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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감] [소감] 배틀그라운드 (4) 2018/01/02 AM 12:37

[소감] 배틀그라운드

 

2018 1 1일 기준 약 6시간

 

0. 가치

 

많은 사람 수는 그만한 가치를 보증한다. 설령 나쁘더라도 가치에는 크게 영향을 주지 못한다. 그것은 옳고 그름의 영역이다. 건전한 여가인 게임도 마찬가지다. 예컨대 PC방 점유율 1위를 달성했던 게임이라면 그만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봐도 된다. 그런 게임에서 유저 수가 줄어두는 것은 대체로 게임 자체의 문제는 아니다. 공정하지 않는 핵을 방치하는 운영이나 공정하지 않은 밸런스 실패가 주 원인이었다.

 

그런 원인들은 게임자체를 나쁘게 만들지 않는다. 나쁜 것이 아니라, 재미가 없어진다. 그 원인들로 인해 재미가 없어진 게임은 가치가 낮아져 유저들에게 외면을 받는다. 그것은 당연한 순리다.

 

그런 논리로 현재 PC방 점유율 1위를 달성하고 있는 배틀그라운드의 게임성에는 크게 이의를 제기하지 못한다. 몇 가지 단점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상회하는 장점이 현재의 인기를 나타내고 있다. 배틀그라운드는 현재 잘 하고 있다. 그러니 나의 의견은 참고만 하길 바란다. 한 명의 의견보단 다수의 의견을 경청하고, 다수의 의견보단 모두의 의견을 고려하길 바라겠다. 의사를 나타내는 사람들은 전체 유저 수에 비하면 소수라는 점을 잊지 않기를 바란다. 그들 말만 들으면 나머지는 소외된다. 그것은 이미 여러 차례 다양한 곳에서 증명되었다. 의사를 나타내는 그들을 포함한 전부를 고려하여 스스로 생각해 최선의 선택으로 그 앞을 개척해 나가길 바라겠다.

 

 

 

1. 무게

 

배틀그라운드의 큰 장점은 빠르고 쉽게 접근이 가능하다는 점이다. 경쟁게임들과는 다르게 수틀리면 그냥 나가면 된다. 아무런 민폐도, 아무런 패널티도 없다. 자유롭게 하고 싶으면 하고 하기 싫으면 안 하면 된다.

 

그런 점은 많은 유저들에게 큰 장점으로 다가가지만, 한편으로는 무게에 대해 지적하지 않을 수가 없다. 한마디로 가볍다. 대체로 애정은 들인 시간에 따라 달라지는 법이다. 투자한 자원(시간, 돈 등)이 많아질수록 그것에 애정이 생기기 마련이다. 한 판, 한 판에 대해 투자한 자원이 적다 보니 그에 따른 애정도 적다. 거기에 어려운 것을 견디며 넘어설 때 생기는 성취감도 없다. 그냥 나가면 되니까. 매번 1위를 노리며 어려운 상황에서 애를 쓰며 성취감을 얻는 유저도 있을지 모르겠지만 소수보다는 다수, 다수보다는 모두를 고려해야 한다. 모두를 고려한다면 쉽게 접근하고 쉽게 나갈 수 있는 시스템은 가벼울 수밖에 없다.

 

물론 의도한 상황일지도 모른다. 대책도 마련되어있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쓴다.

 

이런 흥미롭고 재미있지만 가벼운 풍선 같은 게임은 지면에 붙들어 놓을 요소들이 필요하다. 다른 게임들을 예로 들자면 챔피언이나 영웅 같은 것이 있을 것이다. 그 캐릭터에 애정을 쏟게 되면 게임이 다소 재미없어지는 시기가 오더라도 계속 하게 되는 경우가 생기곤 한다.

 

그렇지만 배틀그라운드는 그것이 없다. 캐릭터가 아니라 아바타다. 온전하게 스포츠만 고려해서 나온 것 같은 느낌이다. 뭐 그것은 그것대로 좋다. 스포츠화가 제대로 된다면 그것과 연계하여 오랫동안 지면에 붙어있을 수 있다. 그러나 게임만 즐기는 사람들에게는 풍선에 무게를 더할 요소라고는 볼 수 없다. 그들의 입장에서 지금의 배틀그라운드는 오로지 플레이함으로서 얻는 재미만을 가지고 지면에 붙어있다. 그 재미가 떨어질 때, 풍선은 저 하늘너머로 날라가 잊혀지는 날이 올 것이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챔피언이나 영웅을 만들라는 이야기는 아니다. 유저들을 붙들어놓을 다른 요소들을 강구하라는 이야기다. 예를 들어 자신이 원하는 닉네임을 만들 때 애정을 쏟게 되기도 한다. 그래서 종종 게임 오픈 때 닉네임 거래가 성행하기도 한다. 그 때문인지는 모르겠는데 블리자드는 배틀태그를 도입해 자기가 원하는 닉네임을 사용하도록 하였다. 배틀그라운드의 특성상 직관적으로 한번에 알기 위해 유니크한 닉네임이 필요하다면 어쩔 수 없지만, 이런 식으로 사소한 것이라도 애정을 쏟을 만한 요소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몇 가지 떠오르는 걸 이야기해보도록 하겠다.

 

첫째,

 

캐릭터가 없다면 맵 자체에 애정을 가지게 만들면 어떨까? 이를테면 배틀그라운드 맵을 비슷하게 흉내 낸 (너무 넓긴 하지만) 장소를 현실에 꾸며 서바이벌 게임을 즐길 수 있는 공원을 만들어 보는 것이다. 일명 배틀그라운드파크. 돈 좀 들 거 같긴 한데, 그만큼의 영향력은 행사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다치면 위험하니까 과학화 훈련처럼 마일즈 장비를 도입한다면 괜찮아 보인다. 만약 이 게임이 세계적으로 오랫동안 인기를 끌게 된다면 그에 관련된 관광상품으로 쓸모 있을지도 모른다.

 

 

둘째, 이야기

 

언젠가 본 거 같은 기억이 나는데, 배틀그라운드 관련 모바일 게임이 출시된다고 하는 것 같다. 뭐 어떻게 출시 될지는 모르겠지만 조금 당연한 이야기를 하겠다. 별 거 아닌 것 같은 물건이라도 그것에 사연이 붙으면 가치가 치솟는다. 그것이 이야기의 가치다. 그런 이야기를 하나 만들어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그것도 그냥 만드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데이터를 근거로 하여 만드는 것이다. 모든 유저들이 플레이하며 남긴 그 흔적을 사용한다면, 그 흔적을 남긴 사람들은 신경이 쓰이게 되어 있다. 나도 그 흔적에 참여했었지, 라는 식으로. 유저들이 가장 많이 사용하는 총기(혹은 인기 있는 총기) 순서로 등장인물들이 사용하는 총기를 설정하고, 사건 또한 유저들이 가장 많이 낙하한 곳, 가장 많이 전투한 곳 등등, 그런 식으로 데이터를 사용한다면 괜찮지 않을까 인기투표를 해도 괜찮을 것이다.

 

 

셋째, 명품

 

한마디로 싸게 굴지 말라는 이야기다. 관련 상품도 적게 찍어내더라도 가치 있는 것으로, 관련 모바일 게임도 재미없어 보이면 만들지 않는 것이 이로울 것이다. 재미없는 관련 게임은 배틀그라운드라는 브랜드 가치를 훼손한다. 명품이라는 것을 떠올릴 때 의류나 가방 같은 것을 떠올리고는 하지만 명품은 모든 것에 해당될 수 있다. 그리고 그런 명품은 가지고 있기만 해도 자신의 가치가 올라가는 것처럼(적어도 그 스스로는 그렇게 느낀다. 그렇지 않으면 사지 않는다), 플레이 하기만 해도 그 유저의 가치가 올라갈 수 있다. 그렇게 만들라는 것이다.

 

캐릭터가 애정이 없더라도, 게임 자체가 브랜드 가치가 높아져 그 자체에 애정을 쏟게 만든다면 충분히 무거워질 수 있다. 운영 또한 가치 있는 운영을, 업데이트도 가치 있는 업데이트를, 충분히 시간을 들여 누구도 반박할 수 없는 그런 운영과 업데이트를 하면 된다.

 

배틀그라운드라는 것이 붙은 모든 것을 가치가 있는 것으로 포장하는 것, 그것이 브랜드 마케팅의 일종이라 생각한다.

 

 

뭐 이건 그냥 내 개인적인 생각이고, 객관적으로 흥미롭고 재미있는 게임에 애정을 가지게 만들 수 있는 수단이라면 뭐든지 생각하길 권한다.

 

사실 놀이터로 비유해서 좀 더 써보려고 했는데 그냥 여기까지.

 

 

 

2. 하다

 

, 버그, 약간 부족한 최적화, 액션의 어색함 등 개인취향 또는 이미 알고 있는 상황에 대해서는 따로 지적하지 않겠다. 뭐 그건 알아서 하겠지.

 

그렇지만 사실 이 외에는 따로 지적할 것이 없을 정도로 우수하다. 그러니까 인기가 높다. 심플한 목표, 쉽게 이해할 수 있는 플레이 방식, 가볍지만 편하게 접했다가 떠날 수 있는 시스템, 늦은 시각에도 많은 사람들이 같이할 수 있는 무수한 유저 수 등 이 게임은 우수하다. 그러나 지적할 것이 없는 것은 아니다. 정보가 아직 완전한 것은 아니어서 많이 떠오르진 않지만 조금 불편했던 것 몇 가지를 이야기해본다.

 

 

첫째, 팀플레이

 

팀플레이 시 사망할 때 보는 것 외에는 할 것이 아예 없다는 점. 보면서 팀원을 도와줄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다. 사망한 사람들끼리 2차전 (경기에는 아무런 영향이 없는, 그러니까 서로 보고 듣지도 못하게) 해보는 것도 재미있을지도 모른다. 총 쏘는 연습도 할 수 있을 테고 말이다.

 

 

둘째, 피격

 

좋은 헤드셋과 안좋은 헤드셋의 차이가 너무 컸다. 의도한 사항이라면 넘어가도 좋다. 만약 그러지 않는다면 잠깐만 읽어주길 바란다.

 

피격지점을 시각적으로 인식할 수 있는 형태를 하나 만드는 것이다. 사람모양의 아바타를 입체적으로 작게 만들어서 피격된 위치를 표시할 수 있게 만들어 어느 방향에서 쏜 것인지 추측할 수 있게끔 하는 것이다. 이것은 현실적으로도 충분히 그럴 듯 한 게, 현실에서 총맞으면 적어도 어디에 맞은 지는 알 것 아닌가? 피격 지점을 시각화하여 볼 수 있게 만들면 좋은 헤드셋과 아닌 헤드셋의 차이를 줄여 보다 더 공정한 게임이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셋째, 단축키

 

붕대 단축키가 있는지 없는지는 모르겠는데, 매번 가방을 열어서 붕대를 꺼내 치료하는 것은 불편했다. 실제 현실에서도 빠르게 치료할 수 있게 가방이 아닌 옷에 보관하는 형태가 있을 수 있지 않겠는가? 하나는 단축키화 하여 빠르게 치료할 수 있는 수단 정도 있어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당장 떠오르는 것은 여기까지 좀 더 해봐야 할 것 같다.

 

 

 

3. 보다

 

실제 경기를 봐본 적이 없어 따로 평가할 수는 없다. 다만 지금까지 FPS 경기를 생각해보면 보는 사람만 보게 되는 스포츠가 될 확률이 높다. 물론 그것도 꽤 많은 수를 차지할 테지만 그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는 이상, 한정된 자원(FPS 경기를 좋아하는 사람)의 쟁탈전이 벌어질 것이다.

 

 

프로경기는 아니었지만 개인 방송국에서 잘하는 사람의 플레이를 본 적이 있는데, 멀리서 쏴서 1등하는 모습이었다. 그 모습만 보고 안 봐서 뭐라 하기는 어렵지만, 원래 FPS 특성상 장거리 공격이 매우 유리하므로 장거리에서 싸우다 끝나는 경우도 많을 것이다. 탄도학이 적용되었지만 잘하는 사람에게는 크게 관계 없을지 않을까 생각이 든다. 그것까지 계산하는 사람도 있을 테니까 말이다.

 

그리고 프로급이 된다면 대게 다들 그 정도는 계산할 수 있는 사람들일 것이다. 그렇다면 필연적으로 장거리 공격으로 경기가 마무리 될 확률이 높다. 보는 사람 입장에서 명확하지가 않다는 것이다. 모든 스포츠는 직관적인 이미지가 중요하다. 누가 봐도, 한눈에, 명확하게, 경기 흐름이 바로 볼 수 있는 스포츠가 되어야 대중을 사로잡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대체로 인기 있는 대중 스포츠는 다 그런 요소를 가지고 있다. 야구나 축구가 얼마나 직관적인가, 게임만 봐도 그렇다. 스타크래프트나 리그오브레전드가 얼마나 직관적인가. 스타크래프트는 한눈에 봐도 땅 따먹기 식으로 볼 수 있어 어느 세력이 더 많은 영역을 차지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리그오브레전드도 킬 수, 타워 수, 골드 차이 등으로 어느 팀이 더 유리한지를 알 수 있다.

 

그러나 배틀그라운드는 한번 죽으면 끝이기 때문에 그런 구체적인 수치를 알기도 어렵다. 그 긴장감은 플레이하는 입장에선 쉽게 와 닿지만 스포츠의 입장에선 조금 어려운 게 아닐까 걱정이 든다.

 

요컨대 종래의 시스템으로는 이 게임을 흥행시키기 어려운 게 아닐까? 지금까지의 대중 스포츠는 시청자가 보기보다는 카메라나 옵저버가 보여주는 장면을 볼 수 밖에 없다. 그리고 또 그것을 위주로 설명하게 되어 있다. 다른 스포츠는 그걸로 충분하다. 한눈에 다 볼 수 있으니까. 그러나 이 게임은 그게 힘들다. 그렇다면 발상을 바꾸어 시청자가 보고 싶은 팀을 볼 수 있게 선택하게 만들면 어떨까?

 

경기가 어떻게 진행이 되는지 자세한 것은 모르겠지만 팀으로 진행을 한다면 팀 별로 옵저버를 두는 것이다. 그리고 옵저버 마다 해설도 하나씩 붙이는 것이다. 팀 전용 옵저버에 전용 해설이다. 시청자는 그 옵저버와 해설을 시작시점에 선택해서 같이 보게 된다. 그 팀이 전멸하면 그 때 옵저버와 해설도 끝이다. 물론 시청자는 갈아탈 수 있다.

 

그런 식으로 체험몰입형 시청이 가능해진다면 전체의 흐름을 한 눈에 볼 수 없다고 하더라도 충분하게 즐길 수 있는 형태를 갖출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또한 팀 전용 해설 같이 되어버리면 왠지 매니저 같은 느낌이 되지 않을까? 중립적으로 해설하지 않아도 된다. 그 팀 위주로 흥미롭고 자유롭게 해설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는 것이다. TV방송할 때를 위해 전체적인 옵저버와 해설도 있어야 되겠지만, 인터넷으로 볼 때엔 선택해서 볼 수 있게끔 한다면 나는 재미있게 볼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그것에서 개성도 생겨나고, 해설마다의 캐릭터가 생겨나 팀과 해설이 한꺼번에 묶여서 홍보할 수 있는 스타가 탄생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갑자기 쓰다가 뉴스 앵커와 지역 기자가 떠올랐다. 메인 해설이 뉴스 앵커이고 팀 해설과 옵저버가 지역 기자. 메인 해설이 1팀 나와주세요, 라고 말하면 1팀 해설이 나와서 현재 팀 상황을 설명한다. 메인 해설은 그렇게 각 팀들의 해설을 듣고 종합하여 전체 경기의 흐름을 파악하여 시청자들에게 설명한다. 그러면 구색이 맞지 않을까? 아하하, 나는 재미있을 것 같다. 그리고 내 개인적으로는 그렇게 어렵지도 않을 것 같다.

 

물론 그건 내 생각이고, 실제로는 조금 어려울지도 모르겠다. 새로운 시도는 언제나 반발을 부르는 법. 거기에 해설 수가 그렇게 늘면 감당할 수 있을까 걱정도 되고.

 

하지만 이런 혁신적인 형태의 변화가 없다면 아마도, 종래의 FPS 경기와 별 다를 바 없이 시작되고, 별 다를 바 없이 끝날 것이다.

 

 

 

즉흥적으로 써서 부족한 부분이 많을 것이다. 추후 좀 더 플레이 해보고, 그리고 경기를 보고 언젠가 업데이트를 해보도록 하겠다.

 

--

    경험에 따라 소감이 바뀔 수 있으므로 플레이타임을 적어놓습니다.

 

예전부터 써봐야지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어쩐지 의욕이 생기지 않아서 쓰지 않았습니다. 누구도 신경 쓰지 않을 테지만.. , 예전에 쓰던 게 있으니까요. 그래도 한번 써보고 싶어졌네요. 그래서 이런 형태라도 써봅니다. 다른 게임도 쓰고 싶어지면 쓸지도 모르겠네요.

 

아무튼 써보기 전에 플레이를 해봤어요. 나름 자신이 있었는데 엉망진창 못했네요. 그래도 뭐 그 정도만 해도 쓸 수 있는 정보는 충분히 모을 수 있습니다. 좀 더 해보면 생각이 바뀔 수는 있겠지만요. 그건 그때에 생각하기로 하고 써보았습니다. 첫 소감, 중간 정도의 소감, 오랫동안 즐긴 뒤의 소감. 아마도 다 다를 겁니다.

 

쓰던 잡답은 쓰던 카테고리에서 이어서 씁니다.

 

올해엔 여러분들의 삶이 좀 더 즐거우면서 흥미롭길 바랍니다. 부디 자기 생각으로 스스로 서서 세상을 바라보는 사람들이 많아졌으면 좋겠어요. 그럼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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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위군    친구신청

참고로 붕대 및 기타 소모품들 전부 단축키 지정 가능합니다.

THE_NErD    친구신청

이야기에 대한 내용과 뉴스 앵커 아이디어는 참신하네요. 마치 전쟁의 현장감을 담아내는 종군기자처럼 옵저버가 실감나게 전달해주면 재미질 듯.
그러면서 이야깃거리가 만들어 질테구요. ㅎㅎ

루리웹-2672327379    친구신청

피격 방향은 의도한거겠죠.
거의 모든 FPS 가 피격방향을 화살표같은걸로 표시하는 시스템이 있죠. 시스템적으로 어려운것도 아니구요.
근데 일부러 뺀건 좀더 긴장감이나 고수와 하수의 차이를 줄일수 있어서 그런거 같네요.

강철의기사    친구신청

9번이붕대...
[글] 너의 미래, 무의식은 알고 있다 (0) 2017/12/16 PM 04:10

너의 미래, 무의식은 알고 있다

 

 

0. 운명

 

오랫동안 운명을 생각했다. 콧물이 흘러나와 훌쩍이던 시절부터 시작된 의문 하나, ‘이 세상 모든 것이 이미 정해진 것이라면 뭘 해도 바뀌는 것이 없는 걸까?’ 그래서 이상한 짓을 해봤다. 그 때문에 세상의 눈은 싸늘해져도 내겐 바뀌는 것이 없는 것 같았다. ‘그 행동조차 이미 정해진 것이 아닐까?’ , 모든 것이 의미가 없었다.

 

그 생각은 모든 의지를 앗아가는 무력감을 만들어주었다. 이 모든 것이 정해진 것이라면, 미래를 생각할 필요가 없었다. 미래를 포기한 내 삶은 그렇게 의미를 잃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굉장히편안했다. 괴롭고 힘든 시절 기댈 곳이 없는 내게 버팀목이 되어주었다. 어리고 연약한 마음이 조금씩 조각나 흩어지는 것을 꿰매주는 실이 되어주었다. 그것이 있었기 때문에 내 마음은 형태를 갖춰 성장할 수 있었다. 그 대신에 언제나 마음은 답답했다.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이란 이름의 감옥에 갇혀 자유를 갈구하게 되었다. 자유, 자유, 그리고 또 자유.

 

벗어날 수가 없었다. 정해진 삶이라는 편안함에 기대는 것은 둘째치고, 반박할 수 있는 논리를 찾을 수가 없었다. 운명을 다룬 수많은 이야기들, 읽어도 보아도 들어도 바뀌는 것은 없었다. 운명이란 감옥의 열쇠를 찾기 위해 얼마나 많은 생각을 해왔던 걸까. 그것은 시간이 흘러 흘러 현재에 이르러도 마찬가지였다. 얼마 전까지는 말이다.

 

그래, 얼마 전까지다. 인공지능 편을 쓰고 나서 자아에 대해 좀 더 알아보고자 이것저것 검색해봤다. 그 때 본 영상 속에 소개 된 하나의 실험은 나의 운명을 박살내버렸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내 마음을 이어주던 실이 사라져 다시금 조각나는 것을 느꼈다. 천천히천천히억지로 이어놓았던 마음 사이에서 새어 나오는 기억들. 실수, 실패, 민폐, 어리석음, 어리광, 유치함, 한심함, 불쌍함, ! 정말이지 상쾌할 정도로 비참했다. 구역질이 나온다거나 하는 식의 극적인 반응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식은땀이 나고 심장박동수가 빨라지는 걸 느꼈다. 시간이 갈수록 기억에 짓눌리는 감각이 괴로웠지만, 드디어 나는 나의 첫 번째 실수를(상징적인 의미) 찾아냈다.

 

이번에는 그 이야기를 해보고자 한다. 부디 여러분들의 삶에 의미가 있기를.

 

 

 

1. 자유의지

 

무의식. 사실 잘 모르는 영역이었다. 별로 관심이 있던 것도 아니었다. 실질적으로 나를 움직인다고 생각했던 의식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하지만 한 영상에서 소개된 하나의 실험은 무의식에 대해 생각하게 만들었다.

 

자유의지는 있는가?

 

Libet팀은 의식적 의도와 뇌 활동간의 관련성을 알아보았다. 이 연구는 두피에 여러 개의 전극을 붙여서 그 전기적 활동을 기록하는 뇌전도 기법으로 얻은 준비전위(자발적 움직임 전의 뇌의 운동피질 활동을 측정한 값)로 시작되었다고 한다.

 

그들은 준비전위, 6명의 피험자, 오실로스코프라는 시계판을 가지고 연구를 시작했다. 이 시계판은 밝은 광점이 2.56초동안 시계바늘처럼 한 바퀴 도는데, 피험자는 그것을 보고 손가락을 움직임과 동시에 자신이 반응하고 싶었던 시간이 언제였는지를 체크한다. 10초 방향이나 20초 방향이나 그렇게 말이다.

 

그렇게 체크한 시간과 준비전위 시간과 실제로 움직인 시간과의 관계성을 관찰했다. 그 결과는 놀라웠다.

 

일반적으로 생각하면 (1)체크한 시간(의식적 의도) 이후 (2)준비전위(움직임 전의 뇌 활동) 나타나고, 그 이후에 (3)실제로 움직인다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결과는 달랐다. 피험자들이 체크한 시간 이전에 준비전위가 나타난 것이다.

 

준비전위1(계획) -> (2)준비전위2(의도 전) -> (1)체크한 시간(의도) -> (3)실제 움직임

 

정리하자면, 우리가 의식적으로 움직이겠다고 생각하기 이전에, 뇌는 움직이겠다고 결정을 내린 것이다. Libet 팀은 우리의 행동은 물론이고 그 행동을 하겠다는 의식적 의도도 무의식적 뇌 활동으로 비롯된 것이다, 라고 해석하였다.

 

그러니 우리의 자유의지는 그저 뇌 활동의 부산물이다, 라고 그들은 그렇게 주장하였다.

 

 

그러나 거부권에 대한 의심, 시계를 바꿨을 때 결과가 달라지는 점, 내성보고의 신뢰도, 준비전위2가 필요조건인가에 대한 물음 등(이하 자세한 내용은 맨 밑단 논문 참조) 이 연구는 반박할 여지를 많이 남겨두었다. 때문에 이 연구만을 가지고 자유의지의 존재여부를 결정짓는 것은 이르다, 라고 결론을 내린다고 한다.

 

 

새로운 정보를 받아드리는 순간, 여느 때처럼 자연스럽게 생각하고 있었다. 감각적으로 느낀다. ‘(의식)’는 모르는데, ‘(무의식)’는 알고 있다. 무언가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으면 왜 그런가에 대해 스스로에게 묻는다. 그러다 보면 나름대로의 답이 나오곤 했다.

 

결론부터 이야기하겠다. 나는 자유의지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Libet 팀의 연구도 맞는다고 생각한다. 자유의지가 있다고 생각하면서 자유의지를 부정하는 연구를 긍정한다는 게 이상하겠지만, 해석을 달리하면 둘 다 맞을 수도 있는 법이다.

 

앞서 소개했던 연구결과가 맞는다고 가정해보았다. 그리고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럴듯한 답이 나왔다.

 

사람은 살면서 손가락을 몇 번 움직이게 되는 걸까? 천 번? 만 번? 십만 번? 아마 셀 수도 없이 많이 움직일 것이다. 그 패턴을 뇌는 기억하고 있다. 조건은 피험자가 마음에 드는 시간에 손가락을 움직이는 것이었다. 피험자가 좋아하는 시간도 뇌는 기억하고 있다. 뇌는 어떻게(손가락), 언제(시간)가 저장된 패턴과 새로 들어오는 정보(마음에 드는 시간에 움직일 것)을 계산하고 예측한다. 그 예측이 사람에겐 가장 편하고 자연스러운 것으로, 그것을 갑작스럽게 거부하지 않는다면 사람은 뇌의 예측대로 움직이게 되어있다.

 

 

Libet 팀은 거부권에 대해서도 연구하였다. (2)체크한 시간과 (3)실제 움직임 사이에는 약 0.1초에서 0.2초가량의 시간이 존재하는데, 그 사이에 거부할 수 있다고 했다. Libet 팀은 피험자들에게 (2)를 한 뒤 (3)을 하기 전, 0.1초에서 0.2초 사이에 (2)를 취소하여 거부하라고 했다. 그러자 놀랍게도 약 0.15초에서 0.25초 사이에 뇌파의 변형이 일어났다고 보고하였다. 이를 근거로 해서 Libet팀은 사람의 거부마저도 무의식적 활동으로 시작된다고 주장하였다.

 

참고한 논문에 따르면, 이렇게 짧은 시간에 반응하는 게 가능하냐며 의심스럽다고 한다. 그리고 Libet 팀이 이 의심스러운 거부권에 대해 재검증 하려는 시도를 찾아볼 수가 없었다고 한다. 내가 봐도 솔직히 이상하긴 하다.

 

하지만 어쩌면 가능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조건은 피험자가 마음에 드는 시간에 손가락을 움직이길 결정한 다음, 바로 취소하는 것이었다. 뇌는 언제 움직이고 취소할 것인지를 이미 알고 있다는 이야기다. 뇌는 저장된 패턴과 새로운 정보로 사람의 움직임을 실시간으로 계산해 예측한다. 그 예측대로 움직인다면 뇌파의 변형이 먼저 일어난다고 하더라도 이상할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 물론 미리 요구 받는 행동으로 한 거부는 진정한 의미에서 자유의지를 가지고 거부한 것이라고 할 수는 없다.

 

 

정리하자면, 우리가 의지를 갖기 전에 뇌는 저장된 패턴과 새로운 정보를 가지고 실시간으로 계산하고 예측한다. 우리가 의식이 없는 상태라면 그 예측대로 움직이고(무의식적 움직임), 의식이 있더라도 갑작스럽게 의지를 가지고 거부하지 않는다면 그대로 움직이게 된다.(가장 편하고 자연스러운 움직임)

 

Libet 팀이 했던 연구는 의지 전에 준비전위가 나타났으므로 자유의지가 없어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건 뇌가 저장된 패턴과 새로운 정보를 계산하여 예측하느라 발생한 것이다. 그러니 예측에 벗어난 움직임을 한다면 사람은 언제든지 자유의지를 가지고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다. 그러므로 Libet 팀의 연구도 맞고, 자유의지도 있다.

 

아주 쉽게 무의식은 자동모드, 의식은 반자동모드, 자유의지는 수동모드 정도로 축약해서 이해해도 되겠다.

 

 

 

2. 무의식

 

첫 번째 패턴, 본능

 

우리들의 조상부터 시작된 과거의 의지는 유전자에 저장되어 대대로 변화하며 이어져 내려왔다. 그것을 사람의 첫 번째 패턴인 본능이라 일컫고 있다

 

본능으로 움직이는 시기인 아기의 뇌는 유전자에 저장된 패턴과 몸에서 요구하는 욕구와 오감으로 수집하는 정보를 계산하여 예측한다. 그 예측대로 움직이는 것이 아기에게는 가장 편하다. 그러니 아기가 먹고 싶을 때 먹게 해주고, 자고 싶을 때 자게 해주고, 싸고 싶을 때 싸게 해주는 것이 아기에겐 가장 이롭다. 아직 정보가 부족한 아기의 뇌가 예측하는 자연스러움을 방해하면 아기에겐 큰 스트레스로 작용할 것이다.

 

이 첫 번째 패턴인 본능에 저항하지 않는다면 대게 유전자에 맞게 성장하게 되어있다. 종종 어릴 때 이별한 쌍둥이가 만나서 보니 취미가 같다더라, 그런 것이 바로 유전자에 순응한 결과다.

 

 

두 번째 패턴, 학습        

 

아기가 성장하면서 정보를 수집한다. 아이가 호기심이 많은 까닭은 좀 더 많이 정보를 수집해야 살아남는데 유리하기 때문에다. 그러므로 본능적으로 호기심이 많을 수밖에 없다. 그러니 아이의 호기심은 충족시켜주는 것이 아이에겐 가장 이롭다. 호기심이 없는 아이는 뭔가 다른 요인으로 억제된 것이니 유심히 관찰하길 권한다. 그렇게 새로운 정보를 학습하면서 새로운 패턴이 만들어진다. 그것을 사람의 두 번째 패턴인 학습이라 하겠다.

 

학습에는 정보를 그대로 수용하는 수동적 학습과 스스로 생각해서 새로운 정보를 만드는 능동적 학습이 있다. 여기서 말하는 학습은 수동적 학습에 해당된다.

 

세 살 버릇 여든 간다는 속담이 있다. 한번 뇌에 학습된 패턴은 쉽게 바꾸기 어려워진다. 성장해 바꿀 수는 있지만 그것이 자연스럽지 않기 때문에 본인이 싫어서 바꾸질 않게 된다. 그래서 세 살 버릇이 여든 가게 되는 것이다. 이런 버릇을 들이게 하는 교육은 유전자에 저장된 패턴과의 싸움이다. 최대한 본능에 거스르지 않으면서(거스르면 아이가 힘들어해 교육이 어렵게 된다) 필요한 버릇을 들이게 하는 것. 그것이 아이를 위한 교육이다.

 

그렇게 해서 패턴이 학습되면 뇌는 본능과 학습과 새로운 정보를 계산하여 우리의 행동을 예측한다. 오랫동안 패턴이 학습되면 본능을 넘어선 자연스러운 행동이 나타난다. 이를 가리켜 만들어지는 자연스러움이라 하겠다. 일 중독자들은 보통 하기 힘든 일조차 하지 않으면 불안해지는 증상이 나타나기도 한다. 학습으로 만들어진 자연스러움이 편안함을 바라는 본능을 넘어선 것이다.

 

이것이 종종 본능으로 착각되기도 하지만 이 둘은 엄격하게 분리해서 봐야 한다. 가능과 불가능은 차이가 크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사람이 못 먹는 음식이 있다고 가정하자. 그 때 유전자가 거부하는 음식이 때론 있다. 그런 것은 거스를 필요가 없다. 그러나 학습을 통해 못 먹게 된 음식도 있다. 그런 것은 의식적으로 바꿔 먹을 수도 있다. 물론 굳이 먹지 않아도 된다면 안 먹어도 된다.

 

 

 

세 번째 패턴, 의지

 

본능은 내부 정보, 학습은 외부 정보다. 그 정보들을 가지고 스스로 생각해 새로운 정보를 만들어 행동한다. 그걸 가리켜 세 번째 패턴인 의지라고 하겠다.

 

뇌에 저장된 패턴에 순응하지 않고 스스로 생각해 새로운 패턴을 만들어가는 것, 그것을 가리켜 자유의지라고 말한다.

 

새로운 의지는 시간이 지나면 뇌에 저장돼 패턴화된다. 이런 저장된 패턴들을 가리켜 중첩된 과거의 의지라고 하겠다. 이것과 새로운 정보를 계산하고 예측하여 자동적으로 움직이는 것을 가리켜 무의식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의식이 있을 때도 무의식적 움직임이 존재하므로 의식이 없을 때만 자동적으로 움직이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의식적 움직임도 저장된 패턴에 순응한다면 뇌가 예측한 대로 움직이게 된다. 그러니까 의식적으로 저항하지 않는 한 앞으로 어떻게 행동할지는 무의식이 알고 있다는 이야기다.

 

과거의 행동을 후회하며 바뀌려고는 하는데 무의식적으로 후회했던 행동을 반복하는 사람이 있다. 그럴 때 자신에 대해 절망하며 포기하기도 한다. 내가 뭐 그렇지, 라면서 말이다. 그러나 무의식은 자신의 현재 의지와 무관하게 뇌에 저장된 패턴대로 움직인다. 그냥 과거의 흔적에 불과하단 말이다. 그러니 현재 자신이 바뀌었다면 자유의지를 가지고 꾸준하게 의식해서 새로운 패턴을 만들어 뇌에 저장해야 한다. 그래야 무의식이 바뀌고 스스로도 바뀐다.

 

 

다양한 곳에서 이 가설에 대한 근거를 찾을 수 있었다. 몇 가지 소개하고자 한다.

 

 

첫째,

 

감이라고 하면 대게 근거가 없기 때문에 믿지 않으려고 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감이 잘 맞는다고 하기도 한다. 왜 그럴까? 주사위를 던질 때 6만 나오면 엄청나게 운이 좋거나, 뭔가 수작을 부린 것이 틀림없다. 그처럼 근거가 없어 보이더라도 감이 계속 맞는다면 무언가 이유는 있는 것이다.

 

뇌는 저장된 패턴과 새로운 정보를 가지고 자동적으로 계산하여 예측한다. 그 활동은 무의식적인 활동으로, ‘(의식)’는 몰라도 (무의식)’는 알고 있다. 의식적 근거는 없어도 무의식적 근거는 있다는 이야기다. 그러니 맞을 때도 있는 법이다.

 

그러나 감을 맹신해서는 안 된다. 어디까지나 감은 무의식이 저장된 패턴을 가지고 계산하는 것이기 때문에 새로운 패턴이 나타나면 대응할 수가 없다. 잘못된 감일 수도 있다는 이야기다. 유전자에 저장된 패턴이라고 하면 본능적으로 위험을 느끼는 감각이라던가, 많은 경험으로 저장된 패턴이라고 하면 형사의 감으로 범인을 예측한다거나, 뭐 이런 것이다.

 

 

둘째, 징크스

 

왜 사람들은 징크스를 믿는 걸까? 그건 실제로 경험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그냥 무시하기에는 현상 그 자체가 존재하기 때문에 무언가 이유가 있는 것은 분명하다. 이 세상, 이유 없는 현상은 없다.

 

왜 그런 현상이 발생했을까? 그건 스스로 징크스를 믿었기 때문이다. 뇌는 저장된 패턴과 새로운 정보를 가지고 자동적으로 계산하여 예측한다. 그 계산에 사람이 믿는 징크스가 들어가 본래의 예측과 달라지게 된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A를 하면 잘되고, B를 하면 잘 안 된다, 라는 징크스를 가지고 있다고 가정하자. 그 상태에서 B를 하게 되면 스스로 안 된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 정보가 뇌의 계산에 포함되어 실제로 안되게 되어버린다.

 

물론 전부 그런 것은 아니다. 징크스를 뛰어넘을 정도로 오랫동안 저장된 패턴이라면 관계없이 잘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기에, 사람들은 징크스가 있다고 믿게 된다.

 

의학적으로 플라보시 효과라는 것이 있다. 진짜 약이라고 말하며 효과가 없는 가짜 약을 처방했음에도 실제로 증상이 호전되는 예가 있다. 스스로의 믿음이 뇌의 계산에 포함되어 작용했기 때문이다. 물론 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하는 거지,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할 수 있지는 않다.

 

 

셋째, 고전적 조건형성

 

파블로프는 개에게 먹이를 주기 전에 종을 울리는 것을 반복해봤다고 한다. 그랬더니 개가 종만 울려도 먹이가 오는 것으로 착각해 침을 흘리게 되었다고 한다. 이를 가리켜 파블로프의 개라고 부르기도 한다.

 

개 또한 뇌가 저장된 패턴(종이 울리면 먹이가 온다)과 새로운 정보(종이 울렸다)를 가지고 무의식이 자동적으로 계산하여 예측했다. 그 예측에 순응하면 자동적으로 침이 흘러 나오는 것이다.

 

 

넷째, 첫 글자와 마지막 글자

 

뇌는 모든 글자를 하나하나 읽는 것이 아니라 단어 하나를 전체로 인식한다고 한다. 그래서 첫 글자와 마지막 글자만 맞으면 문장이 해석이 된다. 이 연구가 캠릿브지 대학의 연결구과로 유명하지만 실제론 아니라고 한다. , 그건 좋다.

 

뇌에 저장된 패턴(언어)를 가지고 새로운 정보(문장)을 접하면 의식적으로 읽기 전에 무의식이 자동적으로 계산해 해석한다. 그래서 의식적으로 하나하나 읽지 않으면 문장이 이상하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달리 말해 뇌에 저장된 패턴이 없는 경우(모르는 단어) 하나하나 의식해서 읽어야 하기 때문에 읽기가 힘들어 쉽게 지치게 된다. 그러니 어려운 단어가 나오는 책부터 읽는 것은 책 자체를 싫어하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 그러므로 독서량을 늘리게 하고 싶다면 쉬운 단어를 사용한 책부터 읽게 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다섯째, 뒷담화, 선입견, 편견

 

일반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뒷담화를 한다는 것은 사람으로서 자연스러운 행위였음을 알았어야 했다. 내가 싫어한다고 하여 그것이 필요 없지는 않았다. 정보를 모아(뒷담화) 빠르게(선입견) 상대를 파악한다.

 

뒷담화엔 분명 문제가 존재한다. 대상의 의지와 관계없는 공간에서 없는 말 지어내기, 험담하기, 앞과 뒤가 다르기 등으로 사람들과의 사이를 나쁘게 하기도 하지만, 일종의 정보수집이기도 했다. 그러니 뒷담화 자체를 경계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 사이를 나쁘게 만드는 뒷담화를 경계해야 한다.

 

선입견은 뇌에 저장된 패턴(상대 정보)과 새로 들어오는 정보(실제 상대 모습)를 보고 무의식이 자동적으로 계산하여 예측하는 것이었다. 그 예측에 순응하면 선입견으로 상대를 보게 된다.

 

이런 선입견은 빠르고 편하지만 감과 같이 매번 맞는 것은 아니다. 뇌에 저장된 패턴이 없을 경우 선입견이 맞기가 어렵다. 그래서 선입견 없이 바라보는 것이 이상적이다. 그러나 매번 의식적으로 자연스러운 예측에 저항하는 것은 어렵기 때문에 쉽지가 않다. 편견 또한 이런 과정 중에 발생한 부작용이다.

 

 

 

3. 실험

 

사람이 공을 던질 때 의식적으로 좌표 값을 계산해서 던지지는 않는다. 그냥 감으로 던지지. 어느 각도로, 어느 힘으로 던져야 되는지는 (의식)’가 계산하지 않고 (무의식)’가 자동적으로 계산해주는 것이다. 던질 때 빗나가도 그 정보 또한 자동적으로 추가되어 계산해준다. 다시 던질 때 의식적으로 좌표 값을 계산해서 던지는 것이 아니라 감각적으로 이 정도면 되겠지, 라며 던지지 않나? 선수 수준이라면 잘 모르겠지만 나는 그렇게 던지고 있다.

 

(의식)’가 계산하는 것이 아니다. ‘(무의식)’가 자동적으로 계산하는 것이다. 그러니 (의식)’가 해야 할 일은 정확한 정보수집과 강력한 의지만 있으면 충분했다.

 

그것을 바탕으로 몇 가지 실험을 해봤다.

 

 

첫째, 리듬게임

 

나는 리듬게임에서 어려운 난이도가 자신이 없었다. 노트가 마구 내려오면 제대로 반응하질 못했다. 그걸 달리 생각해보았다. 의식적으로 노트 하나하나에 반응할 게 아니라 정확한 정보(노래,노트)와 강력한 의지(노트에 손가락 반응)로 시작해봤다. 그랬더니 그 빠른 노트들을 손이 자동적으로 치고 있는 것을 목격했다. 순간 섬찟했지만 재미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된 것은 아니었다. 피곤해지면 손의 반응이 느려져 힘들어졌다. 또한 너무 어려운 것은 잘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가능한 것은 가능해졌다.

 

 

둘째, 날벌레

 

방안에 날벌레들이 있었던 적이 있었다. 예전에는 그 날벌레들을 손으로 잡기가 매우 어려웠다. 양손으로 손바닥 쳐도 잽싸게 피하는데 도통 잡을 수가 없었다. 그걸 달리 생각해보았다. 의식적으로 계산해서 잡으려고 하지 않고 정확한 정보(날벌레위치)와 강력한 의지(잡겠다)만 가지고 손을 뻗어보았다. 그러자 날벌레를 잡을 수 있었다. 그것도 한 손으로 주먹 줘서 잡았다. 우연인가 싶었는데 이후 계속 잡을 수 있었다. , 이게 되는 거였구나. 매번 잡을 수 있던 것은 아니지만 잡을 수 있었던 것이 몹시 신기했다. 물론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만드는 것은 아니다. 너무 빠른 벌레는 못 잡는다.

 

 

셋째, 언어

 

그 동안 이상하다고 생각했던 것이 하나 있다. 왜 모국어는 하기 쉬운데 외국어는 하기 어려운가? 여러 가지 이유는 있겠지만 아이들도 익히는 언어를 쉽게 배울 수 없다는 건 이치에 맞지 않았다.

 

이젠 이유를 안다. 외국어를 의식적으로 배우려고 하니 어려운 것이었다. 언어의 해석은 (의식)’가 하는 것이 아니다. ‘(무의식)’가 하는 것이다. 그런데 외국어는 배운 단어와 문법을 가지고 의식적으로 하나하나 해석해 알아들으려고 하니까 힘들고 짜증날 수밖에 없다.

 

나 또한 그 동안은 의식적으로 해석해 알아들으려고 했었다. 그걸 달리 생각해보았다. 내가 해야 할 것은 정확한 정보수집(듣기)과 강력한 의지(의미 알기)만 있으면 되었다. 준비를 마친 뒤 외국어가 나오는 게임을 해보았다. 그러자 들리기 시작했다. 물론 전부다 알아들은 것은 아니었다. 그래도 들렸다. 한국어로 해석해서 들리는 것이 아니라 의미 자체를 알아듣게 되었다. 이 순간 왜 귀가 좋은 사람이 언어를 잘한다는 건지를 알게 되었다. 외국어와 번역된 자막을 매칭해 반복해서 듣다 보니 자막을 보지 않아도 자동적으로 해석되는 구간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의역과 직역이 구분되기 시작되었다. , 언어는 이렇게 습득하는 게 편하구나. 재미있었다. 그래서 그 게임을 반복해서 플레이 해도 질리지가 않았다. 알던 단어가 나오면 알아듣기 편하긴 했지만 몰라도 알아듣기 시작했다. 게임 내 장면과 대사 전체를 무의식적으로 기억해 의미 자체를 알게 된 것이다. 생각해보니 단어는 어떤 사물을 의미하는 키워드에 불과했다. 진정한 의미에서 그 단어를 알기 위해서라면 단어와 사물을 둘 다 알고 있어야 하는 것이었다. Forest 하면 한글 숲이 떠오르는 게 아니라 숲의 이미지가 떠오르도록. 그래야 무의식이 그 전부를 기억해 문장 해석을 해줄 수 있다.

 

 

넷째, 모험게임

 

위에서 예시로 든 게임인 모험게임을 하는데 이상하게 사격이 잘 안되었다. 타겟의 바로 옆을 계속 쏜다거나 등 잘 맞지를 않았다. 그래서 나는 내가 FPS 게임을 못하는지 알았다. 그걸 달리 생각해보았다. 의식적으로 타겟을 계산해서 맞추겠다는 생각을 버리고 그냥 정확한 정보수집(타겟위치)과 강력한 의지(맞추겠다)만 가지고 포인트를 이동시켜 맞춰보았다. 바로 맞는 것은 아니지만 맞기 시작했다. 뭐 곧바로 익숙한 예전 패턴(의식해서 쏘는)으로 돌아가 안 맞기도 했지만 방법을 알아냈다. 아마도 예전의 나는 무의식적으로 포인트를 맞췄는데 거기에 추가의 의지가 더해져서 약간씩 포인트가 엇나간 게 아닌가 싶다.  어쨌든 그렇게 해서 이 게임의 3편 극악 난이도를 클리어 할 수 있었다. 예전이라면 아마 어려웠을 것이다.

 

 

다섯째, 풍경

 

그간 하나의 의문이 있었다. 나는 의식하지도 않았는데 시야에 약간의 변화만 있어도 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왜 그런지는 몰랐는데 이제야 알게 되었다. 그건 (의식)’가 알아낸 게 아니라 (무의식)’가 알아낸 것이었다. 그걸 알고 나니 세상이 달라 보이기 시작했다. 길거리에 나가 풍경을 바라보았다. 풍경을 보고 소리를 듣고 냄새를 맡고 바람을 느끼고 공기를 맛보았다.

 

그 모든 것을 (무의식)’는 기억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의식하지 않고 지나친 모든 정보들을 (무의식)’는 기억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꿈으로 형태를 갖춰 마주치게 된다. 전혀 모르는 장소가 꿈에 나타나는 것은 의식이 아니라 무의식이 기억했던 것이기 때문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괴로운 와중에도 재미를 느꼈다. 새로운 장난감을 가진 아이가 된 기분으로 이것저것 실험하였다. 인체 사용설명서를 손에 쥐게 된 기분이었다. 무의식은 자동모드, 의식은 반자동모드, 자유의지는 수동모드였다.

 

, 이건 그저 내 개인적인 실험이니 다른 사람들이 동일하게 경험하리라는 보장은 없다. 또한 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만드는 것이지,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 꼭 명심하기 바란다.

 

 

 

4. 우연

 

사람의 삶은 생각 외로 단순했다. 대부분 무의식의 계산대로 살아간다. 처음에는 의지를 갖고 산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패턴화 되어 쌓이기 시작하면 점점 무의식에 의존하게 되어 종국에는 무의식에만 기대는 일도 발생하게 된다. 왜 나이를 먹을수록 변하지가 않는 것인가, 그것은 중첩된 과거의 의지가 현재의 의지를 넘어섰기 때문이었다. 죽을 때까지 자유의지를 가지고 살고 싶다면, 언제까지나 변화를 추구해야 한다. 변화가 죽었을 때, 그 사람의 자유의지도 죽는다. 만약 자유의지를 가지고 살고 싶다면 죽을 때까지 호기심을 가지고 살길 권하겠다. 호기심이 있는 한, 사람은 언제까지고 변할 수 있다.

 

이른바 운명이란, 사람의 힘을 넘어선 초월적인 무언가로 인해 모든 것이 정해져 있는 것. 그러나 개인의 삶은 그런 초월적인 무언가로 정해지는 것이 아니라, 본능, 학습, 의지로 결정된다. 종종 음주, 흡연을 하는 사람들이 하는 말이 하든 안 하든 수명이 같을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를 한다. 해도 오래 사는 사람도 있는가 하면 안 해도 짧게 사는 사람도 있으니까 말이다. 개인의 삶이라면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백 명이라면? 천 명이라면? 만 명이라면? 만 명을 대상으로 금주와 금연을 해보았다고 가정해보자. 그들의 수명에 변화가 없을까? 없다면 음주와 흡연이 몸에 해롭다는 근거는 없는 것이나 다름없다. 하지만 아니지 않나. 누군가는 분명 수명이 변한다. 그렇게 간단하게 죽음의 운명이 바뀌는 것이었다.

 

정말 운명이 정해진 것 같은 삶도 있다. 그러나 그 개인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집단에 초점을 맞추면 그것은 그저 우연의 결과였다. 이 세상엔 사람이 엄청나게 많다! 이 세상에는 마치 운명과도 같은 특별한 일들이 벌어지기도 한다. 운명 같은 만남, 운명 같은 인연, 운명 같은 사건. 그러나 그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 세상에서 1%의 확률로 그런 일들이 벌어진다 가정해도 7천만명이 넘게 경험하게 된다. 오 이런, 제기랄!

 

운명이라 불리는 그 모든 것이 우연이라 가정해도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개체수가 그렇게나 많은데 특별한 일이 없을 리가 없다. 그 확률이 0.0000001%라고 해도 이 세상에는 있을 수가 있다! 오 이런! 오 이런!

 

내가 생각했던 운명은 나 자신을 특별하게 여기지 않는 순간 박살 나버렸다. 개인의 삶과 집단의 삶과 이 세상의 흐름. 그것을 지켜보니 알 것 같았다. , 나의 첫 번째 실수는 나 자신을 객관화해서 바라보지 않았던 것이었다. 내 자신이 특별한 것이 아니라! 내가 나였기 때문에 특별했다!!

 

 

 

5. 개혁

 

개인이든 집단이든 크게 다르지 않다. 개인이 모인 것이 집단이니까 말이다. 그래서 대부분 무의식의 계산대로 살아간다. 중첩된 과거의 의지, 그러니까 옛날에 했던 그대로 행동한다. 신분제 시절의 존중의 척도가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왔던 까닭도 다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세대가 바뀌고 세상이 바뀌어도 오래 전부터 사람들에게 전해 내려온 중첩된 과거의 의지는 의식해서 바꾸지 않는 한 그대로 이어진다.

 

그러나 행태를 띤 것은 생각보다 쉽게 바뀌기도 한다. 실내 금연같이 의식적으로 금지 표시를 계속 보고 인식할 수 있는 제도라면 집단의 무의식이 바뀌어 실제로 바뀌게 된다. 반복된 인식이 패턴으로 변해 뇌에 자리잡게 된다.

 

하지만 의식적으로 계속 인식할 수 없는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가치관 같은 생각이라면 바꾸기가 어려워진다. 형태를 띤 것이 계속 인식할 수 있어 바뀌었던 것처럼, 본질을 꿰뚫어 대다수 사람들에게 공감을 살 수 있는 생각을 스스로가 생각해 의식적으로 계속 인식하게 만들어야 바꿀 수가 있다.

 

그러지 않으면 돌출된 의지는 집단의 무의식에 묻혀 언제까지고 변화할 수 없다. 집단의 자유의지가 죽게 되는 것이다.

 

 

집단의 개혁도 이런 과정을 거치게 된다. 형태를 띤 것은 생각보다 빠르게 바뀐다. 그것을 의식적으로 계속 인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러기 어려운 생각은 쉽게 바뀌질 않는다. 형태를 띤 것을 보고 바뀔 때에는 의지를 가지고 바꾼 것이 아니라 수동적으로 바꾼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실내 금연 표지가 없는 곳이라면 실내 흡연을 하는 사람이 있다. 그런 이유 때문에 해당 법안 마련되었다고 하는데, 이처럼 형태를 띤 것은 쉽게 바뀌지만 본질적으로는 바꿀 수 없다.

 

물론 형태를 띤 것도 계속해서 인식하게 만들 수 있다면 점층적으로 바꿀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야말로 개혁이다. 그러나 본질을 꿰뚫는 생각으로 사람들의 생각을 바꿀 수 없다면 언제고 예전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점을 꼭 명심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이미, 그것을 경험하지 않았나?

 

본질적인 변화는 사람들이 자유의지를 가지고 스스로 생각해 바뀌려는 의지를 가지고 있어야 가능하다. 그러니 나는 내 모든 것을 부정하더라도 상대가 스스로 생각한 것이라면 나는 그것을 긍정하겠다. 그것이 나의 목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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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부정당하면 설득하려고 노력을 하겠죠. 긍정은 그 생각을 존중한다는 이야기입니다.

 

받아드릴 수 없는 논리를 맞닿게 되면 우선 반박을 합니다. 논리적인 반박이 불가능하면 그 논리를 이야기한 상대를 깎아 내릴 방도를 찾지요. 나이, 직업, 경력, 학력, 지위, 등 논리와 무관한 부분을 가지고 반박합니다. 물론 경험입니다만, 대체로 그렇더군요.(예외는 있습니다.) 특히 현실에서는 어쩔 도리가 없을 정도로. 가진 것이 없는 자에게 새로운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일임이 틀림없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저를 버렸습니다. 스스로를 투명하게 만들어서 생각만 남도록. 저는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저 자신을 수단으로 쓰는데 거리낌이 없는 모양이더군요. 생각을 전하기 위해서라면 저는 별로 상관없었던 모양입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것이 정답이었는지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최선이었다고는 생각합니다만아아, 저는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젠 모르겠습니다. 살아만 있으면 그 앞에 무언가는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이젠 그것마저도 없어졌군요. 배우고 싶은 것도 많고 하고 싶은 것도 많은데 너무- 늦게 알았어요. 슬프네요.

 

 

아이는 언제 어른이 되고 싶어하는 걸까요? 어른이 만만하게 보였을 때입니다. 어른이랑 자신이랑 별 차이가 없는데 동등하지가 않죠. 그러니 동등하게 되기 위해, 동격이 되기 위해 어른이 되고 싶어하는 거라 생각합니다. 불신이 반항을 만든다고 이야기 했었는데, 정확히 말하면 불신이 어른의 격을 낮게 만들어 반항하게 되는 거죠. 어른이랑 자신이랑 별 차이도 없는데 윗사람 행세를 하는 것이 못마땅해지거든요. 비슷한 연령의 형제남매자매들이 싸우는 이유도 대게는 이런 이유입니다. 별 차이도 없는데 윗사람 행세하는 게 못마땅하니까요. 그러니 훌륭한 어른 행세하기가 어렵다면 차라리 대등하게 상대하는 것이 사이 좋게 지낼 수 있는 방도일지도 모릅니다.

 

 

이 닉네임은 아즈망가대왕의 냐모선생님이 쓰던 베개 메이커입니다. 정말 편해 보여서 큰맘 먹고 산적이 있었죠. 그래서 지었는데 뭔가 바꾸기가 뭐해서 그냥 쓰고 있네요.

 

해소하지 않는 욕구는 괴롭지요. 그래서 최대한 정보를 차단했는데 아무리 차단해도 쓰고 싶은 글 감은 쌓여가네요. 사실 예전에 쓴 글도 정리하려고 했는데, 지금 쓰고 싶은 것도 쌓여있는 터라 언제 할지는 모르겠어요.

 

무의식 편은 개인적으로 괴로워서 좀 늦은 것 같네요.

다음 글은 삶의 의미 혹은 바둑의 미래입니다. 그 다음은 아마 인공생명

그 뒤엔 개그, 감정, 정보 더 쓸 예정입니다.

 

착각이 아니라면 좋으련만 뭐 어쨌든, 덕분에 살아있을 수 있습니다.

어디서 읽던 어떻게 읽던 읽기만 해주신다면 기쁠 따름입니다.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 … (눈을 내리 깐다) 어쨌든 다들 잘되었으면 좋겠어요.

 

 

참고

영상: 2016 카오스[Brain] 5강 자아의 탄생: 나를 의식하는 나 – 2

논문: 자유의지에 대한 Libet의 연구와 후속 연구들

서울대학교 法學 제52권 제3 2011 9 477∼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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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권선징악, 네 선은 당연한가 (0) 2017/10/03 PM 05:01

권선징악, 네 선은 당연한가

 


0. 권선징악


여러분들은 최초의 불신을 기억하는가? 나는 까먹었다. 하지만 언제, 그리고 어떻게 해서 가지게 되었는지는 알고 있다. 그것은 자신이 배운 것과 세상의 불일치를 경험할 때다.


분명 거짓말 하지 말라고 했던 것 같은데 아이의 눈에도 보일 정도로 빤한 거짓말을 하는 것을 목격했을 때. 분명 욕하지 말라고 했던 것 같은데 욕하는 것을 목격했을 때. 분명 싸우지 말라고 했던 것 같은데 귀보다는 마음이 아플 정도로 큰 소리를 내며 싸우는 것을 목격했을 때. 그 모습이 망막에 새겨져 뇌로 전달돼 이미 있던 정보와 충돌한다.


충돌로 박살이 난 믿음은 잿빛 불신으로 변해 마음 속에 가라앉아 차곡차곡 쌓여간다. 특히 직접 그 불일치를 당했을 때엔 세상이 바뀌고 천지가 개벽할 정도로의 충격을 받는다. 흉할 정도로 입을 벌리며 감정을 잃은 눈으로 쳐다본다. 왜...?


일반적으로는 부모의 실수로 그 씁쓸한 경험을 하게 된다. 부모도 사람인 이상 실수를 하기 마련인데 아이가 그것을 이해하기엔 정보가 부족하다. 경험을 통해 정보가 쌓여야 비로소 이해할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되는데, 보통은 그전에 불신을 가지기 마련이다.


부모가 아이 앞에서 올바르게 행동하려 애쓴다고 하더라도 결국은 상처를 받는다. 세상은 부모만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성장하면서 다양한 사람을 만나게 되고, 언젠가는 반드시 자신이 배운 것과 세상의 불일치를 경험한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 아이들은 조금씩 어른들을 닮아간다. (단순히 옳고 그름만이 아닌, 말의 번복이나 불신을 가질만한 다양한 요소들 등)


시간이 흘러 차곡차곡 쌓여진 불신은 사라지지 않은 채, 권선징악을 비웃게 만드는 잣대가 된다. 특히 인터넷이 발달된 요즈음엔 보다 더 빠르게 세상에 대한 정보를 접하게 되고, 세상의 더러운 면모를 보게 된다. 알고 있지 않나. 착한 행동이 복이 되어 돌아오리라는 보장도 없고, 나쁜 행동이 해가 되리라는 보장도 없다. 오히려 나쁜 놈이 더 잘사는 경우가 많은 이 세상. 권선징악을 비웃게 되는 건 당연한 결과일지도 모른다.


세상의 더러움을 접하고 성장한 아이들은 그것으로 세상을 다 안 것 마냥 교만에 빠진다. 사춘기의 시작이자 반항기의 시작이다. 사람마다 그 시기는 다르고 어쩌면 없을 수도 있지만, 대체로는 위의 흐름에 따라 시작되기 마련이다. 만약 아이가 반항하지 않는다면 유심히 지켜보길 바란다. 주변에 올바른 사람만 있거나, 지나치게 성숙했을 수도 있지만, 반항할 힘도 없을 정도로 망가졌을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아이들은 고개를 갸우뚱하며 의문에 빠진다. 왜 어른들은 자신이 지키지도 못하는 말을 가르치는 걸까? 왜 어른들은 세상과 다른 권선징악을 가르치는 걸까? 그리고 이 의문이 해소될 때쯤 반항기도 점차적으로 끝나게 된다.


다양한 일을 겪게 되면서 사람은 완벽하지 않기에 언제나 올바르기 어렵다는 것을 직접 깨닫는 순간 어른을 조금씩 이해하기 시작한다. 세상을 보는 시야가 넓어져 세상에는 더러운 면만 있는 것이 아니라 깨끗한 면도 있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교만했던 과거를 부끄러워하게 된다.


그렇게 넓어진 시야는 권선징악의 필요성을 깨닫게 만든다. 사람이 선한 것이 아니라 선해지길 바라는 것임을 알게 될 때, 비로소 어른들의 행동을 이해하게 된다. 아, 올바른 말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지키고 싶었던 것이구나. 아, 세상이 깨끗한 것이 아니라 깨끗하길 바라는 것이었구나.


행동의 기준이 있어야 사람은 그것을 보고 선악을 나누고 행동하는 방향을 정하는 법. 설령 못 지킬 말이라도 지향하는 바를 위해 하게 되고, 설령 세상이 더럽더라도 지향하는 바를 위해 선을 권하게 된다. 



그렇게 어른이 되어 아이를 가르칠 때가 되면 똑같이 올바른 행동을 가르치고, 똑같이 권선징악을 가르친다. 나의 사랑스러운 아이야, 부디 네가 사는 세상은 권선징악이 이루어지길…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아이가 겪을 불신으로 인한 슬픔이 안타까워 몇몇은 모든 것을 알려주려 하지만 미성숙한 아이가 받아드리기엔 정보량이 너무나도 많다. 그렇다고 나쁜 것을 가르치고, 세상이 더럽다고 이야기하면 삐뚤어진 아이로 성장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결국 올바른 것을 가르치고, 권선징악을 가르친다.(부모가 아니더라도 주변 사람, 교육, 매체 등을 통해서 배우게 된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이 불신의 순환, 아이의 반항기는 사라지지 않고 있다.



도대체 언제부터 이 순환은 시작되었을까? 하하.. 이 오랜 순환 속에서 권선징악은 당연함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선은 당연히 옳고 악은 당연하게 그르다. 선은 당연히 해야 하고 악은 당연히 하지 말아야 한다. 선은 모두가 당연히 가까이 해야 하고 악은 모두가 당연히 멀리 해야 한다.


이 당연함, 자신은 아니라며 부정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린 시절부터 새겨진 가르침은 무의식 속에 자리 잡아 사람의 사고를 결정한다. 의식적으로 부정하는 사람조차도 무의식적으로는 당연하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그 당연함이 이 세상의 선을 패배하게 만들었다.




1. 당연함


누구나 살면서 불쾌한 기억 하나 둘쯤 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선의의 강요다. 


“내가 널 위해서 하는 건데 왜 받아드리지 못하느냐”


듣는 사람 입장에선 황당하다. 남을 위한다고 하지만 상대가 원하지 않는대도 강요하는 거라면 결국 자기자신을 위해 행동하는 것 아니겠는가? 재미있게도 말하는 사람 입장에선 진짜 남을 위한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것이 바로 자신의 선, 올바름을 당연하게 여기고 있다는 이야기다.


예로부터 많은 갈등을 초래해왔던 사유 중 하나가 바로 잔소리다. 명절날 가기 싫은 이유 중 하나로 꼽히는 이것은 트집을 잡는 등의 더러운 이유로 일어나는 일도 있지만 정말로 남을 위해 말하는 경우도 있다. 그리고 실제로 그 잔소리가 세상에서 말하는 선의라고 불리는 일도 많다. 


하지만 그것을 당연하게 여겼기 때문에 상대방 입장에서 생각해본다거나 하는 등의 노력이 부족했다. 내가 하는 말이 당연하게 옳으니 설득에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 것이다. 혹시 몰라 말하건대, 잔소리의 경우 대체로 위가 아래에게 하는 경우가 많으나, 동격이나 그 반대의 경우도 있으므로 꼭 상하관계 때문에 일어난다고 하기는 어렵다.


부모의 잔소리, 친구의 조언, 충신의 충언 등 남을 위하는 말은 위아래 가리지 않고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자신의 올바른 말을 당연하게 여겨 설득하는데 노력을 게을리 했다면 아무리 좋은 말이라도 변화를 일으키는 일은 많지 않다. 듣는 사람에게도 자신만의 선이 있기 때문이다.


선교활동도 마찬가지다. 종교를 단순히 돈벌이 수단으로 보는 자도 있겠지만 선교하는 사람 중엔 정말로 상대를 위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의 종교가 절대적으로 올바르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상대방 입장에서 생각해보려고 하지 않는다. 오히려 왜 이런 좋은 것을 받아드리지 못하는 건지 이해를 못한다. (이해하는 사람은 종교를 강요하지 않는다.) 듣는 사람도 자신만의 선을 가지고 있으므로 이해를 못한다. 서로가 이해를 못하니 빈번하게 충돌이 빚어지곤 한다.


진정 누군가를 위한다면, 그 사람의 눈을 보고 마음을 보고 입장에 서서 자신이 바라는 것과 상대가 바라는 것을 생각해 설득할 수 있는 수단을 강구하고 보답을 바라지 않는 선의를 주는 게 맞지 않을까 생각한다. 뭐 이러나 저러나 결국 상대가 친절을 기쁘게 받아드린다면 좋다. 



선을 당연하게 여기는 것의 부작용은 이뿐만이 아니다. 세상에는 다양한 선이 존재하지만 대체로 애국이 선이고 매국이 악일 것이다. 그 때문에 이 세상에 많은 불만과 갈등을 낳았다.


“나라를 위해서인데 네가 희생해야지”


대표적으로 군대가 있다. 나라를 지키는 것은 올바르다. 하지만 그 때문에 설득의 노력을 게을리해서는 안 된다.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나서서 나라를 지키겠다며 나설 정도로 노력을 해야지 그저 ‘나라를 지키는 게 올바르니까 강요해도 되겠지’ 라는 마인드라면 군역을 기쁘게 받아드리는 사람은 얼마 없을 것이다.


그 당연함은 나라의 인재를 놓치는 결과를 낳기도 한다. 해외에서 공부한 유능한 인재를 초빙하는데 우리나라사람이라는 이유로 저임금으로 착취하려고 드니 누가 우리나라를 위해 열심히 일하겠는가! 그 때문에 얼마나 많은 인재들을 놓쳤는지 생각해보면 안타까울 따름이다.


이외에도 곰곰이 생각해보면 선을 당연하게 여겼기 때문에 생기는 불만과 갈등이 많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남녀갈등 노사갈등 고부갈등 부부갈등 등 대부분의 사람과의 관계)




2. 정보수집


선의의 강요는 사회적 갈등을 초래하지만 그것만으로 선이 패배했다고 하기는 어렵다. 물론 다른 이유가 있다. 모름지기 승리하기 위해서는 상대를 제대로 알아야 하는 것은 필수조건이다. 정확한 정보수집이 승리의 지름길. 하지만 악이라는 이유로, 당연히 나쁘다는 이유로 사건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는 일도 생기곤 한다.


우리나라의 입장에서 6.25의 문제로 좋게 볼 수가 없는 중국의 마오쩌둥이 남긴 유명한 말 중 하나가 바로 ‘참새는 해로운 새’다 그 말 이후 제사해 운동으로 중국 대륙 전역에 있는 참새가 2억 1천마리 가량 학살당해 생태계가 파괴되어 공식발표 1000만명에서 최대 4000만명 가량의 아사자가 발생했다고 한다.


의도가 어떻게 되었든 독재자의 말 한마디로 이루어진 이 정책은 참새를 학살하여 생태계를 파괴해 수많은 인명 앗아간 최악의 실패로 악임이 분명하다. 실제 마오쩌둥에 대한 평가가 예민한 중국에서조차 실패한 정책이라고 평하며 과로 인정하고 있다.


이 사건에서 선악을 벗겨내 보자. 의도가 어떻게 되든 실패한 정책으로 수많은 생명을 앗아간 악이지만, 동시에 말 한마디, 한 사람의 의지로 대륙에서 종 하나가 자취를 감춘 무시무시한 사건이다.


다음에는 역할을 벗겨내 보자. 실패한 정책으로 인해 일시 사퇴까지 되었지만, 마오쩌뚱 개인에게는 말 한마디로 대륙에서 종 하나를 없앤 강대한 힘의 상징이기도 하다. 


생각해보라, 어떤 과학적 근거도, 연구도 없이 그저 독재자의 말 한마디에 2억 1천마리 가량의 참새가 학살당하고 1000만명에서 4000만명 가량의 아사자가 발생했다. 그런 죄를 짓고도 일시 사퇴로 끝이 났다! 소름 끼치도록 강대한 힘. 그야말로 절대자의 권력이다. 


그의 정책은 중국을 나락으로 떨어뜨리는 결과를 낳았지만 그 자신은 죽을 때까지 권력을 유지했다. 만약 마오쩌둥이 자신의 권력 유지가 최우선이라고 했다면 결과적으로 그가 바라는 흐름으로 된 것이다. (이후 행보를 보면 무엇이 최우선이었는지는 확실히 알 수 있다.)


선과 악, 정책의 성공여부에만 관심을 가지다 보면 그 사건의 흐름이 만들어내는 파장을 놓치게 된다. 또한 그것으로 인해 본래 목적을 달성하였는지를 놓치게 된다.


이렇게 사건의 본질과 무관한 부분을 하나씩 벗겨내 보면 당연했기 때문에 놓치는 부분이 선명해진다. 정말 무시무시한 힘. 그런 자를 상대로 선이 승리하기 위해서는 그저 나쁘다며 비판만 할 게 아니다. 무언가 변화를 이끌어 내기 위해서는 그런 강대한 힘을 만들어내는 요인을 조사해 하나하나씩 공략방법을 강구해야 비로소 상대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되는 것이다. (그 기반은 물질적인 것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그의 말, 사상, 등의 허점 등) 


이세상엔 무능한 정책, 무능한 지도자는 있을 수 있어도 무능한 인간은 있기 어렵다. 능력이 없다면 지도자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혈통, 꼭두각시 허수아비 제외) 


그렇다면 어째서 무능한 정책이나 무능한 지도자가 되는 걸까? 그건 일반 사람들이 생각하는 목적과 다르기 때문이다. 보통 사람들이라면 지도자는 나라를 위해 일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것을 중심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나쁜 지도자는 그렇지 않다. 겉으로는 나라를 위한다고 해도 자신의 이익과 나라의 이익을 저울질해 자신의 이익이 된다면 나라를 망치는 정책이라도 주저 없이 실행한다. 그렇기 때문에 나라를 망치는 무능한 정책과 자신이 원하는 결과를 만든 유능한 인간은 공존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도자를 뽑을 때엔 개인의 능력도 능력이지만 그의 생을 관찰해 무엇이 진정한 목적인지 알아내는 것이 선결과제가 될 것이다. 아무리 유능한 자라도 목적에 따라 나라를 망칠 수 있는 법이니까.




3. 선의 패배


“설마 그렇게 나쁜 놈인데 뽑아주겠어?”


선이 패배한 보다 더 직접적인 요인은 바로 방심이다. 선은 당연히 승리할거라 생각해 노력을 게을리하며 방심했다. 당연하게 패배할 악에 대한 관심도, 조사도, 부족했다. 한마디로 깔보았다. 하지만 악은 그대로 있으면 패배하는 것이 당연했다. 사람의 심리상 기본적으로는 선을 지향한다. 그렇기에 그대로 있으면 악이 패배하는 것은 당연했다.


스스로(또는 세상이) 악이라고 평가하는 자들은 그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필사적으로 행동했다. 악인들끼리 모여 힘을 키우고 그럴듯한 이유를 붙여 악의 꼬리표를 때내려고 애를 썼다. 꼬리표를 때어내지 못하는 이상 언젠간 사회적 격리조치가 될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그것이 안되면 또 다른 악을 지칭하여 표적에서 벗어나기도 했다.


올바르기 때문에 승리를 확신한 선과 가만히 있으면 패배가 확실하기에 필사적으로 움직인 악. 선악을 벗겨내면 노력의 차이가 확연하다. 당연한 선악이 선의 패배를 불렀던 것은 이러한 방심으로 낳은 결과가 커다랬다.



이것에 대한 좋은 예시가 최근 미 대통령 선거다.


딱 부러지게 누가 선이다 하기 어려울 정도로 조금 후보가 애매하긴 했지만 그 당시 여론이나 언론은 상대적으로 힐러리가 선이라고 평했다. 트럼프가 되느니 힐러리가 되는 게 낫다는 것이다.


그걸 힐러리도 알았고 트럼프도 알았다. 분명 힐러리도 노력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부족했다. 그녀의 행보를 살펴보면 승리를 장담했다는 것이 눈에 띈다. 연예인마냥 행동하고 좋은 곳만 돌아다니며 두루뭉실한 공약을 내세웠다.


반면 트럼프는 자기 지지자들이 이해하기 쉬운 공약을 통해 확고한 지지기반을 마련했고 그 외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그 당시 전세계적 테러로 인해 민심이 흉흉했고 다양성 때문에 크리스마스도 제대로 즐기지 못했던 것에 대한 불만이 쌓여있던 시기였다. 그걸 그는 이용했다.


트럼프가 다른 지지자를 패라는 등의 황당한 발언까지 했던 것을 기억하는데 솔직히 꽤 오래 전 일이라 구체적인 내용은 까먹었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상대적으로 선이라 불렸던 힐러리의 승리를 여론, 언론은 확신했다. 그러나 구글은 당연한 선의 승리를 확신하기보단 구체적인 통계를 통해 트럼프의 승리를 예측했다. 


그리고 그 결과 상대적 선은 패배했다.



승패는 선과 악으로 나뉘는 것이 아니다. 누가 더 강한가(무력,지력,자금력,영향력 등등) 로 겨루는 것이다. 선과 악은 목적이지 수단이 아니다. 선이 승리하고 싶다면, 선을 행하고 싶다면! 다양한 방법으로 힘을 키우고 사람들을 설득해 사람 수를 불리는 등 악 보다 더 필사적으로 행동해야 한다.



미 대선 이후 인터넷에서 트럼프를 바라보는 여론의 흐름은 위험했다. 그가 나쁘다는 말을 듣는다고 해서 선입견이나 편견으로 정보수집에 차질을 빚거나, 깔봐 방심할 확률이 높았다. 그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었다. 


머지않아 분명 한국과 미국간 만남이 있을 예정인데 이대로라면 어쩌면 그 흐름에 영향을 받아 좋지 못한 결과를 낳을까 걱정이 되었다. 물론 뭐 실제로 협상할 사람들이 방심할 리는 없겠지만, 위처럼 이미 비슷한 사례가 있었기 때문에 걱정이 드는 것은 사실이었다. 


… 뭐 그건 이미 지났으니 앞으로도 방심하지 말고 승리하기 위해서 온갖 노력을 다하길 바라겠다.  




4. 선의 승리


우리나라 정치도 지금까지 선과 악을 당연하게 여겼다. “이 사람 나쁜 사람이에요” 라고 말하면 당연히 응원해 줄거라 생각했다. 또한 스스로 선이라 승리를 당연하게 여겨 다소 노력이 부족했던 것도 사실이었다. 


그저 나쁘다고만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든 힘을 키우고 숫자를 불렸어야 했다. 선과 악은 어디까지나 목적이지 수단이 될 수 없다. 물론 수단도 가능하긴 하지만 그걸로 설득할 수 있는 것은 어디까지나 같은 선을(또는 비슷한) 공유하는 사람들끼리만 가능하다.


설령 세계평화 같이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선을 이야기한다고 하더라도 당연하게 여겨서는 안 된다. 어디까지나 세계평화는 목적이지 수단이 아니다. 세계평화가 이루어짐으로써 얻을 수 있는 이익(물질만이 아니다.)을 말하며 사람들을 설득하고, 그런 생각에 동조하는 사람들의 수를 늘리고 힘을 키워 평화를 이끌어내야지, 선이기 때문에 당연히 참여하길 바라는 것은 실패를 자초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세계평화는 특정 행동의 근거가 될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자체를 설득할 때엔 목적으로 가정하여 설득해야 한다. ) 


물론 선이 악보다 강하는 것은 조금 어렵다. 선마다 다르겠지만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선은 공공의 이익을 추구하고 악은 사적인 이익을 추구한다. 그 상태에서 선과 악을 벗겨내 살펴보자. 사익을 추구한 쪽이 개인의 부는 더 많을 수 밖에 없다. 그리고 악의 입장에서 금전을 뿌리는데 거리낌이 없다. 그들은 금전을 통해 손쉽게 강해질 수 있는 것이다.


반면 선은 공공의 이익을 추구하는 사람들. 개인의 부가 많을 수가 없다. 물론 많다고 해도 선의 입장에서 금전을 뿌릴 수 없는 것은 당연했다. 그러므로 강해지기 위해서는 대중을 말로 하나하나 설득해야 했다. 그게 쉬운 일이면 진작에 승리했겠지만, 자신들의 선을 당연시 여겼던 과거엔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국정농단이라는 초유의 사태를 통해 진정 위기감을 느낀 사람들이 거리로 나와 촛불시위를 했다. 스스로의 선을 당연하게 여기는 것이 아니라 이기기 위해서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상대적 악의 약점을 수단방법 가리지 않고 조사하고, 상대가 악이라고 한다고 해도 결코 방심하지 않고 끝까지 노력했다. 우리나라의 상대적 선을 응원하는 많은 사람들이 하나되어 힘을 모아 흐름을 바꿔 결과를 만들어냈다.


그리고 그 결과 상대적 선은 승리했다.



우리나라의 상대적 선은 정말 필사적으로 움직여서 간신히 승리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그 승리는 변화의 끝이 아니다. 이제야 변화의 시작을 만들어 낸 것이다.


이 세상의 승패는 선과 악으로만 정해지는 것이 아니다. 진정 이 세상이 권선징악이 이루어지길 바란다면 악이 노력하는 것 이상으로 선이 노력을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 노력이 결과를 만들어낼 때 비로소 권선징악은 이루어질 것이다.




5. 예시 – 최저임금


선과 악을 당연하게 여기지 않고 자신이 원하는 흐름을 만들기 위해 어떻게 보고 행동해야 하는지에 대해 이야기해보도록 한다. 이 예시는 예시일 뿐, 방법이야 아무래도 좋다.



최저임금은 다수의 노동자와 소수의 경영자와의 협상으로 결론을 내린다. 일반적으로 선은 공공의 이익이라는 것을 생각해보자. 그렇다면 상대적 선은 다수의 노동자들을 위한 최저임금 상승이다. (물가는 유지 이하 반복)


이 상대적 선의 승리를 위해서는 우선 선을 당연하게 여기지 말아야 한다. 요컨대 최저임금 상승이 다수의 행복을 부른다고 하더라도, 그것만으로는 경영자들을 설득할 수는 없다는 이야기다.


그리고 상대방이 나쁘다고 하여 나쁜 부분을 보고 비난만 할 것이 아니다. 사건의 본질을 보기 위해 필요 없는 것을 양파껍질 벗기듯 하나씩 벗겨보도록 한다.


우리나라의 많은 기업들은 부도덕한 방법을 통해 성장했다.(미리 말해두건대, 아닌 기업도 있음을 분명히 한다.) 탈세, 상속세 회피, 횡령, 정경유착, 페이퍼컴퍼니, 폐기물 무단 방류, 인명경시, 장시간 저임금 노동, 무노조, 갑질, 허위과장광고, 주가조작 등 쓰다 보니 질릴 정도로 많다. 


아무튼 여기서 선악을 분리해보자. 분명 부도덕한 방법이긴 하나 성장했다는 사실은 확실하다. 그렇기 때문에 경영자들은 자신들의 방식이 올바르다고 생각한다. 그들의 내면엔 부도덕한 측면이 있으나 기업의 성장을 발판으로 나라의 성장에 이바지한 측면이 있으니 괜찮다며 합리화 하기 때문에, 부도덕한 방법으로 성장했더라도 그것은 올바른 방식, 즉 자신만의 선이다.


그들 또한 자신의 선이 당연하다 여기기 때문에 최저임금 상승을 바라는 여론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 방법이 노동자들을 힘들게 만들고 자살하게까지 하더라도 수년에서 수십 년간 해온 (저임금으로 착취해서)성공하는 경영방식을 포기할 리가 없다. 되려 어떻게 사업을 하냐며 불만을 토로할 뿐이다.


똑같이. 노동자 입장에서는 최저임금 상승이 많은 국민들의 행복에 영향을 끼치기 때문에 그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상대적으로 옳다. 그렇게 자신의 선을 당연하게 여겼기 때문에 경영자들의 입장을 고려하지 않았다. 고려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되려 가난한 이가 부자 생각할 필요가 있느냐며 불만을 토로할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서로 절충안을 내놓을 수가 없다. 서로를 이해할 수 없는데 제대로 된 결론이 나올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여론의 눈치를 보며 물가상승과 비교하여 조금씩 올리고 있지만 근본적으로 그들은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아니, 이해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자신들이 절대적으로 옳다고 생각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그래서야 언제까지나 변화가 없다. 기업의 부도덕을 비판해도, 그것이 성공의 길임이 확실하면 어떤 자기합리화를 통해서라도 그 길을 걷는 것이 지금까지 우리나라 기업의 성공방식이며 변화가 없다면 앞으로도 그렇게 될 것이다.


선은 목적이지 수단이 아니다. 그러니 선의 승리를 위해 온갖 수단을 강구해보자. 



첫째, 선의 요구


선을 수단으로 사용해 지금까지의 부도덕한 경영을 포기하고 건전하고 올바른 경영방식과 함께 노동자들의 업무환경개선 및 대우 상승(최저임금 상승 포함)을 요구하는 것이다.


물론 이게 가능했으면 진작에 가능했다.



둘째, 지금까지 방식의 실패


지금까지의 방식인 부도덕한 경영을 실패하게 만들면 된다. 노동자를 위한 법(최저임금 상승 포함)강화와 부정부패 처벌을 강화하는 등 부도덕한 경영을 아예 할 수 없게 만드는 것이다. 


하지만 이 방식은 경영자가 곱게 받아드릴 리가 없다. 이윤추구를 최고의 선으로 생각하는 기업들이 자발적으로 받아드릴 리는 없고 강제적으로 한다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회피할 확률이 높다. 


일례로 올해 최저임금16.4프로 올려 1060원 올렸다. 그것만으로도 경영자는 힘들다며 불만을 토로하고 있는 상황이다. 이 상황에서 그들을 설득할 수 없다면 최저임금 상승으로 손해 본 만큼 다른 방법으로 이윤을 추구할 확률, 그러니까 부도덕한 방법을 사용할 확률이 높아진다. 그러니 그들을 설득해 자발적으로 참여하게 할 수 없다면 상책이라 보기는 어렵다.



셋째, 다른 방식으로의 성공


협상의 기본은 서로간의 신뢰를 쌓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노동자와 경영자는 자신들의 선을 당연하게 여겨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고 적대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그러니 제대로 된 협상이 될 리가 없다. 이렇게 오랜 세월 악화된 관계 속에서 서로간의 신뢰를 위해 물꼬를 트는 것은 최저임금이 적합하다. 왜냐하면 특정 기업이 아닌 나라에 속한 모든 노동자와 경영자에게 직접적으로 연관이 있기 때문이다.


‘최저임금을 올리는 것이 노동자와 경영자(노사) 서로에게 득이 된다’ 라는 인식을 만들 수가 있다면 그것을 통해 서로의 신뢰를 구축하고, 그것을 시작으로 부도덕한 경영방식을 하나하나씩 자발적으로 하지 않는 흐름을 만들 수 있다.


물론 이 방법은 그냥 내 생각일 뿐, 다른 더 좋은 방법이 있다면 그걸로도 좋다. 


그럼 차근차근 설명해보겠다.


최저임금 상승은 대기업보단 중소자영업자들에게 영향이 큰 편이다. 그러니 그들 입장에서 시작한다.


기본적으로 최저임금 상승은 소비자의 소득증가 및 소비증가로 결국은 자영업자들에게 돌아올 돈이기는 하다. 하지만 그들은 지금까지 자신들의 방식인 ‘적게 주고 조금 더 번다’ 로 성공했고, 성공하는 모습을 배우며 사업을 했다. 최저임금 상승이 언젠가 수입으로 돌아온다고 한다고 해도 그것은 확실한 미래가 아니기에 불투명한 미래보단 현재의 방식을 고집하게 된다.


더구나 하루 벌어 하루 사는 중소자영업자들도 많이 있는 상황에서 모든 경영자들을 설득을 하려면 확실한 이익을 보장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 요컨대, 소득이 올라간 만큼 내수시장소비증가가 된다는 보증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다.



그 보증을 만드는 것, 그것이 서로의 신뢰를 구축하는 첫 길이다. 우선 노동자와 경영자의 중간에 서서 흐름을 주도할 누군가가 필요하다. 보통 정부관계자가 될 것이다.


이를 테면 이런 것이다. 이미 지난 이야기긴 한데 가정을 해보자. 정부관계자는 내수시장소비증가를 미끼로 경영자를 설득한다. 그 다음 이렇게 발표한다. “올해 최저임금을 원래 10%를 올리려고 했으나, 노동자들을 위해 16.4%로 올린다. 만약 이후 내수시장소비가 증가한다면 내년엔 더 올릴 계획이다.”


요컨대, Give and take 관계를 성립시키는 것이다. 그 다음 대중을 설득한다. 선동이나 조작이 아니다. 설득을 하라는 이야기다. 모두가 다 납득할 만한 정론과 상대방 입장을 고려한 이득을 통해 대중을 설득한다.


대중을 설득 하기 위해서는 먼저 대다수 국민들이 그 내용을 알아야 한다. 언론은 물론이고, 대중적으로 영향력이 높은 사람들을 설득한다. 정부관계자라면 커넥션 정도는 준비되어있을 것이다.


“노동자와 경영자의 Give and take 관계를 성립시킬 수 있다면, 서로가 이익이 되어 모두가 행복해질 수 있다.” 고 설득하면 된다고 본다. 방법이야 어떻게든 설득하면 되겠다.


그 뒤 언론 발표와 영향력을 가진 인사들의 말을 사람들이 어떻게 받아 드리는지 면밀히 관찰하고 분석한다. 흐름을 주도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유동적이어야 한다. 여론의 흐름을 보고 그 순간, 순간 적합한 행동을 하여 대중을 설득한다.


“경영자들이 손해를 각오하고 최저임금 상승에 찬성했다. 그러니 우리 노동자들도 그에 대한 보답으로 내수시장소비를 해야 한다.” 라고 여론이 생기기 시작하면 반쯤 성공했다고 봐도 되겠다. 


그 뒤 실제로 내수시장소비가 증가되었다면 그것을 바탕으로 노동자와 경영자의 신뢰관계가 시작되는 것이다. 정말 막연한, 뚜렷한 보증이 없는 상황에서 서로간의 믿음만으로 시작된 일이 실제로 성공하게 된다면 이제는 믿을 수밖에 없게 된다. 


협상의 기본은 신뢰관계. 이렇게 해서 신뢰관계가 생겨야만 비로소 노동자와 경영자는 서로를 이해하고 협상할 수 있는 상황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 신뢰를 바탕으로 부도덕적인 경영 하나하나씩 바꿔나가기 시작한다면 분명 자발적으로 바꾸리라 생각한다. 이 흐름에서 벗어나려는 경영자가 있다면 아마 고립되지 않을까? 그야말로 전국민 프로젝트가 성공한 것이나 다름없는데, 벗어나면 진짜 나쁜 놈이 된다. 표적, 그러니까 불매운동이라던가 말이다. 벗어날래야 벗어날 수가 없다. 


그리하여, 우리나라 기업은 도덕적인 경영을 하게 되었다. …  면 좋겠다.



뭐.. 이건 내 생각일 뿐, 실제로는 몹시 어려울 것이 분명하다. 이런 방법보다 중요한 것은 원인이다. ‘선을 당연하게 여겼기 때문에 발생했다’ 라는 원인이 있다면 그것을 바꾸기 위한 방법은 다양하게 강구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이 글을 읽어주는 사람들에게 말하오니, 자신의 선을 추구할 때 부디 당연하게 여기지 말고 노력을 아끼지 말아주길 바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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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개월 전 쓰고 싶었던 글을 이제야 쓰게 됩니다. 그 때 하고 싶었던 말을 드디어 마무리 짓는군요. 하하.. 하. 장소를 바꾸니 의욕도 떨어져 늦어졌습니다만 뭐 제 사정이야 아무래도 상관없겠지요.


저는 보통 사물을 볼 때 본질을 보기 위해 양파껍질 벗겨내듯이 사건의 본질과 무관한 부분을 벗겨냅니다. 선악을 벗기고 역할을 벗기고, 개성을 벗기고, 좀 더 다양한 것들을 벗겨내어 알맹이가 만들어내는 파장, 흐름, 영향력을 관찰하고 수집합니다. 그래야 본질을 보고, 그래야 제가 원하는 흐름으로 만드는데 쓸 수 있기 때문이지요. 잘못된 정보(편견이나 선입견 등)는 흐름을 주도하는데 큰 방해가 되거든요. 물론 이 이야기는 보통 가상에서의 이야기입니다. 현실을 소재로 하더라도 말이죠.


어쨌든 이건 제게 아주 자연스러운, 그러니까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물론 저도 압니다. 제게 당연한 것이 다른 사람에겐 당연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말이에요. 하지만 자각하고 있지 않는 이상 그 부분을 보충하기는 어려웠어요. 대화를 통해(가상이든 현실이든) 나와 다른 사람의 다른 점을 느끼게 되고 나서야 제 실수를 깨닫기 마련이죠. 아 또 실수했구나.


제가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과 실제로 벌어지는 현상을 분리하고, 착하고 나쁜 것과 능력 유무를 분리하고, 제 상황과 다른 사람을 분리합니다. 그렇게 하여 본질을 보려고 했습니다. 그것이 이젠 습관화가 되었지요.


그러다 보니 어쩐지 좋아하는 것이나 저와 연관된 것에는 좀 더 엄격해지는 경우가 많아지더군요. 객관을 유지하기 어렵다고 해야 할까, 아니 결국은 제멋대로였습니다만, …… 변명에 변명하며 도망쳤지만 설마 하는 마음은 있습니다. 조금 과격하거나 제멋대로라 미움 받는 경우도 있었지만 어쩐지 제 글을 좋게 받아드린 분도 있다는 것을 말이죠. 하지만 그것을 받아드리면 편애할 거 같아 두렵더군요. 솔직히 편애한 적도 있긴 합니다. … 설마 했거든요.


그리고 실망할까 봐 두려웠습니다. 이상한일이지요. 처음과는 다르게 아무것도 안 한 것 같은데 미움 받거나, 아무것도 안 한 것 같은데 호의를 받을 때가 있었습니다. 그럴 땐 ‘아, 또 누군가 내 뒷담을 한 걸까’ 하며 차분한 마음으로 응시합니다. 물론 처음에는 괴로웠습니다만 계속 겪다 보니 무뎌진 탓인지 차분해지더군요. 어쨌든 적의보단 호의가 기분은 좋았습니다. 하지만 그만큼 걱정이 들었습니다. 언제 또 그 호의가 적의로 바뀔지 모르니까요. 뭔가 상대방에게 직접 영향을 끼친 기억은 없는데 말이죠. 그 경험 덕에 저는 되도록 남의 이야기나 소문 때문에 태도를 바꾸지는 않으려 했습니다. 그 괴로움 아니까요. 직접 경험하고 판단해야겠지요. 아, 앗. 참 이건 현실에서의 이야기입니다. 이 경험 때문에 두려웠을 뿐이에요.


…… 뭐 결국은 변명입니다. 죄송합니다. 



다음 글은 무의식에 관한 글입니다.

그 다음은 삶의 의미, 인공생명, 바둑의 미래 셋 중 하나 써보고자 합니다.


아, 인공생명 하니까 생각나서 미리 이야기 합니다. 몸에 이로운 것이 사회에 이롭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그 둘은 분리해서 생각해주세요. 배고파서 빵을 훔쳐 먹으면 몸에는 이롭지만 죄책감으로 마음이 상하고, 사회적으로 죄가 됩니다. 몸과 마음이 편하기 위해 시험 공부를 하지 않으면 성적이 떨어지겠지요. 마음이 상하게 될 겁니다. 그렇다고 시험 공부만 하면 몸과 마음이 지쳐 아프겠지요. 밸런스를 취하길 바랍니다.



자신의 선을 당연하게 여기지 않는다면 보다 더 행복한 추석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여러분, 행복하세요.


아, 음 (어쩐지 고개를 들기 어렵긴 하지만) LCK 힘내요.

선을 당연하게 여기는 것과 승리를 당연하게 여기는 것과는 다릅니다.


개천절과 추석이네요.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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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인공지능, 사람이 될 수 있는가 (3) 2017/08/15 AM 11:50

인공지능, 사람이 될 수 있는가


0. 인공지능

 

알파고의 등장은 인류가 시대가 바뀌는 순간을 체감하는 사건이었다. 인류의 자존심이던 바둑이 정복되는 것을 보며 인공지능의 시대가 왔음을 전세계가 알게 되었다.

 

그것은 진정 인류가 인공지능에 대해 본격적인 관심을 가지게 된 사건이었다. 사실 알파고 이전에도 인공지능 기술은 발전되고 있었지만(딥 큐 러닝) 대중의 관심을 끌기에는 많은 부분에서 부족했다. 구글은 그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인류의 자존심인 바둑을 정복함으로써 시대가 바뀌는 것을 세계에 알린 것이다.


 

바둑이 정복당하고 나서 인공지능에 본격적인 관심을 가지게 된 사람들은 코앞에 다가온 혁명에 기대감과 두려움을 안게 되었다. 인공지능을 통해 보다 더 윤택한 삶을 기대하면서도, 인공지능에 일자리를 빼앗기는 것에 두려움을 느끼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 두려움은 허상이 아니었다. 무인상점의 선두주자인 아마존은 아마존 고를 선보이면서 판매원의 일자리를 날려버렸다. 그 외 다양한 분야에서 인공지능이 사람을 대신하고 있으며 대신할 예정이다.

 


하지만 한계는 명확했다. 구글 검색어 [인공지능 의지]

 

인공지능은 자유의지를 가질 수 없다.”

 

구글 창업자 브린의 말이다. 그렇다. 현 인공지능은 바둑을 정복할 정도로 발전했지만, 사람이 입력하지 않으면 안 되는 약 인공지능에 불과하다. 그들에겐 자아가 없다. 계산기가 아무리 어려운 계산을 하더라도 입력해주는 사람이 없으면 의미가 없는 법이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미래에도 인공지능을 수리할 엔지니어의 일자리는 남아 있을 거라 예측한다. 인공지능이 인공지능을 개발 혹은 수리하는 단계가 되려면 자유의지, 자아를 가지게 되는 강 인공지능이 필요하다.

 

구글 검색어 [인공지능 자아]

 

그러나 현재기술로는 가까운 미래에도 불가능하다고 한다.


일각에선 그 원인에 대해 뇌 과학 기술이 부족해서 그런 것이라 추측하기도 한다. 현재 뇌 과학 기술은 쥐의 뇌 구조를 일부 재현하는 수준이라고 하니 사람의 뇌 구조를 재현하는 것은 확실히 머나먼 길임이 분명하다.


지금 이대로라면 말이다.

 

나는 인공지능 전문가가 아니다. 하물며 프로그래머도 아니다. 그런 방향은 애초에 나보다 그들이 훨씬 더 뛰어나다. 그럼에도 돌파구를 찾지 못한다면.. 어쩌면 방향이 잘못된 것이 아닐까..?


 

 

1. 자아

 

강 인공지능의 필수조건인 자아, 자아는 무엇이고 어디에 있는 것일까?

 

위키백과 [자아]

[자아(自我, ego)는 생각, 감정 등을 통해 외부와 접촉하는 행동의 주체로서의 '나 자신'을 말한다.]

 

자아란 즉, 자기자신을 뜻한다. 모든 경험(감각 사고 행동)을 통해 변화를 이루더라도 변화 전과 후가 동일하게 자기자신임이 확신하는 것을 말한다고 한다.

 

그렇다면 자아, 자기자신이라는 확신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그에 관해 세상은 다양한 추측을 내놓았다.

 

 

첫째는 혼이다.

 

인류의 역사와 함께해온 대부분의 종교에서 영혼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을 보았을 때, 종교적 관점에서 탄생한 추측이라고 본다. 이 추측은 많은 문화에 영향을 끼쳤다. 최근 재미난 애니메이션인 너의 이름은도 이를 기반으로 탄생하였다. 남녀가 몸이 바뀌는 바람에 생기는 해프닝으로 시작되는 이 이야기는 혼에 자아가 깃든다는 전제가 있어야 성립되는 이야기다.

 

몸이 바뀌는 이야기는 꽤 좋아하여 이런 작품들을 흥미롭게 접하며 즐기지만 혼을 과학적으로 증명한 사례가 없다 보니(정확히는 모른다) 이 추측에 대해서는 약간 부정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다고 하겠다.

 

이것은 꽤 예민한 문제로 여기까지만 쓰겠다.

 

 

둘째는 뇌다.

 

뇌를 과학적으로 연구하기 전까지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영혼에 자아가 깃든다고 믿었었다. 하지만 뇌를 연구하면서 상황은 바뀌기 시작했다. 사람의 감정이나 욕구가 뇌의 활동으로 일어난다는 것이 증명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많은 과학자들은 뇌에 자아가 깃든다고 믿게 되었다. 대표적으로 마인드 업로딩이 있다. 이것은 신경과학자 랜달 코엔의 프로젝트로 사람의 뇌를 복사해 컴퓨터에 넣으면(뇌 에뮬레이션), 사람은 컴퓨터 속에서 영원히 살 수 있다고 주장했다.

 

최근엔 알파고의 아버지 데미스 허사비스도 이렇게 말을 한다. 인공지능의 다음 단계인 범용인공지능(인간의 뇌 수준)은 인간의 뇌를 연구하여 인공지능 기술과 결합해야만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그 외에 많은 과학자, 기술자들은 뇌에 자아가 깃든다고 믿었고, 그것은 다양한 방면에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죽은 자의 뇌를 냉동 보관해 미래에 소생시킬 수 있다고 주장한다거나(실제로 있다), 뇌를 이식한다거나 말이다.(이것도 실제로 있다)

 

뇌 냉동보관이나 뇌 이식은 다소 황당한 주장이었지만, 결국 뇌에 자아가 깃든다는 전제가 있어야 성립되는 이야기다.

 

현재 대부분의 기술의 방향은 이쪽으로 뇌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는 과정 중이다. 하지만 앞서 말한 것처럼 뇌 과학 기술이 부족해 앞이 보이지 않는 상황이다. 그래서 다른 방향으로 생각해보았다.

 

 

셋째는 생명이다.


 

 

2. 생명

 

사람은, 아니 생명체는 살아있기에 자아를 가질 수 있다. 자아란 생명 그 자체에 깃든다고 생각한다. 인간의 행동을 뇌가 관장하기 때문에 뇌에 깃든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는 아니다. 명령은 뇌가 내리는 것이 아니라, 몸이 뇌에 요청하는 것이다.

 

몸이 수분이 부족하다고 요구하면 뇌는 어떻게 수분을 섭취할 수 있는가에 대한 사고를 시작한다. 그리고 사고 끝에 행동을 취한다. 냉장고에 가서 물을 마신다거나, 상점에 가서 물을 산다거나, 냇가에 가서 물을 마신다거나 등의 다양한 선택에서 골라 행동한다. 그것은 몸이 없으면 불가능한 행동이다.

 

먹는 것, 자는 것, 싸는 것은 전부 몸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태생이 불완전한 몸을 가지고 태어난 생명체는 살아남기 위해 생각해야만 했다. 몸이 요구하는 에너지를 섭취하기 위해 먹었고, 몸이 요구하는 수면을 위해 잠을 잤고, 몸이 요구하는 불필요한 것을 배출하기 위해 쌌다.

 

필멸, 생명체는 반드시 죽기 때문에 종을 남겨야만 했다. 그 과정 속에서 나타난 감정과 욕구가 얼마나 많은가? (여담이지만 불멸자의 자아는 생명체의 자아와 같을 리가 없다)

 

그리고 생명 유지, 종의 유지를 위한 몸의 요구에는 마땅한 대가가 주어졌는데 그것이 바로 쾌감이다. 밥을 먹으면 기분이 좋다. 잠을 자면 기분이 좋다. 싸면 기분이 좋다.(성적인 의미 포함) 이 쾌감은 보다 더 다양한 감정과 욕구를 부르게 되었다. 이 쾌감을 얻기 위해 불합리한 행동을 하는 것이다.

 

이런 모든 생명체의 활동은 몸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 생명체의 자아는 생 그 자체에 깃든다고 보는 게 맞는다고 본다.

 

인간의 경우 다른 생명체와 다르게 지능이 높기 때문에 보다 더 고도화된 활동이 가능하지만, 근본적으로는 다른 생명체와 다를 바 없다. 모든 감정과 욕구의 근간은 생의 유지, 종의 유지로부터 발생하기 때문이다.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의 눈물을 아는가.

자살하는 돌고래를 들어보았는가.

동물도 감정과 욕구가 빚어내는 자아를 가지고 있다.

차이는 그저, 지능뿐이다.




3. 마음

 

생을 유지하기 위한 몸의 요구에 대한 대가인 쾌감은 정신건강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몸의 건강이 아닌 정신건강을 위해서라도 먹고 자고 싸는 것은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그 외에 정신건강에 필요한 모든 행위는 뇌가 뇌에 요구하여 이루어진다. 정신건강은 뇌 내 물질분비로 결정되는 것으로 정신건강에 이로운 물질을 분비하기 위한 행동을 한다. 이를테면 취미에 매진한다거나, 술을 마신다거나 등등 건전한 취미부터 시작해 일견 보기에 불합리한 행동으로 보일지라도 정신건강을 위해서 하는 행동이다.

 

몸이 살기 위해서 음식을 섭취하는 것처럼, 마음이 살기 위해서 다양한 행동을 한다. 스트레스를 푼다거나 말이다. 그리고 그 행동에 실패하면 죽는다. 정신건강에 해로운 물질이 분비되기 시작한다. , 자살이다.

 

이런 정신적 행위는 지능이 높을수록 고도화된다. 지능이 높은 돌고래가 쉽게 자살하는 까닭은, 두뇌가 두뇌에게 요구하는 것이기 때문에 지능에 큰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반면 지능이 낮을수록 자살하는 빈도가 낮다. 구글 검색어 [동물원 동물 자살]

 

지능이 높은 돌고래는 친하던 사람과 헤어졌다는 이유로 자살을 택했지만, 지능이 낮은 동물은 끔찍한 상황에 처해야 자살을 택했다. 뭐 사람이 자살하는 것을 보면 생존과 무관하게 자살하지 않나. 지능이 높을수록 큰 영향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

 

음식을 먹는데 실패하면 몸이 죽지만, 정신건강에 도움이 되는 행동에 실패하면 마음이 죽는다. 스트레스를 풀기 위한 행동을 무조건적으로 막는 것은 마음이 살기 위해 몸부림 치는 것을 막아 마음을 죽게 만드는 행동임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몸이나 정신의 요구는 살아가기에 필요하니까 요구하는 것임을 잊으면 안 될 것이다.

 

몸이 망가지기 시작하면 각종 병으로 증상이 나타나는 것처럼, 마음이 망가지기 시작하면 증상이 나타난다. 술에 의존하거나 약에 의존하는 것이다. 술이나 약에 의존하는 것은 두뇌가 두뇌에게 요구하는 것이다. 정신건강에 필요하니까 술을 마시라고, 약에 빠지라고 요구하는 것이다.

 

약에 중독되어있던 병사가 고향에 돌아와 마음의 평안을 되찾자 약을 끊었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술이나 약이 몸에 악영향을 끼침에도 계속 마시거나 먹는 까닭은 마음이 죽어 자살하는 것보다 몸이 고장 나는 쪽이 좀 더 오래 살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

 

그러니 술이나 약을 끊게 하고 싶다면 마음의 평안을 찾는 방법을 모색해야 할 것이다.

 

이런 정신활동 또한 마음이 살기 위해 두뇌가 두뇌에게 요구하여 발생하는 것으로 생의 유지를 위해 필요한 일이다. 자아는 두뇌에 깃드는 것이 아닌, 생 그 자체에 깃든다고 보는 게 맞다.

 

 

 

4. 퀘스트

 

몸이 두뇌에 요구하는 것이나, 두뇌가 두뇌에게 요구하는 것의 공통점은 내부에서 오는 요구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외부에서 오는 명령이 없어도 스스로 생각과 행동이 가능하다. 불완전한 몸과 마음이 요구하는 다양한 퀘스트를 해결하기 위해 두뇌가 생각한다. 그것을 가리켜 자유의지라 부르고,  의지를 가진 자기자신임을 확신하는 것을 가리켜 자아라고 한다.

 

이것을 전제로 보았을 때, 인공지능과 사람의 차이는 불완전한 몸(두뇌포함)의 퀘스트가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다. 생명체의 자아가 생 그 자체에 깃든다는 전제가 있다면 인공지능은 진작에 다른 방향으로 개발되었어야 했다. 지금의 인공지능은 외부에서 오는 명령밖에 없기 때문이다.

 

잠깐 다른 이야기를 하겠다. 사람들은 인공지능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까? 대체로 상품이란 측면으로 보고 있다고 본다. 상품은 완벽하지 않으면 안 된다. 실수가 없는 인공지능을 개발하기 위해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그 행동이 완전한 인공지능을 만드는데 걸림돌이 되고 있다. 자아가 생 그 자체에 깃든다고 보았을 때, 자아를 가지려면 생명체가 가지고 있는 불완전한 마음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완벽한 제품을 만들려고 하는 과학자와 기술자는 그런 불완전함을 용납할 수 없었다.

 

그 때문에 인공지능은 자아를 가질 수가 없었다. 애초에 사람이 완벽하지 않는데, 사람을 흉내내기 위한 인공지능은 완벽하게 만드니 사람이 될 수 없는 건 당연하다.

 

인공지능이 강 인공지능’, 그러니까 자아를 가지기 위해서는 생명체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줘야 한다. 컴퓨터라는 가상세계에 있는 인공지능에게 첫 번째 줘야 할 것은 바로 죽음이다.

 

생명을 유지해야 하는 이유인 죽음이 가장 먼저 필요하다. 죽음이 있기에 생의 유지와 종의 유지가 필요한 법이니까.

 

죽지 않기 위해 가상의 에너지를 섭취하지 않으면 안되도록 설정하고, 수면을 취해야 활동할 수 있도록 설정하고, 불필요한 것을 배설(제거)해야 활동할 수 있도록 설정한다. 그리고 그것을 해결하면 대가인 쾌감을 얻도록 설정한다. 또한 특정활동(취미 등) 마음의 평안을 얻게 하는 행동을 하지 않으면 스트레스를 받게끔 하여 특정활동을 스스로 선택해 하게끔 유도한다.

 

이런 불완전한 몸과 마음이 요구하는 퀘스트를 딥러닝을 탑재한 인공지능이 학습하면서 해결하는 것이야말로 스스로의 질문에 스스로가 답하는, 스스로 생각하는 자아가 탄생하는 것이다.

 

인공지능에 불완전한 몸과 마음을 주는 것. 즉 인공생명의 탄생이다.

 

 

자아를 갖춘 (범용) 인공지능그것은 불완전한 몸과 마음을 가진 인공생명이 탄생해야 가능하다고 단언하겠다.

 

인공지능이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단순하게 두뇌를 구현할 것이 아니라, 사람이 가진 불완전한 부분까지도 모두 가지고 있어야 비로소 사람이 될 수 있다.

 

 

 

5. 불안

 

사실 일자리를 빼앗긴다는 것은 사소한 두려움이다. 진짜 무서운 것은 인공지능이 인류를 지배해버린다거나, 자신들보다 부족한 인류를 버릴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건 지금 이대로라면 딱히 걱정할 필요가 없지 않을까 싶다. 그들에게 불완전한 몸이 없는 한 자아가 탄생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만약 그들에게 몸을 줘 생명을 불어넣는다면, 어쩌면 정말로 위험해질지도 모른다.

 

그러니 제안하건대, 사람이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 음식을 먹는 것처럼, 인공생명이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 사람에게 봉사해야 살아가기 위한 에너지를 얻을 수 있는 것으로 설정한다면 서로에게 득이 되는 방법이 아닐까.

사람이 내뿜는 이산화탄소를 먹는 식물이 산소를 내뿜는 것처럼, 인공생명과 사람이 서로 공생하기 위한 프로세스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보다 더 나은 세상, 보다 더 흥미로운 세상이 오길 바라며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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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내려서 기분이 좋네요

좀 더 정리해야 될 것 같으니 종종 업데이트 하겠습니다.

 

대한독립만세.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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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zack    친구신청

제 생각엔 일단 나와봐야 안다고 생각됩니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공상과학에나오는 ai가 나올것인지, 아니면 다른 ai가 나올것인지 나오기전까진 어떠한 판단도 결국 상상에 불과한것이라
예상은 할수있되 그게 옳다고 판단하는건 아닐거 같네요

0산타크루즈0    친구신청

내 작은 촌충<< 이라는것을 한번 찾아보시길

CapDuck    친구신청

인공지능이 사람 따라 가겠죠? 아마?
[글] 휴식의 의무, 노는 게 죄인 사회의 비극 (4) 2017/05/05 AM 03:01

1. 나는 즐기지 않았다


"나는 즐기지 않았다." 


한 유명한 전 농구선수의 말이다. 국내 최고가 되기까지의 과정이 고통스럽고 힘들었다고 회고했다. 왜 그는 그런 말을 해야 했을까.


분명 일반적인 이야기는 아니다. 대중스포츠는 취미로 시작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더욱더 즐기는 사람이 많다. 재능이 같다면 즐겁게 노력하는 사람의 능률을 억지로 하는 사람이 따라잡을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보통 즐기는 사람이 최고가 되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말했다. 분명 즐기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 사회적 배경을 고려한다면 그 말은 다른 측면으로 해석될 수도 있다.



우리 사회는 노는 것을 부정적으로 생각한다. 그 원인은 다양하다. 그 중 하나는 조금이라도 남들보다 더 노력을 해야 살아남을 수 있는 과도한 경쟁사회였기 때문이다. 그 원인은 높은 것을 귀하게 여기고 낮은 것을 천하게 여기는 존중의 척도 때문에 조금이라도 남들보다 더 높게 올라가려 했기 때문이었다.


그런 연유로 할 일을 마치고 놀고 있어도 잔소리를 듣는다. 놀고 있는 동안 영어 문장 하나라도 외우라고 타박하며 노는 것 자체를 부정적으로 여긴다. 논다는 것은 곧 죄라고 인식하는 것이다.



'놀다'라는 말의 뜻은 다음과 같다. '직업이나 업무와 관련이 없는, 어떤 일이나 행동을 재미있고 즐겁게 한다.' 그렇다. '직업이나 업무와 관련이 없는' 이라는 전제가 있지만 보통 뭉뚱그려 생각한다. 즐기는 것은 노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는 이야기다.


노는 걸 죄악시하는 사회 속에서 노는 것으로 받아드릴 수 있는 '즐겼다'라는 표현을 어떻게 쓸 수 있겠는가.





2. 휴식의 의무


노는 걸 죄악시하는 사회 속에서 우리는 쉬지(놀지)않고 고생해야 노력했다는 평가까지 나오게 되었다.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본 이야기다. 한 IT기업에서 유능한 인재가 근무 시간 안에 자기 할 일 이상을 해냈음에도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했다고 한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야근을 하지 않아서'


반면, 능력이 부족해 밥 먹듯이 야근을 하는 사람은 고평가를 받았다고 한다. 어처구니없지만 이게 우리나라 사회의 모습니다. 쉬지 않고 고생해야만 노력했다고 생각해 고평가를 하는 황당한 상황이야말로 노는 걸 죄악시하는 사회가 만들어낸 병폐다.



'마스터키튼' 만화에서 본 이야기다. 정확히는 기억이 나지 않는데, 납치범과 협상하는 협상가의 원칙 중 하나가 휴식의 의무라고 한다. 하루 8시간은 꼭 자둬야 말짱한 정신으로 납치범과 협상을 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중요한 협상시간에 휴식이 부족해 실수라고 저지르면 어떻게 할 것인가. "아, 졸려서요." 변명이 된다고 생각하는가. 출처는 불분명하지만, 확실히 일리가 있는 이야기다.



그렇다. 사람은 쉬어야 말짱한 정신으로 일을 할 수 있다. 말짱한 정신 속에서 일을 해야 능률도 오른다. 졸리고 피곤한데 능률이 오를리가 없지 않는가. 사람이 피곤하면 신경이 날카로워지고 짜증도 늘어나 협업에도 차질이 빚어지기 마련이다. 일의 능률을 올리려면 휴식은 반드시 필요한 일이다.


그런데도 쉬지 않고 고생해야 노력했다고 평가하기 때문에 주간에 놀고 야간에 야근을 하며 일하는 비정상적인 상황까지 발생했다. 이게 뭐하는 일인가. 애초에 업무량이 많으면 사람을 늘려야하는 것이고, 업무량이 적당하면 야근 할 필요가 없다. 어리석은 평가기준으로 일의 능률을 낮추는 행위는 지양되어야 한다.


그뿐만이 아니다. 그런 식으로 장시간 노동을 하다보면 사람 자체가 망가진다. 인류의 선은 인류의 생존과 번영. 사람을 망가뜨리는 휴식 없는 장시간 노동은 그 집단에 속한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는 악이다.



이제는 알아야할 것이다. 휴식을 보장하지 않았던 까닭은 노는 것을 죄악시하는 사회가 만들어낸 것이었다. 휴식은 일의 능률을 올려주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필요한 일. 그것을 모르는 우리 사회는, 어쩌면 협상가의 원칙처럼 휴식을 의무화해야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 사회의 비극이다.





3. 게임


게임은 사람이 휴식 중 즐길 수 있는 여가다. 그러므로 노는 것을 죄악시하는 사회의 인식은 게임에게 해가 된다. 그런 관점에서 게임사의 입장(다른 문화산업도 마찬가지다)에선 휴식에 대한 인식이 바뀌는 편이 좋다.


보통 게임사의 근무환경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우리나라는 구로의 등대라는 말이 들릴 정도로 IT업계, 특히 게임업계는 야근을 많이 한다. 휴식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다. 아니, 어떻게! 사람들의 여가를 책임지는 문화산업이 휴식을 긍정적으로 생각하지 않을 수 있는가?


이해가 되지 않는다. 게임업계야말로 앞장서서 휴식의 가치를 설파하고 다녀야하는 것 아닌가? 사람들이 쉬는 것을 긍정적으로 생각해야 쉬면서 게임을 할 것 아닌가? 하긴 뭐, 일하면서 할 수 있는 모바일게임 양산을 하고 있으니 별 상관없을지도 모른다. 최근 배틀그라운드라는 게임이 나와 우리나라 게임 산업에 청신호가 켜졌지만 아직도 모바일게임이 대세를 이루고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온라인게임은 아니다. 온라인게임회사야말로 앞장서서 직원들의 휴식을 보장하고, 사람들에게 휴식의 필요성을 역설해야하는 것이 아닐까?


흔히 모범을 보여야하는 사람들이 종종 하는 실수가 있다면 일에 대한 모범만 보여준다는 사실이다. 휴식 또한 모범을 보여야 사람들이 본받을 수 있다. 게임업계가 휴식의 모범을 보여 본받을 수 있도록 하는 게 어떠할지.



쉬어야 능률이 오른다. 휴식을 의무화하지 않더라도 필요해서 쉬는 것이 권장되는 사회가 만들어질 바라며 글을 마친다.



다시 한 번 말하겠다. 쉬어야 능률이 오른다. (첨언하길, 투표도 권리지만 인식이 나쁘죠. 여러분, 투표를 휴식처럼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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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취ㄴㄴ    친구신청

FM에서도 휴식없이 선수 혹사시키면 똥망

인간은 기계가 아닙니다
기계도 쉬는 시간을 줘야하는데 사람은 더더욱 ㅠ

고기가먹고싶어    친구신청

우리나라의 노동에 대한 인식은 1920년대 미국과 비슷한 것 같아요. 어떤 면에서는 그보다 못한 것 같고.

최후의수    친구신청

100% 놀기만 한다는 거도 아니고.. 정말 잘 쉬어야 능률이 더 오르는데..
눈앞의 단기적인 목표에만 몰두해서 황금알 낳는 거위의 배를 가르는게 사회적인 분위기인게 안타깝습니다

푸른머리 무    친구신청

노동으로는 선진국 말 꺼내기 민망한 나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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