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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무엇을 위해 희생을 해야 하는가? (0) 2020/09/21 AM 12:55

무엇을 위해 희생을 해야 하는가?

 

 

 

왕정국가는 왕을 위해 희생하고 종교국가는 신을 위해 희생한다. 그렇다면 민주국가는 누구를 위해, 무엇을 위해 희생을 해야 하는가? 민주국가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 중 하나가 바로 이것이다. 하지만 이 문제는 공공연하게 논의하기가 어렵다. 누가, , 무엇을 위해 희생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 논의를 한다고 가정해보자. 어떤 반응이 일어나겠는가? 왜 국민을 희생시킬 생각을 하느냐는 반발이 일어날 것이다. 누군가의 희생이 필요하다는 것, 그리고 이미 일상적으로 희생을 하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말이다. 잠시 희생의 사전적 정의에 대해 알아보겠다. 「다른 사람이나 어떤 목적을 위하여 자신의 목숨, 재산, 명예, 이익 따위를 바치거나 버리거나 빼앗기를 것을 뜻한다.」 희생은 크게 세 가지로 나뉜다. 첫째, 하고 싶어서 자발적으로 한다. 둘째, 하기 싫지만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한다. 셋째, 하기도 싫고 필요도 없다고 생각하지만 강제로 하게 된다. 지금까지는 보통 셋째로 강제로 희생을 당했다. 피지배자들은 언제나 지배자들에게 자신의 것을 빼앗겼다. 전쟁이 나면 끌려 나와 왕의 검이나 방패가 되어 싸우다 죽었다. 천재지변이 일어나면 제물로 바쳐져 신의 분노나 민중의 분노를 달랬다. 왕과 신을 위해 생명과 재산을 빼앗기는 것은 일상적인 일이었다. 신분사회는 이런 희생이 강요되었다. 정복자의 논리로 노예가 된 이들은 하루 종일 일을 하고도 제대로 된 대가를 받지 못했다. 평민들의 처지도 좋은 것이 아니었다. 남성은 평생 일만 하다가 죽었고 여성은 평생 집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죽었다. 먹고 사는데 급급했던 그들에게 꾸밈은 사치였다. 힘이 약한 여성에겐 보다 더 가혹했다. 여성은 종종 씨받이란 이름의 아이를 낳는 도구로 활용되기도 했다. 공녀로 팔려나갔다. 과부는 재가도 하지 못했다. 그들은 당시 인간으로 대접을 받지 못했다. 이런 천대는 최근까지 이어졌었다. 얼마나 천대받았으면 남아선호사상이 판을 쳐서 수많은 여자아이들이 낙태를 당했겠는가? 지금이야 그런 문화가 대부분 사라졌다. 오히려 여자아이가 태어나면 기뻐하는 사람들도 많다. 하지만 그 잔재는 여전하다. 유교문화가 남아있지 않는가? 여성주의로 인한 사회적 갈등은 사실상 남성사회의 질서를 유지하던 유교문화가 만든 셈이다. 여성은 남편을 섬겨야 한다고 가르쳤던 것이 유교였다. 섬김의 뜻은 다음과 같다. 「윗사람을 잘 모시어 받들다.」여성은 남성의 아랫사람이라 전제하고 가르쳤던 것이다. 유교는 백성을 지배하고 연하를 지배하고 여성을 지배하는데 사용된 교리이며 학문이며 도덕이었다. 이 질서에 여성은 천대받고 차별 받았다. 여성차별의 본질은 남성보다 힘이 약하다는 것에 있다. 여성의 힘이 약했기 때문에 남성사회가 되었다. 그 남성사회의 질서를 유교가 유지했던 것이다. 그랬던 과거와 달리 지금은 과학의 힘으로 무력()과 생산성(기계)이 거의 비등해졌다. 역할에 따라 여성이 더 우수한 분야도 많은 상황이 되었다. 여성이 차별 받았던 근거가 사라진 것이다. 여성은 과학 덕분에 인권이 올라간 셈이다. 그렇게 올라간 인권으로 평등사회가 만들어지고 있다. 되려 역차별 논란까지 나올 정도다. 그런 평등사회를 이룩하는 과정 속에서 유교는 걸림돌이 되었다. 과거 불평등했던 국가의 도덕이 관습으로 남아 사회적 불평등을 초래했던 것이다. 집안일, 명절, 혼수, 징병 등의 불평등은 과거 문화가 만든 잔재들이다. 여성주의자들이 가장 먼저 했어야 하는 것은 여성의 권익이나 남성혐오가 아니라 유교문화 철폐였음을 분명히 하고 싶다. 유교문화가 만든 폐해로 나타나는 차별 몇 가지를 바꾼다고 해서 평등사회가 오는 것이 아니다. 평등사회를 바란다면 유교 자체에 문제가 있음을 인식하길 바란다. 일제의 침략에 대한 반발로 조선이 미화되다 보니 이런 문제들에 대한 해결이 이루어지지 못하는 것 같아 안타깝다. 당시 조선왕조나 일본제국이나 피지배자들에게는 역겨운 지배자들이었다. 알아볼수록 조선말기를 옹호할 수가 없더라. 민주국가에서 굳이 누가 낫네 다투지 말고 미래로 갔으면 좋겠다. 과거에 얽매여서 조선미화를 하다가는 한국의 발전도 하지 못하게 되니까 말이다. 일본과의 갈등은 철저하게 현재의 시각으로 봐야 한다. 연좌제가 허용되지 않는 이상, 그들의 잘못은 과거에 있는 것이 아니라 현재 과거의 잘못을 외면하려는 것에 있기 때문이다. . 조선왕족들이 일본의 귀족이 된 것을 보면 참 할말이 없다. 언제나 그랬다. 지배국가에서는 약자를 희생시키고 강자가 호의호식을 했다. 내가 분노하고 내가 동정하는 것은 조선의 기득권이 아니라 그 시대 피지배자들이다. (일부 현명한 기득권도 있긴 하다.) 이처럼 과거의 피지배자들은 이외에도 말도 못할 정도로 많은 것들을 희생당해왔다. 인간의 사회는 누군가의 희생 위에 성립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어느 체제, 어느 제도도 누군가의 희생은 필연적이다. 당장 한국도 과거 한국인의 희생을 발판 삼아 성장하지 않았던가? 세계의 지원, 미국의 지원이 있었다고 해서 그들의 희생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경제의 성장도 학문의 성장도 민주주의의 성장도 전부 희생을 발판 삼아 성장했다. 사건사고들이 발생해도 국민들이 희생해서 극복했다. IMF가 터지자 국민들이 손수 금을 모아 국난을 극복하는데 큰 도움을 줬다. (대기업의 배를 불려줬다는 비판이 있다. 누군 희생을 하고 누군 이익을 얻고.) 태안에서 삼성1호와 허베이 스피릿호의 충돌로 인한 원유 유출 사고로 태안 앞바다가 기름으로 뒤덮이자 연 100만명에 가까운 자원봉사자가 찾아가 수작업으로 기름때를 제거해 생태환경을 복원하기에 이르렀다. 이외 다양한 사건사고들을 보라. 국민들이 희생해서 극복한 사례가 많다. 그러니 한국만큼 희생의 중요성을 모르는 국가는 없을 것이다. 사회질서를 준수하는 것, 세금을 내는 것 등 공동체에 속하게 되면 공동체를 위해 자연스럽게 희생하게 된다. 의료보험도 마찬가지다. 세금으로 운영되는 의료보험은 개인보다는 공동체를 위해 존재한다고 본다. 자신을 위해 내는 보험비가 결과적으로 건강한 사람이 희귀병이나 중병을 앓고 있는 사람의 의료비로 사용된다. 공동체를 위한 희생이다. 지금까지의 이런 희생은 지금까지는 어느 정도 관습적인 측면이 있었다고 본다. 지배국가였던 시대의 관습으로 희생을 강요당했던 사람들이 많았을 거란 얘기다. 사고 치는 사람 따로 있고 책임 지는 사람 따로 있고. 이거 어디서 많이 본 그림 아닌가? 지배국가에서 늘 일어나던 일이다. 그러나 이제는 그런 것도 점차 사라지도 있다. 그 어떤 것도 희생하지 않겠다며 나선 여성주의자들의 주장을 보라. 꾸밈, 결혼, 임신 등 조금이라도 손해를 볼 것 같으면 전부 거부하고 있다. 그것에 반발한 남성들 또한 희생할 수 없다며 군 징병과 징용을 비판하고 있는 상황이다. 결혼을 거부하고 징병을 거부한다. 출산율이 줄어들고 이민이 증가한다. 온갖 단체들이 제 이익만 요구하는 집단 이기주의를 보이고 있다. 국민들이 희생을 거부하자 희생 위에 서 있던 공동체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지배국가처럼 강제로 희생할 수 없게 된 이상, 자유국가처럼 모두가 조금씩 자유롭게 자발적으로 희생을 해야 하는데, 그걸 하지 않으니까 지금 국가가 흔들리고 있는 것이다. 한국은 지금 애국심을 고취시킬 수 있는 소식으로 아슬아슬하게 버티고 있는 중이다. 사상누각. 사회의 수많은 문제는 지배국가의 문화를 관습적으로 무분별하게 수용했기 때문이다. 도덕, 가치관, 자발적 희생의 이유. 이 세 가지를 민주국가에 맞게 재정립해야만 기초가 튼튼한 민주국가로 거듭나게 될 것이다. 지금 어떤 정권이든 개혁을 하면 반발이 나오고 있다. 왜 그런 걸까? 그건 일괄적으로 손해를 전부 거부하고 있기 때문이다. 올바른 정책을 시도하면 부당한 이익을 취해왔던 이들이 손해를 본다. 그릇된 정책을 시도하면 정당한 이익을 취해왔던 이들이 손해를 본다. 뭘 하든 누군가는 손해를 보게 되어 있다. 손해 자체에 초점을 맞추면 어떤 개혁이든 반발이 일어나 지지율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그 반발 때문에 개혁이 늦춰져 국가발전에 해가 되고 있다. 일부 집단의 이익 때문에 모든 공동체의 구성원이 손해보고 있는 것이다. 이제는 상황에 따라 손해도 받아드릴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어야 한다. 그걸 못하면 민주국가는 발전하기 어렵다. 예컨대 일부 집단의 이익 때문에 인공지능과 로봇을 거부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냥 뒤쳐지는 거다. 독재국가야 밀어붙여서라도 발전할 수 있겠지. 근데 민주국가는 그게 안되지 않나. 국가가 쇠퇴하는 거 특별한 이유로 발생하는 게 아니다. 국가의 변화가 멈추면 그 나라는 쇠퇴하게 되어 있다. 진작 조선이 중국이 세계의 중심이라는 생각에서 벗어나 세계를 떠돌며 문물을 접하고 성장했었다면 식민지배라는 치욕을 겪지는 않았을 것이다. 역사를 아는 한국인이라면 결코 변화를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그것이 설령 손해를 준다고 해도 말이다. 한국은 희생으로 성장했고 희생을 거부해서 흔들리고 있다. 이제는 더 이상 국가를 위해 희생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누군가의 희생은 반드시 필요하다. 그 누군가는 모든 국민에 해당되는 일이다. 연령, 성별, 학력, 지위 등 관계없이 모든 국민은 민주국가에 살고 있는 이상 자발적인 희생을 각오해야 한다. 그게 국가의 주인이 할 일이다. 그러지 않으면 공동체는 무너질 수밖에 없다. 제 이익만 챙기는 공동체가 어찌 유지될 수 있겠나. 그런 공동체는 사분오열로 무너지고 말 것이다. 희생은 국가존립과 발전이 걸려 있을 정도로 중요한 문제다. 그렇다면 어떻게, 누가, 무엇을 위해 희생을 해야 하는가? 이번에는 이 주제로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그럼 시작하겠다.

 

 

답을 먼저 말하겠다. 민주국가에서 희생은 나를 위해서 희생을 해야 한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위해서 희생을 해야 한다. 왕조국가가 왕을 위해서 희생하고 종교국가가 신을 위해서 희생한다면 민주국가는 나를 위해서 희생해야 한다는 것이다. 일견 이해가 되지 않을 수가 있다. 다음 두 가지 물음을 가정하고 진행해보자. 첫째, 그게 무슨 희생이라 할 수 있나? 둘째, 자신을 위한 희생이 공동체에 도움이 되겠는가? 먼저 첫째의 물음에 대한 답을 적어보겠다. 희생은 다른 사람이나 어떤 목적을 위하여 자신의 것을 바치거나 버리거나 빼앗기는 걸 뜻한다. 요는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위해 자신의 것을 바치는 것 또한 희생의 하나라는 것이다. 한국을 좋아하는 유학생이 있다고 가정하자. 그 사람이 한국을 사랑하여 해외의 좋은 일자리를 마다하고 한국으로 와서 일을 하는 것을 희생이라고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애국심이라. 많은 사람들이 애국심을 비판하는 것은 그걸 빌미로 희생을 강요했기 때문이다. 국가를 위해 희생하라고 강요하니 애국심에 진절머리가 난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희생기피는 주로 이것 때문이었다. 그것과 별개로 스스로 국가를 사랑하여 희생하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세뇌하지 않는 이상 말이다. 국가를 위해 민족을 위해서라는 명분으로 자폭테러 하는 사람들을 보면 과연 그 희생이 자발적이었는가 의문이 든다. 아이에게 폭탄을 건네줘서 자폭하라는 건 아마 자발적이지는 않을 것이다. 인류애가 충만한 사람이 있다고 가정하자. 그 사람이 기아에 허덕이는 아이들을 가엾게 여겨 아프리카에 가서 먹이고 재워주는 것을 희생이라고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동물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고 가정하자. 그 사람이 길거리에 돌아다니는 동물들을 어여쁘게 여겨 자신의 시간과 돈을 사용해 그 동물들을 돌봐주는 것을 희생이라고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개인적으로 해외보다 한국을, 동물보다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더 중요한 것이 아닐까 싶긴 하지만 강요할 수는 없다. 그들의 의지로 그들이 희생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래도 이해가 안 된다면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위해 쏟는 시간과 열정과 자본을 떠올려보자. 아이돌을 좋아해서, 취미를 좋아해서 정신적 이득과 물질적 손해를 보는 것도 자신을 위한 희생이다. 다음은 둘째의 물음에 대한 답을 적어보겠다. 공동체 성립을 위한 희생은 공동체를 위한 희생이 되어야 하는데, 자신을 위한 희생이 과연 얼만큼 공동체에게 이익이 되겠는가? 그런 의문이 들 수 있다. 이기적인 사람과 이기적인 집단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희생을 한다. 사실 그런 희생은 공동체에 큰 도움이 안 된다. 오히려 해가 되는 경우가 많다. 하청업체나 비정규직을 외면하고 자신들의 이익만 챙기는 노조가 있다고 가정하자. 이성을 혐오하고 증오하는 평등주의자가 있다고 가정하자. 그들의 희생이 사회에 얼마나 도움이 되겠는가?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게 별로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어떤 개인이나 집단도 이기적인 주장을 할 수 있다. 노조나 여성주의자가 비판을 받는 것은 그들의 이기적인 주장 때문이 아니다. 그들의 주장을 용인한 사람들과 허용한 정치가들 때문이다. 그런 이기적인 주장이 정책으로 이어지고 법률로 제정되니까 사회논란이 발생했던 것이다. 특히 젊은 남성이 분노하는 것은 여성에 대한 편애로 소외 받은 것이 크다고 본다. 사실 모든 인간은 소외 받으면 상처받고 슬퍼한다. 유치원생이 간식거리 못 받아서 우는 거나, 노인이 간식 못 받아서 삐치는 건 비슷하다는 거다. 너그러움이나 이해심은 사람마다 편차가 있는 거지, 연령이나 성별은 관계가 없다. 어떤 행동도 이걸 전제해야 한다. 여성정책을 내놓으면 아, 남성들이 소외 받고 상처받을 수도 있겠구나, 청년정책을 내놓으면 아, 장년들이 소외 받고 상처받을 수도 있겠구나. 반대의 경우도 동일하다. 이는 다수의 공동체 구성원이 주관에서 벗어나 객관적 시각을 갖춰 이해를 통한 납득이 가능해질 때까지 언제나 염두 해둬야 할 것이다. 잠시 이기적과 이타적에 대해 이야기를 해보겠다. 이는 크게 세 가지로 나뉜다. 하나, 이타적인 이유로 이타적인 행위를 하는 것. , 이기적인 이유로 이타적인 행위를 하는 것. , 이기적인 이유로 이기적인 행위를 하는 것. 여기서 하나는 주로 희생을 강요당할 때 발생한다. 이타적이란 자기의 이익보다 다른 이의 이익을 더 꾀하는 걸 뜻한다. 그런데 자유의지를 가지고 남을 위할 때에는 자신의 이익보다 다른 이의 이익이 더 커질 수가 없다. 이익이란 물질과 정신의 보탬이 되는 것을 뜻한다. 내 의지로 남을 위하는데 어찌 남의 이익보다 더 커질 수가 있겠는가? 자유의지로 남을 위해서 하는 행동은 내가 겪는 손해보다 내 정신적 만족도가 더 크니까 하는 거다. 국가를 위해 자발적으로 희생하는 거나, 아프리카 아이를 위해 자발적으로 희생하는 거나, 길거리 동물을 위해 자발적으로 희생하는 거나, 정신적 만족도가 크기 때문에 하는 거란 말이다. 그게 아니라면 누가 강요했거나 세뇌 당한 것뿐이다. 누가 강요하거나 세뇌했으니까 자신의 의지가 아니므로 남을 위해서 행동하게 된다. 그게 바로 이타적인 이유로 이타적인 행위를 한다는 것을 뜻한다. 여기서 둘과 셋은 자유의지로 희생할 때 발생한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희생한 것이므로 자유의지를 갖고 있다고 봐야 한다. 단지 그 결과의 차이가 있다.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위해서 행동한 것이 다른 이의 이익에 보탬이 된다면 이기적인 이유로 이타적인 행위를 한 것이 된다. 반면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위해서 행동한 것이 다른 이의 이익에 보탬이 되지 않는다면 이기적인 이유로 이기적인 행위를 한 것이 된다. 일반적으로 둘을 이타주의자라고 하고 셋을 이기주의자라고 인식해도 무방하지만 하나의 예가 있으므로 굳이 따지면 구분 지어야 할 것이다. 여기서 둘은 보통 자유주의 국가가 하는 희생이다. 분명 자유국가가 한국전쟁에서 피를 흘리며 희생한 것은 온전히 한국의 이익만을 위해서는 아니었다. 미국이 한국을 위해 물적 인적 지원을 했던 것은 온전히 한국의 이익만을 위해서는 아니었다. 한국에서 필사적으로 도움을 요청했고, 그 요청을 받아드린 것도 그들에게 이익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이념전쟁, 이념경쟁. 하지만 그것이 바로 이기적인 이유로 이타적인 행위를 한다는 것이다. 한국을 도왔던 것은 그들의 이익에 해당되었지만 그들의 이익이 한국에겐 매우 큰 이익이 되었다. 하고 싶어서 한 것이 이타적인 행위가 되는 것. 그게 바로 자유주의자의 희생방식이다. 다시 돌아와 자신을 위한 희생이 공동체에 도움이 되기 위한 방안에 대해 이야기를 해보자. 그 자발적인 희생이 공동체에 도움이 되기 위해서는 그 희생이 이기적인 이유로 이타적인 행위를 하는 것인지, 아니면 이기적인 이유로 이기적인 행위를 하는 것인지를 분명하게 구별해서 용인유무를 결정해야 한다. 그러니까 하청업체나 비정규직도 대변하고 사회와 기업까지 고려하는 노조가 되어야지 귀담아 들을 가치가 있다는 것이고, 이성을 증오하고 혐오하는 평등주의자가 아니라 사랑하고 포용하는 평등주의자가 되어야 귀담아 들을 가치가 있다는 것이다. 무언가 이익과 정의를 주장할 거면 그것을 위한 희생과 더불어 공동체에 이익이 전제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무작정 혐오하고 증오하는데 어찌 공동체에 이익이 될 수 있겠나? 기업을 혐오하고 기업의 편을 드는 노동자를 혐오하는 이들이 있다. 이들의 주장이 공동체에 이익이 되겠는가? 남성을 혐오하고 남성과 가까이 지내는 여성을 혐오하는 이들이 있다. 이들의 주장이 공동체에 이익이 되겠는가? 혐오로 가득 찬 이들의 이기적인 의견은 굳이 귀담아 들을 가치가 없다. 그들은 증오와 혐오를 정의의 도구로 만들어 서로를 할퀴고 상하게 만들었다. 공동체 외부에 대한 혐오와 증오도 바람직하지 않지만 공동체 내부에 대한 혐오와 증오는 보다 더 끔찍하다. 그렇다고 그들의 행동이 아예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다. 지금까지 과거 기업과 남성의 횡포가 어마어마하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언제까지 과거에 얽매일 셈인가? 여성이 차별 받는 것은 성별 관계 없이 모두가 협력해야 할 문제라고 말하니 왜 남성들과 협력해야 하냐며 거부하는 댓글을 봤다. 그리고 그 댓글을 지적하는 여성은 없더라. 정말 끔찍하다. 과거에 속박될수록- 과거의 불행에 집착할수록 현재와 미래는 불행해진다. 불행했던 과거를 들춰내며 감성을 자극해 서로를 공격하여 불행에 빠지지 말고 이성적으로 가능한 모두가 행복할 수 있는 길을 찾았으면 좋겠다. 제발 미래로 갈 수 있으면 좋겠다. 그래. 사실 나도 모른다. 난 한국기업이 국민들을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최근엔 모르겠는데 IMF 때만 해도 제 이익만 챙기다 끝나지 않았나. 누구 말마따나 국민들을 개돼지로 여기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제 이익만 챙기던 조선 기득권들의 전철을 밟지 않기를 바란다. 자유주의의 목적은 모든 인간의 자유다. 모든 인간이 정부, 자본, 의식주 등에서 자유롭게 자신의 능력을 갈고 닦아 인류의 발전에 공헌하는 것이 바로 자유주의가 추구하는 성장이다. 모든 인간이 자유롭게 능력을 발휘하여 사회를 행복하게 만드는 것이 바로 자유주의가 추구하는 행복이다. 자유주의는 말 그대로 인간의 자유의지에 최대한 맡기는 걸 의미한다. 알아서 잘 할게요. 라고 말하는 아이와 비슷하다. 반면 사회주의는 인간의 자유의지로 스스로를 통제하는 게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는 정부에게 그 통제를 맡기는 걸 의미한다. 알아서 못하겠으니 시키는 데로 할게요. 라고 말하는 아이와 비슷하다. 스스로 빈부격차도 사회의 갈등도 혼란도 불행도 통제 불가능한 사람들의 도피처가 바로 사회주의다. 간단히 말해 미숙하다. 신분에 지배로 통제 당하던 사람들이 주어진 자유를 감당하지 못하고 다시 한번 정부에게 통제해달라 바라는 것이 과연 제대로 된 진보인지 묻고 싶다. 사회민주주의는 민주적인 절차로 통제해달라 요구하는 것이고 공산주의는 폭력적이고 독재적인 방식으로 강제로 통제해 버리는 것이다. 이건 자유롭게 날던 새가 다시 새장으로 들어가는 모양새. 자신의 의지로 새장에 들어가는 것은 자유지만 그것은 미숙한 자유다. 자유방임주의는 제멋대로 구는 아이 같은 미숙한 자유고 사회민주주의는 자발적으로 시키는 데로만 하겠다는 아이 같은 미숙한 자유다. 흔히 공산주의가 이상이라고 하는데, 그보다 더 이상적이고 추구해야 하는 것이 바로 자유주의다. 공산주의 같은 독재체제는 독재자만 잘하면 되지만 자유주의 같은 민주체제는 모든 국민이 잘해야 되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자유주의가 사회주의보다 낫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서는 스스로 통제할 수 있다는 걸 보여줘야 한다. 지배는 결코 자유주의가 될 수 없다. 지배자의 자유는 이미 독재자가 잘 보여주고 있으니까. 누굴 지배하고 싶으면 합의하에 플레이로 즐겨라. 혈통의 지배로부터 자유롭기 위해 자유를 외치던 자본주의자들이 혈통지배자들과 마찬가지로 자본지배를 할 것이 아니라 다른 자유주의자들과 같이 자유를 외치고 자유를 위해 살았으면 좋겠다. 이것이 나의 희망이다. 나는 남성들이 여성들을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여성들을 사랑한다면 최소한 여성혐오로 얼룩진 사람들을 비판하고 그들의 주장에 선동되지 말아야 하는 것 아닌가? 가만 보면 이기적인 여성주의자를 공격한다는 명분으로 모든 여성을 싸잡아 공격하는 것에 휘말려 같이 욕하고 있다. 일부 여성의 감성을 비난하는 이들이야말로 감성적인 대응을 할 때가 있었다. 일부 여성의 남성혐오를 비판하고 싶다면 여성혐오를 하는 사람들도 비판해야 한다고 본다. 남자와 여자, 젊은이와 늙은이, 부자와 빈자 등 모두가 사랑할만한 가치가 있는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다. 이것이 나의 희망이다. 자신을 위한 희생이 공동체에 도움이 되기 위해서는 공동체의 도움이 되는 희생을 하는 사람과 집단을 존중하고 아끼고 그들의 주장에 귀를 기울이면 된다. 간단한 예로 자발적으로 군복무를 하고 자발적으로 아이를 낳는 그런 사람들을 존중하면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어떤 이익이나 정의를 요구하면서 그걸 위해 어떤 희생을 하고 그 희생으로 공동체에 이익이 된다는 걸 주장하는 이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면 된다는 것이다. 어떻게 된 게 정의를 주장하면서 어떤 손해도 감수하지 않겠다는 이야기를 할 수 있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권리를 달라, 그러면 어떤 책임을 지겠다. 또는 그건 잘못된 거다, 나도 잘못된 걸 하지 않겠다. 그런 식의 주장이 나와야 하는 것 아닌가? 가령 여성이 입사와 진급에 차별을 하지 말라달라고 주장한다면, 힘들고 고된 일도 같이 한다고 해야 하는 거다. 오지 파견도 당직도 평등하게 말이다. 가령 갑질에 불만을 느낀다면 꼰대질도 하지 말아야 하는 거다. 회사에서 갑질당해서 술 마시고 집에 들어와서 아이들에게 꼰대질을 하는 걸 보면 답답하다. 어른에게 꼰대질 당해서 욕하고 서비스직종에게 갑질하는 것도 답답하다. 기업이 규제가 강해 성장에 해가 된다고 주장할거면 규제를 풀어줬을 때 상응하는 희생을 통한 공동체 이익을 제시했어야 했다. 노동자가 CCTV감시가 인권에 침해된다고 주장할거면 알아서 일을 잘해서 생산성을 높였어야 했다. 이익이든 정의든 어떤 주장을 할거면 그걸 위한 희생을 각오해라. 그리고 그런 각오가 되어있는 이들의 주장에 귀를 기울이면 되는 거다. 이런 사회적 인식변화와 그걸 토대로 한 제도적 변화가 이루어지면 자연스럽게 공동체를 위한 자발적인 희생이 이어질 것이다.

 

 

 

그런데 이런 자발적인 희생은 사실 바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미워하는 상대를 위해 희생하고 싶어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아무리 공동체를 위해 희생하는 이들을 존중한다고 해도 서로를 미워하는 한 매우 어려운 일이라는 것이다. 노사가 서로를 혐오하는데 손해라는 희생을 감수하고 서로를 위한 타협이 가능할까? 이성을 혐오하는데 이성의 권리증진에 찬성하는 사람이 있을까? 군대에 가서 비리와 부조리를 보며 애국심이 사라졌다는 사람들이 많다. 나라를 사랑한다는 마음가짐으로 징병이란 희생을 감내하고 있었는데 그게 사라지고 말았단 얘기다. 자발적인 희생을 하게 하기 위해서는 사랑할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해야 한다. 물론 사랑하지 않아도 필요에 의해 희생할 수 있다. 그러나 거짓으로 한 행동의 끝은 그리 좋지 못한 법이다. 반드시 탈이 나게 되어있다. 이런 것처럼 자발적 희생의 기피는 사실 애정결핍이 낳은 현상이다. 지배국가에서 하던 강제로 하던 희생에서 자유국가에서 하는 자발적인 희생으로 바뀌었으니 하고 싶어야만 희생을 하게 되는데, 하고 싶지 않으니까 하지 않게 되는 거다. 그리고 그 애정결핍은 지배국가의 도덕과 가치관에 영향을 받았음을 강조하고 싶다. 연령으로 위아래를 정해 복종하는 질서를 만들고(장유유서), 직종에 따라 신분을 나눠 차별하는(사농공상) 그런 조선의 문화를 물려받았으니까 나이로 차별하고 직업으로 차별하는 거다. 한국은 지배국가의 차별하는 문화를 물려받고 자유국가의 자유롭고 평등한 이념을 전수받았다. 그게 얼마나 재미있는 현상들을 초래했는지에 대해 잠시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어떤 집단을 분석할 때, 그 집단이 어떤 행동원리를 가지고 있는지 알게 되면 이해가 가능해진다. 첫째, 경쟁. 둘째, 발전. 셋째, 민주주의. 넷째, 문화. 다섯째, 적폐. 첫째인 경쟁은 상명하복의 유교문화에 평등한 민주주의 체제가 도입되었기 때문에 발생하였다. 평등한 체제기 때문에 대부분 능력만 있으면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문화는 상명하복이라 상대적으로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이 낮은 위치에 있는 사람을 지배할 수 있었다. 표면은 민주적이기 때문에 대놓고 하지는 못해도 은밀하게 상하를 나눠 차별하게 되었다. 그 현상이 바로 갑질과 꼰대질이다. 경쟁에서 패배한 사람은 피지배자로 전락할 우려가 있기 때문에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하게 되었다. 왜 과열경쟁이 발생하게 되었는지 알겠는가? 지배 받고 싶은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그러니까 노력한 것이다. 지배 받기 싫으니까. 뭐 개중에는 지배하고 싶어서 노력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어떤 학생이 행복하기 위해 노력을 왜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며 고민을 토로했다고 한다. 행복을 위해 좋은 대학을 가고 좋은 직장에 취업하라고 하는데 그런 노력을 해야 할 이유를 모르겠다고 토로한 것이다. 이에 대한 답은 각자 다를 것이나 나는 두 가지를 지적해보겠다. 하나는 보상의 한계가 있다는 것. 아무리 노력해도 급여만으로 집을 사기도 벅찬 세상 속에서 노력의 의미를 찾지 못하겠다는 것이다. 둘은 애초에 노력하는 까닭이 행복하기 위해서 노력하는 게 아니었다는 것. 행복을 위해서 노력한 것이 아니라 불행하지 않기 위해서 노력했던 것이다. 하나는 굳이 자세히 설명하지 않아도 알 것이다. 자산가가 얻는 잉여가치가 늘어날수록 빈부격차는 커지게 되어있고 후발주자는 노력대비 얻는 보상이 점점 줄어들게 되어있다. 이는 게임에서 올드비(고인물)과 뉴비(청정수) 문제를 대입해보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뉴비가 아무리 노력해도 올드비 서브 캐릭터 하나 이기지 못한다. 쌓아 올린 재화의 차이가 극심하기 때문이다. 그런 상황에서 올드비가 뉴비를 지원하는 걸 반대하면 뉴비는 얼마 있지 않아 그만둬버린다. 현실에서는 출산율이 줄어들고 청년들이 노력하지 않거나 사는 걸 그만둬버린다. 둘도 앞서 이야기한 걸로 알고 있을 것이다. 지금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하는 것은 행복하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다. 불행하지 않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이다. 사회구조상 남들보다 위에 서야 지배 받지 않기 때문에 경쟁에서 패배하면 지배 받는 걸 좋아하는 일부를 제외하면 불행해질 수밖에 없다. 본질을 잘못 보고 행복을 위해서라는 명분으로 노력을 강요 받자 그 의미를 알 수 없어 헤매게 된 탓에 노력을 해야 할 이유를 찾게 된 것이다. 남들보다 위에 서야 불행해지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은 달리 말해 그 나머지는 전부 일반적으로 불행한 상황이란 얘기가 된다. 우리 사회가 불행으로 가득 찬 까닭은 거기에 있다. 과열경쟁은 유교의 불평등한 사상 때문이었고 그 덕택에 인재들을 쥐어짜서 우수한 결과를 냈지만 그만큼 불행한 사람들로 가득 찬 사회가 되었던 것이다. 둘째인 발전 또한 유교의 영향이 크다고 본다. 유교는 장유유서라는 상명하복의 질서를 올바른 도리로 만들었다. 그러다 보니 국가 전체가 군대인 것처럼 체계적으로 움직이게 되었다. 맨 위에 있는 사람이 방향만 제대로 가리키면 군말 없이 따랐기 때문에 지금까지 끊임없이 발전했었다고 본다. 군대에 가면 철이 든다는 소리는 군대에 가야 유교가 만든 상명하복의 질서에 적응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한강의 기적은 국가가 군대처럼 움직였기 때문에 가능했다. 하지만 그건 자유롭지도 않고 평등하지도 않고 행복하지도 않다. 그리고 잘못 가리키면 중국의 제사해 운동이나 문화대혁명과 같은 일이 벌어질 수도 있다. 시키는 데로 군말 없이 다하니까 그런 현상이 일어날 수 있는 것이다. 유교를 적폐로 몰아 문화대혁명으로 지웠다는 얘기도 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형식상에 불과하다고 본다. 공산당에 복종하는 그 행태를 보면 본질은 바뀌지 않았다. 유교를 대체할 새로운 도덕이 있지 않는 이상 본질은 바뀌지 않는다. 한국도 유교를 버렸지만 유교가 만든 문화는 남아있지 않는가? 미국의 커티스 르메이가 일본을 공격할 때 한 말이 있다. 무고한 민간인은 없다. 일본은 모든 국민이 전쟁물자를 만들기 위해 동원되고 있었다고 한다. 스즈키는 볼트, 하루보노는 너트, 키타가와는 공장에서 조립한다. 상명하복이 일상화된 국가에서는 모든 민간인이 전쟁의 도구로 활용된다는 얘기였다. 한국, 중국, 일본 모두 상명하복의 유교문화가 자리잡은 국가답게 전체주의적으로 움직인 경험이 있다. 지금은 조금씩 개선되고 있지만 그 잔재가 남아 국가와 세계를 혼란케 하고 있다고 본다. 유교문화권은 분명 군대 같은 체계적인 움직임으로 빠른 발전을 했지만 그 만큼 불행이 겹겹이 쌓여있는 국가들인 것이다. 셋째인 민주주의는 적이 있기 때문에 가능했다. 중국은 공산당에 복종하고 일본은 자민당에 복종한다. 상명하복의 유교문화권은 기본적으로 윗사람에게 복종하는 게 올바르기 때문에 민주주의가 발전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서 한국은 민주주의가 발전할 수 있었는가? 사실 한국도 보면 민주주의가 발전할 수가 없었다. 상명하복. 윗사람에게 복종하게 되어있는데 어떻게 발전할 수 있나? 그런데 발전했다. 어떻게? 그건 적의 존재가 있기 때문이었다. 프랑스 시민혁명을 부르주아 혁명이라 일컫는 사람들이 있다. 부를 축적한 부르주아가 사회 주도층이 되기 위해 프롤레타리아를 선동하는 것으로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한 반박이 있다. 프롤레타리아는 사상가 장 자크 루소의 영향을 받아 자신의 의지로 혁명에 가담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질문이 하나 있다. 그 장 자크 루소의 사상을 전파할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한 것은 누구겠는가? 현대와 같이 인터넷도 있는 상황이 아니니 쉽게 정보 전달이 되는 것도 아니다. 자유와 평등의 가치를 시민들이 배우게 된 그 배경에는 부르주아의 지원이 있었다고 본다. 물론 그들의 이익을 위해서였겠지만. 만약 부르주아가 왕족과 귀족과 사이가 좋았더라면 시민혁명이 일어나기 어려웠으리라 생각한다. 한국도 마찬가지다. 3.15 혁명은 학생운동으로 시작했다. 그렇다면 그 학생들에게 민주주의의 가치를 알려준 사람들은 누구였겠는가? 이승만은 반공 반일 친미(미국을 경계했으나 기본적으로)로 외교적이나 이념적 문제가 발생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그는 정적을 공산주의자로 몰아 공격하며 독립운동가와 지식인들의 반발을 사게 되었다. 정치권력을 위해 친일파를 비호하는 일도 서슴지 않았다. 한국정부 단독수립이라는 같은 뜻은 지녔던 이들(윤보선)마저 등을 돌릴 정도였다. 사소한 것 하나하나 자신이 결정해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에다가 그의 측근(윤치영) 또한 나폴레옹과도 같은 독재적 지도자가 되길 권했던 것을 보면 권력을 위한 부정선거는 필연이었을지도 모른다. 이런 상황에서 부정선거가 발각되자 학생들이 앞장서는 시민혁명이 발발했다. 그 학생들의 배경에는 분명 이승만을 반대하는 독립운동가와 지식인들의 가르침이 있었을 거라 본다. 만약 이승만과 다른 독립운동가와 지식인들과 사이가 좋았더라면 시민혁명이 일어나기 어려웠을지도 모른다. 부정선거가 되었다는 사실 자체가 전파되지 않았을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그랬다면 다른 유교문화국가와 마찬가지로 오랫동안 독재를 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건 이후 박정희의 등장으로 현실이 되었다. 당시 한국식 민주주의라는 표현으로 3선 개헌을 정당화하며 유신독재를 시작했다. 한국 또한 유교국가의 때를 벗지 못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그렇게 쉽게 독재를 받아드릴 수 있었던 것이다. 민족개조론을 주장했던 안창호나 가족주의를 경멸하며 대를 잇는 걸 거부했던 서재필 같은 경우를 보면 이미 당시에도 유교문화의 한계를 깨닫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싶다. 한국과 북한은 같은 민족이다. 한국과 다른 유교문화 국가들은 같은 유교영향권 아래에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한국에서 유독 민주주의가 발달했던 것은 오로지 적의 존재 말고는 없다. 만약 중국과 일본과 북한도 적의 존재가 있어 그 적이 민주주의 혁명을 외치며 일어날 수 있었다면 유교문화의 영향을 적게 받으면서 제대로 된 민주주의가 활성화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원래 자유당과 민주당은 독립운동가와 친일파가 혼재되어 구성되었다고 한다. 이승만도 윤보선도 반일주의자였으니까 말이다. 그러다 이후 박정희의 한일기본조약 체결부터 친일 여당과 반일 야당이 갈라져 투쟁한 것으로 보인다. 한국은 투쟁의 역사를 통해 민주주의가 발전했고 그 투쟁은 적이 존재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적이 없었다면, 대다수의 국민들이 복종하는 지배자가 있었다면 한국의 민주주의는 유교로 인해 발전할 수 없었을 것이다. 뭐 지금도 독재자와 그 딸에 복종하는 사람이나 대통령을 이름으로 불렀다고 화를 내는 사람들이 있으니 아직 완전한 민주주의라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적의 존재로 인해 같은 유교문화권인 중국이나 일본보다는 민주적으로 되었다는 것이다. 정치적으로 평등해졌기 때문에 한국은 중국과 일본보다 더 심한 과열경쟁이 생기게 되었다. 중국과 일본은 공산당과 지역구세습으로 정치가 신분제화가 되고 있지만 한국은 아니니까 더 올라 갈려고 기를 쓰게 된 것이다. 중국이나 일본이 보다 민주적으로 변하기 위해서는 기존 질서와 맞서 싸울 민주적인 악당들이 등장하거나 유교문화를 버려야 할 것이다. 적은 윗사람이 아니니까 말이다. 넷째인 문화도 유교의 영향을 받았다. 남녀유별이라면서 어려서부터 이성교제를 하는 걸 부도덕하게 여기는 탓에 유사연애산업이 발전하기 시작했다. 한국은 주로 3차원 이성(아이돌)에 빠져 유사연애를 즐기고 일본은 주로 2차원 이성(창작물)에 빠져 유사연애를 즐기고 중국은 둘 다 즐기고 있다. 유사연애를 즐기는 거야 전세계가 다 하는 거지만 유독 유교문화권만 심하다. 문화는 문화를 즐기는 이들이 많을수록 성장한다. 유사연애산업이 성장한 것은 유사연애를 즐기는 사람이 그만큼 많다는 걸 의미한다. 흔히 한국노래에서 사랑이 빠지질 않고 한국 드라마 영화는 어떤 장르든 사랑으로 빠지게 되어있다는 얘기가 있다. 그것은 연애가 산업으로 이어질 만큼 연애물을 즐기는 이들이 많다는 걸 의미한다. 현실에서 충족되지 못한 사랑에 대한 욕구가 가상으로 이어진 것이다. 일반적인 국가에서는 어려서부터 주위 이성을 사랑하며 살아가니 노래도 드라마도 사랑으로부터 보다 자유로울 수 있었다고 본다. 사랑하는 상대가 주변에 있으니 굳이 문화에서 사랑을 강조하지 않아도 되니까 말이다. 요즘 유명한 BTS의 결과는 다음과 같은 과정을 거쳤다고 본다. 남녀유별로 유사연애산업이 발전했다. 적의 존재로 민주주의가 발전해 성차별이 줄어들어 여성의 입맛에 맞는 아이돌이 등장했다. 상명하복으로 인한 과열경쟁이 우수한 아이돌을 배출했다. 그 결과 기본적으로 남성사회가 많은 전세계 여성들은 자신의 입맛에 맞는 수준 높은 한국 아이돌을 좋아하게 되었다. 이성을 사랑해야 결혼하는 사람이 늘고 결혼하는 사람이 늘어야 출산율도 증가한다. 유사연애산업의 발전은 저출산과 맞바꾼 결과일지도 모른다. 다섯째인 적폐는 지금까지 말한 것들로 인해 발생한 것이다. 꼰대질, 갑질, 비리, 부정, 차별, 저출산, 허례허식 등. 유교문화와 자유롭고 평등한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의 충돌이 만든 폐해들이다. 오래된 유교문화의 폐단이 한국을 불행으로 이끌었다. 많은 사람들은 인간을 적폐로 인식하는데 그건 오래된 폐단이 만든 결과물에 불과하다. 환경이 인간을 만드는 거다. 개개인들은 다를 수 있으니까 오차가 있다는 걸 인정한다. 하지만 집단으로 가면 환경의 영향력이 엄청나게 커진다. 특정 개인이 적폐가 되는 건 그 개인의 유전적 특성일 수 있지만 집단 내에서 적폐가 발생하는 것은 환경이 원인일 확률이 높다는 것이다. 생계형 비리가 무슨 말이겠는가? 생계를 위해 비리를 저지르던 것이 일상화되어 있었다는 걸 의미한다. 급여가 적었던 시절 생계를 위해 일상적으로 저지르던 사소한 비리에 익숙해지다 보니 죄의식 없이 비리를 저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환경에 의한 관습적인 잘못은 개개인의 특성과 관계가 없다. 모두가 잘못을 저지르니 잘못인 것처럼 느껴지지 않고, 그러다 보니 선을 추구하던 사람도 아무렇지도 않게 잘못을 저지르게 되어있다. 우리 사회에 존재하는 대부분의 적폐는 다들 이런 과정을 거쳤다. 그냥 그래왔으니까 그랬던 거다. 예컨대 이런 것이다. 그 동안 화재를 몰고 오던 부도덕한 입시과정이나 불투명한 기부단체는 개개인의 특성보다는 악습이 만든 잘못이다. 다들 그렇게 하니까 그랬던 것뿐이다. 누군가의 잘못을 지적하거나 누군가를 옹호하고자 하는 게 아니다. 우리사회, 아니 인간의 잘못은 대부분 관습에 근거한다고 주장하는 것뿐이다. 관습, 관행, 우리가 익숙해서 잘못된 것을 느끼지 못했던 그 모든 것들이 적폐를 만들어 사회를 불행하게 만드는데 일조했다. 진정 적폐를 몰아내고자 한다면 사람보다는 그런 사람을 만드는 환경을 바꿀 필요가 있음을 강조하겠다. 차별금지법에 찬성하는 사람조차 연하가 연상에게 반말하는 걸 불편해할 것이다. 우리는 얼마나 관습에 취약한가? 어떤 올바른 일을 행하고자 하면 자신이 가지고 있는 고정관념을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이외에도 다양한 영향을 끼쳤지만 여기까지만 하겠다. 이렇게 지배국가의 차별하는 문화와 자유국가의 자유롭고 평등한 이념의 충돌은 이와 같은 빠른 발전과 깊은 불행을 안겨주었다고 본다. 여기서 하나의 질문이 있을 수 있다. 이 상황이 장단점이 있는 거라면 발전을 위해 불행을 감수할 수 있는 게 아니냐고 말이다. 하지만 상명하복의 질서가 만드는 발전에는 한계가 있다. 윗사람이 시켜서 하는 일에는 창의력이 발휘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가발을 수출하고 파병이나 파견을 보내어 발전하는 건 분명 상명하복의 질서에서 보다 빠르게 가능하다. 하지만 창작물을 만들고 새로운 아이디어를 내고 고부가가치를 만드는 산업에서 상명하복은 오히려 발전을 저해한다. 윗사람의 창작물이나 아이디어만 인정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보겠다. 어떤 창작물을 만드는데 시시하고 재미없는 결과가 나오는 건 전문가도 아닌 사람들이 위에 있다는 이유 하나로 간섭하고 바꾸기 때문이라고 한다. 광고를 만들어도 광고주가 간섭해서 재미없게 나오고, 게임을 만들어도 투자자가 간섭해서 재미없게 나온다. 비전문가들이 위에 있다는 이유 하나로 자신의 의견을 밀어붙인 결과가 바로 재미없는 창작물이라는 것이다. 발전도 막는데 불행하기까지 한다면 더 이상 유교문화를 방치할 까닭은 어디에도 없다. 사회적 불행은 서로를 미워하게 되는 촉매재가 되었고, 그 미움은 사회적 애정결핍이 되어 희생을 꺼려하게 되었다. 애정결핍이 일어나자 문화로 애정을 충족하게 되는 기현상이 발생하여 모든 문화에 사랑이 섞이게 되었다. 사랑에 대한 애절한 갈구는 사랑이 결핍되어있음을 반증한다. 유교문화가 낳은 애정결핍으로 인한 희생기피현상을 해결하려면 무엇이 우선되어야 하겠는가? 당연히 사랑이다. 취미나 물건이나 우상에 쏟는 애정을 사람에게 쏟을 수 있는 환경조성이 가능해져야 자발적인 희생이 나타나 공동체를 지탱할 것이다. 그게 안되면 인구소멸로 우리는 자연스럽게 사라지게 될 것이다.

 

 

 

도덕, 무엇이 옳고 그른가? 가치관, 무엇이 가치 있는가? 희생의 이유, 무엇을 위해 희생을 해야 하는가? 지배국가에서 벗어난 자유국가에서 해결할 우선과제라고 생각한다. 지금까지 그런 고찰이 얼마나 있었는가? 우리가 생각하는 옳고 그름이 과연 자유국가의 것이라고 할 수 있었는가? 한국의 초대 대통령인 이승만부터가 그런 모순을 안고 있었던 사람이었다. 미국에서 배워온 자유와 민주의 가치를 설파하던 사람이 유교의 영향을 받아 모든 것을 자기 영향권 아래에 놓아 사사건건 간섭하여 지배적인 영역을 구축했다. 자유를 강조하던 장면은 총리가 되고서도 어머니에게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비는 등 전형적인 유교적 복종이 몸에 밴 인물이었다고 한다. 이미 새겨진 도덕은 스스로 인지하고 있지 않는 이상 바꿀 수가 없는 그 사람 특유의 행동원리라는 형태로 자리잡고 있다. 다들 안다. 꼰대질이 나쁘다는 걸. 그런데 연하가 자신과 맞먹으려고 하는 걸 보면 속상하고 답답해진다. ? 이미 도덕이 새겨졌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에게 새겨진 지배국가의 도덕을 지우고 자유국가의 도덕을 스스로 갖춰 나가야 할 때가 왔다고 말하고 싶다. 모든 어른을 공경해야 하는가? 아니다. 제 역할을 다하는 어른을 공경해야 한다. 잘못을 저지른 어른도 공경하라고 말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모든 걸 윗사람 의견으로 결정해야 하는가? 아니다. 사람 사이에서 위아래가 존재하지 않다. 단지 역할이 다를 뿐이다. 연령성별 상관없이 모두가 능력에 맞는 역할을 맡고 그 역할의 수행여부로 존중을 결정하고 기여도의 차이로 대우를 달리해주면 된다. 네 주인은 누구냐며 경비원을 폭행했던 사실이 뉴스에 나온 적이 있었다. 나는 담담하게 충격을 받았다. 알면서도 놀랄 수밖에 없었다. 한국은 아직도 지배국가의 도덕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그런 사람이 실존한다는 것을 알게 되니 굉장히 우울해졌다. 대놓고 그렇지 않더라도 사회 곳곳에서 그런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아이들을 위해서라면서 아이들을 통제하는 사람들이 많다. 언제까지 자기 손 안에서 키우려고 할 것인가? 이미 정보의 통제는 불가능하다는 걸 모르는 건가? 아이들이 즐기는 문화의 검열 좀 적당히 했으면 좋겠다. 사춘기 아이에게 포르노를 가르치지 않는 것은 구시대의 도덕이 만든 잘못된 관념에 불과하다. 식욕이 있는 아이에게 식사방법을 알려주고 수면욕이 있는 아이에게 자는 방법을 알려주는 것은 당연한데 어째서 성욕이 있는 아이에게 성욕을 해소할 방법을 알려주지 않는 건가? 이치에 맞지 않는 것은 대체로 과거의 도덕으로 형성된 관습이 큰 영향을 끼친다고 볼 수 있다. 식사예절이라. 어른이 수저를 들어야 밥을 먹게 하는 것 자체도 참 우습기 짝이 없다. 조상의 묘를 돌보는 벌초도 의미 없는 행위라는 걸 이제는 알았으면 좋겠다. 그건 그냥 조상을 신으로 모시던 유교국가의 도덕이 만든 잔재일 뿐이다. 유교는 신이 없는 게 아니다. 조상을 신으로 모시던 종교다. 우리 사회 곳곳에서 불합리함을 형성하던 수많은 도덕들에 대해 다시 한번 점검해볼 필요가 있음을 강조하고 싶다. 모든 걸 제거하자는 건 아니다. 예컨대 반말과 존댓말은 연령차별이다. 연상은 연하에게 반말하고 연하는 연상에게 존댓말을 한다. 그 때문에 초면에 반말을 들으면 연하취급 받는 것 같아 불쾌해하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이건 다른 용도로 사용할 수 있다. 친하면 연령차이 관계없이 반말을 하고 친하지 않으면 존댓말을 하면 된다. 친분으로 반말과 존댓말을 구분 짓는다면 자유국가에 맞는 언어사용이 가능해질 것이다. 가치관도 지배국가에 물려받은 것 같은 걸 가지고 있다. 연령, 학력, 지위, 재산이 높은 것을 가치 있게 여긴다. 높으면 가치가 있고 낮으면 가치가 없다. 실제 용도와 관계없이 그런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다. 모닥불을 피울 때엔 불에 안 타는 지폐보다 잘 타는 나뭇가지가 더 쓸모 있다. 어떤 용도나 역할로 가치를 판단하는 것이 자유국가에 맞는 가치관이라 생각한다. 나는 이런 역할로 가치를 판단하는 역할주의가 유교의 도덕과 가치관을 대신할 수 있다고 주장하겠다. 역할로 가치를 판단하기에 평등하고, 역할을 수행하기만 하면 그 외엔 자유가 보장되기 때문에 자유롭다. 이런 식으로 도덕과 가치관을 자유국가에 맞게끔 재정립하고 서로를 사랑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어야 자유국가에 맞는 나를 위한 희생이 공동체에 이익을 가져와 결과적으로 공동체를 위한 희생이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나를 위한 희생. 자유국가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은 자유롭게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면 된다. 마음껏 이기적으로 살아라. 그 이기적인 욕심이 공동체에 이익을 가져오면 된다. 마음껏 이기적인 주장을 펼쳐라. 공동체가 그 주장을 판단해서 공동체에 이익이 되는 걸 수용하면 된다. 우리가 자유를 경계하고 부정하는 것은 그것이 미숙한 자유였기 때문이다. 아무 책임도 지지 않고 하고 싶은 대로 다 했던 그 어린아이와도 같은 자유는 노동자를 착취하고 제국주의가 되어 침략을 하고 전쟁을 발발하게 했다. 그런 미숙한 자유 때문에 또 다른 미숙한 자유인 사회민주주의나 자유를 빼앗는 지배인 공산주의가 유행하게 된 것이다. 성숙한 자유라는 건 해야 할 일을 자신의 자유의지로 결정한다는 걸 의미한다. , 공동체를 위해서는 부를 분배해 빈부격차를 줄여야 하는구나. 알아서 분배하면 사회주의는 필요가 없다. , 공동체를 위해서는 어떤 주장을 펼칠 때 그에 대한 책임과 희생이 필요 하는구나. 알아서 책임지고 희생하면 분쟁은 거의 없다. 전염성이 강한 바이러스의 유행으로 마스크를 착용하는 것은 시켜서 하는 건가? 아니면 자유의지를 가지고 그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여 자발적으로 하는 건가? 전자라면 사회주의에 어울리는 사람이고 후자라면 자유주의에 어울리는 사람이다. 모두가 다 하는데 제멋대로 굴겠다며 하지 않는 사람은 자유방임주의가 어울리는 사람이다. 자유주의 공동체를 위해 어떤 사람이 필요하겠는가? 지금도 그렇지만 앞으로는 더더욱 자발적인 희생이 없이 공동체는 유지될 수 없을 전망이다.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일자리를 위해 인공지능과 로봇을 거부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스포츠 심판이 인공지능으로 대체된다는 소식이 있었다. 그걸 반대하면 스포츠의 발전이 있을 수 있겠는가? 법조계, 의료계, 언론계 전부 인공지능이 도입될 수 있는 분야다. 그들이 그걸 무조건 거부하면 발전할 수 있겠는가? 다 수용해서 발전했다고 가정해보자. 그런 상황이면 인공지능과 로봇을 만드는 기업과 재벌들이 얻은 수익을 공동체를 위해 희생을 해야 한다. 그걸 안 하겠다고 하면 공동체는 유지될 수가 없다. 우리는 기술발전을 거부하고 정체되는 것과 기술발전을 받아드리고 희생하는 것,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공동체가 유지될 수 있다는 걸 이제는 알아야 한다. 시대 변화를 받아드려야 한다. 미래로 가자.

 

무엇을 위해 희생을 해야 하는가? 그 답이 자신을 위해서라면 희생의 이유는 각자 다 다를 것이다. 자신이 하고 싶은 게 다 다르니까. 그렇다면 스스로 물어봐야 한다. 나는 무엇을 위해 희생을 해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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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족하네요. 좀 더 공부해서 더 정리해야겠습니다.

분명한 것은 도덕, 가치관, 희생의 이유를 자유국가에 맞게 정립해야 한다는 겁니다. 기초가 튼튼해야 곧고 바르게 성장이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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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포스트 코로나 교육정책 (0) 2020/07/25 PM 10:51

포스트 코로나 교육정책

 

 

 

한국 교육계에 코로나란 불똥이 떨어졌다. 급변하는 사회에 발맞춰 교육정책도 매번 바뀌어 수험생들을 혼란에 빠뜨렸었다. 그럼에도 입시와 취업의 기준이 크게 달라지지 않아 본질적으로는 바뀐 것이 없었다. 그랬던 교육계가 이제는 변해야만 한다. 진보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과학이 예상보다 빠르게 진보할 전망이기 때문이다. 왜 과학이 예상보다 빠르게 진보하는가? 그리고 과학이 진보하는데 어째서 교육도 진보해야 하는가? 그것이 대해 이야기를 하며 시작하겠다. 코로나 사태가 반년을 넘어서고 있다. 공기전염의 가능성도 지닌 전염병이기 때문에 인간이 밀집하는 공간은 언제나 감염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다. 그 감염의 위험으로 인간이 일하기 어렵게 되었다. 일자리와 수출량이 줄어들고 실업자가 늘어났다. 기업들은 예정보다 빠르게 인력감축을 시작하기 시작했다. 항공업계가 인간 대신 물자를 나른다. 유통업계가 코로나 감염으로 마비되어 멈춘다. 유동인구가 줄어 자영업이 힘들어진다. 군부대가 감염이 되기 시작했다. 수십만 명이 사망하고 있는 해외는 더 심각하다. 해외에서 일하는 한국 노동자가 코로나로 사망한 사건들이 뉴스를 통해 속속 전해져 오고 있다. 이라크에서 일하는 한국 노동자를 전세기로 불러올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이 사태가 쉬이 끝날 것 같지도 않다. 전문가의 의견에 따르면 수 년 이상 지속될지도 모른다고 한다. 앞으로도 인간은 일하기 어려울 확률이 높다는 것이다. 인간이 일하기 어렵다는 것은 기업에 충분한 노동력을 제공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기에 필연적으로 인간을 대신할 노동력이 필요하게 된다. 그 노동력이라는 게 소나 원숭이 같은 다른 동물을 말하는 게 아니다. 바로 인공지능과 로봇이다. 알다시피 머지 않은 미래에는 인간 대신 로봇이 대신 일하게 될 것이다. 인공지능이 빠르게 발전하여 단순 노동뿐만 아니라 법조계, 의료계, 언론계 가리지 않고 거의 모든 분야에서 인간을 대신해 일하게 될 거란 전망이 있다. 그래서 기초소득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자본주의 체제를 유지하면서 자원을 분배하기 위해서는 기초소득 말고는 답이 없기 때문이다. 모든 사상은 인간을 위해 존재한다. 자본주의가 인간의 생존을 위협한다면 자본주의는 사라져야 할 사상이 된다. 자본가야말로 자본주의 내에서 자신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기초소득에 동의하는 수밖에 없다. 세계가 통합되면서 대다수의 국가가 시장을 개방함에 따라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는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와의 싸움이 아닌 자본가와 정치가의 권력다툼으로 변질되었다. 큰 시장에선 자본을 지닌 자본가의 힘이 크고, 큰 정부에선 분배할 권리가 있는 정치가의 힘이 크다. 이 싸움에서 자본가가 민중의 지지를 받기 위해서는 정치가가 기초소득을 시도하지 않더라도 할 수밖에 없다. 그러지 않으면 민중은 자본주의를 버리게 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경제이념엔 민중이 없다. 민중에겐 자유주의와 민주주의가 필요할 뿐이다. 그리고 역할 외의 시간을 자유롭게 보낼 권리와 가치판단을 역할로 삼아 평등하게 바라볼 수 있는 역할주의가 필요하다고 역설하겠다. 어쨌든 기초소득을 부르게 될 인공지능과 로봇, 그리고 그걸 토대로 한 완전자동화. 이것이 코로나로 인해 빠르게 발전할 과학기술이고, 이것이 인간을 대신하게 될 노동력이다. 본래라면 이 과학기술은 많은 저항에 부딪쳤을 것이다. 모든 진보의 걸림돌은 시대의 변화를 거부하는 저항의 총체다. 노동과 자본은 둘 다 과학의 진보를 꺼려한다. 노동은 일자리를 빼앗기기 때문에 꺼려하고 자본은 위험부담이 싫기 때문에 꺼려한다. 물론 상대적으로 자본가가 더 여유롭긴 하다. 이미 자동화 공정이 발달한 기업은 정리해고를 하거나 추가 인력을 고용하고 있지 않다. 이 사태를 계기로 더 많은 인력을 정리하고 있다. 그럼에도 보수적인 기업이 많다. 대부분은 다른 곳에서 완전자동화가 상용화되어 이익을 얻는 것을 확인해야만 시도할 것이다. 이런 저항이 코로나로 인해 인간이 일을 할 수 없게 되면 대신할 노동력의 필요로 과학이 진보하게 될 것이란 이야기다. 이는 전쟁 중에 무기개발에 힘을 쏟는 것과 비슷할 것이다. 평시라면 자본, 노동, 도덕, 윤리, 관습, 이해관계 등의 이유로 무기개발이 상대적으로 느려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전시가 되면 그런 저항들이 의미를 잃고 무기개발에 총력을 기울일 수 있게 된다. 전쟁이 과학의 발전을 부른다는 것은 이런 이유가 크다. 저항이 줄어드니까. 코로나 사태도 이와 비슷한 이유로 과학이 진보할 것이다. 과학의 진보는 자연스럽게 교육의 진보도 부른다. 과학의 진보는 출산, 교육, 생산, 분배, 사망의 순환구조에서 생산의 변화를 부르게 된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그 생산에 공급되는 노동력에 대한 교육도 변화할 것이다. 가령 지금 인간이 기계가 하는 일을 배우고 있나? 아니지 않나. 과거의 인간은 지금 기계가 하는 일도 배워서 직접 생산했다. 지금은 어떠한가? 기계가 하는 일은 배우지 않고 기계를 다루는 일을 배운다. 좋은 예가 바로 글씨일 것이다. 직접 쓰는 것이 아니라 컴퓨터로 작성한다. 그렇게 컴퓨터로 서류를 작성하는 일이 많아지자 다들 글씨가 엉망이다. 안 쓰면 퇴화한다. 자연법칙은 사회법칙으로도 이어지기 마련이다. 이처럼 생산의 변화는 교육의 변화로 이어진다. 그와 마찬가지로 인공지능 덕분에 앞으로 하지 않게 될 노동에 관련된 교육을 배우는 것은 적절한 교육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 필요 없는 지식은 배울 필요가 없다. 인간이 사회를 구축한 이상, 지식은 개인의 것이 아닌 사회의 것이기 때문이다. 개개인이 기계가 하는 일, 로봇이 하는 일, 인공지능이 하는 일을 몰라도 괜찮다. 하드웨어를 만드는 사람도 소프트웨어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모르고, 소프트웨어 만드는 사람도 하드웨어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모른다. 모든 사회의 지식은 이와 같이 인간 개인의 것이 아니다. 사회의 지식이 개인의 것이 아닌 사회의 것이라는 인식이 있다면, 모든 전문가는 자신이 가진 지식을 다른 전문가도 알아듣기 쉽게 전달할 의무가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사회의 지식을 키워야 개인의 지식도 키울 수 있으니까 말이다. 그것이 지식의 상향평준화다. 어떤 이는 사회가 붕괴될 때를 대비해 전부 교육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건 지나치게 인간의 자유를 속박한다. 언제 있을지 모를 사회붕괴에 대비해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할 수 없게 되는 것은 자신의 삶을 사회보험에 바치는 것에 불과하다고 말하고 싶다. 이와 같은 이유로 과학이 진보하면 본질적으로는 별로 달라지지 않았던 교육계가 이제는 진보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 진보는 인간이 일을 하기 어려워져 질수록 빨라질 것이다. 인간을 대신할 노동력이 필요하니까.

 

그렇다면 교육은 어떻게 진보해야 하는가? 그것에 대해 이야기를 해보자. 많은 학생들은 이번 교육부가 결정한 대면학습을 부정적으로 생각한다. 등교하다가 코로나 걸리면 책임질 수 있느냐는 것이다. 학생들이 주로 이용하는 유튜브의 댓글들을 살펴보면 등교를 결정한 교육부장관에 대한 불만으로 넘치고 있었다. 심지어 사리사욕을 위해 등교를 결정했다고 믿는 학생들도 있었다. 그 여파인지 몰라도 제주도의 초등학교에서는 집단등교거부 사태까지 벌어지고 있었다. 교육부에 대한 불신이 극에 달했다. 그럼에도 한가지 변호하자면, 그 자리에 누가 앉더라도 등교를 결정했을 확률이 높다는 것이다. 교육은 인간의 자아실현이나 사회화뿐만이 아니라 생산을 위한 노동력 제공에 있다. 최근 대학은 앞의 것보다 뒤의 것에 무게가 실리는 형편이다. 괜히 대학교를 취업기관이라 폄하하는 것이 아니다. 어쨌든 사회에 노동력 공급을 담당하는 교육이 정체되면 사회 전체가 정체될 우려가 있다. 출산, 교육, 생산, 분배, 사망의 순환이 멈추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출산율이 저하되어 사회구조가 흔들리고 있는 상황 속에서 교육도 멈춰버리면 걷잡을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 교육과정이나 출석이나 시험 따위의 기존 교육체계를 유지하면서 사회가 굴러가게 하려면 위험부담을 감수하더라도 등교를 해야 한다. 이는 사회유지를 위해 위험부담을 감수하고 일하고 있는 것과 같다. 만약 현행 교육과정을 무시한다면 많은 학생과 학부모와 교육관계자의 반발이 있을 것이다. 미리 예고한 교육과정대로 교육을 하지 않으면 그들의 계획에 혼란이 생기기 때문이다. 그리고 공정. 체계화된 교육과정이 있어야 공정을 유지할 수 있다. 그 공정 때문이라도 쉽게 교육과정을 바꾸기 어렵다. 그런데 왜 사람들이 공정을 그렇게 갈구할까? 공정이 손해를 받아드리게 만드는 결정요소기 때문이다. 누군가 내 위에 있는데 그게 공정하지 않는다면 받아드릴 수가 없다는 얘기다. 한국은 연상에게 복종하는 것이 올바른 도리였던 장유유서가 도덕이었다. 그래서 사회관계는 복종과 지배로 나뉘게 되었다. 누군가 내 위에 있다는 것은 그 윗사람에게 복종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걸 반길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복종하기 싫어서 중소기업도 가기 싫어하고 회식도 싫어하고 명절에 친척집 가기도 싫어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한국이 겸손한 까닭도 여기에 있다. 대중이란 연령 미상의 집단은 특정 개인이 대중과 맞먹으려고 하는 것을 용납할 수가 없었다. 특정 개인의 연령이 대중보다 높을 확률은 극히 드물기 때문이었다. 이러니 한국인은 겸손할 수밖에 없다. 한국의 과도한 경쟁과 공정에 대한 집착도 그런 불평등한 도덕으로 형성된 사회관계 때문이라 본다. 경쟁으로 지배하느냐 복종하느냐 결정되니까 말이다. 이런 이유들 때문에 교육부는 등교를 결정할 수밖에 없던 것이다. 그럼에도 한가지 비판하자면, 지나치게 보수적이다. 이런 사태가 되었음에도 교육과정을 준수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설령 사람들의 반발이 있더라고 하더라도 말이다. 지금은 긴급한 상황이지 않나. 코로나로 노동력이 저하되고, 그 노동력을 대신할 것을 위해 과학이 진보하고, 그 진보한 과학으로 기업이 진보하고, 그 진보한 기업 때문에 교육이 진보할 수 밖에 없다. 굳이 현행을 유지하는 것은 현실을 보지 않은 무사안일주의에 불과하다. 이 사태가 언제 끝날지도 모른다. 이 기회에 학부모의 반발, 교사의 저항, 입시와 취업, 공정을 위한 체계 등으로 정체되어왔던 교육이 진보해야만 한다. 국민들에게 새롭게 각인을 시켜야 한다. 교육도 변화해야 한다고. 사실 진작에 했어야 했다. 포스트 인터넷과 포스트 인공지능에 맞는 교육을 진작에 했어야 했다는 것이다. 인터넷은 정보의 과잉공급으로 연령과 관계없이 사회의 문제에 접할 수 있게 만들었다. 인공지능은 인간 노동력의 필요성을 감소시켜 생산자가 아닌 사용자를 필요하게 만들었다. 이제는 이 두 가지 변화에 맞는 교육과정이 필요하다.

 

우선 포스트 인터넷에 대해 이야기를 해보자. 인터넷은 판타지에 나오는 어떤 마법보다 마법 같은 도구다. 전세계 어느 곳도 네트워크만 연결되어 있으면 컴퓨터나 모바일의 사용자는 누구나 다 정보교류와 축적이 가능하다. 그것은 정보가 특정 계층이나 연령의 제한을 받지 않고 전달된다는 이야기다. 아이들도 어른들의 정보를 접할 수 있고 어른들도 아이들의 정보를 접할 수 있다. 그걸 통해 원래는 있을 수 없었던 연령을 넘어선 소통이 가능해진다. 이러한 사실은 그 동안 우리가 아이들을 위해서라는 명목으로 통제된 연령대별 정보차단이 무의미해짐을 알게 된다. 최근 아이들 사이에는 민식이법이라는 놀이가 유행한다고 한다. 민식이법이란 어린이 보호구역에서 교통사고 시 운전자에게 가중처벌을 가하는 법을 말한다. 이런 민식이법에 대한 정보가 아이들에게 흘러가자 아이들은 이걸 가지고 어른들에게 위험한 장난을 시도하기 시작했다. 어린이보호구역에 있는 차량에게 접근해서 의도적으로 부딪친 후 신고 당하고 싶지 않으면 돈을 달라고 협박한 것이다. 그 이유를 물어보니 어른들이 벌벌 떠는 모습이 재미있어서 장난쳤다고 한다. 장유유서로 어른들에게 복종해야만 하는 아이들 입장에서 어른들의 그런 태도는 매우 유쾌했겠지. 예전이라면 이런 법 관련 정보가 아이들에게까지 전달이 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민식이법 놀이도 유행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아이들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악용이 가능해졌다. 요즘 늘어나는 촉법소년의 자동차 운전사고는 그런 정보가 전달되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큰 처벌을 받지 않는다는 이미 알게 된 것이다. 특히 최근엔 어린 아이들도 스마트폰을 들고 다니기 때문에 유튜브를 통해 그런 정보를 아주 쉽게 접할 수 있다. 최근 틱톡의 정보유출에 관한 뉴스가 유튜브에 올라온 것이 있었다. 보통 그런 뉴스는 아이들이 잘 안본다는 인식이 있다. 지금까지 사회현안은 어른들을 위한 정보였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어린 학생들도 자신과 관련된 뉴스는 살펴보게 되었다. 틱톡의 이용자는 주로 초등학생과 중학생이라고 한다. 그래서 틱톡 관련 뉴스가 학생들의 추천목록에 뜬 모양이다. 그 뉴스에는 학생들의 댓글이 많았다. 학생A: 정보유출이 무섭다. 학생B: 엄마가 지우라고 해서 지웠는데 다행이다. 학생C: 구글 계정도 지워야 하나요? 등등 다양한 의견들이 많았다. 이처럼 이제 정보는 연령대별로 통제한다고 해서 통제가 되는 것이 아니다. 다 퍼져나간다. 원하면 쉽게 알아볼 수도 있다. 차단 자체가 무의미하다. 오히려 차단을 하면 차단된 일부 학생들만 정보고립으로 외톨이가 될 뿐이다. 이제 모든 학생들은 연령과 관계없이 사회현안에 대한 판단능력이 필요하게 된 것이다. 그 능력이 없으면 앞으로 법을 이용해 어른들을 협박하거나 범죄를 저지르는 일들이 더 많아질 것이다. 정보과잉공급으로 연령에 관계없이 모든 인간이 정보를 접할 수 있는 시대. 이 시대야 말로 지식만 가르치는 것이 아닌 지혜와 지성도 동시에 가르쳐야 한다. 이것이 바로 포스트 인터넷에 맞는 교육방식이다. 그 동안 한국교육은 주입식 교육을 주로 사용했다. 이 교육방식은 많은 비판을 받았지만 다수의 인원에게 지식을 심는 데는 가장 효율적인 방식임을 부정할 수는 없다. 수천 년간 쌓아 올린 인류의 지식은 지나치게 많았다. 간추리고 간추려서 요약만 한 것을 기억하는 것만으로도 시간이 부족했다. 세월이 흘러갈수록 학생들의 고달픔이 늘어나는 것은 인류가 쌓은 지식들이 늘어나기 때문이다. 지금의 교육방식은 이런 지식을 기억하고 이해하고 평가 받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것이 가난하고 무력했던 한국을 키워냈던 매우 효율적인 교육방식이었다. 주입식이 아무리 부작용이 많아도 그 효율자체는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지식을 쌓는데 급급하다 보니 지혜나 지성을 가르치는데 소홀하게 되었다. 남들이 만든 지식을 기억하고 이해하는 것에 치중하다 보니 새롭게 무언가를 만드는데 익숙하지 않은 것이다. 한국의 아이들은 스스로 어떤 현상을 보고 고찰하고 의견을 내는 그런 자유의지를 가질만한 시기가 없었다. 예전에 학생들의 모의재판영상을 시청한 적이 있다. 어떻게 하는지는 잘 모르겠는데 느낀 바가 하나 있었다. 학생 개인의 의견을 내는 것이 아니라 대본대로 하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재판의 형식을 익히는 것이 목적인 듯싶었다. 그런데 그건 결국 남이 만든 지식을 기억하고 이해하고 평가 받는 것이 아닐까? 지저분하고 엉망이어도 좋으니 사건에 대해 자신의 의견을 내는 것을 보고 싶었다. 학생의 자유의지가 담긴 주장을 듣고 싶었다. 학생의 지혜와 지성을 키우는 걸 보고 싶었다. 한국은 이제 선진국의 반열로 올라서고 있다. 선진국이 만든 문명을 그대로 기억하고 이해하는 것은 이제 불필요한 단계가 아닐까 싶다. 그렇지 않아도 인터넷을 통해 정보가 과잉공급 되고 있는 시점에서 지식과 함께 지혜와 지성을 배우게 만드는 교육과정이 필요하다고 본다. 그렇다고 주입식 자체를 아예 없애자는 건 아니다. 지식을 쌓는 최고의 효율은 주입식이다. 태어나서 무언가를 반복학습으로 기억하는 것 하나하나가 주입식 아니던가. 반복해서 빠르게 기억하고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것은 지극히 효율적이다. 그러니 지식을 평가하는 것은 현행을 유지해도 괜찮다고 본다. 단 지식을 쌓는 방식은 바뀌어야 한다고 본다. 웬만한 곳에서 인터넷을 통해 정보를 쉽게 찾을 수 있는 상황에서 그 정보를 일일이 다 기억하는 것은 정말 불필요한 일이다. 모든 교육은 현장에서 사용할 수 있는 도구가 있다는 전제하에 행해져야 한다. 농사를 가르칠 때 트랙터가 있다는 전제하에 가르쳐야지, 손으로 한다거나 소를 끌고 다니는 걸 가르쳐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지식은 정보를 검색할 때 필요한 키워드를 기억하고 그 기억만 평가하면 된다. 굳이 세세하게 년도를 기억한다거나 같은 교훈이 담긴 이야기를 중복해서 배운다거나 하는 일은 지혜를 배우는 시간을 날려먹는 비효율적인 방법이다. 인터넷을 언제 어디서든 사용할 수 있다는 전제하에 쌓는 지식이야말로 포스트 인터넷에 어울리는 지식습득이라 할 수 있겠다. 어떤 상황에서 지식이 필요할 때 인터넷을 사용해 그 지식을 이용할 수 있는 정도만 기억하면 된단 얘기다. 평가 또한 마찬가지다. 암기를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이해를 평가하면 된다. 세세한 부분은 요점만 알고 있으면 인터넷 검색으로 보충할 수 있다. 이렇게 필요한 지식만 쌓다 보면 생각 외로 시간이 많이 남게 된다. 그 남는 시간에 지혜나 지성을 성장시킬 교육을 하면 된다. 지혜는 사물의 이치를 빨리 깨닫고 정확하게 처리하는 능력이라 한다. 지성은 지각된 것을 정리하고 통일하여 새로운 인식을 낳는 능력이라 한다. 지식을 쌓는 데는 단순 암기가 효율적이지만 지혜나 지성을 키우는 데는 암기로는 어렵다. 사물의 본질을 보고 판단하고 새로운 의견을 제시하는 그런 교육이 필요하다. 이는 정보의 공급이 연령과 무관하게 이루어지므로 모든 학생을 대상으로 실시해야 될 것이다. 가령 민식이법 놀이는 초등학생들이 일으키는 사회 논란이다. 그렇다면 당사자인 초등학생들이 직접 관찰과 실험으로 사건을 판단한 후 토론이나 논쟁을 통해 결론을 내리는 교육과정이 필요할 것이다. 이 과정 속에서 교사의 역할은 교사가 어떤 결론에 도달하도록 유도하는 것이 아니라 지식의 오류를 정정하는 것에 머물러야 한다. 누군가 결론을 내리는 것에 의존하다 보면 스스로 의견을 내는 것을 어려워하게 되어있다. 여론이 쉽게 흔들리는 까닭은 의존성과 무책임 때문이다. 자신의 의견에 책임감을 갖게 한다면 이런 현상은 분명 완화될 거라 생각한다. 여기서 사건의 판단이나 토론의 방식은 굳이 대면으로 하지 않아도 된다. 비대면 온라인으로도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다. 만약 글로 자신의 의견을 표현하는 것이 부적절하다면 논술은 도대체 왜 배우는 것인가? 그리고 논술로는 한계가 있다. 논술은 평가자가 원하는 답을 예상하고 그 답에 맞는 의견을 가르치고 있지 않나? 그건 지식을 쌓는 과정과 별반 다르지 않는 방식이다. 지혜나 지성을 키우기 위해서는 어떤 즉흥적인 사건을 과학적인 관찰과 실험으로 판단한 걸 논술로 풀어내고 그걸 바탕으로 다른 이들과 논쟁하여 의견의 장단점을 개선하거나 아예 새로운 결론을 내리는 과정이 필요하다. 이런 교육과정은 비대면 학습으로 가능하기 때문에 지금 같은 상황에 적절한 교육방법이 될 것이라 본다. 예컨대 어떤 사안에 대한 정보를 학교 홈페이지나 유튜브에 올리고 댓글로 익명 토론을 하게 만들면 된다. 이 경우 다른 이의 의견을 가져다 붙이거나 다른 사람이 대신 작성하는 위험이 있으나, 그런 우려는 결과를 평가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다. 토론 참여도만을 평가한다면 웬만해서는 스스로의 의견으로 토론할 것이라 본다. 애초에 인터넷에서 댓글 논쟁은 누구나 다 해본 매우 익숙한 것이므로 참여 자체는 그렇게 어렵지 않은 일이다. 교사는 그 토론 과정 속에서 질서를 유지하고 지식의 오류만 정정해주면 된다. 설령 그릇된 결론이 나온다고 하더라도 괜찮다. 사물이나 사건을 관찰하고 실험하여 판단한 것을 다른 이들과 토론하는 과정 자체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애초에 그릇된 결론이 나오기도 어렵고 나오더라도 외부의 인원과 다시 토론하다가 답을 찾을 수 있기 때문에 큰 문제는 없을 것이다. 정리하겠다. 인터넷은 정보과잉공급이 발생해 예전과는 다르게 초등학생도 사회의 정보를 접할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법을 악용해 어른을 골려 주거나 범죄를 일으키기도 했다. 이런 현상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기존 지식을 위주로 쌓는 교육을 효율화하고 남는 시간에 연령과 관계없이 모든 학생은 사회현안에 대한 판단능력과 토론능력을 길러 지혜와 지성을 갖춰는 교육으로 진보해야 한다. 그 동안은 여러 이해관계로 진보하기 어려웠으리라 본다. 그렇지만 지금은 아니다. 코로나로 혼란스러운 이때, 가장 진보하기 좋은 시기라 본다.

 

그 다음 포스트 인공지능에 대해 이야기를 해보자. 인공지능은 세상을 바꾸고 있다. 이제는 단순노동뿐만 아니라 언론기사나 사법판단 또는 의료판단까지 인공지능의 사고회로로 충분히 가능하게 되었다. 실제 인공지능이 쓴 기사의 중립성이 기자보다 높다는 결과가 있다. 그 결과를 보고 많은 사람들이 희망했다. 하루 빨리 인공지능이 대신 일했으면 좋겠다고. 사리사욕에 휘둘려 제 역할을 못하는 사람들을 보고 분노한 것이다. 이 현상은 분노라는 감정으로 형성되어 여론만으로 결정할 수는 없다. 성실한 사람들도 많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인공지능이 특정 분야에 인간보다 더 쓸모가 있다면 굳이 인간이 그 분야를 담당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기계가 하는 일을 인간이 할 필요는 없지 않나. 세탁기가 있는데 굳이 손 빨래를 하는 것은 시간낭비다. 인간은 보다 더 많은 자유를 누리야 한다. 인공지능이 할 수 있는 일을 인간이 하는 것을 시간낭비다. 인간은 인공지능이 할 수 없는 분야에서 보다 더 자유롭게 능력을 키워야 한다. 그것이 바로 창의다. 인공지능이 인간 수준의 창의력을 발휘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왜냐하면 인공지능에는 자아가 없기 때문이다. 인간의 자아는 세가지가 있어야 갖춰진다. 인간이 지닌 세포, 그 세포와 상호작용하는 세계, 그리고 세포의 의지를 여론화하여 의식적으로 판단하게 만드는 뇌다. 여기서 뇌가 없으면 해파리 같은 생물이 되고, 지능이 낮으면 인간 외의 동물이 되고, 지능이 높으면 인간이 된다. 인공지능은 이 세가지 다 제대로 갖추지 못했다. 인공지능은 단지 특정한 작은 틀에 입력된 데이터 내에서만 새로운 것을 만들어낼 수 있다. 인공지능이 바둑을 제패한 것은 바둑이란 틀 내에서 무한정 사고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바둑의 규칙을 입력하고 시행착오를 수없이 반복시켜 학습시킨 것이다. 하지만 이런 방식으로는 인간 수준의 창의력을 발휘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인간은 세상이란 틀 내에서 무한정 사고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바둑의 변수와 세상의 변수, 얼마나 큰 차이가 있겠는가? 그래서 인공지능의 방식으로는 아무리 발전해도 인간 수준의 창의력을 따라잡을 수가 없다. 진정 인공지능이 인간을 따라잡기 위해서는 유전자부터 시작해 생명을 만드는 수밖에 없다. 완성된 인간과 세계를 만드는 것보다는 유전자를 설계하는 것이 훨씬 편하다는 것이다. 그렇게 인간과 세계를 만들고 나면 비로소 인간 수준의 자아, 인공자아가 탄생할 것이다. 인공자아가 탄생하면 그제서야 인간 수준의 창의력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이다. 그전까지 인간은 인공지능이 할 수 없는 인간 수준의 창의력을 발휘하면 된다. 창의, 그것이 포스트 인공지능 시대에 걸맞은 교육이다. 그렇다면 창의력을 어떻게 키워야 하는가? 우선 교육의 방향성부터 바꿔야 한다. 이제 교육은 생산에 동원될 노동력을 키우는 것이 아니라 창작에 동원될 창의력을 키워야 한다. 지금 교육은 미래에 하게 될 생산활동을 위한 지식을 쌓게 만드는 것에 머무르고 있다. 하지만 앞으로 인간은 대부분의 생산활동을 하지 않게 된다. 그렇다면 미래에 생산을 하게 될 때를 대비해 교육을 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 학생들이 하고 싶은 일에 맞춰서 교육을 하고 동시에 학생들이 창작을 해야 한다. 지식 쌓기와 취미활동의 중요성이 뒤바뀌게 된 것이다. 인간은 인간이 하고 싶은 일을 해야 창의력이 발휘되기가 좋다.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하는 것은 남이 시켜서 생산활동을 할 때나 도움이 되는 것이다. 남이 시켜서 하는 생산활동은 이제 인공지능이 대신할 것이니 이제 인간은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창의적인 결과물을 만들면 된다. 그래야 창의력이 키워질 것이다. 포스트 인터넷은 지식 암기의 양을 줄여주었다고 본다. 맥락만 잡고 있으면 세세한 지식은 인터넷으로 통해 보충할 수 있다. 쓸 수 있는 도구를 쓰지 않는 교육은 단순히 시대에 뒤쳐진 것일 뿐이다. 평가 또한 암기가 아닌 이해를 중점으로 해야 한다. 그렇게 지식을 암기하는 시간을 줄이고 나머지를 취미활동에 열을 올리게 만들어야 한다. 가령 게임개발을 하고 싶은 사람이 게임제작동아리를 만들었다면, 학교는 그 제작을 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도와야 한다. 취미에 필요한 지식을 쌓도록 교육과정을 만들어야 한다. 그 취미가 진로가 되어 대학과 장래를 선택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흔하지는 않았던 취미의 직업화가 이제는 일상이 되어야 한다. 기자가 되고 싶은 학생은 기사를 쓰게 하고 작가가 되고 싶은 사람은 글을 쓰게 하고 장사를 하고 싶은 학생은 직접 장사를 할 수 있게 해야 한다. 포스트 인터넷과 인공지능은 학생들의 경제활동에 대한 접근을 매우 좋게 만들었다. 오픈마켓을 통해 누구나 다 장사를 할 수 있지 있다. 그 외 인터넷을 통해 누구든 방송경험을 할 수 있다. 어플리케이션을 통해 누구든 자신의 능력을 뽐낼 수가 있다. 연령과 관계 없이 사회활동을 하는데 제약이 매우 많이 줄어든 상황이다. 유튜브를 보다 보면 초등학생이 프로그램을 만들었는데 그게 놀랍다며 이야기하는 개인방송들이 있었다. 이제 교육은 미래에 있을 직업을 위해 지식을 단순암기 할 것이 아니라 직접 사회에 뛰어들어 창작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줘야 한다. 그것이 창의력을 키우는 교육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이상하다. 창작하지 않고 어떻게 창의력이 키워지나. 그런데 이 또한 쉽게 진보하기 어려울 것이다. 애들은 공부나 하라는 식의 고지식한 부모들이 많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지금은 아니다. 코로나로 혼란스러운 이때, 가장 진보하기 좋은 시기라 본다.

 

마지막으로 포스트 코로나에 대해 정리해보자. 인간이 일하기 어려운 지금, 인공지능과 로봇을 이용한 완전자동화 시대가 예정보다 빠르게 올 전망이다. 그 시대를 대비하기 위해 포스트 인터넷과 포스트 인공지능 시대에 맞는 교육정책을 추진해야 한다. 교육이 진보할 때다. 이것이 지금까지의 주장이었다. 그렇다면 교육이 진보하기 전, 지금 당장 포스트 코로나에 대응하여 할 수 있는 건 뭘까? 그것에 대해 이야기해보겠다. 우선 교육부의 관점을 살펴보자. 최근 교육부의 뒤로 가는 사고방식을 접할 수가 있었다. 코로나 시대야 말로 공동체 의식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그건 학교를 갈 수 없으니까 공동체 속에서 어른들이 아이들을 돌봐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으로 보였다. 나는 이 이야기를 접하고 놀랐다. 아, 어째서 더 과거로 가는 건가. 어째서 공동체 시절로 돌아간단 말인가! 이제 아이들도 자립심을 길러야 한다. 스스로 일어설 필요가 있다. 얼마 전 6살 러시아 여자아이가 총기분해를 하고 가지고 노는 영상이 유튜브에 올라온 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런 아이들이 모임을 가지기도 했었다. 그걸 보고 어떤 한국인은 댓글로 비아냥을 하더라. 한국 아이였으면 엄마 찾고 난리였을 거라고. 부끄러웠다. 언제까지 아이들을 어른들에게 의존하게 만들려고 하나. 이제 아이들도 어른들 손에서 벗어나 자립심을 길러야 하지 않겠나? 지금은 충분히 그럴 수 있는 환경이다. 인터넷으로 어른의 도움 없어도 정보를 수집할 수 있다. 사회도 많이 성숙해져서 과거에 비해서 치안이 매우 좋은 상태다. 오히려 어린이가 어린이 보호구역에서 민식이법으로 어른을 협박할 정도지. 아, 왜인지 갑자기 눈물이 흘러 나왔다. 잠깐 그 이유에 대해 생각을 해봤다. 아마 도덕에 지배 받는 어른과 그들에게 영향을 받는 아이들에 대한 연민이 것이다. 어째서 조선의 도덕에서 벗어나질 못하는가? 어째서! 조선의 공동체 의식에서 벗어나질 못하는가! 정말 글을 쓰다가 눈물이 나온 것은 오랜만이다. 이제 아이들도 스스로 자신이 원하는 길을 찾게 만들어야 한다. 인터넷이 있지 않는가! 아이들이 직접 자신이 원하는 길을 찾고 그 정보에 대한 사실확인과 외출 시 안전보장만 어른에게 도움을 받으면 된다. 이제는 아이들에게 자유의지를 가르치는 교육이 되었으면 좋겠다. 공동체를 형성하더라도 연령과 관계없이 평등해야 한다. 장유유서의 질서가 자리잡은 공동체는 연상이 지배하는 공간에 불과하다. 그런 곳에서 어떻게 자유의지를 가질 수 있겠는가? 연상이 지배하던 사회였던 한국은 아이들이 자립심을 기르기 어려운 환경이었다. 그런 만큼 코로나 시대야말로 자립심을 기르기 가장 좋은 시기다. 왜냐하면 홀로 있어야 감염이 안 되는 시대기 때문이다. 홀로 책이나 영상으로 정보를 접하고 그 정보를 관찰하고 실험하고 고찰하여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과정이 필요하다. 자유의지로 스스로 생각할 줄 아는 인간이 되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더 이상 한국 아이들이 힘들면 엄마를 찾으며 울 거라는 부끄러운 이야기를 접하고 싶지 않다. 이제는 한국 아이들도 자립할 때다. 그러고 보니 생각나는 것이 하나 있다. 옛날 어른들은 아이들을 강하게 키우고 싶어했다. 그러나 그건 말이 안 되는 얘기였다. 순종적인 인간을 만드는 조선을 도덕으로 연약하게 만들어놓고 강하게 성장하길 바라다니. 그건 자가당착이다. 자유를 보장해주고 그에 대한 책임을 짊어지게 만들어야 강하게 성장할 수가 있다. 그리고 강하게 성장해야만 한다. 코로나는 자립심을 길러 강한 아이로 키우기 좋은 시기라는 것. 그것을 알면 당장 할 수 있는 교육방식도 자연스럽게 나온다. 시험 범위를 공개하고 알아서 공부하라고 해라. 학교는 평가만 하면 된다. 단 포스트 인터넷 시대에 맞게 암기가 아닌 이해로 평가해야 할 것이다. 인터넷이 있다는 전제하게 교육을 하게 되면 암기는 그리 크게 중요한 요소가 아니다. 이해로 평가하게 만들면 시간소요가 줄어들어 시험의 난이도가 적절하게 내려간다. 비대면 학습으로도 충분히 대응할 수 있는 난이도가 될 것이다. 남은 시간에는 취미로 창작을 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어떤 것이든 좋으니까 결과를 만들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육상이 취미면 시간 감축을, 글쓰기가 취미면 글쓰기를, 별보기가 취미면 별 관찰일기를. 어떤 것에 몰두해서 창의적인 창작품을 만들어내는 그런 시간을 줄 필요가 있다. 공부도 스스로, 하고 싶은 일도 스스로 할 수 있는 자유의지를 가진 인간을 길러내야 한다고 생각한다. 교육부가 비대면 학습을 진행하지 않은 것은 기존 교육과정인 출석방식을 유지하기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 학생이 수업에 집중을 할거란 보장이 없기 때문으로 보인다. 아이들을 믿지 못하니까 비대면 학습이 어려운 것이다. 그런데 그건 결국 공동체 속에서 아이들을 어른들 손으로 키우려는 것과 다르지 않다. 실제로 집중하지 않고 딴짓하는 아이들이 있을 것이다. 암기가 아닌 이해로 난이도를 줄여도 그런 아이들은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스스로 공부하게 해야 한다. 사실 이건 인과가 잘못되었다. 시켜서 하는 공부로 학습하다 보니 시키지 않는 공부가 어려운 것이다. 처음부터 스스로 공부하게 했어야 했다. 원하는 길을 위해 스스로 공부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했어야 했다. 그걸 지금이라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또한 쉽게 진보하기 어려울 것이다. 공부를 시켜서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고지식한 부모들이 많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지금은 아니다. 코로나로 혼란스러운 이때, 가장 진보하기 좋은 시기라 본다.

 

한국 교육 자체가 어른에 의존하는 경향이 크다 보니 국가 자체도 의존적인 경향이 있다. 국방을 미국에 의존한다거나 말이다. 나는 주한미군 주둔을 찬성하는 입장이다. 주한미군이 주둔해서 얻는 이익이 크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립심은 그것과 별개다. 국방비리를 보면 나는 이런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좀 비리 해쳐먹어도 미군이 지켜주겠지. 어차피 미군이 다 할 텐데 뭐. 비리가 나도 제대로 처벌도 안하고 제 식구라고 감싸기만 하고 있고. 이게 정녕 휴전국가인지 의심스러울 정도다. 이런 현상은 미군에 대한 의존 말고는 해석이 되지 않는다. 이 얼마나 의존적인가. 이것 외에도 잘 살펴보면 의존적인 성향이 눈에 띈다. 세세한 것을 다루기엔 부끄러운 것이 많으니 두루뭉실하게 넘어가겠다. 애초에 교육이 문제니까 교육이 진보하면 그런 의존적인 성향은 바뀌게 될 것이니 굳이 안 써도 될 거라 본다. 교육이 자립해야 국가도 자립한다. 그걸 강조하며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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섹스를 싫어하는 매우 도덕적인 팬더양반들은 멸종위기고 섹스를 좋아하는 매우 부도덕적인 토끼천민들은 호주를 정복했습니다. 조선의 성 관념은 생존에 적합하지 않습니다. 그건 지배에 적합한 겁니다. 여성을 도구로 삼기 위해 주입한 정조관념 따위 버리기 바랍니다. 지조 절조 따윈 남성이 만든 족쇄일 뿐입니다. 여성들의 자유와 평등은 남성에게까지 정조관념을 주입하는 것이 아니라, 여성 또한 자유로운 성생활을 즐기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여성들이 그 족쇄에서 벗어나서 자유로운 성생활이 가능해져야 성적 농담을 수치스럽게 느낀다거나 하는 일들이 없어질 겁니다. 지금 남성들은 성적 농담이나 알몸에 수치심을 별로 느끼지 않거나 아예 느끼질 못합니다. 주입된 정조관념이 없으니까요. 요즘은 여성에게 주입된 정조관념을 남성에게도 주입하려 애쓰는 모양새가 있지만, 없는 것이 자유로운 인간의 모습입니다. 여성들은 남성들이 주입한 도덕에서 해방되어 그 자유를 쟁취해야 해요. 그게 진정한 여성의 자유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래야 남성들도 덜 피곤해질 겁니다. 최소한 구급대원이 구조할 때 성추행으로 신고 받는 일은 없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여성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여성들이 성추행을 당했을 때 수치심으로 벌벌 떠는 것이 아니라 맞서 싸울 수 있게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만들어진 수치심 때문에 이성을 유지할 수 없어 성추행인지 아닌지 분별할 수 없으니까 구급대원의 구조도 성추행으로 느끼는 겁니다. 고지식한 보수주의자들이여, 나중에 팬더처럼 강제로 포르노 시청해서 애 만들 거 아니면 미리미리 준비해두십시오. 참 왕에게 지배 받던 시대의 도덕 때문에 이게 뭐 하는 건지.

 

안전과 보호라는 명목으로 많은 통제를 하고 있죠. 그렇지 않아도 도덕적인 국가라 자유롭지 못한 상황이에요. 한국은 자유주의 국가라고 알고 있습니다. 혹시 자유주의자라면 인간을 지배하려 들지 말길 바랍니다. 딱 필요한 만큼만 통제해야 해요. 정당으로 지배하려 들지 말고 자본으로 지배하려 들지 말고 도덕으로 지배하려 들지 말고 종교로 지배하려 들지 마세요. 정당으로 지배하는 공산당이나 의식주 투기로 지배하려는 자산가나 장유유서로 지배하려는 연상이나 조선시대 성 관념으로 인간의 성욕을 지배하려는 정조관념이 투철한 자나 맹신이나 불살로 인간의 생각과 행동을 지배하려는 종교인이나 전부 마찬가지입니다. 정치가든 자본가든 도덕이든 종교든 그 어떤 것이든 인간을 지배하려는 것은 자유의 적입니다. 그리고 자유의 적은 나의 적입니다.

 

시원한 여름 따뜻한 겨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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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이상한 나라의 올바름 (0) 2020/07/01 PM 07:28

이상한 나라의 올바름

 

 

 

사람은 행복하길 바란다. 그런데 행복하길 바라면서도 불행을 선택하는 사람들이 있다. 참으로 이상하지. 도대체 왜 그런 걸까? 왜 그런 모순된 행동을 하는 걸까? 이유가 있을 것 아닌가. 물론 이유가 있다. 그 불행이 사회의 올바름이기 때문이다. 올바르기 때문에 불행을 감수한다. 그것뿐만이 아니다. 그게 불행을 부른다는 것조차 모르는 걸로 보인다. 예를 들어보겠다. 많은 사람들은 꼰대를 싫어한다. 꼰대란 높은 연령이나 지위를 수단으로 상대에게 비논리적이고 불합리한 언행을 하는 사람을 뜻한다. 자신이 말이 무조건 맞는다고 생각한다. 독선적이고 지배적이다. 복종을 강요한다. 이하 다양한 특성을 지닌 꼰대는 사회적 문제를 일으켜 논란을 부르고 있다. 어떤 설문조사에 따르면 75%가 사내에 꼰대가 있다고 대답했다. 많은 한국인들이 꼰대에게 괴롭힘을 당한 적이 있다는 얘기다. 도대체 얼마나 많은 사람을 불행하게 했을까? 꼰대는 불행을 부른다. 그렇다면 이런 꼰대가 왜 생기는 걸까? 사회의 악인 것마냥 비난을 받고 있음에도 사라지지 않는 이유가 뭘까? 그 이유는 간단하다. 꼰대야말로 지극히 도덕적인 인간이기 때문이다. 그 행동이 올바른 도리기 때문에 사라지지 않는 것이었다. 조선에는 장유유서라는 도리가 있다. 「어른과 어린이 사이의 도리는 엄격한 차례가 있고 복종해야 할 질서가 있음을 이른다.」이런 도리를 물려받은 한국은 연령에 따라 엄격한 질서가 있다. 어린이는 어른에게 공손하게 존댓말을 해야 되고, 공경을 표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싸움이 일어난다. “어린 것이 반말이야!” “어디서 건방지게!” “주제 넘는 짓을 하고 있군!” 장유유서는 인간이 인간에게 복종하는 것을 올바른 도리로 만들었다. 불평등을 올바른 도리로 교육하고 있는 것이다. 오히려 평등하면 불쾌감을 느낀다. 연령평등을 주장해봐라, 받아드릴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불쾌하니까. 어떤 이는 어린이는 어리석기 때문에 어른에게 복종해야 한다고 주장할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그 논리가 바로 신분제의 논리다. 백성은 어리석기 때문에 복종해야 한다. 이 둘이 무슨 차이가 있는가? 차이가 없다. 장유유서는 어른과 어린이의 관계에서 성립되는 질서가 아니냐고 물어볼 수 있다. 그렇지만 어린 시절 교육받은 질서는 평생가게 되어있다. 세 살 버릇 여든 간다고 하지 않나? 어른이 되도 연령으로 차별하는 모습을 쉽게 접할 수 있다. 한국에선 그것이 올바른 도리가 된 것이다. 이제 알겠는가? 연하에게 복종을 요구하는 꼰대는 무척이나 도덕적인 인간인 것이다. 반대로 복종하지 않는 연하가 부도덕하다. 도덕이란 대체. 사회적 문제 중 갑질이라는 것이 있다. 갑질이란 높은 지위로 불합리한 요구나 명령을 내리는 것을 뜻한다. 꼰대랑 본질적으로 별 차이는 없다. 요는 갑질도 결국 장유유서의 질서에서 비롯되었다는 거다. 인간을 차별하는 게 올바른 도리가 되어버리니, 다른 관계에서도 영향을 미친 것이다.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 꼰대나 갑질에 불만이 있는 사람들도 장유유서의 질서를 따른다는 것이다. 당장 자신에게 물어보라. 연하가 반말을 한다고 가정하면 어떠한가? 단순 연하뿐만 아니라 어린이와 노인이 반말을 하며 평등하게 지낸다고 생각해보라. 이상한가? 불편한가? 그렇다면 장유유서의 질서를 따르고 있다는 말이 될 것이다. 불행을 부르는 꼰대와 갑질은 싫어하면서 꼰대와 갑질의 원인이 된 장유유서는 올바른 도리로 여긴다. 이것이 바로 행복하길 바라면서 불행을 선택한다는 말이다. 헛웃음이 나온다. 어려서부터 배워온 장유유서라는 연령차별주의를 올바른 도리로 교육받아 그게 불행을 부르고 있다는 걸 의심조차 하지 못해 스스로 불행을 선택하고 있는 것이었다. 자리가 바뀌면 사람이 바뀐다는 말이 있다. 갑질에 당하던 인간도 자리가 높아지면 갑질을 한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그 말은 틀렸다! 그건 사람이 바뀌는 게 아니다. 그저 올바른 도리를 행하고 있을 뿐이다. 높은 자리로 가면 복종을 요구하는 게 올바른 도리지 않나! 어쩌면 이렇게 당연한 것이었을까! 참 신기할 정도로 원인이 명백하다. 명절에 친척집 가기 싫은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집안 어른에게 복종하기 싫어서 그런 게 아닌가! 자유와 평등이 자리잡은 현대한국사회에서 이보다 더 이상한 것이 또 어디 있을까? 그야말로 이상한 나라의 올바름이다.

 

올바름이라. 도대체 우리가 알고 있는 올바름은 정말 올바른 것이었을까? 생각해보면 이상한 것이 하나 둘이 아니다. 예부터 남녀유별이 올바른 도리로 여겨졌다. 남녀유별인데 어찌 함께 앉으리요? 어려서부터 남녀가 유별나다는 것을 교육받았기 때문에 어릴 때 하는 이성교제를 부도덕으로 받아드리게 되었다. 그런 영향으로 아직도 많은 학교에서는 이성교제를 교칙으로 금하고 있을 것이다. 뭐 그것이 아니더라도 사회의 시선 자체가 학생교제를 바람직하게 바라보지는 않는다. 애들은 공부나 해. 이성교제는 학업에 도움이 안 된다는 거겠지. 이성교제금지는 본질적으로 남녀유별이 부른 것이지만 명분도 그럴 듯 하기에 연애와 학업을 저울질 해보겠다. 과연 연애가 중요한가, 학업이 중요한가? 이는 얼핏 봤을 때엔 학업이 중요해 보인다. 지금까지 그래왔으니까. 하지만 잘 생각해보면 연애가 더 중요하다는 걸 알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국가생존에 달린 문제기 때문이다. 연애와 생존이 무슨 관계가 있냐고? 관계가 있다. 저출산 문제다. 출산율이 낮아지면 한국은 도태된다. 저출산은 국가생존에 매우 치명적이다. 그렇다면 저출산의 원인은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자본? 환경? 다양한 원인이 있지만 근본적으로 결혼 자체를 하지 않아서 그렇다. 사실 결혼한 부부의 출산율은 높다고 한다. 만약 결혼을 하는 사람이 늘어난다면 출산율을 걱정하지 않아도 될 정도라고 한다. 그러니 저출산은 단지 결혼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결혼을 하지 않는 이유가 뭘까? 이성을 사랑하는 사람이 적기 때문이다. ? 그건 꼰대와 인과관계가 같다. 어려서부터 사람이 사람을 평등하게 대하는 걸 부도덕하다고 교육을 받으니 성장해서도 평등하게 대할 수가 없다. 그래서 꼰대가 생기고 갑질이 생긴다. 마찬가지다. 어려서부터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는 것을 부도덕하다고 교육을 받으니 성장해서도 사랑할 수가 없다. 그래서 결혼이 줄고 이혼이 늘었다. 인과관계가 명확하지 않나? 그렇다면 과거에 결혼과 출산율은 왜 높았는가? 그야 간단하다. 과거에는 결혼이 의무였기 때문이다. 집안과 집안의 연결이라고 할 정도였지. 그래서 학생의 이성교제를 금지해도 사회가 돌아갔다. 사랑하지 않아도 결혼을 하게 했으니까 출산율이 높았던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지 않나. 결혼은 의무가 아니다. 그래서 결혼하는 사람이 줄어들었다. 분명 결혼은 개인에게 많은 희생을 요구한다. 서로에 대한 간섭과 책임. 가족을 형성한다는 것은 개인의 희생을 동반한다는 것이다. 그 희생은 의무가 아니면 사랑이 있어야 감내할 수 있다. 그런데 어려서 사랑하는 방법을 배우지 못했네? 그러니까 우리 사회가 이 지경이 된 것이다. 남녀유별에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 교육을 명분으로 별생각 없이 내세운 학생의 이성교제금지 때문에 사랑하는 법이 배우지 못한 사람들이 많아져서 결혼을 하지 않는 바람에 국가존립을 흔드는 저출산 현상이 나타난 것이다. 이제 알겠나. 국가생존을 위해서라면 지금이라도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는 걸 부도덕하다고 교육하지 말아야 한다. 이제라도 연애하게 만들어야 한다. 어려서부터 서로를 아끼고 사랑하게끔 해야 커서도 서로를 사랑할 수가 있는 거다. 그래야 결혼도 늘어나는 거다. 애초에 사랑하지 않는데 어찌 결혼을 하고 출산율이 높아질 수 있을 거라 생각했던 건가? 모든 현상에는 원인이 있다. 사랑을 교육하지 않았으니까 사랑을 할 줄 모르기에 결혼을 하지 못하는 거다. 흔히 연애는 커서 하면 된다고들 한다. 그런 논리로 학생의 이성교제를 반대하겠지. 똑같이 돌려주겠다. 커서 공부하면 된다. 그러면 공부에는 때가 있다고 말할 것이다. 똑같이 돌려주겠다. 사랑에도 때가 있다. 어릴 때 사랑하는 법을 배우지 못한 인간은 평생 사랑할 줄 모르게 된다. 어린 시절 교육은 평생 가는 법이다! 그리고 학업과 병행이 불가능한 것도 아니다. 오히려 누군가에 대한 사랑이 삶의 원동력이 되어 공부에 집중하게 할 수 있다. 강압으로 공부에 매달려왔던 아이들이 능동적으로 노력할 근거가 생긴다는 거다. 사랑하는 사람과 행복한 미래를 위해 공부한다. 그것이 이상한가? 한국은 사랑을 부도덕하다고 교육한 결과 국가 애정결핍이 되어버렸다. 결혼비율감소. 그것이 명확한 근거가 된다. 이런 애정결핍현상은 저출산에만 영향을 끼치는 것이 아니다. 사람이 사람을 사랑할 줄 알아야 사회도 사랑하고 국가도 사랑하는 것이다. 이제는 애국심을 강요할 수 있는 시대가 아니지 않나. 국가를 위해서, 민족을 위해서, 희생하는 시대가 아니다. 이제는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희생하는 시대다. 가족을 위해 연인을 위해.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손해를 감수한다. 그러나 한국은 애정결핍사회다. 사랑할 대상이 없거나 사랑할 줄 모르는 사람이 많이 늘어났다. 그래서 희생을 하겠다는 사람들도 줄어들고 있다. 군대를 왜 가나? 출산을 왜 하나? 과거엔 강제로 가고 했다. 지금은 사랑하는 사람이 있어야 그 희생을 감수할 것이다. 현재 우리 사회에는 혐오와 증오가 만연하다. 그것은 사람을 사랑하는 걸 부도덕이라 교육한 결과라고 본다. 애정이 결핍되었으니 증오와 혐오가 넘치는 거다. 성별관계 없이 왜 혐오사상에 휘둘리겠는가? 왜 이성을 혐오하는 사람이 많을까? 배움의 시기에 이성을 사랑하는 방법을 배우지 못했기 때문이다. 사랑이 없는 사회, 이 얼마나 불행한 사회인가? 지금까지 우리가 아무 생각 없이 지켜왔던 올바름이야말로 우리를 불행하게 만들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는 그걸 알아야 한다. 도대체 올바르다고 생각해왔던 것 중에 진정 올바른 것이 얼마나 있는 건가?

 

유교의 올바름만 이상한 건 아니다. 다른 것들도 살펴보면 이상했다. 불교는 살생을 죄로 만들었다. 모든 생명체를 죽이면 죄라는 것이다. 즉 불살이 올바른 도리다. 얼핏 보면 맞는 말 것처럼 느껴진다. 살생이 올바르게 느껴지진 않겠지. 그런데 생각해보면 이상하다. 인간은 생명체를 죽여서 생명을 유지하는 생물이다. 잡아먹고 살아남았다. 수백 만년간 그래왔다. 그것이 잡식동물인 인간 본연의 성질, 인간의 본질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불살이 올바른 도리가 되면 잡식이란 인간의 본질이 잘못되었다는 얘기가 된다. 그건 달리 말해 잡식의 성질을 버리는, 인간이 인간에서 벗어나는 게 올바른 도리라고 주장했던 것이다. 도대체 이게 뭔가. 그 어떤 올바름이건 인간의 올바름이면 인간을 위해 존재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어찌 인간이 아니게 되는 걸 올바른 도리라고 하는가? 인간이 인간이 아니게 되는 것이 올바르다면 무엇을 위해 올바름은 존재하는 것인가? 증명되지 않은 신을 위해서? 염라대왕께서 진노하기 때문에? 파리는 잡아죽이면서 반딧불은 예쁘다고 아끼는 게 인간이다. 소와 돼지는 잡아먹으면서 고양이와 개는 예뻐하는 게 인간이다. 원래부터 인간은 동물 상대로 제멋대로 해왔고 그것이 그릇된다고는 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다른 종도 인간 상대로 제멋대로 하기 때문이다. 지금은 힘에 눌려서 제멋대로 하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호랑이를 산에 풀어놔보라. 매일 호환에 시달릴 거다. 그러니 인간이 무슨 만물의 지배자마냥 다른 종까지 보살피려 들지 말라. 잡아먹지 않아도 살 수 있으면 모르되, 다른 종을 잡아먹을 거면서 그들의 사정까지 살피는 건 지나치게 오만한 행위다. 인간은 지적 능력 외에 생명의 가치 측면에서 다른 동물과 아무런 차이가 없다. 그러니 다른 동물처럼 똑같이 생존경쟁에 나선다고 해도 별다른 죄가 되지 않는다고 본다. 살생의 죄라. 어쩌면 도축업자가 천대받은 것은 살생이 죄였기 때문이 아닐까 싶을 정도다. 동물을 도축하는 도축업자는 매일 살생하고 있으니 살생이 죄인 사회에선 존중 받기 어렵겠지. 반면 그런 게 없는 서양에선 도축업자가 존중을 받고 있다. 올바른 도리가 끼치는 영향이란 바로 그런 거다. 여기서 끝난 게 아니다. 생각이 계속 이어진다. 올바름이 사회의 질서를 형성한다. 그렇다면 어쩌면 그 올바름 때문에 동양이 서양보다 뒤쳐졌던 것이 아닐까 싶다. 사회를 형성하는 질서가 다르니까 격차가 생긴 거란 얘기다. 정리해보자. 동양에 영향을 끼치던 불교의 올바름은 인간뿐만 아니라 다른 생명체를 죽이는 것도 덜덜 떨며 죄악감을 가졌다. 그야말로 초식이다. 반면 서양에 영향을 끼치던 기독교의 올바름은 명분만 있으면 그 대상이 인간이라도 죽여도 되었다. 이교도를 학살하는 건 지극히 올바른 도리였다. 그야말로 육식이다. 이 차이가 동양과 서양의 격차를 만드는데 큰 기여를 한 것이 아닐까? 불교는 내면수행을 중요시했고 기독교는 종교전파를 중요시 했다. 불교의 죄는 죽어서 저승에서 갚게 되고 기독교의 죄는 회개하면 천국으로 갈 수 있었다. 과연 어느 쪽이 인간에게 있어 더 자유로운 활동이 가능했는가? 어느 쪽이 더 넓은 세계로 뻗어나갈 수 있겠는가? 인간의 발전은 생각과 행동의 자유에서 비롯된다. 동양은 내면수행을 하고 있을 때, 서양은 종교전파를 목적으로 세계를 떠돌며 새로운 문물을 접했다. 동양은 되도록 얌전히 질서를 유지하고 있었지만 서양은 종교전파의 과정 속에서 침략의 죄도 지었다. 옳고 그름을 제외하고 보자. 어느 쪽이 더 자유로운가? 어느 쪽이 더 나아갔는가? 그것만 따지면 서양 쪽이 더 자유롭게 나아갔다. 자유로운 환경, 새로운 변화. 그러니까 서양이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동양과 서양은 각자가 추구하는 올바름의 차이로 격차가 벌어졌다고 본다. 씁쓸한 일이다. 불살이 진정 인간을 위해 올바른 것이었다면 그래도 이해한다. 그런데 그건 단지 잡식인간이 아니게 되는 걸 올바르다고 주장했던 것뿐이다. 그 때문에 동양이 굴욕을 겪는데 영향을 끼쳤다면 불살을 지켜야 하는 게 올바른 도리라 할 수 있을까? 약자는 죄가 아니다. 하지만 약하게 만드는 것은 죄가 된다. 왜 벌레 하나 죽이지 못하는 약자로 만드는 걸 올바른 도리라고 교육했는가? 참 이상하다. 내가 생각하는 최고선은 종의 생존과 번영이다. 그 최고선을 이루는데 방해되는 올바름은 내게 있어 더 이상 올바름이 되지 못한다.

 

기독교는 의심을 죄로 만들었다. 즉 맹신이 올바른 도리다. 상식적으로 어떻게 이걸 올바른 도리로 여기는지 이해할 수가 없을 것이다. 그런데 그게 올바른 도리로 여겨진다. 그냥 그렇게 교육받아왔기 때문이다. 복종을 올바른 도리로 여기거나 불살을 올바른 도리로 여기거나 하는 것과 똑같은 거다. 그저 그렇게 배웠을 뿐이다. 이런 도리는 지배를 할 때 아주 효율적이고 적절했다. 의심이 죄가 되자 종교의 가르침뿐만 아니라 종교지도자의 말 또한 의심할 수 없게 되었다. 종교지도자의 말은 뭐든지 믿는다. 기독교계열에서 사이비종교가 많은 까닭은 여기에 있다. 뭔가 이상한 게 있어도 의심이 죄다라고 말하며 의심할 수 없게 만들면 되니까. 의심이 죄다 보니까 과학의 효과도 미미하다. 과학이 발달하면서 기독교의 가르침이 비과학적이라는 것이 밝혀지고 있음에도 의심할 수가 없으니까 그냥 종교를 그대로 믿고 있다. 맹신이 올바른 도리라고 교육받은 사람들이 늘어날수록 사회엔 비과학적, 비이성적, 비논리적인 사람들이 늘어났다. 이는 피해의식과 정으로 이미 감성적인 한국을 보다 더 감성적으로 만들었다. 의심이 죄다 보니까 사기꾼도 엄청 많다. 아니 사기꾼 입장에선 매우 손쉬운 먹이였을 것이다. 의심 자체를 할 수 없는 인간들이니까. , 맹신이 올바른 도리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 자체가 괴롭다. 이런 당연한 걸 주장해야 한다니. 그래도 하겠다 맹신은 올바른 도리가 아니다! 의심은 죄가 아니다! 무엇이든 의심하고, 자신이 의심받는 것을 불쾌해 하지 말라. 맹목적인 의심은 잘못되었으나 합리적인 의심은 사회를 건전하게 만드는 훌륭한 수단이다. 의심이야말로 발전의 양분이다. 배운 것을 의심하지 않으면 어떻게 앞으로 나아갈 수가 있나! 기독교의 질서 내에서 현대사회의 사상들이 등장했음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기독교의 맹신이 올바르다고는 할 수는 없다. 의심하고 또 의심해라. 그래야 발전한다. 종교를 가진 사상가와 철학가는 불완전하다. 가르침을 부정하지 못하고 가르침 내에서만 사상과 철학을 할 수 있으니까 말이다. 의심할 수 없는 사상가와 철학가는 그 한계가 명확하다. 그런데 서양이 의심이 죄라는 한계가 있음에도 동양보다 발전할 수 있었다. 그 말은 의심이 죄인 것이 행동에 제약이 많은 초식보다는 발전에 도움이 된다는 이야기가 된다. 인간을 위한 올바름이라, 도대체 뭐라고 해야 할까?

 

왜 싸움이 죄가 되었던 걸까? 나는 싸움이 싫었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니까 싸움 또한 일종의 의사표현이었다. 나의 의사를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는 수단이었다! 그걸 죄로 만들다니! 죄는 폭력으로 인간을 상하게 만들었을 때 죄가 된다고 가르쳤어야 했다. 논쟁! 무도! 그런 것은 올바르다고 가르쳤어야 했다! 최근 미국에서 흑인 사망으로 흑인인권시위가 벌어지고 있다. 그런데 일부 폭력을 사용하는 이들이 있어 논란이 일어나고 있다. 그 때문에 시위 자체를 잘못되었다고 보는 사람이 있다. 하지만 시위 자체는 잘못이 아니다. 설령 폭력이 있다고 하더라도 시위 자체는 그야말로 자유의 상징이다. 불만 있으면 싸워라! 나는 흑인인권시위에 관심이 없다. 그 시위는 모든 인간의 인권도 아니고 흑인인권도 아닌 미국 내에 있는 흑인의 권리를 위한 시위이기 때문에 별로 관심이 없다. 하지만 시위 자체가 잘못되었다고 하지는 않는다. 그것이 자유주의에서는 올바른 도리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자유국가인 미국다운 모습이다. 싸움이 죄를 부를 수 있다고 싸움 자체를 막는 것보다 훨씬 자유롭고 바람직하다. 만약 폭력이 있을 수 있다고 하여 시위 자체를 못하게 했다고 가정해보자. 그것이 정녕 올바른 일일까? 나는 그릇된다고 본다. 지금까지 아이들을 손쉽게 다루기 위해 싸움자체를 죄로 만들었다. 조용히 순종적으로 지내라고 요구했지. 하지만 그것은 잘못되었다. 오히려 싸움할 수 있는 인간으로 길러냈어야 했다. 건전한 싸움, 올바른 싸움을 할 수 있도록 싸우는 방법을 알려줬어야 했다. 논쟁하는 법을 알려주고 무도를 알려준다. 그것이 바로 싸울 줄 아는 인간으로 육성한다는 것이다. 논쟁을 가르쳐서 저열한 욕설보다는 품위 있는 논리적인 공격을 할 수 있도록 했어야 했다. 무도를 가르쳐서 정당한 약자를 보호하고 부당한 강자와 맞서 싸울 수 있도록 했어야 했다. 단순하게 싸움이 죄를 부를 수 있다고 해서 싸움 자체를 죄로 만들면 안됐다는 이야기다! 많은 사람들이 제대로 싸울 줄 모르니까 우리 사회에서 싸움이 불건전하게 진행되고 있지 않나! 인터넷 상에 악플을 단다거나, 약자를 공격하고 강자에게 복종한다거나 하는 것들은 그야말로 인간의 싸움을 배우지 못한 동물들이 저지르는 죄악이다. 따라서 싸움자체를 금하는 것이 아닌 인간의 싸움을 배우도록 하게 했어야 했다. ,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까지 올바르다고 생각했던 것들 대부분이 이상하다.

 

왜 성 상품화가 죄가 되었던 걸까? 얼핏 들으면 올바른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어린 시절 이성교제를 부도덕하다고 교육받아 자연스럽게 섹스도 부도덕하다고 교육받아왔으니까. 자연스러운 욕구 중 하나를 언급하는 것도 조심스럽게 만든 것은 그러한 영향이 크다고 본다. 그 영향으로 포르노를 죄악으로 여기는 건 한국 제외하곤 거의 없다고 하지. 한숨만 나온다. 성 상품화? 그건 결코 죄가 아니다. 인간의 필수적인 욕구를 충족하게 할 상품을 죄로 만들면 어쩌자는 건가. 식욕을 충족하기 위해 만든 상품은 죄가 되는 건가? 성의 상품화나 식의 상품화나 인간 본성을 기준으로 하면 차이가 없다. 그럼에도 조선의 도덕관념과 서양의 여성주의가 합쳐서 성 상품화를 죄로 만드는 사태가 벌어지고 말았다. 이는 인간이 인간임을 부정하는 불교의 불살과도 같은 상황이다. 고기를 먹는 것을 죄로 여긴 이들이나 성 상품으로 성욕을 해소하는 걸 죄로 여긴 이들이나 똑같이 인간을 위한 것이 아닌 것을 올바름으로 추구하고 있다는 거다.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일이다. 어떻게 인간에게 인간이 아니게 되는 걸 올바른 걸로 인정하길 바라고, 따르길 바라고, 인정하길 바라는 걸까. 이런 것 다 집어치우고 물어보겠다. 왜 그렇게 그릇이 좁은 건가? 성 상품으로 행복을 얻는 것이 그렇게나 아니꼬운가? 자신이나 사회에 피해가 많지 않으면 웬만하면 그 자유를 인정해라. 성 상품이 대한 부정적 인식을 줄 수 있어서 반대한다는 의견이 있다. 그건 틀렸다. 성 상품화로 부정적 인식을 주는 것이 아니라, 애초에 그 부정적 인식이라는 게 정상적인 인식이다. 가슴 좋아하고 팬티 좋아하고 근육 좋아하는 것들이 성 상품화 때문인 걸로 보이나? 원래 그런 거다. 원래 인간이 그런 거 좋아하는 거란 말이다! 더럽다고 느끼는 것은 그걸 더럽다고 느끼게 만든 도덕 탓이다. ! 인간의 성애를 더러운 것으로 만들었나! 꼰대가 도덕적인 인간인 것처럼, 애초에 잘못된 올바름을 주입 받아서 그런 거다. 정말 우리가 생각하는 올바름이 진짜 올바른지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성욕은 본능이 원인이지만 성 상품화가 불편한 건 주입된 도덕이 원인이다. 성욕은 생존에 필수적이지만 도덕은 생존에 필수적이지 않다. 무엇이 더 우선되어야겠는가? 본능을 죄로 만들지 좀 마라. 가엾은 한국인들. 의미 없는 올바름 때문에 다른 나라 사람들은 당연하게 얻는 성적 만족감을 우리는 죄악감을 가지며 얻고 있다. 이 또한 사회를 불행케 하는 요소다. 이는 올바름이 불행에 일조하고 있다는 명백한 근거다. 결국 우리는 이 또한 스스로 불행을 선택하고 있는 셈이다. , 도대체 올바름이란. 모든 올바름은 그 근간에 인간애가 있어야 한다고 본다. 인간을 위해서, 인간을 사랑하기 위해서. 존재해야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성 상품화를 죄로 만든 올바름은 과연 인간을 위해서 존재한다고 볼 수 있는가? 성애, 즉 이성을 성적으로 사랑하는 것은, 인간을 사랑하는 것으로 지극히 올바른 도리가 아니겠는가? 성을 사랑하여 상품화가 되는 걸 좀 죄라고 여기지 말라. 그건 조선의 정조관념이 부른 잘못된 도덕관념이다. 조선의 정조관념에서 좀 헤어나왔으면 좋겠다. 정말 지겹다. 여성주의자들은 조선의 여성차별은 싫어하면서 조선의 정조관념은 왜 그렇게 좋아하는가? 단지 입맛에 맞아서인가? 흔히 여성주의가 사회를 바꾸는 개혁이라고 말하는데, 결코 아니다. 지금 여성주의자들이 주장하는 바는 남성이 만든 질서에서 남성의 권리와 여성의 혜택을 바라고 있을 뿐이다. 새로운 질서를 만드는 것이 아니란 얘기다. 남녀의 권리와 혜택이 조금 달라질 뿐, 근본적으로는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다. 연령차별이 사라지나? 정조관념이 사라지나? 그들은 조선의 정조관념을 유지하는 지극히 도덕적인 인간들이다. 그들은 진보가 아니라 보수다. 조선의 정조관념이라, 고리타분하긴. 애초에 수치심도 정조관념에서 온 게 아닌가? 여성을 약하게 만드는 수치심을 왜 그렇게 소중히 여기는지. 정말 보수적인 사람들이다.

 

그 외 자본의 지배를 올바른 도리로 여긴다거나 정당의 지배를 올바른 도리로 여긴다거나 하는 일들이 있다. 흔히 앞에 것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뒤에 것은 공산주의 사회에서 벌어지는 일이다. 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한 자본주의의 명분은 자유고 공산주의의 명분은 평등이다. 자유와 평등, 명분은 그럴 듯 하다. 하지만 그건 명분에 불과하다. 자본을 가진 자는 자유롭게 뭐든지 할 수 있다. 법치 위에도 설 수 있다. 이것이 자본의 지배를 정당화한다는 것이다. 정당에 속한 자는 평등한 분배를 위해 지배할 수 있다. 법치 위에도 설 수 있다. 이것이 정당의 지배를 정당화한다는 것이다. 각 사회에 속한 사람들은 헷갈릴 것이다. 어째서 자본 지배가 이상하다는 거지? 어째서 정당 지배가 이상하다는 거지? 하지만 생각해보라, 「인간이 인간을 지배하는 것은 올바른 도리가 될 수가 없다.」그런 명확한 기준이 있다면 그들이 말하는 궤변에서 벗어날 수 있다. 세상의 올바름은 대부분 인간을 이용하기 위한 부분이 있으니 주의하지 않으면 올바름에 이용당할 수 있다. 그 점을 잊으면 안 된다. 특정 시대의 올바름은 절대선이 아니다.

 

기본적으로 보수는 선이고 진보는 악이다. 기존 질서유지를 바라는 보수는 질서 내에서 선이 될 수밖에 없고 질서파괴를 바라는 진보는 질서 내에서 악이 될 수 밖에 없다. 제정시대에 자유와 평등의 외침은 분명 악이라 할 수 있다. 독재체제에 민주화 운동은 분명 악이라 할 수 있다. 그런 식으로 질서를 파괴하는 진보는 악이 될 수밖에 없다. 그 의미는 악이 없는 집단은 진보할 수가 없다는 얘기가 된다. 조선은 수백 년간 질서가 유지되었다. 수백 년간 질서를 파괴할 악이 등장하지 못했다. 올바른 것이건 올바르지 않은 것이건 그다지 변하지 않았다. 그야말로 불변의 질서가 자리잡은 도덕적인 국가. 그것이 조선의 본질이다. 그리고 그랬기 때문에 진보하지 못하고 결국 몰락하고 말았다. 변화 없는 질서의 끝은 바로 그런 것이다. 참 재미있게도 조선은 질서를 파괴할 악이 없었으니까 망했단 얘기다. 불변의 질서라. 한국사회의 질서에서 장유유서의 도리를 부정하는 것은 분명 악이 될 것이다. 꼰대나 갑질 싫어하는 사람들도 애들이랑 맞먹으라고 하면 불편하겠지. 실제로 그런 방송이 나간 적이 있다. 아이와 노인이 서로 반말을 하며 대등한 관계를 구축했다. 흥미로운 기획이었다. 그러나 장유유서의 도리를 거역한 이 방송은 반발이 많았다. 그 방송을 시청한 시청자의 의견 중 기억나는 것은, 어린 애가 네 부모에게 반말을 해도 괜찮겠냐는 것이었다. 당연히 괜찮다. 장유유서를 올바른 도리로 배운 사람들은 쉽게 받아드리지 못하겠지만 잘 생각해보면 문제가 없다. 반말이 상대를 업신여기는 것이 아니지 않나. 그러면 반말을 사용하는 평등한 관계는 서로 업신여기고 있단 건가? 말이 안 된다. 연하가 연상에게 복종하지 않아도 충분히 서로 사이 좋게 지낼 수 있다. 충분히 서로를 존중하고 아낄 수가 있다. 충분히 서로를 사랑할 수 있다. 그럼에도 연하가 연상에게 복종하는 것을 올바른 도리로 배운 사람들은 연령평등을 악으로 여기게 된다. 끔찍하다. 토할 것 같다. 연령평등을 주장하는 나는 악이 될 수밖에 없다. 그래도 감수하겠다. 사회의 폐단의 원인이 논리적으로 명확함에도 그걸 받아드리지 못해 악으로 취급한다면, 나는 악으로서 기존 질서를 파괴하고 새로운 질서를 만들자고 주장하겠다. 꼰대나 갑질이 싫으면 좀 새로운 질서를 받아드려라! 모든 개혁자와 혁명가는 악이 되는 걸 두려워하지 말라. 그리고 다른 이들도 악을 두려워하지 말라. 꺼려하지 말라. 그 악이 있어야 우리 사회가 변화할 수 있다. 앞으로든 뒤로든 나아갈 수 있다. 그래야 우리가 불필요한 족쇄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 자유, 자유, 자유! 이 나라 사람들이 이상한 올바름에서 해방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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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주의를 올바르다고 교육받은 사람들은 한국을 적대시하는 북한을 형제로 여기고 그걸 부정하는 이들을 반민족주의라며 공격하겠죠.

그런데 그 올바름이 정말 한국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지 묻고 싶어요. 민족과 국가 사이에서 저울질하지 말고 국가를 위해 일했으면 좋겠습니다. 올바르다고 교육받은 것이 전부 올바른 건 아니니까요. 좀 더 고찰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저는 역할에 초점을 맞추고 싶어요. 개인 사상이 어떠하건 한국을 위해 일하는 역할이라면 그 역할을 다하길 바랍니다. 친미니 친일이니 친중이니 친북이니 관계없이. 한국을 위해서 일했으면 좋겠습니다. 외세에 휘둘리는 게 더 부끄러워.

 

북한은 분명 서양의 제국주의에 저항하여 민족주의자들의 귀감이 되었을 겁니다. 지금까지도 저항하고 있죠. 어쩌면 한국의 민족주의자 입장에선 부채감을 느낄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못했는데 그들은 했으니까. 그런데 그게 정말 올바른 겁니까? 모든 독재자는 권력유지가 최우선이다. 이건 어떤 곳에도 들어맞는 이치일 겁니다. 착각하지 마세요. 북한의 독재자는 독재를 위해서 행동하지 민족을 위해서 행동하지 않습니다.

 

서양의 것을 수용한 것이 민족주의자 입장에서 악이 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악이야 말로 사회를 진보시킵니다. 민족자결주의를 주장하며 민족주의자의 선을 지향했던 북한인들이 어떤 삶을 사는지 잊지 마십시오. 민족주의에서 벗어나 서양의 문물을 받아드려 친미파 친일파 소리를 들었던 자들의 악행 때문에 한국이 성장했음을 잊지 마십시오. 독재정권에 대항하여 질서를 파괴하는 악인 취급을 받다가 드디어 질서의 중심이 된 사람들은 잊지 마십시오. 악이 사회를 진보하게 만듭니다. (가끔 퇴보하게 만들기도 하지만.) 현재 질서를 거역하는 악이 사회를 혼란케 할 겁니다. 그래도 그 악이 있어야 한국은 진보할 수 있습니다. 질서를 거역하는 악의 존재를 인정하고 당당하게 맞서 싸우십시오.

 

진보라고 이야기하는 사람들 중에 진짜 진보가 얼마나 있는지 모르겠네요. 그냥 서양정치이념에서 진보라 설정된 걸 따르는 것뿐이잖습니까? 조선의 정조관념을 소중히 하는 사람들이 진보라 주장하는 걸 보면 정말 헛웃음이 나옵니다.

 

앞으로 꼰대나 갑질이 나오면 음, 장유유서의 도리를 따르는 도덕적인 인간이군! 이라고 감탄하면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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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역할평등론 (1) 2019/05/23 PM 07:21

역할평등론

 

 

 

오늘날 무엇이 진정한 평등입니까? 신분제가 평등하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겁니다. 옛사람들도 그랬습니다. 자본가와 프롤레타리아는 신분제가 불평등을 낳는다고 주장하며 시민혁명을 일으켰습니다. 그렇지만 진정한 평등은 오지 않았습니다. 그저 가치판단기준이 혈통에서 자본으로 옮겨진 것이었을 뿐입니다. 자본이 세상을 지배하기 시작하는 걸 지켜본 프롤레타리아는 자본가 계급이 불평등을 낳는다고 주장하며 노동자 계급이 중심이 되는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일으켰습니다. 이것이 냉전을 만든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의 대립입니다. 그렇지만 여기서도 진정한 평등은 오지 않았습니다. 그저 가치판단기준이 자본에서 독재자로 옮겨진 것일 뿐이었습니다. 자본주의에서 공산주의로 전환하기 위해서는 질서를 재편해야 해서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필요하다고 주장하며 독재를 하게 됩니다. 그리고 거기서 끝났습니다. 프롤레타리아 독재에서 공산주의로 넘어가지 못한 채 독재를 계속하게 된 것입니다.

 

혈통과 독재, 신분제와 공산주의는 결국 지배라는 틀에서 궤가 같아집니다 그러니 상대적으로 평등한 체제는 사적 소유권을 인정하는 자유라는 틀에서 궤를 같이하는 자본주의와 사민주의가 되겠습니다. 뭐, 이건 상대적일 뿐입니다. 이들도 온전한 평등을 가져오진 못합니다. 자본이 계급화되는 현상을 막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상속으로 부의 대물림이 진행되고 있는 요즈음엔 부가 또 다른 신분제가 되어가는 추세라 미래에는 현재만큼의 자유와 평등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 어디에도 진정한 평등은 없었던 겁니다.

 

평등이 오지 않았던 까닭, 저는 그 이유를 가치관 때문이라고 봅니다. 이 체제들의 공통점은 가치판단기준이 서열입니다. 신분제는 혈통으로 서열을 매겼고 자본주의는 자본으로 서열을 매겼으며 공산주의는 노동자 계급을 지배하는 독재자들이 서열을 매겼습니다. 평등을 주장하며 새로운 체제들이 등장했지만, 가치판단기준은 여전히 서열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불평등했습니다.

 

민주주의는 분명 국민에게 권력이 있는 평등한 정치체제입니다. 그렇지만 자본주의는 가치판단기준이 서열이었던 경제체제였습니다. 저는 그래서 우리나라가 불평등을 해소할 수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그 점을 보완하기 위한 평등한 가치관이 필요합니다. 수직적 가치판단기준이 아닌 수평적 가치판단기준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이번에 주장할 역할평등입니다. 그럼 시작해보겠습니다.

 

 

 

발상의 시초

 

우리는 불평등한 사회에서 살고 있습니다. 자본으로 서열을 매기고 연령으로 서열을 매기고 학력으로 서열을 매깁니다. 서열이 없는 곳이 없습니다. 아파트 평수로 서열을 매기고 차별을 하는 아이들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마음이 무거웠습니다. 사람들은 정말 평등을 바랐던 것이 맞습니까? 평등하기 위해서는 정당한 손해를 감수하고 부당한 이익을 포기해야 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정당한 손해에 항의하고 부당한 이익을 모른 척을 합니다. 자신의 이기주의에 평등이란 이름을 붙여 이용하는 사람들까지 생기고 있습니다. 어쩌면 사람들은 평등을 바랐던 것이 아니라 평등이 가져오는 이익만을 바랬던 것이 아닐까 하는 슬픈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인간은 평등하다고 가르치는 어른들을 보십시오. 어떤 어른은 불리한 상황에 닥치면 위계질서를 핑계로 불합리한 명령을 내리곤 했습니다. 그러다가 책임을 져야 할 상황이 오면 평등을 핑계로 책임을 똑같이 나누려고 합니다. 무엇이 평등이고 무엇이 책임인지 명확히 구분 지을 줄 모릅니다. 평등하다고 교육받은 아이들을 보십시오. 어떤 아이는 평등이란 이유로 의무를 외면하고 권리만 바랍니다. 어른의 보호는 따르지 아니하면서 권리는 보장해달라고 합니다. 무엇이 평등이고 어디까지 평등해야 하는지를 모르고 있다는 겁니다.

 

평등하기 위해서 다름을 인정해야 한다고들 합니다. 그런데, 다름을 인정해서 평등이 왔습니까? 인종차별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동양인이 서양에 가면 눈을 찢는 사람을 만날 수 있습니다. 지역차별도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지역을 갈라가며 싸우고 있습니다. 연령차별도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청년은 노인복지에 반대하고 노인은 청년복지에 반대합니다. 성별차별도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비율에 맞춘 인위적인 평등을 만들려고 하다 보니 오히려 역차별까지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학력차별도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똑같은 능력으로 똑같은 일을 해도 학력이 높은 쪽이 더 대우를 받습니다.

 

이런 차별들을 보고도 변하는 것이 없습니다. 계속 다름을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차별은 다름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발생하는 거라고 합니다. 그러나 생각해보십시오. 우리가 인정하지 않았습니까? 인정해도 차별은 발생했습니다. 그러면 관점을 달리해야 합니다. 다름을 인정하지 않아서 차별이 발생했던 것이 아니라, 다름을 인정했기 때문에 차별이 발생했던 겁니다. 그러니까 아무리 다름을 인정해도 차별이 사라지지 않는 겁니다. 그러니 평등하기 위해서는 다름이 없는 어떤 특정한 기준이 필요합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 다름이 없는 환경 속의 평등을 이야기해보겠습니다. 인터넷 익명 커뮤니티에서 외국의 인종차별주의자와 외국어로 대화를 나눈다고 가정해보겠습니다. 그가 저를 차별하겠습니까? 불가능합니다. 제가 누군지 알고 차별합니까? 차별할 수가 없습니다. 다름을 인정해야 차별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다름이 없어야만 차별이 사라지는 거였던 겁니다. 다르니까 차별하는 거란 말입니다. 이외 다른 사례를 굳이 설명하지 않겠습니다. 모르면 차별을 할 수가 없습니다. 이론적으로 대화가 통하는 익명의 인터넷 커뮤니티라면 차별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고 그걸 그대로 현실에 대입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니 다름이 없을 수 있는 어떤 특정한 기준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역할입니다. 저는 이 생각을 역할이 필요한 익명의 Role-play game 에서 착안했습니다. 거기서는 상대가 누군지 모릅니다. 그냥 오로지 어떤 특정 역할만 수행할 수 있으면 존중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인종도, 지역도, 연령도, 성별도, 학력도 상관없습니다. 가치판단기준은 오로지 역할수행여부입니다. 제 역할을 수행하면 누구라도 존중하고 제 역할을 수행하지 못하면 누구라도 존중 받지 못합니다. 그걸 보고 저는 ‘아, 현실에서도 역할을 가치판단기준으로 삼으면 차별이 있을 수가 없겠구나!’ 라고 생각했습니다.

 

어떤 사람이라도 역할을 수행하면 존중을 받을 자격이 있고, 수행하지 못하면 존중을 받을 자격이 없습니다. 자본이 많든, 지위가 높든, 권위가 높든, 아무래도 상관없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역할입니다. 사장과 신입사원을 나란히 세운다음 역할수행여부로만 가치를 판단해봅시다. 사장이라도 제 역할을 못하면 존중을 받지 못하고 신입사원이라도 제 역할을 다하면 존중을 받습니다. 이렇게 역할을 가치판단기준으로 삼으면 수평적으로 가치판단이 가능해집니다. 사회에 도움이 되는 모든 역할을 수평으로 나란히 세워보십시오. 어떤 역할이라도 좋습니다. 그 다음 역할수행여부로만 존중유무를 결정하는 겁니다. 그러면 [역할수행]이라는 수평적 기준으로 모두가 평등해집니다.

 

저는 이것이야말로 수직적 가치판단기준이 아닌, 수평적 가치판단기준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평등한 가치관이라 생각합니다. 그렇게 생각한 저는 수년 전 [역할존중, 나는 너를 모른다]라는 글을 쓴 적이 있습니다. 지금 정리한 것이 그때 쓴 글과는 조금 다르지만, 기본은 같습니다. 이것이 역할평등론의 시초입니다.

 

 

 

불평등 기원

 

간단하게 무엇 때문에 불평등했는지에 대해 정리하고 넘어가겠습니다.

 

[진화]

 

인간이 진화했다면, 모든 개체가 한번에 모두 진화했을 리는 없습니다. 아마 어떤 특정 개체 또는 개체의 새끼가 진화를 하여 지능이 높아졌을 겁니다. 그러면 그 개체는 다른 개체와 달리 우수해지게 됩니다. 우수한 개체는 자연스럽게 인간 무리를 이끌었을 겁니다. 이것이 신분제의 시작이라고 생각합니다. 유전자 자체가 달랐던 것입니다. 옛사람들이 혈통을 중시했던 까닭은 이처럼 진화 때문에 발생했던 유전자 차이가 만든 관습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우수한 개체는 다양한 이성개체와 짝짓기를 하게 됩니다. 그리고 태어난 새끼들은 우수한 개체의 유전자를 이어 지능이 높게 태어나게 됩니다. 왕과 왕족의 시작입니다. 이런 식의 반복이 지능이 높은 개체와 지능이 낮은 개체의 차이를 만들었을 겁니다. 왕과 왕족과 귀족, 그리고 평민의 차이의 시작입니다. 이런 차이는 모든 개체가 우수한 유전자를 공유하여 호모사피엔스가 되었음에도 관습으로 남아 신분제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고대 그리스 민주주의에서 노예를 허용한 까닭에는 편의가 크겠지만, 이런 관습적인 측면이 강하게 작용했을 거라 생각합니다. 분명 과거에는 유전자의 차이로 인한 차이가 있을지 모르겠습니다만, 모든 개체가 우수한 유전자를 공유하여 호모사피엔스가 된 현시점에서 신분제는 불평등한 나쁜 관습에 불과합니다.

 

 

[보호]

 

인간은 보호가 필요한 아이를 낳는 동물입니다. 그러므로 필연적으로 불평등한 관계가 만들어집니다. 보호를 위해 불평등한 지시를 내릴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보호자와 피보호자, 이 관계는 인간이 동물로 남아있는 이상 없어질 수가 없는 불평등이 되겠습니다. 이런 점은 이후 설명할 불평등 기준에서 좀 더 자세히 다뤄보도록 하겠습니다.

 

 

 

역할의 기준

 

모든 역할이 존중 받을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범죄자 역할을 수행했다고 존중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기준을 통해 필요한 역할을 골라내야 합니다. 그 기준이 바로 인간이 추구 해야 할 선인 인류의 생존과 번영입니다.

 

동물의 선은 살아남는 겁니다. 그리고 같은 종을 늘리는 겁니다. 이들에게 이것 이외의 올바름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동물의 최고선은 생존과 번영입니다. 여기서 인간은 동물이라는 아주 당연한 진실을 알게 된다면 인간의 선도 알 수 있게 됩니다. 인간이 동물이라면, 인간도 마찬가지로 최고선은 인류의 생존과 번영입니다. 첨언하자면 번영에 행복도 포함됩니다. 행복이 없는 번영은 불완전한 번영입니다.

 

인간이 최고선이 인류의 생존과 번영이라면, 역할도 그걸 기준으로 하여 골라낼 수 있습니다. 인류의 생존과 번영에 도움이 되는 역할들을 골라내면 됩니다. 인류의 생존과 번영에 도움이 되는 역할을 수도 없이 많습니다. 그걸 일일이 설명하긴 그렇고, 인간의 생존과 번영을 돕는 기본단위인 국가를 기준으로 시작해봅시다. 사회의 질서를 만들고 유지하고 운영하는 역할들, 사회의 생존을 돕는 역할들, 사회의 번영을 돕는 역할들, 사회의 행복을 만드는 역할들, 사회의 희망을 만드는 역할들, 사회의 지성을 만드는 역할들, 사회의 편리를 만드는 역할들 등. 이렇게 생존과 번영에 도움이 되는 역할들을 수평으로 나란히 세운 다음 수행여부로 존중유무를 결정하면 되겠습니다.

 

여기서 인류의 생존과 번영에 크게 이익이 되면 존중(유)을 넘어 귀한 존재가 되고, 크게 손해가 되면 존중(무)을 넘어 천한 존재가 되겠습니다. 우리 세상에서 자본이 많거나 지위가 높거나 권력이 있는 사람이 귀한 존재가 아닙니다. 인류의 생존과 번영에 이익이 되어야 귀한 존재인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자본이 적거나 지위가 낮거나 권력이 없는 사람이 천한 존재가 아닙니다. 인류의 생존과 번영에 손해가 되어야 천한 존재인 것입니다. 이건 특별히 이상적인 것도 아닙니다. 그냥 가치관만 약간 바꾸면 됩니다.

 

 

 

평등의 기준

 

차별은 다름을 인정하는 순간부터 시작됩니다. 그러니 다름을 알 수가 없는 어떤 공통점으로 접근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러면 몰개성화가 될지도 모른다고 걱정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다름을 인정하지 않으니까요. 그런데 이건 가치판단기준일 뿐입니다. 존중유무를 결정할 때에만 작용되는 것이니 그리 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인류]

 

인종이나 민족이나 국적이 아닌 인간으로만 접근하면 차별이 일어날 수가 없습니다. 인종을 구분했으니까 차별이 발생했던 겁니다. 흔히 어떤 특정 인종의 잘못을 비판하는 걸 인종차별로 착각하여 논란이 발생할 수 있는데, 인종으로 비판하지 말고 같은 인류로서 비판하면 그런 논란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인종차별은 인종의 특성을 가지고 비하하거나 비아냥 하는 걸 의미하지 잘못을 비판하는 걸 의미하는 게 아닙니다.

 

 

[국민]

 

피부색이 달라도 문화가 달라도 한국인 역할을 해내면 모두 한국인이 됩니다. 설령 다른 체제에 살던 사람이라도 한국인이 되기 위해서는 민주주의적 시민의식이 필요합니다. 같은 민족이라고 하더라도 한국인 역할을 못하면 존중을 받을 수 없고 다른 민족이라고 하더라도 한국인 역할을 다하면 존중을 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민주주의 체제를 갖춘 민족주의자가 아닌, 민족의 언어와 문화를 이은 민주주의자입니다. 우리가 민주주의자니까 독재자를 좋아할 수 없는 건 아주 당연하다고 봅니다. 그게 설령 프롤레타리아 독재라도 말입니다. 그건 독재자의 지배를 통해 모든 노동자가 평등한 구역질 나는 가짜 평등입니다. 지주와 농노의 관계와 무엇이 다른지 모르겠습니다.

 

 

[직업]

 

인류의 생존과 번영에 도움이 되는 직업들을 수평으로 나란히 세운다음, 그 역할의 수행유무에 따라 존중유무를 결정하면 되겠습니다. 이것이 수평적 가치판단기준입니다. 이거면 차별이 발생할 수가 없습니다. 오로지 [역할수행]이라는 공통된 기준으로만 존중유무를 결정하기 때문에 인종, 지역, 성별, 연령, 학력 등으로 차별이 발생할 수가 없습니다. 인종이 뭐든 무슨 상관입니까? 성별이 뭐든 무슨 상관입니까? 연령이 뭐든 무슨 상관입니까? 학력이 뭐든 무슨 상관입니까? 역할만 수행하면 됩니다.

 

흔히 차별의 요소라고 생각되는 외모나 인맥도 어떤 역할에서는 필요한 능력일 수가 있습니다. 배우나 서비스업은 외모가 필요한 역할입니다. 영업은 인맥이 필요한 역할입니다. 이런 식으로 어떤 특성도 예외는 없습니다. 반대로 외모나 인맥을 필요 없는 역할임에도 외모를 자격요소로 내세우는 건 불평등하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자격의 기준

 

저는 역할과 관계없는 모든 가산점에 반대합니다. 군가산점, 성별가산점, 유공자가산점, 지역균등가산점 등. 전부 반대합니다. 이것은 평등을 이유로 역할과 관계없는 능력을 갖춘 사람에게 역할을 맡게 하여 국가 능력의 하향 평준화를 부르는 나쁜 평등입니다. 진짜 평등하길 바란다면, 다른 방법으로 혜택을 줘야 합니다. 군가산점 대신 다른 대가를 주십시오. 성별가산점 대신 좀 더 평등하게 인사가 결정되게 만들도록 하십시오. 유공자가산점 대신 다른 대가를 주십시오. 지역균등가산점 대신 우수한 인재를 수도권이나 해외로 유학 보내도록 하십시오. 그게 더 공정하고 평등합니다.

 

모든 자격은 역할의 수행능력으로만 결정해야 합니다. 학력이 무슨 상관입니까? 간혹 학력을 얻기 위해 노력한 기간이 있으니까 그만큼 가산점을 줘야 한다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러면 도대체 학교는 왜 간 겁니까? 학력이 낮은 사람과 공정한 경쟁을 해서 이길 자신도 없습니까? 블라인드 테스트에서 명문대학생들이 뽑힌다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편법은 제외하겠습니다) 이게 당연한 겁니다. 명문대에서 열심히 공부해놓고 일반대나 전문대나 고졸하고 공정한 경쟁해서 이길 자신도 없다면 학력을 날로 먹었다는 증거밖에 되지 않습니다.

 

평가과목도 역할의 수행능력으로만 결정해야 합니다. 영어가 필요 없는 역할에 영어는 왜보는 겁니까? 그건 해당 역할을 목표로 삼고 있던 사람에게 무의미한 노력을 하게 만들었던 겁니다. 그러니까 전문성이 뒤쳐지는 겁니다. 역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역사를 전문적으로 알아야 하는 역할을 제외하고는, 도대체 역사 년도가 왜 중요했던 겁니까? 몇 년도에 무엇이 일어났는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일이 왜 일어났고, 무엇을 배워야 하는지를 알아야 하는 겁니다. 우리가 반성해야 될 역사에서 배워야 하는 건 년도도 아니고 감정도 아닙니다. 반성입니다. 같은 일을 반복하지 말아야 되겠다는 반성이 필요하다는 겁니다. 그래야 과거에 얽매이지 않고 미래에 잘못을 반복하지 않을 수가 있습니다. 이하 다른 것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역할에 맞는 평가과목을 중요시 해야 합니다. 전문성을 중시하는 것을 보고 편향된 사람들만 양산되는 것이 아니냐는 걱정이 있을까 첨언해둡니다. 중점은 전문성이 아니라 역할에 맞는 평가과목입니다. 다양한 것을 알아야 하는 역할은 다양한 과목으로 평가해야 될 것입니다.

 

 

 

대우의 기준

 

동일노동 동일임금. 이건 우스운 소리입니다. 왜냐하면 제대로 지켜진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같은 일을 해도 학력이 낮으면, 정규직이 아니면 임금을 적게 받습니다. 이런 불공평함은 어떤 다른 평등함을 기준으로 평등을 내세웠기 때문입니다. 학력을 기준으로 서열화하여 평등을 매기고 정규직과 비정규직을 기준으로 서열화하여 평등을 매겼으니까 이런 불평등함이 나타난 겁니다. 대우의 기준은 오로지 하나면 됩니다. [역할수행에 따른 일의 기여도] 이러면 동일노동에 동일임금이 가능해집니다. 이런 기반에서 경력자들은 기여도의 축적도나 비상시 대처능력 등을 고려해 추가금을 지급하면 되겠습니다.

 

역할수행에 따른 일의 기여도는 사실 제대로 판단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니 그걸 판단해주는 직업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부의 분배 건전성 측정(가칭)입니다. 회계사들이 주로 이 역할을 맡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해당 역할이 정당한 임금을 받고 있는지 회계를 통해 판단해보는 겁니다. 이것이 가능해지면 회사와 노조갈등도 객관적으로 판결이 가능해집니다. 부의 분배 건전성이 좋을수록 회사가 올바른 것이고 나쁠수록 노조가 올바르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물론 누가 부의 분배 건전성을 판단하느냐에 따라 의견이 갈릴 수는 있으니 다수의 제삼자가 하는 편이 나을 거라 생각합니다.

 

 

 

불평등 기준

 

인간은 보호가 필요한 아이를 낳는 동물입니다. 그래서 보호하기 위한 불평등이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이점 또한 역할을 통해 완화할 수 있습니다. 어떤 보호자도 보호를 할 때에만 불평등한 지시를 내릴 수 있고, 어떤 피보호자도 보호를 받을 때에만 불평등한 지시를 감수하면 됩니다. 역할평등은 인류의 생존과 번영에 도움이 되는 역할의 수행유무로 존중유무를 결정합니다. 보호자와 피보호자도 마찬가지입니다. 보호자는 보호를 해야 존중을 받고 피보호자는 보호를 받아야 존중을 받을 수 있습니다. 물론 그 보호는 정당할 때에만 적용이 되겠습니다.

 

 

[보호자]

 

보호자는 부모 또는 부모를 대신하는 사람, 교사, 정부, 경찰, 군인, 경호원 등이 있겠습니다. 남성중심사회였던 과거엔 남성도 여기에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지금은 아닙니다. 보호자는 보호를 할 때에만 불평등한 지시를 내릴 수 있음을 알아야 불평등을 최소화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보호자는 피보호자의 모든 것에 간섭할 것이 아니라 보호할 때에만 간섭할 수 있습니다. 장래희망에 간섭하여 보호자 마음대로 결정하는 건 보호이상의 영역임을 말해두겠습니다. 그건 보호자가 피보호자에게 자신을 투영하는 것일 뿐입니다.

 

 

[피보호자]

 

피보호자는 아이, 학생, 국민 등이 있겠습니다. 남성중심사회였던 과거엔 여성도 여기에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지금은 아닙니다. 피보호자는 보호를 받을 때에만 불평등한 지시를 감수해야 됨을 알아야 불평등을 최소화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보호자가 피보호자보고 어디 위험한데 가지 말라고 할 때 불평등하다고 반대할 것이 아니라 보호받는 이상 정당한 보호라면 수긍해야 할 것입니다.

 

 

[계급]

 

효율적인 사회구조를 위해 계급이 있는 곳이 있습니다. 회사나 군대같이 말입니다. 그래서 계급에 의한 불평등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도 역할로 불평등을 최소화 할 수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역할평등을 통해 모두가 수평적으로 평등하지만, 효율적인 업무를 위한 지시나 명령을 내릴 때에만 불평등이 적용되면 되겠습니다. 그 외엔 역할을 하고 있을 때도 평등하고, 하지 않을 때에도 평등하며, 역할에서 벗어날 때도 평등하게 되겠습니다.

 

 

 

가치의 기준

 

물질가치의 기준도 역할로 판단하면 됩니다.

 

[기차]

 

“추석 명절날 고향으로 내려가는 기차 좌석을 여러 장 사도 되는가?” 라는 물음에 논쟁이 발생한 적이 있었습니다. 이 상황을 자본으로 보면 사도 됩니다. 그런데 역할로 보면 사면 안됩니다. 사물이 제 역할을 수행할 수 있도록 해야 되기 때문입니다. 돈이 많으면 기차를 타지 말고 비행기를 타는 편이 낫습니다.

 

 

[음식]

 

“음식을 주문할 때 고객이 어떤 재료를 좀 더 달라고 요청하였다. 그 때 재료를 엄청 주어 음식의 맛이 크게 달라지게 되었다. 그걸 본 고객은 못 먹겠다고 환불을 요청한다. 음식점은 고객의 요구를 들어준 것일 뿐이라고 그 요청을 거부한다. 이때 어느 쪽이 정당한가?” 라는 물음에 논쟁이 발생한 적이 있습니다. 이 상황을 자본으로 보면 음식점이 정당합니다. 재료를 많이 제공하여 금전적인 손해를 입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역할로 보면 고객이 정당합니다. 고객은 엄청 많이 달라고 한 것이 아닙니다. ‘좀 더’ 달라고 했는데 음식의 맛이 달라질 정도로 엄청 주었던 겁니다. 그러니 서비스 역할(고객의 요구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함)과 음식의 역할(고객이 먹기 어려울 정도가 됨)을 하지 못하게 되었으므로 고객의 환불은 정당합니다.

 

이외 다양한 사물을 역할(용도)로 접근하면 평등하게 판단할 수 있을 겁니다.

 

 

 

책임의 기준

 

[힘이 책임을 진다. 지지 않으면 책임에게 힘을 준다.]

 

우리는 힘이 책임을 지는 사회적 어른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지금까진 힘이 있음에도 사회적 아이들 같은 측면이 있었습니다. 자본의 크기와 관계없이 사회를 책임지는 사람이 적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자본주의가 건강하게 작동되기 위해서는 도덕이 필수불가결하다고 합니다. 특히 신자유주의 같이 시장의 원리에 맡기는 경우는 더더욱 그것이 강조됩니다. 자본가가 도덕적이지 못하면 실패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몇몇 자본가는 도덕적일지 몰라도 대부분은 그렇지 아니했습니다. 그래서 신자유주의를 지향했던 대부분의 나라는 불평등이 심해졌습니다. 그 결과 정부는 규제와 간섭을 늘릴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는 자본가들이 자초한 측면이 큽니다. 자본가의 자율규제가 되지 않는 자본주의는 사회를 구성하는 지지대가 불평등으로 붕괴되기 때문에 정부는 강제규제를 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지 않으면 사회가 죽음으로 향하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의 저출산 같이 말입니다. 우리는 지금 천천히 죽음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특별한 이론이 없다는 낙수효과도 이러한 자본가의 자율규제를 통한 사회적 책임이 뒤따를 때나 가능합니다. 자본가가 자신의 자본을 분배해 위에서 아래로 돈을 내려 보내야만 가능하다는 겁니다. 물론 실패했습니다. 그래서 강제규제를 하게 됩니다. 그것이 소득중심성장입니다.  자본가가 위에서 아래로 돈을 내려 보내지 않으니까 정부가 최저임금 상승을 통해 강제로 내린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다 보니 기현상이 발생했습니다. 대기업이 사회를 책임을 지지 않은 상태에서 최저임금이 상승하니 중간에 있는 소상공인이 커다란 부담을 짊어지게 되었습니다. 이를 보고 생산성과 비례하지 않는 최저임금 증가 때문이라며 소득중심성장을 비판합니다. 그러나 최저임금상승은 저출산으로 죽어가고 있는 사회를 살리기 위해 하고 있는 겁니다. 그렇다면 생산성 관점으로 접근할 것이 아니라 부의 분배 정상화의 관점으로 접근해야 합니다.

 

자본가들이 자신의 자본을 분배하여 사회 곳곳에 건강하게 돈이 흐르게 하지 않는 이상 강제규제를 통해 건강하게 만들 수 밖에 없습니다. 최저임금을 올리되, 그 임금으로 부담을 짊어지게 되는 사람들은 부자에게 징수한 세금으로 지원할 수 밖에 없다는 겁니다. 물론 이건 자연스러운 방법은 아닙니다. 그러나 힘이 책임을 지지 않는 이상 어쩔 수 없는 선택입니다. 이대로 죽어가는걸 지켜만 볼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사회가 자연스럽게 건강해지기 위해서는 사회를 책임지는 사회적 어른들이 필요한 시대가 되었습니다. 아무리 강제규제를 하더라도 스스로 책임지지 않으면 규제의 허점을 통해 빠져나가게 됩니다. 그러면 더더욱 규제를 강화할 수밖에 없습니다. 힘이 책임을 지지 않는 이상 악화일로로 걸을 수 밖에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저번에 나이 먹은 부자가 상속세를 내기 싫다며 이민을 가고 싶다는 기사를 봤습니다. 슬펐습니다. 사회를 책임지기는커녕, 자신을 책임지고 싶지 않다는 표명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사회가 제공한 국방, 치안, 은행, 서비스, 교육 등에서 성장하여 힘을 얻은 사람들이 사회가 무엇을 해주었냐고 말하는 것은, 보호자의 도움으로 성장한 사람들이 보호자가 무엇을 해주었냐고 말하는 것과 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모든 자본가들에게 도덕을 강제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강제규제를 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그러면 결국 부자연스러운 규제를 통해 성장둔화를 불러올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자율규제 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책임에게 힘을 준다]는 것입니다. 국민이나 정부는 책임을 지는 도덕적인 자본가에게 힘을 주면 사회가 자연스럽게 건강해질 수 있다고 봅니다. 자본가의 역할에 [도덕]이 포함되는 사람에게 힘을 주자는 겁니다. 국민들은 책임을 지는 기업의 제품을 구매하고 정부는 책임을 지는 기업을 지원합니다. 이런 식으로 책임에게 힘을 주어 힘이 책임을 지게 만드는 사회적 풍토가 마련된다면, 강제규제는 점차 적어질 거라 생각합니다.

 

[힘을 가진 사람이 책임을 지는 역할을 맡아야 한다. 그렇지 아니하면 책임을 지는 사람에게 힘을 주도록 하여 힘이 책임을 지는 역할을 맡게끔 해야 한다.] 이것이 역할로 힘과 책임의 불균형을 해소하는 방법이 되겠습니다.

 

 

 

마무리

 

우리들에게 진정한 평등이 오길 바라며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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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지식이 많이 부족합니다. 더욱 더 배워야겠습니다.

 

게임이 질병 등록한다지요. 다들 똑같은 문화인데 게임만 차별 받는 건, 여러 이유가 붙었지만 가장 큰 이유는 그저 주류문화편입을 하지 못했으니까 그런 겁니다. 올림픽 종목이 되거나, 새로운 마인드 올림픽을 개최하여 건전한 문화라는 걸 세계에 널리 인정받았으면 달라졌을 텐데. 아쉽습니다. 뭐, 업계 분들 힘내시길.

 

 

그럼 또 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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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름을 인정한 사람들은 차별을 하고 있다고 보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국내에서 최근에 논란이 많은 성별논쟁만 보더라도 다름을 인정하는 사람을 대상으로는 갈등이 벌어지지 않습니다.
다름을 인정함으로서 서로의 역할이 있다고 생각하고 그 역할대로 간다고 말하니까요.
성별갈등은 일부 페미처럼 다름을 인정하지 않는 그룹으로 인해 생겨난 논쟁이라고 봅니다
다름을 인정하지 않는사람들이 여전히 차별을 하고 이로인해 인종차별을 비롯한 여러가지 차별이 생기는거라고 봅니다.
전 차별은 다름을 인정함으로서 사라진다고 봅니다.
[글] 욕망의 한계, 양식 (0) 2018/08/12 PM 09:55

 

욕망의 한계, 양식

 

 

위대한 평등은 옹졸한 자유를 앗아갔다. 모독의 자유, 강탈의 자유, 살육의 자유, 이외 모든 악덕의 자유는 평등의 등장으로 방종이 되어 사라졌다. 이제는 더 이상 그것들을 자유라 부르지 못하리니, 자유와 방종을 착각하지 말지어다.

 

 

0. 의의

 

이 글은 제 사상인 역할존중을 위해 준비된 생각 중 하나입니다. 여기서 역할존중은 역할수행여부로 존중을 주자라는 주장이 담긴 사상이에요. 이 사상은 자유와 평등, 그리고 행복을 목적으로 하고 있어요. 그런데 본디 사람은 공동체를 구성하는 순간부터 완전한 평등은 이룰 수 없게 되었답니다. 간단한 예로 보호자와 피보호자를 들어볼게요. 그 둘은 평등할 수가 없어요. 권리, 의무, 자격 등이 다른걸요. 그 외에도 수많은 사회적 역할에 따른 계급, 사라질 수가 없어요. 그렇기 때문에 평등해지기 위해서는 사람과 사회적 역할을 분리할 필요성이 생겨났어요. 그렇게 분리하고 나서 계급을 사람이 아닌 역할에 속하게 만들어야 사람 자체는 계급에서 해방되겠지요. 그래야 인류는 비로소 진정한 평등을 누릴 수 있다고 봐요. 이렇게 평등해진 사회 속에서 특정한 사회적 역할에 맞는 능력을 갖춘 사람이 그 역할을 맡을 자격을 얻게 되고, 그 역할의 수행여부에 따라 인격적인 존중의 유무를 결정하고, 수행수준에 따른 기여도에 따라 금전적인 대우를 달리 하는 사상을 역할존중이라 정리해보겠습니다.

 

그런데 자유와 평등에도 문제가 있어요. 위대한 평등은 옹졸한 자유를 앗아가 악덕의 자유들을 방종으로 만들어버렸죠. 그래서 사람들은 분노로 욕하고 싶다거나, 질투로 빼앗고 싶다거나, 증오로 죽이고 싶다는 악덕을 부르는 감정의 충동을 억제해야 했어요. 그런데 이런 어두운 감정은 억제한다고 사라지는 건 아니에요.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의 어두운 감정을 소비할 곳을 찾게 되었지요. 상대적으로 낮은 대상을 공격한다거나, 조금이라도 나빠 보이면 공격하는 현상들이 나타났어요. 바로 악덕과 악덕을 향한 악행이죠. 이건 어느 시대나 공통된 사항이죠. 알기 쉬운 예를 하나 들어볼게요. 바로 익명성이 보장되는 인터넷의 글과 댓글이에요. 어두운 감정을 소비할 방법이나 장소를 마련해주지 않고 그냥 억제만 하라고 하니 사라지지 않는 그 어두운 감정은 익명성의 방패 속에서 마음껏 소비하게 되었지요. 아무에게나 악플을 달거나 자기 기준으로 나쁘다고 여겨지는 상대에게 악플을 단다거나 말이죠. 이런 현상을 가리켜 평등한 사회가 만들어낸 무차별적인 악덕난사라고 불러 볼게요.

 

이번 글은 변하지 않는 인간의 본성으로 나타나는 이런 현상을 해결하기 위해 구상하게 되었어요. 이 문제를 해결해야 진정한 자유와 평등을 누릴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그걸 통해 보편적인 행복이 누릴 수 있을 거라 생각해요.

 

 

 

1.

 

우선 인간의 죄에 대해 이야기를 해볼게요. 무엇이 죄인지 명확하게 정리해놔야 앞으로의 전개가 가능해지니까요. 저는 인간의 모든 감정과 욕구에는 죄가 없다고 생각해요. 그 어떤 것도요. 세상의 모든 죄는 인간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행동으로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는 순간 생기는 거예요. 왜 그래야 하냐고 묻는다면 대답할게요. 대부분의 인간은 악덕을 부르는 감정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에요. 즉 인간의 본성이에요. 그런데 그게 죄를 낳을 가능성이 있다고 하여 무조건적으로 없애려고 한다면, 그 인간은 더 이상 정상이 아니게 돼요. 사이코패스가 선천적 공감능력결핍인 것처럼 어두운 감정이 없는 것 또한 감정결핍일 뿐이니까요. 망가지고 말 테죠. 불쌍하게도.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스스로를 위해서라도 무엇이 죄가 되는지 명확하게 구분해야 돼요. 그리고 이 구분이야말로 이번 글에서 가장 기초가 되는 생각이에요.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줄 때 죄가 생긴다는 전제가 있어야,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선에서 자신의 어두운 감정을 소비하게끔 유도해야 한다.’가 가능해지니까요.

 

기초를 마련했으니 그럼 자유롭고 평등한 사회에서 나타나는 현상 중 하나인 악덕을 향한 악행에 대해 이야기를 해볼게요.

 

 

 

2. 악덕

 

처음 악덕을 향한 악행에 대해 생각하게 된 계기는 미덕의 불운을 읽었을 때예요. 사디즘으로 유명한 사드 후작의 저서죠. 그러니 미덕의 불운을 이야기해볼게요. 아무래도 글 내용을 인용하게 될 예정이니 내용 누설이 있어요.

 

미덕의 불운은 18세기 프랑스에서 가난한 소녀가 미덕을 추구하여 겪게 되는 불운들에 대해 다루고 있어요. 사드 후작이 왜 사디즘이 되었는지를 잘- 알 수 있었던 작품이죠. 좀 변태적일 정도로 작품 내내 주인공을 괴롭혀요. 그 시대의 어린 고아소녀가 겪을 수 있는 불운이란 불운은 대부분 겪게 만들거든요. 그 주인공인 쥐스띤느는 미덕을 추구할 때마다 불운을 겪게 되는데 그 중 하나, 의문이 생기는 장면이 있었어요. 악덕을 향한 악행도 미덕이라 말하더군요.

 

 

[맹세를 어김도 미덕이니, 그것은 죄악을 벌할 때이니라.]

 

[야수처럼 죽어 가는 너를 끄집어내서 다시 살아가게 해주었던 이 덤불을 알아보겠지? 내가 너에게 베푼 후의를 나 스스로 후회하게 만들 일을 네가 저지를 경우, 너를 다시 비끄러매겠다고 했던 이 나무를 기억하겠지! 내 어머니를 해하려고 너에게 도움을 청했을 때, 네가 나를 배신할 뜻을 가졌다면 왜 내 청을 수락했어? 네 생명을 구해 준 사람의 자유를 위험에 몰아넣으면서 도대체 어떻게 미덕을 실천한다는 생각을 할 수 있어? 어쩔 수 없이 두 개의 죄악 사이에 놓이게 되었다 하더라도, 무슨 이유로 더 추악한 쪽을 선택하게 되었느냐 말이야? 내가 너에게 요청하는 것을 거절했으면 그만이었어. 나를 배신할 의향이었다면 아예 수락하지 말아야 했어.]

 

그럼 이 사건까지의 줄거리를 이야기해볼게요.

 

작중의 주인공인 쥐스띤느는 14살의 어린 고아임에도 미덕을 최우선으로 여기는 고결한 소녀예요. 그런데 쥐스띤느가 사는 곳은 미덕만으로 행복해질 수 있는 곳이 아니었어요. 성실하게 일을 하며 꼿꼿하게 미덕을 추구했지만, 그 미덕을 달갑게 여기지 않았던 사람의 거짓된 절도신고로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는 부당한 사형선고를 받고 감옥에 가게 되었죠. 그 소녀는 매우 비참했어요. 그런데 마침 수많은 죄를 짓고 정당하게 사형선고를 받는 한 여인의 도움으로 탈옥 하게 되었어요. 아이러니하게도 미덕은 불운을 불렀지만, 죄악은 행운을 부르게 되었죠. 쥐스띤느의 불행한 사연을 듣게 된 그 여인은 탈옥 후 한가지 제안을 합니다.

 

[아가씨가 직접 보았듯이, 아무 성공도 가져다주지 못하는 미덕의 실천을 내동댕이치라는 것이에요 어울리지 않는 미덕이 아가씨를 단두대로 인도한 반면, 끔찍한 범행이 나의 생명을 구해 주었어요. … 중략 아가씨는 젊고 아듬다우니, 원한다면 브뤅셀로 함께 가서 내가 책임지고 아가씨의 행운을 찾아주겠어요.]

 

그럼에도 이 고결한 소녀는 달콤한 죄악의 제안을 거절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죄를 지으면 하늘의 벌을 받을 거라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런 태도를 보고 여인은 하고 싶은 대로 하라며 헤어지려고 했지만, 여인의 패거리들은 쥐스띤느를 놓아주지 않았어요. 탈옥 후 마신 술은 한줌도 채 남지 않았던 그들의 도덕심을 녹여버리고 말았기 때문이에요. 쥐스띤느를 덮쳐 성욕을 충족하기로 패거리들끼리 합의를 한 그들은 덮치는 순서를 정하기 위해 서로 싸우게 돼요. 그들이 싸우는 틈을 타서 쥐스띤느는 도망칠 수 있게 되었어요. 그렇게 도망치다가 어떤 한 남자에게 구원받게 되는데, 그 시점이 [야수처럼 죽어 가는 너를 끄집어내서 다시 살아가게 해주었던 이 덤불을 알아보겠지?] 예요.

 

 

수많은 불운 끝에 구원을 받았으나, 이 남자도 정상이 아니었어요. 이 남자의 이름은 브레삭이라고 하는데, 쾌락을 위해서는 뭐든지 하는 미친놈이죠. 그러다가 끝내는 패륜까지 저질렀어요. 그리고 그걸 정당화하기 위해 궤변을 늘어놓기도 해요. 정말 미친놈이죠. 그럼에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쥐스띤느를 구원해준 사실은 변하지 않아요. 그리고 그 뒤 먹고 살수 있게 도와주기까지 했어요. 거기다 패륜을 도와주면 앞으로도 살아갈 수 있는 돈도 마련해주겠다고 약속했어요. 거기다 패륜을 돕지 않겠다고 말하면 다양한 지원을 끊었을 뿐이라고 해요.

 

이런 상황 속에서 쥐스띤느는 미덕을 위해 패륜을 돕겠다는 맹세를 어기고 배신했어요. 주인마님에게 달려가 패륜에 대한 것을 모든걸 고백했죠. 주인마님은 분노에 가득 차서 브레삭의 자유를 억압하게 만들려고 했어요. 그렇지만 교활하고 사악한 브레삭은 결국 자신이 원하는 결과를 만들어냈어요. 기어코 패륜을 저지르고 말았어요. 이 미친놈. 그리고 나서 배신당한 분노에 가득 찬 채로 쥐스띤느를 몰아붙이죠. 그게 위에서 인용한 긴 문장이에요. [네 생명을 구해 준 사람의 자유를 위험에 몰아넣으면서 도대체 어떻게 미덕을 실천한다는 생각을 할 수 있어?] 미친놈의 말이지만 생각해볼 여지가 있었어요. 과연 죄악을 벌할 때엔 죄악도 미덕이 될 수 있을까요?

 

흥미로운 사색을 가져다 주는 생각이었습니다. 결론은 어렵지 않게 나왔지만, 과연 이런 생각이 올바른지에 대해 고민을 좀 하게 되었네요. 그에 대해 써볼게요. , 간단한 이야기예요. 죄악은 죄악이고 미덕은 미덕이에요. 어떤 경우에도 배신은 죄악이 맞아요. 단지 그것이 정당하냐, 부당하냐의 차이라고 생각해요. 이 사건을 예로 들자면, 쥐스띤느의 행동은 미덕이 아닌 정당한 죄악이라고 봐요. 죄는 죄죠. 그걸 잊고 미덕인 양 생각하게 되면 자신의 미덕에 취해 이성적으로 행동하기 어려울지도 몰라요. 이걸 가리켜 자신의 선을 당연하게 여긴다는 말과 비슷하겠네요.

 

그렇다면 왜 쥐스띤느는 그것을 미덕이라 여겼을까요? 그건 미덕의 보상이나 죄악의 심판이 전부 하늘의 뜻이 달려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봐요. 그러니까 앞뒤사정 고려도 하지 않고 미덕을 추구했던 것이겠지요. 쥐스띤느는 미덕을 추구했기 때문에 불운을 겪은 것 같지만, 이 사건에서는 미덕 때문이 아니에요. 그녀의 실수는 미덕과 죄악의 정의, 그리고 미덕의 보상이나 죄악의 심판은 하늘이 아닌 사람이 정하는 것임을 몰랐던 거예요. 사람이 정하는 것임을 알았다면 자신의 미덕을 위해 좀 더 똑똑하게 처신했어야 했겠지요. 물론 뭐, 그 시대에서 14살의 고아소녀가 할 수 있는 일은 제한적이겠지만요.

 

 

이런 상황은 현대에서도 볼 수 있어요. 악덕을 향해 저지르는 악행은 미덕이 아니에요. 정당할 뿐이에요. 예를 들어 범죄자를 대할 때 미덕은 무엇이고 악덕은 무엇일까요? 미덕은 관련기관에 신고하여 사회적 질서를 준수하는 것이고, 악덕은 개인판단으로 처벌을 하는 것이겠지요. 단지 정당방위면 정당한 악행이 된다고 생각해요.

 

이런 정당한 악행은 다양한 곳에서 살펴볼 수 있죠. 쉽게 알 수 있는 정당한 악행은 내부고발이라고 생각해요. 내부고발은 비리를 저지른 사람을 배신할 확률이 매우 높지요. 그렇지만 그건 더 큰 집단인 사회에 이익이 되는 행위에요. 매우 정당한 악행이죠. 하지만 미덕은 아니에요. 미덕은 아니기 때문에 비리를 저지른 악당에게 보복 당할 확률이 매우 높아요. 실제로 내부고발자들은 대체로 불운한 인생을 살게 되죠. 그렇기 때문에, 미덕이 아니라 정당한 악행이기 때문에, 오히려 더욱더 그런 사람들을 사회가 보호해줘야 한다고 생각해요. 내부의 비리를 고발한 정의로운 그들을 보호해줄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사회밖에 없어요.

 

여기까지 악덕(죄악)을 향한 악행에 대해 알아봤어요. 제 생각으로는 악덕을 향한 악행은 결코 미덕이라 부를 수는 없어요. 정당하냐, 부당하냐 로 구분될 뿐이지요. 어떤 경우에도 마찬가지에요. 이건 규모와 관계가 없어요. 작은 규모로 예를 들자면, 아이들 장난이라도 못된 짓에 못된 짓으로 대응하는 것은 미덕이 아니에요. 상황에 따라 정당할 뿐이죠. 큰 규모로 예를 들자면, 전쟁에서 침략국의 공격을 방어하기 위해 인간을 죽이는 것은 미덕은 아니에요. 단지 정당한 것이죠. 미덕이 아니기 때문에 전쟁은 승자든 패자든 심각한 PTSD를 겪을 수 밖에 없어요. 그래서 극히 일부를 제외하곤 전쟁은 그 누구도 행복하지 못해요. 그러니 전쟁은 결코 일어나서는 안돼요. 그것은 인류의 생존과 번영을 기초 선이라 여기는 제게 있어 매우 커다란 죄예요.

 

 

 

3. 정당

 

악덕을 향한 악행은 미덕이 아닌 정당한 악행임을 이야기했어요. 그런데 무엇이 정당한 걸까요? 그리고 어디까지 정당한 걸까요? 이걸 알아야 사람들이 어두운 감정을 소비할 때에 어디까지 허용할 수 있는지를 알 수 있기 때문에 이야기해보도록 할게요.

 

이것에 대해 많이 고민해봤어요. 그런데도 잘 모르겠네요. 기본적으로는 악덕을 향했을 때 정당한 악행이 돼요. 그런데 악덕의 기준이 천차만별이기 때문에 무엇이 정당한지 의문이 생기게 돼요. , 세상에는 명예를 위해 무고한 사람을 죽이는 것을 정당화하는 사람도 있잖아요? 그리고 어디까지 정당한지도 의문이 생기죠. 욕 한번 들었다고 때려죽이는 것이 정당하다고 할 수는 없지 않겠어요? 그렇다고 그대로 돌려주는 것 또한 매번 정당한 것은 아니에요. 이러한 상황 속에서 무엇이 정당한지를 명확하기 구분 짓기 어려웠어요. 그래도 제 나름대로 정한 기준을 이야기해볼게요.

 

 

세계화가 됨에 따라 각 나라의 질서를 최고선이라 부르기 어렵죠. 반드시 선이라는 보장은 없거든요. 그래서 모든 종의 기초 선인 종의 생존과 번영을 객관적인 기준으로 잡아 그걸 기본으로 해야 된다고 생각해요. 그 다음에 각 나라의 질서를 기준으로 잡아야겠지요. 이런 기준의 토대가 마련된 상황 속에서 상대가 명백한 공공의 적일 때엔 악덕을 향한 악행이 대부분 정당해진다고 봐요. 세가지 집어볼게요.

 

첫째, 인류의 적, 침략국

 

정당하기 때문에 현대의 침략국은 전 인류의 적이 되어 말살되겠죠.

 

둘째, 나라의 적, 비리 등.

 

공공의 질서를 파괴하여 공공의 이익을 침해하는 비리는 내부 고발로 배신당해도 싸요.

 

셋째, 개인의 적, 정당방위.

 

개인의 폭력에 살아남기 위해 자기방어수단으로 반격하는 것을 가리켜 정당방위라고 하죠. 이걸 얼핏 보면 개인의 적일 때 정당해진 것으로 보일 수도 있어요. 그러나 인류의 생존과 번영이 선이라고 생각한다면, 먼저 폭력을 써서 종의 생존과 번영에 해를 끼친 쪽이 공공의 적이 되겠지요. 그런데 정당방위가 법을 기준으로 하면 조금 복잡한 기분이 들기는 해요. 

 

그 외에도 인류의 갈등을 초래하는 잘못된 사상은 욕먹어도 싸다고 생각해요.

 

이제 어느 정도는 기준이 잡혔을 거라 생각해요. 공공의 적을 대상으로 할 때엔 대체로 정당하죠. 그리고 악덕의 수준에 맞게 악행을 저질러도 대체로 정당해져요. 물론 그 수준 이상은 부당해질 가능성은 있으니 주의가 필요하긴 할거예요. 그런데 이걸 반대로 생각하면 이 이외에는 정당하기 어렵다는 거에요. 그러니 누군가를 욕하고 싶다면 비난이 아닌 비판을 하도록 하는 게 좋을 거예요. 스포츠를 예로 들자면, 선수들이 부진 하다고 욕하는 건 정당한 게 아니에요. 그들은 공공의 적이 아니잖아요? 그러니 그것은 부당해요. 논쟁을 할 때도 마찬가지예요. 무작정 비난을 하는 것은 부당하기 때문에 논리적인 약점이 되게 되어있어요.

 

 

어느 정도 기준은 잡혔어요. 죄가 무엇인지, 그리고 악덕을 향한 악행은 무엇인지를 이야기하였죠. 죄는 인간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피해를 줄 때 생겨나요. 그리고 악덕을 향한 악행은 공공의 적일 때 주로 정당해져요. 이걸 기반으로 하여 인간의 감정과 욕구를 소비하는 방법에 대해 이야기해보도록 할게요.

 

 

 

4. 소비

 

감정과 욕구를 소비하는데 쓰이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 있다고 봐요. 악덕을 부르는 감정과 욕구를 소비할 때엔 양식으로 소비하고, 악덕을 향한 악행일 때엔 공공의 적을 상대로 소비해야 정당하겠지요. 우선 양식에 대해 이야기해볼게요.

 

양식 [물고기나 해조, 버섯 따위를 인공적으로 길러서 번식하게 함.]

 

마땅한 단어가 떠오르지 않아서 양식이란 단어를 쓰도록 할게요.

 

사실 이미 어느 정도는 다들 양식으로 감정이나 욕망을 소비하고 있어요. 대표적인 예가 예술이죠. 사람이 만든 인공물에 감정을 소비할 수 있게끔 했어요. 그건 밝은 감정뿐만 아니라 어두운 감정도 마찬가지예요. 몇 가지 예를 들어볼게요.

 

첫째, 조롱

 

다른 사람보다 우월하고 싶다, 조롱하고 싶다, 그런 감정과 욕구는 사실 본성에 가까워요. 그것이 공동체 생활에 방해가 되니까 악덕이라 부르며 참게 만드는 거죠. 그건 어두운 감정을 소비할 수 있게 만드는 게 희극이라고 생각해요. 광대들은 자신을 우스꽝스럽게 표현해서 사람들의 어두운 감정을 소비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사람들이에요. 그것을 통해 사람들이 인간성을 유지할 수 있게 만들죠. 그들은 대단해요.

 

둘째, 성욕

 

발정기가 따로 없는 인간에게 이런 성욕은 공동체 생활에 방해가 될 때가 있어요. 그래서 악덕이라 부르기도 했지만 이런 본능을 나쁘다고 해서는 안돼요. 제어할 수 없는 게 나쁜 거죠. 이런 본능적인 욕구를 충족할 수 있게 만드는 게 외설이라고 생각해요. 외설제작자들은 사람들의 성적 욕구를 충족시켜 인간성을 유지할 수 있게 만들죠. 그들은 대단해요.

 

셋째, 폭력

 

폭력은 서로를 상하게 만들어 공동체 생활에 방해가 되죠. 그래서 악덕이라 불러요. 하지만 이것조차 원래 나쁘다고 해서는 안돼요. 제어를 못할 때 나쁜 거죠. 이런 어두운 욕구를 충족할 수 있게 만드는 것에는 격투 스포츠 또는 게임 등이 있다고 생각해요. 폭력성을 제어할 수 있게 해주어 인간성을 유지할 수 있게 만들죠. 그들은 대단해요.

 

 

이처럼 사실 우리 인간은 이미 감정과 욕구를 양식으로 소비하고 있어요. 인공적인 것을 통해 감정이나 욕구를 제어하는 거죠. 이제 무슨 이야기를 할지 아실지도 모르겠네요. 모든 감정과 욕구는 무조건 막는 것이 아니라, 양식을 통해 소비할 수 있게끔 해야 돼요. 앞서 죄가 무엇인지를 살펴보았죠.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면 죄가 아니에요. 그러니까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인공물에 대해서는 뭐든지 가능하게 만들어야 된다고 생각해요. 지금 하는 것을 광범위하게 확대하는 거죠.

 

사실 인간의 어두운 욕망을 파헤쳐보면 장난 아니에요. 나이나 지위 관계없이 대부분 더러운 욕망을 간직하고 있어요. 그걸 표출하면 죄가 되니까 참는 것뿐이죠. 그렇지만 이런 더러운 욕망 또한 충족하지 못하면 스트레스로 스스로를 갉아먹게 될 수밖에 없어요. 어쩌겠어요. 그게 본성인데. 그러니까 이런 더러운 욕망도 충족할 수 있게끔 해야 된다고 생각해요. 흔히 사람들의 이상성욕을 보고 불쾌해 할 수 있지만, 그걸 양식으로 해결한다고 하면 오히려 권장해야 된다고 생각해요. 그런 욕망 또한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다면 아무런 죄가 되지 않으니까요. 대놓고 말해서, 실존인물이 아닌 대상으로 욕망을 배출하여 충족하겠다고 하면 서로 이해를 하는 쪽이 인류를 위해 이롭다고 생각해요. 물론 공공연하게 드러낼 때엔 어느 정도 질서를 유지해야겠지만, 적어도 스스로 즐길 때엔 내버려 둬야 된다고 생각해요. 그래야 스트레스를 받지 않을 수 있겠지요.

 

그런데 과연 인간의 욕망은 양식만으로 충족이 가능한 걸까요? 흔히 이런 양식으로 더러운 욕망을 충족하는 것을 보고 불안에 떠는 것은 그런 모습이 현실로 이어질까 두려웠기 때문이에요. 폭력적인 게임을 즐기던 아이가 폭력적이게 될까 봐 걱정하는 것과 같다고 봐야겠지요. 보통은 자신의 감정과 욕구를 제어할 수 없는 사람들이 가상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하고 사고를 치기 마련이기 때문에 가상과 현실을 분명하게 구분시키기만 하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충족이 가능한지는 모르겠어요. 그냥 어쩔 수 없으니까 대리 만족하면서 참는 것일지도 모르지요. 그래서 현재로서는 양식만으로 충족은 안 되는 것 같아요.

 

하지만 미래에는 조금 달라질 거라 생각해요. 현실과 매우 유사하게 지낼 수 있는 가상현실기술이 발달하고 있으니까요. 만약 현실과 가상의 구분이 어려워지는 시점에 도달한다면 그때에 비로소 양식만으로 욕망을 충족할 수 있게끔 된다고 봐요.

 

 

그럼 이제는 악덕을 향한 악행에 대해 이야기해볼게요. 요즘은 보통 인터넷에서 욕설을 쓰는 것도 제재를 받기 때문에 쉽사리 하기가 어렵지요. 악덕은 배제 당하게 되어있어요. 그런데 악덕을 향한 악행은 어느 정도 정당화되고 있는 현실이에요. 나쁜 놈을 상대로 욕하는데 뭐가 잘못이냐는 거죠. 그런데 그 나쁜 놈이라는 기준이 상당히 애매하기 때문에 가이드라인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그게 바로 공공의 적이죠. 공공의 적을 대상으로 할 때엔 비난을 해도 정당화 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전범을 비난하는 건 정당하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요?

 

이 부분은 좀 더 생각해보도록 할게요. 정리가 더 필요하네요. 현실의 문제기 때문에 아무래도 조금 예민해서요.

 

 

 

5. 행복

 

행복이란, 자신의 감정과 욕구를 억제하는 것에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그것이 밝든 어둡든 소비해야 행복해지는 거겠죠. 그런데 평등해진만큼 어두운 감정은, 정확히 어둡다고 사람들에게 평가 받는 감정은 악덕을 부르기 때문에 소비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어요. 자위만 해도 더러운 것이라며 타박하던 때도 있었으니까요. (지금도 긍정적이지만은 않죠)

 

그러니까 양식을 통해서 자신의 감정과 욕구를 소비해야 평등을 유지하면서 행복도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러니까 좀! 실존인물이 아니라 만들어진 것이라면 사람들이 욕망을 충족할 수 있게끔 나뒀으면 좋겠어요! 그렇게 막 무조건 막기만 한다면! 충족되지 못한 욕망은 언젠가 한계에 다다라 폭발하게 되는 날이 올지도 몰라요! 그러니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다면 즐기게끔 내버려두었으면 좋겠어요. 무엇이 죄이고, 무엇이 정당한지를 분명하게 알았으면 좋겠어요. 그래야 감정과 욕망을 소비하여 사람들이 행복해 질 수 있겠지요.

 

일단 여기까지 쓸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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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많이 부족하네요. 그래도 일단은 여기까지 정리할게요. 언젠가 다시 한번 더 써보고 싶어요. 인간의 욕망을 양식으로 충족하자는 것은 감정이나 욕구가 사라지지 않는 이상, 반드시 필요한 논의라고 생각해요.

 

여전히 가짜뉴스, 선동뉴스들이 많이 보이고 있긴 하지만, 괜찮은 언론인도 있는 걸 보면 매우 기쁘네요. 아이들에게 정보를 제공하여 가르치는 것이 교사라면, 사람들에게 정보를 제공하여 가르치는 것은 언론이겠죠. 명예로운 일이니까 부디 책임감을 가지고 일했으면 좋겠어요.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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