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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중국인] 국가주석 시진핑, 총서기 시진핑 (0) 2015/06/15 PM 01:13


시진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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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2014년 11월 18일에 쓰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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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진핑(?近平)의 활약이 눈부시다. 우선 중국공산당의 총서기로서 내부적으로는 집권 직후부터 시작한 반부패 운동이 인민들의 광범위한 지지와 주요 정치세력들의 협력으로 순조롭게 진행되면서 강력하고 청렴한 지도자로서의 이미지 구축에 성공했다.

혁명 1세대로 부총리를 지냈던 부친(?仲?)의 후광과 전임 총서기 후진타오(胡??)와 개혁적인 공청단(共??) 세력의 적극적인 지원 덕분이기는 하지만, 민심이반의 가장 중요한 원인 중의 하나였던 고위 관료 집단의 부패문제에 강력하고 지속적으로 대처하면서 민심을 얻은 동시에 중앙정부는 물론 각 지역의 토착 관료들까지 통제 가능하게 되었다.

중화인민공화국 국가주석으로서의 국제적인 지위도 한결 단단해졌다. 미국의 강력한 정치-군사적 동맹국인 대한민국과 자유무역협정(한중FTA)을 체결했을 뿐 아니라 미국이 달가워하지 않는 중국 주도의 ‘아시아태평양자유무역지대’(FTAAP)에 대한 한국의 적극적인 지지도 끌어냈다.

안보 동맹인 미국과 최대 무역상대국인 중국 사이에서 불가피한 측면이 있지만 미국이 불편해 하는 중국 주도의 경제 체제에 한국의 적극적인 지지를 끌어낸 것은 적지 않은 성과라 할 수 있다.

동시에 미국의 중국 봉쇄를 겨냥해 새로운 ‘아시아 지역의 안보협력기구’의 설립을 제안(2014년 5월, 샹하이, 아시아교류 및 신뢰구축회의(CICA))하고, 베이징에서 개최된 제22차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 기간 중에는 아베 신조(安倍晋三)일본 총리와의 회담으로 반중 동맹에서 아시아의 가장 강력한 축인 일본과 대화의 끈을 유지하는 등 외교-안보 분야의 대외 협력을 강화하기도 했다.

또 경제적으로는 인도 등 21개국이 창립멤버로 참여하는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 설립 양해각서 체결(10월, 베이징)에 이어 베이징에서 개최된 제22차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에서는 ‘아시아·태평양 자유무역지대’ 구축을 위한 로드맵을 정식으로 채택하고, 실크로드 기금 조성 400억 달러 조성(11월 8일)에도 합의했다.

전임자와 비교해 좀 더 우호적인 정치적 조건 위에서 집권하기는 했지만, 중앙 정치권에서의 일천한 경력과 결코 우호적이지 않은 대외 환경을 감안하면 적지 않은 성과라 할 수 있다. 이 때문에 국내외에서 ‘중국공산당의 집단지도체제를 종식시키고 마오쩌뚱이나 떵샤오핑 같은 절대 권력의 1인자가 되었다.’는 등의 평가도 나오고 있다.


그러나 시진핑의 권력 장악에 대한 평가는 좀 더 신중할 필요가 있다. 전임 후진타오는 총서기 등극 4년 만에 정치국 상무위원과 정치국원 구성에서 절대적으로 자신에게 불리한 상황에서도 당시 쟝쩌민의 황태자라 불리던 샹하이시 당 위원회 서기였던 정치국원 천량위(?良宇)를 처벌하고 당적까지 박탈했다. 반대로 상대적으로 우호적인 환경에서 전권을 이어받은 시진핑의 성적은 후진타오의 거사에 비하면 오히려 평범하다.

지난 10월 개최된 중국공산당 18기 4중전회는 반부패투쟁의 지속적인 전개와 법에 의한 국가 통치가 강조되었을 뿐이다. 국내외 언론을 뜨겁게 달궜던 전임 정법위(政法委) 서기이자 정치국 상무위원이었던 조우용캉(周永康)에 대한 공식적인 당의 처벌도 없었고, 반대로 중앙군사위원으로 승격될 것이라던 태자당 출신 장성들의 승격도 이뤄지지 않았다.

부패 혐의로 체포된 당과 정부를 비롯한 고위 간부들의 이름이 연일 언론에 대서특필 되었지만, 우리 방식으로 표현하자면 ‘깃털만 건드렸을 뿐 몸통은 손도 대지 못한 형국’이다. 여기서 몸통이라 함은 중국공산당의 최고 권력자들인 현직 ‘정치국원’을 말한다. 물론 이들 중의 어떤 인물이 이후 사법처리를 받을 수도 있겠지만, 현재 상황에서 판단하자면 중국공산당의 집단지도체제는 여전히 유효하며, 시진핑이 현재 당-정의 주요 10개 기구의 책임자 자리를 독차지하고 있지만 여전히 마오쩌뚱이나 떵샤오핑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외교무대에서의 화려한 활동도 아직은 구체적인 성과로 드러나지는 않고 있다. 중국의 한반도 정책의 핵심 축인 북한은 시진핑 집권 이후 중국의 중립적인 태도에 불만을 품고 러시아에 손을 내밀면서 미국과 일본에도 지속적으로 대화를 제의하고 있으며, 한국은 최대 교역국인 중국에 한중FTA 체결과 아시아태평양자유무역지대 적극 지지라는 호의를 표명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미국의 군사-안보적 대중국 봉쇄정책에 대해서도 대북 억제라는 이유를 들어 적극 호응하고 있다.

아베 정권의 태도는 좀 더 직접적인 고민거리다. 한국 못지않은 반일감정과 과거사에 대한 자괴감이 정치권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상황에서 일본의 과거사 부정과 (중국 입장에서) 영토(댜오위다오, ???-일본명 센가쿠열도) 문제에 대한 도발은 세계 3대 경제대국이자 미국의 최대 동맹인 일본을 중립지대로 견인하고 한-중-일 3국 협력을 강화해 미국의 아시아 회귀를 저지하고 동북아 공동체를 건설하는 여정의 최대 걸림돌이 되고 있다. 어떤 지도력을 발휘해 인민들의 반일 감정을 적절히 조절하고 일본과 일상적인 관계를 건설할 수 있을 것인지 궁금하다.

특히 국가안보와 관련해 군부의 강경한 목소리를 어떻게 통제할 수 있는지가 앞으로의 성패에 중요한 관건이 될 것이다. 쟝쩌민, 후진타오가 실질적인 군부 경력이 전무한데 반해, 시진핑은 공직의 첫 발을 부친의 친구가 재직하던 중앙군사위 판공청에서 시작해 상당기간 군 관련 직책을 겸임하면서 상당한 인맥을 확보하고 있다. 또 후진타오에게서 바로 군 통수권을 넘겨받아서 출발 시점부터 군부에 대한 강력한 통제권을 확보하고 있다.

그러나 미국의 중국 봉쇄정책에 대한 반감과 중국 근대사에서 지울 수 없는 치욕을 안긴 일본의 영토 문제에 대한 도발은 본능적으로 중국 군부의 강경한 입장을 강화시켜 주고 있으며, 현 상황에서 군부의 이런 강경한 입장이 인민들의 지지를 얻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군부의 이런 강경 대응 입장이 현실화할 경우 문제의 평화로운 해결은 멀어질 수밖에 없으며, 장기적으로 중국의 안정적인 발전에도 장애가 될 것이다. 따라서 군부와 인민들의 일본에 대한 강경한 입장을 어떻게 적절한 수준에서 관리할 것인지가 시진핑의 주요 과제가 될 수밖에 없다.

군부까지 확대된 반부패 운동이 주요 지휘관들을 옥죄면서 표면적으로는 연일 군부의 충성 맹세가 쏟아져 나오고 있지만, 반대로 관행적으로 진행된 기득권의 박탈과 이에 대한 상실감도 존재하고 있다. 당의 가장 강력한지지 기반인 군부에 대한 확고한 통제가 국내외의 산적한 문제해결에 가장 중요한 고리가 될 것이다.

집권 2년을 마무리하는 시점에서 시진핑에게 쏟아지는 지나친 찬사는 그의 수권능력에 대한 올바른 평가를 위해 적절하지 않다. 지속적인 반부패 사정과 과감한 개혁 그리고 시시가각 밀려오는 외부 환경의 변화에 대한 적절한 대응 등 시진핑의 집권 2년을 충분히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적지 않은 요소들이 있지만, 국내외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정책들의 좀 더 명확한 성패는 집권 1기가 마무리되는 시점에나 들어날 것으로 보인다.

다만 현 시점에서 중국의 변화와 시진핑 집권의 성과를 객관적으로 평가하기 위해서는 신문 지상에서 쏟아지는 찬사보다는 행간의 이면에 숨어 있는 변수를 살펴볼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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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중국인] 조우융캉과 중국 반부패 투쟁 (1) 2015/06/15 PM 12:49


시진핑-조우융캉-쟝쩌민(위에서 시계방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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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2014년 8월 1일에 쓰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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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나라의 어느 지역에서는 연일 37~8도를 넘는 무더위가 계속되고, 또 다른 지역에서는 물난리가 계속되고 있다. 중국 이야기다.

난데없는 날씨 이야기가 아니라 중국이란 나라가 면적이나 인구뿐만 아니라 정말 크고 다양해서 내가 읽은 책, 내가 읽은 신문기사 그리고 내가 들은 이야기만으로는 정말 판단하기 어렵다는 말씀을 다시 한 번 드리기 위해서이다

지난 7월 29일, 중국 정부의 공식적인 발표가 있었다. 국내외를 막론하고 중국 관련 최대의 관심사가 되어버린 전임 중국공산당 정치국 상무위원이자 당 정법위원회 서기였던 조우용캉의 사법처리에 관한 내용이다.

우연히 중국을 방문하던 중 저녁뉴스를 보다가 그와 관련된 보도를 접할 수 있었다. 개혁개방 초기에 실각한 후야오방과 짜오즈양 이후 최고위층의 실각이 현실로 다가오고 있다. 조우용캉에 대한 사법처리는 중국정치에서 상당히 중요하고 다양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우선 조우용캉 사건의 공식화는 후진타오 전 총서기 시기부터 본격적으로 시동이 걸린 중국 정부의 반부패 투쟁이 중요한 한 고비를 넘겼음을 의미한다.

특히 정치국 상무위원은 경제문제로는 형사 처벌을 하지 않는다는 당의 내규와 묵계를 깨뜨리면서까지 진행된 사안이어서, 이미 적지 않은 고위 관료들이 부정부패 문제로 낙마했지만 그와는 차원이 다른 최고위급 정치국 상무위원을 형사 처벌함으로써 다른 고위 공직자들에 대해 엄중히 경고하고 출범 3년째를 맞는 시진평의 권위를 확립하면서 한편으로는 일반 대중들의 당과 정부에 대한 신뢰를 강화하는 데 일조할 것이다.

특히 당-정-군의 고위 공직자들에게는 상당한 영향을 줄 것으로 보인다. 사실 지금까지 적지 않은 고위 공직자가 낙마했지만, 대다수는 현직보다 전직, 당-정-군보다는 상대적으로 권한이 약한 각급인민대표대회(전인대) 또는 정치협상회의(정협) 간부들이 주요 낙마 대상이었고, 이 때문에 깃털만 건드리고 몸통은 건드리지 못한다는 비아냥을 듣기도 했다.

그러나 얼마 전 전임 당 중앙군사위 부주석 쉬차이호우에 이어 조우용캉까지 사법 처리하기로 결정함으로써 다시 한 번 반부정부패 투쟁의 의지를 확고하게 보여주었다.

다음으로는 권력구조 개편에 관한 문제이다. 이미 전에도 몇 차례 언급했지만 조우용캉의 전횡으로 그가 담당했던 당 정법위는 권한이 대폭 축소되었고 각 지역의 정법위 책임자들도 핵심 권력에서 배제되었다.

이와 동시에 정치국 상무위원들이 분야별로 분점하던 권력구조가 통치의 효율성과 통일성을 위해 시지핑 총서기 1인에게로 좀 더 집중하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시진핑 집권 이후 2년 동안 시진핑 총서기는 당과 정부에서 10개의 핵심적인 기구의 최종 책임자에 임명되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나머지 6인의 정치국 상무위원들이 꼭두각시가 되거나 시진핑이 마오쩌뚱처럼 절대권력을 휘두를 수 있는 가능성은 아주 희박하지만, 어쨌든 조우용캉의 권력남용으로 촉발된 중국의 권력구조 개편은 결과에 따라서는 향후 중국 정치에 적지 않은 영향을 줄 것이다.

마지막으로 중국공산당 권력의 최종 향방이다. 조우용캉은 중국공산당 내부에 여전히 적지 않은 지분을 확보하고 있는 쟝쩌민 전 총서기의 외척이고 그에 의해 권력의 핵심에 진입했다. 따라서 조우용캉에 대한 사법처리는 최악의 상황에 따라서는 쟝쩌민까지 영향을 미칠 수 있지만 당의 분열을 막기 위해 쟝쩌민 세력과의 협상에 의해 적절한 수준에서 타협을 할 것으로 예측된다.

문제는 조우용캉 문제가 형식상으로는 부정부패와 관련된 경제문제이지만, 실제로는 보시라이 전 충칭시 서기와 연계된 최고권력자인 시진핑을 대상으로 한 권력투쟁이었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당의 집단결정에 불복하고 당의 분열을 기도한 사안에 대해 얼마나 집단적으로 그리고 통일적으로 대처할 수 있을 것인가 관건인데, 문제는 조우용캉 개인이 아니라 그 뒤에 있는 쟝쩌민과 그 세력이다. 전면전은 당을 뒤흔들 수 있고 적당한 처벌은 순식간에 시진핑의 권력을 위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들 간의 협상과 타협을 지켜보는 것도 중국정치를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을 줄 것이다.

단 중국정치에서 법치는 두 가지 의미로 해석 가능한데, 하나는 말 그대로 법에 의한 통치나 처리를 뜻하고, 다른 하나는 같은 의미이기는 하지만 권력투쟁 과정에서 당의 내규 등에 의거해 처벌하지 말고 헌법이 규정한 법률에 의해 처리하라는 의미로 상대방에게 압박을 가하는 수단으로 사용되고 있다는 걸 이해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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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당독재를 해도 결국 그 당내에서도 파가 나뉘고, 견제와 배척으로 배신과 보복이 멈추질 않으니 정치판은 결국 투명성과 깨어 있는 시민들의 지속적인 감시가 필요하지요.
[중국과 중국인] 절대권력의 강화인가 집단지도체제의 개선인가 (0) 2015/06/15 PM 12:42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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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2014년 6월24일에 쓰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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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6월 13일, 중국공산당 총서기 시진핑이 당 중앙위원회 산하의 중앙재정영도소조(中央????小?)의 조장 자격으로 국가에너지안전전략회의를 주재했다고 중국의 관영 신화통신이 보도하면서 중국정치전문가들의 관심을 끌고 있다.

이제 시진핑은 총서기 취임 2년여 만에 당과 국가의 핵심적인 10개 조직의 책임자 자리에 오르면서 명실상부한 최고 권력자임을 내외에 공포했다.

지난 2012년 11월 개최된 중국공산당 제18기 1차 중앙위원회 전체회의에서 총서기와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으로 선출된 시진핑은, 2013년 3월 개최된 전국인민대표대회 제12기 1차회의에서 중화인민공화국 주석과 국가중앙군사위원회 주석으로 선출되면서 전임인 후진타오로부터 순조롭게 권력을 이양받았다.

특히 총서기 취임과 동시에 중국공산당의 실질적 권력기반인 인민해방군의 통솔권까지 이어받음으로서 부족한 베이징에서의 권력 기반을 신속하게 보완하면서, 후진타오의 직계인 총리 리커챵과 쌍두마차 체제를 형성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2013년 12월 개최된 중국공산당 제18기 3차 중앙위원회 전체회의를 기점으로 변화의 조짐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 회의에서 새로 설치가 결정된 심화개혁영도소조(中央全面深化改革??小?)와 국가안전위원회(中央?家安全委??)의 최고 책임자 자리를 차지하더니 계속해서 새로 설립된 인터넷안전과 정보화소조(中央??安全和信息化小?)와 국방개혁심화소조(中央?委深化?防和??改革??小?) 뿐 아니라 중앙재정영도소조의 조장까지 맡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중앙재정영도소조는 1980년 설립이후 총서기인 쟝쩌민(江?民)이 조장직을 차지했던 경우를 제외하면 대부분 경제문제를 총괄하는 국무원 총리가 이 소조의 조장 직을 수행했었다.

쟝쩌민 집권기의 주롱지(朱?基) 총리와 후진타오(胡??) 집권기의 원자바오(?家?) 총리가 바로 이 소조의 조장이었다. 그리고 시진핑-리커챵 체제가 막 성립도 후의 보도에서도 리커챵이 조장직을 수행하는 것으로 보도됐었다. 그러다가 최근의 신화사 보도를 통해 시진핑이 이 소조의 조장으로 보도되면서 해외 중국전문가들의 주목을 끌게 되었다.

이로써 시진핑은 총서기가 당연직으로 차지하던 국가 주석, 중앙군사위 주석, 외교 및 국가안전영도소조(中央外事/?家安全工作??小?)와 대만문제영도소조(中央?台工作??小?) 등을 포함해 무려 중국공산당과 중화인민공화국의 핵심적인 10개 기구의 책임자가 되었다. 마오쩌뚱(毛??)과 떵샤오핑(?小平) 같은 중국공산당의 절대 권력자들보다 더 많은 직책을 차지하고 외견상으로는 오히려 그들보다 더 강력한 권력을 차지한 것처럼 보인다.

문제는 시진핑 집권 초기부터 최근까지 진행된 중국공산당의 권력구조의 변화를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점이다.

과연 시진핑은 마오쩌뚱이나 떵샤오핑을 능가하는 절대 권력을 집단지도체제가 이미 자리 잡은 21세기 초반의 중국공산당 권력 구조 내에서 다시 확립한 것인가? 아니면 집단지도체제가 가져온 의사결정의 문제점을 개선해 좀 더 효율적인 집단지도체제로의 진화인가?

마오쩌뚱은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이후, 단지 2개의 직책, 즉 중국공산당중앙위원회 주석과 중화인민공화국 주석 직을 보유했을 뿐이다. 그러나 마오쩌뚱과 생사고락을 같이 했던 창당시기의 동료들 누구도 마오쩌뚱의 절대 권력을 견제하지 못했다.

떵샤오핑 역시 문화대혁명이 끝나고 개혁개방의 시대를 진두지휘하면서 맡았던 직책이 당의 중앙고문위원회(中?共??中央??委??) 주임과 중앙군사위주석 직이었다. 쟝쩌민이 총서기에서 물러난 후에도 2년 동안 더 유지했던 직위가 바로 중앙군사위 주석이었다.

후진타오를 제외한 중국공산당의 1인자들이 가장 마지막까지 갖고 있었던 직위가 바로 당 총서기가 아닌 당 중앙군사위 주석이었다. 왜 시진핑은 후진타오로부터 중국공산당의 가장 핵심 권력인 중앙군사위 주석 직까지 함께 물려받으면서 순조롭게 출발했지만 이에 만족하지 못하고 10개에 달하는 당과 국가의 핵심 직책을 혼자 독차지 했을까?

이는 최근 우리가 목격하고 있는 중국의 정치적 상황과 깊은 관계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반부패 투쟁을 명분으로 전-현직 고위층을 대상으로 진행되고 있는 정치적인 압박은 시진핑 체제의 탄생과도 무관하지 않다.

쟝쩌민의 후진타오에 대한 적대감과 탄압은 그가 현직에서 완전히 은퇴한 후에도 지속되었으며, 결국 시진핑은 쟝쩌민의 후원으로 후진타오의 직계인 리커챵을 총리로 밀어내고 당의 1인자가 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쟝쩌민은 자신이 후원한 시진핑과 후진타오 세력의 연대에 불만을 품고 자신의 최측근이자 후진타오 시절 정법위 서기로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던 조우용캉(周永康)과 후진타오에 의해 직할시이지만 변방인 총칭시 당위원회 서기로 좌천되어 불만을 품고 있던 보시라이(薄熙?)에 의한 정변을 기도했지만 실패하고 말았다.

후진타오 임기 말 보시라이의 부패사건에 의한 실각과 시진핑 집권 이후 지속되고 있는 부정부패를 명분으로 내세운 조우용캉과 그의 측근들에 대한 수사는 본질적으로 쟝쩌민 세력과 시진핑-후진타오 연대세력의 대결이 계속되고 있음을 말해준다.

개혁개방의 완성을 위한 떵샤오핑 등 원로 세력들의 적극적인 지지를 발판으로 13년 동안 막강한 세력을 형성한 쟝쩌민은 후진타오 집권 10년 동안에도 당의 핵심 권력기구인 정치국 상무위원회에서 다수를 형성한 채 후진타오를 견제했으며 시진핑 집권 초기인 현재에도 그러하다.

결국 시진핑은 기존의 당 기구들과 역할이 겹치거나 비슷한 새로운 역할을 수행하는 기구를 설립하고 자신이 직접 책임자가 됨으로서 집단지도체제 하에서 독자적인 권한을 행사하면서 자신을 견제하고 있는 쟝쩌민 추종자들에 대항하고 그들의 견제를 돌파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여전히 당의 권력구조 자체가 정치국 상무위원회와 정치국의 집단적인 의사결정을 기본으로 운영되고 있어서 시진핑이 현재보다 더 많은 직책을 독점한다 하더라도 밖에서 보는 것처럼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다만 이러한 새로운 기구들의 설립과 인적 재배치가 지난 20여 년 동안 정치국 상무위원들을 포함한 핵심 정치국원들의 지나치게 독자적인 권한 행사를 최소한이나마 견제하고 당 총서기에 의한 전반적인 지도라는 형식을 어느 정도는 완성시켜 줄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비단장수 왕서방”으로 상징되는 중국의 경제적 발전과 변화에 비해 공산당으로 상징되는 중국의 정치적 변화는 서구적인 시각으로 보면 답답하고 불편할 뿐이지만, 소련을 위시한 대다수 사회주의 국가들의 몰락과정에서의 교훈, 2000년이 넘게 지속되어 온 소수 지배세력의 권력독점 등을 되새기면 현재 중국정치가 직면하고 있는 많은 문제점들에도 불구하고 중국공산당의 정치적 변화와 실험은 결과와 내용면에서 의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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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중국인] 시진핑 1년과 권력구조 재조정 (1) 2015/06/15 PM 12:29


전인대 폐막 연설을 하고 있는 시진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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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2014년 3월 19일에 쓰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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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가을에 개최되는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전체회의(9~10월 중 개최)와 함께 중국의 가장 중요한 연례 정치행사인 양회(??,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中?人民政治?商??, 3.3~3.12)와 전국인민대표대회(全?人民代表大?, 3.5~3.13)의 12기(?) 2차 회의)가 막을 내렸다.

양회 개막 직전 민족분리주의자들의 소행인 것으로 추정되는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잔혹한 살인사건이 남서부의 주요 도시 쿤밍(昆明)의 기차역에서 발생해 백 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고, 곧 이어 양회 기간 중에는 중국인들이 대거 탑승한 쿠알라룸푸르발 베이징행 비행기가 실종되는 등 어수선한 상황에서도 예정된 의사일정을 모두 순조롭게 처리하고 막을 내렸다.

특히 정치 분야에서는 양회 개막 전, 전임 정법위 서기 조우용캉(周永康)의 법적 처리에 관한 당국의 입장 표명이 있을 것이라는 외신들의 추측을 뒤로한 채, 시진핑(?近平)이 중앙군사위원회 국방과 군대 개혁 심화 소조 조장(中央?委深化?防和??改革??小?)직을 맡게 되었다는 소식을 전했다.

조우용캉의 의법 조치에 대한 침묵과 시진핑이 또 다른 핵심 소조의 책임자가 되었다는 발표에서 중국의 고민을 발견할 수 있다.

후진타오(胡??) 퇴임 전부터 시작된 조우용캉에 대한 공세는 그의 정치적 기반이었던 중앙과 지방의 정법위 및 공안 계통 간부들에 대한 처리 및 경제적 기반인 석유 계통 고위 국영기업 간부들의 연이은 해임과 체포와 함께 최근에는 그의 아들(조우빈, 周斌)을 포함한 가족들까지 부정부패 혐의로 체포된 것으로 알려지면서 이미 마침표를 찍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우용캉에 대해 보시라이(薄熙?)처럼 공개적인 법적 조치를 취하지 못하는 이유는 그에 대한 법적 조치가 곧 바로 그의 정치적 후견인인 전임 총서기 쟝쩌민(江?民)과 그의 심복 쩡칭홍(曾??) 등에 대한 관계와 직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쟝쩌민이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형성한 샹하이방의 세력이 그의 정계은퇴를 기점으로 쇠퇴하고 있기는 하지만 13년이라는 긴 세월동안 당과 정부 곳곳에 거점을 확보하고 있어서 완전히 제거하기가 쉽지 않으며, 시진핑이 총서기직에 오를 수 있었던 것도 후진타오의 공청단파를 견제하기 위한 쟝쩌민, 쩡칭홍의 강력한 지지 때문이었다.

시진핑에게 이들은 정치적 은인인 동시에 개혁의 대상이다. 조우용캉에 대한 법적 처리의 어려움이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또 다른 이유는 시진핑 집권 후 강력하게 진행되고 있는 반부패 운동이 갖고 있는 양면성이다. 소위 태자당으로 불리는 혁명 열사들의 후예들과 당-정 고위 간부들은 정치적 권력과 함께 엄청난 경제적 부를 소유하고 있다. 쟝쩌민과 후진타오 시대의 고위 지도자들뿐 아니라 현 시진핑 체제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시진핑을 비롯한 정치국원 이상의 고위 간부들과 그의 가족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부를 축적해 왔으며, 따라서 어느 누구도 부정부패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시진핑의 공세가 조우용캉의 배후까지 겨눌 무렵 국제탐사보도언론인협회(ICIJ)를 통해 보도된 시진핑, 후진타오, 떵샤오핑을 비롯한 전-현직 고위 지도자들의 조세회피지역 비자금 문제는 시진핑 개혁의 한계를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주목해야 할 지점이 또 하나 있다. 3월 15일 전국인민대표대회 폐막과 동시에 시진핑이 국방과 군대 개혁 심화 소조의 조장으로 회의를 주최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이미 시진핑은 당의 총서기, 국가주석, 중앙군사위원회주석 등 중국의 권력구조에서 가장 중요한 3개 기구의 최고 책임자에 올랐다.

후진타오는 전임 쟝쩌민의 견제로 총서기에 당선되고 2년 반이 지나고서야 군에 대한 명목상의 통수권을 차지할 수 있었으며, 은퇴를 불과 2~3년 앞두고서야 군에 대한 실질적인 통제권을 확보할 수 있었다. 시진핑은 이와 반대로 자신의 전임인 후진타오의 적극적인 협력으로 이 3개의 직책을 동시에 차지하면서 짧은 자신의 정치경력에 비해 빠른 속도로 권력을 강화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진핑은 집권 이후 끊임없이 새로운 기구를 설립하고 이 모든 주요 기구의 지휘권을 차지하고 있다. 기존의 총서기가 겸임했던 대만문제 소조(中央?台工作??小?), 국가안전지도소조(中央?家安全??小?)와 대외업무지도소조(中央外事工作??小?) 뿐이 아니다.

2013년 11월 개최된 3중전회(중국공산당 제18기 중앙위원회 제3차 전체회의)에서 결정된 전면심화개혁지도소조(中央全面深化改革??小?, 2013년 12월 30일)와 국가안전위위회(中央?家安全委??, 2014년 1월 24일)의 주석 뿐 아니라 계속해서 새롭게 설치된 인터넷 보안과 정보화 소조(中央??安全和信息化小?, 2014년 2월 27일) 그리고 가장 최근에 설치된 국방과 군대 개혁 심화 소조(2014년 3월 15일)의 조장 등 모든 중요한 직책을 독점하고 있다. 마오쩌뚱이나 떵샤오핑도 이렇게 많은 직책을 가진 적이 없었다.

시진핑의 권력 강화인가 아니면 시진핑이 여전히 자신의 권력 기반에 확신을 갖지 못한 것인가 아니면 진정한 정치개혁의 과정인가?

정치국과 정치국 상무위원으로 이어지는 현재 중국공산당의 권력 구조상 시진핑이 몇 개의 직책을 더 독점한다 하더라도 당의 기본적인 집단적인 의사 결정 구조를 변화시키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여전히 각각의 정치국상무위원들과 정치국원들은 자신들이 담당하고 있는 직책에서 고유의 권한을 행사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며, 자신들의 권한을 내주면서 과거처럼 1인 지배체제로 회귀하는 것에 선뜻 동의하지도 않을 것이다.

오히려 쟝쩌민과 후진타오를 거치면서 형성된 집단지도체제 하에서의 지나치게 독자적인 권력행사가 당의 단결을 해치고 통일적 정책집행에 엇박자를 가져오기도 했다는 사실에 최소한의 공감대가 형성되었으며, 이에 따라 권력분점의 내용을 유지하면서도 통일적이고 원활한 정책집행을 위한 변화과정일 수도 있다.

새로 설립된 기구들에 기존의 고위 지도자들이 각자의 권한과 역할에 부합하게 재배치되는 점에서 이러한 해석이 가능하다.

물론 이러한 변화가 시진핑의 권력강화로 이어질 수 있는 가능성도 상존한다. 시진핑이 집권한 지 이제 겨우 1년이 지났다. 물론 이 1년 동안 적잖은 변화가 있었지만 이것만으로 중국정치의 향방을 예측하기에는 충분하지 않다. 중국의 정치구조는 중국의 국-내외적 상황 변화에 따라 앞으로도 계속해서 변화할 것이며, 새로운 시대에 부합하는 인물들도 계속해서 등장할 것이다.

중국정치의 변화에 대한 좀 더 확실한 그림은 적어도 조우용캉의 법적 처리와 쟝쩌민과의 관계 정립 등이 정리되는 시점 이후에나 그려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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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중국인] 시진핑 집권 초기 두 개의 최고기구 구성 완료 (0) 2015/06/13 PM 12:59

시진핑 공산당 총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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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글은 2014년 02월 07일 쓰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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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전면심화개혁영도소조(中央全面深化改革??小?, 이하 심화개혁소조)와 중앙국가안전위원회(中央?家安全委??, 이하 국가안전위원회)의 지도부 구성이 완료되었다.

예상대로 시진핑이 두 기구의 최고 책임자로 임명되었고, 권력 약화설이 나돌던 총리 리커챵이 두 기구의 2인자 자리에 올랐다.

지난 18기 3중전회(3중전회)에서 이 두 기구의 설립이 결정된 이후 중국공산당의 권력구조의 변화와 정치개혁의 방향을 둘러싼 수많은 추측들도 자연스럽게 잦아들고 있다.

여기서 중국정치를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문제에 대해 다시 언급하고자 한다.


지난 3중전회에서 두 기구의 설립이 결정되고 시진핑이 이 두 기구의 수장을 차지할 것으로 예상되면서 다수의 언론에서 마치 시진핑이 마오쩌뚱과 떵샤오핑을 뛰어넘는 절대 권력을 차지하고 반대로 쌍두마차로 불리던 리커챵의 권력이 상대적으로 감소할 것처럼 보도했지만, 중국의 최대 명절인 춘절(春?,설) 전에 급히 발표된 두 기구의 고위직 인선 내용을 살펴보면 이런 보도들과는 다른 점이 눈에 띈다.

우선 중국공산당과 중화인민공화국의 권력구조상 어떤 기구나 조직이 신설되더라도 당 총서기와 국가주석을 겸하고 있는 시진핑이 최고 책임자 직을 차지하는 것은 피할 수 없다. 따라서 시진핑이 이 두 기구의 최고 책임자가 되었다하더라고 이것을 시진핑 개인의 권력 강화로 이해하는 것은 지나치게 단선적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물론 시진핑은 집권 10년 내내 쟝쩌민 세력의 견제를 받았던 후진타오와는 달리 쟝쩌민 세력의 견제라는 공통의 목표를 가진 후진타오의 적극적인 지원 아래 집권 초기부터 자신의 측근들을 요직에 임명할 수 있었고, 동시에 중앙군사위원회주석 직까지 승계 받음으로서 1인자로서의 권력을 좀 더 공고히 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진핑의 권력 확장은 쟝쩌민 이후 시작된 정치국과 정치국 상무위원회를 중심축으로 한 집단지도체제라는 대세를 거스를 수 없을 것으로 보인다.

이 점은 지난 1월말 결정된 국가안전위원회의 성격규정에서도 볼 수 있는데, 정치국은 이 기구를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가 국가안전에 관한 중요한 결정을 내리고 이를 위해 협력하는 기구로 정치국과 정치국 상무위원회에 책임을 진다고 규정하고 있다.

오히려 시진핑의 재빠른 권력 확장과 비교되면서 상대적으로 권력이 축소되는 것처럼 보였던 리커챵은 쌍두마차로서의 존재감을 확실하게 보여주었다.

후진타오가 총리로 밀려난(?) 자신의 측근 리커챵을 위해 제정한 것으로 알려진 국방동원법(국가비상사태시 총리에게 인민해방군의 사용을 요청할 수 있도록 허용한 법으로, 군부에 대해 전혀 간섭할 수 없었던 총리에게 간접적으로 군부에 대한 지휘권 부여)이 있지만 인민해방군에 대한 지휘권은 여전히 중앙군사위주석이 독점하고 있어서, 리커챵이 당의 2인자이면서 총리지만 군부에 대한 영향력을 거의 행사할 수 없었는데 이번 국가안전위원회의 제1부주석에 임명되면서 군부에 대한 직접적인 개입도 가능해졌다.

(최근 사법처리가 임박한 것으로 보도된 전임 정법위서기 조우용캉이 막강한 권력을 행사할 수 있었던 이유 역시 인민해방군 산하 일부 부대와 기타 무장세력, 즉 무장경찰, 공안 등을 지휘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리커챵이 새로 설립된 심화개혁소조와 국가안전위원회의 부조장과 부주석에 임명되면서 명실상부한 2인자의 위치를 확인했다면, 2017년 개최되는 제19차 당 대회에서 정치국 상무위원직을 물러나게 될 다른 5명의 정치국 상무위원 중 현재 중국의 가장 중요한 사업인 반부패투쟁을 진두지휘하고 있는 기율검사위서기 왕치샨을 제외한 4명의 당내 권한은 좀 더 약화될 것으로 보인다.

전국인민대표대회 상임위원장을 겸임하고 있는 쟝더장이 국가안전위원회 부주석으로 임명되었지만 입법기구의 수장으로서 위원회의 활동을 위한 입법조치나 법률문제에 대한 자문 외에는 특별한 역할을 기대하기 쉽지 않기 때문이다.

심화개혁소조의 부조장에 임명된 리우윈샨(당 건설과 선전부문 담당)과 수석 부총리인 장까오리의 역할도 6개 부문으로 구성된 심화개혁소조에서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특히 장기적인 경제정책과 금융 분야를 담당하고 있는 장까오리는 직속상관인 리커챵의 존재로 인해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오히려 이 두 기구의 설립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기존의 당 조직들의 대한 재조정이라 할 수 있다.

우선 이전의 글들에서 몇 차례 언급했던 것처럼 무장병력을 동원할 수 있는 막강한 권력으로 전횡을 일삼았던 정법위 서기의 권한축소이다.

이미 후진타오 임기 말부터 시작된 정법위 서기의 권한 축소는 정치국 상무위원 진입금지와 더불어 각종 권한이 다른 부분으로 이관되었으며, 각 지역 당 위원회의 정법위 서기들 역시 지역의 각종 핵심 권력조직에서 축출되었다.

특히 쟝쩌민 이후 확립된 당 중앙의 권력분산은 마오쩌뚱이나 떵샤오핑 같은 절대 권력자의 전횡은 방지할 수 있었지만 당 권력의 지나친 분화로 당과 국가운영에 있어서 혼란을 초래했다.

정치국 상무위원의 숫자에 관계없이 이들이 각자의 분야에서 절대적인 권한을 행사하면서 부문 이기주의가 표출되기 시작해 후진타오 집권시기에는 최고 결정권자의 지시가 제대로 집행되지 않는 상황에까지 이르렀고 결국에는 보시라이 사건까지 발생하게 되었다.

3중전회에서 두 기구를 설립하기로 결정한 것은 아마도 중국의 국제적 역할이 나날이 증가하고 국내 정치의 불안요인이 증가하고 있는 상황에서 정책결정과 집행의 효율성과 신뢰도를 높이기 위한 조치로 해석할 수 있다.

이미 당 내부에 외교, 안보, 경제, 선전 등을 담당하는 영도소조가 구성되어 각 상무위원들이 역할을 분담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영도소조를 포괄하는 권한을 가진 두 기구를 설립한 것은 기존의 권력분산과 집단지도체제를 유지하면서도 당과 정부의 통일적이고 효율적인 정책집행을 위한 조치로 이해할 수 있다.

심화개혁소조와 국가안전위원회에 다수의 정치국원 및 각 분야의 고위 관료들이 포진한 것도 이런 조치의 일환으로 이해할 수 있다.

중국의 정치개혁이 다른 분야에 비해 더디기는 하지만 여전히 변화를 모색하고 있으며, 또 변화하지 않을 수 없다는 사실을 당과 정부의 지도자들 역시 충분히 인식하고 있다. 시진핑-리커챵 체제의 최대 과제인 정치개혁이 이 두 기구의 설립을 시작으로 어떤 모습으로 전개될지 지켜보는 것도 중국정치에 관심 있는 사람들의 커다란 관심사가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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