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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자유국가의 인간교육 (0) 2021/08/09 AM 07:55

자유국가의 인간교육

 

 

 

자유국가의 교육은 지식의 주입이 아닌 사고방식과 행동원리의 파악과 설계다. 인공지능으로 비유하면 데이터의 입력이 아닌 알고리즘의 설계다. 인공지능은 알고리즘을 설계해두면 알아서 데이터를 수집한다. 그와 비슷하다. 학생이 본인을 파악하고 설계할 수 있으면 타인의 간섭이 없어도 알아서 필요한 지식을 수집한다. 자발적으로 목적을 결정하고 그 목적을 위해 노력한다. 교사가 일일이 간섭하지 않아도 학생이 알아서 공부를 한다. 얼마나 이상적인 교육인가? 한국은 교육열은 높으나 학구열은 낮다. 그에 따라 자발적으로 공부하고 싶어하는 학생이 상대적으로 적은 편이다. 그러니 이런 이상이 이해하기 어려울 수도 있다. 하나 인간의 특성을 떠올려보면 가능하다는 걸 알 수 있다. 한번쯤은 무의식적으로 같은 행동을 반복한 적이 있었을 것이다. 습관이나 파블로프의 개나 루틴 같은 것이 바로 그렇다. 인간은 사고방식이나 행동원리가 한번 정립되면 의식적으로 바꾸려 하지 않는 이상 무의식적으로 정립된 것을 그대로 하게 되어 있다. 공부는 습관이 중요하다는 말도 이런 것에 근거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단순히 습관을 들이라는 것이 아니다. 그런 습관을 들이는 교육은 자아의 파악과 설계가 아닌 단순한 행동반복을 하는 것일 뿐이다. 그런 단순함은 공부하는 습관을 길러줄 수는 있을지언정 자아의 형성에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 한국은 반복적인 학습으로 습관을 들여 지식을 주입하고 있다. 그러나 그러면 개인의 고유성이 말살된다. 제대로 된 자아의 형성이 끝나기 전에 교육이 맹목적으로 지식을 주입하면 지식이 자아를 잡아먹어 지식 자체가 자아의 일부가 된다. 교육받은 대로 언행을 하는 인간. 사랑을 집어넣으면 사랑을 말하고 증오를 집어넣으면 증오를 말한다. 그 어떤 개성도 갖추지 못한 채 주입 받은 지식대로만 행동한다. 고정된 형식에 집착하며 남의 눈치를 보게 된다. 고학력자가 쉽게 휘둘리고 선동되고 세뇌되는 것은 온전한 자아를 갖추기 전에 지식에 잡아 먹혔기 때문이다. 빼곡한 지식을 촘촘하게 주입 받은 학생은 문제에 대한 답을 빠르고 정확하게 풀 줄 알게 되었다. 하나 지식의 활용방법인 능력의 상품화에 대해서는 어떤 개념도 갖추지 못했다. 시험용 인간이 되었던 것이다. 이래 놓고 창의력을 논하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그 상태에서 사회에 내동댕이쳐졌다. 지식으로만 가득 찬 인간은 시장에 공급되어 지식의 활용방법을 아는 인간에게 사용되었다. 인간 자체가 시장경제의 도구가 되어버렸다. 학교에 학생이 운반되면 머리를 열어 지식을 주입하고 봉합한 뒤에 품질을 시험하고 상등품은 시장에 고가에 팔려나갔다. 도구 제조다. 지식 주입 평가 시험에 통과 못한 하등품은 다른 성능이 뛰어나도 평가 받지 못한 채 버려지게 되었다. 고가에 팔려나간 상등품도 다른 성능이 낮으면 빠르게 버려지게 되었다. 이런 관점에서 자아형성 전에 지식주입을 통한 선행학습과 월반조기졸업은 조기제조와 조기출하다. 아이를 학원에 보내어 쉴 틈도 없이 지식을 쑤셔 박히게 만드는 학부모가 있을 것이다. 그렇게 해서 아이가 선행학습을 마치고 월반이나 조기졸업을 하면 기뻐했을지도 모른다. 분명히 말해두겠다. 자아형성이 우선되지 않으면 그런 건 그냥 도구 제조에 불과하다. 얼마를 쏟아 붓든 그건 아이를 위해서가 아니다.

 

인간교육은 인간을 교육하는 것이 아닌 인간이 되게끔 하는 교육이다. 다양한 힘을 체험하여 시야를 넓히고 강한 의지를 유지한 상태에서 온전한 자아를 갖춘 채 현명한 지성을 가진 인간이 되면 알아서 필요한 지식을 공부한다. 그런 인간이 자신의 능력을 상품화하여 소유한 다음 대여의 형태로 거래할 수 있으면 시장경제의 도구로 전락하지 않을 수 있다. 능력을 상품화할 수 있어야 정당하게 그 능력의 소유권을 주장할 수 있다. 그 소유권이 있어야 기업과 대등하게 거래할 수 있다. 교육이 학생에게 순수한 이타심을 요구하며 상품화를 가르치지 않은 결과 인간 자체가 상품화가 되어 팔려나가 도구로 쓰이고 있다. 이게 정상으로 보이는가? 능력의 상품화는 소유한 능력을 타인에게 필요로 할 정도의 매력을 갖추는 걸 의미한다. 모든 사람이 능력을 상품화하여 서로가 서로를 필요로 하는 관계가 되는 것. 상품의 필요한 정도에 따라 대가를 달리 받는 것. 이것이 무엇이 나쁜가? 오히려 바람직하다. 타인에게 필요한 매력적인 능력은 금전거래가 아니더라도 인간관계를 돈독히 하는데 필요하다. 뛰어난 능력을 지닌 사람이 취업이 어려운 까닭은 능력은 뛰어나나 능력의 상품가치가 낮아 그 능력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적기 때문이다. 취업이 어려우면 창업을 하는 것이 마땅하다. 자신의 능력을 상품화할 수 있으면 그 어떤 것도 상품화할 수 있게 된다. 다른 걸 상품화할 수 있게 되면 창업도 어려운 게 아니게 된다. 한국에서 창업할 곳이 없으면 해외로 나가도 된다. 그들이 그런 걸 못하는 까닭은 상품화를 하는 입장이 아닌 상품화가 되는 입장으로 교육받았기 때문이다. 우수한 인재가 취업에만 매달리며 창업을 하지 못하는 게 정상이 아님을 반드시 알았으면 좋겠다. 한국은 공무원이 유망직종이다. 한국이 공무원에 집착하는 사회가 된 까닭에는 사상적으로는 개인이 집단에 종속되어 평생 안정적인걸 올바르다 주장한 사회주의적 노동운동에 있고 정치적으로는 IMF 때문에 입법한 법에 의한 시장의 노동환경악화에 있고 경제적으로는 기술발달로 인한 노동력 필요감소와 후발주자 진입이 어려운 자본주의의 특성에 있고 교육적으로는 자아형성 전 맹목적인 지식주입으로 인한 인간 자체의 상품화에 있다. 능력의 상품화가 익숙했다면 공무원 열풍이 불 수가 없다. 그런걸 배운 적이 없으니까 안정적인 공무원에만 매달리는 것이다. 앞으로 기술의 발달로 일자리가 줄어들어 이제는 기초소득이나 아이디어뱅크 같은 것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사물의 상품화 능력이 뛰어나다면 가상의 세상에서 가상의 상품으로 장사한 게임업계처럼 새로운 상품을 파는 게 가능할지도 모른다. 그러면 일자리 감소로 인한 대책에 과한 의존을 하지 않을 수 있어 기술발달로 인한 시대의 변화를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을 거라 본다. 이제는 상품화에 대한 인식이 달라져야 한다. 원석을 보석으로 만드는 게 상품화다. 지금 교육은 원석을 다듬지 않았다. 사람들을 끌어당기는 매력이 부족하다. 정리하겠다. 모든 인간이 강한 의지를 유지한 상태에서 온전한 자아를 갖추는 것. 자아를 갖춘 인간이 현명한 지성으로 능력을 상품화하여 소유한 뒤 대여의 형태로 거래를 하는 것. 이것이 인간교육이다. 이런 인간교육이 자유국가에서 교육이 맡은 역할이고 이걸 수행하는 것이 교육의 자유적응이다. 자유적응이 무엇인지 예시를 통해 잠시 알아보도록 하겠다.

 

자유주의 사회는 사회에 속한 사람들을 자유롭게 해도 알아서 잘 굴러가는 걸 목적으로 한다. 일일이 간섭하지 않아도 출산율이나 학구열이나 취업률 따위가 높은 수준으로 유지되어야 한다. 경제나 치안이나 복지 따위도 마찬가지다. 알아서 고수준으로 유지되어야 한다. 자유롭게 해도 알아서 잘 하는 것. 이런 것이 자유적응에 성공했다 할 수 있다. 반대로 자유롭게 했는데 잘 안되면 자유적응에 실패했다 할 수 있다. 예컨대 이런 것이다. 경제(재계, 기업 등)를 시장에 맡겼는데 부의 분배 문제로 국민이 불행하다면 경제는 자유적응에 실패한 것이다. 정부가 일일이 시장에 간섭하지 않아도 부가 온전하게 분배되어야 한다. 그러나 경제에서 비정규직이나 위험의 외주화 같은걸 하는 시점에서 제대로 된 분배를 할 생각이 없었다. 그러니까 국민들에게서 큰 정부에 대한 갈망이 솟아나오고 있는 것이다. 경제는 국민의 행복은 정부의 역할이라 항변할 수 있다. 그걸 위해 세금을 내고 있지 않냐고 반문할 수 있다. 그런데 그런 주장이 바로 큰 정부를 정당화한다. 큰 정부가 높은 세금을 받아 계획적으로 부를 분배한다. 그게 큰 정부가 아닌가? 경제는 규제와 억압이 적은 작은 정부를 바란다고 알고 있다. 작은 정부를 바라면서 국민의 행복은 전부 정부에게 떠넘기는 것은 자가당착이다. 작은 정부를 바란다면 정부와 경제가 같이 그런 역할도 담당해야 한다. 그것은 분야의 대표가 입법권을 쥐는 것으로 시작해야 한다고 본다. 경제에 포함되는 분야 또한 직접적으로 정치에 참여하여 국민을 행복하게 하는데 힘을 써야 한다. 국민의 행복은 기존 같이 직원이 기업에 충성하고 기업이 직원을 책임지는 종속적인 관계 속에서 자본가의 이타심에 의존하는 것으로 얻는 게 아닌 경제시스템 자체가 자연스럽게 제대로 된 부의 분배가 되게끔 하여 얻게 해야 한다. 분야에 속한 국민이 분야의 대표를 통해 직접 입법을 하여 본인들이 겪는 부조리와 부당함을 해결하고 분야에 필요한 개혁을 시도한다. 어떤 사람은 분야의 대표에게 입법권을 주면 분야의 이익만을 위한 법안을 추진할거라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생각해보자. 분야의 대표라 해도 몇 석 되지 않는다. 어떤 분야의 대표가 입법을 하면 나머지 대표들이 찬성해야만 법안이 통과된다. 그러니까 자연스럽게 전체의 이익을 전제로 한 분야의 이익을 추구하게 될 수밖에 없다. 지역의 대표가 치적을 위해 부동산 개발에 앞장섰던 것처럼 분야의 대표는 치적을 위해 분야의 개혁을 시도할 수밖에 없다. 자연스럽게 발전한다. 국민의 의사표현도 시위를 할 것이 아니다. 국민이 보다 적극적으로 정치에 참여하여 공적 논의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면 된다. 그것이 정 어려울 때 마지막 수단으로 시위를 하는 것이 정상적이다. 작은 정부와 큰 의회. 이것이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에 적합하다 본다. 경제를 예로 들어 자유적응을 알아보았다. 다른 분야도 다 마찬가지다. 자유롭게 해도 잘되면 자유적응에 성공했다 할 수 있다.

 

 

 

인간이 연관된 문제는 인간에게 책임을 돌리는 순간부터 답을 찾을 수 없게 된다. 몇 가지 생각해보자. 연령차별은 민족에게 부과된 장유유서라는 도덕적 의무로 발생했다. 차별의 의무였으니 연하를 지배하려는 꼰대의 등장은 매우 자연스러웠다. 성별갈등이나 이념갈등도 정조관념이나 민족통일 같은 도덕적 의무가 영향을 끼쳤다. 정치선동은 정치체제의 결함으로 발생했다. 한국인이 선동을 당했던 것은 직간접적으로 실제 겪은 피해 때문이었으나 애초에 지역중심의 정치체제 자체가 선동에 취약했기 때문이다. 조금도 관련이 없는 사람을 정치적 대표라고 뽑아야 되는 시점에서 정상적일 수가 없다. 이와 같이 대부분의 문제는 인간 개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미시적으로 접근하면 개인의 잘못일 수 있으나 거시적으로 접근하면 개인의 잘못일 수가 없다. 내가 만약 인간에게 책임을 돌렸다면 나와 연관된 문제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없었다. 인간과 연관된 문제를 해결하고자 한다면 기억해야 할 것이다. 여기서부터 잠시 나에 대한 얘기를 하겠다. 인간의 생각은 경험에 영향을 받아 사상의 줄기가 될 때가 있어 어떤 주장을 펼칠 때에는 개인사를 얘기할 필요가 있다. 나는 도덕적 의무로 망가졌다. 한국은 연령차별을 도덕적 의무로 교육받는다. 장유유서. 어른과 어린이 사이의 도리는 엄격한 차례가 있고 복종해야 할 질서가 있음을 이른다. 한국은 인간이 인간에게 복종하는 것이 도덕적 의무였다. 나도 예외는 아니어서 어른에게 공손히 복종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 명령으로 인해 수년간 어른에게 제대로 된 의사표현을 하지 못하다가 자존심이 갈갈이 찢어지는 사건에서 어른에게 의사표현을 실패한 뒤 스스로에 대한 깊은 실망과 절망과 불신으로 삶을 포기하고는 운명에 기대어 흘러가는 대로 살았다. 엉망진창이었다. 이것이 일반적이지는 않다. 보통은 그냥 한때의 해프닝으로 끝났을 것이다. 많은 생각과 높은 자존심과 의지할 사람이 없는 환경이 나를 고독한 고뇌로 몰아갔다. 당시 의사표현을 하지 못했던 까닭은 연상에게 복종하라는 도덕적 의무 때문이었지만 그때에는 그런 이유를 몰랐다. 다른 사람에게 의지하지 못하고 마음이 꺾인 상태에서 이유에 대해 끊임없이 생각하다가 절망에 구렁텅이에 빠졌던 것 같다. 애초에 세상은 모순이 너무 많았다. 과학과 종교의 모순이나 인간평등과 연령차별의 모순이나 성을 중요시하면서 성을 터부시하는 모순 따위는 당시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이후 알게 된 독재반대를 하면서 독재자 찬양을 하는 것도 이해하기 어려운 모순 중 하나였다. 주위에는 그런 의문에 대답해줄 사람이 없었다. 있어도 의지했을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홀로 다른 사람은 이해 못할 괴상한 고통 속에서 답을 찾으며 모든 것을 증오했다. 사소한 것에도 짜증이 나고 신경질이 났다. 눈이 따가워서 보통 밤에는 방 안의 불을 껐다. 귀가 아파서 소음을 지우는 비를 좋아했다. 도덕적 의무로 과도한 일탈이 허용되지 않자 그 짜증은 내적으로 파고들어갔다. 자학. 과도한 스트레스로 얼굴을 쥐어뜯고 벽을 펜으로 긁어대고 휴지를 뭉텅이로 뭉쳐 던지고 놀았던 기억이 남아있다. 자존감이 바닥까지 추락했다. 그럼에도 특정 인간에게 책임을 물을 수가 없었다. 화내고 삐치고 울어도 책임을 묻는 것은 할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그게 답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고통스럽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나를 망가지게 한 과도한 도덕적 의무의 부과는 어떤 사건이 계기였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 일로 추정된다. 집 주변 백화점의 마켓에서 어떤 이벤트를 시작했다. 고객이 유통기한 지난 상품을 발견하면 마켓에서 고객에게 그 상품을 3배로 보상했다. 예컨대 고객이 유통기한 지난 라면 1개를 발견하면 마켓은 고객에게 발견한 라면의 3배로 보상했다. 마켓의 철저한 상품관리를 홍보하기 위해서 이벤트를 열었던 것 같다. 그걸 보고 어린 나는 잔꾀를 냈다. 유통기한이 지나기 쉬운 우유를 선반 아래에 쉽게 보이지 않게끔 숨겼다. 유통기한이 지난 후에 선반 아래에서 꺼내 계산대로 들고 가서 뻔뻔하게 보상을 요구했다. 아마 바나나 우유였던 것 같다. 그 우유에 빨대를 꽃아 마시며 놀았던 것 같다. 몇 차례 그걸 반복하다가 직원에게 붙잡혔다. 수상하다 여긴 어떤 직원이 CCTV를 확인한 듯 했다. 나는 직원용 사무실로 가서 CCTV가 촬영한 내가 우유를 숨기는 순간을 보게 되었다. 그때 CCTV에 대한 지식이 없어 깜짝 놀랐던 것 같다. 부모님이 소환되었다. 경찰서에 연락은 하지 않았던 것 같다. 어린 나이에 작은 금액에 절도도 아니다. 단지 상품을 쉽게 보이지 않게끔 숨겼을 뿐이다. 그러니 마켓에서도 처리하기 곤란했을 것이다. 이후 어떻게 처리되었는지는 모른다. 그저 엉엉 울 정도로 회초리를 맞은 기억 말고는 없다. 이 사건은 기억의 편린을 재구성한 것뿐으로 정확하지는 않을 것이다. 분명하게 기억하는 것은 마켓과 유통기한과 회초리다. 생각해보면 나는 교활했다. 나는 내가 교육받은 나쁜 행동을 하지 않았다. 절도는 나빠요. 훔치지 않았다. 거짓말은 나빠요. 속이지 않았다. 교육받은 정해진 룰 내에서 이익을 취했다. 그것에는 어떤 죄책감도 없었다. 차라리 절도였으면 평범하게 해결했을 것이다. 절도가 나쁘다는 건 쉽게 알 수 있으니까 말이다. 나는 그 사건 때문에 회초리를 맞으면서 왜 맞아야 하는지 정확히 몰랐던 것 같다. 그냥 나쁜 짓이니까 맞았다. 여기서부터 비틀리기 시작했던 것 아닌가 싶다. 아이는 혼난 이유를 정확히 몰라 불만을 품고 부모는 이상한 아이라 여겨 과도한 도덕적 의무를 강요한다. 그러면서 능력을 가지치기 당했다. 어떤 능력이 잘못을 낳을 가능성이 있으면 원천 차단 한다. 성욕이 잘못을 낳을 가능성이 있으면 그 욕망 자체를 부정하는 것으로 욕망을 꺾어버린다. 어른에게 반항할 것 같으면 도덕을 명분으로 의지를 꺾어버린다. 성적 매력과 의지를 잃어버린다. 이런 게 바로 능력의 가지치기다. 이런 건 다 알고 있을 것이다. 당해봤고 해봤기 때문이다. 아이를 쉽게 다루기 위해 순종적인 부분을 제외하고는 다 가지치기 해버린다. 그러면서 다양한 능력이 개화될 수 있는 꽃망울도 제거된다. 다른 나무와 다툼이 없게끔 전부 가지치기하고 오로지 올곧게만 자라게 한 나무는 아무런 꽃도 피우지 못한다. 얼마나 슬픈 모습인가. 이때 좀 더 현명한 대처를 했다면 이렇게까지 망가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훔치거나 속이지 않았지만 유통기한을 조사하는 직원에게 피해를 입혔다. 그렇다면 아이가 직접 유통기한 조사하는 일을 며칠간 해보고 스스로 잘못을 깨닫게 했어야 했다. 그러면 아이는 불만을 품지 않고 부모는 맹목적인 도덕적 의무의 강요하지 않았을 것이다. 적당히 교활하고 요령 있게 처세를 잘하면서 나름 즐겁게 성장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들이 그런 걸 알 리가 없다. 나의 부모는 배운 대로 했을 뿐이다. 뺨이나 종아리를 때리는 것도 차별을 도덕적 의무로 강요한 것도 성에 대한 억압도 그저 올바르다 배운 대로 했을 뿐이다. 그걸 알면서 어떻게 탓할 수 있겠는가? 친척에게 무릎을 꿇고 머리를 박은 다음 돈을 받는 굴종을 경험한 것도 동네어른에게 전단지 돌릴 때 혼 난 것도 교사에게 김치를 강제로 먹여진 것도 이것도 저것도 나를 망가지게 한 대부분이 그저 그들이 배운 대로 한 것이었을 뿐이다. 대부분이 도덕적 의무였단 말이다! 수백 번 수천 번 수만 번 셀 수도 없이 생각해봐도 그것은 인간의 책임이 아니었다. 화가 나는데 화를 풀 상대가 없다. 뜨거운 열기가 내부에서 속을 태운다. 도덕적 의무가 감성을 억제하고 지성이 찾은 결론이 이성을 억제한다. 순간 화가 치밀어 욕이 튀어나와도 그것은 갈 곳을 잃고 방황한다. 속이 뒤틀리게 되었다. 그 뒤틀린 상태에서 끊임없이 원인을 찾다가 불필요한 도덕적 의무가 내 망가짐의 원인임을 알게 되었다. 인간이 아니라 사상이 문제였다. 인간에게 부과된 도덕적 의무는 없다. 교육도 다르지 않다. 가르치는 인간이 문제가 아니라 사상이 문제다. 인간을 도구로 제조하여 납품한 교육계를 탓할 생각도 없고 탓해서도 안 된다. 단지 알았다면 변화해줬으면 좋겠다.

 

인간에 사회를 맞추면 자유주의고 사회에 인간을 맞추면 사회주의다. 어떤 현상이 발생할 때 인간에게 책임을 묻지 않고 인간에 맞춰 사회를 바꾸는 게 자유주의고 인간에게 책임을 묻고 사회에 맞춰 인간을 바꾸는 게 사회주의다. 사회민주주의는 민주적 절차가 있어 이 경계가 약간 애매한데 기본은 그렇다. 이 구분은 문제해결방식을 정하는 굉장히 중요한 것이므로 기억해주기 바란다. 자유국가는 인간에 사회를 맞춰야 한다. 인간이 어떤 특성을 가지고 있으면 거기에 맞춰서 사회를 변화시켜야 해야 하는 거지 어떤 관습에 의해 정해진 부당한 규율을 강요해서는 안 된다. 그러지 않고 사회에 인간을 맞추면 인간을 사회에 맞게끔 강요할 수밖에 없게 된다. 예컨대 이런 것이다. 인간에게 성욕이 있다. 그 성욕이 잘못을 낳는다. 그러면 잘못을 최소화한 상태에서 성욕을 만족시킬 수 있는 사회를 유지하는 것이 자유주의다. 반면 인간의 성욕이 잘못되었다고 판단하고 인간의 성욕을 해소할 수 있는 성상품의 전면불법으로 대응하는 게 사회주의다. 한국은 후자다. 유교의 특성인 이타주의적 강요가 사회주의의 특성과 비슷하여 비슷한 결과가 나온다. 이러니 한국은 본래 사회주의가 적합하단 말을 하게 되는 것이다. 독일이 성매매 합법화를 한 것을 보면 사실 사민주의보다 못하다. 한국은 포르노조차 금지한 것을 보았을 때 중동의 신정주의 수준이다. 이제는 바꿔야 한다. 나는 중학생 때까지 성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했다. 그런 정보는 전부 차단되어 있었다. 성교육이라는 것은 말만 그럴듯한 단순한 이미지와 문자의 나열에 불과했다. 그런 건 어떤 정보가치도 없었다. 성에 대해 모르는 상황에서 나타난 신체적 변화는 나를 더욱더 고통스럽게 만들었다. 성욕을 해소하기 위한 자위는 수치스러운 것이었다. 만약 그때 내게 성에 관한 정보가 있었다면 당시의 고뇌의 일부를 덜었을 것이다. 왜 정상적인 행동을 부끄럽고 굴욕적이게 만들었나. 만약 다른 정보도 얻었다면 보다 빠르게 절망에 빠진 원인을 찾았을지도 모른다. 그저 어리다는 이유로 무시하고 제멋대로 강요하니 제대로 성장할 리가 없다. 인간의 어리석음을 전제로 한 연령제한. 멋대로 인간의 한계를 단정짓고 멋대로 정보를 차단하는 꼴을 보면 분통이 터진다. 알고 있지 않나! 본인 과거를 떠올려봐라. 성년의 정보를 접했다 하여 무엇이 달라졌는가? 대다수는 어린 시절에 성년의 정보를 접해도 아무 문제가 없다. 육체연령과 정신연령은 다르다! 일부 문제가 발생하는 아이 때문에 정보차단 당한 아이들은 온전한 성장을 하지 못하며 다른 아이들에 비해 뒤쳐져버렸다. 소년범죄가 많다는 걸 안다. 그 때문에 정보차단을 하고 있다는 걸 안다. 그러나 잘못된 걸 잘못되었다 인지도 못할 능력이 부족한 아이 때문에 다른 아이들이 손해를 봐서야 되겠는가? 소수의 잘못을 해결하기 위한 사회를 구축하고 거기에 모든 인간을 맞추면 어떻게 하나. 왜 나머지 다수의 희생을 당연시하느냔 말이다! 소수를 위해 다수가 전부 희생하는 것이 잘못되었다. 지금 한국은 농가를 위해 모두 비싼 농작물을 먹어야 하고 유통업계를 위해 모두 비싼 물건을 써야 하고 중고자동차업계를 모두 전부 안심하고 중고자동차를 구매할 수 없어야 한다. 건설업계를 위해 쓰레기나 오물이 나오는 아파트에서 살아야 하고 택시업계를 위해 저질 택시 서비스를 감내해야 하고 노점상을 위해 길거리 미관을 포기해야 한다. 눈 앞에 불쌍한 사람을 돕는데 치우쳐 전체를 볼 수 없는 이타주의는 이런 걸 해결할 수가 없다. 인간은 어리석지 않다. 멋대로 인간의 한계를 규정하고 멋대로 정보를 차단하는 일은 있어서 안될 것이다. 어차피 이제는 인터넷으로 정보차단도 제대로 못한다. 그러니 정보를 전부 공개하고 그 정보를 다룰 줄 아는 인간이 되게끔 교육해야 한다.

 

미성년에 대한 통제와 억압을 자행하는 무리 중에 이들이 가장 안쓰럽다. 바로 여성주의자들이다. 여성은 도덕적 의무로 차별 받았다. 대표적으로 부위부강이 있다. 아내는 남편을 섬기는 것이 근본임을 이른다. 여성은 남성의 아랫사람이었다. 그런 여성은 남성이 다루기 쉽게끔 입맛대로 세뇌되었다. 여성은 의지가 약하고 소극적이고 수동적이라 교육받았다. 이를 가리켜 약화교육이라 하자. 남성을 위해 정조관념을 강요 받았다. 정조를 지키는 것이 미덕이었다. 그 영향으로 정조를 잃은 이는 결혼을 하기 어렵고 과부는 재가를 하지 못했다. 약화교육과 정조관념을 강요당한 여성은 의지가 약해지고 성에 취약해졌다. 의지약화로 관계의존도가 높아지고 자립심이 낮아지고 시야가 좁아지며 감성적이게 되었다. 과거 여성의 사회진출이 낮았던 것은 환경 이전에 애초에 그렇게 되게끔 교육되었기 때문이다. 성 취약으로 성에 대한 수치심이 굉장히 강해졌다. 사소한 접촉이나 시선으로도 불편함을 느꼈다. 여성 성 상품화를 보면 마치 자신이 모욕을 당한듯한 기분을 느꼈다. 이런 교육을 받은 이들은 일그러진 자아를 갖게 되었다. 그런 이들이 서양의 여성주의를 접한 뒤 그 자아가 여성의 본성이며 그걸 지키는 것이 여성인권이라 주장하기 시작했다. 여성은 의지가 약하고 수동적이며 성적 수치심이 높다 외쳤다. 그걸 빌미로 온갖 혜택을 주장했다. 사법도 흔드는 성인지감수성의 등장이나 여성할당제나 여성주차장 따위가 생겨났다. 평등을 말하면서도 여대폐지나 여성징병은 외면했다. 여성은 열등하기 때문에 혜택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야말로 여성열등주의다. 분명하게 말해두겠다. 여성은 열등하지 않다! 여성주의자는 그런 말도 안 되는 주장이 무엇을 근거로 하는지 단 한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는 듯 하다. 의지박약이나 성적 수치심이 여성의 본성이라 주장할 거라면 현대 문명과 멀리 떨어진 원시 부족 여성을 보라. 그들이 문명인과 같은 의지박약이나 성적 수치심을 느끼던가? 그런 걸 여성의 본성이라 주장하는 말도 안 되는 소리는 하지 말아야 한다. 그건 그냥 교육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인간에 사회를 맞춰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거짓된 본성까지 맞출 이유는 없다. 진지하게 묻겠다. 여성주의라는 서양에서 온 사상을 입맛에 맞게끔 바꿔 받아드리면 내면에 새겨진 유교사상이 지워질 거라 생각했나? 그럴 리가 없다. 전혀 지워지지 않았다. 여성을 열등하게 보던 그 교육이 그대로 남아있다. 연령차별이라는 도덕적 의무에서도 해방되지 못한 사람들이 그런 거 할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런 도덕적 의무는 어떻게 하지 못하면서 차별금지법을 운운하는 것은 정말 어이가 없다. 여성주의자는 남성이 주입한 여성을 억압하는 내면의 코르셋은 건들기는커녕 여성의 본성인 것처럼 소중하게 대했다. 외면에만 집중하며 외면의 코르셋만 벗자 주장했다. 그렇게나 차별 당하고 고통 받으며 절망 속에서 학력과 능력을 쌓은 인간이 내린 성별차별에 대한 해결방법이 고작 외적인 남성흉내라니. 탄식하게 된다. 남성을 흉내내면 평등해질 거라 생각했던 건가? 탈코르셋을 여성인권이라 주장하며 다른 여성에게 단발과 밋밋한 옷차림을 강요하는 걸 보면 소름이 끼칠 정도다. 그건 자유의 영역이지 여성인권의 영역이 아니다. 머리스타일과 옷차림은 개인의 자유다. 그걸 강요하는 것이 잘못되었다. 여성주의자는 여성을 위한다고 말하면서 여성의 능력을 무시하고 성적 억압을 하고 성에 취약하게 만드는 도덕적 의무를 행했다. 이것은 마치 과거 남성의 꼭두각시와도 같다. 성적 억압을 받는 국가가 여성이 차별당하는 중동국가임을 안다면 여성의 성적 억압이 이상하다는 걸 느꼈어야 했다. 여성이 성을 불편해하는 게 정상일 수가 없다. 여성이 여성 성 상품화를 불편하게 느끼는 것은 과거 남성에게 정조관념을 세뇌 당했기 때문이다. 노출이 심한 옷을 입거나 성적 자유를 누리는 여성이 불편해진다. 이런 그릇된 도덕적 의무에 세뇌 당한 과거 여성주의자가 그걸 여성인권이라 주장하며 다른 여성들을 세뇌하여 똑같은 불편함을 새겨 넣었다. 과거 남성이 과거 여성을 세뇌하고 과거 여성이 현대 여성을 세뇌한다. 이게 바로 억압이 인권이 되는 과정이다. 헛웃음이 나올 수밖에 없다. 여성 성 상품화에 대한 비판의 근거는 남성이 여성을 성적 착취한다는 인식 때문일 것이다. 그걸로 불편해한다. 그런데 그게 사실은 여성을 무시하는 거다. 여성에게 성적 주도권이 전혀 없다고 생각하니까 일방적으로 남성에게 착취당한다 생각하는 것이다. 여성을 단지 남성에게 착취당하는 나약한 존재라고 생각하니까 불편해하는 거란 말이다. 과거 받은 약화교육이 대를 이어서 여기까지 영향을 끼치고 있다. 만약 여성이 성적 주도권을 쥐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런 생각이 나타날 수가 없다. 남성이 성적 주도권을 쥐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남성 성 상품화가 불편하지 않듯이 말이다. 여성의 성적 억압은 여성의 성 관념과 남성의 성 관념을 비교해보면 잘 알 수 있다. 여성이 강한 성적 수치심을 가진 것은 그냥 그렇게 교육받았기 때문이다. 이런 측면에서 여성 성 상품화에 대한 분노는 여성에게 무례한 짓이다. 남녀 관계없이 성 상품화는 강요일 때에만 문제가 발생한다는 점을 강조하겠다. 누구보다 여성을 위한다고 말하는 사람이 사실은 남성에 세뇌된 채로 말하는 것이었다니. 이런 건 정말 가엾은 광대를 보는 기분이다. 이런 짓을 혼자 하면 모르지만 사회가 수용해버려서 지금 사회혼란에 절정에 이르고 있다. 왜 그랬다고 생각하는가? 그건 기성세대와 여성주의자의 이해가 서로 일치했기 때문이다. 여성에 대한 혜택은 늘었어도 여성이 열등하고 소극적이고 수동적이라는 인식은 같았다. 열등하니까 천대하자. 열등하니까 혜택주자. 근거는 똑같단 말이다. 왜 사회가 그런 말도 안 되는 혜택과 억압과 통제를 수용했는지 알았으면 좋겠다. 과거 남성의 꼭두각시들이 여성과 아이를 위한답시고 열등함을 세뇌하고 통제와 억압을 강요한다. 여성은 장애인과 같은 혜택이 필요하고 사리분별이 불가능하여 성인지감수성의 도움이 필요할 정도로 열등하다고 세뇌한다. 여성은 성 상품화나 꾸밈의 자유도 없게끔 통제와 억압을 강요한다. 아이는 정보 수용능력이나 성적자기결정권이나 선거 주권이 없을 정도로 열등하다고 세뇌한다. 아이는 사생활이나 문화의 자유도 없게끔 감시 앱을 설치하도록 하고 게임 셧다운제라는 통제와 억압을 강요한다. 여성과 아이가 의지박약이나 성에 취약해진 걸 보면 정말 짜증이 난다. 오랜 세뇌의 결과물인지는 모르겠는데 미성년이 그런 열등함이나 억압을 올바르다 주장하는 걸 보면 미칠 것 같다. 하긴 여성들도 본인들을 열등하다 주장하며 억압하는 걸 올바르다 받아드리고 있으니 이상한 것은 아니다. 세뇌의 힘이란 진정 무시무시하다. 한국에는 이런 이들이 사회에 많은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걸 안다. 이제는 여성차별적인 도덕적 의무에서 벗어났으면 한다. 아동차별적인 도덕적 의무에서 벗어났으면 한다. 그 따위 열등함이나 억압이 인권일 리가 없다. 여성과 아이는 열등하지 않단 말이다! 억압해서는 안 된단 말이다! 이제는 여성과 아이도 시야를 넓혀야 한다. 나는 화가 난다. 세상을 평등하게 바꾸겠다고 나서는 이들이 되려 차별하던 과거로 역행 하는 걸 보고 화가 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래도 선동이나 세뇌 당한 이들에게까지 책임을 물을 수는 없다. 그저 지금부터라도 변화했으면 좋겠다.

 

인간에게 책임을 돌리지 않고 인간에 사회를 맞추는 것이 자유국가의 방식이다. 어떤 범죄자가 있다 가정하자. 그 범죄자는 자신의 죄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 피해자는 법을 통해 범죄자에게 책임을 물을 수가 있다. 하나 사회는 그 범죄자에게 죄에 대한 책임을 돌리지 않고 범죄자가 죄를 저지르게 된 근본적인 원인을 찾아야 한다. 빈곤이면 빈곤을 줄일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제도면 제도를 개선할 방법을 찾고 사상이면 사상을 바꿀 방법을 찾아야 한다. 그렇게 해서 범죄율을 줄여야 한다. 그러지 않고 개개인에게 책임을 돌려봐야 범죄 원인이 무엇이냐는 문제에 대한 답을 찾기는커녕 증오의 확산만 부추길 뿐이다. 어떤 사이코패스가 있다 가정하자. 사이코패스는 감정이 결핍되어 보통 범죄를 저지를 확률이 높다는 선입견이 있다. 그런 사이코패스에게도 사회가 맞춰야 한다. 사이코패스라고 해서 멸시하고 차별할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그런 개성을 가지고 다른 사람들과 같이 온건하게 살아갈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 사이코패스는 단순한 감정결핍장애다. 사이코패스를 차별하는 것은 장애인을 차별하는 것과 같다. 사이코패스도 본인이 감정결핍장애를 겪고 있다는 걸 인지하고 자신에게 맞춘 사회에 최대한 적응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이런 것이 자유국가의 방식이다. 교육도 다르지 않다. 학생의 문제를 학생에게 책임을 돌리지 않고 학생에 교육을 맞춰야 한다. 어떤 길이든 가야 할 방향을 정하지 않으면 헤매게 된다. 확실히 정해두고 가는 것이 좋다. 교육은 이 방향으로 걸어야 한다. 그럼 그 방향이 어떤 걸 의미하는지 몇 가지 알아보도록 하자.

 

첫째, 인간의 의지. 인간은 강한 의지를 타고난다. 대부분 그렇다. 아기를 생각해보자. 아기는 우는 것으로 의사표현을 한다. 눈치보지 않고 큰 소리로 울어버린다. 이런 걸 보았을 때 인간의 의지박약은 후천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라 볼 수 있다. 교육은 이런 인간의 강한 의지를 유지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아기도 마찬가지다. 우는 아기에 맞춰 교육해야 한다. 그렇다고 모든 걸 맞추라는 건 아니다. 아기가 젖을 달라 계속 운다고 하여 젖을 계속 주면 과체중이 되어버린다. 그러니 아기에게 필요할 때에만 젖을 먹도록 버릇을 들이는 것으로 아기의 의지와 필요한 교육의 균형을 맞춰야 한다. 그렇게 하여 아기의 의지를 꺾지 않고 유지해야 한다. 교육은 이 의지를 학생의 자아형성이 끝날 때까지 섬세하게 관리하며 유지해야 한다. 지금까지는 아이의 의지가 꺾기는 일이 너무 잦았다. 곰곰이 생각해보자. 아이의 의지가 어른의 사정에 의해 윽박지름을 당하며 꺾인 적이 얼마나 많았나. 아마 대부분 경험해봤을 것이다. 그런 식으로 의지박약이 된 아이들은 쉽게 악의에 노출되었다. 집단 괴롭힘이나 성적 노리개나 상습 체벌에 저항하지 못했다. 강한 의지가 있었다면 피해를 입은 시점에서 바로 신고를 통해 저항했을 것이다. 의지가 약하니까 그러지 못했던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런 사건에 분개하면서 아이의 의지박약에는 초점을 맞추지 않았다. 이것이 잘못되었다. 피해자에게 잘못은 없다. 하지만 피해자를 약하게 한 자에게는 잘못이 있다. 그건 야생동물의 이빨과 발톱을 뽑아버린 뒤에 야생에 던져놓은 잘못과 비슷하다. 자유는 강한 의지를 전제로 한다. 의지박약인 피해자의 의지를 믿지 못한다면 피해자가 동일피해를 입을 것을 걱정하며 감시와 통제를 하는 수밖에 없다. 그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그러니 이제는 그러지 말아야 한다. 의지를 위해 모든 걸 아이에게 맞추라는 건 아니다. 어른에게 사정이 있으면 아이에게 설명을 하여 이해와 납득을 받으면 된다. 아이와 어른이 대등한 관계라는 걸 인지하고 서로를 이해하고 사랑하면 된다. 그러면 어른의 사정으로 아이의 의지를 들어주지 않더라도 아이의 의지가 꺾이지 않을 수 있다. 자아형성이 끝난 후에는 강한 의지를 유지하는 것은 알아서 해야 한다. 타고난 의지를 가진 인간에 교육이 맞추는 것이 자유국가의 교육이다.

 

둘째, 인간의 특성과 개성. 인간은 인간 본연의 특성과 고유한 개성이 있다. 우선 특성을 살펴보자. 대표적인 인간 본연의 특성은 욕구나 감정이다. 식욕과 수면욕과 성욕에 대해 알아보자. 하나, 식욕. 인간은 잡식동물이다. 고기와 채소에서 영양분을 섭취한다. 그런 인간에게 맞춰서 잡식으로 교육해야 한다. 그러지 않고 채식이 옳다는 이유로 채식을 강요하는 것은 잘못되었다. 유전적인 문제가 아닌 한 인간이 채식을 하는 것은 그릇된 도덕적 의무를 부과 받아 채식을 할 수밖에 없게끔 약해졌기 때문이다. 못 먹는 음식이 있다 하여 강요해서도 안 된다. 아이의 미각은 예민하여 어른이 먹는 음식을 먹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대표적으로 쓴 음식이 그렇다. 어른 입장에서 먹을 수 있다고 아이에게 강요하는 것은 부당하다. 커피를 생각해보면 애초에 시간 지나면 알아서 쓴 음식을 잘 먹을 수 있으니 초조할 필요도 없다. 음식은 골고루 먹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필수 영양분을 섭취하는 게 중요하다. 쓴 음식은 쓴 약을 먹게 하듯 필요하니 먹는 것이라 설득을 하거나 비타민 같은 걸로 영양분을 섭취할 수 있도록 하면 된다. , 수면욕. 지식을 주입하는 것이 교육이라 생각하는 사람들이 수면시간을 보장하지 않고 맹목적으로 지식을 주입시키려 든다. 그것이 잘못되었다. 인간은 충분한 수면시간이 있어야 건강하게 성장하도록 되어 있다. 그런 인간에 맞춰서 수면시간을 보장해야 한다. 수면은 학습에도 도움이 된다. 자는 동안 뇌가 알아서 기억을 정리하기 때문에 학습에 도움이 된다. , 성욕. 성욕에 대한 교육의 대처가 가장 이해하기 어렵다. 교육은 인간이 자신의 몸에 대해 알아가는 것도 포함된다. 식욕을 위해 먹는 방법을 배우고 먹는다. 수면욕을 위해 자는 방법을 배우고 잔다. 그런데 성욕은 그런 것이 없다. 명목상의 성교육 외에는 실제 성욕을 채우기 위한 방법을 제공하지 않는다. 성욕은 사춘기 무렵부터 눈에 뜨는데 성욕 발산을 위한 성적 문화는 만19세 이후부터 즐길 수 있도록 되어 있다. 그래서 다수의 사춘기 학생이 불법으로 성적 문화를 접한다. 불필요한 죄책감을 받으며 성욕을 해소한다. 다들 그걸 알면서 어쩔 수 없으니까 방치한다. 그러면서 표면상에서는 그 성적 문화에 한참 못 미치는 속옷만으로도 불건전하다며 규제하고 있다. 어처구니 없다. 이보다 더 가식적이고 기만적인 것은 없다. 인간에 교육이 맞춘다면 당연히 사춘기부터 성적 문화를 개방해야 한다. 본인 몸에 있는 기능을 배우고 쓰지 못하게 하는 건 인간으로 대우하는 게 아니다. 도구로 취급하는 것이다. 도구를 다루기 쉽게끔 기능 사용을 막은 것에 불과하다. 아이를 위해서라며 성적 문화를 금하고 있다는 걸 안다. 그런데 그건 도구취급에 불과하다는 걸 꼭 좀 알았으면 좋겠다. 이제 인간은 인간다운 대우를 받아야 한다. 금지가 관습이기에 행해진다고 말할 수 있다. 그건 왕정도 관습이니 행해져도 된다는 말과 같다고 말하겠다. 백성을 어리석게 취급하는 것이나 아이를 어리석게 취급하는 것은 같다. 관습이 인간을 도구 취급할 이유가 될 수 없다. 이제 개성을 살펴보자. 대표적인 인간의 개성은 특기나 적성이나 취미나 취향이나 지향이다. 학문으로 접근해보자. 인간의 개성에 맞춘 교육은 모든 학문을 고르게 잘하기 보다 잘하는 걸 확실하게 잘하게끔 하는 것이다. 인간은 개인의 개성에 따라 성장할 수 있는 한계치가 어느 정도 있다. 예컨대 운동이 그렇다. 운동은 체격적으로 한계가 분명하다. 학문도 예외는 아니다. 그러므로 높은 성장이 가능한 학문은 키우고 그렇지 못한 학문은 최저만 맞추면 된다. 각 역할에 맞는 능력만 확실히 갖추는 것이 이후 자동화 시대에 걸 맞는 인재다. 선진국은 단순한 물건이라도 거기에 부가가치를 만들어야 경제를 유지할 수 있다. 그건 보다 더 전문성을 키워야 해낼 수 있다. 물론 이는 학생의 자유의지로 결정해야 할 것이다. 취향으로 접근해보자. 외모지상주의가 잘못되었다고 말하면서 개인의 취향에 간섭하고 있다. 외모지상주의는 몰개성이 원인이다. 모두가 개성을 가지고 각자 다양한 취향을 가지게 되면 그런 문제는 어느 정도 해결이 가능하다. 그러지 않고 억지로 취향을 강요하는 것은 잘못되었다. 다양한 취향이 공존할 수 있는 개성을 존중하는 교육이 필요할 것이다. 성적 지향도 마찬가지다. 나는 동성애가 인류의 생존에 적합하지 않기에 긍정적이지 않지만 동성애의 자유는 인정한다. 특성 성적 지향을 지녔다면 거기에 맞춘 교육이 필요하다. 그렇다고 해서 동성애를 부추겨서는 안 된다. 동성애를 존중해야 한다고 말하면서 은근슬쩍 동성애를 부추기는 일이 있다. 이성애와 동성애 사이에서 성적 정체성 혼란을 겪는 학생에게 동성애를 부추겨 동성애가 되도록 만드는 것은 잘못되었다고 본다. 그것은 온전하게 학생이 결정해야 할 문제다. 본연의 특성과 다양한 개성을 지닌 인간에 교육이 맞추는 것이 자유국가의 교육이다.

 

셋째, 대등한 역할. 교사는 만능이 아니다. 사회는 이것을 받아드리지 못하고 있다. 어떤 교사의 경험담이다. 학계에서도 모르는 걸 교사가 아무도 모르는 거라고 가르쳤다. 그걸 학생이 부모에게 말하니 학부모가 항의했다고 한다. 어떻게 교사가 모른다고 말할 수 있느냐고 말이다. 모르는 게 정상임에도 교사는 그걸 안다고 말했어야 했다고 한다. 이런 현상이 단적으로 교사를 만능으로 보고 있다는 걸 의미한다. 교사를 의지를 넘어서 의존할 수 있는 존재로 인지하고 있다. 이것이 잘못되었다. 과거 교사는 체벌을 가해도 촌지를 받아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그 정도로 교사는 무한한 권리를 쥐고 있었다. 권리만큼 책임도 졌다. 그런 교사가 드물긴 했지만 말이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학생인권조례로 교사는 학생에게 함부로 대할 수 없다. 권리가 줄었다. 그런데 책임은 과거와도 같다. 권리는 낮은데 책임은 높으니 최근 교사는 힘든 것이다. 학생에게도 바람직하지 못하다. 나의 과거를 떠올려보면 내게도 교사는 만능이었다. 뭐든지 아는 존재라 생각했다. 그런 교사가 나의 의문에 답을 하지 못하자 세상 전체가 나의 의문에 답하지 못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만능이 대답하지 못한다는 것은 되려 나의 의문이 이상하다고 여기게 만드는 기제가 되었다. 차라리 교사가 만능이 아닌 줄 알았다면 스스로를 믿고 흔들리지 않으며 성장했을지도 모른다. 되돌려 교육에 방향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보자. 학생에게 책임을 돌리지 않고 학생에 교육을 맞춰야 한다. 이 말은 교사도 적용된다. 교사에게 책임을 돌리지 않고 교사에 사회를 맞춰야 한다. 교사도 사람이다. 교사도 사람임을 명확하게 학생과 학부모가 인지해야 한다. 교사가 쉬는 날 유흥업소에 간 걸 사람들이 알게 되자 분노했다고 한다. 어떻게 교사가 그런 건전하지 못한 곳에 출입할 수 있느냐고 말이다. 교사도 사람이다! 쉬는 날에는 여가를 즐길 수 있어야 한다. 단순한 유흥업소 출입조차도 막아버리면 교사는 어떻게 숨을 쉬나. 필요이상의 환상을 가지고 있으면 환상이 깨질 때 실망도 커지는 법이다. 교사도 인간이라는 인식이 있으면 인간다운 모습에 실망하지 않아도 된다. 일부 학생이 교사를 막 대하는 것도 어떻게 하든 만능인 교사는 언제나 학생의 편이 되어 줄 거라는 의존적인 믿음이 내제되어 있기 때문이다. 서로 대등하다면 그럴 수가 없다. 교사도 학생도 그저 역할만 다르고 대등하다. 교사는 가르치는 역할이고 학생은 배우는 역할이다. 학생은 특별한 권위가 없는 교사도 역할을 존중해야 하고 교사는 개성적인 학생이라도 역할을 존중해야 한다. 교사 또한 교사에게 책임을 돌리지 않고 교사에 사회를 맞추는 것이 자유국가의 교육이다.

 

 

 

인간은 종종 본질을 꿰뚫는 말을 한다. 노동자의 공노비와 사노비 농담이나 학생의 공부 해야 할 이유를 모르겠다는 토로와 같이 말이다. 노동자를 노비에 비유하며 조소하듯 농담한 것은 노동자가 본질적으로 농노와 다를 바 없는 현 상황을 정확하게 찔렀다. 학생이 공부 해야 할 이유를 모르겠다며 토로한 것은 학교의 맹목적인 지식 주입이 도구 제조와 같다는 것을 정확하게 찔렀다. 학생은 상품화를 하는 입장이 아닌 상품화가 되는 입장에서 교육받고 있으니 학생 자신을 위한 교육이라 느낄 수가 없었다. 도구로 제조되고 있다는 느낌 속에서 공부 해야 할 이유를 모르는 건 지극히 당연하다. 교사나 학부모도 모른다. 그러니 학생의 불만이 나오면 너를 위해서 또는 행복을 위해서라며 어물쩍 넘어가게 되는 것이다. 분명히 말해두겠다. 맹목적인 지식주입은 학생을 위한 것이 아니다. 많은 지식을 주입 받아 좋은 대학에 가서 좋은 직장에 취업한다. 그래서 남들 못지 않게 성공한다. 그러나 거기에 인간의 의지가 없으면 공허할 뿐이다. 기업에 충성해온 우수한 인재가 기업에 홀대 받자 버터지 못하고 자살했다. 그 인재는 무엇을 위해 공부해왔던 것일까? 무엇을 위해 살았던 것일까? 도대체 누구를 위해 살았단 말인가! 정말 안타깝다. 인간은 자아형성이 끝난 뒤 자유의지를 가지고 스스로 공부해야 한다. 그래야 인간 자신을 위해 살 수 있게 된다. 그런데 이런다고 하더라도 지식을 얻는 것은 행복을 위해서가 아니다. 왜냐하면 모를 때 더 행복할 때도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감각은 인간의 인지에 따라 달라진다. 행복도 마찬가지다. 같은 환경이라도 결벽증에 걸린 인간은 작은 더러움에도 불행을 느낀다. 결벽증은 더러운 것에 대한 지식이 있기에 발생한다. 지식이 사람을 불행케 한 것이다. 보편적으로 사람은 하고 싶을 걸 할 때 행복해한다. 먹고 싶으면 먹을 때 행복하고 자고 싶으면 잘 때 행복하다. 그래서 자유로운 정도에 따라 객관적으로 행복한 정도를 유추해볼 수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인지에 따라 천차만별로 달라지므로 지극히 주관적이다. 컴퓨터와 스마트폰이 없던 시대의 사람들을 불행하다 할 수 있는가? 반대로 미래의 사람들이 현대의 사람보다 행복하다 할 수 있는가? 이처럼 지식은 행복을 위해서 얻는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지식을 얻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많은 시간과 노력을 쓰면서도 행복해질 수 없다면 어째서 지식을 얻어야 하는가? 그것은 간단히 말해 힘이다. 살아가는 힘을 얻기 위해서다. 야생에서 살기 위해서는 야생에서 살기 위한 힘이 필요하고 사회에서 살기 위해서는 사회에서 살기 위한 힘이 필요하다. 지식은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힘 중 하나다. 인간은 살기 위해 지식을 얻는 것이다. 그러면 왜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의문이 남는다. 왜 살아야 할까? 그건 객관적으로 알 수 없다. 인간을 비롯한 모든 것에 대한 근원적인 존재 이유를 알 수가 없기에 객관적으로 도출해낼 수 없다. 그걸 차치하더라도 알 수 없다. 모든 종은 생존과 번영이 기본적인 선이다. 왜냐하면 그러지 않은 종은 멸종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종의 존속을 이유로 삼자니 인류는 수가 많다. 그럼에도 굳이 따지면 종의 존속을 이유로 삼을 수 있긴 하다. 그러나 그건 너무 미약한 이유다. 그렇다고 다른 기준을 찾자니 나머지는 전부 절대적이지 못하다. 흔히 타인을 위해 산다고 하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타인을 위해 사는 것은 주관적이다. 모두가 타인을 위해 살지는 않기 때문이다. 만약 그걸 객관화한다면 누군가는 타인의 노예가 되어버린다. 본인을 위해 살고 싶은 사람도 타인을 위해 살도록 강요되기 때문이다. 모두가 본인을 위해 살아야 한다. 그런데 본인을 위해 사는 것은 객관적인 답이 될 수 없다. 모두가 다 다른 답을 내놓을 것이기 때문이다. 애초에 종의 존속 외의 객관적인 이유가 있는 것이 이상하다. 그런 것이야 말로 종교나 전체주의다. 따라서 인간은 살아가야 할 이유를 주관적으로 각자 자유의지에 따라 찾아야 한다. 그건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어야 가능하다. 결국 자유의지를 갖춘 자유로운 인간이 되는 것이 선결되어야 한다.

 

인간을 교육하는 이유는 인간이 되게끔 하기 위해서고 인간이 교육받는 이유는 살아가는 힘을 얻기 위해서다. 교육과 학생은 목적이 서로 다르다. 우선 교육의 입장에서 시작하겠다. 교육의 이념은 자유로운 인간이다. 교육의 목적은 이타주의도 아니고 학업성취도도 아니고 대학진학률도 아니고 취업률도 아니다. 자아형성과 상품화 능력이다. 온전한 자아를 형성하고 상품화 능력을 갖추게 도와주면 된다. 학생의 온전한 자아형성을 도우면 학생이 알아서 하고 싶은 공부를 하게 된다. 그 공부로 얻은 능력을 상품화할 수 있게 도와주면 시장경제의 도구가 되지 않을 수가 있다. 지금 교육은 자유로운 시대가 되면서 명확한 역할이 정해지지 않아 지나치게 많은 걸 짊어지려 하고 있다. 공부는 학생이 알아서 해야 한다. 그것에 간섭하는 것은 학생의 역할에 대한 월권이다. 교육은 이제 그런 걸 내려놓고 학생의 자아형성을 위해 사고방식과 행동원리의 파악과 설계가 가능토록 돕는 일에 전념해야 한다. 방법은 다음과 같다. 첫째, 학생이 선천적인 사고방식과 행동원리를 파악하고 강한 의지를 유지하도록 한다. 둘째, 학생이 후천적인 사고방식과 행동원리를 설계하고 현명한 지성을 얻도록 한다.

 

첫째, 학생이 선천적인 사고방식과 행동원리를 파악하고 강한 의지를 유지하도록 한다. 선천적인 것을 파악한다는 것은 본성이나 본능을 파악한다는 것과 같다. 본래 인간은 어떤 식으로 생각하고 어떤 원리로 행동하는지를 아는 것으로 시작해야 한다. 이런 것이 학생에 맞추는 교육이다. (앞서 설명한 것과 겹칠 수 있다.) 어쩌면 너무 당연해서 어째서 해야 하는지 모를 수도 있다. 시각, 청각, 후각, 촉각, 미각이나 식욕, 수면욕, 배설욕, 성욕 따위나 희로애락 따위는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다. 그런 것을 배우고 인간에 대해 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인간에 대해 모른다. 선천적인 성질과 후천적인 성질을 분리할 줄 모른다. 이 분리가 매우 중요하다. 다들 생각해보길 바란다. 본인이 느끼는 편안함이나 불편함이나 쾌락이나 고통이 무엇을 근거로 하는지 알고 있는가? 홀로 있을 때 느끼는 편안함이나 불편함은 무엇을 근거로 하는가? 여럿이 있을 때 느끼는 편안함이나 불편함을 무엇을 근거로 하는가? 그리고 그 근거는 선천적인가, 후천적인가? 많은 사람들이 근거를 모를뿐더러 알더라도 선천적인 것과 후천적인 것을 분리하지 않는다. 그래서야 선천적인 것에 대해 파악하고 있다고 하기 어렵다. 그 탓에 이런 착각이 생긴다. 연령차별을 도덕적 의무로 세뇌된 사람은 연하의 반말에 불편함을 느끼는 것이 선천적인 성질로 착각하는 경우가 많다. 이는 정조관념에 세뇌된 이가 성 상품화를 불편해하는 것과 같고 채식주의에 세뇌된 이가 육식을 불편해하는 것과 같고 비폭력주의에 세뇌된 이가 폭력을 불편해하는 것과 같다. 이들은 그런 것들이 선천적인 것으로 착각하여 자신을 바꾸는 일을 하지 않는다. 세뇌된 상태에서 살아가는 것을 택한다. 그걸 온전한 자아라고 하기에는 어려울 것이다. 선천적인 성질을 명확하게 파악하고 있으면 후천적으로 세뇌된 성질도 파악할 수 있게 된다. 그렇게 할 수 있어야 온전한 자아형성을 할 수 있다. 나는 이것을 분리하여 고유한 자아를 유지하기 위해 정말 많은 시간을 소모했다. 타인에게 폐가 가지 않는 선에서 의도적으로 벽을 치고 지나간다거나 가장거리를 걷는다거나 괴상을 표정을 지어보았다. 그 행동을 하면서 느끼는 감각을 면밀하게 파악했다. 본인과 타인을 비교해보기 위해 타인의 고민을 상담해보기도 했다. 자아를 파악하는데 도움이 되기 위해 자아형성과정에 있는 인간을 상담했다. 나를 알기에 동성보다는 이성의 고민을 많이 보고 답변해봤다. 피드백을 바랐지만 익명으로 그건 어려웠다. 그래서 지금은 그냥 관찰 중에 있는데 가능하면 피드백을 받을 수 있으면 좋겠다. 본인의 감각을 파악하고 본인과 타인과 비교하며 선천적인 것과 후천적인 것을 분리하기 시작했다. 과거에 연하에게 반말을 들을 때 불편함을 느꼈다. 그건 장유유서라는 연령차별적 도덕적 의무에 의해 후천적으로 만들어진 것임을 파악하고는 더 이상 불편하지 않도록 내부에 있는 인지를 수정했다. 이제는 연하의 반말이 불편하지 않는다. 예전에 고기를 먹을 때 갑작스럽게 맛이 없어지고 역한 느낌을 받았다. 그 느낌이 환경오염이나 채식주의를 다룬 영상에 영향을 받았음을 기억해내고는 잡식이라는 선천적인 인간의 성질이라는 것과 후천적인 불편함이라는 것을 강하게 인식하며 계속 고기를 먹었다. 어느새 고기섭취가 불편해지지 않았다. 몇 년 전 문틀 철봉으로 턱걸이를 하다가 철봉이 문틀에서 빠지는 바람에 머리에 혹이 나고 기절하는 사고를 겪은 적이 있다. 그 사고로 나는 기억퇴행을 겪었다. 당시 가족의 증언에 따르면 5년 전으로 퇴행했다고 한다. 그 순간부터 나는 그것이 내가 아님을 강하게 자각하고 있었다. 가족에게도 퇴행한 걸 내가 아니라고 말했던 모양이다. 그렇게 나는 하루 만에 나의 기억을 다시 되찾고 자아를 되찾을 수 있었다. 이외 다양한 감각을 조정했다. 아마 선천적인 것과 후천적인 것을 분리할 수만 있어도 웬만해서는 자아형성이나 유지를 할 수 있을 거라 본다.

 

학생이 강한 의지를 유지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앞서 말했듯이 인간은 강한 의지를 타고난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이 의지가 약하다. 이유는 간단하다. 성장 도중 무언가에 의지를 박탈당했기 때문이다. 소심한 학생은 발표에 두려움을 느끼곤 한다. 그런데 그게 정상일 수가 없다. 발표에 공포를 느껴? 무대에 오르는 것에 두려움을 가져? 말도 안 된다. 그것은 태생적인 문제가 아니다. 누군가 잔혹하게도 그 사람의 의지를 꺾고 박탈하여 인간 앞에 서는 걸 두려워하게끔 만들었기 때문이다. 한국인은 도덕적 의무로 인간에게 복종하는 법부터 배운다. 연상에 의해 의지가 꺾이는 것이 올바르다. 복종부터 배우는 인간이 자유의지를 갖는 게 쉬울 리가 없다. 복종을 당연시하는 것은 문화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대표적으로 세배가 있다. 현재 세배는 인간에게 무릎을 꿇고 머리를 박고 돈을 받는다. 보통 그런 행위는 복종을 의미한다. 한국인은 세배라는 관습을 통해 돈을 받고 연상에게 복종하는 법을 배운다. 한국인이 연상과 돈에 약한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친인척과 사이 좋은 것은 좋다. 그러나 그것은 이제 절을 하지 않아도 되는 평등한 관계 속에서 사이가 좋아야 한다. 여성은 보다 더 심하다. 이걸 기본으로 여성은 여성주의자가 물려받은 여성용 약화교육을 추가로 받기 때문이다. 연상에 대한 복종에 약한 의지와 강한 성적 수치심이 더해진다. 정말 이래서는 안 된다. 어떤 여성이 사고 발생시 어쩔 줄 몰라 하는 경우가 있다. 그건 다 이유가 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교육 받았으니까 그렇게 행동하는 것뿐이다. 일부 여성의 행동력을 보고 의지가 약하지 않다고 반론할 수 있다. 하나 그것은 보통 그 여성의 의지가 아니다. 선동가의 의지다. 선동되어 한 행동에 자유의지가 있을 수가 없다. 이런 약화교육을 올바르다 여긴 이들이 요즘에는 남성에게도 주입하려는 모습이 보이고 있다. 끔찍하다. 예전에 어떤 여성 아나운서가 남학생에게 은연중에 떠보듯이 농담조로 자위행위에 대해 물어본 적이 있었다. 직접적으로 물어본 것이 아니었다. 지금까지 남학생에게 그런 걸 물어보는 건 그리 큰 잘못이 아니었다. 남학생에게는 성적 주도권이나 자기결정권이 있다 생각했기 때문이다. 되려 예전에는 자위행위를 남학생이 여교사에게 말해 논란이 일었었다. 그러나 이제는 다르다. 사람들이 여성을 예로 들며 그걸 성희롱이라 규정하며 비판했다. 여성이 약화교육으로 약해진 것을 형평성 문제로 남성도 약하게 만들려고 하고 있다는 것이다. 욕구를 만족시킨다는 점에서 식사나 수면이나 자위는 비슷하다. 자위행위를 물어본 쪽이 잘못한 게 아니라 자위행위를 부끄럽게 만든 쪽이 잘못했다. 어떻게 된 게 정상적인 것을 부끄럽지 않게끔 하는 게 아니라 부끄러워하는 걸 배려하기만 한다. 성을 터부시하여 성에 수치심을 강하게 느끼게 만드는 것과 같이 성에 취약하게 만드는 걸 이제는 그만해야 한다. 수치심이란 부끄러워하는 마음을 뜻한다. 부끄럽다란 당당하거나 떳떳하지 못하게 느끼는 상태에 있거나, 숫기나 용기가 없어 거리낌을 느끼는 상태에 있다를 뜻한다. 어째서 성을 당당하거나 떳떳하지 못하게 느껴야 하는가! 성적 모욕에 수치심을 느끼는 것은 성 자체가 부끄럽다 여기기 때문이다. 생각해보자. 의사표현이 무시되면 수치심을 느끼나? 아니지 않나 자존심에 상처를 입는다. 그것은 의사표현이 당당하고 떳떳하다 여기기 때문이다. 성이 부끄럽지 않다면 수치심을 느낄 리가 없다. 수치심은 성을 부끄럽게끔 인지하도록 주입 당했기 때문에 느끼는 것이다. 수치심은 타인이 주입한 감정이다. 반면 자존심은 본인의 본성이다. 예컨대 비자발적 성적 접촉 같은 건 수치심을 느낄 것이 아니라 드높은 자존심에 상처를 입어야 한다. 수치심에 덜덜 떨 것이 아니라 자존심에 상처입고 분노해야 한다. 수치심은 인간을 약하게 만든 결과일 뿐이다. 이제 더 이상 인간을 약하게 만들면 안 된다! 다음은 민족의 슬픔 강요다. 자본주의의 침략과 공산주의의 침공을 둘 다 겪은 한국은 반자본-반공산 같은 이념에 대한 적개심이나 반미반일-반중반북 같은 해당 이념을 가진 국가에 대한 적개심을 교육받았다. 이런 교육은 본인의 의지와 무관하게 세뇌되듯 받기 때문에 감성적인 불편함을 느끼게 된다. 이것은 미국의 매카시즘이나 일본의 혐한과 비슷하다. 분명히 말해두건대 옳고 그름을 말하고자 하는 게 아니다. 어떤 것에 찬성하거나 반대할 때에는 감성이 아닌 이성으로 선택해야 한다는 것이다. 세뇌되어 감성적으로 편하거나 불편하다고 찬성하거나 반대하는 것은 자유의지가 없는 행동이다. 나는 반공반중이다. 현재 변질된 공산주의는 독재를 전제하고 중국은 그 체제에 있으면서 중화사상까지 가지고 있어 한국을 지배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반대할 수밖에 없다. 중국을 반대하는 건 중국인 개개인의 성향이나 선악과 관계가 없다. 중국의 강함과 사상의 위험성에 위기를 느껴 반대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감성적으로 불편해서 반대하지 않는다. 이성적으로 반대한다. 반미반일에 대해 잠시 얘기해보자. 한국이 미국이나 일본과 갈등이 있을 수 있다. 최근 일본과 갈등이 격해지고 있음을 안다. 여기서 하고자 하는 말은 갈등하지 말라는 게 아니다.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해야 한다. 하고자 하는 말은 그렇게까지 갈등을 겪고 있어도 자유라는 이념을 공유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선을 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그 점을 유념하면서 갈등을 빚어야 한다. 그렇다고 불필요한 싸움까지는 필요 없다. 그건 중국의 기세를 늘려줄 뿐이다. 보통 이런 민족의 슬픔을 강요 받은 이들이 주로 정당의 손익으로 가치를 판단하는 정당주의자가 된다. 연상에 대한 복종과 민족의 슬픔 강요가 한국인의 의지를 꺾는 기본적인 요소들이다. 여성은 거기서 여성용 약화교육이 추가된다. 일부는 거기서 종교나 채식주의나 비폭력주의 따위가 추가되어 인간의 의지를 꺾는다. 채식주의에 대해 말해보겠다. 채식주의자가 정녕 이성적으로 채식주의를 하고 싶다면 고기를 먹을 수 있으면서도 이성으로 채식을 해야 한다. 만약 고기만 봐도 불편하고 본인은 물론 타인이 먹는 것조차 불편하다면 그것은 세뇌되었기 때문에 불편한 것이다. 비폭력주의에 대해 말해보겠다. 비폭력주의자가 정녕 이성적으로 비폭력을 하고 싶다면 폭력을 쓸 수 있으면서도 이성으로 비폭력을 해야 한다. 만약 폭력만 봐도 불편하고 본인은 물론 타인이 폭력을 행사할 수 있는 것을 넘어 폭력에 연관된 곳에 있는 것조차 불편하다면 그것은 세뇌되었기 때문에 불편한 것이다. 비폭력주의의 경우 애초에 국가의 질서 자체가 공권력이라는 폭력으로 유지되어 있기 때문에 국가 내에 있는 이상 사실 비폭력주의를 추구한다 하기는 어려워 다소 안타까운 기분이 들곤 한다. 민주적일수록 대부분의 공권력은 대화로 해결하지만 일부 강력 범죄자에게는 폭력으로 해결할 수밖에 없다. 그 점에 있어 국가 질서 내에 속한 이상 폭력에서 벗어날 수 없다. 애초에 세뇌되어 인간의 본성인 잡식성과 폭력성을 부정하는 시점에서 안타깝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런 성질을 잃게 되면 생존에 지나치게 취약하게 된다. 비폭력주의자는 남이 돌봐주지 않으면 타인이나 타동물의 폭력으로부터 본인을 보호조차 할 수 없다. 얼마나 가여운가? 그렇지 않아도 약해진 한국인을 더 약하게 만들어서는 안 된다. 한국인 대다수가 심각한 도덕적 강박증을 겪고 있다. 도덕에 어긋나는 걸 보면 강박증에 걸린다. 정말 슬프다. 종교는 신의 의지에 따라 행동하기 때문에 원래 자유의지가 있기 어렵다. 예컨대 신은 위대하다며 참수하고 테러 하는 이들에게 어떤 자유의지가 있을까? 씁쓸하다. 연상에 복종하게 하는 걸 피하고 여성용 약화교육을 피하고 민족의 슬픔을 강요하는 걸 피하고 인간의 본성과 어긋나는 사상을 피하고 종교를 피하면 일단 학생의 타고난 강한 의지는 유지될 가능성이 높다고 할 수 있겠다.

 

이렇게 약해진 한국인을 가여워하며 배려해주는 사람들이 있다. 그건 알겠다. 하나 애초에 약하게 만들면 안 되는 것이다. 강한 사람은 강해져야 한다. 세상에 약자만 남으면 도대체 누가 처음부터 약하게 태어난 사람을 돌보는가? 세상은 약자를 돌볼 수 있는 강자가 필요하다. 인간을 약하게 해서는 안 된단 말이다. 일부 어떤 사람은 약자를 배려하는 것으로 권력을 얻어 의도적으로 약자를 양산하려 한다. 멀쩡한 사람도 의지가 약하고 수치심이 강한 것이 정상이라며 세뇌한다. 멀쩡한 사람이 약해지면 이런 말을 외친다. 보라, 이렇게 약하지 않느냐! 배려해줘야 한다! 실제 그걸로 배려 받고 있다. 마음은 형태가 있는 것이 아니기에 이런 것이 얼마나 잔인한 일인지를 모른다. 그래서 비유를 통해 설명해보겠다. A가 외친다. B가 아프잖아요! 배려해주세요! C가 대답한다. A님 진정하세요. B의 어디가 아프다는 겁니까? A가 외친다. 아니 안보이세요? 팔 다리가 아프잖아요! C는 차분하게 대답한다. 제 눈에는 아프지 않은 것 같습니다만 여러분들은 어때요? 모두 동의한다. 그러자 A는 눈을 희멀겋게 뜨더니 B의 팔 다리를 직접 분지른다. B는 고통 속에서 절규한다. 그 모습을 보며 A는 말한다. 봐봐요! B가 아프다고 하잖아요! 이 인정머리 없는 사람들! 주위에 있는 모두가 공포에 질려 몸을 떨며 그 광기를 바라본다. 모두가 두려움 속에서 배려를 해주겠다는 약속을 해버린다. 이런 게 의도적으로 약하게 만든 다음 배려해달라 외쳐 강제로 배려 받는 것과 같다. 이게 얼마나 잔혹한 일이었는지 조금이라도 알았으면 좋겠다. 요즘에는 하도 힘들고 어려운 걸로 배려 받는 일이 잦다 보니 기여도나 가치로 평가 받고자 하는 게 아니라 힘들고 어려움을 인정받고 싶어한다. 내가 더 힘드니까 날 더 배려해줘. 이것이 잘못되었다.

 

둘째, 학생이 후천적인 사고방식과 행동원리를 설계하고 현명한 지성을 얻도록 한다. 학생이 선천적인 성질과 후천적인 성질을 분리하여 구분할 수 있다면 후천적인 사고방식과 행동원리를 설계하는 것이 수월해진다. 학생은 본인의 본성을 파악하여 어떤 것을 어떤 것을 키우고 줄일 것인지 선택할 수 있게 된다. 가령 이런 것이다. 용기는 키우고 폭력성은 줄인다. 자립심은 키우고 의존성은 줄인다. 이런 걸 타인이 조절하면 능력의 가치지기처럼 능력 자체가 지워질 위험이 있다. 그러나 본인이 조절하면 그런 위험은 적은 편이다. 능력의 가지치기에 대해 간단히 설명하자. 인간은 사회에 적합하지 않다. 진화를 통해 야생의 동물이 가축화가 되었듯이 인간도 사회화가 된 것은 분명하다. 하나 완전하지는 않다. 그래서 인간은 사회화가 필요하다. 사회화를 하는 과정에서 많은 인간이 능력을 가지치기 당한다. 정원사가 나무를 편하고 보기 좋게 돌보기 위해 가지치기 하듯이 보호자가 인간을 편하고 보기 좋게 돌보기 위해 가지치기를 한다. 아이의 의지가 너무 강하여 어른의 말에 반항하면 의지를 가지치기 해서 얌전하게 만든다. 아이의 두뇌회전이 너무 빨라 어른의 말에 모순을 발견하여 지적하면 지능을 가지치기하여 얌전하게 만든다. 아이의 인간관계가 너무 좋아 어른을 무시하면 관계를 가지치기하여 얌전하게 만든다. 아이의 호기심이 너무 강해 어른에게 자꾸 이것저것 물어보면 호기심을 가지치기하여 얌전하게 만든다. 아이의 애정이 너무 강해 어른에게 성가시게 굴면 애정을 가지치기하여 얌전하게 만든다. 반대로 어른이 집착이 강해 아이에게 학습을 강요하는 것으로 자유의지를 꺾는 등의 다양한 가지치기를 하는 일도 있다. 천재의 범재화는 이런 식으로 만들어진다. 이런 것은 아이에게 굉장히 해로우므로 반드시 주의해야 한다. 도덕적 의무에 의해 아무렇지도 않게 복종을 요구하면 의지가 꺾이는 건 당연하지 않나. 이런 식으로 능력을 가지치기 당한 상태에서 과도한 도덕적 의무를 부과 받은 이들이 보통 의지가 약하고 소심하고 자신감이 없다. 발표도 제대로 못한다. 아이를 부모가 망가트린 것이다. 대부분 부모는 그저 배운 대로 가르치지 때문에 자신이 한 일을 잘 모른다. 부모도 그렇게 배웠고 조부모도 그렇게 배웠을 것이다. 그런 걸 알면서 개개인을 탓하기는 어렵다. 사회를 바꿔야 한다. 교육에 있어 비전문가인 부모가 아이의 자아의 형성에 과도하게 간섭하는 것은 막아야 한다고 본다. 인간은 나무처럼 일방적으로 가지치기 될 대상이 아니다. 인간은 인간 스스로를 키우고 줄일 수 있어야 한다.

 

학생이 본성을 파악하여 알맞게 조절한 상태에서 다양한 경험과 지식을 쌓은 뒤 도덕과 가치관을 결정하고 그것에 맞춰 사고방식과 행동원리를 설계하면 된다. 예컨대 나 같은 경우에는 자유주의와 역할주의를 도덕과 가치관으로 결정하고 그것에 맞춰 사고방식과 행동원리를 설계했다. 그걸 바탕으로 나온 게 바로 이 글이다. 그럼 시작해보자. 아무것도 배우지 않은 학생은 보통 생존에 도움이 되는 것을 올바르고 가치 있게 여길 것이다. 일반적인 동물이 그러하니까 말이다. 그러니 다양한 경험과 지식을 쌓아 시야를 넓혀 선택할 수 있는 힘을 줘야 한다. 그것이 바로 강화교육이다. 선천적인 것은 약화교육에 침범되지 않도록 막고 후천적인 것은 강화교육을 통해 강해지도록 한다. 강화교육은 단순히 학문을 가르치는 게 아니다. 말 그대로 살아갈 수 있는 힘을 가르쳐 인간을 강하게 만든다. 시장경제에 필요한 지식을 주입하는 게 아니라 인간이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힘을 가르쳐야 한다. 인간이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힘은 무엇이 있을까? 원시적인 것부터 가보자. 무력과 지력과 매력과 권력과 재력. 하나, 무력교육은 인류의 폭력을 가르쳐야 한다. , 지력교육은 사물을 보는 방법과 지식의 활용방법을 가르쳐야 한다. , 매력교육은 인간에게 사랑 받는 법을 가르쳐야 한다. , 권력교육은 인간관계에서 주도권을 얻는 법을 가르쳐야 한다. 다섯, 재력교육은 돈을 다루는 법을 가르쳐야 한다. 이런 힘을 기초로 한 교육과정에서 필요한 과목을 정하는 것이 인간을 위한 교육이다.

 

하나, 무력교육은 인류의 폭력을 가르쳐야 한다. 학생은 인간의 본성인 폭력성이 어떤 것인지 배울 필요가 있다. 그래야 그 폭력성을 제어할 수 있다. 폭력이 나쁘다고 아예 가르치지 않는 것은 폭력의 제어방법도 가르치지 않는 것과 같다. 폭력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는 법도 가르치지 않는 것과 같다. 인류의 역사는 폭력으로 점철되어 있다. 폭력을 위해 무기가 발달했다. 인류가 최고포식자가 된 이후 무기는 오로지 인간을 죽이기 위해 발달했다. 그런 무기가 반드시 악이라 보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공격하는 상대로부터 살아남기 위해 방어하다 죽이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무기는 어떤 행위의 수단일 뿐이다. 현대의 무기는 보통 총이다. 학생은 총이 어떤 것인지 체험해봐야 한다. 현재 인류의 폭력이 어떤 것인지 파악하고 그 폭력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는 방법이 무엇인지 생각해봐야 한다. 총이란 폭력을 안다면 주먹이란 폭력으로부터 다소 대담해질 수 있다. 총이란 큰 폭력을 안다면 집단 괴롭힘을 당하는 학생도 그 괴롭힘이 작은 폭력임을 깨닫고 맞서 싸울 수 있을지도 모른다. 싸운다는 것은 물리적인 반격을 의미하는 게 아니다. 신고할 수 있는 의지, 도움을 청할 수 있는 의지를 말한다. 대부분의 집단 괴롭힘은 타인에게 도움을 청할 수 없기에 지속된다. 이 점을 유념하여 의지가 약해진 학생에게 다시 강한 의지를 되찾을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총을 체험한다고 해서 힘든 훈련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건 아니다. 사격장에서 총이 어떤 것인지 한번 쏴보는 것만으로도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이런 교육은 학생만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지금 한국은 총이 금지되어 물리적인 폭력이 약한 이들이 지나치게 불리하기 때문이다. 특히 여성이 그렇다. 모든 사람이 총이라는 큰 폭력을 체험하면서 이미지를 구축해 상대적으로 약한 폭력에 대한 면역력을 키워야 한다.

 

, 지력교육은 사물을 보는 방법과 지식의 활용방법을 가르쳐야 한다. 사물을 보는 방법을 알아보자. 사물은 객관적으로 봐야 한다. 1+1=2와 같이 명확하고 논리적인 것만 파악하고 그 뒤에 인간관계나 도덕이나 가치관을 붙여 판단한다. 예컨대 이런 것이다. 세배는 풍습이다. 그것이 옳지 않다고 말하기 어렵다. 하나 행위만 떠올려보자. 연상에게 무릎 꿇고 머리를 바닥에 박은 뒤에 돈을 받는다. 이 행위만 보면 옳지 않다. 거기에 세배는 풍습이라는 것을 붙이면 세배는 옳지는 않지만 풍습이라 허용된다라는 결론이 나온다. 이런 식으로 사물을 보는 것이 바로 본질을 본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종종 범죄를 저지른 종교인을 같은 종교인이 옹호하는 일이 있다. 이런 것도 마찬가지다. 범죄자의 범죄행위만 바라본 뒤에 종교인을 붙여보자. 그러면 옳고 그름을 분명하게 파악할 수 있다. 마음에 들지 않았던 사람이 있다 가정하자. 그 사람이 올바른 행동을 했다. 그러면 그 사람의 행동만 파악하고 그 다음에 마음에 들지 않음을 붙여보자. 그러면 선입견에 휘둘리지 않을 수 있다. 노동도 객관적으로 볼 수 있다. 학력이나 경력을 배제하고 생산성에만 초점을 맞춘다. 학력이나 경력이 낮아도 생산성이 다른 사람과 같으면 같은 대우를 해줘야 한다. 야근을 하는 사람과 하지 않는 사람의 생산성이 같으면 같은 대우를 해줘야 한다. 생산성을 보고 그 뒤에 이것저것 붙여서 판단하면 공정하게 대우해줄 수 있다. 지식의 활용방법을 알아보자. 지식의 활용방법 문제를 푸는 것이 아닌 문제를 찾거나 만드는 것이 주가 되어야 한다. 그래야 문제해결능력이 키워진다. 단순히 누군가 만든 문제를 푸는 것은 퀴즈풀이 능력일 뿐이다. 과학지식을 배웠다고 하자. 그 지식으로 어떤 문제를 찾고 만들 수 있는가? 찾거나 만든 문제의 풀이는 어떻게 할 것인가? 화학에 대한 지식을 배우고 어떻게 꽃을 키울 수 있는가 같은 문제를 만들고 화학비료를 제조하여 흙에 뿌리는 것으로 풀이를 한다. 뭐 이런 식으로 각자 배운 지식을 어떻게 활용하는가를 스스로 떠올리며 직접 실행해봐야 한다. 국어를 배우면 창작을 해봐야 한다. 영어를 배우면 실제 대화를 해봐야 한다. 수학을 배우면 문제를 만들어봐야 한다. 이런 지식활용방법에 사람을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는 상품가치가 있는 매력이 더해지면 상품화가 가능해진다.

 

, 매력교육은 인간에게 사랑 받는 법을 가르쳐야 한다. 인간의 마음을 사로잡아 사랑 받을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대체로 매력적인 인간은 어딜 가도 환영 받아 살아가기가 편하다. 그런 걸 배우게끔 해야 한다. 우선 자기자신을 가꿀 줄 알아야 한다. 머리스타일과 패션스타일을 배우고 얼굴을 꾸미고 몸을 관리한다. 지금까지 학교는 학생이 꾸미는 걸 금지했다. 그런데 학생에게 꾸미는 걸 막는 것은 학생을 도구 취급하는 것과 같다. 학생을 도구로 여기니까 인간에게 중요한 매력을 무시하고 얌전하게 지식만 주입 받으라고 강요했던 것이다. 그리고 대화방법과 행동요령과 품위를 배운다. 보통 이런걸 잘하는 사람이 사귐이 좋고 발표능력이 뛰어나다. 다양한 관계를 늘려나가는 것이 이런 종류의 힘을 얻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여행이나 아르바이트는 안전하다면 어렵지 않게 추천할 법 하다. 어떤 학생이 강한 의지가 꺾여 의지박약이 되어 인간관계가 어렵다면 강한 의지를 되찾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이런 종류의 타입에게 다양한 관계 맺기부터 시작하는 것은 좋지 못한 결과를 낳을 수 있다. 여기에 노래나 춤이나 연주나 유머나 요리 등과 같이 사람을 즐겁게 만들 수 있는 매력적인 특기 몇 가지를 익히면 기본적인 매력교육이 끝이 난다. 매력교육을 제대로 받으면 웬만해서는 어딜 가든 환영 받을 수 있을 거라 본다. 약화교육을 받지 않고 매력교육만 잘 받아도 모두 자유롭게 연애를 할 수 있다. 지금 연애비율이 낮은 것은 연상의 과도한 간섭과 매력교육을 미비로 이성에게 매력적인 사람이 많지 않기 때문이다. 매력만 키워도 대부분은 알아서 잘 연애할 거라 본다. 그 중 몇 연인이 결혼을 하고 그 중 몇 부부가 출산을 한다. 연애하는 인간의 풀이 넓어야 결과적으로 출산율도 높아질 수 있다. 자유국가인 이상 출산을 강요할 수는 없으므로 학생 90%이상이 자발적으로 연애를 하는 걸 목표로 교육해야 출산율이 올라갈 수 있을 것이다.

 

, 권력교육은 인간관계에서 주도권을 얻는 법을 가르쳐야 한다. 실상 정치적인 능력을 가르치는 것을 의미한다. 권력교육은 학생이 모든 능력을 포괄적으로 사용하여 인간관계에 있어 주도권을 얻을 수 있게끔 가르치면 된다. 기본적으로 논리적인 대화에서 주도권을 잡는다. 하나 다른 힘이 작용하는 예가 많다. 예컨대 매력. 매력적인 사람의 주장은 같은 논리라 하더라도 대화상대자가 수용할 가능성이 높다. 체계적으로 나아가면 인간관계에서 주도권은 관계의 수에 따라 달라지는데 수가 적을수록 주관적이고 상대적인 능력으로 주도권이 정해지고 수가 많을수록 객관적이고 절대적인 능력으로 주도권이 정해진다. 앞이 일반정치라면 뒤는 대중정치다. 학교로 구분 지으면 앞이 소속된 반이고 뒤는 학교 전체다. 일반정치는 집단 구성원보다 뛰어나면 된다. 모든 능력이 고르게 뛰어나면 리더가 될 것이고 특정 능력이 특출 나게 뛰어나면 전문가가 될 것이다. 리더로서의 주도권을 잡는 방법과 전문가로서의 주도권을 잡는 방법을 익힌다. 리더는 집단 전체를 고려하여 언행을 하고 전문가는 전문 영역을 고려하여 언행을 한다. 특별히 뛰어난 것이 없으면 얕고 넓게 능력을 키울 것인지 아니면 깊고 좁게 능력을 키울 것인지 선택하여 어느 방향으로 주도권을 잡을 건지 계획하면 된다. 전체적인 주도권이든 국소적인 주도권이든 어느 영역이든 주도권을 잡을 수 있을 수 있어야 자기의사표현을 확실하게 할 수 있다. 대중정치는 이를 기본으로 하되 대중에게 평가 받는 만큼 주도권을 쥐기 위해서는 객관적이고 절대적인 능력을 표출할 필요가 있다. 비교 대상이 다른 사람이 아닌 대중의 이상이다. 그 이상에 맞춰야 대중정치의 주도권을 쥘 수가 있다. 이를 이해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보다 비교우위에 서려다 둘 다 굴러 떨어지는 일이 생길 수도 있음을 말해두겠다. 대중은 수가 많으므로 숫자로 판단하게 되는 일이 많아진다. 설문과 통계의 숫자에 기대게 된다. 그래서 곧잘 숫자에 휘둘린다. 하나 수에 현혹되어서는 안 된다. 대체로 비슷한 환경에 자라난 이들은 본질이 같은 경우가 많다. 비슷한 유형을 일반정치의 수가 될 때까지 묶어버리면 대중의 이상을 파악하기 쉬워 다소 편하게 주도권을 쥘 수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본질을 제대로 파악하는 것이다. 잘못 파악해버리면 잘못 묶어 판단에 오류가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떤 유형으로 묶을지도 중요하다. 예컨대 특기로 묶을 것인지 취미로 묶을 것인지 같이 말이다. 한국정치를 예로 들어보겠다. 지금 한국정치는 지지 근거가 직간접적으로 겪은 피해에 근거한 트라우마인 경우가 많아 그걸로 묶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약한 부분을 자극하여 선동을 통해 지지를 이끌어내는 것과 같다. 바람직하지는 않은 방법이다. 그러니 앞으로 한국정치는 분야로 묶는 것이 훨씬 낫다고 생각된다. 수가 늘어날수록 관계가 옅어져 일일이 대화를 하기 어려워 알기 쉬운 이미지를 구축하는 것이 좋다. 대화를 나누기 어려우므로 오해를 사지 않는 언행이 필요할 것이다. 정치슬로건이 중요하듯 정치는 어떤 단어로 이미지가 퍼져나가는 경우가 많다. 그걸 고려해야 한다. 네거티브. 비방이나 비난 따위는 바람직하지 않다고 말할 수 있다. 맞다. 그런데 사회에서는 그걸 쓴다. 교육에서는 그걸 지양하더라도 언제든지 쓸 수는 있게끔 가르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다섯, 재력교육은 자본을 다루는 법을 가르쳐야 한다. 학생의 모든 생산 활동에 금전적 가치를 매겨야 한다. 적은 금액이라도 노동에 대한 대가를 받는 법을 익혀야 돈의 가치를 인지하고 다루는 법을 익힐 수 있다. 이타심을 길러주겠다고 봉사활동을 강요하며 노동의 대가를 일절 지급하지 않는다. 그런 식으로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을 다루는 법을 알려주지 않는 것은 학생을 자본의 노예로 만들겠다는 것과 같다. 도구와 비슷한 취급이다. 학교에서 학생들이 교무실을 청소하는 것이 부당하다는 주장이 나온 적이 있었다. 그런데 만약 교무실을 청소하는 학생에게 아르바이트 비용을 지급한다면 부당하다 할 수 있었을까? 부유한 학생과 가난한 학생의 차이가 두드러질 수는 있다. 그러면 청소 자체는 똑같이 평등하게 하고 거기에 비용만 지불하는 형태가 되면 된다. 교육에 있어 불필요한 차등은 필요가 없다. 학생 때 어떤 활동을 하고 적은 돈이라도 받는 경험은 굉장히 귀중하다고 강조하겠다. 그렇게 벌어들인 수익을 교사의 이름으로 주식투자를 시도해본다. 큰 금액이 아니기에 놀이와도 같다. 그런다고 해도 자본의 흐름에 예민해지는 편이 자본주의 사회에 적응하기가 좋다. 자본에 흐름에 휘둘리지 않고 주도하기 위해서는 자본의 흐름 자체를 파악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그렇게 하여 자본의 주인이 되어야지 자본의 노예가 되어서는 안 된다. 어디까지나 자본은 인간의 목적을 달성하게 만드는 수단이다. 이런 수단이 목적이 되어버린 까닭은 대부분 도구로 제조되어 인간의 목적을 가진 사람이 많지 않기 때문이다. 돈을 바라는 이유에 대해 물어보면 대부분 하고 싶은 걸 할 수 있기 때문이라 대답한다. 그래서 뭘 하고 싶으냐고 물어보면 뚜렷하게 정해진 것은 없이 이것저것 대답할 뿐이다. 확고한 목적이 없다. 돈이 있으면 뭐든지 할 수 있고 할 수 없는 건 더 많은 돈이 있으면 된다며 말을 하는 사람이 있다. 자본의 노예가 되어 시야가 좁아지는 바람에 돈이란 단어를 다른 힘으로 교체해도 결과는 같다는 걸 모른다. 재력을 권력으로 바꾸나 무력으로 바꾸나 매력으로 바꾸나 높은 확률로 뭐든지 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낮은 확률로 무작정 쏟아 부어도 하고 싶은 걸 못할 수 있다. 재력은 이런 힘 중 하나일 뿐이다. 돈의 특성상 아무 능력이 없어도 큰 힘을 발휘할 수 있기에 보다 더 매달리는 것은 안다. 그런데 그게 욕망이 작다는 걸 의미한다. 강한 욕망이 있다면 강한 힘을 바랐을 것이다. 돈을 바라는 욕망이 잘못되었다 말하는 게 아니다. 자본의 노예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걸 말하는 것이다. 그저 사는 게 목적이라 말할 수 있다. 그런 게 그건 다른 동물과 다를 바 없다. 학생이 인간다운 목적을 가질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자본을 다루는 법을 배워 자본의 주인이 되어 목적을 위해 자본을 수단으로 쓸 수 있는 인간이 되게끔 가르쳐야 한다.

 

다양한 힘을 배운 상태에서 다양한 도덕과 가치관을 접한 다음 현재 사회의 도덕과 가치관이 타당한지 검토해본다. 예컨대 어떤 사건이 발생했다 하자. 우선 보편적인 도덕과 가치관이 어떤 식으로 적용되는지 알아보자. 그 뒤 주관적으로는 어떤 식으로 적용할 것인지 생각하면서 도덕과 가치관을 구축하다 보면 큰 틀은 다른 사람들과 같을 수 있어도 작은 틀은 개개인의 고유한 개성이 담길 수 있게 된다. 예컨대 이런 것이다. 모두가 자유주의를 추구한다 하더라도 각각의 사건에서는 견해의 차이가 있을 수 있다. 약화교육에 침범되지 않은 상태에서 강한 의지를 가진 이가 고유한 개성을 갖춘 다음 다른 사람과 대화를 하면서 자신의 사고방식과 행동원리를 설계하면 온전한 자아를 형성했다 할 수 있을 것이다. 선동이나 세뇌가 간섭하더라도 온전한 자아가 있다면 크게 휘둘리지 않고 대응할 수 있다. 명확한 방식과 원리를 구축했기 때문이다.

 

온전한 자아를 바탕으로 현명한 지성을 갖춰야 비로소 지성인이라 할 수 있다. 지성이란 지각된 것을 정리하고 통일하여, 이것을 바탕으로 새로운 인식을 낳게 하는 정신 작용. 넓은 뜻으로는 지각이나 직관, 오성 따위의 지적 능력을 통틀어 이른다고 한다. 새로운 인식을 낳게 하는 정신 작용.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것. 새로운 답을 제시하는 것. 알파벳 A에서 Z까지 어떤 지식들이 나열되어 있다고 가정하자. 거기에서 누구는 AFZ를 조합하여 새로운 걸 만들고 누구는 BCN을 조합하여 새로운 답을 제시한다. 이런 것이 보통 새로운 인식이다. 현명의 의미는 어질고 영리하고 사리에 밝다라고 한다. 현명한 지성이란 어질고 영리하고 사리에 밝은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냥 새로운 것이 아니라 현명함이 붙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현명함은 뒤에 붙어야 한다. 먼저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고 그것이 현명하다 할 수 있는지 판별해서 결정해야 한다. 사람은 생각을 할 때 제한을 두면 한계에 봉착한다. 생각에는 어떤 제한도 두어서는 안 된다. 그럼 어떻게 해야 새로운 것을 만들 수 있는지 알아보자. 하나, 객관과 주관을 분리하여 사고하는 교육. , 주관이 온전하게 성장하는 교육. , 성장한 주관을 객관화하는 교육.

 

하나, 객관과 주관을 분리하여 사고하는 교육. 예를 들어보겠다. 소설을 파악할 때 보통 작자의 의도를 알아보는 식으로 교육한다. 그럴 때 보편적으로 널리 알려진 답과 자신이 생각해서 결론 내린 답을 둘 다 생각해야 한다. 평가를 할 때에도 객관적인 답과 주관적인 답을 둘 다 적도록 하게 해야 한다. 그렇게 해서 객관과 주관을 분리할 수 있어야 객관과 주관을 비교하여 명확한 주관을 파악할 수 있다. 파악할 수 있어야 학생의 주관이 살아남을 수 있다. 객관을 모르는 인간이 주관을 분리해낼 수 있을 리 없다. 주관을 모르는 인간이 새로운 걸 만들어 낼 수 있을 리 없다. , 주관이 온전하게 성장하는 교육. 객관과 주관을 분리하여 주관을 유지한 학생이 새로운 생각을 떠올리면 그 생각이 볼품없거나 미약하거나 중복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어떤 형태를 통해 완성을 하는 걸 목표로 하게끔 해야 한다. 인류는 역사가 오래되어 지식을 매우 많이 쌓여있다. 그래서 어떤 새로운 생각이 과거와 겹칠 확률이 높다. 겹치는 게 시장에서는 바람직하지 않을 수 있다. 하나 교육에서는 아무래도 좋다. 그 생각을 양분으로 삼아 성장한 다음 새로운 생각을 하면 되기 때문이다. 시행착오 없는 새로운 길은 드물다. 성패와 관계없이 일단 완성하는 걸 목표로 하는 교육이 필요하다. 이 과정 속에서 현명함을 덧붙여야 한다. , 성장한 주관을 객관화하는 교육. 주관으로 만든 새로운 것을 타인이 알기 쉽게 설득력을 갖출 수 있도록 다듬어서 공개한 뒤 그걸 많은 사람들이 받아드리게 되면 객관화가 된다. 정리해보자. 학생이 강한 의지와 현명한 지성을 갖춘 온전한 자아를 가질 수 있도록 돕는 것이 바로 인간교육이다. 그 다음 능력을 상품화하여 대여의 형태로 거래할 수 있어야 시장경제의 도구로 전락하지 않을 수가 있다. 인간교육까지는 교사가 주도적이고 능력의 상품화부터는 학생이 주도적이다. 이제 능력의 상품화에 대해 알아보자.

 

 

 

능력은 상품화가 되어야 소유권이 생긴다. 인간은 능력을 소유할 수 있어야 능력의 주인이 될 수 있다. 능력의 주인이 되어야 다른 사람과 대등하게 거래할 수 있다. 능력의 상품화야말로 인간을 대등한 존재로 이끄는 열쇠였다. 지금까지 노사관계는 농노와 지주와의 관계와 본질적으로 같았다. 농노에서 배려를 늘린 것이 노동자다. 자본가는 노동자 자체를 구매하여 최대한의 이윤을 위해 노동자를 한계까지 착취했다. 이것이 가여웠던 사회주의자들은 자본가에게 불쌍한 노동자를 배려해달라 요구했다. 사회는 가엾은 노동자들을 위해 일괄적 근무시간이나 고정된 최저임금 등과 같은 배려를 해주었다. 그러나 노동자가 그런 배려를 받는다고 본질적으로 농노의 위치에서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그저 배려만 늘어났을 뿐이다. 공산주의자가 노동자의 나라를 만들자며 노동자를 선동을 했다. 선동 끝에 나라가 세워지자 공산당원이 자본가의 위치를 대신했다. 자본가가 공산당원으로 바뀐 것일 뿐이기에 노동자는 여전히 고통 받았다. 중국을 예로 들어보자. 현재 중국은 경제적으로는 자본주의를 받아드렸다. 그러자 정치적으로는 공산당원이 자본가와 노동자를 착취하고 경제적으로는 자본가가 노동자를 착취했다. 실상 노동자의 나라가 아니라 공산당원의 나라가 되었다. 농노와 노동자는 개인이 집단에 종속된다는 점에서 동일했기 때문에 계속 착취당했다. 농노가 지주가 만든 집단에 종속되는 것이나 노동자가 자본가가 만든 집단에 종속되는 것이나 노동자가 공산당원이 만든 집단에 종속되는 것은 모두 같다. 씁쓸한 일이다. 노동자가 불쌍해 배려해주는 것으로 끝나버리니 근본적인 구조를 바꿀 수가 없었다. 이것은 환자가 불쌍해 진통제를 먹이고 끝나버리고 치료를 하지 않는 것과 같다. 이제는 치료를 해야 한다. 이제는 근본적인 구조를 바꿔야 한다. 그 시작이 바로 능력의 상품화다.

 

상품은 시장에서 거래될 수 있는 모든 걸 지칭한다. 능력의 상품화는 능력을 시장에서 거래될 수 있게끔 만드는 걸 의미한다. 일정시간 동안 능력을 빌려주고 대가를 받는다. 이는 단순한 노동부터 복잡한 노동까지 전부 적용될 수 있다. 아르바이트생이 능력을 빌려주고 대가를 받는다. 전문직이 능력을 빌려주고 대가를 받는다.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되려 인간 자체가 상품화되어 거래되는 것보다 훨씬 낫다. 이래야 대등한 관계에서 공정하게 거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생각해보자. 노동자와 자본가가 대등한 관계에서 거래했기 때문에 대여의 형태로 구매한 능력 외의 것을 노동자에게 요구할 수 없게 된다. 만약 요구하게 되면 그것은 계약위반으로 인한 계약파기 및 위약금 지불이 이루어져야 한다. 이 얼마나 대등하고 공정한가? 물론 인식의 차이로 정착하는데 시간이 다소 걸릴 수 있으나 이 길이 모두 대등해질 수 있는 길임이 확실하다. 지금까지 인간 자체가 상품화되어 거래되고 있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상품화를 부정적으로 여기고 있다. 이제는 그런 편견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능력의 상품화가 가능할까? 그건 능력에 상품가치를 부여하는 매력을 더하면 된다. 그 매력에 이끌려 능력을 빌리고자 하는 이가 나타나면 거래할 수 있게 된다. 한국인은 뛰어나다. 평균 학력도 높고 국민성도 나쁘지 않다. 한국보다 안전한 국가가 드물다. 애초에 한국인은 과중한 도덕적 의무를 부과 받아 기본적으로 도덕적이기 때문에 인터넷 상에서 험한 말을 하는 이조차 사회에서는 보통 얌전한 편이다. 물론 이것은 도덕적 의무는 자유적응이 필요하다. 종종 한국인이 한국인을 평가절하하는데 세계를 기준으로 보면 객관적으로 우수한 편임이 확실하다. 그러나 상품화 능력은 낮은 편이다. 모두가 상품화 능력이 높았다면 실업률이 높을 수가 없다. 애초에 대부분 상품화 능력을 제대로 배운 적이 없었기 때문에 사실 낮을 수밖에 없다. 능력의 상품화나 사물의 상품화가 단순히 포장이나 꾸밈만을 뜻하는 게 아니다. 유창한 자기소개나 포트폴리오만을 말하는 게 아니다. 근본적으로 능력이나 사물이 다른 사람에게 필요하게 되게끔 만드는 걸 말하는 것이다. 필요로 하는 것에 추가로 포장을 할 수 있는 거지 필요로 하지도 않는 것에 포장해봐야 의미가 없다. 필요한 정도에 따라 상품가치가 달라진다. 상품화를 한다고 해서 수익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 필요가 되는 걸 목적으로 한다. 상품이 필요 되면 알아서 수요가 올라 수익을 올릴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은 이런 상품화 능력을 대학이나 직장에서 주먹구구식으로 대충 어렴풋이 익히고 있다. 하나 그래서야 제대로 익힐 수가 없다. 어릴 때부터 익혀야 된다. 자아형성시기에 사고방식과 행동원리가 굳어지는 경우가 많은데 그때 상품화 능력을 키워놓지 않으면 나중에는 어렵다. 가능한 사람도 있지만 보편적으로는 힘들다. 어릴 때 이성애를 배워둬야 나중에도 연애하고 결혼하고 출산하여 출산율을 유지할 수 있게 되듯 어릴 때 상품화 능력을 익혀둬야 나중에도 취업하고 사업하여 경제를 유지할 수 있게 된다. 상품화 능력이 몸에 배면 사진 한 장을 찍더라도 상품가치가 있는 사진을 찍을 수 있게 될 것이다.

 

학생이 상품화를 하는 능력을 어떻게 가르쳐야 할까? 그건 학생들이 직접 상품화를 해봐야 한다. 조별과제를 예로 들어보자. 조장은 자본가 역할을 맡고 조원은 노동자 역할을 맡고 교사는 소비자 역할을 맡는다. 조장은 교사에게 과제를 팔아 점수를 벌고 조원은 조장에게 능력을 빌려주고 점수를 번다. 조장은 교사가 구매하고 싶어할 새로운 주제를 다룬 과제를 만든다. 조장은 과제에 필요한 능력을 가진 조원을 찾는다. 조원은 조장에게 자신의 능력을 상품화하여 빌려준다. 조장은 시장에 나온 능력을 면밀하게 판단하여 필요한 능력을 빌리는 계약을 맺는다. 계약서에 미리 점수 분배 방식을 결정한다. 조장과 조원의 협력으로 과제가 완성되면 그 과제를 교사에게 판다. 교사는 과제의 가치를 고려하여 적절한 점수를 지불하고 과제를 구매한다. 조장은 지불 받은 점수를 계약서에 명시된 분배 방식에 따라 조원에게 나눠준다. 예컨대 이런 것이다. 교사에게 100점을 지불 받으면 조장은 계약에 따라 A에게 23점을 분배하고 B에게 24점을 분배하고 C에게 25점을 분배한다. 조장은 나머지 28점을 받아간다. 과제에 대한 기여도나 판매 결과에 따라 계약위반이 발생할 수도 있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조원에게 계약서에 명시된 대로 점수를 분배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점수 수익이 낮아 분쟁이 발생할 수 있다. 300점에 팔기로 하고 분배를 결정했는데 100점에 팔리면 계약서에 명시된 대로 분배하지 못할 수도 있다. 물론 이것은 퍼센트로 분배하기로 해두면 문제가 없다. 그러나 정도를 넘어서지 않는 한 점수로 분배하기로 결정했다 하더라도 구체적인 계약에 간섭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래서야 교육이 되지 못한다. 이런 계약문제로 발생하는 분쟁을 해결하는 것도 의미 있는 교육이 될 것이다. 공정한 점수를 분배하는 것도 공정한 부를 분배하는 것을 경험하여 부의 분배를 올바르게 이해하는 교육이 될 것이다. 이렇게 유사경제구조를 만든 다음 조원인 학생이 직접 조장인 학생에게 능력을 빌려주는 경험을 해봐야 한다. 어떻게 해야 조장이 능력을 빌리려 할 것인가? 그런 것에 대한 고민이 능력의 상품화 능력을 키워주게 될 것이다. 조장인 학생은 직접 교사에게 과제를 파는 경험을 해봐야 한다. 어떻게 해야 교사에게 비싸게 팔 수 있을까? 그런 것에 대한 고민이 사물의 상품화 능력을 키워주게 될 것이다. 모든 학생이 조장과 조원을 번갈아 하면 다양한 입장에서 상품화하는 능력을 키울 수 있게 될 것이다. 능력의 상품화는 학생의 능력을 보다 세심하고 꼼꼼하게 키우게 만든다. 왜냐하면 그 능력이 학생의 소유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인간은 인간 자체가 팔려나가 개인이 자신의 능력을 키우고 책임지는데 다소 소홀했다고 본다. 자신의 소유도 아닌 능력을 굳이 더 키워야 할 이유를 몰랐을 것이다. 이제는 달라져야 한다. 개인이 자신의 능력을 소유하여 키워나가는 환경이 필요하다.

 

이런 유사경제구조에서 상품화하는 능력을 키운 다음 실제 경제구조에서 상품을 파는 것을 경험해봐야 한다. 상품화 교육을 통해 능력을 키웠다면 그리 어렵지 않다고 본다. 기본적인 구조는 이렇다. 능력을 상품화하여 사업자에게 능력을 팔아 아르바이트를 해보거나 사물을 상품화하여 온라인 마켓에 사물을 팔아 수익을 얻어본다. 이외 나머지도 비슷하다. 학문을 상품화하여 논문을 제출해보거나 예술(미술 음악 등)을 상품화하여 개인방송이나 사이트에 올려본다. 기술(IT)을 상품화하여 앱을 제작해 어플리케이션 플랫폼에 올려보거나 문화(소설 만화 영화 게임 등)를 상품화하여 사이트에 올려본다. 자신의 능력이나 사물에 매력을 더해 사람에게 필요로 해지는 경험을 해봐야 한다. 그래야 인간이 인간을 필요로 하는 존재라는 걸 자각할 수 있다. 새로운 상품화도 할 수 있다. 게임이 가상의 세상에서 가상의 상품으로 장사했듯이 새로운 걸 상품화하여 팔 수도 있을 것이다. 새로운 상품화는 본질을 파악하는 것에서 시작하는 것이 좋다. 어떤 상품을 바라는 본질적인 이유를 파악해야 그 본질을 공유하는 다른 영역을 상품화하여 팔 수 있게 된다. 가령 이런 것이다. 한국과 일본은 애정결핍에 걸려있는 국가다. 한국은 애정결핍을 대중문화로 해소했고 일본은 애정결핍을 창작물로 해소했다. 그래서 한국은 주로 아이돌문화가 발달하고 일본은 주로 오타쿠 문화가 발달했던 것이다. 애정결핍이란 본질을 파악한 뒤 결핍을 해소할 수 있는 새로운 방법을 찾으면 그 방법을 상품화하여 팔 수 있다. 그게 바로 새로운 상품화다. 이렇게 팔고자 하는 대상이 무엇을 필요로 하는가, 무엇이 결핍되어 있는가, 그런 것을 본질적으로 파악하는 방법을 익혀두면 앞으로 새로운 상품을 만드는데 어려움을 느끼지 않게 될 것이다. 이런 상품화는 학생이 주도해야 한다. 교육은 명확한 목적을 제시하고 공정한 평가를 하기만 하면 된다. 어떻게 상품에 매력을 더해 상품가치를 키울 것인지는 학생 스스로 생각해야 한다. 물론 교사가 그걸 도와줄 수는 있다. 그러나 결코 주도해서는 안 된다. 그러면 교육이 되지 못한다.

 

상품화 교육은 시간이 많이 필요하다. 그래서 지식을 암기하는 시간을 줄여야 한다. 마침 인터넷과 스마트폰의 등장으로 어디서든 지식을 참고할 수 있다. 이제 요점만 암기하면 된다. 요점만 기억하면 인터넷에 검색하여 나머지를 보충할 수 있다. 전문분야는 많은 걸 암기할 필요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대부분은 분야에 종사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암기가 될 것이다. 전문 외의 분야는 요점만 기억해도 충분하다. 평가도 요점만 평가해야 한다. 나머지는 상품화 능력을 평가해야 한다. 암기 능력이 뛰어난 사람과 상품화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 있다 해보자. 어느 쪽이 더 수요가 있겠는가? 당연히 상품화 능력일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상품화 능력이 우선되어야 한다. 아니 어느 사회에서든 사람들에게 필요로 하는 능력을 갖추는 것이 우선되어야 한다. 지금까지는 학생 자체가 시장경제의 도구로 팔려나갔으니까 상품화 능력을 키우는데 소홀했던 것이다. 상품화 능력의 평가에 대해 알아보자. 암기는 평가하기가 쉽기 때문에 공정하기도 쉽다. 양궁의 표적 점수와 같다. 하나 상품화 능력은 객관적인 수치를 도출하기 다소 어렵다. 피겨스케이팅의 예술 점수와 같다. 기업이라면 상품이 팔린 수치로 객관적인 평가를 할 수도 있다. 하나 교육은 능력의 종류가 다양하여 모든 상품이 자본을 대가로 받지 않고 과정도 평가하기 때문에 객관적인 평가가 어렵다. 그래서 공정성이 훼손될 우려가 있다. 그러나 생각을 바꿔보자. 상품화 능력은 학생이 주도한다 했다. 학생은 교사의 평가와 무관하게 자신의 상품을 팔 수 있어야 한다. 대학이면 대학에 지금까지 상품화하여 팔았던 것을 보여주고 판단하게 한다. 대학은 최저수능점수를 통해 최저한의 지식을 평가하고 나머지는 상품화 능력을 평가한다. 대학은 학문을 공부하는 곳이기에 상품화가 이상해 보일 수 있다. 하나 상품화는 사람에게 필요로 하게끔 만드는 것이다. 학문을 상품화한다는 것은 학문을 사람에게 필요로 하게끔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학문의 지향점과 무엇이 다른가? 오로지 개인의 욕망에 따라 학문을 공부할 수도 있다. 그런데 그것은 개인이 학문을 필요로 하게 된 것이다. 인간에게 필요로 하게끔 하는 것이 학문에 부적합할 수가 없다. 기업이면 기업에 지금까지 상품화하여 팔았던 것을 객관적인 수치로 보여준다. 기업은 결과를 중시하기에 결과 중심으로 어필하는 것이 좋다. 상품화의 결과를 토대로 해당 기업의 상품을 얼마나 팔 수 있는지 또는 얼마나 새로운 상품을 만들 수 있는지를 어필한다. 이런 식으로 자발적으로 학생이 상품화를 통해 능력의 가치를 증명하는 식으로 진학과 취업을 해야 한다. 사실 상품화 능력이 뛰어나면 굳이 대학이나 기업에 가지 않아도 된다. 홀로 또는 여럿이 사업을 하면 된다. 대학은 진정 학문을 공부하고자 하는 사람이 가면 된다. 기업은 잠시 사업비용을 얻기 위해서 가거나 특별히 가고 싶었던 기업에 가면 된다. 이렇게 학생이 주도적으로 상품화 능력을 대학이나 기업에 어필할 수 있으면 교사의 평가는 오로지 참고자료가 될 것이다. 그러면 굳이 객관적인 평가를 고집하지 않아도 된다. 교사의 학생 평가라는 주관적인 정보에 신뢰도를 더하기 위해 학생이 교사를 평가한 것도 참고할 수 있게 하면 좋을 것이다. 강한 의지를 가진 상태에서 본성을 파악하고 온전한 자아를 형성한 뒤 현명한 지성을 갖추어 상품화 능력을 키우는 것이 자유국가의 인간교육이다.

 

인간교육에 대해 생각하면서 한국이 얼마나 쉴새 없이 빠르게 달려왔는지 새삼 깨닫게 되었다. 지나치게 빨리 달려서 인문학이 쇠퇴할 정도로 경제와 기술 위주로 발달했던 것 같다. 한국은 그러다 자유적응에 실패했던 것이다. 이제는 자유국가에 맞춰 사상과 구조를 재정립해야 하여 자유에 적응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나는 그것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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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이거 써봐야지 하고서 일단 주제부터 던져놓고 쓰는데 상상 이상으로 생각할 게 많았네요. , 인간교육도 이 정도 걸리는데 역할주의는 도대체 얼마나 많은 시간을 소모할지 예상하기 어려워요. 생각도 많이 해야 하고 책도 많이 읽어야 하고 경험도 쌓아야 하고. 까놓고 말해 더 많은 경험을 해보고 싶어요. 정상적인 성장이 아니라서 경험이 부족한 게 꽤 많거든요. 어쨌든 그러면 일반 사상서 정도는 쓸 수 있을 것 같네요.

 

요즘 이런 생각이 듭니다. 어떤 연기자가 있다고 합시다. 그 연기자가 불현듯 현실에서 연기를 하고 싶다는 충동을 느낍니다. 현실에서 정치가를 연기해보겠다고 다짐합니다. 모든걸 버리고 사람들을 속이기 시작했습니다. 연기자는 맑은 이상을 가진 사상과 완벽한 정합성을 띈 논리와 끝없는 사랑을 전할 수 있는 매력을 가진 채 사람들 앞에 당당히 섭니다. 연기자는 관객들을 속이는 것과 같이 사람들을 속입니다. 그런 속임수에 사회 전체가 속았습니다. 속은 것은 연기자 본인도 마찬가지. 진심으로 제 역할을 다하는 정치가를 연기합니다. 국가를 발전시킬 수 있는 개혁과 혁신이 담긴 정치를 합니다. 사이가 좋고 업신여겨지지 않는 외교를 합니다. 모두가 납득하는 부패를 청산하는 경제를 만듭니다. 자유롭고 공정한 사상으로 화합하는 사회를 만듭니다. 낡은 부조리를 지우는 문화를 만듭니다. 다양한 모순을 바로잡습니다. 국가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자유롭고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합니다. 그렇게 하여 국민에게 사랑 받는 정치가를 연기합니다. 그 연기자는 모두를 속인, 자기자신조차 속인 위대한 연기자가 되었습니다. 그런 정치는 진짜일까요, 가짜일까요? 그리고 국민은 무엇을 원할까요? 정치가의 역할은 다른 사람 대신 싸워주는 겁니다. 사람들의 대표가 되어 그들을 위해 대신 싸우는 거죠. 그러니까 정치가는 제정신으로 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사사로운 사리사욕 정도의 작은 욕망을 지닌 사람은 정치에 적합하지 않습니다. 국가의 발전과 수많은 사람의 행복을 바라는 것과 같은 순수하고 커다란 욕망을 지닌 인간이 정치에 적합합니다. 정말 욕망에 미친 인간이 아니고서는 하기 어렵습니다. 만약 그럴 수 없다면 진심으로 말하건대 정치가를 그만두는 편이 좋습니다. 그만두지 않겠다면 연기를 했으면 좋겠습니다. 이상을 연기해주세요. 이상을 연기하다 보면 그 이상이 자신이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떨 때에는 차라리 내가 보좌관을 하는 게 더 잘할 거 같다는 생각이 종종 듭니다. 대중정치는 잘할 것 같은데. 대중정치는 소용돌이죠. 무언가를 하려고 해도 한 바퀴 돌면서 여러 사람들을 고려해봐야 합니다. 직선으로 가는 것보다 돌아서 가는 게 보통 더 빠릅니다. 뭔가 임팩트를 줄 때에는 직선으로 가는 게 아니라 소용돌이를 돌되 속도감을 줘야 하는 거죠. 모두 고려하면서 빠르게 진행하면 됩니다. 작은 시작점에서 뱅글뱅글 돌면서 점점 커집니다. 소용돌이가 커짐과 동시에 영향력도 커집니다. 그런 식이 영향력을 키우면서 주도권을 강화하는 게 대중정치라 생각합니다. 무언가 목표를 향해 나아가기 위한 언행을 하고자 한다면 하기 전에 한번쯤은 소용돌이를 떠올려보길 권합니다.

 

맞춤법 때문에 국립국어원의 질답을 종종 봅니다. 그래서 하나 말하자면 국어학자가 한국어 문법을 정리해서 불규칙을 없애거나 줄였으면 좋겠네요. 한국 국어학자는 우수하다 봅니다. 분명 연구하면 보다 효율적인 문법이 탄생할 거라 생각합니다. 불필요한 단어변경에 힘을 쓰는 것보다 그게 훨씬 유익할 겁니다.

 

소음 스트레스 이사 가고 싶다 의자 바꾸고 싶다

 

왤케왤케 단어가 왤케왤케 귀엽나요 빵모자도 귀엽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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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게임의 사회정착실패 (0) 2021/07/11 PM 04:54

게임의 사회정착실패

 

 

 

게임의 사회정착실패는 국정의 타성과 태만을 상징한다. 게임은 사회정착에 실패했다. 2020년 하반기 모바일 게임 사용자 수만 해도 2600만명을 돌파했다고 한다. 국민 절반 이상이 게임을 즐기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게임을 즐기는 만큼 어떤 분쟁이 일어나는 것도 자명했다. 실제 게임회사와 고객 사이에서 심각한 분쟁이 발생했다. 그 분쟁으로 고객들이 돈을 모아 회사 앞으로 트럭을 보내는 일명 트럭시위를 할 정도였다. 그런데 이 시위가 일반적이지는 않다. 다른 분야를 생각해보자. 보통 분쟁이 발생하면 정해진 절차에 따라 분쟁을 해결했다. 소비자분쟁해결기준이다. 이 기준으로 분쟁을 중재했다. 그런데 왜 게임은 그러지 못했을까? 그건 분쟁사유에 해당하는 기준이 없었기 때문이다. 기준에 온라인게임서비스업이 없는 것은 아니다. 현존하는 기준의 항목을 살펴보자. 미성년자계약, 서비스 중지와 장애, 청약철회, 계속적 이용관계와 이용관계 거부, 허위 및 과장 광고. 이것 외에는 없다. 이 기준은 요즘 유행하는 온라인 게임의 특수성을 고려하지 않았다. 실제 분쟁은 고유의 특수성에서 일어난다. 특수성에 해당하는 기준이 없으니까 소비자분쟁해결기준으로 분쟁을 중재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럼 그 특수성이 무엇인지 알아보도록 하자.

 

본래 게임은 이야기 자체에 금전적 가치를 매겨 통째로 판매했다. 폴란드에서 외교 관례 선물로 선택한 위쳐나 발매 당시 커다란 센세이션을 일으킨 와우가 바로 그러하다. 오프라인 게임인 위쳐는 게임 자체를 팔았고 온라인 게임인 와우는 매월 일정 금액을 지불하고 이용하는 월정액 방식으로 서비스했다. 이 둘은 보통의 소설이나 만화나 영화와 같은 방식으로 게임 자체만 팔았다. 게임회사는 고객에게 가상의 세상을 체험하게 해주는 이야기꾼이었다. 지금의 소비자분쟁해결기준은 이것을 기초로 했다. 만약 모든 게임이 이런 형태였다면 지금의 기준은 아무런 문제가 없었을 것이다. 하나 누군가 굉장한 생각을 해냈다. 여기서부터 요즘 유행하는 온라인 게임의 특수성이 시작된다. 어떤 게임회사들이 이야기 내에 있는 요소에 금전적 가치를 매기기 시작했다. 가상의 세상에 있는 모든 걸 상품화하였다. 가상의 세상의 재화로만 얻을 수 있었던 장비나 치료제를 뿐만이 아니라 등장하는 인물에게조차 금전적 가치를 매겨 현금으로 팔기 시작했다. 게임회사가 직접 이야기 속의 상인이 되었던 것이다. 신대륙을 발견한 심정이었을까? 자본주의는 누군가 지역이든 분야든 선점하여 장악하면 후발주자가 추월하기 어렵다. 세계화가 된 지금 대부분의 영역이 선점되어 있다. 대다수 신생 기업은 후발주자에 머물렀으나 어떤 게임기업은 가상의 대륙을 만들어 그 대륙을 선점하여 가상의 상품으로 장사했다. 기가 막힌 상품화였다. 보다 적극적으로 상품을 팔기 위해 가상의 대륙에 가상의 전쟁터를 마련했다. 고객은 그 전쟁터에서 싸워 승리하는 것에 큰 만족감을 느꼈다. 이기기 위해 게임 내 상품을 마구잡이로 사들였다. 이쯤 되어 고객은 가상의 세상에 방문한 이세계인이 되었다. 현금만 지불하면 치트 능력을 보유한 주인공이 될 수 있었다. 요즘 유행하는 이세계물이 게임으로 구현된 것이다. 이세계물을 좋아한다면 사람들이 이런 종류의 게임에 빠지는 이유를 유추할 수 있을 거라 본다. 가상의 전쟁터에 무기를 공급하는 게임회사는 어느 순간 이야기꾼에서 무기를 파는 죽음의 상인이 되었다. 전쟁터 내의 경쟁 속에서 상품은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거기에서 발생하는 가치는 상상을 초월했다. 죽음의 상인이 된 게임회사는 실적이 나날이 올라갔다. 이야기꾼이었던 게임회사들도 그 흐름에 동참하여 이야기 속의 요소들을 팔기 시작했다. 그 결과 현재 모바일 게임 매출 10위권은 전부 이것과 비슷한 형태의 BM(비즈니스 모델)을 가지게 되었다. 게임 내 요소를 상품화하여 판매하는 것. 이것이 요즘 유행하는 온라인 게임의 특수성이다.

 

이런 특수성이 있음에도 소비자분쟁해결기준은 과거와 달라지지 않았다. 게임회사는 그 어떤 제약도 받지 않은 상태에서 원 단위부터 억 단위의 상품을 팔아버렸다. 게임 내 시스템 미비로 거래에 문제가 발생해도 거래에 대한 보증이 없었다. 현금으로 판 게임 내 상품의 품질에 대한 보증이 없었다. 새로운 상품의 가치를 하루 아침에 폭락시켜도 될 정도로 가치에 대한 보증이 없었다. 이에 대해 아무도 책임지지 않았다. 심지어 상품에 대한 상세내역을 거짓으로 고지해도 책임지지 않았다. 오로지 자본논리에 따른 시장경제의 흐름에만 맡겼을 뿐이다. 이런 건 요즘 시대 일반 기업에서는 보통 있기 어려운 일이다. 이래도 된다면 대부분의 기업은 과거 질서가 없었을 시대의 기업처럼 성장할 수 있다. 게임회사는 지금 무질서 속에서 말도 안 되는 수익을 올리고 있는 셈이다. 일상적으로 해왔기 때문에 게임회사는 죄책감이 없었다. 잘못된 것 자체를 몰랐기 때문에 죄책감이 있을 수가 없었다. 죄책감이 없는 폭거에 많은 고객이 분노했다. 시장경제에만 맡겼기 대문에 고객은 불만이 생기면 신규 고객 유입을 방해하는 별점테러로 대응하게 되었다. 별점테러란 모바일 게임의 평점을 의도적으로 낮추는 걸 의미한다. 그 테러가 부당하다 여긴 게임회사도 분노했다. 명확한 잘잘못의 기준이 없었기 때문에 사소한 불만으로도 평점을 낮추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서로 간의 갈등이 고조된다. 트럭시위는 온라인 게임 내의 상품 확률을 거짓고지 했기 때문에 발생했다고 한다. 이건 지금까지 쌓인 분노가 거짓고지로 터진 것으로 보는 것이 맞다. 트럭시위는 이런 흐름의 끝에서 발생한 것이다. 고객과 회사 사이에서 발생하는 분쟁을 중재하는 기준은 소비자보호에 있어 기초 중에 기초다. 이런 기초적인 기준이 없는 것을 보았을 때, 한국에서 게임은 사회정착에 실패했다.

 

이런 상황임에도 이에 대한 공적 논의가 거의 없다. 일부 국회의원이 트럭시위를 보고 이 사건을 해결해보려는 태도를 보이긴 했다. 그러나 게임의 영향력을 고려하면 이런 일부의 움직임은 너무 미흡한 처사다. 누군가는 게임의 중요도가 낮기 때문에 그런 것이라 말할지도 모른다. 한국에서 게임은 천대받았기 때문에 그런 선입견은 자연스럽다. 그러나 중요도는 그런 일방적인 선입견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얼마나 많은 시간을 써서 얼마나 많은 영향을 받았느냐에 따라 중요도가 달라진다. 생각해보자. 한국은 국민 절반이 게임으로 여가를 보낸다. 중요도가 낮을 수가 없다. 한국인에게 있어 게임은 이제 없어서는 안 되는 문화로 자리매김했다. 게임업계는 이제 인간의 여가를 책임지고 있다. 매우 중요한 역할이다. 게임이란 편견에서 벗어나 인구수와 시간과 영향력만 생각하면 게임이 사회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상당히 높은 편이다. 그럼에도 이런 현상에 대한 공적 논의가 별로 없는 걸 보면 정치권은 게임의 중요도가 낮다 생각했을 거라 본다. 그게 바로 새로움을 거부하는 타성에 해당한다. 시간이 흘러도 타성에서 벗어나려는 시도가 없다. 그게 바로 낡은 관념을 유지하려는 태만에 해당한다. 그러므로 게임의 사회정착실패는 국정의 타성과 태만을 상징한다. 이것에 대해 정치권만 타박하고 싶지 않다. 사회전반적으로 타성에 젖어 자유적응에 실패했기 때문이다. 한국은 자유적응에 실패했다. 사상과 구조는 강요로 둔 채, 개인에게 자유를 주니 사회가 제대로 돌아갈 수가 없었다. 대표적으로 출산율이 그렇다. 결혼과 출산을 강요하다가 자유롭게 놔두니까 출산율이 폭락한 것이다. 그렇다고 다시 강요할 수는 없다. 그러니 자유롭게 놔둬도 결혼과 출산을 자연스럽게 할 수 있도록 사상과 구조를 자유로 바꿔야 한다. 남녀유별이나 정조관념을 버리고 이른 시기에 빠르게 연애하고 성관계하고 결혼하는 풍조와 그에 맞는 사회구조가 형성되어야 저출산이라는 국가의 죽음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사회 전체가 그러하였으니 이런 타성은 모두의 책임이자 누구의 책임도 아니다. 새로운 길을 안내하지 않은 사상가의 책임이다.

 

 

 

이 타성이 일으킨 현상 세 가지를 지적해보겠다.

 

첫째, 거래 기준 부재에 따른 사회갈등

둘째, 효율적인 쾌락의 위험성에 대한 경계 미비

셋째, 미래산업의 성장동력 저하

 

 

 

첫째, 거래 기준 부재에 따른 사회갈등

 

우선 요즘 유행하는 모바일 게임의 형태가 어떠한지 게임을 즐기지 않는 사람도 이해할 수 있도록 현실에 비유해보겠다.

 

어떤 명당 낚시터가 있다고 가정하자. 고객은 그 낚시터에서 높은 만족감을 느낀다. 그 낚시터는 출입 자체는 무료지만 낚시터 주인이 제공하는 낚시물품만 빌릴 수 있다. (부분유료화) 고객은 만족감을 위해 낚시터 주인에게 낚시물품을 빌린다. (이야기 내 요소를 대여의 형태로 판매) 그러다 낚시터 주인이 특정 낚시터에서 좋은 물고기를 낚으면 좋은 낚시물품을 준다는 명목으로 고객들을 경쟁시킨다.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보다 좋은 낚시물품을 빌리게 된다. (경쟁을 부추겨 고가의 물품을 판매) 그때 낚시터 주인은 판매하는 낚시물품에 뽑기에 변동확률을 집어넣어서 좋은 낚시물품을 도박의 형태로 대여한다. (도박과 거짓고지) 낚시터 주인이 고객들을 출입시키기 위해 매일 일정한 낚시물품을 무료로 제공한다. (출석) 매달 일정 금액을 내면 고가의 낚시물품을 매일 저렴한 가격에 제공한다. (구독경제) 고객들은 좋은 낚시물품을 대여하여 고객들과 경쟁하는 걸 즐기는 것으로 만족감을 느낀다. 낚은 물고기는 기록으로 남아 우수한 낚시꾼의 증표가 된다. 이 증표는 실제 물건이 공급되는 것으로 표창이나 트로피 또는 낚시협회의 공인된 낚시꾼으로 명예의 전당에 오를 수 있게 된다. 낚시터에서의 기억과 기록이 애정이 된다. (매몰비용) 그러다가 낚시터 주인이 갑작스럽게 낚시물품의 가격을 올린다. 한창 낚시터에 비용을 지불하던 고객들은 혼란에 빠진다. 갑작스런 가격변동에 불만을 가지고 낚시터를 떠나려고 해도 매몰비용이 아까워 갈등하게 된다. 그렇다고 남자니 낚시물품의 대여비가 부담된다. 더군다나 이번 변동이 계속될 수 있는 확률이 높다. (안정성 부재) 갈등 속에 결국 남게 된다. 낚은 물고기와 낚시물품은 낚시터 주인의 높은 수수료를 받는 중개로만 거래가 가능하다. 수수료 부담으로 다른 방식을 통해 거래를 하다 손해를 보더라도 보상은 일절 없다. (거래보증 부재) 고객이 낚은 물고기나 낚시물품의 품질이 손상되어도 보상은 없다. (품질보증 부재) 고객이 낚시물품을 대여한 다음 날 그보다 품질이 높은 낚시물품을 판매한다. (가치보증 부재) 고객이 이런 것에 불만을 품고 항의하려고 해도 그 어떤 기준도 없다. (소비자분쟁해결기준 부재) 기준이 없기 때문에 고객은 다른 낚시꾼이 이 낚시터에 오지 못하도록 나쁜 소문을 퍼트린다. (별점테러) 끝내 낚시터 앞에서 트럭을 가져와 시위한다. (트럭시위) 어느 날 고객이 낚시터에 가보니 낚시터 시설과 주인이 없다. (게임종료) 그 동안 고객이 대여한 낚시물품이나 낚시기록이 사라졌다. (게임 내 아이템이 대여인 이유) 최근 고객이 대여한 낚시물품 비용은 통장으로 환불되었다. (일반적인 소비자분쟁해결기준) 고객은 허망한 표정을 지으며 주저앉는다. (슬퍼하는 고객)

 

지금 모바일 게임은 대강 이것과 같다. 구매와 환불까지만 기준이 있고 나머지는 아예 없다. 갈등이 일어날 수 밖에 없는 구조다. 이걸 어떻게 해야 하나. 이런 게임업계에 대한 정당한 비판을 부당하다 말하는 것은 전자업계가 전자제품의 보증기간을 무시하는 것에 대한 비판을 부당하다 말하는 것과 같을 정도다. 우선 최소한 세 가지 보증을 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본다. 하나, 거래보증. 둘, 품질보증. 셋, 가치보증.

 

하나, 거래보증. 게임 내 자유롭고 안전한 거래를 보증한다. 모바일 게임A에서 거래보증이 되지 않아 고객a가 현금 1억 9천만원의 손실을 보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에 대해 잠시 설명하겠다. 모바일 게임A는 개인 간 거래를 금지하고 5%의 수수료를 받는 경매장 거래만 가능했다. 고객a는 현금 2억 원의 가치를 지닌 아이템을 거래하고자 했다. 경매장을 거쳐서 거래하면 수수료는 1천만 원이 필요했다. 상당히 비쌌다. 이 수수료를 절약하기 위해 2억 원의 가치를 지닌 아이템을 1천만 원으로 경매장에 올렸다. 이러면 수수료가 50만 원으로 낮아져 9천 500만 원이나 절약할 수 있었다. 이런 방식의 판매는 구매자가 아이템을 1천만 원에 구매하고 나머지 잔금은 다른 방식으로 지불하면 된다. 그런데 경매장에 아이템을 올리자마자 예약한 구매자가 아닌 다른 사람이 사 가버리고 말았다. 경매장에 고가의 아이템이 저렴한 가격에 올라오면 자동으로 구매하도록 설정된 매크로(컴퓨터 프로그램)로 구매한 것으로 추측한다고 한다. 이러면 단순히 2억 원의 아이템을 1천만 원에 팔아버린 것이 된다. 고객a는 현금 1억 9천만 원의 손해를 입었다. 게임회사는 이것이 정상거래라며 어떤 보상도 지급하지 않았다. 물론 이것은 편법을 이용하다 손해를 본 것이 맞다. 그냥 경매장에 2억에 올리고 팔았다면 수수료는 비싸도 정상적인 거래가 가능했을 것이다. 하나 애초에 개인 간 거래를 금지한 것이 잘못되었다. 게임회사가 게임 내 상인이 되어 고객에게 게임 아이템을 현금으로 팔았다. 일종의 디지털 자산을 판매한 격이다. 게임이 종료되면 아이템이 사라지기에 임시 대여의 형태긴 하지만 게임이 존재하는 이상, 그 자산을 소유한 사람은 게임회사에 정당한 소유권을 주장하여 소유물에 대한 정상적인 사용과 수익과 처분을 할 수 있어야 했다. 아예 거래 자체가 안 되는 것이라면 몰라도 경매장을 통한 거래가 가능한 이상 개인 간 거래도 가능했어야 했다. 이용약관을 변명으로 내세울 수도 있다. 그렇다면 묻겠다. 전자기업이 판매한 전자물품의 중고거래를 회사 내 경매장에서만 가능하다 정해두는 것이 타당하다 여겨지는가? 말도 안 되는 폭거다. 물론 보호구역 부동산이나 천연기념물이나 운석 같이 소유권 해석이 달라지는 예가 없는 것은 아니다. 하나 게임 내 상품을 그런 식으로 특별히 대해줄 필요는 없다. 이건 그냥 게임회사만 유리한 불공정한 규칙을 약관으로 만들어버린 것에 불과하다. 가상의 세상이니 현실과 다르다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묻겠다. 인간 사이에서 발생하는 분쟁이 있는데 가상이니 예외라 한다면 그걸 법치가 할 수 있겠는가? 이 세상 법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어야 법치라 할 수 있다. 사사로운 인간관계에 일일이 법치가 적용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건 적용되지 않는 게 아니라 암묵적인 합의하에 그냥 넘어가는 것일 뿐이다. 세세한 것까지 전부 법으로 해결하자는 것이 아니라, 법의 테두리 내에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가상의 세상에서도 법치는 적용되어야 한다. 게임회사가 판매한 디지털 자산에 대한 거래보증을 하지 않는 것은 게임회사의 귀책사유가 된다고 본다.

 

둘, 품질보증. 판매한 상품의 품질을 보증한다. 게임회사가 판매한 상품의 품질을 보증하는 일은 극히 드물다. 본래 게임은 이야기 자체에 가치를 매겨 판매했다 하였다. 그때에 게임 내의 상품은 게임 내의 재화로만 거래할 수 있었다. 그 아이템에 금전적 가치가 없었기 때문에 품질을 보증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것이 관행이 되었다. 게임 내 상품에 금전적 가치를 매겨 판매하게 되었음에도 품질을 보증하지 않았다. 금전적 가치가 매겨진 것에 대한 품질을 보증하지 않자 수백, 수천만의 돈을 지불해도 그에 따른 정당한 대우를 받지 못한 게임 이용 고객들이 분노했다. 게임회사는 관행상 하지 않는 것이었기에 이들의 분노를 이해하지 못했다. 게임 운영에 있어 게임 내 상품의 가치 변동은 언제나 게임사의 권한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다시 말하지만 게임 내 상품에 금전적 가치가 없을 때 해당되는 얘기다. 이를 용인하는 지금의 게임이용약관은 명백하게 잘못되었다. 이 변화를 명확하게 인지해야 갈등의 본질을 알 수 있다. 게임에서 아이템의 품질이 훼손되는 일은 보통 다음과 같다. 밸런스 패치, 버그, 에러 등. 밸런스 패치에 대해 잠시 얘기해보자. 게임은 밸런스가 맞아야 한다. 서바이벌 게임을 한다고 가정해보자. 서바이벌 게임은 제공되는 무기의 성능의 균형이 맞아야 공정한 게임이 가능하다. 완전히 같은 성능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일정한 선을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예컨대 서바이벌 게임의 무기 종류에 검, 창, 활, 총이 있다고 해보자. 이 중 총이 다른 무기에 비해 지나치게 강하다. 총을 든 사람이 너무 유리하여 게임이 재미가 없어진다. 이 총을 빼거나 약하게끔 만들어야 밸런스가 맞게 되어 재미있는 게임이 된다. 이렇게 무기 성능의 균형을 맞추는 것 같은 걸 밸런스 패치라고 한다. 게임회사에서 검, 창, 활, 총에 해당하는 무기를 팔았다고 해보자. 그 중 총의 성능이 지나치게 강하여 약하게 만드는 밸런스 패치를 했다고 해보자. 그러면 게임회사가 판매한 총의 성능이 낮아지게 된다. 밸런스 패치로 아이템 품질이 훼손된 것이다. 그럼에도 게임회사는 관행에 따라 아이템의 품질을 보증하지 않는다. 어떤 보상을 할 의무가 없다. 불만을 잠재우기 위한 게임회사 자체적으로 작은 보상을 하는 경우는 종종 있지만, 품질 보증에 따른 보상이 적용되지는 않는다. 버그나 에러도 마찬가지다. 아이템 품질이 훼손되더라도 그에 대한 보상을 하는 일은 그리 많지 않다. 이것이 잘못되었다. 모든 상품의 품질을 보증하라 하지는 않겠다. 그건 게임운영을 지나치게 어렵게 한다. 그래도 최소한 일정 금액 이상의 상품은 품질을 보증해야 한다. 어떤 캐릭터나 아이템의 뽑기에 쓰인 비용이 일정금액 이상이 되면 그 상품은 품질보증서가 붙어야 한다. 기간은 약 1년 정도는 보증하고, 그 기간 내에 품질이 훼손될 경우 그에 해당하는 게임 내 상품으로 보상해야 한다는 소비자분쟁해결기준이 있어야 한다. 게임 내 요소들을 현금으로 팔아버리다 보니 세부적인 것이 너무나도 많다. 그러니 보증 기준은 상품이 아닌 금액이 되어야 한다. 어떤 상품의 품질이 훼손되면 그 상품을 구매하는데 쓰인 비용을 기준으로 보상해야 한다. 금액보증기간제도다. 금액보증기간제도라면 뽑기 상품을 실제 뽑지 못하더라도 그 뽑기에 지불한 금액을 보증해야 한다. 이런 최소한의 품질보증이 없다면 소비자는 안심하고 구매할 수 없다. 게임회사가 현금으로 판매하는 상품에는 게임회사가 보증하는 보증서가 붙어야 한다. 과금(유료이용고객)과 무과금(무료이용고객)은 앞으로 보증서의 차이로 구분되어야 한다고 본다. 이런 건 어떨까? 과금 상품에는 기본적으로 보증서가 붙고 그 보증서를 누르면 상품에 쓰인 비용이 기록되어 있다. 이후 상품의 품질이 훼손되면 그 금액만큼 보상한다.

 

셋, 가치보증. 판매한 상품의 가치를 보증한다. 요즘 유행하는 모바일 게임은 경쟁이 기본이다. 그러다 보니 상품의 가치를 보증하지 않으면 아예 쓸모 없게 되는 일도 허다하다. 검, 창, 활로 경쟁하고 있는 곳에서 총이 발매된다고 가정해보자. 어떻게 되겠는가? 총이 없으면 경쟁 자체가 어려워져 검과 창과 활은 쓸모가 없게 되어버린다. 최근 검과 창과 활을 구매한 고객은 큰 손해를 보게 되는 것이다. 예컨대 전자제품은 개인의 주관적인 절대평가로 상품의 가치가 판단되어 고성능의 새로운 상품이 발매되어도 어느 정도 가치는 유지된다. 반면 게임의 상품은 객관적인 상대평가로 상품의 가치가 판단되어 고성능의 새로운 상품이 발매되면 가치가 폭락한다. 그 차이로 게인 내 상품은 가치가 보증되어야 한다. 그렇다고 계속 성능이 같기는 어렵다. 그러면 게임업계가 돈을 벌기 어려워진다. 이는 마치 전자업계가 고성능의 신상품을 발매하지 않는 것과 같다. 그러니 최소한의 가치를 보증할 수 있는 기간을 정해야 한다. 시즌제의 도입이다. 일정기간 지날 때마다 게임 내 상품의 성능이 고르게 성장한다. 예컨대 1990년대 무기와 2000년대 무기와 같이 연도별로 나눈 것과 같다고 보면 된다. 6개월 정도 시즌을 나눈다면 그 6개월 안에 발매하는 상품의 성능은 균형이 맞아야 한다. 이렇게 시즌이 있어야 고객이 상품 가치가 언제까지 보증되는지 인지할 수 있다. BM 또한 시즌제로 나눠 일정기간이 지나지 않으면 새로운 BM을 추가할 수 없도록 해야 한다. 게임 초기에는 시행착오를 겪을 수 있으니 예외로 둔다 쳐도 이후에는 지켜야 하는 규정이 되어야 한다고 본다. 이런 시즌제로 게임 내 상품의 가치가 안정적이게 되어야 고객은 안심하고 구매할 수 있게 된다. 만약 지키지 못하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자동차나 스마트폰에 결함이 생기면 전량 리콜하는 걸 보았을 것이다. 시즌이 지켜지지 않아 가치보증이 되지 않았을 경우 게임회사가 그에 대한 모든 책임을 지는 것은 그다지 부당하지 않다고 본다.

 

이런 보증이 게임회사 입장에서 달갑지만은 않게 느껴질 것이다. 하나 소비자가 안심하고 구매할 수 있는 명확한 기준이 있어야 비로소 게임이 사회에 정착했다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외에도 가상의 세상에서 거래하는 이들에 맞는 다양한 소비자분쟁해결기준이 있어야 고객과 회사 사이에서 갈등이 중재되어 감정적인 별점테러도 줄어들거라 본다. 기준이 없기에 고객 또한 게임 자체의 상품화와 게임 내 요소의 상품화를 명확하게 구분 짓지 못했다. 게임 자체의 상품화는 게임 내 요소가 무료다. 무료라는 인식이 모든 게임에서 BM에 대한 이해 없이 게임재화를 요구할 수 있는 근거가 되었다. 그런 고객의 태도에 게임회사 또한 진절머리 치게 되었다. 이는 서로의 몰이해가 만든 갈등이다. 만약 분명한 기준이 정립되면 이런 몰이해는 줄어들거라 본다. 무질서는 고객과 회사 간의 불필요한 분쟁의 야기했다. 이런 현상은 게임회사 혼자 질서를 만드는 것이 아니기에 게임회사에게만 책임을 물을 수는 없다. 지금까지는 시행착오로 여기고 앞으로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가야 한다. 새로운 질서가 험악한 관계를 화합으로 이끌 것이다.

 

 

 

둘째, 효율적인 쾌락의 위험성에 대한 경계 미비

 

게임은 효율적인 쾌락의 마지노선이다. 이보다 덜한 효율에는 소설과 만화와 영화가 있고, 더한 효율에는 도박과 마약이 있다. 현실을 기준으로 쾌락을 얻는데 필요한 노력이 줄어들수록 효율적이다. 정리해보자. 현실을 경험하기 보다 소설을 읽는 것이 효율적이다. 소설을 읽으면서 작중 세상을 상상하기 보다 형상화된 만화나 영화를 보는 것이 효율적이다. 만화나 영화를 보면서 형상화된 가상의 세상에 참여하고 싶은 욕구를 현실에 풀기보다 게임 내에서 바로 체험하여 욕구를 충족해버리는 것이 효율적이다. 게임이 인기가 많은 것은 굉장히 효율적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런데 여기서 더 효율적이게 되면 반사회적이게 된다. 도박과 마약이다. 도박은 단순한 놀이로 큰 돈이 오가는 것으로 큰 쾌락을 얻고 마약은 체내 물질 주입으로 큰 쾌락을 얻는다. 노력 대비 얻는 쾌락의 수치가 굉장히 높다. 그러다 보니 인간의 삶이 피폐해진다. 도박은 인간의 가치관을 망가트린다. 지금까지 소중하게 여긴 것보다 도박의 승리를 더 가치 있게 여긴다. 마약은 인간의 삶을 망가트린다. 마약에 대한 과도한 의존성은 사이비종교와 같이 초법적인 집단을 탄생시킬 우려가 있다. 멕시코 마약 카르텔이 대표적이다. 그런데 사실 마약은 중독성이나 의존성보다 효율이 더 위험하다. 생각해보자. 예를 들어 뇌에 컴퓨터를 연결하여 굉장한 쾌락을 경험한 기억을 주입한다고 해보자. 기억이 주입된 순간부터 그 기억이 재생되면서 실제 경험하는 것과 같게 된다. 그 기억을 주입 받은 사람은 아무런 노력 없이 그 쾌락을 경험할 수 있게 된다. 그러면 마약과 쾌락 기억 중에 무엇이 더 인기 있겠는가? 별다른 부작용이 없고 복잡하고 재미있는 쾌락 기억이 더 인기 있을 것이다. 아마 어떤 경험도 하지 않고 기억 주입만 받으며 살아가는 사람이 생길지도 모른다. 지극히 반사회적이다. 기억 주입이 부작용은 없더라도 인간의 자아에 큰 영향을 줄 확률이 높다. 인간의 자아는 세포의 여론이 형성한 기억을 기초로 한다. 그 기억을 주입 받는다는 것은 기억의 주인의 자아의 일부를 이식 받는 것과 같다. 자아의 복제다. 기억의 추출과 주입이 가능해지면 기억의 상품화가 시작될 것이다. 그러면 인기 있는 기억이 몇 종류 나뉘게 될 것이다. 다수의 사람이 같은 기억을 공유한다. 다수의 사람이 고유성을 잃고 같은 자아가 되어 간다. 썩 좋은 결말은 아니다. 소설과 만화와 영화와 게임을 생각해보면 인간이 즐기는 문화는 점점 더 효율적이게 되었다. 그렇다면 이런 기억 주입도 기술이 발달하면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인류는 효율을 좇다 자아의 자유를 잃어버리게 될지도 모른다. 효율의 끝은 파멸밖에 없다. 따라서 인류는 효율적인 쾌락의 위험성에 대한 경계를 늦춰서는 안 된다.

 

게임은 스펙트럼이 넓다. 정신연령이 낮은 사람도 즐길 수 있는 게임이 있는가 하면 정신연령이 높은 사람도 위험한 게임이 있다. 이는 다른 문화와 다를 바 없지만 직접 체험한다는 점에서 위험도의 정도가 다르다. 위험도는 다양한 기준으로 판단할 수 있는데, 쾌락을 기준으로 한다면 어렵고 복잡할수록 건전하고 쉽고 간단할수록 불건전하다. 이런 노력이 불필요한 불건전한 게임이 효율적인 쾌락의 마지노선이 된다. 게임 내에서 지나치게 낮은 확률로 높은 재화(현금교환이 가능한)를 얻을 수 있다면 그것은 효율에 있어 도박과 다를 바 없게 된다. 마지노선을 넘게 된다. 게임 내에서 노력이 필요한 모든 걸 현금으로 구매해 그 노력으로 얻을 수 있는 쾌락을 단숨에 느끼게 된다면 그것은 효율에 있어 마약과 다를 바 없게 된다. 마지노선을 넘게 된다. 게임이 마지노선을 넘지 않기 위해서는 지나치게 낮은 확률과 높은 대가를 지양하고 목적(예컨대 경쟁에서 승리)을 일정 부분 이상의 노력이 필요하게끔 게임을 설계해야 한다. 앞서 게임 내 요소를 상품화하여 파는 걸 구매하는 이들을 가리켜 치트 능력을 현금으로 사는 이세계인이라 비유하였다. 이세계물은 현실의 주인공이 이세계로 넘어갈 때 쉽게 능력을 얻어 타인보다 우월하게 되는 걸 감정이입하며 즐긴다. 마찬가지로 이런 종류의 게임 또한 쉽게 능력을 사서 타인보다 우월한 것을 체험하는 걸 즐긴다. 이 자체를 나쁘다 말하지 않겠다. 자칫하다가는 마지노선을 넘을 우려는 있으나 그 선을 지킨다면 충분히 즐겨도 된다. 하나 그런 게임이 깊이 있다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치트 능력으로 우월감을 뽐내는 이세계물이 그리 수준 높다 말하기 어려운 것처럼 말이다. 그래픽 수준이 높고 오가는 돈이 많아도 쉽게 산 능력으로 쉽게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면 그 게임은 치트 능력을 보유한 주인공이 등장하는 이세계물과 다르지 않다. 게임은 쉬우면 재미없다는 말이 있다. 거기에 하나 더해 게임은 쉬우면 위험하다라는 말을 붙이겠다. 게임이 반사회적이게 되지 않기 위해서 게임회사는 효율적인 쾌락의 위험성에 대한 경계를 늦춰서는 안 된다.

 

 

 

셋째, 미래산업의 성장동력 저하

 

분명 한국에 기회는 있었다. 충분한 시간이 있었다. 누군가 별다른 고찰 없이 단편적인 생각으로 게임을 악으로 몰지만 않았다면 게임 자체를 상품화하여 팔던 시기에 게임의 사회정착이 가능했을지도 모른다. 그랬다면 효율적인 쾌락에 대한 위험성을 인지하고 그에 대한 충분한 대응책을 마련했을 것이다. 소비자분쟁해결기준도 게임 내 요소의 상품화를 포함했을 것이다. 게임이 사회정착에 성공했더라면 지금 같이 게임개발의 주도권을 빼앗기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제 한국게임보다 나은 외국게임이 수두룩한 상황이다. 그래서 한국은 게임강국이 아니라 게임플레이강국이라는 미묘한 별칭을 얻게 되었다. 안타까운 일이다. 무언가 새로운 것이 나오면 모른다고 무조건 악으로 몰지 말고 충분한 고찰로 현명한 대응책을 마련해야 할 것이다. 일방적인 선입견으로 게임을 홀대하며 악으로 몰아가던 이들이 셧다운제를 만들고 각종 제약과 억압을 주도하여 한국의 게임산업을 쇠퇴시킨 것은 물론이고 게임이 반사회적이게 될지도 모르는 위험에 처해지게 되었다. 셧다운제는 한국 자유의 수치다. 만화의 성장동력은 만화를 악으로 몰던 이들이 저하시켰다면 게임의 성장동력은 게임을 악으로 몰던 이들이 저하시켰다. 너무나도 명백하다. 지금까지는 그렇다 치다. 지금부터라도 게임을 진지하게 바라봐야 한다.

 

생각해보자. 소설과 만화와 영화의 흐름을 생각해보면 필시 게임의 시대가 올 수밖에 없다. 한국에서 이런 게임이란 문화를 단편적으로 생각한다면 한국문화의 미래는 어두울 수밖에 없다. 이미 치트 능력의 구매가 가능한 이세계물 게임의 범람으로 한국 게임의 미래는 밝다고 하기 어렵다. 이런 종류의 게임은 오래가는 것이 드물어 게임 브랜드가 성장하질 못한다. 브랜드가치가 전무한 게임이 줄줄이 나와서 한철 장사하듯 서비스해봐야 한국게임은 성장하지 못한다. 이런 종류의 게임은 내부 구조가 지나치게 단순하여 그래픽 같은 외적인 요소만 발전할 수밖에 없다. 내적인 발전을 할 수가 없다. 창의력이 전무한 게임에 어떤 새로운 가치가 있고 어떤 예술적 가치고 있고 어떤 미래가 있는가? 이런 종류의 게임을 양분 삼아 나오는 다음 게임은 도대체 무슨 가치가 있는가? 똑같은 게임만 계속 양산될 뿐이다. 이런 게임의 범람은 가상의 세상에 질서가 없었기 때문이다. 가상의 세상에서 장사하는 게임업계는 상품에 대한 아무 보증 없이 장사하는 전자업계와 같이 비정상적인 수익을 얻게 된다. 그러니까 능력을 고가에 팔아 높은 수익을 챙기는 이세계물이 유행했던 것이다. 이 유행을 끝내려면 하루빨리 게임 내 요소의 상품화에 대한 소비자분쟁해결기준이 바로서야 한다. 옛날 한국 게임은 분명 어렵고 복잡하여 노력이 필요했다. 어렵고 복잡하여 몰입도도 강했지만 쾌락의 위험성에서는 다소 안전했다. 인간이 어떤 쾌락을 얻기 위해서 이 정도의 노력은 필요하다라는 인식을 주기 충분했기 때문이다. 이런 종류의 게임은 충분히 문화예술이 될 수 있다. 하나 이런 게임은 이세계물에 비해 수익이 좋지 못하다. 이세계물의 비정상적인 수익이 끝이 나야 문화예술이 될 수 있는 게임과 수익이 어느 정도는 비슷해질 수 있다. 그래야 이세계물에 편중되지 않고 모든 게임이 고르게 발전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발전이 미래산업이 될 게임산업 전체의 발전으로 이어질 것이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깨닫는 것이 있다. 지금 정치체제로는 급변하는 시대흐름을 쫓아가기 어렵다는 것이다. 분야의 대표가 입법권을 쥐고 있다면 분야의 성장에 도움이 되는 법안을 즉각적으로 제안했을 것이다. 그랬다면 게임업계가 이런 일그러진 성장을 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법치국가라면 일일이 시위할 것이 아니라 입법으로 싸우는 것이 정상이라 생각된다. 게임 이용 고객이 트럭을 보내는 시위를 하는 것이 유행하고 있다. 그런데 사실 정상적인 절차라면 입법권 대표인 지역구 국회의원에게 이런 분쟁에 대한 공적 논의를 요구했을 것이다. 게임 이용 고객은 전국에 있다. 각 지역의 게임 이용 고객이 각 지역의 국회의원에게 이런 사항을 전달했다면 어쩌면 진작에 소비자분쟁해결기준이 바로 섰을지도 모른다. 이런 게 안 되는 까닭은 국민과 정치가 너무나도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정치가 국민과 관련이 없다 생각하니까 트럭 시위는 하면서 이런 건 할 수 없는 것이다. 애초에 선거 자체도 아예 관련이 없는 사람을 뽑을 수밖에 없게 되어 있다. 나는 지금까지 선거 투표를 하면서 그 후보가 공약으로 내세운 정책이 나와 관련이 있던 적이 많지 않다. 그건 나뿐만이 아닐 것이다. 이게 비정상적이다.

 

자유국가의 국민은 이기적이어야 한다. 자기자신의 의사를 명확하게 표출할 수 있어야 한다. 이기주의가 나쁘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이기심이 잘못을 만드는 것이 아니다. 시야의 좁음이나 지성의 부족이 잘못을 만드는 것이다. 충분한 현명함을 갖추고 있으면 이기적이어도 좋은 결과를 만들 수 있다. 각자의 역할수행이 각자의 이익이 된다고 가정해보자. 그러면 모두가 이기적일 경우 모두가 제 역할을 다하게 될 것이다. 정치가 경제가 사회가 문화가 모두가 각자 자기 역할에 충실하기만 해도 기본적인 행복요건은 달성할 수 있다. 그것이 무엇이 나쁘겠는가? 모든 국민이 자기자신의 의사를 명확하게 표출할 수 있도록 직접적인 이해관계가 있는 사람이 국민의 대표가 되어야 한다. 이해관계가 있는 집단의 대표가 입법권을 쥐어야 한다. 이해관계가 있는 분야의 대표가 입법권을 쥐어야 한다. 분야의 대표가 입법을 공약으로 내세워야 한다. 분야에 속한 국민은 그 공약을 보고 후보를 선택해야 한다. 그렇게 해서 모든 국민이 자신의 의사를 입법에 반영하는 걸 경험해야 한다. 그렇게 하면 선거에 대한 책임의식이 싹트게 될 것이다. 의사반영과 책임의식은 분명 국민의 정치의식의 성장을 도울 것이다. 그 성장이 한국 정치의 성장으로 이어질 것이다. 한국 정치의 성장이 한국의 성장으로 이어질 것이다. 한국의 성장이 한국인을 행복하게 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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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엔 쉬어가는 글이었는데 생각보다 생각할 게 많았네요. 다음 글은 인간교육입니다. 그 다음은 어쩌면 역할주의입니다. 역할주의를 정리하는 건 생각보다 어렵군요. 다양한 주제를 정리하면서 필요한 생각과 지식을 쌓아야 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성추행과 구조도 분간 못할 정도로 성에 취약한 여성이 정상적인 구조를 성추행으로 신고, 그 신고를 믿고 구조하려던 남성을 처벌, 그 처벌로 위험한 여성을 구조하려는 남성 수의 격감, 남녀갈등의 고조화, 분열, 붕괴, 이것을 초래한 사람은? 여성이 성에 취약하도록 세뇌한 정조관념이 투철한 여성주의자. 간단합니다. 성상품화가 불편한 까닭도 그걸 불편하게끔 성에 취약하도록 세뇌했기 때문에 불편한 겁니다. 인간이 성을 보고 불편한 게 정상일 수가 없습니다. 과거 남성이 여성에게 주입한 정조관념을 어떤 여성들이 그걸 여성의 본성인 마냥 취급해서 성에 취약한 걸 여성인권이라 주장하고 있는 것일 뿐입니다. 일부 여성이 그런 자신의 이익을 위해 다른 여성을 약자로 만드는 꼴을 두고 보기 어렵네요. 여성이기 때문이라기보다 인간을 약자로 만드는 꼴을 보고 있을 수가 없습니다. 선천적으로 약한 사람은 어쩔 수 없을지 모릅니다. 하나 강해질 수 있는 사람은 강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예컨대 의지가 그렇습니다. 인간의 의지는 타고납니다. 대부분의 아기가 의사표현 할 것이 있으면 울고 봅니다. 거의 모두가 강한 의지는 타고나는 겁니다. 의지가 약한 사람은 환경에 의해 의지가 꺾였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는 그렇다 칩시다. 지금부터라도 인간을 약하게 만들지 마십시오.

 

A당이 잘못하면 B당이 권력을 쥐고 B당이 잘못하면 A당이 권력을 쥐는, 실상 양당이 정치를 독점하는 구조. 잘못되었다고 봅니다. 정치가 개개인이 아니라 이런 구조가 잘못되었다고 봅니다.

 

저출산 문제는 나한테 대책 비용의 절반만 줬어도 해결했을 겁니다.

 

생활능력은 꽝이라 사는 게 힘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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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자유와 도덕 (0) 2021/06/28 PM 03:10

자유와 도덕

 

 

 

인간에게 부과된 도덕적 의무는 없다. 현존하는 도덕적 의무는 어느 시대에 누군가 어떤 목적을 위해 도덕을 의무화하여 대중에게 전파한 것이 현재까지 남아있는 것일 뿐이다. 간단히 정리해보자. 도덕이란 인간 상호 관계 속에서 옳고 그름을 판단하여 올바르게 행동하기 위한 규범의 총체다. 여기서 규범은 언제나 시대와 장소에 따라 달라진다. 의무[철학]란 도덕적으로 필연성을 가지는 요구로서 인간의 의지 및 행위에 부과되는 강제 및 구속이다. 올바르다는 이유로 강요한다. 즉 도덕적 의무란 어떤 특정한 규범이 인간에게 강요되는 걸 뜻한다. 규범이 교리로 바뀌면 종교적 의무가 된다. 도덕적 의무는 종교적 의무와 마찬가지로 의심하지 않고 당연히 해야 한다. 도덕적 의무는 법적 의무와 달리 영속하다. 법적 의무는 법이 바뀌면 없어지지만 도덕적 의무는 나라가 바뀌어도 남아있다. 도덕적 의무는 미래로 향하는 배가 과거에 영원히 머무르게 하는 보이지 않는 무거운 닻이다. 닻에 걸린 줄 모르고 미래로 향하다 다시 과거로 돌아온다. 과중한 도덕적 의무를 짊어졌던 조선을 이은 한국이 강요로 운영되었던 것은 필연이었다.

 

도덕적 의무에 대해 알아보자. 지금 전염병으로 마스크를 착용하는 것이 일상화되어 있다. 지금 마스크 착용은 올바른 일이다. 이 올바름을 의무화한다고 가정해보자. 사람들은 이 도덕적 의무를 지키기 위해 전염병이 없음에도 마스크를 착용한다. 착용하지 않는 이는 부도덕하다며 공격한다. 마스크 착용여부로 옳고 그름이 결정된다. 마스크를 착용하지 않는 인간은 각종 모욕과 비난을 받게 된다. 이것이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하나 이건 실존한다. 과거 만들어진 도덕적 의무 때문에 불필요한 의무를 행하는 것이 많다. 세 가지를 언급해보겠다. 하나, 연령차별. 조선의 질서를 유지했던 이것은 자유롭고 평등해진 한국에는 더 이상 필요가 없다. 그럼에도 규범으로 강요되고 있다. 이것으로 발생하는 꼰대는 비판하면서 상하관계는 철저히 따지는 모순이 종종 목격된다. 이 의무를 따르지 않는 이를 예의범절을 모른다며 공격한다. , 민족의 통일. 이것은 분단되었던 시기 발생한 민족주의자의 염원이다. 이것은 민족주의자에게 도덕적 의무가 되었다. 민족주의자는 본인이 본인에게 통일이라는 무거운 의무를 부과하며 타인도 당연히 해야 할 의무로 인식한다. 이것이 의무기 때문에 민족주의자들은 북한에게 굽히고 들어간다. 선택인 사람들은 그걸 이해하지 못한다. 남북에 관련된 국내갈등은 대체로 통일이 의무인 사람과 선택인 사람 사이에서 발생하는 몰이해 때문이다. 이 의무를 따르지 않는 이를 반민족주의자라며 공격한다. , 정조관념. 이것은 남성이 여성에게 주입한 그릇된 관념이다. 이 그릇된 관념을 소중하게 여기는 이들이 성을 터부시하고 있다. 외적인 코르셋은 탈피하려 애를 쓰면서 내적인 코르셋은 소중하게 여기고 있다. 정녕 남성이 주입한 코르셋을 벗고자 한다면 성에 대한 관념도 남성과 비슷해야 할 것이다. 성에 대한 터부는 해외도 마찬가지라고 할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정조관념의 주입은 해외도 마찬가지다. 그러니까 비슷하다. 이 의무를 따르지 않는 이를 성인지감수성이 부족하다며 공격한다. 이것들이 위의 예와 구조가 비슷하다. 어쩌면 이해하기 어려울지도 모르겠다. 그러니 이해하기 쉬운 예를 들어보겠다. 도덕적 의무는 종교적 의무와 비슷하다. 맹목적으로 따르게 되기 때문이다. 종교적 의무로 접근해보겠다. 이슬람에서는 돼지고기 섭취가 금지되어 있다. 이는 꾸란에서 금지했기 때문이라 한다. 간단히 말해 종교적 의무다. 꾸란에서 금지했던 까닭에 대해서는 다양한 의견이 있으나 대체로 당시 유목민족이었던 이들에게 돼지고기가 적합하지 않았기 때문이라 추측한다고 한다. 과거에는 돼지고기를 금지할 필요가 있었다. 그 필요가 교리를 통해 의무가 되자 필요가 없어진 지금도 금지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의무는 플라시보 효과처럼 굳게 믿을 때 단순 심리뿐만이 아니라 생리적인 영향까지 끼치게 된다. 연령차별을 도덕적 의무로 여기는 이들이 반말을 들을 때 느끼는 심리적인 불쾌감은 이에 비롯된다. 채식주의자가 느끼는 고기 섭취에 대한 생리적인 불쾌감은 유전적 요인이 아닐 경우 채식이 도덕적 의무 때문이다. 비폭력주의자가 폭력에 간접적이라도 관련되면 모욕적인 불쾌감을 느끼는 것도 비폭력이 도덕적 의무이기 때문이다. 어떤 여성이 남성 경찰관이나 소방관에게 구조받을 때 느끼는 성적인 불쾌감도 정조를 지키는 것이 도덕적 의무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도덕적 의무는 인간의 생리까지 간섭하는 너무나도 무겁고 위험한 강요를 받는 저울대다. 강요된 의무를 어기면 저울이 불행으로 기울게 된다. 이런 도덕적 의무를 단편적인 생각으로 사람들에게 강요하듯 주입하는 교육은 굉장히 위험하다는 것을 강조하겠다. 결벽증 환자가 있다고 가정하자. 결벽증 환자는 더러운 것에 지나치게 예민하여 삶이 불행할 정도로 취약하다. 그런 교육은 결벽증 환자를 양산하는 것과 같다. 교육대상을 교육을 통해 의무를 짊어지게 하는 것으로 특정한 것에 약하게 만들어 교육하는 자를 따를 수 밖에 없게끔 한다. 이는 정신적 장애까지 일으킬 수 있는 최악의 수단이다. 자유와 완전 배치되는 일이다.

 

민족에게 부과된 도덕적 의무가 특유의 민족성으로 나타나곤 한다. 각각의 민족이 독특한 특성을 지는 까닭은 이 때문이다. 비슷한 도덕적 의무를 지닌 가까운 국가가 비슷한 특성을 지닌 것도 이 때문이다. 민족주의자는 도덕적 의무로 나타나는 민족성을 지키는 것이 올바르다 여길지도 모른다. 하나 그것은 개인의 개성을 말살하는 결과를 낳게 된다. 자유와 배치된다. 현대 국가는 도덕적 의무로 나타나는 민족성을 국가의 정체성으로 삼을 것이 아니라 이념을 정체성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한국은 자유를 정체성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하겠다. 자유국가에서 자유를 정체성으로 삼자고 주장하고 있다. 이게 얼마나 당연한 걸 주장하고 있는지 알아주었으면 한다.

 

도덕적 의무는 종교적 의무와 마찬가지로 한번 의무가 되면 시공간을 초월해 지켜야 하는 것이 된다. 의무가 생겨나면 이후 세대는 불필요한 의무를 짊어지게 된다. 조선 후기 수많은 허례허식이 바로 그러하다. 전대가 만든 예절이나 법식을 의무화하여 전부 지키다 보니 쓸데 없는 허례허식이 늘어난 것이다. 도덕적 의무는 결국 이런 식으로 특정 세대가 이후 세대에 부과한 의무에 불과하다. 원시인까지 거슬러 올라가면 애초에 인간에게 도덕적 의무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인간에게 부과된 도덕적 의무는 없다는 것이다. 이 시대는 이 시대의 것이다.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지금 살아있는 사람의 것이다. 산 자가 죽은 자로부터 해방되어야 한다. 현재의 도덕은 이제 생물이다. 지금까지 도덕이 만들어졌을 때 인터넷과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 있었던가? 언제 어느 때건 사건의 옳고 그름을 토론할 수 있는 수단이 있었는가? 과거의 도덕은 박제된 생물이었다면 현재의 도덕은 살아있다. 과거엔 죽은 자가 산 자의 옳고 그름을 판단했다. 현재는 산 자가 산 자의 옳고 그름을 판단한다. 이제 옳고 그름을 산 자가 판단해도 될 정도의 성숙한 지성과 시스템을 갖추었다. 인간이 자유롭기 위해서는 더 이상 도덕적 의무라는 이름으로 과거에 속박되어서는 안 된다. 도덕은 맹목적으로 의무를 짊어질 것이 아니라 지성적으로 필요한 것을 지켜야 한다. 이것이 자유의 시작이다.

 

 

 

인간은 필요로 도덕을 지켜야 한다. 그렇게 해야 과거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 도덕적 의무가 없더라도 반드시 필요한 것은 지켜지게 되어 있다. 인류는 인간의 생존권을 보장하기 위해 인간 보호를 미덕으로 만들고 인간 살해를 악덕으로 만들었다. 이 구조에서 도덕적 의무의 필요성은 존재하는가? 존재하지 않다. 오히려 그릇된 도덕적 의무는 인간 살해마저 미덕으로 만들 수 있다. 명예살인이라는 것이 있다. 명예를 지킨다는 도덕적 의무로 인간을 살해한다. 그 사람에게 있어 그것은 미덕이다. 종교적 의무에 의해 인간 살해를 선행으로 여기는 일도 있다. 이교도 살해다. 현재까지도 세계 각지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이쯤 되면 차라리 이들이 부과된 의무를 저버리는 것이 인류의 생존에 도움이 된다.

 

이런걸 보면 사이코패스의 악마화나 성선설과 성악설이 얼마나 구시대적인지 알 수 있다. 인간은 사이코패스가 아니더라도 정당화할 수 있는 수단이 있으면 얼마든지 흉악한 짓을 저지를 수 있다. 사이코패스는 그냥 감정결핍 장애를 가진 사람이다. 그들이 바르게 살고자 하는 의지가 있다면 그들을 선입견으로 바라봐서는 안 될 것이다. 성선설과 성악설로 가보자. 도덕적 의무로 인해 인간을 살해하는 인간은 성선인가? 성악인가? 그 도덕적 의무는 특정 집단에게 있어 선일 것이다. 반면 그 집단 외는 악일 것이다. 이와 같이 선과 악은 도덕적 기준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진다. 이런 상황에서 성선설이나 성악설이 의미를 가질 거라 보는가? 이것은 그냥 낡은 관점이다. 흉악한 사건이 발생하면 피해자는 거들떠도 보지 않고 가해자만 보고 인간은 원래부터 악하다 말하는 일이 있다. 이건 그냥 단지 인간의 잘못을 인간 태생의 문제로 만들어 책임을 회피하려는 태도에 불과하다. 인간은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다. 인간의 본성을 멋대로 규정하는 일은 위험하다 말하고 싶다.

 

도덕은 생존권과 같이 인간을 위해서 만들어진다. 생존권 이외에도 다양한 것이 있을 것이다. 이번 주제가 자유이므로 자유권을 기준으로 생각해보겠다. 인간의 자유권을 보장하기 위해 무엇을 미덕으로 삼고 무엇을 악덕으로 삼아야 하는가?  미덕은 의지와 지성이고 악덕은 강요와 세뇌다. 인간의 자유를 억압하는 강요와 강제 세뇌가 악덕이고 이 악덕에 저항할 수 있는 의지와 지성이 미덕이다.

 

한국에서 강요는 크게 네 가지가 있다. 연령으로 강요하는 것을 가리켜 꼰대라고 한다. 권력으로 강요하는 걸 가리켜 독재라고 한다. 재력으로 강요하는 걸 가리켜 갑질이라고 한다. 약함으로 강요하는 걸 가리켜 정치적 올바름이라고 한다. 강요란 억지로 요구하는 것을 뜻한다. 연령으로 강요하는 것은 유교의 장유유서에서 비롯되었다. 장유유서는 어른과 어린이 사이의 도리는 엄격한 차례가 있고 복종해야 할 질서가 있음을 이른다. 이걸로 연상이 연하를 지배하여 강요했다. 꼰대는 유교를 기준으로 도덕적 의무를 행하는 지극히 도덕적인 인간이다. 유교가 끼친 영향에는 연령차별 외에도 여성차별도 있을 것이다. 부위부강은 아내는 남편을 섬기는 것이 근본이라 하였다. 이걸로 남성이 여성을 지배하며 강요했다. 정조관념이 대표적이다. 유교의 도덕적 의무에서 해방되어 무엇이 진정한 자유와 평등인지, 그리고 무엇이 인간을 행복하게 하는지에 대한 고찰이 필요할 것이다. 이런 연하나 여성의 차별은 자유권을 기준으로 보면 악덕이 된다.

 

권력으로 강요하는 것은 군부독재나 공산독재가 있다. 정당의 손익으로 가치를 판단하는 정당주의자에 의해 독재가 정당화되는 일이 있다. 진영논리로 반공주의자나 민족주의자가 군부독재나 공산독재를 옹호하기도 한다. 자유주의를 추구해야 할 반공주의자가 군부독재를 옹호하고 민주주의를 추구한다는 민족주의자가 공산독재를 옹호하는 것은 한국 정치의 희극이자 비극이다. 이는 국민들이 유교의 도덕적 의무에 강하게 영향 받아 현대 이념을 가지지 못했던 것과 함께 선동에 취약한 지역별 대표가 입법권을 쥐었기 때문에 발생하는 현상이다. 유교의 도덕적 의무에서 해방된 뒤 현대 이념을 공부하여 새로운 도덕을 만들어가고, 입법이 공약이 되게 될 분야별 대표가 입법권을 쥐게 된다면 이 현상은 긍정적으로 변화할 것이라 본다. 이런 독재 옹호는 자유권을 기준으로 보면 악덕이 된다.

 

재력으로 강요하는 것은 구매자 갑질이나 하청 갑질이 있다. 자본논리로 이런 갑질을 합리화하기도 한다. 구매자 갑질을 보자. 손님은 왕이 아니다. 지불한 대가만큼 서비스를 받는 것이 타당하다. 역할로 가치를 평가하는 역할주의적 관점에서 보자. 판매자는 일정한 대가를 받고 판매자가 소유한 능력을 가지고 잠시 서비스해주는 것일 뿐이다. 구매자는 판매자가 제공하는 서비스라는 역할까지만 요구할 수 있다. 이는 연예인도 마찬가지다. 연예인은 자신의 예능이란 역할까지만 판매하고 있을 뿐이다. 팬이란 이름의 소비자가 연예인의 예능 외의 사생활에 간섭하는 것은 갑질이다. 하청 갑질을 보자. 하청 갑질도 같다. 원청은 대가를 지불한 것만큼만 하청에게 요구할 수 있다. 계약 외의 요구사항은 갑질이 된다. 역할주의적 관점을 가진다면 이 현상은 감소할 것이라 생각한다. 이런 갑질의 합리화는 자유권을 기준으로 보면 악덕이 된다.

 

약함으로 강요하는 것에는 정치적 올바름이나 여성주의가 있다. 약자나 소수자에 대한 이해와 관용과 배려를 하게끔 훈계한다. 다른 것은 강함으로 강요하나 이것은 약함으로 강요한다. 이것은 시대의 변화가 만든 진통이다. 사회적 참여도가 낮았던 약자가 처음으로 타인에게 강요할 수 있는 위치에 서자, 사회에 대한 어떤 사상적 고찰도 없이 특정 이들의 이익만을 강요하게 되었다. 사회 전체가 아닌 특정한 이들의 입장만 고려하는 것에서 이들의 미숙함이 드러난다. 이것은 올바르니까 네가 도덕적 의무를 짊어져야 해. 그걸 하지 않으면 네가 잘못된 거야. 약자만을 위한 논리를 만들고 그 논리를 타인에게 강요한다. 여성주의는 보다 더 심각하다. 노예로 살았던 흑인들조차 흑인주의를 대놓고 내세우지는 않는다. 지나치게 편협하다. 여성의 입장만 고려하는 이들이 국가정책에 깊게 관여하는 것은 국가에 있어 중대한 실책이 된다. 여성도 이제는 사회 전체를 바라보는 성숙한 시각을 가져야 할 것이다. 나는 한국 여성들이 현명하다 생각한다. 충분히 가능하다. 이런 훈계는 자유권을 기준으로 보면 악덕이 된다.

 

한국에서 강제 세뇌는 크게 세 가지가 있다. 도덕적 의무를 부과하는 것. 정치적 선동을 전파하는 것. 종교적 맹신을 설파하는 것. 세뇌란 본디 가지고 있던 생각을 다른 생각으로 개조하거나, 특정한 사상과 주의를 주입하는 일을 뜻한다. 이것이 강제되면 악덕이 된다. 한국에서 도덕적 의무를 부과하는 것에는 유교를 비롯해 채식주의나 비폭력주의나 여성주의 등이 있다. 도덕적 의무에 강제로 세뇌된 이들은 도덕에 대해 의심치 못하고 맹목적으로 행한다. 그 행함에 있어 심리를 넘어 생리적인 영향까지 받게 된다. 한국에서 정치적 선동을 전파하는 것에는 반공주의나 반미주의 같이 이념과 국가를 반대하는 것에 있다. 정치적 선동에 강제로 세뇌된 이들은 선동 목적을 생각지 못하고 맹목적으로 행한다. 본인의 이익보다 선동한 타인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이타주의자가 되어버린다. 이타주의가 올바르다라는 풍조가 있기 때문에 그것이 잘못된 것임을 의심치 못한다. 정치적 선동에 도덕적 의무가 겹쳐 파괴적인 효과가 나타난다. 한국에서 종교적 맹신을 설파하는 것에는 다양한 종교들의 선교나 포교가 있다. 일반적으로 사이비 종교다. 종교적 맹신에 강제로 세뇌된 이들은 인생 자체가 종교에 속박된다. 본인의 이익보다 설파한 타인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것을 넘어서 본인이 종교가 되고 종교가 본인이 된다. 종교가 아니면 살아가는 것 자체가 어려워진다. 맹신을 가리켜 종교적이다라고 말할 정도로 종교의 세뇌가 가장 강도 높다. 이런 강제 세뇌는 자유권을 기준으로 보면 악덕이 된다.

 

이와 같이 자유를 기준으로 하면 강요와 강제 세뇌가 악덕이 된다. 이에 저항하기 위해서는 강요에 맞설 수 있는 굳건한 의지와 강제 세뇌에 속지 않을 지성이 필요하다. 강한 의지가 미덕이다. 현명한 지성이 미덕이다. 둘 다 강함을 요구한다. 약함이나 무지는 악덕에 휘말릴 수 있으므로 온전한 자유를 누리기 어렵다. 최근 약함으로 타인에게 강요하는 사상이 유행하여 약함을 내세우는 일이 종종 있다. 체력이 약하니까 배려해라. 배려하지 않는 네가 잘못이다. 지식이 부족하니 이해해라. 이해하지 못하는 네가 잘못이다. 그 뻔뻔함을 악덕이라 부르기까지는 어려워도 미덕이라 부를 수는 없을 것이다. 힘이 약한 사람도 강한 의지와 현명한 지성을 갖출 수 있다. 어떤 장애를 가진 이를 제외하고는 강함을 얻을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그래야 온전한 자유를 얻을 수 있다. 약함으로 배려를 얻고자 하는 이는 온전한 자유를 누리기 어렵다는 걸 강조하고 싶다. 여성이든 아동이든 노동자든 소수자든 자유롭고 싶으면 의지와 지성이란 강함을 갖춰야 한다.

 

의지란 어떠한 일을 이루고자 하는 마음이다. 이런 의지를 가지고 있어야 강요에 맞설 수 있다. 어떤 교사가 학생을 폭행한 사건이 있다. 그 때 학생은 교사의 강요로 체벌이 없었다고 증언했다. 경찰은 그 증언을 믿었다. 이때 유교적 관점으로 보면 경찰이 미숙한 학생의 의지박약을 의심하여 좀 더 조사했어야 했다. 자유적 관점으로 보면 학생이 강한 의지를 갖고 부당한 행위에 맞서 싸울 수 있어야 했다. 되려 경찰이 학생의 의지박약을 의심하는 것이 무례한 일이 된다. 학생이 어떤 장애를 가지지 않는 이상, 학생의 자유의지에 따른 증언을 믿는 것이 자유의 미덕이다. 의지의 강함을 전제하는 것. 그리고 그 강함을 갖출 수 있는 교육이 필요하다. 배려로 끝나는 이타적인 사상은 결코 자유에 적합하지 않다.

 

의지를 가지고 자유롭게 어떤 일을 할 때, 그 의지에 맞는 책임을 지는 것도 동반된다. 어떤 노인이 산불감시원 직무에 지원하여 면접시험을 보다 사망한 사건이 발생했다. 직무를 수행하기 위한 능력을 검증 받기 위해 등산하다 사망한 것이다. 유교적 관점으로 보면 노인의 지원 자체를 막았어야 했다고 할 수 있다. 하나 자유적 관점으로 보면 노인의 지원은 자유롭다. 대신 그 만큼 자유에 대한 책임은 본인이 진다. 사망할지도 모른다는 리스크를 본인이 지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자유에 책임이 따른다고 말을 하면서 위험감수라는 책임은 지려하지 않는다. 그것은 자유를 기준으로 부도덕하다. 인터넷 실명제 논의가 있었다. 어떤 사람은 어차피 악플을 달지 않을 거라면 실명제 해도 괜찮을 것이 아니냐며 실명제를 옹호했다. 실명제를 비판하는 사람을 가리켜 잠재적 악플러로 간주했다. 그렇다면 묻겠다. 어차피 죄를 짓지 않을 것이니 외출 시 가슴에 이름표를 부착해도 괜찮은가? 이름표 부착을 비판한다면 잠재적 범죄자로 간주해도 괜찮은가? 인터넷과 현실을 동일시 할 수는 없다. 하나 논리는 같다. 어떤 도덕적 명분으로 사생활의 자유를 억압한 것이다. 이런 태도는 자유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기 때문에 나타난다. 모든 자유는 위험을 동반한다. 세상 어딜 가든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위험국가로 선교하러 간 선교자들은 그 위험을 감수했어야 했다. 그와 같은 것이다. 인터넷 세상도 악플이란 위험이 가득하다. 자유롭고 싶으면 그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그걸 방치하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불쾌하면 커뮤니티에 신고하고 차단하면 된다. 악플 때문에 모든 의견 자체를 막거나 실명제를 도입하는 것은 자유를 기준으로 부도덕하다.

 

지성이란 지각된 것을 정리하고 통일하여, 이것을 바탕으로 새로운 인식을 낳게 하는 정신 작용. 넓은 뜻으로는 지각이나 직관, 오성 따위의 지적 능력을 통틀어 이른다. 이런 지성이 있어야 강제 세뇌에 속지 않을 수가 있다. 지각된 것을 정리하고 통일한다. 알고 깨달은 것을 정리하고 통일한다. 무엇을 안다는 것인가? 자신을 아는 것에서 시작해야 한다. 내가 밥을 먹고자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허기졌기 때문이다. 이런 단순한 행동원리부터 시작해 대부분의 행동원리를 파악한다면, 어떤 세뇌가 강제되어도 그 세뇌가 끼치는 영향을 파악하여 원래의 행동원리와 세뇌 후의 행동원리를 구분 지을 수 있다. 이미 세뇌가 되어 있어도 냉정하게 판단할 수 있다. 나도 연하의 반말이 불편했던 적이 있다. 그런데 그 불편함이 유교에 영향을 받았음을 깨닫고 없애려고 노력했다. 그 도덕적 의무는 자유에 있어 불필요한 것이었다. 그렇게 나는 연령차별이란 도덕적 의무에서 해방되었다. 정치적 선동이나 종교적 맹신도 방법은 같다. 자신을 알고 있다면 선동과 맹신에 속지 않을 수 있다. 객관적으로 보는 방법을 말하겠다. 정치적 선동을 당하지 않으려면 정당 이름을 지우고 바라보면 된다. 가령 어떤 사람이 어떤 정당을 지지한다고 해보자. 그 사람이 정당에 선동되지 않으려면 정당의 하는 일을 바라볼 때, 정당의 이름을 지우고 행동 자체만 바라보면 된다. 반공주의자가 선동 당하지 않으려면 정당 이름을 지우고 친공산주의 행위를 저질렀는지에 대해서만 초점을 맞추면 된다. 민주주의자가 선동 당하지 않으려면 정당 이름을 지우고 반민주주의 행위를 저질렀는지에 대해서만 초점을 맞추면 된다. 행위에 초점을 맞추면 선동에서 다소 안전하다. 이는 종교도 마찬가지다. 종교 이름을 지우고 종교의 행동을 바라보면 옳고 그름이 분명해진다. 종교인이 죄를 지었음에도 종교인이라는 이유로 옹호하는 일이 있다. 그 때 종교를 지우고 죄만 바라본다면 옹호할 수 있겠는가? 이렇게 자신을 아는 것으로 자유를 얻은 이가 다양한 것을 아는 것을 바탕으로 새로운 인식을 낳게 하는 것을 가리켜 지성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자유롭기 위해서는 의지와 지성을 가지고 강요에 맞서고 세뇌에 속지 않아야 한다. 이러면 분명 불필요한 도덕적 의무에서 해방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만큼 필요한 것을 명확히 구분 짓고 필요한 만큼은 자발적으로 지켜야 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간단히 말하자. 본인의 생존권을 보장받고 싶으면 타인의 생존권을 보장해야 한다. 본인의 자유권을 보장받고 싶으면 타인의 자유권을 보장해야 한다. 슬픈 일이 있으면 유명인이나 지인이 슬픔이란 도덕적 의무에 동참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공격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그것은 잘못된 것이다. 낡은 도덕적 의무로 타인의 자유권을 침해하는, 자유의 관점에서 악덕이다. 성적 억압을 받는 이가 성적 자유를 누리는 이에게 성 상품화를 빌미로 공격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그것을 잘못된 것이다. 이것은 애초에 성적 매력의 상품은 잘못된 것이 아니기에 어처구니 없는 일이다. 모든 개인은 자신의 능력을 상품화하여 소유한 뒤 대여의 형태로 거래해야 한다. 거기에 성적 매력이 없어야 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성 상품화가 되었다고 가정해보자. 그 상품의 주인은 누구겠는가? 바로 상품화한 본인이다. 그 상품을 구매하는 이들은 성적 매력 외의 것에 간섭할 수 없다. 성적 매력을 판매하는 이와 성적 매력은 별개로 구분된다. 그렇게 함으로써 성적 매력을 판매하는 이는 자유로울 수 있다. 이런 것을 공격하는 것은 유교적 정조관념이나 여성주의적 탈코르셋(외면에만 집중하는)에 영향을 받았을 뿐이다. 성 상품화를 이유로 포뮬러1그리드 걸 폐지는 자유의 관점에서 분명한 악덕이다. 그 외 도덕적 의무를 명분으로 창작의 자유나 발언의 자유 등을 억압하는 행위는 지극히 부당하다 할 수 있겠다. 창작물을 즐기는 입장에서 창작의 자유를 부디 넓은 의미에서 받아드렸으면 좋겠다.

 

연령, , 자산, 학력, 역할 등은 관계 없다. 자유국가에 속한 모두가 자유로워야 한다. 우리는 진리를 모른다. 거대한 우주 속에서 지구는 데굴데굴 어디론가 굴러가고 있다. 그런데 왜 존재하는지, 왜 굴러가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모르기 때문에 자유롭다. 육체를 알기에 자유로웠다면 세상은 모르기에 자유롭다. 이 모순은 를 기준으로 하면 설명이 된다. 나의 육체는 알기에 자유롭지만 나 외의 것은 모르기에 자유롭다. 세상은 뭐든지 해도 된다. 설령 죄를 짓더라도 사후에 처벌받는 일은 없다. 그것은 높은 수준의 현대과학의 편린도 찾기 어려운 과거의 공상이 만들어낸 산물이다. 인간이 저지르는 행위에 제한이 없으면 사회가 혼란스러울 거라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니까 우리가 만들어야 한다. 한국이 자유롭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내가 자유롭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도덕적 의무에서 벗어난다면 그 의무로 질서를 유지하던 시대는 끝나게 된다. 새로운 시대를 만들어가야 한다. 인터넷이라는 희대의 소통 도구를 통해 자유를 기준으로 한 옳고 그름이 무엇인지 모두가 끊임없이 대화를 하며 만들어가야 한다. 이제 도덕은 살아있는 생물이라 했다. 이 생물을 어떻게 키울지는 이제 현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 손에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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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에게 부과된 도덕적 의무는 없다. 이 한 줄을 위해 3주를 썼네요. 이게 일반적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처음 쓰겠다고 했을 때는 단순 책임 여부만 고려했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끝날 게 아니더군요. 자유란 무엇인가 도덕이란 무엇인가 자유에 맞는 도덕은 무엇인가 도덕적 의무는 무엇인가 등 3주간 생각하면서 메모하고 하루 동안 글을 썼습니다. 다음 글은 글쎄요 필요한 걸 쓰겠습니다.

 

미국의 브랜다이스 판사가 정치적 의사 표현의 자유를 제한하는 법에 대한 판례에서 한 말입니다. 독립을 쟁취해낸 선조들은 국가의 궁극적 목적이 인류가 능력을 기르도록 자유롭게 하는 것이고 정부의 심의 권력이 전횡적 권력을 압도하는 것임을 믿었다. 그들은 자유를 목적이자 동시에 수단으로 평가했다. 그들은 자유가 행복의 비결이며 용기가 자유의 비결임을 믿었다. 그들은 원하는 대로 생각하고 생각하는 대로 말할 수 있는 자유가 정치적 진실을 발견하고 확산하는 데 필수 불가결한 방법이라고 믿었다. 언론과 집회의 자유가 없다면 토론이 무익함을 믿었으며, 그러한 자유가 있음으로 해서 토론이 불건전한 교의의 확산을 충분히 방어할 것이라고 믿었다. 자유에 대한 가장 큰 위협은 힘없는 사람들을 괴롭히는 것이라고 믿었다. 공적 논의는 정치적 의무이며, 이 의무가 미국 정부의 기본 원칙임을 믿었다. 이것이 투쟁하는 자유주의의 신조라고 주장한 존 듀이의 자유주의와 사회적 실천에서 발췌했습니다.

 

프랑스 자유주의 루소 자연으로 돌아가라

독일 사회민주주의 칸트 정언명령 감성은 지성이 준 명령(인간성이란 이름의 특정한 도덕)을 의무로 따르라

 

대강 이런 느낌을 받았습니다. 뭐라고 해야 하나, 어떤 사상이 국가 이념에 영향을 끼쳤다고 해야 할까요? 자세한 것은 좀 더 알아봐야겠지만요.

 

만약 분야별 의석이 도입되어 분야의 대표가 입법권을 쥐게 된다면 분명 역할주의가 실질적인 의미를 갖게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입법권 후보자의 공약이 입법이 아니라는 점이 이상했지요. 분야의 대표가 입법권을 쥐게 된다면 분명 후보자의 공약은 입법이 될 것입니다. 우선 이것을 실제 달성해야 할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역할수행으로 집단의 질서가 유지되고, 역할 외는 자유로움으로 개인의 개성은 유지된다. 개인과 개인의 능력을 분리하여 능력이 쓰이는 집단 내 역할과 개인은 분리된다. 개인은 능력을 상품화하여 그 상품의 주인이 된다. 그렇게 하여 개인은 고유성을 가진다. 역할주의는 질서와 자유의 공존을 통해 모든 개인이 자유로워지는 것을 목적으로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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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언론과 법감정 (2) 2021/06/07 AM 07:57

언론과 법감정

 

 

 

한국은 사법의 양형과 국민의 법감정 사이에서 괴리가 발생하고 있다. 양형은 형량의 정도를 정하는 일을 뜻한다. 법감정은 법에 대하여 갖는 정서를 뜻한다. 괴리는 서로 어그러져 동떨어짐을 뜻한다. 정리하면 한국은 사법이 판단한 양형과 국민이 법에 대하여 갖는 정서가 서로 어그러져 동떨어져 있다. 이 현상은 형사사건을 다룬 뉴스의 댓글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대부분 양형에 불만을 토로하고 있다. 형량이 낮다고 주장한다. 낮기 때문에 범죄가 줄지 않는다고 한다. 자유, 민주, 법치를 지향하는 국가로서 이는 바람직한 현상이 아니다. 주권은 국가의 의사를 최종적으로 결정하는 권력을 뜻한다. 법치는 법률에 의하여 나라를 다스림을 뜻한다.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국민이 주권을 가진다. 국민이 법치를 통해 나라를 다스린다. 그런 국민 다수가 사법의 판단인 양형에 불만을 토로하는 상황은 민주적이라 할 수 없을 것이다. 한국이 민주주의를 표방한다면 이 불만을 가볍다 여기지 말고 진지하게 대응해야 할 것이다.

 

한국의 과거를 떠올려보자. 과거에도 양형에 불만을 가지는 사람이 있었다. 사법과 국민과의 괴리는 있었다. 그럼에도 큰 문제는 없었다. 왜냐하면 당시 권력의 권위가 높고 언론의 정보통제가 손쉬웠기 때문이다. 권력에 복종하라. 일방적으로 공급하는 정보에 수긍하라. 강요로 국가가 운영되었기 때문에 별다른 소요사태가 발생할 수가 없었다. 이 때문에 부당한 판결에도 저항하기 어려웠다. 현명한 자가 피해자가 사회에 호소한들, 국민들이 권력에 짓눌리고 정보통제에 눈과 귀가 막혀 작은 반향조차 일어나지 못했다. 대표적으로 2차 인민혁명당 사건이 있다. 중앙정보부의 조작으로 시작된 반공 공안 사건으로, 기소된 8명이 사형선고 18시간만에 실제 사형집행을 당했다고 한다. 이하 구체적인 내용은 생략하겠다. 이런 횡포에도 국민들은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이 사건에 연루된 사람을 아버지로 둔 초등학생 아들이 미 대통령에게 편지를 통해 억울함을 호소하기도 했다. 당시 한국은 국내 사건을 국외에 호소할 수밖에 없을 정도였다. 그러니 사법과 국민과의 괴리에 별다른 말이 없었던 것이다.

 

지금까지 한국은 강요로 국가를 운영해왔다. 사상부터가 그럴 수밖에 없었다. 유교는 어른과 어린이 사이에 차례를 두는 것을 올바른 도리로 만든 사상이다. 이걸로 연상이 연하를 지배하는 걸 정당화하였다. 연상이 연하에게 강요한다. 이런 유교적인 인간을 가리켜 현대사회에서는 꼰대라고 부른다. 상하질서에 따른 지배의 정당화는 국가적으로 보면 독재가 있고 경제적으로 보면 갑질이 있다. 모든 영역에서 강요가 행해졌다. 하나, 결혼과 출산을 강요한다. 집안에서 중매를 주선하고 출산 압박을 넣는다. 혼인율과 출산율이 유지된다. , 학업을 강요한다. 학생을 때려서 공부시킨다. 학력이 유지된다. , 취업을 강요한다. 기업을 협박해 일자리를 늘린다. 열악한 노동환경에도 일하게 만든다. 취업률이 유지된다. 이외 다른 것도 마찬가지다. 강요가 국가를 살아 숨쉬게 만드는 원동력이었다.

 

국가를 생물로 비유해보겠다. 국민은 생물을 구성하는 세포와 같다. 돈은 양분을 공급하는 피와 같다. 감성은 피를 공급해 생명을 유지시키는 심장과 같다. 이성은 지성적인 판단을 하는 뇌와 같다. 이 비유에 맞춘다면 한국이란 생물의 심장이 바로 강요였다. 한국이 조선이었을 무렵에는 뇌와 심장 둘 다 강요가 옳다고 여겼다. 유교를 이성적으로 배우고 감성적으로 행했다. 하나 시간이 흘러 한국이 되자 뇌가 자유를 알아버렸다. 뇌는 자유를 알았는데 심장은 강요인 상태 그대로였다. 이성으로는 자유가 옳다고 생각하는데 감성으로는 강요하고 싶어진다. 자유가 좋고 강요가 나쁘다는 걸 머리로는 아는데 마음으로는 그러지 못한다. 뇌는 자유와 평등을 외치면서 심장은 유교의 연령차별을 옳다고 여긴다. 그 모순 속에서 점점 뇌가 심장에 영향을 끼치기 시작했다. 강요가 줄어들었다. 그런데 강요가 줄어든다는 것은 심장 박동수가 낮아지는 것과 같았다. 국가라는 생물의 세포가 죽거나 장기들이 고장이 났다. 세포를 이식하고 피를 수혈해도 임시 방편에 불과했다. 자유를 알아버린 뇌와 강요를 고수하는 심장의 충돌은 한국이라는 생물을 천천히 죽어가게 했다. 이것이 지금 한국의 현실이다.

 

한국은 이성애를 멀리하고 성을 터부시하는 교육을 하여 이성애 결핍과 성지식 결핍 현상이 있었다. 그럼에도 강요를 통해 혼인율과 출산율을 유지했다. 한국은 수동적으로 암기 위주의 교육을 하여 학구열 결핍 현상이 있었다. 그럼에도 강요를 통해 학력을 유지했다. 한국은 노동을 천시하는 환경으로 노동 기피 현상이 있었다. 그럼에도 강요를 통해 취업률을 유지했다. 그러다 자유를 알게 되어 강요가 줄어들었다. 강요가 줄어들자 강요 속에 감춰져 있던 것이 수면 위로 올라왔다. 혼인율과 출산율이 곤두박질 친다. 학력이 저하된다. 취업률이 낮아진다. 한국이 무너지기 시작한다. 지금 한국 내에 있는 대부분의 사회문제는 강요가 줄어들었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다. 다시 강요할 수 있으면 대부분의 사회문제는 해결할 수 있다.

 

그러나 강요를 되풀이할 수는 없다. 이제 더 이상 강요가 있던 시대로 돌아갈 수는 없다. 자유를 알아버렸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자유에 맞게끔 바꿔야 한다. 이성애와 성관계를 권장하는 교육을 하여 강요가 없어도 혼인율과 출산율을 유지해야 한다. 능동적으로 자기주도 위주의 교육을 하여 강요가 없어도 학력을 유지해야 한다. 노동을 존중하는 환경으로 노동을 즐길 수 있도록 하여 강요가 없어도 취업률을 유지해야 한다. 그렇게 모두가 자유에 적응해야 한다. 이성과 감성이 모두 자유를 얻고 진정한 의미에서 자유국가가 되어야 한다. 자유에 맞는 사상과 체제를 가진 상태에서 모든 영역에서 자발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는 체계를 만들어야 한다. 한국에 살고 있는 이들에게 자유라는 심장이 뛸 수 있도록 해야 한다. 한국이란 생물이 자유라는 심장을 가지고 있어야 살아날 수 있을 것이다. 이 자유가 필시 한국인의 행복과 한국의 성장을 이루도록 할 것이다. 이 자유가 필시 인류의 행복과 성장을 도울 것이다. 자유적응은 이제 이 시대를 사는 이들의 사명이다. 이 자유적응의 과정 중 하나가 바로 강요 아래 감춰져 있던 사법의 양형과 국민의 법감정 사이에서 발생하는 괴리를 줄이는 일이다.

 

 

 

첫째, 입법

둘째, 사법

셋째, 언론

 

입법

 

국민의 법감정은 입법과 사법 둘 다 관계가 있다. 양형이 사법의 권한임에도 입법을 언급하는 것은 양형 이전에 법률 자체에 불만을 가지는 이들이 많아서다. 그럼에도 사법에 초점을 맞출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입법으로 발생하는 법감정에 관련된 괴리는 진정한 의미에서 민주주의를 달성하지 않으면 줄이기 어렵기 때문이다. 지금 한국은 지역의 대표가 입법권을 쥐는 구조기 때문에 정당의 선동에 지나치게 취약하여 완전한 민주주의가 아니다. 지역의 대표 후보로 나온 정치가의 선거공약은 필연 지역의 발전을 우선시하게 된다. 그런데 지역의 부동산을 소유하는 인구수가 고작 10%밖에 되지 않는다. 직접적인 이해관계가 없는 그 외의 국민들은 정치가의 선거공약에 무관심하게 된다. 정당의 선거공약은 대의를 중점적으로 하기 때문에 더욱더 개개인의 이해관계와 동떨어진 경우가 많다. 그래서 다수의 국민들이 정치가나 정당의 공약보다 정당의 선동에 관심을 가지며 투표를 한다. 직접적인 이해관계가 있는 10% 외에는 선동에 휘말리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선거 당선이 선동으로 결정되는 일이 많다. 각 정당은 국민들이 공약에 관심이 적다는 걸 알기에, 선동이라는 씨를 뿌리고 선거철이라는 수확시기에 표라는 작물을 수확한다. 정당의 손익으로 가치를 판단하는 사람을 가리켜 정당주의자라 부르겠다. 이런 정치체제가 정당주의자의 발현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 정당주의자는 정치가가 아닌 정당을 보고 투표하기 때문에 보통 정당이 지지 받는 지역에 공천되는 정치가는 대체로 당선된다. 그래서 대부분의 정치가는 공천권한을 쥔 사람의 눈치를 보게 된다. 국민보다 공천권한자의 의향을 반영하게 된다. 공천권한자에게 주권이 쥐어진다. 국민에게 주권이 사라진다. 더 이상 민주주의라 부르기 어려워진다. 이런 구조로 인해 지역의 대표만 입법권을 쥐는 것은 민주적이라 하기 어렵다. 국민의 반발을 무시하고 입법절차를 밟고 있는 경우를 종종 목격했을 것이다. 물론 이는 정치가 개개인의 잘못이기 보다는 지역 중심인 정치체제의 결함에 가깝다. 어떤 정치가는 분명 국민을 대표하고 있다. 그러므로 정치가 개개인을 비난하기 보다는 보다 민주적인 체제로 변화해야 한다. 지역이 아닌 분야 중심으로 바뀌어야 한다. 분야의 대표도 입법권을 쥘 수 있어야 한다. 지역발전은 주로 부동산이 성장하나 분야발전은 보통 분야 자체가 성장한다. 공약은 분야와 연관된 법률이 될 것이다. 단순하게 어느 지역에 어떤 개발을 추진하겠다는 식의 공약이 아닌 분야 내에 있는 부조리를 개선하거나 분야의 성장을 도울 법의 제정, 개정, 폐지를 추진하겠다는 식의 공약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 공약은 대체로 분야 내 모든 인원과 이해관계가 있을 확률이 높으므로 선거권자는 선동 당하지 않고 마음에 드는 후보에 투표할 것이다. 또한 불특정 인원이 속하여 책임소재가 불명확한 지역과 달리 분야는 특정 인원이 속하여 책임소재가 뚜렷하다. 책임소재가 뚜렷해야 정치가와 투표자에게 책임의식이 싹트게 된다. 책임의식을 통해 보다 더 신중하게 투표하게 된다. 이렇게 진정한 의미에서 민주주의를 달성하여야 입법과 국민의 법감정 사이에서 발생하는 괴리를 줄일 수 있을 것이다.

 

일단 현 상황을 살펴보자. 국민 법감정 또는 국민정서법이 입법에 영향을 끼친 사례 두 가지를 집어보겠다. 보통 국민의 법감정에 영향을 받은 법률은 기존 법률보다 형량이 강화된다. 많은 국민들이 형량이 낮기 때문에 범죄가 일어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음주운전에 분노한 국민의 정서가 만든 법이 바로 윤창호법이다. 어린이보호구역에서 발생한 어린이 교통사고 사망에 분노한 국민의 정서가 만든 법이 바로 민식이법이다. 둘 다 국민의 정서가 만들었고 둘 다 불만이 나오지만 반응은 확연하게 다르다. 윤창호법은 잘 만들었지만 형량이 낮다는 반응이다. 그래서 형량강화가 필요하다고 말하고 있다. 최대형량은 무기징역으로 높아졌기 때문에, 아마 최저형량 강화를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게 되면 양형과 관계없이 높은 형량을 받게 되기 때문이다. 민식이법은 의도는 알겠는데 방법이 잘못되었다는 반응이다. 주로 지목되는 것에는 운전자 처벌이 아닌 불법주정차 처벌강화가 필요하다 말하고 있다. 불법주정차 사이에서 급작스럽게 나타나는 어린이를 발견하지 못해 사고가 발생하는 일이 많았기 때문이다. 민식이법의 경우엔 정치논리가 섞여 정당주의자의 비호나 공격을 받기 때문에 실제 법률과 무관할 때가 있으므로 주의할 필요가 있다. 통계장난으로 비호를 하거나 아예 효과가 없다는 식으로 공격하는 걸 종종 목격할 때가 있다. 민식이법 이후 어린이보호구역에서 어린이 사망자가 작년 대비 절반으로 줄었다는 식으로 홍보하는 걸 본적이 있다. 그런데 실제 수를 보니 6명에서 3명으로 줄었다는 것이었다. 민식이 법이 없던 2018년에도 3명의 어린이가 사망했는데 2018년 대비라면 아무런 효과가 없다는 말이 된다. 이런 건 통계장난으로 치부될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아예 효과가 없다는 건 말이 안 된다. 법률의 옳고 그름을 차치하고 운전자가 세심하게 주의하거나 어린이보호구역을 우회하는 일이 많을 테니 효과가 있을 수밖에 없다. 물론 자유국가에서 자발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바람직하므로 모든 걸 규제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태도는 그렇게 바람직하다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국민의 법감정에 영향을 받은 법률 두 가지를 살펴봤다. 불만은 사라지지 않았다. 이 두 가지뿐만이 아니다. 모든 범죄자가 무기징역형을 받지 않는 이상, 무조건 형량강화만 외치는 이들의 불만을 잠재우기는 어려울 것이다. 모든 국민이 만족할만한 법이 나오지 않는 이상, 입법으로 손해를 본 이들의 불만을 잠재우기는 어려울 것이다. 국민의 법감정에 따라 법을 제정해도 불만은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니 감성적으로 국민의 모든 불만을 법으로 반영해서는 안 된다. 그런걸 보통 중우정치라고 한다. 중우정치를 예로 들며 민주주의가 완전히 올바른 것이 아니라며 비판하는 일이 있다. 하나 민주주의는 반드시 올바른 결과를 낳는 제도가 아니다. 단지 국민에게 주권이 있는 것이 옳다고 주장할 뿐이다. 왕정국가에서 왕의 어리석음을 모두가 책임지는 것처럼 민주국가에서는 국민의 어리석음을 모두가 책임지는 것일 뿐이다. 어리석음을 책임지고 싶지 않다면 중우정치를 조소하기보다는 중우정치가 되지 않도록 다수의 국민들이 현명해질 수 있는 길을 마련해야 할 것이다. 그 첫 번째 방법이 진정한 의미에서 민주주의를 달성하는 것이다. 보다 민주적이게 되어 모두가 적극적으로 정치에 참여하고 자신이 한 투표에 책임의식을 갖게 된다면 법에 대한 맹목적인 성토가 줄어들어 입법과 국민의 법감정의 괴리를 줄일 수 있을 거라 본다. 그런 상황이라면 모든 불만에 대응치 않고 타당한 불만을 검토한 후 입법에 적용하는 것도 수월할 것이다. 설령 타당하지 못한 불만에 영향을 받아 바르지 못한 법이 제정되더라도 괜찮다. 시행착오 없는 새로운 길은 없다. 잘못된 길을 걸었다는 생각이 들면 다시 돌아와 새로운 길을 걸으면 된다. 영속된 법은 없다. 그 어떤 상황이 닥쳐도 그 시대를 살고 있는 국민의 의사가 빠르고 현명하게 반영될 수 있으면 된다. 이 또한 진정한 의미에서 선동에 영향을 적게 받는 민주주의를 달성하면 가능하다.

 

 

 

사법

 

사법의 판결에 국민이 불만을 가지는 경우를 크게 세가지로 나눠보겠다. 하나, 정당한 판결에 불만을 가지는 경우. , 부당한 판결에 불만을 가지는 경우. , 양형에 불만을 가지는 경우. 여기서 둘은 논외다. 부당한 판결은 애초에 잘못되었기에 논할 필요가 없다. 정당한 판결과 국민의 법감정 사이에서 발생하는 괴리를 줄일 필요가 있다. 나는 역할을 존중한다. 어떤 이해관계 없이 나온 판결이라면 웬만해서는 판사의 판단을 존중할 것이다. 대부분의 국민들도 판결 전체보다는 대체로 양형에 대해서만 불만을 가진다. 왜냐하면 옳고 그름이 분명한 형사사건에 감정적으로 분노를 터트리는 일이 많기 때문이다. 괴리로 인한 사법불신은 양형이 가장 크다 할 수 있겠다. 따라서 양형에 초점을 맞췄다.

 

한국인은 이해관계 또는 타성이 아니면 대체로 우수한 편이다. 낡은 사상이나 체제의 영향으로 자유적응에 실패했음에도 한국이 버티고 있는 것은 한국인 개개인이 우수하기 때문이다. 몸으로 비유하면 세포가 강하다. 사법도 마찬가지다. 이해관계나 타성이 아니면 우수한 판결을 내리고 있다고 본다. 이해관계는 비리를 뜻하고 타성은 관행을 뜻한다. 비리에 경우에는 논할 필요가 없다. 잘못된 것이다. 비리로 발생하는 사법불신과 법감정 괴리로 발생하는 사법불신은 별개다. 관행에 경우에는 한국의 역사가 영향을 끼치는 것이 아닐까 싶다. 윤창호법으로 음주운전 사고의 최대형량이 무기징역임에도 양형위원회의 양형기준에 따른 권고형을 최고형으로 선고하고 있다. 이에 많은 이들이 사법을 비판한다. 타성에 젖어서 책임지기 싫기 때문에 관행에 따르는 것이 아니냐고 말이다. 그런데 한국에서 사법은 이미 폭주한 전례가 있다. 군부독재의 치하 아래 사법수치를 겪었던 역사가 있다. 그래서 변화에 제동이 걸리는 것으로 추측한다. 마치 경찰이 군부독재 시절의 역사 때문에 시민들에게 강하게 나가기 어려운 것처럼 말이다. 그 시대가 족쇄가 되고 있는 분야는 생각보다 많을 거라 본다. 그런 것을 감안해도 국민의 법감정보다 판사의 판단이 옳은 경우가 많다. 법의 형평성 차원에서 모든 범죄에 높은 형량을 판결하기 어려우므로 형량강화만 외치는 이들보다 나은 것은 당연하다. 안타깝지만 일부 몰지각한 이들이 아무것도 책임지지 않으면서 감정을 쏟아내는 것에 집중하는 바람에 법치가 대중의 감정 쓰레기통으로 전락하는 일이 종종 있다. 한국인은 우수한 편이다. 우수한 이들이 그런 행위를 저지르는 것은 이들에게 책임의식이 없기 때문이다. 실제 국민들이 사건개요만 읽었을 때보다 구체적인 정보를 읽었을 때 범죄자에 대한 형량이 낮아진다고 한다. 구체적인 정보를 알고 그 무게를 인지하는 순간, 책임의식이 싹터 신중하게 형량을 결정하기 때문에 형량이 낮아지는 거라 추측한다. 그 신중함에는 유교의 이타주의 사상이 영향을 끼쳐 온정주의적인 결정이 나왔을 거라 추측한다. 무책임한 이들이 종종 이런 말을 한다. 형사사건의 양형에 불만을 품은 이가 판사의 가족이 같은 범죄에 피해를 입어야 형량을 높이게 될 거라고 말이다. 당혹스럽다. 나의 일방적인 선입견일지 모르겠지만 현명한 판사라면 비슷한 사건에는 비슷한 판결을 내릴 것이다.

 

양형은 법치의 예술이라 생각한다. 기분 내키는 데로 판결하는 게 아니다. 피해자와 가해자와 국민의 정서와 범죄율과 소모비용과 파급효과와 판례 등을 고려해 판결을 내리고 있다. 그 섬세한 고뇌에 미학이 느껴진다. 양형위원회는 지금까지 판례의 평균값을 양형기준으로 삼았다고 한다. 판사들이 양형위원회의 양형기준을 참고하는 것은 단순한 관행일수도 있겠지만 지금까지의 판사들을 신뢰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물론 이래서는 새시대의 변화에 적응하기는 다소 어려운 점이 있다. 과거에 맞춰진 판례만 따르게 되기 때문이다. 사법도 자유적응이 필요하다. 판사의 변화는 물론이고 양형위원회의 연구가 시급하다. 형량을 정함에 있어 피해자나 국민의 만족을 위해서는 안 된다고 본다. 그것은 인민재판과 다르지 않다. 단순히 법감정에 치우친 감정적인 기준이 아닌 철저하게 계산된 기준이 필요할 것이다.

 

사법과 국민의 괴리는 어느 한쪽이 일방적으로 맞추는 것이 아니다. 괴리로 인해 국민들이 사법을 불신한다고 한다. 그런데 그건 사법도 마찬가지다. 괴리로 인해 국민을 비전문가로 치부하며 무시할 확률이 있다. 서로를 설득해야 한다. 사법은 사법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사회를 위해 싸우면 된다. 모든 분야가 분야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사회를 위해 싸우는 것처럼 사법 또한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민주주의를 명목으로 국민의 법감정을 여과 없이 반영하여 형평성과 공정성이 훼손된 판결이 나오는 일이 있다. 사법의 입에 재갈을 물리는 것이 과연 민주적인지 묻고 싶다.

 

배심원제에 대해 말해보겠다 사법의 배심원제는 입법으로 따지면 불특정 국민들에게 입법의 표결을 맡기는 것과 비슷하다 본다. 사법이 전문적인 지식이 없어도 국민의 참여가 가능하다면 입법 또한 가능하다. 국회의원은 선출되었기 때문에 괜찮다고 말한다면 판사도 선출하면 된다. 각 지역의 이해관계를 줄이기 위해 판사 후보를 무작위로 배정하여 그 안에서 후보 정보를 보고 투표하면 된다. 선출된 판사도 이해관계가 적은 지역에 배치되면 된다. 그쪽이 국회의원처럼 민주주의와 전문성을 고루 갖출 수 있는 방법이다. 반대로 생각해 배심원제가 타당하다면, 입법에도 배심원제 같은 제도를 도입해도 괜찮을 것이다. 이것을 지금 당장 제안하는 것은 아니다. 그저 판사의 목소리도 중요하다 말하고 싶은 것이다. 판사의 역할을 존중해야 한다. 법감정에 휘둘려 판사가 객관적인 시각을 잃게 되는 것은 국가 법치의 중대한 손해가 된다.

 

양형기준도 마찬가지다. 국민의 법감정을 그대로 반영해서는 안 된다. 그렇다고 아예 무시해서도 안 된다. 기본적으로 전문가가 결정한 양형기준이 타당할 확률이 높으나, 법감정이 타당한 경우 그걸 수용할 필요가 있다. 간단히 말해 국민의 법감정을 전문가가 타당하다 여겨질 정도로 끌어올려야 한다는 것이다. 1기 양형위원회 전문위원이 양형정보시스템의 구축을 제안했다. 양형에 대한 모든 정보를 수집하여 국민들이 직접 양형기준을 참고할 수 있도록 시스템을 구축하자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국민들이 객관적인 양형기준을 알 수 있게 될 거라 했다. 이 시스템이 법감정의 수준을 높이는데 도움이 될 거라 생각한다. 그런 관점에서 양형정보시스템은 괜찮은 제안이라 본다.

 

그러나 그걸로 괴리가 좁혀지기는 어려울 것이다. 기사 제목만 보고 화를 내며 댓글을 다는 이들이 수두룩하다. 그런 걸 일일이 볼 사람이 얼마나 있을 것 같은가? 많은 사람들이 책임지지 않으면서 감정을 표출하는 이익을 얻고 싶어하는 것일 뿐이다. 그러지 않고 그런 정보를 찾아볼 정도의 사람은 애초에 법에 관심이 높은 사람이다. 물론 설득력이 높은 전문적인 정보는 성숙한 법감정을 만드는데 도움이 될 수 있다. 이것은 사법의 역할이다. 하나 시스템 구축은 간접적인 방법이다. 직접적으로 사법과 국민 사이에서 법감정의 괴리가 일어나는 곳은 사법이 아니라 언론이다. 언론에서 사건 정보를 공개하는 순간부터 괴리가 발생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언론에 공개된 사건이 국민의 법감정으로 형량이 결정되기도 하는 것이다. 따라서 법감정에 관련된 괴리를 해결은 언론의 역할이다. 그렇다고 괴리에 대한 책임을 누군가에게 묻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사법의 역할이 아니었기 때문에 책임질 이유가 없고, 언론의 역할이었던 적이 없었기 때문에 책임질 이유가 없다. 시대가 변하면서 언론이 맡아야 할 역할이 되었을 뿐이다.

 

 

 

언론

 

인터넷의 등장은 언론의 역할을 변화시켰다. 그 변화에 대해 말해보겠다. 지금까지 언론은 정보에 관해서 독보적인 위치에서 생산한 정보를 일방적으로 전달하고 있었다. 각지에서 수집한 자료로 정보를 하는 정보 생산자 역할을 맡고 있었다. 미성년을 가르치는 것이 교사였다면 국민을 가르치는 것이 언론이었다. 유명한 대기업 창업자도 언론기사가 자신의 교수였음을 말하곤 했다. 온갖 정보를 공급하여 사회구성원의 품위, 품성, 지성 등을 갖추게 했다. 하나 정보독점은 부당한 일의 촉매가 되기도 했다. 그 외에 정보를 다루는 집단이 없었기에 권력자나 이권자가 언론을 이용하여 선동을 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언론사나 기자의 이해관계에 따라 자체적으로 하는 일도 있었다. 정보공급의 취사선택으로 선동하여 누군가의 입맛에 맞게끔 여론을 조성했다. 언론이 이권의 선동도구로 활용되었다. 그런 양면을 가지고 있었던 언론은 최대의 경쟁자인 인터넷을 만나게 된다. 인터넷이 등장하면서 정보 생산자가 늘어나게 되었다. 지금 뉴스보다 조회수가 많은 정보 제공 개인방송이 있다. 지금 언론정보보다 위키를 먼저 찾는 일이 일어나고 있다. 정보생산자로서 독점적인 위치를 잃어버렸다. 언론은 똑같은 정보생산자 중 하나가 되어버렸다. 일방적으로 단방향 정보를 제공하던 때와 달리 수많은 정보생산자가 네트워크를 이루어 양방향 정보가 교류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언론은 길을 잃어버렸다. 존재이유를 찾아야만 했다. 어떤 언론은 정보생산자로서의 위치를 굳건하게 하려고 했다. 다른 언론이나 개인방송보다 많은 관심을 받기 위한 방법을 사용하였다. 일부로 오도나 오해하게끔 제목을 짓는다. 자극적인 기사를 작성한다. 사회갈등을 이용하여 편파적인 기사를 작성한다. 국가자부심을 이용한 개인방송과 비슷한 영상을 올린다. 그런 식으로 다른 정보생산자와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려 했다. 지금까지 똑같은 길을 걷고자 했다. 하나 그 길은 되려 언론을 쇠퇴하게 만드는 길이라 말하고 싶다. 이제 언론은 새로운 길을 걸어야 한다. 단순하게 정보를 생산하고 공급하는 것만이 아니다. 정보와 정보를 잇는 것, 사람과 사람을 잇는 것, 분야와 분야를 잇는 것, 국가와 국가를 잇는 것, 모든 걸 잇는 것으로 서로를 이해하게 하여 괴리를 줄이는 그런 네트워크의 역할을 맡아야 한다고 주장하겠다.

 

내가 생각하는 언론은 생태계로 따지면 꿀벌이다. 국민이란 꽃에서 자본이란 꿀을 빨고 정보라는 꽃가루를 실어 나른다. 그 과정 속에서 잇는다라는 꽃가루받이로 사회라는 생태계를 유지한다. 언론은 국민과 국민을 잇는 것으로 사회를 유지하는 역할이라는 것이다. 이 역할의 필요성이 두드러진 것은 인터넷 시대부터다. 인터넷 시대가 되면서 수많은 정보가 범람하고 있다. 정보생산자는 각자 자신의 주장을 펼치고 있다. 다양한(집단주의적인 성향을 띄고 있어도 과거에 비하면 훨씬 다양하다) 주장 속에서 국가 내에 괴리가 늘어날 수밖에 없다. 그 괴리를 줄일 필요가 생기면서 잇는 역할이 중요해진 것이다. 꿀벌의 중요성은 누구나 잘 알고 있다. 그만큼 잇는 일을 하는 언론은 중요하다. 이제 정보생산은 누구나 다 할 수 있다. SNS으로 통해 실시간 정보공급도 가능하다. 하나 잇는 것은 다방면에 지식과 인맥이 있는 언론이 아니면 어렵다. 언론이라는 유능한 집단이 다른 정보생산자와 차별화되는 게 바로 모든 걸 잇는 것이다. 한국에서 언론만큼 애증을 받는 분야가 없다. 어느 때보다 언론의 자유도는 높아졌지만 어느 때보다 언론의 신뢰도는 낮아졌다. 그 말인즉슨 언론이 자유롭길 바라지만 신뢰하지는 못한다라는 것이다. 또한 언론의 우수성을 의심하는 이는 적다. 믿지 못하는 거지 무능하다 말하는 게 아니다. 그런 유능한 정보집단인 언론이 국민에게 신뢰받는 길은 모든 걸 잇는 것으로 괴리를 줄이는 역할을 맡는 것에서 시작된다고 본다.

 

잇는 것이 언론의 역할이 되면 많은 부분이 달라진다. 단순히 국민에게 정보를 제공하는 것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정보로 국민을 잇는 것이다. 그러면 기사의 방향이 달라진다. 어떻게 하면 A B의 괴리를 줄일 수 있는가? 그런 방향성으로 기사가 작성되게 된다. 언론이 제공하는 정보의 가치를 판단하는 기준도 바뀐다. 과연 이 정보가 괴리를 줄이는 역할을 수행했는가? 이것으로 언론이 언론만의 독보적인 위치를 점할 수 있게 된다. 국가를 잇는 것. 시장경제를 잇는 것. 가족을 잇는 것. 학교를 잇는 것. 성별을 잇는 것. 세대를 잇는 것. 분야를 잇는 것. 지역을 잇는 것. 이외 모든 걸 입장과 입장을 편향적이지 않고 객관적을 정리해 모든 걸 잇는 것으로 서로를 이해하게 하여 괴리를 줄이는 것이 목적이 된다. 그렇게 되면 잇지 않고 괴리를 늘리는 것은 언론으로서 부적합한 행동이 된다. 지금까지는 그런 것도 정치논리나 자본논리나 어떤 올바름에 의해 정당화되곤 했다. 하나 이제 그것은 잘못된 일이 된다. 갈등을 조성해 괴리를 늘리는 언론은 꿀벌이 아니라 말벌이다. 꿀벌을 잡아먹는 말벌이다.

 

사법의 양형과 국민의 법감정 사이에서 발생하는 괴리를 줄이는 것도 언론의 역할이다. 뺏겨서는 안 되는 고유한 언론만의 역할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언론이 그 괴리를 줄일 수 있는가? 그 방법은 각자 생각해야 한다. 나의 생각을 써보겠다. 나는 숫자에 답이 있다고 본다. 간단히 말해 모든 판결을 다룬 기사의 세부내용 첫 번째에 전세계 평균 형량, OECD 평균 형량, 한국 평균 형량을 기입한다. 그렇게 하여 괴리를 줄인다. 괴리가 발생하는 까닭 중 가장 큰 것은 시간과 책임이다. 사건에 대해 구체적으로 지식을 쌓을 시간이 없고 사건을 책임질 생각도 없다. 그 시간과 책임을 해결하는 것이 바로 평균 형량이다. 별다른 지식이 없어도 평균 형량을 보면 이 판결이 일반적인지 아닌지를 분간할 수 있다. 그 직관성이 시간소요와 사법불신을 줄이게 된다. 시간을 들이지 않아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 한국 사법만 그런 것이 아니었구나. 모두 다 그런 것이었구나. 이런 이해로 괴리가 줄어든다. 책임분산도 가능하다. 판결이 어떤 식으로 영향을 끼칠지 책임질 생각이 없는 이들도 평균형량을 통해 한국이 정상이라는 인식을 가지게 되면 다소 누그러지게 된다. 형량에 대한 책임을 전세계의 사법과 분담하는 것이다. 그 외에 다양한 법지식을 제공하여 괴리를 줄일 수가 있다. 타당한 국민의 법감정은 사법이 수긍할 수 있도록 작성하여 괴리를 줄일 수가 있다.

 

시대가 변하면서 자유에 적응하는 것은 언론도 마찬가지다. 모두가 자유롭게 정보를 생산하게 되면서 단순한 정보공급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그 정보생산자를 잇는 것으로 변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강요로 운영되었던 한국이 자유로 운영되기 위해서는 이런 잇는 역할이 반드시 필요하다. 자발적으로 서로를 이해하고 공감하며 바람직한 방향으로 나아간다. 성별을 잇는 것으로 출산율을 유지하고 학교를 잇는 것으로 학력을 유지하고 시장경제를 잇는 것으로 취업률을 유지한다. 모든 것을 잇는 것으로 자유적응을 돕는다. 한국 언론은 그걸 할 수 있고 해야만 한다. 이것이 언론의 새로운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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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자유와 도덕입니다. 자유주의의 미덕에 대해 작성해보고자 합니다. 자유에 맞는 도덕. 이것도 필요한 자유적응 중 하나입니다.

 

주체성을 따지는데 자기신고를 기준으로 평가하면 안 된다고 봅니다. 사이비 종교인도 자발적으로 믿고 있다고 말하고 다니겠죠. 그렇다고 해서 사이비 종교인이 주체성이 강한 건 아니잖아요. 맹목적으로 종교에 의존하는 이가 어찌 주체적이라 할 수 있나요? 주체적으로 행동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도 어쩌면 어떤 흐름에 잡아 먹혀 그 흐름을 그대로 흉내 내는 것에 불과할지도 모릅니다.

 

더 큰 바람을 가지지 못하는 건 무척이나 슬픈 일입니다. 아픈 사람이 하나씩 포기하면서 바라는 것이 작아지는 것과 같은 거니까요. 바람이 작은 사회는 아픈 사회입니다. 나는 그것이 무척이나 슬퍼요.

 

이기주의를 무조건 나쁘다는 인식은 잘못된 겁니다. 이기주의나 이타주의는 결과가 아닌 행위에서 나타납니다. 이기적으로 행동했어도 타인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것이고, 이타적으로 행동했어도 타인에게 피해를 줄 수 있는 것이죠. 이기적임은 본인의 이익만 생각한다는 것인데, 충분히 현명한 사람이면 자신의 이익만 생각해도 좋은 결과가 나옵니다. 왜냐하면 본인이 하고 싶은 것이 본인에게 가장 큰 이익이기 때문입니다. 이타주의는 본인이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할 때를 의미합니다. 강요 받아서 하는 건 강요한 사람의 이익을 우선시 하는 일이지요. 그것이 설령 개인의 이익을 위한 일이라 할지라도 이타적입니다.

 

어떤 모바일 게임의 수익구조는 무기상인과 비슷하죠. 옳다 그르다 떠나서 그냥 그런 게 재미있네요. 겉이 어떻게 바뀌든 본질적인 구조는 같다는 거니까요. 예컨대 이런 겁니다. 어떤 무기상인이 두 국가 사이에서 갈등을 부추기고, 그 갈등으로 전쟁이 터지면 양쪽에 무기를 파는 거죠. A가 우세하면 B에 좋은 무기를 팔고, 그렇게 해서 B가 우세해지면 A에 좋은 무기를 팔죠. 이게 어쩐지 과금 경쟁과 비슷한 것 같아요. 다른 점은 시기일까요? A시기에 과금한 유저를 꺾으려면 이후 B시기에 과금을 하면 되죠. 무기상인 입장에서 균형이 유지되어야 해요. 어느 쪽이든 멸망되지 않아야 꾸준한 무기수요가 있습니다. 이건 어쩐지 무과금이나 소과금 이탈을 방지하여 과금수요를 만드는 것과 같다는 느낌이네요. 모바일 게임이 마련한 전쟁터에서 모바일 게임이 판매하는 무기를 구매하고 모바일 게임 유저들이 전쟁놀이를 하고 있죠. 참 뭐라고 해야 하나. 원래 게임이라는 것이 현실에서 체험하기 어려운 것을 대리만족 하게 해주죠. 수많은 경쟁게임이 사실 전쟁놀이니까요. 그런데 수익구조도 비슷한 것이 있었군요. 신기하네요. 두꺼운 썬글라스를 끼고 시가를 입에 문 무기상인(이미지)이 게임에서는 모바일 게임 BM 기획자였군요. 디지털 탈세가 코인이었다면 디지털 무기상인은 일부 모바일 게임사였네요.

 

인간과 기계는 분명 다릅니다. 하지만 의사의 치료와 기술자의 수리가 그 행위 자체는 동일하다는 걸 인식해야 합니다. 동일한 위치에서 보고 그 뒤에 가치를 다르게 부여해야 합니다. 행위는 같지만 인간이기에 인간을 치료하는 것에 더 많은 가치를 부여하고 있다고 인식해야 합니다. 그래야 본질을 볼 수 있습니다. 공학자와 기술자가 다른 위치에 있듯이 의학자와 의사는 다른 위치에 있을 수 있습니다. 많은 공학지식이 없어도 수리할 수 있는 것처럼 많은 의학지식이 없어도 치료할 수 있습니다. 의료가 권위를 얻기 위한 도구로 전락해서는 안 됩니다. 지금 의료계는 수리하는 기술자조차 공학자 수준의 지식을 요구하는 것과 같습니다. 지나치게 우수합니다. 인재가 적재적소로 배치되고 있지 못합니다. 이는 국가적으로도 손해입니다. 굉장한 활약을 할 인재가 동네 의원에서 감기 처방을 하고 있으니까요.

 

한 줄의 깨달음을 얻기 위해 소요되는 시간이 얼마나 많은지. 얻고 나면 기묘한 만족감과 함께 청명한 기분이 들며 온갖 불안감이 사그라집니다. 불안할 수밖에 없는 환경이지만 그 때는 좀 기분이 나아져요. 나는 사상으로 생산하는 가치가 그 외의 분야에서 생산하는 가치보다 훨씬 크다고 봅니다. 다른 분야는 다른 사람이 해도 괜찮지만 이건 내가 해야만 하는 것일 테니까요. 어쩌면 내가 아니면 안 될 일이니까요. 무엇보다 하고 싶은 일이기도 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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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왕4    친구신청

오랜만에 잘썻다 싶은 글을봤네요
내용도내용이지만 구조가 글쓰기 교과서적같아서 술술읽었습니다

Ezrit    친구신청

지금 대부분 사람들이 느끼는 분노가 양형이 작다가 아니라 양형이 불공평하게 적용된다 입니다.

그것도 철저히 정치적 논리의 의해서 말이죠.

사립대 표창장 위조가 마약밀수, 음주운전사고, 수백억대 계좌위조 등보다 더 큰 범죄 취급 받고 있는데...-_-;
[글] 지역별 의석과 부동산 (2) 2021/05/14 PM 12:01

지역별 의석과 부동산

 

 

 

한국에서 부동산 가격이 오를 수 밖에 없었던 것은 다음과 같은 원인 때문이었다.

 

첫째, 사상

둘째, 인구수와 초과자본

셋째, 정치권력

 

이외 최근엔 규제가 만든 수도권 아파트의 편중된 가격 상승이나 코로나로 인한 양적완화가 부동산 가격을 올리고 있다. 하지만 그것이 근본적인 원인이라 보기는 어렵다. 위의 세가지는 국가정책과 무관하게 상승할 수밖에 없는 요인이 된다.

 

첫째는 기본적인 사상이다. 유교의 집단주의적 위계질서 속에서 하나의 답을 쫓는 주입식 교육을 받은 한국인들은 주입 받은 교육을 완벽하게 이행하겠다는 완벽주의적 결벽증 속에서 효율적이고 생산적인 결과물을 만드는데 집착하게 되었다. 하나의 답을 완벽하게 쫓는 성질로 다음과 같은 현상이 나타났다. 유행을 너도나도 따라 한다. 유행이란 답을 다 같이 쫓는다. 그래서 똑같은 스타일이나 수익구조를 추구한다. 옷차림이나 안경이나 머리모양이 비슷한 건 외국에서도 알고 있는 모양이다. 개성이 상실되었다. 그것으로 인해 수단과 목적의 전도현상이 일어난다. 이타적이고 집단적인 성질이 개개인의 개성을 상실케 하여 이상적인 꿈보다 동물적인 욕구에만 치중하는 바람에 수단에 불과한 돈이 목적이 되어버린다. 돈이 목적이 된 까닭은 다음과 같을 것이다. 하나는 먹고 사는 수단. 둘은 언젠가 얻을지도 모르는 꿈의 실현을 위한 수단. 셋은 위계질서가 뚜렷한 사회 속에서 높은 서열을 얻기 위한 수단. 먹고 사는 문제는 분명 중요하다. 하나 지성을 가진 인간이라면 먹고 사는 것 이상의 바람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본다.

 

꿈을 가진 사람도 성장하여 사회에 나가면 잃어버리는 경우가 많다. 왜냐하면 교육과 사회는 근간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교육은 홍익인간을 기반으로 이타적인 인간이 되도록 가르친다. 반면 사회는 자본주의를 기반으로 이기적일수록 이익을 보는 구조를 띠고 있다. 이타적인 교육을 받은 학생은 사회초년생이 되어 이기적인 사회로 진출하면 적응하기 어려워한다. 곧잘 사기를 당하고 연상에게 등쳐 먹히는 등의 다양한 손해를 본다. 그러다가 돈만 쫓는 사회 흐름에 잡아 먹혀 비슷하게 행동하게 된다. 국민을 이타적인 호구로 가르친 다음 이기적인 사회에 내던져 일그러진 변화를 겪게 만들고 있다. 이타적인 사상과 이기적인 체제의 무질서한 혼합이 국민들에게 고통스러운 모순을 겪게 만든다. 남의 이익을 우선시하고 싶은데, 돈은 최고다. 돈을 위해서 뭐든지 해도 된다고 생각하는데, 다른 이가 그런 짓을 하면 화를 낸다. 소중했던 어린 시절의 꿈은 어디론가 날아가버리고 이율배반적인 가치관이 내부에서 엉키고 엉켜 정리되지 않은 채 모순되는 행동을 하게 만든다. 끔찍하다. 교육단계부터 이기적으로 가르쳐야 올바르고 건전한 이기주의 속에서 자본에 휘둘리지 않고 자신의 꿈을 실현해나갈 수 있다. 본인의 바람을 실현하는 것은 그 어떤 결과를 낳더라도 본인에게 가장 큰 이익이 된다. 올곧게 자신의 바람만 추구하면 그것이 바로 이기적인 것이다. 그 바람이 공공의 이익을 가져올 수도 있고 손해를 가져올 수도 있다. 하나 그런 결과나 무관하게 이기주의와 이타주의의 구분은 인간의 의지에 달려있다. 어떤 고찰이나 타인의 설득 같은 것으로 본인의 의지로 바람을 바꾸는 것이 아닌 타인의 바람에 맞춰 본인의 바람을 바꾼다면 그 순간부터는 더 이상 이기적이라 할 수가 없다. 본인의 바람과 무관한 모든 행동이 이타적이다. 그 순간부터 대부분 고유한 개성을 잃기 시작한다.

 

꿈을 잃어버린 사회에서는 돈을 목적으로 삼은 사람들이 많다. 돈벌이가 된다고 하면 너도나도 한다. 그러다 보니 나중에는 과잉생산으로 인한 손해를 겪게 된다. 마스크 수요가 많을 때 지나치게 많이 생산하여 이후 수요가 낮아질 때 큰 손해를 본다거나, 어떤 작물이 비쌀 때 지나치게 많이 생산하여 이후 싸질 때 큰 손해를 본다. 부동산도 같다. 부동산이란 상품의 수익률이 좋다고 유행하여 가격이 오른 것이다. 최근 코인이 수익률이 높다는 이유로 유행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단순히 유행에 휩쓸리고 있는 것뿐이다. 이런 유행에 맞춰 어떤 이들은 부당한 이익을 추구하는데, 자전거래로 가격을 높이거나, 내부정보를 이용하여 투기를 하곤 한다. 유교적 가치관 아래 수단과 목적의 전도가 부른 자본만능주의 속에서 부동산을 통한 수익실현이라는 하나의 답을 쫓는 현상이 부동산 가격 상승을 초래한 사상적 원인이 된다.

 

해외에도 유사한 사례가 많이 있다는 걸 안다. 그건 그 나라에 맞춰서 해석해야 한다. 한국이 유교로 인해 어떤 현상이 발생했다고 말하면, 유교가 없는 다른 국가에서도 그 현상이 있는데 어떻게 그럴 수 있냐며 반론한다. 당혹스럽다. 해외에도 유교의 교리와 비슷한 사상이 있을 수 있다. 그러면 비슷한 현상이 나타난다. 단지 그뿐이다. 본질이 비슷하면 결과도 비슷할 때가 많다. 다르더라도 결과는 비슷할 수 있다. 그 나라의 현상은 그 나라에서 따로 해석해야 한다.

 

 

둘째는 인구수와 초과자본이다. 수요와 공급의 원리다. 부동산은 한정되어 있는데 인구수와 자본은 계속 늘어나다 보니 수요가 공급을 초과해 부동산의 가격이 상승할 수밖에 없다. 하나는 인구수다. 지방 소멸로 인구수가 낮은 지방 부동산 가격이 낮아지고, 수도권 과밀화로 인구수가 높은 수도권 부동산 가격이 높아지는 것과 같다. 인구분산을 하면 부동산 가격이 평준화될 가능성이 있다고 볼 수 있다. 하나 지방 소멸을 이제 막을 수가 없다고 본다. 교통이 발달하여 수도권과 지방을 연결하면 지방의 인구수가 늘어날 수 있을 거라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교통이 발달하면서 수도권에서 지방으로 출퇴근하는 사례가 나타났기 때문에 교통의 발달은 되려 지방 소멸을 가속화하는 흐름이 될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수도권을 중심으로 주거지를 만들고 지방을 중심으로 생산지를 만드는 것이 미래지향적인 설계라 본다. 어떤 원인으로 인구수가 줄어든다면 부동산 가격이 낮아질 수는 있다. 그러나 부동산이 투기로 활용되는 이상 그것은 요원한 일이다. 투기도 무의미할 정도로 급격하게 인구수가 줄어든다면 얘기는 달라지겠지만 말이다. 둘은 초과자본이다. 자본주의 질서 아래 과잉생산을 하여 수출하는 국가는 상대적으로 부유해지고, 그 생산품을 수입하는 국가는 상대적으로 빈곤해진다. 부유한 국가의 자본이 많아질수록 국가 내 부동산 수요자들의 구매력이 증가함에 따라 실제 수요가 급증한다. 부유한 이들은 그 수요에 맞춰 더 많은 부를 얻기 위해 부동산을 싸게 구매해 비싸게 판다. 부가 부를 부른다. 빈자는 주거를 위해, 부자는 수익실현을 위해 부동산의 수요가 증가함에 따라 가격이 올라간다. 평화롭고 안전한 국가일수록 자본 사용처가 없어 실물자산의 가치가 높아지고, 가치보전이 되는 부동산에 자본이 몰린다. 집은 주거의 역할을 다해야 한다. 그 점에 있어 부자의 부동산 잉여 소유를 방지하기 위한 국가정책이 절실하다 본다. 어떤 원인으로 부동산에 물리적인 타격이 발생한다면 부동산 가격이 낮아질 수는 있다. 그러나 그것은 일반적으로는 바람직하다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부동산 소유자의 수가 지나치게 줄어들거나 외국인의 부동산 소유가 급격하게 늘어나면 얘기는 달라지겠지만 말이다. 인구수와 초과자본에 따른 수요와 공급의 원리가 부동산 가격 상승을 초래한 경제적 원인이 된다.

 

 

셋째는 정치권력이다. 이것이 실상 부동산 가격 상승의 가장 큰 원인이 된다. 깨닫고 나서 크게 탄식했다. 이러니 당연히 부동산 가격이 오를 수밖에 없지! 지역의 대표가 행정권과 입법권을 쥐고 있다. 정치권력을 쥐고자 하는 정치가가 지역의 지지를 받기 위해서는 지역의 발전을 말하게 된다. 지역의 발전을 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지역의 부동산도 가격이 오르게 된다. 필요한 발전이라면 그래도 이해한다. 그러나 지지를 받기 위해서 불필요한 개발까지 공약으로 내세운다. 지역 주민의 필요가 아니라 정치논리로 개발을 하다 보니 비효율적일 수밖에 없다. 그런 비효율에 대응하여 예비 타당성 조사를 통해 경제성 평가를 하지만, 정치논리에 따라 유명무실해지거나 상황에 따라 면제처리도 되므로 실상은 명분 쌓기에 불과할 때가 많다. 공약을 지키기 위해서 무작정 밀어 붙이게 된다는 것이다. 이렇듯 정치논리에 의해 경제, 사회, 문화 등 모든 것이 지역 중심으로 돌아가게 된다. 사람 중심이 아니라 지역 중심으로 국가가 운영된다. 지역의 대표가 지역의 발전을 추구하다 보니, 실상 지역의 사람을 대표하는 것이 아니라 지역을 부동산을 대표하는 것이었다. 사람을 대표하는 것이 아니라 부동산을 대표하는 것이기 때문에 지방소멸을 받아드릴 수 없었다. 사람을 대표했다면 그 지방이 소멸하든 말든 크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을 것이다. 하나 그 지방의 부동산을 대표하고 있었기 때문에 어떻게든 지방을 살려야 했다. 그래서 지방자치단체에서 지역 내 출산율을 높이기 위해 세금을 쏟아 부었는데 별 의미가 없었다. 지방에서 아이를 낳으면 큰 돈을 주자, 신혼부부들이 그 지방에서 아이를 낳고 돈을 받은 뒤 다른 지방으로 이사 가는 일이 빈번해졌다. 사실 낮은 출산율은 강요사회가 만든 애정결핍으로 인한 현상이기 때문에 자유적응에 실패하는 한 그런 세금 사용은 애초에 의미가 없는 일이었다. 자유국가에 있어 이런 자유적응실패는 굉장히 심각한 문제다. 현존하는 대부분의 사회 문제는 자유적응실패가 원인이다. 제대로 된 원인파악을 하지 못하고 마냥 돈으로만 해결하려고 하는 것은 안타깝지만 세금낭비에 불과하다. 사회 문제 해결에 세금투입이나 형벌강화만 외치는 근시안적인 태도는 이제 멈춰야 한다. 표를 얻기 위한 정치논리가 부동산 가격 상승을 초래한 정치적 원인이 된다.

 

지역발전이라, 좋다. 지역발전 할 수도 있다. 그런데 말이다, 한국에서는 인구의 10%가 부동산의 50%이상을 소유하고 있다고 한다. 면적기준으로는 인구의 10%가 부동산의 97.6%를 소유하고 있다고 한다. 이런 상황에서 지역 개발 공약은 실상 10%를 위한 공약이 된다. 국민들을 위해서 투입되는 세금은 실제 10%의 배를 불려주고 있었을 뿐이었다. 재개발을 한다. 학교를 짓는다. 기업이 들어선다. 공항개발을 추진한다. 전부 땅 주인이 큰 이익을 본다. 이익을 볼 확률이 매우 높기 때문에 내부정보를 이용하여 땅 투기하는 일들이 일어나는 것이다. 간접적으로야 시설 편의로 다른 국민들도 이익을 본다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땅 주인에 비하면 극히 미비한 수준에 불과하다. 이런 일을 반복할수록 빈부격차는 커진다. 부동산 가격은 계속 치솟는다. 그걸 보고 정치가들이 부동산 가격을 잡겠다고 말하면서, 지역발전을 추구한 것은 정말 모순되는 일이었다. 밑 빠진 독에 물 붙기나 다르지 않았다. 지역을 중심으로 한 정치권력 자체가 끝없는 부동산 가격 상승의 근본적인 원인이었다. 지역발전은 10%를 위한 공약이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국민들은 정치가의 공약에 무관심하게 되었다. 지금까지 투표율이 저조했던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었다. 행정권은 그렇다 치자. 지역 개발 자체가 아예 없을 수는 없으니 말이다. 입법권을 지역의 대표로 삼는 것은 민주적이지 못한 일이었다. 정당의 공약은 지역의 틀을 벗어나지만, 지역 의원의 공약은 지역의 이익을 추구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까닭에 대다수는 정치가의 정책이나 공약보다 정당의 공약이 선거에 크게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정당의 공약을 홍보하거나 다른 정당의 공약을 비방하기 위해 사람들을 설득이나 선동했다. 국민들은 정당의 공약과 직접적인 이해관계가 없을 확률이 높기 때문에 붕 뜬 허울좋은 소리에 휘둘리게 되었다. 정당의 수많은 네거티브 전략이나 감성을 자극하는 선동이 국민들에게 유효하게 작용했던 것은 정치체제 자체가 민주적이지 못한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사람이 아닌 정당을 보고 투표를 하게 되었다.

 

본인보다 정당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이타적인 이들을 가리켜 정당주의자라 명명하겠다. 보통 정당주의자는 맹목적인 찬성과 반대를 한다. 정당을 기준으로 가치를 판단하기 때문이다. 정당에 이익이 되면 찬성하고 손해가 되면 반대한다. 본인이 손해를 보더라도 정당의 이익을 추구한다. 정당주의자는 본인이 정의롭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도덕적 제약이 없이 날뛰는 경우가 많다. 욕설, 조롱, 비난도 아무렇지 않게 한다. 일찍이 나는 이런 정당주의자가 발생했던 원인이 한국인이 겪은 피해 때문이라고 봤다. 각 정당이 일제침략, 북한침공, 독재횡포, 여성천대, 남성역차별 등을 근거로 반공산과 반자본, 반중국-북한과 반미국-일본, 반독재, 영호남 지역주의, 여성주의, 반여성주의 따위로 국민들을 설득 또는 선동(비율은 아마 선동이 높다.)을 하여 정당주의자로 만들었다고 보았다. 쉽게 선동 당했던 원인에는 위계질서가 뚜렷하고 이타적이며 집단적인 유교적 가치관이 집단에 속한 정치가의 언행에 가치를 부여하여 보다 더 쉽게 선동 당한 것이라 보았다. 한국의 정당주의는 실제 겪은 피해와 유교적 가치관이 만들었다고 파악했다. 그러나 지역의 대표가 정치권력을 쥐는 정치체제로 인해 이해관계로 투표할 수 있는 사람이 매우 적음에 따라 애초에 사회가 선동 당하기 너무나도 쉬운 구조였음을 깨달았다. 따라서 한국의 정당주의는 직간접적으로 실제 겪은 피해와 유교적 가치관과 정치체제가 만들었던 것이라 본다.

 

부동산의 가격이 오를 수밖에 없었던 이유에 대해 정리하겠다. 인구수와 초과자본, 정치권력으로 인해 부동산의 가격이 오를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국민들이 이타적이고 집단적인 사상에 의해 부동산을 통한 수익실현이라는 하나의 답에 몰리자 부동산 가격이 폭등했던 것이다. 지금까지 한국에서 부동산은 사상적, 경제적, 정치적으로 원인으로 인해 가격이 오를 수밖에 없었다.

 

 

 

현대의 노사관계가 농노와 지주와의 관계에서 크게 달라진 것이 없듯이 현대의 정치관계(마땅한 단어가 떠오르지 않음) 또한 농노와 영주와의 관계에서 크게 달라진 것이 없다. 노사관계가 노동의 집단화라는 측면에서 동일했기 때문에 크게 달라진 것이 없었듯이 정치관계 또한 지역별로 대표를 뽑는다는 점에서 동일했기 때문에 크게 달라진 것이 없었던 것이다. 농노에게 자유를 중심으로 한 배려를 해주면 자유주의가 되고, 평등을 중심으로 한 배려를 해주면 사회주의가 된다. 그 다음 투표권을 주면 민주주의가 되고, 주지 않으면 독재주의가 된다. 근본적인 사회구조는 중세시대에 머무른 상태에서 이것저것 조금씩 바꿔나갔던 것이 현대의 이념이었다. 사회구조 자체가 노동자는 차별 받을 수밖에 없고, 국민은 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어려운 상태였다. 지금까지 모든 개혁은 본질적인 내면은 그대로 둔 채, 외면만 구부리고 휘며 억지로 균형을 맞추고 있었을 뿐이었다. 겉 표면만 반짝 반짝하게 닦아봐야 안이 오래되면 새로울 수가 없다. 낡은 사상이 낡은 사회를 만든다. 자유적응실패로 인한 온갖 혼란과 고통과 절망은 사상이 낡았기 때문이었다. 이제는 시대에 맞는 새로운 사상이 필요하다.

 

최초 노동의 집단화가 인간을 집단에 종속시킨다는 점에 주목했다. 집단에 종속되는 이는 능력이나 노력의 여부와 관계없이 상대적으로 대우가 낮게 된다. 대표적으로 과학자 집단이 그렇다. 그들은 다른 전문직들에 뒤떨어지는 것이 없지만 사회적 대우가 낮은 편이다. 그들이 정당한 대우를 받기 위해서는 집단에 종속되지 않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기술의 소유권을 집단이 아닌 개발한 연구자 개인이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래야 기술의 주도권을 잡을 수 있다. 마찬가지로 노동자 또한 정당한 대우를 받기 위해서는 집단에 종속되지 않아야 한다. 노동력의 소유권을 집단이 아닌 노동자 개인이 가지고 있어야 한다. 지금 노동력은커녕 노동자 자체가 집단에 종속되어 보다 많은 잉여가치를 얻기 위해 착취 당하고 있다. 노동자 또한 본인의 노동력을 취급하는 사업자가 되어 기업을 운영하는 자본가와 공정한 거래를 할 수 있다면, 계약에 명시된 노동력만 제공하면 되기 때문에 이런 부당한 착취는 일어날 수 없다. 모든 노동력은 대여의 형태로 판매되어야 한다. 그래야 노동의 주도권을 노동자가 잡을 수 있다.

 

개개인이 혼자서 거대 기업과 주주들과 대등한 거래를 하기는 어렵다. 개개인이 자신의 권리를 정당하게 누리기 위해 개인의 권리를 보호해주는 집단에 속해있어야 한다. 이 집단의 이름은 모꼬지로 하겠다. 모임을 뜻하는 우리말이라고 한다. 실제 뜻은 놀이나 잔치 또는 그 밖의 일로 여러 사람이 모이는 것이라고 한다. 자유국가에서는 가능한 모든 활동이 자발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노동 또한 예외가 될 수 없다. 즐기면서 노동을 해야 한다고 본다. 워라밸이 중요한 게 아니다. 노동이 즐거워야 한다. 국가는 국민을 행복해야 해야 한다. 노동이 행복하지 않으면 행복을 위한 자원소모가 지나치게 늘어난다. 반대로 노동도 행복하면 불행한 국민에게 소요되는 자원이 감소하게 된다. 국가 차원의 경제적인 측면에서 즐거운 노동은 굉장히 효율적이다. 이 점을 강조하겠다. 이런 걸 고려하면 모꼬지는 해당 집단의 이름에 적합하다. 이 모꼬지는 노동조합과 다른 길을 걷는다. 노동조합은 기업에 종속되어 파업 외에는 마땅히 부당한 행위에 맞설 수 있는 수단이 없다. 무력하다. 하나 모꼬지는 기업에 종속된 집단이 아니다. 모꼬지에 속한 이들이 기술이나 노동력의 공급을 제어할 수 있게 된다. 시장경제는 자본만으로 굴러가지 않는다. 기술이나 노동력 둘 중 하나만 빠져도 보통 그 기업은 무너지게 되어있다. 지금 최첨단을 걷는 전자 기업에 최신 기술 공급이 막히게 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생필품의 물류를 담당하는 유통 기업에 노동력 공급이 막히게 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전자 기업이 부당한 행위를 저지르면 다른 라이벌 전자 기업에 기술을 제공한다. 유통 기업이 부당한 행위를 저지르면 다른 라이벌 유통 기업에 노동력을 제공한다. 마땅한 라이벌 기업이 없다면, 새로 기업을 일으킨다. 개개인이 출자하여 기업을 만드는 일이 자연스러워야 한다. 그래야 개인은 집단에 종속되지 않을 수 있다. 출자한 개개인은 전문경영인을 고용하여 그에게 기업 경영을 맡기고 그 기업에서 할 수 있는 일을 하면 된다. 출자한 이가 출자했다고 하여 믿고 맡긴 전문경영인에게 과도한 경영 간섭은 부당하다 본다. 역할을 존중해야 한다. 이런 환경이 가능하다면, 부당한 행위를 저지른 기업은 자연스럽게 몰락하게 되어 있다. 기술과 노동력의 주도권을 개인에게 돌려주는 이 개혁의 시작을 과학자들이 하는 것이 타당하다 보았다. 노동자가 주도하기에는 지금까지 만들어둔 노동관련 사상과 체계가 너무나도 복잡하고 정교하다 판단했기 때문이다. 또한 익숙해진 종속을 벗어나기는 다소 어렵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모든 개개인에게 공통된 이익을 제시하기는 다소 어려웠다고 본다. 구심점이 필요했다. 바로 정치권력이다.

 

우선 모꼬지를 만든다. 그 다음 그 분야에 속한 인구수만큼 의석 수를 배정한다고 명시하면 된다. 그리고 그 의석은 분야에 속한 무소속만 가능하도록 해야 한다. 그래야 정당의 당리당략에 휘말리지 않을 수 있다. 일단 기존 의석 수는 그대로 둔다. 당장은 국회는 약 200명이 지역 대표, 100명이 정당 대표, 그리고 200명 분야 대표로 구성하면 된다고 본다. 모꼬지의 분류는 너무 세세하게 하면 복잡해지므로 큰 단락으로 나눠야 한다. 과학, 법조, 의료, 정보, 교육, 서비스 등 같이 말이다. 그 다음 세부 분야에서 의석 수를 따로 배정한다. 이래야 어떤 세부 분야 역할의 필요성이 감소할 때, 다른 세부 분야로 자연스럽게 이동할 수 있다. 역할이 중심이 되면 시대의 변화에 유연하게 대응할 수 있다. 모꼬지는 누구나 여러 곳을 가입할 수 있다. 여러 분야에 속하는 일이 있기 때문에 공정함을 위해 선거권 신고 수를 기준으로 의석 수를 배정하고, 선거권을 보유한 사람은 모꼬지에 여러 명의 후보가 있더라도 한 명만 투표할 수 있도록 한다. 그 뒤 배정 된 의석 수만큼 많은 표를 받은 순서대로 의원이 되면 된다. 최초 과학자와 노동자만 모꼬지에 속하는 걸 생각했다. 하나 정치권력이 부여된다면, 어떤 사회적 역할을 맡거나 맡을 예정인 모든 인구가 속할 수 있어야 한다. 전문경영인이라는 역할이 있는 만큼, 경영인도 모꼬지에 속하는 것이 이상할 것 없다고 본다. 공무원도 예외가 될 수 없다. 사회적 역할을 가진 것은 마찬가지니까 말이다. 공무원 조직이 아닌 공무원 개인의 역할로 모꼬지를 결정한다. 국가가 공인한 분야의 모임이 시장경제에 악영향을 끼친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은 지역의 모임과 무엇이 다르다고 보는가? 학교와 무엇이 다르다고 보는가? 모꼬지는 정치권력의 획득과 시장경제에 필요한 분야별 능력을 터득하기 위한 모임이다. 분야의 대표가 정치권력을 얻게 된다면, 분야에 속한 인원들이 알아서 모꼬지를 살찌우게 될 것이다. 마치 지역의 대표가 지역을 살찌우는 것처럼 말이다. 분야의 인원에게 표를 모으기 위한 선심성 공약이 나타날 수 있다. 하나 지역의 인원에게 표를 모으기 위해 무의미에 땅에 세금을 쓰느니, 국민에게 쓰는 것이 훨씬 더 낫다. 분야에 속한 인구수만큼 의석 수가 배정되기 때문에 사람들을 모으기 위해 일자리 쪼개기를 자발적으로 하게 될 것이다. 지금 정부에서 일자리를 창출한다고 말을 한다. 그러나 필요한 노동력의 숫자는 한정되어 있는 법이다. 각 분야가 자발적으로 역할을 쪼개지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정치권력을 미끼로 시장에 맡기면 자연스럽게 대부분의 사람이 노동력을 대여의 형태로 거래할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될 수 있을 것이다. 경제활동이 아니더라도 괜찮다. 모든 사회활동이 경제적이라 말하기는 어려우니까 말이다. 분야에 속하면서 어떤 역할을 수행하면 자연스러운 사회참여가 가능하다. 그러면 기초소득을 받는 일이 있더라도 개개인이 퇴락하지 않고 건전하게 생활할 수 있을 것이다.

 

각 분야가 정치권력을 얻게 된다면, 보다 적극적이고 활발한 시장개혁이 나타날 수 있다. 지금까지 개혁은 정당의 정치가 손에 달려 있었기 때문에 지나치게 느긋했다. 방만했다. 기업의 빠른 대응이 바로 정치권으로 이어질 수 있다. 표를 위해 지역 발전에만 몰두하는 정치가 아닌 분야의 발전을 위해 발로 뛰는 정치가 되는 것이다. 느릿느릿한 국가의 대응에 답답하던 이들은 이에 크게 공감할 거라 본다. 경제를 위해서라도 분야가 직접 정치에 참여할 수 있어야 한다. 무엇보다 민주적일 수 있다. 지역의 대표는 실질적으로 부동산을 소유한 10%의 이익을 대변했다고 본다. 반면 분야의 대표는 그 분야에 속한 모든 인구의 이익을 대변한다. 이 얼마나 민주적인가? 직접적인 이해관계가 있기 때문에 정당의 선동에 휘말리지 않고 냉정하고 분야의 이익을 대변할 수 있는 이를 대표로 선출할 것이다. 개인의 이익을 위한 분야별 모임인 모꼬지는 노동의 집단화가 만드는 개인의 집단 종속에서 벗어나고, 지역의 대표가 만드는 비민주주의에서 벗어나게 할 것이다. 그렇게 해서 개인은 자유를 얻는다. 자유국가가 된다. 그렇게 해서 부동산이 아닌 분야가 성장한다. 분야가 성장해야 국가도 성장하는 법이다. 부동산 가격이 높아지면 실 거주 수가 줄어들어 되려 국가경쟁력에 해만 될 뿐이다. 본질적으로 보았을 때 이것이 구조 자체를 바꾸는 최초의 변화가 될 거라 생각한다.

 

아파트의 택배 차량 통제로 아파트와 택배 노동자와 갈등이 벌어진 적이 있다. 아파트의 민원이나 택배 회사와의 갈등으로 택배 노동자는 무력했다.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공멸을 전제로 한 무력한 파업 말고는 없었다. 만약 그들에게 정치권력이 있었다면 어떻게 대응했겠는가? 그냥 입법절차를 밟으면 된다. 택배 차량 통제 시 서비스 제공 거부가 가능토록 입법하면 된다. 동의하는 여론도 많았기 때문에 어려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실제 입법하지 않고 입법절차만 밟더라도 무력한 파업보다 훨씬 더 효과가 있었을 것이다. 분야별 정치권력이 의미하는 것이 바로 이런 것이다. 과거 간호조무사가 하는 역할에 비해 부당한 대우를 받고 있다고 사회에 호소한 적이 있었다. 병원에서 간호사를 고용하는 비용이 아까워서 간호조무사를 고용한 뒤 간호사가 해야 할 일을 하게 한 것이다. 심지어 의사가 해야 할 일을 하는 간호조무사도 있었다. 의사 대신 간호조무사가 무릎수술을 849회나 한 적이 있다고 한다. 불만이 나오는 것은 당연하다. 하나 사회에서는 이런 배경을 무시한 채, 단순히 간호조무사가 간호사의 대우를 받기를 바란다는 식으로 곡해되어 퍼져 그들의 명예가 훼손되었다. 이는 간호조무사의 미숙한 대응이 초래한 사건이기도 하다. 인터넷에서 떠도는 간호조무사의 의견을 보면 미숙함 대응을 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들이 부당한 대우를 받았다는 것에는 이견이 있을 수가 없다. 간호조무사 수가 약 80만명 된다고 한다. 지역 의석을 고려해보면 2~4석은 부여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만약 간호조무사 대표가 정치권력을 쥐었다면 이런 부당함을 개혁하는 것이 어려웠을 거라 보는가? 상대적으로 학력이 낮기 때문에 정상적인 국회업무를 맡지 못할 거란 선입견이 있을 수 있다. 그렇다면 묻겠다. 지금 국회의 모든 업무를 국회의원 혼자서 담당하는가? 민주주의 사회에서 대표가 될 권리가 학력에만 있는가? 그들 가운데 가장 유능한 사람이 대표가 되고, 그 대표가 의원이 되어 국회업무를 맡는다. 그러다가 미숙함으로 분야에 손해를 끼치면 그 대표를 선출한 이들이 감당해야 할 문제다. 가사도우미의 수는 약 60만명 된다고 한다. (실제 수는 모름) 그럼에도 그들이 최근까지 노동권을 인정 받지 못하고 있었다고 한다. 도대체. 민주주의 사회에서 그들을 대변하는 정치가는 어디에 있었는가? 도대체. 누가 그들을 대변했는가? 도대체. 그들의 대표는 누구였는가? 지역의 대표는 도대체 누구를 대변했던 것인가! 이러고도 민주주의라 할 수 있겠는가! 이는 한국의 민주주의에 대한 지극히 정당하고 합리적인 비판이다!

 

모꼬지는 개개인의 기술과 노동력을 관리 및 성장을 도모하고, 기술과 노동력이란 상품의 품질검증을 구체적으로 한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인간이 어떤 분야의 모꼬지에 속하게 된다면 노동력을 대여의 형태로 판매하는 일이 어렵지 않게 된다. 지금 고용체계가 복잡하고 학력사회가 된 까닭은 학력 외에는 노동력의 품질을 검증을 방법이 마땅치 않기 때문이다. 많은 보호자들이 아이들 교육에 실패하고 있다는 걸 안다. 이는 한국 사회 대부분의 문제와 비슷하게 자유적응실패다. 공부를 강요할 수 없다면 자발적으로 할 수 있게끔 해야 한다. 어떻게 그럴 수 있겠는가? 이는 성년이 된 사람이 학생 때 공부할 걸이라는 후회를 하는 걸 떠올려 보면 된다. 공부를 강요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빠른 사회진출로 사회의 구성과 각 분야가 맡고 있는 사회적 역할을 체험하고 관련된 꿈을 가질 수 있어야, 공부의 필요성을 이른 시기에 깨닫고 자발적으로 공부하려 할 것이다. 본인이 스스로 공부해야 할 동기를 찾아야 한다. 그걸 어떤 분야의 모꼬지에 속하여 학생 시기부터 학업과 노동을 연계하며 사회참여와 정치참여를 통해 인간적인 성장을 하도록 도와야 한다. 자발적으로 하게 된다면 대우가 낮은 단순 노동을 꺼려하는 움직임이 나타날 수 있다. 이에 어떤 사람은 단순 노동 분야에 대한 진출을 꺼려하는 한국 사회상을 우려할 수 있다고 본다. 하나 점차 자동화가 되면서 단순 노동력의 필요성이 줄어들기 때문에 그것은 바람직한 현상이다. 오히려 그 분야에 노동력을 다루는 이가 있다면, 개혁의 걸림돌이 되어 국가 발전에 해가 될 수가 있다. 교육과 산업은 미래지향적으로 가야 한다.

 

모꼬지에 대한 정리는 이후 글에서 더 해보겠다. 나는 내가 제시한 이 국가개혁의 청사진이 개인을 행복하게 하고 국가를 발전시킬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지금까지 한국은 매번 다른 국가를 쫓아가기만 했다. 이제 주도할 수 있는 길이 열려있다고 본다. 모꼬지를 통한 분야별 의석 도입이 시대 개혁의 시작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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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을 경계하는 건 그 나라가 못났기 때문이 아닙니다. 강하니까 경계하는 거죠. 중국의 강약이나 선진과 후진이나 어떤 도덕적 옳고 그름과 관계가 없습니다. 중국 공산당의 공산독재와 중국의 중화사상이 있는 이상, 그들은 자유와 한국의 적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사상이 인간의 행동원리를 결정합니다. 그런 사상을 가진 중국은 중국을 중심으로 주변 타국을 속국화하여 지배할 가능성이 굉장히 높습니다. 속국은커녕 복속시키려 할지도 모르지요. 그런 상황에서 중공에 나라를 팔아먹는 인간은 일제에 나라를 팔아먹는 인간과 같은 매국노일 뿐입니다. 일제가 과거사라면 중공은 현대사지요. 현재를 살고 있는 한국인에게 후자가 더 큰 위험으로 느껴질 것입니다. 이 위협은 동북아 전체가 느끼고 있을 겁니다. 어떤 정치가가 본인의 사리사욕으로 나라를 팔아먹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보다 더 민주적인 사상과 체제가 필요합니다.

 

여성주의는 책임지지 않는 이익을 추구하죠. 성평등을 추구해야 할 여성부가 그런 사상을 가진 것은 기성화폐 질서를 담당하는 금융위원회에서 탈중앙화를 외치며 코인을 권장하는 것과 같은 겁니다. 모든 여성이 여성주의를 추구하는 것은 국가 구성원 절반이 코인을 하고 있는 것과 같은 겁니다. 공동체가 붕괴할 수밖에 없어요. 이치와 진리를 추구하는 현명한 여성들이 객관적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여성주의가 아니어도 여성은 충분히 자유롭고 평등할 수 있습니다. 남성주의가 아니어도 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되려 한국의 여성주의는 여성을 너무 열등하게 봅니다. 무력한 배려만 받자고 주장하는 것이 어찌 여성인권으로 이어지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지금 여성주의는 여성들을 선동해서 일부만 이익을 보고 있는 겁니다. 여성은 보다 자유로워야 합니다. 한국의 여성주의야말로 여성을 억압하는 기제가 되고 있습니다. 여성 징병은 여성을 위한 일이라는 걸 이해해야 합니다. 사회적 역할을 받음으로써 남성과 대등하게 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대표적으로 스웨덴이나 노르웨이가 그렇지요. 지금 한국군이 명예롭지 못하기 때문에 성별 가리지 않고 징병을 꺼려하고 있을 뿐입니다. 여성 징병을 남성이 찬성하고 여성이 반대하는 건 징병 군인의 대우가 너무 형편없으니까 나타나는 웃기는 상황에 불과합니다. 본질을 보세요. 예부터 사회적 역할을 부여 받는 것이 권리였습니다. 그 역할을 통해 이익을 쟁취하는 것이지요. 사회적 역할을 수행하면 굳이 할당제를 도입하지 않아도 여성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좋아질 겁니다. 현명한 여성들이 여성을 무력하게 만드는 여성주의에 휘둘리지 말고 어떤 것이 정말 여성인권을 위한 것인지 다시 생각해봤으면 좋겠습니다.

 

여성주의에 반발하는 남성들이 요새 활발히 활동하고 있지요. 본래라면 신경 쓰지 않을 사안까지 물고 늘어지고 있습니다. 이해합니다. 당한 것을 돌려주고 싶다는 심리, 알고 있습니다. 하나, 목적을 명확히 하여 이른바 뇌절을 하는 것은 경계해야 할 것입니다. 모두가 자유롭기 위해서 잠시 억압에 괴로움을 알리는 것을 견지해야 합니다. 중요하지 않는 것도 억지로 지적하는 것이 자유 억압임을 알려주고 있는 겁니다. 개인이 어떤 극단적인 사상을 가진 것 자체는 처벌하기는 어렵습니다. 사상을 가진 것만으로 처벌의 요소가 된다면, 그것은 공산주의적 사상검증에 가까운 겁니다. 잘못된 것은 공정해야 할 사회가 정치적 또는 개개인의 사리사욕으로 극단적인 사상을 무비판적 수용 한 것입니다. 자유주의 사회에서는 개개인이 아닌 그런 무책임한 사회를 비판해야 합니다.

 

징병 군인의 내부고발은 군의 명예를 위한 일이었다고 판단합니다. 무엇이 군의 명예입니까? 어떤 행동이 군을 명예롭게 만듭니까? 부당한 대우가? 비리가? 군은 명예로워야 합니다. 지금까지 징병 군인은 그다지 명예롭지는 못했다고 생각합니다. 부당한 대우가 너무 많았으니까요. 모병 군인도 크게 다르지 않았지요. 비리가 너무 많았으니까요. 대우도 형편없고 이미지도 좋지 못했던 군도 이제는 명예로워져야 한다고 봅니다. 쇄신을 통해 국민에게 존중 받는 것으로 명예를 얻길 바랍니다.

 

예전에 코로나 음모론에 대해 쓴 적이 있지요. 그렇게 생각한 이유는 단순해요. 순수하게 현상과 인과를 떠올려보니 그런 가능성이 떠올랐습니다. 그런데 왜 그게 되지?

 

새로운 길은 멀고도 험하군요. 국가개혁에 대해 작성해보고 있는데 생각보다 오래 걸립니다. 알고 있는 지식을 정리하는 것만이 아니라 새로 생각하는 부분도 많으니까요. 사상서와 소설과 읽고 뉴스와 개인방송과 만화를 보고 게임을 즐기면서 자연스럽게 생각을 하게 됩니다. 많은 생각을 해야 합니다. 시간이 필요합니다. 어떤 사안에 대해 생각하다 잠들었다가 깨어나면 새로운 생각이 나타날 때가 많습니다. 그렇게 생각을 하면 할수록 이 세상은 바꿀 것이 굉장히 많네요. 나는 내가 올바른 길을 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받아드렸으면 좋겠습니다. 괴롭군요. , 이런 젠장. 사람들이 정치에 무관심했던 것은 그들의 책임이 아니었어요. 정치를 비롯한 자유적응실패에 대한 책임은 사상가가 져야 할 것이었네요. 사상가가 새로운 길을 안내하는 일을 하지 않았으니까요. 사상가라 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 책임을 겸허히 받아드려야 할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사상가에게 책임을 돌리는 대신, 지금까지 걸어온 길을 우회하거나 돌아가는 한이 있더라도 인류 개개인의 행복을 위한 새로운 길을 걸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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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쇄작용    친구신청

1. 유교사상? 팬데믹 이후 전세계적 공통 부동산은 5~20%상승이라 유교사상 들먹이기엔 어렵죠. 유동성 증가로 통화가치의 하락으로 봅니다.
2. 인구수 초과자본..인구수가 늘어난게 아니라 가구수의 증가로 봐야되고 1인가구 중심정책의 폐해죠. 어떻게든 유교적 가치관을 가져와 가족 중심체계로 가야되죠. 유교사상의 붕괴로 기성세대의 불만을 가진 젊은세대가 1인 독립하는 비율이 높아졌어요.
3. 정치권력..이건 동감합니다. 노무현때 가덕도 땅 사놓은 민주당 중심세력들이 이번에 가덕도 밀어붙이는것만 봐도 그렇고
청와대 김수현 자기 집잎으로 지하철 노선을 ㄷ자로 바꾸는것도, 김현미 본인 지역구쪽에 신도시 발표하는것도 그렇고..문제는 맞는데 어떻게 대처할만한 방법이 없죠

kimpol3    친구신청

1. 유교쏼라쏼라 = 뇌피셜. 반박할 가치조차 없음.
2. 수도권 쏠림 현상탓 = 이게 2~3년사이의 문제도 아니고,
지방도 지역에따라 집값 심하게 상승함. 즉 인과관계 부족.
3. 정치권 = 그럼 개발을 안하나? 이번 부동산 폭등 전에는
개발 안하고 놀았음? 개발 많이 해도 떨어질땐 떨어졌음.
이또한 연관성 부족.
실제로는 걍 돈이 많이 풀렸고, 해외 자금이 부동산에 많이 유입됬고,
재개발이다 뭐다 동네들 죄다 때려 부시니까 거기서 살던 사람들은
다른 집이 필요해졌고,
신축이 좋아보이니까 신축 아파트로 쏠리는 현상이 심화됬고,
그래서 구축은 텅텅 비었는데 신축은 전세를 추첨해서 들어가는 수준이고,
핵가족화에 이어서 쿼크가족화라고 할만큼 1인가구, 2인가구가 늘었고,
그만큼 분화되니 집은 더 필요하고.
이런게 맞물리는거지. 무슨 유교 쏼라쏼라 개발이 문제다 난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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