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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와 사민주의] 경제민주주의 핵심은 '노동해방'과 '복지국가' 정신 (2) 2015/06/15 PM 02:59


1936년 프랑스의 총파업 모습(사진=노동자연대)


한국 자본주의의에 대해 비정상성, 봉건성, 전근대성으로 접근하고 그 정상화를 지향하는 것이 진보의 이념적 지향이어서는 안되며, 자본주의 자체가 갖고 있는 계급모순과 갈등, 빈부격차 등을 그대로 직시하고 비판하고 대안을 만들어가는 것이 필요하다는 정승일 사민저널 편집위원장의 글을 필자의 동의를 얻어 3차례에 나눠 게재한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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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우리나라 진보진영에서 보편적 복지와 함께 가장 많이 논의되는 화두가 경제민주주의(economic democracy)이다. 그리고 경제민주주의란 재벌그룹 개혁(즉 재벌그룹 축소 + 재벌그룹 해체)과 함께 대기업-중소영세기업간의 갑을 관계 개선 + 동반성장으로 이해된다. 이것은 자유주의적 프레임으로 이해된 경제민주주의이다.

그런데 역사적으로 경제민주주의이라는 개념을 처음으로 제시한 것은 바이마르 공화국 당시의 독일 사회민주당이었다. 그것은 레닌과 로자 룩셈부르크가 추구하던 소비에트 공화국식의 국가 사회주의화를 반대한다는 맥락에서 제시된 개념이었다.

그것은 노동자들의 대표가 자본가들의 대표에 맞서, 미시(기업)와 거시(국민경제), 그리고 메소(산업) 차원에서 노-자간에 일종의 공동통치(협치)의 지배구조(governance structure)를 만들어낸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1970년대 이래 스웨덴과 독일 등 유럽과 그리고 미국에서 활발하게 논의된 경제민주주의 역시 ‘자본+부르주아’의 일방적-전횡적 지배에 맞서는 ‘노동+무산자’들의 복지권·시민권과 노동권, 노동조합권, 그리고 산업 및 국민경제 전체의 지배구조=통치구조에 있어 노자 공동의 공동 통치 구조를 의미했다. 즉 그것은 총노동 대 총자본간의 대립 전선을 전제하면서 양자간의 공동통치 지배구조 구축을 통해 자본과 유산자들을 압박하는 개념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랬던 개념이 우리나라에 수입되어서는 총노동 대 총자본 간의 대립전선 개념은 쏙 빠져버리고, 그 대신 대자본 대 중소자본+영세자본간의 대립 전선 개념으로, 즉 자유주의의 프레임으로 전환되어 버렸다. 그리고 경제민주주의 투쟁의 주역은 노동자들(가장 가난한 비정규직 및 중소영세기업 노동자들 포함)이 아니라, 중소기업의 기업주들(자본가들)이 되어 버렸다.

경제민주주의를 그 본래의 의미로 되돌려야 한다. 경제민주주의의 핵심은 노동해방과 복지국가이다. 5천만 국민의 대다수인 직장인들, 종업원들, 그리고 영세자영업자들이 꿈꾸는 것은 장시간 근무·노동과 산업재해로부터의 해방, 안정적인 일자리, 동일노동-동일임금의 원칙 구현, 산별 단체교섭의 법적 의무화, 노동시간 단축을 통한 저녁과 주말이 있는 삶을 보장하는 공화국이다. 이렇듯 초보적 단계의 노동해방을 이룩한 그런 민주공화국이 바로 경제민주주의 공화국이다.

담론적 설득력의 한계에 직면한 복지국가 운동

4년 전 무상급식 열풍과 함께 호기 있게 출발한 복지국가 운동은 요즘 침체와 전망 부재의 상태에 빠져있다. 왜 그럴까? 사회복지 전문가들은 그 이유로 복지재정 즉 증세의 실패에서 그 이유를 찾는다. 올바른 지적이다.

그런데, 더 깊게 질문해보자. 왜 부자 증세를 비롯한 증세 담론은 대중적 열풍은커녕 대중적 설득력을 획득하는 데 실패했을까? 그 여러 이유의 하나는 사회복지 전문가들이 제시하는 증세의 관점에는 착취 또는 불로소득에 관한 정치경제학적 관점이 빠져 있기 때문이다.

조세 전문가들은 흔히 부자 증세의 논거로 지불능력론을 제시한다. 부자들은 부유해서, 즉 세금 지불능력이 더 많기 때문에 그들이 더 많은 세금을 내는 것이 맞다는 것이다. 일리가 있는 주장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왜냐하면 이런 논법은 즉각적인 반박에 직면하는데, 부자들의 소득 역시 그들이 ‘땀 흘려’ 획득한 대학 학위와 재산 그리고 열심히 노력해서 얻은 직위와 자격증으로부터 얻은 소득, 한마디로 말해서 ‘근로 소득’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듯 피땀을 다해 획득한 소득과 재산에 대하여 고율의 세금을 거두는 것은 ‘정당하지 못한’ 짓, 남의 것을 강탈하는 사악한 행위라는 반박이 제시되고, 그것은 우리 주변의 평범한 동네 아저씨와 아줌마들에게 더욱 설득력 있게 제시된다. 과연 이러한 반박에 대해 뭐라고 다시 역공하면서 주변 사람들을 설득할 것인가?

현재의 복지국가론에는 착취론 즉 불로소득의 정치경제학이 없어

1970년대 영국 노동당은 연간 10억이 넘어가는 개인소득부터는 90%의 세율로 과세했다. 뿐만 아니라 1970년대까지만 해도 모든 선진국(미국, 스웨덴, 독일, 일본 등 모두 포함)에서 소득세 최고 세율은 75~90%였다.

우리나라에서도 박정희에서 노태우에 이르는 군부 독재 시기에 부자들이 내야할 소득세 최고세율은 75~90%에 달했다. 그리고 그것을 40% 대, 30% 대로 대폭 깎는 부자 감세를 단행한 것이 김영삼 문민정부에 이어 김대중, 노무현에 이르는 이른바 민주정부들이었다.

2008년에 집권한 이명박 정권만 혼자 부자감세 한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이명박 정권은 단지 레이건·부시 공화당, 마가렛 대처 보수당을 흉내 내면서 그것을 32%로 더욱 낮추려 하다가 큰 역풍을 맞았을 뿐이다.

아무튼, 고소득자들에 대한 고율 과세의 도덕적 정당성에 대한 논거는 본래 ‘불로소득=착취론’이었다. ‘정당한 소득’이란 “자신의 노동과 노력의 댓가”로 얻은 것이어야 하며, 그것을 초과하는 소득은 모두 불로소득인 바, 불로소득이란 결국 타인의 노동과 노력의 성과를 가져가는 것 즉 착취 또는 요행(행운)의 결과일 뿐이며 따라서 국가(그것이 군부독재 국가이건 민주공화국이건)가 환수해서 사회=국가를 위해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당시의 유럽 사회민주주의자들은 제아무리 능력과 재능이 뛰어난 개인이라도 타인의 5배, 10배 이상의 소득을 얻는다는 것은 도덕적 정당성이 없다고 보았으며, 그것을 넘어서는 소득은 명백한 착취 또는 불로소득이라고 보았다.

왜 불로소득이 발생하는가?

불로소득론은 ‘착취론=수탈론’을 전제로 한다. 그렇다면 왜 “불로소득의 획득 = 착취”가 발생하는가? 여기에는 크게 두 가지 입장이 대립한다.

현재 우리나라의 진보진영의 사고방식을 지배하는 것은 자유주의 경제사상의 입장이다. 즉 한국 경제에 관한 한, 자유주의의 경제사상이 진보정당(통진당과 정의당, 하물며 노동당도)과 노동운동, 시민운동을 지배하고 있다.

자유주의 경제사상은 완전 경쟁시장을 가장 바람직하게 여기며, 완전경쟁시장(그것을 그들은 ‘공정한 시장질서’라고 부르는데)에서는 모든 생산요소(자본, 노동, 토지)가 자신의 가격을 획득하므로 공정하고 정의로운 소득분배가 이루어진다고 본다.

다만 시장이 왜곡되어(market distortion) 완전한 경쟁적 시장질서가 형성되지 않을 경우 지대(rent)가 발생하는 바, 지대가 바로 불로소득이라고 본다. 따라서 자유주의자들은 (우리나라의 경우 개혁적, 진보적 자유주의자들은) 경쟁적 시장질서를 만드는 것이 바로 ‘진보적 과제’이며, 그것을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이 바로 재벌그룹 개혁을 통해 경제력 집중을 축소 또는 해체시키고(통진당과 정의당, 노동당의 ‘재벌그룹 해체’ 강령은 자유주의 경제사상의 테제이다), 중소영세 기업 지원 및 시장 개방(진입 장벽 허물기)이라고 본다.

한편 불로소득에 관한 자유주의 정치경제학의 논의에는 헨리 조지 추종자들의 토지 불로소득 논의도 포함되는데, 19세기의 고전파 경제학자인 리카르도(Ricardo)의 연장선에 있는 미국의 경제학자인 헨리 조지는 자본주의 시장경제는 착취(불로소득)와는 무관하며 다만 토지 소유만이 불로소득을 발생시킨다고 보았다(이것이 바로 ‘토건족’ 개념의 뿌리인 자유주의 경제사상이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경우 하물며 반자본주의를 외치는 노동당 일부와 기본소득론자들마저 헨리 조지의 토지 불로소득론을 인용하면서 이른바 토건족을 비판하는 자유주의 성향을 보인다.

현재 우리나라의 복지국가 운동이 직면하고 있는 침체는 복지국가 담론의 한계를 보여주고 있으며, 그것은 바로 자유주의 담론(철학과 정치경제학)의 한계이다. 완전경쟁시장(재벌그룹 축소/해체, 토건족 해체, 대중소기업 동반성장, 중소벤처기업 지원 등)을 가장 중요한 경제민주주의 담론으로 내세우는 자유주의의 정치경제학으로 과연 제대로 된 복지국가를 만들어낼 수 있겠는가?

스웨덴 복지국가가 과연 사회민주주의 담론 없이 가능했던가?

우리나라의 사회복지 전공 학자들은 압도적으로 “스웨덴 복지국가는 ‘실용주의’(즉 탈이데올로기)의 산물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 과연 스웨덴 복지국가가 탈이데올로기적 실용주의의 산물이었을까?

예컨대 1930~50년대 사이에 스웨덴 복지국가의 설계자였던 복지장관 구스타프 묄러의 철학과 정치경제학을 보자. 묄러는 시종일관 자본주의적 경제질서를 그 자체 ‘착취’체제라고 파악했으며, 그 착취를 어떻게 하면 ‘점진적으로 폐기’해나갈 것인지를 늘 고민했다. 비그포르스 역시 마찬가지였다. 묄러가 전개한 보편적 복지론(시민권에 기초한 사회복지론) 역시 마찬가지였다.

“잠정적 유토피아에 관한 사회계약”이 필요하다

자본주의는 분명 반인간적이고 반민주적이며 반생태적인 체제이다. 자본주의에 대한 철저한 비판의 정신이 없이 보편적 복지와 경제민주주의·노동해방을 말하기 힘들다. 그러나 자본주의의 지양은 단지 소유의 차원에서만이 아니라 소득과 투자, 경제민주주의와 노동해방 등 다차원적인 영역에서 진행될 수 있다.

생산수단(즉 기업) 소유의 사회화가 아니라 하더라도, 소득과 투자의 사회화와 노동시장(노동력 시장)의 사회화는 상당 부분 가능하다. 지난 1백년간의 세계 역사 경험은, 그리고 특히 서유럽 사회민주주의의 경험은, 자본에 대한 사회화가 다차원의 세계에서 다양한 형태로 진행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우리는 ‘자본주의냐 반자본주의냐’라는 흑백논리의 이분법을 거부한다. 보편적 복지와 노동해방-경제민주주의, 생태환경 보존과 남북한 평화공존-평화통일이라는 4대 비전이 실현되는 민주공화국은 100% 반자본주의가 아니며 그렇다고 100% 순수 자본주의도 아니다. 그것은 천국이 아니지만 지옥도 아니다. 적어도 지금 우리 앞에 놓인 지옥 같은 악질적 자본주의(시장 자유주의)보다는 훨씬 인간적이고 민주적이며 생태적이고 평화적인 세상이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궁극적 유토피아가 아니라 잠정적 유토피아를 꿈꾼다. 그리고 앞서 말한 4대 비전을 잠정적 유토피아라고 부르고자 한다.

지금까지 이 나라의 좌파세력은 궁극적 유토피아가 무엇인지를 놓고 논쟁하고 토론해왔다. 하지만 그것은 수천만 국민들이 당장 힘들어하는 일상 생활과는 동떨어진 공허한 토론이 되기 일쑤였다. “우리는 몇 십 년, 몇 백 년 뒤에나 찾아올 유토피아를 준비하며 살아가는 것이 아니다”는 말을 되새겨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잠정적 유토피아를 제안한다. 4대 비전과 그 비전에서 비롯되는 아젠다들을 중심으로 한반도의 남쪽에 살아가는 대다수 사람들이 고민하고 힘들어하는 문제들의 해결책을 제시하자는 것이다. 그것을 우리의 잠정적 유토피아로 삼아, 루소가 말한 사회계약을 맺자. ‘잠정적 유토피아에 관한 사회계약’을 맺는 그런 대안정당을 출범시키자.

그것이 ‘지금, 여기’에서 한 발짝 전진하는 ‘역사적 진보’이다. 그것이 ‘지금, 여기’에서 모두가 함께 하는 ‘역사적 블록’의 구축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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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야 농민봉기로 시작되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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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출처가 노동자연대길레 글도 걔들 글이겠거니 하고 읽다가 뭐지? 얘네답지 않은데? 했더니 역시나 아니었네요 ㅋㅋ 레디앙이었군요
[경제와 사민주의] 1930년대 이후 개입주의 국가의 역할 (0) 2015/06/15 PM 02:57


비그포르스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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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자본주의의에 대해 비정상성, 봉건성, 전근대성으로 접근하고 그 정상화를 지향하는 것이 진보의 이념적 지향이어서는 안되며, 자본주의 자체가 갖고 있는 계급모순과 갈등, 빈부격차 등을 그대로 직시하고 비판하고 대안을 만들어가는 것이 필요하다는 정승일 사민저널 편집위원장의 글을 필자의 동의를 얻어 3차례에 나눠 게재한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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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의 글에서 보았듯이, 이 나라에서 오늘날 벌어지는 모든 문제가 서방의 선진 자본주의에서 동일한 패턴으로 전개되고 있다. 따라서 문제는 자본주의 그 자체이다. 자본주의 그 자체를 비판해야 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대안을 마련할 수 있을까? 마르크스와 레닌이 살아 있던 1백 년 전으로 돌아가잔 말인가? 그렇지 않다. 우리에게는 1883년에 숨진 마르크스와 1922년에 숨진 레닌이 보지 못했던 지난 1백여 년간 세계 역사의 경험이 있다.

마르크스와 레닌은 자본주의 시장경제에서 발생하는 모든 착취와 폐해의 근원에는 사유재산권과 시장이 있다고 믿었다. 따라서 그들은 사유재산권을 폐지하여 그것을 사회화(socialization)하고, 시장 역시 폐지하여 중앙계획 경제 하에 놓게 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고 보았다.

하지만 그들이 살았던 시대에는 소득세(income tax)도 법인세(corporation tax)도 없었다. 부가가치세도 없었다. 하물며 소득세 원천징수는 ? 계산기와 타자기, 컴퓨터의 미발전 등 ? 회계기술상 꿈도 꿀 수 없었다.

하지만 제1차 및 제2차 세계대전의 총력전에 따른 전비 조달 문제는 소득세와 법인세를 선진 자본주의에서 전면화시켰다. 그리고 현금출납기와 계산기, 컴퓨터 등을 이용한 회계처리 기술의 발달은 소득세와 법인세, 부가가치세 등의 부과와 원천 징수를 기술적으로 가능하게 하였다.

그리고 1930년대의 대공황과 제2차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서구 자본주의는 국가가 세금을 거두어 복지에 사용하는 복지국가를 발전시켰다. “현대 국가란 부르주아의 위원회에 불과하며, 따라서 그것을 프롤레타리아 국가(프롤레타리아 독재)로 혁명적으로 전환시켜야 한다”고 했던 마르크스와 레닌의 말이 무색할 정도로 국가의 역할이 달라졌다.

특히 북유럽처럼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이 집권한 민주공화국들에서는 국가의 적극적 개입주의 정책에 의해 친노동 복지국가를 만드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역사적으로 보여주었다.

자본의 사회화(socialization)는 다차원적 개념

자본주의적 착취를 제거하기 위해서는 자본을 사회화(socialization)하여야 한다. 그것을 표방하는 정신이 사회주의(socialism)이다. 그런데 자본의 사회화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전통적인 마르크스주의자들은 그것을 ‘소유’의 사회화(또는 국유화)로 해석한다. 레닌과 카우츠키·힐퍼딩, 그리고 베른슈타인 역시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스웨덴 사회민주주의의 칼레비(Nils Karleby)와 비그포르스(Ernst Wigforss)는 자본의 사회화를 다차원적으로 해석하였다. 자본의 사적 소유를 용인하되, 그 소유로부터 발생하는 소득(법인소득 및 개인소득)에 대하여 세금(법인세와 소득세)을 부과하는 것 역시 일종의 사회화, 즉 자본의 소득에 대한 사회화이다. 다시 말해서, 자본+자산이 벌어들인 (불로) 소득의 일정 부분을 (누진적 방식으로) 무상 몰수하여 그것을 사회공동체 전체를 위하여 사용한다.


또한 자본의 사적 소유를 용인하되, 그 사적 소유 하에 있는 자본을 오로지 생산적 투자에만 (즉 신규 일자리 창출과 기술 발전에 복무하는 투자) 전용하도록 허용하고, 그 이외의 낭비적 사용(금융투기, 부동산·유가증권 투기)을 엄격하게 국가가 규제하는 것 역시 일종의 사회화, 즉 자본의 투자에 대한 사회화이다. (케인스 역시 ‘투자의 사회화’에 대하여 이야기했다).

더구나 자본의 사적 소유를 용인하되, ‘노동력의 상품화’(‘일반적 상품 생산’과 ‘자본주의적 상품 생산’을 구별하는 결정적 차이점)의 경제적 조건을 절반 정도 폐기시키는 것 역시 일종의 사회화, 즉 ‘(가변)자본’(노동력 상품)의 사회화이다.

다시 말해서, 노동자들이 자신의 노동력을 시장(자본주의적 시장)에서 상품으로 매각할 수밖에 없도록 강제하는 두 가지 이유 즉 (1) 생산수단 소유로부터의 소외, (2) 생계수단 소유로부터의 소외 문제 중에서 (2)의 문제를 민주적 복지국가가 보편적 복지 정책(주택과 식품, 교육, 의료, 노후 등)으로 공급하여 생계수단을 국가가 보장한다면, 노동력 상품화는 그 이유가 절반으로 줄어든다.

더구나 민주공화국이 완전고용 정책과 적극적 노동시장 정책, 그리고 적극적인 (즉 시장-자본 논리에만 맡기는 것이 아닌) 일자리 창출 정책(신산업/신기술 육성 정책과 결합된)을 사용하여 일할 의사가 있는 모든 노동자들에게 양질의 일자리를 보장한다면, 위에서 말한 (1) 생산수단 소유로부터의 소외 문제 역시 그 이유가 대폭 줄어들게 된다.

이러한 방식으로 민주공화국은, 만약 그것이 적극적인 복지국가 전략과 완전고용 전략, 일자리 창출 전략(이를 위한 산업/기술 육성 전략)을 동시에, 그리고 다방면으로 사용하는 시장 개입주의(interventionism) 국가 전략을 채택한다면, 즉 “시장이 알아서 하도록 놔두는 것이 최선”(‘합리적 시장’)이라는 자유주의(liberalism)과는 상반되는 정책 노선을 채택한다면, 자본주의적 착취가 발생하는 여러 가지 근원들을 하나하나 폐기해 나갈 수 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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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와 사민주의] 개발도상국적 진보, 이제 버려야 (1) 2015/06/15 PM 02:45
한국 자본주의의에 대해 비정상성, 봉건성, 전근대성으로 접근하고 그 정상화를 지향하는 것이 진보의 이념적 지향이어서는 안되며, 자본주의 자체가 갖고 있는 계급모순과 갈등, 빈부격차 등을 그대로 직시하고 비판하고 대안을 만들어가는 것이 필요하다는 정승일 사민저널 편집위원장의 글을 필자의 동의를 얻어 3차례에 나눠 게재한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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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 더 이상 개발도상국도, 약소국도 아니다

한국의 1인당 국민소득은 2014년 말에 2만7천 달러를 넘었으며 내년에는 3만 달러에 달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정부와 언론은 우리나라가 곧 ‘3050’ 그룹, 즉 1인당 국민소득 3만 달러이면서 동시에 인구 규모가 5천만 명이 넘는 나라들에 속할 것이라고 전망하고 있다.

세계적으로 인구가 5천만 명 넘으면서 동시에 1인당 국민소득이 3만 달러를 넘는 나라는 미국과 일본, 독일, 프랑스, 영국, 이탈리아 등 6개국뿐인데 여기에 한국이 합류할 경우 7개국으로 늘어난다.

한국의 종합적인 과학기술 능력은 세계 7위권이다. 특히 국내총생산(GDP) 대비 과학기술(R&D) 투자액의 비율은 4.36%(2012년)로 세계 1위이며 세계 2위인 스웨덴의 4%보다 높다. 기업 부문의 매출액 대비 연구개발(R&D) 투자비 비율에서도 한국은 3.4%로 세계 1위이다. 예컨대 삼성전자와 현대/기아차가 생산하는 제품들의 기술 및 품질 수준은 이미 글로벌 선진업체의 그것과 비등해졌거나 어떤 영역에서는 더 앞서고 있다.

한국의 군사력은 세계 9위권이다. 세계 106개국의 무기와 병력, 국방비 등을 평가하는 웹사이트인 글로벌 파이어 파워(Global Fire Power)는 세계 군사력 순위에서 한국을 세계 9위로 평가했다.(http://www.globalfirepower.com/countries-listing.asp)

중국 사회과학원은 2006년에 이어 2012년에도 한국의 종합 국력을 세계 9위로 평가했다. 또한 그 동안 ‘선진화’ 담론을 이끌어온 한국의 한반도선진화재단 역시 올해 초 한국의 종합 국력을 세계 9위로 평가했다. 즉 한국은 미국과 중국, 일본, 인도, 독일, 영국, 프랑스, 러시아에 이어 세계 9위의 강국이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서유럽의 이탈리아, 북미의 캐나다의 국력이 한국의 그것보다 낮게 평가 받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탈리아와 캐나다는 그간 서방 7개국(G7)의 일원으로서 국제 사회에서 강대국 행세를 해왔다.

전세계적 차원에서 볼 때, 한반도 남쪽에 위치한 한국은 이제 G10이라 불러도 될 만한 강국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한국을 약소국으로, 개발도상국으로 여기는 사고 관습을 계속 유지하고 있다. 여기에는 먼저, 한반도를 둘러싼 주변의 4대 강국인 미국과 일본, 중국과 러시아가 세계 최강국에 속한다는 점이 크게 작용하고 있다. 미국과 일본, 중국과 러시아에 비할 때 한국은 경제력 또는 군사력 등에서 열위이다.


하지만 한국이 동북아시아의 끝이 아닌 서유럽의 한가운데 속한다고 상상해보자.

서유럽에 인구가 5천만 명이 넘는 나라는 영국(6천만)과 프랑스(6천만), 독일(8천만), 이탈리아(6천만) 뿐이다. 스페인(3천만), 네덜란드(2천만), 스웨덴(1천만) 등이 있지만 모두 인구수에서 한국보다 적다. 물론 한국의 1인당 국민소득은 서유럽 평균(4만 달러)보다 아직 적다.

하지만 인구수와 그에 따른 경제력의 전체적 규모는 매우 중요하다. 이것은 마치 중국의 1인당 국민소득이 아직 7600 달러(2014년)에 불과한데도 불구하고 미국에 이어 세계 2위의 강대국 취급을 받는 것과 비슷하다. 만약 인구 규모와 함께 전체적 경제력과 과학기술능력, 군사력 등을 감안할 때, 한국은 서유럽에서 이탈리아를 제치고 독일과 프랑스, 영국에 이은 4대 강국으로 떠오르게 된다.

개발도상국적 진보사상, ‘민족 민주주의+자유주의’를 이제는 버리자

이제 한국은 세계 7대 자본주의 강국이다. 그리고 우리나라의 진보는 이러한 명명백백한 사실에 상응하여 자신의 사고방식을 새롭게 일신해야 한다.

무엇보다 먼저, 한국을 전근대적 사회 또는 (신)식민지 반(半)봉건 사회로 보는 관점을 버려야 한다. 한국은 근대화와 공업화, 즉 자본주의적 근대화와 공업화를 성공적으로 수행한 나라에 속한다. 그것은 매판적 또는 종속적(예속적) 산업화가 아니라 자주적이고 자립적인 산업화였고, 그 결과 자립적인 한국 자본주의가 세계시장에 등장하였다.

오늘날 세계인들은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민족 자본’(national capital)으로서 삼성과 현대, LG와 SK 등 재벌계 대기업을 꼽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한국 경제에 있어 민족주의(nationalism)의 과제는 자본주의자들(capitalists)에 의해서 성공적으로 수행되었다. 자본주의적 민족주의(capitalistic nationalism)가 성공적으로 자신의 임무를 완수한 것이다.

세계 시장에서 ‘자본주의적 민족’으로서의 한국인을 대표하는 전형적인 모습이 문화적으로는 한류(韓流) 열풍이다. 문화적 현상으로서의 한류 자체가 상업적(자본주의적) 기획사들에 의해 주도되었으며 한류의 내용 역시 매우 현대적=자본주의적=물질적으로 바뀐 한국적=민족적 문화이다.

그런데, 우리나라보다 훨씬 근대화 (즉 자본주의적 산업화, 특히 자립적 산업화)가 덜 된 태국 또는 필립핀에 가서, 한류 드라마에 등장하는 현대적 한국인의 삶(주로 한국 부유층의 삶에 관한 것인데)을 동경하는 그곳 사람들에게 “한국은 전근대 사회이다. 한국을 지배하는 하는 삼성그룹 역시 전근대적, 봉건적 기업이다. 게다가 삼성과 현대그룹은 ‘신식민지 매판’ 자본(즉 미국 또는 일본 자본의 앞잡이)이다”라고 말한다고 상상해보라.

한류 드라마에 등장하는 한국이 ‘전근대 국가’라면, 태국과 필립핀은 미개 국가라도 된단 말인가? 그런 말을 듣는 태국과 필립핀 사람들은 아마도 모멸감을 느끼거나, 아니면 그렇게 말하는 한국인을 자기 나라의 ‘치부’에 지나치게 몰두하는 정신 나간 사람으로 치부할 것이다.

빈부격차와 계급갈등 심화,
아직 덜 근대화되서, 아직 자본주의가 덜 성숙되었기 때문?

모든 통계는 1990년대 초반부터 지금에 이르는 25년간 우리나라에서 부자와 빈자간의 격차가 다시 벌어지기 시작했고 특히 1998년 이후부터는 그것이 더욱 심화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왜 그런 것일까?

자유주의자들(개혁적, 진보적)은 빈부격차 심화의 원인이 여전히 덜 완성된 근대화, 즉 덜 완성된 자유주의 개혁 때문이라고 말한다.

즉 여전히 한국경제에는 과거 박정희-전두환-노태우 군사정권의 중상주의(mercantilism)의 유산인 재벌그룹 체제와 관료주의(모피아)의 지배력이 유지되고 있으며 그로 인해 빈부격차와 갑을 관계 같은 온갖 경제사회적 대립과 모순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재벌(그룹) 개혁과 모피아 타파를 중심으로 하는 자유주의적 개혁을 수행하는 것이 한국 경제의 현재 발전 단계 (즉 ‘전근대적’ 단계)에 상응하는 진보적 과제이다.

정치적으로는 민족 민주주의, 경제적으로는 자유주의(고전적-개혁적 자유주의 또는 진보적-평등적 자유주의) 입장에 서있는 이들 논자들은 한국 경제와 한국 사회를 여전히 근대화-합리화-시장화가 덜 된 사회로, 한마디로 말해 자본주의화가 덜 된 사회로 보며, 따라서 진보 진영의 과제는 ‘합리적 시장’(즉 시장 자유주의)의 원리를 더욱 강화하는 개혁, 즉 자본주의를 더욱 자본주의답게 만드는 개혁이어야 한다고 말한다. 깨끗하고 투명한 자본주의, 착한 자유주의적 자본주의가 이들이 꿈꾸는 이상적 진보이다.

자본주의적 착취와 특권에 대한 비판이 필요하다

하지만 한국 사회의 기본적 갈등 구조(기본 모순)를 ‘천박한 자본주의’(재벌+모피아) vs ‘건전-깨끗-투명-착한 자본주의’ 사이의 대립으로 사고하는 자유주의적 진보의 구상과 기획은 무엇을 낳았던가? 그들의 구상과 기획은 실제로 지난 김대중-노무현 정부의 10년 치하에서 모두 다 실시되었다.

김대중-노무현 정부 하에서 진행된 ‘시장 개혁’(즉 건전하고 깨끗하며 투명한 시장 자본주의화)의 결과로서 가난한 이들은 더욱 가난해지고 부자들은 더욱 부유해졌다. ‘착한 자본주의’라는 미명 하에 자본주의다운 자본주의, 즉 노골적인 이윤 추구와 금융투기, 저임금 비정규직 고용과 청장년 실직자들의 증가, 빈곤층의 증가와 같은 전형적인 ‘시장 자본주의’적 현상들이 사방에 나타났다.

자본주의가 자본주의답게 될수록 인간과 자연을 더욱 착취한다는 것, 그리하여 빈부격차와 환경파괴가 심화된다는 것은 언제나 올바른 진리이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목격되는 빈부격차 심화의 배경에는 인간의 인간에 대한 착취의 심화가 있다. 그리고 그것은 명백하게 자본주의적 착취이다. 자본주의 그 자체(그것이 비록 한국적-민족적 자본주의라 할지라도)를, 그것의 본질인 인간과 자연에 대한 착취를 비판하는 관점에 서지 않는 이상, 더 이상 이 나라 역사의 진보를 이루어낼 수 없다.

피케티의 <21세기 자본>이 말해주는 것 ? ‘선진화’ 담론은 끝났다

피케티가 쓴 <21세기의 자본>이 다루는 대상은 미국과 독일, 프랑스와 스웨덴 같은 선진국들이다. 그런데 그는 그 책에서 20세기 후반부터 선진국들에서 빈부격차가 다시 심화되고 있다고 지적한다. 아프리카와 남미의 가난한 개발도상국 이야기가 아니다.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선진국들에서 빈부격차가 걷잡을 수 없이 확대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우리보다 훨씬 투명하고 건전하고 합리적이며 부유한 자본주의의 대명사인 서구 자본주의 나라들에서 빈부격차가 심화되고 있다는 것은, 더 이상 ‘자유주의적 선진화’ 또는 ‘정상 국가화’ 담론이 이 나라 진보의 담론으로서 유효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즉 한국 사회에서 발생하는 모든 폐해와 대립의 원천을 한국 자본주의의 불투명성과 비합리성, 불건전성에 두면서 그러한 비정상성(abnormality)을 시정하는 ‘정상 국가화’ 또는 ‘정상 자본주의화’를 통해 한국 사회와 한국 경제를 진보적 방향으로 개혁할 수 있다고 믿는 자유주의적(liberal) 담론이 이제는 시대착오적으로 들린다는 점이다.

문제는 우리나라가 아직까지 개발도상국이기 때문에 (즉 아직까지 재벌과 모피아 같은 ‘전근대적’(?) 중상주의 체제가 온존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나라가 선진국으로 진입하기 때문에 발생한다. 즉 선진국과 마찬가지로 우리나라에서도 역시 (신)자유주의의 원리, 즉 시장 자본주의의 원리가 모든 삶의 영역에서 관철되고 있으며, 그 결과의 하나가 바로 빈부격차 심화이다.

한국은 G10에 속하는 강국이며, 선진국 초입에 도달하였다. 그런데 바로 그것과 함께 빈부격차와 계급갈등이 심화되고 있다. ‘선진 자본주의화’와 함께 빈부격차가, 착취가 심화되고 있다. 그렇다면, 문제의 해결 방안은 자본주의 그 자체를 비판하는 것이다.

전근대적 특권이냐 현대적=자본주의적 특권이냐?

우리가 매일 매일 보는 TV 드라마와 사건·사고 뉴스에서 목격하는 온갖 가족간 불화와 사회적 출동은 어느 라인(line)을 따라 발생하고 있는? 다시 말해서, 한국 사회를 앞으로 크게 뒤흔들 대지진은 앞으로 어떤 지진 선(폴트라인: fault lines)을 따라 진행될 것인가?

우리나라 진보 진영 내에 깊숙히 침투한 진보적 자유주의의 사고방식에 따르면 그것은 ‘전근대적’ 특권 세력(즉 재벌과 모피아, 그리고 토건족)과 근대화 세력(중소자본, 영세기업주, 서민) 간에 벌어진다고 말한다. 따라서 그들이 제시하는 특권층 해소의 해법은 자유주의적 내용의 개혁 즉 ‘시장 개혁’(market reform)이다. 즉 시장 원리(market principles)를 더욱 강화하는 ‘시장 자본주의화’가 그들이 제시하는 ‘진보적’(?) 해법이다. 전형적인 자유주의(liberalism)의 세계관이다.


하지만 <왔다 장보리>와 <출생의 비밀>, <밀회> 같은 TV 드라마에 묘사되는 한국 사회 특권층이 과연 ‘전근대적 재벌 오너 패밀리들’과 ‘전근대적 국가관료들’이란 말인가? 전혀 그렇지 않다.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벌어지는 가족적, 사회적 불화와 대립의 전선은 국민의 0.001%도 되지 않는, 한줌도 안되는 숫자의 전근대적 재벌과 모피아 특권 세력과 나머지 사회 계급·계층 전체 사이에서 벌어지지 않는다.

경제적 사회적 특권 세력은 곳곳에 존재한다. 성공한 중소·중견기업가와 벤처기업가들, 성공한 부동산·주식 재테크 투자자들, 그리고 교수와 언론인, 연예인으로서 성공한 이들 역시 스스로를 특별한 신분으로, 부유한 신분으로 의식하고 행동한다.

좋은 대학 나와 좋은 직장에서 승진한 386 세대 역시 일종의 특권적 신분으로 세상 사람들은 바라본다. 좋은 대학과 좋은 직장, 또는 좋은 소득을 가지고 그 재산이 10억, 20억이 넘는 10% 또는 20%의 사람들과 그렇지 못한 80% 또는 90%간의 사람들 간에는 점점 더 넘지 못할 벽이 세워지고 있다.

양자 간에는 더 이상 신분 이동(신분 상승 또는 신분 하락)이 일어나지 않는다. ‘출생의 비밀’ 말고는 달리 신분 상승이 불가능하다. 이것이 현재 TV 드라마에서 묘사되고 매일 매일의 뉴스에서 보도되는 온갖 불화와 충돌, 범죄의 모습이다. 이것이 우리 사회에 임박한 대지진의 지진선(fault line)이다 .

그 대립 전선은 전근대 대 근대의 대립이 아니다. 그것은 매우 자본주의적인 전선이며, 더구나 시장 자본주의(market capitalism)가 매일 매 순간마다 더욱 더 그 간격을 넓히고 있는 대립 선이다. 이제 문제시되는 것은 전근대적 특권이 아니라 매우 자본주의적인 특권이다.

노동과 자본 간의 ‘특수 대립’을 넘어, 가진 자들과 못가진 자들 간의 ‘일반 대립’

자본주의적 특권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대치 전선을 많은 이들은 자본 대 노동 간의 대립 전선, 자본가 계급과 노동자 계급간의 대립 전선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렇게 이야기하는 것은 문제를 협소하게 만든다.

자본가계급이란 누구인가? 노동자계급이란 누구인가? 과연 펀드 매니저와 재테크 개미투자자들(여기에는 민주노총 조합원들도 포함되는데)을 자본가계급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과연 연봉 7천만원~1억의 현장 노동자 및 은행 직원과 연봉 1천5백~3천만 원의 비정규직 또는 영세기업 노동자들이 서로 하나의 연대의식을 가지면서 ‘우리는 하나의 노동계급’이라고 느끼고 있을까?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는 사회적 충돌과 갈등의 선은 ‘노동자계급과 자본가계급’이라는 협소한 경제적 개념으로 환원할 수 없다. 훨씬 더 넓은 개념, 넓은 프레임으로 이해해야 한다.

주로 직장 내에서의 기업주/경영자 대 직원/노동자 간의 대립으로 파악되는 자본-노동간 계급 대립 프레임은 취업자들의 고용관계를 전제로 한다. 하지만 오늘날 21세기 자본주의에서는 미취업 청장년과 노인들, 여성들이 넘쳐난다. 하도급 업체로 위장된 형태의 비정규직 노동도 넘쳐난다. 정리해고와 명퇴 등으로 인하여 노동자 계급에서 이탈한, 하지만 노동자계급보다도 가난한 영세자영업자들도 넘쳐난다. 반면에 부동산·주식 재테크에 성공한 월급쟁이들(노동자계급)도 많으며 아예 직장(즉 노동자계급 지위)을 내던지고 부동산·주식 재테크에 전업적으로 나서는 자들도 많다.

오늘날 우리나라에서 ? 그리고 선진국들에서도 ? 벌어지는 계급적 갈등과 대립을 파악하는 보다 넓은 개념과 프레임이 있다. 바로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 간의 대립 전선이라는 프랑스어이다. 프랑스 사람인 토마 피케티가 자신의 <21세기 자본>에서 ‘자본’을 마르크스가 말한 자본이 아니라 일종의 ‘자산’ 개념으로서 이해한 것은 ‘자본가계급’이 아니라 ‘부르주아 계급’이 오늘날의 21세기 자본주의를 이끌고 있다고 파악했기 때문이다.

산업자본주의의 시대에는 노동자계급과 자본가계급 간의 대립이라는 말이 직관적으로 이해된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나라를 포함한 금융자본주의 시대, 재테크 자본주의의 시대에 일어나는 계급간 대립 전선은 부르주아(유산자)와 프롤레타리아(무산자)간에 형성된다.

미국과 유럽, 일본 등 선진국에서도 프레카리아트(불안정 프롤레타리아)라는 신조어가 유행하고 있다. 그리고 요즘에는 프레카리아트라는 개념이 학문적으로도 그 타당성을 인정받고 있다. 이것은 노동계급과 노자 대립이라는 용어와 프레임보다는 프롤레타리아와 부르주아간의 대립이 오늘날의 금융자본주의, 신자유주의를 설명하는 더욱 포괄적이고 보편적인 계급 개념임을 보여준다.

금융자본주의, 재테크 자본주의 시대에는 자본(capital)이 아니라 자산(property)의 소유 유무가 인간적, 사회적 차별의 근원이 된다. 그리고 자산에는 부동산과 유가증권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의 힘에 의해 만들어지는 학력과 학벌 역시 상속되고 증여된다. 공교육을 무너뜨리고 자신들만의 사립학교와 자사고 특권을 만든 부르주아들은 자신들의 부와 재산을 학력과 학벌을 통해 상속한다.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에 해당되는 우리말이 있다. 바로 ‘가진 자들’(또는 ‘있는 놈들’)과 ‘못 가진 자들’(또는 ‘없는 놈들’)이다. 그리고 (재벌과 모피아만 아니라) 모든 가진 자들은 자신의 부와 소득, 학력을 상속하기 위해, 즉 자신의 계급적 특권을 대대손손 물려주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다. 이것이 『왔다 장보리』를 비롯한 모든 인기 TV 드라마가 다루고 있는 사회적, 가정적 대립과 갈등의 소재들이다.

유산자는 자신의 유산자 지위를 유지하고자 분투하면서 행여 자신의 자식들이 무산자 지위로 추락할까 두려워한다. 반면에 다른 방법으로는 신분 상승이 힘든 무산자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출생의 비밀 위조를 포함하여) 유산자 지위로 상승하기 위하여 고군분투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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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린세스 버블검    친구신청

말이 쓸데없이 긴데 결국
1) 자본이 제계에서 오남악용 되는것을 법이 통제하지 못함(갑질, 사기 등)
2) 자본이 정계에서 오남악용 되는것을 국가가 통제하지 못함(로비, 비자금 등)
3) 자본이 세계에서 오남악용 되는것을 세계가 통제하지 못함(기축통화국의 금리 장난, 산유국의 유가 장난 등)
이 3가지가 현대의 자본주의 핵심 문제죠.
자꾸 바보같은 양반들이 현대의 계급 오남악용을 민주주의의 훼손이라고 얘기하는데 자본주의를 뜯어고쳐야 하는거지 민주주의가 잘못된게 아닙니다.
[경제와 사민주의] 영세자영업자의 몰락, 그 이유는? (8) 2015/06/15 PM 02:18

또한 주주자본주의와 결합된 잘못된 재벌 규제는 영세자영업자의 처지를 악화시킨다. 우리나라 경제활동 인구의 33% 즉 1/3 가량이 자영업에 종사하고 있다. 즉 돈을 버는 이들의 1/3 가량이 식당, 술집, 호프집, 이발소/미용실, 카페, 문방구, 꽃집 등의 주인 또는 종업원이다. 자영업자들의 고달픈 살림살이는 곧 5천만 국민의 1/3이 살아가는 고달픈 삶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재벌 빵집 논란과 함께 여와 야, 진보와 보수를 막론하고 모두가 빈곤한 영세자영업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통닭과 커피를 아무리 팔아도 도무지 수익을 낼 수 없는 점포들, 달콤한 말로 편의점 창업을 꼬여놓고는 패망하면 막대한 돈을 약탈하는 프랜차이즈 지점들, 음식이 날개 돋친 듯 팔려도 망할 수밖에 없는 높은 임대료 문제 등이 그들의 이야기이다.

또한 가게를 운영하기 위해 빌린 은행대출, 카드대출의 연체와 신용불량자로의 전락, 채권추심 또한 그들의 이야기이다. 전체 자영업 창업자의 80%가 실패하여 신용불량자로 전락하고 그 중 상당수가 자살로 인생을 마감한다.

자영업자들의 삶은 왜 이렇게 힘든 것일까? 가장 큰 이유는 너무 많은 사람들이 자영업에 뛰어들기 때문이다. 그러면 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자영업에 뛰어들까?

그 이유는 우리 모두가 알고 있다. 1997년의 외환위기 이후 허리 역할을 하는 중견 대기업들이 재벌개혁 과정에서 대거 퇴출되었고, 기업의 명예퇴직과 희망퇴직, 정리해고와 인력 절감도 상시화되었다. 어느 누구도 안정적인 일자리를 보장받지 못하는 시대를 살고 있다.

그 결과 비정규직과 함께 생계형 자영업자가 급증하고 있다. 망한 자영업자들이 속출하는데도 여전히 무수한 사람들이 신규로 자영업에 뛰어든다. 뒤로 물러날 곳이 없는데도 앞에서 밀려드는 군중의 미는 힘을 이기지 못하여 절벽 가장자리에 선 사람들은 결국 절벽 아래로 떨어진다. 참혹한 상황이다.

공정시장 우선론자들(즉 경제민주화론자들)은 재벌-대기업 규제가 영세자영업 보호를 위해서도 가장 시급하고 중요하다고 말한다. 맞는 말이다. 재벌 빵집 논란과 대형마트 골목상권 침식 논란에서 볼 수 있듯이, 빵집과 통닭집, 피자집과 같은 골목 상권에 대자본이 마구잡이로 진입하는 것은 법률로 막아 규제해야 한다. 신용카드 대기업의 수수료 횡포도 규제해야 한다.

그렇지만 그것만으로는 영세자영업종에서의 무시무시한 과당 경쟁을 막을 수 없다. 불공정 경쟁(따라서 공정한 시장질서의 확립)도 중요하지만, 더 심각한 문제는 과당 경쟁이다.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까?



1998년 이후 만성화 되어 지금도 상시적으로 계속되는 대기업과 은행, 금융권 등에서의 대규모 명예퇴직과 정리해고는 불가항력적인 운명적 힘에 발생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명백하게 1998년 이후 대기업과 은행, 금융회사들의 기업지배구조 및 경영원리가 미국 월스트리트 형의 단기수익성 제일주의, 현금흐름(cash flow) 및 자기자본 수익률(ROE) 제일주의로 재편되면서 일어난 일이다.

1년 안에 매출 및 수익 증대에 도움이 되지 않는 사업부와 종업원을 바로 퇴출, 퇴직시키는 일은 97년 이전에는 생소한 일이었는데, 미국식 회계기준과 수익기준이 모든 대기업들의 경영에 전면화된 김대중·노무현 정부 시절에 그것은 흔해빠진 일이 되었다. 이 모든 일이 ‘경제민주화’라는 아름다운 이름하에 일어났다.

경제민주화는 새롭게 거듭나야 한다

경제민주주의는 반드시 필요하다. 민주주의 즉 민(people)이 주인이 되는 통치 원리는 정치 및 국가 영역만이 아니라 경제 영역에서도 관철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가 살고 있는 경제체제는 자본주의 시장 경제이고, 민(民)이 아닌 자본과 시장이 주인인 체제이다. 과연 자본과 시장이 지배하는 이 체제를 5대 재벌 또는 30대 재벌을 규제하여 그 계열사 숫자를 줄이고, 재벌 총수들의 범법 행위를 엄단한다고 해서 근본적으로 바꿀 수 있을까? 그렇게 하면 민이 지배하는 새로운 경제 체제로 바꿀 수 있을까?

지난 민주 정부의 경험을 보면 별로 성공적이지 못했다. 오히려 거꾸로, 주식투자 펀드들, 재테크 세력, 금융자산가 등 국내외 금융자본의 힘은 엄청나게 커졌는데 반하여 서민들과 노동자들, 빈민들의 처지는 크게 악화되었다. 경제 민주화가 아니라 경제 독재화의 길을 간 것이다.

앞에서 말한 50대의 변절(?)로 되돌아 가보자. 김대중·노무현 정부 10년간 그들의 살림살이는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유린되었다. 경제민주화의 이면은 대규모의 기업구조조정이었고, 재벌개혁 및 재벌해체와 함께 대규모의 계열분리, 해외매각, 인수합병, 사업재편, 부채축소 등의 사태가 일어났다.

그 과정에서 대규모 인력 구조조정이 일어났고 그 와중에서 명퇴, 정리해고 당한 당시 40대, 50대 사람들에게 우리 사회는 ‘사오정’이라는 이름도 붙여줬다. 당시 30대였던 386 세대는 경제 민주화와 재벌 개혁에 열광했다. 기업의 인력 및 사업 구조조정과 함께 진행된 인사제도 재편(팀제 도입)과 임금 제도 재편(성과주의 및 미국식 연봉제 도입) 등에 앞장서면서 미국식 기업 문화를 도입하는데 열심이었던 것도 386 세대였다.

그 ‘경제 민주화’ 과정에서 당시 40대, 50대였던 인물들은 ‘사오정’으로 낙인찍혀 쓸쓸히 퇴출당했다. 그리고 그로부터 10년이 흐른 이번 선거에서 이제 50~60대에 접어든 된 왕년의 ‘사오정’이 자신들의 살림살이를 망가뜨린 민주주의 및 경제민주화에 정치적으로 복수한다.

50-60대 인구의 비중 확대를 고려할 때, 앞으로 50-60대의 정치적 지지가 없다면 민주주의가 전진하기 힘들다. 그런데 그들의 바람은 소박하다. 20-30대에 비해 더 불안하고 더 빈곤한 자신들의 살림살이도 풍요롭고 여유로우며 안정되었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이 바램을 학자들은 ‘실질적 자유’(형식적·절차적 자유가 아닌)라고 말한다. 그에 반해 지금까지 진보 정치권이 주장해온 민주주의와 경제민주화는 여전히 구자유주의의 패러다임에 머무르고 있다. 즉 실질적 자유가 아닌 형식적·절차적 자유에 불과하다.

구자유주의로는 5년 뒤에도 희망이 없다. 지금부터라도 구자유주의를 넘어서는 새로운 민주주의 즉 실질적 민주주의와 실질적 자유, 그것을 위한 새로운 경제민주주의를 이야기하여야 한다. 20-30대만이 아니라 40대와 50-60대까지 모든 세대에서 지지받는 ‘밥 먹여주는 민주주의’를 이야기하여야 한다. 그리고 모든 세대, 모든 국민들이 골고루 풍요롭고 여유로울 수 있는 살림살이 경제에 대한 해답은 구자유주의 또는 개혁적(진보적) 자유주의가 아니라 사회민주주의, 특히 북유럽식 사회민주주의에 있다고 나는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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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하준식 해법을 제시하면서 북유럽식 노사정 대타협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네여...

재벌의 기득권을 일정부분 인정하고 반대로 고용안정 노조설립과 활동 보장 등과 같은

양보와 타협으로 상생을 추구하자는...식의... 그리고 복지국가의 길...

솔직히 김대중 노무현 정부의 경제 정책은 97년 아엠에푸 후의 체제에서

신자유주의에 물들어서 실망도 많이 했었는데...

미국과의 FTA를 추진하면서 좌파 신자유주의라는 말을 되뇌이던 고 노무현 전 대톨령을

생각하면... 당시엔 좀 어이없었던 기억이 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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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허의 레이나♥    친구신청

솔직히 힘들어보이는 이야기ㅠ

레밍즈    친구신청

다같이 먹고 살자? 라는 논리를 안 받아들이는 게 20대일까 아니면 50~60대일까.
50~60대를 피해자처럼 적어놨지만, 우리나라를 이렇게 만든 게 바로 그들임.
그러면서 자기도 피해자라며 징징대는 걸 좋게봐줄 수가 없네요.
그리고 똥 치우느라 고생했던 김대중 노무현 정부 때 가장 크게 배신당했다고 믿는 거야 말로 자가당착이죠. 대체 누가 싸질러 놓은 거였냐 그 똥은.

레밍즈    친구신청

그리고 배신당했다며, 경제를 살리자고 이명박 뽑음 ㅋ

정심일도    친구신청

왘 시밬ㅋㅋㅋㅋ

에키드나    친구신청

386인 아는 형님분은 술마시고 진짜, 열변을 토하시면서 우리가 너네한테 안좋은거만 물려준다고 눈물흘리시더군요.

毛부리    친구신청

아직 시도도 안해본 경제민주화를 이야기하면서

민주정부10년을 예로든 말도 안되는 글이네요..

민주정부 10년은 imf체제 => 신자유주의로 이어지는 흐름위에 있었고

경제민주화 이야기가 나온건 이명박 말년임...

즉 경제민주화에 거론된 요소들은 아직 이나라에서 한번도 시도도 안해봤다는소리..

毛부리    친구신청

즉... 경제민주화에 나온 요소들을 가지고 .. 그걸로 되겠냐? 하는건데
그정도도 안하면서 저 멀리 뜬구름잡는 북유럽이야기는... 걸음마도 못하는 애보고 달리라는 소리죠..;;
현실에서 쥘수 있는것부터 하나씩 해나가야 ;;
그러기엔 엠비오년그네오년... 합쳐서 십팔년... 진짜 앞이 너무 안보인다.

미디어블    친구신청

솔직히 집값 때문에 야당이 이기긴 힘들듯
[경제와 사민주의] '프리티 우먼'과 주주자본주의 (0) 2015/06/15 PM 02:10

주주자본주의적 재벌개혁론에 대한 비판


줄리아 로버트가 인기를 얻은 ‘프리티 우먼’(pretty woman)이라는 영화에는 1980년대 후반의 미국에서 선량한 기업을 조각조각 해체하여 지역공동체의 삶을 파괴하는 나쁜 자본가가 등장한다.

기업사냥꾼인 리차드 기어가 그 인물로 나오는데, 실제 모델은 칼 아이칸이라는 유명한 기업사냥꾼이다. 지금도 미국에는 칼 아이칸처럼 기업사냥 즉 적대적 M&A 위협을 전문적으로 일삼으며 떼돈을 버는 사모펀드 운영자가 많다.

2012년 미국 대통령선거에서 공화당 후보였던 롬니 역시 비슷한 사모펀드 운영으로 억만장자가 된 자이며, 그는 월스트리트의 이익을 대변하면서 ‘월가 점령’ 운동을 조롱하곤 했다.

칼 아이칸은 2006년 초 우리나라의 KT&G(과거 담배인삼공사)에 대해서도 적대적 M&A 위협을 가했다. 우리 사회에는 재벌기업과 공기업의 ‘비효율적인 기업지배구조’ 때문에 1997년 외환금융위기가 발생했다는 주류경제학식 경제민주화론이 지배하면서 기업지배구조 개혁이 시행되었다.



그 과정에서 이상적 모델로 간주된 것은 지배주주, 대주주가 없도록 주식 소유가 완전히 분산되고 집중투표제와 사외이사제 등을 통해 소수주주의 권리 및 이익 관철이 용이한 주주자본주의적 기업지배구조였다. 과거 공기업이던 담배인삼공사(KT&G)와 한국통신(KT), 그리고 포스코 등이 민영화 과정에서 그런 식의 기업지배구조로 바뀌었다.

소액주주의 이익이 완벽하게 관철되는 민영화가 김대중, 노무현 정부 하에서 완료된 2002년과 2003년에 KT와 KT&G는 경제민주화 시민단체들로부터 ‘최우수 기업지배구조상’을 연이어 받았다.

시민단체를 대표해 상을 준 강철규 교수는 노무현 정부 출범 후 공정거래위원장이 되어 재벌개혁을 이끌었다. (그 후 2012년 4월 총선에 즈음하여 강철규 교수는 이른바 민주당 내 친노 세력의 추대에 의해 공천심사위원장으로 활동했고, 그 총선에서 민주당이 패배한 결정적 원인인 친노 패권주의 공천을 실무 지휘했다).

그는 KT와 KT&G와 같은 민영화 공기업들이야말로 재벌개혁이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모델이라며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그는 아이칸의 적대적 M&A 위협에 대해서도 “적대적 M&A 과정의 공격과 방어 과정에서 투명성이 높아지고 지배구조가 개선될 것”이라며 기업사냥 펀드의 투기적 이익추구를 옹호했다.

경제민주화·재벌개혁의 이론적 토대를 마련해온 여러 학자들 역시 KT와 KT&G야말로 이상적인 기업지배구조 모델이며, 재벌개혁은 궁극적으로 KT와 KT&G 모델을 지향해야 한다고 말하곤 했다. 즉 재벌의 계열사들을 독립기업화하고, 그 독립 대기업들에는 경영권 방어를 위한 최소한의 지배주주도 존재하지 않도록 하며, 그리하여 소수주주와 기업사냥 펀드가 ‘투자자 이익 극대화’를 위해 마음껏 자신들의 권리와 요구를 관철시킬 수 있는 상태를 이들은 이상적인 모델이라고 말해왔다. 이들은 소버린의 SK그룹 공격에 대해서도 소버린의 편을 들었다.

실제 오늘날 KT와 KT&G, 포스코 같은 민영화 대기업들은 ‘주주이익 극대화‘ 경영의 선봉을 달리고 있다. 이들 회사의 이사회 의장은 골드만삭스 출신 등 미국 월스트리트의 이익을 대변하는 인물인 경우가 많으며, 매년 순이익의 절반 가량을 현금 배당과 자사주 매입 등의 형태로 주식투자자들에게 환원하겠다고 공개적으로 표방하고 있다.

무자비한 주식투자자 이익 극대화는 노동권 약화를 초래했다. 예컨대 KT의 주주자본주의적 민영화 과정에서 불과 수년 만에 6만의 정규직 종업원이 3만으로 줄었고 그렇게 대량 해고된 노동자들이 외주노동자와 비정규직으로 전락했다.

KT는 지금도 무자비한 노동권 파괴로 유명하며 더구나 설비투자와 연구개발 등 장기투자에도 인색하다. 왜냐하면 주식투자자 이익 보호에 자칫 소홀하여 주가가 하락할 경우 아이칸 같은 기업사냥 펀드의 경영권 공격을 받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재벌 빵집 논란과 함께 지난 1년간 경제민주화가 민주세력의 최우선 과제로 다시 등장하면서 민주통합당은 재벌개혁과 함께 노동권의 신장과 비정규직 해결을 약속하였다.

그런데 과연 그 약속을 믿을 수 있을까? 문재인, 안철수 캠프가 그간 발표한 재벌개혁안은 과거 김대중·노무현 정부의 출범 시와 거의 똑같다. 즉 펀드 의결권 강화와 집중투표제 강화, 순환 출자 규제, 금산 분리, 지주회사 규제 강화 등을 통한 소수주주권 강화와 적대적 기업사냥 활성화가 그 목표이며 결국은 주주자본주의 활성화를 겨냥하고 있다.

그렇다면 주주자본주의적 재벌개혁론자들이 여전히 꿈꾸는 재벌개혁의 이상향은 삼성과 현대차, 롯데 등의 재벌그룹을 부분 해체(즉 일부 계열사들의 분리·매각) 또는 완전 해체시키고, 그리하여 궁극적으로 삼성전자와 현대차, 롯데 등을 KT와 KT&G와 같이 단기투자자 수익 극대화, 즉 국내외 주식펀드 기업 사냥 펀드들의 낙원으로 만드는 것일 터이다. 그런데 과연 그것이 99% 국민의 인권과 노동권을 위한 민주주의의 길이란 말인가?

재벌 규제 강화로 과연 중소기업을 살릴 수 있을까?

개혁적(진보적) 자유주의를 말하는 민주 인사들은 신자유주의 극복을 위한 대안적 이념으로 구 자유주의를 제시한다. 구 자유주의를 상징하는 공약이 바로 문재인, 안철수 캠프가 가장 우선시한 정책이었던 ‘공정한 시장질서’였다. 그리고 재벌규제를 통해 달성되는 공정한 시장질서는 누구보다도 중소기업을 위해 필요하다고 말해진다.

공정시장 우선론자들은 각종 중소기업 관련 통계들을 제시하면서, 중소기업들이 힘들어하는 이유가 주로 재벌계 대기업들의 하청단가 인하 때문이라는 논리를 전개한다. 그들이 제시하는 통계표와 논리 전개만 들어보면 매우 설득력이 있다.

그렇지만 실제의 경제 현실, 산업 현실로 한번 들어가 보자. 신문 지상에서 흔히 삼성전자나 현대차 같은 재벌계 대기업들이 중국과 인도, 미국, 유럽 등지에 현지 공장을 세워 운영한다는 이야기를 읽는다. 그런데 그 신문 기사 바로 아래에는 삼성전자나 현대차에 납품하는 1차 협력사(1차 하청)들의 대부분이 해외로 동반 진출하고 있다는 기사도 등장한다. 실제로 그렇다.

그렇다면 공정시장 우선론의 주장에 의문을 품어보자. 삼성전자, 현대차와 함께 해외로 동반 진출한 1차 협력사들의 매출과 수익이 과연 하청단가 인하 때문에 늘지 않고 있을까? 하청단가는 어디까지나 단가에 불과하다. 제품 단가가 깎이더라도 총매출 수량(해외공장까지 포함한)이 늘어나게 되면 총매출액과 그 수익이 늘어나는 것이 당연하다.

실제 삼성전자나 LG전자, 현대기아차 등과 함께 해외에 동반 진출한 하청협력사들의 국내외 총매출은 지난 10년간 크게 늘었다. 삼성전자와 현대기아차 등 재벌계 대기업의 국내외 총매출이 지난 10년간 2배~4배로 늘었고, 그만큼 하청 물량 역시 증가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공정시장 우선론자들이 제시하는 통계표에는 하청협력업체들의 해외공장에서 발생한 매출이 전혀 반영되지 않는다. 그것은 당연한데, 회계기준상, 해외 현지 법인은 법률상 독립법인인 까닭에 한국 본사의 매출액으로 계상되지 않기 때문이다.

해외 현지 법인에서 발생한 이익 역시 한국 본사의 영업이익으로는 잡히지 않고 (회계기준상 지분법 평가에 의해) 영업 ‘외’ 이익으로 잡힌다. 그런데 그 통계표들은 오직 중소기업의 ‘영업이익’만을 보여주고 있고, 영업이익의 하락을 근거로 중소기업들이 대기업들로부터 수탈당한다고 말한다.

더 결정적인 오류도 있다. 재벌계 대기업에 납품하는 1차 하청협력업체의 상당수가 이미 법률상 중소기업이 아닌 대기업으로 성장해 있다. 즉 이미 글로벌 중견기업(즉 히든 챔피언)으로 10년 전부터 성장해 있는 협력업체들이 부지기수다. 그런데 그들은 오직 (법률상) 중소기업으로 등록된 기업들의 통계만을 보여주고 있다.

그렇다면 그들이 제시하는 통계에 등장하는 중소기업들은 누구일까? 대부분 재벌계 대기업과 직접 계약한 1차 하청 협력기업이 아니라, 그 1차 협력기업과 계약한 2차 또는 3차 협력업체들일 것이다. 왜냐하면 1차 협력 하청업체들은 그 통계표에서 중소기업이 아닌 대기업(즉 중소기업을 수탈한다고 하는)으로 등장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이들 2차, 3차 하청 회사들에서 발생하는 하청단가 인하 문제를 재벌계 대기업들을 규제하여 (그것이 바로 재벌 규제 강화인데) 팔을 비틀어 해결하겠다? 그것은 초법적 발상일 뿐만 아니라, 별로 큰 효과도 없다. 왜냐하면 그런 식의 재벌 규제 강화를 통한 하청단가 인상의 즉각적 수혜자는 2차, 3차 하청업체와 그 종업원들이 아니라 이미 매출과 수익성이 높은 ? 따라서 종업원 임금 수준도 상대적으로 양호한 ? 1차 하청업체들이기 때문이다. <이어서 계속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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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승일님은 장하준 교수와 함께 여러 경제 사회 정치 대담집을 냈던 분으로 기억하는데여

정치적인 면에서 저와는 성향이 약간 맞지 않지만

경제 사회를 바라보는 시각은 배울점이 많은 거 같네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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