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 영웅은 가장 처참한 모습으로 쓰러집니다. (이런 그의 모습은 만약 주인공이 나섰더라도 저렇게 되었을 것이란 암시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이문열 씨는 힘과 마찬가지로 전두환 세력에게 법과 원칙으로 호소하는 것도 통하지 않을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한 가지 주목할 점은, 두 번째 영웅의 호소가 검은 각반들뿐만 아니라 제대병들에게도 전혀 통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첫 번째 영웅이 등장했을 때, 몇 명의 제대병들이 동조해서 일어섰습니다.
세 번째 영웅이 등장했을 때, 제대병들은 모두 일어섭니다.
하지만 두 번째 영웅이 폭행을 당하는 동안에는 누구도 일어서지 않습니다.
이렇게 이문열 씨는 당시 대한민국 국민들에 대한 인식을 드러냅니다. 즉, 법과 원칙에 호소해서는 그들을 움직일 수 없다는 겁니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에서 한병태가 언급했던 '어리석고 비겁한 다수'와 일맥상통합니다.)
동시에 검은 각반 리더와 함께 사라졌던 첫 번째 영웅도 처참한 몰골로 다시 나타납니다. (그들은 처음부터 자신들의 것을 나눌 생각이 없었던 겁니다.)
이쯤에서 독자들은 궁금증이 생깁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떻게 해야 전두환 세력을 무너뜨릴 수 있을 것일까요? 그래서 세 번째 영웅이 등장합니다.
세 번째 영웅은 숨어서 제대병들의 자존심을 건드립니다. '법과 원칙'을 외칠 때는 움직이지 않던 그들이, '부랄', '애인'을 외치자 일어섭니다. 이렇게 이문열 씨는 대한민국 국민들을 '자존심을 건드려야 움직이는 존재'로 설명합니다. 아무튼 마침내 일어선 제대병들은 압도적인 수를 앞세워 검은 각반들을 제압합니다.
만약 다른 작가의 소설이었다면, 이제 검은 각반은 쫓겨나고, 자유를 되찾은 제대병들이 환호하면서 이야기가 마무리되었을 겁니다. 하지만 이 작품은 이문열 씨의 소설이기 때문에, 이제부터가 진짜 그의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이제부터는 더 이상 현실에 대한 은유가 아닌, 온전히 그의 상상입니다.
검은 각반을 제압한 제대병들은 미치광이로 변해 잔인한 폭력을 휘두릅니다.
계속되는 폭력을 지켜보던 주인공의 인식에도 조금씩 변화가 생깁니다. 군사독재가 무조건 나쁜 것이 아니라, 국민들의 광기와 폭력을 억누르는 긍정적인 역할도 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발견한 겁니다.
지금까지 '선'이라고 믿어왔던 민주주의는 '광기와 폭력'으로 바뀝니다.
지금까지 '악'이라고 믿어왔던 군사독재는 '필요악'으로 바뀝니다.
즉, 이문열 씨는 만약 광주민주화운동에서 민주화 세력이 승리했더라면 대한민국은 광기와 폭력이 지배하는 지옥으로 바뀌었을 것이라고 가정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런 질문을 던질 필요가 있습니다.
'이 가정은 얼마나 타당한가?'
아무튼 비로소 주인공의 내적 갈등은 해소되고, 더불어 이문열 씨의 부끄러움 역시 해소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