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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이타주의는 선한가? (1)
2020/11/02 PM 02:05 |
이타주의는 선한가?
사무치게 슬프다. 분명 그들은 열심히 노력했다. 그런데 노력하면 노력할수록 되려 상황을 악화시켰다. 상황이 악화되면 노력이 부족한 것이라며 더욱 더
노력했다. 그리고 상황은 더 악화되었다. 쳇바퀴 돌듯이 잘못된 노력을 반복하며 점점 더 지치고
괴로워졌다. 대표적으로 출산율이 그러하다. 아무리 노력해도 점점 더 낮아질 뿐이다. 이게 특정 개인의 일이라면 가엾다고 느끼는 것이
자연스러울 것이다. 일부 조롱을 하거나 분노하는 이들도 있겠지만 보통은 동정으로 끝날 것이다. 결국 남의 일이니까 말이다. 하지만 사회의 일이라면 다르다. 자신의 일처럼 분노할 법도 하다. 「왜 헛된 노력, 아니 잘못된 노력을 해서 사회의 문제를 더 악화시키느냐!」라고 말이다. 그럼에도 분노하지 않고 그저 슬픈 까닭은 그들이
선한 의지로 행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어리석지도 않고 악하지도 않다. 정말로 사회의 행복을 바라며 노력하고 있다. 신념을 가지고 최선을 다하고 있다. 진정 올바르게 행동하려고 하고 있다. 그렇다면 어째서 악화되었던 걸까? 그것은 단순하다. 그들이 가진 올바름의 기준인 도덕이 문제의 원인이었기 때문이다. 출산율이 낮아지면 낮아질수록 임산부와 여성들의 권리를 늘려주었고, 그와 동시에 일부 여성들이 주장하는 성 문화의 검열을
강화하고 아이들의 이성교제를 금지시켰다. 그럼에도 출산율이 줄어들자 여성의 권리가 부족한 것이라며 권리를 늘렸다. 아이들의 성 문란이 문제라며 더 성 문화를 검열하고 이성교제를 금지시켰다. 노력하고 더 노력했다. 그럼에도 출산율은 줄어들었다. 이쯤 되면 그 노력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눈치챌 법도
한데, 노력의 근거인 도덕을 의심할 수 없었기 때문에 잘못된
노력이라는 수렁에 빠져 헤어나올 수 없었던 것이다. 출산율은 간단한 문제다. 남녀유별로 어릴 때의 이성교제를 금하고 정조관념으로 성관계를 금한 탓에 낮아졌던 것뿐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하자. 한국보다 여성의 권리가 낮은 곳도 출산율이 높다. 한국보다 노동환경이 열악한 곳도 출산율이 높다. 한국보다 빈부격차가 큰 곳도 출산율이 높다. 권리 핑계, 환경 핑계, 빈부격차 핑계를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는 얘기다. 그런데도 출산율이 낮아졌으면 다른 원인을 찾았어야
했다. 자 한국의 과거를 보자. 20세기 후반까지만 해도 결혼은 집안끼리의 결합인 경우가
많았다. 출산 또한 대를 잇는 것을 중요시하여 집안에서 임신을
하라고 압박을 가할 정도로 강요되는 측면이 있었다. 학창시절에 이성교제를 금했더라도 결혼을 하고 출산을 하는데 큰 문제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개인의 권리가 존중되기 시작하면서 결혼과 출산은 의무가 아니게 되었다. 이 시점에서 깨달았어야 했다. 어려서부터 사랑을 배우게 해서 자발적으로 결혼과
출산을 하게 했어야 했다는 것을 말이다. 결혼과 출산은 개인의 희생이다. 집안과 자식을 위해 자신의 자유와 자본을 희생한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무엇을 위해 희생을 해야겠는가? 당연히 바람이다. 사람들은 자신이 원하는 걸 위해 희생해야 한다. 그 중 사랑이 대표적이다. 사랑하는 우상이나 창작물을 위해 자신의 자유와 자본을 희생하는 걸 당연하게 여기고 있다. 그와 마찬가지로 사랑하는 가족을 위해 희생하는 걸 당연하게 여겨야 결혼과 출산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도덕이 그걸 막았다. 남녀유별이라면서 어려서부터 이성교제를 부도덕하게
만들었다. 어려서부터 이성교제를 했어야 이성에 대해서 배우고
이성을 아끼고 이성을 사랑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걸 금하자 이성에 대한 사랑을 배우지 못하고 자라버렸다. 부도덕하다는 이유로 해소되지 않은 사랑에 대한 욕망은 대부분 우상이나 창작물 같은 유사연애산업으로
이어져 그 산업을 발전시켰다. 문화는 즐기는 사람이 많으면 성장하는 것이니까. 어떤 사람은 사랑은 커서 하면 된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건 인간에 대해서 잘 모르고 하는 말이다. 인간은 먹는 방법, 싸는 방법, 걷는 방법, 말하는 방법, 쓰는 방법과 사교 능력, 수학 능력 등을 토대로 욕구나 감정이란 바람을 이루면서 성장한다. 인간은 인간이란 도화지에 지식이란 선을 그리고 바람이란 색을 칠하면서 성장하는 동물이란
것이다. 그런 인간에게 이성애란 색을 칠하지 않고 성장시키면
어떻게 되겠는가? 사랑을 몰라 결혼을 하지 않거나 필요에 의한 기계적인
결혼을 하게 된다. 왜 결혼하지 않겠다는 사람이 늘고, 왜 이성혐오가 늘어나는지 알겠는가? 만약 어려서부터 이성을 가까이 했다면 이성을 위해 외모를 가꾸고 이성을 위해 공부를 하고 이성을 위해 희생을 했을 것이다. 그걸 안 한 결과가 지금의 한국이다. 여성차별적인 정조관념으로 여성의 성관계를 부도덕하게
만들었다. 왜 남성은 여러 여성과 성관계를 맺어도 상관이 없는데
여성은 남성과 성관계를 맺으면 부도덕하겠는가? 단순하다. 과거 여성은 남성의 도구였기 때문이다. 도구가 쓰이기 전에 사용되면 사용자 입장에서 불쾌하겠지. 그래서 중고라는 멍청한 말이 나오는 것이다. 여성을 도구로 삼았던 국가들은 다들 하나같이 정조관념의
흔적이 있다. 정조관념은 지극히 여성차별적인 생각이다. 그럼에도 한국은 도덕을 의심할 수 없어 성 평등을
주장하는 지금도 정조관념이 남아있다. 이 얼마나 황당한 일인가. 그리고 정조관념을 근거로 성 문란을 막기 위해 문화검열도 하고 있다. 포르노나 성매매도 그 선상 위에 놓여있다. 포르노나 성매매로 여성의 성의 가치가 떨어진다는 주장이 있을 수 있다. 하나 남성은 그런 걸 신경 쓰지 않는다. 남성은 남성이 포르노에 나온다고 하거나 성매매를
한다고 해서 자신의 성의 가치가 떨어진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 생각은 그저 정조관념이 만든 환상이다. 도구가 도구로 쓰이기 위해 스스로를 보호하고 있을 뿐이다. 여성이 신체접촉에 민감한 것도 정조관념 때문이다. 남성이 구입할 상품에 흠집이 나면 안되니까 말이다. 지금 한국은 여성차별적인 정조관념을 지금은 여성평등이란
이름으로 바꿔서 소중히 하고 있다. 차별을 평등으로 받아드리다니 정말 현기증이 난다. 그리고 참 슬프고 무서운 일이다. 이런 게 심해지면 남성에게까지 정조관념을 요구하는 문화가 된다. 왜 여성이 성적으로 억압받은 걸 남성에게까지 주입하려고 하는가. 모든 인간이 성적으로 자유를 누려야 하는 것이 올바른
것이다. 여성이 성의 자유를 누리는 것을 문란하다고 비난하는
것이 오히려 차별적이란 말이다. 팍팍 연애하고 팍팍 성관계 맺어도 상관이 없다. 지금 한국은 인구소멸에 직면하고 있다. 과거의 도덕을 운운하는 것은 배부른 소리다. 설령 그러다가 학창시절에 임신을 하더라도 상관이 없다. 지배국가의 도덕관념을 버리고 보면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학교에서 아이를 돌본다고 해도 무엇이 문제겠는가? 어처구니 없다, 황당하다, 그런 생각이 든다면 아직도 지배국가의 도덕관념을
버리지 못했다는 것일 뿐이다. 이는 다른 국가도 마찬가지다. 많은 국가가 과거 지배국가의 도덕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니까 자유로운 선진국수록 출산율이 낮은 것이다. 지배와 자유의 차이를 명확히 인식해야 한다. 아이들끼리 연애를 하는 걸 권장하고 그러다가 임신을 하더라도 이해하는 문화가 받아 드려져야
한다. 학교에 탁아소를 짓는 한이 있더라도 자유국가에서는
인간의 자연스러운 연애욕구를 막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오히려 학생들끼리 공동육아를 하여 피보호자에 대한 애정과 그것을 바탕으로 한 자발적인 희생을 경험할 기회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 건 경험 말고는 배울 기회가 없다. 혹시 학업에 방해가 되면 그들이 일 년 정도 휴학을
해도 큰 문제가 아니다. 휴학을 문제 삼는 것은 어른이 만든 인생의 선로에 종속적인 상명하복 문화의 잔재가 만든 것일 뿐이다. 학생이 임신을 했을 때 도덕적인 문제를 제외하고
남은 문제에 대해 고찰해보라. 경제적인 문제를 제외하면 그리 큰 장벽은 없다. 다 큰 성인들 출산 지원비로 천문학적인 비용을 사용했음에도 출산율은 낮아져만 갔다. 이는 이유 없는 희생을 거부하는 자유로운 인간의 본질을 망각한 대가다. 차라리 아이들에게 연애를 권장하고 그러다가 임신을
하면 그 아이들을 지원해라. 인간의 자연스러운 연애욕구를 권장해서 하고 싶은 것을 위한 희생을 각오하게 해야 출산율이 오를 것이다. 그거 말고는 자유국가에서는 답이 없다. 지금 한국은 지배국가의 도덕이 자유국가에서 남아
국가를 인구소멸로 이끌고 있는 셈이다.
출산율 문제는 누군가에게 책임을 묻기가 어렵다. 거의 모든 이가 도덕을 지적한 적이 없다. 대부분이 도덕을 의심하지 않았는데 누구에게 책임을
물을 것인가? 지금이라도 도덕을 자유국가에 맞게 바꾸는 수밖에
없다. 나는 반체제를 주장하는 게 아니다. 되려 체제에 맞는 도덕을 갖춰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왜 사람들은 도덕이 문제라는 걸 몰랐을까? 사회 문제를 해결하려는 이들은 대부분 머리가 좋다. 그럼에도 몰랐던 것은 자신의 도덕을 의심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신심이 깊은 종교인이 종교의 교리를 의심하는 것과 같을 정도로 흔치 않는 일이다. 도덕, 도덕이라. 도덕에 대해 생각할수록 어처구니가 없다. 어떻게 된 게 하나하나가 그저 지배자가 피지배자를 지배하기 위해 만든 것에 불과했다. 그렇게 만든 도덕으로 피지배자를 올바른 것이라 세뇌하여 지배했던 것이다. 자 세상의 선에 대해 잠시 알아보도록 하자. 우선 보편적인 선은 무엇인가? 질서에 순응하고 타인의 이익을 우선시 하는 것이다. 법을 준수하고 도덕적 의무를 행하고 타인의 이익을
위해 일을 하는 이타주의자. 이런 사람을 일반적으로 선인이라 부른다. 이 기준으로 세상의 선을 살펴보자. 첫째, 인도의 신분 제도인 카스트 제도는 선한가 악한가? 한국의 입장에서는 악하다. 인간을 차별하는 문화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도에서는 그것이 도덕적으로 올바르다고 여겨진다. 힌두교에 영향을 받아 낮은 신분으로 태어난 이들은
전생에 카르마(업)을 짊어졌다고 하여 그들의 불행을 당연하게 여긴다. 전생에 못된 짓을 저질렀으니까 낮은 신분으로 태어났다는
논리다. 한국에서도 운이 좋으면 전생에 덕을 쌓았고 운이
나쁘면 전생에 죄를 지었다고 농담조로 이야기할 때가 있을 것이다. 그것은 카스트를 인정하지 않는 불교에 영향을 받은 것이다. 한국에서는 농담조로 하는 걸 그들은 진심으로 여기며
차별을 정당화한다. 자신은 전생에 덕을 쌓았으니 높은 신분이 당연하고 저들은 전생에 업을 쌓았으니 낮은 신분이 당연하다고 여기는 것이다. 증명되지도 않은 걸 근거로 하여 차별을 정당화했던
것이다. 왜 그들이 카스트 제도를 폐지했음에도 문화적으로
남아있는지 알겠는가? 종교의 가르침이 만든 도덕 때문이다. 이는 단지 늦게 태어났다는 것만으로 차별을 정당화하던 유교보다 더 심각한 차별이다. 종교는 기본적으로 종교적 위인의 가르침을 부정할 수 없게 되어있다. 이게 종교의 사상적 한계다. 보편적인 선은 질서에 순응하고 타인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걸 뜻한다고 했다. 여기서 카스트에 순응하는 사람은 이 기준으로 봤을 때 선하다. 여기서 상위 카스트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사람은 이 기준으로 봤을 때 선하다. 질서가 어떠하든 그 질서에 순응하면 선하고, 대상이 누구건 상대의 이익을 우선시 하면 선하기
때문에 어처구니 없게도 카스트 제도는 그들의 입장에서 선하다. 둘째, 이슬람의 참수 문화는 선한가 악한가? 최근 자유주의자라면 누구나 다 분노할만한 사건이 터졌다. 프랑스에서 역사교사가 이슬람 극단주의자에게 참수당하는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프랑스 중학교 교사는 이달 초에 언론의 자유를 수업하면서
무함마드 풍자 만화를 보여주며 토론을 했다고 한다. 그런 수업을 알게 된 이슬람 학부모가 이슬람 인들끼리 그 내용을 공유하며 비난했다고 한다. 그 다음 주 프랑스 교사는 무슬림 난민 청년에게 참수를 당했다. 범인은 사건 직후 트위터에 「알라를 받들어 무함마드를
조롱한 마크롱의 개 중 하나를 처단했다.」 라는 글과 함께 목을 자른 사진을 게시했다고 한다. 정말 정신 나간 인간이다. 일반적으로 이걸 선이라 부르는 것 자체가 역겨운 일이다. 그래도 한번 선의 기준으로 바라보자. 질서에 순응했는가? 이슬람 문화의 질서에 순응했다. 이타적으로 행동했는가? 종교 위인과 그를 따르는 종교인들의 이익을 위해 행동했다. 그러므로 이 미친 행위는 그들 입장에서 선이다. 황당하게도 이슬람 입장에서는 자신들의 위인이 모독
당했다고 생각하면 모독했다고 생각하는 인간을 참수하는 게 올바르다고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걸 증명하는 것이 이슬람 문화권의 반응이다. 프랑스 대통령이 무함마드에 대한 표현의 자유를 포기하지
않겠다고 선언하자 이슬람 문화권은 프랑스에 대한 보이콧을 시작했다고 한다. 말레이시아 전 총리는 무슬림은 수백 만의 프랑스인을 죽일 권리가 있다고 트위터에 글을
올렸다고 했다. 그가 이슬람 인을 대표하는 것은 아니나, 극단적인 자는 총리가 될 정도로 우수한 인간조차
그렇게 생각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그런 광기는 지식유무와 관계가 없다. 인간의 행동을 결정하는 옳고 그름의 기준인 도덕과 관련이 있다. 셋째, 중국 공산당의 독재는 선한가 악한가? 언젠가 한국인과 중국인이 유튜브에서 댓글로 토론하는 걸 본 적이 있다. 한국인이 중국 공산당이 저지르는 홍콩과 위구르와 티베트 탄압을 비판하니 돌아오는 대답이
가관이었다. 「한국에서 반체제 운동을 하면 잡아가는 것처럼 중국에서
반체제 운동을 하니 잡아가는 것이다.」라고 했다. 일견 타당해 보이지만 그 관점 자체가 사상의 차이를 보여주고 있었다. 한국에서 반체제 운동을 한다는 것은 자유를 부정하는 행위다. 왕정복고를 주장하거나 공산독재를 주장하는 것은 누군가를
지배하겠다는 것이므로 자유주의자 입장에서 그릇된 행위가 맞다. 하나 중국에서 자유를 외치는 것은 지배에 저항하는 것이므로 자유주의자 입장에서 올바른 행위가 맞다. 반체제 운동을 해서 잡아갔다는 그 단순한 논리에서
도출되는 결과는 바로 자유에 대한 시각의 차이다. 그것은 자유의 가치를 모르는 중국인이 할법한 논리였다. 이걸 일반화할 수는 없다. 하지만 선의 기준을 생각해보자. 질서에 순응하는 것. 남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것. 일반적으로 중국인이 선하기 때문에 중국 공산당의 질서에 순응하고 공산당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것이다. 독재자는 피지배자들이 선하길 바랄까 아니면 악하길
바랄까? 그 답은「선하길 바란다.」다. 순종적으로 자신의 지배를 받아드리길 원하기 때문이다. 평화롭게 독재자의 지배를 받아드리는 것이 독재자가
원하는 세상이다. 중국 공산당이 자유가 아닌 평화의 가치를 중시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자신의 지배 아래 자유롭지 못하지만 평화로운 세상이 독재자가 꿈꾸는 세상이다. 그 세상은 한국인에게는 악하더라도 중국인에게는 선하다. 그래서 중국인은 공산당이 지배하는 것을 올바르게
여긴다. 민족주의가 그걸 뒷받침 하고 있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홍콩과 위구르와 티벳을 탄압하는
것에 침묵하고 있다. 거기에 일대일로로 다른 국가를 지배하는 것까지 올바르게 여긴다. 오만한 중화사상이 그걸 뒷받침 하고 있다. 중국의 행보는 명확하게 자유와 반대되고 있다. 공산주의를 명목으로 자국을 지배하고 자본주의를 명목으로
타국을 지배하려고 하고 있다. 중국 공산당이 인간을 지배하려고 하는 이상 그들은 자유의 적이다. 자유주의자 입장에서 중국 공산당과 친하게 지내는 것, 그리고 중국 공산당의 이익에 부합하는 행위를 하는
것이 부도덕하다고 강조하고 싶다. 나는 그래서 중국의 제품을 최대한 구매하지 않고 있다. 완전하게는 불가능하더라. 조미료까지 다 불매할 수는 없지 않는가? 그래도 할 수 있는 것을 했다. 중국 공산당을 옹호하는 영화를 보지 않거나 아무리 재미있어 보여도 중국산 게임은 하지
않았다. 만약 스스로가 유교인이 아니고 자유국가의 국민이며
자유를 도덕으로 삼았다고 생각한다면 중국과의 거래 또는 중국산 제품이나 창작물을 소비하는 것을 다시 한번 생각해보길 바라겠다. 그것은 자유주의자의 입장에서 부도덕한 일이다. 중국 공산당의 현재 문화와 달리 중국의 과거 문화
자체는 중국의 자유를 대변하는 대만의 존재가 있기 때문에 괜찮다. 하지만 중국에 이익을 주는 것은 중국 공산당의 이익을 주는 것이므로 부도덕하다. 자유주의자라면 연하가 연상에게 반말하는 것을 부도덕하다고
여기며 분노할 것이 아니라 인간을 지배하려는 자와 집단을 부도덕하다며 분노해야 할 것이다. 넷째, 일본의 혐한은 선한가 악한가? 세계적으로 일본 국민은 착하다는 이미지가 있다. 한데 혐한에는 침묵하거나 동조한다. 그걸 보고 많은 한국인들은 이중적이라고 말을 하거나
실은 착한 것이 아니라고 비판한다. 선의 기준이 무엇이었는가? 질서에 순응하고 이타적인 것이다. 이 기준이면 일본 국민은 착한 것이 맞다. 질서가 옳건 그르건 자민당을 지지세력이 주도하는 혐한에 순응하고 자신의 이익보다는 타인, 즉 국가의 이익을 우선시한다. 착한 국민답게 일반적으로는 규칙을 준수하고 선진국민처럼 행세하려고 한다. 하지만 그저 착하기 때문에 자민당이 하는 행동이나
그 지지세력이 하는 혐한에 적극적으로 대처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일본의 혐한은 일본에서 악이 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일본이 민주주의 국가임에도 민주적으로 보이지 못할
때가 있는 것은 지배국가의 도덕을 물려받아 질서에 순응적인 것을 착하다 여기고 그렇게 행동하기 때문이다. 국가의 주인이 국민이라면 제 주장을 펼칠 수 있어야
하는데, 순응을 올바르게 여기며 따르기만 하다 보니 주인행세를
못할 때가 있다는 것이다. 일본 유치원생이 횡단보도를 건널 때 하나 같이 손을 들고 건너며 질서를 지키는 모습이 사진촬영 되어 인터넷에 공개된 적이 있다. 착해 보인다. 일본이 경기를 마친 후 깨끗이 청소를 한 것이 기사에
뜬 적이 있다. 착해 보인다. 그들이 그걸 선하다고 인식하기에 행하고 있는 것이고
그들이 선하려고 하기 때문에 옳건 그르건 자민당의 질서를 거역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돌려 말한다거나 동조압력이 있다거나 자기 주장을 펼치기 어려워한다거나 하는 것도 이타주의적인
태도 때문이다. 이제는 관점을 달리해야 한다. 그들이 한국과 갈등을 생기는 것은 질서에 순응하는
착한 인간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일견 착해 보이지만 나쁘게 보이는 모순이 없어진다. 일본이 자유국가라면 일본 또한 과거 지배국가의 도덕을 버리고 자유국가의 도덕을 새로 만들어야 할 것이다. 그들이 지배국가의 도덕이 말하는 착하다는 것에서
벗어나 자유를 도덕으로 삼아 자유롭게 잘못된 것을 잘못된 것이라 외칠 수 있어야 일본은 변화할 것이다. 다섯째, 한국은 어떠한가? 지금까지 세상의 선에 대해 알아보았다. 그들의 질서가 진리로 느껴지던가? 어떤 질서가 가르치는 도덕이 반드시 올바를 거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그것은 한국이 가지고 있는 도덕도 예외는 될 수가 없다. 지금 한국의 수많은 사회 문제는 과거 지배국가의 도덕에서 비롯된 것이다. 낮은 출산율, 높은 자살률, 사회적 갈등, 집단 이기주의 등 다양한 문제는 도덕을 근거로 한다. 스스로의 도덕을 의심하는 것은 그 도덕으로 행동을
결정해온 지금까지 살아온 과거를 부정하는 것이다. 자기부정은 어려운 법. 그러니 도덕을 의심하는 것도 어려울 수밖에 없다. 그래서 먼저 다른 국가들의 도덕을 알아본 것이다. 자신을 부정하는 것은 어려워도 다른 걸 보고 반면교사로 삼는 것은 그나마 쉬우니까 말이다. 한국의 도덕이 진리가 아니라면 지금 당장 우리들이 올바르다고 생각하고 하고 있는 것들을
다시 한번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마냥 착하길 바라는 게 올바른 것이었을까? 마냥 이타적으로 행동하길 바라는 게 올바른 것이었을까? 아이들을 위해서라는 명목으로 검열하는 게 올바른 일이었을까? 연하와 연상을 차별하는 것이 올바른 것이었을까? 과거의 관행과 관습을 수용하는 게 올바른 일이었을까? 다문화, 민족주의, 사회주의, 반공주의, 자본주의, 심지어 자유주의까지도 그것이 올바른 것인지 고찰해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도덕을 다시 한번 되돌아보는 것이야말로 한국 사회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열쇠가 될 것이라 확신한다. 한국이 체제에 맞는 도덕과 가치관과 희생의 이유가
갖춰지면 비로소 기초가 튼튼한 자유국가가 되어 건강하게 성장할 수 있을 것이다. 넘어가기 전에 잠시 다문화에 대한 의견을 내보겠다. 다문화는 실패한 정책이 아니라 원래부터 잘못된 정책이다. 각자의 문화는 각기 다른 도덕을 내포하고 있는데, 서로 충돌하는 도덕을 가진 이들끼리는 공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자유를 도덕으로 삼은 자와 지배를 도덕으로 삼은
자가 어찌 공존할 수 있겠나? 이는 천적과 공존하겠다는 것과 그리 다르지 않는 것이다. 다문화를 위해 카스트를 도입할 수 있겠는가? 명예살인을 도입할 수 있겠는가? 말도 안 되는 소리다. 너를 노예로 삼겠다며 나서는 인간과 자유로운 인간이 어찌 같이 살 수 있겠냔 말이다. 한국은 지금 과거의 도덕에 근거하여 미국과 중국의
갈등에 중립적인 위치에 서 있다고 본다. 하면 미국이 없다면 중국의 지배를 가만히 받아드릴 생각인가? 미국이 있든 없든 그들이 다른 국가를 지배하겠다고 나선다면 싸울 수 밖에 없다. 일국양제가 무너진 홍콩을 보라. 대만을 위협하는 중국의 군사력을 보라. 탄압당하는 소수 민족들을 보라. 주변 국가인 한국도 예외는 될 수가 없다. 아무리 이익을 위해 협상한다고 해도 그들의 도덕이
지배를 올바르게 여기는 이상, 한국은 그들에게 정복할 대상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어찌 중립이 가능한가? 애초에 한국이 자유국가에 맞는 도덕을 갖추고 있었다면 중립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중국은 한국의 적이 아니다. 중국은 자유의 적이다. 한국이 자유국가이므로 결과적으로 한국의 적이 되는 것이다. 중국 외에도 자유를 위협하는 국가는 전부 가상적국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이 다문화는 도덕 때문에 원래부터 잘못된 정책이었다. 그렇다고 순혈주의나 민족주의를 주장하거나 이민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단지 최소한 자유를 부정하는 인간이 자유국가에 들어가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자유를 기반으로 한 단일문화와 다인종이 앞으로 한국이 추구해야 할 이민정책이라 생각한다. 설령 피부색이 다르고 인종이 다르더라도 자유의 가치를 받아드린 사람은 자유국가의 국민이다. 반대로 같은 민족이라도 자유를 부정하면 자유국가의
국민이 될 수 없다.
한국 사회가 지닌 문제의 본질은 지배국가의 도덕이었다. 다른 국가들을 살펴보면 도덕이라는 것은 애초에 진리가
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렇다면 보편적으로 선하다고 여겨지는 이타주의는 과연 정말 올바른 것이었을까? 이에 대해 논하기 전에 가볍게 질서에 순응하는 것에 대해 정리해보자. 질서에 순응하는 것이 선한가? 그것은 객관적으로 선하지 않다. 어떤 질서에 순응하느냐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이다. 독재자의 질서에 순응하는 것이 객관적으로 선하다고
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인간은 보편적으로 자유롭길 바라기 때문에 자유가 없는 질서가 객관적 선이라 할 수 없다. 그럼에도 세상은 그런 순응하는 태도를 선이라 부른다. 그것이 바로 지배국가의 도덕이 남긴 잔재다. 그럼 본 주제로 넘어가겠다. 그렇다면 이타주의는 선한가? 그것도 객관적으로 선하지 않다. 어떤 대상의 이익을 우선시하느냐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이다. 어떤 집단이 있다고 가정하자. 그 집단이 집단 이기주의가 되려면 모든 집단 구성원이
이기적이어야 할까? 답은「아니다.」다. 대부분 이타주의적이어야 그 집단이 어떤 이기주의자가
주장하는 이익을 추구할 수 있는 것이다. 곰곰이 생각해보라. 세상의 수많은 집단 이기주의를 떠올려보라. 과연 그들이 전부 이기적이었는가? 스스로부터 생각해보자. 내가 속한 집단에서 부당한 행위를 통해 이익을 얻는 것을 목격했다. 그걸 목격하고 나서 나는 그 행위를 저지하려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것을 잘못된 일이었다. 그걸 주위에서 말린다. 네 이익을 떠올려보라면서 말이다. 그걸 듣고도 나는 부당한 행위를 막으려고 한다. 그러자 그들은 집단 구성원의 가족을 꺼내며 막는다. 「네가 그걸 막는다면 그 부당한 이익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이들에게 피해를 주는 것이다.」 내게 내제된 이타주의가 속삭인다. 「네가 막고 싶다는 욕심을 접고 다른 이의 이익을 우선시해야 하지 않겠느냐?」 신념과 인정 사이에서 갈등한다. 무엇이 올바른 일이란 말인가? 만약 내가 이기적인 사람이었다면 타인이 피해를 아랑곳 하지 않고 정의를 구현하기 위해
부당한 행위를 저지했을 것이다. 하지만 마냥 이타적인 사람이라면 다른 사람이 얻는 피해가 가슴 아파 자기합리화를 하며 침묵했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한국의 비리와 집단 이기주의를 형성하는
토양이 된다. 부동산 담합을 떠올려보자. 어떤 아파트 주민이 자신의 부동산을 싸게 처분하려는
걸 다른 아파트 주민들이 막았다는 소식이 언론기사로 전해진 적이 있다. 그들은 집값이 떨어진다고 파는 자유를 막은 것이다. 거기서 논리는 간단할 것이다. 「네가 싸게 팔고 싶다는 이기적인 욕심 때문에 다른 이의 이익을 침해하지 마라.」 자신의 이익 때문에 이타주의를 강요하고 있는
셈이다. 상을 몰아주는 예술계의 관행을 떠올려보자. 거기에 속한 인간이 전부 이기주의적이었을까? 분명 실력으로 승부를 보고 싶은 사람들이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관행이 유지되는 것은 이타주의를 강요했기
때문이다. 「그 관행으로 이익을 본 다른 선배들의 이익을 침해할
것인가? 너에게도 언젠가 이익이 돌아올 거니 부당한 관행을
막는 이기주의적인 행동을 하지 마라.」 이타주의가 그 부당한 관행을 유지하게 한 것이다. 여성주의에 휩싸인 여성들을 떠올려보자. 그들이 전부 이기적이었을까? 여성주의에 반하는 행동을 하는 여성들을 비난하는 사례를 떠올려보자. 어떤 여성이 간호사 코스프레를 했다거나 야한 옷을
입었다거나 하는 등의 행위를 했을 때 어떤 비난을 했던가? 「너는 여성주의의 이익을 침해했다.」 자신의 이익보다 여성주의라는 어떤 사상 자체에 대한 이익을 우선시하라는 말이다. 그게 바로 이타주의를 강요하는 것이다. 여성주의로 이익을 보는 일부의 여성들을 제외하고는 전부 이타적이기 때문에 여성주의 광풍이
불었던 것이다. 나는 여성들을 우수하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그들도 알 것이다. 어떤 희생도 책임도 지지 않고 이익만 챙기겠다는
말이 사회에 무슨 영향을 끼치는지에 대해서 알고 있을 것이란 말이다. 그럼에도 말을 못하는 것은 여성집단의 이익을 우선시하라는 이타주의가 간섭해서 그런 것이다. 어떤 집단 내부에서 집단의 이익을 무시하고 행동하는
것을 전부 이기적인 행위로 몰기 때문에 이타주의가 올바른 것이 된 세상에서는 집단의 부당한 행위를 막을 수가 없게 된다. 왜 내부고발자가 그 집단에게 소외되고 퇴출되는지
알겠는가? 이타주의가 선인 곳에서 정의구현이라는 이기적인 행위를
저질렀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한국의 거의 대부분의 집단 이기주의나 비리 사건은 이타주의를 근거로 한다. 이럼에도 이타주의가 올바른 것으로 보이나? 이타주의는 지배국가의 도덕이 남긴 잔재다. 생각해보자. 지배자는 이기적으로 행동하고 피지배자들은 이타적으로 행동해야 모든 이익이 지배자에게 몰리지 않겠나. 국가를 위해서라는 이유로 모든 국민들에게 희생을
요구했던 전체주의는 이타주의를 기반으로 한 것이다. 자신의 이익보다 국가의 이익을 우선시 했기 때문에, 그리고 그걸 강요했기 때문에 전체주의가 된 것이다. 이타주의는 대상을 분명히 할 수가 없다. 대상이 정해지면 목적성을 띠게 되고 목적성을 띠게 되면 그 목적을 결정했다는 자유의지가 간섭하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이기주의가 되게 된다. 순수한 이타주의는 결국 타인에게 이용당할 수 밖에
없다. 인도의 카스트도 이슬람의 참수도 중국 공산당의 독재도
일본의 혐한도 전부 어떤 기준에서 선한 인간들이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다. 한국의 비리도 집단 이기주의도 전부 어떤 기준에서 선한 인간들이었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다. 세상은 사람들이 착하기 때문에 엉망인 것이다. 착하기 때문에 엉망이라면 착하다는 보편적인 기준
자체가 이상하다는 걸 의미한다. 이제는 알았을 것이다. 지배국가의 도덕을 기준으로 정한 선으로는 세상이 행복해지지 않는다는 것을 말이다. 더 이상 무력한 이타주의는 선이 아니다. 자유국가가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새로운 선의 기준을 만들어야 한다.
이기주의의 가치는 자유의지를 근거로 한다. 어떤 경우에도 자유의지를 갖고 행동하는 것은 전부
이기적이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과연 모든 인간의 의지가
자유의지라고 할 수 있는가?」다. 어떤 인간이 세뇌를 당해서 하는 행위를 가리켜 자유의지라고
칭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듯이 단순히 인간이 의지를 가진다고 해서 그것이 자유의지라고는 할 수 없다. 고찰이 없는 의지는 자유로울 수가 없다. 내 의지가 어떤 것이 영향을 받았고 그것이 옳고 그른지 생각을 하고 행동을 해야 비로소
자유의지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남이 시켜서 하는 걸 아무런 고찰 없이 그대로 하는 게 자유의지라 할 수 있겠는가! 그런 건 노예다! 개돼지다! 고찰 없는 의지는 결국 남의 의지를 그대로 수행하는 이타주의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현명한 이기주의야말로 자유주의자가 취해야 할 기본
자세이며 이기주의 내에서 옳고 그름을 따져야 하는 것이다. 인도의 카스트 제도를 바꾸려면 누가 필요하겠는가? 이기주의자다. 카스트 제도로 이익을 보는 이들의 이익을 무시하고 바꾸고 싶다는 욕망을 실천할 수 있는 이기주의자가 있어야 바뀌는 거란 말이다. 이슬람의 참수는 얘기하기가 어렵다. 어떤 이슬람 인이 참수를 비판하면 그 사람도 참수될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도 그들이 바뀌려면 이슬람의 이익을 무시하고 자신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이기주의자가 있어야 바뀔 것이다. 중국의 공산독재도 그러하고 일본의 한국 혐오도 그러하다. 그들 대부분이 선량하지만 무력한 이타주의자들이기
때문에 바뀌지 않는 것이다. 이기주의. 어떤 사람이 땅에 떨어진 쓰레기를 주어 도시를 깨끗하게
하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다고 가정하자. 그걸 보고 다른 도시의 구성원이 도덕적 죄책감을 느끼고 싶지 않아서 그걸 위선이라며 공격했다. 이타주의자는 거기서 그들의 이익을 침해할 수가 없기 때문에 자신의 욕구를 참고 쓰레기를
줍지 아니한다. 이기주의자는 거기서 다른 이의 이익에 관심이 없기
때문에 순수하게 자신의 욕망대로 쓰레기를 주워 도시를 깨끗하게 만든다. 누가 도시에 더 필요한 인간이겠는가? 거기에 이기주의자들은 보답을 바라지 않는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행동한 것이기 때문에 행동한 순간 목적이 달성되었으므로 그 파장으로
다른 이가 이익을 얻는다고 해서 달리 보답을 바라지 않는 것이다. 친절을 베푼 이기주의자는 그 친절로 상대방이 이익을 얻건 말건 관심이 없다. 그리고 그 친절에 대한 보답에도 관심이 없다. 베푼 순간 목적이 달성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서로 부담을 가지지 않아도 된다. 이 얼마나 순수한 선의인가? 보답을 바라는 이기주의자는 보답 자체가 목적이기
때문이다. 잘못된 관행, 관습을 멈출 수 있는 것도 이기주의자들이다. 과거 관행을 만든 그리고 현재 관행으로 이익을 보는
이들의 이익 따위에 관심도 없는 이기주의자들이야말로 잘못된 것을 바로 잡을 수 있다는 것이다. 사법도 마찬가지다. 과거 판례를 중용하는 것은 판례를 만든 과거 판사들의 권위라는 이익을 우선시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잘못된 판례거나 이제는 시대에 맞지 않더라도
선배를 존중해야 한다는 이타적인 생각 때문에 바꾸지를 못하는 있는 것이다. 현재 판사들이 이기적으로 행동해야 판례변경이 가능하다. 지금 정보의 확산으로 촉법소년들이 사회의 정보를
빠르게 습득하여 성인과 비등한 범죄를 저지르면서도 책임을 지지 않고 있다. 이를 막을 수 없는 것은 단순하게 과거의 법 때문이다. 현재 살고 있는 사람들이 이기적이어야 이런 걸 바꿀
수 있단 말이다. 올바른 이기주의가 선이 되어야 우리 사회가 행복하게
될 수 있단 말이다! 정치개혁, 언론개혁, 사법개혁, 검찰개혁, 의료개혁, 관료개혁, 교육개혁, 기업개혁, 예술개혁 등 다양한 개혁들도 결국 그 집단에 속한
이가 집단 이익을 무시하고 이기적으로 행동해야 개혁할 수 있다. 지금 개혁이 제대로 되지 못하는 까닭은 이타주의가 선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이익이 아닌 각자 집단의 이익을 위해서 행동하니까
바뀌질 않는 거란 말이다. 이제는 근시안적이고 멍청한 이기주의자들이 제 배를 불리기 위해 선량한 이타주의자들을 선동하는 것을 배제하고 하고 싶은 대로 올바른 일을
하는 이기주의자를 착하다고 해야 된다. 기자가 언론사와 연계된 곳의 비리를 파헤쳐서 터트리는 것. 「내 맘대로 할거야!」 라면서 특종을 터뜨린다고 해보자. 그것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예술계가 그 동안의 관행을 무시하고 진정 예술적인 것에 상을 준다고 가정해보자. 그것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정계가 자신들의 특권을 무시하고 잘못된 것을 바로잡는다고
가정해보자. 그것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이기주의자들이 각자 맡은 역할에 충실하면 충실할수록
사회는 건강하고 행복해져 간다. 어차피 제 배만 불리려는 그릇된 이기주의자들은 이타주의가 선인 세상에서도 없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이기주의자들이 무력한 이타주의자들을 이용만 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럴 거면 모두가 이기적인 편이 낫다. 올바른 이기주의가 선이 되어야 그릇된 이기주의를
견제하여 세상을 올바르게 이끌 수 있다는 얘기다. 모두가 이기적이면 공동체를 유지할 수 없을 거란 우려를 할 수도 있다. 그것은 인간의 특성을 고려하면 그리 걱정할 문제가 아니다. 자신에겐 관대하고 남에게는 엄격한 보편적인 인간의
특성이 공동체를 유지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모든 인간이 이기적으로 행동하면 나 외의 이기적인 인간이 주장하는 것이 사회에 도움이 되는지 엄격하게 판단하게 된다. 자신의 이기심을 공동체 구성원들에게 인정받기 위해서는
결과적으로 공동체에 이익이 되는 것을 전제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 누구도 이기적인 주장을 펼칠 수 있다. 자 펼쳐봐라. 여성이든 남성이든 노동자든 기업이든 어디든 간에 자신의 이기적인 주장을 펼쳐봐라. 자신이 그러하듯 그 외의 사람들이 그 주장이 공동체에
이익이 되는지 엄격하게 판단을 할 것이다. 자신의 이기심이 대중에게 평가 받는 것이다. 지난번 어떤 인간이 지방에 땅을 사서 톤 단위의 쓰레기를 무단 투기하여 큰 돈을 벌었다는 소식이 언론기사로 공개된 적이 있었다. 그런 인간이 이기적인 주장을 펼친다고 가정해보자. 나머지 공동체 구성원이 받아드리겠는가? 반면 정당하게 돈을 벌어 공동체에 이익을 주는 기업이
있다고 가정하자. 그런 기업이 이기적인 주장을 펼친다고 가정해보자. 나머지 공동체 구성원이 거절하겠는가? 그 주장을 각자 판단을 해서 결론을 내리겠지만 공동체에
이익이 되는 이기적인 주장은 반대할 사람이 거의 없을 것이다. 여성들이 여성의 권익을 보장해달라는 대신에 남성들이 짊어지던 병역의 의무를 같이 하겠다는 주장을 했다고
가정해보자. 그걸 어떤 남성이 반대하겠는가? 현명한 인간이 이기적이어야 거시적인 관점에서 사물을
보고 진정 올바른 일을 이기적으로 행할 수 있는 것이다. 이타주의는 그런 현명한 인간의 자유의지를 꺾었을 뿐이었다. 「내가 올바른 일을 행하려고 하면 다른 이의 이익을 침해할 텐데 그럴 거면 안 하는 게 낫지.」 이처럼 이타주의는 뭔가 하기도 전이 자유의지를
꺾어버린다. 자유국가의 국민들은 하고 싶은 대로 하면 할수록
행복하게 되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되려 하고 싶은 걸 하지 못하게 되면 불행해진다. 따라서 어떤 문제가 있으면 무조건 막을 거나 의무를 만들 것이 아니라 그것이 공동체에 이익이 되는 방향을 생각해야 할 것이다. 의무로 어떤 행동을 하는 것은 지나치게 부자유스러운
일이다. 도덕이 시켜서 어떤 행동을 하게 되는 것은 도덕에
지배 받는 것과 다르지 않다. 스스로 생각해 행동을 결정하는 것이야 말로 자유로운 참된 도덕이라 생각한다. 이슬람 인의 참수는 그것이 자신의 도덕적 의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행동한 것이다. 그것이 자유롭게 보이는가? 혈통을 사랑하는 일, 국가 구성원을 사랑하는 일, 인류를 사랑하는 일. 등등 의무이기 때문에 사랑하기 보다는 스스로 바라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 진정 자유로운 인간의 태도다. 나의 핏줄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네가 너이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 혈통으로부터 자유로운 것이 아닐까? 만약 이혼을 하게 되면 가족이 아니게 된다. 그러면 사랑도 사라지게 되는 것인가? 가족이란 형태에 구애 받는 것은 가족을 사랑하라는
도덕의 명령 때문이다. 가족이라서가 아닌 인간 자체를 사랑해야 한다. 그래야 편협한 혈통주의에서 벗어날 수 있다. 자유롭지 못한 혈통주의 때문에 양자를 들이는 사람이 적은 것이다. 이런 자유로운 환경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자유국가의 사회를 행복하게 만드는 길이라
생각한다. 분명 검열과 규제가 필요할 때도 있다. 하지만 만능은 아니다. 앞서 말했듯이 아이들이 자신들의 자연스러운 연애욕구를
자유롭게 발산했더라면 지금 한국이 출산율로 걱정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나는 그걸 확신한다.
도덕을 새롭게 정립한다는 것은 과거의 자신을 부정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것은 한국인이 가지고 있던 어떤 자부심마저도 무너질 우려가 있다. 자랑스럽게 여겨왔던 것이 실은 자랑스럽지 않다는 걸 깨닫게 되면 큰 상처를 입게 되기
때문이다. 진심으로 사회의 행복을 위해 열심히 야한 것을 검열하고
이성교제를 막아왔던 이들이 사실은 그것이야말로 낮은 출산율을 불러왔던 원인이었음을 깨닫게 되면 어떻게 되겠는가? 인도의 카스트 제도를 비판하던 평등주의자가 자신이
유교의 연령차별을 행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 어떻게 되겠는가? 자신이 올바른 일을 했다고 생각했던 이가 그저 잘못된 관행이었음을 깨닫게 되면 어떻게 되겠는가? 정말 마음이 아프다. 그렇지 않아도 이제 직업 자체가 사라져 직업적 자부심을
잃는 이들이 늘어날 것이다. 국가에서 일자리 창출이 어려운 까닭은 단순하다. 그냥 앞으로 인간의 노동력의 필요성이 줄어들기 때문이다. 인간이 필요한 일이 줄어드니까 강의실 불 끄기 같은 불필요한 일자리나 공무원을 늘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앞으로 직업 자체가 사라지면 평생 그 직업에 종사하던
사람들이 자부심을 잃어버릴 수가 있다. 자유국가에 맞는 도덕이 새롭게 정립되면 자유를 자부심으로 삼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전까지는 의지할만한 어떤 자부심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무엇이 한국인에게 자부심이 될 수 있을
것인가?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자부심을 가질만한 요소들은
모든 한국인이 자부심으로 여기기엔 다소 부족한 점이 있었다. 첫째, 경제발전과 민주주의. 일부 한국인들이 한 것이다. 그것마저도 여러 가지 복잡한 배경이 있기 때문에 온전하게 모든 한국인이 자부심을 갖기는 어렵다. 둘째, 천재. 나는 한글을 사랑하지만 그건 어떤 천재가 만든 작품일 뿐이다. 이외 천재들의 업적도 마찬가지다. 한국인이 해외에서 상을 타거나 인정받는 것은 자랑스러운
일이지만 모든 한국인이 자부심을 느끼기는 어렵다. 셋째, 교육. 교육열도 높고 수준도 높지만 학생들이 행복하지 못하단 말이 있다. 그리고 효율이 낮다는 평가도 있다. 최근 한국 교육의 발전상이 바람직하다. 계속 발전하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아직 자부심을 갖기는 조금 어렵다. 넷째, 역사. 상대적으로 타국을 침략하지 않았던 나라였던 것은 맞으나 조선 말기를 보면 온전하게 자부심을 갖기는
어렵다. 다섯째, 행복. 자살률이 매우 높은 국가다. 행복을 자부심으로 삼기는 어려울 것이다. 여섯째, 미래. 출산율이 매우 낮은 국가다. 자부심 이전에 인구소멸을 걱정해야 해야 할 것이다. 일곱째, 시민의식. 한국 내에서 남의 것을 탐하지 않는 것은 자랑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바가지를 씌우는 관광지를 떠올려보자. 해외에 나가면 가장 조심해야 할 사람이 바로 한국인이라는
말을 떠올려보자. 꼰대, 갑질, 혐오 등. 시민의식으로 자부심을 느끼기엔 발전해야 할 부분이 아직 많다. 경제발전이나 민주주의나 천재 같은 한국인과 관련되어있는 것은 자부심을 가져도 그리 이상한 것은 아니다. 한국의 환경이 그걸 만든 것이니 환경에 포함되어
있는 인간이 자부심을 느낄 수도 있지 않겠는가? 하지만 직접적인 연관이 없는 한 모든 한국인이 온전하게 자부심을 가지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래서 한국인을 비롯한 모든 인류가 인정할만한 어떤 자부심을 가질만한 특성이 있는가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이쯤에서 나는 자부심을 가질만한 것을 찾기 어렵다는 걸 알게 되었다. 한국인의 특성, 그것이 옳건 그르건 전부를 포용할 수 있는 어떤 자부심을 가질만한 요소는 무엇이란 말인가? 한국에 대해 떠올려보았다. 머리 속에 스쳐 지나가면서 그 모습들이 눈 앞에
그려진다. 사랑스러운 모습, 혐오스러운 모습, 똑똑한 모습, 어리석은 모습, 자랑스러운 모습, 한심한 모습, 부끄러운 모습 등. 쭉 떠올려보면서 하나의 공통점을 발견했다. 하나 같이 생명력이 흘러 넘쳤다. 장점이든 단점이든 극단으로 치달을 수 있는 것은
그만큼의 생명력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모든 국가가 놀랄만한 경제성장과 민주주의. 모든 국가가 놀랄만한 낮은 출산율과 높은 자살률. 정말 장단점이 극단적이다. 하나하나 생각해보면 한국인은 무언가를 하면 끝장을 보는 성질을 가지고 있었다. 생명력이 뛰어나다 보니 무얼 해도 극단으로 가버렸던 것이다. 보통 생물의 생명력은 생물체가 생명을 유지하는 힘이다. 하지만 지성이 있는 인간의 생명력은 그저 생명을
유지하는 힘이 아니라 각자 살고 싶은 방향을 끝까지 하는 힘이다. 지성이 단순한 생명력에 방향을 정한 것이다. 그것은 사전적 정의 중 사상적인 측면인 「사물이나 현상의 본질적 기능을 유지하여 나가는
힘」에 가까울 것이다. 인간이 어떤 것을 하고자 하는 힘은 생명력을 기반으로 한다. 생명력이 뛰어나다 보니 놀라운 경제성장과 민주주의와 출산율과 자살률이 가능했다. 경제성장은 성장하고자 하는 힘이 강하니까 상명하복의
유교문화가 만든 무한경쟁 속에서도 살아남아 꿋꿋하게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이다. 민주주의는 자유와 평등을 원하고자 하는 힘이 강하니까 끝없는 투쟁을 하며 이뤄냈던 것이다. 출산율은 이성교제를 부도덕하다 배운 이들이 가진
이성을 혐오하는 힘이 강하니까 이성혐오가 늘어서 그랬던 것이다. 이성혐오가 사회현상이 되어 정치적 영향력까지 끼치게 된 국가가 또 어디 있을까? 이성을 사랑해야 할 힘이 문화를 향하자 세계에 손꼽히는
문화강국이 될 정도가 되는 국가가 또 어디 있을까? 자살률은 죽고자 하는 힘이 강하니까 죽음에 대한 공포를 이겨내고 죽은 것이다. 생명력이 약한 인간은 가는 삶을 유지하면서 살 수 있을 때까지 살다가 죽는다. 그런 사람은 생명력보다는 생존력이 강하다고 해야
한다고 본다. 생명력이 강한 사람은 강렬하게 빛을 발하고 꺼지는
빛처럼 그 힘이 지나치게 강하니까 죽음도 쉽게 결정되었던 것이다. 한국인의 대표적인 문화 중 하나가 빨리빨리 문화다. 뭐든지 빨리 하려고 하다 보니 경솔하다거나 성급하다는 소리를 듣기도 하지만 그만큼 생명력이
넘쳐 흐른다는 근거기도 하다. 사회갈등이 이 정도까지 치달은 국가가 얼마나 있을까? 그만한 생명력이 있기 때문에 거기까지 갈등할 수 있었던 것이다. 갈등을 빚는 상대방을 생각해보라. 그들의 생명력이 얼마나 끈질기고 강인한지 알 것이다. 사상의 차이로 서로를 받아드릴 수 없더라도 생명력
자체는 부정할 수가 없다. 한국은 교육열이 강하다. 얼마나 강하면 좀 자제하라는 소리가 나오겠는가? 한국만큼 발전한 국가도 많지 않다. 발전하고자 하는 힘이 강하니까 그런 거다. 한국은 사이비 종교에 취약하다는 소리가 있다. 어떤 사람이 그걸 믿는다고 결정하면 그 믿는 힘이 너무 강하니까 그랬던 것이다. 조선만큼 유교에 심취한 국가가 어디 있었는가? 유교를 믿자고 결정하자 정말 미친 듯이 파고들었기
때문에 파멸하는 그 순간까지 믿고 따랐으며 그것이 한국에게까지 이어졌던 것이다. 북한 같이 아직까지도 시장을 개방하지 않는 국가가 어디 있는가? 소련이 붕괴됨에 따라 다른 공산국가들은 시장을 개방했음에도
북한은 아직까지도 고집을 피우고 있다. 하나 결정하면 끝까지 보는 성질이 나타난 것 같지 않나. 이외에도 곰곰이 생각해보라. 긍정적인 것도 부정적인 것도 평균 이상이 되는 것은 그만큼 생명력이 뛰어났기 때문이었다. 사실 생명력 자체는 모든 생명이 가진 것이므로 일반적으로는
자부심으로 삼기는 어렵다. 하지만 일정 이상 뛰어나면 그 자체로도 자부심으로 삼을만하다고 본다. 특정 개인이 아니라 공동체 전원이 빨리빨리 라는 문화가 생길 정도로 생명력이 강하다면
충분히 그 공동체의 특성이라 볼 수 있고 그 특성을 자부심으로 삼을 수 있다고 본다. 생명력은 한국에 긍정적인 사람도 부정적인 사람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한국의 특성 중 하나다. 그 특성이 장점과 단점에서 고르게 나타났기 때문에
한국을 냉소적으로 바라보던 한국인조차 건조하게 인정할 수밖에 없는 사실이다. 한국인이 생명력이 강하다는 사실과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간단하다. 지성이 제대로 된 방향만 결정하면 뭐든지 최고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최고가 될 수 있는 소질은 충분히 모든 한국인이 자부심을 가질만하다고 본다. 한국인은 굳이 자부심을 가질만한 것을 찾지 않아도 이미 생물로서 가치 있는 것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화력이 강하니까 화력을 쓸 곳만 제대로 정해두면
팍팍 성장할 수 있다. 모든 한국인이 자유를 찾아 이기적이게 되면 이타주의의 그늘 속에서 펼치지 못했던 올바름에 대한 욕구를 마음껏 펼쳐 사회를 이롭게 만들거라
생각한다. 생명력이 강한 사람들이므로 자유라는 체제에 맞게
도덕이 자리잡으면 그만큼 성장하고 행복해질 수 있는 국가가 될 수 있을 거라 확신한다. 자유를 도덕으로 삼자는 주장은 생각보다 쉽게 받아드려 질 것이다. 자유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때문에 유교를 버리자고 하는 주장은 생각보다
어려울 것이다. 이미 새겨졌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유가 유교의 대척점에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
꾸준히 설득할 수 밖에 없다. 자유와 연상이 연하를 지배하는 것이 올바르다고 가르쳤던 유교가 어떻게 함께 할 수 있겠는가? 자유와 지배가 어떻게 함께 갈 수 있느냔 말이다! 그건 한국의 자유와 중국 공산당의 지배가 함께 갈
수 있다는 망상과 다르지 않다. 모든 국민이 자유를 도덕으로 삼으면 꼰대질과 갑질은 사라질 것이다. 그 외 다양한 사회 악습들도 사라질 것이다. 왜냐하면 타인을 지배하는 것이 부도덕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제 유교는 과거 지배국가의 문화유산으로만 남아야
할 구시대의 유물이다. 부디 그 한국인의 강한 생명력이 자유를 향하길 바라며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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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상가들이 좀 더 분발했으면 내가, 그리고 우리 사회가 행복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지금부터라도 바꿔야겠지요. 이제는 체제에 맞는 도덕이 필요합니다. 노력하면 노력할수록 불행해지는 사회. 도덕이 문제의 원인이라면 그렇게 되어버립니다. 도덕 때문에 꼰대나 갑질 같은 것으로 불행했던 사람은
사회의 도덕 때문에 불행했던 것이지요. 자연스러운 연애욕구로 허용하여 어려서부터 제 짝을 찾아 20대 초중반에 결혼을 했다면 이성혐오가 판을 칠 수 있었겠습니까? 전부 도덕으로 인한 문제입니다. 이제는 옳고 그름을 자유국가에 맞게 바꿔야 합니다.
좀 더 정리해보려고 했는데 그냥 올립니다. 지금 새로운 도덕에 대해 정리 중에 있습니다. 주장하는 자가 누구든 그것이 정녕 옳다면 받아드려
질 거라 생각합니다. 앞으로 어떻게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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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무엇을 위해 희생을 해야 하는가? (0)
2020/09/21 AM 12:55 |
무엇을 위해 희생을 해야 하는가?
왕정국가는 왕을 위해 희생하고 종교국가는 신을 위해
희생한다. 그렇다면 민주국가는 누구를 위해, 무엇을 위해 희생을 해야 하는가? 민주국가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 중 하나가 바로 이것이다. 하지만 이 문제는 공공연하게 논의하기가 어렵다. 누가, 왜, 무엇을 위해 희생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 논의를 한다고 가정해보자. 어떤 반응이 일어나겠는가? 왜 국민을 희생시킬 생각을 하느냐는 반발이 일어날
것이다. 누군가의 희생이 필요하다는 것, 그리고 이미 일상적으로 희생을 하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말이다. 잠시 희생의 사전적 정의에 대해 알아보겠다. 「다른 사람이나 어떤 목적을 위하여 자신의 목숨, 재산, 명예, 이익 따위를 바치거나 버리거나 빼앗기를 것을 뜻한다.」 희생은 크게 세 가지로 나뉜다. 첫째, 하고 싶어서 자발적으로 한다. 둘째, 하기 싫지만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한다. 셋째, 하기도 싫고 필요도 없다고 생각하지만 강제로 하게 된다. 지금까지는 보통 셋째로 강제로 희생을 당했다. 피지배자들은 언제나 지배자들에게 자신의 것을 빼앗겼다. 전쟁이 나면 끌려 나와 왕의 검이나 방패가 되어
싸우다 죽었다. 천재지변이 일어나면 제물로 바쳐져 신의 분노나 민중의
분노를 달랬다. 왕과 신을 위해 생명과 재산을 빼앗기는 것은 일상적인
일이었다. 신분사회는 이런 희생이 강요되었다. 정복자의 논리로 노예가 된 이들은 하루 종일 일을
하고도 제대로 된 대가를 받지 못했다. 평민들의 처지도 좋은 것이 아니었다. 남성은 평생 일만 하다가 죽었고 여성은 평생 집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죽었다. 먹고 사는데 급급했던 그들에게 꾸밈은 사치였다. 힘이 약한 여성에겐 보다 더 가혹했다. 여성은 종종 씨받이란 이름의 아이를 낳는 도구로
활용되기도 했다. 공녀로 팔려나갔다. 과부는 재가도 하지 못했다. 그들은 당시 인간으로 대접을 받지 못했다. 이런 천대는 최근까지 이어졌었다. 얼마나 천대받았으면 남아선호사상이 판을 쳐서 수많은
여자아이들이 낙태를 당했겠는가? 지금이야 그런 문화가 대부분 사라졌다. 오히려 여자아이가 태어나면 기뻐하는 사람들도 많다. 하지만 그 잔재는 여전하다. 유교문화가 남아있지 않는가? 여성주의로 인한 사회적 갈등은 사실상 남성사회의 질서를 유지하던 유교문화가 만든 셈이다. 여성은 남편을 섬겨야 한다고 가르쳤던 것이 유교였다. 섬김의 뜻은 다음과 같다. 「윗사람을 잘 모시어 받들다.」여성은 남성의 아랫사람이라 전제하고 가르쳤던 것이다. 유교는 백성을 지배하고 연하를 지배하고 여성을 지배하는데
사용된 교리이며 학문이며 도덕이었다. 이 질서에 여성은 천대받고 차별 받았다. 여성차별의 본질은 남성보다 힘이 약하다는 것에 있다. 여성의 힘이 약했기 때문에 남성사회가 되었다. 그 남성사회의 질서를 유교가 유지했던 것이다. 그랬던 과거와 달리 지금은 과학의 힘으로 무력(총)과 생산성(기계)이 거의 비등해졌다. 역할에 따라 여성이 더 우수한 분야도 많은 상황이 되었다. 여성이 차별 받았던 근거가 사라진 것이다. 여성은 과학 덕분에 인권이 올라간 셈이다. 그렇게 올라간 인권으로 평등사회가 만들어지고 있다. 되려 역차별 논란까지 나올 정도다. 그런 평등사회를 이룩하는 과정 속에서 유교는 걸림돌이
되었다. 과거 불평등했던 국가의 도덕이 관습으로 남아 사회적
불평등을 초래했던 것이다. 집안일, 명절, 혼수, 징병 등의 불평등은 과거 문화가 만든 잔재들이다. 여성주의자들이 가장 먼저 했어야 하는 것은 여성의 권익이나 남성혐오가 아니라 유교문화
철폐였음을 분명히 하고 싶다. 유교문화가 만든 폐해로 나타나는 차별 몇 가지를 바꾼다고 해서 평등사회가 오는 것이 아니다. 평등사회를 바란다면 유교 자체에 문제가 있음을 인식하길 바란다. 일제의 침략에 대한 반발로 조선이 미화되다 보니
이런 문제들에 대한 해결이 이루어지지 못하는 것 같아 안타깝다. 당시 조선왕조나 일본제국이나 피지배자들에게는 역겨운 지배자들이었다. 알아볼수록 조선말기를 옹호할 수가 없더라. 민주국가에서 굳이 누가 낫네 다투지 말고 미래로
갔으면 좋겠다. 과거에 얽매여서 조선미화를 하다가는 한국의 발전도
하지 못하게 되니까 말이다. 일본과의 갈등은 철저하게 현재의 시각으로 봐야 한다. 연좌제가 허용되지 않는 이상, 그들의 잘못은 과거에 있는 것이 아니라 현재 과거의 잘못을 외면하려는 것에 있기 때문이다. 참. 조선왕족들이 일본의 귀족이 된 것을 보면 참 할말이 없다. 언제나 그랬다. 지배국가에서는 약자를 희생시키고 강자가 호의호식을
했다. 내가 분노하고 내가 동정하는 것은 조선의 기득권이
아니라 그 시대 피지배자들이다. (일부 현명한 기득권도 있긴 하다.) 이처럼 과거의 피지배자들은 이외에도 말도 못할 정도로 많은 것들을 희생당해왔다. 인간의 사회는 누군가의 희생 위에 성립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어느 체제, 어느 제도도 누군가의 희생은 필연적이다. 당장 한국도 과거 한국인의 희생을 발판 삼아 성장하지
않았던가? 세계의 지원, 미국의 지원이 있었다고 해서 그들의 희생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경제의 성장도 학문의 성장도 민주주의의 성장도 전부
희생을 발판 삼아 성장했다. 사건사고들이 발생해도 국민들이 희생해서 극복했다. IMF가 터지자 국민들이 손수 금을 모아 국난을 극복하는데 큰 도움을 줬다. (대기업의 배를 불려줬다는 비판이 있다. 누군 희생을 하고 누군 이익을 얻고.) 태안에서 삼성1호와 허베이 스피릿호의 충돌로 인한 원유 유출 사고로 태안 앞바다가 기름으로 뒤덮이자
연 100만명에 가까운 자원봉사자가
찾아가 수작업으로 기름때를 제거해 생태환경을 복원하기에 이르렀다. 이외 다양한 사건사고들을 보라. 국민들이 희생해서 극복한 사례가 많다. 그러니 한국만큼 희생의 중요성을 모르는 국가는 없을 것이다. 사회질서를 준수하는 것, 세금을 내는 것 등 공동체에 속하게 되면 공동체를
위해 자연스럽게 희생하게 된다. 의료보험도 마찬가지다. 세금으로 운영되는 의료보험은 개인보다는 공동체를 위해 존재한다고 본다. 자신을 위해 내는 보험비가 결과적으로 건강한 사람이 희귀병이나 중병을 앓고 있는 사람의
의료비로 사용된다. 공동체를 위한 희생이다. 지금까지의 이런 희생은 지금까지는 어느 정도 관습적인 측면이 있었다고 본다. 지배국가였던 시대의 관습으로 희생을 강요당했던 사람들이 많았을 거란 얘기다. 사고 치는 사람 따로 있고 책임 지는 사람 따로
있고. 이거 어디서 많이 본 그림 아닌가? 지배국가에서 늘 일어나던 일이다. 그러나 이제는 그런 것도 점차 사라지도 있다. 그 어떤 것도 희생하지 않겠다며 나선 여성주의자들의
주장을 보라. 꾸밈, 결혼, 임신 등 조금이라도 손해를 볼 것 같으면 전부 거부하고 있다. 그것에 반발한 남성들 또한 희생할 수 없다며 군
징병과 징용을 비판하고 있는 상황이다. 결혼을 거부하고 징병을 거부한다. 출산율이 줄어들고 이민이 증가한다. 온갖 단체들이 제 이익만 요구하는 집단 이기주의를 보이고 있다. 국민들이 희생을 거부하자 희생 위에 서 있던 공동체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지배국가처럼 강제로 희생할 수 없게 된 이상, 자유국가처럼 모두가 조금씩 자유롭게 자발적으로 희생을
해야 하는데, 그걸 하지 않으니까 지금 국가가 흔들리고 있는 것이다. 한국은 지금 애국심을 고취시킬 수 있는 소식으로
아슬아슬하게 버티고 있는 중이다. 사상누각. 사회의 수많은 문제는 지배국가의 문화를 관습적으로
무분별하게 수용했기 때문이다. 도덕, 가치관, 자발적 희생의 이유. 이 세 가지를 민주국가에 맞게 재정립해야만 기초가
튼튼한 민주국가로 거듭나게 될 것이다. 지금 어떤 정권이든 개혁을 하면 반발이 나오고 있다. 왜 그런 걸까? 그건 일괄적으로 손해를 전부 거부하고 있기 때문이다. 올바른 정책을 시도하면 부당한 이익을 취해왔던 이들이 손해를 본다. 그릇된 정책을 시도하면 정당한 이익을 취해왔던 이들이
손해를 본다. 뭘 하든 누군가는 손해를 보게 되어 있다. 손해 자체에 초점을 맞추면 어떤 개혁이든 반발이
일어나 지지율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그 반발 때문에 개혁이 늦춰져 국가발전에 해가 되고 있다. 일부 집단의 이익 때문에 모든 공동체의 구성원이 손해보고 있는 것이다. 이제는 상황에 따라 손해도 받아드릴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어야 한다. 그걸 못하면 민주국가는 발전하기 어렵다. 예컨대 일부 집단의 이익 때문에 인공지능과 로봇을
거부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냥 뒤쳐지는 거다. 독재국가야 밀어붙여서라도 발전할 수 있겠지. 근데 민주국가는 그게 안되지 않나. 국가가 쇠퇴하는 거 특별한 이유로 발생하는 게 아니다. 국가의 변화가 멈추면 그 나라는 쇠퇴하게 되어 있다. 진작 조선이 중국이 세계의 중심이라는 생각에서 벗어나 세계를 떠돌며 문물을 접하고 성장했었다면
식민지배라는 치욕을 겪지는 않았을 것이다. 역사를 아는 한국인이라면 결코 변화를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그것이 설령 손해를 준다고 해도 말이다. 한국은 희생으로 성장했고 희생을 거부해서 흔들리고 있다. 이제는 더 이상 국가를 위해 희생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누군가의 희생은 반드시 필요하다. 그 누군가는 모든 국민에 해당되는 일이다. 연령, 성별, 학력, 지위 등 관계없이 모든 국민은 민주국가에 살고 있는 이상 자발적인 희생을 각오해야 한다. 그게 국가의 주인이 할 일이다. 그러지 않으면 공동체는 무너질 수밖에 없다. 제 이익만 챙기는 공동체가 어찌 유지될 수 있겠나. 그런 공동체는 사분오열로 무너지고 말 것이다. 희생은 국가존립과 발전이 걸려 있을 정도로 중요한
문제다. 그렇다면 어떻게, 누가, 무엇을 위해 희생을 해야 하는가? 이번에는 이 주제로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그럼 시작하겠다.
답을 먼저 말하겠다. 민주국가에서 희생은 나를 위해서 희생을 해야 한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위해서 희생을 해야 한다. 왕조국가가 왕을 위해서 희생하고 종교국가가 신을
위해서 희생한다면 민주국가는 나를 위해서 희생해야 한다는 것이다. 일견 이해가 되지 않을 수가 있다. 다음 두 가지 물음을 가정하고 진행해보자. 첫째, 그게 무슨 희생이라 할 수 있나? 둘째, 자신을 위한 희생이 공동체에 도움이 되겠는가? 먼저 첫째의 물음에 대한 답을 적어보겠다. 희생은 다른 사람이나 어떤 목적을 위하여 자신의 것을 바치거나 버리거나 빼앗기는 걸 뜻한다. 요는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위해 자신의 것을 바치는
것 또한 희생의 하나라는 것이다. 한국을 좋아하는 유학생이 있다고 가정하자. 그 사람이 한국을 사랑하여 해외의 좋은 일자리를 마다하고 한국으로 와서 일을 하는 것을 희생이라고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애국심이라. 많은 사람들이 애국심을 비판하는 것은 그걸 빌미로
희생을 강요했기 때문이다. 국가를 위해 희생하라고 강요하니 애국심에 진절머리가 난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희생기피는 주로 이것 때문이었다. 그것과 별개로 스스로 국가를 사랑하여 희생하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세뇌하지 않는 이상 말이다. 국가를 위해 민족을 위해서라는 명분으로 자폭테러
하는 사람들을 보면 과연 그 희생이 자발적이었는가 의문이 든다. 아이에게 폭탄을 건네줘서 자폭하라는 건 아마 자발적이지는 않을 것이다. 인류애가 충만한 사람이 있다고 가정하자. 그 사람이 기아에 허덕이는 아이들을 가엾게 여겨
아프리카에 가서 먹이고 재워주는 것을 희생이라고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동물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고 가정하자. 그 사람이 길거리에 돌아다니는 동물들을 어여쁘게 여겨 자신의 시간과 돈을 사용해 그 동물들을
돌봐주는 것을 희생이라고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개인적으로 해외보다 한국을, 동물보다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더 중요한 것이 아닐까 싶긴 하지만 강요할 수는 없다. 그들의 의지로 그들이 희생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래도 이해가 안 된다면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위해
쏟는 시간과 열정과 자본을 떠올려보자. 아이돌을 좋아해서, 취미를 좋아해서 정신적 이득과 물질적 손해를 보는 것도 자신을 위한 희생이다. 다음은 둘째의 물음에 대한 답을 적어보겠다. 공동체 성립을 위한 희생은 공동체를 위한 희생이 되어야 하는데, 자신을 위한 희생이 과연 얼만큼 공동체에게 이익이
되겠는가? 그런 의문이 들 수 있다. 이기적인 사람과 이기적인 집단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희생을 한다. 사실 그런 희생은 공동체에 큰 도움이 안 된다. 오히려 해가 되는 경우가 많다. 하청업체나 비정규직을 외면하고 자신들의 이익만 챙기는 노조가 있다고 가정하자. 이성을 혐오하고 증오하는 평등주의자가 있다고 가정하자. 그들의 희생이 사회에 얼마나 도움이 되겠는가?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게 별로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어떤 개인이나 집단도 이기적인 주장을 할 수 있다. 노조나 여성주의자가 비판을 받는 것은 그들의 이기적인
주장 때문이 아니다. 그들의 주장을 용인한 사람들과 허용한 정치가들 때문이다. 그런 이기적인 주장이 정책으로 이어지고 법률로 제정되니까 사회논란이 발생했던 것이다. 특히 젊은 남성이 분노하는 것은 여성에 대한 편애로
소외 받은 것이 크다고 본다. 사실 모든 인간은 소외 받으면 상처받고 슬퍼한다. 유치원생이 간식거리 못 받아서 우는 거나, 노인이 간식 못 받아서 삐치는 건 비슷하다는 거다. 너그러움이나 이해심은 사람마다 편차가 있는 거지, 연령이나 성별은 관계가 없다. 어떤 행동도 이걸 전제해야 한다. 여성정책을 내놓으면 아, 남성들이 소외 받고 상처받을 수도 있겠구나, 청년정책을 내놓으면 아, 장년들이 소외 받고 상처받을 수도 있겠구나. 반대의 경우도 동일하다. 이는 다수의 공동체 구성원이 주관에서 벗어나 객관적 시각을 갖춰 이해를 통한 납득이 가능해질 때까지 언제나 염두 해둬야 할 것이다. 잠시 이기적과 이타적에 대해 이야기를 해보겠다. 이는 크게 세 가지로 나뉜다. 하나, 이타적인 이유로 이타적인 행위를 하는 것. 둘, 이기적인 이유로 이타적인 행위를 하는 것. 셋, 이기적인 이유로 이기적인 행위를 하는 것. 여기서 하나는 주로 희생을 강요당할 때 발생한다. 이타적이란 자기의 이익보다 다른 이의 이익을 더
꾀하는 걸 뜻한다. 그런데 자유의지를 가지고 남을 위할 때에는 자신의 이익보다 다른 이의 이익이 더 커질 수가 없다. 이익이란 물질과 정신의 보탬이 되는 것을 뜻한다. 내 의지로 남을 위하는데 어찌 남의 이익보다 더
커질 수가 있겠는가? 자유의지로 남을 위해서 하는 행동은 내가 겪는 손해보다 내 정신적 만족도가 더 크니까 하는 거다. 국가를 위해 자발적으로 희생하는 거나, 아프리카 아이를 위해 자발적으로 희생하는 거나, 길거리 동물을 위해 자발적으로 희생하는 거나, 정신적 만족도가 크기 때문에 하는 거란 말이다. 그게 아니라면 누가 강요했거나 세뇌 당한 것뿐이다. 누가 강요하거나 세뇌했으니까 자신의 의지가 아니므로
남을 위해서 행동하게 된다. 그게 바로 이타적인 이유로 이타적인 행위를 한다는 것을 뜻한다. 여기서 둘과 셋은 자유의지로 희생할 때 발생한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희생한 것이므로 자유의지를 갖고 있다고 봐야 한다. 단지 그 결과의 차이가 있다.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위해서 행동한 것이 다른
이의 이익에 보탬이 된다면 이기적인 이유로 이타적인 행위를 한 것이 된다. 반면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위해서 행동한 것이 다른 이의 이익에 보탬이 되지 않는다면
이기적인 이유로 이기적인 행위를 한 것이 된다. 일반적으로 둘을 이타주의자라고 하고 셋을 이기주의자라고 인식해도 무방하지만 하나의 예가 있으므로 굳이 따지면 구분 지어야 할 것이다. 여기서 둘은 보통 자유주의 국가가 하는 희생이다. 분명 자유국가가 한국전쟁에서 피를 흘리며 희생한
것은 온전히 한국의 이익만을 위해서는 아니었다. 미국이 한국을 위해 물적 인적 지원을 했던 것은 온전히 한국의 이익만을 위해서는 아니었다. 한국에서 필사적으로 도움을 요청했고, 그 요청을 받아드린 것도 그들에게 이익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이념전쟁, 이념경쟁. 하지만 그것이 바로 이기적인 이유로 이타적인 행위를
한다는 것이다. 한국을 도왔던 것은 그들의 이익에 해당되었지만 그들의
이익이 한국에겐 매우 큰 이익이 되었다. 하고 싶어서 한 것이 이타적인 행위가 되는 것. 그게 바로 자유주의자의 희생방식이다. 다시 돌아와 자신을 위한 희생이 공동체에 도움이 되기 위한 방안에 대해 이야기를 해보자. 그 자발적인 희생이 공동체에 도움이 되기 위해서는 그 희생이 이기적인 이유로 이타적인
행위를 하는 것인지, 아니면 이기적인 이유로 이기적인 행위를 하는 것인지를 분명하게 구별해서 용인유무를 결정해야 한다. 그러니까 하청업체나 비정규직도 대변하고 사회와 기업까지
고려하는 노조가 되어야지 귀담아 들을 가치가 있다는 것이고, 이성을 증오하고 혐오하는 평등주의자가 아니라 사랑하고 포용하는 평등주의자가 되어야 귀담아 들을 가치가
있다는 것이다. 무언가 이익과 정의를 주장할 거면 그것을 위한 희생과
더불어 공동체에 이익이 전제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무작정 혐오하고 증오하는데 어찌 공동체에 이익이 될 수 있겠나? 기업을 혐오하고 기업의 편을 드는 노동자를 혐오하는 이들이 있다. 이들의 주장이 공동체에 이익이 되겠는가? 남성을 혐오하고 남성과 가까이 지내는 여성을 혐오하는
이들이 있다. 이들의 주장이 공동체에 이익이 되겠는가? 혐오로 가득 찬 이들의 이기적인 의견은 굳이 귀담아
들을 가치가 없다. 그들은 증오와 혐오를 정의의 도구로 만들어 서로를 할퀴고 상하게 만들었다. 공동체 외부에 대한 혐오와 증오도 바람직하지 않지만 공동체 내부에 대한 혐오와 증오는
보다 더 끔찍하다. 그렇다고 그들의 행동이 아예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다. 지금까지 과거 기업과 남성의 횡포가 어마어마하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언제까지 과거에 얽매일 셈인가? 여성이 차별 받는 것은 성별 관계 없이 모두가 협력해야
할 문제라고 말하니 왜 남성들과 협력해야 하냐며 거부하는 댓글을 봤다. 그리고 그 댓글을 지적하는 여성은 없더라. 정말 끔찍하다. 과거에 속박될수록- 과거의 불행에 집착할수록 현재와 미래는 불행해진다. 불행했던 과거를 들춰내며 감성을 자극해 서로를 공격하여
불행에 빠지지 말고 이성적으로 가능한 모두가 행복할 수 있는 길을 찾았으면 좋겠다. 제발 미래로 갈 수 있으면 좋겠다. 그래. 사실 나도 모른다. 난 한국기업이 국민들을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최근엔 모르겠는데 IMF 때만 해도 제 이익만 챙기다 끝나지 않았나. 누구 말마따나 국민들을 개돼지로 여기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제 이익만 챙기던 조선 기득권들의 전철을 밟지 않기를
바란다. 자유주의의 목적은 모든 인간의 자유다. 모든 인간이 정부, 자본, 의식주 등에서 자유롭게 자신의 능력을 갈고 닦아 인류의 발전에 공헌하는 것이 바로 자유주의가
추구하는 성장이다. 모든 인간이 자유롭게 능력을 발휘하여 사회를 행복하게 만드는 것이 바로 자유주의가 추구하는 행복이다. 자유주의는 말 그대로 인간의 자유의지에 최대한 맡기는
걸 의미한다. 알아서 잘 할게요. 라고 말하는 아이와 비슷하다. 반면 사회주의는 인간의 자유의지로 스스로를 통제하는
게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는 정부에게 그 통제를 맡기는 걸 의미한다. 알아서 못하겠으니 시키는 데로 할게요. 라고 말하는 아이와 비슷하다. 스스로 빈부격차도 사회의 갈등도 혼란도 불행도 통제 불가능한 사람들의 도피처가 바로 사회주의다. 간단히 말해 미숙하다. 신분에 지배로 통제 당하던 사람들이 주어진 자유를
감당하지 못하고 다시 한번 정부에게 통제해달라 바라는 것이 과연 제대로 된 진보인지 묻고 싶다. 사회민주주의는 민주적인 절차로 통제해달라 요구하는 것이고 공산주의는 폭력적이고 독재적인
방식으로 강제로 통제해 버리는 것이다. 이건 자유롭게 날던 새가 다시 새장으로 들어가는 모양새. 자신의 의지로 새장에 들어가는 것은 자유지만 그것은 미숙한 자유다. 자유방임주의는 제멋대로 구는 아이 같은 미숙한 자유고
사회민주주의는 자발적으로 시키는 데로만 하겠다는 아이 같은 미숙한 자유다. 흔히 공산주의가 이상이라고 하는데, 그보다 더 이상적이고 추구해야 하는 것이 바로 자유주의다. 공산주의 같은 독재체제는 독재자만 잘하면 되지만
자유주의 같은 민주체제는 모든 국민이 잘해야 되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자유주의가 사회주의보다 낫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서는 스스로 통제할 수 있다는 걸 보여줘야
한다. 지배는 결코 자유주의가 될 수 없다. 지배자의 자유는 이미 독재자가 잘 보여주고 있으니까. 누굴 지배하고 싶으면 합의하에 플레이로 즐겨라. 혈통의 지배로부터 자유롭기 위해 자유를 외치던 자본주의자들이
혈통지배자들과 마찬가지로 자본지배를 할 것이 아니라 다른 자유주의자들과 같이 자유를 외치고 자유를 위해 살았으면 좋겠다. 이것이 나의 희망이다. 나는 남성들이 여성들을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여성들을 사랑한다면 최소한 여성혐오로 얼룩진 사람들을
비판하고 그들의 주장에 선동되지 말아야 하는 것 아닌가? 가만 보면 이기적인 여성주의자를 공격한다는 명분으로 모든 여성을 싸잡아 공격하는 것에 휘말려 같이 욕하고 있다. 일부 여성의 감성을 비난하는 이들이야말로 감성적인
대응을 할 때가 있었다. 일부 여성의 남성혐오를 비판하고 싶다면 여성혐오를 하는 사람들도 비판해야 한다고 본다. 남자와 여자, 젊은이와 늙은이, 부자와 빈자 등 모두가 사랑할만한 가치가 있는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다. 이것이 나의 희망이다. 자신을 위한 희생이 공동체에 도움이 되기 위해서는
공동체의 도움이 되는 희생을 하는 사람과 집단을 존중하고 아끼고 그들의 주장에 귀를 기울이면 된다. 간단한 예로 자발적으로 군복무를 하고 자발적으로 아이를 낳는 그런 사람들을 존중하면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어떤 이익이나 정의를 요구하면서 그걸 위해
어떤 희생을 하고 그 희생으로 공동체에 이익이 된다는 걸 주장하는 이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면 된다는 것이다. 어떻게 된 게 정의를 주장하면서 어떤 손해도 감수하지
않겠다는 이야기를 할 수 있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권리를 달라, 그러면 어떤 책임을 지겠다. 또는 그건 잘못된 거다, 나도 잘못된 걸 하지 않겠다. 그런 식의 주장이 나와야 하는 것 아닌가? 가령 여성이 입사와 진급에 차별을 하지 말라달라고 주장한다면, 힘들고 고된 일도 같이 한다고 해야 하는 거다. 오지 파견도 당직도 평등하게 말이다. 가령 갑질에 불만을 느낀다면 꼰대질도 하지 말아야 하는 거다. 회사에서 갑질당해서 술 마시고 집에 들어와서 아이들에게
꼰대질을 하는 걸 보면 답답하다. 어른에게 꼰대질 당해서 욕하고 서비스직종에게 갑질하는 것도 답답하다. 기업이 규제가 강해 성장에 해가 된다고 주장할거면 규제를 풀어줬을 때 상응하는 희생을
통한 공동체 이익을 제시했어야 했다. 노동자가 CCTV감시가 인권에 침해된다고 주장할거면 알아서 일을 잘해서 생산성을 높였어야 했다. 이익이든 정의든 어떤 주장을 할거면 그걸 위한 희생을 각오해라. 그리고 그런 각오가 되어있는 이들의 주장에 귀를
기울이면 되는 거다. 이런 사회적 인식변화와 그걸 토대로 한 제도적 변화가 이루어지면 자연스럽게 공동체를 위한 자발적인 희생이 이어질 것이다.
그런데 이런 자발적인 희생은 사실 바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미워하는 상대를 위해 희생하고 싶어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아무리 공동체를 위해 희생하는 이들을 존중한다고
해도 서로를 미워하는 한 매우 어려운 일이라는 것이다. 노사가 서로를 혐오하는데 손해라는 희생을 감수하고 서로를 위한 타협이 가능할까? 이성을 혐오하는데 이성의 권리증진에 찬성하는 사람이 있을까? 군대에 가서 비리와 부조리를 보며 애국심이 사라졌다는
사람들이 많다. 나라를 사랑한다는 마음가짐으로 징병이란 희생을 감내하고
있었는데 그게 사라지고 말았단 얘기다. 자발적인 희생을 하게 하기 위해서는 사랑할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해야 한다. 물론 사랑하지 않아도 필요에 의해 희생할 수 있다. 그러나 거짓으로 한 행동의 끝은 그리 좋지 못한
법이다. 반드시 탈이 나게 되어있다. 이런 것처럼 자발적 희생의 기피는 사실 애정결핍이
낳은 현상이다. 지배국가에서 하던 강제로 하던 희생에서 자유국가에서
하는 자발적인 희생으로 바뀌었으니 하고 싶어야만 희생을 하게 되는데, 하고 싶지 않으니까 하지 않게 되는 거다. 그리고 그 애정결핍은 지배국가의 도덕과 가치관에 영향을 받았음을 강조하고 싶다. 연령으로 위아래를 정해 복종하는 질서를 만들고(장유유서), 직종에 따라 신분을 나눠 차별하는(사농공상) 그런 조선의 문화를 물려받았으니까 나이로 차별하고
직업으로 차별하는 거다. 한국은 지배국가의 차별하는 문화를 물려받고 자유국가의 자유롭고 평등한 이념을 전수받았다. 그게 얼마나 재미있는 현상들을 초래했는지에 대해 잠시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어떤 집단을 분석할 때, 그 집단이 어떤 행동원리를 가지고 있는지 알게 되면
이해가 가능해진다. 첫째, 경쟁. 둘째, 발전. 셋째, 민주주의. 넷째, 문화. 다섯째, 적폐. 첫째인 경쟁은 상명하복의 유교문화에 평등한 민주주의
체제가 도입되었기 때문에 발생하였다. 평등한 체제기 때문에 대부분 능력만 있으면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문화는 상명하복이라 상대적으로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이 낮은 위치에 있는 사람을
지배할 수 있었다. 표면은 민주적이기 때문에 대놓고 하지는 못해도 은밀하게 상하를 나눠 차별하게 되었다. 그 현상이 바로 갑질과 꼰대질이다. 경쟁에서 패배한 사람은 피지배자로 전락할 우려가 있기 때문에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하게 되었다. 왜 과열경쟁이 발생하게 되었는지 알겠는가? 지배 받고 싶은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그러니까 노력한 것이다. 지배 받기 싫으니까. 뭐 개중에는 지배하고 싶어서 노력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어떤 학생이 행복하기 위해 노력을 왜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며 고민을 토로했다고 한다. 행복을 위해 좋은 대학을 가고 좋은 직장에 취업하라고 하는데 그런 노력을 해야 할 이유를 모르겠다고 토로한 것이다. 이에 대한 답은 각자 다를 것이나 나는 두 가지를
지적해보겠다. 하나는 보상의 한계가 있다는 것. 아무리 노력해도 급여만으로 집을 사기도 벅찬 세상
속에서 노력의 의미를 찾지 못하겠다는 것이다. 둘은 애초에 노력하는 까닭이 행복하기 위해서 노력하는 게 아니었다는 것. 행복을 위해서 노력한 것이 아니라 불행하지 않기 위해서 노력했던 것이다. 하나는 굳이 자세히 설명하지 않아도 알 것이다. 자산가가 얻는 잉여가치가 늘어날수록 빈부격차는 커지게
되어있고 후발주자는 노력대비 얻는 보상이 점점 줄어들게 되어있다. 이는 게임에서 올드비(고인물)과 뉴비(청정수) 문제를 대입해보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뉴비가 아무리 노력해도 올드비 서브 캐릭터 하나
이기지 못한다. 쌓아 올린 재화의 차이가 극심하기 때문이다. 그런 상황에서 올드비가 뉴비를 지원하는 걸 반대하면
뉴비는 얼마 있지 않아 그만둬버린다. 현실에서는 출산율이 줄어들고 청년들이 노력하지 않거나 사는 걸 그만둬버린다. 둘도 앞서 이야기한 걸로 알고 있을 것이다. 지금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하는 것은 행복하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다. 불행하지 않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이다. 사회구조상 남들보다 위에 서야 지배 받지 않기 때문에
경쟁에서 패배하면 지배 받는 걸 좋아하는 일부를 제외하면 불행해질 수밖에 없다. 본질을 잘못 보고 행복을 위해서라는 명분으로 노력을 강요 받자 그 의미를 알 수 없어
헤매게 된 탓에 노력을 해야 할 이유를 찾게 된 것이다. 남들보다 위에 서야 불행해지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은 달리 말해 그 나머지는 전부 일반적으로 불행한 상황이란 얘기가 된다. 우리 사회가 불행으로 가득 찬 까닭은 거기에 있다. 과열경쟁은 유교의 불평등한 사상 때문이었고 그 덕택에
인재들을 쥐어짜서 우수한 결과를 냈지만 그만큼 불행한 사람들로 가득 찬 사회가 되었던 것이다. 둘째인 발전 또한 유교의 영향이 크다고 본다. 유교는 장유유서라는 상명하복의 질서를 올바른 도리로
만들었다. 그러다 보니 국가 전체가 군대인 것처럼 체계적으로
움직이게 되었다. 맨 위에 있는 사람이 방향만 제대로 가리키면 군말
없이 따랐기 때문에 지금까지 끊임없이 발전했었다고 본다. 군대에 가면 철이 든다는 소리는 군대에 가야 유교가 만든 상명하복의 질서에 적응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한강의 기적은 국가가 군대처럼 움직였기 때문에 가능했다. 하지만 그건 자유롭지도 않고 평등하지도 않고 행복하지도
않다. 그리고 잘못 가리키면 중국의 제사해 운동이나 문화대혁명과
같은 일이 벌어질 수도 있다. 시키는 데로 군말 없이 다하니까 그런 현상이 일어날 수 있는 것이다. 유교를 적폐로 몰아 문화대혁명으로 지웠다는 얘기도 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형식상에 불과하다고
본다. 공산당에 복종하는 그 행태를 보면 본질은 바뀌지
않았다. 유교를 대체할 새로운 도덕이 있지 않는 이상 본질은
바뀌지 않는다. 한국도 유교를 버렸지만 유교가 만든 문화는 남아있지
않는가? 미국의 커티스 르메이가 일본을 공격할 때 한 말이
있다. 무고한 민간인은 없다. 일본은 모든 국민이 전쟁물자를 만들기 위해 동원되고
있었다고 한다. 스즈키는 볼트, 하루보노는 너트, 키타가와는 공장에서 조립한다. 상명하복이 일상화된 국가에서는 모든 민간인이 전쟁의
도구로 활용된다는 얘기였다. 한국, 중국, 일본 모두 상명하복의 유교문화가 자리잡은 국가답게 전체주의적으로 움직인 경험이 있다. 지금은 조금씩 개선되고 있지만 그 잔재가 남아 국가와
세계를 혼란케 하고 있다고 본다. 유교문화권은 분명 군대 같은 체계적인 움직임으로 빠른 발전을 했지만 그 만큼 불행이 겹겹이 쌓여있는 국가들인 것이다. 셋째인 민주주의는 적이 있기 때문에 가능했다. 중국은 공산당에 복종하고 일본은 자민당에 복종한다. 상명하복의 유교문화권은 기본적으로 윗사람에게 복종하는
게 올바르기 때문에 민주주의가 발전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서 한국은 민주주의가 발전할 수 있었는가? 사실 한국도 보면 민주주의가 발전할 수가 없었다. 상명하복. 윗사람에게 복종하게 되어있는데 어떻게 발전할 수 있나? 그런데 발전했다. 어떻게? 그건 적의 존재가 있기 때문이었다. 프랑스 시민혁명을 부르주아 혁명이라 일컫는 사람들이 있다. 부를 축적한 부르주아가 사회 주도층이 되기 위해
프롤레타리아를 선동하는 것으로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한 반박이 있다. 프롤레타리아는 사상가 장 자크 루소의 영향을 받아 자신의 의지로 혁명에 가담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질문이 하나 있다. 그 장 자크 루소의 사상을 전파할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한 것은 누구겠는가? 현대와 같이 인터넷도 있는 상황이 아니니 쉽게 정보
전달이 되는 것도 아니다. 자유와 평등의 가치를 시민들이 배우게 된 그 배경에는 부르주아의 지원이 있었다고 본다. 물론 그들의 이익을 위해서였겠지만. 만약 부르주아가 왕족과 귀족과 사이가 좋았더라면 시민혁명이 일어나기 어려웠으리라 생각한다. 한국도 마찬가지다. 3.15 혁명은 학생운동으로 시작했다. 그렇다면 그 학생들에게 민주주의의 가치를 알려준
사람들은 누구였겠는가? 이승만은 반공 반일 친미(미국을 경계했으나 기본적으로)로 외교적이나 이념적 문제가 발생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그는 정적을 공산주의자로 몰아 공격하며 독립운동가와 지식인들의 반발을 사게 되었다. 정치권력을 위해 친일파를 비호하는 일도 서슴지 않았다. 한국정부 단독수립이라는 같은 뜻은 지녔던 이들(윤보선)마저 등을 돌릴 정도였다. 사소한 것 하나하나 자신이 결정해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에다가 그의 측근(윤치영) 또한 나폴레옹과도 같은 독재적 지도자가 되길 권했던
것을 보면 권력을 위한 부정선거는 필연이었을지도 모른다. 이런 상황에서 부정선거가 발각되자 학생들이 앞장서는 시민혁명이 발발했다. 그 학생들의 배경에는 분명 이승만을 반대하는 독립운동가와 지식인들의 가르침이 있었을 거라
본다. 만약 이승만과 다른 독립운동가와 지식인들과 사이가
좋았더라면 시민혁명이 일어나기 어려웠을지도 모른다. 부정선거가 되었다는 사실 자체가 전파되지 않았을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그랬다면 다른 유교문화국가와 마찬가지로 오랫동안 독재를 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건 이후 박정희의 등장으로 현실이 되었다. 당시 한국식 민주주의라는 표현으로 3선 개헌을 정당화하며 유신독재를 시작했다. 한국 또한 유교국가의 때를 벗지 못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그렇게 쉽게 독재를 받아드릴 수 있었던 것이다. 민족개조론을 주장했던 안창호나 가족주의를 경멸하며 대를 잇는 걸 거부했던 서재필 같은 경우를 보면 이미 당시에도 유교문화의 한계를 깨닫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싶다. 한국과 북한은 같은 민족이다. 한국과 다른 유교문화 국가들은 같은 유교영향권 아래에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한국에서 유독 민주주의가 발달했던 것은 오로지 적의 존재 말고는 없다. 만약 중국과 일본과 북한도 적의 존재가 있어 그
적이 민주주의 혁명을 외치며 일어날 수 있었다면 유교문화의 영향을 적게 받으면서 제대로 된 민주주의가 활성화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원래 자유당과 민주당은 독립운동가와 친일파가 혼재되어
구성되었다고 한다. 이승만도 윤보선도 반일주의자였으니까 말이다. 그러다 이후 박정희의 한일기본조약 체결부터 친일 여당과 반일 야당이 갈라져 투쟁한 것으로 보인다. 한국은 투쟁의 역사를 통해 민주주의가 발전했고 그
투쟁은 적이 존재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적이 없었다면, 대다수의 국민들이 복종하는 지배자가 있었다면 한국의 민주주의는 유교로 인해 발전할 수 없었을 것이다. 뭐 지금도 독재자와 그 딸에 복종하는 사람이나 대통령을
이름으로 불렀다고 화를 내는 사람들이 있으니 아직 완전한 민주주의라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적의 존재로 인해 같은 유교문화권인 중국이나 일본보다는 민주적으로
되었다는 것이다. 정치적으로 평등해졌기 때문에 한국은 중국과 일본보다
더 심한 과열경쟁이 생기게 되었다. 중국과 일본은 공산당과 지역구세습으로 정치가 신분제화가 되고 있지만 한국은 아니니까 더 올라 갈려고 기를 쓰게 된 것이다. 중국이나 일본이 보다 민주적으로 변하기 위해서는
기존 질서와 맞서 싸울 민주적인 악당들이 등장하거나 유교문화를 버려야 할 것이다. 적은 윗사람이 아니니까 말이다. 넷째인 문화도 유교의 영향을 받았다. 남녀유별이라면서 어려서부터 이성교제를 하는 걸 부도덕하게 여기는 탓에 유사연애산업이 발전하기
시작했다. 한국은 주로 3차원 이성(아이돌)에 빠져 유사연애를 즐기고 일본은 주로 2차원 이성(창작물)에 빠져 유사연애를 즐기고 중국은 둘 다 즐기고
있다. 유사연애를 즐기는 거야 전세계가 다 하는 거지만
유독 유교문화권만 심하다. 문화는 문화를 즐기는 이들이 많을수록 성장한다. 유사연애산업이 성장한 것은 유사연애를 즐기는 사람이 그만큼 많다는 걸 의미한다. 흔히 한국노래에서 사랑이 빠지질 않고 한국 드라마 영화는 어떤 장르든 사랑으로 빠지게
되어있다는 얘기가 있다. 그것은 연애가 산업으로 이어질 만큼 연애물을 즐기는 이들이 많다는 걸 의미한다. 현실에서 충족되지 못한 사랑에 대한 욕구가 가상으로 이어진 것이다. 일반적인 국가에서는 어려서부터 주위 이성을 사랑하며
살아가니 노래도 드라마도 사랑으로부터 보다 자유로울 수 있었다고 본다. 사랑하는 상대가 주변에 있으니 굳이 문화에서 사랑을 강조하지 않아도 되니까 말이다. 요즘 유명한 BTS의 결과는 다음과 같은 과정을 거쳤다고 본다. 남녀유별로 유사연애산업이 발전했다. 적의 존재로 민주주의가 발전해 성차별이 줄어들어
여성의 입맛에 맞는 아이돌이 등장했다. 상명하복으로 인한 과열경쟁이 우수한 아이돌을 배출했다. 그 결과 기본적으로 남성사회가 많은 전세계 여성들은 자신의 입맛에 맞는 수준 높은 한국 아이돌을 좋아하게
되었다. 이성을 사랑해야 결혼하는 사람이 늘고 결혼하는 사람이
늘어야 출산율도 증가한다. 유사연애산업의 발전은 저출산과 맞바꾼 결과일지도 모른다. 다섯째인 적폐는 지금까지 말한 것들로 인해 발생한 것이다. 꼰대질, 갑질, 비리, 부정, 차별, 저출산, 허례허식 등. 유교문화와 자유롭고 평등한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의
충돌이 만든 폐해들이다. 오래된 유교문화의 폐단이 한국을 불행으로 이끌었다. 많은 사람들은 인간을 적폐로 인식하는데 그건 오래된 폐단이 만든 결과물에 불과하다. 환경이 인간을 만드는 거다. 개개인들은 다를 수 있으니까 오차가 있다는 걸 인정한다. 하지만 집단으로 가면 환경의 영향력이 엄청나게 커진다. 특정 개인이 적폐가 되는 건 그 개인의 유전적 특성일
수 있지만 집단 내에서 적폐가 발생하는 것은 환경이 원인일 확률이 높다는 것이다. 생계형 비리가 무슨 말이겠는가? 생계를 위해 비리를 저지르던 것이 일상화되어 있었다는 걸 의미한다. 급여가 적었던 시절 생계를 위해 일상적으로 저지르던
사소한 비리에 익숙해지다 보니 죄의식 없이 비리를 저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환경에 의한 관습적인 잘못은 개개인의 특성과 관계가 없다. 모두가 잘못을 저지르니 잘못인 것처럼 느껴지지 않고, 그러다 보니 선을 추구하던 사람도 아무렇지도 않게
잘못을 저지르게 되어있다. 우리 사회에 존재하는 대부분의 적폐는 다들 이런 과정을 거쳤다. 그냥 그래왔으니까 그랬던 거다. 예컨대 이런 것이다. 그 동안 화재를 몰고 오던 부도덕한 입시과정이나 불투명한 기부단체는 개개인의 특성보다는
악습이 만든 잘못이다. 다들 그렇게 하니까 그랬던 것뿐이다. 누군가의 잘못을 지적하거나 누군가를 옹호하고자 하는 게 아니다. 우리사회, 아니 인간의 잘못은 대부분 관습에 근거한다고 주장하는 것뿐이다. 관습, 관행, 우리가 익숙해서 잘못된 것을 느끼지 못했던 그 모든
것들이 적폐를 만들어 사회를 불행하게 만드는데 일조했다. 진정 적폐를 몰아내고자 한다면 사람보다는 그런 사람을 만드는 환경을 바꿀 필요가 있음을 강조하겠다. 차별금지법에 찬성하는 사람조차 연하가 연상에게 반말하는
걸 불편해할 것이다. 우리는 얼마나 관습에 취약한가? 어떤 올바른 일을 행하고자 하면 자신이 가지고 있는 고정관념을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이외에도 다양한 영향을 끼쳤지만 여기까지만 하겠다. 이렇게 지배국가의 차별하는 문화와 자유국가의 자유롭고
평등한 이념의 충돌은 이와 같은 빠른 발전과 깊은 불행을 안겨주었다고 본다. 여기서 하나의 질문이 있을 수 있다. 이 상황이 장단점이 있는 거라면 발전을 위해 불행을 감수할 수 있는 게 아니냐고 말이다. 하지만 상명하복의 질서가 만드는 발전에는 한계가
있다. 윗사람이 시켜서 하는 일에는 창의력이 발휘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가발을 수출하고 파병이나 파견을 보내어 발전하는
건 분명 상명하복의 질서에서 보다 빠르게 가능하다. 하지만 창작물을 만들고 새로운 아이디어를 내고 고부가가치를 만드는 산업에서 상명하복은 오히려 발전을 저해한다. 윗사람의 창작물이나 아이디어만 인정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보겠다. 어떤 창작물을 만드는데 시시하고 재미없는 결과가
나오는 건 전문가도 아닌 사람들이 위에 있다는 이유 하나로 간섭하고 바꾸기 때문이라고 한다. 광고를 만들어도 광고주가 간섭해서 재미없게 나오고, 게임을 만들어도 투자자가 간섭해서 재미없게 나온다. 비전문가들이 위에 있다는 이유 하나로 자신의 의견을
밀어붙인 결과가 바로 재미없는 창작물이라는 것이다. 발전도 막는데 불행하기까지 한다면 더 이상 유교문화를 방치할 까닭은 어디에도 없다. 사회적 불행은 서로를 미워하게 되는 촉매재가 되었고, 그 미움은 사회적 애정결핍이 되어 희생을 꺼려하게
되었다. 애정결핍이 일어나자 문화로 애정을 충족하게 되는
기현상이 발생하여 모든 문화에 사랑이 섞이게 되었다. 사랑에 대한 애절한 갈구는 사랑이 결핍되어있음을 반증한다. 유교문화가 낳은 애정결핍으로 인한 희생기피현상을 해결하려면 무엇이 우선되어야 하겠는가? 당연히 사랑이다. 취미나 물건이나 우상에 쏟는 애정을 사람에게 쏟을
수 있는 환경조성이 가능해져야 자발적인 희생이 나타나 공동체를 지탱할 것이다. 그게 안되면 인구소멸로 우리는 자연스럽게 사라지게 될 것이다.
도덕, 무엇이 옳고 그른가? 가치관, 무엇이 가치 있는가? 희생의 이유, 무엇을 위해 희생을 해야 하는가? 지배국가에서 벗어난 자유국가에서 해결할 우선과제라고 생각한다. 지금까지 그런 고찰이 얼마나 있었는가? 우리가 생각하는 옳고 그름이 과연 자유국가의 것이라고 할 수 있었는가? 한국의 초대 대통령인 이승만부터가 그런 모순을 안고
있었던 사람이었다. 미국에서 배워온 자유와 민주의 가치를 설파하던 사람이 유교의 영향을 받아 모든 것을 자기 영향권 아래에 놓아 사사건건 간섭하여 지배적인
영역을 구축했다. 자유를 강조하던 장면은 총리가 되고서도 어머니에게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비는 등 전형적인 유교적 복종이 몸에 밴 인물이었다고 한다. 이미 새겨진 도덕은 스스로 인지하고 있지 않는 이상 바꿀 수가 없는 그 사람 특유의 행동원리라는
형태로 자리잡고 있다. 다들 안다. 꼰대질이 나쁘다는 걸. 그런데 연하가 자신과 맞먹으려고 하는 걸 보면 속상하고 답답해진다. 왜? 이미 도덕이 새겨졌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에게 새겨진 지배국가의 도덕을 지우고 자유국가의 도덕을 스스로 갖춰 나가야
할 때가 왔다고 말하고 싶다. 모든 어른을 공경해야 하는가? 아니다. 제 역할을 다하는 어른을 공경해야 한다. 잘못을 저지른 어른도 공경하라고 말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모든 걸 윗사람 의견으로 결정해야 하는가? 아니다. 사람 사이에서 위아래가 존재하지 않다. 단지 역할이 다를 뿐이다. 연령성별 상관없이 모두가 능력에 맞는 역할을 맡고
그 역할의 수행여부로 존중을 결정하고 기여도의 차이로 대우를 달리해주면 된다. 네 주인은 누구냐며 경비원을 폭행했던 사실이 뉴스에 나온 적이 있었다. 나는 담담하게 충격을 받았다. 알면서도 놀랄 수밖에 없었다. 한국은 아직도 지배국가의 도덕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그런 사람이 실존한다는 것을 알게 되니 굉장히 우울해졌다. 대놓고 그렇지 않더라도 사회 곳곳에서 그런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아이들을 위해서라면서 아이들을 통제하는 사람들이
많다. 언제까지 자기 손 안에서 키우려고 할 것인가? 이미 정보의 통제는 불가능하다는 걸 모르는 건가? 아이들이 즐기는 문화의 검열 좀 적당히 했으면 좋겠다. 사춘기 아이에게 포르노를 가르치지 않는 것은 구시대의
도덕이 만든 잘못된 관념에 불과하다. 식욕이 있는 아이에게 식사방법을 알려주고 수면욕이 있는 아이에게 자는 방법을 알려주는 것은 당연한데 어째서 성욕이 있는 아이에게 성욕을
해소할 방법을 알려주지 않는 건가? 이치에 맞지 않는 것은 대체로 과거의 도덕으로 형성된 관습이 큰 영향을 끼친다고 볼 수 있다. 식사예절이라. 어른이 수저를 들어야 밥을 먹게 하는 것 자체도 참 우습기 짝이 없다. 조상의 묘를 돌보는 벌초도 의미 없는 행위라는 걸
이제는 알았으면 좋겠다. 그건 그냥 조상을 신으로 모시던 유교국가의 도덕이 만든 잔재일 뿐이다. 유교는 신이 없는 게 아니다. 조상을 신으로 모시던 종교다. 우리 사회 곳곳에서 불합리함을 형성하던 수많은 도덕들에 대해 다시 한번 점검해볼 필요가
있음을 강조하고 싶다. 모든 걸 제거하자는 건 아니다. 예컨대 반말과 존댓말은 연령차별이다. 연상은 연하에게 반말하고 연하는 연상에게 존댓말을 한다. 그 때문에 초면에 반말을 들으면 연하취급 받는 것 같아 불쾌해하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이건 다른 용도로 사용할 수 있다. 친하면 연령차이 관계없이 반말을 하고 친하지 않으면
존댓말을 하면 된다. 친분으로 반말과 존댓말을 구분 짓는다면 자유국가에 맞는 언어사용이 가능해질 것이다. 가치관도 지배국가에 물려받은 것 같은 걸 가지고 있다. 연령, 학력, 지위, 재산이 높은 것을 가치 있게 여긴다. 높으면 가치가 있고 낮으면 가치가 없다. 실제 용도와 관계없이 그런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다. 모닥불을 피울 때엔 불에 안 타는 지폐보다 잘 타는 나뭇가지가 더 쓸모 있다. 어떤 용도나 역할로 가치를 판단하는 것이 자유국가에
맞는 가치관이라 생각한다. 나는 이런 역할로 가치를 판단하는 역할주의가 유교의 도덕과 가치관을 대신할 수 있다고 주장하겠다. 역할로 가치를 판단하기에 평등하고, 역할을 수행하기만 하면 그 외엔 자유가 보장되기
때문에 자유롭다. 이런 식으로 도덕과 가치관을 자유국가에 맞게끔 재정립하고
서로를 사랑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어야 자유국가에 맞는 나를 위한 희생이 공동체에 이익을 가져와 결과적으로 공동체를 위한 희생이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나를 위한 희생. 자유국가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은 자유롭게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면 된다. 마음껏 이기적으로 살아라. 그 이기적인 욕심이 공동체에 이익을 가져오면 된다. 마음껏 이기적인 주장을 펼쳐라. 공동체가 그 주장을 판단해서 공동체에 이익이 되는 걸 수용하면 된다. 우리가 자유를 경계하고 부정하는 것은 그것이 미숙한 자유였기 때문이다. 아무 책임도 지지 않고 하고 싶은 대로 다 했던
그 어린아이와도 같은 자유는 노동자를 착취하고 제국주의가 되어 침략을 하고 전쟁을 발발하게 했다. 그런 미숙한 자유 때문에 또 다른 미숙한 자유인 사회민주주의나 자유를 빼앗는 지배인 공산주의가
유행하게 된 것이다. 성숙한 자유라는 건 해야 할 일을 자신의 자유의지로 결정한다는 걸 의미한다. 아, 공동체를 위해서는 부를 분배해 빈부격차를 줄여야 하는구나. 알아서 분배하면 사회주의는 필요가 없다. 아, 공동체를 위해서는 어떤 주장을 펼칠 때 그에 대한 책임과 희생이 필요 하는구나. 알아서 책임지고 희생하면 분쟁은 거의 없다. 전염성이 강한 바이러스의 유행으로 마스크를 착용하는
것은 시켜서 하는 건가? 아니면 자유의지를 가지고 그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여 자발적으로 하는 건가? 전자라면 사회주의에 어울리는 사람이고 후자라면 자유주의에 어울리는 사람이다. 모두가 다 하는데 제멋대로 굴겠다며 하지 않는 사람은
자유방임주의가 어울리는 사람이다. 자유주의 공동체를 위해 어떤 사람이 필요하겠는가? 지금도 그렇지만 앞으로는 더더욱 자발적인 희생이 없이 공동체는 유지될 수 없을 전망이다.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일자리를 위해 인공지능과 로봇을 거부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스포츠 심판이 인공지능으로 대체된다는 소식이 있었다. 그걸 반대하면 스포츠의 발전이 있을 수 있겠는가? 법조계, 의료계, 언론계 전부 인공지능이 도입될 수 있는 분야다. 그들이 그걸 무조건 거부하면 발전할 수 있겠는가? 다 수용해서 발전했다고 가정해보자. 그런 상황이면 인공지능과 로봇을 만드는 기업과 재벌들이
얻은 수익을 공동체를 위해 희생을 해야 한다. 그걸 안 하겠다고 하면 공동체는 유지될 수가 없다. 우리는 기술발전을 거부하고 정체되는 것과 기술발전을 받아드리고 희생하는 것,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공동체가 유지될 수 있다는 걸 이제는 알아야 한다. 시대 변화를 받아드려야 한다. 미래로 가자.
무엇을 위해 희생을 해야 하는가? 그 답이 자신을 위해서라면 희생의 이유는 각자 다
다를 것이다. 자신이 하고 싶은 게 다 다르니까. 그렇다면 스스로 물어봐야 한다. 나는 무엇을 위해 희생을 해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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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족하네요. 좀 더 공부해서 더 정리해야겠습니다.
분명한 것은 도덕, 가치관, 희생의 이유를 자유국가에 맞게 정립해야 한다는 겁니다. 기초가 튼튼해야 곧고 바르게 성장이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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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포스트 코로나 교육정책 (0)
2020/07/25 PM 10:51 |
포스트 코로나 교육정책
한국 교육계에 코로나란 불똥이 떨어졌다. 급변하는 사회에 발맞춰 교육정책도 매번 바뀌어 수험생들을
혼란에 빠뜨렸었다. 그럼에도 입시와 취업의 기준이 크게 달라지지 않아 본질적으로는 바뀐 것이 없었다. 그랬던 교육계가 이제는 변해야만 한다. 진보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과학이 예상보다 빠르게 진보할 전망이기 때문이다. 왜 과학이 예상보다 빠르게 진보하는가? 그리고 과학이 진보하는데 어째서 교육도 진보해야
하는가? 그것이 대해 이야기를 하며 시작하겠다. 코로나 사태가 반년을 넘어서고 있다. 공기전염의 가능성도 지닌 전염병이기 때문에 인간이
밀집하는 공간은 언제나 감염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다. 그 감염의 위험으로 인간이 일하기 어렵게 되었다. 일자리와 수출량이 줄어들고 실업자가 늘어났다. 기업들은 예정보다 빠르게 인력감축을 시작하기 시작했다. 항공업계가 인간 대신 물자를 나른다. 유통업계가 코로나 감염으로 마비되어 멈춘다. 유동인구가 줄어 자영업이 힘들어진다. 군부대가 감염이 되기 시작했다. 수십만 명이 사망하고 있는 해외는 더 심각하다. 해외에서 일하는 한국 노동자가 코로나로 사망한 사건들이
뉴스를 통해 속속 전해져 오고 있다. 이라크에서 일하는 한국 노동자를 전세기로 불러올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이 사태가 쉬이 끝날 것 같지도 않다. 전문가의 의견에 따르면 수 년 이상 지속될지도 모른다고 한다. 앞으로도 인간은 일하기 어려울 확률이 높다는 것이다. 인간이 일하기 어렵다는 것은 기업에 충분한 노동력을
제공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기에 필연적으로 인간을 대신할 노동력이 필요하게 된다. 그 노동력이라는 게 소나 원숭이 같은 다른 동물을 말하는 게 아니다. 바로 인공지능과 로봇이다. 알다시피 머지 않은 미래에는 인간 대신 로봇이 대신
일하게 될 것이다. 인공지능이 빠르게 발전하여 단순 노동뿐만 아니라 법조계, 의료계, 언론계 가리지 않고 거의 모든 분야에서 인간을 대신해 일하게 될 거란 전망이 있다. 그래서 기초소득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자본주의 체제를 유지하면서 자원을 분배하기 위해서는
기초소득 말고는 답이 없기 때문이다. 모든 사상은 인간을 위해 존재한다. 자본주의가 인간의 생존을 위협한다면 자본주의는 사라져야 할 사상이 된다. 자본가야말로 자본주의 내에서 자신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기초소득에 동의하는 수밖에
없다. 세계가 통합되면서 대다수의 국가가 시장을 개방함에
따라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는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와의 싸움이 아닌 자본가와 정치가의 권력다툼으로 변질되었다. 큰 시장에선 자본을 지닌 자본가의 힘이 크고, 큰 정부에선 분배할 권리가 있는 정치가의 힘이 크다. 이 싸움에서 자본가가 민중의 지지를 받기 위해서는
정치가가 기초소득을 시도하지 않더라도 할 수밖에 없다. 그러지 않으면 민중은 자본주의를 버리게 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경제이념엔 민중이 없다. 민중에겐 자유주의와 민주주의가 필요할 뿐이다. 그리고 역할 외의 시간을 자유롭게 보낼 권리와 가치판단을 역할로 삼아 평등하게 바라볼
수 있는 역할주의가 필요하다고 역설하겠다. 어쨌든 기초소득을 부르게 될 인공지능과 로봇, 그리고 그걸 토대로 한 완전자동화. 이것이 코로나로 인해 빠르게 발전할 과학기술이고, 이것이 인간을 대신하게 될 노동력이다. 본래라면 이 과학기술은 많은 저항에 부딪쳤을 것이다. 모든 진보의 걸림돌은 시대의 변화를 거부하는 저항의 총체다. 노동과 자본은 둘 다 과학의 진보를 꺼려한다. 노동은 일자리를 빼앗기기 때문에 꺼려하고 자본은
위험부담이 싫기 때문에 꺼려한다. 물론 상대적으로 자본가가 더 여유롭긴 하다. 이미 자동화 공정이 발달한 기업은 정리해고를 하거나 추가 인력을 고용하고 있지 않다. 이 사태를 계기로 더 많은 인력을 정리하고 있다. 그럼에도 보수적인 기업이 많다. 대부분은 다른 곳에서 완전자동화가 상용화되어 이익을
얻는 것을 확인해야만 시도할 것이다. 이런 저항이 코로나로 인해 인간이 일을 할 수 없게 되면 대신할 노동력의 필요로 과학이 진보하게 될 것이란 이야기다. 이는 전쟁 중에 무기개발에 힘을 쏟는 것과 비슷할
것이다. 평시라면 자본, 노동, 도덕, 윤리, 관습, 이해관계 등의 이유로 무기개발이 상대적으로 느려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전시가 되면 그런 저항들이 의미를 잃고 무기개발에
총력을 기울일 수 있게 된다. 전쟁이 과학의 발전을 부른다는 것은 이런 이유가 크다. 저항이 줄어드니까. 코로나 사태도 이와 비슷한 이유로 과학이 진보할 것이다. 과학의 진보는 자연스럽게 교육의 진보도 부른다. 과학의 진보는 출산, 교육, 생산, 분배, 사망의 순환구조에서 생산의 변화를 부르게 된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그 생산에 공급되는 노동력에 대한 교육도 변화할 것이다. 가령 지금 인간이 기계가 하는 일을 배우고 있나? 아니지 않나. 과거의 인간은 지금 기계가 하는 일도 배워서 직접
생산했다. 지금은 어떠한가? 기계가 하는 일은 배우지 않고 기계를 다루는 일을
배운다. 좋은 예가 바로 글씨일 것이다. 직접 쓰는 것이 아니라 컴퓨터로 작성한다. 그렇게 컴퓨터로 서류를 작성하는 일이 많아지자 다들
글씨가 엉망이다. 안 쓰면 퇴화한다. 자연법칙은 사회법칙으로도 이어지기 마련이다. 이처럼 생산의 변화는 교육의 변화로 이어진다. 그와 마찬가지로 인공지능 덕분에 앞으로 하지 않게
될 노동에 관련된 교육을 배우는 것은 적절한 교육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 필요 없는 지식은 배울 필요가 없다. 인간이 사회를 구축한 이상, 지식은 개인의 것이 아닌 사회의 것이기 때문이다. 개개인이 기계가 하는 일, 로봇이 하는 일, 인공지능이 하는 일을 몰라도 괜찮다. 하드웨어를 만드는 사람도 소프트웨어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모르고, 소프트웨어 만드는 사람도 하드웨어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모른다. 모든 사회의 지식은 이와 같이 인간 개인의 것이
아니다. 사회의 지식이 개인의 것이 아닌 사회의 것이라는
인식이 있다면, 모든 전문가는 자신이 가진 지식을 다른 전문가도
알아듣기 쉽게 전달할 의무가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사회의 지식을 키워야 개인의 지식도 키울 수 있으니까 말이다. 그것이 지식의 상향평준화다. 어떤 이는 사회가 붕괴될 때를 대비해 전부 교육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건 지나치게 인간의 자유를 속박한다. 언제 있을지 모를 사회붕괴에 대비해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할 수 없게 되는 것은 자신의 삶을 사회보험에 바치는 것에 불과하다고 말하고 싶다. 이와 같은 이유로 과학이 진보하면 본질적으로는 별로 달라지지 않았던 교육계가 이제는 진보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 진보는 인간이 일을 하기 어려워져 질수록
빨라질 것이다. 인간을 대신할 노동력이 필요하니까.
그렇다면 교육은 어떻게 진보해야 하는가? 그것에 대해 이야기를 해보자. 많은 학생들은 이번 교육부가 결정한 대면학습을 부정적으로
생각한다. 등교하다가 코로나 걸리면 책임질 수 있느냐는 것이다. 학생들이 주로 이용하는 유튜브의 댓글들을 살펴보면
등교를 결정한 교육부장관에 대한 불만으로 넘치고 있었다. 심지어 사리사욕을 위해 등교를 결정했다고 믿는 학생들도 있었다. 그 여파인지 몰라도 제주도의 초등학교에서는 집단등교거부 사태까지 벌어지고 있었다. 교육부에 대한 불신이 극에 달했다. 그럼에도 한가지 변호하자면, 그 자리에 누가 앉더라도 등교를 결정했을 확률이
높다는 것이다. 교육은 인간의 자아실현이나 사회화뿐만이 아니라 생산을
위한 노동력 제공에 있다. 최근 대학은 앞의 것보다 뒤의 것에 무게가 실리는 형편이다. 괜히 대학교를 취업기관이라 폄하하는 것이 아니다. 어쨌든 사회에 노동력 공급을 담당하는 교육이 정체되면 사회 전체가 정체될 우려가 있다. 출산, 교육, 생산, 분배, 사망의 순환이 멈추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출산율이 저하되어 사회구조가 흔들리고
있는 상황 속에서 교육도 멈춰버리면 걷잡을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 교육과정이나 출석이나 시험 따위의 기존 교육체계를 유지하면서 사회가 굴러가게 하려면 위험부담을 감수하더라도
등교를 해야 한다. 이는 사회유지를 위해 위험부담을 감수하고 일하고 있는 것과 같다. 만약 현행 교육과정을 무시한다면 많은 학생과 학부모와 교육관계자의 반발이 있을 것이다. 미리 예고한 교육과정대로 교육을 하지 않으면 그들의
계획에 혼란이 생기기 때문이다. 그리고 공정. 체계화된 교육과정이 있어야 공정을 유지할 수 있다. 그 공정 때문이라도 쉽게 교육과정을 바꾸기 어렵다. 그런데 왜 사람들이 공정을 그렇게 갈구할까? 공정이 손해를 받아드리게 만드는 결정요소기 때문이다. 누군가 내 위에 있는데 그게 공정하지 않는다면 받아드릴 수가 없다는 얘기다. 한국은 연상에게 복종하는 것이 올바른 도리였던 장유유서가
도덕이었다. 그래서 사회관계는 복종과 지배로 나뉘게 되었다. 누군가 내 위에 있다는 것은 그 윗사람에게 복종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걸 반길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복종하기 싫어서 중소기업도 가기 싫어하고 회식도
싫어하고 명절에 친척집 가기도 싫어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한국이 겸손한 까닭도 여기에 있다. 대중이란 연령 미상의 집단은 특정 개인이 대중과 맞먹으려고 하는 것을 용납할 수가 없었다. 특정 개인의 연령이 대중보다 높을 확률은 극히 드물기 때문이었다. 이러니 한국인은 겸손할 수밖에 없다. 한국의 과도한 경쟁과 공정에 대한 집착도 그런 불평등한
도덕으로 형성된 사회관계 때문이라 본다. 경쟁으로 지배하느냐 복종하느냐 결정되니까 말이다. 이런 이유들 때문에 교육부는 등교를 결정할 수밖에 없던 것이다. 그럼에도 한가지 비판하자면, 지나치게 보수적이다. 이런 사태가 되었음에도 교육과정을 준수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설령 사람들의 반발이 있더라고 하더라도 말이다. 지금은 긴급한 상황이지 않나. 코로나로 노동력이 저하되고, 그 노동력을 대신할 것을 위해 과학이 진보하고, 그 진보한 과학으로 기업이 진보하고, 그 진보한 기업 때문에 교육이 진보할 수 밖에 없다. 굳이 현행을 유지하는 것은 현실을 보지 않은 무사안일주의에
불과하다. 이 사태가 언제 끝날지도 모른다. 이 기회에 학부모의 반발, 교사의 저항, 입시와 취업, 공정을 위한 체계 등으로 정체되어왔던 교육이 진보해야만
한다. 국민들에게 새롭게 각인을 시켜야 한다. 교육도 변화해야 한다고. 사실 진작에 했어야 했다. 포스트 인터넷과 포스트 인공지능에 맞는 교육을 진작에
했어야 했다는 것이다. 인터넷은 정보의 과잉공급으로 연령과 관계없이 사회의 문제에 접할 수 있게 만들었다. 인공지능은 인간 노동력의 필요성을 감소시켜 생산자가 아닌 사용자를 필요하게 만들었다. 이제는 이 두 가지 변화에 맞는 교육과정이 필요하다.
우선 포스트 인터넷에 대해 이야기를 해보자. 인터넷은 판타지에 나오는 어떤 마법보다 마법 같은
도구다. 전세계 어느 곳도 네트워크만 연결되어 있으면 컴퓨터나
모바일의 사용자는 누구나 다 정보교류와 축적이 가능하다. 그것은 정보가 특정 계층이나 연령의 제한을 받지 않고 전달된다는 이야기다. 아이들도 어른들의 정보를 접할 수 있고 어른들도 아이들의 정보를 접할 수 있다. 그걸 통해 원래는 있을 수 없었던 연령을 넘어선
소통이 가능해진다. 이러한 사실은 그 동안 우리가 아이들을 위해서라는 명목으로 통제된 연령대별 정보차단이 무의미해짐을 알게 된다. 최근 아이들 사이에는 민식이법이라는 놀이가 유행한다고
한다. 민식이법이란 어린이 보호구역에서 교통사고 시 운전자에게
가중처벌을 가하는 법을 말한다. 이런 민식이법에 대한 정보가 아이들에게 흘러가자 아이들은 이걸 가지고 어른들에게 위험한 장난을 시도하기 시작했다. 어린이보호구역에 있는 차량에게 접근해서 의도적으로
부딪친 후 신고 당하고 싶지 않으면 돈을 달라고 협박한 것이다. 그 이유를 물어보니 어른들이 벌벌 떠는 모습이 재미있어서 장난쳤다고 한다. 장유유서로 어른들에게 복종해야만 하는 아이들 입장에서
어른들의 그런 태도는 매우 유쾌했겠지. 예전이라면 이런 법 관련 정보가 아이들에게까지 전달이 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민식이법 놀이도 유행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아이들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악용이 가능해졌다. 요즘 늘어나는 촉법소년의 자동차 운전사고는 그런
정보가 전달되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큰 처벌을 받지 않는다는 이미 알게 된 것이다. 특히 최근엔 어린 아이들도 스마트폰을 들고 다니기 때문에 유튜브를 통해 그런 정보를 아주 쉽게 접할 수 있다. 최근 틱톡의 정보유출에 관한 뉴스가 유튜브에 올라온
것이 있었다. 보통 그런 뉴스는 아이들이 잘 안본다는 인식이 있다. 지금까지 사회현안은 어른들을 위한 정보였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어린 학생들도 자신과 관련된 뉴스는 살펴보게 되었다. 틱톡의 이용자는 주로 초등학생과 중학생이라고 한다. 그래서 틱톡 관련 뉴스가 학생들의 추천목록에 뜬
모양이다. 그 뉴스에는 학생들의 댓글이 많았다. 학생A: 정보유출이 무섭다. 학생B: 엄마가 지우라고 해서 지웠는데 다행이다. 학생C: 구글 계정도 지워야 하나요? 등등 다양한 의견들이 많았다. 이처럼 이제 정보는 연령대별로 통제한다고 해서 통제가 되는 것이 아니다. 다 퍼져나간다. 원하면 쉽게 알아볼 수도 있다. 차단 자체가 무의미하다. 오히려 차단을 하면 차단된 일부 학생들만 정보고립으로
외톨이가 될 뿐이다. 이제 모든 학생들은 연령과 관계없이 사회현안에 대한 판단능력이 필요하게 된 것이다. 그 능력이 없으면 앞으로 법을 이용해 어른들을 협박하거나 범죄를 저지르는 일들이 더 많아질
것이다. 정보과잉공급으로 연령에 관계없이 모든 인간이 정보를
접할 수 있는 시대. 이 시대야 말로 지식만 가르치는 것이 아닌 지혜와 지성도 동시에 가르쳐야 한다. 이것이 바로 포스트 인터넷에 맞는 교육방식이다. 그 동안 한국교육은 주입식 교육을 주로 사용했다. 이 교육방식은 많은 비판을 받았지만 다수의 인원에게
지식을 심는 데는 가장 효율적인 방식임을 부정할 수는 없다. 수천 년간 쌓아 올린 인류의 지식은 지나치게 많았다. 간추리고 간추려서 요약만 한 것을 기억하는 것만으로도 시간이 부족했다. 세월이 흘러갈수록 학생들의 고달픔이 늘어나는 것은
인류가 쌓은 지식들이 늘어나기 때문이다. 지금의 교육방식은 이런 지식을 기억하고 이해하고 평가 받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것이 가난하고 무력했던 한국을 키워냈던 매우 효율적인 교육방식이었다. 주입식이 아무리 부작용이 많아도 그 효율자체는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지식을 쌓는데 급급하다 보니 지혜나 지성을
가르치는데 소홀하게 되었다. 남들이 만든 지식을 기억하고 이해하는 것에 치중하다 보니 새롭게 무언가를 만드는데 익숙하지 않은 것이다. 한국의 아이들은 스스로 어떤 현상을 보고 고찰하고
의견을 내는 그런 자유의지를 가질만한 시기가 없었다. 예전에 학생들의 모의재판영상을 시청한 적이 있다. 어떻게 하는지는 잘 모르겠는데 느낀 바가 하나 있었다. 학생 개인의 의견을 내는 것이 아니라 대본대로 하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재판의 형식을 익히는 것이 목적인 듯싶었다. 그런데 그건 결국 남이 만든 지식을 기억하고 이해하고
평가 받는 것이 아닐까? 지저분하고 엉망이어도 좋으니 사건에 대해 자신의 의견을 내는 것을 보고 싶었다. 학생의 자유의지가 담긴 주장을 듣고 싶었다. 학생의 지혜와 지성을 키우는 걸 보고 싶었다. 한국은 이제 선진국의 반열로 올라서고 있다. 선진국이 만든 문명을 그대로 기억하고 이해하는 것은
이제 불필요한 단계가 아닐까 싶다. 그렇지 않아도 인터넷을 통해 정보가 과잉공급 되고 있는 시점에서 지식과 함께 지혜와 지성을 배우게 만드는 교육과정이 필요하다고 본다. 그렇다고 주입식 자체를 아예 없애자는 건 아니다. 지식을 쌓는 최고의 효율은 주입식이다. 태어나서 무언가를 반복학습으로 기억하는 것 하나하나가
주입식 아니던가. 반복해서 빠르게 기억하고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것은
지극히 효율적이다. 그러니 지식을 평가하는 것은 현행을 유지해도 괜찮다고 본다. 단 지식을 쌓는 방식은 바뀌어야 한다고 본다. 웬만한 곳에서 인터넷을 통해 정보를 쉽게 찾을 수 있는 상황에서 그 정보를 일일이 다
기억하는 것은 정말 불필요한 일이다. 모든 교육은 현장에서 사용할 수 있는 도구가 있다는 전제하에 행해져야 한다. 농사를 가르칠 때 트랙터가 있다는 전제하에 가르쳐야지, 손으로 한다거나 소를 끌고 다니는 걸 가르쳐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지식은 정보를 검색할 때 필요한 키워드를 기억하고 그 기억만 평가하면 된다. 굳이 세세하게 년도를 기억한다거나 같은 교훈이 담긴 이야기를 중복해서 배운다거나 하는
일은 지혜를 배우는 시간을 날려먹는 비효율적인 방법이다. 인터넷을 언제 어디서든 사용할 수 있다는 전제하에 쌓는 지식이야말로 포스트 인터넷에 어울리는 지식습득이라 할 수 있겠다. 어떤 상황에서 지식이 필요할 때 인터넷을 사용해
그 지식을 이용할 수 있는 정도만 기억하면 된단 얘기다. 평가 또한 마찬가지다. 암기를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이해를 평가하면 된다. 세세한 부분은 요점만 알고 있으면 인터넷 검색으로 보충할 수 있다. 이렇게 필요한 지식만 쌓다 보면 생각 외로 시간이 많이 남게 된다. 그 남는 시간에 지혜나 지성을 성장시킬 교육을 하면
된다. 지혜는 사물의 이치를 빨리 깨닫고 정확하게 처리하는
능력이라 한다. 지성은 지각된 것을 정리하고 통일하여 새로운 인식을
낳는 능력이라 한다. 지식을 쌓는 데는 단순 암기가 효율적이지만 지혜나 지성을 키우는 데는 암기로는 어렵다. 사물의 본질을 보고 판단하고 새로운 의견을 제시하는 그런 교육이 필요하다. 이는 정보의 공급이 연령과 무관하게 이루어지므로
모든 학생을 대상으로 실시해야 될 것이다. 가령 민식이법 놀이는 초등학생들이 일으키는 사회 논란이다. 그렇다면 당사자인 초등학생들이 직접 관찰과 실험으로 사건을 판단한 후 토론이나 논쟁을 통해 결론을
내리는 교육과정이 필요할 것이다. 이 과정 속에서 교사의 역할은 교사가 어떤 결론에 도달하도록 유도하는 것이 아니라 지식의 오류를 정정하는 것에 머물러야 한다. 누군가 결론을 내리는 것에 의존하다 보면 스스로
의견을 내는 것을 어려워하게 되어있다. 여론이 쉽게 흔들리는 까닭은 의존성과 무책임 때문이다. 자신의 의견에 책임감을 갖게 한다면 이런 현상은 분명 완화될 거라 생각한다. 여기서 사건의 판단이나 토론의 방식은 굳이 대면으로
하지 않아도 된다. 비대면 온라인으로도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다. 만약 글로 자신의 의견을 표현하는 것이 부적절하다면 논술은 도대체 왜 배우는 것인가? 그리고 논술로는 한계가 있다. 논술은 평가자가 원하는 답을 예상하고 그 답에 맞는 의견을 가르치고 있지 않나? 그건 지식을 쌓는 과정과 별반 다르지 않는 방식이다. 지혜나 지성을 키우기 위해서는 어떤 즉흥적인 사건을
과학적인 관찰과 실험으로 판단한 걸 논술로 풀어내고 그걸 바탕으로 다른 이들과 논쟁하여 의견의 장단점을 개선하거나 아예 새로운 결론을 내리는 과정이
필요하다. 이런 교육과정은 비대면 학습으로 가능하기 때문에
지금 같은 상황에 적절한 교육방법이 될 것이라 본다. 예컨대 어떤 사안에 대한 정보를 학교 홈페이지나 유튜브에 올리고 댓글로 익명 토론을 하게 만들면 된다. 이 경우 다른 이의 의견을 가져다 붙이거나 다른
사람이 대신 작성하는 위험이 있으나, 그런 우려는 결과를 평가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다. 토론 참여도만을 평가한다면 웬만해서는 스스로의 의견으로 토론할 것이라 본다. 애초에 인터넷에서 댓글 논쟁은 누구나 다 해본 매우
익숙한 것이므로 참여 자체는 그렇게 어렵지 않은 일이다. 교사는 그 토론 과정 속에서 질서를 유지하고 지식의 오류만 정정해주면 된다. 설령 그릇된 결론이 나온다고 하더라도 괜찮다. 사물이나 사건을 관찰하고 실험하여 판단한 것을 다른
이들과 토론하는 과정 자체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애초에 그릇된 결론이 나오기도 어렵고 나오더라도 외부의 인원과 다시 토론하다가 답을 찾을 수 있기 때문에 큰 문제는 없을 것이다. 정리하겠다. 인터넷은 정보과잉공급이 발생해 예전과는 다르게 초등학생도
사회의 정보를 접할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법을 악용해 어른을 골려 주거나 범죄를 일으키기도 했다. 이런 현상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기존 지식을 위주로 쌓는 교육을 효율화하고 남는 시간에 연령과 관계없이
모든 학생은 사회현안에 대한 판단능력과 토론능력을 길러 지혜와 지성을 갖춰는 교육으로 진보해야 한다. 그 동안은 여러 이해관계로 진보하기 어려웠으리라 본다. 그렇지만 지금은 아니다. 코로나로 혼란스러운 이때, 가장 진보하기 좋은 시기라 본다.
그 다음 포스트 인공지능에 대해 이야기를 해보자. 인공지능은 세상을 바꾸고 있다. 이제는 단순노동뿐만 아니라 언론기사나 사법판단 또는
의료판단까지 인공지능의 사고회로로 충분히 가능하게 되었다. 실제 인공지능이 쓴 기사의 중립성이 기자보다 높다는 결과가 있다. 그 결과를 보고 많은 사람들이 희망했다. 하루 빨리 인공지능이 대신 일했으면 좋겠다고. 사리사욕에 휘둘려 제 역할을 못하는 사람들을 보고
분노한 것이다. 이 현상은 분노라는 감정으로 형성되어 여론만으로
결정할 수는 없다. 성실한 사람들도 많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인공지능이 특정 분야에 인간보다 더 쓸모가 있다면 굳이 인간이 그 분야를 담당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기계가 하는 일을 인간이 할 필요는 없지 않나. 세탁기가 있는데 굳이 손 빨래를 하는 것은 시간낭비다. 인간은 보다 더 많은 자유를 누리야 한다. 인공지능이 할 수 있는 일을 인간이 하는 것을 시간낭비다. 인간은 인공지능이 할 수 없는 분야에서 보다 더
자유롭게 능력을 키워야 한다. 그것이 바로 창의다. 인공지능이 인간 수준의 창의력을 발휘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왜냐하면 인공지능에는 자아가 없기 때문이다. 인간의 자아는 세가지가 있어야 갖춰진다. 인간이 지닌 세포, 그 세포와 상호작용하는 세계, 그리고 세포의 의지를 여론화하여 의식적으로 판단하게 만드는 뇌다. 여기서 뇌가 없으면 해파리 같은 생물이 되고, 지능이 낮으면 인간 외의 동물이 되고, 지능이 높으면 인간이 된다. 인공지능은 이 세가지 다 제대로 갖추지 못했다. 인공지능은 단지 특정한 작은 틀에 입력된 데이터
내에서만 새로운 것을 만들어낼 수 있다. 인공지능이 바둑을 제패한 것은 바둑이란 틀 내에서 무한정 사고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바둑의 규칙을 입력하고 시행착오를 수없이 반복시켜 학습시킨 것이다. 하지만 이런 방식으로는 인간 수준의 창의력을 발휘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인간은 세상이란 틀 내에서 무한정 사고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바둑의 변수와 세상의 변수, 얼마나 큰 차이가 있겠는가? 그래서 인공지능의 방식으로는 아무리 발전해도 인간 수준의 창의력을 따라잡을 수가 없다. 진정 인공지능이 인간을 따라잡기 위해서는 유전자부터 시작해 생명을 만드는 수밖에 없다. 완성된 인간과 세계를 만드는 것보다는 유전자를 설계하는
것이 훨씬 편하다는 것이다. 그렇게 인간과 세계를 만들고 나면 비로소 인간 수준의 자아, 인공자아가 탄생할 것이다. 인공자아가 탄생하면 그제서야 인간 수준의 창의력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이다. 그전까지 인간은 인공지능이 할 수 없는 인간 수준의
창의력을 발휘하면 된다. 창의, 그것이 포스트 인공지능 시대에 걸맞은 교육이다. 그렇다면 창의력을 어떻게 키워야 하는가? 우선 교육의 방향성부터 바꿔야 한다. 이제 교육은 생산에 동원될 노동력을 키우는 것이
아니라 창작에 동원될 창의력을 키워야 한다. 지금 교육은 미래에 하게 될 생산활동을 위한 지식을 쌓게 만드는 것에 머무르고 있다. 하지만 앞으로 인간은 대부분의 생산활동을 하지 않게 된다. 그렇다면 미래에 생산을 하게 될 때를 대비해 교육을
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 학생들이 하고 싶은 일에 맞춰서 교육을 하고 동시에 학생들이 창작을 해야 한다. 지식 쌓기와 취미활동의 중요성이 뒤바뀌게 된 것이다. 인간은 인간이 하고 싶은 일을 해야 창의력이 발휘되기가
좋다.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하는 것은 남이 시켜서 생산활동을
할 때나 도움이 되는 것이다. 남이 시켜서 하는 생산활동은 이제 인공지능이 대신할 것이니 이제 인간은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창의적인 결과물을 만들면 된다. 그래야 창의력이 키워질 것이다. 포스트 인터넷은 지식 암기의 양을 줄여주었다고 본다. 맥락만 잡고 있으면 세세한 지식은 인터넷으로 통해
보충할 수 있다. 쓸 수 있는 도구를 쓰지 않는 교육은 단순히 시대에
뒤쳐진 것일 뿐이다. 평가 또한 암기가 아닌 이해를 중점으로 해야 한다. 그렇게 지식을 암기하는 시간을 줄이고 나머지를 취미활동에 열을 올리게 만들어야 한다. 가령 게임개발을 하고 싶은 사람이 게임제작동아리를 만들었다면, 학교는 그 제작을 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도와야
한다. 취미에 필요한 지식을 쌓도록 교육과정을 만들어야
한다. 그 취미가 진로가 되어 대학과 장래를 선택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흔하지는 않았던 취미의 직업화가 이제는 일상이 되어야 한다. 기자가 되고 싶은 학생은 기사를 쓰게 하고 작가가 되고 싶은 사람은 글을 쓰게 하고 장사를 하고 싶은
학생은 직접 장사를 할 수 있게 해야 한다. 포스트 인터넷과 인공지능은 학생들의 경제활동에 대한 접근을 매우 좋게 만들었다. 오픈마켓을 통해 누구나 다 장사를 할 수 있지 있다. 그 외 인터넷을 통해 누구든 방송경험을 할 수 있다. 어플리케이션을 통해 누구든 자신의 능력을 뽐낼 수가
있다. 연령과 관계 없이 사회활동을 하는데 제약이 매우
많이 줄어든 상황이다. 유튜브를 보다 보면 초등학생이 프로그램을 만들었는데 그게 놀랍다며 이야기하는 개인방송들이 있었다. 이제 교육은 미래에 있을 직업을 위해 지식을 단순암기
할 것이 아니라 직접 사회에 뛰어들어 창작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줘야 한다. 그것이 창의력을 키우는 교육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이상하다. 창작하지 않고 어떻게 창의력이 키워지나. 그런데 이 또한 쉽게 진보하기 어려울 것이다. 애들은 공부나 하라는 식의 고지식한 부모들이 많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지금은 아니다. 코로나로 혼란스러운 이때, 가장 진보하기 좋은 시기라 본다.
마지막으로 포스트 코로나에 대해 정리해보자. 인간이 일하기 어려운 지금, 인공지능과 로봇을 이용한 완전자동화 시대가 예정보다
빠르게 올 전망이다. 그 시대를 대비하기 위해 포스트 인터넷과 포스트 인공지능 시대에 맞는 교육정책을 추진해야 한다. 교육이 진보할 때다. 이것이 지금까지의 주장이었다. 그렇다면 교육이 진보하기 전, 지금 당장 포스트 코로나에 대응하여 할 수 있는
건 뭘까? 그것에 대해 이야기해보겠다. 우선 교육부의 관점을 살펴보자. 최근 교육부의 뒤로 가는 사고방식을 접할 수가 있었다. 코로나 시대야 말로 공동체 의식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그건 학교를 갈 수 없으니까 공동체 속에서 어른들이
아이들을 돌봐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으로 보였다. 나는 이 이야기를 접하고 놀랐다. 아, 어째서 더 과거로 가는 건가. 어째서 공동체 시절로 돌아간단 말인가! 이제 아이들도 자립심을 길러야 한다. 스스로 일어설 필요가 있다. 얼마 전 6살 러시아 여자아이가 총기분해를 하고 가지고 노는
영상이 유튜브에 올라온 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런 아이들이 모임을 가지기도 했었다. 그걸 보고 어떤 한국인은 댓글로 비아냥을 하더라. 한국 아이였으면 엄마 찾고 난리였을 거라고. 부끄러웠다. 언제까지 아이들을 어른들에게 의존하게 만들려고 하나. 이제 아이들도 어른들 손에서 벗어나 자립심을 길러야 하지 않겠나? 지금은 충분히 그럴 수 있는 환경이다. 인터넷으로 어른의 도움 없어도 정보를 수집할 수
있다. 사회도 많이 성숙해져서 과거에 비해서 치안이 매우
좋은 상태다. 오히려 어린이가 어린이 보호구역에서 민식이법으로
어른을 협박할 정도지. 아, 왜인지 갑자기 눈물이 흘러 나왔다. 잠깐 그 이유에 대해 생각을 해봤다. 아마 도덕에 지배 받는 어른과 그들에게 영향을 받는
아이들에 대한 연민이 것이다. 어째서 조선의 도덕에서 벗어나질 못하는가? 어째서! 조선의 공동체 의식에서 벗어나질 못하는가! 정말 글을 쓰다가 눈물이 나온 것은 오랜만이다. 이제 아이들도 스스로 자신이 원하는 길을 찾게 만들어야
한다. 인터넷이 있지 않는가! 아이들이 직접 자신이 원하는 길을 찾고 그 정보에
대한 사실확인과 외출 시 안전보장만 어른에게 도움을 받으면 된다. 이제는 아이들에게 자유의지를 가르치는 교육이 되었으면 좋겠다. 공동체를 형성하더라도 연령과 관계없이 평등해야 한다. 장유유서의 질서가 자리잡은 공동체는 연상이 지배하는
공간에 불과하다. 그런 곳에서 어떻게 자유의지를 가질 수 있겠는가? 연상이 지배하던 사회였던 한국은 아이들이 자립심을
기르기 어려운 환경이었다. 그런 만큼 코로나 시대야말로 자립심을 기르기 가장 좋은 시기다. 왜냐하면 홀로 있어야 감염이 안 되는 시대기 때문이다. 홀로 책이나 영상으로 정보를 접하고 그 정보를 관찰하고 실험하고 고찰하여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과정이 필요하다. 자유의지로 스스로 생각할 줄 아는 인간이 되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더 이상 한국 아이들이 힘들면 엄마를 찾으며 울 거라는 부끄러운 이야기를 접하고
싶지 않다. 이제는 한국 아이들도 자립할 때다. 그러고 보니 생각나는 것이 하나 있다. 옛날 어른들은 아이들을 강하게 키우고 싶어했다. 그러나 그건 말이 안 되는 얘기였다. 순종적인 인간을 만드는 조선을 도덕으로 연약하게
만들어놓고 강하게 성장하길 바라다니. 그건 자가당착이다. 자유를 보장해주고 그에 대한 책임을 짊어지게 만들어야 강하게 성장할 수가 있다. 그리고 강하게 성장해야만 한다. 코로나는 자립심을 길러 강한 아이로 키우기 좋은 시기라는 것. 그것을 알면 당장 할 수 있는 교육방식도 자연스럽게
나온다. 시험 범위를 공개하고 알아서 공부하라고 해라. 학교는 평가만 하면 된다. 단 포스트 인터넷 시대에 맞게 암기가 아닌 이해로
평가해야 할 것이다. 인터넷이 있다는 전제하게 교육을 하게 되면 암기는 그리 크게 중요한 요소가 아니다. 이해로 평가하게 만들면 시간소요가 줄어들어 시험의 난이도가 적절하게 내려간다. 비대면 학습으로도 충분히 대응할 수 있는 난이도가
될 것이다. 남은 시간에는 취미로 창작을 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어떤 것이든 좋으니까 결과를 만들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육상이 취미면 시간 감축을, 글쓰기가 취미면 글쓰기를, 별보기가 취미면 별 관찰일기를. 어떤 것에 몰두해서 창의적인 창작품을 만들어내는
그런 시간을 줄 필요가 있다. 공부도 스스로, 하고 싶은 일도 스스로 할 수 있는 자유의지를 가진 인간을 길러내야 한다고 생각한다. 교육부가 비대면 학습을 진행하지 않은 것은 기존 교육과정인 출석방식을 유지하기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 학생이 수업에 집중을 할거란 보장이 없기
때문으로 보인다. 아이들을 믿지 못하니까 비대면 학습이 어려운 것이다. 그런데 그건 결국 공동체 속에서 아이들을 어른들
손으로 키우려는 것과 다르지 않다. 실제로 집중하지 않고 딴짓하는 아이들이 있을 것이다. 암기가 아닌 이해로 난이도를 줄여도 그런 아이들은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스스로 공부하게 해야 한다. 사실 이건 인과가 잘못되었다. 시켜서 하는 공부로 학습하다 보니 시키지 않는 공부가
어려운 것이다. 처음부터 스스로 공부하게 했어야 했다. 원하는 길을 위해 스스로 공부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했어야 했다. 그걸 지금이라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또한 쉽게 진보하기 어려울 것이다. 공부를 시켜서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고지식한 부모들이
많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지금은 아니다. 코로나로 혼란스러운 이때, 가장 진보하기 좋은 시기라 본다.
한국 교육 자체가 어른에 의존하는 경향이 크다 보니
국가 자체도 의존적인 경향이 있다. 국방을 미국에 의존한다거나 말이다. 나는 주한미군 주둔을 찬성하는 입장이다. 주한미군이 주둔해서 얻는 이익이 크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립심은 그것과 별개다. 국방비리를 보면 나는 이런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좀 비리 해쳐먹어도 미군이 지켜주겠지. 어차피 미군이 다 할 텐데 뭐. 비리가 나도 제대로 처벌도 안하고 제 식구라고 감싸기만 하고 있고. 이게 정녕 휴전국가인지 의심스러울 정도다. 이런 현상은 미군에 대한 의존 말고는 해석이 되지 않는다. 이 얼마나 의존적인가. 이것 외에도 잘 살펴보면 의존적인 성향이 눈에 띈다. 세세한 것을 다루기엔 부끄러운 것이 많으니 두루뭉실하게
넘어가겠다. 애초에 교육이 문제니까 교육이 진보하면 그런 의존적인
성향은 바뀌게 될 것이니 굳이 안 써도 될 거라 본다. 교육이 자립해야 국가도 자립한다. 그걸 강조하며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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섹스를 싫어하는 매우 도덕적인 팬더양반들은 멸종위기고
섹스를 좋아하는 매우 부도덕적인 토끼천민들은 호주를 정복했습니다. 조선의 성 관념은 생존에 적합하지 않습니다. 그건 지배에 적합한 겁니다. 여성을 도구로 삼기 위해 주입한 정조관념 따위 버리기 바랍니다. 지조 절조 따윈 남성이 만든 족쇄일 뿐입니다. 여성들의 자유와 평등은 남성에게까지 정조관념을 주입하는
것이 아니라, 여성 또한 자유로운 성생활을 즐기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여성들이 그 족쇄에서 벗어나서 자유로운 성생활이
가능해져야 성적 농담을 수치스럽게 느낀다거나 하는 일들이 없어질 겁니다. 지금 남성들은 성적 농담이나 알몸에 수치심을 별로 느끼지 않거나 아예 느끼질 못합니다. 주입된 정조관념이 없으니까요. 요즘은 여성에게 주입된 정조관념을 남성에게도 주입하려
애쓰는 모양새가 있지만, 없는 것이 자유로운 인간의 모습입니다. 여성들은 남성들이 주입한 도덕에서 해방되어 그 자유를 쟁취해야 해요. 그게 진정한 여성의 자유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래야 남성들도 덜 피곤해질 겁니다. 최소한 구급대원이 구조할 때 성추행으로 신고 받는 일은 없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여성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여성들이 성추행을 당했을 때 수치심으로 벌벌 떠는
것이 아니라 맞서 싸울 수 있게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만들어진 수치심 때문에 이성을 유지할 수 없어 성추행인지 아닌지 분별할 수 없으니까 구급대원의 구조도 성추행으로 느끼는 겁니다. 고지식한 보수주의자들이여, 나중에 팬더처럼 강제로 포르노 시청해서 애 만들
거 아니면 미리미리 준비해두십시오. 참 왕에게 지배 받던 시대의 도덕 때문에 이게 뭐 하는 건지.
안전과 보호라는 명목으로 많은 통제를 하고 있죠. 그렇지 않아도 도덕적인 국가라 자유롭지 못한 상황이에요. 한국은 자유주의 국가라고 알고 있습니다. 혹시 자유주의자라면 인간을 지배하려 들지 말길 바랍니다. 딱 필요한 만큼만 통제해야 해요. 정당으로 지배하려 들지 말고 자본으로 지배하려 들지
말고 도덕으로 지배하려 들지 말고 종교로 지배하려 들지 마세요. 정당으로 지배하는 공산당이나 의식주 투기로 지배하려는 자산가나 장유유서로 지배하려는 연상이나 조선시대
성 관념으로 인간의 성욕을 지배하려는 정조관념이 투철한 자나 맹신이나 불살로 인간의 생각과 행동을 지배하려는 종교인이나 전부 마찬가지입니다. 정치가든 자본가든 도덕이든 종교든 그 어떤 것이든
인간을 지배하려는 것은 자유의 적입니다. 그리고 자유의 적은 나의 적입니다.
시원한 여름 따뜻한 겨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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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이상한 나라의 올바름 (0)
2020/07/01 PM 07:28 |
이상한 나라의 올바름
사람은 행복하길 바란다. 그런데 행복하길 바라면서도 불행을 선택하는 사람들이
있다. 참으로 이상하지. 도대체 왜 그런 걸까? 왜 그런 모순된 행동을 하는 걸까? 이유가 있을 것 아닌가. 물론 이유가 있다. 그 불행이 사회의 올바름이기 때문이다. 올바르기 때문에 불행을 감수한다. 그것뿐만이 아니다. 그게 불행을 부른다는 것조차 모르는 걸로 보인다. 예를 들어보겠다. 많은 사람들은 꼰대를 싫어한다. 꼰대란 높은 연령이나 지위를 수단으로 상대에게 비논리적이고
불합리한 언행을 하는 사람을 뜻한다. 자신이 말이 무조건 맞는다고 생각한다. 독선적이고 지배적이다. 복종을 강요한다. 이하 다양한 특성을 지닌 꼰대는 사회적 문제를 일으켜 논란을 부르고 있다. 어떤 설문조사에 따르면 75%가 사내에 꼰대가 있다고 대답했다. 많은 한국인들이 꼰대에게 괴롭힘을 당한 적이 있다는 얘기다. 도대체 얼마나 많은 사람을 불행하게 했을까? 꼰대는 불행을 부른다. 그렇다면 이런 꼰대가 왜 생기는 걸까? 사회의 악인 것마냥 비난을 받고 있음에도 사라지지
않는 이유가 뭘까? 그 이유는 간단하다. 꼰대야말로 지극히 도덕적인 인간이기 때문이다. 그 행동이 올바른 도리기 때문에 사라지지 않는 것이었다. 조선에는 장유유서라는 도리가 있다. 「어른과 어린이 사이의 도리는 엄격한 차례가 있고 복종해야 할 질서가 있음을 이른다.」이런 도리를 물려받은 한국은 연령에 따라 엄격한
질서가 있다. 어린이는 어른에게 공손하게 존댓말을 해야 되고, 공경을 표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싸움이 일어난다. “어린 것이 반말이야!” “어디서 건방지게!” “주제 넘는 짓을 하고 있군!” 장유유서는 인간이 인간에게 복종하는 것을 올바른
도리로 만들었다. 불평등을 올바른 도리로 교육하고 있는 것이다. 오히려 평등하면 불쾌감을 느낀다. 연령평등을 주장해봐라, 받아드릴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불쾌하니까. 어떤 이는 어린이는 어리석기 때문에 어른에게 복종해야
한다고 주장할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그 논리가 바로 신분제의 논리다. 백성은 어리석기 때문에 복종해야 한다. 이 둘이 무슨 차이가 있는가? 차이가 없다. 장유유서는 어른과 어린이의 관계에서 성립되는 질서가 아니냐고 물어볼 수 있다. 그렇지만 어린 시절 교육받은 질서는 평생가게 되어있다. 세 살 버릇 여든 간다고 하지 않나? 어른이 되도 연령으로 차별하는 모습을 쉽게 접할
수 있다. 한국에선 그것이 올바른 도리가 된 것이다. 이제 알겠는가? 연하에게 복종을 요구하는 꼰대는 무척이나 도덕적인
인간인 것이다. 반대로 복종하지 않는 연하가 부도덕하다. 도덕이란 대체. 사회적 문제 중 갑질이라는 것이 있다. 갑질이란 높은 지위로 불합리한 요구나 명령을 내리는
것을 뜻한다. 꼰대랑 본질적으로 별 차이는 없다. 요는 갑질도 결국 장유유서의 질서에서 비롯되었다는
거다. 인간을 차별하는 게 올바른 도리가 되어버리니, 다른 관계에서도 영향을 미친 것이다.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 꼰대나 갑질에 불만이 있는
사람들도 장유유서의 질서를 따른다는 것이다. 당장 자신에게 물어보라. 연하가 반말을 한다고 가정하면 어떠한가? 단순 연하뿐만 아니라 어린이와 노인이 반말을 하며 평등하게 지낸다고 생각해보라. 이상한가? 불편한가? 그렇다면 장유유서의 질서를 따르고 있다는 말이 될 것이다. 불행을 부르는 꼰대와 갑질은 싫어하면서 꼰대와 갑질의 원인이 된 장유유서는 올바른 도리로 여긴다. 이것이 바로 행복하길 바라면서 불행을 선택한다는
말이다. 헛웃음이 나온다. 어려서부터 배워온 장유유서라는 연령차별주의를 올바른
도리로 교육받아 그게 불행을 부르고 있다는 걸 의심조차 하지 못해 스스로 불행을 선택하고 있는 것이었다. 자리가 바뀌면 사람이 바뀐다는 말이 있다. 갑질에 당하던 인간도 자리가 높아지면 갑질을 한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그 말은 틀렸다! 그건 사람이 바뀌는 게 아니다. 그저 올바른 도리를 행하고 있을 뿐이다. 높은 자리로 가면 복종을 요구하는 게 올바른 도리지
않나! 어쩌면 이렇게 당연한 것이었을까! 참 신기할 정도로 원인이 명백하다. 명절에 친척집 가기 싫은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집안 어른에게 복종하기 싫어서 그런 게 아닌가! 자유와 평등이 자리잡은 현대한국사회에서 이보다 더
이상한 것이 또 어디 있을까? 그야말로 이상한 나라의 올바름이다.
올바름이라. 도대체 우리가 알고 있는 올바름은 정말 올바른 것이었을까? 생각해보면 이상한 것이 하나 둘이 아니다. 예부터 남녀유별이 올바른 도리로 여겨졌다. 남녀유별인데 어찌 함께 앉으리요? 어려서부터 남녀가 유별나다는 것을 교육받았기 때문에
어릴 때 하는 이성교제를 부도덕으로 받아드리게 되었다. 그런 영향으로 아직도 많은 학교에서는 이성교제를 교칙으로 금하고 있을 것이다. 뭐 그것이 아니더라도 사회의 시선 자체가 학생교제를 바람직하게 바라보지는 않는다. 애들은 공부나 해. 이성교제는 학업에 도움이 안 된다는 거겠지. 이성교제금지는 본질적으로 남녀유별이 부른 것이지만
명분도 그럴 듯 하기에 연애와 학업을 저울질 해보겠다. 과연 연애가 중요한가, 학업이 중요한가? 이는 얼핏 봤을 때엔 학업이 중요해 보인다. 지금까지 그래왔으니까. 하지만 잘 생각해보면 연애가 더 중요하다는 걸 알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국가생존에 달린 문제기 때문이다. 연애와 생존이 무슨 관계가 있냐고? 관계가 있다. 저출산 문제다. 출산율이 낮아지면 한국은 도태된다. 저출산은 국가생존에 매우 치명적이다. 그렇다면 저출산의 원인은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자본? 환경? 다양한 원인이 있지만 근본적으로 결혼 자체를 하지 않아서 그렇다. 사실 결혼한 부부의 출산율은 높다고 한다. 만약 결혼을 하는 사람이 늘어난다면 출산율을 걱정하지
않아도 될 정도라고 한다. 그러니 저출산은 단지 결혼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결혼을 하지 않는 이유가 뭘까? 이성을 사랑하는 사람이 적기 때문이다. 왜? 그건 꼰대와 인과관계가 같다. 어려서부터 사람이 사람을 평등하게 대하는 걸 부도덕하다고
교육을 받으니 성장해서도 평등하게 대할 수가 없다. 그래서 꼰대가 생기고 갑질이 생긴다. 마찬가지다. 어려서부터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는 것을 부도덕하다고 교육을 받으니 성장해서도 사랑할 수가 없다. 그래서 결혼이 줄고 이혼이 늘었다. 인과관계가 명확하지 않나? 그렇다면 과거에 결혼과 출산율은 왜 높았는가? 그야 간단하다. 과거에는 결혼이 의무였기 때문이다. 집안과 집안의 연결이라고 할 정도였지. 그래서 학생의 이성교제를 금지해도 사회가 돌아갔다. 사랑하지 않아도 결혼을 하게 했으니까 출산율이 높았던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지 않나. 결혼은 의무가 아니다. 그래서 결혼하는 사람이 줄어들었다. 분명 결혼은 개인에게 많은 희생을 요구한다. 서로에 대한 간섭과 책임. 가족을 형성한다는 것은 개인의 희생을 동반한다는
것이다. 그 희생은 의무가 아니면 사랑이 있어야 감내할 수
있다. 그런데 어려서 사랑하는 방법을 배우지 못했네? 그러니까 우리 사회가 이 지경이 된 것이다. 남녀유별에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 교육을 명분으로
별생각 없이 내세운 학생의 이성교제금지 때문에 사랑하는 법이 배우지 못한 사람들이 많아져서 결혼을 하지 않는 바람에 국가존립을 흔드는 저출산 현상이
나타난 것이다. 이제 알겠나. 국가생존을 위해서라면 지금이라도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는
걸 부도덕하다고 교육하지 말아야 한다. 이제라도 연애하게 만들어야 한다. 어려서부터 서로를 아끼고 사랑하게끔 해야 커서도 서로를 사랑할 수가 있는 거다. 그래야 결혼도 늘어나는 거다. 애초에 사랑하지 않는데 어찌 결혼을 하고 출산율이 높아질 수 있을 거라 생각했던 건가? 모든 현상에는 원인이 있다. 사랑을 교육하지 않았으니까 사랑을 할 줄 모르기에
결혼을 하지 못하는 거다. 흔히 연애는 커서 하면 된다고들 한다. 그런 논리로 학생의 이성교제를 반대하겠지. 똑같이 돌려주겠다. 커서 공부하면 된다. 그러면 공부에는 때가 있다고 말할 것이다. 똑같이 돌려주겠다. 사랑에도 때가 있다. 어릴 때 사랑하는 법을 배우지 못한 인간은 평생 사랑할 줄 모르게 된다. 어린 시절 교육은 평생 가는 법이다! 그리고 학업과 병행이 불가능한 것도 아니다. 오히려 누군가에 대한 사랑이 삶의 원동력이 되어 공부에 집중하게 할 수 있다. 강압으로 공부에 매달려왔던 아이들이 능동적으로 노력할
근거가 생긴다는 거다. 사랑하는 사람과 행복한 미래를 위해 공부한다. 그것이 이상한가? 한국은 사랑을 부도덕하다고 교육한 결과 국가 애정결핍이 되어버렸다. 결혼비율감소. 그것이 명확한 근거가 된다. 이런 애정결핍현상은 저출산에만 영향을 끼치는 것이 아니다. 사람이 사람을 사랑할 줄 알아야 사회도 사랑하고
국가도 사랑하는 것이다. 이제는 애국심을 강요할 수 있는 시대가 아니지 않나. 국가를 위해서, 민족을 위해서, 희생하는 시대가 아니다. 이제는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희생하는 시대다. 가족을 위해 연인을 위해.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손해를 감수한다. 그러나 한국은 애정결핍사회다. 사랑할 대상이 없거나 사랑할 줄 모르는 사람이 많이 늘어났다. 그래서 희생을 하겠다는 사람들도 줄어들고 있다. 군대를 왜 가나? 출산을 왜 하나? 과거엔 강제로 가고 했다. 지금은 사랑하는 사람이 있어야 그 희생을 감수할
것이다. 현재 우리 사회에는 혐오와 증오가 만연하다. 그것은 사람을 사랑하는 걸 부도덕이라 교육한 결과라고
본다. 애정이 결핍되었으니 증오와 혐오가 넘치는 거다. 성별관계 없이 왜 혐오사상에 휘둘리겠는가? 왜 이성을 혐오하는 사람이 많을까? 배움의 시기에 이성을 사랑하는 방법을 배우지 못했기
때문이다. 사랑이 없는 사회, 이 얼마나 불행한 사회인가? 지금까지 우리가 아무 생각 없이 지켜왔던 올바름이야말로
우리를 불행하게 만들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는 그걸 알아야 한다. 도대체 올바르다고 생각해왔던 것 중에 진정 올바른 것이 얼마나 있는 건가?
유교의 올바름만 이상한 건 아니다. 다른 것들도 살펴보면 이상했다. 불교는 살생을 죄로 만들었다. 모든 생명체를 죽이면 죄라는 것이다. 즉 불살이 올바른 도리다. 얼핏 보면 맞는 말 것처럼 느껴진다. 살생이 올바르게 느껴지진 않겠지. 그런데 생각해보면 이상하다. 인간은 생명체를 죽여서 생명을 유지하는 생물이다. 잡아먹고 살아남았다. 수백 만년간 그래왔다. 그것이 잡식동물인 인간 본연의 성질, 인간의 본질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불살이 올바른 도리가 되면 잡식이란 인간의
본질이 잘못되었다는 얘기가 된다. 그건 달리 말해 잡식의 성질을 버리는, 인간이 인간에서 벗어나는 게 올바른 도리라고 주장했던 것이다. 도대체 이게 뭔가. 그 어떤 올바름이건 인간의 올바름이면 인간을 위해 존재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어찌 인간이 아니게 되는 걸 올바른 도리라고 하는가? 인간이 인간이 아니게 되는 것이 올바르다면 무엇을
위해 올바름은 존재하는 것인가? 증명되지 않은 신을 위해서? 염라대왕께서 진노하기 때문에? 파리는 잡아죽이면서 반딧불은 예쁘다고 아끼는 게 인간이다. 소와 돼지는 잡아먹으면서 고양이와 개는 예뻐하는 게 인간이다. 원래부터 인간은 동물 상대로 제멋대로 해왔고 그것이
그릇된다고는 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다른 종도 인간 상대로 제멋대로 하기 때문이다. 지금은 힘에 눌려서 제멋대로 하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호랑이를 산에 풀어놔보라. 매일 호환에 시달릴 거다. 그러니 인간이 무슨 만물의 지배자마냥 다른 종까지 보살피려 들지 말라. 잡아먹지 않아도 살 수 있으면 모르되, 다른 종을 잡아먹을 거면서 그들의 사정까지 살피는
건 지나치게 오만한 행위다. 인간은 지적 능력 외에 생명의 가치 측면에서 다른 동물과 아무런 차이가 없다. 그러니 다른 동물처럼 똑같이 생존경쟁에 나선다고 해도 별다른 죄가 되지 않는다고 본다. 살생의 죄라. 어쩌면 도축업자가 천대받은 것은 살생이 죄였기 때문이
아닐까 싶을 정도다. 동물을 도축하는 도축업자는 매일 살생하고 있으니 살생이 죄인 사회에선 존중 받기 어렵겠지. 반면 그런 게 없는 서양에선 도축업자가 존중을 받고 있다. 올바른 도리가 끼치는 영향이란 바로 그런 거다. 여기서 끝난 게 아니다. 생각이 계속 이어진다. 올바름이 사회의 질서를 형성한다. 그렇다면 어쩌면 그 올바름 때문에 동양이 서양보다
뒤쳐졌던 것이 아닐까 싶다. 사회를 형성하는 질서가 다르니까 격차가 생긴 거란 얘기다. 정리해보자. 동양에 영향을 끼치던 불교의 올바름은 인간뿐만 아니라 다른 생명체를 죽이는 것도 덜덜 떨며 죄악감을 가졌다. 그야말로 초식이다. 반면 서양에 영향을 끼치던 기독교의 올바름은 명분만
있으면 그 대상이 인간이라도 죽여도 되었다. 이교도를 학살하는 건 지극히 올바른 도리였다. 그야말로 육식이다. 이 차이가 동양과 서양의 격차를 만드는데 큰 기여를 한 것이 아닐까? 불교는 내면수행을 중요시했고 기독교는 종교전파를 중요시 했다. 불교의 죄는 죽어서 저승에서 갚게 되고 기독교의
죄는 회개하면 천국으로 갈 수 있었다. 과연 어느 쪽이 인간에게 있어 더 자유로운 활동이 가능했는가? 어느 쪽이 더 넓은 세계로 뻗어나갈 수 있겠는가? 인간의 발전은 생각과 행동의 자유에서 비롯된다. 동양은 내면수행을 하고 있을 때, 서양은 종교전파를 목적으로 세계를 떠돌며 새로운
문물을 접했다. 동양은 되도록 얌전히 질서를 유지하고 있었지만 서양은
종교전파의 과정 속에서 침략의 죄도 지었다. 옳고 그름을 제외하고 보자. 어느 쪽이 더 자유로운가? 어느 쪽이 더 나아갔는가? 그것만 따지면 서양 쪽이 더 자유롭게 나아갔다. 자유로운 환경, 새로운 변화. 그러니까 서양이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동양과 서양은 각자가 추구하는 올바름의 차이로 격차가 벌어졌다고 본다. 씁쓸한 일이다. 불살이 진정 인간을 위해 올바른 것이었다면 그래도 이해한다. 그런데 그건 단지 잡식인간이 아니게 되는 걸 올바르다고
주장했던 것뿐이다. 그 때문에 동양이 굴욕을 겪는데 영향을 끼쳤다면 불살을 지켜야 하는 게 올바른 도리라 할 수 있을까? 약자는 죄가 아니다. 하지만 약하게 만드는 것은 죄가 된다. 왜 벌레 하나 죽이지 못하는 약자로 만드는 걸 올바른
도리라고 교육했는가? 참 이상하다. 내가 생각하는 최고선은 종의 생존과 번영이다. 그 최고선을 이루는데 방해되는 올바름은 내게 있어 더 이상 올바름이 되지 못한다.
기독교는 의심을 죄로 만들었다. 즉 맹신이 올바른 도리다. 상식적으로 어떻게 이걸 올바른 도리로 여기는지 이해할
수가 없을 것이다. 그런데 그게 올바른 도리로 여겨진다. 그냥 그렇게 교육받아왔기 때문이다. 복종을 올바른 도리로 여기거나 불살을 올바른 도리로 여기거나 하는 것과 똑같은 거다. 그저 그렇게 배웠을 뿐이다. 이런 도리는 지배를 할 때 아주 효율적이고 적절했다. 의심이 죄가 되자 종교의 가르침뿐만 아니라 종교지도자의
말 또한 의심할 수 없게 되었다. 종교지도자의 말은 뭐든지 믿는다. 기독교계열에서 사이비종교가 많은 까닭은 여기에 있다. 뭔가 이상한 게 있어도 의심이 죄다라고 말하며 의심할 수 없게 만들면 되니까. 의심이 죄다 보니까 과학의 효과도 미미하다. 과학이 발달하면서 기독교의 가르침이 비과학적이라는
것이 밝혀지고 있음에도 의심할 수가 없으니까 그냥 종교를 그대로 믿고 있다. 맹신이 올바른 도리라고 교육받은 사람들이 늘어날수록 사회엔 비과학적, 비이성적, 비논리적인 사람들이 늘어났다. 이는 피해의식과 정으로 이미 감성적인 한국을 보다
더 감성적으로 만들었다. 의심이 죄다 보니까 사기꾼도 엄청 많다. 아니 사기꾼 입장에선 매우 손쉬운 먹이였을 것이다. 의심 자체를 할 수 없는 인간들이니까. 아, 맹신이 올바른 도리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 자체가
괴롭다. 이런 당연한 걸 주장해야 한다니. 그래도 하겠다 맹신은 올바른 도리가 아니다! 의심은 죄가 아니다! 무엇이든 의심하고, 자신이 의심받는 것을 불쾌해 하지 말라. 맹목적인 의심은 잘못되었으나 합리적인 의심은 사회를
건전하게 만드는 훌륭한 수단이다. 의심이야말로 발전의 양분이다. 배운 것을 의심하지 않으면 어떻게 앞으로 나아갈 수가 있나! 기독교의 질서 내에서 현대사회의 사상들이 등장했음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기독교의 맹신이 올바르다고는
할 수는 없다. 의심하고 또 의심해라. 그래야 발전한다. 종교를 가진 사상가와 철학가는 불완전하다. 가르침을 부정하지 못하고 가르침 내에서만 사상과
철학을 할 수 있으니까 말이다. 의심할 수 없는 사상가와 철학가는 그 한계가 명확하다. 그런데 서양이 의심이 죄라는 한계가 있음에도 동양보다 발전할 수 있었다. 그 말은 의심이 죄인 것이 행동에 제약이 많은 초식보다는
발전에 도움이 된다는 이야기가 된다. 인간을 위한 올바름이라, 도대체 뭐라고 해야 할까?
왜 싸움이 죄가 되었던 걸까? 나는 싸움이 싫었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니까 싸움 또한 일종의 의사표현이었다. 나의 의사를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는 수단이었다! 그걸 죄로 만들다니! 죄는 폭력으로 인간을 상하게 만들었을 때 죄가 된다고
가르쳤어야 했다. 논쟁! 무도! 그런 것은 올바르다고 가르쳤어야 했다! 최근 미국에서 흑인 사망으로 흑인인권시위가 벌어지고 있다. 그런데 일부 폭력을 사용하는 이들이 있어 논란이
일어나고 있다. 그 때문에 시위 자체를 잘못되었다고 보는 사람이
있다. 하지만 시위 자체는 잘못이 아니다. 설령 폭력이 있다고 하더라도 시위 자체는 그야말로
자유의 상징이다. 불만 있으면 싸워라! 나는 흑인인권시위에 관심이 없다. 그 시위는 모든 인간의 인권도 아니고 흑인인권도
아닌 미국 내에 있는 흑인의 권리를 위한 시위이기 때문에 별로 관심이 없다. 하지만 시위 자체가 잘못되었다고 하지는 않는다. 그것이 자유주의에서는 올바른 도리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자유국가인 미국다운 모습이다. 싸움이 죄를 부를 수 있다고 싸움 자체를 막는 것보다
훨씬 자유롭고 바람직하다. 만약 폭력이 있을 수 있다고 하여 시위 자체를 못하게 했다고 가정해보자. 그것이 정녕 올바른 일일까? 나는 그릇된다고 본다. 지금까지 아이들을 손쉽게 다루기 위해 싸움자체를 죄로 만들었다. 조용히 순종적으로 지내라고 요구했지. 하지만 그것은 잘못되었다. 오히려 싸움할 수 있는 인간으로 길러냈어야 했다. 건전한 싸움, 올바른 싸움을 할 수 있도록 싸우는 방법을 알려줬어야
했다. 논쟁하는 법을 알려주고 무도를 알려준다. 그것이 바로 싸울 줄 아는 인간으로 육성한다는 것이다. 논쟁을 가르쳐서 저열한 욕설보다는 품위 있는 논리적인
공격을 할 수 있도록 했어야 했다. 무도를 가르쳐서 정당한 약자를 보호하고 부당한 강자와 맞서 싸울 수 있도록 했어야 했다. 단순하게 싸움이 죄를 부를 수 있다고 해서 싸움 자체를 죄로 만들면 안됐다는 이야기다! 많은 사람들이 제대로 싸울 줄 모르니까 우리 사회에서
싸움이 불건전하게 진행되고 있지 않나! 인터넷 상에 악플을 단다거나, 약자를 공격하고 강자에게 복종한다거나 하는 것들은 그야말로 인간의 싸움을 배우지 못한 동물들이 저지르는 죄악이다. 따라서 싸움자체를 금하는 것이 아닌 인간의 싸움을
배우도록 하게 했어야 했다. 아,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까지 올바르다고 생각했던 것들
대부분이 이상하다.
왜 성 상품화가 죄가 되었던 걸까? 얼핏 들으면 올바른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어린 시절 이성교제를 부도덕하다고 교육받아 자연스럽게
섹스도 부도덕하다고 교육받아왔으니까. 자연스러운 욕구 중 하나를 언급하는 것도 조심스럽게 만든 것은 그러한 영향이 크다고 본다. 그 영향으로 포르노를 죄악으로 여기는 건 한국 제외하곤 거의 없다고 하지. 한숨만 나온다. 성 상품화? 그건 결코 죄가 아니다. 인간의 필수적인 욕구를 충족하게 할 상품을 죄로
만들면 어쩌자는 건가. 식욕을 충족하기 위해 만든 상품은 죄가 되는 건가? 성의 상품화나 식의 상품화나 인간 본성을 기준으로 하면 차이가 없다. 그럼에도 조선의 도덕관념과 서양의 여성주의가 합쳐서 성 상품화를 죄로 만드는 사태가 벌어지고
말았다. 이는 인간이 인간임을 부정하는 불교의 불살과도 같은
상황이다. 고기를 먹는 것을 죄로 여긴 이들이나 성 상품으로
성욕을 해소하는 걸 죄로 여긴 이들이나 똑같이 인간을 위한 것이 아닌 것을 올바름으로 추구하고 있다는 거다.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일이다. 어떻게 인간에게 인간이 아니게 되는 걸 올바른 걸로
인정하길 바라고, 따르길 바라고, 인정하길 바라는 걸까. 이런 것 다 집어치우고 물어보겠다. 왜 그렇게 그릇이 좁은 건가? 성 상품으로 행복을 얻는 것이 그렇게나 아니꼬운가? 자신이나 사회에 피해가 많지 않으면 웬만하면 그
자유를 인정해라. 성 상품이 대한 부정적 인식을 줄 수 있어서 반대한다는
의견이 있다. 그건 틀렸다. 성 상품화로 부정적 인식을 주는 것이 아니라, 애초에 그 부정적 인식이라는 게 정상적인 인식이다. 가슴 좋아하고 팬티 좋아하고 근육 좋아하는 것들이
성 상품화 때문인 걸로 보이나? 원래 그런 거다. 원래 인간이 그런 거 좋아하는 거란 말이다! 더럽다고 느끼는 것은 그걸 더럽다고 느끼게 만든 도덕 탓이다. 왜! 인간의 성애를 더러운 것으로 만들었나! 꼰대가 도덕적인 인간인 것처럼, 애초에 잘못된 올바름을 주입 받아서 그런 거다. 정말 우리가 생각하는 올바름이 진짜 올바른지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성욕은 본능이 원인이지만 성 상품화가 불편한 건 주입된 도덕이 원인이다. 성욕은 생존에 필수적이지만 도덕은 생존에 필수적이지
않다. 무엇이 더 우선되어야겠는가? 본능을 죄로 만들지 좀 마라. 가엾은 한국인들. 의미 없는 올바름 때문에 다른 나라 사람들은 당연하게
얻는 성적 만족감을 우리는 죄악감을 가지며 얻고 있다. 이 또한 사회를 불행케 하는 요소다. 이는 올바름이 불행에 일조하고 있다는 명백한 근거다. 결국 우리는 이 또한 스스로 불행을 선택하고 있는 셈이다. 아, 도대체 올바름이란. 모든 올바름은 그 근간에 인간애가 있어야 한다고 본다. 인간을 위해서, 인간을 사랑하기 위해서. 존재해야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성 상품화를 죄로 만든 올바름은 과연 인간을
위해서 존재한다고 볼 수 있는가? 성애, 즉 이성을 성적으로 사랑하는 것은, 인간을 사랑하는 것으로 지극히 올바른 도리가 아니겠는가? 성을 사랑하여 상품화가 되는 걸 좀 죄라고 여기지
말라. 그건 조선의 정조관념이 부른 잘못된 도덕관념이다. 조선의 정조관념에서 좀 헤어나왔으면 좋겠다. 정말 지겹다. 여성주의자들은 조선의 여성차별은 싫어하면서 조선의
정조관념은 왜 그렇게 좋아하는가? 단지 입맛에 맞아서인가? 흔히 여성주의가 사회를 바꾸는 개혁이라고 말하는데, 결코 아니다. 지금 여성주의자들이 주장하는 바는 남성이 만든 질서에서 남성의 권리와 여성의 혜택을 바라고 있을 뿐이다. 새로운 질서를 만드는 것이 아니란 얘기다. 남녀의 권리와 혜택이 조금 달라질 뿐, 근본적으로는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다. 연령차별이 사라지나? 정조관념이 사라지나? 그들은 조선의 정조관념을 유지하는 지극히 도덕적인
인간들이다. 그들은 진보가 아니라 보수다. 조선의 정조관념이라, 고리타분하긴. 애초에 수치심도 정조관념에서 온 게 아닌가? 여성을 약하게 만드는 수치심을 왜 그렇게 소중히
여기는지. 정말 보수적인 사람들이다.
그 외 자본의 지배를 올바른 도리로 여긴다거나 정당의
지배를 올바른 도리로 여긴다거나 하는 일들이 있다. 흔히 앞에 것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뒤에 것은 공산주의 사회에서 벌어지는 일이다. 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한 자본주의의 명분은 자유고 공산주의의 명분은 평등이다. 자유와 평등, 명분은 그럴 듯 하다. 하지만 그건 명분에 불과하다. 자본을 가진 자는 자유롭게 뭐든지 할 수 있다. 법치 위에도 설 수 있다. 이것이 자본의 지배를 정당화한다는 것이다. 정당에 속한 자는 평등한 분배를 위해 지배할 수
있다. 법치 위에도 설 수 있다. 이것이 정당의 지배를 정당화한다는 것이다. 각 사회에 속한 사람들은 헷갈릴 것이다. 어째서 자본 지배가 이상하다는 거지? 어째서 정당 지배가 이상하다는 거지? 하지만 생각해보라, 「인간이 인간을 지배하는 것은 올바른 도리가 될
수가 없다.」그런 명확한 기준이 있다면 그들이 말하는 궤변에서
벗어날 수 있다. 세상의 올바름은 대부분 인간을 이용하기 위한 부분이
있으니 주의하지 않으면 올바름에 이용당할 수 있다. 그 점을 잊으면 안 된다. 특정 시대의 올바름은 절대선이 아니다.
기본적으로 보수는 선이고 진보는 악이다. 기존 질서유지를 바라는 보수는 질서 내에서 선이
될 수밖에 없고 질서파괴를 바라는 진보는 질서 내에서 악이 될 수 밖에 없다. 제정시대에 자유와 평등의 외침은 분명 악이라 할 수 있다. 독재체제에 민주화 운동은 분명 악이라 할 수 있다. 그런 식으로 질서를 파괴하는 진보는 악이 될 수밖에
없다. 그 의미는 악이 없는 집단은 진보할 수가 없다는
얘기가 된다. 조선은 수백 년간 질서가 유지되었다. 수백 년간 질서를 파괴할 악이 등장하지 못했다. 올바른 것이건 올바르지 않은 것이건 그다지 변하지
않았다. 그야말로 불변의 질서가 자리잡은 도덕적인 국가. 그것이 조선의 본질이다. 그리고 그랬기 때문에 진보하지 못하고 결국 몰락하고
말았다. 변화 없는 질서의 끝은 바로 그런 것이다. 참 재미있게도 조선은 질서를 파괴할 악이 없었으니까
망했단 얘기다. 불변의 질서라. 한국사회의 질서에서 장유유서의 도리를 부정하는 것은
분명 악이 될 것이다. 꼰대나 갑질 싫어하는 사람들도 애들이랑 맞먹으라고 하면 불편하겠지. 실제로 그런 방송이 나간 적이 있다. 아이와 노인이 서로 반말을 하며 대등한 관계를 구축했다. 흥미로운 기획이었다. 그러나 장유유서의 도리를 거역한 이 방송은 반발이
많았다. 그 방송을 시청한 시청자의 의견 중 기억나는 것은, 어린 애가 네 부모에게 반말을 해도 괜찮겠냐는 것이었다. 당연히 괜찮다. 장유유서를 올바른 도리로 배운 사람들은 쉽게 받아드리지
못하겠지만 잘 생각해보면 문제가 없다. 반말이 상대를 업신여기는 것이 아니지 않나. 그러면 반말을 사용하는 평등한 관계는 서로 업신여기고 있단 건가? 말이 안 된다. 연하가 연상에게 복종하지 않아도 충분히 서로 사이 좋게 지낼 수 있다. 충분히 서로를 존중하고 아낄 수가 있다. 충분히 서로를 사랑할 수 있다. 그럼에도 연하가 연상에게 복종하는 것을 올바른 도리로
배운 사람들은 연령평등을 악으로 여기게 된다. 끔찍하다. 토할 것 같다. 연령평등을 주장하는 나는 악이 될 수밖에 없다. 그래도 감수하겠다. 사회의 폐단의 원인이 논리적으로 명확함에도 그걸
받아드리지 못해 악으로 취급한다면, 나는 악으로서 기존 질서를 파괴하고 새로운 질서를 만들자고 주장하겠다. 꼰대나 갑질이 싫으면 좀 새로운 질서를 받아드려라! 모든 개혁자와 혁명가는 악이 되는 걸 두려워하지
말라. 그리고 다른 이들도 악을 두려워하지 말라. 꺼려하지 말라. 그 악이 있어야 우리 사회가 변화할 수 있다. 앞으로든 뒤로든 나아갈 수 있다. 그래야 우리가 불필요한 족쇄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 자유, 자유, 자유! 이 나라 사람들이 이상한 올바름에서 해방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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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주의를 올바르다고 교육받은 사람들은 한국을 적대시하는
북한을 형제로 여기고 그걸 부정하는 이들을 반민족주의라며 공격하겠죠.
그런데 그 올바름이 정말 한국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지
묻고 싶어요. 민족과 국가 사이에서 저울질하지 말고 국가를 위해
일했으면 좋겠습니다. 올바르다고 교육받은 것이 전부 올바른 건 아니니까요. 좀 더 고찰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저는 역할에 초점을 맞추고 싶어요. 개인 사상이 어떠하건 한국을 위해 일하는 역할이라면 그 역할을 다하길 바랍니다. 친미니 친일이니 친중이니 친북이니 관계없이. 한국을 위해서 일했으면 좋겠습니다. 외세에 휘둘리는 게 더 부끄러워.
북한은 분명 서양의 제국주의에 저항하여 민족주의자들의
귀감이 되었을 겁니다. 지금까지도 저항하고 있죠. 어쩌면 한국의 민족주의자 입장에선 부채감을 느낄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못했는데 그들은 했으니까. 그런데 그게 정말 올바른 겁니까? 모든 독재자는 권력유지가 최우선이다. 이건 어떤 곳에도 들어맞는 이치일 겁니다. 착각하지 마세요. 북한의 독재자는 독재를 위해서 행동하지 민족을 위해서 행동하지 않습니다.
서양의 것을 수용한 것이 민족주의자 입장에서 악이
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악이야 말로 사회를 진보시킵니다. 민족자결주의를 주장하며 민족주의자의 선을 지향했던 북한인들이 어떤 삶을 사는지 잊지 마십시오. 민족주의에서 벗어나 서양의 문물을 받아드려 친미파 친일파 소리를 들었던 자들의 악행 때문에
한국이 성장했음을 잊지 마십시오. 독재정권에 대항하여 질서를 파괴하는 악인 취급을 받다가 드디어 질서의 중심이 된 사람들은 잊지 마십시오. 악이 사회를 진보하게 만듭니다. (가끔 퇴보하게 만들기도 하지만.) 현재 질서를 거역하는 악이 사회를 혼란케 할 겁니다. 그래도 그 악이 있어야 한국은 진보할 수 있습니다. 질서를 거역하는 악의 존재를 인정하고 당당하게 맞서
싸우십시오.
진보라고 이야기하는 사람들 중에 진짜 진보가 얼마나
있는지 모르겠네요. 그냥 서양정치이념에서 진보라 설정된 걸 따르는 것뿐이잖습니까? 조선의 정조관념을 소중히 하는 사람들이 진보라 주장하는 걸 보면 정말 헛웃음이 나옵니다.
앞으로 꼰대나 갑질이 나오면 음, 장유유서의 도리를 따르는 도덕적인 인간이군! 이라고 감탄하면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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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담] 초식화의 죄악, 조선의 도덕 (4)
2020/06/15 AM 12:48 |
초식화의 죄악, 조선의 도덕
불평등한 사회의 질서를 유지하던 도덕이 평등한 사회의
질서를 유지하는데 적합한가? 그 의문에 대한 답은 쉬울 것이다. 적합하지 않다. 그렇다면 달리 물어보겠다. 불평등한 신분사회였던 조선의 도덕이 평등한 민주사회인 한국에 적합한가? 이에 대한 답도 쉬울 것인가? 아마 꺼림칙할 것이다. 조선에 대한 비판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조선의 결점을 지적하면 식민지배를 옹호하는 반민족주의자로 몰려 공격 당할 우려가 있기
때문에 애초에 언급 자체를 꺼려한다. 하지만 처음 의문처럼 객관적으로 보면 분명 적합하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보다 나은 방향으로 가기 위해서는 객관적으로 사물을 봐야 한다. 조선의 도덕은 한국의 사회에 적합하지 않다.
조선은 불평등한 신분제국가였다. 그런 조선의 도덕은 왕과 양반에 반항하지 않는 순종적인
백성을 길러내는데 적합했다. 무지한 백성들을 다루기 쉽게 도덕의 족쇄를 채워 반항할 수 없게 만들었다. 분명 그 당시 사회에는 적합했을 것이다. 당시 도덕의 상징인 삼강오륜 중 삼강을 살펴보자. 군위신강「신하는 임금을 섬기는 것이 근본」, 부위자강「아들은 아버지를 섬기는 것이 근본」, 부위부강「아내는 남편을 섬기는 것이 근본.」 삼강의 경우 정치적 목적으로 새로 추가된 것이라고
한다. 뭐 그건 별로 중요한 사실은 아니다. 유교에 초점을 맞춘 것이 아니라 조선의 도덕에 초점을
맞춘 것이니까. 어쨌든 이것이 평등한 사회에 적합하다고 주장하지는
않을 것이다. 삼강은 불평등하다. 좋은 뜻이 담긴 오륜 중에서도 한심한 것은 장유유서다. 「어른과 어린이 사이의 도리는 엄격한 차례가 있고
복종해야 할 질서가 있음을 이른다.」 아이는 어른에게 복종하라. 이것이 정상적인 민주사회에 있을 수 있는 규범인가? 그런데 한국은 그런 식으로 교육했고 그랬기 때문에 불평등한 사회가 되었다. 한국아이는 처음부터 어른에게 복종하라는 불평등한 교육을 받고 성장했다. 그렇게 질서를 유지하는 도덕 자체가 불평등하니 갑질, 꼰대 따위가 존재하는 것이었다.
왜 갑질과 꼰대가 끊이질 않는 걸까? 그건 평등이 부자연스럽기 때문이다. 그 동안 그렇게 교육받아왔기 때문에 평등해지면 자신이
존중 받지 못하다는 느낌을 받는다. 예전에 어떤 아이의 고민상담 글을 본 적이 있다. 본인 스스로는 부모에게 마음을 열고 평등하게 대했는데 부모는 그걸 받아드리지 못한다고 하소연했다. 아마 그 아이는 부모를 친구 대하듯 애정을 담아
평등하게 대했겠지. 하지만 그건 불평등한 교육을 받아온 사람에겐 모욕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감히 아이가 어른과 맞먹으려고 하는가? 아이시절부터 서열주의로 교육을 받은 인간은 서열로 차별하는 걸 당연하게 생각한다. 갑질, 꼰대, 왕따 따위는 아주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한국에서 서열 때문에 나타나는 폐단은 도덕이 근간이다. 물론 그 도덕의 근간은 인간의 본성이므로 한국의
문제는 인간 본성의 문제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그러니까 민주사회에 적합한 도덕이 되지 못한다. 그건 불평등한 사회의 질서를 유지할 때나 도움이 되는 것이다. 야생이나 신분제사회 같이 말이다. 이런 당연한 것을 왜 모르고 있었을까? 올바른 도리라고 생각했던 것이 사회문제를 일으켰던 원인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올바르다고 생각해왔는데 어찌 의심할 수 있겠나? 관습이 된 정의는 시간이 흘러 변화의 시기에 적응하지
못하고 악습이 되어버린다. 오래된 악습은 오래된 폐단이 되어 적폐라고 불린다. 현재 한국에 뿌리 깊게 내린 조선의 도덕은 한국사회에 있어 적폐다. 진정 평등한 사회를 바라는 이가 상대할 대상은 특정한 인간이 아니라 올바른 도리라 생각했던
조선의 도덕이다. 그 도덕이 그런 불평등한 인간을 길러내는 것이니까.
과거 모든 인류가 불평등했음에도 어떤 기준을 나눠
차이를 구분한다면, 육식국가는 힘으로 인간을 지배했고 초식국가는 도덕으로 인간을 지배했다. 동학농민혁명이나 갑신정변의 실패는 도덕이 원인이었다. 많은 백성들이 호응하지 못했을 것이다. 서열에 복종하라 교육받은 인간이 투쟁하기가 쉽겠는가? 힘으로 억눌렀으면 터져 나왔을 것이다. 그러면 자연스러운 혁명으로 이어져 민주화가 되었을
수도 있다. 그런데 조선은 도덕으로 억눌렀다. 백성은 왕과 양반을 섬기는 것이 당연하고 아이는
어른을 섬기는 것이 당연하다. 높은 서열과 싸우는 것이 죄가 되는데 어찌 싸울 수 있겠는가? 죄인이 되는 각오가 된 자들만이 싸울 수 있었다. 이런 불평등한 서열주의가 도덕이 된 순간, 조선의 백성은 도덕의 노예가 되었다. 저항할 수 없고 투쟁할 수 없다. 그런 현상이 두드러지자 조선은 싸울 줄 모르는 국가가 되었다. 이른바 초식화다. 조선은 초식국가였다. 입으로만 도덕적인 양반들은 선비라 불리며 귀함을
받고 야만적인 도축업자들은 백정이라 불리며 천대를 받았다. 이 얼마나 슬픈 일인가. 각자 사회를 구성하는데 필요한 역할임이 분명함에도 서열을 나눴다. 복종을 올바른 도리로 만들다니, 그건 정말 잔인한 일이다. 그리고 그런 잔인한 일은 현대 다른 국가에서도 벌어지고 있다. 현대의 대표적인 초식국가가 바로 일본이다. 제국주의, 군국주의로 파멸을 맞이했던 일본의 정치가들은 민중을
지배하는 방법을 힘에서 도덕으로 바꿨다. 착한 일본, 세계에 사랑 받은 일본, 겉으로만 드러나는 도덕적인 행위에 집착하며 싸움과 투쟁을 죄로 만들었다. 분쟁요소가 있는 시위를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것은 초식화 교육의 산물이다. 무능하고 부패한 정치가들과 싸울 줄 모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투쟁이 죄가 된 사회에서 불의와 맞서 싸우려면 죄인이란
낙인을 받을 수가 있다. 그러므로 일본이 바뀌려면 죄인이 되는 각오가 된 자들이 많아야 할 것이다. 그렇게 초식화된 그들은 아주 자연스럽게 조선의 뒤를 따르고 있다. 조선을 지배했던 일본이 조선의 말로를 그대로 따라간다는
사실은 보고 있으면 참 헛웃음이 나온다. 일본사회에서 전쟁범죄를 받아드리지 못한 까닭도 어쩌면 이것이 원인일지도 모른다. 초식화되어 착하다고 생각하는 자신들의 선조가 그런 악독한 죄를 지었으리라 생각을 하지
못하는 거겠지. 일본에서 교육받다가 서양으로 건너간 일본의 어린
아이가 서양의 관점에서 일본역사를 교육받고 충격 받아 엉엉 울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기억이 난다. 인터넷 글이므로 근거가 확실한 것은 아니나, 초식화된 일본에서 있을 법한 일이라 보고 있다.
지금까지 한국사회의 질서를 유지하던 도덕이 없으면
어찌 사회가 유지될까 불안해할 수가 있다. 어쩌면 서양의 것을 그대로 따르자는 사대주의적인 주장을 하는 것이냐고 물어볼 수도 있다. 아니다. 한국사회에 맞는 새로운 도덕을 만들어보자는 것이다. 어째서 불평등했던 조선의 도덕을 그대로 교육하고 받아야 하는가? 단순히 관습으로 여기기엔 그 도덕이 만드는 사회문제가
한두 가지가 아니지 않나. 한국국민은 불평등했던 조선의 도덕이 없어도 평등한 사회질서를 유지할 수 있는 지적 수준과 정보교환수단이 발달했다. 진정 평등한 민주사회는 그 질서를 유지하는 도덕이
평등해야 달성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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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여기서 역할주의를 주장합니다. 역할의 수행여부로 가치를 판단하는 사상입니다. 연령, 성별, 인종, 지위, 인맥, 학력 등과 관계 없이 역할을 다하면 존중을 주는 사상. 그게 진짜 평등한 사상이라 생각합니다.
일단 초식화의 죄악은 좀 더 정리해봐야겠습니다. 초식화의 죄악 중에서 과거 조선의 도덕만 짧게 요약했는데도
이정도 길이. 참 쉽지 않네요. 다시 한번 초식화되고 있는 한국사회가 건전한 투쟁이
살아있는 자유국가가 되어 자유와 평등을 누리는 이성적인 민주시민이 많아졌으면 좋겠네요. 지금은 여나 야나 다 감성적입니다. 객관적으로 보세요.
우박이 많이 내리네요. 참. 흥미롭죠.
아, 보람이 있는 일을 하고 싶네요. 부디.
한국사회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에 대해 간단히 다루는
글을 써보려고 합니다. 지금까지는 선입견이 들어가는 것이 정보전달에 있어 방해가 된다고 판단하여 인명이나 단체명을 언급하는 걸 자제했는데, 직접적인 언급이 정보전달에 좀 더 도움이 되는 것
같아 그냥 써보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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