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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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2014년 6월24일에 쓰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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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6월 13일, 중국공산당 총서기 시진핑이 당 중앙위원회 산하의 중앙재정영도소조(中央????小?)의 조장 자격으로 국가에너지안전전략회의를 주재했다고 중국의 관영 신화통신이 보도하면서 중국정치전문가들의 관심을 끌고 있다.
이제 시진핑은 총서기 취임 2년여 만에 당과 국가의 핵심적인 10개 조직의 책임자 자리에 오르면서 명실상부한 최고 권력자임을 내외에 공포했다.
지난 2012년 11월 개최된 중국공산당 제18기 1차 중앙위원회 전체회의에서 총서기와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으로 선출된 시진핑은, 2013년 3월 개최된 전국인민대표대회 제12기 1차회의에서 중화인민공화국 주석과 국가중앙군사위원회 주석으로 선출되면서 전임인 후진타오로부터 순조롭게 권력을 이양받았다.
특히 총서기 취임과 동시에 중국공산당의 실질적 권력기반인 인민해방군의 통솔권까지 이어받음으로서 부족한 베이징에서의 권력 기반을 신속하게 보완하면서, 후진타오의 직계인 총리 리커챵과 쌍두마차 체제를 형성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2013년 12월 개최된 중국공산당 제18기 3차 중앙위원회 전체회의를 기점으로 변화의 조짐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 회의에서 새로 설치가 결정된 심화개혁영도소조(中央全面深化改革??小?)와 국가안전위원회(中央?家安全委??)의 최고 책임자 자리를 차지하더니 계속해서 새로 설립된 인터넷안전과 정보화소조(中央??安全和信息化小?)와 국방개혁심화소조(中央?委深化?防和??改革??小?) 뿐 아니라 중앙재정영도소조의 조장까지 맡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중앙재정영도소조는 1980년 설립이후 총서기인 쟝쩌민(江?民)이 조장직을 차지했던 경우를 제외하면 대부분 경제문제를 총괄하는 국무원 총리가 이 소조의 조장 직을 수행했었다.
쟝쩌민 집권기의 주롱지(朱?基) 총리와 후진타오(胡??) 집권기의 원자바오(?家?) 총리가 바로 이 소조의 조장이었다. 그리고 시진핑-리커챵 체제가 막 성립도 후의 보도에서도 리커챵이 조장직을 수행하는 것으로 보도됐었다. 그러다가 최근의 신화사 보도를 통해 시진핑이 이 소조의 조장으로 보도되면서 해외 중국전문가들의 주목을 끌게 되었다.
이로써 시진핑은 총서기가 당연직으로 차지하던 국가 주석, 중앙군사위 주석, 외교 및 국가안전영도소조(中央外事/?家安全工作??小?)와 대만문제영도소조(中央?台工作??小?) 등을 포함해 무려 중국공산당과 중화인민공화국의 핵심적인 10개 기구의 책임자가 되었다. 마오쩌뚱(毛??)과 떵샤오핑(?小平) 같은 중국공산당의 절대 권력자들보다 더 많은 직책을 차지하고 외견상으로는 오히려 그들보다 더 강력한 권력을 차지한 것처럼 보인다.
문제는 시진핑 집권 초기부터 최근까지 진행된 중국공산당의 권력구조의 변화를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점이다.
과연 시진핑은 마오쩌뚱이나 떵샤오핑을 능가하는 절대 권력을 집단지도체제가 이미 자리 잡은 21세기 초반의 중국공산당 권력 구조 내에서 다시 확립한 것인가? 아니면 집단지도체제가 가져온 의사결정의 문제점을 개선해 좀 더 효율적인 집단지도체제로의 진화인가?
마오쩌뚱은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이후, 단지 2개의 직책, 즉 중국공산당중앙위원회 주석과 중화인민공화국 주석 직을 보유했을 뿐이다. 그러나 마오쩌뚱과 생사고락을 같이 했던 창당시기의 동료들 누구도 마오쩌뚱의 절대 권력을 견제하지 못했다.
떵샤오핑 역시 문화대혁명이 끝나고 개혁개방의 시대를 진두지휘하면서 맡았던 직책이 당의 중앙고문위원회(中?共??中央??委??) 주임과 중앙군사위주석 직이었다. 쟝쩌민이 총서기에서 물러난 후에도 2년 동안 더 유지했던 직위가 바로 중앙군사위 주석이었다.
후진타오를 제외한 중국공산당의 1인자들이 가장 마지막까지 갖고 있었던 직위가 바로 당 총서기가 아닌 당 중앙군사위 주석이었다. 왜 시진핑은 후진타오로부터 중국공산당의 가장 핵심 권력인 중앙군사위 주석 직까지 함께 물려받으면서 순조롭게 출발했지만 이에 만족하지 못하고 10개에 달하는 당과 국가의 핵심 직책을 혼자 독차지 했을까?
이는 최근 우리가 목격하고 있는 중국의 정치적 상황과 깊은 관계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반부패 투쟁을 명분으로 전-현직 고위층을 대상으로 진행되고 있는 정치적인 압박은 시진핑 체제의 탄생과도 무관하지 않다.
쟝쩌민의 후진타오에 대한 적대감과 탄압은 그가 현직에서 완전히 은퇴한 후에도 지속되었으며, 결국 시진핑은 쟝쩌민의 후원으로 후진타오의 직계인 리커챵을 총리로 밀어내고 당의 1인자가 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쟝쩌민은 자신이 후원한 시진핑과 후진타오 세력의 연대에 불만을 품고 자신의 최측근이자 후진타오 시절 정법위 서기로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던 조우용캉(周永康)과 후진타오에 의해 직할시이지만 변방인 총칭시 당위원회 서기로 좌천되어 불만을 품고 있던 보시라이(薄熙?)에 의한 정변을 기도했지만 실패하고 말았다.
후진타오 임기 말 보시라이의 부패사건에 의한 실각과 시진핑 집권 이후 지속되고 있는 부정부패를 명분으로 내세운 조우용캉과 그의 측근들에 대한 수사는 본질적으로 쟝쩌민 세력과 시진핑-후진타오 연대세력의 대결이 계속되고 있음을 말해준다.
개혁개방의 완성을 위한 떵샤오핑 등 원로 세력들의 적극적인 지지를 발판으로 13년 동안 막강한 세력을 형성한 쟝쩌민은 후진타오 집권 10년 동안에도 당의 핵심 권력기구인 정치국 상무위원회에서 다수를 형성한 채 후진타오를 견제했으며 시진핑 집권 초기인 현재에도 그러하다.
결국 시진핑은 기존의 당 기구들과 역할이 겹치거나 비슷한 새로운 역할을 수행하는 기구를 설립하고 자신이 직접 책임자가 됨으로서 집단지도체제 하에서 독자적인 권한을 행사하면서 자신을 견제하고 있는 쟝쩌민 추종자들에 대항하고 그들의 견제를 돌파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여전히 당의 권력구조 자체가 정치국 상무위원회와 정치국의 집단적인 의사결정을 기본으로 운영되고 있어서 시진핑이 현재보다 더 많은 직책을 독점한다 하더라도 밖에서 보는 것처럼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다만 이러한 새로운 기구들의 설립과 인적 재배치가 지난 20여 년 동안 정치국 상무위원들을 포함한 핵심 정치국원들의 지나치게 독자적인 권한 행사를 최소한이나마 견제하고 당 총서기에 의한 전반적인 지도라는 형식을 어느 정도는 완성시켜 줄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비단장수 왕서방”으로 상징되는 중국의 경제적 발전과 변화에 비해 공산당으로 상징되는 중국의 정치적 변화는 서구적인 시각으로 보면 답답하고 불편할 뿐이지만, 소련을 위시한 대다수 사회주의 국가들의 몰락과정에서의 교훈, 2000년이 넘게 지속되어 온 소수 지배세력의 권력독점 등을 되새기면 현재 중국정치가 직면하고 있는 많은 문제점들에도 불구하고 중국공산당의 정치적 변화와 실험은 결과와 내용면에서 의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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