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즈맛나쵸 MYP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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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_습작모음] [시] 미움적기 (0) 2024/10/03 PM 06:06

미움적기



네가 빼곡히 적어둔 미움은 한때, 학교를 휩쓸었다.

키득거리는 아이들 손에서 손으로, 교실에서 교실로

잘게 잘게 찢어진 쪽지는 어느새, 모두의 손에 들려있었다.


들불처럼 번져나간 미움적기는

장맛비를 마주한 듯 사그라들어

방학 지나서는 다 끝난 놀이가 되었지만

너는 여전히 미움을 적었다.

반들반들한 교실 칠판에

중앙 현관 큼직한 게시판에

우둘투둘한 학교 담벼락에

마구마구 미움을 적었다.


낙엽이 질 때쯤엔 미움은 으레 네 것인 듯

네가 적지 않은 쪽지도 네 자리로 보내졌다.

그럼에도 너는 계속 미움을 적었다.

보내고, 적고, 받고, 적고,

보내고, 적고, 받고, 보내고,

적고, 적고, 적고...

보내는 것도, 받는 것도 잊은 채

하루 종일 적기만 했다.


무엇이 그리 미웠던 것인지, 여전히 모르겠다.

나는 다만 빼곡히 적어둔 미움 뒷장

네 이름이 적혀있었다는 것만을 기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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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_습작모음] [시] 햇볕은 지지 않는다 (0) 2024/09/25 PM 06:16

햇볕은 지지 않는다



바람이 온 나무를 헝클이며

자신을 뽐내듯 휘몰아치고

지나간 자리마다 잔해를 남기며

고삐풀린 망아지처럼 날뛰어도

햇볕을 어찌하진 못 하더라.


구름이 온 지붕을 뒤덮으며

먹빛 장막으로 마을을 감싸고

축 처진 이불처럼 내려앉아

찡그린 얼굴로 침을 튀겨도

햇볕을 어찌하진 못 하더라.


서리가 온 창문을 두드리며

자신이 왔음을 소란스럽게 알리고

떠날 때마저 구질구질하게 젖어들어

한참을 성가시게 굴어도

햇볕을 어찌하진 못 하더라.


온 세상이 야단스럽게

들이치는 와중에도

햇볕은 말없이 스며들어

한참을 비추다

왔듯이 스르륵

발걸음을 옮기는 중에도

깊고 깊은 노을에다

내일 또 보자 적어두었네.

보아라, 세상 그 무엇도

햇볕을 어찌하진 못 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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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_습작모음] [시] 종이비행기 (1) 2024/09/20 PM 05:15

종이비행기



종이비행기는

그럼에도 날았다.

오늘은 바람이 불지 않는다며

하늘이 고개를 저었다.

금방이라도 비가 올 것 같다며

구름도 고개를 저었다.

종이비행기는

그럼에도 날려달라 했다.


단단한 돌벽에 부딪쳐 고꾸라지면

다신 날지 못한다.

물 고인 웅덩이에 빠지기라도 하면

영영 날지 못한다.

접힌 날개를 편다 하여도

젖은 날개를 말린다 하여도

다시는 예전처럼 날지 못한다.


그럼에도

종이비행기는 날았다.

두려움을 떨쳐내듯 훨훨

황홀한 궤적을 그으며

찬란한 비행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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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너무 멋지네요!
[단편_습작모음] [시] 하얀 편지 (0) 2024/09/10 PM 05:30

하얀 편지



눈물이 뚝뚝 떨어져

묽어진 잉크로

편지를 적어가도

당신이 슬퍼하지 않기를


하얀 거짓말을 주고받아도

이 마음엔 거짓 한 점 없으니


당신은 언제나 태양이었다.

푸른 눈으로도 감히 뒤덮지 못할

영원한 봄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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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_습작모음] [시] 불감 (0) 2024/09/03 PM 05:12

불감



아침부터 들려온 이른 죽음에도

애써 슬퍼할 기운이 나질 않았다.

더듬어보아도 이어진 연이 없다며

덤덤하게 덮어놓을 뿐이었다.


정각마다 울리는 종소리처럼

사람들이 떨어진다던데

일상으로 스며든 괴담처럼

어느덧 멀어버린 한쪽 눈.

잔뜩 찡그려보아도 가늠이 안 된다.

얼마나 멀어진 건지.


헤엄칠 겨를도 없이

끄집어진 나는

어느새 이리 차가워졌던가.

한 줌의 부끄러움은 남았던지

연거푸 뻐끔거렸다.

아니, 헐떡거렸다.

살려달라고, 살려달라고.


나는 비가 오기만을 기다릴 뿐이었다.

시 한 편 떠놓고, 그저 기다릴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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