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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노동개혁과 정치개혁 (0) 2021/04/10 PM 02:33

노동의 개인화와 분야별 의석

 

 

 

자유주의와 사회주의

 

역사와 외세로 갈기갈기 찢겨진 한국을 흔들리지 않는 단단한 국가로 만들기 위해서는 자유국가에 맞는 사상정립이 필요하다. 정립한 사상을 기반으로 체제개혁을 하여 보다 자유롭고 행복한 사회를 만든다. 지금 한국은 불행하다. 낮은 출산율과 높은 자살률 따위의 지표가 증명한다. 불행한 사회가 다른 체제에 대한 희망을 불러 내부 분열을 일으킨다. 불행한 사회가 남북한의 다양한 지표에서 엄청난 격차를 보여줌에도 북한 내부 선동을 지속하게 만든다. 이걸 해결하려면 지금 체제에서 행복한 사회가 되어야 한다. 그렇게 행복한 사회를 만들어 체제 우위를 명확하게 증명할 수 있어야 국내 결속과 국외 결합을 시도할 수 있다. 많은 민족주의자들이 북한과의 결합을 위해 다양한 시행착오를 겪고 있음을 안다. 진정 민족의 결합을 바란다면 우선 국가의 결속이 시급하다. 순서가 어긋나면 이도 저도 안 된다. 어설픈 동정심으로 그릇된 결과를 도출할 수 있다. 내부를 결속해야 외부와도 결합할 수 있는 것이다. 그걸 위해 사상정립을 해야 한다. 그것을 위해 우선 자유주의와 사회주의의 본질부터 보자.

 

자유주의와 사회주의의 본질은 다음과 같다고 본다. 자유주의는 이기적인 권리쟁취다. 본인의 이익만을 위해 싸운다. 그렇기 때문에 힘을 가진 자가 권리를 쟁취하는데 유리하다. 강자가 권리를 쟁취하여 약자를 착취한다. 착취의 늪에 빠진다. 이것이 경제적 자유주의의 결함이다. 이런 착취로 약자에 속하는 노동자들이 억압과 빈곤으로 고통 받자 이에 마음이 아파진 사상가들이 사회주의를 내세우며 노동자에게 각종 혜택을 요구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사회주의는 이타적인 배려요구다. 모두가 타인의 이익을 위한다. 그렇게 하여 공동체 전체의 이익을 도모한다. 그런데 여기서 배려의 연쇄가 끊기면 공동체는 붕괴한다. 누군가 타인에게 배려를 하지 않고 본인의 이익만 우선시하면 그 사람만 이익을 보고 나머지는 손해를 본다. 그러다가 너도나도 배려를 하지 않게 된다. 배려하는 사람만 호구가 된다.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해서 결국 배려를 강요하게 된다. 규제의 늪에 빠진다. 이것이 사회주의의 결함이다.

 

착취의 늪에 빠지면 적자생존의 야만사회가 된다. 규제의 늪에 빠지면 통제감시의 독재사회가 된다. 각각 사상의 일그러진 결말은 제국주의와 공산주의가 있다. 이 두 가지는 지금까지 인류가 겪어온 이기주의와 이타주의의 순환 중 하나다. 욕망에 의한 이기적인 패악이 나타나면 그에 대항하여 도덕에 의한 이타적인 강요가 나타난다. 자연과 사회다. 도덕에 의한 질서가 답답해지면 자유롭길 바라고, 욕망에 의한 자유가 혼란을 부르면 도덕적이길 바란다. 자유주의와 사회주의다. 예컨대 이런 것이다. 성직자[1신분]와 귀족[2신분]의 억압으로 자유롭길 바랐던 평민[3신분]이 자유주의를 추구했다. 자본가가 이기적인 욕망으로 노동자를 착취하자 사상가와 노동자는 이타적인 마음으로 사회주의를 주장했다. 이와 같이 이기적인 자유 추구와 이타적인 질서 강요가 지금까지 인류 역사의 순환 흐름이다. 지금까지 나는 좌파와 우파의 구분을 지나치게 단순하다고 봤다. 십인십색이라고 모두가 다 다른 색을 지녔는데 어찌 두 가지로 분류될 수 있는가 싶었다. 그런데 위와 같이 단순할 수 있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그 단순함은 학습효과가 없이 반복되고 있었다. 지금은 각국이 이런 순환을 다르게 겪고 있다. 한국은 질서 강요에 답답해져 자유 추구가 늘어났고, 미국은 자유 추구로 혼란스러워 질서 강요가 늘어났다. 두 국가의 정당 지지율을 보면 이 흐름을 유추할 수 있다. 아마 별다른 조치가 없다면 자유 추구와 질서 강요는 다시 한번 반복될 것이다.

 

한국은 이념적으로 볼 때 특별한 국가다. 자유주의와 사회주의의 일그러진 결말인 제국주의와 공산주의 침략과 침공을 받았다. 이념으로 민족이 분단된 국가기도 하다. 이런 역사적 배경으로 이념갈등이 심각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한국인의 행동원리는 이념보다 유교적 가치관에 더 큰 영향을 받고 있으므로 온전하게 그렇다고 보기는 어렵다. 유교의 집단적이고 이타적인 특성상 사실 한국은 사회주의에 적합한 국가다. 이런 특성이 있으니까 군부독재의 계획경제나 의료보험 같은 사회주의적 정책이 온전하게 작동할 수 있었던 것이다. 자유민주주의를 외치는 이가 유교적 가치관에 영향을 받아 집단적이고 이타적인 사회주의적인 성향을 가진 걸 보면 한국 내 정치적 갈등을 이념갈등이라 볼 수 있는 건지 의문이 든다. 한국 내 정치적 갈등은 각 정당이 권력투쟁을 하기 위해 이념을 가지고 국민들을 선동한 끝에 나타난 결과라고 본다. 「공산주의 타도! 군부독재 타도!」 이런 기치를 내세우며 민중의 침략과 침공과 탄압의 트라우마를 자극해 설득이나 선동을 했다는 것이다. 한국 정당의 역사를 보면 초기 여당인 자유당과 야당인 민주당은 모두 자유주의 정당이었다. 이승만, 윤치영, 윤보선, 장면 같은 각 정당 인사들도 전부 자유주의자들이었다. 두 정당에 친일 인사도 많았다. 애초에 사회주의자는 대부분 북한으로 갔다. 한국의 사회주의 성향은 군부 쿠데타로 자유당 측 인사들이 권력을 쥐게 되자 대다수 반대세력[민주주의, 민족주의, 사회주의 등]이 민주당에 결집되어 사회주의 색채가 나타난 것뿐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대립을 통해 색채가 보다 더 두드러지게 된 것이다. 민주주의자가 군부독재와 적대하고 민족주의자가 북한과 화합하고 일본과 반목하고 사회주의자가 노동자와 화합하고 자본가와 반목했던 것이다. 근본은 둘 다 자유주의 정당이다. 그런 관점에서 한국의 정치적 갈등은 이념이 아니라 정당의 권력투쟁으로 촉발된 것이었다. 최근 들어 여성주의가 포함되었는데 이 또한 권력투쟁의 산물로 보인다. 여성주의의 역사가 생각보다 긴 편이지만, 본격적으로 세력화하여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한 것은 최근이다. 이것으로 「유교에 뿌리를 둔 한국에서 어찌 그렇게 이념갈등이 심했는가?」에 대한 답이 될 거라 본다.

 

한국은 유교에 사상적 뿌리를 둔 탓에 자유주의자나 사회주의자가 적은 편이다. 각 정당의 설득과 선동으로 반공주의자와 민족주의자와 민주주의자와 여성주의자와 반여성주의자가 많을 뿐이다. (여기서 민족주의와 사회주의는 반제국주의라는 공통점을 지녀 구분 짓기 어려울 때가 있다. 보통 친북 논란에 휩싸이는 다수의 인물이 사회주의보단 민족주의에 가깝다.) 본인의 생각으로 추구하게 된 사상이 아니라 타인의 필요로 만들어진 사상이다. 국민들의 정치적 성향이 정당의 설득과 선동으로 형성되었다는 것이다. 민중은 본인이나 타인이 겪은 침략, 침공, 탄압, 천대, 역차별 등으로 끊임없이 감정적 자극을 당하며 누군가에게 편한 대로 이용되었다. 유교의 이타적인 위계질서는 정치가의 말을 보다 더 강력하게 작용하게 했다. 이런 배경 때문에 사상이 단편적이고 맹목적이며 종속적인 경우가 많다. 좁은 시야, 감성적인 태도, 맹목적인 지지자와 반대자 따위의 현상은 나라의 정치의 수준을 보여준다. 안타까운 일이다. 강인하고 현명한 인간들이 제 가치를 보이지 못하는 걸 보면 흙 속에 파묻혀 빛을 보지 못하는 보석을 보는 기분이 든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새로운 것을 받아드리는데 어렵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낙관적인 추측을 하게 된다. 현 상황에 대한 분석과 그에 맞춰 바람직한 방향을 제시할 수 있다면 많은 사람들이 그걸 받아드릴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가지고 있다. 그런 작은 소망을 가지고 이 글을 작성하는 중이다.

 

자유주의와 사회주의의 일그러진 결말은 이기주의와 이타주의와의 순환을 되풀이하게 할 뿐이었다. 그 순환에서 벗어나 진정 행복한 사회가 되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자유국가에서는 자유주의에서 그 길을 찾아야 한다고 주장하겠다. 국민이 자유를 사랑하는 한, 다른 방식으로는 길을 찾을 수가 없다. 아니, 인류가 자유를 사랑하는 한 다른 길은 답이 될 수 없다. 모든 인류는 자유주의에서 길을 찾아야 하고, 찾을 수 있다. 자유주의의 본질은 이기적인 권리쟁취다. 힘을 가진 자가 권리를 쟁취하는데 유리하다. 그래서 강자가 약자를 착취하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일방적인 약자 착취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사회주의와 같이 노동자 계급이라는 집단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이타주의를 강요할 것이 아니라, 약자 또한 자유롭게 이기적일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해주는 것이 타당하다고 본다. 강자가 가지는 권리쟁취의 유리함을 모두가 동등하게 누릴 수 있도록 국가가 나서서 통제하는 것이다. 그걸 가리켜 공정경쟁을 위한 환경조성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자유방임주의자는 통제 자체를 꺼려할 수 있다고 본다. 한데 통제되지 않는 자유는 타인의 자유를 침해할 가능성이 지나치게 높다. 법이 없는 무법지대에서 얼마나 많은 이들이 자유를 얻을 수 있겠는가? 강자만 자유로울 확률이 높다. 통제 없는 자유는 모든 이의 자유로 이어지기 어렵다. 모두의 자유를 목표로 한다면 자유를 위해서 국가의 통제를 일정 부분은 받아드려야 한다. 그리고 국가 또한 개인의 자유를 위해서 통제를 해야 한다. 그렇게 모두가 자유로워야 한다. 어떤 이념이 단순한 이기심에서 벗어나 대의를 갖춘 이기심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모두가 이익을 볼 수 있는 구조가 마련되어야 한다. 개인이 자유를 바란다면, 모두가 자유롭길 바라야 이념으로써 가치가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모두가 자유롭게 이기적으로 자신의 권리를 쟁취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모두가 자유로운 길의 첫 번째는 개인의 소유권에 대한 해석을 달리하는 것이다. 기술과 노동력은 개인의 고유한 소유가 되어야 한다. 지식재산권과 마찬가지로 노동력 또한 개인의 재산권이 되어야 한다. 그렇게 하여 모든 노동자는 자신의 기술과 노동력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 주인인 노동자는 자신이 소유한 것을 양도가 아닌 대여의 형태로 거래해야 한다. 지금까지 경제적 자유주의는 자본만 자유로운 비정상적 자유주의였다고 본다. 자유주의는 개인의 소유권을 중시한다. 재산권을 쉽게 빼앗기면 노력의 의미가 없어 노력하지 않게 될 거라 말을 한다. 그런데 자본으로 개인의 소유[기술과 노동력]를 쉽게 양도받을 수 있다. 자본만 자유롭다는 것이 여기서 나타나는 것이다. 예컨대 권력이나 무력으로 개인의 소유를 쉽게 양도받는다고 가정해보자. 그걸 받아드릴 자유주의자가 어디 있겠는가? 그럼에도 재력으로 개인의 소유를 쉽게 양도받는 걸 당연시 한다. 기술과 노동력 또한 쉽게 빼앗기면 노력의 의미가 없다. 기술과 노동력을 위해 아무리 노력해도 내 것이 되지 않은데 뭐 하러 노력하겠는가? 그러니까 많은 사람들이 자아실현이 아닌 생계를 위해 일하게 되는 것이다. 비정상적이다. 어떤 사람은 재력으로 개인의 소유를 양도받는 것은 돈이란 형태로 대가를 지불하기 때문에 괜찮다고 말할 것이다. 그렇다면 묻겠다. 권력으로 개인의 소유를 양도받은 뒤에 어떤 형태로 대가를 지불하면 괜찮은 것인가? 곰곰이 생각해보라. 권력으로 개인의 고유한 권리인 자유를 받아낸 뒤에 물질적 혜택을 주면 괜찮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중국 공산당이 기업을 지원하고 그들에게 복종을 요구한다. 복종하지 않으면 중국 공산당 아래에서 그 어떤 기업도 살아남을 수 없다. 권력으로 고유한 권리를 양도받는다는 것이 바로 이런 것이다. 공산주의 질서 내에서 어떤 혜택을 줬다는 이유로 자유를 양도받는 것과 자본주의 질서 내에서 돈을 지불했다는 이유로 개인의 소유를 쉽게 양도받는 것은 그리 다르지 않다. 힘의 논리에서 권력과 재력은 동일하다. 진정한 자유주의자라면 개인이 소유한 고유한 것을 쉽게 양도하는 것에 찬성해서는 안 된다. 지금 자본가가 자본주의 질서 내에서 기술과 자본을 개인에게 양도받아 소유하고 있는 중이다. 그것이 잘못되었다. 양도받아 소유했기 때문에 잉여가치를 더 많이 얻기 위해 노동자를 착취하게 되었던 것이다. 대여의 형태로 거래되었다면 노동력의 주인이 노동자이기 때문에 대등한 관계에서 계약서에 명시된 노동력만 요구하였을 것이다. 마치 지주가 농노를 구매하듯, 노동자 자체를 고용했기 때문에 이런 부당한 착취가 발생했던 것이다. 모든 기술과 노동력을 양도할 수 없는 개인의 소유로 만들어야 노동자와 자본가가 대등한 관계에서 공정한 거래를 할 수 있다. 현재 노사관계는 자본주의 질서 내에서 불공정거래를 하고 있는 셈이다. 개인은 그 어떤 것에도 종속되어서는 안 된다.

 

 

 

노동의 개인화

 

현대의 노사관계는 농노와 지주와의 관계와 동일하다. 각종 혜택만 달라졌을 뿐이다. 농노에게 노동시간을 줄이고 급여를 늘리는 것과 같은 배려를 해주면 현대의 노동자가 된다. 이는 노동의 집단화라는 점에서 두 관계가 동일했기 때문이다. 개인이 집단에 종속되면 집단의 장에게도 종속된다. 노동자는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자본가에게 종속되고 공산주의 사회에서는 공산당원에게 종속된다. 종속된 노동자는 자본가와 공산당원에게 지배적인 영향력을 받았다. 노동의 집단화가 노동자를 집단에 종속시켜 차별 당하게 만든 것이다. 이런 구조 때문에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국가의 노동자는 대부분 억압 받고 차별 받고 천대 받았던 것이다. 착취당하는 노동자들을 가엾게 여긴 이들이 나타났다. 이들은 사회주의를 주장하며 노동의 집단화를 가속시켰다. 노동자들을 모아 집단을 형성하여 사회에 다양한 혜택을 요구하게 되었다. 노동자 전체의 이익을 위한 투쟁. 사회주의자 라살은 자신의 저서를 통해 이런 것이 노동자 계급의 윤리라 말하고 있다. 「전체에 헌신하라! 그것은 인륜성의 영원한 근본 개념이다.」 이런 이타적인 집단에 대한 헌신은 개인의 고유성을 말살하여 그들의 의도와 다르게 개인을 집단의 부품으로 전락하게 만들었다. 개개인의 결점 또한 개성의 일부임에도 그 결점을 감추기 위해 집단화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노동의 집단화를 가속시킨 사회주의는 농노와 지주와의 관계를 단단하게 만드는 요소가 되었을 뿐이다. 사회주의 국가에서 자본가의 지위가 낮아지는 일이 있던가? 공산주의 국가에서 공산당원의 지위가 낮아지는 일이 있던가? 사회주의는 계급 구분의 철폐를 지향한다지만 개인이 집단에 종속되는 한 그것은 요원한 일이다. 어떤 경우에도 개인이 집단에 종속되면 집단의 장의 지위가 높아진다. 결과가 그렇다. 공산주의 혁명으로 사회를 뒤집어도 집단의 장이 권력을 휘두르지 않았던가? 지금 어느 체제든 종속된 개인은 집단의 장에게 무력하게 배려만 요구하고 있는 상황이다. 모두의 자유와 평등을 바란다면 개인이 종속에서 벗어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이타적으로 집단의 이익을 우선시하면 이기적인 개인의 욕망은 집단에 의해 지워진다. 집단에 의해 개인의 바람이 지워지는데 어찌 그걸 민주적이라 할 수 있는지 알 수가 없다. 모든 노동자가 동일하게 전체를 위해 헌신하자는 마음을 갖게 될 수가 있을 거라 보는가? 모든 사람은 각기 다른 개성과 생각을 가지는 것이 타당하다. 그런데 사회주의는 그걸 무시한 채 모두가 전체를 위해 사는 것이 올바른 일이라 주장한다. 그것이 행복한 길이라 생각하고 있다. 이것은 당시 시대상을 고려하면 일정부분 이해할 수 있기도 하다. 산업혁명 당시 노동자는 성숙한 인간으로 대접받지 못했다. 평생 임금을 받는 노동자는 수련공인 도제와 동일한 지위를 갖고 있었다고 한다. 기능장 아래에서 수련 받는 도제는 사회적으로 미숙했다. 그런 도제와 같은 지위를 가지고 있었던 미숙한 임금 노동자는 노동자조차 선거권을 얻을 자격이 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고 한다. 평생 임금을 받는 노동자는 빈곤과 함께 차별과 억압과 퇴락에 시달렸다. 사회주의자는 그들을 위해 노동자 계급을 통해 노동의 집단화를 발전시켜 사회적 요구를 통해 정당한 대우와 함께 모든 계급 특권을 폐지하면 노동자들이 행복해질 거라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런 식으로 모두가 평등하고 모두가 행복한 이상을 꿈꿨던 것이 아닐까 싶다. 안타깝지만 모든 노동자가 계속 같은 가치를 추구할거란 생각은 일종의 신앙에 불과하다고 하고 싶다. 행복의 본질은 바람실현이다. 임금 노동자의 지위가 상승하면 더 큰 것을 바라게 된다. 이는 당연하다. 배만 부르면 바라는 게 사라지는 개돼지도 아니고, 인간이라면 욕망에 근거한 큰 꿈과 바람을 가지는 게 정상이다. 노동자가 정당한 대우를 받는 순간부터 전체에 헌신하는 게 아닌 더 큰 바람을 갖게 될 사람이 등장할 수 있다는 것이다. 모든 노동자가 전체를 위해 헌신했는데 어떤 노동자가 전체에서 벗어나겠다고 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헌신하지 않는 노동자가 발생하는 순간 배려의 연쇄가 끊겨 그 공동체는 파탄이 나고 만다. 그래서 노동자에서 벗어나는 이를 공격하게 된다. 규제! 감시! 통제! 전체를 위해 헌신하게 만들어라! 이타주의 사상이 도달할 곳은 이처럼 독재다. 사회주의의 인류 구원 방식이 작동되기 위해서는 노동자가 더 큰 걸 바라지 못하게 해야 한다. 그들은 계속 빈곤과 차별과 억압과 퇴락에 고통 받아야 한다. 마치 북한의 인민들처럼 말이다. 인민들에게 쌀밥에 고깃국을 먹여주겠다는 말을 아직까지 하는 걸 보면 알 수 있다. 모든 인민들이 쌀밥에 고깃국을 먹어 배가 부르게 되는 순간, 그 체제는 개개인의 욕망에 의해 붕괴하게 되어있기 때문이다. 혁명을 통해 계급을 뒤집은 공산주의자들이 권력을 쥐게 되면 그들이야말로 계급 특권을 휘두르기 시작한다. 거의 모든 공산주의 국가가 겪은 일이다. 스탈린의 대숙청은 경악할 정도였다. 사회주의로는 다양하게 변화하는 인간의 욕망을 근거로 한 행복을 얻게 해줄 수 없다. 되려 그런 욕망을 가진 이들을 부도덕하다며 비난할 것이다. 당시 가여운 노동자들을 동정하며 그들을 배려해준 것은 이해한다. 하지만 진정 그들을 위해서라면 단순히 배려로 끝나서는 안되었다고 본다. 능력과 욕망을 가진 인간은 바람을 실현하기 위한 모두에게 공평한 교육제도를 마련하여 충분한 교육을 통해 계급과 관계없이 역할을 맡을 수 있도록 하여 계급 특권을 철폐하는 방향이 올바른 길이었다고 본다. 이런 걸 떠올리지 못했던 것은 당시 퇴락한 임금 노동자들이 평균적으로 일정 수준 이상의 지성을 갖출 수 있을 거란 예측을 하지 못했던 것 같다. 인터넷이 보급되지 않았다면 아마 지금도 어려웠을지도 모른다. 시대의 한계다. 그런 관점에서 모든 인간이 모든 역할을 맡을 수 있다고 주장하는 역할주의나 개인이 개인으로 남을 수 있다고 주장하는 노동의 개인화는 발전된 현대의 사회에서 평균 이상의 지성을 갖춘 국민들이 존재하는 국가에서 떠올릴 수 있는 생각일 것이다. 사회주의는 비참한 환경에 놓인 지식이 부족한 이들을 배려하는 것 이상의 것을 줄 수가 없다. 진정 노동자를 위해서라면 개인의 이기적인 욕망까지 가능한 실현할 수 있게끔 해야 한다. 그런 가능한 모두의 바람을 실현해줄 수 있는 환경은 이기적인 자유주의가 마련해줄 수 있다.

 

무엇이 사람을 행복하게 할 수 있을 거라 보는가? 인간은 타인의 바람을 들어줄 때가 아닌 본인의 바람을 실현할 때 행복하다. 그것은 타인에게 이익을 주는 행위라 하더라도 같다. 봉사활동이나 기부도 본인의 자유의지로 행한 것이라면 행복할 수 있다. 개인의 자유의지에 근거한 행동은 모두 이기적이다. 본인이 바란 것은 타인에게 어떤 이익을 주더라도 본인에게 가장 큰 이익이 된다. 그런 관점에서 사회주의자들이 노동자를 돕는 것 또한 이기적이다. 노동자를 돕는다는 본인의 바람을 이루고 싶기 때문에 사회주의를 주장하고, 그런 사회주의가 실현된다면 행복하다 여길 것이 아닌가? 이런 이기적인 행위를 모든 노동자가 받아드려야 할 진리마냥 말하면 안 된다. 그것은 오만한 착각이다. 모든 사람은 각자 다른 바람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노동자는 전체를 위해 헌신하고 싶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사회주의자의 이기적인 바람은 올바른 것이 되고 노동자 개인의 이기적인 바람은 그릇된 것이 된다면 이것은 오롯하게 사회주의자의 독선이 된다. 이런 것은 이타주의 사상들이 대체로 그렇다. 유교, 불교, 기독교 같은 종교나 정치적 올바름, 여성주의 같은 사상은 누구보다 타인을 위한다고 말하면서 누구보다 편협하고 독선적이다. 개인이 전체를 위해 헌신하게 만드는 이타주의 사상은 집단에 개인을 맞춘다. 집단에 맞지 않는 개인은 공격대상이 된다. 다른 개성을 지닌 사람을 정의의 철퇴로 내려찍으면서 정의의 일격을 날렸다며 자랑스러워한다. 일격을 맞은 사람은 자신의 개성을 잃고 집단의 일부로 전락해야 공격받지 않을 수 있다. 그렇게 무개성의 시대가 오게 된다. 사회가 일색평면으로 단일화된다. 숨막힐 정도로 답답해진다. 이 얼마나 참혹한가. 진정 인류를 위한 길은 모든 사람이 자유의지에 근거하여 본인의 바람을 이루고 싶어하는 이기적인 존재일거란 전제하에 그들을 위한 환경을 마련해주는 것이다. 이런 자유주의는 노동자를 돕고 싶어하는 사람의 마음도 포용할 수 있다. 자유로운 자유주의 아래에서 돕고 싶은 사람은 도우면 된다. 타인에게 강요하지 않으면 된다. 사회구조상 복지체계가 마련되어야 사회의 질적 향상이 이루어질 수 있으므로 그들을 돕는 것은 필수적이다. 돕고 싶은 자에게 도울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주고, 나머지는 자유롭게 살면 된다. 모든 인간의 바람은 올바르건 그릇되건 이기적임을 잊으면 안 된다. 그래야 교만과 독선에 빠지지 않을 수 있다.

 

노동의 개인화를 위해서는 우선 노동력을 상품화해야 한다. 모든 노동자는 자신의 노동력을 상품화하여 그 노동력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 노동력은 자유권과 마찬가지로 개인의 고유한 소유로 양도되어서는 안 된다. 자유권을 양도한 사람은 양도받은 사람의 노예가 된다. 노동력을 양도한 사람은 양도받은 사람의 높은 잉여가치를 위해 착취당하게 된다. 양도했기 때문에 종속되었고, 종속되었기 대문에 착취당했다. 노동자는 자본가에게 종속되어서는 안 된다. 모든 노동자는 자신의 노동력이란 상품을 취급하며 그 상품을 대여의 형태로 판매하는 사업가가 되어야 한다. 기업이 상품을 생산하여 고객을 찾듯, 노동자가 노동력을 상품화하여 고객을 찾아야 한다. 노동자와 자본가는 상품 주인과 상품 구매 고객이 되어야 한다. 이렇게 대등한 거래관계가 되어야 비로소 공정한 거래가 가능해지는 것이다. 지금은 노동력이 아니라 노동자가 상품이 되어 양도되고 있다. 고용을 생각해보자. 어떤 사람이 상품을 구매할 때 일생을 같이할 반려자를 정하는 것마냥 고심하는가? 노동자를 농노처럼 평생 종속되는 존재로 생각하니까 그렇게 고심하는 것이 아닌가? 노동력이 상품화된다면 상품화된 노동력의 가치를 명확하게 알 수 있어 그렇게 복잡한 고용절차가 필요가 없다. 노동시간을 생각해보자. 노동환경이 다름에도 대체로 9시부터 18시까지로 노동시간이 규격화되었다. 노동자를 구매한 다음에 노동법에 근거하여 일괄적으로 배려해준 것일 뿐이다. 만약 노동력을 구매했다면 노동시간이 규격화될 필요가 없다. 직무에 따라 시간보다 결과가 중요할 때가 있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이 한 시간 일하고 계약을 많이 따냈다. 어떤 사람이 하루 종일 일하고 계약을 아무것도 따내지 못했다. 어떤 사람이 한 시간 일하고 개발했다. 어떤 사람이 하루 종일 일하고 개발하지 못했다. 누가 더 유능한가? 어떤 노동력이 더 가치 있겠는가? 노동력이 상품화된다면 굳이 고정된 고용시간을 준수할 필요가 없다. 임금을 생각해보자. 어째서 노동자는 다른 노동자의 임금을 알기가 어려운가? 지금은 일방적으로 자본가만 유리한 상황에서 거래를 하여 노동자가 정당한 대가를 받지 못하고 있다. 상품을 거래하는데 자본가만 유리하다. 노동시장에서 노동력이란 상품의 정보가 명확하게 공개되지 못해 정당한 대가를 받지 못하고 있다. 자신의 상품을 경매에 올렸는데 비슷한 상품이 얼마에 팔려나갔는지 알 수가 없으면 정당한 경매가를 붙이기 어렵다. 그와 마찬가지다. 노동자와 자본가의 고용형태가 노동력이란 상품을 대여의 형태로 거래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라는 인간 자체를 고용하여 종속되게 만들다 보니 이런 불공정한 거래가 나타나는 것이다. 정상적인 시장경제가 활성화되려면 노동력 또한 양도될 수 없는 대여의 형태의 상품으로 거래되어야 된다고 본다. 지금까지 시장경제 속에서 노동자가 착취당했던 것은 노동력이란 상품이 불공정하게 거래되었기 때문이다. 공정거래가 가능하다면 일방적인 착취는 보통 있을 수 없다고 본다.

 

모든 노동자는 자신의 노동력을 상품으로 취급하며, 그 상품을 대여의 형태로 판매하는 사업자가 되어야 한다. 그런데 노동자는 보통 본인의 노동력만 취급하기 때문에 다수의 상품을 거래하는 자본가와 대등한 관계를 맺기가 어렵다. 갑을 관계에서 벗어나기 어렵다는 것이다. 따라서 비슷한 상품을 취급하는 노동자들이 공정거래를 위한 협약을 맺어야 한다. 가령 어떤 고객[자본가]가 부당한 거래를 한다면 비슷한 상품을 취급하는 공급자[노동자]는 노동력 공급을 통제할 수 있어야 한다. 특정 고객에만 공급 제한을 걸기 때문에 공급자가 불이익을 얻을 확률이 적다. 블랙리스트라는 것이다. 부당한 행위를 널리 알려 사회적 공감대를 사게 된다면 다른 고객이 구매를 기피할 이유가 되지 못한다. 예컨대 이런 것이다. 최근 택배 차량 출입을 금지한 아파트에 배송물품을 아파트 입구 앞에 둬버리는 사건이 발생했다. 서비스 제한을 해버린 것이다. 그럼에도 다른 고객들은 그것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 않고 택배회사를 계속 이용한다. 고객이라 할지라도 불공정한 행위를 저지르면 그에 해당하는 제재를 받더라도 정당하다는 인식이 있기 때문이다. 이런 방법의 대등한 관계를 위해서는 노동자가 분야별로 서로 협약을 할 수 있는 어떤 집단이 필요하다. 개인이 자신의 노동력이란 상품을 관리와 가치성장을 하며 공정거래를 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주는 집단이 있어야 개인이 개인으로 남을 수 있다. 그래야 개인인 노동자가 막강한 재력을 소유한 자본가와 대등해질 수 있다. 계속 어떤 집단이라 부를 수 없으니 임시로 이름을 정하겠다. 처음에는 온라인 게임에서 유저들의 모임인 길드라 가칭했지만, 한국식으로 부르는 것도 좋을 것 같았다. 모임을 뜻하는 모꼬지로 임시 가칭하겠다. 실제 뜻은 놀이나 잔치 또는 그 밖의 일로 여러 사람이 모이는 것이라고 한다. 자유국가에서의 노동은 마치 놀이처럼 즐기듯 본인의 바람으로 노동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자유국가에서는 강요를 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노동 또한 본인의 의지로 해야 한다. 본인의 바람으로 노동을 한다면 워라밸Work-Life Balance는 꼭 필요한 것이 아니게 된다. 즐기면서 일하므로 노동시간이 여가시간과 비슷하게 된다. 바라는 노동과 정당한 대가가 주어진다면 시간 관계없이 즐겁게 일할 수 있다. 실제 그런 사람이 있고 그런 사람은 경제적 자유를 얻어 생계걱정이 없는 상황에서도 시간관계 없이 노동을 즐긴다. 그것이 이상적이다. 반복 작업조차 게임을 떠올려보면 가능하다는 걸 알 수 있다. 게임 내의 지루한 반복 작업도 캐릭터의 성장을 위해 자발적으로 즐기면서 하는 이들이 많다. 보상설계를 잘 한다면 어떤 노동도 즐겁게 즐기게 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모꼬지는 적합한 이름이라고 본다. 받침이 없어 해외에서도 발음하기 괜찮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슬로건은「노동자가 즐기면서 일할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해주자.」다. 이렇게 모꼬지를 통한 협약으로 노동의 주도권을 노동자가 쥐고 있어야 한다. 마찬가지로 기술의 주도권은 개발한 연구자가 쥐고 있어야 한다. 이는 자본의 주도권을 자본가가 쥐고 있는 것과 동일하다. 이래야 시장경제가 자본만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되어 일방적인 자본지배에서 벗어날 수 있다. 지금 시장경제는 노동과 기술을 자본이 일방적으로 양도받아 사용할 수 있기 때문에 자본만 가지고 돌아갈 수 있었던 것이다. 그것이 불공정하며 비정상적이다. 기술, 노동, 자본이 모두 이기적으로 힘을 쥔 상태에서 서로를 견제하는 것이 환상처럼 느껴졌던 보이지 않는 손을 작동시킬 수 있는 수단이라 생각한다. 생산을 하는데 필요한 역할이 모두 대등하다. 이것이 바로 역할주의적 사고다. 본래 자본가를 견제해야 할 노동조합은 이런 걸 할 수가 없다. 자본가에 종속되어 있기 때문이다. 택배와 아파트 같은 거래관계라면 다른 고객을 통해 이익을 얻을 수 있기 때문에 아파트의 부당한 행위에 대항할 수 있다. 하지만 노동조합은 대체로 자본가에게 종속되어있기 때문에 그런 것이 불가능하다. 노동조합이 자본가의 부당한 행위에 맞서 파업을 한다고 가정해보자. 그런 노동조합이 다른 곳에서 이익을 얻을 수 있을 거라 보는가? 그들에게 파업은 공멸을 전제로 한 무력한 협박이다. 자본가 입장에서 대체할 수 있는 인력은 정치권 개입이 없는 이상 그냥 해고하면 된다. 노동조합은 정치가의 배려가 없으면 자주적으로 뭘 할 수도 없는 무력한 구조다. 그러니 독립된 노동자의 분야별 집단인 모꼬지에서 노동력이란 상품의 공급을 조절할 수 있어야 노동의 주도권을 잡고 자본가의 부당한 행위에 맞설 수 있는 것이다. 이는 기술도 동일하다. 기술이란 상품의 공급을 조절할 수 있어야 기술의 주도권을 잡고 자본가의 부당한 행위에 맞설 수 있다. 연구자는 노동자이자 기술개발자이지만 실상 필요로 하는 것은 노동력보다는 기술이기 때문에 좀 예외적인 특성을 가지고 있다. 하나 노동자와 같이 모꼬지로 묶도록 하겠다. 노동력의 공급제어나 기술의 공급제어는 방식이 비슷하기 때문이다.

 

모꼬지의 출현은 기술을 개발하는 연구자부터 시작하는 것이 좋을 거라 본다. 노동은 체계적인 사상과 복잡한 이해관계를 가진 노동조합과 오랜 시간 뿌리내린 갑을 관계의 노사관계 등으로 개혁을 하는데 있어 어려움이 있을 거란 예측을 하게 된다. 앞장서서 변화를 꾀해야 할 노동조합이 노동자가 자본가의 종속에서 벗어나는 걸 바랄지 의문이 든다. 종속되면 배려 받으며 살 수 있지만 자유를 얻으면 세상과 투쟁을 하며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시대가 변하여 온라인으로 차량거래가 가능함에도 노동자들의 이해관계에 부딪쳐 거래가 어려운 상황이다. 사회가 진보하지 못했다. 따라서 그들이 주도적인 변화를 시작하기는 다소 어려움이 있다고 본다. 사회주의가 이기주의와 이타주의의 순환에서 뒤에 자리잡았기 때문에 진보라는 말을 듣지만 사실 누구보다 보수적일 때가 있다. 과거 사회주의자도 영국의 러다이트 운동을 보며 노동자 개개인은 보수적일 수 있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사회주의의 본질은 진보가 아니라 이타주의다. 반면 과학은 언제든지 현재의 지식이 부정될 거란 각오아래 끊임없이 완전한 진리를 쫓는 학문이라 생각한다. 따라서 상대적으로 가장 진보적이라 할 수 있는 과학부터 시작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본다. 자동화 체계의 발전으로 노동력의 필요성이 점진적으로 감소하면서 앞으로 시장경제는 기술과 자본이 중심이 될 확률이 높다. 그러니 기술이 노동을 잡지 않고 혼자서 개혁해도 그리 큰 문제는 아닐 거란 생각을 할 수도 있다. 그런데 그러면 대의를 놓치게 된다. 연구자가 손쉬운 기술양도의 부당함을 느끼지 못했을 리는 없다고 본다. 그래서 기술을 개발한 개인의 소유가 되게끔 하자는 주장이 있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그것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이루어지지 못하는 것은 다수의 공감을 살 수 있는 대의를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본다. 대의가 없으면 개혁할 수 없다. 무슨 대의를 갖춰야 하는가?  자본종속으로부터 인류의 해방. 연구자의 기술독립으로부터 시작해 그 독립성이 다른 분야에도 전파되어 사회전체를 개혁하고, 그 개혁이 세계를 변화시킬 수 있을 거라 본다. 기술독립은 사회의 일방적인 자본종속에서 벗어나 모든 구성원이 자유로울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하는 기반이 될 것이다. 이에 따라 모든 구성원은 그들의 기술독립을 응원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본다. 실상 연구자가 시작한다고 하더라도 다른 분야의 동의가 없으면 개혁은 일어나기 어렵기 때문에 모든 분야의 지원이 절실하다. 어떤 사람은 연구만 하고 싶어할 수 있다. 그런데 정말 어려울 것이 없다. 지금 당장 현존하는 연구자 협회, 재단, 학회 등은 그대로 놔둬도 된다. 모꼬지의 역할은 연구자 개인이 개인으로 있을 수 있는 환경 조성이다. 모든 기술을 개발한 연구자가 소유한다. 소유한 기술의 특허침해는 기술공급 제어를 통해 방비한다. 연구자는 자본가에게 돈을 받고 기술을 헌납하는 존재가 아닌, 거대한 시장경제의 한 축을 담당하는, 자본가와 대등한 존재다. 막말로 모든 기술의 공급을 차단하면 새로운 기술이 필요 없는 회사를 제외하면 어떤 기업도 살아남을 수 없다. 아무리 돈이 많아도 기술을 구매할 수 없으면 그 돈은 무용지물이 된다. 자본가에게 돈으로 부려지는 것이 아니라 자본가와 대등하게 거래할 수 있다. 기술의 주도권을 개발한 연구자가 쥐는 것으로 일방적인 자본종속에서 회피할 수 있다. 기술을 소유하여 기술의 주도권을 연구자가 잡자는 말로 연구자 사이에서 공감대를 형성하면 된다고 본다. 그리하여 시장경제에서 기술이 하는 역할에 대한 정당한 대가를 받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사회에 모범이 되어 다른 분야의 개혁을 촉발시킬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주도권은 시장경제뿐만이 아니라 정부와의 관계도 동일하다. 지금 과학에 대한 지식이 없는 정부 관료가 예산을 책정하여 필요한 곳에 예산이 투입되지 못해 예산효율이 낮다고 한다. 기술의 주도권을 잡아 정부와 대등한 관계가 된다면 그런 일이 줄어들거라 본다.

 

모꼬지는 모든 개인이 개인으로 있을 수 있기 위해 다음과 같은 걸 추구한다. 저번 글에 썼던 걸 재정리해보겠다. 첫째, 분야별 모꼬지 창설. 둘째, 학교는 학업, 모꼬지는 취업. 셋째, 모든 이의 손쉬운 사회참여. 넷째, 민주적인 대표선출. 다섯째, 시장경제의 한 축으로써의 역할 공고. 여섯째, 기술과 노동과 자본에 대한 평가. 일곱째, 개인 능력 향상. 여덟째, 집단지성활용. 아홉째, 사업진출지원 열째, 능동적인 정치참여. 이렇게 분야별로 나눈 것은 역할주의적 가치관이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각각 세부적인 사안은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것까지 해보겠다. 구체적인 정리는 아무래도 시간이 많이 필요하다.

 

첫째, 분야별 모꼬지 창설. 모꼬지는 기술이나 노동력이란 상품을 취급하는 사람들의 모임으로 그들이 개인이나 집단에 종속되지 않은 상황에서 즐기면서 일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걸 목적으로 한다. 모든 인간이 종속되지 않기 위해서는 각자 상품을 취급할 수 있어야 한다. 기술과 노동력 같은 상품은 결코 양도되어서는 안 되는 고유한 소유권에 해당한다. 그래야 누군가에게 종속되지 않고 공정한 거래를 할 수가 있다. 기업을 중심으로 한 노동조합과 달리 분야를 중심으로 하기 때문에 각각 분야별로 모꼬지를 창설해야 한다. 집단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노동조합과 달리 개인의 이익을 우선시한다. 이 모꼬지는 학교기관과 마찬가지로 국가에 공인된 시설로써 자발적으로 소속되며 가입과 탈퇴가 자유롭다. 개인이 기술과 노동력을 관리 및 판매와 함께 상품가치를 올릴 수 있게 돕는다. 모든 인간이 상품을 취급하는 사업자가 되어 노동자와 자본가의 경계를 허문다. 노동자는 자본가에게 노동력을 대여의 형태로 판매하는 사업자이며 자본가는 국민에게 상품을 판매하는 사업자다. 그 관계는 언제든지 변화할 수 있다. 노동자는 노동력이란 상품판매의 이익을 통해 자본을 얻게 되면 자본가가 되어 노동력을 구매할 수 있다. 노동력 판매자가 노동력 구매자가 되어 노동력의 수요를 증가시켜 사회흐름을 유연하게 바꾼다. 이걸 통해 자본가가 바라던 노동유연화도 가능해진다. 개인이 소유할 수 있어야 소유 욕망과 함께 소유물에 대한 책임을 지겠다는 의식이 나타나는 법이다. 자본가 또한 이런 노동의 개인화를 긍정적으로 바라보길 바라겠다. 무엇을 기준으로 분야를 나누느냐에 따라 매우 복잡해진다. 기술이나 노동력 상품의 연관성에 기준을 두고 분야를 나누는 것이 좋아 보인다. 그래야 모꼬지에 모여 자유롭게 상품을 거래할 수 있을 것이다. 분야는 지금 당장 구체적으로 정하기는 어렵지만, 분야별 의석을 통한 정치참여를 고려해보면 세세한 기준으로 나눠야 할 것이다.

 

둘째, 학교는 학업, 모꼬지는 취업. 이는 교육개혁에 해당하는 사안이다. 학교에서 취업까지 담당하는 것은 학교가 제 역할 하는 걸 방해한다고 본다. 아무래도 취업에 맞춰서 교육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인간으로서의 성장이 아닌 시장경제의 도구로써 성장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고 본다. 학교는 학생의 인간적 성장에만 몰두해야 한다. 학업에 대한 강요가 줄어드는 시점에서 자발적으로 학업을 하게끔 하기 위해서는 스스로가 학업에 집중할 이유를 찾아야 한다. 인간적 성장은 그 이유를 찾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모꼬지는 취업을 담당하며 학생들의 사회참여를 지원할 것이다. 그렇게 하여 그들에게 문제해결능력을 올려줄 것이다. 교사가 내려주는 것이 아닌 실제 사회 속에서 사회문제를 해결하면서 능력을 키워나갈 수 있어야 한다. 어떤 사람은 군에서 실수한 경험으로 도전에 대한 두려움을 씻어내 성공할 수 있었다고 한다. 주입식으로 가르치다 보면 어떤 학생들은 그 가르침을 완벽하게 수행하려고 하다가 도전을 꺼려하게 된다. 그런 학생들이 실제 사회에서 작은 실수를 경험하면서 도전에 대한 두려움에서 벗어나 마음껏 도전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들에게 실패를 경험할 기회를 줘야 한다. 학생의 노동을 가볍게 여기는 문화가 있다. 학생이 일을 하면 그에 대한 대가를 제대로 주지 않는다. 많은 사회활동이 무급의 봉사활동에 그친다. 그것은 노동과 그에 따른 보상을 학습하지 못해 노동에 대한 친숙함을 주기 어려운 잘못된 관행이라 본다. 학생들이 게임에 몰두하는 것은 현실의 보상체계가 형편없기 때문이다. 보상체계가 정립되면 게임뿐만이 아니라 현실에서도 높은 만족도를 느끼며 몰입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조기사회활동을 통해 학생의 자립도를 높여 부모의 지나친 간섭으로 인해 피곤한 교육계가 다소 편해질 거라 본다. 실제 사회참여를 돕는 모꼬지는 소속된 인원에게 전부 금융교육을 가르쳐 자산을 불리게 하여 언제든지 자본가가 되어 노동력을 구매할 수 있는 존재로 바꾸게 할 것이다.

 

셋째, 모든 이의 손쉬운 사회참여. 입사 과정 절차가 복잡한 것은 노동력 품질검증이 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복잡한 절차를 통해 인원을 선별한다. 노동 상품에 대한 품질검증이 끝나 있으면 복잡한 절차 없이 어렵지 않게 사회에 참여할 수 있게 된다. 모든 노동자가 노동력이란 상품을 관리하게 된다면 연령이나 성별이나 경력이나 단절시간과 관계없이 능동적인 사회참여가 가능할 거라 본다. 노동력에 대한 구체적인 상세정보를 작성하고 학력과 경력에 따른 관계자의 평가를 통해 어려운 검증절차 없이 대여의 형태로 구매를 결정할 수 있다. 이는 구매자인 자본가에게도 이익이 되는 방식이다. 편리한 구매가 가능하면 구매자가 늘어 판매 또한 수월해진다. 노동과 자본은 분리된 것이 아니다. 판매와 구매로 서로가 없으면 존재할 수 없다. 최근 노동시간이 줄어들면서 여러 개의 직업을 가지는 일이 흔해졌는데, 그것이 당연한 것이다. 누군가에게 종속되지 않은 상태에서 자유롭게 일을 골라할 수 있어야 한다. 손쉬운 사회참여가 가능해지면 모두가 여러 개의 일을 하며 종속된 존재로 남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모두가 노동력이란 상품을 취급하는 사업가로서 필요에 따라 노동력을 쉽게 거래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 중고거래 앱에서 순간적으로 필요한 노동력을 구매하는 글들이 올라오고 있다. 이처럼 이제는 모두가 노동력의 구매자이며 판매자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여 사회에 필요한 노동력이 유연하게 쓰이면서 유기적인 사회구조가 나타나 보다 더 편리하고 만족스러운 생활이 될 것이다.

 

넷째, 민주적인 대표선출. 모꼬지는 모두 대등한 관계기 때문에 대표를 민주적인 절차로 선출해야 한다. 지금까지 노동의 민주화가 불가능했던 것은 대다수 노동자가 자본가에게 종속되어있었기 때문이다. 어떤 것에도 종속되지 않는 집단 내에서 민주적인 절차로 분야의 대표를 선출하고 구성원의 의향으로 시장경제에 기술과 노동력의 공급관리가 가능해진다면 그 순간부터 노동의 민주화가 가능해질 것이다. 모든 노동자가 자신의 노동력의 주인이 되는 것. 인력 공급이 아닌 노동력 공급이 되어야 하는 것. 노동의 주도권을 노동자가 쥐는 것. 이런 것이 노동의 민주화라고 생각한다.

 

다섯째, 시장경제의 한 축으로써의 역할 공고. 기술과 노동은 자본에 종속된 관계가 아니다. 시장경제를 구성하는 한 축에 속한다. 필수적인 역할을 하는 대등한 관계라는 것이다. 따라서 노동자는 자본가에게 충성할 필요가 없고 자본가는 노동자의 삶을 책임 질 필요도 없다. 노동자는 대여의 형태로 판매하는 노동력에 대한 품질보증만 하면 되고, 자본가는 그 노동력에 대한 대가만 충분이 제공하면 된다. 회사에 들어온 신입의 실수를 상사가 책임지기 때문에 상사가 높은 급여를 받는다는 말이 있다. 그것은 개인이 집단에 종속되는 걸 정당화하는 것에 불과하다. 개인의 실수는 보험을 통해 처리하면 된다. 노동력이란 상품을 취급하는 모든 사람은 직무에 해당하는 보험가입을 하면 된다. 그에 따라 본래 기업이 짊어져야 하는 위험부담에 따른 금액을 전부 노동력 상품 구매에 쓰여야 한다. 그렇다면 대다수 노동자는 지금 받는 것 이상의 정상적인 대가를 받게 될 것이다. 지금까지 개인은 집단에 보호받는 만큼 집단을 위해 희생되었다. 그것이 부당하다. 안정적인 노동력 공급을 위해 모든 노동계약은 반드시 구매해야 하는 기간을 정해두고, 해고 시에는 약정위반에 따른 위약금을 내게끔 해야 한다. 그것이 공정한 거래다. 이외 다양한 절차는 모꼬지에서 지원해줄 수 있는 부분이다.

 

여섯째, 기술과 노동과 자본에 대한 평가. 기술과 노동과 자본은 모두 평가 받아야 한다. 가치를 평가 받지 않고 어찌 공정한 시장경제가 활성화될 수 있겠는가? 명확한 가치가 부여되어야 공정한 거래가 가능한 것이다. 그런 가치 평가를 통해 노동자는 고객[자본가]을 고르고 자본가는 상품[노동력]을 고른다. 이런 식으로 공정거래를 대등하게 해야 일방적인 갑질이 사라지는 것이다. 한국이 학력사회가 되는 까닭은 자기어필을 할 수 있는 수단이 적기 때문이다. 노동력의 가치를 모르니까 학력으로 예상하게 되는 것이다. 다양한 곳에서 신뢰할 수 있는 구체적인 평가가 있어야 학력중심사회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이다. 그렇게 공평한 가치평가로 연령과 성별과 학력과 지역과 인맥과 관계없이 정당한 대우를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신입보다 능력이 부족하면서 연차가 높다는 이유로 높은 대우를 받는 것은 정말 부당한 일이다. 그러면서 노동자 인권을 내세우며 해고도 못하게 한다. 이게 도대체 누구를 위한 노동자 인권인가? 신입 노동자는 노동자도 아닌가? 집단을 중시하면 개인은 말살된다. 노동력이란 상품에 가치가 부족한 노동자는 일거리를 찾기 어려울 수도 있다. 특히 자동화 설비가 발전할수록 그럴 것이다. 그런 노동자는 정부의 기초생활보장을 받는 것이 낫다. 괜히 능력도 없는데 높은 자리를 차지하며 생산성을 악화시키는 것보다 훨씬 낫다. 누구든 능력이 있는 사람은 우대받고 능력이 없는 사람은 생활을 보장받는 구조가 이상적이다. 이런 것이 노동의 유연화를 불러 산업의 생산성과 효율성을 늘려줄 것이다.

 

일곱째, 개인 능력 향상. 인간은 성장하기 싫은 것이 아니다. 성장하는 방법을 모르는 것이다. 많은 노년세대가 새로운 기술에 적응하기 어려워한다. 예컨대 키오스크라는 무인주문기계를 이용하는 것을 어려워한다. 어떤 사람은 노년세대도 배워야 한다고 주장한다. 배우기 싫어하면 안 된다고 말한다. 그런데 그들이 배우길 싫어하기 때문에 배우지 않겠는가? 배우는 방법을 모르니까 배우는 것이 어려워서 결과적으로 배우길 싫어하게 되는 것이다. 인간은 평생 배워야 한다. 단순 노동 때문만이 아니다. 보다 만족스러운 삶을 위해 새로운 기술을 쉽게 터득할 수 있어야 한다. 앞으로의 기술 발달을 고려하면 연령과 관계없이 꾸준히 배워야 하는 시대가 왔다. 그걸 모꼬지에서 지원해야 한다. 학교는 미성년까지의 교육을 담당하고 모꼬지는 분야에 맞춰 평생 교육을 담당할 것이다. 모든 인류가 보다 즐겁게 살기 위해. 그런 교육은 게임의 학습과 보상체계가 효율적이라 본다. 게임만큼 효율적으로 만족도를 주는 구조가 많지 않다. 선입견으로 게임을 무시하지 않는다면 그런 구조를 현실에 적용하는 것에 거부감을 느끼지 않을 것이다. 노동력이란 상품의 정당한 가치평가를 위해 상품의 구체적인 소개가 필요한데, 그걸 게임의 시스템을 활용하면 된다고 본다. 각 직무능력을 단순 상중하 정도로 머무를 것이 아니라 레벨을 도입하여 체계적으로 수준을 명시할 수 있어야 한다. 소유하고 있는 언어의 레벨이나 기술의 레벨을 능력에 맞춰 올리거나 내릴 수 있어야 한다. 노력으로 능력을 키우면 그에 대한 보상이 명확해야 한다. 지루할 정도로 재미없는 반복작업도 게임에서는 즐겁게 할 수 있다. 보상체계가 명확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신의 성장을 쉽게 알 수 있다. 게임과도 같은 성장구조가 정착하면 게임을 즐기듯 편하게 도전하고 성장할 수 있을 것이다. 게임이 그러하듯이 말이다. 경력 또한 레벨에 반영되어야 한다. 장시간 대여의 형태로 판매되는 일반적인 일자리부터 단시간의 거래 또한 세부적으로 작성되어 레벨에 반영된다면 사소한 노동도 즐겁게 할 수 있을 것이다. 빈곤에서 벗어난 국가에서 노동은 단순 생계뿐만이 아니라 노동을 하면서 느끼는 행복도도 중요하다고 본다. 그런 행복을 위해서 효과적으로 만족도를 줄 수 있는 게임 시스템 도입이 필요하다고 주장하겠다. 이것은 이미 게임의 형태로 증명된 방법이다.

 

여덟째, 집단지성활용. 완전자동화 사회로 많은 일자리가 사라진다고 해도 분야 자체가 사라지는 일은 드물다. 자율주행차량이 등장하면 대중교통 분야의 일자리는 많이 사라질 것이다. 그러나 교통 분야 자체가 사라지지는 않는다. 운영관리 할 소수는 남게 된다. 그리고 소수를 제외한 나머지가 교통 분야에서 일을 하고 싶다면 다른 방식으로 일을 해야 한다. 교통이란 사람, 화물(화폐포함)등의 장소적 이동 즉 수송 및 전달과 관련된 직접 간접적인 모든 행위와 조직 체계를 의미한다고 한다. 이에 해당하는 새로운 이동 수단을 도입하거나, 교통에 관련된 아이디어를 내야 할 것이다. 여기서 그런 아이디어는 집단지성을 활용하면 효과적일 거라 본다. 아이디어를 공급하는 사회적 역할을 도입해야 한다는 것이다. 아이디어 또한 상품화가 되어 그걸 거래할 수 있어야 한다. 아이디어 공급자를 싱크탱크에 속하게 만들어 각 분야별로 충분한 아이디어를 동원할 수 있어야 한다. 가령 대중교통 운전사가 자율주행차량으로 일자리를 잃게 되면 그 동안 일하면서 생각해왔던 교통 관련된 아이디어를 낼 수 있을 것이다. 그리 큰 대가는 아니더라도 그걸 즐기면서 할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되어야 한다고 본다. 이외 집단지성을 활용할 수 있는 모든 걸 지원해야 한다고 본다. 온라인으로 가능한 일이 무궁무진하다. 대표적으로 번역은 다들 알 것이다. 어떤 게임이 집단지성으로 번역된 사례도 있을 정도다. 위키 또한 집단지성의 결과물이다. 정보의 질은 상대적으로 낮더라도 접근성과 가독성이 훌륭하기 때문에 많은 사람이 이용하는 정보공급사이트다. 출처만 분명하면 간단한 정보는 위키가, 자세한 정보는 언론이, 깊이 있는 정보는 논문이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외 일종의 설계도만 있으면 홈페이지 제작이나 게임도 개발이 가능하지 않을까 싶다. 도면을 받아 각자의 영역만 개발하면 된다. 집단지성은 노동력을 대여의 형태로 판매하는 것과 달리 최소한의 정보로 가벼운 일을 하고 상대적으로 적은 대가를 받는 구조가 될 것이다. 집단지성활용은 결과물이 중요한 것이기 때문에 노동력의 상세정보는 필요가 없다.

 

아홉째, 사업진출지원. 우수한 노동자가 평생 노동자가 아니게 되어야 한다. 대기업의 직원들이 일정이상 수익을 얻게 되면 이제 공급자가 아닌 고객이 되어 노동력을 구매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노동력에 대한 수요가 늘어 공급도 원활하게 진행된다. 노동자를 위해 평생 노동을 올바른 것처럼 사회분위기를 조성한 걸로 안다. 평생 일자리가 중요하다는 듯이 말을 했다. 그런 것에 영향을 받아 노동력을 구매할 고객이 될 수 있는 우수한 인재들이 안정적인 직장에 머물렀던 까닭에 노동력 수요 감소를 불러 노동력이란 상품을 취급하는 노동자가 상품을 팔 대상이 줄어드는 손해를 봤던 것이다. 능력이 있는 사람이 능력을 펼칠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되어야 다른 사람들도 좋은 것이다. 노동력을 대여의 형태로 팔아 자본을 마련한 사람은 누구나 다 사업을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게 해야 부당한 자본가의 횡포에서 벗어날 수 있다. 부당한 자본가에 맞서 노동력 공급 차단을 하기로 결정했는데, 마땅한 일자리가 없다면 사업을 해서 그 자본가를 대체할 수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열째, 능동적인 정치참여. 각 분야를 대표해 정치적인 활동을 한다. 이기적일수록 자유롭고 민주적이다. 이타적일수록 지배적이고 독재적이다. 집단 중심이 될수록 개인의 의사는 집단의 의사에 파묻혀 소멸한다. 자유국가에서는 모두가 이기적이어야 자신의 주장을 마음껏 펼칠 수 있다. 모두가 이기적이어도 타인이 이기적임을 받아드릴 수 있다면 질서는 유지된다. 서로의 이기심이 상충되면 누구의 이기심이 정당한지 토론을 통해 결정한다. 만약 이타적이라면 이런 토론 자체가 성립될 수가 없다. 누구는 이익을 보고 누구는 손해를 보는데도 아무런 의사표현도 못하고 지나가버린다. 부당함과 부조리와 부패가 계속된다. 이타주의는 자유국가에 어울리지 않는다. 이기주의야말로 자유국가에 어울린다. 이기적인 주장이 부딪치는 토론이 정치에 영향을 끼쳐 국가가 운영되는 것이 바로 자유롭고 민주적인 것이다. 국민과 국민이 이기적인 주장을 하고 토론을 통해 정당한 주장이 받아 드려진다. 국민과 정부가 이기적인 주장을 하고 토론을 통해 정당한 주장이 받아 드려진다. 부모와 자녀가 이기적인 주장을 하고 토론을 통해 정당한 주장이 받아 드려진다. 이런 식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각 분야의 길드는 모두 자신들의 분야의 이익을 위해 이기적인 주장을 펼치며 정치적인 활동을 한다. 만약 다른 분야와 의견이 충돌할 경우 토론을 통해 우선시할 의견을 선택한다. 길드는 자본을 견제할 뿐만이 아니라 다른 분야들을 견제하는 일도 하게 된다.

 

 

 

분야별 의석

 

최악을 피해 차악을 뽑는 것이 일반적인 시대에서 과연 한국 정치는 민주적이라 할 수 있는가? 차악을 뽑는 사람들은 선거 후보 중 원하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다는 것이 된다. 그런 사람이 많아지는 시점에서 한국의 정치는 민의를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고 본다. 양당의 후보가 아니면 선출될 확률이 희박한 시점에서 사실상 한국은 양당독재체제나 다르지 않다. 지금 양당은 적대적 공생관계다. 여당이 실수하면 야당이 지지 받고 야당이 실수하면 여당이 지지 받는다. 그 외의 선택지가 없다. 왜냐하면 국민의 정치성향이 정당의 설득과 선동으로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개개인이 고유한 사상을 가지고 있는 게 아니라 정당이 주입한 사상을 가지고 있다. 침략, 침공, 탄압, 천대, 역차별 등의 마음의 상처를 자극해 분노와 증오의 감정을 싹 틔게 한 것이 사상으로 형성되었다. 반공주의, 민족주의, 민주주의, 여성주의, 반여성주의 같은 성향은 설득과 선동을 한 정당이 만든 결과물이다. 그렇게 형성된 지지자 밭에 공천권한을 쥔 사람이 공천을 하면 웬만하면 뽑히게 된다. 정치의 주도권이 국민이 아니라 공천권한자에게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정치가는 누구의 의사를 반영하겠는가? 공천권을 쥔 사람의 의사를 반영하지 않겠는가? 시스템 공천을 도입한다는 얘기도 들은 기억이 난다. 그래 봐야 국민의 민의가 없으면 별 의미가 없다. 정당의 비례대표는 과연 국민의 의견을 얼마나 수용하고 있었던 것인가? 정의당의 비례대표 1번은 정말 웃지 못할 현대판 희극이다. 민의는커녕 지지자들의 의사조차 반영된 인사가 아니라고 본다. 이는 노동자와 자본가의 관계와 같다. 노동조합 자체가 힘을 쥐고 있는 게 아니라 노동조합이 정치에 영향을 끼쳐 힘을 발휘하는 구조가 아니던가? 지금 노사관계에서 자본가는 노동자의 의견보다 정치가의 의견에 귀를 기울이게 되어있다. 중대재해법도 자본가는 노동자가 아닌 정치가를 상대하고 있었다. 노동자는 아무런 힘이 없는 무력한 존재에 불과했다. 그게 정상으로 보이는가? 엉망진창이다. 국민과 노동자가 직접 힘을 쥐는 구조가 아니라면 언제까지나 무력하게 있을 수밖에 없다.

 

이런 의견을 들었다. 과학 예산이 과학에 대해 잘 모르는 관료에 의해 책정되어 예산이 효율적으로 사용되기 어렵다고 한다. 이에 나는 동의한다. 역할을 수행할 능력을 갖춘 사람이 그 역할을 해야 한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불만으로 끝나서는 안 된다. 과학계에 대한 전반적인 홀대는 정치권력 부재가 만든다고 본다. 과학계도 정치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과학자가 꿈꾸는 이상적인 사회를 만드는데 전력을 다해야 한다. 과학자가 진리를 규명하는 이유는 본인의 호기심뿐만이 아니라 그 진리가 인류를 보다 나은 삶으로 인도하길 바라는 마음이 아니겠는가? 단순 생계를 위해서라면 그만한 잠재능력을 지닌 사람이 과학에 매달릴 이유가 없다. 좀 더 쉽게, 좀 더 편하게, 먹고 살 길을 찾았을 것이다. 지금 정치구조로는 이들이 직접적으로 정치에 참여하기는 어렵다. 양당체제에서 정당에 속하지 않으면 정치참여가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정당에서 많은 분야의 의견을 수렴하겠다며 각 분야의 인사를 초빙한다. 그런데 그런 인사는 결국 정당의 입맛에 맞는 코드인사이다. 정당과 다른 이상을 가진 사람도 정당에 속하게 되면 정당을 위해서 일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그런 성가신 걸 바라는 이가 얼마나 있을까? 그래서 지금까지 정계는 분야의 의견을 제대로 수렴하지 못했다고 본다.

 

시대가 바뀌고 있다. 출산율 저하로 지역이 소멸하고 있다. 그런 상황에서 지역의 대표는 과연 국민의 대표라고 할 수 있는가? 지금까지 선거를 지켜보면서 느끼는 것이 있다. 많은 사람들이 후보의 공약이나 정책에 별 관심이 없다. 나는 그것이 피상적으로 잘못된 것이라 느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보면 애초에 그런 공약과 정책이 국민들에게 와 닿는 것이 없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기도 한다. 고시생이 많은 노량진에서 나오는 공약이 재개발이다. 그런 공약이 고시생들에게 의미가 있었다고 보는가? 부가 집중되고 있는 시점에서 지역 내 소수라고 할 수 있는 재개발 관련자에게만 의미가 있었던 공약이라 본다. 이처럼 정책과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는 사람이 많지 않다. 사람들이 바라는 희망 어린 행복에 대한 외침은 공허할 뿐이다. 이제 지역 내에서 평생 머무르는 사람이 오히려 드물다. 한국뿐만이 아니라 해외에서 전전하는 이들도 많다. 그런 사람들에게 지역발전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이제 소멸할 지역의 발전은 도대체 누구를 위한 것인가? 그 예산은 누구의 입으로 들어가는가? 지역대표는 이제 모든 국민을 대표할 수 없다.

 

온전하게 민의가 반영되지 못하는 상황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 나는 분야별 대표를 뽑아야 한다고 주장하겠다. 지금의 의석은 그대로 두고 거기에 분야별로 몇 명씩 뽑아 의원으로 만들어 분야의 대표가 직접 정치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분야별 의석을 정당의 소속으로 뽑게 되면 정당의 입맛에 맞는 코드인사가 뽑힐 확률이 높으므로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본다. 분야별 의석은 모두 무소속으로 하여 분야를 대표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겠다. 이는 모꼬지와 연결이 된다. 모꼬지를 통해 분야를 모으면 그 분야의 대표가 정치에 직접 참여할 수 있게 된다. 기술과 노동이 각자의 주도권을 잡게 되는 노동개혁이 분야를 대표하여 민의를 직접적으로 반영하는 정치개혁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모꼬지만 잘 정립하면 이 체계는 그다지 어렵지 않다. 모꼬지의 대표가 곧 정치에 직접 참여할 수 있는 구조가 되면 된다. 그렇기 때문에 선거 비용도 그리 크지 않을 거라 본다. 각 분야에 속한 인원의 수가 다르므로 형평성 논란이 있을 수 있다. 그것은 미국의 상원 하원처럼 분야별 인구수에 맞춘 의석과 분야별 고정 의석 수를 나눈다면 그런 논란에서 벗어날 수 있을 거라 본다. 어떻게든 최대한 민의를 반영할 수 있는 구조가 필요하다. 이런 것들이 바로 역할주의적 사고다.

 

부의 대물림으로 사회는 자본을 기반으로 한 새로운 신분제가 나타나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 출산율과 마찬가지로 별 다른 대책이 없을 것이다. 지금 구조로는 막을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사실상 방치상태에서 부의 집중과 빈부격차는 커져나간다. 그런 상황에서 사회를 구성하는 힘과 부를 분리시키기 필요가 있음을 주장하겠다. 부의 대물림으로 사회적 역할을 맡지 않거나 그 역할에 맞는 능력을 갖추지 못하게 되면서 보다 더 역할 중심의 사회가 필요하다고 주장하겠다. 역할주의적 관점에서 많은 재산을 소유한 역할이 없는 사람과 재산이 없어도 역할을 맡은 사람을 비교하면 후자가 더 가치가 있다. 공직자 중에서 재산이 없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그런 사람들이 별다른 역할이 없는 엄청난 부자보다 훨씬 더 가치가 있다. 자본가 중에서 건실한 기업을 경영하는 사람들이 별다른 역할이 없이 물려받은 부만 가진 사람보다 훨씬 더 가치가 있다. 사회적 역할의 수행여부가 그 사람의 가치를 증명하는 것이다. 모든 사람은 모든 역할을 맡을 수 있고, 역할에 맞는 능력이 필요하고, 역할수행여부로 존중여부가 결정되고, 역할기여도로 대우를 달리 받아야 한다. 부의 대물림으로 물려받은 부는 시간이 갈수록 가치가 낮아지고 사회적 역할로 새로 창출하는 부는 가치가 높아야 한다. 그렇게 해야 부의 대물림이 만드는 신분사회의 위험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인간은 과거에 종속되어서는 안 된다. 부의 대물림이 미래 세대의 가능성을 지워서는 안 된다. 그 시대는! 그 시대를 살고 있는 사람의 것이다!! 그걸 위해서는 무엇보다 교육품질의 강화가 중요하다고 강력히 주장하겠다.

 

이 주제는 다시 한번 정리할 예정이다. 분야별로 나뉜 역할중심의 사회가 역할주의 사회의 기초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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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타적인 사람들은 뭔가 올바른 걸 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는 사람들일 겁니다. 그런 사람들이 이타주의의 환상에서 벗어나야 사회주의의 환상에서 벗어날 수 있고, 그래야 중국의 더러운 야욕과 맞서 싸울 준비를 할 수 있을 거라 봅니다. 본인들만 이기적인 사람들과 타인에게 이타적이길 강요하는 사람들 때문에 불행한 겁니다. 모두가 이기적일 수 있는 환경 아래에서 건전한 욕망 표출로 행복한 사회를 만들어 더러운 이들의 지배야욕에 맞서 싸우도록 합시다. 이제 지배자와의 투쟁은 과거의 일이 아닙니다. 최근 동북공정을 하려는 드라마가 많은 비난을 받고 조기종영을 했다는 소식을 접했습니다. 그건 드라마 왜곡 때문에 비난 받은 게 아닙니다. 드라마 내에 문화와 역사를 중국화하여 흡수의 형태로 침략하겠다는 야욕이 드러나있기 때문에 반발하며 비난한 것이지요. 표현자유침해가 아닌 침략방어입니다. 이것은 비단 한국만의 문제가 아닐 겁니다. 국제공조를 통해 저항을 해야 합니다. 최소한 국내에서 한국을 우선시하지 않는 정치가는 한국 정치가의 역할을 수행할 수 없으므로 역할을 박탈해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저출산을 보고 한국이 오래지 않아 사라질 거란 전망을 조소하듯 말하곤 합니다. 무언가 나아지길 바랐던, 한국의 발전과 행복을 바랐던 사람들은 무엇을 바랐던 것입니까? 무엇을 위해 그 자리에 있는 겁니까? 그 어떤 사상적 신념도 없이 단순히 개인의 사리사욕을 위해 행동하는 이들은 왜 그렇게 욕망이 부족한 겁니까. 최근 비리들이 연달아 터지고 있지요. 가족 비리, 친인척 비리, 집단 비리 등 전부 다 멍청한 이타주의가 만든 결과물 아닙니까? 우리가 남이냐? 라며 집단의 이타심을 강요하는 그런 행태가 비리를 양산했던 것 아닙니까? 인맥에 대한 애정이 그릇된 결과를 낳은 것 아닙니까? 가족을 위해서라는 변명이 추악한 비리를 정당화하지 않았습니까! 올바른 사람들이 보다 더 이기적이어야 합니다. 사회의 행복을 위해 각자 거대한 욕망을 여지없이 표출할 수 있어야 합니다. 멍청한 이타주의가 개인을 집단의 이익을 위해 행동하게 하고, 양극화를 부추겨 일부 집단에게 부를 집중시켜 국가를 병들게 합니다. 부의 대물림 또한 자식에 대한 이타적인 애정이 만든 거잖습니까? 사회주의적인 노동조합도 노조의 이익을 위해 집단 이기주의적으로 행동하지 않습니까? 타인의 이익을 고려하는 이해관계에 막혀 개혁이 진행되고 있지 못하고 있지 않습니까? 모든 개인이 수준 높은 학습을 통해 바라는 사회상을 실현하기 위한 욕망을 표출할 수 있어야 이런 야망이 부족한 사회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겁니다. 어떤 거대한 꿈이나 목적도 없이 생계나 물질을 위해 안정적인 공무원에 집착하거나 빚을 지고 투자하는 한국사회상은 절망적일 정도입니다. 남을 위해 살게 만들면 개인의 바람은 이렇게 작은 바람에도 날라가 추락하는 연약한 잎사귀에 불과해집니다. 이타주의 사회의 결말은 꿈을 잃어버린 무개성의 사회입니다. 고유한 개인의 작은 꿈도 없으니까 작은 불편함에 집착하고 시시한 것에 휘둘리는 것 아닙니까? 이타적이니까 집단의 눈치를 보고 집단의 말을 맹신하며 똑같은 스타일의 옷과 꾸밈을 자랑하고 무지를 당당하게 드러내는 거 아닙니까? 선량한 이타주의자 여러분. 여러분들이 꿈꾼 세상이 이런 것이었습니까? 이기적으로 자신만을 위한 꿈을 갖게 해야 활력 있는 사회를 만들 수 있는 겁니다. 전체를 위해 희생하도록 공장에서 찍어내듯 같은 유형의 인간들을 양산하면 꿈이 없는 인간이 되어 눈앞에 이익에 집착하고 소소한 물질의 이익만 바라는 사회가 되어버립니다. 아아, 도대체 무엇을 했던 겁니까. 올바른 일을 해야 할 사람들이 동정심에 눈이 멀어 배려로 끝나는 사상에 휘둘리는 바람에 근본적인 개혁을 하지 못한 채 사람들을 무력한 이타주의자로 만들었던 것을 보며 깊은 분노와 슬픔을 느낍니다. 동족에 대한 어찌할 도리가 없는 애증 속에서 이들을 퇴락하게 만든 먼지를 닦아내면 개개인의 고유한 빛을 발하게 될 거란 작은 희망을 가지고 말합니다. 모두가 큰 꿈을 가지고 이기적으로 올바른 일을 하여 사회를 행복하게 만들었으면 좋겠습니다.

 

멍청한 양당정치가 싫어서 한쪽 당이 독식한 뒤에 어떤 혁명을 거쳐 전부 분열하길 바랐을 때가 있었습니다. 양당정치가 끝나지 않는 걸 보며 답답함을 느꼈지요.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면 애초에 국민 사상이 타인에 의해 만들어진 것들이라 양당정치가 존재했던 거고, 그 양당정치를 끝내기 위해서는 사상정립을 통해 휘둘리지 않아야 한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지금까지 정치는 사실상 양당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나 다름없는 상황이니 민주적인 선택권이 있기나 한 건지 의문이 들 정도입니다. 예전에 어떤 외국인과 대화를 했는데, 그 사람이 왕정을 옹호하며 민주주의를 비판하더군요. 반박하기 위해 민주주의는 일반 시민도 지지를 받으면 대통령이 될 수 있는 체제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양당정치 구조 아래 그런 것이 과연 의미가 있는지 궁금합니다.

 

민주당이 중도층을 포섭하고자 지역정당 이미지를 탈피하기 위해 애를 썼죠. 그렇게 해서 권력을 얻었던 정당이 민족주의적인 태도로 북한과 중국의 눈치(인민망 인사는 황당했음)를 보고 극단적인 여성주의를 옹호하면 어떻게 될지 모르고 있었다는 게 신기합니다. 중도를 버리고 다시 극단으로 돌아간 기분이 어떻습니까? 반중과 반페미 정서를 모르면 또 같은 결과가 나올 겁니다. 민족주의나 여성주의가 정말 옳다면 욕을 먹더라도 옹호했을 텐데 그게 아니잖아요. 민족주의는 집단의 정체성을 혈연과 과거로 규정하는 편협한 사상이죠. 특히 유교가 섞인 한국식 여성주의는 얼마나 앞뒤가 다른지. 가부장제의 배려는 받고 싶으면서 여성주의의 자유는 얻고 싶은 모순을 보면 이런 것에 휘둘리는 것 자체가 한국 인문학의 수치입니다. 국가와 여성을 위한 새로운 사상이 필요한 시점입니다.

 

기성화폐와 가상화폐는 이런 관계 같은 느낌이 듭니다. 기성화폐가 확립한 금융질서 내에서 자유로운 가상화폐. 국가가 확립한 사회질서 내에서 자유로운 마피아. 별다른 책임지는 것 없이 기성화폐를 몰아내겠다는 것은 너무 염치없는 것이 아닌가 싶네요. 단순 투기에서 벗어나고 싶다면 가상화폐의 사회적 역할을 확실히 찾아야 할 것입니다.

 

이런 건 나 말고 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래서 내가 해야 한다, 라고 생각이 들어도 무슨 의미가 있나, 라는 생각이 들어 자괴감이 들기도 합니다. 이미 내적인 일그러짐을 바로잡기 위한 고찰의 시기는 지났습니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 뒤가 없는 외줄타기 하는 기분. 기분이 아니라 현실이지만요. 나는 무엇으로 평가 받을 수 있을까요? 평가 받기 위해 자격증 같은 걸 취득하기 위한 지식 쌓기는 시간낭비로 느껴집니다. 나의 사상을 완성하고 싶어요. 몇 가지 사상서를 읽고 있는데 최소 그 수준 정도는 쓰고 싶네요. 공부하다 보면 느끼는 게 있어요. 사상에 관해서 한국은 세계적 영향을 끼치는 발상지가 된 적이 없던 게 아닐까 싶어요. 현대사상으로 따지면 아시아 전체가 그러하지요. 자유주의 사회주의 자본주의 공산주의. . . 언젠가 한국과 아시아를 현대사상의 중심지로 만들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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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자유적응실패와 마약대처방법 (1) 2021/03/18 PM 05:43

자유적응실패와 마약대처방법

 

 

 

「자유를 잃은 자가 자유를 얻게 되면 자유를 감당하지 못한다.」 이보다 한국사회를 명료하게 나타낼 수 있는 문장은 없다. 정치와 경제를 비롯한 모든 분야에서 대부분 그렇다. 간단히 말해 자유적응실패다. 한국은 제대로 된 자유를 누린 시기가 지극히 짧다. 과거 한국은 왕조와 일제와 군부의 지배를 받았었다. 현재 한국은 미국과 중국의 영향권 아래에서 끊임없는 간섭을 당하고 있다. 안타깝지만 한국이란 국가는 과거부터 외부의 간섭으로부터 자유로웠던 적이 매우 적은 편이다. 국가의 기반을 유지한 사상 또한 외부에서 들어온 것에 영향을 크게 받았다. 불교, 유교, 기독교를 비롯해 현대 정치이념들 전부 외부에서 들어온 것들이다. 민족 고유의 종교나 사상의 영향력은 낮은 편이다. 교육이념으로 정한「널리 인간을 이롭게 하라.」는 홍익인간은 현대 자본주의와 배치되는 사상으로 그걸 기반으로 한 교육이 이타적인 인간을 길러내 이기적인 자본가의 도구로써 사용되게 만들었다. 상업이 우대받는 사회가 되었음에도 자본을 경시하고 금융교육을 멀리한 것은 농노에서 혜택만 늘어난 노동자의 지위와 타인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이타주의가 영향을 끼쳤다고 본다. 자유주의, 자본주의, 민주주의, 개인주의 같은 사상의 기본은 이기주의다. 본인의 자유와 이익과 주권을 위해 타인의 자유와 이익과 주권을 위한다. 본인의 이기심을 위해 타인의 이기심을 허용한다. 개인소유가 일부만 가능하면 그게 바로 독재다. 모두가 이기적인 것이 자유국가다. 그런 상황에서 고유하다고 할 수 있는 이타적인 홍익인간조차도 이제는 낡은 사상일 뿐이다. 본인이 타인을 사랑하고 아끼고 돕는 것은 타인의 지시가 아닌 본인의 이기적인 욕망에서 나타나야 한다. 타인을 일방적으로 돕는 것이 아닌 타인의 이기적인 욕망을 듣고 타협점을 맞춰나가야 한다. 본인을 위해 살지 않는 것은 결코 행복하지 않은 삶이다. 지금 한국은 현대 한국인을 위해 맞춰진 어떤 고유한 사상이 없었기에 국민들은 외부의 사상에 갈기갈기 찢겨져 불필요한 다툼을 하고 있다. 외국 친한파가 아닌 한국 친한파가 필요하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외부에 휘둘리고 있다. 내부가 낮은 출산율과 높은 자살률로 미래가 어두운 상황에서조차 그러고 있다. 정말 슬픈 일이다.

그런 사상적 부자유는 과거 한국인의 삶을 살펴보면 보다 쉽게 알 수 있다. 과거 한국인은 결혼, 출산, 학업, 국방, 취업 등 사회에 필요한 일들 대부분을 누군가의 강요로 행했다. 첫째, 결혼. 한국인은 웃어른의 명령으로 본 적도 없는 이성과 중매결혼을 했다. 사랑해서 결혼한 것이 아니라 결혼해서 사랑을 해야만 했다. 둘째, 출산. 한국인은 집안의 대를 잇기 위해서라는 이유로 출산을 강요 받았다. 대를 잇지 못하는 딸을 배었을 경우 낙태를 당했다. 셋째, 학업. 부모와 교사의 강압으로 공부를 했다. 그 때문에 학생들의 학구열은 낮아지고 부모와 교사의 교육열은 뜨겁게 타올랐다. 넷째, 국방. 자의가 아닌 타의로 국가를 지킨다. 징병군인에 대한 천대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징병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섯째, 취업. 가업을 잇거나 시집을 가거나 인맥을 통하거나 원치 않은 곳에 취업했다.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게 아니라 할 수 밖에 없게끔 했다. 사회 모든 것이 누군가의 강요로 이루어졌다. 대부분 한국인이 자유로웠던 적이 없었다. 연상의 지배를 받으며 살며 그 연상이 죽어서도 제사를 통해 절을 하며 복종해야 했다. 일생 연상에게 지배를 받으며 살았다. 한국은 국가 자체가 누군가에게 지배를 받아 강요되는 것으로 운영되어왔던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별다른 변화가 없이 자유를 얻게 되면 어떻게 될까? 운영이 불가능하게 될 정도로 국가가 휘청거리게 된다. 한국은 이성애 결핍을 부를 정도로 보수적인 연애와 성 관념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면 사랑을 배우지 못해 연애와 결혼을 기피하여 출산율이 높을 수가 없다. 그럼에도 중매결혼과 출산강요로 출산율이 유지되었다. 베이비붐 세대라 불릴 정도로 높을 때도 있었다. 그렇게 강요로 출산율을 유지해왔다. 그러다가 자유를 얻어 강요가 사라지자 이성애 결핍이 연애와 결혼을 기피하게 만들어 출산율을 폭락하게 만들었다. 1인 가구와 비혼의 증가는 이를 명확하게 증명하는 지표가 된다. 이런 것이 자유적응실패의 사례라고 볼 수 있다. 자유를 얻으면 그 자유에 맞게끔 구조를 바꿔야 하는데 성에 보수적인 사상이 변하지 않아 구조를 바꾸지를 못했다. 그 때문에 낮은 출산율이 나타났던 것이다. 이외에도 대부분의 문제는 강요에서 자율로 바뀌는 것에 대한 적응실패가 원인이다. 한국은 학생 행복도가 매우 낮은 국가다. 왜? 자율적으로 공부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강요 말고는 공부하게끔 하는 방법을 모른다. 코로나 사태로 공부를 강요할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되지 못하자 한글을 모르는 초등학생까지 나오게 되었다. 매일 같이 게임을 하느라 공부할 시간이 없다고 변명했다. 인간의 자아는 세포의 여론이란 기억을 근거로 한 알고리즘이다. 게임으로 만족도를 느끼는 알고리즘이 작성되면 그 외의 것으로 만족도를 느끼기 어려워 그것에 집착하게 된다. 중독에 가까운 과잉의존은 그것이 원인이다. 그래서 바람직한 상황은 아니다. 다양한 것을 경험하여 아이의 세계를 넓혀서 다른 것들로도 만족감을 느끼게 해야만 의존도가 낮아져 다른 것을 익히기 위해 한글을 자율적으로 공부할 수 있을 것이다. 한데 현재 사정이 여의치 않으면 IQ테스트 따위로 지능 수준을 유지해두는 것이 좋을 거라 본다. 아이 시기에는 알고리즘을 바꾸기 보다 수월하기 때문에 지능 수준만 유지해두면 언제든지 좋은 방향으로 성장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럼에도 게임이 이 현상의 직접적인 원인은 될 수 없다. 이는 아이를 교육할 사람들이 자율적으로 공부하는 방법 자체를 배운 적이 없었기 때문에 그런 방법을 알려줄 수가 없어서 아이가 한글을 자율적으로 공부하지 않았던 것이다. 학생의 학구열이 아닌 부모와 교사의 교육열이 높다는 것 자체가 강요로 학력을 유지해왔다는 걸 증명하고 있다. 지금 한국은 두 가지 갈림길에 서있다. 하나는 모두가 자율적으로 공부하여 고학력을 유지하는 것이고 하나는 일부만 자율적으로 공부하여 일부만 고학력을 유지하는 것이다. 이대로 강요가 사라진 상황에서 자율적으로 공부할 수 있는 구조를 마련하지 못한다면 후자의 길을 걷게 될 확률이 높음을 강조하고 싶다. 강요가 아니면 학력을 유지하지 못하는 것 또한 자유적응실패라고 본다. 징병군인에 대한 천대는 하루 이틀 있었던 것이 아니다. 오랜 세월 온갖 모욕과 멸시를 당하던 것이 징병군인이다. 군대사고 나도 천대받고 대민지원 가도 천대받고 위수지역에서 천대받고 사회에서도 천대받는다. 이러한 천대는 징병 자체가 강요로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이라 본다. 군 내에서도 자유롭지 못했다. 자유롭게 행동할 수 없는 존재, 즉 누군가에게 지배 받는 존재라는 인식이 천대를 부른 것이다. 현재 징병군인에 대한 처우가 좋아짐에 따라 인식도 나아지고 있으니 바람직한 방향이라고 본다. 그럼에도 군 기피 현상은 나아지지 않는 걸 보면 사실상 자유적응실패 사례라고 본다. 자율적으로 국방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징병 구조 자체를 바꾸거나 모병을 하는 수밖에 없다. 개인적으로 남녀 모두 몇 주간 군사교육을 받고 그들을 예비군 편재로 운영하며 전문인력은 전부 직업군인으로 대체하는 것이 합리적이라 본다. 탱크 같은 전문 기술을 징병군인이 운용한다는 것 자체가 비효율적이다. 어차피 이제는 인력부족으로 변화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한국은 중소기업 기피가 심각한 수준이다. 심지어 이제는 대기업도 기피하며 공무원이 되길 원하고 있다. 자수성가 비율도 낮은 편이다. 중소기업에서는 사원들을 착취한다. 그래서 대우가 좋은 대기업 선호가 늘었다. 대기업에서는 사원을 쉽게 해고한다. 그래서 정년이 보장되는 공무원 선호가 늘었다. 정년을 중시하며 집단 구성원으로 남길 바라자 자수성가 비율이 낮아졌다. 왜 이런 현상이 나타나는가? 그걸 알기 위해서는 우선 노동자의 지위가 배려 받은 농노임을 알아야 한다. 농노에서 몇 가지 배려를 늘리면 노동자가 된다. 노동자에서 벗어나야 농노와 달라진다. 이는 본질적으로 농노가 지주에게 종속되는 것처럼 노동자는 자본가에게 종속된다는 점에서 같았기 때문이다. 을의 위치에서 있는 노동자의 노동환경은 대부분 하고 싶지 않아했기 때문에 강요를 통해 일하게끔 했다. 노동환경이 좋지 못함에도 국가가 운영되었던 것은 강요로 취업률을 유지했기 때문이다. 이제는 자유로워졌다. 그러면 자발적으로 일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했어야 했다. 노동자가 착취를 당하면 노동자의 지위를 자본가와 대등하게 만들어 일방적인 착취를 할 수 없게끔 해야 했다. 그럼에도 그 외의 방법을 떠올리지 못하여 농노의 위치에 있는 노동자들이 과도한 착취를 당하지 않도록 배려만 받게끔 했다. 지금의 노동자는 정치권의 도움이 없으면 별다른 힘을 발휘할 수 없다. 철저하게 을의 위치에서 정치가의 도움이나 자본가의 배려만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그것이 잘못되었다. 많은 노동자인권운동가들이 노동자가 자본가와 대등한 관계에서 자유롭게 지내는 것이 아닌 자본가에 종속되어 자본가의 배려를 받는 것이 올바르다고 주장해왔기 때문에 한 기업에서 꾸준히 일하는 것이 미덕이 되었다. 종속되어 배려 받는 것이 바른 것이기에 해고를 하지 못하게 하여 취업도 하기 어렵게 되었다. 쉬운 해고가 되어야 자리가 나고, 자리가 나야 쉬운 취업도 가능한 것이다. 취업이 어렵다 보니 중소기업의 불평등한 착취에도 을의 위치에서 저항할 수가 없었다. 나가서 다른 직장 구하기 어려우니까 부당한 대우에도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중소기업의 착취로 기피현상이 일어나 우수한 인재들이 대기업에 몰림에 따라 대기업은 인재풀이 넘치면서 쉽게 해고를 하면서도 인재고용에 어려움을 겪지 않게 되었다. 기업의 부품으로 성장한 노동자는 그 기업의 부품으로서의 역할밖에 할 줄 모르기 때문에 다른 일을 할 수가 없어 보다 더 기업에 매달렸다. 철저하게 을이 될 수밖에 없었다. 안정적으로 정년을 보장받는 것이 올바르다는 인식 때문에 다수의 사람들이 공무원에 매달리면서 사업을 기반으로 한 자수성가를 통해 성공하겠다는 사람 수가 줄어들게 되어 자수성가 부자 비율이 낮게 되었다. 2016년 조사한 결과 세계 부자 400명 중 자수성가로 성공한 한국 부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고 한다. 이것 또한 자유적응실패의 사례다. 뭔가 좀 자유롭게 되었으면 그에 맞게끔 구조변화를 추진했어야 했는데 구조는 그대로 둔 채 배려만 늘려왔다. 상처가 나면 치료를 해야 하는데 진통제만 먹인 꼴이다. 개인이 개인으로 있을 수 있는 구조. 개인이 기업의 부품으로서 기업의 성장동력이 되는 것이 아닌 기업이 개인의 성장동력이 되는 구조. 노동의 중심이 집단이 아닌 개인이 되는 구조. 노동의 개인화. 그것이 노동의 자유화, 노동의 민주화라고 본다. 그렇게 하여 자율적으로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도록 했어야 했다고 본다. 경제적 자유주의는 경제적 자유를 누리는 일부 자본가의 자유만 보장하고 있는 불완전한 자유주의다. 모두가 자유로워야 진정한 자유주의다. 사실 이건 굉장히 어려운 일이긴 하다. 산업혁명부터 이어져 내려온 체계를 바꾸는 것이니까 말이다. 하지만 그걸 바꾸지 않는 한 어떤 혜택을 주더라도 노동자는 농노의 위치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이런 자유적응실패는 사회갈등도 마찬가지다. 정치적 진영논리는 지배 받던 사람들이 이타적으로 본인의 의견보다 타인의 의견을 우선시하는 것에 익숙해져 자유로워진 지금도 진영의 주장을 우선시하는 바람에 발생하는 현상이다. 모두가 스스로 생각해서 자신의 이익만을 위해 행동한다면 정당이란 집단정치가 아닌 정치가라는 개인정치가 발달했을 것이다. 그게 안되니까 양당정치가 발달하는 것이다. 소수의 엘리트가 국가를 운영하는 미국이 양당정치가 발달한 것을 떠올려보라. 안타깝지만 정치에 있어서는 고학력자들이 많은 한국도 그들과 다를 바 없다. 어떤 민주주의 국가에서 정치 수준이 낮다면 그것은 국민의 정치적 수준이 낮기 때문이다. 정치적 수준을 올리기 위해서는 다수의 의견을 수렴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역과 정당만이 아닌 분야별 국회의원을 뽑아야 한다고 주장하겠다. 시대가 변해 한 지역에 평생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타향살이하는 경우가 많은데 아직도 지역을 중심으로 한 의석 수는 시대착오적이라 말하고 싶다. 의사협회가 굉장히 정치적인데, 그걸 보고 이기적인 의사협회라며 비난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알고 있다. 하지만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그들이 정상이고 나머지가 비정상이다. 모두가 이기적으로 자신의 주장을 펼칠 수 있어야 한다. 의사협회가 이기적인 주장을 하면 다른 분야도 이기적인 주장을 하며 맞서면 된다. 어떤 의견이 올바른지 토론을 하며 서로의 논리가 타당한지 검증한다. 그게 정상이다. 이것은 차후 다른 글에서 세세히 다뤄보고자 한다. 이처럼 민주적이지 못한 정치환경은 자유적응실패 사례라 볼 수 있다. 성별 갈등도 마찬가지다. 과거 남성에게 지배 받던 여성들은 이제 많은 부분 자유로워졌다. 그러면 그 자유에 맞게끔 생각하고 행동했어야 했다. 지배 받았기 때문에 배려 받았던 것들을 내려놓고, 지배 받았기 때문에 하지 않았던 의무를 행했어야 했다. 그렇게 하여 남성과 대등한 권리를 정당하게 누렸어야 했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여성은 힘이 약하니까 배려해달라.」 거의 모든 여성에 대한 혜택이 이걸 근거로 한다. 과거 남성에게 지배 받던 시대에 머물러서 배려만 늘려달라고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만약 여성의 지위를 남성과 동등하게 만들고 싶었다면 남성이 하는 의무도 같이 하여 여성도 할 수 있음을 증명했어야 했다. 노르웨이에서는 여성들도 징병된다고 한다. 오히려 징병되길 바라는 사람이 많다고 한다. 군에 필요한 인원의 수가 적어 군 입대 경쟁률이 6대 1로 치열하기까지 한다고 한다. 이는 사회가 군 경력을 인정해주는 분위기가 만든 현상이기도 할 것이다. 이렇게 의무를 행해야 정당하게 권리를 요구할 수 있는 것인데 한국은 과거 지배 받던 시대에 머물러 배려만 늘려달라고 요구하고 있다. 진정 여성을 위한다면 여성의 사회적 지위를 남성과 동등하게 만들어야 한다. 노동자가 정당한 권리를 누리기 위해서는 자본가와 대등해야 하는 것처럼 여성이 정당한 권리를 누리기 위해서는 남성과 대등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여성은 과잉 혜택을 내려놓고 의무를 다하는 것이 여성을 위하는 길이 될 거라 확신한다. 현재 노동자나 여성은 정치권의 배려가 끝나면 지금 혜택은 아무 의미가 없음을 깨닫길 바란다. 노동자나 여성이 정치권의 도움으로 얻어낸 배려가 없어도 정당한 권리를 누릴 수 있게끔 해야 한다. 스스로 자본가와 싸울 수 있는 구조가 있어야 한다. 자본가에게 손을 벌릴 수 밖에 없는 구조가 잘못되었다. 비단 여성에 대한 배려만 그런 것이 아니다. 보수적인 성 관념도 과거에 머물러 있다. 성적으로 박해 받던 여성들이 적극적으로 성 문화를 박해는 것은 정말 안타까운 일이다. 이제는 자유로워졌는데, 아직도 과거에 머물러 있다. 그러니 출산율이 낮은 것이다. 성별 갈등 또한 자유적응실패에서 왔다고 본다. 미성년 문제도 다를 바 없다. 촉법소년 문제, 학력저하 문제 따위는 더 이상 강요할 수 없는 자유로운 사회에서 그들의 자유의지로 올바른 일을 하는 법을 알려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잘못된 일을 하면 안 된다고 명령할 수 없게 된 시점에서 모든 걸 차근차근 다 설명했어야 했다. 사회구조가 어떻게 운영되고 자유와 질서가 무엇인지 가르쳤어야 했다. 인문학을 철저하게 가르쳐 사고의 폭과 깊이를 늘려 자발적으로 올바른 일을 할 수 있게끔 했어야 했다. 이제 아이들은 시장경제의 도구로 성장하게끔 하는 게 아니라 한 명의 인간으로 성장할 수 있어야 한다. 또한 정보의 양에 근거해 미성년의 연령대도 바꿔야 하는 시기가 왔다고 본다. 과거 지배 받던 시대의 미성년과 자유로운 시대의 미성년이 받아드리는 정보의 양과 그에 따른 정신연령의 성장차이는 분명하게 존재한다. 미성년으로 일어나는 사회문제 또한 자유적응실패 사례다.

가장 큰 문제는 역시 사상이다. 대부분의 사상이 과거 지배국가였을 때 만들어지고 적용되었었기 때문에 그 사상으로 인한 문제들이 너무나도 많다. 인간은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행동한다. 본능이란 재료에 사상이란 도구로 행동이란 결과물이 나온다. 모든 악덕은 본능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사상에서 나온다. 본능 자체로 죄가 지어지지 않는다. 본능을 죄로 만들어서는 안 된다. 그게 죄가 되면 인간의 존재 자체가 부정적이게 되어버린다. 행복하기 위해서는 본능을 받아드리고 이해하고 현실에 맞춰가야 한다. 죄를 야기하는 대표적인 욕구인 살해욕구도 실제 행하지 않고 스포츠나 게임으로 해소할 수 있다면 아무런 죄가 되지 않는다. 본능의 해결 방식에 따라 죄가 결정되므로 사회질서를 유지하는데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사상이 되겠다. 가령 이런 것이다. 인간에게는 지배욕구가 있다. 그 지배욕구에 따라 지배구조가 만들어진다. 인간은 그런 욕구에 맞춰서 사상이 생겨나고 그 사상에 맞게끔 법과 제도가 정비되었다. 신분과 연령에 의한 질서를 정당화한 유교가 바로 그렇다. 그 유교에 맞춰 법이 만들어졌다. 현재까지도 사촌 간 결혼이 금지되거나 부모살해와 자녀살해에 대한 차별이 일어나는 까닭은 유교의 영향이 크다고 한다. 그런 지배구조 정당화에 따른 차별과 억압은 사실상 지배욕구에서 온 것이므로 지배욕구 자체를 부정적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그 지배욕구를 다른 방식으로 충족할 수 있다면 그 욕구 자체가 잘못되었다고 할 수는 없다. 예컨대 게임에서 역할을 나눠 지배와 피지배를 나눠 노는 걸로 해소할 수도 있다. 이렇게 본능적인 욕구 충족과 이성적인 바람 실현을 분리하면 된다. 인간의 자아는 세포의 여론을 담은 기억의 의식적 알고리즘이다. 본능이나 무의식적 행동이 반드시 자신의 의지라고 할 수는 없다. 그러니 감성과 이성을 분리하여 사고하는 것이 충분히 가능하다. 어떤 것을 마주했을 때 자신이 어떤 식으로 느끼게 되는지 관찰하면 자신의 본능에 대해 파악할 수 있고, 그 본능을 파악하면 본능적인 욕구 충족을 어떤 식으로 해내야 사회질서와 발맞출 수 있는지 알 수 있다. 그건 사이코패스라고 해도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본능적인 욕구로 나타난 과거 지배국가의 잔재들을 자유국가에 맞게끔 하는 것이 정상적인 자유적응이 되겠다.

본 주제로 들어가겠다. 최근 마약사건이 늘어나고 있다. 이에 대한 대응책이 마련되어야 하는 시점인데, 어떻게 해야 대응할 수 있는지에 대해 논해보자. 마약은 인간을 의존하게끔 만드는 물질이다. 마약을 복용한 사람은 마약에 중독되어 마약을 파는 사람에게 종속되는 결과를 낳는다. 간단히 말해 지배를 당한다. 마약에 지배당해서 마약이 아니면 살아갈 수가 없다. 가족과 재산을 바쳐서라도 마약을 갈구하게 된다. 마약의 노예가 된다. 이는 사이비종교의 구조와 매우 흡사하다. 마약에 빠져 마약에 맹목적인 의존을 하는 것이나 종교에 빠져 종교에 맹목적인 의존을 하는 것은 둘 다 동일하다. 차이점은 물질과 비물질이다. 한국에는 사이비종교에 빠진 사람들이 많다. 지배국가에서 지배당하던 사람들이 가진 이타적인 마음을 공략하는 것은 사이비종교에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들을 의존적으로 만들어 종교에 모든 걸 바치게 만든다. 한국인의 이타적인 선한 특성이 만든 의존성이 사이비종교에 약하게 만들었다. 이런 특성은 비슷한 구조를 지닌 마약에도 적용되게 된다. 의존성을 가진 한국인이 사이비종교에 약했던 것처럼, 마약에도 약할 확률이 높다. 따라서 마약사건에 대한 대처 또한 자유적응이 필요한 것이라 주장하겠다. 자유에 적응하여 무언가에 맹목적으로 의존하지 않고 설 수 있어야 마약의 유혹에도 빠지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한국이 자유국가를 지향하는 바, 마약에 대한 대처를 강제적으로 하기는 어렵다. 따라서 한국인 개개인이 마약을 스스로 불필요하다고 인지하고 그 마약에 종속되지 않아야만 국가가 마약에 종속되지 않을 수가 있다.

마약의 구조가 사이비종교의 그것과 비슷하다면 마약의 문제도 명확하게 인지할 수 있다. 사이비종교의 가장 큰 문제는 그걸 믿음으로써 발생하는 가정붕괴 따위가 아니다. 그런 것은 좋지 못한 결과 중 하나에 불과하다. 초점에 맞춰야 하는 것은 전염성이다. 마치 바이러스처럼 다른 사람을 전염시켜서 신도 수를 늘려나가는 것이 문제다. 혼자서 맹목적으로 믿고 있으면 무슨 문제가 있겠는가? 마약 또한 마찬가지다. 전염성이 문제다. 만약 무인도에서 마약을 복용하여 사회질서를 혼란스럽게 하지 않는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다. 혼자 먹고 혼자 죽으면 된다. 하지만 이 마약이라는 걸 복용한 사람은 마치 좋은 걸 전해드리려 왔다는 식으로 말하는 사이비종교인들처럼 전염시키려고 한다. 한번 전염시키면 그 사람을 지배할 수 있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마약에 지배당한 사람들은 마약의 위치가 마치 사이비종교처럼 법을 넘어서게 된다. 법을 무시해서라도 마약을 복용하고자 한다. 마약이 그들에게 신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그건 법치로 사회질서를 유지하는 국가의 입장에서 굉장히 골치 아픈 상황이다. 마약이 세를 불리면 마약을 중심으로 한 초법적 집단이 탄생한다. 대표적으로 멕시코의 마약 카르텔이 있겠다. 이런 것들 때문에 정상국가에서는 마약을 허용하기 몹시 곤란한 처지에 놓여있다. 일부 서양에서 마약을 허용한 국가들은 담배처럼 즐기는 사람이 너무나도 많아 어찌할 수 없이 허용하여 국가적 차원에서 관리하고 있는 것이다.

마약의 문제는 전염성이다. 마약을 강제로 대처할 수는 없다. 마약 유통으로 주로 사용되는 텔레그램 같은 앱을 완전 규제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건 자유국가에서 할 수 없는 일이다. 따라서 개개인이 자발적으로 마약을 멀리하여 마음 속 백신을 담고 있어야 한다. 그걸 하기 위해서는 개개인의 지적 수준이 높아야 한다. 마약의 해악 따위를 인지하고 이해해야 그걸 자발적으로 하지 않게 할 수 있다. 그렇다고 개개인에게만 마약확산을 막는 걸 기대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정부차원에서 효과적으로 막을 수 있는 방법 또한 고려해봐야 한다. 지금까지 해왔던 단순히 막는 것만으로 제대로 된 해결책이라 할 수는 없다. 홍보하고 막는다고 해도 할 사람은 하게 되어있다. 왜냐하면 해외에서는 허용된 곳이 있기 때문이다. 마약 자체가 문제라면 어째서 해외에서는 허용하였는가? 라며 반문할 수 있다. 특히 대마초의 경우에는 중독성이 담배에 비해 상대적으로 낮다고 말하기에 허용여론이 있는 상황이다. 이에 대해 간단히 의견을 말하자면, 자유국가에서 누군가에게 지배 받길 바라며 그걸 정당화하는 것은 바르지 않다고 말하겠다. 노예상에게 노예가 자발적으로 끌려가는 걸 방치할 수는 없지 않는가? 이런 관점에서 타인을 지배하는 자를 칭송하는 자유는 허용될 수 없다고 본다. 예컨대 북한 독재자 찬양 따위는 자유의 관점에서 부도덕한 행위다. 그러니 효과적으로 막기 위해서는 홍보나 처벌로 끝나서는 안 된다. 좀 더 본질적으로 보자. 어떤 인간이 천대받는 것은 그 인간의 지위가 낮기 때문이다. 노동자나 여성이나 미성년들이 천대 받는 것은 실질적인 지위가 낮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이걸 인지하고 마약의 지위를 낮춰 천대하게 만들면 보다 쉽게 근절할 수 있다. 우선 마약의 지위가 어떤지 떠올려보자. 마약은 국가의 통제에서 벗어난 물질로 쾌락을 즐기는 일탈이다. 마약 자체가 무조건 금지된 쾌락이다 보니 마약 자체의 지위가 국가라는 거대한 권력에 맞서 싸우는 것과 같게 되어버렸다. 실제로는 마약의 노예와 다를 바 없지만 말이다. 이런 인식 때문에 가진 게 많은 기득권이나 힙합이란 사회에 저항하는 음악을 하는 이들이 종종 마약사건에 연루되는 것이다. 이는 미성년에게 있어 술과 담배의 지위와 같다. 이 지위를 낮춰야 한다. 미성년의 술과 담배를 막는 것은 미성년 입장에서 술 담배의 지위를 낮춰야 하는 것처럼 한국인의 마약을 막기 위해서는 한국인 입장에서 마약의 지위를 낮춰야 한다.

마약의 지위를 낮추는 방법은 미성년의 지위를 낮추는 방법을 떠올려 보면 된다. 미성년을 보호하겠다는 미명아래 미성년을 억압하고 통제하고 감시한다. 그럼으로써 미성년의 지위는 낮아져 많은 사람들에게 부정적인 인식을 주게 만들었다. 한국에서 자녀살해 비율이 높다거나 부모의 과도한 교육열로 아이들이 망가지는 것은 낮은 지위가 만든 미성년의 도구화가 만들었다고 본다. 아이들이 도구나 다름없다는 인식이 그들을 도구처럼 다뤘던 것이다. 물론 이것은 애정결핍도 한몫 한다고 본다. 마약의 지위를 낮추기 위해서는 마약을 국가에서 통제해야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마약을 국가에서 다뤄야만 마약의 지위가 낮아지는 것이다. 마약을 국가에서 허용한 곳에서는 통제하는데 지위가 낮아지지 않았다고 반문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런 통제는 낮은 수준의 통제다. 마약을 복용하는 사람을 24시간 감시하면서 이동의 자유와 문화의 자유와 만남의 자유를 억압한다고 가정해보자. 마약복용자가 마치 정신병에 걸린 사람처럼 되어버린다. 실질적으로 마약을 복용했다고 정신병에 걸리는 것은 아니지만 그 만큼의 지위가 되어버린다는 것이다. 억압과 통제와 감시가 마약 자체의 지위를 낮추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실질적인 방법은 국가 내에서 마약 통제 시스템을 갖춰야 한다. 이름은 중독병원 같은 걸로 명분을 내세우면 된다. 마약을 복용하고 싶다면 모든 걸 버리고 국가 통제 안에서 감금당하여 감시 당하면 된다. 라는 식으로 국가가 관리하는 것처럼 보여준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통제를 바라지는 않을 것이다. 아마 초기에는 시한부 인생을 살고 있는 사람들이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발적으로 감금되어 마약을 복용하게 될 것이다. 마약이 국가에서 통제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여기서 좀 더 마약의 지위를 낮추고 싶으면 마약 복용자의 신상을 공개하면 된다. 자발적으로 신상공개에 동의하는 사람만 마약을 복용할 수 있게끔 한다. 모든 걸 버리고 사회에 속하길 포기한 인간만이 가능하게끔 한다. 정신병자와 동일한 지위를 갖게끔 한다. 모든 걸 억압하고 통제하고 감시한다. 인간의 자유가 얼마나 소중한지 깨닫게 한다. 마약을 노예의 아이콘으로 만든다. 이해하기 쉽게 말하자면, 마약 복용자를 속된말로 찐따로 만들면 된다. 마약이 어떤 부유한 사람들만 누릴 수 있는 특권 같은 게 아니라 아무나 할 수 있는데, 그걸 하는 건 노예나 다름 없는 처지에 놓인 인간만 가능하다는 걸 보여준다. 마약 근절은 이처럼 그냥 막거나 부작용을 홍보하기 보다는 마약 자체의 지위를 낮추는 방법을 강구하는 것이 효과적이다.

한국에서 최근 마약사건이 늘어나는 까닭은 외국인의 영향이 클 것이다. 과거에는 기득권만 마약을 복용했다. 그러다 노동시장이 외국에 개방됨에 따라 외국인이 즐기는 마약이 한국인에게도 흘러가 누구나 쉽게 마약을 접하게 된 것이다. * 2020.08.25 노컷뉴스 기사에 따르면 마약공급책이 말하길 태국 노동자 절반은 마약 투약 경험이 있다고 한다. 그런 이들을 대상으로 한 마약 판매가 한국인에게도 흘러간 것이 크다고 본다. 이는 중국의 경제 의존도를 낮추기 위한 방편으로 동남아 시장을 개척한 것이기 때문에 일정부분 감수해야 할 사안이다. 많은 선진국들이 외국 노동자들의 마약으로 몸살을 겪는 걸 이제야 한국이 경험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한국은 마약 또한 자유적응이 필요한 사안이 되었다. 그 적응 결과가 한국 내 마약 중독자의 수를 결정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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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마약과 외국인에 대해 쓰려고 할 때엔 간단히 쓰려고 했어요. 그런데 생각보다 고찰할 것이 많았어요. 단순 마약 문제만으로 끝나는 게 아니었더군요. 근본적인 자유에 대한 물음이 필요한 사안이었습니다. 이 고찰이 자유주의 정리에 도움이 될 것 같네요. 지금까지 자유주의는 경제적 자유를 누리는 이들의 자유만 보장해준 불완전한 자유라 봅니다. 진짜 자유주의를 추구하고 싶어요.

 

물리학 이론 중 통일장이론이라는 게 있었죠. 확실히 어떤 것이 하나로 통합되어 설명되는 것은 아름다운 것 같아요.

 

알 수 없는 현상들 이해하기 어려운 일들 전부 좋아합니다. 그걸 생각하는 게 즐겁지 않나요? 도대체 왜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지 흐릿하게 유추할 뿐, 정확히는 모릅니다만. 도대체 어디까지 아는 거지. 뭔가 확인해보고 싶잖아.

 

사상가 하고 싶다고 말할 자신이 없네요. 자신 있는 건 생각하는 것인데… 그걸 어떻게 어필해야 할지. 뭔가 열정적으로 몰두할 수 없는 것도 이것 때문인 것 같아요. 확실하게 말할 수 있으면 전력을 다해볼 텐데.

 

다음이 있을지는 모르겠는데, 다음은 노동의 개인화입니다. 그건 확실히 중요하다고 봐요.

 

미치지 않으면 여기까지 도달할 수도 없습니다. 평생 이타주의가 옳다고 생각하며 살아왔던 인간이 그걸 부정한다는 건 자기과거를 완전 부정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도덕에 굴복하고 나서 이타적으로 살려고 하다 보니 괴상한 짓거리도 했었죠. 타인이 뭔가 부탁을 하면 거절을 할 수가 없으니까 부탁할 수 없게끔 유도했습니다. 부탁에 대한 대가를 과장되게 요구하거나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하며 기피하게끔 했죠. 하고 싶지 않은 걸 할 수 밖에 없을 때엔 파토 내는 것도 종종 했습니다. 자유의지욕구와 이타주의명령의 타협점을 찾기 위해 했던 거라 어쩔 수 없었다고 생각하긴 하지만, 그건 분명 비겁했던 행동이었습니다. 잘못된 가르침으로 인한 일그러짐은 비단 나만의 경험은 아닐 것입니다. 그걸 고찰하는 사람이 드물어서 그렇지.

 

어째서 과거의 것만 한국의 것으로 인지하려는지 모르겠습니다. 현대 한국인이 만든 것도 한국문화 아닐까 싶습니다.

 

자유적응에 실패하여 혼란스러운 한국에서 기준을 잡을 수 있는 것은 아직까지는 엘리트에 의한 법치가 아닐까 싶습니다. 당황스러운 판결을 보면 배심원제가 바람직하다 생각하지만 이성적 사고가 다소 부족한 한국에서는 위험한 게 아닐까 싶습니다. 사회질서에 관심 없이 감정적으로 판단하는 의견들을 보면 배심원제의 성공 가능성에 회의감을 느낍니다. 달리 생각해서 제도를 도입하고 나면 성장할지도 모른다는 낙관적인 추측을 하기도 합니다.

 

같은 애정결핍구조를 지닌 한국과 일본이 문화발달과정의 차이가 발생한 것은 한국의 만화박해에서 온 것이 아닐까 합니다. 만화를 박해했기 때문에 다른 문화가 발달했던 것이겠지요. 드라마라던가 영화라던가 아이돌이라던가. 그게 현대에는 도움이 되는 부분도 있다는 게 참 아이러니 합니다.

 

최근 투기꾼들이 수면 위로 올라와 국민들에게 질타를 받고 있지요. 그들이 욕망이 많았기 때문에 그런 일을 저질렀던 걸까요? 아닙니다. 욕망이 적었기 때문입니다. 진정 욕망이 많은 인간은 자신을 구성하는 모든 것에 대해 욕망을 가졌을 것입니다. 본인 일부만이 아닌 본인이 속한 집단의 타인까지 성장하길 바라는 것이 거대한 욕망을 가진 자입니다. 세계평화, 인류의 자유로운 행복 이런 걸 바라는 인간은 욕망에 미친 인간이지요. 그러지 않고 자신의 안위만 바라는 그들은 그저 소인배일 뿐입니다. 그릇이 작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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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우 상당히 흥미로운 글을 쓰시네요. 시간내서 쓰신 글들 한번 정독해보겠습니다.
[글] 저출산과 애정결핍 (2) 2021/02/23 PM 08:31

저출산과 애정결핍

 

 

 

저출산 원인은 간단하다. 자유 억압으로 인한 애정결핍. 그로 인한 연애감소와 결혼감소. 이외의 원인들은 직접적이지 않다. 간접적으로 영향을 주거나 명분이 되었을 뿐이다. 정말 간단한 문제다. 사랑하지 않으면 연애하지 않고 연애하지 않으면 결혼하지 않고 결혼하지 않으면 출산하지 않는다. 자유결혼이 많기 때문에 연애가 곧 결혼이고, 결혼 외의 출산이 적기 때문에 결혼이 곧 출산이다. 따라서 저출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이성애를 교육하고 강조하고 권장하는 것이 타당하다. 그런데 이 간단한 걸 몰라서 수십 년의 시간과 수백 조의 예산을 낭비하고도 저출산 문제를 해결하기는커녕 더 악화시키고 있다. 답답하다. 본론으로 들어가기 앞서 기성세대라면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을 통계를 통해 확인해보자.

* 중앙일보 1991.10.2120년통계로 본 부부생활 실태」 검색해서 나온 기사다. 이 기사에서 나온 통계를 살펴보자. 한국은 80년대 후반에 들어서야 자유결혼 비중이 중매결혼 비율을 넘어섰다고 한다. 자유결혼은 8136.3%에서 89 54.7%로 늘었고, 중매결혼은 같은 기간 58.4%에서 39.4%로 줄었다고 한다. 혼인 연령은 모두 높아지는 추세로 초혼은 72년 남성은 26.7세에서 89 28.6세로 늘었고, 여성은 22.6세에서 24.8세로 늘었다고 한다. 이 통계를 통해 과거 한국에서는 중매결혼이 많았다는 것과 자유결혼이 늘어날수록 혼인 연령은 높아졌다는 걸 알 수 있다. 이 간단한 통계로 애정결핍이 저출산의 원인이라는 걸 알 수 있다. 그것에 대해 설명해보겠다.

중매결혼이 높았을 때로 가보자. 81년만 해도 중매결혼이 높았던 때다. 중매결혼은 혼인 당사자가 아닌 집안 어른의 의사에 따라 배우자가 결정되어 결혼을 하는 걸 말한다. 출산도 집안 어른의 의사에 따랐다. 집안의 대를 잇기 위해 며느리에게 임신을 강요했다. 며느리가 여성을 임신하면 낙태를 시키기도 했다. 가부장제 속에서 출가외인이 되어 대를 잇지 못하는 여성보다는 남성을 선호했기 때문이다. 남아선호사상이다. 이처럼 집안 어른의 의사로 본인의 결혼과 출산이 결정되었다. 사랑을 해서 결혼을 한 게 아니라 누군가 결혼을 시켜서 사랑을 했다. 아이를 낳고 싶어서 낳은 게 아니라 누군가 낳으라고 해서 낳았다. 애정이 없는 상태에서 결혼을 하고 출산을 했기 때문에 부부싸움과 아동학대는 예견된 일이었다. 이런 중매결혼은 자유 억압의 명확한 근거가 된다. 미성년일 때 연애와 성관계를 터부시하게 만들어서 중매결혼을 할 수밖에 없었다. 성에 관해서는 철저하게 억압했다. 소설, 만화, 영화 같은 문화도 검열했다. 유교적 가치관에 따라 여성의 지위가 낮았기 때문에 여성은 보다 더 성에 보수적이었다. 순결을 반드시 지키게 했다. 순결을 지키지 못하면 결혼도 하기 어려웠다. 그러다가 남성에게 팔려나갔다. 이처럼 기성세대는 연상에게 자유를 억압받았다. 그로 인해 애정결핍도 되어 있다. 그러니 자유 억압과 애정결핍으로 사회적 문제가 발생해도 이들에게 모든 책임을 물을 수가 없다. 이들 또한 피해자이기 때문이다. 자유억압과 애정결핍. 이걸 기억해둬야 한다. 이것이 현대의 저출산을 부른 것이기 때문이다. 현대와 과거가 자유억압으로 인한 애정결핍으로 동일함에도 출산율이 달랐던 것은 중매결혼과 출산강요 때문이었다. 그 두 개만 빠지면 현대의 출산율이 된다.

시간이 흐른다. 89년부터 자유결혼이 높아지기 시작했다. 성년이 되면 자유를 찾아 독립하여 집안 어른의 억압에서 벗어난다. 핵가족화가 된다. 그런데 집안 어른의 억압에서 벗어나지 못한 미성년은 계속 억압을 받는다. 미성년은 억압을 받으면서 이성애와 성교육을 받지 못한다. 성년은 억압에서 해방되어 자유롭게 행동한다. 성년은 이성애와 성교육을 받지 못한 채 자유를 얻어버렸다. 그걸 제대로 배우지 못하여 연애와 결혼에 소극적이게 된다. 성년이 되고 나서 이성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되니 시행착오를 겪느라 혼인 시기가 늦어진다. 자유결혼이 늘어날수록 혼인 연령이 높아졌던 것은 이런 까닭 때문이다. 미성년 때 연애를 마치고 성년이 되자마자 결혼했다면 이러지 않았을 것이다. 자유롭게 지내다 때를 놓친 사람들이 결혼을 하지 못했다. 여기서 멈추면 현대의 출산율이 될 것이다. 그러나 당시만 해도 성년은 아직 완전히 자유롭지는 못했다. 집안 어른의 발언권이 강해 늦게까지 자유결혼을 하지 못하면 중매결혼을 강요 받았다. 그렇게 자유든 중매든 결혼을 하면 대를 잇기 위해서라는 명분으로 출산을 강요 받았다. 그래서 이 때까지도 그나마 출산율이 유지되었던 것이다.

시간이 흐른다. 점점 더 자유로워졌다. 중매가 거의 사라졌다. 성년에게 결혼과 출산을 강요할 수 없게 되었다. 자 그러면 어떻게 되겠는가? 이성애와 성관계를 터부시하여 애정결핍이 되었음에도 출산율을 유지시켜주던 중매결혼과 출산강요가 사라지니 애정결핍으로 인한 출산율 저하가 시작되었다. 결혼과 출산을 강요하던 구조에서 강요가 사라지니 출산율이 곤두박질 치게 된 것이다. 그러면 여기서 그 구조를 바꿔야 한다는 걸 이해했을 것이다. 애정결핍을 해소하여 강요가 없어도 출산율을 유지시켜주는 구조를 만들었어야 했다. 그런데 그러지 않았다. 강요를 통해 출산율을 유지시켜주던 그 구조는 그대로 둔 채, 출산과 관계된 곳에 대한 배려만 늘렸다. 과거 자유를 억압받던 기성세대는 자신이 경험한대로 미성년을 억압했다. 미성년의 연애와 성관계를 막는다. 성 문화를 검열한다. 이때 여성의 해방을 말하는 여성주의자가 성을 검열하는 것은 정말 웃기고 슬프다. 그 검열은 과거 남성이 강요한 성적 억압에 영향을 받은 것이므로 그 행동 자체가 여전히 남성에게 종속되어있음을 증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억압들을 받지 않는 소수의 미성년만 연애에 적극적이게 된다. 나머지 미성년은 유사연애산업을 통해 욕구를 충족한다. 한국에서 유사연애산업의 성장은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과도한 수요가 산업을 급속도로 성장시킨 것이다. 성년이 되고 나서도 소수만 연애에 적극적이게 된다. 그 소수 중에서 일부만 자유결혼을 한다. 유사연애산업으로 연애욕구를 충족하던 사람들은 혼자 사는 것에 익숙해져 간다. 1인가구와 비혼이 늘어난다. 그 중에서 여유가 되는 사람은 이성과 만남을 통해 결혼한다. 정상적인 이성애를 배운 적이 없기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하는 것이 아니라 조건이 되는 사람과 결혼을 한다. 조건이 중매를 해준다. 조건중매다. 이성애가 결핍되어 있기 때문에 종종 사람들은 이성을 성욕 해소용이나 ATM 기기로 인식하게 된다. 때로는 트로피처럼 우수한 이성을 곁에 두는 걸로 외부에 자랑하며 만족감을 느낀다. 이처럼 애정결핍이 되는 구조는 그대로 두었다. 그 대신 배려를 늘렸다.

* 한국일보 2018.11.20「저출산 예산 13년간 143조원 다 어디에 썼나」 검색해서 나온 기사다. 기사를 살펴보자. 기사는 다음과 같은 부분을 지적했다. 저출산 예산이 13년간 143조원 정도 되지만 목적과 다른 곳에 쓰이는 예산도 많다고 했다. 여기서 일반적인 저출산 대책은 보통 이런 것이라고 한다. 신혼부부 주거지원, 난임부부 지원, 무상보육 및 교육확대, 아동수당 지급, 공공 어린이집 확대, 돌봄교실 등 다양한 정책을 시행해왔다고 한다. 여기서 다른 곳에 쓰인 예산은 이런 것이라고 한다. 가족여가 프로그램 개발, 산업연계 교육활성화 선도대학, 고성장기업 수출역량 강화 등. 좀 엉뚱한 곳에 쓰이기는 했다. 어떻게 가져가 붙이면 되기는 할지도 모르겠지만 직접적이지는 않다. 기사는 이런 것이 문제라고 지적했다. 그런데 사실 본래 하던 저출산 대책도 실제 효과는 그리 크지 않았을 것이다. 애정이 결핍되게 되는 구조는 그대로 두고 이런 혜택만 늘리지 않았나. 애정이 결핍되어있으니까 연애와 결혼과 출산을 하지 않는데 그런 혜택 늘린다고 출산율에 변화가 있겠는가? 애정이 결핍된 채로 혜택만 늘리니까 가정폭력이나 학대들이 나타나는 것이다. 가정폭력은 4명 중 3명이 남성으로 많다고 한다. 이것은 다들 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자녀살해 비율은 절반으로 비슷하다고 한다. 최근 이런 사건들이 있었다. 3살 친딸 죽은 거 알면서도 새살림 차린 뒤에 양육수당과 아동수당 챙겨먹은 인간이 나오는 사건. 22개월 아들을 남편 닮았다고 굶겨 죽인 인간이 나오는 사건. 8살 딸을 사실혼 남편 충격 받으라고 목 졸라 죽인 인간이 나오는 사건. 약한 자녀를 살해하는 비율은 비슷한 걸 보았을 때 범죄는 성별이 아닌 힘의 논리로 나타난다고 보여진다. 따라서 이런 문제는 성별로 접근할 것이 아니라 애정결핍이나 아동의 지위 문제로 접근해야 한다. 사랑하지 않으니까, 대등하지 않으니까 쉽게 살해하는 것이다. 이 두 가지 문제를 모두 해결할 수 있음에도 방치하고 있다. 머리가 아파온다. 인간에게 사랑하는 걸 배우게 하지 않으면 이렇게 된다. 과거엔 집안의 어른에게 지배 받았으니까 눈치 보면서 사랑하는 척이라도 했지. 이제는 자유롭지 않나. 자유로운 상황에서는 애정이 필수적이다. 애정을 가르쳐야 한다. 이성애를 강조하고 성교육을 적극적으로 하여 빠른 시기에 상대를 찾아 연애를 해서 애정을 배워야 한다. 같이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한 그런 상대를 만나서 애정을 통한 행복을 배워야 한다. 이성을 사랑하고 이성에게 관심을 끌 수 있도록 매력을 가꾸고 이성을 이해하려고 한다. 이성애가 충만해져야 한다. 그렇게 해야 자발적으로 자유결혼을 하고 애정이 담긴 출산을 할 수 있는 거다. 그런데 그렇게 하기는커녕 이성애와 성교육을 보다 더 부정적으로 만들고 보다 더 비혼을 강조하는 사람들이 저출산 대책을 맡고 있다고 한다. 어쩌면 좋나.

한국에서는「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에서(이하 위원회) 저출산 대책을 맡고 있다고 한다. 저출산에 대해서 전부 여기서 하는 건 아니다. 영향력이 엄청 큰 것 같지도 않다. 2006년부터 2017년까지 12년동안 회의를 22회하는 걸로 그쳤다고 한다. 그래도 그 역할을 맡고 있는 건 분명하다. 그런데 위원회의 인선과 발언과 행동이 부적절한 경우가 있었다. 인선을 살펴보자. 이성애에 부정적이며 비혼을 주장하는 여성주의자가 속해있다. 아무래도 출산을 여성이 하다 보니까 여성 중에서 발언권이 강한 이들을 뽑은 모양이다. 이런 이들이 저출산 대책을 마련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처구니 없는지 다음을 보면 안다. 발언을 살펴보자. 위원 중 하나는 이런 말을 했다. 「출산할 권리보다 낙태할 권리를 주장한다.」 이게 어떻게 위원에게 나올 수 있는 발언인가? 나는 낙태를 부정적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여성의 자유권을 존중하기 때문에 법적인 제재가 아닌 윤리적인 문제로 접근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낙태는 법적으로 여성만 책임질 것이 아니라 윤리적으로 남녀 모두 책임져야 할 사안이다. 그럼에도 이건 역할을 생각하면 있을 수 없는 발언이다. 설령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어도 저출산 대책을 담당하고 있으면 그런 말을 하면 안 되는 거 아닌가? 상식적으로 저출산을 담당하면 출산율을 올릴 생각을 먼저 하는 게 맞지 않나? 그러지 않으면 거면 왜 그 자리에 있는가? 답답하다. 정말 여성주의자의 문제 중 하나는 자신의 역할보다 여성주의를 우선시하는 점에 있다. 그들은 역할주의와 다른 길을 걷고 있다. 행동을 살펴보자. 2020 10 7일 보건복지위원회가 진행한 국정감사에서 황당한 것이 지적되었다. 이 위원회에서 만든 홍보 영상 중에서 이런 것이 있었다고 한다. 「비혼」「아이 없이 살기로 결심했습니다.」 이 영상들은 지적 받은 후 삭제되었다고 한다. 어떻게 이럴 수 있나. 이러니까 수십 년의 시간과 수백 조의 예산을 쓰고도 저출산 문제를 해결하기는커녕 악화시켰던 거다. 2016년에서 2020년 저출산 대책에 투입한 예산이 150. 2021년에서 2025년 저출산과 고령화 대책에 투입되는 예산이 196. 연간 40조 가까이 사용할 예정이라고 한다. 그러면서도 2020년 출산율은 0.84명이다. 이러면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해야 하지 않나? 뭔가 열심해 해도 개선되기는커녕 악화된다면 다른 방법을 찾아보는 게 정상 아니냔 말이다. 진작에 저 애정결핍이 되는 구조를 바꿨다면 큰 돈을 들이지 않아도 출산율이 유지되었을 것이다. 정말 상식적으로 생각해보자. 지금 1인가구나 비혼 말하는 사람들이 상대가 있는데도 그러는 것 같나 아니면 상대가 없으니까 그렇게 된 것 같나? 인간은 동물이다. 알지 않나. 그냥 서로 자연스럽게 사랑할 수 있는 환경만 마련해주면 알아서 연애하고 결혼하고 출산한다. 그게 안 되는 건 애정이 결핍되도록 미성년의 이성애나 성관계를 막았기 때문이다. 제발 좀 막지 말라고. 꾸밈 막지 말고 연애 막지 말고 성관계 막지 말고 성 상품화 막지 말고 성 문화 검열 좀 그만 해야 한다. 이성애에 관련된 모든 걸 억압하지 말아야 인간이 정상적인 이성애를 배운단 말이다. 그게 안되니까 여학생들이 BL에 빠지고 알페스를 즐기고 있는 거지 않나. 한국이나 일본의 여학생들 특히 이런 걸 즐긴다는 것이 뭘 의미하는지 알았으면 좋겠다. 여학생들이 하도 억압 받다 보니까 그런 쪽으로 새게 된 거다. 이성에 관심은 있다. 이성과 관계를 맺으면 안 된다. 그러면 이성끼리 관계 맺는 걸 즐긴다. 자연스러운 흐름 아닌가? 이성애가 부족하니까 이성과 갈등을 빚는 거고 이성애를 배우지 못했으니까 비혼을 주장하고 있는 거지 않나. 서로 사랑했으면 이해하고 양보하고 그랬겠지. 어쩌면 좋나. 이성의 매력을 칭찬하는 것조차 이제는 잘못되었다고 비난한다. 그게 폭력이라고 하더라. 어쩌자는 건가. 이러는데 어떻게 출산율이 높아지나. 멸종직전인 팬더를 보고 느끼는 게 없나? 성에 보수적일수록 개체수가 줄어드는 건 당연한 거다. 호주 정복한 토끼를 보고 느끼는 게 없나? 성에 개방적일수록 개체수가 늘어나는 건 당연한 거다. 성에 보수적이기를 바라면서 어떻게 출산율을 올릴 생각을 하는가? 위원회는 아직도 헛다리를 집고 있다. 위원회의 주장은 다음과 같다. 「프랑스와 스웨덴 등 최근 출산율을 회복한 나라들의 사례를 보면 GDP 대비 아동과 가족 지출 비중은 출산율과 정의 관계를 가지고 있다.」 아직도 돈이 원인인지 안다. 당혹스럽다. 프랑스와 스웨덴이 같은 문화를 가지고 있나? 적어도 비교할거면 같은 동양 문화권을 참고해야 하는 게 정상 아닌가? 최소한 프랑스와 스웨덴만큼 성에 개방적이고 나서 그것을 참고해야 한다. 그 나라가 얼마나 성에 개방적인지는 알고 참고한 건가? 상대가 있으니까 결혼하고 그런 결혼한 사람에게 지원했으니까 그만큼 지출이 된 것이다. 무엇보다 프랑스와 스웨덴은 이민자들이 출산율에 영향을 끼쳤다고 한다. 애초에 이민자가 적은 한국은 비교할 수도 없다.

자유 억압으로 인한 애정결핍이 저출산의 원인이다. 그렇다면 해결 방법도 간단하다. 애정을 충족시키면 된다. 단도직입적으로 미성년 연애비율이 90%이상이 되면 된다. 성년은 간섭하기 어려우니까 주기적인 홍보와 성적 자유를 통해 천천히 개선해나갈 수 밖에 없다. 미성년은 교육기관에서 교육을 통해 연애비율을 올리는 게 충분히 가능하다. 대다수 미성년이 이성애와 성을 교육받고 연애를 하면 출산율은 자연스럽게 올라가게 되어있다. 이성애에 대한 모든 걸 개방해서 서로가 자연스럽게 사랑할 수 있는 구조가 마련되면 이성혐오도 자연스럽게 사라진다. 사랑하지 않으니까 쉽게 혐오하는 거 아닌가? 저출산, 이성혐오, 세대갈등 따위의 인간의 애정과 밀접한 관계를 지닌 문제들의 본질적인 원인은 대부분 애정결핍에서 오는 것이다. 애정결핍이 되어있으니까 누군가의 강요가 아니면 출산율도 유지 못하고 있는 거다. 이 멍청한 구조를 바꿔야 한다. 그럼에도 어려운 까닭은 올바름을 바꾸는 일이기 때문이다. 사회전반적으로 깔린 유교적 가치관과 그에 영향을 받은 여성주의에서 벗어나야지 가능해진다. 적어도 그런 것에 영향을 받은 사람이 저출산이나 성별 문제에 관한 역할을 맡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 그런 사람들이 힘을 가지고 영향을 행사한지 꽤 되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는가? 출산율은? 이성갈등은? 더욱 더 악화되지 않았나? 사랑이 넘치는 사회가 되도록 해야지 어떻게 갈등을 조장하고 비혼을 주장할 수 있나. 그러니까 상황이 더 악화되는 거다. 이처럼 현상의 본질을 모르면 상황이 악화될 수도 있다. 그런 것이 우리 사회에 생각 이상으로 많다. 그에 관해서는 꾸준히 지적해보겠다.

그러고 나서 저출산이나 성별갈등 따위의 문제 원인이 애정결핍에서 온다는 사실을 널리 알려 사회적 공감대를 형성해야 한다. 그 뒤에 미성년들에게 연애를 권장하고 세부적인 성교육을 하여 자연스러운 이성애를 배울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래야 그 미성년들이 그런 상대들과 성년이 되자마자 결혼을 하거나, 지금보다 훨씬 쉽게 상대를 만나 연애를 하며 결혼상대를 찾을 것이다. 그렇게 사랑이 넘쳐야 연애와 결혼이 늘면서 자연스럽게 출산율이 늘어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에게 직접적으로 재정지원을 하면 된다. 연애를 권장한다는 것은 이성에게 매력적이게 보일 수 있는 방법을 알려준다는 것이다. 외모를 가꾸고 운동을 하고 옷을 잘 입고 호감 가는 언행을 연습한다. 어떤 사람은 과거 여성이 주로 꾸몄다고 꾸미는 게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그러면 당연히 남성도 꾸며야 한다고 주장해야 하는 게 타당한 게 아닌가? 그런데 어떻게 된 게 다 같이 꾸미지 말자고 주장을 한다. 비정상적이다. 매력을 가꾸는 게 자연스럽게 되면 외모지상주의가 될 수 있다고 지적할 수 있다. 큰 문제 없다. 외모지상주의는 매력이 없는 사람을 천대하는 게 잘못된 것이다. 그걸 하지 않고 매력이 있는 사람에게 호감을 표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매력을 가꾸는 교육이 이성애 교육의 기초가 될 것이다. 이성애 교육의 방해는 이성애에 대한 억압들이다. 꾸밈 막지 말고 연애 막지 말고 성관계 막지 말고 성 상품화 막지 말고 성 문화 검열을 그만하면 된다. 이성애를 권장하고 이성애를 억압하지 않으면 자연스럽게 출산율은 오른다.

성범죄가 문제가 될 수도 있다고 할 수 있다. 미성년이 이성애에 관한 것이 개방되면 성에 눈을 뜨고 범죄를 저지를 수 있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런데 그런 범죄는 이성애 교육과 무관하다. 정보습득 유무와 범죄 유무는 반드시 정비례하지는 않다. 오히려 음지에서 이성애 교육을 받으면 이성을 성욕해소 도구로만 생각하게 될 우려를 발생시킨다. 양지에서 실제 여성과 교류하면서 애정을 쌓아가야 이성을 성욕해소 도구가 아닌 하나의 인격체로 존중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성애를 억압하는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이성을 성욕해소 도구나 ATM 기기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이처럼 좋지 못할 까봐 감추면 더 나빠진다. 개방하고 다 가르치는 것이 더 올바른 길로 인도할 수 있다. 너무 단편적으로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루밍 따위의 문제가 있을 수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그건 그루밍 당하지 않도록 교육하는 게 정상 아닌가? 당혹스럽다. 왜 그 따위 말장난이나 협박에 넘어가게끔 나둔 상태에서 배려만 해주나. 싸울 수 있도록 해야지 않나. 인권개념이 너무 이상하다. 최근 아이스하키 지도자가 학생들을 수시로 폭행한 사실이 드러난 적이 있다. 최초 학생과 학부모가 경찰서에서 자발적으로 체벌을 받았다고 진술했다. 그래서 경찰은 불기소 의견으로 송치했다. 그 뒤에 사실은 체벌이란 이름으로 폭행을 당한 게 맞는다고 고백했다. 그래서 재수사를 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걸 보고 어떤 언론은 경찰에 책임을 물었다. 학생과 학부모가 거짓진술을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에 대한 분석과 그 해결 대책을 촉구한 게 아니라, 그 현상은 그대로 두고 경찰에게 책임을 물었다는 것이다. 학생들에게 어른 말 무조건 들으라고 교육하니까 학생들이 반항할 수가 없었던 거고, 아이스하키 감독의 권한이 너무 강해 견제할 수 없었기 때문에 자녀 미래를 위해서 학부모들이 반항할 수 없었던 것이다. 학생들에게 부당한 것에 항의할 수 있도록 가르치고, 아이스하키 감독이 학생 장래를 결정할 정도의 과도한 힘을 가지게 되는 구조를 바꿔야 한다. 이런 게 바람직한 지적 아닌가? 부디 배려로 끝나지 말고 본질적인 원인 해결을 강구하길 바란다.

저출산이 지속되다 보니 지구 내 인구포화로 인구감소의 필요성이 대두되고 완전 자동화 사회로 인력의 필요성이 줄어들기 때문에 출산율이 낮아도 괜찮지 않냐는 의견이 있다. 그건 시야가 좁은 의견이다. 첫째, 지구 내 인구포화는 한국 인구수만 줄어든다고 바뀌는 게 아니다.  2021년 기준 지구 내 인구수가 약 77억 명 정도 되는데 약 5천만 명 정도 되는 한국에서 인구수 줄어든다고 영향 주는 거 거의 없다. 둘째, 인구의 필요성은 단순 노동력에만 있는 게 아니다. 지금 중국에서 한국을 잡아 삼키려는 움직임이 활발하다. 한국 역사부터 시작해 한국 문화까지도 중국의 것이라며 거짓말을 하고 있다. 그런 상황에서 토종 한국인의 수가 줄어들고 중국인 유입이 늘어나면 어떻게 되겠는가? 자연스럽게 정복되는 것이다. 인구수로. 저출산은 한국이란 국가의 존립을 흔드는 중대한 사안이라는 걸 알았으면 좋겠다. 그 외에도 출산율을 올려야 하는 이유가 있다. 바로 생물의 의무다. 우리가 환경을 지키는 이유는 무엇인가? 우리가 미래를 생각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우리들의 후손을 위해서인 게 아닌가? 인간은 각기 다양한 가치를 추구한다. 그런 인간이 공통된 가치를 추구할 것이 있다면 그것이 바로 인류라는 종을 이어나가는 것이라 본다. 어떤 사람은 지구가 포화되었으니까 인구수가 더 줄어들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나는 다르게 말하겠다. 지구가 포화되었으면 인구를 줄일 것이 아니라, 다른 행성을 개척하여 그 행성에 인구를 늘려나가야 한다. 그것이 순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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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알고 있던 올바르다라는 건 반드시 올바른 결과를 낳지는 못합니다. 어떤 걸 좋게 만들고 싶으면 구조 자체를 바꿔야 하는 겁니다. 좋지 못한 구조는 그대로 두고 배려만 해주는 것은 상황은 더 악화시킬 뿐입니다. 지금 하는 건 상처를 치료하는 게 아니라 진통제만 먹고 있는 겁니다. 상처를 치료해야 합니다. 본질적인 원인을 찾아 문제를 해결합시다.

 

여성은 지금 배려를 받을 때 정당한 권리를 누릴 수 있도록 의무를 다하게 해달라고 해야 하는 겁니다. 배려가 끝나면 지금 받는 혜택들은 물거품처럼 사라집니다. 예전처럼 돌아가게 됩니다. 아니, 예전보다 더 나쁜 환경이 될 수도 있습니다. 과거보다 배려가 더 사라질 테니까요. 여성의 인권을 주장하고 싶으면 자잘한 것들을 바꾸는 게 아니라 여성의 지위를 남성과 대등하게 만드는 걸 해야 합니다. 과도한 혜택은 낮은 위치에 대한 과잉배려일 뿐이라는 걸 인지하고 남성과 의무를 같이하고 혜택을 동등하게 누리는 걸로 남성과 대등해지길 바랍니다. 그런 진정한 여성인권을 추구했으면 좋겠습니다.

 

경력 있는 신입, 낮은 자수성가 비율, 기업에 대한 과한 의존, 자기개발이 아닌 회사발전에 치중, 다른 분야에서 일하기 어려운 환경, 노동자가 을이 되는 구조 따위는 노동자가 자본가에게 종속되어 있기 때문에 나타납니다. 그 구조를 바꿔 노동자 개인이 개인으로 있을 수 있는 노동의 개인화가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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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ck    친구신청

저출산은 긴말 필요없음 그냥 일자리+부동산+페미 이 삼박자가 어울려 일궈낸 현상임

카르레시틴    친구신청

윗분이랑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잇지만..
저출산은 일자리 평생직장이라거나 노후가 보장되어야하는데 그러지 못하고
부동산은 이제 내집마련의 꿈은 접어야하고 일터가 대부분 서울경기에 몰려있어서 너무 비싸서.. 진짜 서민들은 꿈도 못꾸게 되었죠
[글] 노동의 개인화와 기술독립 (2) 2021/02/09 PM 05:48

노동의 개인화와 기술독립

 

 

 

한국은 노동자 인권 운동 방식이 잘못되었다. 어째서일까? 그렇게도 오랫동안 노동자 인권 운동을 해왔음에도 노동자는 여전히 억압과 차별과 천대를 받는다. 의문을 가져본 적이 없나? 왜 변하는 게 없지? 자본가 때문인가? 자본가를 더 억압하고 규제해야 하나? 그런 생각을 가지고 더 강화된 규제를 주장하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자본가를 더 억압하고 규제한다고 한들 별반 달라질 것은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노사관계 구조 자체가 문제의 원인이기 때문이다. 노사관계는 과거 농노와 지주와의 관계에서 본질적으로 달라진 것이 없다. 농노와 지주와의 관계는 산업혁명 이후 공장직원과 공장주의 관계가 되었다. 농노가 지주에게 종속되는 것처럼 공장직원은 공장주에게 종속되었다. 농노와 공장직원은 노예와 국민으로서 신분이 달랐지만 개인이 집단에 종속된다는 점은 같았다. 개인이 집단에 종속된다. 이것이 현대 노사관계의 기본적인 구조가 되었다. 곰곰이 생각해보라. 농노와 지주와의 관계는 불평등하다. 그걸 바라는 이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 농노에게 몇 가지 혜택을 부여하면 현대의 노동자가 된다. 예컨대 농노에게 노동시간을 줄이고 자유시간을 준다고 해보자. 예컨대 농노에게 적당한 급여를 지불하고 휴가와 같은 복지를 지원한다고 해보자. 예컨대 농노에게 다른 지주 밑에서도 일할 수 있게끔 해보자. 지금과 무엇이 다른 것 같은가? 노동자가 노동자에 머무르는 이상 달라지는 건 없다. 노동자가 노동자에서 벗어나야만 농노와 달라진다. 구조 자체가 그렇다. 현대의 노동자들은 농노의 위치에서 다양한 혜택만 늘어난 것이다. 이런 농담이 있다. 공무원은 공노비, 사기업 직원은 사노비. 사람들은 어떤 집단에 종속되어있다는 점에서 사실상 노예와 다를 바 없다며 스스로를 자조하고 서로를 조소했던 것이다.

이처럼 자본주의 노사관계 구조는 과거 농노와 지우와의 관계와 다를 바가 없다. 그렇다면 공산주의가 답인 걸까? 아니다. 공산주의도 마찬가지다. 왜냐하면 노동의 집단화라는 점에서 서로 동일하기 때문이다. 개인이 집단에 종속되면 그 개인은 집단의 장에게 종속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노동자가 자본가에게 종속되고 공산주의 사회에서는 노동자가 공산당원에게 종속된다. 자유 유무와 생산성이나 향상심 따위가 다를지언정 본질적인 구조는 같다. 그러니까 어느 사회든 노동자가 힘든 것이다. 자본주의는 자유주의를 추구하며 노동자들을 좀 더 자유롭게 했고 공산주의는 사회주의를 추구하며 노동자들을 좀 더 평등하게 했다. 자본주의는 주로 민주주의 제도를 도입해 국민들에게 자유로울 수 있는 주권을 주었고 공산주의는 독재주의를 전제해 인민들을 평등하게 지배했다. 추구하는 가치에 따라 정치체제가 달라졌다. 그 정치체제의 차이로 자유권이나 개인의 소유권이 달라짐에 따라 개개인의 생활환경도 달라지게 되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이기적으로 본인의 이익만을 우선시하며 자유권이나 소유권을 주장할 수 있었다. 반면 공산주의 사회에서는 이타적으로 타인의 이익을 우선시하며 자유권이나 소유권을 주장하기 어려웠다. 이런 차이 때문에 자본주의의 노동자가 공산주의의 노동자보다 상대적으로 환경이 나을 확률이 높았던 것이다. 자유인가, 평등인가?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는 농노와 지주와의 관계에서 추구하는 가치에 따라 정치체제가 달랐다. 단지 그것뿐이었다. 따라서 공산주의는 답이 될 수 없다. 자유주의자 입장에서 보면 자유보다 평등을 추구하며 자유를 억압했던 공산주의를 더욱 더 추구할 수가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자본주의의 결함을 해결하기 위해 공산주의가 등장했으나 해결하지 못한 것을 보면 다른 방식이 필요하다는 말이 된다. 우선 지금까지 노동자 인권을 위해 해왔던 것을 살펴보자. 노동자 인권 운동은 이런 것이었다. 노동자가 자본가에게 종속되는 불평등한 구조는 그대로 둔 채, 노동자를 돕기 위해 자본가에게 노동자를 배려해달라고 요구했다. 그 배려로 노동자의 불편과 불만은 다소 해소되었지만 근본적으로 노사관계 구조는 아무것도 달라진 것이 없었다. 그 관계가 불평등했기 때문에 지금도 노동자가 억압과 차별과 천대를 받는 것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빈부격차가 커진다. 자본가의 위상은 높아져만 간다. 어째서 노동자를 위해 운동하는데 이런 현상이 나타나겠는가? 그 운동이 사실 노동자가 아닌 자본가의 힘을 길려줬기 때문이었다. 농노와 지주와의 관계를 되새겨보자. 그리고 노동자 인권 운동이 주장하던 걸 생각해보자. 평생 직장이란 이름으로 평생 동안 노동자가 자본가에게 종속되도록 유도한다. 노동자와 자본가가 개인 대 개인으로 대등한 관계를 구축하는 게 아니라 정규직이라는 이름으로 자본가에게 종속되는 걸 좋은 것처럼 포장한다. 고용안정과 노후보장을 말하며 노동자가 자본가에게 의존하게 만들었다. 노동자는 자본가에게 평생 종속되었다. 자본가는 행동하지 않아도 스스로 목줄을 매는 노동자들을 부릴 수 있게 되었다. 목줄을 풀어주면 왜 내게 걸린 목줄을 푸냐고 항의하며 다시 목줄을 매어달라고 요구할 정도가 되었다. 억압이 권리가 되었다. 정신 나간 구조다. 진실을 아는 자본가는 노동자 인권 운동을 보며 폭소했을 것이다. 「아니 알아서 종속되길 바라게 하네? 알아서 유능하고 우수한 인재들이 자청해서 종속되길 바라게 하네? 오오 고맙소이다. 여러분 덕분에 우수한 인재들을 편하게 부려먹고 삽니다. , 혜택을 늘려달라고? 최저임금 몇 백 원? 아니면 노동 시간을 좀 줄여줄까? , 그래도 그걸 쉽게 해주면 안 되지. 눈치채게 하면 안돼. 그거 몇 푼 올려주거나 시간 좀 줄여준다고 관계가 수직적인 것은 변하지 않는다는 걸 눈치채게 하면 안돼. 그러니까 조금 혜택을 늘려주고 많이 양보한 것처럼 정말 슬프다는 태도를 보여줘야 해. 그래야 노동자들을 편하게 부려먹을 수 있는 거야. 하하하.」 이처럼 그 누구보다 노동자가 자본가에게 종속되게 만드는 것은 다름아닌 노동자 인권 운동가였다. 그러니 불평등한 노사관계 구조로 나타나는 노동자에 대한 억압과 차별과 천대는 자본가만의 책임이 아니다. 이는 고정관념의 한계가 만들었다. 그들은 농노와 지주와의 관계에서 비롯된 개인이 집단에 종속되는 관계 이외의 것을 떠올리지 못했다. 그래서 그 불평등한 관계 내에서 노동자가 겪는 불편함을 배려만 해주었던 것이다. 의도는 훌륭하나 방법이 잘못되었다. 이제는 그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야 한다. 지금 사회를 둘러보라. 사회전체가 자본가에게 종속되고 있다. 사람이 태어나 학교에서 공부를 하는 것은 자본가에게 종속되기 위해서다. 대학에서 연구를 하고 기술을 개발하는 것은 자본가에게 종속되기 위해서다. 사회에서 자기 개발을 하는 것은 자본가에게 종속되기 위해서다. 모든 게 자본가 중심으로 돌아간다. 앞으로 완전 자동화 체계가 완성되면 보다 더 자본가 세상이 될 것이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하루라도 빨리 이 구조를 바꿔야 한다. 노동자가 자본가에게 종속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노동자가 정당한 권리를 취하려면 우선적으로 자본가와 대등하게 되도록 유도했어야 했다. 대등하지 않으니까 노동자가 억압과 차별과 천대를 받았던 것이다. 마치 미성년이 성년과 대등하지 않으니까 억압 받았던 것처럼. 마치 국민이 독재자와 대등하지 않으니까 억압받았던 것처럼. 국민이 자유롭고 평등하게 존중 받으려면 민주적인 절차를 통해 통치자와 대등한 관계가 되어야 한다. 마찬가지로 노동자가 자유롭고 평등하게 존중 받으려면 자본가와 대등한 관계를 구축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간단히 말해 노동의 개인화가 되어야 한다. 노동의 집단화가 노동자를 집단의 장에게 종속되게 만들었다. 그러니 노동의 개인화로 집단의 장과 대등하게 만들어야 한다. 노동자가 집단에 종속되는 것이 아니라 개개인으로 활동하면서 자유롭게 집단을 오갈 수 있어야 한다. 노동의 주체가 집단이 아닌 개인이 되어 개인이 개인으로 있을 수 있는 노동 체계가 마련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정규직이 되어 자본가에 종속되는 것이 아니라 스포츠의 FA시장처럼 자유롭게 일자리를 찾아 다닐 수 있어야 한다. 그런 구조가 되어야 노동자와 자본가가 대등한 관계에서 협상을 할 수가 있다. 고용안정과 노후보장을 자본가에게 의존하는 게 아니라 자신이 낸 세금으로 국가에 보장받아야 한다. 그래야 과도한 의존을 피할 수가 있다. 노동을 하는 이유는 누군가에게 종속되기 위해서가 아니다. 생계유지와 자아실현이 보장된다면 정규직이나 해고에 연연할 필요가 없다. 노동계급이 존재하는 게 아니라 모두 동등한 상황에서 잠시 자신의 노동력을 제공해주고 그에 대한 대가를 받는 구조가 되어야 한다. 개인이 개인 스스로를 갈고 닦으며 언제든지 일자리를 골라가고 여차하면 사업도 할 수 있게끔 해야 한다. 주저앉은 상태에 머무르게 하는 게 아니라 스스로 일어나 자주적으로 행동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렇게 해야 노동자와 자본가가 대등한 관계를 구축하여 일방적으로 종속되지 않을 수가 있을 것이다. 노동자가 자본가에 종속되지 않아야 사회도 자본가에게 종속되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사회가 자본가에게 종속되지 않아야 완전 자동화 사회에서 그들이 과도한 힘을 가지게 되는 걸 견제할 수 있을 것이다. 노동의 개인화. 이것이 바로 자유주의적인 발상이다. 이것에 대해 잠시 뒤 좀 더 정리해보겠다.

 

 

 

우선 기술독립에 대해 다뤄보겠다. 이 부분이 굉장히 중요하다. 이것이야말로 자본가를 견제할 열쇠가 된다. 사소한 규제 따위가 그들을 견제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기술과 자본을 분리해야 기술이 자본을 견제할 수 있다. 삼권분립처럼 기술과 자본과 노동이 서로를 견제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자본가가 기술과 자본을 둘 다 쥐고 있으니 노동자가 일방적으로 불리한 상황이다. 이를 먼저 바꿔야 한다. 연구자에 대해 잠시 알아보자. 연구자는 노력 대비 사회적 대우가 낮은 편이다. 정계나 법조계나 의료계와 어느 정도 비등한 시간과 노력을 필요로 하지만 그들과 비슷한 사회적 대우를 받지는 못한다. 왜 그럴까? 연구자는 집단에 종속되기 때문이다. 현재 노동 구조에서는 연구자가 대부분 자본가 밑으로 들어간다. 오히려 대부분 그걸 바라고 있다. 자본이 많은 자본가 밑으로 들어가면 성공했다고 한다. 더 훌륭한 주인을 만났다고 자랑한다. 기술이 자본에 종속되는 것이다. 반면 정계나 법조계나 의료계는 집단에 종속되지 않는다. 국회의원은 지역이나 정당의 대표로 모두 대등한 관계다. 실상은 좀 다르긴 한데 구조 자체는 그렇다. 법조계나 의료계는 언제든지 집단에서 나와 자영업을 할 수 있다. 개인 변호사 개업을 하건 개인 병원을 개원할 수 있다. 그러다가도 언제든지 집단으로 복귀할 수 있다. 자유롭다. 개인이 누군가에게 종속되는 게 아니라 개인으로 남을 수 있다. 이 차이 때문에 노력은 비슷함에도 사회적 대우가 달라진 것이다. 그리고 이 차이가 과학고 학생들의 의과대 지망을 불렀다. 과학고에서 의과대를 지망하는 학생은 받지 않겠다고 할 정도였다. 대학에서 인공지능을 공부하던 학생이 그걸 그만두고 의과대를 지망한다는 소리도 들었다. 의사가 되기 어렵다는 건 대부분 안다. 시간과 노력이 매우 많이 필요하다. 그럼에도 과학고 학생과 인공지능을 공부하던 학생이 의과대를 지망했다. 왜 그렇겠는가? 사회적 대우가 다르기 때문이다. 기술이 자본에 종속되는 만큼 기술에 대한 대우도 낮아졌다. 따라서 연구자가 정상적인 대우를 받기 위해서는 기술이 자본으로부터 독립해야 한다. 그렇게 기술독립이 되어야 연구자의 사회적 대우가 정상적이게 되고, 그래야 자본가를 견제할 수 있게 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우선 기술을 개인의 소유가 되도록 만들어야 한다. 법적으로 「모든 기술은 개발한 연구자의 소유가 된다.」라고 명시해야 한다는 것이다. 가령 공동연구를 했다면 개발한 기술 지분을 서로 나눠 가지면 된다. 그렇게 소유한 상태에서 누군가에게 양도할 때에는 양도세를 아주 높게 받으면 된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양도가 아닌 대여의 형태로 자본가에게 제공되어 기술을 가진 연구자는 자본가에 종속되지 않고 연구자 개인으로 남을 수 있다. 대등한 관계에서 로열티를 받으면 된다는 것이다. 누군가에게 투자를 받은 상황에도 동일하다. 그걸 고려하여 로열티로 회수한다는 개념으로 투자해야 할 것이다. 만약 자본가가 기술을 무단 도용할 경우엔 연구자 개개인이 모여 대응하면 된다. 연구자 개인이 개인으로 남을 수 있는 어떤 구조가 마련된다면 충분히 대응할 수 있다. 연구자들이 모여 그런 기업에 어떤 기술도 제공하지 않겠다고 선언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런 식으로 기술이 자본을 견제하는 것이다. 무분별한 국외 기술유출을 막기 위해 국외에 기술 양도나 대여를 엄격하게 심사하면 된다. 국내에 떨어진 운석을 해외에 반출할 수 없도록 하는 것처럼 하면 된다. 지금 한국은 기술유출이 활발하다. 그걸 보고 어떤 사람은 처벌이 약하기 때문이라고 하기도 한다. 발상을 바꿔야 한다. 그건 그만큼 연구자가 대우를 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기술이 자본에 종속되어 자본가가 내려주는 돈만 받으니 불만이 생길 수밖에 없다. 어떤 연구자는 자신의 기술로 만든 상품으로 자본가가 돈을 쓸어가는 걸 보고 「재주는 연구자가 부리고 돈은 자본가가 벌어가네.」라며 생각할 수도 있다. 실질적으로 자본가가 하는 일은 많다. 기술을 가지고 어떤 것을 상품화하여 판매하는 걸 관장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그렇지만 그것이 기술이 자본에 종속되어야 할 이유가 되지는 않는다. 상품이 판매되는 만큼 그에 대한 기술 대여료를 연구자에게 지불하는 구조가 되어야 한다. 기술이 자본에 종속되는 구조에 대한 불만이 기술유출을 불렀다고 본다.

로봇과 인공지능의 발달로 앞으로 완전 자동화 사회가 될 것이다. 완전 자동화 공장에서 생산된 물건이 자동으로 자율트럭에 실려 자동으로 배송되어 자동으로 무인 상점에 진열된다. 그 구조를 관리 운영할 사람 외에는 사람이 필요가 없어진다. 그렇기 때문에 자본가의 영향력이 커질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그 비대해진 힘을 누가 견제할 수 있겠는가? 정계인가? 아니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정치가는 국민들의 의향에 영향을 받는다. 그런데 국민들은 자본가에 영향을 받는다. 결과적으로 정계도 자본의 영향을 받게 된다. 그러니 정계가 자본가에 종속되지 않기 위해서는 국민들이 자본가에 종속되지 않아야 한다. 지금의 노사관계 구조로는 쉽게 견제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법조계인가? 아니다. 이미 법조계는 자본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있다. 전관예우가 대표적인 사례일 것이다. 정확히 말해 전관예우는 자본에 영향을 받는 전직 관리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이타주의가 원인이라 본다. 뭐 어쨌든 결과적으로 사법이 자본에 영향을 받은 것과 마찬가지다. 그런 상황에서 인공지능은 법조계의 자본종속을 가속화시킨다. 정상적인 판결도 국민의 법감정과 일치하지 않을 때에는 인공지능 판사를 거론되며 여론이 들끓고 있다. 이런 것이 쌓이고 쌓이다 보면 법조계도 인공지능이 내린 판결이 실제 판결에 영향을 주고, 인공지능을 소유한 자본가에게도 영향을 받게 될 것이다. 의료계도 마찬가지다. 이미 사람보다 우수한 검진을 할 수 있는 인공지능이 있다. 앞으로 더 많은 영향을 받게 될 것이다. 그러면 독립되어있던 이들마저도 자본가에게 종속될 우려가 있다. 따라서 연구자의 기술독립은 단순히 연구자의 문제만이 아니다. 연구자가 기술독립을 하여 자본을 견제할 수 있게 되어야 사회에 속한 다른 전문직들도 자본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연구자의 기술독립은 모든 사람들, 특히 자본에 종속되지 않았던 사람들 또한 적극적으로 지지해야 할 사안이다. 자본가도 개인의 소유를 중시한다고 알고 있는데 부디 기술독립에 반대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연구자가 노력한 만큼 대우를 받기 위해서는 정치적인 문제에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 연구자는 기본적으로 좁고 깊게 아는 사람들이다. 자신의 분야는 정말 뛰어나지만 다른 분야는 다소 미흡한 점이 있다. 반면 정계나 법조계는 기본적으로 넓고 얕게 아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두루두루 뛰어나지만 각각의 전문가에 비하면 깊이는 부족하다. 그 차이가 정치력의 차이를 불렀다. 정치는 기본적으로 넓고 얕게 알아야 다수의 사람들에게 영향을 줘서 정치적인 지지를 받을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정치력의 부재는 정계 진출의 벽이 되었다. 연구자가 사회적 영향력이 적은 까닭은 이런 정치력 차이 때문이다. 비슷한 계열인 의료계도 마찬가지다. 둘 다 좁고 깊게 알아 의사와 연구자가 정계에 진출하는 예가 상대적으로 매우 적은 편이다. 그나마 의사는 의사협회가 굉장히 정치적이기 때문에 정치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때 도움을 받을 수 있다. 그 협회의 옳고 그름을 차치하고 그런 정치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중요하다. 그러나 연구자는 그런 정치적인 협회가 없는 걸로 안다. 있을지도 모르지만 유명하진 않다. 따라서 연구자가 정치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고 싶다면 우선 좁고 깊게 알고 있다는 걸 인정하고 좀 더 넓게 보는 시야를 가지거나 정치적인 집단을 하나 만드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 집단은 연구자 개인이 개인으로 남을 수 있도록 지원해주는 역할을 하는 곳에서 하면 적절하다고 본다. 기술독립과 정치력 보유. 이것이 가능해야 연구자를 자본가에 종속되지 않은 채 기술이 자본을 견제할 수 있게 된다. 그렇게 하여 자본과 기술과 노동이 서로를 견제하는 구조가 만들어져야 한다. 그래야 사회가 자본가에 종속되지 않을 수가 있다.

 

 

 

노동의 개인화가 되기 위해서는 개인이 개인으로 남을 수 있는 어떤 집단이 필요하다. 노동자를 위한 집단이라 하면 노동조합이 떠오를 것이다. 하지만 노동조합은 그 역할을 해낼 수가 없다. 결국 자본가에게 종속되어 있기 때문이다. 자본가에 종속된 노동조합은 자본가에게 노동자에 대한 배려만 요구했다. 불평등한 노사관계를 바꾸는 것이 아니라 혜택만 달라고 요구해왔다는 것이다. 현재 노동조합은 노동자에게 많은 혜택을 줘서 보다 더 자본가에게 종속되게 하여 농노와 지주와의 관계와도 같은 노사관계 구조를 단단하게 하는데 힘을 보태고 있을 뿐이다. 따라서 자본가와 완전히 분리된 어떤 국가에서 공인한 집단이 필요하다. 각 분야별로 분야를 대표하여 정치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어떤 민주적인 집단이 있어야 한다. 그 집단의 이름을 정하기가 쉽지 않다. 조직, 조합, 연맹, 협회 등. 딱히 와 닿는 게 없다. 기존의 이미지가 너무 강하다. 새로운 이미지를 주기 위해서는 다른 이름이 필요하다. 첫 발상은 길드다. 중세 유럽의 길드를 말하는 게 아니다. 온라인 게임의 모임을 뜻하는 길드를 말하는 것이다. 온라인 게임의 길드는 대부분 지극히 민주적이다. 어떤 것에 종속되지 않고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다. 역할수행여부로 존중여부를 결정하는 역할주의가 게임의 역할수행에서 발상한 것처럼, 어떤 민주적인 집단도 게임의 길드를 보고 발상한 것이다. 누군가는 게임에서 발상했다는 것 자체에 거부감을 느낄 수도 있다. 하지만 그건 좋지 못한 편견이다. 모든 정보는 편견 없이 비판적으로 수용해야 한다. 일단 길드라고 가칭하겠다.

길드에 대해 생각나는 대로 정리해보자. 첫째, 분야별로 길드를 창설한다. 둘째, 학교에 있는 학업과 취업의 역할을 분리하여 학교는 학업에 전념하고 길드는 취업에 전념한다. 셋째, 미성년이 진로에 해당되는 길드에 가입해 길드게시판에 올려져 있는 임무를 수행하며 학업과 사회활동을 연계한다. 넷째, 길드원이 길드에 종속되지 않도록 길드장을 민주적인 절차로 뽑는다. 다섯째, 노동자와 자본가가 대등한 관계를 맺을 수 있도록 한다. 여섯째, 노동자와 자본가가 서로를 평가할 수 있도록 한다. 일곱째, 개인이 능력을 갈고 닦도록 지원한다. 여덟째, 집단지성을 활용할 수 있어야 한다. 아홉째, 개인이 사업을 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한다. 열째, 각 분야를 대표해 정치적인 활동을 한다.

첫째, 분야별로 길드를 창설한다. 예컨대 연구자 길드. 연구자가 자본가에 종속되지 않기 위해서 기술독립이 필요하다. 연구자가 자신이 개발한 기술을 소유하고 있어야 자본가를 견제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기술을 탈취 또는 도용 당하지 않기 위해 정치적 또는 법적으로 대응을 대신해줄 곳이 필요하다. 그게 바로 연구자 길드가 될 것이다. 연구자 길드는 모든 연구자가 모여 힘을 합쳐 부당한 것에 대응한다. 예컨대 자본이 횡포를 부리면 더 이상 기술을 제공하지 않겠다는 식으로 대항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게 하여 연구자가 자본가로부터 독립해야 한다. 개인이 자본에 종속되지 않고 개인으로 남을 수 있는 것. 이것이 바로 노동의 개인화다. 다른 분야도 마찬가지다. 각 분야별로 힘을 합쳐 개인이 개인으로 남을 수 있어야 한다. 그렇게 하여 자본이 횡포를 부리면 노동력을 제공하지 않겠다는 식으로 대항할 수 있어야 한다. 노동조합의 파업과 비슷하지만 다르다. 노동조합은 기업에 종속되어있기 때문에 파업을 하더라도 효과가 크지 못하다. 정치와 연계해야 어느 정도 효과를 볼 수 있을 뿐이다. 자본에 종속되지 않은 길드에서 특정 자본가에게 노동력을 제공하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것이 훨씬 대등하고 효과적이다. 그 자본가에게만 노동력을 제공하지 않으므로 다른 곳에서 일할 수 있다. 만약 정말 일할 곳이 없으면 노동자 중에서 사업을 할 수 있도록 지원하면 된다.

둘째, 학교에 있는 학업과 취업의 역할을 분리하여 학교는 학업에 전념하고 길드는 취업에 전념한다. 처음부터 학교에서 직장으로 바로 이어지는 구조가 잘못된 것이었다. 학교는 학업에 전념하고 취업은 다른 곳에 맡겼어야 했다. 학교에서 가르치는 건 실제 노동 현장과 괴리를 보이는 경우가 꽤 있다. 학교가 즉각적으로 현장과 상호작용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니 취업에만 전념하는 길드가 필요하다. 그런 길드에서는 노동교육과 금융교육 같은 사회에 필수적인 교육을 받을 수 있게 한다. 어떤 사람은 학교에서 금융교육을 가르치지 않는 것이 잘못되었다고 지적하며 그걸 가르쳐야 한다고 주장했다. 나는 그것에 동의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에 대해 가르치지 않는 것은 노동자를 농노와 같은 위치에 있다고 인식해왔기 때문으로 보인다. 노동자는 자본가 밑에서 노동력만 제공하면 된다고 인식해왔으니까 금융교육을 가르치지 않았던 것이다. 길드는 그런 필수적인 교육을 담당할 것이다.

셋째, 미성년이 진로에 해당되는 길드에 가입해 길드게시판에 올려져 있는 임무를 수행하며 학업과 사회활동을 연계한다. 사회에 대해 세부적인 것은 알려주지 않고 곧바로 사회에 내던지듯 보내버리는 현행 교육은 잘못되었다고 본다. 애초에 교육과 사회활동을 동시에 해가며 사회에 적응하도록 하게 했어야 한다. 미성년부터 작은 일거리를 놀이처럼 즐기면서 사회활동을 할 수 있는 구조가 있었어야 했다는 것이다. 예컨대 예술가 길드. 예술가 길드에 가입한 미성년은 길드게시판에 올라온 임무들을 살펴보고 할 수 있는 일을 하면 된다. 가게 앞에서 연주를 한다. 어떤 그림을 그려달라는 요청을 받고 그려준다. 그렇게 미성년도 할 수 있는 일을 하면 된다. 그리고 그 임무 수행에 대한 평가를 받고 신뢰도 점수를 쌓아가며 더 높은 대우를 받는 임무를 수행할 수 있도록 하면 된다. 그 평가가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고 그런 가치로 FA시장의 스포츠 선수처럼 각 기업에 러브콜을 받을 수 있는 구조를 만들면 된다. 그렇게 미성년은 경험을 쌓으며 해당 분야의 전문가가 된다. 여러 길드에 가입할 수 있으므로 여러 가지 임무를 수행해보며 적성을 찾으면 된다고 본다.

넷째, 길드원이 길드에 종속되지 않도록 민주적인 절차로 길드장을 뽑는다. 국가의 주인은 국민이다. 길드의 주인은 길드원이다. 이런 것이 성립되기 위해서는 민주적인 절차가 필요하다. 지금까지 노동의 민주화가 불가능했던 것은 노동이 자본에 종속되어있었기 때문이다. 노동조합 내에서 민주적인 절차를 거치더라도 실제 기업 내에서는 대부분 그것과 무관하다. 노동조합에 속하지 못한 노동자는 그런 것조차 없다. 따라서 노동과 자본을 분리해서 노동의 개인화가 되어야 진정한 노동의 민주화가 가능한 것이다.  

다섯째, 노동자와 자본가와 대등한 관계를 맺을 수 있도록 한다. 노동자는 자본가가 필요로 하는 노동력을 제공하고 자본가는 그 노동력에 대한 대가를 지불한다. 그 관계 이상도 이하도 필요 없다. 노동자는 자본가에게 충성할 필요가 없고 자본가는 노동자의 삶을 책임 질 필요가 없다. 충분한 대가만 지불되면 종속되지도 책임지지도 않아도 된다. 필요한 것은 해당 역할에 대한 의무와 책임이다. 노동자는 역할만 잘 수행하고 자본가는 그 역할을 수행할 때 필요한 제반 사항, 예컨대 안전장비 등을 마련해준다. 노동자는 역할수행 능력만 있으면 되고 자본가는 역할수행 능력만 보면 된다. 모든 기업은 직급이 필요가 없다. 해당 능력을 가진 사람이 필요한 역할을 맡으면 된다. 질서가 혼란될 수도 있다는 우려를 할 수도 있지만 그럴 걱정은 할 필요가 없다. 수직적인 관계가 아니어도 역할만 존중하면 질서가 유지된다. 모든 인간은 대등하다. 단지 역할이 다를 뿐이다. 자녀와 부모도 같다. 자녀는 부모에게 종속된 것이 아니다. 역할이 다를 뿐이다. 생계유지 때문에 자본가에게 종속되는 경우가 있다. 따라서 노동자의 기초생활보장이 있어야 한다. 그건 세금을 받는 정부의 의무다. 자본가나 길드가 해야 할 것이 아니다.

여섯째, 노동자와 자본가가 서로를 평가할 수 있도록 한다. 노동자는 자본가를 평가하여 노동자에게 선택할 권리를 주고 자본가는 노동자를 평가하여 자본가에게 선택할 권리를 준다. 좋은 대우를 제공하는 자본가에게는 노동자들이 몰리고 좋은 노동력을 제공하는 노동자에게는 자본가들이 몰린다. 이런 식으로 대등해져야 갑질하는 자본가가 사라지고 능력이 있는 노동자가 대우받을 수 있는 것이다. 능력이 부족한 노동자가 오랫동안 기업에 있었다는 이유로 높은 대우를 받고 자본가에게 노동자에 대한 배려를 강요하며 해고를 하지 못하게 만든다. 그런 것이 잘못되었다. 이런 구조가 되면 분명 능력이 없는 노동자는 일거리를 찾기 어려울지도 모른다. 특히 완전 자동화 사회가 될수록 그렇다. 그런 노동자는 길드게시판에 있는 임무를 행하며 정부에서 지원하는 기초생활보장을 받으면 된다. 노동자든 자본가든 능력이 있는 사람이 우대받고 능력이 없는 사람은 생활을 보장받는 구조가 이상적이다. 이것이 노동의 유연화를 불러 산업의 생산성과 효율성을 늘려줄 것이다.

일곱째, 개인이 능력을 갈고 닦을 수 있도록 지원한다. 미성년 때부터 개인의 능력을 갈고 닦고 임무를 수행하며 경험치를 쌓는다. 그런 과정으로 개인의 레벨을 올린다. 뜬금없는 소리라서 당황했을지도 모르겠다. 설마 게임에서 말하는 레벨인가? 맞다. 게임에서 말하는 레벨이다. 많은 사람들이 게임을 얕보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게임만큼 효율적으로 인간에게 만족도를 주는 구조가 많지 않다. 지나치게 효율적이기 때문에 게임중독 증상까지 있는 것이다. 술이나 담배나 마약 같은 물질에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님에도 그렇게까지 중독되는 것은 게임이 그만큼 효율적인 만족도를 주기 때문이다. 사실상 게임 내 반복 작업은 실제 일보다 더 번거롭고 까다로운 것도 있다. 그럼에도 게임을 즐기는 사람은 묵묵하게 그 반복작업을 한다. 게임 같은 구조가 되면 반복작업조차 자발적으로 하게 할 수 있다.  따라서 인간이 노동을 즐기며 능력을 갈고 닦기 위해서는 게임과도 같은 구조가 필요하다고 주장하겠다. 예컨대 단순히 동네 청소하는 임무도 길드 내에서 자신의 레벨에 영향을 준다고 듣는다면 좋다고 할 사람이 많다. 설령 좀 어려운 임무, 그러니까 뉴트리아 사냥 같은 유해조수 사냥도 기꺼이 할 확률이 매우 높다고 본다. 레벨이 오른다는 것 말고는 실상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아도 노동의욕은 굉장히 증가할 거라 본다. 알기 쉽게 말하자면 감투 하나 씌워줘도 열심히 일하는 것과 같다. 이처럼 자발적 노동과 자발적 자기개발은 게임의 시스템을 활용하는 것이 이상적이다. 앞으로 완전 자동화 사회가 되면 세상은 보다 더 게임과도 같은 구조가 될지도 모른다. 게임에서는 상품이 알아서 진열되고 상인들도 NPC로 인간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완전 자동화 사회에서는 로봇과 인공지능이 생산한 상품이 알아서 진열되고 가게 점원도 무인 상점으로 인간이 아니다. 현실이 게임 세상과 점점 비슷해진다. 사람들은 게임의 모험가처럼 능력을 갈고 닦으며, 그 능력을 가지고 능력이 필요한 사람에게 능력을 제공하고, 그에 대한 대가를 받는다. 게임 내 모험가가 임무를 받고 몬스터를 때려잡는 것처럼 현실 속 길드원은 임무를 받고 일 처리를 한다. 레벨이 오르고 레벨이 오를수록 난이도가 높은 임무를 수행하거나 수준 높은 어떤 집단에 잠시 소속되어 능력을 제공한다. 개인 능력 향상에 게임 레벨링을 도입하는 게 이상적이다.

여덟째, 집단지성을 활용할 수 있어야 한다. 인터넷으로 다수의 사람들의 지성을 활용할 수 있도록 한다. 완전 자동화 사회가 되면 앞으로 일자리가 많이 사라질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국민들은 아이디어를 생산하고 기업은 상품을 생산하고 국가는 국민들의 기초생활을 보장한다.」가 되어야 한다. 간단히 말해 일자리가 없는 사람들을 전부 싱크탱크로 활용할 수 있는 어떤 구조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한국은 고학력자들이 많다. 그럼에도 일자리는 적은 상황이다. 그걸 활용해야 한다. 일자리가 없는 고학력자들을 싱크탱크로 활용할 수 있어야 인구수가 많은 국가들과 경쟁할 수 있을 거라 본다. 천만 명 이상이 싱크탱크에 속하게 된다고 가정해보자. 그 속에서 나오는 진주 같은 아이디어는 국가경쟁력을 한층 끌어올릴 수 있을 것이다. 길드에서 집단지성을 활용할 수 있는 어떤 임무들이 공지되면 국민들은 그 임무에 맞는 아이디어를 생산하고 그 중 적절한 아이디어는 그에 대한 대가를 받는다. 형태는 공모전과 유사하지만 좀 더 적극적이다. 이런 아이디어의 생산도 개인의 레벨에 영향을 주게 되면 된다. 그러면 뭔가 남는다는 느낌이 있어 적극적으로 생산할 것이다. 굳이 아이디어가 아니어도 좋다. 예컨대 번역을 할 때나 자료를 수집하거나 정보를 정리할 때 집단지성은 효율적으로 활용될 수 있다. 위키를 떠올려 보면 될 것이다. 나는 위키가 현대사회에서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맡을 수 있다고 본다. 접근성과 가독성이 훌륭한 경우가 많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그걸 이용해서 정보를 얻기 때문이다. 그런 측면에서 볼 때 국민들의 지적 수준 향상을 위해서 위키와 같은 인터넷 정보공급사이트가 보다 발달될 필요가 있음을 역설하겠다. 발달된다면 위키의 문제점으로 지적되던 오류나 거짓들이 개선될 거라 본다. 위키를 좋지 않게 볼 수도 있다. 그런데 위키와 논문이 같은 정보를 제공함에도 위키를 무시하고 논문을 신뢰하는 것은 권위에 대한 맹목적인 의존이다. 출처만 분명하면 간단한 정보는 위키가, 자세한 정보는 논문이 제공할 수 있을 거라 본다. 역할분담이다. 그 외에도 길드는 집단지성을 활용할 수 있는 다양한 임무를 제공해야 할 것이다.

아홉째, 개인이 사업을 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한다. 완전 자동화 사회가 되면 자본가의 힘이 커질 수밖에 없다. 그걸 견제하기 위해서는 단순히 노동력을 제공하지 않는 것에 머무를 것이 아니라 자본가가 하는 사업을 대체할 수 있어야 한다. 길드원들의 능력을 갈고 닦아 적정 수준을 유지하여, 그들이 언제든지 그릇된 자본가의 사업을 대체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만약 어떤 이유로 개인이 사업을 하게 되면 그 개인은 길드를 탈퇴하고 자본가와 동일한 일을 하면 된다. 동일하게 노동자와 대등한 관계 속에서 노동에 대한 정당한 대가를 주면 된다. 그 개인은 길드 출신 사업가이므로 노동자와 대등한 관계를 보다 쉽게 받아드릴 수 있을 것이다.

열째, 각 분야를 대표해 정치적인 활동을 한다. 이기적일수록 자유롭고 민주적이다. 이타적일수록 지배적이고 독재적이다. 자유국가에서는 모두가 이기적이어야 자신의 주장을 마음껏 펼칠 수 있다. 모두가 이기적이어도 타인이 이기적임을 받아드릴 수 있다면 질서는 유지된다. 서로의 이기심이 상충되면 누구의 이기심이 정당한지 토론을 통해 결정한다. 만약 이타적이라면 이런 토론 자체가 성립될 수가 없다. 누구는 이익을 보고 누구는 손해를 보는데도 아무런 의사표현도 못하고 지나가버린다. 부당함과 부조리와 부패가 계속된다. 이타주의는 자유국가에 어울리지 않는다. 이기주의야말로 자유국가에 어울린다. 이기적인 주장이 부딪치는 토론이 정치에 영향을 끼쳐 국가가 운영되는 것이 바로 자유롭고 민주적인 것이다. 국민과 국민이 이기적인 주장을 하고 토론을 통해 정당한 주장이 받아 드려진다. 국민과 정부가 이기적인 주장을 하고 토론을 통해 정당한 주장이 받아 드려진다. 자녀와 부모가 이기적인 주장을 하고 토론을 통해 정당한 주장이 받아 드려진다. 이런 식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각 분야의 길드는 모두 자신들의 분야의 이익을 위해 이기적인 주장을 펼치며 정치적인 활동을 한다. 만약 다른 분야와 의견이 충돌할 경우 토론을 통해 우선시할 의견을 선택한다. 길드는 자본을 견제할 뿐만이 아니라 다른 분야들을 견제하는 일도 하게 된다. 일반적으로 좁고 깊게 아는 사람들이 정치력이 낮은 편이다. 그런 그들을 대변할 사람이 있어야 한다. 민주적인 절차로 선출된 길드장이 직접 정치적인 활동하거나 정치력이 뛰어난 길드원을 선발해 활동하도록 하면 된다고 본다. 그걸 길드원들이 인정해주면 된다.

 

 

 

일단 이 정도까지 해두자. 상세하진 않더라도 의도하는 바는 파악되었을 거라 본다. 요점은 노동의 개인화다. 그것이 자유주의 국가의 노사관계 구조라고 본다. 나는 길을 안내하는 사람이다. 그 길을 걷는 것은 모두가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 그 길에 도달하는 과정이나 도착 후의 세상은 보다 전문적인 사람들이 만들어 갈거라 생각한다. 이 주제는 개인적으로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이에 대해서는 꾸준히 생각해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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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글 대부분이 초안입니다. 오타도 많고 오류도 많습니다. 그래도 그걸 일일이 수정할 바엔 새로운 걸 생각하고 쓰는 것이 더 낫다고 판단합니다. 이 주제를 비롯해 대부분은 그냥 새 글로 다시 쓸 것 같습니다. 아마 자유주의와 역할주의 같은 새로운 올바름의 기준에 대해 작성한 글 같은 건 계속 수정 반복할 것 같습니다. 아니, 그것도 새로 쓸지도 모르겠습니다. 매 순간 생각은 나아가니까요.

 

저는 사상가에 재능이 있는 것 같습니다. 생각이 지나치게 많거든요. 보통 생각에 쓰는 시간이 90%고 글에 쓰는 시간이 10%정도 되는 거 같아요. 생각이 많다 보니 사회모순을 견디지 못하고 자포자기했던 과거가 있을 정도였죠. 도덕적 이유로 신체 부자유를 겪고 도덕에 반항하는 걸 포기한 채 순종하는 길을 걸어왔던 과거를 생각하면 정말 씁쓸하네요. 모두 사상의 자유를 누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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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hwa    친구신청

다 읽진 못앴지만 어떤 글은 잘 모르는 저도 설득력이 있게 느껴지네요 시사 교양 서적같은 느낌으로 다듬으면 많이 볼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아틴    친구신청

잘 쓰시네요...
[글] 한국 인권의 실태와 자유 억압의 굴레 (4) 2021/01/31 PM 06:09

한국 인권의 실태와 자유 억압의 굴레

 

 

 

한국은 인권 향상 방법이 잘못되었다. 인권과 관련된 갈등의 본질적인 원인은 다음과 같다. 약자를 강자와 대등한 존재로 이끌어 정당한 권리를 누릴 수 있도록 하는 게 아니라 약자가 약자인 상태에 머무르게 하며 약자로서 불편한 점만 배려해주었다. 약자라서 겪는 억압은 그대로 두고 억압을 받으면서 생기는 불편한 점에 대해서만 배려해주고 있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보겠다. 누군가의 강요로 주저앉은 사람이 있다. 그 사람은 주저앉아 있기 때문에 자유가 억압되어 불편한 점이 매우 많았다. 가장 큰 불편함은 마음대로 행동할 수 없다는 점이었다. 하고 싶은 걸 할 수 없고 가고 싶은 곳을 갈 수 없다. 주저앉은 사람의 세계는 몹시 좁았다. 서서 자유롭게 행동하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동경이나 증오를 하거나 절망하며 체념하기도 했다. 시간이 흘렀다. 주저앉은 사람은 조심스럽게 도움을 청했다. 그걸 보고 서 있는 사람A는 주저앉은 사람을 돕기로 결정했다. 이럴 때 보통 주저앉은 사람을 돕고자 한다면 그 사람의 손을 잡아 일으켜 세워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도록 했을 것이다. 행동의 자유라는 권리를 주었을 것이다. 그럼으로써 자신과 대등한 인격체로 존중했을 것이다. 하지만 서 있는 사람A는 그러지 않았다. 서 있는 사람A가 주저앉은 사람 곁에서 주저앉았기 때문에 생기는 불편함, 부당함, 불이익 등을 고려에 그에 상응하는 이익만을 얻을 수 있도록 배려했다. 권리가 아닌 혜택을 준 것이다. 그렇게 혜택만 주고 그대로 놔둔 채 볼일 보러 갔다. 주저앉은 사람은 여전히 자유롭게 행동할 수 없었다. 여전히 서 있는 사람과 대등하지 못했다. 그렇다고 서 있는 사람A가 악의를 가지고 행동한 것은 아니다. 사회규범이 만든 고정관념에 의해 주저앉은 사람은 계속 주저앉아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주저앉은 사람은 서 있는 사람A가 곁에 있지 않을 때에는 차별 받고 억압 받고 괴로움을 당했다. 주저앉은 사람은 괴로울수록 서 있는 사람A가 주는 배려에 기대며 배려만 바라보게 되었다. 주저앉은 사람에게 있어 배려는 이제 인권이 되었다. 서 있는 사람A는 주저앉은 사람을 배려했다는 이유로 칭찬을 받았다. 그런 칭찬으로 서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힘을 얻게 되었다. 권력을 쥐었다. 주저앉은 사람은 서 있는 사람A의 의사와 상관없이 출세의 수단이 되었다. 너도 나도 주저앉은 사람을 배려하기 시작했다. 주저앉은 사람은 주저앉은 채 서 있는 사람들에게 더 많은 배려를 요구했다. 주저앉아 생기는 불편함을 거론하며 그 불편함을 해소해달라고 강압했다. 서 있는 사람A는 그 강압에 동조하며 찬동하지 않는 이들을 비판했다. 그걸 이해하지 못하면 감수성이 부족한 사람이 되었다. 주저앉은 사람은 행동의 자유를 억압당하는 대신 배려를 통해 많은 혜택을 받았기 때문에 자유를 억압당하는 것도 괜찮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들게 되어버렸다. 결국 억압이 인권이 되어버렸다. 스스로 억압을 자청하기 시작했다. 억압에 대한 배려로 주저앉은 사람의 주장이 우선시되어버렸다. 그러다 보니 그걸 악용하는 일이 생기게 되었다. 서 있는 사람이 자신을 괴롭혔다며 거짓말을 한 것이다. 조사 결과 거짓말이라는 것이 드러나도 주저앉은 사람은 제대로 된 처벌을 받지 않았다. 과도한 배려가 그런 힘을 주게 된 것이다. 많은 배려에 서 있는 사람들이 지쳐간다. 이제는 지쳐서 주저앉은 사람을 외면하기 시작한다. 그럴 정도로 많은 배려를 받았음에도 주저앉은 사람은 여전히 억압받았다. 왜냐하면 그들은 서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걸 보던 서 있는 사람B는 주저앉은 사람에게 손을 내밀었다. 혼자서 설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겠다고 했다. 혼자 서는 것은 주저앉은 사람에게 있어 큰 모험이자 고행일 가능성이 높았다. 그러나 그것이 바로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는 방법이었다. 그럼에도 서지 않고 주저앉았다. 서서 당당하게 권리를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주저앉아 무력하게 배려를 받았다. 그런 억압이 곧 인권이라 배웠기 때문이다. 주저앉은 사람은 행동의 자유가 없었기에 많은 사람들에게 선동을 당했다. 「꾸미는 것은 서 있는 사람의 구경거리가 될 수 있으니까 꾸미지마! 서 있는 사람은 음흉하고 더럽고 속셈을 가지고 있으니까 아무도 믿지 말고 관계도 가지지마! 이건 서 있는 사람이 원했던 거니까 해서는 안 돼!」 자유를 억압하자는 주장에 아무렇지도 않고 선동 당해버렸다. 억압이 곧 인권이라 배웠기 때문이다. 심지어 자신이 사리분별도 제대로 못하는 어리석은 사람이라는 말을 들어도 침묵했다. 주저앉은 사람이 서 있는 사람과 어떤 관계를 맺다가 문제가 발생하면 서 있는 사람A는 주저앉은 사람의 어리석음을 강조하며 서 있는 사람의 책임으로 떠넘겼다. 주저앉은 사람을 위해서라고 말하며 주저앉은 사람을 어리석은 인간으로 만든 것이다. 황당하다. 주저앉은 사람은 자유를 억압 받았을 뿐이지 실은 매우 우수하고 똑똑한 사람이었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자유의 억압과 어리석다는 식의 발언이 자신에게 해가 된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럼에도 억압을 인권이라 배웠기 때문에 그런 부당한 것을 순순히 받아드리고야 만다. 정도를 넘어선 사건이 발생했다. 주저앉은 사람이 보기에도 이것은 서 있는 사람의 잘못이 아니었다. 그래서 조심스럽게 서 있는 사람의 잘못이 아니라는 의사를 나타내 보았다. 그리고 무시당했다. 주저앉은 사람과 서 있는 사람은 대등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주저앉은 사람이 스스로를 낮춰가며 배려를 받았던 만큼 주저앉은 사람의 의사도 존중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런 걸 가엽게 여긴 서 있는 사람B와 배려에 지친 서 있는 사람C는 주저앉은 사람도 이제는 서서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서 있는 사람C는 더욱 더 크게 외쳤다. 「더 이상 배려를 해줄 수 없다. 너희도 일어서서 의무를 다해라.」 주저앉은 사람은 행동할 수 없었기에 의무를 다하지도 못했었다. 서 있는 사람C는 그것을 지적한 것이다. 그럼에도 주저앉은 사람은 일어나지 못했다. 서 있는 사람A는 주저앉은 사람은 설 줄 모르는 무력한 인간이니 계속 주저앉아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는 서 있는 사람B C를 주저앉은 사람을 배려할 줄도 모르는 감수성이 없는 사람으로 매도했다. 그걸 지켜보던 주저앉은 사람은 혼란에 빠졌다. 「누가 올바른 거지?」 혼란 속에서 서 보려는 의지가 생기기 시작했다. 그러자 서 있는 사람A는 주저앉은 사람에게 주저앉아 생기는 이득을 강조하며 계속 주저앉도록 유도했다. 「네가 서게 되면 더 이상 배려가 없을지도 몰라. 네가 억압받아야 배려를 받을 수 있는 거야.」 주저앉은 사람은 배려해주던 서 있는 사람A의 말을 믿고 서려던 걸 포기하고는 무력하게 주저앉아 버린다. 주저앉아 다시 한번 사람들에게 배려를 요구한다. 그들은 계속 주저앉은 채 자유를 억압받으며 살고 있다. 이것이 한국 인권의 실태다. 여성, 미성년, 소수자 등 대게 다 비슷한 과정을 겪고 있다. 세세한 부분만 다를 뿐이지 본질적으로는 같다. 그들을 대등하게 바라보며 권리를 주는 게 아니라 열등하게 바라보며 배려만 늘려주었던 것이다. 많은 배려로 점점 혜택은 늘어나는데 정작 자유로울 권리는 그대로이다. 그들의 권리는 지나치게 낮고 그 낮은 것에 대한 배려를 해주다 보니 배려로 인한 혜택이 비정상적으로 늘어나게 되었다. 그런 탓에 역차별 논란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이 점에 굉장히 중요하다. 많은 사람들은 여성이나 미성년이 권리가 많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권리가 많은 게 아니라 혜택이 많은 것이다. 본인이 당당하게 쟁취한 것은 권리고 타인이 배려해준 것은 혜택이다. 권리가 아닌 혜택을 누리는 그들은 변함없이 인권이 낮다.

 

 

 

그 동안 많은 생각을 했다. 「어째서 자유를 억압받는 걸 권리인 것처럼 생각하는 거지?」 예전엔 알 수가 없었지만 이제는 알겠다. 억압으로 받는 배려를 권리인 것처럼 생각해버렸다는 걸 말이다. 그들이 정당한 권리가 아닌 무력함에 대한 배려라는 걸 깨닫자 많은 사회현상이 해석되었다. 역차별 논란이 일어났던 그 모든 것들이 과도한 권리가 아닌 과도한 배려로 인한 혜택 때문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 배려를 해주던 사람들은 지금까지 단 한번도 배려대상을 대등한 존재로 여기지 않았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정말 잔인하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나? 선의라는 점이 더 지독하다. 대부분 선의였을 것이다. 그래서 더 끔찍하다. 잘못되었다는 걸 모르고 더욱 더 좋지 못한 길로 빠지게 되기 때문이다. 여성인권을 주장하면서 여성의 자유를 억압하는 거나 미성년인권을 주장하면서 미성년의 자유를 억압하는 것은 실제로 여성과 미성년을 대등한 존재로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는 걸 의미한다. 우선 여성을 예로 들어보겠다. 여성인권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여성의 자유를 억압한다. 세 가지를 지적해보겠다. 첫째, 여성은 꾸밀 수 있는 자유를 누려야 한다. 꾸며서 자신의 매력을 가꾸고 싶은 사람은 그럴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탈코르셋을 말하며 꾸밀 자유를 억압한다. 둘째, 여성은 옷 선택의 자유를 누려야 한다. 예쁜 옷을 입고 싶으면 입을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짧은 치마는 잘못되었다며 옷 선택의 자유를 억압한다. 셋째, 여성은 자신의 성을 상품화할 자유를 누려야 한다. 레이싱 모델을 하고 싶으면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성 상품화가 잘못되었다고 말하며 성 상품화할 자유를 억압한다. 정말 어처구니 없다. 자유주의자의 시각으로 보면 말도 안 되는 일들이다. 어떤 사람은 꾸밈과 옷 선택과 성 상품화는 남성이 여성을 억압했기 때문에 여성이 그런 걸 했던 것이라며 여성을 위해서 그런 자유를 억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황당하다. 여성 인권을 말하는데 남성의 의향이 뭐가 중요한가? 여성 인권을 주장할거면 여성 중심적으로 바라봐야 하는 것 아닌가? 여성이 꾸미고 싶으면 꾸밀 수 있어야 하고 입고 싶은 곳이 있으면 입을 수 있어야 하며 성을 상품화하고 싶으면 상품화할 수 있어야 하는 게 권리다. 자신의 자유를 보장받는 것이 권리란 말이다. 여성의 자유권을 무시하면서 어떻게 여성 인권을 운운하는가? 거꾸로 생각해보자. 어떤 남성이 남성을 위해 자유를 억압한다고 말하는 알겠다고 말하겠는가? 미쳤다고 말할 것이다. 어떤 남성이 여성을 보호하고 싶어한다. 그런데 그걸 가지고 남성이 여성을 보호하는 것은 평등해진 시대에 바람직하지 않다며 막는다고 가정해보자. 평등을 내세우며 자유를 억압하는 것이다. 그러면 어떤 반응을 보이겠는가? 형평성에 매몰된 일부를 제외하고는 본인이 하고 싶은 걸 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할 것이다. 그것이 그 사람의 권리이기 때문이다. 보다 자유로운 것이 권리다. 최근 어떤 커뮤니티의 게시물이 기억난다. 세상에는 음질에 전기가 영향을 끼친다고 믿는 사람이 있다. 그 사람 중에서 보다 좋은 음질을 얻기 위해 고액을 들여 집 근처에 전용 전봇대를 설치했다고 한다. 게시물의 의도는 음질에 전기가 영향을 준다는 황당한 믿음 때문에 고액을 사용한 것을 비웃는 것이었다. 그런데 댓글 반응은 게시자의 의도와 정반대였다. 댓글은 이런 반응이었다. 「그것이 설령 어리석은 행위라 할지라도 타인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 이상 존중 받아야 한다.」 고액을 황당한 것에 사용한 것을 존중하고 있었다. 그 사람의 자유라고 말했다. 이런 것이 자유로울 권리고 그런 권리를 존중하는 것이 바로 인권이다! 그런데 어떻게 여성의 자유를 억압하면서 인권타령을 할 수 있느냔 말이다. 여성의 자유를 억압하면서 여성 인권을 운운하는 것은 노예상이 노예의 인권을 운운하며 노예를 배려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진정 여성 인권을 위한다면 자유를 억압할 것이 아니라 보다 자유로울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지금 여성 인권은 권리가 아닌 배려다. 꾸미고 싶지 않은 사람을 위해서 모두가 꾸미지 않도록 배려한다. 예쁘거나 야한 옷을 입고 싶지 않은 사람을 위해서 모두가 밋밋한 옷을 입도록 배려한다. 성 상품화하고 싶지 않은 사람을 위해서 모두가 성 상품화를 하지 않도록 배려한다. 지금 여성 인권은 권리가 아니라 배려란 말이다. 이런 배려는 사회 곳곳에서 너무나도 쉽게 알 수 있다. 예컨대 여성 혜택들. 여성 할당제, 여성 주택, 여성 주차장, 여성 혼수, 여성 오지파견 불가 등 여성 특혜들은 전부 그냥 배려다. 이런 것들은 여성이 남성보다 무력하고 무능하다는 전제하에서만 나타날 수 있는 것들이다. 생각해보자. 여성 할당제의 의미는 여성이 할당제가 필요할 정도로 무능하다는 걸 의미하는 것이다. 장애인 할당제와 똑같다. 주택, 주차장 따위도 동일하다. 여성이 무력하다는 전제하에 특별한 혜택을 받는 것이다. 누군가 이런 혜택을 보고 여성우월주의라고 하는데 결코 그럴 수가 없다. 혜택의 근거가 우월이 아닌 열등인데 어떻게 우월주의가 되나. 반대다. 여성열등주의다. 과거 여성이 남성에게 억압받았기 때문에 직업의 자유가 없어 여성의 비율이 낮은 것이므로 기울어진 운동장을 바로잡기 위해서 강제 할당제를 적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얼핏 들으면 맞아 보이지만 그게 바로 함정이다. 이런 게 권리가 아니라 배려다. 진정 대등한 관계를 위해서는 평가만 공정하면 된다. 굳이 할당제가 필요하지 않다. 정당한 권리를 바랐다면 할당제가 아니라 공정한 평가를 요구했을 것이다. 그러지 않고 할당제를 요구한 것은 여성이 무능하니까 그에 대한 배려를 해달라는 것과 같다. 예컨대 경찰 시험. 남성과 여성이 같은 기준으로 평가 받는 것이 대등한 관계 속에서 정당하게 권리를 요구하는 것이다. 그러지 않고 다른 기준으로 평가하는 것은 여성이 약하다는 전제하에 무력하게 배려만 요구하는 것이다. 여성 인권을 주장하는 사람들이야말로 여성을 열등하게 보고 있다. 이 얼마나 웃기는 일인가? 예전 어떤 정치가가 불륜 사건을 저지른 적이 있다. 거기에서 성인 여성과의 관계를 가리켜 그루밍 범죄라고 칭한 적이 있다. 진짜 황당하다. 그것은 성인 여성조차 제대로 된 사리분별을 못하는 어리석은 존재라 칭한 것이다. 얼마나 여성을 열등하게 보는가? 제정신이 아니다. 남성에게 이런 말을 했다고 가정해보자. 그 남성은 엄청나게 화를 낼 것이다. 그럼에도 여성들은 혼란 속에서 배려가 이익을 주니 그런 천대를 인권마냥 생각해버린다. 사실상 여성 인권을 가장 낮추고 있는 부류는 여성을 열등하다 인식하고 배려를 강요하는 이들이다. 성인지감수성이 무엇인지 아는가? 법적으로 보면 여성이 사회적 약자로서 가지는 불리함을 보완해야 한다며 여성 관련 범죄에 대해 여성 측의 진술 및 증언, 증거효력의 인정 기준을 완화하는 것이라고 한다. 여성은 무력하기 때문에 배려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그걸 인지하고 배려하는 것이 성인지감수성이라는 것이다. 스스로 열등함을 주장하고 그 열등함에 대한 배려를 달라고 강요하고 있다. 주저앉은 사람과 정말 똑같다. 주저앉은 사람과 마찬가지로 여성은 낮은 권리와 높은 혜택을 받고 있다. 그런 높은 혜택으로 역차별이 일어나고 있다. 남성들이 역차별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진정한 여성 인권 운동을 해야 한다. 여성은 남성과 대등한 존재라고 주장해야 한다. 어처구니 없지만 그렇다. 그래야 법적으로 대등하게 된다. 사회적으로도 그렇다. 여성 인권이 올라가 여성이 자유로워야 남성도 자유로워진다. 여성이 꾸밈과 옷 선택과 성 상품화의 자유를 누려야 남성이 여성의 매력을 즐길 자유를 누릴 수 있다. 여성이 성 생활의 자유를 누려야 남성 또한 여성과 자유롭게 성관계를 맺어 성적 자유를 누릴 수가 있다. 여성 성의 가치가 올라간 것은 단순히 희소성 때문이다. 자유로운 성 생활을 즐기는 여성 수가 적어 희소성이 증가했기 때문에 여성 성의 가치가 비정상적으로 올라간 것이다. 많은 여성과 성관계를 맺은 남성과 많은 남성과 성관계를 맺은 여성을 동일한 잣대로 보는 경우가 드물 것이다. 남성은 매력이 있다고 여겨지고 여성은 천박하다 여겨지는 일이 많다. 그런 인식에서 벗어나 여성 또한 매력이 있다고 여겨져야 여성이 자유로운 성 생활을 누릴 수 있고 남성 또한 그런 여성과 자유로운 성 생활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여성이 억압을 받으면 결과적으로 남성도 억압을 받는다. 지금 그렇지 않은가? 이런 것이 억압의 굴레다. 지배국가였던 조선에서는 여성이 성적 억압을 받아도 남성은 성적 자유를 누릴 수 있었다. 남성이 여성을 지배했기 때문이다. 여성을 마음대로 성욕의 도구로 삼을 수 있었다. 하지만 자유국가인 한국에서는 여성이 성적 억압을 받으면 남성도 성적 자유를 누릴 수가 없다. 남성과 여성과 평등하기 때문이다. 여성 순결의 중요성을 말하며 처녀에 집착하고 많은 경험이 있는 여성을 걸레라고 비난하는 사람이야말로 여성을 성적으로 억압해 결과적으로 남성도 성적으로 억압했던 것이다. 성적 자유를 누리고 싶다면 최소한 많은 경험이 있는 여성을 모욕해서는 안 될 것이다. 한국 사람들이 제발 자유롭게 살았으면 좋겠다. 이런 억압의 굴레는 자유국가에서는 비슷하게 일어난다. 누군가의 자유를 억압하면 억압한 사람도 억압을 당한다. 노동자와 기업의 관계도 그렇다. 기업이 노동자를 억압하면 노동자는 정치적인 활동으로 기업을 억압한다. 노동자가 기업을 억압하면 다시 한번 기업이 노동자를 직접 고용하지 않는 걸로 대응한다. 억압의 악순환이 계속된다. 자유국가에서는 이것이 일상이다. 위의 악순환으로 기업 규제가 강화되고 일자리 감소와 직접 고용 기피가 늘어난 것이다. 이것과 별개로 인공지능과 로봇으로 일자리가 더 줄어들었다. 앞으로는 더 많이 줄어들 것이다. 이에 대응하기 위해 국민은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생산하고 기업은 로봇으로 상품을 생산하고 국가는 기업이 내는 로봇세로 국민들에게 기초생활을 보장하는 완전자동화 사회구조 정립에 서둘러야 할 것이다. 그러지 못하면 앞으로 생존 자체가 어렵게 된다. 이 부분은 추후 다른 글로 정리해보겠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 여성 징병에 대해 논해보자. 여성이 징병되지 않는 것은 여성이 힘이 약하기 때문이라는 헌법재판소의 판결이 있었다. 여성에게 징병의 의무가 없는 것도 여성을 열등하게 보기 때문이었다. 여성이 남성과 대등한 관계를 맺고 싶었다면 여성이 직접 나서서 징병을 요구했어야 했다. 여성 인권을 위해서는 가장 먼저 했어야 하는 것이 징병 요구 시위였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성을 억압하는 것에 익숙했던 사람들과 그 억압으로 받는 배려에 익숙했던 사람의 합작으로 그러지 않았다. 권리 대신 배려를 받아 권리결핍이 과잉혜택을 불러 역차별이 일어나 성별 갈등이 심화되었다. 그러던 중 상황을 정확하게 판단한 사람들이 있었다. 2014년 서울대 여학생 두 명이 여성 징병을 요구하며 시위에 나섰다. 하지만 그걸 많은 여성들이 부정적으로 봤다. 징병하지 않는 근거가 여성이 열등하다는 것이었음에도 징병 받지 않는다는 배려를 받기 위해 열등함을 받아드린 것이다. 답답하다. 임신을 핑계로 징병 불가의 정당성을 내세우는 일도 있다. 여기서 분명히 해두겠다. 임산부와 여성은 다른 존재다. 임산부나 경산부는 징병되지 않아도 된다. 징병대상은 남성과 여성일 뿐이다. 관점을 달리해야 한다. 여성은 정당한 징병회피수단을 남성보다 하나 더 가진 것이다. 임신은 징병에 있어 유리한 권리로 작용할 뿐이다. 생리를 말하는 여성도 있다. 생리 때문에 군에서는 효율적인 인력이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여성 군 간부의 존재로 그런 주장은 의미를 상실한다. 여성도 남성과 같은 신체검사를 받고 힘이 강한 여성은 군 복무를 하고 그러지 않은 여성은 공익기관에서 근무를 하면 된다. 과거 내가 아직 이타주의에 머물러 있을 무렵에는 여성 징병에 부정적이었음을 고백한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런 생각이야말로 여성을 열등하게 보고 있었던 것 같다. 여성을 대등한 존재로 인식했다면 여성 또한 군 복무를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을 것이다. 여성이 열등하단 인식에서 벗어나 징병이란 의무를 행해야 정당한 권리를 누릴 수 있고 남성 또한 권리 대신 받는 배려로 인한 역차별을 받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황당하지만 이것이 진실이다.

 

 

 

그 동안 많은 생각을 했다. 「어째서 자유를 억압하는 걸 권리라고 말하는 거지?」 미성년의 자유 억압에 대해서는 정말 많이 생각했다. 그런 억압으로 자포자기한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잠시 나의 이야기를 해보겠다. 나의 환경은 굳이 따지자면 그렇게 나쁘지만은 않았다. 좋다고 말은 못해도 평범의 선은 유지했다. 그럼에도 자포자기했던 것은 자아가 강하고 두뇌회전이 빨라 자신이 받고 있는 억압이 부당하다는 걸 어렴풋이 눈치챘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왜 모든 어른을 공경해야 하지? 왜 내가 어른에게 절을 해야 하지? 왜 내가 싫은 음식을 강제로 먹어야 하지? 왜 내 인간관계나 취미에 간섭하지?」 아이들을 위해서라는 명목으로 아이들을 억압했다. 그것이 대부분 아이들의 일상이었다. 그러다 보니 누군가에게 자신의 답답함을 호소할 수 없었다. 다들 그렇게 억압을 하고 당하는 것이 당연했는데 누구에게 호소할 수 있겠는가? 왜 같은 인간인 어른에게 절을 해야 하나요? 라고 묻는 들 무슨 의미가 있었겠는가? 괜히 버릇없는 아이가 되어 혼나게 되었을 것이다. 쓰다 보니 기억난다. 초등학생 때 전단지 알바를 한 적이 있다. 그 당시에는 그것이 합법인가 불법인가도 몰랐다. 초등학생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런 것밖에 없었다. 친구들과 같이 전단지 알바를 모집하는 곳을 찾아갔다. 피자집이었다. 배달을 주로 하는 곳이어서 가게 안은 몹시 좁았다. 옹기종기 모여 가게 사장을 올려다보았다. 일하겠단 의사를 전달했다. 몇 가지 당부를 듣고 일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급여는 장당으로 계산했다. 가게 안의 작은 탁자 위에 전단지 뭉치들이 수북이 쌓였다. 각자 전단지 한 뭉치씩 가지고 와서 전단지 위쪽에 스카치테이프를 붙였다. 그러면서 전단지를 붙일 구역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준비가 끝나고 전단지 뭉치를 들고서 거리를 떠돌았다. 보통은 각자 다른 구역을 갔을 테지만 우리들에게는 놀이와도 같은 일이었기 때문에 그냥 다 같이 돌아다녔다. 한 장씩 붙이고 다니다가 어떤 어른을 마주치게 되었다. 그 어른은 정말 깜짝 놀랄 정도로 험악하게 혼을 냈다. 자기 집 앞에 붙여서 화가 난 모양이었다. 나와 친구들은 그 벼락 같은 호통에 부들부들 떨었다. 어디서 어린 놈이 벌써부터 이런 일을 해! 울면서 붙였던 전단지를 때서 회수했다. 그리고 그것과 함께 스카치테이프가 붙은 전단지 뭉치를 쓰레기통에 그대로 버렸다. 그 뒤는 자세히 기억나지 않는다. 그대로 도망쳤거나 피자집에 가서 이야기를 했을 것이다. 확실한 건 그 뒤로 학창시절 동안 제대로 된 알바를 해보지 못했다. 그 사람에게 있어 이 사건은 그냥 단순한 해프닝이었을 것이다. 아이들을 훈육했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내겐 어른에 대한 불신을 늘리는 사건이 되었다. 좀 차분하게 설득해줬으면 좋았을 텐데. 대부분의 어른들은 아이를 대등한 인격체로 존중하지 않았다. 윗사람의 시선에서 잘못을 일방적으로 꾸짖고 매로 훈육하는 것이 일상이었다. 어른이 잘못하면 괜찮아도 아이가 잘못하면 혼이 났다. 아이와 어른은 대등하지 못했다. 그래서 어른은 믿을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어른에 반항하며 일탈을 일삼는 애들을 믿을 수도 없었다. 그런 애들은 생각이 짧은 멍청이들이었다. 초등학생 때 동네에서 만난 친구들이 재미난 놀이가 있다고 해서 따라가봤다. 아마 밤이었을 것이다. 그 아이들은 동네에 널리고 널린 불법주정차량에 가까이 가서 자세를 잡았다.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걸 바라보았다. 뭘 하려고? 자세를 잡고 다리를 하늘 위로 쭉 올리더니 불법주정차량의 사이드 미러를 내려찍어서 차와 분리시켰다. 툭 하고 떨어져 나갔다. 아이들은 폭소하며 도망치듯 자리를 떠났다. 기겁한 나는 그 아이들의 뒤를 쫓다가 자연스럽게 헤어졌던 걸로 기억난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아이들에게 그 행동은 자신들을 억압하는 어른들을 혼내줄 수 있기에 재미있는 놀이였던 것 같다. 아마 지금 민식이법 놀이와 의도는 비슷할 것이다. 그 뒤는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당시 나는 일정부분 이상 도덕에 지배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차량 파손이 잘못된 것이라고 느꼈다. 그래서 더 이상 만나지 않았던 것 같다. 그걸 생각하면 복잡한 심경이다. 도덕에 지배를 받지 않았다면 나 또한 그런 놀이를 즐겼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도덕의 지배를 정당화하고 싶지 않다. 나는 분명 도덕의 지배를 받지 않았어도 충분한 철학적 지식과 사유를 할 수 있었다면 스스로 올바른 일을 결정할 수 있었을 거라 본다. 올바른 일은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해서 행해야 하는 것이지, 누군가의 가르침을 반드시 지키는 것으로 행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그것은 인간을 개돼지로 취급하여 착하도록 세뇌한 뒤 사육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인간은 아이라고 할지라도 교육과 사유를 통해 스스로 올바른 일을 생각하고 판단할 수 있다. 사람마다 다르지만 적어도 초등학교 고학년부터 다 가능할거라 본다. 아이들을 어리석어 보이는 것은 어리석게끔 가르쳤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현명하고 우수하다. 민식이법 놀이를 생각해보라. 법을 악용해 어른들을 골려 주고 있다. 바둑은 초등학생도 프로가 될 수 있다. 두뇌회전은 아이가 어른보다 나을 때가 있다. 그런 상황에서 인터넷의 발달로 정보가 과잉 공급되자 법을 악용할 정도로까지 똑똑해진 것이다. 똑똑한데 방향이 좀 잘못되었을 뿐이다. 좋든 나쁘든 지적 수준이 보장되면 교육 방법에 따라 충분히 올바른 판단이 가능한 사람이 될 수 있다. 어쨌든 그런 일들을 겪고 나니 어른과 아이, 그 누구에게도 자신의 고민을 털어놓을 상대가 없었다. 혼자서 끙끙 앓기만 했다. 그러다가 중학생 때 몸을 자유롭게 움직일 수 없다는 걸 깨닫고 모든 걸 자포자기 했다. 마냥 사회에 순종하게 되었다. 도덕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이타주의에 강하게 영향을 받았다. 자신의 말 하나하나가 상대방에게 끼치는 영향을 고려했다. 상대방이 상처받지 않는 말을 하려고 정말 노력했다. 머릿속에서 어떤 언행이 떠오르면 그 언행이 만들 가능성을 하나하나 다 떠오르고, 그 떠오른 가능성을 도덕으로 전부 검열했다. 그러다 보니 사람과의 대화가 어려웠다. 검열하는 동안 대화의 흐름이 끊기게 되기 때문이다. 결국 어리버리 하다는 말을 듣게 되었다. 충동적으로 상처를 줄 수 있는 말을 하면 깊은 후회와 슬픔을 느꼈다. 정확히 도덕이 내게 그렇게 느끼게 만들었다. 사람들과 경쟁을 할 때도 경쟁에서 떨어진 사람이 상처를 입을 것까지 머릿속에 떠올라 나를 괴롭혔다. 경쟁에서 이겨도 기쁘지 않았다. 그래서 기쁜 척을 할 때가 많았다. 경쟁에서 지면 슬프지만 안도했다. 그래서 슬픈 척을 할 때가 많았다. 자아존중감이 최하로 떨어졌다. 언제나 타인이 우선이고 타인을 위해 살아야 하는 것처럼 되어버렸다.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는데 도덕의 지배를 받아 그렇게 되어버렸던 것이다. 예전에 친구들과 PC방에 간 적이 있다. 내 옆자리에는 지적장애인이 앉아있었다. 그 사람의 행동을 보고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자기혐오감을 느낀 적이 있다. 아직도 기억난다. 그 사람은 컴퓨터 앞에 앉아 열린 한글 문서를 보며 키보드를 두들기고 있었다. 그 문서에는 문장이 만들어지지 않았다. 마치 원숭이가 키보드를 두들기는 듯 했다. 정신이 혼미해지고 온 몸에서 땀이 줄줄 새어 나왔다. 도덕은 날카로운 칼이 되어 나를 찔렀다. 왜 너는 정상이야? 쟤는 저러고 있는데 왜 너는 정상이야? 왜 너는 살고 있어? 내가 멀쩡하다는 사실조차 지독한 죄책감으로 돌아왔다. 이런 건 내가 느끼지 않아도 되는 감정이었다. 미칠뻔했다. 죽을 것 같은 심적 고통을 느꼈다. 도저히 견디지 못하고 친구에게 자리를 옮기겠다고 했다. 아마 그 친구들은 나를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정확한 이유에 대해서도 말을 하지 못했다. 누군가 상처를 줄 수도 있다는 가정으로 머릿속에서 검열되어 말문이 막힌 것이다. 그냥 자리를 옮기고 같이 놀다가 헤어졌다. 그때 가족 중 장애인이 있는 친구가 한 명 있었다. 장애인에 대한 격한 반응을 보고 어떤 감정을 느꼈을까? 그 당시에는 그것조차 굉장한 후회로 돌아왔다.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그런 고민을 말할 상대가 없었다. 일차적으로는 믿고 기댈 사람이 없었고 이차적으로는 그때까지도 도덕이 옳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며 삼차적으로는 내면에 남은 작은 자존심이 그걸 허락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예전에는 이런 이야기를 제대로 해본 적이 없다. 내면을 문제로 상담 받은 적이 단 한번도 없었다. 가족이건 친구건 교사건 상담사건 의사건 말이다. 최근에 조금씩 글이나 말로 풀어보고 있을 뿐이다. 아무에게도 의지하지 못하고 계속 생각만 했다. 도대체 왜 나는 이런 것인가? 이유가 뭔가? 도대체 왜! 지금은 안다. 내가 도덕의 지배를 받고 있었구나. 신체자유의 억압을 느껴 더 이상 억압에 대한 반항을 포기하고 도덕에 순종하는 순간 나는 자유를 잃어버린 거였구나. 인간을 어떤 사상의 노예로 만들면 이렇게 되어버린다. 그 사상 내에서만 생각할 수 있고 그 사상에 어긋나는 걸 보면 몹시 불편하고 괴로워진다. 한국 사회에 예민하고 진지하고 불편한 사람이 많은 것은 그 만큼 도덕적인 국가이기 때문이다. 어린이가 어른에게 반말하면 건방진 것 같아 불편해진다. 여성이 많은 남성과 잠자리를 가지면 문란한 것 같아 불편해진다. 보통 도덕에 지배 받는 사람들이 대게 그렇다. 최근 여성주의자들이 온갖 것이 불편하다며 호소하고 있다. 마찬가지다. 여성주의에 지배 받는 사람들은 여성주의에 어긋나는 것과 같은 걸 보면 견딜 수 없을 정도로 불편해진다. 그래서 그걸 여성주의에 맞춰 바로잡으려고 한다. 발작하듯 잘못되었다고 호소하고 항의하고 억지로 바뀐다. 보통 사상에 지배 받는 사람들이 이런 행동을 한다. 그들이 불편한 것은 그들이 지배 받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심해지면 이슬람인이 마호메트 풍자만 봐도 발작하며 풍자한 사람을 참수하는 것과 같게 된다. 어떤 사상이든 지배를 받으면 그렇게 된다. 사상의 노예다. 따라서 인간은 특성 사상에 지배를 받을 것이 아니라 사상의 자유를 누려야 할 것이다. 이것이 도덕보다 자유가 우선되는 이유다. 다양한 사상들을 접한 뒤 옳고 그름을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한 것을 사람들과 토론하여 결론을 내려야 할 것이다.

 

본론으로 돌아가자. 미성년을 예로 들어보겠다. 미성년은 자유를 억압받는다. 인권 중 자유권이 굉장히 낮다. 미성년과 성년은 대등하지 못했다. 세 가지를 지적해보겠다. 첫째, 자유롭게 문화생활을 향유할 수 있는 권리를 누려야 한다. 시간 관계없이 검열이 없는 문화를 즐길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셧다운제를 도입해 야간에 문화생활을 즐기지 못하도록 막았다. 늦은 시각까지 학원에 다녀와 잠들기 전 잠깐 게임을 즐기는 것도 막아버렸다는 것이다. 그리고 문화검열을 통해 온전한 문화를 즐기지도 못하게 만들었다. 과거 만화 검열 시대보단 나아졌지만 여전히 검열의 칼날은 존재했다. 그 칼날은 실제 영향을 끼치는 것보다 자신의 불편유무에 따라 잘라내는 걸 결정했다. 요즘은 여성주의에 영향을 받아 야한 걸 많이 검열한다. 그런데 알고는 있겠지? 아이들이 검열하는 것보다 훨씬 더 야한 것을 보고 즐기고 있음을 말이다. 그럼에도 별 문제가 없다는 것도 말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하자. 아이들 성욕을 야한 게 아니면 해소할 방법이 없는데 누가 야한 걸 안보겠냔 말이다. 지독한 억압을 받거나 욕구가 없는 일부를 제외하면 다 본다. 사춘기가 온 이들에게 야한 걸 검열하는 건 그냥 자기만족에 불과한 허울뿐인 검열이다. 특히 여성이 야한 옷을 입으면 여성이 많이 불편해한다. 그런 것은 여성이 성적으로 억압받아왔기 때문이다. 생각해보자. 남성이 야한 옷을 입는다고 남성이 불편해하는 일이 있었던가? 여성은 지금까지 조신하고 정숙하게 순결을 지켜야 한다는 도덕적 강압을 받아왔다. 그 억압에 의해 야한 것을 불편해 하는 것이다. 일부 여성들의 발작적인 야한 것의 검열은 과거 남성들이 주입한 순결 이데올로기에서 아직도 벗어나지 못했다는 걸 나타낸다. 그런 자기검열이야말로 남성에 종속적인 것이다. 부디 여성이 자유롭게 되길 바란다. 폭력적이거나 범죄를 다룬 것에 대한 검열도 의미가 없다. 뉴스만 봐도 그거보다 훨씬 더 폭력적이고 잔인한 것도 많다. 범죄도 어렵지 않게 접할 수 있다. 민식이법 놀이를 어디서 배울 수 있었겠는가? 사실상 사리분별이 어려운 정말 어린 아이를 제외하고는 검열은 스스로 생각해서 판단하는 힘을 저해하는 기능을 할 뿐이다. 웬만한 것들은 편견 없이 바라보고 비판적으로 수용할 수 있으면 된다. 그런 걸 학습하면서 성장하는 것이다. 그냥 주입식으로 올바른 것만 가르치는 것은 그 인간의 성장을 막는 것과 다르지 않다. 사고하지 않는 인간은 가르침의 노예가 된다. 지금의 검열은 그런 식으로 인간을 수동적이고 무력하게 만들 뿐이다. 검열은 우민을 위한 정책이다. 한국인이 현명하다면 검열을 하지 말아야 한다. 둘째, 개인사생활의 자유를 누려야 한다. 아이들도 하나의 인격체로서 공개하고 싶지 않은 것을 공개하지 않을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아이들을 위해서라며 스마트폰 감시 앱을 설치하도록 강제한다. 이동통신사는 청소년에게 유해정보 차단수단을 제공해야 한다라는 법이 시행되고 다양한 회사에서 스마트폰 감시 앱이 나왔다. 많은 부모들이 자녀보호라는 미명아래 스마트폰 감시 앱을 설치했다. 스마트폰에서 일어나는 대부분을 감시했다. 누구와 통화를 했는지, 어떤 문자를 보내는지, 무슨 앱을 사용했는지 확인한다. GPS기능을 이용해 어디에 이동조차 감시한다. 미성년은 독재국가의 국민들처럼 통제와 억압과 감시를 일상적으로 받는다. 그럼에도 어떤 반항조차 할 수 없다. 인권이 없기 때문에 발언의 권리도 없기 때문이다. 스마트폰이 없던 시절에는 그나마 나았다. 부모나 교사가 없는 곳에서 아이들은 다소 위험할지라도 그만큼의 자유를 누렸다. 그런데 지금은 그것보다 훨씬 심하다. 자유가 보장되는 곳이 없다. 언제나 스마트폰이 지켜보고 있다. 성년은 미성년을 대등한 인격체로 보는 것이 아니라 관리 감시해야 하는 열등한 존재로 여겼다. 대부분의 부모는 이것이 잘못되었다는 걸 인지조차 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보호를 위해서라는 말로 합리화할 뿐이다. 보호라. 보호라는 이름으로 손바닥 안에서만 키우면 아이들은 손바닥 정도의 성장밖에 못한다. 대부분 자유로울수록 크게 성장할 수 있다. 아이들을 위해서라면 부디 아이들의 개인사생활을 존중하길 바란다. 셋째, 성적 자기결정권 박탈. 지금까지 미성년과 성년의 연애는 남녀간의 시각 차가 존재했다. 가령 남성 중고등학생과 여성 대학생과 연애를 하면 큰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여성 중고등학생과 남성 대학생과 연애를 하면 문제제기가 나왔다. 여성 대학생은 자유롭게 연애를 할 수 있는 반면 남성 대학생은 많은 사람들에게 백안시를 당했다. 같은 상황이라도 성년 여성보다는 성년 남성이 처벌을 크게 받았다. 그래서 이걸 보고 많은 남성들은 형평성에 어긋나는 것이라며 비판하곤 한다. 남성이 억압을 받고 있다고 인식하기도 한다. 하지만 반대다. 그것은 성년 중심적인 사고다. 미성년을 중심으로 사고하면 남성 중고등학생이 자유롭고 여성 중고등학생이 억압을 받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성관계에 대한 인식도 동일하다. 남성 중고등학생에게는 성적 자기결정권이 있다는 인식이 있어 성년 여성과 성관계를 맺어도 문제가 없다. 대부분의 남성들은 알 것이다. 미성년 남성은 성년 여성과 성관계 맺는 걸 꺼려하지 않는다. 나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취향이 중요하다. 철저하게 자기중심적이다. 만약 끌리는 것이 있으면 연령과 관계없이 성관계 맺기를 희망한다. 하지만 여성 중고등학생에게는 성적 자기결정권이 없다는 인식이 있어 성년 남성과 성관계를 맺으면 문제가 된다. 미성년 여성은 많은 부분 억압을 받고 있기 때문에 자기의사를 존중 받는 일이 적다. 한 가지 사건에 대해 이야기해보겠다. 상서 중학교 성추행 의혹 교사 자살 사건이라는 것이 있다. 여학생 7명이 수학교사가 자신들을 성추행 했다며 호소한 것이다. 진술서가 작성되고 그 진술서를 근거로 경찰에 성추행으로 신고했다. 경찰에서 조사한 결과 여학생 모두가 성추행이 없었다고 말을 해서 혐의 없음으로 사건이 종결되었다. 사소한 사건에 대한 불만으로 거짓 진술서를 썼는데 그게 고발될 줄은 몰랐다고 한다. 그러나 부안교육지원청에서는 2차 가해의 우려를 명분으로 무고한 교사의 징계를 밀어붙여 출근 정지와 강제 퇴출 후 직위해제 되었다. 점점 사태가 심각해지자 가해여학생과 그 부모들은 사죄의 메시지와 탄원서를 제출했다. 그럼에도 그 의견을 무시하고 전라북도교육청 학생인권센터는 가혹행위와 불필요한 신체 접촉을 한 것이 맞는다고 하며 계속 조사했다. 교사는 최초 혐의를 전면 부인했으나 학생들이 무고죄로 처벌받을 수 있다는 협박을 받고 오해였다며 혐의를 인정해버렸다. 가해여학생들을 위해서 누명을 받아드린 것이다. 이후 직위해제가 다시 해제되었지만 학교에 돌아가지 못하고 강제로 40일 휴가서를 작성하고 타학교 전보조치에 서명했다. 그 교사는 12일 동안 단식하다 자살했다. 이 사건이 의미하는 것은 다양하다. 세세한 부분은 넘기겠다. 여기서 초점은 여학생의 의사가 존중되지 못했다는 것이다. 학생인권교육센터는 가해여학생들의 탄원서를 보고 누가 시켜서 쓴 것이 아니냐며 무시했다. 학생인권을 다루는 사람들이 학생의사를 무시했다는 것이다. 얼마나 여학생을 어리석게 봤으면 탄원서의 진위여부도 검토하지 않고 무시를 하나. 이게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알았으면 좋겠다. 결국 인권 운운하는 사람들이야말로 인권이 낮은 사람을 대등한 존재로 인지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한국에서는 혜택이 높은 순서대로 권리가 낮다고 보면 된다. 특히 여성과 미성년은 권리가 낮고 혜택이 높다. 그 둘이 합쳐진 여학생은 매우 낮은 권리과 매우 높은 혜택을 받고 있다. 그래서 여학생의 의사는 제대로 존중되지 못하지만 처벌이 강한 것이다. 가령 미성년 여학생이 잘생긴 성년 대학생과 자기의사로 성관계를 맺는다고 가정해보자. 마음에 들어서 자기의지로 호감을 나타내고 성관계를 맺었다. 그럼에도 그것이 사회에 알려지면 비난을 받는 것은 성년 대학생이다. 미성년 여학생의 의사는 존중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도대체 왜 인권타령 하면서 관점이 인권 대상이 아닌 건가. 미성년 여학생의 자유의지가 가장 중요한 것 아닌가? 정말 어처구니 없다. 하긴 한국에선 성인여성도 그루밍 언급하며 머저리로 보는데 미성년은 말할 것도 없겠지. 한국에서는 혜택이 높은 순서대로 권리가 낮다. 열등한 존재에 대한 과잉혜택. 이것을 잊으면 안 된다. 미성년 대상으로 한 범죄가 늘어나면서 미성년은 더욱 더 억압받고 있다. 특히 최근에는 미성년 남성에게까지 억압을 하려는 시도가 보이고 있다. 지금까지 미성년 남성들은 성적 자기결정권을 존중 받아 원하는 상대와 관계를 맺어도 큰 문제가 없었다. 그런데 미성년 여성에 대한 억압이 점점 강해지면서 형평성 문제로 미성년 남성까지 성적 자기결정권을 박탈당하고 있다는 것이다. 상식적으로 미성년 남성이 자유를 누리고 미성년 여성이 자유를 억압받으면 미성년 여성도 자유를 누릴 수 있는 방향이 바른 길이 아닌가? 왜 미성년 남성까지 억압하려고 드는가? 성관계를 맺는 건 그 사람의 자유다. 자신의 자유의지가 존중 받는 게 권리인 거지 억압받는 게 권리가 아니란 말이다. 이것도 결국 억압의 굴레다. 여성이 억압받자 남성도 억압받는다. 토할 것 같다. 이런 걸 여성을 억압하던 남성들과 억압받던 여성들이 주도하고 있다는 걸 안다. 정 미성년 여성들이 억압받기를 바란다면 최소한 미성년 남성들은 억압하지 말아라. 왜 더 미성년 인권을 악화시키는가? , 그러면 또 형평성 문제로 왜 여성은 처벌받지 않냐며 말이 나오겠지. 정말 한숨만 나온다. 억압의 순환이 끝나질 않아. 결국 미성년 남성이 성적 자기결정권이란 자유를 누리려면 미성년 여성도 성적 자기결정권이라는 자유를 누릴 수 있어야 한다. 제발 좀 미성년 인권 위한다면서 억압하지 말고 부디 자유의 시각으로 미성년의 자유를 보장하길 바란다. 간단하게 문화생활의 억압과 개인사생활의 억압과 성적자기결정권 박탈을 다뤄보았다. 이런 것들이 바로 미성년이 권리가 아닌 배려를 받고 있다는 근거다. 자유로울 수 있는 권리를 누리는 것이 아니라 위험할 소지가 있는 걸 막아주는 배려를 받고 있다. 미성년은 성년보다 열등하다는 전제하에 가능한 배려다. 그리고 그런 배려는 국민이 어리석다는 전제하에 독재자가 우민정책을 펴는 것과 같은 논리다. 국민들은 어리석음으로 국민들의 안전을 위해 자유를 억압해야 한다. 아이들은 어리석음으로 아이들의 안전을 위해 자유를 억압해야 한다. 똑같은 짓을 하면서 미성년 인권을 운운하는 걸 보면 어처구니가 없다. 미성년자들은 이미 성년 수준으로 우수하고 똑똑하다. 이해가 가지 않는 다면 미성년 범죄를 떠올려보라. 미성년자들도 성년 수준의 지식을 보유하여 교활한 범죄를 저지르고 있다. 촉법소년으로 보호받고 있다는 걸 말하며 과감하게 범죄를 저지르는 일들이 늘어나고 있다. 시대가 변한 것이다. 인터넷으로 정보가 과잉공급 되면서 미성년자들도 굉장히 똑똑해졌다. 그럼에도 미성년을 보호할 때는 미성년의 어리석음을 말하며 자유를 억압하고 미성년 범죄가 발생할 때는 미성년의 똑똑함을 말하며 성년 수준의 처벌을 요구한다. 기준이 없다. 기준이. 이런 것은 결국 미성년은 어른 손바닥 위에서 지배를 받아야 하지만 처벌은 성인 수준으로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한국은 미성년 인권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미성년을 그저 편하게 다루고 싶어하는 것뿐이다. 한국은 외국보다 자녀살해가 많다고 한다. 전체 살인 대비 자녀살해 비율이 한국은 5%인 반면 미국은 2% 영국은 1%라고 한다. 5배까지 높다.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나겠는가? 부모들이 자녀들을 대등한 인격체가 아닌 단순한 소유물로 여기기 때문에 그런 것 아니겠는가? 자녀들은 자신의 분신으로 보며 강제로 학습시키는 일들도 상당히 많다. 그 중 충격적인 것은 전교 1등 모범생의 모친 살해다. 전교 1등이었던 그 학생은 24시간 감시당하며 강제로 공부했다. 책상 앞에 앉아 잠깐 졸았다는 이유로 밤 11시부터 다음날 아침 8시까지 9시간 동안 골프채로 200대를 받았다고 한다. 어머니를 살해할 때도 사흘이나 잠을 자지 못하고 공부했었다고 한다. 생명에 위협을 느끼고 있던 그 학생은 잠든 어머니를 보고 화를 참지 못하고는 주방에서 칼을 가져와 눈을 찔렀다고 한다. 찔려서 죽어가는 학생 어머니는 이렇게 소리쳤다. 이렇게 하면 넌 정상적으로 살아갈 수 없을 거야, 왜 이러는 거야? 이에 학생은 이렇게 대답했다. 이대로 가면 엄마가 나를 죽일 것 같아서 그래. 지금 엄마는 모르는 게 너무 많아. 엄마 미안해. 실제로 그 학생은 1등이 아니었다고 한다. 지나친 억압에 성적표를 조작해서 보여줬다고 한다. 그럼에도 억압이 지속되자 견디지 못하고 살해한 것이다. 이 사건은 큰 파장을 주었다. 하지만 그때뿐이었다. 여전히 미성년 인권은 변한 게 없이 여전이 억압하고 있다. 그 근간인 도덕이 바뀌지 못했기 때문이다. 자녀와 부모는 대등하지 못하다. 유교의 가르침인 장유유서 자체가 미성년과 성년을 차별한다. 자녀살해를 보고 분노하는 성년들이 미성년이 성년에게 반말을 하면 화를 내거나 불편함을 느낀다. 어쩌자는 건가? 자녀살해 비율이 높다는 현상에 대한 분석으로 도덕을 원인으로 삼지 않는 것은 마치 종교인이 종교 교리를 의심하지 못하는 것과 같다. 자녀와 부모를 차별하는 걸 올바른 도리로 만든 도덕이 바뀌지 않으니까 계속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것이다. 아이들이 도구처럼 살해당하는 것에 분노하는 사람들이 아이들을 대등한 존재로 여기지 않는다. 미성년이 지금처럼 배려를 받지 못하던 시대의 법은 법부터가 자녀와 부모를 차별했다. 자녀가 부모를 살해하면 존속살해가 되지만 부모가 자녀를 살해하면 비속살해가 된다. 미성년자의 인권도 낮고 배려도 낮던 시절의 법이다. 그걸 보고 미성년 인권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미성년을 대등한 존재로 이끄는 것이 아니라 부모가 자녀를 살해할 때의 처벌도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어처구니 없다. 최근에도 자녀살해 뉴스가 많이 나오고 있다는 걸 안다. 특히 최근 놀란 것은 양녀를 장난감처럼 가지고 놀다가 살해한 사건과 사실혼 남편 충격 받으라고 8세 친딸을 살해한 사건이다. 둘 다 자녀를 인간으로 보지 않았다. 이게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확실히 알아야 한다. 미성년 인권이 올라간 것이 아니라 배려만 늘고 있을 뿐이다. 이런 걸 보면서 많은 사람들은 자녀살해의 처벌과 자녀보호를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미성년 인권은 더 낮아진다. 보호받을수록 열등한 존재로 인지하게 되기 때문이다. 사람은 자기 손안에 들어온 인간을 얕보게 될 확률이 매우 높다. 교도관이나 납치범이 죄수나 인질을 가볍게 여기는 것과 같다. 대등하지 않으면 결국 인권은 낮아지게 되어있다. 사건이 많아질수록 보호와 감시는 늘어나고 보호와 감시가 늘어날수록 미성년 인권은 더더욱 낮아진다. 낮아진 인권으로 인간 대접받지 못하는 미성년은 더더욱 쉽게 살해된다. 이 악순환을 멈추려면 미성년을 대등한 인간으로 대접해야 한다. 어린 시절부터 빠르게 자립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수동적으로 보호만 받게 할 것이 아니라 능동적으로 사회에 참여할 수 있는 수단을 마련해줘야 한다. 정녕 미성년 인권을 위해서라면 문화생활의 억압과 개인사생활의 억압과 성적 자기결정권 박탈을 할 것이 아니라 빠른 사회진출과 함께 미성년 선거권을 줘야 한다. 최소한 교육관련 선거는 그에 대한 권리를 부여 받아야 한다. 애들은 뭘 모르니까 선거권을 주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면 그것 자체가 미성년자들을 어리석은 인간으로 여긴다는 것이다. 미성년 인권을 주장하면서 선거권을 주지말자는 주장을 하진 말았으면 좋겠다. 음주, 흡연, 운전. 이것들도 미성년이 억압받은 것들 중 하나다. 그래서 생각해봤다. 과연 이 억압은 정당한가? 최근 미성년자들의 무면허 음주운전이 많은 것은 억압에 대한 반발이다. 미성년자 사이에서 흡연하는 애들이 발언권이 쌘 것은 성년의 권리를 누리는 미성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미성년 사이에서 힘을 가지게 된다. 흔히 말하는 일진이나 인싸다. 이것만 봐도 안다. 억압받을수록 천대받는다. 이걸 잊으면 안 된다. 사실 과거 미성년 흡연에 대해서 고찰한 적이 있다. 그 당시 나는 미성년 흡연금지에 대한 근거로 건강을 들 수 없다고 판단했다. 왜냐하면 성년이라고 해서 건강에 좋은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미성년자에게 더 해롭다고는 하더라도 성년에게 이로운 것은 아니므로 건강을 근거로 내세울 수는 없다고 봤다. 가령 성년이라고 해도 지병이 있을 경우 미성년보다 흡연이 더 해로울 수 있다. 그럼에도 흡연권을 존중하고 있지 않은가. 건강이 근거가 될 수 없었다. 그래서 피보호자와 보호자 관계를 떠올렸다. 보호자가 피보호자의 건강을 책임져야 하기 때문에 피보호자가 보호자에게 보호를 받기 위해서라면 그런 흡연 금지를 받아드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단순한 자기합리화였던 것 같다. 이미 미성년은 흡연해서는 안 된다고 결론을 내리고 거기에 맞춰 논리를 짜냈던 것이다. 솔직히 부끄럽다. 흡연 금지가 보호자의 책임 문제라면 피보호자와 보호자의 협의 하에 흡연을 허용 받을 수 있었어야 했다. 미성년 학대는 미성년이 바라지 않는 걸 강제로 시킬 때 적용된다. 그것이 설령 공부라고 해도 다르지 않다. 흡연 문제도 동일하다고 본다. 강제로 피우는 것이 미성년 학대다. 본인이 바라서 피우는 것은 보호자의 허락 안에서 그 미성년의 자유권이라고 생각한다. 음주나 흡연이 단순 책임 문제면 법적으로 금지할 근거는 되지 못한다고 본다. 운전은 사고 위험이 있기 때문에 조심스러울 수 있다. 그러나 음주나 흡연은 타인의 자유를 침해하는 경우가 적은 편이다. 본인이 바란다면 보호자 허락 하에 가능해야 하는 것이 미성년의 권리라고 본다. 음주를 즐기지 않는다. 흡연을 해본 적도 없다. 술 마시고 운전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집안이나 길에서 흡연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럼에도 그걸로 행복을 누리는 사람들을 위해 그런 자유를 보장한다. 미성년도 동일한 잣대로 본다. 사고 가능성 때문에 성년의 음주나 흡연을 막지 않는 것처럼 건강 침해 가능성 때문에 미성년의 음주나 흡연을 막을 필요는 없다고 본다. 억압 받는 것보다 자유로운 것이 권리다. 미성년을 위해서라면 건강 침해 가능성이 있더라도 그 의사를 존중해야 한다. 이것은 적극적으로 허용하자고 하지는 않겠다. 음주를 즐기지 않고 흡연을 하지 않는 내가 굳이 그걸 하자고 할 이유는 없다. 단지 억압하는 것이 아닌 허용하는 것이 권리라고 지적할 뿐이다. 음주나 흡연을 즐기는 미성년을 보면 나는 그 자유를 존중할 것 같다. 음주나 흡연 따위도 미성년 인권의 본질적인 부분과 동일하다. 음주나 흡연을 할 권리는 없는데 제대로 된 처벌을 받지 않을 혜택은 있다. 주점에서 미성년이 술을 마시면 미성년이 처벌받는 게 아니라 성년인 주인이 처벌받는다. 이걸 보고 미성년의 권리가 높다고 착각할 수 있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권리가 높다면 음주와 흡연이 가능했을 것이다. 권리는 없는데 혜택은 많으니까 처벌을 성년이 받은 것이다. 적어도 앞으로 운전은 가능할 것 같다. 모든 차량이 자율주행이 되면 미성년 혼자서 차량에 탑승할 수 있겠지. 미성년이 보다 더 자유롭길 바란다. 아이들은 어른들의 도구가 아니다. 높은 지능으로 자유의지를 가진 인격체다. 미성년 인권을 위한다면서 미성년의 자유를 억압하지 말아야 한다. 진정 미성년 인권을 위한다면 미성년의 자유를 최대한 보장하여 미성년과 성년을 대등한 존재로 이끌어야 할 것이다. 함부로 자유 억압을 인권이라 말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여성과 미성년에 대한 자유 억압에 대해 알아보았다. 그들은 지금 권리를 누리는 것이 아니라 혜택만 받고 있다. 여전히 자유를 억압받는다. 이것이 한국 인권의 실태다. 그들이 자유를 억압받으면 자연스럽게 다른 이들도 자유를 억압받는다. 자유국가에서는 그것이 정상이다. 이것이 자유 억압의 굴레다. 대표적으로 여성과 미성년의 예만 들었지만 다른 것도 적용될 수 있다. 본인의 자유가 보장받기 위해서는 타인의 자유도 보장해야 한다. 예컨대 표현의 자유. 어떤 것의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면 다른 것도 표현의 자유가 억압된다. 한국에서는 누군가 불편하다는 이유로 표현의 자유가 굉장히 많이 억압되었다. 개그의 본질이 무엇인가? 조소다. 누군가를 비웃는 것으로 사람은 시원하게 웃을 수 있다. 이해가 되지 않는다면 본인이 어떤 것에 웃는지 파악해보라. 타인이 어떤 것에 웃는지 파악해보라. 하하하, 멍청이. 바보 같은 짓을 보았을 때 사람은 웃게 된다. 정말 모르겠으면 바보 같은 인간이 뉴스에 나왔을 때 웃었던 것을 떠올려보면 된다. 코로나 사태를 막기 위해 마스크 대신 코걸이를 걸어야 한다고 말하며 그걸 판매한 인간이 뉴스에 나온 적이 있다. 사람들은 웃었다. 말도 안 되는 걸 판매하는 사람이나 그걸 사는 사람이나 바보 같았기 때문이다. 그런 바보 같은 걸 비웃음으로써 사람들은 기분이 좋아졌다. 인간은 비웃는 걸로 기분이 좋아지는 생물이다. 그러니까 개그맨이 존재하는 것이다. 사람들을 정당하게 비웃을 수 있도록 해주는 게 개그맨이고 그런 장소를 제공하는 게 개그프로그램이다. 본인을 희화화하거나 타인을 희화화함으로써 사람들을 조소하게 만든다. 사회의 어둠을 조소하는 것을 블랙 코미디다. 개그의 본질은 조소다. 그런데 그런 것도 모르는 인간들이 조소가 불편하다고 개그에서 조소를 빼버렸다. 어떤 인간은 논문까지 썼다. 여성의 외모를 웃음의 소재로 쓰는 것은 여성에 대한 폭력이다. 정신이 나갔다. 사람이 무엇으로 웃는지도 모르는 인간이 조소를 막아버리는 바람에 사람들은 속 시원하게 웃을 수가 없었다. 더 웃긴 것은 개그를 직업으로 삼은 여성이 그것에 선동 당해 여성을 희화화 하지 않겠다고 말한 것이다. 개그를 직업으로 삼을 사람이 개그의 본질조차 모르고 있었다. 정말 눈물 나게 웃기고 슬프다. 여성에 대한 조소가 사라지자 다른 것에 대한 조소도 자취를 감추기 시작했다. 누군가 불편하다고 말을 하면 개그 소재로 쓸 수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여성에 대한 표현의 자유가 억압되자 다른 것에 대한 표현의 자유도 억압되었다. 블랙 코미디를 본지도 정말 오래되었다. 시시한 사회가 되어버렸다. 한숨이 나온다. 어떤 사람은 여성을 조소하면 성인지감수성이 부족하다며 비난한다. 그렇다면 대머리를 조소하면 대머리인지감수성이 부족한 것이 되는가? 많은 여성들이 대머리는 조소하면서 여성이 조소 당하는 건 참을 수 없어한다. 흑인이 흑인 조소를 감내하지 못하면서 동양인 조소는 즐기는 것과 같다. 왜 그렇게 비겁한가? 물론 이유는 안다. 사상에 지배 받고 있기 때문이다. 이슬람의 지배를 받는 사람이 마호메트 풍자를 불편해하는 것과 같다. 이런 지배를 받아 불편해진 사람들이 무한도전 같은 예능프로그램에 참견하고 간섭하여 조소를 빼버렸다. 그러자 정말 재미없는 예능프로그램이 되어버렸다. 불편한 걸 배려해주는 것이 당연해지다 보니 점점 공영방송에서 개그프로그램들이 줄어들었다. 개그의 몰락은 조소가 불편한 사람이 만든 것이다. 위와 같이 비웃을 수 있는 사람이 뉴스에 등장하면 댓글에서 이런 반응이 나온다. 이래서 개콘이 죽었지. 개그 프로그램보다 뉴스가 더 재미있으니까 개그 프로그램이 죽었다고 말을 한 것이다. 정확히 말하면 뉴스가 재미있어서 개그 프로그램이 죽은 것이 아니다. 이제는 정당하게 공적으로 비웃을 수 있는 장소가 뉴스 말곤 거의 없어졌기 때문이다. 작은 조소도 참을 수 없게 되어버린 사상의 노예들 때문에 자유로운 인간들이 정당하게 웃을 수 있는 공간마저 사라져 버렸다. 이 얼마나 개 같은 일인가? 여성들도 조소로 웃을 것이다. 인간은 애초에 그렇게 설계되어 있기 때문이다. 여성들은 여성이 조소되어서는 안 된다는 선동에 휘말려 다른 것에 대한 조소도 즐길 수 없게 되었다. 누군가의 자유를 억압하자 자신의 자유도 억압된 것이다. 자유를 억압하는 것에 동조하거나 방관했던 사람들이여, 이런 결과에 만족하는가? 이런 억압의 굴레는 다른 곳에도 존재한다. 일부 여성들은 사상의 지배를 받아 여성 성 상품화가 몹시 불편했다. 그래서 남성이 즐길 수 있는 성 상품을 억압하기 시작했다. 옷도 검열하고 야한 것도 검열하고 창작물도 검열한다. 지독할 정도로 검열하며 남성이 즐길 자유를 억압했다. 그런 것이 길어지자 남성 또한 여성을 억압하기로 했다. 알페스 공론화다. 알페스라는 것은 Real Person Slash로 실제 인물을 가지고 동성애와 성적 관계를 소재로 한 소설을 쓰는 걸 뜻한다고 한다. 무한도전에 출연한 출연진을 가지고 동성애와 성적 관계를 묘사한 것이 바로 알페스일 것이다. 지금까지 남성들은 그런 것에 무관심했다. 그것은 여성들의 자유였다. 그것이 설령 부도덕하더라도 자유를 보장해줬다. 그럼에도 자꾸 일부 여성들이 지배 받기 때문에 생기는 불편함 때문에 남성들의 자유를 억압하자 남성들도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여성들을 억압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창작물에 간섭하고 AI 성희롱에 발작하며 억압하려고 드니 참을 수가 없어진 것이다. 도대체 피해자가 없는 창작물은 잘못되었고 피해자가 있는 알페스는 괜찮다는 논리는 뭔가? 정말 이번 알페스 공론화는 잘했다. 역지사지를 느껴봐야 이제 억압의 굴레를 조금이나마 인지하겠지. 그렇게 해서 이 악순환을 좀 끊어야 한다. 본인의 자유가 보장받고 싶으면 타인의 자유를 보장해줘야 한다. 그것이 자유주의의 기본이다. 어떻게 자유국가에서 그런 상식조차 모르고 남의 자유를 아무렇지도 않게 억압하려 드는가? 한국에 자유주의자가 정말 부족하다고 보는 것은 바로 이런 것 때문이다. 한국은 성인지감수성이 부족한 것이 아니라 자유인지감수성이 부족하다. 자유가 뭔지는 알고 그렇게 억압하는가? 자유를 위해 목숨 걸고 전쟁을 한 지 백 년이 지나지 않았다. 자유를 위해 목숨 걸고 민주화 운동을 한 지 오십 년도 지나지 않았다. 자유가 소중한지 모르는 인간들이 자신이 억압받아 생기는 불편함을 해소하기 위해 다른 사람의 자유를 억압하는 걸 보면 정말이지 분통이 터진다. 몇 번이고 말하겠다. 본인이 자유롭고 싶으면 타인도 자유롭게 해야 한다. 본인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 것은 대부분 그냥 자유롭게 놔둬야 본인의 자유도 침해 받지 않을 수 있다. 본인의 자유를 침해받지 않음에도 불편함을 느낄 때에는 본인이 어떤 사상에 지배 받고 있는지 스스로를 성찰해보길 권해보겠다. 십중팔구 너를 지배하고 있는 사상이 있다. 지배 받지 말고 자유로워야 한다. 자유국가에서 자유롭자고 하는 말이 이렇게 어렵다는 것 자체가 너무나도 슬프다. 도대체 왜 이런 것인가? 한국에는 똑똑한 사람들이 굉장히 많다. 그런데 어떨 때에는 그 똑똑함이 지식만 높은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정확히 지혜로운 사람은 많은데 사상의 지배를 받다 보니 그 지혜로움을 잘 활용하지 못하는 것 같다. 사상의 지배를 받지 말고 사상의 자유를 누리며 자유롭게 살아야 한다. 부디 그러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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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루다 언급하면서 윤리의식을 말하고 있습니다. AI 성희롱이 뭐가 문제입니까? 자꾸 윤리 들먹이며 자유 억압하려고 들면 안됩니다. 억압 받을 거면 혼자 받으십시오. 최소한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사람들은 이런 개소리에 호응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이런 억압이 싫다면 스스로 자유주의자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사상의 노예들이 자유로운 인간을 억압하는 걸 방치해서는 안 됩니다. 도덕에 지배 받는 인간이 저지르는 횡포를 저지해야 합니다. 누군가 도덕이나 여성주의 같은 걸로 인간의 자유를 억압하려고 하면 자유주의를 내세우며 그것에 대항했으면 좋겠습니다. 나는 그럴 것입니다.

 

자유주의가 인간의 자유를 최대한 보장하고 역할주의가 인간의 평등을 최대한 보장한다. 아마 새로운 올바름에 대해서는 이걸 중심으로 쓸 것 같습니다.

 

어떤 기준이나 잣대가 난잡하고 엉망이어서 사회가 혼란스러운 걸 보면 어느 때보다 사상가가 필요한 시대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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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독성이 너무 나쁘네요...
문단 좀 보기 편하게 나눠주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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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가 혼란스러운게 과연 기준이나 잣대가 난잡하고 엉망이 되어서 그럴까요? 아니면 원래 기준이나 잣대는 난잡했는데 그것들이 잘 들어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어서 그런 것일까요?
저는 사상가의 문제가 아니라 설득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그저 자기 주장들만 외치고만 있고 설득할 생각이 없으니 난잡해지는 것이 아닐까 싶네요.
그리고 사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 자신의 사상에 빠져있느라 다른 이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잘 헤아려보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인지 설득하거나 전달하는 힘도 부족하더군요. 다른 이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혹은 글을 어떻게 볼지, 그들이 잘 이해하고 잘 볼 수 있게를 생각 안하는 것 같습니다.

내아를나아도~    친구신청

한줄 요약좀;;

꼬박,    친구신청

지나가던 국문과가 한 자 적어요. 글의 시각과 논조를 떠나 글을 이만큼 분량으로 적는다는 것 자체가 대단한 열정이고 노력이란 걸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님의 글이 좀 더 많은 사람들이 읽고 느낄 수 있도록 글의 외형적인 부분도 다듬는 게 어떨까 싶습니다. 문단 나누기나 글의 근거 정도 추가해 다듬어도 훨씬 좋은 글이 될 것 같습니다. 파이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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