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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수구파의 생얼] 인도 정경유착의 어제와 오늘 (0)
2015/06/11 PM 12:07 |
LINK : //www.redian.org/archive/75766 |
비를라 하우스에서 간디와 함께 산책을 하고 있는 G. D. 비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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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벌과 정치권의 결탁 사례로부터 이야기를 시작해 보자. 식민지 말기부터 독립 직후 시기에 재벌과 정치권의 관계는 노골화되었다. 독립 전에 구성된 국가계획위원회가 독립 후 인도계획경제의 밑그림을 제시하자 대자본가들은 자신들의 독자적인 안을 내놓았다.
이 모임 역시 타타와 비를라가 주도했다. 통칭 ‘봄베이 플랜[Bombay Plan: 혹은 타타 비를라플랜(Tata Birla Plan)]이라 불린 이 안은 사회주의적 요소를 억제하고 자본의 이익을 옹호하는 내용을 담은 것이었다. 그리고 실제 정책에 상당 부분 반영되었다.
G. D. 비를라는 독립 이후부터 1950년대까지 정부의 여러 위원회에 소속되어 정치와 경제 분야 모두에서 활동했고 국민회의 정부는 인도 공산당으로부터 ‘비를라 정부’라 비판받았다.
독립 후 인도 경제는 기간산업을 대부분 국유화했다. 하지만 국영 기업이라고 해도 경영을 담당할 인력은 타타, 비를라 그리고 여타 재벌의 간부들로 상당수 충원되었다.
구체적 사례는 많다.
“존 마타이는 인도 정청 상무국 정보통계국 국장이기도 했는데, 이후에 타타 재벌의 간부가 된 인물이다. 그 후 1946년의 임시 정부에 들어가 단기간에 운수부 장관, 상공부 장관, 재무부 장관을 역임했는데, 네루 총리와는 사이가 나빠 1950년에 정계를 은퇴하고 타타 재벌로 돌아오는 등 정부와 타타 재벌 사이를 왕래했다. 존 마타이 뿐만 아니라, 인도 최대의 인구수를 보유한 우타르 프라데사(Uttar Pradish) 주 최초의 주지사 호미 모디(Sir Homi Mody) 역시 타타 재벌의 간부였다.”
“재벌의 영향력이 약화되어감에 따라 그들은 정부에 헌납하는 액수를 늘려가며 관료 채용 등에서 정치력을 계속 유지하고자 했다…1967년 제4회 총선거에서는 타타 재벌과 비를라 재벌의 헌납금만으로 인도국민회의에 대한 기업 헌납금의 34%를 점했다. 또한 당시 비를라의 입김이 들어간 의원 수는 40명이었다고 하는데, 이는 곧 전체 의원 수 가운데 10%에 가까운 의원들이 비를라 제국의 일원이었음을 의미한다.”
인도 경제 체제를 국가자본주의라고 부르든 네루식으로 “사회주의 유형의 사회”라고 부르든 간에 실제로 인도에서 나타난 현상은 재벌과 국가는 서로의 이익을 충족시켜주는 관계를 맺게 되었다. 문제는 이 결합에서 얻어진 이익이 결코 대다수 국민들에게는 분배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독립 후 인도에서는 몇 번의 정치적 제스처를 제외하고는 불평등을 실질적으로 감소시키려는 노력도 거의 없었고 그마저도 의미 있는 결과를 가져오지 못했다. 부패의 또 다른 중요 원천이 바로 이 분배과정에 있다. 평등한 분배를 실현시키려는 국가적 시스템 자체가 아니라 개인의 이익을 위해 그 시스템을 왜곡시키는 힘을 제어하지 목하는 것이 문제다.
현재 인도의 집권연합인 UPA는 보통 사람을 위한 정책을 내세우며 보조금 지급을 늘리고 있다. 하지만 보조금의 15~30%가 횡령된다는 통계가 있지만 그것을 막을 뾰족한 대안은 내놓지 못하고 있다. 분명한 것은 이 횡령된 돈이 가난한 이들이 아니라 인도의 지배층에게로 흘러 들어간다는 것이다.
재벌들이 정치와 국가 기구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또 다른 방법은 엘리트 관료들을 자신들의 기업에 채용하는 것이다. 인도는 물론이고 모든 자본주의 사회에서 관료, 자본이 같은 인력풀을 돌려가며 활용하는 행태는 점점 더 확산되고 있다. 재벌에 포섭된 관료집단이 주로 하는 역할은 단순한 이권개입은 물론이지만 더 중요하게는 정부정책의 좌경화 방지다.
“정부와 각 자문 기관에는 반드시 재벌 관계자가 있었다. ‘퇴관 관료의 재벌 고위직 임명’, ‘정부 인사에 대한 선거 자금 헌납’, ‘로비 활동’ 등으로 인해 사회주의적 정책은 정부에서 쉽게 배제될 수밖에 없는 환경이었다.” 일본의 인도경제 분석가 스가이 신이치의 말이다. 정경유착은 결국 좌경화 방지를 위한 재벌로서는 당연한 계급투쟁의 방식이다.
계획경제 시기의 이런 여러 커넥션을 통해서 인도 재벌은 현재 어떤 특혜를 누리게 되었을까? 수입대체산업화의 보호 조치 외에도 국가 경제의 핵심 부문을 위탁받고 납품권을 독점해 몸집을 키우고 신자유주의 시대에도 지속될 수 있는 방전의 기초를 마련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인도의 IT산업 발전은 인도 정부가 주도한 원자력 산업에 그 기초가 있다고 한다. 원자력 산업을 관장하는 위원회의 위원장도 재벌 출신이 맡았다. 또 엄청난 세금감면 혜택을 받았다. 설비투자 등의 명목으로 재벌들이 실제로 부담해야 하는 실효세율은 턱없이 낮게 유지되었다. 한국에서도 삼성전자를 비롯한 대기업들이 연구개발, 설비투자 등의 명목으로 법정세율 절반 수준의 법인세만 내는 일과 비슷하다.
또 국가가 재정을 투입해 발전시킨 각종 사회기반 시설인 철도, 도로, 전기 등을 사적으로 사용하는 경우도 허다했다.
재벌의 행태가 문제가 되자 인도 정부는 1960년에 마할라노비스위원회(Mahalanobis Committee: 소득 배분 및 생활수준에 관한 위원회)를 만들어 실태조사에 나섰는데 조사보고서는 “계획 경제가 그 의도와는 반대로 더욱 부의 집중을 가져왔다. 또 사업의 신규 참가와 규모 확대에 대한 인허가 제도는 기업이 더 유리하게 만들었다”라는 결론을 내놓았다.
하지만 정부는 대책을 내놓지 않다가 1969년이 되어서야「독점및무역실행규칙(MRTP법: The Monopolies and Restrictive Trade Practice Act)」을 제정해 1970년부터 시행했다.
하지만 이런 재벌규제는 인디라 간디가 자신의 정치적 곤경을 벗어나기 위해 기만적으로 시행한 좌선회 정책의 일환일 뿐이었고 재벌들의 강력한 저항으로 1973년 이후에는 재벌규제는 다시 무력화되었다. 우리나라에서도 대통령이 바뀔 때마다 재벌 군기잡기에 나섰다가 슬그머니 물러서는 일이 지금도 반복되고 있지 않은가?
인도에서 ‘재벌’, ‘정경유착’ 하면 ‘부패’가 빠질 수는 없다. 정부와 정치 체제는 만족할만한 수준이 아닐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억제와 균형 체계가 마련되어 있다. 부패가 그 틈을 뚫고 들어가 마비시키기는 하지만 그 체계가 작동함으로써 부패와 독직이 발각되는 경우가 만만치 않게 있다.
그 대표적인 경우가 1989년 라지브 간디 정부가 스웨덴의 보포르사(社)로부터 엄청난 규모의 뇌물을 먹은 게 발각되어 정권이 야당에게 넘어간 사건이다. 그렇지만 재벌과 관련하여 벌어지는 부패 사건은 드러나는 법이 없다.
재벌의 부패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 그 하나는 재벌이 부패된 정부와 정치인들과 협잡하는 것이다. 세금 포탈이나 이권 개입, 혹은 라이벌 기업에게 불이익을 주게 하는 것 등 주로 경제적 이익과 관련된 형태다. 이러한 부패는 대부분 언젠가 발각된다.
그렇지만 기업의 회계 부정이나 주작 조작과 같은 경우는 잘 드러나지 않는다. 이러한 부패는 자기 기업에 대한 투자자나 종업원 혹은 소비자의 돈을 갈취하는 것과 동일한 것이다. 그럼에도 그들은 부정부패는 정치권에만 있는 것이고, 기업인은 국민에게 일자리를 창출하면서 근면하고 성실하게 일하는 주체라는 이미지를 널리 심는데 주력한다.
한국의 삼성그룹 이건희가 몇 년 전 정치가 4류라고 폄하한 것의 이면에는 바로 기업은 정치와 같이 더럽지 않고 성실하고 깨끗한 일을 하는 곳이라는 이미지를 심기 위한 것이었다.
1991년 7월 인도정부가 발표한‘신경제 정책’은 본격적인 신자유주의 시대로의 돌입과 함께 재벌집단에게도 새로운 경제 환경의 도래를 의미했다. 산업 인허가 규제의 폐지 및 완화, 독점규제법 완화, 외국인 투자 규제 완화, 관세 인하, 국공영 기업의 민영화, 재정 및 금융 시스템 개혁 등의 조치들은 새로운 재벌이 등장하게 해주었다.
특히 ICT분야와 인프라산업에서 새로운 재벌들의 성장이 두드러진다. 그동안 국가가 관리하던 인프라 산업을 전면적으로 시장에 개방하면서 기존재벌들과 신흥재벌들은 국가의 인프라 산업을 불하받기 위해 혈안이 되었다.
대표적인 사례가 2002년 국영 통신사 VSNL(Videsh Sanchar Nigam Limited)을 국제 전화 회선의 규제 완화 조치에 힘입어 타타 재벌이 인수한 것이다. 릴라이언스 그룹이 타타와 맞먹는 규모로 성장한 계기도 2002년 인도석유화학공사(Indian Petrchemicals Corporation Limited)를 정부로부터 인수받은 것이다.
인도정부와 재벌들은 공공인프라의 민영화를 통해 재정적자를 해소하고 효율성을 높인다는 뻔한 명분을 내세웠다. 이를 위해 한국 경제부총리처럼 수익성이 있는 알짜 공공자산을 매각했다. 이 과정에서 당연히 매각되는 국유자산에 대한 저평가가 이루어졌고 인수에 성공한 재벌들은 순식간에 몸집을 불릴 수 있었다.
해마다 세계 부자 순위에 이름을 올리는 인도의 슈퍼리치들은 대개 제철?에너지?통신?IT?부동산 부문과 관련을 맺고 있다. 현재 인도의 이 산업들은 과당경쟁, 회계부정에 2008년 경제 위기까지 겹쳐 몸살을 앓고 있다..
인도 재벌이 벌이는 행태는 우리나라의 막장드라마를 현실에 그대로 옮겨놓은 것 같다. 비를라 가문의 상속을 둘러싸고 몇 년째 진행되고 있는 유서 위조 논란이나 릴라이언스 그룹 창업자 디루바이의 사망이후 장남 무케시와 차남 아닐 형제간의 진흙탕 싸움(그 결과 릴라이언스 그룹은 둘로 나누어졌다.)은 가십거리 수준이다.
릴라이언스 그룹은 그것 말고도 ‘외화로 발행된 전환사채의 자금 용도에 대한 부정 의혹’, ‘통신 사업자 면허료 회피를 위한 신고 누락 의혹’, ‘주가 조작 의혹’, ‘사업 인허가 입찰 시 수뢰 의혹’, ‘국영 통신사에 대한 부정 회선 접속’ 등 수많은 스캔들의 주인공이다.
인도 재벌의 과도한 소비는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지만 신자유주의 이후 급성장한 재벌들의 사치는 상상을 초월한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개인 저택, 요트, 전용기에 한 번에 수천만 달러를 쓰는 일은 흔하다. 그러면서도 재벌들은 자신들의 소비를 통해 가난한 이들에게 기여하는 일종의 자선행위라고 강변하기도 한다.
재벌 관련 스캔들 가운데에서 압권은 2009년에 일어난 IT소프트웨어 업계 4위 기업이었던 사티암(Satyam)의 회계부정 사건이다. 수년 동안 설립자이자 사주인 라주(Ramalinga Raju)는 10억 달러가 넘는 규모의 회계부정을 저질렀다. 현금자산 536억 루피(12억 달러) 가운데 94% 정도가 허구였고 영업이익률을 8배나 부풀린 해도 있엇다.
인도 재벌의 이런 행태의 배경이 가족 중심의 소유와 경영, 금융이나 회계 관행의 후진성에서 찾는 것이 일반적인 시각이다. 인도 정부나 재계도 사티암 사태 재발 방지를 위해 미국과 손잡고 금융과 회계 선진화에 나서겠다는 대책을 내놓았다.
그러나 사티암의 회계부정이 M&A시장에서 높은 가격에 회사를 팔기 위한 것이었다는 점 그리고 미국에서도 엔론 사태를 비롯해 이런 류의 부정과 사기가 끊이지 않는다는 점을 보면 실질적이고 생산적인 경제활동이 아닌 금융적 투기에 의한 이익만을 추구하는 경제환경과 그것을 규제하지 않는 제도 자체가 문제라고 봐야할 것이다.
인도 재벌이 인도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크다고 해서 고용창출이나 노동자들의 소득증대에 크게 기여하는 것도 아니다. 비정규직 노동자를 양산하고 있고 비정규직에 대한 규제가 강화되자 수련생이라는 편법을 사용해 여전히 고용과 임금의 차별을 받는 노동자를 채용하고 있고 아예 해외로 사업을 이전하기도 한다.
간디 정신의 계승을 내세우며 이미지를 유지하는 타타 그룹은 인도 내에서보다 오히려 영국에서 더 많은 신규 일자리를 만들어 내고 있다.
이제 인도의 실질적 지배자인 재벌이 인도의 국민들의 편인 적은 별로 없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재벌을 해체하고 더 나아가서 자본주의 이전의 촌락공동체로 돌아가자는 주장이 지금 인도에서 영향력 있는 주장도, 해결책도 아닐 것이다.
독립시기의 간디주의 자본가처럼 이런 주장은 비현실적이어서 오히려 현실의 문제를 바로보지 못하게 만들 위험이 높다. 특정 가문의 소수가 독점한 그 많은 부를 인도 국민들이 어떻게 자신들의 것으로 만들 수 있을지 관심가지고 지켜보고 응원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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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수구파의 생얼] 재벌은 인도를 어떻게 지배하게 되었나? (8)
2015/06/11 AM 11:28 |
LINK : //www.redian.org/archive/75448 |
도로 하나를 사이에 둔 격심한 뭄바이의 빈부 격차 모습
그리고 타타그룹의 창업자인 잠셋지 타타(왼쪽)와 간샴 다스 비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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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토픽으로 심심찮게 등장하는 것이 인도의 재벌에 관한 이야기다. 2013년 10월에는 프랑스 칸느에서 수백억 유로의 비용이 들어가는 어느 인도 재벌의 초호화 결혼식이 열린다는 기사가 떴다.
결혼식의 주인공은 인도의 한 재벌 회장의 아들인데 칸느 해변과 주변 지역 궁전에서 동시에 진행되는 세계적으로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초호화 결혼식이다. 그리고 그 결혼 후에 또 다른 인도 재벌의 결혼도 예정되어 있다 한다.
그런데도 인도 사람들은 별 관심을 갖지 않는다. 세계에서 가장 비싼 저택 또한 인도 재벌의 것이다. 뭄바이에 있는 릴라이언스 그룹 회장가의 집인 안틸라는 27층 규모에 가격이 10억 달러로 추산되는 집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분양이나 임대 따위를 하지 않는 순수한 개인용 저택이다.
삼성 이씨들이 들으면 인도에서 태어나지 못한 것을 안타까워할만한 이야기가 있다. 인도의 세법에는 상속세와 증여세라는 항목이 아예 없다. 그래서 거대 재벌들이 식민지 시대부터 3대 혹은 4대씩 거대한 기업군을 통째로 물려주어도 한 푼의 상속세도 내지 않았다.
상상을 초월하는 사치로 해외토픽의 단골 출연자이자 인도 최고 재벌 중 한 명인 릴라이언스 그룹 회장 무케시 암바니가 그의 아내에게 생일 선물로 5천 2백만 달러 짜리 전용비행기를 사주어도 증여세 한 푼 내지 않았고, 호화로운 그의 개인 저택을 자식에게 물려주더라도 상속세 한 푼 내지 않아도 된다.
1955~1985년 기간에는 인도에도 상속세가 있었지만 경제자유화 조치의 하나로 폐지되었고 심각한 재정적자를 메우기 위해 부활시키려는 시도가 있었지만 기득권 세력의 강력한 저항으로 아직도 제자리 걸음이다. 이에 비하면 머리 쥐어짜며 불법, 편법 상속으로 경영권을 대물림하느라 창업자 이병철이 한국 최고의 세법전문가라는 농담이 나돌게 한 삼성은 준법정신 투철하고 검소한 이들이다.
현재 인도의 재벌들은 인도의 정치와 경제를 지배하는 최고의 지배자들이다. 공식 용어로는 ‘코포레이트 그룹’ 혹은 ‘모노폴리 하우스(monopoly house)’ 라고 불리며 ‘친족에 의한 지배’, ‘다각화’, ‘대규모(과점)’ 등을 특징으로 하는 기업들은 인도 주식 시장 ‘센섹스지수(Sensex Index)’를 구성하는 30개 기업 가운데 60%를 차지하고 있다. 나머지는 국영기업이나 신생 IT기업들이다.
1,000억 루피 이상의 자산을 보유한 재벌가의 수는 22개에 이르는데 기업소유 자산이 아니라 ‘개인(가족) 자산’이 그 정도니 그들의 부유함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인도 부유층의 자산 성장률은 세계에서 가장 빠는 속도로 증가하고 있다.
또 세계 최고의 부패국가 인도에서 정경유착이 없으리라 생각하는 이는 없을 것이다. 인도 재벌들의 정치와 국가 운영에 대한 영향력은 식민지 시대에 만들어진 국민회의의 출발시부터 지금까지 어느 정도의 부침은 있었지만 흔들리지 않고 있다. 그것도 단순한 정경유착이 아니라 정경일체화라고 불릴 만한 방식으로 영향력을 행사해 왔다.
인도 재벌은 크게 두 집단으로 나눌 수 있다. 식민지 시대부터 상인가문에서 출발해 대를 이어 내려온 재벌들과 신자유주의 시대 이후에 부상한 신흥 재벌로 크게 나누어 진다. 하지만 규모와 영향력 면에서는 전통 재벌들이 아직 좀 더 우위에 있다고들 한다.
전통재벌의 두 강자인 타타 재벌과 비를라 재벌은 반세기 이상 인도에서 가장 큰 재벌집단이었다. 현재는 타타 재벌과 릴라이언스 재벌이 ‘새로운 2강“을 형성하고 있다. 나머지 중견 재벌들은 부침을 거듭하며 등장했다 사라지고 있다.
타타와 비를라로 대표되는 전통 인도 재벌의 기원은 봄베이(지금의 뭄바이)와 꼴까따 이 두 도시에서 나타난 상인 공동체다. 봄베이를 중심으로 활동한 페르시아계 상인들의 공동체를 ‘파르시(Parsi 혹은 Parsee)라고 하고 꼴까따를 중심으로 활동한 상인집단으로는 ’마르와리(Marwari)’가 있다.
이들이 급격하게 부를 축적할 수 있었던 것은 1820년경 영국?중국?인도의 삼각 무역체제가 완성되었기 때문이다. 잘 알려진 것처럼 중국과의 차무역으로 인한 적자를 메우기 위해 영국은 인도에서 재배한 면화와 아편을 중국으로 수출했다. 이것이 서구의 중국 침략 신호탄이 된 아편전쟁의 원인이다.
중국으로의 아편 수출에 참여한 인도 상인들은 큰 돈을 벌게 되는데 가장 먼저 아편 거래에 참여한 상인들이 파르시고 그 중에 가장 두각을 나타낸 가문이 바로 타타 가문이다. 즉 타타 재벌의 최초의 자본 축적은 식민주의에 근거한 아편무역을 통한 것이었다.
이때 모은 돈을 바탕으로 인도 경제가 영국경제에 금융적으로 편입되기 시작한 1850년대 즉 ‘인도의 산업 혁명’ 시기에 타타 가문은 방적업에 진출했다. 그리고 방적업 투자 열풍과 그에 따른 거품경제가 만들어낸 부동산값 폭등을 잘 이용한 타타 가문은 부동산 투자로도 엄청난 돈을 벌어 들였다. 이제 단순한 상인 가문이 아니라 진정한 자본가가 된 것이다.
19세기 말에 타타를 비롯한 자본가 계급이 정치적 권력에도 접근할 수 있는 기회가 열렸다. 당시 영국에서는 선거권 확대와 함께 민주주의가 발전하면서 식민지 정책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커지는 상황이었다.
인도의 식민지 정부는 ‘인도인 지식층을 회유해 불만을 제거하는 장치’가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그 장치가 바로 1885년 만들어진 ‘인도국민회의(Indian National Congress)’였고 그 해 12월에 제1차 인도국민회의 대회가 봄베이에서 개최되었다. 그 무렵 타타 가문은 방적업을 통해 번 돈을 부동산에 투자해 봄베이 최대의 부동산 갑부가 되어 있었다.
타타가문은 이 부를 이용해 국민회의에 자금을 제공했다. 그렇다고 해서 타타 가문을 민족주의에 투철한 애국적 민족자본가로 생각해서는 안된다. 그들이 영국 정부에 헌납한 돈은 간디의 독립운동에 지원한 액수 보다 훨씬 많았다. 그 댓가로 타타 가문의 수장 라탄 타타는 1916년 영국에서 작위를 얻었고 영국에 주로 거주하다가 1918년에 사망해서도 영국에 묻혔다.
또 다른 재벌 비를라는 마르와리 출신이다. 흥미롭게도 비를라 가문은 처음에는 국민회의의 강경파들에게 자금을 지원했다. 아마도 타타와의 차별화를 노렸을 것이다.
비를라 재벌의 제3대 회장 간샴 다스 비를라(Ghanshyam Das Birla: G. D. 비를라, 현재의 회장 쿠마르 망갈람 비를라의 증조부, 1894~1983)와 마르와리의 젊은 상인들 일부는 국민회의 내 강경파였던 딸릭(Talik)을 지원했다. 하지만 경찰의 체포위협을 겪고 나서 곧바로 온건파 간디를 지원한다.
1924년부터 비를라는 간디와 많은 서신 교환을 하고 그가 필요한 거의 모든 자금을 제공했다. 그 이후로 비르라는 간디의 후원자이자 비서로 알려진다. 간디의 소박해 보이는 생활과 대중을 도덕으로만 감화시켰을 것 같은 활동은 실은 상당한 비용이 드는 것이었다. 현실 정치에서 이런 힘 없이 영향력을 가지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문제는 간디가 그 후원금으로 인해 어떤 영향을 받았는가 이다. 간디 스스로는 “재벌의 생각에 영향을 받는 것은 거의 없다.… 재벌 후원자에게 우리 정당이 의존한다는 점 자체는 불행한 일이지만 그 사실이 우리의 정책을 저해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답했다.
간디는 진실을 말했을 수 있다. 하지만 간디 이후 국민회의는 재벌의 정치 후원금으로부터 결코 자유롭지 못했다. 인도에서 간디의 문명비판 정신과 자본주의가 하나로 합쳐진 ‘간디주의 자본가(Gandhian Capitalist)’ 라는 말이 있다. 얼핏 기묘해 보이는 이 둘의 결합이 실은 간디주의로 위장한 자본가들이었음은 그 이후의 역사가 보여준다.
인도 재벌이 비약적으로 성장한 계기는 두 번의 세계대전이었다. 1914년 전쟁으로 철강 수입이 막히자 타타제철은 인도 식민지 정부에서 필요로 하는 철강을 독점 공급했다. 비를라 가문도 1차 대전 기간 동안 자산이 4배로 팽창했다. 비를라는 은 투기를 통해 막대한 부를 얻었다. 이를 통해 두 재벌은 상인에서 산업자본가 즉 현대적 의미의 자본가로 전환했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도 전시특수를 톡톡히 누렸고 특히 간디가 주도한 “인도를 떠나라(Quit India)” 운동 이후 인도에서 철수하는 영국 자본을 인수해 몸집을 불렸다. 한국의 초기 재벌들이 적산불하를 통해 탄생한 것과도 비교해 볼만한 경우다.
1947년 독립한 인도는 국가 주도의 계획경제와 시장경제의 혼합 체제를 표방했다. 그런데 국가 주도의 계획경제에 대해 자유주의자들이 진보적이건 급진적이건 공통적으로 유포시킨 오해가 있다. 이 오해는 상당히 널리 퍼져 대중적 상식이 되었다.
첫 번째는 국가 주도의 계획경제는 사적 자본의 자유와 이익을 침해한다는 것이다. 인도의 사례는 그 반대가 진실임을 보여준다. 한국의 재벌도 국가의 강력한 비호가 없이는 성장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인도에서 대자본가들은 스스로가 계획 경제의 필요성을 역설했고(대공황의 여파와 당시 소련의 높은 경제성장률은 네루는 물론 인도자본가들에게는 무척 큰 감명을 주었다.) 계획의 입안자이자 집행자로 직접 참여했고 결국 최대 수혜자가 되었다.
또 인도에서는 국영화를 통해 기존의 민간기업을 국가가 인수하는 방식을 취하지 않았다. “새로운 기업의 창설에 의한 국영부문 설치“라는 방침에 따라 새로운 기업을 만들었고 이것은 오히려 기존 재벌들과 협력 관계를 맺게 되었다.
두 번째 오해는 국가 주도 계획경제는 필연적으로 부패와 비효율을 초래한다는 것이다. 인도에서 재벌과 국가의 관계는 대자본의 이윤추구 특히 지대추구 행위가 부패의 가장 큰 원인임을 잘 보여준다. 국가와 관료제는 그 자체로 부패한 것이 아니라 사적 이익 추구에 연루됨으로써 부패한다. 중요한 것은 계획의 입안과 실행의 장치를 누가 통제하고 누구의 이익을 위해 사용하는가이다.
인도에서 계획과 국가 자체를 부패, 비효율, 권위주의와 동일시하며 비판했던 논리는 결국 신자유주의의 전면화를 정당화했다. 한국의 급진자유주의자들이 했던 역할도 마찬가지다. 두 집단 모두 자본 특히 금융자본이 후원한 제도, 대중매체를 통해 목소리를 유포시켰다는 점도 똑 닮아있다.
신자유주의 경제 정책이 본격적으로 시작한 1990년대 이후 인도의 재벌은 국가 발전을 이끄는 견인차로서 정당성을 인정받았다. 국가 발전은 개혁, 자유화, 유연화, 민영화 등 얼핏 들으면 민주화와 동일한 의미로 오해받을 수 있는 어휘들로 뒷받침되었다.
이제 시장은 사람들이 일상 용품을 사고파는 곳이 아니고 기업들이 거래하는 곳이다. 그리고 그 거래는 주식이나 선물(先物)과 같이 손에 쥐는 상품이 아닌 보이지 않는 상품을 사고파는 행위가 되었고 그 주도적 역할을 재벌이 한다. 미래의 청사진은 재벌들의 머리에서 구상되었고, 그것은 국가적 차원에서 진행되었으며 그것을 거스르는 자들은 사회 자체적으로 제거되게 만들었다.
사회 정의와 경제 민주화는 가난한 사람을 위한다는 명분을 내걸었지만 정작 모든 이득은 재벌들 배로만 들어갔다. 그 사이 생태계는 파괴되고, 자살하는 사람들은 급증하고, 집이나 삶의 터전을 잃은 사람 또한 측정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아졌다. 가난한 사람들을 죽이고, 빼앗고, 쫓아내기 위하여 법이 만들어지고, 군대와 경찰이 동원된다.
언론은 저항하는 사람들을 시대에 뒤떨어지는 자로 매도하고, 사람들은 자기에게 기회가 오기만을 기다릴 뿐, 저항하지 않는다. 그야말로 오로지 이윤만을 위한 주식회사 인도공화국이다. 그 주식회사 안에서 재벌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하는데, 그 권위를 국가가 위임해주고 그 대가로 엄청난 돈이 국가 권력을 쥔 정치인과 관료들에게 들어간다. 그리고 돈의 위력에 짓눌린 사람들의 투표를 통해 그 모든 행위를 정당화 받는다. 그 사이 국민만 죽어나고, 국토만 파괴된다.
이것은 최근 10년 동안 인도에서 일어난 일이다. 그런데 인도라는 말만 하지 않으면 한국에서 일어난 일로 이해하기 딱 십상이다. 당연히 그렇다. 그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가 신자유주의 시대이기 때문이다. 신자유주의 시대에는 재벌이 국가고, 국민은 그 노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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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수구파의 생얼] 구자라트 학살의 배후 인도 총리 나렌드라 모디 (2)
2015/06/11 AM 11:15 |
LINK : //www.kirf.or.kr/kirf/cc202.php?pp=4&bcidx=46&md=READ&idx=6999 |
인도 총선에서 차기 총리로 가장 유력시되는 인물은 힌두 극우주의 성향인 인도국민당의 나렌드라 모디다. 현재 구자라트 주지사인 그는 성공적인 경제성장 모델을 만들어냈다며 열광적인 지지를 이끌어내고 있다. 그러나 모디는 2002년 인도 구자라트 주에서 자행된 처참한 인종청소형 학살의 주역이기도 하다.
'구자라트 학살'은 느닷없이 발생한 기차 화재 사건으로부터 시작되었다. 2002년 2월27일 구자라트 주의 고드라 역을 떠난 기차가 발차 이후 몇 분 지나지 않아 원인 모를 화재에 휩싸였다. 58명이나 되는 승객이 순식간에 사망했다. 문은 양쪽 다 잠겨 있었다. 이 사고가 발생한 정황은 분명하지 않다. 다만 기차가 하필 무슬림 밀집 거주지에 비상 정차했고, 무슬림 군중이 몰려와 돌을 던졌다는 것이 사실로 확인되었다. 당시는, 힌두 극우주의자들이 아요디아의 무슬림 성전을 파괴한 '아요디아 사태( < 시사IN > 제343호 '정치와 종교의 잘못된 만남' 참조)' 직후로 양 종교 간 갈등이 극으로 치닫고 있는 상태였다.
사건 발생 당시 연방 정부의 여당이면서 주 정부의 여당이던 인도국민당이 조사위원회를 구성했다. 조사위원회에 따르면 무슬림 폭도가 기차 안으로 난입해 바닥에 휘발유를 뿌리고 불을 질렀다는 것이다. 이른바 무슬림 폭도에 의한 방화 사건이었고, 재판에서도 관련자 31명에 대해 유죄가 선고되었다. 그러나 일부 시민단체는 이런 조사 결과에 반발했다.
이후 연방 정부의 정권이 바뀌면서 조사위원회가 다시 구성되었다. 그런데 조사 결과가 이전과 완전히 달랐다. 방화가 아니라 우연한 화재였고, 무슬림 군중의 난동 역시 우발적이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도 엄청난 반발이 있었다. 아직까지도 사건의 내막은 베일에 가려져 있다. 기차가 왜 그 자리에 정차하게 됐는지, 누가 무슬림 군중을 선동했는지, 어떻게 불이 붙었는지 납득할 만한 설명이 나온 적이 없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이 기차 화재 사건을 빌미로 구자라트 전역에서 대량 학살이 자행되었다는 것이다.
이쯤에서 우리는 1987년 한국의 13대 대통령 선거에서 발생한 폭력 사태를 상기할 필요가 있다. 당시 여당인 노태우 후보의 광주 유세에서, 청중 가운데 일부가 지역감정을 조장하며 후보에게 돌을 던지자, 옆에서 자극받은 상당수의 시민이 폭력에 휩쓸렸다. 이 사건은 계속 방송에 오르내리면서 전국적으로 지역감정에 불을 붙였다. 다음 날 대구 유세에 나선 김대중 후보 역시 보복성 돌팔매질을 당했다. 이후 13대 대선은 지역감정 중심으로 흘러갔으며, 그 결과는 노태우 후보의 당선이었다. 이후 광주 유세장의 폭력 사태가 어떻게 일어났는지를 두고 '안기부(국정원의 전신) 배후설' 등 갑론을박이 있었다. 그러나 진실이 어떠하든, 광주 유세의 폭력 사태는 당시 군부 세력에게 유리한 정세를 조성하는 데 기여했다.
인도의 힌두 극우세력들은 고드라 열차 화재 사건으로 종교 갈등을 부추기면서 구자라트 지역의 무슬림 학살을 기획하고 집행했다. 사건 직후, 어떤 법적·행정적 권한도 없는 일개 수구 단체가 구자라트 전역에 철시(撤市)를 선언한다고 발표했다. 구자라트의 모든 상인들에게 어떤 영업 활동도 하지 말라고 선포한 것이다. 이에 대해 모디가 이끄는 주 정부는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그리고 수구 단체들은 구자라트 주 집권 여당인 인도국민당의 공공연한 지원을 받으면서 난동을 저지르기 시작했다. 정부가 운영하는 방송은 희생자 가족의 울분과 증오 그리고 애도로 가득 찬 내용을 줄기차게 내보냈다. 모디는 수구 단체들의 난동을 저지하기는커녕 스스로 선동에 나섰다. 그는 사건의 실체가 밝혀지지 않은 상황에서, '테러리스트들이 방화한 고드라 열차에서 우리 형제들이 불에 타 죽었다'고 말했다.
열차 화재 사건이 일어난 다음 날 아침부터 힌두 수구 세력의 색깔인 황토색 옷을 입고 힌두 전통 칼과 도끼로 무장한 폭도들이 시내 전역에 배치됐다. 이들은 무슬림을 대상으로 학살을 자행했다. 힌두 폭도들은 무슬림이나 무슬림으로 의심되는 사람들에게 알라를 모욕하라거나 힌두 신을 찬양하라고 요구했다. 이를 거부하면 칼로 목을 베거나 휘발유에 불을 붙였다. 여성과 어린이도 학살에서 배제되지 않았다. 성폭행과 신체 일부에 대한 절단이 난무했다. 인도의 종교 공동체 간 폭력 갈등의 역사에서는 처음으로 힌두 여성들까지 적극적으로 무슬림에 대한 폭력에 가담했다. 구자라트 주도인 아메다바드에서는 무려 한 달 동안 학살 난동이 벌어졌다.
학살 배후 조종으로 기소됐지만…'증거 불충분'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종류의 죄악이 구자라트에서 저질러졌다'고 언급될 정도다. 고드라 열차 화재 사건은 지금까지도 사고인지 아니면 누군가 치밀하게 계획한 사건인지 밝혀지지 않았다. 그러나 구자라트 학살에 동원된 힌두 수구 세력은 매우 잘 짜인 각본에 따라 무슬림을 난도질했다. 영화감독 라케시 샤르마는 2003년 다큐멘터리 영화를 제작했는데, 그 제목을 < 최종 해결(Final Solution) > 이라 지었다. 나치가 유대인 홀로코스트를 저지르면서 사용한 용어를 그대로 차용한 것이다. 기획에 따른 인종 청소형 학살이었다는 주장인 셈이다. 힌두 수구 세력은 지금도 무슬림은 인도 국민이 될 수 없고, 따라서 인도에 무슬림이 살 공간을 주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을 서슴지 않는다. 나치가 유대인에 대해 10년 동안 차별·탄압·분리·학살 등을 단계별로 실시한 것과 다를 바 없다. 다만 나치는 그 사악함을 강제수용소와 가스실 내부로 은폐한 것에 비해 인도 수구 난동 세력은 대낮 길거리에서 학살을 자행했고 그 장면을 심지어 텔레비전으로 내보냈다.
학살을 주도한 나렌드라 모디는 승승장구했다. 그는 학살 사건 이후 선거에서 압승을 거둬 주정부 총리직을 연임했다. 연방 정부가 교체된 뒤 모디는 학살 배후 조종으로 기소되기도 했다. 그러나 2012년 대법원에서 증거 불충분으로 무죄판결을 받았다. 무슬림 진영과 시민·인권단체가 대법원의 판결에 일제히 반발하고 나섰지만 별무소용이었다.
이후 모디는 2014년 4월 시작된 총선에서 야당인 인도국민당의 총리 후보로 확정되었다. 현재까지 여론 조사에서 국민회의당의 라훌 간디를 여유 있게 따돌리고 1위를 달리고 있다. 큰 이변이 없는 한 '학살자'는 조만간 인도 총리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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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나렌드라 모디라는 구자라트 학살 기획자가 인도 총리를 하고 있다죠..
우리의 서북청년단과 같은 수구난동세력의 총수같은 자가 인도 총리라니....
그리고 인도수구세력은 신자유주의 신봉자들이기도 하죠... 인도가 단순히 오피스국가로 끝날 것이라는
주장도 여기에 기반하고 있구요..
중국같이 자국의 산업을 보호하고 유치산업을 키우기 전에 신자유주의를 적극 받아들이니...
경제 정의나 사회 정의 혹은 빈부의 격차 같은 것은 생각할 겨를이 없기도 하구요
노답...
인도 수구세력의 역사를 알아보면 우리의 현 상황을 해석하고 대응하는데 유익하기에..
알아보고는 있는데.. 참 유익하네여..
수천명을 학살한 학살 기획자가 총리.. 대통령이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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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수구파의 생얼] 인도 수구파의 생얼 '4대세습'이냐 '학살자'냐 (1)
2015/06/11 AM 10:58 |
LINK : //www.redian.org/archive/75278 | 인디라 간디가 암살당한 후 1984년 12월 총선에서 회의당(I)(인도국민회의를 약칭으로 보통 회의당이라 부르는데, 그 당이 1967년 분당되면서 인디라 간디를 중심으로 만든 정당을 ‘인디라’의 약자인 “I”를 덧붙여 부르는 이름이다.)는 전체 하원 의석수의 80퍼센트를 휩쓸어버렸다. 델리에서 시크교도 3,000 여명을 학살하면서 선거를 적대적 감정으로 몰고 간 덕이었다.
국민들은 집권 여당이 조장한 광분과 난동 속에서 치른 선거에서 정치적으로 아무런 경험이 없는, 오로지 인디라 간디의 아들이자 네루의 외손자라는 사실만 가지고 있던 라지브 간디(Rajiv Gandhi)에 대해 인도 투표 역사상 가장 큰 몰표를 퍼부었다.
인디라 간디가 암살당한 날 바로 수상직을 이어받은 라지브 간디는 몇 개월 뒤 어엿한 수상직에 올랐다. 수상 라지브 간디는 자신의 어머니가 조장하였고 그 부메랑으로 돌아온 뻔잡 문제를 맨 먼저 해결하려 하였다. 자신은 어머니를 잃고, 시크교도들은 성지가 유린당하고 동포가 수 천 명이 학살을 당한 상황이었다.
그는 뻔잡을 기반으로 하는 분리주의 정당 아깔리 달(Akali Dal)과 평화 협정을 맺으려 하였으나, 실패하였고 급진주의자들의 국가 분리 운동은 계속되었다. 그러던 중 정권이 통째로 스웨덴의 무기 제조 회사인 보포르(Bofor)사로부터 뇌물을 받은 사건이 터지고 결국 그 여파로 1989년 신생 사회주의 계열 정당인 민족전선(National Front)에게 정권을 넘겨주었다.
라지브 정권의 재무장관을 사임하고, 야당의 길을 택한 싱(V. P. Singh)의 정권은 인도 역사상 두 번째의 비(非)회의당 정부였다. 그렇지만 싱의 정권은 공산당과 우익 수구 세력인 인도국민당과 불안정한 연립을 통해 세운 것이어서 세력 구조가 매우 취약하였다. 정파 싸움을 극복하지 못하고 연립 정부는 무너졌고, 다시 치러진 1991년 선거에서 패배하여 사라지고 만다.
그 때 야당의 입장에서 선거를 지휘하던 라지브 간디는 남쪽 첸나이 근처에서 재임 중 스리랑카에 평화유지군을 파견하여 타밀 반군의 앙심을 사 그 보복으로 벌인 자살 폭탄 테러로 암살당한다. 그러면서 지난 40여 년 동안 집권 여당으로서 실질적인 일당 지배를 해 온 회의당의 영향력은 급격하게 떨어지면서 ‘네루 왕조’에 의존해 온 회의당의 몰락이 눈에 띄게 구체화되었다.
이후 10여 년 동안 회의당이 몰락하면서 강력한 야당으로 등장한 힌두 근본주의 보수 정당인 인도국민당과 수구난동세력 민족의용단과 의용단일가의 연합 세력이 전 국토를 난장판으로 만들었다. 그러다가 2004년 선거에서 라지브 간디의 부인인 소냐 간디(Sonia Gandhi)가 회의당을 다시 집권 여당으로 올려놓는데 성공하였다.
소냐 간디는 이탈리아 태생이라는 이유로 당시 여당인 인도국민당의 심한 공격을 받았다. 수구난동세력들은 ‘인도를 또 다시 유럽의 식민지로 만들 것인가?’라고 주장하며 오로지 소냐 간디의 혈통만을 물고 늘어졌다. 소냐 간디의 출생지 문제는 바로 선거 쟁점으로 불붙었지만, 승리를 거두지는 못했다. 정권은 야당이던 회의당이 되찾아갔다.
야당이 승리하게 된 계기에는 소냐 간디에 대한 ‘유럽 식민지’ 논쟁을 라지브 간디의 아들이자 인디라 간디의 손자인 라훌 간디가 차단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라훌 간디는 자신의 아버지가 암살된 후 암살 협박에 외부에 나타나지 않고, 홈스쿨을 통해 공부를 하면서 일체 외부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다가 2004년 선거에 혜성같이 등장하였다.
그러면서 선거는 오로지 네루의 외증손자이자 인디라 간디의 손자인 라훌에게만 쏠렸다. 라훌 간디는 아버지 라지브가 암살 당했을 때는 스물한 살인 앳된 청년이었으나 2004년 정계 입문하였을 때는 어엿한 30대 중년으로 성장해 네루 가문을 잇는 어엿한 재목으로 보이기에 충분하였다.
그는 자신의 아버지와 어머니의 지역구인 웃따르 쁘라데시 주의 아메티(Amethi)를 선거구로 하여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다. 어머니인 소냐 간디는 자신의 지역구를 아들에게 넘겨주고, 라훌의 할머니이자 자신의 시어머니인 인디라 간디의 생전 지역구인 라이바렐리(Rae Rareli)로 옮겨 동반 당선되었다.
2004년 총선에서 승리한 회의당은 극우 세력이 계속해서 ‘이탈리아의 식민지’가 된다고 자극하면서 그 점을 물고 늘어짐으로써 극우 민족주의를 부추길 가능성이 있어 (소냐 간디가) 수상직에 오르지는 않았다. 하지만 여전히 네루 가문의 정치적 자산 위에서 정치인 입지를 탄탄히 누리고 잇는 것만은 사실이다.
결국 혈통 정치는 라지브와 소냐 간디의 아들 라훌 간디로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오로지 가문과 혈통을 가지고 지역구를 좌지우지 하는 보수 정치인이나 그 거물급 인사를 통해 자신의 일신의 영당을 꾀하려는 얄팍한 민심이 들어맞은 영원한 제국의 역사다.
2004년 총선 당시 회의당(I)는 아메티가 속한 U.P.(웃따르 쁘라데시) 주의회 80석 가운데 10석밖에 확보하지 못하는 참담한 상황이었다. 라훌은 혜성같이 정계에 등장하면서 선풍을 일으켰는데, 특히 젊은 층이 그에게 열광을 했다. 전형적인 이미지 선거였다.
그는 할머니 인디라 간디의 죽음을 잘 활용해 당시 집권당인 인도국민당을 국가 분열을 조장하는 세력이라 비난하고 자신을 모든 종교와 카스트를 통합하는 나라를 만들겠다고 공언했다. 특히 무슬림 테러를 부추기는 외부 세력 (=파키스탄을 의미함)이 있다며 비판했으나 여당의 지지 기반인 힌두 근본주의의 난동에 대해서는 특별한 비판을 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어머니와 여동생이 주로 지역구 선거 운동을 하게 하고 자신은 전국을 다녔다. 인디라 간디와 라지브 간디를 그리워하는 국민들은 그에게 환호했고 그 결과 인도국민당에게 빼앗긴 정권을 약 10년 만에 되찾게 되었다.
하지만 인도국민당과 수구난동세력이 뿌려놓은 아요디야(Ayodhya)를 중심으로 하는 종교 공동체 간의 충돌이 여전히 불씨로 타오르고 있는 자신의 지역구가 속한 웃따르 쁘라데시 주에서는 기대 이상의 큰 성과를 거두지는 못하였다. 하지만 2009년 주 의회 선거에서는 주 의회의 25%를 차지하는 선전을 했다.
아요디야 모스크를 파괴하고 종교 공동체주의에 불을 붙인 후 10년 동안 집권을 한 수구 세력인 인도국민당과 그 연대 세력들은 라훌 간디에 대해 야당은 세습 정치라고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지만, 워낙 강한 혈통 중심의 세계관에 쌓인 인도인들에게 그리 크게 먹히지는 않는다. 라훌 간디는 상대적으로 젊은 나이인지라 젊은 층에 대한 기대와 개혁을 하겠다는 레토릭에 열중하는 편이다.
작년에는 시민감시법안(Citizen’s Ombudsman Bill)을 검토 도입해야 한다고 목청을 높이곤 했지만, 그 어떤 구체적이고 실효성이 있는 방안을 내지 않았다. 그것은 단지 2009년 이후로 부패 문제가 본격적으로 이슈화되면서 시민운동가 안나 하자레(Anna Hazare)가 이끄는 부패 척결 운동이 델리를 비롯한 전국에 들불같이 퍼지는 상황에서 나온 임시방편인 셈이다.
라훌 간디는 상대적으로 젊다는 이미지와 상승 효과를 내면서 청렴한 이미지의 정치인으로 자리매김 할 뿐이었다. 속 빈 강정일 뿐이었다. 자신의 아버지도 젊음을 무기로 청렴한 이미지를 만들었으나 결국 비리로 정권을 내주었다는 사실을 국민은 망각하였기 때문에 보수 정치인들은 유물이 되어 버린 칼집에서 이미지 정치를 다시 꺼내 든 것이다.
급기야 2013년에는 그는 회의당(I)의 부총재로 선출되어 당의 청년 조직과 대학생 조직을 이끌어 왔다. 그리고 올 봄 2014년 인도 총선에서 회의당의 수상 후보로 선거를 이끌었으나 대패하였다. 이탈리아 태생 어머니를 두고 있다지만, 인도에서 태어났고 민족주의의 상징인 힌디를 모어로 구사하는 전형적인 힌두 인도인이라 네루 혈통의 후예로 완벽한 셈이다. 결국 혈통에 기반을 둔 ‘네루 왕조’는 여전히 살아 있는 인도 정치의 진행형이다.
하지만 ‘네루 왕조’의 힘은 예전 같지 않다. 지금은 오로지 돈, 돈, 돈 … 경제 성장을 내세운 인도국민당의 시대가 왔고, 이는 당분간은 변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앞으로 라훌 간디로 이어지는 4대 세습이 과연 성공을 거둘지는 미지수다. 그것은 크게 두 가지 이유에서다.
라훌 간디의 아우라는 그의 아버지나 할머니와의 그것과는 달리 그렇게까지 성스럽지는 않다. 그의 아버지인 라지브는 정국이 시크교도에 대한 복수라는 블랙홀에 빠져 선거의 모든 이슈가 사라진 채 선거를 산 라지브가 치른 게 아니고 죽은 인디라가 치른 것이어서 압승을 거둘 수 있었다. 할머니 인디라 때는 인도를 독립으로 이끌고 분단의 과정에서 국민국가의 통합을 내세운 네루의 후광이 준 아우라를 국민들이 벗어나기에 역부족이었고, 인도국민회의의 조직력을 감당할 만한 야당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라훌은 비단 야당뿐만 아니라, 많은 지식인들로부터 야유와 조롱을 받는다. 과거에는 있을 수 없는 풍자와 패러디가 봇물처럼 쏟아진다. 그가 하바드 경영대학원 1년을 제대로 다녔는지, 영국의 캠브리지 트리니티 컬리지의 준박사(M.Phil)를 제대로 마쳤는지 등에 대한 시비는 여전히 끊이지 않고 있는 것을 봐도 그는 과거 자신의 집안 어른이 누린 아우라를 누리지 못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렇지만 가장 큰 적은 야당 지도자인 나렌드라 모디(Narendra Modi)가 구자라뜨 주지사로 거둔 경제 발전의 성과다. 모디는 2002년 구자라뜨 학살을 실질적으로 자극하고 진두지휘 한 정치인이다. 그래서 일각에서는 도살자라 불리는 사람이다. 수구난동세력의 전형적인 인물이다.
그러나 신자유주의 경제 정책을 적극 받아들여 자신이 주지사로 있는 구자라뜨 주의 경제 지표는 매우 빛이 난다. 경제 정의나 사회 정의 혹은 빈부의 격차 같은 것은 생각할 겨를이 없다. 그가 도살자든 학살자든 개의치 않는다. 오로지 필요한 것은 빵이다. 4대 세습이냐, 학살자냐? 인도인들의 선택에 귀추가 주목된다.
혈통에 의존하는 투표 행위는 아시아 각 나라가 식민 지배를 받은 후 근대적 의미의 시민 사회를 이루지 못해 만들어진 결과다. 노동자, 농민, 자본가 혹은 프롤레타리아와 부르주아 등 비본질적이고 생득적이지 않은 여러 집단을 중심으로 사회화가 이루어져야 하는데 그렇지 못해서 그런 현상이 발생한 것이다.
그 빈 자리를 어떤 곳에서는 언어가, 어떤 곳에서는 지역이, 어떤 곳에서는 종교가, 어떤 곳에서는 반공이, 어떤 곳에서는 혈통이 그 자리를 차지하였다. 그리고 대체적으로 그 여러 자리들은 국가주의를 기반으로 지탱되었다.
1970년대의 한국의 박정희, 북한의 김일성, 필리핀의 마르코스와 같은 독재자들은 국가주의를 최대한 활용하면서 강력한 카리스마를 쌓았다. 그 안에서 한국은 국가주의와 혈통 그리고 지역주의를 묶은 봉건 체제를 한국식 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주조하여 활용하였다.
하지만 그 못지않은 또 하나의 신화가 있다. 1990년대부터 아시아 각국에 불어 닥친 신자유주의의 광풍이다. 아시아 각 나라들은 다양한 경제 위기를 극복해 가는 과정 속에서 경제 제일주의 속에서 무한경쟁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해법으로 찾았고, 그 여정 속에서 어렵게 성취한 민주주의를 후퇴하는데 동의하고 있다. 오로지 돈과 성공, 정글에는 인간이 존재하지 않고 오로지 배고픈, 경쟁에 목을 맨 짐승들만 우글거렸다.
한국 사회도 마찬가지였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국민의 다수는 경제를 살릴 것처럼 보이는 이명박을 선택했다. 그가 전과 16범이고 아니고는 관심 밖이다. 그렇지만 그는 국정 운영을 잘못했고, 그 결과 국민은 정권을 바꾸는 것으로 뜻을 모으는 게 하는 것이 아니고 사람을 바꾸는 데로 뜻을 모았다.
야당이 독재자의 딸이라는 프레임을 걸면 걸수록 국민의 다수는 경제 중흥의 지도자 박정희를 떠올렸다. 국민은 박근혜의 아버지가 독재를 했건, 이명박이 국정을 망쳤건 개의치 않았다.
그들은 사실을 보는 것이 아니라 보고 싶은 것을 보았다. 그들은 박근혜를 통해 경제 개발의 위대한 영도자를 떠올린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의 잘못된 선택에 순간적으로 후회를 한다, 그렇지만 다시 만들어진 신화를 이겨낼 수는 없다. 박근혜씨가 자식이 없다고 해서 안심하지 말라. 없는 것을 만들어 내는 것이 신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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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수구파의 생얼] 1984 델리 학살, 권력을 위해 지옥문을 열다 (0)
2015/06/11 AM 10:40 |
LINK : //www.redian.org/archive/75131 | 1984년 10월 31일 오전 9시 20분, 인디라 간디 수상은 자신의 관저를 지키던 두 명의 시크교도 초병으로부터 총격을 입고 사망하였다.
사망 소식이 곧 알려졌으나 델리 시내는 별 소동이 일어나지 않고 잠잠했다. 델리에는 첫날이 다 가도록 별다른 사건이 발생하지 않았다. 그 다음날이 되면서 사태는 급변하였다.
아침 9시부터 시크교도들이 많이 거주하는 동부 델리를 시작으로 시내 곳곳에서 시크교도에 대한 학살이 시작되었다. 회의당 지지자들과 정치 깡패들은 각목, 쇠몽둥이, 칼 등으로 무장을 하고 ‘피에는 피’라는 구호 아래 눈에 보이는 시크교도들을 무차별 살상하였다.
왜 사고가 난 첫날에는 잠잠하던 민심이 다음날 갑자기 동요하여 학살극의 난동으로 바뀌었을까?
문제의 열쇠는 집권당인 회의당의 수구 세력들에게 있다. 나중에 조사를 통해 밝혀진 바에 따르면, 그 날 밤 회의당의 간부들과 노조 간부는 모처에서 모여 이 사태를 어떻게 끌고 갈 것인지에 대해 구수회의를 하였다.
그들은 구체적으로 작전 모의를 하고 산하 조직의 행동대원들에게 돈과 무기를 제공했다는 사실이 나중에 수사를 통해 밝혀졌다. 군이나 경찰은 아무런 저지도 하지 않았다. 학살극이 시작된 지 나흘 만에 군이 투입되면서 사태가 진정되었으니 딱 사흘 만에 사망한 시크교도는 공식적으로 2,733명에 달한다.
실종자와 행방불명자로 추정되는 수까지 합하면 전국적으로 적게는 4,000명 많게는 8,000명에 달하였다. 남편이 죽어 과부가 된 여성은 1,300 여 명, 부모를 잃어 고아가 된 아이의 수는 4,000여명에 달한다.
그러나 현재까지 이 학살극에 대한 법적 책임을 진 사람은 아무도 없다. 30년 가까운 세월이 지났음에도 재판만 하릴 없이 진행되고 있고, 수 천 명의 목격자가 내세우는 증인이나 증거는 하나같이 묵살당한 채 세월만 가고 있다.
그들의 소요는 매우 유사한 형태로 일어났다. 조직적으로 시크교도에 대한 테러가 감행되었으니 삼사십 명부터 수백 명 이 하나로 몰려다니면서 체계적으로 움직였다. 그들은 각목과 쇠몽둥이로 피해자들을 폭행하였고, 심지어는 석유를 끼얹어 태워 죽이기까지 했다.
길거리에서 발견한 시크는 현장에서 잔인하게 구타 살해하거나 불에 태워 죽였고, 집 안에 있는 시크는 집을 파손하고 들어가 잡아 죽이거나 집에 불을 질러 태워 죽였다. 그들에게 저항하는 여성은 집단 강간을 하고 반항하는 아이들도 짓이겨 죽였다. 시크교도가 운영하는 시내 곳곳의 상점은 대부분 약탈당했고 불에 탔다.
그 사이 국가는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 경찰은 아무런 저지도 하지 않았고, 군대도 투입되지 않았다. 사흘 동안 델리는 문자 그대로 아비규환이자 지옥이었다. 11월 3일 소요 시작 4일째 되는 날 치안 유지를 위해 군대가 투입되었고, 야간 통행금지가 실시되었다. 그제야 소요는 바로 진정되었다.
시크는 힌두와는 달리 상투를 치고 그 위에 터번을 쓰고 수염을 기르기 때문에 남성의 경우 누가 봐도 겉모습으로 쉽게 그 정체를 알아차릴 수 있었고 그래서 피해가 더 클 수밖에 없었다. 인도에서는 10년마다 센서스를 조사하는데, 1981년 센서스에 의하면 델리 거주 시크는 40만 명가량이었고, 학살 사건이 발생한 1984년 추정치로는 약 50만 명 정도 되었는데 델리 인구 전체의 7.5% 정도였다.
그들 대부분은 1947년 인도-파키스탄 분단 당시 나중에 파키스탄이 되는 인도아대륙의 서북부 지역에서 고향을 등지고 힌두를 따라 인도로 들어온 실향민이었다. 그들은 빈손으로 들어온 델리에서 경제적으로 매우 괄목할 만한 성장을 하였고, 그 영향력은 사회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지대하였다.
인디라 간디가 뻔잡 문제를 정치적으로 이용하여 서서히 종교 근본주의적 정치가 일어나기 전까지는 혹은 그 후에도 상당수가 회의당 정권과 가까운 성향을 많이 보였기 때문에 시크교도들은 굳이 회의당 정권으로서는 적이 될 만한 이유는 없었다.
이때까지도 시크교도들만을 위한 독립국 칼리스탄(Khalistan)을 세워야 한다는 주장을 하는 시크 테러리스트들을 지지하는 사람들보다 인도 내에서 하나의 주로 사는 것을 지지하는 온건파 시크들이 훨씬 더 많았다. 따라서 그들은 힌두와 무슬림의 관계와 같이 공동체 간의 감정이 낀 불구대천의 원수 관계가 아니었다. 그들에게 학살의 난동을 부릴 이유는 전혀 없었다.
그렇지만 회의당 수구 세력 입장에서는 그런 사실은 전혀 고려할 필요가 없었다. 시크교도들이 파키스탄에 남지 않고 힌두를 따라 인도로 남하하면서 맺은 의리 따위는 아무런 고려 대상이 되지 않았다. 그들이 필요로 한 것은 인디라 간디 수상이 죽었으니 그 다음 해로 다가오는 총선에서 승리하여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희생양뿐이었다.
인디라 간디 사후 추모 분위기는 끊이지 않았고, 그것은 자연스럽게 다음 해 총선으로 이어졌다. 죽은 인디라 간디의 모습은 곳곳에 초상화로 세워졌고, 그의 ‘하나의 국가’를 주장하는 어록은 선거 내내 육성으로 들려졌다.
선거는 죽은 인디라 간디가 진두지휘하는 풍경이었다. 아무도 죽은 인디라 간디를 이길 수 없었다. 그의 죽음은 마치 조국을 위한 제단에 스스로 몸을 바치는 것인 양 예언하듯 꾸며졌다. 그의 죽음은 하나의 조국을 세우기 위한 희생이고, 시크는 조국을 배신하는 반국가 집단으로 낙인 찍혔다. 시크라는 이유로 국민에서 ‘우리’ 모두의 적으로 순식간에 탈바꿈하였다.
현직 집권당 국회의원을 비롯한 집권당 간부들과 노조 간부들은 노골적으로 현장에서 진두지휘하였고 국영방송은 쉴 새 없이 인디라 간디 애도 방송을 내보내면서 국민들을 자극시켰다. 분위기는 점차 시크를 죽여 원수를 갚아야 하는 쪽으로 기울어져 갔고,
이 때 정치 깡패들이 조직적으로 동원되어 난동의 불에 기름을 끼얹었다. 연방 정부나 델리 시정부나 랄 것 없이 권력은 난동을 저지하기는커녕 방관을 넘어 더욱 자극하였다. 분명한 국가 폭력이다.
이 거대한 학살 난동극의 시대적 배경은 다음 해 총선이고, 주인공은 집권 여당 정치인이며, 주제는 권력 쟁취다. 결국 죄 없는 시크교도들은 몰살당하고, 그 정치인들은 1985년 7월 총선에서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인도 역사상 가장 높은 득표율과 최다 의원을 배출한 압도적 승리였다. 쾌거였다.
학살극이 일단락 되고나서, 정부는 이 사건을 힌두와 시크 사이에 벌어진 종교 공동체 갈등이라 규정했다. 집권 여당은 시크교도들이 많이 사는 뻔잡 주에서 일부 시크 테러리스트들이 힌두를 공격하여 그 동안 시크들에 대한 반감이 커져 있었는데, 인디라 간디 수상이 살해당하자 그 감정이 폭발된 사건이라고 주장했다. 그나마 공권력이 신속히 대처하여 사태가 단 5일 만에 종료될 수 있었다고 주장했다.
인도에서나 한국에서나 수구 세력이 사용하는 언어는 항상 동일하다. ‘우발적 사건’과 ‘공권력의 신속한 대처 덕분’은 그 어떤 난동에도 통하는 만사형통의 언어다. 자신들이 저지른 만행에도 그들의 언어는 전혀 변하지 않는다. 너무나도 뻔뻔하고, 가증스러운 그 언어는 지지자로 하여금 든든함을 느끼게 한다. 거대한 심리적 기제다.
그들이 사용하는 언어는 단순한 소통의 언어가 아니고, ‘우리’를 결집하는 무기이자 ‘남’을 섬멸하는 작전의 신호탄이다. 그들이 사용한 언어의 극치는 선거용 멘트에서 찾을 수 있다. 인디라 간디는 자신이 사주하여 뻔잡 근본주의자들의 세력을 키워 테러와 분열의 씨를 손수 뿌렸음에도 언어를 달리 하였다. Don’t shed blood, shed hatred ! 우리가 떨어뜨려야 할 것은 피가 아니고 미움입니다!
한국에서 공약 파기와 거짓말만 하고, 원칙이라고는 아무 것도 지킨 적이 없는 대통령이 ‘원칙을 지키는 나라’를 되뇌는 것이나, 학자적 양심을 팽개치고 수천 명의 노동자를 직위 해제한 코레일 사장이 ‘자식을 혼내는 어미의 심정’ 운운한 것이나 부정선거 수사를 방해하는 뻔뻔함의 극치를 행동으로 보여준 전 서울경찰청장이 ‘제가 철면피한 역사의 죄인이냐’고 묻는 것 따위가 바로 이 무기가 된 언어의 좋은 예이다.
죽기 전 인디라 간디는 가리브 하타오 (garib hatao 가난 추방)를 외쳤지만 결국 그는 가리비 하타오(garibi hatao 즉 가난한 자 추방)를 한 것이나 박근혜가 경제 성장을 외쳤지만 자본 탐욕만 성장시키는 정책을 쓰는 것이 동일한 것은 그들의 행위는 동서를 막론하고 항상 같은 구조 아래에서 돌아가기 때문일 것이다. 그들 보수는 언어에 능수능란하고, 사람들은 그 레토릭의 현란함에 쉽게 넘어간다.
인류학자 굽따(D. Gupta)는 집단 폭력에 참여하는 폭도들은 국가가 자신을 지지하고 있음을 확신하는 경우 행동에 옮기는 법이라고 확신한다. 그 국가 운영의 주체는 결코 바뀌지 않을 것이라는 즉 정권 교체라는 것은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설 때 난동에 적극 참여하는 법이다.
이런 점에서, 1984년 델리에서 벌어진 시크 대학살이라는 난동은 치밀한 각본이 폭도들에게 자신감을 심어주었고, 세가 불어남을 직접 목격하면서 자기들끼리 더욱 자신감을 가제 돼 더욱 난동이 커져간 것이다. 정부가 아무 짓도 하지 않고, 국가가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그들로 하여금 마음껏 하라는 난동 허가증인 셈이다.
자신의 난동을 무한 리필해주는 그 구조 안에서 그들은 잔혹함의 카타르시스를 맛보게 된다. 이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경기는 내가 죽지 않는 전쟁이라는 말을 상기해보면 그 폭력은 쉽게 맛볼 수 없는 매력 만점의 스릴이다. 그들은 그 엄청난 매력을 쉽게 잊을 수 없다. 그들은 그래서 항상 기다리는 중이다. 지금의 인도가 또 다른 학살과 테러를 잉태하고 있는 것으로 평가하는 이유가 여기에도 있다.
대중은 이성에 따라 행동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그들은 그렇게 하도록 배우지를 못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본능에 따라 행동할 뿐이다. 그들의 행동을 결정하는 것은 종교적 열정인데, 종교라는 것이 궁극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무엇을 추구해야 하는 건지에 대해 들어 본 적도, 생각해 본 적도 없다.
그래서 종교공동체주의의 요구가 각각의 종교공동체 안에 자리를 잡고 있는 소수의 보수 반동적 상층 계급의 요구라는 것이 분명하게 드러났을지라도, 그리고 그것이 수구 정치 세력의 음모와 야욕의 산물이라는 것을 드러낼 지라도 자신들의 행동을 고치려 하지 않는다.
문제는 옳고 그름이나 이성적 판단이 아니다. 부를 갖고, 정치 권력을 갖고, 세를 가진 자들이 뒤를 봐준다는 상황에서 이성적으로 행동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라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알아차리는 것이다. 세상은 살벌한 정글이며, 사각의 링이라는 것을 삶의 궤적을 통해 배운다. 그런 현실적인 사람들에게 꿈과 이상만을 이야기 하는 진보 세력은 무능함에 틀림없다. 이상은 꿈일 뿐이고 적과 아군 그리고 적개심 키우기는 현실이다.
이는 인도의 역사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지나간 한국에도 있었고 다가올 한국에도 있을 가능성이 크다. 해방 공간에서 벌인 제주를 비롯한 여러 곳의 양민 학살이나 5.18 광주학살은 그 권력이 바뀔 수 있다는 가능성이 조금만 보였으면 일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미국이라는 탄탄한 배경이 있다는 사실은 그 난동의 기획자에게 자신감을 주고 그 자신감은 그 아래 군인과 경찰에게 고스란히 전달된다. 세상은 바뀌지 않고 권력은 영원하니 알아서 행동하라는 그 메시지보다 힘 있는 것이 어디 있겠는가?
이것은 오늘날에도 변함없이 여전하다. 가스통 할배들은 그런 역사에 항상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한국에서 권력이란 절대 바뀌지 않는다는 진리를 서북청년단 시절부터 지금까지 두 눈을 뜨고 지켜보았다. 그들, 수구 난동 세력들을 약화시키는 방법은 하나밖에 없다. 권력이 바뀐다는 사실, 그 사실만 보여주면 된다. 그러면 적어도 국가 폭력은 미리 예방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또 다른 5.18을 맞이할 지도 모른다.
1984년 델리에서 벌어진 시크교도 학살극은 선거를 앞 둔 집권 여당과 정부가 꾸민 국가 폭력이다. 국민이 죽어가는 동안 국가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스스로 가만히 그 자리에 있으라를 지켰다.
2014년 6월 4일 한국에서 벌어진 세월호 참사도 이와 다르지 않다. 300 여 명이 죽어간 그 자리에는 가만히 있으라만 있었고, 국가는 없었다. “국가가 국민을 보호하지 못 한다면 그것은 국가가 아니다.”는 대한민국 대통령 박근혜가 한 말이다. 인도와 한국에서 국민을 학살하는 수구 세력의 언어는 항상 똑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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