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국가의 인간교육
자유국가의 교육은 지식의 주입이 아닌 사고방식과
행동원리의 파악과 설계다. 인공지능으로 비유하면 데이터의 입력이 아닌 알고리즘의 설계다. 인공지능은 알고리즘을 설계해두면 알아서 데이터를 수집한다. 그와 비슷하다. 학생이 본인을 파악하고 설계할 수 있으면 타인의
간섭이 없어도 알아서 필요한 지식을 수집한다. 자발적으로 목적을 결정하고 그 목적을 위해 노력한다. 교사가 일일이 간섭하지 않아도 학생이 알아서 공부를 한다. 얼마나 이상적인 교육인가? 한국은 교육열은 높으나 학구열은 낮다. 그에 따라 자발적으로 공부하고 싶어하는 학생이 상대적으로
적은 편이다. 그러니 이런 이상이 이해하기 어려울 수도 있다. 하나 인간의 특성을 떠올려보면 가능하다는 걸 알
수 있다. 한번쯤은 무의식적으로 같은 행동을 반복한 적이 있었을
것이다. 습관이나 파블로프의 개나 루틴 같은 것이 바로 그렇다. 인간은 사고방식이나 행동원리가 한번 정립되면 의식적으로
바꾸려 하지 않는 이상 무의식적으로 정립된 것을 그대로 하게 되어 있다. 공부는 습관이 중요하다는 말도 이런 것에 근거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단순히 습관을 들이라는 것이 아니다. 그런 습관을 들이는 교육은 자아의 파악과 설계가
아닌 단순한 행동반복을 하는 것일 뿐이다. 그런 단순함은 공부하는 습관을 길러줄 수는 있을지언정 자아의 형성에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 한국은 반복적인 학습으로 습관을 들여 지식을 주입하고 있다. 그러나 그러면 개인의 고유성이 말살된다. 제대로 된 자아의 형성이 끝나기 전에 교육이 맹목적으로
지식을 주입하면 지식이 자아를 잡아먹어 지식 자체가 자아의 일부가 된다. 교육받은 대로 언행을 하는 인간. 사랑을 집어넣으면 사랑을 말하고 증오를 집어넣으면 증오를 말한다. 그 어떤 개성도 갖추지 못한 채 주입 받은 지식대로만
행동한다. 고정된 형식에 집착하며 남의 눈치를 보게 된다. 고학력자가 쉽게 휘둘리고 선동되고 세뇌되는 것은
온전한 자아를 갖추기 전에 지식에 잡아 먹혔기 때문이다. 빼곡한 지식을 촘촘하게 주입 받은 학생은 문제에 대한 답을 빠르고 정확하게 풀 줄 알게 되었다. 하나 지식의 활용방법인 능력의 상품화에 대해서는
어떤 개념도 갖추지 못했다. 시험용 인간이 되었던 것이다. 이래 놓고 창의력을 논하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그 상태에서 사회에 내동댕이쳐졌다. 지식으로만 가득 찬 인간은 시장에 공급되어 지식의 활용방법을 아는 인간에게 사용되었다. 인간 자체가 시장경제의 도구가 되어버렸다. 학교에 학생이 운반되면 머리를 열어 지식을 주입하고
봉합한 뒤에 품질을 시험하고 상등품은 시장에 고가에 팔려나갔다. 도구 제조다. 지식 주입 평가 시험에 통과 못한 하등품은 다른 성능이 뛰어나도 평가 받지 못한 채 버려지게 되었다. 고가에 팔려나간 상등품도 다른 성능이 낮으면 빠르게
버려지게 되었다. 이런 관점에서 자아형성 전에 지식주입을 통한 선행학습과
월반조기졸업은 조기제조와 조기출하다. 아이를 학원에 보내어 쉴 틈도 없이 지식을 쑤셔 박히게 만드는 학부모가 있을 것이다. 그렇게 해서 아이가 선행학습을 마치고 월반이나 조기졸업을 하면 기뻐했을지도 모른다. 분명히 말해두겠다. 자아형성이 우선되지 않으면 그런 건 그냥 도구 제조에
불과하다. 얼마를 쏟아 붓든 그건 아이를 위해서가 아니다.
인간교육은 인간을 교육하는 것이 아닌 인간이 되게끔
하는 교육이다. 다양한 힘을 체험하여 시야를 넓히고 강한 의지를
유지한 상태에서 온전한 자아를 갖춘 채 현명한 지성을 가진 인간이 되면 알아서 필요한 지식을 공부한다. 그런 인간이 자신의 능력을 상품화하여 소유한 다음
대여의 형태로 거래할 수 있으면 시장경제의 도구로 전락하지 않을 수 있다. 능력을 상품화할 수 있어야 정당하게 그 능력의 소유권을 주장할 수 있다. 그 소유권이 있어야 기업과 대등하게 거래할 수 있다. 교육이 학생에게 순수한 이타심을 요구하며 상품화를
가르치지 않은 결과 인간 자체가 상품화가 되어 팔려나가 도구로 쓰이고 있다. 이게 정상으로 보이는가? 능력의 상품화는 소유한 능력을 타인에게 필요로 할 정도의 매력을 갖추는 걸 의미한다. 모든 사람이 능력을 상품화하여 서로가 서로를 필요로
하는 관계가 되는 것. 상품의 필요한 정도에 따라 대가를 달리 받는 것. 이것이 무엇이 나쁜가? 오히려 바람직하다. 타인에게 필요한 매력적인 능력은 금전거래가 아니더라도 인간관계를 돈독히 하는데 필요하다. 뛰어난 능력을 지닌 사람이 취업이 어려운 까닭은 능력은 뛰어나나 능력의 상품가치가 낮아
그 능력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적기 때문이다. 취업이 어려우면 창업을 하는 것이 마땅하다. 자신의 능력을 상품화할 수 있으면 그 어떤 것도 상품화할 수 있게 된다. 다른 걸 상품화할 수 있게 되면 창업도 어려운 게 아니게 된다. 한국에서 창업할 곳이 없으면 해외로 나가도 된다. 그들이 그런 걸 못하는 까닭은 상품화를 하는 입장이
아닌 상품화가 되는 입장으로 교육받았기 때문이다. 우수한 인재가 취업에만 매달리며 창업을 하지 못하는 게 정상이 아님을 반드시 알았으면 좋겠다. 한국은 공무원이 유망직종이다. 한국이 공무원에 집착하는 사회가 된 까닭에는 사상적으로는 개인이 집단에 종속되어 평생
안정적인걸 올바르다 주장한 사회주의적 노동운동에 있고 정치적으로는 IMF 때문에 입법한 법에 의한 시장의 노동환경악화에 있고 경제적으로는 기술발달로 인한 노동력 필요감소와
후발주자 진입이 어려운 자본주의의 특성에 있고 교육적으로는 자아형성 전 맹목적인 지식주입으로 인한 인간 자체의 상품화에 있다. 능력의 상품화가 익숙했다면 공무원 열풍이 불 수가
없다. 그런걸 배운 적이 없으니까 안정적인 공무원에만 매달리는
것이다. 앞으로 기술의 발달로 일자리가 줄어들어 이제는 기초소득이나
아이디어뱅크 같은 것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사물의 상품화 능력이 뛰어나다면 가상의 세상에서 가상의 상품으로 장사한 게임업계처럼 새로운 상품을 파는 게 가능할지도 모른다. 그러면 일자리 감소로 인한 대책에 과한 의존을 하지
않을 수 있어 기술발달로 인한 시대의 변화를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을 거라 본다. 이제는 상품화에 대한 인식이 달라져야 한다. 원석을 보석으로 만드는 게 상품화다. 지금 교육은 원석을 다듬지 않았다. 사람들을 끌어당기는 매력이 부족하다. 정리하겠다. 모든 인간이 강한 의지를 유지한 상태에서 온전한 자아를 갖추는 것. 자아를 갖춘 인간이 현명한 지성으로 능력을 상품화하여
소유한 뒤 대여의 형태로 거래를 하는 것. 이것이 인간교육이다. 이런 인간교육이 자유국가에서 교육이 맡은 역할이고 이걸 수행하는 것이 교육의 자유적응이다. 자유적응이 무엇인지 예시를 통해 잠시 알아보도록 하겠다.
자유주의 사회는 사회에 속한 사람들을 자유롭게 해도
알아서 잘 굴러가는 걸 목적으로 한다. 일일이 간섭하지 않아도 출산율이나 학구열이나 취업률 따위가 높은 수준으로 유지되어야 한다. 경제나 치안이나 복지 따위도 마찬가지다. 알아서 고수준으로 유지되어야 한다. 자유롭게 해도 알아서 잘 하는 것. 이런 것이 자유적응에 성공했다 할 수 있다. 반대로 자유롭게 했는데 잘 안되면 자유적응에 실패했다 할 수 있다. 예컨대 이런 것이다. 경제(재계, 기업 등)를 시장에 맡겼는데 부의 분배 문제로 국민이 불행하다면 경제는 자유적응에 실패한 것이다. 정부가 일일이 시장에 간섭하지 않아도 부가 온전하게 분배되어야 한다. 그러나 경제에서 비정규직이나 위험의 외주화 같은걸
하는 시점에서 제대로 된 분배를 할 생각이 없었다. 그러니까 국민들에게서 큰 정부에 대한 갈망이 솟아나오고 있는 것이다. 경제는 국민의 행복은 정부의 역할이라 항변할 수 있다. 그걸 위해 세금을 내고 있지 않냐고 반문할 수 있다. 그런데 그런 주장이 바로 큰 정부를 정당화한다. 큰 정부가 높은 세금을 받아 계획적으로 부를 분배한다. 그게 큰 정부가 아닌가? 경제는 규제와 억압이 적은 작은 정부를 바란다고
알고 있다. 작은 정부를 바라면서 국민의 행복은 전부 정부에게
떠넘기는 것은 자가당착이다. 작은 정부를 바란다면 정부와 경제가 같이 그런 역할도 담당해야 한다. 그것은 분야의 대표가 입법권을 쥐는 것으로 시작해야 한다고 본다. 경제에 포함되는 분야 또한 직접적으로 정치에 참여하여
국민을 행복하게 하는데 힘을 써야 한다. 국민의 행복은 기존 같이 직원이 기업에 충성하고 기업이 직원을 책임지는 종속적인 관계 속에서 자본가의 이타심에 의존하는 것으로 얻는 게
아닌 경제시스템 자체가 자연스럽게 제대로 된 부의 분배가 되게끔 하여 얻게 해야 한다. 분야에 속한 국민이 분야의 대표를 통해 직접 입법을 하여 본인들이 겪는 부조리와 부당함을
해결하고 분야에 필요한 개혁을 시도한다. 어떤 사람은 분야의 대표에게 입법권을 주면 분야의 이익만을 위한 법안을 추진할거라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생각해보자. 분야의 대표라 해도 몇 석 되지 않는다. 어떤 분야의 대표가 입법을 하면 나머지 대표들이
찬성해야만 법안이 통과된다. 그러니까 자연스럽게 전체의 이익을 전제로 한 분야의 이익을 추구하게 될 수밖에 없다. 지역의 대표가 치적을 위해 부동산 개발에 앞장섰던 것처럼 분야의 대표는 치적을 위해 분야의
개혁을 시도할 수밖에 없다. 자연스럽게 발전한다. 국민의 의사표현도 시위를 할 것이 아니다. 국민이 보다 적극적으로 정치에 참여하여 공적 논의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면 된다. 그것이 정 어려울 때 마지막 수단으로 시위를 하는 것이 정상적이다. 작은 정부와 큰 의회. 이것이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에 적합하다 본다. 경제를 예로 들어 자유적응을 알아보았다. 다른 분야도 다 마찬가지다. 자유롭게 해도 잘되면 자유적응에 성공했다 할 수
있다.
인간이 연관된 문제는 인간에게 책임을 돌리는 순간부터
답을 찾을 수 없게 된다. 몇 가지 생각해보자. 연령차별은 민족에게 부과된 장유유서라는 도덕적 의무로 발생했다. 차별의 의무였으니 연하를 지배하려는 꼰대의 등장은 매우 자연스러웠다. 성별갈등이나 이념갈등도 정조관념이나 민족통일 같은
도덕적 의무가 영향을 끼쳤다. 정치선동은 정치체제의 결함으로 발생했다. 한국인이 선동을 당했던 것은 직간접적으로 실제 겪은 피해 때문이었으나 애초에 지역중심의 정치체제 자체가 선동에 취약했기 때문이다. 조금도 관련이 없는 사람을 정치적 대표라고 뽑아야
되는 시점에서 정상적일 수가 없다. 이와 같이 대부분의 문제는 인간 개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미시적으로 접근하면 개인의 잘못일 수 있으나 거시적으로 접근하면 개인의 잘못일 수가 없다. 내가 만약 인간에게 책임을 돌렸다면 나와 연관된
문제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없었다. 인간과 연관된 문제를 해결하고자 한다면 기억해야 할 것이다. 여기서부터 잠시 나에 대한 얘기를 하겠다. 인간의 생각은 경험에 영향을 받아 사상의 줄기가 될 때가 있어 어떤 주장을 펼칠 때에는
개인사를 얘기할 필요가 있다. 나는 도덕적 의무로 망가졌다. 한국은 연령차별을 도덕적 의무로 교육받는다. 장유유서. 어른과 어린이 사이의 도리는 엄격한 차례가 있고
복종해야 할 질서가 있음을 이른다. 한국은 인간이 인간에게 복종하는 것이 도덕적 의무였다. 나도 예외는 아니어서 어른에게 공손히 복종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 명령으로 인해 수년간 어른에게 제대로 된 의사표현을
하지 못하다가 자존심이 갈갈이 찢어지는 사건에서 어른에게 의사표현을 실패한 뒤 스스로에 대한 깊은 실망과 절망과 불신으로 삶을 포기하고는 운명에
기대어 흘러가는 대로 살았다. 엉망진창이었다. 이것이 일반적이지는 않다. 보통은 그냥 한때의 해프닝으로 끝났을 것이다. 많은 생각과 높은 자존심과 의지할 사람이 없는 환경이 나를 고독한 고뇌로 몰아갔다. 당시 의사표현을 하지 못했던 까닭은 연상에게 복종하라는 도덕적 의무 때문이었지만 그때에는
그런 이유를 몰랐다. 다른 사람에게 의지하지 못하고 마음이 꺾인 상태에서 이유에 대해 끊임없이 생각하다가 절망에 구렁텅이에 빠졌던 것 같다. 애초에 세상은 모순이 너무 많았다. 과학과 종교의 모순이나 인간평등과 연령차별의 모순이나
성을 중요시하면서 성을 터부시하는 모순 따위는 당시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이후 알게 된 독재반대를 하면서 독재자 찬양을 하는 것도 이해하기 어려운 모순 중 하나였다. 주위에는 그런 의문에 대답해줄 사람이 없었다. 있어도 의지했을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홀로 다른 사람은 이해 못할 괴상한 고통 속에서
답을 찾으며 모든 것을 증오했다. 사소한 것에도 짜증이 나고 신경질이 났다. 눈이 따가워서 보통 밤에는 방 안의 불을 껐다. 귀가 아파서 소음을 지우는 비를 좋아했다. 도덕적 의무로 과도한 일탈이 허용되지 않자 그 짜증은 내적으로 파고들어갔다. 자학. 과도한 스트레스로 얼굴을 쥐어뜯고 벽을 펜으로 긁어대고 휴지를 뭉텅이로 뭉쳐 던지고 놀았던 기억이
남아있다. 자존감이 바닥까지 추락했다. 그럼에도 특정 인간에게 책임을 물을 수가 없었다. 화내고 삐치고 울어도 책임을 묻는 것은 할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그게 답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고통스럽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나를 망가지게 한 과도한 도덕적
의무의 부과는 어떤 사건이 계기였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 일로 추정된다. 집 주변 백화점의 마켓에서 어떤 이벤트를 시작했다. 고객이 유통기한 지난 상품을 발견하면 마켓에서 고객에게 그 상품을 3배로 보상했다. 예컨대 고객이 유통기한 지난 라면 1개를 발견하면 마켓은 고객에게 발견한 라면의 3배로 보상했다. 마켓의 철저한 상품관리를 홍보하기 위해서 이벤트를
열었던 것 같다. 그걸 보고 어린 나는 잔꾀를 냈다. 유통기한이 지나기 쉬운 우유를 선반 아래에 쉽게
보이지 않게끔 숨겼다. 유통기한이 지난 후에 선반 아래에서 꺼내 계산대로 들고 가서 뻔뻔하게 보상을 요구했다. 아마 바나나 우유였던 것 같다. 그 우유에 빨대를 꽃아 마시며 놀았던 것 같다. 몇 차례 그걸 반복하다가 직원에게 붙잡혔다. 수상하다 여긴 어떤 직원이 CCTV를 확인한 듯 했다. 나는 직원용 사무실로 가서 CCTV가 촬영한 내가 우유를 숨기는 순간을 보게 되었다. 그때 CCTV에 대한 지식이 없어 깜짝 놀랐던 것 같다. 부모님이 소환되었다. 경찰서에 연락은 하지 않았던 것 같다. 어린 나이에 작은 금액에 절도도 아니다. 단지 상품을 쉽게 보이지 않게끔 숨겼을 뿐이다. 그러니 마켓에서도 처리하기 곤란했을 것이다. 이후 어떻게 처리되었는지는 모른다. 그저 엉엉 울 정도로 회초리를 맞은 기억 말고는
없다. 이 사건은 기억의 편린을 재구성한 것뿐으로 정확하지는
않을 것이다. 분명하게 기억하는 것은 마켓과 유통기한과 회초리다. 생각해보면 나는 교활했다. 나는 내가 교육받은 나쁜 행동을 하지 않았다. 절도는 나빠요. 훔치지 않았다. 거짓말은 나빠요. 속이지 않았다. 교육받은 정해진 룰 내에서 이익을 취했다. 그것에는 어떤 죄책감도 없었다. 차라리 절도였으면 평범하게 해결했을 것이다. 절도가 나쁘다는 건 쉽게 알 수 있으니까 말이다. 나는 그 사건 때문에 회초리를 맞으면서 왜 맞아야
하는지 정확히 몰랐던 것 같다. 그냥 나쁜 짓이니까 맞았다. 여기서부터 비틀리기 시작했던 것 아닌가 싶다. 아이는 혼난 이유를 정확히 몰라 불만을 품고 부모는 이상한 아이라 여겨 과도한 도덕적 의무를 강요한다. 그러면서 능력을 가지치기 당했다. 어떤 능력이 잘못을 낳을 가능성이 있으면 원천 차단
한다. 성욕이 잘못을 낳을 가능성이 있으면 그 욕망 자체를
부정하는 것으로 욕망을 꺾어버린다. 어른에게 반항할 것 같으면 도덕을 명분으로 의지를 꺾어버린다. 성적 매력과 의지를 잃어버린다. 이런 게 바로 능력의 가지치기다. 이런 건 다 알고 있을 것이다. 당해봤고 해봤기 때문이다. 아이를 쉽게 다루기 위해 순종적인 부분을 제외하고는 다 가지치기 해버린다. 그러면서 다양한 능력이 개화될 수 있는 꽃망울도
제거된다. 다른 나무와 다툼이 없게끔 전부 가지치기하고 오로지
올곧게만 자라게 한 나무는 아무런 꽃도 피우지 못한다. 얼마나 슬픈 모습인가. 이때 좀 더 현명한 대처를 했다면 이렇게까지 망가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훔치거나 속이지 않았지만 유통기한을 조사하는 직원에게 피해를 입혔다. 그렇다면 아이가 직접 유통기한 조사하는 일을 며칠간
해보고 스스로 잘못을 깨닫게 했어야 했다. 그러면 아이는 불만을 품지 않고 부모는 맹목적인 도덕적 의무의 강요하지 않았을 것이다. 적당히 교활하고 요령 있게 처세를 잘하면서 나름 즐겁게 성장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들이 그런 걸 알 리가 없다. 나의 부모는 배운 대로 했을 뿐이다. 뺨이나 종아리를 때리는 것도 차별을 도덕적 의무로
강요한 것도 성에 대한 억압도 그저 올바르다 배운 대로 했을 뿐이다. 그걸 알면서 어떻게 탓할 수 있겠는가? 친척에게 무릎을 꿇고 머리를 박은 다음 돈을 받는 굴종을 경험한 것도 동네어른에게 전단지
돌릴 때 혼 난 것도 교사에게 김치를 강제로 먹여진 것도 이것도 저것도 나를 망가지게 한 대부분이 그저 그들이 배운 대로 한 것이었을 뿐이다. 대부분이 도덕적 의무였단 말이다! 수백 번 수천 번 수만 번 셀 수도 없이 생각해봐도
그것은 인간의 책임이 아니었다. 화가 나는데 화를 풀 상대가 없다. 뜨거운 열기가 내부에서 속을 태운다. 도덕적 의무가 감성을 억제하고 지성이 찾은 결론이 이성을 억제한다. 순간 화가 치밀어 욕이 튀어나와도 그것은 갈 곳을 잃고 방황한다. 속이 뒤틀리게 되었다. 그 뒤틀린 상태에서 끊임없이 원인을 찾다가 불필요한
도덕적 의무가 내 망가짐의 원인임을 알게 되었다. 인간이 아니라 사상이 문제였다. 인간에게 부과된 도덕적 의무는 없다. 교육도 다르지 않다. 가르치는 인간이 문제가 아니라 사상이 문제다. 인간을 도구로 제조하여 납품한 교육계를 탓할 생각도 없고 탓해서도 안 된다. 단지 알았다면 변화해줬으면 좋겠다.
인간에 사회를 맞추면 자유주의고 사회에 인간을 맞추면
사회주의다. 어떤 현상이 발생할 때 인간에게 책임을 묻지 않고
인간에 맞춰 사회를 바꾸는 게 자유주의고 인간에게 책임을 묻고 사회에 맞춰 인간을 바꾸는 게 사회주의다. 사회민주주의는 민주적 절차가 있어 이 경계가 약간
애매한데 기본은 그렇다. 이 구분은 문제해결방식을 정하는 굉장히 중요한 것이므로 기억해주기 바란다. 자유국가는 인간에 사회를 맞춰야 한다. 인간이 어떤 특성을 가지고 있으면 거기에 맞춰서 사회를 변화시켜야 해야 하는 거지 어떤
관습에 의해 정해진 부당한 규율을 강요해서는 안 된다. 그러지 않고 사회에 인간을 맞추면 인간을 사회에 맞게끔 강요할 수밖에 없게 된다. 예컨대 이런 것이다. 인간에게 성욕이 있다. 그 성욕이 잘못을 낳는다. 그러면 잘못을 최소화한 상태에서 성욕을 만족시킬 수 있는 사회를 유지하는 것이 자유주의다. 반면 인간의 성욕이 잘못되었다고 판단하고 인간의
성욕을 해소할 수 있는 성상품의 전면불법으로 대응하는 게 사회주의다. 한국은 후자다. 유교의 특성인 이타주의적 강요가 사회주의의 특성과 비슷하여 비슷한 결과가 나온다. 이러니 한국은 본래 사회주의가 적합하단 말을 하게
되는 것이다. 독일이 성매매 합법화를 한 것을 보면 사실 사민주의보다
못하다. 한국은 포르노조차 금지한 것을 보았을 때 중동의
신정주의 수준이다. 이제는 바꿔야 한다. 나는 중학생 때까지 성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했다. 그런 정보는 전부 차단되어 있었다. 성교육이라는 것은 말만 그럴듯한 단순한 이미지와 문자의 나열에 불과했다. 그런 건 어떤 정보가치도 없었다. 성에 대해 모르는 상황에서 나타난 신체적 변화는 나를 더욱더 고통스럽게 만들었다. 성욕을 해소하기 위한 자위는 수치스러운 것이었다. 만약 그때 내게 성에 관한 정보가 있었다면 당시의
고뇌의 일부를 덜었을 것이다. 왜 정상적인 행동을 부끄럽고 굴욕적이게 만들었나. 만약 다른 정보도 얻었다면 보다 빠르게 절망에 빠진 원인을 찾았을지도 모른다. 그저 어리다는 이유로 무시하고 제멋대로 강요하니 제대로 성장할 리가 없다. 인간의 어리석음을 전제로 한 연령제한. 멋대로 인간의 한계를 단정짓고 멋대로 정보를 차단하는
꼴을 보면 분통이 터진다. 알고 있지 않나! 본인 과거를 떠올려봐라. 성년의 정보를 접했다 하여 무엇이 달라졌는가? 대다수는 어린 시절에 성년의 정보를 접해도 아무 문제가 없다. 육체연령과 정신연령은 다르다! 일부 문제가 발생하는 아이 때문에 정보차단 당한 아이들은 온전한 성장을 하지 못하며 다른
아이들에 비해 뒤쳐져버렸다. 소년범죄가 많다는 걸 안다. 그 때문에 정보차단을 하고 있다는 걸 안다. 그러나 잘못된 걸 잘못되었다 인지도 못할 능력이 부족한 아이 때문에 다른 아이들이 손해를 봐서야 되겠는가? 소수의 잘못을 해결하기 위한 사회를 구축하고 거기에
모든 인간을 맞추면 어떻게 하나. 왜 나머지 다수의 희생을 당연시하느냔 말이다! 소수를 위해 다수가 전부 희생하는 것이 잘못되었다. 지금 한국은 농가를 위해 모두 비싼 농작물을 먹어야 하고 유통업계를 위해 모두 비싼 물건을 써야 하고 중고자동차업계를 모두 전부 안심하고
중고자동차를 구매할 수 없어야 한다. 건설업계를 위해 쓰레기나 오물이 나오는 아파트에서 살아야 하고 택시업계를 위해 저질 택시 서비스를 감내해야 하고 노점상을 위해 길거리 미관을
포기해야 한다. 눈 앞에 불쌍한 사람을 돕는데 치우쳐 전체를 볼
수 없는 이타주의는 이런 걸 해결할 수가 없다. 인간은 어리석지 않다. 멋대로 인간의 한계를 규정하고 멋대로 정보를 차단하는 일은 있어서 안될 것이다. 어차피 이제는 인터넷으로 정보차단도 제대로 못한다. 그러니 정보를 전부 공개하고 그 정보를 다룰 줄
아는 인간이 되게끔 교육해야 한다.
미성년에 대한 통제와 억압을 자행하는 무리 중에
이들이 가장 안쓰럽다. 바로 여성주의자들이다. 여성은 도덕적 의무로 차별 받았다. 대표적으로 부위부강이 있다. 아내는 남편을 섬기는 것이 근본임을 이른다. 여성은 남성의 아랫사람이었다. 그런 여성은 남성이 다루기 쉽게끔 입맛대로 세뇌되었다. 여성은 의지가 약하고 소극적이고 수동적이라 교육받았다. 이를 가리켜 약화교육이라 하자. 남성을 위해 정조관념을 강요 받았다. 정조를 지키는 것이 미덕이었다. 그 영향으로 정조를 잃은 이는 결혼을 하기 어렵고 과부는 재가를 하지 못했다. 약화교육과 정조관념을 강요당한 여성은 의지가 약해지고
성에 취약해졌다. 의지약화로 관계의존도가 높아지고 자립심이 낮아지고
시야가 좁아지며 감성적이게 되었다. 과거 여성의 사회진출이 낮았던 것은 환경 이전에 애초에 그렇게 되게끔 교육되었기 때문이다. 성 취약으로 성에 대한 수치심이 굉장히 강해졌다. 사소한 접촉이나 시선으로도 불편함을 느꼈다. 여성 성 상품화를 보면 마치 자신이 모욕을 당한듯한
기분을 느꼈다. 이런 교육을 받은 이들은 일그러진 자아를 갖게 되었다. 그런 이들이 서양의 여성주의를 접한 뒤 그 자아가
여성의 본성이며 그걸 지키는 것이 여성인권이라 주장하기 시작했다. 여성은 의지가 약하고 수동적이며 성적 수치심이 높다 외쳤다. 그걸 빌미로 온갖 혜택을 주장했다. 사법도 흔드는 성인지감수성의 등장이나 여성할당제나
여성주차장 따위가 생겨났다. 평등을 말하면서도 여대폐지나 여성징병은 외면했다. 여성은 열등하기 때문에 혜택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야말로 여성열등주의다. 분명하게 말해두겠다. 여성은 열등하지 않다! 여성주의자는 그런 말도 안 되는 주장이 무엇을 근거로 하는지 단 한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는 듯 하다. 의지박약이나 성적 수치심이 여성의 본성이라 주장할
거라면 현대 문명과 멀리 떨어진 원시 부족 여성을 보라. 그들이 문명인과 같은 의지박약이나 성적 수치심을 느끼던가? 그런 걸 여성의 본성이라 주장하는 말도 안 되는 소리는 하지 말아야 한다. 그건 그냥 교육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인간에 사회를 맞춰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거짓된 본성까지
맞출 이유는 없다. 진지하게 묻겠다. 여성주의라는 서양에서 온 사상을 입맛에 맞게끔 바꿔 받아드리면 내면에 새겨진 유교사상이 지워질 거라 생각했나? 그럴 리가 없다. 전혀 지워지지 않았다. 여성을 열등하게 보던 그 교육이 그대로 남아있다. 연령차별이라는 도덕적 의무에서도 해방되지 못한 사람들이
그런 거 할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런 도덕적 의무는 어떻게 하지 못하면서 차별금지법을 운운하는 것은 정말 어이가 없다. 여성주의자는 남성이 주입한 여성을 억압하는 내면의 코르셋은 건들기는커녕 여성의 본성인
것처럼 소중하게 대했다. 외면에만 집중하며 외면의 코르셋만 벗자 주장했다. 그렇게나 차별 당하고 고통 받으며 절망 속에서 학력과 능력을 쌓은 인간이 내린 성별차별에 대한 해결방법이 고작 외적인 남성흉내라니. 탄식하게 된다. 남성을 흉내내면 평등해질 거라 생각했던 건가? 탈코르셋을 여성인권이라 주장하며 다른 여성에게 단발과
밋밋한 옷차림을 강요하는 걸 보면 소름이 끼칠 정도다. 그건 자유의 영역이지 여성인권의 영역이 아니다. 머리스타일과 옷차림은 개인의 자유다. 그걸 강요하는 것이 잘못되었다. 여성주의자는 여성을 위한다고 말하면서 여성의 능력을 무시하고 성적 억압을 하고 성에 취약하게 만드는 도덕적 의무를 행했다. 이것은 마치 과거 남성의 꼭두각시와도 같다. 성적 억압을 받는 국가가 여성이 차별당하는 중동국가임을
안다면 여성의 성적 억압이 이상하다는 걸 느꼈어야 했다. 여성이 성을 불편해하는 게 정상일 수가 없다. 여성이 여성 성 상품화를 불편하게 느끼는 것은 과거 남성에게 정조관념을 세뇌 당했기 때문이다. 노출이 심한 옷을 입거나 성적 자유를 누리는 여성이 불편해진다. 이런 그릇된 도덕적 의무에 세뇌 당한 과거 여성주의자가
그걸 여성인권이라 주장하며 다른 여성들을 세뇌하여 똑같은 불편함을 새겨 넣었다. 과거 남성이 과거 여성을 세뇌하고 과거 여성이 현대 여성을 세뇌한다. 이게 바로 억압이 인권이 되는 과정이다. 헛웃음이 나올 수밖에 없다. 여성 성 상품화에 대한 비판의 근거는 남성이 여성을
성적 착취한다는 인식 때문일 것이다. 그걸로 불편해한다. 그런데 그게 사실은 여성을 무시하는 거다. 여성에게 성적 주도권이 전혀 없다고 생각하니까 일방적으로 남성에게 착취당한다 생각하는 것이다. 여성을 단지 남성에게 착취당하는 나약한 존재라고 생각하니까 불편해하는 거란 말이다. 과거 받은 약화교육이 대를 이어서 여기까지 영향을
끼치고 있다. 만약 여성이 성적 주도권을 쥐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런 생각이 나타날 수가 없다. 남성이 성적 주도권을 쥐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남성 성 상품화가 불편하지 않듯이 말이다. 여성의 성적 억압은 여성의 성 관념과 남성의 성 관념을 비교해보면 잘 알 수 있다. 여성이 강한 성적 수치심을 가진 것은 그냥 그렇게
교육받았기 때문이다. 이런 측면에서 여성 성 상품화에 대한 분노는 여성에게 무례한 짓이다. 남녀 관계없이 성 상품화는 강요일 때에만 문제가 발생한다는 점을 강조하겠다. 누구보다 여성을 위한다고 말하는 사람이 사실은 남성에
세뇌된 채로 말하는 것이었다니. 이런 건 정말 가엾은 광대를 보는 기분이다. 이런 짓을 혼자 하면 모르지만 사회가 수용해버려서 지금 사회혼란에 절정에 이르고 있다. 왜 그랬다고 생각하는가? 그건 기성세대와 여성주의자의 이해가 서로 일치했기 때문이다. 여성에 대한 혜택은 늘었어도 여성이 열등하고 소극적이고
수동적이라는 인식은 같았다. 열등하니까 천대하자. 열등하니까 혜택주자. 근거는 똑같단 말이다. 왜 사회가 그런 말도 안 되는 혜택과 억압과 통제를 수용했는지 알았으면 좋겠다. 과거 남성의 꼭두각시들이 여성과 아이를 위한답시고 열등함을 세뇌하고 통제와 억압을 강요한다. 여성은 장애인과 같은 혜택이 필요하고 사리분별이
불가능하여 성인지감수성의 도움이 필요할 정도로 열등하다고 세뇌한다. 여성은 성 상품화나 꾸밈의 자유도 없게끔 통제와 억압을 강요한다. 아이는 정보 수용능력이나 성적자기결정권이나 선거
주권이 없을 정도로 열등하다고 세뇌한다. 아이는 사생활이나 문화의 자유도 없게끔 감시 앱을 설치하도록 하고 게임 셧다운제라는 통제와 억압을 강요한다. 여성과 아이가 의지박약이나 성에 취약해진 걸 보면
정말 짜증이 난다. 오랜 세뇌의 결과물인지는 모르겠는데 미성년이 그런 열등함이나 억압을 올바르다 주장하는 걸 보면 미칠 것 같다. 하긴 여성들도 본인들을 열등하다 주장하며 억압하는
걸 올바르다 받아드리고 있으니 이상한 것은 아니다. 세뇌의 힘이란 진정 무시무시하다. 한국에는 이런 이들이 사회에 많은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걸 안다. 이제는 여성차별적인 도덕적 의무에서 벗어났으면 한다. 아동차별적인 도덕적 의무에서 벗어났으면 한다. 그 따위 열등함이나 억압이 인권일 리가 없다. 여성과 아이는 열등하지 않단 말이다! 억압해서는 안 된단 말이다! 이제는 여성과 아이도 시야를 넓혀야 한다. 나는 화가 난다. 세상을 평등하게 바꾸겠다고 나서는 이들이 되려 차별하던
과거로 역행 하는 걸 보고 화가 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래도 선동이나 세뇌 당한 이들에게까지 책임을 물을 수는 없다. 그저 지금부터라도 변화했으면 좋겠다.
인간에게 책임을 돌리지 않고 인간에 사회를 맞추는
것이 자유국가의 방식이다. 어떤 범죄자가 있다 가정하자. 그 범죄자는 자신의 죄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 피해자는 법을 통해 범죄자에게 책임을 물을 수가 있다. 하나 사회는 그 범죄자에게 죄에 대한 책임을 돌리지 않고 범죄자가 죄를 저지르게 된 근본적인 원인을
찾아야 한다. 빈곤이면 빈곤을 줄일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제도면
제도를 개선할 방법을 찾고 사상이면 사상을 바꿀 방법을 찾아야 한다. 그렇게 해서 범죄율을 줄여야 한다. 그러지 않고 개개인에게 책임을 돌려봐야 범죄 원인이 무엇이냐는 문제에 대한 답을 찾기는커녕
증오의 확산만 부추길 뿐이다. 어떤 사이코패스가 있다 가정하자. 사이코패스는 감정이 결핍되어 보통 범죄를 저지를 확률이 높다는 선입견이 있다. 그런 사이코패스에게도 사회가 맞춰야 한다. 사이코패스라고 해서 멸시하고 차별할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그런 개성을 가지고 다른 사람들과
같이 온건하게 살아갈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 사이코패스는 단순한 감정결핍장애다. 사이코패스를 차별하는 것은 장애인을 차별하는 것과 같다. 사이코패스도 본인이 감정결핍장애를 겪고 있다는 걸 인지하고 자신에게 맞춘 사회에 최대한 적응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이런 것이 자유국가의 방식이다. 교육도 다르지 않다. 학생의 문제를 학생에게 책임을 돌리지 않고 학생에 교육을 맞춰야 한다. 어떤 길이든 가야 할 방향을 정하지 않으면 헤매게 된다. 확실히 정해두고 가는 것이 좋다. 교육은 이 방향으로 걸어야 한다. 그럼 그 방향이 어떤 걸 의미하는지 몇 가지 알아보도록
하자.
첫째, 인간의 의지. 인간은 강한 의지를 타고난다. 대부분 그렇다. 아기를 생각해보자. 아기는 우는 것으로 의사표현을 한다. 눈치보지 않고 큰 소리로 울어버린다. 이런 걸 보았을 때 인간의 의지박약은 후천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라 볼 수 있다. 교육은 이런 인간의 강한 의지를 유지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아기도 마찬가지다. 우는 아기에 맞춰 교육해야 한다. 그렇다고 모든 걸 맞추라는 건 아니다. 아기가 젖을 달라 계속 운다고 하여 젖을 계속 주면
과체중이 되어버린다. 그러니 아기에게 필요할 때에만 젖을 먹도록 버릇을 들이는 것으로 아기의 의지와 필요한 교육의 균형을 맞춰야 한다. 그렇게 하여 아기의 의지를 꺾지 않고 유지해야 한다. 교육은 이 의지를 학생의 자아형성이 끝날 때까지
섬세하게 관리하며 유지해야 한다. 지금까지는 아이의 의지가 꺾기는 일이 너무 잦았다. 곰곰이 생각해보자. 아이의 의지가 어른의 사정에 의해 윽박지름을 당하며 꺾인 적이 얼마나 많았나. 아마 대부분 경험해봤을 것이다. 그런 식으로 의지박약이 된 아이들은 쉽게 악의에 노출되었다. 집단 괴롭힘이나 성적 노리개나 상습 체벌에 저항하지
못했다. 강한 의지가 있었다면 피해를 입은 시점에서 바로
신고를 통해 저항했을 것이다. 의지가 약하니까 그러지 못했던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런 사건에 분개하면서 아이의 의지박약에는 초점을 맞추지 않았다. 이것이 잘못되었다. 피해자에게 잘못은 없다. 하지만 피해자를 약하게 한 자에게는 잘못이 있다. 그건 야생동물의 이빨과 발톱을 뽑아버린 뒤에 야생에
던져놓은 잘못과 비슷하다. 자유는 강한 의지를 전제로 한다. 의지박약인 피해자의 의지를 믿지 못한다면 피해자가 동일피해를 입을 것을 걱정하며 감시와 통제를 하는 수밖에 없다. 그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그러니 이제는 그러지 말아야 한다. 의지를 위해 모든 걸 아이에게 맞추라는 건 아니다. 어른에게 사정이 있으면 아이에게 설명을 하여 이해와
납득을 받으면 된다. 아이와 어른이 대등한 관계라는 걸 인지하고 서로를 이해하고 사랑하면 된다. 그러면 어른의 사정으로 아이의 의지를 들어주지 않더라도 아이의 의지가 꺾이지 않을 수
있다. 자아형성이 끝난 후에는 강한 의지를 유지하는 것은
알아서 해야 한다. 타고난 의지를 가진 인간에 교육이 맞추는 것이 자유국가의 교육이다.
둘째, 인간의 특성과 개성. 인간은 인간 본연의 특성과 고유한 개성이 있다. 우선 특성을 살펴보자. 대표적인 인간 본연의 특성은 욕구나 감정이다. 식욕과 수면욕과 성욕에 대해 알아보자. 하나, 식욕. 인간은 잡식동물이다. 고기와 채소에서 영양분을 섭취한다. 그런 인간에게 맞춰서 잡식으로 교육해야 한다. 그러지 않고 채식이 옳다는 이유로 채식을 강요하는
것은 잘못되었다. 유전적인 문제가 아닌 한 인간이 채식을 하는 것은
그릇된 도덕적 의무를 부과 받아 채식을 할 수밖에 없게끔 약해졌기 때문이다. 못 먹는 음식이 있다 하여 강요해서도 안 된다. 아이의 미각은 예민하여 어른이 먹는 음식을 먹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대표적으로 쓴 음식이 그렇다. 어른 입장에서 먹을 수 있다고 아이에게 강요하는 것은 부당하다. 커피를 생각해보면 애초에 시간 지나면 알아서 쓴 음식을 잘 먹을 수 있으니 초조할 필요도 없다. 음식은 골고루 먹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필수 영양분을
섭취하는 게 중요하다. 쓴 음식은 쓴 약을 먹게 하듯 필요하니 먹는 것이라 설득을 하거나 비타민 같은 걸로 영양분을 섭취할 수 있도록 하면 된다. 둘, 수면욕. 지식을 주입하는 것이 교육이라 생각하는 사람들이 수면시간을 보장하지 않고 맹목적으로 지식을 주입시키려
든다. 그것이 잘못되었다. 인간은 충분한 수면시간이 있어야 건강하게 성장하도록
되어 있다. 그런 인간에 맞춰서 수면시간을 보장해야 한다. 수면은 학습에도 도움이 된다. 자는 동안 뇌가 알아서 기억을 정리하기 때문에 학습에
도움이 된다. 셋, 성욕. 성욕에 대한 교육의 대처가 가장 이해하기 어렵다. 교육은 인간이 자신의 몸에 대해 알아가는 것도 포함된다. 식욕을 위해 먹는 방법을 배우고 먹는다. 수면욕을 위해 자는 방법을 배우고 잔다. 그런데 성욕은 그런 것이 없다. 명목상의 성교육 외에는 실제 성욕을 채우기 위한
방법을 제공하지 않는다. 성욕은 사춘기 무렵부터 눈에 뜨는데 성욕 발산을 위한 성적 문화는 만19세 이후부터 즐길 수 있도록 되어 있다. 그래서 다수의 사춘기 학생이 불법으로 성적 문화를 접한다. 불필요한 죄책감을 받으며 성욕을 해소한다. 다들 그걸 알면서 어쩔 수 없으니까 방치한다. 그러면서 표면상에서는 그 성적 문화에 한참 못 미치는
속옷만으로도 불건전하다며 규제하고 있다. 어처구니 없다. 이보다 더 가식적이고 기만적인 것은 없다. 인간에 교육이 맞춘다면 당연히 사춘기부터 성적 문화를 개방해야 한다. 본인 몸에 있는 기능을 배우고 쓰지 못하게 하는 건 인간으로 대우하는 게 아니다. 도구로 취급하는 것이다. 도구를 다루기 쉽게끔 기능 사용을 막은 것에 불과하다. 아이를 위해서라며 성적 문화를 금하고 있다는 걸
안다. 그런데 그건 도구취급에 불과하다는 걸 꼭 좀 알았으면
좋겠다. 이제 인간은 인간다운 대우를 받아야 한다. 금지가 관습이기에 행해진다고 말할 수 있다. 그건 왕정도 관습이니 행해져도 된다는 말과 같다고
말하겠다. 백성을 어리석게 취급하는 것이나 아이를 어리석게
취급하는 것은 같다. 관습이 인간을 도구 취급할 이유가 될 수 없다. 이제 개성을 살펴보자. 대표적인 인간의 개성은 특기나 적성이나 취미나 취향이나 지향이다. 학문으로 접근해보자. 인간의 개성에 맞춘 교육은 모든 학문을 고르게 잘하기 보다 잘하는 걸 확실하게 잘하게끔
하는 것이다. 인간은 개인의 개성에 따라 성장할 수 있는 한계치가
어느 정도 있다. 예컨대 운동이 그렇다. 운동은 체격적으로 한계가 분명하다. 학문도 예외는 아니다. 그러므로 높은 성장이 가능한 학문은 키우고 그렇지
못한 학문은 최저만 맞추면 된다. 각 역할에 맞는 능력만 확실히 갖추는 것이 이후 자동화 시대에 걸 맞는 인재다. 선진국은 단순한 물건이라도 거기에 부가가치를 만들어야 경제를 유지할 수 있다. 그건 보다 더 전문성을 키워야 해낼 수 있다. 물론 이는 학생의 자유의지로 결정해야 할 것이다. 취향으로 접근해보자. 외모지상주의가 잘못되었다고 말하면서 개인의 취향에
간섭하고 있다. 외모지상주의는 몰개성이 원인이다. 모두가 개성을 가지고 각자 다양한 취향을 가지게
되면 그런 문제는 어느 정도 해결이 가능하다. 그러지 않고 억지로 취향을 강요하는 것은 잘못되었다. 다양한 취향이 공존할 수 있는 개성을 존중하는 교육이 필요할 것이다. 성적 지향도 마찬가지다. 나는 동성애가 인류의 생존에 적합하지 않기에 긍정적이지
않지만 동성애의 자유는 인정한다. 특성 성적 지향을 지녔다면 거기에 맞춘 교육이 필요하다. 그렇다고 해서 동성애를 부추겨서는 안 된다. 동성애를 존중해야 한다고 말하면서 은근슬쩍 동성애를 부추기는 일이 있다. 이성애와 동성애 사이에서 성적 정체성 혼란을 겪는
학생에게 동성애를 부추겨 동성애가 되도록 만드는 것은 잘못되었다고 본다. 그것은 온전하게 학생이 결정해야 할 문제다. 본연의 특성과 다양한 개성을 지닌 인간에 교육이 맞추는 것이 자유국가의 교육이다.
셋째, 대등한 역할. 교사는 만능이 아니다. 사회는 이것을 받아드리지 못하고 있다. 어떤 교사의 경험담이다. 학계에서도 모르는 걸 교사가 아무도 모르는 거라고 가르쳤다. 그걸 학생이 부모에게 말하니 학부모가 항의했다고
한다. 어떻게 교사가 모른다고 말할 수 있느냐고 말이다. 모르는 게 정상임에도 교사는 그걸 안다고 말했어야
했다고 한다. 이런 현상이 단적으로 교사를 만능으로 보고 있다는
걸 의미한다. 교사를 의지를 넘어서 의존할 수 있는 존재로 인지하고
있다. 이것이 잘못되었다. 과거 교사는 체벌을 가해도 촌지를 받아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그 정도로 교사는 무한한 권리를 쥐고 있었다. 권리만큼 책임도 졌다. 그런 교사가 드물긴 했지만 말이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학생인권조례로 교사는 학생에게 함부로 대할 수 없다. 권리가 줄었다. 그런데 책임은 과거와도 같다. 권리는 낮은데 책임은 높으니 최근 교사는 힘든 것이다. 학생에게도 바람직하지 못하다. 나의 과거를 떠올려보면 내게도 교사는 만능이었다. 뭐든지 아는 존재라 생각했다. 그런 교사가 나의 의문에 답을 하지 못하자 세상
전체가 나의 의문에 답하지 못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만능이 대답하지 못한다는 것은 되려 나의 의문이 이상하다고 여기게 만드는 기제가 되었다. 차라리 교사가 만능이 아닌 줄 알았다면 스스로를 믿고 흔들리지 않으며 성장했을지도 모른다. 되돌려 교육에 방향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보자. 학생에게 책임을 돌리지 않고 학생에 교육을 맞춰야
한다. 이 말은 교사도 적용된다. 교사에게 책임을 돌리지 않고 교사에 사회를 맞춰야
한다. 교사도 사람이다. 교사도 사람임을 명확하게 학생과 학부모가 인지해야
한다. 교사가 쉬는 날 유흥업소에 간 걸 사람들이 알게
되자 분노했다고 한다. 어떻게 교사가 그런 건전하지 못한 곳에 출입할 수 있느냐고 말이다. 교사도 사람이다! 쉬는 날에는 여가를 즐길 수 있어야 한다. 단순한 유흥업소 출입조차도 막아버리면 교사는 어떻게 숨을 쉬나. 필요이상의 환상을 가지고 있으면 환상이 깨질 때
실망도 커지는 법이다. 교사도 인간이라는 인식이 있으면 인간다운 모습에 실망하지 않아도 된다. 일부 학생이 교사를 막 대하는 것도 어떻게 하든 만능인 교사는 언제나 학생의 편이 되어
줄 거라는 의존적인 믿음이 내제되어 있기 때문이다. 서로 대등하다면 그럴 수가 없다. 교사도 학생도 그저 역할만 다르고 대등하다. 교사는 가르치는 역할이고 학생은 배우는 역할이다. 학생은 특별한 권위가 없는 교사도 역할을 존중해야 하고 교사는 개성적인 학생이라도 역할을 존중해야 한다. 교사 또한 교사에게 책임을 돌리지 않고 교사에 사회를
맞추는 것이 자유국가의 교육이다.
인간은 종종 본질을 꿰뚫는 말을 한다. 노동자의 공노비와 사노비 농담이나 학생의 공부 해야
할 이유를 모르겠다는 토로와 같이 말이다. 노동자를 노비에 비유하며 조소하듯 농담한 것은 노동자가 본질적으로 농노와 다를 바 없는 현 상황을 정확하게 찔렀다. 학생이 공부 해야 할 이유를 모르겠다며 토로한 것은
학교의 맹목적인 지식 주입이 도구 제조와 같다는 것을 정확하게 찔렀다. 학생은 상품화를 하는 입장이 아닌 상품화가 되는 입장에서 교육받고 있으니 학생 자신을 위한 교육이라
느낄 수가 없었다. 도구로 제조되고 있다는 느낌 속에서 공부 해야 할 이유를 모르는 건 지극히 당연하다. 교사나 학부모도 모른다. 그러니 학생의 불만이 나오면 너를 위해서 또는 행복을 위해서라며 어물쩍 넘어가게 되는
것이다. 분명히 말해두겠다. 맹목적인 지식주입은 학생을 위한 것이 아니다. 많은 지식을 주입 받아 좋은 대학에 가서 좋은 직장에
취업한다. 그래서 남들 못지 않게 성공한다. 그러나 거기에 인간의 의지가 없으면 공허할 뿐이다. 기업에 충성해온 우수한 인재가 기업에 홀대 받자
버터지 못하고 자살했다. 그 인재는 무엇을 위해 공부해왔던 것일까? 무엇을 위해 살았던 것일까? 도대체 누구를 위해 살았단 말인가! 정말 안타깝다. 인간은 자아형성이 끝난 뒤 자유의지를 가지고 스스로 공부해야 한다. 그래야 인간 자신을 위해 살 수 있게 된다. 그런데 이런다고 하더라도 지식을 얻는 것은 행복을 위해서가 아니다. 왜냐하면 모를 때 더 행복할 때도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감각은 인간의 인지에 따라 달라진다. 행복도 마찬가지다. 같은 환경이라도 결벽증에 걸린 인간은 작은 더러움에도
불행을 느낀다. 결벽증은 더러운 것에 대한 지식이 있기에 발생한다. 지식이 사람을 불행케 한 것이다. 보편적으로 사람은 하고 싶을 걸 할 때 행복해한다. 먹고 싶으면 먹을 때 행복하고 자고 싶으면 잘 때
행복하다. 그래서 자유로운 정도에 따라 객관적으로 행복한 정도를
유추해볼 수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인지에 따라 천차만별로 달라지므로 지극히 주관적이다. 컴퓨터와 스마트폰이 없던 시대의 사람들을 불행하다 할 수 있는가? 반대로 미래의 사람들이 현대의 사람보다 행복하다
할 수 있는가? 이처럼 지식은 행복을 위해서 얻는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지식을 얻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많은 시간과 노력을 쓰면서도 행복해질 수 없다면
어째서 지식을 얻어야 하는가? 그것은 간단히 말해 힘이다. 살아가는 힘을 얻기 위해서다. 야생에서 살기 위해서는 야생에서 살기 위한 힘이 필요하고 사회에서 살기 위해서는 사회에서 살기 위한 힘이 필요하다. 지식은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힘 중 하나다. 인간은 살기 위해 지식을 얻는 것이다. 그러면 왜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의문이 남는다. 왜 살아야 할까? 그건 객관적으로 알 수 없다. 인간을 비롯한 모든 것에 대한 근원적인 존재 이유를
알 수가 없기에 객관적으로 도출해낼 수 없다. 그걸 차치하더라도 알 수 없다. 모든 종은 생존과 번영이 기본적인 선이다. 왜냐하면 그러지 않은 종은 멸종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종의 존속을 이유로 삼자니 인류는 수가 많다. 그럼에도 굳이 따지면 종의 존속을 이유로 삼을 수 있긴 하다. 그러나 그건 너무 미약한 이유다. 그렇다고 다른 기준을 찾자니 나머지는 전부 절대적이지
못하다. 흔히 타인을 위해 산다고 하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타인을 위해 사는 것은 주관적이다. 모두가 타인을 위해 살지는 않기 때문이다. 만약 그걸 객관화한다면 누군가는 타인의 노예가 되어버린다. 본인을 위해 살고 싶은 사람도 타인을 위해 살도록
강요되기 때문이다. 모두가 본인을 위해 살아야 한다. 그런데 본인을 위해 사는 것은 객관적인 답이 될 수 없다. 모두가 다 다른 답을 내놓을 것이기 때문이다. 애초에 종의 존속 외의 객관적인 이유가 있는 것이 이상하다. 그런 것이야 말로 종교나 전체주의다. 따라서 인간은 살아가야 할 이유를 주관적으로 각자
자유의지에 따라 찾아야 한다. 그건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어야 가능하다. 결국 자유의지를 갖춘 자유로운 인간이 되는 것이 선결되어야 한다.
인간을 교육하는 이유는 인간이 되게끔 하기 위해서고
인간이 교육받는 이유는 살아가는 힘을 얻기 위해서다. 교육과 학생은 목적이 서로 다르다. 우선 교육의 입장에서 시작하겠다. 교육의 이념은 자유로운 인간이다. 교육의 목적은 이타주의도 아니고 학업성취도도 아니고 대학진학률도 아니고 취업률도 아니다. 자아형성과 상품화 능력이다. 온전한 자아를 형성하고 상품화 능력을 갖추게 도와주면 된다. 학생의 온전한 자아형성을 도우면 학생이 알아서 하고
싶은 공부를 하게 된다. 그 공부로 얻은 능력을 상품화할 수 있게 도와주면 시장경제의 도구가 되지 않을 수가 있다. 지금 교육은 자유로운 시대가 되면서 명확한 역할이 정해지지 않아 지나치게 많은 걸 짊어지려
하고 있다. 공부는 학생이 알아서 해야 한다. 그것에 간섭하는 것은 학생의 역할에 대한 월권이다. 교육은 이제 그런 걸 내려놓고 학생의 자아형성을
위해 사고방식과 행동원리의 파악과 설계가 가능토록 돕는 일에 전념해야 한다. 방법은 다음과 같다. 첫째, 학생이 선천적인 사고방식과 행동원리를 파악하고 강한 의지를 유지하도록 한다. 둘째, 학생이 후천적인 사고방식과 행동원리를 설계하고 현명한 지성을 얻도록 한다.
첫째, 학생이 선천적인 사고방식과 행동원리를 파악하고 강한 의지를 유지하도록 한다. 선천적인 것을 파악한다는 것은 본성이나 본능을 파악한다는
것과 같다. 본래 인간은 어떤 식으로 생각하고 어떤 원리로 행동하는지를
아는 것으로 시작해야 한다. 이런 것이 학생에 맞추는 교육이다. (앞서 설명한 것과 겹칠 수 있다.) 어쩌면 너무 당연해서 어째서 해야 하는지 모를 수도 있다. 시각, 청각, 후각, 촉각, 미각이나 식욕, 수면욕, 배설욕, 성욕 따위나 희로애락 따위는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다. 그런 것을 배우고 인간에 대해 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인간에 대해 모른다. 선천적인 성질과 후천적인 성질을 분리할 줄 모른다. 이 분리가 매우 중요하다. 다들 생각해보길 바란다. 본인이 느끼는 편안함이나 불편함이나 쾌락이나 고통이
무엇을 근거로 하는지 알고 있는가? 홀로 있을 때 느끼는 편안함이나 불편함은 무엇을 근거로 하는가? 여럿이 있을 때 느끼는 편안함이나 불편함을 무엇을 근거로 하는가? 그리고 그 근거는 선천적인가, 후천적인가? 많은 사람들이 근거를 모를뿐더러 알더라도 선천적인
것과 후천적인 것을 분리하지 않는다. 그래서야 선천적인 것에 대해 파악하고 있다고 하기 어렵다. 그 탓에 이런 착각이 생긴다. 연령차별을 도덕적 의무로 세뇌된 사람은 연하의 반말에 불편함을 느끼는 것이 선천적인 성질로
착각하는 경우가 많다. 이는 정조관념에 세뇌된 이가 성 상품화를 불편해하는 것과 같고 채식주의에 세뇌된 이가 육식을 불편해하는 것과 같고 비폭력주의에 세뇌된 이가
폭력을 불편해하는 것과 같다. 이들은 그런 것들이 선천적인 것으로 착각하여 자신을 바꾸는 일을 하지 않는다. 세뇌된 상태에서 살아가는 것을 택한다. 그걸 온전한 자아라고 하기에는 어려울 것이다. 선천적인 성질을 명확하게 파악하고 있으면 후천적으로
세뇌된 성질도 파악할 수 있게 된다. 그렇게 할 수 있어야 온전한 자아형성을 할 수 있다. 나는 이것을 분리하여 고유한 자아를 유지하기 위해 정말 많은 시간을 소모했다. 타인에게 폐가 가지 않는 선에서 의도적으로 벽을
치고 지나간다거나 가장거리를 걷는다거나 괴상을 표정을 지어보았다. 그 행동을 하면서 느끼는 감각을 면밀하게 파악했다. 본인과 타인을 비교해보기 위해 타인의 고민을 상담해보기도 했다. 자아를 파악하는데 도움이 되기 위해 자아형성과정에
있는 인간을 상담했다. 나를 알기에 동성보다는 이성의 고민을 많이 보고 답변해봤다. 피드백을 바랐지만 익명으로 그건 어려웠다. 그래서 지금은 그냥 관찰 중에 있는데 가능하면 피드백을 받을 수 있으면 좋겠다. 본인의 감각을 파악하고 본인과 타인과 비교하며 선천적인
것과 후천적인 것을 분리하기 시작했다. 과거에 연하에게 반말을 들을 때 불편함을 느꼈다. 그건 장유유서라는 연령차별적 도덕적 의무에 의해 후천적으로 만들어진 것임을 파악하고는 더 이상 불편하지 않도록 내부에 있는 인지를 수정했다. 이제는 연하의 반말이 불편하지 않는다. 예전에 고기를 먹을 때 갑작스럽게 맛이 없어지고
역한 느낌을 받았다. 그 느낌이 환경오염이나 채식주의를 다룬 영상에 영향을 받았음을 기억해내고는 잡식이라는 선천적인 인간의 성질이라는 것과 후천적인 불편함이라는
것을 강하게 인식하며 계속 고기를 먹었다. 어느새 고기섭취가 불편해지지 않았다. 몇 년 전 문틀 철봉으로 턱걸이를 하다가 철봉이 문틀에서 빠지는 바람에 머리에 혹이 나고 기절하는 사고를 겪은 적이 있다. 그 사고로 나는 기억퇴행을 겪었다. 당시 가족의 증언에 따르면 5년 전으로 퇴행했다고 한다. 그 순간부터 나는 그것이 내가 아님을 강하게 자각하고
있었다. 가족에게도 퇴행한 걸 내가 아니라고 말했던 모양이다. 그렇게 나는 하루 만에 나의 기억을 다시 되찾고
자아를 되찾을 수 있었다. 이외 다양한 감각을 조정했다. 아마 선천적인 것과 후천적인 것을 분리할 수만 있어도 웬만해서는 자아형성이나 유지를 할 수 있을 거라 본다.
학생이 강한 의지를 유지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앞서 말했듯이 인간은 강한 의지를 타고난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이 의지가 약하다. 이유는 간단하다. 성장 도중 무언가에 의지를 박탈당했기 때문이다. 소심한 학생은 발표에 두려움을 느끼곤 한다. 그런데 그게 정상일 수가 없다. 발표에 공포를 느껴? 무대에 오르는 것에 두려움을 가져? 말도 안 된다. 그것은 태생적인 문제가 아니다. 누군가 잔혹하게도 그 사람의 의지를 꺾고 박탈하여
인간 앞에 서는 걸 두려워하게끔 만들었기 때문이다. 한국인은 도덕적 의무로 인간에게 복종하는 법부터 배운다. 연상에 의해 의지가 꺾이는 것이 올바르다. 복종부터 배우는 인간이 자유의지를 갖는 게 쉬울 리가 없다. 복종을 당연시하는 것은 문화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대표적으로 세배가 있다. 현재 세배는 인간에게 무릎을 꿇고 머리를 박고 돈을
받는다. 보통 그런 행위는 복종을 의미한다. 한국인은 세배라는 관습을 통해 돈을 받고 연상에게
복종하는 법을 배운다. 한국인이 연상과 돈에 약한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친인척과 사이 좋은 것은 좋다. 그러나 그것은 이제 절을 하지 않아도 되는 평등한 관계 속에서 사이가 좋아야 한다. 여성은 보다 더 심하다. 이걸 기본으로 여성은 여성주의자가 물려받은 여성용
약화교육을 추가로 받기 때문이다. 연상에 대한 복종에 약한 의지와 강한 성적 수치심이 더해진다. 정말 이래서는 안 된다. 어떤 여성이 사고 발생시 어쩔 줄 몰라 하는 경우가 있다. 그건 다 이유가 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교육 받았으니까 그렇게 행동하는 것뿐이다. 일부 여성의 행동력을 보고 의지가 약하지 않다고
반론할 수 있다. 하나 그것은 보통 그 여성의 의지가 아니다. 선동가의 의지다. 선동되어 한 행동에 자유의지가 있을 수가 없다. 이런 약화교육을 올바르다 여긴 이들이 요즘에는 남성에게도
주입하려는 모습이 보이고 있다. 끔찍하다. 예전에 어떤 여성 아나운서가 남학생에게 은연중에
떠보듯이 농담조로 자위행위에 대해 물어본 적이 있었다. 직접적으로 물어본 것이 아니었다. 지금까지 남학생에게 그런 걸 물어보는 건 그리 큰 잘못이 아니었다. 남학생에게는 성적 주도권이나 자기결정권이 있다 생각했기 때문이다. 되려 예전에는 자위행위를 남학생이 여교사에게 말해
논란이 일었었다. 그러나 이제는 다르다. 사람들이 여성을 예로 들며 그걸 성희롱이라 규정하며
비판했다. 여성이 약화교육으로 약해진 것을 형평성 문제로 남성도
약하게 만들려고 하고 있다는 것이다. 욕구를 만족시킨다는 점에서 식사나 수면이나 자위는 비슷하다. 자위행위를 물어본 쪽이 잘못한 게 아니라 자위행위를 부끄럽게 만든 쪽이 잘못했다. 어떻게 된 게 정상적인 것을 부끄럽지 않게끔 하는
게 아니라 부끄러워하는 걸 배려하기만 한다. 성을 터부시하여 성에 수치심을 강하게 느끼게 만드는 것과 같이 성에 취약하게 만드는 걸 이제는 그만해야 한다. 수치심이란 부끄러워하는 마음을 뜻한다. 부끄럽다란 당당하거나 떳떳하지 못하게 느끼는 상태에
있거나, 숫기나 용기가 없어 거리낌을 느끼는 상태에 있다를
뜻한다. 어째서 성을 당당하거나 떳떳하지 못하게 느껴야 하는가! 성적 모욕에 수치심을 느끼는 것은 성 자체가 부끄럽다
여기기 때문이다. 생각해보자. 의사표현이 무시되면 수치심을 느끼나? 아니지 않나 자존심에 상처를 입는다. 그것은 의사표현이 당당하고 떳떳하다 여기기 때문이다. 성이 부끄럽지 않다면 수치심을 느낄 리가 없다. 수치심은 성을 부끄럽게끔 인지하도록 주입 당했기
때문에 느끼는 것이다. 수치심은 타인이 주입한 감정이다. 반면 자존심은 본인의 본성이다. 예컨대 비자발적 성적 접촉 같은 건 수치심을 느낄 것이 아니라 드높은 자존심에 상처를 입어야 한다. 수치심에 덜덜 떨 것이 아니라 자존심에 상처입고
분노해야 한다. 수치심은 인간을 약하게 만든 결과일 뿐이다. 이제 더 이상 인간을 약하게 만들면 안 된다! 다음은 민족의 슬픔 강요다. 자본주의의 침략과 공산주의의 침공을 둘 다 겪은
한국은 반자본-반공산 같은 이념에 대한 적개심이나 반미반일-반중반북 같은 해당 이념을 가진 국가에 대한 적개심을
교육받았다. 이런 교육은 본인의 의지와 무관하게 세뇌되듯 받기
때문에 감성적인 불편함을 느끼게 된다. 이것은 미국의 매카시즘이나 일본의 혐한과 비슷하다. 분명히 말해두건대 옳고 그름을 말하고자 하는 게 아니다. 어떤 것에 찬성하거나 반대할 때에는 감성이 아닌 이성으로 선택해야 한다는 것이다. 세뇌되어 감성적으로 편하거나 불편하다고 찬성하거나
반대하는 것은 자유의지가 없는 행동이다. 나는 반공반중이다. 현재 변질된 공산주의는 독재를 전제하고 중국은 그 체제에 있으면서 중화사상까지 가지고 있어 한국을 지배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반대할 수밖에
없다. 중국을 반대하는 건 중국인 개개인의 성향이나 선악과
관계가 없다. 중국의 강함과 사상의 위험성에 위기를 느껴 반대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감성적으로 불편해서 반대하지 않는다. 이성적으로 반대한다. 반미반일에 대해 잠시 얘기해보자. 한국이 미국이나 일본과 갈등이 있을 수 있다. 최근 일본과 갈등이 격해지고 있음을 안다. 여기서 하고자 하는 말은 갈등하지 말라는 게 아니다.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해야 한다. 하고자 하는 말은 그렇게까지 갈등을 겪고 있어도
자유라는 이념을 공유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선을 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그 점을 유념하면서 갈등을 빚어야 한다. 그렇다고 불필요한 싸움까지는 필요 없다. 그건 중국의 기세를 늘려줄 뿐이다. 보통 이런 민족의 슬픔을 강요 받은 이들이 주로 정당의 손익으로 가치를 판단하는 정당주의자가 된다. 연상에 대한 복종과 민족의 슬픔 강요가 한국인의
의지를 꺾는 기본적인 요소들이다. 여성은 거기서 여성용 약화교육이 추가된다. 일부는 거기서 종교나 채식주의나 비폭력주의 따위가 추가되어 인간의 의지를 꺾는다. 채식주의에 대해 말해보겠다. 채식주의자가 정녕 이성적으로 채식주의를 하고 싶다면 고기를 먹을 수 있으면서도 이성으로
채식을 해야 한다. 만약 고기만 봐도 불편하고 본인은 물론 타인이 먹는 것조차 불편하다면 그것은 세뇌되었기 때문에 불편한 것이다. 비폭력주의에 대해 말해보겠다. 비폭력주의자가 정녕 이성적으로 비폭력을 하고 싶다면
폭력을 쓸 수 있으면서도 이성으로 비폭력을 해야 한다. 만약 폭력만 봐도 불편하고 본인은 물론 타인이 폭력을 행사할 수 있는 것을 넘어 폭력에 연관된 곳에 있는 것조차 불편하다면 그것은 세뇌되었기
때문에 불편한 것이다. 비폭력주의의 경우 애초에 국가의 질서 자체가 공권력이라는 폭력으로 유지되어 있기 때문에 국가 내에 있는 이상 사실 비폭력주의를 추구한다
하기는 어려워 다소 안타까운 기분이 들곤 한다. 민주적일수록 대부분의 공권력은 대화로 해결하지만 일부 강력 범죄자에게는 폭력으로 해결할 수밖에 없다. 그 점에 있어 국가 질서 내에 속한 이상 폭력에서
벗어날 수 없다. 애초에 세뇌되어 인간의 본성인 잡식성과 폭력성을
부정하는 시점에서 안타깝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런 성질을 잃게 되면 생존에 지나치게 취약하게 된다. 비폭력주의자는 남이 돌봐주지 않으면 타인이나 타동물의 폭력으로부터 본인을 보호조차 할 수 없다. 얼마나 가여운가? 그렇지 않아도 약해진 한국인을 더 약하게 만들어서는
안 된다. 한국인 대다수가 심각한 도덕적 강박증을 겪고 있다. 도덕에 어긋나는 걸 보면 강박증에 걸린다. 정말 슬프다. 종교는 신의 의지에 따라 행동하기 때문에 원래 자유의지가
있기 어렵다. 예컨대 신은 위대하다며 참수하고 테러 하는 이들에게
어떤 자유의지가 있을까? 씁쓸하다. 연상에 복종하게 하는 걸 피하고 여성용 약화교육을
피하고 민족의 슬픔을 강요하는 걸 피하고 인간의 본성과 어긋나는 사상을 피하고 종교를 피하면 일단 학생의 타고난 강한 의지는 유지될 가능성이 높다고
할 수 있겠다.
이렇게 약해진 한국인을 가여워하며 배려해주는 사람들이
있다. 그건 알겠다. 하나 애초에 약하게 만들면 안 되는 것이다. 강한 사람은 강해져야 한다. 세상에 약자만 남으면 도대체 누가 처음부터 약하게
태어난 사람을 돌보는가? 세상은 약자를 돌볼 수 있는 강자가 필요하다. 인간을 약하게 해서는 안 된단 말이다. 일부 어떤 사람은 약자를 배려하는 것으로 권력을 얻어 의도적으로 약자를 양산하려 한다. 멀쩡한 사람도 의지가 약하고 수치심이 강한 것이 정상이라며 세뇌한다. 멀쩡한 사람이 약해지면 이런 말을 외친다. 보라, 이렇게 약하지 않느냐! 배려해줘야 한다! 실제 그걸로 배려 받고 있다. 마음은 형태가 있는 것이 아니기에 이런 것이 얼마나 잔인한 일인지를 모른다. 그래서 비유를 통해 설명해보겠다. A가 외친다. B가 아프잖아요! 배려해주세요! C가 대답한다. A님 진정하세요. B의 어디가 아프다는 겁니까? A가 외친다. 아니 안보이세요? 팔 다리가 아프잖아요! C는 차분하게 대답한다. 제 눈에는 아프지 않은 것 같습니다만 여러분들은
어때요? 모두 동의한다. 그러자 A는 눈을 희멀겋게 뜨더니 B의 팔 다리를 직접 분지른다. B는 고통 속에서 절규한다. 그 모습을 보며 A는 말한다. 봐봐요! B가 아프다고 하잖아요! 이 인정머리 없는 사람들! 주위에 있는 모두가 공포에 질려 몸을 떨며 그 광기를
바라본다. 모두가 두려움 속에서 배려를 해주겠다는 약속을 해버린다. 이런 게 의도적으로 약하게 만든 다음 배려해달라
외쳐 강제로 배려 받는 것과 같다. 이게 얼마나 잔혹한 일이었는지 조금이라도 알았으면 좋겠다. 요즘에는 하도 힘들고 어려운 걸로 배려 받는 일이 잦다 보니 기여도나 가치로 평가 받고자 하는 게
아니라 힘들고 어려움을 인정받고 싶어한다. 내가 더 힘드니까 날 더 배려해줘. 이것이 잘못되었다.
둘째, 학생이 후천적인 사고방식과 행동원리를 설계하고 현명한 지성을 얻도록 한다. 학생이 선천적인 성질과 후천적인 성질을 분리하여
구분할 수 있다면 후천적인 사고방식과 행동원리를 설계하는 것이 수월해진다. 학생은 본인의 본성을 파악하여 어떤 것을 어떤 것을 키우고 줄일 것인지 선택할 수 있게
된다. 가령 이런 것이다. 용기는 키우고 폭력성은 줄인다. 자립심은 키우고 의존성은 줄인다. 이런 걸 타인이 조절하면 능력의 가치지기처럼 능력
자체가 지워질 위험이 있다. 그러나 본인이 조절하면 그런 위험은 적은 편이다. 능력의 가지치기에 대해 간단히 설명하자. 인간은 사회에 적합하지 않다. 진화를 통해 야생의 동물이 가축화가 되었듯이 인간도 사회화가 된 것은 분명하다. 하나 완전하지는 않다. 그래서 인간은 사회화가 필요하다. 사회화를 하는 과정에서 많은 인간이 능력을 가지치기 당한다. 정원사가 나무를 편하고 보기 좋게 돌보기 위해 가지치기
하듯이 보호자가 인간을 편하고 보기 좋게 돌보기 위해 가지치기를 한다. 아이의 의지가 너무 강하여 어른의 말에 반항하면 의지를 가지치기 해서 얌전하게 만든다. 아이의 두뇌회전이 너무 빨라 어른의 말에 모순을
발견하여 지적하면 지능을 가지치기하여 얌전하게 만든다. 아이의 인간관계가 너무 좋아 어른을 무시하면 관계를 가지치기하여 얌전하게 만든다. 아이의 호기심이 너무 강해 어른에게 자꾸 이것저것 물어보면 호기심을 가지치기하여 얌전하게
만든다. 아이의 애정이 너무 강해 어른에게 성가시게 굴면
애정을 가지치기하여 얌전하게 만든다. 반대로 어른이 집착이 강해 아이에게 학습을 강요하는 것으로 자유의지를 꺾는 등의 다양한 가지치기를 하는 일도 있다. 천재의 범재화는 이런 식으로 만들어진다. 이런 것은 아이에게 굉장히 해로우므로 반드시 주의해야
한다. 도덕적 의무에 의해 아무렇지도 않게 복종을 요구하면
의지가 꺾이는 건 당연하지 않나. 이런 식으로 능력을 가지치기 당한 상태에서 과도한 도덕적 의무를 부과 받은 이들이 보통 의지가 약하고 소심하고 자신감이 없다. 발표도 제대로 못한다. 아이를 부모가 망가트린 것이다. 대부분 부모는 그저 배운 대로 가르치지 때문에 자신이
한 일을 잘 모른다. 부모도 그렇게 배웠고 조부모도 그렇게 배웠을 것이다. 그런 걸 알면서 개개인을 탓하기는 어렵다. 사회를 바꿔야 한다. 교육에 있어 비전문가인 부모가 아이의 자아의 형성에 과도하게 간섭하는 것은 막아야 한다고
본다. 인간은 나무처럼 일방적으로 가지치기 될 대상이 아니다. 인간은 인간 스스로를 키우고 줄일 수 있어야 한다.
학생이 본성을 파악하여 알맞게 조절한 상태에서 다양한
경험과 지식을 쌓은 뒤 도덕과 가치관을 결정하고 그것에 맞춰 사고방식과 행동원리를 설계하면 된다. 예컨대 나 같은 경우에는 자유주의와 역할주의를 도덕과 가치관으로 결정하고 그것에 맞춰
사고방식과 행동원리를 설계했다. 그걸 바탕으로 나온 게 바로 이 글이다. 그럼 시작해보자. 아무것도 배우지 않은 학생은 보통 생존에 도움이 되는 것을 올바르고 가치 있게 여길 것이다. 일반적인 동물이 그러하니까 말이다. 그러니 다양한 경험과 지식을 쌓아 시야를 넓혀 선택할 수 있는 힘을 줘야 한다. 그것이 바로 강화교육이다. 선천적인 것은 약화교육에 침범되지 않도록 막고 후천적인
것은 강화교육을 통해 강해지도록 한다. 강화교육은 단순히 학문을 가르치는 게 아니다. 말 그대로 살아갈 수 있는 힘을 가르쳐 인간을 강하게 만든다. 시장경제에 필요한 지식을 주입하는 게 아니라 인간이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힘을 가르쳐야 한다. 인간이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힘은 무엇이 있을까? 원시적인 것부터 가보자. 무력과 지력과 매력과 권력과 재력. 하나, 무력교육은 인류의 폭력을 가르쳐야 한다. 둘, 지력교육은 사물을 보는 방법과 지식의 활용방법을 가르쳐야 한다. 셋, 매력교육은 인간에게 사랑 받는 법을 가르쳐야 한다. 넷, 권력교육은 인간관계에서 주도권을 얻는 법을 가르쳐야 한다. 다섯, 재력교육은 돈을 다루는 법을 가르쳐야 한다. 이런 힘을 기초로 한 교육과정에서 필요한 과목을 정하는 것이 인간을 위한 교육이다.
하나, 무력교육은 인류의 폭력을 가르쳐야 한다. 학생은 인간의 본성인 폭력성이 어떤 것인지 배울 필요가 있다. 그래야 그 폭력성을 제어할 수 있다. 폭력이 나쁘다고 아예 가르치지 않는 것은 폭력의
제어방법도 가르치지 않는 것과 같다. 폭력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는 법도 가르치지 않는 것과 같다. 인류의 역사는 폭력으로 점철되어 있다. 폭력을 위해 무기가 발달했다. 인류가 최고포식자가 된 이후 무기는 오로지 인간을 죽이기 위해 발달했다. 그런 무기가 반드시 악이라 보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공격하는 상대로부터 살아남기 위해 방어하다
죽이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무기는 어떤 행위의 수단일 뿐이다. 현대의 무기는 보통 총이다. 학생은 총이 어떤 것인지 체험해봐야 한다. 현재 인류의 폭력이 어떤 것인지 파악하고 그 폭력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는 방법이 무엇인지 생각해봐야 한다. 총이란 폭력을 안다면 주먹이란 폭력으로부터 다소
대담해질 수 있다. 총이란 큰 폭력을 안다면 집단 괴롭힘을 당하는 학생도 그 괴롭힘이 작은 폭력임을 깨닫고 맞서 싸울 수 있을지도 모른다. 싸운다는 것은 물리적인 반격을 의미하는 게 아니다. 신고할 수 있는 의지, 도움을 청할 수 있는 의지를 말한다. 대부분의 집단 괴롭힘은 타인에게 도움을 청할 수
없기에 지속된다. 이 점을 유념하여 의지가 약해진 학생에게 다시 강한
의지를 되찾을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총을 체험한다고 해서 힘든 훈련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건 아니다. 사격장에서 총이 어떤 것인지 한번 쏴보는 것만으로도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이런 교육은 학생만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지금 한국은 총이 금지되어 물리적인 폭력이
약한 이들이 지나치게 불리하기 때문이다. 특히 여성이 그렇다. 모든 사람이 총이라는 큰 폭력을 체험하면서 이미지를 구축해 상대적으로 약한 폭력에 대한 면역력을 키워야 한다.
둘, 지력교육은 사물을 보는 방법과 지식의 활용방법을 가르쳐야 한다. 사물을 보는 방법을 알아보자. 사물은 객관적으로 봐야 한다. 1+1=2와 같이 명확하고 논리적인 것만 파악하고 그 뒤에
인간관계나 도덕이나 가치관을 붙여 판단한다. 예컨대 이런 것이다. 세배는 풍습이다. 그것이 옳지 않다고 말하기 어렵다. 하나 행위만 떠올려보자. 연상에게 무릎 꿇고 머리를 바닥에 박은 뒤에 돈을 받는다. 이 행위만 보면 옳지 않다. 거기에 세배는 풍습이라는 것을 붙이면 세배는 옳지는 않지만 풍습이라 허용된다라는 결론이
나온다. 이런 식으로 사물을 보는 것이 바로 본질을 본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종종 범죄를 저지른 종교인을 같은 종교인이 옹호하는 일이 있다. 이런 것도 마찬가지다. 범죄자의 범죄행위만 바라본 뒤에 종교인을 붙여보자. 그러면 옳고 그름을 분명하게 파악할 수 있다. 마음에 들지 않았던 사람이 있다 가정하자. 그 사람이 올바른 행동을 했다. 그러면 그 사람의 행동만 파악하고 그 다음에 마음에
들지 않음을 붙여보자. 그러면 선입견에 휘둘리지 않을 수 있다. 노동도 객관적으로 볼 수 있다. 학력이나 경력을 배제하고 생산성에만 초점을 맞춘다. 학력이나 경력이 낮아도 생산성이 다른 사람과 같으면 같은 대우를 해줘야 한다. 야근을 하는 사람과 하지 않는 사람의 생산성이 같으면 같은 대우를 해줘야 한다. 생산성을 보고 그 뒤에 이것저것 붙여서 판단하면
공정하게 대우해줄 수 있다. 지식의 활용방법을 알아보자. 지식의 활용방법 문제를 푸는 것이 아닌 문제를 찾거나 만드는 것이 주가 되어야 한다. 그래야 문제해결능력이 키워진다. 단순히 누군가 만든 문제를 푸는 것은 퀴즈풀이 능력일 뿐이다. 과학지식을 배웠다고 하자. 그 지식으로 어떤 문제를 찾고 만들 수 있는가? 찾거나 만든 문제의 풀이는 어떻게 할 것인가? 화학에 대한 지식을 배우고 어떻게 꽃을 키울 수
있는가 같은 문제를 만들고 화학비료를 제조하여 흙에 뿌리는 것으로 풀이를 한다. 뭐 이런 식으로 각자 배운 지식을 어떻게 활용하는가를 스스로 떠올리며 직접 실행해봐야
한다. 국어를 배우면 창작을 해봐야 한다. 영어를 배우면 실제 대화를 해봐야 한다. 수학을 배우면 문제를 만들어봐야 한다. 이런 지식활용방법에 사람을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는
상품가치가 있는 매력이 더해지면 상품화가 가능해진다.
셋, 매력교육은 인간에게 사랑 받는 법을 가르쳐야 한다. 인간의 마음을 사로잡아 사랑 받을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대체로 매력적인 인간은 어딜 가도 환영 받아 살아가기가
편하다. 그런 걸 배우게끔 해야 한다. 우선 자기자신을 가꿀 줄 알아야 한다. 머리스타일과 패션스타일을 배우고 얼굴을 꾸미고 몸을
관리한다. 지금까지 학교는 학생이 꾸미는 걸 금지했다. 그런데 학생에게 꾸미는 걸 막는 것은 학생을 도구
취급하는 것과 같다. 학생을 도구로 여기니까 인간에게 중요한 매력을 무시하고 얌전하게 지식만 주입 받으라고 강요했던 것이다. 그리고 대화방법과 행동요령과 품위를 배운다. 보통 이런걸 잘하는 사람이 사귐이 좋고 발표능력이
뛰어나다. 다양한 관계를 늘려나가는 것이 이런 종류의 힘을
얻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여행이나 아르바이트는 안전하다면 어렵지 않게 추천할 법 하다. 어떤 학생이 강한 의지가 꺾여 의지박약이 되어 인간관계가 어렵다면 강한 의지를 되찾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이런 종류의 타입에게 다양한 관계 맺기부터 시작하는
것은 좋지 못한 결과를 낳을 수 있다. 여기에 노래나 춤이나 연주나 유머나 요리 등과 같이 사람을 즐겁게 만들 수 있는 매력적인 특기 몇 가지를 익히면 기본적인 매력교육이 끝이
난다. 매력교육을 제대로 받으면 웬만해서는 어딜 가든 환영
받을 수 있을 거라 본다. 약화교육을 받지 않고 매력교육만 잘 받아도 모두 자유롭게 연애를 할 수 있다. 지금 연애비율이 낮은 것은 연상의 과도한 간섭과 매력교육을 미비로 이성에게 매력적인 사람이
많지 않기 때문이다. 매력만 키워도 대부분은 알아서 잘 연애할 거라 본다. 그 중 몇 연인이 결혼을 하고 그 중 몇 부부가 출산을 한다. 연애하는 인간의 풀이 넓어야 결과적으로 출산율도
높아질 수 있다. 자유국가인 이상 출산을 강요할 수는 없으므로 학생 90%이상이 자발적으로 연애를 하는 걸 목표로 교육해야
출산율이 올라갈 수 있을 것이다.
넷, 권력교육은 인간관계에서 주도권을 얻는 법을 가르쳐야 한다. 실상 정치적인 능력을 가르치는 것을 의미한다. 권력교육은 학생이 모든 능력을 포괄적으로 사용하여
인간관계에 있어 주도권을 얻을 수 있게끔 가르치면 된다. 기본적으로 논리적인 대화에서 주도권을 잡는다. 하나 다른 힘이 작용하는 예가 많다. 예컨대 매력. 매력적인 사람의 주장은 같은 논리라 하더라도 대화상대자가 수용할 가능성이 높다. 체계적으로 나아가면 인간관계에서 주도권은 관계의 수에 따라 달라지는데 수가 적을수록 주관적이고
상대적인 능력으로 주도권이 정해지고 수가 많을수록 객관적이고 절대적인 능력으로 주도권이 정해진다. 앞이 일반정치라면 뒤는 대중정치다. 학교로 구분 지으면 앞이 소속된 반이고 뒤는 학교 전체다. 일반정치는 집단 구성원보다 뛰어나면 된다. 모든 능력이 고르게 뛰어나면 리더가 될 것이고 특정
능력이 특출 나게 뛰어나면 전문가가 될 것이다. 리더로서의 주도권을 잡는 방법과 전문가로서의 주도권을 잡는 방법을 익힌다. 리더는 집단 전체를 고려하여 언행을 하고 전문가는 전문 영역을 고려하여 언행을 한다. 특별히 뛰어난 것이 없으면 얕고 넓게 능력을 키울
것인지 아니면 깊고 좁게 능력을 키울 것인지 선택하여 어느 방향으로 주도권을 잡을 건지 계획하면 된다. 전체적인 주도권이든 국소적인 주도권이든 어느 영역이든
주도권을 잡을 수 있을 수 있어야 자기의사표현을 확실하게 할 수 있다. 대중정치는 이를 기본으로 하되 대중에게 평가 받는 만큼 주도권을 쥐기 위해서는 객관적이고 절대적인
능력을 표출할 필요가 있다. 비교 대상이 다른 사람이 아닌 대중의 이상이다. 그 이상에 맞춰야 대중정치의 주도권을 쥘 수가 있다. 이를 이해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보다 비교우위에 서려다 둘 다 굴러 떨어지는 일이 생길 수도 있음을
말해두겠다. 대중은 수가 많으므로 숫자로 판단하게 되는 일이
많아진다. 설문과 통계의 숫자에 기대게 된다. 그래서 곧잘 숫자에 휘둘린다. 하나 수에 현혹되어서는 안 된다. 대체로 비슷한 환경에 자라난 이들은 본질이 같은
경우가 많다. 비슷한 유형을 일반정치의 수가 될 때까지 묶어버리면
대중의 이상을 파악하기 쉬워 다소 편하게 주도권을 쥘 수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본질을 제대로 파악하는 것이다. 잘못 파악해버리면 잘못 묶어 판단에 오류가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떤 유형으로 묶을지도 중요하다. 예컨대 특기로 묶을 것인지 취미로 묶을 것인지 같이
말이다. 한국정치를 예로 들어보겠다. 지금 한국정치는 지지 근거가 직간접적으로 겪은 피해에
근거한 트라우마인 경우가 많아 그걸로 묶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약한 부분을 자극하여 선동을 통해 지지를 이끌어내는 것과 같다. 바람직하지는 않은 방법이다. 그러니 앞으로 한국정치는 분야로 묶는 것이 훨씬
낫다고 생각된다. 수가 늘어날수록 관계가 옅어져 일일이 대화를 하기
어려워 알기 쉬운 이미지를 구축하는 것이 좋다. 대화를 나누기 어려우므로 오해를 사지 않는 언행이 필요할 것이다. 정치슬로건이 중요하듯 정치는 어떤 단어로 이미지가 퍼져나가는 경우가 많다. 그걸 고려해야 한다. 네거티브. 비방이나 비난 따위는 바람직하지 않다고 말할 수
있다. 맞다. 그런데 사회에서는 그걸 쓴다. 교육에서는 그걸 지양하더라도 언제든지 쓸 수는 있게끔 가르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다섯, 재력교육은 자본을 다루는 법을 가르쳐야 한다. 학생의 모든 생산 활동에 금전적 가치를 매겨야 한다. 적은 금액이라도 노동에 대한 대가를 받는 법을 익혀야
돈의 가치를 인지하고 다루는 법을 익힐 수 있다. 이타심을 길러주겠다고 봉사활동을 강요하며 노동의 대가를 일절 지급하지 않는다. 그런 식으로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을 다루는 법을 알려주지 않는 것은 학생을 자본의 노예로
만들겠다는 것과 같다. 도구와 비슷한 취급이다. 학교에서 학생들이 교무실을 청소하는 것이 부당하다는 주장이 나온 적이 있었다. 그런데 만약 교무실을 청소하는 학생에게 아르바이트 비용을 지급한다면 부당하다 할 수 있었을까? 부유한 학생과 가난한 학생의 차이가 두드러질 수는
있다. 그러면 청소 자체는 똑같이 평등하게 하고 거기에
비용만 지불하는 형태가 되면 된다. 교육에 있어 불필요한 차등은 필요가 없다. 학생 때 어떤 활동을 하고 적은 돈이라도 받는 경험은 굉장히 귀중하다고 강조하겠다. 그렇게 벌어들인 수익을 교사의 이름으로 주식투자를 시도해본다. 큰 금액이 아니기에 놀이와도 같다. 그런다고 해도 자본의 흐름에 예민해지는 편이 자본주의
사회에 적응하기가 좋다. 자본에 흐름에 휘둘리지 않고 주도하기 위해서는 자본의 흐름 자체를 파악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그렇게 하여 자본의 주인이 되어야지 자본의 노예가
되어서는 안 된다. 어디까지나 자본은 인간의 목적을 달성하게 만드는 수단이다. 이런 수단이 목적이 되어버린 까닭은 대부분 도구로 제조되어 인간의 목적을 가진 사람이 많지 않기 때문이다. 돈을 바라는 이유에 대해 물어보면 대부분 하고 싶은
걸 할 수 있기 때문이라 대답한다. 그래서 뭘 하고 싶으냐고 물어보면 뚜렷하게 정해진 것은 없이 이것저것 대답할 뿐이다. 확고한 목적이 없다. 돈이 있으면 뭐든지 할 수 있고 할 수 없는 건 더 많은 돈이 있으면 된다며 말을 하는
사람이 있다. 자본의 노예가 되어 시야가 좁아지는 바람에 돈이란
단어를 다른 힘으로 교체해도 결과는 같다는 걸 모른다. 재력을 권력으로 바꾸나 무력으로 바꾸나 매력으로 바꾸나 높은 확률로 뭐든지 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낮은 확률로 무작정 쏟아 부어도 하고 싶은 걸 못할 수 있다. 재력은 이런 힘 중 하나일 뿐이다. 돈의 특성상 아무 능력이 없어도 큰 힘을 발휘할
수 있기에 보다 더 매달리는 것은 안다. 그런데 그게 욕망이 작다는 걸 의미한다. 강한 욕망이 있다면 강한 힘을 바랐을 것이다. 돈을 바라는 욕망이 잘못되었다 말하는 게 아니다. 자본의 노예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걸 말하는 것이다. 그저 사는 게 목적이라 말할 수 있다. 그런 게 그건 다른 동물과 다를 바 없다. 학생이 인간다운 목적을 가질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자본을 다루는 법을 배워 자본의 주인이 되어 목적을
위해 자본을 수단으로 쓸 수 있는 인간이 되게끔 가르쳐야 한다.
다양한 힘을 배운 상태에서 다양한 도덕과 가치관을
접한 다음 현재 사회의 도덕과 가치관이 타당한지 검토해본다. 예컨대 어떤 사건이 발생했다 하자. 우선 보편적인 도덕과 가치관이 어떤 식으로 적용되는지 알아보자. 그 뒤 주관적으로는 어떤 식으로 적용할 것인지 생각하면서
도덕과 가치관을 구축하다 보면 큰 틀은 다른 사람들과 같을 수 있어도 작은 틀은 개개인의 고유한 개성이 담길 수 있게 된다. 예컨대 이런 것이다. 모두가 자유주의를 추구한다 하더라도 각각의 사건에서는
견해의 차이가 있을 수 있다. 약화교육에 침범되지 않은 상태에서 강한 의지를 가진 이가 고유한 개성을 갖춘 다음 다른 사람과 대화를 하면서 자신의 사고방식과 행동원리를
설계하면 온전한 자아를 형성했다 할 수 있을 것이다. 선동이나 세뇌가 간섭하더라도 온전한 자아가 있다면 크게 휘둘리지 않고 대응할 수 있다. 명확한 방식과 원리를 구축했기 때문이다.
온전한 자아를 바탕으로 현명한 지성을 갖춰야 비로소
지성인이라 할 수 있다. 지성이란 지각된 것을 정리하고 통일하여, 이것을 바탕으로 새로운 인식을 낳게 하는 정신 작용. 넓은 뜻으로는 지각이나 직관, 오성 따위의 지적 능력을 통틀어 이른다고 한다. 새로운 인식을 낳게 하는 정신 작용.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것. 새로운 답을 제시하는 것. 알파벳 A에서 Z까지 어떤 지식들이 나열되어 있다고 가정하자. 거기에서 누구는 AFZ를 조합하여 새로운 걸 만들고 누구는 BCN을 조합하여 새로운 답을 제시한다. 이런 것이 보통 새로운 인식이다. 현명의 의미는 어질고 영리하고 사리에 밝다라고 한다. 현명한 지성이란 어질고 영리하고 사리에 밝은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냥 새로운 것이 아니라 현명함이 붙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현명함은 뒤에 붙어야 한다. 먼저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고 그것이 현명하다 할 수 있는지 판별해서 결정해야 한다. 사람은 생각을 할 때 제한을 두면 한계에 봉착한다. 생각에는 어떤 제한도 두어서는 안 된다. 그럼 어떻게 해야 새로운 것을 만들 수 있는지 알아보자. 하나, 객관과 주관을 분리하여 사고하는 교육. 둘, 주관이 온전하게 성장하는 교육. 셋, 성장한 주관을 객관화하는 교육.
하나, 객관과 주관을 분리하여 사고하는 교육. 예를 들어보겠다. 소설을 파악할 때 보통 작자의 의도를 알아보는 식으로 교육한다. 그럴 때 보편적으로 널리 알려진 답과 자신이 생각해서
결론 내린 답을 둘 다 생각해야 한다. 평가를 할 때에도 객관적인 답과 주관적인 답을 둘 다 적도록 하게 해야 한다. 그렇게 해서 객관과 주관을 분리할 수 있어야 객관과 주관을 비교하여 명확한 주관을 파악할
수 있다. 파악할 수 있어야 학생의 주관이 살아남을 수 있다. 객관을 모르는 인간이 주관을 분리해낼 수 있을 리
없다. 주관을 모르는 인간이 새로운 걸 만들어 낼 수 있을
리 없다. 둘, 주관이 온전하게 성장하는 교육. 객관과 주관을 분리하여 주관을 유지한 학생이 새로운 생각을 떠올리면 그 생각이 볼품없거나
미약하거나 중복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어떤 형태를 통해 완성을 하는 걸 목표로 하게끔 해야 한다. 인류는 역사가 오래되어 지식을 매우 많이 쌓여있다. 그래서 어떤 새로운 생각이 과거와 겹칠 확률이 높다. 겹치는 게 시장에서는 바람직하지 않을 수 있다. 하나 교육에서는 아무래도 좋다. 그 생각을 양분으로 삼아 성장한 다음 새로운 생각을
하면 되기 때문이다. 시행착오 없는 새로운 길은 드물다. 성패와 관계없이 일단 완성하는 걸 목표로 하는 교육이 필요하다. 이 과정 속에서 현명함을 덧붙여야 한다. 셋, 성장한 주관을 객관화하는 교육. 주관으로 만든 새로운 것을 타인이 알기 쉽게 설득력을 갖출 수 있도록 다듬어서 공개한
뒤 그걸 많은 사람들이 받아드리게 되면 객관화가 된다. 정리해보자. 학생이 강한 의지와 현명한 지성을 갖춘 온전한 자아를 가질 수 있도록 돕는 것이 바로 인간교육이다. 그 다음 능력을 상품화하여 대여의 형태로 거래할
수 있어야 시장경제의 도구로 전락하지 않을 수가 있다. 인간교육까지는 교사가 주도적이고 능력의 상품화부터는 학생이 주도적이다. 이제 능력의 상품화에 대해 알아보자.
능력은 상품화가 되어야 소유권이 생긴다. 인간은 능력을 소유할 수 있어야 능력의 주인이 될
수 있다. 능력의 주인이 되어야 다른 사람과 대등하게 거래할
수 있다. 능력의 상품화야말로 인간을 대등한 존재로 이끄는
열쇠였다. 지금까지 노사관계는 농노와 지주와의 관계와 본질적으로
같았다. 농노에서 배려를 늘린 것이 노동자다. 자본가는 노동자 자체를 구매하여 최대한의 이윤을
위해 노동자를 한계까지 착취했다. 이것이 가여웠던 사회주의자들은 자본가에게 불쌍한 노동자를 배려해달라 요구했다. 사회는 가엾은 노동자들을 위해 일괄적 근무시간이나 고정된 최저임금 등과 같은 배려를 해주었다. 그러나 노동자가 그런 배려를 받는다고 본질적으로
농노의 위치에서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그저 배려만 늘어났을 뿐이다. 공산주의자가 노동자의 나라를 만들자며 노동자를 선동을 했다. 선동 끝에 나라가 세워지자 공산당원이 자본가의 위치를 대신했다. 자본가가 공산당원으로 바뀐 것일 뿐이기에 노동자는
여전히 고통 받았다. 중국을 예로 들어보자. 현재 중국은 경제적으로는 자본주의를 받아드렸다. 그러자 정치적으로는 공산당원이 자본가와 노동자를 착취하고 경제적으로는 자본가가 노동자를 착취했다. 실상 노동자의 나라가 아니라 공산당원의 나라가 되었다. 농노와 노동자는 개인이 집단에 종속된다는 점에서
동일했기 때문에 계속 착취당했다. 농노가 지주가 만든 집단에 종속되는 것이나 노동자가 자본가가 만든 집단에 종속되는 것이나 노동자가 공산당원이 만든 집단에 종속되는 것은
모두 같다. 씁쓸한 일이다. 노동자가 불쌍해 배려해주는 것으로 끝나버리니 근본적인
구조를 바꿀 수가 없었다. 이것은 환자가 불쌍해 진통제를 먹이고 끝나버리고 치료를 하지 않는 것과 같다. 이제는 치료를 해야 한다. 이제는 근본적인 구조를 바꿔야 한다. 그 시작이 바로 능력의 상품화다.
상품은 시장에서 거래될 수 있는 모든 걸 지칭한다. 능력의 상품화는 능력을 시장에서 거래될 수 있게끔
만드는 걸 의미한다. 일정시간 동안 능력을 빌려주고 대가를 받는다. 이는 단순한 노동부터 복잡한 노동까지 전부 적용될 수 있다. 아르바이트생이 능력을 빌려주고 대가를 받는다. 전문직이 능력을 빌려주고 대가를 받는다.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되려 인간 자체가 상품화되어 거래되는 것보다 훨씬 낫다. 이래야 대등한 관계에서 공정하게 거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생각해보자. 노동자와 자본가가 대등한 관계에서 거래했기 때문에
대여의 형태로 구매한 능력 외의 것을 노동자에게 요구할 수 없게 된다. 만약 요구하게 되면 그것은 계약위반으로 인한 계약파기 및 위약금 지불이 이루어져야 한다. 이 얼마나 대등하고 공정한가? 물론 인식의 차이로 정착하는데 시간이 다소 걸릴
수 있으나 이 길이 모두 대등해질 수 있는 길임이 확실하다. 지금까지 인간 자체가 상품화되어 거래되고 있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상품화를 부정적으로 여기고 있다. 이제는 그런 편견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능력의 상품화가 가능할까? 그건 능력에 상품가치를 부여하는 매력을 더하면 된다. 그 매력에 이끌려 능력을 빌리고자 하는 이가 나타나면
거래할 수 있게 된다. 한국인은 뛰어나다. 평균 학력도 높고 국민성도 나쁘지 않다. 한국보다 안전한 국가가 드물다. 애초에 한국인은 과중한 도덕적 의무를 부과 받아 기본적으로 도덕적이기 때문에 인터넷 상에서 험한 말을 하는 이조차 사회에서는 보통 얌전한
편이다. 물론 이것은 도덕적 의무는 자유적응이 필요하다. 종종 한국인이 한국인을 평가절하하는데 세계를 기준으로
보면 객관적으로 우수한 편임이 확실하다. 그러나 상품화 능력은 낮은 편이다. 모두가 상품화 능력이 높았다면 실업률이 높을 수가 없다. 애초에 대부분 상품화 능력을 제대로 배운 적이 없었기 때문에 사실 낮을 수밖에 없다. 능력의 상품화나 사물의 상품화가 단순히 포장이나
꾸밈만을 뜻하는 게 아니다. 유창한 자기소개나 포트폴리오만을 말하는 게 아니다. 근본적으로 능력이나 사물이 다른 사람에게 필요하게 되게끔 만드는 걸 말하는 것이다. 필요로 하는 것에 추가로 포장을 할 수 있는 거지 필요로 하지도 않는 것에 포장해봐야
의미가 없다. 필요한 정도에 따라 상품가치가 달라진다. 상품화를 한다고 해서 수익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
필요가 되는 걸 목적으로 한다. 상품이 필요 되면 알아서 수요가 올라 수익을 올릴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은 이런 상품화 능력을 대학이나 직장에서 주먹구구식으로 대충 어렴풋이 익히고 있다. 하나 그래서야 제대로 익힐 수가 없다. 어릴 때부터 익혀야 된다. 자아형성시기에 사고방식과 행동원리가 굳어지는 경우가
많은데 그때 상품화 능력을 키워놓지 않으면 나중에는 어렵다. 가능한 사람도 있지만 보편적으로는 힘들다. 어릴 때 이성애를 배워둬야 나중에도 연애하고 결혼하고 출산하여 출산율을 유지할 수 있게
되듯 어릴 때 상품화 능력을 익혀둬야 나중에도 취업하고 사업하여 경제를 유지할 수 있게 된다. 상품화 능력이 몸에 배면 사진 한 장을 찍더라도 상품가치가 있는 사진을 찍을 수 있게
될 것이다.
학생이 상품화를 하는 능력을 어떻게 가르쳐야 할까? 그건 학생들이 직접 상품화를 해봐야 한다. 조별과제를 예로 들어보자. 조장은 자본가 역할을 맡고 조원은 노동자 역할을
맡고 교사는 소비자 역할을 맡는다. 조장은 교사에게 과제를 팔아 점수를 벌고 조원은 조장에게 능력을 빌려주고 점수를 번다. 조장은 교사가 구매하고 싶어할 새로운 주제를 다룬 과제를 만든다. 조장은 과제에 필요한 능력을 가진 조원을 찾는다. 조원은 조장에게 자신의 능력을 상품화하여 빌려준다. 조장은 시장에 나온 능력을 면밀하게 판단하여 필요한
능력을 빌리는 계약을 맺는다. 계약서에 미리 점수 분배 방식을 결정한다. 조장과 조원의 협력으로 과제가 완성되면 그 과제를 교사에게 판다. 교사는 과제의 가치를 고려하여 적절한 점수를 지불하고 과제를 구매한다. 조장은 지불 받은 점수를 계약서에 명시된 분배 방식에
따라 조원에게 나눠준다. 예컨대 이런 것이다. 교사에게 100점을 지불 받으면 조장은 계약에 따라 A에게 23점을 분배하고 B에게 24점을 분배하고 C에게 25점을 분배한다. 조장은 나머지 28점을 받아간다. 과제에 대한 기여도나 판매 결과에 따라 계약위반이 발생할 수도 있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조원에게 계약서에 명시된 대로
점수를 분배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점수 수익이 낮아 분쟁이 발생할 수 있다. 300점에 팔기로 하고 분배를 결정했는데 100점에 팔리면 계약서에 명시된 대로 분배하지 못할 수도 있다. 물론 이것은 퍼센트로 분배하기로 해두면 문제가 없다. 그러나 정도를 넘어서지 않는 한 점수로 분배하기로 결정했다 하더라도 구체적인 계약에 간섭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래서야 교육이 되지 못한다. 이런 계약문제로 발생하는 분쟁을 해결하는 것도 의미
있는 교육이 될 것이다. 공정한 점수를 분배하는 것도 공정한 부를 분배하는 것을 경험하여 부의 분배를 올바르게 이해하는 교육이 될 것이다. 이렇게 유사경제구조를 만든 다음 조원인 학생이 직접
조장인 학생에게 능력을 빌려주는 경험을 해봐야 한다. 어떻게 해야 조장이 능력을 빌리려 할 것인가? 그런 것에 대한 고민이 능력의 상품화 능력을 키워주게 될 것이다. 조장인 학생은 직접 교사에게 과제를 파는 경험을 해봐야 한다. 어떻게 해야 교사에게 비싸게 팔 수 있을까? 그런 것에 대한 고민이 사물의 상품화 능력을 키워주게
될 것이다. 모든 학생이 조장과 조원을 번갈아 하면 다양한 입장에서
상품화하는 능력을 키울 수 있게 될 것이다. 능력의 상품화는 학생의 능력을 보다 세심하고 꼼꼼하게 키우게 만든다. 왜냐하면 그 능력이 학생의 소유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인간은 인간 자체가 팔려나가 개인이 자신의
능력을 키우고 책임지는데 다소 소홀했다고 본다. 자신의 소유도 아닌 능력을 굳이 더 키워야 할 이유를 몰랐을 것이다. 이제는 달라져야 한다. 개인이 자신의 능력을 소유하여 키워나가는 환경이 필요하다.
이런 유사경제구조에서 상품화하는 능력을 키운 다음
실제 경제구조에서 상품을 파는 것을 경험해봐야 한다. 상품화 교육을 통해 능력을 키웠다면 그리 어렵지 않다고 본다. 기본적인 구조는 이렇다. 능력을 상품화하여 사업자에게 능력을 팔아 아르바이트를 해보거나 사물을 상품화하여 온라인 마켓에 사물을
팔아 수익을 얻어본다. 이외 나머지도 비슷하다. 학문을 상품화하여 논문을 제출해보거나 예술(미술 음악 등)을 상품화하여 개인방송이나 사이트에 올려본다. 기술(IT)을 상품화하여 앱을
제작해 어플리케이션 플랫폼에 올려보거나 문화(소설 만화 영화 게임 등)를 상품화하여 사이트에 올려본다. 자신의 능력이나 사물에 매력을 더해 사람에게 필요로 해지는 경험을 해봐야 한다. 그래야 인간이 인간을 필요로 하는 존재라는 걸 자각할 수 있다. 새로운 상품화도 할 수 있다. 게임이 가상의 세상에서 가상의 상품으로 장사했듯이
새로운 걸 상품화하여 팔 수도 있을 것이다. 새로운 상품화는 본질을 파악하는 것에서 시작하는 것이 좋다. 어떤 상품을 바라는 본질적인 이유를 파악해야 그 본질을 공유하는 다른 영역을 상품화하여 팔 수 있게
된다. 가령 이런 것이다. 한국과 일본은 애정결핍에 걸려있는 국가다. 한국은 애정결핍을 대중문화로 해소했고 일본은 애정결핍을
창작물로 해소했다. 그래서 한국은 주로 아이돌문화가 발달하고 일본은 주로 오타쿠 문화가 발달했던 것이다. 애정결핍이란 본질을 파악한 뒤 결핍을 해소할 수 있는 새로운 방법을 찾으면 그 방법을
상품화하여 팔 수 있다. 그게 바로 새로운 상품화다. 이렇게 팔고자 하는 대상이 무엇을 필요로 하는가, 무엇이 결핍되어 있는가, 그런 것을 본질적으로 파악하는 방법을 익혀두면 앞으로 새로운 상품을 만드는데 어려움을 느끼지 않게 될 것이다. 이런 상품화는 학생이 주도해야 한다. 교육은 명확한 목적을 제시하고 공정한 평가를 하기만
하면 된다. 어떻게 상품에 매력을 더해 상품가치를 키울 것인지는
학생 스스로 생각해야 한다. 물론 교사가 그걸 도와줄 수는 있다. 그러나 결코 주도해서는 안 된다. 그러면 교육이 되지 못한다.
상품화 교육은 시간이 많이 필요하다. 그래서 지식을 암기하는 시간을 줄여야 한다. 마침 인터넷과 스마트폰의 등장으로 어디서든 지식을
참고할 수 있다. 이제 요점만 암기하면 된다. 요점만 기억하면 인터넷에 검색하여 나머지를 보충할
수 있다. 전문분야는 많은 걸 암기할 필요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대부분은 분야에 종사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암기가 될 것이다. 전문 외의 분야는 요점만 기억해도 충분하다. 평가도 요점만 평가해야 한다. 나머지는 상품화 능력을 평가해야 한다. 암기 능력이 뛰어난 사람과 상품화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 있다 해보자. 어느 쪽이 더 수요가 있겠는가? 당연히 상품화 능력일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상품화 능력이 우선되어야 한다. 아니 어느 사회에서든 사람들에게 필요로 하는 능력을
갖추는 것이 우선되어야 한다. 지금까지는 학생 자체가 시장경제의 도구로 팔려나갔으니까 상품화 능력을 키우는데 소홀했던 것이다. 상품화 능력의 평가에 대해 알아보자. 암기는 평가하기가 쉽기 때문에 공정하기도 쉽다. 양궁의 표적 점수와 같다. 하나 상품화 능력은 객관적인 수치를 도출하기 다소
어렵다. 피겨스케이팅의 예술 점수와 같다. 기업이라면 상품이 팔린 수치로 객관적인 평가를 할
수도 있다. 하나 교육은 능력의 종류가 다양하여 모든 상품이
자본을 대가로 받지 않고 과정도 평가하기 때문에 객관적인 평가가 어렵다. 그래서 공정성이 훼손될 우려가 있다. 그러나 생각을 바꿔보자. 상품화 능력은 학생이 주도한다 했다. 학생은 교사의 평가와 무관하게 자신의 상품을 팔 수 있어야 한다. 대학이면 대학에 지금까지 상품화하여 팔았던 것을
보여주고 판단하게 한다. 대학은 최저수능점수를 통해 최저한의 지식을 평가하고 나머지는 상품화 능력을 평가한다. 대학은 학문을 공부하는 곳이기에 상품화가 이상해 보일 수 있다. 하나 상품화는 사람에게 필요로 하게끔 만드는 것이다. 학문을 상품화한다는 것은 학문을 사람에게 필요로
하게끔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학문의 지향점과 무엇이 다른가? 오로지 개인의 욕망에 따라 학문을 공부할 수도 있다. 그런데 그것은 개인이 학문을 필요로 하게 된 것이다. 인간에게 필요로 하게끔 하는 것이 학문에 부적합할 수가 없다. 기업이면 기업에 지금까지 상품화하여 팔았던 것을
객관적인 수치로 보여준다. 기업은 결과를 중시하기에 결과 중심으로 어필하는 것이 좋다. 상품화의 결과를 토대로 해당 기업의 상품을 얼마나 팔 수 있는지 또는 얼마나 새로운 상품을 만들 수
있는지를 어필한다. 이런 식으로 자발적으로 학생이 상품화를 통해 능력의 가치를 증명하는 식으로 진학과 취업을 해야 한다. 사실 상품화 능력이 뛰어나면 굳이 대학이나 기업에
가지 않아도 된다. 홀로 또는 여럿이 사업을 하면 된다. 대학은 진정 학문을 공부하고자 하는 사람이 가면 된다. 기업은 잠시 사업비용을 얻기 위해서 가거나 특별히 가고 싶었던 기업에 가면 된다. 이렇게 학생이 주도적으로 상품화 능력을 대학이나
기업에 어필할 수 있으면 교사의 평가는 오로지 참고자료가 될 것이다. 그러면 굳이 객관적인 평가를 고집하지 않아도 된다. 교사의 학생 평가라는 주관적인 정보에 신뢰도를 더하기 위해 학생이 교사를 평가한 것도
참고할 수 있게 하면 좋을 것이다. 강한 의지를 가진 상태에서 본성을 파악하고 온전한 자아를 형성한 뒤 현명한 지성을 갖추어 상품화 능력을 키우는 것이 자유국가의 인간교육이다.
인간교육에 대해 생각하면서 한국이 얼마나 쉴새 없이
빠르게 달려왔는지 새삼 깨닫게 되었다. 지나치게 빨리 달려서 인문학이 쇠퇴할 정도로 경제와 기술 위주로 발달했던 것 같다. 한국은 그러다 자유적응에 실패했던 것이다. 이제는 자유국가에 맞춰 사상과 구조를 재정립해야 하여 자유에 적응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나는 그것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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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이거 써봐야지 하고서 일단 주제부터 던져놓고
쓰는데 상상 이상으로 생각할 게 많았네요. 아, 인간교육도 이 정도 걸리는데 역할주의는 도대체 얼마나
많은 시간을 소모할지 예상하기 어려워요. 생각도 많이 해야 하고 책도 많이 읽어야 하고 경험도 쌓아야 하고. 까놓고 말해 더 많은 경험을 해보고 싶어요. 정상적인 성장이 아니라서 경험이 부족한 게 꽤 많거든요. 어쨌든 그러면 일반 사상서 정도는 쓸 수 있을 것
같네요.
요즘 이런 생각이 듭니다. 어떤 연기자가 있다고 합시다. 그 연기자가 불현듯 현실에서 연기를 하고 싶다는
충동을 느낍니다. 현실에서 정치가를 연기해보겠다고 다짐합니다. 모든걸 버리고 사람들을 속이기 시작했습니다. 연기자는 맑은 이상을 가진 사상과 완벽한 정합성을
띈 논리와 끝없는 사랑을 전할 수 있는 매력을 가진 채 사람들 앞에 당당히 섭니다. 연기자는 관객들을 속이는 것과 같이 사람들을 속입니다. 그런 속임수에 사회 전체가 속았습니다. 속은 것은 연기자 본인도 마찬가지. 진심으로 제 역할을 다하는 정치가를 연기합니다. 국가를 발전시킬 수 있는 개혁과 혁신이 담긴 정치를
합니다. 사이가 좋고 업신여겨지지 않는 외교를 합니다. 모두가 납득하는 부패를 청산하는 경제를 만듭니다. 자유롭고 공정한 사상으로 화합하는 사회를 만듭니다. 낡은 부조리를 지우는 문화를 만듭니다. 다양한 모순을 바로잡습니다. 국가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자유롭고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합니다. 그렇게 하여 국민에게 사랑 받는 정치가를 연기합니다. 그 연기자는 모두를 속인, 자기자신조차 속인 위대한 연기자가 되었습니다. 그런 정치는 진짜일까요, 가짜일까요? 그리고 국민은 무엇을 원할까요? 정치가의 역할은 다른 사람 대신 싸워주는 겁니다. 사람들의 대표가 되어 그들을 위해 대신 싸우는 거죠. 그러니까 정치가는 제정신으로 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사사로운 사리사욕 정도의 작은 욕망을 지닌 사람은
정치에 적합하지 않습니다. 국가의 발전과 수많은 사람의 행복을 바라는 것과 같은 순수하고 커다란 욕망을 지닌 인간이 정치에 적합합니다. 정말 욕망에 미친 인간이 아니고서는 하기 어렵습니다. 만약 그럴 수 없다면 진심으로 말하건대 정치가를
그만두는 편이 좋습니다. 그만두지 않겠다면 연기를 했으면 좋겠습니다. 이상을 연기해주세요. 이상을 연기하다 보면 그 이상이 자신이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떨 때에는 차라리 내가 보좌관을 하는 게 더 잘할
거 같다는 생각이 종종 듭니다. 대중정치는 잘할 것 같은데. 대중정치는 소용돌이죠. 무언가를 하려고 해도 한 바퀴 돌면서 여러 사람들을 고려해봐야 합니다. 직선으로 가는 것보다 돌아서 가는 게 보통 더 빠릅니다. 뭔가 임팩트를 줄 때에는 직선으로 가는 게 아니라
소용돌이를 돌되 속도감을 줘야 하는 거죠. 모두 고려하면서 빠르게 진행하면 됩니다. 작은 시작점에서 뱅글뱅글 돌면서 점점 커집니다. 소용돌이가 커짐과 동시에 영향력도 커집니다. 그런 식이 영향력을 키우면서 주도권을 강화하는 게 대중정치라 생각합니다. 무언가 목표를 향해 나아가기 위한 언행을 하고자 한다면 하기 전에 한번쯤은 소용돌이를
떠올려보길 권합니다.
맞춤법 때문에 국립국어원의 질답을 종종 봅니다. 그래서 하나 말하자면 국어학자가 한국어 문법을 정리해서
불규칙을 없애거나 줄였으면 좋겠네요. 한국 국어학자는 우수하다 봅니다. 분명 연구하면 보다 효율적인 문법이 탄생할 거라 생각합니다. 불필요한 단어변경에 힘을 쓰는 것보다 그게 훨씬 유익할 겁니다.
소음 스트레스 이사 가고 싶다 의자 바꾸고 싶다
왤케왤케 단어가 왤케왤케 귀엽나요 빵모자도 귀엽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