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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중국인] 시진핑과 오바마, 미-중의 ‘신형 대국관계’ (0) 2015/11/03 PM 10:02

시진핑과 오바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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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2015년 10월 05일에 쓰여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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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국가주석 시진핑이 7일(9.22~9.28) 간의 미국 방문과 유엔총회 참석을 마치고 귀국했다. 곧 이어 중국 최대 기념일인 건국기념일 행사를 원로들의 참석 없이 성대하게 마무리하고 중국공산당의 가장 중요한 연례행사인 중앙위원회 전체회의(18기 5중전회)의 일정도 결정되었다(10.15~18일).

집권 후 처음으로 미국을 국빈으로 방문해 오바마와의 회담에서 중국의 인권 및 사이버안보와 남중국해 문제 등에서 이견을 노출하기는 했지만, 북한의 핵 개발 문제를 비롯해 기후변화 등의 문제에서 의미 있는 합의를 도출했으며, 특히 시진핑 자신이 제기한 신형 대국관계 형성 문제에서도 어느 정도 진전을 거두면서 다시 한 번 자신의 지위를 공고히 할 수 있게 되었다.

시진핑의 이번 미국 방문은 임기 말에 접어든 오바마에게 적절한 예우, 예를 들면 사이버안보와 기후문제 및 북핵 등의 문제에서 미국의 요구를 수용해 체면을 지켜주면서, 동시에 국제문제에 있어서 미국에 상응하는 지분을 요구하는 의미에서 새로운 권력재편을 요구하는 ‘신형 대국관계’ 설정을 재차 요구해 미국의 일정한 이해와 동의를 이끌어 냈다는 점에서 시진핑에게 있어서는 적지 않은 성과라 할 수 있다.

사실 2010년 무렵부터 중국이 미국에 요구하기 시작한 신형 대국관계 수립의 요구는, 1979년 중-미 수교 이래 중미관계의 발전 및 전 지구적 강대국으로 부상하고 있는 중국의 대외정책의 변화를 대변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떵샤오핑의 개혁개방정책으로 중국이 국제무대에 데뷔한 이후 쟝쩌민을 거쳐 후진타오에 이르기까지 중국의 대외정책은 도광양회(韜光養晦), 즉 미국과의 직접적인 대결을 피하면서 안정적인 내적 발전을 추구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중국의 지속적인 경제성장과 국제무대에서의 역할 증대는 미국과의 관계에서 더 이상 이전처럼 자신을 낮추면서 양보할 필요가 없음을 자각하게 했다. 특히 2010년대에 접어들어 세계 제2위의 경제대국으로 부상하면서 대두되기 시작한 강한 민족주의적 자부심과 더불어 구체적으로 전 지구적 강대국으로서의 평화적인 부상, 즉 화평굴기(和平?起)를 주장하게 되었다.

후진타오 집권 이후 도광양회의 공식적인 폐기와 함께 제기된 화평굴기는 중국이 국제무대에서 미국과의 관계를 이전과는 다른 대등한 관계로 설정하고 G2라는 호칭에 상응하는 역할을 수행하겠다는 선언에 다름 아니다. 좀 더 직설적으로 표현하자면 세계적인 중대사를 다른 나라들은 배제하고 미국과 직접 다루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물론 도광양회에서 화평굴기로의 전환이 마냥 순조롭지는 않을 것이다. 실제로 중국의 화평굴기와 더불어 오바마는 미국의 아시아로의 귀환을 선언했으며 일본, 호주, 한국은 물론 필리핀, 인도 등 가능한 모든 국가를 동원해 중국의 힘의 확장을 저지하려고 시도하고 있으며, 오바마 이후 공화당이 집권한다면 중-미간의 관계는 한 동안 더욱 큰 파열음을 낼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은 세계 도처에서 발생하는 현안문제들에 대해 러시아와의 연대를 통해 미국을 견제할 것이고 결국 차기 대선에서 민주, 공화 어느 당의 후보가 당선되더라도 중국이 요구하는 중-미간의 신형대국관계는 점차 모습을 갖춰가게 될 것이다.(중-미 수교를 이끌어 낸 것도 닉슨의 공화당 정부였다.)

시진핑은 이번 방미는 중국이 줄기차게 요구해온 미국과의 신형 대국관계 형성을 중국 입장에서 보면 더 이상 거부할 수 없는 기정사실로 확인함으로서 중국의 국제적 지위를 공고하게 할 것이며, 이로 인해 시진핑의 내부에서의 정치적 기반을 더욱 강화시켜 줄 것이다.


집권 1기 마무리를 1년 앞두고 열리게 될 18기 5중전회가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집권 이후 지속된 반부패 투쟁은 숨고르기에 들어간 모양새지만 여전히 관료사회에 긴장감을 형성하면서 시진핑의 권력을 강화하는데 일조하고 있다. 세계적인 경제침체로 국내 경기가 주춤하고 있지만 총리 리커챵과의 순조로운 협력으로 대처해 나가고 있다.

결국 시진핑의 권력퍼즐의 완성은 후진타오 말기 당의 중추적 기구와 베이징과 샹하이 등의 대도시에 임명된 몇몇 과도기적 인물들을 자신의 핵심으로 교체할 수 있을 것인가 달려 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후진타오 말기에 합의된 6세대 주자들, 즉 시진핑의 후임으로 예정된 차세대들과의 권력분점을 얼마나 원활하게 합의해 낼 것인가에 달려 있다고 볼 수 있다.

10월 15일부터 18일까지 베이징에서 개최되는 18기 5중전회가 기다려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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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중국인] 시진핑과 장쩌민 옛 권력과 현 권력의 충돌 (0) 2015/11/03 PM 09:49



시진핑과 장쩌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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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2015년 09월 02일에 쓰여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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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진핑(?近平)과 장쩌민(江?民)의 갈등에 대한 국내외 언론들의 보도가 이어지면서 중국의 정치상황에 대한 관심이 다시 뜨거워지고 있다.

얼마 전 사법 당국에 공식으로 기소된 전 정치국 상무위원 조우용캉(周永康)을 비롯해 그의 측근들이 줄줄이 의법 조치 되었으며, 최근에는 장쩌민과 그의 심복으로 알려진 쩡칭홍(曾??)의 가족들에 대한 소환설까지 나돌면서 신구 권력 간의 갈등설이 다시 확산되고 있다.

지금까지 언론에 보도되고 있는 내용들이 어느 정도 사실에 근거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이런 사실들을 지나치게 확대해석하는 것은 중국정치의 실체에 접근하는 데 도움은 고사하고 오히려 곡해하는 지름길이다.

시진핑과 장쩌민의 갈등을 현실 문제에 여전히 개입하려는 전임 권력자와 전권을 행사하려는 현 권력자 사이의 개인적 갈등으로 해석하기보다는 중국의 정치 관행의 변화에서 오는 갈등으로 파악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만약 시진핑과 장쩌민의 갈등을 개인 대 개인의 갈등으로 파악하면, 우리는 시진핑 퇴임 후 시진핑과 시진핑 후임자 사이에 발생하는 권력 투쟁을 다시 보게 될 수도 있다.

장쩌민은, 중국정치에서 자주 언급되는, 인치(人治)에서 법치(法治)로의 전환이 막 시작한 시기에 권력을 잡았던 인물이고, 시진핑은 중국 정치에 법치가 확립되어 가는 시기에 권좌에 올랐다. 법치의 출발점이었지만 당 원로들의 현실 개입에 익숙하고 어느 정도 몸에 밴 장쩌민과, 전임인 후진타오(胡??)의 전권이양과 정치 불개입 선언으로 집권 초기부터 강력한 권한을 행사할 수 있었던 시진핑의 갈등은 예정된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1989년 발생한 “6.4 천안문 사건”으로 인해 갑작스레 최고 권력자가 된 장쩌민은 떵샤오핑(?小平) 등 당 원로들의 강력한 지지를 기반으로 정적들을 제거하면서 권력을 다졌고 동시에 천윈(?云, 1995), 떵샤오핑(1997) 등 당시 당의 양대 주주들이 차례로 세상을 뜨면서 자신의 재임기간(1987~2012. 총서기 외에도 중앙군사위 주석을 유지한 기간 포함)은 물론 은퇴 후에도 중국정치의 핵심 권력자들의 사무실이 집중해 있는 종난하이(中南海, 천안문 광장 서쪽에 위치)와 인민해방군을 지휘하는 중앙군사위원회 건물에 별도의 사무실을 두고 후진타오 집권 마지막 해까지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문제는 장쩌민의 지나치게 강한 권력욕이다. 그는 떵샤오핑처럼 은퇴 후에도 전반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기를 원했고 자신의 후임인 후진타오 뿐 아니라 그 후에도 지속적으로 영향력을 유지하고자 했다. 사실 시진핑이 후진타오의 뒤를 이어 총서기 자리에 오를 수 있었던 것도 후진타오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후진타오의 직계인 현 총리 리커챵을 장쩌민 세력이 거부하는 대신 시진핑을 지지했기 때문이었다. 어찌 보면 시진핑과 장쩌민은 한 배를 탈 수도 있었다.

그러나 후진타오가 장쩌민의 더 이상의 현실 정치 개입을 방지하기 위해 당-정-군의 모든 직위를 시진핑에게 전면 이양하면서부터 변화가 시작되었다. 후진타오의 전권 이양과 은퇴 간부의 현실 정치 불개입 요구는 당의 전현직 고위 간부들로부터 적극적인 지지를 받았고 시진핑에게도 더없이 필요한 조치였다.

시진핑과 후진타오의 연합은 장쩌민을 초조하게 만들었고 결국 시진핑 집권 전후에 불거진 보시라이(薄熙?)-조우용캉을 통한 시진핑 제거 계획으로까지 발전했다는 것이 정설이다. 결국 시진핑 역시 반부패의 기치를 들고 장쩌민과 그의 측근들에 대한 전면전을 선포하게 되었는데, 시진핑 집권 후 당-정-군에서 부패로 낙마한 인물들의 면면이 그것을 대변해 주고 있다.

시진핑과 후진타오 연합의 힘이 상승세를 타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이미 전 정치국 상무위원이었던 조우용캉과 인민해방군의 실세였던 전 군사위 부주석 두 명(궈보숑(郭伯雄)과 쉬차이호우(徐才厚, 사법처리 직전 암으로 사망))이 모두 낙마했고, 이제는 칼날이 장쩌민과 쩡칭홍 일가를 향하고 있다.

그러나 이후의 상황을 단정하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시진핑의 반부패운동이 한창 기세를 올리던 2014년 초 시진핑, 후진타오, 떵샤오핑 등 전현직 최고위 지도자들의 가족이 조세회피처에 법인을 설립하고 천문학적 규모의 자금을 유출했다는 국제탐사보도언론인협회의 발표가 있었다.

이들 최고위 지도자들과 그들 가족에 대한 정보를 확보할 수 있는 사람이나 기관은 중국에서도 아주 한정되어 있다. 20여년이 넘는 기간 동안 중국정치를 쥐락펴락했던 장쩌민도 적지 않은 대비책을 마련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전문가들이 시진핑 등의 조세회피처를 통한 자본유출 사건을 장쩌민의 시진핑에 대한 경고로 해석하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들 때문이다.

중국정치에서 부정축재에 자유로운 인물은 없다고 볼 수 있다. 개혁개방의 최대 수혜자가 당-정 고위 간부들이라는 한 여론조사의 결과는 반부패운동의 집행자들 역시 반부패운동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 국민들이 시진핑의 반부패운동에 지지를 보내면서도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고 있는 것도 이런 상황과 무관하지 않다. 특히 당-정-군의 중견 간부들 및 기층 간부들에게서 반부패운동에 대한 피로감과 편향성에 불만을 토로하는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고 한다.

시진핑과 장쩌민의 갈등이 어떤 모습으로 결말을 맺을지 쉽게 장담하기는 어렵다. 시진핑이 칼자루를 쥐고는 있지만 변수도 많기 때문이다. 특히 당의 최고 지도자였던 인물을 직접 처벌하는 것은 당의 위상과 이미지에도 큰 타격을 줄 수 있다. 문제가 되고 있는 아들들에 대한 간단한 처벌과 장쩌민의 정치 불개입 확약 또는 다음 당 대회에서 장쩌민의 텃밭인 샹하이(上海) 당위원회 서기의 양보 등으로 마무리 지어질 수도 있다.

그러나 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이 두 인물(또는 두 세력)의 갈등의 결말이 중국정치의 변화에 어떻게 긍정적으로 작용할 것인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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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중국인] 집권 3년차, 시진핑 권력기반의 강화 (0) 2015/06/15 PM 01:31


시진칭(왼쪽)과 리커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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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2015년 3월 11일에 쓰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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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인민공화국(이하 중국)의 주요 연례 행사인 전국인민대표대회(이하 전인대)와 전국인민정치협상회의(이하 정협)가 진행되고 있다.

출범 당시의 시진핑(?近平)-리커챵(李克强) 쌍두마차 체제는 집권 3년째 접어드는 현 시점에는 관찰자들의 예상을 뛰어넘는 빠른 속도로 시진핑 1인 체제로 권력구조가 재구성되고 있다. 동시에 정치적 목적을 내포하고 있는 반부패 투쟁 역시 수많은 전-현직 고위 공직자들을 차디찬 감방으로 보내면서 시진핑을 21세기의 포청천으로 형상화하고 있다.

시진핑의 신속한 권력 강화는 이번 양회에서 4개 전면(四?全面), 즉 “샤오캉” 사회의 전면적 건설(全面建成小康社?), 개혁조치의 전면적인 심화(全面深化改革), 법에 의한 국가 통치의 전반적인 강화(全面依法治?), 강력한 집권 기반을 강화하기 위한 당 운영에 대한 전면적인 관리 강화(全面??治?),에 대한 구체화와 홍보를 통해 드러나고 있다.

사실 “4개 전면” 정책에서 새로운 것은 시진핑 집권 후 중앙영도소조 설치로 구체화된 전면적 개혁심화뿐이다.

‘샤오캉 사회의 전면적 건설’은 떵샤오핑(?小平)이 개혁개방정책 실시 초기에 제시한 것이다. 그는 1979년 12월 일본 수상 오히라(大平正芳)와 대담 중 1인당 국민소득을 당시의 2배인 800 미국달러 수준으로 제고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 후 중국은 2001년 처음으로 1인당 국민소득이 1, 000(1.047) 달러를 넘어서면서 떵샤오핑이 제시한 초보적인 샤오캉사회건설 목표를 달성했다.

그리고 2002년 개최된 제16차 중국공산당대회에서 쟝쩌민(江?民)이 2020년까지 전면적 샤오캉 사회 건설(1인당 국민소득 6,000 달러 달성을 목표로 제시했고 이미 2012년에 초과 달성)을 제시했다.


법에 의한 국가통치 그리고 당 간부 및 당원들에 대한 엄격한 관리 역시 개혁개방정책 실시 이후 대외관계 및 집권당으로서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한 정책의 일환으로 꾸준하게 제시되었던 정책들이다.

다만 이런 정책들은 성격상 장기적으로 집행될 수밖에 없으며, 집권 초기에 떵샤오핑 이후 어떤 전임자들보다 더 강력한 권력을 장악한 시진핑은 중국공산당과 중국의 운명을 결정할 수 있는 이런 핵심 의제들을 보다 강력하게 추진함으로서 자신의 역사적 지위를 공고히 하려는 의지를 드러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문제는 이러한 시진핑 1인의 권력 강화가 과연 중국공산당과 중국의 정치적 안정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 하는 점에 있다.

지난 7일 진행된 전인대 업무보고에서 전인대 위원장 장더쟝(?德江)은 시진핑의 지도방침을 수 십 차례 언급했다. 관례상 당 최고 책임자의 지도방침을 언급한 것이라고 보기에는 지나칠 정도로 많았었는데, 이는 이미 시진핑의 권력이 당의 최고 권력기구의 구성원이면서 독자적인 권한을 행사하는 정치국상무위원들에게도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그러나 시진핑의 지나친 권력 독점은 마오쩌뚱의 절대적 권력행사와 그로 인한 폐해를 방지하기 위해 떵샤오핑 이래로 형성된 당의 집단지도체제가 다시 흔들릴 수 있으며 과거로 회귀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해외 중화권 매체에서, 시진핑이 최근 관행화된 당 총서기-총리의 10년 집권 구도를 깨뜨리고 2022년까지 보장된 임기를 한 번 더 연장하려 한다는 추측성 보도가 나오는 것도 이런 이유와 우려 때문이다.

반부패 투쟁을 통한 권력 강화의 부작용은 또 다른 문제점을 낳고 있다. 당-정 고위 간부들의 청렴성은 지극히 당연한 요구일 뿐 아니라 또 강력한 반부패 투쟁으로 만한 당 간부들의 부정부패에 불만을 품고 있던 인민들의 정서적 불만을 달래주고 있기는 하지만, 이로 인해 중국을 떠받치고 있는 당-정-군 3대 조직의 안정성이 흔들리고 있다.

고위 간부들의 잦은 교체와 낙마는 고위 공직자들의 복지부동을 초래하고 심지어 최고위층인 정치국이나 정치국 상무위원회에서도 당-정의 중요한 정책결정에서 시진핑에 반대하는 견해의 목소리가 줄어들고 있다.

특히 중공 내부의 암묵적인 승진연령 제한 정책으로 시진핑보다 먼저 은퇴할 예정인 고위 간부들은 은퇴 이후의 안전을 위해 시진핑의 정책에 대한 이견 제시를 자제하고 심지어 소극적인 동조를 하라고 주변 인사들로부터 요청받고 있다는 보도마저 해외언론을 통해 나오고 있다.

결국 시진핑의 과도한 권력독점은 종신집권이라는 구시대의 유물을 다시 현실로 불러낼 가능성도 있다. 떵샤오핑의 개혁개방정책 실시 이후 6.4 천안문 사태와 같은 정치적 위기와 또 시진핑의 전임자인 후진타오(胡??)가 중국공산당 역사상 최초로 당-정-군의 모든 지휘권을 후임자에게 넘겨주면서 어렵게 다져온 정치의 제도화가 다시 흔들릴 수 있다.

개국공신인 아버지의 후광과 혁명 2세대들의 적극적인 지지 그리고 전임자인 후진타오의 적극적인 협력에 힘입어 베이징에서의 권력기반이 그다지 확고하지 못했던 시진핑은 이제 당과 정부의 어떠한 경쟁자와도 비교할 수 없는 막강한 권력을 확보했다.

이라한 막강한 권력을 자신의 권력의 무한확대와 경쟁자 제거에 사용할 것인지 아니면 개혁개방의 설계사 떵샤오핑이 의도했던 것처럼 중국정치의 제도화를 위해 사용할 것인지는 전적으로 시진핑의 몫이다. 중국 수립 후 태어났지만 중국공산당의 혁명을 위해 일생을 바친 부친의 은혜를 입은 시진핑이 중국공산당의 미래를 위해 어떤 선택을 할 것인지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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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중국인] 2015년, 중국정치의 새 출발? (0) 2015/06/15 PM 01:28


중국공산당 회의 모습. 왼쪽에서 네번째가 시진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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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2015년 1월 13일에 쓰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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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권 3년 차에 들어서는 한국과 중국 정치의 모습이 전혀 다른 모습이다.

지난 1 년 동안 각종 대형 사고와 집권 세력내의 불협화음 그리고 인사 문제로 임기의 반환점이 돌기도 전에 심각한 권력누수 상황에 직면한 박근혜 대통령과 달리 시진핑(?近平)은 지위 고하를 막론한 강력한 반부패 운동으로 떵샤오핑(?小平) 이래 최고의 대중적 지지를 얻고 있으며, 동시에 이를 통해 조우용캉(周永康)을 비롯한 정치적 반대 세력들도 제거하면서 신속하게 권력 기반을 강화하고 있다.

중국의 3대 핵심 권력기관인 중국공산당, 행정부(국무원), 인민해방군의 고위 간부들이 시진핑과 왕치샨姚依林이 주도하는 반부패 운동에 의해 가을낙엽처럼 추락하고 있다. 조우용캉, 쉬차이호우(徐才厚), 링지화(令??)를 비롯해 수많은 고위 간부들이 이미 차디찬 독방에 수감되었거나 조사를 받고 있다.

시진핑 집권 후 반부패 운동이 시작할 때만 해도 과거에 수차례 반복되었던 것처럼 ‘깃털만 건들고 몸통은 건들지 못할 것’이라는 회의적인 시각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었지만, 이제는 모두 몸을 사리면서 최후의 칼날이 과연 어디로, 그리고 누구를 향할 것인지 숨죽이며 지켜보는 상황으로 변했다.

1989년 6월 4일 발생한 ‘천안문 사건’의 출발점이 개혁개방 후 만연해진 당-정 간부들의 ‘부정부패 척결’ 요구였던 점을 상기해보면 시진핑의 반부패 운동이 ‘천안문 사건’ 이후 수면 아래로 잠긴 중국의 정치개혁에 다시 힘을 실어주는 단초가 될 수도 있을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시진핑이 이렇게 전례 없는 강력하고 지속적인 반부패 운동을 통해 권력기반을 강화할 수 있었던 요인들과 그의 권력 강화가 이후 중국정치에 끼칠 영향에 대해 살펴보겠다.


시진핑이 이렇게 짧은 시간에 권력을 공고히 할 수 있게 된 데에는 몇 가지 요인이 있다. 우선, 그의 전임인 후진타오(胡??)의 전폭적인 지지를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후진타오는 자신의 전임인 쟝쩌민(江?民)처럼 당 군사위 주석 자리에 2년 정도 더 머무르면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지만 총서기와 군사위 주석 직을 동시에 물려주면서 시진핑의 권력 안정화에 적극 협력했다.

후진타오는 떵샤오핑에 의해 발탁된 1세대 신진 간부 중의 1인이었으며. 1992년 당시 50세의 젊은 나이로 파격적으로 정치국 상무위원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떵샤오핑 등 당의 원로들에 의해 쟝쩌민의 후임으로 지명되면서 쟝쩌민의 강력한 견제를 받았으며, 심지어 당 총서기에 취임 한 후에도 정치국 상무위원회 내에서 수적 열세를 극복하지 못해서 실권을 행사하지 못하고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이 때문에 후진타오는 임기 말에야 가까스로 장악한 (실질적인) 군부 지휘권을 시진핑에게 온전하게 이양함으로서 쟝쩌민에게 일격을 가했다. 후진타오의 당권 및 군권의 동시 이양에 대해 여러 ‘설’들이 많지만, 이유를 막론하고 중국정치에서 권력이양의 모범 사례로 기억될 것이며 이후에도 중국정치의 고질병인 원로들의 개입을 차단하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두 번째 요인으로는 왕치샨(王岐山)의 기율검사위(中央?律??委?) 서기 임명이다. 왕치샨은 원래 농업 및 금융부문 전문가였다. 그는 기율검사위 서기에 임명되기 직전까지 부총리로 금융 및 경제개혁 분야를 담당했었으며 이 때문에 총리 후보로까지 거론되었지만, 쟝쩌민에 의해 시진핑이 후진타오의 직계인 리켜챵을 밀쳐내고 총서기로 내정되면서 서열 2위로 밀린 리켜챵이 총리(관례상 당의 2인자가 전국인민대표대회 위원장, 3위는 총리)를 맡게 되었고 왕치샨은 기율검사위 서기에 임명되었다.

이것이 시진핑과 왕치샨 모두에게 전화위복이 되었다. 이 시기를 전후로 불거진 전임 정법위 서기 조우용캉의 전횡으로 당 중앙과 지방에서의 정법위원회에 대한 대대적인 사정이 진행되었고 결국 당 18차 대회부터 정법위 서기는 정치국 상무위원회에 진입하지 못하고 정치국원이 담당하게 되었으며, 정치국 상무위원이 지휘하는 당 기율검사위가 정법위보다 큰 힘을 갖게 되었으며 반부패 운동 역시 탄력을 받게 되었다. 여기에는 압력에 흔들리지 원칙을 고수하는 왕치샨의 곧은 성격도 일조했다.

시진핑과 왕치샨 두 사람의 단결이 가져온 또 다른 효과는 진정한(?) 태자당 세력의 결합이라 할 수 있다. 현재는 부모가 혁명열사인 경우에 일반적으로 태자당 성원으로 부르지만, 초기에 태자당을 지칭할 경우에는 부모의 지위가 당 정치국원 이상일 경우를 의미했다. 따라서 엄밀하게 구분하자면 숙부(江上?, 안휘이성에서 활동하다 지주들의 습격을 받아 희생당함)가 혁명 열사였던 쟝쩌민이나 아버지(曾山)가 장관급으로 중앙위원이었던 쩡칭홍을 태자당으로 구분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이에 비해 아버지(?仲?가) 정치국원으로 부총리까지 역임했던 시진핑이나, 장인(姚依林)이 정치국 상무위원까지 역임한 왕치샨은 진짜 태자당 성원으로 분류될 수 있다. 당, 정, 군 및 경제 분야 요소요소에 포진해 있던 태자당 구성원들이 쟝쩌민 세력의 지나친 권력욕 및 부정부패에 적극적인 지지를 유보하다가 시진핑과 왕치샨의 명분과 행동에 지지를 보낼 수 있었던 것도 이런 이유들이 포함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결국 이런 요인들이 긍정적으로 더해지면서 시진핑은 짧은 시간에 확고한 권력을 장악할 수 있었고, 이 때문에 시진핑과 더불어 쌍두마차로 불리던 리켜챵 총리는 자신의 역할을 충분히 잘 수행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권력이 약화된 것처럼 평가 받고 있다.

어찌됐던 여러 요인들이 맞물려 시진핑은 전례 없던 대중적 지지를 확보하면서 동시에 몇몇 외부 언론들로부터는 마오쩌뚱이나 떵샤오핑에 버금가는 권력을 확보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기도 하다. 그렇다면 시진핑의 이런 신속하고 강력한 권력 장악이 과연 중국정치에 긍정적으로만 작용할 것인가?

어떤 권력 구조가 좀 더 효율적인가, 즉 중국정치를 예로 들어 보자면 마오쩌뚱이나 떵샤오핑처럼 강력한 1인자에 의한 권력행사가 더 효율적인지, 아니면 쟝쩌민 이후 모습을 갖춰 가고 있는 정치국 상무위원 더 나아가 정치국에 의한 집단지도 체제가 더 효율적인지에 대해 단언하기는 어렵다. 장단점이 너무 극명하게 드러났기 때문이다.

다만 마오쩌뚱과 떵샤오핑 시대를 지나면서 최고 지도자의 임기가 종신제에서 임기제로, 통치방식이 인치(人治)에서 법치로 정착해가는 과정에서 시진핑으로의 지나친 권력 집중으로 인한 중국정치의 과거로의 회귀에 대한 우려의 시선도 있다. 최근 홍콩 언론에서 시진핑의 2027년까지의 재임 및 명문화된 규정은 아니지만 관례에 따라 2017년에 은퇴해야 할 왕치샨의 연임까지 거론하고 있는 것도 바로 이런 우려의 표명이라 할 수 있다.

아직 7년이란 시간이 남아있어 섣불리 미래를 예단할 필요는 없지만, 최근 전개되고 있는 중국정치의 상황이 이런저런 기대와 우려를 낳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다만 올 한해도 시진핑의 반부패 운동이 지속될 것이고 이와 함께 그의 권력도 한층 강화될 것이다. 이런 과정에서 어떤 새로운 상황이 전개될 것인지 지켜보는 관전자들 역시 긴장의 끈을 놓기 쉽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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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중국인] 시진핑과 중국공산당, 반부패 투쟁의 종착역은? (0) 2015/06/15 PM 01:21


시진핑 국가주석(왼쪽)과 저우융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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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2014년 12월 23일에 쓰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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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일 년 동안 중국 정국의 초미의 관심사였던 조우용캉(周永康)에 대한 사법처리가 마침내 공식적으로 시작되었다. 12월 5일 자정에 가까운 시각에 중국공산당 정치국은 회의를 통해 그의 당적을 박탈하고 사법처리 절차에 돌입했다.

공교롭게도 중국공산당 정치국이 조우용캉에 대한 사법처리를 결정한 날은 중국 정부가 지정한 첫 국가헌법일(?家?法日, 12월 4일) 바로 다음 날이었는데, 이는 지난 10월의 중국공산당 18기 4중전회의 핵심 내용인 ‘법에 의한 통치’(依法治?)에 대한 중국공산당의 의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 조치라 할 수 있다.

조우용캉은 “정치, 조직, 비밀엄수 규정 위반”, “직간접적인 뇌물 수수”, “다수 여성과의 금권을 통한 성관계”, “당과 국가의 기밀 누설” 등등 6개 항의 죄명으로 검찰에 기소되었다.

특히 “당과 국가의 기밀 누설” 조항은 부정부패와 직권남용 등으로 이미 처벌받은 전 정치국원 보시라이(薄熙?)나 현재 사법처리 과정에 있는 전 정치국원 겸 중앙군사위 부주석 쉬차이호우(徐才厚)에게서는 찾아 볼 수 없는 죄명이다.

이는 조우용캉에 대한 처벌이 이들 두 사람보다 훨씬 엄중할 것임을 예고해 주고 있는데, 그 이유는 조우용캉이 2012년 3월, 보시라이 처벌을 위한 중국공산당 정치국 상무위원회의 결정에 유일하게 반대표를 던지고 그 결과를 보시라이에게 비밀리에 알려준 것 때문이다.


최대 관심사였던 조우용캉에 대한 사법처리 이후 반부패 투쟁의 칼끝은 어디로 향할 것인가? 홍콩이나 미국에 서버를 두고 있는 여러 중화권 매체에서는 계속해서 쟝쩌민(江?民)과 그의 심복인 전 국가부주석 쩡칭홍(曾??), 그리고 후진타오(胡??) 시절 총리를 역임한 원자바오(?家?)와 역시 후진타오의 심복으로 중앙판공청 주임을 역임한 현 중국공산당 통일전선부 부장 링지화(令??)의 이름이 계속 오르내리고 있다.

중국정치에서 반부패 투쟁이 내포하고 있는 의미에 대해 다시 한 번 언급하고자 한다.

2014년 9월, ICIJ(국제탐사보도언론인협회)는 시진핑(?近平), 후진타오 원자바오, 리펑(李?), 덩샤오핑(?小平) 등 전-현직 중국의 최고 권력자의 친인척들이 직-간접적으로 영국령 버진아일랜드, 케이맨 제도 등의 조세피난처에 유령회사를 만들어 운용하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쟝쩌민 계열의 당정 고위 관료들에 대한 시진핑의 반부패 혐의 공세가 일 년여 동안 지속되던 시점에 불거진 시진핑을 비롯한 반(反)쟝쩌민 세력들과 관련된 조세피난처를 통한 재산은닉 보도는 ICIJ의 추적 보도와는 별개로 자파 세력에 대한 공세를 중단하라는 쟝쩌민 계열의 경고라는 해석이 지배적이었다.

중국 고위 권력자들 중 재산축적이나 친인척 특히 자녀들의 재산형성 등의 문제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거의 없다고 볼 수 있다.

특히 당과 정부의 고위 권력자들의 2, 3세들은 개혁개방 과정에서 부모들의 지위를 이용해 거대 국영기업이나 민영화된 기업들의 대주주가 되면서 막대한 부를 축적했으며, 동시에 중국에 진출하려는 초국적 기업들과의 협력 과정에서 해외에서도 적지 않은 재산을 형성할 수 있었다.

이들의 재산형성 과정에는 당연히 불법과 탈법과 권력남용이 뒤따랐고, 따라서 어느 누구도 부정부패나 뇌물수수 등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이 때문에 현재 진행되고 있는 반부패 투쟁을 글자 그대로 반부패 투쟁으로만 이해한다면 중국정치의 중요한 다른 측면, 즉 반부패 투쟁을 통한 권력투쟁을 이해할 수 없게 된다.

중하위 간부들을 대상으로 진행되는 반부패 투쟁은 말 그대로 부정부패 척결을 위한 투쟁이지만, 당정 고위 권력자, 특히 정치국원 이상의 권력자들에 대한 반부패 투쟁은 권력투쟁의 의미가 더 강하게 담겨 있다고 할 수 있다.

결국 시진핑의 반부패 투쟁의 종착지는 쟝쩌민 일가와 그 자녀들 또는 그의 복심이라 할 수 있는 전 국가부주석 쩡칭홍과 그 일가에 대한 처벌 여부가 될 수밖에 없다. 이 둘의 관계는 조우용캉이나 그 외의 다른 샹하이방 구성원들과는 또 다른 불가분의 관계이며 샹하이방의 실질적인 공동 소유주인 동시에 시진핑과 같은 혁명 1세대의 후예들이기 때문이다.

그들 역시 시진핑이나 그 측근들의 비리에 관한 자료를 확보하고 있으며, 위에서 언급한 ICIJ의 보도 역시 그런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다.

물론 시진핑이 현직이고 또 다른 주요 세력인 공청단파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고 있지만, 두 세력 간의 전면적인 대결은 중국공산당이 근간을 뒤흔들 수 있으며 과거 행태에 익숙해 있는 기층 간부들의 저항을 촉발할 수도 있어서 쟝쩌민 세력에 대한 전면적인 공격이 쉽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두 세력 간의 전면적인 대결이 가져올 위험성 때문에 두 세력 간에 적절한 타협이 이뤄질 수도 있다. 우선 쟝쩌민이나 쩡칭홍 두 사람이 당의 원로로서 누릴 수 있는 모든 기득권과 정치 문제에 대한 개입 중단을 선언하고 그의 자녀 또는 친인척들에 대한 형식적인 사법처리를 통해 이들과 관련된 부정부패 문제를 마무리 하는 것이 하나의 방식이 될 수 있다.

다른 하나는 쟝쩌민 세력의 근거지인 샹하이 시당위원회의 서기 임명권을 시진핑에게 이양하는 방식이 있을 수 있다. 쟝쩌민 집권 이후 샹하이 시당위원회의 서기는 반드시 쟝쩌민의 동의를 얻어 임명했으며, 오직 쟝쩌민의 측근들만이 임명될 수 있었다.

지역 토착 세력의 입김이 비교적 강했던 광동성은 이미 중앙이 성위원회 서기 임명권을 자유롭게 행사하고 있지만 샹하이는 여전히 쟝쩌민의 영향력 아래 놓여있다.

시진핑이 2007년 잠깐 동안 샹하이 시당위원회 서기를 맡기는 했지만, 이는 쟝쩌민 세력이 후진타오가 차기 총서기로 내정한 현 총리 리커챵(李克强)을 밀어내고 대신 시진핑을 총서기 후보로 추대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것일 뿐이며, 현 샹하이 시당위원회 서기 한정(?正) 역시 샹하이를 벗어난 적이 없는 쟝쩌민 계열의 적자 중 한 명이다. 따라서 차기 샹하이 시당위원회 서기에 누가 임명되는가가 중국정치의 역학관계를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시금석이 될 수 있다.

물론 시진핑의 강력한 반부패 드라이브는 두 가지 중요한 정치적 목적을 갖고 있다.

하나는 개혁개방의 성과를 오로지 당과 정부의 고위 권력자들만이 누리고 있다는 인민들의 불만을 해소해 당을 존폐의 위기에서 구해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후진타오를 견제하기 위해 자신을 발탁했지만 다시 보시라이와 조우용캉의 모사를 통해 자신을 제거하려 한 쟝쩌민 세력을 완벽하게 제압하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점이 시진핑이 반부패 투쟁을 통해 쟝쩌민 세력의 항복을 받아내려는 가장 중요한 이유이다.

이런 이유들 때문에 시진핑이 쟝쩌민 세력에 대해 자비를 베풀 여지가 크지 않은 것도 사실이지만, 반대로 이들을 완전히 굴복시키기 위해 전면적인 공세를 진행했을 때 가져올 수 있는 당의 동요도 적지 않다. 선택은 결국 시진핑의 몫이고, 결국 조우용캉 처리 이후의 사태 진행에 좀 더 관심을 갖고 지켜볼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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