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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수구파의 생얼] 종교가 어떻게 정치를 지배하나 (0) 2015/06/11 PM 03:27

바그와트 민족의용단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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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의 이 글은 5월 인도 총선가 나오기 전에 작성한 글이다. 올 5월 총선에서 집권한 인도 국민당과 나렌드라 모디 수상의 정치적 종교적 배경을 이해할 수 있는 글이다. 힌두 종교공동체의 정치적 조직적 기반으로서 민족의용단이 존재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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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총선을 앞두고 나렌드라 모디가 인도국민당(BJP)의 수상 후보가 되면서 한동안 잠잠하던 종교공동체주의적 정치가 다시 기승을 부릴지 모른다는 우려가 확산되고 있다.

소냐 간디는 인도국민당의 지도부들을 ‘RSS의 노예들’이라고 부르며 종교공동체주의에 대한 거부감을 인도국민당 반대 정서로 연결하려 애쓰기도 했다.

이렇게 선거 때만 되면 인도국민당과 민족의용단의 관계가 대중들의 관심사가 된다. 인도에서 종교공동체주의를 부추기는 수구집단 중에 가장 대표적인 단체가 민족의용단이다.(민족의용단 (RSS)에 대해서는 이 연재 2회를 참조) 인도국민당의 종교공동체주의적 지향도 민족의용단에 기원을 두고 있다. 이번 회에서는 민족의용단과 인도국민당의 관계를 짚어보려 한다.

이 두 집단의 관계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견해가 있다.

한편에서는 민족의용단과 인도국민당의 관계를 아버지와 아들, 멘토와 멘티, 큰형(Big Brother)와 동생 등으로 묘사한다. 또 바즈파이 수상하의 인도국민당 정부 이래로 민족의용단과 인도국민당의 관계가 소원해졌고 종교공동체주의에 대한 거부감 때문에 집권을 노리는 인도국민당이 종교공동체주의로 우선회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보는 시각도 있다.

정작 민족의용단은 자신들은 문화단체에 불과하며 정치와는 관련이 없고 인도국민당과도 친하게 지내며 조언을 주고받는 수준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간디 암살 이후 역사적으로 세 번에 걸쳐 활동이 금지되었던 민족의용단이 자신들의 주장 그대로 문화단체라고 생각하는 인도인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리고 인도국민당이 민족의용단의 최종 결정을 뒤집을 만큼의 자율성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회의적으로 보는 시각이 많다.

민족의용단은 설립된 1920년대부터 문화단체를 표방했지만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할 의도가 있다는 것을 결코 숨기지 않았다. 민족의용단의 출발 자체가 1920년대 하층 카스트의 사회적 상승 욕구에 직면한 상층 카스트와 지주 연합세력의 대응이었다.


초기 민족의용단의 이데올로기(대표적인 이데올로그가 Golwalkar다)는 암베드카르가 이끄는 달리트 운동이 평등을 주장하는데 맞서 카스트에게는 고유하게 배당된 몫이 있다고 노골적인 차별을 주장했다. 즉 처음부터 카스트 정치를 목적으로 생겨난 것이다.

이 때의 이데올로기는 약간의 변형만을 거쳐 지금도 인도정치에서 되풀이되고 있다. 그들이 비정치적 단체라고 선언한 것도 자의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 민족의용단의 정관 4조 b항에는 민족의용단이 정치가 아니라 “순수하게 문화적인 일에 몰두한다”라고 명문화하고 있다.

이 조항은 1949년에 만들어진 것이다. 1948년 간디 암살사건을 계기로 세속주의 노선을 가던 네루 수상은 민족의용단의 활동을 금지시킨다. 민족의용단이 활동 재개를 계속 요청하자 당시 내무부 장관이었던 파텔이 이 정관을 조건으로 1949년 민족의용단 금지 조치를 해제해준 것이다.

이 때의 정관이 민족의용단의 정치 활동을 실제로 약화시키지는 못했다. 오히려 자신들의 노선을 실행할 제도 내의 정치조직이 더욱 더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민족의용단은 1954년부터 선전요원(pracharaks)을 양성하는 정치훈련캠프를 운영했다. 그들은 이렇게 양성된 선전요원들을 인도국민당의 전신인 국민단(Jana Sangh)을 통제하려 했다. 민족의용단은 자체의 정치적 활동은 부인하지만 자원봉사자(swayamsevaks)들이 정당에 가입하는 것은 허용한다. 민족의용단은 지금도 이런 방식으로 인도국민당을 비롯한 여러 정치조직에 자신들의 대리인을 파견한다. 이들을 통해 민족의용단의 제도 정치조직에 대한 통제가 작동한다.

바즈파이, 아드바니, 나렌드라 모디와 같은 힌두 우익의 대표적 정치인들이 모두 선전요원(pracharaks)으로 활동했던 경력을 가지고 있다. 민족의용단이 과거에 국민단(Jana Sangh)에 가했던 통제는 아주 노골적이어서 민족의용단의 노선에 충실하지 않은 국민단의 대표들은 민족의용단의 공개적인 명령으로 당에서 축출되기도 했다. 정치로부터 손을 떼겠다는 1949년의 약속은 공공연하게 무시되었다.

세속주의자 네루와 그 후계자 인디라 간디 정권 초기까지만 해도 종교공동체주의가 인도 정치 전체를 뒤흔들 힘은 없었다. 인디라 간디가 자신의 정치적 지지를 위해 파키스탄과 전쟁을 불사한 이후인 1977년에도 회의당을 물리치고 최초로 정권교체에 성공한 자나타 달 연합정부는 민족의용단과 거리를 두었기 때문에 집권할 수 있었다.

1996년 인도국민당은 당시 총선에서 회의당을 꺾고 여러 군소 정당들과 연합해 집권에 성공했다. 그러나 연정에 참여한 정당들의 이탈로 13일간만 권력을 유지하는 데 그쳤다. 실제 이유는 각 당들의 정치적 이해득실 때문이었지만 표면상으로 내세운 핑계는 인도국민당의 지나친 종교공동체주의적 성향이었다.

그 이후 다른 당들은 인도국민당과의 연합의 조건으로 민족의용단과의 거리두기와 이념적 유연성을 요구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그 요구를 어느 정도는 수용했기에 인도국민당은 1999년 마침내 재집권에 성공했고 임기를 채울 수 있었다.

심지어 노골적인 종교공동체주의 열광을 등에 엎고 1999~2004년에 단독으로 집권했을 때에도 공식적으로는 민족의용단과 거리를 두어야했다. 이때 수상이었던 바즈파이는 민족의용단이 주도하는 람(Ram) 사원 건립운동을 불허하는 조치를 취했다.

하지만 겉으로 드러난 말과 몇 가지 행동만 보고 판단하는 것은 섣부르다. 인도국민당 내에서 활동하는 민족의용단 활동가들은 겉으로는 간디식 사회주의를 표방한다. 하지만 이는 가장일 뿐이고 언제든 람 숭배라는 본색을 드러낼 준비가 되어 있다.

민족의용단이 정치에 노골적으로 개입한 사례도 반대 사례보다 더 많다. 1999년 민족의용단은 자신들에게 더 충성하는 인물로 재무부장관을 교체하라고 요구해 관철시켰다. 바즈파이 수상은 집권 당시 미국을 방문해서 한 연설 중간에 민족의용단에 대한 충성을 확인하기도 했다.

2005년에는 당시 민족의용단의 대표였던 수다르샨(K. S. Sudarshan)이 어느 TV 프로그램에 나와 바즈파이와 당의 대표적 인물인 아드바니가 이제 더 젊은 지도자들에게 자리를 내어주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자 당 내에서 절대적 권력을 행사했던 두 사람은 일거에 힘을 잃어버렸다.

특히 아드바니는 2005년 파키스탄을 방문했을 때 파키스탄 건국의 아버지 진나에 대해 우호적인 연설을 했다가 인도국민당 대표직에서 물러나야 했다. 아드바니는 재기해 2009년 선거에서 인도국민당의 수상 후보로 나서기도 했다. 하지만 2009년 선거에서도 패하자 민족의용단의 새로운 대표가 된 바그와트(Bhagwat)는 아드바니에게 책임을 지고 물러나게 했다.



인도국민당에 대한 민족의용단의 영향력이 다시 커진 것은 2004, 2009년 선거에서 인도국민당이 연달아 패배했기 때문이다. 민족의용단은 인도국민당이 집권기간 동안 도덕적으로 타락했고 선거 패배는 그 대가라고 주장했다.

그들은 정치적 승리는 사회적, 문화적 분위기의 결과물이고 인도국민당의 선거 승리나 실패는 민족의용단이 자신들의 종교공동체주의적 이데올로기가 받아들여질 만한 문화적 분위기를 형성하느냐에 달려있다고 말한다. “우리의 문화가 우리의 정치가 될 것이다.”라고 그들은 당당하게 주장한다.

2013년 민족의용단은 노골적으로 제도 정치에 관여하기 시작했다. 나렌드라 모디가 인도국민당의 선거대책위원장직과 수상 후보에 연이어 지명된 것은 민족의용단이 인도국민당을 지배한다는 것을 부인하는 최소한의 가식마저 포기한 증거라고 봐야한다.

이번 총선을 앞두고 모디에게 인도국민당의 수상 후보 자리를 맡긴 것도 바그와트라고들 한다. 2013년 3월 BJP는 당의 최고의사결정기구인 의회위원회(Parliamentary Board) 및 중앙선거대책위원회(Central Election Committee)의 위원으로, 또 6월에는 중앙선거대책위원회의 위원장으로 임명하였다.

그러자 당의 원로로 명맥을 유지하고 있던 아드바니는 모든 직위를 사퇴하겠다며 모디 임명에 반대하고 나섰다. 이 때 바그와트가 개입해 모디의 임명을 밀어붙였다. 그는 아드바니에게 당 의회위원회의 결정을 존중하라고 공개적으로 권유했다. 사람들은 표현은 정중했지만 사실상의 아드바니 해임 명령이라고 받아들였다. 모디는 도대체 어떤 정치인이기에 민족의용단의 적극적인 지지를 받는 것일까?

그는 1950년 구자라뜨(Gujarat)주에서 대대로 식료품상을 하는 중하층 카스트에 해당하는 집안에서 태어났고 어린 시절부터 신앙심이 깊어 한때 싼야씨(Sanyasi: 힌두 수도자)를 꿈꾸기도 했다. 모디가 10대 후반일 때 홍차 장사를 했는데 가게의 단골이었던 민족의용단 간부의 영향으로 하부청년조직에 가입했고 곧 선전요원이 되었다.

1987년에 모디는 민족의용단의 명령으로 인도국민당 구자라뜨 주 본부에 파견되어 조직담당비서(Organisation Secretary)로 일하게 된다. 이 일은 민족의용단과 국민당의 관계를 잘 보여준다. 모디는 같은 민족의용단 선전요원 출신이었던 바즈파이와 긴밀한 관계를 맺었다.

수상이 된 바즈파이는 모디를 전국 조직담당 비서(National Organization Secretary)로 임명했다. 이 자리는 민족의용단과 인도국민당을 연결하는 역할을 하는 자리라고 알려져 있다. 이후 모디는 극우적 언사로 정치적 유명세를 얻는다.

구자라트 학살을 부추긴 것은 물론이고 1999년 까르길 전쟁(Kargil War)에서 파키스탄과의 평화협상이 실패로 돌아가자 어느 기자회견에서 파키스탄에게 ‘비리야니(Biryani: 무슬림들이 먹는 볶음밥)가 아니라 총탄과 폭탄을 대접할 것이다.’라고 대답해 호전성을 과시했다.

올해 1월 나렌드라 모디는 한 대중 집회에서 자신의 출신 카스트를 공개적으로 천명했다. 이런 일은 주 수상이나 중앙정부 수상을 노리는 거물급 정치인들은 잘 하지 않는 일이다. 작은 규모 선거구에 출마한 정치인이라면 출신 카스트의 지지를 등에 엎고 당선을 노려볼 수 있겠지만 다수 대중을 상대로 하려면 특정 카스트가 아니라 힌두 전체를 포괄한다고 말해야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모디의 이날 발언과 그가 쓴 책은 민족의용단이 지향하는 힌두트바 정치의 중요한 작동방식을 잘 보여준다. 모디는 청소일을 세습하는 불가촉천민 집단 발미키스(Valmikis)의 예를 든다.

“그들은 신이 부여한 이 일(청소)를 전체 사회의 행복과 신을 위해 해야 할 의무가 있다. 세대를 이어가며 말이다. 그리고 이것을 내적인 정신적 활동이라고 부른다.” 카스트 차별을 노골적으로 지지하는 듯한 말이다. 그러나 곧바로 모든 카스트가 이런 식으로 신이 부여한 일을 함으로써 힌두 전체의 조화로운 통일을 이룰 수 있다고 강조한다. 모디의 발언은 힌두트바 정치의 양면성을 잘 보여준 것이다. 조화로운 통일을 위한 차별이라는 자기모순의 정치를 말이다.

모디의 말에서 알 수 있듯이 힌두트바 정치는 본질적으로는 다른 카스트들이 엄격하게 규정된 지위에 자리해야 한다는 카스트 피라미드에 근거한 이데올로기다. 이것이 그들의 진짜 생각이다.

그러나 하층 카스트 민중들을 동원하기 위해서는 단일한 힌두 정체성을 강조한다. 그래서 명목상으로는 카스트 간의 엄격한 차별과 위계를 드러내지 않으려 한다. 지위가 낮은 카스트 소속의 민중들이 자신들의 카스트 정체성보다 힌두 정체성을 더 우선시하도록 만드는 것이 힌두트바 정치의 힘의 원천이다.

1980년대 이후 불가촉천민들과 기타 후진계급에 대한 유보제도가 확대되자 민족의용단은 이로 인해 자신들의 아이들이 마땅히 누려할 몫을 빼앗겼다고 느꼈다. 처음에는 달리트, 기타 후진계급을 상대로 폭력적 행동을 자행했지만 곧 이데올로기적 포장으로 전환했다. 이것이 람 사원 건설 운동이 시작된 동기다.

이 운동을 통해 민족의용단은 달리트들을 힌두트바 정치 안으로 포섭해 종교간 갈등의 최전선에 배치했다. 힌두 정체성이 카스트 정체성보다 우선시 되면 종교공동체주의의 계급 배반의 정치가 작동한다.

무자파르나카르 사건(이 연재의 7회 참고)에서도 지역의 힌두계 자뜨(Jat) 카스트와 무슬림 간에는 하층의 소수집단이라는 연대의식이 존재했었다. 그러나 종교공동체주의자들의 선동으로 힌두 정체성을 강조하면서 이 연대는 깨졌다. 즉 계급 간 연대를 종교적 적대로 대체시킨 것이다.

민족의용단의 이데올로기는 실제로는 카스트 간 차별을 유지하면서 말로만 카스트 간의 조화(평등이 아니라)를 이야기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힌두 정체성에 본질적인 카스트간 위계가 발생시키는 사회적 압력이 감소되지는 않는다.

하층 카스트들은 카스트 위계에서 발생한 분노를 무슬림을 향해 발산한다. 이것이 종교공동체적 폭력이고 하나의 힌두라는 이데올로기가 그 폭력을 정당화한다. 이렇게 힌두트바 정치는 카스트문제에 대한 기만적 대응으로 대중을 정치적으로 동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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