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광수 선생은 레디앙에 ‘현대 인도인민의 역사’를 이미 연재한 바 있다. 주로 진보세력 혹은 좌파들의 역사와 경험들을 중심으로 다뤘다. 인도는 선거가 치러지는 국가 중에서 세계 최대 인구의 나라이다. 이번에는 인도의 우파들, 수구보수파들의 난동사를 중심으로 연재글을 시작한다. 이번 인도 연재 시즌2에는 이광수 선생과 함께 한형식 당인리 대안정책발전소 부소장이 함께 글을 주신다.<편집자>
????????
인도는 아시아에서 가장 먼저 제국주의의 침략에 쓰러진 나라 가운데 하나다. 18세기 후반에 들어오면서 영국은 동인도회사를 앞세워 인도를 침략했다. 그들은 벵갈지역부터 서서히 인도를 식민화하였는데, 처음 100년 정도가 지나갈 때까지 인도 전체의 단합된 저항에 직면하지 않았다.
영국 정부를 대리하여 동인도회사는 인도를 재빠르게 근대화와 자본주의 그리고 시장경제에 편입시키고 그 위에서 갖은 수탈을 자행하여 엄청난 양의 부(富)를 빼앗아 갔다. 카를 마르크스조차도 인도의 봉건사회가 해체되기 위해서는 영국의 철도가 들어가야 한다고 말할 정도였으니, 식민주의자들이 가진 ‘백인의 짐’은 절대 선이었다.
그렇지만 인도는 그들이 바란 대로 그렇게 신속하게 근대화의 ‘진보’가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전통의 힘은 여전히 강했고, 근대화에 대한 수구의 반동은 상당한 파괴력을 가졌다.
동인도회사의 지배가 100년 정도가 흐를 무렵부터 인도인 선각자들은 식민주의에 저항하는 기제로서 민족주의를 싹틔웠다. 민족이라는 근대적 개념이 없던 인도 땅에서 싹이 튼 그 민족주의는 힌두교에 기반을 두면서 과거 회귀를 추구하는 복고적 민족주의가 대세를 이루었다.
영국인들을 만난 인도인들은 경제적으로 침탈을 당하는 것보다 자신들을 야만적이라고 취급하는 악의적 오리엔탈리즘과 제국주의적 시각에 대해 더 자존심이 상했다. 그런 과정에서 전통 사회를 지키는 복고적 방향이 대세를 이루었다.
근대화를 통해 돈을 크게 번 일부 하층민들은 카스트 철폐 대신 상층 카스트로 이동하는 방식을 택했고, 제국주의자와 기독교 선교사로부터 야만의 미신으로 지목된 힌두교는 그 개혁의 방향을 과거 회귀로 틀었다. 전체적으로 사회가 근대화되면 될수록 수구화도 강하게 진행되는 경향이 강했다.
유럽에서 발생한 공통의 정치적 목표를 가진 단위로서의 민족이 형성되지 못한 인도에서는 영국 식민주의에 대항하기 위해 뭔가 공통분모를 만들어야 했고, 그것을 힌두교라는 종교에서 찾았다.
힌두교가 공통분모가 되어 형성된 민족주의는 반영 민족주의의 근간 이데올로기가 되다 보니, 그것을 이루는 두 개의 바퀴 가운데 하나는 전통 사회 질서의 보존이 되었고, 또 다른 하나는 반(反)이슬람 적대주의가 형성되었다.
‘이슬람’이 적으로 등장한 것은 민족주의라는 이분법적 개념이 또 다른 이분법적 담론인 종교와 만나다 보니 만들어진 형상이었다.
서구 근대의 개념으로 평가한다면, 엄밀한 의미로 볼 때 인도인은 하나의 민족이 될 수 없는 상태였다. 그런데 식민주의와 싸우기 위해 하나의 민족을 만들려다보니 본질적으로 이분법적인 그 이념에 필요한 남(타인)으로서의 ‘적’이 필요하였고, 그 ‘적’에 ‘우리’ 힌두가 아닌 이슬람이 끼워 맞춰진 것이다. 결국 이슬람과 무슬림은 힌두 전통 문명과 사회를 파괴한 악의 세력으로써 섬멸의 대상이 되었다.
그 둘 간의 분열의 씨는 애초 영국이 인위적으로 뿌린 것이었으나 그 씨를 영국에 대해 저항하기 위한 수단으로 끄집어 든 것은 악마를 배태한 비극의 씨앗이었다.
독립을 향해 가면 갈수록 힌두교에 기반을 둔 민족주의는 기승을 부렸으니 그것은 곧 힌두와 무슬림의 폭력 갈등이 고조되었음을 의미하였다. 결국 인류사 최대 규모의 인위적 이주인 인도-파키스탄 분단의 비극이 발생했다. 숫자로 헤아릴 수도 없고 언어로 형언할 수도 없는 비극이 도처에서 터져 나왔다. 살인, 강간, 납치, 방화 …
인간이 자행할 수 있는 모든 종류의 죄악이 이 분단 공간에서 터져 나왔고 그 결과 인도의 힌두들은 무슬림과 파키스탄을 불구대천의 원수로 여기는 집단 최면에 빠졌다. 그러나 초대 수상 자와할랄 네루의 정부 아래 세속주의의 기틀을 잡은 진보적 성격이 강한 네루의 국가자본주의가 독립국 인도의 기둥이 되면서 그 힌두 민족주의 세력은 크게 약화되었다.
네루가 죽고 난 후 그의 딸 인디라 간디는 겉으로는 국가 자본주의를 국가 운영의 기조로 계승하였으나 실제로는 철저하게 보수적으로 정치를 하였다. 아버지의 후광을 적극 이용해 권력을 세습하더니 자신의 정적은 모조리 쫓아내고 당 이름에 자신의 이름을 집어넣는 등 정당 권력을 사유화 하였고 결국 비상계엄을 선포하여 인도사에서 헌정 중단이라는 단 한 번의 비극을 벌이는 주인공이 되었다.
국민들의 반대를 희석시키기 위해 뻔잡의 시크교 급진주의자들을 자극하여 분리 독립을 주장하는 무장 소요를 일으키게 한 후 그들의 본거지인 황금사원을 중화기로 공격하여 초토화시켜버렸다. 한 종교의 성지를 군홧발로 짓밟은 대가는 분명했다. 인디라 간디는 얼마 되지 않아 자신의 시크교도 초병 두 사람에 의해 암살당한다.
인디라 간디가 암살당한 후 집권 여당은 그 큰 아들에게 권력을 물려주고자 델리에서 힌두들을 자극 선동하여 시크교도들을 학살하면서 추모의 동정표를 그러모았고, 재집권에 다시 성공하였다. 3대 세습이다.
권력이 혈통의 틀을 기반으로 3대 세습까지 가다 보니 힌두 민족주의 야당으로서는 그 존재감을 드러내기가 쉽지 않았다. 정치가 갈수록 보수화 되면서 야당이 사용할 수 있는 카드는 수구 난동밖에 없었다. 국민들 마음 속 깊이 남아 있는 무슬림과 파키스탄에 대한 적개심을 중심으로 국가 이념인 세속주의를 흔들어내는 것만이 유일한 길이었다.
그것은 적대 국가가 항상 도사리고 있고, 전쟁의 위기가 항상 고조되어 있는 분단 상황에 놓인 나라로서는 지고지선의 카드였다. 사회는 여전히 보수적 사회 질서인 카스트가 기능하고 있고 그 안에서 조화와 공존의 메시지가 계급 갈등이나 체제 전복과 같은 진보적 테제보다 훨씬 압도적 지지를 받는 이 나라에서 보수적 명분은 가히 절대적인 지지 텃밭일 수밖에 없었다.
인도는 세계에서 유일하게 서벵갈과 께랄라 등지에서 공산당이 선거를 통해 정부를 구성한, 즉 집권을 한 나라다. 우리 한국의 진보진영은 그 진보진영이 보수와 수구 난동 세력이 앞세우는 기만, 자극, 선동, 집단 광기 등에 어떻게 대응하면서 정치력을 발휘하였고 종국에 가서 권력을 세웠으며 다시 권력을 잃고 또 재기하는지를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그 점에서 우리 저자 두 사람은 그 필요가 서구에서 수입된 좌파 이론을 통해서 충족될 수 없는데다, 인도라는 나라가 좌파의 모든 저항 방식이 이루어져 오고 있는 곳이기 때문에 인도의 진보 저항 운동을 알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우리 두 사람은 2012년에《현대 인도 저항 운동사: 거의 모든 저항 운동의 전시장》(서울; 그린비, 2013)이라는 책을 내놓았다. 그렇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함을 느꼈다. 정치와 사회 변혁이라는 것이 비단 진보 진영의 성과만을 토대로 한다고 해서 이룰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진보 진영의 움직임은 반드시 수구 세력의 움직임을 알고 대처해야만 그 키를 잡을 수 있다.
이제 우리 두 사람은 한국의 진보진영이 사회를 변혁시키고 권력을 잡아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모든 부문에서 인민의 권력이 민주적이고 평등한 사회를 이루어내기 위해 또 다른 절반인 수구의 난동의 역사를 알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 대상이 인도인 것은 진보진영의 역사를 갈무리 하면서 생각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인도라는 나라가 인간이 저지를 수 있는 모든 종류의 수구 난동의 역사가 일어난 곳이라는 사실이 우선 있어서이고, 다음으로 중요한 사실이 또 하나 있으니, 인도라는 나라는 분단을 통해 적국과 대치하고 있는 나라라는 사실이다. 전쟁의 위험이 항상 도사리고 있다는 사실을 말하는 것이이다. 핵의 위협도 마찬가지다.
이런 점에서 한국의 보수 진영이 툭하면 들고 나오는 ‘빨갱이’ 문제와 ‘종북’ 구도는 인도에서 그들이 툭하면 빼어 드는 전가의 보도인 ‘무슬림’ 카드와 매우 유사하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유럽이나 미국의 수구 세력보다는 인도의 수구 세력이 한국의 그것과 더 많이 닮았다. 우리가 인도를 택한 이유는 여기에 있다.
이와 관련하여 또 하나의 독특한 현상 하나를 말하고자 한다. 1947년 독립 이후 2000년대까지 인도 정치는 인도국민회의와 인도국민당 양당 체제를 중심으로 흘러갔다. 물론 전자가 압도적으로 우세하였지만 최근 20년만 보면 그 세력 판도가 엇비슷하게 시소게임을 하는 백중세다.
양당 가운데 하나인 인도국민회의는 초대 수상인 네루 이후 수상직을 거머쥔 인디라 간디가 암살당한 이후 4대 세습을 향해 달려가고 있고, 또 하나인 인도국민당은 극우 민족주의를 발판으로 파시스트 정치를 서슴지 않는 정당이다. 그러면서 그 혈통주의와 파시즘 사이에서 인도 정치는 헤어날 줄 모르고 대부분의 학자나 정치 평론가들도 그 구조는 절대로 깰 수 없는 것으로 보았다.
한국의 정치 지형과 비슷하다. 지역주의와 분단에 뿌리를 둔 적대감의 양당 정치 구조. 아무리 깨려 해도 그 두 빙벽을 넘을 수 없었고, 절망에 몸부림치는 모습이 비슷하다.
그런데 그런 인도에서 그 벽이 깨졌다. 느닷없는 공무원 출신 한 인사가 인도의 부패를 목표로 정치에 올인하면서 단숨에 델리 시정부를 접수해버렸다. 2013년 ‘보통사람당(Aam Aadmi Party)’이라는 당이 혜성같이 등장했고, 그 당은 수도 델리 주 의회 선거에서 연정을 통해 집권 정부를 구성하면서 당의 대표인 께즈리왈(Kejriwal)은 2013년 일약 수도 델리의 주 수상으로 선출되었다.
께즈리왈은 시민 운동 경력 10년도 되지 않은 시민운동가 출신인데, 우리로 치면 경실련 비슷한 성격의 시민단체 (주로 세금 변론, 부정부패 감시, 국민청원 등을 주로 함)를 하면서 민생 위주의 정치를 한다.
처음에는 부패 반대 운동을 주로 맡은 하자레(Anna Hazare)와 함께 투톱으로 시민운동을 했으나, 하자레는 계속 시민운동을 하자고 주장하였고, 께즈리왈은 정치를 통해 세상을 바꾸자고 해 정당을 창당하고 그 다음 해에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다.
‘보통사람당’은 2014년 4~5월에 있을 총선 (인도는 의원내각제라 우리의 대선과 의미가 같다)에서 인도에서 부패된 자 10인을 선정해 타격을 가하겠다고 선언했다. 정치 정말 예술이다. 현실에 기반을 두는 구체성, 대중성, 선동성, 참신성, 기획성 등이 현재로선 하나같이 완벽한 모습이다. 정치 5년도 하지 않은 채 하루 아침에 인도 같은 거대 국가의 수도 델리의 수장이 된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다.
‘보통사람당’의 등장과 성공은 수구 세력의 난동을 축출하는 정치 지형으로 가는 기점이 될 수 있다는 의미에서 우리도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그들은 수구 세력의 종식을 민생 정치 차원에서 부패 척결에서 찾았다.
이 대목에서 우리가 더욱 걱정하는 것은 인도의 수구 세력의 난동이 그저 남의 일만은 아닐 것이라는 사실이다. 인도에서 그들이 자행하는 학살과 테러의 집단 광기가 아직 한국 사회에서 발생하지는 않았지만, 그 조짐이 보인다는 사실이다. 그 과정에 부패한 일부 기독교 광신도들이 권력과 결탁하여 파시즘적 행태를 보인다는 사실이 매우 위태롭다.
원래 수구 난동자들은 논리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들이 필요로 한 것은 오로지 감정의 자극뿐이다. 그들은 역사적 의미 같은 것은 전혀 거들떠 보지 않는다. 오로지 권력 의지 하나밖에 없다.
그래서 그들은 일반인이 상상할 수없는 일을 저지른다. 그래서 그들을 이겨내기 위해서는 그들이 저지르는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밖에서 지지르는 행태를 우선적으로 파악해야 한다. 정치에서 진보의 의제를 만들어내고, 정책을 입안하여 실천하는 힘을 키워가는 일이야말로 무엇보다 훌륭한 일이다. 하지만 그 보수 수구 세력이 저지르거나 저지를 수 있는 행태의 메커니즘을 모르고, 준비하지 않은 채 행동하면 백전백패다.
정치권력만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정치권력 없이는 세상을 바꿀 수 없는 것은 분명하다. 그런데 그 권력을 잡기 위해서 반드시 해야 할 전제 조건이 있다. 시궁창에 발을 딛어야 한다. 고상한 고담준론이나 구호만으로 권력을 잡을 수는 없다. 반동의 시대에 그 정치판은 시궁창이다. 보수 수구 세력이 저지르는 그 시궁창 난동의 역사를 바로 봐야 한다. 이것이 우리가 인도 수구 난동사를 집필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