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상훈 MYPI

서상훈
접속 : 6588   Lv. 90

Category

Profile

Counter

  • 오늘 : 35 명
  • 전체 : 15095 명
  • Mypi Ver. 0.3.1 β
[필론과 돼지-다시 읽기] [필론과 돼지] 다시 읽기-part04-광기와 폭력. (0) 2023/01/24 PM 08:06


img/23/01/24/185e374fbc7f04e.jpg


img/23/01/24/185e374ffb9f04e.jpg


img/23/01/24/185e374feccf04e.jpg


img/23/01/24/185e3750097f04e.jpg


img/23/01/24/185e37501c4f04e.jpg


img/23/01/24/185e3750227f04e.jpg


img/23/01/24/185e37501c1f04e.jpg


img/23/01/24/185e375025ff04e.jpg


img/23/01/24/185e3750304f04e.jpg


img/23/01/24/185e3750254f04e.jpg

두 번째 영웅은 가장 처참한 모습으로 쓰러집니다. (이런 그의 모습은 만약 주인공이 나섰더라도 저렇게 되었을 것이란 암시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이문열 씨는 힘과 마찬가지로 전두환 세력에게 법과 원칙으로 호소하는 것도 통하지 않을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한 가지 주목할 점은, 두 번째 영웅의 호소가 검은 각반들뿐만 아니라 제대병들에게도 전혀 통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첫 번째 영웅이 등장했을 때, 몇 명의 제대병들이 동조해서 일어섰습니다.

세 번째 영웅이 등장했을 때, 제대병들은 모두 일어섭니다.

하지만 두 번째 영웅이 폭행을 당하는 동안에는 누구도 일어서지 않습니다.

이렇게 이문열 씨는 당시 대한민국 국민들에 대한 인식을 드러냅니다. 즉, 법과 원칙에 호소해서는 그들을 움직일 수 없다는 겁니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에서 한병태가 언급했던 '어리석고 비겁한 다수'와 일맥상통합니다.)


MjAyMDExMTNfNCAg/MDAxNjA1Mjc4NjA2MDIz.Qg5hD7oOJPXGi-KIVpqp9gruGit1uvy6EgVz7xiHLogg.0xOpI5VleYBGoriV7pQVpc-0VX7s8RBCh7W1yC6hFAgg.JPEG.megadoll/%EC%96%B4%EB%A6%AC%EC%84%9D%EA%B3%A0_%EB%B9%84%EA%B2%81%ED%95%9C_%EB%8B%A4%EC%88%98.jpg?type=w3


동시에 검은 각반 리더와 함께 사라졌던 첫 번째 영웅도 처참한 몰골로 다시 나타납니다. (그들은 처음부터 자신들의 것을 나눌 생각이 없었던 겁니다.)


이쯤에서 독자들은 궁금증이 생깁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떻게 해야 전두환 세력을 무너뜨릴 수 있을 것일까요? 그래서 세 번째 영웅이 등장합니다.


세 번째 영웅은 숨어서 제대병들의 자존심을 건드립니다. '법과 원칙'을 외칠 때는 움직이지 않던 그들이, '부랄', '애인'을 외치자 일어섭니다. 이렇게 이문열 씨는 대한민국 국민들을 '자존심을 건드려야 움직이는 존재'로 설명합니다. 아무튼 마침내 일어선 제대병들은 압도적인 수를 앞세워 검은 각반들을 제압합니다.


만약 다른 작가의 소설이었다면, 이제 검은 각반은 쫓겨나고, 자유를 되찾은 제대병들이 환호하면서 이야기가 마무리되었을 겁니다. 하지만 이 작품은 이문열 씨의 소설이기 때문에, 이제부터가 진짜 그의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이제부터는 더 이상 현실에 대한 은유가 아닌, 온전히 그의 상상입니다.


검은 각반을 제압한 제대병들은 미치광이로 변해 잔인한 폭력을 휘두릅니다.

계속되는 폭력을 지켜보던 주인공의 인식에도 조금씩 변화가 생깁니다. 군사독재가 무조건 나쁜 것이 아니라, 국민들의 광기와 폭력을 억누르는 긍정적인 역할도 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발견한 겁니다.


지금까지 '선'이라고 믿어왔던 민주주의는 '광기와 폭력'으로 바뀝니다.

지금까지 '악'이라고 믿어왔던 군사독재는 '필요악'으로 바뀝니다.


즉, 이문열 씨는 만약 광주민주화운동에서 민주화 세력이 승리했더라면 대한민국은 광기와 폭력이 지배하는 지옥으로 바뀌었을 것이라고 가정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런 질문을 던질 필요가 있습니다.


'이 가정은 얼마나 타당한가?'


아무튼 비로소 주인공의 내적 갈등은 해소되고, 더불어 이문열 씨의 부끄러움 역시 해소됩니다.

신고

 
[필론과 돼지-다시 읽기] [필론과 돼지] 다시 읽기-part03-홍동덕. (0) 2023/01/24 PM 12:22


img/23/01/24/185e1cc086af04e.jpg


img/23/01/24/185e1cc0b7cf04e.jpg


img/23/01/24/185e1cc0d77f04e.jpg


img/23/01/24/185e1cc0e59f04e.jpg


img/23/01/24/185e1cc0f87f04e.jpg


img/23/01/24/185e1cc1027f04e.jpg


img/23/01/24/185e1cc0fb4f04e.jpg


img/23/01/24/185e1cc105af04e.jpg


img/23/01/24/185e1cc10a9f04e.jpg


img/23/01/24/185e1cc10bef04e.jpg

첫 번째 영웅은 힘으로 검은 각반을 제압합니다. 하지만 검은 각반의 리더 역시 노련합니다. 그는 오히려 첫 번째 영웅을 설득해 자기편으로 끌어들입니다.


이처럼 이문열 씨는 첫 번째 시뮬레이션을 통해 힘으로는 전두환 세력을 무너뜨릴 수 없을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한 가지 주목할 점은, 이런 이문열 씨가 7년 후의 작품인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에서는 엄석대의 독재가 오직 더 큰 힘에 의해 무너질 수 있다고 설명한다는 것입니다.)
MjAyMDExMTFfMTUy/MDAxNjA1MDU1NTU4MjMz.wDbZ0vKpdBLAh72IMEvAHljT6grO3x6APzVkztN8smYg.UgTpsvC2EIT9ZtKH-nerwS9-qSJeQGUUguV7HXDnCN8g.JPEG.megadoll/%EC%9A%B0%EC%9D%BC%EC%98%8101.jpg?type=w3

마침내 주인공도 징수를 당하게 되는데, 여기서 그가 린치를 당할 뻔하자 홍동덕이 나서서 도와줍니다. 주인공은 처음에는 홍동덕이 자신의 창백한 표정을 보고 착각한 것이라 생각합니다. (홍동덕은 자신의 고뇌를 이해할 수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곧 그가 주인공의 생각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음이 드러나고, 주인공은 다시 한 번 불쾌해 합니다.

이처럼 주인공은 검은 각반 때문에 부끄러워지고, 홍동덕 때문에 분노하는 과정을 반복합니다. 그러면서 주인공의 내적 갈등이 심화됩니다.

홍동덕의 존재를 통해 유추할 수 있는 것은, 이 소설이 '광주민주화운동'보다는 작가 자신의 '부끄러움'에 더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는 점입니다.
즉, 광주민주화운동을 이야기하기 위해 자신의 부끄러움을 가져온 것이 아니라, 자신의 부끄러움을 이야기하기 위해 광주민주화운동을 가져왔다는 것입니다. 이는 '홍동덕'의 유일한 역할이 주인공의 분노와 부끄러움을 키우는 것이란 점에서 알 수 있습니다. 깨끗한 것을 배운 자신과 더러운 것을 배운 홍동덕이 같은 생각과 행동을 하고 있다는 것이 주인공에게는 견딜 수 없이 부끄러웠을 것입니다.

그래서인지 주인공은 검은 각반에게는 약한 모습을 보이면서도 홍동덕에게만은 강한 모습을 보입니다. (심지어 그가 방금 주인공을 도와줬는데도 말이죠.) 아무래도 주인공은 홍동덕에게는 아무렇게나 대해도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모양입니다.

그는 이내 그런 자신에게 다시 부끄러움을 느끼며 현실에서 도망치려 합니다. 그런데 곧 두 번째 영웅이 등장하여 그의 주목을 끕니다.

이 두 번째 영웅은 '법과 원칙'을 상징합니다. 이렇게 작가는 이번에는 전두환 세력에게 법과 원칙을 내세워 설득하는 것은 가능할 것인지 시뮬레이션하고 있습니다.

참고로 이 두 번째 영웅은 여러 명의 영웅들 중에서 주인공과 가장 닮은 인물입니다. 하지만 주인공보다는 학력과 체격, 모든 면에서 부족합니다.
그런데도 주인공은 차마 무서워서 하지 못했던 역할을 합니다.
따라서 세 번째 영웅의 출현에 주인공은 가장 부끄러움을 느꼈을 겁니다.

신고

 
[필론과 돼지-다시 읽기] [필론과 돼지] 다시 읽기-part02-외적 갈등과 내적 갈등. (0) 2023/01/23 PM 07:16


img/23/01/23/185de201a7ff04e.jpg


img/23/01/23/185de2022a1f04e.jpg


img/23/01/23/185de2024e2f04e.jpg


img/23/01/23/185de202572f04e.jpg


img/23/01/23/185de202636f04e.jpg


img/23/01/23/185de2025dbf04e.jpg


img/23/01/23/185de202576f04e.jpg


img/23/01/23/185de20263af04e.jpg


img/23/01/23/185de202656f04e.jpg


img/23/01/23/185de202643f04e.jpg

열차가 출발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검은 각반이 등장합니다. 이처럼 서울의 봄을 깨고 다시 군사독재로 되돌아가려는 이들은 당시 전두환 보안사령관을 상징합니다. 이렇게 이 소설의 외적 갈등이 시작됩니다.

처음에 이들은 술값을 보태달라고 정중하게 제대병들에게 부탁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곧 강요와 폭력으로 바뀝니다. 이러한 제대병들의 폭력은 이문열 씨의 인터뷰에서 드러나듯 광주민주화운동을 상징합니다.

이문열 씨는 1980년 5월 대한민국의 상황을 한 군용열차에 빗대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제가 소설가로서 이문열 씨를 높게 평가하는 점이 바로 이런 부분입니다. 그는 복잡한 현실의 양상을 소설 속에서 단순하고 명쾌하게 재설정하는 데 매우 뛰어난 작가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주인공의 부끄러움, 즉 내적 갈등도 시작됩니다.

그는 이 열차에서 최고의 학력을 가진 인물입니다.
따라서 지식인인 자신이 대중을 이끌고 폭력에 저항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반면에 홍동덕은 아무런 부끄러움도 없습니다. 그는 그런 사회적 책임을 요구받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당시 이문열 씨의 위상이 이런 사회적 역할을 요구 받을 정도였는가 하면, 그렇지는 않습니다. 7년 후에 쓰인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으로 상업적 성공과 함께 대중적 인기를 얻기 시작하였고, 80년의 이문열 씨는 문단 내에서 주목 받는 수준이었습니다. 어쨌거나 이문열 씨 개인은 자신이 이런 시기에 지식인으로서 어떤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하지만 결국 아무 것도 하지 못했고, 거기에 큰 부끄러움을 느끼고 있습니다. (당연히 이 부끄러움은 민주주의가 '선'이고 군사독재가 '악'이라는 인식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16페이지에서 주인공이 헌병이나 공안원이 나타나 주기를 기대하고 있는데,
17페이지에서 홍동덕 역시 주인공과 똑같은 생각을 합니다.
그는 처음에는 놀라다가 이내 홍동덕을 미워하기 시작합니다.
여기서 잠시 그가 홍동덕을 미워하는 이유를 분석해 보죠.

주인공은 이 열차에서 최고의 학력을 가진 인물입니다.
반면에 홍동덕은 최저의 학력을 가진 인물입니다.
또한 주인공은 엘리트 의식에 가득 찬 인물입니다.
따라서 자신이 하는 생각은 지식인들만 할 수 있는 철학적 고민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홍동덕도 같은 생각을 한다면, 자신의 특별함을 증명할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홍동덕으로 인해 그의 좌절감과 부끄러움은 심화되어 갑니다. (이것은 소설의 마지막에 등장하는 필론의 에피소드에서도 반복됩니다.)

19페이지에서 첫 번째 영웅이 등장합니다. 그는 힘을 상징합니다.
이문열 씨는 이 소설 속에서 전두환 세력에 맞설 수 있는 다양한 방법을 시도하고 있는데, 첫 번째로 힘으로 전두환 세력을 꺾을 수 있을 것인지 시도해 보고 있습니다. 그 결과가 어떻게 되는지는 다음 화에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신고

 
[필론과 돼지-다시 읽기] [필론과 돼지] 다시 읽기-part01-사회적 배경. (0) 2023/01/23 AM 11:09


img/23/01/23/185dc5dab9df04e.jpg


img/23/01/23/185dc5dba29f04e.jpg


img/23/01/23/185dc5db7f4f04e.jpg


img/23/01/23/185dc5dbb4af04e.jpg


img/23/01/23/185dc5dba29f04e.jpg


img/23/01/23/185dc5dbbe5f04e.jpg


img/23/01/23/185dc5dbb8ff04e.jpg


img/23/01/23/185dc5dbbe5f04e.jpg


img/23/01/23/185dc5dbc24f04e.jpg


img/23/01/23/185dc5dbd28f04e.jpg


img/23/01/23/185dc604714f04e.jpg

<필론과 돼지>는 1980년의 '광주민주화운동' 직후에 발표되었고, <우일영>은 1987년의 '6월항쟁' 직후에 발표되었습니다. 즉, 하나는 전두환 정권이 출발하던 즈음에, 다른 하나는 끝날 즈음에 발표되었습니다. 여기서 제가 특히 주목한 것은 '전두환 군사독재'에 대한 작가의 인식의 변화입니다.

<필론과 돼지>의 '검은 각반'과 <우일영>의 '엄석대'는 모두 전두환 씨를 상징합니다. 하지만 각각의 작품에서 보여지는 모습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필론과 돼지>에서 검은 각반은 속된 말로 '양아치'입니다. 하지만 <우일영>에서 엄석대는 '초인적인 능력을 가진 비범한 인물'입니다. 비록 그가 후반부에 갑작스레 몰락하기는 하지만, 한병태는 성인이 된 이후에도 그가 지배하던 질서를 간절히 그리워합니다. 이처럼 이 7년 동안 전두환 군사독재를 바라보는 작가의 인식은 크게 바뀌었습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또한 이 소설은 이문열 씨가 왜 민주주의를 혐오하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도 설명해줍니다. 이문열 씨의 작품에서는 민주주의에 대한 혐오가 자주 등장합니다. 예를 들어 1996년작인 <선택>이라는 소설을 보면 아래와 같은 언급이 나옵니다.

개인이 비대해져 개인의 평안, 개인의 행복 위에 어떤 것도 인정하지 않으려는 사회가 되면 제도는 비웃음 속에 소멸될 수밖에 없다. (p.71)

라마인(로마인)들은 가장 먼저 민주주의의 맛을 본 사람들이지만 치욕스런 제정(帝政)으로 끝장을 보고 말았다. (p.78)

두 문장을 종합해 보면, 이문열 씨는 민주주의란 결국 왕정이나 독재에 의해 소멸할 수밖에 없는 열등한 시스템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이런 이문열 씨의 인식은 어떻게 시작된 것일까요?

<필론과 돼지>의 초반부에서 뚜렷하게 나타나는 것은, 광주민주화운동에서 독재에 맞서지 않고 침묵했다는 이문열 씨의 부끄러움입니다. 그리고 그는 이 소설을 통해 자신의 부끄러움을 해소하려 합니다. 따지고 보면 이 부끄러움은 민주주의가 선이고 군사독재가 악이라는 전제 때문에 발생합니다. 따라서 만약 민주주의가 악이고 군사독재가 선이라면, 부끄러워할 이유가 사라집니다. 즉, 이문열 씨가 자신의 부끄러움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민주주의가 악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주인공인 '그'는 초반부에는 군사독재를 혐오하지만, 후반부에서 제대병들의 광기를 보고 나서는 민주주의를 더 혐오하게 됩니다.

제가 이 소설에서 집중적으로 설명할 것은 두 가지입니다. 작품의 '시점'과 '홍동덕'이라는 조연의 존재입니다.

이 소설은 전지적 작가 시점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소설에서 흔히 사용되는 시점이지만 꼼꼼히 살펴보면 조금 이상합니다.

소설 속에서는 검은 각반들과 제대병들이 충돌합니다. 이것은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한 은유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바라보기만 하는 관찰자이자 주인공인 '그'가 있습니다. 그리고 다시 '그'를 관찰하는 전지적 시점의 '화자'가 있습니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그'도 '화자'도 결국 이문열 씨의 대리인입니다. 즉, 이 작품에는 이문열 씨가 두 명 등장합니다. 이건 매우 이상합니다. 왜 '그'의 1인칭 관찰자 시점을 사용하거나, '그'를 생략하고 전지적 시점을 사용하지 않았을까요? 그게 작품을 훨씬 간결하게 만들었을 텐데 말입니다.

홍동덕 역시 주인공인 그와 마찬가지로 사건에 전혀 개입하지 않습니다. 다만 주인공의 옆에서 끊임없이 그의 부끄러움을 자극하는 역할을 합니다.

이 두 가지 설정은 모두 작가인 이문열 씨가 당시에 느꼈던 '부끄러움'과 관련이 있습니다. 다음 회부터 이 이야기를 본격적인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사건의 공간적 배경이 되는 열차칸은 대한민국을 상징합니다. 그리고 대한민국 국민을 상징하는 100명의 제대병들이 타고 있습니다. 제대병들은 이 열차가 자신들을 고향으로 데려다 줄 것이란 기대에 들떠 있습니다. 즉, 갑작스레 박정희 대통령이 사망하고 군사독재가 끝나면서 전국이 민주화에 대한 기대로 들떠 있던, ‘서울의 봄’ 당시의 대한민국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주인공인 ‘그’는 등장하자마자 ‘지난 삼 년의 병역생활은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라고 언급합니다. 이 문장은 이렇게 바꿀 수 있습니다.

‘지난 18년간의 박정희 군사독재는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지금 이문열 씨의 정치적 스탠스를 생각해 보면 매우 이상한 일이지만, 이때에는 그 역시 군사독재를 지독히 싫어했던 모양입니다. 당연히 그는 검은 각반(전두환 군사독재)이 등장하자 처음에는 그들에게 반감을 가집니다.

‘대구에서 고향까지 이백 리 길’이란 언급과 주인공이 ‘이 형’이라고 불리는 것으로 봐서 그는 ‘안동 이 씨’인 것 같습니다. 즉, 주인공은 이문열 씨와 매우 닮은 인물입니다.

이 작품의 시점은 조금 이상합니다. 사건을 관찰하는 주인공이 있고, 그런 주인공을 관찰하는 화자가 있습니다.

1인칭 관찰자 시점을 사용해도 별 차이가 없는데, 왜 이렇게 복잡하게 설정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실제로 이 소설 속의 '그'를 '나'로 고쳐봐도 전혀 어색하지 않습니다.) 그건 아마도 이런 이유인 것 같습니다. 이 소설은 이문열 씨가 느꼈던 ‘부끄러움’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1인칭 시점을 사용하면, 독자들은 당연히 주인공과 작가를 연결시키려 할 것입니다. 때문에 굳이 3인칭을 사용한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자신의 부끄러운 이야기를 꺼낼 때, 괜히 ‘이건 내 친구 이야긴데…’ 하는 식으로 말입니다.)

인물의 첫 사건은 그 인물의 성격을 보여줘야 합니다. 주인공인 '그'는 열차 가운데와 출입구는 귀찮은 사건에 말려들기 쉽기 때문에 1/4 정도에 앉는 것이 안심이 된다고 합니다. 작가는 이렇게 남의 일에 말려들기 싫어하는 주인공의 성격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주인공이 앉자마자 ‘홍동덕’이 나타납니다. 참고로 이 열차칸에서 주인공은 최고의 학력(대졸)을 가진, 그리고 홍동덕은 최저의 학력(초등 중퇴)을 가진 인물입니다. 작가는 홍동덕을 통해 주인공이 더 큰 좌절감과 부끄러움을 느낀다고 설정하고 있습니다.

9페이지에서 중요한 언급이 나옵니다.

‘형태나 방식이 다를 뿐, 삼 년간에 바쳐야 할 봉사의 양은 동일하다는 것을’

주인공이 군대를 싫어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모든 젊은이들이 동일한 양의 봉사를 해야 한다는 것. 즉, 자신이 다른 사람들과 같은 양의 고생을 해야 한다는, 이 평등이 싫은 겁니다. 그는 최고의 학력을 가진 자신은 다른 사람들과 다른 대접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이것이 그가 매번 홍동덕에게 분노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신고

 
[우상의 눈물-다시 읽기] [우상의 눈물] 다시 읽기-part10-이미지 조작. (0) 2023/01/22 PM 06:42


img/23/01/22/185d8db0d07f04e.jpg


img/23/01/22/185d8db1093f04e.jpg


img/23/01/22/185d8db12a6f04e.jpg


img/23/01/22/185d8db1356f04e.jpg


img/23/01/22/185d8db1361f04e.jpg


img/23/01/22/185d8db148cf04e.jpg


img/23/01/22/185d8db1507f04e.jpg


img/23/01/22/185d8db1482f04e.jpg


img/23/01/22/185d8db155df04e.jpg


img/23/01/22/185d8db155af04e.jpg


img/23/01/22/185d8db66aef04e.jpg


img/23/01/22/185d8db691ff04e.jpg


img/23/01/22/185d8db6a46f04e.jpg


img/23/01/22/185d8db6c34f04e.jpg

이번 회에서 임형우가 하는 것은 최기표에 대한 '이미지 조작'입니다.

비록 최기표 자체는 아무 것도 변하지 않았지만, 그에 대한 이미지를 바꾸는 것만으로도 대중은 영향을 받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다시 최기표 본인에게도 영향을 미칩니다. (이 장면은 현대 사회에서 왜 언론의 역할 중요한지를 잘 설명해 줍니다. 언론은 이렇게 자신의 가정을 현실로 바꿔놓을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다음 담임과 임형우가 나서서 모금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반 아이들의 동참을 유도합니다. 이 일련의 과정이 아주 매끄럽게 진행되기 때문에, 반 아이들은 자신들이 선동 당하는 지도 모른 채 앞다투어 모금에 동참합니다.

그러자 담임은 곧바로 다음 단계로 넘어갑니다.
한껏 천사로 포장해 놓은 자신의 이미지를 신문을 통해 퍼뜨리는 것입니다.
당연히 여기에 임형우도 끼워줘야 합니다. 혹시라도 그가 배신하면 안 되니까요.

이제 수많은 사람들이 신문을 통해 최기표의 이야기를 접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들이 읽은 이야기는 62명의 반 아이들이 지금까지 알고 있던 이야기와는 많이 다를 겁니다.
이렇게 최기표에 대한 두 개의 이야기가 동시에 존재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과연 이 사회에서 어떤 이야기가 '진짜 이야기'로 유통될까요?

그런데 담임의 욕망은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그는 최기표의 이야기로 포장한 자신의 이야기를 영화로까지 만들려고 합니다. (이렇게 보면 담임은 정말 거대한 욕망을 감추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여기서 잠시 최기표의 입장이 되어 봅시다.
영화 속에서 담임과 최기표는 어떤 모습으로 연출될까요?
어쨌거나 많은 사람들이 영화를 볼 것이고, 그들은 영화 속의 담임이 진짜 담임이고, 영화 속의 최기표가 진짜 최기표라고 믿을 겁니다.
만약 그들이 어쩌다 최기표를 만난다면 이렇게 말할 겁니다.

"나는 진짜 너를 알아."

이렇게 최기표는 담임에 의해 뜯어고쳐지고 있는 중입니다.
그래서 그는 공포를 느끼고 집을 뛰쳐나갑니다.

이 과정을 지켜보던 이유대는 자신이 그 동안 착각해 왔음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이유대와 비슷한 착각을 하고 있던 1980년 봄의 대중들에 대한 경고일 것이며, 이렇게 작가는 '위선적인 악이 가장 위험하다'라는 주제를 완성합니다.

신고

 
이전 6 7 8 9 현재페이지10 다음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