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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만화] 2. 펭귄, 《Penguin loves Mev》 (0) 2014/08/28 PM 1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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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 무조건! 봐! / 꽤 좋은 작품 / 좋은 작품 / 봐도 되고 안 봐도 뭐… / 안 보는 게 좋을 걸 / 내 시간을 돌려다오


  위의 선택지들이 뭔지 궁금하신가요? 바로 리뷰 할 웹툰에 대한 제 평가입니다. 시간이 바쁘신 분들은 그냥 평가만 보고 가셔도 됩니다. 하지만 제가 왜? 저런 평가를 내렸는지 궁금하시다면, 읽어보세요. 그리고 여러분을 기다리는 멋진 웹툰이 왜 멋진 웹툰인지 알아보는 겁니다!


  오늘 리뷰 할 웹툰은 네이버에 매주 수요일, 금요일마다 연재 중인 펭귄님의《Penguin loves Mev》입니다. 한국여자와 영국남자의 사랑스러운 연애 이야기였는데 어느 순간부터 결혼 이야기로 변신! 지금도 꾸준한 사랑을 받고 있지요. 아무튼 이 웹툰이 어째서 ‘꽤 좋은 작품’인지 이야기를 해드려야겠죠?


펭러메 타이틀.JPG

《Penguin loves Mev》의 타이틀입니다. 사랑스러운 펭귄과 메브가 함께 있네요.




  《Penguin loves Mev》는(이하 펭러메) 사랑스럽고 귀여운 캐릭터들로 시종일관 잔잔한 미소를 자아냅니다. 그림체는 단순하지만 의외의 디테일에 감탄하기도 하고요. 가끔씩 다른 패러디 요소들이 등장할 때면 크게 웃을 때도 있습니다. 대개 그런 요소들은 귀엽고 단순한 그림체와 부자연스럽게 결합되어 우스꽝스럽게 표현되지요.


  《펭러메》의 개그는 주로 엉뚱한 곳에서 발휘 됩니다. 주로 메브의 ‘엉뚱한’ 발언이나 행동들, 혹은 엉뚱한 패러디 등 말이죠. 미처 생각하지 못한 곳에 웃음 포인트가 있습니다. 아무래도 작가인 펭귄님은 그런 소소한 웃음에 관한 센스를 타고난 듯합니다.


메브 이상한 짓.JPG

▲이런 엉뚱한 행동 말이죠….




  이 작품은 외국인에 관한, 인기 좋은 몇 가지 코드를 지니고 있습니다. 하나는 ‘한국을 바라보는 외국인의 시선’, 하나는 ‘외국을 바라보는 한국인의 시선’, 그리고 마지막 하나는 ‘그들이 함께 하면서 벌어지는 우스꽝스러운 사건’이지요. 첫 번째는 공감과 궁금증을 자극 하고, 두 번째는 흥미를 유발하지요. 첫 번째와 두 번째 코드 모두, 유머를 포함하고 있지만 마지막 코드는 그 유머를 극대화 하는 역할을 합니다. 요새 인기 많은 프로그램인 ‘비정상회담’이라든지, 과거 유명했던 ‘미수다’가 이런 코드의 수혜를 입었었죠.


  하지만 《펭러메》는 이들과 조금 다른 길을 걷습니다. 사실 위의 코드는 모두 자극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서로 다른 문화를 이해하기 어려워할 때 느끼는 감정으로 웃음을 유발하는 것이니까요. 수위에 따라 어떤 사람들은 거부감을 느끼기도 하지요. 하지만 이 작품은 그런 문제에서 비켜나갑니다. 왜일까요? 작품의 주인공들이 부부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문제에 대해서도 이들은 끝까지 적대적이지 않습니다. 서로 이해하고 풀어가려고 하지요. 서로 사랑하고 함께 하기에 모든 갈등은 심화되기 전에 흩어집니다. 현실적으로 봉착하는 문제들 또한 마찬가지고요. 그 결과, 그들이 겪을 수 있었던 문제는 껍데기만 남고 그 자리엔 사랑스러운 분위기만 남습니다. 펭귄과 메브가 부부사이라는 건 이 만화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치고 있는 거지요. 그 때문에 독자들은 맘 편히 만화를 읽을 수 있습니다. 어떤 문제에도 긴장하지 않고요. 덕분에 한 편 한 편 읽을 때마다 흐뭇한 기분만 감돕니다.


  가끔씩 등장하는 메브님(현실의!)의 활약도 돋보입니다. 노래를 부르거나, 직접 그림을 그리거나 할 때 말이죠. 엉뚱하고 서툰 요소들이 귀엽게 느껴집니다. 사실 이 만화는 메브를 중심으로 하는 만화입니다. 펭귄은 메브를 보조하는 캐릭터지요. 전형적인 콘셉트입니다. 전형적이기에, 효과는 확실하지요. 메브가 엉뚱하면 엉뚱할수록, 펭귄이 당황하면 당황할수록, 작품은 재밌어집니다.



펭귄 이상한 얼굴.JPG

▲펭귄은 리액션이 참 좋은 것 같습니다. 




  항상 즐겁게 읽고 있는 독자로서 바라는 게 있다면, 메브가 주체가 되어 펭귄과 우리 문화를 바라보는 이야기가 있었으면 합니다. 아무래도 지금까지는 메브의 행동과 생각이 펭귄이라는 나레이터에 걸러 표현된 것이 사실이니까요. 비슷한 에피소드는 이벤트 성으로 몇 번 있긴 했지만 자주 보고 싶은 게 애독자의 마음인가 봅니다.


  따뜻한 감성과 소소한 웃음, 그리고 젊은 한국 여자와 영국 남자의 결혼이야기가 궁금하다면 《Penguin loves Mev》를 읽어보세요!



《Penguin loves Mev》가 보고싶다면?

?여기로->《Penguin loves Me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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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만화] [웹툰 리뷰] 본격 취업만화 "나의 목소리를 들어라!" (12) 2014/08/26 PM 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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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세 번째 웹툰 리뷰로 인사드리는 글린다입니다.

매번 좋은 웹툰을 알리고 싶은데 어떻게 리뷰를 해야하는지 많이 고민을 하고는 합니다.

그래서 결정한 것을 스크린샷수를 많이 넣지 않고 상상력을 자극할 수 있는 범위에서

스포일링없이 포스팅을 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오늘 소개해드릴 웹툰은 이현민 작가님의 "나의 목소리를 들어라!" 입니다.

이 만화는 그냥 보면 열혈 면접만화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지금부터 본격 취업만화 "나의 목소리를 들어라" 리뷰를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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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만화의 배경은 대한민국 최고의 회사 "풍운전자"입니다.
그리고 "최판규"라는 부장의 이야기로 웹툰은 시작됩니다.
"나의 목소리를 들어라" 라는 만화는 크게 보았을 때
최판규라는 부장이 어떻게 신입사원들을 뽑는지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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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최판규라는 사람이 사람을 뽑는 기준은 남들과는 조금 다릅니다.

처음에는 자기가 면접을 보기가 귀찮다고 아무나 자르고 하는

(결국을 누구를 욕할 자격이 없는 것 같은)

모습을 보여주곤 하지만 점점 갈수록 우리는 최판규라는 사람을 알아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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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풍운전자에 지원하는 사람들도 다들 자신만의 색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하나의 면접과정을 만들어 갑니다.

※ 이후부터는 다소 산발적인 전개가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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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싶은 일도 없고, 지가 뭘 잘하는 지도 모르고"

"남 재끼는 방법만 배워온 녀석들"

"적당히 말 좀 알아듣는 몇 놈 뽑아서 빈 곳에 끼워 놓으면 그만 아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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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풍운전자를 위해 일해줄 사람들은 누구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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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감없는 자신(김건호)과 대비되는 황태룡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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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하게 산다고 해서 언젠가 보상이 올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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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란 무엇일까요?

자기 자리를 지키기 위해서 안주하는 사람에게는 최고의 자격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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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이 바라는 우수한 인재였던 최필재

그는 면접을 포기합니다.

하지만 그의 얼굴은 패배자의 얼굴이 아닙니다.

무엇이 그를 이렇게 만들 수 있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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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판규와 반대로 원칙을 중요시 하는 이지창 부장은

우수한 성적으로 협상스쿨을 졸업한 엘리트를 (최필재)

왜 면접을 포기시켰는지 묻습니다.


그러자 최판규는 말합니다.

"네가 뭔데 그들의 성공을 마음대로 정의 내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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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접은 무언가 이상합니다.

실력을 보는 것도 한 인간을 보는 것도 아닌 무언가를 보고 있습니다.

김건호는 외칩니다.


"저의 목소리는 평가되고 있는겁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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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보여드린 스크린샷은 정말 스토리의 일부일 뿐입니다.

40편도 안되는 짧은 만화에서 벌어지는 수 많은 이야기들은

우리에게 정말 많은 메세지들을 전해줍니다.


이러한 메세지들은 재미있고 열혈적으로 그려집니다.

하지만 이현민 작가는 그 안에 정말 많은 메세지를 담고 있습니다.

그 안에서 우리는 정말 많은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아니... 해야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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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목소리를 들어라는 단순한 면접만화가 아닙니다.

면접과정을 통해서 우리 사회의 부조리와 모순을 보여주는 만화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요소들을 정말 만화적으로 너무 잘 살려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만화는 사회를 비판하는 만화만은 아닙니다.

누구보다 자신을 반성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만화이기도 합니다.

이 만화를 읽다보면 저 자신이 계속 찔리곤 합니다.

내가 혹시 이 사람들과 똑같지는 않을까? 하고 말입니다.


"나의 목소리를 들어라"


이건 우리 자신에게 물어봐야 하는 말일지도 모릅니다.


"당신은 당신의 목소리를 듣고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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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툰 리뷰] 판타지의 숨겨진 명작 - 키스우드 (KISSWOOD)

[웹툰 리뷰] 송곳 - 최규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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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꼴통    친구신청

무협물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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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닙니다 ㅎㅎ 정확히는 회사 면접만화입니다 ㅎㅎ

Mr.AutoCad    친구신청

겁나 재미있음. 웰메이드 병맛에 감동도 교훈도 다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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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병맛으로 승화시켜서 그렇지 엄청난 내용입니다 ㅎㅎ

에키드나    친구신청

광고 쪽 이야기도 다들 거짓같지만 거기에 나오는 클라들 보다 더 좆같은 클라들도 많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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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죠 ㅎㅎ 질풍기획에서 다소 과장되기는 했지만
그게 온전한 거짓이라고 볼 수는 없습니다

서울대인문학    친구신청

질풍기획 이현민 작가
정말 좋아하는 작가중 한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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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정말 좋아하는 작가중 한분입니다. 감사합니다 :)

Stingray    친구신청

열혈물같지만 가우스전자랑 같이 웹툰중 회사생활을 제대로 보여주는 웹툰이라는게 참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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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열혈물이기는 합니다만 열혈물은 도구적이고 연출상의 장치일뿐이지 전달하려는 메세지는 그 안에 잘 들어있죠 ㅎㅎ

평범한사람입니다.    친구신청

질풍기획도 진짜 개그물인척 하면서 사회의 어두운면을 풍자로 승화시키는거 보면 ㄷㄷ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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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풍기획도 사실 열혈 개그물을 가장한 사회풍자만화의 성격이 많죠 ㅎㅎ 대단한 작가입니다.
[영화] 영화비평 : 하이힐(Highheel, 2013) (1) 2014/08/26 PM 1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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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힐 (Highheel)

 

2013년에 개봉한 영화 <하이힐>에 대한 비평에 앞서 올해 인터넷을 뜨겁게 달군 한 가지 장면을 참고하고자 한다. (영화에 대한 비평은 포스터이미지부터입니다.^^)

지난 6월 신촌 연세로에서 퀴어문화축제가 열렸다. 일부 보수시민단체와 종교단체의 반대시위로 인해 작은 충돌이 있었다고 한다. 사회적 분위기는 세월호 참사로 인해 차가운 바닷속으로 가라앉았고 그들의 행렬은 시기적으로 적절하지 않다는 이유로 비난받았다. 또한 여론을 의식한 듯 서대문구청은 애도 분위기를 이유로 행사를 불허했다. 그렇게 강행한 일련의 퍼포먼스는 사람들의 주목을 끌기에 충분했다. 팬티바람의 사람들은 옷가지를 벗어 던진 채 거리행렬에 나선다. 진보적 매체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는 인터넷 담론에서도 팬티바람으로 거리를 활보하는 그들에게 비난의 화살을 날린다. 하지만 그들에 대한 비난에 앞서 한 가지 질문을 했어야만 했다.

 

왜 옷을 벗을 수밖에 없었나?

 

사회적 그물망에 속해있는 우리는 다양한 형식들과 만난다. 학교에 등교하기 앞서 우리는 교복으로 갈아입고, 회사에 출근하기 전에 사무복으로 갈아입는다. 장례식과 결혼식은 그 자리에 맞는 복장(암묵적 합의)이 따로 있으며, 형식이 그 사람의 사회성(예의범절)을 대변한다. 오늘도 우리는 밖을 나서기 전에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점검한다. 지금 내가 입고 있는 옷이 를 대변하고 있는가를 끊임없이 질문한다.

 

주체가 어떤 상황에 적절하게, 그때그때 올바른 형식을 자신에게 새겨 넣는 것은 옷장 앞에서 옷을 선택하는 우리의 모습과 비슷하다. 하지만 이런 선택을 가능하게 하는 자율적인 주체는 어떠한 가정이 전제 되어야 한다. 자율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주체가 있다는 것은, 고정된 정체성을 가진 주체가 있단 말 아닌가? 우리 행위에 선행하고, 그것을 선택하는 고정된 정체성이 필연적으로 가정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다시 질문이다.

 

선행되는 고정된 정체성이란 게 존재할 수 있는가?”

 

그 고정된 정체성으로 인해 어떤 특수적인 내용 또한 고정된다. 남성은 남자다움의 내용을 가지고 여성은 여자다움을 가진다. 정확하게 표현하면 가진다라기 보다는 부된다라는 표현이 더 적합한 듯하다. 이렇게 이성애적 매트릭스는 우리의 모든 패러다임을 정의하고 있다. 단어의 의미를 구성하는 건 본질적으로 기표간의 차이뿐이다. 이분법적 사고는 현재 우리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성애적 매트릭스 범주에서 존재할 수 없는 이 퀴어는 무엇이라 정의해야 하는가? 사실 이 질문 자체가 잘못된 질문이다. 퀴어는 고정적인 정박점을 가질 수 없는 것이다. 이성애적 매트릭스 사이에 부유하고 있는, 어떤 곳에서 닻을 내릴 수 없는 것이 퀴어다. 그렇기에 퀴어 이론의 저항성은 다분히 포스트모던적인 것이다.

이상의 것을 고려했을 때 최초의 질문에 대한 답변이 나올 수 있을 것 같다. 선택에 앞서 고정된 정체성이 없다고 한다면, 퀴어의 본질이 정의될 수 없는 것이라는 주장을 이해한다면, 그들이 옷을 벗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옷이 가지고 있는 격식, 그 상징성에 자신의 닻을 내릴 수는 없는 것이다. 그들은 여하한의 선행되고 고정된 정체성을 거부한다. 이것이 그들의 팬티바람행렬의 핵심인 것이다(여성해방 운동과 비슷한 맥락이다-피맨-).

 

 

조금 길게 퀴어문화축제에 대한 인상을 늘어놓았다. 비평에 앞서 무리하게 이 글을 첨가한 것은 퀴어의 저항적 제스처가 이번 비평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필자는 퀴어가 단순히 성해방 운동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고정점이 없는 정체성, 본질을 거부하는 제스처는 현대사회 속에서 부유하는 개인에게 큰 메시지를 던져준다. 그리고 영화 <하이힐>이 단순히 성소수자를 소재로 한 영화가 아니라는 것을 밝히고자 한다. 거칠지만 <하이힐>은 조금 더 넓은 범위를 표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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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내안의 그녀가 죽었다

 

감성 느와르라고 했던가? 마초적인 느낌을 물씬 풍기는 포스터에 떡하니 있는 저 글귀는 하이힐의 표면적인 내용을 지칭한다. 하지만 종종 선물 포장지와 그 내용물은 다른 경우가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영화에서 그녀는 죽은 것이 아니라 원래 그녀는 없었다라는 것이다. 이 의미는 두 가지를 담고 있다. 하나는 앞서 얘기한 선행하고 고정된 정체성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하나이다. ‘여자가 되는은 있어도 여자는 없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앞으로 세부적인 영화를 분석하며 주장하겠지만, 윤지욱(차승원)의 여성성은 강박증에 가깝다는 것이다. 영화에서는 선천적인 것으로 묘사되지만 영화 흐름을 꼼꼼히 짚어 본다면 윤지욱의 여성성은 상징적 부채감으로 인한 강박증에 가까운 것으로 판명된다.

만약 이 주장이 적절하다면 <하이힐>이야말로 전형적인 느와르에 가까운 것이다. 그렇다면 윤지욱의 여성성, 즉 강박적으로 주입된 그것은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이미 영화를 본 독자라면 지금부터 우리가 주목할 장면을 유심히 보았을 것이다.

 

영화 도입부는 윤지욱에 대한 신화로 시작된다. 허불(송용창)진술로 윤지욱의 이미지는 그려진다. ‘600만 불의 사나이라고 일컫는 윤지욱은 그 별명에 걸맞은 화려한 액션과 잔인한 폭력성을 보여준다. 물론 이 장면에서 윤지욱의 여성성은 전혀 엿볼 수 없다. 주목할 장면은 다음 시퀀스이다.

장미(이솜)을 바래다주고 자동차 백미러를 통해 멀어져가는 그녀를 바라본다. 점점 멀어지는 순간, 잔잔한 음악은 페이드-인 되고 영상에는 슬로우-모션 효과가 걸린다. 플래시백 장면의 전형적인 도입문법이다. 우리가 윤지욱을 따라 빠져든 공간은 바로 소년시절의 그의 기억이다. 과도하게 노출된 조리개, 일부러 빗 맞춘 포커스는 마치 환상의 공간을 보고 있는 듯하다. 그리고 우리는 첫 장면에서부터 이 꿈의 내용이 윤지욱의 트라우마를 토대 짓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주연(이언정) 대사

잠을 그렇게 못자서 어떡하니? 때맞춰 잘 수 있는 직업도 아닌데.”

집까지 태워다 줄게. 약기운 때문에 너 운전 못해

처방전이야. 다른 건 몰라도 잠은 자야지. 약 떨어지면 연락하고.”

 

이 대화를 통해서 윤지욱이 불면증에 시달리고 있다는 사실을 유추해 낼 수 있다. 그리고 약을 통해 수면을 보충한다는 사실도 충분히 짐작 가능하다. 무엇이 그를 불면증으로 몰아넣었을까? 우리는 그 원인이 사춘기 시절의 기억에 있다는 것을 예상해야한다. 윤지욱은 잠을 청하는 동시에 억눌러 왔던 기억들이 조금씩 분출되어 외상적 트라우마와 조우한다. 이 섬뜩한 고통으로 인해 윤지욱은 잠을 거부하는 것이다. 그것이 만성적인 불면증의 원인인 것이다. 하지만 억압된 기억은 봉합할 수 없는 벌어진 틈새에서 계속해서 새어져 나온다.

 

영화 초반 그는 관객에게 고백함으로써 여성성을 표면화시킨다. 주연과의 대화와 사직서를 제출하는 장면은 수술을 결심하고 경찰로서의 삶을 마감하려는 그의 결심을 엿볼 수 있게 한다. 그렇게 영화의 주제를 명확히 관객에게 제시하는 듯하다.

하지만 영화는 의문투성이이다. 선천적으로 여성성을 가졌다고 가정되는 윤지욱에게서 뚜렷할만한 특징이 보이지 않는다. 기껏해야 볼 수 있는 것으론 여장을 하는 모습이나 차를 마실 때 새끼손가락을 살며시 드는 습관이다. 겨우 이정도 여성성을 볼 수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오히려 그가 여자로서 진우(고경표)에게 호감을 느끼고 있다는 설정이 필요하지 않을까? 영화에서 보여준 윤지욱의 행동들은 마치 여자가 되어야한다는 강박증에 걸린 것 마냥 자신에게 여성성을 입히는 것 같다. 만약 우리가 주장한대로 이 여성성이 강박적으로 주입된 것이라면 그 해석의 실마리를 분명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위치한 곳이라면 환상과도 같았던 윤지욱의 꿈일 것이 분명하다.

 

억압된 윤지욱의 꿈에는 또 하나의 소년이 등장한다. 중성적인 외모를 가진 그 소년은 윤지욱의 ()정체성에 큰 영향을 미친다(우리는 이 소년을 ‘X’라고 칭하자). 그들은 흔히 동성 간에 있을법한 애정관계를 넘어선 관계까지 발전한다. 사실 이와 같은 장면에서 윤지욱의 트랜스젠더적 성향을 볼 수 있기보다는 동성애적 성향이 더 짙게 보인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사춘기시절 소년/소녀들은 정체성은 모호하다. 그렇기에 그들은 성인들이 가지고 있는 동성 간의 애정보다 더 깊고 모호한 관계가 유지 가능한 것이다. 지난해 9월 독일 가정법이 개정되었는데 우리의 흥미를 돋을만한 내용이 있다. 개정된 내용을 살펴보자면, 자녀 출생 시 출생신고서의 성별 칸을 비워놓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성 구분을 단순히 섹스(생물학적 성)로 구분 짓지 않겠다는 얘기다. 선천적인 성차인 섹스와 본인이 아닌, 부모의 결정으로 신생아의 성별을 고정시키지 않겠다는 것이다. 이 신생아는 성인이 된 후 자신의 성별을 결정할 수 있다는 내용이다. 물론 이 혁신적인 개정안에도 한계는 존재한다. 퀴어 이론으로 보았을 때 여전히 이성애적 매트릭스에 갇혀있기 때문이다(최근 호주의 사례로 그 한계를 넘어서려는 움직임을 볼 수 있다). 다시 영화로 돌아가자면, 사춘기 소년인 그들에게 하나의 성 정체성으로 호명하기가 애매하다. 사실 동성애적 기질이 보인다고 하지만 이들을 단순히 동성애자라고 말하기에는 너무 비약적이다. 하지만 일단 동성애적 성향은 재처 놓더라도 윤지욱의 여성성의 원인을 확인할 길이 요원하다.

그의 여성성이 우리가 가정한 강박증적 징후라고 주장한다면 그것을 뒷받침해줄만한 근거를 영화에서 찾을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윤지욱의 강박적 여성성이 내면화 되는 과정을 몇 단계로 나눠 살펴볼 것이다. 모두 그의 꿈에서 찾을 수 있는 흔적이다. 그리고 장면분석 말미에 그의 기억이 트라우마로 남은 이유, 그리고 그곳에 외상으로 인한 상징적 부채가 무엇인지 우리는 알 수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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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시절 윤지욱에게 여성성이 찾을 수 있는 장면이 있던가? 사실 소년 윤지욱의 행동에서 어떠한 여성성을 찾아보기 힘들다. 만약 찾을 수 있다면 다음의 장면부터이다. 거울에 투영된 그의 이미지 위에 빨간색 입술이 그려진다. 하지만 주목해야할 점은 바로 그 입술을 그린 것은 윤지욱 본인이 아니라 X라는 사실이다. 장면순서는 위에서 보는 것과 동일하다. 빨간색 입술이 보이며 그것을 그리는 손이 보인다. 입술을 그리는 그 손의 주인공은 윤지욱이 아닌 X이다. 그리고 X가 그린 입술은 거울에 투영된 윤지욱의 입술과 겹쳐진다. 바로 이 순간부터 윤지욱의 여성성이 노골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한다.스크_1.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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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투적인 드라마의 한 장면 같은, 비에 젖은 원피스와 마스카라 위에 내려앉은 물방울. 비련의 여주인공을 연상케 하는 소년 윤지욱의 모습이야말로 명백하게 여성성을 지칭한다고 말 할 수 있다. 우리는 거울 씬 이전에 그 어떤 여성성을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을 확인했다. 하지만 X가 소년 윤지욱에게 여성성(입술)을 부여함으로써 비로소 관객에게 전달된다. 우리는 이 연속적인 장면에서 윤지욱은 여성성을 자율적으로 선택된 것이 아니라 타자에게서 역할을 부여받았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단순히 타자의 부름으로 강박증이 성립되는 것은 아니다.

 

소년 윤지욱(이동길) 대사

징그러, 그만해

우린 병에 걸린 거야. 병에 걸린 거라고.”

 

비를 맞던 그날. 소년 윤지욱이 X에게 단언한 말. 자신은 물론 X의 정체성을 부정하는 저 언술이 상황을 급변하게 만드는 기제인 것이다. 이때부터 관객은 앞으로 전개될 장면들이 순탄치 않을 것이라고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다.

우리는 자신의 정체성(성소수자)을 부정하는 윤지욱의 행동이야 말로 지극히 평범하다는 걸 알 수 있다. 이성애적 매트릭스라는 절대적인 범주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사람은 소수에 불과하다. 사회에 존속하는 모든 금기(질서, 습관, 체제 등)는 주체를 구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자신의 여성성을 부정하는 저 제스처가 윤리적(“네 욕망을 포기하지 말라”)으로 옳은가, 그른가를 떠나 사회적 범주 내에서 위치하고자 하는 주체의 히스테리적 반응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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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관객이 트마우마적 꿈(환상)에 접근할 수 있었던 길은 하나뿐이었다. 우리는 윤지욱()을 통해서만 그것이 가능했다. 하지만 영화 전개 이후 조금 다른 방식으로 환상에 접근할 수 있게 된다.

다시금 관객 앞에 제시되는 환상의 공간은 꿈을 매개로 하지 않는다. 관객조차 윤지욱의 발화를 통해 알 수 있었던 그 이름. 본인(장미)은 알려주지도 않은 이름을 미리 알고 있는 그 남자. 자신에게 이상하리만치 호의적이고, 어느 순간 불현 듯 찾아온 그 중년의 남자란 누구인가. 고민이 장미의 머릿속을 헤치는 순간 다시 사춘기 시절 윤지욱의 기억이 드러난다. 이 꿈이 누구에게서 비롯됐는가는 분명치 않다. 하지만 이 장면에서 분명하게 알 수 있는 것은 이 세계를 구성하고 있는 구성원이 한 명 더 있다는 사실이다. 이 컷으로부터 꿈은 근본적인 성격 변화를 겪는다. 3자가 등장한 순간, 그리고 비극의 시작을 알리는 윤지욱의 대사(“나 이사가 서울로”), 중심은 윤지욱의 성정체성 담론에서 상징적 부채로 이동한다.

분석의 편의상 소년 시절 윤지욱의 기억만을 나열하고 있습니다. 실제 영화에서 윤지욱의 꿈은 네러티브 중간에 플래시백 형식으로 편집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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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동생. 너랑 눈이 되게 닮았어.”

클로즈-업으로 교차된 그들의 얼굴, 조금씩 흔들리는 화면. 이미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장미를 포착하는 순간 화면은 평안함을 잃는다. 핸드헨들 기법은 동요되고 있는 윤지욱의 심리를 적절하게 묘사하고 있다. 지금까지 윤지욱은 트라우마적 기억을 직접적으로 조우한 적이 없다. 그는 약을 통한 강제 수면. 기억의 단편들을 간접적으로만 접근할 뿐이었다. 자아는 그 외상적 기억들을 틀어막고 있었던 것이다(불면증의 이유). 하지만 예상치 못한 전개. 철저하게 숨겼던 사실(장미의 이름이 밝혀지는 과정 참고). 예고 없이 찾아온 장미의 침입은 마치 실재의 침입마냥 낯선 것이었다. 그녀의 눈을 바라보는 순간, 억압된 기억들은 새어져 나오고 그는 주체할 수 없는 슬픔에 잠긴다. 자아가 필사적으로 틀어막았던 기억. 불면증을 유발한 트라우마의 핵심, 그 중핵은 바로 X의 자살이다. 서울로 떠나는 윤지욱. 어쩌면 우린 병에 걸린거야라고 말했던 그날, X가 보여준 의미심장한 제스처(자살을 암시하는 듯한)에서부터 이미 예견되어 있었는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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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눈앞에서 자살한 X. 그가 속삭이듯이 남긴 말은 무엇인지 정확히 알 수 없다. 어렴풋이 사랑해라고 말하는 것 같기도 하다. 마지막 한마디만을 남기고 그는 편안하게 뒤로 몸을 허공에 맡긴다. 아름다운 묘사. 너무나도 아름다운, 바람에 몸을 맡긴 가련한 꽃송이가 떨어지는 것만 같다.

꽃송이가 되어버린 그 대신 책상 위에 놓아진 국화꽃. 소년 윤지욱은 서랍 속에 있는 그의 물건들을 하나하나 올려놓는다. 모두가 떠나버린 텅 빈 교실에서, 아무도 없는 그곳에서. 이미 떠나간 그의 빈 자리에서. 윤지욱은 받아들인다. 외롭지 않게. 항상 그에 곁에 있기를 다짐한다. 왼손 약지에 새겨 넣은 그 자국이 다짐의 상징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받아들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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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그러, 그만해. 우린 병에 걸린 거야. 병에 걸린 거라고.”

 

비에 젖은 원피스를 입고 X 앞에서 서던 그날. 그날 이전으로 돌아가고자 한다. X가 직접 그린 입술을 간직했던 그 순간으로, 입술이 서로 포개져 하나가 됐던 그 시절로 말이다.

 

우리는 이것으로 윤지욱의 여성성이 처리하지도 해소하지도 못한, 오히려 해소를 거부한 강박증자의 욕망으로 남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윤지욱은 X가 부여한 여성성을 떠맡음으로서 여자가 된 것이다. 이는 윤지욱이 선천적으로 여성성을 가진 젠더가 아닌, 상징계의 담론적 맥락으로 후천적으로 구성된 성정체성이라 할 수 있겠다. 우리는 앞서 얘기한 선천적으로 고정된 성정체성(정체성)은 존재하지 않다는 퀴어 이론을 통하여 결국, 내안의 그녀가 죽었다라는 <하이힐> 포스터의 글귀를 뒤집는다. 하지만 우리의 분석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지금까지 논의한 것을 종합하면 선천적으로 고정된 성차는 없다는 것. 즉 행위에 앞서 행위자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주장이다. 그리고 윤지욱에게 부과된 성정체성은 타자로 인한, 담론의 효과라는 사실을 밝혔다. 그렇다면 다음 질문으로 이렇게 던져볼 수 있겠다.

 

주체를 규정하고, 호명하는 타자(대타자)란 무엇인가?”

 

우리는 영화 디제시스에 어떻게 접근하였는가? 허불의 진술로, ‘600만 불의 사나이라고 불리는 신화로서 호명된 윤지욱을 통해 영화에 빠져든다. 그렇기에 허불의 진술이 상징하는 의미는 크다.

윤지욱의 꿈을 분석하면서 도달한 결론은 선행하는 주체란 존재하지 않으며, 주체는 담론의 효과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담론을 어떻게 형성되는가? 사회적 담론, 역사적 담론은 누구의 기록하는가? 역사가 승리자의 기록이라는 벤야민의 글을 인용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충분히 알고 있다. 그 승리자란 바로 권력집단을 지칭한다. 그리고 영화를 실질적으로 이끄는 힘은 윤지욱, 개인으로서의 힘이 아닌 담론의 차원에서 이뤄진다.

실제로 영화의 도입은 허불의 진술로써 시작되고 영화의 기승전결은 권력주체가 주재한다. 또한 영화 클라이맥스를 종결하는 존재가 누구인가? 윤지욱이 마침표를 찍었던가? 아니다. 피투성이가 된 윤지욱을 살리는 것도, 그 상황을 종결하는 것도. 마침표를 찍는 것은 개인인 윤지욱이 아니다. 오직 영화 디제시스를 이끄는 힘은 권력주체에게 기인다. 이것이 이번 비평의 핵심이다. <하이힐>은 단순히 성소수자, 성해방 운동만이 아니라 했다. 조금 먼 길을 돌아왔지만, 영화에서 어떻게 권력집단이 개인을 주체화시켰는지 분석해보자.

 

<하이힐>에서 담론을 주도하는 집단이 있다. 별다른 추론 없이 제시할 수 있는 대립되는 두 집단. 보통 선으로 파악되는 법, 질서, 체계의 상징하고 있는 검찰’. 이에 각을 세우는 집단으로 당연히 그와 반대 속성인 범죄, , 무질서를 상징하는 조폭이 있다. 사실 윤지욱을 위험으로 몰아넣는 것도 이 두 집단의 알력다툼이지 않은가. 이분법적인 규분은 이제 무용해졌다. 선과 악은 명확한 구조라 생각하지만 실제로 어떤가? ‘헤드라인을 요구하며 조폭과 거래하는 <하이힐>의 검사와 실제 우리나라 검사들은 무엇 하나 다를 게 없다. 이 두 집단은 단순히 권력을 나눠같은 같은 목적의 집단이라 볼 수 있다. 이들에게 목표는 단 하나다. 상대보다 보다 많은 권력을 갖는 것. 이것이 전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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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둑에서 승자는 누구인가? 흑을 쥔 사람? 백을 쥔 사람? 판위에 많은 돌을 올려 넣은 사람인가? 아니다. 바둑이야 말로 일자의 스포츠이다. 돌은 상관없다. 오로지 집(공간)이 승리의 조건이다. 상대보다 많은 집을 획득한 주체가 승리를 한다. ()이 죽든, ()이 죽든 그것은 플레이어(권력주체)에게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는다. 하나의 돌이 죽든 셋이 죽든 상관없이 상대의 집을 뺏을 수 있다면 얼마든지 소모할 수 있는 소모품이다. 결국 흑을 쥔 권력주체와 백을 쥔 권력주체 간의 다툼인 것이다.

<하이힐> 전개의 급작스런 변화. 검찰과 조폭 간의 거래, 그리고 허불·허곤 형제의 권력다툼이 영화의 흐름을 주도하지 않았던가? 이 권력주체 혹은 권력집단의 바둑판 위에 개인은 놓아져 있다. 윤지욱은 물론 허불, 허곤 그리고 헤드라인검사까지 말이다.

영화의 도입은 허불의 진술로 시작 됐고, 절정으로 치닫는 문은 바둑돌을 쥔 권력주체들에 의해 활짝 열어젖혀진다. 그렇다면 영화 절정 부분은 어떤가? 이미 언급했지만 그 또한 그들에 의해 좌지우지된다.

 

 

출국을 앞둔 윤지욱은 떠나지 못 한다. 공황에서 대기하는 사이 자신이 아끼던 후배 형사 진우가 살해당했다는 보도를 접한다. 그리고 허곤이 장미를 납치했다는 사실 또한 알게 된다. 그는 발걸음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윤지욱이 돌아 올 수밖에 없는 단 하나의 이유가 있다. 그것은 상징적 부채이다. 이미 논의한 상징적 부채는 자살한 X와의 약속, 여성성에 관한 것이다. 하지만 이때 윤지욱은 또다른 장면을 기억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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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 윤지욱(이동길) 대사

오빠한테 약속했었어. 어디에 있든지 내가 지켜줄게

 

깊이 새겨진 다짐. X와의 약속. 여성성과 함께 약지에 새겨진 것은 동생을 지켜주겠다는 약속. 마치 커플링 같이 약지를 두르고 있는 거즈. 그리고 그 손을 붙잡는 어린 장미. 이 장면에 도달해서야 우리는 비로소 알 수 있다. 우연찮게 자신(장미)에게 찾아온 한 남자. 자신에게는 늘 친절했던 그 아저씨. 내 이름은 어떻게 알고 있단 말인가.

 

장미(이솜) 대사

날 왜 찾아 왔어요? 날 알죠?”

 

장미에게 자신의 존재를 알릴 수 없었던 이유 부채감 때문이다. X의 죽음을 강박적으로 떠맡은 이유. 윤지욱은 그 이유를 자신에게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X, 장미도 약지에 새겨놓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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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사범(안길강), 윤지욱(차승원) 대사

박사범: “여자랑 어떻게 싸우겠나?”

윤지욱: “이렇게 생긴 여자본적 있냐?”

 

윤지욱은 유령이다. 정체성을 상실하고 떠다니는 유령 같은 존재이다. 그가 여자가 되기 위해 출국을 결심한 그날. 결국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이뤄놓은 모든 것을 버려놓고 떠나기로 결정했지만, 그는 돌아온다. 죽은 진우, 납치당한 장미. 결국 그는 문턱을 바로 눈앞에 두고 돌아선다. 이미 자신은 신화적 존재로서의 윤지욱이 아니다. 이미 그가 진정한 남자가 아니라는 사실이 드러났다. 그렇다면 그는 누구인가? 문턱을 넘지 못하고 되돌아오는 그/그녀는 누구란 말인가. 이 기괴한 혼합물, 마치 유령처럼 흔들흔들 걸어오는 저 존재는 무엇이란 말인가. 붉은 모조 손톱과 짙은 눈 화장. 하지만 피에 얼룩진 얼굴과 미끄러지듯이 걸어오는 윤지욱. 그의 모습은 섬뜩하기만 하다.

허곤의 대사(“진짜 사랑을 했나보네. 시발, 더 미안해지네)는 장미가 죽었음을 암시한다(물론, 사실과 다르다). 이미 디제시스에 빠져든 관객은 윤지욱의 슬픔을 공유한다. 동생을 지켜주겠다는 X와의 약속. X, 장미도 못 지켰다는 사실에 그는 이성을 잃는다. 이 장면은 <하이힐>의 절정이며 관객의 집중도 또한 최고조에 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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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신창이가 된 윤지욱은 끝내 죽는 것일까? 장미 또한 어떻게 되었을까? 모든 고민이 관객을 사로잡고 있을 때 상당히 어색하게 연출된 장면이 개입한다. 조폭들은 윤지욱을 내버려둔 채 떠났고 허곤을 보좌하던 조폭의 대사가 들려온다.

 

거기도 철수 하시지. 아직 살아있으면 뽀뽀라도 한 번 해주고 보내주라 하시네.”

 

이게 무슨 말인가. 윤지욱을 죽이지도 않고 하물며 장미는 살아있다. 우리는 여기서 이 두 주인공을 못 죽여서 안달난 사람들이 아니다. 관객을 태운 롤러코스터는 절정에 위치했고 윤지욱이 죽는지, 장미는 어떻게 된 것인지 관객은 숨죽이며 있었다. 이렇게 팽팽하게 당겨진 실을 한 번의 가위질로 잘라버린, 당겨진 실이 바닥에 축 처져 늘어진 것이다. 자연스럽지 않은 이 조폭의 개입은 윤지욱의 분노도, 좌절도 모두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 모든 긴장은 해소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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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막 끝나고 나왔습니다. 힘쓸 일 없이 쉽게 끝났네요. 제가 있으니깐 회사걱정 마시고 회장님 건강 챙기십쇼.”

 

구역질이 난다. 입을 틀어막을 정도로 역겹다. 결국 허불과 허곤의 알력다툼이었던 것이다. 윤지욱의 분노, 관객의 긴장. 우리의 감정은 이 권력집단의 판 위에 놀아난 것으로서 생긴 파생물이다. 영화는 끝까지 개인을 놓아주지 않는다. 이 모든 것을 일거에 일소하는, 윤지욱과 관객을 비웃는 연출인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상당히 어색하게 개입한 이 연출에 대해 의구심을 가질 수밖에 없다. 급조한 듯한 연출. 윤지욱과 장미를 살리기 위한 짜 맞추기식 연출이라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종류의 장면에서 단순히 감독의 미숙함이라고 판단하는 순간 비평은 중단된다. 우리는 앞으로 더 나아가기 위해 이 장면이은 감독이 의도적으로 연출한 것이라 가정하고 분석해야 한다(필자는 감독 혹은 작가의 의도 자체는 비평에서 중요하다고 생각지 않는다).

관객의 모든 긴장을 제거하는 연출. 디제시스에 함몰된 주체를 잠에서 깨우듯이 관객을 영화에서 건져낸다. 마치 브레히트의 소격효과가 생각나는 대목이다. 어색한 개입은 관객이 몰입한 슬픔에 잠긴 윤지욱의 모습은 허구적이라 대놓고 말하며 의도적으로 영화과 감정적 교류를 방지하는 듯하다. 그렇다면 이 낯선 연출. 그것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는 뒤에 이어지는 권력집단의 알력다툼이 영화의 결말을 이끌어 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결국 윤지욱의 감정은 바둑돌 하나의 감정일 뿐이다. 영화가 소격효과로 얻고 싶은 사실은 바로 주체화를 부르는 권력의 존재이다. 영화는 철저하게 권력집단의 호명으로 전개된다. 이는 성소수자 혹은 개인이 담론을 이끌어 나가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영화에 녹아든 주인공을 통해서 영화는 흘러가지 않는다. 주인공은 전방에 세워 놓은 바둑돌일 뿐이다. 이 권력주체의 어색한 개입. 모든 상황을 종결짓는 조폭의 몇 마디 대사가 전부라는 것을 관객에게 사실로서 전달한다.

 

영화 마지막 씬. 윤지욱도 장미도 살아있었다. 덥수룩한 수염. 여성성은 고사하고 깔끔한 중년남자의 모습도 찾아볼 수 없다. 우리는 또 다르게 호명된 윤지욱을 보고 있는 것인가? 옆에서 장미를 기다리던 윤지욱에게 어떤 시선이 느껴진다. 대화를 나누던 장미의 보이스가 오프되고 배경음악이 흘러들어온다. 이제 남은 오디오는 현장음과 흘러들어오는 피아노 소리다. 그를 응시하고 있는 것은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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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누구인가? 스쳐가는 행인들 사이에 우두커니 서서 윤지욱을 바라보는 그 주체는 누구란 말인가? 담론에 의해 뭐라 호명되는 주체인가? 트랜스젠더라 불리는가? 성별 기호는 여자가 된 남자인가? 남자가 된 여자인가? 그들은 이 담론에 귀속되기 위해 남자가 되어야 하고 여자가 되어야 했다. 만약 선택치 않는다면 유령처럼 배회하며 정박점 없이 떠 다닐 수밖에 없다.

 

윤지욱과 그/그녀. 서로를 응시하는 순간, 장미의 호명이 개입한다. 수행적인 발화. 그것은 윤지욱을 주체화시키기에 충분하였다.

 

장미(이솜) 대사

오빠, 가자.”

 

오빠라고 호명하는 순간 윤지욱은 깨어난다. 사람들 속으로 사라지는 윤지욱의 뒷모습을 보여주는 컷은 담론으로 귀속되는 주체의 운명을 보여준다. 이제 그는 X를 대신한 장미의 보호자이며 후견인이다. 그가 공황에서 돌아서는 그 순간부터, 그의 여성성은 X에 대한 상징적 부채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리고 두 번 다시는 장미(X)를 잃지 않기 위해 그녀의 곁에 머무른다. 그것이 윤지욱에게 (영화에서) 마지막으로 주어진 역할인 것이다. 그 역할은 오빠라는 장미의 호명에서 찾을 수 있다.

 

만약 주체가 호명에 의해 주체화된다고 한다면, 담론에 필연적으로 종속될 수밖에 없다고 한다면 퀴어 이론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무엇일까?

 

사실 호명으로 인한 주체화, 행위에 이전에 주체가 존재하지 않다는 이론은 매우 논쟁적인 이론이다. 우리가 차용한 퀴어는 이 논쟁 속으로 들어가기 위해 사용된 것이다. 필자는 이들 이론 중 어떤 것이 옳다고 단언하지 못 한다. 만약 퀴어 이론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퀴어자체가 아닐까하고 생각한다. 명명되기를 거부하는 그 저항성 자체를 말이다.

 

인권운동, 해방운동의 씨앗은 불법에서 싹 틔우는 것과 같다. 그렇다고 해서 불법행위를 종용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다만, 우리의 관습과 질서를 흔드는 그 행위에서 전복가능성이 나올 수 있다는 말이다. 우리는 영화비평에 앞서 퀴어문화축제를 잠깐 보았다. 우리가 그들의 포르노그래피적 퍼포먼스에 유독 냉담한 이유가 무엇인가. 또 다른 성해방 운동 집단인 피맨(Femen)의 나체 시위는 용감한 여성들의 시위인가? 그렇다면 여성도 남성도 아닌, /그녀의 포르노그래피는 무엇인가? 음란죄이자 꼴불견인가?

 

모더니티적 기획에서 이데올로기 비판은 은폐되고 허구화된 권력을 폭로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것으로는 부족하다. 이데올로기는 단순히 허구가 아닌 실체였고 더 이상 이데올로기는 무엇을 은폐하는 것이 아니다. 이데올로기는 지극히 평범한, 우리가 사회를 보는 상징계 그 자체인 것이다. 현실이 바로 이데올로기(환상이).

우리가 피맨의 저항운동과 퀴어의 저항운동에서 동일하게 보지 않는다. 이미 이성애적 매트릭스에 갇힌 우리는 그것에서 벗어나려는 퀴어의 움직임 자체가 불편할 뿐이다. 현실이란 관점은 지극히 이데올로기적이다.

 

행위에 앞선 행위자라는 존재는 허구라고 주장하며 주체는 담론의 효과라 말한다. 우리의 정체성이 담론에서 귀결된 것이다. 즉 이데올로기의 파생물이다. 우리는 이것을 인정해야한다. 우리는 그 자체로 순수한 자율적 주체가 될 수 없다. 그렇기에 불편하고 낯설지만 벌려진 상징계의 틈에서 실재의 조각들을 마주할 수 있어야 한다. 그 실재의 조각, 환상을 걷어내고 남은 그 낯설고 섬뜩한 것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야 우리는 부자유 속에서 자유로 한 발짝 내딛을 수 있을 것이다.

 

일련의 어떤 퍼포먼스가 낯설고 불편한가? 그렇다면 그곳에 가능성이 숨어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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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    친구신청

소수자에 대한 표현력이 생각보다 좋았고 딱히 트랜스젠더만이 아니라 장애인이나 동성애자들도 공감할 수 있는 내용이었다고 봄.

액션씬도 구성에서 좀 뻔한 부분이 있었지만 프레임을 빠르게 줄이는 연출이 좋았음.

다만 퀴어 문화에 대한 거부감이 있는 사람이라면 대부분 싫어하는듯
[애니/만화] 플루토 - 나가라, 신기원의 아톰이여! (0) 2014/08/26 PM 1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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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라사와 나오키, 윤영의 옮김, 『플루토』, 서울문화사, 2008.

구입가 34,400?원

 

  소싯적부터 만화도 어지간히 읽었으나 그래도 그쪽 세계 덕후님들만 하겠습니까(덕후들께 인사 아뢰오).

 

  그래도 뒤처지지 않으려고 이것 저것 기웃거려왔으니, 적어도 네임드는 꾸준히 따라잡아왔던 셈.

 

  그 중에서 좋아하는 네임드 중 하나가 바로 이 양반 우라사와 나오키.

 

  그 양반이 다시 그렸다는 아톰에 대한 정보 또한 전혀 없이 접근한 건 행운 아니면 불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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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루토』를 비롯해, 『20세기 소년』을 쓴 우라사와 나오키 씨입니다.
등장인물과 상당히 닮으셨네요. 하핫.
『20세기 소년』의 등장인물의 정체를 둘러싼 밀당도 괜찮았지만.
역시 제게는 『마스터 키튼』이 넘버원입니다.

 

 

 

인상 요인

 

  『20세기 소년을 그린 사람이 만든 21세기 아톰은 과연 무엇이냐는 궁금함 & 그리고 궁금증의 해소. : +1500원

 

  1권 말미에 등장하는 아톰의 매력적 비주얼. : +1000원

 

  그렇다고 (미)소년 덕후도 아닌데, 뭐가 매력적이냐면. : +0원

 

  일종의 아련함이 묻어나는 청순함과 굳셈과 선함을 잘 드러낸 우라사와 나오키 특유의 작법이랄까. 보는 즉시, 굳센 마음과 선한 의지와 강한 힘이 한꺼번에 느껴져. : +1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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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형사 게지히트를 비롯한 강한 로봇 7인방이 지닌 각각의 사연들이 그들의 죽음을 애틋하게 만들어. 그런 에피소드를 짠하게 빚어내는 재주는 『마스터 키튼』 등을 통해 다채롭게 증명되었지. : +750원

 

  『플루토』는 작품 전체로 이라크 전쟁 전체를 비유하고 있어. 이라크 침공의 부당함과 전쟁에 희생된 평범한 사람들의 고통이 생생하게 드러나 있어. : +5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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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0억 명의 선택 앞에 놓인 '사상 최대의 로봇'이라는 철학적인 테마가 흥미로웠어. : +5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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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에서 빌려 읽었는데요.

표지를 본 내용의 컬러판으로 해버리는 탓에, 그 책이 몇 번째 책인지를 책을 펼치지 않고는 알 수 없게 되어버렸어요.

 

    생각해보니, 이 작품은 다카노 가즈아키의 『제노사이드』를 여러 군데에서 떠올리게 만드네. : +0원

 

 

 

인하 요인

 

  이 세계에 대한 이해가 잘 되지 않아. : -1000원

 

  로봇 인권법이 제정되어서 로봇들이 인간과 동등한 권리를 인정받고 세계의 한 축, 혹은 일원이 되었다는 설정 자체가 인간성에 대한 상당한 오해를 동반하고 있어. : -2000원

 

  인간은 다른 존재를 그들 안에 받아들일 정도로 관용적이지 않아. : -0원

 

  로봇이 인간을 죽일 수 없게 프로그램되었고, 거짓말을 할 수 없다면, 그 로봇들은 인간이 아니야.  : -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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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좋아하는 에피소드 중 하나입니다.
지금 생각해보니 역시나 배신에 관련된 에피소드로군요.
잠재의식이란, 흐음.

 

  '로봇 인권법'이라는 말 자체가 어폐가 있어. 거짓말 할 수 없고, 스스로나 다른 개체를 죽일 수 없는 로봇이라는 존재는 결국 인간이 될 수 없기 때문에. 결국 인간이란 유일하게 즐거움을 위해 같은 종족을 죽이는 존재이니까. : -1500원

 

  가장 합당한 단어는 '로봇 관용법' 정도겠지. '로봇을 관용적으로 대해야만 하는 법'은 인간을 통제하기 위한 법이겠지. : -1500원

 

  『플루토』엔 로봇이 노예와 편의 체계의 지점에 머물러야 한다고 믿는 인간들이 많이 등장해. 이러한 로봇혐오자의 내용이 중간부터 흐지부지되면서 플루토와 연관된 전쟁 관련 부분으로 넘어가지. : -3000원

 

  내가 볼 때는 이 두 라인을 다 살려가는 결론을 만들어내는데 실패한 것 같아. : -1500원

 

  로봇에 대한 설정도 문제인데. 여기서 게지히트를 비롯한 대부분의 로봇들을 보면 인간세계에서 거의 인간과 비슷한 대우를 받는 걸로 나와. 심지어는 그들은 다른 로봇까지 입양해 가정을 꾸리지. : -500원

 

  그런 세계라면, 게지히트가 폐기장에서 아직 살아있는 로봇을 500제우스를 주고 사들이는 광경은 굉장히 이상한 거야. 그렇게 로봇과 인간이 대등한 세계라면, 로봇이 그렇게 끔찍하게 폐기되는 장면은 굉장히 이질적이거든. : -4000원

 

  인공두뇌의 한계에 대해 이상하게 설정되어 있어. 초반 등장하는 로봇을 통해 우리는 로봇들이 슬픔이나 고통을 공감하지 못한다는 걸 알게 돼. : -1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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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노키오를 바라보는 제페트의 슬픔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로봇의 한계이기도 하고요.

이러한 한계성을 나오키는 작품 내에서 넘나드는 편이었는데, 그다지 좋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한계성이 작품이 진행되면서 곳곳에서 무너져. : -1500원

?

  뛰어난 로봇 몇몇에게만 그러는 게 아니라 이게 좀 빈번하게 일어나기 때문에?, 로봇의 진화를 통해 일종의 감동을 일부러 일으키려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해. : -1500원

?

  아쉬운 건, 아톰과 플루토를 비롯한 세계의 강력한 로봇 일곱의 전투 장면이 거의 다 생략된 거야. 원작자가 그렇게 그렸기 때문인지는 잘 모르겠는데. 싸우는 과정이 생력되어버렸기 때문에 우리는 이 로봇들이 얼마나 강력한지를 체감하지 못하게 돼. : -2000원

 

  하긴 이건 원작을 읽지 않았기 때문인지도 몰라. 원작을 읽은 사람들은 이미 다 아는 강력함을 또 그릴 필요를 못 느꼈는지도 모르지. 원래 액션보다는 형이상학적인 질문을 통해 독자를 생각하게 만드는 걸 좋아하는 작가이기도 하고 말이야. : -500원

 

  역시나 스타일이랄까. : -0원

 

 

34,400원 +5,250원 -21,500원

감정가 = 18,15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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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브컬쳐] [단편 로맨스] [새벽 별빛] 01 미팅 (0) 2014/08/25 PM 0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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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미팅














어디를 바라보는지도 알 수 없는 사람을 혼자 좋아하기는 어려웠다. 난 지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 이유일까, 내가 지금 이 곳에 있는 것은.


신촌으로 향하는 지하철은 너무도 붐비고 있었고, 사람들 어깨 너머로 보이는 창문 밖으로는 희미하게 밝혀진 형광등 불빛이 하얀 선을 그으며 내 망막에 잔상을 남기고 사라져갔다. 형광등 빛이 앞에서 다가오고 뒤로 사라져가는 그 잠시 동안, 자꾸만 그 사람의 영상이 떠올랐다. 가만히 한숨을 내쉬고는 내 모습을 돌아보았다. 혼자 사는 자취방에서 스팀다리미로 어색하게 다린 흰색 재킷, 그리고 푸른색 남방. 옷깃 사이로 스미는 초봄의 한기를 막기 위해 걸친 크림색 머플러까지. 자취 생활을 시작한 지 만 1개월 만에 나는 내가 입을 수 있는 최대한의 복장을 하고 지하철을 타고 있었다.


‘난, 왜 지금 여기 있을까. 뭘 기대하는 것일까.’


3:3 미팅. 내 옆에는 같은 대학 동기 두 명이 나와 나란히 서 있다. 둘이 열심히 얘기하다가 한 녀석이 나를 돌아보더니 물어왔다.


“오늘 나온 애들… 폭탄이면 어떡하지? 우리 오늘 만나는 애들은 어떻대?”
“야, 내가 그걸 어떻게 아냐? 내가 주선했냐?”
“그래도.”
“시끄러. 그런 소리 하려면 일단 니 면상부터 좀 고쳐놓고 와.”


같이 가는 친구 녀석의 기대 섞인 물음을 나는 차갑게 내치고 말았다. 내가 너무 일찍 늙어버린 것일까. 왜 상대의 외모를 그렇게까지 신경 쓰냐고 묻고 싶었다. 그렇게 상대방의 용모를 신경 쓰는 너는 과연 그 쪽에서 봤을 때 얼마나 잘 생겼다고 생각하느냐고 반문하고 싶었다.


한 명의 자리가 빈다기에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나오게 된 자리지만, 사실 기대가 없었다고 하면 거짓말이었을 것이다. 어쩌면 나 혼자 멀리서 바라보기만 하는 그 사람을, 그 사람의 그림자를 떨쳐버릴 수 있는 기회가 될 지도 모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래, 혹시 모를 일이다. 그녀를 잊을 수 있을 만큼의 무언가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최소한 하나쯤은 나와 주기를, 그리고 그런 사람이 나의 파트너가 되기를 나는 바라 마지않고 있었다.


“다음 역은 신촌, 신촌 역입니다. 이번 역은 열차와 승강장의 사이가 넓으니…….”


잠시 후, 가볍게 앞으로 쏠리는 느낌과 함께 열차는 정지했고, 우리는 그 정체를 알 수 없는, 그리고 굳이 알 필요도 없는 무언가를 성취하러 간다는 느낌으로 뚜벅뚜벅 걸어 나왔다. 신촌역 역사는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역시 금요일 저녁. 아마 내 옆의 두 녀석은 이렇게 중얼거리고 있을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Thanks, God. It’s Friday!’


-우우웅~ 우우우웅~


‘정소연’. 이번 미팅 주선자인, 친구가 알려준 상대측 한 사람의 이름. 괜히 가슴이 두근거렸다. 가만히 목소리를 가다듬고 휴대폰을 귀에 갖다댔다.


“네,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오늘 만나기로 한…….”
“아, 지금 막 도착했습니다.”
“그래요? 어딘데요?”
“신촌역 1번 출구 앞이요.”
“아, 빨리 오셨네요. 금방 갈게요.”


잠시 후 나타난 세 명의 여자들. 밝은 분위기의 한 명, 좀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활발하고 유쾌한 한 명, 그리고 수줍어 제일 뒤에서 따라오는 한 명. 서로를 약간 어색한 눈빛으로 바라봤다. 나와 함께 나온 녀석들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멀뚱멀뚱 여자 측을 바라만 보고 있었다.


“반갑습니다. 최민기라고 합니다. 지금 P대 심리학과 재학중이고요.”
“아, 아까 전화받은 분이시구나. 저는 D여대 교육학과 1학년 다니는 정소연이예요.”


나와 소연을 필두로, 모두의 어색한 자기소개가 끝났다.


“뭐라도 먹으러 가죠. 뭘로 할까요?”
“글쎄요, 저희는 딱히 먹고 싶은 생각은 없는데.”
“그럼, 맥주나 한 잔 할까요? 앞장서세요. 아무래도 저희보다는 그쪽 세 분이 괜찮은 데를 많이 알 것 같은데…….”
“… 네.”


소연은 짤막하게 대답하고 앞장을 섰다. 여자 셋이 앞서 가고, 나를 비롯한 남자들은 뒤에 약간 쳐져서 따라갔다. 첫인상은 나쁘지 않았다. 내가 준 인상도, 내가 받은 인상도. 아니, 최소한 내가 받은 인상만큼은 그랬다. 기대만큼은 아니지만 함께 나온 친구 녀석들의 불안감만큼은 아니었다.






잠시 후, 조용한 호프집에 자리를 잡고 앉아, 우리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소설이든 영화든 로맨스를 즐겨 본다는 내 얘기에 다들 의외라는 눈빛. 숫기 없는 내 친구들은 가만히 나의 이야기를 듣고 맞장구만 쳤다. 내 앞에는 세 명의 여자가 앉아 있었지만, 그리고 당연하게도 내 시선은 셋을 번갈아 봐야 했겠지만, 나의 눈은 소연을 향해 있었다. 열심히 농담을 하고 이야기를 하면서 나는 세 여자와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그런 내 앞에서 나를 열심히 바라보는 그녀. 그 사람도 그랬다면, 아니 그렇다면……. 잠깐만, 현기증이 난다.


“아, 잠깐만요.”


나는 싱긋 웃으며 자리를 비우는 양해를 구하고 화장실로 향했다.


-쏴아


신경질적으로 물을 틀어, 얼굴을 적셨다. 순간, 소연이 날 보는 눈빛에, 그 사람이 떠올랐다. 소연이 바라보는 그 시선으로 그 사람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너무도 다르게 생긴 두 사람인데, 나의 희망사항이 반영된 것일까. 거울 속에는 머리에 왁스를 발라 이리저리 멋을 낸 내가 있었다. 웃어 보았다.


“가식덩어리.”


나지막이 내뱉었다. 진실일지 모른다. 내가 웃는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지금 내 안에는 무엇이 자리하고 있는 것일까, 누가 자리하고 있는 것일까. 일단 돌아가자. 내가 있던 자리로.


“아, 미안. 어제 밤늦게까지 과제를 했더니, 좀 피곤해서.”


어느 새인가 우리는 말을 놓고 있었고, 내 옆의 친구들도 분위기에 적응을 하기 시작했다. 술이 몇 순배씩 돌고, 각자 대학 생활 이야기, 그 외에도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고 어느 정도 분위기가 무르익었을 때, 여자 측에서 한 명이 입을 열었다.


“근데, 우리 좀 섞어 앉으면 안 돼?”


남자 셋, 여자 셋이 나란히 앉아 있었다. 나에게는 그것이 자연스러웠고, 딱히 이상한 점도 느끼지 못하고 있던 차였다.


“그래.”
“그럼, 좀 고전적이기는 하지만 소지품 고르기로 하자. 이거 은근 스릴있거든. 남자들은 눈 감고 있어.”


눈을 감았다. 주변의 테이블이 시끄러웠지만, 바로 앞에서 들리는 부스럭 소리는 세 여자가 주섬주섬 자신의 소지품을 하나씩 꺼내고 있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됐어, 하나씩 집어 가.”


립밤 두 개, 껌 한 통. 셋 다 묘하게 입술에 닿는 물건들이다. 왜 하필이면. 또 현기증이 일었다. 순간적으로, 그 사람은 어떤 껌을 씹을까, 어떤 향의 립밤을 쓸까 하는 의문이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너네 먼저 뽑아라. 난 남는 걸로 가져갈게.”


관자놀이에 손을 짚은 채로 친구들에게 말했다. 선택하고 싶지 않다. 미안하지만, 이들 중 누구도 내 안을 채워줄 수는 없다. 만난 지 겨우 한 시간 반이 지나 두 시간이 되어 가고 있었다. 짧은 시간, 사람의 모든 면을 알 수는 없는 시간이고, 어쩌면 호감을 갖기에도 너무 짧은 시간인지도 모른다.


“야, 최민기. 하나 남았다.”


관자놀이에서 손을 떼고 고개를 들었다. 껌이 남아 있었다. 그리고 내 앞에서, 소연은 날 보고 방긋 웃고 있었다.


“내 거네.”


그녀의 목소리는 약간 붕 뜬 느낌이었지만, 나에게 딱히 할 말은 없었다. 그냥 빙긋이 웃어주었다.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핸드폰을 만지작거린다. 나는 멍하니 그런 그녀를 보고 있었다.


-우우웅


문자메시지. 소연에게서 온 것이다. 바로 앞에서 문자를 보내다니, 이런 황당할 데가.


「미안, 나 오늘 일찍 들어가 봐야 돼. 할 얘기도 있는데 일단 다들 각자 파트너랑 놀라고 하고 우리 나가자.」


난 잠시 망설이다가 소연의 의견에 따르기로 결정했다. 어차피 다들 이 자리에 오래 있어봤자 서로의 눈치를 보느라 헛소리만 지껄여댈 것이 뻔했다. 아니, 그것보다도 소연이 마치 그 때를 기다렸던 것처럼 얘기를 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자, 그럼 일어나서 파트너랑 놀까? 이따가 만나든지 하자고.”


모두들 동의했다. 솔직히 말해서, 우리나 그쪽이나 잘 생기고 예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성격들이 다 좋아서 파트너끼리도 잘 어울리는 듯했다. 남자들이 돈을 내고 밖으로 나왔다. 호프집에 들어갈 때와는 달리 3:3이 아니라, 2:2:2가 되어 있었다.


“자, 그럼 다들 놀고… 알아서 들어가자. 하핫.”
“그래. 자, 그럼 잘들 해보라고.”


네 명이 나의 시야에서 멀어져, 인파 속으로 묻혀버렸다.


“아, 저기…….”
“응?”
“미안, 기분 나빠할 것 같아서 하는 말인데…….”

소연은 잠시 뜸을 들였다.


“너 싫어서 그냥 가려고 하거나 이런 거 아냐. 진짜야. 우리 내일 만나자. 그리고 놀자. 응?”
“음, 뭐……. 난 사실 아무 생각도 안 하고 있었는데. 그래, 그럼. 그렇게 하자.”
“정말 미안. 내일은 안 이럴게.”


거짓말 같지는 않다. 나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나도 들어가 볼까.”
“지하철 타고 가? 어디 사는데?”
“그냥, 좀 올라가야 돼. 너는?”
“나는 이 동네라서. 연희동 살거든. 아, 그럼 가봐야겠다. 내일 봐.”
“응, 잘 가.”


소연도 사람들 사이에 묻혀 사라져간다. 나는 혼자 지하철을 탔다. 그 사람이 보고 싶다. 누군가를 좋아하는 것은 이렇게 갑자기 만난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그냥 무작정 누군가를 잊고 싶다고 좋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또 창밖으로 형광등 불빛이 보인다. 그리고 그 사람의 얼굴이 보인다. 내가 지친다고, 힘들다고 포기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닌가보다. 무작정 그 사람에게 문자메시지를 보낸다.


「내일, 시간 있어? 영화 보고 싶은데 같이 볼 사람이 없다.」


답장이 없다. 아니다, 조금만 기다리면 올 것이다. 웃음이 난다. 가슴이 두근거린다. 미팅 얘기를 들었을 때와는 다른 두근거림. 미묘한 감정이 이리저리 섞여 있는, 그런 느낌. 가슴이 벅차오른다. 좋아한다는 감정을 분산시키지 않겠노라고, 그 사람이 어느 곳을 보든 나는 그 사람을 바라보겠노라고, 그 사람이 오기를 기다리겠노라고 다짐하면서. 아직은 아니지만, 언젠가는 내 사람이기를 바라면서. 짝사랑이어도 아직은 좋았다. 잠깐 힘들다고 해서 금방 다른 사람으로 잊으려 했던 것은 실패로 돌아갔던 셈이다. 다시 휴대폰을 들고 문자메시지를 꾹꾹 눌러 쓴다.


「미안. 나 내일 못 나갈 것 같다. 그래도 오늘 만나서 즐거웠어.」


수신자는……


정. 소. 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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