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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권력의 이기심이 비추는 어둠 (0) 2020/12/14 PM 01:46

권력의 이기심이 비추는 어둠

 

 

 

「이타적인 착한 한국인」 옛날옛적에 한국이란 나라가 있었습니다. 그곳에 사는 한국사람들은 본인의 이익보다 타인의 이익을 우선시하도록 교육받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이타주의가 착한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반대로 본인의 이익만 따지는 이기주의는 나쁜 것이었습니다. 한국에서 이타주의자는 착한 사람이 되고 이기주의자는 나쁜 사람이 되었습니다. 따뜻한 마음씨를 지닌 착한 사람들은 사람들의 행복을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파렴치한 이기주의자가 본인의 이익을 위해 하고 싶은 걸 할 때마다 선량한 이타주의자들은 따끔한 일침을 날렸습니다. 「왜 너는 너의 이익만 따지는 거야? 타인의 이익을 우선시 해야지!」 일침을 당한 사람이 본인의 이익을 내려놓고 타인의 이익을 우선시하자 이타주의자는 그제서야 잘했다고 방긋 웃으며 칭찬을 했습니다. 「정말 착하네. 참 잘했어요.」 칭찬을 받은 이기주의자는 입가를 움직이며 웃습니다. 모두가 웃습니다. 행복해졌습니다. 짝짝짝. 이기적인 사람은 아직 많습니다. 그런 사람이 두더지잡기의 두더지처럼 돌출되어 사람들의 눈에 띄면 이타주의자는 정의의 망치를 들고 그 사람을 두들깁니다. 「하고 싶은 일을 하려고 하다니! 이런 이기적인 사람! 너는 잘못하고 있는 거야!」 이타주의자는 돌출된 이기적인 인간을 마구 두들겨 이타적으로 만들고 나서야 만족하며 웃습니다. 불편함이 사라졌는지 속 시원한 표정입니다. 하고 싶은 걸 하려던 이기적인 사람은 바닥에 내려앉아 입가를 움직이며 웃습니다. 모두가 웃습니다. 행복해졌습니다. 그렇게 정의가 구현되었습니다. 짝짝짝. 한국인들이 타인의 이익을 위해 살았습니다. 모두가 타인의 이익을 위해 살자 어떤 특정한 이익에 몰려 같은 이익을 공유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올바름이 되었습니다. 그 이익에 반대되는 행동을 하는 사람은 정의의 망치로 두들겨 같은 이익을 공유하게 했습니다. 이윽고 너도 나도 다 똑같은 착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착한 한국인들은 오래오래 행복하게 잘 살았다고 합니다. . . . …… 막이 내려가다 멈춘다. - 막이 다시 올라간다. 만들어진 웃는 얼굴 그림이 사라지고 초췌한 현실 속 인간이 퀭한 눈으로 의지를 잃어버린 채 주저앉아 있었다. 현실은 동화가 아니었다. 착한 사람들이 행복한 사회를 만드는 게 아니었다. 오히려 착한 사람들이 착하게 행동할수록 사회는 불행해졌다. 「어째서? 어째서야? 최선을 다해 착하게 행동하려고 노력했는데 어째서 불행해지는 거야?」 진영갈등이 심해졌다. 집단 이기주의가 사방에서 일어났다. 집단 괴롭힘이 사라지질 않았다. 선동에 취약해졌다. 사이비종교가 인간을 세뇌시켰다. 의존도가 높은 사람이 늘어났다. 책임을 지기 싫어하게 되었다. 겸손함을 강요당했다. 자신을 위해 돈을 쓰는 법을 모르게 되었다. 증오와 혐오가 멈추질 않고 불행의 연쇄가 끊어지질 않았다. 한국인들이 이타적으로 행동하면 행동할수록 사회문제는 심각해졌다. 한국사회에 짙은 어둠이 깔리게 되었다. 깜깜한 어둠 속에서 앞을 보지 못하게 된 이타주의자들은 꼭두각시처럼 누군가 하라는 대로 행동하게 되었다. 「그건 잘했어요!」 우르르 몰려가서 다 같이 칭찬한다. 「그건 못했어요!」 우르르 몰려가서 다 같이 욕을 퍼붓는다. 타인의 이익을 우선시하다 보니 자신의 이익을 위해 움직이는 자유의지가 상실되어 누군가에게 이용당하는 것이다. 가엾어라. 자신을 위해 살지 못하게 된 가엾은 사람들. 착한 사람들이 등장하는 「이타적인 착한 한국인」이란 동화는 희극이 아니었다. 도덕에 의해 자유의지를 상실해버린 가엾은 사람들이 등장하는 비극이었다. 그리고 그 비극은 현재 진행 중이다. 이해가 되지 않을지도 모른다. 「한국에 이기주의자가 그렇게 많은데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의문을 품을지도 모른다. 「약자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이타주의는 문제될 거 없지 않아?」 이 두 가지 물음에 대한 답을 하겠다. 첫째, 한국에 이기주의자가 많은가? 아니다. 대다수는 이타주의자들이다. 본인의 이익만을 위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조차 실제로는 타인이 정해둔 어떤 이익을 위해 행동했다. 그걸 어찌 이기주의라고 할 수 있는가? 진짜 이기주의자라면 타인이 어떤 이익을 제시해도 본인이 하고 싶은 일을 했을 것이다.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이 자신에게 있어 가장 큰 이익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국은 어찌했는가? 누군가 괜찮은 것이 있다고 말하면 생각하지도 않고 득달같이 달려들어 하지 않았나? 유행에 휩쓸려서 개업하고 유행이 끝난 뒤 폐업하는 수많은 자영업을 떠올려보라. 유행을 만든 타인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진정 이타적인 태도를 보여주고 있다. 유행을 만든 본사는 가맹점 계약으로 떼 돈을 벌고 가맹점주는 유행이 끝나면 쪽박을 찼다. 이 얼마나 이타적인가? 한국은 이타적인 사회다. 많은 한국인들이 누군가 정해둔 암묵적인 고정관념에 얽매인다. 10대는 이래야 해. 20대는 이래야 해. 30대는 이래야 해. 40대는 이래야 해. 50대는 이래야 해.」 서로 이타적으로 행동하다가 어떤 공통된 이익이 결정되면 그걸 위해서 살았다. 한국인은 평생 눈치를 보며 타인이 정해둔 삶을 산다. 취미도 개인사정에 따라 누군가 정해둔 것을 따른다. 「너희는 놀이공원에 가. 너희는 노래방에 가. 너희는 골프장에 가. 너희는 낚시터에 가.」 그러지 않으면 이상하다고 공격한다. 「너는 왜 어울리지 않는 짓을 하는 거야? 이상해.」 감정도 누군가 정해둔 것을 따른다. 「이건 기쁜 거니까 웃어야 해. 이건 슬픈 거니까 울어야 해. 이건 예쁜 거니까 좋아해야 해. 이건 나쁜 거니까 화내야 해.」 다 같이 같은 감정을 공유하지 않으면 이상한 사람이 된다. 「너는 왜 혼자 다른 감정을 가지고 있는 거야? 남들은 웃고 있는데 왜 웃지 않아? 남들은 울고 있는데 왜 울지 않아? 이상해.」 인간관계도 누군가 정해둔 것을 따른다. 「넌 얘하고 어울려. 넌 쟤하고 어울리지 않아.」 그런 기준에 맞지 않은 관계를 가지면 이상한 사람이 된다. 「나이차이가 많잖아. 미의 수준이 다르잖아. 노는 수준이 다르잖아. 버는 수준이 다르잖아. 이상해.」 장래도 누군가 정해둔 것을 따른다. 「중학생이 되었으니 예체능은 없고 공부를 해서 성적을 올리렴. 예체능을 잘한다고? 좋아한다고? 그걸로 성공할 수 있을 것 같아? 공부를 해. 그래야 성공해. 그게 맞는 거야.」 행복도 누군가 정해둔 것을 따른다. 「이게 행복한 거야. 저게 행복한 거야. 이래야 행복한 거야. 저래야 행복한 거야.」 한국인들은 본인의 의지로 본인을 위해 사는 게 아니라 타인의 의지로 타인을 위해 산다. 자기 이익을 위해 행동하는 방법조차 모른다. 서글플 정도로 이타적이다. 어떤 사람들은 한국인들이 부자들을 비난하는 걸 보고 똑같이 가난해야 하냐며 화를 낸다. 공산주의에 영향을 받은 것이 틀림없다고 한다. 그러나 그런 비난은 부자가 가난하길 바라는 게 아니다. 이타적이기를 바라는 것이다. 「너도 남을 위해 살라고!」 그래서 부자들이 자신을 위해 사치하면 비난 받는 것이다. 착각하면 안 된다. 자유주의든 사회주의든 자본주의든 공산주의든 그런 현대사상은 아직 한국사회에 스며질지 못했다. 대다수 한국인의 생각과 행동은 과거의 도덕에 근거한다. 둘째, 약자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이타주의는 문제가 없는가? 아니다. 약자의 이익을 맹목적으로 우선시하는 이타주의가 불공정한 사회를 불러 서로를 증오하고 혐오하게 만들었다. 여성의 이익을 우선시하자 역차별 논란을 불러 이성혐오를 부추기게 되었다. 아동의 이익을 우선시하자 불합리한 교통법이 생겨 아이들이 그 법을 악용하게 되었다. 소수자의 이익을 우선시하자 일반인은 상상하기 어려운 풍기문란을 저질렀다. 외국인의 이익을 우선시하자 표현의 자유를 용납하지 않는 자유롭지 못하고 차별적인 종교를 가진 사람들의 목소리가 커져 자유를 바라는 사람들이 불안을 떨게 되었다. 약하게 태어난 사람들의 이익을 우선시하자 치안이나 소방 등의 직업에 역할에 맞는 능력이 아닌 성별 같은 타고난 것으로 평가하고 구인해 제 역할을 못하는 사람들이 늘어 사회질서가 흔들리게 되었다. 맹목적인 이타주의는 대상이 무엇이든 잘못되었다. 빌어먹을 이타주의는 옳다는 이유 하나로 많은 사람들의 자유의지를 꺾고 불공정한 사회를 만들었다. 이타주의는 올바름이란 이름으로 인간의 의지를 앗아가는 괴물이었다. 이런 것은 지배국가에서나 어울린다. 자유국가에서는 모두가 이기적으로 행동하고 모두가 서로의 이기심을 평가해 올바른 것을 선정하여 그걸 자유의지로 추구해야 할 것이다. 그것이 자유롭고 민주적인 올바름이다. 그렇다면 왜 사람들은 이타주의가 잘못되었음을 인지하지 못했을까? 첫째는 올바른 것이었기 때문이다. 올바른 것이 잘못된 결과를 낳을 거란 예상을 하지 못했다. 「올바른 행동을 했는데 왜 나쁜 결과가 나와? 그럴 리가 없지!」 그런 안이한 생각 때문에 인지할 수 없었다. 둘째는 대부분의 사람이 무의식을 자신의 것으로 착각하기 때문이다. 앞으로 설명할 것은 굉장히 중요하니까 꼭 기억하길 바란다. 「대부분의 인간은 주변환경에 지배를 받는다.」 농담이 아니다. 자아성찰을 하지 않는 한 그렇게 되어버린다. 인간은 감각기관으로 들어온 모든 정보가 무의식적으로 작용하여 행동원리를 결정한다. 자신의 의지라고 생각했던 어떤 생각과 행동이 반드시 자신의 의지라는 보장이 없다. 누군가에게 들었던 주장을 무의식적으로 되풀이하고 있을 확률이 높다. 가령 이런 것이다. 누군가에게 「너는 A를 해야 해!」라고 교육받은 뒤 잊는다. 나중에 A를 무의식 중에 떠올려서 하고 싶어지게 된다. 그러면 마치 그것이 교육과 관계없이 자신이 하고 싶었던 것처럼 생각하게 되어버린다. A를 하고 싶어하는 건 나의 본심이야!A를 하고 싶어하는 것이 자신의 것이 되어버렸다. 그러다 보니 A가 잘못되었다고 비판 받으면 마치 자신이 비판 받는 것처럼 느껴지고 만다. 그래서 A가 잘못되었어도 바꾸기가 어렵다. 관습, 관행, 도덕 따위가 한번 주입되면 위와 같은 과정을 거쳐 그것이 잘못되었어도 바꾸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어떤 것이 수많은 문제를 일으켰음에도 본질적인 원인조차 파악하지 못했던 것은 올바름과 무의식 때문이었다. 요즘 불편한 사람이 많다는 걸 안다. 이것저것 불편함을 나타내며 불만을 표한다. 그런데 그 불편함이 위의 예시처럼 네 것이 아닐 수도 있다. 누군가 그걸 잘못되었다고 말하고 그것에 영향을 받은 탓에 마음속 불편함이 나타났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너의 무의식은 너의 것만이 아니다. 다른 사람의 영향이 크다. 그러므로 무의식적으로 어떤 생각이 떠오른다면 그걸 스스로 고찰해야 한다. 그래야 자신의 의지가 된다. 예를 들어보겠다. 어느 날 나는 식사를 하던 도중 먹고 있는 육류가 갑자기 맛이 없어지고 불쾌해짐을 느꼈다. 고기가 역겨워졌다. 토악질의 충동을 느꼈다. 고기를 먹는다는 사실이 불편해졌다. 그래서 생각했다. 「내가 이걸 왜 불쾌해할까? 나의 무의식은 왜 불쾌감을 느꼈을까?」 나의 내면을 돌아보았다. 기억이 떠올랐다. 지난번 고기가 되는 동물들의 참상과 환경오염에 관한 영상을 접한 적이 있다는 걸 깨달았다. 「아 내가 거기에 영향을 받아서 그랬던 거구나.」그리고 의식적으로 종의 본능, 생존 따위를 떠올리며 별 문제없음을 인지한 뒤 불쾌감을 감수하고 육류를 섭취했다. 그러자 다시 맛이 돌아왔다. 불쾌감도 사라졌다. 그 뒤도 별 문제없이 육류를 섭취하고 있다. 무의식이 시키는 명령에 따르지 않고 나의 의지로 고기를 먹는 것을 결정했다. 나는 이런 것이 자유의지라고 생각한다. 상당히 인상 깊은 경험이어서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내가 만약 그 순간 고찰하지 않았더라면 내 의지와 무관하게 고기를 먹지 못하는 채식주의자가 되었을 것이다. 육식을 하든 채식을 하든 내 자유의지가 결정할 문제다. 타인이 이래라 저래라 한 것이 무의식적으로 작용하여 본인의 육체를 지배하는 것을 용납해서는 안 된다. 도대체 이런 사례들이 얼마나 있을까? 불편하다고 말하는 사람들 중 자신의 의지로 불편한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환경에 지배 받는 걸 언제나 경계해야 한다. 사람들이 무의식이 자신의 것만이 아님을 깨닫고 환경의 지배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 변화의 시작이라 생각한다. 그래야 무의식에 간섭을 받지 않고 현상의 본질을 파악해 자유의지로 문제를 일으키는 낡은 것들을 바꿀 수 있을 것이다. 문제를 일으키는 낡은 것들은 아직도 사회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올바른 것을 의심하지 않고 무의식을 자신의 것으로 생각해 교육받은 대로 행동하기 때문이다. 연하를 차별하는 장유유서가 꼰대라는 원인을 만들어 가족애결핍과 세대혐오라는 결과를 낳았다. 이성을 멀리하는 남녀유별과 정조관념이 미성년자의 이성교제와 성관계금지라는 원인을 만들어 이성애결핍과 이성혐오라는 결과를 낳았다. 음주에 강한 사람이 우대받는 음주문화가 음주운전이라는 원인을 만들어 음주운전사고라는 결과를 낳았다. 맹목적인 이타주의 강요가 집단이익우선이라는 원인을 만들어 집단 이기주의라는 결과를 낳았다. 교육 받은 대로 결과가 나온다. 교육 받은 대로 하자 불행해졌다. 미성년자의 이성교제와 성관계 금지를 그렇게 강요해놓고 왜 출산율이 낮느냐고 불평하는 걸 보면 정말이지 쓴웃음을 나온다. 올바름과 무의식이 배운 걸 평생가게 한다. 그런데 그런 걸 몰라도 학생 때 공부가 중요하다고 강조했던 걸 보면 학생 때 배운 게 평생 간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걸 알면서도 이성교제와 성관계 금지는 평생 가지 않을 거라 생각했던 것이 된다. 정말 희극이자 비극이다. 대부분 평생 갔으니까 출산율이 줄어들고 이성혐오가 늘어난 것이다. 꼰대나 낮은 출산율이나 이성혐오나 음주운전 따위가 나타났던 것은 한국인들이 그저 배운 대로 행동했기 때문이다. 나는 한국인들이 올바른 것을 위해 사는 착한 사람들이라고 진심으로 생각한다. 단지 착하다는 기준이 문제였을 뿐이다. 한국인들은 가르친 대로 행한 것뿐이니 사회문제를 보고 이들을 너무 나무라지 말길 바란다. 그건 이제부터 바꿔야 하는 문제다. 바꾸는 걸 거부하는 이들을 나무라길 바란다.

 

 

 

본격적으로 이타주의가 부르는 현상들에 대해 알아보겠다. 자 생각해보자. 한국정치는 진영갈등을 부르는 진영논리가 심각하다. 지지하는 정당이 잘하건 잘못하건 지지한다. 심지어 자신의 신념과 다른 행동을 해도 지지한다. 반공과 자유민주주의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정당과 관계없이 그 가치를 중시했어야 했다. 그런데 어떠했던가? 지지하는 정당의 대통령이 중국 전승절에 참석했음에도 지지는 변하지 않았다. 적폐청산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정당과 관계없이 그 가치를 중시했어야 했다. 그런데 어떠했던가? 지지하는 정당에서 폐단의혹으로 논란이 발생해도 지지는 변하지 않았다. 지극히 이타적이다. 이것은 자신의 이익보다 정당의 이익을 우선시했기 때문에 발생하는 현상이다. 만약 이기적인 사람이라면 자신이 생각하는 신념에 맞춰서 세상을 바라봤을 것이다. 반공을 주장하는 사람이 이기적으로 행동했다면 공산당과 친하게 지내는 사람은 정당에 관계없이 비판했을 것이다. 적폐청산을 주장하는 사람이 이기적으로 행동했다면 폐단을 일으키는 사람은 정당과 관계없이 비판했을 것이다. 그렇지 않았던 것은 그런 자신의 이익보다는 그걸 주장했던 사람들의 이익을 우선시했기 때문에 자신의 신념을 접고 정당을 지지했던 것이다. 어떤 정당이 싫어서 다른 정당을 지지하는 일이 있다. 여당이 싫어서 야당을 지지할 수도 있고 야당이 싫어서 여당을 지지할 수도 있다. 아니 그런 경우가 많을 것이다. 만약 정책을 보고 지지했다면 다수의 정당이 지지를 받았겠지. 그러지 않고 양당체제가 된 것은 상대정당을 보기 싫어서 이길 수 있는 정당에 투표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싫어서 지지했음에도 어째서 맹목적으로 변해버리겠는가? 이타적이기 때문이다. 이타적이기 때문에 한번 지지를 결정한 정당에 소속감을 느끼고 그 정당의 이익을 위해 행동했던 것이다. 나는 자유를 기준으로 세상을 바라본다. 독재자를 미화하거나 옹호하는 걸 용납할 수 없다. 인간을 신의 종으로 삼으려는 종교를 정치에 끌어들이는 걸 용납할 수 없다. 인간을 지배하려는 공산당을 용납할 수 없다. 국가, 자본, 종교, 도덕 등 인간을 지배하려는 걸 용납할 수 없다. 이런 기준으로 정당의 행태를 평가하고 지지 여부를 결정한다. 그러면 그들에게 이용당하지 않을 수 있다고 본다. 일방적인 여성특혜나 성 문화검열이라는 남성박해에 반대할 것이다. 여성 혼자서 책임질 확률이 높은 낙태죄라는 여성박해에 반대할 것이다. 인간을 지배하는 걸 올바른 도리로 만든 장유유서라는 연하박해에 반대할 것이다. 유전자에 영향이 적음에도 인간의 사랑을 죄로 만든 4촌 결혼 금지에 반대할 것이다. 이교도를 처단하자는 종교를 다문화라는 이름으로 받아드리는 자국민박해에 반대할 것이다. 다문화는 정말 맹목적인 이타주의가 만든 황당한 정책이다. 지배하겠다는 인간에게 자유를 주고 차별하겠다는 인간에게 평등을 주다니. 자유국가가 혼란스러운 건 너무나도 당연한 현상이다. 지배와 차별을 하겠다는 인간들을 자유롭고 평등하게 대하는 것은 천적에게 잡아먹으라고 몸을 대주는 것과 다르지 않다. 나는 사상차별주의자다. 그리고 너희들도 사상차별주의자다. 전제주의사상을 차별하지 않나? 인종차별사상을 차별하지 않나? 이건 당연한 거다. 그릇된 사상을 차별하는 것은 당연히 해야 한다. 인종차별 말고 사상차별을 하면 된다. 따라서 자유국가에서는 자유와 평등의 가치를 인정하는 단일문화와 다인종 국가를 지향해야 할 것이다. 혈통, 인종, 피부색 아무래도 좋다. 자유국가에서는 자유와 평등을 사랑하면 된다. 그 외 나는 인간을 지배하는 자유롭지 못한 것에 반대할 것이다. 나는 지극히 이기적으로 행동했다. 내가 바라는 자유와 평등이라는 이익만을 위해 생각하고 행동했다. 그것에 어떤 문제가 있는가? 각자 이기적으로 행동할수록 정치가들에게 이용당하지 않을 수 있다. 자신이 바라는 것을 자유의지로 분명하게 표현할 수 있게 되어야 맹목적인 지지가 사라질 것이다. 정치가들에게 선동 당하는 국민들은 바보가 아니다. 단지 착했을 뿐이다. 대중을 개돼지 취급하는 인간이 있다는 걸 안다. 대중의 어리석은 행위에 실망하며 그런 취급에 은연중 동의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것은 이타주의적 교육에 영향을 받아 남의 말을 우선시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교육받았으니까 그렇게 행동했을 뿐이다. 그런 상황에서 대중을 개돼지 취급하는 것은 강제로 세뇌 당해 어리석은 짓을 한 피해자를 비웃는 것과 다르지 않을 정도로 잔혹한 일이다. 대부분 가해자며 피해자인 상황에서 누군가에게 책임을 떠넘길 수 없다. 앞으로 모두 자유롭게 자신이 원하는 올바른 일을 행할 수 있도록 올바른 이기주의를 강조해야 한다. 다음으로 넘어가겠다. 자 생각해보자. 한국은 집단 이기주의가 강하다. 온갖 비리, 폐단, 악습 등의 것들은 집단 이기주의가 영향을 끼친다. 같은 집단 내에 비리가 발생하면 동참하거나 감싸고 덮으려고 한다. 폐단이 있어도 모른 채 한다. 잘못된 관행도 관행을 만든 선배의 체면을 고려해서 방치한다. 지역의 집단 이기주의자들은 「우리가 남이냐?」라고 말하며 문제가 생겨도 모른 척 해달라고 한다. 왜 그랬겠는가? 자신의 이익보다 집단의 이익을 우선시했기 때문이다. 집단 구성원들이 이타주의자들이었기 때문에 집단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집단 이기주의가 일어났던 것이다. 지역갈등도 마찬가지다. 자신보다 지역의 이익을 우선시했기 때문에 다른 지역과의 갈등에 자신의 일처럼 감정이입하며 싸웠던 것이다. 이타주의가 집단에 강한 소속감을 느끼게 해 배타적이 되어 집단 외부와 마찰을 일으키는 것이다. 결속이 강한 시골에서 외지인과 마찰을 일으키는 것과 비슷하다. 노동, 기업, 부동산 등도 마찬가지다. 이타적이기 때문에 보다 더 배타적이다. 노사갈등은 서로의 이익을 위하는 이타주의가 더 심한 갈등을 부추겼던 것이다. 마음을 얼게 만드는 비리와 폐단과 잘못된 관행이 사라지지 않고 지역이기주의로 인한 지역갈등도 사라지지 않고 각 계층의 집단이기주의도 사라지지 않는 것은 따뜻한 마음으로 서로를 위하는 이타주의 때문이었다. 만약 이기적이었다면 어땠을까? 비리가 알아차렸을 때 비리를 일으킨 사람의 이익 따윈 신경 쓰지 않고 고발해버렸을 것이다. 폐단을 무시하지 않고 없애버렸을 것이다. 관행을 만든 선배의 체면은 신경 쓰지 않고 하고 싶은 대로 행동했을 것이다. 「우리가 남이냐?」라는 말에 말려들지 않고 자신이 생각하는 올바름을 행했을 것이다. 집단이 그릇된 이기주의를 주장할 때 집단의 이익을 무시하고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길을 걸었을 것이다. 집단에 강한 소속감을 느끼지 않기 때문에 배타적이지 않게 되어 외부와 불필요한 마찰을 일으키지 않았을 것이다. 사람들은 서로의 이익을 위하는 착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수많은 사회문제들이 사라지지 않았던 것이다. 이타주의 사회에서는 이런 이기주의자들이 공격을 받는다. 집단 구성원 중에 이기적인 이들이 집단 내부의 비리를 고발하면 이기적으로 행동했다며 이타주의자들에게 공격을 받는다. 그 집단에 추방되거나 속하더라도 소외를 당했다. 이타주의자들에게 있어 내부고발자들은 집단의 이익을 해친 이기주의자들이었기 때문에 그들의 공격은 이타주의 사회에서 당연한 일이었다. 이기적인 사회가 되어야 이런 올바른 일을 자유의지로 이기적으로 행하는 이들이 우대받을 수 있을 것이다. 인터넷 커뮤니티 이용자라면 보통 친목질의 폐단을 안다. 친목질은 집단을 배타적으로 만들어 새로운 사람의 유입을 멈추게 한다. 그 친목질이 바로 이타주의에서 비롯된 것이다. 집단 이기주의와 비슷하다. 본인보다 타인의 이익을 우선시하며 친목을 다지면 결속이 생기게 되고 결속이 생기면 집단에 속한 사람과 속하지 않은 사람을 분리해서 생각하게 된다. 그러면 집단에 소속감을 가지고 집단 외부에 배타적이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 사람들은 집단에 속해있음을 나타내기 위해 집단이 쓰는 은어나 손짓이나 그림을 사용한다. 특정 커뮤니티에서만 사용되는 은어를 쓰는 것이 바로 소속감이다. 대표적으로 외계어나 야민정음이 있을 것이다. 인터넷에서 굳이 사투리를 쓰는 것도 마찬가지다. 특정 지역에 속해있음을 드러낸다. 이는 종교의 이익을 위하는 이타적인 종교인들이 무슨 일만 있으면 종교 교리를 말하며 소속감을 드러내는 것과 같다. 이들은 이타적인 착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하지만 이타적이기 때문에 집단의 이익을 우선시하다 보니 배타적이게 되어 집단 외부와 마찰을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은 인지해야 할 것이다. 사람들이 이기적으로 행동해야 집단의 이익보다 개인의 이익을 우선시하게 되어 집단을 위해서라는 말에 선동 당하지 않고 집단 외부에 배타적이지 않게 될 것이다. 자유의지를 가지고 자신이 생각하는 올바름을 관철하길 바라겠다. 다음으로 넘어가겠다. 자 생각해보자. 한국은 집단 괴롭힘이 많다. 따돌리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의 주도로 어떤 학생들 집단적으로 괴롭히는 일들이 많다는 것이다. 왜 그런 걸까? 올바름과 무의식을 떠올려보자. 집단 괴롭힘도 어떤 올바름을 교육받은 결과일 확률이 높다. 한국의 아이들은 어떻게 교육을 받는가? 「부모님 말 잘 들어야 해. 선생님 말 잘 들어야 해. 어른 말 잘 들어야 해.」 아이들을 편하게 돌보기 위해 별생각 없이 아이보다 나은 결정을 내릴 확률이 높은 인간의 의견을 우선시하도록 가르친다. 본인의 생각보다 타인의 생각을 우선시하게 만든다. 이타적으로 만든다. 말 잘 듣는 아이들이 되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우선시 하는 타인이 아이보다 강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부모, 교사, 어른 다 아이보다 강하다. 아이보다 강한 인간의 말을 따르도록 가르친다. 「괴롭히지 말라는 내 말을 우선시하라고!」 그런데 그런 말이 아이들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고 어떤 행동원리를 만드는지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저 괴롭힘은 나쁘니까 하지 말게 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자신의 말을 따를 것을 강요한다. 그러면 어떻게 되겠는가? 아이들 사이에서 강한 인간의 말을 따르게 되어버린다. 교사가 폭력을 쓰지 못하게 된 시대에 아이들에게 물리적으로 가장 강하게 영향을 줄 수 있는 것은 같은 또래 중 힘이 강한 아이다. 강한 인간의 말을 따르도록 교육받은 아이들은 강한 아이의 말을 따르게 되어버린다. 어떤 강한 아이가 어떤 아이를 찍어서 괴롭힘을 하게 되면 강한 인간의 따르도록 교육받은 아이들은 얌전히 괴롭힘을 당하거나 그 아이를 따라 괴롭히거나 외면하게 된다. 집단 괴롭힘은 단순히 누군가 강해서 그렇게 되는 경우가 거의 없다. 인간은 연약하여 칼질 한방으로도 죽는다. 괴롭힘 당하는 아이들이 마음만 먹으면 어렵지 않게 복수할 수 있다. 다른 아이들도 동조하지 않거나 외면하지 않을 수 있다. 그럼에도 그러지 못한 것은 아이들이 교육받은 대로 행동했기 때문이다. 어떤 아이들은 보다 과중한 억압을 받는다. 「인사해. 절해. 복종해. 기뻐해. 슬퍼해. 좋아해. 싫어해. 공부해. 운동해. 이것도 해. 저것도 해. 다 해. 욕설은 안돼. 폭력은 안돼. 복수는 안돼. 일탈은 안돼. 반항은 안돼. 야한 건 안돼. 폭력적인 건 안돼. 노는 건 안돼. 이것도 안돼. 저것도 안돼. 다 안돼.」 어른들의 말을 잘 듣는 아이들일수록 올바름에 얽매여 자유를 잃어버린다. 정보를 검열하고 바람을 막아 아무것도 선택할 수 없게 된 아이들은 자유의지를 상실하고 무기력하게 변해버린다. 인간관계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게 되어버린다. 속된 말로 찐따가 되어버린다. 보통 이런 찐따가 되어버린 아이들이 표적이 되어 괴롭힘을 당한다. 이들이 이보다 더 많은 자유를 잃게 되면 마지막 자유는 죽음뿐이다. 모든 선택지가 막힌 아이들은 어찌할 줄 모르고 헤매다가 죽음이란 선택지에 도달해버린다는 것이다. 그들은 제대로 된 복수도 하지 못한 채 죽음이란 마지막 자유를 누리고 쓸쓸하게 떠나갔다. 절망적이다. 왜 그랬겠는가? 어른들의 말을 잘 듣는 착한 아이들이었기 때문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하자. 동물들도 죽음의 위기에 처하면 죽을 각오로 물어뜯는다. 그렇다면 왜 한국아이들은 죽기직전 죽을 각오로 행동하지 않았는가? 복수가 어렵다면 전학을 가도 되고 가출을 해도 된다. 그러지 않은 이유가 무엇인가? 그 이유는 간단하다. 한국아이들에게 있어 어른들이 강요한 올바름의 족쇄는 죽음보다 무거웠기 때문이다. 사무치게 슬프다. 어른들은 아이들이 왜 그렇게 되어버린 것인지 모를 것이다. 그저 착하게 만들려고 했을 뿐인데. 아이들을 위해서 그랬던 것일 뿐인데. 그런데 그건 착한 아이로 성장을 하게끔 도왔던 걸까 아니면 어른들의 말을 잘 듣는 순종적인 아이로 만들었던 걸까? 시끄러운 아이들을 보고 설득이 아닌 강압으로 시끄럽지 않게 만드는 부모가 있다는 걸 안다.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타인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착한 아이로 만들려고 했을 것이다. 그렇게 조용한 아이가 되면 착한 아이가 되었다고 기뻐한다. 그런데 그건 시끄러운 개를 짖지 않게 만드는 것과 다르지 않다. 인간을 위해 짖지 않는 개처럼 타인을 위해 시끄럽지 않은 순종적인 아이로 만든 것이다. 마음이 아프다. 그렇게 어른의 말에 복종하는 순종적인 인간으로 만들어놓고 아이들 사이에서 제 의사표현도 제대로 못하는 찐따가 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던 걸까? 어떤 경우에도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잃게 하면 안 된다. 이기적으로 살라고 가르쳐야 한다. 왜 다른 사람의 말을 우선시 해야 하는가? 인간은 자신의 의지로도 올바른 일을 할 수 있다. 올바른 일을 행하게 하고 싶으면 강압이 아닌 설득을 해야 한다. 그래야 자유의지를 침해하지 않고 올바른 일을 가르칠 수 있다. 괴롭힘 주동자에 동조하거나 외면하는 아이들도 마찬가지다. 강한 인간의 말을 따르도록 교육받았기 때문에 강한 아이가 어떤 아이를 괴롭히면 동조하거나 외면했던 것이다. 아이들이 자유의지로 올바른 일을 할 수 있는 이기적인 인간이 되도록 가르쳤다면 강한 인간이 나쁜 행동을 이기적으로 하는 것을 저지했을 것이다. 힘이 부족해 저지하지 못했을 거라고? 천만에. 소수의 힘이 아무리 강하더라도 다수가 막으면 막을 수 있다. 다수가 소수에 휘둘리는 것은 강한 사람의 말을 따르도록 교육받았기 때문이다. 왜 지성을 가진 인간이 동물처럼 행동했는지 알겠는가? 아이들은 동물처럼 본능적으로 행동한 것이 아니다. 인간처럼 교육을 받은 결과였던 것이다. 아이들을 망가트린 것은 잘못된 올바름이었다. 인간을 도덕의 노예로 만들면 안 된다. 남이 시켜서 올바른 일을 하게끔 해서는 안 된다. 이제는 자유로운 인간이 자유의지로 올바른 일을 이기적으로 행할 수 있도록 교육해야 할 것이다. 그것이 자유롭고 민주적인 방식이다. 다음으로 넘어가겠다. 자 생각해보자. 한국인은 선동에 취약하다. 왜 그랬던 걸까? 한국인이 선동 당하기 쉬운 것은 이타적이기 때문이다. 이타적이기 때문에 이기적인 자유의지를 잃고 다른 인간의 이익을 우선시하게 된다. 진영의 이익을 위해 다른 진영을 서슴없이 물어뜯는다. 어떤 이기적인 인간이 말하는 주장의 이익을 위해 행동한다. 국가에 선동 당하고 정당에 선동 당하고 기업에 선동 당하고 언론에 선동 당한다. 선동 당하는 모습을 너무나도 흔하게 볼 수 있다. 그런데 슬픈 것은 이타주의가 올바르기 때문에 선동을 당해 자신의 이익보다 집단의 이익을 우선시하는걸 잘못되었다고 인식하질 못하는 것이다. 그런 이타적인 성향 때문에 심지어는 외국인에게도 선동을 당한다. 이타적인 성질 때문에 다른 국가의 선동에도 쉽게 넘어가 버린다는 것이다. 유튜브에서 그런 모습을 볼 수 있다. 악의적으로 한국 내부의 갈등을 부추기는 자는 어떤 목적을 위해 선동하는 자일 확률이 높다. 그 중 외국인이 선동하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주로 외국을 다룬 한국뉴스의 유튜브 댓글에서 외국인의 선동으로 추측되는 댓글을 볼 수 있었다. 몇 가지 기억나는 걸 얘기해보겠다. 왕정이나 공산당을 긍정하며 민주주의를 부정한다. 왜 민주주의를 부정하겠는가? 악의적인 문장을 도배하며 특정진영을 공격해 내부갈등을 심화시킨다. 왜 도배를 해가면서까지 공격하겠는가? 외교적인 문제를 가지고 내부갈등을 부추긴다. 왜 외국을 비판하는데 한국인을 공격하겠는가? 특정 국가의 비판이 발생할 때 한국 내 진영을 흉내 내며 그 비판을 가하는 이를 욕설을 섞어가며 공격한다. 왜 중국 비판하는데 왜구가 나오고 일본 비판하는데 빨갱이가 나오겠는가? 아니 도대체 한국인을 비판한 것도 아닌데 왜 한국인이 발작하는 건가? 물론 이런 일들이 단순히 관심병이나 진영논리에 의해 발생할 수도 있다. 하지만 외국인일 확률도 있는 것이다. 댓글을 잘 살펴보라. 악의적인 문장을 반복적으로 도배만 한다거나 단어나 문장구조가 이상할 때가 있다. 이런 게 반드시 외국인이라는 보장은 없다. 하지만 행태가 이상할수록 외국인일 확률이 높다. 한국을 실컷 욕했던 사람이 있다. 어느 때엔 한국어린이를 욕하고 어느 때엔 한국노인을 욕한다. 그런데 그랬던 사람이 중국 욕에는 발작하며 화를 냈다. 너무 이상하지 않는가? 한국은 욕하면서 중국 욕에는 발작한다. 아마 해외의 중국인이거나 국내 체류 중국인일 것이라 생각한다. 민주주의를 부정하는 사람과 논쟁 중에 생각이나 문장이 이상해서 외국에서 교육받았냐고 물어보니 그 뒤로는 댓글이 달리지 않았다. 생각 이상으로 많다. 이런 일들이. 차라리 이렇게 티가 나는 경우는 알 수라도 있다. 완전 한국인처럼 행세하면서 악의적인 선동을 하는 경우에는 속수무책을 당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제는 인터넷 선동을 조심해야 한다. 누가 언제 선동할지 모른다. 이타적인 사람들은 자신의 목줄을 쥐고 있는 주인이 누구인지 확인해야 할 것이다. 어그로나 자기 진영은커녕 외국인이 그 목줄을 쥐고 있을 수도 있다. 외국인이 이타적인 사람들의 목줄을 쥐고 다른 한국인들을 물어뜯게끔 선동하고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서로 개처럼 물어뜯고 있는데 목줄을 쥐고 있는 인간이 외국인들이면 얼마나 수치스럽겠는가? 꼭두각시보다 부끄럽다. 부디 집단의 이익을 위해서 행동하지 말길 바란다. 자신의 목에 걸린 목줄을 빼서 집어 던지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 행동하길 바란다. 다음으로 넘어가겠다. 자 생각해보자. 사이비종교는 어떻게 인간을 세뇌했을까? 애초에 이타적인 한국인들은 보다 쉽게 세뇌할 수 있었다. 처음부터 타인의 이익을 우선시하라 교육받았기 때문에 사이비종교의 이익을 우선시하라는 세뇌는 그다지 어렵지 않았던 것이다. 종교집단의 이익을 위해 목숨을 걸고 행동하는 광신도들은 자신의 이익보다 종교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이타주의자들이었기 때문에 그랬던 것이다. 보통 종교들이 다 그렇다. 종교의 이익을 최우선적으로 생각한다. 이기적으로 행동했다면 종교의 모순을 깨닫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 살았을 것이다. 세뇌 당한 사람들은 이타적인 착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유를 잃고 종교의 지배를 받으며 살았다. 교주나 신의 종이 되길 바랐다. 단순히 종교들만의 문제는 아니다. 유교도 그렇지 않나? 자유와 평등의 가치를 중시하면서 유교의 나이 차별에는 잘못되었음을 인지하지 못한다. 자유를 주장하면서 연하를 지배하려고 한다. 평등을 주장하면서 연하를 차별하려고 한다. 부디 그 모순을 깨달았으면 좋겠다. 자유국가의 국민이라면 종교의 이익보다 본인의 이익을 우선시하길 바란다. 다음으로 넘어가겠다. 자 생각해보자. 왜 한국인은 의존도가 높을까? 전시작전통제권 전환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많다. 아직도 미군에 국방을 의존하고 있다. 그걸 보고 어떤 중국인으로 추정되는 사람이 한국은 미국의 식민지가 아니냐며 조롱했다. 개 같은 새끼. 함부로 지껄이다니. 하루 빨리 미국과 대등한 관계의 동맹이 되어 보다 더 밀접한 관계가 되었으면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존도가 높은 사람들이 많아 전시작전통제권 전환이 진척되지 못하고 있다. 이것은 정치외교와 자본과 국군 체계의 문제 등 다양한 것들이 진척 차질에 큰 영향을 주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대다수의 국민들이 전시작전통제권 전환을 요망했다면 민주적인 절차에 의해 이미 전환되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은 실리적인 문제 등을 거론하며 반대하고 있다. 정치적 진영논리에 의해 반대하는 것일 수도 있다. 현 정권에 대한 불신 때문에 전환에 반대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과거에는 어째서 전환되지 못했는가에 대한 의문이 남는다. 본질을 보면 복잡할 것이 없다. 간단하게 생각하면 된다. 한국인은 이타적이어서 의존적이다. 다른 사람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착한 사람들이 많다 보니 다른 사람의 말을 우선시하며 그것에 의존하는 사람이 많아졌던 것이다. 그런 의존적인 기질 때문에 전시작전통제권 전환에 거부감을 느꼈을 거라 생각한다. 그런 기질로 나타나는 의존적인 심리를 정당화하기 위해 이것저것 이유를 가져다 붙였을 뿐이다. 나는 미국과 가능한 대등한 동맹관계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미국 영향권 아래에 놓였기 때문에 미국과 친한 것이 아니라 자유의지로 미국과 친했으면 좋겠다. 한국인들이 자유를 사랑하고 그런 자유에 대한 애정이 정치권에 영향을 주는 민주적인 국가라면 전시작전통제권 전환을 하더라도 자발적으로 자유국가와 사이 좋게 지낼 거라 생각한다. 다음으로 넘어가겠다. 자 생각해보자. 왜 한국인은 책임지기 싫어하는 것일까? 책임지기 싫은 거야 만국 공통이지만 한국은 보다 심하다. 인사 책임을 거부하며 하청을 늘리고 보안 책임을 거부하며 인증서를 강요한다. 얼마나 책임지기 싫었으면 하청에 하청에 하청을 두나. 인사에 대한 책임 좀 져야 한다. 하청은 책임전가 이외엔 정말 쓸 데가 없다. 불필요한 유통구조로 대다수 국민들이 높은 생활비를 감내 해야 하는 것과 비슷할 정도로 다수에겐 비효율적이다. 보안도 마찬가지다. 한국은 이상하게 개인이 보안에 대한 책임을 진다. 외국에선 은행이 보안의 책임을 지기 때문에 인증서가 없다고 한다. 얼마나 책임지기 싫으면 고객한테 책임을 떠넘기나. 이제 보안에 대한 책임 좀 져야 한다. 왜 한국인들은 그런 번거롭게 매번 인증해야 하는가? 언제까지 개인이 보안의 책임을 져야 하는가? 이런 무책임함은 개인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 행동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타적인 기질이 본인의 이익보다 타인의 이익을 우선시하게 만들었고, 타인의 이익을 우선시 했기 때문에 책임질 상황이 생기면 그 타인에게 떠넘겨왔다. 예컨대 이런 것이다. 「나는 잘못 없어! 네가 하라는 대로 했을 뿐이야! 다 네 책임이야!」 책임전가에 익숙한 한국인들은 어떻게든 책임을 전가하려고 했다. 이타적이기 때문에 희생에도 익숙했다. 타인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한국인들은 타인을 위해서 희생하는 것이 익숙해 일방적으로 책임을 떠안게 되는 악습에도 제대로 된 저항을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책임을 떠넘기는데 익숙하고 책임을 떠넘겨 받는데 익숙하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강자가 책임을 떠넘기고 약자가 책임을 떠안는다. 그런 것의 대표적인 사례가 IMF. 강자가 책임을 떠넘기면 약자가 책임을 떠안았다. 국민이 금 모으기 운동을 하여 결과의 책임을 떠안으면 부자들이 그걸로 재산을 불렸다. 초등학교 교과서에 국민의 과소비가 문제였다며 국민에게 원인의 책임을 떠넘긴 적도 있다. 정신이 혼미하다. 이타주의는 결국 어떤 이기적인 인간의 이익을 위하게 될 수밖에 없다. 지배국가의 국민들은 이타적이어야만 지배자의 이익을 위해 일할 수 있었다. 과연 이타주의는 자유국가인 한국에 어울린 걸까? 나는 아니라고 본다. 모든 인간이 이기적으로 행동하고 그 이기적인 행동이 국가를 살찌우고 국민들을 행복하게 만들면 되는 것이다. 그것이 자유국가의 올바른 모습이다. 다음으로 넘어가겠다. 자 생각해보자. 한국인은 겸손하다. 외국에서도 유명하다. 지나치게 겸손하여 자신감이 없어 보인다는 말을 들을 정도다. 외국에서 아이가 성과를 내면 사방팔방 소문 다 내는 반면 한국에서는 굉장히 조용하게 넘어간다. 상을 타도 겸손하다. 승리를 해도 겸손하다. 우승을 해도 겸손하다. 왜 그랬던 걸까? 자신감을 드러내는 순간 공격받기 때문에 겸손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겸손하지 않고 자신감을 가졌다고 해보자. 「너의 이익을 위해 자신감을 가지면 다른 사람이 상처받을 수 있잖아 타인의 이익을 우선시해야지! 겸손하게 행동하라고!」 자신감을 가지고 행동을 하면 정의의 망치로 두들겨 맞게 된다. 이타주의 사회는 결과적으로 겸손해 질 수밖에 없다. 미국 전 대통령인 오바마의 기자회견에서 오바마가 한국인 기자에게 질문을 받겠다고 했는데 아무도 나서질 않아 논란이 생겼던 적이 있다. 회견장이 어색한 침묵에 휩싸이자 외국인 기자가 질문을 하겠다고 나섰다. 그럼에도 오바마는 한국인 기자에게 질문을 받겠다고 했다. 그럼에도 한국인 기자는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 이 사건은 많은 사람들이 기억하고 실망했다. 그렇다면 이런 현상은 무엇 때문이었겠는가? 자신의 이익을 위해 나서면 이기적이라고 공격받는 한국사회의 특성이 만든 참사라고 생각되지 않는가? 속된 말로 나대면 찍히니까 나서질 못한 것 같다. 설마 능력이 없어서 못했겠는가? 눈치보다 시간이 끝났을 뿐이다. 어떤 사건이 기억난다. 어느 기업에서 능력 있는 사람이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보다 먼저 훈장을 받았다는 이유로 따돌림을 당하다가 스트레스로 자살했다고 한다. 한국에선 겸손하지 않고 나대면 따돌림 당한다. 어느 기업의 문제라기 보다 이것은 이타적인 한국인의 특성일 뿐이다. 이기적으로 변해야 그런 자신감을 불편하게 느끼지 않게 될 것이다. 부디 한국인들이 마음 편하게 자신감을 갖고 살 수 있길 바란다. 다음으로 넘어가겠다. 자 생각해보자. 한국인은 자신을 위해 돈을 쓸 줄 모른다. 이타적이다 보니 돈을 버는 것도 돈을 쓰는 것도 타인의 이익을 위해 행동한다. 돈 쓰는 거야 개인 마음이다. 하지만 너무 정형화되어 있지 않다고 생각되지 않는가? 뭔가 자유롭게 돈을 쓰고 있다는 느낌이 없다. 돈을 많아 벌어도 쓰는 곳이 한정되어있다. 이타적인 사람이 많은 한국에서는 자신을 위해 사치를 하면 이기적이라며 비난을 받기 때문에 눈에 띄는 사치를 할 수가 없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눈에 띄지 않는 사치를 한다. 모바일 게임과 개인방송에 수백에서 억 단위의 돈을 쏟아 붙는다. 사람 눈에 띄지 않고 사치하는 방법은 인터넷이 적합했기 때문에 그랬던 것이다. 나이가 들어 자신을 위해 돈을 쓰고 싶어도 주위에서 압박이 들어온다. 「가족을 위해 돈을 쓰세요. 어려운 이를 위해 돈을 쓰세요. 이타적으로 돈을 쓰세요.」 본인을 위한 소비가 악이 되었다. 소비가 악이 되자 생산이 선이 된다. 국민들은 생산적인 활동을 위해 부동산과 주식에 투기나 투자를 한다. 부동산 투기는 국가적으로 봤을 때 비생산적인 활동이나 개인적으로 봤을 때엔 무척이나 생산적인 활동이다. 한국에서 부동산은 돈이란 양분을 흡수해 돈이란 열매를 맺게 하는 나무다. 부동산이란 나무가 다른 나무들에게 필요한 돈을 흡수하여 다른 나무들을 말라비틀어지게 하면서까지 돈을 맺게 한다. 그래서 국가적으로는 비생산적이지만 개인적으로 생산적이다. 부동산이나 주식 과열은 소비가 죄가 된 이타적인 사회가 만든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국내에서 돈이 돌지 못했던 것은 사치를 향한 이타주의자들의 냉엄한 비판 때문이었다. 상식적으로 생각하자. 돈 쓰면 욕먹는 곳에서 마음대로 돈 쓸 수 있겠는가? 만약 이기적인 사회였다면 마음대로 돈을 사용하여 국내에 돈이 돌았을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사람들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으므로 굳이 모바일 게임이나 개인방송에 돈을 퍼붓지 않았을 것이다. 인터넷인 모바일 게임이나 개인방송에서 얻은 만족감이 단순하기 때문이다. 모바일 게임에서 잠깐 우월감을 느끼기 위해 큰 돈을 사용하는 것이나 개인방송에서 잠시 관심을 받기 위해 큰 돈을 사용하는 것은 지나치게 비효율적이다. 보다 입체적이고 깊이 있는 만족감을 위해 현실에서 방법을 찾았을 것이다. 가령 이런 것이다. 어떤 사람은 아이들이 웃는 얼굴만 봐도 기분이 좋아진다. 특히 노인들이 그렇다. 손주들을 보면 얼굴에서 웃음이 떠나질 않는다. 모바일 게임에 억 단위의 돈을 쏟아 부으며 얻는 만족감과 고아원을 설립해 아이들의 행복한 얼굴을 보며 얻는 만족감 중 어느 쪽이 더 큰 만족감을 주게 될까? 사람마다 다르지만 나는 아이들의 행복한 얼굴에서 만족감을 더 느낄 것 같다. 만약 어떤 사람이 자신의 만족감을 위해 고아원을 설립하려고 한다고 가정해보자. 그러면 어떤 식으로 흘러가겠는가? 사회는 더 많은 비용과 더 많은 투자를 요구할 것이다. 자신에게도 이타적으로 행동해달라며 강압할 것이다. 자신의 만족감을 위해 행동한 것조차 간섭하면서 이타적일 것을 종용할 것이다. 뭔가 사회를 바꿀 수 있는 사치를 하면 눈에 띄어서 간섭을 당한다. 이러니까 마음 편하게 모바일 게임이나 개인방송에 돈을 쏟아 붙지. 어떤 가수의 일화가 떠오른다. 어떤 가수에게 자기 사정을 이야기하고 기부를 바라는 이메일이 온 적이 있다고 한다. 가엾게 여겨 돈을 보내줬더니 더 큰 돈을 요구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 뒤로는 그런 메일이 와도 무시한다고 한다. 이타적인 사회에겐 한번 이타적으로 행동한 인간은 계속 이타적으로 행동하길 강요한다. 성가시다. 한국인은 착하다. 배운 대로 다 한다. 인간에 대한 애정도 많을 것이다. 그럼에도 사회를 위한 비용지출을 꺼려하는 것은 선의를 강요하는 이타적인 사회였기 때문이다. 이기적으로 선행을 하도록 유도해야 한다. 자기 만족감을 위해 선행을 하는 것을 권장해야 한다. 그 사람이 이기적으로 행동한 것이라면 더 많은 기부를 요구할 수가 없다. 타인을 위해서 한 것이 아니니까 타인이 이래저래 간섭할 수가 없는 것이다. 내가 이기적으로 선행을 하겠다는데 이래저래 간섭할 수 있겠는가? 위선이란 공격도 아무래도 상관없어진다. 남을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위해서 하겠다는데 위선이 어떻게 나오나? 보답이 없더라도 불만을 가지지 않게 된다. 자기 만족감을 위해 행동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마음 편하고 자유롭게 선행을 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이제는 한국도 소비가 선이 되어야 한다. 멋대로 돈을 쓴다고 오지랖 피우는 것은 이타주의 사회였기 때문이다. 그런 사회가 오히려 선행의 첫걸음을 무겁게 만들었다. 마음 편하게 이기적으로 올바른 행위를 할 수 있는 사회가 오길 바란다. 일단 여기까지 하겠다. 「한국인은 이타적이다.」라는 사실 하나로 수많은 현상의 해석이 가능하다. 본질을 알게 되면 왜 그런지 알 수 있다. 어떤 현상을 해석하기 위해 이것저것 이유를 가져다 붙이는 걸로 안다. 그래도 대부분 해결되지 못했던 것은 그것이 본질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집단 괴롭힘을 해결하기 위해 아이들을 보다 더 어른들 말을 잘 따르게 가르친다. 그러면 자신의 의견보다 강자의 의견을 따르는 데에 익숙해져 강한 아이가 다른 아이를 괴롭히는 것에 동참하거나 외면하게 된다. 해결하기 위해 했던 행동으로 오히려 더 집단 괴롭힘이 심해진 것이다. 그래도 본질적인 이유를 몰라 더 더 더 착하게 하고 어른 말 따르게 한다. 그러면 더 더 더 심각해질 뿐이다. 불행의 연쇄가 끊어지질 않는다. 끔찍하다. 정말. 이런 끔찍함에서 벗어나라면 마냥 착하게 만들 것이 아니라 인간의 행동원리를 예측하여 가르쳐야 할 것이다. 단순히 싸우지 말라고 하는 게 아니라 네 의지로 올바른 행동을 하라고 해야지 잘못된 것을 당하거나 목격했을 때 자신의 의지로 올바른 것을 행할 것이다. 이미 행동원리가 결정되었다면 올바름과 무의식이 너의 것이 아님을 강조하며 스스로 생각하는 법을 알려줘야 할 것이다. 그래야 본질을 찾아 근본적인 원인을 토대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맹목적인 이타주의가 사회문제의 원인이었다면 자유의지를 가진 이기주의로 올바른 행동을 할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해야 한다. 그래야 한국이 행복해질 수 있는 길을 걷게 될 것이다.

 

 

 

모두가 이기적인 한국이라. 아마 걱정을 할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이기적으로 행동하면 타인을 위하지 않아 서로에 대한 믿음이 깨져 공동체가 붕괴될지도 모르잖아!」 그렇다면 묻겠다. 그런 걱정을 하는 네가 바라는 이익은 무엇인가? 인간불신인가? 공동체붕괴인가? 네가 바라는 게 도대체 무엇인가? 네 이익에는 사회를 불행하게 만드는 것밖에 없는가? 아니지 않나. 자국민의 행복을 바라는 사람들도 많다. 국가의 발전을 바라는 사람들도 많다. 그런 종류의 바람을 가진 사람들이 많다. 사람들은 타인에게 명령 받지 않아도 충분히 사회를 행복하게 만들 수 있다. 인간은 개돼지가 아니다. 하고 싶은 걸 해도 사회는 건강하게 유지된다. 오히려 더 낫다. 왜냐하면 그릇된 이기주의자들을 견제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릇된 이기주의자들의 바람은 사회를 불행하게 만든다. 비리를 저질러 부정축재를 하거나 사람들을 속여 부당한 이익을 취한다. 그런데 그런 종류의 인간은 이타주의 사회에도 많다. 그런 종류의 인간이 평범한 이타주의자들을 선동하여 부당한 이익을 챙겨왔던 것이다. 「너는 착하니까 나의 이익을 위해 살아라.」 이타적인 착한 사람들은 그릇된 이기주의들의 부당한 이익을 위해 살았다. 이타주의 사회에선 그런 것이 일상이다. 정말 속상하다. 왜 착한 사람들이 이용당해야 했는가? 한국인들은 기본적으로 착하다. 배운 것을 성실하게 실천한다. 단지 착하다는 기준이 문제였을 뿐이다. 기준만 바로잡으면 대다수의 한국인들은 자신의 의지로 올바른 걸 행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이것은 현상을 보고 결론을 낸 객관적인 추론이다. 한국인들은 배운 대로 다 했으니까. 꼰대도 낮은 출산율도 높은 자살률도 이성혐오도 이것도 저것도 다 배운 대로 한 결과니까. 제대로 된 방법만 알려주면 그것도 배운 대로 할 것이다. 그러려면 올바른 이기주의 사회가 되어야 한다. 사회의 행복을 바라는 인간도 이기적이어야 사회의 불행을 바라는 인간의 이기심을 견제할 수 있을 것이다. 이타적인 사회는 사회의 불행을 바라는 이기주의자의 낙원이었을 뿐이다. 한국이 이기적인 사회가 되면 가장 중요한 인식이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모든 인간이 이기적이다.」라는 사실이다. 이기적으로 행동하라고 해서 자신만 이기적으로 행동하려 해서는 안 된다. 중요한 것은 모두가 이기적이라는 것이다. 이기주의가 잘못된 것은 일부만 이기적이었기 때문이다. 일부만 이기적이다 보니 이타적으로 행동하려는 인간들의 이익이 전부 일부 이기주의자로 몰려 마치 이기주의 자체가 잘못된 것처럼 인식되게 되어버렸다. 모두가 이기적으로 행동하면 그런 일은 없어진다. 예를 들어보겠다. 부모와 자식이 휴일 여가를 보낼 곳을 찾기로 했다. 이타적인 가정에서는 일반적으로 서로의 이익을 위해 행동할 것이다. 부모가 자식에게 말한다. 「어디를 가고 싶니? 거기로 가자.」 자식이 부모에게 말한다. 「어디를 가고 싶으세요? 거기로 가요.」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타적이라는 것이다. 상대방이 원하는 곳으로 여가를 가는 것이 진심으로 바라는 것이었다면 이타적이지 않았을 것이다. 「네 행복이 내 이익이다.」 남의 이익을 우선시 하지 않았는데 어찌 이타적이라 할 수 있는가? 이타적이라는 것은 본인이 바라지 않았지만 타인을 위해야 한다고 교육받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렇게 행동할 때 나타난다. 이타적인 것이 올바르기 때문에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했던 것이다. 가고 싶지 않아도 자식을 위해서, 부모를 위해서 여가를 간다. 그것은 그들에게 노는 것이 아니었다. 봉사와 희생이었다. 그런 이타적인 것을 받은 측도 불편하다. 그것이 봉사와 희생이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불편해하면서도 나중을 생각한다. 「나도 그렇게 봉사와 희생을 해야 하겠지. 나도 바라지 않는 걸 해야 하겠지.」 답답하다. 그런 일방적인 봉사와 희생이 불편해질 무렵 가족여행을 꺼려하게 된다.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하며 괜히 눈치 보면서 노는 것보다 대등한 관계하고 속 편하게 노는 것이 낫다고 판단해버린다. 보다 더 나쁠 때에는 즐거움을 강요한다. 「너를 위해서 내가 봉사와 희생을 했는데 왜 제대로 즐기지 못하는 거야! 즐기라고!」 멋대로 한 봉사와 희생을 통한 즐거움을 강요한다. 이타주의란 마음에도 없는 가식은 서로를 오히려 멀리 하게 만드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어중간한 이타주의는 솔직한 감정을 전하는 것조차 막아버린다. 차라리 이기적으로 솔직하게 말하는 게 낫다. 아버지는 A에 가고 싶다. 어머니는 B에 가고 싶다. 자식은 C에 가고 싶다. 그러면 다 이기적으로 행동하면 된다. 가고 싶은 곳을 다 말하고 토론을 하면 된다. AB C에서 여가를 보냈을 때 얻을 수 있는 행복과 지출 비용과 거리와 시간과 애정으로 희생할 수 있는 범위 등을 고려해 가장 좋은 곳을 가면 된다. 자신의 가고 싶다는 곳을 간다는 이익을 위해 최선을 다해 상대를 설득한다. 이 정도는 애정으로 희생할 수 있다고 말을 한다. 토론 끝에 결정된 곳에 가면 대부분 서로 불편한 마음이 없을 것이다. 스스로 납득했기 때문이다. 무조건 아이의 이익을 우선시하면 토론할 줄 모르는 안하무인으로 성장하게 될 것이고 무조건 부모의 이익을 우선시하면 자기의사도 제대로 표현할 줄 모르는 무기력한 이타주의가 될 것이다. 모두가 이기적이어야 자유롭고 건강하고 행복할 수 있다. 상식적으로 생각하자. 남의 이익을 위해 사는 인간이 어떻게 행복할 수 있는가! 남의 눈치나 보고 남의 말이나 듣고 남에게 휘둘리는 걸로 어떻게 행복할 수 있겠는가! 이타주의 사회가 불행한 것은 그냥 당연한 것이었다. 어떤 사람은 무조건 자신의 의견이 통과해야 된다고 주장할 수 있다. 만약 그런 사람이 있다면 그는 모두가 이기적이어야 한다는 사실을 인지하게 해야 한다. 모두가 이기적이라면 본인이 이기적으로 행동하는 것만큼 타인도 이기적으로 행동할 수 있다는 걸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나의 이기심이 존중 받기 위해서는 너의 이기심도 존중해야겠지.」 서로의 이기심을 존중하는 만큼 논리적인 토론과 애정으로 결론을 내리고 수긍할 것이다. 이런 사고방식이 건전하고 바람직한 이기주의자의 모습이다. 이런 이기주의가 가능 하려면 세 가지가 기본적으로 필요하다. 자유, 평등, 지성. 따라서 이기주의는 현명한 자유국가에서나 어울리는 방식일 것이다. 달리 말해 자유국가에서는 이기주의가 어울린다는 것이다. 사람들의 이기심으로 고생하는 곳은 일부만 이기적이거나 지성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필요한 세 가지에 사랑은 굳이 넣지 않았다. 지성이 있다면 사랑이 필요하다는 건 알 것이기 때문이다. 국가를 사랑해야 국가를 위해 희생하고 이성을 사랑해야 이성을 위해 희생하고 가족을 사랑해야 가족을 위해 희생한다. 사랑은커녕 혐오와 증오를 부추기는 자는 그 누구든 위험한 인간이니 주의할 필요가 있다. 그런 사람이야말로 인간불신과 공동체붕괴를 불러올 것이기 때문이다. 지배국가에서는 이타주의가 필요할 것이다. 지배자에게 모든 이익이 몰리려면 사람들이 이타적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자유국가의 국민이라면 이기적으로 생각하자. 모두가 이기적이게 되자. 그러면 지금 권력의 충돌이 얼마나 훌륭한지 깨닫게 될 것이다.

 

 

 

지금 한국은 정쟁의 소용돌이 안에 있다. 권력자들이 각자가 추구하는 이익을 위해 싸우고 있다. 국민들은 그런 싸움에 실망했다. 국정을 돌보지 않고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나서는 모습에 실망한 것이다. 그리고 절망했다. 그들이 싸우는 과정에서 서로의 약점을 공격해버리는 바람에 온갖 더러운 것을 목격했기 때문이다. 국민들은 그걸로 선동 당하기 시작했다. 선동 당하는 사람들은 그에 맞는 이유가 있는 법이다. 이타주의가 선동에 취약한 인간으로 만들었다고 해도 보통 아무런 근거 없이 선동 당하지는 않는다. 공산당의 선동을 당했던 것은 실제 자본가들의 노동자 착취가 있었기 때문이다. 군부독재의 선동을 당했던 것은 실제 공산당의 침공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만큼 선동 당한 사람들을 무조건 나무라기 보다 어째서 선동을 당했는지에 대해 분석을 해야 할 것이다. 선동 당한 국민들은 10의 잘못을 100의 잘못으로 인지하거나 10의 잘못을 0의 잘못으로 인지하게 되었다. 먼지를 털어서 조금이라도 잘못이 나오면 부풀려서 공격하거나 그에 대응하여 아예 잘못이 없다는 식으로 방어를 했다. 그런 모습을 보고 국민들은 서로를 어리석다며 공격했다. 진영을 나눠 서로를 공격하는 동안 선동을 하는 이들은 그런 진영을 이용해 갈등을 부추겼다. 특히 외국인이 그러는 것 같을 때엔 참 참혹했다. 속상하다. 어째서 선동을 당해야 하는가? 이제는 이기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하자. 잘잘못을 공정하게 평가하는 것이 이기적인 자유국가 국민의 필수소양이다. 10의 잘못은 10만큼만 비판하면 된다. 10의 잘못을 아예 잘못이 없다는 식으로 옹호하면 안 된다. 그런 편향적인 사고는 집단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이타주의가 만든 것이다. 몇 가지 권력의 이기심이 만든 사건들을 집어보겠다. 조국. 조국이 법무부장관 후보가 될 무렵 자녀의 입시 문제로 공격을 받았다. 이것은 정치적인 공격이었다. 조국을 옹호하든 비판하든 이 점은 부정해선 안 된다. 만약 조국이 법무부 장관 후보가 아니었다면 공격을 받았겠는가? 공격한 이들과 같은 진영이었다면 공격을 받았겠는가? 이후 다른 진영에 공격을 받았을 수도 있지만 그건 나중의 일이게 되었을 것이다. 정치적이라고 해서 잘못되었다는 게 아니다. 말 그대로 그냥 정치적이라는 것이다. 정치적인 공격이라고 아무 근거가 없는 게 아니지 않나. 단지 정치적이었기 때문에 잘못을 과장되게 해석하거나 아예 잘못이 없다는 식으로 나서는 일이 있었을 뿐이다. 조국에 대한 의혹은 많다. 과장된 것도 있고 축소된 것도 있더라. 일단 여기서는 조국 자녀의 입시문제만 다루겠다. 요점은 내로남불이었다. 쭉 살펴본 결과 느낀 점은 다음과 같다. 권력자가 법의 망을 피해 행할 수 있는 부당한 행위의 나열. 잘못되었지만 관행이어서 암묵적으로 용인되어왔던 그 선을 줄타기 했던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논문 1저자 부당 등재는 관행보다 더한 행위고 무시험 전형은 관행 수준으로 행했던 것으로 보인다. 인맥의 친분으로 좀 더 과장되게 성과를 포장하거나 하지 않은 것을 했다고 해주는 것이 비일비재했던 모양이다. 힘이 있는 사람들이 주로 하던 부당한 행위를 사용했을 뿐이었다. 이타적인 사람들이 인맥이라는 집단의 이익을 위해 부당한 잘못을 저지르는 아주 자연스러운 집단 이기주의였다. 이런 부당한 관행이 보다 큰 파장을 부른 것은 평소 하던 말 때문이라고 한다. 앞에서는 입 발린 말을 하면서 뒤에서는 남들과 똑같이 잘못된 관행을 이용했다는 점이 국민들에게 큰 분노를 불러일으켰던 것이다. 정치적인 사건답게 마치 모든 입시 비리의 원흉인 것마냥 공격을 받거나 아예 잘못이 없다는 식으로 옹호를 받았다. 나는 여기서 잘잘못을 판단하지 않겠다. 이번 주제에서 그런 것은 크게 중요하지 않다. 그런 것은 각자 판단하길 바란다. 그건 개인의 자유다. 단지 진영논리에 매몰되어 편향적으로 판단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집단의 이익에 맞게끔 판단하는 것은 지나치게 이타적이다. 이기적으로 판단하길 바란다. 한국인들은 이기적으로 판단해도 될만한 지성을 갖추고 있다. 이는 객관적인 추론이다. 한국보다 학력과 교육열이 높은 곳이 많지 않기 때문이다. 그 동안 어리석어 보였던 것들은 이타적이었기 때문이다. 이타주의가 지혜로운 사고를 앗아갔다. 나는 한국인들의 지성을 신뢰하겠다. 모든 인간이 이기적으로 행동하면 어떤 이의 이기심이 올바른지 대다수가 납득할 수 있는 결론이 나올 때까지 토론을 하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올바른 결론을 내릴 수 있을 것이다. 이기적으로 바라보면 보이는 게 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입시 비리에 대한 경각심과 공정의 중요성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자리잡았다. 권력이 이기적으로 행동하자 암암리에 행해지던 입시에 관한 부정한 어둠들이 밝은 곳으로 나오게 되었다. 권력의 이기심이 한국에 있던 어둠을 비춘 것이다. 일반적인 국민들은 사회의 발전과 행복과 안녕을 바랄 것이라 생각한다. 그런 사람들이 이기적이라면 이 사건을 긍정적인 결말을 낳은 사건이라 판단할 것이다. 앞으로도 힘을 가진 사람들이 이기적으로 행동하여 서로의 어둠을 비추길 바라겠다. 윤미향. 윤미향이 국회의원에 당선되자 기부금을 횡령했다는 의혹으로 공격을 받았다. 정의기억연대와 관련된 사건은 너무 지저분해서 정리하기가 어렵다. 이 사건의 중심인 위안부는 한국에게 있어 성역에 가까운 것이기 때문에 이래저래 다루기가 어렵다. 정리하기 어렵고 다루기가 어렵다. 정치적인 사건답게 크게 키우거나 잘못이 없는 것처럼 하는 것도 보인다. 사건을 키우기 위한 듯한 언론의 무더기 오보가 있었다. 사건을 정당화하기 위해 위안부 피해자에 대한 공격이 있었다. 이들은 이타주의적인 진영논리가 만든 부끄러운 일이다. 특히 언론은 좀 더 부끄러워했으면 좋겠다. 정보를 다루는 전문가가 그러면 정보를 신뢰할 수 있겠는가? 기자를 신뢰하고 싶다. 이 사건은 너무 지저분해서 요점 잡기가 어려운데, 간단히 요약하면 이 또한 관행적으로 이루어지던 기부단체의 기업화가 만든 폐해로 보인다. 한국의 기부단체들은 기본적으로 불투명하다. 어떤 신문사와 대학의 공동연구를 통해 45개의 공익법인의 투명성을 평가했는데 90점이 넘는 A급은 단 두 곳이었다. 그런데 A급이라 불리는 대한적십자사조차 부실이 심각했다고 한다. 직원이 공금을 횡령하고 리베이트를 받고 혈액관리도 엉망이라고 한다. 5년 동안 107명의 직원이 각종 비위 행위로 징계를 받았다고 한다. A급이 이러면 나머지는 어떻겠는가? 이런 걸 보면 정의기억연대의 불투명함이나 기부금 유용논란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업계 평균이라는 것이다. 여기서도 특별히 잘잘못을 따지지 않겠다. 그런 건 각자 판단하기 바란다. 이기적으로 바라보면 보이는 게 있다. 이 사건으로 인해 한국 내에 있는 기부단체들의 투명성이 필요하다는 사회적 인식이 자리잡았다. 국민들이 기부단체들에게 투명성을 요구할 근거가 생겼다는 것이다. 투명하지 않으면 기부금이 어떻게 사용되는지를 모른다. 해외를 예로 들자면, 해외의 어떤 기부단체에서는 기부금의 70~80%가 단체 운영비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그런가 하면 해외의 어떤 기부단체는 기부금의 97%가 자선에 쓰였다고 한다. 불투명하면 그런 걸 모르게 된다. 과연 한국의 불투명한 기부단체들은 기부금의 몇 퍼센트를 자선에 사용했을 것인가? 기부단체들이 불투명하다 보니 차라리 기업이 기부단체를 운영하는 게 더 합리적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상품을 구매하면 구매금의 일부가 기부금이 되어 자선에 활용될 수 있도록 하는 게 낫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기부되는 금액은 소비자들이 알 수 있게 전부 공개한다. 기업 입장에서 어떨지는 모르겠다. 단지 기업형 기부단체보단 기부단체형 기업이 보다 효율적이라는 것이다. 기업의 제품을 구매하면 자연스럽게 기부를 하게 되어 사회를 이롭게 하는 것이 불투명한 기부단체에 기부하여 그들의 배만 불려주는 것보단 낫다고 본다. 기부단체들이 그런 걸 보고 싶지 않다면 투명하게 운영해야 할 것이다. 결과적으로 이 사건 또한 권력의 이기심이 어둠을 비춘 꼴이 되었다. 보다 더 많은 어둠이 비춰지길 바란다. 추미애. 추미애가 법무부 장관 후보가 될 무렵 아들의 특혜 휴가 논란으로 공격을 받았다. 마찬가지로 정치적인 사건이다. 추미애의 아들이 군복무 도중 휴가를 나가 복귀를 하지 않고 전화를 통해 휴가를 연장했다는 것을 당시 당직사병이었던 병사가 주장했다. 그걸 어떤 신문사가 보도해 논란이 발생했다. 실제로는 병가였다고 한다. 군법상에 하자가 없다고 한다. 병가에는 요양심의가 필요한데 그것은 입원 중인 현역병만 대상이라 한다. 전화로 휴가를 연장한 육군 병사가 4년 동안 삼 천명 정도 된다고 한다. 그 중 카투사는 36건이라고 한다. 이외 의혹제기 한 병사가 명예훼손을 당한다거나 보좌관이 대신 전화를 했다거나 국회에서 거짓말을 했다거나 평창올림픽 통역병 파견 청탁 의혹들이 있었다. 정치적인 사건답게 크게 키우거나 잘못이 없는 것처럼 하게 되었다. 특혜의혹을 제기한 당직 병사가 정정보도를 청구할 정도로 과장되게 보도하거나 추미애 아들을 위인과도 같은 인물로 치켜세우기도 했다. 과장되게 잘못되었다고 비난하거나 의혹을 제기한 병사를 공격하는 일도 있었다. 지나치게 이타적이다. 객관적으로 보면 위의 두 사건에 비하면 큰 잘못은 아니다. 사건 자체만 보면 쟁점은 보좌관 지시와 외압유무만 남기 때문이다. 명예훼손과 거짓말은 사건 이후 벌어진 것들이다. 보좌관 지시는 부탁이란 말로 모호하게 넘어갔다. 외압은 명확하게 증명하긴 어렵다.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절차라면 굳이 외압까지 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만약 다른 부모가 같은 절차를 요구했을 시 허용되지 않는다면 특혜라고 볼 수 있고, 특혜라면 외압을 의심해봐도 좋을 것이다. 사건 자체가 크지 않았기 때문에 여론 또한 위의 두 사건에 비해 잠잠한 편이다. 여기서도 특별히 잘잘못을 따지지 않겠다. 그런 건 각자 판단하기 바란다. 이기적으로 바라보면 보이는 게 있다. 이 사건으로 인해 군 부대 내에서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청탁과 특혜가 잘못되었다는 사회적 인식이 자리잡았다. 한국에서 군복무를 해본 사람이라면 징병된 인원을 차별하고 있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을 것이다. 친인척이 권력자라면 여러모로 배려를 받는다. 일반적으로 허용되지 않는 면회나 외출이 가능하거나 보다 편한 곳에서 복무를 할 수 있었다. 그런 배려가 외압으로 해준 건지 아니면 알아서 해준 건지는 모른다. 분명한 것은 권력이나 인맥으로 차별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 점을 대부분 알고 있다. 최근에는 어떤 그룹의 임원 아들이 황제 군복무를 하여 논란이 발생한 적이 있다. 그 정도까지는 아니어도 특혜는 일상적이었다. 아마 그런 보편적인 인식 때문에 추미애의 아들 논란이 더 심했던 것이 아닐까 싶다. 어쨌든 결과적으로 이 사건 또한 권력의 이기심이 어둠을 비추어 세상을 밝게 만드는데 공헌을 한 것이다. 일단 여기까지 하겠다. 지금 정권을 잡고 있는 여당 측 인사를 다뤄보았다. 과거로 돌아가보면 탄핵이나 사립유치원 같은 예가 권력의 이기심이 비춘 어둠일 것이다. 사실 엄밀히 따지면 그들도 결국 이타적으로 행동했다. 권력집단이 집단의 이익을 위해 행동한 것도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집단끼리 이익을 공유하며 이타적으로 행동하지는 않았기 때문에 그나마 어둠들을 비출 수 있었던 것이다. 여당과 야당이 밀착했다고 가정해보자. 그러면 아무 어둠도 비추지 못했을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일당 독재와 같은 것이다. 만약 권력자들마저 집단의 이익이 아닌 본인의 이익을 위해 행동하기 시작한다면 권력집단 내부의 어둠까지 비추어 잘못된 것을 바로잡을 수 있게 될 것이다. 부디 그러길 바란다. 과거나 현재나 정치적인 사건은 과장되거나 축소되었다. 과거 맹목적으로 옹호하던 사람들이 현재 맹목적으로 옹호하는 사람들을 비난하는 걸 보면 참 닮았다는 느낌을 받는다. 한국인은 이타적이라 그렇다. 이타적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본인의 진영을 옹호하고 타인의 진영을 공격했던 것이다. 이런 진영논리가 서로를 피폐하게 만들고 본질을 흐리게 만들었다. 그러나 이기적으로 생각했다면 진영 관계없이 자신의 기준으로 괜찮다고 판단되는 것은 옹호하고 잘못되었다고 판단되는 것은 비판했을 것이다. 잘못된 정도도 명확하게 선을 그어 형평성 있는 비판을 하고 비난을 가했을 것이다. 이타적이기 때문에 진영논리에 빠져들고 진영논리에 빠져들기 때문에 감성적이게 되었다. 감성적이기 때문에 편향적으로 잘잘못을 따졌다. 그런 객관성의 상실은 이타주의가 부른 것이다. 욕먹고 있는 걸 굳이 애써서 네가 옹호할 필요가 없다. 욕먹고 있는 걸 굳이 애써서 네가 더 심하게 욕할 필요가 없다. 왜 권력에 이용당하고 있는가? 권력의 이기심이 부른 어둠들을 보고 절망할 필요가 없다. 오히려 기뻐해야 한다. 그들이 만약 서로의 이익을 위해 자신들의 치부를 감췄다면 국민들은 그런 어둠들을 몰랐을 것이다. 그것이 더 나쁘다. 현명한 국민들은 이들이 더 이기적으로 행동하여 한국에 있는 어둠들을 비추길 바라야 한다. 그럴수록 사회는 건전해지고 올바르게 되며 행복하게 된다. 권력이 이기적으로 행동하는 것을 무조건 반대할 것이 아니라 그 이기심이 어떤 결과를 낳게 될 것인지에 초점을 맞추자. 그것이 바람직한 자유국가의 모습이다.

 

 

 

무엇이 진정 사람을 위하는 것인가? 무엇이 진정 행복할 수 있는 길인가? 자유국가에서는 어떤 것이 올바른 것이었을까? 우리가 올바르다 생각했던 것은 진짜 올바른 것이었을까? 보통 인간은 환경에 지배당한다. 교육받은 대로 결과가 나온다. 그렇다면 한국 사회에 있는 사회문제는 거의 다 교육이 원인이었다는 결론이 나온다. 가르쳤던 올바름이 사회를 불행하게 만든 것이다. 그걸 인지했다면 이제는 달라져야 한다. 이타적이 아닌 이기적으로 행동해야 한다. 한국인은 학력이 높다. 지식이 많다. 그런 한국인들이 현명하게 이기적으로 행동해야 할 때가 왔다는 것이다. 인터넷을 예로 들겠다. 만약 인터넷에서 옳지 않다고 여겨지는 의견이 나오면 가차없이 반박하길 바라겠다. 자신의 의견을 이기적으로 제시하면 된다. 남이 상처 입을 걸 걱정하여 방치하면 사회수준이 더 낮아지는 것이다. 각자 알고 있는 전문지식들을 사람들에게 이기적으로 알려줘야 사람들이 배우고 사회가 현명하게 성장할 수 있는 것이다. 현실을 예로 들겠다. 만약 현실 속에서 옳지 않다고 여겨지는 의견이 나오면 가차없이 반박하길 바라겠다. 똑같이 자신의 의견을 이기적으로 제시하면 된다. 남이 상처 입을 걸 걱정하여 비리든 부패든 잘못된 관행이든 방치하면 사회수준은 더 낮아지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의견이 주관적일 수 있기 때문에 발언에 신중한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면 자신의 주관을 객관으로 만들면 된다. 자신의 주장을 다수가 인정하게 되면 그 주장은 객관화가 된다. 어떤 사람은 주장보다 그 주장을 하는 사람을 공격할 때가 있다. 모두가 이기적이어야 상대의 손익을 계산하지 않게 되어 상대의 주장만 가지고 판단하고 평가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렇게 각자 올바른 일을 하고 싶다는 충동을 이기적으로 행동해야 사회가 건전하고 행복하게 성장할 수 있는 것이다. 이타주의라는 이름으로 인간의 자유를 억압해서는 안 된다. 이타주의라는 이름으로 불공정한 사회를 만들면 안 된다. 이제는 모든 인간이 자유롭게 이기적으로 사회를 행복하게 만들 수 있어야 한다. 나는 그것을 희망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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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고 나서 한번은 퇴고를 하긴 하는데, 나중에 다시 보면 오타나 오류가 많네요. 분명 당시엔 없는 것 같았는데 나중에 보면 많군요. 좀 더 노력해야겠어요.

 

도덕에 대해 쓰려고 했는데 우선 먼저 이것부터 씁니다.

 

여러분들이 자유롭게 살길 바랍니다. 여러분들에게 달린 족쇄를 집어 던지고 자신이 생각하는 올바름을 행할 수 있길 바랍니다. 여러분들이 사랑하길 바랍니다. 여러분들이 행복하길 바랍니다. 하고 싶은 일을 하세요. 잘한 거면 칭찬 받고 못한 거면 비판 받으면 됩니다. 모두가 이기적으로 행동하고 모두가 이기심을 평가하면 됩니다. 이제는 올바름도 자유롭고 평등하고 민주적이어야 합니다. 부디 바라는 것이 이루어지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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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자유국가의 소년범죄 (3) 2020/11/25 PM 09:04

자유국가의 소년범죄

 

 

 

시대가 변했다. 하지만 도덕은 변하지 않았다. 자유국가임에도 어째서 도덕은 자유롭지 못했는가? 사회에 적응하여 철이 들었다는 말은 인간에게 복종하는 법을 배웠다는 의미와 같다. 어른 말을 잘 듣는 아이. 선배 말을 잘 듣는 후배. 상사 말을 잘 듣는 사원. 착하다고 한다. 사회에 적응하여 철이 들었다고 한다. 이는 인간을 지배하기 위해 인간에게 복종하는 걸 올바른 도리로 만든 탓에 생긴 역겨운 현상이다. 짓지 않는 개를 가리켜 착한 개라고 하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음에도 잘못되었음을 자각하지 못한다. 인간들을 개돼지 취급하면서도 그 취급을 받아드리지 못하면 되려 네가 잘못된 것이라며 타박해왔다. 정말 웃기는 일이다. 어떤 사람은 이런 현상을 그저 문화의 특성으로 치부할지도 모른다. 이런 연령차별이 연하에게 복종을 바라는 꼰대를 만들고 그렇게 학습된 차별로 갑질을 행하게 만듦에도 말이다. 다른 국가에도 갑질이 있지 않냐고 물어볼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그건 당연한 거다. 대부분 국가는 지배국가였다. 그러니까 그런 잔재가 남아있는 거다. 한국은 그런 잔재가 유교였을 뿐이다. 그런 유교가 원인이 된 꼰대질과 갑질이 얼마나 많은 불행을 불러왔던가? 꼰대질과 갑질로 싸우고 증오하고 혐오하고 살해하고 자살한다. 의식적으로 뉴스를 시청하길 권해보겠다. 정말 많은 불행을 부르고 있다. 그것들로 불행했던 이들은 그들의 책임이 아닐 것이다. 피해자에게 책임을 전가할 수는 없다. 그렇다고 해서 불행하게 만든 이들의 책임조차 아니다. 그들은 그저 배운 대로 행동했을 뿐이다. 유교에는 장유유서라는 나이로 차별하는 질서를 올바른 도리로 만든 가르침이 있다. 이 가르침에 따라 한국인들은 한 살만 차이 나도 존대말과 반말이라는 언어의 차이가 발생할 정도로 차별하게 했다. 「연하는 연상에게 복종하라. 그것이 올바른 도리다.」 보아라. 가르침대로 행동한 것이 꼰대질이다. 꼰대가 정확히 모르는 사람들이 많아서 한번 정의해본다. 꼰대는 인간을 도덕을 명분으로 지배하려는 인간이다. 생각해보자. 이래라 저래라 하면서 명령하는 것이 꼰대 아니던가? 「나 때는 이랬으니까 너도 이래야 해. 내가 시키는 대로만 해. 내 말을 따라. 내 말에 복종해.」 간단하지 않나? 지배하려는 인간은 지배자고 도덕을 명분으로 연하를 지배하려는 자는 꼰대다. 꼰대질이나 갑질로 불행을 겪게 되면 이런 식으로 생각하게 될 것이다. 「그들이 그런 행동을 했던 것은 나쁜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나는 착하게 행동해야겠다.」 그리고 나서 의식적으로 보다 더 도덕적으로 행동하려 한다. 그런데 꼰대를 만든 것이 도덕이었다. 그러면 어떻게 되겠는가? 착하게 행동하기 위해 도덕의 가르침인 장유유서를 지키며 연하에게 복종을 요구하게 될 것이다. 나쁜 꼰대가 싫어서 착하게 행동하려 한 결과가 바로 이거다. 그리고 연하에게 꼰대질을 해서 이제는 자신이 불행을 전파한다. 본인인 그게 잘못된 것인지도 모르고 똑같이 행동해버린다. 불행이 불행을 낳는다. 올바른 일을 행함의 결과가 불행이라면 도대체 누굴 탓해야 하겠는가? 한국사회의 많은 불행은 여기에서 왔다. 한국은 애정이 결핍된 나라다. 남녀유별이나 남녀칠세부동석 같은 걸로 미성년일 때 이성교제가 부도덕하다 배운다. 그런 탓에 커서도 이성을 사랑하는 사람이 줄어들었다. 여성을 섹스파트너로만 여기고 남성을 ATM기기로만 여기는 사람이 늘어났다. 어떤 사람은 연애보다 성매매가 효율적이라고까지 하더라. 이성을 성욕 해소 도구로만 생각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사랑을 배우지 못해서 그런 거다. 심각성을 느껴야 한다. 이성애가 결핍되자 이성의 권리에 화를 내고 자신의 손해에 발작하며 거부한다. 결혼과 출산과 육아는 인간의 희생을 필연적으로 필요로 한다. 왜 출산율이 낮을까? 이성애가 결핍되어있으니까 그런 걸로 희생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애국심이 결핍되면 국가를 위해 희생하는 걸 거부하고 싶어지는 것처럼 말이다. 왜 여학생들은 남성끼리 동성 연애하는 작품들을 즐기게 되었을까? 단순 취향으로 치부하기엔 즐기는 사람들이 생각이상으로 많다. 남성끼리 성관계를 맺는 것까지 즐긴다. 모 예능프로그램에서는 어떤 사람이 출연자들을 소재로 동성애 작품을 만들고 그걸 출연자들에게 보여주어 논란이 일어난 적이 있다. 여기서 재미있는 점은 동성애 작품을 만든 사람이 그 행위를 긍정적으로 생각했다는 점이다. 도덕적으로 결함이 없다고 인식하기 때문에 그런 무례한 짓을 저지르면서도 잘못되었음을 모르고 있었다. 이성애가 부도덕하다고 교육받으니까 그런 거다. 여학생들이 본능적으로 남성에게 관심이 많다. 그런데 도덕으로는 나쁘다고 한다. 그 두 가지 사이에서 타협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도덕적으로 행동하려는 착한 여학생들은 남성의 동성애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최근까지도 학교에서 이성교제를 하면 처벌받았다고 하지. 이성애가 잘못되었다고 교육받는 것. 얼마나 가엾은 일일까? 여성의 정조를 명분으로 미성년자의 성관계가 부도덕하게 되었다. 성관계가 부도덕하다고 배우니까 성욕이 많은 이성을 혐오하는 사람이 늘어났다. 성욕이란 자연스러운 본능이 부도덕하다고 느껴지니 성욕을 해소하려는 행동 자체도 역겨워진 것이다. 왜 성 상품화에 예민할까? 생각해보자. 부도덕한 쾌락을 얻기 위해 상품을 구매하는 것.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바로 마약이다. 성욕이란 부도덕한 쾌락을 위해 상품을 구매하는 남성들을 보고 어떤 기분이 들었을 것 같나? 정말 슬프다. 왜 성별이 평등해지고 있음에도 남성혐오가 사라지지 않는지 알겠는가? 성관계가 부도덕하다고 교육받는 한 남성들이 전부 거세당하지 않는 이상 남성혐오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성욕이 부도덕하다는 게 얼마나 심각한 문제인지 인지하길 바란다. 한국은 여성주의로 남성혐오가 생긴 게 아니다. 애초에 도덕으로 성욕이 많은 남성을 혐오하는 사람들이 많았던 것이다. 남성이 여성의 몸을 쳐다보면 화를 낸다. 매력을 느껴 본능적으로 쳐다보는 것도 잘못되었다고 한다. 지금도 학교에서 성교육을 한다고 하면 학부모가 항의를 한다고 한다. 한국은 성인들도 포르노로 성교육을 받아 제대로 된 성교육을 받지 못해 성 지식이 부족하다는 얘기가 있다. 정말 웃기는 얘기다. 왜 그렇겠는가? 성욕이 부도덕하니까 그런 거다. 「세상에 학교에서 부도덕을 가르치다니요!」 성교육에 대한 항의는 그들에게 도덕적으로 당연히 해야 할 일이었을 뿐이다. 이런 현상을 여성주의는 더욱 심화시켰을 뿐이다. 예전에 어떤 여학생이 고민상담을 부탁하며 올린 글을 읽은 적이 있다. 학교에서 걸레라고 불려 화가나 그렇게 부른 상대와 싸우다가 강제전학조치를 당해 많은 부분 자유를 억압받아서 고민이라고 하더라. 걸레라. 왜 여성이 성의 자유를 누리는 걸 모욕으로 취급하는가? 그건 여성을 도구 취급했던 지배국가의 도덕 말고는 이유가 없다. 남성은 그러지 않으니까 말이다. 만약 걸레라고 부르는 부자유스러운 인간이 있다면 유교인이라고 반격하길 권하겠다. 여성들은 여성주의에 휘둘리지 말고 자유주의적으로 생각하길 바란다. 무엇이 더 자유로운가? 사랑하는 사람과 자유롭게 성관계를 맺는 것이 자유로운가? 아니면 억압을 받는 것이 자유로운가? 마음대로 꾸밀 수 있는 게 자유로운가? 아니면 꾸미면 잘못되었다며 공격받는 게 자유로운가? 무엇이 진정 여성인권인지 생각해줬으면 좋겠다. 한국은 지금 유교에 여성주의가 결합되어 성을 억압하는 게 여성인권이 되어버렸다. 그것은 자유롭지 못한 일이다. 나는 여성계가 사랑을 주장하는 걸 본 적이 없다. 아무리 기억을 뒤져봐도 남성을 사랑하자고 주장하는 사람이 없다. 그들에겐 사랑이 없었다. 사랑은 커녕 증오나 혐오를 퍼트린다. 일방적인 여성특혜나 성 문화 검열이라는 성욕이 많은 남성박해로 서로를 증오하고 혐오하게 만들었다. 이런 사람들이 교사와 여학생들에게 영향을 끼치고 있는데 정상적인 이성애가 자리잡을 수 있겠는가? 중동국가보다 더한 성 억압을 강요하며 자연스러운 욕구를 가진 이들을 나쁘다고 공격했을 뿐이다. 한국의 출산율에 그들의 증오와 혐오가 얼마나 큰 영향을 끼쳤을까? 한국의 불행에 얼마나 큰 영향을 끼쳤을까? 정말 무시무시한 일이다. 좋다. 그들도 이기적인 주장을 할 수도 있다. 그런데 그들은 그걸 모든 인간이 따라야 할 정의마냥 내세웠던 점이 잘못되었다. 그 때문에 이타적인 착한 사람들이 휘둘려서 잘못된 정책을 추진했던 것이다. 이래서 이타주의는 자유국가에서 쓸모가 없다. 모든 주장은 이기적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래야 교만해지지 않을 수 있다. 사랑이 줄고 혐오가 는다. 결혼이 줄고 출산도 준다. 이성애가 결핍되었다. 이성을 향해야 할 애정이 문화로 가자 급속도로 성장했다. 왜 한국문화는 노래 자체를 즐기기는 것보다 우상에게 애정을 품는 아이돌문화가 유명할까? 많은 사람들이 한국에도 다양한 장르의 가수가 필요하다고 한다. 그럼에도 왜 아이돌만 성장했는가? 그들의 성장에는 이성애가 결핍된 사람들의 애정이 있었기 때문이다. 왜 한국문화에는 음악이나 드라마나 영화를 가리지 않고 사랑이 빠지지 않는 걸까? 어떤 창작물도 끝내는 사랑으로 흘러가서 지겹다는 사람이 있을 정도였다. 그럼에도 왜 사랑이 빠지지 않았는가? 문화로 애정결핍을 해소하려는 움직임이 있었기 때문이다. 문화의 성장은 그 문화를 즐기는 사람에 영향을 받는 거다. 이런 성장은 그 원인이 반드시 긍정적일 거란 보장은 없다. 게임문화 성장 또한 애정결핍이 큰 영향을 끼쳤다. 가족애나 이성애가 많은 곳에서는 게임보다 실외놀이를 더 즐겁게 즐길 것이다. 그런데 한국은 어떠했는가? 이성애는 애초에 부도덕하다 배우고 성장한다. 가족애는 부모의 꼰대질에 질린 아이들이 어느 순간부터 가족끼리 놀러 가는 걸 거부하게 된다. 꼰대질을 하지 않는 가정이야 사이가 좋겠지만 대부분 그러지 않다. 한국이 그렇게 행복한 국가였으면 출산율과 자살률이 이렇지 않다. 보편적으로 불행하니까 그런 거다. 가족애가 결핍되어 버렸다. 더구나 실외에 놀 거리도 적다. 애정결핍에 놀 거리도 없는 한국의 학생들은 자연스럽게 게임에 몰두하게 되었다. 어떤 국가는 게임을 하는 것 자체로 너드 취급 받는다고 한다. 한국이 그러지 않는 것은 대다수 학생들이 게임을 즐길 수밖에 없었던 환경이었기 때문이다. 게임플레이강국의 이면에는 그런 슬픔이 자리잡고 있다. 이렇듯 한국문화는 애정결핍이 만든 결과물이다. 참 복잡한 심경이다. 사회에 뿌리내린 근본을 알게 되면 거기서부터 다양한 현상이 해석된다. 뿌리부터 자라난 나무의 곁가지를 쳐낸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게 아니다. 뿌리부터 바꿔야 해결된다. 카스트로 불행을 겪은 사람은 카스트의 책임인 것처럼 도덕으로 불행을 겪은 사람은 도덕의 책임이다. 도덕을 바꾸지 않음 도덕으로 발생한 문제들을 해결해봐야 별다른 의미는 없다. 계속 반복될 뿐이다. 나는 내가 이상한 아이인지 알았다. 나는 세뱃돈을 받는 걸 싫어하는 이상한 아이였다. 친척 어른에게 무릎 꿇고 절하는 것도 싫고 그걸로 돈을 받는 것도 싫었다. 내 의지와 감정이 헐값에 팔리는 기분이었다. 그래서 세뱃돈을 받고 나면 부모에게 세뱃돈을 건네주고 모른 척을 했던 기억이 난다. 단순하게 돈을 받고 기뻐하는 어린이였다면 불쾌하지 않았을 텐데. 그래도 최대한 이해 보려고 노력했다. 나중에는 절을 하고 돈을 받는 것이 그들에게 기쁨을 줄 수 있다며 자기합리화를 했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내가 이상한 게 아니었다. 이상한 건 연하에게 복종을 요구하는 한국의 도덕이었다. 죽은 자는 산 자에게 복종을 요구하며 제사를 지내라 하고 산 자는 연하에게 복종을 요구하며 명령을 따를 것을 강요한다. 정말 숨막힐 정도로 답답하다. 이제 내겐 어른과 조상에게 절하는 한국 국민과 태국 왕족에게 절하는 태국 국민과 별반 차이를 느끼지 못하겠다. 어떤 정신 나간 태국 왕족은 한국에 와서 한국인에게도 절을 받았다고 한다. 정말 역겹다. 지금 생각해보면 어른들은 가급적 아이들을 위하려고 노력은 한 것 같다. 그러면 뭐하나. 그 노력의 근간이 지배국가의 도덕이었는데. 친구의 어린 동생과 친구처럼 지낸 적이 있다. 초등학생 때였을 것이다. 그때엔 한두 살 차이도 큰 시기다. 그런데 한참 어린 동생이랑 친구처럼 지냈었다. 그걸 보고 어떤 어른이 불같이 화를 내며 혼을 냈다. 아마 연하와 대등하게 지내는 내가 못마땅했던 모양이다. 도대체 왜 그랬는지는 정확히 모른다. 그 이후 나는 그 친구와 멀어졌다. 당분간 연하와도 어떻게 지내야 하는지 몰랐던 시기가 있었다. 대중가수의 춤과 노래를 TV를 통해 즐긴 적이 있다. 그걸 보고 TV채널을 바꾸고는 화를 내며 혼을 냈다. 아마 그런 문화를 즐기는 내가 못마땅했던 모양이다. 그 이후 도덕에 지배당하고 있다는 내적 결함을 알아차릴 때까지 제대로 즐길 수가 없었다. 밖에서 놀다가 늦게 집에 들어가니 다 식은 음식이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그걸 강제로 먹었다. 왜 늦게 왔냐며 혼이 나고서는 다 불어터진 걸 억지로 먹으며 눈물 흘렸던 기억이 난다. 평소 요리를 하지 않던 사람이 모처럼 준비한 음식이 식을 때까지 늦게 들어온 것이 못마땅했던 모양이다. 나는 김치가 싫었다. 그 신맛이 무척 불쾌했다. 볶음김치는 먹을 만했는데 생김치는 도저히 먹을 수가 없었다. 그런 아이는 한국에서 이상한 아이였다. 김치를 먹게 해야만 했다. 그게 정상이었다. 그런 비정상을 고치기 위해 어떤 어른이 다른 어른에게 김치를 먹을 수 있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나는 초등학교에서 아이들이 다 보는 데서 강제로 김치를 입 안에 쑤셔 넣어지게 되었다. 나는 그걸 받아드릴 수 없었다. 맛이 없는 것도 없는 것이었지만 강제로 그걸 당한 다는 것이 굉장히 수치스러웠다. 나는 그걸 내뱉고 아이들에게마저 이상한 아이로 낙인을 찍히게 되었다. 한국의 자랑식품인 김치를 먹지 않는 게 그렇게나 못마땅했던 걸까? 내가 먹는 음식은 편식하면서 자신들이 먹는 음식은 편식하면 화를 낸다. 유치원생일 때 미형이 아닌 이성과 사이 좋게 지내는 걸 보고 답답했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기억에는 없지만 아마 그때 나는 외모와 관계없이 사람을 대했던 것 같다. 지금 보면 그건 교정된 듯하다. 이외에 자잘한 것 하나하나 어른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강제로 교정을 당했다. 이 세상 모든 것이 내가 이상하고 사회가 올바른 것이라며 꾸짖었다. 어떤 것은 아무리 봐도 내가 아니라 네가 이상한 것 같은데 내가 이상하다고 한다. 내가 이상하지 않다고 말해줄 사람은 없었다. 내 주변에 자유주의자는 없었다. 「어른에게 절하기 싫어하는 내가 나쁜 거야? 연하와 친구 먹는 내가 나쁜 거야? 대중문화를 즐기는 내가 나쁜 거야? 멋대로 준비한 배려를 받지 못한 내가 나쁜 거야? 김치를 먹지 않는 내가 나쁜 거야? 미형이 아닌 이성과 친하게 지내는 게 나쁜 거였어? 나는 나쁜 아이구나?」결국 어린 학생이 스스로를 별볼일 없는 인간이라고 말할 정도로 자신감을 상실해버렸다. 나쁜 자신을 할퀴고 상처를 입혔다. 그 흉터는 아직도 남아있다. 이런 것은 도대체 누구 책임이라 할 수 있는가? 어른들이 과연 악한 의도로 행한 것 같은가? 선한 의도로 행한 것이다. 착한 아이로 만들기 위해 자신이 배운 대로 가르쳤다. 어떻게 그게 그들의 책임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가르침대로 교정되려다 망가진 아이의 잘못인가? 아마 대다수의 아이들은 사회가 뭔가 이상하다고 느꼈을 것이다. 그게 바로 사춘기다. 어린 시절부터 시키는 대로만 하면서 살다가 사춘기쯤 되면 뭔가 이상하다고 느낀다. 「왜 인간을 지배하려고 하지? 내가 왜 복종을 해야 하는 거지?」 뭔가 이상함을 느끼고 자유를 위해 반항을 하는데 정확히 어떤 뭐 때문에 그런 건지를 모른다. 마냥 어른이 잘못되었다고만 한다. 그러다 보니까 반항기로 끝나버리고 마는 것이다. 반항하다가 자유롭지 못한 원인조차 찾지 못하자 결국은 도덕의 지배에 복종하는 결말을 맞이하는 것이 대다수 사춘기의 끝이다. 얌전해졌다. 착해졌다. 그런 말은 더 이상 지배에 반항하지 못하는 노예를 보고 하는 말과 다르지 않다. 많은 아이들이 자유국가에서 자유를 바라다가 망가졌다. 어떻게 그게 그들의 책임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모든 것은 도덕의 책임이다. 자유롭길 바랬던 모양인지 인터넷 아이디마저 대부분 Free가 붙게 되었다. 아무래도 당시엔 Freedom과 Liberal의 차이를 몰랐던 것 같다. 그토록 자유를 바랬지만 나 또한 도대체 무엇이 원인으로 내가 부자유를 느꼈는지 정확하게 알 수 없었다. 자유롭지 못한 세상 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을 때 어떤 사건으로 신체의 부자유를 느낀 순간 모든 걸 자포자기하고 운명이란 이름의 도피를 통해 무기력하게 살아남기만 했을 뿐이다. 이제는 안다. 모든 부자유는 지배국가의 도덕으로부터 비롯되었다. 나의 트라우마와 나의 적인 인간을 지배하고 복종 당하는 걸 올바른 도리로 만든 지배국가의 도덕이다. 인간을 지배하려는 모든 것은 자유의 적이고 자유의 적은 나의 적이다. 나는 그걸 단언하겠다. 이외 도덕이 만든 현상 몇 가지를 살펴보자. 왜 귀농을 꺼려하겠는가? 시골의 연상들에게 지배 받기 싫기 때문이다. 도시는 핵가족화가 진행되어 연상의 꼰대질을 당할 우려가 상대적으로 적은 편이다. 이웃사촌이란 말도 이제 과거의 말일 뿐이다. 도시의 연상들도 직접적인 원인은 몰라도 꼰대질이나 갑질이 문제라는 것은 인식하고 있어 자제하려고 한다. 무의식적으로는 꼰대질을 해도 의식적으로는 하지 않으려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시골은 아직 그런 게 부족하다. 연하가 시골에 가면 모든 연상들에게 꼰대질을 당할 것이다. 꼰대질이 곧 인간을 지배하려는 행동이므로 꼰대질을 당하러 간다는 것은 자발적으로 노예가 되겠다는 것과 다르지 않다. 누가 그러고 싶겠는가? 시골에 젊은 사람이 가기 위해서는 도덕이 자유롭게 바뀌거나 시간이 흘러 지배할 인간이 사라져야 할 것이다. 왜 연하를 아기 취급할 때가 있을까? 다 큰 성인도 자신에게 비하면 어리니까 아기라고 한다. 성인을 아기라고 하다니 황당하다. 왜 그렇겠는가? 나이로 차별하기 때문이다. 어리게 여겨야 자신의 위치가 올라간다는 걸 무의식적으로 알고 있기 때문에 그런 행동이 나타나는 것이다. 현실 커뮤니티나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연상임을 강조하는 사람이 있다. 형이라 강조하며 말을 한다. 이것은 「내가 위니까 알아서 기어라.」라는 의도가 담겨있다. 어린 놈이 건방지게. 어린 주제에 벌써부터 까져가지고. 어린 녀석이 죄를 저질러? 이런 류의 발언도 연령차별에서 비롯된다. 굳이 나이를 붙이는 것은 차별의식이 있기 때문이다. 유교인이 아니라면 연하를 아기 취급하거나 어리다고 하는 것이 무례하다는 걸 인식하고 나이와 관계없이 대등한 인간 대접을 해야 할 것이다. 왜 한국에서 천재는 범재가 되어버리는가? 그건 범재인 어른의 입맛에 맞게끔 천재인 아이가 교정 당하기 때문이다. 왜 한국에서는 창의력이 없는 게임들이 많은 것인가? 창의력이 없는 윗사람 입맛에 맞게끔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창의력이 있는 것은 윗사람이 창의력이 있거나 아랫사람의 창의력을 중용했기 때문이다. 사람에는 위아래가 없고 평등하며 역할에 따라 달라질 뿐이라는 걸 강조하고 넘어가겠다. 왜 명절에 친척과 만나기가 싫은가? 꼰대질 당하고 싶지 않아서다. 위에서 내려다보며 명령하듯 잔소리하는 걸 듣고 싶어하는 자유인이 어디에 있겠는가? 흔히 한국의 핵가족화를 개인주의가 원인이라고 하던데 나는 다르다고 본다. 연상들의 지배가 싫은 자유로운 이들의 자유주의가 원인이라고 본다. 연상의 명령이 싫은 사람들이 가정을 꾸려 나갔다는 얘기다. 재미있는 건 자유가 필요할 때는 자유 찾고 지배가 필요할 때는 도덕을 찾았다는 점이다. 핵가족화가 되었어도 꼰대질 하는 사람들은 수두룩했다. 왜 음주운전은 줄어들지 않는 걸까? 윤창호법이 시행되어 처벌이 강화되었음에도 여전하다. 그걸 보고 많은 사람들이 처벌을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아마 처벌을 강화해도 별반 차이가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음주운전에는 술에 강한 인간이 우대받는 음주문화가 영향을 끼치고 있기 때문이다. 술을 많이 마셔도 멀쩡한 사람이 대단한 사람 취급 받는다. 한국 음주문화에서는 술 마시고 멀쩡한 것이 올바르게 되어버린 것이다. 그런 배경이 음주운전을 하게 만드는 원인으로 작용한다. 술 잔뜩 마시고 「나 안 취했어!」 라며 운전을 한다. 술 마시고 멀쩡하게 운전하는 나는 대단해! 이런 사고의 흐름이 이어지는데 처벌 강화한다고 달라지겠는가? 무엇보다 음주는 이성을 마비시킨다. 술 마시기 전에는 음주운전 하지 말아야지 해놓고 술 마시고 나서 이성을 잃고 「나 멀쩡해!」 라면서 음주운전을 하게 된다. 올바름이 원인이 된 문제는 법을 아무리 바꿔도 해결할 수 없다. 술에 강한 것이 자랑거리가 되는 한 음주운전은 사라지기 어려울 것이다. 도덕적이고 올바르다는 것이 악영향을 끼치는 사례는 무수히 많다. 이것들이 수많은 불행을 불러왔다. 상식적으로 생각하자. 인간을 지배하고 복종하게 만드는 걸 올바르다고 가르치면서 자유국가의 국민이 정상적으로 행복할 수 있겠는가? 이런 다양한 문제들을 성장해서 스스로 바꿀 수만 있다면 좋겠지만 쉽지가 않다. 쉬웠다면 세 살 버릇 여든 간다라는 속담이 없었을 것이고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는 말도 없었을 것이다. 성장기에 배운 교육은 자아성찰이 없다면 대부분 평생 간다. 미성년자의 이성교제와 성관계 금지가 왜 그런 영향을 끼치는지 알겠는가? 한국인들은 학창시절 배운 대로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성애가 결핍되고 성욕이 많은 인간을 혐오하고 있는 것이다. 도덕적으로, 연하가 복종하길 바라고 이성과 교제하는 걸 금하고 야한 걸 검열할수록 사회는 불행해져 갔다. 지배당해서 불행하고 이성애가 결핍되어 불행하고 욕구충족이 어려워서 불행하다. 너무 자연스러운 인과관계가 아닌가? 이런 불행을 부르는 도덕을 한국 문화의 특성이라며 존속하길 바란다면 카스트를 인도 문화의 특성이라며 존속하길 바라는 것과 같다는 걸 지적하고 싶다. 인도의 카스트는 신분으로 인간을 나눠 차별하는 것이고 한국의 장유유서는 나이로 인간을 나눠 차별하는 것이다. 하위카스트가 상위카스트에게 평등하게 대해달라는 걸 보고 철이 들지 않았다며 비난한다면 어떤 기분이 드는가? 황당하거나 화가 나는가? 그렇다면 하위카스트에 연하를 넣고 상위카스트에 연상을 넣어보라. 어떤 기분이 드는가? 이처럼 둘 다 복종을 올바른 도리로 만든 도덕들이다. 부디 잘못되었음을 깨닫길 바란다. 장유유서만의 특이한 점이 있다면 아이일 때는 주로 차별 받고 어른일 때는 주로 차별한다는 점이다. 과거 수공업 도제시절에는 장인에게 부림을 당하더라도 시간이 흘러 장인이 되면 도제를 부릴 수 있었기 때문에 스스로 노동자라 자각하지 못하고 있었다고 한다. 사용자가 될 수 있기 때문에 노동자 시절의 불평등함을 호소하지 않는다. 이는 한국의 의료체계와 비슷하다 수련의나 전공의 시절에 부림을 당하더라도 이후 부릴 수 있기 때문에 악습을 바꾸려 하지 않는다. 장유유서도 마찬가지일지도 모른다. 신분제와 달리 어릴 때는 지배당하더라도 어른이 되고 나서는 지배할 수 있으니까 문제제기를 하지 않는 것이다. 언젠가 젊은 정치가가 늙은 정치가에게 나이로 차별 받았다며 억울하다고 호소한 기사가 공개된 적이 있다. 과연 그 젊은 정치가는 단지 늦게 태어났다는 이유 하나로 차별당하는 한국 도덕의 문제점을 인지하고 연하와 대등한 관계를 맺었을까 궁금하다. 자유. 자유. 자유! 지배국가의 도덕으로부터 자유롭고 싶다. 왜 한국엔 진정한 자유주의자가 보이지 않는 건가? 자유와 평등을 외치며 민주화 운동을 했던 이들은 어디에 있는가? 자유민주주의를 외치며 자유의 가치를 중시하던 이들은 어디에 있는가? 도대체 자유주의자는 어디에 있느냔 말이다! 도덕을 명분으로 인간들을 지배하고 있음에도 그것을 지배라고 인식하지 못하여 왜 자유를 갈구하고 있는지조차 모를지도 모른다. 차라리 알기 쉽게 독재자라도 있으면 싸울 수라도 있으련만 나는 도대체 무엇과 싸웠어야 했는가? 자유국가에서 자유를 외치는 사람들과 자유를 위해 싸워야 했나? 선한 의지로 행동하는 사람들과 싸워야 하냔 말이다! 아아. 자유를 희망했던 민주화 운동가와 자유민주주의자가 진정 자유를 갈구하고 그것에 맞춰 사회의 도덕을 변혁했다면 이토록 높은 자살률과 낮은 출산율을 부를 정도로 불행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도덕이 원인이 된 사회의 불행. 그걸 누군가에게 책임을 물을 수가 없다. 도대체 어떻게 책임을 묻나? 그렇다면 앞으로가 문제다. 앞으로 지배국가의 도덕이란 잘못된 것을 바꾸는 걸 부정하는 이에게 도덕으로 발생한 불행에 대한 책임을 물어야 한다. 부디 문화 특성이라면서 불행을 부르는 도덕을 수호하려 하지 말아 주길 바란다. 자유롭지 못한 도덕을 가지고 있는 자유국가. 그것이 한국이다. 이제는 바뀌어야 한다. 최소한 올바른 일을 행하면 행복할 수 있는 세상으로 바꾸어야 한다.

 

 

 

본론으로 들어가자. 도덕이 시대의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는 것처럼 소년범죄의 대책 또한 시대의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촉법소년 문제다. 최근 촉법소년은 별다른 죄책감 없이 죄를 저질러 사회질서를 어지럽히고 있다. 촉법소년이 무면허 운전차량으로 대학생을 쳐서 사망에 이르게 하고는 SNS에 죄책감을 느끼지 못한 것 같은 메시지를 올려 사회적 공분을 산 적이 있다. 이외에도 다양한 촉법소년 범죄들이 일어나 많은 사람들이 불안에 떨거나 불만을 가지거나 분통을 터트리고 있다. 소년범죄는 언제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소년범죄는 범죄를 저지르지 않아도 될 환경에 놓은 아이들도 저지르고 있다. 이런 현상은 정보검열이 어려운 자유국가의 현대사회에서 일어나는 정보과잉공급이 만드는 결과물이다. 길거리에 총기가 널려 있다고 가정해보자. 어떤 어린이는 그 총을 주어서 쏘고 싶다는 충동만으로도 아무런 죄책감을 느끼지 못한 채 쏘아버릴 것이다. 총기에 정보를 대입하면 그게 바로 촉법소년 범죄다. 자유국가에서는 인터넷을 통해 누구나 다 성인이 접하는 정보를 얻을 수 있다. 미성년자 차단을 한 사이트도 VPN을 통해 어렵지 않게 접속이 가능하다. 굳이 VPN도 필요 없다. 유튜브를 이용하는 어린이들은 뉴스를 통해 어른들이 접하는 정보를 얻을 수 있다. 촉법소년에 관한 정보를 어디서 얻을 수 있겠는가? 과거엔 한자가 많은 불친절한 뉴스나 주변 연상들에게 정보를 얻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양질의 정보를 유튜브만 봐도 얻을 수 있다. 더구나 과거 뉴스와는 다르게 매우 쉽고 친절하게 정보를 전달해주고 있다. 그 정보가 옳다는 확증은 없지만 과거에 비해서 확실히 친절해졌다. 모르는 내용이 있으면 댓글로 물어보면 된다. 자신의 나이를 말하고 도움을 청하는 아이들이 종종 눈에 띈다. 옛날과는 차원이 다른 정보수집이다. 아이들에게 공급되는 정보의 양은 과거와 달리 어른과 비등해지고 있다. 그렇게 얻은 정보를 마치 길거리에 널린 총기를 주인 어린이들처럼 충동적으로 사용하여 범죄를 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현대사회에서는 과거 지배국가처럼 정보검열만으로는 아이들을 올곧게 성장할 수 있도록 도울 수가 없다. 일부 아이들은 정보검열 같은 통제만으로도 망가질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어떤 부모가 자신의 아이를 착하게 키우기 위해 억지로 정보검열을 했다고 가정해보자. 스마트폰을 빼앗고 TV를 못 보게 한다. 그런데 그 외의 아이들은 정보를 얻고 있다.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되겠는가? 간단히 말해 따돌림을 당한다. 정보라는 힘을 쥐지 못한 아이들을 아이들의 사회에서 도태되어 버린다는 것이다. 정보라는 총기를 쥐지 않은 아이가 따돌림이라는 총상으로 온몸이 너덜너덜해져서 집으로 돌아오면 어떤 기분이 들겠는가? 정보검열은 자기보호도 못하게 하는 어리석은 행위다. 아는 게 힘이라고 하면서 왜 정보검열은 그렇게 좋아하는가?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아는 것으로 힘이 강해진다. 아이들을 볼모로 내세워 정보를 검열하는 것은 아이들을 다루기 쉬운 가축처럼 취급하기 위해서와 별반 다르지 않다. 그것은 우민화 정책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정보를 검열할 것이 아니라 그 정보를 다룰 수 있는 방법을 알려줘야 할 것이다. 이제는 정보라는 총기를 쥐어줄 밖에 없는 환경이라는 것이다. 어린이에게 총기를 쥐어 줄 밖에 없는 환경이라면 총기 사용법과 쏴야 할 목적과 대상과 시기 등을 알려줘야 하는 것이다. 이처럼 자유국가에서는 정보과잉공급으로 나타나는 소년범죄에 대한 대책을 그에 맞게 마련할 필요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촉법소년이 저지르는 범죄에 대한 대책이 제대로 마련되지 못하고 있다. 사실 못하고 있는 건지 안하고 있는 건지 모른다. 내부에서 어떤 식으로 진행되는지를 모르니까 말이다. 외부에서 공표되는 소년범죄 전문가와 관련자의 의견에 따르면 크게 두 가지 측면에서 촉법소년의 형사처벌이 어렵다고 한다. 첫째, 촉법소년은 강력범죄 비율이 낮고 생계형 범죄 비율이 높다고 한다. 둘째, 지나치게 어릴 때 형사처벌을 하는 것은 낙인을 찍는 효과가 나타날 수 있다고 한다. 대강 이런 의견이었을 것이다. 생계형과 낙인효과. 어떤 이는 강력범죄만 형사처벌하자고 하던데 그런 의견이 받아 드려지지 않는 걸 보면 강력범죄와 생계형 범죄의 구분이 모호한 것으로 보인다. 생계형이라고 하더라도 강력범죄로 이어질 수 있지 않겠는가? 여기에 하나를 더하겠다. 셋째, 촉법소년의 범죄는 사회의 책임이 있기 때문이다. 이들의 행동은 대부분 환경에 의할 확률이 높다. 환경에 관계없이 독특한 특성을 지니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기 때문이다. 쌍둥이를 예로 들며 유전자가 인간의 행동원리를 결정하는데 큰 영향을 준다고 주장하는 이가 있다. 그렇다면 묻겠다. 쌍둥이 중 한 명은 미국에서 자유주의를 접하며 성장하고 한 명은 중국에서 중화사상을 접하고 성장했다면 그 둘은 같은 사상을 공유할 수 있겠는가? 맛의 호불호나 취미 같은 건 유전적 특성에 의할 확률이 높다. 하지만 사상적인 부분은 환경에 큰 영향을 받는다. 한국 내에서 발생하는 좋은 것은 한국 환경 덕분이고 한국 내에서 발생하는 나쁜 것은 한국 환경 때문이다. 이를 부정하는 것은 좋은 것만 취하고 나쁜 것은 외면하는 편향적인 책임회피에 불과하다. 모든 인간이 환경에 영향을 받는다. 아직 미숙한 어린이들은 더 크게 영향을 받는다. 그런 그들의 범죄는 잘못 가르친 사회의 책임도 크기 때문에 형사처벌을 하기 어렵다. 이런 저런 이유로 소년범죄 전문가와 관계자가 촉법소년 범죄에 대한 대책마련이 쉽지 않다는 걸 알겠다. 실제 현장에서 직접 경험하고 있는 이들의 의견을 귀담아야 할 필요가 있다는 건 누구나 다 알 것이다. 그들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고 있을 것이다. 제 역할을 못하는 이들을 제외하면 그런 점은 어느 전문가나 신뢰하고 있다. 그렇다고 이대로 방치할 수도 없다. 자유국가에서는 지배국가의 도덕을 자유국가에 맞게 바로잡아야 하는 것처럼 정보확산사회에서는 정보통제사회의 범죄대책을 정보확산사회에 맞게 바로잡아야 하는 것이다. 이것은 특별히 소년범죄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모든 범죄는 이제 정보확산사회에 맞게 바로 잡아야 한다. 그 중 촉법소년 범죄에 대한 의견을 내보겠다. 자유국가에서 정보는 총기자유국가의 총기와도 같다. 주자니 위험하고 뺏자니 도태된다. 다 총을 들고 있는데 너만 안 들고 있다고 생각해봐라. 얼마나 위태로운가? 어린이들도 마찬가지다. 잘못 주면 범죄가 발생하고 아예 뺏으면 따돌림을 당한다. 애 망칠 생각이 없다면 결코 정보검열은 하지 말아야 한다. 그런 걸 어느 정도 알기 때문에 대부분은 그냥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그렇게 총기와도 같은 정보를 쥐게 된 어떤 촉법소년들은 충동적으로 범죄를 일으켰다. 이런 상황에서 아이들이 앞으로 범죄를 일으키지 않게 하기 위해서 어떤 방법을 동원해야 하는가?  촉법소년이 저지른 소년범죄는 소년원에 들어간다고 한다. 촉법소년이 아닌 소년범죄는 소년교도소에 수감된다고 한다. 지금 많은 사람들은 촉법소년의 처벌이 약하다며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렇다면 촉법소년들도 소년교소도에 수감되어야 하는가? 그렇게 된다면 앞서 말한 생계형과 낙인효과와 사회책임의 문제가 발생할 것이다. 그렇다고 이대로 방치할 수는 없다. 소년원에 가고 있는 현 상황에서도 소년범죄는 더 뻔뻔해지고 교활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많이 생각해봤다. 사실 예전부터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자유를 억압하고 질서를 강요할수록 자유가 소중해지지 질서가 소중해지겠나? 지금의 교정방식은 질서를 소중하게 여기게 만들지는 못한다고 생각한다. 청소년들이 무면허로 운전을 하고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는 것은 어른 수준의 자유를 누리고 싶기 때문에 그러는 것이 아니었던가? 어른들이 강요하는 질서가 답답하니까 질서가 하찮아진 것이다. 그런 아이들에게 더 억압된 질서를 강요한다는 것은 자유국가에 맞는 방식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질서가 소중해지기 위해서는 더 큰 자유를 주는 것이 타당하다. 더 큰 자유. 그것은 질서 밖의 자유다. 사회질서가 답답하다면 사회 밖으로 나가 사회가 없는 자유를 겪어봐야 사회질서의 소중함을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죄를 지은 자가 사회에 적응하는 방식은 크게 두 가지가 있다. 첫째, 죄를 지은 자에게 더 많은 통제와 억압을 줘서 질서에 복종하게 만드는 것이다. 둘째, 죄를 지은 자에게 더 많은 자유를 줘서 질서의 필요성을 깨닫고 자발적으로 질서를 따르게 하는 것이다. 위의 방식이 교도소고 아래의 방식이 추방이다. 옛 영국에서는 죄를 지은 자를 식민지에 추방하여 거기서 형기를 살도록 했다. 그리고 형기를 마친 이들이 식민지에 남아 정치에 참여하고 사법역할도 맡아 현대국가의 초석을 다지게 되었다. 영국 관리들이 식민지에 파견 나오길 거부하는 바람에 사람이 없어서 죄수 중에서 그런 역할을 맡았다고 한다. 범죄자들이 자유로운 땅에서 자기들끼리 질서의 필요성을 배우고 질서를 만들고 지켜나갔다는 것이다. 그게 지금의 미국과 호주다. 영국의 의도는 그런 것이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렇게 되어 자유주의적 질서가 자리잡고 말았다. 그렇게 촉법소년들이 질서의 필요성을 깨닫고 스스로 질서를 만들고 지켜나가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주장하겠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미국과 호주가 경험한 방식이 적절하다고 본다. 범죄를 저지른 촉법소년들을 나이와 관계없이 보내 어떤 무인도에 보내 생존교육을 받게 한다. 그곳에서 자연과 싸우며 질서의 소중함을 깨닫고 스스로 질서를 만들고 지켜나가게 하는 것이다. 이러면 생계형 문제가 해결된다. 생계형으로 강력범죄를 저지른 아이에게 살아남는 법을 배우는 생존교육은 그들에게 필요한 교육일 것이다. 이 생존교육은 정규교육과정으로 모두에게 열려있으나 범죄학생은 의무고 나머지 학생은 권리다. 이러면 낙인효과 문제도 해결된다. 모든 학생이 자발적으로 지원할 수 있는 정규교육과정이기 때문에 그걸 이수했다고 하여 낙인이 찍혀 차별 받는 일은 개인정보가 유출되지 않는 한 드물 것이다. 그리고 나는 교육계가 나서서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주장하겠다. 촉법소년의 범죄가 환경의 책임이 크다면 부모와 교육의 책임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면 사회책임 문제가 해결된다. 지금은 다른 곳에서 하고 있다고 알고 있는데 촉법소년은 교육계가 책임지는 것이 적절하다고 본다. 사회의 질서가 없는 무인도에서 살아남기 위해 질서를 만들고 지켜나가는 과정을 교육하는 것이야 말로 사회질서 적응을 위한 교육과정이다. 무인도에서 자유를 주고 살아남기 위한 정보를 통제하지 않는다. 그런 방식이 자유국가에서 자유를 다루는 법을 배우는 것이고 정보확산사회에서 정보를 다루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구체적인 방식은 앞으로 설명할 예정이나 그건 아무래도 좋다. 중요한 것은 일반 학생들도 참여할 수 있는 정규교육과정 내에서 죄를 지은 촉법소년들이 질서의 필요성을 배울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교육계가 이런 일을 떠맡는 것이 못마땅할 수도 있다. 하지만 생각해보자. 사회적 영향력이 강할수록 그 집단의 목소리는 커지는 법이다. 예컨대 이런 것이다. 가정폭력피해를 입은 아이들이 편의점에 도움을 청하는 사례들이 늘어났다. 그렇게 하여 편의점이 파출소의 역할을 겸임하게 되었다. 편의점 관계자들은 사회에 더 큰 목소리를 낼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찰리 채플린은 영화 위대한 독재자를 통해 단순한 예능인을 넘어서게 되었다. 예능계가 사회비판을 하는 걸 주저하지 않길 권하겠다. 역할은 고정되는 것이 아니다. 자기역할만 해도 존중은 받을 수 있다. 하지만 그건 최소단위다. 수행하는 역할이 늘어날수록 그에 맞는 대우를 받을 수 있는 것이다. 만약 그러지 못한다면 그런 사회가 잘못되었다. 촉법소년 문제는 부모와 교육의 책임이기도 하니 정규교육과정이 하나 늘어났다고 불평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럼 구체적인 방식을 설명하겠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방식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촉법소년들은 자유롭길 바라기에 자유롭게 무면허 운전을 하고 상점을 약탈했다. 그런 아이들에게 더 큰 자유를 주자. 사회의 질서가 없는 자유가 어떤 것인지 몸소 체험하게 만들자. 왜 사람들이 사회를 이루고 질서를 만들어 준수했는지를 알게 해주자. 그래야 질서의 소중함을 깨닫고 자발적으로 질서를 지키려고 하게 될 것이다. 그것이 자유의지를 가지고 질서를 준수하는 자유주의자로 만드는 교육이다. 자 생존교육을 하기 위한 준비를 해보자. 장소는 한국 내에 있는 무인도다. 한국은 섬이 많으므로 인위적인 생존교육에 적합한 섬을 찾기가 쉬울 것이다. 대상은 초면인 촉법소년이다. 새로운 질서를 배우는 것이므로 서로 초면인 것이 적합할 것이다. 범죄자는 의무고 나머지는 권리다. 범죄를 저지른 촉법소년은 교육을 의무로 무조건 생존교육을 받아야 한다. 그걸 거부하는 방법은 징병을 거부하는 방법과 같이 해외로 이민을 가는 것이다. 의무냐 해외냐 선택해야 할 것이다. 해외로 가는 건 관대한 처사라며 화를 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생각해보자. 평생 교도소에 갇혀 지내는 것과 평생 고국으로 귀국하지 못하는 것은 한국에 사는 한국인이 범죄자를 만날 일이 없다는 점에서 같다. 형사처벌을 받지 않는 촉법소년이라면 적절한 대가라고 생각한다. 나머지 학생들은 교육받고 싶으면 자원해서 교육받을 수 있도록 하면 된다. 생존교육은 따돌림을 당한다거나 자유롭지 못해 답답하거나 변화의 필요성을 느낀 학생들에게 매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초기에는 시범적으로 강력범죄를 저지른 학생들부터 행해보면 좋을 것이다. 기간은 1년 정도가 적당해 보인다. 교육이행 정도에 따라 기간이 조정되어도 괜찮다. 정규교육과정으로 편성되기 때문에 학년이수가 가능하다. 촉법소년의 나이가 다 다를 확률이 높기 때문에 생존교육이 끝나기 전 해당학년의 지식을 담은 시험을 쳐서 유급 여부를 결정한다. 생존교육은 말 그대로 살아남는 방법을 배우는 것이기에 남는 시간이 많다. 그 시간 동안 스스로 공부한 학생들만이 진급할 권리를 취득하게 되는 것이다. 인원은 열 명 정도가 적당하다고 본다. 상황에 따라 수는 달리할 수 있을 것이다. 나이에 관계없이 반말을 하게 하여 차별이 없도록 한다. 교관은 생존전문가가 좋을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교관이 군대처럼 명령을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다른 사람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 한 철저하게 방치한다. 생존하는 방법만 알려주고 알아서 생존할 수 있도록 한다. 정말 위급할 때를 제외하면 그들의 자유에 개입하지 않는다. 방치하던 도중 만약 어떤 학생이 다른 학생의 자유를 침범하는 것과 같은 행위를 저지르면 그에게 더 큰 자유를 주면 된다. 예컨대 어떤 학생이 다른 학생을 폭력을 통해 의식주를 마련하라고 명령을 한다고 가정해보자. 그러면 그 작은 집단의 질서도 적응 못할 정도로 자유가 필요하다는 것으로 판단하여 혼자서 살아남는 공간을 마련해주면 된다. 그러다 만약 혼자 고립된 학생이 무단으로 집단에 돌아오려고 한다면 집단은 그를 질서를 어지럽혔던 적으로 간주하고 공격하게 하면 된다. 실제 인류가 살아온 생존경쟁을 몸소 깨닫게 만드는 것이다. 왜 자유를 준다면서 무인도에 갇히게 하는지 알겠는가? 사회 밖에 속한 외부인은 사회에게 공격 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회의 공격을 피하면서 자유를 누리려면 인간이 없는 곳밖에 없다. 한국에서는 그게 무인도다. 한 일주일에서 한달 가량 혼자서 살아남게 만들자. 밥도 혼자서 만들어 먹고 잠자리도 혼자서 준비하고 노는 것도 혼자서 한다. 그 자유가 힘들다는 걸 깨닫고 집단의 질서에 합류하길 원할 무렵 다시 돌아와서 사고화하고 화해하게 하면 된다. 살아남기 위해 서로가 필요하다는 걸 깨닫게 해야 한다. 환경은 인위적인 생존교육에 적합하게 먹기 좋은 풀과 낚시하기 좋은 장소와 사냥하기 좋은 동물들을 풀어놓는 것이 좋을 것이다. 비용은 소년원보다 더 적을지도 모른다. 원재료와 교육전용 무인도와 생존전문가 인건비만 들어가기 때문이다. 이에 따른 교육은 말 그대로 생존교육이다. 마실 물을 만드는 방법. 먹을 수 있는 풀을 채집하는 방법. 물고기를 낚시하는 방법. 동물을 사냥하는 방법. 사냥한 걸 도축하는 방법. 고기로 요리하는 방법. 농사를 짓는 방법. 집을 만드는 방법. 옷을 만드는 방법. 놀이를 즐기는 방법. 등 이런 기본적인 생존교육으로 시작한다. 그리고 질서를 만들고 유지하는 방법도 배운다. 규칙을 만드는 방법. 역할을 정하는 방법. 토론을 하는 방법. 등 자유로운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해 어떤 것이 가장 필요한 것인지를 배운다. 규칙을 지키지 않으면 생존에 어떤 피해가 가는지를 배운다. 제 역할을 다하지 않으면 생존에 어떤 피해가 가는지를 배운다. 제대로 된 토론이 없으면 불만이 생겨 생존에 어떤 피해가 가는지를 배운다. 생존에 필요한 모든 역할이 중요하다는 걸 깨닫고 직업차별을 하지 않게 된다. 생존에는 나이가 중요하지 않다는 걸 배우고 연령차별을 하지 않게 된다. 이런 것들을 배우고 스스로 생각해서 어떻게 해야 잘살아남을 수 있는지를 고민하고 또 고민한다. 밤 중에 별을 보며 산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생각한다. 직접 질서의 중요성을 깨닫고 질서를 어지럽히는 행위가 얼마나 큰 잘못인지를 인지하게 만든다. 더 나아가 어떤 질서가 옳고 그른지를 판단한다. 어떻게 해야 질서 아래서 더 행복할 수 있는지를 생각한다. 고찰이 아이를 성숙하게 만든다. 그 성숙함이 자유주의 질서 아래서 자유를 감당하는 것과 총기와도 같은 정보를 다루는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물론 이것은 이상적이다. 의도대로 되지 않을 확률이 높다. 그래도 좋다. 살아남는 방법과 질서의 필요함만 깨우쳐도 충분하다. 살아남는 방법을 충분히 터득한 후에는 자발적으로 공부하는 방법을 배운다. 유급하지 않기 위해 학년에서 배우는 지식을 쌓는 도구를 줘서 스스로 배우게 한다. 시기는 생존교육을 받은 지 약 6개월부터가 적절하다고 본다. 학업적인 부분은 완전 방치해야 한다. 문제집과 필기구만 주고 알아서 공부하나 지켜보자. 스스로 공부하지 않아 유급한다고 해도 별 상관없다. 유급하는 동안 스스로 공부하지 않았던 자신을 자책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과정이 어린 학생들에게 다소 가혹할 수도 있다. 하지만 범죄를 저질렀다면 안전이 보장된 곳에서 생존교육을 받는 것이 죄에 대한 큰 대가는 아닐 것이다. 부모도 그건 납득해야 한다. 이런 생존교육이 정규교육과정으로 편입되기 위해서 어떤 절차가 필요한지는 잘 모른다. 그러나 이런 과정이 없다면 촉법소년 문제는 해결되지 못할 것이다. 어른의 입맛에 맞춰서 아이들을 교정시켜 강제로 질서를 준수하게 만드는 것은 자유주의에 적합한 방식이 아니다. 그것은 지배당하는 인간에게 적합한 방식이다. 자유국가에서는 아이들이 스스로 질서를 지키고 그 질서가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하면 자유로운 의견개진으로 바꿀 수 있는 인간이 되어야 한다. 자신의 이기적인 의견이 적절한지 사회에 평가 받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어떤 의견이 이기적이라고 무조건 하지 못하게 하는 것보단 그 어떤 의견이라도 표현하게 하고 그걸 냉정하고 공정하게 평가하는 것이 자유국가에 맞는 방식이라 생각한다. 집단 이기주의는 집단을 위하는 이타주의에서 시작된 것이다. 현명한 인간이 이기적이어야 집단 이기주의가 만드는 폐해에서 벗어나 사회를 행복하게 할 수 있다. 자유의지를 가진 현명한 자유주의자가 되는 것. 자유국가에서는 그것이 진정 철든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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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상부터 바라보고 본질을 찾아가는 방식으로 해석하다 보니 오류가 있었네요. 다른 방식으로 교정 중에 있었군요. 현상부터 사물을 바라보고 본질을 찾아올라 가다 보니 종종 이런 경우를 겪어요. 그래서 대게 오류가 있는지 확인했는데 이번엔 소홀했네요. 다음엔 조심해야겠습니다. 일단 정정해서 다시 올립니다.

 

사랑하는 여성들이 여성주의라는 또 다른 지배로부터 자유롭길 바랍니다. 꾸며도 안돼. 성욕도 안돼. 사귀어도 안돼. 이런 부자유스러운 걸 어째서 여성인권이라 생각합니까? 보다 자유로운 것이 여성의 인권인 것입니다. 착한 여성들이 이타주의에서 벗어나 현명한 이기심으로 자유롭게 살길 바라겠습니다. 머리 긴 것이 남성이 정한 여성성이므로 잘못되었다. 라는 의견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런 과거 기준으로 잘잘못을 따지면 어떻게 합니까? 길게 기르고 싶으면 기르면 되는 거고 짧게 자르고 싶으면 짧으면 되는 겁니다. 길게 기르면 나쁘다고 주장하는 쪽이 더 이상한 게 아닙니까? 철저하게 자유를 관점으로 사물을 보십시오. 그래야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여성들이 자신들을 억압하는 여성주의를 인권이라 생각하는 걸 보면 참 가슴이 아픕니다.

 

모든 인간이 부디 자유롭길 바랍니다.

 

다음 주제는 아마 새로운 도덕입니다만…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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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

인간신    친구신청

세줄요약이 없다니 너무 슬프군요.

산북동    친구신청

가독성이 너무 안좋네요. ;ㅅ;
[글] 소년범죄 대책방안 (0) 2020/11/23 PM 07:28

소년범죄 대책방안

 

 

 

시대가 변했다. 하지만 도덕은 변하지 않았다. 자유국가가 되었음에도 어째서 도덕은 자유롭지 못하게 나둬서 사람들을 힘들고 괴롭게 만들었나? 사회에 적응하여 철이 들었다는 말은 인간에게 복종하는 법을 배웠다는 의미와 같다. 어른 말을 잘 듣는 아이. 선배 말을 잘 듣는 후배. 상사 말을 잘 듣는 사원. 착하다고 한다. 사회에 적응하여 철이 들었다고 한다. 이는 인간을 지배하기 위해 복종하는 것을 올바른 도리로 만든 탓에 생긴 역겨운 현상이다. 짖지 않는 개를 가리켜 착하다고 하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음에도 잘못되었음을 자각하지 못한다. 인간들을 개돼지 취급하면서도 그 취급을 받아드리지 못하면 오히려 잘못된 것은 너라며 타박해왔다. 이 얼마나 웃기는 일인가? 보다 더 끔찍한 것은 자유국가가 되었음에도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어떤 이는 이런 차별을 가리켜 문화의 특성이라고 주장할지도 모른다. 이런 연령차별이 연하에게 복종을 바라는 꼰대를 만들고 그렇게 학습된 차별로 갑질을 행하게 만듦에도 말이다. 다른 국가에도 갑질이 있지 않냐고 물어볼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그건 당연한 거다. 다른 국가도 지배국가였던 시절이 있으니 그런 잔재가 당연히 남아있다. 한국은 그게 유교였을 뿐이다. 그런 유교가 원인이 된 꼰대질과 갑질로 얼마나 많은 사회적 불행을 쌓아 올렸던가? 그들이 불행했던 것은 그들 탓이 아니다. 불행하게 만든 이들의 탓조차도 아니다. 복종을 올바른 도리로 만들었던 사회의 도덕 탓이다. 단지 그렇게 배워서 행한 결과가 나온 것이다. 꼰대질이나 갑질로 불행을 겪게 되면 이런 식으로 사고가 흘러갈 것이다. 「그들이 그런 행동을 했던 것은 나쁜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나는 착하게 행동해야겠다.」 그리고는 착하게 행동하기 위해 도덕의 가르침인 장유유서를 지키며 연하에게 복종을 요구하게 된다. 나쁜 꼰대가 싫어서 착하게 행동하려 한 결과가 바로 이거다. 그리고 꼰대질을 행함으로 이제는 자신이 불행을 전파한다. 불행이 불행을 낳는다. 올바른 일을 행함의 결과가 불행이라면 도대체 누굴 탓해야 하겠는가? 남녀유별이나 남녀칠세부동석 같은 걸로 이성교제가 부도덕하다 배우니까 커서도 이성을 사랑하는 사람이 줄어들었다. 여성을 섹스파트너로만 여기거나 남성을 ATM기기로만 여기는 사람이 늘어났다. 사랑했다면 감수할만한 작은 손해도 사랑하지 않으니까 받아드릴 수 없게 되었다. 결혼과 출산 같은 희생이 필요한 걸 거부하는 까닭은 애정이 결핍되어있기 때문이다. 애국심이 결핍되면 국가를 위해 희생하는 걸 거부하고 싶어지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성관계가 부도덕하다 배우니까 성욕이 많은 이성을 혐오하는 사람이 늘어났다. 성욕 자체가 부도덕하다 느껴지니 성욕을 해소하려는 행동 자체도 역겨워진 것이다. 왜 과거와 달리 많은 부분에서 성평등이 이루어지고 있음에도 남성혐오가 사라지지 않는지 알겠는가? 한국은 여성주의로 인해 남성혐오가 생겼다기 보다는 애초에 도덕으로 인해 성욕이 많은 남성을 혐오하는 사람들이 많았던 것이다. 부도덕한 쾌락을 얻기 위해 상품을 구매하는 것. 그게 마약이다. 성욕이 부도덕해지면 어떻게 되겠는가? 왜 성에 예민하고 상품화에 예민해지는지 알겠는가? 왜 여학생들이 남성끼리 동성 연애하는 작품들을 즐기게 되었을까? 단순 취향이라고 하기엔 그걸 즐기는 사람들이 생각 이상으로 많다. 모 예능프로그램에서 출연자들을 소재로 동성애 작품을 만들고 그걸 보여주어 논란이 일어난 적이 있다. 이상하게 많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이성애가 부도덕하게 되니까 도덕적으로 행동하려는 착한 아이들은 동성애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어진 거다. 정조를 지켜야 한다는 명분으로 성관계를 부도덕하다 교육받으면 그런 결과가 나오게 되는 법이다. 지금도 학교에서 성교육을 한다고 하면 학부모가 발작을 하며 반대한다고 하지. 한국은 지금 유교에 여성주의가 결합되어 성을 억압하는 것이 여성인권이 되어버렸다. 예전에 어떤 여학생이 고민상담 글을 읽은 적이 있다. 학교에서 걸레라고 불려 화가나 부른 상대와 싸우다가 강제전학조치를 당해 많은 부분 자유를 억압받고 있어 고민이라고 하더라. 걸레라. 왜 성의 자유를 누리는 걸 모욕으로 취급하는가? 그건 도덕에 영향을 받은 것 외의 이유가 없다. 남성은 그러지 않으니까! 혹시 걸레라고 부르는 부자유스러운 인간이 있다면 그 사람을 가리켜 유교인이라며 반격하길 권하겠다. 사랑이 줄고 혐오가 는다. 결혼이 줄고 출산도 준다. 이성을 향해야 할 애정이 문화로 가자 성장했다. 왜 한국문화는 노래 자체를 즐기는 것이 아닌 우상에게 애정을 품는 아이돌문화가 유명한가? 왜 한국문화에는 드라마나 음악이나 영화를 가리지 않고 사랑이 빠지지 않는가? 문화로 애정결핍을 해소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한국문화의 성장은 한 국가가 이성에게 향할 대부분의 애정을 문화에 쏟은 결과물이다. 한국문화를 깎아 내리려는 의도는 없다. 단지 인과관계를 살피다 보니 자연스럽게 알게 된 것뿐이다. 어떤 것의 성장함에 있어 그 원인이 반드시 긍정적일 거란 보장은 없다. 게임문화 성장 또한 실외에서 놀 거리가 없는 한국 특성이 만든 결과물이 아닌가? 가족애나 이성애가 많은 곳에서는 게임보다는 실외놀이를 더 즐겁게 즐길 것이다. 놀 거리도 없고 도덕적인 이유로 애정결핍이 된 한국은 자연스럽게 게임에 몰두하게 되었다. 어떤 국가에서는 게임 하는 것 자체로 너드 취급 받는다고 하지. 한국이 그러지 않은 것은 대다수가 게임을 즐길 수밖에 없는 환경이었기 때문이다. 게임플레이강국의 이면엔 그런 슬픔이 자리잡고 있다. 사회에 뿌리내린 근본을 알면 거기서부터 다양한 현상이 해석된다. 인과관계가 단순한 만큼 책임소재도 명확하다. 카스트로 불행을 겪은 사람은 카스트의 책임인 것처럼 이런 종류의 사회적 불행은 도덕 책임이다. 한국인들은 배운 대로 성실하게 하는 착한 사람들이 많으니까 사회가 불행한 것이다. 나는 내가 이상한지 알았다. 어린 시절 나는 세뱃돈 받는 걸 싫어하는 이상한 아이였다. 친척 어른에게 무릎 꿇고 절하는 것도 싫고 그걸로 돈을 받는 것도 싫었다. 내 의지와 감정이 헐값에 팔리는 기분이었다. 그래서 받고 나면 부모에게 세뱃돈을 넘겨주고 모른 척 했던 기억이 난다. 나는 내가 이상한지 알았다. 그래서 자책도 하고 다른 사람들을 이해해보려고 노력도 많이 했다. 그런데 내가 이상한 게 아니었다. 이상한 건 연하에게 복종을 요구하는 한국의 도덕이었다. 이제 내겐 어른과 조상에게 절하는 것과 태국 왕족에게 절하는 태국 국민과 별반 차이가 느껴지지 않는다. 어떤 정신 나간 왕족은 한국에 와서 한국인에게도 절을 받았다고 한다. 정말 역겹다. 친구의 어린 동생과 친구처럼 지낸 적이 있었다. 그걸 보고 어른이 화를 내며 혼을 냈다. 아마 연하와 대등하게 지내는 내가 못마땅했던 모양이다. 그 이후 나는 그 친구와 멀어졌다. 대중가수의 춤과 노래를 듣고 즐긴 적이 있다. 그걸 보고 어른이 화를 내며 혼을 냈다. 아마 그런 문화를 즐기는 내가 못마땅했던 모양이다. 그 이후 내적 결함을 알아차릴 때까지 속 편하게 즐길 수가 없게 되었다. 밖에서 놀다가 늦게 집에 들어가니 식은 음식이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그걸 강제로 먹었다. 꾸짖음을 당하고는 다 불어터진 걸 억지로 먹으며 눈물 흘렸던 기억이 남아있다. 평소 요리를 하지 않던 사람이 준비한 모처럼 배려한 음식이 식을 때까지 늦게 들어온 것이 못마땅했던 모양이다. 김치를 먹길 거부하니 강제로 먹여지다가 내뱉은 적이 있다. 아무래도 한국의 자랑식품인 김치를 먹지 않는 게 못마땅했던 모양이다. 내가 먹는 음식은 편식하면서 자신들이 먹는 음식은 편식하면 화를 낸다. 유치원생일 때 미형이 아닌 이성과 사이 좋게 지내는 걸 보고 못마땅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아마 그때엔 외모 상관없이 대했던 모양이다. 이후 그건 교정된 듯하다. 답답하다. 이외에 자잘한 것 하나하나 어른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강제로 교정을 당했다. 이세상 모든 것이 내가 이상하고 세상이 올바른 것이라며 꾸짖었다. 아무리 봐도 내가 아니라 네가 이상한 거 같은데 모두 내가 이상하다고 한다. 내가 이상하지 않다고 말해줄 사람이 없었다. 내 주변엔 자유주의자가 없었다. 「어른에게 절하기 싫어하는 내가 나쁜 거야? 연하와 친구 먹는 내가 나쁜 거야? 대중문화를 즐기는 내가 나쁜 거야? 멋대로 준비한 배려를 받지 못한 내가 나쁜 거야? 김치를 먹지 않는 내가 나쁜 거야? 미형이 아닌 이성과 친하게 지내는 게 나쁜 거였어? 나는 나쁜 아이구나?」 결국 어린 학생이 스스로를 별볼일 없는 인간이라고 말할 정도로 자신감을 상실해버렸다. 나쁜 자신을 할퀴고 상처 입혔다. 그건 도대체 누구 책임이라 할 수 있는가? 자신이 배운 대로 착한 아이로 만들기 위해 도덕적으로 가르쳤던 어른인가? 가르침대로 교정되려다 망가진 아이인가? 모든 건 도덕의 책임이다. 자유롭길 바랬던 모양인지 인터넷 아이디마저 Free가 붙게 되었다. 아무래도 당시엔 Freedom Liberal의 차이를 몰랐던 것 같다. 그토록 자유를 바랬지만 당최 무엇이 원인으로 내가 부자유를 느끼는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었다. 자유롭지 못한 세상 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을 때 결정적인 사건으로 신체의 부자유를 느낀 순간 모든 걸 자포자기하고 운명이란 이름의 도피를 통해 무기력하게 살아남기만 했을 뿐이다. 이제는 안다. 모든 부자유는 지배국가의 도덕으로부터 비롯되었다. 나의 트라우마와 나의 적은 인간을 지배하는 걸 올바르게 만든 지배국가의 도덕이다. 인간을 지배하려는 모든 것은 자유의 적이고 자유의 적는 나의 적이다. 나는 그걸 단언하겠다. 이하 몇 가지 사회 현상들. 왜 귀농을 꺼려하겠는가? 시골의 연상들에게 지배 받기 싫기 때문이다. 도시는 그래도 개인주의화가 되어 연상의 꼰대질을 당할 우려가 상대적으로 적은 편이다. 어른들도 직접적인 원인은 몰라도 꼰대질이나 갑질이 문제라는 것은 인식하여 자제하려고 한다. 그러나 시골은 그런 것이 아직 부족하다. 젊은이가 시골에 가면 모든 노인에게 꼰대질을 당할 것이다. 누가 자발적으로 노예가 되고 싶어하겠는가? 시골에 젊은 사람이 가기 위해서는 도덕이 바뀌거나 시간이 흘러 지배할 인간이 사라져야 할 것이다. 왜 연하를 아기 취급할 때가 있을까? 다 큰 성인도 나에 비하면 어리니까 아기라고 한다. 성인을 아기라고 하다니 황당하다. 왜 그런 현상이 나타나겠는가? 나이로 차별하는 도덕이 있기 때문이다. 어리게 여겨야 자신의 위치가 올라가기 때문이다. 어린 놈이 건방지게. 어린 주제에 벌써부터 까져가지고. 이런 류의 발언도 연령차별에서 비롯된다. 굳이 나이를 붙이는 건 차별의식이 있기 때문이다. 커뮤니티에서 종종 자신을 형이라 강조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내가 위니까 알아서 기어라.」라는 의도가 담겨있다. 이는 양반이 천민을 천하다고 여기며 업신여기는 것과 같은 구조를 가진다. 유교인이 아니라면 연하를 아기 취급하는 것이 무례하다는 것을 인식하고 나이와 관계없이 대등한 인간 대접을 해야 할 것이다. 왜 한국에서 천재는 범재가 되어버리는가? 범재인 어른의 입맛에 맞게끔 교정 당하기 때문이다. 왜 한국에서는 창의력이 없는 게임들이 많은 것인가? 창의력이 없는 윗사람 입맛에 맞게끔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왜 명절에 친척과 마주하기 싫은가? 꼰대질 당하고 싶지 않아서다. 흔히 한국의 핵가족화를 개인주의화라고 하는데 나는 다르다고 본다. 연상들의 지배가 싫은 자유로운 이들의 자유주의화다. 연상의 잔소리 듣기 싫은 사람들이 가정을 꾸려 나갔다는 얘기다. 이외에도 악영향을 끼치는 사례들이 무수하다. 이들이 수많은 불행을 불러왔다. 상식적으로 생각하자. 지배하고 복종 당하는 걸 올바르다고 가르치는 국가에서 자유국가의 국민이 정상적으로 행복할 수 있겠는가? 이런 다양한 문제들이 성장해서 스스로 바뀔 수만 있다면 좋겠지만 쉽지가 않다. 쉬웠다면 세 살 버릇 여든 간다라는 속담이 없었을 것이고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라는 말도 없었을 것이다. 성장기에 배운 교육은 자아성찰이 없다면 대부분 평생 간다. 도덕적으로, 연하가 복종하길 바라고 이성과 교제하는 걸 금하고 야한걸 검열할수록 사회는 불행해져만 갔다. 이런 불행을 부르는 도덕을 한국 문화의 특성이라며 존속하길 바란다면 카스트를 인도 문화의 특성이라며 존속하길 바라는 것과 같다는 걸 지적하고 싶다. 인도의 카스트는 신분으로 인간을 나눠 차별하는 것이고 한국의 장유유서는 나이로 인간을 나눠 차별하는 것이다. 하위카스트가 상위카스트에게 불평등함을 호소하는 걸 보고 철이 들지 않았다며 비난한다면 어떤 기분이 들겠는가? 황당하거나 화가 난다면 장유유서에도 동일하게 해달라. 복종을 올바른 도리로 만든 이 둘도 다른 부분이 있다. 장유유서는 아이일 때 차별 받고 어른일 때 차별하는 구조를 가진다는 점이다. 과거 수공업 도제시절에는 장인에게 부림을 당하더라도 시간이 흘러 장인이 되면 도제를 부릴 수 있었기 때문에 스스로를 노동자라 자각하지 못하고 있었다고 한다. 사용자가 될 수 있기 때문에 노동자 시절의 불평등함을 호소하지 않는다. 이는 한국의 의료체계와 비슷하다. 수련의나 전공의 시절 부림을 당하더라도 이후 다시 부릴 수 있기 때문에 악습을 바꾸려 하지 않는다. 장유유서도 마찬가지일지도 모른다. 어릴 때는 지배당하더라도 어른이 되고 나서 지배할 수 있으니까 문제제기를 하지 않는 것이다. 언젠가 젊은 정치가가 늙은 정치가에게 나이로 차별 받았다며 억울하다고 호소한 기사가 공개된 적이 있다. 과연 그 젊은 정치가는 단지 늦게 태어났다는 이유 하나로 차별하는 한국 도덕의 문제점을 인지하고 연하와 대등한 관계를 맺었을까 궁금하다. 자유. 자유. 자유! 지배국가의 도덕으로부터 자유롭고 싶다. 왜 한국엔 자유주의자가 보이지 않는 건가? 자유와 평등을 외치며 민주화 운동을 했던 이들은 어디에 있는가? 자유민주주의를 외치며 자유의 가치를 중시하던 이들은 어디에 있는가? 도대체 자유주의자는 어디에 있느냔 말이다! 자신들이 도덕을 명분으로 지배하고 있음에도 그것을 지배라고 인식하지 못하여 왜 자유를 갈구하는지조차 모를지도 모른다. 차라리 알기 쉽게 독재자라도 있으면 싸울 수 있으련만. 나는 도대체 무엇과 싸웠어야 했는가? 자유국가에서 자유를 외치는 사람들과 자유를 위해 싸워야 하나? 선한 의지로 행동하는 사람들과 싸워야 하냔 말이다! 알기 쉽게 나쁜 인간이라도 되면 속 편하게 싸울 수라도 있지 이게 뭔가! 아아. 자유를 희망했던 민주화 운동가와 자유민주주의자가 진정 자유를 갈구하고 그것에 맞춰 사회의 도덕을 변혁했다면 높은 자살률과 낮은 출산율을 부를 정도로 불행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도덕이 원인이 된 사회의 불행. 그걸 누군가에게 책임을 물을 수가 없다. 도대체 어떻게 책임을 물을 것인가? 그렇다면 앞으로가 문제다. 앞으로 지배국가의 도덕이란 잘못된 것을 바꾸는 걸 부정하는 이에게 도덕으로 발생한 불행에 대한 책임을 묻고 싶다. 자유롭지 못한 도덕을 가지고 있는 자유국가. 그것이 한국이다. 이제는 바뀌어야 한다. 올바른 일을 행하면 행복할 수 있는 세상으로 바꾸어야 한다.

 

 

 

본론으로 들어가자. 도덕이 시대의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는 것처럼 소년범죄의 대책 또한 시대의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촉법소년 문제다. 면제부에 가까운 걸 가지고 있는 촉법소년은 별다른 죄책감 없이 죄를 저질러 사회질서를 어지럽히고 있다. 촉법소년이 무면허 운전차량으로 대학생을 쳐서 사망에 이르게 하고는 SNS에 죄책감을 느끼지 못한 것 같은 메시지를 올려 사회적 공분을 산 적이 있다. 이외에도 다양한 촉법소년 범죄들이 일어나 많은 사람들이 불안에 떨거나 불만을 가지거나 분통을 터뜨리고 있다. 소년범죄는 언제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소년범죄는 범죄를 저지르지 않아도 될 환경에 놓은 아이들도 저지르고 있다. 이런 현상은 정보검열이 어려운 자유국가의 현대사회에서 일어나는 정보과잉공급이 만드는 결과물이다. 어린이에게 총기를 주고 간단한 사용법만 일러주었다고 가정해보자. 어린이는 쏘고 싶다는 충동만으로 아무런 죄책감을 느끼지 못한 채 쏘아버리는 일도 있을 것이다. 총기에 정보를 대입하면 그게 바로 지금의 촉법소년 범죄다. 자유국가에서는 인터넷을 통해 누구나 다 성인이 접하는 정보를 얻을 수 있다. 미성년자 차단을 한 사이트도 VPN을 통해 어렵지 않게 접속이 가능하다. 굳이 VPN도 필요 없다. 유튜브를 이용하는 어린이들은 뉴스를 통해 어른들이 접하는 정보를 얻을 수 있다. 「촉법소년이 제대로 된 처벌을 받지 않는다고?」 그 정보를 어디서 얻을 수 있겠는가? 과거엔 주변 연상들에게 정보를 얻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양질의 정보를 유튜브만 봐도 얻을 수 있다. 과거와 뉴스와 달리 매우 쉽고 친절하게 정보를 전달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모르는 내용이 있으면 댓글로 물어보면 된다. 과거와는 차원이 다른 정보수집이다. 아이들에게 공급되는 정보의 양은 과거와 달리 어른과 비등해지고 있다. 그렇게 얻은 정보를 마치 총기를 주운 어린이처럼 충동적으로 사용하여 범죄를 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현대사회에서는 과거 지배국가처럼 정보검열만으로 아이들을 올곧게 성장할 수 있게 도울 수가 없다. 일부 아이들은 정보 검열 같은 통제만으로도 망가질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어떤 부모가 자신의 아이를 착하게 키우기 위해 억지로 정보검열을 했다고 가정해보자. 스마트폰을 빼앗고 TV를 못 보게 한다.  그런데 그 외의 아이들은 정보를 얻고 있다. 그러면 어떻게 되겠는가? 간단히 말해 따돌림을 당한다. 정보라는 힘을 쥐지 못한 아이들은 아이들의 사회에서 도태되어 버린다는 것이다. 아는 게 힘이라고 하지. 알지 못하게 하니까 힘이 없어서 그런 거다.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아는 것으로 힘이 강해진다. 아이들을 위해서라며 정보를 검열하는 것은 그들에게 힘을 빼앗아 약자가 되게 하여 다루기 쉬운 가축으로 만드는 것과 다르지 않다. 따라서 검열을 할 것이 아니라 그 정보를 다룰 수 있는 방법을 알려줘야 할 것이다. 어린이에게 총기를 쥐어 줄 수밖에 없는 환경이라면 총기 사용법뿐만이 아니라 언제 그리고 무엇을 위해 쏴야 하는지도 알려줘야 하는 것이다. 이처럼 자유국가에서는 정보과잉공급으로 나타나는 소년범죄에 대한 대책을 그에 맞게 마련할 필요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촉법소년이 저지르는 범죄에 대한 대책이 마련되지 못하고 있다. 못하고 있는 건지 안하고 있는 건지 모른다. 내부에서 어떤 식으로 진행되고 있는지 모르니까 말이다. 외부에서 공표되는 소년범죄 전문가와 관련자의 의견에 따르면 크게 두 가지 측면에서 촉법소년 처벌이 어렵다고 한다. 첫째, 촉법소년은 강력범죄 비율이 낮고 생계형 범죄 비율이 높다고 한다. 둘째, 지나치게 어릴 때 처벌을 하는 것은 낙인을 찍는 효과가 나타날 수 있다고 한다. 대강 이런 의견이었을 것이다. 생계형과 낙인효과. 어떤 이는 강력범죄만 처벌을 하자고 하던데 그런 의견이 받아 드려지지 않는 걸 보면 강력범죄와 생계형 범죄의 구분이 모호한 것으로 보인다. 거기에서 하나를 더하겠다. 셋째, 촉법소년의 범죄는 사회의 책임이 어느 정도 있기 때문이다. 이들의 행동은 대부분 환경에 의할 확률이 높다. 환경에 관계없이 독특한 특성을 지니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기 때문이다. 쌍둥이를 예로 들며 유전자가 인간의 행동원리를 결정하는데 큰 영향을 준다고 주장하는 이가 있다. 그렇다면 묻겠다. 쌍둥이 중 한 명은 미국에서 자유주의를 접하며 성장하고 한 명은 중국에서 중화사상을 접하고 성장했다면 그 둘은 같은 사상을 공유할 수 있겠는가? 맛의 호불호나 취향 정도는 유전적 특성에 의할 확률이 높다. 하지만 사상적인 부분은 환경에 큰 영향을 받는다. 한국 내에서 발생하는 좋은 것은 한국 환경 덕분이고 한국 내에서 발생하는 나쁜 것은 한국 환경 때문이다. 이를 부정하는 것은 좋은 것만 취하고 나쁜 것은 외면하는 편향적인 책임회피에 불과하다. 미숙한 어린이들의 범죄는 잘못 가르친 사회의 책임이 크기 때문에 쉽게 처벌하기가 어렵다. 이런 저런 이유로 소년범죄 전문가와 관계자가 촉법소년 범죄에 대한 대책마련이 쉽지 않다는 걸 안다. 실제 현장에서 직접 경험하고 있는 이들의 의견을 귀담아야 할 필요가 있다는 건 누구나 다 알 것이다. 그들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고 있을 것이다. 제 역할을 못하는 이들을 제외하면 그런 점은 어느 전문가나 신뢰하고 있다. 그렇다고 이대로 방치할 수도 없다. 자유국가에서는 지배국가의 도덕을 자유국가에 맞게 바로잡아야 하는 것처럼 정보확산사회에서는 정보통제사회의 범죄대책을 정보확산사회에 맞게 바로잡아야 하는 것이다. 그것에 대한 의견을 내보도록 하겠다. 자유국가의 정보는 어린이에게 총기자유국가의 총기와도 같다. 주자니 위험하고 뺏자니 도태된다. 잘못 주면 범죄가 발생하고 아예 뺐으면 따돌림을 당한다. 그래서 대부분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그런 상황에서 총기와도 같은 정보를 제공받은 촉법소년들이 충동적으로 범죄를 일으켰다. 그 때 그 아이들이 앞으로 범죄를 일으키지 않게 하기 위해서 어떤 방법을 동원해야 하는가? 촉법소년이 아닌 소년범죄는 소년원에 가서 사회에 적응할 수 있도록 교정 받을 것이다. 그렇다면 촉법소년은 어떻게 해야 사회에 적응할 수 있게 만들 수 있을 것인가? 똑같이 소년원에 들어가게 해야 하는가? 그렇게 된다면 앞서 말한 생계형과 낙인효과와 사회책임의 문제가 발생할 것이다. 그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 상황에서 그들이 사회에 적응할 수 있도록 하는 방법은 무엇인가? 여러 가지 생각해 보았다. 결론은 다음과 같다. 교육계가 나서야 한다. 교육계가 나서서 정규교육과정으로 이들이 사회에 적응할 수 있도록 환경을 마련해준다면 위의 문제에서 해방될 수 있다. 예컨대 이런 것이다. 범죄를 저지른 촉법소년은 나이와 관계없이 무인도에 들어가 생존교육을 받는다. 이 생존교육과정은 정규교육과정으로 모두에게 열려있으나 범죄학생은 의무고 나머지 학생은 권리다. 이렇게 된다면 생계형 문제가 해결된다. 무인도에서 살아남는 방법을 배워 생계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낙인효과 문제도 해결된다. 모든 학생이 자발적으로 지원할 수 있는 정규교육과정이기 때문에 그걸 이수했다고 하여 낙인이 찍혀 차별 받는 일은 개인정보가 유출되지 않는 한 드물 것이다. 사회책임 문제도 해결된다. 촉법소년의 범죄가 환경의 책임이 크다면 부모와 교육의 책임이라고 할 수 있다. 그걸 교육계가 나서서 이 문제를 해결하면 된다. 그렇다면 왜 생존교육인가? 무인도에 갇혀 받는 생존교육이 사회에 적응하는데 도움이 된다는 말인가? 물론 된다. 죄를 지은 자가 사회에 적응하는 방식은 두 가지가 있다. 첫째, 죄를 지은 자에게 더 많은 통제와 억압을 줘서 질서에 복종하게 만드는 것이다. 둘째, 죄를 지은 자에게 더 많은 자유를 줘서 질서의 필요성을 깨닫고 자발적으로 질서를 따르게 하는 것이다. 위의 방식이 교도소고 아래의 방식이 추방이다. 옛 영국에서는 죄를 지은 자를 식민지에 추방하여 거기서 형기를 살도록 했다. 그리고 형기를 마친 이들이 식민지에 남아 정치에 참여하고 사법역할도 맡아 현대국가의 초석을 다지게 되었다. 영국 관리들이 식민지에 파견 나오길 거부하는 바람에 사람이 없어서 죄수 중에서 그런 역할을 맡았다고 한다. 범죄자들이 자유로운 땅에서 자기들끼리 질서의 필요성을 배우고 질서를 만들고 지켜나갔다는 것이다. 그게 지금의 미국과 호주다. 영국의 의도는 그것이 아니었으나 결과적으로 그렇게 되어 버렸다. 어쨌든 나는 그렇게 촉법소년들이 질서의 필요성을 깨닫고 스스로 질서를 만들고 지켜나가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주장하겠다. 사회의 질서가 없는 무인도에서 살아남기 위해 질서를 만들고 지켜나가는 과정을 경험하면 그게 가능해질 것이다. 무인도에서 자유를 주고 살아남기 위한 정보를 통제하지 않는다. 그런 방식이 자유국가에서 자유를 다루는 법을 배우는 것이고 정보확산사회에서 정보를 다루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구체적인 방식은 앞으로 설명할 예정이나 그건 아무래도 좋다. 중요한 것은 정규교육과정 내에서 죄를 지은 촉법소년들이 질서의 필요성을 배울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교육계가 이런 일을 떠맡는 것이 못마땅할 수도 있다. 하지만 생각해보자. 사회적 영향력이 강할수록 그 집단의 목소리도 커지는 법이다. 예컨대 이런 것이다. 가정폭력피해를 받는 아이들이 편의점에 도움을 청하는 사례들이 늘어났다. 그렇게 하여 편의점이 파출소의 역할을 겸임하게 되었다. 그렇게 되어 편의점 관계자들은 사회에 목소리를 좀 더 낼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찰리 채플린은 위대한 독재자를 통해 단순한 예능인을 넘어서게 되었다. 역할은 고정되는 것이 아니다. 자기역할만 해도 존중은 받을 수 있다. 하지만 그건 최소단위다. 수행하는 역할이 늘어날수록 그에 맞는 대우를 받을 수 있는 것이다. 만약 그러지 못한다면 그런 사회가 잘못되었다. 촉법소년 문제는 환경의 책임이기도 하니 정규교육과정이 하나 늘어난다고 불평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럼 구체적인 방식을 설명하겠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방식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촉법소년들은 자유롭길 바라기에 자유롭게 무면허 운전을 하고 상점을 약탈했다. 그런 아이들에게 더 큰 자유를 주자. 사회의 질서가 없는 자유가 어떤 것인지 몸소 체험하게 만들자. 왜 사람들이 사회를 이루고 질서를 만들어 준수했는지를 알게 만들자. 그래야 질서의 소중함을 깨닫고 자발적으로 질서를 지키려고 하게 될 것이다. 자유의지를 가지고 질서를 준수하는 자유주의자로 만드는 교육이다. 자 생존교육을 하기 위한 준비를 해보자. 장소는 한국 내에 있는 무인도다. 한국은 섬이 많으므로 인위적인 생존교육에 적합한 섬을 찾기가 쉬울 것이다. 대상은 초면인 촉법소년이다. 새로운 질서를 배우는 것이므로 서로 초면인 것이 적합할 것이다. 범죄자는 의무고 나머지는 권리다. 범죄를 저지른 촉법소년은 교육의 의무로 무조건 생존교육을 받아야 한다. 그걸 거부하는 방법은 징병을 거부하는 방법과 같이 해외로 이민을 가는 것이다. 의무냐 해외냐 선택해야 할 것이다. 해외로 가는 건 관대한 처사라며 화를 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생각해보자. 평생 교도소에 갇혀 지내는 것과 평생 고국으로 귀국하지 못하는 것은 둘 다 한국에 사는 한국인은 만날 일이 없다는 점에서 같다. 어차피 제대로 된 처벌을 받지 않는 촉법소년이라면 적절한 대가라고 생각한다. 나머지 학생들은 교육받고 싶으면 자원해서 교육받을 수 있도록 하면 된다. 생존교육은 따돌림을 당한다거나 자유롭지 못해 답답하거나 변화의 필요성을 느낀 학생들에게는 매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초기에는 우선적으로 강력범죄를 저지른 학생들부터 시범적으로 행하면 좋을 것이다. 기간은 1년 정도가 적당해 보인다. 교육이행에 따라 기간이 조정되어도 괜찮다. 정규교육과정으로 편성되기 때문에 학년이수가 가능하다. 촉법소년의 나이가 다 다를 확률이 높기 때문에 생존교육이 끝나기 전 해당학년의 지식을 담은 시험을 쳐서 유급 여부를 결정한다. 생존교육은 그냥 말 그대로 살아남는 방법을 배우는 것이기에 남는 시간이 많다. 그 시간 동안 스스로 공부한 학생만이 진급할 권리를 취득하게 되는 것이다. 인원은 열 명 정도가 적당하다고 본다. 인원인 상황에 따라 수를 달리할 수 있다고 본다. 나이에 관계없이 반말을 하여 차별이 없도록 한다. 교관은 생존전문가가 좋을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교관이 군대처럼 명령을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다른 사람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 한 철저하게 방치한다. 생존하는 방법만 알려주고 알아서 생존할 수 있도록 한다. 정말 위급할 때를 제외하면 그들의 자유에 개입하지 않는다. 방치하던 도중 만약 어떤 학생이 다른 학생의 자유를 침범하는 것과 같은 행위를 할 때는 그에게 더 큰 자유를 주면 된다. 예컨대 어떤 학생이 다른 학생을 폭력으로 의식주를 마련하라고 명령을 하면 그 작은 집단의 질서도 적응 못할 정도로 자유가 필요하다는 것으로 판단하여 혼자서 살아남는 공간을 마련해주면 된다. 그러다 만약 혼자 고립된 학생이 무단으로 집단에 돌아오려고 한다면 집단은 질서를 어지럽혔던 적으로 간주하고 공격하게 만들면 된다. 실제 인류가 살아온 생존경쟁을 몸소 깨닫게 만드는 것이다. 왜 자유라면서 무인도에 갇히게 하는지 알겠는가? 진정 자유라면 사회 밖에 속한 외부인은 공격 당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한 일주일에서 한달 가량 혼자서 살아남게 만들자. 밥도 혼자서 만들어 먹고 잠자리도 혼자서 마련하고 노는 것도 혼자서 한다. 그리고 그것이 힘들다는 걸 깨닫고 집단의 질서에 합류하길 원할 무렵 다시 돌아와서 사과하고 화해하게 하면 된다. 살아남기 위해 서로가 필요하다는 걸 깨닫게 해야 한다. 환경은 인위적인 생존교육에 적합하게 먹기 좋은 풀과 낚시하기 좋은 장소와 사냥하기 좋은 동물들을 풀어놓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이에 따른 교육은 말 그대로 생존교육이다. 마실 물을 만드는 방법. 채집하는 방법. 낚시하는 방법. 사냥하는 방법. 도축을 하는 방법. 요리하는 방법. 집을 만드는 방법. 옷을 만드는 방법. 놀이를 즐기는 방법. 농사를 짓는 방법. 등 이런 기본적인 생존교육부터 시작해서 질서를 만들고 유지하는 방법도 배운다. 규칙을 만드는 방법. 역할을 정하는 방법. 토론을 하는 방법. 등 자유로운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해 어떤 것이 가장 필요한 것인지를 배운다. 규칙을 지키지 않으면 생존에 어떤 피해가 가는지를 배운다. 제 역할을 다하지 않으면 생존에 어떤 피해가 가는지를 배운다. 생존에 필요한 모든 역할이 중요하다는 걸 깨닫고 직업차별을 하지 않게 된다. 생존에는 나이가 중요하지 않다는 걸 배우고 연령차별을 하지 않게 된다. 제대로 된 토론이 없으면 불만이 생겨 생존에 어떤 피해가 가는지를 배운다. 이런 것을 배우고 스스로 생각해서 어떻게 해야 잘살아남을 수 있는지를 고민하고 또 고민한다. 밤 중에 별을 보며 산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생각한다. 직접 질서의 중요성을 깨닫고 질서를 어지럽히는 행위가 얼마나 큰 잘못인지를 인지하게 만든다. 더 나아가 어떤 질서가 옳고 그른지 판단한다. 어떻게 해야 질서 아래서 더 행복할 수 있을지 생각한다. 고찰이 아이를 성숙하게 만든다. 그 성숙함이 자유주의 질서 아래서 자유를 감당하는 것과 총기와도 같은 정보를 다루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물론 이런 것은 이상적일 뿐이다. 의도대로 되지 않을 확률도 높다. 그래도 좋다. 살아남는 방법과 질서의 필요함만 깨우쳐도 충분하다. 살아남는 방법을 충분히 터득한 후에는 자발적으로 공부하는 방법을 배운다. 유급하지 않기 위해 학년에서 배우는 지식을 쌓는 도구를 줘서 스스로 배우게 한다. 시기는 생존교육을 받은 지 약 6개월부터가 적절하다고 본다. 학업적인 부분은 완전 방치해야 한다. 문제집과 필기구만 주고 알아서 공부하나 지켜보자. 스스로 공부하지 않아 유급한다고 해도 상관없다. 유급하는 동안 스스로 공부하지 않았던 그 당시의 자신을 자책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과정이 어린 학생들에게 다소 가혹할 수도 있다. 하지만 범죄를 저질렀다면 안전이 보장된 곳에서 생존교육을 받는 것이 죄에 대한 큰 대가는 아닐 것이다. 부모도 그건 납득해야 한다. 이런 생존교육이 정규교육과정으로 편입되기 위해서 어떤 절차가 필요한지는 잘 모른다. 그러나 이런 과정이 없다면 촉법소년의 문제는 해결되지 못할 것이다. 어른의 입맛에 맞춰서 아이들을 교정시켜 강제로 질서를 준수하게 만드는 것은 자유주의에 적합한 방식이 아니다. 그것은 지배당하는 인간에게 적합한 방식이다. 자유국가에서는 아이들이 스스로 질서를 지키고 그 질서가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하면 자유로운 의견개진으로 바꿀 수 있는 인간이 되어야 한다. 자신의 이기적인 의견이 적절한지 사회에 평가를 받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어떤 의견이 이기적이라고 무조건 하지 못하게 하는 것보단 그 어떤 의견이라도 표현하게 하고 그걸 냉정하고 공정하게 평가하는 것이 자유국가에 맞는 방식이라 생각한다. 현명한 인간이 이기적이어야 행복한 사회를 만들 수 있다. 자유의지를 가진 현명한 자유주의자가 되는 것. 자유국가에서는 그것이 진정 철든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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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이 왜 그렇게 행동하는지 한번씩 고찰했으면 좋겠습니다. 인간은 고찰하지 않은 한 교육받은 대로 행동하게 됩니다. 그건 가르친 인간의 꼭두각시나 다름이 없습니다. 부디 진정한 자유를 찾아 자유롭게 살길 바랍니다.

 

최근 근친혼과 낙태죄에 관한 언론기사를 유튜브로 접한 적이 있습니다. 사촌 결혼이나 낙태죄폐지에 찬성합니다. 도덕적인 걸 제외하면 그리 큰 문제는 없어 보입니다. 사촌 결혼부터는 유전적 문제가 거의 없다고 알고 있습니다. 법적으로 바꿔야 할 것이 많다고 들었는데 자유를 위해서라면 그 정도는 감수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자유를 위해 피를 흘린 한국전쟁이나 민주화 운동보다는 어렵지 않은 것이겠지요. 나는 법조인이 현명하다고 생각하고 싶습니다. 그들의 현명한 이기심이 사회를 행복하게 만들 수 있길 바랍니다. 낙태죄는 태아가 세포에 불과하다는 책임회피만 아니라면 폐지하는 게 맞는다고 봅니다. 여성만 일방적으로 피해를 입을 확률이 높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생명의 가능성을 끊어버렸다는 죄책감에서 벗어나기 위해 태아가 단지 세포에 불과하다는 궤변은 들어주고 싶지 않습니다. 낙태를 하면 남성과 여성 모두 도덕적 비난을 각오하십시오. 그 정도는 감수해야 합니다. 나는 여성들이 생명의 소중함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고 싶습니다. 허용된다 하더라도 낙태가 극적으로 늘지 않을 거라 봅니다. 그 외엔 국가에서 개인의 자유를 허용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출산율이 걱정일 수 있습니다. 그건 무엇보다 서로를 사랑할 수 있는 환경조성이 우선되어야 합니다. 서로를 사랑해야 희생을 받아드립니다. 낙태를 억지로 막을 것이 아니라 사랑을 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여 출산이란 희생을 받아드릴 수 있게 해야 합니다.

 

누군가의 입맛에 맞기 위해 글을 쓰지 않습니다. 옳다고 생각되는 걸 주장하고 있습니다.

 

정말 괴롭군요. 나를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많았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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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이타주의는 선한가? (1) 2020/11/02 PM 02:05

이타주의는 선한가?

 

 

 

사무치게 슬프다. 분명 그들은 열심히 노력했다. 그런데 노력하면 노력할수록 되려 상황을 악화시켰다. 상황이 악화되면 노력이 부족한 것이라며 더욱 더 노력했다. 그리고 상황은 더 악화되었다. 쳇바퀴 돌듯이 잘못된 노력을 반복하며 점점 더 지치고 괴로워졌다. 대표적으로 출산율이 그러하다. 아무리 노력해도 점점 더 낮아질 뿐이다. 이게 특정 개인의 일이라면 가엾다고 느끼는 것이 자연스러울 것이다. 일부 조롱을 하거나 분노하는 이들도 있겠지만 보통은 동정으로 끝날 것이다. 결국 남의 일이니까 말이다. 하지만 사회의 일이라면 다르다. 자신의 일처럼 분노할 법도 하다. 「왜 헛된 노력, 아니 잘못된 노력을 해서 사회의 문제를 더 악화시키느냐!」라고 말이다. 그럼에도 분노하지 않고 그저 슬픈 까닭은 그들이 선한 의지로 행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어리석지도 않고 악하지도 않다. 정말로 사회의 행복을 바라며 노력하고 있다. 신념을 가지고 최선을 다하고 있다. 진정 올바르게 행동하려고 하고 있다. 그렇다면 어째서 악화되었던 걸까? 그것은 단순하다. 그들이 가진 올바름의 기준인 도덕이 문제의 원인이었기 때문이다. 출산율이 낮아지면 낮아질수록 임산부와 여성들의 권리를 늘려주었고, 그와 동시에 일부 여성들이 주장하는 성 문화의 검열을 강화하고 아이들의 이성교제를 금지시켰다. 그럼에도 출산율이 줄어들자 여성의 권리가 부족한 것이라며 권리를 늘렸다. 아이들의 성 문란이 문제라며 더 성 문화를 검열하고 이성교제를 금지시켰다. 노력하고 더 노력했다. 그럼에도 출산율은 줄어들었다. 이쯤 되면 그 노력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눈치챌 법도 한데, 노력의 근거인 도덕을 의심할 수 없었기 때문에 잘못된 노력이라는 수렁에 빠져 헤어나올 수 없었던 것이다. 출산율은 간단한 문제다. 남녀유별로 어릴 때의 이성교제를 금하고 정조관념으로 성관계를 금한 탓에 낮아졌던 것뿐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하자. 한국보다 여성의 권리가 낮은 곳도 출산율이 높다. 한국보다 노동환경이 열악한 곳도 출산율이 높다. 한국보다 빈부격차가 큰 곳도 출산율이 높다. 권리 핑계, 환경 핑계, 빈부격차 핑계를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는 얘기다. 그런데도 출산율이 낮아졌으면 다른 원인을 찾았어야 했다. 자 한국의 과거를 보자. 20세기 후반까지만 해도 결혼은 집안끼리의 결합인 경우가 많았다. 출산 또한 대를 잇는 것을 중요시하여 집안에서 임신을 하라고 압박을 가할 정도로 강요되는 측면이 있었다. 학창시절에 이성교제를 금했더라도 결혼을 하고 출산을 하는데 큰 문제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개인의 권리가 존중되기 시작하면서 결혼과 출산은 의무가 아니게 되었다. 이 시점에서 깨달았어야 했다. 어려서부터 사랑을 배우게 해서 자발적으로 결혼과 출산을 하게 했어야 했다는 것을 말이다. 결혼과 출산은 개인의 희생이다. 집안과 자식을 위해 자신의 자유와 자본을 희생한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무엇을 위해 희생을 해야겠는가? 당연히 바람이다. 사람들은 자신이 원하는 걸 위해 희생해야 한다. 그 중 사랑이 대표적이다. 사랑하는 우상이나 창작물을 위해 자신의 자유와 자본을 희생하는 걸 당연하게 여기고 있다. 그와 마찬가지로 사랑하는 가족을 위해 희생하는 걸 당연하게 여겨야 결혼과 출산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도덕이 그걸 막았다. 남녀유별이라면서 어려서부터 이성교제를 부도덕하게 만들었다. 어려서부터 이성교제를 했어야 이성에 대해서 배우고 이성을 아끼고 이성을 사랑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걸 금하자 이성에 대한 사랑을 배우지 못하고 자라버렸다. 부도덕하다는 이유로 해소되지 않은 사랑에 대한 욕망은 대부분 우상이나 창작물 같은 유사연애산업으로 이어져 그 산업을 발전시켰다. 문화는 즐기는 사람이 많으면 성장하는 것이니까. 어떤 사람은 사랑은 커서 하면 된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건 인간에 대해서 잘 모르고 하는 말이다. 인간은 먹는 방법, 싸는 방법, 걷는 방법, 말하는 방법, 쓰는 방법과 사교 능력, 수학 능력 등을 토대로 욕구나 감정이란 바람을 이루면서 성장한다. 인간은 인간이란 도화지에 지식이란 선을 그리고 바람이란 색을 칠하면서 성장하는 동물이란 것이다. 그런 인간에게 이성애란 색을 칠하지 않고 성장시키면 어떻게 되겠는가? 사랑을 몰라 결혼을 하지 않거나 필요에 의한 기계적인 결혼을 하게 된다. 왜 결혼하지 않겠다는 사람이 늘고, 왜 이성혐오가 늘어나는지 알겠는가? 만약 어려서부터 이성을 가까이 했다면 이성을 위해 외모를 가꾸고 이성을 위해 공부를 하고 이성을 위해 희생을 했을 것이다. 그걸 안 한 결과가 지금의 한국이다. 여성차별적인 정조관념으로 여성의 성관계를 부도덕하게 만들었다. 왜 남성은 여러 여성과 성관계를 맺어도 상관이 없는데 여성은 남성과 성관계를 맺으면 부도덕하겠는가? 단순하다. 과거 여성은 남성의 도구였기 때문이다. 도구가 쓰이기 전에 사용되면 사용자 입장에서 불쾌하겠지. 그래서 중고라는 멍청한 말이 나오는 것이다. 여성을 도구로 삼았던 국가들은 다들 하나같이 정조관념의 흔적이 있다. 정조관념은 지극히 여성차별적인 생각이다. 그럼에도 한국은 도덕을 의심할 수 없어 성 평등을 주장하는 지금도 정조관념이 남아있다. 이 얼마나 황당한 일인가. 그리고 정조관념을 근거로 성 문란을 막기 위해 문화검열도 하고 있다. 포르노나 성매매도 그 선상 위에 놓여있다. 포르노나 성매매로 여성의 성의 가치가 떨어진다는 주장이 있을 수 있다. 하나 남성은 그런 걸 신경 쓰지 않는다. 남성은 남성이 포르노에 나온다고 하거나 성매매를 한다고 해서 자신의 성의 가치가 떨어진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 생각은 그저 정조관념이 만든 환상이다. 도구가 도구로 쓰이기 위해 스스로를 보호하고 있을 뿐이다. 여성이 신체접촉에 민감한 것도 정조관념 때문이다. 남성이 구입할 상품에 흠집이 나면 안되니까 말이다. 지금 한국은 여성차별적인 정조관념을 지금은 여성평등이란 이름으로 바꿔서 소중히 하고 있다. 차별을 평등으로 받아드리다니 정말 현기증이 난다. 그리고 참 슬프고 무서운 일이다. 이런 게 심해지면 남성에게까지 정조관념을 요구하는 문화가 된다. 왜 여성이 성적으로 억압받은 걸 남성에게까지 주입하려고 하는가. 모든 인간이 성적으로 자유를 누려야 하는 것이 올바른 것이다. 여성이 성의 자유를 누리는 것을 문란하다고 비난하는 것이 오히려 차별적이란 말이다. 팍팍 연애하고 팍팍 성관계 맺어도 상관이 없다. 지금 한국은 인구소멸에 직면하고 있다. 과거의 도덕을 운운하는 것은 배부른 소리다. 설령 그러다가 학창시절에 임신을 하더라도 상관이 없다. 지배국가의 도덕관념을 버리고 보면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학교에서 아이를 돌본다고 해도 무엇이 문제겠는가? 어처구니 없다, 황당하다, 그런 생각이 든다면 아직도 지배국가의 도덕관념을 버리지 못했다는 것일 뿐이다. 이는 다른 국가도 마찬가지다. 많은 국가가 과거 지배국가의 도덕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니까 자유로운 선진국수록 출산율이 낮은 것이다. 지배와 자유의 차이를 명확히 인식해야 한다. 아이들끼리 연애를 하는 걸 권장하고 그러다가 임신을 하더라도 이해하는 문화가 받아 드려져야 한다. 학교에 탁아소를 짓는 한이 있더라도 자유국가에서는 인간의 자연스러운 연애욕구를 막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오히려 학생들끼리 공동육아를 하여 피보호자에 대한 애정과 그것을 바탕으로 한 자발적인 희생을 경험할 기회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 건 경험 말고는 배울 기회가 없다. 혹시 학업에 방해가 되면 그들이 일 년 정도 휴학을 해도 큰 문제가 아니다. 휴학을 문제 삼는 것은 어른이 만든 인생의 선로에 종속적인 상명하복 문화의 잔재가 만든 것일 뿐이다. 학생이 임신을 했을 때 도덕적인 문제를 제외하고 남은 문제에 대해 고찰해보라. 경제적인 문제를 제외하면 그리 큰 장벽은 없다. 다 큰 성인들 출산 지원비로 천문학적인 비용을 사용했음에도 출산율은 낮아져만 갔다. 이는 이유 없는 희생을 거부하는 자유로운 인간의 본질을 망각한 대가다. 차라리 아이들에게 연애를 권장하고 그러다가 임신을 하면 그 아이들을 지원해라. 인간의 자연스러운 연애욕구를 권장해서 하고 싶은 것을 위한 희생을 각오하게 해야 출산율이 오를 것이다. 그거 말고는 자유국가에서는 답이 없다. 지금 한국은 지배국가의 도덕이 자유국가에서 남아 국가를 인구소멸로 이끌고 있는 셈이다.

 

 

 

출산율 문제는 누군가에게 책임을 묻기가 어렵다. 거의 모든 이가 도덕을 지적한 적이 없다. 대부분이 도덕을 의심하지 않았는데 누구에게 책임을 물을 것인가? 지금이라도 도덕을 자유국가에 맞게 바꾸는 수밖에 없다. 나는 반체제를 주장하는 게 아니다. 되려 체제에 맞는 도덕을 갖춰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왜 사람들은 도덕이 문제라는 걸 몰랐을까? 사회 문제를 해결하려는 이들은 대부분 머리가 좋다. 그럼에도 몰랐던 것은 자신의 도덕을 의심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신심이 깊은 종교인이 종교의 교리를 의심하는 것과 같을 정도로 흔치 않는 일이다. 도덕, 도덕이라. 도덕에 대해 생각할수록 어처구니가 없다. 어떻게 된 게 하나하나가 그저 지배자가 피지배자를 지배하기 위해 만든 것에 불과했다. 그렇게 만든 도덕으로 피지배자를 올바른 것이라 세뇌하여 지배했던 것이다. 자 세상의 선에 대해 잠시 알아보도록 하자. 우선 보편적인 선은 무엇인가? 질서에 순응하고 타인의 이익을 우선시 하는 것이다. 법을 준수하고 도덕적 의무를 행하고 타인의 이익을 위해 일을 하는 이타주의자. 이런 사람을 일반적으로 선인이라 부른다. 이 기준으로 세상의 선을 살펴보자. 첫째, 인도의 신분 제도인 카스트 제도는 선한가 악한가? 한국의 입장에서는 악하다. 인간을 차별하는 문화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도에서는 그것이 도덕적으로 올바르다고 여겨진다. 힌두교에 영향을 받아 낮은 신분으로 태어난 이들은 전생에 카르마()을 짊어졌다고 하여 그들의 불행을 당연하게 여긴다. 전생에 못된 짓을 저질렀으니까 낮은 신분으로 태어났다는 논리다. 한국에서도 운이 좋으면 전생에 덕을 쌓았고 운이 나쁘면 전생에 죄를 지었다고 농담조로 이야기할 때가 있을 것이다. 그것은 카스트를 인정하지 않는 불교에 영향을 받은 것이다. 한국에서는 농담조로 하는 걸 그들은 진심으로 여기며 차별을 정당화한다. 자신은 전생에 덕을 쌓았으니 높은 신분이 당연하고 저들은 전생에 업을 쌓았으니 낮은 신분이 당연하다고 여기는 것이다. 증명되지도 않은 걸 근거로 하여 차별을 정당화했던 것이다. 왜 그들이 카스트 제도를 폐지했음에도 문화적으로 남아있는지 알겠는가? 종교의 가르침이 만든 도덕 때문이다. 이는 단지 늦게 태어났다는 것만으로 차별을 정당화하던 유교보다 더 심각한 차별이다. 종교는 기본적으로 종교적 위인의 가르침을 부정할 수 없게 되어있다. 이게 종교의 사상적 한계다. 보편적인 선은 질서에 순응하고 타인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걸 뜻한다고 했다. 여기서 카스트에 순응하는 사람은 이 기준으로 봤을 때 선하다. 여기서 상위 카스트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사람은 이 기준으로 봤을 때 선하다. 질서가 어떠하든 그 질서에 순응하면 선하고, 대상이 누구건 상대의 이익을 우선시 하면 선하기 때문에 어처구니 없게도 카스트 제도는 그들의 입장에서 선하다. 둘째, 이슬람의 참수 문화는 선한가 악한가? 최근 자유주의자라면 누구나 다 분노할만한 사건이 터졌다. 프랑스에서 역사교사가 이슬람 극단주의자에게 참수당하는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프랑스 중학교 교사는 이달 초에 언론의 자유를 수업하면서 무함마드 풍자 만화를 보여주며 토론을 했다고 한다. 그런 수업을 알게 된 이슬람 학부모가 이슬람 인들끼리 그 내용을 공유하며 비난했다고 한다. 그 다음 주 프랑스 교사는 무슬림 난민 청년에게 참수를 당했다. 범인은 사건 직후 트위터에 「알라를 받들어 무함마드를 조롱한 마크롱의 개 중 하나를 처단했다.」 라는 글과 함께 목을 자른 사진을 게시했다고 한다. 정말 정신 나간 인간이다. 일반적으로 이걸 선이라 부르는 것 자체가 역겨운 일이다. 그래도 한번 선의 기준으로 바라보자. 질서에 순응했는가? 이슬람 문화의 질서에 순응했다. 이타적으로 행동했는가? 종교 위인과 그를 따르는 종교인들의 이익을 위해 행동했다. 그러므로 이 미친 행위는 그들 입장에서 선이다. 황당하게도 이슬람 입장에서는 자신들의 위인이 모독 당했다고 생각하면 모독했다고 생각하는 인간을 참수하는 게 올바르다고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걸 증명하는 것이 이슬람 문화권의 반응이다. 프랑스 대통령이 무함마드에 대한 표현의 자유를 포기하지 않겠다고 선언하자 이슬람 문화권은 프랑스에 대한 보이콧을 시작했다고 한다. 말레이시아 전 총리는 무슬림은 수백 만의 프랑스인을 죽일 권리가 있다고 트위터에 글을 올렸다고 했다. 그가 이슬람 인을 대표하는 것은 아니나, 극단적인 자는 총리가 될 정도로 우수한 인간조차 그렇게 생각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그런 광기는 지식유무와 관계가 없다. 인간의 행동을 결정하는 옳고 그름의 기준인 도덕과 관련이 있다. 셋째, 중국 공산당의 독재는 선한가 악한가? 언젠가 한국인과 중국인이 유튜브에서 댓글로 토론하는 걸 본 적이 있다. 한국인이 중국 공산당이 저지르는 홍콩과 위구르와 티베트 탄압을 비판하니 돌아오는 대답이 가관이었다. 「한국에서 반체제 운동을 하면 잡아가는 것처럼 중국에서 반체제 운동을 하니 잡아가는 것이다.」라고 했다. 일견 타당해 보이지만 그 관점 자체가 사상의 차이를 보여주고 있었다. 한국에서 반체제 운동을 한다는 것은 자유를 부정하는 행위다. 왕정복고를 주장하거나 공산독재를 주장하는 것은 누군가를 지배하겠다는 것이므로 자유주의자 입장에서 그릇된 행위가 맞다. 하나 중국에서 자유를 외치는 것은 지배에 저항하는 것이므로 자유주의자 입장에서 올바른 행위가 맞다. 반체제 운동을 해서 잡아갔다는 그 단순한 논리에서 도출되는 결과는 바로 자유에 대한 시각의 차이다. 그것은 자유의 가치를 모르는 중국인이 할법한 논리였다. 이걸 일반화할 수는 없다. 하지만 선의 기준을 생각해보자. 질서에 순응하는 것. 남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것. 일반적으로 중국인이 선하기 때문에 중국 공산당의 질서에 순응하고 공산당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것이다. 독재자는 피지배자들이 선하길 바랄까 아니면 악하길 바랄까? 그 답은「선하길 바란다.」다. 순종적으로 자신의 지배를 받아드리길 원하기 때문이다. 평화롭게 독재자의 지배를 받아드리는 것이 독재자가 원하는 세상이다. 중국 공산당이 자유가 아닌 평화의 가치를 중시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자신의 지배 아래 자유롭지 못하지만 평화로운 세상이 독재자가 꿈꾸는 세상이다. 그 세상은 한국인에게는 악하더라도 중국인에게는 선하다. 그래서 중국인은 공산당이 지배하는 것을 올바르게 여긴다. 민족주의가 그걸 뒷받침 하고 있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홍콩과 위구르와 티벳을 탄압하는 것에 침묵하고 있다. 거기에 일대일로로 다른 국가를 지배하는 것까지 올바르게 여긴다. 오만한 중화사상이 그걸 뒷받침 하고 있다. 중국의 행보는 명확하게 자유와 반대되고 있다. 공산주의를 명목으로 자국을 지배하고 자본주의를 명목으로 타국을 지배하려고 하고 있다. 중국 공산당이 인간을 지배하려고 하는 이상 그들은 자유의 적이다. 자유주의자 입장에서 중국 공산당과 친하게 지내는 것, 그리고 중국 공산당의 이익에 부합하는 행위를 하는 것이 부도덕하다고 강조하고 싶다. 나는 그래서 중국의 제품을 최대한 구매하지 않고 있다. 완전하게는 불가능하더라. 조미료까지 다 불매할 수는 없지 않는가? 그래도 할 수 있는 것을 했다. 중국 공산당을 옹호하는 영화를 보지 않거나 아무리 재미있어 보여도 중국산 게임은 하지 않았다. 만약 스스로가 유교인이 아니고 자유국가의 국민이며 자유를 도덕으로 삼았다고 생각한다면 중국과의 거래 또는 중국산 제품이나 창작물을 소비하는 것을 다시 한번 생각해보길 바라겠다. 그것은 자유주의자의 입장에서 부도덕한 일이다. 중국 공산당의 현재 문화와 달리 중국의 과거 문화 자체는 중국의 자유를 대변하는 대만의 존재가 있기 때문에 괜찮다. 하지만 중국에 이익을 주는 것은 중국 공산당의 이익을 주는 것이므로 부도덕하다. 자유주의자라면 연하가 연상에게 반말하는 것을 부도덕하다고 여기며 분노할 것이 아니라 인간을 지배하려는 자와 집단을 부도덕하다며 분노해야 할 것이다. 넷째, 일본의 혐한은 선한가 악한가? 세계적으로 일본 국민은 착하다는 이미지가 있다. 한데 혐한에는 침묵하거나 동조한다. 그걸 보고 많은 한국인들은 이중적이라고 말을 하거나 실은 착한 것이 아니라고 비판한다. 선의 기준이 무엇이었는가? 질서에 순응하고 이타적인 것이다. 이 기준이면 일본 국민은 착한 것이 맞다. 질서가 옳건 그르건 자민당을 지지세력이 주도하는 혐한에 순응하고 자신의 이익보다는 타인, 즉 국가의 이익을 우선시한다. 착한 국민답게 일반적으로는 규칙을 준수하고 선진국민처럼 행세하려고 한다. 하지만 그저 착하기 때문에 자민당이 하는 행동이나 그 지지세력이 하는 혐한에 적극적으로 대처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일본의 혐한은 일본에서 악이 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일본이 민주주의 국가임에도 민주적으로 보이지 못할 때가 있는 것은 지배국가의 도덕을 물려받아 질서에 순응적인 것을 착하다 여기고 그렇게 행동하기 때문이다. 국가의 주인이 국민이라면 제 주장을 펼칠 수 있어야 하는데, 순응을 올바르게 여기며 따르기만 하다 보니 주인행세를 못할 때가 있다는 것이다. 일본 유치원생이 횡단보도를 건널 때 하나 같이 손을 들고 건너며 질서를 지키는 모습이 사진촬영 되어 인터넷에 공개된 적이 있다. 착해 보인다. 일본이 경기를 마친 후 깨끗이 청소를 한 것이 기사에 뜬 적이 있다. 착해 보인다. 그들이 그걸 선하다고 인식하기에 행하고 있는 것이고 그들이 선하려고 하기 때문에 옳건 그르건 자민당의 질서를 거역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돌려 말한다거나 동조압력이 있다거나 자기 주장을 펼치기 어려워한다거나 하는 것도 이타주의적인 태도 때문이다. 이제는 관점을 달리해야 한다. 그들이 한국과 갈등을 생기는 것은 질서에 순응하는 착한 인간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일견 착해 보이지만 나쁘게 보이는 모순이 없어진다. 일본이 자유국가라면 일본 또한 과거 지배국가의 도덕을 버리고 자유국가의 도덕을 새로 만들어야 할 것이다. 그들이 지배국가의 도덕이 말하는 착하다는 것에서 벗어나 자유를 도덕으로 삼아 자유롭게 잘못된 것을 잘못된 것이라 외칠 수 있어야 일본은 변화할 것이다. 다섯째, 한국은 어떠한가? 지금까지 세상의 선에 대해 알아보았다. 그들의 질서가 진리로 느껴지던가? 어떤 질서가 가르치는 도덕이 반드시 올바를 거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그것은 한국이 가지고 있는 도덕도 예외는 될 수가 없다. 지금 한국의 수많은 사회 문제는 과거 지배국가의 도덕에서 비롯된 것이다. 낮은 출산율, 높은 자살률, 사회적 갈등, 집단 이기주의 등 다양한 문제는 도덕을 근거로 한다. 스스로의 도덕을 의심하는 것은 그 도덕으로 행동을 결정해온 지금까지 살아온 과거를 부정하는 것이다. 자기부정은 어려운 법. 그러니 도덕을 의심하는 것도 어려울 수밖에 없다. 그래서 먼저 다른 국가들의 도덕을 알아본 것이다. 자신을 부정하는 것은 어려워도 다른 걸 보고 반면교사로 삼는 것은 그나마 쉬우니까 말이다. 한국의 도덕이 진리가 아니라면 지금 당장 우리들이 올바르다고 생각하고 하고 있는 것들을 다시 한번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마냥 착하길 바라는 게 올바른 것이었을까? 마냥 이타적으로 행동하길 바라는 게 올바른 것이었을까? 아이들을 위해서라는 명목으로 검열하는 게 올바른 일이었을까? 연하와 연상을 차별하는 것이 올바른 것이었을까? 과거의 관행과 관습을 수용하는 게 올바른 일이었을까? 다문화, 민족주의, 사회주의, 반공주의, 자본주의, 심지어 자유주의까지도 그것이 올바른 것인지 고찰해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도덕을 다시 한번 되돌아보는 것이야말로 한국 사회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열쇠가 될 것이라 확신한다. 한국이 체제에 맞는 도덕과 가치관과 희생의 이유가 갖춰지면 비로소 기초가 튼튼한 자유국가가 되어 건강하게 성장할 수 있을 것이다. 넘어가기 전에 잠시 다문화에 대한 의견을 내보겠다. 다문화는 실패한 정책이 아니라 원래부터 잘못된 정책이다. 각자의 문화는 각기 다른 도덕을 내포하고 있는데, 서로 충돌하는 도덕을 가진 이들끼리는 공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자유를 도덕으로 삼은 자와 지배를 도덕으로 삼은 자가 어찌 공존할 수 있겠나? 이는 천적과 공존하겠다는 것과 그리 다르지 않는 것이다. 다문화를 위해 카스트를 도입할 수 있겠는가? 명예살인을 도입할 수 있겠는가? 말도 안 되는 소리다. 너를 노예로 삼겠다며 나서는 인간과 자유로운 인간이 어찌 같이 살 수 있겠냔 말이다. 한국은 지금 과거의 도덕에 근거하여 미국과 중국의 갈등에 중립적인 위치에 서 있다고 본다. 하면 미국이 없다면 중국의 지배를 가만히 받아드릴 생각인가? 미국이 있든 없든 그들이 다른 국가를 지배하겠다고 나선다면 싸울 수 밖에 없다. 일국양제가 무너진 홍콩을 보라. 대만을 위협하는 중국의 군사력을 보라. 탄압당하는 소수 민족들을 보라. 주변 국가인 한국도 예외는 될 수가 없다. 아무리 이익을 위해 협상한다고 해도 그들의 도덕이 지배를 올바르게 여기는 이상, 한국은 그들에게 정복할 대상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어찌 중립이 가능한가? 애초에 한국이 자유국가에 맞는 도덕을 갖추고 있었다면 중립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중국은 한국의 적이 아니다. 중국은 자유의 적이다. 한국이 자유국가이므로 결과적으로 한국의 적이 되는 것이다. 중국 외에도 자유를 위협하는 국가는 전부 가상적국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이 다문화는 도덕 때문에 원래부터 잘못된 정책이었다. 그렇다고 순혈주의나 민족주의를 주장하거나 이민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단지 최소한 자유를 부정하는 인간이 자유국가에 들어가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자유를 기반으로 한 단일문화와 다인종이 앞으로 한국이 추구해야 할 이민정책이라 생각한다. 설령 피부색이 다르고 인종이 다르더라도 자유의 가치를 받아드린 사람은 자유국가의 국민이다. 반대로 같은 민족이라도 자유를 부정하면 자유국가의 국민이 될 수 없다.

 

 

 

한국 사회가 지닌 문제의 본질은 지배국가의 도덕이었다. 다른 국가들을 살펴보면 도덕이라는 것은 애초에 진리가 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렇다면 보편적으로 선하다고 여겨지는 이타주의는 과연 정말 올바른 것이었을까? 이에 대해 논하기 전에 가볍게 질서에 순응하는 것에 대해 정리해보자. 질서에 순응하는 것이 선한가? 그것은 객관적으로 선하지 않다. 어떤 질서에 순응하느냐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이다. 독재자의 질서에 순응하는 것이 객관적으로 선하다고 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인간은 보편적으로 자유롭길 바라기 때문에 자유가 없는 질서가 객관적 선이라 할 수 없다. 그럼에도 세상은 그런 순응하는 태도를 선이라 부른다. 그것이 바로 지배국가의 도덕이 남긴 잔재다. 그럼 본 주제로 넘어가겠다. 그렇다면 이타주의는 선한가? 그것도 객관적으로 선하지 않다. 어떤 대상의 이익을 우선시하느냐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이다. 어떤 집단이 있다고 가정하자. 그 집단이 집단 이기주의가 되려면 모든 집단 구성원이 이기적이어야 할까? 답은「아니다.」다. 대부분 이타주의적이어야 그 집단이 어떤 이기주의자가 주장하는 이익을 추구할 수 있는 것이다. 곰곰이 생각해보라. 세상의 수많은 집단 이기주의를 떠올려보라. 과연 그들이 전부 이기적이었는가? 스스로부터 생각해보자. 내가 속한 집단에서 부당한 행위를 통해 이익을 얻는 것을 목격했다. 그걸 목격하고 나서 나는 그 행위를 저지하려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것을 잘못된 일이었다. 그걸 주위에서 말린다. 네 이익을 떠올려보라면서 말이다. 그걸 듣고도 나는 부당한 행위를 막으려고 한다. 그러자 그들은 집단 구성원의 가족을 꺼내며 막는다. 「네가 그걸 막는다면 그 부당한 이익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이들에게 피해를 주는 것이다.」 내게 내제된 이타주의가 속삭인다. 「네가 막고 싶다는 욕심을 접고 다른 이의 이익을 우선시해야 하지 않겠느냐?」 신념과 인정 사이에서 갈등한다. 무엇이 올바른 일이란 말인가? 만약 내가 이기적인 사람이었다면 타인이 피해를 아랑곳 하지 않고 정의를 구현하기 위해 부당한 행위를 저지했을 것이다. 하지만 마냥 이타적인 사람이라면 다른 사람이 얻는 피해가 가슴 아파 자기합리화를 하며 침묵했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한국의 비리와 집단 이기주의를 형성하는 토양이 된다. 부동산 담합을 떠올려보자. 어떤 아파트 주민이 자신의 부동산을 싸게 처분하려는 걸 다른 아파트 주민들이 막았다는 소식이 언론기사로 전해진 적이 있다. 그들은 집값이 떨어진다고 파는 자유를 막은 것이다. 거기서 논리는 간단할 것이다. 「네가 싸게 팔고 싶다는 이기적인 욕심 때문에 다른 이의 이익을 침해하지 마라.」 자신의 이익 때문에 이타주의를 강요하고 있는 셈이다. 상을 몰아주는 예술계의 관행을 떠올려보자. 거기에 속한 인간이 전부 이기주의적이었을까? 분명 실력으로 승부를 보고 싶은 사람들이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관행이 유지되는 것은 이타주의를 강요했기 때문이다. 「그 관행으로 이익을 본 다른 선배들의 이익을 침해할 것인가? 너에게도 언젠가 이익이 돌아올 거니 부당한 관행을 막는 이기주의적인 행동을 하지 마라.」 이타주의가 그 부당한 관행을 유지하게 한 것이다. 여성주의에 휩싸인 여성들을 떠올려보자. 그들이 전부 이기적이었을까? 여성주의에 반하는 행동을 하는 여성들을 비난하는 사례를 떠올려보자. 어떤 여성이 간호사 코스프레를 했다거나 야한 옷을 입었다거나 하는 등의 행위를 했을 때 어떤 비난을 했던가? 「너는 여성주의의 이익을 침해했다.」 자신의 이익보다 여성주의라는 어떤 사상 자체에 대한 이익을 우선시하라는 말이다. 그게 바로 이타주의를 강요하는 것이다. 여성주의로 이익을 보는 일부의 여성들을 제외하고는 전부 이타적이기 때문에 여성주의 광풍이 불었던 것이다. 나는 여성들을 우수하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그들도 알 것이다. 어떤 희생도 책임도 지지 않고 이익만 챙기겠다는 말이 사회에 무슨 영향을 끼치는지에 대해서 알고 있을 것이란 말이다. 그럼에도 말을 못하는 것은 여성집단의 이익을 우선시하라는 이타주의가 간섭해서 그런 것이다. 어떤 집단 내부에서 집단의 이익을 무시하고 행동하는 것을 전부 이기적인 행위로 몰기 때문에 이타주의가 올바른 것이 된 세상에서는 집단의 부당한 행위를 막을 수가 없게 된다. 왜 내부고발자가 그 집단에게 소외되고 퇴출되는지 알겠는가? 이타주의가 선인 곳에서 정의구현이라는 이기적인 행위를 저질렀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한국의 거의 대부분의 집단 이기주의나 비리 사건은 이타주의를 근거로 한다. 이럼에도 이타주의가 올바른 것으로 보이나? 이타주의는 지배국가의 도덕이 남긴 잔재다. 생각해보자. 지배자는 이기적으로 행동하고 피지배자들은 이타적으로 행동해야 모든 이익이 지배자에게 몰리지 않겠나. 국가를 위해서라는 이유로 모든 국민들에게 희생을 요구했던 전체주의는 이타주의를 기반으로 한 것이다. 자신의 이익보다 국가의 이익을 우선시 했기 때문에, 그리고 그걸 강요했기 때문에 전체주의가 된 것이다. 이타주의는 대상을 분명히 할 수가 없다. 대상이 정해지면 목적성을 띠게 되고 목적성을 띠게 되면 그 목적을 결정했다는 자유의지가 간섭하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이기주의가 되게 된다. 순수한 이타주의는 결국 타인에게 이용당할 수 밖에 없다. 인도의 카스트도 이슬람의 참수도 중국 공산당의 독재도 일본의 혐한도 전부 어떤 기준에서 선한 인간들이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다. 한국의 비리도 집단 이기주의도 전부 어떤 기준에서 선한 인간들이었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다. 세상은 사람들이 착하기 때문에 엉망인 것이다. 착하기 때문에 엉망이라면 착하다는 보편적인 기준 자체가 이상하다는 걸 의미한다. 이제는 알았을 것이다. 지배국가의 도덕을 기준으로 정한 선으로는 세상이 행복해지지 않는다는 것을 말이다. 더 이상 무력한 이타주의는 선이 아니다. 자유국가가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새로운 선의 기준을 만들어야 한다.

 

 

 

이기주의의 가치는 자유의지를 근거로 한다. 어떤 경우에도 자유의지를 갖고 행동하는 것은 전부 이기적이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과연 모든 인간의 의지가 자유의지라고 할 수 있는가?」다. 어떤 인간이 세뇌를 당해서 하는 행위를 가리켜 자유의지라고 칭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듯이 단순히 인간이 의지를 가진다고 해서 그것이 자유의지라고는 할 수 없다. 고찰이 없는 의지는 자유로울 수가 없다. 내 의지가 어떤 것이 영향을 받았고 그것이 옳고 그른지 생각을 하고 행동을 해야 비로소 자유의지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남이 시켜서 하는 걸 아무런 고찰 없이 그대로 하는 게 자유의지라 할 수 있겠는가! 그런 건 노예다! 개돼지다! 고찰 없는 의지는 결국 남의 의지를 그대로 수행하는 이타주의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현명한 이기주의야말로 자유주의자가 취해야 할 기본 자세이며 이기주의 내에서 옳고 그름을 따져야 하는 것이다. 인도의 카스트 제도를 바꾸려면 누가 필요하겠는가? 이기주의자다. 카스트 제도로 이익을 보는 이들의 이익을 무시하고 바꾸고 싶다는 욕망을 실천할 수 있는 이기주의자가 있어야 바뀌는 거란 말이다. 이슬람의 참수는 얘기하기가 어렵다. 어떤 이슬람 인이 참수를 비판하면 그 사람도 참수될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도 그들이 바뀌려면 이슬람의 이익을 무시하고 자신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이기주의자가 있어야 바뀔 것이다. 중국의 공산독재도 그러하고 일본의 한국 혐오도 그러하다. 그들 대부분이 선량하지만 무력한 이타주의자들이기 때문에 바뀌지 않는 것이다. 이기주의. 어떤 사람이 땅에 떨어진 쓰레기를 주어 도시를 깨끗하게 하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다고 가정하자. 그걸 보고 다른 도시의 구성원이 도덕적 죄책감을 느끼고 싶지 않아서 그걸 위선이라며 공격했다. 이타주의자는 거기서 그들의 이익을 침해할 수가 없기 때문에 자신의 욕구를 참고 쓰레기를 줍지 아니한다. 이기주의자는 거기서 다른 이의 이익에 관심이 없기 때문에 순수하게 자신의 욕망대로 쓰레기를 주워 도시를 깨끗하게 만든다. 누가 도시에 더 필요한 인간이겠는가? 거기에 이기주의자들은 보답을 바라지 않는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행동한 것이기 때문에 행동한 순간 목적이 달성되었으므로 그 파장으로 다른 이가 이익을 얻는다고 해서 달리 보답을 바라지 않는 것이다. 친절을 베푼 이기주의자는 그 친절로 상대방이 이익을 얻건 말건 관심이 없다. 그리고 그 친절에 대한 보답에도 관심이 없다. 베푼 순간 목적이 달성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서로 부담을 가지지 않아도 된다. 이 얼마나 순수한 선의인가? 보답을 바라는 이기주의자는 보답 자체가 목적이기 때문이다. 잘못된 관행, 관습을 멈출 수 있는 것도 이기주의자들이다. 과거 관행을 만든 그리고 현재 관행으로 이익을 보는 이들의 이익 따위에 관심도 없는 이기주의자들이야말로 잘못된 것을 바로 잡을 수 있다는 것이다. 사법도 마찬가지다. 과거 판례를 중용하는 것은 판례를 만든 과거 판사들의 권위라는 이익을 우선시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잘못된 판례거나 이제는 시대에 맞지 않더라도 선배를 존중해야 한다는 이타적인 생각 때문에 바꾸지를 못하는 있는 것이다. 현재 판사들이 이기적으로 행동해야 판례변경이 가능하다. 지금 정보의 확산으로 촉법소년들이 사회의 정보를 빠르게 습득하여 성인과 비등한 범죄를 저지르면서도 책임을 지지 않고 있다. 이를 막을 수 없는 것은 단순하게 과거의 법 때문이다. 현재 살고 있는 사람들이 이기적이어야 이런 걸 바꿀 수 있단 말이다. 올바른 이기주의가 선이 되어야 우리 사회가 행복하게 될 수 있단 말이다! 정치개혁, 언론개혁, 사법개혁, 검찰개혁, 의료개혁, 관료개혁, 교육개혁, 기업개혁, 예술개혁 등 다양한 개혁들도 결국 그 집단에 속한 이가 집단 이익을 무시하고 이기적으로 행동해야 개혁할 수 있다. 지금 개혁이 제대로 되지 못하는 까닭은 이타주의가 선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이익이 아닌 각자 집단의 이익을 위해서 행동하니까 바뀌질 않는 거란 말이다. 이제는 근시안적이고 멍청한 이기주의자들이 제 배를 불리기 위해 선량한 이타주의자들을 선동하는 것을 배제하고 하고 싶은 대로 올바른 일을 하는 이기주의자를 착하다고 해야 된다. 기자가 언론사와 연계된 곳의 비리를 파헤쳐서 터트리는 것. 「내 맘대로 할거야!」 라면서 특종을 터뜨린다고 해보자. 그것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예술계가 그 동안의 관행을 무시하고 진정 예술적인 것에 상을 준다고 가정해보자. 그것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정계가 자신들의 특권을 무시하고 잘못된 것을 바로잡는다고 가정해보자. 그것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이기주의자들이 각자 맡은 역할에 충실하면 충실할수록 사회는 건강하고 행복해져 간다. 어차피 제 배만 불리려는 그릇된 이기주의자들은 이타주의가 선인 세상에서도 없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이기주의자들이 무력한 이타주의자들을 이용만 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럴 거면 모두가 이기적인 편이 낫다. 올바른 이기주의가 선이 되어야 그릇된 이기주의를 견제하여 세상을 올바르게 이끌 수 있다는 얘기다. 모두가 이기적이면 공동체를 유지할 수 없을 거란 우려를 할 수도 있다. 그것은 인간의 특성을 고려하면 그리 걱정할 문제가 아니다. 자신에겐 관대하고 남에게는 엄격한 보편적인 인간의 특성이 공동체를 유지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모든 인간이 이기적으로 행동하면 나 외의 이기적인 인간이 주장하는 것이 사회에 도움이 되는지 엄격하게 판단하게 된다. 자신의 이기심을 공동체 구성원들에게 인정받기 위해서는 결과적으로 공동체에 이익이 되는 것을 전제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 누구도 이기적인 주장을 펼칠 수 있다. 자 펼쳐봐라. 여성이든 남성이든 노동자든 기업이든 어디든 간에 자신의 이기적인 주장을 펼쳐봐라. 자신이 그러하듯 그 외의 사람들이 그 주장이 공동체에 이익이 되는지 엄격하게 판단을 할 것이다. 자신의 이기심이 대중에게 평가 받는 것이다. 지난번 어떤 인간이 지방에 땅을 사서 톤 단위의 쓰레기를 무단 투기하여 큰 돈을 벌었다는 소식이 언론기사로 공개된 적이 있었다. 그런 인간이 이기적인 주장을 펼친다고 가정해보자. 나머지 공동체 구성원이 받아드리겠는가? 반면 정당하게 돈을 벌어 공동체에 이익을 주는 기업이 있다고 가정하자. 그런 기업이 이기적인 주장을 펼친다고 가정해보자. 나머지 공동체 구성원이 거절하겠는가? 그 주장을 각자 판단을 해서 결론을 내리겠지만 공동체에 이익이 되는 이기적인 주장은 반대할 사람이 거의 없을 것이다. 여성들이 여성의 권익을 보장해달라는 대신에 남성들이 짊어지던 병역의 의무를 같이 하겠다는 주장을 했다고 가정해보자. 그걸 어떤 남성이 반대하겠는가? 현명한 인간이 이기적이어야 거시적인 관점에서 사물을 보고 진정 올바른 일을 이기적으로 행할 수 있는 것이다. 이타주의는 그런 현명한 인간의 자유의지를 꺾었을 뿐이었다. 「내가 올바른 일을 행하려고 하면 다른 이의 이익을 침해할 텐데 그럴 거면 안 하는 게 낫지.」 이처럼 이타주의는 뭔가 하기도 전이 자유의지를 꺾어버린다. 자유국가의 국민들은 하고 싶은 대로 하면 할수록 행복하게 되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되려 하고 싶은 걸 하지 못하게 되면 불행해진다. 따라서 어떤 문제가 있으면 무조건 막을 거나 의무를 만들 것이 아니라 그것이 공동체에 이익이 되는 방향을 생각해야 할 것이다. 의무로 어떤 행동을 하는 것은 지나치게 부자유스러운 일이다. 도덕이 시켜서 어떤 행동을 하게 되는 것은 도덕에 지배 받는 것과 다르지 않다. 스스로 생각해 행동을 결정하는 것이야 말로 자유로운 참된 도덕이라 생각한다. 이슬람 인의 참수는 그것이 자신의 도덕적 의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행동한 것이다. 그것이 자유롭게 보이는가? 혈통을 사랑하는 일, 국가 구성원을 사랑하는 일, 인류를 사랑하는 일. 등등 의무이기 때문에 사랑하기 보다는 스스로 바라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 진정 자유로운 인간의 태도다. 나의 핏줄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네가 너이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 혈통으로부터 자유로운 것이 아닐까? 만약 이혼을 하게 되면 가족이 아니게 된다. 그러면 사랑도 사라지게 되는 것인가? 가족이란 형태에 구애 받는 것은 가족을 사랑하라는 도덕의 명령 때문이다. 가족이라서가 아닌 인간 자체를 사랑해야 한다. 그래야 편협한 혈통주의에서 벗어날 수 있다. 자유롭지 못한 혈통주의 때문에 양자를 들이는 사람이 적은 것이다. 이런 자유로운 환경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자유국가의 사회를 행복하게 만드는 길이라 생각한다. 분명 검열과 규제가 필요할 때도 있다. 하지만 만능은 아니다. 앞서 말했듯이 아이들이 자신들의 자연스러운 연애욕구를 자유롭게 발산했더라면 지금 한국이 출산율로 걱정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나는 그걸 확신한다.

 

 

 

도덕을 새롭게 정립한다는 것은 과거의 자신을 부정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것은 한국인이 가지고 있던 어떤 자부심마저도 무너질 우려가 있다. 자랑스럽게 여겨왔던 것이 실은 자랑스럽지 않다는 걸 깨닫게 되면 큰 상처를 입게 되기 때문이다. 진심으로 사회의 행복을 위해 열심히 야한 것을 검열하고 이성교제를 막아왔던 이들이 사실은 그것이야말로 낮은 출산율을 불러왔던 원인이었음을 깨닫게 되면 어떻게 되겠는가? 인도의 카스트 제도를 비판하던 평등주의자가 자신이 유교의 연령차별을 행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 어떻게 되겠는가? 자신이 올바른 일을 했다고 생각했던 이가 그저 잘못된 관행이었음을 깨닫게 되면 어떻게 되겠는가? 정말 마음이 아프다. 그렇지 않아도 이제 직업 자체가 사라져 직업적 자부심을 잃는 이들이 늘어날 것이다. 국가에서 일자리 창출이 어려운 까닭은 단순하다. 그냥 앞으로 인간의 노동력의 필요성이 줄어들기 때문이다. 인간이 필요한 일이 줄어드니까 강의실 불 끄기 같은 불필요한 일자리나 공무원을 늘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앞으로 직업 자체가 사라지면 평생 그 직업에 종사하던 사람들이 자부심을 잃어버릴 수가 있다. 자유국가에 맞는 도덕이 새롭게 정립되면 자유를 자부심으로 삼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전까지는 의지할만한 어떤 자부심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무엇이 한국인에게 자부심이 될 수 있을 것인가?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자부심을 가질만한 요소들은 모든 한국인이 자부심으로 여기기엔 다소 부족한 점이 있었다. 첫째, 경제발전과 민주주의. 일부 한국인들이 한 것이다. 그것마저도 여러 가지 복잡한 배경이 있기 때문에 온전하게 모든 한국인이 자부심을 갖기는 어렵다. 둘째, 천재. 나는 한글을 사랑하지만 그건 어떤 천재가 만든 작품일 뿐이다. 이외 천재들의 업적도 마찬가지다. 한국인이 해외에서 상을 타거나 인정받는 것은 자랑스러운 일이지만 모든 한국인이 자부심을 느끼기는 어렵다. 셋째, 교육. 교육열도 높고 수준도 높지만 학생들이 행복하지 못하단 말이 있다. 그리고 효율이 낮다는 평가도 있다. 최근 한국 교육의 발전상이 바람직하다. 계속 발전하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아직 자부심을 갖기는 조금 어렵다. 넷째, 역사. 상대적으로 타국을 침략하지 않았던 나라였던 것은 맞으나 조선 말기를 보면 온전하게 자부심을 갖기는 어렵다. 다섯째, 행복. 자살률이 매우 높은 국가다. 행복을 자부심으로 삼기는 어려울 것이다. 여섯째, 미래. 출산율이 매우 낮은 국가다. 자부심 이전에 인구소멸을 걱정해야 해야 할 것이다. 일곱째, 시민의식. 한국 내에서 남의 것을 탐하지 않는 것은 자랑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바가지를 씌우는 관광지를 떠올려보자. 해외에 나가면 가장 조심해야 할 사람이 바로 한국인이라는 말을 떠올려보자. 꼰대, 갑질, 혐오 등. 시민의식으로 자부심을 느끼기엔 발전해야 할 부분이 아직 많다. 경제발전이나 민주주의나 천재 같은 한국인과 관련되어있는 것은 자부심을 가져도 그리 이상한 것은 아니다. 한국의 환경이 그걸 만든 것이니 환경에 포함되어 있는 인간이 자부심을 느낄 수도 있지 않겠는가? 하지만 직접적인 연관이 없는 한 모든 한국인이 온전하게 자부심을 가지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래서 한국인을 비롯한 모든 인류가 인정할만한 어떤 자부심을 가질만한 특성이 있는가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이쯤에서 나는 자부심을 가질만한 것을 찾기 어렵다는 걸 알게 되었다. 한국인의 특성, 그것이 옳건 그르건 전부를 포용할 수 있는 어떤 자부심을 가질만한 요소는 무엇이란 말인가? 한국에 대해 떠올려보았다. 머리 속에 스쳐 지나가면서 그 모습들이 눈 앞에 그려진다. 사랑스러운 모습, 혐오스러운 모습, 똑똑한 모습, 어리석은 모습, 자랑스러운 모습, 한심한 모습, 부끄러운 모습 등. 쭉 떠올려보면서 하나의 공통점을 발견했다. 하나 같이 생명력이 흘러 넘쳤다. 장점이든 단점이든 극단으로 치달을 수 있는 것은 그만큼의 생명력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모든 국가가 놀랄만한 경제성장과 민주주의. 모든 국가가 놀랄만한 낮은 출산율과 높은 자살률. 정말 장단점이 극단적이다. 하나하나 생각해보면 한국인은 무언가를 하면 끝장을 보는 성질을 가지고 있었다. 생명력이 뛰어나다 보니 무얼 해도 극단으로 가버렸던 것이다. 보통 생물의 생명력은 생물체가 생명을 유지하는 힘이다. 하지만 지성이 있는 인간의 생명력은 그저 생명을 유지하는 힘이 아니라 각자 살고 싶은 방향을 끝까지 하는 힘이다. 지성이 단순한 생명력에 방향을 정한 것이다. 그것은 사전적 정의 중 사상적인 측면인 「사물이나 현상의 본질적 기능을 유지하여 나가는 힘」에 가까울 것이다. 인간이 어떤 것을 하고자 하는 힘은 생명력을 기반으로 한다. 생명력이 뛰어나다 보니 놀라운 경제성장과 민주주의와 출산율과 자살률이 가능했다. 경제성장은 성장하고자 하는 힘이 강하니까 상명하복의 유교문화가 만든 무한경쟁 속에서도 살아남아 꿋꿋하게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이다. 민주주의는 자유와 평등을 원하고자 하는 힘이 강하니까 끝없는 투쟁을 하며 이뤄냈던 것이다. 출산율은 이성교제를 부도덕하다 배운 이들이 가진 이성을 혐오하는 힘이 강하니까 이성혐오가 늘어서 그랬던 것이다. 이성혐오가 사회현상이 되어 정치적 영향력까지 끼치게 된 국가가 또 어디 있을까? 이성을 사랑해야 할 힘이 문화를 향하자 세계에 손꼽히는 문화강국이 될 정도가 되는 국가가 또 어디 있을까? 자살률은 죽고자 하는 힘이 강하니까 죽음에 대한 공포를 이겨내고 죽은 것이다. 생명력이 약한 인간은 가는 삶을 유지하면서 살 수 있을 때까지 살다가 죽는다. 그런 사람은 생명력보다는 생존력이 강하다고 해야 한다고 본다. 생명력이 강한 사람은 강렬하게 빛을 발하고 꺼지는 빛처럼 그 힘이 지나치게 강하니까 죽음도 쉽게 결정되었던 것이다. 한국인의 대표적인 문화 중 하나가 빨리빨리 문화다. 뭐든지 빨리 하려고 하다 보니 경솔하다거나 성급하다는 소리를 듣기도 하지만 그만큼 생명력이 넘쳐 흐른다는 근거기도 하다. 사회갈등이 이 정도까지 치달은 국가가 얼마나 있을까? 그만한 생명력이 있기 때문에 거기까지 갈등할 수 있었던 것이다. 갈등을 빚는 상대방을 생각해보라. 그들의 생명력이 얼마나 끈질기고 강인한지 알 것이다. 사상의 차이로 서로를 받아드릴 수 없더라도 생명력 자체는 부정할 수가 없다. 한국은 교육열이 강하다. 얼마나 강하면 좀 자제하라는 소리가 나오겠는가? 한국만큼 발전한 국가도 많지 않다. 발전하고자 하는 힘이 강하니까 그런 거다. 한국은 사이비 종교에 취약하다는 소리가 있다. 어떤 사람이 그걸 믿는다고 결정하면 그 믿는 힘이 너무 강하니까 그랬던 것이다. 조선만큼 유교에 심취한 국가가 어디 있었는가? 유교를 믿자고 결정하자 정말 미친 듯이 파고들었기 때문에 파멸하는 그 순간까지 믿고 따랐으며 그것이 한국에게까지 이어졌던 것이다. 북한 같이 아직까지도 시장을 개방하지 않는 국가가 어디 있는가? 소련이 붕괴됨에 따라 다른 공산국가들은 시장을 개방했음에도 북한은 아직까지도 고집을 피우고 있다. 하나 결정하면 끝까지 보는 성질이 나타난 것 같지 않나. 이외에도 곰곰이 생각해보라. 긍정적인 것도 부정적인 것도 평균 이상이 되는 것은 그만큼 생명력이 뛰어났기 때문이었다. 사실 생명력 자체는 모든 생명이 가진 것이므로 일반적으로는 자부심으로 삼기는 어렵다. 하지만 일정 이상 뛰어나면 그 자체로도 자부심으로 삼을만하다고 본다. 특정 개인이 아니라 공동체 전원이 빨리빨리 라는 문화가 생길 정도로 생명력이 강하다면 충분히 그 공동체의 특성이라 볼 수 있고 그 특성을 자부심으로 삼을 수 있다고 본다. 생명력은 한국에 긍정적인 사람도 부정적인 사람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한국의 특성 중 하나다. 그 특성이 장점과 단점에서 고르게 나타났기 때문에 한국을 냉소적으로 바라보던 한국인조차 건조하게 인정할 수밖에 없는 사실이다. 한국인이 생명력이 강하다는 사실과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간단하다. 지성이 제대로 된 방향만 결정하면 뭐든지 최고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최고가 될 수 있는 소질은 충분히 모든 한국인이 자부심을 가질만하다고 본다. 한국인은 굳이 자부심을 가질만한 것을 찾지 않아도 이미 생물로서 가치 있는 것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화력이 강하니까 화력을 쓸 곳만 제대로 정해두면 팍팍 성장할 수 있다. 모든 한국인이 자유를 찾아 이기적이게 되면 이타주의의 그늘 속에서 펼치지 못했던 올바름에 대한 욕구를 마음껏 펼쳐 사회를 이롭게 만들거라 생각한다. 생명력이 강한 사람들이므로 자유라는 체제에 맞게 도덕이 자리잡으면 그만큼 성장하고 행복해질 수 있는 국가가 될 수 있을 거라 확신한다. 자유를 도덕으로 삼자는 주장은 생각보다 쉽게 받아드려 질 것이다. 자유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때문에 유교를 버리자고 하는 주장은 생각보다 어려울 것이다. 이미 새겨졌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유가 유교의 대척점에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 꾸준히 설득할 수 밖에 없다. 자유와 연상이 연하를 지배하는 것이 올바르다고 가르쳤던 유교가 어떻게 함께 할 수 있겠는가? 자유와 지배가 어떻게 함께 갈 수 있느냔 말이다! 그건 한국의 자유와 중국 공산당의 지배가 함께 갈 수 있다는 망상과 다르지 않다. 모든 국민이 자유를 도덕으로 삼으면 꼰대질과 갑질은 사라질 것이다. 그 외 다양한 사회 악습들도 사라질 것이다. 왜냐하면 타인을 지배하는 것이 부도덕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제 유교는 과거 지배국가의 문화유산으로만 남아야 할 구시대의 유물이다. 부디 그 한국인의 강한 생명력이 자유를 향하길 바라며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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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상가들이 좀 더 분발했으면 내가, 그리고 우리 사회가 행복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지금부터라도 바꿔야겠지요. 이제는 체제에 맞는 도덕이 필요합니다. 노력하면 노력할수록 불행해지는 사회. 도덕이 문제의 원인이라면 그렇게 되어버립니다. 도덕 때문에 꼰대나 갑질 같은 것으로 불행했던 사람은 사회의 도덕 때문에 불행했던 것이지요. 자연스러운 연애욕구로 허용하여 어려서부터 제 짝을 찾아 20대 초중반에 결혼을 했다면 이성혐오가 판을 칠 수 있었겠습니까? 전부 도덕으로 인한 문제입니다. 이제는 옳고 그름을 자유국가에 맞게 바꿔야 합니다.  

 

좀 더 정리해보려고 했는데 그냥 올립니다. 지금 새로운 도덕에 대해 정리 중에 있습니다. 주장하는 자가 누구든 그것이 정녕 옳다면 받아드려 질 거라 생각합니다. 앞으로 어떻게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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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무엇을 위해 희생을 해야 하는가? (0) 2020/09/21 AM 12:55

무엇을 위해 희생을 해야 하는가?

 

 

 

왕정국가는 왕을 위해 희생하고 종교국가는 신을 위해 희생한다. 그렇다면 민주국가는 누구를 위해, 무엇을 위해 희생을 해야 하는가? 민주국가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 중 하나가 바로 이것이다. 하지만 이 문제는 공공연하게 논의하기가 어렵다. 누가, , 무엇을 위해 희생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 논의를 한다고 가정해보자. 어떤 반응이 일어나겠는가? 왜 국민을 희생시킬 생각을 하느냐는 반발이 일어날 것이다. 누군가의 희생이 필요하다는 것, 그리고 이미 일상적으로 희생을 하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말이다. 잠시 희생의 사전적 정의에 대해 알아보겠다. 「다른 사람이나 어떤 목적을 위하여 자신의 목숨, 재산, 명예, 이익 따위를 바치거나 버리거나 빼앗기를 것을 뜻한다.」 희생은 크게 세 가지로 나뉜다. 첫째, 하고 싶어서 자발적으로 한다. 둘째, 하기 싫지만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한다. 셋째, 하기도 싫고 필요도 없다고 생각하지만 강제로 하게 된다. 지금까지는 보통 셋째로 강제로 희생을 당했다. 피지배자들은 언제나 지배자들에게 자신의 것을 빼앗겼다. 전쟁이 나면 끌려 나와 왕의 검이나 방패가 되어 싸우다 죽었다. 천재지변이 일어나면 제물로 바쳐져 신의 분노나 민중의 분노를 달랬다. 왕과 신을 위해 생명과 재산을 빼앗기는 것은 일상적인 일이었다. 신분사회는 이런 희생이 강요되었다. 정복자의 논리로 노예가 된 이들은 하루 종일 일을 하고도 제대로 된 대가를 받지 못했다. 평민들의 처지도 좋은 것이 아니었다. 남성은 평생 일만 하다가 죽었고 여성은 평생 집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죽었다. 먹고 사는데 급급했던 그들에게 꾸밈은 사치였다. 힘이 약한 여성에겐 보다 더 가혹했다. 여성은 종종 씨받이란 이름의 아이를 낳는 도구로 활용되기도 했다. 공녀로 팔려나갔다. 과부는 재가도 하지 못했다. 그들은 당시 인간으로 대접을 받지 못했다. 이런 천대는 최근까지 이어졌었다. 얼마나 천대받았으면 남아선호사상이 판을 쳐서 수많은 여자아이들이 낙태를 당했겠는가? 지금이야 그런 문화가 대부분 사라졌다. 오히려 여자아이가 태어나면 기뻐하는 사람들도 많다. 하지만 그 잔재는 여전하다. 유교문화가 남아있지 않는가? 여성주의로 인한 사회적 갈등은 사실상 남성사회의 질서를 유지하던 유교문화가 만든 셈이다. 여성은 남편을 섬겨야 한다고 가르쳤던 것이 유교였다. 섬김의 뜻은 다음과 같다. 「윗사람을 잘 모시어 받들다.」여성은 남성의 아랫사람이라 전제하고 가르쳤던 것이다. 유교는 백성을 지배하고 연하를 지배하고 여성을 지배하는데 사용된 교리이며 학문이며 도덕이었다. 이 질서에 여성은 천대받고 차별 받았다. 여성차별의 본질은 남성보다 힘이 약하다는 것에 있다. 여성의 힘이 약했기 때문에 남성사회가 되었다. 그 남성사회의 질서를 유교가 유지했던 것이다. 그랬던 과거와 달리 지금은 과학의 힘으로 무력()과 생산성(기계)이 거의 비등해졌다. 역할에 따라 여성이 더 우수한 분야도 많은 상황이 되었다. 여성이 차별 받았던 근거가 사라진 것이다. 여성은 과학 덕분에 인권이 올라간 셈이다. 그렇게 올라간 인권으로 평등사회가 만들어지고 있다. 되려 역차별 논란까지 나올 정도다. 그런 평등사회를 이룩하는 과정 속에서 유교는 걸림돌이 되었다. 과거 불평등했던 국가의 도덕이 관습으로 남아 사회적 불평등을 초래했던 것이다. 집안일, 명절, 혼수, 징병 등의 불평등은 과거 문화가 만든 잔재들이다. 여성주의자들이 가장 먼저 했어야 하는 것은 여성의 권익이나 남성혐오가 아니라 유교문화 철폐였음을 분명히 하고 싶다. 유교문화가 만든 폐해로 나타나는 차별 몇 가지를 바꾼다고 해서 평등사회가 오는 것이 아니다. 평등사회를 바란다면 유교 자체에 문제가 있음을 인식하길 바란다. 일제의 침략에 대한 반발로 조선이 미화되다 보니 이런 문제들에 대한 해결이 이루어지지 못하는 것 같아 안타깝다. 당시 조선왕조나 일본제국이나 피지배자들에게는 역겨운 지배자들이었다. 알아볼수록 조선말기를 옹호할 수가 없더라. 민주국가에서 굳이 누가 낫네 다투지 말고 미래로 갔으면 좋겠다. 과거에 얽매여서 조선미화를 하다가는 한국의 발전도 하지 못하게 되니까 말이다. 일본과의 갈등은 철저하게 현재의 시각으로 봐야 한다. 연좌제가 허용되지 않는 이상, 그들의 잘못은 과거에 있는 것이 아니라 현재 과거의 잘못을 외면하려는 것에 있기 때문이다. . 조선왕족들이 일본의 귀족이 된 것을 보면 참 할말이 없다. 언제나 그랬다. 지배국가에서는 약자를 희생시키고 강자가 호의호식을 했다. 내가 분노하고 내가 동정하는 것은 조선의 기득권이 아니라 그 시대 피지배자들이다. (일부 현명한 기득권도 있긴 하다.) 이처럼 과거의 피지배자들은 이외에도 말도 못할 정도로 많은 것들을 희생당해왔다. 인간의 사회는 누군가의 희생 위에 성립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어느 체제, 어느 제도도 누군가의 희생은 필연적이다. 당장 한국도 과거 한국인의 희생을 발판 삼아 성장하지 않았던가? 세계의 지원, 미국의 지원이 있었다고 해서 그들의 희생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경제의 성장도 학문의 성장도 민주주의의 성장도 전부 희생을 발판 삼아 성장했다. 사건사고들이 발생해도 국민들이 희생해서 극복했다. IMF가 터지자 국민들이 손수 금을 모아 국난을 극복하는데 큰 도움을 줬다. (대기업의 배를 불려줬다는 비판이 있다. 누군 희생을 하고 누군 이익을 얻고.) 태안에서 삼성1호와 허베이 스피릿호의 충돌로 인한 원유 유출 사고로 태안 앞바다가 기름으로 뒤덮이자 연 100만명에 가까운 자원봉사자가 찾아가 수작업으로 기름때를 제거해 생태환경을 복원하기에 이르렀다. 이외 다양한 사건사고들을 보라. 국민들이 희생해서 극복한 사례가 많다. 그러니 한국만큼 희생의 중요성을 모르는 국가는 없을 것이다. 사회질서를 준수하는 것, 세금을 내는 것 등 공동체에 속하게 되면 공동체를 위해 자연스럽게 희생하게 된다. 의료보험도 마찬가지다. 세금으로 운영되는 의료보험은 개인보다는 공동체를 위해 존재한다고 본다. 자신을 위해 내는 보험비가 결과적으로 건강한 사람이 희귀병이나 중병을 앓고 있는 사람의 의료비로 사용된다. 공동체를 위한 희생이다. 지금까지의 이런 희생은 지금까지는 어느 정도 관습적인 측면이 있었다고 본다. 지배국가였던 시대의 관습으로 희생을 강요당했던 사람들이 많았을 거란 얘기다. 사고 치는 사람 따로 있고 책임 지는 사람 따로 있고. 이거 어디서 많이 본 그림 아닌가? 지배국가에서 늘 일어나던 일이다. 그러나 이제는 그런 것도 점차 사라지도 있다. 그 어떤 것도 희생하지 않겠다며 나선 여성주의자들의 주장을 보라. 꾸밈, 결혼, 임신 등 조금이라도 손해를 볼 것 같으면 전부 거부하고 있다. 그것에 반발한 남성들 또한 희생할 수 없다며 군 징병과 징용을 비판하고 있는 상황이다. 결혼을 거부하고 징병을 거부한다. 출산율이 줄어들고 이민이 증가한다. 온갖 단체들이 제 이익만 요구하는 집단 이기주의를 보이고 있다. 국민들이 희생을 거부하자 희생 위에 서 있던 공동체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지배국가처럼 강제로 희생할 수 없게 된 이상, 자유국가처럼 모두가 조금씩 자유롭게 자발적으로 희생을 해야 하는데, 그걸 하지 않으니까 지금 국가가 흔들리고 있는 것이다. 한국은 지금 애국심을 고취시킬 수 있는 소식으로 아슬아슬하게 버티고 있는 중이다. 사상누각. 사회의 수많은 문제는 지배국가의 문화를 관습적으로 무분별하게 수용했기 때문이다. 도덕, 가치관, 자발적 희생의 이유. 이 세 가지를 민주국가에 맞게 재정립해야만 기초가 튼튼한 민주국가로 거듭나게 될 것이다. 지금 어떤 정권이든 개혁을 하면 반발이 나오고 있다. 왜 그런 걸까? 그건 일괄적으로 손해를 전부 거부하고 있기 때문이다. 올바른 정책을 시도하면 부당한 이익을 취해왔던 이들이 손해를 본다. 그릇된 정책을 시도하면 정당한 이익을 취해왔던 이들이 손해를 본다. 뭘 하든 누군가는 손해를 보게 되어 있다. 손해 자체에 초점을 맞추면 어떤 개혁이든 반발이 일어나 지지율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그 반발 때문에 개혁이 늦춰져 국가발전에 해가 되고 있다. 일부 집단의 이익 때문에 모든 공동체의 구성원이 손해보고 있는 것이다. 이제는 상황에 따라 손해도 받아드릴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어야 한다. 그걸 못하면 민주국가는 발전하기 어렵다. 예컨대 일부 집단의 이익 때문에 인공지능과 로봇을 거부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냥 뒤쳐지는 거다. 독재국가야 밀어붙여서라도 발전할 수 있겠지. 근데 민주국가는 그게 안되지 않나. 국가가 쇠퇴하는 거 특별한 이유로 발생하는 게 아니다. 국가의 변화가 멈추면 그 나라는 쇠퇴하게 되어 있다. 진작 조선이 중국이 세계의 중심이라는 생각에서 벗어나 세계를 떠돌며 문물을 접하고 성장했었다면 식민지배라는 치욕을 겪지는 않았을 것이다. 역사를 아는 한국인이라면 결코 변화를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그것이 설령 손해를 준다고 해도 말이다. 한국은 희생으로 성장했고 희생을 거부해서 흔들리고 있다. 이제는 더 이상 국가를 위해 희생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누군가의 희생은 반드시 필요하다. 그 누군가는 모든 국민에 해당되는 일이다. 연령, 성별, 학력, 지위 등 관계없이 모든 국민은 민주국가에 살고 있는 이상 자발적인 희생을 각오해야 한다. 그게 국가의 주인이 할 일이다. 그러지 않으면 공동체는 무너질 수밖에 없다. 제 이익만 챙기는 공동체가 어찌 유지될 수 있겠나. 그런 공동체는 사분오열로 무너지고 말 것이다. 희생은 국가존립과 발전이 걸려 있을 정도로 중요한 문제다. 그렇다면 어떻게, 누가, 무엇을 위해 희생을 해야 하는가? 이번에는 이 주제로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그럼 시작하겠다.

 

 

답을 먼저 말하겠다. 민주국가에서 희생은 나를 위해서 희생을 해야 한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위해서 희생을 해야 한다. 왕조국가가 왕을 위해서 희생하고 종교국가가 신을 위해서 희생한다면 민주국가는 나를 위해서 희생해야 한다는 것이다. 일견 이해가 되지 않을 수가 있다. 다음 두 가지 물음을 가정하고 진행해보자. 첫째, 그게 무슨 희생이라 할 수 있나? 둘째, 자신을 위한 희생이 공동체에 도움이 되겠는가? 먼저 첫째의 물음에 대한 답을 적어보겠다. 희생은 다른 사람이나 어떤 목적을 위하여 자신의 것을 바치거나 버리거나 빼앗기는 걸 뜻한다. 요는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위해 자신의 것을 바치는 것 또한 희생의 하나라는 것이다. 한국을 좋아하는 유학생이 있다고 가정하자. 그 사람이 한국을 사랑하여 해외의 좋은 일자리를 마다하고 한국으로 와서 일을 하는 것을 희생이라고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애국심이라. 많은 사람들이 애국심을 비판하는 것은 그걸 빌미로 희생을 강요했기 때문이다. 국가를 위해 희생하라고 강요하니 애국심에 진절머리가 난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희생기피는 주로 이것 때문이었다. 그것과 별개로 스스로 국가를 사랑하여 희생하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세뇌하지 않는 이상 말이다. 국가를 위해 민족을 위해서라는 명분으로 자폭테러 하는 사람들을 보면 과연 그 희생이 자발적이었는가 의문이 든다. 아이에게 폭탄을 건네줘서 자폭하라는 건 아마 자발적이지는 않을 것이다. 인류애가 충만한 사람이 있다고 가정하자. 그 사람이 기아에 허덕이는 아이들을 가엾게 여겨 아프리카에 가서 먹이고 재워주는 것을 희생이라고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동물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고 가정하자. 그 사람이 길거리에 돌아다니는 동물들을 어여쁘게 여겨 자신의 시간과 돈을 사용해 그 동물들을 돌봐주는 것을 희생이라고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개인적으로 해외보다 한국을, 동물보다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더 중요한 것이 아닐까 싶긴 하지만 강요할 수는 없다. 그들의 의지로 그들이 희생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래도 이해가 안 된다면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위해 쏟는 시간과 열정과 자본을 떠올려보자. 아이돌을 좋아해서, 취미를 좋아해서 정신적 이득과 물질적 손해를 보는 것도 자신을 위한 희생이다. 다음은 둘째의 물음에 대한 답을 적어보겠다. 공동체 성립을 위한 희생은 공동체를 위한 희생이 되어야 하는데, 자신을 위한 희생이 과연 얼만큼 공동체에게 이익이 되겠는가? 그런 의문이 들 수 있다. 이기적인 사람과 이기적인 집단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희생을 한다. 사실 그런 희생은 공동체에 큰 도움이 안 된다. 오히려 해가 되는 경우가 많다. 하청업체나 비정규직을 외면하고 자신들의 이익만 챙기는 노조가 있다고 가정하자. 이성을 혐오하고 증오하는 평등주의자가 있다고 가정하자. 그들의 희생이 사회에 얼마나 도움이 되겠는가?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게 별로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어떤 개인이나 집단도 이기적인 주장을 할 수 있다. 노조나 여성주의자가 비판을 받는 것은 그들의 이기적인 주장 때문이 아니다. 그들의 주장을 용인한 사람들과 허용한 정치가들 때문이다. 그런 이기적인 주장이 정책으로 이어지고 법률로 제정되니까 사회논란이 발생했던 것이다. 특히 젊은 남성이 분노하는 것은 여성에 대한 편애로 소외 받은 것이 크다고 본다. 사실 모든 인간은 소외 받으면 상처받고 슬퍼한다. 유치원생이 간식거리 못 받아서 우는 거나, 노인이 간식 못 받아서 삐치는 건 비슷하다는 거다. 너그러움이나 이해심은 사람마다 편차가 있는 거지, 연령이나 성별은 관계가 없다. 어떤 행동도 이걸 전제해야 한다. 여성정책을 내놓으면 아, 남성들이 소외 받고 상처받을 수도 있겠구나, 청년정책을 내놓으면 아, 장년들이 소외 받고 상처받을 수도 있겠구나. 반대의 경우도 동일하다. 이는 다수의 공동체 구성원이 주관에서 벗어나 객관적 시각을 갖춰 이해를 통한 납득이 가능해질 때까지 언제나 염두 해둬야 할 것이다. 잠시 이기적과 이타적에 대해 이야기를 해보겠다. 이는 크게 세 가지로 나뉜다. 하나, 이타적인 이유로 이타적인 행위를 하는 것. , 이기적인 이유로 이타적인 행위를 하는 것. , 이기적인 이유로 이기적인 행위를 하는 것. 여기서 하나는 주로 희생을 강요당할 때 발생한다. 이타적이란 자기의 이익보다 다른 이의 이익을 더 꾀하는 걸 뜻한다. 그런데 자유의지를 가지고 남을 위할 때에는 자신의 이익보다 다른 이의 이익이 더 커질 수가 없다. 이익이란 물질과 정신의 보탬이 되는 것을 뜻한다. 내 의지로 남을 위하는데 어찌 남의 이익보다 더 커질 수가 있겠는가? 자유의지로 남을 위해서 하는 행동은 내가 겪는 손해보다 내 정신적 만족도가 더 크니까 하는 거다. 국가를 위해 자발적으로 희생하는 거나, 아프리카 아이를 위해 자발적으로 희생하는 거나, 길거리 동물을 위해 자발적으로 희생하는 거나, 정신적 만족도가 크기 때문에 하는 거란 말이다. 그게 아니라면 누가 강요했거나 세뇌 당한 것뿐이다. 누가 강요하거나 세뇌했으니까 자신의 의지가 아니므로 남을 위해서 행동하게 된다. 그게 바로 이타적인 이유로 이타적인 행위를 한다는 것을 뜻한다. 여기서 둘과 셋은 자유의지로 희생할 때 발생한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희생한 것이므로 자유의지를 갖고 있다고 봐야 한다. 단지 그 결과의 차이가 있다.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위해서 행동한 것이 다른 이의 이익에 보탬이 된다면 이기적인 이유로 이타적인 행위를 한 것이 된다. 반면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위해서 행동한 것이 다른 이의 이익에 보탬이 되지 않는다면 이기적인 이유로 이기적인 행위를 한 것이 된다. 일반적으로 둘을 이타주의자라고 하고 셋을 이기주의자라고 인식해도 무방하지만 하나의 예가 있으므로 굳이 따지면 구분 지어야 할 것이다. 여기서 둘은 보통 자유주의 국가가 하는 희생이다. 분명 자유국가가 한국전쟁에서 피를 흘리며 희생한 것은 온전히 한국의 이익만을 위해서는 아니었다. 미국이 한국을 위해 물적 인적 지원을 했던 것은 온전히 한국의 이익만을 위해서는 아니었다. 한국에서 필사적으로 도움을 요청했고, 그 요청을 받아드린 것도 그들에게 이익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이념전쟁, 이념경쟁. 하지만 그것이 바로 이기적인 이유로 이타적인 행위를 한다는 것이다. 한국을 도왔던 것은 그들의 이익에 해당되었지만 그들의 이익이 한국에겐 매우 큰 이익이 되었다. 하고 싶어서 한 것이 이타적인 행위가 되는 것. 그게 바로 자유주의자의 희생방식이다. 다시 돌아와 자신을 위한 희생이 공동체에 도움이 되기 위한 방안에 대해 이야기를 해보자. 그 자발적인 희생이 공동체에 도움이 되기 위해서는 그 희생이 이기적인 이유로 이타적인 행위를 하는 것인지, 아니면 이기적인 이유로 이기적인 행위를 하는 것인지를 분명하게 구별해서 용인유무를 결정해야 한다. 그러니까 하청업체나 비정규직도 대변하고 사회와 기업까지 고려하는 노조가 되어야지 귀담아 들을 가치가 있다는 것이고, 이성을 증오하고 혐오하는 평등주의자가 아니라 사랑하고 포용하는 평등주의자가 되어야 귀담아 들을 가치가 있다는 것이다. 무언가 이익과 정의를 주장할 거면 그것을 위한 희생과 더불어 공동체에 이익이 전제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무작정 혐오하고 증오하는데 어찌 공동체에 이익이 될 수 있겠나? 기업을 혐오하고 기업의 편을 드는 노동자를 혐오하는 이들이 있다. 이들의 주장이 공동체에 이익이 되겠는가? 남성을 혐오하고 남성과 가까이 지내는 여성을 혐오하는 이들이 있다. 이들의 주장이 공동체에 이익이 되겠는가? 혐오로 가득 찬 이들의 이기적인 의견은 굳이 귀담아 들을 가치가 없다. 그들은 증오와 혐오를 정의의 도구로 만들어 서로를 할퀴고 상하게 만들었다. 공동체 외부에 대한 혐오와 증오도 바람직하지 않지만 공동체 내부에 대한 혐오와 증오는 보다 더 끔찍하다. 그렇다고 그들의 행동이 아예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다. 지금까지 과거 기업과 남성의 횡포가 어마어마하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언제까지 과거에 얽매일 셈인가? 여성이 차별 받는 것은 성별 관계 없이 모두가 협력해야 할 문제라고 말하니 왜 남성들과 협력해야 하냐며 거부하는 댓글을 봤다. 그리고 그 댓글을 지적하는 여성은 없더라. 정말 끔찍하다. 과거에 속박될수록- 과거의 불행에 집착할수록 현재와 미래는 불행해진다. 불행했던 과거를 들춰내며 감성을 자극해 서로를 공격하여 불행에 빠지지 말고 이성적으로 가능한 모두가 행복할 수 있는 길을 찾았으면 좋겠다. 제발 미래로 갈 수 있으면 좋겠다. 그래. 사실 나도 모른다. 난 한국기업이 국민들을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최근엔 모르겠는데 IMF 때만 해도 제 이익만 챙기다 끝나지 않았나. 누구 말마따나 국민들을 개돼지로 여기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제 이익만 챙기던 조선 기득권들의 전철을 밟지 않기를 바란다. 자유주의의 목적은 모든 인간의 자유다. 모든 인간이 정부, 자본, 의식주 등에서 자유롭게 자신의 능력을 갈고 닦아 인류의 발전에 공헌하는 것이 바로 자유주의가 추구하는 성장이다. 모든 인간이 자유롭게 능력을 발휘하여 사회를 행복하게 만드는 것이 바로 자유주의가 추구하는 행복이다. 자유주의는 말 그대로 인간의 자유의지에 최대한 맡기는 걸 의미한다. 알아서 잘 할게요. 라고 말하는 아이와 비슷하다. 반면 사회주의는 인간의 자유의지로 스스로를 통제하는 게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는 정부에게 그 통제를 맡기는 걸 의미한다. 알아서 못하겠으니 시키는 데로 할게요. 라고 말하는 아이와 비슷하다. 스스로 빈부격차도 사회의 갈등도 혼란도 불행도 통제 불가능한 사람들의 도피처가 바로 사회주의다. 간단히 말해 미숙하다. 신분에 지배로 통제 당하던 사람들이 주어진 자유를 감당하지 못하고 다시 한번 정부에게 통제해달라 바라는 것이 과연 제대로 된 진보인지 묻고 싶다. 사회민주주의는 민주적인 절차로 통제해달라 요구하는 것이고 공산주의는 폭력적이고 독재적인 방식으로 강제로 통제해 버리는 것이다. 이건 자유롭게 날던 새가 다시 새장으로 들어가는 모양새. 자신의 의지로 새장에 들어가는 것은 자유지만 그것은 미숙한 자유다. 자유방임주의는 제멋대로 구는 아이 같은 미숙한 자유고 사회민주주의는 자발적으로 시키는 데로만 하겠다는 아이 같은 미숙한 자유다. 흔히 공산주의가 이상이라고 하는데, 그보다 더 이상적이고 추구해야 하는 것이 바로 자유주의다. 공산주의 같은 독재체제는 독재자만 잘하면 되지만 자유주의 같은 민주체제는 모든 국민이 잘해야 되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자유주의가 사회주의보다 낫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서는 스스로 통제할 수 있다는 걸 보여줘야 한다. 지배는 결코 자유주의가 될 수 없다. 지배자의 자유는 이미 독재자가 잘 보여주고 있으니까. 누굴 지배하고 싶으면 합의하에 플레이로 즐겨라. 혈통의 지배로부터 자유롭기 위해 자유를 외치던 자본주의자들이 혈통지배자들과 마찬가지로 자본지배를 할 것이 아니라 다른 자유주의자들과 같이 자유를 외치고 자유를 위해 살았으면 좋겠다. 이것이 나의 희망이다. 나는 남성들이 여성들을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여성들을 사랑한다면 최소한 여성혐오로 얼룩진 사람들을 비판하고 그들의 주장에 선동되지 말아야 하는 것 아닌가? 가만 보면 이기적인 여성주의자를 공격한다는 명분으로 모든 여성을 싸잡아 공격하는 것에 휘말려 같이 욕하고 있다. 일부 여성의 감성을 비난하는 이들이야말로 감성적인 대응을 할 때가 있었다. 일부 여성의 남성혐오를 비판하고 싶다면 여성혐오를 하는 사람들도 비판해야 한다고 본다. 남자와 여자, 젊은이와 늙은이, 부자와 빈자 등 모두가 사랑할만한 가치가 있는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다. 이것이 나의 희망이다. 자신을 위한 희생이 공동체에 도움이 되기 위해서는 공동체의 도움이 되는 희생을 하는 사람과 집단을 존중하고 아끼고 그들의 주장에 귀를 기울이면 된다. 간단한 예로 자발적으로 군복무를 하고 자발적으로 아이를 낳는 그런 사람들을 존중하면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어떤 이익이나 정의를 요구하면서 그걸 위해 어떤 희생을 하고 그 희생으로 공동체에 이익이 된다는 걸 주장하는 이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면 된다는 것이다. 어떻게 된 게 정의를 주장하면서 어떤 손해도 감수하지 않겠다는 이야기를 할 수 있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권리를 달라, 그러면 어떤 책임을 지겠다. 또는 그건 잘못된 거다, 나도 잘못된 걸 하지 않겠다. 그런 식의 주장이 나와야 하는 것 아닌가? 가령 여성이 입사와 진급에 차별을 하지 말라달라고 주장한다면, 힘들고 고된 일도 같이 한다고 해야 하는 거다. 오지 파견도 당직도 평등하게 말이다. 가령 갑질에 불만을 느낀다면 꼰대질도 하지 말아야 하는 거다. 회사에서 갑질당해서 술 마시고 집에 들어와서 아이들에게 꼰대질을 하는 걸 보면 답답하다. 어른에게 꼰대질 당해서 욕하고 서비스직종에게 갑질하는 것도 답답하다. 기업이 규제가 강해 성장에 해가 된다고 주장할거면 규제를 풀어줬을 때 상응하는 희생을 통한 공동체 이익을 제시했어야 했다. 노동자가 CCTV감시가 인권에 침해된다고 주장할거면 알아서 일을 잘해서 생산성을 높였어야 했다. 이익이든 정의든 어떤 주장을 할거면 그걸 위한 희생을 각오해라. 그리고 그런 각오가 되어있는 이들의 주장에 귀를 기울이면 되는 거다. 이런 사회적 인식변화와 그걸 토대로 한 제도적 변화가 이루어지면 자연스럽게 공동체를 위한 자발적인 희생이 이어질 것이다.

 

 

 

그런데 이런 자발적인 희생은 사실 바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미워하는 상대를 위해 희생하고 싶어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아무리 공동체를 위해 희생하는 이들을 존중한다고 해도 서로를 미워하는 한 매우 어려운 일이라는 것이다. 노사가 서로를 혐오하는데 손해라는 희생을 감수하고 서로를 위한 타협이 가능할까? 이성을 혐오하는데 이성의 권리증진에 찬성하는 사람이 있을까? 군대에 가서 비리와 부조리를 보며 애국심이 사라졌다는 사람들이 많다. 나라를 사랑한다는 마음가짐으로 징병이란 희생을 감내하고 있었는데 그게 사라지고 말았단 얘기다. 자발적인 희생을 하게 하기 위해서는 사랑할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해야 한다. 물론 사랑하지 않아도 필요에 의해 희생할 수 있다. 그러나 거짓으로 한 행동의 끝은 그리 좋지 못한 법이다. 반드시 탈이 나게 되어있다. 이런 것처럼 자발적 희생의 기피는 사실 애정결핍이 낳은 현상이다. 지배국가에서 하던 강제로 하던 희생에서 자유국가에서 하는 자발적인 희생으로 바뀌었으니 하고 싶어야만 희생을 하게 되는데, 하고 싶지 않으니까 하지 않게 되는 거다. 그리고 그 애정결핍은 지배국가의 도덕과 가치관에 영향을 받았음을 강조하고 싶다. 연령으로 위아래를 정해 복종하는 질서를 만들고(장유유서), 직종에 따라 신분을 나눠 차별하는(사농공상) 그런 조선의 문화를 물려받았으니까 나이로 차별하고 직업으로 차별하는 거다. 한국은 지배국가의 차별하는 문화를 물려받고 자유국가의 자유롭고 평등한 이념을 전수받았다. 그게 얼마나 재미있는 현상들을 초래했는지에 대해 잠시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어떤 집단을 분석할 때, 그 집단이 어떤 행동원리를 가지고 있는지 알게 되면 이해가 가능해진다. 첫째, 경쟁. 둘째, 발전. 셋째, 민주주의. 넷째, 문화. 다섯째, 적폐. 첫째인 경쟁은 상명하복의 유교문화에 평등한 민주주의 체제가 도입되었기 때문에 발생하였다. 평등한 체제기 때문에 대부분 능력만 있으면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문화는 상명하복이라 상대적으로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이 낮은 위치에 있는 사람을 지배할 수 있었다. 표면은 민주적이기 때문에 대놓고 하지는 못해도 은밀하게 상하를 나눠 차별하게 되었다. 그 현상이 바로 갑질과 꼰대질이다. 경쟁에서 패배한 사람은 피지배자로 전락할 우려가 있기 때문에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하게 되었다. 왜 과열경쟁이 발생하게 되었는지 알겠는가? 지배 받고 싶은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그러니까 노력한 것이다. 지배 받기 싫으니까. 뭐 개중에는 지배하고 싶어서 노력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어떤 학생이 행복하기 위해 노력을 왜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며 고민을 토로했다고 한다. 행복을 위해 좋은 대학을 가고 좋은 직장에 취업하라고 하는데 그런 노력을 해야 할 이유를 모르겠다고 토로한 것이다. 이에 대한 답은 각자 다를 것이나 나는 두 가지를 지적해보겠다. 하나는 보상의 한계가 있다는 것. 아무리 노력해도 급여만으로 집을 사기도 벅찬 세상 속에서 노력의 의미를 찾지 못하겠다는 것이다. 둘은 애초에 노력하는 까닭이 행복하기 위해서 노력하는 게 아니었다는 것. 행복을 위해서 노력한 것이 아니라 불행하지 않기 위해서 노력했던 것이다. 하나는 굳이 자세히 설명하지 않아도 알 것이다. 자산가가 얻는 잉여가치가 늘어날수록 빈부격차는 커지게 되어있고 후발주자는 노력대비 얻는 보상이 점점 줄어들게 되어있다. 이는 게임에서 올드비(고인물)과 뉴비(청정수) 문제를 대입해보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뉴비가 아무리 노력해도 올드비 서브 캐릭터 하나 이기지 못한다. 쌓아 올린 재화의 차이가 극심하기 때문이다. 그런 상황에서 올드비가 뉴비를 지원하는 걸 반대하면 뉴비는 얼마 있지 않아 그만둬버린다. 현실에서는 출산율이 줄어들고 청년들이 노력하지 않거나 사는 걸 그만둬버린다. 둘도 앞서 이야기한 걸로 알고 있을 것이다. 지금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하는 것은 행복하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다. 불행하지 않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이다. 사회구조상 남들보다 위에 서야 지배 받지 않기 때문에 경쟁에서 패배하면 지배 받는 걸 좋아하는 일부를 제외하면 불행해질 수밖에 없다. 본질을 잘못 보고 행복을 위해서라는 명분으로 노력을 강요 받자 그 의미를 알 수 없어 헤매게 된 탓에 노력을 해야 할 이유를 찾게 된 것이다. 남들보다 위에 서야 불행해지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은 달리 말해 그 나머지는 전부 일반적으로 불행한 상황이란 얘기가 된다. 우리 사회가 불행으로 가득 찬 까닭은 거기에 있다. 과열경쟁은 유교의 불평등한 사상 때문이었고 그 덕택에 인재들을 쥐어짜서 우수한 결과를 냈지만 그만큼 불행한 사람들로 가득 찬 사회가 되었던 것이다. 둘째인 발전 또한 유교의 영향이 크다고 본다. 유교는 장유유서라는 상명하복의 질서를 올바른 도리로 만들었다. 그러다 보니 국가 전체가 군대인 것처럼 체계적으로 움직이게 되었다. 맨 위에 있는 사람이 방향만 제대로 가리키면 군말 없이 따랐기 때문에 지금까지 끊임없이 발전했었다고 본다. 군대에 가면 철이 든다는 소리는 군대에 가야 유교가 만든 상명하복의 질서에 적응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한강의 기적은 국가가 군대처럼 움직였기 때문에 가능했다. 하지만 그건 자유롭지도 않고 평등하지도 않고 행복하지도 않다. 그리고 잘못 가리키면 중국의 제사해 운동이나 문화대혁명과 같은 일이 벌어질 수도 있다. 시키는 데로 군말 없이 다하니까 그런 현상이 일어날 수 있는 것이다. 유교를 적폐로 몰아 문화대혁명으로 지웠다는 얘기도 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형식상에 불과하다고 본다. 공산당에 복종하는 그 행태를 보면 본질은 바뀌지 않았다. 유교를 대체할 새로운 도덕이 있지 않는 이상 본질은 바뀌지 않는다. 한국도 유교를 버렸지만 유교가 만든 문화는 남아있지 않는가? 미국의 커티스 르메이가 일본을 공격할 때 한 말이 있다. 무고한 민간인은 없다. 일본은 모든 국민이 전쟁물자를 만들기 위해 동원되고 있었다고 한다. 스즈키는 볼트, 하루보노는 너트, 키타가와는 공장에서 조립한다. 상명하복이 일상화된 국가에서는 모든 민간인이 전쟁의 도구로 활용된다는 얘기였다. 한국, 중국, 일본 모두 상명하복의 유교문화가 자리잡은 국가답게 전체주의적으로 움직인 경험이 있다. 지금은 조금씩 개선되고 있지만 그 잔재가 남아 국가와 세계를 혼란케 하고 있다고 본다. 유교문화권은 분명 군대 같은 체계적인 움직임으로 빠른 발전을 했지만 그 만큼 불행이 겹겹이 쌓여있는 국가들인 것이다. 셋째인 민주주의는 적이 있기 때문에 가능했다. 중국은 공산당에 복종하고 일본은 자민당에 복종한다. 상명하복의 유교문화권은 기본적으로 윗사람에게 복종하는 게 올바르기 때문에 민주주의가 발전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서 한국은 민주주의가 발전할 수 있었는가? 사실 한국도 보면 민주주의가 발전할 수가 없었다. 상명하복. 윗사람에게 복종하게 되어있는데 어떻게 발전할 수 있나? 그런데 발전했다. 어떻게? 그건 적의 존재가 있기 때문이었다. 프랑스 시민혁명을 부르주아 혁명이라 일컫는 사람들이 있다. 부를 축적한 부르주아가 사회 주도층이 되기 위해 프롤레타리아를 선동하는 것으로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한 반박이 있다. 프롤레타리아는 사상가 장 자크 루소의 영향을 받아 자신의 의지로 혁명에 가담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질문이 하나 있다. 그 장 자크 루소의 사상을 전파할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한 것은 누구겠는가? 현대와 같이 인터넷도 있는 상황이 아니니 쉽게 정보 전달이 되는 것도 아니다. 자유와 평등의 가치를 시민들이 배우게 된 그 배경에는 부르주아의 지원이 있었다고 본다. 물론 그들의 이익을 위해서였겠지만. 만약 부르주아가 왕족과 귀족과 사이가 좋았더라면 시민혁명이 일어나기 어려웠으리라 생각한다. 한국도 마찬가지다. 3.15 혁명은 학생운동으로 시작했다. 그렇다면 그 학생들에게 민주주의의 가치를 알려준 사람들은 누구였겠는가? 이승만은 반공 반일 친미(미국을 경계했으나 기본적으로)로 외교적이나 이념적 문제가 발생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그는 정적을 공산주의자로 몰아 공격하며 독립운동가와 지식인들의 반발을 사게 되었다. 정치권력을 위해 친일파를 비호하는 일도 서슴지 않았다. 한국정부 단독수립이라는 같은 뜻은 지녔던 이들(윤보선)마저 등을 돌릴 정도였다. 사소한 것 하나하나 자신이 결정해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에다가 그의 측근(윤치영) 또한 나폴레옹과도 같은 독재적 지도자가 되길 권했던 것을 보면 권력을 위한 부정선거는 필연이었을지도 모른다. 이런 상황에서 부정선거가 발각되자 학생들이 앞장서는 시민혁명이 발발했다. 그 학생들의 배경에는 분명 이승만을 반대하는 독립운동가와 지식인들의 가르침이 있었을 거라 본다. 만약 이승만과 다른 독립운동가와 지식인들과 사이가 좋았더라면 시민혁명이 일어나기 어려웠을지도 모른다. 부정선거가 되었다는 사실 자체가 전파되지 않았을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그랬다면 다른 유교문화국가와 마찬가지로 오랫동안 독재를 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건 이후 박정희의 등장으로 현실이 되었다. 당시 한국식 민주주의라는 표현으로 3선 개헌을 정당화하며 유신독재를 시작했다. 한국 또한 유교국가의 때를 벗지 못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그렇게 쉽게 독재를 받아드릴 수 있었던 것이다. 민족개조론을 주장했던 안창호나 가족주의를 경멸하며 대를 잇는 걸 거부했던 서재필 같은 경우를 보면 이미 당시에도 유교문화의 한계를 깨닫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싶다. 한국과 북한은 같은 민족이다. 한국과 다른 유교문화 국가들은 같은 유교영향권 아래에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한국에서 유독 민주주의가 발달했던 것은 오로지 적의 존재 말고는 없다. 만약 중국과 일본과 북한도 적의 존재가 있어 그 적이 민주주의 혁명을 외치며 일어날 수 있었다면 유교문화의 영향을 적게 받으면서 제대로 된 민주주의가 활성화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원래 자유당과 민주당은 독립운동가와 친일파가 혼재되어 구성되었다고 한다. 이승만도 윤보선도 반일주의자였으니까 말이다. 그러다 이후 박정희의 한일기본조약 체결부터 친일 여당과 반일 야당이 갈라져 투쟁한 것으로 보인다. 한국은 투쟁의 역사를 통해 민주주의가 발전했고 그 투쟁은 적이 존재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적이 없었다면, 대다수의 국민들이 복종하는 지배자가 있었다면 한국의 민주주의는 유교로 인해 발전할 수 없었을 것이다. 뭐 지금도 독재자와 그 딸에 복종하는 사람이나 대통령을 이름으로 불렀다고 화를 내는 사람들이 있으니 아직 완전한 민주주의라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적의 존재로 인해 같은 유교문화권인 중국이나 일본보다는 민주적으로 되었다는 것이다. 정치적으로 평등해졌기 때문에 한국은 중국과 일본보다 더 심한 과열경쟁이 생기게 되었다. 중국과 일본은 공산당과 지역구세습으로 정치가 신분제화가 되고 있지만 한국은 아니니까 더 올라 갈려고 기를 쓰게 된 것이다. 중국이나 일본이 보다 민주적으로 변하기 위해서는 기존 질서와 맞서 싸울 민주적인 악당들이 등장하거나 유교문화를 버려야 할 것이다. 적은 윗사람이 아니니까 말이다. 넷째인 문화도 유교의 영향을 받았다. 남녀유별이라면서 어려서부터 이성교제를 하는 걸 부도덕하게 여기는 탓에 유사연애산업이 발전하기 시작했다. 한국은 주로 3차원 이성(아이돌)에 빠져 유사연애를 즐기고 일본은 주로 2차원 이성(창작물)에 빠져 유사연애를 즐기고 중국은 둘 다 즐기고 있다. 유사연애를 즐기는 거야 전세계가 다 하는 거지만 유독 유교문화권만 심하다. 문화는 문화를 즐기는 이들이 많을수록 성장한다. 유사연애산업이 성장한 것은 유사연애를 즐기는 사람이 그만큼 많다는 걸 의미한다. 흔히 한국노래에서 사랑이 빠지질 않고 한국 드라마 영화는 어떤 장르든 사랑으로 빠지게 되어있다는 얘기가 있다. 그것은 연애가 산업으로 이어질 만큼 연애물을 즐기는 이들이 많다는 걸 의미한다. 현실에서 충족되지 못한 사랑에 대한 욕구가 가상으로 이어진 것이다. 일반적인 국가에서는 어려서부터 주위 이성을 사랑하며 살아가니 노래도 드라마도 사랑으로부터 보다 자유로울 수 있었다고 본다. 사랑하는 상대가 주변에 있으니 굳이 문화에서 사랑을 강조하지 않아도 되니까 말이다. 요즘 유명한 BTS의 결과는 다음과 같은 과정을 거쳤다고 본다. 남녀유별로 유사연애산업이 발전했다. 적의 존재로 민주주의가 발전해 성차별이 줄어들어 여성의 입맛에 맞는 아이돌이 등장했다. 상명하복으로 인한 과열경쟁이 우수한 아이돌을 배출했다. 그 결과 기본적으로 남성사회가 많은 전세계 여성들은 자신의 입맛에 맞는 수준 높은 한국 아이돌을 좋아하게 되었다. 이성을 사랑해야 결혼하는 사람이 늘고 결혼하는 사람이 늘어야 출산율도 증가한다. 유사연애산업의 발전은 저출산과 맞바꾼 결과일지도 모른다. 다섯째인 적폐는 지금까지 말한 것들로 인해 발생한 것이다. 꼰대질, 갑질, 비리, 부정, 차별, 저출산, 허례허식 등. 유교문화와 자유롭고 평등한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의 충돌이 만든 폐해들이다. 오래된 유교문화의 폐단이 한국을 불행으로 이끌었다. 많은 사람들은 인간을 적폐로 인식하는데 그건 오래된 폐단이 만든 결과물에 불과하다. 환경이 인간을 만드는 거다. 개개인들은 다를 수 있으니까 오차가 있다는 걸 인정한다. 하지만 집단으로 가면 환경의 영향력이 엄청나게 커진다. 특정 개인이 적폐가 되는 건 그 개인의 유전적 특성일 수 있지만 집단 내에서 적폐가 발생하는 것은 환경이 원인일 확률이 높다는 것이다. 생계형 비리가 무슨 말이겠는가? 생계를 위해 비리를 저지르던 것이 일상화되어 있었다는 걸 의미한다. 급여가 적었던 시절 생계를 위해 일상적으로 저지르던 사소한 비리에 익숙해지다 보니 죄의식 없이 비리를 저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환경에 의한 관습적인 잘못은 개개인의 특성과 관계가 없다. 모두가 잘못을 저지르니 잘못인 것처럼 느껴지지 않고, 그러다 보니 선을 추구하던 사람도 아무렇지도 않게 잘못을 저지르게 되어있다. 우리 사회에 존재하는 대부분의 적폐는 다들 이런 과정을 거쳤다. 그냥 그래왔으니까 그랬던 거다. 예컨대 이런 것이다. 그 동안 화재를 몰고 오던 부도덕한 입시과정이나 불투명한 기부단체는 개개인의 특성보다는 악습이 만든 잘못이다. 다들 그렇게 하니까 그랬던 것뿐이다. 누군가의 잘못을 지적하거나 누군가를 옹호하고자 하는 게 아니다. 우리사회, 아니 인간의 잘못은 대부분 관습에 근거한다고 주장하는 것뿐이다. 관습, 관행, 우리가 익숙해서 잘못된 것을 느끼지 못했던 그 모든 것들이 적폐를 만들어 사회를 불행하게 만드는데 일조했다. 진정 적폐를 몰아내고자 한다면 사람보다는 그런 사람을 만드는 환경을 바꿀 필요가 있음을 강조하겠다. 차별금지법에 찬성하는 사람조차 연하가 연상에게 반말하는 걸 불편해할 것이다. 우리는 얼마나 관습에 취약한가? 어떤 올바른 일을 행하고자 하면 자신이 가지고 있는 고정관념을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이외에도 다양한 영향을 끼쳤지만 여기까지만 하겠다. 이렇게 지배국가의 차별하는 문화와 자유국가의 자유롭고 평등한 이념의 충돌은 이와 같은 빠른 발전과 깊은 불행을 안겨주었다고 본다. 여기서 하나의 질문이 있을 수 있다. 이 상황이 장단점이 있는 거라면 발전을 위해 불행을 감수할 수 있는 게 아니냐고 말이다. 하지만 상명하복의 질서가 만드는 발전에는 한계가 있다. 윗사람이 시켜서 하는 일에는 창의력이 발휘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가발을 수출하고 파병이나 파견을 보내어 발전하는 건 분명 상명하복의 질서에서 보다 빠르게 가능하다. 하지만 창작물을 만들고 새로운 아이디어를 내고 고부가가치를 만드는 산업에서 상명하복은 오히려 발전을 저해한다. 윗사람의 창작물이나 아이디어만 인정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보겠다. 어떤 창작물을 만드는데 시시하고 재미없는 결과가 나오는 건 전문가도 아닌 사람들이 위에 있다는 이유 하나로 간섭하고 바꾸기 때문이라고 한다. 광고를 만들어도 광고주가 간섭해서 재미없게 나오고, 게임을 만들어도 투자자가 간섭해서 재미없게 나온다. 비전문가들이 위에 있다는 이유 하나로 자신의 의견을 밀어붙인 결과가 바로 재미없는 창작물이라는 것이다. 발전도 막는데 불행하기까지 한다면 더 이상 유교문화를 방치할 까닭은 어디에도 없다. 사회적 불행은 서로를 미워하게 되는 촉매재가 되었고, 그 미움은 사회적 애정결핍이 되어 희생을 꺼려하게 되었다. 애정결핍이 일어나자 문화로 애정을 충족하게 되는 기현상이 발생하여 모든 문화에 사랑이 섞이게 되었다. 사랑에 대한 애절한 갈구는 사랑이 결핍되어있음을 반증한다. 유교문화가 낳은 애정결핍으로 인한 희생기피현상을 해결하려면 무엇이 우선되어야 하겠는가? 당연히 사랑이다. 취미나 물건이나 우상에 쏟는 애정을 사람에게 쏟을 수 있는 환경조성이 가능해져야 자발적인 희생이 나타나 공동체를 지탱할 것이다. 그게 안되면 인구소멸로 우리는 자연스럽게 사라지게 될 것이다.

 

 

 

도덕, 무엇이 옳고 그른가? 가치관, 무엇이 가치 있는가? 희생의 이유, 무엇을 위해 희생을 해야 하는가? 지배국가에서 벗어난 자유국가에서 해결할 우선과제라고 생각한다. 지금까지 그런 고찰이 얼마나 있었는가? 우리가 생각하는 옳고 그름이 과연 자유국가의 것이라고 할 수 있었는가? 한국의 초대 대통령인 이승만부터가 그런 모순을 안고 있었던 사람이었다. 미국에서 배워온 자유와 민주의 가치를 설파하던 사람이 유교의 영향을 받아 모든 것을 자기 영향권 아래에 놓아 사사건건 간섭하여 지배적인 영역을 구축했다. 자유를 강조하던 장면은 총리가 되고서도 어머니에게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비는 등 전형적인 유교적 복종이 몸에 밴 인물이었다고 한다. 이미 새겨진 도덕은 스스로 인지하고 있지 않는 이상 바꿀 수가 없는 그 사람 특유의 행동원리라는 형태로 자리잡고 있다. 다들 안다. 꼰대질이 나쁘다는 걸. 그런데 연하가 자신과 맞먹으려고 하는 걸 보면 속상하고 답답해진다. ? 이미 도덕이 새겨졌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에게 새겨진 지배국가의 도덕을 지우고 자유국가의 도덕을 스스로 갖춰 나가야 할 때가 왔다고 말하고 싶다. 모든 어른을 공경해야 하는가? 아니다. 제 역할을 다하는 어른을 공경해야 한다. 잘못을 저지른 어른도 공경하라고 말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모든 걸 윗사람 의견으로 결정해야 하는가? 아니다. 사람 사이에서 위아래가 존재하지 않다. 단지 역할이 다를 뿐이다. 연령성별 상관없이 모두가 능력에 맞는 역할을 맡고 그 역할의 수행여부로 존중을 결정하고 기여도의 차이로 대우를 달리해주면 된다. 네 주인은 누구냐며 경비원을 폭행했던 사실이 뉴스에 나온 적이 있었다. 나는 담담하게 충격을 받았다. 알면서도 놀랄 수밖에 없었다. 한국은 아직도 지배국가의 도덕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그런 사람이 실존한다는 것을 알게 되니 굉장히 우울해졌다. 대놓고 그렇지 않더라도 사회 곳곳에서 그런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아이들을 위해서라면서 아이들을 통제하는 사람들이 많다. 언제까지 자기 손 안에서 키우려고 할 것인가? 이미 정보의 통제는 불가능하다는 걸 모르는 건가? 아이들이 즐기는 문화의 검열 좀 적당히 했으면 좋겠다. 사춘기 아이에게 포르노를 가르치지 않는 것은 구시대의 도덕이 만든 잘못된 관념에 불과하다. 식욕이 있는 아이에게 식사방법을 알려주고 수면욕이 있는 아이에게 자는 방법을 알려주는 것은 당연한데 어째서 성욕이 있는 아이에게 성욕을 해소할 방법을 알려주지 않는 건가? 이치에 맞지 않는 것은 대체로 과거의 도덕으로 형성된 관습이 큰 영향을 끼친다고 볼 수 있다. 식사예절이라. 어른이 수저를 들어야 밥을 먹게 하는 것 자체도 참 우습기 짝이 없다. 조상의 묘를 돌보는 벌초도 의미 없는 행위라는 걸 이제는 알았으면 좋겠다. 그건 그냥 조상을 신으로 모시던 유교국가의 도덕이 만든 잔재일 뿐이다. 유교는 신이 없는 게 아니다. 조상을 신으로 모시던 종교다. 우리 사회 곳곳에서 불합리함을 형성하던 수많은 도덕들에 대해 다시 한번 점검해볼 필요가 있음을 강조하고 싶다. 모든 걸 제거하자는 건 아니다. 예컨대 반말과 존댓말은 연령차별이다. 연상은 연하에게 반말하고 연하는 연상에게 존댓말을 한다. 그 때문에 초면에 반말을 들으면 연하취급 받는 것 같아 불쾌해하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이건 다른 용도로 사용할 수 있다. 친하면 연령차이 관계없이 반말을 하고 친하지 않으면 존댓말을 하면 된다. 친분으로 반말과 존댓말을 구분 짓는다면 자유국가에 맞는 언어사용이 가능해질 것이다. 가치관도 지배국가에 물려받은 것 같은 걸 가지고 있다. 연령, 학력, 지위, 재산이 높은 것을 가치 있게 여긴다. 높으면 가치가 있고 낮으면 가치가 없다. 실제 용도와 관계없이 그런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다. 모닥불을 피울 때엔 불에 안 타는 지폐보다 잘 타는 나뭇가지가 더 쓸모 있다. 어떤 용도나 역할로 가치를 판단하는 것이 자유국가에 맞는 가치관이라 생각한다. 나는 이런 역할로 가치를 판단하는 역할주의가 유교의 도덕과 가치관을 대신할 수 있다고 주장하겠다. 역할로 가치를 판단하기에 평등하고, 역할을 수행하기만 하면 그 외엔 자유가 보장되기 때문에 자유롭다. 이런 식으로 도덕과 가치관을 자유국가에 맞게끔 재정립하고 서로를 사랑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어야 자유국가에 맞는 나를 위한 희생이 공동체에 이익을 가져와 결과적으로 공동체를 위한 희생이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나를 위한 희생. 자유국가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은 자유롭게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면 된다. 마음껏 이기적으로 살아라. 그 이기적인 욕심이 공동체에 이익을 가져오면 된다. 마음껏 이기적인 주장을 펼쳐라. 공동체가 그 주장을 판단해서 공동체에 이익이 되는 걸 수용하면 된다. 우리가 자유를 경계하고 부정하는 것은 그것이 미숙한 자유였기 때문이다. 아무 책임도 지지 않고 하고 싶은 대로 다 했던 그 어린아이와도 같은 자유는 노동자를 착취하고 제국주의가 되어 침략을 하고 전쟁을 발발하게 했다. 그런 미숙한 자유 때문에 또 다른 미숙한 자유인 사회민주주의나 자유를 빼앗는 지배인 공산주의가 유행하게 된 것이다. 성숙한 자유라는 건 해야 할 일을 자신의 자유의지로 결정한다는 걸 의미한다. , 공동체를 위해서는 부를 분배해 빈부격차를 줄여야 하는구나. 알아서 분배하면 사회주의는 필요가 없다. , 공동체를 위해서는 어떤 주장을 펼칠 때 그에 대한 책임과 희생이 필요 하는구나. 알아서 책임지고 희생하면 분쟁은 거의 없다. 전염성이 강한 바이러스의 유행으로 마스크를 착용하는 것은 시켜서 하는 건가? 아니면 자유의지를 가지고 그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여 자발적으로 하는 건가? 전자라면 사회주의에 어울리는 사람이고 후자라면 자유주의에 어울리는 사람이다. 모두가 다 하는데 제멋대로 굴겠다며 하지 않는 사람은 자유방임주의가 어울리는 사람이다. 자유주의 공동체를 위해 어떤 사람이 필요하겠는가? 지금도 그렇지만 앞으로는 더더욱 자발적인 희생이 없이 공동체는 유지될 수 없을 전망이다.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일자리를 위해 인공지능과 로봇을 거부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스포츠 심판이 인공지능으로 대체된다는 소식이 있었다. 그걸 반대하면 스포츠의 발전이 있을 수 있겠는가? 법조계, 의료계, 언론계 전부 인공지능이 도입될 수 있는 분야다. 그들이 그걸 무조건 거부하면 발전할 수 있겠는가? 다 수용해서 발전했다고 가정해보자. 그런 상황이면 인공지능과 로봇을 만드는 기업과 재벌들이 얻은 수익을 공동체를 위해 희생을 해야 한다. 그걸 안 하겠다고 하면 공동체는 유지될 수가 없다. 우리는 기술발전을 거부하고 정체되는 것과 기술발전을 받아드리고 희생하는 것,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공동체가 유지될 수 있다는 걸 이제는 알아야 한다. 시대 변화를 받아드려야 한다. 미래로 가자.

 

무엇을 위해 희생을 해야 하는가? 그 답이 자신을 위해서라면 희생의 이유는 각자 다 다를 것이다. 자신이 하고 싶은 게 다 다르니까. 그렇다면 스스로 물어봐야 한다. 나는 무엇을 위해 희생을 해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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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족하네요. 좀 더 공부해서 더 정리해야겠습니다.

분명한 것은 도덕, 가치관, 희생의 이유를 자유국가에 맞게 정립해야 한다는 겁니다. 기초가 튼튼해야 곧고 바르게 성장이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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