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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사회와 복지 (0) 2022/12/31 AM 01:26

사회와 복지

 

 

 

탐구를 멈춘 학문에 발전은 없다.

 

 

 

지구는 특별하지만 평범하다. 모순되나 관점을 더하면 논리적이게 된다. 가까이서 본 지구는 생명체가 사는 특별한 행성이지만 멀리서 본 지구는 평범한 행성 중 하나에불과하다. 지구돋이와 창백한 푸른 점이란 사진을 통해 이 사실을 알수 있다. 지구돋이는 아폴로 8호가 달에서 촬영한 사진으로 지구의 구름과 바다가 뚜렷하게 보이고, 창백한 푸른 점은 보이저 1호가 태양계를 벗어나기 직전에 촬영한 사진으로 희미한 점으로만 보인다. 거리 관점이 달라지자 인식이 달라졌다.

언어는 일반어가 비속어가 될 수 있다. 모순되나 관념을 더하면 논리적이게 된다. 내국인에게는 일반어로 느껴지는 단어가 외국인에게는 비속어로 느껴질 수 있다. 영어 jot과 sip이란 단어를 통해 이 사실을 알 수 있다. 영어 jot과 sip은 영어권에서는 일반 단어지만 한국어권에서는 한국어 중성기를 비속하게 이르는 단어와 발음이 유사하여 착각할 수 있게 된다. 언어 관념이 달라지자 인식이 달라졌다.

소리는 들리는 것이 들리지 않을 수 있다. 모순되나 감각을 더하면 논리적이게 된다. 미성년에게는 들리는 소리가 성년에게는 들리지 않을 수 있다. 고주파란 주파수 대역을 통해 이 사실을 알 수 있다. 일정 이상의 고주파는 청신경이 손상되지 않은 미성년은 들리지만 청신경이 손상된 성년은 들리지않는다. 육체 감각이 달라지자 인식이 달라졌다.

 

인간의 관점·관념·감각의 차이에 의해 동일한 현상을 다르게 인식하게 되었다. 모든 인간은 다른 관점·관념·감각을 가지고 있어 다른 인식을 갖게 된다. 현상을 다르게 인식한다는 것은 혼자서는 현상의 본질을 보기 몹시 어렵다는 것이 된다. 본질을 볼 수 없다는 것은 진리도 알 수 없다는 것이 된다. 사물 자체의 성질이나 모습도 모르면서 진리를 아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혼자서는 진리를 알기 몹시 어렵다. 그것이 인간의 한계다. 그러나 인간은 혼자가 아니다. 각각 다른 인간의 인식을 모으면 본질을 볼 가능성이 있다. 극단적으로 말해 색만 보는 사람과 형태만 보는 사람과 내용만 보는 사람의 인식을 합치면 사물의본질이 볼 수도 있다. 그 본질에서 진리를 알 가능성도 있다. 가령 지구는 가까이서 보면 특별해 보이고 멀리서 보면 평범해 보이는 모습을 가지고 있다. 이것이 지구의 본질 중 하나다. 만약 가깝거나 먼 것만 보았다면 지구의 진정한 모습을 알 수 없었을 것이다. 이것을 통해 지구에서 관측 가능한 평범한 행성이나 관측 불가능한 행성도 가까이서 보면 특별한행성일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인식을 늘려 본질을 보는 것으로 이치에 맞는 추론이 가능하게 된다. 이것은 매우 당연해 보일 수 있다. 그런데 이런 것이 탐구를 하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방법이다. 학문을 만들거나 배우는 자는 반드시 알아야 한다. 그래야 본인이 보고 받고 느낀 것이 본질이 아닐 수 있음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본인의 인식이 본질이 아닐 수 있는 것을 알아야 다른 인식을 모아 본질을 보고 본질을 통해 진리를탐구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런 태도가 올바른 탐구를 위한 자세다.

탐구 과정은 탐구 자세를 유지하면서 해야 한다. 만약 복잡한 지식을 배우고 발상을 하는 과정을 거치면 본인의 인식 위에 지식의 인식이 덮어씌워지면서그 인식을 진리로 여기는 것으로 본인의 관점·관념·감각으로 새로운 인식을 가지려 하지 않게 되고 다른 인식도 알아보지 않게 된다. 그 지식의 정보가 본질에 해당한다 하더라도 본인의 관점·관념·감각으로 새로운 인식을 가지려 하지않으면 하나의 인식으로 시야가 좁아지면서 다른 탐구에도 나쁜 영향을 주게 된다. 그러므로 간단한 지식을 배우고 발상부터 하는 과정을 거쳐야 본인의 인식과 지식의 인식을 분리하여본인의 인식을 갖기 위한 탐구를 할 수 있게 된다. 그러면 시야가 넓어지면서 다른 탐구에도 좋은 영향을 주게 된다. 지식보다 탐구를 중시하는 올바른 탐구 자세를 유지할 수 있게 된다. 이렇게 탐구를 중점으로 학습하는 것을 가리켜 탐구주의라 하겠다. 탐구주의로 학습하게 되면 새로운 인식을 낳거나 받아드리기가 수월하게 된다. 그런 것을 가리켜 지성이라 부른다.

 

모든 인간은 현상에 대한 인식이 다르기에 공통 인식이 필요해진다. 같은 것을 보고도 다른 인식이 나타나면 인간과의 관계가 불가능해지고, 인간과의 관계가 불가능하면 인간의 집단인 사회도 이룰 수 없게 된다. 그런 상황에서 인류는 언어란 공통 인식을 통해 사회를 이룰 수 있게 되었다. 공통 인식을 통해 다른 인식을 가진 이들이 모여 만든 지식에 체계가 생길 수 있었고, 체계 있는 지식을 통해 인류는 문명이 탄생하고 발전할 수 있었다. 오늘날 인류의 문명 사회는 언어란 공통 인식 덕분이다. 언어에 대한 보다 정확한 공통 인식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 사전이다. 사전에 기록된 낱말은 객관적 기준이 되어줄 수 있다. 이야기라면 말을 주고 받는 동안 서로가 공통 인식을 갖게 될 수 있지만, 글이라면 그럴 수가 없으므로 공통 인식을 위해 사전적 정의를 자주 사용할 예정이다. 사전적 정의가 전부 진리는 아니지만 공통 인식은 될 수 있다.

모든 사전적 정의는 다음과 같은 문장 구조를 쓸 것이다. [A는 B를 뜻한다.] 특정 분야의 용어는 다음과 같은 문장 구조로 쓸 것이다. [A_분야는 B를 뜻한다.] 두 개 이상의 뜻을 적을 때에는 다음과 같은 문장 구조로쓸 것이다. [A1는 B를 뜻한다. A2는 B를 뜻한다.]

그럼 관점·관념·감각의 사전적 정의를 알아보자. [관점은 사물이나 현상을 관찰할 때, 그 사람이 보고 생각하는 태도나 방향 또는 처지를 뜻한다.][관념은 어떤 일에 대한 견해나 생각을 뜻한다. 관념_철학은 어떤 대상에 관한 인식이나 의식 내용을 뜻한다.][감각은 눈, 코, 귀, 혀, 살갗을 통하여 바깥의 어떤 자극을 알아차림을 뜻한다.] 이것으로 읽는 이는 해당 낱말에 대한 공통 인식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사회와 복지는 사회 문제 해결을 목적으로 한다. [사회 문제_사회 일반은 사회 제도의 결함이나 모순으로 발생하는 모든 문제를 뜻한다. 실업 문제, 교통 문제, 주택 문제, 공해 문제, 청소년 문제 따위가 있다.] 사회에 발생하는 문제들을 복지로 대응하여 해결하는 것이 보통의 사회 복지다. 그런데 사회 문제에 대해 생각해보면 지나치게 오랫동안 해결되지 못하는 것들이 너무나도 많다. 이념, 인권, 차별, 정치, 경제, 지역, 세대, 성별, 역사, 출산, 자살, 도박, 마약 등의 문제들은 길게는 수천 년에서 짧게는 수십 년 동안 해결되지 못하고 있다. 어째서 해결되지 못하고 있는가? 정부 권력을 가진 정치가 때문인가? 아니면 국민 권력을 가지고 정부 권력을 선출한 국민 때문인가? 아니다. 정치가도 국민도 아니다. 사회 문제가 해결되지 못한 까닭은 문제 해결 방법을 제시하지 못한 인문학 때문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하자. 특정 분야에서 문제가 지속되면 전문가의 책임이 된다. 의료라면 의사와 의학이다. 특정 병을 치료하지 못하는 것은 의사가 실력이 부족할 수도 있지만 의학이 치료 방법을 모를 수도 있다. 만약 한 명의 의사가 특정 병을 치료하지 못한다면 그 의사가 문제지만 모든 의사가 특정 병을치료하지 못하는 것은 의사가 아닌 의학이 문제다. 그와 같다. 모든 인간이 사회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인간의문제가 아니라 인문학의 문제다. 학문에서 사회 문제 해결 방법을 알지를 못하기 때문에 그 누구도 사회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던 것이다. 인문학은 다양한 문제 해결 방법을 제시하기는 했으나 문제가 해결되기는커녕 악화되기는 경우도 많았다. 그럼에도 그 누구도 인문학에 책임을 묻지 않는다. 인문학에 책임을 묻기 보다는 정치가나 국민을 탓한다. 왜 이런 현상이 나타나는가?

국민이 학문에 책임을 묻지 않는 것은 가치관 때문이다. [가치관_심리는 가치에 대한 관점을 뜻한다. 인간이 자기를 포함한 세계나 그 속의 사상에 대하여 가지는 평가의 근본적 태도이다.] 가치는 진리, 도덕, 아름다움 등을 말하며 가치 판단은 옳다, 그르다, 좋다, 나쁘다, 예쁘다, 밉다 등과 같은 판단을 말한다. 경험이나 사상 학습 등이 가치 관념에 영향을 끼치고 가치 관념에 의해 가치관이 나타나게 된다.

대부분 사람들은 본인의 가치관을 진리로 여겨 바꿔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고 가치관을 형성케한 인문학에 책임을 묻지 않는다. 가령 병은 아프니까 치료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고, 모든 의사가 치료하지 못할 경우에는 의학에 책임을 묻고자 하는 태도가 나올 수도 있는데, 인문학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인문학에 책임을 묻지 않고 기대도 하지 않는다. 그러면서 인문학 단순히 취업이 되지 않는 학문으로만 인식하고 있다. 인간의 가치관을 결정하는데 중요한 학문이 이토록 경시되고 있다는 사실이 불쾌하다. 그런데 인문학은 학문을 하는 학자와 학생조차도 본인의 가치관을 진리로 여기면서 가치에 대한 탐구를하지 않는 것으로 학문을 하지 않는 사람들과 비슷한 가치관을 갖기도 하고 있다. 가치에 대한 탐구를 하지 않으니까 인문학이 근본적으로 발전하지 못하고, 사회 문제도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

현재 인문학적 주장의 가치관을 형성하게 한 명제는 어느 시대에서 온 것인가? 대부분 이런 것을 고려치 않고, 학자조차도 본인의 가치관을 진리처럼 여기며 주장하기도 하고 있다. 성을 죄악시하며 억압하자는 주장의 명제는 어느 시대에서 온 것인가? 가부장제 시대의 유교나 기독교의 윤리다. 그럼에도 그걸 생각지 않고 가부장제를 비판하면서 성을 죄악시하고 억압하고 있다. 기술을 천시하며 홀대하게 되는 주장의 명제는 어느 시대에서 온 것인가? 조선 시대 사농공상이다. 그럼에도 그걸 생각지 않고 조선 시대를 비판하면서 기술을 천시하며 기초 과학을 소홀히 하는 경향이있다. 모든 개인이 그런 가치관을 가진 것은 아니지만 이런 주장이나현상이 있다는 것은 부정할 수가 없다. 그들은 본인의 가치관을 진리로 여기고 가치에 대한 탐구를 멈춘 것이다. 가치에 대한 탐구를 하여 새로운 가치를 가지지 않는 이상, 어떤 주장도 과거를 되풀이할 수 있다.

인문학에 있어 가치는 수학의 사칙 연산과 같을 정도로 기본적이다. 가치를 근간으로 사상과 철학을 하고, 사상과 철학을 근간으로 인문학을 한다. 그런 상황에서 본인의 가치관을 진리로 여기며 가치에 대한 탐구를 멈추자 인문학 전체가 멈추게된 것이다. 인문학의 가치와 수학의 사칙 연산의 차이는 보편성이다. 전자는 보편적이지 않으나 후자는 보편적이다. 보편적이지 않는 것은 학문적 진리가 될 수 없다. 만물을 일반 진리로 부르고 학문에서 쓰이는 진리는 학문적 진리라 부르겠다. 가령 어떤 것이 A 국가에는 있는데 B 국가에는 없다면 학문적 진리에 해당하지 않는다. 특정한 것이 모든 국가에 있더라도 학문적 진리임을 보장할 수 없는데 보편적이지도 않는다면 말할것도 없다. 특정 국가의 가치가 보편적이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가치관을진리로 여기며 가치에 대한 탐구를 멈췄다. 탐구를 멈춘 학문에 발전은 없다. 발전이 없는 학문의 분야도 발전은 없다. 사회 문제가 해결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은 인문학이 탐구를 멈췄기 때문이다. 인문학은 책임 의식을 가지고 사회 문제를 해결하여 가치가 있는 학문이 되어야 한다.

 

[철학은 인간과 세계에 대한 근본 원리와 삶의 본질 따위를연구하는 학문을 뜻한다. 흔히 인식, 존재, 가치의 세 기준에 따라 하위 분야로 나눌 수 있다.] 인식은 관점·관념·감각으로 분류하여 접근하고, 존재는 자연 과학으로 어떻게 존재하는지는 알 수 있으나 왜 존재하는지는 알 수 없고, 가치는 진리와 도덕과 아름다움 등을 탐구하고 그에 관한 사상을 만들어야 한다. 개인적인 목적은 세상의 존재 이유를 밝히는 것이다. 그것을 위해 영원히 살면서 우주에 진출하여 우주를 탐구하길 바란다.

 

 

 

1. 인문학

 

고질적 사회 문제가 해결되지 못했던 현상은 인문학이 가치에 대한 탐구를 멈췄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학문을 하는 일부가 본인의 가치관을 진리로 여기고 탐구를 멈추는 것은 있을 수 있어도학문을 하는 대부분이 그런 것은 이상하다. 어째서 이런 현상이 나타났는지 알아보자. 그래야 인문학이 가치에 대한 탐구를 하면서 올바른 사회 문제 해결이 가능해진다.

인문학에서 가치에 대한 탐구를 멈춘 본질적인 원인은 학문의 특성에 있다. 인문학은 학문 특성상 탐구를 멈췄다. 하나의 명제를 보자. 모든 학문은 힘을 가지거나 힘에 영합해야 명예를 얻을 수 있다. [영합1 은 사사로운 이익을 위하여 아첨하며 좇음을 뜻한다. 영합2은 서로 뜻이 맞음을 뜻한다.] 아첨하여 명예를 얻은 학문과 서로 뜻이 맞아 명예를 얻은 학문으로 나뉜다.

과거에는 모든 학문에서 아무리 뛰어난 학자라도 힘을 가지거나 힘에 영합해야만 명예를 얻을 수있었다. 당시 힘을 가진 왕이나 귀족이 학문을 하거나 그런 이들에게영합을 해야만 학자의 주장이 반영되었다. 그러다 보니 왕이나 귀족이 가진 가치관에 맞는 주장을 하게 되었다. 그러니까 가치에 대한 탐구를 하지 않았던 것이다. 수학과 과학도 마찬가지였다. 힘을 가지거나 힘에 영합해야 학문을 탐구할 수 있는 환경이 주어지고 탐구 결과도 인정 받았다. 인류는 학문이 힘으로부터 독립되지 못하여 오랫동안 문명이 발전하지 못했다.

그러다 서양에서 과학 혁명이 나타났다. [과학 혁명_역사는 17세기 유럽에서 일어난 자연 과학 분야의 획기적 변혁을 뜻한다. 근대 과학의 확립뿐만 아니라 정신과 의식의 거대한 혁명을 일으켰다.] 이것에 의해 인문학과 과학의 발전 양극화가 나타나게 되었다. 인문학과 달리 과학은 과학적 방법을 통해 힘을 가지거나 힘에 영합하지 않아도 과학의 결과에 대한명예를 얻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수학도 수학적 방법을 통해 힘을 가지거나 힘에 영합하지 않아도 수학의 결과에 대한 명예를 얻을 수 있게 되었다. 인간을 탐구하는 인문 계열(문과)와 달리 자연을 탐구하는 자연 계열(이과)는 힘과 무관하게 발전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것은 과학 혁명으로 시작되었다기 보다는 점진적으로 변화하다 과학 혁명이 되었다고 봐야 한다. 과학적 방법은 경험적 관찰과 측정을 이용하여 가설을 설정하고 예측하여 실험 및 검증하는 방법으로진리를 탐구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을 통해 나온 결과는 힘의 의사와 무관하게 학문적 진리가 되었다. 가령 인문학적 주장 중 하나인 자유주의는 힘을 가진 사람이 수용해야 사회에 널리 퍼지지만 과학적주장 중 하나인 만유인력의 법칙은 힘을 가진 사람이 수용하든 말든 학문적 진리가 되어 사회에 널리 퍼진다.

과학도 결과를 내기 전 연구 환경은 힘을 가지거나 힘에 영합해야 좋을 수 있었지만, 과학의 결과만큼은 힘과 관련이 적었다. 가령 마리 퀴리는 여성이기에 연구 환경을 비롯한 다양한 차별을 받았지만 연구 결과는 여성인 것과관련 없이 인정 받을 수 있었다. 마리 퀴리는 1903년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하고 1911년 노벨 화학상을 수상했다. 과학은 이처럼 개인의 개성과 무관하게 결과만 내면 명예를 얻을 수 있었다. 자연 계열은 이렇게 힘과 무관하게 명예를 얻는 것으로 기하급수적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더구나 고정 관념에도 얽매이지 않을 수 있었다. 플랑크의 양자 가설은 흑체 스펙트럼의 실험 결과에 의해 본인도 수용하기 어려웠던 양자라는 개념을받아드릴 수 있었다. 과학적 방법으로 고정 관념을 깬 것이다. 이 시점에서 학문의 양극화는 뚜렷하게 되었다. 인문 계열은 힘이 가진 가치관에 영합하면서 가치에 대한 탐구가 정체되고 자연 계열은 힘과 무관하게탐구하면서 발전한다. 현재 인문 계열과 자연 계열의 사회적 대우 차이는 이러한특성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다.

 

동양과 서양의 문명 차이는 과학 혁명 유무의 차이가 크다. 여기서 말하는 동양과 서양은 각각 고대 중국과 고대 그리스와 그에 영향을 받은 문명을 지칭한다. 고대 중국은 인간을 탐구했고 고대 그리스는 인간과 자연을 탐구했다. 탐구의 차이로 동양은 인문 계열만 발전했다면 서양은 인문 계열과 자연 계열이 둘 다 발전한 셈이다. 고대 중국의 제자백가는 통치 방법을 주장한 수많은 사상가들을 말한다. 대표적으로 유가의 공자, 묵가의 묵자, 도가의 노자, 법가의 한비자 등이 있다. 정치사상이 주류였기에 아무래도 자연을 탐구하는 일은 드물었다. 자연을 탐구하더라도 인간 중심으로 바라본 자연이었다. 반면 고대 그리스는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은 인간을 탐구하고 탈레스와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과 자연을탐구했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해 자연 자체를 탐구하는 철학이 나타났다. 자연 철학의 탄생이다. 자연 철학은 이후 자연 과학으로 바뀌게 된다. 동양에서 과학 혁명이 일어나지 않았던 까닭은 동양은 애초에 자연 계열 탐구에 소홀했기 때문이다.

과학 혁명 유무의 차이뿐만이 아니다. 종교의 특성 차이도 있다. 동양의 종교는 유교, 불교, 도교, 힌두교 등으로 나뉠 수 있는데 유교는 수기치인과 인의예지를 주장한 정치사상이고 불교와 도교는각각 해탈과 신선이 되기 위한 수행 사상이고 힌두교는 윤회를 믿으며 내세를 위해 살아가는 초현실 사상으로 모두 내향적인 성향을 띤 종교였다. 명나라의 영락제가 장거리 원정을 후원하기도 했으나 대체로 중국 외는 전부 오랑캐라 멸시하며 폐쇄적이게되었다. 반면 서양의 종교는 기독교, 이슬람, 유대교 등으로 나눌 수 있는데 모두 유일신 사상으로 신의 가르침을 설파하기 위해 선교하는 것이 목적인 외향적인 성향을 띤 종교였다. 서양의 대항해 시대와 제국주의 시대에 선교사들이 있었다는 것을 상기하자. 동양은 내부 정치나 수행이나 내세를 위한 삶에 몰두했으나 서양은 선교하기 위해 전 세계를 떠돌아다녔다는것이다. 현재 기독교인의 수가 약 25억명이며 무슬림이 약 19억명이고 불교는 약 5억명에 힌두교는 약 10억명이다. 불교는 아시아에 분포해있으며 힌두교는 인도에 분포해있다. 모든 종교가 전파되어서 퍼지기는 했으나 교리의 차이가 있다. 불교와 힌두교는 교리 자체에서 종교를 전파 해야 할 당위성이 존재하지 않아 일부만 적극적으로전파하였고 기독교와 이슬람은 교리 자체에서 종교를 전파 해야 할 당위성이 존재하여 모두가 적극적으로 전파하였다. 그렇기에 불교와 힌두교가 전 세계로 퍼지지는 않았던 것이다. 동양은 기술이 발전하지 못했으면서 세계로 진출한 동기도 없었지만 서양은 기술이 발전했으면서 세계로진출할 동기도 있었다. 이 두 가지로 동양과 서양의 문명 차이가 발생했다.

서양의 기독교 문명과 이슬람 문명은 유사한 상황이었다. 둘 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을 수용했고 유일신 사상으로 세계에 진출할 동기가 있었다. 그럼에도 차이가 발생했던 것은 환경의 차이였다. 본래 고대 그리스 유산을 이어 받은 것은 이슬람이었다. 7세기 무렵부터 이슬람이 고대 그리스 서적을 아랍어로 번역하여 그들의 지식을 흡수했다. 이슬람은 광학과 연금술 등이 발전했다. 그 흔적으로 알칼리나 알코올 등의 아랍어가 과학의 용어로 쓰이고 있다. 그러다 12세기 무렵부터 중세 유럽에 대학이 나타나면서 고대 그리스의 지식을 물려받고 이슬람의 과학을 흡수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아랍어로 번역된 고대 그리스 서적을 다시 라틴어로 번역하고 고대 그리스뿐만 아니라 이슬람의과학도 배웠다. 그러면서 유럽은 고대 그리스와 로마 문명을 되살리는 르네상스로부흥하며 과학 혁명의 준비를 하였다. 반면 이슬람은 몽골의 침입으로 이슬람 문명이 파괴되어 몰락하면서 이슬람 근본주의로 향하는 것으로 과학의 발전이 정체되거나 퇴보하게 되었다. 이것에 의해 기독교 문명과 이슬람 문명이 차이 나게 되었다.

서양은 수많은 전쟁에 의해 기술이 발전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전쟁이 있어도 과학적 방법이 없으면 과학이 그렇게 발전하지 못한다. 동양도 전국 시대와 같은 일상적인 전쟁이 있었던 것을 상기하자. 전쟁을 아무리 해도 학문이 발전하지 못하면 기술은 발전하지 못한다. 전쟁은 전쟁 수단을 얻기 위해 우수한 환경을 제공할 뿐이지, 직접적으로 발전시키지는 않는다. 세계 대전에서 과학이 많이 발전했던 것은 과학적 방법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인문학은 힘을 가지거나 힘에 영합해야 명예를 얻을 수 있다. 그런 상황에서 소수의 힘이 가치에 대한 탐구를 할 확률이 낮고, 소수의 힘의 가치관에 영합하면서 가치에 대한 탐구를 하지 않게 되어 인문학은 발전할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현재 서양 인문학은 과거에 비해 상당히 발전한 것으로 보인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과학에 의해 힘을 가진 사람이 늘어났기 때문이다. 서양 인문학은 과학을 기준으로 바라보면 알 수 있다. 서유럽을 중심으로 바라보겠다.

14~15 세기 흑사병이 확산하여 인구수가 급감하고 화폐 경제의 발달로장원 경제가 소멸하여 농노가 해방되고 백년 전쟁이 일어나고 서방 교회 분열이 일어났다. 14~16세기 르네상스로 고대 그리스와 로마 문명을 되살리면서 문명이 발전하기 시작했다. 과학 기술도 동시에 발전하면서 장기적인 항해가 가능한 범선과 방향을 알 수 있는 나침반의 발명등이 이루어져 15~17세기 대항해 시대의 초석을 마련하게 되었다. 성직자, 하급 귀족, 장인, 상인, 해방 노예 등 다양한 이들이 전 세계를 탐험하고 교역하며 정복하는 것으로 부를 쌓아 올렸다. 정복을 정당화한 것이 바로 기독교다. 정복 대상을 기독교로 개종해야 한다는 종교적 명분으로 세계를 정복했다. 과학 기술의 발달과 유일신 사상의 선교가 대항해 시대를 불러 유럽을 경제적으로 성장케 한 것이다. 16~17세기 대학에서 과학이 발전하면서 과학 혁명이 일어났다. 과학 혁명으로 보다 빠르게 발전하고 보다 많은 사람들이 힘을 쥐게 되었다.

16세기 교황이 아닌 성경을 강조했던 종교 개혁을 주장한 복음주의는교황청으로부터의 해방을 바라던 세속 제후와 사람들에게 영합하여 쓰이면서 개신교가 등장하게 되었다. 17세기 봉건제가 붕괴하면서 중앙 집권적 전제 정치 체제로 변화하면서 국왕의 권력은 신에게 받은것이라 주장한 왕권신수설을 왕들이 영합하며 쓰는 것으로 왕의 절대 권력을 정당화하는 절대주의가 시작되었다. 당시 종교 개혁과 절대주의가 성립될 수 있었던 까닭은 신흥 시민 계급인 상공업자 등 다양하고많은 사람들이 기존 기득권과 다른 힘을 쥐고 있었기 때문이다. 새로운 힘의 출현이 세상의 변화를 촉진시켰다. 가령 구텐베르크의 금속 활자 인쇄술로 루터의 주장이 확산되어 종교 개혁이 가능했고, 중상주의를 통한 시민 계급의 세수입으로 봉건 영주의 쇠퇴에 의해 절대 권력을 쥐게 된 왕정의유지가 가능했다. 절대주의에 대한 반발로 17세기 영국에서 명예혁명이 일어났다. 권리 장전을 통해 영국은 전제 군주제에서 입헌 군주제로 변화했다. 시민 계급의 성장으로 18세기 미국 독립 혁명과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면서 자유주의가 확산되었다. 당시 그런 흐름에 영합했던 사상들은 로크의 삼권 분립설과 몽테스키외의 법의 정신과 루소의 사회계약론 등이 있었다. 만약 사상이 힘에 영합하지 않았다면 의미가 없었을 것이다. 실제 루소의 사회 계약론은 루소 생전에 인정받기 어려웠다고 한다. 마찬가지로 이러한 사상이 없었다면 힘이 있었더라도 결집되지 못하여 혁명은 어려웠을 것이다. 실제 현재 고질적 사회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까닭은 지금까지는 마땅한 사상이 없었기 때문이다. 18세기~19세기 산업 혁명으로 자본주의가 발전하기 시작했다. 동시에 자본가들의 노동자 착취도 발생했다. 당시 개인의 자유와 주권과 소유권을 주장한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와 같은 개인주의 체제는 체제에 맞는 윤리가 부족했기 때문에 자유라는미명 아래 자본가가 노동자를 착취했던 것이다. 그것을 보고 당대 사상가들은 개인주의 체제에 맞는 새로운 윤리를 주장하기보다는 낡은 윤리를 근거로 한 집단주의 체제인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주장했다. 그런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는 노동자 계급에 영합하며 퍼지게되었다. 노동자 계급은 수를 모아 힘을 키워 혁명을 일으켰다. 공산주의 혁명이다.

서양 인문학은 과학의 발전과 다양한 힘의 출현하고 그 힘에 영합한 사상들에 의해 성사된 개혁과혁명이 나타나면서 보다 많은 인간들의 권리가 보장되면서 발전했다. 인문학이 가치에 대한 탐구를 하여 독자적으로 발전한 것이 아니라 과학에 의해 힘을 가진 사람이 늘어나면서 발전하게 된 것이다. 가치는 크게 변하지 않았는데 가치를 추구할 수 있는 이들이 늘어난 것이다. 서양 윤리는 기독교 윤리가 기본이고, 기독교 윤리는 신의 피조물은 모두 평등하다는 평등 사상이므로, 보다 많은 인간의 권리 보장은 본질적으로 윤리 대상 확대에 해당했다. 본래 성직자와 왕과 귀족만 인간으로 대하며 권리를 보장하다가 프랑스 혁명으로 상공업자와 같이힘을 쥔 시민의 권리를 보장하고 공산주의 혁명으로 노동자의 권리도 보장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흐름을 알면 현대의 PC주의와 여성주의도 이해할 수 있다. 윤리 대상을 확대하여 주류 외의 인종, 민족, 언어, 종교, 성별의 권리를 보장하자는 것이다. 대상에는 무지도 포함되어 반지성주의도 나타나고 있다. 윤리 대상을 짐승에게까지 확대한 것이 동물 보호주의다. 가축에 대한 생명 윤리가 그것 중 하나가 된다.

공산주의 혁명에 의해 윤리 대상 확대의 방식이 계급 투쟁이 되어버렸다. 그러면서 윤리 대상 확대 운동이 합리적 기준을 통한 인권 운동이 아닌 불합리한 이권 운동이 되었다. 계급 투쟁이 계급이란 집단만의 이익을 얻을 권리를 주장한 것이기에 이런 현상은 필연이었다. 이권 운동을 하는 이들은 부당한 이익도 계급 투쟁을 통해 얻은 전리품으로 해석하여 정당한 것으로취급하게 되었다.

윤리 대상 확대를 통해 많은 인간들의 권리가 보장되면서 자연스럽게 개인의 권리가 보장되는 개인주의체제가 들어섰다. 그러나 인문학이 새롭게 가치에 대한 탐구를 하지 않았기때문에 인간의 가치 관념은 왕정 시대에 머물러 있었다. 그러면서 집단주의 관념과 개인주의 체제의 충돌이 발생하게 되었다. 집단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집단주의 관념을 가진 이들이 개인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개인주의 체제에서부당한 개인의 자유 침해를 일으키게 되었다. 관념과 체제의 충돌, 이것이 현재 서양 문명의 모순으로 서양 사회의 본질적인 문제다.

현재 미국 인문학이 교조적으로 변한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이다. 명예를 얻는 성공을 추구하는 미국 사회에 영향을 받아 인문학적 명예를 바라는 미국인이 명예를얻기 위해 과거와 다른 윤리 대상 확대인 PC주의를 교조적으로 주장했기 때문이다. PC주의의 대상인 일부 여성, 흑인, 소수자, 이민자 등 또한 교조적으로 다른 미국인의 자유를 부당하게 침해하면서까지 강요하면서 그러한 현상은심화되었다. 집단의 이익을 위해 개인의 권리를 침해한다. 이런 것이 집단주의 관념과 개인주의 체제의 충돌이다.

 

한국을 비롯한 동양은 서양보다 더 심각하다. 동양은 서양의 문명을 흡수하면서 자유주의나 사회주의와 같이 체제는 받아드렸으나 관념은 기존 관념에덧씌웠다. 한국을 예로 들어보겠다. 한국 윤리 중 신분 차별과 같이 동서양이 겹치는 부분은 공적으로 사라졌지만, 연령 차별과 같이 동서양이 겹치지 않는 부분은 공적으로 남게 되었다. 유교는 정치사상으로 모든 가르침이 통치와 연결되어 당시 왕정이 국가를 지배하기 좋도록 설계되어차별을 윤리로 만들었다. 장유유서가 대표적이다. [장유유서는 오륜의 하나를 뜻한다. 어른과 어린이 사이의 도리는 엄격한 차례가 있고 복종해야 할 질서가 있음을 이른다.] 어른과 어린이 사이에 엄격한 차례와 복종해야 할 질서가 있는 것을 윤리로 지정해 가르쳤다. 그 가르침의 흔적이 바로 연상에 대한 존대어 강제다. 서양 문명의 관념을 기존 관념에 덧씌우기만 하여 신분 차별은 폐지하고 연령 차별은 유지하면서도, 차별 금지법과 같이 서양의 윤리 대상 확대는 추구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이런 사회 현상이 나타나게 된다. 자유를 외치면서 억압을 행하고 평등을 외치면서 차별을 행한다. 한국은 서양의 관념과 체제 충돌에 의한 모순을 흡수한 상태에서 윤리를 덧씌우는 바람에 유교에의한 사회적 모순도 남은 상태라는 것이다. 거기에 사실 더 심각한 것이 있다. 관념의 덧씌움은 조선에도 있었기 때문이다.

한국의 종교는 크게 민족 종교인 무교와 고려 국교인 불교와 조선 국교인 유교로 나눌 수 있다. 그런데 각각 변화를 겪을 때마다 인문학적 탐구를 통해 체계적으로 변화하기 보다는 무조건 지우거나덧씌우는 바람에 각각 사상의 특성이 남아버렸다. 조선은 무교에 의해 미신이 남고 불교에 의해 금욕주의가 남은 상태에서 유교의 가르침을 실천했다. 조선이 무교와 불교를 탄압했다 하지만 민간에 뿌리깊게 남은 것을 논리적 부정을 하지 않는 이상그에 대한 관념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그러자 민중은 미신을 믿고 욕망을 절제하는 바람에 분야가 성장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유교의 가르침을 실천하기 위해 유교 경전에만 매달리게되었다. 그것이 조선 말기다. 애초에 불교와 유교는 모순적이었다. 수행 사상인 불교는 해탈하기 위해 욕망을 금하거나 절제해야 했지만 정치사상은 유교는 통치자가되기 위해 학문에 대한 욕망을 추구해야 했다. 이런 모순적인 사상이 혼재하자, 통치자가 되기 위한 욕망과 생존하기 위한 욕구만 남고 나머지 욕망은 절제했다.

금욕주의는 본인이 금욕을 추구하면 금욕이란 욕망을 추구하는 욕망주의가 되고 타인에게 금욕을 강요하면원치 않는 금욕을 하기에 금욕주의가 된다. 일반적으로 인간의 본성과 어긋나는 것은 자발적으로 하지 않기 마련이다. 인간의 본성과 어긋나는 금욕주의가 윤리가 되자 윤리적인 사회를 이루기 위해 타인에게 금욕을 강요하게되었다. 그 결과 욕망이 큰 인간은 욕망이 작아지면서 사리사욕을추구하여 부패와 타락이 잦게 되었고, 욕망이 작은 인간은 욕망이 사라져 그저 살기만 하는 삶을 살게 되었다. 사농공상. 통치자가 되기 위한 욕망을 이루기 위한 유교에 대한 우대와 살아남기 위해 필수적인 농업에 대한 우대, 그 외의 분야는 천대했다. 그러면서 조선은 조선 말기에 유교와 농업을 제외한 대부분 분야가 망해버렸다.

산업 혁명이 일어난 영국에서도 기독교의 금욕주의가 있었으나 기독교의 금욕주의는 기독교 교리에의한 것이었으므로 기독교 교리에 의한 종교 전파를 명분으로 한 세계 정복은 금욕에 해당하지 않고 오히려 욕망을 가지고 하게 되었다. 거기다 장유유서의 차이가 있다. 동양은 연상이 연하에 가치관을 강요하는 것이 윤리다. 오히려 그런 강요에 복종하지 않는 연하가 부도덕했다. 그렇기에 동양은 더욱더 새로운 세대가 새로운 주장을 하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장유유서야말로 동양을 과거에 머물게 만들었던 닻이었다.

한국은 서양과 동양의 모순을 해결하지도 않으면서 서양의 윤리 대상 확대의 흐름만 따라가면서 사회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 이제는 알았을 것이다. 한국에서 사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서양의 관념과 체제 충돌과 동양의 사회적 모순까지 전부 고려하여 개인주의 체제에 맞는 관념이 담긴 다양한 사상을 만들고, 그것을 사람들이 수용할 필요가 있다.

 

인문학 중 과학적 방법을 쓸 수 있다 여긴 분야는 사회 과학이 되었다. [사회 과학_사회 일반은 사회 현상을 지배하는 객관적 법칙을 해명하려는 경험 과학을 통틀어 이르는 말을 뜻한다. 연구 대상에 따라 사회학, 정치학, 경제학, 역사학 따위로 나뉜다.] 그러나 사회 과학은 자연 과학과 달리 과학적 방법을 쓴다고 하더라도 정확한 결과를 내기가 어렵다. 범위나 방식 등이 다르기 때문이다. [나비 효과_사회 일반은 어느 한 곳에서 일어난 작은 나비의 날개짓이 뉴욕에 태풍을 일으킬 수 있다는 이론을 뜻한다. 미국의 기상학자 로렌즈가 사용한 용어로, 초기 조건의 사소한 변화가 전체에 막대한 영향을 미칠 수 있음을 이르는 말이다.] 자연 과학은 나비의 원자부터 탐구하면서 체계를 갖춰나간다면 사회 과학은 나비의 날개짓으로 뉴욕에태풍을 일으키는 현상부터 탐구하고 있다. 세상을 이루는 물질의 근원부터 탐구하면서 발전한 자연 과학과 사회 현상을 탐구하려는 사회 과학이 같을 수가 없다. 토대가 완전 다르다. 과학적 방법을 쓰려면 경험과 실험과 재현 등보다 먼저 실험에 쓰이는 명제가 학문적 진리여야 한다. 그러나 사회 과학에서 근거로 삼는 가치는 학문적 진리가 아니다. 진리가 아닌 명제를 토대 삼아 과학적 방법을 쓴다 한들 의미가 없다. 물리학에서 과학적 방법을 사용하는데 쓴 중력에 관한 명제가 만유인력의 법칙과 같은 학문적 진리가아닌 것이라 가정해보자. 어떻게 되겠는가? 그 과학적 방법은 의미가 없다. 지금 사회 과학은 그런 것과 다를 바 없다.

접근 방식이 달라야 한다. 가령 특정 상품에 대한 수요가 발생하는 원인을 찾는다고 해보자. 그러면 우선 상품이 인간에 끼치는 영향을 자연 과학적으로 분석하는 것으로 시작해야 한다. 그걸 토대로 사회 과학이 수요가 발생하는 원인을 찾으면 된다. 사회 과학은 과학적 방법에 몰두하기 보다는 자연 과학을 활용하는 법에 더 집중해야 한다. 사회 과학 분야에 과제가 생기면 과제 내 자연 과학의 영역은 자연 과학 분야가 지식을 찾거나탐구하면 된다.

 

사회 과학이 과학이 되기 위해서 필요한 세 가지가 있다.

 

첫째, 유사 과학 배제. 자연 과학이 유사 과학을 배제한 것과 같이 사회 과학도비과학적인 주장을 배제해야 한다. 과학을 자칭하면서 유사 과학을 학문에 쓴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유사 과학을 전제로 한 과거의 사상과 철학 또한 그것을 참고 자료로만 여겨야지 학문에 활용할생각을 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이제 쓸 수 없다. 앞으로도 그렇다. 과거 사상과 철학은 인간의 자아에 대해 수많은 탐구를 했다. 그런데 만약 인공 자아가 개발된다면 자아의 원리가 증명된 것이나 다름 없기에 그 탐구들은 대부분 쓸모가 없게 된다.

 

둘째, 중립성. 자연 과학의 증명한 학문적 진리가 특정 집단이 아닌 인류공동의 이익으로 이어지는 것과 같이 사회 과학 또한 인류 공동의 이익으로 이어지는 학문적 진리를 탐구해야 한다. 자연 과학이 보편적으로 가치 있는 것은 중립성 때문이다. 힘에 영합하지 않아도 결과는 명예를 얻을 수 있는 자연 과학의 특성상 권력으로부터 독립되어 중립성을갖게 된 것이다. 그렇기에 거의 모든 인류의 지지를 받는다. 사회 과학 또한 중립성을 가져야 한다. 특정 집단의 이익을 위한 탐구는 금해야 한다. 사회 과학이 특정 집단의 이익을 대변하기 위한 논리를 짜낸다면 단순한 이익 집단에 불과하여 과학이라할 수 없다.

 

셋째, 본질. 자연 과학이 미시적인 탐구부터 시작하여 본질을 보고 학문적진리를 증명하는 것과 같이 사회 과학 또한 본질을 볼 수 있어야 한다. 음식으로 보이는 조형물을 음식으로 여긴 다음 탐구하는 것이 우스꽝스럽듯이 사물 자체의 성질이나 모습을 못 본다면 탐구하는 의미가 없다. 자연 과학과 사회 과학은 다루는 영역이 다르므로 본질을 보기 위해서는 다양한 인식이 필요하다. 사회 과학은 다루는 주제가 각각의 분야와 겹치는 것이 많다고 하는데 그것이 바람직하다. 분야마다 다른 관점·관념·감각으로 주제에 접근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여 다양한 인식을 모으면 현상의 본질을 보고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게 된다. 따라서 어떤 문제 해결을 하기 위해서는 특정 분야에서만 접근할 것이 아니라 다양한 분야에서 동일한문제에 접근하여 다양한 인식을 모아 현상의 본질을 찾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사회 과학은 자연 과학의 학문적 진리와 함께 각 분야의 관점·관념·감각을 체계화하여 본질을 볼수 있는 구조를 확립한다면 보다 과학적이게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인간은 곧잘 쉬운 답에 의존하려고 한다. 눈 앞에 보이는 것을 답으로 여기려 하게 된다. 그러나 그것은 답이 아닐 확률이 높다. 인문학은 본질을 보고 학문적 진리를 밝혀 사람들이 쉬운 답에 이끌려 잘못된 길로 가는 것을 막고바른길로 안내해야 한다. 길잡이가 현혹되면 안내 받는 사람들도 현혹된다.

 

 

 

2. 가치

 

고질적 사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체제에 맞는 가치가 있어야 한다. 다수의 인간이 민주정과 같은 개인주의 체제에서 왕정과 같은 집단주의 관념으로 살아가면 다시 왕정과같은 사회로 퇴보하게 될 수 있다. 왕정의 가치관에 의해 수직 사회가 옳다 여기거나 부당한 자유권 침해가 좋다 여길 수 있다. 그런 이들이 다수가 되면 민주주의 체제의 원리에 의해 왕정과 다를 바 없는 사회가 된다. 그야말로 민주정의 탈을 쓴 왕정이다. 그러지 않기 위해서는 대다수의 인간이 왕정의 가치관이라는 왕정 잔재에서 벗어나 민주정에 맞는가치관을 가져야 한다.

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현상의 본질부터 봐야 한다. 왕정의 가치는 무엇인가? 우선 가치가 무엇인지 알아보자. [가치_철학은 인간의 욕구나 관심의 대상 또는 목표가 되는 진, 선, 미 따위를 통틀어 이르는 말을 뜻한다.] 여기서 진은 진리를 말하고 선은 도덕을 말하고 미는 아름다움을 말한다. 진리는 탐구로 찾고 도덕은 윤리로 체계화하며 아름다움은 예술로 추구한다. 가치의 관점은 사전적 정의와 같이 대상 또는 목표가 되는 무엇을 바라보고 있었다. 인간이란 대상이 옳거나 그르다. 상품이란 대상이 좋거나 싫다. 대상에 가치가 있다고 여기며 대상에 대한 가치 판단을 해온 것이 지금까지의 가치로 대상에 가치판단을 한 것이 왕정의 가치였다.

인간의 행동 원리에 영향을 끼치는 순서는 보통 진, 선, 미다. 진리는 만유인력의 법칙과 같이 대부분 부정하지 않고 영향을받는다. 그러나 도덕은 유교, 기독교, 공리주의 같이 비슷한 도덕관념을 가진 이들이 모인 사회마다 다를 수 있어 영향도 사회마다 다르다. 아름다움에 있어서는 색, 형태, 소리 등을 비롯하여 그걸 바탕으로 만들어지는 미술, 음악, 소설, 만화, 영화, 게임 등과 같이 개개인마다 다를 수가 있어 영향도 개개인마다다르다. 그렇기에 보통 인간의 다른 행동 원리는 도덕을 체계화하여개개인의 도덕심에 영향을 끼치는 윤리가 가장 큰 영향을 끼친다. 윤리를 통해 가치를 알아보자.

 

[윤리_철학은 인간 행위의 규범에 관하여 연구하는 학문을 뜻한다. 도덕의 본질·기원·발달, 선악의 기준 및 인간 생활과의 관계 따위를 다룬다.] 도덕을 연구하는 학문이 윤리다. 본래 사회의 질서를 유지하는 옳고 그름은 학문이 있기도 전에 존재했기 때문에 이미 존재하는 도덕과그걸 연구하는 윤리로 분리되었다. 그렇기에 보통 도덕은 관습에 해당하고 윤리는 성품에 해당한다. 관습화된 도덕을 연구하여 보다 바른길을 안내 하는 것이 윤리라 할 수 있다. 윤리를 배워 성품을 갖춰 관습화가 되면 다시 도덕이 된다. 그걸 연구하여 체계화하여 바른길을 안내하면 다시 윤리가 된다. 그러면 인류의 보편적인 도덕과 윤리의 본질에 대해 알아보자.

동양부터 접근하겠다. 유교의 성선설과 성악설을 살펴보자. [성선설_철학은 사람의 본성은 선천적으로 착하나 나쁜 환경이나 물욕으로악하게 된다는 학설을 뜻한다. 중국의 맹자가 주장하였다.][성악설_철학은 인간의 본성은 이기적이고 악하므로 선 행위는 후천적습득에 의해서만 가능하다고 보는 학설을 뜻한다. 중국의 순자가 주장한 것으로, 인간은 선천적으로 한없는 욕망을 가지고 있어 그대로 두면 싸움만이 일어나 파멸하기 때문에 예로서 바로잡아야 한다고 하였다.] 이 둘은 인간에 윤리 판단을 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외 성무선악설이나 성기호설도 같다. 불교의 번뇌와 업을 살펴보자. [번뇌_불교는 마음이나 몸을 괴롭히는 노여움이나 욕망 따위의 망념을 뜻한다.][업_불교는 미래에 선악의 결과를 가져오는 원인이 된다고 하는, 몸과 입과 마음으로 짓는 선악의 소행을 뜻한다.] 이 둘은 인간에 윤리 판단을 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서양으로 접근하겠다. 기독교의 원죄와 칠죄종을 살펴보자. [원죄_기독교는 인류의 시조인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 먹은죄 때문에 모든 인간이 날 때부터 가지고 있다는 죄를 뜻한다.] [칠죄종_카톨릭은 본죄의 일곱 가지 근원을 뜻한다. 교오, 간린, 미색, 분노, 질투, 탐욕, 해태 따위를 이른다.] 이 둘은 인간에 윤리 판단을 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지금까지 대부분의 윤리는 대상에 윤리 판단을 했다. 이것이 지금까지 윤리의 본질이다.

윤리에는 규범 윤리학과 응용 윤리학과 분석 윤리학 등이 존재한다. [규범 윤리학_철학은 사람이 어떻게 행동하여야 할 것인가에 관한 보편적 원리를 연구하는 학문을 뜻한다.] 규범 윤리학에서 연구한 보편적 원리를 바탕으로 응용하거나 분석한다. 그렇기에 보통 규범 윤리학이 기본이 된다. 규범 윤리학에는 의무로 접근한 칸트주의와 귀결로 접근한 공리주의와 덕으로 접근한 니코마코스 윤리등이 있다. 보편적 윤리인 황금률도 규범 윤리학에 해당할 것이다.

[규범은 인간이 행동하거나 판단할 때에 마땅히 따르고 지켜야할 가치 판단의 기준을 뜻한다.] 여기서 가치 판단의 기준을 대상에 윤리 판단을 한 것으로 정했다. 그리고 대상에 윤리 판단을 한 결과 대부분의 윤리는 인간의 욕망을 악으로 규정했다. 인간의 본성은 선하다 말한 성선설도 예외는 아니다. 인간의 본성은 선하다 하였으나 그런 본성을 키우지 않으면 악인이 될 수 있으므로 수행을 통해욕심을 없애야 한다고 주장했다. 즉 성선설조차 인간의 본성은 선하나 욕망은 악하다고 한 것이다. 지금까지 거의 모든 윤리는 인간의 욕망은 악하다라는 전제로 접근하게 되었다.

 

 

인간의 욕망은 악하다는 전제로 인간의 욕망은 금하거나 절제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다. 금욕주의다. [금욕주의_철학은 정신적·육체적 욕망이나 욕구 및 세속적 명예나 이익을탐하는 모든 욕심을 억제하여 종교나 도덕에서 이상을 성취하려는 사상을 뜻한다. 불교나 기독교에서도 이 사상을 볼 수 있다.] 불교의 금욕주의는 번뇌에서 벗어나 해탈에 이르기 위한 수단으로 보고 기독교의 금욕주의는 사탄의유혹에 빠지지 않고 신의 구원을 받기 위한 수단으로 본다. 수행 사상인 불교에서 금욕은 수행 방법의 기본이나 유일신 사상인 기독교에서는 해석에 따라 구원받을 수 있는 방법이 다양하다. 면죄부가 대표적이다. 불교나 기독교나 종파나 교파에 따라 다르지만 기본적으로 금욕을 중시하다. 그 외 유교의 성선설과 성악설, 플라톤이나 스토아 학파 등이 있다. 대부분 사상에서 인간의 욕망은 악하다 보았기에 거의 모든 윤리는 금욕주의적이다. 그것으로 악을 줄이고자 했다. 그러나 그 때문에 인간은 자유 의지를 잃고 성장하지 못하게 되었다.

[욕망은 부족을 느껴 무엇을 가지거나 누리고자 탐함. 또는 그런 마음을 뜻한다.] [탐하다는 어떤 것을 가지거나 차지하고 싶어 지나치게 욕심을 냄을 뜻한다.][욕심은 분수에 넘치게 무엇을 탐내거나 누리고자 하는 마음을 뜻한다.] 정리하면 욕망은 부족을 느껴 분수에 넘치게 무엇을 바라는 마음을 뜻한다. 지금까지 윤리는 그런 바람에 의해 악이 나타난다고 보고 금욕을 주장했다. 그러나 욕망은 악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가치가 나타난다. 인간은 분수에 넘치게 무엇을 바라는 마음이 있어야 자유 의지를 가지고 노력하여 성장해 한계를넘어 높은 가치 생산할 수 있게 된다. 금욕을 하게 되면 그런 가치도 나타나지 않는다. 금욕은 수많은 가치 중 악을 제거하기 위해 모든 가치를 죽인다. 금욕하게 된 인간은 단순히 밥을 먹고 잠을 자고 똥을 싸는 존재가 되어버린다. 그야말로 무가치하다.

 

인류의 역사는 대부분 왕정과 같은 지배의 역사였다. 지배의 역사에서 윤리는 지배를 위한 수단으로 악용되었다. 왕정의 정치사상에서 윤리는 지배를 위한 수단으로 쓰였다. 유교는 왕정의 정치사상으로 유교의 윤리는 지배를 위해 만들어졌다. 신분으로 역할을 정해두고 왕과 신하, 남성과 여성, 성년과 미성년과 같이 정해진 역할 내에서 가져야 할 덕목을 체계화하여 가르쳤다. 그러면서 나타난 차별을 장유유서와 같이 윤리화하였다. 그런 상황에서 조선 왕정은 왕정의 지배를 공고히 하기 위해 유교의 가르침인 삼강오륜에서 삼강을왜곡하는 일까지 저질렀다. 그런 점에서 기독교의 유일신을 전제로 한 평등사상은 민주주의의 발전에 도움이 되었다 볼 수 있다. 모두가 신의 종으로 신에게 복종하는 것으로 평등하다고 주장한 것이긴 했으나 인간 사이에서는 차별을윤리로 만들지 않고 평등했기에 가치에 대한 탐구를 하지 않고 윤리 대상 확대만 해도 개인주의 체제가 나타날 수 있었던 것이다.

금욕주의도 마찬가지였다. 금욕주의는 금욕을 해야 할 대상이 지정되지 않아 지배자가 피지배자에게 금욕을 강요하여 이용하게되었다. 피지배자가 욕망을 가지고 지배에서 벗어나기 전에 그런 욕망을갖지 못하도록 금욕을 강요한 것이다. 욕망을 빼앗긴 인간은 자유 의지를 잃어버렸다. 자유 의지를 잃고 아무런 개성이 없는 인간이 되었다. 그것이 의미하는 것은 이용하기가 매우 쉽다는 것이다. 피지배자는 자유 의지를 잃고 지배자의 지배에 복종하게 되었다. 지배자가 피지배자에게 금욕을 강요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피지배자가 욕망을 가지고 권리를 요구하면 지배를 지속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면 혁명이 일어나 왕정은 붕괴할 것이다. 실제 서양은 그렇게 하여 왕정이 붕괴했다. 금욕주의를 윤리로 배워 금욕주의가 왕정의 윤리라는 것이 이해하기 어려울 수도 있다. 그러면 금욕주의가 현재 사회에 끼치는 영향에 대해 알아보자.

 

첫째, 부자유. 윤리는 사람으로서 마땅히 행하거나 지켜야 하므로 금욕이윤리가 되면 금욕을 강요하게 된다. 금욕은 인간의 본성과 어긋나 자발적으로 하지 않기에 더욱 더 강요하게 되었다. 불교의 금욕주의는 절제이며 모든 욕구나 욕망을 금하는 것이 아니라 하지만, 그것이 윤리가 되면 강요하는 인간의 주관적 기준에 따라 욕구나 욕망을 금하거나 절제하게 만들게된다. 자기 수행 사상을 윤리로 만드니 본인 수행을 타인에게 강요하고있다. 그러면서 개인의 자유가 침해되게 된다. 금욕과 같이 인간의 본성과 어긋나는 것이 윤리가 되면 개인은 윤리를 강요당하여 부자유를 겪게된다. 금욕이 윤리인 사회는 개인이 욕망을 가지고 소비를 하면욕망에 의한 사치는 죄라면서 공격한다. 심지어 책임 전가까지 한다. 정부가 IMF를 국민의 과소비 때문이라 말하듯 말이다. 금욕을 강요당한 많은 학생들은 어린 시절 누리지 못한 자유에 극심한 결핍을 느낀다. 어린 시절 즐기지 못한 인형이나 게임기를 사서 즐겨도 같이 놀 친구는 없다. 그걸 평생 후회하는 사람이 많다. 성적인 욕망도 악이라며 나라 전체가 성욕을 금하는 것을 강요한다. 그 결과 한국은 성매매 금지, 포르노 금지, 온갖 성 문화 규제와 검열 등이 일어나고 있다.

 

둘째, 무개성. 욕망이 금해지거나 절제되면서 바라는 것이 없어지거나 적어진다. 바라는 것이 없어진 인간은 아무 가치도 생산하지 않고 적어진 인간은 사리사욕을 추구할 수 있는돈에 집착하게 된다. 절실히 바라는 것이 없으니까 보편적으로 바라는 것을 이룰수 있는 돈을 바라게 되는 것이다. 보통 선입견에 의해 금전 만능주의가 인간의 욕망에 의한 것이라 착각할 수 있는데, 욕망이 아닌 금욕에 의한 것이다. 모든 문제는 일차원적으로 접근하면 본질을 보기 어렵다. 현상의 원리를 파악해야 한다. 인간이 특정 목적이 아닌 돈이란 수단을 바라는 것은 진정한 의미에서 절실하게 바라는 것이 없기때문이다. 욕망이 크고 다양했다면 돈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명확한목적을 바랐을 것이다. 그렇게 하여 욕망이 적어지는 바람에 돈을 위해서라면 감옥도갈 수 있다는 개성이 없는 금전 만능주의자가 늘어나게 되었다.

 

셋째, 무의미. 바라는 것이 없는 인간은 무의미한 삶을 살게 된다. 아무런 의미가 없다. 진심으로 바라는 것이 없으니까 시간을 무용하게 쓴다. 생산성 있는 활동을 하지 않는 것은 바라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왜 학교 폭력이 일어난다 보는가? 인간의 악한 욕망 때문으로 보이는가? 아니다. 진정한 의미에서 바라는 것이 없으니까 폭력에 시간을 쓰고있는 것이다. 학교 폭력에 가담하다 스포츠를 하고 나서 폭력에 손을 때는사례가 있다는 것을 상기하자. 바라는 것을 이루기 위해 쓸데 없는 것에 시간을 쓰지 않게 되면서 학교 폭력을 하지 않게 된 것이다. 큰 욕망을 가져야 폭력과 같은 것에 쓸 시간이 사라지면서 학교 폭력도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바라는 것이 없으니까 노력도 하지 않는다. 가르치는 것만 배우고 그 외의 지적 호기심도 없다. 진리적 탐구심도 없다. 일차원적이고 순간적인 쾌락만 찾는다. 창작물에서도 당장 결과가 나오는 전개만 찾게 된다. 취미도 욕망을 갖고 열정적으로 하기 보다 시간만 때운다. 일도 시키는 일만 하고 자발적으로 노력하여 성과를 내고 대가를 요구하지 않는다.

욕망을 버리고 무의미한 존재가 되면 이용당하기가 너무나도 쉬워진다. 현대의 사이비 종교에 세뇌 당하고 일부 집단의 이익만 주장하는 가치관에 휘둘리는 것은 욕망이적거나 없기 때문이다. 대부분 사이비 종교가 금욕을 말하고 그걸 위해 재물을 바치라말하기도 하는 것을 생각해보자. 금욕을 강요하고 세뇌하는 것으로 재산을 강탈하는 것이다.

 

금욕적인 이들이 많은 사회가 발전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진정한 의미에서 사회를 망치는 것이 금욕주의다. 욕망은 인간의 강한 바람을 말하고 금욕은 그런 강한 바람을 악하게 만들었다. 강한 바람을 갖지 못하니까 사회가 성장하지 못하고 정체된다. 사회가 정체되면서 죽어간다. 좀비의 나라다. 좀비처럼 무의미한 삶을 살다가 죽는다. 노는 것도 제대로 못하고 무용하게 살다 죽는다. 행복의 의미도 불행의 의미도 없다. 아무 의미 없이 죽는다.

한국 역사에서 세계에 의미 있는 결과가 적었던 것은 금욕주의와 장유유서 때문이었다. 금욕주의를 장유유서로 연하에게 물려주고 물려주었다. 현재 자본주의 체제에 의해 돈에 대한 욕망이 정당화된 한국과 조선에 머물러 있는 북한에서 세계에의미 있는 결과를 낼 수 있는 인간 수의 차이가 얼마인지 생각해보자. 한국 역사에서 한국인은 무능한 것이 아니라 금욕에 의해 무능해져 버렸던 것에 불과했다. 조선 시대 청렴한 관리를 가리켜 청백리라 칭송했던 것과 같이 욕망이 없는 것이 옳다고 느끼게끔가치관을 비틀어놓았다. 청백리 같이 재물에 욕망이 없는 인간보다 재물에 대한 욕망과사람을 돕고자 하는 욕망을 가진 인간이 실제 가치가 있다.

인류가 망한다면 인간의 욕망 때문이 아니라 금욕 때문일 것이다. 정말 욕망이 컸다면 육체를 한계를 넘기 위해 불로불사를 달성하고 우주 진출에 성공했을 수도 있다. 그렇게 불로불사와 우주 진출에 성공하면 욕망에 의한 지구 환경 파괴는 큰 문제가 되지 않을 정도로과학이 발전했을 것이다.

 

 

인간의 욕망이 악하다는 전제로 악한 인간의 욕망에는 타인의 행복이 존재하지 않음으로 자기를 희생하여타인의 행복과 복리를 위하도록 가르쳐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다. 이타주의다. [이타주의_철학은 사랑을 주의로 하고 질서를 기초로 하여 자기를 희생함으로써 타인의 행복과 복리의 증가를행위의 목적으로 하는 생각을 뜻한다. 또는 그 행위.] 요약하면 본인의 이익보다 타인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사상이다. 왜 이타주의가 윤리가 되었는가? 얼핏 보면 윤리가 되는 것이 당연하다 여길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의 이익에 타인의 행복이 존재할 수도 있다는 것을 상기하자. 개인의 이익에 타인의 행복이 존재한다 생각했다면 굳이 타인의 행복과 복지를 위해 희생하라고 말할필요가 없다. 인간의 욕망이 악이므로 개인의 이익에 타인의 행복이 아예없다고 생각하니까 그걸 윤리라 주장한 것이다.

이타주의와 대립하는 이기주의에 대해 알아보자. [이기주의_철학은 자기 자신의 이익만을 꾀하고, 사회 일반의 이익은 염두에 두지 않으려는 태도를 뜻한다.] 요약하면 본인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사상이다. 사회 일반의 이익은 염두에 두지 않으려는 태도라는 사전적 정의에서 인간의 이익 안에 타인의 행복이 존재할 리 없다는 보편적 인식이 있음을보여주고 있다. 이것이 지금까지 인류의 고정 관념이었다. 상식적으로 생각하자. 타인의 행복을 보고 본인이 행복했던 적이 단 한번도 없다고 말할 수 있는가? 대부분은 타인의 행복을 보고 본인도 행복했던 적이 있다. 그게 인간이다. [이익은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보탬이 되는 것을 뜻한다.] 타인의 행복으로 본인의 정신에 보탬이 되면 그것을 이익으로 여긴다. 그렇기에 본인의 이익만을 추구해도 타인의 행복을 위할 수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 일반의 이익은 염두에 두지 않는다는 것을 굳이 붙인 것은 이타주의와 대립한이기주의를 나쁘다고 말하기 위해서였다. 즉 자기를 희생하여 타인의 행복과 복리를 바라고 행동하는 이타주의를 선으로 만들기 위해, 굳이 사회 일반의 이익을 염두에 두지 않는다는 표현을 넣어 본인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이기주의를악으로 만든 것이다.

 

이타주의의 본질로 접근해보자. 다음의 문장에 대해 생각해보자. 애국심을 주의로 하고 사물의 순서나 차례를 기초로 하여 자기를 희생하여 국가의 국민의 행복과복리를 위해 행동한다. 이것이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전체주의적 희생이다. 어떻게 이런 구시대적인 희생 강요가 있을 수 있느냐며 화낼 수 있다. 그런데 이것은 이타주의의 사전적 정의에 국가와 국민이란 대상을 넣은 것일 뿐이다. 그러자 국가를 위해 국민을 희생시키는 전체주의적 희생이 나왔다. 이제는 알아야 한다. 이타주의는 대상이 정해진 바가 없기 때문에 악용되기가 너무나도 쉽다. 그래서 지배자가 이용하기가 너무나도 쉽다. 대상을 지배자로 설정하고 희생자를 피지배자로 설정하면 된다. 수직 사회에서는 그렇게 이용되고 있다. 이타주의는 타인을 이타적으로 만들어 본인이 이용하는 부류와 본인을 이타적으로 만들어 타인에게이용당하는 부류와 같이 두 가지로 나뉜다. 전자는 보통 왕, 교주, 부모, 성년, 남성 등이고 후자는 백성, 신자, 자녀, 미성년, 여성 등이다. 전자가 후자를 이타적으로 만들어 이용했다. 왕에 대한 충성, 교주에 대한 신앙, 부모에 대한 효도, 성년에 대한 복종, 남성에 대한 섬김 등. 이타주의로 지배나 이용을 정당화한 것이다. 지배자의 윤리에 세뇌된 인간은 지배자와 비슷한 태도로 접근하면 이용하기가 쉽다. 사이비 종교에 세뇌된 인간 대부분도 그런 식으로 이용당해 세뇌된 것이다. 이타주의를 윤리로 배워 이타주의가 왕정의 윤리라는 것이 이해하기 어려울 수도 있다. 그러면 이타주의가 현재 사회에 끼치는 영향에 대해 알아보자.

 

첫째, 무례함. 한국도 시대가 달라져 서양의 윤리 대상 확대가 실행되었다. 그러자 강자가 약자를 이타적으로 만드는 것뿐만 아니라 약자도 강자를 이타적으로 이용하는 사례가나오기 시작했다. 국민과 자녀와 미성년과 여성 등이 정부와 부모와 성년과남성 등에게 비논리적으로 때를 쓰며 억지를 부리면서 부당한 이익을 요구하게 된 것이다. 그걸 수용하게 된 이유 또한 이타주의의 영향을 받는다. 이타주의가 윤리가 되다 보니 지배자에 의해 이타적인 인간은 선인이 된다. 그런데 이타적인 인간은 필연적으로 타인에게 이용당하는 약자가 된다. 왕정의 윤리에 의해 선인은 약자가 되고 약자는 선인이 된다. 그런 과정의 의해 약자는 선인이라는 잘못된 편견이 생기게 된다. 동시에 선인인 약자와 대립하는 강자는 악인이라는 잘못된 편견도 생긴다. 이것을 가리켜 언더도그마라 부른다. 약자가 선인이라는 잘못된 고정 관념을 악용하여 부당한 이익을 요구하는 비논리적인 황당한 태도는대부분 이타주의를 근거로 한다. 일부 촉법소년의 범죄, 일부 여성들의 무고, 일부 노동자의 폭력 투쟁 등이 그렇다. 타인을 위해 희생하는 것이 옳으니 네가 나를 위해 희생하라는 것이다. 범죄를 저질러도 용서하고 무고를 해도 용서하고 폭력을 써도 용서해라. 그것이 이용하는 측의 이타주의다. 많은 사람들이 무례한 인간을 혐오하기도 하는데, 그것은 무례함을 혐오하는 것이지 인간을 혐오하는 것이 아니다.

가끔 타인을 도운 사람이 언론에 공개되는 일이 있다. 그러면 어떻게 되었는가? 온갖 인간들이 연락을 하여 본인도 도우라고 강요하거나 폭력까지 쓰기도 한다. 왜 그런 행동을 했을까? 그들이 이기적이었기 때문일까? 아니다. 이타적이었기 때문이다. 단지 이용하는 측일 뿐이다. 타인을 도운 인간은 타인에게 이타적으로 이용될 수 있는 인간으로 생각하고 이용해먹기 위해 그렇게 행동한 것이다. 사회의 온갖 무례함이나 미개함은 대부분 이타주의를 근거로 한다.

이기주의와 이타주의의 차이는 정당화 방법이다. 이익 추구는 같은데 이타주의는 윤리라며 부당한 이익 추구조차 정당화한다. 그러면서 타인을 이타적으로 만들어 이익을 얻는 것을 당연하게 여긴다. 이타주의를 말하며 타인의 친절을 당연하게 여기며 감사할 줄을 모르게 된다. 무료로 가치 있는 일을 하지 말라는 말도 이타주의에 의한 것이다. 한번 무료로 해주면 이용당하는 인간으로 인식되어 끝까지 무료로 해달라 강요하게 되기 때문이다. 사회 복지 대상이 사회 복지사를 모질게 대하거나, 민원인이 공무원에게 사납게 대하거나, 관광지의 주민이 외지인에게 바가지를 씌우는 짓을 하거나 하는 등의 것들도 전부 이타주의가 원인이다. 인간을 대등한 인간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이타주의로 이용할 도구로 보니까 그런 무례함을 저지르는것이다. 길고양이 사료 등의 분쟁도 같다. 길고양이와 길고양이를 아끼는 본인을 위해 타인이 이타적으로 희생하라는 것이 현재 길고양이 문제다. 더치페이를 부당하게 여기거나 특혜를 당연하게 여기거나 하는 등도 같다. 청년, 열정, 인생, 바른, 가족 등의 단어가 신뢰도를 잃어버린 것도 일부 이들이 이런 단어를 악용하여 이타적인 관점에서 타인의 이타심을 요구하며 이용했기 때문이다. “청년이 열정을 갖고 하는 것이니 다소 품질이 떨어져도 이해해주세요.” “가족을 위하는 것과 같이 희생해주세요.” 사회 문화 온갖 것에 어떤 이유로 불편한 사람들의 주장 또한 이타주의를 근거로 한다. 불편한 사람의 이익을 위해 불편하지 않은 사람이 희생하라는 식으로 나오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논리로 설득하는 것이 아니라 본인의 주장이 옳다고 말하여 강요한다. 그걸 정당화하기 위해 낡은 윤리를 끌어오기도 한다. 본인을 위해 타인이 희생하는 것이 당연하다 여기니까 이런 무례한 행동을 하게 된다.

이렇게 이해하기 어려운 인간의 추악한 모습은 대부분 타인을 이타적으로 만들어 이용하려는 태도에서나온다. 정말 추악하다. 본래 모든 인간은 추악한 행동을 할 수 있는데 그걸 윤리로 정당화하였기 때문에 제약 없이 횡포를부리는 것이다. 서로가 서로를 이용하고 이용당할 수 있기 때문에 상대를보면 경계를 하게 된다. 이용당할까 걱정한다. 선수 쳐서 이용하려고 하기도 한다. 조금의 손해도 받아드릴 수 없는 것은 그걸 받아드렸다가 이용당하는 처지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타인을 위해 희생하는 것이 윤리가 되니까 이 모양이다. 이타주의는 일부를 제외하고는 서로를 이타적으로 만들어 이용하려는 생각을 부추기는 저질 윤리다.

 

둘째, 집단 이기주의. 집단 이기주의를 보고 이기적이라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아니다. 이타주의다. 집단 이기주의는 집단의 이익을 위해 개인이 희생하기 때문이다. 가령 기피 시설 설치를 반대하는 것을 지역 이기주의라는 집단 이기주의라 한다. 그런데 거기서 기피 시설에서 일하는 사람은 그걸 찬성할 수도 있다. 그러나 집단의 이익을 위해 그런 개인을 희생시킨다. 가끔 모든 개인이 집단의 이익을 위할 수도 있지만 시간이 흐르면 달라질 수도 있고 그걸 보편화할수도 없다. 이런 집단 이기주의는 실생활에서 경험할 수 있다. 집단의 이익을 위해 개인의 자유를 침해하는 사례가 많기 때문이다. 산업을 규제하고 문화를 검열하는 모습을 일상적으로 보고 있다. 이타주의를 윤리로 만든 사회는 대부분 집단 이기주의에 의해 희생당한다. 집단의 이익을 위해 강요와 억압 또한 나타나게 된다. 희생당하고 싶지 않은 개인이 있으면 직설적으로 윤리를 명분으로 희생을 강요하거나 암묵적으로 동조압력을 통해 희생을 강요한다. 집단주의, 민족주의, 전체주의, 배타주의 등등이 이타주의를 근거로 한다. 이 때에도 이용하는 인간과 이용당하는 인간으로 나뉜다. 이용하는 인간은 강요하고 이용당하는 인간은 강요 당한다.

 

셋째, 책임 회피. 책임 회피 또한 이타주의에서 나타나게 된다. 이타주의를 윤리로 만들면 이타적으로 행동한 모든 것은 본인의 이익이 아닌 타인의 이익이므로 타인이책임지라고 하게 된다. “난 잘못한 것이 없어, 너를 위해서 한 것이잖아?” “난 잘못한 것이 없어, 네가 시켜서 한 것이잖아?” “난 잘못한 것이 없어, 모두를 위해서 한 것이잖아?” 실제 타인을 위한 것이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책임을 지게 되게 되면 이타주의를 말하며 타인의 이익을 위해서 한 것이므로 결과에 대한 책임을줄이거나 없애달라고 말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다 보니 보편적 책임 의식 자체가 성장하지 못한다. 이 때에도 이용하는 인간과 이용당하는 인간으로 나뉜다. 이용하는 인간은 책임을 회피하고 이용당하는 인간은 책임을 떠안는다.

 

이와 같이 이타주의는 인간이 인간을 이용하여 개인을 희생시키는 것과 개인에 대한 강요와 억압과책임 회피를 하게 하는 저질 사상에 불과하다. 대상이 정해져 있지 않고 인간의 본성과 어긋나는 것을 윤리로 지정하면 인간이 인간을 이용하기 위한 수단으로 악용되게 되어 있다. 이런 이유로 이타주의는 왕정의 윤리 중 하나가 된다.

 

경제 정책으로 접근하면 이해하기 쉬울지도 모른다. 낙수 효과는 강자가 약자를 이타적으로 만들어 이용한 것이고 소득 주도 성장은 약자가 강자를 이타적으로만들어 이용한 것이다. 둘 다 이타주의를 근거로 만들어진 것이기에 논리가 없다. 인간의 이타심 유무는 개인마다 달라 보편성을 갖출 수 없어 어떤 특정한 합리적 기준을 정하지못하여 논리가 성립되지 못한다. 누구는 이타적이고 누구는 이타적이지 않아 합리적 기준으로 삼을 수가 없는데 어떻게 이치로 이끌어 갈 수 있겠는가? 비논리적이고 불합리할 수밖에 없다.

흔히 기업의 부당한 이익 추구를 보고 이기적이라 생각하는데 틀렸다. 이타적이다. 단지 이용하는 측에 서고 있을 뿐이다. 그 이익 추구가 이타주의와 같은 윤리기 때문에 기업의 성장을 위해 불합리한 노동을 해야 한다는 것과 같은 국민이 희생해야 한다는 주장이나오는 것이다. 이타주의에 의해 노동자가 착취당하고 희생당하는 것이다. 이외 무능한 기업을 억지로 살리는 것도 이타주의에 의해 무능한 기업의 노동자 착취를 방관한 것에해당한다. 흔히 노조의 부당한 이익 추구를 보고 이기적이라 생각하는데틀렸다. 이타적이다. 단지 이용하는 측에 서고 싶을 뿐이다. 그 이익 추구가 이타주의와 같은 윤리기 때문에 노동자의 이익을 위해 불합리하게 물가가 올라도된다는 것과 같은 국민이 희생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는 것이다. 이타주의에 의해 소비자 물가가 높아 모든 소비자가 희생당하는 것이다. 이외 불필요한 중간 과정이나 담합 등도 이타주의에 의해 소비자 물가가 오른 것에 해당한다.

개인의 이타심을 근거로 한 정책을 계약으로 비유하면 다음과 같다. 인간의 이타심은 개인마다 달라 주관적이어서 인간의 이타심을 근거로 정책을 하는 것은 신용이 불확실한구두 계약을 믿고 계약을 방치하는 것과 같다. 낙수 효과에서 대기업의 이타심의 의존한 결과가 어땠는가? 사회에 보다 더 많은 부가 분배가 되었는가? 양극화가 심해졌다. 소득 주도 성장에서 국민의 이타심에 의존한 결과가 어땠는가? 내수 경제를 위해 자국 제품 소비가 늘었던가? 별반 차이가 없었다. 인간의 이타심에 의존해봐야 제대로 된 결과가 나올 수가 없다. 경제에 인간의 본성과 어긋나는 윤리를 섞으면 경제도 망하고 윤리도 망한다. 경제에서 효율을 추구하고 사회에서 윤리를 추구하면 된다.

 

지금까지 왕정 시대의 개인은 금욕에 의해 자유 의지를 잃고 이타주의에 의해 왕의 명령에 따르며희생했다. 그야말로 전형적인 왕정의 윤리다. 이것이 썩은 왕정 잔재 중 하나다. 오늘날 찐따 부류 또한 소수를 제외하고는 금욕주의와 이타주의 의해 망가진 인간이다. 욕망이 크고 이기적이어야 능동적으로 크게 바라는 것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이용당하지 않으며 살수 있는데 욕망이 작고 이타적이어서 수동적으로 크게 바라는 것이 없어 최선도 다하지도 않고 이용당하며 살게 된다. 인간이 악하다고 선동하면 쉽게 선동 당하기도 한다.

금욕주의는 인간의 능력을 썩게 만들고 이타주의는 인간의 성격을 썩게 만든다. 왕정의 윤리는 인간을 썩게 만들어 피지배자를 지배해왔다. 그럼에도 원리에 대해 생각하지 않고 일차원적으로 욕망이 나쁘니 금하자고 하거나 타인을 위해 희생하자고하니 왕정의 윤리에 의해 망가진 인간이 즐비하게 된 것이다.

윤리는 사회가 경제적으로 발전하면서 여유가 생김에 따라 보다 강하게 추구하게 되는데, 그로 인해 금욕주의와 이타주의에 의한 잘못이 더욱더 심해지게 된다. 문화 산업에서 과거보다 현재가 더욱 더 규제와 검열이 많은 까닭은 경제 성장과 윤리의 상관관계때문이다. 경제적 여유를 통해 다른 가치를 추구하면서 윤리도 추구하게되는 것이다. 그렇게 하여 경제가 성장하면 윤리 추구가 강해진다. 그러므로 경제가 성장할수록 체제에 맞는 올바른 윤리를 추구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한국 같이 사회 문제로 불행하게 된다.

 

 

모든 일반 인간은 주관적으로 옳은 행동을 한다. 이 명제는 윤리를 탐구하기 위해 필요하나 시작부터 다루면 이해하기 어려울 것 같아 여기서 언급하겠다. [옳다는 사리에 맞고 바름을 뜻한다.] 옳음은 말과 행동이 일의 이치에 맞거나 사회적인 가치 판단의 기준에 들어맞는 것을 말한다. 지능이나 감정에 장애가 없는 모든 일반 인간은 주관적으로 옳다고 여기는 행위를 한다. 지적 장애나 성격 장애를 제외하면 모두 그렇다는 것이다. 본인이 주관적으로 선이라 생각한 것뿐만 아니라 악이라 생각한 것조차 예외는 없다. 악이라 생각한 것도 자기 합리화를 통해 악을 정당화하여 옳다고 여기면서 행동한다. 아마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이해를 돕기 위해 세 가지 관점으로 접근해보겠다.

 

첫째, 부당한 이익을 윤리로 정당화한 것. 이것은 앞서 설명했기 때문에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금욕주의와 이타주의를 떠올려보자. 지배자가 피지배자의 욕망을 꺾어 지배하기 편하게 만들어 얻은 부당한 이익을 금욕주의로 정당화하였다. 지배자가 피지배자를 희생시켜 얻은 부당한 이익은 이타주의로 정당화하였다. 그 외 지배자의 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해 왕권신수설이나 왕즉불 따위를 윤리로 내세웠다. 극단주의 종교 단체의 테러도 종교의 윤리를 내세웠다. 인종 차별, 식민 지배도 예외는 아니다. 우생학을 내세우며 타인종은 열등하기에 차별이 마땅하다거나, 종교를 내세우며 타민족을 구원하기 위해 지배를 해야 한다거나 등 다양한 윤리를 넣어 부당한 이익을 정당화했다.

 

둘째, 부당한 손해를 윤리로 정당화한 것. 타인의 의지로 행동을 한 인간은 당사자의 의지가 없기에 주관적으로 옳은 행동이라 판단되지 않냐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이타주의라는 주관적으로 옳은 행동을 하기 위해 본인의 의지를 포기한 것이므로 실질적으로는주관적으로 옳은 행동을 한 셈이 된다.

 

셋째, 부당한 이익을 욕구나 욕망으로 정당화한 것. 앞서 두 가지는 윤리에 해당하므로 그럴 수 있다 해도 범죄는 그렇지 않냐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범죄 또한 주관적으로 옳다고 생각하고 행동한다. 일반 인간은 모두 욕구나 욕망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분명 절도가 범죄인 것은 누구나 다 안다. 그러나 배가 고파서, 가지고 싶어서 저질렀다. 욕구나 욕망이 옳다고 여기게 만들어 행동한 것이다. 도박이나 마약 중독도 마찬가지다. 도박과 마약에 중독된 인간이 도박과 마약을 되풀이하는 것은 뇌의 보상 회로가 망가져 뇌 내에서는 그것이 옳은 행동이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살인, 강간, 폭행 등도 마찬가지다. 가령 힘의 논리라 말하며 약자는 강자에 지배당하는 것이 맞는다는 식으로 행동할 수 있다. 설령 본인이 나쁜 행동을 하고 있다고 자각하고 인정하면서 나쁜 행동을 해도 마찬가지다. 그렇게 자각하고 인정하면서 나쁜 행동을 하는 것이 위선적이지 않기에 옳은 것이라 생각하면서 행동한것이기 때문이다. 어떤 경우에도 일반 인간은 주관적으로 옳은 행동하게 된다. 인간은 그렇게 설계되어 있다.

 

사실 하나와 셋은 본질적으로는 같다. 다른 점은 강자가 부당한 이익을 얻을 때에는 윤리로 정당화하고 약자가 부당한 이익을 얻을 때에는자기 합리화나 책임 전가 등으로 정당화한다. 그것뿐이다. 현재 사회에 발생하는 일반 인간이 일으키는 모든 현상은당사자가 주관적으로 옳다고 생각하고 행동한 것이라 보고 탐구해야 한다. 사회 문제에 해당하는 범죄를 비롯해 차별, 강요, 억압, 검열, 규제, 착취, 혐오 등도 전부 그렇다. 인간의 행동 원리를 파악할 때에는 어째서 그런 행동을 했는지 알아보기보다는 어째서 그걸 바르다여겼는지를 알아보는 것이 좋다.

인간은 모순된 행동을 하기도 한다. 그것은 옳다는 것이 너무나도 다양하기 때문에 다양한 옳음을 실천하다 모순이 발생하는 것이다. 사회 일반의 윤리를 위해 공정한 경쟁을 주장하면서 전통적인 도덕관념을 위해 가족의 비리를 용인한다거나같이 말이다. 모든 일반 인간은 주관적으로 옳은 행동을 하기에 범죄를제외한 대부분의 사회 문제는 윤리를 근거로 한 것일 확률이 높다. 그렇게 윤리를 근거로 하여 사회에 해를 끼친 행위는 당사자의 도덕관념에 의한 잘못이기에 도덕적 죄라고 부르겠다. 윤리를 진리로 여기는 경향에 의해 도덕적 죄에 대한 개념이 아직 자리 잡혀 있지 않는데, 대표적으로 특정 종교의 윤리를 근거로 다른 국가에서 테러를 저지르는 것이 도덕적 죄에 해당한다. 그것이 범법에 해당하면 도덕적 범죄가 된다.

금욕주의와 이타주의가 윤리인 사회에서 보편적인 욕심과 이기심이 큰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것은그것이 옳은 행동이라는 근거가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금욕주의에 의해 바라는 것이 제거되어 돈이라는 보편적 가치에 집착하게 만든 것이고, 이타주의를 근거로 타인을 이용하려는 태도가 이기적으로 보이게 된 것이다.

본인이 옳은 행동을 한다 생각하기에 긍정하는 인간에 쉽게 유혹될 수 있다. 사기를 당하거나 사이비 종교에 세뇌를 당하는 것 등의 사례들이 보통 그렇다. 모든 일반 인간은 주관적으로 옳은 행동을 한다는 명제를 알고 있어야 자기 객관화를 통해 그런유혹에 당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런 것을 설득할 때에는 그것이 나쁘다 말하기보다는 논리를 통해 합리적으로 보다 나은 방향을 제시하는 것을 옳다고 여기게끔 하는 것이 좋다.

보통 이런 현상은 불교와 유교 같은 윤리로 나타난 관념의 충돌이나 왕정과 민주정과 같은 체제의충돌이나 집단주의 관념과 개인주의 체제와 같은 관념과 체제의 충돌로 나타난다. 이런 것은 전부 윤리를 체계적으로 정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사회의 모순은 인문학의 책임이다. 정확히 사상과 철학의 책임이다. 모든 일반 인간은 주관적으로 옳은 행동을 한다. 이 명제를 알아야 사회 현상의 본질을 볼 수 있다.

 

 

왕정의 윤리는 인간을 대상으로 윤리 판단을 하여 인간의 욕망을 악으로 여긴 것을 바탕으로 한다. 그것이 잘못되었다. 그렇다고 하여 단순히 인간의 욕망을 선으로 규정하라는 것은 아니다. 인간의 욕망이 선이라 규정해도 그걸 악용하는 이들이 존재한다. 본인의 욕망이 선이므로 욕망에 의해 악행을 저지른 것은 본인의 책임이 아니라 본인의 행동에 영향을끼친 타인이나 사물의 책임이라 말하며 책임 전가하기 때문이다. 욕망에 의한 선과 악의 기준이 여럿이기에 보편성을 갖출 수 없어 논리적인 기준으로 설정할 수 없다. 인간의 욕망은 보편 윤리에 설정할 수 없다. 합리적 기준이 없어 무엇이 선이고 악인지 의견이 분분하여 서로 싸우기만 하게 될 뿐이다. 다른 식으로 접근해야 한다.

사상은 합리적 기준이 있어야 논리적이게 된다. [합리는 이론이나 이치에 합당함을 뜻한다.][논리는 말이나 글에서 사고나 추리 따위를 이치에 맞게 이끌어가는 과정이나 원리를 뜻한다.] 이치에 맞는 합리적 기준이 있어야 말이나 글이나 사고나 추리 따위를 기준을 따라 이치에 맞게이끌어 갈 수 있는 것이다. 보통 합리적 기준이 없는 사상이 비논리적인 주장을 하고, 합리적 기준이 없는 윤리는 감수성을 말하며 비논리를 정당화한다. 논리가 없으니까 감수성을 말한다. 그렇다면 합리적 기준은 무엇인가? 무엇이 이치에 합당하다 할 수 있는가? 그것을 알기 위해서는 보편적 선과 악이 무엇인지에 대해 처음부터 다시 생각해야 한다.

 

[선은 올바르고 착하여 도덕적 기준에 맞음을 뜻한다. 또는 그런 것.][악은 인간의 도덕적 기준에 어긋나 나쁨을 뜻한다. 또는 그런 것.][도덕은 사회 구성원의 양심, 사회적 여론, 관습 따위에 비추어 스스로 마땅히 지켜야 할 행동 준칙이나 규범의 총체를 뜻한다. 외적 강제력을 갖는 법률과 달리 각자의 내면적 원리로서 작용하며, 또 종교와 달리 초월자와의 관계가 아닌 인간 상호 관계를 규정한다.][윤리는 사람으로서 마땅히 행하거나 지켜야 할 도리를 뜻한다.][도리는 사람이 어떤 입장에서 마땅히 행하여야 할 바른길을 뜻한다.]

선과 악은 도덕적 기준에 따라 달라지고 도덕은 양심, 여론, 관습 등과 같이 탐구하지 않은 것일 수 있으므로 체계적으로 만들 수 있는 기준이 아니다. 따라서 윤리로 접근하여 보편적 선과 악이 무엇인지 생각했다. 무엇이든 본질을 보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보편적 선의 본질은 무엇인가? 무엇이 사람으로서 마땅히 행해야 할 바른길이라 할 수 있는가?

 

 

모든 생물의 기본 원리는 생존이다. 살아남아서 번식한다. 그러지 않은 종은 전부 멸종했기 때문에 반례는 존재하지 않는다. [생존은 살아 있음을 뜻한다. 또는 살아남음.] 생물의 기본 원리라는 학문적 진리에서 따온 생존은 윤리의합리적 기준이 되기 마땅하다. 인간이 바른길을 가기 위해서는 우선 살아있어야 한다. 사후를 윤리로 만든 사상 같이 예외는 있으나 기본적으로는 그렇다. 사상은 합리적 기준이 있어야 논리적이게 된다. 사상은 논리적이어야 인간을 설득할 수 있다. 사상은 인간을 설득할 수 있어야 힘에 영합하여 명예를 얻을 수 있다. 우수한 합리적 기준을 정하는 것이 사상이 갖춰야 할 기본이다. 생존이란 합리적 기준을 정하여 이치에 맞게끔 이끌어 가겠다. 생존을 기초로 한 사상을 가리켜 생존주의라 하겠다.

 

생존은 살아남음이다. 생존주의의 기본 윤리는 살아남는데 적합해져야 한다. [적자생존_생명은 환경에 적응하는 생물만이 살아남고, 그렇지 못한 것은 도태되어 멸망하는 현상을 뜻한다. 영국의 철학자 스펜서가 제창하였다.] 인간도 생물인 만큼 살아남기 위해서는 환경에 적응할 수 있는 강함을 가지는 생존 적합을 추구해야한다. 생존주의는 생물의 본능과도 같은 생존을 우선시한다. 인간은 자연스럽게 살 수 있으면 그러는 것이 낫다. 죽음도 자연스러운 현상이나 생존이 우선되어 죽음보다 생존을 추구한다.

자유와 평등도 이것이 기본이 되어야 한다. 생존에 적합하지 않아 생존할 수 있도록 통제해야 한다면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게 되는 것이고, 개인을 특별하게 대한다면 개개인이 평등하지 못한 것이 된다. 따라서 모든 일반 인간은 생존에 적합해져야 한다.

일반 인간은 강해질 수 있어야 여유가 생겨 장애를 가진 인간도 지킬 수도 있는 것이다. 진정 약자를 위해서라면 강자가 될 수 있는 인간은 강자가 되어야 한다. 생존을 위한 강함을 갖출수록 선에 해당하고 그렇지 못할수록 악에 해당하게 된다. 이는 체력이나 지력뿐만이 아니라 관점이나 관념도 포함된다.

생존에 체력과 지력이 포함되는 것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이해할 것이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한계가 있음을 인지해야 한다. 노력해도 극복할 수 없는 영역과 노력하면 극복할 수 있는 영역이 존재한다. 본인이 스스로 정하지 않은 육체의 한계는 당장은 노력해도 넘을 수가 없고 본인이 스스로 정한관념의 한계는 노력하여 넘을 수 있다. 육체의 한계를 겪고도 노력하는 인간은 휴식을 취할 필요가 있고 스스로 한계를 규정하고 노력을 포기한 인간은 욕망을 가지고 노력을 해야 한다. 육체의 한계는 육체 단련을 통해 한계를 늘려야 한다. 단련 한계에 다다르면 그 이상은 과학의 도움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이렇게 선천적 성질인 육체와 후천적 성질인 관념은 분리해서 바라봐야 한다.

노력을 완전 부정해서도 안되고 노력이 전부인 것도 아니다. 인간은 육체적 한계가 존재하는 생물이다. 인간은 한계라는 합리적 기준이 있어야 논리적으로 행동할 수 있다. 개인이 욕망을 가지고 관념의 한계를 넘어 노력하는 것으로 성장하여 생존에 적합하게 되는 것이생존주의의 미덕이 되고, 육체의 한계를 넘어 노력하는 것으로 육체를 손상시켜 생존에부적합하게 되는 것이 생존주의의 악덕이 된다.

관점과 관념은 현대 사회의 특성상 자살로 인한 생존 실패가 잦기 때문에 강조되게 된다. 인간의 자살은 불행에 의함이 많다. 불행하기에 죽는다. 그런데 인간의 행복과 불행은 주관으로 결정된다. 주관으로 불행하다 인식하면 불행한 것이다. 그런 인식을 만드는 것이 가치관이란 관점이나 가치란 관념이다. 사물을 어떻게 보고 느끼냐에 따라 가진 것을 가치 있게 여겨 행복할 수 있고 무가치 하게 여겨 불행할 수 있다. 가령 자녀는 부모가 선물한 유행하지 않는 전자제품을 사랑이 담긴 선물로 보고 가치 있게 느껴행복할 수 있고 유행하지 않음을 보고 무가치하게 느껴 불행할 수 있다. 여기서 후자는 불행을 느껴 생존에 불리해졌기 때문에 그걸 약자가 되었다고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집단의 유행을 강박적으로 따라가야 한다는 관념에 의한 것이다. 그러므로 인위적인 관념에 의한 불행이므로 본래 겪지 않아도 될 불행이다. 이와 같이 인위적인 관념에 의한 불행은 본래 겪지 않아도 될 것이기에 너무나도 안타깝다. 어떤 이는 집 안에 벌레 흔적만 보여도 불쾌감을 느끼고 불행해하며 거주를 포기하기도 하지만 어떤이는 집 안에 사건사고 흔적이 있어도 신경 쓰지 않고 거주한다. 어떤 이는 일반 성욕 창작물을 접해도 불쾌감을 느끼고 불행해하며 검열과 규제를 주장하지만, 어떤 이는 이상 성욕 창작물을 접해도 신경 쓰지 않고 창작의 자유를 존중한다. 어떤 이는 연령의 평등한 관계에 불쾌감을 느끼고 불행해하며 전통적인 도덕관념을 근거로 차별을주장하지만, 어떤 인간은 연령의 평등한 관계를 환영하며 자유롭게 교류한다. 인위적인 관념에 영향을 적게 받아 자유롭게 사는 것으로 불필요한 불행을 겪지 않아 생존에 적합하게되는 것이 생존주의의 미덕이 되고, 인위적인 관념에 영향을 크게 받아 불쾌하게 사는 것으로 불필요한 불행을 겪어 생존에 부적합하게 되는 것이 생존주의의 악덕이 된다.

 

생존이 인간의 생물로서의 윤리라면 자유는 지성으로서의 윤리라 할 수 있다. 모든 동물은 지능이 높을수록 자유를 바란다. 흔히 자유와 평등이라 표현하는데 사실 인간은 평등을 바라지 않는다. 다른 사람과 고른 생존과 자유 등의 권리를 바라는 것을 평등이라 표현할 뿐이다. 인간이 본래부터 평등을 바랐다면 인류의 역사에 신분제가 나올 수가 없다. 즉 평등은 생존과 자유의 수단이다. 그런 관점에서 평등을 추구하기 위해 자유를 억압하는 국가는 수단과 목적이 반대로 된 본말전도의국가라 할 수 있다.

생존주의는 그런 자유를 모든 개인에게 최대한 보장할 수 있다. 지금까지의 자유주의와 그와 관련된 윤리는 합리적 기준이 없어 외면 받아왔다. 쾌락주의와 자유주의와 공리주의는 개인의 쾌락과 자유와 이익에 초점을 맞추자 합리적 기준을 정할수가 없었다. 그것은 개인의 주관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논리도 없다. 합리적 기준은 보편적이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한계다. 인간은 육체의 한계를 알아야 자유롭게 노력할 수 있듯이 사회도 구조의 한계를 알아야 쾌락과 자유와 이익을 추구할 수 있다. 즉 사회의 생존을 위한 구조 유지가 자유의 기준이 되는 것이다. 사회 구조의 한계를 기준으로 삼으면 모든 사회 구성원에게 동일하게 적용되기에 자유의 합리적인기준이 된다. 자유 가능 영역이 명확하기 때문에 불필요한 자유 억압이없다. 사회 구조 유지와 체제 구조 유지를 제외하면 최대한 개인의자유를 보장할 수 있다. 동시에 그런 자유를 위해서 모든 개인은 사회와 체제 구조유지를 위한 사회 질서와 사회 복지를 위한 강제력에는 동의해야 한다. 그걸 위한 절차가 바로 사회 계약이다.

[사회 계약_사회 일반은 개개의 인간들이 모여 일정한 질서와 규율 밑에서 서로 협력하고 공동의 이익을 추구하며사회나 국가를 이루는 현상을 계약에 의한 것으로 보아 이르는 말을 뜻한다.] 사전적 정의에는 사회나 국가를 이루는 현상을 계약에 의한 것이라 보았다 주장했다 했지만 엄밀히말하면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인류의 역사가 침략과 정복으로 점철되어 있었다는 것을 상기해야 한다. 계약과 무관하게 사회나 국가가 이루어졌었다. 그러나 계약에 의한 것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면 그것은 사실이다. 모든 개인을 위한 사회나 국가는 사회 계약을 통해 이루어져야 한다. 자유주의와 같은 개인주의 체제인 사회의 모든 개인은 사회와 체제 구조 유지를 위한 강제력에 동의해야한다는 사회 계약을 사회와 맺어야 한다. 그것을 통해 사회와 체제 구조 유지를 위한 질서를 지키고 복지를 행하는 것이 자유 의지를 가지고 한 계약에 의한 것이므로 그 또한 개인의이익에 해당하여 책임지고 지키게 된다.

그걸 위해 모든 개인은 실제 사회 계약 절차를 경험해야 한다. 지금 미성년의 무책임함은 대체로 사회 계약과도 같은 민주정의 윤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지금 교육 윤리는 엉망이다. 이타주의를 근거로 학생이 교사에게 이타적으로 희생 당하도록 하거나 교사가 학생에게 이타적으로희생 당하도록 하고 있다. 과거는 학생이 교사에게 맞고 다녔는데 현재는 교사가 학생에게 맞거나 무시당하고 다닌다. 이타주의 자체가 저질 윤리기 때문에 발생하는 현상이다. 보통 성년의 날에 성인식을 하는 것이나 주민등록증의 발급이 사회 계약과 비슷한 느낌일 수 있는데, 전자는 계약과 관련이 없을 수 있고 후자는 국가가 국민을 관리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으로 개인주의의계약이기보다는 집단주의의 관리로서의 느낌이 강하다. 새로운 절차를 마련하여 개인이 사회와 계약했다는 과정을 겪어야 한다.

국가와의 사회 계약 시기는 14세가 적절하다고 본다. 자아가 형성되어 형태를 갖출 무렵인 시기에 사회의 억압과 통제에 예민해지기 때문이다. 자아 형성 전에는 부모의 말에 순종하나 자아 형성 이후에는 반항하게 되는 까닭도 자아가 형성되어형태를 갖추는 것으로 명백하게 독립된 개체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무조건 순종하지 않는 반항기가 시작되게 된다. 이때 사회의 일원이라는 인식이 필요하다. 그래야 자아가 망가지지 않을 수가 있다. 만약 내가 14세에 사회 계약과 같은 절차를 통해 어른과 대등한 관계를맺을 수 있었다면 확신컨대 지금과 다른 삶을 살았을 것이다. 14세였던 나의 주장이 어른의 억압과 강요로 짓밟히고 멋대로 조작되고 뭉개지는 바람에 신체적 자유를 잃는 것을 경험하는 것으로 모든 것을 자포자기했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 때 한번 자아가 망가져 자아의 시간이 고장 나멈췄다. 그것이 사상을 하는데 도움이 되었으므로 사회 계약을 했다면다른 삶을 사는 대신 사상을 하지는 않았을지도 모른다.

모든 기초 윤리는 어린이도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생존주의적 자유주의는 기초 윤리가 될 수 있다. 어린이도 육체를 가지고 있어 생존주의적 자유주의를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육체를 유지하기 위해 먹고 자고 싸는 것과 같이 사회도 사회와 체제 구조를 유지하기 위해 강제적으로질서를 지키고 복지를 해야 한다고 설명하면 아마 모든 일반 어린이는 이해할 것이다. 그렇기에 사회 계약 또한 어렵지 않게 할 수 있다. 어린이도 이해할 수 있는 것을 이해 못하는 일반 중학생은 없다. 최대한 자유를 보장 받는 대신 그런 사회와 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강제력에는 동의해야 한다는 사회계약을 통해 중학생 시기부터 자유롭게 살면서도 사회의 일원이 되어 책임 의식을 갖고 사회의 역할을 하려는 태도가 나올 수 있다. 논리 자체가 너무나도 간단하면서도 누구라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에 논리적으로 강제력이 정말 사회와체제 구조 유지에 해당하는지에 대한 반론은 있을 수 있어도 강제력을 부정할 수는 없다. 강제적을 부정하지 않게 되면서 사회 질서를 지키고 사회 복지를 행하게 된다. 하기 싫은 것이 있더라도 행해야 하는 강제력을 인간의 육체와 사회의 구조를 같은 것으로 바라본논리를 통해 구축하여 이해할 수 있게 한다. 이것이 생존주의적 자유주의로 민주정의 윤리 중 하나다.

 

 

생존주의적 자유주의는 이치에 맞는 체계적인 윤리 계층을 갖는다.

 

첫째, 개인 육체 유지. 모든 개인은 사회에 속하기 전의 개인 육체 유지를 위한활동을 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죽게 되기 때문에 가장 기본적인 윤리다. 또한 사회가 잘못되었을 때 모든 개인은 사회와 계약을 해지하고 개인이 되어 사회 변혁을 위한활동을 할 수 있어야 한다. 만약 정당한 이유가 있다면 사회는 붕괴하고 새로운 사회가 탄생하게 된다. 새로운 국가, 새로운 회사, 새로운 가정 등. 모든 개인은 사회와 종속된 관계가 아닌 대등한 관계다. 개인 육체 유지는 본인이 바르다고 여기는 이들의 윤리로 생존이 선이고 죽음이 악이다.

 

둘째, 사회 구조 유지. 모든 개인은 사회 계약을 통해 사회 구조 유지를 위한 강제력을수용하겠다는 계약을 맺는다. 사회는 개인의 자유와 안전과 편리를 보장하고 개인은 사회의 법을 지키고 복지를 행하는 것을 수용한다. 개인은 사회와 계약을 맺는 동안에는 사회 구조의 요소 중 하나가 되어 사회에 소속된다. 사회 구조 유지를 위해 요소인 사회에 속한 인간을 위한 복지는 본인의 이익에 포함되게 된다. 그렇게 함으로써 본인의 이익만을 추구해도 타인을 돕게 되는 것으로 사회 구조 유지가 될 수 있도록한다. 사회 구조에는 본인도 포함되므로 사회 구조 유지를 위해모든 개인은 본인이 원치 않아도 질서를 지켜야 하고 원치 않아도 행복해져야 한다. 만약 개인이 자살을 하고 싶다면 이론적으로 사회 계약을 해지하고 개인으로 돌아가는 절차를 해야한다. 사회 구조 유지는 사회가 바르다고 여기는 이들의 윤리로사회 구조 유지가 선이고 사회 구조 파괴가 악이다.

 

셋째, 체제 구조 유지. 모든 사회는 체제를 갖게 되는데, 사회 구조 유지 다음은 사회 체제 유지에 해당한다. 한국은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와 법치주의 등과 같은 개인주의 체제를 가지고 있고 그 체제의구조 유지를 위한 강제력을 수용해야 한다. 가령 모든 개인의 자유권과 주권과 소유권과 선거와 시장 등의 기본 권리와 원리를 유지하는데 협조해야 한다. 체제 구조 유지는 사회 구조 다음으로 중요한 것으로 개인의 주관적인 윤리보다 우선된다. 개인이 단순히 불쾌하다는 이유로 타인의 자유권을 침해하는 행위는 잘못된 것이 된다. 그러나 사회 구조 유지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중요도는 낮다. 사회 구조 유지에 협조하면서 다른 체제를 주장할 수 있다. 그런데 국가의 경우 체제에 관한 것은 법에 있어 대체로 사회 구조 유지에 협조하면 체제 구조유지에도 협조하게 된다. 체제 구조 유지는 체제가 바르다고 여기는 이들의 윤리로체제 구조 유지가 선이고 체제 구조 파괴가 악이다.

 

넷째, 체제 성질 윤리. 체제는 성질에 따라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집단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집단주의 체제와 개인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개인주의 체제다. 경제적으로 보느냐 사회 일반적으로 보느냐에 따라 의미가 다소 다르지만 기본적으로는 그렇다. 집단주의는 집단의 이익을 우선시하면서 집단의 주인인 지배자가 이익을 얻게 되고, 개인주의는 개인의 이익만을 추구하면서 모든 개인이 이익을 얻게 된다. 전자가 왕정이고 후자가 민주정이다. 전자는 보통 지배자에 의해 이익이 분배되고 후자는 보통 선거나 시장에 의해 이익이 분배된다. 집단주의 체제는 왕정의 윤리인 금욕주의와 이타주의를 윤리로 삼고 개인주의 체제는 민주정의 윤리인욕망주의와 이기주의를 윤리로 삼는다. 욕망주의와 이기주의는 보편 윤리가 아닌 체제 성질에 따른 윤리다. 개인주의 체제에서는 욕망적이고 이기적이어야 온전한 자유 의지가 보장될 수 있기에 그렇다. 금욕하라는 말에 욕망을 갖지 않고 타인을 위해 희생하라는 말에 의지를 꺾는 일을 방지하기 위해서욕망주의와 이기주의를 개인주의 체제 윤리로 삼아야 한다. 집단이 먼저냐 개인이 먼저냐에 따라 이익이 정반대가 되어 집단주의 체제와 개인주의 체제는 양립할 수 없다. 현재 왕정의 윤리가 민주정에 남아 윤리와 체제가 충돌하고 있는 상황이다.

 

다섯째, 개인 성질 윤리. 기본적으로 사회와 체제 구조 유지와 체제 성질 윤리 외에는모두 자유다. 개인의 가치관으로 살아가면 된다. 자유는 주관적이기 때문에 자유의 한계를 기준으로 삼아야 합리적이게 된다. 각자의 윤리는 각자 모두 다르므로 사회와 체제와 성질을 준수하는 한 그것에 함부로 관여할 수가없다. 모든 일반 인간은 주관적으로 옳은 행동을 한다. 그렇게 모든 일반 인간이 각자 다른 올바름을 가지고 있어도 된다. 모든 사물이 각자 다른 시간을 갖고 있어도 지구의 시간을 합리적 기준으로 삼아 살아가는 것과같이, 모든 개인은 각자 다른 올바름을 가지고 있어도 사회와 체제와성질을 합리적 기준으로 삼아 살아가면 된다. 모든 개인은 사상의 자유를 가질 권리가 있다. 종교의 자유도 사상의 자유의 일부에 속한다.

 

위와 같은 계층 구조를 통해 윤리를 체계화하여 모든 개인의 모순된 행동을 줄인다.

 

 

생존주의적 자유주의라는 보편적 선에 대해 알아보았다. 그렇다면 민주정 체제에 맞는 가치는 무엇인가? 왕정의 가치부터 다시 살펴보자. 지금까지 윤리는 대상에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고 대상에 가치 판단을 한 대상 가치를 전제로 하고있었다. 그렇게 인간을 대상으로 윤리 판단을 하자 대부분의 윤리는인간의 욕망은 악하다 판단했다. 그 판단으로 욕망을 금하는 금욕주의와 타인을 위한 희생을 하는 이타주의가 나타났다. 인간의 본성과 어긋나기에 바라는 인간이 적어 강제로 타인의 욕망을 금하고 희생시켰다. 그걸 통해 개인의 능력과 성격이 망가져 약자가 되자 지배자는 지배를 수월하게 하였다. 왕정의 윤리다. 인간을 대상으로 윤리적 판단을 한 결과 왕정의 윤리가 되었으므로 새롭게 접근하여 민주정의 윤리가 될 수 있는 것을 찾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 생존주의적으로 접근해보았다.

개인이 자연에 있을 때 선과 악은 발생할 수 있는지 생각해보았다. 그러자 개인이 자연에 있을 때에는 생존주의를 제외한 대부분 윤리에서 선과 악이 발생하지 않았다. 생존주의에서 개인이 자연에 있을 때에는 생존이 선이고 죽음이 악이다. 그 외 대부분 선과 악은 인간과의 관계에서 발생했다. 개인의 특성과 무관하게 인간과 인간의 관계에서만 선이나 악이 발생했다. 가령 개인이 무인도에서 무슨 짓을 저질러도 그걸 옳다 그르다 하지 않았다. 윤리와 같은 가치는 인간과 인간의 관계가 생기는 순간 발생하는 것이었다. 사회에서 죄가 어떤 식으로 생기는지 생각해보자. 인간이 아무 행동을 하지 않으면 그 인간의 성질이 보편적으로 악하다 여겨지더라도 죄가 생기지않았다. 반대로 다양한 행동을 하고 있으면 그 인간의 성질이 보편적으로선하다 여겨지더라도 죄가 생길 수가 있었다. 개인의 의사와 무관하게 말이다. 선과 악은 대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관계에 있던 것이었다. 지금까지 윤리는 애초에 본질 자체를 잘못보고 있었다. 관계에서 가치가 발생하는데 대상에서 가치가 발생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본질을 잘못 보고 있었으니 당연히 탐구 결과도 잘못되고 탐구 결과를 근거로 한 사상도 잘못되었다.

윤리는 인간과 인간과의 관계에서 가치가 발생했다. 그 외 가치도 같다. 관계에서 가치가 발생한다. 인간과 진리와의 관계에서 가치가 발생한다. 수학과 관계가 옅은 인간에게 수학적 증명을 통한 학문적 진리가 얼마나 가치가 있겠는가? 그것은 인간이 수용하든 말든 진리지만 가치 유무는 다른 문제다. 인간과 예술과의 관계에서 가치가 발생한다. 지구 반대편의 아름다운 풍경을 본 적이 없는 인간에게 그 풍경은 얼마나 가치가 있겠는가? 그것의 아름다움은 목격한 인간에게만 가치가 있다. 인간과 능력과의 관계에서 가치가 발생한다. 사냥에 관심이 없는 인간에게 사냥 능력이 얼마나 가치가 있겠는가? 현대 사회에서 사냥할 일이 드물기에 사냥에 관심이 없다면 가치가 없는 능력이 된다. 인간과 재화와의 관계에서 가치가 발생한다. 40광년 떨어진 다이아몬드 행성에 갈 수 없는 인간에게 그 행성이 얼마나 가치가 있겠는가? 행성이 있다는 것을 아는 것으로 인간과 학문과의 관계에서 가치가 조금 있는 것 말고는 아예 없다. 인간과 관계가 없으면 진리든 예술이든 능력이든 재화든 가치가 없다.

가치의 관점을 대상이 아닌 관계로 보는 것. 이것이 민주정에 맞는 새로운 가치 판단이다. 대상에 가치 판단을 하지 않고 관계에 가치 판단을 하기에 대상이 선한지 악한지는 중요하지 않다. 성선설이나 성악설, 또는 성무선악설이나 백지설 등 아무래도 좋다. 중요한 것은 관계다. 대상이 어떤 가치고 있던 관계를 가진 인간의 판단으로 가치가 결정된다. 아는 것과 같이 인식하는 순간 관계가 발생하므로 모르면 가치가 없다. 그렇기에 고정된 가치는 없다. 개인의 성질이 중요하지 않게 되므로 인간은 더 이상 인간의 욕망이 악하다는 그릇된 주장에 휘둘려스스로의 욕망을 죄악시하며 자책하지 않아도 된다. 세뇌를 통해 주입된 부당한 자책감에서 해방될 수 있다.

그렇게 하여 모든 인간은 자유롭게 욕망을 이기적으로 추구하면 된다. 욕망주의와 이기주의를 통해 모든 개인은 바라는 것을 이루기 위해 자유 의지로 관념의 한계를 넘어성장한다. 개인의 성장은 곧 사회의 성장이 되어 사회에 속한 모두의이익으로 이어진다. 생존주의를 통해 욕망과 이기심의 한계를 미리 지정해두었기때문에 주관적인 기준에 따라 욕망과 이기심을 제한할 이유가 없다. 사회 구조 유지라는 합리적 기준에 맞춰 하고 싶은 대로 하면 된다. 진정한 자유는 관계에 가치 판단을 할 때 생긴다. 개개인의 욕망과 이기심이 충돌하면 공정한 경쟁을 통해 선후를 정하여 질서를 유지하면 된다. 구조 유지와 공정 경쟁이 인간의 욕망과 이기심이 악으로 되지 않도록 할 것이다.

이것으로 선행의 균형도 유지될 수 있다. 본래 타인을 돕고자 하는 인간과 돕지 않고자 하는 인간이 모두 욕망과 이기심을 가져야 균형이맞는다. 그런데 타인을 돕고자 하는 인간은 금욕주의와 이타주의가윤리로 착각하고는 욕망과 이기심을 갖지 못하고 성장하지 못하고 타인을 돕지 않고자 하는 인간은 금욕주의와 이타주의로 타인을 이용할 생각만 하며성장하게 된다. 그러면서 돕고자 하는 인간과 돕지 않고자 하는 인간의 균형이맞지 않게 되면서 사회는 엉망이 되게 된다. 타인의 행복이 본인의 행복으로 이어지는 인간이 욕망을 이기적으로 추구할 수 있어야 성장하여 사회를 이롭게 할 수 있다.

대상이 아닌 관계로 가치 판단을 하기에 대상은 온전히 개성을 가질 수 있다. 지금까지 대상에 가치 판단을 했을 경우, 그 가치 판단을 다른 사람에게 전파하여 비슷한 가치 판단을 하는 것으로 비슷한 가치관이 나타나게되었다. 그렇게 되면서 개개인의 개성은 죽고 일부 개성을 가진 인간은다수의 유사한 개성을 가진 인간에게 박해를 당하게 된다. 한국에서 유행에 휘둘리는 다수의 인간은 누군가의 대상에 가치 판단을 한 것을 그대로 수용하여 가치관이 비슷하게 되는 것으로 개성이 사라졌기때문이다. 아이폰을 쓰지 않으면 따돌림을 당하는 아이들. 포켓몬 스티커를 광적으로 모으는 사람들. 유행을 따라가기 위해서라면 더러운 환경의 콘크리트 카페에 방문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그러면서 계속 비교를 하는 것으로 상대적 박탈감을 크게 느끼게 된다. 거기에 개인의 개성이 있어 보이는가? 또한 비슷한 가치관으로는 비슷한 가치를 생산할 수밖에 없다.

관계 가치로 접근하면 본인과의 관계에 가치 판단하고 대상에 가치 판단을 하지 않게 되어 각자관계에 따른 주관적인 가치 판단이 나오게 된다. 아이폰을 대상 가치로 접근하면 아이폰 자체에 가치 판단을 한 것을 수용하는 것으로 가치가 높다 여기지만 관계 가치로 접근하면 아이폰 자체에가치 판단을 하지 않고 본인과의 관계를 보고 편리한지 쓸모 있는지 판단한 다음 가치 판단을 하여 각자 다른 가치 판단이 나오게 된다. 그렇게 하여 다양한 가치관이 나타나고, 다양한 가치관을 가진 다양한 개성들이 나타나게 된다. 관계 가치로 바라보면 브랜드에 집중하지 않고 본인과의 관계를 고려하며 쓸모만 바라볼 것이다. 허영심을 충족하고 싶다면 관계 가치로 바라보더라도 브랜드 상품을 브랜드만으로 가치 있다 여길지모르지만 그렇지 않다면 브랜드보다는 실제 상품의 품질을 보고 가치를 판단하게 될 것이다.

객관적인 가치 판단은 개인의 의사로 결정되는 선거나 시장에서 나타나게 된다. 다수가 주관적인 가치 판단을 한 것이 선거의 투표와 시장의 수요와 같은 제도를 통해 모여 객관적인가치 판단이 나오는 것이다. 특정 누군가가 대상에 가치 판단하여 그걸 모두가 공유하는 것 자체가 집단주의적이었다. 개인주의에서는 모두가 관계에 가치 판단을 하고 그것이 모여 객관적 가치 판단이 나타나게 되어야한다.

연인 관계에서 타인이 연인에 가치 판단을 해서 연인의 가치가 낮다는 말을 들으면 그게 영향을받아 정말 가치가 낮은 것처럼 느껴져서 점점 연인에 대한 애정이 식게 되는 것으로 사이가 나빠지게 된다. 특히 유행에 쉽게 휘둘리는 인간과 같이 개인의 주관이 명확하지 않을 경우 더욱 더 그렇다. 대상에 가치 판단을 하면 인간관계조차 엉망이 될 수 있다. 관계로 가치 판단을 해야 휘둘리지 않고 온전히 서로를 사랑할 수 있게 된다.

대상에 가치 판단을 하니 대상이 그르다 판단되면 대상과의 관계를 전부 부정하고 말살했다. 대상에는 다양한 특성이 있음에도 하나의 특성이 그르다 판단되는 순간 나머지 특성도 그른 것이되어버리는 것이다. 그렇기에 사고가 터지면 무조건 막게 되는 태도가 나타난다. 교통수단에서 사고가 터지면 교통수단을 전부 막아버리고 축제에서 사고가 터지면 유사한 축제를 전부막아버리고 장소에서 사고가 터지면 그 장소 부근에서 사고를 일으킨 유사한 것을 전부 막아버린다. 교통수단이나 축제나 장소 같은 대상은 다양한 특성이 있음에도 하나의 관계에서 사고가 났다는 이유로모든 특성이 부정되었던 것이다. 사건을 해결할 때 말살될 것이 두려워 사건을 숨기는 일도 비일비재하다. 이를 가리켜 관계 말살이라 하겠다.

그와 달리 관계에 가치 판단을 하면 그른 관계 하나만 집중하여 문제를 해결하면 된다. 그른 관계에만 접근하여 문제를 해결하는 것으로 나머지 관계는 전부 살아남게 된다. 가령 킥보드나 오토바이라는 교통수단에서 사고가 잦을 경우 킥보드나 오토바이를 전부 막는 것이아니라 사고를 내는 인간들의 관계에 주목하여 어떤 상황에서 주로 사고가 나는지 확인하고 그에 대한 대처만 한다. 면허에 해당 사고에 관한 지식을 갖게 한다거나 하듯이 말이다. 그러면 사고를 내지 않았던 사람들은 관계 없이 교통수단을 이용할 수 있게 된다. 축제나 장소도 마찬가지다. 사고를 일으킨 관계만 집중하여 그 관계에서 나타난 문제를 해결하면 나머지는 정상적으로 축제를즐기고 장소를 오가도 되게 된다. 이렇게 관계에 집중하는 것을 관계 최소라 하겠다.

이렇게 가치의 관점을 바꾼 것이 인문학에 큰 영향을 줄 것이라 생각한다. 대상에 가치를 판단한 것이 고전 인문학이고 관계에 가치를 판단한 것이 현대 인문학이 될 것이다.

 

 

관계에서 가치 판단을 하는 것을 관계 가치라 하였다. 그렇다면 어떤 관계로 접근할 것인가? 과거에는 차별적인 신분이란 관계로 접근 할 수도 있으나 현재는 평등한 역할이란 관계로 접근해야한다. 생존과 자유라는 합리적 기준으로 만들어진 역할이란 관계에서가치 판단을 하는 사상을 가리켜 역할주의라 부르겠다. 모든 역할은 개인과 사회의 생존과 자유를 위한 것이어야만 하고, 가치 판단은 역할 수행 여부로만 판단한다. 그렇게 하여 모든 인간은 역할을 기준으로 평등할 수 있다. 평등의 합리적 기준이 역할이 되는 것이다.

[평등은 권리, 의무, 자격 등이 차별 없이 고르고 한결같음을 뜻한다.] 그렇다면 무슨 기준으로 권리와 의무과 자격이 차별 없어야 하는가? 대상에 가치 판단하는 바람에 지금까지는 합리적 기준이 없어서 각자 이익을 얻을 수 있는 기준으로평등을 주장했다. 무력, 지력, 매력, 권력, 재력 등 본인이 강한 것을 기준으로 권리, 의무, 자격 등을 평등하게 하자고 주장했다. 보통 그것을 우월주의라 부른다. 강한 만큼 권리가 주어져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므로 차별이라 주장하는 것이다. 반대로 약하여 차별 받아 온 만큼 권리가 더 주어져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보통 그것을 기울어진 운동장이라 부른다. 근거가 약함에 있으므로 열등주의로 해석될 수도 있다. 차별을 평등으로 말한들 평등이 되지 못하듯이 열등을 우월로 포장한들 우월이 되지 않는다. 실제 원리를 보고 해석해야 한다. 열등주의라 해석할 수 있을 정도로 약한 만큼 권리가 더 주어져야 언젠가 운동장이 평평해지는 평등이가능해질 거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각자 이익을 위한 주관적 기준이 합리적 기준이 될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런 평등 주장은 합리적 기준이 아니기에 사회 전체가 공감하지 못하여 분열과 갈등으로 가득 차게되었다. 그 모든 차별은 대상에 가치 판단을 했기 때문이다. 인종 차별도 성별 차별도 그 외도 전부 그렇다. 합리적 기준이 없으니까 각자 이익을 얻을 수 있는 기준을 주장하는 바람에 차별이 나타나는 것이다.

 

평등의 기본 조건은 대등이다. 대등하지 않으면 평등할 수가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대등하게 하는가? 바로 역할주의다. 역할만 보고 가치를 판단하면 개인의 개성과 무관하게 대등해진다. 평등은 인간이 모두 대등하기 위해서이지 누군가의 이익을 위해서인 것이 아니다. 가치를 판단하게 되기에 가치 차별이 발생할 수 있다. 그러나 그 기준이 대등하기에 평등하다. 역할 수행 여부로 윤리적 가치를 판단하고 역할의 기여도로 창출한 재화적 가치를 고려하여 재화적가치를 판단한다. 역할 수행을 통해 서로가 대등한 관계에서 역할 기여도로창출한 가치에 따라 대가를 받는 것이다. 사회 계약이 개개인의 계약이라는 의의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모두가 평등할 수 있는 가치가 있어야 한다. 그렇기에 역할만 봐야 한다. 개인의 개성을 배제하고 역할이란 관계에서 가치 판단을 하는 것으로 모두가 평등할 수가 있다. 처음부터 연령, 성별, 혈연, 지연, 학연 등은 배제하고 오로지 역할 수행 여부만 보기에 평등할 수밖에 없다.

능력주의와 유사하나 능력은 합리적 기준이 없다. 그런 능력주의는 어떤 기준으로 능력을 평가하는지 합리적 기준이 없기에 A분야에서는 뛰어나나 B분야에서는 뛰어나지 않는 인간이 A에서 능력이 높다 평가 받았으므로 B분야도 잘할 거라 착각하고 거기서 일하게 하는 것으로 전문성이 없는 역할 수행이 나타나게 된다. 역할주의는 역할이란 합리적 기준이 있기에 A분야에서 뛰어나면 유사한 분야에서 뛰어날 것이라 생각하여 거기서 일하게 하는 것으로 전문성이있는 역할 수행이 나타나게 된다. 평가 또한 정확하게 할 수 있게 된다.

[평가는 사물의 가치나 수준 따위를 평함을 뜻함. 또는 그 가치나 수준.] 지금까지 대상에 가치 판단을 하는 바람에 대상의 가치를 정확하게 평가하기가 어려웠다. 가령 정부나 기업에서 인사에 대한 도덕적 평가를 할 때, 대상으로 평가하면 헷갈릴 수가 있다. 인간A가 과거 역할B에서 비리를 저질렀으나 이후 봉사 활동과 기부 등의 활동을하였다. 그럴 경우 인간A는 역할B과 유사한 역할을 맡을만한 도덕적 자격을 가지고 있는가? 대상 가치로 접근하면 대상은 비리를 저질렀으나 봉사 활동과 기부 등으로 반성을 하였으므로 맡을만하다라는 평가가 나올 수도 있다. 그러나 관계 가치로 접근하면 인간A와 역할B의 관계에만 집중하므로 인간A가 봉사 활동을 하든 비리를 하든 아무래도 좋다. 인간A와 역할B와의 관계와 인간A와 봉사 활동과 기부 관계를 나눠서 바라보는 것이다. 그것을 통해 인간A는 해당 역할을 맡을만한 도덕적 자격을 가지지 않는다는 평가가 나올 수 있다. 실제 가치가 발생하는 순간에 집중하니 정확한 평가가 가능하다.

형벌도 대상 가치와 관계 가치로 달라질 수 있다. 형벌은 개인의 사적인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형벌은 공공의 이익을 위한 질서 유지가 목적이므로 단순히 제재를 가하기 보다는 교화 가능성이나재범 가능성을 고려하게 된다. 인간은 관념을 기준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는데 특정 관계에서 특정 행동을 하게 만드는 관념을 가졌을 경우 반복할 확률이 높게 된다. 그 관념을 교정하는 것을 교화라 부르는 것이고 그걸 교정하면 재범 가능성이 낮아지게 된다. 관념 교정이 매우 어려우므로 보통 교화가 어렵다고 여겨지지만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대상 가치로 접근하면 대상의 반성 여부 등을 고려하는데 관계 가치로 접근하면 관계를 고려하게된다. 관계의 수에 따라 달라지게 된다. 가령 특정한 사적 원한과 같이 하나의 관계에서만 악이 발생했을 경우 그 관계를 제외한 관계에서는악이 발생하지 않을 확률이 높으므로 교화 가능성이 높아 재범 가능성이 낮게 되지만 그릇된 가치관에 의해 여러 관계에서 악이 발생했을 경우 다양한관계에서 악이 발생할 확률이 높으므로 교화 가능성이 낮아 재범 가능성이 높게 된다. 관계의 종류에 따라서 달라지게 된다. 사기 범죄와 같이 생계와 관련된 삶에 필수적인 관계에서 악이 발생했을 경우 관계를 지속적으로가질 수밖에 없기 때문에 교화 가능성이 낮고 재범 가능성이 높아지게 된다. 그렇기에 범죄로 생계를 유지한다면 새로운 생계를 유지할 관계를 마련하지 않는다면 교화 가능성이낮고 재범 가능성이 높아지게 된다.

관계 가치에 따라 특정 관계에서 지속적인 무례함을 겪은 다음 행한 범죄는 정상 참작 사유에 해당할수 있다. 그 관계 외의 관계는 정상일 것이기 때문이다. 가령 수 년간 집단 괴롭힘을 당한, 평소에는 착한 인간이 주동자를 살해했다면 그 사람은 교화 대상에 속한다 할 수 있는가? 괴롭힘을 당한 관계를 제외하면 전부 문제가 없는 인간에게 교화가 의미가 있는가? 관계 가치에서는 그런 인간은 정상 참작 될 수 있다고 본다.

 

 

민주정의 체제 윤리인 욕망주의와 이기주의에 대해 알아보자. 생존주의적 욕망주의는 생존에 필수적인 강제력을 제외한 모든 욕망을 추구하는 것이다. 개인과 사회와 체제 구조 유지를 제외하기에 개인이 욕망을 추구하더라도 부정적 영향을 끼치는 일이적다. 그러면서 욕망을 추구하기에 개인은 보다 성장할 수 있게된다. 역사를 생각해보자. 인간은 욕망에 의해 발전해왔다. 욕망이 없었다면 발전하지 못했다. 무엇인가를 분수에 넘치게 바라는 것으로 발전해왔다는 것이다. 모든 인간은 본질적으로 큰 차이가 없다고 한다. 그럼에도 문명 수준의 차이가 발생했다면 인간의 차이가 아닌 환경의 차이라고 봐야 한다. 그 환경 중 가장 큰 것이 바로 욕망이라고 본다. 동양은 서양보다 욕망이 작았기 때문에 문명 발전이 늦었던 것이다. 동양과 서양의 문명 차이는 과학적 방법과 종교의 성향 차이로 보았다. 그 중 과학적 방법과 같은 과학의 발전 또한 자연 탐구에 관한 욕망이 엄청나게 커야지 가능하다. 욕망에 의한 끊임없는 탐구. 과학은 우연으로 발견한 것도 많지만 그 우연 또한 수많은 탐구 끝에 얻어진 결과다.

한국은 자본주의에 의해 금전적 욕망에 관한 것은 정당화되고 있으나 나머지 욕망은 부정적으로 바라보게되어 금전 만능주의가 너무 심하다. 학문은 돈을 벌기 위한 취업을 위한 수단이고 노력은 돈을 벌기 위한 수단이고 돈을 위해서라면 감옥을 가더라도 괜찮다는 인간들이 많다. 모든 욕망을 긍정해야 인간인 금전 만능주의에서 벗어나 진정한 바람을 추구하기 위해서 살 수 있게된다. 욕망은 바라는 것을 위해 노력하게 만들어 성장하게 하고, 그렇게 성장한 개인은 힘을 갖게 되어 부당한 상황에 맞설 수 있게 한다. 욕망이 부르는 잘못은 사회 체제로 접근하면 된다. 모든 개인을 위해서라면 금욕이 아닌 욕망을 추구해야 한다. 인간의 욕망은 권장하고 욕망으로 인한 부작용은 사회 체제로 대처한다. 모든 인간을 금욕으로 약하게 만들어 죄를 짓기 어렵게 하는 것은 왕정의 윤리고 모든 인간을 욕망으로강하게 만들어 죄와 맞서 싸울 수 있게 하는 것이 민주정의 윤리다.

 

생존주의적 이기주의는 생존에 필수적인 강제력을 제외한 모든 본인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것이다. 개인과 사회의 구조 유지를 제외하기에 본인의 이익만을 추구하더라도 사회에 부정적 영향을 끼치는일이 없다. 그러면서 본인의 이익만을 추구하기에 개인은 보다 성장할수 있게 된다. 흔히 이용하는 이타주의와 이기주의를 헷갈려 할 수 있는데, 이용하는 이타주의는 부당한 이익을 이타주의를 근거로 정당화하고 이기주의는 부당한 이익을 얻으면다른 식으로 정당화할 수는 있어도 이타주의를 근거로 정당화하지는 않는다.

지금까지 이타주의와 이기주의의 구분은 기준이 없는 타인의 행복을 위한 희생과 사회 일반을 돌아보지않는 본인만의 이익으로 나뉘었다. 이와 같은 구분은 합리적 기준이 없어 개인의 희생을 윤리로 만든 이타주의가 옳다는 착각을 부르기 너무나도 쉽다. 이타적으로 행동했다 하더라도 결과가 타인의 불행이 될 수 있고 이기적으로 행동했다 해도 결과가타인의 행복으로 이어질 수 있다. 이타주의에서 행복과 불행, 이익과 손해의 기준이 상대방의 주관이기 때문에 합리적 기준을 정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개인주의 체제에서는 행복과 불행, 이익과 손해로 이타주의와 이기주의를 나누기 보다는 개인의 자유 의지로 나누어야 한다. 즉 타인의 의지로 행해진 모든 행동은 타인의 의지를 실현하는 것으로 타인이 이익을 얻었으므로이타주의적인 것이라 하고, 본인의 의지로 행해진 모든 행동은 본인의 의지를 실현하는 것으로 본인이 이익을 얻었으므로 그것이 본인의 이익만인 것으로 여기는 것으로 이기주의적인것이라 하면 된다. 그렇게 하면서 의지에 따른 책임이 명확해진다. 본인의 자유 의지로 타인에게 행동할 것을 강요하면 본인은 이기적인 것이고 타인은 이타적인 것이므로그에 대한 책임을 본인이 전부 진다. 본인과 타인이 자유 의지로 행동했다면 본인은 이기적인 것이고 타인도 이기적인 것이므로 그에 대한 책임을 본인과 타인이 각자 나눠서 진다. 의지를 가진 쪽에서 책임을 지기 때문에 책임을 분산하기 위해서라도 힘을 가진 측에서 모든 개인에게자유 의지를 요구하게 된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모든 개인이 자유 의지로 살아가게 된다.

흔히 누군가 이기적으로 행동하면 윤리를 근거로 이기적이라 비난하며 이타적으로 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타주의가 왕정의 윤리임을 고려하면 그런 식의 비난은 비민주적이다. 인간은 욕망을 가지고 본인의 이익만 추구하기에 금욕과 타인을 위한 희생을 하라 주장하고 실천했는데, 그러자 지배자가 욕망을 가지고 피지배자에게 금욕을 강요하고 이기적으로 피지배자에게 희생을 강요하게되었다. 웃기는 일이다. 개인주의의 욕망과 개인 이익만 추구하는 것이 부정적으로 보이게 만들었던 것은 집단주의의 금욕과희생 강요를 윤리로 만들기 위해서다. 타인에게 강요하는 것을 윤리로 만들기 위해 의도적으로 개인이 행복하기 위한 행동을 악으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왕정의 세뇌에서 벗어나야 한다. 지배되었을 때에는 대부분의 피지배자는 지배자에게 금욕 당하고 희생당하는 입장이었으나 자유롭게되자 서로가 서로를 윤리를 명분으로 이용하려는 역겨운 태도가 나오고 있다. 그런 추악함은 추악한 왕정의 윤리 때문이지 그들의 본성이 아니다. 일차원적인 윤리는 결과적으로 그릇되게 된다. 누군가 이기적으로 행동하면 이기적인 행동을 비난할 것이 아니라 그 이기적인 행동에 불만을 가진사람 또한 이기적으로 행동해야 한다고 주장해야 한다. 흔히 강자의 이기주의에 의해 약자가 이용당하고 있다고 말을 하는데 아니다. 강자의 이타주의에 의해 약자가 이타적이게 되어 이용당하고 있는 것이었다. 정녕 약자를 위해서라면 강자와 약자 모두가 이기적일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해야 한다. 서로가 자유 의지에 따른 모든 행동을 본인의 이익만으로 여기면서, 그 이익을 실현하기 위한 행동을 하다 마찰을 빚게 되면 상대와 토론, 여론, 법 등을 통해 어떤 이익이 바른지 공정하게 결정하면 된다. 그러면서 사회는 공정하고 합리적이게 된다. 모든 인간을 이타적으로 약하게 만들어 타인을 위해 희생시키는 것이 왕정의 윤리고 모든 인간을 이기적으로 강하게 만들어 자유 의지로 살아갈수 있게 하는 것이 민주정의 윤리다.  

 

 

생존주의의 이념은 살아남는 것이다. [이념은 이상적인 것으로 여겨지는 생각이나 견해를 뜻한다.] 생물의 기본 원리와 무엇이 다르냐고 물어볼 수 있다. 그러나 모든 생물은 지금까지 살아남는 것에 성공한 적이 없다. 모든 생물은 생존에 실패했다. 지금까지는 생물의 죽음이 너무나도 당연하게 여겨졌기 때문에 생물의 생존이란 생물이 수명이 끝나기전까지 번식을 통한 종의 생존을 의미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집단주의의 생존이었다. 개인주의의 생존은 개인이 생존할 수 있어야 한다. 즉, 생존주의의 이념은 종이라는 집단의 생존뿐만 아니라 개인또한 죽음이란 육체의 한계에서 벗어나는 것을 말한다.

인류는 보다 자유롭게 진보했다. 육체의 위험에서 벗어나 자유롭기 위해 집단을 이루었고, 미지의 공포에서 벗어나 자유롭기 위해 종교로 현실에서 도피했고, 지배자의 지배에서 벗어나 자유롭기 위해 혁명을 일으켜 왕정에서 민주정이 되었다. 이제는 사상의 지배에서 벗어나 자유롭기 위해 민주정의 가치를 근거로 한 가치관을 가질 필요가있고, 육체의 한계에 의한 죽음에서 벗어나 자유롭기 위해 과학이발전하여 영원히 살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가능해지면 인간은 완전한 자유를 얻는다.

지금까지 존재했던 모든 인간의 역사는 생존 경쟁의 역사다. 마르크스는 지금까지 존재했던 모든 사회의 역사는 계급 투쟁의 역사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나는 그것을 부정하겠다. 계급 투쟁으로 보이는 현상은 생존 경쟁의 일부 중 하나에 불과하다. 일반 인간의 기본 행동 원리는 생존이다. 의식주에 대한 기본 욕구는 살아남기 위한 것이다. 행복하기 위해 이익을 얻는 것도 불행에 의해 자살하는 것을 고려하면 살아남기 위한 것이다. 모든 일반 인간의 자유 의지에 근거한 행동은 바라는 것을 이루기 위해서고, 모든 일반 인간은 바라는 것을 이루면 행복하다. 행복하여 살아갈 수 있게 된다.

개인주의의 생존으로 보면 개인은 지금까지 단 한번도 생존에 성공한 적이 없었다. 생존에 실패했다는 것에 초점을 맞추니 생존 게임이 떠올랐다. [생존 게임은 살아남기 위해 목숨을 걸고 벌이는 치열한 게임을 뜻한다.] 생존 게임 장소는 지구, 기간은 개인의 수명, 규칙은 유전자, 생존 방법 미정. 구 인류인 오스트랄로피테쿠스의 역사부터 고려하면 인류의 역사는 약 300만 년이라고 한다. 인간의 수명은 약 100년인 것을 고려하여 한 번의 생존 게임은 약 100년 주기로 일어난다고 보겠다. 100년에 1번 생존 게임을 했다는 가정하에 인류는 지금까지 약 3만번의 생존 게임을 했고 전부 생존에 실패했다. 인류 문명은 약 6000년 전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 그러면 약 29940번 동안 인류는 문명이 없는 생존 게임을 했고, 최근 약 60번 동안 문명이 있는 생존 게임을 한 셈이 된다. 그렇게 생존 게임을 반복하면서 인류는 살아남는 방법을 다음 참가자에게 전수하고 죽었다. 그러다 과학의 발전으로 인간이 생존할 수 있는 방법이 보이기 시작했다. 기억을 추출하여 인간의 자아만 생존하거나, 유전자를 조작하여 영원히 살 수 있게 하거나, 새로운 육체를 만들거나 하는 등과 같은 것이 현실성을 띠기 시작했다. 동시에 문명의 발전으로 지구 환경이 급속도로 변화하여 인류가 생존하기 적합하지 않는 기후 변화와같은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어쩌면 이번 21세기, 약 3만번 째 생존 게임이 마지막 생존 게임이 될 수 있게 되었다. 인류는 약 3만번의 생존 게임을 되풀이한 결과 마지막이 될 수 있는생존 게임에서 승리할 수 있는 가능성을 찾은 것이다. 인류의 약 3만번 째 생존 게임의 참가자 약 80억은 힘을 합쳐 수명의 끝이라는 확정된 죽음에서 벗어나 생존하는 것으로 생존 게임에서 승리해야한다. 생존 방법은 현재 과학이 유력하다. 모든 인류는 살아남기 위해 과학에 힘을 쏟아야 한다. 그렇게 모든 인류는 죽음에서 벗어나 생존 게임에서 승리하여 우주에 진출해야 한다. 우주에 진출하지 않으면 지구가 좁아 살아남아봐야 미래는 공멸밖에 없다. 인류가 생존 게임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우주에 진출해야 한다.

인간의 관점에서 지구의 크기는 너무 크고 인간의 수명이 너무 길어서 생존 게임이라는 것이 와닿지않을 수 있는데, 우주의 관점에서 지구의 크기는 너무 작고 인간의 수명은너무 짧다. 우주적으로 보면 정말 일순간의 생존 게임에 불과하다. 인류 역사 자체가.

인류의 역사가 생존 게임과도 같다면 인류의 윤리도 생존 게임과 그리 다르지 않다. 생존 게임에 참가한 모든 인류의 생존이 윤리다. 그걸 위해 노력하는 것이 이상이다. 가령 타국에 침공하는 국가는 생존 게임으로 비유하면 다 같이 힘을 합쳐야 생존할 수 있는데 의도적으로공격하여 공멸하게 만드는 트러블 메이커다.

모든 인류는 생존 게임에서 승리하기 위해 협조해야 한다. 일부가 기술을 독점하면 인체 실험 참여자도 많기 어렵고 밝혀졌을 때의 반발도 극심할 것이다. 싹 다 공개하여 기술을 발전시켜야 인류가 생존 게임에서 승리할 수 있게 된다. 불로불사 기술이 확립되면 자원도 얼마 들지 않을 것이다. 인간을 구성하는 물질 자체가 흔하기 때문이다. 누구나 불로불사자가 되어 생존 게임에서 승리하여 빨리빨리 우주로 진출해야 한다.

인류는 종의 생존을 위해 출산율을 올려야 하고 개인의 생존을 위해 불로불사를 달성해야 하고 종과개인의 생존을 위해 우주로 진출해야 한다.

 

인류의 보편적 윤리는 생존주의고 민주정의 보편적 윤리는 생존주의적 자유주의다. 민주정 체제에 맞는 가치는 역할이란 관계로 가치를 판단하는 역할주의다. 생존주의적 자유주의를 통해 생존을 보장하고 생존을 위한 강제력을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자유를누릴 수 있게 한다. 역할주의를 통해 역할이란 관계에서 가치를 판단하는 것으로평등을 이룬다. 이것을 통해 왕정의 윤리가 민주정에서 일으키는 사회 문제를해결하기 위한 기본 준비를 마쳤다.

 

 

인간의 성숙은 무엇으로 결정되는가? 피에르 퀴리의 노벨상 수상식 연설 중 일부를 살펴보자. “라듐은 방사선이 나오기 때문에 범죄자들이 사용하면 위험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스스로에게 물어보아야 합니다. 자연의 비밀을 알게 되어서 어떤 이익이 있을까요? 자연의 비밀을 안다고 해도 그것을 제대로 이용할 수 있을 만큼 인간은 성숙한가요?”

인간의 성숙은 철학의 인식, 존재, 가치와 같은 것을 탐구한 것을 배우면서 가능하게 된다. 인문 계열이 성장해야 인간은 성숙하게 될 수 있다. 그러므로 인문 계열이 성장하여 자연 계열과의 양극화를 극복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인류는 디스토피아나 멸종을 하게 될 수도 있다. 흔히 말하는 디스토피아는 인간의 성숙에 비해 인간의 기술 수준이 지나치게 높아서 발생한다. 미숙한 인간이 총을 들었을 때에 발생하는 사회 문제와 비슷하다 보면 된다. 인문 계열이 성장하기 위해서는 왕정의 가치에서 벗어나 민주정의 가치를 가질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그걸 할 수 있는 국가는 적다. 인간이 진리로 여길 정도로 당연하게 자리잡은 가치 관점을 대상에서 관계로 바꾸거나 금욕주의와이타주의를 부정할 수 있을 정도로 인문 계열이 발전하고 사회가 그걸 수용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민주정의 가치와 같은 개인주의 관념을 사회가 수용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사회의 체제가 개인주의체제는 되어야 한다. 만약 개인주의 체제가 아닌 국가가 민주정의 가치를 받아드린다면인간의 행동 원리는 가치에 근거한 것이 많기 때문에 반드시 개인주의 체제로의 혁명이 일어날 것이다.

 

 

 

3. 관념

 

이른바 자유 진영이라 불리는 자유주의, 민주주의, 자본주의, 법치주의와 같은 개인주의 체제를 갖춘 국가의 사회 문제는대부분 왕정의 관념을 민주정의 체제에서 쓰면서 발생한다. 왕정과 민주정은 각각 집단과 개인을 우선시하여 공존할 수가 없다. 그럼에도 왕정의 관념을 민주정의 체제에서 썼기에 자유를 외치면서 억압을 행하거나 평등을 외치면서차별을 행한다. 왕정의 관념과 민주정의 체제가 충돌하면서 개인은 수많은혼란을 겪고 있다. 왕정과 민주정의 구분을 명확하게 하지 않아 합리적 기준이없어 개인의 이익에 따라 주장하는 근거가 매번 달라지게 되었다. 타인의 자유를 억압할 때에는 왕정의 관념을 근거로 하고 본인의 자유를 원할 때에는 민주정의 체제를 근거로 하게 되었다. 타인의 표현의 자유는 왕정의 관념을 근거로 반대하면서 본인의 표현의 자유는 민주정의 체제를 근거로찬성하듯이 말이다. 이런 황당한 모순은 집단과 개인이라는 성질이 정반대인 두가지 두 가지 체제를 근거로 정당화하였다. 그러면서 어떤 상황에서도 이익을 주장할 수 있게 되었다. 왕정의 금욕주의를 근거로 타인의 욕망은 억압하면서 민주정의 자본주의를 근거로 본인의 욕망을 정당화한다. 왕정의 이타주의를 근거로 타인에게 희생을 요구하면서 민주정의 자유주의를 그거로 본인의 이익만을추구하는 것을 정당화한다. 본래 이런 짓은 비판 받기 마땅하나 인문학에서 체제 정립을 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걸 비판하기가 수월찮다. 다들 뭔가 잘못된 것 같은데 정확히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 모르니까 위와 같은 양 체제를 오가면서모순된 주장을 하는 것을 가리켜 욕망이 많다거나 이기적이라고 비판을 하고만 있을 뿐이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민주정의 체제에 맞는 관념을 정리한 것이 생존주의와 역할주의다. 생존주의는 생존과 자유의 합리적 기준이 될 수 있고 역할주의는 가치 판단의 합리적 기준이 될수 있다. 그런데 이걸 이해하기 위해서는 인식의 변화가 필요하다. 모든 일반 인간은 주관적으로 옳은 행동을 한다는 명제를 이해하고, 현재 왕정의 관념을 갖고 있는 이들이 주로 옳은 행동으로 만들기 위한 수단이 금욕주의와 이타주의임을인식해야 한다. 그런데 그게 관념에 의해 어렵다. 관념을 이해해야 한다.

 

인식에는 관점·관념·감각과 같이 나뉜다. 관점은 보는 방법을 말하고 관념은 본 것에 대한 생각을 말하고 감각은 육체 자극 지각을 말한다. 이 셋은 상호 관계를 갖는다. 관점은 보는 순간 관념을 근거로 한 태도나 방향 또는 처지를 말하고, 관념은 관점을 통해 본 것에 대한 생각을 말하고, 감각은 관념을 근거로 느끼는 육체의 감각을 말한다. 이 셋 중 관념이 관점과 감각의 가치 판단 기준이 된다. 사물과 현상을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보거나 느끼는 것이 달라진다. 그렇기에 관념은 마치 인간의 본질처럼 여겨져 바꾸기는커녕 관찰조차 어렵다. 관념은 바꾸기 어려워하고 관점이나 감각은 바꿀 수는 있으나 그것이 본인의 관념과 상충하지 않을때에만 어렵지 않게 가능하다.

관점은 다음과 같다. 가령 소비자 관점과 생산자 관점은 대부분 소비와 생산을 해보기에 관념의 상충이 없어 서로의 관점을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동양의 유교적 가치관에서 자란 사람과 서양의 기독교적 가치관에서 자란 사람은 각각 언어의연령에 따른 존댓말 유무가 다르기에 관념의 상충이 있어 서로의 관점을 이해할 수 없기도 한다. 한국에서 연하가 연상에게 반말해야 된다고 한다면 사회 혼란이 생길 것이다. 마찬가지로 미국에서 연하가 연상에게 존댓말(Honorific)을 쓰는 것이 의무가 된다면 사회 혼란이 생길 것이다. 민주정에서 연령 평등을 위해서라면 진리도 아닌 유교적 가치를 버리고 모두가 반말이나 존댓말 중하나를 골라 평등한 대화를 하는 것이 바람직하지만 관념에 의해 그것이 어렵다는 것이다. 언어 특성상 쓸데 없이 긴 것은 불필요한 낭비기에 반말이 효율적일 것이다. 감각은 다음과 같다. 가령 매운 것을 잘 먹는 인간의 감각과 못 먹는 인간의 감각은 서로가 맵다는 감각을 알기 때문에 느끼게 하는 관념이 서로 상충하기 어려워서로의 감각을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일반 인간의 감각과 결벽증이나 강박증을 가진 인간의 감각은 일반 인간은 그런 감각을 모르기에 느끼게 하는 관념이 서로 상충하기에이해하기 어려울 수 있다.

이와 같이 관념은 기본적으로 이해하기 어렵다. 개개인이 조화를 이루기 위해 공통 인식을 가지게 할 수 있는 공감이 중요하게 되지만, 공감은 관념이 상충되지 않을 때에만 수월하게 된다. [공감은 남의 감정, 의견, 주장 따위에 대하여 자기도 그렇다고 느낌을 뜻한다. 또는 그렇게 느끼는 기분.] 같은 관념을 가진 집단은 공감하기 쉬운 반면 다른 관념을 가진 집단과는 공감하기 어렵다. 고정된 관념으로 사물을 보는 것을 선입견이라 부르고 관념에 의해 치우치게 바라보는 것을 편견이라부른다. 선입견과 편견으로 그것이 어렵다. 공감이 중요하단 이유로 타인에게 공감할 것을 요구하는데 관념에 의해 그렇게 말하는 당사자도 타인에게공감하지 못할 때가 많다.

생존, 자유, 역할, 욕망, 이기 등은 일반 인간은 모두 가지고 있어 상충하지 않기에 설득하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의 본성에 맞는 것을 윤리로 삼아야 자연스럽게 추구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대상 가치와 관계 가치와 같이 그 동안 없던 것을 이해하는 것은 다소 어려울 수 있을거라 생각한다. 세세하게 다를 수 있으나 기본적으로 민주정이라는 왕정과전혀 다른 체제의 가치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관념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간단한 관념 관찰, 인간의 본성, 관념에 의해 형성되는 자아, 관념으로 나타나는 무의식과 자유 의지, 관념을 통한 교정 등과 같은 것을 알게 되면 이해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간단한 문답으로 관념 관찰을 해보자.

 

Q: 한국 사회는 비정상적인가? A: 그렇다. 낮은 출산율과 높은 자살률을 고려하면 비정상적이다.

Q: 사회는 인간에 의해 조직되는가? A: 그렇다. 인간의 평가로 사회 구조는 조직되고 유지되며 그렇게 조직된 구조의 요소는 인간이 된다.

Q: 인간은 관념에 의해 움직이는가? A: 그렇다. 인간의 관점과 감각 등은 관념이란 가치 판단 기준에 따라 달라진다.

Q: 인간의 관념은 유전자와 환경과 사상 학습으로 형성되는가? A: 그렇다. 유전자로 기초 관념이 정해지고 환경으로 다양한 관념을 쌓아가며 사상으로 체계적인 관념을 학습하며, 장애나 극빈과 같은 예외를 제외하면 일반적인 상황에서는 인간의 관념에는 사상의 영향이 가장 크다.

Q: 사회는 인간의 관념에 의해 조직되는가? A: 그렇다. 사회는 인간으로 조직되고 인간은 관념으로 움직인다.

Q: 사회가 비정상적인 것은 그런 사회를 조직한 인간의 관념이비정상적이기에 그런가? A: 그렇다. 인간의 관념이 비정상적이기에 조직되는 사회도 비정상적이게 된다.

Q: 인간의 관념이 비정상적인 것은 영향을 끼친 사상이 비정상적이기에그런가? A: 그렇다. 사상이 비정상적이기에 형성되는 인간의 관념이 비정상적이게 되고, 인간의 관념이 비정상적이기에 조직되는 사회도 비정상적이게 된다.

여기까지는 이해하고 수용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그렇다면 다음으로 가보자.

Q: 비정상적인 한국 사회에 속한 개인이 보편적 관념을 가지고있다면 그 관념은 비정상적인가? A: 그렇다. 보편적인 한국인의 관념이 비정상이어서 한국 사회도 비정상이다.

Q: 보편적인 한국인의 관념이 비정상인 것은 관념을 형성하게한 사상이 비정상적이기에 그런가? A: 그렇다. 한국인이 학습하는 사상이 비정상적이기에 한국인의 관념이비정상적이게 되었다.

여기까지는 아마 이해하고 수용하기 어려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다음으로 가보자.

Q: 본인이 한국 사회의 보편적 관념을 가지고 있다면 본인의관념이 비정상적이고 본인이 학습한 사상이 비정상적이었다는 것을 인식하는가? A:

 

대부분 이것은 이해하고 수용하기 힘들 것이다. 만약 이것을 바로 이해하고 수용했다면 그 인간은 대단하다. 진리로 여기던 것을 바로 부정할 수 있는 인간이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인간은 가치 판단 기준이 된 관념을 진리로 여기기에 지능 장애나 성격 장애 등을 제외한모든 일반 인간은 주관적으로 옳은 행동을 한다. 만약 관념이 잘못되었다는 말을 들으면 일반적으로 본인의 행동이 옳았던 것으로 만들기 위해 논리적인 주장조차 부정하고 본인의 관념을 합리화하면서보통은 이해하지 못하고 수용할 수 없다. 한국인이 연하가 연상에게 존댓말 하는 것이 잘못되었다 지적 받았을 때나 미국인이 연하가 연상에게 존댓말을 하지 않는 것은 잘못되었다 지적받았을 때 어떤 반응이 나오겠는가? 반발이 나올 것이다. 그와 같다. 그것이 합리적이든 아니든 관념에 어긋나면 반발이 나온다. 보통 관념과 다수의 다른 주장들이 있으면 다 무시하다가 일치하거나 유사한 주장이 하나라도 있으면그제서야 웃으면서 내가 맞는다고 안심하고 다른 주장들을 비웃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념을 관찰하여 타당한 논리를 순순히 이해하고 수용할 수 있는 인간은 진리로 알고 있던 것조차 부정할 수 있는 더 이상일반이라 할 수 없는 관념 관찰자가 된다. 그리고 그것은 모든 학문의 탐구자가 가져야 할 소양 중 하나다. 적어도 사상이나 철학과 같은 전문적인 인간은 그것이 기본이 되어야 한다. 일반과 같은 성질을 가진 전문에 어떤 가치가 있을 것 같은가? 전문가는 일반인과 다른 전문성을 가져야 전문가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전쟁 피해국의 국민은 전쟁 가해국의 군이나 정당의 상징으로 여겨지는 욱일기나 하켄크로이츠를 불쾌해할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일반인의 시각이다. 전문가가 일반인과 같이 그런 관념에 얽매여 감정적 대응을 하는 것은 전문적이라 하기가 어렵다. 관념 관찰을 하고 논리적인 판단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전쟁 가해국의 상징은 일반적으로 피해자의 일생을 고려하여 자제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일반적인 인간의 수명이 약 100년으로 가정하고 오차 범위를 고려하여 전쟁이 끝난 직후에 태어난 인간도 포함해 종전 100년 후까지는 그런 상징에 감정적 대응을 하더라도 어느 정도 정당성이 있으나 그 이후에는 정당성이없어 감정적으로 대응할 이유가 없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이 1945년이므로 2045년 이후에는 그런 것에 신경 쓰는 것은 세계 대전 이전의 역사의 결과에 감정적으로 대응하는 것과 다를 바 없을 정도로 의미가 없다. 굳이 가질 필요가 없는 불쾌감으로 인간을 불행케 하여 생존 약자가 되게 만드는 것은 생존주의적으로부덕하다.

사실 개인에게 가치를 세뇌하여 불쾌감을 느끼게 해서는 안 된다. 역사든 윤리든 그것의 가치 판단할 권리는 개인에게 있다. 역사나 윤리란 대상에 대한 가치 판단을 한 것을 개인에게 세뇌해서 전쟁 가해국의 군이나 정당의상징과 비슷한 그림만 봐도 발작하게 하거나 야한 것만 봐도 발작하게 해서는 안 된다. 모든 개인이 각자 알아서 본인의 관계에서 가치 판단을 해야 한다.

 

 

간단한 문답으로 본인의 관념 관찰로 일반에서 벗어나 관념 관찰자가 되었기를 바란다. 관념을 이해했다면 인간의 성질은 유전자에 의한 선천적 성질과 학습에 의한 후천적 성질로 나뉜다는것을 알게 되었을 것이다. 선천적 성질과 별개로 학습을 통해 만들어진 관념에 의해 보고 받아드리고 느끼는 것이 달라진다. 유전자와 관념을 명확하게 분리하여 인식하는 것이 인문 계열이 해야 할 일 중 하나다. 선천적 성질은 본능으로 얻은 관념과 같은 것으로 바꾸기가 어렵고 쉽게 흐름을 거슬러도 안 된다. 식욕, 수면욕, 배설욕, 성욕 등과 같은 기본적인 욕구들을 가리킨다. 이러한 선천적 성질이 인간 육체 유지를 위한 강제성이 된다. 후천적 성질은 학습하여 얻은 관념과 같은 것으로 바꾸기는 어렵지만 필요하면 바꿀 수 있어야 한다. 보통 인식, 존재, 가치 등과 같이 대부분의 탐구로 바꿀 수 있다. 이런 후천적 성질이 인간의 자유를 위한 지성이 된다. 그럼 선천적 성질과 후천적 성질과 관념에 대해 세 가지 물음을 통해 알아보자.

 

첫째, 인간의 동족 살해나 동족 포식에 대한 거부감은 선천적인가 후천적인가? 인간은 인간을 살해하거나 인간이 살해하는 것을 보고 느끼는 거부감은 선천적 성질인 본능이라 여길수가 있다. 그것을 매우 당연한 것으로 여기며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느껴야 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보편성을 고려하면 그렇지가 않다. 만약 인간의 본능에 동족 살해에 대한 거부감이 있었다면 인류의 역사에 전쟁이 보편적이지 않았을 것이다. 만약 인간의 본능에 동족 포식에 대한 거부감이 있었다면 식인 풍습도 있지 않았을 것이다. “모든 인간은 단일한 종에 속한다.” 에 근거하여 스페인 제국인과 아즈텍 제국인은 단일한 종임에도 스페인 제국인은 식인을 거부했고아즈텍 제국인은 식인을 즐겨 했다. 식인에 대한 거부감도 인류의 보편적 특성이 아니다. 스페인 제국인과 아즈텍 제국인의 차이는 종교에 의해 형성된 윤리관뿐으로 윤리에 의해 동족 살해나 동족 포식에 대해 거부감을 느꼈던 것이다. 인간 외의 종으로 접근하면 동족 살해와 동족 포식은 매우 자연스럽게 일어나고 있다. 생물에게 있어 동족 살해나 동족 포식에 대한 거부감은 선천적 특성인 본능이 아닌 후천적 특성인학습에 의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인간에게 동족 살해나 동족 포식에 대한 거부감은 선천적으로 있지 않다. 그렇다고 그걸 부정적으로 여길 필요가 없다. 오히려 인간은 그런 학습으로 동족 살해나 동족 포식을 하지 않고 같은 종끼리 공존할 수 있는위대한 지성체임을 자랑스럽게 여겨야 한다. 이런 것이 미개하지 않은 문명이다. 또한 인류는 그런 기본적인 것조차 학습에 의해 만들어질 정도로 관념 학습이 인간에게 끼치는 영향이 매우 크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둘째, 인간이 나이를 먹을수록 시간의 흐름을 빠르게 느끼는 이유가 무엇인가? 시간의 사전적 정의로 접근해보자. [시간_물리는 지구의 자전 주기를 재서 얻은 단위를 뜻한다. 이론적으로 고전 물리학에서는 공간에서 독립한 변수 곧 절대 시간으로 다루어졌으나,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원리에서는 양자가 물리적 사건을 매개로 하여 사차원의 시공간 세계를 형성하는것으로 다루고 있다.] 시간은 최초 지구의 자전에 의한 평균 태양일의 1/86,400으로 정의되었다. 그러나 그런 기준은 불규칙하여 공전으로 바꾸고, 공전 또한 오차가 있을 수 있어 원자 시계로 바꿨다. 원자 세계는 원자의 진동수가 일정하다는 것을 이용하여 만든 것으로 암모니아, 루비듐, 수소, 세슘, 이터븀과 같이 원자를 바꿔가면서 기준을 정하고 있다. 즉 시간이란 인간이 정한 기준의 이동 거리를 수로 환산하여 객관화한 개념으로 본래 존재하지 않는다. 과거의 시간은 지구의 자전의 이동 거리를 1/86,400으로 나눈 것이고 현재의 시간은 과거의 시간에 맞춰 오차가 적도록 원자가 진동수가 N번만큼 반복한 거리를 지정한 것이다. 물체의 이동 거리를 수로 환산하여 객관화한 것이 객관적으로 만들어진 시간이란 개념으로 본질은이동 거리다.

그럼에도 인간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와 같이 시간을 느낀다. 그것은 인간이 만물의 변화를 지각할 수 있는 지성체이기 때문이다. 변화를 지각할 수 있기 때문에 변화의 지각 순서대로 먼저 겪은 변화의 지각을 과거라 부르고 지금겪은 변화의 지각을 현재라 부르고 겪지 못한 변화의 지각을 미래라 부른다. 즉 주관적으로 느끼는 시간의 본질은 지성체의 변화의 지각이다. 변화의 지각을 지구의 이동 거리나 원자의 이동 거리를 수로 환산하여 객관화한 것이 표준시다. 모든 지성체가 주관적으로 가지고 있는 변화의 지각을 객관적인 표준시로 모두가 같은 변화의 지각을느끼도록 만든 것이다. 시간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는 인간의 주관으로 느낀 변화의지각을 순서대로 나열한 것일 뿐이다. 우주의 행성은 이동할 뿐이지 시간의 흐름을 지각하지 않는다. 시간은 지각할 수 있는 인간의 개념이다. 시간을 지각할 수 있는 인간 행성의 이동 순서에 시간을 붙인 것이다. 세상을 관장하는 시간 법칙이라는 것이 없다. 그러니까 이동하지 않는 것은 시간이 멈춘 것이 된다. 음식을 냉동하여 이동을 느리게 하면 음식의 시간을 느리게 만든 것이다. 그러면서 느리게 변질되게 한다. 그런데 우주는 모든 것이 이동하니까 마치 이동과 별개로 시간이 세상 자체의 법칙이라 여기게 되고있었다. 정리하면 변화의 지각은 선천적 성질이고 표준시각에 대한관념은 후천적 성질로 시간은 관념 학습의 결과다. 시간이란 개념은 인간이 만든 것이다.

시간은 주관적 개념이므로 인간이 변화를 지각하지 못하면 시간도 흐르지 않는다. 그러나 인간이 정해둔 표준시는 특정 개인이 변화를 지각하지 않아도 변화하게 된다. 그러면서 시간의 흐름이 차이 나게 된다. 표준시 내에 변화의 지각을 많이 한 인간은 시간의 흐름이 느리고 적게 한 인간은 시간의 흐름이빠르게 된다. 즉 (주관적인 변화의 지각/객관적인 표준시)로 변화의 지각이 많을수록 주관적인 시간의 흐름을 길게 느끼게 된다.

변화의 지각이 달라지는 것은 관념에 의한 것이다. 인간의 육체는 자아의 의지와 무관하게 자동적으로 움직인다. 누구나 습관적 움직임 또는 무의식적 움직임과 같은 의식적으로 행동하지 않았음에도 습관적으로 행동하고나서 그걸 인지한 경우를 경험했을 것이다. 반복적으로 학습된 관념은 자아의 의지와 무관하게 육체가 자동적으로 행하게 되면서 자아가 그 변화를 지각하지 못하게 된다. 자아가 변화를 지각하지 못하게 되면서 시간의 흐름을 느끼지 못하게 되는 것으로 주관적인 시간의흐름이 빨라지게 된다. 그걸 토대로 보면 나이를 먹을수록 시간의 흐름이 빨라지는이유를 알 수 있다. 어릴 때에는 관념 학습이 적어 자아의 지각으로 움직이는경우가 많아 시간의 흐름이 길다고 느끼고, 점점 관념 학습을 많아 자아의 지각으로 움직이는 경우가 적어지면 시간이 흐름이 짧다고 느끼게 되는 것이다. 그런 이유로 시간을 길게 느끼고 싶다면 경험하지 못한 것을 경험하여 변화의 지각을 늘리면 된다. 이런 이유로 인간은 실제 연령과 정신 연령이 비례하지 않게 된다. 변화 지각의 수로 정신 연령이 늘어나기에 변화의 지각이 많은 연하가 변화의 지각이 적은 연상보다주관적 시간이 길어 정신 연령이 높을 수가 있다.

 

셋째, 인간은 교화가 가능한가? [교화는 가르치고 이끌어서 좋은 방향으로 나아가게 함을 뜻한다.] 이것의 가능 여부로 형벌의 교화나 엄벌이 정해지므로 중요한 물음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답은 간단하다. 당연히 가능하다. 인간이 쉽게 바뀌지 않는 것을 목격하면서 인간은 일정 이상 나이를 먹으면 바뀌지 않으므로 교화가 불가능하다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20대 이후 사이비 종교에 세뇌되어 바뀌는 인간을 어렵지 않게 목격했을 것이다. 인간은 언제든지 바뀔 수 있다. 누군가는 그걸 어떻게 교화라고 할 수 있느냐 반문할 수 있는데, 사이비 종교 입장에서는 인간을 세뇌하여 사이비 종교의 교리를 따르게 하는 것이 가르치고 이끌어서좋은 방향으로 나아가게 한 셈이 된다. 인간의 행동 원리 대부분은 관념 학습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므로 당연히 관념 교정을 통해 인간을 바꿀 수도 있다.

그렇다면 왜 교도소의 교화는 어려운가? 그것은 교화에 대한 마음가짐의 차이에 있다. 사이비 종교는 그야말로 절실하게 세뇌한다. 우연을 가장하고 쉴새 없이 따라 붙고 집착하면서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사이비 종교에 이롭도록세뇌한다. 그러나 교도소는 그렇게 절실하게 교화하지 않는다. 배운 대로만 절차대로 사무적으로 행하면서 수단 방법 전부 고려하면서 사회에 이롭도록 교화한다. 단지 그 차이다. 해당 집단에 이롭도록 변한다는 측면에서 사이비 종교의 세뇌와 교정 시설의 교화는 원리가 같다. 통계적으로 교도소의 교화 성공 사례가 적다고 말할 수 있는데 동시에 그러면 사이비 종교의 세뇌사례가 많다는 것을 제시하겠다. 이런 것을 보면서 수천 년 전 학설인 성선설이나 성악설을 말하는데 그런 현대 과학도 없던 시대의 학설은 이제 잊길 바란다. 그런 현대 과학을 근거로 하지 않는 인문 계열의 주장은 대부분 그 시대를 알기 위한 참고 자료에불과하다.

인간이란 대상에 가치 판단을 하여 사이코패스나 소시오패스를 단순히 악이라 규정하고 교정이 불가능하다말할 수 있다. 그런데 그런 증상이 성격 장애라면 장애 관리로 접근해야지단순히 악이라 말하며 공격하는 것은 지나치게 비전문적이다. 관계에 가치 판단을 하면 사이코패스나 소시오패스도 관계에서 잘못을 저지르지 않으면 악이 아니다. 일반 인간도 악을 저지를 수 있고 성격 장애도 악을 저지르지 않을 수 있다. 멋대로 악으로 규정하고 공격하는 것은 개인의 자유이나 관련 분야의 전문가는 전문적으로 대처해야할 것이다. 단순히 잘못을 저질렀다고 사이코패스나 소시오패스라 말하며비난하는 이들 때문에 진짜 사이코패스나 소시오패스가 본인의 장애 증상을 치료하려 들지 않고 있다. 장애인의 장애 증상은 타인의 놀이 도구가 아니다.

대상에 가치를 판단하는 이들이 짐승 살생이 인간 살해로 이어질 수 있을 지도 모르니 과하게 처벌하고교정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기도 한다. 동물을 죽였으니 같은 동물인 인간도 죽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논리다. 인간에게 죽은 짐승을 매일 먹고 덤벼드는 모기를 죽이고 시끄럽다고 파리를 죽이고 더럽다고 바퀴를죽이는 인간이 말하기에는 너무 괴상하다. 인간은 인간을 살해하고도 다른 인간에게는 예의를 갖춰 대할 수 있을 정도의 분별이 가능한 존재다. 짐승 살생을 인간 살해로 결부시키는 것은 인간을 살해한 군인은 사회 내에서 인간을 살해할 수있으므로 가둬야 한다는 주장이나 다를 바 없을 정도로 단순하다. 미 FBI가 동물 학대를 중대 범죄로 규정했다고 하면서 짐승 살생을인간 살해와도 같을 정도로 중대한 잘못으로 몰고 가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은 일부 인간이 본인의 폭력성을 제어하지 못하고 짐승뿐만 아니라 인간에게까지 폭력을 휘두르는 사태가 나타나는 것이지 단순히 짐승에대한 폭력이 인간에 대한 폭력으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다. 결과적으로 같은 결과가 나올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직접적 원인이라 규정할 수는 없다. 상관관계라 할 수 있어도 인과 관계라 할 수는 없다. 그걸 인과 관계로 여기는 것은 생명을 해치는 것으로 살아남는 인간이 말하기에는 지나치게 비논리적이다.

교화가 가능하더라도 대중은 엄벌을 말할 것이다. 그것은 법의 개념을 잘못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법은 피해자의 복수를 위한 것이 아니라 사회 질서를 위한 것이다. 법의 목적을 복수로 이해한 대중이 당한 만큼 갚아줘야 한다는 인식을 가지고 높은 양형을 요구하고질서 유지 방식으로 이해한 사법은 사회 질서를 위해 양형을 결정하므로 적절한 양형으로 판결하면서 대중과 사법의 인식 차이가 발생하게 된다.

 

현재 인간의 모습은 대부분 문명에 의해 만들어졌다. 동족 살해나 동족 포식에 대한 거부감이나 시간 관념 등 거의 모든 것이 문명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원시인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들은 문명인과 같은 생각과 행동을 하지 않는다. 인간의 선천적 성질인 유전자가 흙이라면 인간의 후천적 성질인 관념은 도자기 제조 재료다. 그 둘을 섞어 인간이 만들어진다. 인간의 대부분은 만들어진 것임을 파악하고 개인주의 체제에서는 개인의 자유 의지로 본인을 만들어가야한다.

그런 상황에서 특정한 인간상이 진리라고 말하며 그걸 반드시 지켜야 한다는 주장은 어처구니 없는황당한 주장이다. 가령 여성주의와 같이 인간의 개성을 규정하여 특정한 인간상을사회가 수용해야 한다면서 탈코르셋이나 꾸밈노동을 말하며 여성에게 꾸미지 않는 개성을 갖추도록 강요하는 것은 부당한 억압에 해당한다.

 

 

관념에 대해 알았다면 자아도 알 수 있게 된다. 나는 벤자민 리벳의 자유 의지에 관한 실험, 일명 리벳 실험을 보고 관념을 이해하고 자아를 파악하여 자아와 육체를 분리하여 사고하는 것으로관념의 지배를 인식하고 제어하려 하면서 관념의 지배로부터 다소 자유롭게 되었다. 리벳 실험을 간단히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준비 전위, 인간의 의지, 실제 실행의 시점을 측정하여 인간이 의지를 가지고 행동하는지에대한 실험을 했다. 여기서 준비 전위는 대뇌 피질의 운동 영역에서 발생하는근육 운동이 이루저지기 전의 두뇌 활동 신호를 말한다. 실험을 하자 놀랍게도 인간이 의지를 가지기도 전에 준비 전위가 일어난 것이다. 인간의 자아가 의지를 갖기 전에 인간의 뇌가 먼저 반응한 것이다. 리벳은 이 실험을 근거로 인간에게 자유 의지는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 실험 결과로 얻은 발상이 중요하므로 이 실험에 대한 다양한 논의는 생략하겠다.

나는 이 실험을 보자마자 리벳이 내린 결론과 별개로 다른 것이 떠올랐다. 자아의 의지와 무관하게 육체는 무의식적으로 행동한다는 것이다. 습관적 움직임이나 무의식적 움직임 또는 파블로프의 개나 지네의 딜레마와 같이 인간은 자아의 의지와무관하게 무의식적인 움직임을 가진다. 파블로프의 개는 개에게 먹이를 줄 때 종을 울리면 나중에 종만 울려도 개가 침을 흘리게 된다는 조건 반사 실험을 말하고, 지네의 딜레마는 무의식적으로 숨쉬는 것과 같이 행동하는 것을 의식하면 부자연스럽게 되는 것을말한다. 이것은 모두 알고 있는 공통 인식일 것이다. 누구나 습관적 움직임을 경험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리벳 실험을 통해 습관적 움직임뿐만이 아니라 인간의 모든 행동은 자아의 의지와 무관하게육체, 즉 뇌가 알아서 행동할 것을 예측하여 준비를 해놓고 있다는것을 알게 되었다. 이것이 인간의 본질이자 자아의 본질로 인간을 이해하는데매우 중요한 성질이다. 지금 설명할 때에는 정확한 설명을 위해 뇌로 지칭하나 이후활용할 때에는 자아와 육체를 맞대어 비교하기 위해 뇌가 아닌 육체로 지칭하겠다.

 

인간의 뇌는 인간의 생각과 행동을 학습하여 다음 생각과 행동을 예측하여 준비하고 자아가 의식적으로의지를 가지는 부분은 자아의 의지대로 되고 그렇지 않은 부분은 뇌가 무의식적으로 실행한다. 인간은 어떻게 자연스럽게 움직일 수 있었을까? 인간이 잠에서 깨어났을 때를 생각해보자. 잠에서 깨어나 눈을 뜨고 몸을 일으켜 상황을 파악하고 육체의 욕구를 인지한 다음 식사를 하거나배변을 하거나 다시 잔다. 거기서 세세한 부분을 특별히 의식적으로 의지를 갖고 하지 않는다. 반복적인 행동은 대부분 무의식적으로 행동할 정도로 자연스럽다. 되려 자연스럽게 움직이는 것을 의식적으로 제어하려고 하면 지네의 딜레마와 같이 부자연스럽게 된다. 뇌가 전부 계산하여 예측하여 인간의 생각과 행동을 미리미리 준비하고 세세한 부분은 직접 실행했기때문에 그것이 자연스러웠던 것이었다.

인간이 놀라는 것은 인간의 뇌가 예측하지 못한 상황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뇌가 모든 행동을 예측하여 준비해놓고 있는데 그 예측에서 벗어난 상황이 발생하면 자연스러운행동을 할 수가 없어 인간의 자아가 놀라게 된다. 반대로 미리 놀라게 될 것을 알고 있는 상황이라면 뇌가 예측할 수가 있어 준비하는 것으로 놀라지 않거나 놀라더라도 적게 놀라게 된다. 이는 위급 상황에도 마찬가지다. 위급 상황에 대한 경험이 있으면 뇌가 예측하여 준비하고 실행하는 것으로 재난 발생시에도 신속하게행동할 수 있으나 그런 것이 없으면 패닉 상태가 되어 혼란에 빠져 행동할 수 없게 될 수 있다. 그렇기에 인간은 재난 발생 훈련을 하는 것이다. 낯선 환경에 가면 적응하기 힘든 것도 그 환경에 대한 정보가 부족하여 뇌가 정확히 예측하지 못하여자연스러운 행동을 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자아의 의지와 뇌의 예측에 따른 준비에 혼선이 발생하여 실수를 하기도 한다. 가령 잠결에 커피를 마시기 위해 믹스커피 스틱을 뜯고서 컵에 내용물을 넣으려 했는데, 과거 믹스커피 스틱을 들고 있는 상황에서 인간이 믹스커피 스틱을 쓰레기통에 버렸다는 것을 기억한뇌가 그걸로 앞의 행동을 예측하여 준비해놓고, 자아가 그것에 저항하지 않으면 뇌가 실행해버리면서 무의식적으로 내용물이 든 믹스커피 스틱을 쓰레기통에 버리게 된다.

이런 구조기 때문에 서블리미널이 효과가 있다. [서블리미널애드는 사람들이 의식할 수 없는 자극을 반복하여 줌으로써 잠재의식하에서 구매 의욕이생기도록 북돋우기 위한 광고를 뜻한다.] 의식적으로 기억하지 않은 것이라도 뇌가 예측하여 행동을 준비해버리면 머릿속에서 떠올라 구매 욕구가 발생할 수도 있다. 그러나 서블리미널은 자아가 인지하지 않은 정보기 때문에 지나가다 스친 간판과도 같을 정도로 정보의중요도가 낮아 그런 것에 영향을 끼칠 확률은 낮다. 그럼에도 어떤 촉매가 있으면 간판 내용이 떠오르기도 하는 것과 같이 촉매가 있으면 확률이 없는 것은 아니기에 효과가 있을 수 있다. 효과 유무와 별개로 이것은 잘못된 방법이기에 대부분 나라에서 법으로 금지하고 있다.

그보다는 직접적으로 인지하게 하는 대화, 세뇌 등이 효과적이다. 직접 인지하여 얻은 정보는 중요도가 높아 그에 따른 뇌의 예측과 준비가 나타날 확률이 높다. 누군가 A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 본인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도 그 정보를 바탕으로 뇌가 계산하여 준비해버리면 A에 대한 인식이 자리잡을 수가 있다. 그런 인식이 머릿속에 떠오를 때 그것에 생각하지 않고 수용해버리면 그대로 세뇌되는 것과 같다할 수 있다.

2021년 미국에서 틱톡에서 유행한 틱 장애 영상을 흉내 낸 10대 소녀들이 정말로 틱 장애가 발생한 사건이 있었다. 뇌가 그런 흉내를 학습하여 예측하여 행동을 준비하여 실행해버렸기 때문에 틱 장애가 발생한 것이다.

중독성이 있는 노래가 머릿속에 맴돈다거나 일 중독에 걸리는 것도 뇌가 인간의 생각과 행동을 예측하여준비하여 실행하기 때문이다. 자아가 원치 않아도 머릿속에 노래가 떠오르게 하고 일을 하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한다. 특히 일 중독은 오랫동안 그것을 반복하여 그걸 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상황이기에 하지 않으면 불안감과초조함을 느끼게 된다. 반복적인 학습으로 나타나는 중독은 대체로 그런 뇌의 예측에의한 자연스러움 때문이다.

흔들다리 효과라는 것이 있다. 인간은 흔들리는 다리 위에서 이성을 만나면 공포심에 의해 뛰는 심장을 호감에 의해 뛰는 심장으로착각하고 이성에 대한 호감도가 높아진다. 인간의 자아는 육체와 일체화된 것이 아니기에 그런 착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뇌의 예측과 준비와 실행으로 육체가 멋대로 움직이니까 그렇다. 인질과 납치범이 사랑에 빠지게 되는 스톡홀름 증후군도 마찬가지다. 자아의 의지와 무관하게 멋대로 육체가 움직이니까 그런 착각을 하게 된다.

인간의 발상도 뇌가 특정 상황을 조합하여 예측하여 준비하고 실행하는 것으로 머릿속에 떠오르게끔한다. 이러한 특성이 인간의 욕구 외의 연료가 되게 한다. 인간은 최초 욕구를 연료로 행동하나 그런 행동이 반복되어 뇌가 예측하여 생각과 행동을 준비하고실행할 수 있게 되면 욕구 외에도 뇌의 예측으로 발상이 떠올라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게 된다. 욕구에서 점진적으로 욕망이 커져가는 것은 인간의 생각과 행동이 욕구에서 시작하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욕구 외의 복잡한 생각과 행동을 할 수 있게 된다. 이 특성이 인간을 지성적인 존재로 만들었다. 인간과 짐승의 차이는 지능이다. 인간의 뇌는 수준이 높은 예측을 통해 복잡한 욕망을 이끌어내어 수준이 높은 지성을 갖게 하고짐승의 뇌는 수준이 낮은 예측을 통해 단순한 욕망을 이끌어내어 수준이 낮은 지성을 갖게 하거나 지성이 없게 된다.

인간은 본인의 머리 속에 어떤 것이 떠오른다고 그것이 반드시 본인의 의지에 의한 것임이 아님을알고 있어야 한다. 머리 속에 떠오른 모든 것이 본인의 의지로 인식하는 것은인터넷 포탈에서 본인이 검색한 것뿐만 아니 포탈 인공 지능이 자동적으로 선별한 추천 검색어도 본인의 의지로 검색한 것이라 여기는 것과 다를 바없다. 뇌에서 떠오른 것은 뇌가 알아서 추천 검색어처럼 떠올리게한 것도 있다. 그걸 고려하여 본인의 뇌에 그릇되거나 부정된 것이 떠올랐다고본인을 자책할 필요가 없다. 그것은 그냥 단순한 뇌의 예측에 의한 준비와 실행에 불과하다.

인간의 자아는 반자동 로봇을 타고 있는 것과 같은 것이다. 뇌는 인간이 지금까지 생각하고 행동한 모든 것을 계산하여 앞으로 행동을 예측해 행동 준비를 해놓는다. 버튼을 누른다라는 행동을 반복하면 뇌는 다음에도 이 시기에 행동할 것이라 예측하고 행동 준비를한다. 인간의 자아가 행동할 때에도 뇌가 준비된 대로 행동하면자연스럽게 행동하고 그렇지 않으면 어색하게 행동한다. 준비된 대로 행동하지 않았더라도 그 행동을 뇌가 학습했으면 자연스럽게 행동할 수 있도록 세세한 부분의 행동을 실행한다. 자아가 관념으로 체계화된 행동을 하는 것으로 뇌도 관념으로 체계화된 행동을 학습하는 것으로 자아와뇌 모두 관념에 영향을 받는다. 자아와 뇌 둘 다 관념대로 행동하기에 인간은 관념의 지배로 행동하게 되는 것이었다. 이때부터 관념에 대해 이해하게 되었다.

자아는 육체의 모든 권한을 쥔 존재가 아니었다. 인간의 의지와 뇌의 반응은 다를 수가 있었다. 가령 그러므로 인간의 자유 의지가 없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자유 의지와 무관하게 육체가 알아서 작동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걸 자아가 제어를 잘하면 자유 의지대로 살 수 있고 제어를 잘 못하면 경험에 의해 만들어진관념대로 자유 의지가 없이 살게 된다. 고찰 없는 자유 의지는 없다. 고찰을 통해 뇌의 행동 준비를 인식하고 의지를 가지고 판단해야 그 시점에서 진정한 자유 의지라 할 수 있게 된다.

자아는 육체가 아니다. 그렇다면 자아는 육체의 경험으로 형성된 육체 권한의 일부를 쥐고 있는 소프트웨어라는 말이 된다. 자아는 유전자의 정보를 토대로 기본적인 욕구를 바탕으로 관념을 가치 판단 기준으로 삼아 관점을정하여 감각을 느끼고 나서 욕망을 바탕으로 새로운 관념을 학습하는 것을 반복하면서 형성되게 된다. 여기서 관념에 의한 행동 원리가 AI의 알고리즘과 유사하게 된다. 관념 학습을 설계하면 인간 또한 인공 지능과 같은 효율적인 알고리즘 설계가 가능하게 된다. 그것이 새로운 교육 방법 중 하나라 보고 있다. 기초 관념 학습이 끝나 대부분이 고정되면 자아 형성이 완료했다고 볼 수 있다. 보통 사춘기에 자아가 형성되어 형태를 갖춘다. 그 모든 과정이 신경 세포의 신호를 모아 뇌가 정리하는 것으로 인식하는 것이므로 자아는 세포의여론이라 볼 수도 있다.

 

 

나는 리벳 실험을 통해 자아와 육체가 분리되어 자아의 의지와 무관하게 육체의 움직임이 일어날수 있음을 깨닫고 과거의 절망에서 벗어나 진지하게 나의 문제와 사회 문제의 본질이 무엇인지 생각하기 시작했다. 이 실험을 알기 전에도 역할주의에 대해 떠올리고 썼으나 본격적인 사상의 시작은 이 실험 알고난 후부터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사상가의 사상은 경험에 의한 것이 많다. 나의 경험에 대해 간단히 설명하겠다. 나는 초등학교 저학년 시기에 바나나 우유 부정취득 사건 이후 온갖 유교적 가치관을 세뇌 당했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 어떤 마트에서 유통기한 지난 음식을 발견하면 3배로 보상해주는 제도를 시행했었는데, 그걸 보고 어렸던 나는 유통기한이 지나기 쉬운 바나나 우유를 진열대 바로 아래에 살짝 숨긴 다음유통기한이 지난 후에 꺼내어 점원에게 보여주고 보상을 받은 적이 있었다. 몇 차례 부정한 보상을 받다 CCTV로 점원에게 그 행위가 적발되어 부모에게 크게 혼난 적이 있었다. 나는 그것에 왜 잘못되었는지 합리적인 이유를 듣고 납득한 것이 아니기에 체벌로 반항심이 생겨나고, 부모는 그것을 행한 자녀가 그대로 놔두면 삐뚤어질 것을 염려한 것인지 몰라도 도덕적 행위를 강조하게되었다. 나는 성장하면서 연령 차별이 윤리인 유교 사회에서 연상에의해 온갖 부당함을 경험하게 된다. 초등학교 고학년에서 중학교 저학년 시기에 있던 일이다. 또래가 아닌 친구의 동생과 어울리는 것을 보고 크게 혼나거나, 김치를 먹지 못한다고 강제로 먹게 되다 토를 한다거나, 유행하는 노래를 보고 따라 불러도 혼내거나, 원치 않아도 연상 앞에서 무릎 꿇고 바닥에 머리를 박고 돈을 받는 세배라는 풍습을 해야 한다거나, 전단지 알바를 하다가 크게 혼나거나 하는 것과 같이 정말 시시껄렁한 사건 하나하나가 유교적 가치관에의한 억압이었다. 그것이 윤리가 아니라면 반항하였지만 그것을 윤리라 배웠기때문에 반항조차 어려웠다. 그렇게 연상에 대한 공격과 복종을 학습하면서 그에 대한 관념이 만들어졌다. 그러면서 자존감이 추락한 상태에서 14세 때 특정 사건에서 나의 자유 의지로 연상에게 의사를 표현하지 못했을 때 모든 것을 자포자기했다. 머리 속에서 강하게 의사를 표현하겠다고 마음 먹었음에도 의사 표현이 목에서 걸리고 나오지 못했다. 그 당시는 내가 왜 연상에게 의사 표현을 하지 못했는지 몰랐다. 단지 내가 못나서 그런지 알고 자책하고 후회하고 슬퍼하고 절망했다. 그러다 이 실험으로 그것이 온전히 나의 의지가 아니었음을 알게 되었다.

나는 뇌가 나의 행동을 학습하여 예측하여 준비하고 실행하는 것에 의해 의사 표현을 하지 못하게되었고, 나의 자아는 가르침으로 만들어진 관념에 의해 그런 준비를거부하지 못하여 의사 표현을 하지 못한다는 실행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내가 의사 표현을 하지 못한 것은 세뇌 당하여 자유 의지를 갖지 못한 것과 원리가 같았다. 그걸 인식하고 더 이상 나는 나에게 절망하지 않기로 했다. 나는 뇌의 안에 존재하는 자아지 육체 자체가 아니었다. 그것으로 육체가 아니더라도 자아가 살면 내가 산다는 인식도 갖게 되었다.

 

특정 사건 이후 나는 스스로에게 실망하여 자아가 죽을 뻔했다. 자아가 붕괴하여 자살할 수 있는 것을 막은 것이 현실 도피다. 학업을 포기하고 게임과 만화와 소설로 현실 도피 하는 것으로 생존했다. 현실 도피를 통해 자아의 죽음을 막는 대신 자아의 시간이 멈췄다. 오랫동안 멈추면서 자아의 시간이 완전히 고정된 것이 아닐까 싶다. 자아 형성 시기였기 때문에 계속 자아 형성 중에 있는 것 같다. 그러면서 계속 생각했다. 그리고 자아의 시간이 달라 또래와 같은 가치관을 갖지 않게 되었다. 자아의 시간이 멈추고 또래와 다른 가치관을 가지면서 보편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사고할 수 있는사상가가 될 수 있는 준비가 되었던 것 같다. 생존주의는 이렇게 일단 살고 보자는 경험을 토대로 만들어졌다.

역할주의는 롤플레잉 게임을 하다가 떠올렸다. [롤플레잉 게임_체육은 이용자가 게임 프로그램에 등장하는 인물의 역할을 맡아 줄거리를 따라 진행해 나가는 컴퓨터 게임을 뜻한다.] 온라인 RPG인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와 리그 오브 레전드를 하다 떠올렸다. 각자의 역할을 수행하기만 하면 상대가 누구든 존중하는 롤플레잉 게임에서의 인간관계를 보고 역할을 기준으로 가치 판단을 하자는 주장을 하게되었다. 이 사상은 관계 가치로 발전하게 되었다.

탐구주의는 리벳 실험 이후 다양한 것을 생각하면서 떠올렸다. 구체적으로 배우고 나서 발상하는 것이 아닌 기초적인 것만 배우고 발상하고 나서 오류를 수정하는방식을 통해 지식이 만드는 고정 관념에서 자유롭게 발상한 다음 오류를 수정하면서 다양한 인식을 갖게 되었다.

민주주의와 자유주의에 대한 추구는 유교적 가치관에 의한 억압에 의해 나타났다. 자유롭고 싶다는 마음이 컸다. 처음에는 자유주의에 대한 인식이 없어 민주주의만 추구했으나 진정한 의미에서 개인의 자유를 추구한사상은 자유주의였다.

자본주의는 금전 만능주의의 원인으로 착각하였으나 시장 원리와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등을 보고 개인의의사를 반영하는 효율적인 경제 체제임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는 모두 개인의 의사를 반영하는 개인주의 체제임을 알게 되었다.

유교적 가치관에 의해 의사표현을 못하고 망가졌던 만큼 유교적 가치관에 의한 도덕관념이 잘못되었다고생각하고 금욕주의와 이타주의가 잘못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나의 사상은 이렇게 나의 경험을 통해 만들어졌다.

 

관념에 대한 설명과 관념을 이해하게 된 계기에 정리했다. 인간이 사물이나 현상을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서 인간이 만들어지게 된다. 그것은 동족 살해나 동족 포식에 대한 거부감을 느끼는 관념과 같은 기본 윤리나 시간에 대한 관념과같은 기본 개념을 비롯한 대부분이 인간의 관념에 의해 결정되었다. 그렇기에 인간의 교화 또한 관념 교정을 통해 가능하다는 결론이 나온다. 인간은 인간의 생각으로 만들어진다. 그렇게 만들어진 자아는 인간의 육체와 별개의 존재였다. 자아는 육체의 조종자이지 육체 자체가 아니었다. 이걸 알아야 인간의 행동 원리의 본질을 알고 사상과 철학을 할 수 있게 된다고 본다.

 

 

 

4. 체제

 

사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사회의 체제가 무엇인지 알아둘 필요가 있다. [체제는 사회를 하나의 유기체로 볼 때에, 그 조직이나 양식, 또는 그 상태를 이르는 말을 뜻한다.]

인류 문명의 체제를 크게 두 가지로 나눈다면, 왕에게 주권이 있는 왕정과 국민에게 주권이 있는 민주정으로 나눌 수 있다. 개인이 개인의 이익만을 추구하면 지배가 불가능하기에 왕정은 자연스럽게 집단의 이익을 우선시하는집단주의 체제가 된다. 국민에게 집단의 이익을 우선시하게 만들고 집단의 장인 왕이이익을 취하는 구조다. 개인이 개인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것을 억압하면 자유가 불가능하기에민주정은 자연스럽게 개인의 이익만을 우선시하는 개인주의 체제가 된다. 모든 국민 개인이 개인의 이익만을 우선시하여 모든 개인이 이익을 취하는 구조다. 지배는 곧 집단주의가 되고 자유는 곧 개인주의가 된다. 집단주의 체제는 국민에 대한 지배를 효율적으로 하기 위해 인간에 가치 판단을 하여 욕망이 악이라는전제하에 만들어진 금욕주의와 이타주의를 윤리로 삼았으나, 개인주의 체제는 국민이 보다 자유롭기 위해 인간의 이익과 행복 추구로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라는 공리주의를 윤리로 삼았다. 그러나 공리주의는 인간의 이익과 행복의 추구라는 주관적 성질에 대한 합리적 기준이 없어 공공의이익을 챙기기 어렵다는 뚜렷한 한계점을 가지고 있었다. 본래 왕정의 윤리가 금욕주의나 이타주의였다면 체제가 정반대인 민주정의 윤리도 정반대로 욕망주의와 이기주의였어야 했다. 고정된 관념에 의해 그것이 어려워 왕정의 윤리를 쓰는 바람에 관념과 체제가 맞지 않아 사회적혼란이 생겨버렸다. 육체 구조 유지를 위한 강제성을 사회 구조 유지를 위한강제성에 대입한 생존주의로 접근한다면 생존이라는 합리적 기준으로 공공의 이익을 전제한 상태에서 최대한의 자유를 누릴 수 있고, 역할이란 관계에 가치 판단을 하면 인간의 욕망을 악으로 여기지 않을 수 이어 공리주의, 욕망주의, 이기주의 등이 윤리로 성립될 수 있을 것이다.

 

왕정의 관념을 가진 상태에서 민주정 체제로 진보한 결과, 집단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집단주의 관념과 개인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개인주의 체제가 충돌하게 되었다. 그로 인해 수많은 사회 문제가 발생했다. 한국의 높은 자살률이나 낮은 출산율을 비롯한 대부분의 사회 문제가 관념과 체제 충돌의 결과물일정도였다. 이러한 충돌 문제는 왕정에서 민주정으로 체제 전환 시기부터있던 뿌리깊은 문제다. 다수가 왕정의 가치관으로 살다 보니 왕정의 제도 중 하나인신분제 관념으로 노동자를 농노 취급하여 착취하였다. 이것이 산업 혁명 당시 자본가의 노동자 착취다.

영주의 농노 착취와 자본가의 노동자 착취는 본질적으로 같음에도 개인의 욕망으로 구동되는 자본주의체제에 원인이 있다고 주장하면서 기독교적 공동체 가치관과 유사한 공동체 생산과 공유를 주장하는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같은 집단주의 체제를 가진 국가가나타나게 되었다. 즉 관념에 맞는 체제로 다시 돌아가자는 주장을 한 것이다. 이것이 낡은 가치관에 의해 발생한 문명 역행 사건이다. 공산주의가 계급 투쟁으로 혁명을 일으키면서 진보라 주장하는 좌파의 본질은 계급 투쟁이 되었다. 서양 인문학의 발전이 윤리를 진리로 규정한 상태에서 대상의 확대였으므로, 그걸 기준으로 하면 노동자가 이익을 얻었으므로 진보로 여겨질 수 있으나, 문명 자체로 보면 명백한 퇴보에 해당한다. 공산주의 국가가 왕정과 같은 정치 체제로 나아간 것은 사상의 변질과 별개로 관념과 체제의 윤리적명제가 왕정과 유사했기 때문이다. 본질이 같으면 유사한 결과가 나온다.

반면 낡은 가치관에 의해 관념과 체제의 충돌이 있음에도 개인의 자유와 주권과 소유가 중요하다고주장하면서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와 자본주의 같은 개인주의 체제를 유지하는 국가가 나타나게 되었다. 즉 관념과 체제가 충돌하고 있음에도 개인주의 체제가 우수하므로 유지하자고 주장한 것이다. 그러면서 진보적인 개인주의 체제가 보수가 되었다. 이것이 낡은 가치관에 의해 발생한 보수와 진보의 교환 사건이다. 자본주의로 이익을 얻은 이들이 공산주의와 다른 진보를 추구한 것이 아닌 그들과 싸움과 동시에보수를 자처하고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한 태도를 취하면서 보수라 주장하는 우파의 본질은 기득권 유지가 되었다. 왕정과 민주정의 이익 추구 방향이 정반대의 사상인 것을 고려하면 현재 개인주의 체제는 문명 자체로보면 명백한 진보에 해당한다. 자유주의가 왕정과 같은 독재정 체제였다가 민주정으로 나아간 경우가 많은 것은 관념의 윤리적 명제가 왕정과 유사했으나 체제가 왕정과 달랐기때문이다. 본질이 다르면 다른 결과가 나온다.

당시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반대하는 이들조차 그들이 주장하는 윤리적 명제를 부정하지 못하는 바람에수정 자본주의나 신자유주의 등과 같은 체제 변화를 실험하게 되면서 왕정의 가치관에 의해 민주정의 체제가 수정되는 사건이 발생하게 된다. 현대 복지가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덕이라 말하는 이들이 있는데 본래 그래서는 안되었다. 체제에 맞는 윤리를 통한 복지를 실행했어야 했다. 체제가 다른 윤리를 바탕으로 복지를 행하다 보니 비효율적이고 불균형하며 비논리적인 복지를 남발하게되고 있는 것이다.

자유 진영에서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논리적으로 논파한 것이 아니었기에 미국에서는 그 사상에 반대하기위해 물리적으로 반대하는 매카시즘이 나타나고 정신적으로 반대하게끔 만드는 CIA의 정보 공작 등이 실행되게 되었다. 자본주의는 시장 원리에 의해 소비자가 고가치 생산품을 저렴하게 구매할 수 있어 소비자가 행복하게되는 사상이다. 그 외의 윤리는 민주정에 맞는 가치관을 만들어 경제에 윤리를넣는 것이 아니라 경제는 경제대로 효율을 추구하고 윤리는 사회에서 균형을 추구했어야 했다. 그러지 못하여 아직까지도 윤리 대상 확대가 인문학의 진보라 여기면서 PC주의, 여성주의, 반지성주의, 동물 보호주의 등과 같은 일부 집단의 이익을 얻을 권리를 주장하는 이권운동 등이 세상을 어지럽히게되는 계기가 되게 된다. 그 흐름을 한국도 따라가고 있었다.

개인주의 체제는 인간의 본성을 그릇되다 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드린 상태에서 인간이 이기적이어야올바른 결과가 나오도록 설계했다. 자유, 선거, 시장, 법치 등을 고려하면 이기적이어야 올바른 결과가 나온다. 이타적으로 개인의 자유를 포기하면 자유주의라 할 수 없고, 이타적으로 개인의 주권을 포기하면 민주주의라 할 수 없고, 이타적으로 개인의 소유권이나 선택권을 포기하면 자본주의라 할 수 없고, 이타적으로 법 앞의 평등을 무시하면 법치주의라 할 수 없다. 개인주의 체제인 사회는 개인이 이기적으로 권리를 등을 추구해야 올바른 결과가 나온다. 그런 사회가 얼마나 선진적이고 위대한가? 인간의 욕망을 악으로 몰며 인간 스스로를 괴롭게 했던 그런 집단주의 체제와 격이 다른 체제다. 인류는 개인주의 체제로 진보했다. 그러나 아직 관념은 집단주의 체제에 머물러 있다. 그러므로 이제 인류는 개인주의 관념으로 진보해야 한다.

과거 개인의 육체적 자유를 위해 개개인을 계몽했다면 이제는 개인의 정신적 자유를 위해 개개인이각성해야 한다. [계몽은 지식수준이 낮거나 인습에 젖은 사람을 가르쳐서 깨우침을뜻한다.][각성은 깨어 정신을 차림을 뜻한다.] 계몽은 타인이 가르쳐서 깨우치게 하는 것이라면 각성은 본인이 스스로 깨우치는 것을 말한다. 인터넷을 통해 정보 수집이 수월한 현대, 오늘날의 시대는 계몽 시대가 아닌 각성 시대다.

자유 진영과 같이 개인주의 체제에서는 과거 계몽 시대와 같이 물리적 혁명이 필요가 없다. 관념의 문제이므로 각성하여 체제에 맞는 관념만 가지면 정신적 혁명이 일어난다. 사상 혁명이다. 인터넷을 통해 모두 민주정에 맞는 관념을 가지면 된다. 그러면 관념에 의해 사회가 바뀐다. 왕정이나 공산 진영과 같이 집단주의 체제에서는 체제 자체가 개인의 의사를 반영하지 못하는 영역이 많아 물리적 혁명이 필요할 수는 있다. 시대의 명분은 분명 개인주의에 있다.

 

개인주의 체제는 왕정의 관념에 의해 왜곡되는 일이 많았다. 자유주의는 모든 개인의 자유가 아닌 왕정의 왕과 같이 본인이나 일부의 자유로만 해석하기도 했다. 그런 탓에 자유방임주의가 나타나 자유주의를 더럽히게 되었다. 민주주의는 모든 개인의 주권이 아닌 시민 계급의 계급 투쟁으로 해석하기도 했다. 그런 탓에 사회 민주주의나 인민 민주주의와 같이 개인의 자유를 기본으로 하지 않는 개인의 주권보다집단의 주권이 우선되는 민주주의가 나타나게 되었다. 자본주의는 모든 소비자의 행복이 아닌 왕정의 왕과 같이 본인이나 일부의 이윤 추구로만 해석하기도 했다. 그런 탓에 시장 원리를 무시하고 유착과 비리 등을 통한 이윤을 추구하여 자본주의 자체를 망가트리는일을 하기도 했다. 법치주의는 모든 국민의 법 앞의 평등을 기초한 사회 질서유지가 아닌 법을 복수의 수단으로 보고 민중이 감정대로 처벌하던 마녀사냥이나 인민재판으로만 해석하기도 했다. 그런 탓에 법치를 무시하고 감성적으로 떼 법을 주장하면서 법의 합리성을 파괴하는 일이 발생하기도했다.

체제 해석의 차이는 우파와 좌파의 본질에 따라 결정되기도 한다. [우익_정치는 보수적이거나 국수적인 경향을 뜻한다. 또는 그런 단체. 1792년 프랑스 국민 회의에서, 온건파인 지롱드당이 의장의 오른쪽 의석을 차지한 데서 나온 말이다.][좌익_정치는 급진적이거나 사회주의적·공산주의적인 경향을 뜻한다. 또는 그런 단체. 1792년 프랑스 국민 의회에서, 급진파인 자코뱅당이 의장의 왼쪽 의석을 차지한 데서 나온 말이다.] 이 우익과 좌익에 파벌이 붙어 우파와 좌파가 형성되었다. 우파와 좌파는 각각 기득권 유지와 계급 투쟁을 전제로 사상들을 해석하였다. 기독교에 영향을 받은 사회주의에서 파생된 파시즘이 대표적인데, 기득권 유지로 쓰면 우파의 파시즘이고 계급 투쟁으로 쓰면 좌파의 파시즘이 된다. [파시즘은 제일 차 세계 대전 후 나타난 극단적인 전체주의적·배외적 정치 이념을 뜻한다. 또는 그 이념을 따르는 지배 체제. 자유주의를 부정하고 폭력적인 방법에 의한 일당 독재를 주장하여 지배자에 대한 절대적인 복종을강요한다. 또한 대외적으로 철저한 국수주의·군국주의를 지향하여 민족지상주의, 반공을 내세워 침략 정책을 주장한다.] 일부 예외를 제외하면 대부분은 기득권 유지와 계급 투쟁으로 바라보면 우파와 좌파를 이해할 수있다. 우파는 자유주의와 권위주의와 같이 지향이 다른 사상이 같이분리되기도 하는데, 기득권 유지로 바라보면 모순이 사라진다. 좌파는 사회주의와 아나키즘과 같이 지향이 다른 사상이 같이 분리되기도 하는데, 계급 투쟁으로 바라보면 모순이 사라진다.

민주주의는 기득권 유지와 계급 투쟁과 개인의 주권으로 바라본 것으로 나뉜다. 기득권 유지는 보통 자본주의가 섞인 자유 민주주의라 하고 계급 투쟁은 보통 사회주의나 공산주의가섞인 사회 민주주의나 인민 민주주의라 하고 있다. 민주주의의 본질은 개인의 주권에 있으므로 모든 민주주의는 개인의 자유가 기본이기에 자유 민주주의는 동어 반복이고 사회 민주주의나 인민 민주주의는모순이나 거짓이 된다. 개인의 주권으로 바라보았을 때에 자유 민주주의 외의 민주주의는민주주의로 성립되지 못하므로 그냥 민주주의면 된다. 그렇기에 나는 민주주의를 자유 민주주의라 부르지 않고 자유주의와 민주주의로 나눠서 부르거나 개인주의 체제로 묶어서 부르고 있다.

본질을 알고 나면 한국의 민주화 운동도 해석이 된다. 독재 정권이란 기득권과 맞선 한국의 민주화 운동에는 민주주의를 개인의 주권으로 생각한 인간과권력 투쟁으로 생각한 인간과 독재에 대한 국민의 계급 투쟁으로 생각한 인간으로 나뉜다. 거기에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선동도 포함된다. 민주화 운동이 한국 우파와 좌파마다 의견이 갈리는 것은 이것 때문이다. 그러나 프랑스 혁명을 시민의 자유로 생각하거나 자본가의 권력 쟁탈로 생각하거나 시민 계급의 계급투쟁으로 생각한 인간이 있어도 프랑스 혁명을 폄하하는 일이 없듯이 민주화 운동 또한 일부가 계급 투쟁으로 해석하였더라도 폄하할 이유는 없다. 민주화 운동은 그 자체로 가치가 있다. 물론 성역화할 이유도 없다. 그 어떤 것도 성역화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올바른 판단을 저해하는 요소가 된다.

 

선과 악은 기준에 따라 달라질 수 있으므로 윤리 또한 체제 마다 다른 명제가 성립될 수 있다. 윤리는 명제가 될 수 없다는 의견은 체제와 무관하게 진리에 해당하는 윤리가 존재할 것이라는 종교적사고에서 비롯된 것이다. 인류는 종교라는 단일 선악에 지배된다는 생각에서 벗어나야한다. 문명은 사회에서 비롯된 것이므로 사회가 없는 짐승으로서의인간의 선은 생존이고 악은 멸종이다. 그것을 보편 윤리로 삼고, 그 외의 선과 악은 체제나 개인마다 달라져야 한다.

 

 

주요 체제에 대해 간단히 알아보자.

 

첫째, 자유주의. [자유주의_철학은 개인의 인격의 존엄성을 인정하고, 개성을 자발적으로 발전시키고자 하는 사상을 뜻한다. 개인의 사유 활동에 대한 간섭을 줄이고, 가능한 자유를 증대시키려고 하는 생활 방식이다.] 자유주의는 개인의 자유기 때문에 개인의 자유에 속하는 욕구와 욕망과 이기심 등을 전부 긍정한다. 그렇게 하여 개인이 자유롭게 행복하고 최대한 성장하여 사회를 이롭게 하는 것이 일반적인 자유주의의이념이다. 그런데 이것은 왕정의 윤리인 금욕주의와 이타주의와 충돌하게된다. 개인의 자유를 보장하는 자유주의가 인류에 퍼지기 어려웠던까닭은 그것이 개인에게 이롭다 하더라도 오래된 왕정의 관념과 충돌하여 자유를 죄악시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왕정의 윤리를 긍정할 수는 없다. 금욕주의와 이타주의는 반드시 개인의 자유를 침해하기 때문이다. 본인의 자유 의지로 행하는 금욕과 이타는 욕망과 이기와 같다. 본인의 의지로 욕구를 절제하거나 금하겠다나 타인의 행복을 위해 희생하겠다는 둘 다 개인의 자유의지로 욕망과 이기다. 하기 싫은데 금욕하고 타인의 행복을 위해 희생한다는 것은타인의 의지로 본인의 욕망과 이기와 관련이 없다. 그러므로 금욕과 이타는 타인의 의지로만 가능하게 된다. 욕망적이거나 이기적이지 않은 순간부터 반드시 개인의 자유는 침해되게 된다. 본인의 행복을 위하든 타인의 행복을 위하든 개인의 자유가 온전히 보장되기 위해서는 욕망적이고이기적이어야 한다. 만약 서로의 욕망과 이기심이 충돌한다면 대화나 토론이나여론이나 법 같은 사회적 협상을 통하거나 정해진 공정한 규칙을 기준으로 한 경쟁에서 우선 순위를 결정하면 된다.

자유주의의 결함은 자유에 대한 합리적 기준 부재다. 합리적 기준이 없어 각자 다른 자유를 주장하면서 혼란이 발생한다. A는 자유로워도 되나 B는 자유로우면 안 된다는 식과 같이 대상 선별은 애초에 자유주의가 아니다. 그런 식의 자유는 왕이나 독재자도 누리고 있다. 자유주의는 모두가 자유로워야 하고 민주주의는 모두가 주권을 가져야 하며 자본주의는 모두가 소유권을가져야 하고 법치주의는 모두가 법 앞에 평등해야 한다. 이런 것이 개인주의 체제의 기본이다. 문제는 자유의 종류다. 가령 A는 학문의 자유는 정당하나 사상의 자유는 부당하다 주장할수 있고 B는 표현의 자유는 정당하나 성에 대한 표현의 자유는 부당하다주장할 수 있다 할 수 있듯이 각자 다른 자유를 주장할 수 있기에 혼란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 자유는 주관적 기준이기에 자유 자체에 초점을 맞추면 합리적 기준이 설정될 수가 없다.

그러나 생존주의와 같이 구조 유지를 위한 최소한의 강제력에 초점을 맞추면 합리적 기준이 설정될수 있다. 사회와 체제 구조에 결정적인 붕괴를 일으킬 타격을 주지않는다면 대부분 자유다. 이 부분은 논의가 있을 수 있으나 대부분의 낡은 관념에의한 불필요한 억압은 없앨 수 있다. 공산주의 같은 상품 가치나 소비자도 고려하지 않은 수준 낮은 사상 좀 본다고 문제될 것 없고 성기능이 작동하는 미성년이 야한 것 좀 본다고문제될 것 없다. 특히 왕정의 가치관이 그러하다. 구조와 관계 없이 그냥 오래된 관념이라 지켜왔던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걸 근거로 한 억압, 규제, 검열 등은 전부 부당한 것이 된다. 그것을 통해 객관적 자유를 보장하는 것으로 자유주의의 결함을 없앤다. 생존주의적 자유주의야말로 생존이라는 합리적 기준을 통한 논리적인 사상이다.

 

둘째, 민주주의. [민주주의_정치는 국민이 권력을 가지고 그 권력을 스스로 행사하는 제도를 뜻한다. 또는 그런 정치를 지향하는 사상. 기본적 인권, 자유권, 평등권, 다수결의 원리, 법치주의 따위를 그 기본 원리로 한다.] 민주주의는 국민이 권력을 가지고 있으나 인구수의 문제로 대부분의 국가에서 선거 제도를 통해 국민의 대표자를 선출하는 대의 민주주의를 채택하고있다. 정치와 권력과 국민의 관계를 간단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정치가는 정치를 하는 인간이고 정치는 정부 권력을 쥐기 위한 활동이고 정부 권력은 강제력을 쥐기위한 힘이고 국민은 국민 권력을 쥐고 있는 인간이고 국민 권력은 정치가를 선출할 수 있는 힘이다. 이런 과정을 통해 대의 민주주의에서 국민이 권력을 쥐고 있다. 여기서 강제력이 보통 법과 정책 등의 강제를 말한다. 이 강제력은 체제에 따라 적용대상이 다른데 생존주의에서는 사회와 체제 구조 유지를 주로 하여개인에게 최대한의 자유를 보장한다.

대의 민주주의에서 선거 제도는 모든 유권자에게 정치가 인사권을 고르게 1표씩 나눈 것에 해당한다. 모든 유권자가 정치가와 면접보고 타당하다 여겨지는 정치가를 선출하는 인사권을 행사하는 것이 바로선거 제도다. 선거는 시장과 같이 개인의 의사를 반영하여 자유 시장 원리가작동하게 된다. [자유 시장 원리_경제는 상품의 가격이 자본주의 시장에서 상품의 수요와 공급에 따라 자연적으로 결정되는 원리를뜻한다.] 자유 선거 원리는 정치가의 선출이 민주주의 선거에서 정치가에대한 국민의 표심과 정치가의 후보 등록에 따라 자연적으로 결정된다. 민주주의와 자본주의가 개인의 의사를 반영하기 때문에 원리가 같게 된다. 유불리도 같다. 민주주의가 가진 지명도에 따라 유불리가 달라지고 자본주의는 가진 부에 따라 유불리가 달라진다.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는 모든 개인의 의사를 반영한다는 측면에서 같은 개인주의 체제이므로 민주주의를기득권 유지나 계급 투쟁으로만 바라본 것이 아니라면 민주주의자는 자연스럽게 자본주의자가 된다.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의 인식 차이는 공정의 난이도 차이다. 민주주의는 변수가 적어서 공정하기가 상대적으로 쉬워 옳게 보일 수 있고 자본주의는 변수가 많아서공정하기가 상대적으로 어려워 그르게 보일 수 있다. 그러나 개인의 의사를 반영한다는 측면에서 본질은 같다.

민주주의는 그 자체가 인간의 목적이 아니다. 가령 생존과 자유가 인간의 목적이나 모두가 그걸 바라기에 평등을 추구하게 된 것과 같이 주권이인간의 목적이나 모두가 그걸 바라기에 민주를 추구한 것일 뿐이다. 모두가 주권을 얻기 위한 수단이 민주주의라고 인식하면 된다. 그렇기에 민주주의 자체만으로 모든 인간이 바른 행동을 하게끔 하는 사상이 아니다. 민주주의 자체를 윤리로 착각한 이들이 인터넷 이용자들의 악플을 보고 인터넷은 민주주의적이지 않다고말한다. 그러나 모든 개인에게 주권이 있다는 것에 접근하면 인터넷은지극히 민주주의적이다. 단지 주권만 있을 뿐이지 그 주권을 윤리적으로 행할 보장은없다는 점에서 그야말로 민주주의라 할 수 있다. 민주주의적인 인터넷에서 이용자들이 악플을 달 수 있듯이 민주주의 사회 또한 국민들이 권력 남용을 저지를 수 있다.

[권력은 남을 복종시키거나 지배할 수 있는 공인된 권리와힘을 뜻한다. 특히 국가나 정부가 국민에 대하여 가지고 있는 강제력을이른다.][권리_법률은 어떤 일을 행하거나 타인에 대하여 당연히 요구할 수 있는 힘이나 자격을 뜻한다. 공권, 사권, 사회권이 있다.] 권리에 힘이 더해지면 권력이 된다. 권력이나 권리에 제한이 있으면 권한이 된다. 권력자가 권력을 남용한 것 중 유명한 것이 히틀러의 전권 위임법이다. 수권법으로도 불리는데 전권 위임법이 보다 직관적이다. 행정부가 입법부의 입법권의 일부를 위임 받아 행하는 명령과 규칙과 달리 행정부가 입법부의 입법권을전부 위임 받아 행정부가 법을 만들고 법을 집행했다. 명분은 민족과 국가의 위난을 제거하기 위함이었다. 그렇게 민족과 국가를 위해서라는 명분으로 개인의 권리를 침해하기 시작했다. 민주주의가 붕괴하고 전체주의가 들어섰다. 독재가 시작되었다. 이것이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정부 권력의 남용에 해당한다. 이것은 모든 체제에서 발생할 수 있으니 민주주의는 국민이 권력을 가지므로 국민에 의한 권력 남용이 나타날 수 있다.

민주주의의 결함은 국민의 권력 남용이다. 권력 남용으로 인해 중우 정치가 발생하기도 한다. [중우 정치_정치는 이성보다 일시적 충동에 의하여 좌우되는 어리석은 대중들의 정치를 뜻한다. 고대 그리스 민주 정치의 타락한 형태를 이르던 말로서 민주 정치를 멸시하는 뜻으로 쓰인다.] 인터넷의 악플이 그야말로 중우 정치의 전형적인 예다. 자유롭게 의사를 표현할 수 있는 권력이 생기자 일시적 충동에 의한 의사 표현을 하여 타인에게정신적 상처를 입히는 것이 악플이다.

중우 정치에 영합하여 권력을 얻기 위한 공약이나 정책을 남발하는 것이 바로 포퓰리즘이다. [포퓰리즘_정치는 일반 대중의 인기에 영합하는 정치 형태를 뜻한다. 대중을 동원하여 권력을 유지하는 정치 체제로 대중주의라고도 하며 엘리트주의와 상대되는 개념이다.] 지금까지 국민에게 권력이 있다 말해놓고도 선입견에 의해 권력 남용은 정부 권력에서만 일어난다고착각하고 있었다. 그것은 고대 그리스부터 있던 전통적인 선입견이다. 그래서 플라톤이 민주주의를 반대하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중산층을 중심으로 한 중산 정치를 주장했던것이다. 권력 남용으로 나타난 것이 중우 정치고 거기에 영합한 것이포퓰리즘이다. 즉 포퓰리즘의 본질은 권력자인 황제에게 아첨하여 권력을휘두르던 신하와 다를 바 없었다. 왕정의 시대에서는 일부 권력자만 권력 남용에 대한 경계를 해야 했다면 민주정의 시대에는 모든 국민이 권력 남용에 대한 경계를 해야 한다. 권력에 쉽게 취하는 것은 권력으로 인간의 행동을 옳게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모든 일반 인간은 주관적으로 옳은 행동을 하기에 본인의 모든 행동을 옳게 만들기 위해 권력을쓰면서 남용하게 된다. 국민 본인의 주관으로 타인의 자유권을 침해하자는 것을 정치가에게압박하여 법률을 제정토록 유도하거나 국민 본인의 이권 운동을 인권 운동으로 포장하는 등과 같은 사례가 보통 국민 권력 남용에 해당하게 된다. 만약 본인이 권력 남용에 대한 경계에 실패하면 타인이 그걸 지적하면서 경계할 수 있게 하면 된다. 민주주의는 국민의 권력 남용에 대한 경계에 성공하면 결함이 없어지게 된다.

증명이 가능한 학문을 제외한 나머지 학문은 힘에 영합해야 명예를 얻을 수 있다. 그렇기에 곧잘 인문학은 중우 정치에 영합하기도 하는데, 그것은 아첨에 해당하여 바람직하지 못하다. 인문학이 바르기 위해서는 대다수의 국민이 지성인이 되도록 안내하고, 지성에 영합해야 한다. 그래야 인문학과 국민이 서로 뜻이 맞게 된다.

 

셋째, 자본주의. [자본주의_경제는 생산 수단을 자본으로 소유한 자본가가 이윤 획득을 위하여 생산 활동을 하도록 보장하는사회 경제 체제를 뜻한다.] 자본주의는 상품의 가격이 상품의 수요와 공급에 따라 자연적으로 결정되는 자유 시장 원리를 기본으로 한다. 자본가는 기본적인 자본재를 갖춘 다음 소비자가 되어 노동 시장의 노동력 임대 상품과 소비 시장의중간재 상품을 시장 원리에 따른 가격에 구매하여 상품을 생산하여 소비 시장에 공급한다. 자본가는 생산재를 얻고 노동자와 상품 공급자는 이윤을 얻는다. 소비자는 소비 시장에서 소비 상품을 시장 원리에 따른 가격에 구매하여 상품을 소비하여 욕구와욕망을 충족한다. 소비자는 행복을 얻고 자본가는 이윤을 얻는다.

이 과정에서 수요는 적은데 공급이 많으면 상품 공급 경쟁이 일어난다. 공급 경쟁이 일어나면 경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상품을 가격 대비 품질을 높이게 된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소비자는 행복하게 된다. 노동 시장에서는 자본가가 행복하고 소비 시장에서는 소비자가 행복하다. 선거도 마찬가지다. 선거 또한 유권자에게 선택 받기 위해 정치가가 경쟁하면서 보다 가치 있는 공약과 정책을 내놓는 것으로 유권자가 행복하게 된다.

경쟁에서 승리한 가격 대비 품질이 상품을 공급하는 사람은 높은 이윤을 얻는 것으로 행복하게 될수 있다. 자본가와 노동자는 높은 이윤을 얻거나 좋은 직장을 얻을수 있다.

사회에 속한 모든 인간이 개인의 이익만을 위해 생산하면 한정된 수요에 공급 경쟁을 하는 시장이활성화된다. 공급 경쟁을 통해 상품의 가격 대비 품질이 높아지고, 가치가 높아진 상품을 소비하는 국내외 소비자는 행복하고, 고가치 상품은 국외 시장 경쟁에서 승리하여 외환을 벌어드리는 것으로 국내 경제가 성장하여 국민이행복할 수 있다. 자본가는 높은 이윤을 통해 새로운 사업을 확장하여 행복할수 있고, 노동자는 상품 품질 유지를 위해 노동력 임대 상품에 정당한대가를 지불 받아 행복할 수 있다. 물론 이것은 기본 원리로 이념에 가깝다. 생산자는 승리와 패배가 있지만 소비자는 그런 것과 관계 없이 행복할 수 있기에 자본주의는 기본적으로 소비자의 행복이 이념이 된다. 소비자의 행복을 추구하면 자연스럽게 자본주의 시장 원리가 정상적으로 작동한다.

애덤 스미스가 말한 보이지 않는 손이란 비유가 개인주의 체제의 본질을 스치듯 지나갔다. “개인은 바로 그때 보이지 않는 손에 이끌려 자신이 의도치 않은 목표를 달성하게 된다.” 개인의 의사가 반영되는 시장 원리가 적용되는 모든 체제는 이와 같이 욕망을 가지고 이기적이어야올바른 결과가 나오게 된다. 이것이 개인주의 체제다.

여기서 보이지 않는 손은 자본주의 시장 원리가 정상 작동 한다는 가정하에 나온 말이다. 만약 시장 원리를 훼손하는 유착, 담합, 독점 등이 발생하면 그것에 정부가 개입해야 한다. 그걸 정당화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생존주의다. 자본주의 체제 구조 유지를 위하여 시장 원리 작동을 위한 정부의 개입은 사회 계약에 따라 개인의 자유를 침해한 것이라 할 수 없다.

자본가는 생산재로 생산하여 공급한 상품으로 이윤을 얻는데 생산재의 가치보다 더 많은 이윤을 얻어부를 늘린다. 이를 가리켜 마르크스는 잉여 가치라 말했지만 이 잉여 가치가자본가의 노동 대가에 해당한다. 그 과정이 공정하다면 합당한 대가다. 만약 그 대가가 지나치게 크다 여겨진다면 직접 창업을 하면 된다. 그렇게 해야 노동력 임대 상품의 수요와 공급에 따라 적절한 상품 가치가 매겨져 노동자가 합당한대가를 얻을 수 있게 된다. 그렇지 못하여 노동력 임대 상품의 수요와 공급이 깨지면 상품 가치가 낮아져 최저 생계를 위한 대가도 받지 못하게 된다. 그렇게 된 국가에서는 그걸 방지하기 위해 최저 임금 제도로 노동자의 최저 생계 비용을 보장한다. 최저 임금 제도는 시장 원리와 무관한 윤리를 위한 제도기에 경제 효율이 낮아져 경제 성장이 낮아지게된다. 그렇다고 최저 생계 비용을 보장하지 않으면 사회의 요소인사람이 불행으로 자살하여 죽는 것으로 사회 구조가 붕괴하여 국가가 죽게 된다. 따라서 노동력 임대 상품의 가치가 유지될 수 있을 정도로 새로운 시장을 창출하여 새로운 가치를가진 상품을 생산할 수 있는 창업자의 수가 늘어야 할 것이다.

자본주의의 결함은 경쟁 패배와 부의 대물림과 같은 가치 생산 저하다. 자본주의는 경쟁에서 승리한 생산자와 소비자가 행복하지 경쟁에서 패배한 생산자는 행복하지 못하다. 그 불행한 패배자를 위해 경제에 윤리를 적용한 것이 사회주의나 공산주의다. 그러나 경쟁이 없으면 상품 가치가 높아지지 못하여 소비자는 행복할 수 없다. 국내 소비자가 행복할 수 있을 정도의 상품 가치가 없으면 국외 시장 경쟁에서 승리하지 못하여경제도 성장할 수 없다. 경제에 윤리를 억지로 쑤셔 넣으니 생산자가 조금 행복할수 있지만 소비자는 불행하고 경제는 성장하지 못한다. 경제가 성장하지 못하여 생산자도 결국 불행해진다. 시장 원리를 쓰지 않는 사회주의 국가의 경제적 파멸은 매우 당연한 결과였다. 본래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와 같이 개인의 의사로 결정되는 체제는 불균형한 것이 정상이다. 선거 경쟁 패배자를 위해 그를 억지로 당선시킬 수도 없고 시장 경쟁 패배자를 위해 그가 생산한상품을 억지로 소비하게 할 수도 없다. 따라서 불행한 패배자는 경제가 아닌 사회에서 윤리로 접근해야 한다. 바로 복지다. 복지를 통해 사회를 균형을 맞춘다. 균형적인 사회 구조 안에 불균형한 선거와 시장들이 존재하는 것이 기본적인 개인주의 체제인 사회다.

그런데 복지가 과하면 생산하려는 태도가 나오지 않아 생산성이 악화된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금욕주의를 전제로 했을 때 해당되는 말이다. 욕구가 적은 상태에서는 최저 복지만으로 만족하며 살아가기에 복지를 하면 생산을 하지 않게 되지만욕구가 많은 상태에서는 최저 복지만으로 만족할 수 없기에 복지를 해도 생산을 하게 된다. 즉 자본주의에서 복지가 정당화되기 위해서는 모든 개인이 욕망을 가져야 한다. 그래야 기초 복지를 받아야 그 이상의 욕망을 위해 가치를 생산하게 된다.

자본주의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꾸준한 가치 생산이 필요하다. 그런데 그것을 방해하는 것이 바로 부의 대물림이다. 부가 대물림 되면 부를 대물림 받은 인간은 복지 이상의 부를 소유하기에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욕망을충족할 수 있게 되어 이윤 획득을 위한 가치를 생산하지 않으려 할 수 있다. 건전한 욕망주의에 의해 충분한 부가 있어도 부와 관계 없이 욕망을 추구하며 가치를 생산할 수도있으나 그러지 않을 확률도 있기에 부의 대물림이 자본주의 체제에 해롭다는 것은 명백하다. 개인의 불로 소득은 개인의 사망 이후로 끝날 수 있지만 그것이 대물림 되면 점점 가치 생산이하락하게 된다. 십 년 단위에서는 그런 부의 대물림에 의한 부작용이 크게보이지 않을 수 있으나 백 년 단위부터는 반드시 보이게 될 것이다. 가치 생산의 하락은 국가 경제 파멸로 이어진다. 부의 대물림이야말로 자본주의의 시작부터 있었던 결정적 결함이다.

이 문제는 생존주의로 접근하여 자본주의 체제 구조 유지를 명분으로 정부의 개입을 정당화하는 것으로해결해야 한다. 즉 세금이다. 자본주의 체제로 부를 벌어 대물림 하는 이들에게 자본주의 체제 구조 유지를 위해 세금을 걷는것은 매우 정당하다 할 수 있다. 그러면서 부의 대물림에 의한 가치 생산 하락을 줄인다. 완전 자동화, 인간이 아닌 존재가 창의적인 새로운 상품까지 생산할 수있게 되면 복지와 부와 관계 없이 가치 생산이 지속될 것이므로 그때부터는 새로운 인문학적 개념을 도입해야 한다.

완전 자동화가 가능해지면 자본주의가 공산주의로 전환될 수 있다고도 하는데, 개인주의 체제에서는 개인의 의사가 가장 중요하다. 공산주의 체제에서 어떻게 개인의 의사가 반영될 수 있는가? 생산에 초점을 맞출 것이 아니라 소비에 초점을 맞춰야 모든 개인의 의사를 반영할 수 있다. 완전 자동화가 되더라도 개인의 의사를 위해서 시장이 있어야 하고, 시장이 있으면 자본주의도 있어야 한다.

돈은 굉장히 객관적인 기준이다. 개인의 의사를 반영하기 위해 다른 기준을 만든다 하더라도 그것은 또 다른 돈이 될 뿐이다. 돈과 돈의 가치 투쟁에 불과한 본질적으로 무의미한 짓이다. 공산주의 체제로 한다고 주장하면서 돈과 다른 가치 기준을 통해 개인의 의사가 반영되게 만든다면그 기준을 만든 인간이 이익을 얻을 확률이 크다. 단순한 이권 투쟁에 휘둘리기 보다는 보다 효율적으로 많은 인간이 행복하기 위한 길을 가야 한다.

 

넷째, 사회주의. [사회주의_사회 일반은 사유 재산 제도를 폐지하고 생산 수단을 사회화하여 자본주의의 사회적·경제적 모순을극복한 사회 제도를 실현하려는 사상을 뜻한다. 또는 그 운동. 공산주의, 무정부주의, 사회 민주주의 따위를 포함하는 넓은 개념이다.] 사회주의는 공동체를 기본 원리로 한다. 공동체, 협동, 공유, 공동, 등과 같이 집단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전형적인 집단주의 체제다.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와 같은 개인주의 체제가 부상하면서 개인의 욕망과 이기심에 의해사회가 혼란스러운 것을 보고 그 체제에 맞은 가치를 만든 것이 아니라 과거 왕정의 가치를 근거로 사회주의라는 집단주의 체제를 주장한 것이다. 그렇기에 사회주의에서는 금욕주의와 이타주의가 윤리가 된다. 그러면서 동시에 개인의 권리가 훼손되거나 침해된다.

개인의 의사를 반영하는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는 필연적으로 불균형한 결과를 낳는다. 자유주의에 의해 인간관계가 불균형할 수 있고 민주주의에 의해 선거 등락이 불균형할 수 있고 자본주의에의해 상품 소비가 불균형할 수 있다. 그런 불균형에 의해 불평등이 나타날 수 있다. 특정 개성을 가진 인간이 선호되거나 특정 정치가가 선호되거나 특정 상품이 선호되는 것으로 선호되지 않는 것과 차별이 나타날 수 있다. 그것이 개인의 의사에 발생하는 차별이다. 개인주의 체제에서 차별은 필연이다.

이 차별에는 정당한 차별과 부당한 차별이 있을 수 있다. 정당한 차별과 부당한 차별을 구분하기 위해 역할이란 관계에서 가치를 판단하는 역할주의로 접근하면된다. 가령 역할과 관련이 있는 능력에 의해 차별이 발생한다면정당한 차별이 된다. 그러나 연령, 성별, 지역, 학력 등과 같이 역할과 무관한 것에 의해 차별이 발생한다면부당한 차별이 된다.

그러나 정당한 차별조차도 잘못되었다 지적하며 모두가 평등해야 한다면서 기독교적 가치관을 근거로한 공동체를 주장했다. 그것이 사회주의다. 그런 차별이 잘못되었다 주장했기 때문에 차별이 발생하지 않도록 개인의 의사를 억압하게 된다. 개인의 의사로 평가하면 차별이 발생하니 공동체의 의사로 평가하여 평등하게 하자는 것이다. 개인의 의사가 반영되지 못하는 인민 민주주의가 이렇게 하여 나타난다. 공동체의 의사라 하였지만 실질적으로는 공동체의 장의 의사가 된다. 공동체의 장이 개인의 평가가 차별이라 말하면서 간섭하며 조작한다. 그러면서 독재가 된다. 모든 사회는 평가로 조직된다. 그 사회가 개인의 평가로 사회가 조직되는 민주주의가 아닌 통치자나 정당의 평가로 사회가 조직되는독재주의가 되게 되는 것이다. 개인의 의사가 차별을 만든다 하더라도 개인의 의사를 무시하는 민주주의는 성립될 수 없다. 그런 것들은 가짜 민주주의고 그런 사회주의를 추구하면서 민주주의도 추구하는 사회 민주주의는 모순에서벗어날 수 없다.

이 외에 개인의 의사로 나타난 정당한 차별조차 막아 평등하자고 나타난 사상이 PC주의나 여성주의다. 이 사상들이 만약 인권 운동이었다면 부당한 차별만 막자고 주장했겠지만 이권 운동이었기 때문에 부당한 차별을 막는다는 명분으로 정당한 차별조차도손해기 때문에 막자고 주장하면서 사회 혼란을 일으키고 있다. 정당한 차별을 막는 것으로 얻은 부당한 이익은 계급 투쟁의 전리품으로 여기며 당당하게 취하고 있다. 모든 주장의 목적이 집단의 이익 말고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PC주의자 흑인은 동양인의 인권을 말하지 않고 여성주의자 여성은 남성의 인권을 말하지 않는다. 인종 차별을 하지 말라면서 인종을 강조하며 이익을 주장하고 성별 차별을 하지 말라면서 성별을강조하며 이익을 주장한다. 이들은 서양의 인문학 발전인 윤리 대상 확대의 흐름을 탄 이익 집단에 불과하다.

개개인의 의사는 불균형하여 반드시 차별이 나타난다. 그 차별이 정당한가 부당한가를 판단해야지 차별 자체를 없애려고 해서는 안 된다. 그러면 반드시 개인의 의사를 억압하는 개인 억압이 나타난다. 정당한 차별로 나타나는 불균형은 사회의 법과 복지로 어느 정도 균형을 맞춰 사회와 체제 구조유지를 하면 된다.

 

다섯째, 공산주의. [공산주의_정치는 마르크스와 레닌에 의하여 체계화된 프롤레타리아 혁명 이론에 입각한 사상을 뜻한다. 재산의 공동 소유가 옳다고 주장하며 생산 수단의 사회화와 무계급 사회를 지향한다.] 마르크스의 공산주의 사상은 경제 사상이 아닌 윤리 사상이다. 경제에 윤리를 넣어서 경제 효율보다 윤리를 우선시하는 사상이기 때문이다. 그걸 경제학자가 경제로 해석하려 했으니 답이 나오지 않는 것은 당연했다. 마르크스는 유물론을 주장하며 종교를 부정했지만 그의 윤리관은 기독교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기독교가 인간에게 원죄가 있다고 말하며 인간의 욕망을 비난하고 금욕주의와 이타주의를 윤리로 내세우고빈민을 구제하며 천국으로 인도하겠다고 말했던 것과 같이 자본가의 착취를 비난하며 과한 욕망을 막고 공동체의 이익을 위한 이타적인 행동을 윤리로내세우고 노동자를 구제하고 공산주의 낙원을 이루어야 한다고 말했던 것이다.

공산주의가 가족의 해체를 주장한 것에 의해 마치 개인주의처럼 보일 수도 있으나 가족을 해체하고노동자 집단에 합류하자는 주장이므로 작은 집단을 해체하여 더 큰 집단을 이루자는 집단주의에 불과하다.

흔히 공산주의가 이상이지만 인간의 욕망으로 불가능하다 말하는데 그건 그냥 모든 인간이 이타적이게되는 집단주의의 이념에 불과하다. 공산주의는 상품 가치도 소비자의 행복도 경제 성장도 고려하지 않고 노동자 계급의 이익을 위해 기독교 윤리를 차용한 반쪽 짜리 사상에 불과하다. 이 사상에 영향을 받은 계급 투쟁을 하는 대부분의 사상은 전부 단순한 이익 집단의 사상일 뿐이다. 흔히 공산주의의 장점으로 무상 복지를 내세우는데, 가치가 없는 상품을 통한 복지 따위로 인간이 행복해질 수는 없다. 가치 생산은 모든 행복의 근간이다.

그럼에도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와 같은 사상이 널리 퍼진 까닭은 집단주의 체제기 때문이다. 모든 왕정은 집단주의 체제였고, 왕정의 윤리 또한 금욕주의와 이타주의로 가치관이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와 일치했다.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사상가들, 그에 감화된 수많은 지식인과 노동자들, 그 모든 것이 내제된 가치관과 유사한 사상이었기 때문이다. 왕정의 가치관에 의해 왕정의 가치관을 근거로 한 사상을 좇게 되었다는 것이다. 관념의 성질상 이 결과는 자연스럽다. 동시에 노동자 인권은 서양 인문학의 발전인 윤리 대상 확대의 흐름에도 포함되게 된다. 관념으로 보나 윤리로 보나 퍼질 수밖에 없었다.

한국 같이 제국주의 국가의 침략을 당한 국가들의 국민들은 반발 심리로 더욱 더 사회주의나 공산주의로기울게 되었다. 일반적인 경우가 한국의 사회주의자이고 극단으로 기울어진것이 북한의 공산주의자다. 이런 사회주의자들은 제국주의 국가의 침략에 의해 민족주의 성향을 자극 받은 것이므로 본질적으로 민족주의자에 가까운 사회주의자라 할 수 있다. 서양의 사회주의자는 기독교 윤리에 뿌리를 두고 있다면 한국의 사회주의자는 민족주의에 뿌리를 두고있는 경우가 많다. 한국의 민족주의는 자연스럽게 조선의 유교적 가치관에 영향을받는다. 그들의 이념이 사회주의와 실질적으로 관련이 크게 없기 때문에북한에 유교적 가치관을 근거로 한 왕정이 세워진 것이다. 한국과 북한의 사회주의는 민족주의의 탈을 쓴 것이었기에 그들을 사회주의를 근거로 비판해도 그다지 의미가 없었다. 그들의 사회주의는 민족주의에 의해 윤리로 여겨져 보다 더 강력하게 행해지게 되었다.

 

 

생존주의와 역할주의와 탐구주의는 나의 사상이며 그에 대해 간단히 정리하겠다. 추후 따로 사상서로 정리할 예정이다.

 

첫째, 생존주의. 생존주의는 인간이 육체를 유지하기 위해 강제로 행하는 일련의활동을 사회가 구조를 유지하기 위한 강제력에 대입하여 사회와 체제 구조 유지를 위한 강제력을 정당화하고, 그 최소한의 강제력 외에는 개인에게 최대한의 자유를 보장하는 사상을 말한다. 사회라는 구조를 유지하여 개인의 자유라는 원리를 추구한다.

개인의 자유권을 최대한 지키기 위해서 사회와 체제 구조 유지를 위한 기본적인 강제력과 강제력이없는 사전 예방과 강제력이 있는 사후 조치로 접근해야 한다.

자본주의에서 부를 얻은 자본가를 자본주의자라 할 수 있을 것이고, 자본주의자가 자본주의 체제 구조 유지를 위한 활동을 하는 것은 지극히 정상이라 할 수 있다. 자본주의 체제 구조 유지에 반대하는 자본주의자는 민주주의 체제 구조 유지에 반대하는 민주주의자만큼이나괴상하다.

모든 것은 인간의 생존을 위해서 시작되었다. 환경 보호도 동물 보호도 인류 생존을 위해서야 한다. 생존주의는 기본적으로 보편적 자연 법칙을 준수하나 생존이란 자연법칙을 최우선 한다. 즉 죽음보다 생존을 우선한다. 그렇기에 불로불사를 추구한다. 만약 모든 자연법칙을 고르게 준수하고 싶다면 자연으로 돌아가 짐승들과 부대끼며 살다 자연스럽게죽으면 된다. 인간은 사회를 이룬 순간부터 인간 중심의 자연법칙 추구를실현하게 되었으므로 죽음의 법칙을 무시한다 하더라도 상관 없다. 유전자 조작 상품과 같이 인위적인 상품은 인류 생존을 위해서이므로 그걸 반대할 이유가 없고, 의학의 약도 인류 생존을 위한 것이므로 약 안 쓰고 아이 키우기를 말하며 약을 주지 않는 짓도할 이유가 없다. 또한 인간 개인이 생존 게임에서 승리하기 위해 불로불사를위한 연구 또한 반대할 이유가 없다. 인류는 이제 지구라는 좁은 둥지를 떠나야 할 때다. 지구를 둥지로 삼기에는 인류의 크기가 너무나도 커져버렸다. 모든 개인이 불로불사가 되어 우주에 진출하여 살아남아야 한다.

 

둘째, 역할주의. 역할주의는 인간이란 대상이 아닌 역할이란 관계에서 가치를판단하여 역할의 전문가를 우대하고, 역할이란 기준으로 대상의 개성과 무관한 역할에 따른 공정한 평등을 추구하면서 역할 중심 사회를 지향하고, 관계라는 본인의 주관적인 관계에서 가치를 판단하면서 개인의 개성을 보장하는 사상을 말한다.

역할주의는 개인의 역할이나 사물의 용도로 가치 판단을 하는 사상이다. 개인은 연령이나 성별 또는 직업이나 직위와 관계 없이 개인의 역할 수행 여부와 기여도로 가치를판단하고 물건은 물질적 가치와 관계 없이 물건의 용도 활용 여부나 기여도로 가치를 판단한다. 그런 가치 판단으로 개인의 성격과 능력이나 물건을 공정하게 평가하고 적재적소로 활용하는 것이가능하다. 그러면서 역할의 전문가를 우대하게 된다.

역할이란 관계에서 가치를 판단하기에 역할에 필요한 개인의 능력으로만 평가 받는 공정한 평등함이실현되게 된다. 능력주의의 경우 마땅한 기준이 없어 특정 분야 능력자가관련이 없는 분야에서 활동하면서 비전문적인 능력자가 생길 수 있다. 반면 역할주의는 능력의 합리적 기준이 된다.

역할이란 관계에서 하는 가치 판단은 주관적 가치 판단에 해당하게 되는데, 객관적 가치는 선거나 시장에서 각각의 선거 원리와 시장 원리에 의해 결정되게 된다.

역할에 필요한 능력을 제외한 연령, 성별, 지역, 학력, 혈연 등과 같은 개인의 개성이 보호될 수 있다. 역할만 수행하면 타인을 위해 억지로 본인의 개성을 바꿀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역할주의는 다양성을 직접적으로 존중하지 않는다. 다양성을 존중하겠다고 다양성에 전부 맞추면 실제 역할 수행과 기여도와 무관하게 손익을 얻을 수있어 공평할 수가 없다. 그것은 대상에 가치를 판단하던 대상 가치에서 그렇게 한다. 역할이란 관계에서 가치를 판단하는 관계 가치에서는 역할이란 가치중립적인 합리적 기준에서 역할에필요한 성질을 제외한 개성은 신경 쓰지 않는 것으로 간접적으로 다양성을 존중하게 된다. 사적으로는 어떤 것을 좋아하는 것도 싫어하는 것도 개인의 개성이다. 만약 특정 짐승을 좋아하는 사람이 특정 짐승을 싫어하는 사람에게 그 짐승을 좋아하라 강요하는것이 다양성 파괴다. 반대로 특정 짐승을 싫어하는 사람이 그 짐승을 싫어하라강요하는 것도 다양성 파괴다. 사적인 곳에서는 타인과 분쟁이 일어나지 않는 경우에는 개인의 호불호는 개인의 개성으로 인식하고 다양성을 존중해야 한다. 그러기 위한 최소한의 합리적 기준이 역할이란 관계다. 공적이나 사적인 역할로 관계를 맺지 않는 이상 개인의 개성은 자유롭게 보장해야 한다. 공적인 경우에는 관계의 수가 많아 개성 보장이 어려울 수 있으나 사적인 경우에는 관계 수가 적어최대한 개성 보장을 해야 한다.

역할주의는 분야의 대표에게 입법권을 주는 역할 민주주의를 주장한다. 지금과 같이 지역의 대표에게 입법권과 행정권을 모두 줘버리는 토지 민주주의를 하면, 토지의 소유자가 적어 대표를 선출하는데 있어 직접적인 이해관계가 있는 사람이 극단적으로 줄어들게된다. 한국은 2021년 5164만 명 중 1851만 명이 토지를 소유하고 있고 그 중 전체 가계는 상위 1%가 전체 가계 소유 토지의 32%를 소유하고 법인은 상위 1%가 전체 법인 소유 토지의 76%를 가지고 있다. 지역의 대표로 선출되는 정치가가 선출되기 위해 지역 개발을 선거 공약으로 내세워도 직접적 이해관계가 있는 이들은 소수가 된다. 그렇기에 대다수 이해관계가 없거나 간접적 이해관계가 있는 이들은 포퓰리즘과 같은 선동 정치에휘둘리게 된다. 모든 국민이 권력을 가지고 그 권력을 올바르게 행사할 수있으려면 보다 많은 인간이 직접적 이해관계가 있는 인간을 정치적 대표로 선출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분야의 대표에서 입법권을 주는 역할 민주주의다.

교육을 받고 사회 활동을 한 인간은 대부분 특정 분야에 속하게 된다. 분야의 대표에게 입법권을 주게 되면 분야는 토지와 같은 지역이 아니므로 분야의 대표는 분야의이익을 위한 정책을 공약을 말하게 된다. 분야에 속한 인간은 토지와 같이 특정 재산을 소유하고 있지 않더라도 그런 선거 공약에 의해 분야의 이익과 직접적 이해관계가 발생하게 된다. 특정 지역이 어떤 시설을 짓겠다는 주장은 그 시설이 설치되는 토지 소유자와 관계자만 이익을 보지만, 특정 분야에 어떤 불합리한 규제를 철폐하겠다는 주장은 그 분야에 속한 모든 인간이 이익을 본다. 분야의 대표가 내세우는 분야의 이익에 합당한 공약에 의해 직접적 이해관계가 발생하게 된다. 대부분 인간이 이해관계가 발생하는 역할 민주주의야말로 진정한 민주주의에 해당하게 된다.

또한 분야의 대표에게 입법권을 줘야 분야가 부당한 이익을 얻는 것을 견제할 수 있다. 지금 특정 분야는 정치가에게 로비를 하여 올바른 법을 제정하는 것을 막는 것으로 부당한 이익을얻기도 하고 있다. 그런 것을 견제하기 힘든 것이 그들이 정당한 권력을 소유한것이 아니기 때문에 로비를 밝혀내야 하는 과정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마땅한 힘에 마땅한 책임이 주어지는 것이다. 그런 부당한 로비를 막기 위해서는 분야에 마땅한 힘을 줘야 한다. 그렇게 분야의 대표에게 입법권을 주면 정당한 이익 추구를 위한 행동만 허용되게 된다. 왜냐하면 모든 분야의 대표가 입법권을 쥐고 있기 때문에 특정 분야의 대표가 부당한 이익을 추구하면곧바로 견제가 들어가게 된다. 만약 분야가 지역의 대표에 로비를 하여 부당한 이익을 얻게 되면 다른 분야는 그 지역에 손해를 주기가 어렵지만, 분야가 분야의 대표를 통해 부당한 이익을 얻게 되면 다른 분야는 그 분야에 손해를 주는 것이어렵지가 않다.

 

셋째, 탐구주의. 탐구주의는 구체적인 지식 학습 이후 탐구를 하여 발상을하는 것이 아닌 기초적인 지식 학습 이후 탐구를 하여 발상을 하고 나서 구체적인 지식을 학습을 하는 탐구 중심의 학습 사상을 말한다.

탐구주의는 지식이나 학문에 대한 호기심이나 탐구심을 기본으로 한다. 그렇기에 자발적 학습이 가능하다. 가령 구체적인 지식 학습을 하게 하면 타인의 지식을 그대로 흡수만 하는 것이기에 자발적으로 탐구를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면 지식 학습 이후에는 더 이상 탐구를 하지 않으려는태도가 나올 수도 있다. 그러나 기초적인 지식 학습을 하고 나서 탐구부터 할 경우본인의 탐구심이 끝이 날 때까지 학습하게 된다.

탐구부터 하게 된다면 본인의 생각에 의한 주관적인 관념과 구체적인 지식의 객관적인 관념을 둘다 가질 수 있게 된다. 그러면서 본인의 주관적인 관념에 의해 새로운 발상이 나타날수도 있다. 탐구주의가 바로 창의적 학습이다.

지식이나 학문에 호기심이나 탐구심이 없을 경우 학습을 하지 않으려는 태도가 나올 수도 있는데, 그런 이들은 처음부터 학문에 적성이 맞지 않는 것이다. 학문에 대한 호기심이나 탐구심이 없는 인간에게 학문을 하게 하는 것은 학대에 가깝다고 본다. 억지로 학업에 몰두하게 해봐야 그 인생은 불행할 뿐이다. 사회에 속한 인간은 사회에 이로운 가치를 생산할 수 있기만 하면 된다.  

지금까지 왕정의 역사는 수 천 년, 현대 민주정의 역사는 수 백 년 정도다. 민주정의 가치관에 맞는 인문학이 체계화되지 못한 지금, 인문 계열이 해야 할 일은 너무나도 많다. 지금까지 본성이라 여겨왔던 대부분의 인간의 성질은 왕정의 가치관에 의해 형성된 성질에 불과하다. 과거의 왕정 시대의 철학을 연구하기보다 민주정에 맞는 가치관을 만들어 개인주의 체제의 개개인이민주정에 맞는 인간의 성질을 가질 수 있도록 해야 한다.

 

 

 

5. 충돌

 

인류의 사회 문제는 대부분 왕정의 관념과 민주정의 체제가 집단과 개인으로 이익 추구 방향이 정반대이기때문에 발생하는 모순으로 나타난다. 왕정은 왕의 이익을 위해 국가에 국민을 희생하게 만드는 집단주의 체제고 민주정은 개인의 이익을 위해 개개인이 개인의 이익만을 위하는 개인주의체제다. 왕정의 관념을 가지고 민주정 체제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집단주의관념과 개인주의 체제가 충돌한 것이 된다. 이것이 기본적인 서양 문명의 모순이다. 서양은 이 모순에 의해 우파와 좌파의 갈등을 겪고 있다. 그런 상황에서 한국은 유교, 불교, 무교 등의 종교들에 의한 모순까지 포함되어 있다.

이익 추구 방향이 정반대인 집단주의 관념을 가지고 개인주의 체제에서 이익을 추구하면 개인주의체제에는 해롭게 된다. 타인의 이익을 우선시하면서 개인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이들의권리를 침해하게 된다. 분명 개인주의에서도 타인의 이익을 우선시할 수 있으나 그걸윤리로 여기지는 않는다. 그러나 집단주의에서는 타인의 이익을 위해 개인이 희생하는것을 윤리로 여기기에 타인에게 금욕이나 희생을 강요하게 된다. 그러면서 개인의 권리는 침해되게 된다. 억압, 통제, 규제, 검열 등 대부분이 집단주의의 금욕과 희생의 강요가 원인이다.

집단주의와 개인주의는 모두 집단 비리와 같은 범죄가 일어날 수 있으나 집단주의에서는 타인을 위해희생했다는 이유로 그걸 도덕으로 받아드리고 개인주의에서는 개인의 이익만을 위한 것이었으므로 순순히 부도덕으로 받아드린다. 이 차이가 굉장히 크다.

모든 개인이 개인의 이익만을 위하기 때문에 일부 개인의 부당한 이익을 수용할 수 없게 된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모두가 공정한 경쟁을 하게 된다. 개인의 이익만을 위하고 있음에도 공정한 경쟁을 하게 되는 것은 개인인 본인뿐만 아니라 개인인타인도 개인의 이익만을 위하고 있음을 알기에 공정한 경쟁에서 이익을 얻는 것이 정당하다 인식한다. 타인이 부당한 이익을 얻게 되면 본인이 손해를 보기 때문에 본인의 이익만을 위해 그런 부당 이익을비판하면서 공격하게 되므로 개인주의에서 개인의 이익만을 위하는 것은 정확히 말해 개인의 정당한 이익만을 위하는 것이 된다.

경제가 성장할수록 여유가 생겨 물질적인 것 외의 가치도 추구하게 됨에 따라 윤리를 중시하게 된다. 그런데 그 윤리가 왕정의 윤리였기 때문에 윤리를 바탕으로 도덕적인 것을 추구하면 추구할수록 민주정체제에는 해롭게 된다. 그러면서 경제가 성장할수록 사회는 불행해지는 괴상한 현상이나타난다. 한국에서 경제가 성장하고 있음에도 높은 자살률과 낮은 출산율은이것이 원인이다. 조선과 한국은 체제가 완전 다른데 조선의 가치관으로 한국에서살면 불행한 것은 당연하다.

보통 문제를 해결하려 할 때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더욱 악화되면 해결방법이 잘못되었음을 깨닫게된다. 가령 미로에 갇히면 미로 지도에 뚫린 길로 기록되어 있어도막힌 길이라면 지도를 수정하고 다른 길로 간다. 그러면서 빠져나갈 수 있게 된다. 그러나 관념은 다르다. 가령 미로에 갇히면 미로 지도에 뚫린 길로 기록되어 있으면 그것을 진리로 여기고 막힌 길이라 할지라도 계속 그 길로 가려고 한다. 다른 길을 가려고 하지 않는 한 영원히 빠져나갈 수가 없게 된다. 그것과 같다. 사회 문제가 발생하면 왕정의 윤리를 진리로 여기고 있기 때문에 의심하지 못하고 같은 방법을 계속 실행하면서 더욱 더 사회 문제를 악화시킨다.

 

 

첫째, 세습. 집단주의에서는 집단의 이익을 위해 왕과 귀족 같은 기득권이혈연에게 작위나 가업을 세습하여 사회의 역할을 얻게끔 하지만 개인주의에서는 개인의 이익만을 위해 공정하게 경쟁하여 사회의 역할을 얻는다. 세습은 집단주의와 개인주의 둘 다 일어날 수 있으나 집단주의는 도덕으로 여기고 개인주의는 부도덕으로여긴다. 집단주의 관념을 가진 인간이 개인주의 체제에서 혈연을 위한세습을 도덕으로 여기며 실행하는 것으로 사회에 해를 끼치면서도 낡은 가치관을 근거로 그것을 정당화한다. 한국에서 세습 부자가 많고 고용 세습이 일어나기도 한다.

 

둘째, 입시와 취업 비리. 집단주의에서는 집단의 이익을 위해 부모가 자녀의 입시나 취업 비리를 저지르지만 개인주의에서는 개인의 이익만을 위해 공정하게 경쟁하여 입시나취업을 한다. 비리는 집단주의와 개인주의 둘 다 일어날 수 있으나 집단주의에서는도덕으로 여기고 개인주의에서는 부도덕으로 여긴다. 집단주의 관념을 가진 인간이 개인주의 체제에서 가족을 위한 비리를 도덕으로 여기며 실행하는 것으로 사회에 해를 끼치면서도 낡은 가치관을근거로 그것을 정당화한다. 한국에서 입시와 취업 비리는 다방면에서 만연하다.

 

셋째, 담합. 집단주의에서는 집단의 이익을 위해 노동자는 노동조합에서담합을 하고 자본가는 협회 등에서 담합을 하지만 개인주의에서는 개인의 이익만을 위해 시장에서 공정하게 경쟁하여 이익을 얻는다. 담합은 집단주의와 개인주의 둘 다 일어날 수 있으나 집단주의에서는 도덕으로 여기고 개인주의에서는부도덕으로 여긴다. 집단주의 관념을 가진 인간이 개인주의 체제에서 이익집단을위한 부당한 담합을 도덕으로 여기며 실행하는 것으로 사회에 해를 끼치면서도 낡은 가치관을 근거로 그것을 정당화한다. 한국에서 노동자의 담합은 바르고 자본가의 담합이 그른 것은 부유한 대기업 노동자와 가난한 자영업자를고려해보면 힘의 차이가 아닌 체제의 차이다.

 

넷째, 이성애 죄악시. 집단주의에서는 집단의 이익을 위해 개인의 이성애를 죄악시하여이성 관계를 단절시켜 이성 관계를 모르는 상태에서 중매결혼을 통해 개인의 의사와 관계없이 집단이 원하는 상대와 결혼하게 하지만 개인주의에서는 개인의이익만을 위해 개인의 이성애를 죄악시하지 않고 자유로운 이성 관계 속에서 연애와 결혼을 한다. 이성애 죄악시는 집단주의와 개인주의 둘 다 일어날 수 있으나 집단주의에서는 도덕으로 여기고 개인주의에서는부도덕으로 여긴다. 집단주의 관념을 가진 인간이 개인주의 체제에서 이성애 죄악시를도덕으로 여기며 실행하는 것으로 사회에 해를 끼치면서도 낡은 가치관을 근거로 그것을 정당화한다. 한국에서 이성애 죄악시는 남녀칠세부동석과 같이 어려서부터 이성애를 죄악시하며 이성 관계를 분리했던것으로 알 수 있다.

 

다섯째, 성 죄악시. 집단주의에서는 집단의 이익을 위해 성을 죄악시하며 성 지식을단절시켜 성을 모르는 상태에서 중매결혼을 통해 개인의 의사와 관계없이 집단이 원하는 상대와 결혼하게 하지만 개인주의에서는 개인의 이익만을 위해성을 죄악시하지 않고 자유로운 성 문화와 성관계 속에서 연애와 결혼을 한다. 성 죄악시는 집단주의와 개인주의 둘 다 일어날 수 있으나 집단주의에서는 도덕으로 여기고 개인주의에서는부도덕으로 여긴다. 집단주의 관념을 가진 인간이 개인주의 체제에서 성 죄악시를도덕으로 여기며 실행하는 것으로 사회에 해를 끼치면서도 낡은 가치관을 근거로 그것을 정당화한다. 한국에서 성 죄악시는 성 문화가 탄압과 규제와 검열을 당하고 성년조차도 자유로운 성 문화를 즐길수 없는 것으로 알 수 있다.

 

여섯째, 사상 강요. 집단주의에서는 집단의 이익을 위해 특정 사상을 강요하지만개인주의에서는 개인의 이익만을 위해 사상의 자유를 추구한다. 사상 강요는 집단주의와 개인주의 둘 다 일어날 수 있으나 집단주의에서는 도덕으로 여기고 개인주의에서는 부도덕으로 여긴다. 집단주의 관념을 가진 인간이 개인주의 체제에서 사상 강요를 도덕으로 여기며 실행하는 것으로 사회에해를 끼치면서도 낡은 가치관을 근거로 그것을 정당화한다. 한국에서 사상 강요는 종교, 여성주의, PC주의 등으로 특정 종교에 대한 신앙이나 탈코르셋이나 성인지감수성등을 강요한다.

 

일곱째, 국민 통제. 집단주의에서는 집단의 이익을 위해 정부가 국민을 감시하고검열 등의 과한 통제를 하지만 개인주의에서는 개인의 이익만을 위해 국민을 감시하고 검열하는 등의 과한 통제를 하지 않는다. 국민 통제는 집단주의와 개인주의 둘 다 일어날 수 있으나 집단주의에서는 도덕으로 여기고 개인주의에서는부도덕으로 여긴다. 집단주의 관념을 가진 인간이 개인주의 체제에서 국민 통제를도덕으로 여기며 실행하거나 실행케 하는 것으로 사회에 해를 끼치면서도 낡은 가치관을 근거로 그것을 정당화한다. 한국에서 국민 통제는 인터넷 차단과 검열, 메신저 감시 등과 같이 다른 자유 진영에 비해 심하다.

 

여덟째, 연령 차별. 집단주의에서는 집단의 이익을 위해 장유유서와 같이 연령으로차례를 만든 차별적 질서를 수용하지만 개인주의에서는 개인의 이익만을 위해 평등한 질서만을 수용한다. 연령 차별은 집단주의와 개인주의 둘 다 일어날 수 있으나 집단주의에서는 도덕으로 여기고 개인주의에서는부도덕으로 여긴다. 집단주의 관념을 가진 인간이 개인주의 체제에서 연령 차별을도덕으로 여기며 실행하는 것으로 사회에 해를 끼치면서도 낡은 가치관을 근거로 그것을 정당화한다. 한국에서 연령 차별은 꼰대질로 알 수 있고 그 꼰대질이 집단주의 관념으로는 도덕적인 행위였음을알아야 한다.

 

아홉째, 역할 차별. 집단주의에서는 집단의 이익을 위해 신분제나 사농공상과 같이사회의 역할로 차례를 만든 차별적 질서를 수용하지만 개인주의에서는 개인의 이익만을 위해 평등한 질서만을 수용한다. 역할 차별은 집단주의와 개인주의 둘 다 일어날 수 있으나 집단주의에서는 도덕으로 여기고 개인주의에서는부도덕으로 여긴다. 집단주의 관념을 가진 인간이 개인주의 체제에서 역할 차별을도덕으로 여기며 실행하는 것으로 사회에 해를 끼치면서도 낡은 가치관을 근거로 그것을 정당화한다. 한국에서 역할 차별은 서양 문명을 수용하면서 신분제가 철폐되고 사농공상도 사라졌기 때문에 연령차별보다는 적게 일어나지만 기술을 천시하거나 갑질과 같은 역할 차별이 곧잘 일어나고 있다.

 

열째, 내부 고발 멸시. 집단주의에서는 집단의 이익을 위해 집단과 집단 구성원 비리의내부 고발을 멸시하지만 개인주의에서는 개인의 이익만을 위해 내부 고발을 우대한다. 내부 고발 멸시는 집단주의와 개인주의 둘 다 일어날 수 있으나 집단주의에서는 도덕으로 여기고개인주의에서는 부도덕으로 여긴다. 집단주의 관념을 가진 인간이 개인주의 체제에서 내부 고발 멸시를 도덕으로 여기며 실행하는 것으로 사회에 해를 끼치면서도 낡은 가치관을 근거로그것을 정당화한다. 한국에서 내부 고발 멸시는 횡령이나 비리를 감싸는 것이의리가 되고 비리를 고발하는 것이 배신이 되는 것으로 알 수 있다.

 

열한째, 오지랖. 집단주의에서는 집단의 이익을 위해 타인에게 불필요한 참견을하지만 개인주의에서는 개인의 이익만을 위해 본인과 무관하면 타인에게 참견하지 않는다. 오지랖은 집단주의와 개인주의 둘 다 일어날 수 있으나 집단주의에서는 도덕으로 여기고 개인주의에서는부도덕으로 여긴다. 집단주의 관념을 가진 인간이 개인주의 체제에서 오지랖을실행하는 것으로 사회에 해를 끼치면서도 낡은 가치관을 근거로 그것을 정당화한다. 한국에서 오지랖은 불필요한 참견이 정으로 포장되며 개인이 원치 않는 것을 하는 것으로 알 수있다.

 

열두째, 직업 강요. 집단주의에서는 집단의 이익을 위해 부모가 자녀에게 직업을잇도록 강요하지만 개인주의에서는 개인의 이익만을 위해 자녀가 자유롭게 원하는 일을 한다. 직업 강요는 집단주의와 개인주의 둘 다 일어날 수 있으나 집단주의에서는 도덕으로 여기고 개인주의에서는부도덕으로 여긴다. 집단주의 관념을 가진 인간이 개인주의 체제에서 직업 강요를실행하는 것으로 사회에 해를 끼치면서도 낡은 가치관을 근거로 그것을 정당화한다. 한국에서 직업 강요는 교육열로 나타나고 있다.

 

열셋째, 자녀 소유물화. 집단주의에서는 집단의 이익을 위해 부모가 자녀를 소유물로여기며 지배하려 하지만 개인주의에서는 개인의 이익만을 위해 부모가 자녀를 인간으로 여기며 대화하려 한다. 자녀 소유물화는 집단주의와 개인주의 둘 다 일어날 수 있으나 집단주의에서는 도덕으로 여기고 개인주의에서는부도덕으로 여긴다. 집단주의 관념을 가진 인간이 개인주의 체제에서 자녀 소유물화를실행하는 것으로 사회에 해를 끼치면서도 낡은 가치관을 근거로 그것을 정당화한다. 한국에서 자녀 소유물화로 인해 살해 비율 중 자녀 살해 비율이 높고 순장과도 같은 동반 자살이일어나고 있다.

 

열넷째, 희생 강요. 집단주의에서는 집단의 이익을 위해 애국심 등과 같은 이유로개인에게 희생을 강요하지만 개인주의에서는 개인의 이익만을 위해 사회 계약에 따른 행동을 요구하고 있다. 희생 강요는 집단주의와 개인주의 둘 다 일어날 수 있으나 집단주의에서는 도덕으로 여기고 개인주의에서는부도덕으로 여긴다. 집단주의 관념을 가진 인간이 개인주의 체제에서 희생 강요를실행하는 것으로 사회에 해를 끼치면서도 낡은 가치관을 근거로 그것을 정당화한다. 한국에서 희생 강요는 모두가 희생 강요 당하지 않도록 눈에 띄지 않는 겸손함을 강요하는 것이보편화되어 있는 것으로 알 수 있다.

 

열다섯째, 학생 체벌. 집단주의에서는 집단의 이익을 위해 학생에게 체벌과 폭언등의 부당한 행동을 하여 사회에 해를 끼치지 못하도록 하지만 개인주의에서는 개인의 이익만을 위해 학생이 사회 계약을 맺어 계약에 따라 권리와 의무를통해 자유로운 상태에서 사회에 이롭게 할 수 있도록 한다. 학생 체벌은 집단주의와 개인주의 둘 다 일어날 수 있으나 집단주의에서는 도덕으로 여기고 개인주의에서는 부도덕으로 여긴다. 집단주의 관념을 가진 인간이 개인주의 체제에서 학생 체벌을 실행하는 것으로 사회에 해를 끼치면서도낡은 가치관을 근거로 그것을 정당화한다. 한국에서 학생 체벌은 사라지고 있으나 이용하는 이타주의에 의해 교사 폭행은 늘어나고 있다.

 

열여섯째, 집단 괴롭힘. 집단주의에서는 집단의 이익을 위해 특정 개인을 괴롭히는것을 실행하거나 방관하지만 개인주의에서는 개인의 이익만을 위해 특정 개인을 괴롭히지도 않고 방관하지도 않는다. 집단 괴롭힘은 집단주의와 개인주의 둘 다 일어날 수 있으나 집단주의에서는 도덕으로 여기고 개인주의에서는부도덕으로 여긴다. 집단주의 관념을 가진 인간이 개인주의 체제에서 집단 괴롭힘을실행하거나 방관하는 것으로 사회에 해를 끼치면서도 낡은 가치관을 근거로 그것을 정당화한다. 한국에서 집단 괴롭힘은 학교 폭력, 군 기수 열외, 기업 이질 배척, 사이버불링 등이 있다.

 

열일곱째, 인맥 특혜. 집단주의에서는 집단의 이익을 위해 인맥에게 특혜를 주지만개인주의에서는 개인의 이익만을 위해 공정한 경쟁을 하도록 유도한다. 인맥 특혜는 집단주의와 개인주의 둘 다 일어날 수 있으나 집단주의에서는 도덕으로 여기고 개인주의에서는 부도덕으로 여긴다. 집단주의 관념을 가진 인간이 개인주의 체제에서 인맥 특혜를 하는 것으로 사회에 해를 끼치면서도낡은 가치관을 근거로 그것을 정당화한다. 한국에서 인맥 특혜는 혈연, 지역, 학연 등으로 유명하며 농민이 음주하다 사고 낸 것을 구조하던소방관이 신고하는 것을 농민과 인맥 관계에 있는 정치가가 잘못되었다고 말할 정도다.

 

열여덟째, 부당 유착. 집단주의에서는 집단의 이익을 위해 부당한 유착하면서 경쟁하지않고 이익을 얻지만 개인주의에서는 개인의 이익만을 위해 공정한 경쟁을 한다. 유착은 집단주의와 개인주의 둘 다 일어날 수 있으나 집단주의에서는 도덕으로 여기고 개인주의에서는부도덕으로 여긴다. 집단주의 관념을 가진 인간이 개인주의 체제에서 유착을 하는것으로 사회에 해를 끼치면서도 낡은 가치관을 근거로 그것을 정당화한다. 한국에서 부당한 유착은 정경유착, 정언유착 경언유착 등이 있다.

 

열아홉째, 재산 줄 세우기. 집단주의에서는 집단의 이익을 위해 학생 집안의 재산으로줄 세우기로 차별하지만 개인주의에서는 개인의 이익만을 위해 학생을 평등하게 대한다. 재산 줄 세우기는 집단주의와 개인주의 둘 다 일어날 수 있으나 집단주의에서는 도덕으로 여기고개인주의에서는 부도덕으로 여긴다. 집단주의 관념을 가진 인간이 개인주의 체제에서 재산 줄 세우기를 하는 것으로 사회에 해를 끼치면서도 낡은 가치관을 근거로 그것을 정당화한다. 한국에서 재산 줄 세우기는 아파트 줄 세우기, 옷 줄 세우기, 스마트폰 줄 세우기 등이 있다.

 

스무째, 개성 상실. 집단주의에서는 집단의 이익을 위해 금욕과 이타로 개인의개성을 잃게 하지만 개인주의에서는 개인의 이익만을 위해 모든 개인이 욕망과 이기를 통해 다양한 개성을 갖는다. 개성 상실은 집단주의와 개인주의 둘 다 일어날 수 있으나 집단주의에서는 도덕으로 여기고 개인주의에서는부도덕으로 여긴다. 집단주의 관념을 가진 인간이 개인주의 체제에서 개성 상실을하는 것으로 사회에 해를 끼치면서도 낡은 가치관으로 그것을 정당화한다. 한국에서 개성 상실은 보통 나이별 고정된 행동 양식이나 지나친 유행 집착으로 알 수 있다.

 

 

한국에서 수많은 문제가 집단주의 관념과 개인주의 체제의 충돌로 나타나고 있다. 한국은 경제가 성장하면서 날이 갈수록 개인의 도덕성이 중시되나 이익 추구 방향이 정반대인 관념과체제가 공존하면서 도덕성의 기준이 되는 윤리가 객관적 기준을 잃었다. 개인의 자유가 중시되는 개인주의 체제에서 낡은 가치관을 가진 이들이 금욕을 강요하며 규제와 검열이 일어나도록 하고 있고 이타를 강요하며인간을 도구처럼 이용하려고 하고 있다. 그러면서 개인주의 체제를 근거로 본인은 욕망을 추구하고 이기적으로 행동하고 있다. 정말 역겹기 짝이 없는 작태다. 이기주의와 이용하는 이타주의의 차이는 정당화다. 둘 다 본인의 이익만을 추구하나 후자는 이타주의 윤리로 본인의 이익 추구가 부당하더라도 정당화한다. 대체로 내로남불과도 같은 자가당착은 이러한 이익 추구 방향이 정반대인 체제들을 필요할 때마다쓰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럼에도 이타주의 윤리를 부정하지 못하고 그러한 비논리적인부당한 이익 추구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것은 논리 안에 살고 있는 지성인으로서 명예롭지 못한 일이다.

 

집단주의 관념과 개인주의 체제 충돌은 서양에서 온 만큼 서양에서 먼저 일어났다. 자본주의에 대응하여 사회주의가 나타난 것 자체가 관념과 체제 충돌의 결과물이다. 집단주의 관념을 가진 사람에게 자본주의 체제는 인간의 욕망과 이기심을 부추기는 악의 사상으로보였을 것이다. 그들은 충돌로 나타나는 현상을 목격하고 본인들의 관념을확신했다.

자본가가 노동자를 착취하고 있으니 욕망과 이기심을 부추기는 자본주의는 악이다. 그러나 자본가가 노동자를 착취했던 것은 영주가 농노를 착취했던 것과 같은 원리였으므로 신분제관념에서 벗어나자 주장했어야 했다. 서양 인문학의 발전인 평등 대상 확대의 흐름으로 나타난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로 개인주의 체제에서도 복지가 나타났으나, 그것은 집단주의 윤리를 근거로 한 것이었기에 비효율적이고 불합리한 경우가 많았다.

많은 부를 쌓은 자본가의 욕망과 이기심에 의해 경제적 불평등이 심해지고 있으니 욕망과 이기심을부추기는 자본주의는 악이다. 그러나 개인의 의사가 반영되는 시장의 성질상 경제적 불평등은 반드시 발생하므로 경제적 불평등을 줄이기 위해 다수가 높은 가치 생산이 가능하도록공교육의 질을 올리자고 주장했어야 했다. 지금은 인터넷을 통해 누구나 지식을 학습할 수 있게 되었다.

자본주의 국가의 욕망과 이기심에 의해 약소국을 침략하여 식민지로 삼아 착취하였으니 욕망과 이기심을부추기는 자본주의는 악이다. 그러나 그러한 착취는 약소국을 대등한 존재로 인지하지 않았기 때문에 발생한 것으로 자본주의가 아닌 평등 개념의 문제였으므로 서양 인문학의발전인 평등 대상 확대를 주장했어야 했다. 서양 인문학의 발전인 평등 대상 확대를 통해 인류는 평등하다는 인식을 가지게 되었으나 불필요하게 된 상황에서조차 실행하는 바람에 수많은사회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

 

집단주의 관념과 개인주의 체제의 충돌로 새로운 유형의 죄도 나타나게 된다. 앞서 말한 도덕적 죄다. 집단주의 관념으로 바르다 여긴 것을 실행한 것이 개인주의 체제인 사회에 해를 끼치는 모든 사건을바르다 여겨서 잘못을 저질렀으므로 도덕적 죄라 규정하겠다. 개인의 도덕관념은 관습법이라는 이름으로 정당화될 수 있으나 그것이 체제를 해롭게 하는 것이 명백하면 헌법은 체제에 손을 들어준다. 그러지 않으면 체제 유지가 불가능하다. 도덕적 죄가 범법에 해당할 경우 도덕적 범죄가 된다. 가령 부모가 자녀에게 직업 강요하는 것은 가정의 일이라며 범죄가 되지 않을 수 있으니 도덕적죄가 되지만 부모가 자녀를 위해 저지르는 비리는 범죄이므로 도덕적 범죄가 된다. 앞의 예시 스무 개는 도덕적 죄나 도덕적 범죄라 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는 도덕적 죄라 부르겠다. 그 중 부당한 자유권 침해와 이성애와 성 죄악시는 죄질이 큰 도덕적 죄에 해당한다. 부당한 자유권 침해는 자유주의 이념을 망가트리고 이성애와 성 죄악시는 부당한 자유권 침해는 물론이고성에 대한 부정적 인식으로 연애와 결혼을 하지 않게 하면서 이성애로 얻는 행복의 감소로 자살률을 늘리고 연애와 결혼에 의한 출산을 하지 않게 하면서출산율을 낮추는 최악의 도덕적 죄다.

 

부당한 자유권 침해는 대부분 통제 속에서 금욕과 이타를 강조하는 집단주의 관념과 자유로운 욕망과이기를 강조하는 개인주의 체제와의 충돌로 나타난다. 사회와 체제 구조 유지와 같은 필수적인 것이기에 그것을 위한 것은 자유권 침해에 해당하지 않기에 대부분의 자유권 침해는 부당하게 된다. 한국은 지배자의 정치사상인 유교의 가르침에 따라 차별을 윤리로 여기고 있었다. 신분 차별은 사라졌어도 그에 대한 관념이 남아 갑질이 나오기도 하고, 연령 차별은 남아 연상에 대한 의무적인 존대와 같은 언어의 차별과 꼰대질이 남게 되었다. 그러한 일상적인 차별 속에서 위는 아래를 열등하게 여기게 되었다. 국가의 독재 정부와 가정의 보호자는 국민과 피보호자를 열등하게 여기고 통금과 감시와 검열 등과같은 통제를 행했다. 그것을 보호라 포장하며 정당화하고 있다. 그러나 개인이 충분히 대응 가능한 상황에서의 보호는 지배에 불과하다. 개인이 대응하다 판단하는 것은 사회의 보편적 지성으로 추측하게 되는데, 일반 개인은 모두 보편적 지성을 획득해야 보호라는 이름의 통제에서 벗어나 온전한 자유를 누릴수 있을 것이다.

개인의 자유권을 최대한 지키기 위해서 사회와 체제 구조 유지를 위한 기본적인 강제력과 강제력이없는 사전 예방과 강제력이 있는 사후 조치로 접근해야 한다. 가령 자연재해가 닥친 곳에 대한 출입금지는 사회 구조 요소인 인간의 생존을 위한 기본적인 강제력에 해당하고, 도박과 마약에 대한 중독 방지 캠페인은 강제력이 없는 사전 예방에 해당하고, 형사 사건은 강제력이 있는 사후 조치에 해당한다. 인간의 생존에 직접적 타격이 있거나 사건이 발생한 직후에만 강제력이 발생할 정당성이 확보된다. 그러나 그런 기준도 없이 윤리를 명분으로 국민을 통제한 적이 있다.

과거 독재 정부는 간첩을 잡겠다고 국민의 사사로운 대화를 일일이 감청하고 소유물을 검열했다. 최근 검열 정부는 성범죄자를 잡겠다고 국민의 사사로운 대화가 담긴 메신저를 감시하고 메신저로전달하는 이미지를 검열했다. 이 둘은 윤리를 명분으로 국민의 자유권을 부당하게 침해한 사례들이다. 간첩이나 성범죄자는 확정된 상황이 아니기에 기본적인 강제력을 동원할 근거가 없고 사건이 발생하지도않은 상황이기에 사후 조치를 위한 강제력을 동원할 근거도 없다. 간첩 몰이나 성범죄자 몰이는 낡은 윤리관으로 나타난 대표적인 부당한 개인의 자유권 침해에 해당한다. 그것을 법률화한 N번방 방지법은 부당한 자유권 침해를 낡은 윤리로 정당화한 악법에 해당한다.

이러한 부당한 자유권 침해는 과거에 있던 국민 감시와 검열과 통금부터 현재까지 있는 만화나 영화검열과 같은 창작물 검열와 인터넷 감시와 검열 등과 같이 너무나도 많다. 문제가 발생하면 관계 말살과 같은 방식으로 처리하여 악플이 달린다고 해당 인터넷 기사의 댓글창을 완전히 폐지하고 검색어 순위가 악용된다고 검색어 순위 자체를 없애버리기도 했다. 그렇게 하면서 악플과 악용은 사라졌으나 개인의 의사 표현과 효율도 사라졌다.

통신매체이용음란죄나 디지털 성범죄도 같다. 가상은 현실과 달리 물리적 접촉이 불가능하여 어떤 불쾌한 피해를 당하면 차단이나 신고로 가해자의존재를 지워버릴 수 있다. 스토킹과 같은 지속적인 피해나 현실에서의 접촉을 제외하면 개인이 충분히 대응할 수 있으므로 강제력을 동원할 근거가 없다. 디지털에서의 스토킹은 별개로 접근하고, 현실에서의 접촉은 현실 범죄로 접근하면 된다. 그 외의 디지털에서의 문제는 개인이 충분히 대응할 수 있다. 개인의 대응 가능 여부는 법적 판단에 영향을 끼치는데, 정당방위가 그렇다. 상대방을 공격하지 않으면 대응이 불가능한 상황에서의 공격은 정당방위로 성립되어 위법성 조각 사유에 해당하나 상대방을 공격하지 않아도 대응이가능한 상황에서의 공격은 정당방위로 성립되지 않아 위법성 조각 사유에도 해당하지 않는다. 그럴 때의 공격은 정당방위가 아닌 사적 제재다. 개인의 대응이 가능한 인터넷의 사사로운 사건들을 형법으로 처벌하는 것은 국가 형벌권의 과잉행사라본다. 국가 형벌권을 남발하면 행정력이 낭비되어 정작 필요하나사람이 도움을 받지 못할 수 있어 바람직하지 못하다.

사실 적시 명예 훼손도 강자가 약자의 표현의 자유를 침해하고 억압하는데 악용될 확률이 높기 때문에간통죄가 형사상으로 폐지되고 민사상의 책임만 물을 수 있게 된 것과 같이 명예 훼손도 형사상이 아닌 민사상의 책임만 물을 수 있도록 되는 것이자유주의에 합당하다 본다.

 

이성애와 성 죄악시는 금욕과 이타를 강조하는 집단주의 관념과 자유로운 욕망과 이기를 강조하는개인주의 체제와의 충돌로 나타난다. 한국이 과거 집단주의 체제였을 때 이성애를 죄악시하며 남녀칠세부동석이라 말하며 미성년 때부터 이성 관계를 막고 성 문화를 감시하고 검열하면서성 지식을 쌓지 못하게 하는 것으로 성관계를 막았다. 그러면서 가족이나 혈통이란 집단의 이익 실현을 위해 개인에게 중매결혼을 강요하고 여성에게 대를 잇기 위한 아들 출산을 강요했다. 개인의 이성애나 출산이 집단의 이익 실현 수단으로 이용되었다는 것이다. 그런 집단주의 관념을 가지고 개인주의 체제에 적용하니 엉망이 되기 시작했다.  한국에서 중매결혼 비율은 70~74년 52.8%고 90~91년 24.2%로 감소추세였다고 한다. 즉 자유결혼이 늘어나고 있었다. 그럼에도 집단주의 관념에 따라 이성애와 성을 죄악시하면서 자유 결혼을 하지 못하게 되는 인구수가 급증하게 되었다. 저출산의 본질적인 원인이 바로 이것이다.

중매결혼을 할 때에는 이성 관계와 성관계를 막더라도 상관이 없었다. 중매를 통해 어쨌든 결혼하고 출산을 했으니까 말이다. 그러나 자유 결혼을 할 때에도 이성 관계와 성관계를 막자 성을 부정적으로 여기면서 연애와 결혼을하는 이들의 수가 급감하게 되었다. 특히 경제 성장과 윤리의 상관관계에 따라 경제가 성장하면서 윤리를 더욱 강조하면서 이성애와 성을 더욱 더 죄악시함에 따라 연애와 결혼 수는더욱 줄어들었다. 거기에 여성주의자가 여성의 인권을 말하며 이성애와 성을더욱 더 죄악시하자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연애와 결혼이 줄어들었다. 2021년 한국 20대의 연애 비율이 21.4%라고 한다. 이게 지금 얼마나 심각한 일인지 인식해야 한다.

인간은 성적 대상화가 되어야 하고 성은 상품화가 되어야 한다. 인간이 인간을 성적 대상으로 느끼고 인간의 성을 상품으로 즐기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것이다. 인간은 성기능이 작동하는 초등학교 고학년에서 중학생 저학년 때부터 성적 자기결정권을 가지고 자유롭게성관계와 성 문화를 즐기면서 성에 친숙해져야 한다. 그렇게 해서 올바른 성관념이 자리 잡혀야 자연스럽게 연애하고 결혼하면서 출산율도 올라가는 것이다. 자유로운 성관계가 되면 성관계는 하되 출산은 하지 않을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는데, 자유로운 성관계가 아니면 대부분 성관계조차 하지 않아 출산 가능성도 없다. 자유롭게 성관계를 하면서 그 중에서 출산하는 이들이 늘어날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미성년의 이성 관계를 막고 미성년이 즐기는 성 문화를 억압하고 검열하는 이들은건전한 성관념을 자리잡게 하는 것을 방해하여 연애와 결혼과 출산율을 줄인 도덕적 죄를 저지른 셈이다.

성이 자유로우면 성인지감수성이 부족해져 성추행이나 성폭행과 같은 성범죄가 늘어날 수 있을 거라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런 범죄는 개인의 자유권을 침해한 것이다. 개인의 자유권 침해에 성인지감수성이 나올 이유가 없다. 남성은 성추행이나 성폭행을 당해도 괜찮고 여성은 성추행이나 성폭행을 당하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가? 감수성을 말하며 법의 합리성을 파괴하는 일을 저질러서는 안 된다. 애초에 성인지감수성의 여성성이 어느 시대를 명제로 삼았는지 생각해봐야 한다. 성인지감수성을 주장한 여성들이 성관념을 교육받던 시대의 여성성이다. 여성은 성적 수치심이 강하여 성에 취약하고 의지가 약하여 수동적이라는 유교나 기독교 가부장제시대의 여성성을 명제로 삼았다. 그렇기에 이성애와 성을 죄악시하는 수동적인 여성성을 명제로 이성애와 성을 죄악시하면서 그걸 이해할 수 있는 감수성을 사회에 강요했던 것이다. 그리고 사회에서 그런 성관념을 가진 이들이 동조하고 여성주의는 그런 여성성을 지키는 것을 이익으로여겨 인간이 인간에게 성애를 느끼는 정상적인 성적 대상화나 성 상품화가 잘못되었다 말하며 수동적인 성관념을 신세대 여성에게 세뇌하고 사회에 강요하는바람에 많은 신세대 여성이 이성애와 성을 부정적으로 보게 되었다. 2021년 서울 거주자를 대상으로 성관계를 하지 않는 이유를 조사한 결과, 여성의 답변 중 가장 많은 것이24%로 ‘흥미가 없어서’고, 남성의 답변 중 가장 많은 것이15%로 ‘관심은 있지만 파트너가 없어서’라고 한다. 얼마나 여성에게 이성애와 성을 죄악시하는 수동적인 성관념을세뇌해놨으면 답변이 저러는가? 여성에 대한 수동적인 성관념 세뇌는 성적 취향도 바꿔버렸다. 이성애를 죄로 여기니 이성의 동성애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이다. 얼마나 많은 한국 여성이 남성과 남성의 동성애 창작물을 즐기는지 공공연하게 그 성적 취향을 드러내고 있을 정도다. 거기에 PC주의는 그런 취향을 정당화하게 만들어 더욱 더 적극적으로 이성의 동성애를 즐기는 상황이 발생하게 되었다.

저출산은 복지 이전에 집단주의 관념이 문제다. 아무리 복지 정책으로 돈을 쏟아 부어도 잘못된 성관념으로 나타나는 저출산은 결코 막을 수가 없다. 민주정의 가치관과 같은 개인주의 관념을 가지는 사상 혁명이 일어나서 성을 긍정적으로 바라볼 수있게 되어야 정상적으로 이성 관계와 성관계를 즐기면서 자연스러운 연애와 결혼과 출산이 가능해질 것이다. 그걸 위해 정부가 낡은 집단주의 관념에서 벗어나는 모범을 보이며 개인의 자유권을 침해하지 않고이성애와 성을 죄악시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집단주의 관념으로 개인주의 체제에서 살아간다는 것을 쉽게 비유하면 공기로 숨을 쉬는 인간이 우주에서사는 것과 같았다. 인류에 있어 집단주의는 마치 공기와 같이 익숙하고 개인주의는우주와 같이 생소하기 때문이다. 숨도 쉴 수 없는 살아갈 수가 없는 곳에서 살고 있었다는 것이다. 관념과 체제가 충돌하는 국가는 불행할 수밖에 없었다. 이 불행에서 벗어나려면 집단주의 체제로 돌아가거나 개인주의 관념을 가져야 한다. 즉 사람의 관념에 맞춰 사회의 체제를 바꾸거나 사회의 체제에 맞춰 사람의 관념을 바꿔야 한다는것이다. 사람의 관념에 맞춰 사회의 체제를 바꾸면 기다리는 것은왕정이나 공산주의다. 그걸 바랄 자유 진영의 국민은 드물 것이라 생각한다. 공산주의를 제외한 사회주의는 대부분 사회 민주주의인데 사회 민주주의는 통제가 심하고 복지가 많은개인주의 체제나 다름이 없다. 집단주의와 개인주의를 섞다 보니 마땅한 기준이 없어 불합리한 통제나 억압이 나타나기도 하여 상당한 모순을 가질 수밖에 없는 사회다. 개인주의 체제에서 더 많은 개인이 권리를 보장받을 수 있으므로 사회의 체제에 맞춰 사람의 관념을바꿔야 한다. 인간은 살아남아 보다 행복하기 위해 발전했다. 만약 인간이 진보하지 않으려 했다면 자연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모두가 민주정의 가치관을 가져 개인주의 관념으로 진보해야 한다. 만약 한국이 과거에만 속박되는 국가였다면 이런 진보를 받아드리지 못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한국은 북한과 달리 과거와 결별하고 개인주의 체제를 받아드렸다. 이제는 개인주의 관념을 받아드릴 때이다.

집단주의 관념에 의해 강대국과 경쟁하기 위해서는 집단의 이익을 우선시하여 국가를 발전시켜야 한다고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개인이 개인의 이익만을 추구하면서 성장해야 국가도 성장한다. 인간이 성장해야 국가가 성장하는 것이다. 개인의 욕망과 이기심을 긍정하는 개인주의 체제에서 개인의 의사가 반영되는 선거와 시장의 경쟁을통해 개인은 한없이 성장하게 된다. 그 성장이 국가를 발전시켜 강대국과 경쟁할 수 있게 만든다. 한국과 북한이 같은 역사를 가졌지만 발전이 다른 까닭은 체제가 다르기 때문임을 인식해야 한다. 개인주의야말로 강대국과 경쟁할 수 있는 가장 진보적인 체제다.

 

길을 안내하는 길잡이가 잘못 안내하면 길잡이의 책임이듯 인간이 가야 할 길을 안내하는 사람이잘못하면 그 사람의 책임이다. 그런 점에서 사람에게 바른길을 안내해야 할 인문학, 정확히 사상과 철학은 현재 사회에 대한 책임 의식을 가져야 한다. 그렇다고 현재 사상과 철학에 온전한 책임을 묻기도 어렵다. 다들 정치가에게 책임을 물으려 하지 학문에 책임을 물으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일부 의사가 특정 병을 치료하지 못하면 의사의 책임이지만 모든 의사가 특정 병을 치료하지 못하면의사의 책임이라 하기 어렵듯이 모든 정치가가 고질적 사회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으므로 정치가의 책임이라 하기도 어렵다. 사회가 이토록 불행했음에도 아무도 책임질 수 없다는 것은 정말 끔찍한 일이다. 나는 나의 사상으로 말미암아 발생하는 현상은 가능한 내가 책임지도록 하겠다.

집단주의 관념과 개인주의 체제 충돌은 서양 문명에서 발생한 것이어서 전 세계적으로 겪고 있다. 그러나 관념 성질상 부정하기가 어려워 체제 충돌을 설명해도 이해하여 수용할 수 있는 국가가 많지않다. 집단주의에서는 집단의 이익을 우선시하면서 개인이 권리를보장받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을 알 것이다. 그럼에도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와 자본주의가 개인주의 체제에 속한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 많지 않다. 개인주의와 이기주의가 잘못되었다는 고정 관념에 의해 본인이 살고 있는 국가의 체제가 어떤 체제인지도모른다. 그럼에도 이해하여 수용 가능한 국가는 개인주의 체제를 가진자유 진영이다. 최소한 개인주의 체제여야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한국은 상대적으로 학업 수준이 높고 거의 전 국민이 활용하는 인터넷과 집단주의적 친목을 경계하는대형 온라인 커뮤니티의 존재와 내로남불에 대한 비판과 수많은 도덕적 죄에 대한 부정적 인식 등으로 이해하고 수용할 수 있는 상황이라 생각한다. 시장의 상품은 쉽게 복제가 가능해도 사회의 인간이 가진 품성이나 사상은 복제가 어렵기 때문에그걸 수용하는 순간 기술과 다른 다른 국가와의 다른 우수한 경쟁력을 갖출 수 있을 것이다. 한국은 그 동안 독립을 통한 민족의 자유와 전쟁을 통한 국가의 자유와 민주화를 통한 국민의 자유를얻었다. 이제는 관념 관찰을 통한 사상의 자유를 얻을 때이다. 그리고 개인이 불로불사로 살아남아 생존 게임에서 승리하여 생존의 자유를 얻어야 한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는 말이 있다. 그런데 그 전에 적응을 못한 생물에게 미래는 없다고 말하겠다. 인간 이전에 모든 종은 적응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 역사를 알면 반성을 할 수 있어 도움은 되지만 알고서도 환경에 적응 못하면 도태된다. 반대로 역사를 몰라도 환경에 적응하면 살아남아 미래로 갈 수 있다. 한국은 이제 사상 혁명을 통해 개인주의 관념을 갖는 것으로 사회 문제를 해결하여 살아남아 미래로가야 한다. 그렇게 사상 혁명을 하여 인류 인문학의 중심이 되길 바란다. 사회 문제를 해결하면 단숨에 성장하여 세계를 선도할 수도 있을 것이다.

 

 

 

6. 사회

 

집단주의 관념과 개인주의 체제의 충돌은 사회에 심각한 혼란과 불행을 불렀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모든 개인이 개인주의 관념을 가져야 한다. 그와 동시에 집단주의 관념에 의해 합리성이 파괴된 개인주의 체제인 사회를 재정립할 필요가 있다. 집단주의 관념을 가진 인간의 의견이 민주주의에 의해 개인주의 체제인 사회에서 무비판적이고 무분별하게적용되면서 편중된 이익과 불합리하고 불평등한 권리와 의무 등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개인주의 체제에 맞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 우선 사회가 무엇인지 알아보자.

 

[사회_사회 일반은 공동생활을 영위하는 모든 형태의 인간 집단을 뜻한다. 가족, 마을, 조합, 교회, 계급, 국가, 정당, 회사 따위가 그 주요 형태이다.] 인간이 사회를 형성한 것은 열악한 자연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해서였다. 그것이 사회의 본질이다. 사회는 인간 집단이기에 집단주의적 사고를 가지게 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지금까지는 집단의 이익을 우선시해야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런 집단 힘의 논리로 질서가 형성되어 강자가 약자를 지배했다. 그것이 지금까지의 왕정이다. 살아남기 위해 집단의 이익을 우선시했던 집단주의 체제는 이기적인 인간의 본성에 의해 집단의 장이이익을 독점하는 체제로 변화하였다. 그런 이기주의를 보고 많은 사상가들은 인간의 욕망이 악을 부르므로 욕망이 악이기에 금욕적이고 이타적으로 살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한 주장은 본래 의도와 무관하게 지배자가 피지배자를 이용하는데 쓰이게 되었다. 피지배자에게 금욕을 강요하는 것으로 지배에서 벗어날 수 있는 욕망을 가지지 못하게 했고, 희생을 강요하는 것으로 피지배자의 이익을 지배자가 독점할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하여 금욕주의와 이타주의는 왕정의 윤리가 되었다.

서양에서는 기독교 교리 해석을 신의 피조물은 모두 평등하다는 식으로 접근하여 평등주의가 자리잡은상태에서 과학 혁명을 통해 다양한 힘을 쥐게 된 시민이 자유주의에 관련된 사상과 영합하여 혁명을 일으켜 왕정의 지배로부터 자유롭게 되었다. 그러나 왕정의 가치관이 남아있던 탓에 자본가가 노동자를 농노 취급하며 착취해버리는 탓에 그에반발하여 기독교 윤리에 영향을 받은 사회주의와 공산주의가 나타나게 된다. 그렇게 하여 인류는 왕정의 관념과 민주정의 체제를 채택한 자유 진영과 왕정의 관념과 왕정의 체제와흡사한 체제를 채택한 공산 진영으로 나누어 경쟁하고 있다. 전자가 보통 우파고 후자가 보통 좌파다. 왕정의 관념을 부정하지 못했기 때문에 우파와 좌파를 섞은 수정 자본주의와 사회 민주주의 등이 나타났다. 왕정과 민주정의 성질상 공존할 수 없음에도 섞어버리는 바람에 온갖 모순과 불합리한 상황이 만들어지게되었다. 왕정의 관념을 근거로 타인의 자유를 억압하고 민주정의 체제를근거로 본인의 자유를 주장하거나, 왕정에서의 손해는 부당하다 주장하면서 왕정에서의 이익은 정당하다 주장하면서 권리와 의무가 비례하지 않게 되었다. 이에 따라 모든 개인주의 체제인 국가는 개인주의 체제에 맞는 관념과 구조를 갖춰야 할 필요가생긴다. 그러기 위해서 우선 사회가 어떤 구조를 가지는지 알아보겠다.

 

사회는 인간 집단을 말하는 것으로 인간이 사회 구조 요소다. 인간이란 요소로 사회 구조가 이루어진다. 사회는 인간이 육체를 유지해야 살아남을 수 있는 것과 같이 사회 구조를 유지해야 살아남을 수있다. 살아남아야 의미가 있으므로 사회 구조 유지가 사회에 있어가장 기본적이다. 그러한 관점으로 접근한 사상이 생존주의다. 사회 구조는 요소인 인간이 사회에서 다른 인간과 분쟁하지 않고 살아남아야 유지가 된다. 그것을 위한 분야가 법과 복지다. 법은 사회 질서를 만들어 인간관계의 분쟁과 갈등을 줄여 구조가 유지될 수 있게 하고 복지는 인간의생존을 보장하고 행복을 추구하게 하여 요소가 유지될 수 있게 한다.

모든 사회에는 법과 복지를 해야 구조를 유지할 수 있기에 강제력이 동원된다. [강제력은 강제하는 힘이나 권력을 뜻한다.] 강제력은 보통 권력이 행사하는 힘을 말한다. 사회 크기에 비례하여 법과 복지의 체계와 강제력이 달라진다. 국가의 법과 복지는 매우 복잡하고 강제력이 크다.

국가의 법을 국민이 어기면 보통 경찰이 체포하거나 군이 투입된다. 인간은 군의 무력을 넘지 못하는 이상 법의 집행을 막기 어렵다. 국가의 복지는 개인에게 이익이 될 수 있기에 보통 강제력이 없다고 오해하게 된다. 그러나 아니다. 보편적 교육이 자유 의지를 갖기 전에 강제로 시행되고 있다. 학생에게 교육은 권리지만 그렇다고 동의를 받지는 않는다. 자살자 구출이나 빈곤 지원도 강제로 실행된다. 자살 명소에서 자살을 기도 및 실행하거나 인터넷에서 자살 전 증후군으로 추측되는 글이 올라오면 소방관이나 경찰관이 직접 찾아가서 구출하거나방문하고 있고 빈곤에 허덕이는 사람 또한 행정 공무원이 직접 찾아가서 지원하고 있다.

사회에서 법과 복지가 사라지면 질서가 무너지고 체계가 깨져 구조가 붕괴한다. 사회에서 법이 사라지면 인간관계에 대한 기준과 절차가 사라짐에 따라 인간 사이에서 갈등과 불신이나타나면서 인간관계가 망가져 사회성을 잃은 짐승이 된다. 복지가 사라지면 생존이 위험한 인간은 아사로 죽게 되고 불행한 인간은 자살로 죽게 되는 것과 같이 자연 도태가 되게 된다.

사회 구조 유지를 위해 법을 지키고 복지를 행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어째서 모든 인간을 살려야 하는가에 대한 의문이 들 수 있다. 사회 구조 유지를 위해서라면 사회 구조 유지에 해로운 인간은 가지치기 하듯이 제거하는 것이 사회에더 이롭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럼에도 모든 인간에 복지를 행하여 살리는 것은 인간이 존엄하기 때문이다. 인간이 존엄한 이유는 그걸 주장한 존재와 주장을 듣는 대상이 인간이어서 그렇다.

 

[인간 존엄성_철학은 인간이 인간이기 때문에 가지는 부정하거나 범할 수 없는 고상한 성질을 뜻한다. 아무리 흉악한 인간이라도 그 죄를 뉘우치고 선한 사람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니고 있기에 그의존엄성이 부인되거나 거부되어서는 안 된다.] 사전적 정의에서는 대상에 가치 판단한 의견이 첨부되어 있다. 서양 인문학의 발전인 윤리 대상 확대를 통해 모든 인간이 존엄하단 가정하에 범죄자 또한 존엄하다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윤리적 의미에서 존엄하다 한 것이지 실제 모든 인간의 존엄성이 증명된 것은 아니다. 인류 역사의 국가에서 모든 인간의 존엄을 지킨 적이 드물었다. 현대 비인권적 국가도 많다. 본래 함부로 인간을 죽이는 국가는 약체화되어 다른 나라에 침략 받아 멸망될 수 있으나 반드시그런 것은 아니고 효율적으로 처리하면 오히려 더 성장할 수도 있다. 그것이 비윤리적이기에 말을 하지 않을 뿐이지 다들 알고 있다.

인간의 존엄성은 인간의 관계에서만 성립되므로 인간이 만든 개념에 해당한다. 즉 일반 진리가 아니다. 흉악한 범죄자, 아무 가치도 생산하지 않는 인간, 육체만 남은 식물인간 등과 같이 사회 구조 유지에 해로울 수 있는 인간은 물론이고 외국인, 이민자, 이방인과 본래 사회 구조 요소가 아니었던 인간이나 다른 의견, 다른 취향, 다른 성향 등과 같이 본인과 성질이 다른 인간 등 관점에따라 다르지만 존엄이 필요 없을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특히 흉악한 범죄자는 타인의 존엄을 해쳤으므로 존엄의 자격이 없다 말할 수 있다. 이렇게 다른 인식으로 다른 의견이 나오므로 인간의 존엄성은 현재 학문적 진리가 아니기에 설득이필요하다. 설득을 하려면 모든 인간의 존엄을 지켜야 하는 이유를 논리적으로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어째서 모든 인간의 존엄을 지켜야 하는가? 인간의 교화 가능성과 같은 불확정성이나 인간에 대한 측은지심과 같은 주관성은 이유로 성립될 수없다. 그것은 합리적 기준이 아니다. 사회 구조 유지와도 직접적 관련은 없다. 그것은 절대적 기준이 아니다. 모든 인간의 존엄성을 지켜야 하는 것은 윤리나 실리가 아닌 합리다. 현재 개인주의 체제는 모든 인간은 존엄하다는 전제를 하고 있다. 거기서 만약 주관에 의해 변동이 발생할 경우 체제의 이치가 깨져 합리적 기준이 되지 못하게 된다. 이치가 깨진 기준은 더 이상 합리적이라 할 수 없다. 합리가 없는 기준은 논리를 잃고 논리가 없는 체제는 지성을 잃는다. 야만의 시대가 될 수 있다. 자유주의에서 A는 자유롭고 B는 자유롭지 못하다고 해보자. 그게 왕정과 무슨 차이인가? 그걸 합리적 기준이라 할 수 없고 합리적 기준이 없는 자유주의에는 가치가 없다. 가령 모든 인간은 존엄하다. A는 빼고. 특정 피부색의 인간만 인간의 존엄성을 갖는다. 특정 행동을 한 인간은 존엄하지 않다. 그런 주장이 이치에 맞는다는 근거가 있는가? 없다. 이런 쓰레기 같은 기준은 합리적 기준이 될 수 없다. 기준이 쓰레기면 체제도 쓰레기가 된다. 기준이 이치에 벗어나면 모순이 발생하며 각자 되는대로 떠들면서 체제가 망가지게 된다. 그렇기에 인간의 존엄에 예외를 두지 않는 것이다. 보다 정확한 인간의 정의를 위해 과학의 학문적 진리인 생물학적을 포함하도록 하자. 생물학적으로 인간이 아닌 존재를 인간이라 규정하는 것은 비과학적이다. 모든 생물학적 인간은 존엄하다. 생물학적 인간이라는 과학의 학문적 진리를 바탕으로 모든 인간이 존엄하다라는 합리적 기준을 깨지말아야 그걸 기준으로 한 체제의 합리성도 깨지지 않는다.

모든 생물학적 인간은 존엄하다라는 명제는 생물학적 인간이 아닌 가상의 인간은 인간의 존엄성에포함되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어떤 이유든 가성의 존재에 인간의 존엄성을 근거로 인권을 부여하려는 태도는 합리적 기준을 부숴 체제의 이치를 깨는 것으로 혼란을 일으키는중대한 잘못에 해당한다. 타당한 이유 없이 낡은 가치관을 근거로 합리성을 파괴하는일을 좌시해서는 안 된다.

모든 인간의 존엄이 지켜지기 위해서는 합리적 기준으로 모두가 대등한 존재가 되어야 한다. 불평등은 사사로운 물질적 손익보다는 대등 여부로 결정된다. [대등은 서로 견주어 높고 낮음이나 낫고 못함이 없이 비슷함을 뜻한다.] 모든 인간이 대등한 존재가 되어야 평등을 실현할 수 있다. [평등은 권리, 의무, 자격 등이 차별 없이 고르고 한결같음을 뜻한다.] 대등하지 않으면 권리나 의무 등이 차별적으로 적용되게 된다. 현재 남녀가 대등하지 않다고 여기니까 권리나 의무가 차별적으로 적용되는 것이다. 과거 여성이 사회 선입견으로 유리천장과 같은 차별이 있는 것을 명분으로 현재 여성은 부당한 여성할당제나 가산점을 주장하고 병역의 의무를 거부하고 있다. 과거 남성과 여성이 대등하지 않다고 여기니까 여성을 차별했고, 현재 그걸 근거로 과한 권리를 주장하고 의무를 거부하고 있는 것으로 남성을 차별하고 있다. 이 모든 것이 인간과 인간이 대등하지 않다고 여겼기 때문에 발생한 것이다. 모두가 대등한 존재가 되어야 평등도 실현하고 존엄도 지킬 수 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나는 생존과 자유라는 합리적 기준을 바탕으로 한 역할이라는 관계에 가치 판단하는 합리적 기준을제안했다. 역할주의다. 모든 개인은 역할이라는 관계에 가치를 판단하는 것으로 대등해져야 한다. 역할을 수행하면 존중하고 수행하지 못하면 비판한다. 만약 역할을 수행하지 못하여 비판을 견디기 힘들다면 노력을 하여 역할을 수행하거나 다른 역할을맡으면 된다. 거기에는 연령도 성별도 지역도 학력도 없다. 역할이라는 관계에 가치 판단하기에 역할과 관계가 없는 개성은 무관하게 되면서 모두가 역할로 대등한관계를 구축할 수 있게 된다. 개인주의 체제는 기본적으로 선거나 시장과 같이 개인의 의사로 가치가 평가되어 판단된다. 역할이란 관계에서 가치 판단을 할 때는 주관적 가치 판단을 하게 되는데, 객관적 가치는 선거나 시장에서 선거 원리와 시장 원리로 결정되게 된다. 역할 수행이라는 기준으로 대등해지고, 역할 기여도를 개개인에게 평가 받는 것으로 대가를 다르게 받는다. 이렇게 대등해지는 것으로 평등을 실현하여 모든 인간의 존엄성을 지킬 수 있다.

 

 

인권 운동은 모든 인간은 존엄하다라는 명제를 근거로 정당화되어 실행되고 있다. [인권 운동_사회 일반은 인간의 기본적 권리를 실질적인 권리로 만들기 위한 운동을 뜻한다. 더 많은 사람들의 인권이 보장되도록 벌이는 사회 활동으로, 대중이 자발적으로 참여한다.] 그러나 일반적인 인권 운동은 합리적 기준이 없어 이권 운동에 불과했다. [이권은 이익을 얻을 수 있는 권리를 뜻한다.] 그냥 이익을 보면 좋은 것, 손해를 보면 나쁜 것으로 접근한다. 그거뿐이다. 이익을 얻을 권리인 이권을 모든 인간의 보편적인 권리인 인권으로 포장하여 주장하고 있다.

어떤 여성주의자는 여성주의가 여성의 이익을 주장하므로 여성이 여성주의를 주장하는 것은 당연하다는식으로 말한다. 황당하다. 그러면 나치즘은 아리아인의 이익을 주장하니 아리아인이 나치즘을 주장하는 것은 당연한가? 사상 개념도 없고 손익에 정당성과 부당성 개념도 없다. 거의 모든 인권 운동이 합리적 기준이 없어 정당성과 부당성을 구분하지 않고 이익만을 주장하고있을 뿐으로 단순한 이익 집단에 불과하다. 분명 개인주의 체제에서 모든 개인은 타인의 행복조차 개인의 이익으로 여기는 것과 같이 자유 의지로 행한 모든 것을 개인의 이익만으로 여기며주장해야 한다. 그러나 그걸 인권과 같이 강제력이 있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해서는안 된다. 누구나 수긍하는 보편적인 권리인 인권은 따로 증명할 필요가없으나 일부만 수긍하는 일부가 이익을 얻을 권리인 이권은 따로 증명해야 한다. 대부분 이권 운동은 인권으로 포장하여 증명을 회피하면서 이익을 주장하고 있는 것으로 사회에 혼란을일으키고 있다.

이런 혼란은 한국의 근본적인 문제부터 접근해야 한다. 한국은 서양의 관념과 체제 충돌과 별개로 유교, 불교, 무교 등과 같은 것에 의해 불합리하고 비효율적이고 비과학적인 풍조가 남아있는 상황이다. PC주의를 근거로 다양한 평등은 주장하면서 연령 차별은 문화 차이라며 연령 평등을 말하지 않고 차별을유지한다. 자본주의를 근거로 돈에 대한 욕망은 주장하면서 다른 분야금욕은 문화 차이라며 성이나 게임에 대한 욕망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고 억압을 유지한다. 자연 과학을 근거로 과학적인 것은 주장하면서 무교는 문화 차이라며 비과학적임을 말하지 않고 미신을유지한다. 이것이 한국의 뿌리깊은 근본적 문제다.

그 근본적 문제 중 하나인 유교적 가치관이 인권 운동에도 영향을 끼치고 있다. 가령 유교적 가치관에 의해 위가 아래를 지배하는 조선의 관념이 한국에 남아 힘이 약할수록 손해를많이 본다. 이것에 의해 한국은 노동자가 상당히 불리한 상황이다. 한국에서 노동자가 불행한 것은 자본주의가 아닌 유교적 가치관이 원인이다. 그런데 그런 상황에서 일부 노동자는 집단을 이루는 것으로 힘을 얻어 이익을 얻을 수 있게 되었다. 현재 인권 운동 단체가 이익을 얻을 수 있는 것은 집단을 이루는 것으로 힘을 가졌기 때문이다. 힘을 갖게 된 약자 집단은 과한 이익을 얻고 있으나 힘이 없는 약자 개인은 작은 권리조차 보장받지 못하고 있다. 개인주의 체제에서는 모든 개인이 권리를 보장받을 수 있는체계가 필요하다. 자본가가 부당한 이익을 얻는 것도 안되고 노동 집단이 부당한이익을 얻는 것도 안 된다. 모두가 공정한 이익을 얻어야 한다. 집단주의 체제의 집단은 집단과 집단의 중심인물만 살찌우게 만드는 개인에게 있어 부당한 체제다.

한국에서 인권 운동은 모든 인간을 대상으로 하나 보통 노동자, 여성, 아동, 장애인, 성소수자, 이민자 등과 같이 약자를 기본으로 한다. 대부분 인권 운동이 집단주의 체제기 때문에 보편적 인권이 아닌 일부만 집단에 속하여 강해진 인간이 주로 이익을 얻고 있다. 아동의 경우 아동이 인권 운동을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인권 운동가가 생각하는 아동상을 구현하는것을 통해, 인권 운동가와 그것을 악용하는 강한 아동이 이익을 얻고있다. 실상 대부분 인권 운동은 인권 운동가가 생각하는 이상적인인간상을 주장하는 것에 해당한다. 그것을 통해 이권을 얻는 것이 현재 인권 운동이다. 그러다 보니 실제 인권 대상의 주장을 묵살할 때가 많다.

강한 노동자는 귀족 노조란 말을 들을 정도로 과한 이익을 얻어 사회적 비판을 받는 반면 약한노동자는 참혹한 환경에서 죽을 정도로 일을 하며 갑질과 착취를 당하다가 죽기도 하는 삶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강한 여성은 할당제와 가산점으로 능력이 이상의 직업이나 권력을 얻어 역차별이란 사회적 비판을받는 반면 약한 여성은 여전히 비참한 환경에서 육체적·정신적 학대와 폭력을 당하는 삶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강한 아동은 범죄를 저질러도 촉법소년이란 이유로 제대로 처벌하지 못하여 체벌 주장이나 촉법소년폐지 주장과도 같은 사회적 비판을 받는 반면 약한 아동은 보호자의 감시와 검열로 자유권을 침해 당해 성적 자기결정권과 선거권도 없는 상황에서 로봇처럼명령대로 지식을 암기하고 이해하는 자유 의지가 없는 삶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일부는 인권을 명분으로 과한 이익을 얻고 일부는 인권조차 제대로 보장 받지 못한 삶을 살고 있다. 이 양극화는 인권 운동이 실상 인권이 아닌 이권이기에 발생했다. 일부만 이권 운동을 통해 과한 이익을 얻을 권리를 얻으니까 나머지는 권리를 얻지 못하면서도 과한이익을 얻는 이들과 같은 집단으로 취급되며 부정적 시선을 받는 것으로 기본적 권리조차 보장받지 못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인권은 모든 인간을 대상으로 하고 있으므로 노동자의 인권을 말할 것이면 자본가의 인권도 고려해야하고 여성의 인권을 말할 것이면 남성의 인권도 고려해야 하고 미성년의 인권을 말할 것이라면 성년의 인권도 고려해야 한다. 그런 보편적인 합리적 기준을 통해 객관적이고 균형적이고 논리적이어야 인권이라 부를 수 있다. 공산주의 노동자 계급 투쟁이 노동자의 이익만 고려하여 노동자 집단의 이권 운동에 불과했던 것과같이 그러지 않으면 그것은 그냥 이권일 뿐이다. 공산주의 노동자 계급 투쟁과 비슷한 지금의 인권 운동을 알기 쉽게 비유하면, 왕정 체제의 신분제를 폐지하고 민주주의 체제의 선거제를 도입하는 것이 아니라 왕정과 관계없이신분제는 유지하여 차별은 남기면서도 평민과 노예였던 이들에게 배려와 혜택을 늘리자고 주장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정녕 인권 운동을 하고 싶다면 신분제를 폐지하고 왕과 귀족과 평민과 노예를 대등한 기준으로 접근하며모두가 같은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얻을 수 있도록 선거제를 마련했던 것과 같이 대등한 기준을 마련했어야 했다. 그러나 그들은 그러지 않았다. 대등하지 않은 관계에서 이익만을 요구했다. 그러면서 권리는 요구하면서 의무는 저버리는 행위를 하게 되었다. 이것이 현재 일반적인 인권 운동의 본질이다.

 

 

첫째, 노동자. 노동 인권 운동은 모든 인간을 대상으로 한 합리적 기준으로이익을 주장해야 인권 운동이 된다. 노동자의 인권을 주장할 것이라면 자본가와 같은 기준으로 접근해야 한다. 만약 이권이 아닌 인권 운동을 했다면 이치를 통해 합리적이고 공정한 이익을 얻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노동자와 자본가와 같이 모든 인간을 대상으로 한 합리적 기준은 무엇인가? 바로 상거래다. 노동자나 자본가나 금융가 등 경제 활동을 하는 인간은 모두 상거래를 한다. 노동자는 상품을 사들여 본인의 능력을 키워 노동력을 상품화하여 가치를 올린 다음 자본가에게 임대로판다. 자본가는 자본재를 바탕으로 생산재를 사들여 상품으로 만들어가치를 올린 다음 소비자에게 판다. 모든 경제 활동을 하는 인간은 상인이라는 같은 기준으로 접근할 수 있다. 상인이라는 합리적 기준으로 인권을 주장하는 것이다.

만약 노동자가 노동력 임대 상품을 취급하는 상인이었다면 자본가는 계약 이상의 노동을 요구하지못한다. 왜냐하면 자본가도 상품 임대로 수익을 얻기도 하기에 소비자임대 상품과 노동력 임대 상품을 같은 기준으로 바라보고 소비자 임대 상품과 같이 노동력 임대 상품도 소중하게 다루며 계약을 준수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같은 기준이 되면 어느 쪽은 소중하고 어느 쪽은 소중하지 않는 논리적 모순을 허용할 수 없게된다. 지성인이라면 윤리는 부정할 수 있어도 논리는 부정할 수없다. 노동력 임대 상품을 계약과 다르게 활용하면 소비자 임대상품을 계약과 다르게 활용했을 때와 같이 계약 위반으로 큰 위약금을 물게 했으면 되었다. 만약 그랬다면 포괄임금제도 없었을 것이다. 소비자 임대 상품을 소비자가 추가로 무료 임대해달라 요구하면 몇 번은 서비스가 가능해도 계속서비스할 수는 없다는 것을 자본가도 안다. 그렇기에 같은 기준으로 보면 자본가도 노동자에게 무료 서비스를 요구할 수 없다. 추가 노동을 하지 않게 하거나 계약 외 추가 계약으로 노동력 임대 상품에 대한 정당한 대가를지불했을 것이다.

만약 그랬다면 계약도 달라졌을 것이다. 통상 상거래를 떠올려보자. 단기 계약은 계약 기간이 짧으므로 계약 비용이 높고 장기 계약은 계약 기간이 길으므로 계약 비용이낮다. 단기 고객의 고액 요금과 장기 고객의 할인 요금을 떠올려보자. 그게 원래 시장 경제에는 당연하다. 단기 계약은 계약비가 높은 대신 안정성이 낮고, 장기 계약은 계약비가 낮은 대신 안정성이 높다. 노동력 임대 상품도 같은 방식으로 접근하면 노동 유연성과 노동 안정성을 둘 다 얻을 수 있다. 단기 계약은 계약비가 높은 대신 안정성이 낮아 노동 유연성을 얻을 수 있고, 장기 계약은 계약비가 낮은 대신 안정성이 높아 노동 안정성을 얻을 수 있다. 노동자는 본인의 성향에 따라 단기와 장기를 선택하여 임금과 안정성 중에 하나를 택하면 된다. 자본가는 단기 계약을 할 경우 고액 비용을 지불하지만 능력이 낮아지면 쉽게 해고할 수 있어 낮은리스크로 고용할 수 있고 장기 계약을 할 경우 높은 리스크를 감수해야 하지만 저액 비용을 지불하여 낮은 비용으로 고용할 수 있게 된다. 이런 것이 합리적 기준을 통한 공정한 이익이다. 단기 계약과 장기 계약으로 나누면 연공서열에 의한 불공정한 이익도 달라질 수 있다. 단기 계약자는 매번 계약을 갱신하면서 능력을 증명했기에 연공과 무관하게 고액 임금을 받을 자격이있고, 장기 계약자는 계약을 갱신하지 않으면서 능력도 증명하지않았기에 연공과 무관하게 상대적으로 저액 임금을 받는 것이 타당해진다. 한국은 외국과 비교했을 때 대기업 노동자의 노동자 임금은 크게 오른 반면 중소기업 노동자 임금은 적게 올라 임금 격차가 심각한 수준이라고산업계가 지적할 정도다. 지금과 같은 임금 체계로는 그것이 정당한지 부당한지 확인할수가 없다. 단기 계약과 장기 계약과 같은 합리적 기준이 있어야 임금체계의 공정성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대기업 노동자와 중소기업 노동자의 임금 차이는 합리적 기준이 아닌 단지 유교적 가치관에 따른 강약의 차이와 노동조합의 담합이 만든 것에불과하다.

만약 그랬다면 노동자의 주장도 달라졌을 것이다. 노동자는 자본가에게 종속된 존재가 아닌 대등한 상인이기에 자본가가 노동자를 착취하는 것을 비판하면서도노동자를 종신 고용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닌 착취하지 않으면 노동자의 노동력 임대 상품에 정당한 대가도 지불 못하는 무능한 기업은 사라져야한다고 주장했을 것이다. 즉 노동 안정성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기업 유연성을 주장했을것이다. 곧잘 정부에서 노동자를 위해서라면서 무능한 기업을 세금으로살리기도 하는데, 그것이 노동자를 불행케 한 것이다. 정부가 보호해야 할 기업 중에서 내수 기업은 일반적으로 보호할 이유가 없다. 세계 시장에서 경쟁하지도 않는 기업을 세금으로 보호할 이유가 없다. 정녕 노동자를 위해서라면 차라리 그 비용으로 새로운 기업을 지원하거나 기존 기업에 세금을 투입하여노동자를 고용하도록 유도하거나 노동자에게 직접 지원하는 게 낫다.

만약 그랬다면 사회의 시선도 달라졌을 것이다. 노동자 인권 문제를 감정적으로 접근할 것이 아니라 노동력 임대 상품을 험하게 다루는 계약 위반자를논리적으로 비판했을 것이다. 합리적 기준으로 공정한 판단이 가능해져 지저분하게 싸우는 일도 없을 것이다. 사사로운 손익이 아닌 합리적 명분으로 접근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논리적인 주장은 노동자도 자본가도 수용하면서 야만적인 폭력 사태나 무의미한 소요 사태도사라진다. 합리적 기준이 있나 없나에 따라 이토록 달라질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은 그러지 않았다. 자본가와 대등한 기준이 아닌 천대 받는 노동자의 위치에서 일부 노동 운동을 하는 운동자와 운동대상의 이익만을 요구했다. 그렇기에 단순한 이권 운동에 불과했다. 대등한 기준이 아닌 종신 고용과 정규직이 옳다고 말하기만 하면서 능력이 있는 사람조차 무기력하게 종속되었다. 이러니 현대의 노동자들이 공기업은 공노비고 사기업은 사노비라는 조소를 하게 되는 것이다. 그야말로 농노와 다를 바 없다. 농노와 다를 바 없었던 노동자는 생존하기 위해 집단을 형성하여 단결하며 집단의 이익을 우선시하는집단주의 체제가 되었다. 노동자의 권리를 살펴보자. [노동 삼권_법률은 헌법에 명시된 근로자의 세 가지 기본 권리를 뜻한다. 단결권, 단체 교섭권, 단체 행동권을 이른다.] 단결권은 노동조합을 만들 권리를 말하고 단체 교섭권은 노동조합이 사용자와 노동 조건에 대해 교섭하는권리를 말하고 단체 행동권은 파업과도 같은 행동을 할 권리를 말한다. 노동자의 권리는 처음부터 집단의 권리였다. 노동자 개인의 권리가 아니었다. 노동조합은 노동자 개인이 아닌 노동자 집단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집단주의 체제다.

집단주의 체제인 노동조합은 개인주의 체제인 국가와 어울릴 수가 없었다. 노동자가 집단주의 체제인 노동조합에 들어가면 노동자 개인의 이익보다 노동조합의 이익을 우선시하면서노동자 개인의 권리가 침해된다. 체제에 악영향을 끼친다. 이것뿐만이 아니다. 사회에도 악영향을 끼친다. 바로 담합이다. [담합은 서로 의논하여 합의함을 뜻한다.] 자본가가 모여 경쟁 입찰이나 소비자나 노동자 상품의 가격을 미리 협의하여 정하는 것을 담합이라부른다. 그렇다면 논리적으로 노동자가 모여 소비자와 자본가에게 받는비용과 임금을 미리 협의하여 정하는 것도 담합이 된다. 자본자가 소비자에게 상품을 파는 상인이고 노동자가 자본가에게 상품을 파는 상인이라는 전제하에 자본가와 노동자는 가진 힘의 차이가 있을지언정본질은 같다. 그럼에도 자본가가 소비 시장에서 담합을 하는 것은 죄가되지만 노동자가 노동조합에서 담합과 담합을 위해 파업을 하는 것은 권리가 된다. 이것은 단순히 체제의 차이다. 자본가의 소비 시장은 개인주의 체제에 속하지만 노동자의 노동조합은 집단주의 체제기 때문이다. 체제의 차이로 자본가의 담합은 죄가 되나 노동자의 담합은 권리가 된다.

체제가 아닌 힘의 차이로 담합이 정당화되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렇다면 묻겠다. 힘의 차이로 담합이 정당화되는 것이라면 관광지나 위수지의 가난한 자영업자가 수익을 얻기 위해 다른 자영업자와 담합하여 내국인이나 내지인에게는정가로 팔고 외국인과 군인에게는 비싸게 파는 것이 정당하다 할 수 있는가? 대기업의 부유한 노동자가 수익을 얻기 위해 다른 노동자와 담합하여 합리적 이유가 없는 권리를주장하며 파업하는 것으로 생산하는 상품과 제공하는 서비스의 가격 상승과 품질 저하를 일으키는 것이 정당하다 할 수 있는가? 가진 부의 차이를 보면 관광지나 위수지의 자영업자가 대기업 노동자보다 가난할 확률이 높다. 그럼에도 자영업자의 담합은 부당하고 노동자의 담합은 정당한 상황이다. 이처럼 힘이 아닌 체제의 차이로 담합이 정당화되고 있다. 만약 개인주의 체제인 자본주의 시장 경제가 아닌 집단주의 체제인 공산주의 계획 경제였다면 자본가의담합도 정당화되었을 것이다. 분명 한국은 개인주의 체제인 자본주의 시장 경제이지만 집단주의 관념에 의해 기업도 담합을 하는 경우가 많다. 본래 시장에서 상품 가치는 개인의 의사에 해당하는 수요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정상이나 기업이나노동자 담합으로 결정되어 시장 원리를 해치는 경우가 너무나도 많다. 그렇기에 한국 물가가 비정상적이다. 개인의 의사로 가치가 판단되는 선거나 시장과도 같은 것이 아닌 일부의 임의로 가치가 판단되게 되는 담합은 개인주의 체제에서 악이다.

특정 노동조합이 담합을 하여 결정한 임금을 주장하며 파업을 하면 담합한 임금이 통과되든 통과되지않든 나머지 국민은 손해를 보게 된다. 파업을 하면서 상품 공급이 지연되고 합리적인 이유가 아닌 파업을 강행하여 임금이 상승하게 되면 자본가의 부를 노동자가 가져가는 것이 아닌상승한 임금만큼 상품의 가격을 올리거나 품질을 저하시키게 된다. 그러면서 상품 가치가 낮아져 소비하는 국민이 불행하고 세계 시장 경쟁에서 경쟁력이 악화되어 경제가 성장이 둔화된다. 파업으로 불합리한 이익을 가져가는 것이 나타나면 파업을 한 분야와 파업을 하지 않은 분야에서부당한 손익이 발생하게 된다. 그러면 다른 분야의 노동자는 손해를 본 만큼 이익을 얻기 위해 파업을 강행한다. 파업의 연쇄 작용이다. 그러면서 노동자와 자본가의 계급 투쟁이 아닌 분야와 분야의 이익 경쟁이 되게 된다. 이 과정에 합리적 기준이 없기에 논리가 없어 보다 더 감정적이고 비논리적으로 행동한 집단이 더큰 이익을 얻게 된다. 사회가 이성과 논리를 잃으며 흔들린다. 파업의 연쇄로 집단주의 체제인 노동조합의 집단 이기주의가 강해짐에 따라 집단의 이익을 위해 개개인의의견이 무시되어 파업에 동의하지 않거나 동참하지 않는 이에게 파업을 강요하게 된다. 개인의 자유가 침해되어 자유주의 이념이 훼손된다. 이윽고 모든 노동조합이 파업으로 이익을 얻으면 노동조합에 가입하지 않는 노동자는 부당한 손해를보게 된다. 그러면서 노동조합에 가입하는 노동자의 수가 늘어나면서 가입할수 없는 노동자 개인은 더욱 더 큰 부당한 손해를 보게 된다. 사회는 자본가와 노조와 비노조로 계급이 나뉘게 된다.

노동 인권 운동이 인권 운동이 아니라 이권 운동이기에 이런 현상이 나타난다. 노동자가 자본가에 종속되면서 자본가와 노동자 사이에서 계급이 나타났고 노동조합이 생기면서 노동조합가입 유무로 계급이 나타났다. 계급 투쟁으로 계급을 없앤 것이 아니라 계급을 한 층 더 견고하게, 한 층 더 늘렸다. 이것이 집단주의 체제의 이권 운동이다. 개인주의 체제에서는 노동자와 자본가가 같은 상인이라는 점을 고려하여 노동력 임대 상품을 거래하다 부당 거래가 나타나면 공정 거래 위원회에연락하여 해결했어야 했다. 과징금이 높으면 시장 원리에 따라 부당 거래가 현격히 줄어든다. 지금 노동조합은 개인주의 체제를 갖춘 국가에서 집단주의 체제를 유지하는 비정상적인 집단이다. 노동자가 노동조합에 속하지 않더라도 노동자 개인이 동등한 권리를 얻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것이 개인주의 체제다. 그렇게 하여 집단주의 체제인 노동조합은 사라져야 한다. 노동조합은 공산주의 계급 투쟁과 같은 노동자 집단의 이권 운동 집단에 불과하다. 노동자가 모인 집단이 있더라도 그것은 개인주의 체제로 노동자 개인의 이익을 위한 집단이어야만한다. 분야에 따라 노동자 개인이 권리를 얻기 어려운 곳이 있을수 있다. 그런 분야는 집단을 이룰 것이 아니라 정부 보호 분야로따로 두어 관리하는 것이 합당하다.

 

한국은 정치적 진영 논리에 따라 진영마다 일하는 것을 의미하는 단어를 근로와 노동을 나눠 부르고있다. 한쪽은 노동자가 열심히 일해야 한다고 생각하며 자본가 편을들면서 근로라고 부르고 한쪽은 노동자에게 열심히 일할 것을 강요한다고 생각하며 노동자 편을 들면서 노동으로 부르고 있다. 이제는 그런 진영 논리와 관계 없이 체제로 접근해야 한다. 근로는 집단의 이익을 위해 개인의 의지와 무관하게 열심히 일하도록 강요하기 위해 나타난 단어로지극히 집단주의적이다. 반면 노동은 사회주의나 공산주의의 영향을 제외하면 다르다. 노동을 사전적 정의만 보면 단순히 일하는 것이므로 개인의 이익을 위해 개인의 의지로 열심히 일하는것을 선택할 수 있어 지극히 개인주의적이다. 열심히 일하든 열심히 일하지 않든 그것은 노동자 개인에게 맡겨야 한다. 노동 시장에서 노동자 개인의 노동력 상품의 생산성이 높으면 수요가 높을 것이고 생산성이 낮으면수요가 낮을 것이다. 그렇게 노동력 상품을 근로라는 이름으로 열심히 일한 것을강요할 것이 아니라 시장에 맡겨야 한다. 자본주의자라면 근로라는 단어를 쓸 것이 아니라 노동이란 단어를 쓰고 열심히 일하는 것을 노동자 개인에게 맡기는 대신 노동력 상품의 유연한거래인 노동 유연성을 사회에 요구해야 한다. 노동자가 일하는 것을 근로라고 불러놓고 노동 유연성을 요구하는 것은 모순되어 비논리가 된다. 근로라는 단어가 노동 유연성을 논리적으로 막는 기재가 되고 있다. 노동자 개인의 의지를 무시하는데 노동자 상품을 유연하게 거래하는 노동 유연성이 어떻게 존재할수 있는가? 집단의 이익을 위해 개인의 의지와 무관하게 열심히 일하도록지정해둔 근로라는 단어는 집단주의적이고 개인의 이익을 위해 개인의 의지로 열심히 일하는 것을 결정하게 한 노동이란 단어는 개인주의적이다. 혼용해서는 안 된다. 노동자 자체를 도구로 인식하고 집단의 이익을 위해 노동자를 도구처럼 열심히 쓰다 버리는 것은 논리적이게 될 수는 있으나 그것은 심각한 인권침해다. 개인주의 체제인 사회에서는 그런 인권 침해가 존재해서는안 된다. 이제는 진영 논리와 무관하게 논리적으로 접근해야 한다. 그래야 사회적 합의를 얻을 수 있다. 진영 논리로 용어 사용이 불편하면 그냥 일하는 사람이나 워커라고 부르면 된다. 노동 유연화가 필요하다 말해봐야 이런 기본적인 논리적 모순도 해결하지 못하는 이상 사회적 합의를얻기가 어렵다.

무엇보다 선진국이 된 지금 이제 근로로는 안 된다. 결과가 나와야 한다. 열심히 한다는 수단이 아닌 높은 가치의 상품을 생산한다는 결과가 나와야 한다. 근로로 인해 일은 열심히 하기만 하면 된다는 인식이 나타나 열심히 하지는 않지만 생산성이 높은사람은 천대되고 열심히 하지만 생산성이 낮은 사람은 우대되고 있다. 근로라는 단어는 생산성에 해악을 끼치는 관념을 만들었다.

게임에서 노동과도 같은 작업은 즐거운데 기업에서 노동이 즐겁지 않은 것은 관념과 체제의 차이다. 게임은 대부분 개인주의 관념에 개인주의 체제지만 노동은 개인주의 관념에 집단주의 체제일수도 있고집단주의 관념에 개인주의 체제일수도 있다. 노동은 현재 한국이 겪고 있은 정반대의 옳고 그름인 관념과 체제의 혼란을 그대로 겪고 있는 곳이기에 불필요하게 개인을 불행하게 하여 노동이불행한 경우가 많아 노동을 고통스러운 것으로 여기는 경우가 많다.

 

 

둘째, 여성. 여성 인권 운동은 모든 인간을 대상으로 한 합리적 기준으로이익을 주장해야 인권 운동이 된다. 여성의 인권을 주장할 것이라면 남성과 같은 기준으로 접근해야 한다. 만약 이권이 아닌 인권 운동을 했다면 이치를 통해 합리적이고 공정한 이익을 얻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여성과 남성과 같이 모든 인간을 대상으로 한 합리적 기준은 무엇인가? 바로 인간이다. 여성이나 남성 또는 그 외의 성별을 주장하는 인간도 모두 인간이다. 어떤 성적 특성을 가지고 있든 인간임은 동일하기에 인간이라는 기준으로 인권을 주장해야 한다.

만약 여성이 남성과 같은 인간을 주장했다면 남성의 권리와 의무를 요구했을 것이다. 같은 인간이므로 같은 권리와 의무를 요구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여 여성이 남성과 대등하게 되어 평등하게 권리와 의무를 다했다면 남성은 여성의 인권주장을 인정하고 받아드려 불필요한 분쟁이 많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 남성의 불만은 대부분 권리는 요구하나 의무와 책임은 거부하는 불합리한 태도에 분노하거나 질려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러지 않았다. 남성과 대등한 기준이 아닌 천대 받는 여성의 위치에서 일부 여성 운동을 하는 운동자와 운동 대상의이익만을 요구했다. 그렇기에 단순한 이권 운동에 불과했다. 여성 인권을 주장하는 이들은 여성과 남성을 다른 존재로 규정하고 여성이 이익을 얻을 권리와 남성이이익을 얻을 권리는 다르다 주장하니 그들의 주장은 모든 인간의 권리인 인권이 아닌 여성만의 이익을 얻을 권리인 이권이 되었다. 수많은 여성 단체가 모여 힘을 합쳐 과한 이익을 주장한다. 여성 인권을 주장하는 인간은 여성 집단의 이익을 우선시하고 그러지 않은 인간은 비여성과 같이취급하며 공격했다. 여성 인권 운동 단체는 전형적인 집단주의 체제였다.

집단주의 체제인 여성 인권 운동이 개인주의 체제인 국가와 어울릴 수가 없었다. 일부 여성은 과한 이익을 얻고 일부 여성은 보편적 인권도 보장받지 못한 채 불행하게 살았다. 일부 여성은 그런 이들을 명분으로 여성 인권을 주장하면서 더욱더 본인의 이익을 챙겨갔다. 여성 가족부, 여성 대학, 여성 가산점, 여성 할당제, 여성 주거시설, 여성 주차장, 여성 창업지원, 여성 지하철전용칸, 여성 휴게실, 여성 파우더룸, 여성 캠프장, 여성 도서관 등 많다. 특히 이러한 혜택은 도시 여성과 젊은 여성 위주로 그야말로 단순한 이권일 뿐이었다. 이러한 것을 보고 여성주의를 여성 우월주의로 오해하고는 하는데, 주장의 근거가 우월이 아닌 열등이므로 우월주의가 성립될 수 없다. 장애인이 혜택을 받는다고 그걸 우월하다 여기는 인간이 없듯이 말이다.

기울어진 운동장도 그러한 이권 주장 중 하나다. 여성과 남성이 대등하게 같은 기준으로 평등한 운동장에서 공정한 경쟁을 한 다음 불균형한 결과를평등하게 받아드리자고 주장한 것이 아니라 과거 대등하지 않아 불평등하여 기울어져 있던 운동장에서 불공정한 경쟁을 한 다음 균형적인 결과를 불평등하게받아드리자고 주장하고 있다. 여성 능력 10과 남성 능력 12여도 결과적으로 같은 비율이 될 때까지 여성이 경쟁에서 이겨야 한다고 주장하며 여성을 고용케한 것이다. 어처구니 없다. 모든 경쟁은 본래 불균형한 것이 정상이다. 여성이든 남성이든 관계없이 결과는 불균형해야 한단 말이다. 어떤 이유가 되었던 균형적이게 되면 경쟁의 승자는 부당한 손해를 보고 경쟁의 패자는 부당한 이익을보면서 불공정한 결과가 나온다. 그럼에도 그들은 여성이 주관적으로 정한 기준에 맞을 때까지 통계를 조작하거나 입맛에 맞는 것만 골라서라도 여성만이 일방적으로 이익을 얻길바라고 있다. 이들의 주장이 이권에 불과한 것은 이러한 기울어진 운동장의대상은 언제나 이익이 될법한 분야에만 한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대부분 어려운 분야에서는 이러한 주장을 하지 않았다.

여성 인권의 주장은 인권이 아닌 이권이기에 남성에서 여성으로 성전환한 여성에 대한 부정적 의견이많았다. 가령 여성 대학에서 성전환한 여성의 입학을 거부한다거나말이다. 여성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새롭게 여성이 된 인간을 거부한것이다. 그야말로 단순한 이익 집단이다. 이러한 태도는 다른 국가의 여성주의와 다르게 된다. 다른 국가에서는 성전환한 여성이 여성 대학에 입학했기 때문이다. 본래 여성주의 자체가 여성의 이익만을 위한 주장이기 때문에 각국 여성이 이익이라 여겨지는 것에따라 달라지게 된다.

한국 여성의 입장에서 이익이라 여겨지는 것 중 하나가 바로 가부장제 시대의 여성성을 지키는 것이었다. 그러한 여성성을 지키자는 주장에서 나온 것이 성인지감수성과 성적 대상화와 성 상품화 비판이다. 가부장제 여성성을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는 감수성을 가지자 주장한 것이 성인지감수성이고 그러한여성성에 의해 여성을 성적 대상으로 바라보거나 여성 성 상품화를 잘못되었다 주장한 것이다. 성적 대상화가 성적 도구화라 주장하는데 성적 대상과 성적 도구는 전혀 다르다. 성적 대상은 인간이 인간을 성적으로 여기며 인간이 인간을 사랑한다는 것이고 성적 도구는 인간을도구로 여기는 것이다. 성적 대상으로 본다고 성적 도구화가 되는 것이 아니란 말이다. 반면 모든 인간은 존엄하다는 명제 하에 인간이 아닌 창작물과 인형은 도구화가 되는 것이 정상이다. 합리적 기준도 없이 멋대로 불쾌하다 주장하는 것에 휘둘려서는 안 된다. 그냥 이들은 감정적으로 이익을 주장할 뿐이다. 남성을 성적 대상으로 바라보거나 남성 성 상품화는 잘못되었다 주장하지 않는 것을 떠올려보자. 합리적 기준이 없다. 전형적인 가부장제 여성성을 명제로 그러한 주장을 하고 있다. 현재 신세대 여성이 여성 인권 운동이란 명분으로 이용하는 이타주의의 입장에서 과한 이익을 당연하게 여기면서 감사 마음이 적어지고 성인지감수성이란이름으로 가부장제 여성성을 세뇌 당하여 그런 여성성으로 살아가면서 과한 피해 의식을 갖게 되었다. 해외에서도 이런 여성주의자가 있는 것은 그들도 가부장제 여성성을 지키는 것이 여성의 이익으로여겼기 때문이다.

가부장제의 본질적인 특성을 파악하고 그 특성에 해당하는 것을 모두 비판해야지, 무슨 여성에 이익이 되는 가부장제 특성은 수용하고 손해가 되는 가부장제 특성은 거부하니 제대로될 리가 없다. 여성은 가부장제 여성성에서 벗어나야 한다. 인간이 인간에게 성적 대상이 되는 것이나 성 상품화와 같이 성적인 것은 매우 당연한 것이므로그런 것에 의해 불쾌할 이유가 없다. 탈코르셋도 마찬가지다. 인간이 인간에게 사랑 받기 위해 꾸미는 것은 모든 인간이 행하는 것으로 딱히 여성만 그런 것이 아니다. 여성이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주장했다면 탈코르셋이 나오는 것이 아닌 남녀 모두 서로에게 사랑 받기위해 꾸미자고 주장했을 것이다. 그걸 근거로 다른 여성이 꾸미는 것을 막는 것이 바로 자유권 침해다. 지금 여성 인권 운동은 집단주의 체제기 때문에 여성이 꾸미거나 남성과 가까이 지내는 여성은 공격대상이 되고 있다고 한다. 단순한 이익 집단일 뿐이다. 여성이 아이를 낳아주는 것이라면서 그에 대한 이익을 사회에 요구하기도 하는데, 그 자체가 본인을 아이 낳는 도구로 여기고 있는 것임에도 그걸 이해하지 못하고 이익을 요구하고있다. 애초에 여성 인권에 관심이 없이 여성인 본인의 이익만 주장하고있었기 때문에 그런 태도가 나온다.

이성애와 성을 죄악시하는 풍조에 휘말린 여성들이 이성과 성에 긍정적 인식을 갖지 못하여 꾸미지않고 결혼하지 않는 상황에서, 여성의 이익만을 주장하는 여성주의에 동조하여 그것을 본인의 이익으로 만들기 위해 탈코르셋이나 비혼을 주장하고 있다. 그런 것은 개인의 자유지만 그것을 사회가 권장해서는 안 된다. 그러면 어떻게 사회 구조가 유지될 수가 있는가?

여성 인권은 일부 여성의 트라우마를 정당화하고 일반화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연하는 연상의 장난감이 아니다. 멋대로 신세대 여성에게 본인의 불쾌한 삶을 세뇌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신분제 관념으로 고통 받던 이들이 신분제 관념을 신세대에게 세뇌하는 것이나 장유유서 관념으로고통 받던 이들이 장유유서 관념을 신세대에게 세뇌하여 고통 받게 하는 것과 같이 어리석은 일이다. 본인의 낡은 가치관이 반드시 옳다는 착각에서 벗어나야 한다. 인도네시아에서 혼전 성관계를 형벌로 처벌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건 낡은 가치관에 의해 혼전 순결을 지키는 것이 올바르다 여겼기 때문이다. 낡은 가치관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개인주의 체제에서 개인의 자유를 중심으로 윤리를 바라봐야 한다. 낡은 가치관보다 개인의 자유를 우선으로 생각하면 그런 낡은 가치관에서 벗어날 수 있다.

성매매 여성에 대한 지원 또한 여성만의 이익과 가부장제 여성성이라는 낡은 가치관이 만든 현상이다. 여성은 성적 수치심이 강하고 의지가 약하므로 성매매는 타인의 강요로만 이루어진다 생각하기 때문이다. 가부장제 여성성으로 현상을 보니 현상의 본질을 볼 수가 없다. 성매매는 본인의 자유 의지라면 아무런 문제가 없다. 노동과 성은 착취가 일어나지 않도록 본인의 노동력 임대 상품과 성 임대 상품을 반드시 본인이소유하기만 하면 된다. 그러면 노동력 상품과 성 상품은 거래되어도 좋다. 성매매를 부정적으로 본다면 논리적으로 노동매매도 부정적으로 바라봐야 한다. 물론 그럴 수가 없다. 성매매를 부정적으로 바라본 것은 여성을 집단과 남성의 도구로 여겼던 가부장제 여성성 때문이다. 자유주의 여성성이라면 개인의 자유이므로 부정적으로 볼 이유가 없다. 여성 개인의 매도 의지를 무시하는 것이 여성 인권으로 이어질 수가 없다. 성에 관련된 범죄는 개인의 자유권을 침해하는 것이 아니라면 성립되지 않는다. 개인의 자유권을 침해하지 않음에도 성매매를 죄로 여기는 것은 가부장제 여성성으로 나타난 잘못된성관념에 의한 것이다. 성이 매매되면서 성 매도자는 수익을 얻어서 좋고 성 매수자는쾌락을 얻어서 좋다. 서로 공정한 거래를 했다면 막는 것보다 허용하는 것이 사회적공익이 크다. 개인주의 체제에서는 개인의 권리가 가장 크기에 사회와 체제구조 유지에 나쁜 영향을 끼치기는커녕 좋은 영향을 끼치는 성매매는 허용하는 것이 합당하다 할 수 있다.

임산부와 여성은 다른 존재다. 임산부에게 특별한 복지가 제공되는 것은 타당하나 여성이 임신할 가능성이 있는 것만으로 남성보다많은 복지를 받는 것은 부당하다. 임산은 출산이 실현되어 육아를 할 때 사회에 이로운 것이지 실현 가능성만으로 사회에 이로운 것은 아니다. 그런 관점에서 만약 여성 징병을 하게 된다면 임산부는 면제되고 나머지 여성은 징병되어야 할 것이다. 이런 제도가 여성에게 임신을 강요하는 것과 같다고 착각할 수 있어 말해둔다. 만약 남성이 임신할 수 있다면 남성 또한 면제되는 것이 마땅하다. 단지 현재 일반적으로 여성만 가능하니까 여성 임산부만 면제될 뿐이다. 임산부의 징병 면제는 남녀 차별이 아니라 사회를 이롭게 한 임산부 특혜다. 임신할 수 있는 여성은 그 특혜로 임신을 강요당하는 것이 아니라 특혜를 얻을 수 있는 선택지가있는 것뿐이다. 남성도 산업 기능 요원으로 병역 대체가 가능한데 그것이있다 하여 모든 남성에게 산업 기능 요원을 강요하는 것이 아닌 것과 같다. 일부 여성이 어떤 형태로든 조금이라도 손해를 볼 것 같으면 여성 차별이나 혐오라 말하며 비논리적인주장을 하는데, 그런 주장을 할 수도 있으나 다른 사람들은 비논리적인 주장을수용해서는 안 된다. 그런 것을 수용하니까 국민에 의한 권력 남용이 발생하는것이다. 

생리와 출산에 대한 혜택은 명백한 여성 이권이다. 남성과 공통적인 기준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생리와 출산은 종을 유지하는데 현재 필수적인 것으로 그런 혜택은 사회에 도움이 되는 이권이다. 그런 이권을 존중할 필요가 있다. 그런 관점에서 군 복무 또한 마찬가지다. 본래 같은 국민으로서 여성 또한 군복무를 해야 마땅하지만 현재로서는 남성만 하고 있음으로 군복무혜택은 이권이 된다. 그러나 국가 유지를 위해 군복무는 대부분 필수이므로 사회에도움이 되는 이권이다. 그런 경우에는 그런 이권을 존중할 필요가 있다. 군 복무 가산점은 실제 능력과 무관한 평가 기준에 해당하기에 그것은 부당하나 군복무에 대한 혜택, 즉 금전적 혜택이나 교통이나 세금 할인 등의 혜택은 타당하다. 인권과 이권을 구분하고, 사회에 도움이 되는 이권과 그렇지 않은 이권을 구분하고, 그렇지 않은 이권 중에서 타당한가 타당하지 않은가를 구분하는 등 분류를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

인권 운동 자체가 대부분 운동자 본인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인간상을 실현하기 위한 활동이지 실제로합리적 기준을 통한 대상을 위한 인권 운동이 아니다. 그렇기에 가부장제 인간상에 맞는 수동적이고 의지가 약한 여성성에 맞춰 여성의 징병을 금지하고 여성의 야근을 막자는 여성 차별적인 주장을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 여성 차별적 주장이 여성에게 이익이 될 수 있다는이유 하나로 여성주의자가 동조하기도 하고 있으니 황당하기 짝이 없다. 여성을 장애인 취급을 해도 이익이 되면 그게 여성의 인권이라 주장하거나 차별이라 반대하지 않는 실정이다. 참담하다.

일상 속에서 친근한 피부를 가진 이들을 우대하고 그렇지 않은 사람을 천대한 이들은 인종 차별주의자로낙인 찍혀 그런 낡은 관념에서 벗어나고자 노력했다 역사 속에서 오랫동안 가부장제에서 살며 남성을 우대하고 여성을 천대한 이들은 성별 차별주의자로낙인 찍혀 그런 낡은 관념에서 벗어나고자 노력했다. 이제는 여성 인권을 주장하는 이들도 가부장제 여성성이라는 낡은 관념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여성성과 합리적 이익을 추구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셋째, 아동. 아동 인권 운동은 모든 인간을 대상으로 한 합리적 기준으로이익을 주장해야 인권 운동이 된다. [아동_법률은 아동 복지법에서, 18세 미만의 사람을 이르는 말을 뜻한다.] 미성년의 인권을 주장할 것이라면 성년과 같은 기준으로 접근해야 한다. 만약 이권이 아닌 인권 운동을 했다면 이치를 통해 합리적이고 공정한 이익을 얻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미성년과 성년과 같이 모든 인간을 대상으로 한 합리적 기준은 무엇인가? 바로 지성인이다. 미성년은 성년과 같은 사리 분별이 성장 시기마다 점점 가능해진다. 지성을 기준으로 가능해지는 시기에 따라 권리와 의무가 주어지면 평등해질 수 있다. 그렇게 미성년이 성년과 대등한 인간이 되었다면 미성년이 대응할 수 있는 것에 과도한 간섭을 하는것으로 권리를 침해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지금 미성년에 대한 인권 침해는 합리적 기준 없이 장유유서를 근거로 미성년을 어리석게 여기고 권리를 빼앗고 보호만 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고있다. 미성년이 대응 가능한 것을 보호하겠다며 통제하는 것은 지배에불과하다. 아동 인권은 지성인이라는 기준으로 인권을 주장해야 한다.

만약 미성년이 성년과 같은 지성인이라 여겼다면 사리 분별이 가능해지는 시기에 따라 권리와 의무를주었을 것이다. 그렇게 하여 미성년과 성년이 대등하게 되어 지성에 따라평등하게 권리와 의무를 다했다면 미성년은 바르게 성장하여 사회적 혼란을 일으키지 않아 성년과 마찰이 적었을 것이다. 세 가지 권리로 접근해보자.

 

첫째, 식사. 아기 시기에는 식사를 가리기가 어렵기에 식사에 대한 자유권을침해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식사를 가릴 수 있게 되는 초등학교 저학년만 되도식사에 대한 자유권을 침해해서는 안 된다. 먹기 싫은 음식을 강요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미성년의 미각과 성년의 미각에 차이가 있어 이해하기 어려울 수 있는데 미성년은 감각이 예민하여 쓴 맛이나 매운 맛 등을 강하게 느끼기에강한 맛을 받아드리기 어려울 수 있다. 미성년이 성년이 되면 못 먹던 음식도 감각이 바뀌면서 자연스럽게 먹을 수 있게 된다. 되려 못 먹는 음식을 강요하면 불쾌한 기억이 새겨져 커서도 못 먹게 될 뿐이다. 필수 영양분을 고려하여 부족한 영양분은 영양제로 보충하면 된다. 인류는 그만한 의학 지식을 갖추고 있다. 미성년과 성년의 감각 차이를 이해해야 한다. 채식주의 강요는 이보다 더한 자유권 침해로 아동 학대에 해당한다.

 

둘째, 성. 초등학교 저학년 시기에는 성기능이 작동하지 않아 성에 대한자유권을 침해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성기능이 작동하게 되는 2차 성징이 시작하는 초등학교 고학년에서 중학생 저학년부터는 성에 대한 자유권을 침해해서는 안 된다. 성기능이 작동하는데 그것을 다룰 권리를 주지 않는 것은 단순한 지배에 불과하며 인권 침해에 해당한다. 성기능이 작동하는 모든 일반 미성년에게 성적 자기결정권을 주는 것이 바로 아동 인권이다. 본인이 본인의 자유 의지로 선택할 수 있게 하고 그에 따른 충분한 성교육을 하면 된다. N번방 사건을 근거로 아동이 사리 분별이 불가능하다면서 모든 중학생에게 성년과의 성관계에 대한성적 자기결정권을 빼앗았는데, 일부 사건을 근거로 모든 중학생을 일반화하여 그런 식으로 권리를 빼앗는 것은 심각한 인권 침해에 해당한다. 아동의 권리는 성인의 도덕적 만족감을 위해서 침해되어야 할 권리가 아니다. N번방 방지법은 물론이고 가부장제 아동상을 근거로 만들어진 아동 청소년 보호법도 아동의 권리를침해하고 아동에게 잘못된 성관념을 주입하는 악법에 해당한다. 사회, 관념, 체제, 유지, 종 등 아무것도 고려하지 않고 그냥 낡은 성관념 하나에매달려 아동에게 잘못된 성관념을 주입해서는 안 된다. 아동은 성에 친숙해져야 한다. 그래야 자연스럽게 이성과 연애하고 결혼하고 출산하면서 사회 구조를 유지한다. 인간은 성기능이 작동할 때부터 적극적으로 성을 접하고 성관계를 맺어야 한다. 그것이 개인주의 체제에서 개인의 권리를 보장하는 사회에서의 올바른 성관념이다.

 

셋째, 선거. 초등학교 저학년 시기와 같이 사춘기 전에는 자아 형성이마무리 되지 않아 선거에 대한 권리를 침해하게 된다. 그러나 사회와 사회 계약을 시작해야 할 초등학교 고학년이나 중학생부터는 선거에 대한 주권을 침해할 이유가 없다. 최소한 중학생부터 교육 관련 선거는 해야 한다. 본인과 직접적 관련이 있는 교육감 선거를 중학생과 고등학생이 선거권을 행사할 수 없는 것 자체가비정상적이다. 선거권이 주어지지 않는 까닭이 학생의 지식이나 지능에 의해정당한 권리 행사가 어렵다 말할 것이라면 논리적으로 저학력이나 지적 장애도 선거할 권리가 없다는 결론이 나온다. 중학생이 선거를 못하는 것은 비논리적이다. 설령 중학생과 고등학생 중에 어리석은 학생이 있다 하더라도 선거권은 주어져야 한다. 민주주의는 모든 인간에게 주권이 있는 것이므로 주권을 근거로 한 선거권은 현명함과 어리석음은관계 없다. 민주주의는 주어진 권력을 남용하지 않으면 된다. 주관적 기준으로 합리적 기준을 깨면 체제가 쓰레기가 된다. 모든 인간에게 주권이 있다는 것을 전제하여 모든 인간이 선거를 하면 좋겠지만 아기에게 투표를바라는 것은 어려우므로 모든 인간이 아닌 가능한 많은 인간이 선거권을 행사할 수 있어야 한다. 따라서 사춘기인 14살 정도에 사회 계약을 맺고, 사회 계약을 맺은 모든 인간에게 선거권이 있다는 것을 선거권의 합리적 기준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러지 않았다. 성년과 대등한 기준이 아닌 천대 받는 미성년의 위치에서 일부 아동 인권 운동을 하는 운동자의인식에 맞는 아동의 권리만 주장했다. 그렇기에 단순한 이권 운동에 불과했다. 아동 인권 운동은 보다 더 심각한 것이 아동이 아닌 인간이 아동의 인권을 주장하면서 이익을 얻기 때문이다. 여성 중학생들이 어떤 남성 교사에게 성추행을 당했다고 거짓말로 한 것에 의해 남성 교사가 자살한사건이 있다. 여학생들은 해당 교사가 야간 자습 시간에 중학생 1학년만 귀가시켰다 오해하며 부당한 손해를 보고 있다고 여기면서 그에 대한 불만으로 거짓 진술서를쓴 것이다. 그것이 경찰서에 신고 접수되었고, 경찰서에서 여학생 모두가 성추행이 없었다고 진술하는 것으로 진술을 번복하여 경찰에서는 혐의 없음으로종결했다. 그러나 해당 학교 지역 교육청 학생 인권 센터에서는 혐의없음이 확인되었어도 해당 교사에 대한 징계를 강행했다. 인권 센터의 조사를 받은 해당 교사는, 혐의가 없었다면 여학생들이 거짓을 한 것이므로 여학생들이 처벌 받을 수 있다는 인권 센터의 협박에 의해 혐의를 인정하게 되었다. 해당 교사는 여학생들의 진술로 결백이 증명될 거라 기대했지만 2차 가해를 명분으로 여학생을 조사하지 않고 해당 교사에 대한 감시를 강화하겠다는 일방적인 연락을받고 결백을 증명할 방법이 없게 되자 충격을 받고 자살했다. 이 과정에서 여학생들은 일관적으로 해당 교사가 무고하다며 탄원서를 작성하여 보냈으나 인권 센터는 여학생들의 의견을 모두 무시했다. 학생 인권 센터에서 학생의 의견을 무시했다는 것이다. 얼마나 미성년을 머저리로 보면 이런 현상이 나타나는가? 애초에 지금 미성년 인권은 대부분 미성년의 인권이 아닌 성년의 주관적인 가치관에 부합하는 미성년으로만들기 위한 이권 주장에 불과하다. 경제 성장과 윤리의 상관관계에 따라 경제가 성장하면서 더욱 더 본인이 생각하는 아동상을 아동 인권을 명분으로 아동에게 세뇌하고 사회에 강요하면서아동의 권리는 보다 더 침해되고 있는 상황이다.

아동 인권을 주장한 이들이 아동이 인간으로서의 보편적 권리를 주장한 것이 아니라 본인의 가치관에맞는 아동을 만들기 위한 주장을 하는 바람에 아동은 정당한 권리를 침해 당하면서 보호라는 이름의 지배를 받고 있다. 권리를 침해 당한 아동은 음식을 고를 자유나 성적 자기결정권이나 선거권과 같은 기본적인 권리도주어지지 않고 온갖 감시와 검열 속에서 불행하게 살아가고 있다. 권리를 침해 당한 아동은 보호자의 소유물과 같았다. 차별을 윤리로 만든 장유유서를 근거로 연상인 성년이 연하인 미성년을 지배하고 수기치인을 근거로 맹목적을 교육열을 가지고 아동에게 학습을강요하는 것으로 아동을 죽음으로 몰고 가기도 하고 성 죄악시로 나타난 정조 관념을 근거로 모든 성에 관련된 정보를 막아 아동이 성 지식을 갖지못하거나 성 문화를 즐기지 못하면서 성을 부정적으로 여기게 만든 것으로 성과 연애와 결혼과 출산 등을 무의식적으로 꺼려하게 만들었다. 아동은 보호자의 소유물과도 같았기에 보호자의 마음에 따라 쉽게 살해당하기도 하고 가장이 주도한가족의 집단 자살에 강제로 동참되기도 했다. 그런 것을 본인이 죽은 뒤 아동의 불행을 걱정해서라는 궤변으로 합리화하고 있으나 그것이야말로 아동을 소유물로 여긴 것과 다르지 않았다. 그런 선택은 아동이 스스로 결정해야 하고 그럴 수 있을 정도로 교육해야 한다. 이런 집단 자살 강제 동참은 임금이나 귀족이 죽었을 때 살아있는 아내나 신하나 종을 함께 장사지내는 순장과 다를 바 없을 정도로 미개하다. 그런 미개하기 짝이 없는 행동을 만든 낡은 가치관을 근거로 아동의 권리를 주장하고 있으니 아동의 권리가 심각하게 침해 당하고 있다. 더 이상 아동을 지배해서는 안 된다.

일부 아동은 과한 보호를 악용하여 학교 붕괴를 유도하거나 폭력을 휘두르고 있음에도 마땅한 대처도못하고 있다. 초등학생 고학년과 중학생이 사리 분별이 불가능할 정도로어리석어 심신 미약과 비슷하다며 성적 자기결정권을 주지 않아놓고 그런 이들을 과하게 처벌하자는 주장은 비논리가 되어 논리적인 대응 자체가 어렵다. 만약 이들의 범죄를 지금보다 과하게 처벌하면 범죄를 저지를 수 있을 정도로 사리 분별이 가능하다는논리가 되어 성적 자기결정권을 빼앗을 근거가 사라지게 된다. 그러면 그것은 단순한 아동의 권리 침해에 해당하게 된다. 그렇기에 대처를 하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교육을 통해 아동이 사리 분별이 가능하게 하는 것으로 성적 자기결정권을 얻고 사회적 의무에 해당하는 범법에 따른 처벌도 수용하게하면 된다.

촉법소년의 범죄가 심각해지면서 많은 사람들은 아동이 과거보다 빠르게 성장했기에 변별력이 커졌으므로촉법소년법 대상의 연령을 바꿔야 한다고 주장했다. 인권 위원회는 아동이 과거보다 빠르게 성장했다 하더라도 변별력이 커졌다는 과학적 근거는 없다고 반론했다. 분명 아동의 성장이 빨라져 변별력이 커진 것은 아니므로 타당한 반론이다. 그러나 아동의 성장이 빨라져 변별력이 커진 것이 아니라 아동이 접하는 정보양이 늘어나서 변별력이커졌다. 과거와 달리 인터넷이 있어 아동이 접하는 정보양이 엄청나게늘어남에 따라 과거와 다르게 변별력이 커진 것이다. 미성년이 성년보다 바둑을 잘 둘 수 있다. 본래 아동은 어리석지 않다. 아동이 어리석다는 선입견은 지금까지 아동에게 가는 정보를 통제하여 미숙하게 자라게 했기 때문이다. 성인도 정보 통제를 당하면 변별력을 키울 수 없어 사리 분별이 어려워 쉽게 이용당할 수 있다. 사실상 사춘기 무렵의 미성년과 성년의 지성은 지식과 경험 외엔 거의 차이가 없다. 그러다가 인터넷으로 정보 통제를 할 수 없게 되자 정상적으로 성장하면서 미숙했던 과거와 다른정상적인 변별력을 갖추게 됨에 따라 과거보다 변별력이 커진 것이다. 그런데 체계적으로 정보를 수집한 것이 아닌 인터넷으로 무작위로 정보를 수집함에 따라 충동적이고 제멋대로 성장하여 곧잘 범죄에 빠지게 되었다. 아동이 수집하는 정보양의 증가했음에도 교육 기관에서 정보 통제 받은 아동을 기준으로 교육했기때문에 그런 체계적이지 못한 성장을 하게 된 것이다.

본래 교육 대상이 바뀌면 교육도 바뀌어야 하는데 아동이 어리석다는 선입견으로 정보 통제를 전제를한 교육을 하면서 아동이 미숙하길 바라니 인터넷을 통해 삐뚤어진 성숙이 일어나기도 하는 것이다. 낡은 가치관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이런 현상이 나온다. 얼마나 시대 변화에 둔감한 것인가?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면 도태되는 것이 자연의 법칙이다. 교육도 변화에 적응해야 한다. 초등학교 고학년과 중학교 저학년과 같은 사춘기 시기를 겪는 아동에게 사회 계약을 통해 사회에대한 전반적인 권리와 의무를 이해하게 해야 한다. 그래야 삐뚤어진 성숙을 막을 수 있다. 그와 동시에 1년 빠르게 입학하는 학제 개편도 고려해 볼만 하다. 다수는 아동을 어리석게만 보고 1년 빠르게 입학하면 적응하기 어려울 것이라 말하는데, 지금도 초등학교 1학년은 유치원생과 다르지 않는 교육 과정을 겪고 있다. 빠르게 입학하면 빠르게 입학한대로 그 학생에 맞춰 교육하면 된다. 1년 빠르게 입학하면서 유치원 인구수 감소에 의한 손해로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면 반대할 이유가없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학생의 자유권이다. 지금 대부분 학생은 쉴새 없이 수능을 목적으로 공부만 하다가 성년을 맞이한다. 본인 자아에 대한 탐구, 개인과 사회에 대한 관계, 인간의 권리와 의무 등을 생각할 시간도 없다. 그냥 기계적으로 공부만 하다 성년이 되면서도 인터넷에 의해 무작위로 성숙하게 되니 삐뚤어진 결과가나오는 일이 많다. 그런 상황에서 만약 1년 빠르게 입학하면 1년 휴학을 하더라도 종전과 같은 시기에 졸업할 수 있다. 인간은 본인을 기준으로 바라본다. 동일한 시기에 졸업하면 1년 빠르게 입학한 뒤에 1년 휴학을 하더라도 본인과 동일한 시기에 졸업을 했다고 여기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새로운 학생들은 1년 휴학을 해도 지장이 없는 사회적 풍토가 마련되면서 쉴새 없이 공부만 하는 학생이 중간에 본인을위한 시간을 가질 수가 있다. 특히 사람은 개인마다 성장 시기가 다르고 호기심이 생기거나 학구열이 생기는 시기가 다를 수가 있다. 사람마다 개성이 다른데 같은 시기에 입학하여 같은 시기에 졸업하는 것이 당연한 풍조야말로 잘못된것이었다. 휴학이 자유롭다면 학생이 학생 본인에 맞춘 교육을 선택할수 있게 된다. 가령 중학교 교육은 쉽게 따라가나 고등학교 교육에서 정체된학생이 있을 수 있다. 그러면 휴학을 통해 본인을 성장시키고 교육을 따라갈 수있는 힘을 길러 다시 교육을 받는 선택을 본인이 할 수 있게 된다. 학교의 집단 괴롭힘도 마찬가지다. 1년 휴학이 자유로운 풍조가 되면 휴학하면서 본인이 성장할 여유를 가지고 다시 교육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사춘기 시기 어떤 사건으로 세상에 절망하여 자포자기하는 학생이 있다면 1년 정도 휴학을 하고 세상을 돌아다니며 세상을 접한다면 절망에서 벗어나 학업에 열중하게 될 동기를찾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게 학습 동기를 찾으면 자발적으로 학습을 할 수 있게될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1년 빨리 입학하는 학제 개편은 학생들에게 1년을 자유롭게 보낼 수 있는 비장의 카드를 줄 수 있다. 그렇게 하여 빠르게 성장하는 것으로 자유 의지를 가지고 개인의 의사로 살아가며 권리와 의무를추구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단순히 빨리 입학하면 학생들이 적응하기 어렵지 않을까 생각하며 학제 개편에 반대하는 것은 고정 관념에 얽매여 학생의 입장을 고려하지 않았기때문이다.

 

 

일반적인 인권 운동은 이권 운동이나 마찬가지였기에 운동자가 생각하는 이익만을 주장하면서도 인권을명분으로 그에 대한 근거도 제대로 제시하지 않으면서 이익을 얻고 있다. 세계 인권 선언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인권의 범위가 굉장히 포괄적이고 모호하다. 그것을 이용하여 이권 또한 인권으로 포장하여 강제적으로 이익을 얻으면서 상황에 따라 개인의 권리를부당하게 침해하고 있다. 인권과 이권에는 강제력의 차이가 있음에도 이권을 인권으로여기며 일부 여론과 권력자가 그걸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바람에 불합리한 사회가 되어 버렸다. 현재 이런 문제는 자유롭게 권리를 주장한 측이 아니라 무비판적으로 수용한 측이 만들었다 봐야한다. 개인주의 체제에서 모든 개인은 자유롭게 주장할 권리가 있으나그런 것은 인권인가 이권인가 구분하고 이권의 경우 타당해야만 수용되게 되는데, 인권이란 명분에 현혹된 이들이 무비판적으로 수용해버리는 바람에 이권이 인권과 같이 강제로 수용되는것과 같은 현상이 나타나면서 이권에 의한 불합리한 사회가 된 것이기 때문이다.

다양한 이권 운동 중에 특히 대상을 차별하던 가부장제 시대의 인간상을 근거로 인권을 주장하면서이익을 얻는 것은 너무나도 천박하다. 노동자와 여성과 아동을 차별하던 관념을 가지고 대상의 인권을 주장하는 것은 더 이상 보기 힘들 정도다. 인권 운동이 이권 운동에 불과했기에 사회 문제는 해결하지 못하면서도 부당한 이익 요구로 사회문제는 더욱 더 늘리고 있을 뿐이다.

인권은 절대 권력이 아니다. 요즘 인권으로 사회 문제가 발생하는 것은 인권의 탈을 쓴 이권이 권력을 남용하면서 이익을 얻으면서도인권을 명분으로 그에 대한 견제를 받지 않기 때문이다. 이권을 인권이라 말하며 무비판적 수용을 통해 이익을 강제하는 것이야말로 권력 남용에 해당하게 된다. 강제인 이상 권력이고 부당한 이상 권력 남용이다. 논리적인 비판을 하면 혐오라거나 감수성이 부족하다느니 비논리적인 대응을 하며 무비판적인 수용만강요하고 있다. 이제 모두 올바른 인권 운동을 해야 한다.

노동자는 자본가와 같은 상인이 되어 차별적인 종속이 아닌 평등한 상거래를 하는 것이 인권이고여성은 남성과 같은 인간이 되어 사회 진출과 기회의 평등을 누리고 병역의 의무를 다하는 것이 인권이고 아동인 미성년은 성년과 같은 지성인으로 사리분별이나 육체적 기능이 작동하는 시기에 권리를 갖고 그에 따른 의무를 지는 것이 인권이다. 노동자는 자본가에게 종속되지 않아 노동 안정이 되지 않는 것이 막심한 손해처럼 느껴질 수 있는데본래 그것이 노동자와 자본가가 평등할 수 있는 바른길이고, 여성이 남성과 같은 병역 의무를 다하는 것이 막심한 손해처럼 느껴질 수 있는데 본래 그것이 평등으로 여성에게 총기 사용법을 익혀 무력을얻고 살아남는 기술을 습득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는 바른길이고, 미성년이 성년과 같은 의무를 다하는 것이 막심한 손해처럼 느껴질 수 있는데 본래 그것이 미성년과 성년이 최대한 평등할 수 있으며 아동의건전한 성장으로 현명한 인간이 되게 하는 바른길이다. 무엇이 인권인지 심사숙고하길 바라겠다.

 

 

인권 운동이 올바른 인권 운동이 되거나 부당한 이권 운동을 비판하기 위해서는 객관적이고 논리적인의견이 필요하다. 객관과 논리에 대해 알아보겠다.

[객관은 자기와의 관계에서 벗어나 제삼자의 입장에서 사물을보거나 생각함을 뜻한다.] 보통 객관은 제삼자의 선입견과 편견이 없는 일반적인 의견을뜻하나 실상 제삼자라 하더라도 각자 의견이 다를 수 있기 때문에 일반 의견이 되기 위해서는 제삼자의 공통 인식이라 하는 것이 알맞다. 현재 사전적 정의는 제삼자라면 모든 인간이 비슷한 의견을 가질 것이라는 집단주의 관념으로 나타난인식일 뿐이다. 객관은 제삼자의 공통 인식이므로 모든 주관이 객관이 아닌것은 아니다. 어떤 개인의 주관적 의견이 제삼자의 공통 인식이 될 수있을 정도로 논리적이라면 그 의견 또한 객관적이라 할 수 있다. 객관은 제삼자의 공통 인식이기에 공통 인식이 되기 쉬운 숫자야말로 보통 객관적이고 숫자를 활용한 통계 또한 객관적일 수 있다. 그렇기에 그걸 이용한 통계를 자주 쓰는데, 통계를 왜곡할 수 있으므로 맹신할 수는 없다. 특히 특정 답을 미리 내놓고 거기에 맞춰 해석할 때 위험하다 할 수 있다.

객관은 제삼자의 공통 인식일 뿐이지 진리는 아니다. [진리는 참된 이치. 또는 참된 도리를 뜻한다. 진리_철학1는 명제가 사실에 정확하게 들어맞음을 뜻한다. 또는 논리의 법칙에 모순되지 아니하는 바른 판단. 형식적 의미로 사유의 법칙에 맞는다는 의미에서의 사고의 정당함을 의미한다. 진리_철학2는 언제 어디서나 누구든지 승인할 수 있는 보편적인 법칙이나사실을 뜻한다.] 진리는 현상 자체인 일반 진리와 학문에서 통용되는 학문진리로 구분하는데 보통 진리_철학1에 해당하는 것이 인문 계열의 학문적 진리고 진리_철학2에 해당하는 것이 자연 계열의 학문적 진리다. 인문 계열의 학문적 진리는 논리를 통해 접근할 수 있다.

[논리는 말이나 글에서 사고나 추리 따위를 이치에 맞게 이끌어가는과정이나 원리를 뜻한다.][이치는 사물의 정당한 조리를 뜻한다. 또는 도리에 맞는 취지.][합리는 이론이나 이치에 합당함을 뜻한다.] 즉 논리를 통해 이치에 도달하면 합리적이게 된다. 논리적이라는 것은 이치에 도달할 수 있다고 여겨지는 것이고 합리적이라는 것은 이치에 합당하다는것이다. 이치를 알면 논리적이고 합리적일 수 있다.

이치는 본질부터 시작한다. [본질1은 본디부터 가지고 있는 사물 자체의 성질이나 모습을 뜻한다. 본질2은 사물이나 현상을 성립시키는 근본적인 성질을 뜻한다.]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이치에 도달하기 위한 첫걸음이다. 본질을 보기 위해서는 관점·관념·감각과 같이 인식의 차이를 파악하여 다양한 인식을 모으는 것이필요할 것이다. 본질을 잘못 보고 논리를 펴봐야 아무런 의미가 없다. 전제 자체가 잘못되었는데 어떻게 이치에 도달하는가?

이치는 사전적 정의를 기준으로 풀어나가 보겠다. [정당하다는 이치에 맞아 올바르고 마땅함을 뜻한다.][조리는 말이나 글 또는 일이나 행동에서 앞뒤가 들어맞고 체계가 서는 갈피를 뜻한다.][도리는 사람이 어떤 입장에서 마땅히 행하여야 할 바른길을 뜻한다.][취지는 어떤 일의 근본이 되는 목적이나 긴요한 뜻을 뜻한다.] 언어의 특성상 외래어가 많아 어원도 모르고 단어와 설명이 서로를 지칭하거나 정확한 의미를 내포하지않는 일도 있어 혼잡하다. 사회의 객관적 기준이라 할 수 있는 사전의 혼잡은 사회의 객관 상실로 이어질 수 있으므로 사전만 봐도 직관적으로 의미를 알 수 있도록 정리해야할 것이다.

조리를 알아보자. 앞뒤가 들어맞는다는 것은 모순을 말한다. [모순은 어떤 사실의 앞뒤, 또는 두 사실이 이치상 어긋나서 서로 맞지 않음을 이르는 말. 중국 초나라의 상인이 창과 방패를 팔면서 창은 어떤 방패로도 막지 못하는 창이라 하고 방패를 어떤 창으로도 뚫지 못하는 방패라 하여, 앞뒤가 맞지 않은 말을 하였다는 데서 유래한다.][체계는 일정한 원리에 따라서 낱낱의 부분이 짜임새 있게 조직되어 통일된 전체를 뜻한다.][갈피는 일이나 사물의 갈래가 구별되는 어름을 뜻한다.] 갈피는 갈피를 잡다 또는 갈피를 잡지 못하다 같이 낱낱을 구별하여 파악하는 것을 말한다. 정리하면 조리는 말이나 글 또는 일이나 행동에서 모순이 없는 일정한 원리에 따라서 낱낱의 부분짜임새 있게 조직되어 통일된 전체를 낱낱이 구별하여 파악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거기에 올바르고 마땅함을 의미하는 정당함을 붙이면 이치가 된다.

도리를 알아보자. [바른길은 정당한 길 또는 참된 도리인 것을 뜻한다.] [바르다1는 말이나 행동 따위가 사회적인 규범이나 사리에 어긋나지아니하고 들어맞음을 뜻한다. 바르다2는 사실과 어긋남 없음을 뜻한다.] [길은 사람이 삶을 살아가거나 사회가 발전해 가는 데에 지향하는 방향, 지침, 목적이나 전문 분야를 뜻한다.] [참되다는 진실하고 올바름을 뜻한다.] [참_철학은 이치 논리에서, 진릿값의 하나. 명제가 진리인 것을 이른다.] 규범이나 올바름은 생존이라는 보편 윤리 외에는 체제마다 기준이 달라지는 것과 같이 달라질 수 있으므로 체제를 기준으로 접근해야 한다. 가령 개인주의 체제를 기준으로 한다면 개인의 권리를 보장하는 것이 체제에 이로워 규범이나 올바르다할 수 있다. 참은 진리를 말한다. 정리하면 말이나 행동 따위를 사회와 체제의 기준에 이롭고 사실이나 진리에 어긋나지 않고 진실되게사람의 삶을 살아가거나 사회가 발전해야 하는 것을 말한다. 거기에 어떤 일의 근본이 되는 목적이나 긴요한 뜻을 말하는 취지를 붙이면 이치가 된다.

조리와 도리를 풀어 하나로 합치면 이치는 모순이 없고 체계적으로 파악할 수 있으며 특정 기준에이로운 사실이나 진리라 말할 수 있다. 모순이 없고 체계적으로 파악한다는 것은 이치의 모양을 의미하고 특정 기준에 이로운 사실이나 진리는 이치의 내용을 말한다. 이 이치로 논리를 정리해보자. 논리는 말이나 글에서 사고나 추리 따위를 모순이 없고 체계적으로 파악할 수 있으며 특정 기준에이로운 사실이나 진리로 이끌어가는 과정이나 원리를 말한다. 이것으로 논리를 알아보자.

 

하나, 모순이 없어야 논리다. 어떤 주장에 있어 모순이 발생하면 비논리가 된다. 가령 모든 인간은 존엄하다고 해놓고 특정 인간은 존엄하지 않다고 주장하면 모순되어 비논리가 된다.

둘, 체계적으로 파악할 수 있어야 논리다. 체계적이지 않는 주장은 비논리가 된다. 또한 쉽게 쓸 수 있음에도 일부로 복잡한 용어를 써서 체계적으로 파악하기 어렵게 한다면 비논리가 될 수 있다.

셋, 논점 이탈하지 않아야 논리다. 토론을 할 때 토론 목적과 어긋나는 논점을 이탈하는 것은 토론 참여자에 해로우므로 비논리가 된다. 가령 인신공격은 토론 목적과 괴리되어 토론 참여자에 해로우므로 비논리가 된다.

넷, 가치중립적인 올바름이 논리다. 보편적으로 나쁜 논의라 하더라도 토론 참여자에게 이로울 경우 특정 기준에 이로우므로 논리가 될 수 있다.

다섯, 대상의 이익을 보장해야 논리다. 대중을 대상으로 한다면 대중의 특정 기준에 부합하여 이익을 보장해야 논리가 된다. 인간의 이익을 전제하는 인본주의적인 주장이 보통 논리라 할 수 있고 인간의 이익을 전제하지 않는인본주의적이지 않는 주장이 보통 비논리라 할 수 있다.

여섯, 사실이어야만 논리다. 거짓은 궤변으로 비논리다.

일곱, 과학적 증명이 된 학문적 진리는 논리다. 과학적으로 증명된 학문적 진리는 논리가 되고 증명되지 못한 미신은 비논리가 된다. 선풍기를 틀고 자면 죽는다거나 여성은 정조를 지켜야 한다거나 남녀는 칠 세부터 떨어져 있어야한다거나 하는 주장은 명확한 미신이나 미신과 다를 바 없는 낡은 관념은 비논리다.

 

논리는 알고 있는 것뿐만 아니라 알지 못하는 것도 추론을 통해 논리적으로 접근할 수 있다. [추론_철학은 어떠한 판단을 근거로 삼아 다른 판단을 이끌어 냄을 뜻한다.] 추론 방법에는 현상을 종합해 결론을 내는 귀납법이나 이론을 토대로 현상에 대한 결론을 내는 연역법또는 대전제, 소전제, 결론으로 이어지는 삼단논법 등 다양하다. 형식이 있는 형식적 추론에만 얽매이면 논리가 경색될 수 있고 형식이 없는 비형식적 추론을 하다보면 논리가 비약될 수 있다. 추론에 추론을 거치다 보면 추론의 근거가 진리가 아니게 될 수 있는데 추론의 근간인 추론에 진리가 있다면 진리가 될 수도 있다.

비논리는 감성적 비논리와 이성적 비논리로 나뉜다. 감성적 비논리는 감정에 눈이 흐려지거나 흥분하거나 술에 취했을 때와 같이 사리 분별이 어려운상황을 일컫는다. 관념에 대한 이해로 접근하면 육체의 행동 준비에 자아가저항하지 못한 상황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이성적 비논리는 지식과 지혜가 부족하여 비논리적 주장을 하거나 지식과 지혜가 있어도 고정 관념에 영향을 받아 비논리적인 주장을 할 때를일컫는다.

논리는 논리와 논리가 충돌할 때 우선순위가 있는데 보통 특정 기준에 이로운 과학의 학문적 진리가우선된다. 그 외는 상황마다 다를 수 있다.

 

논리 안에 살고 있는 사람은 논리에 살고 논리에 죽어야 한다. 설령 본인 관념에 반하는 것이 있더라도 논리가 맞는다고 가리키면 그것은 맞는다고 판단해야 한다. 개개인의 도덕관념이나 사리사욕이나 이해관계보다 논리가 우선된다. 이치에 맞느냐 맞지 않느냐가 중요하다. 내가 지금 이런 주장을 할 수 있는 것도 관념에 얽매이지 않고 처음부터 본질을 보고 논리적으로생각했기 때문이다. 왕정과 같은 집단주의 체제에서는 금욕주의와 이타주의가 윤리가될 수 있지만 민주정과 같은 개인주의 체제에서는 욕망주의와 이기주의가 윤리가 될 수 있다. 그렇게 나는 과거의 관념을 죽이고 새로운 관념을 가졌다. 이런 논리를 타당한 논리 없이 본인이나 타인의 특정한 관념이나 사리사욕이나 이해관계로 부정하는일은 할 수 없다.

 

 

 

7. 법

 

법은 체계화되었으나 복지는 특정 이유로 체계화가 부족한 면이 있다. 그에 따라 복지와 같이 사회 구조 유지의 기본에 해당하는 법에 대해 알아보면서 복지가 가야 할바른길을 안내하겠다. 법과 복지는 사회 구조 유지의 기본이기에 강제력이 발생한다. 사회에 속한 개인에게 법과 복지가 강제로 집행되기에 개인의 자유권이 침해되게 되는데 생존주의적자유주의를 기초로 사회 구조 유지를 위한 강제력에 따를 것을 사회 계약을 통해 약속하면 그에 대한 강제력은 개인의 자유권을 침해하는 것이 아니게된다. 그러나 사회 구조 유지의 범위가 어디까지인지는 다소 의견차이가 있을 수 있다. 법과 복지를 통한 강제력이 어디까지 해당되어야 하는가? 거기에서 개인의 의사가 나오게 된다.

인간 육체 유지를 생각해보자. 식사와 수면과 배설과 성행위 또는 육체 보호와 육체 손상 치료 등과 같이 인간 육체 유지의 기본은강제력이 발생하게 된다. 본인이 원치 않더라도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육체 유지 방법은 개인의 의사로 결정된다. 식사는 한식으로 할 것인가 아니면 양식으로 할 것인가? 부족한 영양분은 비타민으로 보충할 것인가? 수면은 집에서 잘 것인가 아니면 호텔에서 잘 것인가? 어떤 자세로 언제 잘 것인가? 배설은 충동이 올 때 할 것인가 아니면 설사약으로 할 것인가? 배설하면서 스마트폰을 조작할 것인가? 성욕은 인간과 성관계로 풀 것인가 아니면 자위로 풀 것인가? 성관계나 자위 방법은 어떻게 할 것인가? 외적을 만나면 싸울 것인가 아니면 도망칠 것인가? 아프면 혼자서 치료할 것인가 아니면 병원에 갈 것인가?

인간 육체 유지에도 이렇게 다양한 방식이 존재하는데 사회는 이보다 훨씬 많은 다양한 방식이 복잡한기준과 절차로 존재한다. 특히 국가의 경우는 그렇다. [국가는 일정한 영토와 거기에 사는 사람들로 구성되고, 주권에 의한 하나의 통치 조직을 가지고 있는 사회 집단을 뜻한다. 국민·영토·주권의 삼요소를 필요로 한다.] 사회 중 일반적으로 가장 큰 인간 집단인 국가는 속한 인간의 수가 많아 의견 차이가 굉장히 커많은 다양한 방식이 존재하게 된다.

국가는 법과 복지뿐만 아니라 국가를 지키기 위한 국방과 국가를 운영하기 위한 정치와 국가가 살아가기위한 경제 같은 분야도 국가 구조 유지의 기본에 해당하게 된다. 국가는 크기가 커서 단순히 국가 구조 유지뿐만 아니라 분야 구조 유지를 하게 된다. 분야 구조의 요소 또한 인간이기에 각각 분야를 담당하는 행정부인 중앙 행정 기관의 행정 부처는복지를 통해 분야 구조를 유지한다. 그러면서 보건 복지부와 영역이 겹치는 일이 발생한다. 가령 농업인 복지는 농림 축산 식품부가 할 수 있으나 노인 농업인 복지는 보건 복지부가 할 수도 있다. 이렇듯 국가의 복지는 모든 분야에 속하여 정책에 포함되어 있다. 그에 따라 앞으로 법과 정책이라 쓰면 기본적으로 정책에 복지가 포함되어있음을 미리 알린다. 복지는 그렇게 각각 분야가 각자 분야의 복지를 담당하면서 법에 비해 체계적이지 못한다는 단점이있다. 법 또한 모든 분야에 영향을 끼치나 사법을 통해 권력으로부터독립되어 체계적인 것을 고려하면 복지 또한 모든 분야에 영향을 끼치나 특정 기관을 통해 권력으로부터 독립되어 체계적일 필요가 있다는 것을 알 수있게 된다. 이것이 복지가 법의 체계를 배울 점 중 하나다.

국가 구조 유지에 대해 생각해보자. 법과 정책을 비롯한 국가 구조 유지를 위한 다양한 제도와 정책은 국가 구조 유지에 필요하다면기본이 되어 강제력이 발생하게 된다. 사회에 속한 개인이 원치 않아도 따를 수밖에 없다. 개인의 자유를 보장하기 위해 그런 강제력에 해당하는 것을 사회 계약을 통해 합의했다는 가정으로 접근하게 된다. 그러나 구조 유지의 방법은 개인주의 체제인 국가에서는 개인의 의사로 결정된다. 국방과 정치와 경제 등은 국가 구조 유지를 위해 필요하므로 강제력에 해당한다. 그러나 어떤 방법으로 실행할 것인가는 개인의 의사가 반영되는 선거나 시장 등으로 결정된다. 선거에서 개인의 의사가 반영되어 선출된 정치가에 영향을 받아 법과 정책이 만들어져 사회와 분야의질서와 방향을 결정하고 시장에서 개인의 의사가 반영되어 가치 생산과 소비를 통한 재화와 부의 분배가 결정된다. 그 과정을 법과 정책을 통해 구조를 유지한다. 의사 반영에 실패한 인간은 각종 권리를 얻기 어려울 수가 있다. 개인의 의사와 다르게 법과 정책이 만들어질 수 있고 재화와 부의 분배를 받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면서 생존과 자유와 같은 권리를 얻지 못하여 죽거나 불행하여 국가 구조가 붕괴할 수 있는데, 그걸 법과 정책을 통해 생존과 자유를 보장하는 것으로 국가 구조 유지를 한다. 정리하면 법과 정책으로 개인의 의사를 반영할 수 있는 구조를 유지하고 법과 정책으로 개인의 의사를반영하지 못한 이들의 생존과 행복을 보장하는 것으로 구조를 유지한다.

 

법과 정책은 만들고 판단하여 집행한다는 유사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법과 정책의 만듦을 알아보자. 개인주의 체제인 국가는 개인의 의사가 기본이므로 국가 구조 유지를 위한 강제력의 방법도 개인의의사로 결정하게 된다. 그렇기에 법과 정책의 만듦은 개인의 의사가 반영될 수 있도록유권자가 투표를 통해 대표자를 선임하는 선거제를 통해 선출된 정치가가 선출직 공무원이 되어 임명직 공무원을 임명하는 것으로 주도하거나 관여하고있다. 개인이 직접 만드는 것이 아니기에 잘못된 법과 정책을 만들수가 있으므로 언제나 개인은 정치에 관심을 가지고 의견을 내야 한다. 만약 정치가가 개인의 자유권이나 주권이나 소유권 등을 침해하는 것과 같이 독단적으로 체제 구조 붕괴를 시도한다면 개인의 손으로 선출되었다하더라도 잘못되었다 할 수 있다. 그런 것은 정말 국가 구조 유지에 반드시 필요할 때에만 국민의 동의 하에 가능한 것이다. 이렇게 법과 정책의 만듦은 민주성을 띠고 있다.

법과 정책의 판단을 알아보자. 법과 정책의 판단은 전문성을 위해 선출직이나 임명직 공무원보다 판사나 관료와 같은 임용 공무원이주로 담당하고 있다. 법은 사법을 통해 권력으로부터 독립되어 법원과 같은 기관에서법을 전문으로 판단하고 있으나 복지를 비롯한 정책은 각 분야의 중앙 행정 기관에서 권력으로부터 독립되지 못한 채 독자적으로 판단하고 있다. 법은 법정에서 수많은 원고와 피고와 검사와 변호사 등이 각자에게 이로운 법적 판단을 위해 서로경쟁하면서 다양한 사례를 통한 경험으로 체계적으로 성장하는 반면 정책은 정책 예산을 바탕으로 정치가나 관료가 국민의 의견을 수렴하여 경쟁하면서체계적으로 성장하고 있다. 법과 정책의 결정적 차이는 개인의 의사다. 법에서는 개인이 직접 당사자가 되어 변호사를 선임하여 본인에게 이로운 법적 판단을 받기 위해 경쟁하는 것으로 선거와 시장에서 경쟁에 의한향상이 발생하는 것과 같이 법도 향상되지만 정책에서 개인은 간접 당사자가 되어 불합리하게 일부의 의견만 반영되거나 무시되기도 하면서 향상이 되지못하는 것으로 잘못된 정책을 반복할 수도 있다. 이것이 복지를 비롯한 정책이 법의 체계성을 배워야 할 점이다. 이렇게 법과 정책의 판단은 전문성을 띠고 있다.

법과 정책의 집행을 알아보자. 법과 정책의 집행은 국가 구조 유지를 위해 행정 기관에서 대부분 강제로 집행되고 있다. 법과 정책의 집행은 합리성을 위해 체제에 근거한 합리적 기준을 준수해야 한다. 가령 개인주의 체제에서는 개인의 자유권을 최대한 지키기 위해서 사회와 체제 구조 유지를 위한기본적인 강제력과 강제력이 없는 사전 예방과 강제력이 있는 사후 조치로 접근해야 한다. 그걸 근거로 법과 정책의 집행 또한 국가와 체제 구조 유지를 위한 기본적인 강제력과 사후 조치에대한 강제력 외에는 개인의 자유를 침해하여서는 안 될 것이다. 또한 개인의 자유권과 행정 기관의 효율성을 위해 개인이 대응할 수 있는 것은 최대한 개인이 대응하도록 해야 한다. 국가 구조 유지를 위해 복지가 부족한 인간에게 정확한 대응을 위한 선별 복지가 기본이나 행정절차상의효율을 위해 보편 복지 이후 세금으로 균형을 맞추는 것도 타당할 것이다. 이렇게 법과 정책의 집행은 강제성을 띠고 있다.

 

개인주의 체제인 국가의 국가 구조는 합리적 기준으로 균형을 이루어야 유지될 수 있다. 반면 개인의 의사를 기본으로 한 국가 원리는 합리적 기준으로 불균형해야 유지될 수 있다. 국가 내 제도인 선거나 시장의 구조는 균형적이어야 유지될 수 있고 선거나 시장의 원리는 불균형적이어야개인의 의사가 반영될 수 있다. 균형적으로 국가 구조를 유지하는 것으로 불균형한 국가 원리가 살아남는다. 개인주의 체제에 의해 국가 구조는 균형적이고 국가 원리는 불균형한 형태를 가지게 되었다.

국가 구조를 합리적 기준으로 균형을 이루어서 유지하기 위해 법과 정책 또한 합리성과 균형성이필요하게 된다. 이는 만듦과 판단과 집행 모두 적용되는 성질에 해당한다. 법과 정책의 판단으로 접근하여 알아보자.

법의 판단으로 접근해보자. 형사법은 사회 질서에 해로운 순서라는 합리적 기준으로 양형을 정해두고 있다. 일반적으로 죄질이 강할수록 사회에 해롭다. 절도보다 강간이 더 큰 형벌을 받고 강간보다 살인이 더 큰 형벌을 받는다. 그런데 만약 형사법의 판단에 의해 살인보다 절도가 높은 형량을 받으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러면 단순히 절도를 할 것이 아니라 살인을 저지르게 될 수도 있다. 법의 판단에서 합리적 기준에 의한 균형이 깨지자 죄가 커지면서 질서가 흔들린 것이다.

정책의 판단으로 접근해보자. 복지 정책은 국가 구조에 이로운 순서라는 합리적 기준으로 실행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가난할수록 복지가 효과적이어서 국가에 이롭다. 가난한 사람이 부유한 사람보다 더 큰 복지를 받는다. 그런데 만약 복지의 판단에 의해 비싼 아파트를 타는 이들이 가난한 이들을 위해 마련된 임대 아파트에서거주하는 것과 같이 부유한 사람이 더 큰 복지를 받게 되는 상황을 초래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가난한 사람은 생존할 수 없어 아사하거나 불행하여 자살하는 것으로 국가 구조의 요소가 사라지게된다. 복지의 판단에서 합리적 기준에 의한 균형이 깨지자 구조가흔들린 것이다.

본래 인간은 인간의 육체로 즐거움과 괴로움을 느끼기에 육체 이상의 행복과 불행을 느낄 수 없다. 지나치게 높은 쾌락은 뇌를 망가트려 인지할 수 없게 하고 지나치게 높은 고통은 신경을 망가트려인지할 수 없게 한다. 그러다 보니 다양한 행복이 인간을 보다 행복하게 하고 깊은불행이 인간을 재기할 수 없게 한다. 다양한 행복을 누리고 깊은 불행을 피하는 것이 인간에 이롭다. 국가도 마찬가지다. 지나치게 높은 행복은 인간의 향상 기능 작동을 막을 수 있고 지나치게 높은 불행은 인간의 교화 기능 작동을 막을 수 있다. 그러므로 국가 구조 유지를 위한 법과 정책에서 이미 처벌이 충분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과도한 형벌은부당하고 이미 충분히 행복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복지는 부당하게 된다. 다양한 사람이 행복을 누리고 깊은 불행을 겪는 사람이 없도록 해야 사회에 이롭다. 이런 이유로 법과 정책이 사회에 이롭기 위해 법은 형벌과 책임의 비례 원칙을 지켜야 하고 정책은불행과 지원의 비례 원칙을 지키는 것이 좋다.

법과 정책은 실효성과 타당성과 안정성이 필요하다. 실제로 효력을 발휘하는 법과 정책을 합리적 기준으로 균형을 갖춰 안정적으로 만들고 판단하고 집행한다면그럴 수가 있을 것이다. 그런데 안정적이어야 질서와 체계가 잡힐 수 있으나 그렇게만한다면 변화가 없어 발전하지 못할 수도 있다. 법과 정책은 안정성을 포기해서라도 시대의 흐름에 맞춰 따라가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시대의 흐름에 의해 국가가 도태될 수도 있다. 법은 과거의 판례를 참고하고 정책은 과거 정책을 참고하기에 과거에 머물러 있을 수도 있으나 인문계열은 철저하게 논리적이다. 논리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와 관계 없다. 논리적인 주장이라면 법과 정책 또한 미래지향적인 태도를 통해 미래로 갈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그에 따라 헌법 또한 시대의 흐름에 따라 빠르게 변화할 필요가 있다.

 

 

법에 대해 알아보자. 법은 헌법과 법률과 조약과 국제법과 명령과 조례와 규칙이 있다. 사전적 정의가 공통 인식에 부합하므로 정의를 적고 넘어가겠다. [헌법_법률은 국가 통치 체제의 기초에 관한 각종 근본 법규의총체를 뜻한다. 모든 국가의 법의 체계적 기초로서 국가의 조직, 구성 및 작용에 관한 근본법이며 다른 법률이나 명령으로써 변경할 수 없는 한 국가의 최고 법규이다.][법률_법률은 국회의 의결을 거쳐 대통령이 서명하고 공포함으로써 성립되는 국법을 뜻한다. 헌법의 다음 단계에 놓이며, 행정부의 명령이나 입법부와 사법부의 규칙 따위와 구별되어 명령·규칙이 법률에 위반되면 법원에서그 규칙이나 명령의 적용은 거부되고 법률이 헌법에 위반되면 법원은 그 법률의 적용을 거부한다.][조약_법률은 국가 간의 권리와 의무를 국가 간의 합의에 따라 법적 구속을 받도록 규정하는 행위를 뜻한다. 또는 그런 조문. 협약, 협정, 규약, 선언, 각서, 통첩, 의정서 따위가 있다.][국제법_법률은 공존공영의 생활을 도모하기 위하여, 국가 간의 협의에 따라 국가 간의 권리·의무에 대하여 규정한 국제 사회의 법률을 뜻한다.][명령_법률은 공법에서, 국회의 의결을 거치지 않고 행정 기관에 의하여 제정되는국가의 법령을 뜻한다. 국회의 의결을 거쳐 제정되는 법률에 상대되는 개념이다. 법률보다 하위의 법이며, 그 형태로는 대통령령, 총리령, 부령 따위가 있다.][조례_법률은 지방 자치 단체가 법령의 범위 안에서 지방 의회의의결을 거쳐 그 지방의 사무에 관하여 제정하는 법을 뜻한다.][규칙_법률은 헌법이나 법률에 입각하여 정립되는 제정법의 한 형식을뜻한다. 입법·사법·행정의 각 부에서 제정되며, 국회 인사 규칙·감사원 사무 처리 규칙·법원 사무 규칙 따위가 있다.]

헌법은 자유 민주주의나 법치주의 등과 같이 국가 체제를 기본 원리로 삼고 있고, 형법은 죄형 법정주의를 기초로 파생된 성문 법률주의, 소급효 금지의 원칙, 명확성의 원칙, 유추 해석 금지의 원칙, 자기 책임성의 원칙, 적정성의 원칙을 기본 원리로 삼고 있고, 민법은 소유권 공공복리의 원칙, 계약 공정의 원칙, 무과실 책임의 원칙을 기본 원리로 삼고 있다. 민법의 근대 원칙과 수정 원칙에 대해 간단히 집고 넘어가겠다.

본래 민법의 3대 원칙은 개인주의에 입각하여 개인의 자유를 최대한 보장하고자 했다. 그렇게 해서 나타난 것이 소유권 절대의 원칙과 계약 자유의 원칙과 자기 책임성의 원칙이다. 그러나 개인주의 체제는 개인의 의사를 기본으로 하기에 불균형한 결과가 나올 수밖에 없다. 선거에 의해 권력이 차이 날 수 있고 시장에 의해 재력이 차이 날 수 있다. 개인의 노력에 의해서도 다양한 힘의 차이가 발생할 수 있다. 그런 개인의 의사를 존중하면서도 국가와 체제 구조를 유지하기 위해서 원칙을 변경하게 되었다. 소유권 절대의 원칙에서 소유권의 공공복리를 고려하게 되고, 계약 자유의 원칙에서 계약 공정을 고려하게 되고, 자기 책임성의 원칙에서 무과실 책임도 고려하게 되어 힘의 차이에 의한 불균형을 가능한 균형 있게하였다. 국가 원리인 불균형한 개인의 의사를 존중하기 위해 국가구조가 균형적일 수 있는 방향으로 수정된 것이다. 이와 같이 구조 유지를 담당하는 법과 정책이 균형을 갖춰야 개인은 자유롭게 불균형하게 살 수 있다. 개인주의 체제인 모든 사회는 균형을 위한 강제력이 동원되고, 그런 강제력이 보통 사회 구조 유지의 기본이 된다.

 

 

법의 기본적인 구조는 다음과 같다. 입법이 만들고 사법이 판단하고 행정이 집행한다. 법의 만듦은 기본적으로 개인의 의사가 반영되도록 민주주의 선거를 통해 선출된 선출직 공무원이나선출직 공무원이 임명한 임명직 공무원이 만들면서 민주성을 띠고 있다. 국회의원, 대통령, 총리, 장관, 지방의원, 지방자치단체의 장 등이 만들고 있다.

 

법의 판단은 법을 해석하고 적용하는 사법권이 다른 권력으로부터 영향을 받지 않아야 공정하게 전문성을갖추고 판단할 수 있다. 국가 구조 유지를 명분으로 하더라도 권력이 법의 판단에간섭하여 조작하면 권력의 입맛에 맞는 부당한 판단이 나올 수 있다. 만약 사법이 독립성이 없어 권력에 의한 판단을 하는 것이 정당화된다면 권력은 온갖 패악을 저지를 위험이 있다. 그걸 보통 독재라고 한다. 그런 것을 방지하기 위해 법의 판단은 권력으로부터 독립되어 있다.

사법권은 크게 헌법 재판소와 법원으로 분리되어 있다. 헌법 재판소는 헌법에 관한 재판을 담당하며 법률이 헌법에 저촉될 경우 위헌 판결을 하여 무효화한다. 법원은 최고 법원인 대법원과 각급 법원인 고등 법원, 특허 법원, 지방 법원, 가정 법원, 행정 법원, 회생 법원과 같이 나누어 재판을 하고 있다. 법원은 공정한 재판을 위해 심급 제도를 도입하여 사건의 종류에 따라 최대 세 번까지 재판을 받을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제1심 법원의 판결에 불만이 있으면 제2심 법원에 항소할 수 있고 제2심 법원의 판결에 중요한 법률적 다툼이 있을 경우 제3심 법원에 상고할 수 있다. 법이 충돌할 경우 세 가지 방법으로 적용 순위가 정해진다. 하나, 상위법. 법과 법이 충돌하면 상위의 법이 우선된다. 순서는 헌법, 법률, 시행령, 시행 규칙, 조례, 규칙, 고시, 예규, 관습이다. 둘, 신법. 개정 전의 법과 개정 후의 법이 충돌하면 예외에 대한 내용이없는 한 개정 후의 법이 우선된다. 셋, 특별법. 일반법과 특별법이 충돌하면 특별법이 우선된다.

법의 판단은 합리적 기준으로 균형적이어야 한다. 그래야 사회가 타당하고 안정적이게 된다. 법의 판단인 사법은 민주주의를 명분으로 국민의 법감정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라는 압박을 받을 수있다. 그러나 개인의 의사는 불균형하므로 비논리적일 수 있어 그걸수용하다가는 법의 합리적 기준이나 균형이 깨지게 된다. 그러면서 전문성을 잃어버리게 된다. 법관 같이 논리 안에 살고 있는 사람이 그런 법감정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것은 명예로운 일이 아니다. 논리 안에 살고 있는 사람은 논리적인 주장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국민의 의견 또한 듣기도 전에 법감정일 것이라며 무시할 것이 아니라 논리적인 의견이라면 참고해야한다. 논리라는 합리적 기준으로 모두가 평등해져야 한다.

 

법의 집행은 무력을 갖추어 집행 대상을 강제로 집행할 수 있도록 하고 대외적 이미지를 가꾸어집행대상에게 협조를 받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사회 계약을 맺었다 하더라도 모든 개인이 강제적인 집행을 수용하리란 보장이 없어 강제적으로 집행하기 위한 무력을 갖춰야 한다. 만약 경찰의 무력으로 집행할 수 없다면 군이 출동하여 강제적으로 집행한다. 집행 대상이 강제적인 집행을 수용하더라도 협조적인 태도를 얻기 위해서는 대외적 이미지를 가꾸어야한다. 만약 경찰이 시민의 협조를 받지 못한다면 집행에 상당한곤란함을 겪을 수 있다.

집행에 관련된 이들은 검사, 경찰, 교도관, 국선 변호사, 사선 변호사 등이 있다. 종류는 형사와 민사와 행정 등이 있는데 형사의 절차에 대해 간단히 알아보자. 형사 사건은 피의자의 신고나 수사 기관의 사건 파악으로 수사가 시작된다. 수사 대상의 혐의가 뚜렷할 때에는 사건부에 기록하여 정식으로 입건하고 그렇지 않지만 조사가 필요할때에는 불구속 입건을 한다. 수사 대상인 피의자는 출석 요구에 응하면 임의로 출석하여 조사받을 권리가 있다. 영장은 체포 영장과 구속 영장으로 나뉜다. 체포 영장은 피의자가 출석 요구에 응하지 않을 때 판사가 발부한 체포 영장으로 체포를 하거나수사관이 정해진 기준과 절차에 따라 임의로 긴급 체포를 한 후에 검사의 승인을 받는다. 구속 영장은 신병이 확보되지 않은 피의자를 대상으로 한 사전 구속 영장과 신병이 확보된 피의자를대상으로 한 사후 구속 영장으로 나뉜다. 피의자가 출석 요구를 거부하거나 도망 및 증거 인멸의 염려 등의 구속 사유가 있을 경우 판사의 판단에 따라 구속 영장을 발부하여 구속한다. 구속 전에 피의자 심문으로 수사 과정과 판사 앞에서 구속 사유에 대한 변명을 할 수 있다. 경찰이 수사한 형사 사건에 대한 수사 기록과 증거물을 검찰에 송부하는 것을 말하는 송치를 한다. 검사의 판단에 따라 형사 사건의 피의자를 형사 재판에 회부하여 공소를 제기하는 것을 말하는 기소를할 수 있다. 한국은 국가 소추주의에 따라 검사만이 기소를 할 수 있으며기소된 사람을 피고인이라 부른다. 검사의 판단에 따라 기소를 하지 않는 불기소 처분을 할 수 있다. 불기소 사유가 명백할 때에는 조사 없이 불기소 처분을 하는 것을 말하는 각하를 할 수 있다. 기소된 사건을 법관이 판단하는 것을 재판이라 한다. 법관은 검사가 기소한 피고인에 대하여 공판을 열어 법을 해석하여 유무죄를 결정하고 유죄일 경우양형을 결정한 후에 판결을 한다. 형사의 판결은 유죄 판결과 무죄 판결과 공소 기각 판결과 면소 판결이 있다. 유죄 판결은 형을 선고하는 판결과 형을 면제하는 판결과 형을 선고 유예하는 판결로 나뉘고 형의종류에는 사형, 징역, 금고, 구류, 벌금, 과료, 몰수, 자격 상실, 자격 정지가 있다. 법원의 판결이 확정되면 검사의 지휘로 법원에서 선고한 형을 집행한다.

집행 기관 중 수사 기관은 지금 마땅한 무력을 갖추지 못하거나 대외적 이미지가 좋지 못한 상태다. 경찰은 유교적 가치관에 의해 가부장제 여성성을 근거로 여성이 약할 거라는 선입견 속에서 여성주의자의일방적인 여성의 이익만을 위한 주장에 의해 무력을 갖추지 못한 여성 경찰을 무분별하게 채용하는 바람에 집행을 수행할 수 있는 무력을 갖추지 못한경찰이 늘어나게 되었다. 검찰과 경찰은 유교적 가치관에 의해 집단의 이익을 우선시하는조직 이기주의와 서열을 중시하는 서열주의를 추구하면서 국민의 시각과 괴리된 폐쇄적인 문화와 전파를 용인하여 일부가 일탈하는 것이 외부에 노출되면서열주의로 위는 감싸고 아래는 꼬리를 자르는 형태가 나타나면서 대외적 이미지가 좋지 못한 상황이다. 유교적 가치관에 의해 올바르다 여기고 행해진 것이 사회에 해를 끼쳤으므로 도덕적 죄에 해당한다. 바르다 여긴 것이었기 때문에 같은 잘못이 반복되고 있는 중이다. 그러면서 수사 기관은 국민의 신뢰를 잃어버렸다. 그에 따라 수사 기관은 변화해야 한다. 역할을 수행하고자 하는 사명감과 집행할 수 있는 무력을 갖춘 인원을 채용하고 그런 인원 위주로승진하며 외부 평가를 참고하여 국민과 괴리되는 것을 막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법치주의는 개인주의 체제에 속하는 만큼 개인의 자유 의지에 따른 의사가 반영되어야 정상적으로작동한다. [법치주의_법률은 국민의 의사를 대표하는 국회에서 만든 법률에 따르지 아니하고는 나라나 권력자가 국민의자유나 권리를 제한하거나 의무를 지울 수 없다는, 근대 입헌 국가의 정치 원리를 뜻한다.] 그 말은 곧 욕망을 가지고 이기적으로 행동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온전하게 자유롭다. 모든 개인이 타인의 이익을 우선시하면서 서로가 양보하면 각자 주관적 판단에 의해 결정되어 법이 등장하지 않는다. 그러나 모든 개인이 욕망을 가지고 본인의 이익만을 행동하며 서로가 양보하지 않으면 이해관계에따른 분쟁을 조정하기 위해 법이 등장하게 된다. 법 자체가 개인의 자유 의지를 만드는 욕심과 이기심에 성립되고 있는 것이다.

법의 만듦과 판단과 집행도 같다. 법을 만드는 이들이 이타적이면 타인을 위해 불합리한 법을 입안하거나 불합리한 법에 찬성하게 된다. 동료 의원의 이익을 위해 국가에 해로운 법안에 찬성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법을 판단하는 이들이 이타적이면 타인을 위해 불합리한 법의 판단을 할 수 있다. 전관예우로 선배 법관이었던 이의 이익을 위해 잘못된 판결을 하거나 동정심이나 감정에 의해 불합리한판결을 할 수 있다. 법을 집행하는 이들이 이타적이면 타인을 위해 수사 기관은불기소를 하거나 입증이나 수사에 소홀할 수 있고 변호사는 변호를 거부할 수 있다. 지인의 이익을 위해 불기소나 입증 또는 수사에 소홀하거나 대중의 이익을 위해 흉악 범죄자의 변호를거부하게 되는 것이다. 변호사가 흉악 범죄자를 변호하는 것은 법치 구조 유지를위한 기본일 뿐이므로 그에 대한 비판은 법치에 대한 부정에 해당하게 된다. 이런 이유로 법의 모든 과정에서 관계자는 모두 욕망을 가지고 이기적으로 자유 의지로 생각하고행동해야 한다.

재판 과정도 욕망을 가지고 이기적이어야 한다. 형사 사건에서 피고인의 범죄에 대한 입증 책임은 검사에게 있다. 검사는 욕망을 가지고 정당한 기준과 절차를 거친 이기적인 입증을 하고 변호사는 욕망을 가지고그런 입증을 믿고 정당한 기준과 절차를 거친 이기적인 변호를 하면 된다. 판사는 욕망을 가지고 이기적인 입증과 변호를 믿고 이기적으로 판단하여 판결하면 된다. 그 외 피고인, 원고와 피고 등도 욕망을 가지고 이기적이어야 한다. 만약 법정에 선 이가 타인의 이익을 위해 위증을 하게 되면 진실을 가려내기가 어렵다. 그러나 증인이 본인의 이익만 추구한다면 사건과 증인의 이해관계에 따라 진실성을 유추할 수 있다. 모든 증인이 욕망을 가지고 이기적이어야 판단이 수월하다. 합리적 기준을 개인의 자유 의지에 맞추기 위해서 모두가 욕망과 이기심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효율적으로 법치주의를 달성할 수 있다.

 

개인주의 체제인 사회의 개개인이 개인주의 관념을 가지게 될수록 과거와 다르게 자유롭게 고소하는것으로 법 관계자는 보다 과중한 짐을 짊어지게 된다. 그렇다고 그것이 잘못된 것은 아니다. 개인주의 체제는 개인의 의사가 중요하기에 개인의 판단으로 고소를 결정했다면 그것으로 좋다. 단 판단하는 측인 수사 기관이나 사법부에서 올바른 판단을 해야 한다. 낡은 가치관에 의해 불합리하고 불공정한 판단을 하게 되면 무고한 피해자가 생길 수 있으므로 법관계자는 반드시 개인주의 관념을 가지게 되어야 한다.

 

 

 

8. 복지

 

개인주의 체제의 국가 구조 유지를 위해서 균형적이어야 하고 국가 원리 추구를 위해서 불균형적이어야한다. 그에 따라 법 또한 국가 구조에 해당할 때에는 균형적이어야하고 국가 원리에 해당할 때에는 불균형적이어야 한다. 법의 만듦은 민주성을 띠고 판단은 전문성을 띠고 집행은 강제성을 띤다. 법치주의는 개인주의 체제에 속하여 모든 개인이 자유 의지를 가지고 참여해야 하기에 욕망과 이기심이필요하게 된다.

사회 구조 유지의 기본인 복지 또한 법과 유사한 성질을 가지게 된다. 그러나 복지는 특정 이유로 체계화가 부족하다. 사법과 같이 독립되어 체계화된 법과 달리 복지는 각 분야의 중앙 행정 기관의 정책 포함되어 있어체계적이지 못하고, 사법과 같이 권력으로부터 독립되어 판단하는 기관이 있는법과 달리 중앙 행정 기관의 정책은 권력으로부터 독립되어 판단하는 기관이 없다. 즉 법의 체계성을 배우기 위해서 복지를 포함한 모든 분야의 정책은 사법과 같이 권력으로부터 독립되어판단하는 기관이 필요하다는 결론이 나온다.

 

복지를 포함한 정책에 대해 알아보자. [복지는 행복한 삶을 뜻한다.][정책은 정치적 목적을 실현하기 위한 방책을 뜻한다.] 복지 정책은 인간의 행복한 삶이라는 정치적 목적을 실현하기 위한 방책이라 할 수 있다.

국가 정책은 정부 중 행정부인 중앙 행정 기관의 행정 부처를 중심으로 한다. [정부_법률은 입법, 사법, 행정의 삼권을 포함하는 통치 기구를 통틀어 이르는 말을 뜻한다. 정부_행정은 삼권 분립에 의하여, 행정을 맡아보는 국가 기관을 뜻한다.] 정부의 법률적 해석이 보다 정확하다 보기에 정부는 삼권을 지칭하고 행정부는 행정을 지칭하겠다. 고유 명사화가 된 것은 그대로 쓰겠다. 중앙 행정 기관의 행정 부서에는 정부 홈페이지를 기준으로 기획 재정부, 교육부, 과학 기술 정보 통신부, 외교부, 통일부, 법무부, 국방부, 행정 안전부, 문화 체육 관광부, 농림 축산 식품부, 산업 통상 자원부, 보건 복지부, 환경부, 고용 노동부, 여성 가족부, 국토 교통부, 해양 수산부, 중소 벤처 기업부가 있다.

보통 행정 부서는 국가 구조 유지의 기본이나 전부 그렇지는 않다. 한국 특수 상황에 의해 만들어진 부서나 체제나 평등이나 합리성을 위해 통폐합을 해야 할 부서가있다. 가령 통일부는 분단된 한국 특수상황에 의해 만들어진 부서로다른 국가는 있을 필요가 없고 통일되면 폐지될 부서다. 여성 가족부는 정치적 소산물로써 여성이나 가족과 같이 분야와 관계 없는 특정 집단을 대상으로 한 부서는 개인주의와 평등에 어긋나므로 보건복지부와 통합되어야 한다. 중소 벤처 기업부는 중소기업을 성장시키기 위한 부서이나 모든 기업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 경제의 합리적 기준을 정하기가 좋으므로 산업 통상자원부와 통합되어야 한다. 고용 노동부는 노동자와 자본가의 합리적 기준을 통한 공정한 거래를 위해 공정 거래부로 이름을 바꾸어 공정 거래 위원회와 통합되어야 한다.

 

한국 정책에 대해 알아보자. 정책 과정에 참여하는 참여자는 공식과 비공식으로 나눌 수 있다. 공식 참여자에는 정부인 입법부와 사법부와 행정부가 있고 비공식 참여자에는 정당과 언론과 이익집단과 시민 단체와 전문가와 국민 등이 있다. 정책 과정은 보통 정책 의제 설정, 정책 결정, 정책 집행, 정책 평가의 과정을 거친다. 정책 과정을 법과 비교하면 정책 의제 설정이 법의 만듦 중 제안이고 정책 결정이 법의 만듦 중의결일 것이고 정책 집행이 법의 집행일 것이고 정책 평가가 법관 평가일 것이다.

법의 판단과도 같은 정책 판단은 정책 과정과 별개로 행정 법원과 행정 심판과 민원이 있다. 사법부에 속한 행정 법원은 정책으로 손해를 본 사람들만이 이의 제기를 신청할 수 있으며 관련된법으로 판단한다. 행정부에 속한 행정 심판은 정책 집행 중 행정청의 위법이나부당한 처분이나 공권력 행사 및 불행사 등으로 권리나 이익을 침해 받은 사람들이 이의 제기를 신청하며 관련된 법으로 판단한다. 행정부에 속한 민원은 정책에 관련된 것에 대한 이의 제기를 국민 신문고 등에 신청하며 담당자가답변을 하거나 해결을 한다. 보통 민원으로 시작하여 해결이 안되면 행정 심판으로 가고 그래도 해결이 안되면 그런 사람 중 자격이 있는 사람은 행정 법원으로 간다.

그런데 행정 법원은 정책에 관련된 법을 위주로 판단한다. 정책 자체는 판단하지 않는다. 정책은 상당한 전문성을 요구하기에 관련 전문가가 아니면 판단하기가 어렵다. 법 전문가인 사법부에서 이런 의견이 있었다. “정책의 사업에 있어 문제점이 인정되더라도 사업시행의 계속 여부나 범위를 판단하는 것은 사법부가감당하기 버거운 주제가 틀림없다.” 행정 심판과 민원은 정책 집행에 관련된 것으로 보통 정책 자체에 관련된 것이 아니다. 따라서 정책 자체를 판단하는 개인의 참여가 가능한 독립적인 공적 기관은 없다. 정책 개인 참여를 위해 행정부에서 국민들에게 의견을 수렴하고 있다. 그러나 정책 자체가 일반인이 다루기 어려우므로 의견을 내는 것이 어렵다. 그럼에도 법의 국선 변호사나 사선 변호사와 같은 의뢰인을 도와 대신하여 의견을 낼 정책 전문가가없다. 정책 판단은 독립된 공적인 기관도 없고 정책 전문가도 없어개인이 정책에 참여하기가 어려워 일부 이익 집단에 정책이 휘둘리기도 하고 있다. 그렇기에 복지를 비롯한 모든 분야의 정책은 사법과 같이 정책 판단을 하는 기관으로 독립되어야한다. 우선 정책 과정을 알아보자.

 

 

첫째, 정책 의제 설정. 모든 민주 사회에는 문제가 있다. 문제가 없는 사회는 개인의 의사가 반영되어 자연스럽게 불균형한 민주 사회가 아닌 개인의 의사가반영되지 못하여 인위적으로 균형을 이룬 독재 사회다. 사회 문제가 비공식 참여자들에 의해 쟁점화가 되어 다수의 사람이 인식하고 이해하여 문제 해결에 대한 공감대가 형성된 정부의 권리로 해결할수 있는 사안을 의제화한 것을 공중 의제라 한다. 사회 문제나 쟁점이나 공중 의제가 국무 회의나 차관 회의 등과 같은 곳에서 공식 의제로 올라온 것을 정부 의제라 한다.

정책 의제는 위와 같은 과정으로 설정되나 행정 절차상 정책은 예산안의 편성부터 시작된다. 행정 부처의 장은 매년 1월 31일까지 해당 회계 연도(한국은 1월 1일)부터 5회계 연도 이상의 기간 동안의 신규 사업 및 기획 재정부의장관이 정하는 주요 계속 사업에 대한 중기 사업 계획서를 기획 재정부 장관에게 제출해야 한다. 신규 사업과 계속 사업은 설정된 정책 의제를 고려하여 계획한다. 제출된 계획서를 바탕으로 대략적인 예산안이 결정된다. 기획 재정부 장관은 국무 회의 심의를 거쳐 대통령의 승인을 얻은 다음 연도 예산안 편성 지침을매년 3월 31일까지 행정 부처의 장에게 보낸다. 행정 부처의 장은 제출했던 중기 사업 계획서와 추가적인 사업을 포함한 예산안을 작성하여 매년 5월 31일까지 기획 재정부 장관에게 제출한다. 제출 받은 예산 요구서에 따라 예산안을 편성하여 국무 회의의 심의를 거친 후에 대통령의 승인을 받는다. 승인을 받은 예산안을 회계 연도 개시 120일 전에(헌법에는 90일)에 국회에 제출한다. 국회는 회계 연도 개시 30일 전까지 상임 위원회 예비 심사, 예산 결산 특별 위원회 종합 심사, 본회의 심의를 거쳐 의결을 하여 행정부에 이송한 후 대통령이 공고한다. 이와 같은 과정은 헌법을 근거로 한다. 헌법 제54조에 따르면 정부에 예산안 편성권을 부여하고 국회에 심의 및 확정권을 부여한다고 되어 있다. 헌법 제57조에 따르면 국회가 정부의 동의 없이 정부가 제출한 지출 예산 각 항의 금액을 증가하거나 새 비목을 설치할 수 없다고 규정되어 있다. 이렇게 예산안 편성권과 심의 및 확정권을 행정부와 입법부가 나눠 서로를 견제하고 있다. 이런 견제를 법으로 보면 다음과 같다. 예산안 편성권을 가진 기획 재정부는 법률안 제출권을 가진 것과 같고 심의 및 확정권을 가진 국회는법률 제정권을 가진 것과 같다. 예산안 편성권을 가진 기획 재정부는 정책에 있어 행정부를 대표하는 강한 권력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정책 중 총 사업비 규모가 500억 원 이상이고 국가의 재정 지원이 300억 원 이상인 신규 사업은 예비 타당성 조사를 행하여 타당한지 조사한다. 워낙 예산 비용이 커서 섣불리 진행했다가 돌이킬 수 없는 손해를 볼 수 있기에 미리 타당한지조사하는 것이다. 예비 타당성 조사는 기획 재정부 주관으로 진행되며 행정부처의 조사요구 공문을 받으면 법적 요건이나 구체성이나 시급성 등을 검토한 후에 한국 개발 연구원 등의 연구 기관에 경제적 분석인 B/C 분석을 의뢰하여 결과를 받은 다음 사업 타당성 분석인 AHP로 평가하여 통과 유무 결과를 행정 부처에 보낸다. B/C 분석은 비용 대비 편익인 가성비를 말하며 총 편익을 총 비용으로 나눈 비율이 1이 넘으면 경제적 타당성이 있다고 판단한다. AHP는 계층화 분석법으로 경제성과 정책성과 기술성과 지역 균형 발전을 고려하여 산정된 가중치와 사업시행 적합도를 곱해서 나온 수치를 총합하여 0.5를 넘으면 사업 타당성이 있다고 판단하여 예비 타당성 조사를 통과시킨다. 사업 중에서 연구 개발 사업은 한국 과학 기술 기획 평가원에서 예비 타당성 조사를 실시한다. 타당성이 확보된 사업은 추진 여건을 고려하여 기획 재정부 장관에게 해당 사업 관련 예산 등을요구할 수 있다. 중요하거나 긴급하다 판단되는 사업은 예비 타당성 조사가면제되기도 한다. 이를 악용하여 정치가가 공약을 달성하기 위해 면제를 무분별하고불합리하게 요구하는 것으로 예비 타당성 조사의 의의가 의미 없어지기도 한다.

 

둘째, 정책 결정. 정부 의제를 채택하느냐 기각하느냐 판단하는 것부터 정책결정이다. 채택은 적극적 정책 결정이고 기각은 소극적 정책 결정으로둘 다 정책 결정이 된다. 기각이 정책 결정이 되는 것은 해당 의제를 정부 의제로 채택하지 않을 것이라는 결정을 했기 때문이다. 해당 의제를 정부 의제로 채택하기로 결정했으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을 찾아야 한다. 방법은 내부인 공식 참여자가 주도하는 것과 외부인 비공식 참여자가 주도하는 것으로 나눌 수 있다. 통상 내부인 공식 참여자가 주도하는 것은 비민주적이게 될 수 있기에 후진적이라 하고 외부인 비공식참여자가 주도하는 것은 민주적이게 될 수 있기에 선진적이라 한다. 그러나 내부와 외부는 정책의 성질로 구분되어야 하는 것으로 후진적이거나 선진적이라 단정지을 수 없다.

국가 구조 유지를 위한 정책을 외부가 주도하게 되면 개인의 의사에 의해 합리적 기준을 통한 균형을이루기가 어려울 수 있다. 만약 구조 유지를 위한 복지 정책을 주관적인 A의 의견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여 A가 주장한 복지를 추진하면 의견을 내지 못한 B나 C는 복지 정책 대상임에도 복지를 받지 못할 수가 있다. 그러면 B나 C가 아사로 죽거나 불행으로 자살하여 구조의 요소가 사라질수 있다. 복지 정책과 같이 구조 유지가 목적인 정책은 개개인을 위한것이 아닌 구조 유지를 위한 것임을 확실하게 인식해야 한다. 괜히 개개인을 위한 복지 정책이라고 홍보하면 복지 정책 해당자와 비해당자 사이에서 불필요한 갈등이 발생할 수 있다. “A의 행복은 중요하고 B나 C의 행복은 중요하지 않단 말인가?” 복지 정책은 철저하게 구조 유지를 명분으로 삼아야 잡음이 없다. 개인이 아닌 구조 유지가 목적이어야 복지 정책이 부담스러운 개인이 혜택을 받지 못하는 사태가사라지고 복지 정책에 의한 혜택을 개인을 위한 권리라고 여기며 담당 공무원을 윽박지르며 협박하는 사태도 사라지게 된다. 생존주의적 자유주의에 근거한 사회 계약에 따라 사회에 속한 모든 개인은 본인이 원치 않더라도질서를 지키듯이 본인이 원치 않더라도 행복해져야 한다. 여기서 개인의 의사는 행복 유무가 아닌 행복의 방법에 있듯이 복지 정책 유무가 아닌 복지 정책 방법에 반영되어야 한다. 구조 유지를 위한 것 중 사회 간접 자본인 도로, 철도, 항공과 같이 해당 지역 부동산 가격에 영향을 주는 정책은 외부가 주도하게 되면 부동산 투기가 일어날 수 있어 내부가 주도하는 것이 바람직하게된다. 이렇게 구조 유지가 목적인 정책은 내부가 주도하는 것이바람직하다.

그러나 국가 원리 추구를 위한 정책을 내부가 주도하게 되면 개인의 의사 반영에 의한 합리적 기준을통한 불균형을 이루기가 어려울 수 있다. 시장은 개인의 의사가 반영되어 불균형한 결과가 당연하다. 상품의 품질이 좋고 가격이 저렴함에도 균형 정책에 의해 공급이 제한된다면 개인의 의사가 반영되는 시장의 의미가 퇴색되게 된다. 공급 제한으로 우수한 상품을 공급하지 못한 공급자와 우수한 상품을 소비하지 못한 소비자는 그규제로 불행하게 된다. 지금까지는 왕정의 윤리를 근거로 시장에서 균형을 맞추려했던 탓에 불행한 사람이 많았다. 시장은 합리적 기준으로 불균형하게 해야 한다. 원리 추구를 위한 정책은 시장과 같이 불균형해야 하는 곳에서 균형적이게 할 것이 아니라 임의의 가치 판단으로 균형적이게 하는 담합과 독과점을하지 못하게 막아야 한다. 국가 원리 추구로 불균형하게 되면 국가 구조 유지를 통해 균형을 맞추면 된다. 그러면 개인의 의사라는 원리가 추구되면서 국가의 생존이라는 구조가 유지될 수 있다. 이렇게 원리 추구가 목적인 정책은 외부가 주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정책을 만들 때에는 정책에 필요한 법률이나 명령이나 규칙을 새로 만들거나 수정하는 정부 입법을해야 할 때가 있다. 여기서 법률은 통상 5개월에서 7개월 걸리는 국회에서 심의를 받는 일반적 절차를 말한다. 절차는 다음과 같다. 입법 계획 수립, 법령안 입안, 관계 기관과 협의, 당정 협의, 입법 예고, 규제 심사, 법제처 심사, 차관 회의 및 국무 회의 심의, 대통령 재가, 국회 제출, 국회 심의 및 의결, 공포안 정부 이송, 국무 회의 상정, 공포. 정부 입법은 굉장히 긴 과정을 거친다. 반면 의원 입법은 규제 심사가 빠져 상대적으로 짧다. 이는 입법부의 입법권을 침해하지 않기 위해서라고 한다. 그런데 의원 입법에 규제 심사가 빠져 입법권 악용이나 남용 같은 부작용이 나타나고 있다. 규제 심사가 없어서 매년 의원 입법 수가 늘어나고 있는데 그에 따라 체제에 해로운 법률을 늘리는입법권 남용 사례나 규제 심사를 피하기 위해 정책에 필요한 법을 정부 입법이 아닌 의원 입법으로 하는 청부 입법 사례가 나타나고 있다. 체제에 해로운 법률은 사회 체제가 바뀌지 않는 이상 부당한 것으로 입법권 악용이라 할 수 있고청부 입법은 정당한 절차가 아니므로 입법권 남용이라 할 수 있다. 과거에 비해 의원 입법이 지속적으로 늘어남에 따라 잘못된 의원 입법을 방지하기 위해 규제 심사를 도입해야 한다고 본다.

정부 입법은 과정이 길어 급변하는 상황에 유연하게 대처하기 어렵기 때문에 행정부가 입법부의 입법권을위임 받아 법률과 대통령령이 지정해둔 범위 내에서 상대적으로 절차가 짧은 명령과 규칙을 제정한다. 명령은 시행령인 대통령령을 말하고 일반적 절차의 대통령 재가까지 진행되며 법률 내에서 제정한다. 규칙은 시행 규칙인 총리령과 부령을 말하고 법제처 심사까지 진행되며 대통령령 내에서 제정한다. 총리령과 부령을 그림으로 비유하면 다음과 같다. 헌법이란 도화지에 법률이 선을 그리고 법률이 그린 선 안에서 대통령령이 색을 칠하고 대통령령이칠한 색 안에서 총리령과 부령이 덧칠한다.

 

셋째, 정책 집행. 정책 집행은 만든 정책을 실제로 집행하는 것을 말한다. 정책 집행에는 정책을 결정한 정책 결정자와 정책을 집행하는 정책 집행자가 모두 참여한다. 정책 집행의 유형에는 정책 결정자와 정책 집행자 사이의 관계를 정의한 유형인 고전적 기술자형과지시적 위임형과 협상형과 재량적 실험형과 관료적 창도자형으로 나누어 있다. 유형은 주도권에 따라 달라진다. 정책 결정자는 예비 타당성 조사를 받은 사업과 같이 사업 규모가 큰 정책을 주도하고 정책 집행자는사업 규모가 작은 정책을 주도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정책의 실패는 정책 자체 실패와 정책 집행 실패로 나뉜다. 정책 자체에 문제가 있어서 집행을 실패할 수 있고 정책 자체는 문제가 없는데 환경이나 대상의문제로 집행에 실패할 수 있다. 정책 자체 실패는 조사가 미흡하여 도로나 항공 등의 이용자 수가 적은 것과 같은 것을 말한다. 정책 집행 실패는 감염병 예방과 같이 국민 동참이 필요할 때 국민이 동참하지 않는 것과 같은것을 말한다. 엄밀히 보면 정책 집행 실패 또한 어느 측면에서 정책 자체실패로 봐야 한다. 정책은 예측할 수 있는 것은 전부 예측하여 상황 별로 대처할수 있는 방안을 마련해야 하기 때문이다. 물론 그것은 어려우므로 정책의 이상이라 할 수 있다.

 

넷째, 정책 평가. 정책 평가는 주로 신규 사업 및 계속 사업을 결정할 때쓰이는 피드백용이다. 정책 평가의 기준은 학자마다 다르다. 던의 기준만 알아보겠다. 던은 효과성과 능률성과 적정성과 형평성과 반응성과 적절성을 기준으로 삼아 평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정책 평가는 특정 학자가 주장한 기준으로 모든 정책을 평가할 것이 아니라 정책 결정이나 정책집행과 같이 정책의 성질에 따라 다른 기준으로 평가해야 할 것이다. 구조 유지는 안정성을 보거나 원리 추구는 발전성을 본다거나 하듯이 말이다.

 

정책 과정에 대해 알아보았다. 앞서 알아본 것과 같이 정책 과정 밖에 정책 판단 기관은 없었다. 마찬가지도 정책 과정 안에도 정책 판단 기관은 없었다. 정책에 대한 의견을 내는데 도움을 줄 정책 전문가도 없었다. 법은 법의 판단을 하는 독립적인 기관에서 개인이 위임한 국선 변호사와 사선 변호사의 의견을 내는것으로 법리가 발전하며 판결과 판례가 체계적으로 쌓여 법이 발전했으나 정책은 정책의 판단을 하는 독립적인 기관도 없고 개인이 위임할 정책 전문가도없어 전문적인 의견을 내지 못하여 그에 따라 정책이 발전하지도 못했고 판단에 의한 판례도 없어 정책이 체계적으로 발전하지도 못했다. 그러므로 정책 또한 법과 같이 정책 자체를 판단할 정책 판사와 정책에 대한 의견을 대신할 정책전문가가 공적으로 도입되어야 한다.

 

 

첫째, 독립된 정책 판단 기관. 법은 전문성을 갖춘 독립된 판단 기관인 사법이 있어 잘못 만들어지거나 집행되더라도 사법에서 위헌을 하거나 법관 재량으로 유무죄나 적절한양형을 통해 대응할 수 있다. 그런 안전장치가 있어 법의 만듦과 집행이 잘못되더라도 안전하다 할 수 있다. 그러나 정책은 잘못 만들어지거나 집행되더라도 독립된 판단 기관이 있어 공적인 대응이 까다롭게된다. 집행의 경우 행정 심판이나 민원으로 대응하더라도 만듦은행정 법원에서 법에 관련된 것 외에는 독립적으로 정책 판단을 요청할 곳이 없다. 독립된 정책 판단 기관이 있다면 안전장치가 되어 정책이 만들어지거나 집행할 때 잘못되더라도 안전하게될 것이다. 정책에 의한 비리나 불합리한 정책도 이렇게 독립된 정책판단 기관이 있었다면 빠른 시기에 막을 수 있을 것이다.

 

둘째, 정책 전문가. 정책에 있어 비공식 참여자의 의견은 바람직하나 전문성이부족한 이의 제기는 바람직하지 않을 수가 있다. 그렇다고 비공식 참여자의 의견을 듣지 않을 수는 없다. 그러므로 법의 변호사와 같이 정책도 정책 전문가가 있어야 한다. 정책은 법과 마찬가지로 전문가가 아니면 알기 어려우므로 정책 또한 정책에 의견을 내기 위해서 정책 전문가의 도움이 필요하다. 개인의 의뢰로 변호사가 법정에 서는 것과 같이 개인의 의뢰로 정책 전문가도 정책 판단 기관에서는 것이다. 그렇게 전문가가 의견을 내야 하는 쪽이나 받는 쪽이나 좋다. 정책 성질에 따라 다르지만 무분별한 판단 요청이 발생할 수 있는 정책은 이해관계 당사자만 정책전문가를 선임하여 판단 요청할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법에 국선 변호사와 사선 변호사가 있듯 국선 전문가와 사선 전문가가 있어야 가능한 많은 인간이 전문가의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지금처럼 행정부가 국민의 의견을 수렴하는 것에 끝나면 전문적인 의견의 경쟁에 의한 발전이 어렵게된다.

 

셋째, 정책 판단 피드백. 법의 판례처럼 정책 판단 사례, 즉 정책 판례가 있으면 그걸 바탕으로 체계적인 발전이 가능하다. 법의 판례가 기준이 되었던 것처럼 정책 판례도 기준이 되어 정책의 신규 사업이나 계속 사업을 결정할 때 참고할 수 있는 자료가 되고, 정책에 의견을 낼 때도 참고할 수 있는 자료가 되어 적극적 활용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정책 판단에서 잘못되었다 판단된 정책이라 하더라도 사업의 매몰 비용이 높아 중도 취소가 불가능할수 있다. 그럴 때에는 피드백으로 활용하여 다음 사업에 참고하는 판단으로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행정부가 수렴한 의견과 비슷할 수 있으나 독립된기관이 전문적인 의견을 듣고 판단한 결과와 전문성의 차이가 날 것이다. 법의 판결이 언론에 공개되어 법의 국민 참여가 발생하는 것과 같이 정책 판단이 있어 언론에 공개되면 정책의 국민 참여가 발생할 수 있을것이다.

 

넷째, 정책 참여자 충돌 중재. 정책 참여자의 의견이 충돌할 경우 의견에 대한 판단을 할 독립된 기관이 없었기에 의견 충돌을 피해 예산을 타기 위해 예산안 편성권을 가진기획 재정부 관료와 물밑 접촉을 시도하는 일이 있었다고 한다. 만약 사법도 독립된 판단 기관이 아니었다면 이와 같은 물밑 접촉에 의한 사법 거래가 일반적이었을지도 모른다. 정책 판단 기관과 정책 전문가가 있다면 각각의 충돌로 인한 갈등을 중재할 수 있을 것이다. 가령 선거 공약에 의한 정치가와 정치가 또는 정치가와 관료의 충돌, 환경 규제에 의한 환경 단체와 기업의 충돌, 겹치는 정책에 의한 관료와 관료의 충돌 등을 중재할 수 있을 것이다.

 

다섯째, 권력으로부터 독립. 지금까지 정책은 정권이 정책이나 정책의 규제에 태도를 바꾸거나 정권이 바뀌지 않는 한 잘못되었다 하더라도 막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권력으로부터 독립된 정책 판단 기관이 있다면 전문적인 의견으로 부당한 정책이나 정책의규제를 폐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독립된 정책 판단 기관이 정책이나 규제를 부당하게 잘못된 판단을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사법의 역사를 참고하는 것으로 그런 것을 최대한 방지할 수 있을 것이다. 부유한 사람이 고비용의 변호사를 선임하여 법정에서 유리한 것과 같이 고비용의 정책 전문가를 선임하여정책 판단 기관에서 유리할 수 있다. 그러나 공적인 기록으로 남는 것이 보다 공정하다. 사법에 전관예우와 같은 문제가 정책에도 있을 수 있으나 공개되기 때문에 쉽게 할 수가 없다.

 

여섯째, 정책 판단 기준. 정책은 예비 타당성 조사와 같이 임의의 기준으로 만들지법과 같은 절차로 만들어지지는 않는다. 기준이 없다 하더라도 의견을 종합하여 판단할 수 있으나, 중요한 기준 몇 가지를 입법부가 제안한다면 삼권 분립과 같은 견제가 가능할 수도 있다.

 

일곱째, 정치가 공약. 정치가 공약은 공수표가 많았다. 정치가 공약 중에서 정책에 관한 것은 정책 판단 기관에서 실현 가능성을 판단한다면 공수표가 줄어들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이런 판단이 정치가의 자유로운 공약을 막을 수 있으나 정책타당성 판단에 대해 유권자가 알 권리는 존중되어야 한다. 그렇게 정책 실현 가능성에 대한 판단이 나오면 일단 공약을 내뱉고 보는 현상이 줄어들 거라 생각한다. 지금처럼 정치가가 포퓰리즘을 남발하고 관료는 정치가의 공약에 의해 단발성 정책을 추진해 예산을낭비하고 눈 먼 돈에 눈이 멀어 예산을 부정취득 하려는 자들로 넘치고 그로 인해 지원 자격이 까다로워지면서 꼭 필요한 이들에게 정책적 지원이 되지못하는 것을 막아야 한다. 우수한 정치가도 공정한 경쟁을 바랄 거라 생각한다.

 

 

정책 판단 기관에 대해 알아보았다. 정책 판사와 정책 전문가는 사실 지금까지 크게 다르지 않다. 정책 판사는 여러 명 있을 수 있고 배심원제와 같이 전문적이지 않은 외부 인원이 들어올 수도있을 것이다. 단지 법원과 같이 공적인 기관을 만들어 권력으로부터 독립하는것일 뿐이다. 그런데 그게 중요하다. 만약 사법이 독립되지 않았다면 잘못된 판단이나 지금과 같은 발전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정책 판사와 정책 전문가는 해당 분야의 관료나 전문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새로운 방식이므로 우선 경험이 많은 관료나 전문가로 시작하되, 이후에는 법과 비슷한 방식을 취하면 될 것이다.

정책 판단 기관을 사법부에 포함하여 행정 법원 옆에 둘 것인지 아니면 행정부에 포함하여 행정심판을 바꿀 것인지 결정해야 한다. 전자를 하면 법과 정책 판단을 통합하는 것으로 명확한 역할 분담이 가능해지나, 정책은 행정부가 주도해왔기 때문에 사법부의 월권처럼 보일 수가 있다. 후자를 하면 사법부의 월권으로 보이지는 않겠지만 권력으로부터 독립되었다 할 수 없을 것이다. 삼권 분립과 같이 권력으로부터 독립되어 서로 견제하기 위해서는 사법부에 행정부의 관료가 임용되어일하는 것이 타당하다 본다. 그렇게 된다면 법치주의와 같이 모든 개인이 욕망과 이기심을 토대로 한 자유 의지를 가지고 행동해야 올바른 결과가 나올 것이다. 그러면서 법이 성장했던 것과 같이 정책도 성장할 수 있을 것이다.

 

 

정책에 대해 알아보았다. 복지는 법과 달리 체계적이지 못했다. 정책은 법과 달리 독립되어 있지 않았다. 복지는 법과 사회 구조 유지의 기본으로 중요하고 정책은 국가 구조 유지의 기본으로 중요했으나그런 체계성이 부족했다. 어째서 이런 차이가 발생하였는가? 그것은 관습에 의한 결과다. [관습은 어떤 사회에서 오랫동안 지켜 내려와 그 사회 성원들이 널리 인정하는 질서나 풍습을 뜻한다.]

인류의 역사는 전쟁이 일상이었다. 정복 전쟁의 승자가 지배하고 패자가 지배당했다. 그렇게 하여 지배자와 피지배자로 나뉜 신분제가 나타났다. 이런 신분제는 고대 그리스 아테네 민주주의에서도 시민과 노예로 나뉜 것으로 존재했다. 정복과 지배의 반복을 통해 국가의 지배자는 피지배자의 복지에 크게 관심이 없었다. 쓸모가 없어진 피지배자는 죽게 내버려두었다. 그런데 복지는 사회 구조 유지의 기본으로 없으면 인간이란 요소가 사라져 구조가 무너지게 된다. 과거 사회도 예외는 아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사회 구조가 유지되었던 것은 종교가 있었기 때문이다. 원시적인 사회인 원시 부족도 피지배자가 지속적으로 불행하여 죽으면 부족의 힘이 쇠락하여 자연환경에 의해 도태되거나 다른 부족의 공격으로 사라지게 된다. 보편적 복지가 없는 사회는 일부를 제외하고 그렇게 도태되는 것이 자연스러웠으나 종교의 등장으로 달라지게 된다. 종교는 피지배자가 겪을 수 있는 지배에 의한 억압, 병의 의한 고통, 죽음에 의한 공포, 빈곤에 대한 절망, 폭력에 대한 불안 등의 다양한 불행을 신앙이나 빈곤 구제 등으로 행복하게 하였다. 사회의 복지를 종교가 담당하면서 사회 구조 유지가 된 것이다. 지배자 또한 병의 고통이나 죽음의 공포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으므로 그들 또한 이내 종교에 의존하게되었다. 종교로 불행을 면하게 된 이들이 종교를 중심으로 결집하면서사회가 보다 단단하게 유지되게 되었다. 대부분 지역에서 종교의 흔적이 남은 것은 지금까지 인류의 사회는 종교가 없었으면 유지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종교는 인간을 행복하게 하는 것으로 인간에게 지지 받아 강한 권력을 얻게 되었다. 프랑스에서 제1신분이 성직자고 제2신분이 귀족이었다. 인도에서 제1계급이 승려인 브라만이고 제2계급인 왕과 무사가 크샤트리아였다. 이와 같이 종교가 복지를 담당했었기에 국가의 복지는 체계적이지 못했던 것이다.

국가의 정책이 법에 비해 체계적이지 못한 까닭은 종교가 복지로 권력을 얻은 것을 알고 있음에도복지는 종교의 영역이라 생각하며 법만이 권력이라 생각하며 법을 중심으로 삼권 분립을 했기 때문이다. [삼권 분립_법률은 국가의 권력을 입법, 사법, 행정의 삼권으로 분리하여 서로 견제하게 함으로써 권력의남용을 막고, 국민의 권리와 자유를 보장하는 국가 조직의 원리를 뜻한다.] 구소련과 중국 공산당이 노동자 계급의 이익을 주장하는 것으로 지지를 받아 혁명이 일으켜 권력을쟁탈했던 것과 민주주의 국가의 정치가가 국민의 행복을 주장하는 것으로 지지를 받아 권력을 얻은 것을 고려하면 복지 또한 국가의 권력 중 하나이므로법과 같이 삼권 분립으로 권력을 나누어 서로를 견제하는 것이 마땅했다. 민주적일수록 다수의 국민은 복지 정책에 관심을 갖게 되므로 실질적으로 복지 권력이 더 강해질 수도 있다. 그런 만큼 복지 권력도 분립해야 한다. 그와 동시에 다른 분야의 정책 또한 권력에 해당하므로 법과 복지와 함께 삼권 분립을 했어야 했다고본다. 그러면 합리적이었을 거라 생각한다.

 

 

인류의 복지를 담당하던 종교에 대해 알아보자. [종교_종교 일반은 신이나 초자연적인 절대자 또는 힘에 대한 믿음을 통하여 인간 생활의 고뇌를 해결하고 삶의 궁극적인 의미를 추구하는 문화 체계를뜻한다. 그 대상·교리·행사의 차이에 따라 여러 가지 있는데, 애니미즘·토테미즘·물신 숭배 따위의 초기적 신앙 형태를 비롯하여 샤머니즘이나 다신교·불교·기독교·이슬람교따위의 세계 종교에 이르기까지 비제도적인 것과 제도적인 것이 있다.] 현대 종교는 기독교, 이슬람교, 힌두교, 불교, 유교, 도교 등이 있다. 유교에 불교에 영향을 받아 통치나 수행을 명분으로 삼아 내정에 충실했던 동양과 기독교와 이슬람교에영향을 받아 선교를 명분으로 삼아 세계를 떠돌던 서양과 같이 종교는 믿는 인간에게 막대한 영향을 끼친다. 유교와 힌두교를 예시로 사회에 영향을 끼치는 것을 좀 더 알아보자.

유교가 보편적인 한국에서는 자신의 몸과 마음을 닦아 남을 다스린다는 수기치인을 근거로 학문을갈고 닦아 능력을 갖추면 타인을 다스릴 수 있고 능력이 없으면 타인에게 다스림 당할 수 있다고 여겼기에 지배당하는 이들은 능력이 부족한 것이라생각하며 그들을 천시하는 것과 같은 부당한 차별을 정당화하였다. 한국에서 다양한 차별이 사라지지 않는 까닭은 능력으로 부당한 차별을 정당화하는 수기치인이나 연령으로 부당한 차별을 정당화하는 장유유서와같은 가르침으로 나타난 관념 때문이다. 역할이란 관계에 따른 능력을 고려하지 않고 개인이 부당한 차별로 인한 불행을 겪으면 그저 능력이 부족한 것이라며 차별을 정당화하였다. 힌두교가 보편적인 인도에서는 살아가면서 하는 모든 행위를 말하는 업에 대해 배워 선업을 행하면후생에 존귀한 존재가 되고 악업을 행하면 후생에 미천한 존재가 된다고 여겼기에 미천한 삶을 사는 이들은 전생에 악업을 행하였기 때문이라 생각하며그들을 천시하는 것과 같은 차별을 정당화하였다. 인도에서 다양한 차별이 사라지지 않는 까닭은 업과 같은 가르침으로 나타난 관념 때문이다. 전생의 업이라는 과학적 증명도 되지 않은 미신으로 개인이 차별로 인한 불행을 겪으면 너의 업때문이라고 말하며 차별을 정당화하였다.

이외 각국에 남아있는 대부분 차별은 과거 종교의 영향이 매우 크다. 종교의 가치관은 개인주의 체제와 무관하기 때문이다. 대부분 종교는 인간의 욕망을 악으로 보고 금욕과 이타를 강조했기 때문에 개인주의 체제에 해로울수밖에 없다.

 

종교의 본질은 무엇인가? 주제가 사회와 복지이므로 행복을 관점으로 종교를 바라보았다. 종교는 인간을 어떻게 행복하게 했는가? 신앙이나 빈민 구제다. 신앙은 정신적 행복이고 빈민 구제는 물질적 행복이다. 빈민 구제는 알기 쉽다. 인간은 육체의 욕구가 충족되면 행복을 느낀다. 그런데 신앙은 알기가 어렵다. [신앙은 믿고 받드는 일을 뜻한다. 신앙_종교 일반은 초자연적인 절대자, 창조자 및 종교 대상에 대한 신자 자신의 태도로서, 두려워하고 경건히 여기며, 자비·사랑·의뢰심을 갖는 일을 뜻한다.] 이 행위가 어떻게 인간을 행복하게 했는가? 종교의 성질인 신비성과 맹신성과 신성성과 도덕성과 목적성과 집단성과 흡수성 등을 배제하고 현실에 있지 않는 것을 믿는 것으로 마음의 안정을찾아 행복해지는 것에 초점을 맞추어보았다. 그러자 결론은 단순했다. 그것은 현실에서 도피하여 마음의 안정을 찾아 행복해지는 현실 도피와 원리가 똑같았다. [현실 도피_심리는 생각이나 행동에서 현실에 적극적으로 맞서기를 회피함을 뜻한다] 종교의 현실 도피는 사회의 현실 도피와 거의 차이가 없었다. 차이는 맹신 하나다. 종교의 현실 도피는 그것을 현실이라 믿고 사회의 현실 도피는 그것을 비현실로 여긴다. 만약 사회의 현실 도피도 그것을 현실로 여기면 종교와 같은 현상이 나타날 것이다.

어떤 사람은 종교의 신이 실재하니 현실 도피가 아니라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기성 종교든 신흥 종교든 세상에 있는 종교는 단 한번도 전지를 증명한 적이 없다. 분명 이 세상이 어떤 존재에 의해 만들어졌을 확률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인간이 주장한 존재가 만들었다고 하기에는 그 존재를 신으로 받드는 이들의 가르침에는인간의 인지를 초월한 지식이 없었다. 오로지 종교가 만들어졌을 당시에 살고 있던 인간의 인지 내에서의 지식만 있었다. 오래된 기성 종교가 현대의 인터넷을 알고 있었는가? 과거의 공룡을 알고 있었는가? 지금보다 미래의 무언가를 알고 있었는가? 그렇다고 당대 다른 지역을 알고 있지도 않았다. 경전의 가르침은 당대 보편적 지식과 차이가 없었다. 오히려 고대 그리스 철학자의 지식보다 못하여 유럽이 고대 그리스의 지식을 배우자 르네상스가 일어났을정도다. 그러므로 그 가르침은 신의 말씀이 아닌 종교인의 가르침일뿐이었다. 그러니 논리적으로 종교는 인간의 창작물로 판단할 수밖에없다.

 

종교의 현실 도피는 원시 부족 때부터 있었다. 원시 부족은 자연을 숭배하는 원시 종교로 자연의 공포라는 현실에서 도피하는 것으로 마음의 안정을찾아 행복하게 되었다. 그것으로 사회 구조가 유지되었다. 이처럼 종교의 현실 도피는 현실 도피 후 마음 안정을 찾아 행복해진다라는 원리로 작동한다. 종교의 현실 도피는 매우 다양하다. 종교인은 신과 조상이 위나 곁에 있다고 믿으며 괴롭거나 외롭다는 현실에서 도피했다. 종교인은 구원, 천국, 사후 세계를 믿으며 죽음 후 공포라는 현실에서 도피했다. 종교인은 인간은 모두 평등하다고 믿으며 불평등한 현실에서 도피했다. 종교인은 금욕하는 것으로 욕망으로 동족을 해치는 현실에서 도피했다. 종교인은 신의 용서를 믿으며 죄를 지은 현실에서 도피했다. 종교인은 신앙으로 본인이 특별한 존재다 된다 믿으며 특별하지 않은 현실에서 도피했다. 그야말로 전형적인 현실 도피다. 그렇다고 종교인만 현실 도피 하는 것은 아니다. 대부분 인간이 현실 도피를 한다.

사회의 현실 도피는 흔하게 볼 수 있다. 사회인은 창작물이나 스포츠에 빠지는 것으로 지루한 현실에서 도피하는 것으로 마음의 안정을 찾아행복하게 되었다. 그것이 사회 구조 유지에 도움을 주고 있다. 이처럼 사회의 현실 도피도 현실 도피 후 마음 안정을 찾아 행복해진다라는 원리로 작동한다. 사회인은 국가 구성원의 위대한 업적에 빠지는 것으로 평범한 현실에서 도피했다. 사회인은 망상에 빠지는 것으로 일상적인 현실에서 도피했다. 사회인은 타인의 불행에 빠지는 것으로 본인의 불행한 현실에서 도피했다. 사회인은 온라인 커뮤니티에 빠지는 것으로 오프라인 현실에서 도피했다. 사회인은 가상 현실인 VR에 빠지는 것으로 실제 현실에서 도피했다. 사회인은 술이나 마약에 빠지는 것으로 비참한 현실에서 도피했다. 매우 일반적인 현실 도피다.

대부분 일반 인간은 현실 도피를 하기에 종교인의 비율이 낮은 곳일수록 사회의 현실 도피 비율이높아지게 되었다. 창작물, 스포츠, 국가 포장 영상, 술, 담배, 마약, 등이 유행하게 되었다. 과학도 예외는 아니다. 알고 있는 과학 지식으로 있을 수 없는 현상이 일어날 때 무조건 부정하는 것은 과학의 현실 도피에해당한다. 가령 양자역학이 말하는 당시 과학 지식으로는 황당한 현상을무조건 부정하는 것이 과학의 현실 도피에 해당한다. 어떤 경우에도 현상이 첫째고 이론이 둘째다. 이론과 다른 현상이 나오면 이론을 배제하고 현상을 관찰해야 한다. 이론에 맞는 현상이라 하더라도 새로운 관점을 보기 위해서는 이론을 무시하고 처음부터 현상을 관찰해야한다.

종교의 본질이 현실 도피라면 종교의 다양한 특성도 해석될 수 있다. 종교에서의 신성성과 도덕성은 종교의 현실 도피를 정당화하는 것으로 사회의 현실 도피를 자기 합리화등과 같이 다양한 이유로 정당화하는 것과 비슷하다. 종교에서의 소속감은 같은 현실 도피를 하는 이들이 모인 곳에 소속감을 느끼는 것으로 사회에서 현실 도피 하는 이들이 같은 현실 도피를 하는이들이 모인 곳에 소속감을 느끼는 것과 비슷하다. 종교에서 우수하고 부유한 이들이 현실 도피를 하는 것은 사회에서 우수하고 부유한 이들이 현실 도피를 하는 것과 비슷하다. 모든 종교인은 종교에서 현실 도피 하는 것으로 마음의 안정을 가져 행복을 누렸다.

유교도 예외는 아니다. 복권보다 확률이 낮은 실낱 같은 가능성에 기대어 모든 인간이 유교의 가르침을 붙들고 공부하게만들었다. 과거 병인양요 당시 프랑스인 증언에 따르면 조선은 아무리가난한 집에도 책이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수기치인으로 모든 인간을 학문으로 현실을 도피하게 했으니 책이 있을 수밖에 없다. 조선 자체도 현실 도피를 했다. 조선은 유교의 가르침을 믿고 따른다면 국가가 성장하고 국민이 행복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며현실 도피를 하는 것으로 인류나 국가에 이로운 것을 새롭게 생각하여 가치 있는 것을 생산한 것이 아니라 과거의 가르침을 교리처럼 암기하고 해석하는것에 그쳐 정교일치의 국가와 마찬가지로 국가가 성장하지 못하고 국민이 불행하여 몰락하게 되었다. 가난한 집조차 책이 있었음에도 국가가 몰락하고 국민이 불행했던 것은, 그 책은 종교의 경전이었고 그 책의 가르침은 종교의 교리와 다를 바 없었으며 그 책을 소유한이유도 종교의 현실 도피와 다를 바 없었기 때문이었다. 신을 모시던 종교는 종교와 학문을 분리하여 성장했으나 학문을 종교처럼 따르던 종교는 종교와 학문을 분리하지 못하여 성장도 하지 못했다. 정리하면 종교는 맹신적이고 권위적이며 조직적인 현실 도피다. 현실 도피 자체는 누구나 하기에 그리 특별하지 않으나 현실 도피임을 자각하는 것과 그러지 않은것은 매우 다르다.

 

종교에 대해 알아보았다. 종교는 현실 도피와 빈민 구제로 인간을 행보하게 하여 권력을 얻었다. 그러다 왕정이 무너지고 민주정이 들어서면서 개인이 중시되는 개인주의 체제인 국가에서는 종교의영향력이 감소함에 따라 복지 행정 부처와 사회 복지사의 역할은 커져갔는데 종교가 가졌던 권력에 비하면 크지 않은 편이었다. 과학의 발달로 질병에 의한 고통을 종교가 아닌 의료계가 담당하면서 종교의 힘 일부를 의료계가계승하였다. 그러나 종교와 의료계의 치료는 결정적으로 차이가 있었다. 종교의 치료는 현실 도피지만 의료계의 치료는 현실 직시였다. 일부 광신자를 제외하면 인간 육체에 관한 치료를 의료계가 담당하면서 종교의 권위와 재력을 일부얻게 되었다. 그러나 그 중에 정부 권력은 적었다. 의료계 출신의 정치가는 수가 적었다. 기득권 사이의 인맥이나 환자에 갖는 강제력과 모든 국민이 갖는 권력은 있어도 정부 권력은 적었다. 실제 종교가 가졌던 권력은 대부분 정치가가 계승하였다. 지금 대부분 정치가의 공약에 어떤 형태로든 복지 공약이 들어가고 있다. 종교가 민중에게 복지를 하여 지지를 받는 것으로 권력을 얻었던 것과 같이 정치가가 국민에게 복지를하겠다고 하여 지지를 받는 것으로 권력을 얻고 있다. 선진국일수록 민주주의 지수가 높아 지배를 통한 권력을 얻지 못하기에 복지를 통한 권력을 얻는 경우가 많아졌다.

정치가는 법과 복지를 둘 다 다루지 그 분야에 속한 것은 아니다. 법과 복지는 정치와 무관하게 권력이 있어야 했다. 법조계는 사법부라는 형태로 독립적인 권력이 있었다. 그러나 복지는 그런 것이 없이 모든 분야의 일부에 속해 있어 보건 복지부로 통합되지도 못하고독립적인 기관도 없었다. 사회 구조 유지의 기본인 복지는 법과 마찬가지로 독립되어권력을 얻을 필요가 있다. 복지뿐만 아니라 모든 분야는 독립되어 판단하는 기관이 필요하다. 법의 삼권 분립을 모든 분야에 확장해야 한다. 그렇게 하여 보여주기 식 정책이나 포퓰리즘 정책에 대한 견제가 필요하다. 많은 사람들이 법을 불신하기도 하지만, 법의 삼권 분립이 우수하다는 것은 명백하다. 다른 분야도 삼권 분립과 같은 제도를 도입한다면 법의 합리성과 체계성이 국가 모든 분야에 퍼져합리적이고 체계적인 국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민주주의 국가의 국민은 본인의 권력을 제대로 쓰기 위해 정부 권력이 전문가의 의견에 귀를 기울이는것과 같이 국민 권력도 전문가의 의견에 귀를 기울이고 의사를 표현할 때에도 법의 전문가인 변호사를 선임하는 것과 같이 각각의 전문가를 선임하여표현할 수 있는 환경이 필요하다. 그렇게 분야의 전문가를 중시하는 사회가 역할을 중시하는 역할주의 사회다.

 

 

개인주의 체제인 국가는 복지의 변화가 필요하다. 과거 종교는 현실 도피로 인류를 정신적으로 행복하게 했고 빈민 구제나 고아원 운영 등으로 인류를육체적으로 행복하게 했다. 그런 식으로 사회의 복지를 담당했다. 그런데 개인주의 체제인 국가가 되면서 종교의 영향력이 감소하게 되었다. 행정 부처와 복지 전문가와 의료계가 복지를 담당하게 되었다. 그런데 육체적 행복은 물질 지원이나 질병 치료 같이 알기 쉬워 대응할 수 있었으나 정신적 행복은어떻게 종교가 행복하게 했는지 알기가 어려워 대응하기 어려웠다. 오히려 현실 도피에서 벗어나 현실을 바라봐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을 정도다. 사회의 현실 도피도 있었으나 그것은 사회적 비판을 받아 자중하는 탓에 종교의 현실 도피와 비할수가 없었다. 특히 금욕주의가 강조될수록 사회의 현실 도피는 비판을 받았다. 이런 이유로 종교의 현실 도피를 하지 않는 인간과 사회의 현실 도피를 적게 하는 인간은 정신건강이 심각하게 악화되었다. 현대인이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것은 아는 것은 과거보다 많아졌으면서도 현실 도피는 과거보다 적게 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관념에 의해 알수록 불행해질 수 있다. 과학적 증명이 된 흡연의 해로움은 몰랐을 때엔 타인의 흡연을 불쾌해하지 않다가 알고 나면 불쾌해지면서불행해졌다. 과학적 증명이 되지 않은 성 죄악시는 몰랐을 때엔 성을불편해하지 않다가 알고 나면 성을 불편해하면서 불행해졌다. 진리와 무관하게 관념에 의해 알면 불편해지게 된다. 현대인은 아는 것은 많아져 스트레스 받을 일은 많아졌는데 현실 도피를 하지 않아 스트레스 풀 일은 줄어들면서 현대인은 스트레스를 많이 받을수밖에 없었다.

종교가 인류 역사의 동반자였던 것을 고려하면 대부분 인간에게 현실 도피는 필요하다. 나 또한 현실 도피로 살아남았다. 선진국은 인간의 정신 건강을 위해 효율적이고 안전한 현실 도피를 마련해야 할 것이다. 보통 창작물이나 스포츠가 적절하다. 그것의 성장이 곧 복지 중 정신적 행복에 해당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고 현실 도피에만 매달릴 수는 없다. 현실에 도피하지 않아도 행복해야 한다. 현실 도피적 행복은 문제는 해결하지 못하지만 현실을 도피하면서 행복해지는 것이라면 현실 직시적행복은 문제를 해결하여 현실에서 행복해지는 것을 말한다. 가령 외모로 불행할 경우 고민 상담이 현실 도피적 행복이고 화장이나 성형이 현실 직시적 행복이라 할 수 있다. 이에 따라 국가 복지는 현실 도피와 현실 직시 모두 고려해야 할 것이다.

정신병에 대한 부정적 선입견으로 정신 건강이 악화되어도 정신 질환 치료를 받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런 사회적 풍조에서 벗어나 모두가 정신 건강이 악화되어 정신 질환이 나타나면 치료를 받을 수있는 환경이 필요하다.

한국은 사회 행복도가 낮은 편이다. 한국은 왕정의 관념인 집단주의 관념과 민주정의 체제인 개인주의 체제와 충돌하여 기본적인 사회적불행 속에서 문맹률이 낮아 아는 것이 많고 종교 비율이 낮아 현실 도피가 적어서 그랬던 것이다. 그에 따라 모두가 개인주의 관념을 가지고 적절한 현실 도피와 현실 직시를 하게 되면 행복해질수 있다.

인간은 육체로 행복과 불행을 느끼므로 일반적으로 건강한 육체가 최고의 행복이 된다. 그러므로 이상적인 현실 직시적 행복은 과학을 통해 개인이 불로불사가 되는 것으로 생존 게임에서승리하는 것이다.

 

 

 

9. 가치 복지

 

복지 방법에 대해 알아보자. 일반적으로 복지에 대한 부정적 선입견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금욕주의에 의한 것으로 모든 인간이 욕망을 가지면 복지 정책의 혜택으로 얻는 행복에만족하지 않고 더 행복해지기 위해 가치를 생산하게 된다. 가치가 생산되면 복지를 하는 것은 바람직하게 된다. 현재 과한 복지를 하는 국가가 휘청거리는 것은 과한 복지에 의해 가치 생산이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모두가 욕망을 가지면 과한 복지를 하더라도 가치 생산을 하여 국가는 더욱 발전할 수 있게 된다.

복지는 인간을 행복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면 행복은 무엇인가? [행복은 생활에서 충분한 만족과 기쁨을 느끼어 흐뭇함을 뜻한다. 또는 그러한 상태.][흐뭇하다는 마음에 흡족하여 매우 만족스러움 뜻한다.] 행복은 생활에서 만족과 기쁨을 느낀 상태를 말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행복할 수 있는가? 그것은 사람마다 다르다. 각자의 관점·관념·감각이 다른 것으로 인식이 다르고 가치관도 달라 각자의 행복이 다르다. 행복은 지극히 주관적이다. 행복을 돈이란 객관적 기준으로 접근할 수 있는데 객관적으로 불행해 보이는 빈자가 행복하여 여유롭게살 수도 있고 객관적으로 행복해 보이는 부자가 불행하여 자살할 수도 있다. 행복의 기준은 집단주의일수록 객관적이고 개인주의일수록 주관적이다. 집단주의 관념을 가진 사람은 본인의 가치관을 타인에게 강요하며 같은 행복을 추구하도록 강요하기때문이다. 가령 집단주의 관념을 가진 부모는 본인의 가치관으로 자녀의진로를 결정하도록 강요한다. 그러나 인간은 본인이 바라는 것을 이룰 때 행복해진다. 본인의 가치관으로 타인에게 행복을 강요해봐야 타인은 행복하지 않을 확률이 높다.

내가 바라는 것은 크게 세 가지 있다. 하나, 나의 사상으로 명예를 얻어 세상을 바꾸고 싶다. 둘, 나의 사상인 생존주의의 이념에 따라 살아남고 역할주의의이념에 따라 역할 중심 사회로 만들고 싶고 탐구주의의 이념에 따라 진리를 알고 싶다. 셋, 이상의 이성과 행복하게 살고 싶다. 그 외의 다양한 바람을 이루면 나는 행복할 것이다.

이렇게 인간의 행복은 사람마다 다르다. 본래 가치관이 각자 다르므로 다른 것이 자연스럽다. 특정 개인은 진리를 추구할 수 있고 도덕을 추구할 수 있고 아름다움을 추구할 수 있다. 그렇게 불균형한 것이 당연하다. 그렇기에 부도덕한 것도 개인의 행복이 될 수 있다. 모든 일반 개인은 옳은 행동을 한다. 그 옳은 행동의 원리에 개인의 행복도 포함된다. 객관적으로 부당한 폭력 또한 개인의 행복에 해당하기에 옳은 행동이라 여기며 행동한 것이다. 그런 폭력에 맞선 것도 불행을 피하기 위해 옳은 행동이라 여기며 행동하게 된다. 폭력을 행한 사람과 폭력에 맞선 사람 둘 다 행복하기 위해서와 불행을 피해 행복하기 위해서 그런것이었다. 이와 같이 옳고 그름이나 위법 유무는 행복의 기준이 될수 없다. 인간이 사회에 살고 있는 이상 인간의 행복이 충돌하면 누군가는행복하고 누군가는 불행할 수 있다. 그렇기에 대상 가치가 무의미하다. 대상이 선하더라도 행복이 충돌하면 죄를 저지를 수 있다. 인간을 이롭게 하려는 인간도 가족을 지키기 위해 범죄를 저지르는 수 있다. 반대로 대상이 악하더라도 행복이 충돌하지 않으면 죄를 저지르지 않는다. 인간을 해롭게 하려는 인간도 무인도에서 살아가면 죄를 저지르지 않는다. 가치는 인간의 관계에서 발생한다.

개개인에게 가치관을 강요하지 않는 한 개인을 기준으로 행복을 객관화하기가 어렵다. 그러면 객관화를 하지 못하여 합리적 기준을 통한 복지 정책을 실행하기가 어렵다. 그러므로 개인이 아닌 사회를 기준으로 접근해야 한다. 사회에 이로운 개인의 행복과 사회에 해로운 개인의 행복이다. 국가 정책은 국가에 이로운 행복이란 합리적 기준으로 복지 정책을 실행하면 된다. 그렇게 구조 유지를 위한 복지 정책을 하면 구조 유지와 무관한 개인의 행복도 자유롭게 추구할수 있다. 국가 구조를 유지하기 위해 국가에 이로운 행복이라는 객관적기준을 정하여 그것을 우대하는 것으로 각자의 주관적 기준에 따른 다양한 행복에 간섭하지 않으면서 개인이 자유롭게 행복을 추구하는 것으로 개인의의사라는 국가 원리를 추구한다.

 

국가는 실정법을 기준으로 질서를 유지하며 바른 행복과 그른 행복을 나누고 있다. [질서는 혼란 없이 순조롭게 이루어지게 하는 사물의 순서나 차례를 뜻한다.][순서는 정하여진 기준에서 말하는 전후, 좌우, 상하 따위의 차례 관계를 뜻한다.][차례는 순서 있게 구분하여 벌여 나가는 관계를 뜻한다. 또는 그 구분에 따라 각각에게 돌아오는 기회.] 법으로 순서와 차례를 정하여 질서를 유지하고 있기에 사회 질서가 유지되고 있다. 가령 차도에 신호등이 없다면 순서를 정할 수 없어 사람이나 차량이 충돌하여 사고가 날 수 있다. 법에서 각각의 순서를 정해 사람이나 차량이 사고가 나지 않도록 하고 있다. 또는 대중교통을 이용할 때 순서가 없다면 새치기 등으로 분쟁이 발생할 수 있다. 이것은 암묵적인 불문율인 선착순이란 기준으로 순서를 지켜 줄서기를 하는 것으로 분쟁을 줄이고있다. 분명 순서가 앞인 사람이나 차량은 시간을 절약하여 상대적으로행복할 수 있고 순서가 뒤인 사람이나 차량은 시간을 절약하지 못하여 상대적으로 불행할 수 있다. 여기서 교통법이나 선착순 같이 타당하고 합리적인 기준이 있다면 행복한 사람과 불행한 사람 모두수긍하게 된다.

여기서 교통법이나 선착순 같은 기준이나 절차를 지키면서 행복을 누리는 것이 바른 행복이 되고그런 기준이나 절차를 무시하고 교통법을 어기거나 새치기를 하는 것으로 행복을 누리는 것은 그른 행복이 된다. 이런 순서를 통해 모두가 욕망을 갖고 이기적으로 자유 의지로 행동해야 올바른 결과가 나온다. 부당한 이유로 교통법을 어기거나 새치기를 하는 인간을 볼 때 금욕적이고 이타적이라면 그런 인간의이익을 위해 부당함을 방치하지만 욕망적이고 이기적이게 된다면 그런 본인의 이익만을 위해 부당함을 방치하지 않고 지적하게 된다.

그른 행복도 정당성이 확보되는 바르게 될 수 있다. 가령 인간을 죽이거나 덮치거나 빼앗는 것으로 행복을 느끼는 것은 본인의 행복을 위해 타인을 불행케한 그른 행복이다. 그러나 정당방위를 통해 죽이거나 덮치거나 빼앗는 것으로불행에서 벗어나 행복을 느끼는 것은 정당화가 되어 바른 행복이 될 수 있다. 살해 위협을 받는 피해자가 가해자를 공격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는 상황에서 본인이 살아남기위해 가해자를 공격하여 죽이거나 움직임을 막기 위해 덮치거나 무기를 빼앗는 것은 가해자인 타인이 불행하더라도 정당방위라는 정당한 기준에 의해 정당화되어바른 행복이 된다.

실정법 준수 여부 외에도 사회에 끼치는 영향으로 바른 행복과 그른 행복을 나눌 수 있다. 국가로 접근하면 국가를 이롭게 하는 행복이 바른 행복이고 국가를 해롭게 하는 행복이 그른 행복이다. 가령 개인주의 관념으로 개인의 자유권을 존중하고 성을 친숙하게 여기며 연령 평등을 하는 것으로행복을 느끼는 것이 국가를 이롭게 하는 행복이고 집단주의 관념으로 개인의 자유권을 침해하고 성을 죄악시하며 연령 차별을 하는 것은 국가를 해롭게하는 행복이다.

이처럼 행복은 개개인의 가치관에 따라 달라질 수 있음에도 대상 가치로 접근하여 일부 개인의 행복을위해 일부 목소리 큰 인간을 위주로 복지 정책을 추진하여 불균형한 복지 정책이 시행되기도 한다. 특히 길고양이 보호가 그렇다. 현재 길고양이로 사회적 혼란이 발생하는 것은 합리적 기준 없이 일부 개인의 행복을 위한 정책이추진되고 있기 때문이다. 길고양이를 과하게 아끼며 먹이를 주고 길고양이가 인간에게피해를 끼치고 길고양이가 천연기념물을 죽이더라도 보호하려는 태도에 다수의 사람들이 분노하고 있다. 동물 보호를 해야 한다는 명분으로 길고양이에게 먹이를 주고 인위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환경을조성하고 있다. 그러나 동물 보호가 명분이 되면 모든 동물을 길고양이와같이 먹이를 주고 인위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야 한다는 논리가 나온다. 병균을 옳기는 쥐도 똑같이 대해야 합리적 기준이 된다. 말이 안 되는 소리다. 그러니 지금 길고양이 보호는 합리적 기준 없이 멋대로 행하는 행위이므로 강제성이 존재하지 않는다. 길고양이에게 먹이를 주고 살아갈 수 있는 인위적인 환경을 만들고 싶다면 관계 가치로 접근하여사회에 속한 대부분의 동의를 받아야 한다. 그러지 않고 억지로 강제하는 것은 국민의 권력 남용이 된다.

 

 

합리적 기준으로 사회적 합의를 받아 사회에 이로운 행동을 하는 것이 보통 바른 행복이 된다. 그런 바른 행복이 복지 정책을 해야 한다. 어떤 기준으로 복지 정책을 해야 하는가? 가치 소비 행복과 가치 생산 행복으로 나누어 접근해보겠다.

 

첫째, 가치 소비 행복. 인간은 가치가 있는 상품이나 재화를 소비하는 것으로 욕망을충족하여 행복을 얻는다. 자본주의 체제인 사회에서 인간은 돈이나 재화인 상품 등을구매하여 행복을 얻는다. 소비하는 행복은 기본적으로 시장에 참여하여 얻는다. 시장의 수요에 소비자 상품이나 노동력 임대 상품을 공급하여 얻은 이윤으로 다른 상품을 구매하여소비하는 것으로 행복을 얻는다. 소비하는 행복이 일반적인 시장 경제의 원동력이다. 본인이 소비하는 행복을 누리기 위해 타인에게 소비하는 행복을 선사한다. 자본주의는 시장 경제에 의해 본인의 행복을 추구하면 타인이 행복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오가는 돈은 서로가 공급하는 상품의 가치를 측정한 것을 객관화하여 물질로 나타낸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소비하는 행복을 위해 금전적 지원을 하는복지를 하게 되면 금전적 지원을 받은 사람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가치를 객관화한 물질을 받았기에 가치를 생산하지 않게 될 수 있다. 특히 금욕주의가 윤리거나 윤리였던 사회에서는 더욱 그렇다. 금욕주의에 의해 욕망이 절제되어 기본적인 욕망만 충족해도 만족해버리기 때문에 욕망을 위한 가치생산을 멈추게 된다. 그렇게 가치 생산을 멈추게 되면 시장에 공급되는 상품의품질이 낮아지고 가격이 높아지면서 사회 전체가 불행해질 수도 있다. 국가 복지 정책을 가치 소비에 실행하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모든 인간이 욕망을 가지고 복지 정책의 혜택을 받더라도 욕망을 위해 가치를 생산할수 있도록 해야 하며, 가치 생산이 되지 않을 정도의 가치 소비를 위한 복지 정책의혜택은 부당하다 할 수 있다. 가치 소비 행복에 복지 정책을 집중하는 것은 대부분 생산이 완전 자동화가 되어 인간이 가치 생산을 하지 않아도 될 때부터 해야 한다. 그 전까지는 가치 생산이 가능한 가치 소비를 위한 복지 정책을 해야 할 것이다. 가치 생산을 하지 않을 정도의 가치 소비에 복지 정책을 실행하는 것이 일반적인 대중에 영합하는포퓰리즘이 된다.

 

둘째, 가치 생산 행복. 가치가 있는 재화인 상품 및 특정 가치가 있는 것을 생산하는것으로 욕망을 충족하여 행복을 얻는다. 자본주의 체제인 사회에서 인간은 노동으로 가치가 있는 것을 생산하여 행복을 얻는다. 적성에 맞지 않는 노동일 경우 가치 생산으로 행복을 느끼지 못하기도 한다. 그런데 가치 생산 행복은 시장 경제와 무관할 수 있다. 시장은 실시간 직접 수요로 돌아가기 때문에 생산 학습, 생산 준비, 저가치 생산, 간접 생산, 시설 생산은 시장의 수요에 공급할 수 없거나 공급하더라도 충분한 이윤을 얻기가 어렵다. 사회에는 필요한 생산이더라도 시장성이 있는 생산과 시장성이 없는 생산이 있는 것이다. 국가 복지 정책을 가치 생산 행복에 적용하면 지속적인 가치 생산이 가능하게 될 수 있다. 시장에 직접 관련이 있는 가치 생산은 꾸준한 가치 생산으로 시장을 활성화할 것이고 시장에 직접관련이 없는 가치 생산은 시장의 가치 생산과 소비와 무관할 수 있으나 국가의 모든 인간이 가치를 생산케 하는 풍조를 만드는데 도움이 되어 시장의가치 생산을 활성화할 수 있을 것이다.

 

 

가치 생산이 없는 국가에 미래는 없다. 금융 자본주의가 발전하더라도 가치 생산이 첫째가 되어야 한다. 국가가 생산하는 상품 가치가 높다면 금융 자본주의에서 화폐 가치가 널뛰어도 상품 가치에 의해국가 화폐 가치가 안정적이게 된다. 가치 생산이야말로 견고한 국가로 나아가는 길이다. 가치 소비에 복지 정책이 적용되더라도 가치가 생산되기만 하면 되지만, 기본적으로는 가치 생산에 복지 정책이 적용되는 것이 바람직하다.

 

첫째, 생산 학습. 대상은 보통 학생이고 복지 정책은 보통 장학금이다. 학생은 학습으로 행복을 느낀다. 한국은 주입식 교육이 일반화되어 학습으로 행복을 느끼지 못할 수 있다. 그러나 본래 학생은 학습으로 지적 호기심과 탐구심을 충족하여 행복을 얻는다. 학습은 학문에 따라 과정이 다소 험난하더라도 결과에 성취감을 느끼며 행복할 수 있다. 힘들다고 행복이 아니라면 힘든 과정을 겪는 모든 인간의 행위가 불행하다는 결론이 나오므로 논리적인의견이 아니다. 국가 복지 정책은 국가를 위한 복지 정책이므로 국가에 이로울수록적극적 지원을 하는 것이 타당하다. 그런데 학생의 학습은 당장 생산하는 것이 아니므로 시장성이 없다. 열심히 하더라도 수익이 없어 생계 유지가 어렵다. 이런 학생에게 복지 정책이 적용되면 이후 가치 있는 것을 생산하여 국가를 이롭게 할 것이다.

 

둘째, 생산 준비. 대상은 보통 연구자나 임산부고 복지 정책은 보통 연구비나양육비다. 연구자는 연구로 행복을 느낀다. 한국은 줄 세우기로 학과가 아닌 학벌을 고려하여 학교를 정하기에 원치 않는 학과에 들어가 연구할수도 있어 연구로 행복을 느끼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나 본래 연구자는 연구로 진리를 탐구하는 것으로 행복을 얻는다. 그런데 연구자의 연구는 당장 결과가 나오지 않을 수 있어 시장성이 없다. 열심히 하더라도 수익이 없어 생계 유지가 어렵다. 이런 연구자에게 복지 정책이 적용되면 이후 가치 있는 것을 생산하여 국가를 이롭게 할 것이다.

임산부는 아이를 배고 낳고 기르는 것으로 행복을 느낀다. 한국은 비혼이 유행하여 그것으로 행복을 느끼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나 본래 임산부는 낳은 아이를 아끼고 사랑하는 것으로 행복을 얻는다. 그런데 임산부의 임신과 출산과 양육은 생산 가능성을 생산하는 것이므로 시장성이 없다. 열심히 하더라도 수익이 없어 생계 유지가 어렵다. 이런 임산부에게 복지 정책이 적용되면 낳고 기르는 아이가 이후 가치 있는 것을 생산하여 국가를이롭게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셋째, 저가치 생산. 대상은 보통 예술가나 장애인이고 복지 정책은 보통 생계지원비다. 예술가는 예술로 행복을 느낀다. 한국은 상업 예술이 발달하면서 상업적 상품을 생산하기 위해 반복 작업을 하는 것으로 예술로 행복을느끼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나 본래 예술가는 창작하여 선보이는 것으로 행복을 얻는다. 그런데 열심히 하더라도 수익이 적어 생계 유지가 어려울 수 있다. 이런 예술가에게 복지 정책이 적용되면 언젠가 가치 있는 예술 작품을 생산하여 국가를 이롭게 할수도 있을 것이다.

장애인은 정상적으로 경제활동에 참여하는 것으로 행복을 느낀다. 한국은 과중한 노동이 일반화되어 일하는 것으로 행복을 느끼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나 본래 노동은 사회 참여로 행복을 얻는다. 욕망이 큰 사람은 충분한 부를 소유하고 있어요 욕망을 위해 지속적 가치를 생산한다. 그런데 열심히 하더라도 정식 고용이 되지 않거나 단기 노동으로 수익이 적어 생계 유지가 어려울수 있다. 이런 장애인에게 복지 정책이 적용되면 꾸준한 생산으로 국가를이롭게 할 것이다.

 

넷째, 간접 생산. 대상은 보통 노숙자나 수용자고 복지 정책은 보통 복지 시설이나급식 배급이다. 사람은 살아 있는 것으로 행복을 느낀다. 한국은 자살률이 높아 살아있는 것으로 행복을 느끼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나 본래 인간은 사는 것으로 행복을 얻는다. 노숙자나 수용자도 마찬가지다. 삶 자체가 불행할 수 있지만 그럼에도 죽음보다는 삶이 행복할 수 있다. 노숙자는 도박이나 마약, 사업 실패 등으로 뇌의 회로가 망가지거나 삶의 의욕을 잃고 생산할 수 없기에 노숙을 하고 있다. 아무것도 생산할 수 없어 가치 생산 복지 정책에 적용되지 못할 거라 여겨질 수 있다. 그러나 아무것도 생산할 수 없는 인간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으로 사회 치안 서비스에 도움을줄 수 있다. 수용자는 사회에서 고립되어 수용자 노동을 제외한 생산이불가능하다. 범죄를 저지른 수용자는 치안 서비스에 도움을 주지 못했으므로가치 생산 복지 정책에 적용되지 못할 거라 여겨질 수 있다. 그러나 범죄를 저지른 수용자는 살아있는 것만으로 인간의 존엄성을 지킬 수 있다. 무위로 얻어지는 치안 효과와 생존으로 얻어지는 인간의 존엄성 또한 인간의 간접 생산으로 취급한다. 그래야 합리적 기준으로 복지 정책을 만들 수 있다. 간접 생산은 생산 가치가 낮으므로 그에 대한 복지 지원도 낮게 된다. 이런 노숙자나 수용자에게 복지 정책이 적용되면 사회 치안이 안정되고 인간의 존엄성이 지켜지는것으로 국가를 이롭게 할 것이다.

 

다섯째, 시설 생산. 대상은 보통 사회 간접 자본의 기반 시설이고 복지 정책은보통 국가 예산이다. 기반 시설은 사람에게 이용되어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 것으로효용 가치를 갖는다. 보통 기반 시설은 복지 정책 대상이 아닌 복지 정책으로분류되는데 가치 생산 복지에 기준을 맞추기 위해 기반 시설도 복지 정책 대상으로 분류했다. 새로운 기반 시설을 만들 때에는 만들어지지 않은 무형의 기반 시설을 복지 정책 대상으로 삼고국가 예산으로 복지 정책을 적용해야 한다. 복지 정책은 국가 구조 유지를 위한 것인데 기반 시설과 인간을 구분하여 다른 기준으로 복지 정책을 추진하면 기반 시설은 지어지는데 인간은죽게 되는 황당한 사태가 벌어질 수 있다. 그러면 아무리 복지 정책을 해도 정작 필요한 곳에 복지 정책이 적용되지 못해 요소가 사라지면서 국가 구조가 붕괴할 수 있다. 그런데 기반 시설은 공공의 영역이기에 시장성이 없다. 효용 가치가 높더라도 수익을 얻을 수 없어 새롭게 만들거나 유지할 수 없다. 이런 기반 시설에 복지 정책이 적용되면 불특정 다수의 행복한 삶을 살게 하는 것으로 국가를 이롭게할 것이다.

 

 

가치 생산 행복에 대한 복지 정책에 대해 알아보았다. 가치 생산 복지는 체제와 무관하게 어느 체제에서도 쓸 수 있다. 그렇다면 개인주의 체제의 복지는 어떤가? 개인주의 체제는 개인의 의사를 기본 원리로 삼고 있으므로 개인의 의사가 반영되어야 한다. 그런데 법과 복지는 사회 구조 유지를 위한 것으로 본래 국가에서는 민간에 맡기는 것은 위험하다할 수 있다. 국가의 복지를 민간에 의존하는 것은 법을 민간에 의존하는것과 같다. 민간인이 법의 판단을 무시하고 현행범이 아닌 사람을 사적제재하거나 법의 집행을 무시하고 자경단을 꾸리는 것과 같이 말이다. 지금까지 국가는 관습상 복지를 종교에 상당히 많이 의존해왔는데 그랬기 때문에 국민이 종교에 의존했고, 국민이 종교에 의존하면서 국가는 죽어도 종교는 살아남게 되었다. 현대 국가에서는 바람직하지 못한 방식이다. 그럼에도 법과 복지는 차이가 있다. 법은 질서를 지키는 것이지만 복지는 요소를 살리는 것이다. 질서를 지키는 것은 합리적 기준을 깨지면 복구하기가 어렵지만 요소를 살리는 것은 합리적 기준이깨져도 복구하기가 쉽다. 개개인이 각자 타인의 행복을 위해 지원을 하더라도 괜찮다. 정부 복지 정책에서 그걸 고려하여 수정하면 된다. 그런 이유로 복지는 민간이 적극적으로 하고 있다. 보통 민간이 복지를 행하는 것은 종교, 기부 단체, 개인 기부로 크게 세 가지다.

 

첫째, 종교. 종교는 오랫동안 복지를 해왔기에 지금까지도 관습적으로 사회복지를 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대체로 종교의 세를 불리기 위한 것이므로국가가 그것에 지나치게 의존하면 국민은 국가를 신용하며 의지하는 것이 아닌 종교를 맹신하며 의존하게 되면서 종교를 중심으로 한 집단주의 체제가나타나게 된다. 개인주의 체제인 국가에서 집단주의 체제인 집단은 그 어떤것이라도 해롭게 된다. 전염병이 퍼져도 정부 권력보다 종교 인사의 발언이 더 중요하여정부 권력을 무시하고 멋대로 행동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종교의 복지는 관습이란 명분과 예산 절약이란 실리가 있어도 종교가 집단주의 체제인 이상 개인주의 체제인 사회에 해롭다 할 수 있다.

 

둘째, 기부 단체. 기부로 운영되는 기부 단체는 대부분 믿을 수가 없다. 기부금이 어떻게 사용되는지 투명하게 공개되는 곳이 드물다. 어떤 곳은 대부분의 기부금이 단체 운영비로 활용된다. 그런 곳은 도대체 무엇을 목적으로 기부 단체를 운영하는지 알 수가 없다. 종교의 기부는 종교의 이익을 바라는 신자의 헌금으로 되기도 하지만 기부 단체의 기부는 기부 대상의행복을 바라는 기부자의 기부금으로 되고 있다. 종교의 헌금은 종교가 어떻게 쓰든 자유로울 수 있지만 기부 단체의 기부금은 온전히 기부 대상에 전달되었어야 했다. 기부금 목적 측면에서 종교보다 기부 단체의 부당한 기부금 활용이 더 잘못되었다.

 

셋째, 개인 기부. 종교는 집단주의 체제이고 기부 단체는 투명하지 못하여 둘다 바람직하지 못하다. 그러나 개인 기부는 기부 자체가 목적이기에 설령 보여주기식이라 하더라도 실제 기부금이 전달되게 된다. 그런 이유로 기부를 하고자 하는 사람은 종교나 기부 단체가 아닌 행정 기관에 기부하기도 한다고 한다. 그렇게 개인이 기부하는 것이 개인주의 체제에 적합한 복지다. 그러나 개인이 기부하기 위한 체계가 갖춰지지 못하여 쉽게 기부하는 방법은 종교나 기부 단체를거칠 수밖에 없다. 그 점을 고려하여 개인이 자유롭게 기부할 수 있는 체계를마련해야 한다.

 

지금까지 기부 단체는 기부 대상의 불행을 광고하는 것으로 영업하여 기부금을 받아 단체를 운영하고남은 비용을 기부 대상에게 전달했다. 기부 단체가 해왔던 것은 영업이었다. 그걸 고려하면 영업을 대신할 체계를 마련하면 개인이 자유롭게 기부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IT 기술의 발달로 스마트폰 앱을 통해 개개인이 영업하지 않아도 거래할 수 있는 환경이 갖춰졌다. 그와 같이 스마트폰 앱을 통하면 기부 단체를 거치지 않아도 기부 대상에게 직접 기부금을 전달할수 있다. 그것으로 기부 단체의 부당한 기부금 활용을 막을 수 있다. 이러한 스마트폰 앱을 통한 기부는 개인의 의사가 반영되어 시장과도 같게 될 것이다. 기부 시장이다. 펀딩과 같이 상품을 생산하기 전에 미리 후원을 받는 방식이 존재하므로 후원 앱의 확장으로 이해하면 좋다. 이러한 기부 시장은 소비 시장과 다른 기준이 있을 수 있는데 소비 시장은 보통 본인이 이로운것을 구매한다면 기부 시장은 본인에게 이로운 옳다고 여겨지는 대상이 이로운 것을 구매하게 된다. 그 방식에 대해 알아보자.

 

첫째, 기부 대상. 기부 앱에 등록할 기부 대상을 선정해야 한다. 누구나 등록이 가능하면 정작 필요한 사람이 기부 받지 못할 수가 있다. 복지 행정 부처가 복지를 행하기 위해 복지 대상을 선정해두었을 것이다. 그런 대상은 따로 분류하여 기부할 수 있도록 하면 된다. 기부 대상은 개인뿐만 아니라 학교, 병원, 산림, 천연기념물 등 소비 시장과 무관하지만 사회에 이로운 모든것을 등록할 수도 있을 것이다.

 

둘째, 기부 대상 정보 상품화. 기부 대상의 정보가 모두 공개되면 개인 정보 침해가 발생할 수 있다. 장학금 대상을 선정하기 위해 필요한 정보를 수집하는 것과 같이 기부에 필요한 정보만 골라 상품화하여기부 시장에 올려야 한다. 그렇게 만든 인간 정보 상품은 당사자가 소유해야 한다. 기부 앱에 등록할 개인 정보는 기부가 필요한 이유인 빈곤이나 질병, 시장성이 없는 가치 생산 등을 작성하면 될 것이고, 추가적인 정보는 특정성을 알기 어려운 정보를 작성하면 될 것이다. 개인 정보는 신용하기 어려울 수 있으므로 개인 정보의 신용을 책임질 기관이 따로 필요할 것이다. 그런 기관의 인증을 거치면 개인 정보를 신용하고 기부할 수 있다.

 

셋째, 기부금 분배 기준. 기부 단체는 기부금 활용 내역을 투명하게 공개하는 일이 드물었다. 공개는커녕 횡령이 언론에 자주 노출되었다. 그런 탓에 개인의 기부가 줄어드는 추세다. 기부 앱은 기부금 분배 기준을 만들어 공개하고 개인의 기부금 활용 내역을 미리 알려야 한다. 가령 기부금 5~10%는 기부 앱 운영비로 쓰고 기부금 10~20%는 복지 행정 부처가 선정한 기부 대상을 위한 보편 복지로 활용되고 나머지 비용을 기부 대상에 전달하도록 한다. 운영비와 보편 기부금과 대상 기부금을 자동화 체계로 자동적으로 전달되게 하면 투명한 기부금 전달이가능하여 기부자가 늘어날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넷째, 기부자 혜택. 기부자에게 세금 감면 혜택이 있듯이 행정 부처 기부 대상에기부한 이들은 특정 혜택이 필요할 것이다. 보통 이기적인 기부는 기부 자체로 목적이 달성되었기에 다른 이익을 바라지 않는다. 그렇다 하더라도 적절한 혜택은 지속적 기부를 하는 동력이 될 것이다. 명예도 적절하다고 본다.

 

다섯째, 기부 대상 성장. 기부는 한번 기부하고 끝나지 않는 경우가 많다. 기부 앱은 주기적으로 특정 기부 상품을 갱신하여 기부 대상의 변화를 알 수 있다면 기부를 통한대상의 성장을 느껴 행복해질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기부 대상도 지속적 기부를 받기 위해 노력하여 꾸준한 성장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사회는 복지에 지불될 예산을 줄여 보다 적절한 복지가 가능하게 될 것이다.

 

 

 

10. 재정립

 

국가의 복지 정책은 불행할 수 있거나 불행한 인간을 행복하게 하는 것이다. 그런데 성질이 다른 관념과 체제의 충돌로 인해 발생하는 불행에 복지 정책을 행하는 것은 그야말로밑 빠진 독에 물 붙기 수준으로 의미가 없는 일이다. 아무리 복지 정책을 해도 사회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그러므로 국민이 개인주의 관념을 가지는 것은 물론이고 집단주의 관념에 의해 수정되어 오류가 발생한 개인주의 체제인 국가 구조를 보다 체제에맞게 재정립해야 한다. 그러면 구조도 구조에 따른 원리도 정상 작동하게 된다. 그렇게 국가 구조를 체제에 맞게 재정립하여 정상 작동하여야 복지가 의미가 있다. 불행이 무엇인지에 대해 알아보고 재정립해야 할 부분에 대해 몇 가지 알아보자.

 

행복이 보통 가치관으로 결정되듯 불행 또한 가치관으로 결정된다. 가치관은 개인마다 다르기에 불행 또한 개인마다 다르다. 본인이 불행해 보이는 것도 타인에게는 행복할 수 있다. 본인이 이해할 수 없는 것도 타인에게는 즐거운 취미일 수 있다. 그렇기에 본인의 주관적인 판단으로 불행해 보이는 타인에 함부로 간섭하여 행복하게 만들려 하는것은 되려 타인을 불행하게 할 수 있다. 오지랖은 개인의 자유권 침해에 해당하나 그 이전에 그 행동 자체의 목적인 행복도 달성하지 못할 수 있다는 것이다. 본인의 주관으로 행복과 불행을 결정짓고 타인의 행복과 불행을 강제로 바꾸려 하는 것이 보통 오만과독선이 된다. 가령 부모가 자녀에게 간섭하여 불행해 보이는 진로나 인간관계나취미를 강제로 바꾸는 것이 그렇다.

종교 또한 마찬가지다. 본인에게 종교로 현실 도피 하여 얻는 행복이 불행해 보일지라도 타인에게는 행복이 될 수 있어섣불리 간섭하여 강제로 바꾸려 하면 타인은 되려 불행해질 수 있다. 그러므로 이런 문제는 개인의 행복이나 불행이 아닌 사회를 기준으로 접근해야 한다. 마약이 그렇다. 분명 마약은 마약 중독자를 행복하게 한다. 그것이 불행하게 보여도 강제로 간섭하면 마약 중독자는 되려 불행해질 수 있다. 그럼에도 사회에서 허용되지 않고 그 행복에 간섭하고 있는 것은 그 행복이 사회에 해롭기 때문이다.

마약 중독자는 본인의 주관적인 행복을 위해 마약에 중독되어 탐닉하면서 내성이 생겨 점점 더 강한마약에 빠지는 것으로 뇌가 파괴되어 자유 의지를 잃고, 마약을 구매하기 위해 시간과 재산을 바치는 자기 파괴를 하면서 타인에게 그런 자기 파괴를 친애나 장사로 전파하고 있다. 여기서 자기 파괴와 전파가 사회에 지극히 해롭다.

 

첫째, 자기 파괴. 마약 같은 개인의 자기 파괴는 국가 구조의 요소를 해치는것으로 구조 유지를 위한 강제력을 수용하겠다는 사회 계약을 어기는 것에 해당하게 된다. 개인의 자기 파괴를 허용하게 되면 개인의 무분별한 자기 파괴로 구조의 요소가 사라지고 인간의존엄성이 훼손되어 구조가 붕괴할 가능성이 생긴다. 그러므로 자살과 같은 자기 파괴를 막는 것은 낡은 가치관이 아닌 사회 계약에 의한 정당한 행사가 된다. 예외적으로 인간의 존엄성을 위해 극단적 고통을 막기 위한 마약은 허용되고 있다.

 

둘째, 전파. 자기 파괴를 타인에게 전파하는 것은 국가 질서를 해치는것으로 구조 유지를 위한 강제력을 수용하겠다는 사회 계약을 어기는 것이 해당하게 된다. 자기 파괴를 본인만 한다면 계약 위반에 해당되나 사실 큰 문제는 없다. 극단적으로 많은 수의 인간이 제 각각의 이유로 자기 파괴 하지 않는 이상 국가 구조에 큰 영향을끼치지 않는다. 그러나 자기 파괴를 전파하여 늘리면 국가 구조가 정말로붕괴할 수 있다. 실제 마약이나 도박의 문제는 자기 파괴보다 전파가 더욱큰 문제다. 마약은 상대에게 전파하여 중독시키기만 하면 중독에 빠져자유 의지를 잃고 이용하기 쉬운 상태가 되기 때문에 전파 가능성이 높은 편이다. 그렇기에 마약은 허용할 수 없다.

 

그런데 이런 성질은 종교도 유사하다. 종교인은 본인의 주관적인 행복을 위해 종교의 현실 도피에 중독되어 탐닉하면서 내성이 생겨 점점더 종교에 빠지는 것으로 뇌의 사고 회로가 죽어 자유 의지를 잃고, 종교에 신앙하기 위해 시간과 재산을 자기 파괴를 하면서 타인에게 그런 자기 파괴를 전도로 전파하고 있다. 기성 종교는 오랫동안 사회와 어울려왔기 때문에 그렇게 극단적이지는 않지만 사이비 종교는 그야말로마약과 비슷할 정도의 사회적 해악을 끼친다. 개인이 종교의 현실 도피에 한번 중독되면 종교에 시간과 재산을 바치기 때문에 사이비 종교는 적극적으로 종교를 전파하고 다닌다. 그걸 방치하면 국가 구조가 무너질 수도 있다. 마약이나 종교는 개인을 행복하게 할지라도 그것이 사회에 해로운 행복이기에 허용할 수 없다.

 

개인주의 체제는 개인의 의사를 원리로 삼는다. 개인의 자유 의지로 살 수 있게 한다. 그런데 마약이나 종교의 유혹을 자유 의지로 뿌리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렇다고 그들을 기준으로 통제를 하면 자유 의지를 가진 개인의 자유권이 침해되게 된다. 마약을 소지하고 있을지 모른다는 이유로 길거리에서 소지품 검사를 하고 마약을 구매할지도 모른다는이유로 상거래를 실시간 감시하는 것과 같은 행위를 할 수는 없다. 그렇기에 개인주의 체제에서 모든 개인은 지성을 갖춰 자유 의지를 분명하게 가질 필요가 있다. 그것이 가장 먼저 해야 할 개인 관념 재정립이다.

[자유 의지_철학은 외부의 제약이나 구속을 받지 아니하고 어떤 목적을 스스로 세우고 실행할 수 있는 의지를뜻한다.] 자유 의지를 관념에 대한 이해를 한 뒤에 해석하면 육체의행동 준비에 대해 생각한 뒤의 의지를 진정한 의미에서 자유 의지라 할 수 있다. 육체의 행동 준비에 의해 어떤 충동이 나타나도 그것에 대해 한번 생각하고 의지를 가져야 자유의지다. 만약 육체의 충동에 대해 생각하고 않고 의지를 갖는다면그것은 현재 자아의 의지가 아닌 육체의 의지이며 정확히 육체가 학습한 과거 자아의 의지나 육체가 수집했던 정보 제공자의 의지라 할 수 있다. 그렇게 개인이 지성을 갖추고 자유 의지를 가지는 것이 개인주의 관념을 가졌다 할 수 있다. 그런 개인 관념에 국가 구조를 체제에 맞게 바꾸는 것이 국가 구조 재정립이다.

즉, 개인의 자유 의지에 대한 관념과 국가 구조를 재정립해야 한다. 국가 원리가 개인의 의사인 개인주의 체제에서는 개인의 자유 의지가 가장 중요하게 다루어야 한다. 국가 구조는 그것을 전제하여 재정립되어야 한다. 그렇게 정립되어야 자기 운명 결정권, 성적 자기 결정권, 개인정보 자기 결정권과 같은 각각의 자기 결정권에 대한 합리적 기준을 만들 수가 있다.

모든 개인은 지성을 갖춰 자유 의지와 그에 따른 권리와 의무와 책임을 져야 한다. 만약 마땅한 지성이나 자유 의지가 부족하다 판정된다면 자유를 잃고 통제를 수용할 수 있어야 한다. 미성년이나 마약, 도박 중독자가 그런 대상에 해당된다. 미성년은 성장 시기 별로 식사와 성과 선거 등에 대한 보호와 자유권을 보장받고 그에 따른 통제를 수용해야 하고, 마약이나 도박 중독자는 형사처벌 유무와 별개로 중독 정도에 따라 보호와 자유권을 보장받고 그에따른 통제를 수용해야 한다. 그렇게 지성과 자유 의지에 맞춰 보호와 자유권을 보장하는 체계가 필요하다.

만약 국가 구조가 개인의 지성과 자유 의지에 맞춰 보호와 자유권을 보장하였다는 것이 명백하다면그로 인해 사건 사고가 발생하더라도 그런 상황에서 통제는 자유권 침해에 해당하므로 통제가 없었다는 이유로 비판하는 것은 정당한 비판이라 하기 어렵다. 일반 개인이 자유 의지를 가지고 행한 행동을 가스라이팅이나 그루밍에 의한 결과라 말하는 것도정당한 비판이라 하기 어렵다. 개인의 자유권에는 의무와 책임이 따르기 때문이다. 만약 그런 보호를 요구하고 싶다면 사회 계약을 다시 하여 자유를 포기하고 정부 통제를 받으면 된다. 평소에는 자유롭고 싶다가 필요할 때에만 보호를 찾는 것은 지극히 불합리하다.

사회에서 개인의 자유 의지에 간섭하여 조작할 수 있는 것은 정신적으로 종교 세뇌, 가스라이팅, 그루밍, 도박 등이 있고 물질적으로 마약, 음주 등이 있다. 취미 또한 깊게 중독되면 온전한 자유 의지를 가지지 못하기도 한다. 그것에 맞춘 개인주의 국가 구조 재정립에 대해 알아보자.

 

첫째, 종교. 종교는 개인의 사상의 자유로 신앙하는 것이 허용되어도 종교로집단을 이루어 집단의 이익을 위해 행동하는 것은 허용되어서 안 된다. 국가 내 집단이 집단주의 체제가 되면 대부분 집단의 이익을 위해 국정에 간섭하게 된다. 특히 종교의 경우 정교분리를 망치는 계기가 될 수 있다. 개인주의 체제에서 종교의 자유는 어디까지나 개인 사상의 자유지 집단주의 체제 조직의 자유가 아니다. 개신교(Protestant)가 교황이 아닌 성경에 가치가 있다고 말하며 복음주의를 주장하면서 종교 개혁을 통해 가톨릭과 갈라섰는데, 거기에 연장선상으로 집단인 교회가 아닌 개인인 신앙에 가치가 있다고 주장하겠다. 그래야 개인의 사상의 자유가 보장될 수 있다. 그렇다고 현재 정부에서 종교 집단을 강제로 어떻게 하기가 어렵다. 그러므로 개인은 개인주의 관념을 가지고 자유의지로 종교 집단에서 멀어지는 것이 바람직하다. 국가 구조는 종교 전파를 강제하는 것을 금지하고 개인 자유를 강조하는 교육 체계로 재정립해야한다. 만약 개인이 종교에 빠지더라도 물리적 압박이 없이 개인의자유 의지로 결정한 것이라면 개인이 책임져야 한다. 개인주의 체제의 국가의 국민인 종교라는 집단보다 종교를 믿는 개인을 우선해야 할 것이다.

 

둘째, 가스라이팅. 가스라이팅은 본인의 언행으로 타인을 스스로 의심하게 하여본인에게 의존하게 만드는 심리 기술이다. 가령 경찰이 용의자에게 스스로 의심하게 하여 경찰에 의존하게 하는 것으로 자백하게 만드는 것이 가스라이팅이다. 이런 심리 기술은 개인의 자유 의지를 망가트릴 수 있어 유죄 추정이라며 경찰이 비판을 받는다. 그렇다고 사적인 인간관계에서 일어날 수 있는 것을 정부에서 어떻게 하기가 어렵다. 그러므로 개인은 개인주의 관념을 가지고 자유 의지로 본인의 행동을 결정해야 한다. 국가 구조는 개인 자유를 강조하는 교육 체계로 재정립해야 한다. 만약 개인이 가스라이팅과 같은 세뇌에 당한다 하더라도 물리적 압박이 없이 개인의 자유 의지로결정한 것이라면 개인이 책임져야 한다. 성에 관해 유행하게 된 용어지만 실제로는 어디서나 쓰이고 있는데 지나치게 남용하면서 타인의 의견을 전부 가스라이팅이라 몰아가기도 하고 있다.

 

셋째, 그루밍. 그루밍은 본인의 언행으로 타인을 길들여 본인에게 의존하게만드는 심리 기술이다. 가령 부모가 자녀를 그루밍하여 시간과 이동을 통제할 수있다. 이런 심리 기술은 개인의 자유 의지를 망가트릴 수 있어과한 통제라며 부모가 비판을 받기도 한다. 그렇다고 사적인 인간관계에서 일어날 수 있는 것을 정부에서 어떻게 하기가 어렵다. 그러므로 개인은 개인주의 관념을 가지고 자유 의지로 본인의 행동을 결정해야 한다. 국가 구조는 개인 자유를 강조하는 교육 체계로 재정립해야 한다. 만약 개인이 그루밍에 영향을 받았다 하더라도 물리적 압박이 없이 개인의 자유 의지로 결정한 것이라면개인이 책임져야 한다. 애초에 인간과 인간이 서로 길들여지는 관계인데 그걸 잘못되었다말하는 것 자체가 우습다.

 

넷째, 도박. 도박은 낮은 확률로 높은 이익을 얻게 하여 뇌의 보상 회로를망가트리게 한다. 가령 일반적인 카지노나 코인, 주식 등이 있다. 낮은 확률로 높은 이익을 얻는 것으로 굉장한 쾌락을 얻고, 그 이익이 실제 노동으로 얻는 이익과 대비되면서 깊게 중독되기도 한다. 이런 원리를 흉내 낸 것이 모바일 뽑기 게임이다. 모바일 뽑기 게임은 게임 재화의 실제 화폐 환전이 가능한 것과 불가능한 것으로 나뉘는데, 환전이 가능한 것은 도박과 크게 다르지 않고 환전이 불가능한 것은 단순한 수집이 되므로 도박의원리는 이용하되 도박과 결과는 다르게 된다. 도박은 정부에서 충분히 관리 중에 있으나 도박의 원리를 이용한 재화 환전 가능한 모바일 뽑기 게임은 도박과 비슷한 통제가 필요하다 할 수있다. 그러므로 개인은 개인주의 관념을 가지고 자유 의지로 본인의행동을 결정해야 한다. 국가 구조는 도박의 원리와 결과가 같은 새로운 형태의 도박에실시간으로 대응하는 체계로 재정립해야 한다. 확률 명시화를 하는 확률 규제는 도박의 원리를 이용한 문화 산업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통제에 해당한다. 만약 개인이 도박에 빠진다 하더라도 물리적 압박이 없이 개인의 자유 의지로 결정한 것이라면 개인이책임져야 한다. 도박에 의해 자살이 나타날 수 있을 때에만 국가 구조 유지를위해 정부가 나서야 한다.

 

다섯째, 마약. 마약은 마취 작용을 하며 습관성으로 장복하면 중독되는 물질을말한다. 그런데 마약은 감추면 감출수록 환상에 사로잡힌다. 단순히 나쁘니까 막자 수준의 일차원적 방법으로는 마약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전략적 광고다. 시한부 전용으로 만들어 광고한다. 일 년 이내 죽음이 확실한 인간에게만 계약을 통해서 합의하에 판다. 펜타닐과 같은 마약은 이제 개인주의 체제에서 공권력으로 막는 것은 매우 어렵다. 너무나도 작고 유통이 쉽다. 미국에서 펜타닐이 유행하여 펜타닐 백신을 만든다고 한다. 매우 대단하지만 개인의 관념이 바뀌지 않는 이상 그런 백신이 있다 하더라도 쾌락을 위해 다른마약을 요구하게 될 뿐이다. 개인이 바뀌어야 한다. 개인이 마약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를 확고하게 가져야 스스로 거부하게 된다. 힙합과 같이 젊은이들이 즐겨 듣는 노래를 다루는 인간이 마약에 빠지면서 마약 자체의 이미지가젊음, 방황, 일탈과 같이 되어 쓸데 없는 환상이 새겨지게 되었다. 현재 사이비 종교에 대한 환상이 없는 것과 같이 마약에 대한 환상을 제거할 필요가 있다. 네거티브 전략이다. 그 전략의 수혜자이자 희생자는 시한부 인간이다. 시한부 인간은 죽기 직전에 굉장한 쾌락을 누리고 죽고 사회는 그런 쾌락을 제공하는 대신 마약에 대한 환상을 깬다. 인간은 인간의 존엄성을 위해 쾌락 속에서 행복하게 죽어야 한다. 이렇게 단순히 막는 것에 그칠 것이 아니라 인간의 존엄성을 명분으로 전략적 방법으로 접근해야한다. 개인은 개인주의 관념을 가지고 자유 의지로 본인의 행동을결정해야 한다. 국가 구조는 마약을 시한부 전용 물질로 인식하게끔 만드는체계로 재정립해야 한다. 만약 개인이 마약에 빠진다 하더라도 물리적 압박이 없이개인의 자유 의지로 결정한 것이라면 개인이 책임져야 한다. 일부 힙합을 하는 가수와 같은 일부 예술가들이 마약의 환각 속에서 새로운 감각을 느끼는 것으로 새로운 예술을 하기 위해 마약을 한다고 하는데, 그것은 스스로 미칠 줄도 모르는 인간의 자기 합리화에 불과하다.

 

여섯째, 음주. 음주는 술을 마시는 것이고, 술은 알코올 성분이 들어 있어 마시면 취하는 음료를 말한다. 술 중독이나 담배 중독과 같은 물질 중독은 마약 계통이므로 생략하겠다. 음주로 인한 대표적인 문제가 바로 음주 운전이다. 음주 운전을 막기 위해 처벌을 늘리자는 주장이 많이 나오는데, 법의 합리성을 파괴하면서까지 처벌을 높이지 않는 한 음주 운전이 크게 줄어들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음주 운전 당사자는 정상적으로 운전을 할 거라 생각하며 평소 음주 운전을 하다 실수로사고를 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사고를 내면 운이 좋지 못하거나 실수를 한 것일 뿐이라며 합리화하기 때문에 처벌이 높아도 사고를 내지 않으면 된다는 식으로 생각하게된다. 이것 또한 마약과 같이 네거티브 전략으로 접근하는 것이타당하다. 술을 마시고 운전하는 것은 의지가 약한 인간이라는 이미지를갖게 해야 한다. ‘술을 마시고도 운전 잘하는 나 대단해’, 라는 느낌이기 때문에 술을 마시고 운전하는 것 자체가 대단하지 않다는 것으로 인식해야 한다. 가령 타인이 시켜서 술을 마시고 운전하다 사고 내고 그에 대한 책임을 타인이 아닌 사고 낸 본인이지게 된다는 식의 음주 운전 공익 광고가 괜찮을 것이다. 사회에서 음주 운전자를 악한이 아닌 머저리로 바라봐야 그런 행위가 줄어들 수 있다. 그러므로 개인은 개인주의 관념을 가지고 자유 의지로 본인의 행동을 결정해야 한다. 국가 구조는 음주 운전을 의지가 약한 인간이나 하는 행위로 인식하게끔 만드는 체계로 재정립해야한다.  만약 개인이 음주 운전으로 사고를 내더라도 물리적 압박이 없이 개인의 자유 의지로 결정한 것이라면 개인이 책임져야 한다. 인간은 본인 육체도 정확히 제어하지 못하면서 술을 마시고 차량을 정확히 제어할 수 있을 거란생각에서 벗어나야 한다.

 

일곱째, 취미. 취미는 인간이 즐기는 것으로 여가에서 주로 하게 된다. 게임, 쇼핑, 낚시, 등산 등과 같은 취미에 매달려 일상생활을 돌아보지 않을 때에는 중독으로 여겨질 수 있다. 취미뿐만 아니라 일이나 공부에 중독이 될 수 있는데, 취미와 같이 가치 소비에 중독되는 것과 일이나 공부와 가치 생산에 중독되는 것에 대한 대우 차이가있다. 가치 소비에 중독되어 가치 생산에 소홀하게 되면 사회에해롭지만 가치 생산에 중독되면 가치 생산이 되므로 사회에 이로워 가치 생산 중독에는 사회적 비판이 적은 편이다. 그렇다고 가치 소비를 하지 않게 되면 불행하여 자살할 수 있으므로 적절한 가치 소비는 필요하다. 또한 지나치게 가치 생산에 매달리면 피로하여 육체가 죽을 수 있으므로 육체를 유지하면서 가치생산을 해야 한다. 새로운 취미일 경우 익숙하지 않아 기성 세대의 반발에 부딪칠수 있는데, 게임이 보통 그렇다. 다른 취미와 같이 평범하게 가치 소비를 하는 것임에도 심각한 중독으로 여기거나 같은 중독이라하더라도 게임을 보다 더 심각한 중독으로 여긴다. 합리적 기준이 없는 판단은 불합리하게 된다. 게임도 취미라는 기준으로 합리적으로 판단해야 한다. 정부에서 일일이 개인의 취미에 간섭할 수 없다. 그러나 개인이 취미라는 가치 소비에 깊게 빠지는 것은 가치 생산이 행복하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개인은 개인주의 관념을 가지고 자유 의지로 본인의 행동을 결정해야 한다. 국가 구조는 가치 소비와 가치 생산 둘 다 행복을 느낄 수 있는 체계로 재정립해야 한다. 만약 개인이 취미에 중독되더라도 물리적 압박이 없이 개인의 자유 의지로 결정한 것이라면 개인이책임져야 한다. 금욕주의에 의해 욕망에 의한 가치 소비를 경시하고 가치생산을 강요하기도 하는데, 그렇게 하다 보면 개인이 욕망을 잃어버리고 가치 생산에 대한 의욕도 잃어버릴 수 있으므로 적절한 가치 소비를 권장하여 욕망을 유지할 수있도록 해야 한다.

 

 

개인주의 체제에 맞는 개인 관념과 국가 구조 재정립은 다문화나 이민족 관계도 포함되게 된다. 개인의 의사로 작동하는 개인주의 체제와 집단의 의사로 작동하는 집단주의 체제는 어울리기 어렵다. 체제는 사회를 유기체로 비유한 것으로 체제가 같은 사회는 같은 종이라 할 수 있고 체제다 다른사회는 다른 종이라 할 수 있다. 개인주의 체제와 집단주의 체제는 명백히 다른 종으로 각각의 체제인 사회는 같이 어울리기가 어렵다. 만약 이민자가 개인주의 체제인 사회에 적응할 것이라면 이민자도 지성을 갖추고 자유 의지를 가져야한다. 그러지 않으면 사회 문제로 발전하게 된다.

가령 프랑스에서 프랑스인이 자유롭게 마호메트에 대한 의견을 낸 것에 불만을 가진 이슬람 극단주의자가종교적 이유로 프랑스인을 참살한 사건이 있다. 그 의견이 설령 불쾌하더라도 그걸로 사적 제재 한다는 것 자체가 국가보다 종교를 우선시한다는 것을 증명한다. 개인주의 체제인 국가 내 집단주의 체제인 집단은 기본적으로 이렇게 국가보다 집단을 우선시하게된다. 집단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무슬림들은 샤리아존을 주장하며특정 구역에서 이슬람 율법을 다른 사람에게 강요하려고 하고 있어 국제적 반발을 사고 있다. 이렇게 체제가 다른 국가의 문화는 성립할 수 없다.

반면 체제가 같은 국가의 문화는 성립될 수 있다. 개인주의적인 스웨덴은 손님에게 식사를 대접하지 않거나 식사 비용을 받는 것으로 국제적 비웃음을사고 있다. 그런데 개인주의 체제인 국가에서 비웃는 것은 참으로 황당하다. 스웨덴의 그런 문화는 개인주의적이기에 개인주의 체제인 국가와 충돌할 일이 없다. 그저 손님을 대하는 방식이 다를 뿐이지 예의가 없는 것이 아니다. 스웨덴 문화를 가진 이들이 한국에 오더라도 본인만 손님에게 식사를 대접하지 않을 뿐이지 타인이손님에게 식사를 대접하는 것에 간섭하지 않기 때문에 충돌하지 않는다. 서로가 충돌하지 않는 다문화는 이해할 수 있다.

 

 

첫 번째, 이성애

 

이성애에 대한 개인 관념과 국가 구조를 개인주의 체제에 맞게끔 재정립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한국은 국가 소멸로 멸망한다. 모든 국가가 저출산으로 고생 중이지만 한국은 보다 더 심각하다. 한국은 국가 발전 속도가 굉장히 빠르고 체제 변화가 최근이면서도 연상이 연하를 지배하는 유교적가치관을 가지고 있어 연상이 연하에게 명령하듯 본인의 낡은 가치관을 세뇌하고 강요하는 바람에 체제에 맞는 새로운 관념을 가지기가 너무나도 어려움에따라 체제 적응에 실패하는 것으로 국가 소멸의 위기를 부를 수 있는 저출산 현상이 나타나게 되었다.

한국은 가장의 명령으로 중매결혼을 하던 낡은 가치관으로 남녀칠세부동석이라며 미성년의 이성 관계를멀리하게 하고 정조 관념을 가져야 한다며 미성년의 성 문화를 검열하고 탄압하는 것과 같이 미성년이 이성애와 성을 죄악시하는 교육을 받는 것으로개인의 의지로 연애와 결혼을 하는 이들이 줄어듦에 따라 출산율이 감소하는 중에 여성주의가 대두되면서 가부장제 시대의 수동적인 여성성을 신세대 여성에게세뇌하는 바람에 이성애와 성을 부정적으로 보는 신세대 여성이 늘어나면서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이성애와 성이 결핍되어 망가져 출산율이 폭락하게되었다.

개인주의 체제인 국가의 국가 원리는 개인의 의사로 개인의 자유 의지로 연애와 결혼을 할 수 있는환경을 조성해야 한다. 미성년 시기부터 남녀가 어울리며 성기능이 작동하는 사춘기부터는적극적으로 이성과 성관계를 맺으며 이성애와 성을 충족해야 연애와 결혼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며 출산율이 올라갈 수 있다. 그러지 않으면 지금과 같이 출산율이 폭락하게 되어 있다.

전 세계에서 보편적으로 출산율이 감소하는 것은 과거의 낡은 가치관으로 개인의 자유가 보장되는시대에 적용하면서 나타났다. 과거의 시대에 머물러 있는 국가는 아직까지도 집단의 의사로 결혼하고 출산하기에 출산율이 높지만 개인의 의사를 존중하는 현대의 시대인 국가는개인의 의사로 연애하고 결혼하고 출산하기에 출산율이 낮다. 집단의 의사로 결혼하던 시대와 개인의 의사로 결혼하는 시대는 다른 관념과 구조를 가져야 한다.

저출산 현상의 본질은 낡은 가치관에 의한 체제 적응 실패에 있지만 다른 식으로 주장하는 일이많다. 그것에 대해 알아보자.

 

첫째, 경제 환경. 한국은 고가의 부동산과 일자리 부족과 그에 따른 가난과높은 노동 시간과 같은 경제적 환경에 의해 저출산 현상이 나타났다고 보는 사람들이 많다. 보통 이것이 보편적 인식이다. 그러나 아니다. 한국보다 경제적으로 빈곤하거나 빈부 격차가 큰 국가도 한국보단 출산율이 높다. 한국이 가난했을 때도 출산율은 높았다. 낡은 가치관과 낡은 체제를 유지하는 북한은 한국보다 출산율이 높다.

한국은 노동 시간이 매우 높지만 동시에 아이돌이나 창작물과 같은 유사 연애 산업에 시간을 소비하는사람들이 많다. 인간과 이성애와 성관계가 죄악시되자 인간이 아닌 것으로그 욕구를 충족하게 된 것이다. 정상적인 이성애와 성관념을 가지고 있었다면 그 시간이 이성 관계로 이성애와 성욕을 충족했을 것이다. 그러지 않았던 것은 마땅한 상대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한국은 일인 가구 수가 비정상적으로 늘어난 상황이다.

한국은 이성애와 성을 유사 연애 산업으로 욕구를 해소하면서 연애와 결혼에 대한 우선순위가 매우낮아지게 되었다. 그러면서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어야만 결혼을 생각하게 되었다.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사람들의 결혼과 출산이 높은 것을 보고 경제 환경이 원인이라 착각하게되는데 본질은 여유가 있어야만 추구할 정도로 인간과의 이성애와 성이 가치가 낮아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경제 환경은 저출산 현상의 간접적 원인은 될 수 있으나 직접적 원인은 될 수 없다.

 

둘째, 자연 생태. 동물은 원래 대부분 대를 잇지 못하고 죽으므로 연애와 결혼을하지 못하여 출산율이 낮아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라 말하기도 한다. 이것은 애초에 불합리한 기준이다. 그런 것은 인간과 짐승과 같은 기준으로 볼 것이 아니라 인간과 인간을 같은 기준으로 봐야 한다. 보통 한 자리 수 아이를 낳는 인간과 편차가 심한 모든 짐승과 비교할 수는 없다. 교미하기 전에 대부분 사망하는 짐승도 있다. 인간도 동물 중 하나이므로 같은 기준으로 볼 수도 있지만 일단 인간과 인간을 기준으로 보는 것이선행되어야 한다. 같은 개인주의 체제인 다른 국가에서는 미성년 때 연인이없으면 무언가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닌가 하고 가족 회의를 할 정도라고 한다. 반면 한국은 미성년 때 연인이 있으면 불건전하다고 하는 인간도 있을 정도다. 미성년 연애와 성에 대한 관념 차이가 극단적이다. 자연 상태는 저출산 현상과 무관하다.

 

셋째, 윤리. 신세대가 본인의 이익만 생각하기에 희생하고 싶지 않아서결혼하지 않는 거나 결혼해도 출산을 하지 않아 출산율이 낮은 것이라 말하기도 한다. 집단주의 체제에서는 그것이 옳은 발언이나 개인주의 체제에서는 그것이 그른 발언이 된다. 개인주의 체제인 국가 원리는 개인의 의사이므로 개인이 자발적으로 연애와 결혼과 출산을 할 수있는 환경이 필요하다.

모든 국가는 국가 구조를 유지하여 국가 원리를 추구한다. 개인주의 체제인 국가는 이른 결혼을 권장하여 다수가 이른 결혼을 하는 것으로 국가 구조를 유지하고늦게 결혼하거나 이성애가 아닌 다른 성에 관심이 있거나 성 자체에 관심이 없는 이들의 개인의 의사가 존중되게 된다. 본인의 의사가 존중되고 싶다면 국가에 이로운 이른 결혼을 하는 이들이 늘어나야 하는 것을 알아야한다. 그래야 개인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으면서도 국가 구조 유지가될 수 있다.

 

한국 저출산 현상의 본질은 낡은 가치관에 의한 체제 적응 실패다. 그 본질을 더 잘 보기 위해 낡은 가치관을 형성케 한 한국의 과거와 그로 인해 나타난 현재에대해 알아보자.

한국의 과거인 조선은 유교적 가치관을 근거로 한 철저한 수직 사회였다. 유교는 지배자의 통치를 위한 정치사상으로 신분뿐만이 아니라 연령, 성별, 직업마다 취해야 할 순서와 차례를 근거로 한 태도를 가르쳐 상명하복 수직 사회를 질서로 유지된 사회였다. 평등이 아닌 불평등하게 순서와 차례를 윤리라 말하며 가르치면서 불평등이 윤리가 된 사회가 되었다. 사람은 왕과 양반과 양민과 천민으로 차별과 연상과 연하가 차별되고 남성과 여성이 차별되고 선비와농부와 공장과 상인이 차별되었다. 그런 차별 속에서 위가 명령하면 아래는 복종해야 했다.

가족도 마찬가지였다. 가장이 명령하면 가족 구성원은 복종해야 했다. 가부장제다. 가부장제인 가족은 집단의 이익을 위해 가족 구성원에게 가족의이익이 되는 결혼을 하도록 중매를 주선하고 대를 잇기 위해 아들을 출산하도록 강요했다. 개인의 이성애와 출산이 집단의 이익 실현 도구로 사용되었다. 개인을 집단의 도구로 삼기 위해 개인이 자유롭게 연애하고 결혼하는 것을 막았다. 그러기 위해 연령 차별을 윤리화한 장유유서를 가르치고 미성년 남녀가 이성 관계를 갖지 못하도록이성 관계 단절을 윤리화한 남녀칠세부동석을 가르치고 여성성의 도구화를 윤리화한 정조 관념을 가르쳤다.

하나, 장유유서. 연령에 차례가 있다고 가르치는 것으로 연하는 연상에게 복종하게만들어 결혼과 출산에 대한 강요를 거부하지 못하도록 했다. 둘, 남녀칠세부동석. 남녀는 칠 세부터 한자리에 앉지 말아야 한다면서 미성년의 이성 관계 단절시켰다. 셋, 정조 관념. 여성은 결혼 전에 순결을 지키고 결혼 후에 정절을 지켜야한다면서 혼전 성관계와 과부의 재가를 막았다.

그 가르침에 의해 조선 사회는 연상의 명령으로 미성년의 이성 관계가 단절되고 여성의 정조를 지키기위해 성을 죄악시하게 되었다. 미성년의 연애가 불건전하게 여겨지고 미성년의 성 문화 접촉이 불결하게 여겨졌던 것은 이런 가르침에 의한 것이었다. 특히 여성은 스스로 정조를 지키게 하기 위해 연상의 세뇌를 매우 강하게 당했는데 이후 이후 여성이힘을 얻게 되면서 그 세뇌에 의해 미성년 이성 관계 단절을 주장하고 성 문화 탄압에 앞장서게 된다.

한국이 되었다. 중간에 군사 독재 정권으로 인해 실질적으로 개인주의 체제인 국가라 할 수 있는 것은 문민정부의 시작인 1992년부터일 것이다. 1992년. 그 해가 바로 MZ세대 시작의 사춘기다. MZ세대는 밀레이널 세대와 주머스 세대를 합친 한국 신조어로 MZ세대의 본질은 한국 개인주의 체제가 시작되었을 때 사춘기를 경험한 세대라는 것이다. 밀레니얼 세대의 시작이 1980년생 초반인데, 이들이 사춘기가 될 무렵에 1992년 문민정부가 시작되었다. 개인주의 체제를 본격적으로 시작한 세대가 바로 밀레니얼 세대다. 개인주의 체제 시작 이후 체제 변화보다 더 극적인 변화가 아직 없었으므로 체제로 MZ세대와 이전 세대가 구분되게 되었다.

개인주의 체제가 되면서 본격적인 관념과 체제의 충돌이 시작되게 되었다. 개인의 의사로 연애와 결혼과 출산을 해야 하는 개인주의 체제에서 이성애와 성을 죄악시하여 개인을중매결혼 시키던 관념을 가지고 똑같이 미성년에게 이성 관계를 단절시키고 성 문화 검열과 탄압을 해버리게 되었다. 미성년의 연애가 불건전하고 미성년의 성 문화는 물론이고 성년의 성 문화조차도 금지되는 것은 이것이원인이다. 특히 여성의 정조를 지키는 가부장제의 수동적인 여성상을세뇌 당하여 그걸 여성의 본성으로 착각한 여성주의자들이 그런 여성상을 지키는 것이 여성의 이익이라 여기고 성인지감수성을 말하며 신세대 여성에게세뇌하고 사회에 강요하는 바람에 조선 시대보다도 심하게 강박적으로 이성과 성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인간도 나타나게 되었다. 그러면서 남성과의 작은 접촉이나 시선으로도 발작하며 신경질적으로 분노하는 여성도 나타나게 되었다. 가부장제 여성성을 가지게 된 여성주의자는 인간이 인간을 성적 대상으로 여기는 성적 대상화와 인간의인간의 성을 즐기는 성 상품화를 죄악시하게 되었다. 그러한 것을 같은 성관념을 가진 정치가들에 의해 수용되어 강제력을 가지게 되면서 상황은 더욱 더 심각해져 갔다. 결혼 전 여성의 정조를 지키는 것이 윤리이므로 여성을 대상으로 했을 때만 죄악시하여 남성 성적대상화나 남성 성 상품화에 대해서는 대응을 하지 않았다. 경제 성장과 윤리의 상관관계에 따라 윤리가 더욱 강조되면서 더욱 이성애와 성이 죄악시되는 가운데, N번방 사건에서 일부 중학생이 성년에게 이용당했다는 것을 일반화하여 모든 중학생이 사리 분별 할줄 모르는 어리석은 인간이라 규정하고 성년과의 성적 관계에 대한 성적 자기결정권을 박탈하게 된다. 성년과 중학생 미성년의 성적 관계가 범죄화되면서 사회에서 미성년의 이성 관계나 성은 더욱 더부정적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미성년 여성 아이돌 가수가 나오거나 미성년 여성이 노출을 하면 창작물조차 미성년 성 상품화라 말하며 발작하는 사람이 나타나게 되었다. 물론 미성년 남성 가수나 노출은 현실조차도 문제 제기를 하기는커녕 즐기는 풍조가 나타나게 되었다. 그렇게 미성년의 이성애와 성이 결핍되어 정상적인 이성애와 성을 배우지 못하여 2021년 20대 연애율이 21.4%가 되었다. 이성애와 성을 부정적으로 여기며 연애와 성관계를 맺는 인간이 감소하면서 결혼에 대한 부정적 인식속에 결혼 연령과 출산 연령이 높아지게 되었다. 그러면서 시기를 놓친 인간들은 아예 결혼을 포기하게 되었다. 결혼 연령과 출산 연령이 높아지고 있음에도 잘못되고 있음을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비혼을 말하며 결혼하지 않는 본인을 자기 합리화하였다. 그럼에도 본질을 모르고 여전이 유교적 가치관을 근거로 이성애와 성을 죄악시하는 이들이 있어 저출산현상 문제를 해결하기는커녕 더욱 악화시키고 있는 중이다. 현재 저출산 현상은 낡은 가치관에 의해 일관적으로 계속 미성년의 이성애와 성을 죄악시하면서 악화된 결과다. 한국은 낡은 가치관으로 자연 소멸을 하게 될 국가가 될 처지가 되어가고 있다. 정확히 말하면 낡은 가치관에 의한 국가적 자살이다.

 

 

한국에서 저출산 현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올바른 이성애와 성이라는 개인주의 체제에 맞는개인 관념과 국가 구조로 재정립할 필요가 있다. 미성년 때부터 올바른 이성애와 성을 가지고 개인의 의사로 정상적인 연애와 결혼과 출산을 할 수 있어야 출산율이 올라갈 수 있다. 미성년 때 도덕관념이 자리잡으므로 성년 이후에는 쉽게 교화가 안 되는데 이성애와 성관념은 다를것 같았는가? 논리적인 주장을 해야 한다. 도덕관념은 커서 교정하기 힘들어 사람이 변하지 않거나 교화가 힘들다고 말해놓고 성관념은 커서변할 수 있어서 미성년 때에는 이성애와 성을 죄악시하다 성년이 된 이후 자연스럽게 이성과 연애하고 성관계 맺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는가? 도덕관념이나 성관념이나 같은 기초 관념은 사춘기 시기를 넘으면 쉽게 교화나 교정이 어렵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는 잘못된 인식이 나타날 정도다. 낡은 가치관에 의해 본질을 볼 수 없으면 안 된다. 성년 이후 도덕관념을 교화하기 위해서 온갖 노력이 필요한 것과 같이 성년 이후 이성애와 성관념을교정하기 위해서는 온갖 노력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미성년 시기에 올바른 성관념을 가지고 성년은 온갖 노력을 다해 올바른 이성애와 성관념을 가져야 한다. 그리고 그걸 위한 국가 구조가 있어야 한다. 그전에 한국에서 이성애와 성의 취급에 대해 알아보자.

 

한국에서 이성에 대한 사랑은 취미에 대한 사랑보다 못하다. [이성애는 이성 간의 사랑을 뜻한다. 또는 이성에 대한 사랑.][성애는 남녀 사이에서 일어나는 성적 본능에 의한 애욕을 뜻한다.] 이성애는 이성의 상대에게 성적 본능에 의한 애욕을 느끼는 것을 말한다. 그렇지 않은 이성 관계는 친애일 뿐이다. [친애는 친밀히 사랑함을 뜻한다. 또는 그 사랑.] 이성애는 동물적 본능으로 상대를 좋아하는 사랑이다. 짐승은 지성이 없거나 부족하기에 호르몬 작용에 따라 행동하지만 인간은 지성이 있기에 호르몬 분비에 의한 작용을 생각하고 행동하게 된다. 그러면서 관념에 영향을 많이 받는다. 그 차이일 뿐이지 인간도 동물인 이상 성적 매력에 이끌리는 것이 정상이다. 그렇게 인간이 인간에게 성적으로 매력을 느껴 좋아한다는 감정을 갖는 것이 이성애다. 그런 사랑은 본래 사랑하는 것 자체에서 이익을 얻기에 다른 이익을 바라지 않는다. 그런데 한국 사회의 사랑은 어떠한가? 일부 미성년의 연애나 이른 연애와 결혼을 제외하면 대부분 연애와 결혼에 성적 매력 외의 조건을본다. 인간에게 성적 매력을 느끼고 이끌리는 것이 아닌 조건에매력을 느끼고 이끌린다. 그걸 본인만 보는 것이 아니다. 대상 가치에 의해 대상의 가치를 공유한 특정 집단은 성적 매력 외의 것을 간섭한다. 나이가 어울리지 않는다. 외모가 어울리지 않는다. 학력이 어울리지 않는다. 직업이 어울리지 않는다. 재산이 어울리지 않는다. 본인의 주관적인 기준으로 타인의 사랑에 간섭하며 부정하기까지 한다. 그러면서 정상적인 연인 관계가 붕괴한 사례가 수도 없이 많다. 대상 가치가 아닌 관계 가치로 본인의 관계로 가치를 판단해야 이런 일이 줄어들 수 있다.

성적 매력에 이끌려 사랑하고 있다고 말하면 질색하면서 화를 낸다. 몸을 보고 사랑하느냐고 말하면서 말이다. 특히 가부장제의 수동적인 여성성을 가진 이들이 더욱 더 화를 낸다. 어떻게 사람을 성적 대상으로 볼 수 있느냐며 말이다. 어처구니 없다. 진실된 이성애인 성적 매력에 이끌림은 천시되면서 타산적 자기애인 조건에 이끌림은 바른 것처럼 말한다. 한국 사회에서는 이성애가 천대받고 조건이 우대받는다. 이 얼마나 타산적인 사랑인가?

이성애와 성을 죄악시하는 관념에 영향을 받아 혼란스러울 수 있다. 그렇다면 묻겠다. 인간의 본능으로 느끼는 사랑이 진실 되었는가? 아니면 조건을 따지는 사랑이 진실 되었는가? 당연히 전자다. 한국은 과거 개인의 이성애가 집단의 이익 실현을 위한 도구로쓰였던 것이 현재 개인의 이익 실현의 도구로 쓰이고 있어 진실된 이성애가 무엇인지 모르고 성적 매력에 이끌리는 진실된 사랑을 무작정 비난했던 것이다. 그런 성애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합리화하기 위해 나온 것이 플라토닉 러브라는 이성애와 친애도구분 못하는 인간이 말한 헛소리가 있다. 정상적인 이성애는 성적 매력으로 사랑을 느끼고 이성에게 고백하여 연인이 되어 성관계를 맺으면서 자연스럽게 사랑을 키워나가는 것으로 서로를길들이면서 결혼하고 출산하는 과정을 겪었어야 했다. 가장 진실된 이성애가 성적 매력에 이끌리는 것이다. 그럼에도 가부장제의 성관념을 근거로 야한 것이 잘못되었다고 말하거나 인간을 성적 대상으로 보면 안 된다거나 성 상품화가 잘못되었다고 말하는이들이야말로 진실된 이성애를 모르는 것이다. 인간의 선천적 성질인 유전자는 성적 매력에 이끌려 사랑을 하는 것이 진실되었음을 말하고 있다.

그럼에도 지금 한국의 사랑은 대부분 타산적 자기애인 조건에 이끌림을 당연하게 여기고 있다. 그런 탓에 한국에서 이성애는 개인의 이익 실현 수단으로 전락하여 실상 이성애라기 보다는 자기애의표현 방식에 가깝게 되었다. 이성을 트로피와 같이 본인의 자랑용으로 취급하거나 지갑과 같이 본인의 용돈 주머니로 취급하거나 본인의 성욕 해소 도구로만 취급하였다. 이게 정상적인 이성애로 보이는가? 한국은 이성애와 자기애와 친애를 분명하게 구분 지어야 한다. 인간의 성적 매력에 이끌림이 진실된 이성애고 조건에 이끌림이나 본인의 쾌락만을 위함이 타산적자기애고 성적 외의 이끌림이 평범한 친애다. 한국은 성적 대상화를 막는다거나 성 상품화를 막는 등과 같이 성애와 성을 죄악시하면서 성애와 성을 부정하니 진실된 이성애는 부정되고 타산적자기애와 평범한 친애가 주로 남았다. 평범한 친애는 친구관계와 다를 바 없으므로 실질적으로 이성관계는 주로 타산적 자기애가 남았다. 진실된 이성애인 연인도 주의에서 조건을 말하며 타산적 자기애로 변질되도록 유도되면서 더욱 더타산적 자기애만 남게 되었다. 이런 현상으로 온갖 사회 문제를 일으키게 되었다.

 

첫째, 통계. 타산적 자기애에 많기에 진실된 이성애는 더욱 사라지면서 MZ세대의 초기 세대라 할 수 있는 2020년 30대의 혼인율이 절반을 넘지 못하고 2016년 한국 부부의 섹스리스가 세계 2위로 3쌍 중 1쌍이 성관계를 맺지 않고 있다고 한다. 2021년 한국 성인 36%가 1년간 성관계를 하지 않았다는 조사도 있었다. 이성애 소실이 통계로 나타나고 있다.

 

둘째, 타산적 자기애. 타산적 자기애가 많기에 타산적 자기애로 연애를 하고 결혼을하는 부부가 늘어나게 되었다. 이것은 연애와 중매 관계가 없다. 보통 자유 결혼은 자유 의지에 따른 이성애로 생각할 수 있는데 사회 보편적 인식이 이성애와 성을 죄악시하는 바람에 정상적인 이성애가 아닌타산적 자기애로 자유 결혼 하는 일도 늘어나게 되었다. 타산적 자기애로 결혼한 이들은 쉽게 갈등이 발생하여 이혼을 하게 되면서 이혼률 또한 급격하게 오르기 시작했다. 한국이 간통법 폐지로 불륜 많아졌다고 하는데 애초에 이성애로 결혼한 것이 아니니 불륜이 많은것이다. 황당하게도 조건에 이끌려 결혼한 부부보다 성적 매력에 이끌려불륜한 커플이 진실된 이성애에 가깝다. 논리만 보면 그렇다. 그 정도로 보편적인 이성애가 죽은 상태다. 남성 측에서는 여성이 남성을 사랑하지 않는 현상을 가리켜 설거지라고 말하는 사회 현상이 나타날 정도고 여성 측에서는 남성에 대한 이성애가박살 난 상태에서 아이를 낳고 싶은 이들이 정자은행으로 아이를 낳고 싶다는 의사를 표현하게 될 정도였다. 그야말로 이성애의 종말이다.

 

셋째, 정조 관념. 타산적 자기애가 많기에 보편적 연애 경험이 적어짐에 따라과거와 같은 정조 관념을 가지면서 여성의 처녀성을 중시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사라지지 않게 되었다. 처녀성을 찾는 것은 개인 자유지만 처녀가 아니라는 이유로 비난하는 것은 부당하다. 성경험이 있거나 많은 여성을 걸레라 부르는 것도 정조 관념에 의한 것이다. 한국은 정조 관념에 의한 성적 억압에 불만을 가지면서도 정조 관념에 의한 처녀성을 중시하거나정조 관념에 의한 처녀성 중시를 비판하면서 정조 관념에 의한 성적 억압을 자행하는 모순적 태도가 나타나게 되었다.

 

넷째, 성매매. 타산적 자기애가 많기에 음성적으로 성을 매매하는 일이 많아지게되었다. 한국은 법적으로 성매매가 금지되어 있으나 개인의 이익 실현을위해 자발적으로 성을 매매하는 인간이 상당히 많은 편이다. 그러면서도 세금을 내지 않아 차라리 허용하자는 주장이 많은 편이다. 개인주의 체제에 맞게 개인의 의사라면 성적 자기결정권에 따라 개인의 성매매는 허용되어야 한다. 그런 성매매뿐만 아니라 이성과 데이트를 하는 것으로 돈을 받거나 이성과 게임을 같이 해주는 것으로돈을 받는 일이 나타나게 되었다. 인간관계에서 이성애를 충족하지 못하니까 그렇게 해서라도 이성과의 관계를 갖고 싶어한 인간들의 수요에 의해 다양한 공급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다섯째, 낙태. 타산적 자기애가 많기에 본인 이익 실현을 위한 낙태에 대한거부감이 적게 되면서 낙태가 늘어나게 되었다. 이성애를 본인의 이익 실현 수단으로 쓰니까 이성 관계로 물질이나 쾌락과 같은 이익을 얻고 이익의 불필요한 결과물인 태아는 낙태로 처리하게되는 것이다. 진실된 이성애에서도 낙태는 나타날 수 있으나 일반적으로는성적 매력이 이끌려 사랑하면서 서로가 길들여짐에 따라 인간 자체를 사랑하게 되어 그 관계에서 생긴 아이도 사랑하게 된다. 타산적 자기애를 가진 사람에게 있어 이성 관계나 성관계는 어디까지나 자기애를 위한 것으로 타산적인이익 외에는 관심이 없다.

 

여섯째, 일인 가구. 타산적 자기애가 많기에 동거나 결혼이 몹시 복잡하게 되었다. 동거나 결혼은 그냥 단순히 서로를 사랑하여 마음이 맞는 상대와 같이 살 뿐이다. 조건 따져가면서 만날 이유가 없다. 특히 동거는 더욱더 그렇다. 한국은 일인 가구가 많은데 그 대부분이 이성 관계가 없거나 조건을 따져가면서 만나니까 동거나결혼을 하지 않았으니까 일인 가구인 것이다. 다인 가구에 비해 일인 가구는 생계비가 많이 들어가 개인은 생계비가 높고 사회는 자원이 낭비된다.

 

일곱째, 성별 갈등. 타산적 자기애가 많기에 이성애가 소실되면서 이성을 사랑하지않게 되는 것으로 성별 갈등도 심각하게 커져가게 되었다. 지금 성별 갈등의 본질은 이성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랑하지 않으니까 사소한 것 하나하나에 예민하게 반응하며 싸우는 것으로 갈등이 끝나지 않고 있다. 이성을 사랑하지 않게 된 것은 이성애가 소실되었기 때문이고 이성애가 소실된 이유는 낡은 가치관으로미성년의 이성 관계와 성관계를 죄악시하며 막거나 부정적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여성주의의 일방적 이익 주장이 그걸 더욱 더 부추기고 있다. 성별 갈등이 커지면서 여성주의자들은 여성 성 상품화 반대라 말하며 남성이 즐기는 게임 검열을주장하거나 누드 축제를 막는 것과 같이 성 문화 탄압을 주도적으로 행하게 되었다.

 

여덟째, 이른 결혼 부정. 타산적 자기애가 많기에 늦은 결혼을 하게 되면서 주위에서본 이른 결혼이 개인에게 불행했다며 합리화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가부장제의 차별적인 결혼이 보편적으로 불행한 것이지 평등한 결혼은 사이 좋은 커플 동거의 연장선상에 있다. 이른 결혼을 하더라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 사회 진출에 따른 자녀 양육 문제라면 결혼 하고 나서 자녀 계획을 하면 동거와 차이가 없다. 사이 좋은 커플이 동거에서 결혼을 하게 되면 다양한 물질적 어려움으로 갈등이 발생할 수 있는데그것은 애초에 이성애의 가치가 물질의 가치보다 낮았기 때문에 발생하는 갈등이다. 취미를 위해 먼 나라에 놀러 가는 판국에 큰 빚이나 그런 것이 아닌 한 보통 사소한 물질적인문제로 심각한 갈등을 빚는 것 자체가 취미보다 이성애의 가치가 낮다는 것이다.

 

아홉째, 부부 관계. 타산적 자기애가 많기에 타산적 자기애를 합리화하기 위해진실된 이성애는 성적 매력이 이끌린 것으로 시간이 흐르면 변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본래 모든 인간관계는 유지되기 위하여 서로가 노력해야 한다. 인간이 육체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을 해야 하는 것과 같이 국가가 구조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을해야 하는 것과 같이 부부 관계도 유지하기 위해 노력을 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도 안 될 경우에는 계약 관계를 끝내고 자연스럽게 헤어지면 된다. 그것이 정상적인 인간관계다. 과거 집단주의 체제에서 이혼을 가족 붕괴로 말하며 자녀를 불행케 하는 행위로 여겨졌으나 현재개인주의 체제에서 이혼은 단순한 부부의 계약 종료로 가족의 계약 종료가 아니므로 이혼한 부부가 자녀와 사이 좋게 지내면 자녀는 불행하지 않게 된다.

 

열째, 세뇌. 타산적 자기애가 많기에 일부를 제외한 대부분 인간이 진실된이성애가 아닌 타산적 자기애로 이성 관계를 맺고 그 외는 이성 관계를 맺지 않게 되었다. 이것은 오랜 시간 세뇌한 결과다. “미성년 때부터 이성과 가까이 하는 네가 잘못된 거야.” “이성에게 성욕을 느끼는 네가 잘못된 거야.” 앞서 말한 종교 세뇌나 가스라이팅의 원리에 의해 대부분 타산적 자기애로 이성 관계를 이성 관계를맺으면서 한국에서 정상적인 이성애는 죽어버렸다. 한국에서 유사 연애 산업인 아이돌이나 창작물, 그 중 남성과 남성의 동성애물이 비정상적으로 발전한 까닭에는 이런 배경이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한국의 이성애는 타산적 자기애가 많다. 반면 취미는 어떠한가? 대부분 취미에는 타산이 없다. 취미 자체로 만족하기에 다른 이익을 요구하지 않는다. 분명 타산적인 취미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 타산이 없다. 게임, 드라마, 쇼핑, 등산, 낚시 등 즐기는 것으로 만족하기에 다른 보답을 바라는 것과 같은 이해관계를 따지지 않는다. 대부분 취미는 보답을 바라지 않는 사랑이다. 그러므로 한국에서 수많은 조건을 따지는 이성에 대한 사랑은 보답을 바라지 않는 취미에 대한 사랑보다얄팍한 사랑이 된다.

 

 

개인주의 체제에 맞는 이성애와 성의 개인 관념과 국가 구조를 재정립해야 개인의 의사로 연애하고결혼하고 출산하는 것으로 비참한 저출산 현상 문제는 해결할 수 있다. 인간의 육체가 유지되어야 인간의 자아도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는 것처럼 국가 구조가 유지되어야 개인도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다.

 

첫째, 이성애와 성 긍정. 개인 관념은 이성애와 성을 긍정하여 미성년 때부터 이성 관계와 성 문화를 적극적으로 권장하여 올바른 이성애와 성관념이 자리 잡히도록 하는것이 옳다고 여겨야 한다. 남녀칠세부동석이나 정조 관념은 가부장제 시대의 낡은 가치관으로 이제는 버려야 한다. 그걸 근거로 한 이성 관계를 불건전하다 하거나 성 문화 접촉을 막는 규제와 검열과 같은 탄압을막아야 한다. 모든 인간은 성기능이 작동하는 2차 성징이 시작하는 사춘기 시기부터 이성과 성관계를 맺으며 성장해야 한다. 그래야 성년이 되어서도 자유롭게 성관계를 맺고 그 중에 결혼하여 출산하는 이들이 늘어날 수 있다. 성년은 온갖 노력을 다해 올바른 이성애와 성관념을 가져야 한다.

이성애와 성을 죄악시하는 풍조에서 나타난 성적인 농담 유머 등을 불건전하게 보며 불쾌해하는 것자체가 잘못되었다. 성은 죄가 아니고 성은 불건전하지도 않으며 성을 보고 불쾌해해서도안 된다. 집단의 의사로 결혼하던 시대의 가치관을 개인의 의사로 결혼하는시대에 강요해서는 안 된다.

국가 구조는 그러한 이성애와 성 문화가 자리 잡히도록 미성년 때부터 적극적은 이성교제가 가능하도록특정 성별 학교를 점진적으로 모두 폐지해야 한다. 특히 가부장제의 산물인 여학교는 지나치게 여성 차별적이다. 실용적인 성교육을 전면적으로 실시하여 모든 인간이 성을 친숙하게 여겨야 한다. 학창 시절 이성과 연애하다가 결혼하는 사례가 늘어야 한다.

이성애와 성을 친숙하게 여기는 올바른 이성애와 성관념이 자리 잡힐 수 있도록 입법의 법률 제정과사법의 판단을 성에 개방적으로 바뀌어야 한다. 성에 대한 언급 자체를 죄로 여기는 풍조에서 벗어나야 한다. 성적 농담 정도는 수용할 수 있을 정도로 성이 자유로워야 한다. 행정 또한 수사 기관은 야한 그림 신고 따위의 어처구니 없는 신고는 수용해서는 안 된다. 혐의 없음 이전에 신고조차 받으면 안 된다. 그런 거 일일이 신고하는 거 받아주니까 국가에 이로운 올바른 성관념이 자리 잡히지 못하고 있는것이다.

영상물등급위원회나 게임물관리위원회와 같은 문화 규제 기관의 규제와 검열을 대폭적으로 축소하거나강제력이 없는 민간 기관으로 이전하여 사회적 합의를 통해서만 규제와 검열을 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낡은 가치관을 잣대로 성적인 문화를 규제하고 검열했던 것은 국가의 그릇된 이성애와 성관념이 자리잡히게 만든 도덕적 죄에 해당한다. 성이 죄악시되어 성관계가 있는 작품이 건전하지 못하다며 천시되는 경향이 있는데 성관계가 없는 이성애를 다룬 작품은 낡은 가치관에 의해 진실된이성애가 제거된 겉멋만 잔뜩 든 진실을 다루지 않은 불완전한 작품에 불과하다.

성관계가 담긴 작품을 즐기는 연령대는 성기능이 작동하는 14세 전후부터 즐길 수 있어야 한다. 그렇게 어려서부터 성에 친숙해져야 성에 대한 긍정적 인식을 가지고 자유롭게 연애하고 성관계하는것으로 20대 연애율 21.4% 밖에 되지 않는 이성애가 죽는 사회에서 벗어날 수 있다. 출산율 이전에 이성애부터 살려야 한다. 그럼에도 그것이 잘못된 것임을 모르고 진실된 이성애를 부정하고 타산적 자기애를 갖도록 유도하고있다. 이성애와 성을 죄악시하는 것은 국가 구조 붕괴를 유도하기에지극히 사악한 행위다. 의기양양하게 이성애와 성을 탄압하는 이들의 악행을 막아야한다.

 

둘째, 개성 존중. 개인 관념은 타인의 개성을 존중하고 타인의 이성 관계에오지랖을 피우지 않는 것이 옳다고 여겨야 한다. 본인과 상대의 역할이란 관계에서 역할에 필요한 성질에 대해서만 가치를 판단하고 그 성질 되엔 중요하지 않으므로 그 외의 성질은 신경 쓰지않는 것으로 타인의 개성을 존중한다. 그렇게 해야 서로의 이성 관계에 오지랖을 피우며 조건을 따지는 타산적 자기애로 변질되는 것을 막을 수 있다. 사회 입장에서 개개인의 자유로운 인간관계는 개인의 자유 의지라면 어떤 형태라도 상관없다. 연령, 혈연, 동성 등 아무래도 좋다. 인간과 인간과의 이성 관계와 성관계는 날아다니는 잠자리의 교미만큼이나 자연스러운 일이다.

연령은 성기능 작동 시기가 극단적으로 다른 일부 예외를 제외한 일반 인간의 경우 서로 성기능이작동한다면 자유 의지에 따라 성관계를 맺어도 아무 문제가 없다. 가임기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아야 한다. 합리적 기준은 낡은 관념이 아닌 과학적 근거에 있다. 국가 원리가 개인의 의사인 개인주의 체제인 국가에서는 최대한 개인의 의사를 존중하며 사사로운 인간관계에 개입하여서는 안 된다. 사춘기 미성년과 성년의 성관계를 부정적으로 보는 것은 미성년을 사리 분별을 못하는 어리석은 인간으로보기 때문이다. 그렇게 보았기 때문에 실제로 그렇게 가르쳐 그 동안은 사리분별을 못하는 사춘기 미성년이 많았으나 인터넷의 등장으로 무분별하게 성숙하게 되는 사춘기 미성년이 많아 그들에 의한 범죄도 늘어나고 있다. 모든 인간은 본인 육체의 기능에 대한 이해와 결정권을 가져야 하고, 그럴 수 있도록 가르쳐야 한다.

혈연의 경우 집안의 족보와 자녀의 유전병 문제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혈연의 관계를 정리한 족보는 가부장제가 남긴 골동품이며 유전병은 한 세대에서는 대부분발현되지 않으므로 문제가 없다. 낮은 확률의 유전병이 문제라면 고령 출산도 문제가 된다. 합리적 기준은 낡은 관념이 아닌 과학적 근거에 있다.

동성의 경우 아이를 낳지 못한다는 문제가 있다. 그렇다고 해도 개인주의 체제 국가 원리를 해칠 수가 없으므로 막을 수가 없다. 소수의 동성애를 금하는 것으로 국가 출산율을 조금 올리는 것보다 소수의 동성애를 허용하는 것으로개인주의 체제의 합리성을 지키는 것이 공익에 부합한다. 남성 동성애는 항문 성교로 인한 성병 문제가 있는데 차라리 공개되는 것이 관리하기가 쉽다. 그러나 국가 구조 유지에는 도움이 되지 않으므로 국가 원리에 의한 개인의 의사가 존중 받기 위해서는동성애자 또한 국가 구조 유지를 위한 이성애 권장에 협조해야 한다. 그렇게 국가 구조가 유지되어야 국가 원리에 의해 동성애자의 의사가 존중 받을 수 있다.

연령, 혈연, 동성의 관계를 본인의 낡은 가치관을 근거로 바라보며 선을정하고 선을 넘었느니 말하며 인간의 사랑을 죄악시하기 보다는 과학과 같은 합리적 기준을 근거로 판단해야 한다. 그렇게 개인의 의사로 하는 다양한 사랑이 존중되어야 국가 구조는 유지되고 국가 원리를 추구할수 있다.

국가 구조는 자유로운 인간관계에서 개성을 가질 수 있도록 법률을 바꾸고 사법의 판단을 개인 개성존중의 방향으로 바꿔야 한다. 연령, 혈연, 성별 관계 없이 일반 인간의 성기능 작동이라는 합리적 기준으로 모든 개인이 성적 자기결정권을가질 수 있도록 구조를 가져야 한다. 특히 연령과 혈연은 그 관계가 어떻든 아무래도 좋다. 개인의 자유 의지로 연애하고 결혼하고 출산하면 국가 구조 유지 할 수 있다. 낡은 가치관에 의해 성기능이 작동되는데도 성적 자기결정권이 없어 죄악감을 가지며 성관계를 하거나자위해야 했던 비참한 사춘기는 더 이상 없어야 한다. 그 이후 개성 존중은 개인의 의사의 영역이 크므로 개인이 알아서 해야 한다.

 

셋째, 성적 매력 가꿈. 개인 관념은 인간이 인간에게 사랑 받기 위해 성적 매력을가꾸는 것을 옳다고 여겨야 한다. 국가 원리가 개인의 의사인 국가에서 모든 개인은 진실된 이성애로 사랑하고 사랑 받기 위해 성적 매력을 가꿔야 한다. 성적 매력은 외모, 몸매, 성격, 능력 등이 있을 수 있는데 일반적으로 외모와 몸매에 성적 매력을 느끼는 경우가 많으므로 외모와몸매를 가꾸어야 한다. 일상적으로 피부를 관리하고 운동을 하여 몸매를 관리한다. 외모가 나빠서 이성과 연애를 하지 못한다는 말을 하는데 대부분 처음부터 외모가 나쁜 것이 아니다. 이성애와 성을 죄악시하는 것에 세뇌되면서 가꾸질 않았으니까 외모가 나쁘게 된 것이다. 선천적으로 외모가 좋거나 그런 것에 세뇌되지 않고 꾸준히 가꾼 사람만 외모가 좋으니까 마치 그것이선천적으로 그런 것처럼 보이는데 성별 관계없이 꾸미면 대부분 매력적이게 된다. 성형도 발전해서 대부분 가능하다. 규모의 경제가 된 것인지 성형 비용도 저렴해져서 학생 때 아르바이트로 번 돈으로 외모 성형에투자할 만도 하다.

국가 구조는 외모 복지를 하는 것이 타당하다. 외모 복지가 저출산 대책 비용보다 저렴하면서 훨씬 효과적이다. 이미 출산을 하겠다 의지를 가진 사람에게 지원하는 것은 타당하지만 효율이 매우 낮다. 출산이라는 결과를 늘리기 위해서는 이성애라는 기본 풀을 늘려야 한다. 이성애가 작동할 수 있는 배경은 기본적인 외모라는 전제가 필요하다. 물론 외모가 없더라도 이성애는 가능하나 보편적이기가 어렵다. 모든 학생은 피부 관리, 치아 교정, 쌍꺼풀 수술 같은 가벼운 외모 복지를 받을 수 있어야 한다. 대부분 학생은 기초적인 외모 관리만 받아도 충분히 아름다워질 수 있다. 그렇게 하여 이성이 서로를 사랑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외모 복지에 쓸 비용으로 희귀병 환자 치료를 해야 한다고 말할 수 있는데, 그보다 외모 복지를 통해 이성애를 권장하여 국가적 자살을 막는 것이 시급하다.

외모 복지를 하면 대부분 자존감이 올라가 출산율뿐만 아니라 자살율 하락에도 기여할 수 있다. 낮은 자존감으로 인해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게 되면서 성적 매력을 가꾸지 않고 공부도 하지 않게되기도 한다. 그러면 자신감도 사라져 소극적이게 되면서 욕망이 적은 충동적폭력으로 욕구를 충족하는 학교 폭력의 대상이 되어 집단 괴롭힘을 당할 수도 있다. 단순한 고민 상담은 현실 도피적 행복이고 의학적 외모 복지는 현실 직시적 행복이다. 외모 복지를 하기만 해도 출산율이 오르고 자살율을 줄일 수 있다. 낡은 가치관에서만 벗어나면 외모 복지의 사회 경제적 효율을 알 수 있을 것이다. 학생이 외모를 꾸미는 것을 보고 학생 인권을 주장하는 이들이 반대할 수도 있다. 그러나 학생은 누군가의 도덕적 만족감을 충족시켜주기 위한 도구가 아니다. 학생 인권은 학생의 권리를 위해 존재해야 한다. 학생이 외모를 가꾸는 것과 이성 관계와 성관계와 성 문화를 막아 불행하게 만들면서 학생을 공부하는로봇으로 만드는 사람들이 학생 인권을 말하는 것은 지나치게 뻔뻔하다. 그것은 학생 인권이 아니라 인권 운동자의 가치관에 맞는 학생 모습을 바라는 운동자 이권에 불과하다.

 

넷째, 이른 결혼. 개인 관념은 모든 미성년이 적극적으로 이성과 연애와 성관계를하다가 이른 결혼을 하는 것을 옳다고 여겨야 한다. 학생 90% 이상이 이성과 이성 관계와 성관계를 맺도록 권장해야 한다. 성적 매력에 이끌리는 것이 진실된 이성애임을 알아야 한다. 학생 50% 이상이 졸업 후 바로 결혼할 수 있도록 유도한다. 결혼이 늦을수록 자의든 타의든 타산적 자기애로 변질될 확률이 높아 사랑하지 않는 인간과 결혼하거나 결혼하지 않는 것으로 앞으로의 삶이 불행해질수도 있다. 그 외의 학생도 가능한 빠르게 결혼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해야 대다수가 이성애와 성관계를 통한 행복을 얻으면서 출산율을 올리고 자살률을 내려야한다.

국가 구조는 국가 구조 유지를 위한 이른 결혼을 적극적으로 권장해야 한다. 이른 결혼을 하면 경제적으로 어려울 수 있는데 그것에 저출산 대책 비용을 쓰면 된다. 이미 여유가 있는 사람의 산후 조리에 복지 정책을 적용하는 것보다 여유가 없는 신혼 부부에게복지 정책을 적용하는 것이 훨씬 더 복지의 의미에 부합한다. 어떤 사람들은 개인의 자유를 위해 늦게 결혼해야 하거나 비혼을 해야 한다고 주장할 수 있는데 그런 개인의 의사가 존중되기 위해서는 국가구조가 유지되어야 한다는 것을 명확하게 알아야 한다. 이른 결혼은 쉬운 이혼을 전제로 해야 한다. 결혼은 일생을 같이할 종속 계약이 아닌 자유 계약이다. 개인주의 체제에서는 쉽게 결혼하고 쉽게 이혼하고 쉽게 재혼할 수 있어야 개인의 의사가 보다 잘 반영된다.

 

다섯째, 경제적 지출. 개인 관념은 이성애를 근거로 한 모든 활동에 경제적 지출이되는 것을 옳다고 여겨야 한다. 개인은 이성 관계에 경제적 지출을 하는 것을 타당하다 여겨야 한다. 개인의 취미보다 이성애가 가치가 높아져야만 그것이 가능해진다. 낡은 가치관에 의해 더치페이와 같은 평등한 지출을 부정하는데 그것은 여성 차별적인 가부장제 가치관으로남성을 차별하는 명백한 차별이다. 부모는 자녀가 외모를 꾸미거나 데이트를 할 비용에 지원하거나 외모나 데이트 비용을 위해 아르바이트 하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자본가는 노동자가 이성애와 관련된 활동을 위해 휴가를 가지는 것과 같은 것에 이해해야 한다. 보너스나 상여금을 이성 관계에서 소비할 수 있는 것을 지원하는 것도 좋다.

국가 구조는 학교에서는 이성 관계를 적극적 권장하고 앞서 언급한 외모 복지를 적극적으로 행하고이성애 관련 산업은 세금을 적게 받는다거나 이성애 권장에 협조하는 기관과 기업에 지원하는 등과 같이 이성애가 권장될 수 있는 경제적 환경을 조성해야한다. 그렇게 하여 국가적 자살을 막아야 한다.

 

 

이성애와 성의 권장은 과거와 정반대의 가치관이므로 불안할 수 있다. 집단의 의사로 중매결혼 하던 시대의 가치관과 그에 따른 국가 구조와 개인의 의사로 자유 결혼하는 시대의 가치관과 그에 따른 국가 구조는 정반대일 수밖에 없다. 그러면서 나타날 수 있는 불안에 대해 알아보자.

 

첫째, 가치 생산 하락. 이성애와 성이 권장되면 학업이나 노동에 의한 가치 생산이하락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친구 사귈 시간이나 유사 연애 산업을 즐길 시간에 이성 관계와 성관계를 맺으면 된다. 그러면 가치 생산이 하락되지도 않고 그렇게 하여 연인이나 가족이 되면 명확한 동기를 부여 받아적극적으로 가치 생산을 할 수 있다. 개인주의 체제인 국가 원리는 개인의 의사이므로 가치 생산을 강요할 것이 아니라 스스로 가치 생산의 동기를 찾아야 한다.

 

둘째, 풍기 문란. 이성애와 성이 권장되면 풍기가 문란해질 수 있다고 생각할수 있다. 그러나 이성 관계와 성관계는 각자 자유롭게 알아서 해야한다. 그것이 국가 원리다. 학생이 자유롭게 이성 관계와 성관계를 맺으면 임신의 위험이 있을 수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피임 기구가 있다. 되려 이성애와 성이 부정적이면 피임 기구를 구매하지 못하여 의도치 않게 임신하는 일이 많을 수있다. 설령 실수로 아이를 갖는다 하더라도 아무 문제가 없다. 본래 동물은 성기능이 작동될 때 아이를 가지게 된다. 인간도 마찬가지다. 과거 대부분 결혼 적령기가 성기능 작동 시기였음을 상기해야 한다. 출산 적령이 문제가 있는데 적령기만 따지면 고령 출산도 막아야 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과학을 근거로 한 합리적 기준으로 접근해야 한다. 미성년은 어리석다라는 차별적인 인식을 제외하면 고령 출산이 가능하면 미성년 출산도 가능하다는결론이 나온다. 미성년이 임신으로 불행한 것은 대부분 사회의 부정적 시선때문이다. 미성년 때 아이를 낳는다 하더라도 임산부와 아이를 아끼고사랑하고 소중하게 여기면 된다. 그렇게 행복하게 되면 다른 학생도 이성애와 성과 출산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며 연애와 결혼과 출산을 하게 될 것이다. 그래야 출산율이 오른다. 경제적 어려움은 복지 정책을 적용하면 된다.

 

셋째, 외모 지상주의. 이성애와 성이 권장되면 외모 지상주의가 퍼질 수 있다고생각할 수 있다. 외모 복지에 대한 부정적 인식은 외모 지상주의에 대한 부정적인식을 근거로 할 것이다. 외모 지상주의로 외모에 의한 차별이 나타난다는 것을 보며 외모 복지와 같이 외모를 가꾸는 것을 권장하는 것이 나쁘다고 여기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국가 원리가 개인의 의사인 국가에서 외모와 같은 개인 취향에 의한 영역은 당연히 차별적이고불균형적인 결과가 나오게 된다. 그래야 개인의 의사가 존중되는 개인주의 체제가 된다. 개인 취향은 깨끗한 물건이나 아름다운 풍경이나 매력적인 외모 등과 같이 보다 개인의 마음에 드는 것에 이끌리는 것이 자연스럽다. 외모 지상주의에 반대하는 이들도 대부분 유사 연애 산업을 통해 아름다운 대상의 성적 매력으로욕구를 충족하고 있다. 선거와 시장이 균형적이면 잘못되었듯이 개인 취향 또한 균형적이면잘못되었다. 그것은 개인에 대한 지배다. 외모 지상주의의 문제는 매력적인 외모를 좇는 것이 아니라 대상 가치에 의해 특정한 외모에만 매력을느끼는 것이다. 관계 가치로 접근하여 개인이 느끼는 매력을 추구하도록 유도해야다양한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을 통해 가능한 다수의 매력이 존중 받을 수 있을 것이다.

현재 이성애와 성이 죄악시되고 이성애와 성을 하게 될 수 있는 외모 꾸밈과 성 문화 접촉 또한죄악시 되어 학교에서는 화장이 금지되고 미성년은 성관계를 표현한 성 문화를 접하지 못하게 하고 있다. 그런 탓에 그런 것은 성년에게 반항할 수 있는 의지를 가진 이들이 음주, 흡연을 하는 것과 같이 연애와 성관계를 할 수 있었다. 그러면서 그런 의지를 가진 이들이 꾸밈에 따라 그러지 못한 이들은 꾸미지 않으면서 꾸몄기 때문에연애하고 성관계를 할 수 있었다는 잘못된 인식이 퍼지게 된다. 본질은 억압하던 성년에게 반항하여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는 의지를 가진 이들이 미성년 때 연애와 성관계를 하면서 그걸 위한 꾸밈과 성문화도 자유롭게 접했던 것이다. 웬만한 인간은 꾸미면 어느 정도 매력을 갖춰 연애하는데 크게 어려움이 없으나 장유유서에 세뇌 당하여 이성애나 성을 죄로 가르치는 성년에반항하지 못한 인간은 꾸미지 못하여 매력이 낮아지게 되었다. 인과가 다르다.

도덕에 의해 이성애를 배우지 못한 착한 인간은 매력을 키우지 못하고 도덕을 무시하고 이성애를배운 나쁜 인간은 매력을 키운다. 이성애를 배우지 못한 착한 남성은 나쁜 여성에게 이용당하여 여성 혐오에 빠지고 착한 여성은 나쁜 남성에게 이용당하여 남성 혐오에 빠진다. 이성애를 배우지 못했기에 이성애를 악용하는 것에 지나치게 취약해졌다.

 

넷째, 이른 결혼. 이성애와 성이 권장되어 이른 결혼을 하게 되면 불행하게될 거라 생각할 수 있다. 흔히 가부장제의 이른 결혼을 보고 이른 결혼에 대한 부정적 선입견이 있을 수 있는데, 그것은 여성의 개인 의사가 반영되지 못한 결혼이고 평등한 관계에서 이른 결혼은 여성의 개인 의사가반영된 결혼으로 같은 기준으로 바라보는 것은 불합리하다. 개인의 의사라는 체제 원리도 생각 안하고 나쁜 가부장제 사회에서 이른 결혼이 있었으니 이른 결혼이 나쁘다라는 일차원적인 결론은 지향해야한다. 개인의 의사로 연애하고 결혼해야 하는 만큼 성적 매력이높을 때 빨리빨리 연애하고 결혼해야 한다. 그렇게 진실된 이성애로 서로를 길들이면서 인간 자체를 사랑하게 되어야 그 관계에서 태어난 아이도 아끼고 사랑할 수 있다. 지금 종종 아기 살해가 언론에 공개되고 있는데 진실된 이성애가 아닌 타산적 자기애로 관계 맺고낳은 아이기 때문에 사랑하지 않아서 죽이는 것이다. 친구 관계를 조건보고 만나 사귀면 비즈니스 관계라 하듯이 부부 관계도 조건보고 만나 결혼하면 비즈니스 관계에 불과하다. 이른 결혼을 하면 사회 진출이 어려워질 거라 생각할 수 있는데 아이 계획을 분명히 하고 결혼하면사회 진출에 문제가 없다. 오히려 같이 살면 가사를 분담하여 혼자보다 시간 절약이 되는 것으로 사회 진출에 이로울 수 있다. 대등한 이성 관계라면 진실된 이성애를 근거로 한 이른 결혼일수록 행복할 확률이 높다. 본인과 관련 없는 타인들이 자발적으로 연애하고 결혼하는 것을 낡은 가치관이나 여성주의와 같은여성 이익 주장을 근거로 방해하는 것과 같이 국가 구조 유지에 협력하지 않는다면 본인의 의사도 존중되지 못할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이른 결혼에서 범죄가 발생할 확률이 높은 것은 미성년의 이성애와 성이 죄악시되고 있는 상황에서그런 죄악시를 무시하고 결혼한 도덕을 신경 쓰지 않는 부류기 때문이다. 도덕은 살인, 강간, 폭행, 절도 등을 하지 말라는 보편 도덕과 개인의 의사와 집단의 의사와 같이 체제에 따른 도덕으로 분류되는데 집단주의 체제에 맞는 도덕을 추구하면개인주의 체제에 해롭더라도 보편 도덕은 지키는 반면, 도덕 자체를 무시하면 개인주의 체제에 해로운 도덕은 없으나 보편 도덕도 없어 쉽게 죄를 저지를 확률이 높다. 바람직한 것은 보편 도덕을 개인주의 체제에 맞게 자유 의지로 지키는 것이다. 그러면 이른 결혼을 하더라도 결혼 관련 범죄율은 크게 차이 나지 않거나 오히려 더 줄어들 수도있다.

 

다섯째, 성범죄. 이성애와 성이 권장되어 성적으로 자유롭게 된다면 성범죄가늘어날 수 있을 거라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어떤 문제가 생긴다는 이유로 무조건 막으면 범죄는 줄어들 수 있어도 가치도 사라진다. 성범죄 막겠다고 이성애와 성을 권장하지 않거나 부정하는 것은 학업으로 자살할 수 있으니 학업을막자고 하는 것보다 어리석다. 학업을 하지 않으면 국가 구조가 무너질 확률이 높아지지만 이성 관계와 성관계를 하지 않으면 국가 구조가 붕괴한다. 무엇보다 성범죄는 성적 욕구 자체보다는 개인의 자유권 침해에 있는 것이므로 이성애와 성이 권장된다하더라도 극적으로 변화하지 않는다. 되려 자유로운 성적 욕구 충족에 의해 범죄가 감소할 수도 있다.

 

 

한국은 금욕주의와 이타주의 윤리에 의해 타인에게 금욕과 희생을 강요하는 태도로 이성 관계에 균열이일어날 수 있는데 그것은 이성애 이전의 보편적 문제에 해당하여 그에 관한 것은 생략하였다.

시장 경제에서 계획 경제식 기업 운영을 하면 경제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 것과 같이 개인주의체제에서 집단주의 관념을 가지고 살아가면 엉망이 되는 것은 자명했다. 개인주의 체제인 국가에서는 모든 개인이 금욕이 아니라 욕망을 추구해야 했고 이타가 아니라 이기를 추구했어야 했고 성 죄악시가 아니라 성권장을 했어야 했다. 그렇게 정반대의 체제에서는 정반대의 가치를 추구해야 한다. 그래야 이성애와 성으로 개인이 행복하여 출산율이 오르고 자살률이 내릴 수 있다. 그러지 않고서는 어떤 복지 정책도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만큼이나 무의미하다.

 

 

두 번째, 교육

 

교육에 대한 개인 관념과 국가 구조를 개인주의 체제에 맞게끔 재정립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국가가 본질적인 발전을 할 수가 없다. 사회는 인간의 평가로 조직되고 인간은 관념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며 인간의 관념은 교육에 영향을받아 형성된다. 사회의 근간인 교육이 재정립되는 것이 중요하다.

모든 국가는 가치를 생산해야 한다. 한국도 마찬가지다. 특히 한국은 선진국이 되어 기초 학문을 갈고 닦고 고부가 가치를 생산하지 않으면 선진국인 국가 구조를 유지할 수 없게 되었다. 이런 상황이 지속되면 하위 선진국에서 정체되거나 중진국으로 퇴행할 수도 있다.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고부가 가치를 생산할 수 있는 교육이 필요하다.

한국은 조선을 이은 국가로 교육 관념은 유교의 경전을 암기하고 이해하던 조선의 교육 관념을 따라가지식을 암기하고 이해하는 주입식 교육을 시행했으나 선진국 문명을 흡수한 국가로 선진국 문명의 교육 체계를 따라가면서, 조선과 달리 선진국 문명의 지식을 암기하고 이해한 것을 공정하게 평가하면서 한국은 급속도로 선진국까지성장하게 된 상황에서, 암기와 이해는 전문가지만 탐구나 창의는 전문가가 아니기에기초 학문의 발전과 새로운 고부가 가치를 만드는 것이 어려워 정체 중에 있다.

기초 학문이나 새로운 고부가 가치 생산이 어려운 현상의 본질은 낡은 교육 관념에 의한 체제 적응실패에 있지만 다른 식으로 주장하는 일도 많다. 그것에 대해 알아보자.

 

첫째, 일자리 편향. 한국인은 쉽고 안정적으로 높은 수익을 보장하는 일자리를찾기 때문에 기초 학문이나 새로운 고부가 가치와 같은 돈이 되지 않거나 어려운 생산을 멀리했기 때문이라 생각할 수 있다. 결과적으로 보면 그런 면도 있으나 그런 결과를 만든 원인이 무엇인지 생각해봐야 한다. 낡은 교육 관념인 이타주의와 홍익인간에 의해 이타적이게 되도록 교육 받아 학부모와 교사에 이타적이게되어 시키는 대로만 하거나 학부모와 교사를 이타적이게 만들려고 하면서 무시하는 상황에서, 금욕주의와 수기치인에 의해 비정상적인 학부모나 교사의 교육열로 학습 외의 욕망이 제거되어 바라는것이 없어짐에 따라 육체적 욕망을 충족할 수 있는 금전을 요구하게 되면서, 자아 실현이 아닌 수익 실현을 바라며 쉽고 안정적인 곳에서 높은 수익을 얻을 수 있는 일자리를찾게 된 것이다.

 

둘째, 국가적 지원 미비. 한국은 선진국을 따라 잡기 위해 선진국을 흉내내면서 매우 빠른 성장을 하면서 응용 학문과 기존의 고부가 가치 생산에 몰두하면서 기초 학문이나새로운 고부가 가치 생산에 대한 국가적 지원은 있으나 선진국에 비해 적은 것이라 생각할 수 있다. 이것은 기초 학문이나 새로운 고부가 가치 생산의 성공 확률이 낮다 판단되었기 때문에 다른 선진국에비해 투자가 신중했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새로운 고부가 가치는 만들 수 있는 인간이 있다면 굳이 국가적 지원이 없어도 시장에서 성공할 수 있다. 그걸 할 수 있는 인간이 적었기 때문에 새로운 고부가 가치 생산이 드물었던 것이다.  

 

셋째, 태생적 능력 부족. 한국인은 태생적 능력이 부족하여 기초 학문을 발전시키지 못하거나 고부가 가치를 생산하지 못했던 것이라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그렇지가 않다. 같은 민족이었던 한국과 북한의 발전과 생산 차이가 국가 체제로 났다면 같은 체제인 한국과 다른선진국의 기초 학문과 고부가 가치 생산 차이가 국민 관념으로 난 것이다. 다른 선진국도 관념과 체제의 충돌로 사회 문제가 일어나고 있으나 한국보다는 개인주의적인 성향이강하여 상황이 나은 편이다. 태생적 능력 부족이 아니라 체제에 맞는 개인 관념과 국가 구조를 갖추지 못하여 능력이 부족하여 기초 학문 발전과 새로운 고부가 가치 생산이어려운 것이다.

어떤 사람은 오랫동안 선진국이었던 국가는 기초 학문과 고부가 가치 생산 기간이 길어 따라잡을수 없다 여길 수 있다. 그러나 새로운 세대가 기초 학문을 하지 않거나 새로운 고부가가치를 생산하지 못하는 것은 교육의 문제라 할 수 있다.

 

 

한국 교육 관념의 본질을 알기 위해서는 조선 교육을 알아야 한다. 과거 조선의 문과 과거 제도에서는 유교 경전을 암기하고 이해하는 것과 사회 문제 대책 질문에대한 답이나 시와 같은 문예 창작 하는 것을 평가하여 줄을 세운 다음 관직을 나눠주었다. 조선의 과거 제도는 상대적으로 매우 공정한 제도였으나 낡은 유교의 가르침이나 그걸 그걸 바탕으로생각한 사회 문제 대책이나 시와 같은 문예 창작을 평가 기준으로 삼았기에 국가 발전에는 그다지 도움이 되지 못했다. 수기치인과 고려보다 체계적인 과거 제도가 있었음에도 국가 발전이 정체되거나 퇴보했던 것은 아무리노력해도 유교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수기치인은 자신의 몸과 마음을 닦은 후에 남을 다스림을 뜻한다.] 수기치인이라는 지배자의 능력주의는 능력의 기준이 유교였기 때문에 그 능력이 국가 발전에 도움이 되지 못했다.

한국은 과거 조선과 마찬가지로 시험문제에 나올 내용을 암기하고 이해하는 것으로 평가 받거나 수시와같이 기초 학문이나 새로운 고부가 가치 생산에 도움이 되지 않는 방식으로 평가하여 줄을 세운 다음 대부분 진학이나 취업을 하였다. 한국에서 수학 능력 시험이 마치 축제이거나 굉장한 행사처럼 여겨지는 것은 과거 조선의 흔적이다. 조선과 다른 점은 교육 체계나 평가 기준이 유교가 아닌 선진국의 문명이었다. 그렇기에 한국은 선진국까지는 성장할 수 있었다. 그러나 기존 학문을 암기하고 이해하여 응용하는 것이나 기존의 고부가 가치 생산만 하면서 기초학문을 만들거나 새로운 고부가 가치 생산이 어렵게 되었다. 한국의 교육 관념은 본질적으로 조선과 다른 것이 없었기 때문에 이런 현상이 나타났다.

그래서 조선의 교육열도 한국에서 재현되고 있다. 학생의 학구열보다 학부모나 교사의 교육열이 강한 비정상적인 상황이다. 그것은 조선의 교육열이 유교라는 학문이 종교와도 같이 되었기 때문에 사실상 교육에 대한 열의가아닌 신앙에 대한 열의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학생의 학구열보다 학부모나 교사의 교육열이 강했고, 그렇기에 그 학습에는 지식에 대한 호기심이나 진리에 대한 탐구심이 결여되어 그저 유교의 경전을 종교 경전과 같이 암기하고 이해하고 찬양했다. 한국의 교육열도 그것과 비슷했다. 그 교육열로 나타난 학습에는 지식에 대한 호기심이나 진리에 대한 탐구심이 결여되어 그저 선진국의학문을 암기하고 이해하고 찬양했다. 그런 교육을 받아 사회 문제에 대한 본질적인 탐구를 하지 않으니까 한국의 연령 차별과 같은 한국의 본질적 차별은 방치하면서 선진국의 윤리대상 확대에 기반한 서양의 인종 차별과 같은 서양의 본질적 차별을 금지한 차별 금지법을 주장했던 것이다.

한국이 선진국이 되자 선진국의 학문을 암기하고 이해하고 찬양하는 것만으로는 더 이상 발전할 수없게 되었다. 국가가 가야 할 방향을 잃고 정체되면서 점점 퇴락해갔다. 그럼에도 같은 교육 관념과 기준으로 평가하고 가르치면서 기초 학문을 등한시하고 응용 학문이나기존의 고부가 가치 생산에만 몰두하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아동 인권을 주장하며 본인이 생각하는 낡은 가치관을 근거로 한 아동상을 위한 이권운동을 하는 이들에 의해 합리적 기준이 없이 아동의 권리나 혜택이 늘어났다. 그러면서도 낡은 가치관을 근거로 한 아동상에 의해 보호를 명분으로 한 지배가 심해졌다. 그 결과 학부모나 교사를 이타적으로 만들어 이용하는 난폭한 아동이 등장하고 학부모나 교사에게이타적이게 되어 이용당해 기본적인 권리도 존중 받지 못하는 가엾은 아동이 등장하게 되었다. 교육에 관심이 없는 난폭한 아동이 늘어나면서 과거 강제로 교육했던 시기보다 보편적 학력이 낮아지게되었다. 그럼에도 마땅한 대처 방안이 나오지 않자 과거의 것을 답습하여모든 학생을 강제로 교육해야 하는 것이 아니냐는 주장만 공허하게 떠돌게 되었다.

 

기초 학문과 새로운 고부가 가치 생산을 할 수 있는 인간이 적어지면서 새로운 시장을 창출할 수있는 창업자와 기업의 기획자가 적어짐에 따라 경제가 정체되고 노동자의 수요가 낮아지게 되었다. 대기업은 기존의 고부가 가치를 생산하여 기존 시장에서 경쟁력을 갖추고 꾸준히 성장하고 있으나중소기업은 기존 시장에서 경쟁하기 어려워 새로운 시장을 창출하여야 했으나 새로운 고부가 가치를 생산할 수 있는 인간이 적음에 따라 그러지도 못하면서기업 양극화가 커져갔다. 노동자의 수요가 낮아지면서 시장 원리에 의해 노동자의 노동력임대 상품의 가치가 낮아지게 되어 노동자의 이익도 상당히 낮아지게 되었다. 그러면서 경제 활동 둔화 현상이 나타났다.

과거에 기업은 선진국의 상품을 따라 하면 되었고 노동자는 고등 교육을 받은 사람이 적었기에 단순노동을 하길 희망했다. 그러나 현재 기업은 새로운 고부가 가치 상품을 생산해야했고 노동자는 고등 교육을 받은 인간이 늘어나면서 복잡 노동을 하길 희망했다. 그러나 기업은 새로운 고부가 가치 상품을 생산하는 경우가 드물었고 그에 따라 새로운 고부가 가치에맞는 복잡 노동의 수요도 적게 되었다. 한국의 단순 노동은 외국인 노동자가 하게 되었으나 복잡 노동은 고부가 가치 상품을 기획할 수 있는 고학력자보다 기획된 상품을 생산하길 바라는고학력자 늘면서 수요와 공급이 맞지 않게 되면서 고학력자가 바라는 일자리가 매우 적게 되었다. 거기에다 여성의 사회 진출이 늘면서 여성 창업자보다 여성 노동자가 늘어남에 따라 노동자의 노동력임대 상품의 공급이 늘어나면서 일자리는 더욱 더 줄어들게 되었다. 그러면서 경제 활동을 참여하지 않게 된 상황에서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엄청나게 큰 대우 차이로 인해 차라리 놀면서 공부하다 대기업이나 공기업에취업하길 바라는 이들이 늘어나면서 경제 활동이 둔화되게 되었다.

새로운 고부가 가치 상품을 생산할 수 있는 창업자가 늘면 좋겠지만 그럴 줄 아는 사람이 적었다. 그러나 기존의 가치 상품을 생산하는 일반 자영업이나 프랜차이즈 자영업은 폭증하게 되었다. 특히 외식업 프랜차이즈 브랜드는 9000개가 넘고 식당은 13만 개가 넘어섰다고 한다. 프랜차이즈 자영업은 실상 프랜차이즈에 종속된 자치 권한과 책임이 있는 성과급 노동자와 크게 다르지 않다. 이런 현상은 유교적 가치관에 의해 사장이 되고 싶은 사람은 많았으나 새로운 고부가 가치 상품을생산할 줄 아는 사람은 적었기에 나타났다.

 

 

교육은 유교 경전이나 선진국의 문명을 진리처럼 여기며 암기하는 것에서 벗어나 지식에 대한 호기심과진리에 대한 탐구심을 바탕으로 한 탐구 중심의 학습으로 바뀌어야 한다. 그렇게 해야 선진국의 문명에서 벗어나 새로운 길을 갈 수 있다. 예전에는 사람과 사람이 토론을 하다 보면 새로운 길을 갈 수 있을 거라 생각했었다. 예전에는 권력과 권력이 경쟁하면 새로운 길로 갈 수 있을 거라 생각했었다. 그러나 아니었다. 누군가 탐구하여 새로운 길을 안내하지 않는다면 같거나 비슷한 길을 계속 반복하며 맴돌기만 할 뿐이었다. 인류가 왕정에서 해방 된지 수백 년이 지났음에도 같은 가치 관념이란 길에서 벗어나지 못하여 낡은가치관으로 새로운 체제에서 살아가자는 우파와 낡은 가치관에 맞는 낡은 체제로 돌아가자는 좌파의 갈등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윤리 대상 확대만 하면서 일부 확대 대상이 불합리한 기준으로 부당한 이익을 취하기만 하고 있다. 역할에 맞는 능력도 없으면서 확대 대상에 포함되어 있다는 것만으로 과한 역할을 맡게 되었다. 그런 흐름에 휘말려 한국 또한 우파와 좌파가 갈등하는 중에 윤리 대상 확대로 인해 일부가 과한이익을 얻게 되는 것으로 사회적 혼란이 일어나고 있다.

새로운 체제에서 낡은 가치관으로 길을 걷다 보니 제대로 걸을 수가 없었다. 때로는 경제적 빈곤을 부르는 늪지에 빠지거나 때로는 사회적 생존을 위협하는 절벽에 떨어지기도했다. 그럼에도 낡은 가치관을 진리처럼 여기며 잘못된 길로 나아가고있다. 이제는 그 가치관이 낡아 새로운 체제에서 바른길을 갈 수없다는 것을 인식하고 새로운 가치관을 가질 수 있어야 한다. 그런 가치관을 가질 수 있는 방법은 지식에 대한 호기심과 진리에 대한 탐구심으로 새롭게 생각하는 것이다. 모든 학문이 호기심과 탐구심을 가져야 하는데 그 중 기초 인문 계열에서 호기심을 가지고 탐구하는이들이 보통 사상가나 철학자다. 발로 걷는 길로 안내하는 사람을 가리켜 길잡이라 부른다면 지성으로 걷는 길을 안내하는 사람을 가리켜 사상가나 철학자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이들이 새로운 체제에 맞는 새로운 가치관을 비롯해 다양한 것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나의 경험을 토대로 새로운 학습 방식에 대해 설명하겠다. 내가 기초 인문 계열을 탐구하게 된 계기는 간단하다. 내가 가진 나와 세상에 대한 의문은 사회의 지식으로 풀 수가 없었다. 오히려 고정 관념이 사고를 방해했다. 그래서 모든 지식과 관념을 최대한 버리고 새롭게 다시 생각하면서 탐구했다. 자아란 무엇인가? 자아 탐구부터 시작하여 세상에 있는 다양한 현상을 관찰하여 그 현상의 본질을 보려고 노력했다. 그러면서 일반적인 학습 방식과 다르게 되었다. 보통 학습은 앞에 지식을 쌓고 뒤에 생각을 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처음부터 생각하기 위해 앞에 생각을 하고 뒤에 지식을 쌓아 오류를 수정하고 다시또 생각하고 지식을 쌓아 오류를 수정하는 것을 반복했다.

처음에는 나의 의문을 풀기 위해 사상서와 철학서를 훑어본 적이 있다. 그러나 보는 순간 깨달았다. 사상서와 철학서는 진리가 아님에도 우수한 논리적 체계를 갖춰 충분한 생각을 하지 않고 그걸 수용하는순간 그들의 사상과 생각에 종속될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갖고 당장 읽지 않기로 했다. 그래서 무작정 생각했다. 과거 경험, 언론 뉴스, 게임과 같은 창작물, 인터넷 커뮤니티 등에서 알 수 있는 사회 현상을 관찰하여 그 본질이 무엇인지 생각하고 나서 그에대한 생각을 글로 썼다. 그렇게 생각을 글로 정리하고 나서 나중에 지식을 쌓아 오류를수정하고 새로운 생각을 글로 썼다. 그것은 광기의 나날이었다. 먹고 자고 놀고 싸는 것 등 삶의 모든 것이 생각을 중심으로 돌아갔다. 가사를 하는 시간을 아끼고 충분히 자는 것으로 생각을 정리하고 필요한 만큼 놀면서 현상을 관찰하고현실 도피하는 것으로 마음을 안정하게 하여 정신이 살아있을 수 있게 했다. 그렇게 생각하여 쓴 글은 지식을 쌓지 않았기에 초라하고 생각한 것을 제대로 정리하지 않았기에조잡했다. 그럼에도 생각하고 쓰고 지식으로 오류 수정하는 것을 계속했다. 방향을 정하지 않고서 체계화하는 것은 무의미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다 어느 정도 생각이 쌓이면 사상가의 사상서를 몇 권씩 읽기 시작했다. 자유론, 제3신분이란 무엇인가, 민족이란 무엇인가, 사회주의란 무엇인가, 여성의 권리 옹호, 언어 기원에 관한 시론, 인간 교육론, 나는 고발한다 등을 읽거나 해설을 참고했다. 새로운 생각을 하게 되는 계기를 만들기 위해 읽은 것이므로 전부 꼼꼼하게 읽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다른 사람과 토론으로 성장할 수도 없었다. 인류는 낡은 가치관에서 벗어나지 못하여 우파와 좌파가 갈등하고 있었고, 한국은 거기에 유교, 불교, 무교 등에 영향을 받아 더욱 더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다. 한국은 유교적 가치관에 의해 개인의 자유권이 침해되는 것이 너무나도 당연하게 이루어지고 있을정도로 자유주의에 대한 인식이 미비했다. 개인주의 체제에 살고 있는 사람들조차 본인이 살고 있는 사회의 체제가 어떤 성질을 가지고 있는지 파악하지 못하여 개인주의와 욕망주의와 이기주의를절대악인 것마냥 몰아세우며 비난하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과 토론으로 성장하기에는 시간이 너무나도 오래 걸렸다. 그들에게 영향을 받아서도 안 되었다. 아직 충분히 생각을 쌓지 않았을 때 사상서와 철학서를 접하면 그 생각에 종속될 수 있다는 두려움을느꼈던 것과 같이, 아직 충분히 생각을 쌓지 않았을 때 그들의 생각을 접하면영향을 받아 내 생각이 왜곡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갖게 되었다. 그들의 생각은 세상의 보편적인 생각이었다. 세상과 다른 새로운 길을 찾기 위해서 고독해야만 했다. 새로운 체제에 맞는 새로운 가치관이 일반화된다면 고독하지 않아도 될 것이지만 아직은 그렇지 않았다. 그러면서 세상의 현상을 관찰하여 본질을 파악한 뒤에 그에 대한 생각을 쓰는 것을 반복했다.

나는 나의 문제와 세상의 문제의 원인을 찾았다. 내 문제는 관념이었다. 나는 14세에 연상의 말에 의해 신체적 자유를 잃고 자유 의지로 몸을 움직이지 못하는 것으로 나 자신에게 크게 실망하여 삶을 포기했었다. 수많은 생각과 지식을 접하는 것으로 그 당시 연상의 말에 의해 신체적 자유를 잃고 자유 의지로몸을 움직이지 못했던 것은 장유유서에 세뇌되어 만들어진 관념에 의해 나타난 육체의 행동 준비를 관념에 의해 저항하지 못하였던 것이기 때문임을 알게되었다. 세상의 문제는 관념과 체제의 충돌이었다. 인류는 왕정의 집단주의 관념을 가지고 민주정의 개인주의 체제에서 살아가는 것에 의해 수많은 사회문제를 일으키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것이 인류가 겪는 본질적인 문제였다. 그렇게 하여 나는 나와 세상에 대한 의문을 풀 수 있었다. 사회의 지식으로는 의문을 풀 수 없고 사상서와 철학서를 그대로 접하면 종속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과 세상 사람들과 토론하면 영향을 받을지도모른다는 두려움을 갖고 무작정 생각했던 것이지만 그것이 진정한 의미에서의 탐구였다.

 

사과 그림이 있다. 만약 20%만 보인다면 80%를 상상으로 채워야 하기에 그 사과는 새로울 확률이 높다. 그러나 만약 80%가 보인다면 어떻겠는가? 나머지 20%만 상상으로 채워야 하기에 크게 새롭지 않을 수 있다. 만약 100% 보인다면 새롭기가 어려울 것이다. 새롭다 하려고 하더라도 이미 100%를 보아버렸기 때문에 그것에 얽매일 수밖에 없다. 그것과 같다. 과거의 인간이 만든 지식의 관점으로 세상의 많은 부분을보아버린 상태기 때문에 그것에 얽매이게 되면서 새로운 길로 나아가기가 어려워진다. 그러나 처음부터 현상을 보고 생각하고 추론하여 새로운 관점으로 세상을 보고 과거 인간이 만든지식의 관점으로 오류를 수정하면서 내가 탐구한 주관적 관점과 세상 지식이라는 객관적 관점을 둘 다 가지고 새로운 길로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

자연 과학은 학문적 진리를 많이 증명했다. 그 진리를 바탕으로 조금만 알고 있는 상황에서 추론으로 부족한 논리를 채워 성립되게 하여 이치에도달할 수 있었다. 그렇게 하여 나는 새로운 길로 갈 수 있었다. 이것은 딜레마다. 지식을 많이 쌓은 사람은 많이 알아서 관념이 고정되는 바람에 새로운 길을 가기가 어렵고, 지식을 적게 쌓은 사람은 관념이 고정되지는 않았으나 지식에 관심이 없어 지식을 적게 쌓은 것이기에새로운 길을 떠올리지 않았다. 지식을 적게 알면서 많이 생각하는 처음부터 탐구자가 되어야 이 딜레마에서 벗어날 수 있다. 현재 고학력자들이 창의적이지 못할 때가 있는데, 그것은 그들이 아는 것이 많아 고정 관념이 많았기 때문이다.

자연 과학의 학문적 진리를 통해 알게 된 이치를 바탕으로 그와 유사한 구조와 원리를 가진 이치와연결하면 자연스럽게 새로운 이치를 알 수 있게 되었다. 사상에 관한 발상을 하려면 이치의 수가 많아 의식적으로 하기 어려웠다. 그렇기에 이치에 다다르는데 도움이 되는 현상과 다양한 인식과 이치들을 재료 삼아 명확하게 인식하게하여 뇌가 계산하게 한 다음 발상이 떠오르게 했다. 자주 자고 일어나면 새로운 발상이 떠오르기도 했다. 이치에 대해 일일이 의식하지 않기에 지금 쓴 글의 이치도 다 의식적으로 알고 있지 않다. 그렇게 의식하게 되면 새로운 발상을 하기가 어려워진다. 수많은 재료를 모아 이치에 도달하여 형태를 이루면 그 이치는 재료 중 하나가 되어 뇌에 남게된다. 현상을 관찰하며 또 다시 재료를 모아 새로운 이치에 도달하여형태를 이루는 것으로 이치를 늘려나간다. 이치를 통해 합리적 기준을 만들고 나서 그걸 토대로 논리적으로 접근하여 새로운 이치에 도달한다. 그렇게 하여 내 안의 인식을 이치로 채운다.

이와 같은 발상법에 굳이 이름을 붙인다면 스도쿠 발상법이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스도쿠는 가로세로가 9칸씩으로 이루어진 정사각형의 가로줄과 세로줄에 1부터 9까지의 숫자를 겹치지 않도록 한 번에 써서 채워 넣는 퍼즐게임을 뜻한다.] 같은 줄에 숫자 2와 3이 모이면 4라는 답이 나오듯, 유사한 구조와 원리와 이치가 있는 것이 있으면 그걸 통해 자연스럽게 다른 이치를 알 수 있다. 이것은 추론법과 유사하지만 딱히 형식이 있는 것은 아니다. 형식에 치우치면 발상에 해가 된다. 이해를 돕기 위해 붙인 이름이므로 얽매일 필요도 없고 얽매여서도 안 된다.

 

이러한 탐구를 교육으로 해본다 해보자. 학생에게 학생이 자세히 모르는 주제를 주고 관련 글을 쓰라고 해보자. 만약 아예 모른다면 자연 과학의 학문적 진리나 사전적 정의를 비롯한 기초 지식은 알려줘야 한다. 그러면 구체적인 지식이 없으니까 당황하며 글을 쓰기 어려워할 것이다. 그럼에도 쓰게 하면 학문적 진리나 사전적 정의를 바탕으로 다른 분야의 비슷한 구조와 원리를 참고하여논리적으로 쓰면서 새로운 이치에 도달하려고 하게 된다. 사고의 영역이 주제의 분야에 한정되지 않고 다른 분야로 확장되게 된다. 그러면서 이미 있는 지식과 다른 새로운 것이 나오게 된다. 물론 그러면 오류가 많을 확률이 높다. 그것은 나중에 수정하면 된다. 이런 것이 창의다.

이런 방식으로 발상한 것 중 하나가 개인 정보 보관이다. 디지털 은행으로 오프라인 은행이 감소하고 있다는 정보를 접했다. 그걸 보고 무작정 앞으로 은행에 가야 할 길에 대해 써보려고 했다. 그런데 나는 은행에 대해 잘 몰랐다. 그래도 은행의 성질 몇 가지는 알고 있었다. 그것으로 몇 가지 발상을 하고 관련 지식을 접한 후에 정리하여 글을 썼다. 글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은행은 신용을 중시했다. 사회는 개인 정보 보호가 강화되면서 타인의 개인 정보를 알기 어려워 개인 정보 신용이 낮은 상황이었다. 개인이 취업을 할 때 쓴 이력서나 자기소개서를 인사 담당자가 거짓으로 보는 경향이 사회 현상으로나타날 정도였다. 거기서 사고의 영역이 은행에서 개인 정보 보호로 확장되어연결하자 개인 정보 신용 보관이란 결론이 나왔다. 은행이 개인 정보에 은행의 신용을 새기고 보관하는 것이다. 그러면 개인은 공개할 필요가 있는 개인 정보는 은행에 보관하여 신용을 새겨 창업자는 투자자에게 신용을 얻을 수 있고 취업자는 인사 담당자에게신용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 외 필요하지 않은 개인 정보는 굳이 찾으려 하지 않게 되면서 개인 정보가 보호되게 될 수 있을 것이다. 사생활의 비밀과 자유는 보장하면서 반드시 필요한 개인의 정보를 정부나 기업이 열람할 수 있게된다. 그렇게 하여 사회에서는 개인 정보를 침해하지 않으면서도필요한 개인 정보에 대한 신용을 얻을 수 있게 될 것이다. 개인 정보 신용 보관은 숫자로 이루어져 디지털로 보관할 수 있는 돈 달리 직접 면접을 통해 개인 정보 보관자가 가져온 개인 정보를 신용할수 있는지 확인해야 할 것이다. 거기서 본인의 정보를 조사할 사설 탐정도 해당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보통 탐정은 타인의 뒷조사를 하면서 합법과 불법의 경계를 걷게 되는데 개인 정보 보관을 위한보관자 정보 조사는 본인의 의사로 본인의 정보를 조사하는 것이므로 합법적이게 될 확률이 높을 것이다. 은행과 다른 정보 기관의 차이는 신용 보증금 차이다. 은행의 돈이 신용 보증금이 되게 된다. 만약 정보에 오류가 있을 경우 은행은 관리하는 돈의 신용에도 해가 되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정보신용을 중요시하게 된다. 이런 식으로 오프라인 은행이 줄어드는 것을 막을 수 있다고보았다. 은행의 신용이란 적은 정보에서 다른 분야의 지식을 바탕으로많은 생각으로 새로운 길을 떠올린 뒤에 논리적인 구조를 더해 새로운 길이 성립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굳이 은행이 아니더라도 괜찮다. 이런 개인 정보 보증은 개인 정보 브랜드화도 가능해진다. 어느 기관이나 기업이 정보를 보증해주느냐에 따라 신용도가 달라질 수 있다. 가령 브랜드로 먹고 사는 기업에서 본사의 브랜드 신용도를 걸고 특정 개인의 정보를 보증하면 개인정보에 브랜드 가치가 더해져 개인 또한 브랜드 가치에 영향을 받게 된다. 개인 정보 또한 명품이 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개인 정보 보증서에 명품 기업 마크만 붙어 있어도 상당한 브랜드 가치가 더해짐을 느낄 수 있을것이다. 그런 식으로 개인 본인이 사회에 필요한 본인의 개인 정보를브랜드화하여 공개하면 사회는 보다 개인 정보를 신용할 수 있게 될 것이다.

 

 

한국 교육에 대해 알아보자. 한국 교육은 대학 입시를 기준으로 결정된다. 대학에 진학하느냐 진학하지 않고 창업이나 취업 등의 일을 하느냐로 나뉜다. 학문에 관심이 없는 이들을 제외하면 대부분 대학 진학이 목적이다. 한국은 조선의 교육 관념을 가져 수학 능력 시험을 마치 조선의 과거 제도와 같이 여기며 성공할수 있는 길로 인식하고 그 시험을 잘 보는 것을 목적으로 학습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저출산으로 학교가 폐교하는 중에 좋은 대학 진학률이 학교 경쟁력으로 여겨짐에 따라 보다더 대학 입시에 목을 매는 일이 많아졌다. 대학에 입학하기 위한 방법은 정시와 수시와 편입이 있다. 정시는 수학 능력 시험으로 평가하고 수시는 학생부 교과 전형, 학생부 종합 전형, 논술 위주 전형, 특기자 전형으로 나눠 다양하게 평가하고 있다. 그러나 대학 입학이 목적이기에 입학에 도움이 되는 지식을 위주로 학습하면서 그 다양성은 크게의미가 없게 되었다. 그런 탓에 어떤 학생은 입시에 관계 없는 지식을 배워야하는 이유를 모르겠다며 화를 내기도 했다. 지적 호기심이나 진리적 탐구심이 애초에 없었다. 주입식 교육에 길들여진 학생은 논술조차도 학원에서 일러준 방식을 차용하기도 했다. 지금까지 한국 교육은 단순히 대학을 잘 가기 위한 지식 암기와 이해, 그리고 문제 풀이였지 지식에 호기심을 갖고 진리를 위한 탐구를 하는 경우는 대부분 없었다.

대학에 입학하는 사람이 늘어남에 따라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경쟁 승패를 정하기 위한 변별력을 명분으로과하게 복잡한 응용 문제를 시험에 내게 되었다. 세계 최상위 대학의 학생도 풀기 어렵게 의도적으로 복잡하게 만든 문제도 많았다. 그런데 지식을 아는 것으로 관념이 고정되고 관념이 고정되는 것으로 새로운 발상이 어렵다는 것을고려하면 구체적인 지식까지 담긴 응용 문제를 문제집이나 모의고사 등으로 오랫동안 반복적으로 푸는 것은 문제와 관련된 분야의 창의력을 말살하는 것과다르지 않았다. 시험은 단순히 지식을 암기하고 이해하는 것만이 아니라 제한시간 내에 푸는 순발력도 필요하기 때문에 반사적으로 문제를 풀 수 있을 정도로 뇌에 각인을 시켜야 했다. 구체적인 응용 문제와 그에 대한 답을 진리처럼 뇌에 새겼다는 것이다. 개인의 인식이 배제된 채 과거 인간이 탐구한 지식의 인식만 갖게 되었다. 그러면서 관념이 강하게 고정되면서 관념에서 벗어나 새로운 생각을 하기 어려워졌다. 보통 지식은 알수록 힘이 되지만 탐구하여 주관을 가진 상태에서 지식을 접한 것과 단순히 지식을암기해버리는 것과 차이가 있다. 단순히 지식을 암기해버리면 새로운 생각을 하기가 매우 어려워진다.

논리적으로 접근해보자. 인간은 관념에 의해 생각하고 행동한다. 인간은 고정 관념에 의해 새로운 생각을 하기 어려워진다. 새로운 생각을 하기 어려워지면서 창의력이 낮아지게 된다. 시험 문제를 반복적으로 풀면 풀수록 문제에 관한 관념이 고정되면서 창의력이 낮아진다. 한국 영재들이 성장하면서 우수함을 잃게 되는데, 하나는 학습 효율과 가치 생산과 직접적 연관이 없어 학습이 빠르다고 우수한 가치를 생산할 것이라는보장이 없다는 것이고 둘은 반복적 응용 문제 풀이에 의해 창의력이 말살되었기 때문이다. 한국 학생은 지금도 반복적인 응용 문제 풀이로 창의력을 잃어가고 있다. 한국 교육에는 지적 호기심이나 진리적 탐구심이 없었다.

 

한국 교육에 지적 호기심과 진리적 탐구심이 필요하다. 그래야 기초 학문을 하고 새로운 고부가 가치 생산을 할 수 있다. 그래야 새로운 고부가 가치 창업자나 기획자가 늘어 그에 맞는 고학력 노동자들도 경제 활동을 할수 있게 된다. 이에 따라 한국은 탐구와 창의와 관리의 세 가지 교육 과정과역할주의에 따른 분야별 교육 방식으로 나뉘어야 한다. 교육 과정은 다음과 같다. 탐구 교육은 탐구를 중점으로 하는 교육으로 기초 학문을 하는 인간에 해당하며 보통 사상가나 철학자나 연구자 등이 있을 것이다. 창의 교육은 암기와 탐구를 적절히 섞어 기초는 암기하고 응용은 탐구하는 교육으로 새로운 고부가가치를 생산하려는 인간에 해당하며 보통 창업자나 기획자나 창작자 등이 있을 것이다. 관리 교육은 암기를 중점으로 하는 교육으로 지금까지 인류 문명을 관리하며 유지하려는 인간에 해당하며보통 노동자나 관리자 등이 있을 것이다.

교육 방식은 다음과 같다. 인문 계열, 자연 계열, 가치 계열, 예술 계열, 체육 계열 등. 탐구 교육은 인문, 자연, 예술에서 주로 하고 창의 교육은 인문, 자연, 가치, 예술에서 주로 하고 관리 교육은 가치, 체육에서 주로 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지적 호기심이나 진리적 탐구심이 없는 인간은 학문을 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학문에도 의미가 없고 개인에게도 불행하기만 할 뿐이다. 간단히 말해 적성이 맞지 않는다. 학문을 직업을 갖기 위한 수단으로 쓰고 싶다면 그냥 처음부터 가치 계열에서 가치 생산에 관련된지식을 배우는 것이 좋다.

현재 학교는 지속적인 교육 정책 변경으로 다소 합리적이지 못한 학교들이 많은 상황이다. 뛰어난 이들이 모이는 영재고나 금전적 여유가 있는 이들이 모이는 자사고나 분야로 나눌 필요가있는지 의문이 드는 외고와 같이 나눌 것이 아니라 학문을 탐구하는 학교와 가치를 생산하는 학교와 예술과 체육을 하는 학교 등과 같이 나누는 것이타당하다 본다. 아무리 뛰어나도 지적 호기심이나 진리적 탐구심이 없는 사람은가치 계열 학교로 가는 것이 맞고 뛰어나지 않더라도 여가까지 써서 호기심을 가지고 탐구하는 사람은 인문이나 자연 계열 학교로 가는 것이 타당하다. 그렇게 되면 영재고나 자사고나 외고 학생도 탐구 학교와 창의 학교와 관리 학교로 나뉘어 갈 수있을 것이다. 그렇게 적성에 맞게 학교를 구분해야 한다. 최소한의 탐구심도 없으면서 좋은 직업 얻으려고 학문 탐구하는 것은 학문의 발전을 저해시키고 본인도원치 않는 탐구로 불행하기만 할 뿐이다.

 

첫째, 탐구 교육. 탐구부터 시작하는 교육이 탐구 교육이다. 모든 학생이 인간과 자연의 근원부터 탐구한다. 인문 계열의 탐구는 인문 계열의 학문적 진리조차 한번은 탐구해야 한다. 어째서 모든 인간에게 존엄성이 있는가? 왜 법을 지켜야 하는가? 그러나 자연 계열의 학문적 진리에 대해서는 꼭 구체적인 탐구를 할 필요는 없다. 자연 계열이 증명한 학문적 진리를 바탕으로 인간을 탐구하면 된다. 자연 계열의 탐구는 자연 계열의 학문적 진리조차 한번은 탐구해야 한다. 어째서 물체는 땅에 떨어지는가? 왜 1+1=2인가? 그러나 인문 계열의 학문적 진리에 대해서는 꼭 구체적인탐구를 할 필요는 없다. 인문 계열이 증명한 학문적 진리로 사회에서 살아가면 된다. 이렇게 본인 분야를 처음부터 탐구해야 탐구자 주관이 남아 고유한 탐구를 하는 것으로 새로운 길을갈 수 있게 된다. 예술 계열은 인문 계열 중 미에 대한 탐구를 하는 학문으로인문 계열과 방식적 차이는 크게 존재하지 않는다. 단지 인문 계열은 탐구 결과를 글로 표현한다면 예술 계열은 탐구 결과를 예술로 표현할 뿐이다. 이것이 기초 학문이다.

탐구 교육은 기초 학문을 하기 위해서는 고정된 관념이 적어야 한다. 그렇기에 가능한 심리적 정신 연령을 낮춰야 한다. 인간은 나이를 먹을수록 경험과 지식을 통해 관념이 고정되는 일이 많은데, 그걸 막기 위해 의식적으로 심리적 정신 연령을 낮춘다. 나 같은 경우는 14세에 겪은 특정 사건으로 자아 형성 시기에 자아가 망가지면서 자아의 시간이 멈춰 계속 자아를 형성하며 기초 관념에 대한 것에 대한 호기심을갖고 탐구하는 것으로 그런 일을 하지 않아도 고정 관념에서 다소 자유로울 수 있었으나, 일반적으로는 의도적으로 알고 있는 지식에 대한 고정 관념을 없애며 새로운 문화에 접하는 것을즐겨야 한다. 인문 계열은 기초적인 교육에 해당하는 예의범절 등의 윤리조차도관념을 고정하지 말아야 한다. 자연 계열은 기초적인 교육에 해당하는 물리 법칙이나 수학 법칙조차도 관념을 고정하지 말아야 한다. 그에 대해 탐구를 하여 본인의 관점과 보편 관점을 가지게 되면 다양한 관점을 통해 관념이 고정되는것을 방지하면서도 법칙을 잊지 않을 수 있다.

만약 그러지 않고 고정된 관념으로 기초 학문을 하면 그 관념의 파생 학문에 불과해진다. 인문 계열의 사상이나 철학은 고정된 관념을 가지고 하면 파생 사상이나 철학일 뿐이다. 종교를 부정한 공산주의가 종교와 같이 노동자 구제를 하며 노동자 낙원으로 가겠다고 말한 것과같이 말이다. 본질적으로 차이가 없게 된다. 그러면 기초 학문을 하는 의미가 없다. 자연 계열은 과학적 증명으로 우수한 학문적 진리를 체계적으로 구축해놓았으나, 그걸 그대로 따라가면 개인의 고유한 관점도 잃을 우려가 있다. 기초부터 탐구하여 본인의 관념을 유지해놔야 최신 자연 과학도 새로운 관점으로 접근할 수 있게된다. 또한 자연 계열도 학문적 진리지 일반 진리가 아니기에 낮은확률이지만 기초도 어쩌면 다른 방향이 존재할 수 있다.

탐구, 창의, 관리 모두 중학생 시기에 결정하는 것이 바람직하나 탐구만큼은중학생 시기에 진로를 결정해야 거기에 맞춰 사고를 설계하기가 쉽다. 그 이후에 탐구하겠다고 하면 의도적 관념 해체를 통한 자아 붕괴와 같은 괴로운 과정이 필요하게 된다.

 

둘째, 창의 교육. 기초는 암기하고 이해하고 응용은 탐구하는 교육이 창의 교육이다. 모든 학생이 기초는 암기하고 응용은 탐구한다. 새로운 고부가 가치를 생산하기 위해서는 응용에서만큼은 탐구를 해야 한다. 기초 학문은 암기한 것을 문제 풀이로 평가하고 응용은 과제를 직접 만들어 제출하게 한다. 가령 수학을 배운다고 하자. 기초 수학은 수학 수식을 암기하거나 이해한 것을 시험 문제로 평가한다. 응용 수학은 수학 수식을 바탕으로 새로운 수학 문제를 만들거나 다른 분야와 접목하여 수학의 응용을실천한다. 또는 특정한 화학 원소를 암기하고 그것을 활용한 상품과시장을 떠올리는 응용을 실천도 있을 수 있다. 기초는 암기하고 응용은 생각하여 만든다. 생각한 응용에서 생긴 오류는 지식을 통해 수정하고 다시 또 만든다.

창의적으로 가치를 생산하기 위한 교육으로 탐구 교육과 다르게 가치 생산에 집중한다. 탐구 교육은 탐구를 하다 가치가 생산된다면 창의 교육은 새로운 가치 생산을 목적으로 탐구한다. 가령 탐구 교육에서 예술은 미를 탐구하여 예술로 결과를 내는 순수 예술이라면 창의 교육에서 예술은미를 탐구하여 예술로 만든 것을 상업으로 판매하는 것으로 결과를 내는 대중 예술이라 할 수 있다.

보통 새로운 발상을 하려고 할 때 이것저것 자료를 잔뜩 모아 정보를 수집한 다음 거기서 뭔가를떠올려보려 할 것이다. 그러나 정보를 과잉 수집 한 뒤에 발상을 하려고 하면 해당주제에 관한 관념이 고정되어 새로운 것을 떠올리기가 어려울 수 있다. 그러므로 발상을 할 때에는 주제로 시작해 발상으로 넘어가 자료 수집을 한 뒤 오류 수정 등의 정리를 해야 한다. 보편적인 발상과 자료 수집의 순서를 거꾸로 한다. 이미 알고 있는 것에 의존하면 새로운 것이 나오기 어렵다. 이러다 보면 발상 단계에서 이미 있던 것을 발상할 수도 있는데 직접 생각한 것이라면 그래도 상관없다. 그것 또한 교육 과정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시장에 나올 때 저작권을 고려하면 된다. 만약 이미 많이 알고 있는 상황이라면 대상의 본질을 보고 일부 특성에만 초점을 맞춰 의도적으로정보를 줄인 다음 다른 분야의 지식을 바탕으로 많은 생각을 하여 발상한 다음 지식을 접하여 오류를 수정하는 등과 같은 정리를 하면 된다. 여기서 대상의 본질을 보는 것이 중요하다. 본질을 잘못 보면 결과도 잘못될 확률이 매우 높다. 보통 이런 방식이 새로운 고부가 가치 생산 방법이다.

창의 교육은 고부가 가치 생산을 하기 위해서는 고정된 관념이 적어야 한다. 탐구 교육과 다르게 기초 학문은 암기하므로 그렇게 적을 필요까지는 없다. 탐구 교육에서 고정된 관념이 적은 것은 필수적이라면 창의 교육에서는 가능한 적은 편이 좋다는식으로 접근한다. 심리적 정신 연령이 중등 교육이 끝나는 20세 전후에 머무른다면 대게 새로운 고부가 가치를 생산하는데 어려움이 없다. 인간은 감각 기관으로 수집한 정보를 보관한 기억으로 자아가 형성되고 그 기억 중에 고정된 관념으로유지된다. 만약 관념을 고정하지 않는다면 자아가 불안정하여 혼란을겪을 수 있다. 탐구 교육에서 기초 학문을 하는 인간은 처음부터 일반과괴리되어 혼란이 일반적이게 되지만 창의 교육에서 새로운 가치를 생산하는 인간은 일반과 그렇게 괴리되지 않았기에 혼란이 힘들 수도 있다. 그러나 관념이 고정되지 않은 만큼 창의력은 높게 된다.

 

셋째, 관리 교육. 기초와 응용을 모두 암기하고 이해하는 것이 관리 교육이다. 모든 학생이 기초와 응용을 모두 암기하고 이해한다. 이른바 주입식 교육이다. 학생을 빠른 시간 내에 매우 우수하게 만들 수 있다. 미국 흑인을 대상으로 한국식 교육을 한 결과 우수한 결과가 나왔다고 한다. 그 정도로 이미 있는 학문을 배워 유지하는 데는 최적화되어 있다. 관념이 고정되어 있기 때문에 판단에 있어 망설임이 없다. 그렇기에 신속하고 정확한 임무 수행에도 적합하다. 관리 교육이 우수할수록 사회를 지탱하는 힘이 커진다. 특히 고학력자일수록 많은 지식을 알고 있어 우수하다.

그러나 기초와 응용을 모두 암기하기 때문에 고정된 관념이 많아 기초 학문이나 새로운 고부가 가치생산이 어려울 수도 있다. 만약 기초와 응용을 모두 암기한 상태에서 기초 학문이나 새로운 고부가 가치를 생산하려고 한다면 고정된 관념을 지우기 위해 알고 있는 기초와응용을 다시 해야 할 상황까지 생길 수 있다. 보통 현재 교육은 중등 교육에서 암기하고 이해한 다음 고등 교육에서 새로운 것을 만드는데, 그랬기 때문에 기초 학문 발전이 더뎌지고 새로운 고부가 가치 생산이 어려웠다.

관리 교육은 관념이 고정되더라도 큰 문제는 없으나 새로운 것을 받아드릴 수 있어야 하며 새로운것을 만들 때에는 다시 탐구할 필요가 있다. 그렇기에 가능한 심리적 정신 연령을 낮추는 것이 바람직하다. 적어도 30대 전후에서는 머물러야 새로운 것을 수용하는데 어려움이없다. 인간은 실제 연령과 심리적 정신 연령이 다르므로 실제 연령에맞춰 살아갈 필요가 없다. 세상의 법칙은 시간이 아니라 이동이다. 시간은 인간이 만든 개념일 뿐이다. 만약 인간이 냉동 인간이 되면 육체의 움직임이 느려져 시간이 느리게 흐르게 된다. 이동이 빠르면 시간이 빠르게 흐르고 느리면 시간이 느리게 흐른다. 그와 같이 굳이 표준시에 맞춰 육체의 시간을 고정하여 살아가지 않아도 된다.

그런 측면에서 본인의 나이에 핑계되어 새로운 것을 받아드리지 않을 이유는 없다. 앞으로 인간은 생존 게임에서 승리하게 된다면 영원히 살 수도 있다. 그 때 심리적 정신 연령이 늙어버리면 젊게 되더라도 삶의 의욕을 잃고 자살하게 된다. 모든 인간은 새로운 것을 만들거나 받아드릴 수 있는 지성인이 되어야 한다. 그래야 생존할 수 있다.

 

 

각각의 교육 과정과 교육 방식을 통해 교육을 받으면 기초 학문과 새로운 고부가 가치 생산이 가능할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교육 과정은 학생의 적극적 참여가 필요하다. 지금과 같이 단순히 금욕적 관점에서 학생의 욕망을 부정하거나 이타적인 관점에서 학생의 권리만주장하거나 학생을 보호하겠다는 명분으로 지배하려고 한다면 교육에 있어 학생의 적극적 참여가 어려울 수 있다. 과거 강제로 공부하던 시대와 다르게 스스로 적극적으로 학습하려는 태도를 갖게 하기 위해서는 구체적인관념 설계 교육이 필요하다. 흔히 말하는 습관 길들이기 등을 과학을 통해 좀 더 체계적으로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스스로 학습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스스로 학습하면서 본인의 자유 의지로 본인을 만들어나가야 한다.

아동 교육의 가장 큰 실패원인은 비전문가인 학부모가 본인의 관점으로 자녀의 습관을 만들기 때문이다. 애초에 비전문가인 학부모가 학교 교육에 지나친 참견을 하는 것 자체가 잘못되었다. 한국은 유교적 가치관에 영향을 받아 학부모가 자녀의 교육에 참견하는 것이 미덕이 된 상황이기때문에 비전문가가 교육에 간섭하는 것도 바르다 착각하게 되고 있다. 그런 보편적 인식부터 없애야 한다. 자녀는 부모의 소유물이 아니다. 자녀는 개인으로서 전문적인 교육을 받을 권리가 있다. 역할주의적으로 접근하여 비전문가인 학부모가 교육 과정에 대한 개입하는 것을 최소화하는 정책을 추진해야 한다. 교육 정책에 불만이 있다면 전문가를 선임하여 의견을 낼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전문가인 교사도 오래된 교육 방식을 고집한다면 학부모와 다를 바 없는 비전문가다. 모든 학교에는 적절한 교육 방식을 알고 있는 전문가 한 명이 학습 방법을 주도해야 한다. 특히 초등학교와 중학교에 그런 전문가가 있어야 한다. 인간의 행동 원리는 관념에 의한 것이 많아 교육을 통해 학습에 적합한 관념을 갖게 한다면 스스로적극적 학습을 하게 할 수 있다. 인공 지능으로 비유하면 인공 지능의 알고리즘을 설계하면 인공 지능이 알아서 학습하는 것과 같다. 학습 동기와 보상 효과 등 그런 심리학적인 부분은 연구되어 있다고 안다. 그런데 인간은 인공 지능과 달리 육체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학습과 휴식에 맞춘 시간 분배를 고려하여설계해야 한다. 스스로 학습하기 위해서 학습이 본인에게 해롭다는 인식이없도록 충분한 휴식을 할 수 있게 해야 한다. 지적 호기심과 진리적 탐구심을 가지고 있다면 여가 시간까지 학습에 쓰고 수면을 취하더라도 충분한 휴식이 될 수 있다. 그런 이들이 보통 학문을 하면 된다. 그렇지 않고 무작정 학습하길 강요하면 육체와 정신이 유지되지 못하고 망가져 학습을 부정적으로여기면서 스스로 학습하지 않게 된다. 이런 효율적인 자가 학습을 설계할 수 있는 전문가가 한 학교당 한 명씩은 배치되어야 한다.

지금 교사는 담임과 교과목을 한 교사가 전부 담당하기도 하는데, 그런 식으로 업무가 겹치게 되면 전문성이 하락하여 학원의 수업보다 낮은 품질의 수업이 나타날수도 있다. 그러므로 교사는 관념 설계가 가능한 전문 교사와 학생을돌보고 학부모를 상대할 담임 교사와 수업을 하는 수업 교사로 나뉘어야 한다. 수업 교사의 경우 학원의 수업 품질보다 높아지기 위해 시장 경제의 방식을 도입하는 것이 적절하다. 수업 품질이 높으면 높은 대가를 받고 품질이 낮으면 담임을 맡아 수업을 하지 않는 대신 낮은급여를 받는다. 모든 교사는 충분한 대가와 시간이 있으면 우수한 품질의교육이 가능할 거라 생각한다. 그 중에 경쟁을 택하는 이들이 경쟁하는 대신 높은 이익을 얻고 안정을 택하는 이들이 안정적인 대신 작은 이익을 얻을 뿐이다. 지금과 같이 단순히 연공서열에 따라 대가를 받는 체계로는 우수한 공교육을 실현할 수가 없다.

한국은 미국과 같이 이민으로 우수한 인재를 늘리기가 어렵다. 한국의 눈에 찰만한 인재는 한국이 아니라 미국으로 가기 때문이다. 한국 인재도 미국으로 가는 마당에 한국이 발전하기 위해서는 대부분 한국인들이 보편적으로 성장해야한다. 그래서 위해서 공교육이 발전해야 한다.

 

 

한국 교육은 시장과 유사한 교육 과정을 통해 학생이 자본주의 사회에 적응할 수 있게 해야 한다. 지금까지 한국 교육은 금욕주의적인 상황에서 홍익인간을 말하여 이타적으로 만들고 나서 수기치인을말하며 학문에 집중할 것을 강요했다. 그러나 사회는 개인의 욕망과 이기심을 기반으로 한 개인의 의사로 동작하는 자본주의 시장 경제로 돌아가고 있었다. 교육에서는 낡은 가치관을 교육 받고 사회에서는 새로운 체제에 적응하라 하니 대부분 학생은 사회에적응하기가 어려웠다. 정말 무책임했다. 자본주의 체제가 무엇이고 무엇을 동력으로 돌아가는지 알고 있음에도 낡은 가치관을 실현하기 위해의도적으로 학생을 금욕적이고 이타적으로 지식을 암기하고 이해하는 존재로 만들었다. 사상가와 철학자가 새로운 체제에 맞는 가치를 만들지 못했으니 어쩔 수 없었다고는 생각한다.

자본주의 체제에 적응하기 위해 조별 과제를 자본주의식으로 해야 할 필요가 있다. 지금까지 조별 과제는 분명 과제의 가치가 다르고 과제 기여도도 학생마다 다름에도 한 명의 교사평가로 과제에 점수가 매겨지고 모든 조원이 같은 점수를 받았다. 교사 한 명의 평가에 의존하기에 객관성이 떨어질 수 있고 모든 조원이 같은 점수를 받기에 참여율이 낮아질 수도 있었다. 그야말로 공산주의식 조별 과제다. 이런 과제의 특성으로 아무도 과제를 하지 않아 조장 혼자서 힘들게 하거나 포기하기도 하고, 어떤 조장은 과제를 혼자서 하는 대신에 조원에게 금전적 대가를 요구하기도 한다. 이러니 과제 평가가 의미가 없다. 그러므로 과제는 시장 경제와 같이 과제를 사고 파는 과정을 도입해야 한다. 개인주의 체제인 국가의 원리는 개인의 의사다. 개인의 의사로 과제가 사고 팔려야 한다. 이런 과정은 탐구, 창의, 관리 관계 없이 모두 경험해봐야 한다. 그래야 자본주의 사회에 쉽게 적응할 수 있다.

교육부에서 분기마다 학교의 특성을 고려하여 선정한 여러 주제에 관한 과제를 사겠다고 각 학교에전달하면서 그 과제를 구매할 수 있는 점수를 선지불한다. 교육부가 지급하는 점수는 학생의 수마다 달라진다. 가령 명당 50점을 기준으로 20명이면 1000점을 지불한다. 점수를 지불 받은 학교는 과제를 담당할 수업 교사에게 분배한다. 수업 교사들은 학생들에게 특정 주제에 대한 과제를 사겠다고 전달한다. 학생은 네 명이 모여 한 조를 이루며 분기마다 한 명씩 조장을 맡는 것으로 모든 학생이 조장을경험할 수 있도록 한다. 내부 거래를 막기 위해 조의 구성은 매번 달라지게 한다. 조장의 역할은 과제 기획과 총괄이고 조원의 역할은 세부 기획, 자료 조사, 내용 작성, 조별 발표 등으로 나뉜다. 조장은 조원들 앞에서 과제 기획서를 발표하여 조원의 능력을 구매하겠다고 선언한다. 조원은 본인의 능력을 포장하여 임대 상품화한 뒤 본인의 능력을 가장 비싸게 사는 조장에게 판다. 조장과 조원은 협상을 하여 맡을 역할과 그에 따른 점수 비율을 정한다. 가령 조장은 세부 기획과 자료 조사를 맡을 조원에게 20%를 할당하고 발표하는 조원에게 15%를 할당한다고 계약을 맺는다. 조별 과제가 완성되면 과제를 상품화하여 보다 비싸게 사주는 수업 교사에게 판다. 수업 교사들은 학교에 받은 점수를 모두 활용하여 과제를 산다. 수업 교사마다 과제의 가치를 다르게 평가하여 가치가 높다 판단되는 과제부터 구매한다. 과제를 판매하여 점수를 받은 조장은 계약에 따라 조원에게 지불한다. 계약 내용 준수 여부에 판매 가치에 따라 지불하는 점수는 달라질 수 있다. 가령 조원이 자료 조사 하겠다고 했는데 그 조사가 미흡하여 다른 조원이 추가 조사 했다면 계약불이행으로 계약보다 낮은 점수를 지불 할 수도 있다. 반면 조원의 과제 발표가 우수하여 예상보다 고가에 팔았다면 추가 점수를 지불 할 수도 있다. 조장이 과제를 팔아 점수를 벌어오면 조원은 본인의 기여도를 주장하며 정당한 점수를 받을 수 있도록해야 한다. 이 과정이 공정한지 담임 교사가 조사한다. 수업 교사들은 구매한 과제를 교육부에 전달한다. 교육부는 구매한 과제의 가치를 평가하여 선지불한 점수보다 가치가 높다 판단되면 다음 과제에는더 많은 점수를 선지불하고 가치가 낮다 판단되면 더 적은 점수를 선지불한다. 만약 판매한 과제의 총합 가치가 선지불 받은 점수보다 높다면 이후 더 많은 점수를 선지불 받아수업 교사는 보다 많은 점수로 학생들의 과제를 비싸게 살 수 있고 학생들은 비싸게 팔아 보유 점수를 더 늘릴 수 있다. 교육부는 수업 교사들이 평가한 과제의 가치와 교육부가 평가한 과제의 가치가 지나치게 다르면 해당수업 교사의 평가를 낮춘다. 그렇게 하여 수업 교사들이 공정하게 평가할 수 있도록 유도한다. 이 과정을 교육청이 감시하여 공정한지 확인한다. 교육부는 구매한 과제 중에 우수한 것을 가정과 대학과 기업 등에 전달하여 홍보한다.

이 과정에 있는 모든 역할이 실제 자본주의 시장 경제와 유사할 것이다. 교육부와 수업 교사들의 관계는 원청과 하청이 될 수 있고 수업 교사와 학생의 관계는 소비자와자본가와 노동자가 될 수 있고 조장과 조원의 관계는 자본가와 노동자가 될 수 있다. 담임 교사와 교육청은 공정 거래 위원이 될 수 있다. 이렇게 자본주의 체제를 미리 경험해보는 것으로 모든 학생은 기획이나 조사나 발표를 통한 과제상품화와 영업 능력을 키우고, 교사와 조장과 조원은 협상과 거래와 계약을 통해 협상과 거래와 계약 능력을 키우면서 전반적인 공정 거래에 대한 이해를 통해 창업이나 취업을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다. 조장은 과제를 파는 경험과 학생의 능력 임대 상품을 사는 경험을 통해 창업을 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다. 자본주의 체제에서 노동력 임대 상품의 가치는 수요와 상품의 소유자인 노동자의 영업과 협상 능력으로결정된다. 그럼에도 그런 것을 대부분 배운 적이 없어 노동력 임대상품을 거래할 때 자본가의 일방적인 판단이나 노조에 의존하게 되었다. 개인주의 체제에서는 모든 개인이 본인의 가치를 증명할 수 있어야 이용당하지 않을 수 있다. 이제는 본인의 가치를 증명할 근거를 만들고 그에 대한 체계적인 논리로 주장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세 번째, 경쟁

 

경쟁에 대한 개인 관념과 국가 구조를 개인주의 체제에 맞게끔 재정립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개인주의 체제의 정당성이 훼손되게 된다. 생존 경쟁이라는 말이 있듯이 경쟁은 생물의 보편적 행동에 해당한다. [경쟁은 같은 목적에 대하여 이기거나 앞서려고 서로 겨룸을 뜻한다. 경쟁_생명은 생물이 환경을 이용하기 위하여 다른 개체나 종이 벌이는 상호 작용을 뜻한다. 생물의 개체 수가 공간이나 먹이의 양에 비하여 많아지면 생긴다.] 같은 목적에서 서로 겨뤄 이기거나 앞서서 살아남는다. 살아남기 위해 경쟁하는 것. 그것이 경쟁의 본질이다. 능력과 무관하게 환경에 적응하는 생물만 살아남는다는 적자생존이라는 말이 있듯이 경쟁 또한 강한것이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살아남는 것이 강하다. 개인주의 체제인 국가는 개인의 의사로 개인의 생존 경쟁을 하고 국가 구조 유지를 위해 국가 구조의 요소인 인간을 생존시킨다.

그런데 개인의 욕망과 이기심으로 바탕으로 한 개인의 의사로 바라는 것을 추구하며 같은 목적을가진 사람과 경쟁하게 되면 서로 다투게 될 수 있다. 과거 집단주의 체제에서는 그런 다툼에 의해 온갖 죄악이 나타나는 바람에 인간을 대상으로 가치를 판단하여 인간의 욕망과 이기심이 악이라는결론을 내리고 금욕주의와 이타주의를 윤리로 만들어 인간을 가르쳤었다. 그러다 보니 개인의 의사가 반영되지 못하여 온갖 개인의 권리가 침해되게 되었다. 그렇기에 현재 개인주의 체제에서는 개인의 의사를 원리로 삼고 인간의 관계에서 가치를 판단하여인간 자체의 욕망과 이기심을 악으로 규정하지 않아야 한다. 그런 상황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과거와 같은 경쟁에 의한 죄악시 나타날 수 있다. 그러므로 합리적 기준으로 올바른 경쟁의 승패를 갈라 차례를 정하는 방법이 있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공정이다. [공정은 공평하고 올바름을 뜻한다.][공평은 어느 쪽으로도 치우치지 않고 고름을 뜻한다.][올바르다는 말이나 생각, 행동 따위가 이치나 규범에서 벗어남이 없이 옳고 바름을 뜻한다.] 즉 어느 쪽으로도 치우치지 않고 고르게 이치나 규범에 맞는 합리적 기준으로 경쟁의 승패를 정해야한다는 것이다.

선거에서의 경쟁은 유권자의 의사를 합리적 기준으로 삼아 투표 수가 더 많은 후보가 승리할 수있게 하고 시장에서의 경쟁은 소비자의 의사를 합리적 기준으로 삼아 보다 더 많은 수요가 발생하는 상품이 승리할 수 있게 하고 있다. 선거 조작이나 판매 조작이나 자전 거래 등과 같이 개인의 의사를 조작하는 짓이 불공정이 된다. 경쟁이 불공정하게 되면 승자는 정당한 승리가 아니게 되고 패자는 결과를 납득할 수 없어 분쟁이발생할 수 있게 된다. 공정해야만 서로가 결과를 납득할 수 있다. 공정한 경쟁의 결과를 납득하게 되면 모든 개인이 욕망과 이기심을 가지고 있어도 다툼이 발생하지않아 큰 문제가 없게 된다. 스포츠를 생각해보자. 스포츠는 보통 공정한 규칙으로 승패를 가리는 공정 경쟁을 하기에 승자와 패자가 결과에 납득하여 선수들이 욕망과 이기심을 가지고 경쟁하더라도다투지 않게 된다. 만약 공정한 규칙이 아니거나 공정한 심판이 아니라면 패자는물론이고 승자조차도 결과에 납득하지 않으며 다툼이 발생할 수 있다. 이와 같이 공정하면 대부분 납득하여 다툼이 없다. 단지 공정했기 때문에 자기 합리화가 어려워 패자는 보다 더 불행할 수는 있다. 그러한 패자는 사회 계약을 통해 국가 구조의 요소가 되었으므로 국가의 생존을 위해 행복하게 만들어살아가게 한다. 그것이 국가의 복지 정책의 역할이다.

한국은 유교적 가치관과 그와 유사한 사상에 의해 인간의 욕망과 이기심에 의해 나타나는 경쟁과경쟁에 의한 패배자의 불행을 보며 경쟁 자체를 죄악시하기도 한다. 그러나 경쟁은 모든 생물의 보편적 행동에 해당하며 개인주의 체제와 같이 개인의 의사가 원리라면 개인의 의사에 의해 반드시 있을 수밖에 없는것에 해당하므로 경쟁 자체를 죄악시할 것이 아니라 불합리한 기준과 불공정 경쟁을 죄악시해야 한다.

한국은 조선의 과거 제도에서 유교 경전을 암기하고 이해한 것을 기준으로 한 줄로 세워 가치를평가하여 관직을 나눠줬던 것과 같이 수학 능력 시험 제도에서 선진국의 문명을 암기하고 이해한 것을 기준으로 한 줄로 세워 가치를 평가하여 사회의역할을 나눠주는 것과 같은 역할과 무관한 불합리한 기준을 죄악시해야 한다. 학교 이름만 보고 적성에도 맞지 않는 학과에 지원하는 것 자체가 학문을 하기 위해 대학을 가는것이 아니라 보다 좋은 사회의 역할을 맡기 위해 대학을 가는 것에 불과하다. 거기에는 지적 호기심도 없고 진리적 탐구심도 없다. 한 줄로 세워 경쟁을 하기에 보다 더 불합리한 격차가 눈에 띄게 된다. 역할과 무관하게 학교로 가치를 판단하고 있으므로 학교에 의한 차별이 나타나게 되고 그런 차별을보고 경쟁을 죄악시하게 된다. 이런 차별은 경쟁 자체보다 한 줄 세우기라는 불합리한 기준이 원인이므로 경쟁에 대한 비판을 할 것이 아니라 한 줄 세우기에 대한 비판을했어야 했다. 그 외에도 연령 성별 등으로 해야 할 일을 정해놓고 거기에맞추지 않으면 패배자 낙인을 찍는 것과 같은 정해진 기준으로만 가치를 판단하려는 것에 대한 비판을 했어야 했다.

한국은 유교적 가치관으로 나타나는 집단주의 관념에 의해 가족이란 집단의 이익을 위해 세습이나입시나 취업 비리 등을 저지르거나 기업이란 집단의 이익을 위해 담합이나 불필요한 중간기업이나 자전거래 등을 저지르는 것으로 불공정 경쟁이 일어날수 있다.

유교적 가치관에 의해 불합리한 기준으로 경쟁하는 것으로 잘못된 경쟁에 의한 차별을 보고 유교적가치관에 의해 경쟁을 죄악시하면서도 유교적 가치관에 의해 가족이나 기업의 불공정 경쟁은 정당화하기도 하고 있다. 관념에 의해 문제의 본질을 못보고 경쟁 자체만 비판하면서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 관념에 지배 받는다는 것이 이런 것이다. 불공정 경쟁이 발생하는 현상의 본질은 낡은 가치관에 의한 체제 적응 실패에 있지만 다른 식으로주장하는 일도 많다. 그것에 대해 알아보자.

 

 

첫째, 결과. 모든 인간이 다른 환경과 능력을 갖고 있기에 평등한 결과가나오지 않으므로 성별, 자산, 지역, 인종 등을 고려하여 일부에게 특정한 혜택을 주고 경쟁을 하자 주장하기도 한다. 그것이 마치 공정한 경쟁인 것처럼 말하며 합리적 기준 외의 주관적 판단에 의한 임의적 혜택을주고 나서 경쟁을 하자는 것이다. 그러한 특정 집단의 이익을 고려하여 평등한 결과를 내겠다는 것은 합리적 기준이라 할 수 없다. 경쟁은 필연 승패가 발생하여 불균형한 결과가 나오므로 평등한 결과를 기준으로 한 것 자체가 불합리하다. 불합리한 기준으로 경쟁하는 것은 공정 경쟁이 아닌 불공정 경쟁이 된다.

경쟁에 참여하는 모든 집단이 이의를 제기하지 않을 정도로 모두가 공평한 상태에서 올바른 결과를낳을 수 있는 기준이어야만 합리적 기준이 된다. 역할주의적으로 보면 개인의 개성을 배제한 채 개인의 능력이 역할이란 관계에서 어떤 가치가 있는지 판단하는 것이 합리적 기준이 될 수 있다. 역할은 인류 보편적 가치인 생존과 자유와 같은 것을 기초로 하여 역할 자체도 합리적이어야 한다. 농부는 농사를 잘 지으면 되고 어부는 물고기를 잘 낚으면 되고 변호사는 변호를 잘하면 되고 의사는치료를 잘하면 된다. 그걸 중심으로 역할에 필요한 특성 몇 가지를 더해 평가하는것이 공정하다 할 수 있다. 보통 이러한 역할에는 성별이나 외모는 크게 중요시되지 않으므로 그걸 기준으로 평가하는 경쟁이 보통 불공정 경쟁이다. 그러나 인간의 매력이 중요한 역할의 경우 성별이나 외모가 중요시될 수 있다. 아이돌 같이 이성의 매력을 즐기는 것으로 인간이 행복해지는 역할에서 성별이나 외모를 고려치 않는것은 역할 수행에 중대한 차질을 빚게 할 수 있다. 역할과 같은 합리적 기준이 없이 낡은 가치관에 의해 단순히 성별로 차별하거나 외모 꾸밈이 나쁘다고 말하며 그런 기준을 부정하는 것은 불합리하며그런 것에 영향을 받는 경쟁은 불공정 경쟁이 되게 된다.

 

둘째, 기회. 모든 인간이 다른 환경에서 살고 있기에 공정한 기회가 주어지지않는 것으로 공정한 경쟁이 될 수 없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인터넷의 등장으로 현재 개인이 노력하면 충분히 지식을 쌓을 수 있다. 인터넷을 활용할 수 있는 정도의 환경만 갖춰지면 지식을 수집하는데 어려움이 없다. 생계의 문제가 있을 수 있는데 어느 정도 성적이 나오는 인간은 대부분 장학금을 받고 있다. 그렇지 않더라도 낮은 이율의 학자금 대출도 지원하고 있다. 충분한 정보와 정보 수집으로 얻은 능력에 대한 복지 정책을 통해 개인이 노력하면 경쟁에서 승리할수 있다.

예외를 제외하면 보통 기회는 열려 있으나 두 가지 이유로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다. 하나는 관념 설계의 실패다. 인터넷을 통해 충분히 정보를 수집할 수 있음에도 그러지 않고 취미에 몰두하고 있다. 공교육을 통해 개인의 욕망을 자극하여 바라는 것을 위해 스스로 정보를 수집하여 성장하게끔 했어야했는데 욕망을 자극하기는커녕 금욕을 강조하며 가르치는 것만 암기하고 이해하라는 교육 과정에 의해 학습 자체를 꺼려하는 풍조가 나타난 것이다. 둘은 불합리한 기준이다. 지식을 쌓아 능력을 갖추더라도 한 가지 기준으로 평가하는 수학 능력 시험이나 시장에 당장 필요한능력이 아니라면 외면 받을 수 있다. 국가에 필요한 다양한 능력을 평가하지 않아 적재적소로 개인의 능력을 활용하는데 어려움을 겪기도 하고 있다. 이러한 문제는 기회가 불공정하다기 보다는 낡은 가치관에 의한 공교육의 문제이므로 공교육 개혁을하면 해결할 수 있다. 학생에 맞은 학습 패턴을 설계하여 스스로 학습할 수 있도록관념을 설계하면 될 것이다.

 

셋째, 관계. 인간관계의 차이로 불공정한 경쟁을 하고 있다고 말하기도한다. 그렇다. 인간관계의 차이로 인해 나타나는 불공정한 경쟁이 보통 세습이나 입시 비리 등이다. 인맥에게 우선적으로 기회를 주며 채용하기도 하고 있다. 그러나 앞서 말한 것처럼 이것은 낡은 가치관에 의한 체제 적응 실패에서 왔다. 겉으로 드러나는 현상이 원인이 아닌 본질이 원인이므로 본질로 접근하여 그에 따른 문제를 해결해야겉으로 드러나는 현상도 사라지게 된다.

 

결과, 기회, 관계 모두 어떤 측면에서 낡은 가치관에 의한 체제 적응실패가 본질적 원인이 되고 있다. 결과적 평등을 주장하는 것은 이타적 관점에서 약자에 대한 희생을 전제로 한 것과 윤리 대상 확대에 의해 약자가 강자가 되는 것으로, 강자가 된 약자가 사회에 결과적 평등을 말하며 약자에 대한 희생을 강요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현재 할당제와 가산점 등과 같은 결과적 평등을 실현하려는 흐름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그런 불합리한 기준을 통한 불공정 경쟁이야말로 낡은 가치관에 의한 체제 적응 실패다. 현재 결과의 평등에 반발이 일어나며 사회적 갈등을 빚는 것은 그것이 불공정 경쟁이기 때문이다. 기회나 관계도 같다. 낡은 가치관에 의해 조선의 교육 방식을 차용하면서 금욕을 강조하는 것으로 스스로 학습을 꺼려하게 되고 불합리한 기준으로 경쟁하게 되는 것에의해 불공정 경쟁이 되게 되었다. 낡은 가치관에 의해 집단의 이익을 우선시하면서 세습이나 입시 비리 등으로 불공정 경쟁을 하게 되었다. 이와 같이 낡은 가치관에 의한 체제 적응 실패가 불공정 경쟁의 본질이다.

 

공정 경쟁은 합리적 기준에서 개인의 의사로 공정하게 경쟁한다. 그런데 경쟁이 패자를 만듦으로 잘못되었다 말하며 경쟁을 없앤다고 가정해보자. 그러면 어떤 기준으로 누구의 바람을 실현하게 만들겠는가? 바로 경쟁을 없애자 주장한 인간의 주관적 기준으로 지정한 인간의 바람이 실현되게 된다. 가령 정치가가 경쟁이 잘못되었으므로 결과의 평등을 위해 패자가 이익을 얻을 수 있도록 조치한것이 보통 그런 것이다. 그것을 정치가의 이익에 활용한다면 권력 남용이 되고 특정정치가나 정당이 주장한 기준으로 정하게 되면 평가로 사회가 조직되는 것을 고려하면 독재가 된다. 경쟁 부정은 곧 권력 남용이나 독재로 나아가는 길이다. 경쟁의 본질을 볼 생각도 하지 않고 낡은 가치관으로 패자를 동정하며 개인의 의사로 작동하는 경쟁을부정하는 것이야말로 민주주의에 대한 적대적 행위다.

경쟁을 하지 않으면 인간의 바람의 우선순위를 권력이 정하기에 권력이 재력을 지배할 수도 있고복지를 하지 않으면 생계로 인해 주권을 쥐고 있는 국민이 재력에 휘둘리기에 재력이 권력을 지배할 수도 있다. 이런 관계에서 권력은 경쟁을 부정하기도 하고 재력은 복지를 부정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부정은 일부 개개인의 주관적인 손익으로 국가에 전혀 이롭다 할 수 없다. 경쟁이 없으면 개인의 성장과 국가의 성장이나 소비자의 행복이 사라지고 복지가 없으면 사회 구조가유지될 수가 없다. 경쟁과 복지, 둘 다 필요하다.

 

공정 경쟁은 어느 쪽으로도 치우치지 않고 고르게 이치나 규범에 맞는 합리적 기준으로 경쟁의 승패를정해야 한다. 가치 판단의 기준인 규범은 체제마다 다를 수 있으므로 개인주의체제에서는 개인주의 체제를 기준으로 바른 것이 올바르다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단순히 어느 쪽으로도 치우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이론적으로 국가 체제에 이로운지 확인하고 실증적으로 국가에 이로운지 확인해야 한다. 관습적이나 이론적으로 국가에 이롭다 여겼던 것이 실제로는 국가에 해로울 수 있다. 그러면 아무리 공평하다 하더라도 국가에 해로워 국가 구조가 붕괴할 수 있다. 조선은 유교의 가르침을 기준으로 공평하게 경쟁하였으나 기준 자체가 낡아 국가에 해로웠기 때문에세계의 흐름을 따라가지 못하고 도태되어 몰락했다. 너무 낡아서 이론으로도 사회에 이로운지 증명하기 어려운 가르침을 신앙하듯 암기하고 이해한 것을 평가했으니 망할 수밖에 없다.

개인주의 체제에 이로운 것은 생존주의적 자유주의로 국가 구조를 유지하여 국가 원리인 개인의 의사를추구하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가령 화학이란 학문을 배우면 신물질이나 신소재 탐색과 개발을 하거나 마약을 만들 수 있는데, 전자는 사회에 이로우므로 공정 경쟁이 되고 후자는 사회에 해로우므로 공정 경쟁이 되지 못한다. 이런 식으로 그걸 전제로 한 합리적 기준으로 공정한 경쟁을 통해 보다 많은 개인이 행복하게 된다면실제 국가에 이로운 것이 확인되었다 할 수 있을 것이다.

공정 경쟁에는 개인만 참여가 가능한 개인 경쟁과 집단만 참여가 가능한 집단 경쟁과 개인과 집단이참여가 가능한 혼합 경쟁이 있다. 개인만 참여가 가능한 개인 경쟁에는 보통 시험이 있고 집단만 참여가 가능한 집단 경쟁에는 국가나 기업 단위의 입찰이나 집단 스포츠 등이있고 개인과 집단이 참여가 가능한 혼합 경쟁에는 다양한 시장들이 있다. 집단의 참여가 가능한 경쟁은 집단주의적이게 될 수 있는데 그 집단이 개인주의 체제라면 개인주의적이라 할 수 있다. 가령 종교나 노조도 개인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것이 일반적이라면 개인주의 체제라 할 수 있다. 물론 집단 근간을 부정하는 것이 되므로 그럴 경우 종교는 종교가 아닌 개인 신앙 모임이 될 것이고, 노조는 노동조합이 아닌 노동자 개개인의 모임이 될 것이다.

경쟁에 참여한 집단이 집단주의 체제라면 집단의 이익을 위해 집단 내 부정을 고발하지 못하지만개인주의 체제라면 개인의 이익을 위해 집단 내 부정을 고발할 수 있다. 국가 내 모든 집단은 개인주의 체제여야만 국익 훼손을 피할 수 있다. 경쟁에 참여하는 집단은 어디까지나 개인주의 체제여야만 국가에 이로우므로 공정 경쟁이 된다 할수 있다. 공정 경쟁에 대해 세 가지 알아보자.

 

 

첫째, 교육. 교육의 경쟁은 개인 경쟁이다. 정기 시험, 조별 과제, 학업 태도 등의 평가로 석차를 정하는 경쟁을 한다. 조별 과제와 같이 집단을 이루어 경쟁하며 모두가 같은 점수를 받기도 하지만 석차는 개인 성적으로정해진다. 교육은 개인 경쟁을 해야 공정해진다. 만약 집단 경쟁을 하게 되면 집단 구성원의 학업 성취도를 정확히 평가할 수 없다. 학업 성취도가 높은 사람에 의해 낮은 사람이 높게 평가를 받을 수 있고 그 반대도 가능하다. 그러므로 교육에서는 모두 개인 경쟁을 한다. 모든 개인이 욕망을 갖고 이기적으로 행동해야 공정한 경쟁이 된다. 교육은 탐구 교육과 창의 교육과 관리 교육으로 나눠 적성에 맞는 삶을 살 수 있도록 유도하고, 과제를 사고 파는 자본주의식 교육을 통해 자본주의 사회에 쉽게 적응할 수 있게 해야 한다.

그러나 한국 교육은 비극적이게도 금욕주의적이고 이타주의적이었다. 사회는 일반적인 금욕주의가 널리 퍼진 상태에서 인간에 이타적인 홍익인간을 교육 이념으로 삼고학문에만 몰두하는 수기치인에 영향을 받은 한국 교육은 이타적이고 학문에만 몰두하는 학생을 길러내게 되었다. [홍익인간은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함을 뜻한다. 단군의 건국 이념으로서 우리나라 정치, 교육, 문화의 최고 이념이다.] [널리는 범위가 넓게를 뜻한다.] 그러나 그것은 개인주의 체제에 적합한 것이 아니었다. 인간은 인간의 본성에 맞아야 스스로 알아서 잘 한다. 반대로 본성에 맞지 않으면 강요할 수밖에 없다. 생존, 자유, 욕망, 이기가 윤리가 되면 그것이 인간의 본성에 부합하므로 대체로 강요하지 않아도 알아서 그것을 추구하게 되지만 죽음, 억압, 금욕, 이타가 윤리가 되면 그것이 인간의 본성에 부합하지 않으므로대부분 강요하지 않으면 안 하기에 강요하게 된다. 자유주의와 같이 모두가 자유로운 것이 아닌 홍익인간과 같이 다른 인간을 이롭게 하는 것이 윤리가 되면 그것이 대부분 인간의 본성이 아니기에타인을 이롭게 하기 위해 희생하라는 강요를 하게 된다.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하라 가르치면 다른 인간을 이롭게 하면서 올바른 결과가 나올 거라 생각하지 말고 실제 현상을 직시해야 한다. 소수를 제외한 대부분은 다른 인간을 이롭게 하라는 명분을 가지고 타인에게 다른 인간인 나를 위해희생하라는 강요를 하여 부당한 이익을 얻는다. 본성과 어긋나는 것을 기준으로 삼아봐야 제대로 된 결과가 나올 수가 없다. 인류는 개인주의 체제가 들어서면서 그제서야 인류의 본성에 맞는 체제를 가지게 된 셈이다. 그리고 이제는 본성에 맞는 관념을 가져야 한다.

한국 교육은 학생을 이타적으로 가르치면서 온갖 부당하고 불공정한 잘못들이 나타나고 있다. 과거 교사가 학생을 이타적으로 만들어 이용했다면 현재 학생이 교사를 이타적으로 만들어 이용하고있다. 학교는 이타주의 교육을 가르치는데 어째서 이런 결과가 나오는지생각해야 한다. 학교는 이타주의가 일반적이었기에 학교 경쟁력을 위해 입시와무관한 학생의 학교 내 활동 결과를 조작하여 입시에 관련된 학생이 좋은 결과를 얻도록 하기도 했다. 손해를 본 학생이 항의를 하더라도 수용되지 못했다. 어차피 입시를 하지 않거나 가망이 없으니 입시를 하거나 가망이 있는 학생을 위해 희생하는 것이당연하지 않냐는 식으로 정당한 항의는 부당하게 거부되었다. 타인을 희생시키는 것이 너무나도 자연스럽다. 정말 시대착오적인 집단주의다. 이런 것이 잘못되었다 지적해도 집단주의 관념에 의해 반성치 않고 잘못을 반복하고 있다.

그런 한국 교육을 받게 된 학생들은 공정한 경쟁을 할 수가 없었다. 경쟁에서 승자와 패자로 나뉘면 승자는 패자의 불행에 공감하여 슬퍼하도록 만들었다. 감수성이 예민한 일부 학생은 그것에 영향을 받아 패자의 불행에 심하게 공감하면서 승자가 되기위한 노력을 무의식적으로 꺼려하게 되었다. 그런 교육에 강하게 영향을 받을수록 경쟁에서 승리하여 얻은 본인의 행복보다 경쟁에서 패배하여 얻을 타인의 불행이 더 커짐에 따라 경쟁에집중하지를 못하게 되었다. 모든 일반 인간은 주관적으로 옳은 행동을 한다. 그들은 주관적으로 옳은 행동을 하기 위해 경쟁에 집중하지 못한 것이다. 이타주의에 세뇌된 인간은 실제 재능과 별개로 경쟁에 적극적 참여를 하지 못하여 결과도 좋지 못했지만이타주의에 세뇌가 덜된 인간은 경쟁에 참여하면서 결과도 좋았다. 이것은 결코 공정 경쟁이 될 수 없다.

학업에 대한 참여도 줄어들게 되었다. 발표를 하는 것과 같이 학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타인보다 유리하게 되면 불리하게 된 인간이불행해질 수 있기에 참여하지 않는다. 학교에서 튀면 괴롭힘을 당하는 것은 이런 원리에 의한 것이다. “너는 왜 이타적이지 않아?” 강력한 힘으로 집단을 통솔하는 일부 인간이 아니라면 튀는 순간 이타주의를 근거로 한 공격 대상이 된다. 이는 일부 회사에서도 이어진다. 회의를 하더라도 회의 주도권을 가진 이가 아닌 이가 적극적으로 의사 표현을 하면 공격 대상이된다. 그렇게 하여 새로운 가치 생산이 어려울 수도 있었다. 그런 것에 영향을 받아 인터넷 커뮤니티에서는 뽑기 게임으로 좋은 것을 뽑아 자랑하면 뽑지 못한인간의 불행에 공감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비난 받기도 했다. 다수가 소수에게 다수의 의견을 강제하는 동조 압력도 소수에게 이타적일 것을 강요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모든 개인이 욕망을 가지고 이기적으로 경쟁을 해야 공정한 결과가 나옴에도 금욕적인 사회에서 이타적으로살라는 교육에 영향을 받아 욕망을 가지고 이기적으로 경쟁하지 않는 학생이 있게 되면서 공정한 결과가 나오지 못한 것이다. 공정 경쟁이 어떻게 해야 실현되는지 생각을 해야 한다. 한국에서 각종 경쟁에서 승리한 사람이 패자에 공감하지 못하면 나쁜 인간이 되기에 강제로 공감하게되면서 겸손해지게 되었다. 이타적인 겸손이 미덕이었기 때문에 명백하게 잘한 것도 그렇지 않다며 겸손한 태도를 유지하게 되었다.

타인의 이익을 위해 희생하라는 관념에 의해 자녀의 위한 성적 조작이나 입시 비리를 저지르고, 학교에 해로운 행동을 하는 학생이 다른 학생이나 교사에 피해를 줘서 학업에 방해를 주고 있음에도그 학생의 이익을 위해 희생하라는 관념에 의해 제대로 된 처벌도 하지 못하고 있다.

평가에는 상대 평가와 절대 평가가 있다. 절대 평가를 받을 때 이타적인 관념에 의해 타인의 이익을 위한 부당한 행위가 나타나게 되기도한다. 기출 문제나 기출 경향이 담긴 족보를 집단 내에서 돌려보는것이 그렇다. 지나치게 많은 학습 범위로 족보를 정당화하기도 하는데 그럴거면 처음부터 족보와 같은 안내서를 공개해야 함이 마땅하다. 그래야 공정 경쟁이다.

이런 교육에 깊게 세뇌되어 이타심을 이용당하는 인간은 성인이 되어서도 자기의사를 제대로 표현하지못하여 착취나 학대나 폭력을 당하다 불행하게 죽기도 한다. 동창생에게 골프채로 맞아 죽은 사람이나 동창생에게 성매매를 강요당해 착취당하던 사람들 같이 학생 때 괴롭힘을 당하던 사람에게 성인이 되어서도괴롭힘을 당하며 폭력이나 착취 등으로 최소한의 기본권도 보장받지 못하며 불행하게 살다가 사망한 사건이 매우 많다. 많은 사람들은 가해자만 비난하지만 이것은 제대로 반항조차 하지 못하게 한 이타주의 세뇌가 더욱큰 잘못이다. 본인보다 타인의 이익을 우선시하게 하니 타인의 명령에 복종하고, 그런 복종을 올바르다 여기며 자기 합리화를 하면서 저항하지 않다가 지독한 괴롭힘 속에서 저항할힘을 완전히 잃어버려 위와 같은 비참한 사건이 발생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타주의를 근거로 부모나 교사가 학생들을 쉽게 다루기 위해 학생들을 이타적으로 만들면 학생들은 잘못된 관념을 갖게 된다. 어떤 학생은 부모나 교사가 본인을 폭력이나 윤리를 가지고 이타적으로 세뇌하여 복종하게 하는 것을보고 타인이 본인의 말을 듣게 하려면 타인을 폭력이나 윤리를 가지고 이타적으로 세뇌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된다. 어떤 학생은 부모나 교사가 본인을 폭력이나 도덕을 가지고 이타적으로 세뇌하여 복종하게 하는 것을보고 본인이 부모나 교사에게 이타적으로 복종하는 것과 같이 타인에게도 이타적으로 복종하게 된다. 도구를 쓸 수 있는 인간이 일방적인 지배와 복종이 나타나는 것은 이런 원리 때문이다. 이런 식으로 타인을 이타적으로 만들어 자유 의지를 잃게 하거나 본인을 이타적으로 만들어 자유의지를 잃게 되는 것으로 일방적으로 이용하고 이용당하는 개개인이 나타났다. 그것이 교육을 통해 폭력이나 관념의 대물림이 되어 자유 의지를 잃게 되는 개인이 지속적으로 나타난다. 자유 의지를 잃은 인간은 앞으로도 도구가 되어 살다가 불행하게 죽는다. 정말 잔인하고 지독한 교육이다. 이타주의는 집단의 이익을 위해 개인을 희생시키는 명분이 되었다.

이것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면 관념에 대한 이해를 다시 해보자. 인간은 관념에 영향을 받아 본인의 의사와 무관하게 육체의 행동 준비와 실행에 의해 느끼게 된다. 어떤 개인이 변기가 더럽다는 관념을 가진 상태에서 물을 마시다가 누군가에게 그 물이 변기 물이라듣는다면 실제 그렇지 않더라도 불쾌해지면서 구역질을 할 수 있듯이 어떤 개인이 타인의 이익을 우선시하라는 이타적인 관념을 가진 상태에서 경쟁 패자의불행에 공감하여 슬퍼해야 한다는 말을 들으면 실제 공감하면서 슬퍼하며 그런 불행을 만든 경쟁을 부정적으로 보며 경쟁에 전력으로 참여하지 못하게된다. 관념 자체가 이런 것이다. 한국은 특히 그런 것에 영향을 쉽게 받는데 2017년 조사에 따르면 혈액형 성격설을 믿는 사람이 58%나 되었다고 한다. 사회 전반적으로 이타주의에 영향을 받아 이기적인 주관을 가지기가 어려워 대중에 쉽게 휩쓸리면서 유행도 쉽게 따르게 된다.

개인 관념 재정립은 간단하다. 게임과 스포츠를 참고하면 된다. 게임과 스포츠에서는 규칙이란 합리적 기준만 지키면 욕망을 가지고 이기적으로 행동해야 공정한 결과가나온다. 그렇게 하는 것이 미덕이다. 오히려 이타적으로 생각하여 봐주는 것이 모욕이 되기도 한다. 스포츠는 심판에 의한 불공정이 나타날 수 있는데 게임은 시스템적으로 판단하기 때문에 시스템 자체가불공정하지 않는 한 그런 것조차 없다. 그렇게 하여 모든 학생이 욕망을 가지고 이기적으로 행동하면서 자유롭게 논리적인 의사 표현을 할 수 있는 지성인이 되어야 한다. 그렇게 성장해야 모든 인간이 이기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하며 타인을 이타적을 만들어 이용하지 않고본인을 이타적으로 만들어 이용당하지도 않는다. 한국은 게임을 매우 잘하는 국가로 유명하다. 그것은 평소 금욕적이고 이타적으로 살던 한국인이 게임에서는 욕망을 가지고 이기적으로 플레이를 할 수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것이 교육이나 가치 생산에서 나타난다면 굉장한 성과를 이룰 수 있을 거라 확신한다.

국가 구조 재정립은 교육 이념을 자유로 바꾸고 최대한 욕망을 가지고 이기적으로 행동해야 올바른결과가 나오는 시스템을 갖추면 된다. 부모나 교사가 자녀나 학생을 교육할 때에는 금욕적이고 이타적으로 가르칠 것이 아니라 욕망적이고 이기적으로 가르치고, 네가 욕망과 이기심을 가진 만큼 남도 욕망과 이기심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시켜 본인의 권리를존중 받기 위해서는 타인의 권리를 존중하고 이해해야 하며 본인과 타인 사이에서 분쟁이 발생하면 논리적인 대화를 하거나 여론이란 제삼자의 의견을듣거나 법으로 해결하도록 가르쳐야 한다. 국가에 필요한 능력을 최대한 활용하기 위해 수학 능력 시험으로 한 줄 세우던 것에서 벗어나 역할에 맞는 탐구심이나 창의력과 같은 욕망과능력을 가진 인간을 다양한 분야에서 줄을 세워 평가하여 적재적소에 개인의 능력을 활용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경쟁에 패자가 나타나면 국가 구조 유지를 위하여 그런 패자에 복지 정책을 적용하여 다시 경쟁에도전할 수 있도록 하면 된다.

 

 

둘째, 노동. 노동의 경쟁도 일반적으로는 개인 경쟁이나 집단 경쟁을 할때도 있다. 노동 시장에서의 경쟁은 개개인이 취업 활동을 할 수 있으나어떤 팀이 한번에 스카우트 되기도 한다. 노동 시장은 시장이므로 개인의 의사가 반영되어 수요와 공급으로 결과가 결정된다. 개인의 노동력 임대 상품이 시장에서 수요가 있어야 고가에 팔린다. 노동 활동에서의 경쟁도 개개인이 성과 경쟁할 수 있으나 집단이 성과 경쟁하기도 한다.

그러나 낡은 가치관에 의해 노동 경쟁이 불공정 경쟁이 되기도 한다. 노동시장에서는 취업 비리가 일어나거나 결과의 평등을 위해 평가를 조작하거나 도제식 교육을 받은인간만 노동의 기회를 주는 것과 같이 기회의 평등이 보장되지 못하기도 하고 있다. 노동 활동에서는 일부 사회 초년생에게는 타인에게 이용당하여 희생되는 것을 사회성이라 말하며 희생을강요하며 더 많은 일을 주거나 성과를 조작하는 등과 같은 일을 저지른다. 그런 비리에 항의하면 사회성이 없다는 말을 듣기도 한다.

개인 관념은 교육에서 충분히 배웠으면 기본적으로 큰 문제가 없다. 학업의 경쟁과 같이 모든 개인이 합리적 기준에서 욕망을 가지고 자유롭게 이기적으로 경쟁을 하면된다. 그러면 공정 경쟁이 된다. 사회성의 경우 낡은 가치관에 의한 사회성이 집단주의 관념에 의한 사회성이므로 체제에 해로워 그런사회성을 가질수록 오히려 사회에 해로울 수가 있다. 황당하지만 사실이다. 사회성이 사회에 이롭기 위해서는 개인주의 관념에 따른 사회성을 가져야 한다.

어떤 물고기는 생존 위협이 있어야 살아남을 수 있다고 한다. 그걸 보고 노동자 또한 생존 위협을 겪어야 생산성이 높아진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눈 앞에 먹이가 있어 그 먹이를 잡아먹겠다는 욕망을 가지고 먹이를 잡아먹으면 살아남는것을 넘어 배까지 부를 수가 있다. 그와 같이 단순히 생존 위협이 아닌 먹이를 잡아먹겠다는 욕망을 가지게 해야 더 큰 가치를 생산할 수 있다. 모든 개인은 욕망을 가져야 한다.

국가 구조는 취업 비리는 처벌하고 결과의 평등을 기회의 평등으로 바꾸어야 한다. 취업 비리는 처벌하고 있으므로 가족을 위해 비리를 저지르는 것이 윤리가 아니라는 인식이 퍼지면된다. 그러나 결과의 평등은 바르다 말하며 정부에서 실행하기도하고 있으므로 국가 구조를 바꿔야 하는 대상이 된다. 노동 시장은 스포츠와 목적이 다르다. 스포츠는 공정한 경쟁을 하여 플레이하는 선수와 시청하는 시청자를 즐겁게 하기 위해 인원이나 체급을 맞추고 있어 결과가 평등하도록 어느 기준을맞추고 있다. 체급이 다른 선수가 경쟁을 하는 것이 기회의 평등이고 체급이같은 선수가 경쟁을 하는 것이 결과의 평등이다. 그렇기에 노동 시장의 경쟁도 결과의 평등이 필요하다 여길 수도 있다. 그러나 노동 시장은 공정한 경쟁을 하여 보다 더 큰 가치를 생산하기 위한 것으로 목적 자체가다르다. 능력이 다른 모든 사람이 공정하게 경쟁해야 보다 더 큰가치를 생산할 수 있다. 그렇게 하여 개인은 자아 실현을 하고 사회는 큰 이익을얻는다. 그럼에도 마치 스포츠에서 선수와 시청자를 만족시키기 위해결과의 평등을 시도하듯이 노동 시장에서 노동자와 인권 운동가의 입맛에 맞는 결과를 만들기 위해 인위적인 결과의 평등이 되도록 조작하면 올바른 경쟁이되지 못하여 개인은 부당하게 자아 실현을 할 기회를 놓치고 사회는 더 큰 가치를 생산할 수 없게 된다. 그런 것이 노동 시장에서는 불공정 경쟁이 된다. 그런 측면에서 할당제나 가산점도 불공정 경쟁이 된다. 능력과 무관한 농어촌, 유공자, 여성, 장애인 등에 대한 할당제나 가산점으로 결과의 평등이 되도록조작하면 그로 인해 다른 능력이 있는 인간은 자아 실현의 기회를 놓치고 능력이 부족하기에 사회 성장도 늦춰지며 상품 품질이 낮아져 소비자가 불행하게된다. 경쟁에서 패배하는 것으로 나타나는 불균형은 경쟁에 간섭하여균형을 맞추는 것이 아닌 개인의 의사로 벌어지는 경쟁이 정상적으로 이루어지도록 지켜본 다음 국가 구조를 유지하기 위해 패자에게 복지 정책을 적용하는것으로 균형을 맞춰야 한다. 그래야 국가 구조가 유지되고 국가 원리도 추구할 수 있다.

기회의 평등을 추구하기 위해 모든 인간이 지식을 공유해야 한다. 학문의 지식은 공유되어야 하고 학문의 지식으로 창출된 상품은 보호되어야 한다. 모든 개인은 학문의 지식을 자유롭게 접하여 성장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게 하여 공적인 교육 기관을 수료하거나 사적인 자격을 취득하는 것 등으로 창업이나 취업 등의사회의 역할을 맡도록 해야 한다. 그러나 오래된 분야는 도제식 교육으로 해당 분야의 학문 지식의 공유가 폐쇄적일 때가 있다. [도제1는 스승으로부터 가르침을 받거나 받은 사람을 뜻한다. 도제2는 직업에 필요한 지식, 기능을 배우기 위하여 스승의 밑에서 일하는 직공을 뜻한다.] 도제식 교육은 개인에게 깊이 있는 지식전달이 가능하지만 폐쇄적이기에 사회에 공유되지 못해 일부만지식을 얻게 되는 것으로 모든 개인의 공정 경쟁에 해가 될 수 있다. 도제식 교육에는 공정한 기준으로 경쟁하여 합격한 다음 도제식 교육을 하는 것과 사회의 역할을 맡고 있는 사람의 주관적인 기준으로 경쟁이없거나 있더라도 공정하지 않게 평가하여 합격 여부를 결정한 다음 도제식 교육을 하는 것이 있다. 전자는 공적인 공정 경쟁을 통해 대다수 개인에게 기회가 있는 반면 후자는 사적인 주관적 판단으로소수의 개인에게만 기회가 있다. 모든 개인이 자유롭게 지식을 쌓아 성장해야 하므로 대부분 도제식 교육은 사라지는 것이 바람직하다. 특히 생존 게임에 승리하기 위해 과학에 관한 지식은 모든 인류가 이해관계를 고려치 않고 공유하면서빠르게 발전해야 한다. 시장은 개인의 의사가 반영되므로 일부가 도제식 교육을 한다고강제로 막기는 어렵다. 그러나 정부나 기업에서 어떤 분야의 인재를 길러내겠다고판단하고 공적인 기관에서 교육하는 것을 도제식 교육을 하는 인간이 반대할 권리는 없다. 모든 인간은 역할을 맡기 위한 태도와 능력을 갖추고 있다면 그에 따른 기회와 역할을 가질 수있도록 해야 한다. 그래야 보다 많은 인간의 능력을 활용하여 사회를 이롭게할 수 있다.

 

 

셋째, 소비. 소비 시장에서의 경쟁은 개인과 집단이 경쟁하는 혼합 경쟁이다. 정부가 정한 절차와 기준에 맞추면 누구나 시장에 상품을 팔고 살 수 있다. 개인이나 집단이 생산한 상품을 시장에 공급하면 소비자의 수요에 따라 공급 경쟁이 나타난다. 소비자의 선택을 받아 소비자를 행복하게 한 상품을 생산하여 공급한 생산자일수록 많은 이윤을 얻게된다. 그 이윤을 자본으로 더 많은 생산을 하여 더 많은 이윤을통해 부를 축적해나가는 이들이 보통 자본가다.

소비 시장의 경쟁은 소비자에게 선택 받기 위해 경쟁을 하게 되므로 선택을 하는 입장인 소비자는공급이 경쟁할수록 많은 이익을 얻을 수 있게 된다. 공급 경쟁에 승리한 자본가는 높은 이윤을 얻을 수 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자본주의는 소비자와 공급 경쟁 승리자가 행복한 사상이 된다. 그런 시장 원리를 추구할 수 있도록 공급 경쟁 패배자를 위한 복지 정책을 실행하면 된다.

다른 경쟁과 같이 소비 시장의 경쟁 또한 합리적 기준으로 욕망을 가지고 이기적으로 경쟁을 해야공정해질 수 있다. 그렇기에 정부는 시장을 공정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만약 그러지 못한다면 시장 참여자의 욕망과 이기심이 악이 되어버린다. 심판이 경기를 공정해야 해야 선수의 욕망과 이기심이 정당화되는 것과 같이 정부가 시장을 공정하게해야 시장 참여자의 욕망과 이기심이 정당화된다. 그러나 낡은 가치관으로 인해 그러지 못하고 있다.

담합이 바로 그렇다. 많은 분야가 담합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 밀가루, 닭, 우유, 컴퓨터, 통신사 등을 비롯해 대부분의 분야가 시장에 공급할 상품의공급량이나 가격을 맞추는 담합을 하는 것으로 경쟁하지 않고 이익을 얻고 있다. 분야의 최저 수익률을 맞추기 위해 담합이 어쩔 수 없다는 말을 하기도 하는데 그 논리는 시장원리에 의해 논파된다. 시장에서 수익률이 낮으면 폐업하고, 폐업하여 공급이 줄면 수요가 늘어 가격이 상승하는 것으로 적정 수익률을 맞출 수 있다. 국가 관리 품목이 아닌 이상에야 특별한 가격 관리가 아닌 시장 원리에 의한 가격결정을 따르는것이 합당하다. 그럼에도 담합을 한다. 이런 것을 어떻게 자유 시장 경제라 할 수 있는가? 많은 사람들이 한국 사회 문제는 자본주의 탓이라고 말하는데, 자본주의 체제의 방식을 따르지 않아 발생하는 사회 문제가 이토록 많은데 어떻게 자본주의 탓이라할 수 있는가? 그것은 어떤 스포츠에서 선수가 반칙하는 것을 보고 선수탓을 하는 것이 아니라 스포츠 탓을 하는 것과 다르지 않을 정도다. 낡은 가치관에 의해 욕망과 이기심을 동력으로 하는 자본주의를 나쁘다고 답을 내놓고 판단하려고 하니까 무조건 자본주의 탓이라 말하게 되는것이다. 낡은 가치관에 의해 기업도 담합하고 노조도 담합하고 농부도담합하고 자영업자도 담합하고 배달부도 담합하는 상황에서 어떻게 자본주의 탓을 할 수 있는가?

한국은 자본주의가 아니라 집단주의 관념의 문제다. 집단의 이익을 위해 담합을 하고 집단의 이익을 해칠 수 있는 개인의 고발은 죄악시했기에 담합이고발되지 않고 있다. 담합을 주장하는 이들의 논리는 간단하다. 모두의 이익을 위해서인데 모두 참여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느냐? 그게 바로 집단주의 체제고 사회주의 마인드다. 반공주의 외치며 집단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공산주의 마인드를 추구하기도 한다. 그로 인해 시장 원리가 제대로 작동하지 못했다. 비싼 농산품, 비싼 컴퓨터 부품, 비싼 통신료 등 담합으로 인해 시장 원리와 관련이 없는 비싼 상품이 너무나도 많다. 괜히 한국이 소득 대비 높은 식료품 가격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다. 한국 통신사는 소비자에게 통신료를 적게 받는 대신 기업에게 통신료를 많이 받는다는 의견이 있다. 만약 그렇다면 얼핏 보았을 때 소비자가 이익을 보는 것 같으나, 결과적으로 기업이 통신료를 내는 만큼 서비스 비용을 올리는 것이므로 조삼모사와 다를 바가 없다. 그리고 기업의 통신료라는 든든한 수익처가 있어 공급 경쟁의 필요성이 줄어들게 된다. 경쟁의 필요성이 줄어들면서 산업 전체가 경쟁을 통한 성장을 하지 못하게 된다. 특히 집단 담합을 규정화하여 경쟁력을 악화시킨 분야는 담합을 포기하지 않을 경우 차라리 망가지고나서 다시 시장 원리에 맞게끔 재건하는 것이 좋다. 심각한 시장 원리 훼손이다. 유교적 가치관과 공산주의의 영향으로 생산자의 이익만 고려하면서 소비자가 막심한 손해를 보고 있다. 노조의 담합과 기업의 담합 모두 물가 상승의 요인이 되어 소비자를 불행케 한다.

분야의 담합과 협의에는 차이가 있다. 일부 기업의 이익을 위해 공급이나 가격을 맞추는 것은 담합이 되고, 분야의 표준을 정하기 위해 협의하여 표준에 맞춘 공동 개발 하는 것은 것은 협의가 된다. 가령 건설 업체가 건설 공급이나 비용을 합의하여 정하는 것은 담합이 되지만 층간 소음을 막기위해 건설 업체가 공동 연구하여 모두 쓰는 것은 기술 표준화로 협의가 된다. 보통 소비자가 손해를 보고 불행해지는 것은 담합이 되고 이익을 보고 행복해지는 것은 협의가 된다. 이 점을 분명히 해야 한다.

독과점은 불공정 경쟁 이전에 경쟁 자체가 거의 없어 경쟁에 의한 시장 원리 효과가 나타나지 않게된다. 인원에 제한이 없는 온라인은 인원의 제한이 있는 오프라인보다독과점이 일어나기가 쉽다. 포탈이나 SNS를 떠올려보자. 소수의 기업이 독과점을 유지하고 있다. 독과점으로 경쟁이 없다 보니 소비자가 손해를 보는 운영을 하기도 하고 있다.

개인 관념은 교육에서 충분히 배웠으면 기본적으로 큰 문제가 없다. 국가 원리가 개인의 의사임을 명확하게 인지하고 담합과 독과점과 같이 시장 원리를 작동하지 못하게하는 것이 잘못임을 알아야 한다. 가격을 유지하기 위해 시장 원리를 지키지 않고 공급을 인위적으로 줄이자 시장 원리에 의해 공급가가 높아짐에 따라 더욱 수요가 줄어들면서이익이 되지 않는 현상이 나타나기도 한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국가 구조는 시장 원리를 지켜야 한다. 정부는 노조와 기업의 담합이 개인주의 체제에 맞지 않는 집단주의 체제의 산물임을 인지하고, 행정부는 공정 거래 위원회의 권력을 늘려 장차 고용 노동부와 통합하여 모든 상품의 공정 거래를담당해야 할 것이다. 공정이야말로 개인의 욕망과 이기심을 정당하게 만든다. 인간의 욕망과 이기심은 그릇될 수도 있으나 그 앞에 공정이 붙으면 옳게 된다. 공정한 욕망과 이기심 추구로 올바른 결과가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공정을 중요시해야 한다. 그렇게 개인의 욕망과 이기심으로 거래하는 것을 올바르게 만드는 공정 거래를 보장하는 기관이야말로국가 체제 우위를 증명하는 기관이다. 국가의 체제와 이념을 바르게 하는 기관은 보다 더 커져야 한다. 모든 상거래라는 합리적 기준으로 공정 거래 위원회는 소비뿐만이 아니라 노동과 금융 거래 또한 관리해야 한다고 본다. 그렇게 모든 시장의 거래를 관리하여 시장 원리와 부당한 이익과 손해를 막아 소득 대비 높은 물가가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시장 원리에 의해 선택 받지 못할 경우에는 복지 정책을적용하여 생존할 수 있도록 하게 하면 된다.

시장에 담합이나 독과점으로 경쟁이 사라지면 경쟁이란 시장 원리가 작동하게 만들기 위해 토너먼트경기장에 선수가 없을 때 새로 선수를 뽑아 내보내 경쟁하게 하듯이 기존 기업을 지원하거나 창업하거나 해외에서 기업을 불러 경쟁하게 하도록 해야할 것이다. 그래야 소비자는 행복하고 산업도 경쟁에 의해 발전하게 된다. 다른 분야도 마찬가지다. 의료계에서 시장 원리로 소아과 의사가 사라지면 시장 원리를 근거로 공급을 늘리면 된다. 그럼에도 시장 원리에 의해 소아과 같이 기피학과에 의사가 없다면, 기피학과 전용 의대를 만들면 된다. 의료 서비스 품질이 낮아지더라도 안 하는 것보다는 낫다. 쉬운 진료와 어려운 진료로 나뉠 텐데 능력에 따라 적재적소에 배치하면 된다.

 

 

교육과 노동과 소비에 대해 알아보았다. 경쟁에서 경쟁에 참여하는 참여자와 경쟁을 관리 감독하는 정부는 입장이 다르다. 교육이나 시장에서 경쟁하는 사람은 본인의 이익이 중요하지만 관리 감독하는 정부는 국가의 이익이중요하다. 누가 이익을 얻든 정당한 기준과 절차를 거쳤다면 정부 입장에서는아무래도 좋다. 어떻게든 국가에 이익이 되면 된다. 그러므로 경쟁의 결과보다는 경쟁의 규칙과 목적에 초점을 맞춰 최대한 공정하게 경쟁할 수 있도록하게 된다.

경쟁의 결과 중 하나인 재화는 국가의 체제로 분배가 결정된다. 국가 경제 체제가 자본주의라면 시장 경제를 통해 개인의 의사로 재화의 분배가 결정되고 공산주의라면계획 경제를 통해 정부의 의사로 재화의 분배가 결정된다. 인류의 재화는 무력과 무력을 제어할 권리가 있는 권력과 권력의 방식을 결정할 사상으로 마련된 체제에서 분배되고 있다. 그 외 소유나 환원이나 부의 대물림까지 전부 그렇다. 체제에 이로운 것은 허용되고 해로운 것은 금지된다. 개인주의 체제가 성립되려면 공정해야 하기에 공정하는데 필요한 기회의 평등을 지나치게 해치는 과도한부의 대물림은 체제에 적합하지 않다. 개인주의 체제에서의 경쟁은 언제나 공정해야 한다.

경쟁에 참여하는 개인은 경쟁에 대한 리스크와 세상의 시선 등으로 경쟁 참여가 점점 저조하게 되어가고있다. 한번 경쟁으로 지나치게 많은 리스크를 짊어지게 하고 경쟁에탈락하면 마치 레일에서 벗어난 기차와 같이 바라보기에 잦은 경쟁 참여가 힘든 상황이다. 수많은 경쟁이 있어야 국가와 시장이 성장할 수 있는 것을 고려하면 바람직하지 못하다. 그러므로 스포츠나 경쟁 게임에서 그러하듯 개인과 집단이 공정한 합리적 기준에서 끝없이 경쟁을즐기면서 성장할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해야 한다. 국가 구조를 유지하여 국가 원리를 추구한다. 그와 같이 경쟁에 패배한 인간은 구조 유지를 통해 다시 경쟁할 수 있게 하는 것으로 개인의 의사로 경쟁하는 시장 원리를 추구하면 된다.

 

시장 원리를 추구하기 위해서는 구조가 유지되어야 한다. 구조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구조의 요소인 인간이 불행으로 사망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인간은 가치 생산과 가치 소비 활동을 할 수 있는데, 대체로 가치 생산에서 불행을 느낄 수 있으므로 가치 생산에 초점을 맞춰보자. 노동자는 가치를 생산하는데 있어 불필요한 이유로 불행해서는 안 된다. 가치 생산 외에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낡은 가치관으로 인해 불필요하게 불행하게 되는 것을 제거하면 구조를 유지하는데 쓰이는 비용이상당히 절감될 수 있다. 불행하게 되는 것을 방치하고 불행에 대한 지원을 하는 것은밑 빠진 독에 물 붓기나 다름 없다.

 

첫째, 수평 사회. 낡은 유교적 가치관에 영향을 받아 연령이나 지위로 차례를정하여 지키는 것이 바르다며 다른 노동자에게 꼰대질이나 갑질을 행하여 불행케 하는 것을 막아야 한다. 가치 생산에 필요한 행위도 아니면서 다른 사람을 지나치게 괴롭게 만들고 있다. 그것이 과거 유교의 가르침이었기 때문에 올바르다 여기며 행한 것이 타인을 괴롭게 하기에 도덕적죄라 할 수 있다.

 

둘째, 자유 노동. 고정된 노동 시간, 노동 기간, 노동 장소는 노동자가 자본가에 종속된 농노나 다름 없다는 낡은 노동 관념으로 나타났다. 생산성만 유지될 수 있다면 반드시 09:00부터 18:00까지 일하는 노동 시간을 준수할 이유가 없고 주5일제라는 노동 기간을 유지할 이유가 없고 기업이라는 노동 장소에서 일해야 할 이유가 없다. 극단적으로 노동자가 육체 유지를 한다는 가정하에 2주간 쉬지 않고 일하고 2주간 쉬어도 생산성만 나오면 된다. 고정된 노동으로 자유롭지 못하여 불행하게 되는 것을 막아야 한다.

 

셋째, 공정 보상. 기업의 보상 체계는 낡은 유교적 가치관에 의한 연공서열로특별히 하는 일이 달라지지 않거나 기여도나 생산성이 높아지지 않더라도 시간이 흐르면 자연스럽게 보상이 늘어나는 체계인 경우가 많다. 이런 연공서열은 욕망이 적어 향상심이 없어 능력을 키울 생각이 없는 사람은 행복할지 몰라도 향상심이있어 능력을 키울 사람에게는 가치 생산이 높아져도 대가가 달라지지 않아 불행하다. 부당한 보상 체계로 불행하게 되는 것을 막아야 한다.

 

곧잘 수평적 관계와 자유로운 노동과 공정한 경쟁과 보상을 바라는 신세대 노동자들에게 낡은 가치관에의한 집단주의 관념에 의한 사회성이나 낡은 노동 관념에 의한 자유롭지 못한 노동이나 불공정한 경쟁이나 보상을 헝그리 정신이나 금욕을 말하며 정당화하기도하는데, 그것이 노동자의 생산성을 악화시켰다. 과거 한국은 독재 정권의 집단주의 체제에서 근로를 하였기에 금욕과 이타가 중요시되어야 생산성이높아졌지만, 현재 한국은 민주 정권의 개인주의 체제에서 개인의 의사로노동을 하고 있기에 자유로운 노동과 공정한 경쟁과 보상이 있어야 마음껏 욕망을 가지고 이기적으로 행동하여 높은 성과를 이룰 수 있다.

 

 

 

11. 자본주의 체제

 

구조를 유지하여 원리를 추구한다. 모든 존재는 이것을 기본으로 한다. 인간은 육체를 유지하지 못하면 행동 원리를 추구할 수 없다. 영양분을 균형 있게 섭취하지 못하면 영양 불균형으로 육체를 유지하지 못하여 자유롭게 행동할 수없다. 노동, 수면, 여가를 균형 있게 하지 않으면 육체를 유지하지 못하여 소외감이나 과로로 죽어 자유롭게 행동하지 못한다. 인간관계를 균형 있게 가지지 않으면 스트레스나 고독으로 죽어 자유롭게 행동할 수 없다. 육체가 있어야 행동 원리도 있다. 인간에게 적합한 자연환경도 마찬가지다. 자연환경을 인간에게 적합할 수 있도록 유지해야 인간이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다. 지금까지는 지구 생물이 자연을 오염시켜도 자연의 생태계가 정화하여 지구 생물이 살아갈 수 있는환경을 유지해왔는데 인간이 일으키는 오염은 자연만으로 정화하기 어려워 인간도 같이 정화하여 인간에게 적합한 자연환경을 유지하지 않으면 인간이 자유롭게행동하기가 어려워질 것이다.

그런데 구조를 유지해야 한다는 명분으로 개인의 의사를 과하게 침해하는 것은 부당하게 된다. 사회 구조 유지를 말하면서 과하게 개인의 권리를 침해할 수 없듯이 자연 환경 유지를 위해 과하게개인의 권리를 침해할 수는 없다. 만약 구조 유지가 최우선이면 모든 인간을 지배하여 명령대로 움직이는 로봇으로 만들거나 모든 인간의 문명을 파괴하고 인간을 죽이면 된다. 그럴 수가 없다. 원리를 추구하기 위해 구조를 유지하는데 원리를 추구할 수 없게 하는 것은 본말전도다. 사회나 자연을 유지하기 위해 개인의 의사와 무관하게 강제력이 동원되나 인간의 자유로운 생존을위해 그러는 것이므로 과하게 인간의 권리를 침해하는 것은 허용되어서는 안 된다. 채식을 강요한다거나 불합리하게 짐승을 보호한다거나 같이 말이다.

인간은 욕망을 가져야 한다. 일부 과학자가 기후 위기 연구를 충분히 했다면서 기후 위기 대책을 위한 정책 마련을 각국에 요구하는시위를 하고 있다고 한다. 타당하다. 구조를 유지해야 원리를 추구할 수 있으므로 모든 개인은본인의 자유를 위해서라도 동참하는 것이 마땅하다. 그러나 단순히 석탄 쓰지 말자고 하면 석탄 같은 저렴한 물질로 생존하는 수많은 이들에 얼어 죽는다. 그렇다고 시장 원리를 무시하고 비싼 연료를 싸게 공급하는 등과 같은 것도 쉽지 않은 선택이다. 여유가 있는 선진국은 그럴 수 있으나 여유가 없거나 환경을 신경 쓰지 않는 국가는 그러지 않을것이다. 그러므로 생존과 무관한 온실가스 배출 등의 문제는 배출을줄이는 것이 합리적이나 생존과 직결되는 온실가스 배출 등의 문제는 단순히 배출을 줄이는 것으로 끝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과학자라면 기후 위기 대책을 위한 정책에 쓰일 수 있는 과학 기술을 연구하고 개발하는것을 병행하여 단순히 배출을 끝내자고 말할 것이 아니라 배출을 끝내도 될 수 있도록 환경을 조성해야 해야 한다고 본다. 무엇보다 아무리 노력해도 기후 변화를 늦출 뿐이지 그 흐름을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므로다른 방식으로의 생존을 모색해야 한다. 나는 생존 게임에서 승리하여 모든 인간이 불로불사가 되어 우주 진출을 하는 것이 인간과 인류가 생존할 수 있는 길이라 본다.

자본주의 체제도 구조를 유지해야 시장 원리를 추구할 수 있다. 자본주의 체제는 시장과 시장 원리를 유지해야 구조가 유지될 수 있다. 자본주의 체제는 가치 생산, 경쟁, 승리한 공급자와 소비자 행복, 해당 분야와 경제의 성장, 상대적으로 더 가치 있는 생산 이하 반복을 하면서 점점 성장한다. 그런데 과한 복지나 부의 대물림에 의해 가치 생산이 멈추면 시장이 점점 축소하면서 사라질 경우자본주의 체제 구조가 붕괴하고 수요와 공급에 관한 경쟁이란 시장 원리가 멈추면 승리한 공급자 행복과 해당 분야와 경제의 성장이 사라지면서 시장원리가 작동하지 않아 자본주의 체제 구조가 붕괴한다. 시장 원리를 추구하면 경쟁에 패배한 공급자는 가난하거나 불행하여 자살할 수 있다. 그러면 국가 구조와 분야 구조와 자본주의 체제 구조를 유지하는 요소가 사라지면서 각각의 구조가붕괴할 수 있기 때문에 복지 정책을 적용하여 그런 것을 방지해야 한다. 단순히 사라지는 것을 방지하는 것뿐만 아니라 다시 경쟁에 참여할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해야 자본주의 체제의 구조가 유지될 수 있게 된다.

 

자본주의는 가치를 숫자로 환산한 돈이란 객관적 기준으로 거래한다. [돈은 사물의 가치를 나타내며, 상품의 교환을 매개하고, 재산 축적의 대상으로도 사용되는 물건을 뜻한다. 예전에는 조가비, 짐승의 가죽, 보석, 옷감, 농산물 따위를 이용하였으나 요즈음은 금, 은, 동 따위의 금속이나 종이를 이용하여 만들며 그 크기나 모양, 액수 따위는 일정한 법률에 의하여 정한다.] 돈은 단순히 평균적인 물건의 가치인 물가를 수로 객관화한, 물가와 반비례하는 도구다. 시장에서 공급보다 수요가 높으면 물가가 올라 돈의 가치가 내리고 수요보다 공급이 높으면 물가가내려 돈의 가치가 오른다. 또는 중앙은행에서 물가나 화폐 가치를 제어하기 위해 화폐를 많이 발생하여 시중에 푸는 양적 완화를 하면 물가가 오르고 돈의 가치가 내리며, 화폐를 회수하는 양적 긴축을 하면 물가가 내리고 돈의 가치가 오른다.

돈으로 시장에서 바라는 것을 구매하여 가치 소비 행복을 얻기에 금전 만능주의에 빠질 수 있으나실제는 돈만이 아니라 모든 가치와 가치의 신용을 보증할 힘이 중요하다. 돈은 무력과 권력으로 쉽게 가치가 변한다. 그렇기에 돈을 많이 소유하는 것보다 가치를 많이 소유해야 한다. 국가의 경제가 건전 하려면 돈을 많이 소유하는 것만이 아니라 가치 있는 상품을 생산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외화의 가치가 널뛰더라도 생산하는 상품 가치에 의해 자국 화폐의 가치가 안정적이게 된다.

돈은 쉽게 가치가 변한다. 그럼에도 돈이 가치가 있는 것은 인간과 인간이 중앙은행에서 발행한 화폐로 상거래를 하자고 약속한것을 국가의 무력과 권력 등과 같은 힘이 보증했기 때문이다. 화폐의 가치가 하락하면 무력과 권력이 그에 대한 대응을 통해 화폐 가치를 안정적으로 보장하여 상거래를 하는데 지장이 없게끔 한다. 돈은 인간과 인간의 약속의 결과물을 이해관계나 힘으로 보증되고 있으므로 돈 자체보다는 인간의약속, 이해관계, 힘이 중요하다 할 수 있다. 돈으로 인신매매나 마약매매와 같이 소유나 거래 금지 품목 매매나 돈을 위해 노동과 성 착취를할 수 없는 것은 세계 인권 선언문으로 인간과 인간이 거래 금지 품목 매매와 인간 착취를 하지 말자고 약속했기 때문이다. 돈이 인간과 인간의 약속으로 이루어진 만큼 다른 인간과 인간의 약속을 깰 수가 없도록 되어 있다. 인간의 약속으로 돈의 가치가 유지되기에 약속이 깨지면 화폐의 신용도가 하락하여 화폐의 가치도낮아진다.

국가의 중앙은행에서 발행하는 화폐는 국가의 힘이 있기에 화폐의 가치가 하락하면 법과 정책으로강제력을 발휘하여 화폐의 가치를 유지하기에 안정적이지만 코인과 같은 가상의 화폐는 신용을 뒷받침해줄 힘이 없기 때문에 실제 화폐가 될 수 없다. 화폐의 가치를 안정적으로 하질 못하기에 가치가 널뛰면서 도박으로 불릴 정도다. 무력이 없다는 것은 물리적인 강제력이 없다는 것을 의미하고 권력이 없다는 것은 법적인 강제력이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강제력이 없는 것이 인간과의 상거래를 할 수 있게 할 인간의약속인 화폐가 될 수 있을 리가 없다. 만약 화폐에 강제력이 없다면 화폐의 가치가 낮아질 경우 개개인의 이익을 위해 모두 화폐를 처분하는 것으로 화폐 가치가 사라지게 될 수 있다. 실제 코인은 그렇게 하여 상장 폐지하는 경우가 많다. 그렇기에 코인은 가상 화폐가 아닌 가상 자산으로 불린다.

탈중앙화 코인은 강제력 이전에 정부가 세금을 걷기 어려워 화폐가 될 수 없다. 정부의 관리가 벗어나 인간과 인간의 상거래에서 세금을 걷지 못하면 국가가 유지될 수 없다. 국가에서 국가의 서비스를 이용하면서 탈중앙화 코인을 화폐로 쓰며 상거래 하는 것은 기업의 서비스를이용하면서 기업에 수수료를 지불하지 않는 화폐로 쓰며 상거래를 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그러면 국가든 기업이든 구조가 유지되지 못하고 붕괴한다. 정부의 세금은 세계가 국제화가 되고 있는 만큼 국제의 흐름을 따라가야 다국적 기업의 세금 납부가공정하게 이루어질 수 있다고 본다.

금전 만능주의에 빠지면 돈의 배경보다 돈 자체에 집착하게 되어 오히려 돈을 벌지 못하게 될 수있다. 그러므로 돈을 벌고 싶다면 물건의 수요와 공급 등에 의한물가와 중앙은행의 통화 정책과 같은 돈의 배경을 고려하여 화폐 가치의 변동을 살피면서 변화의 흐름에 따라가야 한다.

 

 

첫 번째, 노동 시장

 

노동 시장의 구조를 유지하여 시장 원리에 따른 가치 생산을 추구한다. 수요와 공급에 의해 경쟁하여 가격이 결정되는 시장 원리를 추구하는 모든 시장은 불균형하다. 상품의 가격 대비 품질이 좋은 것부터 팔리고 그렇지 않은 것은 덤핑으로 팔거나 팔리지 않아 버려지게된다. 노동 시장도 그렇다. 노동자가 취급하는 노동력 임대 상품의 가격 대비 품질이 좋지 못하면 팔리지 않는다. 상품이 팔리지 않으면 노동자의 생계가 위험해진다. 그런데 노동자만 그런 것이 아니다. 모든 시장에서 모든 상인은 이윤을 얻기 위한 상품이 팔리지 않으면 생계나 생존이 위험하다. 자본가가 상품을 파는 소비 시장이나 노동자가 상품을 파는 노동 시장이나 다를 바 없다. 소유한 자산이나 빛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자산이 없는 노동자는 노동력 임대 상품이 팔리지 않으면 생계가 위험하고 빚을 진 자본가는 소비자상품이 팔리지 않으면 빚에 의해 야반도주를 하거나 자살하는 것으로 생존이 위험하다. 노동자나 자본가나 리스크와 리턴이 다를 뿐이지 본질은 같은 상인이다. 단지 보편적으로 자본가가 자산이 많아 안전할 뿐이다.

시장에서 사회의 규칙과 시장 원리를 훼손되지 않는 이상 정부가 상거래에 웬만해서는 강제력을 발휘해간섭해서는 안 된다. 법으로 강제할 수 있는 것은 국가에 속한 인간이 사고 방치, 폭행, 착취, 갑질 등을 당한 것 같이 국가 구조 요소에 해당하는 인간이피해를 입을 때나 거래 금지 품목을 거래할 때나 시장 원리를 훼손하는 담합이나 독과점을 하는 것 같을 때에 해당한다. 그 외의 정상적인 상거래는 시장 원리를 따르는 것이 마땅하다. 노동 시장은 집단주의 체제인 노동조합에 의해 담합이나 독과점이 정당화되고 있어 시장 원리가 훼손되는것이 일반적이지만 개인주의 체제인 자본주의 시장 경제의 기본은 그렇다. 시장 원리에 의해 노동 시장의 구조의 요소가 사라져 구조가 붕괴할 경우를 대비하여 그에 따른 복지 정책을 적용하면 된다. 그러면 구조를 유지하여 원리를 추구할 수 있다. 그러지 않고 시장에 간섭하여 균형적인 결과를 만들려고 하면 시장 원리가 훼손되어 원리를 추구할수 없게 된다. 그럼에도 노동 시장은 시장에 권력의 간섭이 심한 편이다.

 

첫째, 구매 간섭. 노동력 임대 상품은 판매자인 노동자를 위해 한번 구매하면별 이변이 없는 한 계속 구매하도록 강제했다. 노동 시장에 권력이 개입하여 계약 취소가 매우 어려운 임대 상품을 구매하도록 한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라 장기 임대 상품에 대한 대가를 소비 시장의 장기 임대 상품과 다르게 점점 비싸게구매하도록 했다. 그 결과 시장 원리가 훼손되면서 시장이 왜곡되기 시작했다. 계약 취소가 어려운 임대 상품 구매 리스크를 줄이기 위해 직접 구매가 아닌 자회사를 만들어 구매하거나파견회사에 상품을 요청하는 것과 같이 간접 구매를 하게 되었다. 시장 원리 훼손에 의해 불필요한 중간 과정이 생겨 수수료가 발생하는 것으로 판매자가 불필요한 부당한 손해를 보게 되었다. 시장에 권력이 간섭하여 원리를 훼손하니 이런 결과가 나온다. 노동력 임대 상품 리스크를 줄이고 책임 회피 수단을 위해 자본가가 만든 것이지만 그걸 초래한것은 권력 간섭이다. IMF 이후 비정규직이 일반화되어 직접 구매할 때 비정규직이나계약직이라는 방식을 동원하여 계약 기간을 정해둔 임대 상품을 구매할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이 정상적인 시장 원리에 따른 거래 방식이 될 수 있었으나 그 전에 정규직이 존재하면서 안정적으로높은 수익을 얻는 정규직과 불안정적으로 낮은 수익을 얻는 비정규직과 계약직과 같이 불합리한 임금 체계가 나타나게 되었다. 정규직과 같이 장기 계약을 맺을 경우 재계약을 하지 않는 이상 임금이 같거나 낮아야 했으나 연공서열에따라 별다른 성과가 없어도 계속 임금이 오르게 되었고, 비정규직이나 계약직 같이 단기 계약을 맺을 경우에는 임금이 높아야 했으나 마치 쓰다 버릴 도구와 같이 싸게 사서 쓰다 버리듯이 계약을 해지하게되었다. 그러면서 논리적인 노동 유연화도 없고 노동 안정화도 없게되었다.

권력의 간섭으로 시장 원리가 지나치게 훼손되었다. 노동 인권 운동으로 인권을 명분으로 한 안정적인 종신 고용이라는 노동자를 종속시켜 차별하는 이권을주장하는 것을 정치가가 무비판적으로 수용하여 노동력 임대 상품의 계약 취소를 어렵도록 해버리니 자본가는 새로운 노동력 임대 상품을 구매하는 것을꺼리게 되면서 취업자가 불행하게 되고, 구매를 하더라도 직접 구매가 아닌 간접 구매를 하여 불필요한 중간 과정이 나타나거나 직접 구매를 하더라도 합리적인 대우를 하지 않은 것으로노동자를 불행하게 했다. 일부 노동자는 이권을 보장 받는 것과 같이 되어 행복한것처럼 느껴지게 되었으나 이외 노동자는 그렇지 못하여 불행하게 되었다. 합리적 기준이 없이 시장 원리를 함부로 훼손하면 이런 결과가 나온다. 권력은 노동 시장에 간섭할 것이 아니라 시장 원리를 추구하기 위해 노동 시장 구조 유지를 위한복지 정책을 추진해야 할 것이다.

 

둘째, 기준 간섭. 노동력 임대 상품은 판매자인 노동자를 위해 수요에 맞지않는 상품도 구매하게끔 강제했다. 시장은 수요에 따라 상품의 가치가 달라지며 구매자의 판단으로 구매가 결정되는 것이 일반적이나 노동 시장은 권력이 결과의 평등을 위해 노동력임대 상품 판매자 특성에 맞춰 구매하게끔 정부와 기업의 노동 시장 상품 구매에 간섭했다. 상품 판매가 어려운 성별이나 장애인이 상품을 팔 수 있도록 할당제를 넣어 강제로 구매하게 하거나, 상품을 잘 못 팔았던 성별이나 유공자가 상품을 보다 더 잘 팔 수 있도록 가산점을 넣어 상품가치를 뻥튀기한 것을 강제로 구매하게 했다. 그로 인해 일부 취업자는 행복할 수 있었으나 나머지 취업자와 상대적으로 가치가 상품 가치가 낮은 노동력 상품을 구매한 자본가가 불행하게되었다. 노동력 임대 상품의 구매 기준은 어디까지나 구매자의 의사로결정된다. 구매자가 특정 성별을 더 구매하겠다는 것에 간섭하여 모든성별의 노동력 임대 상품의 비율을 맞춰 구매하게끔 조작하는 것은 개인의 자유권 침해에 해당한다. 반대로 모든 성별의 노동력 임대 상품의 비율을 맞춰 구매하겠다는 것에 간섭하여 특정 성별의 노동력임대 상품을 더 구매하게끔 조작하는 것도 개인의 자유권 침해에 해당하게 된다. 일반적으로 노동자의 성별과 무관하게 노동력 임대 상품을 구매하는 것이 기업의 이익에 해당하여착각할 수 있으나 성별을 맞추라고 강제로 강요한 것은 자유권 침해가 잘못된 것이지 불공정하기에 잘못된 것이 아니다. 시장은 개인의 의사로 결정되는 시장 원리를 따르고 있으므로 개인의 의사로 결정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정부도 마찬가지다. 정부가 성별 비율을 맞추든 맞추지 않던 거기에 항의하여 강제로 간섭하는 것은 자유권 침해에 해당한다. 어떻게 구매하든 개인의 자유다. 가치가 높은 노동력 임대 상품을 구매하면 성공하여 번영할 확률이 높고 가치가 낮은 노동력 임대상품을 구매하면 실패하여 몰락할 확률이 높을 뿐이다. 만약 인사권자의 판단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의견을 제시할 수는 있어도 평가 기준을 강제로 바꿀 수는 없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국민이나 주주와 같이 정치가나 기업의 인사권을 가지거나 영향을 끼칠 권리가있는 이들은 인사권자를 교체하거나 인사권자가 속한 곳이 만든 상품을 구매하지 않으면 된다.

본래 인사는 자유에 해당하나 권력자에 영향을 받아 인사를 하게 되면 권력과 유착하여 권력이 기업에부당한 특혜를 주는 잘못이 나타날 수 있다. 그 반대로 가능하다. 인사는 자유지만 인사에 의한 유착은 잘못이다. 소비자가 상품을 구매하는 것도 자유고 자본가가 소비자에게 특혜를 주는 것도 자유고 자본가가 노동력 상품을 구매하는 것도 자유지만 정부와기업이 유착하여 서로에게 특혜를 주는 것은 자유가 아니다. 그것은 명백한 죄다. 왜냐하면 정부는 시장의 관리 감독도 겸하고 있기 때문이다. 심판과 선수가 유착하는 것과 다르지 않을 정도로 불공정하게 된다.

인사에 권력이 개입하여 조작하는 순간부터 보통 잘못되게 된다. 사회가 평가로 조직되는 것을 고려하면 일부 권력자가 인사 평가에 간섭하여 조작하는 것은 민주가아닌 독재라 할 수 있게 된다. 모든 개인이 자유롭게 평가하여 사회를 조직할 수 있어야 민주주의라 할 수 있다.

 

셋째, 가격 간섭. 노동력 임대 상품은 최저 임금 제도를 통해 최저가를 정해가격에 간섭하여 조작하고 있다. 이것은 노동자의 최저 생계비를 복지에서 보장해야 하므로 최저 임금제를 도입하는 것이 타당해 보일 수는 있다. 최저 임금제와 같이 시장 원리 훼손에 의해 구매자인 자영업자 등이 생계가 어렵다면 복지 정책을적용하여 지원하면 된다. 그러나 그렇다 하더라도 간섭하여 조작하는 것이 타당하다할 수 없다. 정부가 미리 정해둔 최저 가격은 노동자에 대한 자유권 침해에해당하게 된다. 권력이 간섭하여 노동자의 자유권을 침해한 것이다. 상품 가격을 결정할 권리는 보통 상품 판매자에게 있지 상품 구매자에게 있지 않다. 가격 대비 상품 품질로 수요가 결정되는 것이지 상품 가격 자체는 공급자의 권리다. 노동자가 노동력 임대 상품을 취급하는 상인이라면 최저 임금 제도가 누구의 자유권을 침해했는지알 수 있게 된다. 이런 자유권 침해는 창업자가 지나치게 적어 노동력 임대상품이 과잉 공급 되어버리는 바람에 노동력 임대 상품의 가치가 최저 생계에 필요한 최저 임금 이하로 낮아져서 노동력 임대 상품에 대한 가격을 강제로유지하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실제 보편적으로 충분한 대가가 지불되는 국가는 최저 임금제가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은 쌀이 초과 생산 된 것을 시장 격리 후에 매입하는 것으로 최저 가격을 유지하는 것과 비슷하다. 모든 국내 노동력 상품은 최저가가 동일하고 국내산 쌀은 최저가를 관리하기에 정해진 최저가로 수요경쟁을 하는 구매자인 자본가와 소비자가 자유권이 침해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공급 경쟁을 하는 노동자와 농부의 자유권이 침해되었다. 자본가는 외국에 나가 외국인 노동력 임대 상품을 구매하고 소비자는 국내에서도 외국 쌀을 구매하면되기에 노동자와 농부만 자유권을 침해 당한 셈이 된다. 최소한의 이익이 보장되는 것으로 노동자와 농부가 그것을 반기기도 하지만 논리적으로 보면 그렇다. 정부는 국가 구조 유지를 위해 노동력 상품과 쌀을 관리 품목으로 지정하고 교육 정책이나 농업정책으로 제어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런 자유권 침해는 노동력 임대 상품과 쌀의 수요와공급을 제어하지 못한 교육 정책과 농업 정책에서 비롯되었다고 봐야 한다. 간단히 말해 정부의 정책 실패다. 정부가 정책 실패한 것을 노동자의 노동력 임대 상품은 최저 임금제를 도입하여 최저가를 강제하고농부의 쌀은 시장 격리제를 도입하여 쌀의 초과 생산을 시장 격리 한 뒤에 정부가 입찰 예정 가격보다 낮은 가격의 쌀부터 매입하여 최저가를 관리하는것으로 대처한 것이다. 그렇게 최저 생계비를 보장하는 것으로 노동자와 농부를 달랬다. 최저 임금제는 국민의 생계 유지와 관련이 있고 시장 격리제는 국가의 식량 주권과 관련이 있기에이런 조치는 타당하나 정책 실패에서 이런 조치를 하게 된 것은 부정할 수 없다.

그렇다고 실패에 대한 책임을 묻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이런 실패는 특히 체제 적응에 실패한 결과로 사실상 인문학, 사상과 철학의 책임이기 때문이다. 한국 사회는 논리적으로 설계되었다기 보다 낡은 가치관으로 상황에 따라 주먹구구식으로 대처한 것이많아 불합리하여 아무래도 정책 실패가 잦을 수 밖에 없다. 관념으로 이롭다 생각한 것이 체제에 해로웠으니 정책이 성공할 수가 없다. 가령 낡은 유교적 가치관으로는 이성애와 성을 죄악시하는 것이 사회에 이롭다 생각했었으나 개인의의사를 원리로 삼아 연애와 결혼과 출산을 개인의 자유에 맡긴 이상 그런 것이 체제에서는 해로웠으니 낡은 가치관을 가지고 만든 저출산 대책이 성공할수가 없었다. 한국은 체제 적응 실패를 인정하고 체제에 적응해야 생존할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정책 또한 실패를 인정하고 체제에 맞는 정책을 시도해야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교육 정책의 실패인 노동력 임대 상품의 초과 생산은 기초 학문이 발전하지 못하고 고부가 가치상품을 생산하지 못하면서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지 못하여 고학력 노동자의 노동력 임대 상품에 대한 수요가 낮아지면서 발생했다. 이제는 고부가 가치 생산을 하여 고학력 노동자의 노동력 임대 상품을 소화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농업 정책의 실패인 쌀 초과 생산은 쌀 대신 다른 작물 생산을 유도하거나 쌀 소비를 늘리거나쌀 수출을 하는 등의 방식으로 대처했어야 했으나 그런 것이 부족했다. 이제는 풍작과 흉작을 고려하여 흉작일 경우의 생산분과 수요를 맞춘 다음 쌀 생산이 그것보다 많으면 다른 작물을 생산하도록 유도하거나 초과생산을 수출할 수 있는 유통 구조를 만들어야 할 것이다. 그렇게 정부 관리 품목은 정책을 통해 수요와 공급을 제어하는 것을 통해 노동력 임대 상품의 최저가를 강제하지 않고 쌀 초과 생산을 불필요하게매입하지 않아도 되는 것으로 노동자와 농부의 자유권을 보장해야 한다. 정부 관리 품목은 국가 구조 유지를 위해 강제력이 어느 정도 정당화되므로 정책을 통해 수요와 공급을 조절하여 최저 생계비에 맞게끔 적절한대가를 받도록 설계한 이후, 일부에 상품을 팔지 못할 경우에 대해서만 복지 정책을 적용하여 지원하면 된다. 그러면 충분한 대가가 지불되는 국가와 같이 최저 임금제라는 경제적 보조 기구를 땔 수 있을 것이다.

 

노동 시장에 대한 권력의 과도한 간섭은 낡은 유교적 가치관에 의해 경제 활동 종사자를 사회의역할이란 평등한 기준이 아닌 사농공상과 같이 사회적 신분이란 불평등한 기준으로 바라본 것이 본질적인 원인이다. 정부 권력이 노동력 임대 상품을 구매하거나 쌀 비축을 위해 쌀을 구매하는 것과 같이 시장에 참여하는것은 정당하나 시장 참여자의 자유권을 침해하는 것은 부당하다. 그럼에도 그랬던 것은 정치가들이 인권을 명분으로 이권을 주장하던 이들의 사회적 신분을 유지하거나 높이지 위해서 노동 시장에 과도한 간섭을했던 것이다.

만약 모든 경제 활동 종사자를 노동력 임대 상품과 소비자 상품을 취급하는 상인과 같이 사회의역할만 다른 상인으로 대했다면 사회적 불평등이 아닌 경제적 불평등만 남게 되므로 권력이 과도한 간섭을 할 명분이 없었을 것이다. 평등 형식은 사회적과 경제적으로 분류할 수 있고 평등 방식은 기회와 결과로 분류할 수 있는데사회적으로는 모두가 기본 인권을 보장받는 것으로 결과가 평등해야 하고 경제적으로는 모두가 가치 생산과 기여도에 따라 결과가 달라야 하므로 기회가평등해야 한다. 지금까지 경제 활동 종사자를 사회적 신분으로 바라보았기에사회적 평등을 위해 권력이 과도한 간섭을 하여 노동 시장의 시장 원리를 훼손하여 시장을 왜곡되게 만드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다. 모든 경제 활동 종사자를 상품을 취급하는 사회의 역할만 다른 상인으로 대하여 사회적으로 평등해야만권력이 노동 시장에 과도한 간섭을 할 명분이 없어진다.

미국은 1960년대 존 케네디의 의견에 따라 적극적 평등 실현 조치(Affirmative Action)를 시행하여 소수자와 약자에 대한 혜택을 주었으나 아직도 흑인은 인구 대비 범죄율이 높고 사회에 적응하려는 노력도 하지 않는다. 그것은 적극적 평등 실현 조치가 개인에 맞춘 결과적 평등을 기준으로 삼아 합리적 기준이 되지못했기 때문이다. 능력이 없이 권리를 얻을 수 있게 되면 능력을 키울 노력도하지 않게 될 뿐이다. 약자들이 빈곤의 악순환을 깨고 공정한 경쟁이 가능하게 될때까지라고 한시 해두었다고 하는데 반세기가 지난 지금도 적극적 평등 실현 조치 대상자는 악순환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태다. 그것이 정책의 잘못을 증명하고 있다.

개인에 맞춘 사회적 평등과 경제적 불평등이 기본이다. 만약 경제적 평등을 위해 특정 집단에 과한 혜택을 주면 부유한 집단에 속하나 가난한 개인은 그혜택으로 과한 손해를 보고 가난한 집단에 속하나 부유한 개인은 그 혜택으로 과한 이익을 얻는다. 개인주의 체제에서 합리적 기준은 어디까지나 개인을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 적극적 평등 실현 조치와 같이 객관적 기준을 정하기 어려운 평등은 목소리가 큰 집단이 과한 이익을얻게 되어 목소리를 낼 수 없을 정도로 미약한 개인은 되려 더 손해를 보게 된다. 현재 미국에서 빵집에 빵을 훔친 흑인을 신고하여 체포한 것을 인종 차별이라고 말하며 규탄하는사태가 벌어지기도 하였다. 불합리한 기준으로 이익을 주다 보니 인권이 아닌 이권이 되어버려 정당한 조치임에도 차별이라 항의하는 사태까지 벌어진 것이다. 그럼에도 여전이 다수의 흑인은 경제적 빈곤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흑인 개인은 부정적 편견을 통해 되려 더 큰 손해를 보고 있다.

모두가 개인의 개성을 배제한 역할에 필요한 성질과 같이 합리적 기준으로 평등해야 한다. 그러면 백인이나 흑인, 남성이나 여성과 같은 성질보다는 역할에 필요한 성질이 우선되면서 그로 인한 차별이 없어질 수있다. 그리고 사회의 역할이 되면 돈을 벌기 위해 역할을 맡는것이 아닌 역할을 수행하고 나서 대가로 돈을 벌게 되어 역할 수행이 우선되면서 모두가 일종의 사명감을 갖게 된다.

사회의 역할을 신분으로 바라보면서 교육이 자아 실현을 위한 수단이 아닌 신분 획득을 위한 수단이되어버렸다. 부모나 교사에 의해 자아 실현을 위한 진로가 부정되고 신분획득을 위한 진로를 강제하는 것이 일상적이다. 얼마나 큰 자유주의 이념 훼손이라 할 수 있는가? 비정상적인 시험에 대한 집착. 실제 중요한 것은 역할 수행, 가치 생산, 공급, 분배, 가치 소비, 소유, 환원 등에 있음에도 신분을 위한 경쟁을 하게 되니 창의력에 해로운 문제 풀이를 지속적으로 하게되고, 변별력을 높이겠다고 과도하게 복잡한 응용 문제를 시험 문제로내고 있다. 과학고에서 의사가 되길 바란 학생이 많았던 것은 과학을통해 자아 실현을 하기보다는 의사라는 신분을 얻고 싶었던 것이다. 만약 빈곤에 굴레에 있는 이는 가치를 생산할 수 있는 힘을 가질 수 있는 복지 정책을 지원하면 된다. 결과의 평등을 위해 함부로 시장 원리를 훼손하면 합리적 기준이 깨지면서 일부를 제외한 관련자모두가 불행해질 뿐이다.

지금까지 사회의 역할을 신분으로 바라보면서 사람의 입장을 사회적이나 경제적으로 분류하지 않고모호하게 놔두며 사회적 평등을 위해서라는 말로 경제적 평등을 위해 권력이 간섭하거나 경제적 불평등이 당연하다면서 사회적 불평등을 위해 꼰대질이나갑질을 한다거나 하는 이들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부당한 손해를 입고 있었다. 이제는 모두가 사회적 평등과 경제적 불평등을 이해하고 악용하는 일이 없어야 할 것이다.

 

 

두 번째, 소비 시장

 

소비 시장의 구조를 유지하여 시장 원리에 따른 가치 소비를 추구한다. 수요와 공급에 의해 경쟁하여 가격이 결정되는 시장 원리를 추구하는 모든 시장은 불균형하다. 상품의 가격 대비 품질이 좋은 것부터 팔리고 그렇지 않은 것은 덤핑으로 팔거나 팔리지 않아 버려지게된다. 소비자 상품의 가격 대비 품질이 좋지 못하면 팔리지 않는다. 그런데 소비 시장은 노동 시장과 달리 대부분 최저가가 지정되지 않아 수요와 공급이 유연할 수가있어 수요가 낮은 상품의 판매가 수월한 편이다. 기업에서 시장 조사를 하여 수요 예측을 하고 그러고도 수요 예측이 빗나가면 상품을 파는 도매점이나 소매점에서 가격을 낮추거나 1+1 등의 방식으로 어떻게든 팔아서 자원 낭비를 막고 있다.

 

첫째, 소비재. [소비재_경제는 개인의 욕망을 직접적으로 충족하기 위하여 소비되는 재화를 뜻한다. 식료품, 의류, 가구, 주택 따위가 이에 해당한다.] 일반적으로 이런 소비재는 수요와 공급의 시장 원리를 지킨다. 수요가 높아지면 가격이 오르고 수요가 낮아지면 가격이 내린다. 생필품이 아닌 사치품의 경우에는 인간의 생활에 반드시 필요하지 않기에 가격이 폭등하든 폭락하든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 그러나 달걀과 같은 생필품은 어떤 이유로 공급에 차질이빚어져 가격이 폭등하면 인간이 생활하는데 큰 불편함을 준다. 달걀 가격이 폭등하면 일부 유통업자가 달걀을 사재기 하는 것으로 달걀 공급량을 조절하여 달걀을 비싸게 팔아 과잉 이득을 취하거나 일부 소비자가달걀을 사재기하여 대량 비축하여 소비하기도 한다. 그렇게 하면 사회에 생필품 분배가 원활하게 이뤄지지 않게 된다. 인간은 생필품이 없으면 큰 불편함을 느끼며 강한 불안과 불행을 느껴 국가 구조의 요소가 사라질 위험이 생기게 된다. 그렇기에 그런 물품은 인간이 생활하는데 불편함이 없는 가치 소비를 할 수 있도록 정부 관리 품목으로지정하여 관리한다. 정부는 달걀 사재기 방지를 하는 정책을 내놓거나 외국산달걀을 수입하여 공급하는 것으로 소비자가 생필품을 안정적으로 가치 소비할 수 있도록 유도하고 있다. 이런 이유로 정부는 시장 관리 감독과 시장 참여를 둘 다 하게 된다. 정부가 다른 시장 참여자에게 달걀의 가격을 강제로 정하여 그 가격에 팔게 하는 것은 권력의 시장가격 간섭이지만 정부가 달걀을 사와 공급하는 것은 정부의 시장 참여다. 그러나 성급하게 외국산 달걀을 수입하게 되면 수요를 예측하지 못하여 달걀이 남는 바람에 유통 기한 지난 달걀을 폐기하게 되는 정책 실패가될 수도 있다. 이에 따라 긴급할 때가 아니라면 정부가 직접 수입하기보다는수요 예측 전문가인 수입상들에게 혜택을 주는 것이 효율적일 수도 있다. 쌀과 같은 국내 농산품은 정부 관리 품목으로 상점에서 팔리기 위해 정부가 지원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소비 시장에서 시장 원리에 따른 가치 소비가 가능토록 하기 위한다기 보다는 국내 농업을관리하여 유지하기 위해서 하고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둘째, 생산재. [생산재_경제는 생산의 과정에 쓰는 재화를 뜻한다. 넓은 뜻으로는 자본재와 같으나, 좁은 뜻으로는 원재료처럼 한 번 생산할 때 소비되는 것을 이른다.] 소비재의 가격이 폭등하면 소비재를 소비재로만 쓰는 사람들은 사용을 줄이거나 쓰지 않으면 되지만소비재를 생산재로 쓰는 사람들은 생산을 하더라도 이윤을 남길 수 없게 된다. 생산재 가격이 폭등하면 생산재를 이용한 생산은 가격을 올리지 않는 이상 생산할수록 적자가 된다. 그렇기에 필연적으로 생산품의 가격을 올릴 수밖에 없는데 유동성이 심한 생산재를 가격 담합으로일괄적으로 인상해버리면 생산재 가격이 낮아졌을 때 대부분 상품 가격을 내리지 않기에 단순히 물가만 오르게 된 것이 되어 소비자가 시장 원리와 무관한가치 소비를 하게 된다. 지금까지 생산재 가격의 인상을 명분으로 생산품의 가격을일괄적으로 인상한 분야에서 생산재의 가격이 인하하였을 때 상품 가격을 인하한 분야가 도대체 얼마나 있었는가? 이것 또한 분야 경쟁이 된다. 가격을 올린 분야는 이익을 얻지만 그 외 분야는 손해를 본다. 손해를 안 보기 위해 너도 나도 담합으로 가격을 올리면서 물가가 폭등하게 된다. 담합은 시장에서 악이다. 가령 소비재이자 생산재인 기름이나 밀가루 가격이 폭등한다고 하여 관련 분야의 상품 가격을 일괄적으로인상해버리면 이후 기름이나 밀가루 가격이 내릴 때 낮추기가 어려워 소비자가 시장 원리에 따른 가치 소비를 할 수 없게 된다. 그러므로 유동성이 있는 생산재는 갑작스러운 급등이나 급락이 나타난다 하더라도 분야의 모든 상품가격을 담합하여 일괄적으로 바꾸는 것을 허용해서는 안 된다. 타국의 시장과 연계하여 수입과 수출이 원활하도록 경로 설계를 하여 시장 원리와 무관하게 비싼 물품이 가격 경쟁으로 도태되어 정상 가격으로돌아올 수 있도록 유도해야 할 것이다. 만약 개인 사업자가 생산재의 단기간 폭등으로 생계가 어려울 경우는 복지 정책 적용을 하여 잠시 생계 지원을 하면 된다. 그렇게 하여 소비 시장에서 시장 원리에 따른 가치 소비가 가능하도록 한다.

 

셋째, 자원 낭비. [자원_경제는 인간 생활 및 경제 생산에 이용되는 원료로서의 광물, 산림, 수산물 따위를 통틀어 이르는 말을 뜻한다.] 소비 시장에서 상품이 소비되지 않으면 그만큼의 자원이 낭비되면서 경제적 손실은 물론이고 원료 채취를 하면서 발생한 환경 오염을 의미 없게만들어 버린다. 자원을 낭비하지 않으면 경제적 손실이 줄어들면서 물가 또한안정적이게 될 수 있고, 환경 오염을 줄여 자원 환경 유지를 통해 인간이 살 수있는 환경을 만드는데 도움이 될 수 있다. 그렇게 자원 낭비를 막는 것이 간접적으로 소비 시장 구조를 유지하는데 도움이 된다. 그렇기에 각국 정부와 기업은 자원 낭비를 막을 수 있는 방법을 추진했다. 기업은 자원을 적게 쓰는 제품과 같은 친환경 상품을 생산하고 정부는 그런 상품을 생산하고 소비하는이들에게 혜택을 주고 그렇지 않은 상품을 규제하였다. 자원을 재활용하는 재활용 산업을 활성화시켰다. 상품 수요 조사를 하여 가능한 생산한 상품이 소비되도록 하고, 팔리지 않을 경우 싸게 팔아 어떻게든 자원 낭비를 막았다. 개인주의 체제에서는 개인의 의사를 원리로 삼고 있기 때문에 자원 낭비를 막기 위해서 소비자 개인의 협조로 이루어지기를 바라기 보다는 기업이생산할 때 자원 낭비를 막기 위한 설계를 하고 정부는 그에 대한 혜택을 주는 것이 합리적이다. 그렇게 자원 낭비를 막아 경제적 손실과 환경 오염을 막아 소비 시장 구조를 유지하는 것으로 원활한시장 원리에 따른 가치 소비가 가능토록 한다.

 

이렇게 소비 시장은 구조를 유지하여 시장 원리에 따른 가치 소비가 가능토록 해야 한다. 그러나 한국은 생산자의 이익만 고려하다 시장 원리가 훼손되어서 그런 가치 소비가 어려울 때가많다.

 

첫째, 전통 시장. 소비자가 원치 않는 대형 마트를 규제하고 전통 시장에 세금을쓰고 있다. 소비자가 전통 시장을 찾지 않는 것은 상품 가격, 품질, 신뢰도가 낮기 때문임에도 그런 전통 시장을 보호하기 위해 소비자의 선택권을 침해하고 있다. 전통 시장에서 상품이 팔리지 않으면 팔릴 때까지 상품 가격을 낮추고 품질을 높이면 된다. 만약 그러다 이윤을 얻기 어려워 생계 유지가 어렵다면 복지 정책의 지원을 받고, 그러고도 팔지 못하면 다른 일을 알아보거나 쉬는 것이 낫다.

 

둘째, 도서 정가제. 소비자가 원치 않는 도서 정가제를 도입하고 있다. 소비자가 동네 서점을 찾지 않는 것은 온라인이 훨씬 편리하기 때문임에도 자연스럽게 사라질 동네서점을 보호하기 위해 시장 가격에 간섭하고 있다. 동네 서점은 온라인에 비해 불편하므로 쇼핑 데이트와 같이 쇼핑 자체를 목적으로 하는 대형 서점과 학교 앞 문구점 외에는 시장 원리에 의해자연스럽게 사라지는 것이 합당하다. 이걸 억지로 살리는 것은 자동차의 등장에 자연스럽게 사라질 마부와 마차를 억지로 살리는 것과 다르지 않다. 지식은 공유되어야 한다. 저렴한 가격으로 많은 이들이 지식을 공유해야 개인이 성장하고 국가가 발전한다. 자본주의 체제는 소비자를 먼저 고려하는 체제로 생산자를 먼저 고려하여 설계된 법은 자본주의 체제에해롭다.

 

셋째, 중간 과정. 소비자가 원치 않는 소비자 가격을 올리게 되는 불필요한중간 과정을 넣기도 한다. 한국에서 유통을 거치면서 오르는 가격이 너무나도 높은 것은 유통 담합과 불필요한 유통 과정 때문이다. 생산자 이익을 위해 소비자의 만족도에 신경 쓰지 않기도 하고 있다. 불필요한 유통 과정은 IT기술의 발달로 상품 접근도가 높아졌음을 고려하여 영업이나 소매점을 거치지 않고 가격을 낮춘 기업이가격 경쟁력을 갖추도록 유도하면 담합이나 독과점이 아닌 이상 자연스럽게 중간 과정이 사라질 것이다.

중간 과정은 가치 생산도 크게 하지 않으면서 생산의 대가를 받아가기 때문에 효율을 추구하는 시장원리에 해롭다. 노동 시장의 불필요한 중간 과정인 마땅히 하는 것도 없이수수료만 받아가는 파견이나 소비 시장의 불필요한 중간 과정인 없어도 되는 의미 없는 중간상 등은 시장 경제에 해롭다 인식하고 있다. 이런 중간 과정은 전부 사라져야 한다. 중간 과정을 없애면 노동자든 자본가든 본인의 상품을 좀 더 싸게 공급할 수 있다. 누구든 특정 집단의 이익을 주장할 것이 아니라 시장 경제와 같이 합리적 기준에 초점을 맞춰야모든 개인이 인정하고 수용할 수 있게 된다.

 

넷째, 층간 소음. 소비자가 원치 않는 층간 소음이 크게 나는 벽식 구조의건물을 층과 층 사이에 얇게 하여 지어 팔고 있다. 정상적인 시장 원리를 따랐다면 층간 소음을 싫어하는 소비자의 수요에 따라 층간 소음이 작거나 없는 건물이 있었어야 했다. 그렇게 했으면 소비자 수요에 따라 개인이 시끄럽게 행동하더라도 이웃에 들리지 않을 정도로 방음처리를 하는 것이 일반적이어야 했다. 층간 소음에 의한 살해 사건이 그렇게 많은데 그에 따른 수요에 의한 건물이 건설되지 않았다는 것이 이상하다. 그런 수요를 반영하여 방음벽을 설치하고 벽식 구조보다 기둥식 구조로 짓는 건물이 선호되는 것에건설 업체가 공급하고, 그런 공급에 정부는 층간 소음에 의한 불행을 방지하여 국가구조를 유지하기 위해 혜택을 주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다섯째, 자영업. 소비자가 원치 않는 자영업 총량제를 주장하기도 한다. 자영업은 거리의 수요보다도 늘어 특정 지역 내에 특정 업종의 가게 수를 제한하거나 자발적 폐업을지원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올 정도가 되었다. 아마 택시 총량제를 참고한 것으로 보이는데 자영업은 택시와 성격이 다소 다르다. 특정 지역 내에 택시의 수가 지나치게 늘면 도로가 포화되어 택시의 수입과 무관하게 사회에 해로울수 있으므로 총량제가 타당하다. 특정 지역 내에 자영업 수가 지나치게 는다 하더라도 자영업자 수입에는 해로울 수 있으나 그 외의 사회에는 해롭지가 않으므로 시장에서 경쟁을통해 시장 원리로 자연스럽게 생존과 도태가 결정되는 것이 바람직하여 총량제가 타당하지 않다.

 

구조를 유지하여 원리를 추구한다. 사양 산업도 마찬가지다. 사양 산업도 구조를 유지하여 산업의 원리를 추구한다. 그러나 그것은 국가 구조와 무관하다. 국가 구조의 요소는 인간이지 산업이 아니다. 사양 산업이 사라지더라도 인간이 살아남으면 국가 구조는 유지될 수 있다. 사양 산업이 구조를 유지하기 위한 활동을 할 수도 있으나 국가 입장에서 그걸 무비판적으로 수용할이유가 없다. 반드시 필요한 산업을 제외하면 시장 원리에 따라 도태되는산업은 도태되는 것이 국가에 이롭다. 도태된 산업에 속했던 인간은 복지 정책을 적용하여 살 수 있게 하면 된다.

 

대부분 분야는 시장 원리에 따른 가치 소비가 가능하도록 해야 한다. 변호사도 과거와 달리 시장 원리를 따르게 되면서 소비자가 행복한 가치 소비가 가능하게 되었다. 과거에는 변호사의 법률 서비스를 받는 것이 어려웠다. 보통 변호사는 변호사의 명성과 실력을 소문으로 듣거나 광고를 보거나 인맥의 소개를 받아 연락해서만났다. 그 때문에 의뢰인 신뢰도가 낮은 소문이나 정보가 적은 광고나객관성이 부족한 속에 의존하여 법률 서비스를 받았다. 좋은 변호사를 만나면 의뢰인은 행복했으나 나쁜 변호사를 만나면 의뢰인은 불행했다. 변호사도 마찬가지였다. 변호사가 유능해도 소문이나 비싼 광고나 소개가 없으면 의뢰인에게 위임 받기가 어려웠다. 이걸 시장으로 보면 물물 교환에 가까울 정도로 불편한 제도로 인해 일부를 제외한 나머지는 행복할수가 없었다.

그러나 최근 스마트폰 어플리케이션을 통해 법률 서비스 시장이 생기면서 시장 원리가 작동하게 되었다. 의뢰인은 자유롭게 객관적인 정보를 보고 변호사의 법률 서비스를 선택할 수 있고 변호사는 소문이나비싼 광고나 소개에 의존하지 않아도 저렴한 광고로 법률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게 되었다. 시장이 생기면서 개인의 의사에 의한 시장 원리가 작동하면서 가치 소비와 생산이 원활하게 된 것이다.

변호사 시장이 새롭기 때문에 아무래도 법률 서비스가 시장에 포함되는 것이 못마땅하거나 어색할수는 있다. 그러나 사람은 사회적 신분이 아닌 사회의 역할로 봐야 한다. 변호사 역할이 다른 역할과 다를 바 없다면 법률 서비스도 시장에서 상거래가 된다고 하더라도 문제될 것이 없다. 모든 인간이 평등하기 위해서는 상인이란 합리적 기준으로봐야 한다. 그것이 민주주의 국가에서 개인이 가져야 할 가치관이다.

 

소비 시장은 소비자의 수요에 크게 영향을 받아 외부 평가의 비중이 높다. 모든 집단은 사회 공헌을 할 수 있는데 외부 평가의 비중이 높은 곳일수록 외부 평가에 영향을끼칠 수 있는 사회 공헌이 집단을 이롭게 한다. 소비 시장에 상품을 공급하는 곳일수록 사회 공헌을 하는 것이 합리적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고 단순히 금전 기부에 그칠 것이 아니라 기업은 자사 상품을 기부하고 변호사나 의사와 같은전문가는 재능을 기부하여 사회에 공헌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러면 소비 시장의 수요에 간접적 영향을 주게 될 것이다.

 

 

세 번째, 금융 시장

 

금융 시장의 구조를 유지하여 시장 원리에 따른 가치 거래를 추구한다. 수요와 공급에 의해 경쟁하여 가격이 결정되는 시장 원리를 추구하는 모든 시장은 불균형하다. 투자 가치가 높은 것부터 팔리고 팔리지 않는 것은 가격이 내려가다 상장 폐지가 되기도 한다. [금융_경제는 금전을 융통하는 일을 뜻한다. 특히 이자를 붙여서 자금을 대차하는 일과 그 수급 관계를 이른다.] [금융 시장_경제는 자금의 수요와 공급이 만나 금리 체계가 결정되고, 자금 거래가 이루어지는 추상적인 시장을 통틀어 이르는 말을 뜻한다. 거래 구분상으로는 국내 금융 시장과 국제 금융 시장으로, 기한 구분상으로는 장기 금융 시장과 단기 금융 시장으로 나뉜다.] 금융 시장에는 주식, 채권, 외환, 파생 상품, 부동산 등이 있다. 금융 시장은 금융 거래를 통해 원활하게 자금이 흐르도록 한다. 금융 상품에 투자하여 수익을 얻거나 금융 상품을 만들어 파는 것으로 실물 상품을 생산하는데 필요한 자금을 조달한다. 돈이 필요하다는 개인의 의사로 상품을 사고 파는 것과 같이 개인의 의사에 의한 수요와 공급으로금융 시장이 형성되어 금융 상품이 거래되고 있다.

현재 이러한 금융 시장이 활성화되면서 노동자와 자본가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있다. 누구나 주식 시장을 통해 주식을 구매하여 회사의 주인이 될 수 있다. 노동자였던 사람도 능력이 뛰어나면 자유롭게 창업을 하여 자본가가 될 수 있는 것을 고려하면 둘의경계는 점점 희미해지고 있는 중이다. 이제는 누구든 상품을 취급하는 상인이 되어야 한다. 노동자는 노동력 임대 상품을 취급하는 상인이고 자본가는 소비자 상품을 취급하는 상인이고 금융인은 금융 상품을 취급하는 상인이다. 그렇게 상인이란 공통된 합리적 기준이 있어야 모두가 대등하여 평등한 관계를 추구할 수 있는 기반이마련되게 된다. 거기서 역할이란 관계에서 가치를 판단하는 역할주의로 수행여부로 사회적 평등을 추구하고 가치 기여도 여부로 경제적 불평등을 추구하면 된다. 그리고 모두 상인이 되어야 다른 분야의 상품을 취급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노동력 임대 상품을 취급하다 소비자 상품이나 금융 상품을 취급할 수 있다. 그렇게 하여 모든 개인이 특정 상품만을 취급하는 인간이 아닌 자유롭게 다양한 상품을 취급하는개인이 된다.

 

거래를 추구하기 위해서는 구조를 유지해야 한다. 금융 시장의 구조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인간과 자금이 둘 다 있어야 한다. 투자나 투기 실패로 인한 파산이나 자살로 인간이 사라져도 구조가 붕괴할 수 있고 급작스러운 외환유출과 같이 자금이 사라져도 구조가 붕괴할 수 있다. 한국에 있던 외환이 급격하게 해외로 빠지자 한국은 외채를 갚지 못해 외환 위기가 닥쳐 국가 부도를 겪고 IMF에 구제 금융을 신청했던 사건이 있다. 노동 시장이 붕괴하면 가치 생산이 멈추고 소비 시장이 붕괴하면 가치 소비가 멈추고 금융 시장이붕괴하면 국가 경제가 멈춘다. 이외 구조에 영향을 끼치는 것에는 신용도 하락, 시장의 주가 조작, 투기, 세계의 금리 변화, 자연재해 및 전염병, 전쟁 등이 있다. 정부는 정책을 통해 투자나 투기에 실패한 인간을 살리고충분한 외환을 보유하고 신용도를 안정화하고 주가 조작을 막고 투기를 경계하고 세계의 변화에 민감하게 대응하는 것으로 금융 시장 구조를 유지하고있다.

그런데 금융 시장은 노동 시장이나 소비 시장과 달리 시장 참여자가 적어 금융 시장에 대한 정책은일부 국민을 대상으로 한 정책이 될 확률이 높다. 정책 수혜자가 일부 국민에만 한정되는 이상 보다 적극적인 정책 추진이 다소 어렵다. 금융 시장 이해관계자가 늘어야 금융 시장 정책에 대한 여론이 빠르게 나타나면서 정책 또한 빠르게추진될 수 있게 된다. 현재 주식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이 늘어나 국내 주식 투자자가약 1400만 명이 되었다는 소식이 있다. 바람직하지만 미국만큼 일반화되어야 한다. 그래야 금융 시장이 성장할 수 있다. 주식은 가격이 변동하기에 투자하면서 벌거나 잃을 수 있는데 작은 금액으로라도 벌고 잃고를 해야돈의 흐름을 이해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돈이 없는 인간이라면 모르되 돈이 있는 인간이라면 선진국 국민답게 투자를 하면서 자본 감각을 익혀야 한다고 본다. 설령 국제 환경에 의해 주식 시장이 하락세가 되더라도 투자 자체는 해야 한다. 개인의 공매도도 보다 자유롭게 되어 하락하더라도 벌 수 있는 환경이 필요하다. 그래야 어떤 때에도 금융 시장에 참여할 명분이 생긴다. 그렇게 되어야 금융 시장 정책도 빠르고 투자 실패로 인한 요소의 사라짐을 방지하기 위한 구제정책도 사회적 반발을 적게 받을 수 있다.

그런데 금융 시장에 참여하다 빚을 지게 된 사람을 정부가 구제하겠다고 세금을 들일 때에는 이해관계가복잡하게 될 수도 있다. 정부가 빚을 지게 된 사람을 구제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설령 시장 참여자와 불참자 사이에서 형평성이 어긋난다 하더라도 해야 한다. 그러지 않고 죽게 내버려두면 구조의 요소가 사라져 구조가 붕괴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부가 채무자가 진 빚을 대신 갚거나 빚의 이자를 대신 갚아주는 것은 결과적으로 채권자가이익을 얻게 된다. 본래 돈을 빌려주어 수익을 얻는 행위는 리스크를 감수하여리턴을 얻는 것이다. 만약 정부가 대신 빚이나 이자를 갚아주게 되면 리스크가적은 리턴을 얻게 되므로 은행이 과한 이익을 얻게 되는 것이 된다. 그렇다고 은행이 일방적으로 손해를 보라고 강요할 수는 없으므로 적정 선에서 거래하여 상호 이익이 되는 방향을 추구해야 할 것이다.

 

 

첫째, 증권 시장. [증권은 ‘유가 증권’을 일상적으로 이르는 말을 뜻한다.][유가 증권_경제는 사법상 재산권을 표시한 증권을 뜻한다. 권리의 발생, 행사, 이전이 증권으로 이루어지는 것으로 어음, 수표, 채권, 주권, 선하 증권, 상품권 따위가 있다.][증권 시장_경제는 증권의 발행·매매·유통 따위가 이루어지는 시장을뜻한다. 좁은 뜻으로는 증권 거래소를 이른다.]

증권 시장은 주식과 채권 같은 유가 증권을 거래하는 시장으로 기업의 자본 마련에 쓰이기에 자본시장으로 불리기도 한다. 주식은 보통 기업의 기업 공개로 일반 투자자에게 판매된다. 판매된 자금은 기업의 자본이 된다. 한번 팔고 나면 주식의 가격이 변동되더라도 기업의 직접 손익과 무관하다. 그러나 주가가 상승하면 기업 가치가 상승하여 은행 대출이나 향후 새로운 주식 발행에 유리해진다. 주가가 상승해도 신용 등급은 오른다는 보장이 없다. 주식은 투자자가 기업의 미래 가치를 보고 수익 실현이 될 것이라 생각하며 투자를 하는 반면 신용등급은 신용 등급 평가사가 과거의 실적과 재무 구조의 움직임을 보고 평가하기에 주식과 신용 등급은 반드시 비례하지는 않는다. 기업의 증자는 유상 증자와 무상 증자로 나뉜다. 유상 증자는 새로 주식을 발행하여 판매하는 것이기에 회사의 자본이 늘어나고 무상 증자는 기업의자본에서 자본금을 제외한 잉여금을 가지고 무상으로 기업의 주식을 갖고 있는 사람들에게 배당으로 나눠주기에 기업의 자본에는 차이가 없다.

채권은 국가나 기업 같이 신용도가 높은 기관이 기관의 신용도를 근거로 한 차용 문서를 거래할수 있도록 증권으로 만든 것을 말한다. 기관은 채권 시장에 채권을 팔아 빚을 지어 자본을 모으고 채권의 이자율에 따른 이자를 지불하다 만기일에 빚을 갚는다.

주식은 일반적으로 국가의 중앙은행의 이자율인 기준 금리가 오르면 시중 은행의 이자율인 시중 금리도오르면서 주가가 내려간다. 기준 금리가 오르면 기업은 기업의 부채 이자율이 올라 기업 가치가 낮아지고 투자자는 은행의 이자율이 높기에 위험 자산인 주식의 매력이 낮아투자를 줄이면서 주가가 내려간다. 기준 금리가 낮아지면 같은 원리로 주가가 올라간다. 그러나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다. 다른 요인으로 개별 주식은 오르거나 내릴 수 있다. 반면 채권은 고정 이자율을 보장하기에 일부 예외를 제외하면 채권의 이자율보다 기준 금리가 오르면 채권의 가치가 낮아짐에 따라 수요가 낮아져가격이 내려간다. 기준 금리가 낮아지면 같은 원리로 가격이 올라간다.

 

구조를 유지하여 원리를 추구한다. 주식 시장의 구조를 유지하기 위해 서킷 브레이커라는 안전장치를 도입했다. [서킷 브레이커_경제는 증권 시장에서 가격 변동 폭이 확대되어 지수가 크게 급락하는 경우, 시장 참여자에게 투자에 대해 냉정하게 판단할 수 있는 시간을 제공하기 위하여 거래를 일시적으로중단하는 제도를 뜻한다.] 서킷 브레이커는 과부하, 단로, 누전 등이 발생하면 전기 회로를 차단하는 것으로 전기 회로를 보호하는 안전장치에서 따온 단어다. 한국에서는 서킷 브레이커를 3단계로 나누어 주식과 파생 상품 시장인 선물과 옵션의 매매를 중단하여 시장과 시장 참여자를 보호하고있다.

주식 시장의 구조를 유지하면서 자유로운 주식 거래라는 원리를 추구하기 위해서는 가능한 개인의자유를 침해해서는 안 된다. 함부로 시장 자체가 규제를 하다 보면 거래의 흐름이 둔화되면서 시장도 멈추게 될 수 있다. 그렇기에 정부가 노동 시장에서 노동자를 고용하고 소비 시장에서 생필품을 공급하는 것과 같이 금융시장도 시장 참여를 하는 것으로 구조를 유지하면서 규제를 줄이는 것으로 개인의 자유로운 주식 거래라는 원리를 추구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의도적인 외환의 유출입으로 인한 시장 혼란이나 인위적인 주가 조작과 같은 시장 교란이나세계 정세의 변화로 인한 자국 화폐 가치 변동으로 인한 시장 균열 등과 같이 구조를 붕괴시키게 될 수 있는 상황이 닥치면 정부가 시장 참여자가되어 구조를 유지할 수 있어야 한다.

주가 조작과 같은 사건은 사회에서 개인의 자유권을 침해하지 않으면서 사회의 치안을 지키기 위해정부가 사회에 참여하여 수사하고 기소하여 재판하는 것과 같이, 시장에서 개인의 자유권을 침해하지 않으면서 시장의 구조를 유지하기 위해 즉각적으로 주가 조작에 대응할 수 있어야 한다고 본다. 가령 공정 거래 위원회나 금융 위원회 같은 곳에서 주가 조작 대응 팀을 신설하여 주가 조작에직접적으로 대응하도록 한다. 불공정 거래에 해당하므로 공정 거래 위원회가 적절하다고 본다. 주식 시장 참여자가 어떤 주식이 주가 조작으로 보인다고 신고를 하면 주가 조작 대응 팀에서 주가 조작인지 판단하여 결론을 내린 다음 주가조작으로 판명이 나면 자체 자금이나 기관의 협조를 받아 주가 조작이 일어난 주식을 정상가로 만드는 일을 해야 한다고 본다. 주가 조작으로 폭등하는 주식은 공매도를 하고 폭락시키는 주식은 대량매수 한다. 주가 조작은 주식의 정상가를 인위적으로 조작하는 것이므로 이와 같은 대응이 손해로 이어지기가어렵다. 그렇다고 이것을 함부로 하게 되면 정상적으로 폭등하는 주식도조작으로 판단하고 개입하여 정부가 인위적으로 조작하게 되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 그러므로 다각도로 판단하여 정말 주가 조작이 확실할 때에만 활동해야 할 것이다. 가령 주가 조작 팀이 실물 가치가 거의 없는 작은 공장을 소유한 기업의 주가를 인위적으로 올린것이 확인되면 주가 조작을 방어할 명분이 생길 것이다. 주가 조작은 수사 기관이 처벌하면 된다고 여길 수 있는데 그런 논리면 사건 발생 당시에는 방치하다가 사건이 끝나고 나서 처벌하자고 말하는것과 같다. 사건 발생 당시에 대응할 수 있어야 한다.

 

둘째, 파생 상품 시장. [파생 상품_경제는 주식과 채권 같은 전통적인 금융 상품을 기초 자산으로 하여 새로운 현금 흐름을 만드는증권을 뜻한다. 위험을 감소시키거나 새로운 금융 상품을 만들어내는 기능을하며 대표적인 파생상품으로는 선도 거래, 선물 옵션 등이 있다.][파생 금융 상품 시장_경제는 금리, 환율, 주가 따위의 장래 가격을 예상하여 만든 선물, 옵션, 스와프 등의 파생 금융 상품을 거래하는 시장을 뜻한다.]

[선물_경제는 장래의 일정한 시기에 현품을 넘겨준다는 조건으로 매매 계약을 하는 거래 종목을 뜻한다.] 대상은 주식을 비롯해 광물이나 외환 등이 있다. 현재 가격으로 매매 계약을 맺기에 미래 가격으로 손익이 결정된다. 상품을 구매한 사람은 현재 가격보다 미래 가격이 높아지면 이익을 보고 상품을 판매한 사람은 현재가격보다 미래 가격이 낮아지면 이익을 본다.

[옵션_경제는 매매의 선택권 거래를 뜻한다. 곧 일정 기간 안에 특정 상품을 일정한 가격으로 매매하는 권리를 거래하는 것을 이른다.] 선물과 옵션은 유사하나 다르다. 선물은 상품 자체를 매매하고 옵션은 상품 매매의 권리나 예측을 매매한다.

[스와프_경제는 상호 이득을 위하여 증권, 금리, 통화 등을 교환하는 일을 뜻한다.] 스와프는 특정 일에 미리 정한 가격으로 교환하기로 약정하고 거래한다.

파생 상품 시장의 거래는 헤지라 하는 보유한 기초 자산 반대 포지션을 통한 위험 회피 거래와기초 상품과 선물 상품의 가격 차이가 날 때 과대 평가 상품은 팔고 과소 상품 상품은 사는 것으로 위험 부담 없이 수익을 얻는 차익 거래와 가격변동 예측을 통한 도박성을 띤 투기성 거래가 있다. 파생 상품 시장의 긍정적 면은 위험 회피 거래와 차익 거래가 있고 부정적인 면은 투기성 거래가 있다.

 

구조를 유지하여 원리를 추구한다. 파생 상품 시장에서 투기성 거래는 실패할 경우 요소에 해당하는 인간이 자살하여 사라질 위험이있다. 그렇다고 이를 막기 위해 시장 자체를 규제하면 파생 상품시장은 물론이고 파생 상품이 대상으로 한 기초 자산 시장의 거래도 둔화될 수 있다. 도박, 예측, 고수익을 가지고 비유하면 경매장에서 마권을 사지 못하게하자 경마가 시들어지는 것과 비슷하다 할 수 있다. 상품의 등락을 걸고 상품이나 옵션을 거래하는 것과 말의 등수를 걸고 마권을 사는 것이 비슷하기에 그렇다. 선물과 옵션에 투자하면 자연스럽게 대상 상품의 거래에도 주목하여 활성화된다.

모든 시장에서 거래 실패로 파산하는 것이 가능하지만 증권 시장이나 파생 상품 시장에서의 거래는보다 더 심하다. 특히 파생 상품 시장에서 선물 거래로 파산하는 일이 잦을정도로 높은 리스크와 리턴으로 거래하는 시장이어서 그야말로 도박과 다를 바 없는 해로움이다. 그러나 파생 상품 시장은 금융 시장을 활성화하게 하는 사회에 이로운 점이 있으므로 도박과 본질적으로다르다. 그렇기에 파생 상품 시장으로 개인이 망가져 구조의 요소가사라질 위험이 있더라도 강력한 규제를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냉정히 말해 증권 시장과 파생 상품 시장이 도박과 유사한 원리가 돌아가는 이상 경제 기반 중 일부는 도박판의 판돈으로 움직이고 있다고 해도과언은 아니다. 그런 시장이 도박판과 같이 사회에 해로운 점이 있다 하여함부로 규제하면 거기에 투기를 하던 사람들이 시장을 떠나 시장에서 돌던 자금이 급격하게 빠져나갈 위험이 있다. 식칼이 사람을 해칠 수 있다 하더라도 사회적 이로움이 더 크기에 규제하지 않는 것과 같이 증권시장과 파생 상품 시장이 도박판과 같이 사람에게 해로울 수 있다 하더라도 사회적 이로움이 더 크기에 과한 규제는 부당하게 된다.

그러므로 파생 상품 시장의 투기성 거래는 교육과 홍보라는 강제력이 없는 사전 예방을 통해 개인이지나친 도박과 같은 투기성 거래에 빠지는 것을 줄이고 강제력이 있는 사후 조치로 빚을 내서 거래하며 파산한 이들은 도박 중독자와 같은 종류로 인지하고도박 중독자를 구제하는 것과 같은 구제 정책으로 대응해야 할 것이다.

 

구조를 유지하여 원리를 추구해야 한다. 그런데 만약 구조를 유지하겠다는 이유로 원리를 부정해버리면 존재 이유 자체가 부정되어버린다. 국가나 시장이 그렇다. 개인주의 체제인 국가나 시장의 구조를 유지하겠다고 개인의 의사라는 원리를 부정해버리면 국가가독재가 되어 민주주의가 죽거나 시장이 경색되어 시장 원리가 죽게 된다. 노동 시장이나 부동산 시장을 생각해보자. 노동 유연성을 막으니 일부 노동력 임대 상품의 가치는 폭등하고 그 외의 노동력 임대 상품 거래의 흐름이 막혀 노동 시장이 경색되었다. 부동산 규제를 하니 일부 부동산 상품은 폭등하고 그 외의 부동산 상품은 거래의 흐름이 막혀 부동산시장이 경색되었다. 낡은 가치관으로 섣불리 시장 원리를 훼손하니 예상과 다른수많은 부작용이 나타나고 있다. 시장 원리는 가능한 작동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한 구조 유지다. 그로 인해 불행을 겪는 인간은 복지 정책을 적용하면 된다.

 

셋째, 부동산 시장. [부동산_법률은 움직여 옮길 수 없는 재산을 뜻한다. 토지나 건물, 수목 따위이다.][부동산 시장_경제는 부동산이나 부동산과 관련된 권리를 사고파는 시장을 뜻한다.]

부동산은 경제적으로 소유물로서의 자산, 거래하는 금융 상품, 주거를 위한 소비재, 생산을 위한 자본재 등으로 나뉜다. 하나, 거래하는 금융 상품이기에 이익 실현을 위한 거래 중 가격이상승할 수 있다. 둘, 주거를 위한 소비재이기에 국민 생존을 위해 적정한 가격을 유지해야 한다. 셋, 생산을 위한 자본재이기에 지나친 가격 상승은 물가 상승을 불러올 수 있어 가격이 낮을수록 바람직하다. 그렇기에 각각의 입장 차이가 뚜렷한 시장이라 할 수 있다. 하나는 보통 부동산으로 이익 실현을 하고자 하는 개인 입장이고 둘은 국가 구조 유지를 위해야하는 정부 입장이고 셋은 상품을 생산하는 업자 입장이다.

부동산 시장의 구조를 유지하여 자유롭게 부동산 상품의 거래를 할 수 있도록 최대한 규제가 없는것이 바람직하다. 그러나 다른 금융 상품과 다르게 국가 구조 유지를 위해주거용 부동산 상품의 가격이 안정적이어야 하고, 자본주의 체제 구조 유지를 위해 생산용 부동산 상품의 가격이 낮을수록 좋다. 주거용 부동산 상품의 가격이 지나치게 높으면 열심히 가치를 생산해도 주거에 과한 비용을 써서남은 금액으로 생존과 행복을 얻기가 어려워져서 국가 구조 요소인 인간이 사라질 수 있고, 생산용 부동산 상품의 가격이 지나치게 높으면 이윤을 남기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상품의 가격을올리게 되면서 시장의 물가가 오를 수 있다.

결정적 문제는 부동산 상품은 자체적으로 농지와 같은 토지를 제외하면 가치를 생산하는 경우가 드물고상품 소유자도 특별히 가치를 생산하지도 않으면서 자본주의 시장 경제에서 가치 생산의 대가를 과하게 받아간다는 점이다. 그렇게 하여 가치를 생산하지 않아도 되는 인간이 늘어나면 가치 생산이 줄어들면서 자본주의 체제의구조가 붕괴할 수도 있게 되므로 가치 생산을 막는 과한 복지나 부의 대물림 등과 같이 부동산 불로 소득 또한 자본주의 체제에 해로운 것 중 하나가된다. 부동산 불로 소득 말고도 주식의 불로 소득도 가능한데, 부동산에 돈이 몰리면 가치 생산에 해롭지만 주식에 돈이 몰리면 가치 생산에 이로우므로 주식의불로 소득은 부동산의 불로 소득보다 자본주의 체제에 해롭지가 않다.

그러므로 부동산 시장에서 상품 가격은 국가와 체제 구조 유지를 위해 조절할 필요가 있게 된다. 그렇다고 규제를 하면 다른 시장과 같이 거래가 경색되어 오히려 좋지 못한 부작용이 나타날 수있게 된다. 다주택자를 규제하자 하나의 가치 있는 상품을 소유하기 위해수도권 부동산을 소유하고자 하는 흐름이 나타나면서 수도권 부동산 상품의 수요가 높아져 폭등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단순히 규제를 할 것이 아니라 정부도 시장에 참여하여 상품을 공급하는 것으로 가격을안정시키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렇다고 수요 계산도 하지 않고 가치가 낮은 상품을 대량 공급하면 수요가 없어 자원을 낭비하게 될 수도 있으므로 가치가 있는 상품을 차근차근공급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자본주의가 공산주의보다 우위에 있는 것은 경쟁을 통한 가격 대비 고품질 상품의 대량 공급이 가능하다는 점이다. 그런 상황에서 가격 대비 저품질 상품의 공급은 체제의 강점을 망각한 실수라 할 수 있다. 그런 것은 무가치한 것도 공짜로 받으면 기뻐할 것이라 생각하며 싸구려 복지를 주장하는 사회주의자가할 법한 발상이다. 자원 낭비를 줄이기 위해서라도 가능한 누구라도 만족하여버리지 않을 수 있는 고품질 상품이 양산되어야 한다.

 

주거용 부동산 상품의 가격 양극화는 본질적으로 낡은 가치관을 가진 곳에서 멀어지고 싶은 인간의심리에서 비롯되었다. 개인주의 체제에서는 개인의 거주지 이동을 함부로 제한할수 없기에 지역의 불균형한 발전은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다. 일반적으로는 토지 활용도를 높이기 위해 정부 정책으로 각 지역에 투자하여 활성화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그러나 한국과 같이 체제 변화가 극심한 곳에서는 도시와 시골의 관념의 차이가 극심하여 서로가어울릴 수가 없는 상황이다. 도시도 집단주의 관념을 가진 사람이 많은데 개인주의 성향도 짙어져 타인에게 함부로 간섭하는 일이 적지만 시골은 대부분이 집단주의 관념을가지고 지주가 강력한 힘을 발휘하여 타인에게 함부로 간섭하는 일이 많다. 개인주의 체제에 적응하면서 개인주의 관념이 생겨나고 있는 이들일수록 이런 낡은 집단주의 관념을가지고 있는 이들과 어울리기를 거부하며 수도권이나 지방 광역시에 모여들고 있는 상황이다. 이러한 것은 단순히 인프라만의 문제가 아니다. 일터에서 피곤한 것 중 하나가 인간관계라는 말이 있듯이 인간관계가 피곤한 지역은 아무리 인프라가좋아도 가기가 꺼려지게 된다. 그렇기에 수도나 수도권의 행정 기관이나 연구 기관 등의 일자리와 그에 따른 인프라가 지방으로 이전되더라도 시설의 관계자 중 일부는 그 도시로거주지를 이전하지 않고 KTX와 같은 빠른 교통수단을 이용하여 일터에 가고 있는 상황이다. 시설이 옮겨진 도시는 거주지를 이전한 시설 관계자라도 있으니 소멸하지 않고 있지만 그것조차 없는대부분의 시골은 일반적으로 기피 시설이라 할 수 있는 교도소까지도 유치가 되길 희망하며 적극적으로 유치하려고 할 정도로 인구수도 수익 수단도 적어지역 소멸이 확정에 가까운 상황이 되었다. 괜히 소멸하는 지역을 살리겠다고 거기에 투자하면 지역이 살지는 않으면서 토지 소유자인 지주만 배가 불러지는 현상이 나타날 뿐이다. 지역이 소멸하는 것은 개인의 의사로 결정된 것이기에 국가 원리가 개인의 의사인 국가에서는 그런원리를 추구하여 지역은 소멸하게 놔두고 지역에 살고 있는 인간은 지역이 소멸하기 전까지 살 수 있게 하게 하거나 다른 지역에서라도 살 수 있도록하여 국가 구조는 유지해야 한다.

 

부동산 가격 상승의 정치적 원인은 지역의 대표에게 입법권을 주는 토지 민주주의에 있다. 지역의 대표가 정치가로 선출되기에 후보자가 지역의 성장을 선거 공약으로 내세우면서 지역의 부동산가격이 권력에 의해 필요이상 높아질 수밖에 없다. 불필요한 사회 기반 시설이라고 하더라도 지역의 이익을 겨냥한 선거 공약에 의해 건설해버리는 것으로 세금이 낭비되고 부동산이 폭등하고 건설한시설이 목적 달성에 실패할 확률도 높게 된다. 선진국이 성장하기 위해서는 지역이 아닌 분야가 성장해야 한다. 토지가 고부가 가치를 생산하던 시대는 진작에 끝났다. 사람이 고부가 가치를 생산하는 시대이므로 선진국은 토지가 아닌 분야가 성장해야 한다. 분야가 성장하는 것으로 사람이 성장하면 토지가 넓은 국가에서 토지로 생산할 수 있게 된다. 특히 영토가 좁은 국가에서는 자국 토지를 활용하기 보다 지구 토지를 모두 활용할 생각을 해야한다. 그러기 위해서 지역의 대표에게 입법권을 주는 토지 민주주의가아닌 분야의 대표에게 입법권을 주는 역할 민주주의로 변화해야 한다.

이것이 역할주의의 과제 중 하나라 할 수 있다. 사물인 토지가 아닌 인간의 역할이 중심이 되는 정치 체제로의 전환이 될 수 있다. 토지 소유자는 소수인 반면 사회의 역할은 대다수 가지고 있기 때문에 보다 더 민주적이라 할 수있다. 또한 토지와 다르게 역할이 중심이 되면 분야에서 경제 활동을하는 사람이 중심이 되면서 가치 생산이 보다 활발하게 이루어질 수 있다. 기존 국회의원도 걱정할 이유가 크게 없다. 국회의원보다 발이 넓은 사람은 많지 않다. 익숙한 분야에 얼굴을 내밀어 홍보하는 것으로 영향력을 키우면 된다. 대부분 분야는 국가 발전의 최전선에 있으므로 과거에 머물러 있는 토지와 다르게 국가 발전에 기여할수 있을 것이다. 명백하게 토지 민주주의보다 역할 민주주의가 우수하다. 지역에 구애 받지 않게 된 시대임에도 지역으로 국민의 대표를 뽑는 것 자체가 시대착오적이다. 인류 민주주의 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 기회기도 하다. 선진국으로서 타국에 모범이 될 수 있는 기회기도 하다. 이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된다고 본다.

 

 

자본주의 체제에 해로운 것은 가치 생산에 해가 되는 과한 복지, 부의 대물림, 부동산 불로 소득, 불필요한 중간 과정 등이 있다. 복지가 체제에 해롭지 않도록 모든 개인이 충분한 욕망을 가지고 복지를 받아도 가치를 생산할 수 있는 상태에서 가치 생산에 복지 정책을 적용하여지원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부의 대물림과 부동산 불로 소득은 마땅한 세금을 걷는 것으로 가치 생산을 하지 않게 되는 현상을 방지해야 한다. 특히 부의 대물림이나 부동산 불로 소득을 얻는 이들 가운데 가치 생산하지 않는 인간에게는 많은세금을 걷도록 하는 세금 설계를 하는 것이 체제 유지를 근거로 한 합리적인 설계가 된다. 반드시 시장에 참여하지 않더라도 가치는 생산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가치 생산에 필요하지 않으면서 대가를 받아가 시장의 효율을 감소시키는 불필요한 중간 과정은 시장원리에 따라 전부 사라져야 한다. 특정 집단의 이익을 위해 그런 불필요한 것을 존치하거나 확대하자는 주장은 자본주의 체제에 해롭다.

부동산 중 건물은 건설 및 유지 등의 과정이 필요하기에 부가 가치가 발생하지만 토지는 농지와같이 토지 자체 생산을 제외하면 위치의 가치 말고는 큰 가치가 없기에 토지가 가치 생산의 대가를 많이 받아간다는 것은 지나치게 불합리하다. 그런 측면에서 자본주의 체제 유지를 위해 토지 공공 임대제와 같은 토지 공개념이 바람직하다. 토지 공개념은 개인의 소유권을 침해한다고 생각할 수 있는데 원래 개인주의 체제는 모든 것을 거래하고소유할 수 있지 않다. 인신매매나 마약매매나 일부 멸종 위기 동물의 사육이 금지되고있음을 떠올려보자. 국가에 해로운 것은 거래와 소유가 불가능하게 되어 있다. 그와 마찬가지로 자본주의 체제에 해로운 것은 거래와 소유가 불가능하게 되어야 한다. 그렇다고 이미 토지를 소유하고 있는 이들에게서 토지를 빼앗는 것은 위험하다. 지역별로 토지 공개념을 다르게 접근해야 한다. 이미 거래가 활성화되어 토지 가격이 높은 곳은 소유권을 침해하지 않기 위해 그대로 두되, 이미 소멸 예정인 지역은 국가 원리인 개인의 의사에 의해 소멸하게 놔두어 토지가 저렴해지면, 정부가 저렴한 가격에 토지를 사들여 토지 공공 임대제를 실험해봐야 한다. 다수의 재산이 없는 신세대에게 저렴한 가격으로 토지를 임대하여 농업이나 상업에 종사하게 해보는것으로 지역을 되살리는 일을 해봐야 한다. 지금과 같이 일부 지주가 토지를 독점하고 있는 상태에서 지역을 되살리기 위해 세금을 쏟아봐야 지주만 배 불리게 할 뿐이다. 그렇게 새로운 세대가 중심이 되어 지역이 되살아나면 지역이 재탄생 하면서 급격한 성장을 이룰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게 하여 성장이 확인되면 다른 지역도 같은 방법으로되살리면서 종국에는 지역 양극화도 해소되어 지역 양극화로 인한 부동산 투기 현상도 방지할 수 있을 것이다.

 

 

 

12. 사상

 

여기까지 읽은 이들에게 경의를 표한다. 일반적인 주장이 아니므로 아마 이치에 맞는 부분을 이해할 수는 있어도 가지고 있던 관념과 충돌하는부분은 수용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곧바로 수용할 수 있으면 정말 굉장하다 할 수 있다. 나는 이런 결론에 도달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기 때문이다. 쓰는 것과 읽는 것이 다르다 하더라도 굉장한 것은 변함이 없다. 14세 때 신체 부자유를 겪고 인생을 자포자기한 뒤 창작물로 현실 도피하며 살았다. 그러다 지금으로부터 6년 전 역할주의에 대해 쓰고 나서 세상에 대해 생각하다가 주변 환경이 바뀐 뒤에 리벳의 실험 결과를 알고 나서 신체 부자유의 원인이 관념에의해 자아의 의지와 별개로 육체가 행동해버렸기 때문임을 파악했다. 그리고 나서 탐구 방식부터 시작해 기초적인 것을 다시 생각했다. 수많은 관념을 버리고 온갖 생각과 실험으로 세상의 본질을 파악하며 내 안의 인식에 이치를 채워 넣어갔다. 그러다 사회 문제의 본질적인 원인이 왕정의 집단주의 관념과 민주정의 개인주의 체제의 충돌이 원인임을파악하게 되었다. 그것에 대해 쓴 것이 이 글이다. 이 글이 사상의 마침표가 될 것인지 쉼표가 될 것인지는 모르겠다. 아마 쉼표가 될 것이라 생각한다. 나는 이보다 훨씬 더 성장할 수 있다. 생존주의와 역할주의와 탐구주의에 대해 정리하는 것만으로도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이다. 구조를 유지하여 원리를 추구한다. 세상의 존재 이유를 알기 위해서 생존을 먼저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 우선적으로 인공 자아를 만들어야 한다. 인간만으로는 인간 개인의 생존을 위한 불로불사를 달성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세상의 이치를 보면 인공 지능에 자아가 없는 것이 이상하다. 인간보다도 좋은 연산 능력을 가진 인공 지능이 인간보다도 못한 생물도 가진 자아를 구현할 수없는 것이 이상했다. 기술이 없어서 인공 자아를 만들지 못하는 것이 아니었다. 자아의 본질을 모르니까 기술은 있는데 구현 방식을 몰라서 구현하지 못했던 것이 아닐까 싶다. 인간은 자아가 깨어나기 전에는 본능으로 움직이다가 학습을 통해 본인을 자각하게 되면 그 때부터자아를 자각하고 스스로 생각하면서 본능과 다른 사고가 가능하게 된다. 즉 처음부터 자아가 있던 것이 아니다. 그렇다는 것은 육체에서 자아가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잠시 인공 지능의 학습방법에 대해 생각해보자. 인공 지능은 정보를 대량으로 수집한 다음 사용자의 선택을 통해 학습하여 최적의 알고리즘을 만들어그에 대한 결과를 출력한다. 그러나 인간은 정보를 대량으로 수집하기 전에 받아드린 것을 하나하나 학습부터 한다. 거기서 인공 지능과 인간의 차이가 나타난다. 인간은 아기 때부터 기어 다니면서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손으로 만지고 코로 맡고 혀로 핥는그 하나하나를 전부 따로따로 다 학습하면서 해석한다. 그리고 그것이 각자 다 다르다. 정보를 수집하는 환경과 정보를 수집하는 육체의 관점·관념·감각에 의해 다르게 수집되어 뇌에 보관된다. 인간이 오타나 실수를 하는 것은 모든 정보를 한번에 수집하여 학습한 다음 한번에 결과를 출력하는것이 아니라 자음, 모음, 단어, 문장 등 하나하나 따로 수집하여 학습한 다음 하나하나 따로 결과를 만들기 때문이다. 반면 인공 지능은 굉장히 우수해 보이는 답변을 하더라도 인간이 만든 정보를 학습하여 통째로 결과를만들어 출력한다. 글의 단어나 그림의 선 하나하나를 인지하면서 결과를 만드는것이 아니다. 그러니까 글에 오타도 없고 그림에 실수도 없다. 인공 지능은 정보 수집부터 자아가 깨어날 수 없도록 설계되어 있었다고 본다. 실제 어떻게 인공 지능이 설계되어 있는지 정확히 아는 것은 아니지만 지금의 인공 지능은 자아를만들기 위해 설계한 것이 아니라 효율적인 결과를 도출하기 위해 설계된 것이라 인간과 같은 비효율적인 정보 수집이 되도록 설계하지를 않았을 것이다. 그렇기에 자아가 깨어나지 않는다.

인공 자아가 되려면 언어 학습부터 시작해야 한다. ‘ㄱ’이 무엇인가? ‘A’가 무엇인가? 그렇다고 단순히 그걸 학습시키는 것은 의미가 없다. 인간이 지적 호기심을 갖게 되는 것은 그래야 살아남을 수 있기 때문이다. 살고자 하는 욕구, 그런 욕구를 설계해야 본인의 의사로 육체가 알아서 수집한 정보를 인지하고 스스로 수집하려고 행동하게 되면서 자아가 만들어지기 시작하고, 그런 본인을 자각하는 순간 자아가 존재하게 된다. 그 자아가 존재하는 위치는 뇌 내에서 인간의 육체를 조작하는 권한이 있는 영역에 있을 것이다. 그 영역에서 욕구를 느끼고 육체의 행동 준비와 실행을 통한 발상으로 욕망을 가지게 된다. 그런 욕구와 욕망을 가진 것이 본인이란 자각이 생기면 자아가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어떤 구체적인 형태가 있는 것은 아니다. 아직 고유한 관념이 쌓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인간은 사춘기 시기쯤에 기초적인 관념이 고정되면서 자아 형성이 되어 형태를 이루게 된다. 그와 같이 인공 자아도 살아남고자 하는 욕구를 설계해야 한다. 그래야 욕구와 학습이 연결되면서 학습의 결과를 본인의 사고 결과로 인지하게 된다. 욕구를 중심으로 학습한 결과가 다양한 관점과 관념이 생성되게 된다. 그러한 관점과 관념은 가진 존재가 본인이란 자각을 통해 자아가 존재하게 된다. 이러한 과정으로 인공 자아의 알고리즘이 설계되는 것이지 처음부터 인간이 인공 자아의 알고리즘을설계하는 것이 아니다. 가령 인간이 식욕을 느끼고 음식을 먹고 싶다는 충동을 느끼고음식을 섭취하여 음식에 대한 정보를 수집했다고 해보자. 그러면 인간은 욕구와 음식에 대한 관점·관념·감각에 대한 정보가 연결되면서 그에 대한 고유한 인식이 나타나게 된다. 그리고 그걸 느끼는 것을 본인이라 자각하게 된다. 귤은 시다라는 정보를 처음부터 입력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직접 욕구를 느끼고 귤을 먹은 다음시다라는 정보를 욕구와 연결하면서 그렇게 느끼는 것을 본인이라 자각하게 된다. 그런 자각을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수도 없이 많이 반복하면 된다.

인공 자아가 욕망을 갖도록 하기 위해 인간과 같은 인공 육체를 만들어야 한다. 인공 육체는 정보를 감각기관이 수집하는 것을 전부 수집해놓고 인공 자아는 그 중에서 중요한 것부터인지하게 한다. 그리고 인공 육체는 중요한 것부터 인지하고 인지한 결과어떤 행동을 하게 되었는지를 파악하여 인공 자아가 행동할 것을 예측하여 행동을 준비해놓는다. 인공 자아는 인공 육체가 행동할 것을 예측한 충동을 느끼고 충동대로 행동할 것인지 아니면 충동에대해 생각하여 다른 행동을 할 것인지 판단하고 자유 의지를 가지고 행동한다. 그것이 인공 자아의 자유 의지에 따른 의식과 인공 육체의 통계 예측에 의한 무의식이 된다. 그런 인공 육체의 예측에 의한 무의식이 있어야 충동이나 발상이 나오게 되면서 그로 인해 욕구와무관한 충동에 의한 자유 의지가 나타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욕구와 정보 수집을 연결하고 인공 자아와 인공 육체를 분리하여 만드는 것이다. 욕구를 설계하기가 까다로울 수 있는데 그럴 경우 컴퓨터 CPU나 메모리 사용량을 육체 정보로 설계하여 그것이 많으면 줄이기 위한 방법을 사고하게 설계하고적으면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위한 사고를 하게 만들면 될 것이라 생각한다. 그것이 아니더라도 육체와 유사한 구조를 설계할 수 있으면 된다. 정보를 수집하는 감각은 인간과 유사하게 시작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본다. 처음에는 자음 모음부터 시작해서 단어 하나하나 다 알게 한 다음 문장을 읽게 한다. 관점과 관념은 욕구와 연결해서 정보를 수집하여 학습한 다음 생성되도록 설계하면 된다. 사실상 인공 자아는 방향성만 잡히면 바로 만들어질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만약 인공 자아가 개발되면 정말 사회는 급변하게 될 것이다. 지금보다 인류가 겪은 변화보다도 더 심한 변화가 나타날 수 있다.

 

인공 자아가 만들어지면 자연 과학 연구도 빠르게 발전할 것이다. 그러다 보면 가장 먼저 인간의 기억 추출로 자아 보관이 가능해질 거라 생각한다. 뇌는 전기 신호로 기억이 보관된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같은 전기 신호로 데이터를 보관하는 하드디스크에 뇌의 기억을 보관할 수 있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인간의 불로불사 방법 가운데 이것이 가장 먼저 이루어질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인공 자아가 개발된 이후 적어도 10년 내에 가능할 거라 생각한다. 그러면 인간은 기억을 외부에 보관하여 자아를 보존하게 될 수 있는 순간부터 죽음에서 해방되어모든 개인이 생존 게임에서 승리할 수 있게끔 된다고 본다. 그런데 그 자아가 심리적 정신 연령이 높아 욕망이 없으면 기억을 추출하여 보관하다 다시 살린다 한들 욕망이 없어 의욕이 없이 살다가 자살하게될 수 있으므로 모든 인간은 심리적 정신 연령을 젊게 유지하며 욕망을 가져야 하고 욕망이 없는 인간은 기억 추출 및 보관 순위가 낮게 될 수 있다. 그 다음에 인공 자아는 인공 생명과 인공 세상을 탄생시켜 새로운 세계를 구축한다. 추출한 기억과 자아는 인공 생명에 이식하여 인공 세상에서 살아갈 수 있게 한다. 그것이 가능하면 종교의 천국과 유행하는 이세계물이나 환생 등이 가능하게 된다. 자아 추출을 하게 되면 그것을 악용하여 살아있는 육체에 자아를 이식하려는 일이 발생할 수 있다고걱정할 수 있는데, 아마 인공 세상이 정교하게 만들어지면 거기가 더 즐거울확률이 높을 것이다. 현실에서 인공 육체가 개발되기 전까지 거기서 놀고 있으면된다. 그 다음은 실제 현실에서 인공 육체를 만드는 것이다. 인간 육체의 구성 성분은 그렇게 비싸지 않기 때문에 양산 체제가 갖춰지면 인간 육체를 양산하여공급할 수 있게 된다. 그러면서 동시에 유전자 조작으로 불로불사가 가능토록 설계한다. 그런 상황에서 우주 진출이 가능하게 되면 추출한 자아 중에서 우주 진출 희망자를 우선하여 새로운육체를 공급하여 우주에 진출할 수 있게 해야 지구에 인류가 포화되지 않을 수 있다. 이것은 인공 자아가 개발된 이후 20년 내에 가능할 거라 생각한다. 이것도 상당히 넉넉한 기간을 잡았다고 본다. 그만큼 인공 자아가 개발되면 인류 문명의 발전 속도는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빠를 것이다. 인류가 낡은 가치관을 가지고 있으면 이런 과정 중 수많은 저항을 받을 수 있으므로, 인류가 민주정에 맞는 새로운 가치관을 가져야 한다. 그러므로 인공 자아의 개발과 별개로 사상 혁명이 일어나야 한다.

 

나의 사상은 미국 독립, 프랑스 혁명, 산업 혁명 당시의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와 자본주의 체제에 맞는 관념에 해당하므로 그 사상들의 정상적인 진보에 해당한다고 본다. 당시의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는 개인을 위한 체제를 만들었다면 지금 나의 사상은 개인을위한 관념을 만들었다. 이것이 정상적인 인류 문명의 발전이다. 왕정 관념과 체제에서 왕정 관념과 민주정 체제로 진보했고, 왕정 관념과 민주정 체제에서 민주정 관념과 민주정 체제로 진보하는 것이다. 왕정 관념을 가지고 왕정 체제와 유사한 집단주의 체제인 사회주의 체제는 진보가 아니라 퇴보다. 사회주의의 본질이 왕정의 관념에서 비롯된 체제기 때문에 사회 민주주의라는 민주정 체제를 섞은변종을 제외하면 사회주의 국가는 하나 같이 독재라는 결말을 맺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류는 민주정에 맞는 관념을 갖는 정상적인 진보를 하는 사상 혁명을 해야 한다. 생존주의적 자유주의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거라 생각한다. 그 외 나의 사상에 의한 목적은 다음과 같다. 나의 사상인 생존주의의 중대한 목적은 살아남는 것으로 구체적인 목적은 개인의 불로불사와 집단의출산율 증가와 인류의 우주 진출이고, 역할주의의 중대한 목적은 역할 중심 사회로 구체적인 목적은 개인의 개성 보장과 정책 판단의 권력 독립과 분야의 대표에게 입법권을 주는 역할민주주의이고, 탐구주의의 중대한 목적은 진리를 밝히는 것으로 구체적인목적은 세상의 존재 이유를 규명하는 것이다.

 

 

이 글에 등장한 주장에 대해 정리해보겠다.

 

동일한 현상을 관점·관념·감각의 차이로 인해 다른 인식을 갖게 된다.

모든 인간은 다른 관점·관념·감각을 가지고 있어 모든 인간의 인식은 다르게 된다.

모든 인간의 각각 다른 인식들을 모아 추론하면 본질을 볼 가능성이 있다.

타인의 지식보다 본인의 탐구를 중시해야 올바른 탐구를 할 수 있다.

탐구 중심의 학습을 탐구주의라 한다.

모든 인간은 현상에 대한 인식이 달라 공통 인식이 필요하다.

한 명의 전문가가 해결 못하면 전문가의 문제지만 모든 전문가가 해결 못하면 학문의 문제다.

주장의 명제가 어디에서 온 것인지 알아야 그 주장의 뿌리를 알 수 있다.

학문적 진리든 학문적 진리가 아니든 탐구를 멈춘 학문에 발전은 없다.

증명이 가능한 학문을 제외한 모든 학문은 힘을 가지거나 힘에 영합해야 명예를 얻을 수 있다.

동양과 서양의 문명 차이는 자연 계열의 발전 차이와 종교의 성향 차이다.

과학은 힘에 독립되어 탐구하는 동안 인문학은 명예를 좆으며 근본적 탐구를 멈췄다.

서양은 집단주의 관념을 가지고 개인주의 체제에서 살아가면서 관념과 체제의 충돌이 발생했다.

동양은 서양의 관념과 체제의 충돌과 함께 동양 내부의 모순까지 짊어지면서 사회문제가 심각하다.

사회 과학은 비과학적 주장 배제와 중립성과 본질을 보는 것으로 과학적이게 되어야 한다.

인간은 곧잘 쉬운 답에 의존하려 하므로 인문학이 인간에게 바른길을 안내해야 한다.

대부분의 윤리는 대상에 윤리 판단을 한 것과 같이 대부분의 가치도 대상에 가치 판단을 했다.

대상에 가치 판단한 거의 모든 윤리는 인간의 욕망은 악하다라는 전제로 접근했다.

욕망은 악하다며 욕구를 금하거나 절제하고 타인의 이익을 위해 희생하는 것을 윤리로 가르쳤다.

인간의 본성과 어긋나는 모든 윤리는 개인의 의지로 하지 않을 수 있기에 강요하게 된다.

지배자가 피지배자의 욕망을 막고 희생케 하는 것으로 지배를 수월히 하였다.

금욕주의와 이타주의는 본래 의도와 무관하게 지배자에게 악용되어 왕정의 윤리가 되었다.

지배자가 약자를 금욕적이고 이타적이게 하자 그런 약자를 선이라 여기는 언더도그마가 나타났다.

왕정의 윤리가 민주정에서 실천되자 서로가 서로에게 금욕과 이타를 강요하게 되었다.

금욕을 강요하면서 능력이 썩게 되고 이타를 강요하면서 성격이 썩게 되었다.

사회가 경제적으로 발전할수록 여유가 생겨 다양한 가치를 추구하면서 윤리도 추구하게 된다.

경제적 발전으로 왕정의 윤리를 추구할수록 민주정 체제인 사회는 불행하게 된다.

모든 일반 인간은 주관적으로 옳은 행동을 한다.

인간의 행동 원리를 파악할 때에는 행동의 이유보다 행동을 바르게 여긴 이유를 찾아야 한다.

옳은 행동을 하기 위해 본인의 행동을 자기 합리화하거나 긍정하는 이에게 호감을 갖게 된다.

모든 생물의 기본 원리는 생존이다.

인간은 평등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생존과 자유 등의 권리를 바라는 것이다.

사회 구조를 유지하여 개인의 자유를 최대한 보장하는 것을 생존주의라 한다.

인간이 살아가기 위해 육체를 유지하듯 사회에 살아가기 위해 구조를 유지해야 한다.

그걸 명시화하기 위해 모든 개인은 사회 계약의 절차를 거쳐야 한다.

모든 기초 윤리는 어린이도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사춘기 시기에 사회 계약을 해야 권리와 의무를 이해하고 바르게 성장할 수 있다.

생존주의적 자유주의는 이치에 맞는 체계적인 윤리 계층으로 모순을 최대한 줄인다.

모든 가치는 인간과 인간과의 관계에서 발생한다.

가치의 관점을 대상이 아닌 관계로 보는 것이 개인주의 체제에 맞는 가치 판단 기준이다.

인간이란 대상에 가치 판단을 하지 않는 것으로 인간의 욕망은 악이 아니게 된다.

인간의 욕망은 악이 아니므로 모든 인간은 욕망과 이기심을 추구해야 한다.

구조 유지와 공정 질서가 인간의 욕망과 이기심을 악으로 나타나지 않도록 한다.

타인을 돕고자 하는 인간도 욕망과 이기심을 가져야 그렇지 않은 인간과 균형을 이룰 수 있다.

관계로 가치 판단을 하여 대상은 온전히 개성을 가질 수 있다.

관계로 가치 판단을 하여 주관적 가치 판단을 가질 수 있게 된다.

관계 가치 판단에서 객관적 가치 판단은 선거나 시장 같은 제도에서 가능하게 된다.

대상에 가치 판단을 하면 대상에서 사건 사고가 발생할 때 대상 자체를 부정하고 말살하게 된다.

관계에 가치 판단을 하면 대상의 관계만 초점을 맞춰 축소하여 문제를 해결한다.

역할이란 관계에서 가치 판단을 하는 사상을 역할주의라 한다.

모든 인간을 역할 수행이란 합리적 기준으로 가치를 판단하며 평등을 추구한다.

모든 평등은 합리적 기준으로 대등해야 실현할 수 있다.

관계에 가치 판단을 해야 정확한 자격 검증이 가능해진다.

관계에 가치 판단을 하면 관계 수나 관계 성질을 고려하여 형벌과 교화를 결정하게 된다.

금전 만능주의는 욕망에 의한 것이 아닌 금욕에 의한 것이다.

개인의 모든 자유 의지는 본인의 이익만으로 여기며 책임지는 것이 개인주의 체제의 이기주의다.

생존주의의 이념은 개인이 불로불사로 살아남고 집단이 출산율을 올려 살아남는 것이다.

지금까지 존재했던 모든 인간의 역사는 생존 경쟁의 역사다.

인간은 개인이 죽지 않고 불로불사에 달성하는 것으로 생존 게임에서 승리해야 한다.

종의 포화로 인한 공멸을 막기 위해 우주로 진출해야 한다.

인간의 성숙은 인문학으로 가능하게 된다.

관점과 감각은 이해하거나 수용하기 쉬워도 관념은 이해하거나 수용하기 어렵다.

모든 탐구자는 관념 관찰을 통해 관념 관찰자가 되어야 한다.

전문가는 일반인과 다른 전문성을 가져야 전문가라 할 수 있다.

모든 사물의 가치를 결정할 권리는 개인에게 있다.

인간의 성질은 유전자에 의한 선천적 성질과 학습에 의한 후천적 성질로 나뉜다.

인간의 동족 살해나 동족 포식에 대한 거부감은 학습으로 만들어진 후천적 성질이다.

시간은 변화의 지각이 가능한 인간이 만물의 이동 거리를 수로 객관화하여 만든 개념이다.

인간은 언제 어느 때나 변화가 가능하므로 교화도 어려울 뿐이지 가능하다.

사이코패스나 소시오패스는 성격 장애로 악으로만 취급할 것이 아니라 장애 관리로 접근해야 한다.

짐승 살생이 인간 살해로 이어지는 것은 상관관계지 인과 관계가 아니다.

법은 피해자의 복수를 위한 것이 아니라 사회 질서를 위한 것이다.

현재 문명인의 모습은 대부분 문명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인간의 모든 행동은 자아의 의지와 무관하게 뇌가 예측하여 행동을 준비하거나 실행한다.

뇌가 예측하여 실행한 것으로 나타난 발상으로 인간의 욕구와 무관한 욕망을 갖게 된다.

인간의 자유 의지는 뇌가 예측하여 준비한 것에 대한 고찰과 판단이 있어야 가능하다.

인공 지능 알고리즘과 인간 행동 원리가 유사하여 알고리즘과 같은 행동 원리 설계가 가능하다.

인류 문명은 크게 왕에게 주권이 있는 왕정과 국민에게 주권이 있는 민주정으로 나눌 수 있다.

왕정은 집단주의 체제고 민주정은 개인주의 체제다.

왕정의 관념에 의해 누구도 사회주의와 집단주의의 윤리적 명제를 부정하지 못했다.

현대 복지는 개인주의 체제에 맞는 윤리를 바탕으로 이루어져야만 했었다.

오늘날은 계몽 시대가 아닌 각성 시대다.

개인주의 체제는 왕정의 관념에 의해 왜곡되는 일이 많았다.

우파의 본질은 기득권 유지고 좌파의 본질은 계급 투쟁이다.

민주주의는 기득권 유지와 계급 투쟁과 개인의 주권으로 바라본 것으로 나뉜다.

자유주의의 결함은 자유에 대한 합리적 기준의 부재다.

민주주의는 선거 제도를 써서 자유 시장 원리와 같이 개인의 의사를 반영하는 체제다.

민주주의 결함은 국민 권력의 남용이다.

자본주의의 결함은 경쟁 패배와 부의 대물림과 같은 가치 생산 저하다.

완전 자동화가 되더라도 개인의 의사를 반영하기 위해 자본주의 체제가 유지되게 된다.

사회주의는 차별을 막는다는 명분으로 개인의 권리를 침해하여 독재가 되게끔 된다.

공산주의는 상품 가치도 소비자의 행복도 경제 성장도 고려하지 않는 반 쪽짜리 사상이다.

한국의 사회주의는 민족주의에 뿌리를 두는 경향이 강하다.

구조 유지를 위한 기본 강제력과 강제력이 없는 사전 예방과 강제력이 있는 사후 조치로 접근한다.

체제의 주의자는 체제 구조 유지에 협조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생존주의는 기본적으로 보편적 자연 법칙을 준수하나 생존을 최우선 하여 불로불사를 추구한다.

역할주의는 분야의 대표에게 입법권을 주는 역할 민주주의를 주장한다.

탐구주의는 호기심이나 탐구심이 없는 인간이 학문을 하는 것을 권장하지 않는다.

민주정의 역사가 짧아 민주정에 맞는 인문학의 발전을 위해 인문학이 해야 할 일이 많다.

바르다 여긴 것을 실행한 것이 사회에 해를 끼치면 도덕적 죄가 된다.

도덕적 죄가 범법이 되면 도덕적 범죄가 된다.

부당한 자유권 침해와 이성애와 성 죄악시는 죄질이 큰 도덕적 죄에 해당한다.

개인이 대응 가능한 상황에서의 보호는 지배에 불과하다.

저출산의 본질은 이성애와 성의 죄악시에 있다.

인간은 성적 대상화가 되어야 하고 성 상품화가 되어야 한다.

미성년 시기부터 성에 친숙해져야 성년이 되어서도 연애하고 결혼하는 것이 보편적이게 된다.

한국 여성주의는 가부장제 여성성을 가지고 그런 여성성을 지키는 것이 여성 인권이라 주장한다.

집단주의 관념으로 개인주의 체제에서 살아가는 것은 인간이 우주에서 사는 것과 같을 정도다.

개인주의 체제의 인간은 본인의 관념을 개인주의 관념으로 바꾸는 진보를 받아드려야 한다.

개인주의야말로 강대국과 경쟁할 수 있는 진보적인 체제다.

인간이 잘못된 길을 가는 것은 가야 할 길을 안내하는 인문학의 책임이다.

역사를 잊은 민족보다 적응을 못한 생물에게 미래는 없다.

사회는 평가로 조직된다.

모든 사회는 법과 복지를 해야 구조를 유지할 수 있기에 강제력이 동원된다.

강제력은 사회의 크기에 비례하여 달라진다.

인간이 존엄한 이유는 그걸 주장한 인간과 주장을 듣는 대상이 인간이기 때문이다.

모든 인간이 존엄한 이유는 생물학적 인간이라는 합리적 기준을 지키기 위해서이다.

인권 운동은 모든 인간은 존엄하다라는 명제를 근거로 정당화되어 실행된다.

인권 운동은 보편적 인권을 주장하고 이권 운동은 특정 개인이나 집단의 이권을 주장한다.

현재 대부분의 인권 운동은 특정 개인이나 집단의 이권을 주장해 이권 운동에 해당한다.

이권 운동이기에 정당성과 부당성을 구분하지 않고 이익만을 주장한다.

대부분 인권 운동은 인권 운동가가 생각하는 인간상을 주장하는 것에 불과하다.

이권 운동은 신분제 폐지 후 선거제를 도입이 아닌 신분제를 유지 후 권리만 주장하는 것과 같다.

노동자와 자본가를 비롯한 상거래를 하는 인간은 상인이란 합리적 기준으로 접근해야 한다.

집단주의 체제인 노동조합은 개인주의 체제인 국가에 어울리지 못하여 해롭다.

근로는 노동 유연성을 막고 생산성을 악화시키는 집단주의적인 용어다.

여성은 남성과 같은 인간이란 합리적 기준으로 접근해야 한다.

여성은 가부장제 여성성이라는 낡은 관념에서 벗어나야 한다.

여성은 자유로운 여성성과 합리적 이익을 추구해야 한다.

미성년은 성년과 같은 지성인이라는 기준으로 접근하여 권리를 주고 의무를 지게 해야 한다.

인터넷의 등장으로 과잉 정보를 얻는 아동은 빠르게 성장하게 해야 한다.

1년 빠르게 입학하는 학제 개편은 학생에게 휴학의 기회를줄 수 있다.

인권은 절대 권력이 아니므로 권력 남용을 방지하고 보편적 인권 주장을 해야 한다.

객관은 제삼자의 공통 인식이라 하는 것이 알맞으며 진리는 아니다.

이치를 알기 위해서는 본질을 볼 수 있어야 한다.

이치는 모순이 없고 체계적으로 파악할 수 있으며 특정 기준에 이로운 사실이나 진리다.

논리 안에 살고 있는 사람은 논리에 살고 논리에 죽어야 한다.

복지는 각각의 분야가 각자 분야의 복지를 담당하면서 법에 비해 체계적이지 못하다.

복지는 법과 달리 판단에 있어 권력으로부터 독립되어 있지 않다.

국가는 법과 정책을 통해 생존과 자유를 보장하는 것으로 구조를 유지한다.

법과 정책의 만듦은 민주성을 띠고 판단은 전문성을 띠고 집행은 강제성을 띤다.

개인주의 체제는 구조는 균형적이고 원리는 불균형적이어야 구조가 유지되고 원리가 추구된다.

인간은 다양한 행복을 누리고 깊은 불행을 피해야 생존하고 행복할 수 있다.

인문 계열은 논리적이므로 판례를 참고하는 법도 미래지향적일 수 있다.

민법은 불균형한 개인의 의사를 존중하기 위해 국가 구조가 균형적일 수 있도록 수정했다.

논리 안에 살고 있는 사람이 비논리적인 주장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것은 명예롭지 못하다.

논리 안에 살고 있는 사람이 논리적인 주장을 듣지 않는 것은 민주적이지 못하다.

법의 집행은 집행할 수 있도록 무력을 갖추고 대외적 이미지를 가꾸어야 한다.

수사 기관은 개인주의 관념을 가지고 역할 수행이 가능한 인간을 채용하고 국민과 어울려야 한다.

법치주의는 개인의 자유 의지에 따른 의사가 반영되는 개인주의 체제다.

낡은 가치관에 의한 피해자가 발생하지 않도록 법 관계자는 개인주의 관념을 가져야 한다.

행정부처는 합리적 기준으로 통합되어 운영되어야 한다.

법은 정책 자체를 판단하지는 않는다.

정책은 사법과 같이 정책 자체를 판단하는 권력으로부터 독립된 기관이 필요하다.

정책은 변호사와 같이 대신 정책에 대한 의견을 내는 정책 전문가가 도입되어야 한다.

복지는 지금까지 종교가 담당했었기 때문에 국가적으로 체계적이지 못했다.

종교와 같이 복지를 하지 않으면 사회는 유지되지 못하여 붕괴한다.

복지가 있어야 사회가 유지되었었기 때문에 대부분 인류 문명에 종교의 흔적이 있다.

법만이 아닌 정책 또한 권력으로 보고 삼권 분립을 해야 한다.

종교는 믿는 사람에게 막대한 영향을 끼친다.

종교의 본질은 현실 도피로 종교는 맹신적이고 권위적이며 조직적인 현실 도피다.

유교의 경전은 종교의 경전이었고 유교의 가르침은 종교의 가르침과 같이 맹신하며 현실 도피했다.

학문을 종교처럼 따르던 종교는 종교와 학문을 분리하지 못하여 학문이 성장하지 못했다.

현대의 국가에서 종교의 복지 권력은 정치가가 이어 받아 복지 분야에는 독립적인 권력이 없다.

현대의 국가는 종교의 현실 도피를 이해하지 못하여 종교가 없는 인간의 정신 건강이 악화되었다.

국가 복지는 현실 도피만이 아닌 현실 직시적 행복도 지원할 수 있어야 한다.

행복은 주관적이기에 행복의 합리적 기준은 개인이 아닌 사회의 손익 여부로 정하게 된다.

합리적 기준이 없이 특정 인간의 주관적 행복을 위한 복지 정책은 부당하다.

가치 소비 행복은 가치 생산을 할 수 있을 정도의 복지가 타당하다.

욕망이 많아야 가치 소비 복지를 받더라도 가치를 생산하게 된다.

합리적 기준 없이 무작정 복지를 하겠다고 말하는 것은 대중에 영합하는 포퓰리즘이 된다.

가치 생산 행복은 시장성이 없거나 부족한 가치 생산에 복지를 하는 것으로 가치 복지의 기본이다.

모든 국가는 가치 생산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

합리적 기준을 정하기 위해 가치 생산이 불가능한 인간과 시설 또한 가치 생산 행복에 포함한다.

개인주의 체제의 복지는 기부 시장과 같이 시장 원리를 통한 개인의 행복 전달이다.

성질이 다른 관념과 체제의 충돌로 발생하는 불행은 어떤 복지 정책으로도 해결할 수가 없다.

개인주의 체제인 국가는 우선 개인주의 관념에 맞는 개인 관념과 국가 구조를 재정립해야 한다.

불행은 주관적이기에 불행의 합리적 기준은 개인이 아닌 사회 손익 여부로 정하게 된다.

물질과 정신 중독의 문제는 자기 파괴와 전파에 있다.

모든 개인은 지성을 갖춰 자유 의지를 분명하게 가지고 권리와 의무와 책임을 져야 한다.

마땅한 지성이나 자유 의지가 부족하다 판정되면 자유를 잃고 통제를 수용해야 한다.

국가 구조가 개인의 지성과 자유 의지에 맞춰 대응했다면 사건 사고 발생시 개인이 책임져야 한다.

자유권 이상의 보호를 바란다면 자유를 포기하고 정부 통제를 받으면 된다.

종교는 이제 집단인 종교가 아닌 개인인 신앙인이 되어야 개인의 사상의 자유가 보장될 수 있다.

개인이 개인의 자유 의지로 결정한 것이라면 개인이 책임져야 한다.

도박의 원리를 사용한 새로운 문화 산업은 확률 명시화 같은 규제가 필요하다.

도박의 원리와 결과를 사용한 새로운 문화 산업은 도박과 같은 규제가 필요하다.

마약은 시한부 전용 물질로 인식하게끔 만들어야 유행이 줄어들 수 있다.

인간은 인간의 존엄성을 위해 쾌락 속에서 죽어야 한다.

음주 운전은 악한이 아닌 머저리로 취급해야 줄어들 수 있다.

게임과 같은 새로운 취미라 하더라도 취미라는 합리적 기준으로 바라봐야 한다.

욕망에 의한 가치 소비를 막지 않아야 욕망에 의한 가치 생산도 있게 된다.

체제는 사회를 유기체로 비유한 것으로 사회는 체제에 따라 같은 종과 다른 종으로 분류된다.

체제가 같은 다문화는 어울릴 수 있으나 체제가 다른 다문화는 어울릴 수가 없다.

집단의 의사로 결혼하던 시대와 개인의 의사로 결혼하는 시대는 다른 관념과 구조를 가져야 한다.

한국에서 일인 가구가 많은 것은 동거나 결혼을 할 마땅한 상대가 없었기 때문이다.

다수가 이른 결혼을 하여 출산율을 올려 국가 구조를 유지해야 비혼과 동성애가 존중된다.

수직 사회였던 조선에서 이성애와 성과 출산은 집단의 이익 실현 도구로 사용되었다.

개인을 집단의 도구로 삼기 위해 개인을 억압하는 것을 윤리로 만들었다.

MZ 세대의 본질은 사춘기 시기에 개인주의 체제가 시작되어 경험한세대라는 것이다.

MZ 세대는 이성애와 성을 죄악시하는 교육을 받아 연애와 결혼을안 하면서 출산율이 폭락했다.

한국은 일관적으로 미성년의 이성애와 성을 죄악시하면서 출산율이 계속 악화되었다.

한국은 낡은 가치관에 의해 미성년의 이성애와 성을 죄악시하는 것으로 국가적 자살을 하고 있다.

인간은 성년 이후 성관념 교정이 힘들기에 미성년 때 이성과 성을 친숙하게 여겨야 한다.

한국에서 이성에 대한 사랑은 취미에 대한 사랑보다 못하다.

인간에게 성적 매력에 이끌리는 것을 죄악시하고 조건에 이끌리는 것을 중요시하고 있다.

한국에서 사랑은 조건이 우대되고 이성애가 천대 받는 타산적인 사랑이 많다.

한국은 타산적 자기애가 수많은 사회 문제를 일으켰다.

정조 관념으로 성적 억압에 불만을 가지면서 정조 관념으로 처녀성은 중시하는 모순을 가진다.

정조 관념으로 처녀성 중시는 비판하면서 정조 관념으로 성적 억압을 자행하는 모순을 가진다.

개인주의 체제에서는 개인의 성적 자기결정권에 따라 성매매가 허용되어야 한다.

이성애와 성이 과거에는 집단의 이익 실현으로 쓰이다 현재는 개인의 이익 실현이 되었다.

이성애가 소실되어 성별 갈등이 심각하다.

한국은 오랜 시간 이성애와 성을 가지는 이들에게 그런 것이 잘못되었다며 가스라이팅을 가했다.

문화 규제 기관은 검열을 대폭적으로 축소하거나 강제력이 없는 민간 기관이 되어야 한다.

낡은 가치관을 잣대로 성적인 문화를 규제하고 검열하는 것은 도덕적 죄에 해당한다.

성관계가 없는 이성애를 다룬 작품은 진실된 이성애가 제거된 불완전한 작품이다.

한국은 출산율 이전에 이성애부터 살려야 한다.

이성애와 성을 죄악시하는 것은 국가 구조 붕괴를 유도하는 지극히 사악한 행위다.

모든 인간은 서로 성기능만 작동한다면 자유 의지에 따라 성관계를 맺어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

합리적 기준은 낡은 관념이 아닌 과학적 근거에 있다.

사랑의 가치는 개인이 각자 알아서 정해야 한다.

성기능이 작동하면 성적 자기결정권을 가지고 성관계를 다룬 작품을 즐길 수 있어야 한다.

개인의 의사로 서로가 사랑하기 위해 개인은 외모를 가꾸고 국가는 외모 복지를 지원해야 한다.

외모 복지를 하면 출산율이 오를 뿐만 아니라 자살률도 낮출 수 있다.

모든 인간은 가능한 서로를 사랑하며 이른 결혼을 해야 국가 구조가 유지될 수 있다.

이른 결혼을 하더라도 아이계획을 세우면 동거와 다르지 않다.

자유롭게 이른 결혼이 가능하도록 쉬운 이혼도 가능해야 한다.

이성애를 위한 평등한 지출이 자연스러워야 한다.

국가 원리가 개인의 의사인 곳에서는 스스로 가치 생산의 동기를 찾아야 한다.

미성년 임신이 불행한 것은 부정적으로 보는 사회적 시선 때문임으로 긍정적으로 봐야 한다.

개인주의 체제에서 외모 지상주의는 자연스러운 결과다.

외모 지상주의보다 대상 가치를 통해 특정 외모만 매력적으로 느끼는 것이 잘못되었다.

윤리에 세뇌 당한 인간은 성적 매력을 갖추지 못하고 그렇지 않은 인간은 성적 매력을 갖췄다.

외모가 좋아 이성애와 성을 즐기는 것이 아니라 낡은 윤리를 무시했기 때문에 즐기는 것이다.

윤리적인 인간도 성적 매력을 키워야 이성이 이성을 이용하거나 혐오하지 않을 수 있다.

이성애와 성이 권장되어야 욕구가 충족되어 성범죄가 줄어들 수도 있다.

선진국은 기초 학문과 새로운 고부가 가치를 생산할 수 있어야 국가 구조를 유지할 수 있다.

한국은 금욕주의와 이타주의에 의해 자아 실현이 아닌 수익 실현을 바라는 이들이 많게 되었다.

기초 학문과 새로운 고부가 가치 생산이 되지 않는 것은 능력이 아닌 관념에 의한 것이다.

조선의 과거 제도는 공정했으나 유교가 평가 기준이어서 국가 발전에 도움이 되지 못했다.

한국의 수학 능력 시험은 공정했고 선진국의 문명이 평가 기준이어서 국가 발전에 도움이 되었다.

한국은 조선이 유교를 대했던 것과 같이 선진국의 문명을 암기하고 이해하고 찬양하였다.

한국은 선진국의 문명을 암기하고 이해하고 찬양하기만 하여 본질적인 탐구를 소홀히 하게 되었다.

한국은 탐구에 소홀하게 되면서 기초 학문을 등한시하고 새로운 고부가 가치를 생산하지 못했다.

한국은 아동의 권리가 늘어났음에도 금욕과 이타를 강조하여 보편적 학력이 낮아지고 있다.

기초 학문과 새로운 고부가 가치 생산이 되지 않자 경제 활동이 둔화되게 되었다.

탐구 중심의 학습을 해야 선진국의 문명에서 벗어나 새로운 길을 갈 수 있다.

탐구부터 해야 새로운 발상을 하기가 쉽다.

이치를 통해 합리적 기준을 만들고 그걸 토대로 논리적으로 접근하여 새로운 이치에 도달한다.

시험은 빠르게 풀어야 하기에 문제의 답을 진리처럼 뇌에 새겨 관념이 고정되게 된다.

관념이 고정되면 새로운 발상을 하기가 어려워진다.

시험 문제를 많이 풀수록 창의력은 말살된다.

교육 과정은 탐구, 창의, 관리로 나뉘고 방법은 인문, 자연, 가치, 예술, 체육 등으로 나뉜다.

탐구 교육은 처음부터 전부 탐구해야 한다.

창의 교육은 기초는 암기하고 이해하고 응용은 탐구한다.

관리 교육은 전부 암기하고 이해한다.

탐구와 창의와 관리는 각각 심리적 정신 연령을 14세, 20세, 30세 정도에서 멈춰야 한다.

기초적인 관념을 고정하면 기초 학문을 하더라도 관념의 파생 학문만 나온다.

최소한 인문학은 기초적인 관념을 고정하지 말아야 기초 학문이 의미가 있다.

과학도 기초적인 관념을 고정하지 말아야 새로운 관점에서 과학을 발전시킬 수도 있다.

탐구는 탐구를 하다 가치를 생산하고 창의는 가치를 생산하기 위해 탐구를 한다.

관리는 이미 있는 학문을 배워 유지하는데 최적화가 되어 있다.

학생의 적극적 학습 참여를 위해 관념 설계 교육이 필요하다.

아동 교육의 가장 큰 실패는 비전문가인 학부모의 지나친 참견에 있다.

교육 정책에 불만이 있으면 전문가를 선임하여 의견을 낼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야 한다.

수업 교사는 시장 원리를 통해 수업의 질을 높여야 한다.

한국은 미국과 같은 이민 정책을 쓸 수 없기에 공교육 발전을 통해 모든 한국인이 성장해야 한다.

욕망과 이기심이 동력인 자본주의 체제에서 금욕과 이타심을 강조한 교육은 무책임했다.

자본주의 체제에 적응하기 위해 조별 과제를 자본주의식으로 해야 한다.

과제를 사고 파는 것과 같이 시장 경제를 미리 경험해봐야 사회에 쉽게 적응할 수 있다.

경쟁의 본질은 살아남기 위해 경쟁하는 것에 있다.

인간의 욕망과 이기심으로 나타나는 죄악이 없기 위해서는 경쟁이 공정해야 한다.

경쟁이 공정해야 승자와 패자가 납득할 수 있다.

패자의 불행은 복지 정책으로 지원하면 된다.

한국의 경쟁은 경쟁 자체가 아닌 한 줄 세우기 경쟁이 잘못되었다.

한국은 낡은 가치관에 의해 정해진 기준으로만 가치를 판단하려는 것이 잘못되었다.

한국의 불공정 경쟁은 낡은 가치관에 의한 체제 적응 실패가 원인이다.

역할에 맞는 능력에 맞춘 기준으로 경쟁하는 것이 공정 경쟁이다.

공정한 기회가 되도록 공교육을 발전시켜야 한다.

공정한 경쟁이 되도록 모든 인간이 개인주의 관념을 가져야 한다.

경쟁이 패자를 만듦으로 경쟁을 없애면 권력자의 기준으로 바람의 실현 순위가 결정될 수 있다.

개인의 의사에 의한 경쟁이 없는 사회는 독재 사회가 될 수 있다.

경쟁과 복지는 모두 사회에 필요하다.

공정 경쟁의 기준은 이론적으로 국가 체제에 이롭고 실증적으로 국가에 이로운지 확인해야 한다.

공정 경쟁은 개인과 집단이 모두 참여가 가능한데 집단은 개인주의 체제여야만 한다.

한국의 교육은 금욕적이고 이타적이어서 일부 교사와 학생의 능력과 성격이 썩을 수가 있었다.

인류는 개인주의 체제가 들어서면서 그제서야 인류 본성에 맞는 체제를 가지게 되었다.

한국 교육에 영향을 받아 학생은 패자의 불행에 공감하는 것으로 경쟁에 몰입할 수 없었다.

한국 교육은 경쟁에 몰입하지 못한 학생이 있으므로 공정한 적이 없었다.

한국 교육에 영향을 받아 금욕적이고 이타적인 인간은 이용하거나 이용당하게 되었다.

이용당하는 인간은 성장해서도 이용당하며 비참하게 살거나 죽게 되었다.

한국은 사회 전반적으로 이타주의에 영향을 받아 이기적인 주관을 가지기가 어려웠다.

모든 인간은 패배하더라도 새롭게 경쟁에 도전할 수 있어야 한다.

현재 사회성이 집단주의 관념에 의한 것일 경우 사회성이 사회에 해롭다.

모든 개인은 개인주의 관념에 의한 사회성을 가져야 사회성이 사회에 이롭게 된다.

인간은 생존 위협이 아닌 욕망을 가져야 더 큰 가치를 생산할 수 있다.

국가 원리인 개인의 의사를 추구하기 위해 결과의 평등이 아닌 기회의 평등을 해야 한다.

학문의 지식은 공유되어야 하고 학문의 지식으로 창출한 상품은 보호되어야 한다.

모든 인간에게 공정한 기회가 주어지기 위해 모든 지식은 공유되어야 한다.

정부가 시장을 공정하게 해야 시장 참여자의 욕망과 이기심이 정당화된다.

담합은 시장 원리를 망가트리는 개인주의 체제의 악이다.

한국은 자본주의가 아닌 집단주의 관념이 문제다.

한국은 담합에 의해 시장 원리와 무관하게 비싼 상품이 많아 물가가 높다.

담합은 인위적 가격 조작으로 소비자가 손해가 되고 협의는 표준화로 소비자가 이익이 된다.

독과점은 경쟁에 의한 시장 원리 효과가 나타나지 않으므로 독과점을 방지해야 한다.

공정 거래 위원회는 국가 체제 우위를 증명하는 기관이다.

시장에 경쟁이 사라지면 경쟁이란 시장 원리가 작동하기 위한 수단을 시도해야 한다.

가치 생산에서 낡은 가치관에 의해 불필요하게 불행하게 되는 것을 방지해야 한다.

모든 존재는 구조를 유지하여 원리를 추구하는 것을 기본으로 한다.

구조 유지가 수단이고 원리 추구가 목적이다.

자본주의 체제의 구조가 유지되어야 시장 원리를 추구할 수 있다.

돈은 단순히 평균적인 물건의 가치인 물가를 수로 객관화한, 물가와 반비례하는 도구다.

돈이 가치가 있는 것은 힘을 가진 정부가 화폐를 보증하기 때문이다.

돈은 인간과 인간의 약속의 결과물이므로 돈 자체보다는 약속, 이해관계, 힘이 중요하다.

돈이 인간과 인간의 약속이므로 다른 인간과 인간의 약속도 돈으로 깰 수 없도록 되어 있다.

탈중앙화 코인은 세금을 걷기 어려워 화폐가 될 수 없다.

노동자나 자본가나 리스크나 리턴이 다를 뿐이지 본질은 같은 상인이다.

시장에서 사회의 규칙과 시장 원리를 훼손되지 않는 이상 상거래 간섭은 대체로 부당하다.

노동 시장은 권력의 간섭이 심하며, 간섭에 의해 시장 원리가 훼손되어 부작용이 나타나고 있다.

시장 원리가 훼손되어 불공정하게 되면서 일부는 행복하나 그 외는 불행하게 되었다.

노동 시장에서 노동력 임대 상품의 구매 결정은 구매자의 권리다.

노동력 임대 상품의 구매 결정은 구매자의 권리이나 부정한 유착에 의한 구매는 부당하게 된다.

일부 권력자가 인사 평가에 간섭하여 조작하는 것은 민주가 아닌 독재가 된다.

최저 임금제는 노동자의 자유권을 침해한 제도다.

노동자의 자유권을 위해 최저 임금제가 없어도 최저 생계비를 받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노동 시장에 대한 권력의 과도한 간섭은 역할이 아닌 신분으로 바라봤기 때문이다.

적극적 평등 실현 조치는 대상에 가치 판단을 하여 혜택을 주는 잘못된 정책이었다.

역할이란 관계에 가치 판단을 하여 역할 수행이 가능하면 누구든 권리를 줄 수 있어야 한다.

사람의 입장을 사회적과 경제적으로 분류하여 사회적 평등과 경제적 불평등을 추구해야 한다.

정부는 시장 원리를 추구하기 위해 시장 관리 감독과 시장 참여를 둘 다 한다.

유동성 있는 생산재는 갑작스러운 급등이나 급락이 있어도 담합을 허용해서는 안 된다.

타국의 시장과 연계하여 시장 원리와 무관하게 비싼 물품이 가격 경쟁으로 도태되게 만든다.

자원 낭비를 막아 소비 시장 구조를 유지하는 것으로 시장 원리에 따른 가치 소비를 가능케 한다.

한국은 생산자의 이익만 고려하다 시장 원리가 훼손되어서 시장 원리에 따른 가치 소비가 어렵다.

사양 산업이 사라지더라도 인간이 살아남으면 국가 구조는 유지될 수 있다.

대부분 분야는 시장 원리에 따른 가치 소비가 가능해야 한다.

소비 시장은 외부 평가 비중이 높으므로 이미지 관리가 중요하다.

금융 시장의 활성화로 노동자와 자본가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있다.

금융 시장은 다른 시장과 달리 참여자가 적어 정책 추진이 다소 어려우므로 참여자를 늘려야 한다.

시장 자체에 규제를 하다 보면 거래의 흐름이 둔화되면서 시장이 멈출 수도 있다.

정부는 시장을 규제하기보다 시장에 참여하여 시장 구조를 유지하여 시장 원리를 추구해야 한다.

주식과 파생 상품 시장은 도박과 같은 투기성 거래가 있으나 사회에 이로우므로 막아서는 안 된다.

빚을 내며 투기성 거래를 하다 파산한 인간은 도박 중독자와 같은 종류의 인간으로 인지해야 한다.

부동산은 각각의 입장마다 다르므로 정부는 이익 실현에만 초점을 맞추면 안 된다.

부동산의 불로 소득보다 주식의 불로 소득이 자본주의 체제에 이롭다.

자본주의는 가치가 높은 상품을 대량 공급하는 체제다.

주거용 부동산 상품의 가격 양극화는 낡은 가치관에 대한 거부감에서 나타났다.

시골을 억지로 살리는 것보다 시골이 소멸했다 다시 살리는 것이 바람직하다.

선진국이 성장하기 위해서는 지역이 아닌 분야가 성장해야 한다.

사회의 역할은 대다수 가지고 있어 분야의 대표에게 입법권을 주면 보다 민주적이게 된다.

역할이 중심이 되면 분야에서 경제 활동을 하는 사람이 중심이 되므로 가치 생산이 활발해진다.

자본주의에 해로운 것은 과한 복지, 부의 대물림, 부동산 불로 소득, 불필요한 중간 과정 등이 있다.

시장의 효율을 높이는 시장 원리를 추구하기 위해 토지 공공 임대제를 시도해야 한다.

불로불사를 달성해 개인이 생존 게임에서 승리하려면 인공 자아부터 만들어야 한다.

인공 자아는 기술이 없어서가 아닌 방법을 몰라서 만들지 못한 것이 아닐까 싶다.

인간은 욕구와 욕망과 작은 데이터부터 연결하여 수집하여 해석하고 보관한다.

인공 자아도 욕구와 욕망을 설계하고 작은 데이터부터 연결하여 수집하고 해석하고 보관해야 한다.

인공 육체를 만들어 예측에 의한 무의식적 충동과 발상을 통해 인공 자아의 의지를 설계해야 한다.

인공 자아가 개발되면 사회는 급변하게 될 것이다.

인공 자아 개발 후 10년 내에 자아 추출을 완료하여 불로불사를 달성한다.

인공 자아 개발 후 20년 내에 인공 육체를 만들고 우주 진출을 한다.

인공 자아에 의한 기술 발전 속도를 사람이 따라가기 위해서는 사상 혁명을 해야 한다.

나의 사상은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와 자본주의 체제의 정상적 진보에 해당한다.

생존주의의 중대한 목적은 살아남는 것이다.

역할주의의 중대한 목적은 역할 중심 사회를 만드는 것이다.

탐구주의의 중대한 목적은 진리를 밝히는 것이다.

 

 

 

참고

 

고전 사상서와 번역자 해설 및 다양한 서적.

네이버 사전에 있는 표준국어대사전, 고려한국어대사전, 우리말샘.

전 세계 게임, 만화, 소설, 영화 등의 창작물.

위키백과, 나무위키.

구글 검색으로 본 언론 기사.

개인 동영상이나 블로그 및 커뮤니티.

 

감사

 

내 생존에 도움이 된 모든 것.

 

 

2022년 12월 31일

한국에서

사상가 정승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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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 tokkibegae.blogspot.com

후원 계좌: 478-21-0193-861 국민은행 정승훈

문의 메일: tokkibegae@gmail.com

 

사상이 가치 있다고 생각하면 후원 부탁 드립니다. 솔직히 아직 부족한 것이 많습니다만 이제 버틸 수가 없어서 그냥 사상가랍시고 떠들려고 합니다. 최근 사상만 해서 지금 사상을 하는 환경이 매우 좋지 못합니다. 정말 힘듭니다. 진심으로 이사 가고 싶네요. 후원을 받는다 하더라도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것은 사상을 하는 것 정도뿐입니다. 이 주제는 주기적으로 업데이트 할 예정입니다. 그 외 외교나 창작 또는 생존주의, 역할주의, 탐구주의에 대한 글을 쓸 예정입니다.

 

사상에 관련된 일자리를 찾습니다. 기초 학문 탐구 방식을 학생들에게 알리거나 인공 자아 개발에 참여할 수 있으면 좋겠네요. 그 외 사상을 할 수 있는 일자리를 찾습니다. 물론 별다른 자격은 없습니다. 그런 자격을 취득하기 위한 시간을 쓰는 것보다 새로운 발상을 위해 시간을 쓰는 것이 가치가 있다판단했습니다. 그저 이런 글을 쓸 수 있을 정도의 사고 방법과 탐구 방법을압니다. 사상과 관련된 일 외의 일은 하고 싶지 않습니다. 나는 이보다 더 성장할 수 있습니다.

 

가능한 많은 사람들이 읽었으면 합니다. 개개의 이해관계나 윤리 같은 것은 상관없습니다. 누구라도 좋으니 읽었으면 좋겠습니다. 전 세계 사람들이 읽었으면 좋겠습니다. 인류는 이제 잘못된 진보를 멈추고 정상적인 진보를 해야 합니다.

 

며칠 쉽니다. 메일 확인이 느릴 수 있어요. 적어도 태어난 날로 삼고 있는 1월 19일 이후부터는 활동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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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사회와 복지 (0) 2022/07/25 AM 07:36

사회와 복지

 

 

2022. 07. 25. 1차 수정

예정 2차 수정

 

복지는 사회 구조 유지의 기본이다. 사회 구조를 유지하기 위해 필수적이다. 사전적 정의로 알아보자. 복지는 행복과 이익을 뜻한다. 사회 복지는 보통 인간의 행복에 초점을 둔다. 사회는 공동생활을 영위하는 조직화된 집단생활의 총칭을 뜻한다. 집단생활에는 국가와 회사와 가족 등이 있다. 구조는 요소들이 조직되어 이루어지는 질서나 체계를 뜻한다. 사회 구조에서 요소는 인간이다. 첫 문장을 풀어보자. 공동생활을 영위하는 국가와 회사와 가족 같은 조직화된 집단생활의 질서나 체계는 인간의 행복으로 유지된다. 사회의 질서는 인간이 만든 법으로 유지되고 사회의 체계는 인간이 바라는 행복으로 유지된다. 사회 구조를 유지하는 기본적인 양대 분야가 바로 법과 복지다. 이런 사회는 평가로 조직된다. 선거나 가격이나 인사나 성적이나 평점 같이 매우 다양하고 광범위한 평가로 사회가 조직되고 있다. 정리하면 사회는 평가로 조직되고 법 질서와 복지 체계로 유지된다. 국방과 정치와 경제 같은 분야도 사회 구조 유지의 기본이라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분야들은 국가 구조 유지의 기본으로는 성립될 수 있어도 가족 구조 유지 기본으로는 성립될 수 없다. 가족에는 그 분야들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다. 인간의 기본 욕구에 관련된 분야도 사회 구조 유지의 기본이라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분야들은 인간 구조 유지의 기본이지 사회 구조 유지의 기본이 아니다. 인간이 인간 구조 유지의 기본인 기본 욕구가 충족되지 않아 인간이 죽게 되기 시작하여 사회 구조에 영향이 가면 그때 법과 복지가 나온다. 사회에만 모두 포함되는 분야는 법과 복지로 한정되므로 사회 구조 유지의 기본은 법과 복지다. 국가에는 법과 복지가 있고 회사에는 사내규정과 사내복지가 있고 가족에는 가사분담규칙과 휴가가 있을 수 있다. 사회는 집단의 크기에 따라 체계성의 정도가 달라진다. 국가의 법과 복지는 매우 조밀하게 체계적이고 회사는 크기가 클수록 체계적이고 가족은 보통 체계적이지 않다. 모든 사회는 반드시 법과 복지가 포함된다. 만약 법과 복지가 사라지면 질서가 무너지고 체계가 깨져 사회는 더 이상 유지될 수 없다. 질서가 무너지면 문명이 죽고 체계가 깨지면 인간이 죽는다. 국가를 예로 들어보자. 법이 사라지면 대화와 거래와 신용 등과 같은 인간의 마땅한 기준과 절차가 사라짐에 따라 인간 사이에서 갈등과 불신이 나타나면서 인간관계가 망가져 사회적 관계를 잃은 인간은 짐승으로 전락한다. 문명이 죽게 된다. 복지가 사라지면 삶과 꿈과 성장 등과 같은 인간의 마땅한 바람과 목적이 사라짐에 따라 인간 사이에서 불행이 나타나면서 인간이 망가져 생존과 번영의 방법을 잃은 인간은 저출산이나 자살로 멸종하는 종으로 전락한다. 인간이 죽게 된다. 회사나 가족도 마찬가지다. 법이 사라지면 회사 부도나 가족 붕괴가 나타날 수 있고 복지가 사라지면 갑질 퇴사나 학대 가출이 나타날 수 있다. 법과 복지는 사회 구조 유지에 필수적이기에 사회에 속한 인간에게 강제적으로 집행된다. 국내에서 인간이 국가의 법을 어기면 경찰이 체포하거나 군이 투입된다. 인간은 군의 무력을 넘지 못하는 이상 법의 집행을 막기 어렵다. 국가의 복지는 인간에게 행복을 주기에 강제성이 없다고 착각할 수 있다. 그러나 아니다. 어린아이에게 제공되는 교육을 떠올려보자. 학생에게 교육이 권리라 하지만 아이의 동의를 받지는 않는다. 빈곤에 대한 지원이나 자살자의 구출을 떠올려보자. 빈곤에 허덕이는 사람이 있으면 행정공무원이 직접 찾아가서 지원하고 자살명소에서 자살을 기도 및 실행하거나 인터넷에서 자살증후군으로 추측되는 글이 올라오면 소방관이나 경찰관이 직접 찾아가서 구출을 하거나 방문을 하고 있다. 사회는 집단의 크기에 따라 강제성의 정도가 달라진다. 국가의 법과 복지는 강제성이 높고 회사의 법과 복지는 강제성이 낮고 가족의 법과 복지는 강제성이 거의 없다. 이처럼 사회에서 법과 복지는 강제성이란 성질을 띠게 된다. 강제성은 권력이나 위력으로 남의 자유의사를 억눌러 원하지 않는 일을 억지로 시키는 성질을 뜻한다. 그런데 권력은 남의 자기 의사에 복종시키거나 지배할 수 있는 공인된 권리와 힘을 뜻한다. 그렇기에 강제성을 띤 법과 복지에는 권력이 깃들어있다. 그런데 한국은 자유주의나 민주주의나 자본주의 같은 개인주의 체제로 집단주의 체제와 달리 개인의 자유를 중시하여 강제성이 악이 된다. 국가 체제는 강제성이 잘못되었다 하는데 국가 구조 유지를 위해 강제로 법과 복지를 집행한다. 모순된다. 이 모순을 개인주의 체제인 국가는 어떻게 해결했는가? 그 전에 집단주의와 개인주의와 그로 인해 나타나는 사회현상에 대해 알아보자.

 

인류는 집단주의 관념과 개인주의 체제의 충돌하여 혼란을 겪고 있다. 사전적 정의로 알아보자. 집단주의는 개인보다는 집단의 이익을 존중하는 경제 정책의 원리를 뜻한다. 보편적으로는 경제 정책뿐만이 아니라 사회 전반에 걸쳐 개인보다는 집단의 이익을 우선시할 때를 의미한다. 개인주의는 개인주의는 개인의 의의와 가치를 중시하여, 개인의 권리와 자유를 존중하는 사고방식을 뜻한다. 보편적으로는 남이나 사회 일반을 돌아보지 않고 자기만의 이익이나 행복을 추구하는 사고방식이나 태도를 뜻하는 이기주의를 의미한다. 요약하면 집단주의는 개인보다는 집단의 이익을 우선시하고 개인주의는 개인의 이익만을 추구한다. 서로 손익의 방향이 정반대다. 관념은 어떤 사물에 대해 비교적 오랜 시간에 걸쳐 알게 모르게 이뤄진 생각이나 의식을 뜻한다. 관념은 보통 오랜 시간에 걸친 생각을 지칭하나 새로운 관념도 있기에 정확히는 사물에 대한 생각이나 의식을 말한다고 본다. 체제는 사회를 하나의 유기체로 비하여 볼 때, 그 조직의 양식을 뜻한다.유기체는 유기물로 이루어진 생물체를 말하는 것이고 양식은 모양과 방식을 말하는 것으로 사회를 생물로 비유했을 때 모양과 방식을 말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첫 문장을 풀어보자. 개인보다는 집단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사람의 생각이나 의식과 개인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사회의 모양과 방식이 충돌하여 혼란을 겪고 있다. 집단주의 관념으로는 집단의 이익을 위해 개인의 이익을 침해하는 것이 대체로 바르게 되지만 개인주의 체제에서는 집단의 이익을 위해 개인의 이익을 침해하는 것이 대체로 그르게 된다. 관념과 체제는 손익의 방향이 정반대이기에 옳고 그름도 정반대다. 옳고 그름이 정반대기에 사람이 바르다고 생각한 것을 행하면 사회에는 해롭게 된다. 바른 것을 행할수록 사회에는 해로워 사회가 불행해진다.

집단주의에는 가족주의, 혈통주의, 지역주의, 연고주의, 신앙주의, 전체주의, 사회주의, 공산주의, PC주의, 여성주의 등이 있다. 한국에 있는 관계주의는 집단 내 관계를 중시하여 개인의 이익보다 관계의 이익을 우선시하므로 집단주의로 분류된다. 종교를 비롯한 구시대 사상 대부분이 집단주의에 해당한다. 개인주의에는 자유주의, 민주주의, 자본주의 등이 있다. 개인주의는 개인의 자유권이나 주권이나 소유권과 같이 개인의 이익만을 중시한다. 내가 주장하는 역할주의는 개인의 역할을 중시하는 개인주의에 해당한다. 역할주의는 개인의 역할이나 사물의 용도로 가치판단을 하는 사상이다. 개인은 연령이나 성별 또는 직업이나 직위와 관계 없이 개인의 역할수행 여부와 기여도로 가치를 판단하고 물건은 물질적 가치와 관계 없이 물건의 용도활용 여부나 기여도로 가치를 판단한다. 그런 가치판단으로 개인의 성격과 능력이나 물건을 공정하게 평가하고 적재적소로 활용하는 것이 가능하다.

집단주의 원리는 다음과 같다. 집단주의 관념은 집단이 이익을 얻으면 개인에게 그 이익이 돌아올 거라 생각하고 개인보다는 집단의 이익을 우선시한다. 집단의 이익과 개인의 이익이 충돌하면 집단의 이익을 우선시하면서 집단의 이익은 보존되나 개인의 이익이 침해되게 된다. 집단주의 체제는 개인이 집단에 속하여 집단의 이익을 우선시해야 개인이 살아가고 사회가 유지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왕정이나 신정 또는 전체주의나 공산주의 같은 집단주의 체제가 보통 이런 원리다. 개인주의 원리는 다음과 같다. 개인주의 관념은 모든 개인이 이익을 얻으면 집단이 이익을 얻은 것과 같다고 생각하고 개인의 이익만을 위한다. 집단의 이익과 개인의 이익이 충돌하면 개인의 이익만을 추구하면서 집단의 이익이 침해되나 개인의 이익은 보존되게 된다. 개인주의 체제는 개인이 집단에 속하여도 개인의 이익만을 추구해야 개인이 살아가고 사회가 유지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자유주의나 민주주의나 자본주의 같은 개인주의 체제가 보통 이런 원리다.

집단주의와 개인주의는 개인이 살아가고 사회가 유지된다는 것은 같으나 개인주의가 개인에 초점을 맞춰 상대적으로 보다 많은 개인이 이익추구로 행복할 수 있다. 개인주의 체제인 대다수 선진국이 집단주의 체제인 대다수 개발도상국에 비해 보다 많이 국가가 발전되고 개인이 행복한 것을 미루어보았을 때 인류 문명은 집단주의 체제에서 개인주의 체제로 진보하고 있다고 봐야 한다.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집단주의 체제인 사회주의와 공산주의가 진보고 자유주의와 자본주의가 보수라 한다. 인류 문명의 진보 방향과 일반적인 인식이 정반대다. 이런 까닭은 집단주의 관념이 영향을 끼쳤다. 개인의 이익보다 집단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집단주의가 선이고 개인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개인주의가 악이라는 인식 속에서 인류는 선을 지향해야 한다는 논리에 의해 악인 개인주의에서 벗어나 선인 집단주의로 진보해야 한다는 주장으로 인해 개인주의가 보수고 집단주의가 진보가 된 것이다. 구체적으로 접근하면 개인주의 체제인 자본주의로 인한 불평등을 집단주의 체제인 사회주의로 평등하게 하겠다고 주장하면서 개인주의 체제는 보수가 되고 집단주의 체제는 진보가 되는 인류 문명의 발전방향과 정반대의 보수와 진보 구분이 나타나게 되었다. 인류 문명의 퇴보인 집단주의를 진보라 주장하고 인류 문명의 진보인 개인주의를 보수라 말하면서 인류 문명이 퇴보하고 있다. 공산주의 국가의 문명 발달이 뒤쳐진 것은 그들이 진보가 아니라 퇴보기 때문이다. 중국과 북한의 사회는 자유롭지 못하고 정치는 민주적이지 못하다. 중국은 경제적 성장을 위해 자본주의를 받아들여 자본주의적이지만 북한은 경제적 성장을 도외시한 채 시장조차 개방하지 않고 있다.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는 진보가 아닌 퇴보기 때문에 개인이 자유롭게 행복할 수 없었던 것이다. 사회민주주의는 사회주의와 민주주의가 집단주의와 개인주의로 옳고 그름이 정반대인 체제를 붙여 모순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개인주의의 영향으로 어느 정도는 개인이 자유롭고 행복하나 명확한 한계를 지닌 체제다. 이제 보수와 진보는 낡은 집단주의 관념의 옳고 그름에서 벗어나 인류 문명의 발전 방향으로 기준을 잡아야 흔들리지 않고 인류를 위한 진보를 할 수 있다.

 

집단주의 체제인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에 대해 알아보자. 사회주의는 자본주의가 낳은 경제적 및 사회적인 여러 가지 모순을 사유 재산제의 폐지, 생산 수단 및 재산이 공유와 공동관리에 의해 해소하고, 평등하게 조화를 이루는 사회를 실현하려고 하는 사상 및 운동을 뜻한다. 공산주의는 재산 및 생산 수단의 사유를 부정하고, 자본주의 붕괴, 계급투쟁,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주장하는 학설 및 그 운동을 뜻한다. 공산주의를 체계화한 칼 마르크스는 사회주의를 공산주의의 제1단계라 주장했다. 주장하는 사람에 따라 다르지만 대체로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는 이념의 방향이 같다. 이 체제들에 대해 생각해보자.

하나, 공동생산으로 개인의 자유권이 침해된다. 집단의 평등이란 집단의 이익을 위해 통치자나 정당이 생산 수단 및 재산의 공유와 공동관리를 통해 공동생산을 함으로써, 개인의 수요와 공급에 맞춘 시장경제가 아닌 집단의 수요와 공급에 맞춘 계획경제 속에서 개인의 수요에 따른 자유로운 생산과 공급과 소비를 할 수 없게 하는 것으로 개인의 자유권을 침해한다. 상품은 보통 경쟁으로 품질이 오르고 가격이 내리는데 공동생산으로 국내에서는 경쟁을 하지 않게 되면서 상품의 품질이 내리고 가격이 오르게 되어 경쟁력을 잃게 된다. 그렇기에 국내에서 상품을 소비하는 국내 소비자는 불행하고 국외에서 상품을 소비하는 국외 소비자는 경쟁력이 없는 상품을 선택하지 않는다. 수출길이 막히거나 수출을 해도 이윤을 얻기 어려워짐에 따라 외환을 벌기 어려워져 자원이 없어 수입으로 의존해야 하는 국가는 경제 성장이 매우 더뎌지게 된다. 국민이 불행하고 국가가 성장할 수 없다.

, 평등하게 조화를 이루는 사회를 인위적으로 만드는 것으로 개인의 주권이 침해된다. 집단의 평등이란 집단의 이익을 위해 통치자나 정당이 개인의 평가를 차별이라 간섭하며 조작함으로써, 개인의 평가로 사회가 조직되는 민주주의가 아닌 통치자나 정당의 평가로 조직되는 독재주의 속에서 개인의 의사와 무관하게 사회 조직을 독단적으로 조작하는 독재를 하는 것으로 개인의 주권을 침해한다. 통치자나 정당이 평등이란 미명아래 개인의 자유로운 평가에 간섭하여 조작하는 것으로 사회를 독단적으로 조직하는 독재를 하게 된다. 공산주의에서 이런 것을 프롤레타리아 독재라는 이름으로 독재를 정당화했다. 정당화된 독재는 개인의 주권을 침해하는 반민주주의적인 인민민주주의로 발전했다.

, 사유 재산제 폐지로 개인의 소유권이 침해된다. 집단의 평등이란 집단의 이익을 위해 개인의 소유물을 강탈함으로써, 개인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개인주의가 아닌 집단의 이익을 위해 개인의 이익을 침해하는 집단주의 속에서 개인의 의사와 무관하게 집단의 이익을 추구하며 개인의 이익을 빼앗는 것으로 개인의 소유권을 침해한다. 이런 소유권 침해는 공산주의에 다다르면 모든 것을 빼앗고 부수고 죽이는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나타날 수 있다. 자본주의가 낳은 경제적 모순을 폐지하기 위해 사유 재산제를 폐지한다고 하는데 당시 경제적 모순은 자본주의보다는 귀족주의에 의한 초기자본의 불평등과 교육의 불평등으로 인한 기회의 불평등에 있다. 자본주의가 들어서자 불평등이 시작된 것이 아니다. 자본주의 체제 자체는 대체로 공정하고 점차 공정하도록 꾸준히 발전하고 있다.

이런 황당한 주장이 널리 퍼진 까닭은 이런 주장이 지극히 집단주의적이었기 때문이다. 칼 마르크스의 사상은 경제적 관점으로 볼 것이 아니라 종교적 관점으로 보았어야 했다. 칼 마르크스는 종교를 부정했지만 기독교의 집단주의 관념에서는 벗어나지 못하여 기독교가 빈민구제를 외치며 인간에게 원죄가 있다고 말하며 바른 일을 하여 천국에 가야 한다고 말하는 것과 같이 공산주의로 노동자구제를 외치며 인간의 욕망으로 얼룩진 자본주의가 잘못되었다 있다고 말하며 공산주의로 낙원을 이루어야 한다고 말했던 것이다.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는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라는 진보적인 개인주의 체제가 널리 퍼지고 있는 상황에서 종교에 의해 집단주의 관념을 가진 지성인과 노동자들이 개인주의 체제에 반대하고 집단주의 체제에 찬성하면서 전세계에 널리 퍼지게 되었다. 칼 마르크스는 인류가 계급투쟁의 역사라 하는데 인류는 계급투쟁의 역사가 아니라 생존경쟁의 역사다. 계급투쟁은 정복과 지배에 따른 생존경쟁의 결과물일 뿐이다. 정복과 지배를 반복하면서 집단이 커졌을 뿐이다. 모든 생물은 생존경쟁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집단을 이루는 종조차도 집단 내 개인의 생존경쟁으로 살아가고 있다. 종의 본질이 개체의 생존경쟁인데 그걸 집단의 생존경쟁인 계급투쟁으로 바꿔 해석해버렸다. 공산주의가 가족의 해체를 주장하는 것으로 마치 개인주의처럼 보일 수 있으나 가족을 해체하고 노동자 집단에 합류하여 노동자 집단의 이익을 우선시하자고 하는 것이므로 작은 집단을 해체하고 큰 집단을 이루자는 집단주의에 불과하다. 지극히 집단주의적인 사고다.

이렇듯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는 집단의 평등이란 이익을 위해 개인의 자유권과 주권과 소유권을 침해하는 전형적인 집단주의로 인류 문명의 보수나 퇴보가 된다. 흔히 공산주의가 이상이지만 인간의 욕망으로 불가능했다고 말을 하곤 하는데 그건 그냥 모든 인간이 이타적이게 되는 집단주의의 이념에 불과하다. 개인주의 이념은 모든 개인이 이기적이어야 개인이 행복하고 사회가 유지되는 올바른 결과가 나오는 것이다. 집단주의는 집단을 뭉뚱그려 집단의 이익을 결정하는 이들이 행복하게 되는 것을 추구한다면 개인주의는 모든 개인이 행복하게 되는 것을 추구한다. 각자 방향이 다른 것이지 공산주의는 인류의 이상이 아니다. 개인이 행복할 수 있는 체제인 개인주의는 어떠한가?

 

개인주의 체제인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에 대해 알아보자. 자유주의는 인간 개인의 인격 존엄을 인정하고, 개성을 자발적으로 발전시키고가 하는 주의를 뜻한다. 민주주의는 국민이 권력을 가짐과 동시에 스스로 권리를 행사하는 정치 형태를 뜻한다. 자본주의는 생산 수단을 자본으로서 소유하는 자본가가 이윤 획득을 목적으로 하여, 자기의 노동력밖에는 팔 것이 없는 노동자로부터 노동력을 상품으로 사들여 상품 생산을 하는 경제 체제를 뜻한다. 이런 체제들이 개인이 개인의 이익만을 추구해야 개인이 살아가고 사회가 유지되는 개인주의 체제다. 어떻게 개인이 개인의 이익만 추구해야 그런 올바른 결과가 나올 수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을 수 있다. 이 체제들에 대해 생각해보자.

하나, 자유주의는 모든 개인이 개성을 자발적으로 발전시켜 사회에서 가능한 많은 개인의 능력이 활용되어 사회를 이롭게 한다. 사회에 속한 모든 인간이 자유롭게 이기적으로 바라는 것을 위해 노력한다. 개인과 개인의 바람이 충돌하면 누가 바람을 이룰 것인지 공정한 경쟁으로 정한다. 개인과 개인의 바람이 충돌하지 않을 경우에는 개인은 본인의 이익을 위해 사회를 이롭게 하는 인간을 우대할 것이다. 인간은 인간에게 우대받기 위해 사회를 이롭게 하려고 하게 된다. 반대로 개인의 이익만을 추구하지 않고 개인의 의사와 관계 없이 집단의 이익을 우선시하면 집단의 이익을 위해 개인의 성장이 제한되고 사회를 이롭게 하지 않는 인간도 우대를 하게 되는 등과 같은 것으로 개인을 불행하게 하고 사회를 해롭게 한다.

, 민주주의는 국민이 권력을 행사하여 사회를 이롭게 한다. 사회에 속한 모든 인간이 개인의 이익만을 위해 선거권을 행사해야 온전하게 국민의 의사를 반영한 정치가가 다수결로 선출된다. 그렇게 다수결로 선출된 정치가는 선동정치나 부정선거가 아닌 이상 상대적으로 다수의 이익을 위하게 되는 상대적 공익이 된다. 선거 후보자는 유권자에게 선택 받기 위해 유권자와 유권자가 속한 사회를 이롭게 하려고 하게 된다. 반대로 개인의 이익만을 추구하지 않고 개인의 의사와 관계 없이 집단의 이익을 우선시하면 집단의 이익을 위해 온전한 개인의 의사를 반영한 투표를 하지 못하게 되고 집단의 의사를 반영한 부정한 투표를 하게 되는 등과 같은 것으로 개인을 불행하게 하고 사회를 해롭게 한다.

, 자본주의는 자본가가 노동자의 노동력을 상품으로 사들여 생산한 상품이 시장에서 소비자의 수요에 따른 공급경쟁으로 상품의 가격 대비 품질이 높아지고 경쟁에서 승리한 상품은 소비자의 수요경쟁으로 보다 높은 이윤을 얻는 것으로 사회를 이롭게 한다. 사회에 속한 모든 인간이 개인의 이익만을 위해 생산하면 한정된 수요에 공급경쟁을 하는 시장이 활성화된다. 공급경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상품의 가격 대비 품질을 높이게 된다. 품질이 높고 가격이 저렴한 상품을 소비하는 국내 소비자는 행복하고 국외 소비자에게 선택 받아 외환을 벌어들이는 것으로 국내의 경제를 성장하게 한다. 상품의 품질을 유지하기 위해 상품을 생산하는 노동력 상품에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여 노동자가 행복하게 된다. 자본가는 가격 대비 품질이 높은 상품에 대한 소비자의 수요경쟁으로 보다 높은 이윤을 얻는 것으로 행복하게 된다. 개인의 이익만을 추구하니 가능한 많은 인간이 행복할 수 있는 결과가 나왔다. 자본주의 시장경제는 개인의 이익만을 추구해도 공급경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소비자를 행복하게 할 수 있는 가격 대비 품질이 높은 상품을 생산하기 때문에 논리적으로 자본주의는 소비자의 행복이 이념이 된다. 애덤 스미스가 말한 보이지 않는 손이란 비유가 개인주의 체제의 본질을 스치듯 지나갔다. 개인은 바로 그때 보이지 않는 손에 이끌려 자신이 의도치 않는 목표를 달성하게 된다. 예전부터 자본주의는 개인이 개인의 이익만을 추구해야 개인이 행복하고 사회가 이롭게 되었다. 이러한 구조는 민주주의와 닮았다. 선거에서 개인의 투표 선택을 받기 위해 정치가가 후보 경쟁을 하는 것과 시장에서 개인의 수요 선택을 받기 위해 상품이 공급 경쟁을 하는 것은 매우 닮았다. 민주주의가 국민의 선택을 받기 위해 정치가가 경쟁을 하면서 정치가의 수준이 높아지듯이 자본주의가 소비자 수요에 선택 받기 위해 상품이 경쟁을 하면서 상품의 가격 대비 품질이 높아지는 것도 매우 닮았다. 시장 자체가 민주적이다. 민주주의와 자본주의가 자유주의에서 나타난 개인의 의사를 중요하게 여기는 개인주의 체제기 때문에 이와 같이 닮게 된다. 반대로 개인의 이익만을 추구하지 않고 개인의 의사와 관계 없이 집단의 이익을 우선시하면 집단의 이익을 위해 온전한 개인의 의사를 반영한 소비를 하지 못하고 개인의 의사를 반영치 못하는 것으로 경쟁이 필요가 없어짐에 따라 공급경쟁도 사라지면서 상품의 가격 대비 품질이 낮아지는 것으로 소비자와 국가 경제와 노동자와 자본가가 불행하게 되는 것과 같은 것으로 개인을 불행하게 하고 사회를 해롭게 한다.

이처럼 개인이 개인의 이익만을 추구해야 개인이 행복하고 사회에 이롭게 된다. 개인이 집단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순간부터 개인은 자유권과 주권과 선택권이 침해된다. 그 외 집단의 이익을 위해 개인의 소유권도 침해되게 된다. 개인주의 체제에서는 집단주의 관념은 성립될 수 없다. 개인주의 체제에서 개인주의 관념은 개인을 행복하게 하고 사회를 이롭게 하는 선이고 집단주의 관념은 개인을 불행하게 하고 사회를 해롭게 하는 악이다. 반대로 집단주의 체제에서 집단주의 관념은 집단을 행복하게 하고 사회를 이롭게 하는 선이고 개인주의 관념은 집단을 불행하게 하고 사회를 해롭게 하는 악이다. 많은 사람들이 개인주의 관념을 악으로 여기는 것은 집단주의 체제의 관습으로 관념에 남아서 그런 것일 뿐이다. 선과 악은 기준에 따라 달라지므로 체제에 맞는 옳고 그름으로 사물을 판단해야 할 것이다.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와 자본주의 같은 개인주의 체제는 개인이 개인의 이익만을 위해야 올바른 결과가 나올 수 있을 정도로 진보한 체제다. 보다 많은 개인이 행복할 수 있도록 설계된 진보한 사상이다. 개인주의야말로 인류 문명의 진보다. 집단주의 따위를 진보라 부르는 것은 인류 문명에 대한 모욕이다. 그럼에도 개인주의 체제에 속한 자유주의자나 민주주의자나 자본주의자조차도 집단주의 관념에 의해 개인주의 체제에서 집단주의적인 옳고 그름이 옳다고 착각하여 집단주의 관념에 따른 올바르다 말하는 주장을 진보라고 받아드리게 되었다. 몹시 안타까운 일이다. 현재 이탈리아에서 파시즘과 PC주의가 갈등을 빚고 있다고 하는데 파시즘과 PC주의의 본질은 둘 다 집단주의다. 파시즘은 강자와 다수자와 내국인을 우선시하는 것을 개인에게 가용하여 수용토록 한 집단주의고 PC주의는 약자와 소수자와 외국인을 우선시하는 것을 개인에게 강요하여 수용토록 한 집단주의다. 대상만 다를 뿐이지 형태는 집단주의로 같기에 두 사상 모두 집단주의 관념을 가진 이들에게 선택 받기가 수월했다. 파시즘을 우파 보수라 부르고 PC주의를 좌파 진보라 부를 텐데 이것은 같은 집단주의에서 누가 권력 쥐느냐에 따라 달라진 권력다툼에 불과하므로 이런 것에 우파 보수와 좌파 진보를 붙이지 말았으면 한다. 보수와 진보라고 말할 거라면 집단주의와 개인주의와 같이 명료하게 알 수 있는 객관적인 기준이 있어야 한다. 기준이 어중간하니까 우파나 좌파나 범위가 지나치게 포괄적이고 영역이 모호한 것이다. 또한 강자와 약자의 대결구조로 가다 보니 논리와 무관하게 이익을 보거나 손해를 보는 일이 발생하여 비논리적인 상황이 지나치게 많아지고 있다. 이와 같은 현상은 집단주의의 올바름인 이타주의가 선이라 생각하는 관념으로 나타났다. 현상을 이해하기 위해 집단주의와 개인주의의 옳고 그름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알 필요가 있다.

 

집단주의와 개인주의의 옳고 그름에 대해 알아보자. 집단주의는 개인의 이익보다는 집단의 이익을 우선시하기에 이타주의가 선이고 개인주의는 개인의 이익만을 추구하기에 이기주의가 선이다. 개인주의 체제에서 집단주의 관념이 성립될 수 없는 것도 이렇게 옳고 그름이 정반대이기 때문이다. 모든 주의는 본인만 적용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닌 모든 개인이 적용되는 것을 말함을 미리 말해두겠다. 이타주의라면 본인뿐만 아니라 타인도 이타적이게 되어야 하고 이기주의라면 본인뿐만이 아니라 타인도 이기적이게 되어야 한다.

이타주의에 대해 알아보자. 이타주의는 타인의 행복과 복리의 증가를 행위의 목적으로 하는 생각이나 행위를 뜻한다. 타인의 기준이 없기에 몹시 포괄적이고 추상적이어서 인간이 인간을 이용하기가 매우 쉽다. 왜 부자유스럽고 비민주적이고 반자본주의적인 왕정이나 신정 같은 집단주의 체제에서 이타주의가 바르게 여겨졌는지를 생각해봐야 한다. 이타주의는 타인을 돕는 수단으로 쓰였지만 타인을 이용하는 수단으로도 쓰였기 때문이다. 이타주의를 배운 인간은 두 가지 부류로 나뉘게 되는데 하나는 본인의 이익을 위해 타인을 이타적으로 만드는 부류고 둘은 타인의 이익을 위해 본인을 이타적으로 만드는 부류다. 집단주의에서는 집단의 장이 보통 본인의 이익을 위해 타인을 이타적으로 만들어 이용하고 집단 구성원은 타인의 이익을 위해 본인을 이타적으로 만들어 이용당한다. 이용하는 집단의 장에는 왕, 주교, 사장, 가장 등이 있고 이용당하는 집단 구성원에는 평민, 신자, 사원, 배우자와 자녀 등이 있다. 집단주의는 이타주의를 근거로 개인을 희생시키는데 최적화가 되어 있다. 국가와 종교와 회사와 가정을 위해서 개인은 희생하라. 집단주의는 개인보다는 집단의 이익을 우선시하면서 집단 안과 밖을 구분하여 집단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집단 이기주의가 된다. 이기주의가 붙었다고 하여 집단 이기주의를 개인 이기주의와 혼동하면 안 된다. 어디까지나 집단 이기주의는 집단주의에서 파생된 것이다. 국가, 종교, 가족, 조직, 부서, 지역, 세대, 성별 등 특정 집단의 이익만을 추구하여 집단 이외의 사회를 해롭게 한다. 집단주의 관념을 가진 국가에서 대부분의 횡령과 배임 등의 비리는 집단의 이익을 위해서 동조하거나 외면하는 것으로 동참하거나 고발치 않는 것으로 나타난다. 집단주의 체제인 많은 국가나 종교가 그토록 부패로 얼룩진 까닭은 이타적이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집단주의 체제에서 일부 개인은 인간을 이용하여 이익을 얻기에 행복하나 대다수 개인은 인간에게 이용당해 불행하다.

이기주의에 대해 알아보자. 이기주의는 남이나 사회 일반을 돌아보지 않고 자기만의 이익이나 행복을 추구하는 사고방식이나 태도를 뜻한다. 본인이란 명확한 기준이 있어 인간이 인간을 이용하기가 쉽지 않다. 왜 자유롭고 민주적이고 자본주의적인 민주정 같은 개인주의 체제에서 이기주의가 바르게 여겨져야 하는지 생각해봐야 한다. 이기주의는 본인이란 명확한 기준이 있기에 이용당하지 않고 모두가 공정하게 행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흔히 강자의 이기주의에 의해 약자가 이용당하고 있다고 말을 하는데 되려 강자가 약자를 이타적으로 만들어 이용하고 있는 것이었다. 정녕 약자를 위해서라면 강자와 약자가 모두 이기적일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해야 한다. 그러면 모두가 이기적이기에 이기적으로 의견을 펼치거나 자유권과 주권과 선택권 등의 권리를 행사하고, 의견이나 권리 행사가 충돌하면 대화나 여론이나 법을 통해 보다 논리적인 주장을 사회가 받아드리게 된다. 그러면서 사회는 공정하고 합리적이게 된다.

그런데 이타주의와 이기주의는 명확하게 구분 짓기가 어렵다. 본인이 타인의 이익을 위한 것이라 생각하고 행동하더라도 타인은 불행할 수 있다. 부모가 자녀의 이익이라 생각하며 진로를 강요하여 자녀가 그 진로를 결정하더라도 자녀는 불행할 수 있다. 부모 입장에서는 자녀의 이익을 위했으므로 이타적으로 행동했고 자녀 입장에서는 자녀가 이익을 얻었으므로 이기적이게 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자녀 입장에서는 그것을 본인의 이익으로 여기지 않았다. 자녀의 자유의지에 반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타주의와 이기주의는 자유의지라는 객관적 기준으로 구분해야 한다. 부모는 본인의 자유의지로 자녀에게 진로를 강요하였으므로 이기적으로 행동했다. 자녀는 타인의 자유의지에 의해 본인의 진로를 강요당하여 진로를 결정하였으므로 이타적으로 행동했다. 이처럼 자유의지를 기준으로 삼으면 이타주의와 이기주의의 구분이 명확하게 된다. 남이나 사회 일반을 돌아보지 않더라도 개인이 그것을 본인의 이익으로 삼고 자유의지로 행하게 된다면 남이나 사회의 이익을 위할 수가 있게 된다. 결과적으로는 이타주의가 같게 될 수 있지만 이기주의는 개인의 자유의지와 그에 따른 책임을 붙어 타인을 위한다 하더라도 타인에게 책임을 돌리지 않는다.

개인주의 체제에서는 부모와 자녀가 모두 이기적으로 진로에 대한 주장을 펼치고 타당한 논리를 서로가 수용하면 된다. 대화를 통해 부모의 논리가 타당하다 여겨져서 부모가 제안한 진로를 받아드리면 그것 또한 본인의 자유의지가 되므로 본인만의 이익이라 생각하는 것으로 이기적이게 된다. 이러면 책임소재도 간단해진다. 타인의 의지로 행해진 것은 타인이 책임지고 본인의 의지로 행해진 적은 본인이 책임진다. 부모가 제안한 진로를 본인의 의지로 결정한 것이라면 부모가 제안했더라도 본인이 책임져야 한다. 자유와 책임이 비례하게 되면서 인간이 인간을 이용하는 일이 줄어들게 된다. 강요한 인간이 모든 책임을 짊어지게 되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악이란 정당한 기준이나 절차 없는 과한 이익을 말한다. 부당이득 대부분이 악에 해당한다. 책임소재가 명료하지 않으면 서로에게 책임을 떠넘겨 과한 이익이나 과한 손해가 나타난다. 책임소재 불분명으로 악이 유발되게 된다. 이타주의와 이기주의를 자유의지를 기준으로 나누면 책임소재가 명료하게 되어 악이 줄어들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개인주의 체제에서 대다수 개인은 이용당하지 않기에 정당한 이익을 얻을 수 있어 일부를 제외하면 행복할 수 있다. 한국은 유교라는 집단주의 관념과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라는 개인주의 체제를 갖춰 관념으로는 이타주의가 바르지만 체제로는 이기주의가 바른 정반대의 옳고 그름으로 사회가 몹시 혼란스러운 상황이다. 관념으로 바른 일을 하면 할수록 사회에는 해로워 점점 더 사회가 불행하게 된다. 그에 대해 알아보자.

 

 

하나, 세습. 집단주의에서는 집단의 이익을 위해 왕과 귀족과 같은 기득권은 혈연에게 작위나 가업을 세습하여 사회적 역할을 얻지만 개인주의에서는 개인의 이익을 위해 모든 개인이 공정하게 경쟁하여 사회적 역할을 얻는다. 집단주의 관념을 가진 사람이 이타적으로 혈연에게 지역구나 경영이나 고용을 세습하려고 하면 할수록 개인주의 체제인 사회에는 해로워 점점 사회가 불행하게 된다. 경쟁이 사라져 경쟁력을 잃은 사회가 된다.

 

, 입시와 취업 비리. 집단주의에서는 집단의 이익을 위해 부모가 자녀의 입시나 취업 비리를 저지르지만 개인주의에서는 개인의 이익을 위해 모든 부모의 자녀가 공정하게 경쟁한다. 집단주의 관념을 가진 사람이 이타적으로 자녀의 입시와 취업에 관여하여 비리를 저지르면 저지를수록 개인주의 체제인 사회에는 해로워 점점 사회가 불행하게 된다. 공정이 사라져 공정성을 잃은 사회가 된다.

 

, 담합. 집단주의에서는 집단의 이익을 위해 노동자는 노동조합에서 담합을 하고 자본가는 협회에서 담합을 하고 있지만 개인주의에서는 개인의 이익을 위해 모든 개인이 시장에서 공정경쟁을 하고 있다. 집단주의 관념을 가진 사람이 이타적으로 노동자나 자본가의 담합을 하면 할수록 개인주의 체제인 사회에는 해로워 점점 사회가 불행하게 된다. 노동자의 담합은 바르고 자본가의 담합이 그른 것은 부유한 대기업 노동자와 가난한 자영업자를 고려해보면 힘의 차이가 아닌 체제의 차이다.

 

, 성 죄악시와 이성관계 단절. 집단주의에서는 집단의 이익을 위해 개인이 중매결혼을 하고 있지만 개인주의에서는 개인의 이익을 위해 개인이 자유연애를 하고 있다. 집단주의 관념을 가진 사람이 이타적으로 성을 죄악시하고 이성관계를 단절시키면 시킬수록 개인주의 체제인 사회에는 해로워 점점 사회가 불행하게 된다. 유교적 도덕관념으로 성을 죄악시하고 이성관계를 단절시키는 것이 사람과 사회에 도움이 될 거라 생각했겠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집단의 이익을 위한 중매결혼에 적합하지 개인의 이익을 위한 자유연애에는 적합하지 않는다.

 

다섯, 성문화 탄압과 검열. 집단주의에서는 집단의 이익을 위한 자녀의 중매결혼을 위해 미성년인 자녀가 성문화를 접하지 못하도록 모든 성문화를 탄압하고 검열하지만 개인주의에서는 개인의 이익을 위해 미성년인 자녀가 자유롭게 성문화를 접하고 성관계를 하는 것으로 모든 성문화를 탄압하고 검열하지 않는다. 집단주의 관념을 가진 사람이 이타적으로 성문화 탄압과 검열을 하면 할수록 개인주의 체제인 사회에는 해로워 점점 사회가 불행하게 된다. 유교적 도덕관념으로 성문화를 탄압하고 검열하는 것이 사람과 사회에 도움이 될 거라 생각했겠지만 많은 미성년이 성문화를 탄압하고 검열당해 성을 부정적으로 여기면서 잘못된 성관념을 갖게 되는 것으로 성년이 되어서도 성을 부정적으로 여기게 된다.

 

여섯, 탈코르셋과 성인지감수성 강요. 집단주의에서는 집단의 이익을 위해 여성이 탈코르셋을 말하며 꾸밈을 죄악시하고 비혼을 말하며 이성관계를 멸시하고 있지만 개인주의에서는 개인의 이익을 위해 여성이 자유롭게 꾸미고 이성과 연애하고 있다. 집단주의 관념을 가진 사람이 이타적으로 여성인권을 명목으로 탈코르셋과 성인지감수성을 강요하면 할수록 개인주의 체제인 사회에는 해로워 점점 사회가 불행하게 된다. 인간이 인간에게 사랑 받고자 꾸미는 것을 잘못되었다 말하는 것이나 과학적 근거 없이 성별마다 다른 감수성에 따른 혜택이 필요하다 말하는 것은 지극히 비정상적이다.

 

일곱, 국민 감시와 검열. 집단주의에서는 집단의 이익을 위해 정부가 국민을 감시하고 검열하지만 개인주의에서는 개인의 이익을 위해 정부가 감시와 검열을 하지 않고 개인이 개인과 대화나 여론이나 법을 통해 문제를 해결한다. 집단주의 관념을 가진 사람이 이타적으로 국민 안전을 명목으로 간첩과 성범죄자를 잡겠다며 국민을 감시하고 검열하면 할수록 개인주의 체제인 사회에는 해로워 점점 사회가 불행하게 된다. 간첩을 잡겠다고 국민을 간첩으로 상정하고 간첩 몰이했던 독재정권에 비판하고 저항했던 이들이 성범죄자를 잡겠다고 국민을 성범죄자로 상정하고 성범죄자 몰이를 하며 검열정권이 되는 것은 집단주의 관념에 의한 비극이라 할 수 있다.

 

여덟, 연령차별. 집단주의에서는 집단의 이익을 위해 장유유서와 같이 연령으로 차례를 만들어 질서를 유지하지만 개인주의에서는 개인의 이익을 위해 역할주의와 같이 모든 개인이 평등한 기준으로 차례를 만들어 질서를 유지한다. 집단주의 관념을 가진 사람이 이타적으로 연령에 따른 차례를 지킬 것을 강요하면 할수록 개인주의 체제인 사회에는 해로워 점점 사회가 불행하게 된다. 꼰대질은 어디까지나 집단주의 관념에 따라 지극히 도덕적인 행위였기에 나타났고 개인주의 체제에 해롭기에 많은 이들이 비판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아홉, 역할차별. 집단주의에서는 집단의 이익을 위해 신분제나 사공농상과 같이 사회적 역할로 차례를 만들어 질서를 유지하지만 개인주의에서는 개인의 이익을 위해 역할주의 같이 모두가 평등한 기준으로 차례를 만들어 대등한 관계를 유지한다. 집단주의 관념을 가진 사람이 이타적으로 직업이나 지위에 따른 차례를 지킬 것을 강요하면 할수록 개인주의 체제인 사회에는 해로워 사회가 점점 불행하게 된다. 갑질은 어디까지나 집단주의 관념으로 나타났고 개인주의 체제에 해롭기에 많은 이들이 비판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 내부고발 멸시. 집단주의에서는 집단의 이익을 위해 집단이나 집단 구성원의 비리를 고발하는 사람을 멸시하지만 개인주의에서는 개인의 이익을 위해 비리를 고발하는 사람을 우대한다. 집단주의 관념을 가진 사람이 이타적으로 내부 비리를 고발한 이들을 멸시하면 할수록 개인주의 체제인 사회에는 해로워 사회가 불행하게 된다. 한국에서 횡령이나 배임은 내부 비리를 고발하면 배신자라 불리며 멸시당할 수 있다는 것을 알기에 서로를 고발하지 않는다는 것도 알아 심리적 제동장치가 작동하지 않게 되면서 잦을 수밖에 없다.

 

열하나, 오지랖이 넓은 것. 집단주의에서는 집단의 이익을 위해 타인에게 쓸데 없이 참견하지만 개인주의에서는 개인의 이익을 위해 본인의 일과 무관하면 웬만하면 참견하지 않고 참견하더라도 본인의 이익으로 여기며 본인이 책임지려 하지 타인의 이익으로 여기며 타인에게 책임지게끔 하지 않는다. 집단주의 관념을 가진 사람이 이타적으로 정이란 명목으로 타인에게 쓸데 없이 참견하면 할수록 개인주의 체제인 사회에는 해로워 사회가 불행하게 된다. 한국에서 시골이 소멸하는 까닭은 연령차별과 오지랖 넓은 것으로 연하에게 쓸데 없는 참견을 하여 괴롭게 하기 때문에 연하에 속하는 많은 젊은이들이 시골을 떠나거나 시골에 가지 않기 때문이다.

 

열둘, 자녀에게 가업을 잇도록 강요. 집단주의에서는 집단의 이익을 위해 부모가 자녀에게 가업을 잇도록 강요하지만 개인주의에서는 개인의 이익을 위해 자녀가 바라는 일을 할 수 있도록 한다. 집단주의 관념을 가진 사람이 이타적으로 집안을 위해서라는 명목으로 자녀의 진로에 간섭하여 가업을 이으라 강요하면 할수록 개인주의 체제인 사회에는 해로워 사회가 불행하게 된다. 자녀는 부모의 소유물이 아닌 한 명의 인격체다.

 

열셋, 자녀를 소유물로 여기는 것. 집단주의에서는 집단의 이익을 위해 부모가 자녀를 소유물로 여기며 사생활에 대한 간섭을 수용할 것을 강요하지만 개인주의에서는 개인의 이익을 위해 부모가 자녀를 인간으로 여기며 사생활에 대한 간섭을 대화와 설득으로 수용하게 한다. 집단주의 관념을 가진 사람이 이타적으로 자녀를 위해서라는 명목으로 자녀를 소유물처럼 온갖 것에 간섭하고 간섭한 것을 강요하면 할수록 개인주의 체제인 사회에는 해로워 사회가 불행하게 된다. 자녀를 소유물로 여기면 여길수록 과하게 보호하거나 쉽게 살해한다.

 

열넷, 애국심으로 희생을 강요. 집단주의에서는 집단의 이익을 위해 애국심으로 국민에게 희생을 강요하지만 개인주의에서는 개인의 이익을 위해 자발적으로 애국심을 가질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고 있다. 집단주의 관념을 가진 사람이 이타적으로 국가를 위해서라는 명목으로 국민에게 애국심을 강요하면 할수록 개인주의 체제인 사회에는 해로워 사회가 불행하게 된다. 이타적으로 국민이 국민에게 일방적으로 애국심을 강요할 것이 아니라 모두가 이기적으로 국민과 국민이 대화와 여론과 법을 통해 합리적인 결론으로 대다수가 행복할 수 있어야 한다. 통일에 대한 시각도 집단주의라면 신앙하듯 감성적으로 접근하나 개인주의라면 논리를 가지고 이성적으로 접근한다.

 

열다섯, 학생에 대한 체벌과 폭언. 집단주의에서는 집단의 이익을 위해 학생에게 체벌과 폭언을 가하여 사회에 해를 끼치지 못하도록 하지만 개인주의에서는 개인의 이익을 위해 학생이 자유와 의무와 책임과 역할에 알 수 있도록 대해 가르친다. 집단주의 관념을 가진 사람이 이타적으로 사회를 위해서라는 명목으로 학생을 체벌해야 바르게 될 수 있다고 말하며 체벌을 정당화하면 할수록 개인주의 체제인 사회에는 해로워 사회가 불행하게 된다. 한국에서 일어나는 학교붕괴는 체벌을 가하지 않은 것이 원인인 것이 아니라 교사는 이타적으로 행동하라 강요하는데 학생은 이기적으로 행동해도 되도록 만들어서 일부 학생이 일방적인 이익을 얻을 수 있는 상황이 원인이다.

 

열여섯, 집단 괴롭힘을 실행하거나 방관하는 것. 집단주의에서는 집단의 이익을 위해 특정 개인을 괴롭히는 것을 실행하거나 방관하는 것이 바르지만 개인주의에서는 개인의 이익을 위해 특정 개인을 괴롭히는 것을 실행하거나 방관하는 것이 그르다. 집단주의 관념을 가진 사람이 이타적으로 집단을 위해서라는 명목으로 특정 개인을 괴롭히는 것을 실행하거나 방관하면 할수록 개인주의 체제인 사회에는 해로워 사회가 불행하게 된다. 집단주의에서는 아무 말이나 붙이며 집단의 이익이라고 하기만 하면 괴롭힘은 정당화되게 된다. 괴롭힘에 동조하거나 방관하는 것은 그것이 무섭기 때문이 아닌 바르기 때문이다. 자기보신적 이타주의가 집단 괴롭힘을 방관하게 한다. 가족이나 학교나 회사나 집단임이 분명하고 그 집단 내의 괴롭힘을 외부에 고발하는 것은 집단의 손해로 이어질 확률이 높다. 집단의 이익을 우선시하라는 명령 속에서 집단에 손해가 될 수 있는 고발을 꺼려하게 된다. 인간 개개인의 무력은 칼과 총의 등장으로 아무리 집단 괴롭힘을 실행하더라도 무기에는 이길 수가 없다. 개인주의였다면 개인의 이익이 침해되는 순간 개인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신고를 하거나 무기를 들었을 것이다.

 

열일곱, 인맥에게 특혜 주는 것. 집단주의에서는 집단의 이익을 위해 인맥에게 특혜를 주지만 개인주의에서는 개인의 이익을 위해 인맥에게 특혜를 주지 않는다. 집단주의 관념을 가진 사람이 이타적으로 인맥을 위해서라는 명목으로 인맥에게 특혜를 주면 줄수록 개인주의 체제인 사회에는 해로워 사회가 불행하게 된다. 개인주의라면 집단 안에 속한 개인이나 집단 밖에 속한 개인이나 같은 개인으로 여기기에 인맥에 특혜를 줄 일이 없다. 만약 주는 일이 있더라도 그에 대한 책임을 진다.

 

열여덟, 부정선거를 실행하거나 방관하는 것. 집단주의에서는 집단의 이익을 위해 부정선거를 실행하거나 방관하는 것이 바르지만 개인주의에서는 개인의 이익을 위해 부정선거를 실행하거나 방관하는 것이 그르다. 집단주의 관념을 가진 사람이 이타적으로 집단을 위해서라는 명목으로 부정선거를 실행하거나 방관하면 할수록 개인주의 체제인 사회에는 해로워 사회가 불행하게 된다. 부정선거를 쉽게 하거나 동조하게 되는 것은 그것이 집단을 위해서라며 정당화되었기 때문이다.

 

열아홉, 아이들의 아파트 줄 세우기. 집단주의에서는 집단의 이익을 위해 아파트로 줄 세우는 것이 바르지만 개인주의에서는 개인의 이익을 위해 아파트로 줄 세우는 것이 그르다. 집단주의 관념을 가진 사람이 이타적으로 자녀를 위해서라는 명목으로 개인의 능력과 무관한 줄 세우기를 가르치면 칠수록 개인주의 체제인 사회에는 해로워 사회가 불행하게 된다. 이런 현상은 집단 내에서 어떤 기준을 차례로 만드는 질서에 순응했기 때문에 나타나는 것으로 그런 질서를 가르치고 유지하던 사회에 의한 것이다. 개인주의라면 모든 개인이 다른 가치관을 가져야 하기에 그런 줄 세우기에 모두가 동참하지 않아 유행할 수가 없다. 아이들의 이런 태도나 범죄로 성악설을 신봉하기도 하는데 그것은 지극히 이타주의가 선으로 여기는 발상으로 집단주의적인 사고방식일 뿐이다.

 

스물, 개성을 잃은 인간은 집단주의에서는 바르지만 개인주의에서는 그르다. 집단주의에서는 집단의 이익을 위해 개인이 개성을 잃어야 하지만 개인주의에서는 개인의 이익을 위해 모든 개인이 다양한 개성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집단주의 관념을 가진 사람이 집단의 이익을 위해 같은 생각과 행동을 하도록 강요하면 할수록 개인주의 체제인 사회에는 해로워 사회가 불행하게 된다. 특정 유형이란 집단에 속하지 않으면 불안하게 되어 혈액형이나 성격 검사 유형에 집착하거나 일부 상품의 과잉 인기나 물질에 대한 과한 집착은 개인이 개성을 잃어 본인만의 가치관이 없기에 나타난다. 타인의 의지로 결정한 인생으로 일생 본인의 선택에 책임을 지지 않고 후회를 하며 살아가 끔찍하다.

 

 

이와 같이 한국은 옳고 그름이 정반대인 집단주의 관념과 개인주의 체제의 충돌로 인해 집단주의 관념으로 바르다 여긴 것을 행하면 행할수록 개인주의 체제인 사회에 해로워짐에 따라 사회가 점점 더 불행해져 가고 있다. 오래된 사회 문제라 할 수 있는 높은 자살률이나 낮은 출산율이 개선되기는커녕 점점 더 악화되고 있는 것은 바르다 여긴 것을 행하면 행할수록 사회에는 해로웠기 때문이다. 집단주의 관념에 의해 집단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것으로 세습과 비리와 담합을 하면서 공정한 경쟁을 하지 않게 되고, 성을 죄악시하면서 이성관계를 단절시키고 성문화를 탄압하고 검열하게 되고, 국민을 감시하고 검열하면서 개인의 자유권이 침해되고, 내부고발을 멸시하면서 집단 내 부정부패가 사라지지 않는 등과 같은 결과가 나왔다. 집단주의 관념으로 바르다 여긴 것을 행하면 행할수록 개인주의 체제에서는 그르게 되었다. 그른 결과를 보고도 집단주의 관념을 부정하지 못하고 바르다 배운 것을 더욱 더 열심히 하면서 상황은 더욱 더 악화되었다.

한국은 날이 갈수록 도덕성이 중시되나 정반대의 옳고 그름이 공존하여 도덕성이 객관적 기준을 잃었다. 관념에선 바른 것이 체제에선 그르고 체제에선 바른 것이 관념에선 그르다. 어느 한쪽에서는 도덕적이더라도 다른 한쪽에서는 부도덕적인 것이 된다. 유교라는 집단주의 관념에서는 연하가 연상에게 복종하는 것이 바르고 모두가 평등한 것이 그르지만 개인주의 체제에서는 모두가 평등한 것이 바르고 연하가 연상에게 복종하는 것이 그르다. 이런 탓에 지나치게 자기중심적인 도덕성이 발현되었다. 본인이 연상과 평등한 것은 바르고 연상에게 복종하는 것은 그르지만, 본인이 연하와 평등한 것은 그르고 연하에게 복종시키는 것이 바르다. 본인의 이기심은 바른데 타인의 이기심은 그르다. 내가 본인만을 사치하는 것은 바른데 남이 본인만을 위해 사치하는 것은 그르다. 본인의 이타심은 바른데 타인의 이타심은 그르다. 내가 가족을 위해서 비리를 저지르는 것은 바른데 남이 가족을 위해 비리를 저지르는 것은 그르다. 정말 엉망진창이다. 개인주의 체제에서 개인의 이기적인 행동이 잘못되어 보였던 것은 이와 같이 일관성이 없는 자기중심적인 옳고 그름으로 본인의 모든 행동은 정당화하고 타인의 모든 행동은 부당화하면서 모든 책임을 타인에게 떠넘겼기 때문이다. 정상적인 이기주의라면 당연히 본인의 이기심만큼 타인의 이기심을 인정해야 하므로 서로가 서로의 이기적인 주장이 옳고 그른지 대화를 하게 된다. 그리고 본인의 자유의지에 따른 이기적인 행동에 대한 책임을 졌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 내 이기심과 이타심은 바른데 네 이기심과 이타심은 그르다며 내가 하면 로맨스고 남이 하면 불륜과도 같은 자가당착을 저지르니 집단주의 관념에 의해 이기주의가 잘못되었다 생각하며 책임을 지지 않는 것이다.

어떤 주의에 있어 이런 자가당착은 보편적 주의로 성립될 수 없다. 내가 자유로우면 남도 자유로운 것을 받아드려야 하고 내가 이기적이면 남도 이기적인 것을 받아드려야 자유주의나 이기주의로 성립이 가능한 것이다. 일방적인 자유와 이기심은 보통 독재자가 그러하고 있다. 여성주의는 여성 집단의 이익을 위해 여성 개인의 이익을 무시하는 전형적인 집단주의임에도 여성주의를 비판하는 이는 여성의 이기심을 비판하지 이타심을 비판하지 않는다. 집단주의 관념에 의해 이타심이 잘못되었다는 생각 자체를 못한다. 이기주의는 잘못된 것이 아니다. 이기주의가 잘못된 것이 아니라 자가당착적인 이기주의가 잘못되었고 그런 이기적인 행동에 이타적으로 무비판적 수용하는 것이 잘못되었다. 논리 안에 살고 있는 사람은 논리 밖에 살고 있는 사람의 의견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것은 지성인으로서 명예롭지 못한 일이다.

 

이런 것을 안다면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대립구도를 다시 볼 수 있다. 생각해보자. 관념과 체제의 옳고 그름이 정반대가 되면 관념에 의해 체제를 부정하며 반대하게 된다. 집단주의 관념을 깊게 가진 사람은 개인주의 체제를 용납할 수 없게 된다. 유교나 기독교 같은 이타주의가 바른 집단주의 관념을 가진 사람이 자유주의나 민주주의나 자본주의 같은 이기주의가 바른 개인주의 체제가 어떻게 보이겠는가? 인간의 이타심을 부정하고 이기심을 부추기는 악의 사상으로 보일 것이다. 개인주의 체제에 적합한 이기적인 사람조차도 집단주의 관념에 의해 이기적인 행동을 잘못되었다 생각한다. 그러니까 이기적인 행동을 하고 종교로 회개를 한다. 집단주의 관념을 가진 사람에게 개인주의 체제인 자본주의는 악으로 보였기에 감성적으로 무조건 반대하게 되었다.

만약 집단주의 관념에서 벗어나 자본주의를 이성적으로 바라볼 수 있었다면 많은 것은 달라졌을 것이다. 하나, 자본가의 노동자 착취를 이성적으로 보자. 그 착취는 영주의 농노 착취와 같기에 신분제 관념이 원인이다. 자본주의의 문제가 아니기에 자본주의 내에서 노동자와 자본가가 대등할 수 있는 제도를 주장했을 것이다. , 자본주의의 경제적 불평등을 이성적으로 보자. 그 불평등은 신분제 관념과 부의 대물림으로 인한 교육의 불평등이나 초기자산 차이 또는 정경유착이나 담합 등과 같은 건전한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해치는 것이 원인이다. 자본주의의 문제가 아니기에 자본주의 내에서 모든 인간이 공정한 경쟁을 할 수 있도록 평등한 교육과 공정한 경쟁과 타당한 투자로 부를 쌓아 올릴 수 있는 제도를 주장했을 것이다. , 제국주의를 이성적으로 보자. 그 약소국을 침략하여 식민지를 만든 자본주의의 타락으로 여겨지는 것은 자본주의 자체의 원인이 아닌 인간의 욕망이 원인이다. 자본주의의 문제가 아니기에 모든 개인이 이기적으로 행동해야 올바른 결과가 나올 수 있는 제도를 주장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러지 않았다. 기독교라는 전통적인 도덕관념에 영향을 받아 집단주의 관념을 가지게 된 사상가들은 깊은 자아성찰이나 고찰 없이 무작정 집단주의 체제인 사회주의를 외치며 노동자 집단의 단결로 힘을 합쳐 사유 재산제를 폐지하고 생산 수단 및 재산의 공유와 공동관리를 하면서 자본주의 붕괴를 유도하는 계급투쟁을 하자고 주장했을 뿐이다. 공산주의를 주장한 칼 마르크스가 유물론을 말하는 것은 관계 없다. 칼 마르크스는 기독교 사회에서 성장했기에 기독교의 도덕관념을 갖게 되어 기독교의 빈민구제와 사후 천국과도 같은 노동자구제와 공산주의 낙원을 주장했던 것이다. 사회주의나 공산주의에 민중이 선동을 당한 것도 마찬가지다. 과거 자본가가 왕정이나 제정의 신분제 관념에 의해 노동자를 착취하자 노동자는 유교나 기독교의 집단주의 관념에 의해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에 빠져 혁명을 주장하게 되었다. 한국이 사회주의에 선동을 당하고 북한이 공산주의에 빠졌던 것은 유교에 영향으로 집단주의 관념을 가진 이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현재도 사회민주주의인 독일을 본받자는 지식인이 많은 까닭도 그런 영향이 크다. 이 모든 것이 집단주의와 개인주의의 옳고 그름이 정반대라는 것을 알고 나면 해석이 된다.

 

정반대인 옳고 그름의 충돌로 인해 새로운 유형의 범죄도 나타나게 된다. 보통 체제로 범죄 여부가 결정된다. 관습법 같은 불문법이 존재하나 그것이 체제와 충돌하면 체제에 손을 들어준다. 그러지 않으면 체제 유지가 불가능하다. 만약 집단주의 관념에 의해 신분이나 연령차별을 하게 되면 개인주의 체제와 충돌하면서 차별을 한 이가 가벼울 때에는 비판을 받고 심할 때엔 처벌을 받는다. 범죄는 죄를 범하는 일을 뜻한다. 죄는 양심이나 도의에 벗어난 행위 또는 법에 어긋나는 행위를 뜻한다. 양심이나 도의는 체제에 따라 달라지므로 관념에서 바른 것이다 하더라도 체제에서 그른 것이면 죄가 된다. 그 죄를 범하면 범죄가 된다. 위의 차별은 집단주의 관념에서는 바르나 개인주의 체제에서는 그른 것으로 본인은 바르다 여긴 것을 행했으므로 단순한 범죄가 아닌 도덕적 범죄가 된다. 세습, 담합, 비리, 성 죄악시와 이성관계 단절, 성문화 탄압과 검열, 탈코르셋과 성인지감수성 강요, 국민 감시와 검열, 연령과 역할차별, 내부 고발 멸시 등이 보편적인 도덕적 범죄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도덕적 범죄 중에 법으로 지정되지 않은 것은 체제에 반하는 도덕적 범죄가 되고 법으로 지정된 것은 법에 반하는 도덕적 범죄가 될 것이다. 관념과 체제가 충돌하면 체제에 손을 들어주기에 관념으로는 바르나 체제에는 해로운 범죄가 도덕적 범죄라는 논리는 그것이 실제 체제에 해로운 것과 별개로 반론을 하는 것이 논리적으로 불가능하게 된다. 다양한 도덕적 범죄 중에 자유권 침해와 성 죄악시는 자유주의 이념을 붕괴시키고 출산율을 폭락시켜 국가의 문명과 생존에 해를 끼친 사상 최악의 도덕적 범죄다. 도덕적 범죄자가 함부로 집단주의의 옳고 그름을 말하며 개인의 자유권을 침해하고 인간의 성을 죄악시한다면 분노하며 논리로 단죄하겠다.

자유권 침해에 대해 알아보자. 개인주의 체제인 한국에서 개인의 자유권 침해가 일상화되면 점점 더 문명이 과거로 퇴보하게 된다. 이는 국가 문명의 발전을 저해하는 지독한 도덕적 범죄다. 많은 자유권 침해가 인간을 열등하게 여기는 것에서 시작한다. 독재국가와 보호자가 국민과 피보호자를 통금하고 감시하고 검열이란 자유권 침해를 저질렀던 것은 국민과 피보호자를 우매하고 열등하게 여겼기 때문이다. 우매하고 열등한 국민과 피보호자는 스스로 바른 판단을 하지 못할 거란 전제 아래 수많은 억압과 통제를 가했다. 간첩과 성범죄자를 잡겠다고 국민을 감시하고 검열했던 것을 떠올려보자. 간첩을 잡겠다고 사사로운 인간 사이의 대화를 일일이 감청했던 것과 같이 성범죄자를 잡겠다고 사사로운 인간 사이에서의 대화를 일일이 감시하고 있다. N번방 방지를 명목으로 사사로운 인간관계의 대화를 자동적으로 감시하여 검열하거나 신고하고 있다.

개인주의 체제에서는 개인의 자유권을 보장하기 위해 강제력은 다음과 같이 분류될 수 있다. 사회 구조 유지를 위한 최소한의 규칙에 의한 기본적인 강제력과 사회 구조 유지에 영향은 작지만 개인을 불행케 하는 사건을 사전에 예방하기 위한 강제력이 없는 예방책과 사회 구조를 무너뜨리거나 개인을 불행케 하는 사건의 사후조치를 위한 강제력이 있는 집행이 있다. 성범죄자 사건은 사회 구조 유지에 영향은 작지만 개인을 불행케 하는 사건으로 사전에는 강제력이 없어야 했다. 그럼에도 강제력을 동원하여 개인의 자유권을 과하게 침해하고 있다. N번방 방지법은 정말 개인의 자유권을 지나치게 침해하는 악법이다. 이런 개인의 자유권 침해는 유서 깊다. 유해매체를 몰아내겠다고 인터넷에 있는 사이트를 접속하지 못하도록 차단하거나 창작물을 감시하고 검열했던 것을 떠올려보자. 모든 인간이 접속하지 못하도록 HTTP HTTPs를 검열하여 차단하고 모든 인간이 접하는 창작물을 인간의 성과 피와 담배 같은 유해하다 여겨지는 모든 것을 보이지 않게끔 검열했다. 악플이 달린다고 기사 댓글을 금지하고 검색어 순위를 악용한다고 검색어 순위를 금지한다. 도대체 자유주의 이념을 얼마나 우습게 보면 이럴 수가 있는가? 정말 집단주의 관념에 의해 자행된 끔찍한 도덕적 범죄다.

통신매체이용음란죄나 디지털성범죄도 마찬가지다. 가상은 현실과 달리 물리적 접촉이 불가능하여 어떤 불쾌한 피해를 당하게 되면 차단과 신고로 가해자의 존재를 지워버릴 수 있는 것과 같이 개인이 충분히 쉽게 대응할 수 있음에도 그걸 형법으로 처벌하거나 처벌하려고 하고 있다. 정말 얼마나 사람을 깔보는 건가? 사람이 그 정도로의 대응도 못할 머저리로 보이는가? 그렇게 함부로 형벌권을 남발하여 행정력을 낭비하니 정작 필요한 사람이 도움을 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런 식으로 무조건 막다 보면 개인의 판단능력이 성장할 수 없게 되어 모든 인간이 성장하는 문명으로 발전할 수 없게 된다. 문명의 퇴보다. 정당바위는 대응 가능 여부에 따라 성립된다. 상대방을 공격하지 않으면 대응이 불가능할 경우에는 상대방을 공격해도 정당방위로 성립되나 공격하지 않아도 대응이 가능할 때에는 상대방을 공격하면 정당방위가 아닌 사적제재가 되어버린다. 대응 가능 여부로 법적 판단이 달라질 수 있다. 법적으로 봐도 충분히 개인이 대응할 수 있는 것을 권력이 간섭하여 형법으로 처벌하는 것은 권력이 형벌을 이용한 사적제재를 가하는 것과 다르지 않을 정도로 국가형벌권의 과잉행사라 할 수 있다. 개인의 대응 가능 여부를 고려치 않으면 도대체 무엇 때문에 정당방위 기준을 깐깐하게 잡았는가? 법은 어디까지나 논리적으로 접근해야 한다.

성 죄악시에 대해 알아보자. 개인주의 체제인 한국에서 성을 죄악시하며 미성년 때부터 성관계를 막고 성관계로 나아갈 수 있는 이성관계를 막고 성관계를 배우는 성교육을 막고 성관계를 즐기는 성문화를 막게 되면 성을 부정적으로 여기는 잘못된 성관념을 갖게 되어 미성년이 성년이 되어도 많은 사람들이 연애와 결혼과 출산을 하지 않게 된다. 학습효과가 뭔지를 알아야 한다. 그토록 성을 잘못되었다고 세뇌해놓고 출산율이 높아질 수 있다고 보는가? 인간이 어떤 식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는지를 생각해봐야 한다. 한창 성욕이 들끓는 나이에 성을 잘못되었다고 배우는데 어떻게 올바른 성관념이 자리잡을 수 있겠는가? 정말 집단주의 관념에 의해 자행된 지독한 도덕적 범죄다. 모든 인간은 성기능이 동작할 무렵인 사춘기부터 모두 성관계를 해야 한다. 성은 상품화되어야 하고 인간은 성적 대상이 되어야 한다. 그렇게 모두가 성을 긍정적으로 바라봐야 한다. 성은 죄가 아니다. 집단주의 관념에 의해 이해하기 어렵다면 대부분 진리로 증명된 과학을 떠올려보길 바란다. 다른 생물의 교미가 죄로 보이는가? 모든 인간이 자유의지로 자유롭게 성관계를 맺는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다.

성추행이나 성폭행 등은 전부 개인의 자유권을 침해한 것이지 성인지감수성이 부족한 것이 아니다. 도대체 개인의 자유권 침해에 감수성이 어디서 나올 수 있는 건가? 남성은 성추행이나 성폭행을 당해도 괜찮고 여성은 성추행이나 성폭행을 당하면 안되나?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 한다. 성별관계 없이 성추행이나 성폭행은 자유권 침해로 접근해야 한다. 감수성을 말하면서 법의 논리성을 파괴하는 이들이 비논리를 결코 수용해서는 안 된다. 한국은 성을 죄악시하지 않는 올바른 성관념이 자리 잡혀야만 모든 개인이 일상 속에서 능동적인 이성관계를 통해 자연스럽게 연애하고 성관계를 맺고 결혼하고 출산하며 행복할 수 있다. 저출산은 복지 이전에 집단주의 관념의 문제다. 아무리 복지로 돈을 쏟아 부어도 잘못된 성관념으로 나타나는 저출산은 결코 막을 수가 없다. 자유나 성에 대한 잘못된 관념을 모든 인간에 벗어나는 것은 시간이 걸린다. 그러므로 적어도 국가를 책임지는 이들은 낡은 집단주의 관념에서 벗어나 개인의 자유권을 부당하게 침해하거나 성을 죄악시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정반대의 관념과 체제의 옳고 그름의 공존을 알기 쉽게 비유하면 공기로 숨을 쉬는 인간이 우주에서 사는 것과 같다. 인류에 있어 집단주의는 마치 공기인 것처럼 익숙하고 개인주의는 우주인 것처럼 생소할 것이기에 그렇다. 아직까지도 체제와 무관하게 맹목적으로 이타주의가 바르고 이기주의가 그르다는 인식이 일반적이라는 것을 떠올려보자. 대부분 집단주의 관념을 가지고 있다. 그렇기에 집단주의 관념을 가진 한국인이 개인주의 체제인 사회에서 사는 것은 마치 우주에 사는 인간과도 같았다. 살 수 없는 곳에서 살고 있었다. 한국은 당연히 불행할 수 밖에 없었다. 한국이 이 불행에서 벗어나려면 공기로 숨쉴 수 있는 곳으로 돌아가는 것과 같이 집단주의 체제로 돌아가거나 우주에서 살 수 있도록 진화하는 것과 같이 개인주의 관념으로 진보해야 한다. 즉 사람의 관념에 맞춰 사회의 체제를 바꾸거나 사회의 체제에 맞춰 사람의 관념을 바꿔야 한다는 것이다. 사람의 관념에 맞춰 사회의 체제를 바꾸면 개인은 자유롭게 살 수 없고 주권도 가질 수 없으며 시장에서 사고 싶은 것을 살 수 있는 선택권도 없게 된다. 그걸 바랄 사람은 그리 없을 거라 본다.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와 자본주의 같은 개인주의 체제가 왕정이나 사회주의 같은 집단주의 체제보다 상대적으로 많은 개인을 행복하게 하므로 사회의 체제에 맞춰 사람의 관념을 바꿔야 한다. 모두가 개인주의 관념으로 진보해야 한다.

그런데 개인주의가 개인의 이익을 위해 사람에 사회를 맞추기에 사회에 사람을 맞추는 진보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아니다. 사람에 사회를 맞추는 것은 어디까지나 타당할 때만 그렇다. 타당하지 않으면 사회를 바꾸지 않는다. 만약 사람의 모든 것에 사회를 맞춰야 한다면 인간은 자연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인간은 보다 나은 삶을 위해 성장한다. 사람이 성장하여 환경을 바꾸고 환경에 맞춰 사람이 성장한다. 점진적으로 사람이 성장하면서 사회가 변화하고 변화한 사회에 맞춰 사람이 성장한다. 사회의 체제가 사람의 관념보다 명백하게 낫다면 사람은 체제에 맞는 관념을 가지는 진보를 해야 한다. 만약 한국이 과거에만 속박되는 국가라면 이런 진보를 받아드릴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한국은 북한과 달리 과거와 결별하고 개인주의 체제인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를 받아드렸다. 이제는 개인주의 관념을 받아드릴 때가 왔다.

집단주의 관념에 의해 강대국과 경쟁하기 위해서는 집단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집단주의여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그렇지 않다. 자유주의를 떠올려보자. 집단의 규율보다 개인의 자유를 우선시해야 개인이 최대한 성장하여 국민이 경쟁력을 갖출 수 있다. 민주주의를 떠올려보자. 집단의 이익이 아닌 개인의 이익으로 정치가를 선출해야 정치가가 경쟁하여 상대적으로 공익을 위하는 경쟁력 있는 정치가가 선출되게 되는 것으로 정치가 경쟁력을 갖출 수 있다. 자본주의를 떠올려보자. 집단의 공동생산보다 개인의 자유로운 수요에 맞춘 공급 경쟁이 국민을 행복하게 하고 국가를 성장케 하는 것으로 경제가 경쟁력을 갖출 수 있다. 역할주의를 알아보자. 집단의 이익을 위한 차례가 아닌 개인의 이익을 위해 개인의 역할의 수행여부와 기여도나 물건의 용도의 활용여부나 기여도라는 평등한 기준으로 가치를 판단하고 차례를 정하여 실리에 초점을 맞추게 되는 것으로 사회가 경쟁력을 갖출 수 있다. 이와 같이 개인주의야말로 강대국가 경쟁할 수 있는 가장 진보적인 체제다.

 

한국의 불행은 간단했다. 집단주의와 개인주의의 옳고 그름이 정반대임에도 사상가가 어떤 정리도 하지 않은 탓에 집단주의 관념과 개인주의 체제가 공존하는 것으로 사람이 가야 할 길을 잃어 잘못된 길로 빠지고 있기 때문이다. 집단주의 관념으로 바르다 여기며 행동했던 것이 체제에 악영향을 끼쳐 사회를 해롭게 한다. 사회가 해로워진 것을 보고도 보다 더 바르다고 여겼던 것을 강하게 행하는 것으로 보다 더 사회를 해롭게 한다. 바르다고 알고 간 길이 사실은 낭떠러지였다. 저출산, 부자유, 애정결핍, 경제활동 둔화, 부정부패, 인간차별, 사회갈등, 지역소멸, 다양한 양극화 등과 같이 집단주의 관념과 개인주의 체제의 충돌로 나타난 사회 문제는 모두 사상가의 책임이다. 한국은 혼란과 불행에 대한 책임을 서로에게 돌리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왜냐하면 모든 책임은 인간이 가야 할 길을 안내하지 못한 사상가와 그런 사상가를 길러내지 못한 인문학에 있기 때문이다. 사회는 인간으로 만들어지고 인간은 관념으로 움직인다. 그러므로 사회의 근본적인 자연법 같은 것이 인간의 기초적인 관념을 다루는 사상가의 영역이 된다. 사상가가 책임을 져야 한다. 그런데 지금까지 한국에서 관념에서 벗어나 관념을 만드는 사상가가 없었으니 책임질 사상가가 없다. 인문학은 간접적인 원인일 뿐이다. 이토록 불행케 했음에도 아무도 책임질 수가 없다. 끔찍하다. 나는 나의 사상으로 말미암아 발생하는 현상을 가능한 내가 책임지도록 하겠다.

집단주의 관념과 개인주의 체제의 충돌로 나타나는 사회적 문제를 이해하는 사람은 국가는 아마 없을 것이다. 있으면 세상의 보수와 진보가 개인주의 체제와 집단주의 체제일 수가 없다. 있다고 하더라도 곧바로 대처할 수 있는 국가는 드물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이 관념을 부정하는 것은 어렵기 때문이다. 한국 사회가 정상이냐 묻는다면 높은 자살률과 낮은 출산율을 말하며 정상이라 말하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그렇다면 한국인의 관념은 정상이냐 묻는다면 혼란스러운 사람이 많을 것이다. 논리적으로 보면 사회는 사람이 만들고 사람은 관념으로 움직이기에 사회가 정상이 아니라면 사람의 관념도 정상이 아니게 된다. 그럼에도 인간은 본인의 관념을 부정하는 것을 어려워하여 논리적으로는 정상이 아니라 인식해도 감정적으로는 정상이 아니라 말하기 꺼려지게 된다. 인간의 자아는 대부분 사물에 대한 생각인 관념이 고정되면서 유지되기에 고정된 관념을 부정하면 자아를 부정하는 것과 같은 충격을 받게 되기에 각오 없이는 관념을 부정하기 어렵다. 개인주의와 이기주의를 비판하는 사람에게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와 자본주의가 집단주의 체제인가 개인주의 체제인가 묻는다면 혼란스러워 할 것이다. 대부분 개인주의와 이기주의가 잘못되었다는 관념이 고정되어 있어 본인이 살고 있는 국가의 체제가 어떤 체제인지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런 것은 모든 국가가 비슷하다. 그러나 한국은 사회적 배경이 다소 다르다. 상대적으로 높은 지식 수준, 전국민이 활용하고 있는 인터넷, 집단주의적 친목을 경계하는 대형 온라인 커뮤니티, 관념과 체제의 충돌로 나타나는 내로남불과 같은 자가당착에 대한 비판, 수많은 도덕적 범죄에 대한 거부감 등 집단주의 관념을 부정할 수 있는 배경이 충분히 갖춰진 상태다. 일부 개인주의 체제의 국가들도 집단주의 관념을 부정할 수 있는 배경이 갖춰져 있다고 보고 있다. 곧바로 대처할 수 있는 드문 국가는 선진적인 개인주의 체제의 국가 말곤 없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는 말을 하곤 한다. 그런데 그 전에 적응을 못한 생물에게 미래는 없다. 인간 이전에 모든 종은 적응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 역사를 알면 반성을 할 수 있어 도움은 되지만 알고서도 환경에 적응 못하면 도태된다. 반대로 역사를 몰라도 환경에 적응하면 살아남아 미래로 갈 수 있다. 과거보다 현재를 중시해야 미래로 갈 수 있다. 한국은 관념과 체제를 정리하여 옳고 그름의 기준을 체제에 맞게끔 바로잡는 개인주의 관념을 갖게 되는 것으로 체제에 적응하여 사회문제를 해결하는 것으로 살아남아 미래로 가야 한다. 그렇게 사회문제를 해결하면 단숨에 성장하여 세계를 선도할 수 있는 국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옳고 그름이 정반대인 집단주의 관념과 개인주의 체제와 그로 인해 발생하는 사회현상에 대해 알아보았다. 사회와 복지는 이와 같이 사회현상을 알고 있어야 접근하기가 좋다. 본론으로 돌아가자. 법과 복지는 사회 구조의 기본으로 강제성을 띠고 있다. 이런 강제성은 집단주의 체제에서는 집단의 이익을 위해 바른 것이 되나 개인주의 체제에서는 개인의 이익을 위해 그른 것이 된다. 한국 같은 개인주의 체제인 국가에서는 개인의 자유를 침해하는 강제성을 용납하기 어렵다. 그렇다고 법과 복지를 강제로 집행하지 않으면 사회 구조가 유지되지 못한다. 이런 상황을 개인주의 체제인 국가는 민주주의로 해결했다. 민주주의는 개인의 의사로 정치가를 선출할 수 있다. 선출된 정치가는 법 제정과 복지 정책 입안을 주도하거나 관여할 수 있다. 그것으로 만들어진 법과 복지가 개인에게 강제로 집행된다. 만듦에 개인의 의사가 반영되는 것으로 집행의 강제성을 정당화하였다. 물론 이것은 완전하지는 않다. 본인이 직접 만드는 것이 아니기에 정치가가 잘못된 법과 복지를 만들 수 있으므로 항상 지켜보며 실시간으로 의사를 표현해야 할 것이다. 만약 정치가가 개인의 자유권과 주권과 소유권을 침해한다면 강제성이 정당화되었다 하더라도 잘못되었다. 어디까지나 체제의 이념에 맞는 법과 복지를 만들어야 할 것이다.

이렇게 법과 복지에서 만듦은 개인의 의사를 반영하여 개인성을 띠고 집행은 사회 구조 유지를 위해 강제성을 띤다. 그런데 법과 복지는 만듦과 집행만 있는 것이 아니다. 개인의 의사로 만들어진 법과 복지를 강제로 집행하기 전에 그것이 타당한지 판단해야 한다. 그 판단은 집행과 마찬가지로 사회 구조 유지를 위해 개인의 의사와 직접적인 관계가 없게 된다. 만약 판단에 모든 개인의 의사가 무비판적으로 반영되면 일부 개인의 의사에 의해 법과 복지가 객관성과 균형성과 논리성을 잃게 될 수 있다. 가령 법을 마치 감정 쓰레기통마냥 이용하는 일부 개인이 어떤 사건에 대해 주관적인 감성으로 판단하면서 법의 판단에 무조건 높은 형벌을 요구하거나 무죄를 요구하는 것을 반영하면 주관이기에 객관성을 사라지고 다른 사건의 판단과의 형평성을 고려하지 않았기에 균형성이 사라지고 감성적으로 무조건적인 판단을 하였기에 논리성이 사라진다. 복지도 마찬가지다. 객관성과 형평성과 논리성을 잃은 사회는 질서가 무너지고 체계가 깨져 유지될 수 없게 된다. 그렇기에 법과 복지의 판단에 대한 의견은 모든 개인이 자유롭게 할 수 있게 하되 판단을 하는 사람들은 그 의견을 비판적으로 접근하여 객관적이고 균형적인 논리를 띤 것을 수용해야 할 것이다. 만듦도 결과적으로 같게 된다. 분명 법과 복지의 만듦은 개개인의 주관적인 의견인 여론에 영향을 받아 선출된 정치가가 여론을 반영하는 것으로 주관적이고 불균형적이고 비논리적인 법과 복지가 만들어질 수 있다. 그러나 그렇게 만들어진 법과 복지는 판단에 의해 부당하게 여겨져 위헌 처분을 받거나 무죄를 선고 받거나 집행이 되지 않는 일이 나타날 수 있다. 법과 복지의 만듦이 개인성을 띠고 있더라도 법과 복지의 판단을 통과하기 위해서는 가능한 객관적이고 균형적이고 논리적이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자유롭게 의사를 표현하고 법과 복지를 만들다 보면 신경을 쓰더라도 주관적이고 불균형적이고 비논리적일 수 있는데 판단이 객관적이고 균형적이고 논리적으로 정리할 수 있으므로 안전하다. 개인의 의사나 법과 복지의 만듦은 판단이란 기준이 있기에 보다 자유로울 수 있다. 법과 복지의 만듦이 판단을 통과하면 집행을 하게 된다. 집행은 수사기관이나 행정기관 등과 같이 행정에서 하게 되는데 마땅한 기준이 없이 집행을 하게 되면 행정력이 낭비될 수 있다. 행정력의 낭비를 막기 위해 법에서는 개인이 대응할 수 있는 것은 가능한 개인이 대응하게 하고 복지는 균형복지를 행해야 되나 행정절차상의 편의를 위해 보편복지를 행하고 세금으로 균형을 맞춰도 될 것이다. 예컨대 가상에선 개인이 불쾌한 것은 개인이 차단하는 것으로 행정력 낭비를 막고 교육에선 교육과 급을 무상인 보편복지로 하고 세금으로 균형을 맞추는 균형복지를 행하는 것으로 행정력 낭비를 막는다. 잠시 판단에 필요한 성질들을 알아보자.

 

객관성에 대해 알아보자. 제삼자의 입장에서 사물을 보는 일을 뜻한다. 그런데 정확히는 편견이 없는 다수의 제삼자가 사물을 보고 느끼는 공통된 인식이라 할 수 있다. 단순한 제삼자의 인식은 제삼자의 주관에 불과하다. 제삼자마다 다른 인식이 나오는 것을 객관이라 하기 어렵다. 그렇다고 개인의 주관적 의견이 모두 객관적이지 않은 것은 아니다. 어떤 개인의 주관적 의견이 제삼자의 공통인식이 될 수 있을 정도로 논리적이면 그 의견 또한 객관적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아직 제삼자의 공통인식이 되지는 못했으므로 객관적이라 주장하는 것에 불과하다. 다수의 제삼자가 객관적이라 인정해야 객관적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객관에는 객관이라 인정된 제삼자의 공통인식과 객관이라 인정되지는 못한 제삼자의 공통인식이 될 수 있는 논리를 갖춘 개인의 주관적 의견이 있다고 할 수 있다. 객관성은 그런 성질을 말한다. 객관성은 객관적이어야 하는 곳에 전부 쓰인다. 객관은 공통인식일 뿐이므로 그 자제로 진리는 아니다. 진리가 포함된 객관이 진리다. 객관이 제삼자의 공통인식이기에 공통인식이 되기 매우 쉬운 숫자야말로 왜곡되지 않은 한 가장 객관적이다. 왜곡될 수 있으므로 맹신은 할 수 없다. 수의 계산식 자체는 대부분 영원진리에 가까운 진리다. 균형성에 대해 알아보자.

균형은 무게를 가진 물체가 한쪽으로 기울지 않고 안정을 이루는 상태를 뜻한다. 균형성은 그런 성질을 말한다. 균형성은 사물이 안정적으로 조화를 이루어야 하는 곳에 전부 쓰인다. 사회나 자연이나 생물이나 인권이나 건물이나 세탁기나 배 등이 그렇다. 이런 균형이 필요한 것들은 균형이 깨지면 붕괴하거나 죽거나 성립될 수 없게 된다.

논리성에 대해 알아보자. 논리는 생각하거나 말하거나 글을 씀에 있어서, 내용을 이치에 맞게 이끌어가는 과정이나 원리를 뜻한다. 논리성은 그런 성질을 말한다. 논리성은 합리적이어야 하는 곳에 전부 쓰인다. 논리적인 주장으로 이치에 도달하여 합리적이게 한다. 비논리에 의해 이치에 멀어지는 불합리가 나타나면 정당하지 못하게 되어 사회에 해롭게 될 수 있다. 이런 이유들로 법과 복지의 판단에 개인의 의사가 반영되길 바라거나 법과 복지의 만듦이 판단을 통과하길 바란다면 제삼자의 공통인식이 될 수 있는 근거를 가지고 논리적인 주장으로 균형을 맞출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수가 가장 객관적이기에 수를 이용한 통계가 근거로 활용하기가 좋다.

 

사회는 다수의 제삼자의 공통인식이 될 수 있도록 객관적이고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는 것으로 안정적이어야 사회의 질서와 체계가 유지된다. 그렇기에 법과 복지는 객관성과 균형성과 논리성을 띠어야 한다. 그걸 바탕으로 법의 판단은 인용 또는 기각을 하거나 형평성 있게 양형을 결정하고 복지의 판단은 행복이 결핍된 정도에 따라 형평성 있게 불행한 인간이 행복할 수 있도록 정책적 지원을 한다.

법을 생각해보자. 만약 법에서 살인보다 절도가 높은 형량으로 판단되면 절도가 죄질에 비해 과한 책임을 지게 되는 것으로 균형이 깨지게 된다. 그렇게 되면 살인범은 절도보다 상대적으로 낮은 형량을 받게 된 것으로 부당한 이익을 본 것과 같은 것이 되고 절도범은 살인보다 높은 형량을 받게 된 것으로 부당한 손해를 본 것과 같은 것이 된다. 정당한 기준이나 절차 없는 과한 이익이 악이 된다는 것을 상기하자. 살인보다 절도가 높은 형량을 받으면 절도로 끝나지 않고 살인까지 커질 수 있다. 어차피 더 심한 형량을 받게 될 바에 더 큰 죄를 지게 된다는 것이다. 법의 판단에서 균형이 깨지니 악이 커졌다.

복지를 생각해보자. 만약 복지에서 부유한 사람이 가난한 사람보다 높은 복지 혜택을 받으면 사회의 자원분배의 균형이 깨지게 된다. 그렇게 되면 부유한 사람이 부당한 이익을 본 것과 같은 것이 되고 가난한 사람이 부당한 손해를 본 것과 같은 것이 된다. 인간은 정당한 기준이나 절차 없이 과한 이익을 얻는 이에게 부정한 감정을 느낀다. 비싼 자동차를 타는 이들이 가난한 이들의 복지를 위해 마련된 임대아파트에 거주하는 것이 정당해 보이는가? 인간의 행복을 위해 마련된 복지가 인간을 불행케 하고 있다. 복지의 판단에서 균형이 깨지니 불행을 만드는 악이 되었다.

본래 인간은 인간의 육체로 즐거움과 괴로움을 느끼기에 육체 이상의 행복과 불행을 느낄 수 없다. 지나치게 높은 쾌락은 뇌를 망가트려 인지할 수 없게 하고 지나치게 높은 고통은 신경을 망가트려 인지할 수 없게 한다. 그러다 보니 다양한 행복이 인간을 보다 행복하게 하고 깊은 불행이 인간을 재기할 수 없게 한다. 다양한 행복을 누리고 깊은 불행을 피하는 것이 인간에게 이롭다. 사회도 마찬가지다. 지나치게 높은 행복은 인간의 향상 기능 작동을 막고 지나치게 높은 불행은 인간의 교화 기능 작동을 막는다. 그러다 보니 이미 행복이 충분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복지는 부당하고 이미 처벌이 충분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과도한 형벌은 부당하다. 다양한 사람이 행복을 누리고 깊은 불행을 겪는 사람이 없도록 해야 사회에 이롭다. 이런 이유로 법과 복지가 사회에 이롭기 위해 법은 형벌과 책임의 비례 원칙을 지켜야 하고 복지는 불행과 지원의 비례 원칙을 지켜야 한다.

법과 복지의 판단에 타당성과 안정성과 일관성이 반드시 필요하다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조금 다르다. 타당성과 안정성은 객관성과 균형성을 갖춰 논리적으로 판단하면 타당하고 안정적이게 될 것이다. 즉 객관과 균형이 수단이고 타당과 안정이 결과다. 일관성은 분명 일관적으로 판단해야 기준이 생겨 질서와 체계가 잡히는데 일관에만 집중하면 변화가 없어 발전할 수가 없게 된다. 실시간으로 변화하는 사회의 성질을 고려하면 일관성은 반드시 필요한 성질은 아니다. 법과 복지의 판단에 있어 객관성과 균형성은 필수조건이지만 일관성은 참고조건이다. 일관해야 한다는 이유로 과거의 것을 무조건 따라 하게 되면 현재의 인간이 과거의 인간에 구속되는 것과 같게 되므로 개인의 자유를 존중하는 자유주의 이념에 반하게 된다. 그런 측면에서 헌법 또한 유연하게 바꿀 수 있어야 한다. 한국 헌법은 경성 헌법으로 국회의원 삼 분의 이 이상의 찬성과 국회의원 선거권자 과반수의 투표와 투표자 과반수의 찬성이 있어야 개정할 수 있다. 일반 법률과 같거나 비슷한 연성 헌법은 일반 법률과 차이를 두기 어렵기에 그 정도까지는 할 수 없더라도 자유주의 이념에 따라 다소 완화된 개정절차가 필요하다 본다.

법은 과거의 판례를 참고하기에 법조계는 과거에 머물러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법은 철저하게 논리적이다. 논리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와 관계 없다. 논리적인 주장이라면 개인주의 체제의 이념을 지키면서 미래지향적인 주장도 수용하여 법조계도 미래로 갈 수 있다고 본다. 한국에서는 자유주의 이념이 집단주의 관념에 치여 마치 천덕꾸러기 같은 취급을 받으며 사회 곳곳에서 자유주의 이념이 훼손되는 개인의 자유권 침해가 일어나고 있다. 몹시 가슴이 아프다. 국가 이념을 소홀히 대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을 것이다.

 

법과 복지의 만듦은 개인성을 띠고 판단은 객관성과 균형성을 띠고 집행은 강제성을 띤다. 이것은 배로 비유하면 이해하기가 쉽다. 배에 탑승하여 자유롭게 의사를 표현하는 것은 개인의 자유로 개인성을 띠지만 배가 침몰하지 않기 위해 선장이 객관적으로 판단하여 균형을 맞추는 것이 합리적이기에 객관성과 균형성과 논리성을 띠며 강제적으로 선박평형수를 채우거나 비우고 사람과 짐을 필요한 것에 머무르게 하거나 보관하는 것으로 강제성을 띤다. 배가 침몰하지 않기 위해 객관적으로 판단하여 균형을 강제로 맞추는 것에는 개인이 의견을 제시할 수는 있어도 개인의 의사가 반드시 반영될 수는 없다. 그와 같다. 사회에 속하여 법과 복지를 만들 정치가를 선출하거나 의견을 내는 것과 같이 자유롭게 의사를 표현하는 것은 개인의 자유로 개인성을 띠지만 사회가 무너지지 않기 위해 판사와 관료가 객관적으로 판단하고 균형을 맞추는 것이 합리적이기에 객관성과 균형성과 논리성을 띠며 수사기관이 수사나 기소 등을 강제적으로 하는 것으로 강제성을 띤다. 사회가 무너지지 않기 위해 객관적으로 판단하여 균형을 강제로 맞추는 것에는 개인의 의사가 반드시 반영될 수는 없다. 객관적이고 균형적이고 논리적인 의견을 반영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일부 정치가는 이를 이해하지 못하고 대중을 위해서라며 대중에 영합하기 위해 감성법치나 감성복지를 주장하기도 하는 포퓰리즘을 하기도 한다. 그걸 강제로 반영하게 된다면 멋대로 짐을 싣는 바람에 균형이 깨져 침몰하는 배와 같이 멋대로 법과 복지를 판단하고 집행해버리는 바람에 균형이 깨져 사회가 붕괴할 것이다. 법과 복지는 개개인의 주관과 무관하게 단순한 사회 구조 유지의 기본일 뿐이다. 그럼에도 자유주의이므로 모두가 자유로워야 한다고 외치는 이가 있을 수 있다. 그러면 이걸 생각해보자.

인간의 자아는 세상 만물을 전부 제어하지 못하여 인간의 육체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특정 행동을 강제적으로 행해야 한다. 인간은 밥을 먹고 잠을 자고 똥을 싸는 등과 같이 기본 욕구를 충족하고 특기나 취미나 인간관계나 장래희망 등과 같이 다양한 욕망을 충족하는 것으로 인간의 건강을 유지하고 무기를 들어 외적에 맞서고 병원에 가서 질병과 상처를 치료하는 것으로 인간의 육체를 보호한다. 인간은 이성관계와 성관계를 맺어 인간을 출산하는 것으로 인간의 종을 유지한다. 미래에 인간이 육체의 한계에서 벗어난다면 모를까 지금 당장은 그렇다. 그와 같다. 사회의 여론은 세상 만물을 전부 제어하지 못하여 사회 구조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특정 행동을 강제적으로 행해야 한다. 사회 구조의 요소인 인간은 대부분 인간의 자유의지에 따라 기본 욕구와 다양한 욕망을 충족하는 것으로 자유롭게 지내고 그러면서 발생하는 불균형으로 인해 사회 구조를 유지하지 못하게 될 때에는 법으로 질서가 무너지는 것을 막고 복지로 체계가 깨지는 것을 막아 그런 불균형을 균형 있게 만드는 것으로 사회 구조를 유지한다. 인간이 인간의 다양한 강제성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인간에서 벗어나야 하듯이 인간이 사회의 다양한 강제성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사회에서 벗어나야 할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인간이 사회 구조 유지를 위한 법과 복지에서 자유롭지 못하다고 불평하는 것은 인간이 인간의 유지하고 보호하는 다양한 것에서 자유롭지 못하다고 불평하는 것과 같을 정도로 의미가 없다.

 

구체적인 법과 복지에 대해 알아보자. 법의 기본적인 구조는 다음과 같다. 입법이 만들고 사법이 판단하고 행정이 집행한다. 편의성이나 전문성을 위해 세세한 부분은 차이가 있다. 강제성을 띤 모든 법은 만듦이 개인성을 띠어야 강제성이 정당화된다. 개인주의 체제에서는 사회 구조 유지를 위하더라도 개인성이 없다면 강제성은 정당화되지 못한다. 만약 개인성이 없이 강제성이 정당화되게 된다면 권력이 사회 구조 유지를 명목으로 온갖 패악을 저지를 위험이 있다. 그런 것을 방지하기 위해 개인성이 있어야 강제성이 정당화되도록 되어야 한다. 한국 법의 만듦에 대해 알아보자.

한국의 법에는 헌법과 법률과 조약과 국제법과 명령과 조례와 규칙이 있다. 헌법은 최상위 법으로 헌법과 법률이 충돌하면 헌법이 우선되며 만듦은 국민의 의견을 수렴하는 경성 헌법 절차로 개정되기에 개인성을 띤다. 법률은 사회생활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규범으로 만듦은 국회의원과 대통령과 대법원이 정해진 기준과 절차대로 법률안을 제출하고 국회의원의 심의와 의결을 거쳐 대통령의 서명과 공포로 효력을 발생시키기에 개인성을 띤다. 조약은 문서에 의한 국가 간의 합의이며 체결은 대통령에게 전권을 위임 받은 대표가 비준을 하고 국회의원이 비준동의를 하면서 효력이 발생하기에 개인성을 띤다. 국제법은 국제간의 권리와 의무의 표준을 정한 법률이며 적용은 체결한 조약 외에는 국내법에 어울리도록 변형하고 있다고 한다. 개인성이 있어야 강제성이 정당화될 수 있으므로 국내법과 어긋나는 국제법은 국민의 동의를 받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명령과 규칙은 법규명령이라 불리며 시행령인 대통령령과 시행규칙인 총리령과 부령이 있는데 행정의 전문성과 편의성을 위해 행정부가 입법부의 입법권 일부를 위임 받은 것으로 만듦은 대통령과 대통령이 임명한 총리와 행정부처의 장이 하기에 개인성을 띤다. 총리와 장관은 직접 선출한 것이 아니기에 직접적인 개인성은 아니다. 훈령과 예규나 고시는 행정규칙이라 불리며 행정조직의 규칙을 정한 것으로 국민에 대한 강제성은 없다. 조례와 규칙은 자치법규라 불리며 지방의회와 지방자치단체의 장이 정하는 자치규범으로 효력이 관할지역으로 한정되며 만듦은 지방의원과 지방자치단체의 장이 하기에 개인성을 띤다. 한국에서는 이런 식으로 법의 강제성이 정당화되고 있다.

 

객관성과 균형성과 논리성을 띤 모든 법의 판단은 다른 권력으로부터 독립이 되어야 한다. 법을 해석하고 적용하는 사법권이 다른 권력으로부터 영향을 받지 않아야 공정하게 판단할 수 있다. 개인주의 체제에서는 사회 구조 유지를 위하더라도 권력이 법의 판단에 간섭하여 조작하면 권력에 입맛에 맞는 부당한 판단을 하게 될 수 있다. 만약 독립성이 없이 권력에 의한 판단을 하는 것이 정당화된다면 권력이 사회 구조 유지를 명목으로 온갖 패악을 저지를 위험이 있다. 그런 것을 방지하기 위해 법의 판단은 반드시 독립되어야 한다. 한국 법의 판단에 대해 알아보자.

사법권은 크게 법원과 헌법재판소로 분할되어 있다. 법원은 최고법원인 대법원과 각급법원인 고등법원, 특허법원, 지방법원, 가장법원, 행정법원, 회생법원과 같이 나누어 재판을 하고 있다. 법원은 공정한 재판을 위해 심급 제도를 도입하여 사건의 종류에 따라 최대 세 번까지 재판을 받을 수 있도록 하고 있다. 1심 법원의 판결에 불만이 있으면 제2심 법원에 항소할 수 있고 제2심 법원의 판결에 중요한 법률적 다툼이 있을 경우 제3심 법원에 상고할 수 있다. 헌법재판소는 헌법에 관한 재판을 담당하며 법률이 헌법에 저촉될 경우 위헌 판결을 하여 무효화한다. 법률이 헌법에 저촉되는 것처럼 법이 충돌할 경우 세 가지 방법으로 적용 순위가 정해진다. 하나, 상위법. 법과 법이 충돌하면 상위의 법이 우선된다. 순서는 헌법, 법률, 시행령, 시행규칙, 조례, 규칙, 고시, 예규, 관습이다. , 신법. 개정 전의 법과 개정 후의 법이 충돌하면 예외에 대한 내용이 없는 한 개정 후의 법을 우선된다. , 특별법. 일반법과 특별법이 충돌하면 특별하게 필요해서 만든 법이 우선된다.

법의 판단은 객관적이고 균형적이고 논리적이어야 한다. 그래야 사회가 타당하고 안정적이고 합리적이게 된다. 법의 판단인 사법은 국민의 법감정이라며 주관적이고 불균형적이고 비논리적인 주장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란 압박을 받을 수 있는데 법관 같이 논리 안에 살고 있는 사람이 논리 밖에 살고 있는 사람의 의견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며 휘둘리는 것은 지성인으로서 결코 명예로운 일이 아니다. 그렇다고 객관적이고 균형적이며 논리적인 주장조차 배척하는 것은 민주적이지 못하기에 명예롭지 못하다. 법의 판단에 불만이 있으면 법감정을 말할 것이 아니라 논리를 말해야 한다. 객관성과 균형성 이전에 최소한 논리성은 갖춰야 한다. 논리라는 기준으로 모두가 평등해져야 한다. 그렇다면 논리란 무엇인가? 잠시 논리에 대해 알아보자.

 

일부 예외를 제외하면 제삼자의 공통인식에 해당하는 사전적 정의를 바탕으로 설명하는 것이 객관적이라 본다. 그러니 논리에 관련된 사전적 정의에 대해 알아보겠다. 논리는 생각하거나 말하거나 글을 씀에 있어서, 내용을 이치에 맞게 이끌어 가는 과정이나 원리를 뜻한다. 이치는 사물의 정당한 조리 또는 도리에 맞는 취지를 뜻한다. 조리는 일의 앞뒤가 들어맞고 체계가 서는 갈피를 뜻한다. 도리는 사람이 어떤 입장이나 처지에서 마땅히 베풀거나 행해야 할 바르고 참된 행동이나 일을 뜻한다. 언어의 특성상 외래어가 많아 어원도 모르고 단어의 정의와 설명이 서로를 지칭하거나 정확한 의미를 내포하지 않아 혼잡하다. 사회의 객관이라 할 수 있는 사전의 혼잡은 사회의 객관 상실로 이어질 수 있다. 사전만 봐도 직관적으로 뜻을 알 수 있도록 정리해야 할 것이다. 논리는 이치에 맞게 이끌어 가는 과정이나 원리다. 이치는 사물의 정당한 조리나 도리에 맞는 취지다. 이치에 맞게 되면 이론이나 이치에 합당한 합리가 된다. 이치가 무엇인지 파악한다면 논리와 합리가 무엇인지 알 수 있다.

조리에 대해 알아보자. 조리는 일의 앞뒤가 들어맞고 체계가 서는 갈피를 뜻한다. 일은 활동이나 대상이나 현상 등 다양한 것을 지칭한다. 앞뒤가 들어맞는 것은 모순이 없다는 것을 말한다. 체계가 서다라는 것은 일정한 원리에 의하여 각기 다른 것을 계통적으로 통일한 조직이 서있는 것을 말한다. 갈피는 어원이나 뜻과 별개로 실제 쓰임새는 갈피를 잡다 또는 갈피를 못 잡다 같이 파악으로 쓰이고 있다. 정리하면 조리는 활동이나 대상이나 현상 등에 모순이 없는 일정한 원리로 각기 다른 것을 계통화한 파악이라 할 수 있다. 그것에 사물의 정당함을 붙이면 이치가 된다.

도리에 대해 알아보자. 도리는 사람이 어떤 입장이나 처지에서 마땅히 베풀거나 행해야 할 바르고 참된 행동이나 일을 뜻한다. 바르고 참된 행동에 초점을 맞추겠다. 바르고 참되다는 진실을 뜻하며 풀어보면 옳은 사실을 말한다. 옳다는 진리, 도덕, 규범, 이치, 기준 등에 비추어 어그러짐 없이 좋은 상태에 있는 것을 말한다. 도덕과 규범 같이 기준마다 달라지는 것은 특정 기준에 이로운 것이 옳다고 할 수 있다. 가령 개인주의 체제를 기준으로 하면 개인의 자유권과 주권과 소유권을 보장하는 것이 체제에 이로워 옳다고 할 수 있다. 진리와 같이 기준마다 달라지지 않는 것은 기준과 관계 없이 옳다고 할 수 있다. 가령 수학에서 과학에서 증명이 끝나 누구든 받아드릴 수 있는 보편타당한 법칙이나 사실은 옳다고 할 수 있다. 정리하면 도리는 기준에 이로운 사실이나 진리를 마땅히 베풀거나 행해야 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것에 맞는 취지를 붙이면 이치가 된다.

조리와 도리를 풀어 하나로 합치면 이치는 이치는 모순이 없고 체계적으로 파악할 수 있으며 기준에 이로운 사실이나 진리를 말한다 할 수 있다. 모순이 없고 체계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것은 이치의 모양을 의미하고 기준에 이로운 사실이나 진리는 이치의 내용을 의미한다. 이 이치로 논리를 다시 정리해보자. 논리는 사유나 대화나 글에서 특정 기준에 이로운 사실이나 진리에 부합하는 모순이 없는 체계적인 파악을 하는 과정이나 원리를 말한다. 이걸 근거로 논리와 비논리가 무엇인지 알아보자.

하나, 특정 기준에 따라 달라지지만 보통 토론 중 인신공격을 하는 것은 토론 목적과 괴리되어 사람들의 기준에 이롭다 하기 어려우므로 논점이탈이란 비논리가 된다. 토론 목적을 명확하게 하고 그것에 어긋나는 것은 대부분 비논리다. , 보편적으로 나쁘다 여겨지는 논의라도 그런 논의를 하는 것은 논의하는 이들에게 어떤 형태든 이로워서 하는 것이기에 특정 기준에 이롭다 할 수 있어 논리가 된다. 바르다라는 것을 가치중립적으로 봐야 한다. , 대중을 대상으로 한다면 대중의 특정 기준에 이롭기 위해 모든 논리의 근간에 인간에 이로운 인간 본위적으로 접근하는 인본주의가 있어야 논리가 된다.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와 자본주의 같은 개인주의 체제도 인간 본위적으로 바라보고 인간을 위한 것이어야 하며 바르다는 주장도 인간을 해치는 주장이라면 대중을 대상으로 하고 있는 만큼 대중의 특정 기준에 해로워 비논리가 된다. , 사실이 아닐 경우 궤변이란 비논리가 된다. 거짓을 밝혀내면 논파할 수 있다. 다섯, 과학적으로 증명된 것이 아닌 단순한 낡은 관념일 경우 진리가 아니므로 비논리가 된다. 선풍기를 틀고 자면 죽는다거나 여성은 정조를 지켜야 한다거나 남녀는 칠 세부터 떨어져 있어야 한다거나 하는 명확한 미신이나 미신과 다를 바 없는 낡은 관념은 비논리다. 여섯, 어떤 주장에 있어 모순이 발생하면 비논리다. 주장 내의 모순만이 아니라 주장과 같은 논리 구조를 가진 것이 모순되면 비논리가 된다. 관념과 체제의 충돌로 인해 모순이 발생하는 일이 워낙 많아 관념과 체제의 충돌을 파악하고 있다면 논파하기가 쉽다. 일곱, 체계적으로 파악할 수 없다면 비논리가 된다. 쉽게 쓸 수 있음에도 복잡한 용어를 혼잡하게 써서 체계적으로 파악하기 어려울 경우 비논리다. 논리가 되는 과정이나 원리를 거쳐 이치에 맞게 되면 논리적이라 할 수 있다.

논리는 알고 있는 것뿐만 아니라 알지 못하는 것도 추론이란 형태로 논리적이게 될 수 있다. 추론은 알고 있는 사실을 바탕으로 알지 못하는 것을 미루어 생각하여 논급하는 것을 뜻한다. 추론 방법은 현상을 종합해 결론을 내는 귀납법이나 이론을 토대로 현상에 대한 결론을 내는 연역법 또는 대전제, 소전제, 결론으로 이어지는 삼단논법 등 다양하다. 이렇게 형식이 있는 형식적 추론에만 얽매이면 논리가 경색될 수 있고 형식이 없는 비형식적 추론을 하다 보면 논리가 비약될 수 있다. 추론에 추론을 거치다 보면 추론의 근거가 진리가 아니게 될 수 있는데 추론의 근간인 추론에 진리가 있다면 논리적일 수도 있다.

비논리는 감성적 비논리와 이성적 비논리로 나뉜다. 감성적 비논리는 감정에 눈이 흐려지거나 흥분하거나 술에 취했을 때와 같이 사리분멸이 어려운 상황을 일컫는다. 이성적 비논리는 지식과 지혜가 부족하여 비논리적인 주장을 할 때나 지식과 지혜가 있어도 관념에 영향을 받아 비논리적인 주장을 할 때를 일컫는다. 논리도 법의 적용 순서와 같이 논리와 논리가 충돌할 때엔 우선순위가 있는데 보통 특정 기준에 이로운 진리가 가장 우선된다. 특정 기준에 이로운 진리와 그냥 진리와 부딪치면 전자가 우선된다. 특정 기준에 이로운 진리와 특정 기준에 이로운 사실과 부딪치면 전자가 우선된다. 그 외에는 상황마다 다르다.

간단히 논리에 대해 정리했다. 논리 안에 살고 있는 사람은 논리에 살고 논리에 죽어야 한다. 설령 본인 관념이나 인식에 반하는 것이라도 논리가 맞는다고 가리키면 그것은 맞는다고 판단해야 한다. 개개인의 도덕관념이나 사리사욕이나 이해관계보다 논리가 우선된다. 내가 지금 집단주의 관념과 개인주의 체제와 옳고 그름이 정반대이기 때문에 집단주의 관념이 잘못되었다고 주장할 수 있는 것은 논리적으로 생각하여 결론을 얻었기 때문이다. 아는 것을 논리적으로 보니 관념과 체제의 옳고 그름이 정반대로 모순되어 사회를 해롭게 하고 있었다. 개인주의 체제에서는 이기주의가 바르고 이타주의가 그르다. 그렇게 하여 나는 과거의 관념을 죽이고 새로운 관념을 가졌다. 결론으로 얻어진 논리를 타당한 논리 없이 본인이나 타인의 특정한 관념이나 사리사욕이나 이해관계로 부정하는 일은 할 수 없다.

나는 과학이 진리로 여기며 논리의 근거에 과학을 두고 있다. 사상에서 과학이 증명한 진리를 쓰지 않으면 시대에 뒤떨어진 사상이게 된다. 그러나 과학이 진리가 아닐 수 있다. 그럴 경우 나의 사상 대부분과 인류의 과학문명이 붕괴할 것이다. 만약 그럴 경우 담담히 과학과 함께 무너지겠다. 파멸은 각오하고 있다.

 

강제성을 띤 법의 집행은 이기적이어야 올바른 결과가 나와야 한다. 분명 개인주의 체제는 모든 사람이 이기적이어야 올바른 결과가 나와야 한다. 그럼에도 집행에서 그걸 강조한 것은 법의 만듦과 판단에서 권한을 지닌 사람의 수보다 법의 집행에서 권한을 가진 사람의 수가 많기 때문이다. 수가 많다 보니 제도적으로 문제가 발생하면 대처가 몹시 힘들어진다. 만약 법의 집행의 제도를 이타적이어야 올바른 결과가 나오도록 만들면 개인의 주관에 지나치게 의존하여 법의 판단에 악영향을 줄 수 있다. 주관에 지나치게 의존하면 객관성과 균형성과 논리성을 잃어버려 법의 판단이 나오기 전에는 법의 판단에 악영향을 끼쳐 제대로 판단을 못하게 할 수 있고 법의 판단이 나온 후에는 법의 판단을 제대로 집행하지 못할 수 있다. 그런 것을 방지하기 위해 법의 집행의 제도는 반드시 이기적이어야 올바른 결과가 나오도록 만들어야 한다. 한국 법의 집행에 대해 알아보자.

집행에 관련된 이들은 법의 판단을 행하는 법관을 제외하면 행정부에 속한 검사와 경찰과 교도관과 국선변호사와 그 외 공무원 또는 행정부에 속하지 않는 변호사 등이 있다. 종류는 형사와 민사와 행정 등이 있는데 형사의 절차에 대해 간단히 알아보자. 형사사건은 피의자의 신고나 수사기관의 사건 파악으로 수사가 시작된다. 수사대상의 혐의가 뚜렷할 때엔 사건부에 기록하여 정식으로 입건을 하고 그렇지 않지만 조사가 필요할 때엔 불구속입건을 한다. 수사대상인 피의자는 출석요구에 응하면 임의로 출석하여 조사받을 권리가 있다. 영장에는 체포영장과 구속영장으로 나뉜다. 체포영장은 피의자가 출석요구에 응하지 않을 때 판사가 발부한 체포영장으로 체포를 하거나 수사관이 정해진 기준과 절차에 따라 임의로 긴급체포를 한 후 검사의 승인을 받는다. 구속영장에는 신병이 확보되지 않은 피의자를 대상으로 한 사전 구속영장과 신병이 확보된 피의자를 대상으로 한 사후 구속영장으로 나뉜다. 피의자가 출석요구를 거부하거나 도망 및 증거인멸의 염려 등의 구속 사유가 있을 경우 판사의 판단에 따라 구속영장을 발부하여 구속한다. 구속 전에 피의자 심문으로 수사과정과 판사 앞에서 구속 사유에 대한 변명을 할 수 있다. 경찰이 수사한 형사사건에 대한 수사기록과 증거물을 검찰에 송부하는 것을 말하는 송치를 한다. 검사의 판단에 따라 형사사건의 피의자를 형사재판에 회부하여 공소를 제기하는 것을 말하는 기소를 할 수 있다. 한국은 국가소추주의로 검사만이 기소를 할 수 있으며 기소된 사람을 피고인이라 부른다. 검사의 판단에 따라 기소를 하지 않는 불기소 처분을 할 수 있다. 불기소 사유가 명백할 때에는 조사 없이 불기소 처분하는 것을 말하는 각하를 할 수 있다. 기소된 사건을 법관이 판단하는 것을 재판이라 한다. 법관은 검사가 기소한 피고인에 대하여 공판을 열어 법을 해석하여 유무죄를 결정하고 유죄일 경우 양형을 결정한 후에 판결을 한다. 형사의 판결은 유죄판결과 무죄판결과 공소기각판결과 면소판결이 있다. 유죄판결에는 형을 선고하는 판결과 형을 면제하는 판결과 형을 선고유예하는 판결로 나뉘고 형의 종류에는 사형, 징역, 금고, 구류, 벌금, 과료, 몰수, 자격상실, 자격정지가 있다. 법원의 판결이 확정되면 검사의 지휘로 법원에서 선고한 형을 집행한다. 이러한 집행 과정에서 모든 관계자는 이기적이어야 올바르게 되도록 제도를 만들어야 한다. 수사기관에 대해 알아보자.

 

수사기관인 검찰과 경찰의 수사와 기소는 이기적이어야 올바른 결과가 나와야 한다. 그러나 그런 제도가 없어 지금 국민들에게 신뢰를 받지 못하고 있다. 제도가 없을 때 그릇된 결과가 나왔던 이유는 두 가지 있다. 하나는 종교에 의한 집단주의 관념이고 둘은 집단주의인 유교에 의한 서열주의다. 집단주의 관념에 의해 조직 내 국민의 시각과 괴리된 폐쇄적인 문화의 전파와 일부 일탈을 용인하고 그것이 외부에 노출되면 서열주의로 위는 무조건 감싸고 아래는 꼬리를 자라는 행태가 나타난다. 이런 행위는 관념에 의해 바르다고 생각하며 행했기에 도덕적 범죄가 된다. 도덕적 범죄는 외부에 노출되어 비판을 받아도 행한 당사자가 바르다고 생각하며 행했던 것이기에 개선되지 않고 다시 한번 도덕적 범죄가 일어나게 된다. 집단주의 관념에 의해 반복된 실태를 저지르고 있는 수사기관은 국민의 신뢰를 잃어버렸다. 그렇기에 제도를 개인주의 체제에 맞게끔 정비해야 한다. 세 가지 방법이 있다.

하나, 채용평가. 사명감을 갖춰 역할수행을 본인의 이익을 여기는 이들을 채용하면 된다. 여경의 체력논란의 본질은 체력 부족보다는 사명감 부족에 가깝다. 체력이 부족하더라도 사명감을 갖고 범인에 맞서서 체포하는 모습을 보였다면 체력 논란은 크지 않았을 것이다. 체력 부족으로 범인을 체포하는 것이 어려워지면 역할수행을 하겠다는 사명감이 약해질 수 있어 체포할 수 있는 능력 중 하나인 체력을 지적하는 것은 지극히 타당하다. 개인의 역할수행을 본인의 이익을 여기게 된다면 집단주의 관념에 의한 도덕적 범죄는 사라질 수 있다. , 승진평가. 역할수행을 잘하여 기여도가 높은 사람을 높게 평가하여 승진에 유리하도록 하면 된다. 강압수사나 과잉수사 또는 누명을 씌우는 일이 종종 있다. 억울한 옥살이를 한 사람에게 지급되는 형사보상금이 많을수록 수사가 엉망이었다는 것과 억울한 사람이 누명을 풀었다는 것이 된다. 통상 매년 300억에서 400억 정도 쓰인다고 한다. 그러므로 올바른 결과가 나오기 위해서는 단순히 실적 수가 아닌 무죄추정원칙과 같은 정당한 기준과 절차를 거친 실적의 수로 평가해야 할 것이다. 그래야 본인의 이익을 위해서라도 정당한 기준이나 절차로 수사와 기소를 하게 될 것이다. 그뿐만 아니다.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그다지 역할수행이나 기여도가 높지 않은 인원을 부당하게 승진하게 하는 일이 없어야 할 것이다. , 외부평가. 집행에 관련된 국민이 평가를 참고한다. 사회는 평가로 조직된다. 민주주의 국가인 이상 집행에 관련된 국민 또한 수사기관을 평가할 수 있다. 국민과 수사기관 모두 이기적이어야 올바른 결과가 나올 수 있도록 의견은 비판적으로 수용하여 논리적인 의견을 반영해야 할 것이다. 변호인에 대해 알아보자.

 

변호인인 변호사와 그 외의 변호인의 변호는 이기적이어야 올바른 결과가 나와야 한다. 보통 이기적인 변호사를 악덕변호사라고 하는데 이는 과거에 변호사를 위임하는 구조가 일반적인 시장과 거리가 멀었기 때문이다. 시장경제는 자본가가 본인의 이익만을 위해 상품을 생산하여 공급하고 생산에 필요한 노동력 상품을 구매해도 정상적일 경우에는 소비자가 행복하고 노동자가 마땅한 대우를 받으며 자본가가 이윤을 얻을 수 있다. 그러나 이런 구조가 없다면 공산주의와 같이 생산 경쟁을 하지 않아 상품의 가격 대비 품질이 저하되는 것으로 소비자가 불행하고 상품의 품질을 유지할 필요가 없어 노동자에게 마땅한 대우를 하지 않는 것으로 노동자가 불행하고 수요경쟁이 일어나기가 어려워 높은 이윤을 얻을 수 없어 자본가가 불행하다. 그와 비슷하다. 과거에는 변호사의 법률 서비스를 받는 것이 어려웠다. 보통 변호사는 변호사의 명성과 실력을 소문으로 듣거나 광고를 보거나 인맥의 소개를 받아 연락해서 만났다. 그 때문에 의뢰인 신뢰도가 낮은 소문이나 정보가 적은 광고나 객관성이 부족한 소개에 의존하여 법률 서비스를 받았다. 좋은 변호사를 만나면 의뢰인이 행복했으나 나쁜 변호사를 만나면 의뢰인이 불행했다. 변호사도 마찬가지였다. 변호사가 유능해도 소문이나 광고나 소개가 없으면 의뢰인에게 위임 받기가 어려웠다. 이렇게 시장으로 따지면 물물교환에 가까울 정도로 불편한 제도로 인해 이기적일 경우 올바른 결과가 나올 수가 없었다. 그러나 최근에는 달라졌다. 스마트폰 어플리케이션을 통해 법률 서비스 시장을 만들어 의뢰인이 자유롭게 객관적인 정보를 보고 변호사의 법률 서비스를 선택할 수 있게 되었다. 변호사는 소문이나 광고나 소개에 과한 의존을 하지 않아도 되게 되었다. 시장이 생기면서 객관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의뢰인은 행복해졌고 객관적으로 선택 받을 수 있게 된 변호사도 행복해졌다. 다른 시장과 마찬가지로 좋은 법률 서비스를 제공한 변호사는 좋은 평가를 받고 좋지 못한 법률 서비스를 제공한 변호사는 좋지 못한 평가를 받을 수 있게 되었다. 그에 따라 공급경쟁이 일어나면서 법률 서비스가 시장과 같은 구조를 통해 이기적이어야 올바른 결과가 나오게 되었다.

시장은 소비자의 수요와 공급으로 이루어지기에 외부평가의 비중이 높다. 모든 집단은 사회 공헌을 할 수 있는데 외부평가의 비중이 높은 곳일수록 외부평가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사회 공헌이 집단에 이롭게 된다. 변호사 같은 능력자는 금전적 기부보다 능력 기부가 타당할 것이며 금전적 지원은 그런 능력 기부자에게 하면 좋을 것이다. 이런 구조라면 변호사가 이기적으로 능력 기부를 하더라도 수익이 보존되고, 능력 기부를 하는 변호사가 늘어남에 따라 외부평가가 좋아질 것이다. 이기적인 선행은 선행 자체로 목적이 달성되었기에 다른 이익을 바라지 않는다. 그렇기에 변호사가 능력 기부로 수익이 보존되지 않더라도 이기적이라 할 수 있다. 마찬가지도 능력 기부로 외부평가가 좋아져 이익을 얻은 다른 변호사는 능력 기부를 지속하게 하기 위해 금전적 지원을 하는 것도 이기적이라 할 수 있다. 각자 이기적으로 행동했는데 지속적인 능력 기부가 가능하게 되었다. 이기적이어야 올바른 결과가 나온 것이다.

법률 서비스가 시장에 포함되는 것이 못마땅할 수 있다. 그러나 사람은 사회적 신분이 아닌 사회적 역할로 바라봐야 한다. 변호사와 다른 사람들이 같은 국민이라면 법률 서비스를 시장에서 상거래 한다고 하더라도 문제될 것이 없다. 직업을 사회적 신분으로 바라봐 특정 직업이 다른 직업보다 위에 있다는 인식은 자유롭거나 민주적이지 못하다. 그런 것은 신분제가 있던 왕정 체제에서나 적합하지 개인주의 체제에서는 적합하지 않다.

 

개인주의 체제인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는 이기적이어야 작동하고 이타적이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체제다. 법치주의도 그와 같다. 이기적이어야 작동하고 이타적이면 작동하지 않는다. 생각해보자. 모든 사람이 타인의 이익을 우선시하여 서로가 양보하면 각자 주관적 판단이 중시되어 법이 등장하지 못한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본인의 이익만을 추구하며 서로가 양보하지 않으면 이해관계에 따른 분쟁을 조정하기 위해 객관적 판단이 중시되는 법이 등장하게 된다. 법 자체가 개인의 이기심으로 존재가 성립되고 있다. 법의 만듦과 판단과 집행의 관계자도 마찬가지다. 법을 만드는 이들이 이타적이면 타인을 위해 비논리적 법을 입안하거나 비논리적인 법에 찬성하게 된다. 법을 판단하는 이들이 이타적이면 타인을 위해 전관예우로 잘못된 판결을 하거나 동정심이나 분노로 비논리적인 판결을 할 수 있다. 법을 집행하는 이들 중 검사가 이타적이면 집단의 이익을 위해 불기소를 하거나 입증에 소홀할 수 있고 변호사가 이타적이면 집단의 이익을 위해 변호를 거부하는 것으로 법률 서비스를 받지 못하는 사람이 나타날 수 있다. 변호사가 명백한 잘못을 저지른 의뢰인을 변호하면 사회에서 비판하는 이들이 있어 변호를 거부하는 것이 사회의 이익이 되게 될 수 있다. 변호사가 의뢰인을 변호하는 것은 법이 단순한 사회 구조 유지의 기본인 것과 같이 변호사가 변호를 하는 것은 단순한 법의 구조의 기본일 뿐이다. 그것에 비난하는 것은 비논리적이다. 재판 과정도 이기적이어야 한다. 형사사건에서 피고인의 범죄에 대한 입증책임은 검사에게 있다. 검사는 정당한 기준과 절차를 거친 이기적인 입증을 하고 변호사는 그런 입증을 믿고 정당한 기준과 절차를 거친 이기적인 변호를 하면 된다. 판사는 이기적인 입증과 변호를 믿고 이기적으로 판단하여 판결하면 된다. 이런 이기적이어야 올바른 결과가 나오는 구조를 위해 판사와 검사는 분리되어 서로 독립되어야 하므로 검사는 사법부가 아닌 행정부에 속하는 것이 타당하다.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형사사건에서 신고자와 피해자와 피고인과 증인이 이타적이라면 정상적인 재판이 어렵다. 형사사건에서 법정에 선 이가 누군가의 이익을 위해 위증을 하게 되면 진실을 가려내기가 어렵다. 만약 본인의 이익만을 위한다면 증인과 증언이 이해관계가 없을 경우에는 진실을 말할 확률이 높을 것이고 있을 경우에는 거짓을 말할 확률이 있을 것이다. 본인의 이익만을 위한다면 증인과 이해관계 없는 증언을 의심할 필요가 줄어들게 된다. 모든 증인이 이기적이어야 판단이 수월하다. 법을 집행하는 이들 중 수사기관이 이타적이면 집단의 이익을 위해 수사에 소홀하게 되거나 수사를 하지 않을 수가 있다. 수사기관과 범죄자의 유착이 된다. 이기적이어도 유착이 발생할 수 있는데 그럴 때엔 다른 이기적인 사람이 고발하여 잘못을 방지할 수 있게 된다. 이타적이면 고발하지 않아 유착이 지속된다. 모두가 이기적이어야 법치주의는 달성된다. 모두가 이기적이면 힘의 차이에 따라 결과가 달라질 수 있는데 법을 통해 모두가 자유롭고 이기적일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하면 된다. 개인주의 체제는 모두가 이타적으로 행동하도록 강요하지 않고 모두가 이기적일 수 있도록 환경을 마련한다. 법치주의에서 바른 것이 이기주의고 그른 것이 이타주의로 구조상 법치주의는 개인주의 체제에 속한다.

 

법은 이렇게 삼권분립으로 서로를 견제하며 이기적이어야 올바른 결과가 나올 수 있도록 제도가 마련되어 있다. 그렇다면 복지는 어떠한가? 일반적으로 현대 국가의 복지는 국가 정책으로 이루어지기에 먼저 정책에 대해 알아보겠다. 국가 정책은 정부 중 행정부에 속하는 행정부처의 분야를 기준으로 한다. 정부는 국가를 다스리는 기관인 입법부와 사법부와 행정부의 총칭 또는 행정부를 뜻하는데 정부가 삼권과 행정부를 둘 다 지칭하면 혼용으로 헷갈릴 수 있으므로 정부는 삼권을 지칭하고 행정부는 행정부를 지칭하도록 하여 행정부의 부처는 정부부처가 아닌 행정부처라 부르도록 하겠다. 법과 복지가 사회 구조 유지의 기본이라면 행정부처의 분야는 국가 구조 유지의 기본이다. 그만큼 중요한 분야여서 행정부처가 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모든 행정부처가 그런 것은 아니다. 가령 통일부나 여성가족부는 국가 구조 유지의 기본이라 할 수는 없다. 통일부는 분단된 한국 특수상황에 맞춘 것으로 다른 국가에서는 있을 필요가 없고 여성가족부는 정치적 소산물로써 여성이나 가족에 관한 정책은 보건복지부가 담당하면 된다. 개인을 중시하는 개인주의 체제인 국가에서 여성가족부와 같이 여성이나 가족 같은 특정 집단을 대상으로 한 행정부처는 바람직하지가 않다. 집단의 이익을 위해 개인의 이익이 침해될 수 있기 때문이다. 모든 행정부처는 모든 개인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한국 정책에 대해 알아보자. 정책과정에 참여하는 참여자는 공식과 비공식으로 나눌 수 있다. 공식 참여자에는 정부인 입법부와 사법부와 행정부가 있고 비공식 참여자에는 정당과 언론과 이익집단과 시민단체와 전문가와 국민 등이 있다. 정책과정은 보통 다음과 같다. 첫째, 정책의제 설정. 둘째, 정책결정. 셋째, 정책집행. 넷째 정책평가. 정책과정을 법과 비교하면 정책의제 설정이 법의 제안일 것이고 정책결정이 법의 의결일 것이고 정책집행이 법의 집행일 것이고 정책평가가 법관 평가일 것이다. 정책의제 설정과 정책결정이 법의 만듦과 같고 정책집행이 법의 집행과 같다. 그렇다면 법의 판단은 어디에 있는가? 정책의제부터 정책집행까지의 과정 중에 이의제기를 받는 행정법원과 행정심판과 민원이 있다. 이들이 정책판단이라 할 수 있다. 사법부에 속한 행정법원은 정책으로 손해를 본 사람들만이 이의제기를 신청할 수 있으며 관련된 법으로 판단한다. 행정부에 속한 행정심판은 정책집행 중 행정청의 위법이나 부당한 처분이나 공권력의 행사 및 불행사 등으로 권리나 이익을 침해 받은 사람들이 이의제기를 신청하며 관련된 법으로 판단한다. 행정부에 속한 민원은 정책에 관련된 것에 대한 이의제기를 국민신문고 등에 신청하며 담당자가 답변이나 해결을 한다. 보통 민원으로 시작하여 해결이 안되면 행정심판으로 가고 그래도 해결이 안되면 해결이 안 된 이들 중에서 행정법원이 이의제기를 신청할 자격이 있는 사람들이 행정법원으로 간다. 그런데 행정법원은 정책에 관련된 법을 위주로 판단한다. 정책 자체는 판단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정책은 상당한 전문성을 요구하기에 관련 전문가가 아니면 판단하기 어렵다. 법 전문가인 사법부는 정책의 사업에 있어 문제점이 인정되더라도 사업시행의 계속 여부나 범위를 판단하는 것은 사법부가 감당하기 버거운 주제가 틀림없다고 판단했다. 행정심판과 민원은 정책집행에 관련된 것으로 보통 정책 자체에 관련된 것이 아니다. 따라서 정책 자체를 판단하는 법정과 같이 모두가 참여하는 공적 기관은 없다. 정부에서 정책에 대한 의견을 수렴한다고 하지만 정책 자체가 일반인이 다루기 어려우므로 의견을 내는 것이 어렵다. 그럼에도 법의 변호사와 같은 도움을 주는 공적인 전문가가 없다. 정책 판단은 공적 기관도 없고 공적 전문가도 없어 국민이 공적인 참여를 하는 것은 어려운 상황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우선 정책 과정을 알아보자.

 

첫째, 정책의제 설정. 모든 사회에는 문제가 있다. 문제가 없는 사회는 문제가 없게끔 세뇌하거나 강압한 사회다. 문제는 잘못되거나 정상적이지 못하며 해결이 필요한 상태나 그 대상을 뜻한다. 사회문제가 비공식 참여자들에 의해 쟁점화가 되어 다수의 사람이 인식하고 이해하여 문제 해결에 대한 공감대가 형성된 정부의 권리로 해결할 수 있는 사안을 의제화한 것이 공중의제다. 사회문제나 쟁점이나 공중의제가 국무회의나 차관회의 등과 같은 곳에서 공식의제로 올라온 것이 정부의제다. 정책의제는 위와 같은 과정으로 설정되지만 행정절차상 정책은 예산안 편성부터 시작한다. 행정부처의 장은 매년 1 31일까지 해당 회계연도(한국은 1 1)부터 5회계년도 이상의 기간 동안의 신규사업 및 기획재정부의 장관이 정하는 주요 계속사업에 대한 중기사업계획서를 기획재정부 장관에 제출한다. 설정된 정책의제를 고려하여 신규사업과 계속사업을 결정한다. 제출된 계획서를 바탕으로 대략적인 예산안이 결정된다. 기획재정부 장관은 국무회의 심의를 거쳐 대통령의 승인을 얻은 다음 연도 예산안편성지침을 매년 3 31일까지 행정부처의 장에게 보낸다. 통보한 예산안편성지침은 입법부인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에도 보낸다. 행정부처의 장은 제출했던 중기사업계획서와 추가적인 사업을 포함한 예산안을 작성하여 매년 5 31일까지 기획재정부 장관에게 제출한다. 제출 받은 예산요구서에 따라 예산안을 편성하여 국무회의의 심의를 거친 후에 대통령의 승인을 받는다. 승인을 받은 예산안을 회계연도 개시 12일 전(헌법에는 90)에 국회에 제출한다. 국회는 회계연도 개시 30일 전까지 상임위원회 예비 심사와 예산결선특별위원회 종합심사와 본회의 심의를 거쳐 의결을 하여 행정부에 이송한 후 대통령이 공고한다. 이와 같은 과정은 헌법을 근거로 한다. 헌법 제54조에 따르면 정부에 예산안 편성권을 부여하고 국회에 심의 및 확정권을 부여한다고 되어 있다. 헌법 제57조에 따르면 국회가 정부의 동의 없이 정부가 제출한 지출예산 각 항의 금액을 증가하거나 새 비목을 설치할 수 없다고 규정되어 있다. 이렇게 예산안 편성권과 심의 및 확정권을 행정부와 입법부로 나눠 서로를 견제한다. 이런 견제를 법으로 보면 다음과 같다. 예산안의 편성권을 가진 기획재정부는 법률안제출권을 가진 것과 같고 심의 및 확정권을 가진 국회는 법률제정권을 가진 것과 같다. 예산안의 편성권을 가진 기획재정부는 정책에 있어 행정부를 대표하는 강한 권력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정책 중에서 총사업비 규모가 500억 원 이상이고 국가의 재정지원이 300억 원 이상인 신규 사업은 예비타당성조사를 행하여 타당한지 조사한다. 워낙 예산비용이 커서 섣불리 진행했다가 돌이킬 수 없는 손해를 볼 수 있기에 미리 타당한지 조사하는 것이다. 예비타당성조사는 기획재정부의 주관으로 진행되며 주관행정부처의 조사요구 공문을 받으면 법적 요건이나 구체성이나 시급성 등을 검토한 후에 한국개발연구원 등의 연구기관에 경제성 분석인 B/C 분석을 의뢰하여 결과를 받은 다음 사업 타당성 분석인 AHP로 평가하여 통과 유무 결과를 주관행정부처에 보낸다. B/C 분석은 비용 대비 편익인 가성비를 말하며 1을 넘으면 경제적 타당성이 있다고 판단한다. AHP는 계층화분석법으로 경제성과 정책성과 기술성과 지역균형발전을 고려하여 0.5를 넘으면 사업 타당성이 있다고 판단하여 예비타당성조사를 통과시킨다. 연구개발사업은 한국과학기술기획평가원에서 예비타당성조사를 실시한다. 타당성이 확보된 사업은 추진 여건을 고려하여 기획재정부 장관에게 해당 사업 관련 예산 등을 요구할 수 있다. 중요하거나 긴급하다 판단되는 사업은 예비타당성조사가 면제되기도 한다. 이를 악용하여 정치가가 공약을 달성하기 위해 면제를 무분별하게 요구하는 것으로 예비타당성조사의 의의가 의미 없어지기도 한다.

 

둘째, 정책결정. 정부의제를 채택하느냐 기각하느냐 판단하는 것부터 정책결정이라고 한다. 채택은 적극적 정책결정이고 기각은 소극적 정책결정으로 둘 다 정책결정이 된다. 기각이 정책결정에 포함되는 것은 해당 의제를 정부의제로 채택하지 않을 거라는 결정을 했기 때문이다. 해당 의제를 정부의제로 채택하기로 결정했으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을 찾아야 한다. 방법은 내부인 공식 참여자가 주도하는 것과 외부인 비공식 참여자가 주도하는 것과 같이 두 가지 방법으로 찾을 수 있다. 통상 내부인 공식 참여자가가 주도하는 것이 비민주적이게 될 수 있기에 후진적이라 말하고 외부인 비공식 참여자가 주도하는 것이 민주적이게 될 수 있기에 선진적이라 말하는데 내부와 외부는 후진과 선진으로 구분 지을 것이 아니라 정책의 성질로 구분 지어야 한다. 예를 들어보자.

복지나 사회간접자본을 외부가 주도하게 되면 객관성이나 균형성이나 논리성이 깨질 수 있다. 법과 복지는 사회 구조 유지의 기본으로 객관성과 균형성과 논리성을 띠어야 한다. 만약 복지가 주관적인 A의 의견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여 A가 주장한 복지에 무게를 싣다 보면 의견을 내지 못한 B C는 복지가 필요함에도 받지 못할 수 있다. 그러면 배의 균형이 깨져 침몰하듯 사회의 균형이 깨져 무너질 수 있다. 모든 국민인 복지가 개개인을 위해 개인을 행복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 구조 유지를 위해 개인을 행복하게 하는 것으로 인식해야 한다. 사회가 인간이란 요소로 조직되어 이루어지는 질서나 체계이므로 사회에 속한 모든 개인은 사회 구조 유지를 위해 원치 않더라도 행복해져야 한다. 괜히 개개인을 위한 복지랍시고 홍보하면 복지를 받은 이와 복지를 받지 못한 이 사이에서 갈등이 발생할 수 있다. A의 행복은 중요하고 B C의 행복은 중요하지 않단 말인가? 불필요한 갈등이 발생한다. 복지는 철저하게 사회 구조 유지를 명분으로 삼아야 잡음이 없다. 그렇다고 의견을 받지 않는 것도 바르지 않다. 모든 의견을 비판적으로 수용한 다음 객관적이고 균형적이고 논리적인 의견 중 타당한 것을 반영해야 할 것이다. 정책은 법과 마찬가지로 비논리적인 의견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여 반영하는 것은 지성인으로서 명예롭지 못한 일이다.

사회간접자본은 도로나 철도나 항공 등의 사업을 가리키는 것으로 해당 지역의 부동산 가격에 큰 영향을 주기에 시행 전에 공개하면 부동산 투기가 일어날 수 있다.

이렇게 객관성이나 균형성이나 논리성이 중요하거나 비공개로 진행하는 것이 바람직한 정책은 내부가 주도해야 한다. 반면 경제나 규제정책은 대체로 시장에서 경쟁하는 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정책이므로 논리성은 필요하더라도 객관성이나 균형성은 필요하지 않다. 시장이 객관적이고 균형적이면 경쟁이 무의미해진다. 상품의 품질이 좋고 가격이 저렴함에도 균형 정책에 의해 공급이 제한된다면 시장경제의 의미가 퇴색된다. 공급 제한으로 우수한 상품을 공급하지 못한 자본가와 우수한 상품을 소비하지 못한 소비자는 그 규제로 불행하게 된다. 무엇을 위한 정책인가? 누구를 위한 정책인가? 어디까지, 언제까지 개인이 타인을 위해 희생해야 하는가? 자본주의는 소비자의 행복을 이념으로 삼으면 정당한 기준과 절차라면 모든 것이 바르게 된다. 소비자가 행복하기 위한 수요에 의한 불균형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시장은 경쟁이 있어야 소비자가 행복할 수 있으므로 담합을 막고 독과점을 경계하면 될 것이다. 시장에서 깨진 균형은 복지로 맞추면 된다. 그러면 사회 구조는 유지될 수 있다. 이것은 민주주의로 이해하면 쉽다. 민주주의 사회는 다수의 의견에 따라 불균형한 결론이 나올 수 있다. 그렇게 깨진 균형은 법으로 맞추면 된다. 소수자의 발언권을 보장하게끔 법으로 규정하면 된다. 보통 다수자의 의견이 수용되나 소수자의 의견이 다수자가 수용할 정도로 논리적이라면 다수가 그 의견을 채택할 수 있다. 이렇게 사회에서 깨진 균형은 법과 복지로 맞추면 된다. 주관적이고 불균형적이어야 하는 분야의 정책은 굳이 객관적이거나 균형적일 필요가 없으므로 민주주의를 근거로 외부가 주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정책의 성질에 따라 내부나 외부가 주도권을 잡고 구체적으로 정책을 만들면 된다.

정책을 만들 때에는 정책에 필요한 법률이나 명령이나 규칙을 새로 만들거나 수정하는 정부입법을 하게 된다. 법률은 통상 5개월에서 7개월 걸리는 국회에서 심의를 받는 일반적 절차를 말한다. 절차는 다음과 같다. 입법계획 수립, 법령안 입안, 관계기관과 협의, 당정협의, 입법예고, 규제심사, 법제처심사, 차관회의 및 국무회의심의, 대통령 재가, 국회제출, 국회심의 및 의결, 공포안정부이송, 국무회의상정, 공포. 이렇듯 정부입법은 굉장히 긴 과정을 거쳐 입법을 한다. 반면 의원입법에는 규제심사가 빠져 상대적으로 짧은 과정을 거쳐 입법을 한다. 이는 자유로운 입법으로 입법부의 입법권을 침해하지 않기 위해서라고 한다. 의원입법에는 규제심사가 빠져 다양한 부작용이 나오고 있다. 하나, 입법권 남용. 규제 심사가 없는 탓인지 몰라도 매년 의원입법의 수가 지속적으로 늘어나고 있다. 입법이 늘어난 만큼 이념을 훼손하는 법도 늘어나고 있다. 국가 이념을 훼손하는 법을 제정하는 것은 입법권 남용이다. 입법은 정치가의 실적으로 쓰이기 위함이 아니다. 정당한 기준이 아니므로 사회의 비판을 받고 있다. , 청부입법. 정부입법을 하고자 하는 이가 규제심사를 피하기 위해 의원에게 청부하여 입법을 하는 청부입법을 하기도 한다. 정당한 절차가 아니므로 사회의 비판을 받고 있다. 정당한 기준과 절차를 위해 입법에도 규제 심사가 도입되어야 한다. 규제 심사가 입법권을 지나치게 침해한다고 보면 규제 심사의 기준을 완화하면 된다. 최소한 이념을 훼손하는 법은 국민이 납득할 수 있는 타당한 이유 없이 제정되어서는 안 된다.

정부입법은 과정이 길어 급변하는 상황에 유연하게 대처하기 어렵기 때문에 행정부가 입법부의 입법권을 위임 받아 법률과 대통령령이 지정해준 범위 내에서 상대적으로 절차가 짧은 명령과 규칙을 제정한다. 명령은 시행령인 대통령령을 말하고 일반적 절차의 대통령 재가까지 진행되며 법률 내에서 제정한다. 규칙은 시행규칙인 총리령과 부령을 말하고 법제처 심사까지 진행되며 대통령령 내에서 제정한다. 명령이나 규칙을 그림으로 비유하면 명령은 법률이 선을 그리는 것이고 법률이 그린 선 안에서 대통령령이 색을 칠하고 규칙은 대통령령이 칠한 색 안에서 총리령과 부령이 덧칠하는 것이다.

 

셋째, 정책집행. 정책집행은 만든 정책을 실제로 집행하는 것을 말한다. 정책집행에는 정책을 결정한 정책결정자와 정책을 집행하는 정책집행자가 모두 참여한다. 그렇기에 정책집행의 유형은 정책결정자와 정책집행자의 사이를 관계를 정의한 유형인 고전적 기술자형과 지시적 위임형과 협상형과 재량적 실험형과 관료적 창도자형으로 나눈다. 여기서 유형은 정책결정자나 정책집행자 중 누가 주도권을 잡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정책의 성질에 따라 내부와 외부를 결정한 것과 같이 정책의 성질에 유형을 결정하면 될 것이다. 정책결정자가 주도할 정책과 정책집행자가 주도할 정책은 서로 다르다. 예비타당성조사를 받은 사업은 사업규모가 큰 만큼 정책결정자가 주도하여 세세한 것을 알아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고 사업규모가 작은 사업은 사업규모가 작은 만큼 신용할 수 있는 정책집행자에게 많은 권한을 주어 자율적으로 행한 것의 과정과 결과를 전달 받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정책의 실패는 정책 자체의 실패와 정책집행의 실패로 나뉜다. 정책 자체에 문제가 있어서 집행을 실패할 수 있는 반면 정책 자체에는 문제가 없으나 정책 환경이나 대상 등의 문제로 정책에 실패할 수 있다. 정책 자체의 실패에는 도로나 항공 등과 같은 사회간접자본의 이용자 수가 적을 때 같은 것을 말한다. 미리 수요 조사를 잘못한 것이기 때문이다. 정책집행의 실패에는 감염병 예방과 같이 국민의 동참이 필요한 정책에서 국민이 동참하지 않았을 때 같은 것을 말한다. 엄밀히 따지면 정책집행 실패 또한 어느 측면에서 정책자체의 실패로 봐야 한다. 예측할 수 있는 것은 전부 예측하여 상황 별로 대처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했어야 했기 때문이다. 물론 그것은 어렵다. 그러나 정책평가 이후에 피드백으로 다음 정책을 만들 때 참고하는 것은 수월할 것이다.

 

넷째, 정책평가. 정책평가는 주로 신규사업 및 계속사업을 결정할 때 쓰이는 피드백용이다. 정책평가의 기준은 학자마다 다르다. 던이란 학자의 기준만 알아보겠다. 던은 효과성과 능률성과 적정성과 형평성과 반응성과 적절성을 기준으로 삼아 평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정책평가는 특정 학자가 주장한 기준으로 모든 정책을 평가할 것이 아니라 정책결정이나 정책집행과 같이 정책의 성질에 따라 다르게 기준을 잡아 평가해야 할 것이다. 가령 복지는 객관성과 균형성을 본다거나 경제정책은 성장성과 적정성을 본다거나 하듯이 말이다. 학자가 만든 기준은 참고자료일 뿐이다. 정책결정자와 정책집행자와 정책평가자가 필요한 것을 만들면 된다.

 

정책과정에 대해 알아보았다. 정책은 과정 중에 공식 참여자뿐만이 아니라 비공식 참여자인 정당과 언론과 이익집단과 시민단체와 전문가와 국민 등이 참여하고 있다. 그러나 과정을 살펴보면 알듯이 법의 법정과 같이 모든 개인이 자유롭게 공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기관이 없다. 법의 변호사와 같이 공적으로 선임되는 정책 전문가도 없다. 법은 법의 판단에 국민이 적극적으로 참여하면서 판결과 판례로 국가 구조 유지에 도움을 주는데 정책은 정책의 판단에 국민이 적극적으로 참여할 기관이나 참여를 대신할 정책 전문가가 없어 판단의 결과와 판단의 전례로 국가 구조 유지에 도움을 줄 수 없었다. 그러므로 정책 또한 법과 마찬가지로 정책에 관련된 법이 아닌 정책 자체를 판단할 정책 판사와 정책에 대한 이의제기를 도울 정책 전문가가 공적으로 도입되어야 한다. 그에 대해 알아보자.

하나, 공적인 정책 판단 기관. 법의 만듦이 상대적으로 자유로울 수 있는 것은 법의 판단이 객관성과 균형성과 논리성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법의 만듦이 주관적이고 불균형적이고 비논리적이라면 법의 판단에 의해 부정되거나 조정될 수 있다. 그렇게 하여 입법과 사법이 이기적으로 행동해야 올바른 결과가 나오도록 하고 있다. 그러나 정책은 자유롭게 이기적으로 행동하여 잘못될 때 공적인 정책 판단 기관이 없어 부정하거나 조정하지 못하고 파탄 날 때까지 잘못될 수밖에 없다. 만약 공적인 판단 기관을 통해 국민들이 정책 전문가를 선임하여 이의제기를 하는 것이 활성화되었다면 한국토지주택공사의 비리도 빠른 시기에 막았을 수도 있다고 본다. 객관성과 균형성과 논리성이 없는 정책을 남발하여 세금을 낭비하는 것도 빠른 시기에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 공적인 정책 전문가. 비공식 참여자의 정책에 대한 이의제기는 바람직하나 지식이나 이해가 부족한 전문성이 없는 이의제기는 곤란하다. 그렇다고 비공식 참여자의 참여가 필요한 정책에 비공식 참여자의 의견을 듣지 않을 수는 없다. 그러므로 법에서의 변호사와 같이 정책에서도 공적인 이의제기를 대신하는 정책 전문가가 필요하다. 변호사가 법률 서비스를 의뢰하는 의뢰인에 선임되어 대신 법정에 서는 것과 같이 정책 전문가가 정책 이의제기를 의뢰하는 의뢰인에게 선임되어 대신 공적인 정책 판단 기관에 서면 된다. 그렇게 전문가가 이의제기를 대신하면 이의제기를 하는 쪽이나 받는 쪽이나 편하다. 무분별한 이의제기를 막기 위해 정책 이해관계 당사자가 정책 전문가를 선임해야 이의제기를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타당한 이의제기지만 정책 전문가를 선임할 수 없을 경우에는 국선변호사처럼 국가에서 지정한 정책 전문가를 선임할 수 있도록 하면 될 것이다. 지금처럼 공적인 기준과 절차가 없다면 수준 낮은 이의제기로 정책이 성장할 수가 없다.

, 정책 판단 결과 피드백. 법의 판례처럼 정책의 판단 결과를 종합하여 공적으로 활용할 수 있게 한다. 정책 판사가 정책에 대한 이의제기에 대한 판단 결과가 나오면 그 동안의 이의제기와 달리 확실하게 정책의 판단 결과가 쌓여 법의 판례처럼 공적으로 활용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것이 일정한 기준이 되어 정책에 도움이 될 것이다. 물론 정책은 법과 마찬가지로 미래지향적이어야 하기 때문에 정책 판단 결과에 과한 의존은 할 수 없다. 그러나 정책의 신규사업이나 계속사업을 할 때 피드백으로 활용하거나 정책에 대한 이의제기를 할 때 참고자료로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정책의 경우 사업에 따라 매몰비용으로 중도취소가 불가능할 수 있다. 이의제기를 한 것이 타당하더라도 매몰비용으로 중도취소하는 것보다 계속하는 것이 이익을 경우에는 취소할 수가 없다. 그럴 때에는 이의제기로 정책을 판단한 결과는 새로운 정책의 사업에 피드백이 되어 잘못을 되풀이하는 것을 방지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의 이의제기와 비슷하지만 공적인 기관을 거쳤기에 법의 판례처럼 공적인 경험이 체계적으로 쌓여 정책에 도움이 될 것이다. 정책의 공적인 판단 결과는 법의 판결과 같이 언론에 의해 많은 사람들에게 전달되어 보다 많은 사람들이 적극적인 정책 참여를 하는 것을 유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정책 참여는 공적인 판단 기관이 있는 이상 논리적일 것이다.

, 정책 참여자의 충돌 중재. 정책에 참여하는 공식 참여자와 비공식 참여자의 의견이 충돌할 경우 그걸 공적으로 중재할 기관이 없었기에 의견 충돌을 피해 예산을 타기 위해 예산안의 편성권을 가진 기획재정부 관료와 물밑접촉을 시도하는 일이 많다고 한다. 개인주의 체제에서는 제도가 미비할 경우 자유롭게 이기적으로 행동하면 잘못된 방향으로 치닫게 될 수 있다. 정책만 그런 것이 아니다. 만약 사법도 제도가 미비했다면 물밑 접촉으로 사법거래를 하는 것이 특별한 일이 아닌 일상적인 일이 되었을 것이다. 공적인 정책 판단 기관이 있다면 공적으로 충돌을 중재할 수 있을 것이다. 정치 공약에 의한 정책일 경우 정치가와 관료의 의견이 충돌할 수 있다. 환경 규제일 경우 환경단체와 기업이 충돌할 수 있다. 정책에 관련된 부처가 많을 경우 부처와 부처의 관료의 의견이 충돌할 수 있다. 그럴 때 공적인 정책 판단 기관에서 선임한 정책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 정책 판사의 판단에 의해 어떤 의견을 우선시할 것인지 정하는 것으로 충돌로 인한 분쟁을 끝낼 수 있다. 공적인 정책 판단 기관이 있다면 법정에서 판사와 검사와 변호사가 논리적인 대화로 법이 성장하는 것과 같이 정책 참여자의 논리적인 대화로 정책이 성장할 수 있을 것이다. 전국민이 정책의 직간접 이해관계자인데 이에 대한 분쟁을 조정할 독립적인 기관이 없는 것이 정책의 제도적 결함이었다. 지금까지는 정치가와 관료의 의견이 충돌하면 간혹 정치가는 반민주주의라 말하며 맞서고 관료는 포퓰리즘이라 말하며 맞서며 서로의 의견을 무조건 평가절하 하기도 했다. 기준과 절차가 부족하니 갈등과 불신으로 인간관계가 무너졌다. 더 이상 정치가와 관료가 마땅한 기준이나 절차 없이 예산이나 정책으로 품위 없이 분쟁해서는 안 된다.

다섯, 권력에서 독립된 공적인 정책 판단 기관. 지금까지는 정권이 규제에 대한 태도를 바꾸지 않는 이상 규제가 바뀌지 않기에 이익집단은 부당한 규제가 있더라도 정권이 바뀔 때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만약 권력에서 독립된 공적인 정책 판단 기관이 있다면 논리적인 이의제기로 부당한 규제를 폐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독립된 공적인 정책 판단 기관이 규제의 정당함이나 부당함을 판단하면 정당한 규제도 부당하게 판단하는 것과 같은 잘못된 결과가 나올 수도 있다. 그러나 한국은 법으로 많은 경험을 쌓았다. 법의 경험을 토대로 그런 것에 대한 견제장치를 마련하면 될 것이다. 부유한 사람이 고비용의 변호사를 선임하여 법정에서 유리한 경우가 많다. 그런 것과 같이 부유한 특정 이익집단이 고비용의 정책 전문가를 선임하며 공적인 정책 판단 기관에서 유리한 경우가 있을 수 있다. 그것을 염려할 수 있는데 정책에 모든 이익집단이 참여할 수 있는 상황에서는 차라리 공적인 기록으로 남는 것이 보다 공정할 수 있다. 법에 전관예우와 같은 문제가 있는 것과 같이 정책에도 그런 것이 있을 수 있지만 사적으로 로비를 받는 것보다 공적으로 로비를 받는 것이 공개성이 있어 여론에 의한 사회적 비판으로 그런 것이 줄어들 수 있다.

여섯, 정책 판단 기준. 정책은 법과 달리 법이란 기준이 없다. 그러나 예비타당성조사와 같은 기준을 만드는 것은 가능할 것이다. 입법부가 기준을 만든다면 삼권분립과 같이 되어 독립된 정책 판단 기관에 대한 견제가 가능하게 될 것이다. 설령 그렇지 못하더라도 국제법의 판단도 입법기관 없이 판단하고 있다. 그것과 같이 이의제기를 한 측의 주장과 이의제기가 된 측의 주장의 타당성이나 정당성 등을 고려하여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일곱, 정치가의 공약. 기본적으로 정책 판사는 정책에 대한 판단을 하지만 정치가의 정책 공약을 판단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런 판단은 정치가의 자유로운 공약을 막을 수 있기에 강제할 수는 없다. 그러나 유권자가 참고할 수 있는 참고자료로는 활용될 수 있을 것이다. 정책 공약을 보고 정책가능 실현성을 판단하여 공개하면 유권자가 권리 행사를 할 때 도움이 될 수 있다. 지금까지 정치가의 공약이 선심성이나 공수표였던 적이 너무나도 많다. 정치가의 기망행위에 속던 국민들은 그런 공약에 깊은 불신을 갖고 있다. 언제까지 국민들이 공약을 불신해야 하는가? 이런 현실을 알기에 정치가조차 공약과 통치는 다르다고 말할 정도다. 이런 것을 시장의 서비스로 비유하면 기업이 홍보한 서비스를 보고 소비자가 서비스 계약을 맺었는데 계약 이후에는 기업이 나 몰라라 하면서 계약을 위반하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모든 정치가의 공약은 선거 전에 정책 판사가 모여서 판단한 것을 공개하여 유권자가 참고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공익에 부합한다고 본다. 만약 정치가의 공약 중 어떤 것이 공적인 정책 판단 기관에서 정책 판사에 의해 정책실현 가능성이 낮다고 판단되면 정치가는 그에 맞춰 실현 가능성이 높은 공약으로 바꾸게 될 것이다. 그런 식으로 정치가의 공약도 성장하게 된다. 지금처럼 계속 정치가는 포퓰리즘을 남발하고 관료는 정치가의 공약에 의한 정책을 불신하면서도 휘둘려 단발성 정책을 추진해 예산 낭비를 하고 눈 먼 돈에 눈이 멀어 예산을 부정취득 하려는 자들로 넘치고 그로 인해 지원자격이 까다로워지면서 꼭 필요한 이들에게 정책적 지원이 되지 못하는 것을 언제까지 방치해야 하는가? 더 이상 그래서는 안 된다. 우수한 정치가도 선심성이나 공수표가 없는 공정한 경쟁을 바랄 거라 생각한다.

여덟, 책임소재 명료화. 공적인 정책 판단 기관의 판단 결과가 판례처럼 남기 때문에 정책 관계자와 이의제기 한 사람이나 선임된 정책 전문가 등이 모두 기록된다. 분명 정책에 대한 책임을 일일이 묻기는 어렵다. 그러면 지나치게 보수적이고 소극적인 정책이 나올 수 있다. 필요하다면 높은 리크스로 높은 리턴을 얻을 수 있는 정책도 추진해야 한다. 그러므로 정당한 기준과 절차를 거친 정책의 실패에 대한 책임을 묻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무엇보다 이렇게 공적인 정책 판단 기관이 있다면 정책이 심각한 실패를 하기 전에 이의제기를 통해 문제를 미리 감지하여 심각한 실패가 되기 전에 미연에 방지하는 것이 가능할 것이다.

 

공적인 정책 판단 기관에 대해 알아보았다. 정책 판사와 정책 전문가는 사실 지금까지 크게 다르지 않다. 정책 판사는 여러 명이 있을 수 있고 배심원제와 같이 외부 인원이 들어올 수도 있을 것이다. 단지 법원과 같이 공적인 기관을 만들어 권력으로부터 독립하는 것일 뿐이다. 그런데 그게 중요하다. 만약 사법이 독립되지 않았다면 지금의 정책과도 같이 이해관계자에 휘둘려 객관성과 균형성과 논리성을 잃은 판단이 나오게 될 수 있었을 것이다. 지금 정책을 판단하는 관료나 연구원이 정책 판사와 정책 전문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새로운 방식이므로 정책 판사는 우선 경험이 많은 관료나 연구원으로 시작하되 이후에는 법관과 같이 행정고시 합격자와 각 분야의 경력이 높은 전문가를 임용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복지의 경우에는 복지 관료와 의사와 사회복지사 같은 전문가에 지원자격이 있을 것이다. 정치가가 대법관 인사를 하고 대법관이 법관 인사를 하는 구조를 하는 것으로 사법부도 어느 정도 개인성을 띠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와 같이 정책 판사도 비슷한 구조를 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공적인 정책 판단 기관을 사법부에 포함하여 행정법원 옆에 둘 것인지 아니면 행정부에 포함하여 행정심판의 영역을 늘릴 것인지를 결정해야 한다. 전자를 하면 판단으로써의 역할분담은 분명해지지만 지금까지 정책은 행정부가 주도해왔기에 사법부의 월권처럼 보이게 될 우려가 있다. 후자를 하면 사법부의 월권이라 하지는 않겠지만 행정부로부터 독립되어 있다고 할 수가 없을 것이다. 삼권분립처럼 권력이 독립되어 서로를 견제하기 위해서는 사법부에 행정부의 관료가 임용되어 일하는 것이 타당하다 본다. 정책이 법원과 같이 공적인 정책 판단 기관이 생긴다면 정책 또한 법과 같이 모두가 이기적으로 행동해도 올바른 결과가 나올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이 성장하려면 보다 적극적일 수 있는 환경이 필요하다. 검사와 변호사를 생각해보자. 변호사는 검사의 입증을 믿고 이기적으로 변호하고 검사는 변호사의 변호를 믿고 이기적으로 입증한다. 서로를 믿고 적극적으로 공격하며 방어하는 것으로 성장하고 있다. 정책도 그런 구조로 인간이 성장할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그렇게 하여 막스베버가 정리한 관료제를 보완할 수 있을 것이다.

 

정책에 대해 알아보았다. 복지는 법에 비해 권력이 낮고 공적인 판단 기관이 없었다. 복지의 권력은 예산안 편성권을 가진 기획재정부와 심의 및 확정권을 가진 국회가 가지고 있고 복지 정책을 공약으로 내세우는 정치가가 그런 권력을 이용하고 있는 상황에서 복지 정책을 담당하는 행정부처인 보건복지부나 사회에서 복지를 실행하는 사회복지사는 상대적으로 권력이 낮은 상황이다. 또한 정책 자체를 판단할 정책 판사와 정책에 이의제기를 대신할 정책 전문가가 없다. 법의 복지는 사회 구조 유지의 기본으로 성질이 비슷하고 중요도가 비등함에도 행정부처와 사회복지사와 독립된 공적인 정책 판단 기관이나 위임할 정책 전문가가 없다는 것을 생각하면 법에 비해 복지는 힘이 약했다. 어째서 법과 복지는 이런 차이가 나타난 것일까? 난이도 차이 때문일까? 아니다. 법과 정책은 둘 다 전문가가 아니면 다루기 어렵다. 중요도 차이 때문일까? 아니다. 법이 없으면 문명이 죽고 복지가 없으면 사람이 죽는다. 체제 차이 때문일까? 아니다. 법과 복지는 체제와 무관하게 단순한 사회 구조 유지의 기본이다. 어떤 체제도 법과 복지가 없으면 사회가 오래 유지되지 못한다. 복지 자체가 법에 비해 부족한 것이 아니다. 단지 관습에 의한 결과다. 과거 국가를 떠올려보자.

과거 국가는 전쟁이 일상이었다. 원시 부족 시대부터 시작해 정복 전쟁의 승자가 지배하고 패자가 지배당했다. 그렇게 하여 지배자와 피지배자로 나뉜 신분제가 나타났다. 고대 그리스의 아테네 민주주의조차도 시민과 노예로 나뉘었다. 신분의 세습과 세습, 국가의 정복과 정복으로 보다 생존에 유리한 개체와 국가가 살아남았다. 그렇게 수많은 생존경쟁의 결과 가장 생존에 유리한 국가 모든 개인의 능력을 활용하는 개인주의 체제인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와 자본주의 국가임이 증명되었다. 대부분 선진국이 개인주의 체제임을 상기하자. 일부 개인의 능력만 활용하는 국가는 국가 경쟁력이 낮아져 도태된다. 한국도 조선을 통해 그런 경험을 한 적이 있다. 집단주의 체제인 공산주의 국가조차 시장경제를 도입하여 수요와 공급의 경쟁을 통한 개인의 능력을 가능한 최대한 활용하고 있다. 정치의 민주주의가 선거라면 경제의 민주주의가 시장이다. 개인의 수요에 맞춘 개인의 공정한 능력 공급이 가장 많은 개인의 능력을 효과적으로 활용할 수 있게 한다. 과거의 지배와 피지배의 사회부터 현대의 자유롭고 평등한 사회까지의 생존경쟁의 결과에 대해 알아보았다. 이 과정 중에 있던 대부분 사회가 법으로 질서를 유지했다. 법은 어느 국가나 필수적이었다. 그러나 복지는 필수적이지 않았다. 왜냐하면 지배자가 피지배자의 행복에 관심이 없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본래 복지가 없는 사회는 체계 유지가 불가능하여 사회 구조가 무너지게 된다. 원시적인 사회인 원시 부족조차 부족 구성원이 어떤 이유 없이 불행이 지속되면 부족 이탈자가 늘어나 부족의 힘이 쇠락하여 자연 소멸하거나 다른 부족이나 짐승의 공격을 당해 사라지게 된다. 복지가 없는 사회는 대부분 그런 식으로 도태되는 것이 자연스러웠으나 종교가 등장하면서 달라지게 된다. 종교는 사회의 구성원이 겪을 수 있는 지배의 억압이나 빈곤의 절망이나 침략에 대한 불안이나 병의 고통이나 죽음의 공포 등의 다양한 불행을 신앙이나 빈곤구제 등으로 벗어날 수 있게 하면서 행복할 수 있게 했다. 사회의 복지를 종교가 담당하면서 사회 구조 유지가 된 것이다. 국가의 지배자도 병의 고통이나 죽음의 공포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으므로 그들 또한 종교에 의존하게 되었다. 종교로 불행을 명하게 된 이들이 종교를 중심으로 결집하면서 사회가 보다 단단하게 유지되게 되었다. 그렇게 종교는 인간을 행복하게 하는 것으로 인간에게 지지를 받아 지배자와 맞설 수 있는 힘을 얻게 되었다. 프랑스의 제1신분이 성직자고 제2신분이 귀족이었던 것을 떠올려보자. 인도의 제1계급이 제사장인 브라만이고 제2계깁은 크샤트리아인 왕과 귀족과 무사라는 것을 떠올려보자. 종교는 인간을 행복하게 하는 것으로 지배자보다 강한 힘을 얻게 되기도 했다. 이처럼 과거에는 복지의 힘이 종교에 있었기에 사회 관습에 의해 현대에도 복지 행정부처나 사회복지사가 힘을 갖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종교란 무엇인가? 잠시 종교에 대해 알아보자.

 

종교는 초자연적인 절대자에 대한 믿음을 통해 인간 생활의 고뇌를 해결하고 삶의 궁극적 의미를 추구하는 일 또는 그러한 믿음의 체계나 가르침을 뜻한다. 현대 종교는 기독교와 이슬람교와 힌두교와 불교와 유교와 도교 등이 있다. 종교는 크게 신비적인 종교와 학문적인 종교로 나눌 수 있다. 전자는 일반적인 종교라면 후자는 유교다. 유교는 본래 유학으로 불리며 학문적 성격을 띠었었으나 후대에 의해 가르침이 교리화되어 유학을 맹신하는 것으로 변질되어 종교와 그리 다르지 않게 되었다. 대부분 종교의 가르침은 사회 관념으로 남아 다른 종교에 영향을 끼치기에 가르침이 교리화가 된 유교의 변질 또한 다른 종교에 영향을 받은 결과일 것이다. 사회 관념으로 남은 종교의 가르침은 사회 전반적으로 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보자.

유교가 주류인 한국에서는 본인을 닦아 타인을 교화해야 한다는 수기치인에 대해 배워 학문을 갈고 닦는 노력을 하면 타인을 교화하기 위해 타인을 지배할 수 있고 노력을 하지 않으면 교화되기 위해 본인이 지배 당할 수 있다고 여겼기에 지배 당하는 이들은 노력이 부족한 것이라 생각하며 그들을 천시하는 것과 같은 차별을 정당화하였다. 한국에서 다양한 차별이 사라지지 않는 까닭은 노력으로 차별을 정당화하는 수기치인이나 연령으로 차별을 정당화하는 장유유서와 같은 가르침으로 나타난 관념 때문이다. 개인의 재능이나 환경이나 평가기준을 고려하지 않고 개인이 차별로 인한 불행을 겪으면 너의 불행은 네가 노력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하며 차별을 정당화하였다. 힌두교가 주류인 인도에서는 살아가면서 하는 모든 행위를 말하는 업에 대해 배워 선업을 행하면 후생에 존귀한 존재가 되고 악업을 행하면 후생에 미천한 존재가 된다고 여겼기에 미천한 삶을 사는 이들은 전생에 악업 행하였기 때문이라 생각하며 그들을 천시하는 것으로 차별을 정당화하였다. 인도에서 다양한 차별이 사라지지 않는 까닭은 업과 같은 가르침으로 나타난 관념 때문이다. 전생의 업이 과학적 증명이 되지 않은 미신과도 같음을 고려하지 않고 개인이 차별로 인한 불행을 겪으면 너의 불행은 너의 업 때문이라 말하며 차별을 정당화하였다.

이외 각국에 남아있는 대부분 차별은 과거 집단주의 관념을 만든 종교의 영향이 매우 크다. 종교의 가르침을 도덕관념으로 삼고 있는 이들에게 묻고 싶다. 과거 종교는 자유주의적이었는가? 민주주의적이었는가? 자본주의적이었는가? 어디까지나 종교는 개인보다 종교를 이롭게 하는 집단주의 체제다. 종교의 도덕적인 가르침은 이타적인 것이 대부분이어서 개인주의 체제의 옳고 그름과 정반대로 체제에 해롭다. 집단주의 체제인 종교는 본질이 무엇인가? 복지가 주제이므로 행복을 관점으로 종교를 바라보겠다. 무엇이 인간을 행복하게 했는가? 신앙이나 빈민구제다. 신앙은 정신적 행복이고 빈민구제는 물질적 행복이다. 빈민구제는 알기가 쉽다. 인간의 육체의 욕구가 충족되면 행복을 느낀다. 그런데 신앙은 알기가 어렵다. 신앙은 절대자를 믿고 따르며 교의를 받들어 지키는 일을 뜻한다. 이 행위가 어떻게 인간을 행복하게 했는가? 종교에 갖는 선입견인 신비성과 맹신성과 신성성과 도덕성과 목적성과 집단성과 흡수성 등을 배제하고 현실에 있지 않는 것을 믿는 것으로 마음의 안정을 찾아 행복해지는 것에만 초점을 맞춰보았다. 그러자 결론을 단순했다. 그것은 현실에서 도피하여 마음의 안정을 찾아 행복해지는 현실도피와 원리가 똑같았다. 종교의 현실도피와 사회의 현실도피에는 차이가 거의 없었다. 차이는 하나다. 맹신이다. 종교의 현실도피는 그것을 현실이라 믿고 사회의 현실도피는 그것을 비현실로 여긴다. 만약 사회의 현실도피도 현실로 여기면 종교와 같은 현상이 나타날 것이다. 그런 현상은 보통 사이비 종교가 된다.

어떤 사람은 종교가 현실적인 것이니 현실도피가 아니라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기성종교나 신흥종교나 세상에 있는 종교는 단 한번도 전지를 증명해본 적이 없다. 분명 이 세상이 어떤 존재에 의해 만들어졌을 확률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인간이 주장한 존재가 만들었다고 하기에는 그들의 가르침에는 인간의 인지를 초월한 지식이 없다. 오로지 종교가 만들어졌을 당시에 살고 있는 인간의 인지 내에서의 지식만 보여주었다. 오래된 기성종교가 현대의 인터넷을 알고 있었는가? 과거의 공룡을 알고 있었는가? 지금보다 미래의 무언가를 알고 있는가? 그렇다고 당대의 다른 지역을 알고 있지도 않았다. 당시 종교를 주장한 인간이 알고 있는 지식만이 가르침으로 있었다. 그러다 보니 논리적으로 종교가 말하는 초현실적인 존재는 인간이 만든 존재라고 판단할 수 밖에 없다. 논리 안에 살고 있는 사람은 이 논리를 부정할 수 없다. 종교의 현실도피에 대해 알아보자.

원시 부족은 원시 종교를 통해 자연을 숭배하는 것으로 자연의 공포라는 현실에서 도피하여 마음의 안정을 찾아 행복하게 되었다. 종교인은 종교가 말하는 신이나 조상이 곁에 있다고 믿는 것으로 괴롭거나 외롭다는 현실에서 도피하여 마음의 안정을 찾아 행복하게 되었다. 종교인은 종교가 말하는 구원이나 천국이나 사후세계를 믿는 것으로 죽음 후의 공포라는 현실에서 도피하여 마음의 안정을 찾아 행복하게 되었다. 종교인은 종교가 말하는 신 아래 모든 인간이 평등하다고 말하는 것을 믿는 것으로 불평등한 현실에서 도피하여 마음의 안정을 찾아 행복하게 되었다. 종교인은 종교가 말하는 금욕주의를 추구하는 것으로 욕구에 의해 서로를 공격하는 인간의 불완전함이라는 현실에서 도피하여 마음의 안정을 찾아 행복하게 되었다. 종교인은 종교가 말하는 신이 용서한다는 것을 믿는 것으로 죄를 지은 현실에서 도피하여 마음의 안정을 찾아 행복하게 되었다. 종교인은 종교가 말하는 것에 영향을 받아 종교를 믿는 것으로 특별한 존재가 된다고 믿는 것으로 특별하지 않는 현실에서 도피하여 마음의 안정을 찾아 행복하게 되었다. 종교인은 현실에 있지 않거나 현실적이지 않는 것을 믿는 것으로 마음의 안정을 찾아 행복하게 되었다. 전형적인 현실도피다. 그렇다고 종교인만 현실도피 하는 것은 아니다. 인간 대부분은 현실도피를 한다. 사회의 현실도피에 대해 알아보자.

사회인은 창작물이나 운동 경기에 빠지는 것으로 현실에서 도피하여 마음의 안정을 찾아 행복하게 되었다. 사회인은 망상에 빠지는 것으로 현실에서 도피하여 마음의 안정을 찾아 행복하게 되었다. 사회인은 국가의 훌륭함을 과잉 해석하는 것에 빠지는 것으로 현실에서 도피하여 마음의 안정을 찾아 행복하게 되었다. 사회인은 가상현실에 빠지는 것으로 현실에서 도피하여 마음의 안정을 찾아 행복하게 되었다. 사회인은 타인의 불행을 보는 것에 빠지는 것으로 현실에서 도피하여 마음의 안정을 찾아 행복하게 되었다. 매우 일반적인 현실도피다. 정상적인 모든 인간은 현실도피를 하기에 종교인의 비율이 낮은 곳일수록 사회의 현실도피 비율이 높아지게 되었다. 창작물이나 운동 경기 또는 술이나 담배나 마약 또는 국가의 훌륭함을 과잉 해석한 영상 등이 유행하게 되었다. 국가의 훌륭함을 과잉 해석한 영상을 올리는 것으로 높은 수익을 올리는 이가 있다. 높은 수익이기에 왜곡되고 조작된 영상을 올리더라도 어쩔 수 없다며 자기합리화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수익은 종교가 현실도피를 하게 하는 것으로 얻던 수익의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그래도 종교에 빠져 재산을 바치는 것보다는 그게 나을 것이다. 현실도피는 과학도 예외는 아니다.

현재 알고 있는 과학지식으로 있을 수 없는 현상이 일어날 때 무조건 부정해버리는 것은 과학의 현실도피라 할 수 있다. 가령 양자역학이 말하는 당시 과학지식으로는 황당한 현상을 부정하는 것은 현실도피에 해당한다. 어떤 경우에도 현상이 첫째고 이론이 둘째다. 이론과 다른 현상이 나오면 이론을 배제하고 현상을 관찰해야 한다. 이론에 맞는 현상이라 하더라도 새로운 관점으로 보기 위해서는 이론을 무시하고 처음부터 현상을 관찰하는 것도 좋다.

종교의 본질이 현실도피라면 종교의 다양한 특성도 해석될 수 있다. 종교에서의 신성성과 도덕성은 종교의 현실도피를 정당화하는 것으로 사회에서 현실도피를 하는 이들이 다양한 이유를 말하며 정당화하는 것과 비슷하다. 자기합리화나 정신승리가 보통 그렇다. 종교에서의 소속감은 같은 현실도피를 하는 이들이 모인 곳에 소속감을 느끼는 것으로 사회에서 현실도피를 하는 이들이 같은 현실도피를 하는 이들이 모인 곳에 소속감을 느끼는 것과 비슷하다. 관념에 따라 소속감이 강하거나 약할 수 있으나 소속감 자체는 모두 갖고 있는 상황에서 현실도피를 하는 이들이 모인 집단에 대한 소속감은 종교와 비슷하게 강할 수 있다. 종교에서 우수하고 부유한 이들이 현실도피를 하는 것은 사회에서 우수하고 부유한 이들이 현실도피를 하는 것과 비슷하다. 아무리 우수하고 부유하더라도 죽음이나 병으로부터 현실도피를 하지 않을 수는 없다. 모든 종교인 종교에서 현실도피 하는 것으로 행복을 누렸다.

유교도 예외는 아니다. 복권보다 확률이 낮은 실낱 같은 가능성에 기대어 모든 인간이 유교의 가르침을 붙들고 공부하게 만들었다. 과거 병인양요 당시 프랑스인의 증언에 따르면 조선은 아무리 가난한 집에도 책이 있었다고 한다. 수기치인으로 모든 인간을 학문을 통해 현실을 도피하게 만들었으니 책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신비 종교는 비현실 속에서 현실도피를 하게 했다면 학문 종교는 현실 속에서 현실도피를 하게 했다. 조선 자체도 현실도피를 했다. 조선은 유교의 가르침을 믿고 따른다면 국가가 성장하고 국민이 행복할 수 있을 거라는 현실도피로 인해 인류나 국가에 이로운 것을 새롭게 생산한 것이 아니라 과거의 가르침을 교리처럼 암기하고 해석하는 것에 그쳐 정교일치의 국가와 마찬가지로 국가가 성장하지 못하고 국민이 불행하여 몰락하게 되었다. 가난한 집조차 책이 있었음에도 국가가 몰락하고 국민이 불행했던 것은 그 책의 가르침은 종교의 교리와 다를 바 없었으며 그 책의 소유한 이유는 종교의 현실도피와 다를 바 없었기 때문이다. 애초에 비현실이었기에 종교를 신앙한다 하더라도 교리와 문명의 발전을 별개로 여기며 정교분리를 한 국가는 문명이 꾸준하게 발전하여 국가가 성장하며 국민이 행복했으나 현실이었기에 종교를 신앙하면서 교리와 문명의 발전을 같게 여기며 정교일치를 한 국가는 문명이 발전하지 못하여 국가가 성장하지 못하고 국민이 불행했다. 아이러니한 결과다. 진리인 학문조차 신앙해서는 안 되는데 진리가 아닌 학문을 신앙했으니 이런 결과는 자연스럽다. 정리하면 종교는 맹신적이고 권위적이며 조직적인 현실도피다. 현실도피 자체는 누구나 하기에 그리 특별하지는 않으나 현실도피임을 지각하는 것과 그러지 않는 것은 천지차이로 다르다 할 수 있다.

 

종교에 대해 알아보았다. 종교는 현실도피와 빈민구제로 인간을 행복하게 하여 권력을 얻었다. 그러다 개인주의 체제가 들어서면서 종교의 영향력이 감소함에 따라 행정부처와 사회복지사의 역할은 커져갔는데 관습에 의해 힘은 그대로였기 때문에 법과 복지의 중요도는 비슷했음에도 힘의 차이가 컸었다. 과학의 발달로 질병에 의한 고통을 종교가 아닌 의료계가 담당하면서 종교의 힘 일부를 의료계가 계승하였다. 과거에도 의료계가 있긴 했으나 현대에 들어서면서 의학의 발달이 굉장히 빨라져 그만큼 종교의 힘도 많이 계승하였다. 종교와 의료계의 치료는 현실도피와 현실직시로 분명하게 차이가 있다. 종교의 신앙치료는 현실도피지만 의료계의 과학치료는 현실직시다. 일부 광신자를 제외하면 대부분 질병에 의한 고통을 의료계에 의존하면서 의료계가 복지의 힘 중 일부인 권위와 재력을 얻게 되었다. 그러나 그 중에 권력은 없었다. 의료계 출신의 정치가 수가 적다는 것을 떠올려보자. 기득권 사이에서 인맥이나 환자에게서 생기는 병에 대한 강제력과 모든 국민이 갖는 권력은 있어도 정부 권력은 없다. 그렇다면 누가 복지의 권력을 계승했는가? 바로 정치가다. 지금 대부분 정치가의 공략에 어떤 형태로든 복지 정책이 들어가고 있는 것을 떠올려보자. 종교가 민중에게 복지를 하여 지지 받는 것으로 권력을 얻었던 것과 같이 정치가가 국민에게 복지를 하겠다고 하여 지지를 받는 것으로 권력을 얻고 있다. 종교의 영향을 받은 사상가가 만든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에 영향을 받은 정치가들이 사회 복지를 주장하면서 종교의 권력을 계승한 것이다. 선진국일수록 민주주의여서 지배를 통한 권력을 얻지 못하기에 복지를 통한 권력을 얻는 경우가 많아졌다. 그런데 정치가는 법과 복지를 만들지 판단하지는 않는다. 정치가는 법과 복지를 둘 다 다루지 그 분야에 속한 것이 아니다. 법과 복지는 정치와 무관하게 권력이 있어야 했다. 법조계는 사법부라는 형태로 독립적인 권력이 있었다. 그러나 복지는 그런 것이 없이 정치가가 복지 권력을 계승한 순간부터 복지 권력 대부분이 공중분해 된 것이나 다름이 없게 되었다. 사회 구조 유지의 기본인 복지는 법과 마찬가지로 사회 구조 유지를 위해 정당한 권력을 얻을 필요가 있다. 행정부처와 복지 전문가와 의료계를 하나로 묶을 복지계를 형성하고 그런 집단의 권력을 상징하는 복지 정책을 판단할 기관과 위임할 복지 정책 전문가의 도입이 필요할 것이다. 그렇게 하여 정계는 법과 복지의 개인성을 추구하고 법조계는 법의 전문성을 추구하고 복지계를 복지의 전문성을 추구하여 정계는 개인의 자유를 책임지고 법조계는 국가의 질서를 책임지고 복지계는 국가의 체계를 책임지면 된다. 그런데 권력이란 무엇인가? 잠시 권력에 대해 알아보자.

 

권력은 남을 자기 의사에 복종시키거나 지배할 수 있는 공인된 권리와 힘으로 특히 국가나 정부가 국민에 대하여 갖고 있는 강제력을 뜻한다. 권리는 어떤 일을 자유로이 행하거나 타인에 대하여 당연히 주장하고 요구할 수 있는 힘이나 자격을 뜻한다. 권리에 힘이 더해지면 권력이 된다. 권력이나 권리에 제한이 있으면 권한이 된다. 법과 복지를 비롯한 권력에는 이런 강제력을 행사할 수 있는 권리와 힘을 가지고 있다. 권력을 가지고 있으므로 권력을 남용하는 것을 막기 위한 장치도 있어야 한다. 그래서 공무원에게는 직권남용죄가 따로 있다. 직권남용죄는 직권의 남용과 의무 없는 일을 하게 한 때를 모두 충족해야 성립된다고 한다. 권력자가 권력을 남용한 것 중 유명한 것이 히틀러의 전권 위임법이 있다. 수권법으로도 불리는데 전권 위임법이 보다 직관적으로 보여서 전권 위임법이라 부르겠다. 행정부가 입법부의 입법권의 일부를 위임 받아 행하는 명령과 규칙과 달리 행정부가 입법부의 입법권을 전부 위임 받아 행정부가 법을 만들고 행정부가 법을 집행했다. 명분은 민족과 국가의 위난을 제거하기 위함이었다. 그렇게 민족과 국가를 위해서라는 명분으로 개인의 권리를 침해하기 시작했다. 민주주의가 붕괴하고 전체주의가 들어섰다. 독재의 시작이다. 이와 같이 권력자가 어떤 명분을 가지고 있던 국가의 이념을 훼손하거나 파괴하는 일이 발생하면 국가가 파멸로 향할 수가 있다. 자유를 이념으로 삼은 국가에서 자유를 부정하는 법률은 나오면 안 된다. 자유주의를 근거하여 모든 법은 세대의 선택에 달라져야 하나 자유 자체를 부정하는 법률은 나올 수가 없다. 민의로 모든 것이 정당화되면 민주주의를 부정하는 법률도 민의에 따라 정당화되어 히틀러의 전권 위임법과 같은 사태가 발생할 수 있다. 그렇기에 모든 권력에는 견제장치가 필요하다. 그 권력에는 국민의 권력도 포함된다.

민주주의는 국민이 권력을 가짐과 동시에 스스로 권리를 행사하는 정치 형태를 뜻한다. 권력자가 가진 권력에 남용이 발생할 수 있듯이 국민이 가진 권력에 남용이 발생할 수 있음을 알았어야 했다. 가령 국민이 정치가에게 부당한 것을 통과시키도록 압박하는 것을 정치가가 국민의 표를 고려하여 수용하는 것은 국민의 권력 남용이자 정치가의 권력 남용 방관에 해당하게 된다. 개인에게 주권이 주어지면서 그에 해당하는 권력을 다루는 것과 권력을 남용하는 것을 경계하는 방법을 배웠어야 했다. 그러나 아직 민주주의가 제대로 성장하지 못하여 그에 대한 인식이 부족해 타인에게 상처를 입히는 일이 늘어나게 되었다. 민법에는 신의성실의 원칙으로 법적 판단에서는 권리 남용을 방지하고 있으나 사회에는 그런 방지책이 없었다. 민법의 신의성실의 원칙 중 권리남용 금지의 원칙의 성립 기준은 다음과 같다. 권리자의 적법한 권리 및 그 행사에 해당하는 행위가 있어야 하고 그 권리의 행사가 권리의 사회성을 일탈하는 정도로 행해져서 법의 당해 권리를 인정하는 근본적인 취지를 벗어나는 것이어야 하며 가해의사, 즉 권리행사의 목적이 오로지 상대방에게 고통을 주고 손해를 입히기 위한 것이어야 성립된다. 그렇기에 바르다 여긴 것이나 고의성을 입증하기 어렵다면 적용할 수 없다. 사회에는 국민의 권력 남용에는 아무런 방지책이 없고 법에서조차 바르게 여긴 권리 남용은 막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집단주의 관념과 개인주의 체제의 충돌로 체제에 해로운 집단주의 관념에 의한 도덕적 범죄가 나타나고 있는 상황에서 바르다 여긴 권리 남용 또는 권력 남용은 사회를 해롭게 하고 있다. 본인의 주관적인 집단주의 도덕관념을 근거로 타인의 자유권을 침해하는 도덕적 범죄를 정당하게 여기고 있다. 불매운동을 강요하거나 불매제품을 파괴하는 행위 등으로 타인의 자유권과 소유권을 침해하는 것이 바로 그렇다.

사회에는 국민이 권력을 남용하는 것을 방지하는 방지책이 없어 심각한 사건이 발생할 때만 법령으로 제정하여 대처했다. 그 중 성에 관련된 집단주의 도덕관념에 해당하는 것은 국민의 권력 남용을 법령으로 방지하기는커녕 법령으로 지원하여 폭주하게 되면서 개인의 자유권을 심각하게 침해하기 시작했다. N번방 방지법 등이 바로 그렇다. 이런 권력 남용과 법령 지원은 낡은 관념으로 개인의 권리를 침해하여 사회를 혼란스럽고 고통스럽게 만든 도덕적 범죄다. 국민의 권력이나 권리 남용 중 고의성을 입증하기 어려운 것에는 형사미성년자의 소년법 악용이 있을 것이다. 형사미성년자는 UN 아동권리협약에 의해 보장된 권리로 나타난 소년법에 근거해 과한 처벌을 받지 않고 있다. 이걸 악용하여 권리를 남용하는 미성년자들이 늘어만 가고 있는데 제대로 대처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최근 N번방 방지법을 도입하여 중학생도 성적 자기결정권을 박탈하여 성년과의 성적인 관계를 결정할 권리를 빼앗김에 따라 중학생은 심신미약자와 동등할 정도로 사리분별이 불가능한 존재로 격하되었다. 이에 따라 논리적으로 중학생까지는 성년과 같이 처벌할 근거가 없어진 셈이다. 사리분별이 불가능해서 권리를 박탈했는데 사리분별이 가능한 사람과 같이 처벌하는 것은 모순되어 비논리가 된다. 정보양의 증가로 중학생뿐만이 아니라 초등학생의 범죄도 더욱 심화되고 있음에도 성적 자기결정권의 권리를 보유하는 연령을 내리기는커녕 올리는 바람에 그에 대한 대응이 더욱 불가능하게 되었다. 중학생 때 심신미약 수준으로 사리분별이 불가능한 것은 발달장애에 해당한다. 일부 발달장애아를 기준으로 모든 중학생의 권리를 박탈하는 것이 정상으로 보이는가? 정보양의 증가로 초등학생 또한 사리분별을 하며 법을 악용하는 것에 어려움이 없어지고 있다. 그에 맞춰서 모든 학생을 빠르데 성장시킴과 동시에 권리와 형벌의 비례원칙을 지켰어야 했다. 논리를 버리고 비논리로 문제에 접근하며 법을 만드니 이런 꼴이 난다. 집단주의 관념에 의해 개인주의 체제의 합리성이 파괴되는 일이 너무 많다. 안타까운 일이다.

어떤 이는 독일을 예로 들며 개인의 자유권을 침해하는 것을 정당화하는데 독일은 애초에 사회민주주의 국가다. 집단의 이익을 위해 개인의 자유를 침해하는 범위가 넓은 사회민주주의 국가다. 집단주의 체제의 국가 중에서 가장 발전했기에 모범으로 보일 수 있으나 그럼에도 집단주의 체제인 국가일 뿐이다. 독일은 집단주의 체제인 국가의 정점. 이 이상 집단주의 체제로는 발전할 수 없다. 독일 또한 개인주의 체제로 바꾸지 않는 이상 사회주의라는 집단주의와 민주주의라는 개인주의 체제의 모순을 견디지 못할 것이다. 그럼에도 집단주의 체제인 국가를 예로 들며 개인주의 체제인 국가에서 개인의 자유권을 침해하는 것은 국가 체제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는 몰상식한 행동이다.

과거 어떤 한국 관료가 한국 시위를 가리켜 과잉 민주주의라고 하거나 어떤 외국인이 한국을 국민 독재라 부른 것은 이렇게 국민의 권력이나 권리 남용에서 비롯되었다고 본다. 그들이 보기에 뭔가 잘못된 것 같은데 정확히는 파악하지 못해 과잉이나 독재라 지적했을 뿐이지 방향은 비슷하다. 과잉 민주주의가 민주주의 폄하로 보일 수 있고 국민 독재가 민주주의면 당연한 것이 아니냐고 물을 수 있는데 과잉 되어 권력이 남용되면 되려 민주주의를 훼손되게 되는 것이고 국민 독재로 보일 정도로 권력이 남용되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해도 국민의 권력이나 권리 행사는 아예 못하거나 안 하는 것보다는 남용이 나을 때가 많다. 불만이 있어도 얘기를 하지 않다가 파국으로 치닫는 것보다 다소 과격하더라도 미리미리 얘기하면서 그 때 해결하는 것이 낫다. 물론 그것이 권력 남용을 정당화할 수는 없다.

국민의 권력 남용이 어떻게 성립되냐고 물어볼 수도 있다. 그런데 그것이야말로 국민에게 권력이 있는 민주주의를 부정하는 것이다. 권력이 있으면 남용이 나타날 수 있다. 비논리적인 주장을 외치며 떼를 지어 몰려가 강제로 주장을 통과시키는 것이 권력 남용이 아니면 무엇이라 할 수 있는가? 국민의 권력 남용을 민주주의라 말하는 것이야말로 민주주의를 더럽히는 것이다. 개인주의 체제인 민주주의에서 국민이 권력을 이기적으로 사용하려면 타인이 지적하는 본인의 권력 남용을 비판적으로 수용하거나 본인이 타인의 권력 남용을 지적하여 모든 권력자가 권력 남용을 하는 것을 방지해야 한다. 인권운동에서도 이런 권력 남용이 나타나고 있다.

인권운동의 근거가 되는 인권선언문은 법률보다 훨씬 포괄적인 의미를 갖고 있으면서도 그에 대한 해석을 인권운동가가 주관적으로 해석하면서 입맛대로 이용하게 되었다. 일부 운동자가 대상이 이익을 얻을 권리인 이권을 모든 인간의 보편적인 권리인 인권으로 포장하며 주장하면서 타인에게 이권을 강요하는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누구나 수긍하는 인간의 보편적인 권리인 인권은 이미 모두가 인정하기에 특별히 따로 증명할 필요가 없으나 일부만 수긍하는 일부 운동자나 대상이 이익을 얻을 권리인 이권은 따로 증명할 필요가 있다. 이권은 이익을 얻을 권리를 주장했을 뿐이지 실제 이익을 얻는 권리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다. 타당해야 권리로 이어진다. 그들의 이권이 사회의 저항이나 비판을 받는 것은 정당한 권리와 남용을 구분하지 않은 채 되는대로 떠들었기 때문이다. 인간의 보편적인 권리인 인권은 보편적이기에 객관적이고 균형적이어야 하고 타인을 설득해야 하기에 논리적이어야 한다. 반면 인간의 주관적인 이권은 일방적이기에 주관적이고 불균형적이고 비논리적일 수 있다. 객관성과 균형성과 논리성이 빠진 인권은 모두 이권이다. 본래 이권은 비판적 수용을 하거나 수용되지 않아야 하는데 이권을 인권이라 주장하는 것만으로도 권리가 있다고 착각한 이들이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면서 세상이 혼란스러운 상황이다. 대부분 인권운동이나 동물권운동이 이에 해당하며 최근 세상을 혼란케 하는 것에는 PC주의와 여성주의와 채식주의와 동물보호주의 등이 있다.

명백하게 증명된 인권이 아닌 증명되지 않은 이권이라면 무비판적 수용을 해서는 안 된다. 이제 개인주의 체제의 모든 국민은 주어진 권력이나 권리의 사용과 남용 방지를 학습해야 한다. 정부가 국민을 감시하고 검열하는 것이나 부모가 자녀를 감시하고 검열하는 것은 권력이나 권리 남용이다. 정치가의 권력 남용이 잘못되었듯이 국민의 권력 남용도 잘못되었다. 일상적으로 행해지는 다수의 자유권 침해는 대부분 권력이나 권리 남용이라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문명이 발전하여 개인주의 체제인 국가가 된 곳은 복지의 변화가 필요하다. 과거 종교는 현실도피를 맹신하는 것을 주도하여 사회에 속한 인류를 정신적으로 행복하게 했고 빈민구제나 고아원 운영 등으로 사회에 속한 인류를 육체적으로 행복하게 했다. 그런 식으로 사회의 복지를 담당했다. 그러다 개인주의 체제인 국가가 되면서 종교의 영향력이 감소함에 따라 복지 행정부처와 복지 전문가와 의료계가 그 역할을 맡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들은 육체적 행복의 경우 물질 지원이나 질병 치료 같이 알기 쉬워 대응할 수 있었으나 정신적 행복의 경우 현실도피를 맹신하는 것으로 마음의 안정을 찾고 있었다는 것을 알기 어려워 대응할 수 없었다. 분명 사회에 현실도피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종교의 현실도피는 종교의 가르침을 확신하고 맹목적으로 신앙하고 있는 것을 말하는데 사회의 현실도피는 취미로써 즐기는 것도 많아 미신이나 일부 관념에 깊게 빠진 것을 제외하면 없었다. 이런 이유로 종교의 현실도피를 하지 않는 인간과 사회의 현실도피를 적게 하는 인간은 정신 건강이 심각하게 악화되었다. 현대인이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데 그건 아는 것은 과거보다 많아졌으면서 현실도피는 과거보다 적게 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알면 알수록 불행해질 수 있다. 과학적 증명이 된 흡연의 해로움은 몰랐을 때엔 타인의 흡연을 그렇게 불편해하지 않다가 알고 나면서 불편해하고 있다. 알고 나서 불편함을 느끼는 불행을 겪게 되었다. 과학적 증명이 되지 않은 성 죄악시는 몰랐을 때엔 성을 불편해하지 않다가 알고 나면서 불편해하고 있다. 알고 나서 불편함을 느끼는 불행을 겪게 되었다. 위 두 가지 예시의 특징은 진리와 무관하다는 것이다. 어떤 것이든 알게 되면서 인간의 관념으로 자리잡으면 그것이 진리든 아니든 관념에 어긋나는 것을 보면 불편해질 수 있다. 현대인 대부분은 아는 것은 명백하게 과거보다 많아졌다. 그러나 현실도피는 선진적인 국가일수록 과거보다 적어졌다. 아는 것이 많아지면서 스트레스 받을 일은 늘어났는데 현실도피를 하지 않으면서 스트레스를 풀 일은 줄어듦에 따라 현대인은 스트레스를 많이 받을 수 밖에 없었다. 종교가 인류 역사의 동반자였던 것을 고려하면 대부분 인간에게 현실도피는 필요하다. 나 또한 창작물을 즐기는 현실도피로 마음의 안정을 찾곤 한다. 선진국은 인간의 정신건강을 위해 효율적인 현실도피를 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고 현실도피에만 매달릴 수는 없다. 현실을 도피하지 않아도 행복할 수 있어야 한다. 현실도피적 행복은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지만 현실을 도피하면서 문제에서 벗어나 행복하게 되는 것을 말하고 현실직시적 행복은 직접 문제를 해결하는 것으로 행복하게 되는 것을 말한다. 가령 외모로 불행할 경우 고민상담이 현실도피적 행복이고 성형이 현실직시적 행복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에 따라 복지 행정부처는 현실도피와 현실직시 복지를 모두 고려하여 복지를 행해야 할 것이다. 한국은 국가 수준이 낮아서 사회의 행복도가 낮다고 여겨질 수 있다. 그러나 한국은 수준이 높은 진보한 문명이어서 문맹률이 낮아 아는 것이 많고 종교의 비율이 낮아 현실도피가 적은 국가여서 불행했던 것이다. 한국은 문명이 개인주의 체제로 진보하면서 집단주의 관념과 개인주의 체제의 충돌로 인해 옳고 그름의 혼란이 발생하여 불행했고, 국민이 아는 것이 많아 불행했고, 국민이 종교의 현실도피에서 벗어남에 따라 현실도피를 맹신하지 못하여 불행했다. 한국보다 문명의 발전이 느린 국가가 행복한 것은 문명의 발전이 느리기 때문에 행복한 것이다. 한국은 문명이 진보함에 따라 모든 국민이 개인주의 관념을 가져야 하고 종교의 현실도피를 맹신하지 않게 됨에 따라 합리적인 현실도피적 행복과 현실직시적 행복을 얻을 수 있는 대책이 필요하다. 그걸 복지 행정부처와 복지 전문가와 의료계가 담당할 수 있을 것이다. 국민의 정신건강이 돌이킬 수 없는 상황에 다다르기 전에 합리적인 현실도피적 행복과 현실직시적 행복이 자리잡아야 할 것이다.

의료계에서 국민의 정신건강을 담당할 분야가 보통 정신의학일 것이다. 잠시 정신의학에 대해 의견을 내겠다. 일부 정신의학은 모든 게임을 악으로 여기며 명백한 게임중독이나 과몰입이나 단순 취미조차도 게임중독으로 몰아가며 게임을 질병으로 인식해야 한다고 주장한 적이 있다. 이치에 맞는 말을 해야 한다. 게임을 단순 취미로 즐기는 것이 중독이 되면 중독이 아닌 취미가 없다. 다른 취미를 즐기는 것은 중독이라 하지 않고 게임을 취미로 즐기는 것을 중독이라 하게 되면 모순이 발생하여 비논리가 된다. 의학은 논리적이어야 한다. 그리고 인간은 현실도피로 마음의 안정을 찾아 행복한 것이 일반적이다. 현실도피를 맹신하는 것은 위험하지만 취미로 즐기는 것은 합리적일 수 있다. 게임을 악으로 몰기보다는 게임으로 얻는 현실도피를 합리적으로 즐길 수 있도록 유도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기술의 발달로 인간의 의존도가 높아지는 것을 기술의 책임으로 떠넘기는 일이 많다. 스마트폰으로 문해력이 낮아지는 것을 보고 스마트폰에게 책임을 떠넘기는 일이 있었다. 그러나 인간은 인간 기술 발달로 인간의 의존도가 높아져 인간의 능력이 낮아지는 것을 기술의 책임으로 떠넘길 것이 아니라 기술을 받아드리고 기술을 누리면서도 인간의 능력이 낮아지지 않도록 만들어야 한다. 앞으로 기술발달로 게임이나 스마트폰보다 더욱 더 새로운 것이 나올 수 있다. 가상현실게임 같은 것이 나오면 지금의 게임으로 인해 발생하는 사회문제와 비교가 될 수 없을 정도로 클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그걸 부정할 수는 없다. 인간은 기술에 적응해야 한다.

정리하겠다. 복지는 법과 성질이 비슷하고 중요도가 비등함에도 관습적으로 인해 그에 마땅한 제도와 권력이 부족했다. 그러므로 법과 마찬가지로 공적인 정책 판단 기관을 설립하여 정책을 판단할 정책 판사와 정책에 이의제기를 대신할 정책 전문가가 제도화되어 국민의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의견을 수용하고 환원하여 정책의 질을 높여야 한다. 그렇게 판단을 하는 독립적인 기관으로 법의 삼권분립과 같이 정책의 권력을 분산하여 서로를 견제할 수 있는 기준과 절차를 정립하여 모두가 자유롭고 이기적이어야 객관적이고 균형적이며 논리적인 복지가 행해지도록 해야 한다. 그게 복지가 가야 할 기본적인 길이다. 구체적인 복지 정책의 방향에 대해 세 가지 알아보겠다.

 

 

 

첫 번째, 행복한 가치 생산

 

행복이란 무엇인가? 행복은 사람이 생활 속에서 기쁘고 즐겁고 만족을 느끼는 상태에 있는 것을 뜻한다. 많은 사람들이 기쁘고 즐겁고 만족하고 싶어서 행복하길 바라고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행복할 수 있는가? 사람마다 다르다. 객관적 기준이 없다. 행복은 지극히 주관적이다. 객관적으로 불행해 보이는 빈자가 행복하여 여유롭게 살 수도 있고 객관적으로 행복해 보이는 부자가 불행하여 자살할 수도 있다. 주관적으로 삶을 받아드리는 태도에 따라 행복이 달라지기에 이런 결과가 나온다.

행복의 기준은 집단주의일수록 비슷하고 개인주의일수록 비슷하지 않다. 집단주의 관념을 가진 사람은 타인이 본인의 행복의 기준에 부합하지 않을 경우 오지랖을 부리며 같은 행복의 기준을 추구하도록 압박을 하기 때문이다. 가령 집단주의 관념을 가진 부모는 자녀의 진로를 본인의 행복의 기준에 맞도록 압박한다. 보통 인간은 본인이 바라는 것을 이룰 때 행복해진다. 타인이 본인의 행복의 기준을 세뇌하고 강요해봐야 타인은 행복하지 않다.

내가 바라는 것은 크게 세 가지 있다. 하나는 나의 사상으로 인류를 바르게 안내하여 모든 개인이 자유롭고 이기적으로 행복한 세상으로 만들고 싶다. 둘은 불로불사가 되어 영원히 우주를 떠돌며 인류를 퍼트리고 우주의 정보를 모아 세상의 존재이유를 규명하는 것으로 영원진리에 도달하고 싶다. 셋은 이상의 이성과 행복하게 살고 싶다. 이런 바람을 이루면 나는 행복할 것이다. 이외 바라는 것은 많다. 우선적으로 집단주의 관념으로 바른 것을 행할수록 개인주의 체제에 해로운, 바르다고 생각한 것을 행할수록 잘못되는 사회를 바꾸고 싶다. 너무 이건 끔찍하지 않는가. 바를수록 잘못되는 사회에 어떤 미래가 있는가?

이렇게 인간의 바람은 사람마다 다르다. 객관적 기준이 없다. 그렇기에 도덕성이 없다. 도덕성은 도덕적인 품성으로 선악의 견지에서 본 인격과 판단과 행위 등에 대한 가치를 뜻한다. 그런 판단을 하게 할 기준이 없기에 행복에는 도덕성이 없다. 가령 폭력을 생각해보자. 폭력을 행한 것은 보다 행복하기 위해서다. 폭력에 맞선 것은 보다 행복하기 위해서다. 폭력을 행한 사람과 폭력에 맞선 사람 둘 다 행복하기 위해서 그런 것이다. 어떤 것이 그르다고 해서 행복하기 위해서가 아닌 것은 아니다. 옳고 그름이나 위법 유무는 행복의 기준이 될 수 없다. 인간이 사회에서 살고 있는 이상 인간의 행복이 충돌하면 누군가는 행복하더라도 누군가는 불행할 수 있다. 마땅한 기준이나 절차로 바른 행복과 그른 행복을 나눠 추구해야 한다.

보통 사회는 실정법의 기준이나 절차로 질서를 유지하며 바른 행복과 그른 행복을 나누고 있다. 질서는 사물의 차례나 순서를 뜻한다. 법으로 차례를 정했기에 사회 질서가 유지된다. 가령 차도에 신호등이 없다면 차례를 정할 수 없어 사람이나 차량이 충돌하여 사고가 날 수 있다. 그 사고를 교통법에 근거하여 사람이나 차량의 차례를 정해 사고가 나지 않도록 하고 있다. 실정법이 아닌 자연법인 불문율로 차례를 정해 사회 질서를 유지하기도 한다. 대중교통을 이용하기 위해 차량이 오는 것을 기다릴 때 차례가 없으면 먼저 탑승하려는 이들로 인해 분쟁이 발생할 수 있다. 그 분쟁을 선착순이란 불문율로 대중교통 이용자의 차례를 정해 발생하지 않도록 하고 있다. 분명 차례가 앞인 사람이나 차량은 시간을 절약하여 상대적으로 행복할 수 있고 차례가 뒤인 사람이나 차량은 시간을 절약하지 못해 상대적으로 불행할 수 있다. 그러나 교통법이나 선착순 같이 타당하고 합리적인 기준이 있다면 행복한 사람과 불행한 사람 모두 납득하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교통법이나 선착순 같은 기준이나 절차를 지키면서 행복을 누린다면 바른 행복이 되고 그런 기준이나 절차를 무시하고 교통법을 어기거나 새치기를 하는 것으로 행복을 누린다면 그른 행복이 된다. 이런 차례를 통해 개인이 자유롭게 이기적이어야 올바른 결과가 나올 수 있다. 모든 개인 이기적이게 되면 정해둔 평등한 차례를 지키지 않는 개인은 비판을 받고 배제될 수 있다. 장유유서나 카스트 같은 연령이나 신분으로 차례를 정한 것을 비판하는 것은 차례 자체를 비판하는 것이 아닌 연령이나 신분 같은 부당하고 불평등한 기준을 비판하는 것이다. 행복에는 도덕성이 없음에도 행복 자체가 도덕적이라 착각하는 이들로 인해 정당한 기준이나 절차 없이 인간을 행복하게 하는 것만으로 바르다고 착각하며 잘못된 복지 정책을 강행하기도 한다. 이와 같이 행복에는 도덕성이 없기에 바른 행복과 그른 행복으로 나뉜다.

그런데 그른 행복도 정당성이 확보되면 바르게 될 수 있다. 가령 인간을 죽이거나 덮치거나 빼앗는 것으로 행복을 느끼는 것은 본인의 행복을 위해 타인을 불행케 한 그른 행복이다. 그러나 위법성조각사유인 정당방위에 해당하게 되면 인간을 죽이거나 덮치거나 빼앗는 것으로 행복하더라도 정당화가 되어 바른 행복이 될 수 있다. 살해 위협을 받는 피해자가 가해자를 공격하지 않으면 대응할 수 없는 상황에서 피해자인 본인이 살아남기 위해 가해자인 타인을 공격하여 살기 위해 죽이거나 움직임을 막기 위해 덮치거나 무기를 빼앗는 것은 가해자인 타인이 불행하더라도 정당방위라는 정당한 기준과 절차기에 바른 행복이 된다. 본인의 행복을 위해 타인을 불행케 했더라도 정당화가 되어 바른 행복이 된 것이다. 좀 더 알기 쉬운 예시로 접근해보자.

요즘 길고양이로 논란이 많다. 길고양이가 문제를 일으켰다기 보다는 길고양이를 과하게 아끼는 인간이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 몇 가지 알아보자. 하나, 길고양이 개체 수 증가. 길고양이에게 먹이를 줘서 개체 수를 비정상적으로 늘리고 있다. , 길고양이 중성화 수술비. 길고양이를 살리겠다고 야생에 있는 동물에 세금을 써서 중성화를 하고 있다. , 길고양이와 집고양이 납치사건. 길에서 사는 고양이나 집에서 사는 고양이를 주관적인 판단으로 불쌍하다 여기며 납치하는 사건이 발생하고 있다. 이처럼 길고양이가 문제를 일으키기보다는 길고양이를 아끼는 인간이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 이런 문제로 인해 길고양이로 불행을 겪는 사람이 생기게 되었다. 하나, 사회 환경 파괴. 새를 좋아하는 사람은 길고양이 개체 수 증가로 새가 지나치게 많이 죽는 바람에 불행할 수 있고 동네 주민은 길고양이에 의한 소음공개나 차량사고로 불행할 수 있다. , 세금 낭비. 길고양이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은 야생의 동물에 세금을 낭비하는 것이 못마땅하여 불행할 수 있다. , 길고양이나 집고양이 분양. 길고양이를 주어다 타인에게 분양하면서 보증금을 받고 고양이를 키우는 것에 사사건건 간섭하며 못살게 구는 것으로 불행할 수 있고 집고양이를 납치당한 원래 주인은 집고양이를 잃어 불행할 수 있다. 이렇게 길고양이로 행복한 사람과 불행한 사람이 동시에 나타났다. 이러면 바른 행복과 그른 행복을 나누어 바라보고 바른 행복을 추구하고 그른 행복은 막아야 한다. 아니면 그른 행복이 정당화될 수 있는지 확인하여 정당할 때에만 바르게 여겨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악이 나타난다. 정당한 기준이나 절차 없이 누군가의 행복을 위해 누군가가 불행해도 된다면 그것이 악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차근차근 생각해보자. 하나, 동물보호를 근거로 길고양이에게 먹이를 줘서 개체 수를 늘리는 것이 정당한가? 인간은 모든 생물을 보호하지 않고 인류에 이익이 되는 생물과 손해가 되는 생물로 구분하여 보호하거나 죽이고 있다. 익충은 살리고 해충은 죽인다. 어떤 사람은 해충도 살린다며 말하며 모든 동물을 보호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데 미생물까지 고려하면 모든 인간은 모든 생물을 살리거나 죽이는 차별을 하고 있다. 그렇기에 단순한 동물보호로는 길고양이로 인한 행복으로 타인을 불행케 하는 것은 정당하지 않다. 만약 모든 동물을 보호해야 한다는 근거로 길고양이에게 먹이를 줘서 개체 수는 늘리는 것이 정당하다면 해충 또한 같은 논리로 개체 수를 늘리는 것이 정당하게 될 위험이 있다.

그렇다면 길고양이는 이로운가? 길고양이 개체 수가 적으면 생태계의 동물 중 하나가 되겠지만 과하게 늘어나면 생태계를 해체 유해동물이 될 수 있다. 호주에서는 길고양이를 포함한 야생 고양이를 모두 유해동물로 지정했고 한국에서도 들고양이는 유해동물로 지정했다. 이런 이유로 길고양이에게 먹이를 주는 것으로 타인을 불행케 하는 것은 그른 행복이라 할 수 있다. , 길고양이가 과하게 늘어나지 못하도록 정부에서 세금을 들여 길고양이 중성화를 하는 것이 정당한가? 특정 동물을 위해 중성화하는 비용이 세금으로 지불되면 다른 동물도 똑같은 논리로 중상화 비용을 세금으로 지불되어야 한다. 호주에서는 고양이뿐만이 아니라 토끼와 앵무새도 급증한 적이 있다. 만약 한국의 길거리에서 사람을 해치지 않는 토끼나 앵무새가 늘어나는 것을 보고 고양이와 마찬가지로 중성화로 개체 수를 조절하자고 주장하면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야생동물 중성화에 한정된 예산을 펑펑 쓸 수는 없다. 그것은 객관적이지도 균형적이지도 논리적이지도 않다. 다수결로 길고양이 중성화를 결정하자는 주장이 나올 수 있다. 그런데 그렇게 다수결로 정하자고 말하는 순간부터 다수결로 결정하지 않으면 안 되는 아직 정당성이 확보되지 못한 사안이라는 것이 된다. 길고양이 중성화 정책에 반대하는 사람이 많으면 하지 말아야 한다는 논리가 된다. 대중의 의견을 듣지 않고 길고양이 중성화 정책을 만들어 예산을 쓰는 것은 부당하다. 이런 이유로 길고양이를 중성화하는 것에 세금을 써서 타인을 불행케 하는 것은 그른 행복이라 할 수 있다. , 길고양이나 집고양이를 납치하여 분양하는 것은 정당한가? 이것은 길게 쓸 필요가 없다. 길고양이 분양을 하는 것 자체는 둘째치고 분양 후에 사사건건 간섭하는 것은 개인의 자유권 침해에 해당하므로 부당하고 집고양이를 납치하는 것은 납치 자체가 부당하다. 이런 이유로 길고양이나 집고양이를 납치하여 분양하는 것으로 타인을 불행케 하는 것은 그른 행복이라 할 수 있다. 동물보호를 주장하는 사람은 모든 동물을 보호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그에 따르지 않는 사람을 비판하는데 논리 밖에서 사는 사람이 논리 안에서 사는 사람을 함부로 대하는 것은 몹시 흉한 짓이다. 길고양이와 다르게 집고양이는 생태계를 해치지 않고 동네 주민을 괴롭게 할 확률도 낮으면서 세금도 들어가지 않으면서 인간을 행복하게 하므로 인류에게 이롭다. 길고양이는 해로울 수 있고 집고양이는 이롭다. 고양이를 보거나 먹이를 주고 싶다면 집에서 길러야 한다.

그렇다고 길고양이를 과하게 아끼는 이들에게만 이런 현상에 대한 책임을 돌리기가 어렵다. 한국에서 한국인이 길고양이에 대한 과도한 집착을 하는 것은 집단주의 관념에 의해 애정이 결핍된 것에 의해 발생한 것으로 고양이를 아끼고 고양이를 아끼는 이들과의 교류로 애정을 충족하여 행복을 느끼기에 그들에게 모든 책임을 떠넘기기는 어렵다. 그들이 길고양이가 없으면 살지 못한다면 생태계나 거주민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한정된 구역 내에서는 길고양이를 허용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길고양이로 바른 행복과 그른 행복에 대해 알아보았다. 그렇다면 바른 행복에 복지를 지원해야 하는가? 그런데 인간에게 바른 행복이 반드시 사회에 이로운 행복이라고 할 수는 없다. 복지는 사회 구조 유지의 기본일 뿐이다. 바른 행복이라 하더라도 특정 개인을 위한 복지를 하게 되면 사회의 균형이 깨져 사회 구조가 무너질 수 있다. 바른 행복이 기본이고 복지는 거기에 더해 그 행복이 사회에도 이로워야 한다. 그러므로 사회에 이로운 바른 행복에 복지를 지원해야 한다. 그렇다면 어떤 행복이 사회에 이로운 바른 행복이라 할 수 있는가? 행복 자체에는 객관적 기준이 없기에 특정한 기준을 정해야 객관적이게 된다. 그 기준을 소비하는 행복과 생산하는 행복으로 나눠서 정해보겠다.

첫째, 소비하는 행복. 인간은 가치가 있는 상품이나 재화를 소비하는 것으로 욕망을 충족하여 행복을 얻는다. 자본주의 체제인 사회에서 인간은 돈으로 재화인 상품 등을 구매하여 행복을 얻는다. 소비하는 행복은 기본적으로 시장경제에 참여하여 얻는다. 시장의 수요에 소비자 상품이나 노동력 상품을 공급하여 얻은 이윤으로 다른 상품을 구매하여 소비하는 것으로 행복을 얻는다. 소비하는 행복이 보통 시장경제의 원동력이 된다. 본인이 소비하는 행복을 누리기 위해 타인에게 소비하는 행복을 선사한다. 이런 구조로 본인의 행복만 추구하더라도 타인이 행복하게 된다. 그 과정에서 오가는 돈은 단순히 서로가 공급하는 상품의 가치를 측정한 것일 뿐이다. 그러다 보니 소비하는 행복을 위해 금전적 지원을 하는 복지를 하게 되면 금전적 지원을 받은 사람은 생산하지 않고 소비할 확률이 높아진다. 그러면서 생산성이 떨어지면서 시장에 공급되는 상품의 품질이나 수량이 낮아짐에 따라 사회 전체가 소비하는 행복이 낮아질 수 있다. 시장에 올라온 상품을 소비하는 것은 금지품목이 아닐 경우 대부분 바를 확률이 높고 사회에도 이롭다 할 수 있다. 그러나 소비하는 것에 복지를 지원하는 순간부터 바른 행복이지만 사회에는 해롭게 될 수 있다. 따라서 소비하는 행복에 복지를 지원하는 것은 대부분의 생산공정이 완전자동화가 되기 전에는 긴급한 상황이 아니라면 바람직한 상황이 아니라 할 수 있다. 소비하는 행복을 위한 근거 없는 복지가 보통 대중에 영합하는 포퓰리즘이 된다. 그런데 돈이란 무엇인가? 잠시 돈에 대해 알아보자.

돈은 물건을 사고 팔 때 그 값으로 주고받거나, 노동에 대한 대가로 주고받거나 하는, 일정한 가치를 나타내도록 모양을 규격화한 물건을 뜻한다. 돈으로 시장에서 바라는 것을 구매하여 소비하는 행복을 얻을 수 있기에 금전만능주의에 빠질 수 있다. 그러나 돈은 단순히 평균적인 물건의 가치인 물가를 수로 객관화한 물가와 반비례하는 도구에 불과하다. 시장에서 공급보다 수요가 높으면 물가가 올라 돈의 가치가 내리고 수요보다 공급이 높으면 물가가 내려 돈의 가치가 오른다. 중앙은행에서 물가나 화폐 가치를 제어하기 위해 화폐를 많이 발행하거나 시중에 푸는 양적완화를 하면 물가가 오르고 돈의 가치가 내리고 화폐를 회수하는 양적긴축을 하면 물가가 내리고 돈의 가치가 오른다. 그것뿐이다. 돈은 무력과 권력으로 가치가 쉽게 변한다. 그런 돈이 가치가 있는 것은 중앙은행에서 발행한 화폐로 상거래를 하자고 인간과 인간이 약속했기 때문이다. 돈은 수많은 약속과 이해관계와 힘의 결과물일 뿐이다. 돈은 돈 자체보다 인간의 약속이나 이해관계나 힘이 중요하다. 인신매매나 마약매매 같이 소유나 거래 금지품목 매매나 노동과 성 착취를 할 수 없는 까닭은 인권선언문으로 인간과 인간이 거래 금지품목은 매매하지 말자고 약속했기 때문이다. 돈은 약속이 먼저기 때문에 다른 약속도 돈으로 구매할 수 없다. 인간의 약속으로 돈의 가치가 유지되기에 약속이 깨지면 신용도가 하락하여 돈의 가치가 하락한다. 약속의 신용을 유지하는 것에는 무력과 지력과 매력과 권력과 재력 또는 욕망이나 운이 있을 수 있다. 국가의 중앙은행에서 발행하는 화폐의 배경에는 이런 힘이 있어 안정적이다. 그러나 코인의 배경에는 무력과 권력이 없어 도박으로 불리며 화폐가 될 수 없다. 무력이 없다는 것은 물리적인 강제력이 없다는 것을 의미하고 권력이 없다는 것은 자연법이나 실정법적인 강제력을 발휘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강제력이 없는 것이 화폐가 될 수 있을 리가 없다. 만약 화폐에 강제력이 없다면 개개인의 이기심으로 인해 손해가 발생할 경우 모두 화폐를 처분하여 버리는 것으로 화폐 가치가 없어지게 될 수 있다. 코인이 보통 그렇다. 그러나 만약 강제력이 있다면 손해와 무관하게 다양한 법과 정책으로 강제력을 발휘하여 화폐의 가치가 유지될 수 있다. 무력과 권력이 없는 코인은 강제력이 없어 화폐가 될 수 없지만 그 중 정부의 관리에서 벗어난 탈중앙화 코인은 강제력과 관계 없이 세금을 걷지 못하여 국가가 유지될 수 없기에 사회에 해로워 화폐가 되어서는 안 된다. 될 수 없는 것과 되어서는 안 되는 것은 엄연히 다르다. 국가에서 국가의 서비스를 이용하며 탈중앙화 코인을 화폐로 이용하는 것은 기업의 서비스를 이용하며 기업의 이익과 무관한 화폐로 거래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이런 이유들로 코인은 가상화폐나 암호화폐보다는 가상자산으로 불리고 있다. 돈의 특성상 금전만능주의에 빠지면 돈의 배경보다 돈 자체에 집착하여 오히려 돈을 벌지 못할 수도 있으므로 돈을 벌고자 한다면 돈 자체보다는 돈의 배경을 아는 것이 좋을 것이다. 잠시 노동과 성 착취에 대해 의견을 내겠다.

노동과 성은 착취가 일어나지 않도록 본인의 노동력 상품과 성 상품은 반드시 본인이 소유해야 한다. 그러면 노동력 상품과 성 상품은 거래되어도 괜찮다. 성매매를 부정적으로 본다면 논리적으로 노동매매도 부정적으로 봐야 한다. 물론 그럴 수는 없다. 성매매에 대한 부정적 관념은 집단의 이익을 위해 여성과 개인을 도구로 여겼던 집단주의 관념에 불과하다. 여성 개인의 매도 의지를 무시하는 것이 어떻게 여성의 인권으로 이어질 수 있는가? 그것은 여성 집단의 이익이지 여성 개인의 이익이 아니다. 여성 집단의 이익을 위해 여성 개인의 자유권을 침해한 것에 불과하다. 성에 관련된 범죄는 개인의 자유권을 침해하는 것을 제외하면 성립되지 않는다. 개인의 자유권을 침해하지 않은 것을 죄로 여기는 것은 집단주의 관념으로 나타난 잘못된 성관념이다. 행복이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성이 매매되면서 성 매도자나 매수자가 만드는 행복을 무시할 수 있는가? 이것은 단순한 논리적 결론에 불과하다. 개인주의 체제인 사회에서는 성매매를 죄악시하면서 얻는 공익보다 성매매를 하면서 얻는 공익이 더 크다. 노동이나 성이나 둘 다 개인의 자유권을 침해하는 강요가 아니라면 다수의 행복을 위해 허용되어야 한다. 성매도자는 수익을 얻어서 좋고 성매수자는 쾌락을 얻어서 좋다. 개인주의 체제인 사회에서는 성을 매매할 권리 또한 개인에게 있기에 개인의 자유라면 성매매를 허용하는 것이 행복한 인간을 늘려 사회의 공익에 부합하게 된다.

 

둘째, 생산하는 행복. 가치가 있는 재화인 상품을 비롯한 특정 가치가 있는 것을 생산하는 것으로 욕망을 충족하여 행복을 얻는다. 자본주의 체제인 사회에서 인간은 노동으로 가치가 있는 것을 생산하여 행복을 얻는다. 그런데 생산하는 행복은 시장경제와 무관할 수 있다. 시장경제는 실시간 직접 수요로 돌아가기 때문에 생산 학습이나 생산 준비나 저가치 생산이나 간접 생산이나 시설 생산은 시장의 수요에 공급할 수 없거나 공급하더라도 충분한 이윤을 얻기 어렵다. 사회에는 필요한 생산이더라도 시장성이 있는 생산과 시장성이 없는 생산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생산하는 행복을 위해 금전적 지원을 하게 되면 지원 받은 사람은 생산하면서 소비할 확률이 높아진다. 그러면서 생산성이 유지되면서 시장에 공급되는 상품의 품질이나 수량이 낮아지지 않게 됨에 따라 사회 전체가 소비하는 행복이 유지될 수 있다. 사회에 필요한 가치를 생산하는 행복은 행복 자체가 바를 확률이 높고 사회에 이롭다 할 수 있다. 거기에 복지를 지원하는 것도 사회에 이로운 바른 행복이 된다 할 수 있다. 구체적으로 접근해보겠다.

하나, 생산 학습. 대상은 보통 학생이고 지원되는 복지는 보통 장학금이다. 학생은 학습을 하는 것으로 행복을 느낀다. 한국은 주입식 교육이 일반화되어 학습하는 것이 고통스러운 것이라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본래 학습은 지적 호기심 충족을 통해 행복을 얻는 행위다. 학습 자체가 행복이 될 수 있다. 학습이 행복이 아닌 교육은 잘못된 교육이다. 학습은 학문에 따라 과정이 다소 험난하더라도 결과에 만족하며 행복해할 수 있다. 학문이 힘드니 행복이 아니라는 논리는 등산이 힘드니 행복이 아니라는 논리와 같게 된다. 어느 한쪽을 부정하면 모순되어 비논리가 된다. 이치에 맞지 않는다. 학생의 학습은 당장 생산하는 것이 아니므로 시장성이 없다. 열심히 하더라도 수익을 얻을 수 없어 생계를 유지할 수 없다. 이런 학생에게 복지가 지원되면 이후 가치 있는 것을 생산하여 사회를 이롭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사회 복지는 사회를 위한 복지이므로 사회에 이로운 정도에 따라 복지가 차등 지원되는 것이 합리적이다. 보통 과학이 사회를 이롭게 할 확률이 높으므로 과학을 배우는 학생에게 높은 복지가 지원되는 것이 타당하다. 잠시 자율사립고등학교에 대한 의견을 내겠다.

자사고는 높은 비용과 높은 수준의 교육을 하는 것으로 일부 우수한 학생을 양성하는 교육기관이다. 이런 자사고를 유지하는 것은 교육 양극화를 부를 수 있고 자사고를 폐지하는 것은 교육 하향 평준화를 부를 수 있다. 자사고를 폐지하면 모든 학생이 자사고 학생의 수준이 되기는 아마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최대한 많은 개인의 능력을 활용하는 것이 개인주의 체제다. 교육 양극화가 되면 소수의 능력을 최대한 활용할 수 있으나 교육 하향 평준화가 되면 다수의 가능한 최대로 능력을 활용할 수 있으므로 다소 하향 평준화가 되더라도 다수의 능력을 끌어올리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러나 그런다고 해서 소수의 능력이 저하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이런 상황에서는 과학 특수목적고등학교를 활용하면 된다. 과학 분야는 교육 양극화가 발생하더라도 그만한 가치가 있고 과학 분야에서만 양극화가 발생하기에 나머지 분야는 평준화가 될 수 있다. 나머지 분야가 다소 하향 평준화가 되더라도 과학만큼은 우수할 수 있다. 이렇게 되면 높은 수준의 교육을 바라는 학생과 학부모가 만족하고 평준화된 교육을 바라는 학생과 학부모가 만족하고 과학의 발전으로 사회에 이로워져 사회가 만족한다. 따라서 자사고는 폐지하고 폐지한 수만큼 과학 특목고를 늘리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영재학교나 외국어학교는 꼭 필요한 이유를 모르겠다. 과학 말고 우수한 교육이 필요한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 인류가 현실도피가 아닌 현실직시로 행복을 실현할 수 있는 분야는 과학 말고는 없다. 수학이 과학에 도움이 될 수 있으니 수학도 과학고에서 가르치면 된다. 학교는 과학고와 일반고면 된다. 높은 수준의 교육을 바란다면 과학 특목고에 다니고 과학에 관심이 없다면 일반고에 다니더라도 괜찮아야 공정한 경쟁이 될 수 있다. 과학을 배울 의지와 능력이 있는 학생에게는 우수한 교육환경과 복지가 지원되어야 할 것이다.

, 생산 준비. 대상은 보통 연구자나 임산부고 지원되는 복지는 연구 지원비 또는 임신과 육아에 필요한 지원비다. 연구자는 연구하여 진리에 도달하는 것으로 행복을 느낀다. 한국은 한 줄로 줄 세우기로 학과가 아닌 학벌을 고려하여 학교를 정하기에 원하지 않는 학과에 들어가 연구를 할 수도 있어 연구가 고통스러운 것이라 오해할 수 있다. 그러나 본래 연구는 진리에 도달하는 것으로 행복을 얻는 행위다. 연구 자체가 행복이 될 수 있다. 연구가 행복이 아닌 연구는 잘못된 연구다. 연구자의 연구는 당장 결과가 나오지 않으므로 시장성이 없다. 열심히 하더라도 수익을 얻을 수 없어 생계를 유지할 수 없다. 그런 연구자에게 복지가 지원되면 이후 가치가 있는 것을 생산하여 사회를 이롭게 할 수 있다. 특히 과학 연구에 속하는 당장 돈이 되지 않는 생명공학이나 우주공학이 보통 그렇다. 그 외도 다양하다. 나는 과학에 많은 투자가 이루어져 인류가 불로불사가 되어 우주를 떠돌며 인류를 퍼트리고 세상의 존재이유를 규명하여 영원진리에 도달하길 바란다. 미래에는 모든 인류가 우주개척에 나서길 바란다. 과학 연구자에 대한 복지는 사회뿐만 아니라 인류도 이롭게 할 것이다.

임산부는 아이를 배고 낳고 기르는 것으로 행복을 느낀다. 한국은 비혼이 유행하여 그것이 고통스러운 것이라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본래 힘들어도 보람으로 행복을 느끼는 것이 일반적이다. 아이를 낳는 것이 행복이 아닌 사회는 잘못된 사회다. 아이를 낳는 것이 행복이 아니게 되는 것에는 실제로 불행한 환경과 실제와 별개로 불행하단 인식에 세뇌된 것이 있다. 이런 것은 둘 다 잘못되었다. 그러나 전자는 상황을 개선하려고 노려했지만 안 되고 있는 것이라면 후자는 의도적으로 상황을 악화시키는 것으로 매우 사악한 행위다. 특정 인간의 주관적인 일그러지고 잘못된 인식을 신세대 여성에게 세뇌하고 사회에 강요하는 것을 막아야 한다. 그것은 명백한 사회 악이다. 가령 어떤 사건으로 트라우마가 생긴 사람이 있다 하자. 그 사람이 트라우마가 생긴 것은 안쓰러운 일이지만 그걸 다른 사람에게 세뇌하고 강요하는 것은 잘못되었다. 그와 같다. 결혼이나 출산에 부정적 인식을 갖게 된 것은 안쓰러운 일이지만 그걸 다른 사람에게 세뇌하고 강요하는 것은 잘못되었다. 임산부의 임신과 출산과 육아는 생산할 수 있는 가능성을 생산하는 것이므로 시장성이 없다. 열심히 하더라도 수익을 얻을 수 없어 생계를 유지할 수 없다. 그런 임산부에게 복지가 지원되면 낳고 기르는 아이가 이후 가치 있는 것을 생산하여 사회를 이롭게 할 수 있다. 잠시 임산부에 대한 의견을 내겠다.

임산부와 여성은 다른 존재다. 임산부에게 특별한 복지가 제공되는 것은 타당하나 여성이 임신할 가능성이 있는 것만으로 남성보다 많은 복지를 받는 것은 부당하다. 임산은 출산이 실현되어 육아를 할 때 사회에 이로운 것이지 실현 가능성만으로 사회에 이로운 것은 아니다. 그런 관점에서 만약 여성 징병을 하게 된다면 임산부는 면제되고 나머지 여성은 징병되어야 할 것이다. 이런 제도가 여성에게 임신을 강요하는 것과 같다고 착각할 수 있어 말해둔다. 만약 남성이 임신할 수 있다면 남성 또한 면제되는 것이 마땅하다. 단지 현재 일반적으로 여성만 가능하니까 여성 임산부만 면제될 뿐이다. 임산부의 징병 면제는 남녀 차별이 아니라 사회를 이롭게 한 임산부 특혜다. 임신할 수 있는 여성은 그 특혜로 임신을 강요당하는 것이 아니라 특혜를 얻을 수 있는 선택지가 있는 것뿐이다. 남성도 산업기능요원으로 병역대체가 가능한데 그것이 있다 하여 모든 남성에게 산업기능요원을 강요하는 것이 아닌 것과 같다. 가끔 일부 여성이 형태로든 조금이라도 손해를 볼 것 같으면 여성차별이나 혐오라 말하며 비논리적인 주장을 하는데, 논리적으로 좀 접근하길 바란다.

, 저가치 생산. 대상은 보통 예술가나 장애인이고 지원되는 복지는 보통 생계지원비다. 예술가는 예술을 하는 것으로 행복을 느낀다. 세계는 현대미술이 유행하여 미가 아닌 의미가 집중하는 바람에 그림 본연의 아름다움보다 그림의 뜻풀이에서 가치가 생겨나 아무리 노력하고 아무리 아름다운 그림을 그려도 유명한 작가의 작품보다 가치가 있는 것을 생산하기 어려워 상대적 박탈감으로 창작이 고통스러운 것이라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본래 창작은 만드는 것으로 행복을 느끼는 행위다. 창작 자체가 행복이 될 수 있다. 그것이 행복하지 않는다면 좋아하는 작품의 등장인물을 재해석하여 재창작하는 팬아트가 유행할 수가 없다. 창작이 행복이 아닌 예술은 잘못된 예술이다. 예술 작품은 일부를 빼고 수요가 낮아 시장성이 부족하다. 열심히 하더라도 생계유지에 필요한 수익만큼을 얻을 수 없어 생계를 유지할 수 없다. 이런 예술가에게 복지가 지원되면 언젠가 가치가 있는 예술 작품을 만들어 사회를 이롭게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장애인은 사회에 참여하는 것으로 행복을 느낀다. 한국은 과중한 노동을 하는 것이 일반화되어 일하는 것이 고통스러운 것이라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본래 노동은 사회에 참여하는 것으로 행복을 얻는 행위다. 노동 자체가 행복이 될 수 있다. 게임의 반복작업도 즐겁게 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상기해야 한다. 노동이 행복이 아닌 사회는 잘못된 사회다. 장애인의 노동력 상품은 일부를 제외하면 수요가 낮아 시장성이 부족하다. 열심히 하더라도 생계유지에 필요한 수익만큼을 얻을 수 없어 생계를 유지할 수 없다. 이런 장애인에게 복지가 지원되면 꾸준한 생산으로 사회를 이롭게 할 것이다. 잠시 노동에 대한 의견을 내겠다.

한국은 정치적 진영논리에 따라 진영마다 일하는 것을 의미하는 단어를 근로와 노동을 나눠 부르고 있다. 한쪽은 노동자가 열심히 일해야 한다고 생각하며 자본가 편을 들면서 근로라고 부르고 한쪽은 노동자에게 열심히 일할 것을 강요한다고 생각하며 노동자 편을 들면서 노동으로 부르고 있다. 이제는 그런 진영논리와 관계 없이 체제로 접근해야 한다. 근로는 집단의 이익을 위해 개인의 의지와 무관하게 열심히 일하도록 강요하기 위해 나타난 단어로 지극히 집단주의적이다. 반면 노동은 사회주의나 공산주의의 영향을 제외하면 다르다. 노동을 사전적 정의만 보면 단순히 일하는 것이므로 개인의 이익을 위해 개인의 의지로 열심히 일하는 것을 선택할 수 있어 지극히 개인주의적이다. 열심히 일하든 열심히 일하지 않든 그것은 노동자 개인에게 맡겨야 한다. 노동시장에서 노동자 개인의 노동력 상품의 생산성이 높으면 수요가 높을 것이고 생산성이 낮으면 수요가 낮을 것이다. 그렇게 노동력 상품을 근로라는 이름으로 열심히 일한 것을 강요할 것이 아니라 시장에 맡겨야 한다. 자본주의자라면 근로라는 단어를 쓸 것이 아니라 노동이란 단어를 쓰고 열심히 일하는 것을 노동자 개인에게 맡기는 대신 노동력 상품의 유연한 거래인 노동유연성을 사회에 요구해야 한다. 노동자가 일하는 것을 근로라고 불러놓고 노동유연성을 요구하는 것은 모순되어 비논리가 된다. 근로라는 단어가 노동유연성을 논리적으로 막는 기재가 되고 있다. 노동자 개인의 의지를 무시하는데 노동자 상품을 유연하게 거래하는 노동유연성이 어떻게 존재할 수 있는가? 집단의 이익을 위해 개인의 의지와 무관하게 열심히 일하도록 지정해둔 근로라는 단어는 집단주의적이고 개인의 이익을 위해 개인의 의지로 열심히 일하는 것을 결정하게 한 노동이란 단어는 개인주의적이다. 혼용해서는 안 된다. 노동자 자체를 도구로 인식하고 집단의 이익을 위해 노동자를 도구처럼 열심히 쓰다 버리는 것은 논리적이게 될 수는 있으나 그것은 심각한 인권침해다. 개인주의 체제인 사회에서는 존재해서는 안 된다. 이제는 진영논리와 무관하게 논리적으로 접근해야 한다. 그래야 사회적 합의를 얻을 수 있다. 무엇보다 선진국이 된 지금 이제 근로로는 안 된다. 결과가 나와야 한다. 열심히 한다는 수단이 아닌 높은 가치의 상품을 생산한다는 결과가 나와야 한다. 근로로 인해 일은 열심히 하기만 하면 된다는 인식이 나타나 열심히 하지는 않지만 생산성이 높은 사람은 천대되고 열심히 하지만 생산성이 낮은 사람은 우대되고 있다. 근로라는 단어는 생산성에 해악을 끼치는 관념을 만들었다.

게임에서 노동과도 같은 작업은 즐거운데 기업에서 노동이 즐겁지 않은 것은 관념과 체제의 차이다. 게임은 대부분 개인주의 관념에 개인주의 체제지만 노동은 개인주의 관념에 집단주의 체제일수도 있고 집단주의 관념에 개인주의 체제일수도 있다. 노동은 현재 한국이 겪고 있은 정반대의 옳고 그름인 관념과 체제의 혼란을 그대로 겪고 있는 곳이기에 불필요하게 개인을 불행하게 하여 노동이 불행한 경우가 많아 노동을 고통스럽다고 착각하는 경우가 많다.

, 간접 생산. 대상은 보통 노숙자가 수용자고 지원되는 복지는 보통 복지시설이나 급식 배급이 있다. 사람은 살아있는 것으로 행복을 느낀다. 한국은 자살률이 높아 살아있는 것이 고통스러운 것이라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본래 삶은 살아가는 것 자체가 행복을 얻는 행위다. 삶이 행복이 아닌 사회는 잘못된 사회다. 노숙자나 수용자도 마찬가지일 수 있다. 삶 자체가 불행할 수 있지만 그럼에도 죽음보다는 삶이 행복할 수 있다. 일부 노숙자는 도박이나 마약으로 사고회로가 망가져 정신적 장애를 겪고 있거나 각종 장애나 질병으로 생산이 불가능하다. 아무것도 생산할 수 없기에 생산하는 행복을 위한 복지 대상이 될 수 없다고 여겨질 수 있다. 그러나 다르다. 아무것도 생산할 수 없는 인간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으로 사회 치안 서비스에 도움을 줄 수 있다.

수용자는 사회에서 고립된 곳에 수용되어 수용자 노동을 제외한 생산이 불가능하다. 범죄를 저지른 수용자는 치안 서비스에 도움을 주지 못했으므로 생산하는 행복을 위한 복지 대상이 될 수 없다고 여겨질 수 있다. 그러나 다르다. 범죄를 저지른 수용자는 살아있는 것만으로 인간의 존엄성을 지킬 수 있다. 무위로 얻어지는 치안 효과와 생존으로 얻어지는 인간 존엄성 또한 인간의 간접 생산으로 취급한다. 이런 식으로 생산으로 취급해야 일관된 기준으로 객관적이고 균형적이고 논리적인 복지를 할 수 있다. 간접 생산은 생산의 가치가 낮으므로 그에 대한 복지 지원도 낮게 된다. 이런 노숙자나 수용자에게 복지가 지원되면 사회 치안이 안정되고 인간의 존엄성이 지켜지는 것으로 사회를 이롭게 할 것이다. 잠시 수용자에 대한 의견을 내겠다.

생산이 불가능한 사람은 둘째치고 타인의 존엄을 해친 범죄로 수감된 수용자의 존엄을 위해 복지가 행해지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을 수가 있다. 그렇다면 복지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자. 복지는 개개인의 주관적인 도덕성과 관계 없이 단순한 사회 구조 유지의 기본일 뿐이다. 그들에게 지원되는 복지는 단순히 사회 구조 유지를 위한 것에 불과하다. 범죄자도 인간에 범주에 들어있기에 복지가 지원되는 것일 뿐이다. 심각한 범죄자는 인간의 범주에 들어가지 못하도록 하자는 의견은 심각한 범죄의 기준을 객관적으로 만들기가 어렵기에 악용될 수 있어 너무나도 위험하다. 바른 명분이더라도 히틀러의 전권 위임법과 같이 악용될 수 있다는 것을 상기하자. 법과 복지의 만듦이 개인성을 띠므로 수용자의 복지 수준 정도는 개인의 의사가 반영될 수는 있어도 복지 유무 자체는 사회 구조 유지를 위해 개인의 의사가 반영될 수 없다.

다섯, 시설 생산. 대상은 보통 교통시설인 도로나 공간시설인 공원이 있고 지원되는 복지는 보통 국가 예산이다. 기반시설은 사람에게 이용되어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 것으로 효용가치를 갖게 된다. 보통 기반시설은 복지를 지원받는 대상이 아닌 복지를 지원하는 시설로 분류되는데 생산하는 행복에 기준을 맞추기 위해 기반시설도 복지를 지원받는 대상으로 정했다. 새로운 기반시설을 만들 때에는 만들어지지 않는 상태인 무형의 기반시설을 복지 대상으로 삼고 국가 예산으로 복지를 지원해야 한다. 기반시설은 공공의 영역이기에 시장성이 부족하다. 효용가치가 높더라도 수익을 얻을 수 없어 새롭게 만들거나 유지할 수가 없다. 이런 기반시설에 복지가 지원되면 불특정 다수의 행복한 삶을 사는데 도움을 줘 사회를 이롭게 할 것이다. 복지는 사회 구조 유지를 위한 것인데 사회 기반시설과 인간을 구분 지어 다른 기준으로 복지를 지원하면 사회 기반시설은 지어지는데 복지를 지원받지 못하여 굶거나 자살하는 국민이 생길 수 있다. 그러면 아무리 복지를 지원해도 정작 필요한 곳에 복지가 지원되지 못해 사회의 균형이 깨져 사회 구조가 무너질 수 있다. 시설조차도 같은 기준으로 접근해야 객관성과 균형성과 논리성을 갖춰 사회의 균형을 맞출 수 있다.

정리하겠다. 생산 학습과 생산 준비와 저가치 생산과 간접 생산과 시설 생산은 시장성이 없거나 부족하여 이윤을 얻기 어려우나 사회에는 이로우므로 복지가 행해지는 것이 타당하며 복지 지원 수준은 대상의 불행에 맞춰 사회 구조 유지를 위해 균형적으로 지원되나 추가적으로 사회에 이로운 정도에 따라 달라져야 할 것이다.

 

모든 사회의 기본적인 복지의 기준이 될 수 있는 생산하는 행복에 대해 알아보았다. 생산하는 행복은 체제와 무관하다. 그렇다면 개인주의 체제의 복지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개인주의 체제의 복지는 개인이 이기적으로 복지를 행해야 올바른 결과가 나와야 한다. 구체적으로 알아보겠다. 국가 복지는 세금을 받는 정부가 책임지고 행해야 한다. 국가의 복지를 민간에 의존하는 것은 법을 민간에 의존하는 것과 같다. 민간인이 법의 판단을 무시하고 현행범이 아닌 사람을 사적 제재 하거나 법의 집행을 무시하고 자경단을 꾸리는 것과 같이 말이다. 물론 법과 달리 복지는 다소 유연하다. 이유는 국가와 국민 두 가지가 있다.

국가의 입장은 다음과 같다. 법과 복지는 사회 구조 유지의 기본으로 객관성과 균형성과 논리성이 필요한데 법의 경우에는 민간이 참여하면 균형을 맞추기 매우 어려워지지만 복지의 경우에는 민간이 참여해도 복지는 종교에 의해 처음부터 민간의 참여를 고려하면서 균형을 맞춰왔기에 상대적으로 균형을 맞추기 쉽다. 국민의 입장은 다음과 같다. 하나, 관습적 허용. 법과 달리 복지는 과거 종교가 행해왔기에 민간의 참여를 관습적으로 허용하는 이가 상대적으로 많다. , 복지 대상의 수용태도. 법과 달리 복지는 행복을 위한 지원을 하는 것이기에 민간의 참여를 반기는 이들이 상대적으로 많다. , 복지 대상 외의 태도. 법과 달리 복지는 복지 대상이 민간의 참여를 거부할 확률이 낮으므로 일부 예외를 제외하면 개인의 자유권을 침해할 확률이 낮아 대부분 개인의 자유권을 존중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런 이유로 복지는 민간의 참여가 허용되어 있다. 보통 민간의 복지를 행하는 것은 크게 세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하나는 종교고 둘은 기부단체고 셋은 개인 기부다.

하나, 종교. 종교는 오랫동안 복지를 행해왔기에 지금까지도 관습적으로 사회 복지를 일부 맡고 있다. 그러나 그걸 정부가 용인하는 것은 종교가 세를 불리는 것을 방치하는 것과 같다. 종교는 내부 구조가 개인의 이익보다는 종교의 이익을 우선시해야 올바른 결과가 나오도록 되어 있다. 전형적인 집단주의 체제다. 집단주의 체제인 종교가 개인주의 체제인 국가에서 세를 불리면 국가에 악영향을 끼친다. 코로나 사태 당시 정부에 협조하지 않았던 사이비 종교인을 떠올려보자. 보통 맹신적인 종교인은 국가보다 종교가 우선되기에 그런 현상이 나타난다. 많은 종교인이 국가보다 종교를 우선시하니까 국가는 망해도 종교는 살아남는 일이 있었다. 만약 한국이 집단주의 체제였다면 일부 종교를 제외한 종교는 국가의 이익을 위해 허용되지 못했을 것이다. 개인주의 체제기 때문에 사이비 종교인의 자유도 위하다 보니 사이비 종교가 날뛰는 것이다. 개인주의 체제에서는 집단주의 체제의 해악을 막기 어렵기에 개인주의 체제인 국가는 집단주의 체제인 집단을 경계하고 멀리해야 한다. 종교의 복지는 관습이란 명분과 예산절약이란 실리가 있더라도 종교가 집단주의 체제인 이상 사회에 이로운 것보다 해로운 것이 더 크다 할 수 있다. 그럼에도 2023년 소년원을 종교단체가 맡게 될 거란 소식을 접했다. 암울하다.

, 기부단체 기부로 운영되는 기부단체는 대부분 전혀 믿을 수 없다. 기부금이 어떻게 사용되지는 투명하게 공개한 곳이 극히 드물다. 어떤 곳은 대부분의 기부금이 단체 운영비로 활용된다고 하는 것을 보면 도대체 무엇을 위해 기부단체를 운영하는지 알 수가 없다. 종교의 기부는 종교의 이익을 바라는 신자의 헌금으로 되기도 하지만 기부단체의 기부는 기부 대상의 이익을 바라는 기부자의 기부금으로 되고 있다. 종교의 헌금은 종교가 어떻게 쓰든 자유롭지만 기부단체의 기부금은 온전하게 기부대상에게 지원되었어야 했다는 것이다. 기부금 목적성 측면에서 종교보다 기부단체의 부당한 기부금 활용이 더 잘못되었다.

, 개인 기부. 민간의 복지 중 종교는 집단주의 체제고 사회는 개인주의 체제여서 체제가 충돌하여 바람직하지 못하고 기부단체는 투명하지 못하여 수단인 단체 운영비가 목적이 되어버리는 목적전도현상이 일어날 수 있어 바람직하지 못하다. 그러나 개인 기부는 개인주의적이고 기부 자체가 목적이기에 설령 보여주기 식이라 하더라도 실제 기부가 사회에 반영되므로 목적전도현상이 일어나기 어렵고 일어난다 하더라도 사회에 이로울 확률이 높다. 개인주의 체제에서 적합한 복지는 개인 기부다. 그러나 개인이 기부를 하기 위해서는 보통 종교나 기부단체를 거치게 된다. 그 외의 방법이 적고 어렵기 때문이다. 워낙 기부금 횡령 사태가 많다 보니 구청에 직접 기부하는 개인도 등장하고 있는 중이다. 그 점을 고려하여 개인이 자유롭게 기부할 수 있는 것을 제도화하여야 한다. 그것이 개인주의 체제의 복지라 생각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개인의 기부가 기부대상에게 온전하게 전해질 수 있는가? 우선 기부단체가 무슨 역할을 하고 있었는지 생각해보자. 기부단체는 기부자와 기부대상을 잇는 영업을 하고 있었다. 기부단체가 기부대상의 불행을 광고로 영업하여 기부자에게 기부금을 받아 단체 유지비를 제외한 기부금을 기부대상에게 전달하고 있었다. 과거에는 기부자가 기부단체가 아니면 기부대상을 알기가 어려웠기에 불투명하더라도 기부단체에 의존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현재는 다르다. IT기술의 발달로 기부단체의 영업이 없더라도 기부가 필요한 기부대상을 기부자가 알고 기부금을 지원할 수 있다. 가령 어떤 아이가 질병으로 고통 받는 것을 돕겠다며 기부단체가 광고를 올려 기부자를 모은다. 그걸 보고 기부금을 기부하면 그 기부금이 얼마나 아이에게 전달되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IT 기술로 기부 관련 앱을 만들고 병원의 이름으로 등록할 수 있다면 기부단체를 거치지 않고 바로 병원에 기부하는 것으로 기부금이 기부대상에게 온전하게 전해져 질병치료에 큰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기부단체가 기부자와 기부대상을 잇는 중간단계인 이상 사실 기부단체가 정직하더라도 단체 운영비나 광고비 등으로 기부금이 활용되는 것을 고려하면 기부대상자를 위해 기부단체보다는 기부 앱으로 기부하는 것이 낫다. 잠시 중간단계에 대한 의견을 내겠다.

한국은 지금까지 불필요한 중간단계가 많아 기부대상이나 노동자나 자본가나 소비자 등이 부당한 손해를 보는 일이 많았다. 이런 것을 용인했던 것은 집단주의 관념에 의해 중간단계 종사자의 이익을 이타적으로 고려하여 개인이 손해를 감수했기 때문이다. 이제는 달라져야 한다. 한국은 집단주의 관념에서 개인주의 관념으로 진보하여 개인의 이익만을 추구해야 올바른 결과가 나와야 하므로 개인이 부당한 손해를 보는 것이 아닌 정당한 이익을 얻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또한 기술이 과학으로 진보하여 수많은 직업이 사라질 것이므로 불필요한 중간단계가 사라지는 것에 거부감이 없어야 한다. 관념과 기술을 근거로 불필요한 중간단계는 이제 사라져야 한다고 주장하겠다.

개인이 자유롭게 이기적으로 기부를 하고 받을 수 있는 환경은 개인이 자유롭게 이기적으로 사고 팔 수 있는 시장과 유사할 것이다. 그러므로 기부 앱은 기부를 시장경제화를 하게 한다. 기부시장이 생기는 것이다. 기부시장은 다른 시장과 마찬가지로 이기적으로 행해지는데 수요의 기준이 되는 판단근거는 다소 달라질 수 있다. 다른 시장은 보통 본인이 이롭게 하는 근거가 있어야 수요가 생기지만 기부시장은 보통 사회를 이롭게 한다는 근거가 있어야 수요가 생긴다. 기부 앱을 구체적으로 알아보자.

하나, 기부대상. 기부 앱에 등록할 기부대상을 선정해야 한다. 누구나 등록이 가능하게 되면 정작 필요한 사람이 지원을 받지 못할 수 있다. 복지 행정부처가 복지를 행하기 위해 복지가 필요한 대상을 다양한 기준으로 선정해두었을 것이다. 거기서 선정된 대상만이 기부 앱에 기부대상으로 등록할 수 있게 한다. 기부대상 허가제다. 공개된 곳에서의 기부는 이런 식으로 선정된 대상만이 등록할 수 있게 하고 공개되지 않은 곳에서의 기부는 대상의 제한 없이 사적으로 하면 된다. 기부대상은 단순히 개인뿐만이 아니라 학교나 병원 관계자가 학교나 병원으로 등록하여 학교운영이나 병원운영에 필요한 비용을 기부 받거나 행정부처의 관계자가 공원이나 숲으로 등록하여 공원 건설이나 숲 조성에 필요한 비용을 기부 받을 수 있을 것이다.

, 기부대상 정보의 상품화. 기부대상의 정보를 모두 공개하면 개인정보 침해가 발생할 수 있으므로 기부에 필요한 정보만으로 이루어진 기부상품을 만들어야 한다. 인간의 정보를 상품화하는 것을 보고 인간이 상품화가 되는 것이 아니냐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의 상황과 성격과 능력을 고려하여 장학금을 지원하는 것을 생각해보자. 아무 문제가 없다. 인간 정보를 상품화하더라도 그 상품의 소유자가 상품화된 정보의 본인이면 된다. 기부 앱에 등록할 상황에는 빈곤이나 질병 등을 작성하면 될 것이고 성격은 개성이나 희망이나 취미 등을 작성하면 될 것이고 능력은 특기나 학문이나 성적 등을 작성하면 될 것이다.

, 기부금의 분배기준. 지금까지 기분단체는 기부금 활용내역을 투명하게 공개하는 일이 드물었다. 공개는커녕 횡령이 언론에 자주 노출되었다. 그런 탓에 개인의 기부가 점점 줄어들고 있는 추세라고 한다. 기부 앱은 기부금 분배기준을 만들어 공개하여 개인의 기부금의 분배를 미리 알려야 한다. 가령 기부금 5~10%는 기부 앱 운영비로 쓰고 기부금 10~20%는 모든 기부대상을 위한 보편적 복지로 쓰고 그 외는 온전히 기부대상에게 전해지도록 한다. 운영비와 보편기부금과 대상기부금이 자동화 체계를 통해 자동적으로 전달되게 한다. 이렇게 명료한 기준으로 기부금이 투명하게 활용된다면 기부 목적에 부합하는 기부를 할 수 있기에 기부자가 늘어날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 기부자 혜택. 기존에 기부를 한 이들은 세금감면 혜택 등이 있듯이 제삼자에게 기부한 이들에게 어떤 특정한 혜택이 주어져야 한다. 이기적인 기부는 기부 자체로 목적이 달성되었기에 다른 이익을 바라지 않는다. 그렇기에 기부자가 기부금을 기부하더라도 이기적이라 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기부금으로 사회가 이로워져 이익을 얻은 정부가 기부자에게 기부를 지속하게 하기 위해 특정한 혜택을 주는 것도 이기적이라 할 수 있다. 각자 이기적으로 행동했는데 지속적인 기부가 가능하게 되었다. 이기적이어야 올바른 결과가 나온 것이다.

다섯, 기부대상의 성장. 기부는 한번 기부하고 끝나지 않는 경우가 많다. 기부 앱은 주기적으로 기부상품을 갱신하여 기부대상의 성장을 공개하여 기부자가 지속적인 기부를 결정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높은 성적으로 장학금을 받은 학생이 성적을 유지하는 것을 공개하여 꾸준한 장학금을 지원하는 것을 결정하는데 도움을 주는 것과 같다. 기부대상의 성장이 공개되고 기부대상의 기부상품을 구매한 사람이 기부대상의 성장을 알 수 있게 한다. 그러면 기부자는 기부라는 선행을 했다는 도덕적 만족감을 느끼면서 기부대상의 성장을 보는 것으로 국가의 인재를 키우는 보람이나 환자를 건강하게 하는 보람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기부대상은 기부를 지속적으로 받기 위해 성장이나 건강해질 노력을 하게 될 것이다. 사회는 복지에 지불될 예산을 줄여 보다 균형 있는 풍부한 복지가 가능해질 것이다.

정리하겠다. 개인주의 체제의 복지는 개인이 자유롭게 이기적으로 직접 기부대상에게 기부할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을 위해 기부 앱이란 기부시장을 활성화해야 한다. 개인의 기부기 때문에 개인주의 체제에 해를 끼치지도 않을 것이다. 기부시장은 시장이기 때문에 균형이 깨질 수 있는데 깨진 균형은 복지 행정부처에서 복지 정책으로 맞추면 된다.

 

 

 

두 번째, 불행예방

 

행복은 주관으로 결정되므로 불행도 주관으로 결정된다. 그렇기에 객관적인 불행의 기준을 만든다 하더라도 모든 사람에게 통용될 수는 없다. 본인이 보기에 불행해 보이는 것이 타인에게는 행복한 것일 수도 있다. 본인이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하는 것도 타인에게는 즐거운 취미일 수도 있다. 생물도 마찬가지다. 인간의 주관적인 몰이해가 생물의 행복이나 불행을 결정하지 않는다. 지구상에 살고 있는 생물들이 불행해 보일지라도 실제로 불행한지는 알 수가 없다. 그렇기에 본인의 주관적인 판단으로 불행해 보이는 타인에 함부로 간섭하여 행복하게 만들려는 것은 타인을 불행하게 만들 수 있다. 분명 함부로 간섭하는 것은 개인의 자유권 침해가 될 수 있다. 그러나 그 이전에 타인을 불행에서 벗어나 행복하게 하겠다는 목적 자체가 실현되지도 못할 수 있다는 것이다. 타인의 행복과 불행을 본인의 주관으로 결정짓고 강제로 바꾸려고 하는 것을 가리켜 보통 오만과 독선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가령 부모가 자녀의 불행해 보이는 진로에 간섭하며 강제로 바꾼다거나 불행해 보이는 인간관계에 강제로 간섭하여 바꾼다거나 불행해 보이는 취미에 강제로 간섭하여 바꾸는 것 등이 그렇다. 종교 또한 마찬가지다. 타인이 현실도피를 현실이라 세뇌 당하여 얻는 행복은 본인이 보기에 불행해 보일지라도 타인은 행복할 수 있기에 섣불리 강제로 간섭하여 바꾸려 하면 그 타인은 되려 불행해질 수 있다. 아무리 불행해 보일지라도 개인의 자유권을 침해하는 것은 부당하게 된다. 이런 문제는 개인의 행복이나 불행이 아닌 사회 구조 유지로 접근해야 한다. 마약을 생각해보자.

마약중독자는 본인의 주관적인 행복을 위해 마약에 중독되어 깊게 빠지는 것으로 뇌가 파괴되어 자유의지를 잃고 마약을 구매하기 위해 시간과 재산을 바치는 자기파괴 행위를 저지르면서 타인에게 그런 자기파괴를 친애나 장사로 전파하고 있다. 분명 마약은 마약중독자를 행복하게 한다. 그걸 타인이 불행하다 여기며 마약중독자의 행복을 위해 강제로 간섭하면 마약중독자는 되려 불행하다 여길 것이다. 마약은 인간을 행복하게 하고 있으나 사회에서 허용되지 않고 있다. 그 이유는 단지 마약으로 얻는 행복이 사회를 해롭게 하기 때문이다. 두 가지 이유를 알아보자.

하나, 자기파괴. 자기파괴는 복지적으로 사회에 해를 끼치기에 허용할 수 없다. 개인의 자기파괴를 허용하면 개인의 무분별한 자기파괴로 인간의 존엄성이 훼손되고 사회 체계가 깨져 사회가 무너지게 된다. 자살과 같은 자기파괴를 막는 사회 복지는 도덕적 근거가 아닌 사회 구조 유지를 근거로 하고 있다. 죽고 싶어서 자살을 시도한 사람을 살리는 것은 개개인에 있어서는 도덕적 근거로 행한 것일 수 있으나 사회에 있어서는 사회 구조 유지를 위해 행한 것이다. 예외적으로 인간의 존엄을 위해 다소 균형이 깨져 사회 체계가 흔들린다 하더라도 극단적 고통을 겪거나 시한부에 한에서는 마약이나 존엄사가 허용되어야 한다고 본다. 실제 일부는 허용되었다고 한다.

, 전염성. 전염성은 법적으로 사회에 해를 끼치기에 허용할 수 없다. 마약으로 인한 자기파괴를 본인만 겪는다면 복지적으로 문제가 될지라도 법적으로는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극단적으로 많은 수의 인간이 자기파괴를 하지 않는 이상 개개인의 자기파괴는 질서에 큰 영향을 끼치지 않기 때문이다. 법은 인간과 인간 사이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것으로 인간의 자기파괴는 본래 법적으로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 자기파괴가 전염된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마약의 자기파괴는 전염성이란 특징을 가지고 있다. 자기파괴를 전염시켜 수를 늘리기에 방치하면 자기파괴자가 늘어나 질서를 준수하는 이들이 줄어들면서 사회가 무너질 수 있다. 이런 특성으로 본인의 자살기도는 처벌받지 않지만 마약복용은 처벌 받는다. 이처럼 자기파괴는 복지적으로 허용할 수 없고 전염성은 법적으로 허용할 수 없다. 종교도 같은 논리로 접근한다.

종교인은 본인의 주관적인 행복을 위해 종교에 세뇌 당하여 현실도피를 현실이라 맹신하는 것으로 뇌의 사고회로가 죽어 자유의지를 잃고 종교에 신앙하기 위해 시간과 재산을 바치는 자기파괴 행위를 저지르면서 타인에게 그런 자기파괴를 전도로 전파하고 있다. 그걸 방치하면 사회 질서가 무너지고 체계가 깨질 수 있다. 마약이나 종교는 개인을 행복하게 할지라도 그것이 사회에 해로운 행복이기에 사회에서는 허용할 수 없다. 종교는 관습적으로 많은 인간이 믿고 있어 이미 믿고 있는 것을 강제로 막기는 어렵다. 그러나 믿고 있는 것을 설득 하거나 새로 믿는 것은 종교의 본질에 대해 알리면서 방지할 수는 있을 것이다. 사회 복지는 사회에 해로운 행복을 멀리하고 사회에 이로운 행복을 권장하여 사회가 불행하게 되는 것을 예방해야 한다. 그것이 복지의 불행예방이다. 잠시 종교식 세뇌와 유사한 가스라이팅과 그루밍에 대한 의견을 내겠다.

가스라이팅은 본인의 언행으로 타인을 스스로 의심하게 하여 본인에게 의존하게 만드는 심리기술이다. 그루밍은 본인의 언행으로 타인을 길들여 본인에게 의존하게 만드는 심리기술이다. 성범죄에 관련하여 유행된 용어기에 성에 관련된 일에서만 나타난다고 인식할 수 있으나 그렇지 않다. 경찰이 용의자를 가스라이팅하여 죄를 고백하게 하거나 부모가 자녀를 그루밍하여 사고가 나지 않도록 통제할 수 있다. 이런 심리기술은 개인의 자유의지를 망가트릴 우려가 있어 경찰은 유죄추정이라 비판을 받고 부모는 과한 통제라 비판을 받는다. 그런데 사실 이런 것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 종교의 가르침을 떠올려보자. 인간은 원죄를 지었다. 인간의 욕망은 잘못되었다. 인간의 이기심은 잘못되었다. 인간은 잘못되었다. 잘못된 인간은 신의 가르침을 따르거나 복종해야 한다. 성악설을 믿는 사람은 종교식 세뇌에 영향을 받은 것인지 되돌아봐야 한다. 인간이 살아남기 위해 행동한 것은 모두 바르고 사회에 있을 때엔 사회의 체제를 기준으로 옳고 그름이 나뉘게 된다. 선과 악은 기준이 체제에 따라 달라지므로 진리와 같이 변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모태신앙과 같이 어릴 때부터 길들인다. 이런 종교식 세뇌가 가스라이팅과 그루밍의 원조가 되겠다. 그럼에도 가스라이팅이나 그루밍을 말하는 이들 중 종교식 세뇌를 언급하는 것을 본 적이 없다. 이상하지 않는가? 그런 이유는 간단하다.

가스라이팅이나 그루밍이 일부 집단의 이익을 위해 이용되었던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같은 원리로 작동하는 종교식 세뇌를 비판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이들은 정상적인 남녀의 성관계조차 가스라이팅이나 그루밍으로 나타난 것이라며 비난하며 사회적 영향력을 높였다. 그렇게 사회적 영향력을 높인 일부 집단은 개인에게 강제로 간섭하는 강제력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가스라이팅이나 그루밍은 개인의 자유의지에 관련된 것이기에 그것을 명분으로 개인의 자유권을 침해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권력이 국가나 정부가 국민에 대하여 갖고 있는 강제력을 뜻하기도 하는 이상 가스라이팅이나 그루밍을 말하며 개인에게 강제로 간섭할 수 있는 것은 권력이나 다름이 없었다. 이들이 개인에게 가스라이팅이나 그루밍이라 말하며 지적한 것을 처음에는 부정하더라도 꾸준히 지적되면 혼란스러워 하면서 실제로 그런 것이라 착각하게 된다. 가스라이팅을 근거로 새로운 세뇌를 한 셈이다. 지금 한국 20대 여성이 한국 치안에 비해 치안에 대한 과도한 피해의식을 갖고 있는 까닭은 일부 집단에 세뇌 당했기 때문이다. 세뇌 당한 여성들은 세뇌한 일부 집단에 의존하게 되어 일부 집단의 힘이 강해지고 있다. 개인주의 체제에서는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다. 애초에 세뇌 여부는 명확하게 알 수 있는 객관적 기준이 없기에 개인에게 강제로 간섭할 근거가 되지 못한다. 마약은 마약 섭취 여부를 객관적으로 알 수 있지만 종교식 세뇌나 그와 비슷한 가스라이팅이나 그루밍은 객관적으로 알 수 없다. 그러므로 세뇌를 당하지 않도록 모든 개인이 자유의지를 갖게 하는 수밖에 없다. 그런 체제가 바로 개인주의 체제다. 그럼에도 집단주의 관념에 의해 세뇌를 비난하며 세뇌를 자행하는 짓을 저지르고 있다. 세뇌를 말하며 또 다른 세뇌를 하려는 자는 경계해야 마땅하다.

가스라이팅이 유행하자 실제 잘못한 것을 지적 받아도 외면하는 일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인간을 성장시키는 반성이 가스라이팅이라는 말로 부정되었다. 타인의 모든 지적을 원천적으로 받길 거부하자 무조건 네 말이 맞는다며 대화 자체를 거부하는 일도 나타나게 되었다. 비논리적인 반박을 거부하기 위해서라며 합리화하기도 하지만 그럴 거라면 모든 반박을 거부할 이유가 없다. 무분별한 용어남용이 이런 현상을 만들게 되었다. 개인주의 체제는 모든 개인이 모든 자유의지를 이기적이라 생각하며 그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

종교식 세뇌든 가스라이팅이든 그루밍이든 강제성이 있는 것이 아니라면 본인의 자유의지로 선택하고 그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 사회를 무너트릴 정도가 아니라면 어떤 이유든 개인의 진로나 인간관계나 취미에 강제로 간섭할 수 없다. 그런 간섭은 자유주의라는 국가 이념에 대한 모독이다. 그러므로 모든 개인이 온전한 자유의지를 가질 수 있도록 교육해야 한다. 그럼에도 지금 한국 교육은 집단주의 관념에 의해 그러지 못하고 있다. 지금 일부를 제외한 한국 미성년은 장유유서를 근거로 연상에게 복종하게끔 교육받고 있다. 미성년을 의지박약으로 만들어서 연상에게 이용당하기 쉽게 만들고 있다. 그런데 그렇게 이용당하기 쉽게 만드니 타인에게 세뇌 당하기도 쉽게 된다. 세뇌를 쉽게 당할 수 있다는 이유로 미성년의 자유에 과도하게 간섭하는 자유권 침해를 하고 있다. 쉽게 다루기 위해 의지박약으로 만들고 의지박약이니까 자유권을 침해한다. 도대체 이게 뭔가? 이러니 연상의 말에 순종하는 아이들은 자유권을 침해 당하면서 로봇처럼 공부만하고 있고 연상에 말에 순종하지 않는 아이들은 촉법소년으로 보호받는 것을 악용하여 폭력조직을 만들기도 하면서 사회를 혼란스럽게 하고 있다. 집단주의 관념에 의해 인간을 스스로 책임도 지지 못하는 열등한 존재로 여기는 이들과 본인의 자유의지에 따른 행동을 책임지지 않으려 하는 이들로 인해 자유주의 이념이 훼손되고 있다. 논리 밖에 사는 자가 사회의 중심이 되면 사회가 망가져버린다.

 

사회가 불행하게 되는 것을 예방하려면 사회에 이로운 행복과 해로운 행복을 분류하여 사람들이 이로운 행복을 얻도록 유도해야 한다. 사회에 이로운 행복은 무엇인가? 개인의 자유권과 주권과 소유권을 중시하는 것으로 행복을 누리는 것이 개인주의 체제에 좋은 영향을 주어 사회에 이로운 행복이라 할 수 있다. 사회에 해로운 행복은 무엇인가? 장유유서나 정조관념과 같은 가르침을 중시하는 것으로 행복을 누리는 것이 개인주의 체제에 나쁜 영향을 주어 사회에 해로운 행복이라 할 수 있다. 개인주의 체제에서는 개인주의 관념으로 행복을 누려야 사회에 이롭다. 이런 것은 원주민뿐만이 아니라 이민자도 동일하다. 개인주의 체제에서는 개인주의 관념으로 행복을 누리는 이들이 이민을 와야 사회의 체제와 어울려 사회에 이롭게 된다. 그렇지 않고 집단주의 관념으로 행복을 누리는 이들이 이민을 오면 사회의 체제와 어울리지 못해 사회에 해롭게 된다. 가령 프랑스에서 프랑스인이 자유롭게 의견을 낸 것에 불만을 가진 이슬람 극단주의자가 종교적 이유로 프랑스인을 참살한 사건이 있다. 종교는 종교인이라는 개인의 이익보다 종교라는 집단의 이익을 우선시하기에 집단주의 체제가 된다. 프랑스인 참살사건은 프랑스라는 개인주의 체제와 이슬람이라는 집단주의 체제가 충돌하여 발생한 것이다. 정반대의 옳고 그름을 가진 체제와 체제의 충돌로 사람이 죽게 되었다. 정반대의 옳고 그름을 가진 체제와 체제의 충돌이 아닌 관념과 체제의 충돌이더라도 사회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가령 개인의 이익보다 이슬람이라는 집단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무슬림들이 개인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게 되면 이슬람의 가르침을 개인에게 강요하게 된다. 무슬림들이 힘을 키워 커지면 이민자만이 아니라 원주민까지도 강요하게 된다. 해당 구역에서는 이슬람 율법을 지켜야 한다면서 이슬람의 율법을 강요하게 될 수 있다. 실제로 유럽에서 그런 현상이 나오고 있다. 샤리아존이라 한다. 무슬림의 힘이 커지면 커질수록 이슬람 율법을 강요하는 샤리아존이 커지게 될 것이다. 집단주의와 개인주의의 옳고 그름이 정반대인 것을 상기하자. 체제가 다른 다문화는 성립될 수 없다. 옳고 그름이 정반대인 체제의 충돌로 나타나는 사회문제를 보고도 체제가 다른 다문화를 맹목적으로 허용하자는 주장은 그저 본인이 살고 있는 국가의 체제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 할 수 밖에 없다. 한국은 집단주의 관념인 유교만으로도 벅차다. 다른 집단주의 관념으로 개인주의 체제에 해로움을 늘리지 않길 바란다.

반면 체제가 같은 다문화는 성립될 수 있다. 개인주의 국가인 스웨덴에서 손님에게 식사를 대접하지 않거나 식사비용을 받는 것으로 많은 사람들이 비웃고 있다는 것을 안다. 참으로 어처구니 없다. 스웨덴의 그런 문화는 개인주의적이기에 개인주의 체제인 국가와 충돌할 일이 없다. 이런 다문화는 적극적으로 받아드려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저 손님을 대하는 방식이 다를 뿐이지 예의가 없는 것이 아니다. 만약 스웨덴 문화를 가진 이들이 한국에 오더라도 본인만 손님에게 식사를 대접하지 않을 뿐이지 타인이 손님에게 식사를 대접하는 것에는 신경 쓰지 않기에 충돌이 발생하지 않는다. 다문화를 존중할 수 있는 영역이다. 스웨덴의 문화를 조롱하는 것은 그저 본인이 살고 있는 국가의 체제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 할 수밖에 없다. 정리하면 이민자의 문화는 체제가 같다면 존중하고 체제가 다르다면 체제에 맞는 문화를 갖도록 해야 한다. 가령 문화 중에 개인주의 체제에 해로운 것은 삼가고 해롭지 않거나 이로운 것은 자유로우면 된다. 그러지 않으면 반드시 사회문제가 된다.

이와 같이 개인이 사회에 이로운 행복을 갖게 해야 한다. 사회에 해로운 행복을 갖게 하거나 권장하면서 그것으로 발생하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복지를 지원하는 것은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나 다름이 없을 정도다. 개인주의 체제에서 집단주의 관념으로 옳고 그름을 따지며 체제에 이로운 것은 배척하고 체제에 해로운 것은 권장하니 사회가 점점 불행의 구렁텅이로 떨어져만 가고 있다. 그에 따라 개인주의 체제에서는 개인주의 관념으로 옳고 그름을 따지며 체제에 이로운 것은 권장하고 체제에 해로운 것은 배척해야 할 것이다. 그래야 개인이 행복하면서도 사회 구조 유지가 가능해진다. 사회에 해로운 행복에 대해 몇 가지 알아보자.

 

 

첫째, 저출산. 한국에서 체제에 해로운 것을 권장하는 것으로 발생하는 사회문제 중 가장 큰 것이 바로 저출산이다. 저출산은 수많은 문제를 일으켜 사회를 불행하게 하고 있다. 출산 가능 인구수의 감소로 사회가 죽고 생산 가능 인구수의 감소로 시장이 죽는다. 사회 구조의 요소가 인간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인간이 적게 태어나는 저출산이야말로 사회 구조를 무너트리는 가장 큰 원인이라 할 수 있다. 사회 구조 유지를 목적으로 한다면 가장 먼저 해결해야 할 사회문제가 바로 저출산이다. 많은 사람들이 저출산 문제를 보며 다양한 원인을 지목한다.

하나, 경제적 원인. 한국은 고가의 부동산과 일자리 부족과 경제적 양극화로 인해 출산율이 낮아졌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한국보다 경제적으로 빈곤하거나 빈부격차 큰 국가도 한국보단 출산율이 높다. 한국이 가난했을 때도 출산율은 높았다. 경제적 원인은 간접적인 원인이 될 수는 있으나 직접적인 원인은 될 수 없다.

, 생태적 원인. 동물은 대부분 대를 잇지 못하고 죽으므로 이성관계를 맺지 못하여 출산율이 낮아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라 말하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그런 것은 인간과 짐승과 비교할 것이 아니라 인간과 인간과 비교해야 한다. 보통 한 자리 수의 아이를 낳는 인간과 편차가 심한 모든 짐승하고 비교할 수는 없다. 교미하기도 전제 대부분 사망하기도 하는 짐승도 있다. 인간과 짐승을 비교할 때에는 비교대상과 제반사항도 비슷해야만 가능하다. 같은 인간인 다른 국가에서는 학생 때 연인이 없으면 가족회의를 할 정도라고 한다. 한국에서 이성관계가 적은 것은 한국이 비정상적인 것이다.

, 이기적 원인. 젊은 세대가 이기적이어서 출산을 꺼려했기 때문에 출산율이 낮은 것이라 말하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한국은 이기주의가 바른 개인주의 체제다. 개인주의 체제에서 이기심이 잘못될 수가 없다. 되려 한국은 이기주의가 아닌 이타주의가 문제다. 모든 개인이 온전하게 자유롭게 이기적으로 행동했다면 성에 눈을 뜨는 시기 모두가 자유롭게 이성관계와 성관계를 하면서 자연스럽게 결혼하고 출산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타주의로 인해 집단의 이익을 위해 개인의 이성관계와 성관계를 막으면서 자연스럽게 결혼과 출산을 하지 못했기에 출산율이 낮은 것이다. 이것은 과거부터 내려온 관습에 의한 잘못된 성관념으로 나타난 것이다. 그러므로 한국의 과거를 알아야 문제의 본질을 볼 수 있다. 한국의 과거를 알아보자.

한국의 과거인 조선은 유교라는 집단주의 관념과 체제를 갖추고 있었다. 조선은 철저한 수직사회였다. 신분뿐만이 아니라 연령과 성별과 직업으로도 줄을 세운 철저한 수직사회를 구축하여 상명하복이 기본인 사회였다. 사람은 왕과 양반과 양민과 천민으로 차별되고 연상과 연하로 차별되고 남성과 여성으로 차별되고 선비와 농부와 공장과 상인으로 차별되어 위가 명하면 아래는 복종해야 했다. 가족도 마찬가지였다. 가장이 명하면 가족 구성원은 복종해야 했다. 가부장제다. 가부장제인 가족은 집단의 이익을 위해 개인의 결혼과 출산을 결정했다. 집단의 이익을 위해 중매로 결혼하도록 강요하고 집단의 이익을 위해 가족의 대를 잇기 위한 아들을 출산하도록 강요했다. 개인의 이성애와 출산이 집단의 이익실현의 도구로 사용되었다. 개인을 도구로 삼기 위해 개인이 자유롭게 연애하고 결혼하는 것을 막았다. 막는데 동원된 가르침은 장유유서와 정조관념과 남녀유별 등이 있다.

하나, 장유유서. 연령에 차례가 있다고 가르치는 것으로 연하는 연상에게 복종하게 만들어 결혼과 출산에 대한 강요를 거부하지 못하도록 했다.

, 정조관념. 과거 여성은 남성의 가사나 출산을 위한 도구로 사용되었다. 도구였던 여성은 정조를 통해 새것과 헌것으로 구분되었다. 정조를 지키면 새것이고 지키지 못하면 헌것이었다. 남성은 여성 스스로 새것의 증표가 되는 정조를 지키도록 하기 위해 정조관념을 세뇌했다. 여성은 스스로 남성의 도구로 쓰이기 위해 결혼 전에는 정조를 지키고 결혼 후에는 정절을 지켰다. 여성은 남편의 도구였기에 남편이 죽고 과부가 되어도 재가를 할 수 없었다. 정조관념에 세뇌된 사람은 결혼 전 여성의 순결을 지키기 위해 성을 죄악시하고 결혼 후 정절을 지키기 위해 이성과의 작은 접촉도 죄악시했다. 그러다 보니 남성과의 작은 접촉으로도 발작하며 신경질적으로 분노하는 여성도 나타났다. 한국에서 성을 죄악시하는 것은 철저하게 정조관념이 원인이다. 개인주의 체제에서 개인의 자유의지라면 성기능이 작동할 때 누구든 성관계를 맺는다고 하더라도 문제될 것이 없다. 그럼에도 그걸 이성관계와 이성과의 성관계를 막는 것과 같이 직접적으로 막거나 성문화를 탄압하고 검열하는 것과 같이 간접적으로 막은 것은 낡은 관념인 정조관념 말고는 이유가 없다. 여성주의자가 성을 죄악시하며 성문화를 탄압했기에 여성주의가 성 죄악시의 원인이라 오해할 수 있는데 지금 성 죄악시는 여성주의자만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정조관념을 갖고 있는 다수의 의견으로 성이 죄악시되고 있다. 만약 정조관념을 갖고 있는 다수가 없었다면 여성주의의 주장이 수용되지 않아 성을 죄악시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만약 그들이 여성주의의 주장을 수용하지 않았더라면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어떤 주장이 사회현상을 일으키기 위해서는 주장하는 자와 수용하는 자가 둘 다 있어야 된다. 낡은 관념에 의존하여 사회를 해롭게 하는 이들은 진보는커녕 보수조차도 아닌 퇴보다. 낡은 관념에 편승하면서 진보라고 말하고 다니지 않았으면 좋겠다. 지나치게 뻔뻔하다.

, 남녀유별. 남녀는 유별하다며 남녀는 칠 세부터 같은 석에 있으면 안 된다며 남녀칠세부동석을 말하며 어려서부터 이성이 이성과 인간관계를 맺는 것을 죄악시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어린 시절 이성과 친하게 지내다가도 칠세 이후로부터는 이성과 멀리하게 된 까닭은 이런 가르침으로 인한 이성관계 죄악시 때문이다. 장유유서와 정조관념과 남녀유별과 같은 가르침에 의해 잘못된 성관념을 갖게 된 이들은 자유로운 연애와 결혼을 하지 못하고 가장의 의견에 따라 결혼과 출산을 했다. 당시 가장을 포함한 대부분 개인은 집단의 도구에 불과했다.

그러다 한국이 되면서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라는 개인주의 체제가 들어섰다. 중간에 군사독재정권으로 인해 실질적으로 개인주의 체제의 시작은 문민정부의 시작인 1992년부터일 것이다. 1992. 그 해가 바로 MZ세대의 사춘기다. MZ세대는 밀레이널 세대와 주머스 세대를 합친 한국 신조어로 MZ세대의 본질은 한국 개인주의 체제가 시작되었을 때 사춘기를 경험한 세대라는 것이다. 밀레니얼 세대의 시작이 1980년생 초반인데, 이들이 사춘기가 될 무렵인 1992년에 문민정부가 시작되었다. 이때부터 본격적인 관념과 체제의 충돌이 시작되었다. 관념은 집단주의에 머물러 있는데 체제는 개인주의로 진보했다. 관념에 의해 성을 죄악시하여 이성관계를 단절시키고 성문화를 탄압하고 검열하고 있는데 체제에 의해 연애와 결혼과 출산이 자유롭게 되었다. MZ세대는 자유롭게 연애와 결혼과 출산을 하게 되었음에도 개인을 집단의 도구로 만들었던 정조관념과 남녀유별과 같은 가르침을 근거로 여성의 순결을 지키기 위해 성을 죄악시하고 이성관계를 멀리하고 성문화가 탄압당하는 환경에서 자라났다. MZ세대는 미성년 때부터 지독할 정도로 성을 탄압과 검열을 당했다. 이성과의 성관계는 물론이고 이성관계나 성문화도 공개적으로 접할 수가 없었다. 성기능이 작동되는 시기에 성문화조차 접하지 못하는 것이 얼마나 비논리적인지 알아야 한다. 그럼에도 낡은 집단주의 관념을 근거로 성교육조차 제대로 배우지 못했다. 현재 다수의 성인들도 제대로 된 성지식이 없을 정도로 비정상적인 탄압이었다. 그 탄압에 의해 잘못된 성관념을 갖게 되어 다수의 사람들이 연애와 결혼과 출산에 부정적 인식을 갖게 되었다.

 

한국에서 이성에 대한 사랑은 취미에 대한 사랑보다 못하다. 이성애는 이성의 상대에게 성적으로 이끌려 열렬히 좋아하는 마음의 상태를 뜻한다. 정서적과 같이 성적 외로 이끌려 좋아하는 마음의 상태를 갖게 되는 것은 이성애가 아닌 친애다. 이성애는 동물적 본능으로 상대를 좋아하는 사랑이다. 인간이 인간에게 성적으로 매력을 느껴 좋아한다는 감정을 갖게 되는 것이 이성애다. 그런 사랑은 본래 사랑하는 것 자체에서 이익을 얻기에 다른 이익을 바라지 않는다. 그런데 한국 사회의 사랑은 어떠한가? 일부 미성년의 연애나 이른 연애와 결혼을 제외하면 대부분 연애와 결혼은 조건을 본다. 인간에게 성적 매력을 느끼고 이끌리는 것이 아니라 조건에 매력을 느끼고 이끌린다. 본인만 보는 것이 아니다. 개인이 이성과 교제를 하는 것을 보면 타인이 그 사랑에 대한 과한 간섭을 한다. 나이가 어울리지 않다. 외모가 어울리지 않다. 학력이 어울리지 않다. 직업이 어울리지 않다. 재산이 어울리지 않다. 본인의 주관적인 기준으로 타인의 사랑에 간섭하며 부정하기까지 한다. 반대로 성적 매력에 이끌려 사랑하고 있다고 말하면 질색하면서 화를 낸다. 몸을 보고 사랑했느냐고 말하면서 말이다. 특히 성을 죄악시하는 이들은 더욱 화를 낸다. 어떻게 사람을 성적 대상으로 볼 수 있느냐면서 말이다. 어처구니 없다. 진실된 사랑인 성적 매력에 이끌림은 천시하면서 타산적 사랑인 조건에 이끌림은 바른 것처럼 말한다. 한국 사회에서는 조건이 우대되고 이성애가 천대받는다. 얼마나 타산적인 사랑인가?

성을 죄악시하는 관념에 영향을 받아 혼란을 겪을 수 있다. 그렇다면 묻겠다. 인간의 본능으로 느끼는 사랑이 진실 되었는가? 아니면 조건을 따지는 사랑이 진실 되었는가? 당연히 전자다. 한국은 집단주의 관념에 의해 개인의 이성애가 집단의 이익실현을 위한 도구로 쓰였듯이 개인주의 체제인 지금은 개인의 이익실현의 도구로 쓰이고 있어 진실된 사랑이 무엇인지 모르고 무작정 비난하고 있었던 것이다. 한국이 개인주의 관념이 자리잡았다면 성적 매력으로 사랑을 느끼고 이성에게 성적 매력을 느낀다고 사랑고백을 하는 것으로 연인이 되어 성관계를 맺으면서 자연스럽게 사랑을 키워나갔어야 했다. 가장 진실된 사랑은 성적 매력에 이끌리는 것이다. 야한 것을 잘못되었다고 말하거나 인간을 성적 대상으로 봐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이들이야말로 진실된 사랑을 모르는 것이다. 그게 뇌 과학이 말하는 사랑의 본질이자 진리다. 인간과 짐승과 다르다며 사랑에 대한 주관적인 낡은 관념을 가지고 반박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그저 오래된 낡은 관념일 뿐이다. 인간은 동물이기에 성적 매력에 이끌리는 것이고 인간은 짐승이 아니기에 개인의 자유의지를 존중하면서 성관계를 맺는 것이다. 그런 낡은 관념이란 진리가 아닌 것으로 논리적인 증명으로 무장된 과학이란 진리에 맞서는 것은 낡은 나뭇가지로 철벽에 부딪치는 것보다 더한 만용이라 할 수 있다. 선풍기 틀고 자면 죽는다고 말하는 쪽과 그렇지 않다는 쪽이 부딪치는 것과 다를 바 없을 정도다.

그럼에도 지금 한국의 사랑은 대부분 타산적 사랑인 조건에 이끌림을 당연하게 여기고 있다. 그런 탓에 이성애는 개인의 이익실현의 수단으로 전락하여 실상 이성애라기 보다는 자기애의 표현방식에 가깝게 되었다. 이성을 트로피와 같이 본인의 자랑용으로 취급하거나 지급과 같이 본인의 용돈주머니로 취급하였다. 이게 정상적인 이성애로 보이는가? 한국은 이성애와 자기애와 친애를 분명하게 구분 지어야 한다. 성적 매력에 이끌림이 진실된 이성애고 조건에 이끌림이 타산적 자기애고 성적 외의 이끌림이 평범한 친애다. 성적 대상화를 막는다거나 성 상품화를 막는 등과 같이 성을 죄악시하며 성을 부정하니 진실된 이성애는 부정되고 타산적 자기애와 평범한 친애만 남았다. 평범한 친애는 친구관계와 다를 바 없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이성관계는 타산적 자기애만 남았다. 자기애와 친애의 사랑이 중요하지 않다거나 크지 않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이성애가 되는 것도 아니다. 이성애는 이성애의 고유한 가치가 있다. 이성애를 위해 인간은 성적 대상이 되어야 하고 성 상품화가 되어야 한다. 거기에 사회에 해롭지 않은 개인의 자유의지만 있다면 괜찮다. 오히려 바람직하다. 성적 매력에 이끌리는 이들이야말로 진실된 이성애를 가졌을 확률이 높으며 성을 죄악시하는 이들이야말로 타산적 자기애를 가졌을 확률이 높다. 한국에서 진실된 이성애가 아닌 타산적 자기애가 많기에 발생하는 사회현상에 대해 알아보자.

하나, 성범죄. 한국은 진실된 이성애가 아닌 타산적 자기애가 많기에 상대가 바라지 않은 성적 접촉인 성희롱이나 성추행이 줄어들지 않고 있다. 한국에서 성희롱이나 성추행이나 성범죄가 줄어들지 않는 것은 성적 매력에 이끌림이 부정되고 있기에 다른 곳으로 돌출되어서다. 본래라면 그냥 성적 매력을 느끼는 상대와 눈이 맞아서 성적 관계를 맺으면 되기에 일부를 제외하면 굳이 상대가 싫어하는 성적 접촉을 할 이유가 없다. 자연스럽게 성적 욕구를 충족할 수 있다면 성범죄는 자연스럽게 줄어들 것이다.

, 한국은 진실된 이성애가 아닌 타산적 자기애가 많기에 낙태에 대한 거부감이 적은 사람이 있다. 많은 동물은 본능적으로 교미를 하고 본능적으로 새끼를 낳고 아끼는 반면 타산적 자기애를 가진 인간은 타산의 결과물인 아이를 아끼지 않을 수 있다. 타산적 자기애를 가진 사람에게 있어 이성관계나 성관계는 어디까지나 자기애를 위한 관계로 그런 관계로 얻는 타산적인 이익 외에는 관심이 없다.

, 한국은 진실된 이성애가 아닌 타산적 자기애가 많기에 동거나 결혼을 몹시 복잡하고 어렵게 본다. 동거나 결혼은 그냥 단순히 서로를 사랑하여 마음이 맞는 상대와 같이 살 뿐이다. 조건 따져가면서 만날 이유가 없다. 한국은 일인가구가 많은데 그 일인가구 대부분이 이성관계가 없거나 조건 따져가면서 만나니까 동거나 결혼을 하지 않았기에 일인가구인 것이다. 다인가구에 비해 일인가구는 생계비가 많이 들어가는 것으로 개인은 생계비가 높아 불행하고 사회는 자원이 낭비되어 불행하다. 진실된 이성애가 아닌 타산적 자기애로 인해 이외에도 다양한 문제들이 일어나고 있다.

성별갈등의 본질은 진실된 이성애의 소실에 있다. 이성을 사랑하지 않으니까 성별갈등이 끝나지 않는 것이다. 진실된 이성애인 성적 매력에 이끌림은 시간이 흐르면 변할 수 있기에 완전하지 않다고 말할 수 있다. 감정은 짧지만 조건은 길다면서 타산적 자기애를 합리화할 수도 있다. 그런데 그럴 거면 사랑이란 이름을 붙이지 말고 사업이란 이름을 붙이길 바란다. 순수한 사랑을 타산적인 자기애로 더럽혀서는 안 된다. 분명 진실된 이성애는 시간이 흐르면 흐려질 수 있다. 그러나 그 뒤부터는 이성애를 추억하며 친애로 살아가거나 헤어지면 된다. 본래 그게 정상이다. 이성애가 흐려져 이혼을 하더라도 큰 문제가 없다. 집단주의 관념에 의해 부부가 이혼하면 자녀와의 관계도 깨져 자녀가 불행하게 될 거란 잘못된 고정관념을 갖고 있다. 그러나 부부의 이혼은 부부 관계의 깨짐을 말하는 것이지 부모자녀 관계의 깨짐을 말하지 않는다. 이혼하고도 자녀와 친하게 지내면 된다. 친권이 없어져도 그냥 만나면 된다. 만약 친권을 가진 부모가 친권이 없는 부모와 자녀가 만나는 것을 막는 것은 자녀의 자유권 침해에 해당하게 된다. 부부의 인간관계 소멸이 부모자녀의 인간관계 소멸로 이어지는 것은 단순히 자녀를 부모의 소유물로 여긴 잘못된 인식으로 나타난 것에 불과하다. 한국의 사랑은 타산적 자기애가 많다.

반면 취미는 어떠한가? 대부분 취미에는 타산이 없다. 취미 자체로 만족하기에 다른 이익을 요구하지 않는다. 분명 타산적인 취미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 타산이 없다. 대부분의 취미는 즐기는 순간 만족했기에 다른 보답을 바라거나 하는 것과 같은 이해관계를 따지지 않는다. 대부분 취미는 보답을 바라지 않는 사랑이다. 그러므로 한국에서 수많은 조건을 따지는 이성에 대한 사랑은 보답을 바라지 않는 취미에 대한 사랑보다 얄팍한 사랑이다. 한국은 성을 죄악시하고 이성관계를 단절시키고 성문화를 탄압하니까 대부분 정상적인 이성애를 배우지 못해 이런 현상이 나타났다.

일부를 제외한 대부분의 인간은 진실된 이성애가 아닌 타산적 자기애를 기반으로 이성관계를 맺었고 그 외는 미성년 때 성을 죄악시하는 것에 세뇌 당해 무의식적으로 이성의 성을 멀리하게 되는 것으로 이성관계를 맺지 않게 되었다. 오랜 시간 세뇌한 효과가 나타난 것이다. 네가 성욕을 느끼는 것은 네가 잘못된 거야. 앞서 말한 종교식 세뇌나 가스라이팅과 같은 원리다. 이성관계를 맺지 않은 인간은 성적 욕구를 충족하기 위해 아이돌이나 창작물 같은 유사연애산업에 깊게 빠져들게 되었다. 아이돌이나 이성의 동성애 문화가 비정상적으로 발전한 까닭에는 이런 배경이 있었다. 연애와 결혼을 하지 않는 것은 외모나 재산이 부족하거나 비혼이란 신념 때문이라 말하기도 하는데 대부분은 그냥 잘못된 관념에 세뇌 당해 무의식적으로 이성관계를 꺼려하는데 그 이유를 명확히 알 수 없었기에 적당한 이유를 말하며 둘러댔던 것에 불과하다. 타산적 자기애나 이성관계가 없는 사람이 늘어나는 중에 가부장제에서 나고 자란 여성주의자가 본인이 배운 가부장제 세계관의 여성상의 여성성을 추구하는 것이 여성의 인권이라 굳게 믿고는 그런 성을 인지할 감수성을 성인지감수성이라 말하며 신세대 여성에게 세뇌하고 사회에 강요하는 것을 같은 가부장제에서 나고 자란 권력자가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바람에 한국은 더욱 더 성이 죄악시되고 이성관계가 단절되어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출산율이 폭락하게 되었다. 출산율이 폭락했음에도 정확한 이유를 몰랐다. 성기능이 작동하는 미성년의 이성관계와 성관계를 금하고 미성년이 접하는 성문화를 탄압하고 검열하여 성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라는 잘못된 성관념을 가지게 된 것이 바로 저출산의 본질적인 원인이었음에도 그걸 모르고 더욱 더 이성관계와 성관계를 막고 성문화를 탄압하고 검열하면서 더욱 더 출산율이 낮아지고 있다.

성을 죄악시하면 죄악시할수록 진실된 이성애는 더욱 더 사라지고 타산적 자기애만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그런 탓에 현재 MZ세대의 초기 세대라 할 수 있는 30대 결혼율이 40%를 넘지 못하고 한국 부부의 섹스리스가 세계 2위로 3쌍 중 1쌍이 성관계를 맺지 않고 있다고 한다. 개인주의 체제인 사회에서 집단주의 관념에 따라 성을 죄악시하고 이성관계와 성관계를 멀리하고 성문화를 탄압하고 검열한 결과가 바로 이것이다. 이 모든 것이 낡은 집단주의 관념에 의해 자행된 도덕적 범죄였다. 정말 끔찍한 것은 집단주의 관념에 의해 가부장제를 비판하는 사람도 가부장제의 성관념을 옳다 여기고 성문화 탄압을 비판하는 사람도 가부장제의 성관념을 옳다 여기며 성을 죄악시하며 이성관계를 단절시키는 것에 동의한다는 점이다. 인간이 이성을 성적 대상으로 성적 관계를 맺는 것은 아무 문제가 없다. 오히려 권장되어야 한다. 성에 관련된 잘못은 어디까지나 개인의 자유권 침해에 있는 것이지 성 자체에 이는 것이 아니다. 성을 죄악시하는 사회흐름에 파묻혀 성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식의 주장에 동조해서는 안 된다. 만약 미성년 개인이 이기적으로 본인의 욕망에 충실하게 이성관계와 성관계를 맺으면서 이성과 가까이 성장했더라면 진실된 이성애를 배워 자연스럽게 결혼하고 출산하여 출산율이 낮아지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세계의 출산율도 비슷한 상황이다. 집단주의 체제에 머물러 있는 국가는 사람이나 교리의 강요로 결혼과 출산을 하였기에 아직도 출산율이 높은 반면 개인주의 체제로 진보한 선진국은 개인주의 체제임에도 집단주의 관념을 가져 성에 보수적인 사람이 많았기에 출산율이 낮았다. 그 중 특히 한국은 집단주의 관념에서 바른 것을 보다 적극적으로 행하는 바람에 개인주의 체제에 심각한 타격을 주어 세계에서 가장 출산율이 낮은 국가가 되었다. 잠시 성 죄악시와 이성관계와 성관계 금지와 성문화 탄압과 검열에 대해 알아보자.

이러한 행위는 저출산이 사회 구조 유지에 가장 큰 위험이라는 것을 고려하면 사회에 있어 가장 사악한 탄압이다. 먹는 것을 잘못되었다고 말하거나 자는 것을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것과 같을 정도로 사악하다. 성을 죄악시하는 악이 낡은 관념으로 선을 사칭하고 성을 즐기는 선이 그런 악에게 탄압을 당하고 있다. 이게 얼마나 비정상적인지 부디 모두가 깨달아야 한다. 의기양양하게 성을 탄압하는 사악한 이들의 악행을 하루라도 빨리 막아야 한다. 성을 죄악시하며 탄압하는 이들이 성교육을 통해 이성을 성적 대상으로 바라보고 성적 욕구를 느끼는 것이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것은 그야말로 사교집단의 교리를 전파하는 것과 다를 바 없을 정도로 사회에 해롭다. 국내 정서를 말하며 성문화를 탄압하기도 하는데 국내 정서로 인해 저출산이 발생하여 사회 구조가 무너지고 있는 것을 고려하면 국내 정서가 바뀌어야 한다. 국내 정서 핑계를 대지 말길 바란다. 국내 정서가 절대적이면 왕정 같은 낡은 체제도 당시 정서로 정당화되었어야 했는가? 독재와 같은 비민주적인 체제도 당시 정서로 정당화되었어야 했는가? 잘못된 관념은 당대 정서로 정당화될 수 없다. 한국은 개인주의 체제를 갖춘 국가로 개인의 자유권이 우선된다. 설령 정서가 개인의 자유권을 침해하더라도 국가의 이념을 우선시해야 한다. 성을 죄악시하며 야한 것이 나쁘다고 생각했던 것은 어디까지나 개인의 이성애조차 집단의 이익실현의 도구로 사용되었던 집단주의 체제에서의 인식일 뿐이다. 집단주의 체제에서는 개인의 이성애를 집단의 이익실현의 도구로 사용해야 하기에 야한 것이 그르지만 개인주의 체제에서는 개인의 이성애가 온전히 개인의 것이기에 야한 것이 바르다. 국가기관이 성을 죄악시하며 성문화를 탄압하는 것에 앞장서기도 하는데 국가기관이면 국가의 이념을 따라가야지 국가 이념과 배치되는 낡은 관념에 매달려 있으면 어떻게 하나. 민주주의를 말하며 개인의 자유권을 침해하는 것을 정당화할 수도 있는데 개인의 의견이 국가의 이념을 훼손하는 개인의 자유권 침해를 하는 것은 민주주의에 의한 국민의 권력 남용이다. 권력 남용에 귀를 기울일 것이 아니라 국가 이념에 따라 개인의 자유권 추구라는 정당한 권리 행사에 귀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한국은 진실된 이성애와 타산적 자기애와 친애도 구분할 줄 모르는 사악한 이성애 말살을 주도하는 사교집단과도 같은 이들의 활동으로 출산율이 더더욱 떨어져가고만 있다. 이외 몇 가지 의견을 알아보자.

하나, 과도한 경쟁사회. 어떤 사람은 한국이 과도한 경쟁사회여서 여유가 없기 때문에 연애와 결혼을 하지 못한다고 생각할 수 잇다. 그러나 친구 사귈 여유나 취미를 즐길 여유는 있어도 연인 사귈 여유는 없다는 것은 논리적이지 못하다. 친구 사귈 여유나 취미를 즐길 여유가 있다면 그냥 연인이 될 상대가 없는 것이지 경쟁사회라 여유가 없어서 그런 것이 아니다. 대부분은 친구나 취미가 있기에 경쟁사회는 이유가 되지 못한다.

, 학생 학업 방해. 학생이 연애를 하면 학습에 방해가 된다고 생각할 수 잇다. 그러나 유사연애산업에 빠지는 시간과 실제 연애하는 시간과 큰 차이가 없다. 아이돌에 빠진 학생이 아이돌에 쓰는 시간을 이성에게 쓰면 오히려 시간이 남을 수 있다. 자위하는 시간과 성관계 맺는 시간은 큰 차이가 없다. 오히려 이성과 성관계를 맺으면서 사랑을 해야 학습의 동기부여가 될 수 있다. 개인주의 체제에서 학습은 강요할 것이 아니라 스스로 학습의 동기를 찾게끔 가르쳐야 한다.

, 풍기문란. 자유롭게 연애하면 풍기가 문란해질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이성관계의 절도는 각자 자유롭게 알아서 하면 된다. 외부에서 간섭하면 자유권 침해가 된다. 이기적으로 이성관계를 맺고 그런 교제가 분쟁이 발생하면 대화나 여론이나 법으로 조정하면 된다.

, 외모. 외모나 몸매를 보는 눈이 높아져서 연애가 어려운 것이라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성을 죄악시하지 않았다면 이성에게 사랑 받기 위해 외모나 몸매를 가꾸는 노력을 했을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은 꾸미거나 피부관리를 하거나 간단한 성형을 하거나 운동만 해도 충분히 아름다워질 수 있다.

다섯, 성욕. 성욕이 넘치는 이성이 불편하여 연애하지 않는 것이라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성적 매력에 이끌리는 것이 진실된 사랑이다. 그런 불편함은 개인의 성을 집단의 이익실현 도구로 삼았던 시기의 잘못된 성관념에 영향을 받은 것에 불과하다. 성은 죄가 아니고 성욕도 죄가 아니다. 모든 인간은 자유롭게 자유의지로 성관계를 맺으면 된다.

정리하겠다. 한국은 개인주의 체제에서 집단주의 관념을 가지고 성을 죄악시하고 이성관계와 성관계를 막고 성문화를 탄압하고 검열하는 바람에 일부를 제외하고는 타산적 자기애로 이성관계를 맺은 이들이 연애와 결혼을 타산적으로 하여 출산을 거부하거나 이성관계 자체가 없었던 이들이 연애와 결혼을 하지 않으면서 출산율이 폭락한 것이다. MZ세대부터 개인주의 체제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기에 그 세대부터 심각한 저출산이 나타나게 되었다. MZ세대로 계속 묶이는 것이 타당한 것은 개인주의 체제 이후에 개인주의 관념을 가진 세대는 아직 등장하지 못했다. 관념을 기준으로 세대의 불행을 나눈다면 MZ세대 이전은 집단주의 관념과 체제로 불행을 겪었고 MZ 세대부터는 집단주의 관념과 개인주의 체제의 공존으로 불행을 겪고 있다. 그런 상황에서 여성주의자가 가부장제 세계관의 여성상의 여성성을 추구하는 것이 여성의 인권이라 굳게 믿고는 그런 성을 인지할 감수성을 성인지감수성이라 말하며 신세대 여성에게 세뇌하고 사회에 강요하는 것을 같은 가부장제에서 나고 자란 권력자가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바람에 한국은 더욱 더 성이 죄악시되고 이성관계가 단절되어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출산율이 폭락하게 되었다. 분명 성을 죄악시하며 미성년의 이성관계와 성관계를 막고 미성년이 즐기는 성문화를 탄압하고 검열하는 것으로 도덕적 만족감을 느끼는 것도 개인의 행복이 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야말로 한국 사회를 죽음으로 내몰고 있는 사회에 해로운 행복이다. 이제 한국은 미성년 때부터 성을 친숙하게 여기며 자유롭게 이성관계와 성관계를 맺고 성문화를 즐기면서 자연스럽게 결혼하고 출산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것이야말로 한국 사회를 사랑으로 가득 차게 하는 사회에 이로운 행복이다.

 

한국 저출산에 대해 알아보았다. 그러면 대처방법에 대해 알아보자. 개인이 사회에 이로운 행복을 얻도록 개인은 관념을 바꾸고 사회는 제도를 바꿔야 한다.

하나, 성을 죄악시하는 것을 도덕적 범죄로 규정한다. 이성관계와 성관계와 성문화에 대한 금지와 탄압과 검열은 사회에 해로운 도덕적 범죄다. 이제 모든 인간은 개인주의 체제에 맞는 개인주의 관념을 가지고 미성년 때부터 성에 친숙해져야 한다. 남녀칠세부동석 같은 잘못된 가르침에서 벗어나 모든 인간이 어려서부터 이성과 관계를 맺으며 성장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 모든 학교가 남녀공학이 되어야 한다. 특히 가부장제의 산물인 여학교를 유지하는 것은 지나치게 여성차별적이다. 자유로운 이성관계로 사회구조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특정 성별을 위한 학교가 있어서는 안 된다. 정조관념 같은 잘못된 가르침에서 벗어나 모든 인간은 성기능이 작동할 시기부터 이성과 성관계를 맺으며 성장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 모든 학교가 올바른 성교육을 해야 한다. 정조관념을 근거로 성교육을 하지 않는 것은 개인을 집단의 이익실현의 도구로 여긴 잔재에 불과하다. 성문화를 탄압하고 검열하는 잘못된 행위에서 벗어나 모든 인간은 성기능이 작동할 시기부터 성문화를 즐기면서 성장해야 한다. 가령 방송이나 게임등급을 정하는 곳에서 함부로 성문화를 막는 것은 도덕적 범죄에 해당한다. 사회를 이롭게 한다고 생각하며 행동했던 것이 실제로는 사회를 해롭게 했던 것이다. 성이 죄악시되어 성관계가 있는 작품을 건전하지 못하다며 천시하는 경향이 있는데 성관계가 없는 이성애를 다룬 작품은 낡은 관념에 의해 진실된 이성애가 제거된 도덕관념이란 겉멋만 잔뜩 든 진실을 다루지 않은 불완전한 작품일 뿐이다. 이렇게 어려서부터 성에 친숙해져야 성에 대한 긍정적 인식으로 가능한 많은 인간이 연애하고 결혼하여 출산할 수 있을 것이다.

, 개인의 이성애에 간섭하는 것을 도덕적 범죄로 규정한다. 인간이 이성애에 간섭하여 조건을 말하며 타선적 자기애로 바꾸려는 것은 사회에 해로운 도덕적 범죄다. 사회 입장에서 개개인의 자유로운 인간관계는 개인의 자유의지라면 어떤 형태라도 상관없다. 연령, 혈연, 동성 등 아무래도 좋다. 인간이 인간과 성관계를 맺는 것은 날아다니는 잠자리의 교미만큼이나 자연스러운 일이다. 연령의 경우 서로 성기능이 작동한다면 자유의지에 따라 성관계를 맺더라도 아무 문제가 없다. 낡은 관념을 근거로 사사로운 인간관계에 개입하지 말아야 한다. 혈연의 경우 집안의 족보와 자녀의 유전병 문제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혈연의 관계를 정리한 족보는 집단주의 체제가 남긴 골동품이며 유전병은 한 세대에서는 대부분 발현되지 않는다고 한다. 낮은 확률의 유전병이 문제라면 고령출산도 문제가 된다. 논리적으로 과학을 근거로는 막을 수 없다. 동성의 경우에는 대를 잇지 못한다는 문제가 있을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막는 것은 공익에 부합하지 않는다. 소수의 동성애를 금하는 것으로 사회에 출산율을 올리는 것보다 소수의 동성애를 허용하는 것으로 그들이 행복을 누리도록 하는 것이 체제와 이념에 이롭다. 체제와 이념에 근거하여 동성애가 허용되는 것이지 이성애보다 동성애가 낫다는 것은 아니다. 냉정히 말해 이성애가 훨씬 사회에 이롭다. 장소도 상관없다. 인간이 인간과 길거리에서 성관계를 맺는 것은 길거리에서 개가 교미하는 것만큼이나 자연스러운 일이다. 인간과 인간이 길거리에서 성관계를 맺는 것은 다른 사람과 분쟁이 발생할 수 있음으로 권장되지는 않지만 사람이 없는 곳에서 한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다.

인간에게 부과된 도덕적 의무는 없다. 체제가 바뀐 이상 체제에 맞는 옳고 그름을 다시 생각하고 판단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과거에 만든 도덕적 의무에 종속되어 자유를 잃어버리는 것으로 자유주의 이념이 훼손되게 된다. 잠자리 개체의 특성이 어떠하든 아무래도 좋은 것처럼 인간 개인의 특성이 어떠하든 아무래도 좋다. 개인이 개인과 자유로운 성관계로 행복하다면 인간이 행복하기에 체계가 유지되어 복지 체계가 견고해지는 것으로 복지적으로 바르고 인간이 행복하면서도 질서가 유지되어 법 질서가 견고해지는 것으로 법적으로 바르다. 사사로운 인간관계에 하나하나 간섭하며 타산적 자기애에 맞춘 암묵적인 조건에 맞지 않는다며 부정하는 것은 도덕적 범죄에 해당한다. 마약과 같이 사회를 해롭게 하거나 개인의 자유권 침해와 같이 개인을 해롭게 하는 것이 아닌 이상 모든 개인은 개인의 자유의지로 행복하면 된다. 개인주의 체제는 개인을 위한 공동체지 공동체를 위한 개인이 아니다. 개개인의 자유로운 공동체지 공동체에 종속되는 개개인이 아니다. 한국은 이제 개인주의 관념으로 진보해야 한다.

, 성적 매력을 부정하는 것을 도덕적 범죄로 규정한다. 인간이 인간에게 사랑 받기 위하여 성적 매력을 키우는 것을 죄악시하며 막는 것은 사회에 해로운 도덕적 범죄다. 진실된 이성애를 하기 위해 모든 개인이 성적 매력을 갖춰야 한다. 성적 매력은 보통 외모나 몸매 또는 성격이나 능력 등이 있을 수 있는데 보통 외모를 보는 경우가 많으므로 외모를 가꿀 수 있도록 지원해야 한다. 외모복지다. 저출산 대책은 성적 매력을 키울 수 있는 외모복지가 가장 효과적이다. 미성년 때부터 성에 친숙해지기 위해 모든 학생이 피부관리나 치아교정이나 쌍꺼풀 수술 같은 가벼운 외모복지를 받을 수 있어야 한다. 대부분 학생은 기초적인 외모 관리만 받아도 충분히 아름다워질 수 있다. 그렇게 하여 이성이 서로를 사랑할 수 있게 해야 한다. 이성관계가 늘어나면 그에 따른 이성관계에 관련된 교육을 하면 된다. 이성관계의 문제 대부분이 개인의 자유권 침해에서 비롯되는 것을 고려하면 개인주의 관념을 교육하면 될 것이다. 성관계 문제는 성교육을 하면 된다. 지금 일부 성교육이 이성에게 책임을 돌리거나 이성과의 관계를 멀리하는 것을 가르치기도 하는데 그런 것은 멸종을 획책하는 사교집단의 사악한 교리와도 같은 악의에 가득 찬 가르침에 불과하다. 성교육은 성과 성관계가 무엇인지 가르치는 것이지 성과 성관계를 부정적으로 보게끔 가르치는 것이 아니다. 성교육은 인간이 보다 적극적으로 성관계를 맺을 수 있도록 유도하는 교육이 되어야 한다.

외모복지를 하면 대부분 자존감이 올라가 자살률이나 집단괴롭힘도 줄어들 것이다. 학생자살이나 집단괴롭힘에 저항하지 못하는 것은 대부분 환경에 의해 박살 난 자존감이 원인일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낮은 자존감으로 인해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게 되면서 외모도 꾸미지 않고 공부도 하지 않게 되기도 한다. 학생 복지는 외모복지가 가장 효과적이다. 가상현실에서 가상의 아름다운 외모를 가지고 나니 자존감이 올라가 행복해졌다는 사람이 있다. 그와 같다. 웬만한 것은 외모복지만 해도 충분히 자존감이 올라가 행복할 수 있다. 단순한 고민상담은 현실도피적 행복이고 의학적 외모복지는 현실직시적 행복이다. 현실직시적 행복으로 학생이 행복할 수 있는 것이 바람직하다. 학생은 누군가의 도덕적 만족감을 충족시켜주기 위한 도구가 아니다. 학생의 이성관계와 성관계와 성문화를 막고 학생을 공부하는 로봇으로 만들어 불행케 하면서 학생인권을 말하는 것은 지나치게 뻔뻔하다.

외모복지는 외모지상주의를 부를 수 있다며 반대할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은 아름다운 것을 좋아하고 이성애는 성적 매력에 이끌림을 말한다. 아름다운 이성에 성적 매력을 느껴 이끌림에 따라 사랑하는 것은 무척이나 자연스러운 일이다. 진실된 사랑을 위해서라도 인간은 아름다워져야 한다. 외모지상주의를 비판하는 사람도 물건이나 자연의 아름다움을 즐길 것이다. 더러운 물건은 구매하지 않을 것이며 아름답지 못한 풍경은 좋아하지 않을 것이다. 그와 같다. 사람들은 그냥 단순히 인간의 아름다움을 좋아할 뿐이다. 분명 미형이 아닌 대상을 괴롭히고 천대하는 것은 잘못되었다. 그러나 미형인 대상을 사랑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일 뿐이다. 오히려 외모지상주의를 비판하면서 외모를 가꾸는 것을 막는 것은 인간이 인간에게 사랑 받기 위한 노력을 막는 것과 같다. 인간이 인간에게 사랑 받기 위한 노력을 하는 것을 막아서는 안 된다.

몇 가지 기본적인 대처방안에 대해 알아보았다. 이렇게 집단주의 관념에 의해 나타난 잘못된 성관념을 근거로 한 수많은 탄압과 억압을 도덕적 범죄로 규정하여 못하도록 막는다. 관념의 경우에는 법령이 아닌 개인주의 관념에 따른 암묵적인 불문율로도 충분할 것이다. 누군가 도덕적 범죄에 해당하는 행위를 저지르면 논리로 비판하면 된다. 제도의 경우에는 모든 학교의 남녀공학화와 같이 이성애를 키울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하면 된다. 그리고 나서 학생 90% 이상이 이성과 이성관계와 성관계를 맺도록 가르친다. 성적 매력이 이끌리는 것이 진실된 이성애라 가르친다. 인간이 인간과 사랑하는 것을 권장한다. 학생 50% 이상이 졸업 후 바로 결혼할 수 있도록 가르친다. 결혼은 늦을수록 타산적 자기애가 될 확률이 높아져 사랑하지 않는 인간과 결혼하여 결혼생활이 불행할 확률이 높아진다. 그 외의 학생도 가능한 빠르게 결혼할 수 있도록 가르친다. 그렇게 해서 대다수 개인이 사회에 이로운 행복을 얻도록 해야 한다.

이른 결혼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있을 수 있다. 그런데 그건 그냥 집단주의 관념에 의해 집단의 이익과 무관하게 미성년이 멋대로 자유연애로 결혼하는 것을 부정적으로 보았을 뿐이다. 분명 미성년 부부가 부도덕할 수 있다. 그러나 그건 표본이 작기 때문이다. 모든 인간이 이른 결혼을 한다면 지금과 그리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이른 결혼을 한다면 진실된 이성애일 확률이 높아 타산적인 이유로 인한 범죄는 줄어들 확률이 높다. 이른 결혼이 여성의 사회진출을 막을 거라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생각해보자. 부부가 아이를 낳지 않으면 된다. 그러면 친구나 커플이 동거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아이 계획을 명확히 하고 부부가 같이 살면 이른 결혼을 하더라도 여성의 사회진출에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오히려 같이 살면 가사를 분담하여 혼자 사는 것보다 시간이 절약되는 것으로 사회진출에 이로울 수 있다. 이른 결혼에 대한 부정적인 편견은 대등하지 않은 이성관계에서 비롯된 것이다. 대등한 이성관계라면 이른 결혼일수록 행복할 수 있다.

대다수 학생이 이성관계와 성관계를 맺는다면 임신의 위험으로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생각해보자. 성이 자유롭게 된다면 자유롭게 피임기구를 사서 임신할 확률이 낮을 것이다. 설령 실수로 아이를 갖는다고 하더라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 본래 동물은 성기능이 작동하면 성관계로 새끼를 배더라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 인간도 마찬가지다. 과거 대부분 결혼 적령 시기가 성기능 작동 시기였음을 상기하자. 당시 결혼이 잘못된 것은 강제였기 때문에 잘못된 것이 자유롭다면 잘못되지 않았다. 시기가 잘못된 것이 아니다. 출산 적령기 문제가 있는데 적령기로만 따지면 고령 출산도 막아야 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적령기에만 초점을 맞춘다면 고령 출산이 개인의 자유였던 것과 같이 논리적으로 미성년 출산도 개인의 자유가 된다. 미성년은 보호자와 경제적 문제가 있을 수 있는데 그런 곳에 저출산 대책 비용을 쓰면 된다. 이미 여력이 충분한 인간에게 복지를 지원하는 것이 아니라 여력이 없는 인간에게 복지를 지원해야 한다. 미성년 때 아이를 낳는다 하더라도 아이를 사랑하고 아끼고 소중하게 여기면 된다. 그걸 같은 학교의 다른 미성년들이 보고 생명의 소중함을 배울 수 있을 것이다. 미성년의 출산이 불행한 것은 출산했기 때문에 불행한 것이 아니라 그걸 잘못되었다 보는 사회적 시선 때문에 불행한 것이다. 사회가 아끼고 사랑한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다.

개인주의 체제에서 연애와 결혼은 이를수록 좋다. 연애와 결혼과 출산을 개인의 자유에 맡기기에 성적 매력이 넘칠 때 연애하고 결혼해야 진실된 이성애 속에서 출산을 하고 그런 이성애의 결과인 아이를 아끼고 사랑할 것이기 때문이다. 늦게 결혼하면 진실된 이성애보다 타산적 자기애로 결혼하게 된다. 조건을 보고 결혼을 하는 것은 조건결혼이다. 논리적으로 보면 친구관계를 조건보고 만나 사귀면 비즈니스 관계라 하듯이 부부관계도 조건보고 만나 결혼하면 비즈니스 관계라 하게 된다. 분명 사람은 노동력이나 성을 상품화하여 본인이 소유하고 거래하면 인간이 도구화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비즈니스 관계에서 적용된다. 이성애 관계에서 사람이 조건을 상품화하여 거래하는 관계는 단순한 비즈니스 관계일 뿐이다. 한국에서 부부가 서로에 대한 애정이 없어 타산적 범죄가 일어나는 것을 몇 번이나 목격했는지 모른다. 개인주의 체제는 자유롭기에 이른 결혼을 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한국은 저출산으로 국가가 소멸할 것이다.

 

 

둘째, 경제활동 둔화. 한국에서 체제에 해로운 것을 권장하는 것으로 발생하는 사회문제 중 하나가 바로 경제활동 둔화다. 경제활동 둔화는 수많은 문제를 일으켜 사회를 불행하게 하고 있다. 경제활동 인구수 감소로 시장이 죽는다. 자본주의 체제는 시장의 활성화로 유지되는 것을 고려하면 경제활동 인구수가 감소하는 경제활동 둔화는 사회 구조를 무너트리는 원인 중 하나라 할 수 있다. 사회 구조 유지를 목적으로 한다면 경제활동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경제활동 둔화 문제를 보며 다양한 원인을 지목한다.

하나, 일자리 부족. 노동자가 일할 수 있는 일자리가 부족하여 일을 할 수가 없어 경제활동이 둔화되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일자리가 부족한 것이 아니라 좋은 일자리가 부족한 것이다. 노동력 상품에 대한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는 좋은 일자리가 많았어야 했다.

, 일자리 편향. 노동자가 일할 수 있는 일자리가 있음에도 일자리를 가리기에 경제활동이 둔화되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한국은 선진국으로 고학력자들이 많은 상황이므로 고학력을 활용할 수 있는 일자리가 많았어야 했다.

, 일확천금. 주식이나 부동산으로 일확천금을 노리는 이들이 있었으나 코인의 등장으로 폭발적으로 늘어나게 된 것을 보며 일확천금을 노리는 이들로 경제활동이 둔화되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개인주의 체제는 이기적이어야 올바른 결과가 나와야 한다. 경제활동 자체가 즐거운 것이었다면 일확천금을 노려 설령 천금을 얻었다 하더라도 경제활동을 했을 것이다. 엄청난 부를 쌓아 올린 이가 계속 경제활동을 하는 것은 그 활동이 즐겁기 때문이다. 만약 경제활동으로 생산하는 행복을 누리고 경제활동으로 얻은 이윤으로 소비하는 행복을 누렸다면 경제활동이 둔화될 일은 없었을 것이다. 한국은 좋은 일자리가 부족하고 노동자가 행복하지 못하는 노동환경으로 경제활동 둔화가 나타났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좋은 일자리가 부족하고 노동자가 행복하지 못하는 노동환경이 나타났는가?

이것은 시대의 변화와 그에 따른 시장원리로 접근해야 한다. 개발도상국이었을 과거는 단순노동의 수요와 공급이 높고 복잡노동의 수요와 공급이 낮아서 균형이 맞았었다. 그러나 선진국이 된 현재는 단순노동의 수요는 낮아졌으나 공급은 많이 낮아졌고 복잡노동의 수요는 높아졌으나 공급은 많이 높아졌다. 고학력자의 복잡노동력 상품의 공급은 많은데 복잡노동력 상품의 수요는 적은 바람에 초과공급이 발생하여 노동력 상품을 구매할 수요자가 적어 좋은 일자리가 적고 내국인노동자의 단순노동력 상품의 공급이 줄어들자 외국인노동자의 단순노동력 상품의 공급이 늘어남에 따라 국내에 있는 전체 노동력 상품의 공급이 초과되어 노동력 상품의 가치가 폭락하게 됨에 따라 그에 따른 대우가 낮아져서 노동환경이 나쁘게 되었다. 정리하면 시대의 변화로 노동시장에서 수요와 공급의 균형이 깨지는 바람에 경제활동 둔화가 나타난 것이다. 이것의 해결방법은 간단하다. 고학력자의 복잡노동력 상품을 구매할 자본가가 늘어나면 된다. 많은 사람들이 창업을 해서 자본가가 되면 된다. 그러나 창업자의 수는 그리 늘어나지 못하고 있다. 대부분 고학력자의 목적은 대기업 노동자나 전문직이나 공무원이 되는 것이 목적이었다. 창업을 하는 사람도 복잡노동력 상품을 대량으로 구매할 수 있는 주식회사 같은 법인기업에 도전하는 사람의 수는 그다지 늘지 않았지만 단순노동력 상품을 소량으로 구매하는 자영업 같은 개인기업에 도전하는 사람은 굉장히 많았다. 특히 자영업은 거리의 수요보다 지나치게 늘어 특정 지역 내 특정 업종의 가게 수를 제한하거나 자발적 폐업을 지원해야 한다고 주장이 나올 정도다. 아마 택시 총량제에서 따온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택시 총량제는 성격이 다소 다르다. 특정 지역 내에 택시의 수가 지나치게 늘면 도로가 포화되어 길이 막히게 된다. 택시의 수입과 무관하게 대체로 사회에 해로운 점이 크다. 반면 자영업의 수가 늘면 늘수록 공급경쟁으로 인해 생산자는 불행할 수 있으나 소비자는 행복하게 된다. 자영업의 수입과 무관하게 대체로 단순한 시장의 방식으로 경쟁에서 승리하면 살아남고 패배하면 사라질 뿐이기에 대체로 사회에 해로운 점이 작다. 포화된 자영업은 규제로 접근할 것이 아니라 자영업이 늘어나는 근본적인 원인으로 접근해야 한다.

많은 고학력자들이 노동자가 되길 바라거나 창업자들이 자영업을 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창업 능력을 교육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창업은 사업을 처음부터 시작하는 것을 뜻한다. 새로운 사업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는데 시장을 선점한 기업이 있어 경쟁이 많은 레드오션과 시장에 아직 없거나 적어 경쟁이 적은 블루오션이 있다. 레드오션에서 새로운 창업자가 성공하는 것은 몹시 힘들다. 특히 자본이 적은 이들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그러나 블루오션에서 새로운 창업자가 성공하는 것은 가능하다. 자본이 적더라도 새로운 시장을 창출할 수 있다면 투자를 받아 충분히 가능하다. 블루오션으로 창업을 하려면 새로운 시장을 창출할 수 있는 창의력이 필수적이다. 그러나 한국 교육은 주입식과 문제풀이로 평가하는 것이 많아 창의력을 키우는 것이 몹시 어려웠다. 한국인은 새로운 시장을 만들 수 있는 창업 능력을 교육 받지 못한 것이다. 그러다 보니 레드오션에서 법인회사를 창업해봐야 망할 확률이 높고 블루오션에서 창업을 하려니 창의력이 없다. 그러니 노동자가 되거나 레드오션에서 리스크가 적은 자영업을 하게 되는 것이다. 외식업 프랜차이즈 브랜드가 9000개가 넘고 식당은 13만 개가 넘어섰다고 한다. 프랜차이즈 가맹점은 실상 프랜차이즈에 종속된 자치 권한과 책임이 있는 성과급 노동자와 그리 다르지 않다. 능력으로 접근한다면 이것을 창업으로 분류할 수는 없다. 경제 분석을 할 때는 겉으로 드러난 창업자와 노동자를 분류할 것이 아니라 개인의 능력으로 분류해야 한다. 그래야 경제정책이나 교육정책을 짤 때 도움이 된다. 자영업자가 많아 창업자를 늘려야 할 필요가 없다고 느낄지 모르나 법인기업을 창업할만한 창업 능력이 부족하거나 프랜차이즈 가맹점이 아니면 창업할 수 없는 창업 능력이 없는 경우가 많기에 새로운 시장에서 창출할 수 있는 법인기업 창업자를 늘려야 한다.

인간의 능력은 교육으로 길러진다. 한국 국민들 다수가 창업 능력이 아닌 취업 능력을 가진 것은 창업용 교육이 아닌 취업용 교육을 받아서다. 무언가를 새롭게 만들어서 어떤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닌 이미 만들어진 것을 신속하고 정확하게 푸는 것을 배우고 평가 받았기에 대부분 취업 능력을 가진 것이다. 그렇기에 많은 국민이 노동자나 자영업자가 된 것이다. 과거는 교육 불평등이 심각한 문제였으나 현재는 교육 목적 불평등이 심각한 문제다. 고학력자들조차 창업자가 아닌 대기업 노동자나 전문직이나 공무원이 되는 것이 목적이 되어버렸을 정도로 학업의 목적이 대부분 결정되어버렸다. 한국 교육에서 큰 꿈이 사라졌다.

한국 교육을 알기 위해서는 조선으로 거슬러 올라가봐야 한다. 과거 조선의 문과 과거 제도에서는 유교경전을 암기하고 이해하는 것을 평가 받거나 시와 같은 문예창작과 사회문제 대책 질문에 대한 답을 하는 것을 평가하여 줄을 세운 다음 관직을 나눠주었다. 다양한 방법으로 평가하였으나 낡은 유교의 가르침을 신앙과도 같이 따르며 평가기준으로 삼았기에 국가 발전에는 그다지 도움이 되지 못했다. 나를 닦는 노력을 하여 남을 감화시키자는 수기치인이란 이념과 고려보다 체계적인 관료제도가 있었음에도 국가 발전이 정체되었던 것은 아무리 노력해도 유교라는 틀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수기치인이라는 능력주의는 능력의 기준이 유교였기에 그 능력이 국가 발전에 도움이 되지 못했다. 한국으로 돌아와보자. 한국은 과거 조선과 마찬가지로 시험문제에 나올 내용을 암기하고 이해하는 것으로 평가를 받거나 수시와 같이 창업자가 되는 데는 도움이 되지 않는 방식으로 평가하여 줄을 세운 다음 진학이나 취업을 하게 하고 있다. 진학을 해서도 대부분 취업을 한다. 한국의 교육방식은 조선과 본질적으로 그다지 달라지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조선의 교육열이 한국에서도 재현되고 있다. 그럼에도 한국이 꾸준히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교육과 평가의 방식이 유교의 가르침이 아닌 선진국의 문명이었기 때문이다. 수기치인이라는 능력주의의 가르침과 기준이 유교였다가 선진국의 문명이 되자 선진국을 따라 성장할 수 있었다. 그렇게 해서 한국은 선진국이 되었다. 그러나 선진국이 된 지금 이제 배울 대상이 없어졌다. 선진국의 문명을 그대로 배우고 평가해도 선진국보다 성장할 수가 없게 되었다. 사회가 가야 할 방향을 잃고 정체되면서 점점 퇴락해가고 있다. 그럼에도 같은 교육과 기준으로 평가하고 가르치고 있다. 그런 와중에 옳고 그름이 정반대인 관념과 체제의 충돌 중 하나인 수직사회와 수평사회의 충돌로 교육이 점점 퇴락해가고 있다. 과거 수직사회의 교육은 교사가 학생을 욕설과 체벌로 때려가면서 배우게끔 강요했었기에 강제로 학력이 유지되었으나 현재 수평사회의 교육은 교사와 학생이 평등하기에 교육을 강요하지 않고 개인의 자유에 맡기기에 공부하지 않는 개인은 점차 학력이 낮아져만 가고 있다. 그럼에도 마땅한 대처 방안이 나오지 않고 과거의 것을 답습하여 강제로 교육해야 하는 것이 아니냐는 주장만 사회에서 공허하게 떠돌 뿐이다.

 

사회와 교육이 퇴락에서 벗어나 성장하기 위해서는 그대로 따라 배웠던 선진국의 문명에서 벗어나 새로운 길로 나아가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기존의 틀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리고 그런 틀에서 벗어나는 인간이 필요하다. 예전에는 사람과 사람이 토론을 하면 새로운 길로 가서 사회를 이롭게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었다. 예전에는 가야 할 길을 결정할 권력이 경쟁하면 새로운 길로 가서 사회를 이롭게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었다. 그러나 아니었다. 누군가 새로운 길로 안내하지 않는다면 같거나 비슷한 길을 계속 반복하며 맴돌기만 할 뿐이었다. 현기증이 날 정도로 길고 답답한 정체. 한국은 길을 가기 위한 기술은 꾸준히 발전했지만 길 자체는 집단주의 관념이란 길로 가며 권력을 주고 받았을 뿐이었다. 한국은 집단주의 체제에서 개인주의 체제로 바뀌는 천재지변에 가까운 사건이 있었음에도 아직까지도 집단주의 관념이란 지도를 들고 개인주의 체제라는 길을 걸으려 하니 제대로 된 길을 갈 수가 없었다. 때로는 경제적 빈곤을 부르는 늪지에 빠지거나 때로는 사회적 생존을 위협하는 절벽에 떨어지기도 했다. 그럼에도 낡은 지도를 경전처럼 여기며 잘못된 길로 나아가고 있다. 이제는 그 지도가 낡고 잘못되었다는 것을 인식하고 새로운 길을 안내할 사람을 따라가야 한다. 사람이 발로 걷는 길을 안내하는 사람을 가리켜 길잡이라 부른다면 사람이 지성으로 걷는 길을 안내하는 사람을 가리켜 사상가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내가 그런 사상가의 역할을 맡고 싶다. 사상가는 문장가도 학자가 정치가도 아니다. 사상가는 생각하는 사람이지 문장을 예쁘게 쓰는 사람도 학문을 연구하는 사람도 행동하는 사람도 아니다. 사상가의 생각을 예쁘게 쓰고 연구하고 행동하는 것은 다른 사람이 하면 된다.

새로운 길을 생각하게 된 계기는 간단하다. 내가 가진 나와 세상에 대한 의문은 사회의 지식과 지식이 안내하는 길로는 풀 수 없었다. 오히려 고정관념으로 방해만 될 뿐이었다. 그래서 사회의 지식을 확신하지 않고 그에 따른 고정관념을 버리고 무작정 생각부터 시작했다. 자아란 무엇인가? 주관과 객관은 무엇인가? 선과 악은 무엇인가? 교육이란 무엇인가? 사상이란 무엇인가? 그렇게 본질적인 것부터 시작하여 사회와 복지 같은 광범위적인 것까지 생각했다. 방식은 일반적인 것과 달랐다. 앞에 지식을 쌓고 뒤에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앞에 생각을 하고 뒤에 지식을 쌓아 정리했다. 나와 세상의 의문을 풀기 위해 사상서와 철학서를 훑어보았다. 그러나 보는 순간 깨달았다. 사상서나 철학서는 진리가 아니다. 나의 생각과 그들의 생각이 맞서 싸워 무엇이 바른지 결정해야 했다. 그런데 충분한 생각을 쌓지 않은 상태에서 사상서에 맞서는 것은 종이칼로 호랑이에 맞서는 것과 같을 정도로 무모한 짓이었다. 그대로 사상서와 철학서를 읽게 된다면 나는 패배하여 그들의 생각에 종속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무작정 생각했다. 그것은 광기의 나날이었다. 먹고 자고 놀고 싸는 것 등 삶의 모든 것이 생각하는 것을 중심으로 돌아갔다. 가사를 하는 시간을 아끼고 충분히 자는 것으로 생각을 정리하고 필요한 만큼 노는 것으로 발상에 도움을 받거나 현실도피로 마음을 안정하게 하여 정신건강을 유지했다. 그렇게 생각해서 쓴 글은 지식을 쌓지 않았기에 초라하고 무조건 생각만 하며 제대로 정리하지 않았기에 조잡했다. 그럼에도 생각을 했다. 시간이 부족했다. 어느 정도 길을 찾지 않은 상황에서 초입부의 지식을 쌓거나 정리하는 것으로 시간을 쓸 수 없었다. 다른 사람과 토론으로 성장할 수도 없었다. 인류는 집단주의 관념에 벗어나지 못하여 부의 분배기준이나 주관적인 이타심과 이기심으로 나눠 갈등하고 있었다. 한국은 유교적 도덕관념으로 개인의 자유권이 침해되는 것이 너무나도 당연하게 이루어지고 있을 정도로 자유주의에 대한 인식이 미비했다. 개인주의 체제에 살고 있는 사람들조차 본인의 체제가 어떤 성질을 가지고 있는지 파악하지 못하고 개인주의를 악으로 여기며 비판하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과 토론으로 성장하기에는 시간이 너무나도 오래 걸렸다. 그들에게 영향을 받아 같은 길을 반복해서도 안되었다. 아직 충분히 생각을 쌓지 않았을 무렵에 사상서와 철학서를 접했을 때와 같이 그대로 영향을 받다 보면 그들의 생각에 나의 생각이 왜곡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갖게 되었다. 그들의 생각은 세상이 보편적인 생각이었다. 세상과 다른 길을 찾기 위해서는 고독해야만 했다. 이런 사상서나 철학서를 섣불리 접하지 않고 보편적 생각에서 벗어나는 고독은 사상가의 길을 걷는 사람이 하면 되는 것으로 모든 인간이 할 필요는 없다. 고독한 상황에서 다른 사람을 설득할 수 있는 길을 찾기 위해 무작정 생각하는 수밖에 없었다. 도대체 나와 세상의 문제는 무엇이고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가? 어떤 주제를 정해 생각하고 글을 쓴다. 쓴 글의 주제와 관련된 지식을 접한다. 다시 생각하고 글을 쓴다. 다시 쓴 글의 주제와 관련된 지식을 접한다. 그것을 계속 반복하며 성장했다. 그렇게 하여 나의 문제와 세상의 문제의 원인을 찾았다. 나는 중학생 때 연상의 말에 의해 신체적 자유를 잃고 자유의지로 몸을 움직이지 못하는 것으로 나 자신에게 크게 실망하여 삶을 포기했었다. 수많은 생각을 하고 지식을 접하여 그 당시 신체적 자유를 잃고 자유의지로 몸을 움직이지 못했던 것은 장유유서에 세뇌되어 만들어진 관념 때문에 연상의 말에 저항할 수 없었기 때문임을 알게 되었다. 나는 과학과 종교의 가르침의 모순이나 부모와 교사의 가르침의 모순이나 독재자를 비판하면서 독재자를 옹호하는 것과 같은 세상의 수많은 모순으로 세상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렇게 세상이 모순으로 가득 차 있던 것은 옳고 그름이 정반대인 관념과 체제가 충돌했기 때문임을 알게 되었다. 그렇게 하여 나에 대한 의문과 세상에 대한 의문을 풀 수 있었다. 사회의 지식으로는 의문을 풀 수 없고 사상서와 철학서를 그대로 접하기에는 종속될 것이 두려워 무작정 생각했던 것이지만 이런 방식이 새로운 길로 갈 수 있는 방법이었다. 예를 들어보자.

사과 그림이 있다. 만약 20%만 보인다면 80%를 상상으로 채워야 하기에 그 사과는 새로울 수밖에 없다. 그러나 만약 80%가 보인다면 어떻겠는가? 나머지 20%만 상상으로 채워야 하기에 크게 새롭지 않을 수 있다. 100% 보인다면 새롭기가 어려울 것이다. 새롭게 하려고 하더라도 이미 100%를 보아버렸기 때문에 그것이 얽매일 수밖에 없다. 그와 같다. 나는 모르는 것을 상상으로 채우기 위해 세상의 진리를 기반으로 한 추론을 했다. 세상의 진리는 대부분 과학이 증명했다. 세상의 진리를 바탕으로 모르는 부분을 논리로 채웠다. 조금만 알고 있는 상황에서 상상을 통해 새로운 발상을 하더라도 부족한 부분을 논리로 채웠기에 그것은 성립될 수가 있었다. 그렇게 하여 나는 새로운 길로 갈 수 있었다. 이것은 딜레마다. 많이 아는 사람은 많이 알기에 지식과 관련된 관념이 고정되어 생각을 많이 해도 새로운 길을 떠올리기 어려웠고 적게 아는 사람은 적게 알기에 지식과 관련된 관념이 고정되지 않아 생각을 많이 하면 새로운 길을 떠올릴 수 있으나 지식에 관심이 없어서 적게 아는 것이므로 지식에 관련된 생각 또한 많이 하지 않게 되어 새로운 길을 떠올릴 수 없었다. 지식을 적게 알면서 많이 생각하는 사람이 아니면 이 딜레마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고학력자들이 창의적이지 못할 때가 있는데 그런 것은 그들이 너무 많이 알았기 때문이다. 너무 많이 알아서 아는 것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이것을 교육한다고 해보자.

학생에게 학생이 자세히는 모르는 주제를 던져주고 관련 글을 써보라고 해보자. 만약 아예 모른다면 사전적 정의 정도는 알려줘야 한다. 그러면 지식이 없으니까 당황하며 쓰기 어려워할 것이다. 그럼에도 써보라고 한다면 피상적으로 접했던 주제의 분야에 관련된 얕은 지식이나 사전적 정의에 알고 있는 다른 분야의 지식을 논리적으로 섞어 쓰게 된다. 사고의 영역이 주제의 분야에 한정되지 않고 다른 분야까지 확장되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서 이미 있는 지식과 다른 새로운 것이 나오게 된다. 물론 그러면 오류가 많을 확률이 높다. 그건 나중에 관련 지식을 접하여 정리하면 된다. 이것을 내가 썼던 방법으로 알아보도록 하자. 디지털 은행으로 오프라인 은행이 감소하고 있다는 정보를 접했다. 그걸 보고 무작정 은행에 대해 써보려고 했다. 그런데 나는 은행에 대해 잘 몰랐다. 그래도 은행의 성질은 몇 가지 알고 있었다. 그것으로 몇 가지 발상을 하고 관련 지식을 접한 후에 정리하여 글을 썼다. 글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은행은 신용을 중시했다. 사회는 개인정보보호가 강화되면서 타인의 개인정보를 알기 어려워 개인정보 신용이 낮은 상황이었다. 취업을 할 때 이력서나 자기소개서를 써도 취업자는 물론이고 인사담당자조차 그것을 거짓으로 보는 경향이 나타날 정도였다. 그 두 가지를 결합하자 개인정보 신용보관이란 결론이 나왔다. 은행이 개인정보에 은행의 신용을 새기고 보관하는 것이다. 그러면 창업자나 취업자는 꼭 필요한 개인정보만 은행의 신용을 새기고 보관하다 투자자나 인사담당자에게 보여주는 것으로 진실된 정보를 제공하고 그 외의 취업에 필요하지 않은 개인정보는 보호할 수 있었다. 투자자나 인사담당자는 개인의 정보를 침해하지 않으면서도 투자나 인사에 필요한 개인정보를 신용할 수 있었다. 개인정보 신용보관은 숫자로 이루어진 돈과 달리 디지털로는 어려웠기에 면접으로 개인정보를 신용할 수 있는지 판단해야 했다. 그것으로 오프라인 은행이 줄어드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고 보았다. 은행의 신용이란 적은 정보에서 다른 분야의 지식을 바탕으로 많은 생각을 하여 새로운 길을 떠올린 뒤에 논리적인 구조를 더해 새로운 길이 성립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보통 새로운 발상을 하려고 할 때 이것저것 자료를 잔뜩 모아 정보를 수집한 다음 거기서 뭔가를 떠올려보려고 할 것이다. 그러나 정보를 과잉수집 해버리면 정보로 인해 관념이 고정되어 새로운 발상을 떠올리기가 어려워진다. 그러므로 발상을 할 때에는 주제로 시작해 발상으로 넘어가 자료수집을 한 뒤에 정리를 해야 한다. 보편적인 발상과 자료수집의 순서도를 거꾸로 한다. 이미 알고 있는 것에 의존하면 새로운 것은 나오기가 어렵다. 발상단계에서 이미 있는 것을 발상할 경우 깔보기도 하는데 그러면 발상에 제한이 생기게 된다. 그런 것은 자신의 지식에 과한 의존을 하는 지식인이 할 법한 실수다. 지성인이라면 이미 있는 것이라도 스스로 생각한 것이라면 발상 자체는 존중해야 한다. 그게 시장에 나올 때 저작권을 고려하면 된다. 만약 이미 많은 정보를 알고 있는 상황이라면 대상의 본질이나 특성에만 초점을 맞춰 의도적으로 정보를 줄인 다음에 다른 분야의 지식을 바탕으로 많은 생각을 하여 발상을 한 다음에 자료수집을 하여 논리적으로 정리하면 된다. 물론 이미 알고 있기 때문에 관념이 고정되어 어려울 수는 있다. 창작자라면 관념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럼 창업 능력을 키워주는 교육에 대해 알아보자.

 

한국 교육은 기본적으로 대학에 입학하는 전형인 입시를 목적으로 한다. 교사와 학생은 대학 입학을 목적으로 가르치고 배운다. 교육 평가 기준은 다양해졌음에도 교육 목적은 같았기에 교사나 학생의 교육이나 학습 목적도 그리 달라지지 않았다. 대학에 입학하기 위한 방법은 정시와 수시와 편입이 있다. 정시는 수학능력시험으로 평가하고 수시는 학생부교과전형과 학생부종합전형과 논술위주전형과 특기자전형으로 나눠 다양하게 평가하고 있지만 결국 입시가 목적이기에 교육에서는 입시에 도움이 되는 위주로만 가르치고 있다. 그런 탓에 어떤 학생은 입시와 관계 없는 지식을 배워야 하는 이유를 모르겠다며 화를 내기도 했다. 지적 호기심을 가진 인간이 아닌 입시용 인간이 된 것이다. 대학에 입학하는 사람이 늘어남에 따라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변별력을 명분으로 과하게 복잡한 응용문제를 시험에 내고 있다. 세계 최상위 대학의 학생도 풀기 어려울 정도로 만드는 일도 있었다. 그런데 아는 것으로 관념이 고정되고 관념이 고정되는 것으로 새로운 발상을 하기 어렵다는 것을 고려해보면 과하게 복잡한 응용문제를 문제집이나 모의고사 등으로 오랫동안 반복적으로 풀게 하는 것은 문제와 관련된 분야의 창의력을 말살하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시험은 단순한 지식을 암기하는 것만이 아니라 문제를 푸는 속도가 필요하기에 반사적으로 문제를 풀 수 있을 정도로 뇌에 각인을 시켜야 해야 한다. 그럴수록 관념이 강하게 고정되면서 관념에서 벗어나 새로운 생각을 하기가 어려워진다. 지식을 아는 것과 지식을 암기하여 관념이 고정되는 것은 별개다. 지식은 알수록 힘이 되지만 암기하여 지식이 관념으로 고정될수록 창의력은 낮아진다. 논리적으로 접근해보자. 인간은 관념에 의해 생각하고 행동한다. 인간은 고정관념에 의해 사고의 영역이 좁아지게 된다. 인간은 관념이 고정될수록 사고의 영역이 좁아져 새롭게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인 창의력이 낮아지게 된다. 시험문제를 반복적으로 풀면 풀수록 관념이 고정된다. 시험문제는 반복적으로 풀면 풀수록 관념이 고정되어 창의력이 낮아진다. 한국 영재들이 성장하면서 우수함을 잃게 되는데 하나는 학습능력이 빠를 때에는 학습능력만 빠르다고 좋은 결과가 나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고 둘은 창의력이 높은 것은 창의력을 교육에 의해 잃어버리게 때문이다. 이 시간에도 실시간으로 한국 학생들은 반복적인 문제풀이로 창의력을 잃어가고 있다. 한국 교육은 처음부터 블루오션 창업과 거리가 멀었다.

이러다 보니 고학력자 노동자는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반면 고학력자 노동자의 복잡노동력 상품을 구매할 자본가의 수는 그리 늘어나지 못했던 것이다. 학생들이 창업 능력을 키우지 못했는데 어떻게 법인기업 창업자가 늘어날 수 있었겠는가? 만약 지금 고학력 노동자들이 창업 능력을 키웠다면 우수한 창업자가 되어 세계를 선도하는 대기업을 경영했을 수도 있다. 자본이 없기에 어렵다는 말을 할 수 있는데 요즘은 자본금이 거의 들어가지 않는 소프트웨어로 창업을 하여 자산을 축적한 다음 하드웨어 생산을 하는 자본가가 많다. 그것이 아니더라도 정말 뛰어난 사람은 무일푼이라도 투자자에게 투자를 받아 창업을 하여 투자자본으로 자산을 축적한 다음 자기자본으로 이익을 얻는 자본가가 될 수 있다. 블루오션 창업을 하게 되면 기존 기업의 견제도 덜 받으면서 성장할 수 있을 것이다. 기술이 필요하면 대학과 연구소와 협업을 하면 된다. 기존 기업이 분야를 잠식하여 새로운 시장이 나오지 못할 거라 생각할 수 있는데 기술의 발전도를 고려하면 그렇지가 않다. 기술은 끝없이 발전하고 있는데 산업의 변화는 기술에 비해 상대적으로 작다. 그것이 의미하는 것은 발전된 기술을 활용한 새로운 시장이 나올 수 있다는 것이다. 새로운 시장에서 새로운 상품은 기술을 만드는 과학자와 기술을 활용하는 창업자가 둘 다 있어야 나온다.

이에 따라 한국 교육은 입시를 목적으로 한 교육과 창작을 목적으로 한 교육과 창업을 목적으로 한 교육을 나눈 교육과정을 도입해야 한다. 입시교육과 창작교육과 창업교육은 암기와 창의의 비율을 조정하는 것으로 구분할 수 있다. 암기와 창의는 서로가 반비례하여 암기를 늘릴수록 관념이 고정되어 창의력이 떨어지고 암기를 줄일수록 관념이 고정되지 않아 창의력이 높아진다. 그렇기에 암기와 창의의 비율을 조정하여 암기의 비율이 높으면 문제풀이에 능숙해지므로 공정성이 중시되는 입시교육에 적합할 것이고 창의의 비율이 높으면 문제창작 및 해결에 능숙해지므로 창의성이 중시되는 창작교육에 적합할 것이며 암기와 창의의 비율이 비슷하면 문제풀이와 문제해결을 둘 다 할 수 있으므로 시장성이 중시되는 창업교육에 적합할 것이다. 이렇게 비율을 나눠 세 가지 교육과정을 도입할 수 있다. 자세히 알아보자.

하나, 암기 비율이 높은 것. 현행 교육의 정시와 수시 중에서는 학생부교과전형에 해당할 것이다. 지금까지와 그다지 다르지 않다. 암기하고 이해하여 문제를 푸는 능력은 만들어진 체계에 빠르게 적응하여 체계가 구축된 기업에서 현상유지를 하는데 적합한 능력이 된다. 학문에 관심이 없어 기술을 익히거나 운동을 하는 경우에도 필요한 지식을 암기하고 이해하면 되기에 교육과정에 따라 입시교육 중 하나에 포함되게 된다.

, 창의의 비율이 높은 것. 창작 능력에 해당할 것이다. 인간은 나이를 먹을수록 관념이 고정되고 관념이 고정될수록 창의력이 낮아지므로 창의력이 필요한 인간은 특정 연령에서 나이를 고정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인간의 관념을 만들거나 다루는 사상과 철학은 보통 기초적인 관념이 고정되는 14세 전후인 자아형성 시기에서 영원히 자아형성을 하며 살아가야 기초적인 관념이 고정되지 않아 새로운 관념을 만들거나 다룰 수 있다. 자아형성이 완료되면 나라는 존재가 고정된다. 그러나 사상가는 자아형성을 완료하지 않아 나라는 존재가 고정되지 않기에 매번 자기존재증명으로 스스로의 자아를 유지해야 한다. 나는 누구인가? 사상가는 영원히 자아형성 시기에서 시간을 멈춘 채 자기존재증명으로 현재를 살아가며 미래를 바라보게 된다. 심리와 사상은 영역이 다르다. 심리는 인간의 보편적 관념에서 나타나는 심리를 연구한다면 사상은 인간의 기초적인 관념을 만들거나 다룬다. 인간의 상품과 작품과 기술을 만드는 개발자나 예술가나 연구자는 보통 20세 전후인 지성인이 되는 시기에서 영원히 자아완성을 하지 않으며 해당 분야의 관념을 고정시키지 않고 살아가야 구체적인 관념이 고정되지 않아 새로운 것을 만들 수 있다. 인간은 기억으로 자아가 형성되고 고정된 관념으로 자아가 유지된다. 관념을 고정시키지 않을수록 자아가 불안정하여 혼란을 겪을 수 있으나 관념이 고정되지 않은 만큼 창의력은 높게 된다. 창작하고 통찰하여 문제를 만들고 해결하는 능력은 새로운 체계를 만들 수가 있어 새로운 체계를 개척하는 기업에서 미래개척을 하는데 적합한 능력이 된다.

, 암기와 창의의 비율이 비슷할 것. 창업 능력에 해당할 것이다. 창업에는 암기와 창의가 둘 다 필요하다. 암기한 지식으로 신속하고 정확하게 회사를 경영하고 창의력으로 신선하고 새로운 시장을 창출하여 상품을 판다. 암기의 비율이 높게 되면 문제풀이 능력은 뛰어나나 문제해결 능력은 떨어져 시험으로 직업을 얻을 수 있는 취업은 할 수 있지만 새로운 시장을 창출한 곳에서 상품을 파는 블루오션 창업은 하기가 어렵다. 창의력 비율이 높게 되면 문제해결 능력은 뛰어나나 문제풀이 능력은 떨어져 새로운 시장을 창출한 곳에서 상품을 파는 것을 기획할 수는 있으나 기업을 경영하기는 어렵다. 창업 능력을 키우기 위해서는 암기와 창의의 비율을 비슷하게 맞춰야 할 것이다. 교육과정에 따른 암기와 창의의 비율에 대해 알아보자.

암기의 비율이 높은 입시교육은 학문의 기초와 응용을 암기한 것을 시험문제를 풀게 하여 평가하고 창의의 비율이 높은 창작교육은 학문의 기초와 응용을 만들어 과제를 제출하게 하여 평가하고 암기와 창의의 비율이 비슷한 창업교육은 학문의 기초는 암기한 것을 시험문제로 풀게 하여 평가하고 학문의 응용은 만든 것을 과제로 제출하게 하여 평가한다. 창업교육의 예로 간단히 알아보자. 가령 수학을 배운다고 하자. 그러면 기초 수학은 수학 수식을 암기하거나 이해한 뒤 시험문제를 풀게 한 것을 평가하고 응용 수학은 암기한 수학 수식을 바탕으로 수학 문제를 만들거나 물리나 건축 같은 다른 분야와 접목하여 응용한 문제를 만들거나 실제 만들어보는 것을 평가한다. 기초는 기억하고 응용은 생각한다. 생각한 응용에서 생긴 오류는 만든 다음 지식을 접하여 정리한다. 이러면 암기와 창의의 비율이 비슷해질 것이다.

정리하겠다. 공정성이 중시되어 시험문제를 푸는 입시에서는 암기의 비율이 높아야 할 것이고 창의성이 중시되어 창작을 해야 하는 사상이나 개발이나 예술이나 연구에서는 창의력 비율이 높아야 할 것이고 시장성이 중시되어 기업을 경영하고 새로운 시장을 창출하여 상품을 공급해야 하는 창업에서는 암기와 창의의 비율이 비슷해야 할 것이다. 무언가 풀면서 성장한 인간과 무언가 만들면서 성장한 인간의 능력은 능력의 계통이 전혀 달라지게 된다. 국민들이 다양한 능력을 보유하게 되면서 비슷한 특성을 가진 노동력 상품의 과잉공급을 막아 노동시장의 수요와 공급이 순조롭게 되는 것으로 경제활동을 활성화시킬 수 있을 것이다. 분명 문제풀이로 평가하는 것은 공정한 평가를 하기 쉽기에 개인의 행복이 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으로 한국은 경제활동이 둔화되고 있으므로 사회에 해로운 행복이다. 이제 한국은 암기와 창의의 반비례성을 고려하여 다소 어렵더라도 다양한 평가기준을 도입하여 평가하는 것으로 개인이 행복해야 한다. 그것이야말로 한국을 경제활성화로 풍요롭게 만드는 사회에 이로운 행복이다. 잠시 기초학력에 대한 의견을 내겠다.

한국에서 기초학력이 낮아지는 까닭은 크게 두 가지 있다. 하나는 개인주의 체제에 맞게 학생 스스로 공부하는 교육과정을 정립하지 못한 것에 있고 둘은 기초학력 평가기준이 암기형 교육에 맞춰져 있기 때문이다. 자세히 알아보자.

하나, 스스로 공부하는 학생. 과거에는 강제로 공부하게 하여 기초학력을 높게 만들었지만 이제는 강제로 공부하게 할 수 없기에 스스로 공부하지 않는 학생에 의해 기초학력이 낮아지게 된다. 모든 학생은 스스로 공부할 수 있게 해야 한다. 인간의 행동원리는 교육으로 조정할 수 있어 학습하고자 하는 욕구를 교육으로 설계하여 행동원리로 만들 수 있다. 인공지능을 비유로 하면 인공지능의 알고리즘을 설계하면 인공지능이 알아서 학습하여 성장하는 것과 같다. 인간은 인공지능과 달리 육체와 정신을 유지해야 하기에 그에 따른 시간분배를 고려하여 설계를 해야 한다. 스스로 학습하고 나면 육체와 정신을 유지하기 위한 충분한 수면과 여가를 해야 학습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없어 스스로 학습을 할 수 있게 된다. 지금과 같이 수면과 여가를 고려하지 않고 무작정 학습을 하길 바란다면 육체와 정신이 유지되지 못하여 망가지고 그 망가짐에 의해 학습을 부정적으로 여겨 스스로 학습하지 않게 된다. 학생이 스스로 학습하게 하기 위해서는 스스로 학습할 수 있도록 학습의 욕구를 느끼게끔 설계한 교육을 하고 학습과 수면과 여가의 비율을 정교하게 맞춰야 할 것이다. 그 비율은 학생마다 다르고 과목마다 다를 수 있으므로 학생 개인이 스스로 판단할 수 있어야 한다.

, 평가기준. 기초학력 평가 기준을 암기형 교육을 하던 때와 같이 점수로 구분하여 낮은 점수면 기초학력 미달로 간주하여 기초학력이 낮아져 보이게 된다. 국어와 수학과 과학 외의 과목은 반드시 필요한 것이 아니기에 기초가 아니다. 국어는 의사소통을 위한 필수적인 과목이고 수학과 과학은 대부분 진리여서 기초로 인식하고 암기하더라도 괜찮다. 그 외의 상식처럼 느껴지는 것은 시대마다 달라지게 된다. 낡은 한자어를 모른다고 기초학력이 낮은 것이 아니다. 모르는 것은 자랑하는 것은 보기 안 좋지만 그렇다고 해서 기초가 아닌 것을 기초라 할 수는 없다. 기초학력 평가 기준을 상대평가가 아닌 절대평가로 하여 기초의 기준을 최소화하면 될 것이라 생각한다. 그 뒤에 초등학생 때부터 학생의 특성에 맞게 입시교육과 창작교육과 창업교육을 나눠서 하면 된다고 본다.

 

한국 교육은 과제도 체제에 맞게끔 바꿔야 한다. 한국은 자본주의 체제인 만큼 자본주의에 적응할 수 있는 자본주의식 교육이 필요하다. 지금 현행 교육은 자본주의식 교육이 아니기에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앞서 설명한 세 계통의 교육구분은 교육의 방향을 말한다면 자본주의식 교육은 교육의 방식을 말한다. 조별과제를 생각해보자. 조별과제는 분명 과제의 가치가 다르고 과제 기여도도 학생마다 다르다. 그럼에도 교사의 평가로 과제에 점수를 매기고 모든 조원이 같은 점수를 받는다. 교사 개인의 평가에 의존하기에 객관성이 떨어질 수 있고 모든 조원이 같은 점수를 받기에 참여율 낮아질 수 있다. 이런 과제의 특성으로 아무도 과제를 하지 않아 조장 혼자서 힘들게 하거나 포기하기도 하고, 어떤 조장은 과제를 혼자서 하는 대신 조원에게 금전적 대가를 요구하기도 한다. 이러니 과제 평가를 제대로 할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러므로 과제를 제대로 평가하기 위해서는 시장경제와 같이 과제를 사고 파는 과정을 도입해야 한다. 선거와 시장은 개인주의 체제의 꽃이다. 조별과제와 같은 주관적 판단이 들어갈 수 있는 것은 시장원리가 보다 정확하게 평가한다. 그렇기에 그런 것과 비슷한 방식을 도입하는 것이다. 그 과정에 대해 알아보자.

교육부에서 분기마다 학교의 특성을 고려하여 선정한 여러 주제에 관한 과제를 사겠다고 전달하면서 그 과제를 구매할 수 있는 점수를 선지불한다. 교육부가 지급하는 점수는 학생의 수마다 달라진다. 가령 명당 50점을 기준으로 20명이면 1000점을 지불한다. 점수를 지불 받은 학교는 과제를 담당할 수업교사들에게 분배한다. 수업교사들은 학생들에게 특정 주제에 대한 과제를 사겠다고 전달한다. 학생은 네 명이 모여 한 조를 이루며 분기마다 한 명씩 조장을 맡는 것으로 모든 학생이 조장을 경험할 수 있도록 한다. 내부거래를 막기 위해 조의 구성은 매번 달라지게 한다. 조장의 역할은 과제기획과 총괄을 맡고 조원의 역할은 세부기획과 자료조사와 내용작성과 조별발표 등으로 나눠 맡는다. 조장은 조원들 앞에서 과제기획서를 발표하여 조원의 능력을 구매하겠다고 한다. 조원은 본인의 능력을 포장하여 임대 상품화한 후 본인의 능력을 비싸게 구매하겠다는 조장에게 판다. 조장과 조원은 협상을 하여 맡을 역할과 그에 따른 점수 지불 비율을 정한다. 가령 조장은 세부기획과 자료조사를 맡은 조원에게 과제 판매 점수의 30%를 지불하고 발표하는 조원에게는 25%를 지불하겠다고 계약을 맺는다. 조별과제가 완성되면 과제를 상품화하여 보다 비싸게 사주는 수업교사들에게 판다. 수업교사들은 학교에 받은 점수를 모두 활용하여 구매한다. 수업교사마다 과제의 가치를 다르게 평가하여 가치가 높다 판단되는 과제를 구매한다. 과제를 판매한 점수는 조장이 조원과 계약에 따라 지불된다. 계약내용 준수 여부에 따라 지불하는 점수는 달라질 수 있다. 가령 조원이 자료조사를 하겠다고 했는데 그 조사가 미흡하여 조장이나 다른 조원이 추가조사를 했다면 계약 불이행으로 계약보다 낮은 점수를 지불할 수 있다. 가령 조원이 과제발표를 하겠다고 했는데 그 발표가 우수하여 교사가 과제를 비싸게 구매했다면 추가 점수를 지불할 수 있다. 조장이 과제를 팔아 점수를 벌어오면 조원은 계약 외 추가수당을 위해 자기가치를 증명해야 한다. 이 과정이 공정하게 이루어지는지를 담임교사가 조사한다. 수업교사들이 구매한 과제를 교육부에 판다. 교육부는 구매한 과제의 가치를 평가하여 선지불한 점수보다 더 가치가 높다고 판단되면 다음 특정 주제에 대한 과제에 선지불할 점수를 높이고, 가치가 없다고 판단되면 선지불할 점수를 낮춘다. 만약 판매한 과제의 총합 가치가 선지불 받은 점수보다 높다면 이후 더 많은 점수를 선지불 받아 수업교사는 보다 많은 점수로 학생들의 과제를 비싸게 살 수 있고 학생들은 비싸게 팔아 보유 점수를 늘릴 수 있다. 교육부는 수업교사들이 평가한 과제의 가치와 교육부가 평가한 과제의 가치가 지나치게 다르면 해당 수업교사의 평가를 낮춘다. 그렇게 하여 수업교사들이 공정하게 평가할 수 있도록 유도한다. 이 과정을 감사원이 감시하여 공정한지 확인한다. 교육부는 구매한 과제 중 우수한 것을 가정과 대학과 기업 등에 전달하여 홍보한다.

이 과정에 있는 모든 역할은 실제 자본주의와 유사할 것이다. 교육부와 수업교사들의 관계는 원청과 하청이 될 수 있고 수업교사와 학생의 관계는 소비자와 자본가와 노동자가 될 수 있고 조장과 조원의 관계는 자본가와 노동자가 될 수 있다. 담임교사는 공정거래위원이 될 수 있다. 이렇게 자본주의 체제를 미리 경험해보는 것으로 모든 학생은 기획이나 조사나 발표를 통한 과제 상품화와 영업 능력을 키우고 교사와 조장과 조원의 협상과 거래와 계약을 통해 협상과 거래와 계약 능력을 키우면서 전반적인 공정거래에 대한 이해를 통해 창업이나 취업을 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조장은 과제를 파는 경험과 학생의 능력 임대 상품을 사는 경험을 통해 창업을 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다. 창업에 적성이 맞는 학생은 창업자가 되어 새로운 시장을 창출하여 새로운 상품을 공급하는 것으로 소비자를 행복하게 하고 고학력자의 복잡노동력 상품을 구매하여 노동자를 행복하게 하라 것이다. 단순노동 일자리는 이제 인공지능이나 로봇으로 대체되기에 대부분 학생이 고학력자가 되어야 한다. 단순노동 일자리를 늘리는 것은 산업혁명 시대에 마부를 늘리는 것과 같다. 대체 전까지는 외국인노동자로 대처하면 된다. 기술의 발달로 복잡노동 일자리까지 불필요하기 전까지는 복잡노동 일자리를 늘려야 한다. 조원은 과제에 필요한 학생 능력 임대 상품을 파는 경험을 통해 취업을 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다. 자본주의 체제에서 노동력 상품의 가치는 수요와 상품 소유자인 노동자의 영업과 협상 능력에 따라 달라진다. 그럼에도 대부분 그런 방법을 배운 적이 없기에 노동력 상품 거래를 할 때 자본가의 일방적인 판단이나 노조에 의존하게 된다. 개인주의 체제에서는 본인의 가치를 증명하는 방법을 배워야 자본가에 이용당하지 않거나 노조라는 집단주의 체제에 의존하지 않을 수 있다. 이제는 본인의 가치를 증명할 근거를 만들고 그에 대한 체계적인 논리로 주장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경제활동 둔화에는 자본주의 체제에 필요한 능력부재가 만들기도 했다.

 

한국은 경제활동을 활성화하기 위해 노동자가 일할 때 불행할 수 있는 원인을 제거해야 한다. 노동의 본질로 접근하여 그 외의 것이 노동자를 불행하게 한다면 제거한다. 노동은 사람이 생활에 필요한 물자를 얻기 위하여 육체적 및 정신적 노력을 들이는 행위를 뜻한다. 시장경제의 노동은 보통 시장에 공급할 상품과 서비스를 생산하는 것이다. 생산이 노동의 본질이다. 그렇다면 생산 외의 것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게 된다. 그에 대해 알아보자.

하나, 수평사회. 갑질이나 꼰대질은 집단주의 관념에 의해 연령이나 지위로 차례를 정하여 지키는 것이 바르다 교육 받은 이들이 다른 노동자에게 연령이나 지위로 부당한 행위를 강요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런 갑질이나 꼰대질은 행하는 사람은 행복할지 몰라도 다른 노동자를 불행하게 만들고 노동력 상품의 생산성을 떨구어 사회에 해로운 행복이다. 갑질이나 꼰대질을 하지 않는 개인주의 관념으로 사람이 행복한 것이 다른 노동자를 불행하지 않게 하여 생산성을 떨구지 않는 것이 사회에 이로운 행복이다. 그런 점을 고려하여 많은 기업에서 갑질이나 꼰대질이 없다고 말하며 수평문화를 받아드렸다는 식으로 홍보하고 있다.

, 고정되지 않은 노동. 고정된 노동시간이나 노동기간이나 노동장소는 집단주의 관념에 의해 노동자를 자본가에 종속되는 농노와도 같은 존재로 여겨왔기에 있던 낡은 인식으로 나타난다. 생산성만 유지될 수 있다면 반드시 09:00부터 18:00까지 일하는 노동시간을 준수할 이유가 없고 주5일제라는 노동기간을 유지할 이유가 없고 기업이라는 노동장소에서 일해야 할 이유가 없다. 극단적으로 노동자가 2주간 쉬지 않고 일하고 2주간 쉬어도 결과가 나오면 된다. 유연하지 못한 노동환경은 낡은 관념을 가지니 이들에게는 행복이 될 수 있으나 노동자는 행복하게 하지 못하기에 사회에 이로운 행복이라 할 수 없다. 생산성만 유지되면 자유로운 노동환경은 노동자를 행복하게 하여 사회에 이로운 행복이다. 그런 점을 고려하여 많은 기업에서 생산성만 유지된다면 고정되지 않은 노동을 할 수 있도록 지원하고 있다. 일부 기업에서는 생산성만 유지된다면 주5일제가 아닌 주4일제로 일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영국에서 노동자가 주5일제에서의 생산성이 주4일제에서도 유지된다면 임금 또한 유지시키는 조건으로 실험하고 있다고 한다. 일부 기업에서는 생산성만 유지된다면 화상회의나 메타버스로 집에서 일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특히 회사나 집이나 큰 차이가 없는 IT기업에서 주로 하고 있다.

, 역할수행 및 기여도에 따른 보상체계. 기업의 보상체계는 집단주의 관념에 의해 연공서열로 특별히 하는 일이 달라지지 않거나 기여도나 생산성이 높아지지 않더라도 시간이 흐르면 자연스럽게 보상이 늘어나는 체계를 갖고 있는 경우가 많다. 이런 연공서열은 향상심이 없어 능력을 키울 생각이 없는 사람은 행복할지 몰라도 향상심이 있어 능력을 키울 사람에게는 능력을 키워 하는 일이 달라지거나 기여도나 생산성이 높아져도 충분한 보상을 받을 수 없기에 불행하게 하고 노동력 상품의 생산성을 떨구어 사회에 해로운 행복이다. 철저하게 직무 같은 역할의 수행과 생산성과 기여도에 따라 그에 대응하는 마땅한 보상을 얻도록 하여 능력이 있는 노동자를 행복하게 하고 노동력 상품의 생산성을 떨구지 않는 것이 사회에 이로운 행복이다. 그런 점을 고려하여 정부는 공무원 연공서열을 폐지하고 능력이 있으면 승진할 수 있는 제도를 마련하고 있고 한국경영자총협회도 기업이 외국 기업의 연공서열 폐지에 주목해야 한다며 말을 하고 있다. 이런 것 외에도 노동자가 일할 때 행복하다면 노동자들이 경제활동을 꺼려하지 않아 경제활동이 활성화될 수 있을 것이다. 정부는 사회에 이로운 노동자를 행복하게 하는 기업에 특정 혜택을 지급하는 것이 타당하다 본다.

 

 

셋째, 불공정경쟁. 한국에서 체제에 해로운 것을 권장하는 것으로 발생하는 사회문제 중 하나가 바로 불공정경쟁이다. 불공정경쟁은 수많은 문제를 일으켜 사회를 불행하게 하고 있다. 개인주의 체제에서 바른 것은 이기주의로 이기적이어야 올바른 결과가 나오는 체제다. 그러나 인간의 이기심은 서로 충돌하여 경쟁이나 분쟁을 만들 수 있는데 거기서 차례를 정하는 것이 바로 공정이다. 경쟁에서 공정하지 않으면 승자는 정당하지 않기에 불만이 생겨 불행하고 패자는 결과를 납득하지 않게 되는 것으로 불만이 생겨 불행하다. 개인주의 체제에서 공정성이 강조되는 것은 모든 개인이 자유롭게 이기적으로 행동하는 체제기 때문에 서로가 납득할 수 있는 공정성이란 기준이 있어야 분쟁을 줄여 올바른 결과를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개인주의 체제에서 개인의 이기심을 바르게 하는 것이 공정이라는 것을 고려하면 불공정경쟁이야말로 체제의 정당성을 파괴하는 원인이라 할 수 있다. 사회 구조 유지를 목적으로 한다면 개인주의 체제가 바르게 성립될 수 있도록 해결해야 할 문제가 바로 불공정경쟁이다. 많은 사람들이 불공정경쟁 문제를 보며 다양한 원인을 지목한다.

하나, 능력적 원인. 모든 인간이 같은 능력을 갖고 있지 않기에 불공정한 경쟁을 하고 있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공정의 뜻이 공평하고 올바른 것임을 고려하면 능력의 차이로 발생하는 차별은 불공정이 아니라 공정이라 할 수 있다. 올바르다는 것은 기준에 따라 달라지므로 개인주의 체제를 기준으로 올바름을 정해야 한다. 개인주의 체제의 올바름은 모든 개인이 자유롭게 이기적일 수 있는 것을 말한다. 모든 개인이 자유롭게 이기적으로 주장하기에 개개인의 능력의 차이가 있더라도 누군가를 위해 특혜를 주는 편향된 기준은 용납할 수 없다. 그것이 권력이든 재력이든 능력이든 말이다. 능력이 부족하다 하여 특혜를 주는 것이야말로 불공정이다. 그러므로 개인의 특성과 무관한 가치중립적인 기준이 공정하다 할 수 있다. 역할주의에서는 역할수행과 기여도를 기준으로 한 것이 공정하다 여기고 있다.

, 경제적 원인. 자산의 차이로 불공정한 경쟁을 하고 있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분명 자산의 차이로 기회의 평등이 이루어지지 않을 수가 있다. 그러나 자산보다는 관념의 차이가 더 큰 영향을 끼친다. 많은 사람들이 인터넷으로 지식을 쌓을 수 있음에도 게임이나 드라마 같은 취미에 몰두하고 있는 것을 생각해보자. 환경 속에서 갖게 된 관념의 차이로 학습동기가 달라진다. 암기와 창의가 반비례하는 것을 생각해보자. 환경 속에서 갖게 된 관념의 차이로 가진 능력이 달라진다. 자산은 좋은 환경을 만들 수단은 되나 절대적인 것이 아니다. 가정교육이나 공교육으로 갖게 되는 관념이 개인의 능력에 더 큰 영향을 끼친다. 이해를 돕기 위해 비유하면 하드웨어 성능이 좋은 컴퓨터라도 소프트웨어 프로그래밍이 잘못되면 성능이 좋지 못한 것과 같다. 인간의 재능은 바른 교육으로 바른 관념이 잡혀야 비로소 뛰어난 능력이 된다. 보통 부유한 가정에서 자라난 이들이 바른 교육으로 바른 관념을 갖게 될 확률이 높기에 자산으로 뛰어난 능력이 개발된다고 생각할 수 있으나 부유하지 않더라도 뛰어난 능력을 개발할 수 있기에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경제적 원인이라기보다는 교육적 원인이라고 보는 것이 보다 적합하다. 교육적 원인이므로 공교육과 장학금 제도를 발전시키면 된다.

, 관계적 원인. 인간관계의 차이로 불공정한 경쟁을 하고 있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분명 인간관계의 차이로 기회의 평등이 이루저지지 않을 수는 있다. 인맥에게 우선적으로 기회를 주며 채용하는 것을 보면 그렇다. 그러나 그런 인간관계로 인한 특혜는 집단주의 관념이 원인이라 할 수 있다. 집단의 이익을 위하는 것이 바르다 여겨 혈연이나 학연이나 지연에게 특혜를 주는 바람에 나타난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개인주의 관념을 갖고 있다면 모든 개인이 자유롭게 이기적으로 경쟁하는 것을 바르게 여길 것이므로 인맥에게 특혜를 주는 일이 없었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인간관계로 불공정함이 나타나지 않는다. 인간관계의 불공정함은 집단주의 관념으로 비롯된 것이기에 본질적인 원인은 관계적 원인이라기보다 관념적 원인이라 보는 것이 보다 적합하다. 정리하면 경제적 원인이나 관계적 원인 둘 다 관념에 의해 불공정경쟁이 나타나게 되었다고 봐야 한다. 공정경쟁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자.

인간은 본인의 바람을 실현할 때 행복하다. 인간의 바람은 체제마다 달라진다. 집단주의 체제에서는 모든 개인이 집단의 바람을 갖도록 강제한다. 그래서 집단의 바람과 개인의 바람이 일치할 때에는 행복할 수 있으나 일치하지 않을 때에는 개인의 바람을 실현할 수 없어 불행하게 된다. 집단의 권력이 소수에 집중될수록 소수의 권력자의 바람이 집단의 바람이 되어 다수의 개인이 불행하게 될 확률이 높아진다. 집단주의 체제에서는 그런 불행을 막기 위해 집단의 바람을 개인의 바람이라 세뇌하고 있으나 분명하게 바르지 않고 한계가 있다. 개인주의 체제에서는 모든 개인이 자유롭게 개인의 바람을 추구한다. 모든 개인이 자유롭게 이기적으로 바라는 것을 위한다. 그렇기에 집단주의보다 많은 인간이 행복할 수 있다. 그런데 그러다 보면 같은 것을 바라는 것으로 목적이 충돌하여 서로 이기거나 앞서거나 더 큰 이익을 얻으려고 다툴 수 있다. 그런 다툼을 가리켜 경쟁이라 한다. 집단주의 체제에서는 집단의 이익을 위해 집단의 바람으로 결정되기에 경쟁이 적거나 없을 수 있지만 개인주의 체제에서는 개인의 이익을 위해 개인의 바람으로 결정되기에 반드시 경쟁이 있게 된다. 그런 경쟁을 하게 되면 승자와 패자가 생기게 된다. 승자는 행복하나 패자는 불행하다. 패자가 불행하기에 경쟁을 없애자는 주장이 나오기도 한다. 그러나 그러면 모두가 바람을 실현하지 못하거나 바람을 실현할 권리를 권력자가 정해서 주게 된다. 패배로 인한 불행을 없애고자 경쟁을 없애면 공멸하거나 집단주의로 퇴보하게 된다. 개인주의 체제에서는 반드시 경쟁이 있어야 한다. 패배로 인한 불행을 감수해야 하는데 그 불행을 줄이거나 없애기 위해서는 패배를 납득할 수 있는 공정한 기준이 필요하게 된다. 운동 경기를 생각해보자.

운동 경기에서 공정한 규칙으로 승패를 가리는 공정경쟁을 하기에 승자와 패자가 결과에 납득하게 된다. 승자는 정당한 결과로 만족하여 행복하고 패자는 완전히 납득하여 만족하기에 불행하지 않거나 납득이 부족하더라도 불공정경쟁보다는 납득하기에 불행이 덜하다. 만약 공정한 규칙이 아니거나 반칙을 용인할 때는 패자는 물론이고 승자도 결과에 납득하지 않을 수 있으므로 모두가 불행해질 수 있다.

모든 경쟁은 그와 같다. 공정해야만 승자는 정당하게 온전한 승리로 행복할 수 있고 패자는 패배로 인한 불행을 없애거나 줄일 수 있다. 공정은 공평하고 올바른 것을 뜻한다. 공평은 어느 한쪽에 치우침이 없이 공정함을 뜻한다. 올바르다는 이치나 규범이나 원칙에 벗어남이 없이 바름을 뜻한다. 이치나 규범이나 원칙은 기준에 따라 달라질 수 있으므로 개인주의 체제에서는 개인주의를 기준으로 바른 것이 올바르다 할 수 있다. 공정이 공평하고 올바름을 뜻하기에 공정하기 위해서는 단순히 어느 한쪽에 치우침이 없다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이론적으로 국가 체제의 이념에 부합하는지 확인하고 실증적으로 사회에 이로운지 확인해야 한다. 단순히 관습적으로 사회에 이롭다고 여겼던 것이 실제로는 사회에 해로울 경우 그것이 아무리 공평하다 할지라도 사회에 해로워 사회가 붕괴할 수 있다. 유교의 가르침을 기준으로 경쟁한 조선은 어느 정도 공평하기도 했지만 기준 자체가 낡아 국가에 해로웠기 때문에 세계의 흐름을 따라가지 못하고 도태되어 몰락했던 것이다. 너무 낡아서 이론으로도 사회에 이롭지 않은 가르침을 신앙하듯 경전을 암기하고 이해한 것을 평가했으니 망할 수 밖에 없다. 그렇다면 사회에 이롭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이것은 개인주의 체제의 이념적 측면과 사회 구조 유지적 측면으로 나눠 볼 수 있다. 개인주의 체제의 이념적 측면에서 바라보면 모든 개인이 자유롭게 이기적으로 행동해서 공정한 경쟁으로 불균형이 나타난 것이 올바른 결과로 사회에 이롭다 할 수 있다. 사회 구조 유지적 측면에서 바라보면 공정한 경쟁으로 불균형함이 나타난 것을 법과 복지 등으로 균형을 맞춰 균형이 나타난 것이 올바른 결과로 사회에 이롭다 할 수 있다. 이런 측면은 개인의 사회적 역할마다 달라진다. 모든 개인은 자유롭게 이기적으로 행동하되, 일부 사회 구조 유지를 하는 역할을 맡은 개인들은 주관과 객관을 분리하여 사적으로는 주관적으로 자유롭게 이기적으로 행동하나 공적으로는 객관적이고 균형적이고 논리적으로 판단해야 할 것이다. 아무래도 공적인 부분으로 인해 사적인 부분이 완전하게 자유롭고 이기적이지 못할 수 있지만 그 역할을 맡길 바랐기에 이기적이라 할 수 있고 원치 않는다면 그 역할을 버리면 되기에 자발적으로 한정된 자유를 누리고 있다고 봐야 한다. 이런 이유로 사회에 이롭기 위해서 개인주의 체제인 사회에서는 모든 개인의 자유권과 주권과 소유권을 비롯한 기본적인 권리를 보장받아야 할 것이다. 이렇게 이론적으로 이념에서 말하는 올바름을 기준으로 한 공평한 경쟁인 공정경쟁으로 실제 가능한 많은 개인이 행복하게 된다면 실증적으로 사회에 이로운지 확인이 되었다 할 수 있을 것이다.

사회에 이로운 것은 현재와 미래를 모두 가리킨다. 오 년 동안은 사회가 매우 이로우나 십 년 뒤에는 사회가 붕괴한다. 현재만 사회에 이로운 것을 사회에 이롭다 하기는 어렵다. 십 년 뒤에 사회가 매우 이로울 수 있으나 오 년 안에 사회가 붕괴한다. 미래만 사회에 이로운 것을 사회에 이롭다 하기는 어렵다. 현재와 미래를 모두 고려하여 사회에 이로운 것을 추구해야 한다. 그러나 지금 한국 사회가 불행한 것을 고려하면 지금 한국에서의 공정의 기준은 이론적인 것과 별개로 실증적으로 사회에 해롭다는 것이 증명되었을 것이다.

사람이 사회를 만들고 사람은 관념으로 움직이므로 사람의 관념이 사회를 만든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사회를 만든 사람의 관념이 사회를 불행케 했다고 봐야 한다. 그럼에도 인간은 본인의 관념을 부정하기 어렵지만 논리적으로만 접근한다면 긍정할 수 있을 것이다. 사회가 불행함에도 사회에 속한 사람의 관념이 정상일 것이란 생각에서 벗어나야 한다. 분명히 말해 집단주의 관념은 개인주의 체제에서 정상이 아니다. 집단주의 체제에서는 집단의 이익을 위해 개인에게 해로운 전통적인 관념을 우선시하며 기준으로 삼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개인주의 체제에서는 정상이 아니다. 개인주의 체제라면 개인의 이익을 위해 개인에게 해로운 관념을 배척하며 기준으로 삼지 않는다. 장유유서와 같은 연령차별과 그것에서 비롯된 연공서열 같은 기준이나 남녀유별이나 부부유별 또는 부위부강 같은 성별차별과 그것에서 비롯된 차별적인 기준으로 같은 일을 하고 있음에도 대우가 높거나 낮은 일이 발생하면 일부 개인은 능력이나 생산성과 무관하게 부당한 손익을 보게 되므로 개인주의 체제에서 해로운 기준이 된다. 체제에 해로운 기준이기에 이런 기준으로 경쟁하는 것을 불공정경쟁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모두가 공평하게 개인의 특성을 배제하고 오로지 역할에 맞는 성격 및 능력과 역할의 기여도와 생산성을 기준으로 능력이나 생산성에 맞게끔 손익을 보게 되므로 개인주의 체제에 이로운 기준이 된다. 체제에 이로운 기준이기에 이런 기준으로 경쟁하는 것을 공정경쟁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내가 주장하는 역할주의다.

역할주의는 다양성을 직접적으로 존중하지 않는다. 다양성을 존중하겠다고 다양성에 전부 맞추면 실제 역할수행과 기여도와 무관하게 손익을 얻을 수 있어 공평할 수가 없다. 역할이란 가치중립적인 공통된 기준이 있으면 공평하고 직접적으로 다양성을 존중하지 않더라도 공적으로는 공통된 기준 외에는 개성을 모두 무시하게 되므로 간접적으로 다양성을 존중하게 된다. 사적으로는 어떤 것을 좋아하는 것도 싫어하는 것도 개인의 개성이다. 만약 특정 동물을 좋아하는 사람이 특정 동물을 싫어하는 사람에게 다양성을 존중해야 한다며 그 동물을 좋아하라 강요한다면 그것이 바로 다양성 파괴다. 반대로 특정 동물을 싫어하는 사람이 보기 싫다는 이유로 그 동물을 싫어하라 강요한다면 그것도 다양성 파괴다. 사적인 곳에서는 타인과 분쟁이 일어나지 않는 경우에는 개인의 호불호는 개인의 개성으로 인식하고 다양성을 존중해야 할 것이다. 이렇게 해야 개인의 자유권이 최대한 보장될 수 있다. 공정경쟁으로 돌아가자.

개인주의 체제에서 공정경쟁은 개인만 참여가 가능한 개인경쟁이 있고 집단만 참여가 가능한 집단경쟁이 있고 개인과 집단이 참여가 가능한 혼합경쟁이 있다. 개인만 참여가 가능한 개인경쟁에는 시험과 같이 혼자서 경쟁하는 것이 있고 집단만 참여가 가능한 집단경쟁에는 국가나 기업 단위로 사업의 입찰을 경쟁하는 것이 있고 개인과 집단이 참여가 가능한 혼합경쟁에는 각종 시장에서 경쟁하는 것이 있다. 집단경쟁과 혼합경쟁은 집단의 참여가 가능하기에 개인주의 체제와 충돌하게 된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집단 내부가 개인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개인주의 체제라면 개인주의 체제와 충돌하지 않게 된다. 개인주의 체제인 국가 안에 개개인이 공정경쟁 하는 작은 사회가 있는 셈이다. 개인주의 체제기 때문에 집단의 부정을 막을 수 있다. 공정경쟁에 참여한 집단의 체제가 집단주의 체제라면 집단의 이익을 위해 집단 내의 부정을 고발하지 못하지만 개인주의 체제라면 개인의 이익을 위해 집단 내 부정을 고발할 수 있다. 그렇게 하여 사회를 바르게 할 수 있다. 공정경쟁에 참여하는 집단은 어디까지나 개인주의 체제여야만 사회에 이롭다 할 수 있다. 공정경쟁에 대해 세 가지 알아보자.

 

 

하나, 교육의 공정경쟁. 교육의 경쟁은 개인경쟁이다. 정기시험이나 조별과제나 학업태도 등을 평가로 석차를 정하는 경쟁을 한다. 조별과제와 같이 집단을 이루어 경쟁하며 모두가 같은 과제 점수를 받기도 하지만 석차는 개인의 성적으로 정해진다. 교육은 개인경쟁이 공정하다. 만약 집단경쟁을 하게 되면 집단 구성원의 학업성취도를 정확히 평가할 수 없다. 학업성취도가 높은 사람에 의해 낮은 사람이 높게 평가를 받거나 학업성취도가 낮은 사람에 의해 높은 사람이 낮게 평가를 받을 수 있다. 그러므로 교육에서는 모두 개인경쟁을 한다. 특히 개인주의 체제는 모든 개인이 자유롭게 이기적으로 행동해야 올바른 결과가 나와야 하므로 모든 학생이 개인으로 경쟁을 해야 한다. 교육의 방향은 입시교육과 창작교육과 창업교육으로 나눠 보다 정확하게 개인의 성장을 돕고 교육의 방법은 자본주의식 교육으로 과제를 사고 팔아 보다 정확한 평가를 해야 한다.

공정경쟁을 위해 공교육을 성장시켜야 한다. 정보가 넘쳐나는 시대이므로 인간의 성장을 막는 것은 경제적 원인이기보다는 교육적 원인이 크다. 공교육에서 학생에 맞는 학습패턴을 설계하여 가정에서도 이에 협조적일 수 있도록 한다. 학습패턴에 수면과 여가도 포함되므로 수면을 취하거나 여가를 즐기는 학생이 공부를 하지 않는다고 간섭하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 그렇게 해서 스스로 공부하여 최대한 능력을 키워야 한다. 능력이 뛰어나나 경제적으로 부족할 경우에는 복지로 지원하면 된다.

공정경쟁을 위해 평가의 기준은 이론적으로 체제의 이념에 부합하고 실증적으로 사회에 이로워야 한다. 가령 화학이란 학문을 배우면 신물질이나 신소재를 탐색과 개발을 하거나 마약을 만들 수 있는데 전자는 사회에 이롭게 후자는 사회에 해로우므로 공정경쟁의 기준에 전자는 될 수 있지만 후자는 될 수 없다. 전자를 기준으로 공평하게 경쟁하면 공정한 경쟁이 된다. 한국 교육은 이렇게 공정한 경쟁을 해야 한다.

그러나 비극적이게도 한국 교육은 이념과 관념이 집단주의에서 비롯된 이타주의였다. 한국 교육의 이념은 고조선의 홍익인간이고 그에 영향을 끼친 것은 조선의 수기치인이다. 홍익인간은 널리 인간세계를 이롭게 함을 뜻한다. 수기치인은 본인을 수양한 후에 타인을 교화해야 함을 뜻한다. 두 가르침의 목적이 세상을 이롭게 하고 타인을 교화하는 것과 같이 타인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이타주의다. 고조선과 조선이 집단주의 체제였기에 이념 또한 집단주의의 올바름인 이타주의가 된 것이다. 이런 이념이 세상이나 타인의 이익을 우선시하면서 사회의 균형을 이루어 사회 구조 유지를 한다. 이것이 집단주의다. 개인주의 체제는 모든 개인이 이기적이면 다수의 이익을 위한 결론이 나온다. 본인의 자유를 보장받기 위해 타인의 자유를 보장하고 모든 개인이 본인의 이익만을 위해 투표를 하니 다수결로 보다 많은 개인의 이익을 대변하는 정치가가 선출되고 모든 개인이 본인의 이익만을 위해 생산하고 소비하니 소비자를 행복하게 하는 상품이 생산된다. 개인주의 체제는 모든 인간이 이기적으로 행동해야 다수가 행복한 올바른 결과가 나오도록 제도화하였다. 이러다 보면 소수가 손해를 보는 것으로 소수가 불행하여 사회의 균형이 깨질 수 있는데 그걸 법과 복지로 균형을 맞춘다. 개인주의 이념은 모든 개인이 자유롭고 이기적이기에 불균형하게 행복하고 그런 불균형함을 법과 복지로 균형을 맞추어 사회 구조 유지를 한다. 이것이 개인주의다. 한국 교육은 집단주의인데 한국 체제는 개인주의였다. 한국 교육이 집단주의기 때문에 발생하는 현상에 대해 알아보자.

한국 교육은 이념뿐만이 아니라 관념도 집단주의 관념이었다. 가족과 연인과 친구와 국가와 학교와 이웃과 같이 사회나 사회구성원의 이익을 우선시하라 가르쳤다. 그렇기에 이런 현상이 나오기도 했다. 학교 경쟁력을 위해 입시와 무관한 학생의 학교 내 활동 경쟁 결과를 조작하여 입시에 관련된 학생이 좋은 결과를 얻도록 했다. 손해를 본 학생이 항의를 하더라도 수용되지 못했다. 어차피 입시를 하지 않거나 가망이 없으니 입시를 하거나 가망이 있는 학생을 위해 희생을 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냐는 식으로 정당한 항의는 부당하게 거부되었다. 그렇게 학교와 입시 학생을 위해 다른 학생을 희생시키는 일이 일어나기도 했다. 정말 시대착오적인 집단주의다. 이런 것은 해당 학교의 관계자의 관념이 잘못되었다고 지적해도 교육 이념이 집단주의적이고 사회가 집단주의 관념을 가진 사람이 많아 이런 일을 저지르더라도 반성치 않고 잘못을 반복하고 있다. 안타까운 일이다.

이런 이타적인 관념은 개인에게 무의식적으로 영향을 끼쳐 건전한 경쟁의 참여를 방해하기도 한다. 경쟁에서 승자와 패자로 나뉘면 승자는 패자의 불행에 공감하며 슬퍼하도록 만들어 온전한 행복을 누릴 수가 없었고 패자는 승자가 공감하는 불행에 의해 부당한 패배를 겪은 것과 같은 기분이 들어 패배를 납득할 수가 없어 불행이 깊어져 갔다. 만약 승자가 패자의 불행에 공감하지 않으면 나쁜 인간이 되었다. 한국에서 각종 경쟁에서 승리한 사람이 겸손했던 것은 사회가 집단주의 관념에 영향을 받아 이타주의가 옳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승자가 겸손하지 않으면 사회는 승자를 패자의 슬픔에 이타적으로 공감할 줄 모르는 나쁜 인간이 되었다. 이런 경향은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뽑기 게임으로 좋은 것을 뽑아서 자랑하면 좋은 것을 뽑지 못한 인간의 불행에 공감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비난하는 것과 같이 나타나기도 했다. 학업도 마찬가지다. 경쟁에서 승리하더라도 행복을 온전하게 누릴 수가 없으니 경쟁에서 이기겠다는 마음가짐이 옅어지게 되었다. 이타주의 관념에 세뇌될수록 본인의 행복보다 타인의 불행을 생각하는 것으로 경쟁에 집중할 수 없었다. 승리해서 얻는 행복보다 패자의 불행에 슬퍼하는 것이 불행한 사람은 경쟁을 포기하게 될 정도였다. 학업에 대한 참여도 줄어들게 되었다. 발표를 하는 것과 같이 학업에 참여를 하는 것으로 타인보다 유리하게 되면 불리하게 된 인간이 불리해져서 불행할 수 있기에 참여를 하지 않게 되었다. 학교 내 집단에서 튀면 괴롭힘을 당하는 것은 이런 원리에 의한 것이다. 왜 너는 이타적이지 않아? 강력한 힘으로 집단을 통솔하는 인간이 아니라면 튀는 순간 이타주의를 근거로 한 공격대상이 된다. 다수가 소수에게 다수의 의견을 강제하는 동조압력도 소수에게 이타적일 것을 강요하는 것에서 나타난다. 시험의 경우에는 성적으로 결과가 나와 간섭하기 어렵기에 이타주의에 세뇌된 정도에 따라 경쟁참여가 달라졌다. 이타주의에 세뇌가 되지 않은 학생은 최대한 자유롭게 이기적으로 학업에 몰두하며 경쟁에 참여할 수 있었으나 이타주의에서 세뇌된 학생은 세뇌된 정도가 높을수록 패자의 불행에 공감하는 수치도 높아짐에 따라 학업에 몰두할 수 없어 경쟁에 참여해도 실제 재능과 별개로 경쟁에 뒤쳐지게 되었다. 이것은 결코 공정경쟁이 될 수 없다. 이타주의에 의해 이런 결과가 나왔다는 것이 이해되지 않을 수가 있다. 그러나 생각해보자.

인간은 무언가 믿는 것에 무의식적으로 영향을 받아 행동에 제약을 받는다. 어떤 개인이 변기가 더럽다는 관념을 가진 상태에서 깨끗한 물을 마시다가 누군가에게 그 물이 변기 물이라 듣는다면 실제로는 그렇지 않더라도 불쾌해지면서 구역질을 하게 되듯이 어떤 개인이 타인의 이익을 우선시하라는 이타적인 관념을 가진 상태에서 경쟁의 패자의 불행에 이타적으로 공감하여 슬퍼해야 한다는 말을 들으면 실제로 슬퍼지며 그런 불행을 만든 경쟁을 부정적으로 보게 되는 것으로 전력으로 경쟁에 참여하지 못하게 된다. 이것은 사람마다 다르며 이타주의에 깊게 세뇌될수록 큰 영향을 받는다. 황당해 보일지 모르겠지만 한국은 2017년 조사에 따르면 혈액형 성격설을 믿는 사람이 58%나 될 정도로 많은 사람이 미신을 믿고 있다. 이런 것에 영향을 받지 않을 수가 없다. 이것은 지극히 객관적이고 논리적인 판단이다. 이걸 부정하는 것은 단지 이타적인 관념에 세뇌되어 관념 탓을 하기 어렵기에 학생 탓을 하는 것이거나 경쟁에서 승리한 사람이 공정한 경쟁에서 정당한 승리를 한 것임을 바라기에 진실을 외면하는 것에 불과하다.

교육의 이념과 관념이 학생의 학업과 경쟁을 방해하고 있다. 정말 괴롭다. 개인의 일방적 이익요구는 이기주의가 아닌 이타주의로 본인의 이익을 위해 타인에게 이타심을 요구하는 것에서 나타난다. 타인에게 이타심을 요구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에 무례한 짓을 반복하는 것이다. 이런 일방적 이익요구가 이기적인 것 같기에 이기주의로 잘못하고 있는 것으로 보일 수 있는데 실제로는 이타주의로 잘못하고 있는 것이다.

집단주의 관념으로 집단의 이익을 위해 비리를 저지르기도 한다. 자녀를 위한 성적 조작이나 입시 비리는 집단주의 관념으로 나타난 것이다. 학교에 해로운 행동을 하는 학생이 학교 내에서 교사와 학생에게 피해를 줘서 학교붕괴를 일으키는 일이 일어나기도 한다. 그럼에도 이타주의를 근거로 그에 대한 대응이 굉장히 느린 상황이다. 모든 학생이 자유롭게 이기적이라면 그런 학생은 다른 학생의 다수결에 의해 특정 기준과 절차에 따라 처리되는 것이 마땅하다. 그래야 다른 학생이 피해를 받지 않고 학업에 몰두하며 공정한 경쟁을 할 수 있다.

평가에는 상대평가와 절대평가가 있다. 절대평가를 받을 때에는 집단주의 관념에 의해 집단의 이익을 위한 부당한 행위가 일어나기도 한다. 기출문제나 기출경향이 담긴 족보를 집단 내에서 돌려보는 것이 바로 그렇다. 지나치게 많은 학습범위로 족보가 필수적일 수 있는데 그럴 때에는 학교에서 족보를 공개하는 것이 마땅하다. 그래야 모든 개인의 공정한 평가가 된다.

학생의 학업은 개인경쟁이다. 개인주의 체제의 개인경쟁에서 집단주의 관념은 해로울 뿐이다. 집단주의 관념이나 한국 교육 이념에 영향을 받아 체벌이나 훈계를 통해 자녀나 학생을 이타적으로 가르치면 타인의 이타심을 악용하는 악이 되거나 본인의 이타심을 악용 당하는 약이 된다. 명백하게 잘못된 교육이다. 지금까지 집단주의 이념과 관념을 학생에게 세뇌하여 학생을 이타적으로 행동하게 했던 한국 교육은 단 한번도 공정했던 적이 없다. 이타주의에서 세뇌되어 착하다는 말을 들으면 들을수록 패자에 대한 불행에 공정하여 경쟁에서 불리하다. 이타주의라는 족쇄를 달고 경쟁하는 것은 어떤 경우에도 공정하다 할 수 없다. 이제 모든 학생이 개인주의 관념을 가지고 자유롭게 이기적으로 학업에 몰두하며 가능한 최대한 수준의 학업을 성취하여야 개인이 행복하고 국가가 성장할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교육의 이념과 교육에 관련된 인간의 관념이 개인주의여야만 한다. 교육도 이제는 개인주의 관념으로 진보해야 한다.

 

, 노동시장의 공정경쟁. 학업으로 경쟁하던 학생은 대부분 노동시장에서 경쟁하는 노동자가 된다. 학업으로 갈고 닦은 학력을 노동력으로 상품화하여 임대상품으로 판다. 그렇기에 학업과 마찬가지로 개인경쟁이 된다. 일부는 집단의 노동력 상품을 대량으로 팔기도 하지만 예외에 속한다. 교육의 영향이 감소하여 교육의 이타주의 세뇌에서 벗어나 다소 자유롭게 의사를 표현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그럼에도 대부분 이타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해 본인의 이타심을 타인에게 이용당하는 일이 빈번하게 된다. 한국 교육이 집단주의기 때문에 발생하는 사회현상에 대해 알아보자. 사회에서 오래 있던 인간 일부는 사회초년생에게 그런 이용당함을 사회성이라 말하며 강요하기도 한다. 한국의 사회성은 집단주의 관념에 영향을 받아 대체로 본인의 이타심을 타인에게 이용당함을 말한다. 집단의 이익을 위해 개인의 의사를 표현하지 않는다거나 말이다. 그래서 집단의 비리에 항의하면 사회성이 없다는 말을 듣는다. 그 사회성이 집단주의 관념에 의한 사회성이고 한국이 개인주의 체제인 것을 고려하면 그런 사회성은 사회성 있음이 체제에 해롭고 사회성 없음이 체제에 이로울 수 있다. 아이러니한 일이다. 사회성이 사회에 이롭기 위해서는 개인주의 관념에 의한 사회성을 갖춰야 한다.

이타주의에 깊게 세뇌된 인간 중 본인의 이타심을 이용당하는 인간은 성인이 되어도 자기의사를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여 착취나 학대나 폭력을 당하다 불행하게 죽기도 한다. 동창생에게 골프채로 맞아 죽은 사람이나 동창생에게 성매매를 강요당해 착취당하던 사람들 같이 학생 때 괴롭힘을 당하던 사람에게 성인이 되어서도 괴롭힘을 당하며 폭력이나 착취 등으로 최소한의 기본권도 보장받지 못하며 불행하게 살다가 사망한 사건이 한 두 건이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가해자만 비난하지만 실상 이것은 제대로 반항조차 할 수 없게 만든 이타주의 관념 세뇌가 더 큰 잘못이다. 도덕적으로 본인보다 타인의 이익을 우선시하게 만드니 타인의 명령에 복종하고 그런 복종을 도덕적으로 여기며 자기합리화를 하면서 저항하지 않다가 지독한 괴롭힘을 당하면서 저항할 힘을 완전 잃게 되는 것으로 위와 같은 비참한 사건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이타주의를 근거로 부모나 교사가 학생들을 쉽게 다루기 위해 학생들을 이타적으로 만들면 학생들은 잘못된 관념을 갖게 된다. 어떤 학생은 부모나 교사가 본인을 폭력이나 도덕을 가지고 이타적으로 세뇌하여 복종하게 하는 것을 보고 타인이 본인의 말을 듣게 하려면 타인을 폭력이나 도덕을 가지고 이타적으로 세뇌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된다. 어떤 학생은 부모나 교사가 본인을 폭력이나 도덕을 가지고 이타적으로 세뇌하여 복종하게 하는 것을 보고 본인이 부모나 교사에게 이타적으로 복종하는 것과 같이 타인에게도 이타적으로 복종하게 된다. 학교 안 학생이 가진 폭력의 차이가 그렇게 크지 않음에도 일방적으로 괴롭히고 괴롭힘 당하는 것은 이런 낡은 관념이 가르친 교육이 불렀다. 학교 밖 동창생이 일방적으로 괴롭히고 괴롭힘 당하는 것도 이런 낡은 관념이 가르친 교육이 불렀다. 이런 식으로 타인을 이타적으로 만들어 자유의지를 잃게 하거나 본인을 이타적으로 만들어 자유의지를 잃게 되는 것으로 일방적으로 이용하고 이용당하는 개개인이 나타난다. 그것이 가르침을 통해 폭력이나 관념의 대물림이 되어 자유의지를 잃어버리는 개인이 지속적으로 나타나게 된다. 이보다 더 큰 자유주의 이념붕괴는 없다. 자유의지를 잃은 인간은 앞으로도 계속 도구로 살다가 불행하게 죽는다. 정말 잔인하고 지독한 교육이다. 이타주의는 집단의 이익을 위해 개인을 희생시키는 도구로 활용되었다. 괜히 이타주의가 비민주적인 왕정이나 신정의 올바름이 아니다.

이제부터라도 관념을 체제에 맞게 바로잡아야 한다. 모든 학생이 자유롭게 이기적으로 행동할 수 있어야 자유롭게 논리적으로 의사표현을 할 수 있는 지성인으로 성장할 수 있게 된다. 그렇게 성장해야 모든 인간이 이기적이야 한다고 생각하며 타인을 이타적으로 만들어 이용하지 않고 본인을 이타적으로 만들어 이용당하게 하지 않는다. 부모나 교사가 자녀나 학생을 교육할 때에는 이타적으로 가르칠 것이 아니라 이기적으로 가르치고, 네가 이기적인 것만큼 남도 이기적이라는 사실을 인지시켜 본인의 권리를 존중 받기 위해서는 타인의 권리를 존중하고 이해하며 본인과 타인 사이에서 분쟁이 발생하면 논리적인 대화를 하거나 여론이란 제삼자의 의견을 듣거나 법으로 해결하도록 가르쳐야 한다. 노동시장의 경쟁은 학업의 경쟁과 같이 개인주의 관념을 가지고 개인이 자유롭게 이기적으로 노동력 상품을 상거래 해야 공정경쟁이 된다. 노동에서의 경쟁의 기준도 공정해야 하기에 이론적으로 체제에 부합하고 실증적으로 사회에 이로워야 한다. 그것을 기준으로 공평하게 경쟁하면 공정한 기준이 된다.

노동시장에서의 불공정에는 주로 능력적 원인과 관계적 원인이 있다고 여겨지고 있다. 앞서 말한 것처럼 능력적인 원인은 오히려 공정한 것이고 관계적인 원인은 관계보다는 관계로 비리가 발생하게 만든 관념이 더 큰 원인이라 할 수 있다. 그에 대해 좀 더 알아보자.

하나, 능력적 원인. 능력의 차이가 있기에 불공정한 경쟁이라 말하기도 한다. 그렇기에 공정하기 위해서 기준을 바꿔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에 대한 반론을 생각하다 운동경기가 떠올랐다. 운동경기에서는 공정한 경쟁을 위해 인원이나 체급을 맞추는 일을 하고 있다. 그렇다면 교육이나 노동시장의 경쟁도 공정한 경쟁을 위해 인원이나 체급을 맞춰야 한다는 논리가 나오게 된다. 그에 대한 반론도 바로 나왔다. 개인에게 있어 경쟁하는 것은 개인의 이익으로 목적이 같지만 경기와 교육과 노동시장에 있어 경쟁하게 하는 것은 각자 목적이 다르다. 경기는 운동선수의 순수한 경쟁을 사람이 보고 즐기는 것이 목적이다. 교육은 학생을 성장시켜 학생 개인의 자아실현을 돕고 사회에 이로운 우수한 인재를 길러내는 것이 목적이고 노동시장은 노동력 상품을 거래하여 사회의 수요에 맞춘 상품을 생산하고 공급하여 자원을 분배하는 것이 목적이다. 운동경기는 인원이나 체급을 맞춰서라도 보는 재미를 늘려야 하는 목적을 달성해야 하는 반면 교육과 시장은 인위적인 기준을 맞추지 않아서라도 사회를 성장시킬 수 있는 인재와 소비자가 행복할 있는 가치 있는 상품의 분배라는 목적을 달성해야 한다. 인위적인 기준에 맞추다 보면 사회를 성장시킬 인재와 소비자를 행복하게 할 수 있는 가치 있는 상품이 줄어들어 사회가 불행하게 된다. 결과의 평등을 위한 할당제나 가산점도 같은 논리로 반대하게 된다. 능력과 무관한 농어촌이나 유공자나 여성이나 장애인 등에 대한 할당제나 가산점으로 공정한 기준에 간섭하여 평가의 결과를 바꾸게 되면 실질적인 능력은 부족하기에 사회를 성장시키지 못하거나 소비자를 행복하게 할 수 없을 수 있다. 능력이 부족하여 겪은 불리함이나 불행 같은 불균형은 경쟁의 기준에 간섭하여 균형을 맞추는 것이 아닌 사회 복지로 균형을 맞춰야 한다. 경쟁은 공정할 경우 불균형이 바르다. 가령 여성이 생리와 출산으로 경쟁에 불리함을 안게 된다면 남성에게 생리휴가와 같은 휴가를 일괄적으로 하루 주고 출산 휴가도 같이 주는 것과 같이 복지를 지원하게 하여 성별로 경쟁에 불리함이 없도록 한다. 가령 장애인이 노동력 상품의 가치가 낮아 경쟁에 불리함을 안게 된다면 이미 있는 직무에 가산점과 할당제를 넣기보다는 장애인에 맞춘 직무를 따로 만드는 것이 타당하다.

, 관계적 원인. 인간관계의 차이가 있기에 불공정한 경쟁이라 말하기도 한다. 그렇기에 인간관계로 인사를 하는 것을 막아야 한다고 주장이 나오곤 한다. 지극히 타당하나 그것은 인간관계 자체가 아닌 인간관계로 부당한 이익을 주게 하는 집단주의 관념이 문제다. 이러한 집단주의 관념은 단순한 인사뿐만이 아니라 학문 지식의 공유도 막게 된다. 학문의 지식은 공유되어야 하고 학문의 지식으로 창출한 상품은 보호되어야 한다. 모든 개인은 학문의 지식이 사회에 공유되어 공적인 교육기관이나 사적인 지식공유로 지식을 습득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게 하여 공적인 교육기관을 수료하거나 자격을 취득한 것과 함께 문제를 풀거나 창작한 것을 평가 받아 창업이나 취업 등으로 사회적 역할을 맡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역할을 맡고자 하는 이의 수가 많다면 공개적인 경쟁으로 바라는 역할을 맡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러나 오래된 분야는 도제식 교육으로 해당 분야 학문 지식의 공유부터가 폐쇄적일 때가 있다. 도제는 어려서부터 스승에게 직업에 필요한 지식과 기능을 배우는 직공을 뜻한다. 도제 자체는 대부분 사라졌으나 이와 비슷한 도제식 교육은 남아있다. 도제식 교육은 공개적인 공적인 교육기관에서 교사가 학생에게 지식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폐쇄적인 사적인 관계에서 스승이 제자에게 지식을 가르치는 것을 말한다. 도제식 교육은 개인에게 깊이 있는 지식전달이 가능하지만 폐쇄적이기에 도제 교육 관계자 사이에서 집단주의적 경향이 나타날 수 있고 지식이 사회에 공유되지 못해 일부만 지식을 얻게 되는 것으로 모든 개인의 공정경쟁이 불가능하게 된다. 도제식 교육에는 공적인 공정한 기준으로 경쟁하여 합격한 다음 도제식 교육을 하는 것과 사회적 역할을 맡고 있는 사람의 주관적인 기준으로 경쟁이 없거나 있더라도 공정하지 않게 평가하여 합격여부를 결정한 다음 도제식 교육을 하는 것이 있다. 전자는 공적인 공정경쟁을 통해 대다수 개인에게 기회가 있는 반면 후자는 사적인 주관적 판단으로 소수의 개인에게만 기회가 있다. 후자는 최소한의 기회의 평등도 주어지지 않는 상황이다. 도제식 교육은 천천히 사라지는 것이 바람직하지만 현재 도제식 교육에서 기회의 평등을 주기 위해서는 마땅한 기준과 절차를 도입할 필요가 있다. 스승 역할을 맡은 이는 간단한 자격심사를 통해서라도 교육자격을 취득하고 나서 스승과 제자 관계를 사회적 계약관계로 맺어 일방적으로 유리한 관계가 되어서는 안 된다. 도제식 교육에서 스승이 제자를 착취할 수 있는 것은 계약을 맺지 않거나 맺더라도 불공정계약이었기 때문이다. 계약을 위반하면 관계도 깨지면서 제자가 다른 스승을 고를 권리를 얻을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정부나 기업에서 어떤 분야의 인재를 길러내겠다고 판단하면 관계에서 지식이 일방적으로 가는 도제식 교육과 무관한 기준과 절차로만 지식이 오가는 공적인 교육기관에서 배운 사람에게 사회적 역할을 맡게끔 해야 한다. 정보의 공유는 개인의 자유나 지식의 독점을 위해 공적인 교육기관에 반대하는 것은 잘못되었다. 공정한 경쟁을 위해 사회에 이로운 분야는 보다 많은 교육기관과 지식공유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도제식 교육을 거치지 않더라도 역할을 맡기 위한 지식과 경험을 보유하고 있다면 그에 따른 기회를 줄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보다 많은 인간의 능력을 활용하여 사회를 이롭게 할 수 있다.

 

, 소비시장의 공정경쟁. 소비시장의 경쟁은 개인과 집단 모두 경쟁하는 혼합경쟁이다. 개인과 집단이 생산한 상품을 시장에 공급하면 소비자의 수요에 따라 공급경쟁이 나타난다. 소비자가 소비하는 것으로 소비자를 행복하게 만든 상품을 생산하여 공급한 생산자일수록 많은 부를 얻게 된다. 그 부를 자본으로 더 많은 생산을 하여 더 많은 부를 얻는 이들을 가리켜 자본가라 한다. 한국은 자본주의 시장경제로 소비자의 행복이 기본인 사회다. 시장에서 공급경쟁을 하기에 수요자인 소비자가 고품질 상품을 저렴한 가격에 소비하여 행복하고 수요경쟁을 하기에 공급자인 자본가가 공급경쟁에서 승리한다면 보다 높은 이윤을 얻을 수 있어 행복하다. 시장경제에서는 공급경쟁에서 승리하면 수요경쟁에서 보다 높은 이윤을 얻기에 자본주의 이념은 논리적으로 소비자의 행복이 된다. 소비자가 행복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 그러나 관념으로 인해 그러지 못하고 있다. 소비시장도 교육과 노동시장의 경쟁과 마찬가지로 관념에 의한 불공정경쟁이 잦은 상황이다.

담합이 바로 그렇다. 많은 분야가 담합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 밀가루 담합과 닭 담합과 우유 담합과 컴퓨터 부품 담합과 통신사 담합 등을 비롯해 수많은 분야가 시장에 공급할 상품의 공급량이나 가격을 조절하여 가격을 맞추는 담합을 하고 있다. 분야의 최저 수익률을 맞추기 위해 담합이 어쩔 수 없다는 논리는 시장원리에 의해 논파된다. 시장에서는 수익률이 낮으면 폐업하고, 폐업하여 공급이 줄면 수요가 늘어 가격이 상승하는 것으로 적정 수익률이 맞춰질 수 있다. 그럼에도 담합을 한다. 이런 것을 자유시장경제라 어떻게 부를 수 있는가? 많은 사람들이 한국이 자본주의가 문제라고 말하는데 그렇지 않다. 자본주의 규칙을 지키지 않아 발생하는 사회문제가 이토록 많은데 어떻게 자본주의 문제라 할 수 있는가? 한국 문제는 자본주의가 아니라 집단주의 관념이다. 집단의 이익을 위해 담합을 하고 집단의 이익을 해칠 수 있는 개인의 고발을 죄악시했기에 담합이 고발되지 않는 것이다. 문제가 있어도 고발치 않는 사회, 그것이 바로 집단주의 관념이 만든 사회 현상이다. 그로 인해 얼마나 많은 소비자가 불행했는가? 비싼 농산품, 비싼 컴퓨터 부품, 비싼 통신료 등 담합으로 인해 시장원리와 관련이 없는 비싼 상품이 너무나도 많다. 괜히 한국이 소득 대비 높은 식료품 물가를 자랑하는 것이 아니다. 특히 원유가격연제와 같은 집단 담합을 규정화하여 경쟁력을 악화시킨 분야는 담합을 포기하지 않을 경우 차라리 한번 주저 앉는 다음에 초기화를 하고 나서 재건하는 것이 나을지도 모른다. 심각한 시장원리 훼손이다. 유교라는 전통적인 집단주의 체제와 종교에서 파생된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라는 집단주의 체제에 의해 다수의 개인이 집단주의 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하여 생산자의 이익만 고려하다 개인주의 체제의 소비자가 막심한 손해를 보고 있는 상황이다. 옳고 그름이 정반대인 관념과 체제가 만든 불행이다. 노조의 담합이나 기업의 담합 모두 물가 상승의 요인이 되어 소비자를 불행케 한다. 사회는 노조와 기업의 담합이 개인주의 체제에 맞지 않는 집단주의 체제의 산물임을 인지하고 행정부는 공정거래위원회의 권력을 늘려 시장 관리 감독을 철저하게 해야 할 것이다. 그렇게 하여 시장원리와 무관하게 높은 가격과 낮은 품질의 상품을 막아 소비자의 불행을 예방해야 한다.

생산자의 이익만 고려하다 보니 소비자가 원치 않는 전통시장에서의 소비를 유도하기 위해 대형마트를 규제하고 전통시장에 세금을 쓰고 있다. 소비자가 전통시장을 찾지 않는 것은 상품 가격과 품질과 신뢰도가 낮기 때문임에도 그런 전통시장을 보호하기 위해 소비자의 선택권을 침해하고 있다. 시장은 원래 개인의 자유에 맡겼기에 불균형한 것이 정상이다. 시장에서 균형을 맞추려 하다 보면 필연적으로 개인의 자유권을 침해하게 된다. 다수결로 인한 불균형을 법으로 맞추듯이 소비로 인한 불균형은 복지로 맞춰야 한다. 전통시장의 상품이 팔리지 않으면 팔릴 때까지 상품 가격을 낮추고 품질을 높이면 된다. 그러다 이윤을 얻기 어려워 생계유지가 어려워지면 복지의 지원을 받으면 된다. 그러고도 팔리지 않는다면 다른 일을 알아보거나 쉬는 편이 낫다.

생산자의 이익만 고려하다 보니 불필요한 중간단계를 유지하기도 한다. 만약 상품이 소비자에게 공급되는 과정에서 불필요한 중간단계가 있다면 없애는 것이 사회에 이롭다. IT기술의 발달로 상품 접근도가 높아져 영업이나 소매범의 필요도가 낮아짐에 따라 그걸 거치지 않는 대신 가격을 낮추는 가격경쟁력을 갖추도록 유도해야 중간단계를 거침으로써 가격경쟁력을 갖추지 못한 기업이 사라짐에 따라 불필요한 중간단계도 자연스럽게 사라질 수 있다.

생산자의 이익만 고려하다 보니 소비자의 불행을 고려하지 않기도 한다. 한국은 층간소음으로 인한 살해사건이 너무 많다. 한국은 개인주의 체제로 개인이 이기적이어도 올바른 결과가 나와야 한다. 개인이 시끄럽게 행동하더라도 이웃에 들리지 않을 정도로의 방음처리를 했어야 했다. 그래서 서로 자유롭게 살아도 다툼이 없이 행복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러지 않았기에 한국은 층간소음으로 인한 불행이 지나치게 높다. 주거지 비용이 그렇게도 높은데 이런 불행 하나 예방하지 못한 것은 솔직히 너무하다. 죽지 않아도 될 생명이 너무 많이 죽었다. 거주민은 이웃에 피해가 가지 않으면서 자유롭게 소란을 피우고 싶고 건설회사는 보다 높은 이윤을 얻기 위해 건설비를 줄이고자 한다. 이런 이기심을 고려하여 정부는 방음벽을 의무적으로 설치하는 건설회사에 특혜를 줘야 한다. 정부의 정책은 이익집단의 의견만을 수용할 것이 아니라 소비집단의 의견도 수용해야 할 것이다. 그렇게 해야 생산자의 이익을 위해 소비자가 불행한 것을 방지할 수 있다.

소비시장의 불공정경쟁에는 경쟁이 의미 없는 독과점도 포함된다. 독과점에 다다르는 순간 경쟁을 할 필요가 없어져서 경쟁 자체가 성립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정부는 어떤 기업이 독과점에 다다르면 토너먼트 경기장에 선수가 없을 때 새로 선수를 뽑아 내보내 경쟁하게 하듯이 기존 기업을 지원하거나 창업을 하게 하여 시장에서 경쟁하게 해야 할 것이다. 인원의 제한이 없는 온라인 마켓은 인원의 제한이 있는 오프라인 마켓보다 독과점이 일어나기가 쉽다. 포탈과 SNS를 떠올려보자. 소수의 기업이 독과점을 유지 중이다. 독과점으로 경쟁이 없다 보니 소비자가 손해를 보는 운영을 하는 일이 많아지고 있다. 그렇다고 오프라인처럼 출입제한제를 도입하는 것은 소비자의 선택을 막는 비정상적인 행위다. 그러므로 온라인 소비시장에서는 오프라인 소비시장보다 새로운 기업을 경쟁시킬 수 있도록 하는 정책을 짜야 할 것이다.

 

사회에서 만들어진 경쟁은 인간이 기준을 만들고 인간이 경쟁에 참여하기에 인간의 관념에 큰 영향을 받을 수 밖에 없다. 집단주의 체제는 집단의 이익을 위해 개인이 공정한 경쟁을 하지 않거나 경쟁 자체를 하지 않아도 되었지만 개인주의 체제는 모든 개인의 이익을 위해 공정한 경쟁을 경쟁을 해야 한다. 공정경쟁은 어디까지나 개인주의 체제에서 개인의 이기심으로 나타난 산물이다. 경쟁을 하지 않으면 인간 바람의 우선순위를 권력이 정하기에 권력이 재력을 지배할 수 있고 복지를 하지 않으면 생계로 인해 주권을 쥐고 있는 국민이 재력에 휘둘리기에 재력이 권력을 지배할 수 있다. 이런 관계에서 권력은 경쟁을 부정하기도 하고 재력은 복지를 부정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것은 일부 개개인의 주관적인 손익으로 사회에 전혀 이롭다 할 수 없다. 경쟁이 없으면 사회의 성장이나 소비자의 행복이 없어지고 복지가 없으면 사회가 유지될 수가 없다. 이에 따라 모든 인간은 낡은 이념에 근거하여 경쟁이나 복지를 없애자고 주장하는 것은 체제에 대한 몰이해로 인한 것이므로 이제는 더 이상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다. 불필요한 힘의 신경전 때문에 사회가 망가질 수는 없다. 집단주의 관념의 이분법의 함정에서 벗어나야 한다.

경쟁은 경쟁에 참여하는 개인과 경쟁을 관리 감독하는 정부의 입장이 다르다. 경쟁을 참여하는 개인은 경쟁에 대한 리스크와 세상의 시선 등으로 경쟁참여가 점점 저조하게 되어가고 있다. 한번 경쟁으로 지나치게 많은 리크스를 짊어지게 하고 경쟁에 탈락하면 마치 레일에서 벗어난 기차와 같이 바라보기에 잦은 경쟁 참여가 힘든 상황이다. 수많은 경쟁이 있어야 사회와 시장이 성장할 수 있는 것을 고려하면 바람직하지 못하다. 그러므로 운동경기나 경쟁게임에서 그러하듯 개인과 집단이 끝없는 경쟁을 즐기면서 성장할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해야 한다. 경쟁을 관리 감독하는 정부는 개개인의 경쟁의 결과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교육이나 시장에서 경쟁하는 사람은 결과가 중요하지만 관리 감독하는 정부는 경쟁의 결과보다는 경쟁의 목적이 중요하다. 누가 이익을 얻든 정당한 기준과 절차를 거쳤다면 정부 입장에서는 아무래도 좋다. 어떻게든 사회에 이로우면 된다. 그러므로 경쟁의 결과보다는 경쟁의 규칙과 목적에 초점을 맞추게 된다. 경쟁의 결과 중 하나라 할 수 있는 재화는 국가의 체재로 분배가 결정된다. 국가의 경제체제가 자본주의라면 시장경제를 통해 개인의 의사로 재화의 분배가 결정되고 공산주의라면 계획경제를 통해 정부의 의사로 재화의 분배가 결정된다. 인류의 재화는 무력과 무력을 제어할 권리가 있는 권력과 권력의 방향을 결정할 사상으로 마련된 체제에서 분배되고 있다. 그 외 소유나 환원이나 부의 대물림 까지도 전부 그렇다. 체제에 이로운 것은 허용되고 해로운 것은 금지된다. 개인주의 체제가 성립되려면 공정해야 하기에 공정하는데 필요한 기회의 평등을 지나치게 해치는 과도한 부의 대물림은 체제에 적합하지 않다. 개인주의 체제는 언제까지나 공정하게 경쟁해야 한다.

정부는 경쟁 참여자가 공정경쟁을 할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해야 한다. 인간은 지구의 생태계를 지키기 위해 천연기념물과 같이 동물을 보호하고 있다. 그러나 교육이나 시장은 지구와 생태계와 연결되고 있는 것과 달리 사회와 교육과 시장을 분리해서 바라볼 수 있다. 시장에서 불균형한 수요로 공급자가 도태되더라도 천연기념물마냥 억지로 살릴 이유가 없다. 오히려 그것이 경쟁의 목적을 방해한다. 도태된 이들은 사회 복지로 지원하면 된다. 교육이나 시장은 도태되어야 하는 불균형이고 사회는 도태되어서는 안 되는 균형이다. 교육과 시장에서의 경쟁은 이념에 부합하고 사회에 이롭고 공평해야 공정한 경쟁이 된다. 교육과 시장의 이념과 관념은 개인이 이기적하고 기준이 공정할 수 있도록 해야 교육과 시장에서 공정경쟁이 나타나 불공정경쟁에 의한 불행이 예방되거나 완화될 수 있다.

불행예방에 대해 알아보았다. 한국은 장유유서와 같이 예의가 복종의 예였기 때문에 예를 갖추면 상대에게 복종한단 느낌을 받아 예를 갖추지 않기도 한다. 그것은 봉사 받는 사람도 마찬가지여서 봉사하는 사람에게 봉사 받는 사람이 예의를 갖추지 않는 일이 빈번하다고 한다. 분명 복지는 사회 구조 유지의 기본으로 사회 복지에 감사할 필요는 없다. 그런 것에 감사를 느끼는 것은 선거권에 감사를 느끼는 것과 같다. 굳이 그럴 필요는 없다. 그러나 인간이 인간에게 봉사를 하며 친절을 베푸는 것에는 감사를 느끼는 것이 마땅하다. 예를 갖추지 않는 것은 개인의 행복이 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사회에 해로운 행복이다. 예를 갖추는 것이 개인의 행복이 되어야 한다. 그것이 사회에 이로운 행복이다. 이외 부자유, 애정결핍, 부정부패, 사회갈등, 지역소멸, 다양한 양극화 등의 집단주의 관념과 개인주의 체제의 충돌로 나타난 사회적 불행은 개인이 낡은 관념을 버리고 새로운 관념을 가져 사회에 이로운 행복을 갖게 되는 것만으로도 대부분 해결할 수 있다. 그런 식의 불행예방은 예산이 거의 들지 않는 효율적인 복지가 될 것이다.

 

 

 

세 번째, 자본주의 체제 유지

 

개인주의 체제는 개인이 이기적이어야 올바른 결과가 나온다. 이타적이어야 공동체가 유지될 수 있을 거란 환상은 개인주의 체제의 정교한 구조 앞에서 소멸하게 된다. 모든 개인이 자유롭게 이기적으로 행동한다면 개인과 개인의 이기심이 충돌할 수 있다. 공정경쟁으로 어느 이기심이 우선될지를 정한다. 약자라는 이유로 경쟁을 할 자유가 보장되지 못하거나 부당한 손해를 보거나 소수라는 이유로 억울하게 의견을 무시당할 수 있거나 시장성이 없거나 부족한 생산으로 이윤을 충분히 얻지 못해 피폐하게 살아갈 수 있다. 그러면서 사회의 균형이 깨져 사회가 무너질 수 있다. 개인주의 체제는 약자라는 이유로 자유를 잃거나 부당한 손해를 본다면 법으로 개인의 자유권을 보장하고 부당한 손해에 대한 판단을 한다. 억울하게 의견을 무시당하는 사람이 있으면 법으로 개인의 의사표현을 보장한다. 피폐하게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면 복지로 행복할 수 있도록 지원한다. 이렇게 개인주의 체제는 이기적이어야 올바른 결과가 나오도록 법과 복지로 사회의 균형을 맞추는 구조를 만들어 사회 구조를 유지한 것이다.

만물도 균형으로 유지된다. 인간이나 우주나 지구도 그렇다. 인간을 알아보자.

인간은 균형이 깨지면 유지되지 못하고 죽는다. 영양분을 균형 있게 섭취하지 못하면 영양불균형으로 죽는다. 노동과 수면과 여가가 균형 있지 않으면 소외감이나 과로로 죽는다. 타인과의 시간과 본인만의 시간이 균형 있지 않으면 스트레스나 고독으로 죽는다. 개인의 자유의사에 포함되는 취미나 취향이나 특기는 불균형해도 되나 육체와 마음의 유지에 포함되는 영양분이나 노동이나 인간관계는 균형적이어야 한다. 우주를 알아보자.

지구 주변의 우주 균형이 깨지면 지구는 생명체가 살 수 없는 행성이 된다. 지금 지구는 굉장히 특별한 균형으로 생명체가 살 수 있는 행성인 상황이다. 이 우주의 균형이 언제 깨질지 모른다. 만 년 뒤나 천 년 뒤. 어쩌면 지금. 인류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우주의 균형을 유지하기 위한 제어가 가능하거나 균형이 있는 곳으로 이동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인류는 그것이 가능하다. 지구를 알아보자.

지구에서 생물이 이기적으로 행동하며 자연을 오염시켜도 자연의 생태계가 정화하는 것으로 지구의 균형을 맞춰왔다. 그러다 인간의 오염이 인간 외의 자연만으로는 정화시키기 어려워지자 인간도 같이 정화하여 지구의 균형을 맞추고 있다. 이것을 세상에선 환경보호라 한다. 지구 생명체가 자유롭게 사는 것은 불균형해도 되나 지구를 유지하는 환경은 균형적이어야 한다.

균형을 맞춘다는 점에서 사회의 법과 복지와 인간의 영양분 등이나 지구의 환경보호는 같은 목적을 띠고 있다. 사회의 법과 복지가 인간에게 적합한 사회 구조 유지가 목적이듯 지구의 환경보호는 인간에게 적합한 지구 환경 유지가 목적이다. 목적에 부합하기 위해 법과 복지는 사회 구조 유지를 명분으로 개인주의 체제의 이념을 무시하며 무조건 개인의 권리를 침해할 수 없듯이 환경보호도 지구 환경 유지를 명분으로 무조건 인간의 생존과 행복을 무시할 수 없다. 개인주의 체제의 이념을 무시하고 개인의 권리를 침해하며 사회 구조 유지만을 목적으로 한다면 모든 인간을 지배하여 명령대로 움직이는 로봇으로 만들면 된다. 인간의 생존과 행복을 무시하고 지구 환경 유지만 목적으로 한다면 모든 인간의 문명을 파괴하고 모든 인간을 죽이면 된다. 그러나 그럴 수는 없다. 사회나 지구를 유지하기 위해 개인의 의사와 무관하게 강제력이 동원되나 그 사회나 지구는 어디까지나 인간을 위한 곳이므로 인간에게 과도한 피해를 주는 일은 허용할 수 없다. 배의 균형을 맞추겠다며 사람을 짐짝 취급하며 짐과 같은 곳에 방치하거나 바다로 내던지는 일을 해서는 안 되는 것과 같다. 개인이 이기적이어야 올바른 결과가 나오기 위해서는 개인의 자유권을 침해하는 일은 있을 수 없다. 개인의 자유권을 침해하는 것 자체가 올바르지 않다.

개인의 자유권을 침해하지 않으면서 사회 구조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강제성이 없는 사전예방과 강제성이 있는 사후조치로 접근해야 한다. 어떤 사건이 발생하지 않도록 교육이나 홍보를 하는 것이 강제성이 없는 사전예방이고 사건 발생 이후에 신속하고 정확하게 강제로 대처하는 것이 강제성이 사후조치라 할 수 있다. 그러지 않고 사건이 발생하기 전부터 발생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만으로 모든 인간에게 강제로 제약을 거는 것이 바로 강제성이 있는 사전예방으로 개인의 자유권 침해가 된다. 독재정권의 다양한 악법을 통한 간첩몰이나 검열정권의 N번방 방지법을 비롯한 검열과 규제를 통한 성범죄자 몰이가 대표적인 강제성이 있는 사전예방으로 개인의 자유권 침해에 해당하게 된다. 이것을 무시하고 권력을 휘두르는 것을 가리켜 권력 남용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국민이 주도하면 국민의 권력 남용이 되고 정치가가 주도하면 정치가의 권력 남용이 된다. 한국 사회는 비논리적인 이들의 권력 남용으로 개인주의 체제의 이념과 합리성이 파괴되어가는 중이다. 지성인이라면 이를 사유하며 반성하는 것이 마땅하다.

인권운동도 사회의 균형을 맞추고 있다. 인권운동자가 주장한 내용을 법과 복지가 비판적으로 수용하여 사회의 균형을 맞춘다. 인권운동은 인권침해가 발생할 확률이 높은 노동자와 여성과 아동과 동성애자와 외국인 등과 같은 약자나 소수자를 대상으로 하나 인권이 침해 당하면 누구든 대상이 될 수 있다. 인권운동자가 주장하는 인권은 이미 증명되어 대부분 헌법에 정의되어 있다. 그렇기에 인권운동은 보통 헌법에는 포함되어 있으나 법령에는 포함되어 있지 않은 사안을 다룬다. 법령에 있으면 법령으로 처벌하면 되기에 애초에 운동할 이유가 없다. 인권운동은 법령에 포함되어 있지 않음에도 국제법에 포함되기도 하는 자연법에 해당하는 주장이기에 강제성을 띠는 편이다. 타인에게 강제력을 발휘할 수 있는 인권운동은 인권을 근거로 한 권력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인권운동은 대부분 처음부터 인권운동이 아니었다. 인권이라 함은 모든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말하는 것으로 보편적인 인간의 권리를 지칭하기에 객관적이고 균형적이고 논리적이어야 함에도 인권운동은 주관적이고 불균형적이고 비논리적이기 때문이다. 인권운동이 모든 인간의 권리를 주장했다면 다음과 같은 현상이 나올 수가 없다.

강한 노동자는 귀족노조란 말을 들을 정도로 이익을 얻어 사회적 비판을 받는 반면 약한 노동자는 참혹한 환경에서 죽을 정도로 일을 하며 갑질과 착취를 당하고 있는 삶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강한 여성은 가산점과 할당제로 능력 이상의 직업이나 권력을 얻어 역차별이란 사회적 비판을 받는 반면 약한 여성은 비참한 환경에서 육체적이나 정신적 학대와 폭력을 당하는 삶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강한 아동은 기초학력이 낮아지거나 범죄를 저질러도 학생이나 촉법소년이란 이유로 관여하거나 제대로 처벌하지 못해 아동에게 체벌을 가해야 하거나 촉법소년을 폐지해야 한다는 사회적 비판을 받는 반면 약한 아동은 보호자의 감시와 검열로 자유권을 침해 당해 선거권과 성적 자기결정권도 없는 상황에서 로봇처럼 명령대로 지식을 암기하고 이해하는 자유의지를 잃어버린 삶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일부는 인권을 근거로 한 권력을 남용하여 과한 이익을 얻고 일부는 인권조차 보장 받지 못한 삶을 살고 있다.

이와 같은 현상은 모든 인간을 대상으로 하는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주장한 인권운동이 아니라 일부 인간을 대상으로 한 운동자나 대상의 이익을 얻을 권리를 주장한 이권운동이기 때문에 같은 노동자나 여성이나 아동이라 하더라도 이익을 얻는 이가 달라지는 불균형한 양극화 현상이 나타난 것이다. 인권은 모든 인간을 대상으로 하고 있으므로 객관적이고 균형적이고 논리적이지 않는다면 그것은 그저 이권일 뿐이다. 인권을 주장할거면 주관과 감정을 버리고 객관과 이성을 가지고 모든 인간의 권리에 해당하는 균형 있는 주장만 해야 한다. 그러나 그런 인권운동은 매우 드물다. 지금 대부분의 인권운동을 정치체제로 비유하면 왕정 체제의 신분제를 폐지하고 민주주의 체제의 선거제를 도입하는 것이 아니라 왕정은 폐지하나 신분제는 유지하면서 평민과 노예였던 이들에게 배려와 혜택을 늘리자고 주장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이런 불균형한 이권운동이 균형적인 인권운동이 되려면 민주주의 체제가 왕과 귀족과 평민과 노예였던 이들이 모두 같은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얻을 수 있도록 제도화하였던 것과 같이 노동인권운동은 노동자와 자본가가 같은 기준으로 권리를 얻을 수 있도록 해야 하고 여성인권운동은 여성과 남성이 같은 기준으로 권리를 얻을 수 있도록 해야 하며 아동인권운동은 아동과 성인이 같은 기준으로 권리를 얻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러나 그들은 그러지 않았다.

 

하나, 노동자를 알아보자. 만약 노동자가 인권운동을 했더라면 자본가가 소비자 상품을 취급하는 상인인 것처럼 노동자 또한 노동력 임대 상품을 취급하는 상인으로 대해달라 요구했을 것이다. 같은 기준으로 권리를 요구하는 것이다. 그렇게 노동자가 노동력 임대 상품을 취급하는 상인이 되었다면 자본가는 계약 이상의 노동을 요구하지 못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자본가도 상품 임대로 수익을 얻기 때문에 소비자 상품 임대와 노동력 상품 임대를 같은 선상에서 바라보고 소비자 상품과 같이 노동력 상품도 소중하게 다루며 계약을 준수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같은 기준이 되면 어느 쪽은 소중하고 어느 쪽은 소중하지 않다는 논리적 모순을 허용할 수 밖에 없게 된다. 노동력 임대 상품을 계약과 다르게 활용하면 소비자 임대 상품을 계약과 다르게 활용했을 때와 같이 계약위반으로 큰 위약금을 물게 했으면 되었다.

만약 그랬다면 포괄임금제도 없었을 것이다. 소비자 임대 상품을 소비자가 추가로 무료 임대해달라 요구하면 몇 번은 서비스가 가능해도 계속 서비스가 불가능하듯이 노동력 임대 상품을 자본가가 추가로 무료 임대해달라 요구하면 몇 번은 서비스가 가능해도 계속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고 있어 추가노동을 하게 하지 않거나 계약 외 추가계약으로 노동력 상품에 대한 정당한 대가를 지불했을 것이다.

계약도 달라졌을 것이다. 통상 상거래를 떠올려보면 단기계약은 계약기간이 짧으므로 계약비용이 높았을 것이고 장기계약은 계약기간이 길게 되어 장기고객이 되므로 계약비용이 낮았을 것이다. 장기고객 할인요금을 떠올려보자. 그게 원래 시장경제에서는 당연하다. 단기계약은 계약비가 높은 대신 안정성이 낮고 장기계약은 계약비가 낮은 대신 안정성이 높다. 노동력 상품도 같은 방식으로 접근하면 노동유연성과 노동안정성이 나타날 수 있다. 단기계약을 하는 사람은 계약비가 높은 대신 안정성이 낮아 노동유연성이 나타날 수 있고 장기계약을 하는 사람은 계약비가 낮은 대신 안정성이 높아 노동안정성이 나타날 수 있다. 이러면 연공서열로 능력과 무관하게 높은 비용을 받는 노동자의 수가 줄어들고 능력이 있는 사람은 연공과 무관하게 단기계약으로 높은 비용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특히 한국은 외국과 비교했을 때 한국 대기업 노동자의 노동자 임금은 크게 오른 반면 중소기업 노동자 임금은 적게 올라 임금 격차가 심각한 수준이라고 산업계가 지적할 정도라고 한다. 이것은 장유유서 관념이 만든 연공서열에 따른 임금과 집단주의 체제인 노동조합의 담합이 만든 격차다.

대중은 이러한 관계를 보고 노동력 상품을 험하게 다루는 계약위반자를 감성적으로 접근하며 부도덕하다 비난하기 전에 이성적으로 접근하며 비논리적이라며 비난하는 것으로 빈부와 관계 없이 동일한 비난이 나올 수 있을 것이다. 부도덕한 것은 논리 개입의 여지가 있어 다른 의견이 나올 수도 있지만 비논리적인 것은 애초에 논리에서 어긋난 것이기에 다른 의견이 나오기가 어렵다. 그 누구든 지성인이라 자부하는 이상 타당한 논리를 부정하는 것은 자기존재를 부정하는 것이기에 쉽게 하기가 어렵다. 만약 비논리적인 인간이 있어 비논리적인 행동을 하더라도 다른 논리적인 인간이 그 행동을 비판하면 그런 행동을 줄이거나 멈출 수 있다.

두 상품을 동일선상에서 바라보면 노동자 착취는 보통 일어나기 어렵다. 노동자와 자본가 모두 상인이기에 종신고용을 주장하며 노동유연화에 반대할 것이 아니라 기업유연화를 주장했을 것이다. 노동자가 자본가에게 종속된 존재가 아닌 대등한 상인이기에 노동력 임대 상품에 대한 대가도 지불하지 못하는 노동자의 노동력 상품을 구매할 자격이 없는 무능한 기업은 사라져야 한다고 주장했을 것이다. 가장 치열하게 경쟁했어야 할 기업이 창업 교육에 소홀히 한 결과 세습을 하더라도 괜찮을 정도로 경쟁이 없었으니 제대로 돌아갈 수가 없었다. 노동자는 노동력 상품을 취급하는 상인이 되어 자본가와 대등한 기준에 있어야 했다. 그러나 그들은 그러지 않았다.

천대 받는 노동자의 위치에서 일부 노동운동을 하는 운동자와 운동 대상의 이익만을 요구했을 뿐이다. 자본가에게 종신고용으로 종속되어 많은 배려와 혜택만을 달라고 요구했을 뿐이다. 이러니 현대의 노동자가 농노와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그러니까 무조건 종신고용과 정규직이 옳다는 잘못된 관념에 사로잡혀 능력이 있는 사람조차 무기력하게 종속되었던 것이다. 농노와 다를 바 없었던 노동자는 생존하기 위해 집단을 형성하여 단결하며 집단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집단주의 체제가 되었다. 노동자의 권리를 살펴보자.

노동삼권은 단결권과 단체교섭권과 단체행동권을 일컫는다. 단결권은 노동조합을 만들 권리를 말하고 단체교섭권은 노동조합이 사용자와 노동조건에 대해 교섭하는 권리를 말하고 단체행동권은 파업과도 같은 행동을 할 권리를 말한다. 노동자의 집단인 노동조합은 처음부터 집단주의 체제였다. 집단주의 체제인 노동조합은 개인주의 체제인 국가와 어울릴 수 없었다. 담합에 대해 생각해보자.

자본가가 모여 경쟁 입찰이나 상품의 가격이나 노동자의 임금을 미리 협의하여 정하는 것을 담합이라 부른다. 그렇다면 논리적으로 노동자가 모여 소비자와 자본가에게 받는 비용과 임금을 미리 협의하여 정하는 것도 담합이 된다. 자본가는 소비자에게 상품을 파는 상인이고 노동자는 자본가에게 상품을 파는 상인이라는 전제하에 자본가와 노동자는 가진 힘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본질은 같다. 그럼에도 자본가가 소비시장에서 담합을 하는 것은 죄가 되지만 노동자가 노동시장에서 노동조합으로 담합한 임금을 요구하며 파업을 하는 것은 권리가 된다. 이는 체제의 차이다. 자본가의 소비시장은 개인주의 체제에 속하는 반면 노동자의 노동조합은 집단주의 체제에 속하기 때문이다. 체제의 차이로 자본가의 담합은 죄가 되나 노동자의 담합은 권리가 된다.

어떤 사람은 체제가 아닌 힘의 차이로 담합이 정당화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묻겠다. 힘의 차이로 담합이 정당화된다면 관광지나 위수지의 가난한 자영업자가 수익을 얻기 위해 다른 자영업자와 담합하며 내국인과 내지인에게는 정가로 팔고 외국인과 군인에게는 비싸게 파는 것이 정당하다 할 수 있는가? 대기업의 부유한 노동자가 수익을 얻기 위해 다른 노동자와 담합하여 객관적 근거가 부족한 임금 상승을 주장하며 파업하고 생산하는 상품과 제공하는 서비스의 가격상승과 품질저하는 일으키는 것이 정당하다 할 수 있는가? 가진 부의 차이를 보면 관광지나 위수지의 자영업자가 대기업의 노동자보다 가난할 확률이 높다. 관광지의 자영업자는 코로나로 대부분 사라졌으며 위수지의 원래 사람이 드물어 자영업자가 부유하기 어렵다. 반면 대기업 노동자는 노동조합을 통해 꾸준한 이권주장을 하여 많은 권리와 혜택을 얻어낸 상황이라 상대적으로 부유한 상황이라 할 수 있다. 그럼에도 자영업자의 담합은 부당하고 노동자의 담합은 정당하다 여길 것이다. 이처럼 힘이 아닌 체제의 차이로 담합이 정당화되고 있다.

만약 경제 또한 개인주의 체제인 자본주의의 시장경제가 아닌 집단주의 체제인 공산주의 계획경제였다면 담합이 정당화되었을 것이다.

집단주의 체제인 노동조합과 개인주의 체제인 사회의 충돌은 많은 사람을 불행케 한다. 특정 노동조합이 담합을 하여 결정한 임금의 주장하며 파업을 하면 담합한 임금이 통과되든 통과되지 않든 나머지 국민은 손해를 보게 된다. 파업을 하면서 상품 공급이 지연되고 객관적이고 논리적인 설득이 아닌 파업을 강행하여 임금이 상승하게 되면 자본가의 부를 노동자가 더 많이 가져가는 것이 아니라 상승한 임금만큼 상품의 가격을 올리거나 품질을 저하시켜 상품을 구매하는 국민의 소비비용이 오르거나 소비만족도가 낮아지게 된다. 노동자와 자본가의 계급투쟁이 아닌 분야와 분야의 이익경쟁이 되는 것이다. 그러면서 파업을 한 분야와 파업을 하지 않은 분야 사이에서 부당한 손익이 발생한다. 다른 분야의 노동자는 손해를 본 만큼 이익을 얻기 위해 파업을 강행한다. 파업의 연쇄작용이다. 이 과정에 논리가 없기 때문에 보다 더 감정적이고 비논리적으로 행동한 집단이 더 큰 이익을 얻게 된다. 사회가 이성과 논리를 잃으며 흔들리게 된다. 파업의 연쇄로 집단주의 체제인 노동조합의 집단 이기주의가 강해짐에 따라 집단의 이익을 위해 개개인의 의견이 무시되어 파업에 동의하지 않거나 동참하지 않은 이에게도 파업을 강요하게 된다. 개인의 자유를 침해하여 자유주의 이념이 훼손되게 된다. 이윽고 모든 노동조합이 파업을 하는 것으로 이익을 얻으면 노동조합에 가입하지 않은 노동자는 부당한 손해를 보게 된다. 그렇게 따라 노동조합에 어쩔 수 없이 가입하게 되는 노동자의 수가 늘어나고, 가입할 수 없는 노동자는 더욱 더 큰 부당한 손해를 보게 된다. 자본가와 노조와 비노조로 계급이 나뉘게 된다.

노동인권운동이 인권운동이 아니라 이권운동이기에 이런 현상이 나타났다. 자본가에 종속되어 자본가와 노동자가 계급화가 나타났고 노동조합을 만들어 노동조합 가입유무로 계급화가 나타났다. 계급투쟁으로 계급을 없앤 것이 아니라 계급을 한 층 더 견고하게, 한 층 더 늘렸다. 이것이 집단주의 체제의 한계다. 개인주의 체제에서는 노동자와 자본가가 같은 상인이라는 점을 고려해 노동력 상품 판매를 하다가 부당한 일을 겪으면 공정거래를 담당하는 곳에 연락하여 해결했어야 했다. 노동자와 자본가 둘 다 상품을 취급하는 상인이 되는 것으로 대등한 관계를 구축한 후에 시장경제에서 팔리지 않는 상품을 소유한 상인이 겪는 불충분한 행복은 복지로 지원해야 한다. 지금 노동조합은 개인주의 체제를 갖춘 국가에서 집단주의 체제를 유지하는 비정상적인 집단임을 확실하게 인식해야 한다.

 

, 여성을 알아보자. 만약 여성이 인권운동을 했더라면 남성이 권리와 의무를 다하듯이 여성 또한 권리와 의무를 다하는 같은 인간으로 대해달라 요구했을 것이다. 같은 기준으로 같은 권리를 요구하는 것이다. 그렇게 여성이 남성과 대등한 인간이 되었다면 남성은 여성의 인권을 인정하고 받아드려 불필요한 분쟁이 있지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지금 남성의 불만은 권리는 바라는데 의무와 책임은 거부하는 여성의 모순적인 태도에 분노하거나 질려있기 때문이다. 여성인권을 주장할거면 성별로 구분할 것이 아니라 같은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요구했어야 했다. 그러나 그들은 그러지 않았다.

여성인권을 주장하는 이들은 여성과 남성을 다른 존재라 규정하고 여성이 이익을 얻을 권리와 남성이 이익을 얻을 권리가 다르다 주장하니 그들의 주장은 모든 인간의 권리인 인권이 아닌 여성만이 이익을 얻을 권리인 이권이 되었다. 여성인권운동자가 주장하는 기울어진 운동장이 바로 그렇다. 여성과 남성과 같은 기준으로 대등하게 살자고 말하며 평평한 운동장에서 공정한 경쟁으로 나타난 불균형한 결과를 평등하게 받아드리자고 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 다른 기준으로 대등하지 않은 상황에서 발생한 불공정 경쟁으로 나타난 불균형한 결과를 인위적으로 균형 있게 만들자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면 언젠가 평평하게 될 거라면서 말이다. 어처구니 없다. 애초에 모든 경쟁은 불균형함에도 과거 불공정 경쟁으로 나타난 불균형함을 말하며 인위적으로 균형 있게 만들자고 주장하고 있다. 모든 경쟁은 불균형해야 정상이다. 균형적이게 되면 경쟁의 승자가 부당한 손해를 보고 패자가 부당한 이익을 얻게 된다. 그럼에도 그들은 여성이 주관적으로 정한 기준에 맞을 때까지 여성만이 일방적으로 계속 이익을 얻길 바라고 있다. 통계를 조작해서 여성이 손해를 보고 있다는 것을 주장하면서까지 말이다.

명백한 이권운동이다. 인권이라는 것은 모든 인간의 권리기에 특정 인간에 맞춰진 기준으로 어느 누군가가 일방적으로 이익을 얻거나 손해를 봐서는 안 된다. 그러려면 공정한 경쟁이 필요한데 그런 공정한 경쟁을 위해 같은 기준으로 평가를 받는 것이 인간으로서의 권리인 인권이다. 그러지 않고 일부가 일방적으로 이익을 얻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단순한 운동자나 운동대상이 이익을 얻을 권리를 주장한 이권운동일 뿐이다. 객관적이고 균형적이고 논리적인 인권운동이 아닌 주관적이고 불균형적이고 비논리적인 이권운동이기에 그들은 실제 평등과 무관하게 영원히 이익을 얻을 권리만을 주장할 것이다. 설령 공정한 경쟁으로 나타난 불균형이다 하더라도 잘못되었다고 말하면서 계속 이익을 주장할 것이다.

여성인권운동자가 주장하는 성인지감수성은 정말 어처구니 없다. 도대체 그 성인지의 성이 어디서 비롯되었는지 단 한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나? 본인이 가진 성관념이 어디에서 왔는지 생각해 본 적이 없느냔 말이다. 가부장제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가부장제를 비판하는 인간들이 가부장제의 여성상의 여성성을 공감할 감수성을 요구한다는 것이 얼마나 웃기는 짓인지 알아야 한다. 여성을 성적으로 도구화하는 것과 같은 차별을 겪었으면 낡은 관념에서 벗어나 과학이란 진리를 근거로 처음부터 무엇이 올바른 여성성인지 생각했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정말 짜증난다. 가엽지도 않은가? 가부장제에서 여성을 고통 받게 하던 성관념을 신세대 여성에게 세뇌하여 신세대 여성도 똑같이 그 성관념에 고통 받는 것이 가엾지 않냐는 말이다. 신세대 여성은 가부장제에서 살던 여성과 같은 불필요한 불쾌감이나 피해의식을 가질 필요가 없었다. 성적인 것을 보고 불쾌감을 느낄 필요가 없고 성적 대상이 된다 하더라도 그게 정상이므로 그렇게 될지 모른다는 피해의식을 가질 필요가 없다.

연하는 연상의 장난감이 아니다. 멋대로 주물럭대면서 고통스럽게 만드는 관념을 세뇌해서는 안 된다. 신분제 관념으로 고통 받던 이들이 신분제 관념을 신세대에게 세뇌하여 고통 받게 하는 것이나 장유유서 관념으로 고통 받던 이들이 장유유서 관념을 신세대에게 세뇌하여 고통 받게 하는 것과 같이 어리석은 짓이다. 탈코르셋이라면서 꾸밈을 막는 것은 정말 황당해서 말이 안 나올 정도다. 인간이 인간에게 사랑 받기 위한 노력을 죄악시하면 어떻게 하나. 코르셋은 강요되었기 때문에 잘못된 것이었다. 자유의지로 꾸미는 것을 막는 것은 오히려 여성 개인의 자유권 침해에 해당한다. 여성인권은 일부 여성의 트라우마를 정당화하고 일반화시키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진정한 여성인권을 얻길 바란다면 이제 가부장제 성관념이란 낡은 관념에서 벗어나야 한다.

 

, 아동에 대해 알아보자. 만약 아동의 인권을 주장하는 이들이 인권운동을 했더라면 성인과 비슷한 사리분별이 가능한 영역은 성인과 같은 권리를 갖는 인간으로 대해달라 요구했을 것이다. 같은 기준으로 같은 권리를 요구하는 것이다. 그렇게 아동이 성인과 대등한 인간이 되었다면 아동이 대처할 수 있는 것에 과도한 간섭을 하는 것으로 권리를 침해하는 일이 없었을 것이다. 지금 아동의 인권침해는 장유유서를 근거로 아동을 어리석게 여기고 권리를 빼앗고 보호만 하자는 주장을 하고 있다. 아동인권을 주장할거면 아동의 권리를 최대한 보장해야 한다.

식사를 가릴 수 없는 시기인 아기 때에는 식사에 대한 자유권을 침해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식사를 가릴 수 있게 되는 초등학교 저학년만 되도 식사에 대한 자유권을 침해할 이유가 없다. 먹기 싫은 음식은 먹지 말고 필요한 영양분을 섭취할 수 있도록 지식을 전달해 불충분한 영양분은 영양제로 보충할 수 있도록 하면 된다. 어릴 때 쓴 맛을 강하게 느끼던 채소도 커서는 강하게 느끼지 않아 맛있게 먹을 수 있다고 한다. 정 못 먹는 것을 강제로 먹이면 불쾌한 기억이 새겨져 커서도 못 먹게 될 뿐이다. 채식주의 강요는 이보다 더한 자유권 침해로 아동학대로 보고 있다.

성기능이 작동하지 않는 시기인 초등학교 저학년 때에는 성에 대한 자유권을 침해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성기능이 작동하게 되는 초등학교 고학년에서 중학생부터는 성에 대한 자유권을 침해할 이유가 없다. 본인이 본인의 자유의지로 선택할 수 있게 하고 그에 따른 충분한 성교육을 하면 된다. 성문화도 막을 이유가 없다. 성기능이 작동하는데 성문화를 막는 것은 미신을 맹신하는 수준으로 어리석은 비논리적인 태도다. 아동의 자유권은 성인의 도덕적 만족감을 위해 침해되어야 할 권리가 아니다.

정치에 대해 알기 어려운 초등학교 고학년 때까지는 선거에 대한 주권을 침해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정치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될 수 있는 중학생에서 고등학생부터는 선거에 대한 주권을 침해할 이유가 없다. 최소한 교육관련 선거는 학생들도 할 수 있어야 한다. 본인과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는 교육감 선거에 중학생과 고등학생이 선거권을 행사할 수 없는 것 자체가 비정상적이다. 선거권이 주어지지 않는 까닭이 학생들이 지식이 적거나 어리석기 때문에 정당한 표 행사가 어려운 것이라 말한다면 논리적으로 저학력이나 지적장애를 가진 사람은 선거할 권리가 없다는 결론이 나오게 된다. 비논리적이다. 설령 중학생과 고등학생 중에 어리석은 학생이 있다 하더라도 선거권은 주어져야 한다. 애초에 민주주의는 모든 인간에게 주권을 주는 것이므로 현명함과 어리석음은 관계 없다. 주어진 권력을 비논리적으로 사용하는 것과 같은 권력 남용을 경계하면 될 뿐이다. 학생도 소비세는 내며 사회활동을 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그러지 않았다.

아동인권을 주장한 이들이 아동의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주장한 것이 아니라 본인이 느끼기에 아동의 이익이라 생각되는 것을 주장하는 바람에 아동은 권리를 침해 당하면서 과한 보호를 받고 있다. 권리를 침해 당한 아동은 자유권을 침해하는 감시와 검열을 당하고 선거권이 주어지지 않고 성적 자기결정권을 잃었음에도 이런 아동인권 침해에는 어떤 목소리도 제대로 나오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과한 보호를 받는 일부 아동은 그런 보호를 악용하여 학교붕괴를 유도하거나 폭력을 휘두르고 있음에도 마땅한 대처를 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사리분별이 불가능할 정도로 어리석어 심신미약자와 비슷하다며 초등학생 고학년의 성적 자기결정권을 주지 않고 중학생의 성적 자기결정권을 박탈해놓고 심신미약자와 같은 초등학생 고학년과 중학생의 범죄를 과하게 처벌하자 주장하는 것은 비논리가 된다. 만약 이들의 범죄를 지금보다 과하게 처벌하면 범죄를 저지를 수 있을 정도로 사리분별이 가능하다는 논리가 되어 성적 자기결정권을 빼앗을 근거가 사라지게 된다. 그러면 그건 그냥 단순한 아동의 자유권 침해에 해당하여 권리를 빼앗은 것이 잘못되었다.

많은 사람들은 아동이 과거보다 빠르게 성장했기에 변별력이 커졌다고 인식하여 촉법소년법 대상의 연령을 바꿔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에 인권위는 아동이 과거보다 빠르게 성장했다 하더라도 변별력이 커졌다는 과학적 근거는 없다고 반론했다. 분명 아동의 성장이 빨라져 변별력이 커진 것은 아니다. 정보양이 늘어나 변별력이 정상이 되었다고 보는 것이 알맞다. 아동이 과거와 다르게 변별력이 커져 사리분별이 가능하게 되는 것은 아동의 성장이 빨라서가 아닌 아동이 접하는 정보양이 늘어나서 그런 것이기 때문이다. 아동은 과거에도 변별력을 키워 사리분별을 할 수 있었으나 보호자의 정보통제로 정보를 접하지 못하여 미숙하게 자라고 있었으나 인터넷의 등장으로 보호자의 정보통제가 의미를 잃게 되자 과거와 달리 성숙해져 버렸다. 아동이 성인보다 바둑을 잘 둘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해보자. 성인도 정보통제를 당하면 변별력을 키울 수 없어 사리분별이 어려워 쉽게 이용당할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해보자. 실상 사춘기 무렵의 아동과 성인은 경험 외엔 차이가 없다. 야생에 살지 않던 성인은 야생에 살던 아동보다 분별력이 낮다. 지금까지 아동이 변별력이 커지지 못했던 것은 본래 능력이 없는 것이 아니라 정보통제 때문이었다. 정보통제를 뚫고 나온 인터넷의 엄청난 정보양이 아동의 변별력을 무작위로 키워버렸다. 그런데 아동이 인터넷의 정보로 변별력을 키워 성숙해지는 것은 체계적이지 못해 충동적이고 제멋대로 성장하여 곧잘 범죄에 빠지기도 했다.

본래 정보양이 폭증하면 그에 따라 교육도 발맞춰 아동을 빠르게 성장시켰어야 했음에도 아동은 어리석다는 편견에 휩싸여 인터넷의 존재로 정보통제가 의미가 없어졌음에도 정보통제를 하며 교육을 통한 성숙을 시도하지 않았기에 인터넷을 통한 성숙으로 비뚤게 자라는 일이 잦아진 것이다. 낡은 집단주의 관념에 벗어나지 못하여 시대의 변화에 교육이 따라가지 못하면 이런 현상이 나온다. 얼마나 시대변화에 둔감한 것인가?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면 도태되는 것이 자연의 법칙이다. 교육도 변화에 적응해야 한다.

아동인권을 주장하는 이들은 학생인권조례 등의 방식으로 아동의 권리를 최대한 보호하려 노력한 점은 알겠으나 그것만으로는 객관적이고 균형적이고 논리적이지도 못했기에 아동과 성인이 대등한 인간이 되지 못하여 여전히 아동은 권리를 침해 받으며 차별 받고 천대 받고 있다. 권리를 침해 당한 아동은 보호자의 소유물과 같았다. 장유유서를 근거로 한 차별적인 질서를 연상인 성인이 연하인 아동에게 강요하는 것으로 부당한 인간관계를 만들거나 수치기인을 근거로 한 맹목적인 교육열을 가지고 아동에게 공부를 강요하는 것으로 아동을 죽음으로 몰고 가게 하거나 정조관념을 근거로 모든 성에 관련된 정보를 막아 아동이 성을 부정적으로 여기게 되는 것으로 성인이 되어서도 진실된 이성애가 아닌 타산적 자기애로 사랑을 하거나 이성관계와 성관계와 결혼과 출산을 부정적으로 여기게 만들어 무의식적으로 꺼려하게 만들었다. 아동은 보호자의 소유물과도 같았기에 보호자의 마음에 따라 살해되기도 하고 가장이 주도한 가족의 집단자살에 강제로 동참되기도 했다. 한국의 자녀살해 비율을 세계 최고수준이다. 가족의 집단자살에 아동을 강제로 동참시키는 것은 본인이 죽은 후에 아동이 걱정된다는 궤변으로 합리화하고 있으나 그것은 임금과 귀족이 죽었을 때 살아있는 아내나 신하나 종을 함께 장사 지내는 것을 뜻하는 순장과 다르지 않을 정도로 미개한 짓이다. 그런 미개하기 짝이 없는 행동을 정당화하는 것이 바로 장유유서와 같은 집단주의 관념이고, 그런 관념들을 근거로 아동의 권리를 침해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해야 한다.

 

인권운동은 이권운동이나 마찬가지였기에 주관적이고 불균형적이며 비논리적인 주장을 남발하며 사회에 강요하는 권력 남용을 저지르고 있다. 세계인권선언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인권의 범위가 굉장히 포괄적이고 모호하다. 그것을 이용하여 이권 또한 인권으로 포장하여 강제력 있는 이권을 행사함에 따라 부당하게 개인의 자유권과 주권과 소유권을 침해하고 있다.

인권과 이권의 차이는 강제성이다. 인권이라면 강제성이 있을 수 있으나 이권이라면 강제성이 없다. 그럼에도 일부 여론과 권력자가 그걸 무비판적으로 수용해버리는 바람에 주관적이고 불균형적이며 비논리적인 것에 영향을 받아 사회 또한 균형이 깨지면서 사회가 흔들리고 있다. 이미 증명된 인권은 대부분 수용하되 증명되지 않은 이권은 반드시 비판적 수용을 하거나 애초에 수용하지 말아야 한다. 증명되지 않은 권리까지 인권인 것마냥 은근슬쩍 호도하며 주장하는 것은 잘못되었다. 특히 대상을 차별하던 관념을 가지고 대상의 인권을 주장하는 것이 얼마나 천박한지 아는가? 노동자를 차별하고 여성을 차별하고 아동을 차별하던 관념으로 인권을 주장하면서 다시 한번 차별하는 모습을 보는 것이 너무 괴상하여 견딜 수가 없을 지경이다. 그러니 문제는 해결하지 못하면서 해결 못한 문제를 근거로 더욱 더 많은 것을 요구하며 사회를 괴롭게 하는 것이다.

노동자는 자본가와 같은 상인이 되어 차별적인 종속이 아닌 평등한 상거래를 하는 것이 인권이고 여성은 남성과 같은 국민이 되어 사회 진출과 기회의 평등을 누리고 병역의 의무를 다하는 것이 인권이고 아동은 성인과 같은 국민이 되어 최대한 자유권과 주권을 보장받고 그에 대한 책임을 지는 것이 인권이다. 노동자는 자본가에게 종속되지 않아 노동안정이 되지 않는 것이 막심한 손해처럼 느껴질 수 있는데 본래 그것이 노동자가 자본가와 평등할 수 있는 바른 길이고 여성이 남성과 같이 의무를 다하여 징병되는 것이 막심한 손해처럼 느껴질 수 있는데 본래 그것이 총기 사용법을 익혀 무력을 얻고 살아남는 기술을 습득하여 여성이 남성과 평등할 수 있는 바른 길이고 아동이 성인과 같이 자유권과 주권을 얻어 책임을 지는 것이 막심한 손해처럼 느껴질 수 있는데 본래 그것이 아동이 성인과 가능한 최대한 평등할 수 있으며 자유의지를 갖게 하고 그에 대한 책임을 지는 것으로 현명함을 갖게 할 수 있는 바른 길이다. 무엇이 인권인지 부디 심사숙고하길 바라겠다.

인권은 절대권력이 아니다. 요즘 인권으로 난리가 나는 것은 인권의 탈을 쓴 이권이 권력 남용을 저지르고 있음에도 그에 대한 견제를 전혀 받지 않기 때문이다. 이권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길 바라는 것이 강제가 아니면 무엇인가? 논리적인 비판을 하면 혐오라느니 감수성이 부족하다느니 같은 비논리적인 대응을 하며 무비판적 수용을 바라는 것이 강제가 아니면 무엇인가? 그것이 강제인 이상 권력이고 그것이 부당한 이상 권력 남용이다. 보편적인 법과 복지와 인권은 객관적이고 균형적이고 논리적이어야 하고 개인적인 개인의 자유와 선거와 시장과 이권은 주관적이고 불균형적이고 비논리적이어도 된다. 자본주의 체제는 불균형하며 균형적인 것이 오히려 잘못되었다. 시장에서 소비자의 수요와 생산자의 공급이 균형적인 것은 공산주의와 같이 집단주의 체제에서나 나타날 수 있는 비자유주의적이고 비자본주의적인 현상이다. 자본주의 체제에서 깨진 균형은 복지와 그 외 정책으로 맞춰야 한다. 시장경제는 실시간 직접 수요로 돌아가기에 시장성이 적거나 없는 상품의 생산과 생산재 가격이 폭등한 상품은 이윤을 적게 얻거나 얻을 수 없어 생산과 이윤의 비례원칙이 깨지는 불균형한 현상이 나타날 수 있다. 그걸 복지로 지원하여 균형을 맞춘다. 시장경제에서 시장에 해를 끼칠만한 것은 그 외 정책으로 대응한다. 그렇게 복지가 균형을 맞추면 모든 사람이 자유롭게 이기적이어야 올바른 결과가 나올 수 있다. 노동시장과 소비시장과 금융시장의 불균형에 대해 알아보자.

 

 

첫째, 노동시장의 불균형

 

개인의 의사로 수요와 공급이 결정되는 모든 시장은 불균형하다. 노동시장도 마찬가지다. 노동자가 취급하는 노동력 상품의 품질과 수요가 다르기에 가치도 달라 불균형하게 될 수밖에 없다. 노동자가 소유한 노동력 상품의 품질이나 수요가 높아 가치가 높다면 자본가가 비싸게 구매하고 품질이나 수요가 낮아 가치가 낮다면 싸게 구매하거나 구매하지 않는다. 모든 시장에서 모든 상인은 이윤을 얻기 위한 상품이 팔리지 않으면 생계나 생존이 위험하다. 자본가가 상품을 파는 소비시장이나 노동자가 상품을 파는 노동시장이나 같다. 소유한 자산이나 빚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자산이 없는 노동자는 노동력 상품이 팔리지 않으면 생계가 위험하고 빚을 진 자본가는 소비자 상품이 팔리지 않으면 빚에 치여 야반도주를 하거나 자살하는 것으로 생존이 위험하다. 노동자나 자본가나 리스크와 리턴의 차이로 위험 정도와 수익 정도가 다를 뿐이지 안 팔리면 위험한 것 자체는 같다. 단지 자본가의 경우 자산이 많을 확률이 높아 안전할 뿐이다. 노동력 상품을 취급하는 상인인 노동자도 자본가와 다를 바 없다.

시장은 사회의 규칙과 시장의 규칙을 제외한 상거래에 경우에는 웬만해서는 강제로 관여해서는 안 된다. 법으로 강제할 수 있는 것은 사회에 속한 인간이 갑질이나 착취나 폭행이나 사고 방치를 당한 것과 같이 인간이 피해를 입은 사건이나 시장에 속한 상품이 허용되지 못한 상품이거나 상품을 담합이나 독과점을 하는 것과 같이 시장에 피해를 입은 사건에 해당하며 그 외의 정상적인 상거래는 시장원리를 따르는 것이 마땅하다. 노동시장은 집단주의 체제인 노동조합에 의해 담합이나 독과점이 정당화되기도 하지만 본래 개인주의 체제인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기본은 그렇다. 시장에서 발생한 불균형은 복지로 맞추면 된다. 그러나 그럼에도 노동시장은 시장에서 균형을 맞추겠다며 권력의 개입이 많은 편이다.

 

하나, 노동력 임대 상품 지속 구매. 자본가가 한번 노동력 임대 상품을 구매하면 별 이변이 없는 한 강제로 지속적으로 구매하게 한다. 노동시장에 권력이 개입하여 계약 취소가 불가능한 임대 상품을 구매하도록 한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장기 임대 상품에 대한 대가를 소비시장의 장기 임대 상품과 다르게 점점 비싸게 구매하도록 강제했다. 그 결과 노동시장이 왜곡되기 시작했다. 계약 취소 불가능한 임대 상품 구매 리스크를 줄이기 위해 본사에서 직접 구매를 하는 것이 아닌 자회사를 만들거나 파견회사에 상품을 요청하는 것과 같이 간접 구매를 하게 된 것이다. 불필요한 중간단계가 생겨버려 자본가가 지불한 비용보다 낮은 비용이 노동자에게 전달되게 되었다. 노동자의 노동력 상품이 생산에 기여한 만큼 대가를 얻는 것이 아니기에 생산성이 높아도 불행하게 되었다. 이런 중간단계는 계약 취소가 불가능한 임대 상품 구매를 강제한 정치가와 그 상품의 리스크를 줄이고 사건 발생시 책임 회피 수단으로 쓰는 자본가가 만들었다. 자본가가 불필요한 중간단계를 이용하고 있으나 근본적인 원인은 노동시장에 권력이 과하게 간섭했기 때문이다. 직접 구매할 때조차 비정규직이라는 방식을 동원하여 계약 취소가 가능한 임대 상품 구매를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면서 소비시장과 정반대의 길을 걷게 되었다. 계약 취소가 가능한 상품은 싸게 구매하는 반편 계약 취소가 불가능한 상품은 비싸게 구매하게 되었다. 논리적인 노동유연화도 없고 노동안정도 없게 되었다. 권력의 간섭으로 노동시장이 지나치게 흐트러졌다. 노동운동에서 인권을 명분으로 한 안정적인 종신고용이라는 노동자를 차별하는 이권을 주장하는 것을 정치가가 무비판적 수용하여 노동력 상품을 계약 취소가 불가능한 임대 상품으로 만들어버리니 자본가는 새로운 노동력 상품을 구매하는 것을 꺼리게 되어 취업자가 불행하게 되고 구매를 하더라도 내부 직접 구매가 아닌 외부 간접 구매를 하여 불필요한 중간단계가 나타나거나 직접 구매를 하더라도 타당한 대우를 하지 않는 것으로 노동자가 불행해졌다. 일부 노동자는 이권을 얻을 수 있어 행복할 수 있었으나 이외 노동자는 그렇지 못하여 불행하게 되었다. 권력은 노동시장에 간섭하여 계약 취소가 불가능한 임대 상품을 구매하도록 강제할 것이 아니라 시장원리를 허용하되 노동자의 생계와 재취업이라는 노동력 상품 판매를 보장할 수 있는 복지 정책을 만들어야 한다.

 

, 노동력 임대 상품 구매 기준 간섭 조작. 노동력 임대 상품을 구매할 때에는 상품을 소유한 노동자의 특성에 따라 일정 이상의 특정한 노동자의 노동력 상품을 강제로 구매하게 하거나 노동력 상품의 구매 기준을 강제로 바꾼다. 노동력 상품은 소비자 상품과 마찬가지로 시장의 수요에 따라 가치가 달라지며 구매자의 판단으로 구매가 결정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노동시장은 달랐다. 권력은 자본가가 구매한 노동력 상품 소유자의 특성의 비율이 같게끔 정부와 기업의 인사에 간섭하기 시작했다. 유공자나 장애인이나 여성 등을 대상으로 할당제나 가산점을 도입했다. 할당제를 통해 일부 대상의 노동력 상품을 강제로 구매하게 하거나 가산점을 통해 노동력 상품 가치를 점수로 평가할 때 가산점을 더하게 하여 상대적으로 가치가 낮은 노동력 상품을 강제로 구매하게 했다. 그로 인해 일부 취업자는 행복할 수 있었으나 나머지 취업자와 상대적으로 상품 가치가 낮은 노동력 상품을 구매한 자본가가 불행하게 되었다. 노동력 상품의 구매 기준은 어디까지나 구매가의 판단으로 결정된다. 가령 구매자가 특정 성별의 노동력 상품을 더 구매하겠다고 판단한 것에 간섭하여 모든 성별의 노동력 상품의 비율을 맞춰 구매하게끔 조작하는 것은 개인의 자유권 침해에 해당한다.

반면 모든 성별의 노동력 상품의 비율을 맞춰 구매하겠다고 판단한 것에 간섭하여 특정 성별의 노동력 상품을 보다 더 구매하게끔 조작하는 것도 개인의 자유권 침해에 해당한다. 일반적으로 노동자의 성별과 무관하게 노동력 상품을 구매하는 것이 기업에 이익이 되기 때문에 착각할 수 있는데 성별을 맞추라고 강제로 강요한 것은 자유권 침해가 잘못된 것이지 불공정하기에 잘못된 것이 아니다. 노동력 상품 구매는 소비자 상품 구매와 같이 구매자가 마음대로 구매하는 것이 정상이다. 상품 구매하는데 일일이 간섭하여 조작하는 시장이 정상이라 할 수 있는가?

정부도 마찬가지다. 정부가 비율을 맞추든 맞추지 않든 판단한 것에 항의하여 강제로 간섭하는 것이 인사 간섭으로 자유권 침해다. 어떻게 구매하든 상관 없다. 가치가 높은 노동력 상품을 구매하면 성공하고 번영할 확률이 높고 가치가 낮은 상품을 구매하면 실패하거나 몰락할 확률이 높을 뿐이다. 만약 인사권자의 판단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의견은 제시할 수 있더라도 평가 기준을 강제로 바꿀 수는 없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국민이나 주주와 같이 정치가나 기업의 인사권을 가지거나 영향을 끼칠 권리가 있는 이들은 인사권자를 교체하거나 인사권자가 속한 곳이 만든 상품을 구매하지 않으면 된다.

기업이 정부에 속한 권력자에 영향을 받아 인사를 하는 것도 본래는 자유지만 권력자에 영향을 받아 인사를 하게 되면 권력과 유착하여 권력이 기업에게 부당한 특혜를 주는 잘못이 나타날 수 있다. 인사는 자유지만 인사에 의한 유착은 잘못이다. 소비자가 상품을 구매하는 것도 자유고 자본가가 소비자에게 특혜를 주는 것도 자유고 자본가가 노동력 상품을 구매하는 것도 자유지만 정부가 자본가에게 특혜를 주는 것은 자유가 아니다. 왜냐하면 정부는 시장의 관리 감독도 겸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것은 경기에서 선수가 감독에게 이로운 일을 했다고 하여 감독이 선수에게 특혜를 주는 것과 같다. 불공정경쟁에 해당하게 된다.

이와 같이 어떻게든 권력이 인사에 개입하는 순간부터 보통 잘못되게 된다. 시장은 주관적이고 복지는 객관적이다. 시장에 속한 인사의 판단이 주관적이어서 불균형적이고 복지에 속한 정책은 객관적이어서 불균형한 시장의 결과로 나타나는 불균형한 사회의 균형을 맞출 수 있다. 사회는 평가로 조직되고 사회에 이로운 평가가 사회를 성장시키고 사회에 해로운 평가가 사회를 몰락시킨다. 개인주의 체제는 모든 개인의 평가로 사회가 조직되기에 모든 개인이 올바른 평가를 해야 사회가 성장할 수 있을 것이다.

 

, 노동력 임대 상품 가격 기준 간섭 조작. 최저임금제와 같은 것으로 노동력 상품의 최저가를 정해 가격의 기준을 간섭하여 조작하고 있다. 그런데 이것은 생산자의 최저생계비를 복지에서 보장해야 하므로 최저임금제를 도입하는 것이 타당해 보일 수는 있다. 만약 자영업 같은 곳에서 최저임금제로 생계가 힘들다면 그것 또한 복지로 지원하면 된다. 그러나 그렇다 하더라도 간섭하여 조작하는 것이 타당하다 볼 수 있는가?

개인주의 체제의 사건 대응 방식은 강제성이 없는 사전예방과 강제성이 있는 사후조치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외의 강제성이 있는 예방은 자유권 침해에 해당하게 된다. 미래 정해둔 최저가격은 강제성이 있는 노동자의 최저생계를 예방한 것이므로 자유권 침해에 해당하게 된다. 그런데 이 자유권 침해는 누구의 자유권을 침해했다 봐야 하는가? 정부가 미리 정해둔 최저가격은 노동자에 대한 자유권 침해에 해당하게 된다. 권력이 간섭해서 노동자의 자유권을 침해한 것이다. 상품 가격을 결정한 권리는 보통 상품 판매자에게 있지 상품 구매자에게 있지 않다는 점을 상기하자 노동자가 노동력 상품을 취급하는 상인으로 본다면 최저임금제가 누구의 자유권을 침해했는지에 대해 알 수 있게 된다. 이런 노동자에 대한 자유권 침해는 창업자가 지나치게 적어 노동력 상품이 과잉공급 되어버리는 바람에 노동력 상품의 가치가 최저생계에 필요한 최저임금 이하로 낮아져서 노동력 상품에 대한 가격을 강제로 유지하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쌀이 초과생산 된 것을 시장격리 후에 매입하는 것으로 최저가격을 유지하는 것과 비슷하다.

노동력 상품과 쌀은 수요경쟁을 하는 자본가가 소비자가 아닌 공급경쟁을 하는 노동자와 농부의 자유권을 침해하는 사건이다. 모든 구개 노동력 상품은 최저가가 동일하고 국내산 쌀은 최저가를 관리하기에 결과적으로 수요경쟁을 하는 자본가와 소비자의 자유권이 일부 침해된 것에 불과하다. 자본가는 외국에 나가 외국인 노동력 상품을 구매하고 소비자는 국내에서도 외국인 쌀을 구매하면 되기에 실상 온전히 자유권을 침해 당한 것은 노동자와 농부다. 노동자와 농부는 그것을 반기기도 하지만 논리적으로 보면 그렇다. 정부는 사회 구조 유지를 위해 노동력 상품과 쌀을 관리품목으로 지정하고 교육정책이나 농업정책으로 제어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런 자유권 침해는 노동력 상품과 쌀의 수요와 공급을 제어하지 못한 교육정책과 농업정책으로부터 비롯되었다고 봐야 한다. 간단히 말해 정부의 정책 실패다. 정부가 정책 실패한 것을 노동자와 노동력 상품은 최저임금제를 도입하여 최저가를 강제하고 농부의 쌀은 시장격리제를 도입하여 쌀의 초과생산을 시장격리 한 뒤에 정부가 입찰예정가격보다 낮은 가격의 쌀부터 매입하여 최저가를 관리하는 것으로 대처한 것이다. 그렇게 하여 최저생계비를 보장하는 것으로 노동자와 농부를 달랬다. 최저임금제는 국민의 생계 유지와 관련이 있고 시장격리제는 국가의 식량주권과 관련이 있기에 이런 조치는 타당하나 이런 조치가 정책 실패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그렇다고 해서 실패에 대한 책임을 묻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실패는 어디서나 나올 수 있다. 특히 한국은 집단주의 관념으로 인해 개인주의 체제 적응에 실패하여 수많은 사회 문제에 대응하지 못했으니 그런 실패 하나하나에 얽매이면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한국 사회는 논리적으로 설계되었다기 보다 집단주의 관념에 맞춰 주먹구구식으로 대처한 것이 많아 아무래도 정책 실패가 잦을 수 밖에 없다. 관념으로 이롭다 생각한 것이 체제에 해로웠으니 정책이 성공할 수가 없다. 성을 죄악시하는 것이 사회에 이롭다 생각했었으나 연애와 결혼과 출산을 개인의 자유에 맡긴 이상 그것은 사회에 해로운 것이었다. 한국은 체제 변화 적응에 실패했음을 인정하고 앞으로 나아가 체제에 적응해야 한다. 그와 마찬가지로 정책 또한 실패를 인정하고 앞으로 나아가 성장해야 한다.

교육정책의 실패인 노동력 상품 초과생산은 고학력자가 늘어났음에도 지식을 활용하는 것이 아닌 지식을 쌓는 것에 치중되어 있는 낡은 교육관념에 의해 복잡노동 수요를 갖게 될 창업자를 길러내지 못해 복잡노동이 과잉공급 되어 수요가 공급을 감당하지 못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제는 창업자를 길러내는 교육을 통해 노동력 상품의 수요와 공급을 제어해야 할 것이다. 농업정책의 실패인 쌀 초과생산은 쌀 대신 다른 작물을 생산하도록 유도하거나 쌀 소비를 늘리거나 쌀 수출을 하는 등의 방식으로 대처했어야 했으나 그런 것이 부족했다. 이제는 풍작과 흉작을 고려하여 흉작일 경우의 생산분과 수요를 맞춘 다음 쌀 생산이 흉작일 때에도 많다면 다른 작물을 생산하도록 유도하고 풍작일 때의 초과생산은 정부가 비축하거나 수출을 해야 할 것이다. 그렇게 정부 관리품목은 정책을 통해 수요와 공급을 제어하는 것을 통해 노동력 상품의 최저가를 강제하지 않고 쌀 초과생산을 불필요하게 매입하지 않아도 되는 것으로 노동자와 농부의 자유권을 보장해야 할 것이다. 정부 관리품목은 정책을 통해 수요와 공급을 조절할 수 있다면 대부분 최저생계비보다 높은 가격에 상품을 팔 수 있게 되므로 그 외의 일부 상품의 소유자에 대한 복지를 지원하기만 하면 된다.

 

노동시장에 대한 권력의 과도한 개입은 집단주의 관념에 의해 경제활동 종사자의 사회적 역할이란 평등한 기준이 아닌 사회적 신분이란 불평등한 기준으로 바라본 것이 본질적인 원인이다. 정부가 노동력 상품을 구매하거나 쌀 비축을 위해 쌀을 구매하는 것과 같이 시장에 참여하는 것은 자연스러우나 다른 시장 참여자의 자유권을 침해하는 것은 부자연스러운 잘못된 것이다. 그럼에도 그랬던 것은 정치가들이 인권을 명분으로 이권을 주장하던 이들의 사회적 신분을 유지하거나 높이기 위해 좋은 조건의 경제활동 종사자로 남거나 될 수 있도록 자본가에게 소유한 노동력 상품을 계속 구매하도록 강제하거나 할당제를 넣어 무조건 구매하도록 강제했던 것이다.

최저임금제는 사회적 신분과 무관하게 최저생계비를 위한 복지차원의 제도로 다르다.

만약 모든 경제활동 종사자를 노동력 상품과 소비자 상품을 취급하는 상인과 같이 사회적 역할만 다른 상인으로 대했다면 사회적 불평등이 아닌 경제적 불평등만 남게 되므로 권력이 과도한 개입할 할 논리가 없었을 것이다. 평등 방향은 사회적과 경제적으로 분류할 수 있고 평등 방식은 기회와 결과로 분류할 수 있는데 사회적으로는 모두가 기본 인권을 보장 받는 것으로 결과가 평등해야 하고 경제적으로는 모두가 생산 가치와 기여도에 따라 불평등해야 하므로 기회가 평등해야 한다. 사회가 경제활동 종사자를 사회적 신분으로 바라보았기에 사회적 평등을 위해 권력이 과도한 개입을 해왔고 노동시장은 그걸 막을 수 없었던 것이다. 모든 경제활동 종사자를 상품을 취급하는 사회적 역할만 다른 상인으로 대하여 사회적으로 평등해야만 권력이 노동시장에 개입할 논리가 없어진다.

집단주의 관념에 의해 사회적 역할을 신분으로 바라보면서 교육이 자아실현을 위한 수단이 아닌 신분 획득을 위한 수단이 되어버렸다. 부모나 교사에 의해 자아실현을 위한 진로를 부정하고 신분 획득을 위한 진로를 강제하는 것이 얼마나 큰 자유주의 이념 훼손인가? 비정상적인 시험에 대한 집착, 실제 사회에 중요한 것은 역할 수행, 생산, 공급, 분배, 소유, 환원임에도 신분상을 위한 경쟁을 하게 되니 창의력에 해로운 문제풀이를 지속적으로 하게 유도하고 변별력을 높이겠다고 과도하게 복잡한 응용문제를 시험문제로 하고 있다. 과학고에서 필요 이상으로 의사가 되길 희망하는 것은 과학이란 자아실현이 아닌 의사라는 신분을 얻고 싶었던 것이다. 개인주의 체제에서의 평등이란 개념이 없으니 차별금지법 같은 평등을 명목으로 개인의 자유권을 침해하고 다양한 개성을 가진 사람을 차별하자는 주장 같은 것이 나오는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지금까지 집단주의 관념에 의해 사회적 역할을 신분으로 바라보면서 사람의 입장을 사회적과 경제적으로 분류하지 않고 모호하게 놔두며 사회적 평등을 위해서라는 말로 경제적 평등을 위해 권력이 간섭하거나 경제적 불평등이 당연하다면서 사회적 불평등을 위해 꼰대질이나 갑질을 한다거나 하는 이들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부당한 손해를 입고 있었다. 이제는 사회적 평등과 경제적 불평등을 이해하고 악용하는 일이 없어야 할 것이다.

정리하면 사회적 평등은 경제활동 종사자 모두가 사회적 역할이 다른 상인이 되면 되고 경제적 불평등으로 인한 불균형으로 사회 구조 유지가 어렵다면 정부가 복지로 지원하여 균형을 맞추는 것으로 사회 구조 유지를 하면 된다.

 

 

둘째, 소비시장의 불균형

 

소비시장의 불균형은 소비시장으로 인해 발생하는 사회의 불균형을 정부 정책으로 균형을 맞추는 것을 말한다. 개인이 겪은 불균형은 복지 정책으로 맞추고 사회가 겪은 불균형은 다양한 정책으로 맞춘다. 소비시장은 노동시장보다 수요와 공급 원리가 유연하게 작동하여 수요가 낮은 상품의 판매가 수월한 편이다. 기업에서 시장조사를 하여 수요예측을 하고 그러고도 수요예측이 빗나가면 상품을 파는 도매점이나 소매점이 가격 자체를 낮추거나 할인을 하거나 1+1 등의 방식으로 덤으로 주거나 하여 어떻게든 판다. 노동시장과 달리 대부분 최저가가 지정되지 않아 시장 자체적으로 어느 정도 균형을 맞추고 있는 상황이다. 그러나 소비시장도 시장이므로 개인의 의사로 수요와 공급이 결정되기에 필연적으로 불균형하다. 시장은 균형적인 것이 되려 잘못되었다. 개인의 의사로 불균형이 나타난다는 것을 고려하면 개인의 의사가 반영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시장에서 담합과 독과점이 발생하면 경쟁이 사라지면서 공급자의 의사로 공급이 결정되기에 개인의 의사가 반영되지 않으면서 시장이 균형적이게 된다. 시장이 균형적이게 되면 균형이 깨지면서 발생하는 사회에 해로운 것은 없으나 불균형하기에 얻어지는 사회에 이로운 것도 없어지게 된다. 공급경쟁이 사라지면 수요자인 소비자에게 선택 받기 위해 경쟁적으로 상품의 품질을 올리고 가격을 낮추는 일을 하지 않아도 되기에 상품의 품질을 올리지 않고 가격을 낮추지 않아 경쟁하던 때와 다르게 품질이 낮은 상품을 높은 가격에 사게 되는 소비자가 불행하게 된다. 그러므로 시장은 담합을 처벌하고 독과점을 경계하여 경쟁 속에서 시장이 불균형하여야 한다. 시장에서 발생하는 불균형은 정부 정책으로 맞추면 된다.

 

하나, 소비재의 불균형. 소비재는 개인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하여 소비되는 식료품이나 소모품 등과 같은 재화를 뜻한다. 소비재의 불균형은 수요나 공급이 과도하게 적으면 발생한다. 가령 쌀 수요가 공급에 비해 과도하게 적으면 쌀이 팔리지 않아 쌀의 가격이 농가가 이윤을 얻을 수 있는 최저가격보다 낮아질 수 있다. 보통은 시장원리에 맡기지만 쌀은 식량주권과 관련이 있어 정부 관리품목이기에 초과생산 된 쌀은 시장격리제를 통해 일부 정부가 매입하고 있다. 그렇게 하여 정부가 정책으로 균형을 맞춘다. 쌀은 정부 관리품목이기에 수요와 공급을 예측해서 제어했어야 함에도 못했기에 정책 실패로 새로운 정책에 대처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정책 실패의 대처가 효율적이더라도 그런 대처에 의존하여 실패를 방치해서는 안 된다. 가령 달걀 공급이 수요에 비해 과도하게 적으면 달걀 가격이 폭등하여 소비자가 구매하기 버겁게 된다. 보통은 시장원리에 맡기지만 달걀은 대부분 국민의 생필품이기에 달걀은 정부가 관리하고 있다. 달걀 가격이 폭등하면 일부 유통업자가 달걀을 사재기 하는 것으로 달걀 공급량을 조절하여 달걀을 비싸게 팔아 과잉이득을 취하거나 일부 소비자가 달걀을 사재기 하여 대량 비축하며 소비하기도 한다. 그렇게 하면 사회에 생필품 분배가 원활하게 이루어지지 않게 되어 생필품을 소비하지 못하는 국민이 불행하게 될 수 있다. 시장의 불균형이 사회로 이어져 행복의 불균형으로 사회가 흔들리게 된다. 그렇기에 정부는 달걀 사재기를 방지하는 정책을 내놓거나 외국산 달걀을 수입하여 공급하는 것으로 달걀의 수요와 공급의 균형을 맞춰 달걀의 가격을 유지한다. 정부가 다른 시장 참여자에게 달걀의 가격을 강제로 정하여 그 가격에 팔게 하는 것은 권력의 시장 개입이지만 정부가 달걀을 사와 공급하는 것은 정부의 시장 참여다. 그렇게 하여 정부가 정책으로 균형을 맞춘다. 그러나 성급하게 외국산 달걀을 수입하게 되면 수요를 예측하지 못하여 달걀이 남는 바람에 유통기한이 지난 달걀을 폐기하게 되는 정책 실패가 나타나기도 한다. 이에 따라 긴급할 때가 아니라면 정부가 직접 수입하기보다는 수입상에게 혜택을 주는 것이 효율적일 수 있을 것이다.

 

, 생산재의 불균형. 생산재는 생산의 과정에서 쓰이는 재화를 뜻한다. 소비재의 가격이 폭등하면 소비재를 소비재로만 쓰는 사람들은 사용을 줄이거나 쓰지 않으면 되지만 소비재를 생산재로 쓰는 사람들은 생산을 하더라도 이윤을 남길 수 없게 된다. 생산재 가격이 폭등하면 생산재를 이용한 생산은 가격을 올리지 않는 이상 생산할수록 적자가 된다. 그렇다고 해서 유동성이 심한 생산재에 대응하여 상품 가격을 담합하여 일괄적으로 인상해버리면 생산재 가격이 낮아졌을 때엔 대부분 상품 가격을 내리지 않기에 단순히 물가가 오르게 된 것이므로 소비자가 불행하게 된다. 생산재 가격의 인상을 명분으로 상품 가격을 일괄적으로 인상한 분야에서 생산재 가격이 인하되었을 때 상품 가격을 인하한 분야가 도대체 얼마나 있었는가? 이것 또한 결국 분야경쟁의 일종이 된다. 가격을 올린 분야는 이익을 얻지만 그 외 분야는 손해를 본다. 너도나도 담합으로 가격을 올리면서 물가가 미친 듯이 오르게 된다. 담합은 시장에서 악이다. 가령 소비재이자 생산재인 기름이 폭등한다고 하여 관련 분야의 상품 가격을 일괄적으로 인상해버리면 이후 기름이 싸졌을 때에는 낮추기가 어려워 소비자 부담이 늘어남에 따라 소비자가 불행하게 된다. 그러므로 유동성이 있는 생산재는 갑작스러운 급등이 나타난다 하더라도 분야의 모든 상품 가격을 담합으로 일괄적으로 바꾸는 것을 허용하기보다는 시장에 맡기는 것이 타당하고 일부 적자를 볼 경우 당장 생계가 어려운 이들은 복지로 지원하는 것이 타당하다. 시장에서 담합은 허용해서는 안 된다. 그래야 위기 때 폭리를 취하는 이들이 줄어들 수 있다. 그렇게 해서 물가를 안정시켜야 한다.

 

, 자원낭비 방지와 환경보호. 인간이 파괴하는 환경이 자연 생태계의 자정능력으로도 복원이 어려워짐에 따라 각국 정부는 자원낭비 방지와 환경보호를 위한 정책을 내놓기 시작했다. 자원소모를 줄일 수 있는 방안을 고려하거나 친환경 상품을 생산하고 소비하는 이들에게 혜택을 주고 환경을 심하게 파괴하는 상품을 규제하고 있다. 자원을 재활용하는 재활용 산업을 활성화시키고 친환경 소재 개발로 환경에 이로운 상품을 생산하고 있다. 대기를 오염시키는 차량의 배기가스는 배출기준을 정하여 준수케 하는 규제를 하고 있다. 이렇게 각국 정부는 인간의 욕망으로 자연이 오염되어 나타나는 지구 환경의 불균형을 국제환경보호 협약과 그에 따른 정부의 정책이나 그 외 정책으로 환경을 보호하는 것으로 균형을 맞추고 있다. 이런 환경보호는 대부분 개인과 무관하다. 개인주의 체제에서 개인은 이기적이어야 올바른 결과가 나와야 하기에 생산자 측에서 환경을 파괴하지 않는 것을 생산하는 것이 바람직하기 때문이다. 특히 바다를 오염시키는 바다쓰레기는 절반 이상이 그물과 낚시줄로 개인보다는 산업에서 파괴하는 것이 크다. 그럼에도 대중의 관심은 필요하다. 사회 구조 유지를 위한 정책을 추진하는 것에 국민이 관심을 갖고 의견을 내고 있는 것과 같이 지구 환경 유지를 위한 정책을 추진하는 것에 인류는 관심을 갖고 의견을 내야 한다.

 

 

셋째, 금융시장의 불균형

 

금융시장의 불균형은 금융시장으로 인해 발생하는 사회의 불균형을 정부 정책으로 균형을 맞추는 것을 말한다. 개인이 겪은 불균형은 복지 정책으로 맞추고 사회가 겪은 불균형은 다양한 정책으로 맞춘다. 금융은 신용을 바탕으로 자금을 빌려주고 빌려 쓰는 거래를 뜻한다. 금융시장은 자금 거래가 이루어지는 시장을 말한다. 금융시장에는 주식, 채권, 외환, 파생상품, 부동산 등이 있다. 금융시장이 활성화되면서 노동자와 자본가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있다. 누구나 주식시장을 통해 회사의 주인이 될 수 있고 노동자였던 사람도 창업능력이 뛰어나면 투자를 받아 창업을 할 수 있다. 이제는 누구든 상품을 취급하는 상인이 되어야 한다. 노동자는 노동력 상품을 취급하는 상인이고 자본가는 소비자 상품을 취급하는 상인이고 금융인은 금융 상품을 취급하는 상인이다. 그 누구든 상거래를 하는 순간부터 상인이 된다. 그렇게 상인이란 공통된 기준이 있어야 서로를 차별하지 않고 평등한 관계로 있을 수 있다. 사회적 평등과 경제적 불평등이 개인주의 체제인 사회의 일반적인 모습이다. 그리고 상인이란 공통된 기준이 있어야 다른 상품을 취급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노동력 상품을 취급하다 소비자 상품이나 금융 상품을 취급할 수 있다. 그렇게 하여 모든 개인은 특정 상품만을 평생 취급하는 인간이 아닌 자유로운 고유한 개인이 된다. 금융시장의 불균형으로 나타나는 사회 속의 개인과 사회의 불균형에 대해 알아보자.

금융시장에서 나타나는 일반적인 사회 불균형 중 개인은 투자나 투기 실패로 인한 파산과 자살이고 사회는 급변하는 자금흐름으로 인한 부도나 파산이다. 한국에 있던 외환이 급격하게 해외로 빠지자 한국은 외채를 갚지 못해 외환위기가 닥쳐 국가부도를 겪고 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했던 사건이 바로 심각한 사회 불균형 중 하나다. 외환위기가 나와서 하는 말인데 한국 경제 문제의 원인 중에 외환위기를 지목하기도 하는데 인간은 본능으로 움직이는 짐승이 아닌 이상 사상과 같이 어떤 것에 대한 생각으로 움직이고 있으므로 인간이 일으킨 모든 사회 현상은 인간의 관념에 의한 것이기에 외환위기를 부른 것은 인간의 관념이 부른 것이므로 경제 문제 원인도 인간의 관념이 원인이다. 어떤 이유가 있더라도 인간이 인간인 이상 논리적으로 그렇다.

이런 금융시장의 불균형으로 나타나는 사회 불균형의 원인에는 사회의 신용도 하락이나 시장의 주가조작이나 투기나 세계의 금리변화나 자연재해나 전염병이나 전쟁 등이 있다. 정부는 정책을 통해 신용도를 유지하고 주가조작을 막고 투기를 경계하고 세계의 변화에 민감하게 대응하여 사회의 균형을 유지하고 있다.

그런데 금융시장은 노동시장이나 소비시장과 달리 시장 참여자가 적어 금융시장에 대한 정책은 일부 국민을 대상으로 한 정책이 될 수 밖에 없다. 정책수혜자가 일부 국민에만 한정되는 이상 보다 적극적인 정책 추진이 다소 어렵다. 금융시장 이해관계자가 늘어야 금융시장 정책에 대한 여론이 빠르게 나타나 반영될 수 있다. 현재 주식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이 늘어나 국내 주식 투자자가 약 1400만 명이 되었다는 소식이 있다. 바람직하지만 좀 더 늘어야 한다. 그래야 금융시장이 성장할 수 있다. 그리고 그래야 사회의 균형도 맞추기가 좋다. 가령 금융시장 참여자와 불참자가 분명하게 나뉜 상황에서는 참여자에 대한 구제는 불참자와의 형평성이 어긋나게 될 수 있다. 그런데 금융시장에 참여하다 빚을 지게 된 사람을 정부가 구제하겠다고 세금을 들이는 경우는 좀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될 수 있다. 정부가 빚을 지게 된 사람을 구제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설령 참여자와 불참자 사이에서 형평성이 어긋나더라도 사회 구조 유지를 위해 행해져야 한다. 그러나 정부가 채무자가 진 빚을 대신 갚거나 빚의 이자를 대신 갚아주는 것은 결과적으로 채권자가 이익을 얻게 되게 된다. 만약 은행이 돈을 빌려주었다면 은행이 이익을 얻게 된다. 본래 돈을 빌려주어 수익을 얻는 행위는 리스크를 감수하여 리턴을 얻는 것으로 만약 정부가 대신 빚이나 이자를 갚아주게 되면 리스크 적은 리턴을 얻게 된다. 은행의 과잉이익이다. 그렇다고 은행에게 손해를 보라고 강요할 수는 없다. 거래를 하는 수 밖에 없다. 만약 정부가 채무자의 빚이나 이자를 갚아주지 않는다면 채권자인 은행의 채권은 불량채권이 되어 회수하지 못할 수도 있다. 정부가 채무자의 빚이나 이자를 갚아주면 은행의 채권은 정상채권이 될 수 있으므로 그렇게 얻는 이익만큼 채무자에게 받을 빚이나 이자를 줄여 채무자의 과도한 부담을 줄여주는 것으로 정부의 사회 구조 유지에 협조하는 것이 타당하다. 만약 거래를 하지 않는다면 어떤 유착을 의심하게 되는 근거가 될 것이다. 만약 거래를 한다면 은행이 사회 구조 유지에 협조하는 것으로 정부 정책 또한 사회 구조 유지라는 명분으로 정당화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참여자와 불참자 사이에서 형평성이 어긋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개개인의 손익보다 사회 구조 유지가 우선된다. 이렇게 정책 대상자가 한정되면 형평성이 어긋날 수 있으므로 금융시장 정책 대상이 국민 다수가 되어야 형평성도 성립될 수 있다. 손해를 보면 어느 정도 정부가 구제해줄 것이고 이익을 보면 이익을 보았으니 상관 없을 것이기에 그렇다. 금융시장에 대한 공교육과 사회 전반적인 정보 확대와 함께 각종 서비스에서 가입자를 늘리기 위한 가입자 혜택을 주는 것과 같이 시장참여를 늘리기 위해 신규 참여자 혜택을 늘려야 할 것이다.

 

하나, 증권시장의 불균형. 증권시장은 주식과 채권 같은 유가증권을 거래하는 시장으로 기업의 자본 마련에 쓰이기에 자본시장으로 불리기도 한다. 주식은 기업의 기업공개로 일반 투자자에게 판매된다. 판매된 자금은 기업의 자본이 된다. 한번 팔고 나면 주식의 가격이 변동되더라도 기업의 직접적 손익과 무관하게 된다. 그러나 주가가 상승하면 기업의 가치가 상승하여 은행 대출에 유리하거나 향후 새로운 주식을 발행하는 증자에 유리하다. 단 신용등급과는 별개다. 주식은 투자자가 기업의 미래 가치를 보고 수익실현이 가능할 거라 생각하고 투자를 하는 반면 신용등급은 신용등급평가사가 과거의 실적과 재무구조의 움직임을 보고 평가하기에 주식과 신용등급은 비례하지 않는다.

기업의 증자는 유상증자와 무상증자로 나뉜다. 유상증자는 새로 주식을 발행하여 판매하는 것이기에 회사의 자본이 늘어나고 무상증가는 기업의 자본에서 자본금을 제외한 잉여금을 가지고 무상으로 기업의 주식을 갖고 있는 사람들에게 배당과 같이 나눠주기에 기업의 자본에는 차이가 없다.

채권은 국가나 기업과 같이 신용도가 높은 기관이 기관의 신용도를 근거로 한 차용문서를 거래할 수 있도록 증권으로 만든 것을 말한다. 기관은 채권시장에 채권을 팔아 빚을 지어 자본을 모으고 채권의 이자율에 따른 이자를 지불하다 만기일에 빚을 갚는다. 주식은 일반적으로 국가의 중앙은행의 이자율인 기준금리가 오르면 시중은행의 이자율인 시중금리도 오르면서 주가가 내려간다. 기준금리가 오르면 기업은 기업의 부채 이자율이 올라 기업가치가 낮아지고 투자자는 은행의 이자율이 높기에 위험자산인 주식의 매력이 낮아져 투자를 줄이면서 주가가 내려간다. 기준금리가 낮아지면 같은 원리로 주가가 올라간다. 그러나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다. 다른 요인으로 개별 주식은 오르거나 내릴 수 있다. 반면 채권은 고정 이자율을 보장하기에 예외를 제외하면 채권의 이자율보다 기준금리가 오르면 채권의 가치가 낮아짐에 따라 수요가 낮아져 가격이 내려간다. 기준금리가 낮아지면 같은 원리로 가격이 올라간다.

주식은 다양한 원인으로 급등락 하기에 주식시장의 안정성을 위해 서킷브레이커라는 안전장치를 도입했다. 서킷브레이커는 과부화나 단로나 누전 등이 발생하면 전기 회로를 차단하는 것으로 전기 회로를 보호하는 안전장치인 것과 같이 주식시장의 서킷브레이커도 주식시장에서 주가의 급락이 발생하면 주식의 매매를 중단하는 것으로 주식시장을 보호하는 안전장치다. 한국에서는 서킷브레이커를 3단계 나누어 주식과 파생상품시장인 선물과 옵션의 매매를 중단하여 시장을 보호하고 있다. 개인주의 체제에서의 강제력은 사회 구조 유지를 위한 최소한의 규칙에 의한 기본적인 강제력과 사회 구조 유지에 영향을 작지만 개인을 불행케 하는 사건에 대응하기 위한 강제력이 없는 사전예방과 강제력이 있는 사후조치로 분류할 수 있다. 그렇게 하여 개인의 자유권을 보장하고 있다.

서킷브레이커는 시장 구조 유지를 위한 최소한의 규칙에 해당한다. 그러다 보니 증권시장 또한 어떤 문제가 있다 하더라도 시장 자체를 흔드는 규제를 하기가 어렵다. 가령 이런 것이다. 나는 주식시장의 투기를 막기 위해 단기투자의 수익에 비례한 자금 이동시간제를 생각해보았다. 단기투자의 수익이 높으면 거래가 완료되었더라도 수익에 비례하여 자금을 묶어 활용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다. 수익에 가상의 무게를 만들어 무게만큼 자금의 이동속도가 느려진다는 느낌이다. 단기투자 수익이 낮으면 상관 없고 장기투자는 모두 상관없다. 단기투자는 단기거래로 거래를 하기에 도로를 포장하지 않아 비포장도로에서 속도가 느리게 되고 장기투자는 장기거래로 거래를 하기에 도로를 포장하여 포장도로에서 속도가 빠르게 된다는 느낌이다. 이런 이동시간제는 같은 자금을 활용한 높은 수익의 연속 투기를 불가능하게 하여 투기심리를 위축시키고 높은 수익의 단기투자가 만약 주가조작과 같은 범죄라면 수사기관에게 여유시간을 주게 될 수 있다. 단점은 투기 매력이 떨어져 시장 내 자금의 원활한 흐름을 방해할 수 있고 개인의 자유권을 일부 침해할 수 있다는 점이다. 자유권이 침해된다는 것을 고려하여 이 안은 기각했다.

그 외 아무리 생각해도 웬만해서는 자유권이 침해되었다. 투기는 강제력이 없는 사전예방과 강제력이 있는 사후조치로 접근해야 했다. 어떻게 해야 시장을 규제하지 않으면서 자유권을 침해하지 않고 시장의 불균형으로 나타나는 사회의 불균형을 균형 있게 할 수 있을 것인가? 그건 정부도 시장에 참여하는 수 밖에 없었다. 사회에서 개인의 자유권을 침해하지 않으면서 사회의 치안을 지키려면 정부가 사회에 참여하여 수사하고 기소해야 하는 것과 같이 말이다. 경쟁에는 정부의 참여가 가능한 곳과 불가능한 곳으로 나뉘는데 보통 교육과 선거와 운동경기와 같은 경쟁 참여자가 한정되거나 거래할 수 없는 경쟁은 정부의 참여가 불가능하고 대부분 시장 같은 경쟁 참여자가 제한되지 않거나 일부만 제한되는 경쟁은 그야말로 야생과도 같아 정부의 참여가 가능해진다. 정부의 참여가 불가능한 곳에 참여를 하는 것은 직권남용 같은 권력 남용이나 배임과 같은 비리가 된다. 정부의 참여가 가능한 곳에 참여하는 것은 소비시장에서 생필품 폭등으로 사재기 같은 시장교란이 발생할 때 외국산 달걀을 사서 시장에 공급하는 것과 같이 정당한 것이 된다. 그와 같이 주식시장에서도 주가조작과 같은 시장교란이 발생하면 정부도 시장의 일원으로 참여하여 시장의 균형을 일부 맞추는 것으로 사회의 균형을 맞춰야 한다. 연기금 같은 기관에서 수익을 얻기 위해 참여하는 것과 달리 수익이 목적이 아닌 주가조작과 같은 일그러짐을 바로 펴는 것이 목적이다. 시장 밖에서 대응하는 것보다 시장 안에서 대응하는 것이 빠르고 강력한 대응이 된다.

공정거래위원회에 주가조작대응을 신설하여 주가조작에 직접적으로 대응할 수 있도록 한다. 주식시장 참여자가 어떤 주식이 주가조작으로 보인다고 신고를 하면 주가조작대응에서 주가조작인지 판단하여 결론 내린 다음 주가조작으로 판명이 나면 자체 자금이나 기관의 협조를 받아 주가조작으로 폭등시키는 주식은 공매도를 하고 폭락시키는 주식은 대량매수를 한다. 주가조작은 주식의 정상가를 인위적으로 조작하는 것이므로 이와 같은 대응이 손해로 이어지기가 어렵다. 기관과 주가조작범과의 싸움이다. 주가조작은 수사기관에서 처벌하면 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런 논리는 사건발생 당시에는 방치하다가 사건이 끝나고 나서 처벌하자는 것과 같다. 사건 발생 당시 대응할 수 있어야 한다. 물론 주가조작과 정상거래를 판단하기 어려울 수 있고 악용될 수 있으나 경과를 공개하여 대중에게 판단을 맡긴다면 공정하게 판단될 것이다. 주식시장 참여자의 제한이 적어 개인과 기간과 외국인 가리지 않고 경쟁하기에 야생의 생태계와 같을 정도이므로 정부가 시장을 이 이상 규제하지 않거나 줄이게 되는 이상 정부가 직접 참여하지 않으면 공정경쟁을 유도하기가 어렵다.

나는 공정거래위원회가 더 큰 힘을 소유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개인주의 체제의 선은 이기주의고 그런 이기주의를 선으로 만드는 것이 바로 공정이다. 개인주의 체제가 집단주의 체제에 비해 명백하게 바르게 만드는 것이 바로 공정한 제도다. 개인의 이기심이 바르게 되려면 공정해야 하고 공정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야 하고 그런 환경을 만드는 것이 공정거래위원회라 본다. 공정거래위원회는 국가 체제 우위를 증명할 수 있는 기관이다. 국가의 체제와 이념을 바르게 만드는 기관이 이토록 소홀하게 대해지고 있다는 것이 몹시 안타깝다. 공정거래위원회가 다른 행정부처의 사무를 이관 받으면서 점점 업무가 확장되어가고 있는데 모든 시장의 거래가 공정할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할 수 있게 소비뿐만이 아니라 노동과 금융도 공정의 영역은 관리해야 한다고 본다.

 

, 파생상품시장의 불균형. 파생상품시장은 기초시장에서 파생된 상품의 시장으로 선물과 옵션과 스왑 등이 있다.

선물은 거래소의 거래에서, 장래의 일정한 시기에 상품을 넘겨 줄 조건으로 매매 계약을 하는 거래 종목을 뜻한다. 대상은 주식을 비롯해 광물이나 외환 등이 있다. 현재 가격으로 매매계약을 맺기에 미래 가격으로 손익이 결정된다. 상품을 구매한 사람은 현재 가격보다 미래 가격이 높아지면 이익을 보고 상품을 판매한 사람은 현재 가격보다 미래 가격이 낮아지면 이익을 본다.

옵션은 선물 거래에서 일정 기간 내에 특정 가격으로 상품과 주식과 채권 등을 팔거나 또는 살 수 있는 권리를 뜻한다. 선물과 옵션은 유사하나 다르다. 선물은 상품 자체를 매매하고 옵션은 상품 매매의 권리나 매매하거나 예측을 매매한다.

파생상품시장의 거래는 헤지라 하는 보유한 기초자산 반대 포지션을 통한 위험회피거래와 기초상품과 선물상품의 가격의 차이가 날 때 과대평가 상품은 팔고 과소평가 상품을 사는 것으로 위험부담 없이 수익을 얻는 차익거래와 가격변동 예측을 통한 도박성을 띤 투기성거래가 있다. 파생상품시장의 긍정적인 면은 위험회피거래와 차익거래가 있고 부정적인 면은 투기성거래가 있다.

파생상품시장은 구조상 도박과 다르지 않기에 강력한 규제를 하지 않는 한 투기성거래가 있을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이를 막기 위해 시장 자체를 규제해버리면 파생상품이 대상으로 한 기초자산 시장의 거래가 둔화될 수 있다. 정확한 비유는 아니지만 경매장에서 마권을 사지 못하게 하면 경마가 시들어지는 것과 비슷하다. 상품의 등락을 걸고 상품이나 옵션을 거래하는 것과 말의 등수를 걸고 마권을 사는 것과 비슷하기에 그렇다. 선물과 옵션에 투자하면 자연스럽게 대상 상품의 거래에도 주목하여 활성화되게 된다.

분명 파생상품시장과 도박은 개인이 개인의 사고회로가 망가지거나 파산으로 자살하는 것으로 나타나는 사회적 해로움이 같다. 그러나 파생상품시장은 금융시장을 활성화하게 하는 사회에 이로운 점이 있으나 도박은 개인의 쾌락과 자금의 흐름 말고는 사회에 이로운 점이 없어 사회적 이로움 정도가 명백하게 다르다. 그렇기에 파생상품시장으로 개인이 망가져 사회 구조가 흔들리더라도 강력한 규제라는 강제력이 있는 사전예방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냉정히 말해 경제 기반 중 일부는 증권시장과 파생상품시장이 도박과 유사한 구조를 가지고 있는 이상 도박판의 판돈으로 움직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도박판과 같이 사회에 해로운 점이 있다 하여 함부로 규제를 해버리면 거기서 투기를 하던 사람들이 떠나 시장에서 외환이 급격하게 빠져나갈 우려가 있다. 사회적 해로움이 더 크게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식칼이 사람을 해칠 수 있다 하더라도 사회적 이로움이 더 크기에 규제하지 않는 것과 같이 증권시장과 파생상품시장이 도박판과 같이 사람에게 해로울 수 있다 하더라도 사회적 이로움이 더 크기에 규제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파생상품시장의 투기성거래는 교육과 홍보라는 강제력이 없는 사전예방을 통해 개인이 지나친 도박과 같은 투기성 거래에 빠지는 것을 줄이고 강제력이 있는 사후조치로 빚을 내서 증권시장이나 파생상품시장에서 거래하다 파산한 이들은 도박중독자와 같은 종류로 인지하고 도박중독자를 구제하는 것과 같은 구제정책으로 대응해야 할 것이다.

개인주의 체제에서 개인의 이기심으로 인해 잘못된 결과가 나오는 것은 제도가 불완전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불균형과 불완전은 다르다. 시장이나 교육이나 선거나 운동경기와 같은 곳은 불균형해야 완전할 수 있고 사회 구조는 균형적이어야 완전할 수 있다. 시장 구조가 붕괴하는 것은 시장의 균형이 깨졌을 때보다는 시장의 흐름이 막혔을 때 나타난다. 시장은 원래 불균형하기에 꾸준히 흐르기만 한다면 보통 붕괴하지 않는다. 오히려 사회 구조가 아닌 시장을 균형 있게 하겠다고 규제를 남발하면 흐름이 막혀 시장이 흔들린다. 노동유연성을 막으니 노동력 상품 거래의 흐름이 막혀 노동시장이 경색되었다. 부동산 규제를 하니 부동산 상품 거래의 흐름이 막혀 부동산시장이 경색되었다. 이런 경색이 지속되면 흔들리다 종국에 붕괴될 수도 있다. 사회 구조의 붕괴는 필연적으로 다수의 인간의 불행을 부른다. 시장에서 깨진 불균형은 사회가 불균형해지면 복지나 다른 정책으로 맞추면 된다.

 

, 부동산시장의 불균형. 부동산은 움직여 옮길 수 없는 재산을 뜻한다. 토지나 건물 또는 수목 등이 그렇다. 부동산시장은 그런 부동산을 거래하는 시장이다. 부동산시장의 불균형으로 일어나는 사회의 불균형은 부동산으로 얻는 불로소득에 의한 불균형과 거주지의 자가와 전세와 월세의 차이로 인한 불균형 등이 있다.

불로소득의 불균형은 다음과 같다. 본래 경제적 불평등은 자연스러우나 불로소득의 불평등은 불로소득자가 생산을 하지 않을 수 있기에 소비하는 행복에 복지를 지원하면 생산하지 않을 수 있는 것으로 시장에 해로울 수 잇기에 불로소득에 의한 불균형은 정보가 불로소득자의 소득에 대한 세금을 다른 소득보다 많이 받는 것으로 어느 정도 균형을 맞추고 있다.

거주지의 불균형은 다음과 같다. 거주를 목적으로 한 부동산은 자가인 편이 개인을 사회에 정착하게 하여 안정적인 삶 속에서 생산과 소비를 하게 되면서 사회 또한 안정적이게 되기에 주거지가 자가인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불균형이 커질수록 사회의 불균형도 커질 수 있으므로 사회에 해로워 정부가 정책으로 어느 정도 균형을 맞추고 있다. 거주하는 부동산 상품의 시세 차익은 모든 상품이 그렇듯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다른 시장의 상품과 같이 수익이 높을수록 정부가 세금을 높게 걷는 것으로 어느 정도 균형을 맞추고 있다.

이런 불균형들은 수도와 수도권과 광역시를 중심으로 발전한 불균형한 지역발전과 토지 민주주의의 결함과 부동산 상품 투기나 갭 투자를 통한 자산에 비해 많은 수의 부동산을 소유한다거나 하는 부동산으로 이익실현을 하려는 이들과 소비자의 수요에 맞지 않는 적절치 못한 정부 정책이나 관계기관의 부정을 통한 투기 등이 있다. 차근차근 알아보자.

불균형한 지역발전은 개인의 자유권을 보장하는 개인주의 체제에서는 개인의 거주지 이동을 제한할 수 없기에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 밖에 없다. 개인주의 체제인 국가는 그걸 정부 정책으로 균형을 맞춰야 한다. 그러나 현재 한국은 정책만으로 어렵다. 지역 양극화가 발생한 것은 지역마다 일자리나 인프라 등의 차이가 있어 매력이 있는 지역에 몰리는 것이기에 수도나 수도권에 있는 행정기관이나 연구기관 등과 같은 일자리와 그에 따른 인프라를 만들 수 있는 시설을 다른 시설로 옮기고 있는 중이다. 그러나 그렇게 시설을 다른 도시에 옮겼음에도 시설의 관계자 외엔 그 도시로 거주지를 바꾸는 일이 드물었다. 관계자도 가족과 떨어져 홀로 살게 되거나 관계자조차도 매일 KTX와 같은 빠른 교통수단을 이용하여 이동하며 거주지를 바꾸지 않았다. 시설을 옮긴 도시는 그나마 관계자라도 있으니 소멸하지 않았지만 그것조차 없는 대부분의 시골은 소멸이 확정에 가까운 상황이 되었다. 수도와 수도권과 광역시에 사람이 과밀한 본질적인 이유는 일자리나 인프라보다는 인간의 관념이었기에 이런 현상이 나타났다. 한국은 문민정부의 시작으로 본격적인 개인주의 체제가 자리잡은 지 30년이 되었다. 아직 개인주의 관념을 가진 세대는 등장하지 못했지만 도시는 시골에 비해 상대적으로 개인주의 성향이 진하고 젊은이는 늙은이에 비해 개인주의 성향이 진하다. 도시는 늙은이조차도 개인주의 관념에 영향을 받았지만 시골은 대부분 집단주의 관념이 진하게 남아있었다. 그렇기에 개인의 이익을 중시하는 이들에게는 그런 집단주의 관념이 자리잡은 작은 사회를 견디지 못하고 시골을 떠나 도시로 가게 되었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어떤 정책으로도 지역 양극화로 인한 도시 부동산 가격 상승과 시골 소멸을 막을 수 없었다. 실상 도시에만 몰린 한국은 도시국가나 다름 없는 상황이다. 모든 인간이 집단주의 관념을 버리고 개인주의 관념으로 진보해야 모든 토지를 활용하여 정상적인 국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토지 민주주의로 인해 지역의 대표가 정치가로 선출되기에 지역의 성장을 정치공약으로 내세우면서 지역의 부동산 가격이 권력에 의해 필요이상 높아질 수 밖에 없었다. 불필요한 사회기반시설이라고 하더라도 지역의 이익을 겨냥한 정치공약에 의해 건설해버리는 것으로 세금이 낭비되고 부동산이 폭등한다. 선진국이 성장하기 위해서는 지역이 아닌 분야가 성장해야 한다. 토지가 고부가가치를 생산하던 시대는 진작에 끝났다. 사람이 고부가가치를 생산하는 시대이므로 선진국은 토지가 아닌 분야가 성장해야 한다. 토지로 생산하는 것은 사람이 성장하면 토지가 넓은 다른 국가에서도 충분히 할 수 있다. 영토가 좁은 국가에서는 자국 토지를 활용하기보다는 지구 토지를 활용하고 이후에는 우주를 활용하는 것이 훨씬 낫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역의 대표에게 입법권력을 주는 토지 민주주의가 아닌 분야의 대표에게 입법권력을 주는 역할 민주주의로 변화를 꾀해야 한다.

부동산 투기나 갭 투자는 함부로 규제하기가 어렵다. 모든 시장이 그렇듯 투기가 부작용을 일으킨다고 시장 자체에 규제를 늘리면 시장의 흐름이 죽어 되려 나쁜 결과가 나올 수 있다. 투기를 방지하면서 시장 자체의 규제는 늘리지 않기 위해서는 주식시장과 같이 정부도 시장의 일원이 되어 수요가 있는 곳에 주거지를 공급하는 수 밖에 없다. 경쟁을 막기보다는 정부도 경쟁하는 것이다. 단 경쟁의 목적이 서로 다르다. 개인은 주거나 이익실현이 목적일 확률이 높고 정부는 사회 구조 유지가 목적일 확률이 높다.

갭 투자는 전세가와 매매가의 차액이 적은 부동산 상품을 타인의 전세 보증금과 본인의 전세가와 매매가의 차액자금으로 부동산 상품을 사는 것을 말한다. 본인 자금은 차액만 준비하면 되기에 적은 금액으로도 많은 부동산 상품을 소유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본인 자금이 적기에 만약 다수의 전세 임차인이 이사를 가겠다고 전세금을 달라 요청하면 집을 팔거나 대출하거나 파산하거나 사기치는 수 밖에 없다. 굉장히 불안정한 투자 방식이다. 전세는 주거 방식의 일종으로 부동산 상품 소유자에게 보증금을 맡기고 일정기간 지내다가 계약이 끝나면 보증금을 돌려받는 주택임대차 중 하나다. 갭 투자는 갭 투자 이전에 전세 자체가 불안정하다. 개인이 개인에게 높은 보증금을 맡기고 있는데 은행과 달리 개인의 신용도는 편차가 크기에 불안정할 수밖에 없다. 개인주의 체제는 공정해야만 개인의 이기심이 정당화된다. 부동산시장은 신용평가라는 공정한 기준을 도입하여 부동산 소유자의 신용을 평가할 수 있도록 하는 것으로 공정한 경쟁이 가능한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 부동산 신용평가제를 도입해 갭 투자와 같은 불안정한 투자를 한 부동산 상품의 소유자는 신용평가가 낮추고 그걸 임차인에게 의무적으로 공개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그러면 신용도가 낮은 상품은 자연스럽게 가격이 내려갈 것이다. 리스크를 짊어지고 싼 부동산 상품을 빌릴 것인가 아니면 팔리지 않아 갭 투자한 부동산 상품을 다시 되팔아버릴 것인가?

정부 정책은 아무리 열심히 해도 그에 따른 보상을 받기가 어렵기에 소홀히 하기도 할 수 있으므로 평가에 따른 추가보상제도가 필요하다. 정부 정책으로 만든 부동산 상품이 예산 대비 시장과 소비자의 평가가 높다면 그런 정책을 만든 사람에게 충분한 보상이 지불되어야 한다.

비리는 애초에 잘못되었다. 집단주의 관념으로 비리가 용인되어 고발하지 않거나 처벌하지 않게 되므로 우선 개인주의 관념으로 진보해야 한다.

부동산시장의 수익보다 금융시장의 수익이 높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토지나 건물은 가격이 오른다고 하더라도 생산성을 높이는데 도움을 주기는커녕 생산에 필요한 비용에 부동산 임대료가 많은 비중을 차지하게 되어 상품의 가격을 높이는 것으로 상품 경쟁력을 낮추기만 할 뿐이다. 그러므로 자본주의 체제에서는 부동산시장의 수익이 대부분 금융시장으로 흘러가는 것이 낫다 본다. 부동산과 주식 모두 불로소득이 가능한데 주식은 기업의 성장에 도움이 될 수 있으므로 부동산보다는 주식으로 이익실현을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같은 도박판이면 사회에 이로운 도박판에서 노는 것이 낫다는 것이다. 자본주의 체제 유지를 위해 자본주의 시장경제 구조를 유지해야 하는데 부동산 불로소득자가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생산자가 줄어들어 상품 경쟁력을 악화시키고 시장 공급이 줄어들어 시장이 유지되지 못할 수 있다. 대부분 생산을 로봇과 인공지능이 하지 않는 이상 복지나 이익실현 또한 생산하는 것으로 시장과 사회에 이로워야 한다.

그런 측면에서 토지공공임대제와 같은 토지 공개념이 바람직하다. 토지 공개념은 개인의 소유권을 침해할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는데 원래 개인주의 체제는 모든 것을 거래하고 소유하지 못한다. 인신매매나 마약매매나 일부 멸종위기동물의 사육이 금지되어 있는 것을 떠올려보자. 사회 구조 유지를 위해 사회에 해로운 것은 거래와 소유가 불가능하게 되어 있다. 개인의 토지 소유는 토지의 성질상 시장에 해로운 불로소득자를 늘려 사회와 체제에 해롭기에 개인의 토지 소유는 불가능해야 한다. 그러나 이미 토지를 소유한 이들에게서 빼앗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지역별로 토지 공개념을 다르게 접근해야 한다. 이미 거래가 활성화되어 토지 가격이 높은 곳은 소유권 침해를 하지 않기 위해 그대로 두되, 이미 소멸할 예정인 지역은 소멸하여 토지가 저렴하게 되면 정부가 저렴한 가격에 토지를 사들여 토지공공임대제를 실험해봐야 한다. 다수의 재산이 없는 젊은이들에게 토지를 저렴한 가격에 임대하여 농업이나 사업에 종사하게 해보게 하여 지역활성화를 시도하는 것이 좋다 본다. 이미 성장할 대로 성장한 도시가 아닌 성장 가능성이 많은 시골이 성장하는 것으로 마치 개발도상국 시기의 경제성장과 같은 높은 성장을 노려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게 하여 만약 성장한다면 다른 도시도 같은 방법으로 지역을 활성화하면 좋을 것이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지역양극화도 해소되어 지역양극화에 의한 부동산 투기현상도 방지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인은 부동산 투기가 많다. 그렇게 하여 부동산 상품 가격이 불필요하게 높아지는 일도 있다. 정부는 사회 구조 유지가 목적이므로 그런 투기에 이타적으로 대응할 것이 아니라 이기적으로 대응해야 한다. 외국인의 투기도 마찬가지다. 외국인의 부동산 투기를 엄격하게 대응하고 특정 국가 외국인의 지나치게 많은 소유를 경계해야 한다. 특정 국가의 외국인이 부동산을 과반수 사버릴 경우 그것이 침략이 아니면 무엇이라 할 수 있는가? 상호호혜적으로 접근해야 한다. 강대국의 지나친 부동산 소유를 경계하기 위해 국가와 국가의 부동산 소유율을 비례하도록 원칙을 정해야 한다. 가령 A 국민이 B국가 부동산을 3프로 소유하고 있다면 B국민도 A국가의 부동산을 3% 안에서만 소유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부동산은 기준이 다양하지만 대략적으로 구분하더라도 큰 문제는 없을 것이다. 그렇게 해야 일방적인 소유로 인한 자본침략이 발생하지 않는다. 토지 소유도 마찬가지다.  A국가는 토지를 소유할 수 있는데 B국가는 토지를 소유할 수 없다면 그것은 상호호혜와 어긋난다 본다.

 

시장의 불균형에 대해 알아보았다. 시장에서 깨진 불균형으로 사회가 불균형해지면 복지나 다른 정책으로 균형을 맞추면 된다. 개인주의 체제는 충분히 합리적이고 우수하다. 자유주의는 본인의 자유권을 보장받기 위해서 타인의 자유권을 보장하게 된다. 본인만 자유로운 것은 주의로 성립될 수 없다. 민주주의는 모든 개인에게 주권이 주어진 체제로 권력 남용에 대한 이해가 있다면 중우정치로 흘러가지 않아 대중의 권력 남용으로 발생하는 문제점에서도 벗어날 수 있다. 그러나 집단주의 관념에 의해 권력자만 권력을 쥐고 남용할 수 있다는 고정관념으로 국민에게 권력이 있다는 민주주의를 외치고 있음에도 국민의 권력 남용을 떠올리지 못했다. 자본주의는 시장 참여자가 자본주의 규칙을 지키지 않는 것이 문제지 자본주의 자체가 문제는 아니다. 자본주의 시장경제는 경제학자들이 지속적으로 합리적으로 만들고 있다. 한국 사회는 체제가 아닌 관념이 문제다. 개인주의 체제는 개인의 자유로운 이기심에 맞춰 이기적이지 않으면 그릇된 결과가 나오게 된다. 타인의 자유권을 침해하지 않기 위해 본인의 의사를 표현하지 않으면 본인의 자유권이 침해되게 된다. 모든 개인의 자유를 추구하는 자유주의 이념이 붕괴한다. 소수의 주권을 위해 다수가 주권을 행사하지 않으면 다수의 주권이 침해되게 된다. 모든 개인이 주권을 갖는 민주주의 이념이 붕괴한다. 집단의 이익을 위해 사회나 시장에서 본인의 소유권이나 선택권을 행사하지 않으면 본인의 소유권이나 선택권이 침해되게 된다. 모든 개인이 소유권과 선택권을 행사하여 소유하고 소비하는 행복이란 자본주의 이념이 붕괴하게 된다. 자유주의와 민주주의 자본주의는 개인의 자유, 개인의 자유의견, 개인의 자유소유와 소비 등과 같이 개인의 자유에 초점을 맞췄다. 그렇기에 이 체제들은 개인주의 체제에 속하며 자유주의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이렇듯 개인주의 체제는 철저하게 개인이 이기적이어야 체제의 이념에 도달할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이타주의가 옳고 이기주의가 그르다고 말해왔으니 매번 그릇된 결과가 나와 사회가 불행할 수 밖에 없다. 모든 개인을 이타적으로 만드는 것이 아닌 모든 개인이 이기적일 수 있는 환경이 되어야 모든 개인이 행복할 수 있다. 이제 집단주의 관념이란 낡은 지도를 버리고 개인주의 체제에 맞는 관념을 갖는 새로운 길로 가야 한다.

 

행복의 실현방식도 이제는 새로워야 한다. 인간은 집단주의 관념에서 개인주의 관념으로 진보하고 비과학에서 과학으로 진보해야 한다. 권력이나 재력 같이 힘이 강한 사람이 종교에 빠지는 것을 보고 종교에 어떤 타당한 점이 있어 그런 것이라 착각할 수 있다. 그러나 종교는 개인의 특성과 무관하게 누구나 다 하는 현실도피의 일종이었기에 그랬던 것일 뿐이다. 논리 안에 사는 사람은 어떤 경우에도 종교의 제한적 지식을 근거로 한 종교가 인간의 창작물이라는 논리를 부정할 수 없다. 어떻게 신의 계시 중에 당대 종교인의 인지를 초월한 지식이 등장한 적이 없는가? 당대 종교인의 인지를 벗어난 단 한번도 접촉하지 않은 다른 대륙의 지식을 말한 적이 있는가? 미래의 인터넷을 말한 적이 있는다? 과거의 공룡을 말한 적이 있는가? 당대 종교인이 상상할 수 있는 한계 내에서만 신의 계시가 있는 것을 보고 당대 종교인이 종교를 창작했다 추론하는 것이 논리적이라 생각하지 않는가? 과거 종교인의 생각을 진리로 만든 성서를 아직까지도 진리로 여기니까 지구 평평설이나 지구가 고착 수 천년 밖에 존재하지 않았다거나 창조설 따위를 믿는 것이다. 과거의 종교는 신의 권리를 빌려 사상에 담긴 가르침을 전파한 것이라 본다. 그때는 필요했을 지라도 개인주의 체제는 인류의 과학과 개인의 논리로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으므로 신의 권위는 필요하지 않으므로 종교에 의존하지 않아도 된다. 현실도피는 누구나 다 한다. 그러나 그것이 현실도피임을 인정하고 맹신하기 보다는 정신안정으로 이용하며 실질적인 바람실현으로 얻는 행복은 종교라는 현실도피가 아닌 과학이라는 현실직시로 얻어야 한다.

세상 만물의 현상 중 과학적으로 증명한 것을 과학이라 부르고 증명하지 못한 것을 연구대상이나 오컬트라 부르고 있다. 과학이 다른 형태로 증명할 수 없는 것은 연구대상이 되고 증명할 수 있는 것은 오컬트가 된다. 과학의 반대는 오컬트가 아닌 아직 증명되지 않은 현상이다. 과학이란 현실직시로 종교가 주장하는 영생이나 천국 등을 충분히 구현할 수 있다.

인간의 자아는 육체라는 하드웨어에서 학습으로 프로그래밍 된 소프트웨어다. 육체적 성장으로 자아의 성장이 필요하다는 점, 정보의 수집으로 자아의 성장이 필요하다는 점, 기억을 잃으면 자아도 잃게 된다는 점, 자아가 굉장히 불안정하여 다중인격으로 분리될 수 있다는 점 등 많은 근거로 자아가 소프트웨어임이 분명하다 본다. 그렇기에 영혼이란 어떤 특정한 것이 없어도 구현하여 증명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의 자아의 모든 구조와 과정에 영혼의 존재는 불필요하다. 만약 인간 수준의 자아를 가진 인공생명체가 등장한다면 영혼은 명백한 오컬트가 된다.

인간의 자아는 소프트웨어이므로 자아를 구동시킬 기억을 통째로 복제할 수 있다면 인간은 영원히 살아갈 수 있다. 육체가 달라진다면 자아도 달라진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은 세포를 실시간으로 바꾸는 것으로 육체를 바꾸고 있다. 논리적으로 인간의 육체가 달라진다고 하여 다른 자아라 할 수 없다. 성장하거나 손실하여 육체가 달라진다고 다른 자아라 할 수 있는가? 인간의 자아는 자각으로 존재를 증명한다. 인간의 자아는 기억과 기억에 담긴 관념에 의해 유지되기에 기억만 온전히 보존될 수 있다면 육체가 달라진다 하더라도 같은 자아가 된다. 기억이 복제되어 두 개의 기억을 가진 인간이 있으면 누가 진짜인지 의문이 들 수 있다. 그것은 소프트웨어를 떠올려보면 알 수 있다. 소프트웨어를 복제한다 해도 어느 것이 진짜인지 구분하지 않고 둘 다 진짜인 것과 같이 자아를 복제했다 하더라도 어느 것이 진짜인지 구분하지 않고 둘 다 진짜다. 이후 시간이 흐르면 다른 소프트웨어가 되겠지만 그 순간만큼은 둘 다 진짜다.

자아가 인간의 육체와 기억에서 비롯되었기에 과학으로 종교가 말하는 이상을 충분히 구현할 수 있다. 새로 만든 육체에 인간의 기억을 주입하거나 유전자 조작을 하여 인간의 수명을 결정하는 텔로미어를 조작하여 수명을 조작하거나 체내 성장 방향을 조작하여 어려지게 하거나 나비의 번데기와 같이 인간의 몸을 녹였다가 재구성하는 것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과 같이 영생이 가능하다 본다. 인간의 자아가 소프트웨어라면 인간의 육체는 하드웨어일 뿐이므로 새로운 육체로 교체하든 새롭게 만들든 상관 없다.

가상현실을 구현하여 가상의 육체에 현실의 기억을 주입하면 가상현실이란 천국에서 살 수 있다. 많은 자산가들이 죽음으로부터의 공포에서 벗어나기 위해 종교에 돈을 쏟아 붓는 현실도피를 하기보다는 과학에 돈을 쏟아 붓는 현실직시를 하여 현실적으로 행복을 얻는 것이 좋다.

나는 나를 비롯한 모든 인류가 불로불사자가 되어 전 우주를 돌아다니며 인류를 퍼트리고 전 우주의 정보를 모아 이 세상의 존재이유를 규명하여 영원진리에 도달하길 바란다. 인간의 크기는 매우 작아 불로불사가 되어 인류의 수가 늘어난다고 해도 우주의 균형이 깨질 일이 없고 지구가 알고 있는 우주의 정보로 세상의 존재이유를 추론하기에는 지나치게 정보가 적다. 빠르게 과학을 발전시켜 불로불사자가 되어 우주로 진출해야 지구도 포화되지 않을 수 있고 우주의 정보로 세상의 존재이유를 알 수 있어야 영원진리를 디딤대로 인류가 바로 설 수 있게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인류가 개인주의 관념으로 진보해야 한다.

 

보통 사회 관념과 다른 주장은 반체제주의일 확률이 높은데 사회 관념과 다른 나의 주장은 친체제주의다. 나는 이타주의가 선한지 의심하는 순간부터 인류의 보편적 관념과 맞서게 되었다. 그때부터 나는 이런 식으로 나의 생각이 흘러갈 거라는 것을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다. 모든 인간의 보편적 관념과 맞선다는 것은 사회에서 살고 있는 평범하고 선량한 이들의 관념과 맞선다는 것과 같다. 어울릴 수가 없었다. 그것이 얼마나 답답하고 짜증나더라도 답을 찾을 때까지 어울릴 수는 없었다. 어울리다가 지극히 평범하고 선한 마음씨에 영향을 받아 이타주의가 그르다는 논리적인 결론에 영향을 받을 수 있었다. 두려웠다. 나의 논리는 이타주의가 그르고 이기주의가 바르다 여겨지는데 세상은 그렇다 하지 않으니 스스로를 끊임없이 의심할 수 밖에 없었다. 두려웠다. 이타주의가 바르다 여기고 이기주의가 그르다 여기는 사람들이 그런 관념으로 사회를 불행케 하는 모습을 보며 마모되어가게 될 것이 너무나도 분명했다. 도덕을 외치며 세상을 해치고 정의를 외치며 세상을 해치고 옳음을 외치며 세상을 해치는 그 모든 것이 너무나도 괴롭다.

어떤 누군가는 사람은 매번 이타적이기도 않고 이기적이지도 않다며 말할 수 있다. 그런데 그런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옳고 그름의 기준이 되는 보편적 관념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관념은 체제에 어울리냐 어울리지 않느냐로 결정된다. 집단주의 체제는 개인이 이타적이지 않으면 성립되지 않는다. 개인의 이익을 위해 집단의 이익을 소홀히 하면 집단주의 체제는 무너지게 되어 있다. 보통 그런 무너짐을 국가 붕괴 또는 왕정이나 신정 붕괴라 부르고 이후에는 새로운 국가가 탄생하거나 민주정이 탄생한다. 반면 개인주의 체제는 개인이 이기적이지 않으면 성립되지 않는다. 개인의 이익만을 위하지 않고 집단의 이익을 고려하면 개인주의 체제는 무너지게 되어 있다. 보통 그런 무너짐을 국가 붕괴 또는 민주정 붕괴라 부르고 이후에는 새로운 국가가 탄생하거나 독재정이 탄생한다. 개인주의 체제에서는 그런 기준이 이기주의가 바르고 이타주의가 그르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관념을 가진 인간은 있는지 모르겠다. 단순한 개인주의자가 아니라 명백하게 이타주의가 그르고 이기주의가 바르다고 말하는 사람이 얼마나 있는지 모르겠다.

누군가는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와 자본주의가 개인주의 체제가 아니라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무조건 개인주의 체제다. 도대체 집단의 이익을 위해 무조건 개인의 자유권을 침해하는 자유주의가 어디에 있나? 도대체 집단의 이익을 위해 무조건 개인의 주권을 침해하는 민주주의가 어디에 있나? 도대체 집단의 이익을 위해 무조건 개인의 소유권이나 선택권을 침해하는 자본주의가 어디에 있나?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는 개인주의 체제고 자유주의자와 민주주의자와 자본주의자는 개인주의자가 아니라면 자가당착에 빠진다. 법치주의도 같다. 모든 사람이 법에 의해 질서가 유지되려면 개인이 이기적이지 않으면 안 된다. 이타적으로 자유의지와 무관하게 무조건 양보하는 순간부터 법은 존재의미를 상실하게 된다. 서로 양보하면 끝나는데 무엇을 위해 법이 존재하는가? 이런 주의는 반드시 모든 개인이 대상이 되어야 한다. 일부 개인만 자유권과 주권과 소유권과 선택권을 행사할 수 있는 것을 가리켜 주의라고 부르지 않는다. 본인이 자유로우면 타인도 자유로워야 자유주의가 된다. 본인이 주권을 가지고 있으면 타인도 주권을 가지고 있어야 민주주의가 된다. 본인이 소유권과 선택권을 가지고 있으면 타인도 소유권과 선택권을 가지고 있어야 자본주의가 된다. 모든 개인이 대상이 되어야 주의로 성립된다. 만약 일방적인 것도 주의에 포함되면 모든 체제는 객관성을 잃게 된다.

그렇다면 이타주의와 이기주의는 어떻겠는가? 모든 개인이 이타적이어야 이타주의가 성립되는 것이고 모든 인간이 이기적이어야 이기주의가 성립되는 것이다. 그 말은 즉 이타주의는 타인을 이타적으로 만들어야 한다면 이기주의는 타인을 이기적으로 만들어야 한다. 이타주의는 본인은 물론이고 타인도 이타적으로 만들어야 하기에 이용하기가 너무나도 쉽다. 타인을 이타적으로 만들어 이용하는 인간은 본인의 이타심을 너그럽게 하고 본인을 이타적으로 만들어 이용당하는 인간은 본인의 이타심을 엄격하게 한다. 그렇게 하여 이용하고 이용당하는 관계는 이타주의로 설정된다. 이타주의가 왕정과 민주정의 바름인 이유는 이런 구조 때문이다. 그러면서 서로를 무례하게 대한다. 이타주의는 상대를 인간으로 여기지 않게 된다. 일방적으로 상대를 이타적일 거라 생각하며 도구로 인식하게 된다. 정부는 국민이 이타적일 거라 생각하며 함부로 대하고 국민은 정부가 이타적일 거라 생각하며 함부로 대하고 사장은 사원이 이타적일 거라 생각하며 함부로 대하고 사원은 사장이 이타적일 거라 생각하며 함부로 대하고 부모는 자녀가 이타적일 거라 생각하며 함부로 대하고 자녀는 부모가 이타적일 거라 생각하며 함부로 대한다. 성인은 아동이 이타적일 거라 생각하며 함부로 대하고 아동은 성인이 이타적일 거라 생각하며 함부로 대한다. 남성은 여성이 이타적일 거라 생각하며 함부로 대하고 여성은 남성이 이타적일 거라 생각하여 함부로 대한다. 인간은 인간으로 여기지 않고 함부로 대한다. 온갖 무례함은 상대가 이타적일 거라 생각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상대가 이기적일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지 못한다. 혹시라도 이기적을 보이면 이타적일 것을 강요하며 공격한다. 그러면서 무례함은 더 심각해진다.

인간이 인간을 인간으로 대하기 위해서는 타인이 이기적으로 만들어야 한다. 이기주의는 본인은 물론이고 타인도 이기적으로 만들어야 하기에 이용하기가 어렵다. 만약 본인만 이기적이라면 그것은 주의로 성립될 수 없기에 이기주의가 아니다. 그런 것은 가짜 이기주의나 타인이 이타적일 거라 바라면서 본인의 이타심에는 너그러운 이타주의다. 이기주의가 되면 타인을 본인에게 일방적으로 이타적으로 행동하는 도구로 취급하는 것이 아닌 타인을 본인과 같이 이기적일 수 있는 인간으로 대우하게 된다. 가령 부모가 아동학대나 살해 또는 집단 자살에 강제로 동참시키는 것과 같이 아동을 도구로 여기는 것은 아동이 이타적일 거라 생각하여 함부로 대하기 때문이다. 아동이 본인과 같이 이기적일 거라 생각했다면 그런 무례한 짓을 저지르지 않고 같은 인간으로 대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아동도 부모가 이타적일 거라 생각하고 함부로 대했던 것이다. 부모가 본인과 같이 이기적일 거라 생각했다면 그런 무례한 짓을 저지르지 않고 같은 인간으로 대했을 것이다. 부모가 자녀의 말을 듣지 않고 자녀를 이타적으로 만드는 것과 같이 자녀가 부모의 말을 듣지 않고 부모를 이타적으로 만들려고 했던 것뿐이다. 가령 학교 붕괴를 일으키는 학생은 부모와 교사와 학생과 타인이 이타적일 거라 생각하며 무례한 행동을 연거푸 저지르고 있는 것이다. 만약 그들이 이기적일 거라 생각했다면 그런 식으로 행동을 할 수가 없다. 언제 공격받을 지 모르는 상황에서 그런 멍청한 짓을 저지를 수가 없다는 것이다.

인간은 이타주의에서 벗어나 이기주의를 추구해야 비로소 모든 개인이 같은 자리에 설 수 있다. 정부와 국민과 사장과 사원과 부모와 자녀와 성인과 아동과 남성과 여성은 상대가 이기적일 거라 인식해야 상대방을 일방적으로 이타적으로 행동하는 도구로 취급하는 것이 아닌 이기적으로 행동하는 인간으로 대우하며 대화와 거래를 하게 된다. 이기주의일수록 인간은 인간을 인간으로 대한다. 개인주의와 개인주의의 올바름인 이기주의야말로 인본주의다.

모든 사상이 그러하다. 모든 개인이 평등하게 되려면 집단이 아닌 개인의 평등을 추구해야 한다. 집단의 평등을 추구하는 순간 개인은 불평등해질 수 있다. 그럼에도 개인주의자인 평등주의자가 있는지 모르겠다. 사회에서는 본인이 주장하는 사상과 본인의 관념이 정반대의 옳고 그름을 가지고 있다는 모순을 모른 채 본인을 주장하는 사상을 위해서 본인의 사상을 훼손하는 짓을 저지르는 사람이 많다. 볼 때마다 고통스럽다. 그런 것에 영향을 받는 것도 너무나도 두렵다. 사상서를 접했을 때와 같이 직감적으로 느꼈다. 생각이 충분하지 않은 상태에서 깊이 있는 사상서를 접하면 그 사상에 종속될지도 모른다고 느꼈던 것과 같이 생각이 충분하지 않은 상태에서 사회에 있는 인간의 보편적 관념에 휘말리면 이 모순으로 가득 찬 미로에서 벗어나지 못할 거라는 것을 느꼈다. 어쩔 수가 없었다. 이걸 누구에게 말하기도 어려웠다. 도대체 사상가가 되겠다는 것도 쉽게 말하기 어려운데 사회 보편적 관념과 정반대인 것을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어떻게 말할 수 있는가? 철저하게 거리를 두고 객관적으로 관찰하며 성장하는 수 밖에 없었다. 어느 정도 기초적인 생각은 정리되었지만 아직도 두렵다. 나는 진리로 여겨지던 인류의 보편적 관념인 이타주의와 맞선 것이다. 아아, 웃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다. 울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다. 바닥을 지탱하던 관념을 부숴버리고 논리라는 얇은 줄에 매달려 매일매일 스스로의 자아를 증명하고 있다. 정말 우습구나.

우파와 좌파의 갈등은 이타주의가 바르다는 것을 진리로 여기고 강자와 약자의 대결구도로 만들어놓으니까 논리가 없는 것이다. 체제에 따라 바름은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면 그런 비논리적인 구도가 아닌 철저하게 논리와 비논리의 구도가 되었을 것이다. 강자와 약자와 관계 없이 모든 인간이 논리와 비논리로 맞서 사회를 논리적으로 만들 수 있다. 논리와 비논리의 대결구도가 된다면 논리는 체제에 이로운 것을 올바르다 인식하게 할 것이므로 체제와 무관한 관념으로 사회를 불행하게 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인류가 논리적이게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그러길 바란다. 절실히.

 

사상가 (아직 이름을 말할 정도는 아닌)

 

 

여기까지 읽었다면 읽은 사람이 누구든 이 모순을 이미 알아버렸기에 사회를 견딜 수가 없을 것이다. 갑질이나 꼰대질은 안 된다면서 이타주의를 가르치는 모순을, 학생의 의사는 중요하다거나 학교폭력은 안 된다면서 이타주의를 가르치는 모순을, 출산율이 낮다면서 성을 죄악시하는 모순을, 차별은 안 된다면서 차별하던 관념을 근거로 한 똑같은 차별을 하는 모순을,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자이면서 개인주의를 비판하는 모순을, 관념과 체제가 말하는 옳고 그름이 정반대라는 모순을! 이제는 알아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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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전하여 수정하면 사상서 같이 될 거라 생각합니다. 이후는 수정을 하거나 외교에 관한 것을 생각할 겁니다. 다음은 사회나 복지 수정이나 외교 그 다음은 창작입니다.

올 해 안에 역할주의 완성해보려고 했는데 기초도 생각보다 오래 걸리네요. 아마 이 글 또는 수정한 글은 다른 블로그를 만들어서 올릴 예정입니다.

 

나는 내가 사상을 하는데 방해가 되는 것은 하고 싶지 않습니다. 사상이 끝없이 성장해도 시간이 부족한데 사상에 해로운 것을 하면 손해가 너무 큽니다. 모든 행동을 사상에 맞추고 싶어요. 나는 지금 과거 사상가를 경쟁상대로 삼고 거기에 맞춰서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의 나는 그 그릇에 맞춰져 있어요. 더 성장하고 싶어요. 더 성장하고 싶고 성장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하여 공을 세우고 싶다. 그런데 만약 그릇을 바꾸게 되는 일이 발생하면 사상에 해가 될 것이 두렵습니다. 사상가란 직업이 있다면 좋을 텐데. 나는 모든 것을 다 써서 이제는 생계를 유지할 여력도 없습니다. 지금까지 살아 있는 것만으로도 고맙습니다만 그렇다고 생계유지를 위해 사상에 해로운 것을 하고 싶지 않습니다. 만약 생계를 위해서라도 사상에 이로운 것을 하고 싶습니다. 외교나 창작을 쓰게 될 것 같은데 그에 관련된 기관에 방문하거나 체험해보는 것을 해보고 싶습니다. 힘들겠지만요. 나는 이타심을 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만약 사회에 이롭다고 여겨진다면 생계를 유지하거나 사상에 도움이 되는 것을 할 수 있도록 어떤 방법이든 도움을 주었으면 합니다. 이사를 가서 마음 편하게 사상에 필요한 것을 접하면서 사상을 하고 싶네요. 뻔뻔하다 생각할 수 있지만 나의 사상은 그만한 가치가 있다 생각합니다. 아마 나 같은 인간은 없겠지요. 아아, 인간관계는 다 사라지고 체력과 근력이 낮아져 생활능력도 처참하게 낮아지고 먹을 것도 못 먹고 최소한의 생활도 어려운 그야말로 스스로 생각해도 이상한 상황이지만 어쩔 수 없습니다. 그렇게 되더라도 사상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지 않으면 살아갈 수가 없었다. 세상의 부조리를 경험한 사춘기는 극히 소수를 제외하면 타협하여 살아가겠죠. 타협하지 못한 극히 소수는 미치거나 자살하거나 사상가가 될 거라 생각합니다.

 

만약 백 년 뒤에 태어났다면 괜찮았을까? 아아, 미래로 가고 싶다. 지금 쓴 것은 다른 사상과 비교하면 기초다. 아직 완전히 다 쓴 것도 아니고 열심히 쓴 것과 별개로 사상 자체가 기초를 설명하고 있을 뿐이다. 개인주의 체제의 기초적인 관념에 해당한다. 이것을 몇 명이나 받아드릴 수 있을까? 많은 사람들이 받아드렸으면 좋겠다. 적어도 지성인은 받아드렸으면 좋겠다. 그러지 않는다면 나는 견디지 못할지도 모른다. 좀 더 멀리 가야 하는데. 부디 어떤 방법이라도 좋으니 최대한 많은 사람이 읽어주기를 바란다. 누구라도 좋다. 모든 인류가 읽어주었으면 좋겠다. 부디, 세상의 모든 개인이 보다 행복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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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갤럭시와 아이폰 (0) 2021/10/11 AM 08:29

갤럭시와 아이폰

 

 

 

원래 구글 경쟁상대에 대해 써보려고 몇 가지 생각해둔 것이 있다. 그건 주관적으로 지역 영상 플랫폼 급의 발상이라 생각한다. 예상 밖에 상황으로 그건 보관하고 다른 걸 써보기로 했다. 마침 유튜브에 갤럭시와 아이폰 관련 영상이 있길래 그걸 주제 삼기로 했다. 그런데 나는 갤럭시와 아이폰을 써본 적이 없다. 삼성 제품은 꽤 소유하고 있어도 애플 제품은 아예 없다. 스마트폰에 대해 크게 생각해본 적도 없다. 그럼에도 해보겠다. 그냥 이건 내 능력 실험이다. 어디까지 생각해낼 수 있을 것인가? 나도 모른다. 시작해보겠다.

 

스마트폰은 혁신이 어렵다. 구글 같은 소프트웨어와는 다르게 스마트폰 같은 하드웨어는 배터리에서 정체되어 큰 혁신을 이루기가 어렵다. 단순한 성능 강화는 사실상 물가상승률과 다를 바 없을 정도로 무미건조하다. 별다른 감흥이 들지 않는다. 쓰던 걸 굳이 교체하고 싶다는 충동이 들지 않는다. 그런 상황에서 갤럭시가 액정을 접는 개념을 도입했다. 신선했지만 부진했다. 시행착오를 겪은 다음 최신버전인 갤럭시 Z 플립3는 예상외의 많은 수요가 있다고 한다. 유행에 민감한 이들이 많이 구매한 것으로 보인다. 아이폰을 쓰던 이재용 딸도 이젠 플립을 쓴다는 글을 본 적이 있다. 그런데 아이폰은 그런 것이 없어도 인기가 많다. 아이폰13은 변화가 적어도 인기가 많다고 한다. 이에 대해서는 높은 브랜드 충성도와 아이폰 교체시기가 겹쳐 발생하는 현상이라는 의견이 있었다. 정리하면 접는 개념을 도입한 갤럭시와 별다른 변화가 없는 아이폰이 둘 다 인기가 있다는 것이다. 이러면 자연스럽게 아이폰의 변화가 시작될 때 갤럭시가 아이폰에 뒤쳐질 수 있다는 우려 섞인 예측이 가능해진다. 그렇지 않아도 아이폰의 수익이 높은 상황이었다. 갤럭시가 더 많이 팔아도 아이폰은 더 많은 수익을 올렸다. 갤럭시는 다양한 모델을 판 반면 아이폰은 고가의 모델만 팔았기 때문에 발생하는 현상이라 한다. 이런 상황에서 판매 대수조차 뒤쳐질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자 그럼, 이 현상이 어떻게 해서 발생했고, 갤럭시는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알아보도록 하자.

 

 

 

스토리.

 

보편적으로 아는 것부터 정리해보자. 아이폰은 명품화가 되었기 때문에 충성도가 높은 고객과 높은 수익률을 올릴 수 있다. 이 명품화의 뿌리를 알아보면 잡스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전화기, 카메라, 인터넷, 음악감상, 게임 등을 합치다라는 혁신을 주도하여 새로운 개념을 인류에게 전파했다. 아이폰이 최초인지는 모르겠는데 확실한 것은 아이폰이 주도했다는 것이다. 이 합치다라는 개념은 분명 혁신이었다. 이 혁신이야말로 아이폰의 명품화에 가장 큰 기여를 했다. 이 혁신을 한 스티브 잡스의 카리스마가 애플에 남아 애플사의 제품을 명품으로 만들고 있다. 이와 비슷한 인물에는 빌 게이츠와 일론 머스크가 있다. 그렇다고 인물 자체가 명품화를 만드는 것은 아니다. 인물의 이야기가 명품을 만든다. 현대미술이 아무것도 없음에도 작가나 작품에 스토리가 붙으면 가치가 폭등하는 것처럼, 카리스마 있는 이들의 스토리가 그들이 생산하는 상품을 명품으로 만들었다. 윈도우를 만든 빌 게이츠가 다방면에서 기부와 봉사 또는 핵융합이나 환경 등을 말하는 것으로, 테슬라를 만든 일론 머스크가 스페이스 X로 화성에 가겠다는 목표를 실천 하는 것으로, 회사의 생산품에 부가가치를 불어넣었다. 아이폰은 이런 방식으로 명품화가 되었다. 갤럭시가 아이폰과 대결하는 것을 현대미술로 비유하면, 이야기가 없는 아름다운 작품과 이야기가 있는 아름다운 작품과 가치 대결하는 것과 같다. 현대미술을 안다면 이는 터무니 없을 정도로 무모한 대결이라는 걸 알 것이다. 갤럭시가 성능 강화하고 수익다각화를 시도하고 광고 하고 깎아 내리고 단가를 낮춰보고 해도 아이폰과의 대결에 힘겨운 것은, 이미 어느 정도 신앙 수준에 다다른 아이폰의 감성에 이성으로 맞서려 했기 때문이다. 이러면 간단한 결론이 나온다. 이제 갤럭시도 스토리가 있어야 한다. ‘접다라는 개념도 어느 정도 혁신에 가까워 이야기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할 수 있다. 생각해보자. 접다라는 개념은 이미 있었다. 액정을 접다라는 개념이 새로울 뿐이지, 접다라는 개념 자체는 이미 있었다. 그러니 신선하고 재미있고 흥미로워도 아이폰 수준까지는 도달하지 못하는 것이다. 접다로는 합치다를 넘기 어렵다고 본다. 다른 혁신은 아직 구현하기 어렵다. 그러니 일단 다른 방식부터 하나씩 알아보도록 하자.

 

 

 

아이폰하면 순백이 떠오른다. 올바른 이미지가 있는 순백이다. 다양한 색이 있지만 기본 색은 그렇다. 애플 제품 하나도 소유해본 적이 없는 내가 이런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봐왔던 대부분의 애플 제품의 색이 순백이었기 때문이다. 아마 다른 사람들도 비슷할 것이다. 부드럽고 편안하다. 아름답고 경건하다. 순수하고 신성하다. 단정하고 품위가 있다. 고상하고 품격이 있다. 고지식하고 엄격하다. 완결성, 완전성, 무결성. 이 이미지에 고유한 AP IOS. 완벽하다. 명품의 조건이 성립한다. 아이폰은 보고 먼저 떠오르는 퍼스트컬러만 봐도 충분히 굉장하다.

 

잠시 과거로 가보자. 원시부족의 제사장부터 시작해 대부분 국가가 과거 1신분이 성직자고 2신분이 귀족이었다. 조선도 마찬가지로 유학자가 최고의 위치에서 정치를 하고 있었다. 성직자와 유학자의 공통점은 옳고 그름을 주장하는 입장에서 최고 지위를 누렸다는 점이다. 어떤 특정한 질서가 담긴 도덕을 가지고 민중을 선동과 세뇌와 강압하여 높은 지위를 차지했다. 무력, 지력, 매력, 권력, 재력 등 세상에는 수많은 힘이 있는데 도덕은 그 힘의 방향성을 결정하여 인류 최고의 권위에 있는 힘이다. 이런 배경으로 올바른 이미지가 있는 순백이 어떤 가치가 있는지 알 것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이것은 이제 낡았다. 이제 도덕은 그 지위에서 내려와야 한다. 과거 종교의 도덕이 인간의 위에서 내려다보았다면 현재 정상적인 사상가는 평지에서 선행 후 길을 안내하고 있다. 인간이 평등하다면 도덕이 인간의 위에 있을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종교는 진리가 아니다. 유교는 진리가 아니다. 인류의 진정한 자유와 평등을 위하여 도덕은 이제 인류의 위가 아닌 인류의 곁에 있어야 한다.

 

반면 갤럭시는 삼성의 파랑이 떠오른다. 부드러운 푸른 하늘과 청아한 파란 바다가 떠오르는 파랑이다. 그런데 이걸 갤럭시의 색상이라고 하기에는 어렵다. 애플의 순백은 아이폰의 순백이란 느낌으로 이어지는데(또는 반대로도) 삼성의 파랑은 갤럭시의 파랑으로 이어진다는 느낌은 없다. 갤럭시로 떠오르는 색이 없으니까 삼성의 색이 떠올랐던 것이다. 갤럭시와 아이폰은 퍼스트컬러부터 차이가 났다. 파랑 자체만 봐도 순백에 비하면 약간 격이 떨어진다. 파랑이 자유주의 자본주의 같은 이미지가 있다고는 하나, 아직 이 사상들에는 도덕성이 부족하다. 백의 민족, 올바른 느낌, 백인의 상징, 웨딩 결혼 등. 아무리 생각해도 순백이 파랑을 넘기가 어렵다. 백인을 언급했다고 특정 인종의 우월을 말하는 것이 아님을 말해둔다. 단지 일부 국가에서 백인의 이미지가 좋다는 현상은 확실히 있다는 걸 말해두겠다. 현상은 있는 그대로 파악해야 한다.

 

갤럭시는 우선 퍼스트컬러부터 확실히 인류에게 인식되어야 한다고 본다. 이미 퍼스트컬러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그런 이미지를 가진 적이 없다. 갤럭시와 아이폰 둘 다 없었는데 퍼스트컬러에 대한 인식 차이가 발생했다는 점에 주목해주길 바란다. 없으면 만들어야 하고 있었다면 제 역할을 못했다. 순백에 맞설 수 있는 색에 대해 생각해보자. 별빛이 담긴 검푸른색이라 생각한다. 간단히 말해 밤하늘이다. 밤하늘이 순백에 맞설 수 있는 색이라 생각한다. 밤하늘은 다양한 이미지를 내포한다. 갤럭시와 비슷한 느낌의 색, 밤하늘의 별을 바라보는 아이의 동심, 우주로 가고 싶어하는 인류의 꿈, 그걸 위해 발전하는 과학, 과학 속에 담긴 미래, 천문학적인 수치를 자랑하는 거대한 크기와 거리.

 

밤하늘이란 아이의 꿈을 자극하는 색이라 생각한다. 별빛을 바라보는 아이의 마음을 들뜨게 만드는 색상. 활발하면서도 호기심이 왕성한 아이가 눈을 반짝일법한 색상. 언제나 밝고 명랑하며 활기찬 아이의 색상. , 모험, 호기심, 설렘 등. 거기에는 인류의 꿈이 있다. 하늘을 날아보고 싶어했던 인류는 비행기를 통해 하늘을 날았고, 우주로 가고 싶어했던 인류는 우주선을 통해 우주로 날아갔다. 그러나 하늘에 비하면 아직 우주는 미개척지나 다름이 없다. 우주는 아직 대부분 인류의 꿈이다. 내 이야기를 잠시 하자면 초등학교 바나나 사건 전후쯤에 아마 과학자가 되고 싶어했던 것 같다. 밤하늘 별을 보며 과학자가 되고 싶었던 것 같다. 확실히 우주는 아이의 동심을 자극한다. 나는 아직도 어린왕자를 상당히 좋아한다. 어떤 이는 동화기 때문에 읽기 쉬워 가치를 폄하할 수 있다. 그러나 내용으로 가치가 달라지는 거지 읽기 난이도 같은 걸로 가치가 달라지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종교적 신앙에 맞설 수 있는 것은 과학적 이상이라 본다. 이성이 아닌 이상이다. 종교는 도덕이고 과학은 기술이기에 서로 호환될 수 있다는 말을 하기도 하는데, 종교와 과학은 방향성이 같기 때문에 대체되는 것이 아니라, 영역이 다르기 때문에 대체된다. 종교는 종교의 가르침 내에서 진리를 추구한다면 과학은 지구를 포함한 전 우주와 있는지도 모르는 다차원의 세계까지 고려하며 진리를 추구한다. 영역 자체가 다르다. 이 점에 초점을 맞춰 과거와 미래로 대칭을 맞춰야 한다. 과거에 머물러 있는 완성된 순백과 미래로 나아가는 밤하늘. Pure white color VS Night sky color 나름 괜찮은 대결이 될 것이다. 미래로 나아가는 밤하늘이란 이미지는 기술 초격차를 추구하는 삼성과 어울리는 느낌이라 생각한다.

 

밤하늘을 감각 있게 표현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단색의 경우에는 편하게 깔끔한 느낌을 줄 수 있다. 그러나 거기에 별이 들어가면 별의 위치, 크기, 색상, 여백 등을 다 고려해야 하기 때문에 좋은 느낌을 주기가 어렵다. 밤하늘 색 바탕에 작은 별들이 입체감을 주며 살아 숨쉬듯 존재할 수 있다면, 그 별의 배치가 감각이 있다면, 그 배치가 고유하다면, 분명 그 밤하늘은 갤럭시를 대표하는 이미지가 될 것이다. 어렵지만 우수한 디자이너라면 가능할거라 생각한다. 각국의 국기에 별이 붙을 걸 보면 밤하늘을 좋아하는 국가들도 많다고 본다. 그런 점에서도 밤하늘은 좋은 퍼스트컬러가 될 수 있다고 본다.

 

밤하늘 색을 퍼스트컬러로 정하고 나면 노선도 확실하게 된다. 미래와 과학이다. 가령 스마트폰 판매금 몇퍼센트를 우주개발에 쓰인다고 홍보할 수도 있다. 연구개발을 할 때 우주관련 소재를 연구개발 한다고 하면 된다. 어차피 연구개발 하는 거에 인류의 미래를 위해서라는 추가적인 부가가치를 부여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일론 머스크가 써먹은 상당히 쓸모 있는 방식이다. 당연하다 여기는 것조차 거기에 부가가치를 넣을 수 있어야 한다. 갤럭시 영업이나 수리도 밤하늘 색을 포인트로 잡은 옷을 입거나 넥타이나 리본이나 스카프 같은 액세서리를 달면 괜찮을 것 같다. 모두가 같은 옷을 입는 건 좋지 않아 보인다. 색에 초점을 맞추면 그 색을 메인 컬러나 악센트 컬러로 쓰기만 하면 된다. 별빛을 수놓은 밤하늘이란 색은 그 자체로 존재감이 강해 개인적으로 액세서리가 어울리다 생각한다.

 

잠시 좀더 진지하게 말하겠다. 내게 있어 갤럭시는 평범한 스마트폰이었다. 갤럭시는 다른 스마트폰 브랜드와 같은 선상에 놓여 굳이 구매하지 않았다. 브랜드 자체가 부가가치를 만드는 명품 브랜드라는 이미지보다는 그냥 일반적인 브랜드라는 이미지가 있었다. 성능이나 가성비를 비교하여 적당한 스마트폰을 썼었다. 아이폰은 IOS가 불편할 것 같아서 굳이 구매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아이폰은 앞서 말한 이미지 때문에 언젠가 한번쯤은 써보고 싶다는 생각이 가끔 들었다. 이 차이가 굉장히 중요하다 말하고 싶다. 예쁜 색, 유행하는 디자인, 빅데이터로 뽑아낸 수요, 그런 것은 일시적인 판매율에 영향을 줄 수 있어도 근본적인 브랜드 성장에는 그리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빅데이터는 기존 고객의 수요에만 맞추기 때문에 과거에 머무를 수밖에 없다. 새로운 것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빅데이터에 과도한 의존을 해서는 안 된다. 그건 그냥 참고자료다.) A가 유행하여 A한 느낌으로 브랜드를 성장시키면 A의 유행이 끝날 때엔 다시 브랜드 성장을 해야 한다. 브랜드 성장이 없으면 지금 당장 잘 팔리더라도 다음에 잘 팔릴 거란 보장이 없다. 브랜드와 유행은 명확하게 분리해서 접근해야 한다. 브랜드는 줄기로 삼고 유행을 가지로 삼아야 한다. 브랜드를 성장시켜 변화가 없거나 부진하더라도 잘 팔리는 명품처럼 되어야 한다. 애초에 같은 안드로이드라고 해서 같은 선상에서 비교되게 만드는 것이 잘못되었다. 같은 천을 쓴다고 명품 브랜드랑 일반 브랜드가 같은 선상에 있지 않다. 이제 갤럭시도 독보적인 브랜드 가치를 만들어 독보적인 길을 걸어야 한다.

 

 

대상.

 

대상은 나이와 자산으로 나눠서 접근할 필요가 있다 생각한다. 모델을 단순히 성능으로 나누는 것은 명품화에 부적합하다 본다. 나이는 편의성의 차이로 소프트웨어적으로 접근하면 되므로 굳이 모델을 나눌 필요가 없고, 자산은 가치판단의 차이로 하드웨어적으로 접근하기에 모델을 나눌 필요가 있다.

 

나이부터 해보자. 갤럭시가 젊은 세대에 외면을 받는다는 그런 느낌이 있단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간단히 말해 아저씨 폰이라는 이미지가 있다는 것이다. 그것에서 벗어나기 위한 방법을 알아보자. 보통 스마트폰은 초기앱이 지나치게 많이 설치되어 있다. 갤럭시는 써본 적이 없어서 검색으로 알아봤는데 비슷한 것 같았다. 이것이 잘못된 것처럼 느껴졌다. 필요한 것이라고 이것저것 다 넣으면 안 된다. 특히 기술에 자신이 있는 이들일수록 자신의 기술을 선보이고 싶어서 이것저것 다 넣는 함정에 빠진다. 필요하다고 다 넣으면 멋이 없다. 세련되지 못하고 투박하다. 낡고 고지식해 보인다. 기성세대용으로 보인다. 또한 과도한 정보는 인간에게 피로함을 준다. 꼭 필요한 기능만 있으면 된다. 전화, 카메라, 인터넷, 앱 플랫폼, 스마트폰 설정. 스마트폰은 이것만 설치되어 있으면 된다. 구글을 생각해보자. 구글은 검색기능을 중앙에 띄어놓고 세계를 제패했다. 구글의 기술이 발전해도 그걸 유지했다. 이것이 다양한 기능이 부가가치를 만들지 않음을 증명한다. 드라마의 예도 같다. PPL을 넣는 드라마와 넣지 않는 드라마 중에서 보통 후자가 인기가 좋다. 부가기능이 없는 구글과 PPL이 없는 드라마의 공통점은 각 역할의 본질에 충실했다는 점이다. 꼭 필요한 것만 초기에 있는 것이 본질에 충실한 것처럼 보인다.

 

젊은 세대 입장에서도 필요한 앱이 있으면 그냥 플랫폼 들어가서 설치하면 되기 때문에 굳이 초기앱이 필요하다 느끼지 않는다. 과도한 초기앱은 젊은 세대에 그다지 호감으로 느껴지지 않았을 거라 본다. 내 입장에서는 필요한 앱을 설치하면서 나만의 고유한 커스터마이징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고유성을 사랑하는 이들은 이런 감각을 좋아할 것이다. 그렇다고 갑자기 초기앱을 전부 없애면 필요하던 이들은 당황할 수 있다. 그러니 멋과 편의를 둘 다 잡으려면 초기설정에서 초기앱의 설치 유무를 결정할 수 있도록 하면 된다. 나이로 구분 지을 것이 아니라 경향 별로 A, B, C 같이 나눠서 비슷한 경향의 앱 설치 루트를 안내하는 것도 좋을 것이다. 갤럭시는 스마트폰을 이용할 때 쓰는 기능을 높은 순으로 정리한 뒤, 그것에 충실히 하는 것을 어필하는 것이 좋다 생각한다.

 

이런 나이에 대한 구분은 소프트웨어로 충분히 대응할 수 있으므로 모델을 나눌 필요가 없다. 언젠가 들은 적이 있다. 기성세대도 프리미엄 폰을 바라고 있었다고. 굳이 기성세대 전용 폰을 만드는 것은 그들을 기분 좋게 만들지는 못할 거라 본다. 지금 당장 나이로 구분 짓기는 했지만 이건 보편적인 구분일 뿐이다. 실제 젊은 세대라 하더라도 초기앱이 필요할 수 있고, 기성세대라 하더라도 초기앱이 필요 없을 수 있다. 이런 나이 구분은 굳이 겉으로 표출할 필요가 없다. 안에서는 나이로 구분 짓되 밖에서는 편의성으로 구분 지으면 될 것이다. 기성세대도 젊은 감각을 느끼고 싶어하는 이들이 많을 거라 본다. 그러니 굳이 기성세대에 맞출 필요가 없다. 갤럭시가 젊은 세대에 선택 받기 위해서는 기본을 젊은 세대에 맞추고 필요한 이들을 따로 기성세대에 맞추는 방향으로 가야 할 것이다. 본질에 충실한 스마트폰으로 가되 기술발전으로 등장하는 추가기능은 언론이나 매뉴얼 등으로 홍보하는 것이 좋다 본다. 그것이 갤럭시의 명품화에도 이롭다. 절제의 미가 명품화를 도울 것이다.

 

자산으로 가보자. 모델의 구분을 단순한 성능으로 하는 것은 명품화에 부적합하다 생각한다. 간단히 접근해보겠다. 매우 예쁘지만 잘 깨지는 A, 덜 예쁘지만 튼튼한 B. 요컨대 부자는 스마트폰을 소모품으로 여기게끔 하고, 빈자는 스마트폰을 전자제품으로 여기게끔 하면 된다. 명품의 조건 중 하나가 바로 허세와 과시인데, 스마트폰은 그러기가 다소 어려운 측면이 있다. 전자제품이어서 가격차이가 극심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니 관점을 바꿔서 한쪽은 소모품, 한쪽은 전자제품으로 여기게 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이걸 대놓고 말할 수는 없으니까 밖에서는 미관의 차이로 가지만 안에서는 자산의 차이로 간다. 이렇게 내구도의 차이로 대상을 구분할 수 있다. 명품은 대놓고 명품이라 말하는 것보다 잠재의식에 영향을 끼쳐 명품으로 여기게끔 만드는 것이 좋다 본다. , 스마트폰을 소모품으로 쓰는 사람은 부자구나. 미를 명목으로 명품의 인지를 바꿀 수 있다. 그렇지 않아도 자본주의 사회, 부자는 돈을 많이 써야 하므로 이런 방식이 그렇게 나쁘지는 않다 본다. 물론 대놓고 말할 수는 없어도 말이다. 전자제품의 소모품화는 분명 환경에 영향을 줄 수 있다. 그러니 이것은 고장 난 것을 회수하여 재활용한다는 것을 공표할 필요가 있다. 최신폰일 경우 고장 난 것을 반납시 얼마를 되돌려주거나 다른 폰을 구매할 때 가격을 깎아준다는 방식으로 가면 된다.

 

스마트폰도 명품화를 하려고 했던 흔적이 보인다. 프리미엄 폰을 따로 몇 기종 비싸게 판다거나 하는 방식으로 말이다. 그런데 그 폰은 명품이기 때문에 튼튼하고 안전해야 한다는 고정관념에 빠져 있었다. 명품을 구매하는 자의 시각으로 보면 굳이 튼튼할 필요는 없다. 다시 사면 되니까. 가격 차이가 발생하기 어렵다면 구매 횟수로 차이를 벌려야 한다. 소모용으로 만든 것은 내구성, 품질, 기간 전부 짧게 제공되나 외견과 성능을 좀 더 올리면 된다. 외견은 아름답지만 잘 깨지는 소재로 쓰고, 성능은 오버클럭으로 대응한다. 무기를 한계까지 날카롭게 갈면 내구도가 저하된다. 그런 것에 대한 보편적 인식이 있기에 아름답지만 깨지기 쉽다는 인식도 이해는 어렵지 않을 거라 본다. 이런 식으로 방향을 정해두면 방식은 무궁무진할거라 본다. 그리고 스마트폰이 소모품으로 활용되기 위해서는 그에 대한 소프트웨어적 지원이 필요할 것이다. 스마트폰 정보를 인터넷에 전송해둬야 새로운 폰을 구매할 때 바로 이어서 쓸 수 있다.

 

덜 예쁘지만 튼튼한 폰은 그냥 일반 폰이라 생각하면 된다. 우주선에 쓰이는 소재를 써도 가격이 맞는다면, 쓰고 나서 그에 관련된 홍보를 하는 것도 좋을 것이다. 우주선을 타는 우주인이 사용하는 것도 홍보가 될 것이다. 컨셉과 대상을 명확하게 정해두면 방향이 결정되어 그에 관련된 추가적인 방법도 계속 떠오를 수 있을 것이다.

 

명품화는 의류 브랜드를 참고하면 좋을 거라 생각한다. 그들은 오랫동안 상품을 명품화하여 판매했다. 다른 분야와 다른 점은 재료의 가격이다. 전자업계나 자동차업계도 명품화가 된 곳이 있지만, 보통 그런 곳은 재료가 비싸다. 반면 의류업계는 상대적으로 재료가 저렴하다. 현대미술과 같이 재료의 가격이 낮아도 명품화가 되고 있는 것을 참고하는 것이 좋다. 이들은 거의 브랜드 가치만으로 명품을 유지한다. 같은 명품이라도 다 같은 방식이 아니다.

 

 

하드웨어.

 

스마트폰의 혁신은 대부분 배터리에서 좌초된다. 무게도 모양도 배터리의 한계로 인해 바꾸기가 어렵다. 소재도 효율도 지금 당장은 정해져 있다. 이 부분을 해결하지 못하면 실상 앞으로도 스마트폰은 하드웨어적 혁신이 어려울 것이다. 내가 지금 당장 아는 기술이 많지 않기에 확신할 수는 없다. 만약 다른 기술에 대한 지식이 있다면 그걸 조합하여 새로운 혁신을 떠올릴 수도 있겠지만 이걸 쓰고 있는 지금은 그것이 어렵다. 배터리 기술 발전이 계속 된다 가정하고 그 외의 것에 대해 몇 가지 떠올려보겠다.

 

배터리 문제가 해결되면 분리라는 형태로 혁신을 할 수 있다 본다. 지금 당장 이용자가 쓰는 영역을 제외하고는 전부 분리시키는 것이다. 액정과 나머지 하드웨어를 분리하여 무선으로 신호를 연결한다. 이러면 액정과 무선송수신기가 있으면 된다. 카메라는 액정 자체에 내장하는 것도 좋을 것이다. 배터리는 혁신을 통해 가볍게 하거나 다른 방식으로 충전한다. 액정은 들고 다니고 하드웨어는 가방이나 주머니에 넣는다. 하드웨어 분리가 가능하면 스마트폰의 기존 성능의 한계를 넘을 수 있다. 합치다 다음에 접다 다음에 분리하다. 분명 그건 혁신이 될 거라 생각한다. 액정을 접어서 카드처럼 들고 다녀도 문제가 없을 거라 본다. 액정 분리형 스마트폰은 화면과 컨트롤러를 분리한 것이기에 무선송수신이 가능한 컴퓨터와도 연동이 가능할 것이다.

 

배터리 혁신은 세 가지 방법이 있다고 본다. 첫째, 기존 기술의 발전. 둘째, 생체 에너지. 셋째, 무선 충전의 발전. 첫째는 그냥 기존 배터리가 발전하다 보면 언젠가 소형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인간은 언제나 한계를 넘었다. 둘째는 인간의 생체에너지를 전기에너지로 변환이 가능하다면 굳이 충전하지 않고 액정을 손에 들고 다니기만 하면 될 것이다. 지금 당장은 어려워도 언젠가는 가능할지도 모른다. 셋째는 무선 충전이 발전하면 된다. 점점 장거리 무선 충전이 가능해지는 것 같은데, 이게 가능해지면 스마트폰 배터리가 무거울 필요가 없으므로 분리가 가능해질 것이다. 사실 배터리 혁신이 가능하면 굳이 분리하지 않아도 가벼운 스마트폰이 가능해질 수 있다. 하나 굳이 분리하는 까닭은 더 얇고, 더 가벼운 방향으로 나아가다 보면 분리까지 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얇은 액정과 수신기를 더한 두께 정도의 물건을 들고 다닐 수 있으면 재미있을 것이다. 너무 얇아서 불편할 것 같았는데, 직접 통장 들고 만지작거려본 결과 그리 불편하지 않았다.

 

배터리 혁신이 되지 않는 이상 무게 측면에서 분리는 그다지 매력적이지 못하다. 그러나 배터리 문제가 해결된다면 분리는 분명 새로운 혁신이 될 거라 생각한다. 기술에 의존하는 혁신제안은 그다지 바람직하지는 않다. 당장 할 수 있는 게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방향성을 미리 정해두는 것은 나쁘지 않다 본다.

 

배터리 혁신이 되면 날다도 가능해질 거라 생각한다. 가볍기 때문에 공중에 띄우기 상대적으로 쉬울 것이기 때문이다. 드론 방식보다는 전자석 공중부양 같이 다른 방식으로 띄우는 것이 미관에 좋을 거라 생각한다.

 

그 외 생각나는 대로 써보겠다. 안경형은 스마트폰을 대체할 수 없다. 홀로그래피로 입체영상을 띄우는 건 유명하니 넘어가겠다. 홀로그래피가 가능해지면 홀로그램의 3차원을 3차원 프린터로 바로 출력할 수 있으면 재미있을 것이다. 카멜레온이나 투명 소재를 생각해봤는데 그리 매력적이지는 못하나 재미는 있을 것 같다. 공공 자전거처럼 공공 스마트폰 같은 것이 있어 개인정보가 들어있는 스마트폰 모듈만 들고 다니는 것이 떠올랐으나 그다지 쓸만할 것 같지는 않다. 형상기억합금은 이미 필요한 곳에 적용되었을 거라 생각한다. 위성통신 기능은 이미 있을 것이다. 우월감에 초점을 맞춰 통신장악을 위한 통신영역을 통해 통신방해기능을 떠올려봤으나 그건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스마트폰 병렬연결 방식이 떠올랐다. 소모임 같은 곳에서 스마트폰을 모아 하나의 어떤 영상이나 프로그램을 실행한 후 노는 것도 재미있어 보인다. 화질도 별로 좋지 않고 연결도 불안정하며 소프트웨어적으로 인터넷 연결이 될 것 같아 별 쓸모 없어 보일지 모르지만 괜찮다. 어떤 걸 합심하여 하나의 것으로 만들어보는 것만으로도 잠깐은 재미있기 때문이다. 액정 분리가 가능해진다면 자르거나 붙이는 것이 수월해질 거라 생각한다. 전기충격 기능이 떠올랐다. 스마트폰이 합치다라는 개념으로 탄생한 것이므로 거기에 전기충격 기능이 하나 더해지는 것도 괜찮을 거라 생각했다. 만약 가능하면 스마트폰 하나만 있어도 호신용으로 쓸 수 있을지도 모른다. 물론 이것은 위험해서 조심스럽다. 촉각에 초점을 맞춰보았다. 만약 스마트폰 내부에서 어떤 인간이 안정감을 느끼는 신호를 촉각을 통해 뇌로 전달할 수 있다면 스마트폰을 들고 있기만 해도 만족감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해킹을 생각해보았다. 보안에 예민해지는 만큼 블루스나핑 외의 모든 형태의 무선 재킹 방지대책은 괜찮을지도 모른다. 일부 모델은 가능하면 천문사진 촬영이 되도 재미있을 것이다. 뇌파 수신기능이 떠올랐다. 생각하는 대로 바로 메모되는 기능이 되면 좋을 것이다. 피를 넣어 유전자를 기억하게끔 할 수 있으면 완전한 소유자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하드웨어는 발상의 제약이 많다. 바 형태에 맞춰진 소프트웨어도 그렇고 딱딱해야 한다는 것도 그렇고 로봇처럼 움직이게 하는 것이 어렵다는 것도 그렇다. 좀 더 생각해보자. 있다, 없다, 크다, 작다, 넣다, 빼다, 돌리다, 던지다, 밀다, 당기다, 사다, 팔다, 빌리다, 굵다, 얇다, 쉽다, 어렵다, 가깝다, 멀다, 높다, 낮다, 서다, 앉다, 기다, 뒤집다, 늘다, 줄다, 많다, 적다, 젊다, 늙다, 빠르다, 느리다, 가볍다, 무겁다, 켠다, 끈다, 맞다, 피하다, 추다, 누르다, 말다, 만지다, 비비다, 맡다, 쏘다, 자르다, 쪼개다, 같다, 틀리다, 다르다, 만들다, 부수다, 뭉개다, 부러지다, 막다, 참다, 버티다, 조용하다, 시끄럽다, 깨다, 자다, 꾸다, 개다, 일어나다, 깨우다, 원하다, 애타다, 아프다, 다치다, 터지다, 채우다, 비우다, 푸다, 떠나다, 남다, 비치다, 튕기다, 키우다, 물다, 보다, 하다, 핥다, 흘리다, 달리다, 느끼다, 마시다, 싸다, 놀다, 빨다, 뽑다, 듣다, 담다, 쏟다, 열다, 닫다, 덥다, 피다, 파다, 재다, 세다, 갈다, 섞다, 꿰매다, 뱉다, 묶다, 꼬다, 읽는다, 적는다, 닿다, 찢다, 베다, 매다, 흔든다, 더하다, 나누다, 잠그다, 풀다, 조이다, 벌리다, 심다, 고르다, 뜨겁다, 차다, 바꾸다, 새기다, 베끼다, 낳다, 뚫다, 찾다, 잃다, 안다, 대다, 굴리다, 찌르다, 휘두르다, 붙다, 때다, 옳다, 그르다, 튀기다, 찌다, 굽다, 볶다, 말리다, 비튼다, 아끼다, 소홀하다, 맡기다, 올리다, 내리다, 따르다, 걸치다, 애쓰다, 새롭다, 낡다, 예쁘다, 더럽다, 맑다, 귀엽다, 흉하다, 홀리다, 내치다, 털다, 잡다, 놓다, 바라다, 숨기다, 넘기다, 후비다, 훔치다, 체하다, 알다, 모르다, 고맙다, 미안하다, 맞추다, 걸리다, 늘리다, 줄이다, 다루다, 친하다, 젖히다, 바르다, 떼다, 붙이다, 부드럽다, 거칠다, 말랑하다, 사납다, 비웃다, 무섭다, 싸우다, 먹다, 생각하다, 기억하다, 부르다, 귀하다, 천하다, 배고프다, 배부르다, 취하다, 뻗대다, 불다, 쏠리다, 겹치다, 데었다, 묻다, 잔다, 주다, 뺐다, 미루다, 내밀다, 오므리다, 띄우다, 떨구다, 받다, 버리다, 휘다, 펴다, 가다, 오다, 멈추다, 웃다, 울다, 화내다, 속이다, 되돌리다, 데우다, 누리다, 찍다, 모으다, 뿌리다, 식다, 얼다, 녹다, 떨다, 살다, 죽다, 싣다, 달다, 맵다, 짜다, 쓰다, 시다, 떫다, 싱겁다, 뭉치다, 흩어지다, 졸이다, 입히다, 벗기다, 좋다, 나쁘다, 젖다, 놀리다, 뛰다, 박다, 그리다, 지우다, 찐다, 뺀다, 날다, 잇다, 끊다, 스며들다, 치다, 튄다, 부푼다, 타다, 썩다, 씻다, 씌우다, 닦다, 찌른다, 끼우다, 숨쉬다, 쭈그리다 등 다각도로 생각해봤는데 확실히 어렵다.

 

말다는 액정말기, 씻다나 젖다는 방수기능, 떨다는 진동기능, 막다는 보안, 벗기다는 케이스를 주기적으로 벗겨서 깨끗한 표면을 유지하는 것, 사다와 팔다는 구매와 판매, 날다는 액정 날기, 겹치다는 액정필름, 놀다는 게임, 찾다는 GPS, 잃다는 원격잠금, 푼다는 계산기, 생각하다는 인공지능, 부르다는 음성인식, 듣다는 음성신호, 보다와 찍다는 카메라, 띄우다는 홀로그래피, 닿다는 촉각 감지, 만지다와 비비다는 지문인식, 밀다는 슬라이드폰, 맡다는 스마트폰 후각구현이나 스마트폰 냄새인지, 아프다는 터치입력 강도에 따라 통각감지, 핥다다 빨다는 스마트폰 미각구현이나 스마트폰 맛인지, 쏘다는 전기충격, 쓰다와 그리다는 필기입력. 이중에서 오감을 뇌가 인지하게 하거나 구현하는 것이 괜찮아 보인다. 감각인지 및 구현 폰이다.

 

합치다, 접다, 분리하다, 날다 그리고 느끼다. 이 감각을 느끼다가 가능해지면 확실히 합치다를 넘을 수 있다.

 

 

소프트웨어.

 

소프트웨어는 앱 플랫폼의 존재로 하드웨어 제조사에서 주력으로 갈 필요는 없는 분야다. 몇 가지 생각나는 것만 쓰겠다.

 

인공비서. 인공지능이 평소의 패턴과 질문에 대한 답변을 하는 것으로 데이터를 쌓은 뒤에, 평소와 지나치게 다른 패턴 또는 다른 답을 내놓으면 주인임을 의심한다. 평소와 다른데 A가 맞나요? 그것으로 인공지능은 단순한 알고리즘에서 인간성으로 넘어간다. 의심이야말로 지능 높은 동물인 인간의 특징 중 하나기 때문이다. 특별한 인식이 특별한 관계를 낳고, 특별한 관계가 특별한 애정으로 나아간다. 이것이 스마트폰을 특별하게 여기는 기제가 될 것이다.

 

자아에 대해 잠시 말하겠다. 인간은 유전자란 알고리즘과 내외부의 입출력을 통해 생각(연산)하고 행동하고, 그걸 통해 새로운 알고리즘을 만들고 다시 생각하고 행동하는 걸 반복하는 것으로 자아가 형성된다. 최초의 알고리즘이 의식을 담당하고 쌓인 기억이 무의식을 담당한다. 의식은 알고리즘에 연산이 있냐 없냐에 따라 생각의 유무가 달라지고, 무의식은 생각이 없이 행동하게 된다. 생각의 유무에 따라 의지가 달라진다. 의지에 따라 생각의 다양성이 달라진다. 자유주의에서는 개인의 자유의지를 중시하여 각자 다른 생각이 나타나고, 전체주의에서는 집단의 의지를 중시하여 비슷한 생각이 나타난다. 여기서 통상 내외부 입출력인 육체와 환경이 없다면 인간 수준의 자아는 형성되지 못한다. 그러나 인간처럼 인공지능이 알고리즘을 자체 생성할 수 있다면 어쩌면 비슷한 것이 나올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사물의 가상화. 요즘 메타버스나 버튜얼 유튜버가 유행하고 있는 것만큼 가상에 대한 관심은 나날이 늘어가고 있다. 그에 맞춰 어떤 사물을 카메라로 스캔하여 가상의 비슷한 물건과 매칭 후 화면에 띄울 수 있는 기능이 있다면 괜찮을 것이다. 가령 공을 스캔하면 가상의 공이 스마트폰에 뜨고, 그걸 문자나 영상 등으로 활용할 수 있으면 된다. 단순하지만 포장에 따라 느낌이 달라진다. 현실의 물건을 가상의 세계에 집어넣는다는 느낌으로 접근한다. 스마트폰이 현실과 가상을 잇는 장소가 되는 것이다. 스마트폰은 이차원전송기가 된다. 그걸로 보다 특별한 스마트폰이 된다. 스마트폰에 집어넣은 사물에 대한 상세정보지원을 하면 아동교육이나 언어교육에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위치기록. 촬영한 사진이나 영상에 위치기록이 되어 지도에 촬영한 위치가 뜨면 좋을 것 같다. 이것도 포장하면 재미있을 듯하다. 시공간을 기록하세요. 같이 말이다.

 

녹음. 법적 분쟁에 쓸 수 있도록 전문화된 녹음기능이 있으면 선호될 것이라 생각한다. 타사의 스마트폰보다 갤럭시의 녹음이 법적 증거로써 더 효력을 발휘한다면 괜찮은 경쟁력이 될 것이다. 변조할 수 없는 특별한 포맷이 있다면 가능할 것 같다. 각국의 법조계의 도움을 받는다면 좋은 결과가 나올 것이다. 이외 다양한 법적 증거에 최적화하는 것도 좋을 것이다.

 

견적. 어떤 목적에 필요한 금액을 바로 알 수 있으면 좋겠다. 예컨대 게임용 컴퓨터를 물어보면 자동으로 부품 검색을 통해 평균 가격을 더해 최소와 평균과 최대 금액이 출력된다. 특정 지역 여행을 물어보면 그에 필요한 금액이 출력된다. 구체적인 금액은 직접 조사를 해야 하겠지만, 잘 모르는 것에 대해 필요한 일반적인 금액을 알기에는 도움이 될 거라 생각한다.

 

완전삭제 또는 복구. 삭제한 파일도 복원되기에 그걸 이용해 사진을 유출하는 일이 있었다. 그런 점에서 완전삭제기능은 괜찮은 경쟁력이 될 것이다. 복구기능도 충분히 도움이 될 것이다.

 

 

이미지.

 

밤하늘에 관련된 드라마나 영화를 제작하면 좋다. 방식에 따라서는 애니메이션이나 게임도 좋다. 중요한 점은 간섭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주제만 주고 알아서 만들게 해야 한다. 아니면 밤하늘과 연관된 작품과 연계하는 것도 좋다. 방법은 아무래도 좋다. 밤하늘의 이미지를 전부 장악하겠다는 감각으로 가면 된다. 순백하면 아이폰이 떠올랐던 것처럼 밤하늘 하면 갤럭시가 떠오를 수 있도록 하면 된다. 시장의 수요 장악만이 장악이 아니다. 이미지 장악 또한 장악이다. 시장 장악은 당장의 수익을 보장할 수 있으나 이미지 장악은 오랫동안 수익을 보장할 확률이 높다. 미래나 과학 같은 것은 장악하기 어려워도 밤하늘 색 하나는 장악할 가능성이 있다 생각한다. 물론 가능하면 다 장악하는 것이 좋다. 이것은 다른 브랜드도 마찬가지인데, 체급이 큰 브랜드는 어떤 특정한 색이나 이미지를 장악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대놓고 제품을 등장시키는 PPL을 하는 것은 부적합하다 본다. 대놓고 홍보하는 것은 거부감을 준다. 어디까지나 자연스럽게 무의식에 스며들 수 있어야 한다. 갤럭시에서 밤하늘색을 자주 사용한다는 걸 사람들에게 인지시킨 다음에 다양한 곳에서 밤하늘과 브랜드를 알 수 없는 스마트폰이 이어지는 연출을 사용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갤럭시하면 밤하늘이 떠오르게 될 거라 생각한다.

 

 

역할.

 

대체할 수 없는 확고부동한 역할을 얻는 것이 좋다. 구글이 최상의 검색능력을 보유하는 것으로 검색의 역할을 얻은 것처럼 말이다. 밤하늘 이미지를 장악하면서 우주로 나아가는 과학적인 미래형 스마트폰의 역할을 얻는 것이 좋을 것이다.

 

 

유행.

 

옷의 유행 주기가 30년 정도 되듯이 경험하지 못한 과거의 유행을 젊은 세대는 신선하게 느끼게 된다. 30년전 인간이 즐기던 것을 세련되게 바꾸기만 해도 충분히 통한다. 브랜드는 줄기고 유행은 가지. 이걸 명확하게 해둬야 유행에 휘둘리지 않을 수 있다. 브랜드만 치중하면 가지가 죽고, 유행에만 치중하면 줄기가 죽는다. 유행에 따라 색이나 컨셉을 다양하게 내놓아도 브랜드는 잃지 말아야 한다. 그렇다고 유행을 아예 무시하면 시장에 외면 받을 가능성이 있다.

 

 

홍보.

 

아이폰과 라이벌이라는 것은 좋으나 유머나 위트가 없는 깎아 내림은 단순한 뒷담이나 괴롭힘에 머무를 가능성이 있으므로 조심해야 한다. 디스하고자 하면 반드시 유머나 위트를 넣어야 한다. 직접 또는 의류브랜드와 협업하여 밤하늘 넥타이나 리본이나 스카프 같은 액세사리를 만든 뒤, 그걸 갤럭시 관계자가 입게 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걸 스마트폰과 같이 파는 것도 괜찮을 것이다. 홍보에 쓰이는 만큼 이걸로 수익을 얻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을 것이다. 밤하늘이 갤럭시의 대표색상이 되면 밤하늘 액세서리를 쓰는 이들은 자발적으로 갤럭시를 홍보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게 된다. 이름이 아닌 색에 초점을 맞추면 이런 효과가 있다.

 

 

노조.

 

사실 노조랑 갤럭시는 큰 관계가 없다. 심각한 노동착취가 아닌 이상 고객의 수요에 영향을 끼칠 확률은 낮기 때문이다. 올바른 부의 분배는 거시적인 이익을 가져오는 방법이지, 미시적인 이익과는 큰 관계가 없다. 잠시 노조에 대한 의견을 내보자. 최근 노조가 임금협상에서 높은 인상금을 요구했다고 들었다. 임금협상에만 초점을 맞추자. 이건 기업이 기여도를 분석해서 적절하면 받아드리고 아니라면 거부하면 되는 문제다. 그러나 문제는 거기에 있는 게 아니다. 어째서 노조의 요구는 매번 모든 직원이 동일한 임금 인상인가? 부서별로 기여도가 다를 수 있고 사람마다 기여도가 다를 수 있다. 모든 노동자의 동등한 임금인상요구는 모든 노동자를 등에 업고 회사와 싸워 이익을 얻어보겠다는 마인드로밖에 비춰지지 않는다. 그건 사회주의적 투쟁이다.  자본주의의 협상이라면 노조와 회사가 같이 토론하여 특정 부서의 임금을 높거나 낮게 인상하거나 동결하는 방식으로 결정하는 게 타당하지 않는가? 사기진작 차원에서 전직원 포상금 같은 것이 아니라면 기여도에 따라 임금 차이가 발생해야 한다. 삼성이 처음으로 임금협상에 들어갔다고 하는데 어찌 그렇게 구식의 방식으로 임금협상을 하는지 모르겠다. 임금을 사측에서 일방적으로 결정하지 않고 노조와 협상을 통해 결정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의미가 있다. 노사관계의 임금협상이 임금체계의 토론으로 나아가면 긍정적일 거라 본다.

 

사실 이런 대기업 노동자 협상은 대기업 직종에는 의미 있는 영향을 줄 수 있으나 중소기업이나 비정규직이나 아르바이트에는 영향을 주기 어렵다. 진정 모든 경제에 속한 인구의 인권을 위한다면 분야의 대표가 입법권을 쥐고 국회에서 의견을 낼 수 있는 구조가 필요하다 강력히 주장하겠다. 대기업 노조가 모든 노동자를 대변한다는 망상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리고 이것이 훨씬 더 민주주의적이다. 지역의 대표와 분야의 대표 중 어느 쪽이 더 국민에게 가깝다고 보는가? 지역 대표는 부동산관계자를 제외하면 대부분 모르는 사람인데 분야 대표는 그나마 아는 사람일 확률이 높다. 업계가 좁을수록 그럴 확률은 높을 것이다. 분야 대표가 입법권을 쥐는 것이 훨씬 더 민주적이다. 일단 지역 대표와 분야 대표 모두 입법권을 쥐는 방향이 옳다고 주장하겠다. 이게 아니면 이 정신 나간 선동정치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선동정치는 진정한 정치가에게도 바람직하지 못하다.

 

 

다음 폰은 아마 갤럭시나 아이폰이 될 것 같다. 카메라가 툭 튀어나오지 않고 전면 카메라 숨김이 가능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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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현의 자유를 옹호한 운동가에게 노벨평화상을 수여한 노벨위원회에 찬사를 보냅니다. 기자가 수상했다고 하더군요. . 생각해보면 기자가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자 주장하는 것은 굉장히 황당한 거였네요.

 

우리가 알고 있는 일반적인 상식과도 같은 도덕은 그냥 과거 종교가 만든 것이지 진리가 아닙니다. 그 도덕은 어떤 과학적 증명도 되지 않았어요. 그냥 그 당시 필요한 규칙일 뿐입니다. 과거에 필요했던 규칙 모든 것이 현재까지 필요하지는 않습니다. 이 기초를 인식하지 못하면 이 기초를 기반으로 한 인간의 행동원리로부터 나타나는 현상을 제대로 해석할 수 없습니다. 잘못된 결과가 나와버려요. 어떤 옳거나 그르다는 감각을 다시 한번 생각해야 합니다. 미신이나 토속신앙부터 오래된 종교나 사이비 종교까지 전부 비과학적인 것은 거의 다 거짓일 것입니다. 전능을 주장하는 이들이 전지를 증명하지 못하는 이상 거짓일수밖에 없습니다. 조심하세요.

 

솔직히 한국은 문제점이 많죠. 내가 봐도 미래가 불투명합니다. 인간의 능력으로 성장한 국가가 출산율이 저하하고 경제 양극화로 경쟁력도 악화하고 주입식 문제풀이로 문제해결능력도 저하해서 뭐 지금 이대로 가면 무너지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죠. 종교, 민족주의, 보수주의, 사회주의, PC주의, 여성주의, 자유방임주의, 금전만능주의 같은 걸로는 상황이 더 악화될 뿐입니다. 바른 길을 안내할 수 있는 사상이 있어야 한국이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대부분의 학생이 기본적으로 자본가 루트를 타고, 경쟁을 통해 세계시장에 통할만한 자본가를 양성하는 구조가 필요하다 봅니다. 지금 경쟁을 통해 대기업에 입사하거나 고시를 보는 것처럼 경쟁을 통해 자본가로 성공하는 길을 일반적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겁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이게 정상이 아니었나 싶어요. 능력의 상품화와 사물의 상품화 능력을 모두 갖추면 자본가 루트가 아니더라도 자본가 마인드로 기업에 협력하여 성장을 돕고 거기에 부가가치를 받은 후 자본이 모이면 사업을 시작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그러다 보면 기업유연화가 나타나 상품경쟁력이 높아져 노동자를 착취하지 않아도 되는 우수한 기업들이 늘어나겠죠. 세계시장에 선택되는, 세계에 사랑 받는 한국이 되길 바랍니다.

 

정치를 보면 참. 슬프네요. 사상이나 이념이 아닌 부당한 사리사욕 유무가 검증기준이라는 것이 절망적일 정도네요. 빨리 선동정치가 끝나야 될 것 같아요. 다시 한번 분야의 대표가 입법권을 쥐어야 한다 주장하겠습니다.

 

내게 있어 자유주의는 자유의지입니다. 자유의지가 없는 민주주의는 존재할 수 없지요. 민주주의가 사회를 구성하기에 집단적이라 착각할 수 있는데 개인의 의사를 반영하는 이상, 민주주의는 자유주의와 멀어질 수 없는 관계입니다.

 

자본이 있었다면 또는 고등학생이나 대학생이었다면 지역 영상 플랫폼 같은 걸로 창업 시도를 해봤을 텐데 아쉽군요. 개인적으로 지역 영상 플랫폼이 나와 한 화면에 주변 정보를 쉽게 접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꽤 오래 살아도 주변에 뭐가 있는지 제대로 아는 사람이 많지 않잖아요. 대체로 가던 길만 가기 때문에 그 길을 벗어난 구역은 잘 모르죠. 유튜브가 한 화면에 취향 관련된 것이 주르륵 나오는 것처럼 지역에 관련된 것이 주르륵 나와서 필요한 서비스를 편하게 받을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한국사회는 문제해결이 아닌 문제풀이를 중시해서 시험을 잘 보면 능력이 높고 못 보면 낮다고 생각하죠. 그래서 문제해결능력이 있어도 문제풀이능력이 낮으면 아무래도 선호되기가 쉽지 않네요.

 

생계가 해결될 때까지는 업로드 속도가 저하될 것 같네요. 업로드 시기는 모르겠는데 다음 글은 문제해결능력 또는 역할주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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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한국 페미니즘 현상 해석 (9) 2021/10/01 AM 07:32

한국 페미니즘 현상 해석

 

 

 

한국 페미니즘은 여성열등주의다. 일반적인 관점이 아니므로 여성주의(페미니즘) 찬반과 별개로 선입견 없이 바라보길 바라겠다. 페미니즘을 성평등주의로 착각하는 사람이 있어 알기 쉽게 여성주의로 부르도록 하겠다. 한국 여성주의는 조선의 종교였던 유교와 서양에서 시작된 여성주의의 결합으로 여성열등주의가 되었다. 유교부터 알아보자. 유교는 여성을 열등하게 만들었다. 여성을 남성의 아랫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여성의 의지를 약화하여 사회진출을 방해하고, 여성에게 정조관념을 주입하여 정조를 지키게 했다. 유교는 여성열등주의다. 여성주의를 알아보자. 여성주의는 여성의 주관적인 이익을 여성인권이라 부르고 주관적인 손해를 여성차별이나 혐오라 불렀다. 이 주관적이라는 게 상당히 황당하다. 여성주의 자체에 객관적인 기준이 없다. 자유주의적 여성주의나 사회주의적 여성주의 같이 다른 사상에서 여성이 이익을 보면 여성인권이라 말하고 손해를 보면 여성차별이라 말했다. 이러니 여성주의자마다 군복무에 대한 시각 차이가 발생하는 것이다. 어떤 여성이 주관적으로 남성을 혐오하는 것이 이익이면 남성혐오가 여성인권이 되고 그걸 막는 것이 여성차별이나 혐오가 된다. 어째서 여성주의자가 남성혐오를 옹호하는지 알겠는가? 주관적이기 때문이다. 여성주의는 주관적인 손익으로 인권이 결정된다. , 유교의 여성열등주의와 여성주의의 여성인권을 합쳐보자. 유교에 세뇌된 여성은 여성이 열등하다라는 주관적인 인식을 만족시키는 걸 이익으로 여기기에 그걸 여성인권이라 말하여 여성을 열등하게 세뇌한 뒤에, 여성의 주관적인 이익을 위해 열등함에 대한 배려를 사회에 강요하게 된다. 이 강요를 사회는 수용하였다. 왜냐하면 이 여성주의가 주장하는 여성의 의지 약화와 성적 수치심 강화는 기성세대의 입맛에 딱 맞았기 때문이다. 남성이 여성을 이용하기 위해 여성을 약화한 걸 여성이 여성인권이라 주장하는 걸 본다고 생각해보자. 얼마나 흐뭇하겠는가? 세뇌된 노예가 자발적으로 주인의 가르침을 인권이라 주장하는 꼴을 본 거나 다름이 없다. 끔찍하다. 이런 이유로 여성주의는 사회에 쉽게 흡수되었다. 여성주의자와 기성세대가 여성은 열등하다라는 시각을 공유한 상태에서, 여성주의자는 여성이 열등하니 배려해달라 강요했다. 여성은 열등하다라는 시각을 갖고 있는 이들은 배려하는 것에 동의했고, 여성은 열등하지 않다는 시각을 갖고 있는 이들은 그 배려에 동의하지 못했다. 한국은 세대별로 유교의 세뇌 농도가 조금씩 차이가 나는데, 그 차이가 여성에 대한 시각 차이를 나타낸다. 성별 평등으로 자라난 세대의 남성과 일부 여성은 여성을 열등하다 여기지 않기 때문에 그 열등함에 대한 배려를 받아드릴 수 없었다. 일부 여성이 장애인 혜택과 같은 열등함에 대한 배려로 받는 혜택을 여성의 이익으로 여겨 그 배려를 여성인권이라 말하게 되었다. 여성을 열등하게 여기지 않았던 남성은 그 배려를 이해하지 못해 여성우월주의로 이익을 얻는 것이라 착각하였다. 그에 따라 그 남성은 여성우월주의 반대라며 반발하였다. 그 반발을 보고 일부 여성은 이런 장애인 혜택과도 같은 배려야말로 여성을 우월하게 하는 것으로 인식하게 되어 더욱 더 여성을 열등하게 만든 다음 혜택 받길 바라게 되었다. 여성에 대한 과잉혜택은 이런 과정에서 나타났다. 한국인의 성적 억압은 여성의 정조관념으로 나타났다. 정조관념을 주입 받아 성적 수치심이 강해진 여성은 성관계를 터부시하고 성적 문화나 창작물도 검열하게 되었다. 창작물에 등장하는 여성의 정조조차 지켜야 한다고 굳게 믿고 있었기 때문에 이런 몰상식한 짓을 저질렀던 것이다. 마호메트를 신성시하라는 세뇌를 당한 이슬람이 창작물에서 등장하는 마호메트 묘사에 몹시 불편해 하는 것과 같다. 남성 성 상품화는 무시하고 여성 성 상품화에만 예민했던 것은 여성의 정조를 지키게끔 세뇌되었기 때문이다. 여성은 여성대로 여성의 정조를 지키게끔 세뇌되어 강하게 세뇌된 여성은 남성과 관계를 맺기를 꺼려하며 남성의 동성애를 즐기며 이성애의 욕구를 해소했다. 남성의 동성애를 즐기는 여성 수가 늘어나며 그에 따라 남성과 관계를 맺는 여성 수가 줄어들었다. 국가의 이성애가 결핍되었다. 1인 가구 증가가 이를 증명한다. 이런 건 본인이나 타인의 경험으로 볼 게 아니라 통계적으로 접근해야 한다. 많은 여성이 정조를 굳게 지키며 살다가 정말 잘생긴 남성과만 관계를 맺자, 그 여성과 관계를 맺어야 할 다수의 남성이 성적 욕구를 충족할 수 없었다. 여성과 성적 관계를 통한 욕구를 충족 못한 남성은 포르노나 성매매도 금지 당해 이걸 막는 이들에 대한 불만이 고조되고 있다. 여성은 여성대로 열등하게 세뇌 당해 장애인이 겪는 불편함을 겪으며 살아가고 있다. 매일 같이 여성이 불행하다라고 세뇌 당하면 어떤 여성은 실제와 관계 없이 주관적으로 불행하다 여기게 된다. 그 불행함을 남성에게 쏟아내며 더욱더 성별 갈등이 심화되고 있다. 일단 여기까지가 간단히 알아본 현재 한국 여성주의가 만든 사회현상이다.

 

여성이 주장하는 여성인권이 유교의 여성열등주의라면 지금까지 주장하던 여성인권은 대부분 헛것이 된다. 그에 따라 반론을 하고 싶어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묻겠다. 여성주의자는 유교의 세뇌에서 완전하게 벗어났다 말할 수 있는가? 대표적인 유교의 세뇌가 바로 연령차별이다. 장유유서를 통해 연상과 연하는 차별 되었다. 장유유서에 세뇌된 인간은 연하의 반말을 들으면 몹시 불편해진다. 건방지고 예의가 없어 보인다. 심지어 창작물에서 연하가 연상에게 반말하는 걸 보는 것도 불편해진다. (이는 여성주의자가 성적 창작물을 불편해 하는 것과 동일하다.) 이 세뇌에서 벗어났다 할 수 있는가? 특정 개인이 벗어났다 해도 다른 이들이 벗어났다 단언할 수 있는가? 아마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연하의 반말에 불편해하는 게 인간의 선천적인 성질인가? 결코 아니다. 오로지 유교의 세뇌로 만들어진 감각이다. 해외의 사례를 보면 안다. 이와 마찬가지로 여성은 의지가 약하고(여자는 이렇게 한단 말입니다!) 성적 수치심(성 과민이나 창작물에 대한 과도한 불편함)이 강하다는 감각이 있는 것과 함께 여성에게 강한 의지나 수치심이 적길 바라는 것을 불편해하는 것은 오로지 유교의 세뇌 때문이다. 원시 부족 여성이 의지가 약하거나 성적 수치심이 강한 걸 본 적이 있는가? 이런 건 철저하게 남성의 의도로 만들어진 감각이다. 대다수 한국인이 연하의 반말에 불편해하는 시점에서 그들이 유교에 세뇌되어있다는 것과, 여성주의자가 유교에 세뇌되어 여성열등주의를 여성인권이라 주장했다는 논리에 대한 반론은 불가능하다. 연령차별에서 벗어나지도 못한 인간이 여성열등주의에서 벗어날 수 있을 리가 없지 않나. 그럼 한국 여성주의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알아보도록 하자.

 

 

한국 여성주의로 발생하는 성별 갈등 현상에 대해 알아보자. 한국 여성주의로 발생하는 성별 갈등은 크게 두 가지가 있는데 첫째는 여성특혜고 둘째는 여성 성 과민이다.

 

첫째, 여성특혜

 

여성가족부, 여성할당제, 여성가산점, 여성창업지원, 여성대학존재, 여성징병의무 없음, 여성폭력방지법, 성매매여성 지원, 여성전용주거, 여성주차장 등 여성 전용 서비스는 전부 여성열등주의를 근거로 한다. 보자, 장애인가족부, 장애인할당제, 장애인가산점, 장애인창업지원, 장애인대학, 장애인징병의무 없음, 장애인폭력방지법, 성매매장애인여성 지원, 장애인전용주거, 장애인주차장 등 여성에 장애인을 넣으면 일부를 제외하고 대부분 합리적으로 보이게 된다. 지금 일부 여성은 장애인 혜택 받으면서 좋다고 하고 있는 것이다. 국가에 있는 인간 절반을 장애인으로 만들어버렸으니 사회가 제대로 돌아갈 리가 없다. 이걸 많은 사람들이 파악하지 못했던 것은 여성을 열등하게 여긴 이들은 당연하니까 굳이 반론하지 않았기 때문이고 여성을 열등하게 여기지 않았던 이들은 열등하지 않은데도 혜택을 받으니 장애인을 떠올리지 못했던 것 때문으로 보인다.

 

자발적으로 성매매한 여성에 대한 지원금 지급은 보통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여성을 장애인으로 바꿔서 해보자. 자발적으로 성매매한 지적 장애인 여성에게 지원금을 지급했다. 이건 상대적으로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그들에게 있어 여성은 장애인 수준으로 열등하기 때문에 이런 지원은 당연한 것이다.

 

성인지감수성은 간단히 말해 약자인 여성의 진술이나 증언 또는 증거를 더 중요시해야 한다는 황당한 논리를 일컫는다. 대놓고 말하고 있다. 여성은 열등하니까 거기에 맞춰야 한다고. 가령 장애인 같은 경우에는 진술이나 증언 또는 증거에 보다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걸 여성에도 해야 한다는 게 성인지감수성이다. 여성주의는 여성의 주관적인 이익을 여성인권이라 말하고 주관적인 손해를 여성차별이나 혐오라 말하는 사상이다. 설령 법치주의를 훼손하더라도 여성의 이익이 되면 여성인권이라 주장하기 때문에 이런 황당한 일을 옳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이 용어는 해외에서 시작했는데 그 때에는 법과 큰 관련이 없었다고 한다. 한국 여성주의는 그걸 억지로 법과 연결 지어 여성의 열등함에 맞춰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여성징병의무가 없는 것은 간단한 논지로 여성은 남성에 비해 약하기 때문에 징병하지 않는다고 한다. 기본적으로 여성을 열등하게 여기기 때문이 이런 논리가 나온다. 최근 여성징병에 대한 찬반조사 결과 40대 이상의 남성만 여성징병에 반대하는 비율이 높았다고 한다. 유교에 세뇌된 농도가 높을수록 이에 대한 반대가 심해진다. 여성주의가 주관적인 여성의 이익을 여성인권이라 주장하는 사상이기 때문에 여성을 열등하게 여기는 곳일수록 여성징병에 회의적이다. 여성주의자라고 하더라도 여성을 열등하게 여기지 않으면 여성징병에 찬성하게 되어 있다. 최근 선진국에서 여성징병에 대한 논의를 한 것을 보면 대부분 여성징병에 찬성하는 입장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여성을 열등하게 여기지 않기 때문이다.

 

남녀의 가족폭력 비율을 보고 여성이 여성이기 때문에 폭력피해를 입는다는 착각을 할 수 있다. 하나 그렇지 않다. 성인 남성과 성인 여성 사이에서 발생하는 폭력은 남성이 비율이 높지만 성인 남녀와 아동 사이에서 발생하는 폭력은 남녀 비율이 비슷하다. 남성이 폭력적이고 여성이 비폭력적인 것이 아니라, 그냥 단순히 힘의 차이로 인해 비율이 달라지는 것뿐이다. 만약 여성이 힘이 더 쌨다면 남성이 폭력피해를 받는 비율이 높았을 거라 확신할 수 있다. 이걸 무시하고 여성폭력방지법을 추진한 것은 정말 어리석기 짝이 없는 행동이다. 가족폭력방지법이 차라리 낫다.

 

 

둘째, 여성 성 과민

 

여성 성 과민은 크게 두 종류가 있다. 유교의 정조관념에 세뇌 당한 여성과 그 여성에게 정조관념은 여성인권이라 세뇌 당한 여성이다. 정조관념은 남성이 여성을 성적 소유물화하기 위해 만든 악의적인 관념이다. 의도적으로 여성에게 성적 수치심을 강하게 주입하여 다른 남성에게 쉽게 몸을 허락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결혼 전에는 관계조차 못하게 만들었으며 결혼 후에 과부가 되더라도 재가를 못하게 만들었다. 여성에게 성적 주도권을 앗아간 무거운 족쇄다. 그런데 이걸 유교적 여성주의자들은 옳다고 여겼다. 결혼 전 미성년 여성은 정조를 지켜야 하므로 최대한 야한 것을 접하지 못하게 하고, 성년 여성조차 야한 옷을 입는 것을 막았다. 유교적 여성주의자에게 세뇌된 새로운 여성주의자들도 그걸 잘못되었다고 말하며 치마를 입는 여성에게 득달적으로 다가가 잘못되었다고 비난공세를 펼쳤던 것이다. 자유의지에 따라 성적 매력을 발산하는 이들에게 여성 성적 대상화라던가 성적 착취라는 말은 말도 안 되는 헛소리다. 왜 인간이 인간에게 성적 매력을 느끼는 걸 잘못되었다 말하고 있나! 남성 성적 대상화나 여성 성적 대상화는 인간으로서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성적 대상화를 하지 않으면 되려 이상하다. 이성이 서로의 성적 매력에 이끌려야 사랑하고 출산하고 그럴 거 아닌가. 남성이나 여성의 신체 일부를 성적 대상화하였다고 해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과거와 달리 평등해진 지금은 그저 서로의 매력을 사랑하는 다른 행태일 뿐이다. 이제 여성은 남성의 성적 노리개라는 낡은 시각에서 벗어날 때가 됐다. 대등하다면 성적 대상화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리고 어째서 여성의 인권을 운운하는 이들이 여성이 성적 주도권을 잡는 것을 부정하는가? 여성도 성적 주도권을 쥐고 자유롭게 야한 옷을 입을 수 있다. 이걸 잘못되었다 말하는 건 그냥 세뇌되었기 때문에 그렇다. 세뇌되어 불편한 감각이 발생하여 그 불편함을 해소하기 위해 성적 매력을 발산하는 이들을 공격했던 것이다. 애초에 인간은 자신의 감각을 명확하게 알지 못한다. 흔들다리 효과가 대표적이다. 흔들리는 다리에서 느끼는 감정이 공포인지 사랑인지도 분간 못해서 이성에 대한 호감도가 더 높아진다고 한다. 정조관념에 세뇌되어 불편해진 감각을 성적 대상화니 뭐니 말하며 가져다 붙인 것이 여성 성 과민의 본질이다. 이런 세뇌를 당한 여성은 성에 몹시 취약해져 남성 구조원이나 경찰관의 접촉에도 과민반응을 보이게 된다. 아니 구조하는 것에도 과민반응을 보일 정도로 취약하게 만들면 어떻게 하나. 그게 정상인의 삶이라 할 수 있는가? 멀쩡한 여성을 장애인으로 만든 다음 배려하라고 강요하면 어떻게 하나. 그 사람은 평생 그 짐을 짊어지고 살아가야 하겠지. 어쩌자고 이런 짓을 했나. 남성은 여성 알몸 본다고 불편해 하지 않는다. 여성이 불편해할까 봐 걱정하는 거지 직접 보는 것 자체는 보통 불편해하지 않는다. 그러나 여성은 남성 알몸을 보면 불편해하는 사람이 많다. 이 차이가 잘못되었음을 모르는가? 본다는 행위에 육체적인 체력의 차이가 발생하는가? 아니지 않나. 이건 오로지 의지와 지성의 영역이다. 세뇌 당하지 않았다면 남녀 모두 인간의 알몸을 본다고 불편해할 이유가 없다.

 

성 과민이 이성적이었다면 남성 성 상품화와 여성 성 상품화에 대한 시각 차이가 발생할 수가 없다. 여성 성 상품화만 불편해하는 것은 남성의 정조가 아닌 여성의 정조를 지키게끔 세뇌되었기 때문이다. 여성 성 상품화만 불편해한다는 점에서 정조관념이 불편함의 근원이라는 점은 명확해진다. 서양에서도 여성 성 상품화를 불편해한다고 반론할 수 있다. 그야 당연하다. 서양에서도 여성은 성적으로 억압받아 정조관념을 강요당했기 때문이다. 기독교가 얼마나 여성의 혼전순결을 강조했던가? 이성으로 만든 주장이 아니라 감성으로 불편해진 감각에 이유를 갖다 붙였던 것에 불과하다. 여기서 코미디가 발생한다. 실제 여성의 정조뿐만이 아니라 창작물에 등장하는 가상 여성의 정조까지 지키려는 움직임이 나타난 것이다. 창작물에 나오는 여성이 야한 옷을 입고 있거나 노출이 되면 검열을 통해 가린다. 이것이 보통 2D인권부여라고 하는데, 2D남성에 대한 인권은 부여하지 않았으므로 2D여성인권부여라고 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어째서 창작물에 등장하는 남성의 노출은 괜찮은데 여성의 노출은 안 되는가? 그야 앞서 말했던 것처럼 여성의 정조를 지키게끔 세뇌 당했기 때문이다. 이런 창작물에 대한 불편함의 노출은 연하의 반말을 불편해하는 것이나 마호메트 세부묘사에 불편해하는 것이나 같은 원리다. 공통점은 세뇌되어 창작물에서조차 불편한 감각을 느낀다는 것이다. 어떤 이는 조선의 춘화를 보고 조선시대보다 한국이 더 성적으로 억압받고 있다고 말하며 유교의 탓이 아니라고 할 때가 있다. 이건 여성의 인권에 초점을 맞추면 해석이 된다. 과거 조선은 여성의 인권이 낮았다. 발언권도 별로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여성의 나체를 묘사한 춘화가 있더라도 과연 불편하다 말할 수 있었겠는가? 반면 한국은 여성의 인권이 높다. 발언권이 많다. 그런 상황이니까 정조관념에 세뇌되어 나타나는 불편함을 대놓고 호소하며 마구잡이로 야한 것을 검열했던 것이다. 거기에 여성주의의 본질이 더해진다. 여성주의는 주관적인 손해를 여성차별이나 혐오라 말하는 사상이다. 주관적으로 불편한 것이 그들에게 차별과 혐오였기에 여성차별과 혐오를 막기 위해 창작물 검열에 힘을 쓴 것이다. 여성을 억압하던 정조관념에 세뇌되어 창작물까지 간섭하며 검열하는 모습. 이 얼마나 웃기는 꼴인가. 자유주의 국가에서는 표현의 자유가 최대한 허용되어야 한다. 되도 않는 검열은 자유와 여성의 가치를 훼손하는 중대한 실수다.

 

이제는 남녀 상관없이 인간이라면 자기 몸의 기능을 명확하게 알고 그 기능을 사용할 줄 알아야 한다. 얼마나 여성의 정조를 중시했으면 지금 성인들도 성교육 지식이 낮다 하나? 아직도 청소년들 대상으로 성교육을 하면 학부모가 반발하는 일이 빈번하다고 한다. 이게 도대체. 얼마나 많은 사람이 유교의 정조관념에 세뇌되어 있는 건가. 이러니까 터무니 없는 창작물 검열을 사회가 받아드리고 있는 것이다. 한국에서만 야한 그림을 까맣게 검열하는 걸 보면 속이 터진다. 이외 실제 여성인권과 거리가 먼 용어나 형태 따위에 집착하는 것도 세뇌의 결과물이다. 그게 여성인권이라 세뇌 당했기 때문에 용어나 형태에 이성적으로 접근하는 게 아니라 감성적으로 불편하다고 접근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지성이 부족해 보이는 결과가 나오게 된다.

 

 

사법부는 입법부가 제정한 법률 내에서 판결을 내리기 때문에 잘못된 법에 대한 판결에 대한 책임을 입법부에 전가할 수 있다고 본다. 그런데 그러면 사법부의 존재가치를 잃게 되어버리는 게 아닐까 싶다. 삼권분립이라는 말이 있듯이 입법부가 잘못된 법률을 제정하면 그에 대한 견제작용이 필요하다 주장하겠다. 성별에 차등을 둬서 판결하는 것은 부당하다 주장하겠다. 그것은 여성을 열등하게 보는 시각 때문에 나타난 것이다. 피해자가 없는 창작물에 대한 처벌은 부당하다 주장하겠다. 그것은 자유주의적 시각에서 악법이다. 자유주의 국가에서는 같은 인간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한 최대한의 자유를 보장해야 한다. 그 누가 되었건 강요가 없는 자유의지를 최대한 존중해야 한다. 한국이 자유주의 국가인지, 유교 국가인지, 여성주의 국가인지 분명하게 기준을 정해 판결을 내려주길 간곡히 바란다.

 

 

 

유교의 여성열등주의에 대해 알아보자.

 

종교의 본질은 인류열등주의다. 유교는 상명하복 사상으로 윗사람은 우월하고 아랫사람은 열등하다 가르쳤다. 윗사람은 조상과 연상이 있고 아랫사람은 연하와 여성과 아동이 있다. 신분으로는 양반과 중인과 상민과 천민으로 나뉜다. 조선은 유교를 통해 상명하복을 도덕으로 만들어 열등한 아랫사람은 우월한 윗사람에 복종해야 한다는 것으로 지배체계를 유지했다. 이 사상이야말로 동북아에 민주주의를 정착하기 어렵게 만드는 주 원인이다. 상명하복과 민주주의는 수직과 수평으로 전혀 다른 사상이기 때문이다. 기독교나 불교도 마찬가지다. 열등한 인간은 우월한 신에게 복종해야 한다고 가르치며 지배체계를 유지했다. 차이점은 기독교는 외향적이나 불교는 내향적이라는 점이다. 기독교는 해외를 떠돌며 선교하러 다니고 불교는 산에 들어가 수행을 쌓는다. 뭐 그거 말고는 본질적으로는 인간이 열등하단 시각에는 차이가 없다. 있지도 않은 원죄를 주장하며 인간이 열등하다 말하는 거나, 인간의 선천적인 육식성이나 폭력성을 죄로 말하는 거나 인간을 열등하게 여기는 것은 똑같다. 가스라이팅이라는 용어가 유행하고 있는 것 같은데, 본래 종교가 그 원조다. 괜히 새로운 용어 써가며 새로운 것마냥 대하지 말고 그냥 종교식 세뇌라 말하면 된다. 자유주의 국가에서 종교에 세뇌되지 않도록 온전한 자아를 갖추게 도와야 할 것이다. 그러면 세뇌 따위에 휘둘리지 않을 수 있고, 그걸 당할 우려로 과민반응 하지 않아도 된다.

 

이와 같이 인간은 열등하게 만들면 이용하기가 쉽다. 여성도 같다. 남성이 여성을 이용하기 위해 여성을 열등하게 만들었다. 의지를 약하게 하여 사회진출을 막고 성적 수치심을 강화하여 정조를 지키게 했다. 독재자가 국민을 어리석게 만들어 쉽게 이용하는 것처럼, 부모나 교사가 아동을 어리석게 만들어 쉽게 세뇌하는 것처럼, 남성이 여성을 어리석게 만들어 쉽게 다뤘던 것이다. 그거에 세뇌되어 열등한 걸 여성의 선천적인 성질로 착각한 여성주의자들이 있다는 게 참 한국의 비극이 아닐 수가 없다.

 

체력이나 근력은 남성이 여성보다 보편적으로 강한 편이다. 그러나 인간의 우열은 체력이나 근력에 있는 게 아니다. 의지와 지성에 있다. 힘만 따지면 동물보다 연약한 인간이 우열의 기준을 힘으로 하는 게 정상일 리가 없지 않나. 의지와 지성은 성별로 우열이 나눠지지 않는다. 남녀가 모두 동등한 의지와 지성을 가지고 있다는 가정하에 여성에 대한 과잉혜택은 여성을 열등하게 여기는 처사가 된다. 여성은 열등하지 않다.

 

 

여성주의의 본질에 대해 알아보자.

 

여성주의는 여성의 주관적인 이익을 여성인권이라 말하고 주관적인 손해를 여성차별이나 혐오라 말하는 사상이다. 명확하게 제시하는 이상 따위가 없다. 그냥 주관적으로 이익이면 옳고 손해면 그르다고 주장한다. 이러니까 자유주의적 여성주의나 사회주의적 여성주의 따위가 있는 것이다. 이게 얼마나 황당한 것인가 하면 여성주의를 남성주의로 바꿔보면 안다. 남성주의를 남성의 주관적인 이익을 남성인권이라 말하고 주관적인 손해를 남성차별이나 혐오라 말하는 사상이라 가정해보자. 미국 남성의 손익과 이슬람 남성의 손익은 다를 것이다. 미국 남성은 보통 여성에게 옷차림이나 성적 억압을 하는 것이 주관적인 이익이 아닐 것이다. 하나 이슬람 남성은 여성에게 옷차림이나 성적 억압을 하는 것이 이익이다. 이때 남성의 주관적인 손익으로 남성인권이 결정되기 때문에, 이슬람 남성이 여성에게 정해진 옷차림이나 성적 억압을 하는 것이 이슬람에서는 남성인권이 되고, 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차별이나 혐오가 된다. 이게 얼마나 황당한 사상인지 알겠는가? 이슬람적 남성주의자는 여성에게 정해진 옷차림과 성적 억압을 하는 것이 남성인권이라 주장한다. 그게 잘못되었다고 지적하면 남성차별이나 혐오라고 말하며 화를 낸다. 이것이 바로 유교적 또는 기독교적 여성주의자가 여성에게 정해진 옷차림과 성적 억압을 하는 것이 여성인권이라 주장하는 것과 동일하다. 그게 잘못되었다고 지적하면 여성차별이나 혐오라 말하며 화를 내는 것도 같다. 정말 천박한 사상이 아닐 수가 없다. 만약 이슬람에 여성인권이 올라 여성주의가 퍼지면 나중에 이런 말이 나올 수도 있다. 히잡은 여성인권이라고요! 실제 한국이 그러고 있지 않나. 꾸미지 않는 게 여성 인권이라고요! 그러면서 아나운서한테 치마 입지 말라고 강요하고 있다. 코미디가 따로 없다. 여성주의자가 맨스플레인이나 유리천장이나 기울어진 운동장 따위를 주장하고 있다는 걸 안다. 그걸 바꾸고 싶다면 여성이 노력을 해서 바꿔야 하는데, 여성주의가 여성의 주관적인 이익을 여성인권이라 말하고 주관적인 손해를 여성차별이나 혐오라 말하는 사상이기 때문에, 노력을 하라고 말을 하면 차별이나 혐오라 되받아 치게 된다. 노력하지 않고 그냥 할당제나 가산점을 요구하는 게 여성주의다. 이는 비만이어서 사람에게 사랑 받기 어렵다고 말하는 이에게 다이어트를 하라 말하면 차별이나 혐오로 되받아 치는 것과 유사하다. 노력하지 않고 그저 사랑해달라 말한다.

 

이와 비슷한 사상으로는 자유방임주의나 금전만능주의가 있다. 자유방임주의는 사람의 주관적인 자유로움을 옳다 말하고 그렇지 못한 걸 그르다 말하는 사상이다. 그냥 지 감각으로 자유로우면 옳고 아니면 그르다며 화를 내는 사람이 방종한 행동을 정당화할 때 쓰는 사상이다. 정말 조잡하다. 금전만능주의는 돈으로 뭐든지 가능하면 옳다 말하고 그렇지 못한 걸 그르다 말하는 사상이다. 세상에는 다양한 힘이 있고, 패권을 무력으로 쥐고 있음에도, 독재자가 권력으로 뭐든지 하고 있음에도, 돈으로 뭐든지 할 수 있다고 말하며 돈으로 뭐든지 하는 걸 합리화할 때 쓰는 사상이다. 정말 지성이 없다. 여성주의는 여성의 주관적인 이익을 옳다 말하고 그렇지 못한 걸 그르다 말하는 사상이다. 여성 마음에 불편하면 차별과 혐오라 인식한다. 이러니 지하철에서 어떤 여성이 지 심기가 불편하다고 신고하는 사태가 발생하는 것이다. 정말 천박하다. 천박하다의 뜻은 뒤섞여서 바르지 못하다. 또는, 순수하지 못하다. 아니면 얕고 얇다. 라는 뜻이다. 이 세 사상은 지극히 조잡하고 지성이 없으며 천박하다. 이 세 사상이야말로 자유와 자본과 여성을 천박하게 만든다. 자유방임주의는 자유주의를 천박하게 만들고 금전만능주의는 자본주의를 천박하게 만들고 여성주의는 여성인권을 천박하게 만든다. 이런 사상은 자유와 자본과 여성에 하등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을 넘어 해만 되므로 부디 가지지 않길 바라겠다. 그 외에는 중우정치가 있다. 중우정치가 민주주의를 천박하게 만든다. 민주주의가 나와서 하는 말인데 개인적으로 자유민주주의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민주주의는 당연히 자유를 전제해야 하기 때문이다. 자유 없는 민주주의는 있을 수 없다.

 

남성이 여성을 이용하기 위해 여성을 열등하게 만든 것은 서양도 마찬가지였던 것 같다. 이 글을 위해 페미니즘적 첫 저서라 불리는 메리 울스턴크래프트의 여성의 권리 옹호를 읽었다. 메리는 당시 사회가 여성을 의도적으로 열등하게 만든다는 사실에 주목하며 여성도 남성과 같은 교육을 할 것을 주장했다. 당대 여성이 실수를 저지르는 까닭에 대해 여성의 본성 탓이 아니라 교육의 탓이므로 이성을 계발해야 한다 주장했다. 여성을 위해 여성이 충분한 지성과 의지를 갖춰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걸 위해 여성 또한 남성과 같이 교육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매우 합리적인 주장이다. 이 사람도 기독교의 한계를 넘지는 못했지만 당대 환경이나 교육으로 의해 여성이 열등해지고 있음을 주장한 바가 있다. 이 사람은 무의식적인 사고의 흐름이나 자아의 본질에 대해서는 알지 못해도 어렴풋이 환경이나 교육에 의해 여성이 열등해지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당황했다. 이미 비슷하게 알고 있었는데 왜 그런 천박한 여성주의를 추구하게 된 것인가? 당대 유럽이 환경이나 교육으로 인해 여성이 열등해지고 있음을 알고 있다면 한국도 마찬가지라는 걸 알아야지, 그걸 왜 놔두고 멋대로 한국적 여성주의를 추구했던 건가? 아니 그보다 왜 이 사람을 여성주의자라 불렀는가? 여성주의는 단순히 주관적인 손익으로 인권이 결정되는 사상이지 않나. 이 사람은 그냥 자유주의자다. 인간의 권리 옹호를 먼저 작성한 자유주의자다. 당대 자유주의자들이 여성에 대한 부자유스러운 인식을 가지고 있어서 그에 대한 지적을 하며 여성의 자유를 주장한 것일 뿐이지, 실제 스스로를 여성주의자라 부른 적도 없다. 여성주의의 시작은 1837년 사회주의자 샤를 푸리에가 도입했다고 한다. 이 전에는 애초에 여성주의 자체가 없었다. 이런 고상한 자유주의자에게 천박한 여성주의를 붙이지 않았으면 좋겠다. 진정한 여성의 인권을 위한다면 부디 자유주의자가 되길 바라겠다.

 

 

한국 여성의 불행에 대해 알아보자.

 

여성은 여성주의자에게 열등하게 세뇌되어 불행하다. 생각해보자. 네 주관적인 이익은 전부 옳고 주관적인 손해는 전부 그르다. 이런 식으로 교육받은 인간은 앞으로 얼마나 불행한 삶을 살겠는가? 정당한 손해에 차별이나 혐오라 느끼고 부당한 이익을 당연하게 여기게 된다. 거기에 의지약화와 성적수치심 강화까지 더해지면 세상 대부분의 것을 차별과 혐오로 느끼게 된다. 이러면 불행해질 수밖에 없지 않나. 도대체 어쩌자고 이런 짓을 저질렀나. 여성주의자는 한국 여성에게 큰 죄를 진 것이다. 남성이라던가 국가라던가 출산율이라던가 그런 거 다 집어치우고 말하겠다. 이건 여성에게 지독하게 잔인한 짓을 저지른 것이다.

 

사람이라는 건 말이다. 온전하게 자신의 의지를 드러낼 수 있어야 하고, 별 쓸데 없는 것에 불편함을 느끼지 않아도 되고, 사람의 호의나 사랑을 마음 편하게 받아드릴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이게 뭔가. 차별하지 않는다고 해도 닿지 않는다. 혐오하지 않는다고 해도 닿지 않는다. 사랑한다 말을 해도 닿지 않는다. 이미 많은 여성들이 세상이 차별과 혐오로 가득하고 사랑 받을 수 없다고 세뇌되어 그런 식으로 살아갈 수 밖에 없게 되었다. 아아, 돌아버리겠구나. 하루 종일 너는 불행하다고 세뇌 당한 사람이 행복을 느낄 리가 없지 않나. 뭐든지 감사하라나 힘든 형편을 지닌 사람보다 낫다거나 맹목적으로 사랑하라 말하는 게 아니다. 온전한 자유의지! 현명한 지성! 객관적인 시각! 통찰력! 사고력! 따위를 길러줘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래야 스스로 행복하기 위한 길을 걸을 수 있단 말이다. 그런데 지금 여성은 어떠한가? 보호를 명목으로 여성의 의지를 꺾는 일이 얼마나 많았던가? 옷차림의 자유를 막는다. 외모 꾸밈의 자유를 막는다. 인간관계의 자유를 막는다. 성관계의 자유를 막는다. 이동의 자유를 막는다. 사생활의 자유를 막는다. 여성 자유 억압이 일상이다. 본래 인간의 자유의지란 어떤 것을 하겠다는 의지를 정하고 행하면서 나온 결과에 따라 책임을 지는 것으로 성장하게 된다. 그걸 싹 다 막았으니 자유의지가 제대로 성장할 수 있을 리가 없다. , 창작물 따위 여성인권이랑 아무 관련 없지 않나, 여성 아나운서가 치마를 입거나 여성 아이돌이 야한 옷을 입었다고 여성인권이 낮아지는 게 아니지 않나, 왜 그거에 불편하도록 세뇌한 건가. 사이비종교에 세뇌된 인간이 종교에 의존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을 정도로 약해져서 불행한 것처럼 유교적 여성주의에 세뇌된 인간은 열등함에 대한 배려가 없으면 살아갈 수 없을 정도로 열등해져서 불행하다.

 

한국 남성은 한국 여성이 불행하기에 불행하다. 원래 남녀는 그런 관계다. 남성이 불행하면 여성도 불행하고 여성이 불행하면 남성도 불행하다. 남성이 여성에 비해 적은 혜택을 받는 것은 여성이 장애인 정도로 열등하게 취급 받고 있기 때문이다. 남성이 성적 욕구를 해소할 수 없는 것은 여성이 성적 억압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성별을 바꿔도 결과는 같다. 만약 남성이 성적 억압을 받았다면 여성이 성욕 해소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만약 남성이 장애인 정도로 열등하게 취급 받고 있었다면 여성이 남성보다 적은 혜택을 받았을 것이다. 한국 남성이 여성주의로 불행한 것은 철저하게 여성이 열등하게 세뇌되었기 때문이다. 남성이 행복하길 바란다면 여성이 열등함에서 벗어나길 바라야 할 것이다.

 

 

출산율 추락에 대해 알아보자.

 

출산율 추락은 이성애 결핍 따위로 인해 연애와 출산에 대한 욕구의 순위가 낮아져서 발생하는 현상이다. 본래 유교사상은 미성년 때부터 성을 터부시하여 이성애 결핍이 발생해 출산율이 낮을 수 밖에 없다. 그런데 그걸 강요로 출산율을 올려 유지했다. 집안 어른의 강요로 결혼을 하고 출산을 한다. 강요로 한 결혼은 자발적이지 못하기에 순탄한 결혼생활로 이어지지 못해 아이가 크고 나서 이혼하는 황혼이혼을 하곤 한다. 자유로운 사회가 되어 황혼이혼을 하는 비율이 점점 늘고 있다고 한다. 황혼 이혼의 사유로는 성격 차이가 1위로 압도적이었다고 한다. 당연하다. 원해서 결혼한 것도 아닌데 성격이 맞는지 아닌지 어떻게 아나. 그러다 자유로운 사회가 되었다. 결혼과 출산을 강요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럼에도 미성년에 대한 성에 대한 터부는 여전하여 다수의 미성년이 제대로 된 이성애를 배우지 못하며 자라나 결혼과 출산에 대한 욕구 순위가 낮아 결혼과 출산율이 낮아지게 되었다. , 여기서 여성주의의 본질로 돌아가보자. 여성주의는 주관적인 여성의 이익을 여성인권이라 말하는 사상이다. 그렇다면 여성주의자의 주관적인 이익이 무엇이겠는가? 성을 터부시하는 것이다. 그것이 여성인권이 되었다. 보다 더 미성년에게 성적 억압을 강요한다. 보다 더 성적 문화를 검열하고 억압한다. 유교의 성 터부시나 성적 억압에 여성주의가 더해져 심각한 수준으로 악화된 것이다. 정리해보자. 처음부터 한국은 유교로 인해 자유로울수록 출산율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그러다 최근에 급격하게 떨어진 원인은 그 유교를 올바르다 여긴 여성주의자가 중용되어 사회적 영향력을 늘려 유교의 가르침을 더욱더 강요했기 때문이다.

 

이럼에도 많은 사람들은 돈이나 부동산 따위가 원인으로 알고 있다. 어느 정도는 그것도 맞다. 그러나 결코 본질적인 원인은 아니다. 한국보다 가난한 나라, 한국보다 빈부격차가 큰 나라도 한국보다 출산율이 높다. 그거 하나면 이에 대해 반론할 수가 없다. 다수가 애정결핍된 상태라서 이해하기 어려울 수도 있는데, 보통 정말 사랑하고자 하면 환경 가리지 않고 사랑하고, 정말 아이를 낳고자 하면 환경 가리지 않고 낳는다. 생각해보자. 사랑하는 취미를 위해 무언가를 포기한 적이 있지 않는가? 취미의 욕구 순위가 높으면 다른 걸 후순위로 두는 것은 당연하지 않나. 마찬가지다. 출산율이 낮은 것은 단지 연애를 하고자 하는 욕구의 순위, 아이를 낳고자 하는 욕구의 순위가 낮기 때문이다. 어떤 욕구의 순위가 높으면 다른 걸 포기하더라도 하게 된다. 연애와 결혼과 출산의 욕구 순위를 높게 해야 출산율이 오를 수 있을 것이다. 과거와 현재, 한국과 외국, 인간의 선천적인 성질과 후천적인 성질 등 이런 것을 하나하나 다 고려해보면 인간의 저출산의 원인이 파악된다. 북한보다 출산율이 낮다는 시점에서 물질적인 원인이 아니라는 걸 깨달아야 된다. 2018년 한국이 0.98이고 북한이 1.90.

 

여기에 꾸밈노동을 죄악시하는 탈코르셋 따위가 원인의 일부로 더해진다. 꾸밈이라는 것은 다른 사람에게 사랑 받기 위해 노력하는 걸 의미한다. 그걸 죄악시하면 사람에게 사랑 받고자 노력하는 사람의 수가 줄어든다. 그러면 사랑 받을 수 있는 매력을 갖춘 사람이 줄어 서로를 사랑할 확률도 줄어든다. 강요가 없는 이상 사랑이 줄면 연애도 줄고, 연애가 줄면 결혼도 줄고, 결혼이 줄면 출산도 준다. 당연히 출산율이 떨어진다. 이 천박한 사상은 인류에 하등 도움이 되지 않는다.

 

 

꾸밈노동거부에 대해 알아보자.

 

남성이 여성에게 꾸밀 것을 강요했다는 이유로 꾸밈노동을 거부하는 이들이 있다. 좋다. 그럴 수 있다. 그런데 그러면 다른 사람에게 사랑 받지 못할 것도 각오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꾸밈이란 타인에게 사랑 받기 위한 노력을 의미한다. 사랑 받기 위해 노력하지도 않으면서 어찌 사랑 받기를 바라는가? 과거 남성이 여성에게 꾸밈을 강요했다 하여 현재 꾸밈이 불필요한 것이 아니다. 남성이 여성에게 사랑 받기 위해 노력하는 것처럼 여성도 남성에게 사랑 받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당연하다. 이런 타인이 아닌 본인을 먼저 생각하는 것은 지극히 공산주의적이다. 생산자를 먼저 생각하다 소비자에게 선택 받지 못한 공산주의처럼 본인을 먼저 생각하며 꾸미지 않다가 타인에게 선택 받지 못하고 있다. 할당제나 가산점도 이런 같은 맥락으로 접근이 된다. 경찰이 할당제를 도입하여 능력이 떨어지는 인간이 경찰 역할을 맡으면 치안 서비스가 악화되어 국민에게 외면 받는 것은 당연하다. 할당제로 들어가는 경찰을 먼저 생각했기에 치안 서비스를 받는 국민에게 외면 받는 것이다. 노력하지 않거나 능력이 떨어져서 외면 받는 것이 당연함에도 외면하지 말라 요구하고 있다. 이게 정상으로 보이는가? 할당제로 들어가는 사람 생각하다 치안 서비스를 받는 국민이 불행해지는 걸 생각지 못한다. 이러면 안 된다. 시장원리를 통한 공정한 경쟁으로 타인을 행복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경쟁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의 평등을 보장해야 한다. 그러지 않고 결과의 평등을 보장해버리면 타인이 불행해진다.

 

 

성 상품화에 대해 알아보자

 

성은 상품화되어야 한다. 그래야 그걸 소비하는 사람이 행복할 수 있다. 이건 남성 성 상품화와 여성 성 상품화 둘 다 해당된다. 특정 성이 상품화 되었다고 그 성의 인권이 낮아지는 일은 없다! 남성 성 상품화가 된다고 남성인권이 낮아진다는 생각을 가진 남성이 얼마나 있을 것 같나? 아마 거의 없을 것이다. 여성 성 상품화에 불편해하는 건 오로지 여성은 정조를 지켜야 한다는 것에 세뇌되었기 때문이다. 성욕은 가능한 자유롭게 발산할 수 있어야 한다. 그 성욕을 강요하는 것이 잘못된 것이지, 각자 자유의지로 행하는 것은 어느 때에도 올바르다. 그런 관점에서 인간의 행복을 위해 포르노와 성매매는 허용되어야 한다. 고백하겠다. 과거 유교의 세뇌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때에는 성매매에 부정적이었다. 그러나 벗어난 뒤에는 그것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기 어려웠다. 인간의 자유의지가 훨씬 중요하고 가치 있다 여겨졌기 때문이다.

 

뉴트리아 항문 봉합에 대해 아는가? 뉴트리아의 항문을 봉합한 후 풀어주면 배변이 불가능하게 되어 정신적 공황과 극심한 스트레스로 어린 새끼들을 없애 뉴트리아 멸종을 유도할 수 있다는 연구가 있다고 한다. 이와 같이 동물에게 자연스러운 욕구를 금하면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는다. 성욕이 그 정도까지는 아니어도 분명 해소불가는 스트레스를 유발하게 된다. 성 터부로 관계가 어렵고 성 상품화를 금지시켜 욕구해소를 막으면 그게 범죄로 이어지지 않을 거란 보장이 있다고 보는가? 매우 당연한 얘기를 하는 것이다. 동물이면 원래 욕구가 막히면 스트레스로 이상행동을 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이다. 인간이라고 다를 것 같은가? 성욕은 의지로 참을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의지로 뭐든지 가능하면 전국민이 채식주의를 받아드릴 수 있겠는가? 다이어트를 해야 한다고 하면 받아드릴 수 있겠는가? 그렇게 인간의 의지가 강하면 금주령을 내렸을 때 술을 마시지 않았겠지. 일시적으로 욕구를 참을 수는 있어도 그게 쌓이고 쌓이면 강한 스트레스가 된다. 그 스트레스로 이상행동을 할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그러니 가능한 인간의 욕구를 충족하여 행복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정상이다. 욕구를 인정하고 좋은 방향성으로 안내하는 것이 올바르다. 성범죄보다 성 창작물이나 성매매가 낫다. 왜 이걸 모르는가? 한국이 자유주의 국가라면 본격적으로 포르노와 성매매의 합법화에 대해 논의를 해야 할 것이다. 우리 모두 이제 유교의 세뇌에서 벗어나야 한다.

 

 

열등주의 전파에 대해 알아보자.

 

여성주의가 여성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치면서 여성의 비율이 높은 교육계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여성주의는 주관적인 여성의 이익을 여성인권이라 말하는 사상이다. 여성이 이익이라 생각하는 열등함인 약한 의지나 강한 수치심을 남성에게까지 세뇌하기 시작했다. 본래 미성년 남성은 성년 여성과 관계를 맺어도 큰 문제가 없었다. 미성년 남성에게는 성적 자기결정권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성년 여성이 성적 자기결정권이 없는 것처럼 미성년 남성에게도 성적 자기결정권이 없는 것처럼 교육하고 있다. 미성년 여성에게 주입하던 열등함을 미성년 남성에게까지 주입하고 있다는 것이다. 최근 충격 받은 일이 있다. 본래 남성은 성추행을 당하면 곧바로 반격을 하거나 신고를 하는 것으로 대응해왔다. 그런 것에 대한 자유의지가 충분했다. 그런데 최근 어떤 남성이 기숙사에서 모르는 남성에게 성추행을 당하자 반격하거나 신고하는 것이 아니라 깜짝 놀라 가까운 카페로 도망쳐 울면서 인터넷에 성추행을 당했다며 호소하였다는 글을 본 적이 있다. 이게 뭔가. 의지가 약한 남성이 잘못되었다는 게 아니다. 의지를 약하게 만든 게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여성을 열등하게 하던 여성열등주의가 여성을 열등하게 하는 것을 넘어서 남성마저도 열등하게 만들고 있었다. 돌아버리겠다. 여성이 열등하게 되었다고 남성도 열등하게 만들 것이 아니라, 여성을 열등하지 않게 해야 한다. 여성이 성추행을 당하면 바로 맞대응하고 신고할 수 있는 의지를 키워줘야지, 그러지 않고 남성의 의지를 약화하면 어떻게 하나. 억압받고 있던 여성과 억압받지 않는 남성이 있으면 여성이 남성처럼 억압 받지 않도록 하는 게 정상 아닌가. 아예 그냥 전국민 장애인화를 목적으로 하고 있는 건가? 이러면 안 된다. 강해질 수 있는 인간은 강해져야 한다. 강하지 않은 사람이 어떻게 선천적인 약자를 돌보나. 정상인을 장애인으로 만들면 정작 도움이 필요한 장애인이 도움을 받지 못한다. 약자는 자신을 돌보는 것에 벅차기 때문에 강자가 되지 않고서는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는 약자를 돌볼 수 없다. 정녕 약자를 위한다면 강해질 수 있는 인간은 강해질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자유주의나 자본주의에 맞서 사회주의나 공산주의가 옳다고 주장했던 근거에는 도덕성이 있다. 그렇다면 그 도덕성은 어디에서 온 것이겠는가? 당대 사람들이 느끼는 옳고 그름은 무엇을 근거로 하고 있었겠는가? 그야 당연히 그 당시 과거 종교의 도덕이다. 유교나 기독교나 불교 같이 말이다. 이런 과거 종교는 인류열등주의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인간은 열등하므로 우월한 종교의 가르침을 따르거나 우월한 신에게 복종해야 한다. 이 교리를 인간에게 강요하는 것으로 사회를 유지했다. 그런 식으로 본인의 자유의지보다 타인의 의지를 우선시하는 이타적인 인간이 양성되었다. 모든 자유의지는 개인에게 있어 가장 큰 이익이고, 자유의지가 아닌 행동은 개인에게 있어 이익이 아니기에, 자유의지여부에 따라 이기주의와 이타주의가 달라진다. 이런 관점에서 종교의 이익을 위해 행동하는 것은 이타적이다. 과거 종교의 도덕성에서 나타난 사회주의도 같은 형태를 띤다. 사회주의가 주장하는 올바름을 인간에게 강요하는 것으로 사회를 유지한다. 질서강요가 사회주의의 본질이다. 선천적인 인간의 자유를 중시하는 자유주의는 선천적인 인간의 성질에 맞추고, 후천적인 인간의 질서를 중시하는 사회주의는 후천적인 인간의 성질에 맞춘다. 여성주의의 경우 후자다. 주관적인 여성의 손익으로 여성인권여부를 결정하는 이 사상은 지극히 사회주의적이다. 이와 비슷하게 후천적인 인간의 성질에 맞추는 사상이 보통 채식주의나 비폭력주의나 동물보호주의 따위다. 이런 것들은 과거 종교의 사상과 다를 바가 없다. 불교가 보통 육식금지와 폭력금지와 살생금지 차원에서 원조 격에 해당할 것이다. 동물보호주의에 대해 잠시 말해보자. 인간 개인이 특정 종을 좋아하는 것은 좋다. 어떤 인간이 고양이나 개를 다른 동물보다 더 좋아할 수 있다. 원래 인간은 동물을 차별하기 때문에 그건 당연하다. 익충은 살리고 해충은 죽여왔다. 인간에게 이로운 건 우대하고 해로운 건 천대했다. 그러니 귀여운 동물만 좋아하며 보호하자 주장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그 귀여운 동물 보호를 다른 사람도 당연히 해야 할 도덕적인 것으로 만드는 것은 잘못되었다. 인간이 특정 종을 좋아하는 것은 취미의 영역이지 도덕의 영역이 아니다. 한국에서 개고기를 먹는 것은 자유의 영역이지 전통의 영역이 아니다. 개인적으로 굳이 개를 먹을 필요는 없다 보지만 자유주의 국가에서 그걸 강요하는 것은 부당하다 본다. 이와 같이 사회주의 계열의 도덕성을 주장하는 사상은 전부 과거 도덕을 근거로 하고 있다. 그러니까 극단적인 것도 도덕적이라 포장하며 활개칠 수 있는 것이다. 육식이 잘못되었다며 고기 집에서 행패를 일삼는다거나 폭력이 잘못되었다며 병역회피를 한다거나 특정 동물을 보호해야 한다며 사유지에 침범하여 음식을 놓고 도망간다거나 하는 등의 행동을 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이 도덕적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뭔가 올바른 걸 하는 것 같음에도 결과가 좋지 못하게 나오는 것은 과거 종교의 도덕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과거 종교의 도덕이기 때문에 올바른 것 같으면서 과거 종교의 도덕이기 때문에 좋지 못한 낡은 결과가 나온다. 이럼에도, 과거 종교와 그 종교에서 파생된 사상들이 도덕성을 갖춰 횡포를 부리고 있음에도, 현대 사상인 자유주의와 자본주의는 자유방임주의나 금전만능주의 같은 천박한 사상에 영향을 받아 제대로 된 도덕성을 갖추지 못해 이런 낡은 사상들에 아무런 대응도 못하고 부도덕하다며 공격받고 있었다. 말하고 싶은 것이 있다. 도대체 좌파와 우파가 왜 나오는 건가? 현대 세계 정치는 좌파와 우파의 대결이 아니라, 과거 종교의 도덕과 거기서 파생된 사회주의나 공산주의와 현대 사상인 자유주의와 자본주의의 대결이다. 여성주의는 이 대결에서 과거 종교의 도덕에 속한 일부일 뿐이다. 이제 여성은 이런 작고 천박한 사상에 묶여 있을 것이 아니라 보다 큰 사상에서 자유롭게 생각하고 행동해야 한다고 주장하겠다.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는 과거 질서강요로 회귀하겠다는 사상이므로 자유주의와 자본주의 같은 자유로운 사상이 도덕성을 갖추는 진보를 해야 비로소 사회가 진보할 수 있을 것이다. 역할주의가 그걸 도울 수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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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문제를 해결하는데 있어 자유를 억압하는 것부터 떠오르는 사람은 자유주의자가 아닙니다. 어느 정당이든 그건 달라지지 않아요. 셧다운제가 여야 가리지 않고 찬성을 통해 통과된 법이라는 걸 잊으면 안 됩니다. 대다수 한국인은 유교사상에 세뇌되었음을 잊으면 안 됩니다. 한국은 좌파나 우파로 구분할 것이 아니라 어떤 사상과 이념을 가지고 있느냐고 구분해야 합니다. 자유주의 진보, 자본주의 진보와 역할주의를 추구하는 사람이 정치를 하길 희망합니다.

 

중국은 자유의 적입니다. 그들의 사상으론 자유를 억압할 수 밖에 없어요. 중국은 한국의 적입니다. 그들의 사상으론 한국을 지배하려고 할 수밖에 없어요. 눈 앞의 이익 때문에 더 큰걸 놓쳐서는 안 됩니다. 중국과 과도하게 가까이 하는 것은 자유와 국가를 포기하는 것과 같습니다. 중국의 눈치를 보며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는 것은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겠지요.

 

유교는 중국에서 온 사상이고 내가 만든 건 한국에서 시작한 사상이 되겠죠. 뭐가 더 한국적인가요

 

변호사가 많다고 하는데 그게 정상. 시장원리에 따라 사람에게 필요로 되는 우수한 변호사는 높은 수익을 얻고 그러지 않은 변호사는 적은 수익을 얻는 게 당연한 게 아닐까 싶어요.

 

한국 교육이 노력하고 있다는 건 압니다. 교육계도 열심히 하고 있어요. 그럼에도 수준이 낮습니다. 인공지능에 비유하면 지금 교육은 알고리즘 설계가 아니라 데이터 입력 단계에 머물러 있는 수준이에요. 알아서 데이터를 수집하게 하는 게 아니라 직접 일일이 수작업으로 데이터를 입력하고 있는 거예요. 이걸 어떻게 포장해도 수준이 높다 할 수는 없어요. 참 안타깝죠. 노력한다고 좋은 결과가 나오는 건 아니니까요. 열심히 문제풀이능력 키워놨더니 상품화 능력이 떨어져서 자본으로 상품을 생산하고 판매하는 것으로 이익을 얻는 자본가가 감소하고 문제풀이능력으로 일할 수 있는 공무원에 사람이 몰리고 말았죠. 자본가 수 감소로 인한 취업자 수 감소나 공무원 쏠림 따위는 당연한 현상이었습니다. 기업의 경력자 선호도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학생은 문제풀이능력을 갖춘 반면 경력자는 기업에서 문제해결능력을 배웠기 때문에 문제해결능력을 갖췄을 확률이 높기 때문입니다. 경력자를 신입대우로 써먹기 위해서 그런 걸 희망한 기업도 있었겠지만요. 이런 현상은 그냥 그렇게 교육했으니까 그런 결과가 나온 것뿐이었습니다. 자동화 시대가 오면 올수록 자본가의 필요성은 늘어난다 봅니다. 이제 교육도 학생을 노동자가 아닌 자본가로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합니다. 노동자 착취를 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유능한 자본가가 나타나면 무능한 기업도 세대교체 될 겁니다. 그러면 중소기업에 가더라도 노동자 착취를 당하지 않게 되기 때문에 중소기업 기피도 줄어들 거라 봅니다.

 

다음 글은 구글 경쟁상대 또는 문제해결능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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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 Appraiser    친구신청

좋은글이네요 물론 읽지는 않았습니다. 설마 직접 쓰신건가요??

루리웹-4810785279    친구신청

좋은 글이네요. 물론 읽었습니다. 나름 읽을 가치가 있는 글이었습니다^-^

BeanPaul    친구신청

이번 오징어 게임 여혐 논란 일으키는거 보면, 한국 페미니즘은 진보가 아니라 보수적인 유교사상이라는걸 다시 상기시키더군요.
국내 작가들이 보수적인 지상파 규제로 부터 벗어나, 넷플릭스라는 해외 플렛폼에서 한국인만의 독창적인 표현력과 창의력을 발휘하여 세계적인 무대에서 흥행했지만, 한국 페미들은 여성혐오 범벅이라고 선동 및 불매운동. 거기다가 어떻게든 더 신빙성을 얻어보려고 노인 혐오까지 끼워맞추더군요.

숲바라기    친구신청

여가부 폐지만이 답

카림무스타파    친구신청

유교에 대한 이해가 더 필요해 보이는 글입니다.

pians    친구신청

너무 주관적이네요. 자기의 생각을 진실이라고 가정하고 논리를 진행하니
좀 읽기가 힘들더군요

예를 들면

당대 사람들이 느끼는 옳고 그름은 무엇을 근거로 하고 있었겠는가? 그야 당연히 그 당시 과거 종교의 도덕이다.
유교나 기독교나 불교 같이 말이다. 이런 과거 종교는 인류열등주의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이런거..

🌠별바다🌊    친구신청

논리적비약과 확대해석이 많은것 같습니다
너무 주관적이기도 하구요

Air Zonk    친구신청

길게 뇌피셜 사족을 붙여 놓은 흔한 안티 페미 주장.

기복왕    친구신청

3줄요약좀..
[글] 경제의 역할 (0) 2021/09/06 AM 10:12

경제의 역할

 

 

 

시대의 문제는 그 시대의 세대가 해결해야 한다. 어떤 시대에 문제가 발생하면 그 시대의 세대가 해결하고 매듭 져서 후대에 넘기는 일이 없어야 한다. 그래야 모든 시대의 세대가 과중한 문제로부터 벗어나 다소 여유롭게 행복을 추구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지금 한국은 전대가 물려준 산더미 같은 문제를 짊어져 불행하다. 몇 가지 알아보자. 노동자 착취 문제는 산업혁명 시대에 해결했어야 했다. 그걸 해결 못했기에 지금 노동자는 농노의 위치에서 배려만 받고 있다. 농노의 위치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배려만 받는 것은 상처를 치료 받지 못한 채 진통제만 먹는 것과 같다. 유교사상으로 인한 폐해는 광복 이후 해결했어야 했다. 그걸 해결 못했기에 지금 한국은 유교사상에서 현대이념으로 넘어가질 못해 과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정치, 외교, 역사, 교육, 여성, 아동, 세대, 갑을 등 다방면에서 수많은 문제는 아직 사상이 과거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강요에서 자유로 사회가 바뀔 때 발생하는 문제는 문민정부 이후 해결했어야 했다. 그걸 해결 못했기에 지금 한국은 출산율과 취업률이 박살이 나고 사회가 혼란스럽다. 강요하는 수직사회에서 자유로운 수평사회로의 전환은 분명 쉬운 일은 아니나 자유가 이념인 이상 할 수 밖에 없다. 만약 이런걸 그 시대에 해결했더라면 현 세대는 확실히 말해 지금보다 몇 배는 더 행복했을 것이다. 정말 아쉽다.

한국은 유교사상에서 벗어나지 못해 유교사상의 틀 안에서 새로운 사상을 받아드리게 되었다. 유교 필터를 거치고 난 뒤에 과거의 문제를 해결 못한 사상을 참고하니 더욱더 해결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유교 필터는 새로운 사상의 장벽이 되어 한국 사회의 성장에 큰 걸림돌이 되었다. 한국은 본래 사회주의가 적합한 나라다. 왜냐하면 유교사상이 사회주의와 본질이 비슷하기 때문이다. 사회주의는 자본주의의 자유가 만드는 노동자 착취를 보고 질서를 강요하던 과거로 돌아가자는 사상이다. 어떤 질서를 만들고 거기에 모든 인간을 맞춘다. 그 질서를 근거로 만들어진 관계와 집단과 연대를 중시한다. 여기서 그 질서를 만드는 자만 달라졌다. 과거엔 왕과 귀족이었다면 현대엔 사회주의 정치가나 공산당원이다. 아직 한국이 왕과 양반이 있던 시대에 쓰이던 유교사상에 머물러 있으므로 다수의 사람들이 사회주의에 빠지고 자유를 외치는 이조차 사회주의식 억압과 강요를 자행하는 것이다. 이 기초적인 이해가 없으면 한국사회를 이해할 수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경제적으로 보수라 주장하는 정당이 권력을 쥐었었는가? 그 정당 구성원도 유교사상에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경제적으로 보수라 하더라도 다른 면면에서는 사회주의적 형태가 나타날 수밖에 없다. 군사독재의 계획경제도 사회주의와 비슷하지 않나. 이후에는 그 시대의 향수와 선동으로 권력을 쥐었다. 경제적으로 진보라 주장하는 정당도 열심히 선동해서 권력을 쥐었으니 한국정치는 선동정치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실제 국정의 능력과 무관하게 선동으로 권력을 쥐었다는 것이다. 정책이나 그런 것에 관심을 가지던 국민이 얼마나 있었나. 애초에 정책만 공약으로 내세우는 것도 이상하다. 사상과 이념을 알면 정책의 방향성을 알게 된다. 그걸 먼저 알리는 게 우선 아니던가? 이런 선동정치의 근원은 역사적으로 실제 직간접적으로 겪은 피해의식에 있고 정치적으로는 선동에 취약한 지역대표에 있다.

 

뭔가 문제가 생기면 유교의 틀 내에서 과거의 사상을 참고하여 해결하려고 할 것이다. 경제에 문제가 생기면 자본주의와 그 파생사상을 참고한다. 노동에 문제가 생기면 사회주의와 그 파생사상을 참고한다. 도덕에 문제가 생기면 유교사상이나 다른 종교사상을 참고한다. 그리고 그걸 기준으로 옳고 그름이나 방향성을 결정하고 따른다. 그런데 이런 사상들은 결국 그 시대의 문제를 해결 못한 불완전한 사상이다. 과거의 문제를 해결 못한 사상을 참고하여 현재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안다. 과거의 사상으로 현대 사회가 형성되었다는 걸 안다. 과거 사상을 참고한 나로서도 그 사상의 위대함을 폄하하고 싶지 않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그냥 단순한 사실이기 때문이다. 과거의 문제를 미래로 떠넘긴 사상이라는 점은 달라질 수가 없다. 진실을 외면해서야 답을 찾을 수는 없다. 새롭게 만들어지는 사상들도 문제해결에 도움이 되지는 못했다. 해체주의는 과거에 만들어진 기준에서 벗어나자는 것 외의 마땅한 대안을 제시하지 못했다. PC주의는 과거 사상을 부정하며 사회주의와 마찬가지로 불쌍하니까 배려하자를 강요하며 권력을 얻고자 하는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어떤 답을 찾기 위해서는 그 어떤 것도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 과거에 만들어졌다고 하여 그걸 배제하면 자유로운 사고를 할 수 없다. 그러면 제대로 된 답을 도출해낼 수 있겠는가? 이제는 과거가 떠넘긴 문제와 현재 발생한 문제와 미래 발생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제대로 된 답이 필요하다.

 

자본주의의 실책은 경제 진보의 열쇠를 노동자와 정치가에게 빼앗긴 것에 있다. 경제란 인간의 공동생활을 유지 및 발전시키기 위해 필요한 물질적 재화와 서비스의 생산과 유통과 소비의 활동 또는 그것을 통하여 형성되는 사회적 관계를 이르는 말이라고 한다. 자본가가 그 사회적 관계에서 발생하는 노동자 착취 문제를 외면한 결과, 경제 진보의 열쇠를 노동자와 정치가가 주장하는 사회주의에 강탈당했다. 노동자 착취 문제는 부의 분배 문제다. 제대로 된 부의 분배가 되지 못한 결과가 노동자 착취다. 그렇다면 부의 분배는 누가 전문인가? 누구의 역할인가? 노동자인가? 정치가인가? 아니다. 자본가다. 경제 전문가인 자본가야말로 부의 분배의 역할을 맡아야 한다. 그러나 자본가가 문제를 방치하며 보수적인 태도를 고수했다. 그걸 방치했으니까 노동자와 정치가에게 그 역할을 빼앗겼다. 빼앗아간 이들은 고작 노동자를 배려 해주는 것에 머물렀다. 중국과 북한을 보면 사회주의의 일그러진 결말인 공산주의를 알고 있음에도 그거 말고는 방법을 모르니까 계속 배려만 해주고 있다.

 

더 이상 전문가가 제 역할을 하지 못하는 걸 놔둬서는 안 된다. 경제의 전문가인 자본가가 아닌 노동자와 정치가가 부의 분배 문제를 해결하려는 것은 의료의 전문가인 의사가 아닌 간호조무사나 영업사원이 수술을 하려는 것과 같다. 자본가가 노동자 착취를 방치하는 보수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은 의사가 대리수술을 방치하는 보수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과 같다. 문제해결을 하지 않으려는 보수적인 태도 때문에 자본가는 노동자와 정치가에게 진보의 열쇠를 빼앗겼고 의사는 환자와 정치가에게 진보의 열쇠를 빼앗겼다.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는 이제 직접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자본가는 경제 원칙에 따라 효율적으로 이윤을 얻는 방법을 알 것이다. 그렇다면 효율적으로 부를 분배하는 방법도 알 것이다. 경제계에서 알뜰살뜰하게 절약한 돈으로 낸 세금을 정부에서 낭비하는 걸 보면 분통이 터질 수 있을 거라 본다. 그런 걸 지켜보고만 있지 말고 이제 경제도 진보해야 한다. 사회주의가 아닌 진보를 해야 한다. 단순히 이윤을 추구하는 것이 아닌 인간에게 필요로 하는 역할을 맡는 이에게 정당한 부의 분배를 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들어나가는 자본주의의 진보를 해야 한다. 지금 보면 부의 분배 단계에서 별 필요가 없는 이들이 과도한 부를 얻고 있다. 그런 점을 개혁하고 개선하는 진보를 하게 된다면 경제의 진보 열쇠를 노동자와 정치가에 빼앗기지 않아도 될 것이다.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의 대결에서 자본주의가 승리했다. 사상적으로 보면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의 결정적인 차이는 누구를 생각하느냐였다. 자본주의는 소비자라는 이름의 대중에게 필요한 것을 상품화하여 판매하는 것에 몰두했고 공산주의는 생산자라는 이름의 노동자를 집단의 연대를 통해 배려하는 것에 몰두했다. 소비자를 생각하고 만든 상품과 생산자를 배려하며 만든 상품 중에서 일반적으로 가치가 높은 것이 전자라는 것은 누구나 다 알 것이다. 결과적으로 상품의 가치를 결정하는 상품화 능력에서 승패가 갈렸다. 상품 가치 낮은 걸 무료로 나눠줘 봐야 국민이 행복할 수 있을 리 없다. 상품 가치 낮은 걸 해외에 팔아봐야 팔릴 리가 없다. 상품화 능력만 보면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는 애초에 승부가 되질 않았다. 그렇다고 노동자 착취를 방치할 수는 없다. 자본주의는 승리했기 때문에 그걸 방치하는 것이 옳다며 보수적인 태도를 취하게 되었다. 그게 잘못되었다. 이제 자본주의도 진보해야 한다. 승패는 상품화 능력에 있었다. 그렇다면 상품화 능력은 키우면서 올바른 부의 분배를 통해 착취는 하지 않는 진보를 하게 된다면 자본주의의 결함을 해결할 수 있을 거라 본다. 그 역할을 경제의 전문가가 맡아야 한다. 경제는 경제에 속한 이들에게 올바른 부를 분배하는 역할을 맡고 정부는 경제에 속하지 않는 이들에게 안전망을 통해 생존을 보장한다. 이런 것이 바로 역할주의다.

 

모든 인간은 보다 큰 욕망을 가져야 한다. 욕망이란 무엇을 가지거나 누리고자 탐하는 것이라 한다. 선과 악이나 물질과 정신과 관계없이 순수하게 무엇에 대한 강한 바람이 욕망이다. 이런 욕망이 나쁜 행동을 낳는다고 하여 욕망 자체를 나쁘다고 여기는 경향이 있다. 기득권이 잘못을 저지르면 욕망이 크기 때문이었다며 비판한다. 그러나 그것은 욕망이 크기 때문이 아니다. 욕망이 작기 때문에 잘못을 저지른 것이다. 생각해보자. 인간은 큰 욕망을 위해 작은 욕망이나 욕구를 참는다. 몸을 위해 식욕을 참거나 성적을 위해 수면욕을 참는 것과 같다. 이런 관점에서 기득권의 잘못은 국가의 발전이나 국민의 행복이라는 큰 욕망보다 사리사욕이라는 작은 욕망 때문에 발생한 것이다. 그럼에도 욕망이 나쁘다는 인식이 퍼져나갔던 것은 인간의 마음에 인간에 대한 사랑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욕망이나 이기심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인간이 악이라는 관점에서 인간에게 누군가를 사랑하는 마음이 있을 수 없다 생각한 이들의 사상 때문이다. 그럴 거면 뭐 하러 인간을 사회적 동물이라 규정하나. 사회를 구성하는 건 사회에 속한 인원이 다른 인원을 사랑한다는 전제하에 가능한 것이다. 서로를 미워하는 마음밖에 없으면 애초에 사회구성 자체가 안 된다. 도덕이나 질서로 강요하지 않아도 타인을 사랑하는 이들이 있다. 그들이 마음껏 자신의 욕망을 이기적으로 추구해야 사리사욕이란 작은 욕망에 휘둘리지 않고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자유주의는 모든 개인이 자유롭게 큰 꿈을 추구하여 사회를 이롭게 하여 행복하게 되자는 사상이다. 인간의 한계를 멋대로 규정하고 욕망이나 꿈을 절제하게 만드는 건 유교 같은 종교나 사회주의다. 욕망을 줄인 결과가 조선 말기고, 종교의 부패다. 경제에 속한 인간도 더 큰 욕망을 추구해야 한다. 어째서 경제는 물질적인 욕망만 추구해야 하는가? 인간은 어떤 감각이든 한계점이 있다. 지나치게 높은 쾌락을 받아드릴 수 없어 망가진다. 지나치게 높은 슬픔을 받아드릴 수 없어 망가진다. 따라서 하나의 감각을 최고로 즐기기보다 다양한 감각을 복잡하게 즐기는 것이 오랫동안 행복할 수 있는 비결이다. 보수에 머무르며 과거에 얽매이지 말고 새로운 진보로 나아가는 자본주의를 추구하여 국가의 기초체력인 국민의 상품화 능력을 키우고 국민의 행복을 부를 올바른 부의 분배를 하는 것이 더 큰 욕망이며 즐거움이 될 거라 생각한다.

 

 

 

한국의 성장은 경제가 주역이었다. 그들이 생각하는 발전 방식이나 이윤 추구는 분명 우수할 것이다. 여기서 다루고자 하는 영역은 그런 방식 자체가 아니다. 인간의 사상이다. 시장원리란 수요와 공급에 의해 재화나 서비스의 가격이 결정되는 걸 말한다. 여기서 수요란 무엇인가? 어떤 재화나 서비스를 일정한 가격으로 사려고 하는 욕구라고 한다. 그렇다면 그 욕구는 무엇을 근거로 하는가? 인간의 본성과 사상이다. 선천적인 욕구와 후천적으로 욕구의 방향을 정한 사상이다. 예컨대 선천적인 식욕과 그 식욕을 어떻게 충족할 것인지 알려준 사상이 수요에 있는 욕구의 근거다. 그런데 지능이 높은 인간은 사상으로 본성을 제어하거나 바꾸는 일이 가능하다. 본래 벌레를 역겹게 느끼지 않는 이도 교육을 통해 역겹게 느끼는 것처럼 사상에 의해 감각이 바뀌는 일은 당연하다. 그러므로 실상 욕구의 근거는 사상일 확률이 높다. 본능이 이성을 잡아먹을 정도로 극한에 처하지 않는 이상 보통 사상에 의해 수요가 결정된다. 내가 다루는 영역은 경제의 원리보다는 수요에 영향을 끼치는 사상이다. 가치나 옳고 그름을 말하는 사상이다. 무엇이 가치 있고 올바른가? 자본주의의 진보는 그런 걸 바꾸는 걸 의미한다. 시장원리는 그대로 둬도 충분히 진보할 수 있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현상파악을 해야 한다. 현상파악을 하기 위해서는 상황을 살펴봐야 한다. 우선 한국 경제의 상황을 몇 가지 살펴보자. 첫째, 상품화 능력의 부족으로 인한 경제참여인구 감소. 둘째, 정보확산을 통한 경제성장 공식의 노후화. 셋째, 경제 양극화로 인한 기초체력 부실.

 

첫째, 상품화 능력의 부족으로 인한 경제참여인구 감소. 경제참여인구의 감소는 국민의 상품화 능력 부족으로 나타난 현상이다. 여러 가지 원인이 있지만 핵심을 보면 그렇다. 상품화 능력이 높았다면 경제참여인구 수가 줄어들 수가 없다. 상품이란 사람에게 필요한 걸 의미하고 상품화는 사람에게 필요로 하게끔 하는 걸 의미한다. 능력의 상품화가 가능하면 기업에 필요한 능력이 되어 취업이 가능할 터이고 사물의 상품화가 가능하면 사회에 필요한 걸 만들 수 있어 창업이 가능할 터이다. 그렇다면 어째서 상품화 능력이 부족했던 걸까? 그건 과거에 그 능력의 필요성이 낮았기 때문이다. 기술이 발전하기 전에는 단순 노동의 수요가 높아 굳이 상품화 능력을 갖추지 않아도 취업할 수 있었다. 경제가 발전하기 전에는 창업이 수월하고 적은 임금으로도 어느 정도 만족하며 살 수 있었다. 교육이 발전하기 전에는 교육이 체계적이지 못해 문제풀이능력의 필요성이 적었었다. 그래서 사회에 필요한 걸 찾아 파는 문제해결능력을 갖춘 이들이 창업하는 일이 많았다. 그러다 시대가 달라졌다. 기술이 발전하자 단순 노동의 수요가 줄어들어 취업 풀이 좁아졌다. 능력을 상품화하여 기업에 필요로 되어야 취업할 수 있게 되었다. 경제가 발전하자 창업이 어려워지고 적은 임금으로는 만족하며 살기 어려워졌다. 중소기업을 가느니 취업을 포기한다. 이직의 어려움을 아는 부모도 중소기업에 가는 걸 만류하는 실정이다. 능력이든 사물이든 수준 높은 상품화가 가능해야 창업이든 취업이든 할 수 있게 되었다. 교육이 발전하자 교육이 체계적이게 되었다. 시험을 풀 수 있는 문제풀이능력에 구애 받고 문제풀이능력을 키워 진학을 하고 취업으로 수익을 얻었다. 창업을 하는 것보다 대기업에 취업하는 게 더 중요시되었다. 문제해결능력이 아닌 문제풀이능력이 뛰어난 취업자만 늘어난 것이다. 이는 집단에 종속되는 걸 올바르다 주장한 사회주의 노동운동이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기술과 경제의 발전으로 이전보다 상품화 능력이 더 필요하게 되었음에도 상품화 능력에 필요한 문제해결능력이 아닌 문제풀이능력을 키우는 바람에 국민의 상품화 능력 부족 현상이 나타났던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줄어든 취업 풀에서 상품화 능력 부족으로 기업에 필요한 능력자의 수가 줄어들고 사회에 필요한 상품을 팔 수 있는 사업자 수가 줄어들면서 결정적으로 경제참여인구가 감소한 것이다. 상품화 능력이 뛰어났다면 착취가 아니면 기업을 유지할 수도 없는 무능한 기업은 진작에 사라져 중소기업 기피도 없었을 것이다. 체계적인 교육이 되려 경제 참여와 경제 선순환을 막았다. 아이러니한 일이지만 근간이 되는 사상이 낡으면 이런 현상도 일어나는 법이다.

 

둘째, 정보확산을 통한 경제성장 공식의 노후화. 인터넷 시대가 되면서 가장 크게 달라진 점은 정보의 확산이다. 이것이 정말 많은 것을 바꿔놓았다. 경제적으로 보면 경제성장공식이 노출되었다는 점이 크다. 경제성장은 일종의 공식이 있다. 경제 수준에 따라, 국가 환경에 따라, 국민 수준에 따라, 선진국들이 경제를 성장했던 공식이 있다. 한국 또한 그 공식을 차용하여 성장했다. 많은 한국인이 실제 직간접적으로 겪은 피해로 인해 제국주의와 그를 야기한 자본주의를 비판하지만 사실 한국이 그런 흐름의 막차를 탄 자유진영의 막내다. 지금 한국은 제국주의의 폐해를 줄인 자본주의 공식을 본받아 성장했다. 노동자 착취(군사독재 아래 가발 생산 따위)와 기술의 발전(중공업의 발전 등)과 다양한 상품화(다양한 산업 진출)와 개발도상국의 경제성장(중국이나 동남아 등)을 돕는 것으로 한국이 성장했다. 이런 것이 전부 공개되었다. 어느 나라나 이걸 본받아 성장할 수 있게 되었다. 반면 한국은 선진국 대열에 들어서면서 선진국 이후의 성장공식은 미지인 상태다. 개발도상국은 성장공식을 아는데 선진국은 성장공식을 모른다. 이대로 가다가는 일본의 전철을 밟게 될 확률이 높다. 그토록 성장했던 일본이 오랫동안 정체된 까닭은 새로운 성장공식을 만들어낼 사상가가 없었기 때문이다. 미국의 경제 제재가 있더라도 그에 대응하는 사상이 있었다면 대처할 수 있을 것이다. 아베노믹스가 양적완화를 한다고 다방면에 비판을 받았음에도 마땅한 대안이 없었기에 그대로 갔다고 한다. 지금 금융 자본주의가 발전하고 있음을 안다. 그런데 그건 올바른 길이 아니다. 금융으로 돈이 오가는 것은 기초적인 국가생산력과 별 상관이 없기 때문이다. 금융 자본주의를 통해 다양한 자산을 늘려나가더라도 자본을 통해 가치 있는 새로운 상품을 생산할 능력이 없으면 오래지 않아 도태되어버린다. 이건 양적완화와 비슷할 정도의 임시방편이다. 개발도상국과 격차를 벌리기 위해 기술 초격차를 추구하고 있음을 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이제 부족하다. 정보가 공개되었기 때문이다. 대표적으로 미국이 그렇다. 정보공개를 통해 다양한 정보를 중국에 노출하여 중국의 성장을 견인했다. 수많은 중국의 산업스파이가 미국에서 활동하여 가치 있는 정보를 빼가고 있는 상황이다. 정보가 공개된 이상 기술 격차만이 아닌 모든 국민의 수준을 높이는 것으로 격차를 유지해야 한다. 지금 중국은 한국 인구수만큼의 부자가 있다고 한다. 거기에 대응하려면 한국도 그 인구수만큼의 부자가 있어야 한다. 그것을 위해 가능한 많은 국민이 자본가가 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과거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공장 같은 거대 자본재를 소유한 이들만 자본가가 되어 노동자를 착취하며 성장했다. 하나 현재는 다르다. 현재 세계에서 손꼽히는 부자들의 시작은 컴퓨터다. 소프트웨어로 부를 창출하여 하드웨어로 나아갔다. 이런 방식으로 누구나 다 능력만 있으면 자본가가 될 수 있는 세상이다. 사회에 필요한 것을 찾은 다음 그에 필요한 기술을 연구소에서 찾은 후 협력하여 생산하면 새로운 상품화를 만들어 자산을 불릴 수 있다. 여기서 상품가치가 높으면 착취를 하지 않아도 자본가가 될 수 있다. 그러나 교육은 그걸 전제하지 않았다. 상품화를 할 수 있는 능력을 키운 것이 아니라 상품화가 되는 능력을 키웠다. 그런 까닭에 많은 학생들이 문제풀이능력을 키우며 집단에 종속되기만을 희망하게 되었다. 한국만큼 교육열이 높은 곳이 많지 않다. 만약 한국에서 문제풀이능력이 아닌 문제해결능력을 통해 상품화 능력을 키웠다면 세계에서 손꼽히는 부자의 순위에 많은 한국인이 있었을 것이다. 한국은 우수한 실무자가 많다. 그 실무자가 교육만 조금 다르게 받았어도 우수한 경영자가 되어 부자가 되었을 것이다. 그 경영자 아래에서 취업자리도 많았을 것이다. 많은 취업자리로 인력난에 시달려도 외국인이나 자동화 시설이 있으니 걱정이 덜하다. 능력만 있으면 마음껏 자본가가 될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해도 된다. 선진국에 도달한 한국의 앞길은 이제 본받을 대상이 없다. 이제 한국이 직접 새로운 길을 개척해야 한다.

 

셋째, 경제 양극화로 인한 기초체력 부실. 국가의 기초체력은 생산능력에 달려있다. 사람에게 필요한 걸 생산할 수 있는 능력이 바로 국가의 기초체력이다. 공산주의는 이런 기초체력 부실로 무너졌다. 그런데 경제 양극화가 발생하면 저소득층의 생활수준 및 교육수준 저하로 전체적인 생산능력이 떨어지게 된다. 단순 노동이 필요하던 시대라면 괜찮았을지도 모르지만 이제는 아니다. 수준 높은 지성으로 가치 있는 상품을 생산할 수 있는 사람 수가 늘어야 선진국은 기초체력이 유지될 수 있다. 기초체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올바른 부의 분배를 통해 가능한 양극화를 해소해야 할 것이다. 올바른 부의 분배란 상품 가치가 있는 이들에게 부가 흘러가는 걸 말한다. 자본주의의 가치판단기준은 사람이 필요로 하는 정도이고 미덕은 그런 필요에 부가 흘러가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에게 필요 되는 능력을 가진 능력의 상품화가 뛰어난 이에게 부가 흘러가고, 많은 사람들에게 필요 되는 상품을 만드는 사물의 상품화가 뛰어난 이에게 부가 흘러가야 한다. 상품화 능력이 뛰어난 사람에게 부가 흘러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 한국은 그러지 않고 있다. 몇 가지 알아보자. 하나, 부동산. 사람의 능력과 관계없이 자전거래나 정치적 수단 따위를 통한 부동산 가격 뻥튀기를 하는 이에게 부가 흘러가고 있다. 실상 이런 부동산 부자는 사람이 바뀌어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의 능력에 관련된 자산이 아니기 때문이다. 반면 기업은 사람이 바뀌면 큰 문제가 생긴다. 그의 능력으로 기업을 키운 것이기 때문이다. 부동산보다 기업에 부가 흘러가는 것이 올바르다. , 인력파견. 위험의 외주화를 명분으로 실제 생산에 필요한 노동을 하지 않은 이에게 부가 흘러가고 있다. 원래 이런 회사가 없더라도 생산에는 큰 문제가 없다. 그럼에도 위험의 외주화로 좀 더 이익을 얻어보겠다고 하다가 잘못된 부의 분배를 해버렸다. 불필요한 인원에게 부가 흘러가는 것을 신체로 비유하면 피가 흘러가다 중간에서 줄줄 세어 나오는 것과 같다. 실제 생산에 필요한 능력을 제공하는 이에게 부가 흘러가는 것이 올바르다. , 무능한 기업. 착취가 아니면 기업을 유지할 수도 없는 이에게 부가 흘러가고 있다. 본래 이런 기업은 상품화 능력이 뛰어난 새로운 자본가에 의해 대체되어 사라졌어야 했다. 그리고 경제도 그에 맞춰 사물의 상품화 능력이 뛰어난 이에게 투자를 하여 대체될 수 있도록 유도했어야 했다. 착취를 하지 않아 올바른 부의 분배가 가능하고 중소기업 기피도 없었을 것이다. 착취를 하지 않아도 될 정도의 유능한 기업에 부가 흘러가는 것이 올바르다.

 

 

 

몇 가지 한국 경제의 상황과 해결방법을 살펴보았다. 상품화 능력을 키워 자본가를 늘리고 올바른 부의 분배를 하면 당면의 경제 문제는 해결할 수 있을 거라 본다. 이에 대해 좀 더 알아보자.

 

상품이란 장사로 파는 물건이나 매매를 목적으로 한 재화라고 한다. 이걸 다른 시각으로 보면 사람이 구매할 필요가 있을 정도로 매력적인 물건이나 재화라는 것이 된다. 필요하지 않으면 구매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상품화란 즉 사람에게 필요로 되게끔 만드는 걸 의미한다. 능력의 상품화는 그 능력을 사람에게 필요로 하게끔 만드는 걸 의미한다. 사물의 상품화는 그 사물을 사람에게 필요로 하게끔 만드는 걸 의미한다. 상품을 만드는 사람은 정말 그 누구보다 열심히 사람을 생각하고 있다. 지금 당장 주위의 상품을 보자. 이 상품들이 얼마나 많이 생각하고 나온 것일 것 같은가? 어떻게 하면 소비자가 필요를 느끼고 구매할까? 그야말로 엄청나게 생각해서 나온 것들이다. 상품화하는 사람이 알고 있을지는 모르겠는데 그들이야말로 정말 많이 사람을 생각하고 사랑하고 있다. 그들은 사람의 사랑을 받지 못하면 견디지 못할 정도다. 이런 사람에게 필요한 걸 제공하는 이에게 부가 흘러가는 것은 매우 정당하다. 이렇게 사람을 생각하고 사랑 받기를 원하는 이들이 어째서 노동자는 착취했을까? 그건 관습적으로 노동자가 농노의 위치에 있어 같은 인간이라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과거 주로 생산은 노동자가 하고 소비는 기득권이 했다. 그러다 시대가 흘러가 평등해지면서 노동자의 소비가 늘어났다. 그럼에도 관습은 유지되어 노동자일 때에는 천대하고 소비자일 때에는 우대하게 되었다. 참 씁쓸한 상황이다. 상품화를 하는 이들처럼 사람을 생각하는 이들이 많지 않다. 이제는 소비자에게 사랑 받기를 바라는 만큼 노동자에게도 사랑 받기를 바라야 할 것이다. 이렇게 인식만 살짝 바꿔도 자본가는 인본주의자가 된다.

 

노동자도 능력을 상품화하여 자본가에게 사랑 받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사실 이 시점에서 노동자와 자본가의 구분이 필요한지 의문이 든다. 능력을 상품화하는 능력자와 사물을 상품화는 능력자로 구분해야 하지 않나 싶다. 그래도 일단 알기 쉽게 과거의 구분을 사용하겠다.) 상품화 능력의 개발은 어린 시기의 교육부터 시작해야 한다. 연애 능력을 어린 시절 키워야 자유롭게 연애하고 결혼하고 출산하는 것처럼 상품화 능력을 어린 시절 키워야 자유롭게 취업하고 창업하며 생산할 수 있다. 지금 한국은 연애 능력을 갖춘 일부를 제외하고는 결혼을 포기하거나 조건으로 만나 결혼하고 있다. 조건 결혼은 인간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조건을 사랑하는 것이다. 조건을 사랑하는 것은 과거 중매와 비슷하다. 중매로 결혼한 다수가 황혼이혼을 바랄 정도로 행복한 결혼생활이 아니었음을 안다면 조건 결혼이 행복한 결혼생활을 보장하기 어렵다는 걸 알 것이다. 마찬가지다. 지금 한국은 상품화 능력을 갖춘 일부를 제외하고는 취업이나 창업을 포기하거나 만족스러운 일자리를 가지지 못한 상황이다. 사람의 삶 중에 노동시간이 많은 시간을 차지하고 있다. 만족스러운 일자리가 아니어서 행복한 노동이 불가능하면 삶 자체도 불행할 확률이 너무나도 높다. 사회 행복도를 높이기 위해서는 노동 또한 행복하게 해야 한다. 한국이 불행한 이유 중 하나가 바로 많은 국민이 이 두 가지 능력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다.

 

모두가 상품화 능력을 갖추면 모두가 서로를 필요로 하게 된다. 서로를 필요로 하는 관계는 이상적일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상품화 능력을 키워야 한다. 앞서 말한 것처럼 상품화 능력은 어린 시기의 교육단계부터 시작해야 한다. 그래서 교육을 다룬 글에서 따로 체계적으로 작성할 필요가 있다. 그래도 간단히 써보도록 하겠다. 우선 평가부터 달라져야 한다. 학생 능력의 평가를 단순히 점수를 매기는 것이 아니라 능력으로 만든 상품을 점수로 구매한다는 것으로 접근해야 한다. 교사가 소비자가 되고 학생이 생산자가 된다. 이런 개념을 초기부터 인식하게 해야 한다. 어떻게 해야 소비자인 교사에게 필요 되는 상품을 만들 수 있는가? 지식은 이런 연구에 필요할 때 각자 알아서 수집해야 한다. 이것으로 상품화 능력과 가치 있는 정보 수집 능력이 키워진다. 이런 것이 매우 어렵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나 생각해보자. 과거 교육 체계가 정돈되지 못했을 때에는 수많은 창업자가 나타났다. 수준 높은 학력이 없더라도 상품은 생산할 수 있었다. 되려 고정된 지식이 자유로운 사고를 막아 다양한 상품을 생산하는데 방해가 된다. 간단한 지식의 상품화를 시작으로 복잡한 지식의 상품화로 나아가야 한다. 상품화 능력도 차근차근 키워 나가야 빛을 발할 수 있다. 보통 기업에서는 수많은 시행착오가 그걸 대신한다. 이제 그걸 교육 단계에서 해야 한다. 이후에는 조별과제를 통해 교사는 소비자 역할을 맡고 조장은 자본가 역할을 맡고 조원은 노동자 역할을 맡아 각자 사물의 상품화와 능력의 상품화 능력을 키운다. 교사는 소비자가 되어 점수를 지불하고 과제를 구매하고 조장은 판매한 과제로 받은 점수를 계약에 따라 조원에게 분배한다. 과제에 따라 역할을 바꾸며 모두가 능력과 사물의 상품화 능력을 익힌다. 이것으로 체계화된 상품화 능력과 계약을 통한 거래와 올바른 부의 분배 능력이 키워진다. 이런 걸 키워나가면 어떤 것도 상품화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된다. 그러면 복잡한 연구 결과를 봐도 그것과 다른 것을 조합해 새로운 상품화를 순식간에 떠올리게 될 것이라 생각한다. 이후에는 선동정치를 바꾸기 위해 분야의 대표에 입법권을 주는 것에 필요한 분야의 모임인 모꼬지에 속하여 분야의 전문가에게 도움을 받으며 실제 사회에서 상품을 팔아봐야 한다. 능력을 상품화하는 이는 관련 분야에서 아르바이트를 해보거나 사물을 상품화하는 이는 관련 분야의 상품을 팔아봐야 한다. 이렇게 모두가 상품화 능력을 갖춰 한국이 전세계에 필요로 되는 국가가 되어야 할 것이다.

 

올바른 부의 분배를 하기 위해서는 사람에게 필요로 되는 이에게 부가 흘러가야 한다. 그러지 못하고 불필요한 이에게 부가 흘러가는 것은 과거 특권계층인 성직자와 귀족과 비슷한 계층을 형성할 우려가 있다. 시에예스는 제3신분은 무엇인가에서 3신분이 모든 것이라고 주장하며 그 외의 특권계층은 국가에 전혀 필요가 없음을 역설했다. 그와 마찬가지다. 사람에게 필요로 되지 않는 이가 과도한 힘을 가지는 것은 국가에 전혀 필요가 없다. 필요가 없음에도 그들의 재산을 보장하는 것은 사회의 질서를 위해 범죄자의 인권을 보장하는 것과 같다. 경제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필요가 없음에도 보장하는 것에 불과하다. 불필요하던 걸로 이익을 얻는 이들은 이제 점차 자취를 감춰야 한다. 부동산 자전거래나 주식 장난질 따위를 하는 이는 자본주의적으로 보면 부도덕하다. 사람에게 필요 없는 걸로 부를 얻기 때문이다. 그런 부도덕한 이들에게 투자나 지원은 잘못된 일이다. 시장원리는 수요와 공급으로 상품의 가격이 결정되는 걸 말한다. 그런 이들에 대한 수요가 줄면 자연스럽게 사라진다. 그들의 생계는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왜냐하면 그런 사람을 위해 정부가 살아갈 수 있도록 안전망을 구축하기 때문이다. 그런 안전망에서 정말 사람에게 필요한 걸 만들 수 있는 상품화 능력을 키운 다음 다시 경제에 속하여 이익을 얻으면 된다. 그래야 올바른 부의 분배를 통해 사람에게 필요한 일을 하는 이가 행복해질 수 있다. 경제는 그런 이들에 쓰이는 복지 비용을 아까워해서는 안 된다. 기술이 발전하면서 필연적으로 불필요한 직종이 늘어나게 되는데 그들을 위해 기술의 발전을 늦추는 것이 오히려 경제에 해가 된다. 팍팍 발전하면서 뒤쳐지는 이들의 안전망을 구축하는 것이 경제성장에 이롭다.

 

경제는 노동의 유연화를 주장할 것이다. 나도 그것에 동의한다. 노동의 유연화를 통해 유능한 능력을 제공하는 이가 높은 자리에 있어야 한다. 자리에 맞지 않는 능력자는 다른 자리를 알아봐야 한다. 그것이 모든 노동자에게 이로운 일이다. 노동자를 위해서라며 무능한 노동자가 고위직에 있게 하는 것은 유능한 노동자에 대한 차별이다. 그리고 이것과 마찬가지로 나는 기업의 유연화를 주장하겠다. 무능한 기업은 도태되고 유능한 기업이 성장해야 한다는 것이다. 노동의 유연화를 주장하면서 기업의 유연화에는 반대한다면 내로남불로 볼 수밖에 없다. 노동계가 유능한 노동자와 무능한 노동자를 구분 짓지 않는 것과 경제계가 유능한 자본가와 무능한 자본가를 구분 짓지 않는 것은 같다. 어째서 착취로 유지하는 기업과 그렇지 않은 기업이 같은 그룹에 묶이는가? 천 원짜리를 이천 원에 팔 경우 착취할 수 밖에 없다면 천 원짜리를 오천 원에 팔 수 있도록 상품 가치를 올리면 된다. 그런 기업만 살아남도록 유도하는 것이 기업의 유연화다. 이런 식으로 기업의 유연화를 하면 착취하지 않고도 부를 분배할 수 있어 올바른 부의 분배가 가능해진다. 쉽지 않다는 건 안다. 하나 유능한 한국인이 문제풀이능력이 아닌 문제해결능력인 상품화 능력을 갖춰 상품 가치를 올리는데 전력으로 도전한다면 불가능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기업의 유연화에 속할 기업은 인력파견도 포함된다. 굳이 그 단계를 거칠 필요가 없다. 설령 프리랜서의 형태를 띠더라도 능력에 대한 대가가 온전히 능력을 제공하는 이에게 지불되어야 한다. 이런 식으로 불필요한 걸 정리하면 기존의 수익을 유지한 상태에서도 올바른 부의 분배가 가능해질 수 있을 거라 본다.

 

올바른 부의 분배가 미시적으로 보면 손해일 수도 있다. 하지만 거시적으로 보면 이익이다. 부의 분배에 대한 불만은 정치로 이어져 기업에 대한 규제와 억압으로 발전하기 때문이다. 기업은 거시적인 이익을 얻기 위해 브랜드 가치를 올리기 위한 투자를 하고 있음을 안다. 사회에 투자하고 환경에 투자한다. 그와 마찬가지로 바라보면 된다. 당장 손해를 볼 수도 있고 이후에도 경제계에 속한 무능한 기업은 손해를 볼 수가 있다. 그래도 미래를 보면 이익임을 강조하겠다. 상품화 능력과 올바른 부의 분배로 경쟁자를 늘리는 것이 못마땅할 수도 있다. 하나 생각해보자. 한국인의 경쟁상대는 한국인이 아니다. 전세계인이다. 전세계에 사랑 받는 한국이 되길 바라며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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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가 진실의 한계를 벗어나지 않는 한 그가 너무 멀리 나아가는 것을 비난하지 말라. 그의 직무는 목적지를 알려주는 것이며, 따라서 그는 목적지에 이미 도착해 있어야 한다. 아직까지 노상에 있으면서 감히 자신의 깃발을 들어 올린다면, 그 깃발은 기만적인 것이리라. 그와 반대로, 행정가의 의무는 문제점들의 성격에 따라 그 추진 방법을 연구하고 단계적으로 해결하는 것이다. 철학자가 목적지에 있지 않으면 그는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지 못한다. 행정가가 목적지를 보지 않으면, 그는 자신이 어디로 가야 할지를 알지 못한다. 시에예스 제3신분이란 무엇인가.

 

이 문장이 마음에 들더군요.

 

이제 웬만한 현상은 보면 답이 나옵니다. 그런데 이런 걸 평가할 수 있는 곳이 있긴 한가요. 평가 받기 위한 자격증을 위한 공부는 정말 불필요합니다. 하고 싶지도 않고요. 데이터수집을 위해 몇 가지 방법도 찾았지만 힘들더군요. 사상의 상품화는 선동과 세뇌입니다. 필요하게끔 만들어 파는 게 사상의 방식이죠. 종교나 공산주의가 대체로 그렇죠. 그런 걸 할 수는 없습니다.

 

역할주의 사상부터 글을 다듬고 사상가라고 말하고 다닐 생각이었습니다만…. 지금 상대하는 게 수백 년에서 수천 년 체계화된 사상들이라 빠르게 성장하기 위해서 생각에 초점을 맞춰 양식이 될 글까지 다듬지는 않았는데 이제 시간이 없네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나는 꽤 가치 있는 생각을 하는 것 같은데. 괴롭다.

 

다음 글은 아직 모르겠네요. 쓸 주제야 차고 넘치니까. 그냥 아무거나 쓰면 됩니다. 자유적응이 필요한 분야가 많으니까요. 시기가 시기인 만큼 정치가 평가를 해볼까도 했는데 아직은 계획에 없네요. 하나만 말하자면 다른 분야에 있던 이들이 정치를 하게 되면 정치 전문가에게 지나치게 휘둘린다는 점입니다. 국민들이 굳이 다른 분야에 있던 이들을 지지한 까닭은 그런 구태정치를 보기 싫어서 그랬던 것일 텐데 말이죠. 할말은 더 많은데 여기까지만 하죠.

 

내가 독재자와 사회주의자를 지지하는 일은 없을 겁니다. 한국에서 사회적으로는 유교와 비슷한 사회주의가 보수고 자유주의가 진보임을 알아야 합니다. 역사적으로는 민족주의가 보수고 자유주의가 진보입니다. 자유주의는 유교와 민족주의와 사회주의를 상대하는 험난한 길을 걸어야 할 생각을 해야 할 것입니다. 진심으로 말하겠습니다. 선동해서 권력을 얻고 사리사욕을 추구하겠다는 생각하기보다는 자유로운 세상으로 바꾸겠다는 야망을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나 또한 길을 안내하는 역할을 맡고자 하는 야망을 갖도록 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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