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정게에서 고 박원순 시장의 공과를 박정희나 조주빈과 비교하는 글을 보고
나름대로 생각을 정리하고 댓글을 써서 엔터를 눌렀는데
원글이 삭제됐네요ㅠㅠ
다행히 메모장에 쓰고 복-붙하던 습관이 있어 살렸습니다.
그냥 휴지통에 버리기엔 아까워 마이피에라도 남겨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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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쎄요...
잘잘못 갈리지 않고 모든 일에 잘한 사람, 또는 모든 일에 잘못한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일생을 착하게 살았어도 말년에 잘못했으니 삶 전체가 무의미했다는 논리는
말년에 잘못했어도 일생을 착하게 살았으니 삶 전체가 의미있었다는 논리와도 다를 바 없으니
그 자체로 모순되죠.
어떠한 인물에 대한 평가를 내릴 때, 잘잘못을 비교하고 경중을 따지는 건 지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다만 그 과정을 두루뭉술하게 넘어가면 악인을 옹호하는 결과가 나올 수 있으니
더욱 철저하게 따지고 들어가야죠.
예를 들어
일제시대의 한반도 근대화와 수탈을 공과로 두고 비교할 때
근대화는 수탈이라는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행해진 것이기에
'수탈과 별개로 이건 일제의 공으로 봐야한다'는 건 설득력이 없죠.
수탈의 목적 없이 온전히 선의로 근대화를 해준 게 아니니까요.
박정희의 경제발전과 그 부작용을 공과로 두고 비교할 때
그가 추진한 개발정책은 장면 정부에서, 그 자금은 미국과 일본에서 왔기에
오직 그의 주체적 행위만으로 이끌어낸 긍정적 결과는 없다고 볼 수 있으며
반면 그의 독단적 결정으로 인한 화폐개혁이나 중공업 및 대기업 중심 투자는 양극화와 지역갈등의 뿌리가 되었고
무엇보다 개인의 영욕을 위해 쿠데타를 일으키고 독재정권을 유지하는 과정에서
다수의 국민들을 억압하고 민주주의를 후퇴시킨 부정적 영향이 압도적으로 크죠.
그러니 '독재와 별개로 경제발전은 박정희의 공으로 봐야한다'는 건 설득력이 떨어지죠.
조주빈 등 성범죄자나 살인범이 '성실하고 착한 사람'으로 살았던 것과 실제 범죄활동을 공과로 두고 비교할 때
그들에 대한 주변인의 평가는 '민폐 안 끼치니 착하다' 수준이지 '헌신적이고 전무후무한 족적을 남긴 사람'이 아니죠.
오히려 평범을 가장하기 위해 눈에 띄지 않는 평범한 사람으로 평범하게 스펙 쌓고 학보사 활동도 하고,
크게 손해보지 않는 한 때로는 봉사활동같은 '선행'을 하기도 하죠. 그게 '보통사람'이니까요.
그런데 그들의 선행은 위장을 위한 것이니 손해 보면서까지 헌신적으로 꾸준하게 하지는 않죠.
그러니 '범죄행위와 별개로 그들의 착한(본질적으로는 '평범을 가장한') 삶은 공으로 봐야한다'는 건 설득력이 떨어지죠.
이렇게 악행의 수단이나 과정으로 선행을 하여 공과를 딱 나누기 애매한 사례와 달리
고 박원순 시장이 일생동안 걸어온 족적과 (고소내용이라 언론에 보도된 바에 따르면) 위계에 의한 성폭력을 공과로 두고 비교할 때
그가 서울 시장이기에 위계에 의한 성폭력이 이루어졌다고 폭넓게 해석한다 할지라도
서울 시장 취임 이전의 인권변호사, 시민사회운동가로서의 삶이
2017년 이후의 성폭력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나 과정, 또는 위장을 위한 '위선'이라고 볼 수 없고
또한 빚을 내면서까지 오랜 시간 다방면의 시민운동을 지원하는 등 그 헌신의 수준이 비범하기에
이런 경우는 공과를 구별하고 어느 하나가 다른 하나를 덮어씌우지 않도록 하는 게 바람직하다 생각합니다.
물론 그의 언행이 불일치했다는 모순을 비판하거나,
죽음으로 도피하여 공소권을 소멸시킴으로써 사건의 실체를 흐지부지시켰다는 게 비겁하다고 말할 수는 있습니다.
당장 저부터도 그의 일생에서 가장 큰 오점은
(고소내용이라 언론에 보도된) 성폭력이 아니라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이라 생각하니까요.
그러나 그의 일생이 말년의 잘못을 정당화할 수 없고, 없어야만 하듯이
그의 말년의 잘못이 일생의 족적을 부당화할 수 없고, 없어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