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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언론과 법감정 (2) 2021/06/07 AM 07:57

언론과 법감정

 

 

 

한국은 사법의 양형과 국민의 법감정 사이에서 괴리가 발생하고 있다. 양형은 형량의 정도를 정하는 일을 뜻한다. 법감정은 법에 대하여 갖는 정서를 뜻한다. 괴리는 서로 어그러져 동떨어짐을 뜻한다. 정리하면 한국은 사법이 판단한 양형과 국민이 법에 대하여 갖는 정서가 서로 어그러져 동떨어져 있다. 이 현상은 형사사건을 다룬 뉴스의 댓글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대부분 양형에 불만을 토로하고 있다. 형량이 낮다고 주장한다. 낮기 때문에 범죄가 줄지 않는다고 한다. 자유, 민주, 법치를 지향하는 국가로서 이는 바람직한 현상이 아니다. 주권은 국가의 의사를 최종적으로 결정하는 권력을 뜻한다. 법치는 법률에 의하여 나라를 다스림을 뜻한다.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국민이 주권을 가진다. 국민이 법치를 통해 나라를 다스린다. 그런 국민 다수가 사법의 판단인 양형에 불만을 토로하는 상황은 민주적이라 할 수 없을 것이다. 한국이 민주주의를 표방한다면 이 불만을 가볍다 여기지 말고 진지하게 대응해야 할 것이다.

 

한국의 과거를 떠올려보자. 과거에도 양형에 불만을 가지는 사람이 있었다. 사법과 국민과의 괴리는 있었다. 그럼에도 큰 문제는 없었다. 왜냐하면 당시 권력의 권위가 높고 언론의 정보통제가 손쉬웠기 때문이다. 권력에 복종하라. 일방적으로 공급하는 정보에 수긍하라. 강요로 국가가 운영되었기 때문에 별다른 소요사태가 발생할 수가 없었다. 이 때문에 부당한 판결에도 저항하기 어려웠다. 현명한 자가 피해자가 사회에 호소한들, 국민들이 권력에 짓눌리고 정보통제에 눈과 귀가 막혀 작은 반향조차 일어나지 못했다. 대표적으로 2차 인민혁명당 사건이 있다. 중앙정보부의 조작으로 시작된 반공 공안 사건으로, 기소된 8명이 사형선고 18시간만에 실제 사형집행을 당했다고 한다. 이하 구체적인 내용은 생략하겠다. 이런 횡포에도 국민들은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이 사건에 연루된 사람을 아버지로 둔 초등학생 아들이 미 대통령에게 편지를 통해 억울함을 호소하기도 했다. 당시 한국은 국내 사건을 국외에 호소할 수밖에 없을 정도였다. 그러니 사법과 국민과의 괴리에 별다른 말이 없었던 것이다.

 

지금까지 한국은 강요로 국가를 운영해왔다. 사상부터가 그럴 수밖에 없었다. 유교는 어른과 어린이 사이에 차례를 두는 것을 올바른 도리로 만든 사상이다. 이걸로 연상이 연하를 지배하는 걸 정당화하였다. 연상이 연하에게 강요한다. 이런 유교적인 인간을 가리켜 현대사회에서는 꼰대라고 부른다. 상하질서에 따른 지배의 정당화는 국가적으로 보면 독재가 있고 경제적으로 보면 갑질이 있다. 모든 영역에서 강요가 행해졌다. 하나, 결혼과 출산을 강요한다. 집안에서 중매를 주선하고 출산 압박을 넣는다. 혼인율과 출산율이 유지된다. , 학업을 강요한다. 학생을 때려서 공부시킨다. 학력이 유지된다. , 취업을 강요한다. 기업을 협박해 일자리를 늘린다. 열악한 노동환경에도 일하게 만든다. 취업률이 유지된다. 이외 다른 것도 마찬가지다. 강요가 국가를 살아 숨쉬게 만드는 원동력이었다.

 

국가를 생물로 비유해보겠다. 국민은 생물을 구성하는 세포와 같다. 돈은 양분을 공급하는 피와 같다. 감성은 피를 공급해 생명을 유지시키는 심장과 같다. 이성은 지성적인 판단을 하는 뇌와 같다. 이 비유에 맞춘다면 한국이란 생물의 심장이 바로 강요였다. 한국이 조선이었을 무렵에는 뇌와 심장 둘 다 강요가 옳다고 여겼다. 유교를 이성적으로 배우고 감성적으로 행했다. 하나 시간이 흘러 한국이 되자 뇌가 자유를 알아버렸다. 뇌는 자유를 알았는데 심장은 강요인 상태 그대로였다. 이성으로는 자유가 옳다고 생각하는데 감성으로는 강요하고 싶어진다. 자유가 좋고 강요가 나쁘다는 걸 머리로는 아는데 마음으로는 그러지 못한다. 뇌는 자유와 평등을 외치면서 심장은 유교의 연령차별을 옳다고 여긴다. 그 모순 속에서 점점 뇌가 심장에 영향을 끼치기 시작했다. 강요가 줄어들었다. 그런데 강요가 줄어든다는 것은 심장 박동수가 낮아지는 것과 같았다. 국가라는 생물의 세포가 죽거나 장기들이 고장이 났다. 세포를 이식하고 피를 수혈해도 임시 방편에 불과했다. 자유를 알아버린 뇌와 강요를 고수하는 심장의 충돌은 한국이라는 생물을 천천히 죽어가게 했다. 이것이 지금 한국의 현실이다.

 

한국은 이성애를 멀리하고 성을 터부시하는 교육을 하여 이성애 결핍과 성지식 결핍 현상이 있었다. 그럼에도 강요를 통해 혼인율과 출산율을 유지했다. 한국은 수동적으로 암기 위주의 교육을 하여 학구열 결핍 현상이 있었다. 그럼에도 강요를 통해 학력을 유지했다. 한국은 노동을 천시하는 환경으로 노동 기피 현상이 있었다. 그럼에도 강요를 통해 취업률을 유지했다. 그러다 자유를 알게 되어 강요가 줄어들었다. 강요가 줄어들자 강요 속에 감춰져 있던 것이 수면 위로 올라왔다. 혼인율과 출산율이 곤두박질 친다. 학력이 저하된다. 취업률이 낮아진다. 한국이 무너지기 시작한다. 지금 한국 내에 있는 대부분의 사회문제는 강요가 줄어들었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다. 다시 강요할 수 있으면 대부분의 사회문제는 해결할 수 있다.

 

그러나 강요를 되풀이할 수는 없다. 이제 더 이상 강요가 있던 시대로 돌아갈 수는 없다. 자유를 알아버렸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자유에 맞게끔 바꿔야 한다. 이성애와 성관계를 권장하는 교육을 하여 강요가 없어도 혼인율과 출산율을 유지해야 한다. 능동적으로 자기주도 위주의 교육을 하여 강요가 없어도 학력을 유지해야 한다. 노동을 존중하는 환경으로 노동을 즐길 수 있도록 하여 강요가 없어도 취업률을 유지해야 한다. 그렇게 모두가 자유에 적응해야 한다. 이성과 감성이 모두 자유를 얻고 진정한 의미에서 자유국가가 되어야 한다. 자유에 맞는 사상과 체제를 가진 상태에서 모든 영역에서 자발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는 체계를 만들어야 한다. 한국에 살고 있는 이들에게 자유라는 심장이 뛸 수 있도록 해야 한다. 한국이란 생물이 자유라는 심장을 가지고 있어야 살아날 수 있을 것이다. 이 자유가 필시 한국인의 행복과 한국의 성장을 이루도록 할 것이다. 이 자유가 필시 인류의 행복과 성장을 도울 것이다. 자유적응은 이제 이 시대를 사는 이들의 사명이다. 이 자유적응의 과정 중 하나가 바로 강요 아래 감춰져 있던 사법의 양형과 국민의 법감정 사이에서 발생하는 괴리를 줄이는 일이다.

 

 

 

첫째, 입법

둘째, 사법

셋째, 언론

 

입법

 

국민의 법감정은 입법과 사법 둘 다 관계가 있다. 양형이 사법의 권한임에도 입법을 언급하는 것은 양형 이전에 법률 자체에 불만을 가지는 이들이 많아서다. 그럼에도 사법에 초점을 맞출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입법으로 발생하는 법감정에 관련된 괴리는 진정한 의미에서 민주주의를 달성하지 않으면 줄이기 어렵기 때문이다. 지금 한국은 지역의 대표가 입법권을 쥐는 구조기 때문에 정당의 선동에 지나치게 취약하여 완전한 민주주의가 아니다. 지역의 대표 후보로 나온 정치가의 선거공약은 필연 지역의 발전을 우선시하게 된다. 그런데 지역의 부동산을 소유하는 인구수가 고작 10%밖에 되지 않는다. 직접적인 이해관계가 없는 그 외의 국민들은 정치가의 선거공약에 무관심하게 된다. 정당의 선거공약은 대의를 중점적으로 하기 때문에 더욱더 개개인의 이해관계와 동떨어진 경우가 많다. 그래서 다수의 국민들이 정치가나 정당의 공약보다 정당의 선동에 관심을 가지며 투표를 한다. 직접적인 이해관계가 있는 10% 외에는 선동에 휘말리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선거 당선이 선동으로 결정되는 일이 많다. 각 정당은 국민들이 공약에 관심이 적다는 걸 알기에, 선동이라는 씨를 뿌리고 선거철이라는 수확시기에 표라는 작물을 수확한다. 정당의 손익으로 가치를 판단하는 사람을 가리켜 정당주의자라 부르겠다. 이런 정치체제가 정당주의자의 발현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 정당주의자는 정치가가 아닌 정당을 보고 투표하기 때문에 보통 정당이 지지 받는 지역에 공천되는 정치가는 대체로 당선된다. 그래서 대부분의 정치가는 공천권한을 쥔 사람의 눈치를 보게 된다. 국민보다 공천권한자의 의향을 반영하게 된다. 공천권한자에게 주권이 쥐어진다. 국민에게 주권이 사라진다. 더 이상 민주주의라 부르기 어려워진다. 이런 구조로 인해 지역의 대표만 입법권을 쥐는 것은 민주적이라 하기 어렵다. 국민의 반발을 무시하고 입법절차를 밟고 있는 경우를 종종 목격했을 것이다. 물론 이는 정치가 개개인의 잘못이기 보다는 지역 중심인 정치체제의 결함에 가깝다. 어떤 정치가는 분명 국민을 대표하고 있다. 그러므로 정치가 개개인을 비난하기 보다는 보다 민주적인 체제로 변화해야 한다. 지역이 아닌 분야 중심으로 바뀌어야 한다. 분야의 대표도 입법권을 쥘 수 있어야 한다. 지역발전은 주로 부동산이 성장하나 분야발전은 보통 분야 자체가 성장한다. 공약은 분야와 연관된 법률이 될 것이다. 단순하게 어느 지역에 어떤 개발을 추진하겠다는 식의 공약이 아닌 분야 내에 있는 부조리를 개선하거나 분야의 성장을 도울 법의 제정, 개정, 폐지를 추진하겠다는 식의 공약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 공약은 대체로 분야 내 모든 인원과 이해관계가 있을 확률이 높으므로 선거권자는 선동 당하지 않고 마음에 드는 후보에 투표할 것이다. 또한 불특정 인원이 속하여 책임소재가 불명확한 지역과 달리 분야는 특정 인원이 속하여 책임소재가 뚜렷하다. 책임소재가 뚜렷해야 정치가와 투표자에게 책임의식이 싹트게 된다. 책임의식을 통해 보다 더 신중하게 투표하게 된다. 이렇게 진정한 의미에서 민주주의를 달성하여야 입법과 국민의 법감정 사이에서 발생하는 괴리를 줄일 수 있을 것이다.

 

일단 현 상황을 살펴보자. 국민 법감정 또는 국민정서법이 입법에 영향을 끼친 사례 두 가지를 집어보겠다. 보통 국민의 법감정에 영향을 받은 법률은 기존 법률보다 형량이 강화된다. 많은 국민들이 형량이 낮기 때문에 범죄가 일어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음주운전에 분노한 국민의 정서가 만든 법이 바로 윤창호법이다. 어린이보호구역에서 발생한 어린이 교통사고 사망에 분노한 국민의 정서가 만든 법이 바로 민식이법이다. 둘 다 국민의 정서가 만들었고 둘 다 불만이 나오지만 반응은 확연하게 다르다. 윤창호법은 잘 만들었지만 형량이 낮다는 반응이다. 그래서 형량강화가 필요하다고 말하고 있다. 최대형량은 무기징역으로 높아졌기 때문에, 아마 최저형량 강화를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게 되면 양형과 관계없이 높은 형량을 받게 되기 때문이다. 민식이법은 의도는 알겠는데 방법이 잘못되었다는 반응이다. 주로 지목되는 것에는 운전자 처벌이 아닌 불법주정차 처벌강화가 필요하다 말하고 있다. 불법주정차 사이에서 급작스럽게 나타나는 어린이를 발견하지 못해 사고가 발생하는 일이 많았기 때문이다. 민식이법의 경우엔 정치논리가 섞여 정당주의자의 비호나 공격을 받기 때문에 실제 법률과 무관할 때가 있으므로 주의할 필요가 있다. 통계장난으로 비호를 하거나 아예 효과가 없다는 식으로 공격하는 걸 종종 목격할 때가 있다. 민식이법 이후 어린이보호구역에서 어린이 사망자가 작년 대비 절반으로 줄었다는 식으로 홍보하는 걸 본적이 있다. 그런데 실제 수를 보니 6명에서 3명으로 줄었다는 것이었다. 민식이 법이 없던 2018년에도 3명의 어린이가 사망했는데 2018년 대비라면 아무런 효과가 없다는 말이 된다. 이런 건 통계장난으로 치부될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아예 효과가 없다는 건 말이 안 된다. 법률의 옳고 그름을 차치하고 운전자가 세심하게 주의하거나 어린이보호구역을 우회하는 일이 많을 테니 효과가 있을 수밖에 없다. 물론 자유국가에서 자발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바람직하므로 모든 걸 규제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태도는 그렇게 바람직하다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국민의 법감정에 영향을 받은 법률 두 가지를 살펴봤다. 불만은 사라지지 않았다. 이 두 가지뿐만이 아니다. 모든 범죄자가 무기징역형을 받지 않는 이상, 무조건 형량강화만 외치는 이들의 불만을 잠재우기는 어려울 것이다. 모든 국민이 만족할만한 법이 나오지 않는 이상, 입법으로 손해를 본 이들의 불만을 잠재우기는 어려울 것이다. 국민의 법감정에 따라 법을 제정해도 불만은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니 감성적으로 국민의 모든 불만을 법으로 반영해서는 안 된다. 그런걸 보통 중우정치라고 한다. 중우정치를 예로 들며 민주주의가 완전히 올바른 것이 아니라며 비판하는 일이 있다. 하나 민주주의는 반드시 올바른 결과를 낳는 제도가 아니다. 단지 국민에게 주권이 있는 것이 옳다고 주장할 뿐이다. 왕정국가에서 왕의 어리석음을 모두가 책임지는 것처럼 민주국가에서는 국민의 어리석음을 모두가 책임지는 것일 뿐이다. 어리석음을 책임지고 싶지 않다면 중우정치를 조소하기보다는 중우정치가 되지 않도록 다수의 국민들이 현명해질 수 있는 길을 마련해야 할 것이다. 그 첫 번째 방법이 진정한 의미에서 민주주의를 달성하는 것이다. 보다 민주적이게 되어 모두가 적극적으로 정치에 참여하고 자신이 한 투표에 책임의식을 갖게 된다면 법에 대한 맹목적인 성토가 줄어들어 입법과 국민의 법감정의 괴리를 줄일 수 있을 거라 본다. 그런 상황이라면 모든 불만에 대응치 않고 타당한 불만을 검토한 후 입법에 적용하는 것도 수월할 것이다. 설령 타당하지 못한 불만에 영향을 받아 바르지 못한 법이 제정되더라도 괜찮다. 시행착오 없는 새로운 길은 없다. 잘못된 길을 걸었다는 생각이 들면 다시 돌아와 새로운 길을 걸으면 된다. 영속된 법은 없다. 그 어떤 상황이 닥쳐도 그 시대를 살고 있는 국민의 의사가 빠르고 현명하게 반영될 수 있으면 된다. 이 또한 진정한 의미에서 선동에 영향을 적게 받는 민주주의를 달성하면 가능하다.

 

 

 

사법

 

사법의 판결에 국민이 불만을 가지는 경우를 크게 세가지로 나눠보겠다. 하나, 정당한 판결에 불만을 가지는 경우. , 부당한 판결에 불만을 가지는 경우. , 양형에 불만을 가지는 경우. 여기서 둘은 논외다. 부당한 판결은 애초에 잘못되었기에 논할 필요가 없다. 정당한 판결과 국민의 법감정 사이에서 발생하는 괴리를 줄일 필요가 있다. 나는 역할을 존중한다. 어떤 이해관계 없이 나온 판결이라면 웬만해서는 판사의 판단을 존중할 것이다. 대부분의 국민들도 판결 전체보다는 대체로 양형에 대해서만 불만을 가진다. 왜냐하면 옳고 그름이 분명한 형사사건에 감정적으로 분노를 터트리는 일이 많기 때문이다. 괴리로 인한 사법불신은 양형이 가장 크다 할 수 있겠다. 따라서 양형에 초점을 맞췄다.

 

한국인은 이해관계 또는 타성이 아니면 대체로 우수한 편이다. 낡은 사상이나 체제의 영향으로 자유적응에 실패했음에도 한국이 버티고 있는 것은 한국인 개개인이 우수하기 때문이다. 몸으로 비유하면 세포가 강하다. 사법도 마찬가지다. 이해관계나 타성이 아니면 우수한 판결을 내리고 있다고 본다. 이해관계는 비리를 뜻하고 타성은 관행을 뜻한다. 비리에 경우에는 논할 필요가 없다. 잘못된 것이다. 비리로 발생하는 사법불신과 법감정 괴리로 발생하는 사법불신은 별개다. 관행에 경우에는 한국의 역사가 영향을 끼치는 것이 아닐까 싶다. 윤창호법으로 음주운전 사고의 최대형량이 무기징역임에도 양형위원회의 양형기준에 따른 권고형을 최고형으로 선고하고 있다. 이에 많은 이들이 사법을 비판한다. 타성에 젖어서 책임지기 싫기 때문에 관행에 따르는 것이 아니냐고 말이다. 그런데 한국에서 사법은 이미 폭주한 전례가 있다. 군부독재의 치하 아래 사법수치를 겪었던 역사가 있다. 그래서 변화에 제동이 걸리는 것으로 추측한다. 마치 경찰이 군부독재 시절의 역사 때문에 시민들에게 강하게 나가기 어려운 것처럼 말이다. 그 시대가 족쇄가 되고 있는 분야는 생각보다 많을 거라 본다. 그런 것을 감안해도 국민의 법감정보다 판사의 판단이 옳은 경우가 많다. 법의 형평성 차원에서 모든 범죄에 높은 형량을 판결하기 어려우므로 형량강화만 외치는 이들보다 나은 것은 당연하다. 안타깝지만 일부 몰지각한 이들이 아무것도 책임지지 않으면서 감정을 쏟아내는 것에 집중하는 바람에 법치가 대중의 감정 쓰레기통으로 전락하는 일이 종종 있다. 한국인은 우수한 편이다. 우수한 이들이 그런 행위를 저지르는 것은 이들에게 책임의식이 없기 때문이다. 실제 국민들이 사건개요만 읽었을 때보다 구체적인 정보를 읽었을 때 범죄자에 대한 형량이 낮아진다고 한다. 구체적인 정보를 알고 그 무게를 인지하는 순간, 책임의식이 싹터 신중하게 형량을 결정하기 때문에 형량이 낮아지는 거라 추측한다. 그 신중함에는 유교의 이타주의 사상이 영향을 끼쳐 온정주의적인 결정이 나왔을 거라 추측한다. 무책임한 이들이 종종 이런 말을 한다. 형사사건의 양형에 불만을 품은 이가 판사의 가족이 같은 범죄에 피해를 입어야 형량을 높이게 될 거라고 말이다. 당혹스럽다. 나의 일방적인 선입견일지 모르겠지만 현명한 판사라면 비슷한 사건에는 비슷한 판결을 내릴 것이다.

 

양형은 법치의 예술이라 생각한다. 기분 내키는 데로 판결하는 게 아니다. 피해자와 가해자와 국민의 정서와 범죄율과 소모비용과 파급효과와 판례 등을 고려해 판결을 내리고 있다. 그 섬세한 고뇌에 미학이 느껴진다. 양형위원회는 지금까지 판례의 평균값을 양형기준으로 삼았다고 한다. 판사들이 양형위원회의 양형기준을 참고하는 것은 단순한 관행일수도 있겠지만 지금까지의 판사들을 신뢰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물론 이래서는 새시대의 변화에 적응하기는 다소 어려운 점이 있다. 과거에 맞춰진 판례만 따르게 되기 때문이다. 사법도 자유적응이 필요하다. 판사의 변화는 물론이고 양형위원회의 연구가 시급하다. 형량을 정함에 있어 피해자나 국민의 만족을 위해서는 안 된다고 본다. 그것은 인민재판과 다르지 않다. 단순히 법감정에 치우친 감정적인 기준이 아닌 철저하게 계산된 기준이 필요할 것이다.

 

사법과 국민의 괴리는 어느 한쪽이 일방적으로 맞추는 것이 아니다. 괴리로 인해 국민들이 사법을 불신한다고 한다. 그런데 그건 사법도 마찬가지다. 괴리로 인해 국민을 비전문가로 치부하며 무시할 확률이 있다. 서로를 설득해야 한다. 사법은 사법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사회를 위해 싸우면 된다. 모든 분야가 분야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사회를 위해 싸우는 것처럼 사법 또한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민주주의를 명목으로 국민의 법감정을 여과 없이 반영하여 형평성과 공정성이 훼손된 판결이 나오는 일이 있다. 사법의 입에 재갈을 물리는 것이 과연 민주적인지 묻고 싶다.

 

배심원제에 대해 말해보겠다 사법의 배심원제는 입법으로 따지면 불특정 국민들에게 입법의 표결을 맡기는 것과 비슷하다 본다. 사법이 전문적인 지식이 없어도 국민의 참여가 가능하다면 입법 또한 가능하다. 국회의원은 선출되었기 때문에 괜찮다고 말한다면 판사도 선출하면 된다. 각 지역의 이해관계를 줄이기 위해 판사 후보를 무작위로 배정하여 그 안에서 후보 정보를 보고 투표하면 된다. 선출된 판사도 이해관계가 적은 지역에 배치되면 된다. 그쪽이 국회의원처럼 민주주의와 전문성을 고루 갖출 수 있는 방법이다. 반대로 생각해 배심원제가 타당하다면, 입법에도 배심원제 같은 제도를 도입해도 괜찮을 것이다. 이것을 지금 당장 제안하는 것은 아니다. 그저 판사의 목소리도 중요하다 말하고 싶은 것이다. 판사의 역할을 존중해야 한다. 법감정에 휘둘려 판사가 객관적인 시각을 잃게 되는 것은 국가 법치의 중대한 손해가 된다.

 

양형기준도 마찬가지다. 국민의 법감정을 그대로 반영해서는 안 된다. 그렇다고 아예 무시해서도 안 된다. 기본적으로 전문가가 결정한 양형기준이 타당할 확률이 높으나, 법감정이 타당한 경우 그걸 수용할 필요가 있다. 간단히 말해 국민의 법감정을 전문가가 타당하다 여겨질 정도로 끌어올려야 한다는 것이다. 1기 양형위원회 전문위원이 양형정보시스템의 구축을 제안했다. 양형에 대한 모든 정보를 수집하여 국민들이 직접 양형기준을 참고할 수 있도록 시스템을 구축하자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국민들이 객관적인 양형기준을 알 수 있게 될 거라 했다. 이 시스템이 법감정의 수준을 높이는데 도움이 될 거라 생각한다. 그런 관점에서 양형정보시스템은 괜찮은 제안이라 본다.

 

그러나 그걸로 괴리가 좁혀지기는 어려울 것이다. 기사 제목만 보고 화를 내며 댓글을 다는 이들이 수두룩하다. 그런 걸 일일이 볼 사람이 얼마나 있을 것 같은가? 많은 사람들이 책임지지 않으면서 감정을 표출하는 이익을 얻고 싶어하는 것일 뿐이다. 그러지 않고 그런 정보를 찾아볼 정도의 사람은 애초에 법에 관심이 높은 사람이다. 물론 설득력이 높은 전문적인 정보는 성숙한 법감정을 만드는데 도움이 될 수 있다. 이것은 사법의 역할이다. 하나 시스템 구축은 간접적인 방법이다. 직접적으로 사법과 국민 사이에서 법감정의 괴리가 일어나는 곳은 사법이 아니라 언론이다. 언론에서 사건 정보를 공개하는 순간부터 괴리가 발생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언론에 공개된 사건이 국민의 법감정으로 형량이 결정되기도 하는 것이다. 따라서 법감정에 관련된 괴리를 해결은 언론의 역할이다. 그렇다고 괴리에 대한 책임을 누군가에게 묻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사법의 역할이 아니었기 때문에 책임질 이유가 없고, 언론의 역할이었던 적이 없었기 때문에 책임질 이유가 없다. 시대가 변하면서 언론이 맡아야 할 역할이 되었을 뿐이다.

 

 

 

언론

 

인터넷의 등장은 언론의 역할을 변화시켰다. 그 변화에 대해 말해보겠다. 지금까지 언론은 정보에 관해서 독보적인 위치에서 생산한 정보를 일방적으로 전달하고 있었다. 각지에서 수집한 자료로 정보를 하는 정보 생산자 역할을 맡고 있었다. 미성년을 가르치는 것이 교사였다면 국민을 가르치는 것이 언론이었다. 유명한 대기업 창업자도 언론기사가 자신의 교수였음을 말하곤 했다. 온갖 정보를 공급하여 사회구성원의 품위, 품성, 지성 등을 갖추게 했다. 하나 정보독점은 부당한 일의 촉매가 되기도 했다. 그 외에 정보를 다루는 집단이 없었기에 권력자나 이권자가 언론을 이용하여 선동을 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언론사나 기자의 이해관계에 따라 자체적으로 하는 일도 있었다. 정보공급의 취사선택으로 선동하여 누군가의 입맛에 맞게끔 여론을 조성했다. 언론이 이권의 선동도구로 활용되었다. 그런 양면을 가지고 있었던 언론은 최대의 경쟁자인 인터넷을 만나게 된다. 인터넷이 등장하면서 정보 생산자가 늘어나게 되었다. 지금 뉴스보다 조회수가 많은 정보 제공 개인방송이 있다. 지금 언론정보보다 위키를 먼저 찾는 일이 일어나고 있다. 정보생산자로서 독점적인 위치를 잃어버렸다. 언론은 똑같은 정보생산자 중 하나가 되어버렸다. 일방적으로 단방향 정보를 제공하던 때와 달리 수많은 정보생산자가 네트워크를 이루어 양방향 정보가 교류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언론은 길을 잃어버렸다. 존재이유를 찾아야만 했다. 어떤 언론은 정보생산자로서의 위치를 굳건하게 하려고 했다. 다른 언론이나 개인방송보다 많은 관심을 받기 위한 방법을 사용하였다. 일부로 오도나 오해하게끔 제목을 짓는다. 자극적인 기사를 작성한다. 사회갈등을 이용하여 편파적인 기사를 작성한다. 국가자부심을 이용한 개인방송과 비슷한 영상을 올린다. 그런 식으로 다른 정보생산자와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려 했다. 지금까지 똑같은 길을 걷고자 했다. 하나 그 길은 되려 언론을 쇠퇴하게 만드는 길이라 말하고 싶다. 이제 언론은 새로운 길을 걸어야 한다. 단순하게 정보를 생산하고 공급하는 것만이 아니다. 정보와 정보를 잇는 것, 사람과 사람을 잇는 것, 분야와 분야를 잇는 것, 국가와 국가를 잇는 것, 모든 걸 잇는 것으로 서로를 이해하게 하여 괴리를 줄이는 그런 네트워크의 역할을 맡아야 한다고 주장하겠다.

 

내가 생각하는 언론은 생태계로 따지면 꿀벌이다. 국민이란 꽃에서 자본이란 꿀을 빨고 정보라는 꽃가루를 실어 나른다. 그 과정 속에서 잇는다라는 꽃가루받이로 사회라는 생태계를 유지한다. 언론은 국민과 국민을 잇는 것으로 사회를 유지하는 역할이라는 것이다. 이 역할의 필요성이 두드러진 것은 인터넷 시대부터다. 인터넷 시대가 되면서 수많은 정보가 범람하고 있다. 정보생산자는 각자 자신의 주장을 펼치고 있다. 다양한(집단주의적인 성향을 띄고 있어도 과거에 비하면 훨씬 다양하다) 주장 속에서 국가 내에 괴리가 늘어날 수밖에 없다. 그 괴리를 줄일 필요가 생기면서 잇는 역할이 중요해진 것이다. 꿀벌의 중요성은 누구나 잘 알고 있다. 그만큼 잇는 일을 하는 언론은 중요하다. 이제 정보생산은 누구나 다 할 수 있다. SNS으로 통해 실시간 정보공급도 가능하다. 하나 잇는 것은 다방면에 지식과 인맥이 있는 언론이 아니면 어렵다. 언론이라는 유능한 집단이 다른 정보생산자와 차별화되는 게 바로 모든 걸 잇는 것이다. 한국에서 언론만큼 애증을 받는 분야가 없다. 어느 때보다 언론의 자유도는 높아졌지만 어느 때보다 언론의 신뢰도는 낮아졌다. 그 말인즉슨 언론이 자유롭길 바라지만 신뢰하지는 못한다라는 것이다. 또한 언론의 우수성을 의심하는 이는 적다. 믿지 못하는 거지 무능하다 말하는 게 아니다. 그런 유능한 정보집단인 언론이 국민에게 신뢰받는 길은 모든 걸 잇는 것으로 괴리를 줄이는 역할을 맡는 것에서 시작된다고 본다.

 

잇는 것이 언론의 역할이 되면 많은 부분이 달라진다. 단순히 국민에게 정보를 제공하는 것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정보로 국민을 잇는 것이다. 그러면 기사의 방향이 달라진다. 어떻게 하면 A B의 괴리를 줄일 수 있는가? 그런 방향성으로 기사가 작성되게 된다. 언론이 제공하는 정보의 가치를 판단하는 기준도 바뀐다. 과연 이 정보가 괴리를 줄이는 역할을 수행했는가? 이것으로 언론이 언론만의 독보적인 위치를 점할 수 있게 된다. 국가를 잇는 것. 시장경제를 잇는 것. 가족을 잇는 것. 학교를 잇는 것. 성별을 잇는 것. 세대를 잇는 것. 분야를 잇는 것. 지역을 잇는 것. 이외 모든 걸 입장과 입장을 편향적이지 않고 객관적을 정리해 모든 걸 잇는 것으로 서로를 이해하게 하여 괴리를 줄이는 것이 목적이 된다. 그렇게 되면 잇지 않고 괴리를 늘리는 것은 언론으로서 부적합한 행동이 된다. 지금까지는 그런 것도 정치논리나 자본논리나 어떤 올바름에 의해 정당화되곤 했다. 하나 이제 그것은 잘못된 일이 된다. 갈등을 조성해 괴리를 늘리는 언론은 꿀벌이 아니라 말벌이다. 꿀벌을 잡아먹는 말벌이다.

 

사법의 양형과 국민의 법감정 사이에서 발생하는 괴리를 줄이는 것도 언론의 역할이다. 뺏겨서는 안 되는 고유한 언론만의 역할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언론이 그 괴리를 줄일 수 있는가? 그 방법은 각자 생각해야 한다. 나의 생각을 써보겠다. 나는 숫자에 답이 있다고 본다. 간단히 말해 모든 판결을 다룬 기사의 세부내용 첫 번째에 전세계 평균 형량, OECD 평균 형량, 한국 평균 형량을 기입한다. 그렇게 하여 괴리를 줄인다. 괴리가 발생하는 까닭 중 가장 큰 것은 시간과 책임이다. 사건에 대해 구체적으로 지식을 쌓을 시간이 없고 사건을 책임질 생각도 없다. 그 시간과 책임을 해결하는 것이 바로 평균 형량이다. 별다른 지식이 없어도 평균 형량을 보면 이 판결이 일반적인지 아닌지를 분간할 수 있다. 그 직관성이 시간소요와 사법불신을 줄이게 된다. 시간을 들이지 않아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 한국 사법만 그런 것이 아니었구나. 모두 다 그런 것이었구나. 이런 이해로 괴리가 줄어든다. 책임분산도 가능하다. 판결이 어떤 식으로 영향을 끼칠지 책임질 생각이 없는 이들도 평균형량을 통해 한국이 정상이라는 인식을 가지게 되면 다소 누그러지게 된다. 형량에 대한 책임을 전세계의 사법과 분담하는 것이다. 그 외에 다양한 법지식을 제공하여 괴리를 줄일 수가 있다. 타당한 국민의 법감정은 사법이 수긍할 수 있도록 작성하여 괴리를 줄일 수가 있다.

 

시대가 변하면서 자유에 적응하는 것은 언론도 마찬가지다. 모두가 자유롭게 정보를 생산하게 되면서 단순한 정보공급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그 정보생산자를 잇는 것으로 변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강요로 운영되었던 한국이 자유로 운영되기 위해서는 이런 잇는 역할이 반드시 필요하다. 자발적으로 서로를 이해하고 공감하며 바람직한 방향으로 나아간다. 성별을 잇는 것으로 출산율을 유지하고 학교를 잇는 것으로 학력을 유지하고 시장경제를 잇는 것으로 취업률을 유지한다. 모든 것을 잇는 것으로 자유적응을 돕는다. 한국 언론은 그걸 할 수 있고 해야만 한다. 이것이 언론의 새로운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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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자유와 도덕입니다. 자유주의의 미덕에 대해 작성해보고자 합니다. 자유에 맞는 도덕. 이것도 필요한 자유적응 중 하나입니다.

 

주체성을 따지는데 자기신고를 기준으로 평가하면 안 된다고 봅니다. 사이비 종교인도 자발적으로 믿고 있다고 말하고 다니겠죠. 그렇다고 해서 사이비 종교인이 주체성이 강한 건 아니잖아요. 맹목적으로 종교에 의존하는 이가 어찌 주체적이라 할 수 있나요? 주체적으로 행동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도 어쩌면 어떤 흐름에 잡아 먹혀 그 흐름을 그대로 흉내 내는 것에 불과할지도 모릅니다.

 

더 큰 바람을 가지지 못하는 건 무척이나 슬픈 일입니다. 아픈 사람이 하나씩 포기하면서 바라는 것이 작아지는 것과 같은 거니까요. 바람이 작은 사회는 아픈 사회입니다. 나는 그것이 무척이나 슬퍼요.

 

이기주의를 무조건 나쁘다는 인식은 잘못된 겁니다. 이기주의나 이타주의는 결과가 아닌 행위에서 나타납니다. 이기적으로 행동했어도 타인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것이고, 이타적으로 행동했어도 타인에게 피해를 줄 수 있는 것이죠. 이기적임은 본인의 이익만 생각한다는 것인데, 충분히 현명한 사람이면 자신의 이익만 생각해도 좋은 결과가 나옵니다. 왜냐하면 본인이 하고 싶은 것이 본인에게 가장 큰 이익이기 때문입니다. 이타주의는 본인이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할 때를 의미합니다. 강요 받아서 하는 건 강요한 사람의 이익을 우선시 하는 일이지요. 그것이 설령 개인의 이익을 위한 일이라 할지라도 이타적입니다.

 

어떤 모바일 게임의 수익구조는 무기상인과 비슷하죠. 옳다 그르다 떠나서 그냥 그런 게 재미있네요. 겉이 어떻게 바뀌든 본질적인 구조는 같다는 거니까요. 예컨대 이런 겁니다. 어떤 무기상인이 두 국가 사이에서 갈등을 부추기고, 그 갈등으로 전쟁이 터지면 양쪽에 무기를 파는 거죠. A가 우세하면 B에 좋은 무기를 팔고, 그렇게 해서 B가 우세해지면 A에 좋은 무기를 팔죠. 이게 어쩐지 과금 경쟁과 비슷한 것 같아요. 다른 점은 시기일까요? A시기에 과금한 유저를 꺾으려면 이후 B시기에 과금을 하면 되죠. 무기상인 입장에서 균형이 유지되어야 해요. 어느 쪽이든 멸망되지 않아야 꾸준한 무기수요가 있습니다. 이건 어쩐지 무과금이나 소과금 이탈을 방지하여 과금수요를 만드는 것과 같다는 느낌이네요. 모바일 게임이 마련한 전쟁터에서 모바일 게임이 판매하는 무기를 구매하고 모바일 게임 유저들이 전쟁놀이를 하고 있죠. 참 뭐라고 해야 하나. 원래 게임이라는 것이 현실에서 체험하기 어려운 것을 대리만족 하게 해주죠. 수많은 경쟁게임이 사실 전쟁놀이니까요. 그런데 수익구조도 비슷한 것이 있었군요. 신기하네요. 두꺼운 썬글라스를 끼고 시가를 입에 문 무기상인(이미지)이 게임에서는 모바일 게임 BM 기획자였군요. 디지털 탈세가 코인이었다면 디지털 무기상인은 일부 모바일 게임사였네요.

 

인간과 기계는 분명 다릅니다. 하지만 의사의 치료와 기술자의 수리가 그 행위 자체는 동일하다는 걸 인식해야 합니다. 동일한 위치에서 보고 그 뒤에 가치를 다르게 부여해야 합니다. 행위는 같지만 인간이기에 인간을 치료하는 것에 더 많은 가치를 부여하고 있다고 인식해야 합니다. 그래야 본질을 볼 수 있습니다. 공학자와 기술자가 다른 위치에 있듯이 의학자와 의사는 다른 위치에 있을 수 있습니다. 많은 공학지식이 없어도 수리할 수 있는 것처럼 많은 의학지식이 없어도 치료할 수 있습니다. 의료가 권위를 얻기 위한 도구로 전락해서는 안 됩니다. 지금 의료계는 수리하는 기술자조차 공학자 수준의 지식을 요구하는 것과 같습니다. 지나치게 우수합니다. 인재가 적재적소로 배치되고 있지 못합니다. 이는 국가적으로도 손해입니다. 굉장한 활약을 할 인재가 동네 의원에서 감기 처방을 하고 있으니까요.

 

한 줄의 깨달음을 얻기 위해 소요되는 시간이 얼마나 많은지. 얻고 나면 기묘한 만족감과 함께 청명한 기분이 들며 온갖 불안감이 사그라집니다. 불안할 수밖에 없는 환경이지만 그 때는 좀 기분이 나아져요. 나는 사상으로 생산하는 가치가 그 외의 분야에서 생산하는 가치보다 훨씬 크다고 봅니다. 다른 분야는 다른 사람이 해도 괜찮지만 이건 내가 해야만 하는 것일 테니까요. 어쩌면 내가 아니면 안 될 일이니까요. 무엇보다 하고 싶은 일이기도 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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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왕4    친구신청

오랜만에 잘썻다 싶은 글을봤네요
내용도내용이지만 구조가 글쓰기 교과서적같아서 술술읽었습니다

Ezrit    친구신청

지금 대부분 사람들이 느끼는 분노가 양형이 작다가 아니라 양형이 불공평하게 적용된다 입니다.

그것도 철저히 정치적 논리의 의해서 말이죠.

사립대 표창장 위조가 마약밀수, 음주운전사고, 수백억대 계좌위조 등보다 더 큰 범죄 취급 받고 있는데...-_-;
[글] 지역별 의석과 부동산 (2) 2021/05/14 PM 12:01

지역별 의석과 부동산

 

 

 

한국에서 부동산 가격이 오를 수 밖에 없었던 것은 다음과 같은 원인 때문이었다.

 

첫째, 사상

둘째, 인구수와 초과자본

셋째, 정치권력

 

이외 최근엔 규제가 만든 수도권 아파트의 편중된 가격 상승이나 코로나로 인한 양적완화가 부동산 가격을 올리고 있다. 하지만 그것이 근본적인 원인이라 보기는 어렵다. 위의 세가지는 국가정책과 무관하게 상승할 수밖에 없는 요인이 된다.

 

첫째는 기본적인 사상이다. 유교의 집단주의적 위계질서 속에서 하나의 답을 쫓는 주입식 교육을 받은 한국인들은 주입 받은 교육을 완벽하게 이행하겠다는 완벽주의적 결벽증 속에서 효율적이고 생산적인 결과물을 만드는데 집착하게 되었다. 하나의 답을 완벽하게 쫓는 성질로 다음과 같은 현상이 나타났다. 유행을 너도나도 따라 한다. 유행이란 답을 다 같이 쫓는다. 그래서 똑같은 스타일이나 수익구조를 추구한다. 옷차림이나 안경이나 머리모양이 비슷한 건 외국에서도 알고 있는 모양이다. 개성이 상실되었다. 그것으로 인해 수단과 목적의 전도현상이 일어난다. 이타적이고 집단적인 성질이 개개인의 개성을 상실케 하여 이상적인 꿈보다 동물적인 욕구에만 치중하는 바람에 수단에 불과한 돈이 목적이 되어버린다. 돈이 목적이 된 까닭은 다음과 같을 것이다. 하나는 먹고 사는 수단. 둘은 언젠가 얻을지도 모르는 꿈의 실현을 위한 수단. 셋은 위계질서가 뚜렷한 사회 속에서 높은 서열을 얻기 위한 수단. 먹고 사는 문제는 분명 중요하다. 하나 지성을 가진 인간이라면 먹고 사는 것 이상의 바람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본다.

 

꿈을 가진 사람도 성장하여 사회에 나가면 잃어버리는 경우가 많다. 왜냐하면 교육과 사회는 근간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교육은 홍익인간을 기반으로 이타적인 인간이 되도록 가르친다. 반면 사회는 자본주의를 기반으로 이기적일수록 이익을 보는 구조를 띠고 있다. 이타적인 교육을 받은 학생은 사회초년생이 되어 이기적인 사회로 진출하면 적응하기 어려워한다. 곧잘 사기를 당하고 연상에게 등쳐 먹히는 등의 다양한 손해를 본다. 그러다가 돈만 쫓는 사회 흐름에 잡아 먹혀 비슷하게 행동하게 된다. 국민을 이타적인 호구로 가르친 다음 이기적인 사회에 내던져 일그러진 변화를 겪게 만들고 있다. 이타적인 사상과 이기적인 체제의 무질서한 혼합이 국민들에게 고통스러운 모순을 겪게 만든다. 남의 이익을 우선시하고 싶은데, 돈은 최고다. 돈을 위해서 뭐든지 해도 된다고 생각하는데, 다른 이가 그런 짓을 하면 화를 낸다. 소중했던 어린 시절의 꿈은 어디론가 날아가버리고 이율배반적인 가치관이 내부에서 엉키고 엉켜 정리되지 않은 채 모순되는 행동을 하게 만든다. 끔찍하다. 교육단계부터 이기적으로 가르쳐야 올바르고 건전한 이기주의 속에서 자본에 휘둘리지 않고 자신의 꿈을 실현해나갈 수 있다. 본인의 바람을 실현하는 것은 그 어떤 결과를 낳더라도 본인에게 가장 큰 이익이 된다. 올곧게 자신의 바람만 추구하면 그것이 바로 이기적인 것이다. 그 바람이 공공의 이익을 가져올 수도 있고 손해를 가져올 수도 있다. 하나 그런 결과나 무관하게 이기주의와 이타주의의 구분은 인간의 의지에 달려있다. 어떤 고찰이나 타인의 설득 같은 것으로 본인의 의지로 바람을 바꾸는 것이 아닌 타인의 바람에 맞춰 본인의 바람을 바꾼다면 그 순간부터는 더 이상 이기적이라 할 수가 없다. 본인의 바람과 무관한 모든 행동이 이타적이다. 그 순간부터 대부분 고유한 개성을 잃기 시작한다.

 

꿈을 잃어버린 사회에서는 돈을 목적으로 삼은 사람들이 많다. 돈벌이가 된다고 하면 너도나도 한다. 그러다 보니 나중에는 과잉생산으로 인한 손해를 겪게 된다. 마스크 수요가 많을 때 지나치게 많이 생산하여 이후 수요가 낮아질 때 큰 손해를 본다거나, 어떤 작물이 비쌀 때 지나치게 많이 생산하여 이후 싸질 때 큰 손해를 본다. 부동산도 같다. 부동산이란 상품의 수익률이 좋다고 유행하여 가격이 오른 것이다. 최근 코인이 수익률이 높다는 이유로 유행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단순히 유행에 휩쓸리고 있는 것뿐이다. 이런 유행에 맞춰 어떤 이들은 부당한 이익을 추구하는데, 자전거래로 가격을 높이거나, 내부정보를 이용하여 투기를 하곤 한다. 유교적 가치관 아래 수단과 목적의 전도가 부른 자본만능주의 속에서 부동산을 통한 수익실현이라는 하나의 답을 쫓는 현상이 부동산 가격 상승을 초래한 사상적 원인이 된다.

 

해외에도 유사한 사례가 많이 있다는 걸 안다. 그건 그 나라에 맞춰서 해석해야 한다. 한국이 유교로 인해 어떤 현상이 발생했다고 말하면, 유교가 없는 다른 국가에서도 그 현상이 있는데 어떻게 그럴 수 있냐며 반론한다. 당혹스럽다. 해외에도 유교의 교리와 비슷한 사상이 있을 수 있다. 그러면 비슷한 현상이 나타난다. 단지 그뿐이다. 본질이 비슷하면 결과도 비슷할 때가 많다. 다르더라도 결과는 비슷할 수 있다. 그 나라의 현상은 그 나라에서 따로 해석해야 한다.

 

 

둘째는 인구수와 초과자본이다. 수요와 공급의 원리다. 부동산은 한정되어 있는데 인구수와 자본은 계속 늘어나다 보니 수요가 공급을 초과해 부동산의 가격이 상승할 수밖에 없다. 하나는 인구수다. 지방 소멸로 인구수가 낮은 지방 부동산 가격이 낮아지고, 수도권 과밀화로 인구수가 높은 수도권 부동산 가격이 높아지는 것과 같다. 인구분산을 하면 부동산 가격이 평준화될 가능성이 있다고 볼 수 있다. 하나 지방 소멸을 이제 막을 수가 없다고 본다. 교통이 발달하여 수도권과 지방을 연결하면 지방의 인구수가 늘어날 수 있을 거라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교통이 발달하면서 수도권에서 지방으로 출퇴근하는 사례가 나타났기 때문에 교통의 발달은 되려 지방 소멸을 가속화하는 흐름이 될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수도권을 중심으로 주거지를 만들고 지방을 중심으로 생산지를 만드는 것이 미래지향적인 설계라 본다. 어떤 원인으로 인구수가 줄어든다면 부동산 가격이 낮아질 수는 있다. 그러나 부동산이 투기로 활용되는 이상 그것은 요원한 일이다. 투기도 무의미할 정도로 급격하게 인구수가 줄어든다면 얘기는 달라지겠지만 말이다. 둘은 초과자본이다. 자본주의 질서 아래 과잉생산을 하여 수출하는 국가는 상대적으로 부유해지고, 그 생산품을 수입하는 국가는 상대적으로 빈곤해진다. 부유한 국가의 자본이 많아질수록 국가 내 부동산 수요자들의 구매력이 증가함에 따라 실제 수요가 급증한다. 부유한 이들은 그 수요에 맞춰 더 많은 부를 얻기 위해 부동산을 싸게 구매해 비싸게 판다. 부가 부를 부른다. 빈자는 주거를 위해, 부자는 수익실현을 위해 부동산의 수요가 증가함에 따라 가격이 올라간다. 평화롭고 안전한 국가일수록 자본 사용처가 없어 실물자산의 가치가 높아지고, 가치보전이 되는 부동산에 자본이 몰린다. 집은 주거의 역할을 다해야 한다. 그 점에 있어 부자의 부동산 잉여 소유를 방지하기 위한 국가정책이 절실하다 본다. 어떤 원인으로 부동산에 물리적인 타격이 발생한다면 부동산 가격이 낮아질 수는 있다. 그러나 그것은 일반적으로는 바람직하다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부동산 소유자의 수가 지나치게 줄어들거나 외국인의 부동산 소유가 급격하게 늘어나면 얘기는 달라지겠지만 말이다. 인구수와 초과자본에 따른 수요와 공급의 원리가 부동산 가격 상승을 초래한 경제적 원인이 된다.

 

 

셋째는 정치권력이다. 이것이 실상 부동산 가격 상승의 가장 큰 원인이 된다. 깨닫고 나서 크게 탄식했다. 이러니 당연히 부동산 가격이 오를 수밖에 없지! 지역의 대표가 행정권과 입법권을 쥐고 있다. 정치권력을 쥐고자 하는 정치가가 지역의 지지를 받기 위해서는 지역의 발전을 말하게 된다. 지역의 발전을 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지역의 부동산도 가격이 오르게 된다. 필요한 발전이라면 그래도 이해한다. 그러나 지지를 받기 위해서 불필요한 개발까지 공약으로 내세운다. 지역 주민의 필요가 아니라 정치논리로 개발을 하다 보니 비효율적일 수밖에 없다. 그런 비효율에 대응하여 예비 타당성 조사를 통해 경제성 평가를 하지만, 정치논리에 따라 유명무실해지거나 상황에 따라 면제처리도 되므로 실상은 명분 쌓기에 불과할 때가 많다. 공약을 지키기 위해서 무작정 밀어 붙이게 된다는 것이다. 이렇듯 정치논리에 의해 경제, 사회, 문화 등 모든 것이 지역 중심으로 돌아가게 된다. 사람 중심이 아니라 지역 중심으로 국가가 운영된다. 지역의 대표가 지역의 발전을 추구하다 보니, 실상 지역의 사람을 대표하는 것이 아니라 지역을 부동산을 대표하는 것이었다. 사람을 대표하는 것이 아니라 부동산을 대표하는 것이기 때문에 지방소멸을 받아드릴 수 없었다. 사람을 대표했다면 그 지방이 소멸하든 말든 크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을 것이다. 하나 그 지방의 부동산을 대표하고 있었기 때문에 어떻게든 지방을 살려야 했다. 그래서 지방자치단체에서 지역 내 출산율을 높이기 위해 세금을 쏟아 부었는데 별 의미가 없었다. 지방에서 아이를 낳으면 큰 돈을 주자, 신혼부부들이 그 지방에서 아이를 낳고 돈을 받은 뒤 다른 지방으로 이사 가는 일이 빈번해졌다. 사실 낮은 출산율은 강요사회가 만든 애정결핍으로 인한 현상이기 때문에 자유적응에 실패하는 한 그런 세금 사용은 애초에 의미가 없는 일이었다. 자유국가에 있어 이런 자유적응실패는 굉장히 심각한 문제다. 현존하는 대부분의 사회 문제는 자유적응실패가 원인이다. 제대로 된 원인파악을 하지 못하고 마냥 돈으로만 해결하려고 하는 것은 안타깝지만 세금낭비에 불과하다. 사회 문제 해결에 세금투입이나 형벌강화만 외치는 근시안적인 태도는 이제 멈춰야 한다. 표를 얻기 위한 정치논리가 부동산 가격 상승을 초래한 정치적 원인이 된다.

 

지역발전이라, 좋다. 지역발전 할 수도 있다. 그런데 말이다, 한국에서는 인구의 10%가 부동산의 50%이상을 소유하고 있다고 한다. 면적기준으로는 인구의 10%가 부동산의 97.6%를 소유하고 있다고 한다. 이런 상황에서 지역 개발 공약은 실상 10%를 위한 공약이 된다. 국민들을 위해서 투입되는 세금은 실제 10%의 배를 불려주고 있었을 뿐이었다. 재개발을 한다. 학교를 짓는다. 기업이 들어선다. 공항개발을 추진한다. 전부 땅 주인이 큰 이익을 본다. 이익을 볼 확률이 매우 높기 때문에 내부정보를 이용하여 땅 투기하는 일들이 일어나는 것이다. 간접적으로야 시설 편의로 다른 국민들도 이익을 본다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땅 주인에 비하면 극히 미비한 수준에 불과하다. 이런 일을 반복할수록 빈부격차는 커진다. 부동산 가격은 계속 치솟는다. 그걸 보고 정치가들이 부동산 가격을 잡겠다고 말하면서, 지역발전을 추구한 것은 정말 모순되는 일이었다. 밑 빠진 독에 물 붙기나 다르지 않았다. 지역을 중심으로 한 정치권력 자체가 끝없는 부동산 가격 상승의 근본적인 원인이었다. 지역발전은 10%를 위한 공약이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국민들은 정치가의 공약에 무관심하게 되었다. 지금까지 투표율이 저조했던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었다. 행정권은 그렇다 치자. 지역 개발 자체가 아예 없을 수는 없으니 말이다. 입법권을 지역의 대표로 삼는 것은 민주적이지 못한 일이었다. 정당의 공약은 지역의 틀을 벗어나지만, 지역 의원의 공약은 지역의 이익을 추구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까닭에 대다수는 정치가의 정책이나 공약보다 정당의 공약이 선거에 크게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정당의 공약을 홍보하거나 다른 정당의 공약을 비방하기 위해 사람들을 설득이나 선동했다. 국민들은 정당의 공약과 직접적인 이해관계가 없을 확률이 높기 때문에 붕 뜬 허울좋은 소리에 휘둘리게 되었다. 정당의 수많은 네거티브 전략이나 감성을 자극하는 선동이 국민들에게 유효하게 작용했던 것은 정치체제 자체가 민주적이지 못한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사람이 아닌 정당을 보고 투표를 하게 되었다.

 

본인보다 정당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이타적인 이들을 가리켜 정당주의자라 명명하겠다. 보통 정당주의자는 맹목적인 찬성과 반대를 한다. 정당을 기준으로 가치를 판단하기 때문이다. 정당에 이익이 되면 찬성하고 손해가 되면 반대한다. 본인이 손해를 보더라도 정당의 이익을 추구한다. 정당주의자는 본인이 정의롭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도덕적 제약이 없이 날뛰는 경우가 많다. 욕설, 조롱, 비난도 아무렇지 않게 한다. 일찍이 나는 이런 정당주의자가 발생했던 원인이 한국인이 겪은 피해 때문이라고 봤다. 각 정당이 일제침략, 북한침공, 독재횡포, 여성천대, 남성역차별 등을 근거로 반공산과 반자본, 반중국-북한과 반미국-일본, 반독재, 영호남 지역주의, 여성주의, 반여성주의 따위로 국민들을 설득 또는 선동(비율은 아마 선동이 높다.)을 하여 정당주의자로 만들었다고 보았다. 쉽게 선동 당했던 원인에는 위계질서가 뚜렷하고 이타적이며 집단적인 유교적 가치관이 집단에 속한 정치가의 언행에 가치를 부여하여 보다 더 쉽게 선동 당한 것이라 보았다. 한국의 정당주의는 실제 겪은 피해와 유교적 가치관이 만들었다고 파악했다. 그러나 지역의 대표가 정치권력을 쥐는 정치체제로 인해 이해관계로 투표할 수 있는 사람이 매우 적음에 따라 애초에 사회가 선동 당하기 너무나도 쉬운 구조였음을 깨달았다. 따라서 한국의 정당주의는 직간접적으로 실제 겪은 피해와 유교적 가치관과 정치체제가 만들었던 것이라 본다.

 

부동산의 가격이 오를 수밖에 없었던 이유에 대해 정리하겠다. 인구수와 초과자본, 정치권력으로 인해 부동산의 가격이 오를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국민들이 이타적이고 집단적인 사상에 의해 부동산을 통한 수익실현이라는 하나의 답에 몰리자 부동산 가격이 폭등했던 것이다. 지금까지 한국에서 부동산은 사상적, 경제적, 정치적으로 원인으로 인해 가격이 오를 수밖에 없었다.

 

 

 

현대의 노사관계가 농노와 지주와의 관계에서 크게 달라진 것이 없듯이 현대의 정치관계(마땅한 단어가 떠오르지 않음) 또한 농노와 영주와의 관계에서 크게 달라진 것이 없다. 노사관계가 노동의 집단화라는 측면에서 동일했기 때문에 크게 달라진 것이 없었듯이 정치관계 또한 지역별로 대표를 뽑는다는 점에서 동일했기 때문에 크게 달라진 것이 없었던 것이다. 농노에게 자유를 중심으로 한 배려를 해주면 자유주의가 되고, 평등을 중심으로 한 배려를 해주면 사회주의가 된다. 그 다음 투표권을 주면 민주주의가 되고, 주지 않으면 독재주의가 된다. 근본적인 사회구조는 중세시대에 머무른 상태에서 이것저것 조금씩 바꿔나갔던 것이 현대의 이념이었다. 사회구조 자체가 노동자는 차별 받을 수밖에 없고, 국민은 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어려운 상태였다. 지금까지 모든 개혁은 본질적인 내면은 그대로 둔 채, 외면만 구부리고 휘며 억지로 균형을 맞추고 있었을 뿐이었다. 겉 표면만 반짝 반짝하게 닦아봐야 안이 오래되면 새로울 수가 없다. 낡은 사상이 낡은 사회를 만든다. 자유적응실패로 인한 온갖 혼란과 고통과 절망은 사상이 낡았기 때문이었다. 이제는 시대에 맞는 새로운 사상이 필요하다.

 

최초 노동의 집단화가 인간을 집단에 종속시킨다는 점에 주목했다. 집단에 종속되는 이는 능력이나 노력의 여부와 관계없이 상대적으로 대우가 낮게 된다. 대표적으로 과학자 집단이 그렇다. 그들은 다른 전문직들에 뒤떨어지는 것이 없지만 사회적 대우가 낮은 편이다. 그들이 정당한 대우를 받기 위해서는 집단에 종속되지 않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기술의 소유권을 집단이 아닌 개발한 연구자 개인이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래야 기술의 주도권을 잡을 수 있다. 마찬가지로 노동자 또한 정당한 대우를 받기 위해서는 집단에 종속되지 않아야 한다. 노동력의 소유권을 집단이 아닌 노동자 개인이 가지고 있어야 한다. 지금 노동력은커녕 노동자 자체가 집단에 종속되어 보다 많은 잉여가치를 얻기 위해 착취 당하고 있다. 노동자 또한 본인의 노동력을 취급하는 사업자가 되어 기업을 운영하는 자본가와 공정한 거래를 할 수 있다면, 계약에 명시된 노동력만 제공하면 되기 때문에 이런 부당한 착취는 일어날 수 없다. 모든 노동력은 대여의 형태로 판매되어야 한다. 그래야 노동의 주도권을 노동자가 잡을 수 있다.

 

개개인이 혼자서 거대 기업과 주주들과 대등한 거래를 하기는 어렵다. 개개인이 자신의 권리를 정당하게 누리기 위해 개인의 권리를 보호해주는 집단에 속해있어야 한다. 이 집단의 이름은 모꼬지로 하겠다. 모임을 뜻하는 우리말이라고 한다. 실제 뜻은 놀이나 잔치 또는 그 밖의 일로 여러 사람이 모이는 것이라고 한다. 자유국가에서는 가능한 모든 활동이 자발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노동 또한 예외가 될 수 없다. 즐기면서 노동을 해야 한다고 본다. 워라밸이 중요한 게 아니다. 노동이 즐거워야 한다. 국가는 국민을 행복해야 해야 한다. 노동이 행복하지 않으면 행복을 위한 자원소모가 지나치게 늘어난다. 반대로 노동도 행복하면 불행한 국민에게 소요되는 자원이 감소하게 된다. 국가 차원의 경제적인 측면에서 즐거운 노동은 굉장히 효율적이다. 이 점을 강조하겠다. 이런 걸 고려하면 모꼬지는 해당 집단의 이름에 적합하다. 이 모꼬지는 노동조합과 다른 길을 걷는다. 노동조합은 기업에 종속되어 파업 외에는 마땅히 부당한 행위에 맞설 수 있는 수단이 없다. 무력하다. 하나 모꼬지는 기업에 종속된 집단이 아니다. 모꼬지에 속한 이들이 기술이나 노동력의 공급을 제어할 수 있게 된다. 시장경제는 자본만으로 굴러가지 않는다. 기술이나 노동력 둘 중 하나만 빠져도 보통 그 기업은 무너지게 되어있다. 지금 최첨단을 걷는 전자 기업에 최신 기술 공급이 막히게 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생필품의 물류를 담당하는 유통 기업에 노동력 공급이 막히게 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전자 기업이 부당한 행위를 저지르면 다른 라이벌 전자 기업에 기술을 제공한다. 유통 기업이 부당한 행위를 저지르면 다른 라이벌 유통 기업에 노동력을 제공한다. 마땅한 라이벌 기업이 없다면, 새로 기업을 일으킨다. 개개인이 출자하여 기업을 만드는 일이 자연스러워야 한다. 그래야 개인은 집단에 종속되지 않을 수 있다. 출자한 개개인은 전문경영인을 고용하여 그에게 기업 경영을 맡기고 그 기업에서 할 수 있는 일을 하면 된다. 출자한 이가 출자했다고 하여 믿고 맡긴 전문경영인에게 과도한 경영 간섭은 부당하다 본다. 역할을 존중해야 한다. 이런 환경이 가능하다면, 부당한 행위를 저지른 기업은 자연스럽게 몰락하게 되어 있다. 기술과 노동력의 주도권을 개인에게 돌려주는 이 개혁의 시작을 과학자들이 하는 것이 타당하다 보았다. 노동자가 주도하기에는 지금까지 만들어둔 노동관련 사상과 체계가 너무나도 복잡하고 정교하다 판단했기 때문이다. 또한 익숙해진 종속을 벗어나기는 다소 어렵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모든 개개인에게 공통된 이익을 제시하기는 다소 어려웠다고 본다. 구심점이 필요했다. 바로 정치권력이다.

 

우선 모꼬지를 만든다. 그 다음 그 분야에 속한 인구수만큼 의석 수를 배정한다고 명시하면 된다. 그리고 그 의석은 분야에 속한 무소속만 가능하도록 해야 한다. 그래야 정당의 당리당략에 휘말리지 않을 수 있다. 일단 기존 의석 수는 그대로 둔다. 당장은 국회는 약 200명이 지역 대표, 100명이 정당 대표, 그리고 200명 분야 대표로 구성하면 된다고 본다. 모꼬지의 분류는 너무 세세하게 하면 복잡해지므로 큰 단락으로 나눠야 한다. 과학, 법조, 의료, 정보, 교육, 서비스 등 같이 말이다. 그 다음 세부 분야에서 의석 수를 따로 배정한다. 이래야 어떤 세부 분야 역할의 필요성이 감소할 때, 다른 세부 분야로 자연스럽게 이동할 수 있다. 역할이 중심이 되면 시대의 변화에 유연하게 대응할 수 있다. 모꼬지는 누구나 여러 곳을 가입할 수 있다. 여러 분야에 속하는 일이 있기 때문에 공정함을 위해 선거권 신고 수를 기준으로 의석 수를 배정하고, 선거권을 보유한 사람은 모꼬지에 여러 명의 후보가 있더라도 한 명만 투표할 수 있도록 한다. 그 뒤 배정 된 의석 수만큼 많은 표를 받은 순서대로 의원이 되면 된다. 최초 과학자와 노동자만 모꼬지에 속하는 걸 생각했다. 하나 정치권력이 부여된다면, 어떤 사회적 역할을 맡거나 맡을 예정인 모든 인구가 속할 수 있어야 한다. 전문경영인이라는 역할이 있는 만큼, 경영인도 모꼬지에 속하는 것이 이상할 것 없다고 본다. 공무원도 예외가 될 수 없다. 사회적 역할을 가진 것은 마찬가지니까 말이다. 공무원 조직이 아닌 공무원 개인의 역할로 모꼬지를 결정한다. 국가가 공인한 분야의 모임이 시장경제에 악영향을 끼친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은 지역의 모임과 무엇이 다르다고 보는가? 학교와 무엇이 다르다고 보는가? 모꼬지는 정치권력의 획득과 시장경제에 필요한 분야별 능력을 터득하기 위한 모임이다. 분야의 대표가 정치권력을 얻게 된다면, 분야에 속한 인원들이 알아서 모꼬지를 살찌우게 될 것이다. 마치 지역의 대표가 지역을 살찌우는 것처럼 말이다. 분야의 인원에게 표를 모으기 위한 선심성 공약이 나타날 수 있다. 하나 지역의 인원에게 표를 모으기 위해 무의미에 땅에 세금을 쓰느니, 국민에게 쓰는 것이 훨씬 더 낫다. 분야에 속한 인구수만큼 의석 수가 배정되기 때문에 사람들을 모으기 위해 일자리 쪼개기를 자발적으로 하게 될 것이다. 지금 정부에서 일자리를 창출한다고 말을 한다. 그러나 필요한 노동력의 숫자는 한정되어 있는 법이다. 각 분야가 자발적으로 역할을 쪼개지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정치권력을 미끼로 시장에 맡기면 자연스럽게 대부분의 사람이 노동력을 대여의 형태로 거래할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될 수 있을 것이다. 경제활동이 아니더라도 괜찮다. 모든 사회활동이 경제적이라 말하기는 어려우니까 말이다. 분야에 속하면서 어떤 역할을 수행하면 자연스러운 사회참여가 가능하다. 그러면 기초소득을 받는 일이 있더라도 개개인이 퇴락하지 않고 건전하게 생활할 수 있을 것이다.

 

각 분야가 정치권력을 얻게 된다면, 보다 적극적이고 활발한 시장개혁이 나타날 수 있다. 지금까지 개혁은 정당의 정치가 손에 달려 있었기 때문에 지나치게 느긋했다. 방만했다. 기업의 빠른 대응이 바로 정치권으로 이어질 수 있다. 표를 위해 지역 발전에만 몰두하는 정치가 아닌 분야의 발전을 위해 발로 뛰는 정치가 되는 것이다. 느릿느릿한 국가의 대응에 답답하던 이들은 이에 크게 공감할 거라 본다. 경제를 위해서라도 분야가 직접 정치에 참여할 수 있어야 한다. 무엇보다 민주적일 수 있다. 지역의 대표는 실질적으로 부동산을 소유한 10%의 이익을 대변했다고 본다. 반면 분야의 대표는 그 분야에 속한 모든 인구의 이익을 대변한다. 이 얼마나 민주적인가? 직접적인 이해관계가 있기 때문에 정당의 선동에 휘말리지 않고 냉정하고 분야의 이익을 대변할 수 있는 이를 대표로 선출할 것이다. 개인의 이익을 위한 분야별 모임인 모꼬지는 노동의 집단화가 만드는 개인의 집단 종속에서 벗어나고, 지역의 대표가 만드는 비민주주의에서 벗어나게 할 것이다. 그렇게 해서 개인은 자유를 얻는다. 자유국가가 된다. 그렇게 해서 부동산이 아닌 분야가 성장한다. 분야가 성장해야 국가도 성장하는 법이다. 부동산 가격이 높아지면 실 거주 수가 줄어들어 되려 국가경쟁력에 해만 될 뿐이다. 본질적으로 보았을 때 이것이 구조 자체를 바꾸는 최초의 변화가 될 거라 생각한다.

 

아파트의 택배 차량 통제로 아파트와 택배 노동자와 갈등이 벌어진 적이 있다. 아파트의 민원이나 택배 회사와의 갈등으로 택배 노동자는 무력했다.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공멸을 전제로 한 무력한 파업 말고는 없었다. 만약 그들에게 정치권력이 있었다면 어떻게 대응했겠는가? 그냥 입법절차를 밟으면 된다. 택배 차량 통제 시 서비스 제공 거부가 가능토록 입법하면 된다. 동의하는 여론도 많았기 때문에 어려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실제 입법하지 않고 입법절차만 밟더라도 무력한 파업보다 훨씬 더 효과가 있었을 것이다. 분야별 정치권력이 의미하는 것이 바로 이런 것이다. 과거 간호조무사가 하는 역할에 비해 부당한 대우를 받고 있다고 사회에 호소한 적이 있었다. 병원에서 간호사를 고용하는 비용이 아까워서 간호조무사를 고용한 뒤 간호사가 해야 할 일을 하게 한 것이다. 심지어 의사가 해야 할 일을 하는 간호조무사도 있었다. 의사 대신 간호조무사가 무릎수술을 849회나 한 적이 있다고 한다. 불만이 나오는 것은 당연하다. 하나 사회에서는 이런 배경을 무시한 채, 단순히 간호조무사가 간호사의 대우를 받기를 바란다는 식으로 곡해되어 퍼져 그들의 명예가 훼손되었다. 이는 간호조무사의 미숙한 대응이 초래한 사건이기도 하다. 인터넷에서 떠도는 간호조무사의 의견을 보면 미숙함 대응을 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들이 부당한 대우를 받았다는 것에는 이견이 있을 수가 없다. 간호조무사 수가 약 80만명 된다고 한다. 지역 의석을 고려해보면 2~4석은 부여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만약 간호조무사 대표가 정치권력을 쥐었다면 이런 부당함을 개혁하는 것이 어려웠을 거라 보는가? 상대적으로 학력이 낮기 때문에 정상적인 국회업무를 맡지 못할 거란 선입견이 있을 수 있다. 그렇다면 묻겠다. 지금 국회의 모든 업무를 국회의원 혼자서 담당하는가? 민주주의 사회에서 대표가 될 권리가 학력에만 있는가? 그들 가운데 가장 유능한 사람이 대표가 되고, 그 대표가 의원이 되어 국회업무를 맡는다. 그러다가 미숙함으로 분야에 손해를 끼치면 그 대표를 선출한 이들이 감당해야 할 문제다. 가사도우미의 수는 약 60만명 된다고 한다. (실제 수는 모름) 그럼에도 그들이 최근까지 노동권을 인정 받지 못하고 있었다고 한다. 도대체. 민주주의 사회에서 그들을 대변하는 정치가는 어디에 있었는가? 도대체. 누가 그들을 대변했는가? 도대체. 그들의 대표는 누구였는가? 지역의 대표는 도대체 누구를 대변했던 것인가! 이러고도 민주주의라 할 수 있겠는가! 이는 한국의 민주주의에 대한 지극히 정당하고 합리적인 비판이다!

 

모꼬지는 개개인의 기술과 노동력을 관리 및 성장을 도모하고, 기술과 노동력이란 상품의 품질검증을 구체적으로 한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인간이 어떤 분야의 모꼬지에 속하게 된다면 노동력을 대여의 형태로 판매하는 일이 어렵지 않게 된다. 지금 고용체계가 복잡하고 학력사회가 된 까닭은 학력 외에는 노동력의 품질을 검증을 방법이 마땅치 않기 때문이다. 많은 보호자들이 아이들 교육에 실패하고 있다는 걸 안다. 이는 한국 사회 대부분의 문제와 비슷하게 자유적응실패다. 공부를 강요할 수 없다면 자발적으로 할 수 있게끔 해야 한다. 어떻게 그럴 수 있겠는가? 이는 성년이 된 사람이 학생 때 공부할 걸이라는 후회를 하는 걸 떠올려 보면 된다. 공부를 강요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빠른 사회진출로 사회의 구성과 각 분야가 맡고 있는 사회적 역할을 체험하고 관련된 꿈을 가질 수 있어야, 공부의 필요성을 이른 시기에 깨닫고 자발적으로 공부하려 할 것이다. 본인이 스스로 공부해야 할 동기를 찾아야 한다. 그걸 어떤 분야의 모꼬지에 속하여 학생 시기부터 학업과 노동을 연계하며 사회참여와 정치참여를 통해 인간적인 성장을 하도록 도와야 한다. 자발적으로 하게 된다면 대우가 낮은 단순 노동을 꺼려하는 움직임이 나타날 수 있다. 이에 어떤 사람은 단순 노동 분야에 대한 진출을 꺼려하는 한국 사회상을 우려할 수 있다고 본다. 하나 점차 자동화가 되면서 단순 노동력의 필요성이 줄어들기 때문에 그것은 바람직한 현상이다. 오히려 그 분야에 노동력을 다루는 이가 있다면, 개혁의 걸림돌이 되어 국가 발전에 해가 될 수가 있다. 교육과 산업은 미래지향적으로 가야 한다.

 

모꼬지에 대한 정리는 이후 글에서 더 해보겠다. 나는 내가 제시한 이 국가개혁의 청사진이 개인을 행복하게 하고 국가를 발전시킬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지금까지 한국은 매번 다른 국가를 쫓아가기만 했다. 이제 주도할 수 있는 길이 열려있다고 본다. 모꼬지를 통한 분야별 의석 도입이 시대 개혁의 시작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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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을 경계하는 건 그 나라가 못났기 때문이 아닙니다. 강하니까 경계하는 거죠. 중국의 강약이나 선진과 후진이나 어떤 도덕적 옳고 그름과 관계가 없습니다. 중국 공산당의 공산독재와 중국의 중화사상이 있는 이상, 그들은 자유와 한국의 적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사상이 인간의 행동원리를 결정합니다. 그런 사상을 가진 중국은 중국을 중심으로 주변 타국을 속국화하여 지배할 가능성이 굉장히 높습니다. 속국은커녕 복속시키려 할지도 모르지요. 그런 상황에서 중공에 나라를 팔아먹는 인간은 일제에 나라를 팔아먹는 인간과 같은 매국노일 뿐입니다. 일제가 과거사라면 중공은 현대사지요. 현재를 살고 있는 한국인에게 후자가 더 큰 위험으로 느껴질 것입니다. 이 위협은 동북아 전체가 느끼고 있을 겁니다. 어떤 정치가가 본인의 사리사욕으로 나라를 팔아먹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보다 더 민주적인 사상과 체제가 필요합니다.

 

여성주의는 책임지지 않는 이익을 추구하죠. 성평등을 추구해야 할 여성부가 그런 사상을 가진 것은 기성화폐 질서를 담당하는 금융위원회에서 탈중앙화를 외치며 코인을 권장하는 것과 같은 겁니다. 모든 여성이 여성주의를 추구하는 것은 국가 구성원 절반이 코인을 하고 있는 것과 같은 겁니다. 공동체가 붕괴할 수밖에 없어요. 이치와 진리를 추구하는 현명한 여성들이 객관적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여성주의가 아니어도 여성은 충분히 자유롭고 평등할 수 있습니다. 남성주의가 아니어도 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되려 한국의 여성주의는 여성을 너무 열등하게 봅니다. 무력한 배려만 받자고 주장하는 것이 어찌 여성인권으로 이어지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지금 여성주의는 여성들을 선동해서 일부만 이익을 보고 있는 겁니다. 여성은 보다 자유로워야 합니다. 한국의 여성주의야말로 여성을 억압하는 기제가 되고 있습니다. 여성 징병은 여성을 위한 일이라는 걸 이해해야 합니다. 사회적 역할을 받음으로써 남성과 대등하게 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대표적으로 스웨덴이나 노르웨이가 그렇지요. 지금 한국군이 명예롭지 못하기 때문에 성별 가리지 않고 징병을 꺼려하고 있을 뿐입니다. 여성 징병을 남성이 찬성하고 여성이 반대하는 건 징병 군인의 대우가 너무 형편없으니까 나타나는 웃기는 상황에 불과합니다. 본질을 보세요. 예부터 사회적 역할을 부여 받는 것이 권리였습니다. 그 역할을 통해 이익을 쟁취하는 것이지요. 사회적 역할을 수행하면 굳이 할당제를 도입하지 않아도 여성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좋아질 겁니다. 현명한 여성들이 여성을 무력하게 만드는 여성주의에 휘둘리지 말고 어떤 것이 정말 여성인권을 위한 것인지 다시 생각해봤으면 좋겠습니다.

 

여성주의에 반발하는 남성들이 요새 활발히 활동하고 있지요. 본래라면 신경 쓰지 않을 사안까지 물고 늘어지고 있습니다. 이해합니다. 당한 것을 돌려주고 싶다는 심리, 알고 있습니다. 하나, 목적을 명확히 하여 이른바 뇌절을 하는 것은 경계해야 할 것입니다. 모두가 자유롭기 위해서 잠시 억압에 괴로움을 알리는 것을 견지해야 합니다. 중요하지 않는 것도 억지로 지적하는 것이 자유 억압임을 알려주고 있는 겁니다. 개인이 어떤 극단적인 사상을 가진 것 자체는 처벌하기는 어렵습니다. 사상을 가진 것만으로 처벌의 요소가 된다면, 그것은 공산주의적 사상검증에 가까운 겁니다. 잘못된 것은 공정해야 할 사회가 정치적 또는 개개인의 사리사욕으로 극단적인 사상을 무비판적 수용 한 것입니다. 자유주의 사회에서는 개개인이 아닌 그런 무책임한 사회를 비판해야 합니다.

 

징병 군인의 내부고발은 군의 명예를 위한 일이었다고 판단합니다. 무엇이 군의 명예입니까? 어떤 행동이 군을 명예롭게 만듭니까? 부당한 대우가? 비리가? 군은 명예로워야 합니다. 지금까지 징병 군인은 그다지 명예롭지는 못했다고 생각합니다. 부당한 대우가 너무 많았으니까요. 모병 군인도 크게 다르지 않았지요. 비리가 너무 많았으니까요. 대우도 형편없고 이미지도 좋지 못했던 군도 이제는 명예로워져야 한다고 봅니다. 쇄신을 통해 국민에게 존중 받는 것으로 명예를 얻길 바랍니다.

 

예전에 코로나 음모론에 대해 쓴 적이 있지요. 그렇게 생각한 이유는 단순해요. 순수하게 현상과 인과를 떠올려보니 그런 가능성이 떠올랐습니다. 그런데 왜 그게 되지?

 

새로운 길은 멀고도 험하군요. 국가개혁에 대해 작성해보고 있는데 생각보다 오래 걸립니다. 알고 있는 지식을 정리하는 것만이 아니라 새로 생각하는 부분도 많으니까요. 사상서와 소설과 읽고 뉴스와 개인방송과 만화를 보고 게임을 즐기면서 자연스럽게 생각을 하게 됩니다. 많은 생각을 해야 합니다. 시간이 필요합니다. 어떤 사안에 대해 생각하다 잠들었다가 깨어나면 새로운 생각이 나타날 때가 많습니다. 그렇게 생각을 하면 할수록 이 세상은 바꿀 것이 굉장히 많네요. 나는 내가 올바른 길을 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받아드렸으면 좋겠습니다. 괴롭군요. , 이런 젠장. 사람들이 정치에 무관심했던 것은 그들의 책임이 아니었어요. 정치를 비롯한 자유적응실패에 대한 책임은 사상가가 져야 할 것이었네요. 사상가가 새로운 길을 안내하는 일을 하지 않았으니까요. 사상가라 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 책임을 겸허히 받아드려야 할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사상가에게 책임을 돌리는 대신, 지금까지 걸어온 길을 우회하거나 돌아가는 한이 있더라도 인류 개개인의 행복을 위한 새로운 길을 걸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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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쇄작용    친구신청

1. 유교사상? 팬데믹 이후 전세계적 공통 부동산은 5~20%상승이라 유교사상 들먹이기엔 어렵죠. 유동성 증가로 통화가치의 하락으로 봅니다.
2. 인구수 초과자본..인구수가 늘어난게 아니라 가구수의 증가로 봐야되고 1인가구 중심정책의 폐해죠. 어떻게든 유교적 가치관을 가져와 가족 중심체계로 가야되죠. 유교사상의 붕괴로 기성세대의 불만을 가진 젊은세대가 1인 독립하는 비율이 높아졌어요.
3. 정치권력..이건 동감합니다. 노무현때 가덕도 땅 사놓은 민주당 중심세력들이 이번에 가덕도 밀어붙이는것만 봐도 그렇고
청와대 김수현 자기 집잎으로 지하철 노선을 ㄷ자로 바꾸는것도, 김현미 본인 지역구쪽에 신도시 발표하는것도 그렇고..문제는 맞는데 어떻게 대처할만한 방법이 없죠

kimpol3    친구신청

1. 유교쏼라쏼라 = 뇌피셜. 반박할 가치조차 없음.
2. 수도권 쏠림 현상탓 = 이게 2~3년사이의 문제도 아니고,
지방도 지역에따라 집값 심하게 상승함. 즉 인과관계 부족.
3. 정치권 = 그럼 개발을 안하나? 이번 부동산 폭등 전에는
개발 안하고 놀았음? 개발 많이 해도 떨어질땐 떨어졌음.
이또한 연관성 부족.
실제로는 걍 돈이 많이 풀렸고, 해외 자금이 부동산에 많이 유입됬고,
재개발이다 뭐다 동네들 죄다 때려 부시니까 거기서 살던 사람들은
다른 집이 필요해졌고,
신축이 좋아보이니까 신축 아파트로 쏠리는 현상이 심화됬고,
그래서 구축은 텅텅 비었는데 신축은 전세를 추첨해서 들어가는 수준이고,
핵가족화에 이어서 쿼크가족화라고 할만큼 1인가구, 2인가구가 늘었고,
그만큼 분화되니 집은 더 필요하고.
이런게 맞물리는거지. 무슨 유교 쏼라쏼라 개발이 문제다 난리.
[잡담] 일론 머스크와 시뮬레이션 (0) 2021/05/01 PM 07:02

일론 머스크와 시뮬레이션

 

 

 

개인방송을 보다 보면 마치 텔레비전의 채널을 돌리는 것과 같이 예기치 않는 정보를 접할 때가 많다. 그 중 하나가 일론 머스크에 대한 정보다. 그를 다루는 개인방송이 늘어나자, 자연스럽게 그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게 되었다. 정보가 들어오면 자동으로 생각하게 된다. 화성, 무신론자, 시뮬레이션 우주론, 무책임한 장난기, 기행, 노동자 홀대, 가상화폐, 물질자산 매각, 오타쿠, 친중 등 그는 어떤 사람인가?

 

자유주의자라고 하기에는 어렵다. 독재적인 기업 경영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회주의자라고 하기에도 어렵다. 무노조 경영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본주의자라고 하기에도 어렵다. 노동자를 홀대하기 때문이다. 환경주의자라고 하기에도 어렵다. 환경오염이 심한 자산을 소유하기 때문이다. 보수주의자라고 하기에도 어렵다. 혁신적인 사업을 하기 때문이다.

쾌락주의자라고 하기에도 어렵다. 매우 성실하게 일을 하기 때문이다. 반공주의자라고 하기에도 어렵다. 친중 행보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자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물질자산을 매각하는 걸 보면 물질에 대한 집착이 크지 않는 것 같다. 무엇보다 화성 가는 꿈을 가진 사람에게 돈은 화성을 가기 위한 수단일 것이다. 화성을 가겠다는 꿈이 돈을 벌기 위한 기만이었다면 사기꾼이 되겠지만, 그럴 확률이 높지는 않아 보인다. 만야 그럴 경우 추측에 대한 모든 전제가 무너지므로 이건 넘어가도록 하겠다. 본인 스스로 문화적 자유주의나 경제적 보수주의라고 하는 것처럼 그는 부분부분 어떤 사상에 부합되는 면은 있으나 완전하지는 않다고 보여진다.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면 그는 무엇으로 정의할 수 있는가? 본인 입으로 말한 시뮬레이션 우주론자라고 생각된다. 시뮬레이션 우주론이란 이 세상이 컴퓨터 시뮬레이션이라고 보는 사상이다. 인류문명이 발달하여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컴퓨터로 구현하게 된다면 그 가상세계는 지금의 현실세계와 다른 것이 없을 것이다. 만약 그 전제가 옳다면, 지금 이 세상도 그런 식으로 만들어진 가상세계라 하더라도 이상할 것이 없다. 이외 다양한 근거인 빛의 속도나 양자역학이나 리만의 가설 등에 대해서는 생략하겠다. 중요한 것은 이걸 거의 확정적으로 믿고 있다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걸 어떻게 받아드렸을지는 모르겠다. 어쨌든 이것이 그의 행동원리를 결정하고 있다고 본다. 그의 다양한 특징이 시뮬레이션 우주론자라는 가정하에 들어맞는 경우가 많다. 이는 후술하겠다. 일론 머스크가 모든 걸 걸고 화성에 가려고 하는 것과 시뮬레이션 우주론자라는 걸 조합하자 어떤 것이 떠올랐다. 어쩌면 그는 이 세상이 시뮬레이션인지 확인하기 위해 화성에 가고 싶어하는 것이 아닐까?

 

이 세상이 시뮬레이션이라면, 효율 상 지구를 중심으로 시뮬레이션 했을 확률이 높고, 그런 상황에서 지구 내 생명체가 지구를 벗어나 화성에 도달하게 된다면, 시뮬레이션에 어떤 변화가 있을지도 모른다. 시뮬레이션은 보통 어떤 목적이 있어서 하기 마련이다. 심즈 같은 게임은 시뮬레이션 자체를 보며 즐기고, 문명 같은 게임은 경쟁 속에서 어떤 조건을 달성하면 누군가의 승리로 마무리된다. 만약 이 세상이 문명 같은 시뮬레이션이라면, 지적 생명체가 지구를 떠나 화성에 도착하는 순간, 과학승리가 되어 시뮬레이션이 종료될 수도 있다. 그걸 확인하게 위해 모든 걸 걸고 화성에 가는 게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만약 문명이라면, 재산은 승리조건에 포함되지 않는다. 엄청난 부를 지닌 사람이 등장해도 세상은 변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는 물질 자산을 매각했다. 현실 같은 가상현실의 도입은 승리조건에 포함될 수 있다. 그걸 해낸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그는 인공지능의 발달이 위험하다 말하면서도, 직접 인공지능 산업에 뛰어들었다. 견제를 하면서 직접 한다. 세계정복도 승리조건에 포함될 수 있다. 그걸 해낸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스타링크로 통신을 장악하고 인류의 뇌에 칩을 박아 제어한다. 세계정복이 목적인 중화사상을 가진 중국과 가까이 지내려 한다.

 

보통 종교인이 사후세계에 대한 인식은 다음과 같을 거라 본다. 대체로 믿지만 확신은 못한다. 확신했다면 사이비 종교인들과 마찬가지로 죽음을 선택하고 사후세계로 떠날 사람들이 많았을 것이다. 그도 아마 비슷할 거라 본다. 매우 높은 확률로 이 세상이 시뮬레이션이라 생각하지만 확신은 못할 것이다. 확신은 못하니까 가상과 현실의 가능성을 둘 다 가지고 활동하고 있을 것이다. 가상이라 거의 확신하고 있으니 일단 화성에 도착하는 것 자체가 목적이고, 가상이 아니라 현실이라면 우주 개척을 통한 인류 구원이 목적이라 본다. 최초 그가 우주에 관심이 있었을 때에는 순수하게 우주에 대한 호기심을 가지고 인류의 미래를 걱정했을 거라 본다. 그러다가 시뮬레이션 우주론을 접하고 나서 그의 사상과 신념이 바뀌게 된 것이 아닐까 싶다.

 

자 세상이 시뮬레이션이라 확정해보자. 그러면 세상은 어떻겠는가? 현실세계에서 만들어진 가상세계와, 가상세계에서 만들어진 가상세계로 나뉠 것이다. 지금 이곳이 시뮬레이션이라 하더라도 그 시뮬레이션을 만든 곳이 반드시 현실일 거란 보장은 없다. 시뮬레이션 내에서 시뮬레이션이 만들어졌을 수도 있다. 그러면 인류는 어떻겠는가? 시뮬레이션으로 만들어진 인공지능, 즉 NPC다. 참여가 가능한 시뮬레이션이면 일부는 가상현실의 게임처럼 시뮬레이션을 만든 곳의 존재가 접속했을 수도 있다. 인류의 사후는 두 가지로 나뉠 것이다. NPC의 경우에는 정보가 보존되지 않는 한 소멸한다. 시뮬레이션을 만든 곳의 존재라면 만든 곳의 세상에서 다시 깨어날 것이다. NPC의 경우에는 정보를 보존할만한 가치가 있을 때에만 생존할 수 있을 것이다. 시뮬레이션에 어떤 지대한 영향을 끼친 NPC는 그 정보가 보존될 수도 있다고 본다. 종교적으로 말하자면, 이는 천국이나 영생의 조건이 된다.

 

시뮬레이션 우주론자라면 인류와 환경을 어떻게 생각하겠는가? NPC와 컴퓨터 그래픽으로 여길 것이다. 하나 그걸 확신하고 있지는 않다. 갈팡질팡 애매하다. 이 점이 그의 모순적인 행동원리를 결정했다고 본다. 인류의 미래를 위해 화성을 개척하고 친환경을 추구하지만, 노동자는 가볍게 여긴다거나 환경오염이 심한 자산을 보유한다. 문화적 자유주의를 추구하지만, 표현의 자유가 부족한 중국과 친하게 지내려 한다. 엄청난 부자지만, 물질자산에 집착하지는 않는다. 성실한 경영자지만, 무책임한 장난이나 기행을 일삼는다. 쾌락주의자 같은 면이 있음에도, 원대한 꿈을 가지고 있다. 이외에도 모순적이고 조각나 있는 특성들은 이처럼 시뮬레이션 우주론자라는 것으로 바라보면 해석이 된다. 이는 본인 입으로 말한 것을 그의 행동에 대입했을 뿐이다. 그가 언제부터 시뮬레이션 우주론을 알고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거의 확신하고 있다는 영상이 올라온 시기는 2016년이다. 그가 화성에 사람을 보내겠다고 선언한 시기도 2016년이다. 그 시기에 어떤 심정 변화가 있었을까? 어쨌든 그는 한쪽으로는 현실이라 생각하며 성실하게 일을 하지만, 한쪽으로는 가상으로 생각하며 쾌락주의적으로 행동하는 것 같다.

 

시뮬레이션 우주론은 진리일까? 이는 과거 인류의 행적을 돌이켜 생각해보면 예상할 수 있지 않나 싶다. 수천 년 전, 우주의 진리를 주장한 집단이 있었다. 그를 가리켜 종교라고 했다. 당시 인류가 가진 지식으로는 그들이 말하는 신과 영혼과 사후세계 같은 것을 진리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와 비슷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 인류가 아는 우주의 영역이 4%라는 얘기가 있다. 4%만으로도 공통된 질서 속에서 많은 걸 유추할 수 있기는 하다. 하지만 많이 아는 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 지식을 쌓은 인류가 내놓은 답이 진리라 확정 짓기는 어려운 게 아닐까 싶다. 물론 시뮬레이션 우주론은 충분히 가능한 얘기기는 하다. 이치에는 맞는다고 본다. 그러나 증명되지 않는 한, 그것은 과학시대의 종교에 머무를 수밖에 없다. 본질을 찾는 자는 실제 현상에 주목한다. 그 어떤 황당무계한 것도 현상이 나타나고 그에 따른 과학적 증명이 가능하다면, 그것을 외면하지 않고 받아드린다. 공룡, 진화, 우주 등에 대한 지식이 없었던 전지 증명에 실패한 종교의 주장조차도 실제 현상이 나타나고 과학적 증명이 가능하다면 받아드릴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시뮬레이션 우주론도 어떤 과학적 근거가 마련된다면 진리라 받아드릴 것이다.

 

시뮬레이션 우주론이 진리라고 하더라도 별반 달라질 것은 없다. 애초에 인간은, 아니 모든 지구 내 생명체는 망망대해 위에 떠있는 조각배에 타있는 것과 같이 아슬아슬한 삶을 이어가며 불투명한 미래로 나아가고 있다. 지구가 데굴데굴 돌아가면서 어디론가 가고 있다. 가면서도 언제 무작위로 삶이 끝날지 모른다. 운석이 떨어지는 건 알 수라도 있는데 감마선 폭발 같은 게 터져 지구에 영향을 끼치면 갑작스런 인류의 몰락이 시작된다. 그 무엇이 진리일지라도 이 세상은 처음부터 안전한 적이 없다. 내일 당장 시뮬레이션이 끝나 우주가 종료가 되는 것이나 갑작스런 인류 멸종이나 별 차이가 없다. 인간 개개인도 별반 차이가 없어진다. 왜냐하면 동등한 객체이기 때문이다. 시뮬레이션을 만든 곳에서 게임처럼 들어온 존재도 있을지 모르지만, 있더라도 그리 많은 수는 아닐 것이다. 어차피 대부분 같은 종류라면 굳이 헤맬 필요도 없다. 평소처럼 대하면 된다. 게임 내 역할을 수행하는 이가 남녀노소 상관없이 역할만 수행하면 우대하는 것처럼, 역할주의적 관점에서 보면 별 차이는 없다. 이 세상이 그 무엇일지라도 혼란해 하지 말고 진정한 진리를 향해 나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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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상화폐 중 탈중앙화 특성을 가진 암호화폐가 끼치는 영향에 대해 쓴 적이 있지요. 그건 변함이 없습니다. 책임지는 이익을 추구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도박성은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요? 누군가 이것은 제로섬, 돈 넣고 돈 먹기라는 말을 한 적이 있지요. 그래서 누군가는 반드시 손해를 본다고 했어요. 그런데 이것은 세계적 도박입니다. 환경에 따라 한국에서 전부 딸 수도 있고 전부 잃을 수도 있어요.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당연히 전부 따는 쪽으로 가야겠지요. 도박적 재능을 가진 이들이 이익을 보고 그에 따른 세금을 내면 한국은 이득을 볼 수 있습니다. 이건 이미 게임이에요. 머니게임. 전세계적 도박판에 도박사들이 가서 돈 내기 걸고 싸우는 거죠. 그런 상황에서 돈 좀 더 벌어보겠다고 초짜 꼬셔서 데려가는 건 한국의 패배를 자초하는 일인 것 같습니다. 게임에서 지는 거죠. 게임을 즐기는 국가에서 그건 좀 자존심 상하는 일이죠. 이걸 국가에서 권장할 수는 없다고 봐요. 단순 도박도 어려운데, 그 도박 자금의 출처가 불법자금일 확률이 높으니까요. 한국은 대외적으로 정도를 걷는 국가라 여겨진다고 봅니다. 그러니까 무비자 입국 국가 수가 많은 거겠죠. 국력이나 외교나 동맹의 영향도 크겠지만요. 그런 상황에서 국가에서 그걸 인정하고 권장하기는 어렵다고 봅니다. 그렇지만 내부적으로 암묵적인 인정을 받기 위해서라면, 초짜 데리고 가서 다단계 식으로 뜯어먹을 생각을 하기보다는, 세계의 거대세력과 맞서 싸워서 수익을 올리고, 그에 해당하는 세금을 내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즉, 어차피 못 막을 거면 딸 수 있는 사람만 하길 바랍니다. 내부적으로 돈 먹고 돈 먹기가 안되도록 구조를 만드는 것도 필요하겠지요. 결론을 말하죠. 가상화폐는 현재 도박성이나 탈중앙화나 환경오염이나 그래픽카드 희소현상 등으로 소유를 권장하지 말아야 할 자산입니다. 그러나 소유를 허용할 수밖에 없다면, 수익을 올릴 수 있는 도박적 재능을 가진 사람만 해서 정당하게 세금을 내면 된다고 봅니다. 그러면 국가적 차원에서 공식적으로 인정받기는 어려우나, 국민들 사이에서 인정할 수 있다는 공감대는 형성될 것입니다.

 

어쨌든 변화가 필요한 것 같네요. 과거에 머무르고 싶지 않아요. 산업혁명 시대나 제국주의 시대나 일제강점기 시대나 군부독재 시대에 머물러 있는 건 더 이상 보고 싶지 않아요. 지긋지긋 해요. 예전부터 느껴왔던 것이 있어요. 국가 자체가 꼭두각시로 움직이는 느낌. 특히 유교에 영향을 받는 한국은 그런 것이 더 심하겠지요. 연상의 꼭두각시. 연령, 성별, 빈부 따위와 관계없이 뭔가에 조종당하는 느낌. 선동하고 선동 당하고, 내로남불적인 사람들. 북풍을 기반으로 한 평화의 댐 선동이나 반미를 기반으로 한 광우병 선동이나 일본 물건 쓰면서 맹목적인 반일을 하거나 중국 게임 하면서 맹목적인 반중을 하는 건 비슷하지요. 대부분 비슷한 일들 해왔으니까 다 청산하고 이제는 정말 새로운 길을 걷고 싶네요.

 

한국이나 일본이나 둘 다 과거에 머물러서 중국의 야욕에 대응하기 어려운 상황인데, 좀 심플하게 갔으면 좋겠네요. 조선시대 다수의 기득권은 어리석은 멍청이였습니다. 일부 개화파나 독립운동가 같은 이들을 제외하면 추악한 인간들이었습니다. 당시 동정 받아야 할 사람들은 조선의 백성들이었어요. 그 외는 대부분 쓰레기입니다. 괜히 그런 거 인정 안하고 일본 탓만 하는 건 조선에 머물러 있다고 봐야 하는 거죠. 마찬가지로 일본이 과거에 저질렀던 잘못을 부정하는 건 일제에 머물러 있다고 봐요. 조선과 한국이 별개의 국가이면 조선 비판이 어려울 것이 없겠죠. 마찬가지로 일제와 일본이 별개의 국가라면 일제 비판이 어려울 것 없다고 봐요. 그러면 과거를 부정할 필요가 없겠죠. 물질적인 이유가 있다고들 하지만 그런 것 빼더라도 과거 부정은 오히려 과거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라 봅니다. 정치적 뿌리가 연결되어 있기 때문일지도 모르지요. 일단 객관적으로 봐봅시다. 한국 주장은 위안부 강제 동원이나 강제 징용 있었다고 하죠. 일본은 없었다고 하고요. 그래요. 일본 말대로 자발적으로 한 사람도 있을 수도 있어요. 지금도 몸 파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때라고 없을까요? 그런데 강제 동원이 아예 없었다는 건 말이 안돼요. 여성의 순결을 중시하던 시대였는데, 아무리 많은 돈을 줘도 거부할 사람이 있었을 거예요. 무엇보다 당시 인권이 그렇게 높았다고 보기는 어렵지요. 사실 한국에서도 그런 역사가 있거든요. 과거 한국에서 미군을 상대하기 위한 위안부가 있었고, 거기 동원된 여성들이 인신매매를 통해 강제로 동원되었다고 하니까요. 이처럼 굳이 증거 없어도 이치만 따져도 결론이 나옵니다. 그런데 증거도 많다고 하잖아요. 강제 동원이 없었을 수가 없어요. 그 자체를 부정하는 건 냉정하게 일본의 잘못입니다. 과거 조상이 나쁜 짓 했다, 인정하면 되는 거 같은데 왜 그렇게 과거와 현재를 결부시키는 건가요. 한국도 일본을 너무 몰아붙이는 것도 자제했으면 좋겠어요. 정치가들이야 정치적 목적으로 그런다 치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냥 과거는 과거에 뒀으면 좋겠어요. 과거에 머물러서는 현재의 위기에 대항할 수 없잖아요. 중국 공산당은 자유국가의 공통된 적이잖아요. 북한이야 국력이라도 약한데 중국은 그게 아니니까요. 정말 위험한 상황이에요. 한국이나 일본이나 과거 조상들 자존심 세워주다가 현재 우리들이 불행할 처지에 놓여있는 거예요. 이게 뭔가요. 바보 같지 않나요?

 

과거 여성인권이 낮았던 것은 사실입니다. 그런데 여성주의자가 지금 책임지지 않는 이익을 추구하는 건, 마치 조별 과제에서 하는 거 없이 점수 받고 싶어하는 것과 같은 거라 봐요.

 

국가론을 읽고 있는데 복잡한 심정이네요. 문명의 뿌리라.

 

지금 살고 있는 환경을 바꾸고 싶어요. 이사 가고 싶은데 갈 곳도 방법도 없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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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담] 가상화폐와 책임 (11) 2021/04/23 PM 06:54

가상화폐와 책임

 

 

 

가상화폐는 블록체인이란 신기술을 사용하여 새시대의 화폐인 것처럼 홍보되었다. 하나 기술이 새롭다고 한다고 하더라도 달라지지 않는 것이 있다. 사회적 역할이다. 기술의 발달로 마차가 자동차로 변하더라도 교통수단이라는 점에서 이 둘은 동일하다. 앞으로 자율주행자동차가 나오더라도 그것은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가상화폐도 이와 마찬가지로 달라지지 않는 것이 있다. 지금 각국이 가상화폐에 대해 방관 중인 것으로 보인다. 이는 아마 가상화폐를 어떻게 취급해야 할지 모르기 때문에 생기는 정체일 것이다. 이런 정체를 멈추고 정확하게 대응하기 위해서는 신기술이라는 말에 현혹되지 않고 가상화폐가 무엇인지 명확하게 알 수 있어야 한다. 신기술이나 보안 등의 갖가지 명분이나 변동성이 높아 나타나는 도박과도 같은 투기에 대해서는 잠시 접어두겠다. 가장 중요한 특징인 탈 중앙화에 초점을 맞춰보자.

 

가상화폐의 큰 특징 중 하나가 바로 탈 중앙화다. 중간을 거치지 않고 직접 거래하기 때문에 수수료가 없어 기성화폐보다 높은 수익을 얻을 수 있다. 가상화폐는 그 자체로는 세금을 내지 않는다. 취득세나 보유세가 없다. 거래할 때도 세금이 붙지 않는다. 가상화폐를 기성화폐로 바꿀 때와 상속이나 증여할 때 세금을 낸다. 이 두 가지도 세금을 피할 방법이 있다. 지금 당장은 기성화폐의 쓰임새가 많기 때문에 가상화폐에서 기성화폐로 바꾸기 마련이다. 하나 만약 가상화폐로도 생필품을 비롯한 대부분을 구매할 수 있게 된다면 기성화폐로 바꿀 이유가 없다. 다크웹 같은 곳에서 국가의 감시에서 벗어난 은밀한 거래를 할 때 가상화폐가 쓰인다고 들었다. 그런 곳에서 세금을 내겠는가? 세금 내지 않고 장사가 가능하다. 노동자 임금도 가상화폐로 지급이 가능해질 수도 있다. 가상화폐로만 살아갈 수 있다면 세금을 내지 않아도 된다. 상속이나 증여도 마찬가지다. 은밀한 곳에서 거래를 한다면 세금을 내지 않고 상속이나 증여를 할 수 있다고 한다. 이렇게 되면 어떤 세금도 내지 않고 세금으로 운영되는 국가의 다양한 혜택을 무료로 이용할 수 있게 된다.

 

가상화폐는 중앙의 간섭을 받지 않고 고수익을 올릴 수 있다. 이런 점에서 탈 중앙화는 매력적으로 비춰질 수 있다. 그런데 이건 달리 말해 납세의 의무를 저버렸다는 것과 같다. 책임은 맡아서 행하지 않으면 안 되는 임무나 의무라고 한다. , 가상화폐는 책임 지지 않는 이익을 추구한다. 이것이 가상화폐의 본질이다. 가상화폐가 탈 중앙화를 지향하는 한 이것이 달라지는 일은 없다. 탈 중앙화로 중앙의 간섭을 받고 싶지 않으면 중앙의 보호도 받지 말아야 하는 게 일반적일 것이다. 그럼에도 중앙의 보호는 받으면서 중앙에서 벗어나고 싶어 한다. 앞뒤가 맞지 않는다. 이것은 어떤 것을 떠올리게 한다. 여성주의다.

 

책임 지지 않는 이익을 추구한다는 공통점을 지닌 부류들은 꽤 많다. 대표적으로 여성주의가 있다. 남성과 동일한 책임을 지지 않으면 남성과 동일한 권리를 주장한다. 병역의 의무는 지지 않으면서 사회적 권리는 동일하길 바란다. 지금까지 여성들은 가부장제로 차별을 받아왔다. 그걸 정상화하는 과정에서 책임지는 부분은 가부장제 시절로 놔뒀다. 책임지는 부분을 비정상으로 놔둔 결과, 여성들은 책임 지지 않는 이익을 추구하게 되어 남성들이 역차별을 받게 되었다. 그래서 남성들이 분노했던 것이다. 가상화폐도 동일하다. 기성화폐와 동일한 책임을 지지 않으면서 기성화폐와 동일한 권리를 누리려고 한다. 가상화폐가 책임 지지 않는 이익을 추구한다면, 기성화폐의 권력을 쥐고 있는 국가 또한 분노하게 될 것이다. 또한 기성화폐로 성실히 세금을 내어 국가 운영에 이바지하는 사람들도 분노하게 될 것이다.

 

기성화폐를 비판하면 이런 말이 나온다. 너도 해라. 시대를 따라가지 못하네. 가상화폐는 새로운 시대를 여는 거야. 이런 것은 그다지 특별하지 않다. 여성주의도 같은 말을 한다. 너도 해라. 시대를 따라가지 못하네. 여성주의는 새로운 시대를 여는 거야. 책임지지 않는 여성 특혜를 보고 비판하면 이런 저런 말을 하며 특혜를 정당화한다. 남성에게 책임을 떠넘기며 특혜는 온전히 자신들의 것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납세의 의무를 저버린 가상화폐도 일종의 특혜다. 그런 특혜를 비판하면 기성화폐에게 책임을 떠넘기며 특혜는 온전히 자신들의 것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할 것이다. 어떤 것을 명분 삼아 책임 없는 이익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이 둘은 정말 같다. 가상화폐의 승리를 외치며 일부 사람들의 고수익을 자랑하거나, 여성의 승리를 외치며 일부 여성의 이익을 자랑하는 것은 정말 비슷하다. 가상화폐 이용자가 가상화폐의 높은 이익을 미끼로 사람들을 선동하는 것과, 여성주의가 여성의 높은 이익을 미끼로 여성들을 선동하는 것도 같다.

 

다수가 가상화폐를 사용하여 세금이 걷히질 않아 국가가 붕괴된다고 가정해보자. 그렇다면 누가 개인을 지켜줄 수 있을 것인가? 가상화폐의 자산이 개인을 지켜줄 수 있을 것 같은가? 국가라는 공인된 폭력이 사라지면 공인되지 않은 폭력이 무질서하게 개인을 공격한다. 당장 마피아가 가상화폐를 소유한 개인을 납치해서 고문하면 어떻게 될 것 같은가? 가상화폐의 훌륭한 보안도 그 폭력 앞에서 무용지물이 되어버린다. 가상화폐로 마피아를 회유할 수 있을 거란 착각은 그만두는 것이 좋다. 마피아 입장에서 그냥 개인을 고문한 다음 전부 빼앗는 게 훨씬 이익이다. 그렇게 되면 결국 개인은 자신을 지키기 위해 개인 사병을 모집할 수 밖에 없다. 그것이 국가의 보호보다 안전하고 믿을 수 있을 것인가? 그리고 얼마나 효율적일 것인가? 이쯤 되면 일반적인 사람들은 대부분 그냥 세금을 내는 게 이익이다. 그렇다면 가상화폐 이용자들끼리 집단을 이뤄 자신들을 보호하겠다는 말이 나올 수 있다. 가상화폐 국가다. 그렇게 되면 이것이 지금 국가와 무엇이 달라질 것인가? 언젠가 인터넷에서 여성들로만 이루어진 국가가 있으면 좋을 것 같다는 글을 본 적이 있다. 여성들의 국가다. 이 둘은 정말 비슷하다. 중앙의 간섭을 받기 싫은 가상화폐와 남성과 관계 맺기 싫은 여성주의는 아마 비슷하게 흘러갈 것이다. 책임 지지 않는 이익의 결말이 바로 이런 것이다.

 

국가가 확립한 사회질서 내에서 책임 없는 이익만 추구하는 마피아. 남성이 확립한 사회질서 내에서 책임 없는 이익만 추구하는 여성주의. 기성화폐가 확립한 금융질서 내에서 책임 없는 이익만 추구하는 가상화폐. 무책임하다는 점에서 이들은 동일하다. 국가나 남성이나 기성화폐가 부당한 일을 저질렀다고 주장할거면 정당한 대안과 함께 책임지는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 그런데 그러지 않고 책임 지지 않는 이익만 추구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국가가 잘못하여 사회가 혼란스러우면 마피아는 마약을 유통하며 이익을 보면서 사회혼란은 정부의 책임으로 떠넘긴다. 남성중심사회가 불공정하면 여성은 불공정에 대응하는 과잉 특혜로 이익을 보면서 그걸로 나타나는 역차별은 남성의 책임으로 떠넘긴다. 이런 것과 가상화폐가 이제는 그다지 다르지 않음을 알게 되었을 거라 본다. 그렇다면 앞으로 가상화폐는 어떤 길을 걷게 될 것인가? 가상화폐가 탈 중앙화로 세금을 내지 않아 국가 운영에 차질이 빚어지게 되면, 최대 가상화폐 이용과 소유자의 국적박탈까지 가능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왜냐하면 이미 다른 영역에서 비슷한 결과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기성화폐가 납부한 세금으로 국가가 운영되는데, 그걸 거부하며 국가가 제공하는 서비스를 받는 것은, 비폭력주의자가 국방의 의무를 거부하며 국가의 국방으로 개인의 안전을 보장받는 것과 다르지 않다. 탈 중앙화라는 신념을 위해 납세의 의무를 거부하는 것과 비폭력주의라는 신념을 위해 병역의 의무를 거부하는 것은 비슷하다. 병역의 의무를 거부한 사람은 감옥에 갇히거나 고된 대체복무를 하거나 난민 신청하여 국적을 포기했다. 가상화폐도 비슷한 흐름으로 흘러가 최대 국적박탈까지 고려될 확률이 없지는 않을 거라 본다.

 

병역의 의무 자체가 부당하다 여길 수 있다. 하나 민주국가인 이상 개인이 국가를 지키는 것은 그리 부당하다 보이지 않는다. 자신의 국가를 자신이 지키는 것이다. 처우개선과 공정성의 필요성이나 징병 방식의 변경 등의 논란은 있을 수 있어도, 개인이 국가를 지키는 것 자체에 논란이 있기는 어렵다고 본다. 납세의 의무와 병역의 의무를 동일하게 보기 어렵다고 할 수 있다. 맞다. 납세의 의무를 저버린 쪽이 오히려 더 심각하다. 병역의 의무를 저버리면 국방에 차질이 빚어지지만 납세의 의무를 저버리면 국가 운영 자체에 차질이 빚어지기 때문이다. 이는 한국만의 문제가 아니다. 각국이 가상화폐의 특징인 탈 중앙화가 국가에 끼치는 영향을 파악하여 가상화폐 소유자에게 그가 가진 국민으로서의 권리를 박탈한다면, 가상화폐는 아마 국가권력에 맞서 질서를 뒤흔드는 마피아의 전유물로 남을 확률이 높다. 이런 극단적인 것까지 예상하는 것은 책임 지지 않는 이익을 얻는 이들을 대신하여 책임지는 이들의 정당한 비판이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렇게까지 극단적일 확률은 그리 높지는 않다. 그래도 가상화폐가 탈 중앙화를 고수하는 한 가능성 없는 얘기는 아니다. 국가붕괴의 우려를 국민들이 직접적으로 느끼게 되면 개개인의 사정은 그리 크게 고려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가상화폐가 인정받기 위해서는 책임 지는 이익을 추구해야 할 것이다.

 

책임 지지 않는 이익은 정말 매력적이다. 누구나 다 그 달콤한 유혹에 흔들릴 수 있다. 그러니 날을 세워가며 칼같이 지적하고 싶지는 않다. 그래도 조금 아쉬울 때가 있다. 성별 갈등을 극단적으로 일으킨 여성주의의 폭발적인 확산과 김치프리미엄이란 말이 붙을 정도로의 가상화폐의 폭발적인 성장. 이익이 되니까 인기를 끌었던 이것들이 어떤 걸 의미하는지 안다면 자랑스럽게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라 생각한다. 알고 있을 것이다. 여성주의의 모순과 폐해를 말해도 받아드리고 변화하는 여성주의자가 그리 많지 않았다는 걸 말이다. 아마, 가상화폐도 비슷할 확률이 높다. 받아드리기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에 대해서는 처연히 웃으며 한국인의 지성으로 본질을 자각하는 것에 기댈 수밖에 없다. 사실 뭐 탈세, 비리 따위가 연일 뉴스에 나오는 상황에서 가상화폐만 지적하는 것도 우습다. 개인적으로 보았을 때, 지금 당장은 가상화폐보다 부동산 투기가 사회에 더 나쁜 영향을 끼친다고 본다. 이런 상황임에도 최소한 탈 중앙화가 어떤 걸 야기하고, 가상화폐가 어떤 위치에 있는 건지는 알았으면 좋겠다. 마냥 선동 당하는 것보다는 나으니까 말이다. 무엇이 변해도 교통수단은 교통수단인 것처럼, 이런 형태는 기술 발달과 별개로 어느 시대든 나타날 수 있는 현상일 것이다. 이익이 크기 때문이다. 과거에도 있었고 현재에도 있고 미래에도 있을 것이다. 과연 미래에는 어떤 것이 이 책임 지지 않는 이익의 계보를 이어나갈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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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어가는 글입니다. 다음 글은 아마 국가개혁입니다. 분야별 의석이 정착되면 분명하게 역할주의 사회가 될 거라 봅니다. 자유주의는 이념이고 역할주의는 가치관이지요. 자유주의를 실현하기 위해 역할주의가 지탱하는 것입니다. 자동화 사회가 되어 인간 노동력의 필요성이 줄어듦에 따라 국민들을 위해 기초소득을 고려하고 있음을 압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어떤 사회적 역할도 맡지 못한 사람은 적극적 사회참여에서 멀어져 개개인의 삶이 무너질 수도 있다고 봅니다. 이에 따라 지역별 의석뿐만 아니라 분야별 의석도 도입하면, 각 분야는 정치권력을 위해 국민들이 자신들의 분야에 속하게 하기 위해 보다 적극적으로 나서게 될 것입니다. 본래라면 분야에 속한 인구수를 늘리기 싫어하는 폐쇄적인 곳도 정치권력을 위해 개방할 가능성이 있다는 겁니다. 지금 각 학교가 신입생 유치를 위해 많은 수단을 동원하여 학생들을 유혹하는 것처럼 각 분야가 의석 수를 늘리기 위해 많은 수단을 동원해 국민들을 유혹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하여 모든 국민이 어떤 역할을 맡게 된다면, 기초소득의 도움을 받는 일이 있더라도 개개인이 퇴락하게 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게 하여 국민들이 건전하고 자유로운 행복을 누려야 합니다. 국가는 국민을 행복하게 해야 합니다. 그런데 노동이나 학업이 즐겁지 않다면 어찌 국민들을 행복하게 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이 불행하다면, 삶의 절반이 넘는 시간을 불행하게 보내야 합니다. 한국이 불행한 까닭은 강요로 국가가 운영되었기 때문이고, 강요가 사라진 지금은 자유에 적응을 실패했기 때문입니다. 강요가 사라졌으므로 모든 행위는 인간의 능동적인 바람에서 나타나야 합니다. 이제는 한국이 자유에 맞는 국가로 변해야 합니다. 자유에 적응해야 합니다. 모두가 가능한 자유롭게 행복하기를 바랍니다.

 

선거는 최대한 제 생각과 일치하는 사람을 뽑을 예정입니다. 그 사람이 설령 정당에 속하지 않더라도 말이죠. 국민들의 보다 적극적인 정치참여가 가능하다면 대통령이 정당에 속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어쩌면 이래야 과거와 결별하고 미래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목이 터져라 외치고 싶습니다. 미래로 가고 싶다고. 지금 각 정당이 노력하지 않는 것은 아닐 겁니다. 하지만 차악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초래한 것은 지금의 정당들입니다. 최근 뽑고 싶어서 뽑았다는 의견이 얼마 되지 않았다는 얘길 들은 것 같습니다. 이걸 정상적인 민주주의라 할 수 있을까요? 부디 진정한 민주주의를 위했으면 좋겠습니다. 나는 그것을 위해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은은 기억하고 원은 방관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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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본좌    친구신청

코인충은 한강샤워가 시급하지

카우보이A밥    친구신청

오늘 한강가는사람 많을듯 ㅋㅋㅋㅋㅋ

병무청1    친구신청

너무 길어서 딱 여성주의 까지 읽었습니다만..언제적 정보를 바탕으로 적운글인지 모르겠으나 당장 연말부터 가상화폐는 정부에서 수익의 20% 를 세금으로 걷는다 했습니다.

그리고 블록체인의 기술은 앞서 여러산업에서 실용적으로 쓰이고 있으며 심지어 테슬라는 비트코인으로 차량을 구매 할 수 있도록 합니다 세상은 뱐하고 있어요 반대로 금은 어떤 실용성을 가져서 저만한 가치를 얻게됬는지도 설명이 되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미술품 또한 어떤 가치를 가지어서 초고액의 예술품들이 가치를 가지는지요?

이런 편협하고 일방적인 글은 많은 사람을 설득하긴 쉽지 않아보입니다

Braindead    친구신청

돈이 오가는데 세금이 없을리가요? 그리고 블록체인을 만들면 수고했다는 요금식으로 비트코인을 지급한거임.
블록체인은 필요한 기술이고 비트코인은 그냥 딸려운 부수적이라는거.
예술품과 금은 예술성과 가치성이 있습니다. 유형자산이고요.
님 글은 그냥 머스크가 테슬라 구입하는데 비트코인으로 구매할수있다는 하나의 장점만 있군요.

병무청1    친구신청

그리고 코인충 코인충 하면서 비판하시는분들? 주식은 주식충이라고 비판하시는지요? 왜 코인하는사람들이 비판을 받아야하는지 그 이유가 궁금합니다 누구에게 피해를 줬지요? 혹시 코인 하시는분들에게 맞았거나 피해를 보신분 좀 알려주세요 저는 참고로 지금은 코인을 하지 않습니다만 급변하는 세상에서 남들은 이런저런 투자로 좋은소식을내면 자신은 혼자만 도태되는 것 같은 박탈감을 가지니 화가 나는건 이해됩니다만 무분별한 비난은 보기 좇치 아니합니다

이름없는아저씨    친구신청

주식과 코인은 다르다고 보지만 충이니 한강이니 싸잡아 욕하고 비난하고 하는건 보기안좋네요 진짜 코인하는사람한테 맞은적있나 왜들그러나모르겠네ㅡㅡ

칼밥    친구신청

게임커뮤니티에서 그래픽카드를 못산다는건 중대문제죠
그리고 금이 실용성이 없다니... 웃고 갑니다 ㅋㅋㅋ

웨폰메이커    친구신청

코인자체가 각종사기와 범죄에 이용당하고 있고
여기에 사회분위기도 조성되어서
많은 사람들이 코인에 투기해서 그 피해도 크죠.

그리고 그피해를 정부보고 책임지라는데 좋은소리 나올까요?

당연히 안나오죠.

MISUKI    친구신청

일단 코인충 덕분에 100만원짜리 그래픽카드가 180-200만원인데 어떻게 설명할건대

덕분에 그래피카드없이 pc 쓰고 있음 내장그래픽으로 ㅡㅡㅋ

니나가라군대    친구신청

이러니 충 소리 듣죠.
주식과 도박이랑 같다고 말하는 소리랑 뭐가 다름?
정해진 시간에 장이 열리는 것도 아니고 장이 끝나는 것도 아니고 줄창 24시간 열리만 있고
주식 마냥 일정 수치 이상 또는 이하로 올르고 내리고를 막아주는게 없이 올라가면 한 없이 올라가고 내려가면 한 없이 내려가는게 주식이랑 비빌수 있다 생각하는것 부터가;
애초에 코인이란게 주식마냥 보증이 되는게 있고서 이런 소리라도하면 이해라도 하겠는대 실가치도 없는대다 돈에 출처 자체도 확인이 불가능한 검은돈 세탁하기 딱 좋은 구조가 코인이구만
그리고 현시점에서 코인충이라 욕하는게 한두가지 요소로 이렇겠음?
여기 루리웹은 컴퓨터에 관심 많은 사람도 많아서 현 코인충들이 글카 싹쓸이 해서 글카 시장 개판으로 만들어 놔서 더더욱 코인충이라고 욕을 하는거를 이해 보니다 이런 소리를 하지...왜 욕하는지에 대한 요점 파악 좀 하시길...
사람들이 무턱대고 욕도 한다만 대다수 루리웹에서 욕하는 요점이 뭔가 생각 해보시길 바람

녹투아의날개    친구신청

1.코인 자체가 각종 사기와 범죄에 이용<- 그럼 화페는? ㅋ일단 기본이 되는 화폐와 금 다이아는 엤날부터 앞에 블러드라는 접두사가붙을만큼 더러운 사례가 몇백년 단위로 있음
2. 사회분위기가 조성되어서 투자를하는건? 코인뿐만아니라 주식도 바이오 주 소식들 보면 똑같은 맥락임

3. 그 피해를 정부보고 책임지라는 말은 무슨 피해를 받던 정부보고 책임지라고 하는 어디든 항상 있는 무책임한 인간들입니다.
굳이 코인하는 사람을 까내리는건 그저 대상만 다를뿐 3번 인간들이랑 다를바가 없어보이네요
[글] 노동개혁과 정치개혁 (0) 2021/04/10 PM 02:33

노동의 개인화와 분야별 의석

 

 

 

자유주의와 사회주의

 

역사와 외세로 갈기갈기 찢겨진 한국을 흔들리지 않는 단단한 국가로 만들기 위해서는 자유국가에 맞는 사상정립이 필요하다. 정립한 사상을 기반으로 체제개혁을 하여 보다 자유롭고 행복한 사회를 만든다. 지금 한국은 불행하다. 낮은 출산율과 높은 자살률 따위의 지표가 증명한다. 불행한 사회가 다른 체제에 대한 희망을 불러 내부 분열을 일으킨다. 불행한 사회가 남북한의 다양한 지표에서 엄청난 격차를 보여줌에도 북한 내부 선동을 지속하게 만든다. 이걸 해결하려면 지금 체제에서 행복한 사회가 되어야 한다. 그렇게 행복한 사회를 만들어 체제 우위를 명확하게 증명할 수 있어야 국내 결속과 국외 결합을 시도할 수 있다. 많은 민족주의자들이 북한과의 결합을 위해 다양한 시행착오를 겪고 있음을 안다. 진정 민족의 결합을 바란다면 우선 국가의 결속이 시급하다. 순서가 어긋나면 이도 저도 안 된다. 어설픈 동정심으로 그릇된 결과를 도출할 수 있다. 내부를 결속해야 외부와도 결합할 수 있는 것이다. 그걸 위해 사상정립을 해야 한다. 그것을 위해 우선 자유주의와 사회주의의 본질부터 보자.

 

자유주의와 사회주의의 본질은 다음과 같다고 본다. 자유주의는 이기적인 권리쟁취다. 본인의 이익만을 위해 싸운다. 그렇기 때문에 힘을 가진 자가 권리를 쟁취하는데 유리하다. 강자가 권리를 쟁취하여 약자를 착취한다. 착취의 늪에 빠진다. 이것이 경제적 자유주의의 결함이다. 이런 착취로 약자에 속하는 노동자들이 억압과 빈곤으로 고통 받자 이에 마음이 아파진 사상가들이 사회주의를 내세우며 노동자에게 각종 혜택을 요구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사회주의는 이타적인 배려요구다. 모두가 타인의 이익을 위한다. 그렇게 하여 공동체 전체의 이익을 도모한다. 그런데 여기서 배려의 연쇄가 끊기면 공동체는 붕괴한다. 누군가 타인에게 배려를 하지 않고 본인의 이익만 우선시하면 그 사람만 이익을 보고 나머지는 손해를 본다. 그러다가 너도나도 배려를 하지 않게 된다. 배려하는 사람만 호구가 된다.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해서 결국 배려를 강요하게 된다. 규제의 늪에 빠진다. 이것이 사회주의의 결함이다.

 

착취의 늪에 빠지면 적자생존의 야만사회가 된다. 규제의 늪에 빠지면 통제감시의 독재사회가 된다. 각각 사상의 일그러진 결말은 제국주의와 공산주의가 있다. 이 두 가지는 지금까지 인류가 겪어온 이기주의와 이타주의의 순환 중 하나다. 욕망에 의한 이기적인 패악이 나타나면 그에 대항하여 도덕에 의한 이타적인 강요가 나타난다. 자연과 사회다. 도덕에 의한 질서가 답답해지면 자유롭길 바라고, 욕망에 의한 자유가 혼란을 부르면 도덕적이길 바란다. 자유주의와 사회주의다. 예컨대 이런 것이다. 성직자[1신분]와 귀족[2신분]의 억압으로 자유롭길 바랐던 평민[3신분]이 자유주의를 추구했다. 자본가가 이기적인 욕망으로 노동자를 착취하자 사상가와 노동자는 이타적인 마음으로 사회주의를 주장했다. 이와 같이 이기적인 자유 추구와 이타적인 질서 강요가 지금까지 인류 역사의 순환 흐름이다. 지금까지 나는 좌파와 우파의 구분을 지나치게 단순하다고 봤다. 십인십색이라고 모두가 다 다른 색을 지녔는데 어찌 두 가지로 분류될 수 있는가 싶었다. 그런데 위와 같이 단순할 수 있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그 단순함은 학습효과가 없이 반복되고 있었다. 지금은 각국이 이런 순환을 다르게 겪고 있다. 한국은 질서 강요에 답답해져 자유 추구가 늘어났고, 미국은 자유 추구로 혼란스러워 질서 강요가 늘어났다. 두 국가의 정당 지지율을 보면 이 흐름을 유추할 수 있다. 아마 별다른 조치가 없다면 자유 추구와 질서 강요는 다시 한번 반복될 것이다.

 

한국은 이념적으로 볼 때 특별한 국가다. 자유주의와 사회주의의 일그러진 결말인 제국주의와 공산주의 침략과 침공을 받았다. 이념으로 민족이 분단된 국가기도 하다. 이런 역사적 배경으로 이념갈등이 심각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한국인의 행동원리는 이념보다 유교적 가치관에 더 큰 영향을 받고 있으므로 온전하게 그렇다고 보기는 어렵다. 유교의 집단적이고 이타적인 특성상 사실 한국은 사회주의에 적합한 국가다. 이런 특성이 있으니까 군부독재의 계획경제나 의료보험 같은 사회주의적 정책이 온전하게 작동할 수 있었던 것이다. 자유민주주의를 외치는 이가 유교적 가치관에 영향을 받아 집단적이고 이타적인 사회주의적인 성향을 가진 걸 보면 한국 내 정치적 갈등을 이념갈등이라 볼 수 있는 건지 의문이 든다. 한국 내 정치적 갈등은 각 정당이 권력투쟁을 하기 위해 이념을 가지고 국민들을 선동한 끝에 나타난 결과라고 본다. 「공산주의 타도! 군부독재 타도!」 이런 기치를 내세우며 민중의 침략과 침공과 탄압의 트라우마를 자극해 설득이나 선동을 했다는 것이다. 한국 정당의 역사를 보면 초기 여당인 자유당과 야당인 민주당은 모두 자유주의 정당이었다. 이승만, 윤치영, 윤보선, 장면 같은 각 정당 인사들도 전부 자유주의자들이었다. 두 정당에 친일 인사도 많았다. 애초에 사회주의자는 대부분 북한으로 갔다. 한국의 사회주의 성향은 군부 쿠데타로 자유당 측 인사들이 권력을 쥐게 되자 대다수 반대세력[민주주의, 민족주의, 사회주의 등]이 민주당에 결집되어 사회주의 색채가 나타난 것뿐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대립을 통해 색채가 보다 더 두드러지게 된 것이다. 민주주의자가 군부독재와 적대하고 민족주의자가 북한과 화합하고 일본과 반목하고 사회주의자가 노동자와 화합하고 자본가와 반목했던 것이다. 근본은 둘 다 자유주의 정당이다. 그런 관점에서 한국의 정치적 갈등은 이념이 아니라 정당의 권력투쟁으로 촉발된 것이었다. 최근 들어 여성주의가 포함되었는데 이 또한 권력투쟁의 산물로 보인다. 여성주의의 역사가 생각보다 긴 편이지만, 본격적으로 세력화하여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한 것은 최근이다. 이것으로 「유교에 뿌리를 둔 한국에서 어찌 그렇게 이념갈등이 심했는가?」에 대한 답이 될 거라 본다.

 

한국은 유교에 사상적 뿌리를 둔 탓에 자유주의자나 사회주의자가 적은 편이다. 각 정당의 설득과 선동으로 반공주의자와 민족주의자와 민주주의자와 여성주의자와 반여성주의자가 많을 뿐이다. (여기서 민족주의와 사회주의는 반제국주의라는 공통점을 지녀 구분 짓기 어려울 때가 있다. 보통 친북 논란에 휩싸이는 다수의 인물이 사회주의보단 민족주의에 가깝다.) 본인의 생각으로 추구하게 된 사상이 아니라 타인의 필요로 만들어진 사상이다. 국민들의 정치적 성향이 정당의 설득과 선동으로 형성되었다는 것이다. 민중은 본인이나 타인이 겪은 침략, 침공, 탄압, 천대, 역차별 등으로 끊임없이 감정적 자극을 당하며 누군가에게 편한 대로 이용되었다. 유교의 이타적인 위계질서는 정치가의 말을 보다 더 강력하게 작용하게 했다. 이런 배경 때문에 사상이 단편적이고 맹목적이며 종속적인 경우가 많다. 좁은 시야, 감성적인 태도, 맹목적인 지지자와 반대자 따위의 현상은 나라의 정치의 수준을 보여준다. 안타까운 일이다. 강인하고 현명한 인간들이 제 가치를 보이지 못하는 걸 보면 흙 속에 파묻혀 빛을 보지 못하는 보석을 보는 기분이 든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새로운 것을 받아드리는데 어렵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낙관적인 추측을 하게 된다. 현 상황에 대한 분석과 그에 맞춰 바람직한 방향을 제시할 수 있다면 많은 사람들이 그걸 받아드릴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가지고 있다. 그런 작은 소망을 가지고 이 글을 작성하는 중이다.

 

자유주의와 사회주의의 일그러진 결말은 이기주의와 이타주의와의 순환을 되풀이하게 할 뿐이었다. 그 순환에서 벗어나 진정 행복한 사회가 되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자유국가에서는 자유주의에서 그 길을 찾아야 한다고 주장하겠다. 국민이 자유를 사랑하는 한, 다른 방식으로는 길을 찾을 수가 없다. 아니, 인류가 자유를 사랑하는 한 다른 길은 답이 될 수 없다. 모든 인류는 자유주의에서 길을 찾아야 하고, 찾을 수 있다. 자유주의의 본질은 이기적인 권리쟁취다. 힘을 가진 자가 권리를 쟁취하는데 유리하다. 그래서 강자가 약자를 착취하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일방적인 약자 착취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사회주의와 같이 노동자 계급이라는 집단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이타주의를 강요할 것이 아니라, 약자 또한 자유롭게 이기적일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해주는 것이 타당하다고 본다. 강자가 가지는 권리쟁취의 유리함을 모두가 동등하게 누릴 수 있도록 국가가 나서서 통제하는 것이다. 그걸 가리켜 공정경쟁을 위한 환경조성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자유방임주의자는 통제 자체를 꺼려할 수 있다고 본다. 한데 통제되지 않는 자유는 타인의 자유를 침해할 가능성이 지나치게 높다. 법이 없는 무법지대에서 얼마나 많은 이들이 자유를 얻을 수 있겠는가? 강자만 자유로울 확률이 높다. 통제 없는 자유는 모든 이의 자유로 이어지기 어렵다. 모두의 자유를 목표로 한다면 자유를 위해서 국가의 통제를 일정 부분은 받아드려야 한다. 그리고 국가 또한 개인의 자유를 위해서 통제를 해야 한다. 그렇게 모두가 자유로워야 한다. 어떤 이념이 단순한 이기심에서 벗어나 대의를 갖춘 이기심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모두가 이익을 볼 수 있는 구조가 마련되어야 한다. 개인이 자유를 바란다면, 모두가 자유롭길 바라야 이념으로써 가치가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모두가 자유롭게 이기적으로 자신의 권리를 쟁취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모두가 자유로운 길의 첫 번째는 개인의 소유권에 대한 해석을 달리하는 것이다. 기술과 노동력은 개인의 고유한 소유가 되어야 한다. 지식재산권과 마찬가지로 노동력 또한 개인의 재산권이 되어야 한다. 그렇게 하여 모든 노동자는 자신의 기술과 노동력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 주인인 노동자는 자신이 소유한 것을 양도가 아닌 대여의 형태로 거래해야 한다. 지금까지 경제적 자유주의는 자본만 자유로운 비정상적 자유주의였다고 본다. 자유주의는 개인의 소유권을 중시한다. 재산권을 쉽게 빼앗기면 노력의 의미가 없어 노력하지 않게 될 거라 말을 한다. 그런데 자본으로 개인의 소유[기술과 노동력]를 쉽게 양도받을 수 있다. 자본만 자유롭다는 것이 여기서 나타나는 것이다. 예컨대 권력이나 무력으로 개인의 소유를 쉽게 양도받는다고 가정해보자. 그걸 받아드릴 자유주의자가 어디 있겠는가? 그럼에도 재력으로 개인의 소유를 쉽게 양도받는 걸 당연시 한다. 기술과 노동력 또한 쉽게 빼앗기면 노력의 의미가 없다. 기술과 노동력을 위해 아무리 노력해도 내 것이 되지 않은데 뭐 하러 노력하겠는가? 그러니까 많은 사람들이 자아실현이 아닌 생계를 위해 일하게 되는 것이다. 비정상적이다. 어떤 사람은 재력으로 개인의 소유를 양도받는 것은 돈이란 형태로 대가를 지불하기 때문에 괜찮다고 말할 것이다. 그렇다면 묻겠다. 권력으로 개인의 소유를 양도받은 뒤에 어떤 형태로 대가를 지불하면 괜찮은 것인가? 곰곰이 생각해보라. 권력으로 개인의 고유한 권리인 자유를 받아낸 뒤에 물질적 혜택을 주면 괜찮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중국 공산당이 기업을 지원하고 그들에게 복종을 요구한다. 복종하지 않으면 중국 공산당 아래에서 그 어떤 기업도 살아남을 수 없다. 권력으로 고유한 권리를 양도받는다는 것이 바로 이런 것이다. 공산주의 질서 내에서 어떤 혜택을 줬다는 이유로 자유를 양도받는 것과 자본주의 질서 내에서 돈을 지불했다는 이유로 개인의 소유를 쉽게 양도받는 것은 그리 다르지 않다. 힘의 논리에서 권력과 재력은 동일하다. 진정한 자유주의자라면 개인이 소유한 고유한 것을 쉽게 양도하는 것에 찬성해서는 안 된다. 지금 자본가가 자본주의 질서 내에서 기술과 자본을 개인에게 양도받아 소유하고 있는 중이다. 그것이 잘못되었다. 양도받아 소유했기 때문에 잉여가치를 더 많이 얻기 위해 노동자를 착취하게 되었던 것이다. 대여의 형태로 거래되었다면 노동력의 주인이 노동자이기 때문에 대등한 관계에서 계약서에 명시된 노동력만 요구하였을 것이다. 마치 지주가 농노를 구매하듯, 노동자 자체를 고용했기 때문에 이런 부당한 착취가 발생했던 것이다. 모든 기술과 노동력을 양도할 수 없는 개인의 소유로 만들어야 노동자와 자본가가 대등한 관계에서 공정한 거래를 할 수 있다. 현재 노사관계는 자본주의 질서 내에서 불공정거래를 하고 있는 셈이다. 개인은 그 어떤 것에도 종속되어서는 안 된다.

 

 

 

노동의 개인화

 

현대의 노사관계는 농노와 지주와의 관계와 동일하다. 각종 혜택만 달라졌을 뿐이다. 농노에게 노동시간을 줄이고 급여를 늘리는 것과 같은 배려를 해주면 현대의 노동자가 된다. 이는 노동의 집단화라는 점에서 두 관계가 동일했기 때문이다. 개인이 집단에 종속되면 집단의 장에게도 종속된다. 노동자는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자본가에게 종속되고 공산주의 사회에서는 공산당원에게 종속된다. 종속된 노동자는 자본가와 공산당원에게 지배적인 영향력을 받았다. 노동의 집단화가 노동자를 집단에 종속시켜 차별 당하게 만든 것이다. 이런 구조 때문에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국가의 노동자는 대부분 억압 받고 차별 받고 천대 받았던 것이다. 착취당하는 노동자들을 가엾게 여긴 이들이 나타났다. 이들은 사회주의를 주장하며 노동의 집단화를 가속시켰다. 노동자들을 모아 집단을 형성하여 사회에 다양한 혜택을 요구하게 되었다. 노동자 전체의 이익을 위한 투쟁. 사회주의자 라살은 자신의 저서를 통해 이런 것이 노동자 계급의 윤리라 말하고 있다. 「전체에 헌신하라! 그것은 인륜성의 영원한 근본 개념이다.」 이런 이타적인 집단에 대한 헌신은 개인의 고유성을 말살하여 그들의 의도와 다르게 개인을 집단의 부품으로 전락하게 만들었다. 개개인의 결점 또한 개성의 일부임에도 그 결점을 감추기 위해 집단화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노동의 집단화를 가속시킨 사회주의는 농노와 지주와의 관계를 단단하게 만드는 요소가 되었을 뿐이다. 사회주의 국가에서 자본가의 지위가 낮아지는 일이 있던가? 공산주의 국가에서 공산당원의 지위가 낮아지는 일이 있던가? 사회주의는 계급 구분의 철폐를 지향한다지만 개인이 집단에 종속되는 한 그것은 요원한 일이다. 어떤 경우에도 개인이 집단에 종속되면 집단의 장의 지위가 높아진다. 결과가 그렇다. 공산주의 혁명으로 사회를 뒤집어도 집단의 장이 권력을 휘두르지 않았던가? 지금 어느 체제든 종속된 개인은 집단의 장에게 무력하게 배려만 요구하고 있는 상황이다. 모두의 자유와 평등을 바란다면 개인이 종속에서 벗어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이타적으로 집단의 이익을 우선시하면 이기적인 개인의 욕망은 집단에 의해 지워진다. 집단에 의해 개인의 바람이 지워지는데 어찌 그걸 민주적이라 할 수 있는지 알 수가 없다. 모든 노동자가 동일하게 전체를 위해 헌신하자는 마음을 갖게 될 수가 있을 거라 보는가? 모든 사람은 각기 다른 개성과 생각을 가지는 것이 타당하다. 그런데 사회주의는 그걸 무시한 채 모두가 전체를 위해 사는 것이 올바른 일이라 주장한다. 그것이 행복한 길이라 생각하고 있다. 이것은 당시 시대상을 고려하면 일정부분 이해할 수 있기도 하다. 산업혁명 당시 노동자는 성숙한 인간으로 대접받지 못했다. 평생 임금을 받는 노동자는 수련공인 도제와 동일한 지위를 갖고 있었다고 한다. 기능장 아래에서 수련 받는 도제는 사회적으로 미숙했다. 그런 도제와 같은 지위를 가지고 있었던 미숙한 임금 노동자는 노동자조차 선거권을 얻을 자격이 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고 한다. 평생 임금을 받는 노동자는 빈곤과 함께 차별과 억압과 퇴락에 시달렸다. 사회주의자는 그들을 위해 노동자 계급을 통해 노동의 집단화를 발전시켜 사회적 요구를 통해 정당한 대우와 함께 모든 계급 특권을 폐지하면 노동자들이 행복해질 거라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런 식으로 모두가 평등하고 모두가 행복한 이상을 꿈꿨던 것이 아닐까 싶다. 안타깝지만 모든 노동자가 계속 같은 가치를 추구할거란 생각은 일종의 신앙에 불과하다고 하고 싶다. 행복의 본질은 바람실현이다. 임금 노동자의 지위가 상승하면 더 큰 것을 바라게 된다. 이는 당연하다. 배만 부르면 바라는 게 사라지는 개돼지도 아니고, 인간이라면 욕망에 근거한 큰 꿈과 바람을 가지는 게 정상이다. 노동자가 정당한 대우를 받는 순간부터 전체에 헌신하는 게 아닌 더 큰 바람을 갖게 될 사람이 등장할 수 있다는 것이다. 모든 노동자가 전체를 위해 헌신했는데 어떤 노동자가 전체에서 벗어나겠다고 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헌신하지 않는 노동자가 발생하는 순간 배려의 연쇄가 끊겨 그 공동체는 파탄이 나고 만다. 그래서 노동자에서 벗어나는 이를 공격하게 된다. 규제! 감시! 통제! 전체를 위해 헌신하게 만들어라! 이타주의 사상이 도달할 곳은 이처럼 독재다. 사회주의의 인류 구원 방식이 작동되기 위해서는 노동자가 더 큰 걸 바라지 못하게 해야 한다. 그들은 계속 빈곤과 차별과 억압과 퇴락에 고통 받아야 한다. 마치 북한의 인민들처럼 말이다. 인민들에게 쌀밥에 고깃국을 먹여주겠다는 말을 아직까지 하는 걸 보면 알 수 있다. 모든 인민들이 쌀밥에 고깃국을 먹어 배가 부르게 되는 순간, 그 체제는 개개인의 욕망에 의해 붕괴하게 되어있기 때문이다. 혁명을 통해 계급을 뒤집은 공산주의자들이 권력을 쥐게 되면 그들이야말로 계급 특권을 휘두르기 시작한다. 거의 모든 공산주의 국가가 겪은 일이다. 스탈린의 대숙청은 경악할 정도였다. 사회주의로는 다양하게 변화하는 인간의 욕망을 근거로 한 행복을 얻게 해줄 수 없다. 되려 그런 욕망을 가진 이들을 부도덕하다며 비난할 것이다. 당시 가여운 노동자들을 동정하며 그들을 배려해준 것은 이해한다. 하지만 진정 그들을 위해서라면 단순히 배려로 끝나서는 안되었다고 본다. 능력과 욕망을 가진 인간은 바람을 실현하기 위한 모두에게 공평한 교육제도를 마련하여 충분한 교육을 통해 계급과 관계없이 역할을 맡을 수 있도록 하여 계급 특권을 철폐하는 방향이 올바른 길이었다고 본다. 이런 걸 떠올리지 못했던 것은 당시 퇴락한 임금 노동자들이 평균적으로 일정 수준 이상의 지성을 갖출 수 있을 거란 예측을 하지 못했던 것 같다. 인터넷이 보급되지 않았다면 아마 지금도 어려웠을지도 모른다. 시대의 한계다. 그런 관점에서 모든 인간이 모든 역할을 맡을 수 있다고 주장하는 역할주의나 개인이 개인으로 남을 수 있다고 주장하는 노동의 개인화는 발전된 현대의 사회에서 평균 이상의 지성을 갖춘 국민들이 존재하는 국가에서 떠올릴 수 있는 생각일 것이다. 사회주의는 비참한 환경에 놓인 지식이 부족한 이들을 배려하는 것 이상의 것을 줄 수가 없다. 진정 노동자를 위해서라면 개인의 이기적인 욕망까지 가능한 실현할 수 있게끔 해야 한다. 그런 가능한 모두의 바람을 실현해줄 수 있는 환경은 이기적인 자유주의가 마련해줄 수 있다.

 

무엇이 사람을 행복하게 할 수 있을 거라 보는가? 인간은 타인의 바람을 들어줄 때가 아닌 본인의 바람을 실현할 때 행복하다. 그것은 타인에게 이익을 주는 행위라 하더라도 같다. 봉사활동이나 기부도 본인의 자유의지로 행한 것이라면 행복할 수 있다. 개인의 자유의지에 근거한 행동은 모두 이기적이다. 본인이 바란 것은 타인에게 어떤 이익을 주더라도 본인에게 가장 큰 이익이 된다. 그런 관점에서 사회주의자들이 노동자를 돕는 것 또한 이기적이다. 노동자를 돕는다는 본인의 바람을 이루고 싶기 때문에 사회주의를 주장하고, 그런 사회주의가 실현된다면 행복하다 여길 것이 아닌가? 이런 이기적인 행위를 모든 노동자가 받아드려야 할 진리마냥 말하면 안 된다. 그것은 오만한 착각이다. 모든 사람은 각자 다른 바람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노동자는 전체를 위해 헌신하고 싶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사회주의자의 이기적인 바람은 올바른 것이 되고 노동자 개인의 이기적인 바람은 그릇된 것이 된다면 이것은 오롯하게 사회주의자의 독선이 된다. 이런 것은 이타주의 사상들이 대체로 그렇다. 유교, 불교, 기독교 같은 종교나 정치적 올바름, 여성주의 같은 사상은 누구보다 타인을 위한다고 말하면서 누구보다 편협하고 독선적이다. 개인이 전체를 위해 헌신하게 만드는 이타주의 사상은 집단에 개인을 맞춘다. 집단에 맞지 않는 개인은 공격대상이 된다. 다른 개성을 지닌 사람을 정의의 철퇴로 내려찍으면서 정의의 일격을 날렸다며 자랑스러워한다. 일격을 맞은 사람은 자신의 개성을 잃고 집단의 일부로 전락해야 공격받지 않을 수 있다. 그렇게 무개성의 시대가 오게 된다. 사회가 일색평면으로 단일화된다. 숨막힐 정도로 답답해진다. 이 얼마나 참혹한가. 진정 인류를 위한 길은 모든 사람이 자유의지에 근거하여 본인의 바람을 이루고 싶어하는 이기적인 존재일거란 전제하에 그들을 위한 환경을 마련해주는 것이다. 이런 자유주의는 노동자를 돕고 싶어하는 사람의 마음도 포용할 수 있다. 자유로운 자유주의 아래에서 돕고 싶은 사람은 도우면 된다. 타인에게 강요하지 않으면 된다. 사회구조상 복지체계가 마련되어야 사회의 질적 향상이 이루어질 수 있으므로 그들을 돕는 것은 필수적이다. 돕고 싶은 자에게 도울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주고, 나머지는 자유롭게 살면 된다. 모든 인간의 바람은 올바르건 그릇되건 이기적임을 잊으면 안 된다. 그래야 교만과 독선에 빠지지 않을 수 있다.

 

노동의 개인화를 위해서는 우선 노동력을 상품화해야 한다. 모든 노동자는 자신의 노동력을 상품화하여 그 노동력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 노동력은 자유권과 마찬가지로 개인의 고유한 소유로 양도되어서는 안 된다. 자유권을 양도한 사람은 양도받은 사람의 노예가 된다. 노동력을 양도한 사람은 양도받은 사람의 높은 잉여가치를 위해 착취당하게 된다. 양도했기 때문에 종속되었고, 종속되었기 대문에 착취당했다. 노동자는 자본가에게 종속되어서는 안 된다. 모든 노동자는 자신의 노동력이란 상품을 취급하며 그 상품을 대여의 형태로 판매하는 사업가가 되어야 한다. 기업이 상품을 생산하여 고객을 찾듯, 노동자가 노동력을 상품화하여 고객을 찾아야 한다. 노동자와 자본가는 상품 주인과 상품 구매 고객이 되어야 한다. 이렇게 대등한 거래관계가 되어야 비로소 공정한 거래가 가능해지는 것이다. 지금은 노동력이 아니라 노동자가 상품이 되어 양도되고 있다. 고용을 생각해보자. 어떤 사람이 상품을 구매할 때 일생을 같이할 반려자를 정하는 것마냥 고심하는가? 노동자를 농노처럼 평생 종속되는 존재로 생각하니까 그렇게 고심하는 것이 아닌가? 노동력이 상품화된다면 상품화된 노동력의 가치를 명확하게 알 수 있어 그렇게 복잡한 고용절차가 필요가 없다. 노동시간을 생각해보자. 노동환경이 다름에도 대체로 9시부터 18시까지로 노동시간이 규격화되었다. 노동자를 구매한 다음에 노동법에 근거하여 일괄적으로 배려해준 것일 뿐이다. 만약 노동력을 구매했다면 노동시간이 규격화될 필요가 없다. 직무에 따라 시간보다 결과가 중요할 때가 있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이 한 시간 일하고 계약을 많이 따냈다. 어떤 사람이 하루 종일 일하고 계약을 아무것도 따내지 못했다. 어떤 사람이 한 시간 일하고 개발했다. 어떤 사람이 하루 종일 일하고 개발하지 못했다. 누가 더 유능한가? 어떤 노동력이 더 가치 있겠는가? 노동력이 상품화된다면 굳이 고정된 고용시간을 준수할 필요가 없다. 임금을 생각해보자. 어째서 노동자는 다른 노동자의 임금을 알기가 어려운가? 지금은 일방적으로 자본가만 유리한 상황에서 거래를 하여 노동자가 정당한 대가를 받지 못하고 있다. 상품을 거래하는데 자본가만 유리하다. 노동시장에서 노동력이란 상품의 정보가 명확하게 공개되지 못해 정당한 대가를 받지 못하고 있다. 자신의 상품을 경매에 올렸는데 비슷한 상품이 얼마에 팔려나갔는지 알 수가 없으면 정당한 경매가를 붙이기 어렵다. 그와 마찬가지다. 노동자와 자본가의 고용형태가 노동력이란 상품을 대여의 형태로 거래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라는 인간 자체를 고용하여 종속되게 만들다 보니 이런 불공정한 거래가 나타나는 것이다. 정상적인 시장경제가 활성화되려면 노동력 또한 양도될 수 없는 대여의 형태의 상품으로 거래되어야 된다고 본다. 지금까지 시장경제 속에서 노동자가 착취당했던 것은 노동력이란 상품이 불공정하게 거래되었기 때문이다. 공정거래가 가능하다면 일방적인 착취는 보통 있을 수 없다고 본다.

 

모든 노동자는 자신의 노동력을 상품으로 취급하며, 그 상품을 대여의 형태로 판매하는 사업자가 되어야 한다. 그런데 노동자는 보통 본인의 노동력만 취급하기 때문에 다수의 상품을 거래하는 자본가와 대등한 관계를 맺기가 어렵다. 갑을 관계에서 벗어나기 어렵다는 것이다. 따라서 비슷한 상품을 취급하는 노동자들이 공정거래를 위한 협약을 맺어야 한다. 가령 어떤 고객[자본가]가 부당한 거래를 한다면 비슷한 상품을 취급하는 공급자[노동자]는 노동력 공급을 통제할 수 있어야 한다. 특정 고객에만 공급 제한을 걸기 때문에 공급자가 불이익을 얻을 확률이 적다. 블랙리스트라는 것이다. 부당한 행위를 널리 알려 사회적 공감대를 사게 된다면 다른 고객이 구매를 기피할 이유가 되지 못한다. 예컨대 이런 것이다. 최근 택배 차량 출입을 금지한 아파트에 배송물품을 아파트 입구 앞에 둬버리는 사건이 발생했다. 서비스 제한을 해버린 것이다. 그럼에도 다른 고객들은 그것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 않고 택배회사를 계속 이용한다. 고객이라 할지라도 불공정한 행위를 저지르면 그에 해당하는 제재를 받더라도 정당하다는 인식이 있기 때문이다. 이런 방법의 대등한 관계를 위해서는 노동자가 분야별로 서로 협약을 할 수 있는 어떤 집단이 필요하다. 개인이 자신의 노동력이란 상품을 관리와 가치성장을 하며 공정거래를 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주는 집단이 있어야 개인이 개인으로 남을 수 있다. 그래야 개인인 노동자가 막강한 재력을 소유한 자본가와 대등해질 수 있다. 계속 어떤 집단이라 부를 수 없으니 임시로 이름을 정하겠다. 처음에는 온라인 게임에서 유저들의 모임인 길드라 가칭했지만, 한국식으로 부르는 것도 좋을 것 같았다. 모임을 뜻하는 모꼬지로 임시 가칭하겠다. 실제 뜻은 놀이나 잔치 또는 그 밖의 일로 여러 사람이 모이는 것이라고 한다. 자유국가에서의 노동은 마치 놀이처럼 즐기듯 본인의 바람으로 노동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자유국가에서는 강요를 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노동 또한 본인의 의지로 해야 한다. 본인의 바람으로 노동을 한다면 워라밸Work-Life Balance는 꼭 필요한 것이 아니게 된다. 즐기면서 일하므로 노동시간이 여가시간과 비슷하게 된다. 바라는 노동과 정당한 대가가 주어진다면 시간 관계없이 즐겁게 일할 수 있다. 실제 그런 사람이 있고 그런 사람은 경제적 자유를 얻어 생계걱정이 없는 상황에서도 시간관계 없이 노동을 즐긴다. 그것이 이상적이다. 반복 작업조차 게임을 떠올려보면 가능하다는 걸 알 수 있다. 게임 내의 지루한 반복 작업도 캐릭터의 성장을 위해 자발적으로 즐기면서 하는 이들이 많다. 보상설계를 잘 한다면 어떤 노동도 즐겁게 즐기게 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모꼬지는 적합한 이름이라고 본다. 받침이 없어 해외에서도 발음하기 괜찮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슬로건은「노동자가 즐기면서 일할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해주자.」다. 이렇게 모꼬지를 통한 협약으로 노동의 주도권을 노동자가 쥐고 있어야 한다. 마찬가지로 기술의 주도권은 개발한 연구자가 쥐고 있어야 한다. 이는 자본의 주도권을 자본가가 쥐고 있는 것과 동일하다. 이래야 시장경제가 자본만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되어 일방적인 자본지배에서 벗어날 수 있다. 지금 시장경제는 노동과 기술을 자본이 일방적으로 양도받아 사용할 수 있기 때문에 자본만 가지고 돌아갈 수 있었던 것이다. 그것이 불공정하며 비정상적이다. 기술, 노동, 자본이 모두 이기적으로 힘을 쥔 상태에서 서로를 견제하는 것이 환상처럼 느껴졌던 보이지 않는 손을 작동시킬 수 있는 수단이라 생각한다. 생산을 하는데 필요한 역할이 모두 대등하다. 이것이 바로 역할주의적 사고다. 본래 자본가를 견제해야 할 노동조합은 이런 걸 할 수가 없다. 자본가에 종속되어 있기 때문이다. 택배와 아파트 같은 거래관계라면 다른 고객을 통해 이익을 얻을 수 있기 때문에 아파트의 부당한 행위에 대항할 수 있다. 하지만 노동조합은 대체로 자본가에게 종속되어있기 때문에 그런 것이 불가능하다. 노동조합이 자본가의 부당한 행위에 맞서 파업을 한다고 가정해보자. 그런 노동조합이 다른 곳에서 이익을 얻을 수 있을 거라 보는가? 그들에게 파업은 공멸을 전제로 한 무력한 협박이다. 자본가 입장에서 대체할 수 있는 인력은 정치권 개입이 없는 이상 그냥 해고하면 된다. 노동조합은 정치가의 배려가 없으면 자주적으로 뭘 할 수도 없는 무력한 구조다. 그러니 독립된 노동자의 분야별 집단인 모꼬지에서 노동력이란 상품의 공급을 조절할 수 있어야 노동의 주도권을 잡고 자본가의 부당한 행위에 맞설 수 있는 것이다. 이는 기술도 동일하다. 기술이란 상품의 공급을 조절할 수 있어야 기술의 주도권을 잡고 자본가의 부당한 행위에 맞설 수 있다. 연구자는 노동자이자 기술개발자이지만 실상 필요로 하는 것은 노동력보다는 기술이기 때문에 좀 예외적인 특성을 가지고 있다. 하나 노동자와 같이 모꼬지로 묶도록 하겠다. 노동력의 공급제어나 기술의 공급제어는 방식이 비슷하기 때문이다.

 

모꼬지의 출현은 기술을 개발하는 연구자부터 시작하는 것이 좋을 거라 본다. 노동은 체계적인 사상과 복잡한 이해관계를 가진 노동조합과 오랜 시간 뿌리내린 갑을 관계의 노사관계 등으로 개혁을 하는데 있어 어려움이 있을 거란 예측을 하게 된다. 앞장서서 변화를 꾀해야 할 노동조합이 노동자가 자본가의 종속에서 벗어나는 걸 바랄지 의문이 든다. 종속되면 배려 받으며 살 수 있지만 자유를 얻으면 세상과 투쟁을 하며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시대가 변하여 온라인으로 차량거래가 가능함에도 노동자들의 이해관계에 부딪쳐 거래가 어려운 상황이다. 사회가 진보하지 못했다. 따라서 그들이 주도적인 변화를 시작하기는 다소 어려움이 있다고 본다. 사회주의가 이기주의와 이타주의의 순환에서 뒤에 자리잡았기 때문에 진보라는 말을 듣지만 사실 누구보다 보수적일 때가 있다. 과거 사회주의자도 영국의 러다이트 운동을 보며 노동자 개개인은 보수적일 수 있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사회주의의 본질은 진보가 아니라 이타주의다. 반면 과학은 언제든지 현재의 지식이 부정될 거란 각오아래 끊임없이 완전한 진리를 쫓는 학문이라 생각한다. 따라서 상대적으로 가장 진보적이라 할 수 있는 과학부터 시작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본다. 자동화 체계의 발전으로 노동력의 필요성이 점진적으로 감소하면서 앞으로 시장경제는 기술과 자본이 중심이 될 확률이 높다. 그러니 기술이 노동을 잡지 않고 혼자서 개혁해도 그리 큰 문제는 아닐 거란 생각을 할 수도 있다. 그런데 그러면 대의를 놓치게 된다. 연구자가 손쉬운 기술양도의 부당함을 느끼지 못했을 리는 없다고 본다. 그래서 기술을 개발한 개인의 소유가 되게끔 하자는 주장이 있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그것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이루어지지 못하는 것은 다수의 공감을 살 수 있는 대의를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본다. 대의가 없으면 개혁할 수 없다. 무슨 대의를 갖춰야 하는가?  자본종속으로부터 인류의 해방. 연구자의 기술독립으로부터 시작해 그 독립성이 다른 분야에도 전파되어 사회전체를 개혁하고, 그 개혁이 세계를 변화시킬 수 있을 거라 본다. 기술독립은 사회의 일방적인 자본종속에서 벗어나 모든 구성원이 자유로울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하는 기반이 될 것이다. 이에 따라 모든 구성원은 그들의 기술독립을 응원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본다. 실상 연구자가 시작한다고 하더라도 다른 분야의 동의가 없으면 개혁은 일어나기 어렵기 때문에 모든 분야의 지원이 절실하다. 어떤 사람은 연구만 하고 싶어할 수 있다. 그런데 정말 어려울 것이 없다. 지금 당장 현존하는 연구자 협회, 재단, 학회 등은 그대로 놔둬도 된다. 모꼬지의 역할은 연구자 개인이 개인으로 있을 수 있는 환경 조성이다. 모든 기술을 개발한 연구자가 소유한다. 소유한 기술의 특허침해는 기술공급 제어를 통해 방비한다. 연구자는 자본가에게 돈을 받고 기술을 헌납하는 존재가 아닌, 거대한 시장경제의 한 축을 담당하는, 자본가와 대등한 존재다. 막말로 모든 기술의 공급을 차단하면 새로운 기술이 필요 없는 회사를 제외하면 어떤 기업도 살아남을 수 없다. 아무리 돈이 많아도 기술을 구매할 수 없으면 그 돈은 무용지물이 된다. 자본가에게 돈으로 부려지는 것이 아니라 자본가와 대등하게 거래할 수 있다. 기술의 주도권을 개발한 연구자가 쥐는 것으로 일방적인 자본종속에서 회피할 수 있다. 기술을 소유하여 기술의 주도권을 연구자가 잡자는 말로 연구자 사이에서 공감대를 형성하면 된다고 본다. 그리하여 시장경제에서 기술이 하는 역할에 대한 정당한 대가를 받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사회에 모범이 되어 다른 분야의 개혁을 촉발시킬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주도권은 시장경제뿐만이 아니라 정부와의 관계도 동일하다. 지금 과학에 대한 지식이 없는 정부 관료가 예산을 책정하여 필요한 곳에 예산이 투입되지 못해 예산효율이 낮다고 한다. 기술의 주도권을 잡아 정부와 대등한 관계가 된다면 그런 일이 줄어들거라 본다.

 

모꼬지는 모든 개인이 개인으로 있을 수 있기 위해 다음과 같은 걸 추구한다. 저번 글에 썼던 걸 재정리해보겠다. 첫째, 분야별 모꼬지 창설. 둘째, 학교는 학업, 모꼬지는 취업. 셋째, 모든 이의 손쉬운 사회참여. 넷째, 민주적인 대표선출. 다섯째, 시장경제의 한 축으로써의 역할 공고. 여섯째, 기술과 노동과 자본에 대한 평가. 일곱째, 개인 능력 향상. 여덟째, 집단지성활용. 아홉째, 사업진출지원 열째, 능동적인 정치참여. 이렇게 분야별로 나눈 것은 역할주의적 가치관이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각각 세부적인 사안은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것까지 해보겠다. 구체적인 정리는 아무래도 시간이 많이 필요하다.

 

첫째, 분야별 모꼬지 창설. 모꼬지는 기술이나 노동력이란 상품을 취급하는 사람들의 모임으로 그들이 개인이나 집단에 종속되지 않은 상황에서 즐기면서 일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걸 목적으로 한다. 모든 인간이 종속되지 않기 위해서는 각자 상품을 취급할 수 있어야 한다. 기술과 노동력 같은 상품은 결코 양도되어서는 안 되는 고유한 소유권에 해당한다. 그래야 누군가에게 종속되지 않고 공정한 거래를 할 수가 있다. 기업을 중심으로 한 노동조합과 달리 분야를 중심으로 하기 때문에 각각 분야별로 모꼬지를 창설해야 한다. 집단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노동조합과 달리 개인의 이익을 우선시한다. 이 모꼬지는 학교기관과 마찬가지로 국가에 공인된 시설로써 자발적으로 소속되며 가입과 탈퇴가 자유롭다. 개인이 기술과 노동력을 관리 및 판매와 함께 상품가치를 올릴 수 있게 돕는다. 모든 인간이 상품을 취급하는 사업자가 되어 노동자와 자본가의 경계를 허문다. 노동자는 자본가에게 노동력을 대여의 형태로 판매하는 사업자이며 자본가는 국민에게 상품을 판매하는 사업자다. 그 관계는 언제든지 변화할 수 있다. 노동자는 노동력이란 상품판매의 이익을 통해 자본을 얻게 되면 자본가가 되어 노동력을 구매할 수 있다. 노동력 판매자가 노동력 구매자가 되어 노동력의 수요를 증가시켜 사회흐름을 유연하게 바꾼다. 이걸 통해 자본가가 바라던 노동유연화도 가능해진다. 개인이 소유할 수 있어야 소유 욕망과 함께 소유물에 대한 책임을 지겠다는 의식이 나타나는 법이다. 자본가 또한 이런 노동의 개인화를 긍정적으로 바라보길 바라겠다. 무엇을 기준으로 분야를 나누느냐에 따라 매우 복잡해진다. 기술이나 노동력 상품의 연관성에 기준을 두고 분야를 나누는 것이 좋아 보인다. 그래야 모꼬지에 모여 자유롭게 상품을 거래할 수 있을 것이다. 분야는 지금 당장 구체적으로 정하기는 어렵지만, 분야별 의석을 통한 정치참여를 고려해보면 세세한 기준으로 나눠야 할 것이다.

 

둘째, 학교는 학업, 모꼬지는 취업. 이는 교육개혁에 해당하는 사안이다. 학교에서 취업까지 담당하는 것은 학교가 제 역할 하는 걸 방해한다고 본다. 아무래도 취업에 맞춰서 교육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인간으로서의 성장이 아닌 시장경제의 도구로써 성장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고 본다. 학교는 학생의 인간적 성장에만 몰두해야 한다. 학업에 대한 강요가 줄어드는 시점에서 자발적으로 학업을 하게끔 하기 위해서는 스스로가 학업에 집중할 이유를 찾아야 한다. 인간적 성장은 그 이유를 찾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모꼬지는 취업을 담당하며 학생들의 사회참여를 지원할 것이다. 그렇게 하여 그들에게 문제해결능력을 올려줄 것이다. 교사가 내려주는 것이 아닌 실제 사회 속에서 사회문제를 해결하면서 능력을 키워나갈 수 있어야 한다. 어떤 사람은 군에서 실수한 경험으로 도전에 대한 두려움을 씻어내 성공할 수 있었다고 한다. 주입식으로 가르치다 보면 어떤 학생들은 그 가르침을 완벽하게 수행하려고 하다가 도전을 꺼려하게 된다. 그런 학생들이 실제 사회에서 작은 실수를 경험하면서 도전에 대한 두려움에서 벗어나 마음껏 도전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들에게 실패를 경험할 기회를 줘야 한다. 학생의 노동을 가볍게 여기는 문화가 있다. 학생이 일을 하면 그에 대한 대가를 제대로 주지 않는다. 많은 사회활동이 무급의 봉사활동에 그친다. 그것은 노동과 그에 따른 보상을 학습하지 못해 노동에 대한 친숙함을 주기 어려운 잘못된 관행이라 본다. 학생들이 게임에 몰두하는 것은 현실의 보상체계가 형편없기 때문이다. 보상체계가 정립되면 게임뿐만이 아니라 현실에서도 높은 만족도를 느끼며 몰입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조기사회활동을 통해 학생의 자립도를 높여 부모의 지나친 간섭으로 인해 피곤한 교육계가 다소 편해질 거라 본다. 실제 사회참여를 돕는 모꼬지는 소속된 인원에게 전부 금융교육을 가르쳐 자산을 불리게 하여 언제든지 자본가가 되어 노동력을 구매할 수 있는 존재로 바꾸게 할 것이다.

 

셋째, 모든 이의 손쉬운 사회참여. 입사 과정 절차가 복잡한 것은 노동력 품질검증이 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복잡한 절차를 통해 인원을 선별한다. 노동 상품에 대한 품질검증이 끝나 있으면 복잡한 절차 없이 어렵지 않게 사회에 참여할 수 있게 된다. 모든 노동자가 노동력이란 상품을 관리하게 된다면 연령이나 성별이나 경력이나 단절시간과 관계없이 능동적인 사회참여가 가능할 거라 본다. 노동력에 대한 구체적인 상세정보를 작성하고 학력과 경력에 따른 관계자의 평가를 통해 어려운 검증절차 없이 대여의 형태로 구매를 결정할 수 있다. 이는 구매자인 자본가에게도 이익이 되는 방식이다. 편리한 구매가 가능하면 구매자가 늘어 판매 또한 수월해진다. 노동과 자본은 분리된 것이 아니다. 판매와 구매로 서로가 없으면 존재할 수 없다. 최근 노동시간이 줄어들면서 여러 개의 직업을 가지는 일이 흔해졌는데, 그것이 당연한 것이다. 누군가에게 종속되지 않은 상태에서 자유롭게 일을 골라할 수 있어야 한다. 손쉬운 사회참여가 가능해지면 모두가 여러 개의 일을 하며 종속된 존재로 남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모두가 노동력이란 상품을 취급하는 사업가로서 필요에 따라 노동력을 쉽게 거래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 중고거래 앱에서 순간적으로 필요한 노동력을 구매하는 글들이 올라오고 있다. 이처럼 이제는 모두가 노동력의 구매자이며 판매자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여 사회에 필요한 노동력이 유연하게 쓰이면서 유기적인 사회구조가 나타나 보다 더 편리하고 만족스러운 생활이 될 것이다.

 

넷째, 민주적인 대표선출. 모꼬지는 모두 대등한 관계기 때문에 대표를 민주적인 절차로 선출해야 한다. 지금까지 노동의 민주화가 불가능했던 것은 대다수 노동자가 자본가에게 종속되어있었기 때문이다. 어떤 것에도 종속되지 않는 집단 내에서 민주적인 절차로 분야의 대표를 선출하고 구성원의 의향으로 시장경제에 기술과 노동력의 공급관리가 가능해진다면 그 순간부터 노동의 민주화가 가능해질 것이다. 모든 노동자가 자신의 노동력의 주인이 되는 것. 인력 공급이 아닌 노동력 공급이 되어야 하는 것. 노동의 주도권을 노동자가 쥐는 것. 이런 것이 노동의 민주화라고 생각한다.

 

다섯째, 시장경제의 한 축으로써의 역할 공고. 기술과 노동은 자본에 종속된 관계가 아니다. 시장경제를 구성하는 한 축에 속한다. 필수적인 역할을 하는 대등한 관계라는 것이다. 따라서 노동자는 자본가에게 충성할 필요가 없고 자본가는 노동자의 삶을 책임 질 필요도 없다. 노동자는 대여의 형태로 판매하는 노동력에 대한 품질보증만 하면 되고, 자본가는 그 노동력에 대한 대가만 충분이 제공하면 된다. 회사에 들어온 신입의 실수를 상사가 책임지기 때문에 상사가 높은 급여를 받는다는 말이 있다. 그것은 개인이 집단에 종속되는 걸 정당화하는 것에 불과하다. 개인의 실수는 보험을 통해 처리하면 된다. 노동력이란 상품을 취급하는 모든 사람은 직무에 해당하는 보험가입을 하면 된다. 그에 따라 본래 기업이 짊어져야 하는 위험부담에 따른 금액을 전부 노동력 상품 구매에 쓰여야 한다. 그렇다면 대다수 노동자는 지금 받는 것 이상의 정상적인 대가를 받게 될 것이다. 지금까지 개인은 집단에 보호받는 만큼 집단을 위해 희생되었다. 그것이 부당하다. 안정적인 노동력 공급을 위해 모든 노동계약은 반드시 구매해야 하는 기간을 정해두고, 해고 시에는 약정위반에 따른 위약금을 내게끔 해야 한다. 그것이 공정한 거래다. 이외 다양한 절차는 모꼬지에서 지원해줄 수 있는 부분이다.

 

여섯째, 기술과 노동과 자본에 대한 평가. 기술과 노동과 자본은 모두 평가 받아야 한다. 가치를 평가 받지 않고 어찌 공정한 시장경제가 활성화될 수 있겠는가? 명확한 가치가 부여되어야 공정한 거래가 가능한 것이다. 그런 가치 평가를 통해 노동자는 고객[자본가]을 고르고 자본가는 상품[노동력]을 고른다. 이런 식으로 공정거래를 대등하게 해야 일방적인 갑질이 사라지는 것이다. 한국이 학력사회가 되는 까닭은 자기어필을 할 수 있는 수단이 적기 때문이다. 노동력의 가치를 모르니까 학력으로 예상하게 되는 것이다. 다양한 곳에서 신뢰할 수 있는 구체적인 평가가 있어야 학력중심사회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이다. 그렇게 공평한 가치평가로 연령과 성별과 학력과 지역과 인맥과 관계없이 정당한 대우를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신입보다 능력이 부족하면서 연차가 높다는 이유로 높은 대우를 받는 것은 정말 부당한 일이다. 그러면서 노동자 인권을 내세우며 해고도 못하게 한다. 이게 도대체 누구를 위한 노동자 인권인가? 신입 노동자는 노동자도 아닌가? 집단을 중시하면 개인은 말살된다. 노동력이란 상품에 가치가 부족한 노동자는 일거리를 찾기 어려울 수도 있다. 특히 자동화 설비가 발전할수록 그럴 것이다. 그런 노동자는 정부의 기초생활보장을 받는 것이 낫다. 괜히 능력도 없는데 높은 자리를 차지하며 생산성을 악화시키는 것보다 훨씬 낫다. 누구든 능력이 있는 사람은 우대받고 능력이 없는 사람은 생활을 보장받는 구조가 이상적이다. 이런 것이 노동의 유연화를 불러 산업의 생산성과 효율성을 늘려줄 것이다.

 

일곱째, 개인 능력 향상. 인간은 성장하기 싫은 것이 아니다. 성장하는 방법을 모르는 것이다. 많은 노년세대가 새로운 기술에 적응하기 어려워한다. 예컨대 키오스크라는 무인주문기계를 이용하는 것을 어려워한다. 어떤 사람은 노년세대도 배워야 한다고 주장한다. 배우기 싫어하면 안 된다고 말한다. 그런데 그들이 배우길 싫어하기 때문에 배우지 않겠는가? 배우는 방법을 모르니까 배우는 것이 어려워서 결과적으로 배우길 싫어하게 되는 것이다. 인간은 평생 배워야 한다. 단순 노동 때문만이 아니다. 보다 만족스러운 삶을 위해 새로운 기술을 쉽게 터득할 수 있어야 한다. 앞으로의 기술 발달을 고려하면 연령과 관계없이 꾸준히 배워야 하는 시대가 왔다. 그걸 모꼬지에서 지원해야 한다. 학교는 미성년까지의 교육을 담당하고 모꼬지는 분야에 맞춰 평생 교육을 담당할 것이다. 모든 인류가 보다 즐겁게 살기 위해. 그런 교육은 게임의 학습과 보상체계가 효율적이라 본다. 게임만큼 효율적으로 만족도를 주는 구조가 많지 않다. 선입견으로 게임을 무시하지 않는다면 그런 구조를 현실에 적용하는 것에 거부감을 느끼지 않을 것이다. 노동력이란 상품의 정당한 가치평가를 위해 상품의 구체적인 소개가 필요한데, 그걸 게임의 시스템을 활용하면 된다고 본다. 각 직무능력을 단순 상중하 정도로 머무를 것이 아니라 레벨을 도입하여 체계적으로 수준을 명시할 수 있어야 한다. 소유하고 있는 언어의 레벨이나 기술의 레벨을 능력에 맞춰 올리거나 내릴 수 있어야 한다. 노력으로 능력을 키우면 그에 대한 보상이 명확해야 한다. 지루할 정도로 재미없는 반복작업도 게임에서는 즐겁게 할 수 있다. 보상체계가 명확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신의 성장을 쉽게 알 수 있다. 게임과도 같은 성장구조가 정착하면 게임을 즐기듯 편하게 도전하고 성장할 수 있을 것이다. 게임이 그러하듯이 말이다. 경력 또한 레벨에 반영되어야 한다. 장시간 대여의 형태로 판매되는 일반적인 일자리부터 단시간의 거래 또한 세부적으로 작성되어 레벨에 반영된다면 사소한 노동도 즐겁게 할 수 있을 것이다. 빈곤에서 벗어난 국가에서 노동은 단순 생계뿐만이 아니라 노동을 하면서 느끼는 행복도도 중요하다고 본다. 그런 행복을 위해서 효과적으로 만족도를 줄 수 있는 게임 시스템 도입이 필요하다고 주장하겠다. 이것은 이미 게임의 형태로 증명된 방법이다.

 

여덟째, 집단지성활용. 완전자동화 사회로 많은 일자리가 사라진다고 해도 분야 자체가 사라지는 일은 드물다. 자율주행차량이 등장하면 대중교통 분야의 일자리는 많이 사라질 것이다. 그러나 교통 분야 자체가 사라지지는 않는다. 운영관리 할 소수는 남게 된다. 그리고 소수를 제외한 나머지가 교통 분야에서 일을 하고 싶다면 다른 방식으로 일을 해야 한다. 교통이란 사람, 화물(화폐포함)등의 장소적 이동 즉 수송 및 전달과 관련된 직접 간접적인 모든 행위와 조직 체계를 의미한다고 한다. 이에 해당하는 새로운 이동 수단을 도입하거나, 교통에 관련된 아이디어를 내야 할 것이다. 여기서 그런 아이디어는 집단지성을 활용하면 효과적일 거라 본다. 아이디어를 공급하는 사회적 역할을 도입해야 한다는 것이다. 아이디어 또한 상품화가 되어 그걸 거래할 수 있어야 한다. 아이디어 공급자를 싱크탱크에 속하게 만들어 각 분야별로 충분한 아이디어를 동원할 수 있어야 한다. 가령 대중교통 운전사가 자율주행차량으로 일자리를 잃게 되면 그 동안 일하면서 생각해왔던 교통 관련된 아이디어를 낼 수 있을 것이다. 그리 큰 대가는 아니더라도 그걸 즐기면서 할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되어야 한다고 본다. 이외 집단지성을 활용할 수 있는 모든 걸 지원해야 한다고 본다. 온라인으로 가능한 일이 무궁무진하다. 대표적으로 번역은 다들 알 것이다. 어떤 게임이 집단지성으로 번역된 사례도 있을 정도다. 위키 또한 집단지성의 결과물이다. 정보의 질은 상대적으로 낮더라도 접근성과 가독성이 훌륭하기 때문에 많은 사람이 이용하는 정보공급사이트다. 출처만 분명하면 간단한 정보는 위키가, 자세한 정보는 언론이, 깊이 있는 정보는 논문이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외 일종의 설계도만 있으면 홈페이지 제작이나 게임도 개발이 가능하지 않을까 싶다. 도면을 받아 각자의 영역만 개발하면 된다. 집단지성은 노동력을 대여의 형태로 판매하는 것과 달리 최소한의 정보로 가벼운 일을 하고 상대적으로 적은 대가를 받는 구조가 될 것이다. 집단지성활용은 결과물이 중요한 것이기 때문에 노동력의 상세정보는 필요가 없다.

 

아홉째, 사업진출지원. 우수한 노동자가 평생 노동자가 아니게 되어야 한다. 대기업의 직원들이 일정이상 수익을 얻게 되면 이제 공급자가 아닌 고객이 되어 노동력을 구매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노동력에 대한 수요가 늘어 공급도 원활하게 진행된다. 노동자를 위해 평생 노동을 올바른 것처럼 사회분위기를 조성한 걸로 안다. 평생 일자리가 중요하다는 듯이 말을 했다. 그런 것에 영향을 받아 노동력을 구매할 고객이 될 수 있는 우수한 인재들이 안정적인 직장에 머물렀던 까닭에 노동력 수요 감소를 불러 노동력이란 상품을 취급하는 노동자가 상품을 팔 대상이 줄어드는 손해를 봤던 것이다. 능력이 있는 사람이 능력을 펼칠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되어야 다른 사람들도 좋은 것이다. 노동력을 대여의 형태로 팔아 자본을 마련한 사람은 누구나 다 사업을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게 해야 부당한 자본가의 횡포에서 벗어날 수 있다. 부당한 자본가에 맞서 노동력 공급 차단을 하기로 결정했는데, 마땅한 일자리가 없다면 사업을 해서 그 자본가를 대체할 수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열째, 능동적인 정치참여. 각 분야를 대표해 정치적인 활동을 한다. 이기적일수록 자유롭고 민주적이다. 이타적일수록 지배적이고 독재적이다. 집단 중심이 될수록 개인의 의사는 집단의 의사에 파묻혀 소멸한다. 자유국가에서는 모두가 이기적이어야 자신의 주장을 마음껏 펼칠 수 있다. 모두가 이기적이어도 타인이 이기적임을 받아드릴 수 있다면 질서는 유지된다. 서로의 이기심이 상충되면 누구의 이기심이 정당한지 토론을 통해 결정한다. 만약 이타적이라면 이런 토론 자체가 성립될 수가 없다. 누구는 이익을 보고 누구는 손해를 보는데도 아무런 의사표현도 못하고 지나가버린다. 부당함과 부조리와 부패가 계속된다. 이타주의는 자유국가에 어울리지 않는다. 이기주의야말로 자유국가에 어울린다. 이기적인 주장이 부딪치는 토론이 정치에 영향을 끼쳐 국가가 운영되는 것이 바로 자유롭고 민주적인 것이다. 국민과 국민이 이기적인 주장을 하고 토론을 통해 정당한 주장이 받아 드려진다. 국민과 정부가 이기적인 주장을 하고 토론을 통해 정당한 주장이 받아 드려진다. 부모와 자녀가 이기적인 주장을 하고 토론을 통해 정당한 주장이 받아 드려진다. 이런 식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각 분야의 길드는 모두 자신들의 분야의 이익을 위해 이기적인 주장을 펼치며 정치적인 활동을 한다. 만약 다른 분야와 의견이 충돌할 경우 토론을 통해 우선시할 의견을 선택한다. 길드는 자본을 견제할 뿐만이 아니라 다른 분야들을 견제하는 일도 하게 된다.

 

 

 

분야별 의석

 

최악을 피해 차악을 뽑는 것이 일반적인 시대에서 과연 한국 정치는 민주적이라 할 수 있는가? 차악을 뽑는 사람들은 선거 후보 중 원하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다는 것이 된다. 그런 사람이 많아지는 시점에서 한국의 정치는 민의를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고 본다. 양당의 후보가 아니면 선출될 확률이 희박한 시점에서 사실상 한국은 양당독재체제나 다르지 않다. 지금 양당은 적대적 공생관계다. 여당이 실수하면 야당이 지지 받고 야당이 실수하면 여당이 지지 받는다. 그 외의 선택지가 없다. 왜냐하면 국민의 정치성향이 정당의 설득과 선동으로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개개인이 고유한 사상을 가지고 있는 게 아니라 정당이 주입한 사상을 가지고 있다. 침략, 침공, 탄압, 천대, 역차별 등의 마음의 상처를 자극해 분노와 증오의 감정을 싹 틔게 한 것이 사상으로 형성되었다. 반공주의, 민족주의, 민주주의, 여성주의, 반여성주의 같은 성향은 설득과 선동을 한 정당이 만든 결과물이다. 그렇게 형성된 지지자 밭에 공천권한을 쥔 사람이 공천을 하면 웬만하면 뽑히게 된다. 정치의 주도권이 국민이 아니라 공천권한자에게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정치가는 누구의 의사를 반영하겠는가? 공천권을 쥔 사람의 의사를 반영하지 않겠는가? 시스템 공천을 도입한다는 얘기도 들은 기억이 난다. 그래 봐야 국민의 민의가 없으면 별 의미가 없다. 정당의 비례대표는 과연 국민의 의견을 얼마나 수용하고 있었던 것인가? 정의당의 비례대표 1번은 정말 웃지 못할 현대판 희극이다. 민의는커녕 지지자들의 의사조차 반영된 인사가 아니라고 본다. 이는 노동자와 자본가의 관계와 같다. 노동조합 자체가 힘을 쥐고 있는 게 아니라 노동조합이 정치에 영향을 끼쳐 힘을 발휘하는 구조가 아니던가? 지금 노사관계에서 자본가는 노동자의 의견보다 정치가의 의견에 귀를 기울이게 되어있다. 중대재해법도 자본가는 노동자가 아닌 정치가를 상대하고 있었다. 노동자는 아무런 힘이 없는 무력한 존재에 불과했다. 그게 정상으로 보이는가? 엉망진창이다. 국민과 노동자가 직접 힘을 쥐는 구조가 아니라면 언제까지나 무력하게 있을 수밖에 없다.

 

이런 의견을 들었다. 과학 예산이 과학에 대해 잘 모르는 관료에 의해 책정되어 예산이 효율적으로 사용되기 어렵다고 한다. 이에 나는 동의한다. 역할을 수행할 능력을 갖춘 사람이 그 역할을 해야 한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불만으로 끝나서는 안 된다. 과학계에 대한 전반적인 홀대는 정치권력 부재가 만든다고 본다. 과학계도 정치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과학자가 꿈꾸는 이상적인 사회를 만드는데 전력을 다해야 한다. 과학자가 진리를 규명하는 이유는 본인의 호기심뿐만이 아니라 그 진리가 인류를 보다 나은 삶으로 인도하길 바라는 마음이 아니겠는가? 단순 생계를 위해서라면 그만한 잠재능력을 지닌 사람이 과학에 매달릴 이유가 없다. 좀 더 쉽게, 좀 더 편하게, 먹고 살 길을 찾았을 것이다. 지금 정치구조로는 이들이 직접적으로 정치에 참여하기는 어렵다. 양당체제에서 정당에 속하지 않으면 정치참여가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정당에서 많은 분야의 의견을 수렴하겠다며 각 분야의 인사를 초빙한다. 그런데 그런 인사는 결국 정당의 입맛에 맞는 코드인사이다. 정당과 다른 이상을 가진 사람도 정당에 속하게 되면 정당을 위해서 일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그런 성가신 걸 바라는 이가 얼마나 있을까? 그래서 지금까지 정계는 분야의 의견을 제대로 수렴하지 못했다고 본다.

 

시대가 바뀌고 있다. 출산율 저하로 지역이 소멸하고 있다. 그런 상황에서 지역의 대표는 과연 국민의 대표라고 할 수 있는가? 지금까지 선거를 지켜보면서 느끼는 것이 있다. 많은 사람들이 후보의 공약이나 정책에 별 관심이 없다. 나는 그것이 피상적으로 잘못된 것이라 느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보면 애초에 그런 공약과 정책이 국민들에게 와 닿는 것이 없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기도 한다. 고시생이 많은 노량진에서 나오는 공약이 재개발이다. 그런 공약이 고시생들에게 의미가 있었다고 보는가? 부가 집중되고 있는 시점에서 지역 내 소수라고 할 수 있는 재개발 관련자에게만 의미가 있었던 공약이라 본다. 이처럼 정책과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는 사람이 많지 않다. 사람들이 바라는 희망 어린 행복에 대한 외침은 공허할 뿐이다. 이제 지역 내에서 평생 머무르는 사람이 오히려 드물다. 한국뿐만이 아니라 해외에서 전전하는 이들도 많다. 그런 사람들에게 지역발전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이제 소멸할 지역의 발전은 도대체 누구를 위한 것인가? 그 예산은 누구의 입으로 들어가는가? 지역대표는 이제 모든 국민을 대표할 수 없다.

 

온전하게 민의가 반영되지 못하는 상황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 나는 분야별 대표를 뽑아야 한다고 주장하겠다. 지금의 의석은 그대로 두고 거기에 분야별로 몇 명씩 뽑아 의원으로 만들어 분야의 대표가 직접 정치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분야별 의석을 정당의 소속으로 뽑게 되면 정당의 입맛에 맞는 코드인사가 뽑힐 확률이 높으므로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본다. 분야별 의석은 모두 무소속으로 하여 분야를 대표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겠다. 이는 모꼬지와 연결이 된다. 모꼬지를 통해 분야를 모으면 그 분야의 대표가 정치에 직접 참여할 수 있게 된다. 기술과 노동이 각자의 주도권을 잡게 되는 노동개혁이 분야를 대표하여 민의를 직접적으로 반영하는 정치개혁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모꼬지만 잘 정립하면 이 체계는 그다지 어렵지 않다. 모꼬지의 대표가 곧 정치에 직접 참여할 수 있는 구조가 되면 된다. 그렇기 때문에 선거 비용도 그리 크지 않을 거라 본다. 각 분야에 속한 인원의 수가 다르므로 형평성 논란이 있을 수 있다. 그것은 미국의 상원 하원처럼 분야별 인구수에 맞춘 의석과 분야별 고정 의석 수를 나눈다면 그런 논란에서 벗어날 수 있을 거라 본다. 어떻게든 최대한 민의를 반영할 수 있는 구조가 필요하다. 이런 것들이 바로 역할주의적 사고다.

 

부의 대물림으로 사회는 자본을 기반으로 한 새로운 신분제가 나타나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 출산율과 마찬가지로 별 다른 대책이 없을 것이다. 지금 구조로는 막을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사실상 방치상태에서 부의 집중과 빈부격차는 커져나간다. 그런 상황에서 사회를 구성하는 힘과 부를 분리시키기 필요가 있음을 주장하겠다. 부의 대물림으로 사회적 역할을 맡지 않거나 그 역할에 맞는 능력을 갖추지 못하게 되면서 보다 더 역할 중심의 사회가 필요하다고 주장하겠다. 역할주의적 관점에서 많은 재산을 소유한 역할이 없는 사람과 재산이 없어도 역할을 맡은 사람을 비교하면 후자가 더 가치가 있다. 공직자 중에서 재산이 없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그런 사람들이 별다른 역할이 없는 엄청난 부자보다 훨씬 더 가치가 있다. 자본가 중에서 건실한 기업을 경영하는 사람들이 별다른 역할이 없이 물려받은 부만 가진 사람보다 훨씬 더 가치가 있다. 사회적 역할의 수행여부가 그 사람의 가치를 증명하는 것이다. 모든 사람은 모든 역할을 맡을 수 있고, 역할에 맞는 능력이 필요하고, 역할수행여부로 존중여부가 결정되고, 역할기여도로 대우를 달리 받아야 한다. 부의 대물림으로 물려받은 부는 시간이 갈수록 가치가 낮아지고 사회적 역할로 새로 창출하는 부는 가치가 높아야 한다. 그렇게 해야 부의 대물림이 만드는 신분사회의 위험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인간은 과거에 종속되어서는 안 된다. 부의 대물림이 미래 세대의 가능성을 지워서는 안 된다. 그 시대는! 그 시대를 살고 있는 사람의 것이다!! 그걸 위해서는 무엇보다 교육품질의 강화가 중요하다고 강력히 주장하겠다.

 

이 주제는 다시 한번 정리할 예정이다. 분야별로 나뉜 역할중심의 사회가 역할주의 사회의 기초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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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타적인 사람들은 뭔가 올바른 걸 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는 사람들일 겁니다. 그런 사람들이 이타주의의 환상에서 벗어나야 사회주의의 환상에서 벗어날 수 있고, 그래야 중국의 더러운 야욕과 맞서 싸울 준비를 할 수 있을 거라 봅니다. 본인들만 이기적인 사람들과 타인에게 이타적이길 강요하는 사람들 때문에 불행한 겁니다. 모두가 이기적일 수 있는 환경 아래에서 건전한 욕망 표출로 행복한 사회를 만들어 더러운 이들의 지배야욕에 맞서 싸우도록 합시다. 이제 지배자와의 투쟁은 과거의 일이 아닙니다. 최근 동북공정을 하려는 드라마가 많은 비난을 받고 조기종영을 했다는 소식을 접했습니다. 그건 드라마 왜곡 때문에 비난 받은 게 아닙니다. 드라마 내에 문화와 역사를 중국화하여 흡수의 형태로 침략하겠다는 야욕이 드러나있기 때문에 반발하며 비난한 것이지요. 표현자유침해가 아닌 침략방어입니다. 이것은 비단 한국만의 문제가 아닐 겁니다. 국제공조를 통해 저항을 해야 합니다. 최소한 국내에서 한국을 우선시하지 않는 정치가는 한국 정치가의 역할을 수행할 수 없으므로 역할을 박탈해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저출산을 보고 한국이 오래지 않아 사라질 거란 전망을 조소하듯 말하곤 합니다. 무언가 나아지길 바랐던, 한국의 발전과 행복을 바랐던 사람들은 무엇을 바랐던 것입니까? 무엇을 위해 그 자리에 있는 겁니까? 그 어떤 사상적 신념도 없이 단순히 개인의 사리사욕을 위해 행동하는 이들은 왜 그렇게 욕망이 부족한 겁니까. 최근 비리들이 연달아 터지고 있지요. 가족 비리, 친인척 비리, 집단 비리 등 전부 다 멍청한 이타주의가 만든 결과물 아닙니까? 우리가 남이냐? 라며 집단의 이타심을 강요하는 그런 행태가 비리를 양산했던 것 아닙니까? 인맥에 대한 애정이 그릇된 결과를 낳은 것 아닙니까? 가족을 위해서라는 변명이 추악한 비리를 정당화하지 않았습니까! 올바른 사람들이 보다 더 이기적이어야 합니다. 사회의 행복을 위해 각자 거대한 욕망을 여지없이 표출할 수 있어야 합니다. 멍청한 이타주의가 개인을 집단의 이익을 위해 행동하게 하고, 양극화를 부추겨 일부 집단에게 부를 집중시켜 국가를 병들게 합니다. 부의 대물림 또한 자식에 대한 이타적인 애정이 만든 거잖습니까? 사회주의적인 노동조합도 노조의 이익을 위해 집단 이기주의적으로 행동하지 않습니까? 타인의 이익을 고려하는 이해관계에 막혀 개혁이 진행되고 있지 못하고 있지 않습니까? 모든 개인이 수준 높은 학습을 통해 바라는 사회상을 실현하기 위한 욕망을 표출할 수 있어야 이런 야망이 부족한 사회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겁니다. 어떤 거대한 꿈이나 목적도 없이 생계나 물질을 위해 안정적인 공무원에 집착하거나 빚을 지고 투자하는 한국사회상은 절망적일 정도입니다. 남을 위해 살게 만들면 개인의 바람은 이렇게 작은 바람에도 날라가 추락하는 연약한 잎사귀에 불과해집니다. 이타주의 사회의 결말은 꿈을 잃어버린 무개성의 사회입니다. 고유한 개인의 작은 꿈도 없으니까 작은 불편함에 집착하고 시시한 것에 휘둘리는 것 아닙니까? 이타적이니까 집단의 눈치를 보고 집단의 말을 맹신하며 똑같은 스타일의 옷과 꾸밈을 자랑하고 무지를 당당하게 드러내는 거 아닙니까? 선량한 이타주의자 여러분. 여러분들이 꿈꾼 세상이 이런 것이었습니까? 이기적으로 자신만을 위한 꿈을 갖게 해야 활력 있는 사회를 만들 수 있는 겁니다. 전체를 위해 희생하도록 공장에서 찍어내듯 같은 유형의 인간들을 양산하면 꿈이 없는 인간이 되어 눈앞에 이익에 집착하고 소소한 물질의 이익만 바라는 사회가 되어버립니다. 아아, 도대체 무엇을 했던 겁니까. 올바른 일을 해야 할 사람들이 동정심에 눈이 멀어 배려로 끝나는 사상에 휘둘리는 바람에 근본적인 개혁을 하지 못한 채 사람들을 무력한 이타주의자로 만들었던 것을 보며 깊은 분노와 슬픔을 느낍니다. 동족에 대한 어찌할 도리가 없는 애증 속에서 이들을 퇴락하게 만든 먼지를 닦아내면 개개인의 고유한 빛을 발하게 될 거란 작은 희망을 가지고 말합니다. 모두가 큰 꿈을 가지고 이기적으로 올바른 일을 하여 사회를 행복하게 만들었으면 좋겠습니다.

 

멍청한 양당정치가 싫어서 한쪽 당이 독식한 뒤에 어떤 혁명을 거쳐 전부 분열하길 바랐을 때가 있었습니다. 양당정치가 끝나지 않는 걸 보며 답답함을 느꼈지요.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면 애초에 국민 사상이 타인에 의해 만들어진 것들이라 양당정치가 존재했던 거고, 그 양당정치를 끝내기 위해서는 사상정립을 통해 휘둘리지 않아야 한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지금까지 정치는 사실상 양당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나 다름없는 상황이니 민주적인 선택권이 있기나 한 건지 의문이 들 정도입니다. 예전에 어떤 외국인과 대화를 했는데, 그 사람이 왕정을 옹호하며 민주주의를 비판하더군요. 반박하기 위해 민주주의는 일반 시민도 지지를 받으면 대통령이 될 수 있는 체제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양당정치 구조 아래 그런 것이 과연 의미가 있는지 궁금합니다.

 

민주당이 중도층을 포섭하고자 지역정당 이미지를 탈피하기 위해 애를 썼죠. 그렇게 해서 권력을 얻었던 정당이 민족주의적인 태도로 북한과 중국의 눈치(인민망 인사는 황당했음)를 보고 극단적인 여성주의를 옹호하면 어떻게 될지 모르고 있었다는 게 신기합니다. 중도를 버리고 다시 극단으로 돌아간 기분이 어떻습니까? 반중과 반페미 정서를 모르면 또 같은 결과가 나올 겁니다. 민족주의나 여성주의가 정말 옳다면 욕을 먹더라도 옹호했을 텐데 그게 아니잖아요. 민족주의는 집단의 정체성을 혈연과 과거로 규정하는 편협한 사상이죠. 특히 유교가 섞인 한국식 여성주의는 얼마나 앞뒤가 다른지. 가부장제의 배려는 받고 싶으면서 여성주의의 자유는 얻고 싶은 모순을 보면 이런 것에 휘둘리는 것 자체가 한국 인문학의 수치입니다. 국가와 여성을 위한 새로운 사상이 필요한 시점입니다.

 

기성화폐와 가상화폐는 이런 관계 같은 느낌이 듭니다. 기성화폐가 확립한 금융질서 내에서 자유로운 가상화폐. 국가가 확립한 사회질서 내에서 자유로운 마피아. 별다른 책임지는 것 없이 기성화폐를 몰아내겠다는 것은 너무 염치없는 것이 아닌가 싶네요. 단순 투기에서 벗어나고 싶다면 가상화폐의 사회적 역할을 확실히 찾아야 할 것입니다.

 

이런 건 나 말고 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래서 내가 해야 한다, 라고 생각이 들어도 무슨 의미가 있나, 라는 생각이 들어 자괴감이 들기도 합니다. 이미 내적인 일그러짐을 바로잡기 위한 고찰의 시기는 지났습니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 뒤가 없는 외줄타기 하는 기분. 기분이 아니라 현실이지만요. 나는 무엇으로 평가 받을 수 있을까요? 평가 받기 위해 자격증 같은 걸 취득하기 위한 지식 쌓기는 시간낭비로 느껴집니다. 나의 사상을 완성하고 싶어요. 몇 가지 사상서를 읽고 있는데 최소 그 수준 정도는 쓰고 싶네요. 공부하다 보면 느끼는 게 있어요. 사상에 관해서 한국은 세계적 영향을 끼치는 발상지가 된 적이 없던 게 아닐까 싶어요. 현대사상으로 따지면 아시아 전체가 그러하지요. 자유주의 사회주의 자본주의 공산주의. . . 언젠가 한국과 아시아를 현대사상의 중심지로 만들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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