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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식] 2019년 11월 17일 일요일 (0) 2019/11/17 PM 11:30


공정의 본질, 분노의 한계점


최근 흥미로운 소식을 접했다. 불평등이 내년 세계금융의 가장 큰 위험요소라는 소식이다. 도이체방크의 수석은 부의 불평등, 소득 불평등, 보건 불평등의 확대를 위험요소 1위로 지목했다고 한다. 어떤 근거로 그런 주장을 했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세계정세를 살펴보면 그러한 흐름이 이미 목격되고 있음은 확실했다. 세계는 불평등에 분노하고 있다. 칠레는 지하철 요금 50원 인상에 민심이 폭발하여 대규모의 시위를 했다고 한다. 고작 50원이라 여길지 모르지만, 그건 표면상에 나타나는 결과에 불과하다. 칠레는 지금 한국 절반 정도의 임금에 한국의 물가라고 한다. 그 동안 겪어왔던 수많은 불평등으로 민심이 부글부글 끓고 있다가 결정타를 날린 것이기 때문에 그들의 분노는 정당했다. 프랑스는 대학생이 불평등에 항의하며 분신자살을 시도 했다고 한다. 선진국도 예외는 아니라는 것이다. 한국도 예외는 아니다. 한국 부동산의 임대 소득이 19조인데 10%가 절반을 독식하고 있다는 기사가 있다. 이 얼마나 불평등한가. 지금 당장은 한국 정치가 북한, 독재, 성별이 주를 이루기 때문에 부의 불평등 문제가 상대적으로 부각되지 않을 뿐이다. 부글부글, 부글부글, 부동산 문제 같이 부의 불평등에 관한 기사를 접할 때마다 수면 아래에서 민심은 들끓고 있다. 북한과 독재 문제가 정리되고 나면 반드시 부의 불평등 문제가 수면 위로 떠오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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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중에 다시 써볼게요. 너무 늦게 써서 안되겠네요.

세계은 왜 평등을 바라고 한국은 왜 공정을 바라는지, 

최근 공정에 대한 이슈가 많아서 그걸 정리해보려고 합니다.

 

사실 지금까지 기득권 문제가 해결된 적이 없으니까 평등을 위한 새로운 사상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저는 역할평등을 주장합니다. 집이 제역할을 못하면 안돼죠. 집은 사는 사람을 위해 존재해야 합니다. 임대업자를 위해 존재하는 게 아니라고요.

사람은 역할, 물건은 용도. 이 기준이 가장 평등하다고 생각합니다.

 

정확히는 모르겠어요. 저출산 대책 비용이 13년간 153조라는데...

효과가 없다고 하죠?

저출산의 큰 원인 미혼. 그리고 그 미혼의 큰 원인 책임.

 

차라리 저 비용으로 국가에서 아이를 책임지는 체계를 구축하는 게 낫겠어요.

기본적으로 부모가 아이를 책임지되, 못질 것 같으면 국가에 맞길 수 있도록

사람들이 그러죠. 책임 못질 거면 아이 낳지 말라고. 이제는 책임 안져도 되니까 낳으라고 해야 할 때가 온 것 같네요.

 

지금 이 생각이 상당히 극단적이긴 한데, 이 정도의 극약처방이 아니면 저출산, 해결 못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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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담] 모병제, 희생 없는 개혁 없다 (1) 2019/11/10 PM 11:59
9시가 넘어서 원래 쉬려고 했는데 써지길래... 음, 원래 써보려고 했던 것 한번 간단히 써봅니다.

 

 

모병제, 희생 없는 개혁 없다


  모든 개혁에는 희생이 뒤따른다. 특별히 새로운 이야기는 아니다. 혁명과 개혁은 방식의 차이일 뿐, 그 목적은 낡은 것을 새로운 것으로 바꾸는 것을 뜻한다. 그러다보니 혁명에 비할 바는 아니나 개혁 또한 희생이 필연적으로 발생한다.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나갈 때, 낡은 것으로 기득권을 유지하던 이들은 손해를 입게 되고, 그 손해가 바로 희생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부당한 이익으로 얻은 기득권의 희생으로 정당한 손해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주관적인 관점에서 보통은 희생으로 간주된다. 제 손으로 들어온 이익이 부당하더라도 그걸 거절할 위인은 그리 많지 않으니까 말이다. 따라서 어떤 경우에도 개혁은 누군가의 희생과 함께 그 희생으로 나타날 반발을 각오해야할 것이다.

 

  이번 주에 나는 흥미로운 기사를 접했다. 여당에서 모병제 검토를 했다는 것이다. 한국은 군대에 매우 민감한 나라이다. 남성중심사회였던 한국은 대부분의 남성이 군복무를 하게 되자, 군대는 한국 사회 곳곳에 영향을 끼치고 있었다. 군대에서 배운 상명하복은 자연스럽게 사회에 스며들어 한국사회의 특별한 개성을 형성하게 되었다. 이 예시가 바로 해외 원전 수주에 대한 이야기이다. 원전의 담당자가 각국에서 모인 기업들을 지켜보고 있는데, 그 중 한국을 보고 매우 인상 깊었다고 한다. 다른 나라는 일반적인 기업의 모습으로 준비에 임했으나, 한국만은 마치 전쟁을 앞둔 듯한 필사적인 태도로 준비에 임했다는 것이다. 그런 태도가 영향을 미친 것인지, 한국이 원전을 건설하게 되었다고 한다. 군대의 상명하복이나 군대의 기강을 생각나게 하는 그 모습은 징병제로 인해 군대가 얼마나 한국 사회에 영향을 끼치고 있었는지를 가늠할 수 있다. 물론 이러한 현상은 과거서부터 내려오던 가치관에도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동물이었던 시대의 약육강식과 진화론적인 관점에서 형성된 혈통주의 서열 같은 서열중심의 가치관에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애초에 인간은 평등하지 않았으니까 말이다. 더구나 동아시아 특유의 문화는 이를 더욱 견고하게 했을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알고 있다면 사회적 세대갈등의 원인도 어느 정도 유추할 수 있다. 군대문화에 길들여진 기업조직은 군복무를 하지 않은 사람의 근무태도를 이해하기 어려워한다. 학교 문화 개선과 함께 군복무 기간 단축, 군 문화 개선은 많은 젊은이들을 이러한 군대 특유의 문화에서 벗어나게 만들었다. 이 차이가 많은 세대 갈등의 원인이기도 한 것이다. 숨쉬는 듯이 자연스러웠던 기업조직의 군대식 문화에 적응한 기성세대는 자유, 평등, 공정의 가치를 중요시하는 젊은세대와 갈등이 빚어질 수 밖에 없었다. 거침없이 자기주장을 내뱉는 펭수라는 캐릭터의 유행은 젊은세대의 특성을 나타내는 현상이라 볼 수 있겠다. 군대가 사회에 끼치는 영향을 고려해보았을 때, 군대체계의 변화는 곧 사회체계의 변화이며 사회전반적인 개혁을 만들 수 있는 기폭제가 될 수 있다고 본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반발이 심할 수 밖에 없다. 희생 없는 개혁은 없기 때문이다.

 

  문화라는 무형의 가치는 보통 환산하기가 어렵기 마련이다. 상대적으로 가치판단이 쉬운 문화제나 음식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사회에 속한 인간이 가지고 있는 가치관이나 관습은 매우 주관적이기 때문에 객관적인 가치로 환산하기 몹시 어렵다. 어떤 이에게는 낡고 부패한 문화라고 하더라도 소중할 수도 있는 것이다. 분명히 말해두건대, 나는 서열중심의 가치관을 싫어한다. 태생부터 나는 평등이 아니면 불쾌함을 느낄 정도로 평등을 중요시 했다. 그럼에도 그것이 어떤 이들에겐 가치있는 것이라고 말하는데는 주저하지 않는다. 그것이 실제 나타나는 현상이기 때문이다. 어느정도 나잇살 먹어서도 내가 더 나이 많네 다투며 서열정리를 하는 모습을 보라, 얼마나 소중하면 그리하겠나? 그러니 사회를 개혁함에 있어 이를 고려하지 않을 수는 없을 것이다. 이는 군대의 개혁, 모병제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흔히 생각하는 모병제의 문제는 휴전과 강대국의 중심이라는 국내외 정세, 모병이 제대로 되지 않는 해외의 사례들, 징병자의 상대적 박탈감을 말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징병된 사람의 상대적 박탈감은 어느정도일 것인가? 더구나 앞서 말한 것처럼 군대는 사회에 지나치게 영향을 많이 끼치고 있다. 사회에 섞여들어간 군대 문화, 군입대 문화, 위수지역의 생계 등 여러가지 문제에 영향을 끼치고 있다. 한 가지 예시를 통해 얼마나 큰 영향을 끼치고 있는지 말해보겠다. 최근 군복무 중인 채식주의자의 고난을 담은 기사가 나오고 있다. 군대에서 제공하는 잡식을 위한 식사에 적응하지 못해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어떤 날에는 밥말고는 먹을 것이 없다고 할 정도였다. 나는 본래 인간의 본질이 동물이라 여기기 때문에 채식주의는 인간을 동물로 여기지 않는 오만한 사상이라 생각하고 있다. 육식이나 잡식을 하는 모든 동물을 다른 동물을 잡아먹는다. 그것은 동물의 본능으로 그것이 나쁘다고 생각하는 건, 자신이 동물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오만함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다른 동물을 좁은 곳에서 사육하며 잡아먹는 것이 잔인하다고 생각하며 채식을 하는 것은 지나치게 오만하다. 그럼에도 그들이 하는 행동이 무익한 것은 아니다. 다량의 사료를 소비하는 육류의 소비를 줄인다면 분명 자연환경에는 도움이 될 것이다. 잡식을 하는 사람들은 이들이 다른 이들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고 자기들끼리만 채식을 한다면 환경적인 부분에서 이익을 봄이 분명하다. 그럼에도 많은 이들은 이를 고려하기 보다 군의 특성을 논하며 군대의 채식을 부정한다. 왜 그런 걸까? 그건 논리적인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채식이 없는 군대에서 수 년을 지낸 사람들은 채식이 존재하는 인권적인 군대에 거부감을 느낀다. 물론 금전적인 문제, 체계적인 문제, 생산적인 문제등이 존재하나, 심리적인 거부감이 더 크기 때문에 채식의 이로움을 고려하지 않고 거부부터 하는 것이다. 결론을 내려놓고 이유를 찾는다. 그것은 보통 심리적인 이유에 근거한다. 이렇게 모병제는 현실적인 문제와 심리적인 문제가 공존한다. 

 

 이런 문제들이 있음에도 모병제를 고려할 수밖에 없는 것은 심각한 저출산이라는 현실이 눈앞에 닥쳤기 때문이다. 이미 1이하로 떨어진 저출산은 회복할 기미를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다양한 출산정책은 근본적인 원인인 결혼을 고려하지 않고 추진하여 거의... 아니 솔직히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결혼을 하면 아이를 낳는다. 결혼을 하지 않으면 아이를 낳지 못한다. 금전, 환경, 자유, 가치관 등의 다양한 원인으로 발생한 결혼기피현상은 저출산을 부르는 결정적인 원인이 되어 징병할 수 있는 자원의 부족을 불러 모병제를 검토할 수 밖에 없는 현실을 만든 것이다. 그리고 성별차별에 민감한 젊은 세대는 남성만의 군복무에 많은 박탈감을 가지고 있는 상황이다. 이들의 불만을 잠재울 수 있는 것은 여성징병이나 모병제밖에 없다. 그 중 여성징병은 여성들의 반발을 살 것이 분명하니, 젊은 세대만 고려했을 때 모병제가 가장 최선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그래서 검토한 것이다.(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현실적으로 검토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지만, 사실 모병제는 정치적으로 상당한 손해를 각오할 수 밖에 없다. 병력의 수를 줄여 적국을 이롭게 한다는 오명을 살 수도 있기 때문이다. 현실을 보면 누가 정권을 잡든 모병제를 검토할 수 밖에 없는 상황임에도, 이러한 비난을 피할 수가 없다. 그렇지 않아도 지금 여당은 민족주의적 정책으로 인해 나타난 북한에 대한 유화정책으로 반북, 반공의 가치를 지닌 이들의 반발을 사고 있어 비난은 더욱 심할 것이다. 이들이 가진 북한과 공산주의에 대한 공포와 증오는 쉽게 다룰 수 있는 성질이 아니다. 다른 문제들이 가벼운 것도 아니므로 모병제를 추진하는 것은 상당히 어려울 것이라 본다. 최소한 군대문화를 가지고 있는 이들이 그것을 희생한다는 각오 없이는 불가능 할 것이다. 가치관을 바꾸는 일. 쉬울리가 없다.

 

  그렇다고 이대로 방치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러니 다른 방법으로 이 문제를 해결할 수 밖에 없다. 나는 이 문제를 직업군인 증원과 징병병과의 제한으로 해결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많은 사람들은 복무기간이 최소 일년이 넘어야 군대가 유지된다고 이야기를 한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전문직에 해당되는 말이다. 총만 쏘는 소총수는 교육기간이 그리 길 필요가 없다. 기본 훈련만 받아도 소총수의 역할은 해낼 수가 있다. 탱크를 몰거나 하는 특별한 업무가(사실 잘 모른다. 탱크도 얼마 안걸릴 수도 있다.)아니라면 길 필요가 없다. 그리고 예비군이 되면 전문적인 업무를 하기 보다는, 그냥 소총수로 편제되어 총만 쏘고 끝난다. 아무리 전문적인 훈련을 받아도 결국 예비군에서는 소총수가 되는 판국에, 전문직을 징병할 필요가 얼마나 있겠는가? 

 

  그러므로 모든 전문직은 직업군인으로 대체하고 나머지 징병자원은 전부 소총수가 된다면, 많은 징병자원이 필요하지 않기 때문에, 저출산으로 인한 자원부족에서도 벗어날 수 있고, 많은 기간이 필요하지 않기 때문에, 긴 복무기간로 젊은 남성의 반발도 줄어들 것이다. 다들 알다시피 소총수라면 6개월도 충분히 긴 시간이 될 것이다. 나머지 시간은 할 것이 없어서 대민지원을 나가는 형편인 만큼, 소총수만 있다면 긴 복무기간은 필요가 없다. 그리고 6개월정도라면 여성계와 타협할 수 있는 시간이라고 본다. 6개월 정도만 나라를 위해 희생하라. 이것도 상당히 마찰을 불러올 것이 분명하지만, 지금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수월하게 타협할 수 있을 거라 본다. 사실 6개월이면 아마 남성도 그렇게 부담을 느끼지 않을 것이다. 훈련만 받다가 끝날 텐데 말이다. 군대의 전문화는 직업군인 증원으로 발전시키고, 군대병력의 유지는 예비군으로 유지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가장 이상적인 상황이라고 본다.


  사회는 지금 공정을 바라고 있다. 이는 고도화된 사회와 고학력의 경쟁과 유리천장의 파괴가 영향을 끼치고 있다고 본다.(지금 당장 생각나는 것.) 기술, 학력, 사상의 발전이 공정에 대한 희구를 형성했다는 것이다. 때론 편향적이고, 때론 자기중심적이고, 때론 선택적인 상황이 표출되긴 하나, 사회적 공감대가 나타났다고 보고 있다. 그러니까 공정을 위해서 정시를 늘려달라는 여론이 늘어난 것이라 본다. 그러나 지금 당장 공정을 위한 정시위주의 교육은 분명 과거의 실수를 답습하는 것이 될 것이다. 창의성이 없어서 수시를 늘렸는데, 공정성이 줄어들어서 정시를 늘리겠다는 것이이 말이다. 부자들의 고액 컨설팅으로 설계되는 학생들을 보면 공정을 바라는 마음을 이해할 수 있기도 하다. 아마 공정열풍이 끝나고 나면 창의성 논란이 다시 빚어져 다른 걸 바랄 수 있을 것 같지만, 지금 당장은 많은 사람들이 공정을 바라고 있으므로, 그 마음을 충족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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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 혁명! 변화! 이제 좀 젊어지자구요. 사상이 젊다면 변화를 바라면 좋겠습니다. 재미를 바라면 좋겠습니다. 재미를 위해 마약 같은 걸 하지 말고 재미를 위해 사회를 긍정적으로 바꿔보세요. 차라리 그게 더 재미있고 보람찰 겁니다.

 

다음에 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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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이 너무 길어요......
[잡담] 현상, 늙은 세상을 바로 보는 법 (0) 2019/11/03 PM 11:32

현상, 늙은 세상을 바로 보는 법

 

 

 

미래를 다룬 작품을 접할 때면 언제나 위화감을 느끼곤 했어요. 그 위화감을 정확히 설명할 수는 없었어요. 그래서 그런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사람들과 나눌 때도 이건 정확한 미래가 아니야라고 답하면서도 그 이유에 대해서는 얼렁뚱땅 넘기고 말았죠. 그런데 이제는 알 것 같아요. 그 이유. 생각해보면 되게 간단한데, 상식에 갇혀있으면 결코 알 수 없는 거였어요. 그 이유, 그 위화감. 그건 바로 사상의 불변이었습니다.

 

사실 큰 줄기의 사상이라는 건 쉽게 사라지지 않아요. 세계의 근간이 되는 사상들은 보통 수천 년이 넘죠. 특히 종교는 불신이 악덕이기 때문에 경전에 담긴 내용이 바뀌지가 않아요. 그걸 진리라고 생각하니까 그 옛날 사람들이 적은 경전의 구절을 자랑스럽게 읊으며 다니죠. 그래서 등장하기도 쉽지가 않죠. 늙은 사상들이 사라지질 않으니까 새로운 사상이 나타나질 않아요. 그래서 세계는 사상의 노화로 인해 매번 늙고 부패함을 경험하게 됩니다. 괜히 매번 종교개혁 했던 것이 아니에요. 스스로 봐도 썩었으니까 개혁을 하는데, 근간이 되는 사상은 그대로 나두고 껍데기만 종교를 개혁하니 아직도 문제가 남아있죠.

 

비종교적 사상들도 그리 쉽게 사라지거나 등장하진 않았어요. 자본주의와 공산주의가 등장한지 수백 년이 넘었는데, 아직도 그걸로 갈등이 빚어지고 있죠. 자본주의와 공산주의가 이미 변질되어서 수정자본주의와 독재수단전락화가 된지 오래인데도 그래요. 그 어떤 자본주의 국가가 복지의 필요성을 부정합니까? 그 어떤 공산주의 국가가 평등합니까? 이미 늙어서 변질된 사상을 붙들고서 아직도 그걸로 편가르기로 갈등을 빚고 있어요. 근간이 되는 사상은 그대로 나누고 껍데기만 정치를 개혁하니 아직도 문제가 남아있죠. 정말 종교나 정치를 개혁하고 싶었으면, 인간의 근간이 되는 사상의 개혁을 먼저 했어야 했어요.

 

이러한 사상의 불변이 현대사회에서 지나치게 익숙하자, 미래를 다룬 작품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되었어요. 기술은 그렇게 발달했음에도 현대의 사상이 그대로 남아있어, 같은 어리석음을 반복하고 있었죠. 저는 거기서 위화감을 느꼈던 것 같아요. 그 위화감을 이제는 대답할 수 있어요. “아니 왜, 로봇과 일자리 문제로 갈등이 빚어지지? 아니 도대체 얼마나 오랫동안 사상이 변하지 않은 거야? 당연히 바뀌어야 하는 거 아닌가?” 공유경제화로 인해 노동가치, 소유가치, 자본가치의 감소가 발생하거나, 환경문제로 인해 친환경가치, 재활용가치, 자연보호가치의 증가가 발생할 수 있다고 봐요. 그런데 그런 사상의 변화가 눈에 띄는 작품을 못 봤어요. 단지 제가 못 본 것일 수도 있는데, 일반적으로 나타나는 사람들의 경향을 살펴보면 아마 그런 걸 주장하는 사람이 얼마 없었을 거라 봐요. 뭐 사회 근간이 되는 사상을 부정하고 새로운 사상을 주장할 수 있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는 않겠죠. 자칫 하단 죄가 될 수도 있으니까요.

 

그래도 미래에는 달라질 거라 봐요. 아마 생산의 완전자동화가 가능해져서 인간이 노동에서 해방된다면, 노동과 자본의 가치가 감소하여 세계를 양분하던 이념인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의 끝을 부를 수 있을 거라 생각해요. 그래서 로봇과 인간이 일자리 문제로 갈등이 일어날 수는 없다고 생각해요.

 

 

 

이 세상은 이미 늙었어요. 프랑스 5월 혁명, 68 운동을 통해 많은 국가들이 조금은 젊어졌다고 해요. 많은 부분 진보했죠.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 같은 것이 젊어지기 위해 발버둥친 것이더군요. 그런데 그래 봐야 노화는 막지 못했어요. 그 근간이 되는 사상은 그대로니까요. 저는 한국에서 많은 불합리, 불평등, 부조리 등을 겪고 보았어요. 위계질서, 온갖 차별, 온갖 비리. 그런 걸 보면 정말 한국은 늙었다고 생각해요. 전통과 관습이란 이유로 수많은 불합리가 정당화되는 시점에서 늙었다는 소리는 피할 수가 없는 거겠죠. 그런데 재미있는 건, 세계 평균과 비교하면 상대적으로 젊은 상황이라는 거예요.

 

다른 국가들은 얼마나 늙었는지. 경전에서 이거 해라, 이거 하지 마라 정해두면 그게 어떤 불합리, 어떤 불평등, 어떤 부조리를 불러온다 하더라도 꿋꿋하게 지켜요. 그리고 그걸 보는 저는 지쳐요. 도대체 언제까지 특정 고기를 피할 거예요? 도대체 언제까지 악령퇴치를 하고 있을 거예요? 저는 이거 사실 판타지인지 알았어요. 에이 설마. 그런데 진지하게 하고 있더라고요. 충격 받았어요. 이런 것이 아니더라도, 나쁜 것이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전통이란 이유로, 관습이란 이유로 유지되고 있는 것들이 지나치게 많았어요. 그 많은 바보 같은 일들이 전부 늙었기 때문이라는 사실과 그러한 잘못된 늙은 것을 존중해야 하는 현시대의 왜곡된 존중은 사건과 사고를 만들어내는 원흉이 되어 이민자들을 꺼려하게 되는 삭막한 세상으로 몰고 가게 되었어요.

 

자유는 일방적인 것이 아니에요. 자유를 원한다면, 다른 이의 자유도 긍정해야죠. 그런데 다른 이의 자유는 부정하면서 자신의 자유만을 원하는 이들을 어떻게 존중하라는 건지 모르겠어요. 중국의 지배주의, 이슬람의 배타주의, 어떻게 존중하라는 거죠? 다문화가 좋은 것이라며 다문화를 존중한다는 의미에서 그들을 지원하고 그들의 세력확산을 방관하는 이들은, 이것 또한 경쟁이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나요? 다른 소수민족의 다문화는 존중해도 괜찮아요. 그런데 한국의 문화를 잠식하여 잡아먹을 수 있는 민족의 문화는 경계해야 함이 마땅하죠. 무엇이 중요한지 생각 해주세요. 자신의 문화를 사랑해주세요. 부탁해요.

 

그리고 한국의 문화도 전통이나 관습이란 이유로 악습을 방치하지 말고 새로운 것으로 변화하여 젊어졌으면 좋겠어요.

 

 

 

모든 것을 현상으로부터 시작해야 해요. 지식에 현상을 끼워 맞출 것이 아니라, 현상을 보고 지식을 만들어내야 하는 거죠. 그게 바로 창의성, 독창성으로 이어질 겁니다. 현상을 보고 본질을 찾아 결론을 내려야지, 있는 지식으로만 현상을 바라보려고 하니 아무것도 바뀌지 않죠!

 

정치도 경제도 사회도 문화도 실제 일어나는 현상을 관찰해서 본질을 찾아 그에 맞는 해결책을 내려야지, 그냥 그게 옳은 거라고 생각하고 무작정 추진하면 어떻게 하나요. 난민 수용도 그랬잖아요. 그게 옳은 거라고 무작정 추진하다가 부작용 때문에 난민인식이 나빠져 오히려 그들에게 해가 되었죠. 뭐 난민 받은 건 다른 이유도 많았겠지만, 결과적으로 국민과 난민 모두에게 해가 되었을 거예요. 무작정 받을 것이 아니라, 융화될 가능성이 있는 사람만 받았다면 별다른 문제는 없었겠죠.

 

정치도 콘크리트를 무작정 비난할 것이 아니라 현상을 관찰하여 그 원인의 본질을 찾아 결론을 내렸어야 했어요. 정치 하니까 생각 나는 게 하나 있어서 써볼게요. 정치가들은 경제를 매우 중요시 하며 경제지표에 신경을 많이 쓰죠. 그런데 어쩌죠? 경제가 살아나든 죽어나든 진영논리에 빠진 사람들은 이미 결론을 내려놓고 경제지표를 판단해요. 경제가 좋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좋은 지표만 생각하고, 경제가 나빠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나쁜 지표만 생각하죠. 그러니까 무작정 성장률만 보고 비난하는 사람들이 생기죠. 무작정 옹호하는 사람들도 있지만요. 그러니까 경제는 결국 평균만 하면 껍데기일 뿐이에요. 막상 경제가 좋지 못해도, 북한 또는 독재세력만 망해도 무작정 지지할 사람들이 넘쳐날 겁니다. 그게 지금 한국의 정치니까요. 거기에 최근 성별에 의한 세력이 증가하고 있는 상황이죠. 이렇게 좌파나 우파로 구분 지을 것이 아니라 일어나는 현상을 보고 결론을 내려야죠.

 

사회도 마찬가지에요. 아니 악습이라는 거 알면 그만 하면 안돼요? 친인척 취업은 왜 이렇게 많이 해요. 그런 혈연, 인맥이 바로 정이라는 거 알겠는데, 정 때문에 사회 부조리를 정당화하진 않았으면 좋겠어요. 세습도 많이 하고, 비리도 많이 하고. 최근 재미있는 소식을 접한 적이 있어요. 인공지능 전문가가 없어서 초빙하려고 하는데, 금액이 부족해서 어렵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본질은 그것만이 아니래요. 인공지능전문가를 적정 비용에 채용을 하면, 그 전문가보다 윗급에 있는 사람은 그 비용보다 더 많은 연봉을 받아야 하고, 그 윗급에 있는 사람은 그거보다 더 많이 받아야 하는, 그런 구조라서 그렇다고 하더군요. 역할에 맞은 대우가 아니라, 서열에 맞는 대우를 추구하니 중요한 역할에 많은 급여를 줄 수 없어서 인공지능 전문가를 초빙하기 어렵다고 하더군요. 웃기지도 않아요. 이런 악습.

 

문화도 마찬가지에요. 자세히 아는 건 아니에요. 그런데 단편적인 이야기만 접해도 왜 이렇게 불합리하고 부조리한 일들이 많은 건지 모르겠더군요. 예체능의 군대 같은 서열화는 이미 식상할 정도죠. 그걸 정당화하는 게 웃겨요. 협회는 양궁 같은 협회 빼곤 부조리로 가득하고, 인맥 혈연 따위 때문에 인재가 유출되는 사고도 발생하죠. 그런 늙어터진 악습들은 제발 좀 그만 봤으면 좋겠어요.

 

 

모든 것은 늙기 마련이에요. 시간에 따라 달라질 뿐이죠. 뭐 기술이 발달해서 유전자조작으로 인류의 수명이 바뀔 수는 있어요. 어쩌면 영원히 살 수도 있겠죠. 그런데, 그럼에도 육체는 영원해도 사상은 늙을 수 밖에 없어요. 그러한 사상의 노화를 어떻게 대처할 건가요? 그리고 이미 늙어버린, 이 세상을 늙게 만든 사상들은 어떻게 할 건가요?

 

저번 글에서 문과의 몰락 원인에 대해 짧게 써본 적이 있지요. 이공계는 새로운 것을 꾸준히 만들어내지만, 문과는 변화가 없어서 몰락했다고. 문과의 논문들을 살펴보면 자신의 새로운 사상을 쓰기 보다는, 과거 사상을 분석하는 것에 그쳤어요. 원래 그런 건가요? 혹시 뭐 사상도 서열 순서대로 새롭게 발표해야 하는 거예요?

 

왜 그렇게 과거의 것만 공부하는지, 새로운 것을 생각할 수가 없는 건지. 아니면 해서는 안 되는 건지. 가능하면 새로운 사상들을 접했으면 좋겠어요. 새롭게 생각하는 법을 알려줄게요. 다시 한번 말하죠. 현상을 보고 본질을 파악하여 새로운 결론을 내리세요. 부탁 드립니다. 세상을 젊게 만드는걸 도와주세요. 우리나라가, 그리고 모든 인류가, 그리고 모든 것이 젊은 세상에서 살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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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이정도 글로 끝낼 주제가 아니었는데 요새 상황이 좋지 못해서 도저히

그냥

그래요

 

좀 엉망이네요..

나중에 다시 써볼게요.

 

가치판단이 중요한 시대라고 생각해요. 무엇이 더 중요한가? 부디 생각해주시길.

 

나중에 한번 다룰 건데, 미리 말해줄게요.

민주주의자인가요? 민족주의자인가요?

민주주의자인가요? 자본주의자인가요?

민주주의자인가요? 여성주의자인가요?

 

무엇이 더 우선 되야 할까요?

 

이제 앞으로는 독재와 반독재와의 싸움, 기득권과 비기득권과의 갈등, 그리고 완전자동화의 시대가 있을 거 같아요. 뭐 또 변할지 모르겠지만요.

 

그럼 또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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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식] 2019년 10월 27일 일요일 (0) 2019/10/27 PM 08:09

이번 주는 쉽니다

 

불출마라... 아, 세번째 정치세력이 등장하여 협력 하에 기득권 개혁을 이뤘으면 좋겠습니다.

 

선을 넘어야겠어요. 어떻게 하지.

 

사실 늙어버린 세상에 대해 써보려고 했는데 뭐 나중에 쓰죠 

 

구글에서 양자컴퓨터가 나왔다고 하죠. 개인적으로 인공자아는 인공생명이 있어야 된다고 생각해요.

근데, 그건 그거고 어쨌든 누군가 인공자아를 만들어서 시대를 바꿨으면 좋겠어요.


세상에 좀 더 큰 변화가 있기를 바랍니다.

 

몇 가지 큰 것 올해 안에 정리해보려고 했는데 가능할 지 모르겠네요.

 

많이 살아봐야 수백년 정도 살텐데 수천년의 사상을 짊어질 생각 말고

자신의 사상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아졌으면 좋겠어요.

남의 꿈을 이루는 것을 자신의 꿈인 것 마냥 행동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좀 더 노력해야겠어요. 부족한 것이 많네요. 

 

그럼 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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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담] 민주적 관점, 여성주의의 피해자 (2) 2019/10/20 PM 11:21

민주적 관점, 여성주의의 피해자

 

 

 

사법의 판결이 정의롭지 않다고 느낀 사람들이 이의를 제기하곤 합니다. 보통 소년범, 흉악범, 사기꾼, 기득권 같은 부류들의 형량이 정의롭지 않다는 이유에서 하곤 합니다. 주로 소년범이나 흉악범은 형량이 적다는 이유로 분개하며 항의를 하고 사기꾼이나 기득권은 유전무죄라며 씁쓸하게 고개를 숙이고 자조하곤 합니다. 돈이 많은 사람이 살기 좋은 나라. 우리나라의 비겁한 단면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만약 사법이 법에 의거해 정당한 판결을 내렸다면, 그것이 설령 사회적 정의(법감정라 불리는)에 부합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올바르게 판결을 내렸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사법은 특정 누군가의 정의를 위한 기관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만약 법관이 자신의 사적 정의에 의거하여 판결을 내리게 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게 바로 법치주의의 몰락을 가져올 겁니다.

 

동물보호협회를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이들은 동물을 보호하는 것이 최우선인 사람들입니다. 최근 아프리카돼지열병에 걸린 돼지들을 보호하기 위해 돼지를 훔치거나 죽어가는 돼지를 흉내 내는 공연을 보여주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들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것이 보편적인 정의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그것이 올바른 도리라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설령 그것으로 인해 인간이 피해를 입더라도, 동물을 보호하는 것이 최우선인 겁니다. 저는 세상의 많은 정의들을 존중하려 합니다. 하지만 그 정의의 근간에는 인간주의가 있어야 합니다. 인간을 위하지 않는 사상, 인간을 위하지 않는 정의로 어찌 인간들에게 존중 받으려 하는 건지, 뻔뻔하기 짝이 없습니다.

 

만약 법관이 이들의 정의에 공감하여 이들의 범법 행위에 이로운 판결을 내린다면 사회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외에 다양한 정의들, 이기주의나 혐오, 증오 따위를 올바른 것인 마냥 예쁘게 포장하여 정의라고 자처하는 이들에게 영향을 받아 그들의 정의에 부합하는 판결이 내려진다면 사회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미 경험했으니까 잘 아실 거라 생각합니다. 이런 이유들 때문에 사법은 특정 누군가의 정의에 영향을 받기 보다는 공정한 판결을 내려야 합니다. 따라서 사법은 특정 누군가의 정의를 구현하는 집단이 될 수 없습니다. 일반적으로는 법에 의거한 공정한 판결이 사법의 정의이기 때문입니다. (예외는 언제나 있습니다)

 

 

 

그렇다면 누가 정의를 구현하는 걸까요? 사법은 만들어진 법에 의해 판결을 내립니다. 간단히 말해 입법에 의해 같은 사건이라도 판결이 달라질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 사회적 정의를 구현하는 건 입법에 속하는 국회의원의 업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선출하는 건 정상적인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국민입니다. 따라서 정의를 구현하는 건 결국 국민들의 일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오늘은 그러한 정의를 구현할 수 있는 정치와 국민에 대해 잠시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정치는 이용하는 자들에게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이용당하는 사람들에게 초점을 맞추는 것이 올바른 해석을 낳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정치는 어떤 정치체재라도 일반 국민에 의해 유지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독재체제를 통해 권력을 손에 넣었다고 해도 그 힘은 국민들로부터 나옵니다. 설령 무소불위의 왕이었다고 하더라도 이후 백성이 따르지 아니하고 혁명에 참여하면, 그 왕은 국민의 감정에 의해 처리될 것입니다. 이렇게 권력이 국민들로부터 나오기 때문에 독재자들은 국민들을 선동하거나 회유하거나 탄압하거나 괴롭히는 겁니다. 국민들이 자신들의 힘을 눈치채지 못하게 당근과 채찍으로 강압하는 것이지요. 때로는 없는 죄를 만들어가면서까지 공포분위기를 조성해서 권력을 유지하기도 합니다.

 

한국에서는 간첩몰이가 대표적이라 할 수 있을 겁니다. 개중에선 진짜가 있겠지만 없는 경우도 많았겠지요. 죄 없는 많은 이들이 고통 받았을 겁니다. 그럼에도 대외적으로는 진짜 간첩을 잡은 것마냥 떠들어댔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걸 방관했을 겁니다. 그리고 여기서 사람들이 이용당하는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진짜 간첩에 대한 공포로 진짜든 가짜든 선동을 당했던 것입니다. 그 공포, 그리고 분노. 그러한 감정들이 이용당하는 근본적인 이유입니다. 이렇게 이런 현상을 바라볼 때, 이용하는 자의 이념이나 선동방식에 초점을 맞추기보다 이렇게 이용당하는 사람들의 감정에 초점을 맞추면 어떤 식으로 접근해야 국민들의 공감을 얻어 정치적 혁명이나 개혁을 이룰 수 있을 것인지를 알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국민에게 권력이 있으니 국민의 입장에서 정치를 본다. 즉 민주적인 관점에서 정치를 바라보면 정치가 일정한 규칙에 의거해 흘러간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감정을 통해 정치적인 관계가 성립되고, 이후 다른 방식으로 감정이 형성되면, 그 감정을 통해 또 다른 정치세력이 형성되어 정권이 교체됩니다. 정치의 본질은 사람의 감정을 살펴보면 알 수 있습니다. 특히 일반 국민들, 일반적으로 기득권에게 이용당해왔던 국민들의 감정을 살펴보면 어째서 이용당해왔는지를 알 수 있기 때문에, 그를 통해 좀 더 올바른 길을 제시하여 보다 나은, 보다 젊은 정권으로 교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왕과 신하, 백성의 관계는 충성과 복종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러한 충성과 복종은 기나긴 세월 속에 주입된 혈통주의적 서열이 만들어냈습니다. 종교와 신자의 관계는 신앙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러한 신앙은 기나긴 세월 속에 주입된 신앙주의가 만들어냈습니다. 이러한 감정으로 정치적인 관계가 성립되었습니다. 그리고 이후 이들의 부당한 행동으로 인해 차곡차곡 쌓인 분노를 통해 또 다른 정치세력, 즉 혁명의 흐름이 나타났습니다. 본래 한국도 이러한 흐름에 의해 왕정이 폐지될 운명을 맞이하나 싶었으나, 자본주의로 형성된 제국주의의 발호로 인해 나타난 일제침략으로 그 정치세력이 항일운동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래서 현대 정치이념을 정립한 국가와는 다른 정치세력이 형성되었습니다.

 

 

잠시 다른 이야기를 하자면, 이러한 혈통주의적 서열이나 신앙주의는 기술의 발달로 인해 거짓된 것임이 증명되어 사상의 종말을 불러오고 있는 시점입니다. 혈통주의적 서열은 유전자와 환경에 대한 연구를 통해 혈통만으로 결정되는 것임이 아님과 동시에, 일부 혈통만이 우수하다고 할 정도로 유의미한 차이를 발견할 수 없었기 때문에 혈통주의적 서열은 지식인들에게 비웃음을 사 사상의 종말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기득권이 부유함에 취해 부모의 능력도 자신의 것인 것 마냥 행세하는 일종의 혈통주의적 서열을 정당화하는 흐름이 나타나고 있음을 주의 깊게 지켜봐야 할 것입니다. 현재 한국은 그러한 기득권적인 노화가 다양한 억지논리를 통해 정당화되고 있으니 조심하지 않으면 늙은 국가로 일직선하게 될 것입니다.

 

신앙주의는 옛 종교가 과거와 미래를 알지 못하여 전지(모든 것을 앎)를 증명하지 못하였으므로 믿고 받들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되어 사상의 종말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한국만 해도 20대의 70%가 종교를 믿지 아니하고 있다는 통계가 있을 정도니 말입니다. 지금 종교에 빠진 국가들을 살펴보십시오. 지나치게 늙어서 옛 위인이 한 말을 그대로 따르지 않습니까? 그럼으로써 갈등이 빚어지고 있을 정도입니다.  

 

 

이후 정치의 흐름도 비슷합니다. 자본주의의 침략(일본)과 자본주의의 도움(미국)을 받아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사이에서 혼란을 겪고 있던 상황에서 공산주의의 침략(북한과 중국)을 받게 됩니다. 이 침략은 민중에게 커다란 상처를 입히게 하여, 군사독재정부의 독립운동가 탄압을 방관하고 횡포에 순응하게 됩니다. 지난 군사독재정부의 슬픈 역사는 그러한 배경 속에서 이루어졌던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용당하는 사람들에게는 각자 이용당하는 이유가 있는 겁니다. 그것이 설령 선동이라고 하더라도 말입니다. 그리고 그걸 몰랐던 민주주의자들은 민족을 위해 북한과 화합을 시도하다 정치적 패배를 경험합니다. 그리고 그걸 이번에도 해보다가 좋은 결과를 만들지 못했습니다. 이는 민족에 흔들려 독재자의 본질을 잊은 대가입니다. 이러한 것을 주의 깊게 살펴보면 지금 일어나는 정치적 현상과 함께, 미래에 있을 정치적 현상에 대해 유추해볼 수 있습니다.

 

지금 한국정치가 기득권에 반발하며 변화할 수 있는 까닭은 그걸 지탱하는 정치세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간단히 말해 군사독재정부의 피해자들입니다. 이들이 아니라면 그 어떤 정치인이더라도 지금의 지지율을 유지할 수는 없었을 겁니다. 지금 북한과의 관계도 엉망인 상황에서 지지율이 유지되는 건, 그간 군사독재정부와 그를 이었던 정당에 대한 공포와 분노가 피해자들에게 자리잡아 정치세력화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존 기득권이 무슨 짓을 해도 일정 이상의 지지율이 유지되는 것이지요. 사람들의 감정을 우습게 본 대가입니다. 그리고 그 흐름은 정치세력의 연령에 의해 대세가 결정되었습니다. 기존 정치세력인 공산주의 침략의 피해자들로 형성된 정치세력은 이미 황혼기에 접어들었지요. 자본과 종교가 아니면 세력을 유지하기도 벅찬 시점입니다. 그러므로 대세를 읽을 줄 아는 사람이라면 그 흐름을 타 원하는 것을 이루는 것이 현명한 선택이 될 것입니다. 이것이 현재 정치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흐름도 언제까지 지속되지는 않습니다. 사람의 감정은 주관적이기 때문입니다. 전쟁의 피해자는 군사독재의 피해자를 이해하기 어려워합니다. 그들의 입장에서는 전쟁이 더욱 더 심각한 문제기 때문입니다. 설령 독재하고 부패하더라도 전쟁의 원인이 된 자들에게 강경대응 하는 쪽을 택합니다. 마찬가지로 군사독재의 피해자도 전쟁의 피해자를 이해하기 어려워합니다. 그들이 피부에 좀 더 와 닿는 것은 군사독재기 때문입니다. 전쟁의 원인이 된 자들과 화합을 하더라도 반독재, 반부패를 원하게 됩니다. 이러한 서로의 몰이해는 막 형성되기 시작한 정치세력인 성별 역차별의 피해자들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여성주의의 이기주의로 인한 피해자들이 분노하는 것을 군사독재의 피해자들은 이해하기 어려워할지도 모릅니다. 군사독재와 성별 역차별 문제의 피해 정도를 놓고 봤을 때엔 어느 쪽이 더 심각한지는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전쟁과 독재를 비교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사람의 피해의식은, 사람의 감정은 철저하게 주관적입니다. 군사독재의 피해자들이 바라봤을 때엔 별 것 아닌 것처럼 보이는 문제라고 하더라도, 지금 그 피해를 직접 겪는 이들에겐 크게 느껴진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걸 나무랄 수도 없습니다. 그걸 똑같이 전쟁의 피해자들이 군사독재의 피해자들에게 말할 수 있는 문제기 때문입니다.

 

지금 젊은 세대가 공정을 바라고, 평등을 바라는 것은 이러한 사상적 불평등과 함께, 그걸 용인하는 기득권층에 대한 불만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한 불만을 가볍다 여기며 사소한 것으로 치부한다면, 과거의 잘못을 되풀이하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이들의 불만을 이용할 부당한 정치세력의 발호를 방관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단 말입니다! 간첩몰이를 통해 단맛을 봤던 부당한 권력층이 다시 한번 성별 불평등을 통해 단맛을 보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걸 좀 알아야 합니다. 지금은 성별불평등보다 군사독재정부의 피해자의 세력이 더 크므로, 맹목적인 지지가 적게 나타납니다만, 시간이 흐르면 달라질 겁니다. 공산주의의 피해자에서 군사독재의 피해자로 이어졌듯이, 성별역차별의 피해자로 이어질지도 모르는 겁니다.

 

과거를 보면 현재를 알 수 있고, 현재를 알면 미래를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자연스러운 정치흐름을 외면한다면, 한국은 다시 한번 어둠을 경험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지금 미국의 자국주의, 중국의 지배주의, 일본의 노화, 북한의 투정으로 국제사회가 혼란에 빠져있습니다. 민주주의에서 갈등은 국민에게 주권이 부여된 이상 필연이지만, 최대한 불필요한 갈등을 줄이고 서로에 대한 이해를 통해 더 나은 방안을 마련하여 가능한 만족할 수 있는 결론을 내려야 이러한 혼란스러운 시대를 헤쳐나갈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 제발 좀 부당한 권력층을 좀 그만 봤으면 좋겠습니다. 간첩몰이 지겹지 않았습니까? 또 반복할 겁니까? 보기 싫다면, 부디 북한과 성별문제를 신중하게 접근하길 바랍니다. 부탁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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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한 이야기를 쓰는 것, 쓴 이야기를 또 쓰는 것, 의욕이 저하되네요. 뭐 반복해야 발전하는 건가,

 

사람은 없는 걸 바란다고 하지요. 사랑, 정의, 존중, 평등, ,

 

알면서도 견딜 수 없을 때가 있습니다. 제 생각이 다르다는 걸 아니까 밖에서는 표출하지 않습니다. 그러다 보니 좀 외롭네요. 생각을 공유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수용소군도라는 작품을 읽고 있습니다.

 

또 그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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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루시에드I    친구신청

우리가 사는 세상은 이미 당연한 것들이 당연하지 않게 된지 오래인 것 같네여

롸데꾸    친구신청

앞선 전쟁과 독재는 그 반대되는 가치에 대한 정치 세력이 존재했습니다.
즉 누군가를 지지하면 그 반대에 대한 의견을 표출할 수 있었죠.


하지만 성별에 따른 역차별은 그 반대세력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성평등을 주장하는 정치세력은 없습니다.
역차별은 곧 정치세력이고 머릿숫자이기 때문에 역차별을 지지하는 세력만이 있습니다.

즉 성별에 관한 문제는 앞선 예들과는 전혀 다른 접근법이 필요합니다.
여성우월주의를 주장하는 세력이 여야의 지지를 받고 있는 마당에 신중한 접근이 무엇이고 그 어떤 세력이 부당하지 않다는 말인지 전혀 이해할 수 없습니다.

결국 스스로 신중한의 탈을 쓴 각자의 정의와 좌우논란만이 있을 뿐이죠.
그 누구하나 옳은 놈이 없는데 좌우가 무슨 소용이며 그 어떤 선택이 신중하단 말입니까.

대놓고 아무나 맹목적으로 지지해도 그 어떠한 신중한 선택보다 저열하지 않으며 그 어떠한 신중한 선택도 그 누구보다 눈꼽 만치도 더 의미가 없습니다.
즉 신중할 필요도 없고 그럴 가치 있는 선택지는 지금으로선 없는거죠.그저 자신들을 지지해야 신중한 선택지라는 사기꾼 정도가 있다면 몰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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