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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식] 2018년 4월 29일 (0) 2018/04/29 PM 10:59

이번 주 소재는 쉽니다. 어쩌면 글도 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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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둑의 미래편을 작성할 때에 우리나라의 미래에 비유하며 쓰다가 갑작스런 무력감에 빠져 너무 우울해지는 바람에 며칠 아무것도 안하고 있다보니 시간이 흘러 한 주가 갔네요. 혹시라도 기다려주시는 분이 계셨다면 미안합니다. 오늘 하루만에 쓸 수는 없을 것 같아요.

 

원래는 선과 악에 대해 쓸려고 했어요. 아마 별 일 없으면 다음 주에 쓰게 되겠지요. 전에 한번 쓴거라 쓰는 것 자체는 별로 어려운 것은 아닌데 포장이 마음에 안드네요. 정확히 말하면 첫 시작. 어떤 글이라도 프롤로그, 아니 첫 문장으로 사람들은 글을 판단할 수 있게 되기 때문에 그걸 아주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사람이 글을 접할 때 (매번 하는 말이지만) 무의식적으로 지금껏 읽어왔던 글들을 떠올려며 이 글은 재미있겠다, 없겠다를 판단하게 되거든요. 이유는 모르겠는데 흥미가 든다, 이유는 모르겠는데 흥미가 없다, 이런 것들은 전부 그런 무의식적 편견이 작용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이왕 이렇게 된 것 평소대로 잡담이나 써야겠네요. 내키는대로 쓰면 정말 한도 끝도 없이 쓸 수 있어요. 오타며 오류며 비문이며 아무것도 신경안쓰면 매일매일이라도 쓸 수 있지요. 그냥 세상을 보고 '나는 이렇게 생각하는데,' 를 쓰면 되니까요. 지금 쓰면서도 쓰고 싶은 게 여러 개 떠오르는데 주저하게 되네요. 저는 조금 이상한 편인 것 같으니까요. 제가 일반적인 감성과 약간은 다르다고 생각했다고 확실하게 느꼈던 적이 있는데, 아주 예전에 '적성'에 대해 쓸 때 저는 사람들이 이해할 줄 알았어요. 그것도 당연하게 이해받을 줄 알았어요. 그런데 그걸 이해하는 사람이 별로 없더군요. 솔직히 조금 충격받았어요. 그래서 쓸 때마다 늘 조금씩은 주저하게 되요.

 

그래도 썼던 것은 제겐 어차피 뒤도 없었고, 아무래도 좋았으니까요. 사실 지금도 뒤가 없어요. 앞으로 어떻게 해야할지도 모르면서 이렇게 방만하게 지내는 것도 웃기죠. 아뇨, 아뇨, 어떻게 할지는 알아요. 모를리가 없지요. 근데 제가 그걸 하고 싶은 의욕이 적다는 게 문제에요. 대체로 다들 문제도 알고 해결방법도 알아요. 단지 하고 싶지 않거나 해서 의욕이 없을 뿐이죠. 어차피 뒤가 없으니까 마구잡이로 써볼게요.

 

 

의견

 

저는 어설프게 문제게 접근해서 문제만 지적하며 비아냥하거나, 겉핥기 식으로 해결방법을 내놓는 의견을 싫어하는 편이에요.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세상을 바꾸는 일이지요. 그런데 그렇게 세상을 바꾸는 의견이 일반적인 사람들의 공감을 산다는 것은 지극히 일반적인 사회적 상식선의 의견이라는 거에요. 그런 상식선의 의견이 어떻게 세상을 바꿀 수 있을까요? 이치가 맞지 않지요. 상식선의 문제였다면 이미 진작에 바꿀 수 있었을텐데요. 그렇게 본질적인 문제가 아닌 겉핥기식의 문제해결방법은 사람들의 입맛에는 맞을지 모르겠지만 아무것도 바꾸지 못해요. 바꾸기는 커녕 문제를 심화시키지요. '아, 지금대로 하면 맞는거구나' 라고 생각하고 그냥 똑같이 행동할테니까요.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만큼 사람들의 마음에 드는 의견도 없지만, 그 만큼 아무것도 해결할 수 없는 의견도 많이 없지요. 생각해보세요. 통쾌하긴 한데, 본질적으론 아무것도 바꾸지 못하죠. 그냥 똑같은 사람이 되어 아무것도 바꾸지 못하고 끝날 뿐. 무슨 성인군자냐며 비아냥 할지 모르겠지만, 스스로 생각해보세요. 자기 일이라 생각하지 말고 객관적으로 접근해보려고 하면 아마 이해할거라 생각해요. 

 

무력감

 

사실 무력감은 예전에도 한번 저를 우울하게 만들어 몇 달을 아무것도 안하고 지내게 만들었어요. 배틀그라운드를 쓰고 나서 바둑의 미래를 쓰는데 우리 사회의 문제를 쓰면서 지적할려고 하다보니 내적 갈등과 혼란이 생기더군요. 내가 그것을 지적해서 뭐하는가,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행동하면 내가 이상한게 아닌가? 내가 이상한 것은 알지만 굳이 내가 지적하여 귀찮은 상황을 맞이할 필요가 있는가? 그런 생각들 때문에 번거롭고 짜증나서 잠시 손을 놨지요. 이번에도 비슷하게 무력감에 빠져 며칠 흔들렸었는데, 어쩄든 쓸거에요. 어떤 반응이 나오든 그냥 받아드려 볼려고 합니다.

 

 

국가적 제도와 기업의 서비스

 

예전에 무의식 편에선 사람들을 자발적으로 따르게 만들어야 한다고 말해놓고 배틀그라운드 편에선 서비스의 혁신적인 변화가 필요하다고 말한 적이 있었지요. 그 모순에 대해 잠시 이야기 하보고자 해요. 국가적 제도와 기업의 서비스는 무슨 차이가 있을까요? 그건 피할 수 없는 제도와 선택할 수 있는 기업의 서비스, 선택가능여부에요그리고 그 차이가 변화의 시작을 정하지요. 피할 수 없는 제도는 자발적으로 따르게 만드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지만선택할 수 있는 서비스는 기업이 고객들에게 맞추는 수밖에 없어요. 그래서 고객에 맞춘 혁신적인 서비스가 필요해요. 제도도 사람들에게 최대한 맞춰야겠지만 모든 사람들이 그 제도를 좋아할 수는 없으니까요. 가난한 이에게 맞추면 부유한 이가, 부유한 이에게 맞추면 가난한 이가, 좋아할 수 없겠지요. 그러니 모두가 납득할 수 있는 생각으로 자발적으로 따라야 서로간의 다툼이 적고, 그래야 모두가 행복한 세상으로 발돋움할 수 있겠지요그리고 자발적으로 따르기 위해서는 스스로 생각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해요.자신의 생각이 한번 스스로 생각해서 나온 것인가, 아니면 다른 이들의 생각을 그대로 읊을 뿐인가에 대해 고민해본다면 개인적으로 기쁠 것 같아요. 그리고 제 생각이 그렇게 스스로 생각할 때 쓰이는 수단으로 사용될 수 있다면 몹시 기쁠거에요.

 

 

최근 읽은 책 중에 인상 깊은 것은(많이 읽지는 않았지만) 언어 기원, 자유론, 실험소설이에요. 사실 많이 안읽어서 읽은 건 대게 인상깊었어요. 이외에 몇 가지 더 있어서 나중에 한번 다뤄볼 거에요. 그나저나 참 신기도 하지요. 제가 옛날 사람들이랑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게 놀랍고 신기해요. 특히 실험소설에서 나온 '결정론'은 정말 놀랐어요. '모든 현상에는 원인이 있음을 가정한다. 그러므로 원인을 이루는 조건을 바꿔주면 당연히 결과도 바뀐다. 다시 말해 결정론에 의하면 '운명'을 바꾸는 것이 불가능하지 않다.' 제가 운명에서 벗어나 현상을 받아드리면서 그에 대한 원인을 찾게 되었는데, 이 결정론은 모든 현상에 원인이 있음을 가정하여 정해진 운명이란 없다고 이야기하더군요. 제가 운명에 기대게 된 것은 저에 대한 불신이었기 때문에, 그 당시 제가 이 '결정론'을 알고 있었다고 하더라도 바뀌진 않았을테지만 그래도 좀 더 빨리 깨달을 수 있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이 들어 어쩐지 슬퍼지더군요. 

 

 

실험

 

사실 이 글은 예전 1월달에 써둔 거에요. 무의식 편에 썼던 실험에 대해 조금 써둔 거지요. 지금도 실험을 계속해서 조금 달라진 부분들이 있는데 뭐 크게 다르진 않아요. 그러니 당시 글을 올려볼게요. [몇 가지 실험을 지속 중인데, 그렇게 갑작스럽게 엄청 잘해진다거나 그러지는 않아요. 예를 들어 리듬게임은 어려운 난이도를 체력회복 없이 클리어 하기 어려웠던 것을, 체력회복 없어도 클리어 가능해진 정도. 그리고 풀콤보를 노려볼 수 있는 정도. 실제로 가장 어려운 난이도 바로 아래 난이도는 이벤트 중 풀콤보 가능했습니다. 그러나 그 정도일 뿐입니다. 뭐 엄청 잘하는 것은 아니지요. 정보수집과 노트를 치겠다는 의지만 가지고 누르다 보면 섬찟한 게, 마치 눈을 감고 걷는 기분입니다. 쳐지는 게 재미있는 동시에 그 미지의 장소에 가는 것이 겁나서 눈을 감다가 뜨는 것처럼 의식이 깨어나 어어하다가 실수를 하게 되더군요. 매번 그런 것은 아닙니다만 뭐 그렇습니다. 언어의 경우, 어순이 같은 언어(일본어)는 영상적 이미지와 함께 들을 때 대부분 알아들을 수 있더군요. 한 애니메이션으로 테스트해봤었습니다. 쓰는 김에 한편 더 봤는데 모국어에서 모르는 단어가 나올 때 생기는 공백같이 몇 군대 공백이 생기는 것 빼고는 전부 알아들을 수 있네요. , 마시로와 나나미 귀여워요. 아니, 그뿐만이 아니라 등장인물 대부분 마음에 드네요. 아무튼 라디오 같이 언어만 들을 경우엔 그 공백이 좀 더 늘어나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래도 얼추 알아들을 수는 있었지요. 그러나 문장의 연결점이 부자연스러운 노래가사는 절반도 못 알아 듣겠더군요. 문자는 아이우에오도 정확히 못알아봅니다만어쨌든 듣는 건 얼추 알아 들을 수 있네요. 어순이 다른 언어(영어)는 현재 모험게임을 무자막 플레이 해보고 있습니다. 간단한 대사는 알아듣고, 어려운 대사는 그 장면자체를 기억해버려서 뭔 말인지는 알겠는데 문장과 매칭은 안되더군요. 아마도 예상하지만 이 매칭이 완전해지면 처음 듣는 것도 알아들을 수 있어지는 게 아닌가 싶어요. 어순이 같은 언어는 그게 되었으니까. 이쪽은 문자를 알아볼 수 있으니까 들리기 시작하면 쉽게 터득할 것 같아요. 듣는 게 어려울 뿐이지. 사격은 AI와 사람의 차이라고 해야 할지, 패드와 키마의 차이라고 해야 할지, 뭐 패드로 할 때도 엄청나게 잘하는 건 아니지만, 다른 게임에서는 잘 안되더군요. 가끔 커서를 움직일 때마다 표적을 연달아 맞출 때도 있기 때문에 잘하는지 알았어요. 커서를 빠르게 이동시키면서 버튼을 누를 때마다 표적을 연달아 계속 맞추게 될 때도 있었거든요. 그 때에 얼마나 신기하고 재미있던지! 그렇지만 어쩌면 그건 패턴을 외워버려서 그런 거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예전보단 조금 더 늘긴 했지만 잘 안되긴 하네요. 뭐 어쨌든 개인적으로는 재미있네요. 아 참, 이런 활용에서 가장 어려운 점은 스스로를 믿는 것이었어요. 자신을 믿어야 흔들리지 않고 의식하지 않아도 자동적으로 계산되는 뇌의 계산, 즉 무의식의 계산을 사용할 수 있더군요. 아마도 스스로를 강하게 믿어왔던 사람은 별로 차이를 느끼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또한 자신을 아예 믿지 못하는 사람도 못 믿기 때문에 차이를 못 느낄지도 모르겠습니다.]

  


 

더 쓰고 싶은데 멀쩡한 글이 나올 것 같지 않아 여기까지만 할게요. 사실 이걸 읽어주실 분이 얼마나 계실지는 저도 몰라요. 그럼에도 읽어주시는 분이 계신다면 진심으로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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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 3. 정보 (1) 2018/04/22 PM 12:37

 

3. 정보

 

 

세상은 변해도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 후천적 언어와 문자를 통해 문명을 이룩한 동물인 인류에게 어울리는 말이다. 가르침으로서 우리의 문명은 발전해왔지만 우리의 유전자는 변하지 않았다. 어쩌면 이렇게 물어볼지도 모른다. 현대에 들어서면서 인간의 평균 수명이 늘어났다고 말이다. 그러나 그것은 생활환경 개선 등을 통해 유전적으로 가능한 수명에 도달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네이처’에 실린 논문에 의하면 인간의 수명은 보통 115세가 한계라고 한다. 그러한 주장에 맞서 150세가 한계라고 하거나, 애초에 수명의 한계가 없다는 주장도 있지만, 이제껏 인류가 살아온 흔적을 보면 보통은 115세가 맞긴 했다. 모든 본질은 세상에 나타나는 현상을 제쳐두고 볼 수 없는 법이다. 그런 관점에서 수명이 아무리 늘어난다 하더라도 120세에서 150세가 한계일 것이다. 만약 수명에 한계가 없다면 장수하는 인간의 수명이 비슷할 리가 없다. 우리가 수명의 한계를 넘기 위해서는 변하지 않는 유전자를 변하게 만드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즉, 유전자 변형을 통한 진화다. 

 

이렇게 기술이 발전해도 유전자는 바뀌지 않아 수명은 달라지지 않는 것처럼, 발전하는 문명과 변하지 않는 유전자의 괴리는 우리 사회 속에서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우리의 문명은 달에 갈 수 있을 정도로 발전했지만, 사람의 마음은 달에 토끼가 살고 있다고 생각하던 시절과 별반 다르지 않다. 세상에, 믿을 수 있는가? 우리는 수천 년 전에 있었던 이야기에 매료될 수 있다. 만약 과거의 인물이 현대에 온다면 그들 또한 우리의 이야기에 어렵지 않게 매료될 것이다. (학습을 통해 자아가 발달된 현생 인류는 어떤 언어라도 배울 수 있고, 어느 시대에도 적응할 수 있다.)

 

 

이러한 가변과 불변의 괴리는 정보에도 동일하게 나타난다. 기술의 발달로 인해 정보의 형태는 바뀌었지만 사람은 변하지 않았기 때문에 정보의 활용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인터넷이 등장하기 전까지 정보는 보통 수직적으로 전달되었다.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가르치는 형태였다. 때로 현명한 사람은 아랫사람에게도 가르침을 청하곤 했지만 일반적으로 그 구조가 바뀌는 일은 없었다. 

 

세상의 수많은 물줄기(자료)들이 바다로 모여 구름(정보)을 형성하면 태풍이 되어 육지에 빗물(가르침)을 퍼부었다. 그 빗물들은 다시금 물줄기로 변해 바다로 모여 구름을 형성하게 된다. 그런 과정 속에서 땅(아랫사람)은 빗물을 내려주는 하늘을 우러러 볼 수 밖에 없었다. 그 구조는 오랫동안 변하지 않은 채 이어져 내려왔다가 익명의 상호작용이 가능한 인터넷의 등장으로 급격하게 바뀌게 되었다. 일방적으로 빗물을 받던 땅에서 물이 솟아올라 하늘에 닿는 세상이 되었다. 익명인 가상세계에선 어린이가 어른을 가르치고(곤충을 관찰한 어린이는 그것에 관심 없는 어른보다 곤충에 대해 더 잘 알 수 있다.), 교사가 학생들에게 배우기도 한다. 익명이라 상대가 누군지 모르니까 그게 가능하다. 그것을 가리켜 천지가 바뀌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이렇게 정보의 형태는 천지가 바뀌었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바뀌었지만, 정보의 활용은 과거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정보를 활용하는 사람은 달라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것에 대해 이야기를 하기 전에 이해를 돕기 위해 인간의 본성과 행동원리에 대해 잠시 이야기해보겠다. 

 

첫째, 인간의 본성은 우열을 가리고 싶어하는 동물과 큰 차이가 없다. 

 

인간은 동물이니까 말이다. 분명한 사실조차 받아드리기 괴로워 본질을 보지 못하면 문제를 제대로 해결할 수 없다. 우리 사회의 가장 본질적인 문제는 이러한 우열을 가리고 싶어하는 본성으로 나타난 ‘윗사람을 존중하고 아랫사람을 천대하는 상하존중’이었다. 이것이 왕을 만들고, 이것이 귀족을 만들고, 이것이 노예를(아테네 민주주의에서조차) 만들었던 것이다. 이런 상하존중이 현대의 평등한 사회와 부딪치며 다양한 문제를 야기했다. 이것 또한 발전하는 문명과 변하지 않는 인간 본성의 괴리로 일어난 문제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우열을 가리고 싶어하는 본성을 바꿀 수는 없다. 그러니 우리는 위아래가 아닌 다른 방식으로 우열을 가려야 한다. 그것이 위아래 관계없이 ‘역할수행여부로 존중을 주는 역할존중’이다. 그래야 평등한 사회와 인간의 본성이 어우러질 수 있다고 본다. 그에 관해서는 차후 자세히 다뤄보도록 하겠다. 이렇듯 우리는 우열을 가리고 싶어하는 본성을 가지고 있어서 정보 또한 우열을 가리고 있다. 

 

둘째, 인간의 행동원리 또한 뇌를 가진 동물의 그것과 큰 차이가 없다. 

 

(많은 과학자들이 지적하는 인간과 동물의 차이는 기능이 차이가 아닌 지능의 차이다. 물론 지능에 따라 그 기능도 약간씩 차이 날 수는 있지만 본질적으로는 같다. 파블로프의 개를 생각해보자.) 뇌가 있는 동물은 뇌가 자동적으로 기억(본능과 학습), 욕구, 오감을 계산하여 동물의 행동을 예측하는데, 그러한 예측을 보통 자신의 마음으로 생각하여 그걸 그대로 받아드린다. 그 바람에 사람들은 선입견이나 편견에 저항할 수가 없었다. 한 철학자가 말하길, 학력이 있을 때나 없을 때나 동일한 말을 하는데 청중은 다르게 받아드린다며 한탄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우열을 가리는 본성과 그런 본성을 바탕으로 뇌가 자동적으로 계산하여 나타난 선입견이나 편견 때문에 그랬던 것이니 온전하게 그들의 의지라고는 할 수 없다. 그들을 탓하기보다는 우열을 가리는 기준을 바꾸거나 인간의 행동원리를 알려주어 자유의지를 통해 그것에 저항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이렇듯 우리는 정보를 온전하게 받아드릴 수가 없었다. 이렇게 인간의 본성과 행동원리로 인해 정보의 형태가 천지가 바뀌었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바뀌어도 그 정보의 활용은 그전과 비슷했던 것이다.

 

 

우리시대는 기술의 발달로 정보의 형태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뉘게 되었다. 현실세계와 가상세계다. 이런 형태에 따라 정보의 활용도 약간씩 달라지는데 우선 현실에 대해 이야기해보도록 한다. 다들 알다시피 현실에서는 예전과 크게 다르지 않다. 가상에 영향을 받다 보니 조금씩 달라지고 있긴 하지만 본질은 같다. 정보의 우열을 나누고, 그 기준이 선입견이나 편견이 되어 정보를 온전하게 받아드리지 않고 있다. 과거와 동일하게 높은 것을 먼저 존중하고 받아드리고 낮은 것을 천대하고 거부한다. 권위나, 지위, 학력, 나이 등을 기준으로 우열을 나누는 것이다. 

 

어쩌면 이렇게 반박할 수도 있다. 요즘 아이들은 어른들의 의견(정보)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고 말이다. 그러나 그것은 아이의 입장에서 봤을 때 그 어른의 권위가 실추되어 낮아졌기 때문이지, 위아래로 정보를 취사선택하는 것은 그다지 달라지지 않았다. 

 

어쩌면 그렇게 위아래로 정보를 취사선택하여 활용하는 것이 무엇이 나쁘냐고 물어볼지도 모른다. 대답하겠다. 중요하니까 또 얘기한다. 그런 기준으로 나누어 보게 되면 정보를 온전하게 받아드릴 수 없다. 어떤 사건을 주사위로 바꿔 바라보는 것으로 비유하자면, 모든 면을 보는 것이 아니라 몇몇의 면만 보게 된다. 또한 그렇게 높은 것에만 기대게 되면 스스로 생각할 줄 모르게 된다. 아무 생각 없이 그것이 기대게 되고 만다. 사람이 맹목적이게 된단 말이다! 어떤 높은 자의 말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진리라는 보장은 없다. 그러니 되도록(가능하면 반드시) 한번은, 그 어떤 것이라도 한번은 생각해야 한다.

 

 

그렇다면 가상에선 어떻게 정보가 활용되고 있는 걸까? 놀랍게도 크게 다르지 않다. 그 방식이 약간 달라졌을 뿐이다. 기본적으로 실명이나 현실세계를 기준으로 한 정보 출처의 경우엔 현실과 거의 다를 바 없이 활용된다. 같은 말이라도 권위나 지위 등이 높은 정보를 받아드리기 마련이다. 정보 자체를 스스로 생각해 판단하지 않고 그냥 주어 삼킨다. ‘높은 사람이 한 말이니 맞겠지’ 하고 말이다. 익명에서는 조금 다르게 전개되는데, 위아래로 우열을 가리는 것은 동일하다. 익명일 경우엔 특정한 사람의 권위를 알 수 없기 때문에 다수의 의견에 휩쓸린다. ‘많은 사람이 맞는다고 하니 맞겠지’ 하고 말이다. 이 경우엔 다수가 높고 소수가 낮다고 평가하고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친목이 권장되는 커뮤니티는 그런 것이 더 심할 때가 있는데, 친목의 중심이 되는 사람의 주장은 아무런 생각 없이 그대로 받아 드려진다. 이 경우엔 중심이 되는 사람이 높고 외부인이 낮다고 평가하고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 외 다양한 문제들로 인해 많은 커뮤니티는 친목을 권장하지 않게 되었다. 

 

이런 저런 문제가 있음에도 사실 현실보다는 가상이 낫다. 왜냐하면 가상에선 익명일 수가 있어 자신만의 의견을 개진하거나 소수의 의견에 찬성하기가 쉽기 때문이다. 소수의 의견이 다수에게 몰려 핍박당해도 현실에서 당하는 그것보다는 훨씬 낫다. 정말 사회적 물의를 일으킬 정도의 의견이나 욕설 따위가 아니라면 한 번쯤은 소수의 의견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이 나타나게 된다. 누구 의견인지 모르니까 말이다. 이렇게 낫긴 하지만 가상과 현실의 차이는 이것 정도뿐이다. 상대를 모르기 때문에 의견을 개진하거나 소수의 의견에 찬성하기가 현실보다 ‘쉬울’ 뿐이지, 일반적인 정보의 활용은 별반 차이가 없다. 

 

정보의 출처에 따라 우열을 가리는 현상을 보면 보다 더 쉽게 이해가 가능하다. ‘똑같은’ 정보라고 하더라도 익명이 작성한 위키와 전문가의 의견은 다르게 받아드린다. 심지어 전문가의 출처를 달아도 그렇게 받아드린다. 그게 뭐가 문제라고 묻는다면 다시 말해주겠다. 그것은 정보를 정보자체로 받아드리는 것이 아니라, 위아래로 우열을 가려 선입견이나 편견을 통해 정보를 받아드리는 것이다. 그 때문에 생기는 문제도 다시 말해주겠다. 그렇게 정보를 받아드리게 되면 정보를 온전하게 받아드릴 수 없을뿐더러, 높은 것에만 기대게 되어 스스로 생각할 수 없게 된다. 맹목적이게 된다.

 

 

현실의 세계에 있는 맹목적인 집단들은 이미 알고 있을 테니 굳이 이야기는 하지 않겠다. 가상의 세계에서도 맹목적인 집단들이 있는데 쉽게 접할 수 있는 부류들이 흔히 말하는 성별우월주의자들이다. 커뮤니티 중심인물의 의견이라고, 다수의 의견이라고, 아무 생각 없이 맹목적으로 그 의견을 받아드려 그것과 동화되었다. 그리고는 옳고 그름도 생각하지 않고 똑같이 행동하게 된다. 그런 사람들이 커뮤니티 내 지위상승을 위해 보다 더 과격한 행동을 취하기 시작했는데, 그것이 사회적 물의를 일으켜 수면 위로 올라와 많은 사람들이 알게 되었다. 

 

만약 그들이 스스로 생각하여 옳고 그름을 판단했었더라면 그런 선택은 하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한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기본 교육을 충실하게 받아왔기 때문에 일반적으로는 우수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보다 문맹자가 적은 나라도 그리 많지 않다. 뭐 우스개 소리로 언어가 같다고 말이 통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들 하지만, 현실적으로 똑똑한 사람이 많은 나라일수록 잘 굴러가는 것은 확실하다. 베네수엘라의 몰락을 보면 더 쉽게 받아드릴 수 있을 것이다. 풍부한 자원으로 교육을 방치한 나라는 자원의 가치가 낮아지면 그렇게 되게 되어있다.

 

 

맹목적으로 받아드리는 사람 중에서 어쩌면 자신이 스스로 생각하고 있다고 여길지도 모르기 때문에 ‘스스로 생각한다.’에 대해 잠시 이야기를 하겠다. 스스로 생각한다라는 것은 어떤 정보를 접했을 때, 그 정보를 다양한 방법으로 고찰하는 것을 의미한다. 신뢰도를 고려하고, 옳고 그름을 따져보고, 공익과 사익을 따져보고, 누구의 이익을 대변하는지 생각해보고, 그것이 목적인지 수단인지 생각해보고, 논리적인지 생각해보고, 필요와 불필요를 생각해보고, 가능과 불가능을 생각해보고, 감성과 이성을 생각해보고, 형평성에 대해 생각해보고, 당연하게 여기고 있는지 생각해보고, 특별하게 여기고 있는지 생각해보고, 시점을 달리 하여 다양한 각도에서 관찰해보고, 다른 이들의 시각에서 관찰해보고, 다른 이들의 다양한 생각들을 차별 없이 관찰해보고, 그 정보가 실제 현상이 나타나는지 알아보고, 과거의 비슷한 정보를 관찰하여 그 흐름을 파악하여 미래를 예측해보고, 교차검증을 해보고, 자신의 자연스러운 선입견이나 편견에 순응하는지 스스로를 성찰해보는 것 등을 가리켜 스스로 생각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런 방식으로 스스로 생각하는 것이 본질을 보는 것과 일맥상통하다 할 수 있다. 이렇게 스스로 생각하여 자신의 가치관이나 손익 등을 고려해 그 정보를 어떻게 활용할 것인지를 정하면 된다. 너무 많은 것이 아니냐고 물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우리가 의사소통을 할 때 생각해보면 그건 가능한 일이다. 우리가 의사소통을 할 때, 거기에 쓰이는 모든 단어와 문법을 의식적으로 기억하여 말하지 않는다. 어떤 의사를 전달하겠다는 의지를 가지게 되면 뇌가 알아서 계산하여 그에 해당되는 단어나 문장을 알려주는데, 그게 적절하다고 생각하면 그대로 말하면 되는 것이고, 아니면 한번 더 생각해 다른 것을 떠올려보면 된다. 

 

그렇게 의사소통을 할 때처럼 스스로 생각하는 방법을 알고 난 뒤엔 스스로 생각하겠다는 의지만 갖고 있으면 뇌가 알아서 계산하여 그 정보가 어떤지에 대해 알려준다. 예컨대, ‘오늘 대기오염이 심각하다.’라는 정보를 받아드리면 자동적으로 떠오르는 생각들이 있을 것이다. ‘미세먼지가 많겠군’, ‘오늘 갈 때 마스크를 써야겠군’, ‘뭐 때문에 심각한 걸까?’ 등등 떠오르게 된다. 이렇게 뇌가 자동적으로 계산하여 알려주는 것처럼, 스스로 생각하는 방법에 습관을 들이면 받아드린 정보를 다양한 방법으로 고찰하고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나의 경우를 예로 들자면, 모든 것이 다 떠오르는 것은 아니다. 정보를 받아드리는 순간에 다양한 것이 떠오르면서 여러 가지가 판단된다. 그러나 그걸로는 부족할 때가 많고, 그렇게 떠오른 것이 선입견이나 편견일 가능성도 있다. 그래서 판단이 될 때까지 하나하나 다시 생각할 때도 많다.

 

  

이렇게 정보는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여 활용해야 한다. 그렇다면 정보의 우열은 어떻게 정해야 하는지 물어볼 수도 있다. 대답하겠다. 기본적으로 정보의 우열은 스스로 생각하지 않을 때엔 위아래로 나누고 있지만, 스스로 생각할 때엔 다양한 기준으로 나누게 된다. 옳고 그름, 가치, 영향력, 정합성 등 아주 다양한 기준으로 나눌 수 있는데, 사람마다 정보의 우열이 다를 수 있으므로 객관적인 지표는 없는 것이나 다름없다. 심지어 ‘틀린’ 정보 조차도 가치 있게 활용하는 사람도 있으니까 말이다. 그러니 정보의 우열은 스스로 판단하여 나눌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정보 자체가 아닌 정보 출처의 우열은 가릴 수 있다. 우열이라고 하기엔 좀 이상한 표현인데, 적합도에 따른 구분이라고 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예컨대 익명이 작성한 위키는 쉽게 정보를 접할 수 있다. 그런 위키를 가지고 논문 수준의 신뢰도와 정확성을 기대하는 것은 인스턴트 식품을 먹으면서 건강을 챙기겠단 말과 비슷하다. 이렇듯, 익명이 작성하는 위키의 역할은 ‘쉽고 빠른 정보’다. 그 역할에 따라 적합도를 따지면 된다. 쉽고 빠르게 접근할 수 있는 위키에 논문 수준의 어려운 정보는 적합하지 않다. 앞서 말한 것처럼 정보 자체의 우열은 스스로 정해야 하는 것이지만, 정보 출처에 적합한 정보인지 아닌지는 이렇게 역할에 따라 객관적으로 판단이 가능하다. 그걸 기준으로 하여 각 정보들의 편의성, 신뢰도, 정확성 등의 점수를 매겨 그걸 감안하여 해당 출처의 정보를 받아드리면 된다. 무작정 위아래 우열을 가려 취사선택을 하다 보면 위에서 수 차례 설명한 부작용이 나타나게 될 것이다. 

 

정보의 출처는 매우 다양한데, 부모, 교사, 종교, 언론, 어른, 친구, 책, 잡지 등등 그 출처에 적합한 정보인지 판단한다. 그리고 그 출처에 대한 편의성, 신뢰도 정확성 등의 점수를 매기고, 그걸 감안하여 정보를 받아드리면 될 것이다. 예컨대 ‘여기 언론사 정보는 신뢰도가 이 정도니까 이만큼은 감안하고 받아드리자.’ 같이 말이다. 심지어 거짓정보를 유포하는 정보 출처조차 한번 생각해볼 여지가 있다. ‘왜 그런 거짓정보를 유포하는가? 그리고 그런 거짓정보를 유포하여 그들이 얻는 이익은 무엇인가?’ 등을 생각하다 보면 그에 맞는 정보를 수집할 수 있게 된다. 이렇게 정보 출처에 따라 감안해야 할 부분을 감안한 뒤,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해야 올바른 정보수집이 가능하고, 그 올바른 정보수집에서 올바른 결론이 도출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런 정보활용이야말로 변화하는 문명과 변화하지 않는 유전자를 지낸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이라고 생각한다.

 

 

일단 정보에 대한 이야기는 여기까지. 앞으로 지식이 늘면 정리하거나 보충하겠다. 그리고 언젠가 이 소재를 가지고 정보 공유에 관한 글을 쓸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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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발상법 중 하나를 공개하자면, 뇌가 알아서 계산해 주는 모양인지 놀고 자다 보면 뭔가가 떠오릅니다. 예를 들어 하나를 생각하고자 결정하면 그에 대해 좀 생각하다가 놀기 시작하죠. 게임도 하고 만화도 보고 독서도 보고 최근에 시작한 운동도 하다가 피곤하면 잡니다. 자던 도중에 갑자기 눈을 떠지더니 발상이 떠오릅니다. 그 떠오른 것을 적어둡니다. 그게 제 발상법 중 하나에요. 믿을지 안 믿을지는 모르겠습니다. 보통은 그냥 생각해서 떠오르지만 이렇게 떠오를 때도 있습니다. 사실 이 글을 쓸 때도 그렇게 시작했어요. 정보에 대해 쓰고 싶은데 어떻게 시작해야 할까? 그걸 고민하다가 잤어요. 그리고 자던 도중이었지, 자기 직전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데, 갑자기 눈이 떠지더니 발상이 떠올랐어요. 처음엔 ‘세계는 변했다, 사람은 변하지 않았다.’ 이렇게 떠올랐다가 조금 바꾸고 시작했지요. 명확한 기준이 잡히니 술술 써지더군요. 뭐 아무튼, 읽어줘서 고마워요. ///

 

저는 eBook을 좋아하는 편이에요. 읽기 편하고 관리하기 편하고 종이를 쓰지 않아도 되니 환경보호도 되나요? 아무튼 그래서 좋아해요. 그런데 걱정되는 건 회사가 망하면 남는 게 없을지도 모른다는 점이에요. 예전에 온라인 인증방식의 게임을 구매해서 즐겼었는데 회사가 망하니까 그 권한도 사라져서 끝나더군요. 아무런 보상도 받지 못했었답니다. eBook은 안 망했으면 좋겠지만 만약 망하더라도 그대로 사라지지 말고 부디 다른 회사에 인계했으면 좋겠어요. 그런 보장이 있다면 좀 더 마음 편하게 대여하거나 구매할 것 같네요. 회사가 사라져도 구매한 것은 남는다고 할지도 몰라 말해둘게요. 구매한 책을 보관한 것을 분실하면 다시 다운로드 받을 수가 없어요. 어쨌든, 지식을 공유하는 매체는 발전했으면 좋겠습니다. 똑똑한 사람들이 많아져야 대화가 통하고 즐겁거든요.

 

저는 글을 쓸 때 꼬박꼬박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라고 썼어요. 그런데 왜 ‘고맙습니다.’라고 써왔을까요? 그 이유에 대해 몇 가지 이야기 해볼게요. 첫째는 그 쓰임새가 특이한 것이 재미있어서 그랬어요. ‘고맙다.’나 ‘고마워.’는 보통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하거나 대등한 사람 또는 친한 사람에게 쓰이더군요. ‘감사합니다.’는 보통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하거나 거리감이 있는 사무적인 관계에 사람에게 쓰이더군요. 그런데 ‘고맙습니다.’는 그 어디에도 명확하게 쓰이는 곳이 없다고 생각했어요.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또는 대등하거나 친한 사람에게 쓰이는 ‘고맙다.’나 ‘고마워.’와 높임말인 ‘습니다’가 합쳐지니 어쩐지 대등한 관계에서만 쓰이는 말 같지 않나요? 그게 재미있다고 느껴져서 그렇게 쓰기 시작했어요. 더구나 예전에 저는 대등한 관계 아니면 상대하기 어려웠었거든요. 둘째는 초성이 어렵기 때문이었어요. ‘감사’와 달리 ‘고맙’은 초성으로 알아보기 힘들죠. 마찬가지로 ‘수고’와 달리 ‘고생’도 알아보기 힘들고요. 그 뜻을 전달하기 위해서는 온전하게 다 쓸 수밖에 없어요. 저는 나름 제 글을 읽어주시는 분들에게 정성스럽게 인사하고 싶었어요. 셋째는 보던 만화나 소설에서 쓰였기 때문이었어요. 넷째는 사람들이 잘 안 써서 쓰면 재미있을 거라 생각했어요. 다섯째는 평등한 사회, 대등한 관계를 추구하는 제게 어울리는 인사라고 생각했어요. 그저 재미있어서 쓰기 시작했던 것이 그런 이유로 그 인사말이 정착하게 되었죠. 뭐 사실은 이러니 저러니 해도 재미있는 부분이 큰 것 같아요.

 

 

2018년 4월 22일 작성

 

참고 인터넷 검색 (수명 한계에 관한 지식이 맞는지 확인, 사용한 단어가 맞는지 사전에서 확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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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 2. 언어 기원 (0) 2018/04/15 AM 05:56

 

2. 언어 기원

 

 

말과 글, 어쩌면 그렇게 사랑스러운가? 이런 의사전달의 매개체가 있기 때문에 우리는 좀 더 고상하게 사람들과 웃고 울을 수가 있다. 생각해보라, 언어와 문자가 없었다면 우리는 다른 동물들처럼 야옹야옹 거리거나 멍멍! 꿀꿀! 거리며 대화를 나눴을지도 모른다. 기쁜 일에 어깨를 들썩이며 꿀! 거리거나 슬픈 일에 축 처져서 꿀, 꾸울… 거리는 것은 특수한 성벽이 있는 사람을 제외하곤 그리 유쾌하진 않을 것이다.

 

우리를 사람답게 해준 언어와 문자는 우리 주변에 당연하게 있었기 때문에 언제부터 말하고 썼는지에 대해서는 별다른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못한다는 표현이 더 어울릴 것이다. 당연하면 그 소중함을 잊어버리니까 말이다. 하지만 이런 시작에 대한 탐구는 사물의 본질을 보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라고 본다. 사람을 사람답게 해준 언어와 문자가 언제 시작되었는지를 알게 된다면, 사람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 분명하다.

 

인류가 처음으로 발견한 문자는 기원전 4천년전 경에 발견한 수메르 비문이라고 한다. 물론 이 이전에도 문자가 있었을 확률은 높다. 아직 발견되지 않았을 뿐이다. 이렇게 문자는 유적으로 남아있어 그 시기를 추측할 수 있지만, 언어는 그런 것이 있을 수가 없다. 언어를 남기려면 녹음기 같은 기술이 있어야 하니까 말이다. 그래서 언어가 언제 처음 시작되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오로지 상상만이 가능할 것이다. 답이 없다는 이야기는 어떤 이의 의견도 답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앞다투어 자신의 상상을 세상에 널리 알렸다. 참고한 서적의 옮긴이에 따르면 대표적으로 신수설, 의성설, 유추설, 감정표출설, 가창설, 몸짓설, 노동설, 의지설, 진화설이 있다고 한다. 여러분들도 한번쯤 상상해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그것이 답이 될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이런 유행의 흐름에 따라 장 자크 루소(1712~1778) 또한 자신의 상상을 글로 써서 발표했다. 그 상상이 꽤나 흥미롭고 재미있어 현재까지 많은 사람들이 읽는 글이 되었다. 다음은 루소의 글을 나름대로 정리하였다.

 

 

‘욕구는 첫 몸짓들을 유발했고, 정념은 첫 목소리들을 토해내게 했다.’

 

루소는 몸짓 언어와 목소리 언어를 구분하는 것으로 시작했다. 인간의 원초적 욕구인 육체적 욕구는 몸짓으로 시작되었을 거라고 한다. 몸짓은 쉽고 강력한 시각적인 이미지를 준다. 무엇보다 육체적 욕구는 몸짓만으로도 충분히 의사소통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먹는 시늉, 자는 시늉, 싸는 시늉 어렵지 않게 가능하다. 그러니 굳이 목으로 소리를 내서 말할 필요도 없지만, 무엇보다 당시엔 목으로 소리를 낼 줄 몰랐을지도 모르고 그 기능조차 불안정했을지도 모른다. 사람이 쉬운 것에 먼저 기대는 건 자연스러운 현상이 아닐까? 그렇기 때문에 루소는 우리 언어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는 목소리를 토해내게 한 것은 정신적 욕구인 정념이라고 주장했다. 정념에서 일어나는 감정들인 사랑, 증오, 동정심, 분노 같은 것들은 몸짓으로만 전달하기에는 어려움이 따른다. 그 감정들을 표현하지 못할 것까진 아니지만, 그 세세한 구분이 어려운 것은 이해할 것이다. 더 뜨겁고 강하게 자신의 감정을 전달하기 위한 방법이 필요했고, 그런 필요로 의해 목에서 소리를 냈던 것이 최초의 언어라고 한다.

 

인간이 말을 하게 된 동기가 정념이었다면, 최초의 표현들은 비유였다고 한다. 간단히 정리하자면, 모르기 때문에 대명사로 지칭하던 것을 알고 나서 제대로 된 명사를 붙여줬다는 이야기다. 동물들을 따로 구분하지 않고 그냥 동물로 지칭하던 것을, 제대로 알고 나서 하나하나 이름을 붙여주었다고 이해하는 것도 좋다.

 

인간은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 감정을 담아 소리를 내기 시작했고, 그 소리는 매우 음악적이었을 것이라고 한다. 생각해보면 그럴 듯 하다. 기쁨이나 슬픔을 표현할 때 단조롭게 말하는 이는 별로 없다. 기쁠 때는 활기차고 톡톡 튀는 목소리가 나오고 슬플 때는 축 처지고 음울한 목소리가 나온다. 언어가 정념으로 시작되었다면 감정을 담은 음악적인 목소리로 의사소통을 했을 것이다. (일상생활에서 오페라처럼 대화를 주고받는 것을 생각하고 왠지 재미있다. 흔히 원시인들의 생활을 떠올릴 때 ‘우가 우가’ 같은 짐승적인 느낌으로 떠올리는데, 이제는 조금 달라져야 할 것이다. ‘우가아! 우가아~’ 같이 음악적이며 감각적인 느낌으로 대화했을 것이다.)

 

음악적이었던 언어는 문자의 등장으로 퇴화되었다고 한다. 사실 이 이야기는 상당히 놀라웠고 언어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만들었다. 그래 그렇지, 자유로운 언어가 문자라는 틀에 종속되니 필요 없어지는 부분은 퇴화되는 게 맞았다. 문자는 이성적 필요로 나타난 것으로 절제되고 효율적인 언어만 남게 되었다. 이는 문명이 발달할수록 점점 정교한 문법과 논리를 통해 다듬어져 과거 언어의 상당수는 사라지게 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현상을 가리켜 ‘한 언어를 이내 단조롭고 생기 없게 만들려면 그 말을 하는 나라에 아카데미를 설립하기만 하면 된다는 것이다.’ 라며 비꼬기도 했다.

 

이런 현상에 대한 근거는 로마의 아우구스투스 시대(기원전27년~서기14년)의 사학자 드니 달리칼리나스(Denis d’halycarnasse)가 고대 그리스(기원전1100년경~기원전146년)에서 사용되었던 악센트에 대해 말한 것을 정리한 글을 가지고 설명했다.

 

‘드니 달리카르나스에 따르면, 악상 테귀(accent aigu)에서 성조의 높임과 악상 그라브(accent grave)에서 성조의 낮춤은 일종의 5도 음정에 속하는 것이었다. 그처럼 음조 악센트 역시 음악적이었으며, 특히 악상 시르콩플렉스(accent circonflexe)가 그런데, 그것은 같은 음절에도 5도 음정 올라갔다가 새로 5도 음정 내려오는 목소리다.’

 

이 문장에서 알 수 있는 사실은 우리의 언어에서 음악적인 악센트가 아닌, 음조 악센트와 음성적인 악센트만을 인정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고 한다. 이해를 돕기 위해 설명을 보충하자.

 

분명 ‘음의 높낮이가 있는 악센트가 있다면 음악적인 언어가 아닌가?’ 라고 의문을 품을 수도 있다. (우리 시대에도 있는 중국어의 성조와 같이 말이다.) 그러나 그 악센트는 로마시대 사람이 고대그리스 언어의 발음을 문자로 표시하기 위해서 발명한 것으로 추측한다고 한다. 고대그리스에서 사용했던 수많은 음악적 발음 중에서 몇 가지를 골라 표시한 것에 불과하다는 사실이다. 다음은 그에 대한 루소의 설득을 정리해보았다. 어떤 악기의 음을 목소리로 정확하게 소리 내어 본다고 가정하자. 그럴 때엔 이렇게 발명된 악센트 부호와 관계없이 소리를 낼 것이다. 그렇게 낸 소리를 발명된 악센트 부호에 맞춰 문자로 표시해보자. 아마 불가능할 것이다. 이렇듯, 악센트가 없던 시대의 발음을 문자로 표시하기 위해 악센트를 발명했기 때문에 음악적인 언어는 효율적인 언어로 점차 바뀌게 되었다고 한다. 언어가 그렇듯, 음악 또한 선율에 대한 새로운 규칙들이 강요되면서 퇴화되었다고 주장한다. 일리 있는 말이다. 모든 소리를 글자로 표시할 수 있다면 모든 음악가는 같은 곡을 같은 소리로 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렇지 않기에 같은 곡이라도 음악가마다의 개성이 드러나게 된다.

 

음악적인 부분을 상당히 잃어버린 언어는 통치 형태에 따라 달라지기도 했다고 한다. 그 옛날 고대그리스에서는 설득이 공권력의 구실을 했기 때문에 힘이 있는 웅변으로 사람들을 설득해야 했다. 그 웅변에는 선율이 담겨있었다고 한다. 그러한 음악적인 웅변은 사람들을 설득하는데 강력한 효과를 발휘했다고 한다. 음악은 감정을 자극하니까 말이다. (그래서 설득으로 정치가 가능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계층이 고착되면서 통치자의 권력이 강해지는 바람에 그런 웅변술이 필요 없어졌다고 한다. “이것이 짐이 기뻐하는 것이니라.” 이 말 하나면 끝인 시대에 무슨 웅변이 필요하겠느냐고 그는 역설한다. 그런 사회가 형태를 갖추게 되어버린 그의 시대엔 대포와 돈이 아니고는 사회의 어떤 것도 변화시키지 못한다며 한탄한다. (이러한 이야기를 안다면 오늘날 민주주의가 자리잡은 국가에서는 이 점을 심도 있게 받아드려야 할 것이다. 공권력은 명령이 아닌 설득으로 행사해야 한다. 물론 받아드리는 사람 또한 그에 걸맞은 지성이 필요할 것이다.)

 

여기까지가 루소가 설명한 보편적인 최초 언어들과 그 언어들의 지속으로 비롯된 진보다. 루소는 기후에 따라서도 언어가 달랐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그 부분에 대해 간단히 정리하고 루소의 주장에 대한 정리를 마치도록 하겠다. 루소는 크게 남방(더운) 언어와 북방(추운) 언어로 구분하였는데 그런 차이점을 관찰해야 고유성을 발견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요점은 간단하다. 따뜻한 남방에서는 자연의 축복을 받아 모든 것이 풍부해 생존에 전력을 다하지 않아도 되었다. 여유 있는 삶 속에서 그들은 정신적 욕구의 충족에 집중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남방의 최초 언어는 ‘나를 사랑해줘요’ 였을 거라고 한다. 그렇게 남방 언어는 사랑과 부드러움이 담겨있는 따스하고 여유로웠을 거라고 추측한다고 한다. 반면 추운 북방에서는 먹고 살기 위해 전력을 기울여야 했다. 척박한 환경 속에서 그들은 정신적 욕구보다 육체적 욕구를 충족하는데 급급했다. 그러므로 북방의 최초 언어는 ‘나를 도와줘요’ 였을 거라고 한다. 그렇게 북방 언어는 척박한 환경 속에서 불안과 초조함이 담겨있는 날카롭고 위협적이었을 거라고 추측한다고 한다. 현대에는 북방과 남방언어가 섞여 알아보기는 어렵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요즘도 약간 남아있다고 한다.

 

루소의 글은 여기가 끝이다. 나름 간략하게 요약했기 때문에 부족한 부분이 많이 있다. 그러니 자세한 것은 그의 글을 직접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 당시 글이라고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로 참신하고 재미있는 발상들로 여러분들의 사고 영역을 넓혀 줄 기회가 되리라 생각한다. 그것은 또 다른 삶의 즐거움이며, 사람마다 다른 개성을 만들어낼 수 있는 수단이기도 하다. 아! 혹시 몰라 말하는데, 그의 이야기를 그대로 받아드리지는 말길 바란다. 어느 것이나 마찬가지로 그의 주장도 되도록 한번은 생각하고 받아드리기를 권하겠다.

 

 

지금부터는 나의 생각이다. 사실 나는 지금까지 언어 기원에 대해 본격적으로 생각해 본적은 없었다. 언젠가 한번은 생각해봤지만 ‘아마 언어는 … 그랬을 것이다.’ 정도로만 끝냈었다. 그러나 루소의 다양한 생각이 담긴 상상을 접하고 나니 나 또한 언어 기원에 대해 생각하고 싶어졌다. 그러므로 나의 상상을 적어보도록 하겠다.

 

기본적으로 나는 ‘사람은 동물이다.’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래서 언어 기원 또한 그런 관점으로부터 시작하게 된다. 그렇다면 우리 인류의 최초 언어 또한 다른 동물들과 별로 다를 바 없으리란 예상도 그리 어렵지 않다. 그에 대한 근거는 인간사회에 격리된 채 자라난 야생아나 고립아들을 보면 알 수 있다. 참고한 서적의 옮긴이에 따르면, 1724년 독일 하노버에서 발견되어 페터라고 이름 붙여진 어린이는 아무런 말을 할 줄 몰랐다고 한다. 그리고 인간 사회에 적응하는 과정에서도 많은 어려움을 겪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고 한다. 특히 1920년 인도의 늑대소굴에서 발견된 어린 자매들의 이야기가 인상적이다. 그 아이들은 발견 당시 모두 일어서지 못하고 두 손 두 발로 기어 다녔으며, 음식도 손으로 사용해 먹지 못하고 혀로 핥아 먹었다고 한다. 그리고 발견된 뒤에도 한동안은 하룻밤에 세 번씩 늑대처럼 짖었다고 한다. 놀라운 이야기다. 그 외 다양한 이야기를 예시로 들었지만 여기까지 하겠다. 이렇듯, 사람 또한 사회에 격리된 채 살아가면 동물과 다를 바 없이 생활하게 된다. 그러니 우리들은 동물처럼 대화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동물의 의사소통 수단을 먼저 알아봐야 한다. 그들은 어떻게 대화를 할까? 구글에서 ‘동물 울음 의사소통’으로 검색을 해봤다. 심심하면 검색해보길 권하겠다. 그들은 다양한 방법으로 의사소통을 했다. 꼬리를 흔들거나 귀를 씰룩 거리거나 날개를 퍼덕이는 등 몸짓 언어로 대화를 하거나 짖는 것, 포효하는 것, 으르렁거리는 것, 새의 지저귀는 소리 등 목소리 언어로도 대화하였다. 이렇게 보면 이상하다. 동물들도 몸짓 언어와 목소리 언어를 가지고 있다. 인간과 동물, 무슨 차이일까? 어떤 이는 동물은 인간처럼 말을 할 수 없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의 관점에서 바라본 시각이다. 우리가 모르는 언어를 쓰는 외국인의 말을 들으면 웅얼거리듯 들리며 못 알아듣는 것처럼, 우리가 동물의 언어를 알아듣지 못하는 것은 해석할 수 있는 능력이 없을 뿐이다. 그러니 그것은 동물과 인간의 차이가 아닌, 동물과 동물의 차이라고 할 수 있겠다. 또한 인간의 말을 흉내 낼 수 있는 앵무새가 있는 한 인간처럼 말하는 것은 인간만의 특징이 아니다. 그렇다면 무슨 차이가 있을까? 루소는 인간과 동물의 차이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동물들의 언어는 선천적으로 습득한 것으로, 그들은 후천적으로 언어를 습득할 수 없다고 한다. 그러니 그들은 진보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것은 옳은 말이 아니다. 수화를 배운 침팬지에 대해 알고 있는가? 동물들도 언어를 후천적으로 배울 수 있다. 단지 지능에 따라 달라지는 것뿐이다. 동물들 사이에서도 선천적 언어와 후천적 언어습득이 다른 것처럼, 인간과 동물의 차이는 오로지 지능 말고는 없다. 구강구조나 발음방법, 직립보행 등의 인간적 특징은 다른 종보다 우월하다는 증거가 되지 못한다. 직립보행이 지능을 높게 해주었다는 추측은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직립보행 자체가 우월한 것이라고는 할 수 없다. 날거나 물속에서 숨쉴 수 없는 인간이 다른 종보다 육체적으로 우월하다고 할 수 있겠는가? 지능 말고는 없다. 그러니 우리의 최초 언어도 지능이 낮은 동물들과 별로 다를 바 없었을 것이다. 동물은 육체적 특징에 따라 의사소통 방식이 다르므로, 아마 원숭이나 침팬지처럼 대화했던 것이 우리 언어의 기원이었을 것이다.

 

선천적 언어습득과 후천적 언어습득의 차이가 지능뿐이라면, 우리 언어의 진보 또한 지능의 발달에 영향을 받았을 것이라는 추측도 어렵지 않다. 지능의 발달은 진화에 직접적인 연관이 있다. 그러므로 언어의 진보에 대해 설명하려면 우리 인류가 진화해온 과정을 이야기 해야 할 것이다. 인류는 어떻게 진화하였을까? 진화를 하면 떠오르는 것은 다윈이 주장한 적자생존이다. 생존경쟁의 결과, 환경에 적응할 수 있는 생물만이 살아남고, 그렇지 못한 것은 도태되어 멸망하는 현상이라고 한다. 최근 상아 없는 코끼리가 대표적인 예다. 하지만 이런 설은 인류의 지능 발달에 대한 정확한 해답이 될 수는 없다. 우리 인류가 처음부터 지능이 뛰어났던 것도 아니었고, 어떤 특정한 개체의 지능 발달이 유전되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직립보행이 뇌의 용량을 늘려주어 지능이 높아졌다는 이야기도 있는데, 특정 개체가 갑자기 직립보행 한다고 해서 그 개체로부터 유전된 개체 또한 직립보행을 했을 리는 없다. 물론 교육을 통해서 가능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능이 낮고 언어와 문자가 없던 시절에 그런 교육이 어디까지 가능하고 얼마나 효과가 있었을지 의문이 든다. 원숭이나 침팬지에게 직립보행을 가르쳐봐라, 배울 수 있겠는가? 있긴 있었다. 침팬지 올리버다. 직립 보행하는 침팬지가 있어 사람들에게 놀라움을 선사했지만 그것이 이어지진 않았다. 그처럼 직립보행 하는 개체가 있다 해도 그들이 자기새끼들에게 가르칠 수 있겠는가? 나는 부정적으로 생각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여 인류는 현재의 지능을 지니게 되었는가? 유인원들의 유골이 아프리카 대륙과 이어진 곳에서 발견되는 것을 보고 사람들은 그곳에서 인류가 시작되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그곳에 어떤 공통된 조상(무엇인지는 모른다.)이 오스트랄로피테쿠스 같은 유인원으로 진화하였고, 그 오스트랄로피테쿠스에서 수많은 진화를 거쳐 사람으로 진화한 것이 현 인류라고 한다. 다음은 이런 진화과정에 대해 설명해보도록 하겠다. 우리는 우리의 학습이 유전되지 않음을 알고 있다. 그렇다면 유전적인 변화는 유전자의 변형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현대에 들어 유전자 변형을 통해 강제적으로 동물과 식물을 진화시키고 있다. 또한 현대의 고구마가 자연 속에서 유전자 변형을 통해 나타난 것이 밝혀지면서 자연적인 유전자 변형이 가능하다는 근거가 마련되었다. 여기까지 쓰면 무슨 이야기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유전자 변형으로 진화하였다. 공통조상 중 특정 개체가 어떤 특별한 일을 겪어 유전자에 변형이 일어났다. 그 특별한 일이 뭔지는 모른다. 고구마의 경우 수세기전 토양 속 박테리아의 일부가 야생 고구마에 들어가 변이를 일으켜 다른 고구마보다 더 크고 튼튼하게 자랐다고 한다. 당시의 농부는 당연히 크고 좋은 고구마만 골라 다시 심기 시작했고, 자연스럽게 현대의 고구마만 살아남게 되었다고 한다. 그와 마찬가지로 그 공통조상 중 특정 개체의 변형된 유전자가 짝짓기를 통해 유전되었다. 그렇게 변형된 유전자가 유전되면서 그들은 하나의 종으로 진화한 것이다. 그런 유전자 변형이 일어난 특정 개체는 하나가 아니었기 때문에 다양한 종의 유인원들이 나타났고, 그런 유인원들끼리도 짝짓기를 하여 살아남는 유전자를 가지고 있는 종이 살아남게 되었다. 하나의 예로 현생 인류에는 4만년전 멸종된 네안데르탈인의 유전자가 1~9% 가량 발견된다고 한다. 그렇게 유전자 변형으로 진화를 시작하여, 변형된 유전자끼리의 싸움을 통해 살아남은 유전자를 보유하고 있는 종이 살아남았고, 살아남지 못한 유전자는 자연스럽게 사라졌다. 그 유전자의 생존경쟁에서 살아남는 마지막이 바로 우리 인간이다. 인류가 아닌 다른 유인원들의 멸종 이유에 대해 다양한 의견이 있지만, 나는 이런 유전자의 생존경쟁으로 결정되었다고 생각한다. A유인원(또는 유전자 변형이 일어난 B와 같은 종)이 B유인원과 짝짓기를 할 때 A유인원의 특징을 가진 유전자가 많이 유전되면 B유인원은 자연스럽게 멸종할 수 밖에 없다. 원숭이나 침팬지가 멸종하지 않은 까닭은 그들과의 짝짓기로 아이를 낳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가능하더라도 호랑이와 사자의 잡종인 라이거 같이 다음 세대로 유전되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멸종한 이유에는 적자생존 등 여러 가지 복합적인 이유도 있었으리라.

 

유전자 변형을 통한 수많은 진화로 조금씩 지능이 높아져갔고, (때로는 낮아질 때도 있었을 것이다.) 그 지능이 높아짐에 따라 우리의 언어는 조금씩 달라졌을 것이다. 처음에는 동물들과 다를 바 없었으리라. 아마 이 때가 그 공통조상이었을 때 일 것이다. 그것에서 자연적인 유전자 변형을 통해 진화하여 불을 쓸 수 있게 될 때쯤엔 다른 동물들과 다른 언어를 사용했을 것이다. 유전자 변형이 일어나서 지능이 조금 높아진 개체는 다른 이들과 달리 우수했기 때문에 리더적 역할을 했을 거란 예상은 어렵지 않다. 그 리더적 역할을 했을 개체는 지능이 높아진 덕분에 의사를 남들과 다르게 표현하고 싶다는 의지를 갖게 되었다. 이 때 그 의지를 갖게 된 동기에 대해 상상해보자. 유전적 변형으로 지능이 높아진 개체(또는 그 유전자를 이어받은 개체)는 왜 남들과 다르게 언어를 표현하고 싶어졌을까? 선천적으로 알고 있던 목소리 언어는 다른 동물들과 마찬가지로 울음소리였을 것이다. 왜 그 울음소리를 넘어서 후천적인 언어를 표현하고 싶어졌을까? 육체적 욕구는 선천적인 몸짓과 목소리 언어면 충분하다. 동물들을 보면 충분히 가능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동물에게 감정이 없다고 이야기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니 감정표현도 할 수 있다. 그렇게 육체적 욕구와 정신적 욕구인 정념을 다 표현할 수 있는 그런 상황 속에서 후천적 언어를 표현하고 싶어진 까닭은 바로 나와 다른 존재를 지칭하고 싶어질 때다. 세상 만물에 있는 다양한 것들에는 소리가 있었고, 그 소리를 통해 그것을 지칭할 수 있는 단어를 떠올릴 수 있게 되었다. 지능이 높아진 뇌는 그 방법을 알려주게 된다. 세상의 소리를 학습하여 따라 하는 것. 그것이 인간이 세상에 내뱉은 새로운 말일 것이다. 고양이가 야옹하는 것을 보고 야옹이라 부르거나 강아지가 멍멍 하는 것을 보고 멍멍이라고 부르는 것처럼, 당시의 동물이 내뱉는 소리를 듣고 그 소리를 단어화하여 불렀을 것이다. 그것은 뇌가 동물의 울음소리를 저장하여 패턴화하였을 때, 유인원이 의지를 가지게 되자, 그 의지가 반영되어 머릿속에 하나의 발상으로 떠오르게 된다. ‘아 저것은 꿀꿀거리니까 꿀꿀이라고 불러보자’ 또는 ‘이유는 모르겠는데 꿀꿀이라고 불러보자’가 떠올랐을 것이다. 그렇게 리더가 꿀꿀이라고 부르자, 어느 정도 지능이 있던 개체도 같이 꿀꿀이라고 부르게 된다. 그것이 단어의 탄생과정이라고 생각한다. 번개를 보고 꽈꽝하니까 꽈꽝이라고 불렀을지도 모르고, 물소리를 듣고 슈루루 라고 불렀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자연을 보고 학습하여 언어를 터득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렇게 조금씩 단어 하나씩은 배우게 되었지만 지능의 한계로 그 이상은 배울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도 단어 하나씩 말했던 것이 본격적인 언어의 시작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단어를 터득한 유인원들 중 또다시 유전자 변형이 일어나 새로운 개체가 나타났고, 그 개체가 다른 개체와 짝짓기를 할 때 그 개체의 유전자가 살아남아 다시 한번 진화하게 된다. 그렇게 진화한 또 하나의 새로운 개체는 높아진 지능으로 문장을 형성할 수 있었을 것이다. 아마 이때쯤부터 대화에 논리적인 색체가 조금씩 드러나기 시작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현 인류에 비교하면 부족하다. 그래도 이때쯤부터 루소가 말한 음악적인 언어가 나타났을 거라 생각한다. 자신의 감정을 몸짓이나 울음소리가 아닌 언어에 실어 대화할 수 있는 수준까지 도달했다. 또다시 유전자 변형을 통해 진화하였고, 또다시, 또다시, 또다시 등  반복하여 현 인류까지 도달했다. 이렇듯, 언어의 기원과 진보는 인류의 진화와 직접적인 연관이 있을 수밖에 없다. 후천적 언어는 지능이 높아야 가능하기 때문이다. 우리들이 좀 더 고상하게 웃고 울을 수가 있는 것은 후천적 언어 습득을 가능하게 한 지능을 얻을 수 있었던 진화과정과, 언어가 시작되었을 때부터 내려온 언어 관습(사회와 격리된 아이들이 언어를 몰랐던 점을 생각해보자.)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오늘의 상상은 여기까지. 나중에 좀 더 보충하거나 정리할 수도 있고, 또 나중에 이 소재를 가지고 언어 교육에 관한 글을 쓸 예정이다. 그에 관해 약간만 쓰도록 한다. 언어가 문자의 등장으로 퇴화되었다면 지금의 외국어 교육방식도 달라져야 하지 않겠는가? 우리는 외국어를 문자로 배우기 시작한다. 그것이 효율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언어가 본디 문자에 종속된 것이 아니라면 그런 식의 교육은 언어적 사고 영역을 문자라는 작은 틀 안에 가두는 결과이며, 퇴화된 방식으로 언어를 배우는 것과 같다. 언어란, 모국어처럼 언어로 시작해야 한다. 외국문자를 모국어로 번역하여 배우기 시작하면 뇌 속에서 모국어에 대한 연상이 되기 때문에 혼동될 수밖에 없다. 우리는 학교에서 12년 넘게 영어를 배우며 문자로는 해석이 가능하지만 회화는 어려워하는 사람들을 많이 봐왔을 것이다. 또한 그렇게 배웠음에도 콩글리쉬 같이 잘못된 발음으로 회화를 하게 되는 경우도 많이 봐왔을 것이다. 이것은 전부 문자를 통해 외국어를 시작했기 때문이다. 나는 다른 이들이 우수하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그들이 이런 것을 모를 리가 없다고 가정하자. 그러면 왜 문자로 외국어를 교육했을까? 그것은 어느 입장을 기준으로 삼느냐의 차이다. 가르치는 입장에서 평가하기 편리하느냐, 학습하는 입장에서 배우기 편리하느냐, 물론 단어와 문법의 암기능력을 평가하는 것이 훨씬 편하다. 그것의 차이로 인해 우리는 문자로 외국어를 배우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학습의 기준으로는 정말로 비효율적이며, 잘못된 버릇(콩글리쉬)이 생기는 교육이다. 그러니 외국어를 배울 때엔 모국어를 가지고 번역하여 배우게 하기 보다는 그 나라 어린아이들이 언어를 배우는 과정을 그대로 따라 하는 것이 가장 효율적이며 이상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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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소의 글은 이번에 처음 읽었는데 막 나가는 게 마음에 드네요. 그의 의견은 사고의 자유가 느껴져요. 세상에 남방 언어가 필요가 아닌 즐거움 때문에 생겨났다니, 그걸 주장하기 위해 우물가에서 이성을 꼬시는 것을 진지하게 설명하는 걸 보면 재미있어요. 그의 ‘자연으로 돌아가라’ 에는 동의할 수 없지만요. 아무튼 이런 글을 보니까 한번 써보고 싶어서 씁니다. 제 생각을 정리하는 건 즐거운 일이네요. 그 생각, 읽어줘서 고마워요. 나중에 지식이 늘어나면 한번 더 정리해야겠어요. 그리고 이 소재를 중심으로 언어 교육에 관해 나중에 써볼 생각이에요. ///

 

제 이야기를 쓰고 나서 우울했어요. 이런 식으로 자신을 드러내는 것은 분명 손해겠지요. 그래도 하는 수밖에 없었어요. 가상과 현실의 괴리를 없애 스스로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자기자신과 마주볼 수밖에 없었어요. 아무래도 빠진 부분은 많지만 최대한 솔직하게 스스로에 대해 작성했다고 생각하는데, 혹시라도 환멸이나 경멸하셨다면 미안해요. 제게 슬픈 것 중 하나는 호의를 표하던 사람의 변모더군요. 손바닥 뒤집듯 태도를 바꾸는 건 너무 슬픈 일이었어요. 만약 그런다고 해도 과거의 저를 넘어서기 위해서는 받아드려야 하겠지요.

 

거짓을 진실로 생각해왔었다면 그것은 진실일까요, 거짓일까요? 사람이 몰리면 무언가를 만들어내죠. 인격을 만드는 이들도 있지만, 저는 흉내 낸 가짜를 만들어 그것에 맞추려고 했고, 그것이 옳다고 생각했어요. 모든 것이 진심이자 거짓이었죠. 그렇다면 그것은 진실일까요, 거짓일까요? 흉내를 낼 필요가 없어질 때쯤에 생각해보니 그것이 거짓으로 느껴져 자기자신이 몹시 싫었어요. 그리고 거짓도 싫어지게 되었죠. 이 외에도 빠진 부분은 많지만, 여기까지만 할게요. 앞으로는 달라지려 노력해 볼 거에요. 공부도 해보고, 세상과도 마주보겠어요. 자기관리도 하고 집안정리도 하겠어요. 실패할 확률은 높지만, 그래도 할 수 있는 데까지 해보려고 해요. 조금 과한 욕심으로는 철학가 사상가 소설가.. 아니면 어떤 종류라도 나의 생각과 이야기를 세상에 알리는 것으로 먹고 살고 싶어요. 가능할까요? 하하…

 

기운이 빠져 우울한 상태였는데, 최근 읽은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론’에서 힘을 조금이나마 얻었네요. 제 생각이랑 닮은 부분이 많았어요. 물론 읽어주시는 분들이 있다는 것이 가장 힘이 나지만, 그건 별개의 영역인 것으로 느껴져요. 글이 인정받는 것과 방식이 인정받는 것의 차이일까요? 아무튼 그래서 일부 발췌해봤어요.

 

'사상가라면 모름지기 결론이 어떻게 나든 자신의 논리를 끝까지 따라가야 한다. 단지 생각하는 것이 귀찮아서 기존의 올바른 의견을 그대로 받아드리고 그 덕분에 실수를 피할 수 있는 사람보다는, 적절한 공부와 준비 끝에 자기 혼자 생각하다가 실수를 저지르는 사람이 진리의 발견에 더 크게 기여한다.'

 

‘흔히 자제심을 잃은 토론이라고 할 때 독설, 빈정댐, 인신공격 등을 꼽는데, 논쟁의 당사자 모두에게 이런 것을 금지시킬 수만 있다면 그 같은 조치에 공감하는 사람이 늘어날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그저 통설에 대해 무차별 공격을 가하지 못하게 가로막는 것이 주목적일 뿐이다. 이에 반해 소수 이설에 대해서는 아무런 제약도 받지 않은 채 거침없이 공격을 퍼부을 수 있다. 심지어 그런 식의 공격을 가하는 사람에게 뜨거운 양심이니 정의의 분노니 하는 따위의 찬사를 보내기까지 한다. 그러나 가장 심각한 문제는 이런 일이 상대적으로 힘이 없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벌어진다는 점이다.’

 

‘일반적으로 볼 때, 다수가 받아드리는 의견과 일치하지 않는 소수 의견은,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표현을 순화하고, 상대방에게 불필요한 자극을 주지 않도록 극도로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깜짝 놀랄 정도로 현대에 벌어지는 현상과 비슷하죠. ‘자유론’이 작성된 시기가 1859년인데도 말이죠. 저와 생각이 비슷한 건 ‘자유론’에 영향을 받는 작품을 보고 영향을 받았거나, 그 때나 지금이나 별반 차이가 없다는 것을 증명하는 사례가 아닐까 생각이 돼요. 일종의 광기 속에서 글을 작성할 때, 스스로의 이상함을 자각하며 ‘세상에 나 하나쯤은 있어도 괜찮겠지’라고 생각하며 썼었는데 그걸 응원해주는 것 같은 문장을 보니까 힘이 났어요. 그는 개인의 개별성을 매우 중요시했거든요. 이 외에도 몇 가지 고전 저서들을 읽고 있는데, 고전을 접할수록 저자신의 부족한 부분과 배울 점을 많이 느낄 수 있어서 뭔가 충족되는 기분이 들기도 하네요. 세상 지식이 얼마나 많은데 그 많은 것을 접하고 나면 저는 그 때 어떻게 변해있을지 걱정도 되고 기대도 돼요. 자신의 무지함에 절망하며 무너질지, 새로운 지식에 전율하며 앞으로 나아갈지, 역시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의 문제에 대해 깨달은 게 너무 늦긴 늦은 것 같아요. 그래도 별 수 없지요. 어떻게 살든 제 자유니까, 엉망진창으로 제멋대로 살아보려고 합니다. 폐를 끼칠지도 모르고 기댈지도 모르고, 거부당할지도 모르고 상처받을지도 모르지만 어떻게든 나아가봐야겠지요. 간신히 소생한 상태라 언제 마음이 꺾일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예전보다는 나을 것 같아요. 이제는 미래를 보고 있으니까.

 

 

2018년 4월 15일 작성

 

참고

언어 기원에 관한 시론, 루소

인터넷 검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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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 1. 본질 (0) 2018/04/06 PM 03:56

1. 본질

 

절대중립은 가능한가? 본질을 보기 위해서는 중립적이고 객관적인 시각에서 봐야 하는 것은 무엇보다 분명한 사실일 것이다. 그러나 가치관, 편견, 손익 등의 이유로 중립과 객관을 유지하기가 어렵다. 예컨대 사건을 주사위 면으로 바꿔 바라본다고 가정해보자.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각자 보고 싶은 면을 보고 그것이 답이라고 말할 것이다. 확증편향이라고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정보공급자(언론, 교사 등) 아무리 노력해도 중립적인 정보를 전달하기 어렵다. 정보는 수요자(시민, 학생 등)가 어떻게 받아드리냐가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정보공급자는 중립과 객관을 지켜야 하는 것은 맞다. 그렇지만 그것 또한 정보와 지식의 한계로 인해 불가능에 가깝다. 다시 한번 사건을 주사위 면으로 바꿔보자. 정보공급자 입장에서 바라볼 때, 모든 면을 보더라도 본 것이 진실이라는 보장은 없다. 또한 그 모든 것이 진실이라고 하더라도, 그 사건이 사실 6면 주사위가 아닌 12면 주사위일지도 모른다. 모르기 때문에 전달하지 못한 6면으로 인해 사건의 방향성이 완전 달라지는 것을 종종 목격했을 것이다. (사건의 예시는 특별히 들지는 않겠다.) 선악이 바뀌고 옳고 그름이 바뀌고 피해자와 가해자가 바뀌기도 한다. 설령 현재모든 면을 보더라도 미래엔 어떻게 달라질지 모른다. 지식은 변화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정보와 지식의 한계는 정보공급자의 절대중립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다만 최선을 다할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서 소개할 본질을 보는 방법으로 본 본질이 반드시 정답이라는 보장은 없다. 더구나 이 세상엔 뛰어난 이들이 무수히 많다. 이 글을 보는 여러분들도 뛰어난 사람들일 것이다. 그런 여러분들에게 나의 방법이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그 동안 써왔던 나의 글에 담긴 생각이 여러분들에게 도움이 된 적이 있었다면, 그 생각에 도달할 수 있었던 방법 또한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그런 소박한 희망을 안고 나의 경험과 그 경험을 토대로 만들어진 방법에 대해 작성하겠다. 아무래도 나의 경험으로 만들어진 방법이기 때문에 나의 이야기가 많이 나올 예정이다. 그 점 감안해주었으면 좋겠다.

 

 

방법을 소개하기 앞서 가장 먼저 준비해야 할 것은 확고한 목적이다. 가치관, 편견, 손익 등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시각에서 중립과 객관을 통해 본질을 보기 위해서는 다양한 것을 버리거나 받아드려야 한다. 그것은 어쩌면 사람에게 괴로운 일일지도 모른다. 분명한 사실조차 괴롭기 때문에 받아드릴 수 없어 적당한 자기합리화로 외면하곤 만다. 그렇게 때문에 그걸 견뎌낼 이유가 되어줄 목적이 먼저 필요한 것이다.

 

그 목적은 거창하지 않아도 된다. 나 같은 경우엔 단순히 가상세계인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상대를 설득하기 위한 방법을 떠올리다가 그 목적을 발견했다. 어떻게 하면 상대방을 설득할 수 있는가, 어떻게 하면 좋지 못한 커뮤니티 여론의 흐름을 바꿀 수 있는가, 등을 생각했다. 그 결과 본질을 보고 정론을 기반으로 둬야 설득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고 본질을 보려고 노력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것은 몹시 즐거웠다. 인터넷 커뮤니티다 보니 상대방을 몰라 선입견이나 편견에 치우치지 않고 공정하게 상대방 의견만 바라볼 수 있었다. 물론 유추할 수 있는 방법(커뮤니티 성향이나 연령대 등)은 있었지만 그럼에도 현실보다는 나았다. 유저들의 의견들을 종합하고, 각각의 시선을 살펴보고, 방향과 흐름을 관찰한다. 그런 상황을 하나의 사건으로 바라봐 그 사건의 본질을 보고, 내가 생각하는 바를 정리해 작성한다. 그렇게 하면 대게 여론의 흐름이 바뀌었다. 나의 의견으로 사람들의 생각을 바꾸는 것은 가슴이 뛰는 일이었다. 그렇게 즐겁기 때문에 시작했고, 현재는 필요도 하기 때문에 유지하고 있다.

 

이렇듯, 별로 대단찮은 목적이라도 분명하게 준비해야 본질을 볼 때 생기는 괴로움을 넘어설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나의 방법은 시기에 따라 순서대로 세가지 방법으로 나뉘는데, 첫째는 당연함을 버리는 것이고 둘째는 특별함을 버리는 것이며 셋째는 현상을 받아드리는 것이다. 우선 첫째에 대해 이야기해보도록 하겠다.

 

 

첫째, 당연함을 버리는 것

 

내가 당연함을 버렸다고 추측되는 시기는 자기자신을 믿지 못하겠다고 생각했을 때다. 당시 초등학생이던 나는 부모, 학교, 종교의 가르침과 실제 세상과의 불일치로 인해 내적 갈등을 겪고 있었다. 그 때문에 나는 어른들을 믿지 못하고 반항하기도 했다. 그럴듯한 표현을 하긴 했지만 그냥 어린애의 흔한 반항기였다. 그런 와중에 한 교사가 공개된 식당에서 싫어하는 음식을 강요하여 먹일 때, 그 강요가 싫어 내뱉었다가 주위 아이들에게 한동안 고립된 적이 있었다. 그럼에도 아무런 사과도 없었고 오히려 이상한 아이로 취급 받았던 게 아닐까 싶다. 슬프게도.

 

그렇게 중학생이 되어 점점 내적 갈등과 어른에 대한 불신이 심해지고 있었을 무렵, 하나의 사건이 일어났다. 사건 자체는 그리 특별하지 않다. (시기는 불명확하다.) 어린 동생이 내 나이 또래에게 협박당해 돈을 갈취 당한 사건이다. 사건은 어른들의 손에 넘어가 경찰과 보호자들이 만나 해결되었다. 그 나이 대 아이가 그렇듯, 나는 동생에 대한 책임감과 가해자에 대한 분노로 어쩔 줄 모르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한 상점 앞에서 그 가해자와 마주쳤다. 싸움이야 아이일 때 종종 했었다지만, 머리에 열이 올라 나도 모르게 주먹이 나갔던 적은 그 때가 처음이자 현재까지는 마지막이었다. 그렇게 치고 박고 싸우고 있을 때 상점 주인이 나와 중재를 했다. 그리고 평범하게 설교를 시작했다. 뻔하디 뻔한 재미없는 설교였다. 어처구니 없게도 싸움과 관련이 없었던 자기자식 자랑에 들어갔다는 것까지 기억하고 있다. 아마도 지금 생각해보면, ‘훌륭한 자식을 길렀으니 자신 또한 훌륭한 어른이다. 그러니 내 말을 잘 들어야 한다.’ 따위의 생각으로 나타난 것이 아닐까 추측한다. 아니면 뭐 그냥 자랑하고 싶어서 그랬다던가. 어쨌든 그런 재미없는 설교 앞에 나는 무력했다. 어째서? 그 당시 나는 나의 분노가 정당하고 싸움 또한 나의 권리이지 의무라고 생각했다. 나는 그 어른에게 대들었어야 했다. 분노하고 화를 내며 감정표출을 했어야 했다. 얘는 내 적이라고 이야기 했어야 했다! 그러나 나의 몸은 내 말을 듣지 않았다. 목구멍에서 말이 빠져 나오지 않았다. 말을 못해 감정표현을 웃고 우는 것으로 하는 아기처럼, 말이 나오지 않자 분노와 절망과 스스로에 대한 실망 끝에 엉엉 울어버렸다. 엉엉 우는 나를 보고 그 사람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자신의 훌륭한 설교로 반성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을까? , 그 당시의 감정이 아직까지도 또렷하게 남아있는 이유는 스스로에 대한 실망이 너무 컸기 때문이리라. ‘어른을 공경할 것그것이 나를 가로막은 주입식 교육의 효과였다. 그 때문에 나는 어른들에게 소극적 반항은 할 수 있었어도, 적극적으로 반항할 수는 없었다. 어른을 공경하라는 교육과 현실 속의 한심한 어른들의 차이로 인해 갈등을 겪고 있었던 나는, 이 사건을 계기로 어른과 어른이 가르치는 교육에 대한 신뢰를 버리게 되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를 믿지 못하게 되었다. 내 의지대로 움직이지도 않는 나를 어떻게 믿을 수 있겠는가?

 

실망으로 인한 불신으로 피폐해지고 있던 마음은 기댈 곳을 찾게 되었다. 그것이 종교에서 배운 운명이었다. 이 세상은 신이 정한대로 움직인다. 뭐 그런 것 말이다. 초등학교 시절에 수년간 다녔던 그곳에서 배운 것들은 많은 모순을 내포하고 있었기 때문에 중학교 올라갈 때 바쁘다는 핑계로 가지 않게 되었다. (어떤 핑계였는지는 사실 잘 기억 안 난다) 다만 내 성격을 고려할 때, 내가 납득할 수 있었다면 그 종교의 독실한 신자가 되었으리라. 그렇게 납득할 수 없어서 가지 않게 되었지만 운명은 반박할 수 있는 논리를 찾지 못하고 헤매고 있었다. 시간여행이니 타임패러독스니 그런 이야기를 들으니 더욱 헷갈리고 있었다. 그렇게 어른들을 믿지 못하고 자기자신조차 믿지 못하고 있을 때 모든 게 정해져 있다면 어떻게든 되겠지라며 자포자기하게 되었다.

 

 

그 이후 나는 세 가지로 나눠서 이야기 할 수 있겠다.

 

불신. 어른과 어른이 가르치는 교육에 대한 불신으로 내가 자각하고 있는 모든 것에 대해 반발하고 있었다. 보통 이런 반항기는 자기자신이 믿고 있는 것에 대해서는 수용하지만 나는 나조차 믿지 못했었기 때문에 세상의 모든 것을 의문시했다. 아주 당연한 것조차 한번쯤은 생각하고 넘어갔다. 그 이유는 유치한 반항심리였지만 어쨌든, 그렇게 하여 나는 당연한 것을 당연하게 여기지 않게 되었다. 물론 내가 자각하고 있는 것만. 당연하다 여기는 것을 자각하고 있지 못한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나이를 먹고 어른들을 이해했을 무렵에 반항기는 점점 사라지게 되었지만, 자기자신에 대한 불신과 당연하게 여기지 않는 이 습관만은 남아 수많은 생각을 하여 사고의 영역이 조금씩 넓어지고 있었다. 그에 따른 부작용으로 진지하다라는 말을 듣기 시작했다.

 

운명. 처음에는 어떻게든 되겠지라는 생각으로 마음이 편해졌지만 시간이 가면 갈수록 답답해져 갔다. 모든 것이 정해진 거라면 도대체 나의 의지와 행동은 무슨 의미가 있나, 왜 나는 살고 있는가, 등 어린아이의 유치한 고민은 끝도 없이 이어졌지만 도저히 답을 찾을 수가 없었다. 답을 찾기 위해 이상한 짓을 많이 해봤지만 세상의 눈만 싸늘해져 갈 뿐이었다. 답을 찾지 못해 결국 기대게 된 이 생각은 결정적으로 나의 의욕을 꺾어버렸다. 모든 것에 의욕이 생기지 않았다. 극복하려고 마음을 먹어도 이 세상에 어른이 없는 곳은 없었다. 어른을 보면 나의 무력했던 기억이 떠오르면서 주눅이 들었다. 그리고 자기불신으로 인한 자기혐오로 마음이 꺾어버렸고 자연스럽게 다시금 운명에 기대게 되었다. ‘어떻게든 되겠지라며 자포자기 한 나는 그렇게 미래를 포기하게 되었다. 어디에서나 그렇듯, 학교에서 안 좋은 의미로 튀는 아이는 표적이 되곤 한다. 그걸 알았기 때문에 적당히 남의 흉내를 내며 살았다. 그것은 편안한 일이었다. 물론 그 흉내는 제대로 된 것이 아니라 이상한 아이라는 이야기는 듣게 되었지만 어쨌든 그럭저럭 보통으로 보내게 되었다. 우리나라는 적당히 살아도 레일에 탑승해 살아갈 수 있었기 때문에 겉으로 보기에는 별다른 문제가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살아가다 종착역에 도달할 때쯤 내 주변에 있던 비슷한 나이 대 이성의 죽음을 간접적으로 알게 되었다. 죽음에 대한 공포와 삶의 대한 의미를 찾지 못해 절망한 나는 삶을 포기하게 되었다. 그 사람은 그렇게 죽는 것이 운명이었나 도대체 그 사람의 삶은 무슨 의미가 있었나, 절망에 빠져 그 이후 한동안 망가진 채 살아가게 된다. 이 당시 모든 인간관계가 끝을 맺었지만 놀라운 우연으로(그 당시엔 운명이라 생각될 정도로) 인해 생각지 못했던 장소에서 마주친 사람과 그 그룹, 딱 하나의 인간관계만 남게 되었다. 제멋대로인 나와 어울려주었었던 사람들과 다시 한번 어울려준 그들과 곁에서 지켜봐 준 가족에겐 고맙고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다.

 

가상세계. 어른에 대한 불신, 나에 대한 불신, 운명에 기대는 것 그 전부가 대등하지 못했던 사회로 인해 발생했던 것이었다. 상대를 모르기 때문에 대등했던 가상세계인 인터넷에 빠지는 것은 아주 자연스럽게 진행되었다. 이런 도피 행각으로 마음은 편해졌지만 상하관계에 따라 상대하는 방법이 다른 현실에서의 적응은 점점 어려워지고 있었다. 남을 흉내내면서 그럭저럭 살아갈 수 있었지만 무의식적으로 종종 실수를 저지르게 되었다. 어차피 남의 흉내, 제대로 될 리가 없었다. 어른을 믿지 못했었기 때문에 기댈 어른도 없었고, 나를 믿지 못했었기 때문에 자기합리화도 할 수 없었다. 운명도 더 이상 나를 편안하게 만들어 줄 수 없었다. 나의 마음의 안식처는 대등한 사람들이나 사람들을 상대하지 않아도 되는 게임, 만화, 소설 등. 그리고 가상세계인 인터넷뿐이었다. 그 중 정말 마음이 편안했던 곳은 인터넷이었다. 아무래도 흉내를 내며 살아가던 현실은 아무리 대등하더라도 마음 한편은 답답할 수 밖에 없었다. 그렇게 나는 인터넷에 더욱 빠지게 되었다. 그 결과, 현실의 상하관계와 가상의 대등함의 괴리로 인해 점점 나의 내부는 분리되고 있었다. 어느 정도 마음을 열 수 있었던 가상과 달리 현실은 호의와 적의조차 제대로 마주볼 수 없었다.

 

나는 약하고 어리석었다. 내가 당연함을 버리게 된 것은 그저 세상에 대한 유치한 반항심리에 불과했다. 그렇지만 원인이 뭐가 되었든 나는 그렇게 당연함을 버리게 되었고, 본질을 볼 수 있는 최초 기반이 마련되었다. 내 생각에 의문을 품고 내 행동에 의문을 품고 내가 배우는 것에 의문을 품었다. 내 경험에 의문을 품고 다른 사람의 경험에 의문을 품었다. 예컨대 이런 것이다. 실습 온 교생에게 왜 교사가 되려고 하세요?’ 라고 물어본다거나 말이다. 이 외에 모든 것에 의문을 품었다. 물론 그럴듯한 표현을 쓰긴 했지만 실상은 사실 많이 유치하고 어리석은 시행착오를 반복했다. 실수도 많이 하고 실패도 많이 했지만 어쨌든 그렇게 나는 당연함을 버리게 되었다.

 

 

둘째, 특별함을 버리는 것

 

주변 인물의 죽음으로 한동안 틀어박혀 망가진 채 살아가다 어쨌든 살아있으니까 살 방법을 찾아야 했다. 죽는 것도 용서할 수 없었다. 그것조차 운명으로 정해진 것이 아닐까 생각이 들자 반발하게 되었다. 죽는 것도 사는 것도 의미를 찾지 못했다. 그래도 어쨌든 살아있으니까 살아보고자 결심했다.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내가 살아갈 이유를 찾는 것이었다. ‘모든 것이 정해져 있다면 어떻게든 되겠지라고 자신을 다독이며 어떤 일이 있어도 살아만 있어보자고 마음을 먹게 된다. 운명에 반발하면서 운명에 기대는 모순적인 행동이 나타났지만, 어쨌든 사는 것에만 집중하게 되었다. 바로 생존이다.

 

몸과 마음이 망가져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과의 교류가 어려웠다. 특히 상하관계가 어려웠는데, 나보다 상대적으로 높은 사람에게 무의식적으로 대등한 친구처럼 대했다가 깜짝 놀라 자기자신의 스위치를 만들게 되었다. 일부로 말투를 딱딱하게 하여 상하관계에 적응하려고 애썼다. 그러지 않으면 다시 또 실수할 것 같았다. 아마 그 당시 주변 사람들은 나를 이상하게 생각했겠지만, 나로서는 그것이 최선이었다. 불신과 절망의 어린 시절을 경험했던 곳에서 벗어나자 조금씩 마음의 안정을 되찾기 시작했다. 천천히- 천천히- 어째서 사람들은 마음의 상처가 금방 치유 될 거라 생각하는 걸까.. 마음의 안정을 되찾기 위해 모든 것을 내려놓고 노는 것에 집중했다. 생계에 필요한 일은 최선을 다했지만 그 외엔 전부 놀았다. 생존에만 집중하고 있었기 때문에 다양한 것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고, 그것은 다른 사람들에게 이해를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조금 유치하고 치사한 방법도 사용했었다. 솔직하게 말한다는 변명아래 내 불행함을 어필하면 불쌍히 여기거나 역겨워하며 멀어져 갔다. 그렇게 해서 나는 스트레스를 주는 인간관계에서 벗어나려고 했다. 지금에야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당시에는 다른 방도를 떠올릴 수가 없었다. 그리고 다짐했다. 만약 이런 나도 받아줄 수 있는 사람이라면 진심으로 대하자고. 그래서 몇 명의 사람들에겐 어느 정도 마음을 열기도 했었다. 물론 그 이상의 관계는 진전되지 않았다. 내가 날 믿지 못하고 싫어하는데 어떻게 내게 그런 자격이 있겠는가? 그런 자신이 비참해져 술김에 엉엉 울어버린 적이 있는데, 그게 너무 부끄러워 술을 끊게 되었다. (이건 좀 나중에 일이다) 애초에 나의 의지에 간섭하던 알코올은 그다지 좋아하는 편이 아니었기 때문에 어렵지는 않았다. 어쨌든 그렇게 나는 마음의 안정을 되찾고 있었다.

 

그렇게 마음의 안정을 되찾으면서 어느 게임을 하고 있었다. 그 게임을 즐기다가 마음에 들지 않는 정책에 반발하기 위해 한 게임 커뮤니티 게시판에 글을 쓰게 되었다. 그것이 본격적으로 글을 쓰게 된 계기였다. 그 계기는 단순했지만, 한번 나의 생각을 표출하기 시작하자 강물이 범람하듯 생각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주로 나의 경험으로 나타난 생각이었다. 아무래도 제대로 된 교육을 거부하고 게임과 만화와 책을 읽으며 사고영역을 넓혀왔기 때문에 글은 조잡하기 짝이 없었다. 그래도 즐거웠다. 그리고 그렇게 쓰면서 나의 생각이 정리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당연한 것을 버리고 본질을 생각해 작성했기 때문에 조금 이상한 편이었고, 그 결과 반발을 사게 되었다. 그 당시 게임 커뮤니티 게시판은 휴대폰 인증을 하지 않으면 댓글을 달 수 없는 정책을 취하고 있었다. 아마도 악플이 많았기 때문에 그랬으리라. 이 때 나는 어리석은 선택을 하게 된다. 글은 쓸 수 있는데 댓글을 달 수 없다는 사실이 운명처럼 느껴졌다. 어처구니 없어 보이지만, 정말로 그랬다. ‘뭐 별 수 없지라며 댓글을 달지 않고 계속 써나가니 이 게시물 작성자는 댓글을 보지도 않는 게 분명하다는 사람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래서 글을 쓸 때 휴대폰 인증하지 않아 댓글을 달 수 없습니다.’ 라고 썼지만 사실상 이해를 구할 수는 없었다. 아니, 그럼 인증하면 되지 않냐고 생각할게 뻔했다. 그래서 이해를 구하는 것을 포기했다. 어떻게 운명에 대해 설명하겠는가 하하.. 그렇게 취미로 틈틈이 쓰게 되었고, 쓰게 된 원동력은 넘쳐나는 생각과 더불어 게시판 자체가 그리 수준이 높은 편이 아니었기 때문에 (한 두줄 쓰고 글이 올라오는 경우도 많았다) ‘뭐 괜찮겠지라고 생각했다. 내 대응이 어처구니 없다는 것을 알았었기 때문에 어떤 반응이라도 읽어만 주면 고맙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래서 매번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라는 인사를 했다. 처음에는 큰 의미가 없었다. 또한 왜 그런 반응이 나타나는지에 대한 의문이 생기게 되었다. 그게 촉매가 되어 나중에는 역할존중이란 생각까지 닿게 되었다. 어쨌든, 그렇게 쓰다가 부정적인 반응에 지쳐 도대체 뭐 하러 이걸 쓰는 거지’, 라며 회의감이 들었다. 그래서 애정의 뿌리편을 쓰고 그만 쓰기로 결심했다.

 

뭐 어쩔 수 없지’, 라고 자신을 다독이며 넘어 갈려다가 eSports(게임) 대회 경기에서 좋아하는 팀의 부진을 보자 뭐라도 쓰고 싶어졌다. 믿기지 않을지 모르겠지만 정말로 그냥 그 때문에 다시 쓰게 되었다. 그리고 결심했다. 아무거나 쓰자, 그리고 쪽지로 항의가 오면 미련 없이 그만두자. 정말로 게임과 관계없어 보이는 것까지 다 엮어가며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일종의 광기에 가까웠다. 소재는 아무런 걱정이 없었다. 애초에 쓰고 싶어지면 쓰기도 했지만, 다른 사람들과 조금 다르게 보면 세상의 모든 것이 소재가 되어주었다. 한 때는 새로운 생각이 담긴 책을 수 페이지 읽다가 생각하고, 수 페이지 읽다가 생각하는 것을 반복하다 집어 던지고 하루 종일 생각에 빠진 적도 있었다.

 

사실 선후가 헷갈리긴 하는데, 이쯤에서 나는 특별함을 버리게 되는 글을 쓰게 되었다. 바로 선과 악에 대해 생각하고 쓸 때였다. 선과 악의 본질을 보려고 하다 보니 내게 있던 특별함을 하나씩 벗겨내기 시작했다. 선과 악의 본질은 무엇인가? 사람은 동물이다, 그리고 생각하는 것 외엔 다른 동물들과 별차이가 없다, 문명이 없는 동물의 선은 그들의 생존과 번영이다, 동물과 사람이 별 차이가 없다면 사람의 선 또한 생존과 번영이다, 뭐 이런 식의 사고전개가 이루어졌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렇다. 내가 특별함을 버렸던 것은 사람은 동물이라는 생각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렇게 한번 특별함을 버리자 다양한 것이 눈에 띄기 시작했다. ‘, 사람이 특별한 것이 아니라 내가 사람이니까 사람이 특별한 것이구나이 생각은 모든 것에 적용할 수 있었다. ‘내가 특별한 것이 아니라 내가 나니까 특별한 것이구나’ ‘우리나라가 특별한 것이 아니라 내가 우리나라에 속해있기 때문에 특별한 것이구나등등.

 

이런 특별함을 버리는 것은 영혼의 존재도 부정할 수 있게 되었다. 그 전까지도 과학적 증명이 없어 모순이 많았던 그 존재는 자신의 특별함을 버리게 되자 확실하게 부정할 수 있게 되었다. 사람과 동물이 지구의 입장에선 아무런 차이가 없고, 과거의 고대 생명체들과도 아무런 차이가 없었다면 그 모든 것에 영혼이 존재했어야 했다. 그러나 종교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사람만을 특별하게(또는 현시대의 동물) 여기는 종교의 가르침은 특별함을 버린 내겐 큰 의미가 없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그 존재를 믿고 있었고, 굳이 번거롭게 그것을 부정할 필요는 없었다. 더구나 나는 게임과 만화와 소설 등의 이야기를 몹시 좋아하고 있었다. 그런 이야기 속에서 영혼의 존재는 종종 필수불가결했다. 그러니 부정할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거기에 무의식편을 쓰기 전까지의 나는 운명에 기대어 살아가고 있었기 때문에, 의욕이 없었던 내겐 영혼의 존재는 있든 말든 아무래도 좋았다. 그러나 본질을 보기 위해서는 영혼의 존재가 없다는 전제하에 생각해야만 했다. 그것은 현실에서 과학적 증명이 된 적 없기 때문이었다. (내가 아는 한은 없었다)

 

그렇게 특별함을 버리자 다양한 것을 다시 보게 되었고, 나의 사고의 영역은 좀 더 넓어지게 되었다. 그 이후 나의 생각은 좀 더 가속화되기 시작했다. 나의 글이 반응을 이끌어내기 시작했다. 그러자 걱정이 들기 시작했다. 현실의 나는 가진 게 없었다. 그렇다면 나의 글은 현실의 나 때문에 격하될 것이 분명했다. 본질을 보려 애쓰던 내가 그런 것을 모를 리가 없었다. 그래서 아예 반응을 신경 쓰지 않는 것으로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하며 글을 쓰기 시작했다. 스스로를 투명하게. 당시에는 그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 때쯤에 읽어만 주면 고맙다는 의미가 현재의 의미를 띠게 되었다. 읽고 스스로 생각만 할 수 있다면 그거로 만족하겠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물론 이런 것은 어디까지나 가상의 이야기였다. 그 당시까지도 나는 나를 믿지 못하고 좋아할 수가 없었다. 현실에선 호의도 적의도 마주볼 수 없었다. 다시 한번 운명에 기대었기 때문에 운명의 존재여부를 반박하기 위해 이상한 짓도 많이 하게 되었다. 수많은 생각은 더 많은 내적 갈등과 혼란을 가져다 주었고, 더더욱 현실을 외면하게 되었다.

 

 

셋째, 현상을 받아드리는 것

 

아무거나 쓰던 나의 마지막은 갑작스럽게 찾아왔다. 드디어 게임 커뮤니티 운영자의 경고 쪽지를 받게 되었다. 거기에 현실에서의 생활 또한 변화하기 시작했다. 마침 현실과 가상이 둘 다 끝을 맺어야 할 타이밍이 오자 운명처럼 느껴지게 되었다. 아무런 태도를 취하지 않았던 것은 그것이 운명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아무런 의욕이 생기지 않았다.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물론 어리석은 생각이었지만 당시엔 어쩔 수가 없었다. 그것은 나의 트라우마나 마찬가지였다. 당시를 후회하는 것은 제대로 된 인사를 못했다는 것, 그리고 그냥 떠나버린 것에 대한 사과도 제대로 못했다는 것, 그렇기 때문에 마주볼 면목도 없다는 점이었다. 그런 행동은 날 지켜봐 준 사람들에게 예가 아니었다. 지금도 어떻게 마주봐야 할지 모르겠다. 슬프게도.

 

그렇게 평범했던 생활을 마치고 제멋대로 살기 시작했다. 이것도 운명이겠거니 생각하며 자포자기를 했다. 그러다 불현듯 인공지능에 대해 쓰고 싶어졌고(어디에 영향을 받았는지는 나도 잘 기억이 안 난다.) ‘인공지능편을 쓰고 나서 자아에 대해 알아보다가 자유의지에 관한 Libet의 실험을 다룬 한 영상을 접하고 나서 내 삶을 지배해왔던 운명과 나의 대한 불신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당시엔 미치는지 알았다.

 

처음엔 별로 심각하게 받아드린 것은 아니었다. 그저 재미있다고만 생각했다. 사람의 의식적 의도조차 무의식적인 뇌활동으로 일어난다는 그 생각은 놀라웠고 신기했다. 새로운 정보를 접한 나는 자연스럽게 생각을 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사고의 흐름은 다음과 같다. 실험이 맞는다고 가정한다. 그런데 아직 그 실험에 대해 명확하게 나온 답은 없다고 한다. 그렇다면 내가 생각해봐도 괜찮을 것이다. (물론 답이 있다고 해도 생각했을 것이다) , 그럼 답은 무엇인가?

 

영상에선 버튼으로 비유를 했었는데, 그걸 보니 내가 얼마나 많은 버튼을 눌러 왔었는가를 생각하게 되었다. 무의식과 의식, 자유의지 등 생각해왔던 것들이 퍼즐이 맞춰지듯 하나의 답으로 이어졌고, 그 결과를 떠올릴 수 있었다. ‘사람의 뇌는 사람이 의식적 의도를 행하기 전에 무의식적으로 몸에서 요구하는 욕구와 오감으로 수집하는 정보와 뇌에 저장된 패턴을 가지고 자동적으로 계산하여 사람의 의도를 예측하며, 그 예측(갑자기 떠오르는 발상이나 잡념, 충동 등)에 그것에 기대면 무의식적 뇌활동에 의해 움직이게 되어있다라는 발상까지 도달했다. 당연함을 버렸기 때문에 나의 행동을 내 의지가 결정한다는 생각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물론 과거의 경험이 크게 도움이 되었다) 특별함을 버렸기 때문에 나 말고 다른 사람들도 그럴 것이라는 생각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것이 맞는지 아닌지는 나도 잘 모른다. 다만 나는 내가 맞는다고 생각하고 있으며, 무엇보다 내가 그것을 받아드렸다. 그 당시 어른에게 아무런 말대꾸조차 못했던 것에 대한 이유를 아는 것으로 스스로를 이해하여 자기자신을 용서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로 인해 기대게 되었던 운명 또한 사람의 삶을 이해하니 그것은 자기본위적 해석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렇게 나는 운명과 불신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었다.

 

그리고 현상을 받아드리게 되었다. 사람의 행동원리를 알 수 있게 되자 사고의 영역이 크게 확장되어 이 세상 모든 현상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볼 수 있게 되었다. 나는 그 전까지는 뒷담화를 싫어해서 그걸 마주보지 않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을 흉내 내며 거짓된 삶을 살아왔던 나는 거짓을 싫어하고 있었고, 뒷담화는 그런 거짓을 만들어내는 원흉 중 하나로 받아드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을 마주보고 현상을 받아드렸더니 그 필요성을 깨달을 수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그런 뒷담화를 하는 것이라면, 그 현상에 대한 이유는 반드시 있었다. 그 외에도 이 세상 모든 현상에 대한 이유를 찾게 되었다.

 

그 동안 거부했던 많은 현상들을 살펴보고 그 이유를 찾기 시작했다. 사람의 바른 부분과 바르지 못한 부분들을 전부 받아드리게 되었다. 현상이 있다는 것은 그에 대한 마땅한 이유가 존재한다는 것이었다. 어렴풋이 생각했던 다양한 것들이 현상을 받아드리면서 구체적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현상을 받아드릴수록 나의 사고영역은 점점 더 넓어지고 있다고 느끼고 있었다. 물론 그 뿐이었다. 그런다고 해서 내 삶이 딱히 나아지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비참했다. 아파서 끙끙대느라 한파 때 수도꼭지를 약하게 열어 물을 조금씩 흘려 내린다는 것을 깜빡 잊는 적이 있었다. 그 바람에 보일러가 꽁꽁 얼기도 했다. 한겨울에 보일러를 쓸 수 없다는 것은 굉장히 힘든 일이었지만, 무엇보다 고장에 대한 걱정 때문에 마음이 몹시 심란했었다. 다행히 고장은 아니었다.

 

운명과 불신에서 벗어나자 미래를 생각하게 되었다. 도대체 나는 뭘 하고 살아야 한단 말인가.. 내가 할 줄 아는 것은 얼마 없는데.. 그리고 지식에 대한 욕구도 생겨나기 시작했다. eBook에서 책을 구매해 평소 읽지 않았던 다양한 것을 읽기 시작했다. 어려웠지만 재미있었다. 동시에 과거에 대한 후회도 했지만 당시에는 별 수 없었다며 자신을 다독일 수 밖에 없었다. 쓰면서 생각하는 건데 진짜 어쩌지.. 이럴 때가 아니긴 한데.. 글로 먹고 살고 싶긴 하지만 가능할까.. 그게 안 된다면 뭘 해야 하는 걸까.. 뭘 할 수 있는 걸까.. 그런 생각이 드는 현재까지. 지금까지가 나의 경험을 토대로 한 본질을 보는 방법이다. (나에 대한 이야기는 본질을 보는 법에 중점을 두었기 때문에 빠진 부분이 많아 이해가 안 되는 구간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점을 감안해주길 바라겠다)

 

 

나는 불신으로 인한 반항으로 당연함을 버렸고, 글을 쓰면서 필요로 의해 특별함을 버렸고, 사람의 행동원리를 알게 되자 현상을 받아드리게 되었다. 그렇게 해서 세상의 본질을 보려고 하고 있다. 이런 것이 여러분들에게 얼마나 도움이 될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이런 시각으로 글을 써왔고, 앞으로도 그렇게 쓸 예정이며, 이후 또 다른 방법이 나타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니 그 동안 써왔던 내 글이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다면, 나의 방법도 도움이 되리라 생각한다. 아니, 되었으면 좋겠다. 긴 글 읽어줘서 고맙고, 지금까지 지켜봐 준 사람과 앞으로 지켜봐 줄 사람이 있다면 그에 대한 감정, 잊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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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04 06일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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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 0. 시작 (0) 2018/04/01 PM 09:18

0. 시작

   

제가 그 동안 쓴 글에 사용되었던 소재들이나 앞으로 쓸 글에 사용될 소재들을 정리해보려고 해요. 굳이 오늘 이렇게 쓰겠다고 하는 것은 앞으로의 의지표명이에요. 

 

우선 적어도 주에 하나씩은 쓸 예정이에요. 쓸 소재는 본질, 언어 기원, 선악, 역할존중 등 쓰고 싶은 소재에 대해서 쓸려고 해요. 지금까진 주제에 맞춰 생각해둔 소재를 글에 넣었어요. 그러다 보니 소재에 대한 설명이 부족하거나 정리가 덜 되곤 했지요. 그런 것을 명확하게 정리해두면 앞으로 글을 쓸 때 좀 더 편리할 것 같아 써두려고 해요. 

 

앞으로 글은 바둑의 미래, 인공생명, 욕망의 한계 등 순서대로 작성할 예정으로 적어도 달에 하나씩은 쓸 예정이에요. 소재는 꽤 많이 쌓여있어서 쓰는 데는 별 문제가 없을 것 같아요.

 

지금까진 자기자신을 믿지 못하고 싫어했던 터라 자존감이 낮아 자신을 가질 수 없었어요. 그 때문에 호의도 적의도 제대로 마주볼 수 없었지요. 이제는 마주보려고 합니다. 앞날이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앞으로 걸어보려고 합니다. 거짓이 거짓이 아니게 되길 바라며, 또 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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