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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수구파의 생얼] 보수정치의 바로미터, 카시미르 (0) 2015/06/10 AM 11:39
카시미르는 분단된 지역이다. 인도가 독립될 당시에 독립된 하나의 인도에 대한 민족주의적 요구가 있었다. 그 민족주의는 반제국주의를 표방하며 새로운 국가 건설이라는 진보적인 역사적 과제를 내세웠지만 동시에 힌두 중심주의라는 치명적 배타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 치명성이 마하뜨마 간디를 비롯한 수많은 이들의 목숨을 실제로 빼앗았고 지금도 사람들을 죽이고 있다. 1947년 이래 인도와 파키스탄의 대립은 카시미르에서 가장 강렬하고 폭력적인 방식으로 나타났다.

카시미르에서 분단과 대립은 지금도 진행되고 있다. 힌두 중심의 인도와 이슬람의 파키스탄 지배층은 인민들의 불만을 잠재우고 자신들의 지배권을 공고히 하기 위해 대내적 결속을 위한 대외적 갈등 조장이라는 오래된 지배전략을 포기하지 않고 있다. 그들은 카시미르의 분단 상황이 종식될 수 있는 방안을 찾는 데 별 관심이 없어 보인다.

우리의 남북이산가족들이 상봉하는 것처럼 양국 정부는 인도령 카시미르와 파키스탄이 지배하는 카시미르로 흩어진 이산가족들을 상봉시키기 위해 ‘평화의 버스’ 라는 것을 만들었다.

첫 번째 버스가 출발하는 행사장에는 인도의 만모한 싱 총리가 직접 참석해서 “이제 움직이기 시작한 이 평화의 버스를 누구도 멈추게 할 수 없을 것”이라고 선언했다. 하지만 지금까지 2만여 명이 넘는 신청자 가운데 실제로 그 버스를 탄 주민은 400명에 못 미치는 것을 보면 양국의 지배집단이 카시미르 문제를 대하는 태도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1947년 독립 이후로 인도와 파키스탄은 카시미르에 대한 영유권을 놓고 세 번의 전쟁을 치렀다. 카시미르는 한반도와 비슷한 22만여㎢ 넓이의 땅에 1,255만 명 (Census of India 2011 기준)의 인구가 사는데 이슬람교도가 다수고 힌두교 신자가 소수다.

1846년 힌두교도인 이 지역 토후국 왕이 관할권을 동인도회사에게서 매입해 자치권을 행사하다가 1947년 인도와 파키스탄이 분리 독립하면서 어디로 귀속되느냐를 선택해야 하는 문제가 발생했다.

문제가 복잡해진 이유는 당시 카시미르는 지역 주민의 대부분(77%)이 회교도였지만 통치집단은 소수집단인 힌두교계(22%)였기 때문이다. 진나가 이끄는 무슬림연맹은 카슈미르가 지리적인 근거에서나 언어학적, 문화적, 종교적인 이유에서도 당연히 파키스탄에 편입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1차 분쟁은 1947년 10월 힌두교도였던 마하라자 하라싱(Maharajah Harasingh)왕이 전격적으로 인도 편입을 결정하자 파키스탄이 지원하는 이슬람계 무장집단이 수도인 스리나가르(Srinagar) 점령을 시도했고 인도군이 이에 군사적으로 대응하면서 제1차 인도-파키스탄전쟁이 발생했다.

그해 11월 인도의 네루 수상은 주민투표에 따라 카시미르의 장래를 주민투표로 결정하기로 약속했고, 1948년 1월에는 카시미르 문제를 유엔에 상정했다. 1948년 8월 유엔의 중재로 정전 합의가 이루어졌고1949년 7월의 카라치(Karachi) 협정에 따라 카시미르는 인도와 파키스탄에 의해 각각 63%와 37%씩 분할되었다. 1963년 인도는 잠무-카슈미르 지역을 독립된 주(州)로 승격시켰다.

이후 유엔의 정전 감시활동에도 불구하고 1950년대와 60년대 초반까지 정전 경계선을 따라 수많은 무장 충돌이 발생했다. 그러던 중 1964년 12월 양국간 전면전이 촉발되었다. 1965년 9월에는 중국이 개입하면서 이 전쟁은 더욱 복잡한 양상으로 전개된다.

파키스탄이 중국 신장지역에 접한 아자드 카시미르 서쪽지역 일부를 중국에 넘겨준 데 자극받은 인도가 잠무-카시미르에 대한 영유권 강화 조치에 나서자 이슬람 주민들의 폭동이 발생했다.

이전에도 인도와 국경 분쟁을 벌인 바 있는 중국이 파키스탄 측을 지지하고 중국-인도 접경지역에서 인도군의 철수를 요구하면서 인도 북동부의 시킴(Sikkim)과 중국의 티베트(Tibet) 접경에서 인도-중국간 교전이 발생하기도 했다.

1965년 9월 유엔의 제의로 정전협정이 발효되면서 대규모 지상전은 종식되었다. 하지만 산발적인 교전은 계속되다가 1966년 1월 소련이 중재한 타슈켄트 선언(Tashkent Declaration)을 발표하면서 전쟁은 공식 종결되었고 양국은 1949년 설정된 정전 경계선으로 복귀했다.


2차 분쟁의 결과 인도는 소련과 가까워졌고, 파키스탄은 미국과 중국 쪽으로 기울었다. 2차 분쟁은 카시미르 문제가 단순히 인도와 파키스탄 간의 영토 분쟁에 그치지 않고 국경을 맞대고 있는 중국과 아프가니스탄 그리고 그 바로 북쪽의 소련까지 관련된 국제문제의 양상을 띠고 있음을 알게 해준다. 또 당시의 냉전 상황은 카시미르 분쟁을 미-소의 대리전의 성격까지 가지게 만들었다.

인도와 파키스탄의 분쟁이 양국의 국내 정치적 필요에 의한 측면이 강함을 가장 잘 보여주는 사례가 바로 3차 분쟁이다.

1971년 12월 서파키스탄과의 차별에 불만을 품어온 동파키스탄이 독립을 선언하자 인디라 간디 수상은 인도군을 파견해 동파키스탄을 지원한다. 인도가 적대국인 파키스탄을 견제하기 위해 서파키스탄에 의해 홀대받고 있던 동파키스탄을 사주하여 독립전쟁을 유발한 것으로 보는 게 일반적인 해석이다.

여기에 인도 수상 인디라 간디가 국내 정치 위기를 벗어나기 위해 적성국과의 전쟁을 결행한 것도 있다. 당연히 파키스탄군과 전면전이 발발했고 인도측의 승리로 동파키스탄은 방글라데시로 독립하고 인디라 간디의 국내 지지율은 치솟게 된다.

이 전쟁에서도 카시미르 지역은 주요 전장이 되었다. 전쟁이 공식적으로 종료된 1972년 1월의 시믈라(Simla) 협정에서 설정한 정전 경계선이 오늘날의 통제선(LOC, Line of Control)이 되었다.

그 이후 더 이상의 전면전은 발생하지 않았지만 인도와 파키스탄 두 나라 모두 카시미르 지역을 군사 요새로 만들며 긴장을 유지해왔다. 경제적으로 곤란을 겪으면서도 두 나라는 긴장 상황을 빌미로 치열한 군비경쟁을 해왔고 인도가 1974에 핵실험을 감행한 이후 핵개발에 엄청난 자원을 동원해 두 나라 모두 사실상 핵무기 보유국가가 되었다.

물론 인도의 핵개발은 중국에 대한 압박을 염두에 둔 미국의 묵인하에 이루어진 것이다. 인도가 매년 지출하는100억불이 넘는 군사비의 상당 부분이 카슈미르 분쟁과 관련된 것이었다. (최근에는 중국을 의식한 해군, 공군력 증강을 명분으로 다시 대규모 군비 확충을 하고 있다.)

파키스탄은 오랫동안 평균 30억 달러 즉 정부예산의 40% 정도의 돈을 군사비로 지출해 왔다. 외채문제가 심각한 파키스탄이 해마다 지불하는 원리금 상환액수와 비슷한 규모라고 한다. 파키스탄의 핵무기 개발을 주도한 부토 전 수상은 “풀을 뜯어먹고 살더라도 핵무기를 가져야 한다”고 말한 것으로 유명한데 정작 본인들이 아니라 가난한 국민들만이 그 비용을 감당해야 했다.

1990년대 이후에는 유엔의 정전 감시활동으로 인도-파키스탄 통제선에서의 분쟁은 현저히 줄었다. 하지만 잠무-카시미르 주 안에서는 회교도와 힌두교도간에 여전히 테러와 폭동, 게릴라전이 발생하고 있다.

1989년부터 잠무-카시미르해방전선(JKLF)이 본격적으로 무장투쟁에 나서면서 인도 영토 안에서도 테러로 인한 희생자가 속출했다. 이들은 인도나 파키스탄으로의 귀속이 아니라 카시미르의 분리 독립을 목표로 하고 있다. 1989년 이래 7만 여명의 카시미르인이 사망했는데, 비무장 민간인이 대부분이라고 한다.

그러나 현지 인권단체가 주장하는 사망. 실종자 규모는 그 2배가 훨씬 넘는다. 투옥된 사람은 4만 명 이상, 난민도 17만 5천명 이상 발생했는데 더 문제는 현지에서 활동하는 민간단체의 실태조사 외에는 제대로 된 공식 통계도 없다는 것이다.

카시미르 문제의 해법으로 인도나 파키스탄으로의 귀속은 대중적 지지를 잃었다. 남은 대안은 분리독립론과 자치론이다. 현지의 여론은 분리독립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강한데 현실적으로 어렵다. 인도나 파키스탄이나 두 나라 모두 허용할 생각도 없고 분리 독립된 카시미르가 정치적, 경제적으로 독자 생존할 수 있는 가능성이 낮기 때문이다.

인도연방에 소속되어 있으면서 높은 수준의 정치적 자립을 이루는 것을 목표로 하는 자치론은 ‘카슈미르의 전폭적인 자치를 허용한 인도 헌법 제370조’라는 법적 근거를 이미 가지고 있다. 그러나 계속된 무력분쟁을 빌미로 인도의 지배집단은 그 시행을 무기한 연기하고 있는 상황이다. 자치를 허용하지 않아 갈등이 고조되고 그 갈등을 핑계로 다시 자치를 허용하지 않는 악순환이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위에서 본 것처럼 세 번의 인도-파키스탄 전쟁은 남아시아를 둘러싼 국제정세와도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었고 지금도 그렇다. 하지만 동시에 인도의 국내정치적 맥락도 카시미르 분쟁의 중요 원인이다.

첫 번째 전쟁은 인도와 파키스탄 정부 둘 다에게 필요했던 신생 독립국가의 안정과 결속력 강화에 큰 도움을 주었다. 인도의 1964~6년은 초대수상이자 독립의 아버지였던 네루가 사망하고(1964년 5월) 그의 뒤를 이은 샤스뜨리의 급사 그리고 인디라 간디의 집권이라는 정치적 급변의 시기였고 1965~6년의 대기근과 1966년의 외환위기로 국민들의 경제적 삶이 큰 곤경에 처한 시기이기도 했다.

1966년의 외환 위기로 인도 경제는 국가자본주의 모델의 계획경제가 중단되고 세계은행이 개입하게 된다. 1991년의 외환위기로 신자유주의가 전면화 되는 것과 동시에 종교공동체주의(Communalism)가 기승을 부리게 된 상황과도 유사하다.

동파키스탄이 방글라데시로 독립되는 과정에서 인도 정부가 군사적으로 개입한 세 번째 전쟁을 계기로 인디라 간디는 떨어진 대중적 지지를 일시적으로 만회할 수 있었고 그 기세를 몰아 인디라 통치(Indira Raj)라고 불리는 권위주의적 통치시대를 열었다.

1971년의 선거에서 국회의원에 당선된 인디라 간디는 네루의 딸이라는 후광과 집권당으로서의 프리미엄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부정선거에 의존해야만 할 정도로 인기가 바닥인 상태였다. 그 선거는 지리한 재판 끝에 1974년 부정선거라는 대법원의 확정 판결을 받게 되고 인디라 간디는 비상사태라는 극단적인 수단으로 정치적 곤경을 돌파하려 했다. 또 인도 정치의 가장 암적인 요소인 종교공동체주의가 기승을 부릴 명분을 준 것도 카시미르 분쟁이 인도 국내정치에 미친 영향이다.

인도 보수 정치인에게 카시미르 라는 존재는 언제든 정국의 분위기를 반전시킬 수 있는 쓸모 있는 화약 창고인 셈이다. 여기에 최근의 아프가니스탄 내전 문제까지 겹치면서 그곳은 인도 정국의 핵이라 할 수 있는 테러와 국지전을 가져다주는 마르지 않는 샘이 되어 있다.

이 점에서는 파키스탄 또한 마찬가지다. 그 가장 좋은 예가 파키스탄이 카시미르에 대한 세계적 관심을 끌어내어 향후 더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기 위해 벌인 2008년 뭄바이 테러이다. 세 번의 전쟁 모두 인도의 지배층에게 대내적으로는 큰 이익을 가져다주었고 두 나라 민중들은 갈등, 증오, 폭력으로 가득 찬 삶을 강요당했고 자신들이 마땅히 누려야 할 경제적 자원조차도 핵무기 개발 따위에 빼앗기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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