 그들의 신념아래 양심적 병역 거부를 한다. 말이 양심적 병역 거부지, 공동체를 위해 살해의 죄를 짊어질 각오도 되어있지 않는 자들일 뿐이다. 다른 이들은 공동체의 안전을 위해 목숨을 걸어가며 싸울 때 자신만의 신념을 위해 안전한
곳에서 평화를 노래한다. 얼마나 이기적인가? 그들의 정의는 추악하다. 죄를 짊어질 각오를 하지 못하는 것. 이것이 초식화의 죄악이다.
초식화를 주장하는 이들은, 그리고 초식화를 추진하는 이들은 이를 결코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너는 너를 위해서, 그리고 우리를 위해서 죄를 짊어질 각오가 되어있는가? 육식화의 죄악은 분명 끔찍했다. 하지만 한국은 그걸로 성장했다. 침략해서 이익을 얻고 세계와 경쟁하여 이겨나갔다. 그들의 죄값으로 우리는 풍요를 누리고 있다. 초식화가 되어가고 있는 우리는 공동체의 이익을 위해
죄를 짊어질 각오가 되어 있는지 묻고 싶다. 미제에 반대하며 쇄국을 결정해 아직도 조선시대에 살고 있는 북한은 내부에서 썩어 들어가고 있다. 반미를 외치며 그들을 무작정 비난하는 자들이여, 북한이 행한 고난의 행군도 즐겨 할 수 있겠는가? 미국을 따르는 것이 죄를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미국이 부당한 요구를 하기도 할 것이다. 그렇다고 무작정 반대해서야 되겠는가? 그것이 공동체의 이익이 된다면 누군가는 해야 한다. 죄를 만들 수 있는 일을 해야 한다. 그 죄의 무게를 짊어져야 한다. 그러지도 않을 사람들이 그들을 가벼운 말로 비난해서는
안될 것이다.
지금 한국은 평화, 평등, 안정을 추구하는 정당의 정치적 승리로 전방위적인 초식화가 진행되고 있다. 조선의 문화를 물려받아 일부 초식화 된 상황 속에서
다른 영역까지 초식화가 된다는 것이다. 정치, 법치, 교육, 노동, 언론 등 여러 방면에서 초식의 가치가 커지고 있다. 나는 그것에 반대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찬성하는 영역도 있다. 그 동안 평화롭지 못하고 평등하지 못하고 안정적이지 못하지 않았나. 단지 그게 완전무결한 정의는 아니라고 말하고 싶을 뿐이다. 초식화에도 죄악은 있다. 싸울 줄 모르는 약자로 만든다. 죄를 짊어질 각오도 못하게 한다.
초식화는 아이들을 약자로 성장하게 했다. 어른의 책임을 짊어지지 않는 아이들의 권리가 인정되기
시작했다. 학생인권조례로 학생의 권리를 보장해준다. 그런데 학생의 책임은 그대로인 상황이다. 아이들을 안전한 새장 속에서 보호만 해주고 있을
뿐이다. 아이들이 피해를 입는 사건이 발생하면 아이들을 문제를
능동적으로 대처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 아니라, 문제 자체를 없애버린다. 최근 이슈 되는 아동 관련 법률이 바로 그렇다. 어린이보호구역에서 운전자가 주의할 상황이 맞지만 운전자만 주의할 상황은 아니지 않나. 성 문제도 마찬가지다. 성범죄가 일어난다고 해서 성에 대한 제약을 강화하고 있다. 이젠 아주 조선시대의 성관념으로 회귀하는 듯 했다. (이런 부분에서 조선은 초식국가란 것이 느껴진다.) 이런 것들이 아이들을 초식동물로 만들고 있다. 아이들을 약자로 만들고 있다. 초식화된 아이들이 초식화되지 않은 아이들에게 잡아
먹히게 하고 있다. 조선의 죄를 되풀이하고 있다.
초식화는 여성들을 약자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했다. 초식화가 진행되면서 여성주의자들의 목소리가 커져나갔다. 부당했던 과거의 일로 다방면에서 권리가 올라가고
특혜가 늘어났다. 그런데 그 만큼의 의무와 책임은 외면하고 있다. 어떤 여성이 남성을 깎아 내리기 위해 군인을 단순히
집 지키는 개로 비하했던 사건을 잊을 수 없다. 공동체를 위해 죄를 짊어질 각오도 없는 이들이 군인을 비하한 것이다. 평범한 많은 여성들은 그 무게를 인정하고 있다고 본다. 그런데 그러지 않은 여성들도 있다. 그리고 그러지 않은 여성들이 여론을 흔들고 있다. 제 앞의 이익만 생각하지 공동체의 이익은 안중에도
없다. 여성이 죄를 지으면 옹호하고 남성이 죄를 지으면
필요이상 비난한다. 성별로 세상을 바라보고 있다. 그런 관점으로 나타나는 감성적인 주장이 어떤 사회적 파장을 일으키는지는 관심도 없다. 감성적인 주장을 펼치고 감성적인 법 제정을 요구하고 감성적인 법 판결을 기대한다. 판사가 여론이 무서워서 사건을 바꾼 것은 참 놀라운
일이었다. 이게 정상으로 보이는가? 대중은 어리석은 것이 아니다. 무책임할 뿐이다. 이성이 없는 사회는 책임지지 않는 사회와 다를 바
없다. 이런 현상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여성이 남성 수준의
책임을 짊어질 필요가 있어 보인다. 공동체의 이익을 위해 죄를 짊어질 각오를 할 수 있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가벼운 말로 감성적인 주장을 펼치며 사회적 혼란을 초래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들의 목소리에 죄의 무게를 달아줄 필요가 있다.
앞으로 미래가 어떻게 될지 확신할 수 없다. 그 누가 올해의 현상을 예상했을까? 전쟁이 없더라도 지금처럼 평화로운 사회가 지속되리라는
보장은 없다는 것이다. 언제 어느 때에 싸우게 될지 모른다. 언제 어느 때에 죄를 짓게 될지 모른다. 그런 상황에서 별 다른 고찰 없이 사람을 약하게 만드는 초식화 무분별하게 추진한다면 앞으로 어떻게 되겠는가? 조선의 실수를 되풀이할 셈인가? 가해자와 피해자가 있다. 이 중 피해자에게 잘못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피해자를 약하게 한 자는 잘못이 있다. 한국 호랑이의 이빨과 손톱을 뽑아버린 뒤 야생에
풀어놓았다. 그 호랑이는 다른 동물에게 공격 당해 죽었다. 그렇다면 그건 누구의 잘못이겠는가? 지금 한국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호랑이를 우리에
가두거나 야생의 터전 자체를 없애버렸다. 그게 올바른 방식인가? 좋다. 그렇게 해서 호랑이의 안전이 보장되었다. 하지만 그건 한국 호랑이만 약해지게 되는 결과를
낳는다. 그런 식의 해결방법은 다른 지역의 동물에게 잡아
먹히게 만든다. 인간은 동물이다. 포식동물이다. 싸울 줄 아는 동물이다. 한국인을 그런 인간끼리의 생존경쟁에서 도태시키고
싶지 않다면 더 이상 한국인을 약하게 만들지 말아주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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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여기까지 다시 정리해야 할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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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담] 배달독점사태, 공정경쟁의 길 (2)
2020/04/27 AM 12:00 |
배달독점사태, 공정경쟁의 길
배달업계의 전망은 밝습니다. 시대는 온라인으로 흘러갔습니다. 오프라인 강자였던 대형마트들이 적자신세를 면하지
못했습니다. 그런 와중에 코로나 사태까지 겹쳐버리니 배달하지
않던 음식점도 배달을 시작했습니다. 배달앱을 보고 있으면 처음 보는 음식점이 종종 늘어나고 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밝은 전망을 가지고 있는 배달업계는 최근
독점사태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배달업계 2위와 3위를 소유하던 독일회사가 1위를 사버렸기 때문입니다. 어떤 기사에서는 배달 점유율의 99%까지 될 거라고 할 정도니… 그야말로 독점입니다. 인터넷쇼핑몰인 쿠팡과 위메프가 배달업계 경쟁에 뛰어들었지만, 아직 그 영향은 미미하다고 합니다.
독점사태에 이르게 되면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것이
독점에 쓰인 자금회수입니다. 예컨대 이런 겁니다. 초기점유율 장악을 위해 저렴한 가격으로 공급하다가, 독점한 후에는 가격을 올려 초기점유율 장악에 쓰인 자금을 회수하는 것입니다. 1000원 하던 것이 2000원 하게 되더라도 독점 때문에 선택지가 없게 되면 소비자는 구매할 수 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독점의 폐해입니다.
한국의 배달독점도 비슷하게 흘러갑니다. 이번에 독일회사인 딜리버리히어로에 인수된 배달의
민족에서 수수료 정책변화를 꾀했습니다. 정액제에서 정률제로 바뀐 것입니다. 간단히 정리하면, 수익이 낮은 소수의 가맹점은 수수료를 인하하고, 그 외 다수의 가맹점은 수수료를 인상한 것이라고 합니다. 그럼으로써 배달의 민족은 이전보다 많은 수익을 얻게 되는 것이지요. 가맹점은 노출비율에 따라 홍보효과가 달라집니다. 그래서 노출비율에 따라 광고비가 달라지는데, 동일수준의 노출을 유지하려면 이전과 비교했을 때
광고료 사용료가 급격하게 늘어난다고 합니다. 광고비가 늘어나면 자연스럽게 상품의 가격도 높아집니다. 상품의 가격이 올라가면 소비자의 부담도 늘어납니다. 결국 소비자가 이전보다 더 높은 가격을 지불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독점의 폐해입니다.
이런 사태를 방지하고자 독점금지법이라는 것이 있다고
합니다. 그 근거로 대표적인 독점 기업인 구글이나 아마존이
제재를 하고 있습니다. 물론 별다른 효과는 없습니다. 한국에도 독점금지법이 있다고 하는데 자세한 것은 모르겠지만 잘 작동하지는 않는다고 합니다. 정부의 힘이 약해서 그런다나. 정말 극단적인 상황일 때나 개입한다고 합니다. 어쨌든 배달 독점에 대한 대처가 미비한 것을 볼
때 잘 작동하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군산시에서는 자영업자들의 부담을 덜어주고자 수수료나
광고비를 받지 않는 배달 공공앱인 배달의 명수를 서비스하고 있었습니다. 이번 배달독점 사태가 터지자, 경기도에서 군산시와 협의하여 배달 공공앱의 개발을 착수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공정한 시장경제 질서를 위해 독점을 견제하겠다는
겁니다. 이외 지자체나 국회의원들도 수수료나 광고비를 받지
않는 배달 공공앱의 개발을 추진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배달 공공앱은 정부가 시장에 직접 개입하는
것입니다. 이른바 사회주의식 방식인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말하길, 「세금으로 운영되는 공공앱의 출현은 시장질서를 교란할
우려가 있다.」고 합니다. 한쪽은 세금으로 운영되고, 한쪽은 자비로 운영되니 불공정한 경쟁으로 건전한
시장질서가 교란될 우려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세금으로 운영되기 때문에 그 금액에 대한 부담은 모든 지역주민이 짊어지게 됩니다. 배달앱을 이용하지 않는 주민들의 세금도 사용된다는 것입니다. 일부의 혜택을 위해 세금이 사용되는 것은 이상하지
않습니다. 의료혜택이 필요 없는 사람의 세금도 의료에 사용됩니다. 그렇지만 배달 공공앱이 그만큼 공공의 성격을 띠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논쟁이 필요할 것입니다.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는 각각의 역할이 있습니다. 자본주의는 경쟁이 필요한 영역에서 공정한 경쟁을
통해 건전한 시장질서를 유지하여 국가발전에 이바지할 의무가 있고, 사회주의는 생존이 필요한 영역에서 안정적인 생존을 통해 건전한 사회를 유지하여 국가발전에 이바지할
의무가 있습니다. 정리하자면, 삶이 필수적이지 않은 취미의 영역에서는 경쟁이 필요하고, 삶에 필수적인 의식주 또는 의료, 전기, 통신, 수도 등의 영역에서는 생존이 필요합니다. 과연 배달앱은 경쟁의 영역일까요? 생존의 영역일까요? ‘음식’배달이므로 의식주에 들어가긴 합니다. 하지만 음식’배달’이므로 필수적이지는 않습니다. 필수적인 것은 식료품입니다. 따라서 배달앱은 경쟁의 영역이라 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정부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이겠습니까? 시장에 직접 개입하기 보다는 간접적으로 공정경쟁을
할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해주는 것입니다. 온라인 쇼핑몰의 가격비교사이트를 생각해보십시오. 상품들의 가격비교를 한눈에 볼 수 있습니다. 그럼으로써 소비자는 가장 저렴하고 평가가 좋은 상품을 구매할 수 있습니다. 그럼으로써 쇼핑몰은 그에 맞춰 건전한 공정경쟁을 하고 있습니다. 반면 배달앱은 음식배달(가격, 서비스, 배달비 등)을 한눈에 볼 수 있는 곳이 없습니다. (있을지도 모르겠는데 대중적이지는 않습니다.) 아무래도 음식을 배달앱으로 배달하게 된지 오래되지 않았기 때문인 듯 합니다. 원래는 전단지가 익숙했던 걸로 기억합니다.
음식배달은 단계별로 홍보의 범주가 넓어졌습니다. 각각의 음식점에서 따로 홍보하는 것.(전단지 등) 프랜차이즈에서 가맹점들을 홍보하는 것.(방송 광고 등) 배달앱에서 가맹점을 홍보하는 것.(배달앱 자체 홍보 등) 점점 홍보의 범주가 넓어지면서 소비자는 선택의 폭이
넓어지고, 공급자는 공정경쟁의 토대가 마련되었습니다. 앱에서 소비자의 평가를 보고 음식점을 골라서 먹을
수 있는 환경이 탄생한 것입니다. 그 동안 전단지를 보고 주문했던 시절을 생각해보면 정말 많이 편해지고, 정말 많이 공정 경쟁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배달앱 자체의 경쟁은 토대가 마련되지 않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배달독점이라는 사태가 발생했던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본래 배달은 음식 해먹기 귀찮거나 시간이 없거나
요리실력이 떨어져 맛이 없을 경우 주문하게 됩니다. 그런 부류가 이용하는 서비스기 때문에 한번 이용하는 배달앱에서 계속 이용하는 편입니다. 귀찮으니까 다른 곳을 알아보기 보다는 그냥 주문을 하던 곳에서 주문을 하는 겁니다. 그래서 후발주자가 나와도 고객유치가 쉽지 않습니다. 온라인 쇼핑몰이라면 가격비교사이트에서 가격비교우위를
통해 가격으로 승부 볼 수 있는데, 배달앱의 경우 그것도 어렵습니다.
따라서 음식배달 가격비교사이트가 등장해 배달앱에서
제공하는 쿠폰이나 서비스, 음식가격, 음식메뉴, 배달비 등의 정보가 포함된다면 후발주자들이 다른
방식으로 승부하여 공정 경쟁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할 수 있을 거라 봅니다. 예컨대 수수료나 광고비가 적은 배달앱이라면, 음식가격을 낮추거나 양을 늘려도 무방할 것입니다. 음식점 입장에서 배달앱 마다 가격이나 양을 조절하는
것은 까다로운 일입니다. 그래도 배달앱과 협의 하에 배달앱의 대표 음식점이 된다면, 다소의 편차는 감내할 수준이라 보고 있습니다. 애초에 이런 것이 공정경쟁의 효과 아니겠습니까? 가격비교가 되어야 가격경쟁에 나서서 소비자의 선택권이
늘어나고 후발주자의 승부처도 생기는 것입니다. 어느 배달앱은 한식에 강하거나 하는 방식도 괜찮을 것입니다. 어느 배달앱은 가격이 낮다, 어느 배달앱은 양이 많다는 식의 이미지 효과도 노려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면서 자연스럽게 독점도 견제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전 어떤 배달앱에서 가맹점에게 경쟁사 아이디를
요구하여 논란이 일어난 적이 있습니다. 다른 배달앱을 견제한 겁니다. 이런 것을 보았을 때, 배달앱에 있는 정보를 공개하지 않으려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냥 있으면 경쟁할 필요 없이 독점적 지위를 유지할 수 있는데, 뭣 하러 공개하려 하겠습니까? 여기서 국가가 해야 할 일이 있는 겁니다. 모든 배달앱이 서비스에 대한 정보를 공개할 의무가
있도록 명시하십시오. 그렇게 규정을 정해 가격비교사이트의 출현을 유도한다면, 배달앱의 공정경쟁으로 배달독점사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객관화가 부족한 음식평가란에 불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평가는 맛있다고 하는데, 직접 먹어보면 영 아니었던 경험이 상당합니다. (아마 그런 경험은 다른 사람들도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각 배달앱의 정보를 한눈에 볼 수 있는
가격비교사이트에서 나오는 평가들을 두루두루 살피면서 정보를 총합해 자신에게 맞는 음식점을 찾아 실패를 줄이고 싶습니다. 배달앱의 이용자로써 한국배달업계가 공정경쟁의 길을
걷기를 바라며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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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 좀 차려야겠어요. 대강 대강 사니 실수를 했네요. 멍 때리다 몸 다치고 멍 때리다 마음 다쳤네요. 뾰족한 것이 박혀 발에 구멍이 났어요. 피가 줄줄. 아, 뭔가 좀 해봐야지. 가능하면 많이 써볼게요.
저는 바보가 아닙니다. 제가 뭘 쓰고 뭘 주장했는지 알고 있습니다. 지금 상황이 어떤지도 압니다. 제가 주장했던 것들이 놀라울 정도로 현실화되고 있어요. 사실 주장하면서도 쉽지는 않을 거라 봤어요. 미세먼지 감소나, 중국 공산당 몰락이나, 무교의 정치세력화나, 사상의 노화 대처나 쉽지가 않은 일들이죠.
근데 놀랍게도 코로나 사태가 발생하면서 전부 해결됐네요. (코로나 사태의 옳고 그름은 일단 제쳐 두고 현상
자체만 볼게요.) 정말 미세먼지가 싫었어요. 목이 칼칼하고 답답하고 먼지냄새도 짜증나고. 이해할거예요. 정말 싫었어요. 그래도 별 수가 없었어요. 중국은 자기 책임도 인정 않고 오리발만 내밀고 있었죠. 한국이 나사와 협력해서 원인분석 한다고 하니 그제서야
반응만 하더군요. 그런데 보세요. 코로나 사태로 중국이 공장을 멈추자 한국의 공기가
맑아졌어요. 봄만 되면 날라오던 미세먼지 문자도 오질 않았어요. 대신 뭐 코로나 문자를 많이 받았지만요.
중국 공산당의 일대일로가 싫었어요. 전세계가가 중국화 되는 것이 정말 싫었어요. 그래도 방법이 없었지요. 다른 나라에서 돈 벌겠다고 중국 돈 받아드리는데
어찌 할 수가 없었어요. 미국이 나서서 해도 안 되는 거였어요. 우방인 영국도 중국 화웨이를 받아드리고 있었죠. 그런데 보세요. 코로나 사태로 일대일로는 완전 끝이 난 거나 마찬가지죠. 아무리 돈이 좋아도 믿을 수 없으면 거래할 수 없는 법이니까요.
한국정치가 종교에 휘둘리는 것이 싫었어요. 무교비율이 절반을 넘는데도 불구하고 무교인을 대표하는
정치인 하나가 없었지요. 무교인들도 한국의 도덕관념을 가지고 있었기에 종교에 다소 너그러운 점이 있었을 거예요. 종교과세나 종교특혜금지도 결국 외치는 사람만 외쳤죠. 정말 무교가 정치세력화 되는 건, 누가 나서서 꾸준히 활동하지 않는 이상, 아마 어려웠을 거예요. 시간이 흘러 무교비율이 더 늘어나면 결국 가능했겠지만요. 그런데 보세요. 코로나 사태로 사이비 종교와 국가에 협력하지 않는
종교의 이미지는 끝장난 거나 마찬가지죠. 종교에 대한 여론이 워낙 좋지 못하다 보니 정치인들도 이를 활용하기 시작했어요. 드디어 무교의 정치세력화가 시작된 거죠. 이번 선거 결과에 이 종교도 큰 영향을 미쳤을 거라 봐요. 어느 정당이 그 종교를 지지하는지는 명백했으니까요.
인류의 숙제 중 하나가 바로 사상의 노화라고 봤어요. 본디 인류는 정보의 연속성이 불안전했기 때문에 사상이
노화되기가 어려웠어요. 거기에 전쟁, 재해, 기아 등의 문제로 인류의 수명도 짧았죠. 하지만 인터넷의 등장으로 정보의 연속성이 보장되고, 과학의 발달로 전쟁, 재해, 기아에 대처가 원활하게 이루어졌어요. 그러니까 사상의 노화는 필연적이게 되었다고 생각하여, 연령불문하고 언제든지 변화할 수 있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지요. 쉽지는 않았어요. 선진국이라 불리는 국가들조차 늙어버려서 IT기술도입이 굼뜬 상황이었죠. 상대적으로 젊은 국가인 한국도 아직 늙은 부분이
많이 남아있었어요. 그런데 보세요. 코로나 사태가 장기화되자 젊어서 빠르게 움직이는 한국이 돋보이고, 그 한국을 본받자고 주장하는 국가들이 늘어나기 시작했어요. 변화가 시작되었어요. 그게 바로 젊어지고 있다는 거죠. 아직도 굼뜨게 움직이는 늙은 국가들은 많이 죽어서
물리적으로 젊어질지도 모르겠네요.
이외에도 수도 없이 많아요. 공장이 멈추자 맑아진 하늘을 보고 환경개선의 목소리가
커졌지요. 게임중독을 내세웠던 WHO는 코로나 사태 대처 미흡으로 이미지 박살이 났죠. 게임 중독을 외치던 이들이 집안에서 게임을 하라고
말하고 있죠. 웃었어요 저는. 개인적으로 마음에 들지 않던 마약과 담배가 코로나에
취약하죠. 조선이 늙어서 망했던 것처럼 일본도 늙어서 망하게
생겼죠. 한일관계 또한 변화하기 싫어하는 그 보수적인 태도가
원인이라 보고 있습니다. 과거의 영광을 잊고 과거의 실수를 인정하여 새로운 관계정립이 필요하다는 것이지요. 변화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이번 기회에 각성하고 젊어져야 관계도 개선될 듯합니다.
그 동안 공산독재국가에 투자하는 것이 꺼림칙했었는데
코로나로 공산국가의 행태를 알게 되었죠. 감정적이어서 쉽게 선동되고 극단으로 치달아서 상대하는데 피곤해요. 동양의 공산주의는 서양의 제국주의 침략에 맞서면서 선택된 것이기 때문에 지극히 민족주의적인
성향을 띠고 있지요. 민족끼리 뭉치고, 민족의 자존심을 건드리면 불같이 화내고. 소중화사상이라고도 하더군요. 중화사상에 영향을 받아서 자신들이 가장 우수한 민족이라 생각하는 것. 해당정보 예시에는 한국 일본 베트남이 있네요. 감정적이기 때문에 정보의 진위여부도 생각하지 않고
감정대로 행동해요. 그나마 한국은 팩트체크니 교차검증이니 하는 판인 듯 한데, 감성정치나 감성법치를 보면 아직 아쉬운 점이 많지요. 감성적으로 행동하는 것은 좋지만, 이성의 필요성도 꼭 알아두었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연방제 같은 방식으로 북한과의 통일을 바라지
않았어요. 북한정권이 붕괴되어 민주화가 되어야 통일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어요. 그게 쉽지 않다고 생각했었는데 코로나 사태가 터지자, 북한정권이 흔들리고 붕괴조짐이 보이기 시작했어요. 잘하면 올해 통일도 가능할지도 몰라요. 통일에 관계된 다른 강대국들이 코로나로 흔들리고
있는 상황이라 간섭할 여유가 없기 때문에 보다 쉽게 가능하겠지요. 정말 이 타이밍 아니면 통일은 언제 될지 몰라요. 전력으로 북한 사람들을 회유하여 내부붕괴를 유도한 뒤 점진적 통일을 시도해야 된다고 생각해요. 저는 민주주의자를 지지했죠. 잘되고 있지요. 한국이 잘되길 바랐지요. 잘되고 있지요.
정말이지 사상의 노화 대처나 환경보호 대해 주장하면서도
그게 사람이 죽는 것으로 해결될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어요. 인류의 생존과 번영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애초에 고려대상도 아니었어요. 그런데 환경문제나 사상의 노화문제나 공산당 문제나 종교 문제 따위는... 객관적으로 봐서 코로나 아니었으면 해결 불가능했을
거예요. 여러 가지 이해관계가 달려있는 문제니까요. 참. 이게 지금 말은 못하는데 정말 더 많아요. 어떻게 이렇게까지 입맛에 맞는 상황들이 연속으로 나타나는지 모르겠네요. 사실 저번 한달 동안 글을 쓰지 않았던 것이 코로나
사태에 놀랐기 때문이었어요. 기획에 관련된 글을 쓸 생각하고 있었는데, 코로나 사태가 터지고 나니까 뭔가 좀 허탈해서 그냥 관뒀죠. 뭔가 이상했거든요. 어디까지 제 입맛에 맞는 상황들이 연출될 건지. 코로나가 자연발생인지- 사고인지- 사건인지 확실하게는 모르겠지만…(개인적으로 사건 같습니다. 유전자 조작여부에 초점을 두는 사람도 있는데, 거기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의도적 살포이냐 아니냐에 초점을 맞춰야 합니다. 일루미나티 얘기가 많은데 국가대응을 보면 거기일
확률은 낮다고 생각하네요. 일반인도 알고 있는 집단을 각국 정부가 모를 리 없다고 생각해요.) 정말 흥미로운 세상이 왔네요. 그리고 그 동안 개인적으로 실험하는 게 있었는데, 작년엔 어느 정도 성과를 거뒀어요. 올해도 시도했는데 어느 정도 성공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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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담] 소년범죄, 어른의 시기 (2)
2020/04/12 PM 11:16 |
소년범죄, 어른의 시기
「아이의 잘못은 어른이 책임을 진다. 하지만 어른의 시기는 언제든지 바뀔 수 있다.」
최근 파렴치한 소년범죄들이 줄을 잇고 있어 소년범죄자들의
처벌을 바라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무면허 사고를 일으킨 촉법소년의 SNS는 죄책감이 없는 듯한 발언을 하여 공분을 사기도 했지요. 강간 등의 강력범죄를 일으키고 있음에도 아이라는 이유로 큰 처벌은 받지 못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예부터 이런 현상이 있었기 때문에 소년법에 대한
개정문제는 꽤 오래 전부터 논의되어왔지만 별다른 대책이 없는 상태입니다.
이런 현상을 보고 소년범죄가 늘어나는 것이 아니냐는
불안감을 느끼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는 촉법소년이 일종의 면죄부이기 때문입니다. 농담조로「어릴 때 죄를 지었어야 했는데」, 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검색해봤습니다. 소년범죄는 현재 어떠한가?
1. 청소년 범죄는 10년새 폭행사건이 4배 증가 ‘2019 사법연감’
2. 소년범죄자의 수는 76000명(2016년)에서 72759명(2017년)으로 점차 감소 ‘2019 청소년 통계’
3. 소년사범 형사사건은 104998건(2010년)에서 75197건(2019년)으로 점차 감소 ‘대검찰청 통계’
소년범죄는 줄어들지만 소년범죄 중 강력범죄의 비율을
높아지고 있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A변호사의 의견에 따르면, 「청소년 범죄의 흉포화는 인터넷의 발달로 인한 범죄접근의 용이성, 사회적 유대의 악화, 가족 구성원의 붕괴 등 다양한 원인에 기인한 것」이라고 합니다. 일부 동의합니다.
단순히 수치만 보면 현대의 아이들이 과거의 아이들보다
보다 흉포하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하지만 과거엔 정보공개 자체가 되지 않아 통계에 잡히지 않은 범죄들이 많았을 겁니다. 예전에는 아이들 사이의 싸움으로 끝날 문제가 지금은 형사사건으로 이어지고 있으니까요. 그러니 통계의 수치만으로 판단하는 것은 인식의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사소한 사건도 통계에 잡힘에도 전체 소년범죄가 줄어든 지금, 현대의 아이들은 분명 과거보다 순해졌습니다.
그럼에도 이러한 현상을 방치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다수가 순해질수록 소수의 폭력은 보다 더 흉포화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한 해결은 크게 세 가지가 있습니다.
1. 소년범죄도 성인범죄와 같이 처벌하는 것
2. 보호자가 대신 처벌받는 것
3. 소년의 기준을 바꾸는 것
1은 개인적으로 부정적입니다. 어른이 아이를 책임진다는 이치는 바뀌지 않을 거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을 어른처럼 대하고 싶다면, 아이들에게 어른의 권리를 줄 수 있는 방향을 먼저 생각해야 될 것입니다.
2는 연좌제 논란이 있을 것 같습니다. 보호자가 처벌받지 않기 위해 피보호자의 범죄사실을 숨기거나, 피보호자를 억압할 가능성이 있다고 봅니다.
3이 가장 적절하다고 봅니다. 어른이 아이를 책임지는 것은 바꿀 수 없지만, 어른의 시기는 언제든지 바꿀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언제부터 어른이라고 부를 수 있는 걸까요? 신체능력만으로 아이와 어른을 구분 지을 수 있지 않을 것입니다. 현대사회에서의 힘은 단순히 신체능력만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보다 선진화될수록 주먹보다 법이 더 무거워질 것입니다. 따라서 선진화된 사회일수록 신체능력이 아닌 다른
기준으로 어른이라 인식함이 옳을 것입니다. 저는 그 기준을 바로 정보라고 생각합니다.
사람에게 정보는 크게 세 단계가 필요합니다. 첫째, 정보공급. 둘째, 정보제어. 셋째, 정보통제.
아이에겐 아이수준의 정보공급이 필요하고, 그 공급된 정보에 맞게 제어가 필요하고, 그 수준에 맞는 통제가 필요합니다. 예컨대 이런 겁니다.
1. 정보공급, 아이의 교통사고를 막기 위해서는 횡단보도와 신호등에
대한 정보의 공급이 필요합니다.
2. 정보제어(내부), 횡단보도를 건널 때 필요한 행동을 가르칩니다. (신호등 확인, 길 좌우 확인, 손을 들고 건널 것)
3. 정보통제(외부), 교육된 지침을 지키지 않았을 때, 교사가 혼을 냅니다. (사고가 발생하면 생기는 비극에 대해 설명한다거나)
이렇듯 어떤 정보도 공급이 되면 그에 따른 제어와
통제가 필요합니다. 하지만 현대는 어떻습니까? 인터넷이라는 정보의 바다는 연령과 관계없이 무차별적으로 정보를 과잉공급하고 있습니다. 어린이도 어른의 정보를 쉽게 접할 수 있는 시대라는 겁니다. 그런데 아직도 어른들의 관념은 과거에 머물러 있습니다. 아이는 정보공급을 어른 수준으로 받고 있음에도 제어와
통제는 과거의 어린아이수준이라는 겁니다. 예전이라면 어른들이나 할 수 있었던 지능적인 사기범죄가 아이들도 어렵지 않게 할 수 있는 시대가 왔습니다. 통계에 따르면 아이들의 절도범죄는 줄어들었으나, 사기범죄는 늘어났다고 합니다. 정보과잉공급이 일으킨 현상이라 보고 있습니다.
최근 유튜브를 보며 느끼는 바가 있었습니다. 어떤 초등학교 5학년 아이가 메뚜기 떼라는 재난에 맞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알고 싶다고 했습니다. 단순히 메뚜기 떼라는 정보뿐만이 아니라, 그에 대한 대처방법까지 알려달라는 이야기였지요. 아이들도 스스로 알고 있다는 겁니다. 정보는 과잉공급 되는데, 그에 따른 제어나 통제가 미비하다는 겁니다. 메뚜기 떼에 대한 대처는 어른도 마땅히 할 수 있는 게 없지만, 그래도 그 사실 자체를 대부분은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굳이 의문을 가지지 않습니다. 하지만 아이들은 모릅니다. 정보는 아이들에게까지 닿고 있지만, 그에 대한 사회적 인식은 아직도 부족하다는 겁니다.
정보공급과 제어가 없이 통제만 발생하는 상황이 보통
교육받지 못한 어른들입니다. 시키는 데로 따를 수밖에 없지요. 교육받지 못했기 때문에 지식인들에게 의존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일반적으로 말해 우민화된 상황입니다.
정보공급은 되는데 제어와 통제가 없는 상황이 지금
현대의 아이들입니다. 지식이 있는데 그에 대한 제어와 통제가 없어 악용할 수도 있는 상황이라는 겁니다. 일반적으로 말해 방치된 상황입니다.
인터넷이란 수단 때문에 아이들은 어쩔 수 없이 빠르게
어른이 되어버렸습니다. 이를 안타까워하며 아이들에게 인터넷을 접하게 하지 않을 경우 정보라는 힘을 가지지 못하여 또래 아이들 사이에서 도태되고 말 것입니다. 정보는 힘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어른들이, 정보의 부작용을 두려워하여 정보를 공급하지 않는
것은, 아이들을 약자로 만드는 것일 뿐입니다. 진정 아이들을 위해서라면, 정보공급에 따른 제어와 통제를 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시대가 달라졌습니다. 아이는 더 이상 그 옛날의 아이가 아닙니다. 인터넷으로 접할 수 있는 정보수준을 예상하여 그에
맞는 제어와 통제가 필요한 시대가 왔습니다. 지금의 교육은 단순히 지식입력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지식활용이 더 필요합니다. 압도적으로 많은 정보량에 맞서 스스로를 지키고 성장할 수 있는 기반마련이 시급한 때입니다.
정보의 양이 어른을 결정하기 때문에 과거 어른의
기준을 유지할 수 없습니다. 보통 연령 기준을 12세, 15세, 17세, 19세 정도로 나누어서 콘텐츠를 제공하고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걸 이제 바꿀 때가 온 것 같습니다. 정보량에 맞게 그에 따른 제어와 통제방식이 필요하다는
겁니다. 시대착오적인 기준은 이제 끝낼 때가 왔습니다. 아니 애들은 인터넷을 통해서 성인들의 정보를 접하는데, 공식 콘텐츠는 그대로라는 것이 얼마나 무의미한 짓인지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좀 더 세부적인 기준으로 바꾸어야겠지만, 대강 말해서 12세를 10세로 낮추고 15세를 12세로 낮추고, 17세를 15세로 낮추고, 19세를 17세로 낮추는, 현대적인 기준이 다시 정립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정보량을 기준으로 미성년과 성년을 구분 짓는다면, 촉법소년과 소년법도 개정되어야 마땅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책임에 맞게 권리도 부여해야 할 것입니다. 선거연령을 낮춰야 한다는 것입니다. 교육관련 선거는 중학생부터, 전체 선거는 고등학생부터 해야 한다고 주장하겠습니다. 정보량이 어른과 아이를 구분 짓는 겁니다. 아이들도 옳고 그름은 판단할 수 있습니다. 어른보다 우수한 바둑기사를 떠올려보십시오. 지능은 14세만 되도 충분히 어른과 비견될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아이들에게 부족했던 것은 정보뿐이었습니다. 그 정보가 과잉공급 되는 시대인 만큼 아이들도 자신의
미래를 결정할 권리(선거권)가 부여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겠습니다.
어른의 시기를 정보량에 맞춰 바꾸게 된다면, 소년범죄에 대한 적절한 처벌로 소수 청소년의 흉포화를
경감하여 다수의 선량한 이들의 지지를 받을 수 있을 거라 봅니다. 어른이 아이를 책임진다는 것은 바꿀 수 없지만, 어른의 시기는 정보량에 따라 언제든지 바꿀 수 있습니다.
정보의 공급과 제어와 통제, 그리고 그에 맞는 권리와 의무와 책임. 균형 잡힌 기준이 있어야 공정한 질서가 유지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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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사태로 시민의식에 대한 자부심이 굉장히 높아져서
이번 선거 투표율이 높을지도 모르겠네요. 뭐… 진영논리가 극대화 되어서 그런 것도 있겠지만요. 사전투표율이 높은 건 그런 이유들 때문이겠죠. 세계의 시선이 한국에 모이고 있습니다. 누굴 뽑아도 괜찮으니 투표율이라도 높이는 게 좋을지도. 기권표도 투표율에 포함되지요?
이번 여름은 눈이 올지도 모르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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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담] 외부여론조작, 이성이 필요한 때 (0)
2020/03/29 PM 11:40 |
외부여론조작, 이성이 필요한 때
한국인인 것 마냥 노인 혐오, 청소년 혐오 등의 발언을 쏟아내던 사람이 중국혐오발언엔
발작하는 게 예사롭지가 않습니다. 솔직히 구역질 나요.
「한국은 누구에게 이용당하고 있는 것인가?」
혐오를 부추기는 사람들을 많이 봤습니다. 그런데 어쩌면 그 중 한국인이 아닌 사람도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외국인이 한국인인척 하면서 여론조작에 나설 수도
있다는 겁니다. 야당 지지자들이 외부여론조작에 대한 경종을 울렸기
때문에, 여당 지지자들 중에 그 현상 자체가 없을 거란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외부여론조작 자체는 있을 거라 봅니다. 위의 사례처럼 중화사상에 깊게 박혀있는 사람은 중국에
대한 모욕을 견디지 못해 유독 티가 납니다만, 그렇다고 해서 중국인만 여론조작을 하는 것은 아닐 겁니다. 개인적인 감정이나 국익을 위해 고의적으로 한국혐오를 부추기거나, 특정 국가에 대한 감정(애정이나 혐오)를 호소할 수 있겠지요.
차라리 티가 나는 사람은 그나마 낫습니다. 경계라도 할 수 있으니까요. 전문적인 집단에서 운영하는 여론조작은 일말에 티도
나지 않으면서 자연스럽게 여론조작을 하겠지요. 그 방식은 단순히「OO가 좋다, OO가 싫다.」로 끝날 것이 아닐 겁니다. 공산주의자가 반공주의를 외칠 수도 있을 겁니다. 자본주의자가 반자본주의를 외칠 수도 있을 겁니다. 내부분열로 사회불신을 만들어 혼란을 빠뜨리는 것이
목적이라면, 그 어떤 방식도 상관이 없습니다.
간단히 말해서 내편 들어주고 있는 사람이 순수하게
같은 편이라는 보장이 없다는 겁니다. 「네 말이 옳아!」라고 말하면서 뒤에선 욕하고 있을 수도 있는 것이지요. 앞에서는 반중이나 반미 또는 남혐이나 여혐을 외치면서, 뒤에서는 병신새끼들이라며 비웃고 있을 수 있다는 겁니다. 이게 얼마나 꼴사나운 일입니까? 순진한 사람들은 애초에 이런 것이 없을 거라 생각하거나, 있더라도 단순하게「OO 개새끼 해봐」로 검증하고 끝낼 뿐이지요. 이런 거 못하는 사람들은 전문가가 아닙니다. 아마 일반인이겠지요. 중화사상에 빠진 사람이나 종교에 빠진 사람이나 대체로
이용당하는 일반인일 겁니다.
한국은 유독 사기범죄가 많은 나라입니다. 그건 단순히 사기꾼이 많다는 것이 아니라, 남을 믿다가 순진하게 속는 사람들이 많다는 겁니다. 그런 나라니까, 남을 믿으니까 보다 여론조작을 당하는 것이 아닐까도
생각됩니다. 위의 사진도 앞의 세 장은 전부 한국인일거라 생각하고
분노하고 있지 않습니까? 의심하지 않고 있어요.
「관계로 자아를 유지하는 사람 = 집단주의」
한국은 감성적인 국가입니다. 그게 나쁘다는 게 아닙니다. 이건 한국문화 특성상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한국문화 중 하나가 바로 정문화지요. 한국인은 정든 사람을 아끼고 사랑합니다. 그래서 내가 아닌 남의 일에도 감정이입을 합니다. 감정이입을 하다 보니까 감성적인 행태가 나오고, 그러다 보니까 감성적인 국가가 됩니다. 개인주의자들은 「남이 나와 무슨 상관이야?」라며 신경을 끄는 반면, 집단주의자들은「남이 있어야 내가 있어.」라며 관심을 갖게 되죠. 이번 코로나 사태도 한국 특성이 두드러지게 나타났지요. 남이 있어야 내가 있다고 생각하여 타인을 배려한
사람들의 비율이 높았다는 겁니다. 대신에 그만큼 배려하지 않은 사람에 대한 혐오감도 크기 마련입니다. 나와 상관 없는 일이라며 제멋대로 행동한 사람들에 대한 비난여론이 심한 상황이지요.
정문화는 정이 든 사람을 아끼고 사랑하는 좋은 면도
있는 반면, 집단이기주의를 부르는 나쁜 면도 있습니다. 정든 사람(혈연, 학연, 지연 등)의 결점이나 죄마저 감싸주려는 것도 정문화의 특징 중 하나입니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 외의 사람들을 차별하는 것이라는 말이 생각납니다. 전부는 아니지만, 일부 동의하는 말입니다. 지역이기주의, 학벌이기주의 따위의 집단이기주의는 누군가(지역민, 동창생)를 사랑하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니까요.
정문화라는 집단주의적 문화를 공유하는 한국은 많은
사람들이 관계로 자아를 유지합니다. 네가 있어야 내가 있다는 겁니다. 스스로 자아를 유지하지 않기 때문에 타인에게 의존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이것이 유독 종교가 활발하고, 유독 맹신자들이 많은 까닭 중 하나겠지요. 관계로 자아를 유지하는 이들이 많기 때문에 인싸(관계가 많은 사람)와 아싸(관계가 적은 사람)을 구별하고, 밥도 혼자 못 먹고, 남의 눈치를 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것이 특별히 나쁘다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알아만 두세요. 한국은 감성적인 국가라는 것을. (국가로 자아를 유지하는 사람 = 전체주의, 스스로 자아를 유지하는 사람 = 개인주의)
「감성의 자유를 외칠 것이면, 이성의 필요도 받아드려야 한다.」
한국은 감성적인 국가입니다. 감성정치와 감성법치는 이제 친숙할 정도지요. 민주주의이기 때문에 감성적으로 행동하는 국민의 의향을
따른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지만, 역할이 다르기 때문에 옹호할 수도 없습니다. 대중은 무책임해도 어쩔 수 없지만, 정치와 법치는 무책임하면 안되기 때문입니다. 대표적인 감성정치가 여성주의고, 감성법치가 성인지감수성이죠.
대중은 자신의 감정에 책임지지 않고 주장합니다. 눈에 보이는 것에 우선적으로 분노하고 과한 처벌이나
과한 혜택을 요구하죠. 감성적인 것. 그것 자체는 문제삼지 않겠습니다. 단지 스스로 감성적인 것이라 인식하고, 이성적으로 생각하고 판단하여 결론을 내린 사람들의 주장을 귀담아 들을 필요성이 있다는 것을 인식했으면 좋겠습니다.
예컨대, 민식이 법이 감성적으로 만든 졸속법안이라 비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이번에 초등학생 고아를 합법적으로
등쳐 먹으려는 보험사의 행태에 감성적으로 분노하고 비판한 적이 있지요. 그 사람도 결국 정이 있는 한국인이라는 겁니다. 네가 있기에 내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는 겁니다. 이성적으로 졸속법안을 비판하는 사람마저 그런 감성적인
특성을 지니고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런지, 민식이 법이 나쁘다는 관점으로만 보려는 편향적인 모습도 가끔 보이기도 했습니다. 예컨대, 운전자의 실수가 다소(10 정도) 있었음에도 그 정도는 없는 것처럼 생각한다거나.)
보험사 사건과 민식이 법의 차이는, 감성적인 행태가 정치로 이어지느냐 이어지지 않느냐의
차이입니다. 만약에 보험사 사건 때문에 그와 관련된 감성정치적인
졸속법안이 통과된다면, 이 둘의 차이는 없습니다.
모든 한국인은 감성의 자유를 누릴 자격이 있습니다. 어떤 사건에 기뻐하고 분노하고 슬퍼할 자격이 있다는
겁니다. 단지 그만큼 이성도 필요합니다. 누군가는 이성적으로 생각하고 판단해서 행동할 필요가
있다는 겁니다. 감수성이 많은 국민들은 그 필요성을 인식하고, 자신의 감성대로 정치와 법치가 실현되지 않는다고
불만을 토로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책임지지도 않을 거면서 책임지는 사람들을 몰아세우는 일은 너무나도 잔혹합니다. 국민의 역할과 정치, 그리고 법치의 역할은 엄격하게 다릅니다. 적어도 책임지는 역할은 이성적으로 행동하길 바랍니다. 설령 감성적인 국민들에게 비난을 받더라도, 역할을 다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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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바이러스 특성이「잠복기 감염, 무증상 감염, 비말 감염, 병자와 노인 대상, 재감염, 태아 감염 등」굉장히 특이해서 인위적인 바이러스라는
의혹이 있지요. 그래서 한번 음모론도 써본 적이 있습니다. 그거 이어서 써보겠습니다.
지금 코로나 사태가 누군가 어떤 이유를 위해 인구감축을
시도하는 사건으로 가정해보겠습니다. 지금 많은 국가들이 쇄국하고 있지요. 그건 말이죠. 표적만 골라서 살포하기 적절하다는 의미도 됩니다. 특정 국가에 바이러스가 퍼지면, 다른 나라로 전파되기 쉽지 않다는 겁니다. 그렇다고 살포 자체가 불가능한 것도 아닌 것 같아요. 쇄국해서 방역을 성공적으로 했다고 평가 받는 국가들이 외부 유입으로 전염되고 있습니다. 한번 검색해보세요. 외부 유입으로 며칠 전부터 확진자가 늘어나고 있다는
기사를 볼 수 있을 겁니다. 지금 시점에서 몰래 살포하면 웬만하면 그 국가 내에서면 전염병이 돌 겁니다.
인류가 문명을 유지하면서 효율적으로 인구감축을 하는
방법은 모든 국가에서 조금씩 감축하는 것보다, 특정 국가에서 다수 감축하는 겁니다. 국가 붕괴가 일어나지 않으면 그 국가를 기준으로 다른 국가가 본받아서 다시 재건할 수 있으니까요. 그런 관점에서 보면, 특정 국가에 치사율이 높은 바이러스를 살포하는 것이
효율적일 것입니다. 어떤 기준으로 인구감축을 국가를 정할지는 모르겠습니다. 개인적으로는 환경오염이라 생각합니다만, 이번 바이러스도 시험의 일종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번 바이러스는 자본논리로 보면 방치하는 것이 효과적이지요. 생산적이 없는 병자와 노인이 주로 사망하니까요. 문제는 지나치게 효과적이라는 겁니다. 자본논리로 불필요한 인구를 포기하는 국가는 환경논리로
그런 국가를 불필요하다고 여길 수도 있겠지요. 인간성이 부족하다면서 말이죠. 어쩌면 미래로 갈 수 있는 국가가 이번에 결정될지도 모르겠습니다.
결국 음모론입니다만, 만약 특정 국가에서 변종이나 신종이 발생하여 치사율이
계속 높아진다면, 의심할 필요는 있을 것 같습니다. 모든 사람이 평범하게 생각하고 행동하지 않습니다. 의심은 필요합니다. 적어도 의심할 필요가 있는 역할은.
부자 동네는 공직자 변호도 받는군요. 놀랐어요. 정말. 돈으로 이어진 관계인지 정으로 이어진 관계인지 모르겠지만… 슬프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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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담] 한국방역의 본질, 사람대접 (3)
2020/03/22 PM 08:36 |
한국방역의 본질, 사람대접
「치사율이 높을수록 전염력이 낮다.」
올해 유행하는 코로나 바이러스는 RNA로 계속 변종이 발생한다고 해요. (전문적인 내용은 넘기도록 할게요. 여기선 중요한 게 아니니까.) 그래서 백신을 만들기가 어렵다고 해요. 모든 변종에 대응하긴 힘들겠지요. 백신이 없는 지금 세계는 무방비한 상태에서 무분별하게
전염되고 있어요. 절반 이상은 전염될 거라는 전문가의 의견이 있던
걸로 기억하고 있어요. 엄청난 전염력이죠. 감염된 사람이 많다 보니까 변종도 매우 많은 상태예요. 어떤 변종은 치사율이 높을 것이고, 어떤 변종은 치사율이 낮겠지요.
여기서 자연선택이 발생한다고 해요. 치사율이 높은 녀석은 숙주(사람)을 빨리 사망하게 만들어 전염하지 못하고 사라지게 되고, 치사율이 낮은 녀석들 중에서 전염력이 높은 녀석은
오랫동안 살아남아 널리 퍼지게 된다고 해요. 그러다 보면 지금의 감기처럼 될 수 있다고 하네요. 영국이 주장했었던 집단면역이 바로 이거였어요. 전부 감염되어서 전염력이 높고 치사율 낮은 녀석이 퍼지게 만들어 면역체계를 갖추자는 거겠죠. (자세한 건 몰라요. 지금은 철회했다고 했던가?)
그런데 이번에는 조금 다른 것 같아요. 이번 바이러스의 주요 특성을 말해볼게요. 「잠복기 감염, 무증상 감염, 비말 감염, 병자와 노인 대상」어른은 40대까지는 치사율이 1%가 채 안되었는데 70대 8%, 80대 이상 14.8%였다고 하네요. [2월 11일 중국 조사] 어린이는 4.4% 무증상, 50,9% 경미한 증상, 38.8% 보통 증상이었다고 해요. 단지 1세 미만의 영아는 10.6%라고 하네요. [3월 21일 중국 조사] 어쨌든 어린이는 거의 타격이 없다는 거죠. 아직도 그에 대한 명확한 원인은 모른다고 해요. (이런 특성을 보면 명백하게 목적성을 띈 것 같지만 일단 그 음모론은 옆에 두도록 할게요.)
앞서 설명한 것처럼 일반 상식으로는 치사율이 높을수록
전염력이 낮은 게 맞을 거예요. 그래서 시간이 흐르면 자연스럽게 진정될 거라 생각할 수 있죠. 에볼라 바이러스가 바로 그렇다고 하네요. 높은 치사율 낮은 전염력. 그런데 이번 바이러스의 특성에 잠복기 감염, 무증상 감염이 있단 말이죠. 만약에 치사율이 높은 변종이 잠복기에 감염시킬 수 있게 된다면 어떻게 되는 걸까요? 무증상에는? 지금도 병자와 노인의 치사율이 높은 상황이에요. 이미 치사율이 높은 바이러스를 잠복기나 무증상의
확진자가 옮기고 있는 상황이란 이야기예요. 잠복기와 무증상 감염. 지금보다 치사율이 높아지거나 범위가 넓어진다고 해도 전염력이 줄어들 거란 낙관적인 관측은 사실상 어려운 것이 아닐까 생각되네요. 숙주 사망 전에 감염이 가능하니까요. 에볼라 바이러스는 잠복기 감염은 없었다고 해요. 있었으면 아마….
지금 일본은 검사를 하지 않고 있는 상황입니다. 이유는 심증적으로 알 것 같습니다만, 굳이 여기서 언급하지는 않겠습니다. 어쨌든 검사하지 않기 때문에 확진자는 적은 듯 합니다만, 내부 현황파악은 아마 안될 것으로 보입니다. 그냥 방치상태죠. 어디에 누가 감염 되었는지를 모를 겁니다. 그리고 그래서 변종도 파악이 안될 거고요. 이런 상황에서 만약 잠복기 전염, 무증상 전염, 높은 치사율, 연령대 가리지 않음의 특성을 가진 변종A가 나타난다면, 아마 몰살에 가까운 피해를 입지 않을까 싶습니다. 발병 지역은 무증상을 제외한 나머지는 사망할 확률이
높겠지요. 구역자체를 격리해야 될 것입니다. 변종A의 확진자가 일본 전역을 떠돌았다면 일본 전체가, 세계를 떠돌았다면 세계 전체가 끝이 나겠지요.
검사를 하고 확진자 파악이 된 상태라면, 변종A가 나타나도 감염경로 파악 후 빠른 조치로 수습할 수 있겠지만, 그게 아니라면 통제불능 사태가 일어날지도 모릅니다.
일본이 동부역병지대가 되기 전에 검사하고 방역체계를
갖추는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
「정보독점은 동물의 통제방식.」
보통 상식으로는 내버려 두면 알아서 잠잠해지니까
각국이 좀 안일하게 대처했던 것 같습니다. 「이번에도 바이러스의 자연선택으로 감기처럼 되겠지.」, 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르죠. 그래서 방치하거나 집단면역정책을 추진했겠지요.
전세계는 크게 세 가지 선택지가 있었어요. 첫째, 한국방역. 투명한 정보공개와 국민들의 자발적 참여로 민주적인 방역체계를 구축하는 것. 둘째, 중국방역. 까만 정보은폐와 공산당의 강압적인 통제로 독재적인 방역체계를 구축하는 것. 셋째, 집단면역. 국민의 절반 이상을 감염시켜 바이러스의 자연선택으로 약화된 바이러스를 출현시켜 사회적 면역체계를 갖추는
것.
어느 국가는 방치하다가 정보공개와 정부의 강압적인
통제로 방역하려 하고 있고, 어느 국가는 집단면역을 시도하려다 상상이상의 피해가 나타날 것이라는 보고서를 듣고 다른 방식을 시도하려고 하고 있죠. 지금 상황이 매우 긴급하게 돌아가기 때문에 할 수
있는 것은 아마 다 할 것입니다.
한국은 맹목적인 신앙을 가진 확진자의 돌발행동으로
예상치 못한 피해를 입어 초기에 많은 확진자가 있던 국가입니다. 그래서 초기에 방역체계를 구축했어요. 그때 민주적인 방역체계를 구축하자고 결정을 내렸지요. 정보를 투명하게 공개하고 국민들의 자발적인 참여를
유도했어요. 확진자가 많다는 정보가 나돌면, 국민들이 통제되지 않고 폭동이 일어날수도 있었어요. 그럼에도 국가는 국민을 믿었습니다.
「정보를 공개하고 설득하면 말이 통할 것이다.」
국민을 말이 통하지 않는 동물로 취급한 것이 아니라, 말이 통하는 사람으로 대접해줬다는 거예요. 이는 외국인도 똑같이 사람대접 해줬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중국 입국을 막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
같은 불상사가 일어났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그래서 정부를 비난하고 있지요. 「지금 한국 방역은 창문을 열어놓고 모기를 잡는 것과 다르지 않다!」아무리 집안에서 모기를 잡아도 창문 열어놨으니 의미가 없다는 거예요. 그런 논리로 지금 확산된 지역들의 출입을 막으라고
요구하고 있어요. 일견 들으면 일리가 있어 보이죠. 하지만 결정적인 차이가 있어요. 외국인은 모기가 아니에요. 말이 통하는 사람이에요.
물론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도 있긴 해요. 맹목적인 신앙으로 바이러스에 안전할거라 믿는 사람도
있지요. 하지만 대부분은 말이 통하는 사람들입니다. 반공주의자들이 많기 때문에 「중국인은 말이 통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할지도 모르겠어요. 저도 중국의 공산독재가 싫기 때문에 중국과 가까이
하고 싶지 않아요. 중국 공산당이 하루 빨리 몰락했으면 좋겠어요. 그것이 설령 반제국주의에서 비롯된 것이라도 말이죠. 시대가 어느 때인데 아직도 반제국주의라니. 중국도 진작에 쇄국 포기하고 개방해서 일대일로(자본식민지)라는 제국주의놀이하고 있지요. 지금 동양에서 반제국주의 주장하면서 쇄국하는 곳은 북한 말고 모르겠습니다. 반미 하던 북한조차 미국과 대화 중에 있지요. 그러니 반제국주의에 너무 집착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감정이 아닌 국익을 위해서 행동했으면 좋겠습니다.
그것과 별개로 중국인도 사람입니다. 말이 통한다고요. 주관적으로 봤을 때, 감정적인 편견이 있을 수 있어요. 하지만 객관적으로 생각하면 의도적인 살포가 아닌
이상, 지 살기 위해서라도 한국방역에 협조하기 마련이에요. 외국인에 대한 치료비로 세금 나가는 걸 아까워할
수도 있어요. 자세히는 모르지만 상호호혜원칙에 따라 한국이 무료로
치료해주면 외국도 무료로 해주겠지요. 자세히는 모르니 넘길게요. 어쨌든 외국인의 출입을 금지하지 않은 것은, 한국이 외국인도 사람으로 대접해줬기 때문입니다. 민주적인 거예요. 뭐 믿다가 뒤통수 맞을 수도 있겠지만요. 지금 한국은 한국인도 외국인도 사람대접 해줬는데, 사람처럼 행동하지 않은 일부 때문에 전파된 겁니다. 그러니까 한국인이냐 외국인이냐가 중요한 게 아니에요. 사람이냐 아니냐가 중요한 거죠.
지금 정부가 모든 정보를 투명하게 공개했다고는 생각하진
않아요. 하지만 최대한 투명하게 공개했다고는 생각해요. 그러니까 국민들이 믿고 질서 있게 따르고 있는 거겠죠. 외국인들도요. 민주적으로 하다 보니까 말을 듣지 않는 집단들이
집단행동을 하겠다고 나서도 벌금 이상의 제재를 하지 못하는 것도 결국 사람을 믿어서인 것 같아요.
사실 사람이 살면서 사람대접 받기가 쉬운 게 아니에요. 부모는 아이들에게 갈 정보를 통제하죠. 교사는 학생들에게 갈 정보를 통제하죠. 회사는 직원들에게 갈 정보를 통제하죠. 국가는 국민들에게 갈 정보를 통제하죠. 왜냐하면 그래야 편하기 때문이에요. 보호자와 피보호자로 예를 들게요. 보호자는 피보호자에게 해가 될 가능성이 있는 정보를
통제해두는 것이 편하겠죠. 괜히 전달했다가 통제불능상태로 빠지면 곤란하거든요. 피보호자가 스스로 생각해서 판단하게 만드는 것보다, 그냥 정보 자체를 전달하지 않는 것이 훨씬 편하고 안정적입니다. 하지만 그건, 사람으로 대접하는 것은 아니겠지요. 어쨌든 여러모로 통제하는 입장에서 정보는 독점해야 편합니다. 권력자도 같아요. 그래서 지금까지 대부분의 기득권은 정보를 독점해왔어요.
저번에 방역을 하면서 무수히 늘어나는 확진자들을
보고 국민들이 국가통제에 따르지 않고 폭동이 일어날 수도 있었어요. 생필품을 사재기를 하고 총과 총알을 사서 대비하는, 그런 일이 있을 수도 있었겠죠. 그래서 일반적으로는 정보를 투명하게 공개하지 않아요. 그런데 이번 한국은 달랐어요. 국가는 국민을 믿고 정보를 투명하게 공개했고, 국민은 국가를 믿고 질서를 유지했어요. (전부는 아닙니다.) 많은 국가들이 한국방역을 보고 놀란 것은 우수한
의료인들, 뛰어난 IT기술도 있겠지만, 무엇보다 민주적이었다는 것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지금 한국방역은 부모가 아이에게 포르노를 알려주거나, 교사가 학생들에게 학교정보(예시가 뚜렷하게 떠오르지 않음)를 공개하거나, 회사가 직원들에게 연봉테이블과 직원들 연봉을 공개하는
것과 비슷한 수준이 아닐까 싶어요. 국가가 국민을 믿고 정보를 공개했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짐작했으면 좋겠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정부가 한일이 없고 의료인들이 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한국 의료인은 우수한 것이 맞아요. 한국 IT기술이 우수한 것이
맞아요. 한국 국민이 우수한 것이 맞아요. 그렇다고 정부가 한 일이 없는 것이 아니에요. 국민을 믿고 투명하게 정보를 공개했잖아요. 정보를 투명하게 공개하여 국민과 방역(의료,공무,관료 등)을 연결해줬죠. 진정 민주국가다운 행보였어요. 정보 공개의 가치를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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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기회에 중국과 북한 사람들이 독재의 압제로부터
해방되길 바라봅니다. 민주주의 만세!
유튜브의 댓글을 보다 보면 한국인인데 한국인이 쓰지
않는 단어를 쓰는 걸 볼 때가 있어요. 예시는 안 할게요. 어쨌든 한국인이면 누구나 다 이상함을 느낄법한 단어였어요. 그래서 「아, 저 사람은 한국인이 아니구나.」싶었죠. 그렇다고 외국인이 한국인인척 댓글 다는 걸 어떻게
막을 수 있는 건 아니니 한국인이 스스로 걸러보는 수밖에 없을 것 같아요. 진영 따지지 말고 국익에 해가 되는 말을 하는 사람은 대체로 외국인이구나, 라고 생각하는 게 좋을지도 모르겠네요.
하고 싶은 일이 있는데 할 수 있으면 좋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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